십자가 지고 가는 길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하며”(마.27:27~29)
녹취자 ; 정윤미
오늘 이 장면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사형언도를 받으신 다음에 예수님을 희롱하는 장면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들이 오늘 정말 예수를 따라가는 삶,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사건을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들이 우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 질것인가 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던지, 복음 전파의 역사를 보던지 무엇을 보던지 간에 자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역사에는 언제나 주역들이 있었고, 그리고는 엑스트라들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시면, 한번 나타났다가는 간단 간단히 사라져가는 수많은 사람들 혹은 손만 보이고, 발만 보이고 지나가는 수많은 단역들이 나옵니다. 조연만 되어도 괜찮은데, 그런 많은 단역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사람들 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정황이 그 속에서 주역으로 쓰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그 십자가를 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계획하고 계신 뜻들을 이루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십자가를 지며 예수의 정신으로 그 뒤를 따라가는 이러한 역사가 없이는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일들에 있어서 주역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언제나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데,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 예수의 뒤를 따라가려는 간절함 사모함과 그리고 그 십자가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과, 또 그 정신으로 말미암아 구체화된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선 그 관정이라는 곳에 끌려가셨습니다. 여기가 소위 이야기 하는 “그라도리온” 이라는 곳이라고 되어있는데, “크라이토리옴” 이라고 하는 그 말하자면 건물 중에서 아마 뜰의 이름 같은데, 거기에는 아마 시위대나 군병들이 이렇게 거하는 그런 곳이 있고 한 그런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곳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수님이 먼저 희롱을 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예수님이 받으신 희롱이 무엇이었다고 되었습니까? 옷을 먼저 벗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벗겼습니다. 옷을 벗긴다고 하는 의미는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 모든 지위와 이전에 누리고 있었던 모든 권한이라고 그럴까 그런 것들을 말하자면 강탈당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예화) 쉽게 이야기 하면, 요즈음 그런 소리 못 듣는데, 공무원 생활 할 때에, “그 사람 옷 벗었데!”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우나 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공직을 그만 두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가톨릭에서는 신부들이 혹시 사제로 할 수 없는 잘못된 일을 행하면, 반드시 교황 앞에 가서 그 옷을 벗는 그 예식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그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입으셨던 옷은 수많은 사람들이 입고 다니며 자랑하던 관리의 복장과 같이 자색 옷이나 홍색 옷, 아니면 자수를 놓은 화려한 옷이나, 혹은 가느다란 모시로 짠 그런 좋은 옷들을 입고 다니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훌륭한 옷을 입는데 별로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게 입고 다니던 초라한 옷조차도 예수그리스도의 몸에서 벗겨졌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치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벌거벗긴다는 의미는 바로 이것은 부끄러운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벗겨지고, 이렇게 옷을 벗는 일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맨 처음 경험하신 말하자면 치욕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비록 훌륭한 옷은 아니지만, 그 옷을 입고 다닐 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옷을 입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랍비여“ 라고 불렀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 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옷을 입고 다니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랍비라고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예수그리스도의 옷 입은 모습을 보고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관정에서 수많은 병정들과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모두 벗겨지고, 치욕스럽게도 속살을 들어내 보이고, 벗은 몸으로 서있는 그를 보고, 누구도 이제는 더 이상 그분을 랍비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분을 메시아라고는, 커녕 선지자라고도 부를 수 없었고, 주님이라고도 부를 수 없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처럼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런 치욕을 당하심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모든 옷을 벗겨지시므로, 이전에 자기가 누리고 사람들로 부터 받던 모든 인정을 스스로 모두 빼앗기도록 버리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매일 기도할때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묻습니다. 정말 그 기도를 드릴 때 마다, 여러분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여러분들을 구원 하셨다고 믿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우리에게 감격으로 다가옵니까?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가 어떤 고난을 당하고, 우리를 위해서 어떤 치욕을 당하셨는지가 그 기도 속에서 우리의 가슴에 다가오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골고다 언덕을 그 고난의 언덕을 올라가기 전에 잠시도 그에게 안식이나 쉼이나 평화가 보상으로 주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낯모르는 수많은 군병들에게 이끌려서 옷을 찢어버리듯이 사람들이 벗겨버렸습니다. 그의 속살이 들어 났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나를 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당신의 고귀하신 살과 피를 주셨기 때문에 벗어버린 것 무엇입니까? 입기만 하면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옷 같이 편하고 좋았던, 이 세상에서의 특권을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관정에서 벗어본적 있으십니까? 이전에는 몸에 걸칠수록 딱 맞고, 활동하기 편하고 입기만 하면 내게 어울리던 세상의 모든 더러운 관습과 불의한 모든 습관과 같은 성도의 의복을 옛사람의 의복을 벗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벗을 때에 들어나는 속살이 부끄러워, 그렇게 벗어버리고 나며는 벗은 내 몸을 보고, 조롱할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고귀한 몸에 옷이 벗겨지고, 남모르는 수많을 사람들은 벌거벗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조롱하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사람들은 벗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속살이 드러난 그 벌거벗은 모습을 보며 희롱하고 조롱하였습니다. 사람들과 똑같이 바라보시면서도 조롱하지 않는 분이 계셨으니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조롱을 받으셨으나 고귀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그분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었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수치스럽게도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바라 볼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벗겨지지 않아도 될 옷을 벗겨지고, 찢기지 않아도 될 그 겉옷을 찢기 운채 조롱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서있으시며,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관념이나 생각의 나열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뒤를 따라 가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이처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수그리스도는 이 빌라도의 관정에서 자신의 옷을 벗겨졌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옷이 벗겨지는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수치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 우리가 옛사람과 옛습관 오랫동안 입고 다니던, 그 성도의 불법한 옷을, 불결한 옷을 불경건한 옷을 벗어 버릴 수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바울이 그토록 알기를 원했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가 빌라도의 관정에서 옷을 벗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내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므로 이루기 위하여 벌거벗겨지는 그 수치를 기쁘게 감당해야 하는 것입디다.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다가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때 있으면 생각하십시오.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그 진심이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충성이 조롱으로 돌아올 때,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그렇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나서야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는 이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옷 벗기고, 부끄러움을 당한 것처럼 예수그리스도께서 벌거벗은 몸으로 빌라도의 관정에서 하늘의 천사를 불러내어, 천상에서 지으신 천사의 옷을 입으시므로, 자신을 영광가운데 가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아니한 것은 오직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 이렇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이 세상에서의 대우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자랑과 이런 옷들을 기꺼이 벗어 버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또 당하신 일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 가시 면류관은 저도 한번 봤습니다. 약 7cm -10cm이상 되는 아주 지독한 가시로 만들어진, 그러한 그냥 빙빙 둘러서 만든 그런 가시관입니다. 그것을 머리위에 씌웠습니다. 그냥 올려놓으면, 사람들이 치고, 침 뱉고 조롱하고 발로 차고 하는데, 그것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가시관을 올려놓고 그것을 눌려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가시관을 쓰고 팔레스타인의 굵고 기다란 갈대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의 그 머리에 두르신 가시관을 때렸다고 하였습니다. 때릴 때 마다 그 가시는 이마의 여린 살을 찢고 살 깊이 살 깊이 박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분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십자가를 지기 전에 자신의 육체로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예수의 뒤를 따라 갔던 훌륭한 사람들의 생애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고, 예수만 위해 살았던 훌륭한 사람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무협소설을 읽는 것 같은 감탄에 빠지는 것이 예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그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마지막에 승리하기 까지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그리스도처럼 그렇게 고통을 당하며 그렇게 예수를 위해서 쓴잔을 기꺼이 마시려고 할 때에 그 삶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따라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건은 이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기 전에, 빌라도의 관정에서 철저하게 이미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메었던 십자가는 평안함 가운데 그리스도 어깨위에 메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먼저 하나님은 여러모로 이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임을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분이심을 이 빌라도의 뜰에서 그 관정에서 시험을 당하게 하시므로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던 사람들만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평소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정신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언젠가 그리스도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실 때 그것을 지고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자신을 낮추며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럴 기회가 올 때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가신 면류관을 엮어서 그 머리에 씌움을 당하고, 그리고, 고통을 당하시므로, 잠시 후에 있을 십자가에 못 박힐 그 고난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음을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분 안에 모든 능력이 있었으나, 그것을 포기 했습니다. 모든 권세가 있었으나, 그것을 버렸고, 천사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공경 받으실 수 있는 권세가 있었으나 그것을 버렸습니다. 왜 입니까? 주님이 영광과 존귀를 세상에서 받으셔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 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는 홍포를 입으셨습니다. 홍포는 임금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은 뒤에 그 위에 두르는 옷입니다. 임금 통치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지금 완전히 벌거벗은 몸에 그 겉옷을 두르고 있었으니, 그 모양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습니까? 이들은 한때에 빌라도를 향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애원하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왕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당신은 가이사의 신하가 아니다” 그러며,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인하여 분노에 떨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까지 데려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들이 예수의 몸에 자신들도 인정해 주지 않으면서, 예수를 왕으로 치장을 해서 금빛 빛나는 호를 들려주는 대신 시궁창에서 끊어온 갈대를 그분의 고귀한 손에 들려준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조롱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뒤를 따라 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예수께서 관정에서 홍포를 입고, 갈대 호를 드시므로, 사람들에게 희롱을 받으신 것과 같은 그런 희롱과 조롱을 받게 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은 주님이 받으셨던 것과 같은 거의 같은 것을 공유합니다. 그분께서 당하셨던 수치와 고난과 모욕을 당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 수없이 그분만이 누리셨던 하나님과의 교통과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 받아 죽어가면서도,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렸던, 그 특별한 은혜가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면 자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뒤를 따르는 삶으로 내어주고, 그리스도처럼 벗겨지고, 그리스도처럼 채찍에 맞고, 그리스도처럼 홍포를 입으므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그리스도처럼 갈대 호를 손에 들으므로 말미암아, 저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는 사람들, 그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나는 수치를 당하나,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 져야 하리라” 주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나도 잘 모르지만, 여러분, 사랑을 아세요? 나는 이것은 영원한 신비입니다. 사랑, 분노가 끊어 오르다가도, 돌아서면, 논리와는 상관없이 이름 석 자를 부를 때에 마음이 녹는 것 같고, 눈물이 흐르는 사람,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논리와 이치로 따지면, 요 못된 것, 그리고, 다시는 보지 말아야 하는데, 돌아서서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면, 처절하게 다가오는 그 가슴이 에이는 것 같은 무너짐, 그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눈물 없이 보실 수 없었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 없이 보실 수 없었던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많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 특별히 예수의 뒤를 쫓으며,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예수를 위해서 드렸던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보다 더 사랑하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무엇 인고하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서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되겠다 말씀 하셨을 때에, “아니 되옵니다” 말했을 때에, 예수님의 입에서는 거의 지체 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베드로를 향한 강력한 도전과 책망의 음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지체하지 않고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실족케 하는 자로구나”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하신 치욕이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는 그가 요단 강변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 있는 요한에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은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시는 그분이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만류하며 예수 그리스도께 말했습니다. “주님!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 “내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어찌 죄 없으신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으실 수 있단 말입니까? 불가능 하옵나이다” 그때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허락하라, 그리하여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관심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것을 원하고,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저것을 원할 때, 여러분은 옷을 벗겨지는 수치와 홍포를 뒤집어쓰는 조롱과 가시관을 쓰는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기꺼이 이런 부끄러움과 고난과 조롱을 사람들로부터 받을 각오가 되어있습니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나를 다 인정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릅니다. 세상에 사람이 아무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사람들은 사자처럼 살다가 갔습니다.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사람에게도 인정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십자가를 지며 걸어가는 길에는 때때로 그런 아름답고 이상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것은 아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저녁에 가슴에 아로새기시기 바랍니다.
어제께 안수를 받았습니다. 12시 넘어서 잤는데, 4시에 눈을 떴는데,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설래 이던 날이 내 인생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의 설래 임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치욕스러운 그런 설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 같은 사람이 오늘 목사가 되었는데, 이 무슨 한국 교회에 비극입니까?” 그리고, 새벽에 결국은 일찍 나와 버렸습니다. 새벽기도가 끝나고 엎드려 기도하는데 가슴에 확 처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혼탁한 세상에 또 하나 쓰레기가 보태어지는 구나. 저는 9월 달까지도 80%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9월 중순에 금식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성령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고, 내 마음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통하며 그러고 있는데, 모두들 거의 돌아갈 때가 되었나? 할 때에, 하나님이 내 마음에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 자신을 다 드려라, 그러면 네 자신을 다드려서 십자가를 지면, 그다음은 내가 책임진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이 성경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순식간에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순처럼 내 마음에서 우러났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눈물로 정화수를 삼아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상하신 당신의 이마에 핏자국을 닦아 드리고, 내 머리카락을 잘라 신발을 삼아 우리를 위하여 험한 길을 오르시기 위해 벗으신 그 발에 신겨드리고, 내 살가죽을 벗겨내여 고운 홍포 옷을 만들어서, 관정에서 벌거벗고 서계신 그리스도 예수께 입혀드리고, 점점이 내 살을 베어 뚫어진 옆구리를 메어드리고, 구멍 난 손가락에 채워드리자, 그리고도, 주님! 남은 살과 피가 있다 할지라고 그것도 내 것은 아니오니 주님 마음대로 쓰시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성공하는지 우리는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이로 만든 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화려한 삶은 있으나 예수의 향기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모양은 있으나, 껍질을 깨고 우러나오는 깨뜨려진 옥합 속에서 흘러나오는 향료의 아름다운 내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대업을 이루시기 전에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모든 이전의 특권과 그 모든 옷을 벗어버리고, 희롱과 멸시를 받으시므로, 그 길을 가셨다면, 그분의 뒤를 따라 가는 우리가, 그 관정에 서서 벗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우리가, 훌륭한 옷과 그리고, 이세상의 모든 특권의 옷으로 치장할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그 분의 뒤를 따라 갈수 없는 것입니다. 옛 습관의 옷 하나 벗어버리는 것이 섭섭하여, 내려놓을 수 없는 사람들은 예수의 뒤를 따라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공하는 인생인지 우리는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나를 위해 살고자 하는 모든 욕심을 포기하고 나면, 우리의 인생이 걸어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결심하고, 그것을 택했기 때문에 수치와 아픔과 조롱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도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고, 아버지의 계획을 이루고 성취하며 걸어갈 수 있다는, 이 사실 하나에 인생의 보람과 비전을 거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수많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보다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저를 위해서 또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받쳐진 사람들입니다. 나는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나는 누가 안수를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안수를 받으면서 한없이 울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하나님 , 이제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나를 소유하거나 주님의 손에서 빼앗거나 할 수 없습니다. 주님 홀로 다 가지시고, 모두 소유 하시옵소서“ 이렇게 받쳐진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내 인생 모두 주님 앞에 다 받쳤다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고난을 받고, 치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편안하고 안일한 모든 길을 버리고, 이런 고난의 길을 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 받쳐진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남강선생이 하루는 초대교회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인지 길선주 목사님인지 기억은 안 납니다만, 목사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게, 내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이 오산학교를 맡을 사람이 없네, 부탁하건데, 자네가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오산학교를 맡아서, 교장 노릇을 해주게”, 그때에 목사님이 존경하는 스승 남강선생 앞에서 말했습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스승님, 저는 이미 하나님께 받쳐져 버렸습니다. 주님께 다 받쳤기 때문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왜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십자가의 정신으로 멸시와 천대를 세상의 부귀와 영화보다 기쁘게 여기고, 고난을 친구삼아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십자가의 뒤를 따라 갈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만 받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도 받치고 세상에도 받치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온전히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 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지기 어렵고 예수와 같이 자신을 벗어 버리고, 치욕을 당하고, 예수를 위해서 살아가는 일들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때마다 이 빌라도의 관정에 선 예수그리스도,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어딘가 굴러다니던 어느 청년의 찬송가를 펼쳐보고 가슴속에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형제가 혹은 자매인지 ”사랑이다. 내 평생에 걸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누명을 벗겨드리고야 말리라, 예수가 당한 고난은 못나서 당한 고난이 아니고, 그의 매 맞음과 고난이 능력이 없어서 당한 고난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 수많은 누명으로부터 예수를 증거하므로 예수의 누명을 벗겨, 재판 석에 앉아 계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향해 무릎을 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일평생의 소원“ 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의 정신으로 사십시오. 지금은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 언제까지 이런 날들이 계속 될지 주님만이 아십니다. 여러분들이 전쟁도 없고, 기근도 없는 고요한 환경에서 아름다운 예배당에 모여 단출하게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경배를 돌리지만, 언제까지 세상이 평안한 날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인생이 이렇게 관정에 서있는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