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가정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가정(잠22:6) 2005.5.1 주일오전 1
2. 복된 자녀로 사는 길(잠31:17) 2005.5.8 주일오전 11
3. 돕는 베필(창2:18) 2005.5.15 주일오전 26
4. 아름다운 형제(시133:1) 2005.5.29 주일오전 41
5. 네 형제와 입 맞추라(창33:3-4) 2005.6.5 주일오전 53
1. 어떻게 아이를 가르칠까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지난주까지 계명과 순종을 11주간에 걸쳐서 설교했습니다.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는 가정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는데 오늘은 어린아이에 대해서 그리고 다음주에는 부모에 대해서 그리고 그 다음주에는 부부에 대해서 또 그 다음에는 형제에 대해서 차례대로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본문을 좀 해설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솔로몬이 자기의 아들을 지혜롭게 할 요량으로 지은 지혜서입니다. 아들뿐 아니라 자기가 다스리는 모든 사람들이 지혜를 터득하고 슬기로운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단순히 인생을 살아가는 처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참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또 사람들에게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신앙적인 통찰을 함께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어린아이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라고 권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아이가 늙은 후에도 그 길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어린아이들을 가르쳐야지 될까? 가르침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들을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30년에 프랑스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산에서 짐승들과 함께 뛰어노는 정글북에 나오는 모글린 소년 같은 아이 둘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은 사냥꾼의 그물에 의해서 나포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불과 한 9세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두 아이를 이제 잡아서 문명사회에 데리고 왔지만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네발로 기어 다니고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에 숨어 있기 좋아하고 눈은 빛나고 말을 하는 대신 짐승들처럼 끙끙거리고 아주 심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언어는 물론 사용할 줄 몰랐고 배변하는 모든 동작도 영락없는 짐승이었습니다.
세계의 모든 교육학자들의 관심은 이제 이 아이들을 당시의 교육이론으로 가르쳐서 문명사회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가? 몸은 물론 돌아왔지만 문명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이 아이들을 돌려놓을 수 있겠는가가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 있는 교육학자들 중에 내놓으라하는 사람, 그 중에서 특별히 유아교육에 관심이 있고 어린이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속속 프랑스로 모여서 회의를 하고 인류최초의 시험적인 교육에 이제 그들의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이론을 제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었는데 많은 사랑을 쏟았고 또 많이 애를 썼지만 결국은 이 아이들을 문명사회의 일원으로 돌려놓는데 실패를 했고 너무 오래 전에 읽은 기록이라서 제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제 기억 속에는 아이들이 16-7까지 살고 죽었습니다. 특별한 질병에 걸려서 죽었다기보다는 아마 문명사회 속에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서 죽은 것으로 그렇게 기억이 됩니다. 이때에 전 세계의 교육학자들, 특별히 어린이교육을 한 사람들이 내린 아주 놀라운 결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문명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 절대적인 양은 어느 시기에 그 지식의 양이 아이에게 전달되는가가 매우 중요한 관건이라고 하는 것을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그 시기에 맞는 교육이 행해지지 않으면 그 시기를 놓친 다음에는 아무리 그 아이를 교육을 시키려고 해도 그 아이가 문명세계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점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제 엄청난 자부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누누이 역설했지만 실험적으로 이 유아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아주 놀랍게 입증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이 교육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린아이가 단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미숙하기 때문에 그리고 교육을 잘 받아들이는 시기이기 때문에 어린아이 적에 교육을 시켜야 된다고 하는 그런 평범한 결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을 사람으로 만들어 가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일정한 시기에 인간으로서 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식을 강력하게 흡수할 수 있는 그리고 흡수된 지식이 지성의 창고에만 고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마음에 각인되어서 인간으로서 성향을 형성하는 특별한 시기를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것입니다. 그 시기는 이제 모든 다른 시기보다 훨씬 더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는 시기입니다. 빨판과 같아서 그 시기에는 참된 지식과 올바르지 않은 지식이 특별히 없이 아이의 심성 속으로 빨판에 빨려 들어가듯이 아주 강하게 흡착되어서 빨려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제 올바른 교육이 좋은 환경 속에서 행해지게 되면 그러면 좋은 본성 이런 세 가지 요소들이 잘 갖추어지게 되면 그러면 아주 좋은 사람으로서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유아교육학에 있어서 이제 인지발달과 함께 성품이 형성되는 것에 관한 고전적인 이론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설이고, 하나는 천성설이 됩니다. 그러니까 환경설이고 또 하나는 환경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인간의 본성설입니다. 그래서 이제 존 로크나 장작크 루소 같은 사람들이 두 이론에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존 로크 같은 경우는 인간의 경험, 그리고 교육과 환경 이런 것들을 굉장히 중요시했고 이것이 그 사람을 형성하는 요인이 라고 보았고 장작크 루소 같은 사람은 타고난 본성이 그 사람의 성품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두 이론을 오늘날 어느 하나가 정확하다고 보지 않고 이 두 이론이 통합된 것들이 오늘날 오히려 사실에 가까울 것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상세한 것을 이 시간에 장황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아주 간략하게 요약을 해서 설명을 하자면 교육의 환경은 지면에 있는 눈과 같고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기울기와 같아서 그래서 기울기가 아주 완만하고 그리고 눈이 많이 쌓여있으면 천천히 굴러가면서 눈 덩이가 이루어지고 또 기울기가 매우 급해도 눈이 별로 쌓이지 않으면 빠른 속도로 눈이 굴러가도 눈이 뭉쳐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기울기가 적당하고 많은 눈이 쌓여있다고 하면 눈 덩어리가 굴러가면서 놀랍게 형성이 되어서 커다란 눈 덩이가 될 것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그런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학자들은 교육학의 삼각형을 이야기합니다. 타고난 본성이 있고 교육이 있고 환경이 있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세 개의 선을 가지고는 삼각형을 만들 수밖에 없고 세 개의 선을 조합해서 사각형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본성을 바탕에 놓고 교육과 환경에 따라서 예각과 둔각의 다양한 삼각형을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제 이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사실은 선교나 구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아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교육의 중요한 사명은 일차적으로는 교회에 맡겨진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부모에게 맡겨졌고 그리고 이차적으로 교회에 맡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그 할일을 다해서 언약백성으로서 그 자녀들을 길러내야 하고 그리고 교회는 교회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이 아이들을 잘 가르쳐서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차피 정해진 시간 안에 살다가 우리의 인생을 마치게 되어있고 미래의 교회를 위해서는 사실은 우리가 미래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봉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현재에 봉사할 수 있는 이때에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에 모든 심혈을 기울여서 그 아이들이 정말 고운 주님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언젠가 교회 교육에 관해서 우리 교역자들과 그리고 일부 교회의 중직들을 놓고 제가 이런 케치플레이즈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흔히 유럽에서 복지국가를 얘기하면서 그러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사회 복지론을 얘기하는데 우리는 보다 신령한 의미에서 태내에서 천국까지라고 케치플레이즈를 제가 이야기해준 적이 있습니다. 한 자매가 교회에서 잉태하였다는 소문이 들릴 때 그때부터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그리고 그를 잘 가르쳐서 어머니가 되도록 준비를 시키며 배속에 있는 그 아이와 선생님과 부모가 대화해서 그래서 그 아이가 좋은 신앙의 영향을 받으며 태내에서 성장하게 하고 마지막 사람이 죽은 다음에 천국과 지옥을 보내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이 땅의 자원을 가지고 그 일을 결정할 수는 없지만 임종하는 노인의 손을 붙들고 하늘나라의 그 소망에 대해서 말하며 눈을 감게 해주는 일은 교회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우리 교회가 교육적 사명을 감당해야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런 교육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볼 때 마음아파 하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생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일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호주에 갔을 때 온 교회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모이고 커다란 교회당과 체육관이 다 먼지에 가득 쌓여서 비우고 교회당을 다 쓸 수 없어서 반을 칸막이로 막아서 쓰고 반은 창고로 쓰고 그것도 내놓는 헌금 가지고는 유지가 안 되어서 가끔 돌아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기탁하는 유산에 의해서 교회가 운영되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정말 같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일원으로서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팠고 이 땅의 조국교회에서까지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마지막에 우리가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러울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올바르게 아이들을 교육하고 그들을 위한 투자에 아까워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되고 또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이처럼 빨판처럼 빨아들이는 특별한 시기를 가지고 있고 이 때에 올바르게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애를 써서 이 아이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가정과 교회가 손잡고 길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각 교회학교 부서에서 부모들을 불러서 함께 기도하는 모임이 있는데 이것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이 매우 기쁩니다, 예전과 같으면 부모들이 잘 모이지 않았는데 그만큼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이런 아이들 시절에 주님의 모든 교훈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지 되겠다고 하는 것은 합의할 수 있고 그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문제에 우리들이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르쳐야지 되는가? 우선 그 가르쳐야하는 표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하녹 라나아르 알피따르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녹’이라고 하는 것은 ‘가르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자기 아이입니다. 그 아이에게 가르치라. ‘알피’ ‘무엇 무엇을 따라서’ ‘따르코’ ‘그에 길을 따라서 가르치라’ 여기서 ‘그’라고 하는 소유격은 아이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이의 길을 따라서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따르코 데레끄’에서 온 변화인데 이 ‘데레끄’는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어가는 길,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걸어가는 길, 그리고 그것은 은유적으로 행하는 모든 습관이나 행동의 연속적인 것 이런 것들을 가르칩니다. 그런 길이 바로 인생의 길인데 그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아직 아이가 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볼 때 살아야 할 그 길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가르쳐지지 않은 사람들은 인생길이 없을까요?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그들에게는 없고 그들이 행하는 라인이 그들에게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살아가면 그것이 모든 인생의 길이고 걸어가면 그것이 모두 사람이 다니는 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다르코 그의 길이 아닙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 우리들이 살았던 삶을 한번 회상해보십시오. 우리가 걸어온 인생의 길이 정말 길만 따라서 걸어온 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길을 따라서 사람의 도리를 행하며 걸어온 길도 있지만 오히려 더 많은 길은 사람으로서는 걸어가서는 안 되는 길에 들어선 적도 있었고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우리는 가시밭길과 같은 인생의 길을 지나면서 우리 스스로의 결함과 죄악 때문에 상처를 받고 아파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참으로 걸어야 할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발견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곧 길이요”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을 처음 만나고 회개할 때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걸어온 것 때문에 회개했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인생에 커다란 고통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고 유익을 끼쳐야 할 많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안겨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아픈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게 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람들도 이렇게 우리 자신이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가는 인생 때문에 고통을 받았지만 가장 많이 고통을 받고 아파하신 분은 하늘아버지가 아니고 누구시겠습니까?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이 땅에 창조하셔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시는데 그 길을 주님이 우리에게 계시해주셨는데도 무지와 어두움 속에서 그 길로 가지 않았던 많은 우리의 날들, 우리의 삶 이런 것들이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그때 우리처럼 살려고 한다면 우리들은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포기해도 괜찮습니다. 아무 길이나 그 자신이 가야할 길이 아닌 아무 길이나 걸어갈 자녀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수고스럽게 아이들을 교육할 필요가 없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길러놓으면 그것이 모두 부모의 할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마치 돼지우리에서 짐승을 키우는 목부의 심정이지 부모의 심정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제가 작년에 조국교회에서 아무도 쓰지 않은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삯군 부모 아니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으시지만 저는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삯군 부모 밑에서 자란 여러분의 자녀의 영혼에 대한 슬픔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삯군 목자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가지고 있지만 삯군 부모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두려움을 갖고 있는지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제발 집에 가서 너희들 먹이고 입히기 위해서 아빠가 직장을 다닌다는 등 아침부터 밤까지 너희 밥하고 학교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엄마가 힘들어서 죽겠다는 등 그런 신파조의 고백은 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그런 넋두리에 감동을 받을 아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짐승도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었으면 결혼하지 마셔야 했고 아이를 낳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짐승들도 모두 하는 것입니다. 개, 돼지나 날짐승도 자기 새끼는 끔찍이 여기고 자기는 바짝 바짝 말라가면서도 새들이 그 새끼들이 주둥이를 벌린 입에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거기에 먹이를 넣어주지 않습니까? 그것은 위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것은 동물로서 모두 가지고 있는 종족본능과 같은 것입니다. 제발 그런 것을 가지고 아이들 앞에 유세하고 그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부모도 여러분을 그렇게 키웠고 개들도 아이들을 낳으면 그렇게 키울 것입니다. 그것을 내세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하나 가지고 선한 부모가 된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도 안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은 짐승입니다. 무슨 사람입니까? 자기 자식을 그렇게 버리고 무슨 사람입니까 짐승이지. 그것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하고 성도인 여러분들은 비교하지 마십시오. 왜 비교합니까? 비교를,
삯군 목자와 선한 목자는 평소에 섬기는데 있어서는 구분이 안 됩니다. 삯군 목자가 있다고 칩시다. 설교를 안 하겠습니까, 심방을 안 가겠습니까, 교회에서 회의를 안 하겠습니까? 아니면 선교사 파송예배 인도를 안 하겠습니까? 다 합니다. 멀리서 보면 삯군 목자와 선한 목자를 구분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 다녀서 아빠가 돈 벌어오고 엄마가 밥 해먹이고 아이들 빨래해주고 그렇게 적금 들어서 시집 장가보내고 그런 것은 삯군 부모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차이는 똑같이 설교하고 똑같이 심방하지만 선한 목자 속에는 양들을 향한 사랑 그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그렇게 구원해주시고 양들을 만나게 해주신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의 감격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면서 한줄, 한줄 설교 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영혼들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피어린 갈망이 마음속에 묻어있습니다. 심방을 해도 삯군은 가서 대접을 받고 오지만 그러나 선한 목자는 그 관심이 그 영혼에 흐느낌에 가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시에 찔린 이 양을 건져내어서 그래서 치료해주고 주님의 사람으로 살게 할 것인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에도 선한 목자는 마음이 실리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선한 목자의 가장 훌륭한 본을 보여주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마음에 없는 섬김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낮고 천한 자들을 섬기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실 때 팔복산에서 설교하실 때 주님의 마음이나 벳세다 광야에서 거친 보리떡을 떼어 굶주린 자들의 입에 넣어주실 때 주님의 마음이나 똑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진리를 가르쳐주실 때나 문둥병자의 헌데를 만져서 치료해주실 때나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죄인들에게 사랑을 받으실 때나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그들의 손에 못박혀죽으실 때나 주님의 마음을 늘 같은 마음이었고 그래서 그분의 생애는 액정의 생애였습니다. 피의 생애였고, 땀의 생애였고,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모든 섬김 속에 모두 배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선한 목자의 본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에 대해서 선한 부모인지 삯군 부모인지 한번 깊이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난 감격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그 자녀가 너무 소중하고 내 살을 찢고 내 뼈를 갈고 그리고 내 심장을 가늘게 썰어서라도 이 아이를 정말 내가 살지 못했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내가 되지 못했던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존재의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야지 되겠다는 소명이 여러분에게 있는지 나는 오늘 이 시간에 말씀에 근거해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세대가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나 그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보다 나아야지만 다음시대의 교회는 희망이 있고 교회의 희망은 곧 이 세상에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그 방식이 무엇인가? 첫째는 아이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쳐야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모의 마음에 말씀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담은 것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게 마련이기 때문에 부모의 사명이 선한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부모에 마음속에 말씀에 의한 감화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오년 전에 여러분들에게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해서 청교도의 어린이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에 저는 17세기의 키드 민스터의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의 그 교육방식을 읽으면서 커다란 감화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열렬하게 아이들을 가르치기를 원했는지 마더 스케트 키즈미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어머니 무릎에서 배우는 교리문답이라는 정도가 됩니다. 우리식 표현으로 하자면 어머니 무릎에서 배우는 교리반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저는 문답으로 나와 있는 그 구절을 보면서 정말 놀라웠습니다. ‘문’ 아이야 이제 우리 교리문답을 배우자. ‘답’ 엄마 그게 뭐예요? ‘문’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우리가 어떻게 섬기고 이 세상에 살아가야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인간의 도리란다. 그런데 엄마 왜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 하나도 안 배우는데 우리를 그것을 배워야 하나요? 아이야 신경 쓸 필요 없다. 그 사람들은 짐승이란다. 그것을 우리 나이로 따지면 한 돌 조금 지났을 때부터 무릎에 놓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말라기까지 나갑니다. 이렇게 두껍습니다. 그것을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지난번에 가정예배의 교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첫 달에는 많이 나갔습니다. 두 번째 달에는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 우리가 왜 이렇게 살까? 그것을 안 사간 이유가 가격 때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의지가 없는 부모의 집안에 한구석에 가정예배라고 소리치고 있는 그 책이 꼴 보기가 싫고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 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여러분들은 삯군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삯군 부모입니다.
여러분들의 아이가 여러분보다 훨씬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났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질 높은 삶을 살고 있을까요? 미래에는 여러분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자식이 미래에 주님의 마음에 근심이 되는데 좋은 집안에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큰 기쁨과 영광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주님 앞에 가서 어떻게 주님을 뵈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의 아이가 신앙도 없이 부랑아처럼 떠돌아다닐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불변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천국에서 여러분의 자녀들의 삶이 내려다보이는데 거기가 어떻게 천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옥과 방불할 것입니다.
나는 너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책이지만 교역자와 출판사 직원들이 밤을 새워서 만든 것입니다. 이번에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만들었는데 잡지 형태로 만들어서 어린아이부터 모두 친숙하게 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나오면서 내게 지금 350만원이 있다면- 350만원의 제작비가 들었습니다. -오늘 마당에서 쌓아놓고 모든 교인들을 한권씩 사주고 싶다고 하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이번에도 심혈을 기울여서 그 책을 만들었는데 제가 책을 내는 저자로서 아주 단언할 수 있는데 여러분들은 조국교회 어느 곳에 가도 그 정도의 품질의 가정지도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못 구합니다. 그 정도로 최고의 책을 만들어서 오죽했으면 출판사에서 원고를 보고 그것을 자기네 출판사에서 제발 출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게 힘들면 몇 천부 찍어서 자기네가 팔아주겠으니 넘겨달라고까지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고열을 짜내면서 만든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하찮게 취급받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여러분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런 삯군의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여러분들이 자녀를 주님의 사람으로 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잘 자라면 여러분 같은 수준이 될 것이고 아마 그것도 많이 기도해야지 될 것입니다. 그럼 다음 시대의 교회가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가정예배를 드리는 몇 안 되는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피땀을 흘리면서 그 책을 만듭니다. 만약에 여기에 단 일점의 영업의도가 있다면 하나님이 천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두다 이 책을 사가지고 가면 한 30만원쯤 밑집니다. 왜 그렇게 사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인 이 말씀을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자녀를 축복할 자격이 있습니까? 말씀대로 이 아이들을 기르려고 하는 의도가 없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려고 하지 않는데 그 아이를 위해 비는 많은 축복, 공부를 잘하라. 건강 하라. 그리고 좋은 훌륭한 인재가 되어라. 좋은 지위를 갖게 해주십시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람이 아닌데 그들이 건강하다면 힘을 얻어서 창조의 세계를 파괴할 것이고 주님의 사람이 아닌데 그들에게 지혜가 있다면 아마 영악한 사람들이 되어서 악의 심부름꾼이 되지 않겠습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를 그렇게 소홀히 하십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정말 말합니다. 눈물로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를 유아세례를 줄 때 여러분은 서약을 했습니다. 이 아이의 영혼이 이 아이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참된 구원이 이르게 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구원인 것처럼 위하여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힘쓰며 이 아이를 위하여서 섬기겠는가 하고 서약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방치해둡니까? 그렇게 해서 이 다음에 어떻게 주님을 뵈려고 합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진지하게 한 마디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가르쳐본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저고리를 풀어서 젖을 꺼내어 우리에게 먹여주시듯이 그렇게 우리를 보듬어 길러서 이만큼 자라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은 과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젖을 먹이시는 주님의 그 신령한 젖을 어린아이처럼 사모합니까? 그리고 거기에서 영향을 섭취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도 불은 젖으로 앞가슴을 헤치며 아이에게 그런 사랑으로 먹이고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부모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사모함을 가지고 그 말씀을 채워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모본을 보임으로서 그 아이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웃에게 온 삶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십시오. 꼭 필요하다면 말도 하십시오.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이웃들에게 온 삶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십시오. 그러나 꼭 필요하다면 복음에 대해서 말도 하십시오. 무엇이 먼저라고 하는 것입니까?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 더 먼저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의 무릎에서 엄마 아빠의 면전에서 배우지만 나이가 들면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우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이는 삶의 모본이 예수를 닮은 모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서 번듯한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 부모의 사명이 아닙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 아이에게 참으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보여줄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로 인하여 날마다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 아이에게 그 본을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여러분의 온 삶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하다면 말로도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들은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익숙해진 것이라고 변론밖에 없는지라 입을 열면 아이에게 청산유수지만 살면서는 오염된 냄새가 악취가 가득 나는 그런 삶의 모본을 여러분들에게 보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미래에 여러분들 대한 아이의 태도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의 그런 모습을 다행히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데 여러분이 보여준 모본을 따라서 똑같이 사는 것입니다. 원하면 한번 아멘 해보십시오. 왜 못하십니까? 여러분들이 보여주는 그릇된 삶의 모본대로 아이들이 살고 그런 부모에 대해서 사후에도 비난하지 않으면 좋다고 생각하면 아멘 해보십시오. 다행히 그 아이가 여러분의 삶의 모본을 따르지 않고 올바르게 산다고 칩시다. 다행인데 그 대신 여러분들에 대한 그 아이의 마지막 기억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우리 아빠를 통해 우리 엄마를 통해서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너무 많이 배웠다. 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원하시면 아멘 해보십시오. 왜 대답을 못 하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모본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인격화되어야 합니다. 깊이 인격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의 눈빛 다음으로 무서운 것은 목사의 눈빛도 아니고 그리고 직장 상사의 눈빛도 아니고 심지어는 부모의 눈빛도 아닙니다. 부모는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빛 다음으로 무서운 것은 자기 자녀의 눈빛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사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저는 이때가 되면 하나님 앞에 늘 부끄럽습니다. 저는 아이를 둘 낳았지만 그렇게 만족스럽게 잘 기르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매우 잘 할 것이라고 하는 자신은 사실 없습니다. 그냥 힘닿는 대로 애를 쓸 뿐입니다. 결혼하고 7년 만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는데 정말 얼굴도 예쁘고 영특했습니다. 유치원에서도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학교에서는 4학년 때까지 모두 올 수였습니다. 저녁 늦게까지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하여튼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아이가 참 바르게 잘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참 감사했고 아주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내가 못산 삶을 아이가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기대였고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포기할 용의가 있다고까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5학년부터 아이가 제 마음에 차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성적을 떨어지고 그리고 생활은 무질서하고 정리정돈은 전혀 안 하고 그리고 학교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2년은 잘 참았는데 중학교 들어가면서는 점점 더 실망이 심해져서 이제 거의 그 아이에 대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그 아이를 향해 가졌던 큰 기대는 섭섭함으로 번졌고 섭섭함은 미움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진지하게 아이 하나를 더 입양할 계획도 마음에 세우고 있었습니다. 실행은 못했지만 그 정도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저를 깊이 깨우치셨습니다. 저는 그 날의 그 깨우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경험을 여러분들에게 모두 다 말하지는 않겠지만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애야, 내가 너에게 아버지가 되었던 것처럼 너도 아이에게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아이에게 아버지가 되는 방식과 하나님이 나에게 아버지가 되는 방식이 너무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게 좋은 아버지였지만 내 아이에게 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미명하에 그 아이에게 가졌던 과도한 기대, 나 중심의 비전, 이런 것들을 따라오지 못할 때 아이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미움, 이런 종류의 아버지 됨은 사실 하나님 아버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아버지 됨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혼자서 회개를 참 많이 했습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혼자서 여러 날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인간적인 기대를 접었습니다. 마치 아이라고 하는 나무에 얽어매놓았던 쇠줄들을 다 걷어버리고 그리고 아이가 그냥 자라게 내버려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이들은 화초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선물 받을 때 싫어하는 선물이 분재입니다. 그런 것 저에게 선물하지 마십시오. 정말 싫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무에다가 구리줄을 감아서 자기 원하는 모양대로 자라게 한 그런 것들은 정말 그 선물한 사람의 성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나는 그런 것 싫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그 아이를 분재처럼 키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설악산이나 태백산에 뿌리박고 있는 잘라 가면 큰 궁궐을 짓는 대들보에 쓸만한 그 큰 동냥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그렇게 자라라고 거기다 틀을 매달아주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거기에 있었고 그냥 거기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내리시고 계절을 따라서 그 나무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모든 기대를 접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구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젖혀놓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평가는 각각 다르겠습니다만 그 이후로 저는 한번도 통지표를 책상머리에 놓고 아이를 혼낸 적이 없습니다. 무럭무럭 자라게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빠가 집회만 나가면 좋아하던 아이가 이제 벌써 20살이 다 되었는데 지금도 하루에 집에 서너 번 들어가면 제일 먼저 마루에 나와서 저를 안아줍니다.
하나님이 어머니 같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어떻게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사랑과 인내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모본을 예수님 친히 보이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수없이 그분을 실망시켜드렸고 수없이 결심과 약속을 번복했는데도 아직도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집안에서 자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유아부인가 영아부에서 아이들에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아빠에게 매일 한번씩 기도해주기, 아이가 집에 와서 아빠 나 기도해주래. 그거 숙제야. 무슨 간지럽게 기도냐. 네가 기도해라. 하나님이 어차피 들어주시는데. 아이가 여러 번 요청하니까 할 수 없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기도하다가 아빠가 울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번도 아이를 가슴에 품고 기도해준 적이 없어 아빠가 회개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그런 사랑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해주십시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으십시오. 안아주십시오. 그리고 축복하십시오. 깊이 사랑하십시오. 그 아이가 그렇게 배운 주의 모본을 따라서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복된 자녀로 사는 길
“아비를 조롱하여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30:17)
우리들이 읽은 본문을 잠시 해설을 하고 어버이 주일을 맞추어서 오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부모 공경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 앞에도 부모 공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원래 이 제 문학에 속하는 이 잠언은 서술적 구조를 가지고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문학적 방식을 취하지 않고 짧은 경구들로 조합을 이루어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와 여호와를 공경하는 도를 깨우치기 위해서 기록이 된 성경입니다. 서술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얼핏 보면 쪼가리, 쪼가리 흩어진 것 같고 별 내용이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지 않지만 그러나 이런 문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마치 바짝 마른 미역과 같아서 처음 볼 때에 별 뜻이 없는 것 같지만 생각이라는 늪 속에 깊이 잠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한줌밖에 안되던 마른 미역이 퍼져서 양푼 가득 되듯이 그렇게 아주 많은 진리의 내용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아비를 멸시하고 어미를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골짜기에서 버려진 것과 같아서 까마귀가 그 눈을 쪼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하는 이런 무시무시한 부정적인 이야기로 이 경구가 끝이 납니다. 이것 역시 지혜문학과 시 문학에서 대표적인 작시법으로 쓰이고 있는 병행법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미와 아비, 그리고 까마귀와 독수리새끼 각각 그에 뒤따르는 동사, 멸시하고 그 다음에 순종하기 싫어하고 그리고 쪼이고 먹히고 이것이 각각 a 다시 b 다시 이렇게 엮어져서 그래서 병행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병행법의 구조에서는 까마귀와 독수리의 차이가 무엇이고 쪼이고 먹히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전반부는 부모 공경에 대한 대의를 보여주고 후반부는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가 받을 저주를 이렇게 그림과 같은 회화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비를 멸시하고 어미에게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 이렇게 나오는데 이것 역시 똑같은 논리에 의해서 멸시하는 것이 아버지와 무슨 관계가 있고 순종하는 것은 또 고유하게 어머니에게 뭐가 관계가 되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분석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것은 부모를 풀어서 어미와 아비를, 그리고 그 부모에게 공경하는 것을 또 그 부모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이것을 뒤집어서 멸시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묘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모두 통합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경구적 성격을 가진 그런 문장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부모에게 해야 될 공경을 올바르게 하지 않을 때 그때에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앞에 저주받는 삶이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주 아끼는 자 없이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살아서는 아무렇게나 살았어도 죽은 후에는 그 사람의 시신을 수습해서 예를 갖추고 정중하게 장례를 지낸 것이 사자에 대한 마지막 예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의 갖춘 대접을 받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골짜기에 버려진 사람들이 되어서 그래서 새들이 와서 눈을 쪼고 독수리가 와서 그 살을 뜯어먹어서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아끼는 자 없이 버려진 그런 사람의 마지막 주검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중한 저주를 선언하신 죄일수록 그것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계명이 많이 있고 그 모든 계명에 대해서 하나님은 순종하기를 원하시지만 순종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은 모든 계명에 다 동일하지는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질에 있어서 동질의 것이지만 그 중요성에 있어서는 모두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작은 계명을 어겼을 때는 작은 죄가 되지만 큰 계명을 어기게 되면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여기에 담겨있으니 이렇게 그 계명을 어겼을 때 이렇게 아주 비참한 언어로 표현되고 있는 저주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죄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중대한 저주를 선언하신 이 순종에 의미가 바로 부모에 대한 공경이고 이렇게 부모에 대한 공경을 강력하게 촉구하시는 이유는 부모를 공경하는 이 대의를 통해서 이 창조의 질서가 보존되어가고 하나님의 회복 하시려고 하는 창조의 영광에 대한 회복의 계획이 수행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효도를 이야기하는데 우리들이 본성적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효도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효도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책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제 자신의 논리의 구조를 가지고 효도를 크게 삼 구분하여 말하자면 첫째는 도의적 효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님이 입지 않고 자지 않고 먹지 않으시고 나를 이렇게 길러주시고 또 당신의 살과 뼈와 그리고 피를 나에게 나누어주셔서 이렇게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까 그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옳다하는 것이 바로 도의적 효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본성의 빛만을 호소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효도의 사람들에게 효도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살과 나의 피부 그리고 나의 모든 머리카락까지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까 나는 부모에게 빚진 자라는 사상이 바로 효도의 개념이 되는 것이고 특히 동양적 사상에서 이 효도가 그런 개념을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효도는 적선적 효도입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많은 것을 받았다. 실제로 받은 것을 고맙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부모에게 효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게 적선적인 효도입니다. 살면 이제 얼마나 더 살까? 그러니까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안하게 해드려야지 되지 않겠는가. 노인네들이 불쌍하지 않나. 이런 것들이 모두 적선적인 개념의 효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하라고 가르치는 효도는 그런 도움이거나 혹은 적선적인 의미에서의 효도가 아닌 공경적 효도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공경적 효도라고 하는 것은 효도의 동기 자체가 사람이 부모에게로부터 받은 은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효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일을 한다. 그러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인 저를 포함해서 우리 간사들까지 심지어는 너무 급할 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까지 봉사를 합니다. 그것을 교회에서 월급을 받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낸 헌금은 하나님께로 다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그 월급 때문에 일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세워주신 것이 소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더니 하나님이 하늘창고를 여시고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당신을 위해서 산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교회의 물질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 때도 항상 교회에서 돈을 타서 그것을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바친 헌금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모두 다 들어 가버렸고 그리고 우리가 이런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창고를 열고 새롭게 주신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적 효도는 부모로부터 받은 은덕이 크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거나 혹은 오래 살지 못하실 것 같으니까 불쌍해서 부모를 긍휼히 여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하나님, 어머님과 아버지를 합쳐놓은 것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이제껏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두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을 이루는 선을 이루는데 기여하는 미덕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부모를 섬기고 그리고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경적 효도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부모의 자격문제와는 상관없이 주님의 분부 앞에서 우리들이 자녀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자유함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에게 대한 공경에 본질이 무엇인가?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효도는 바로 공경과 순종입니다. 공경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야례'라는 단어인데 원래 뜻은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두려워하다고 하는 이 단어는 하나님을 경외하다는 것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감정은 두려움과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함께 혼합된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그 하나님을 친근히 할 수 없을 것이고 두려움이 없고 친근함만 있다면 하나님 앞에 무례해질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두려움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함께 공전함으로 주님의 엄위하신 영광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그 애끓는 자비의 사랑을 동시에 느끼면서 그분 앞에 서있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분 앞에 관계를 가지고 서있는 자체를 행복해하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향한 이런 공경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부모의 교훈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하고 또 적극적으로는 부모의 명령을 어기지 않을 뿐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자녀의 마땅한 도리이고 이렇게 하지 않을 때 그가 저주받은 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이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지혜서에서 그리고 있는 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주님을 깊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여호와의 모든 율법의 도에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성결하게 살아가는 그런 이성적인 부모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여러분의 부모가 그런 이상형이 되어서 나보다 뛰어나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젖어들고 그래서 나와 그리고 나 자신과 그리고 이 세상을 향해서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평생 내가 성화의 길을 걸어가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는 그런 위대한 부모를 모시고 있다면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가르쳐주는 대로 살면 되니까. 문제는 가르쳐도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만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러분들 중에 그런 부모가 가지신 분이 몇 분이 될까요? 그게 궁금합니다. 아마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그런 부모를 가졌을 것이고 또 그런 부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자식이 그 부모를 그렇게 정당하게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자식도 은혜를 받아서 올바른 판단력을 가져야 합니다. 제 주위에는 부모님은 너무 훌륭하셔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시는데 자식들이 그 부모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몇몇의 목사님들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목사님들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큰 문제는 자식들이 아버지가 만난 하나님을 못 만난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더더욱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의할 수 없는 부모, 그리고 나보다 훨씬 더 신앙이 약한 부모, 심지어는 불신상태에 있고 심지어는 도덕적인 수준에 있어서도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그런 결함이 있는 부모를 가진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 아닙니까? 이런 경우에 그럼 어떻게 그 부모를 공경할 수 있고 또 어떻게 그 부모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사도 바울이 바로 구약의 율법을 복음에 적용시키면서 이런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는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십계명 중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이 땅에서 장수할 것이요 라고 하는 계명을 신약적으로 적용을 시키면서 거기에다가 첨가했습니다.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 안에서' 라고 하는 그 단서는 이렇게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순종해야지만 그러나 그렇게 부모에게 공경하고 순종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계명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이런 하나의 안전장치를 해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깊이 공경하고 또 부모님께 순종해야지만 부모님이 바라시는 바가 하나님의 명령에 배치될 때 여러 가지 부모의 미성숙과 혹은 죄로 인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도에 어긋나는 것에 대한 소원을 갖거나 우리에게 강요할 때 그때 우리는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그렇게 정확하게 추론해서 생각하지 않고 부모님을 공경하기 싫어하는 자신의 성향, 그리고 부모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고 거기에 따르라는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절하고 싶은 자신의 패역함, 이런 것들을 부모님의 미숙함이나 죄악 혹은 부도덕성 이런 것들을 빌미로 한꺼번에 말려든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 안에서' 라고 하는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억압이나 강요, 어쩌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이렇게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 이런 것들이 부모에 대한 공경이나 순종의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 절대적으로 주님을 의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데 그 사실에 대해서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이 회심을 통해서입니다.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서 우리는 모든 선한 것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여받게 되고 그 선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부모는 하나님이고 그 원인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자신은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인데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서 모든 선한 것, 모든 은혜와 모든 유익 모든 지식 모든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 모든 것들이 값없이 주어지게 되고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백성이 되면서 진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자마자 깨닫게 되는 것이 내게 분협 된 모든 것의 원천이 그분이시고 그분을 의존하는 것만이 나의 참된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런 하나님을 향한 깊은 의존 속에서 하나님은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경하고 그리고 순종할 수 없는 부모를 보면서 하나님께 받은 많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그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만약에 이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스스로 저주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이 그를 심판적으로 징벌하시는 종류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그들을 파멸시키기 위해서 징벌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이 그들을 특별히 보호하기 위해서 붙잡으신 은총적인 붙잡음을 하나님이 푸실 때 그때 본성에 이치에 의해서 그들이 불행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도 성경이 저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부모 공경의 대의에 대해서 저주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의미가 강하게 됩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이 저주받는 자가 되는지를 설명하겠으니 짧은 시간에 여러분이 추론하고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제 강적이 여러분들의 성화의 길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남편이고 또 하나는 자식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강적은 아마 시부모님이나 뭐 이런 등등이 될 것입니다. 강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게 무슨 해를 준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관계 속에서 우리들이 상상도 못해본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고 거기에서 꿈꾸어본 적도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연단하고 성화시킵니다. 자매들 중에 가끔 보면 애들을 절대로 싫어하는 자매들이 있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있습니다. 강아지는 좋아하는데 애들을 싫어합니다. 그런 자매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자매들은 결혼에 대한 기대도 의무감은 있을지 모르나 기대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를 놓고 그 애에게 매어서 그렇게 산다는 것이 끔찍하다고 이야기하고 그러는데 그런 애들은 대부분 어머니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이 그런 자매들이 어떻게 하다가 형제를 엄청 힘들게 하면서 시집이라는 것을 갑니다. 망가진 사람이 안 힘들게 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집을 가서 같이 생활을 해서 아이를 하나 낳습니다. 그러면 거의 그런 경우에 해당되는 대부분의 자매들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한 인간을 위해서 이제껏 그 정도로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랑을 아이에게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총체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던 그런 변화가 생겨납니다. 그것은 그런 것들이 모두 복음적이고 신령한 깨어짐에 의해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성적 깨어짐이 수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식을 애틋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남편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서 사도 바울이 여자가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그렇게 결혼생활이 여러분들을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이제 그 아이가 자랍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정말 상상한 적도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연단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별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번에 어느 여론기관에서 리서치 조사를 했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30대를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자식을 위해 희생할 수 없다가 38%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사회가 악해지면서 가장 기본적이고 본성적인 것조차도 무너져내려갑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 자식이 그렇게 자랍니다. 그러면서 그 자식이 그 부모를 힘들게 하고 연단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절대로 자기 마음대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사실 법적으로 보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사법상의 특별권력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공무원이 국가와 특별권력관계에 있습니다. 우편물을 뜯어보면 3년 이하의 징역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우편물을 뜯어봐도 죄가 안 됩니다. 특별권력관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의 권한이 얼마나 셉니까? 그러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데서는 때려도 문제가 안 됩니다. 개 패듯 때려도 이 자식이 바뀌지 않습니다. 결국은 부모들이 손을 들게 됩니다. 믿는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한참 생각하고 시도해보고 난 후에 주님께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의 삶의 태도도 안 변하고 영적으로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이렇게 보면 참 걱정이 됩니다. 그렇게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시집가려고 장가가려고 애쓰는데 좀더 변화되어 가야지 될 것인데 저대로 가서 누구를 연단하려고 그러나. 그런데 어째든 자식을 통해서 많은 연단을 받습니다.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데 부모를 위해서 그렇게 되는 자식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되는 부모는 많은데 부모를 위해서 그렇게 되는 경우는 너무 소수입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향해서는 오래 참는데 부모를 위해서는 오래 참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결국은 사랑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 하면 나와는 상충되는 상대방의 경향성을 견디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전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의 모든 덕목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운데 참고 견딘다는 이야기가 세 번이나 반복되는 이야기는 인내하는 것이 사랑의 결정적 속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그 인내는 무엇에 대한 인내인가 하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 나의 경향성과는 충돌되는 그 경향성을 내가 싫어하면서 인내함으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죄인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뭘 참으신다는 것입니까? 당신을 싫어하고 대적하며 살려고 하는 우리의 경향성, 그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도 참으시는 것입니다. 왜 언젠가는 그것을 모두 버리게 하고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시고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왜 사랑한다는 것은 기대한다는 것이고 기대가 살아있는 한 희망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식을 향해서는 많이 가집니다. 그런데 부모를 향해서는 안 가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부모에 대해서는 항상 자기가 가진 상처나 피해 같은 것으로 부모 공경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을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 부모와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그것을 고쳐가는 자기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을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망가진 상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방면에서 고쳐질지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미덕적인 관계에서 자식이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존재와 삶의 그 모본이 올바른 모본이 될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자녀가 보는 것입니다. 자녀가 그것을 보면서 똑같이 자녀가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많이 안 해주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기보다는 자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올바르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여러분, 자라면서 늘 듣는 이야기가 아버지가 가끔 술 먹고 오셔서 성적표 갖다놓고 야, 내가 뭐 때문에 새벽부터 나가서 이렇게 직장을 다니고 고생을 하고 장사를 하고 그러는가. 다 너희들 기르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냐. 그 소리가 제일 듣기 싫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뼈저리게 느껴집니까? 그러니까 자식이 원하는 것은 그런 신파적 감동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망가진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자식도 망가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망가진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할 수 있는 일은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화의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흘려보내는 원천이 되어야 할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할퀴면서 지나가는 가시와 같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게 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러니까 그 아픔은 다시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라고 하는 것은 메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면 그 사람도 그것을 느낍니다. 못 느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래 지나고 보면 더 감동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난 그렇습니다. 모르고 지나갔는데 옛날에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러면 더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부메랑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인덕이 많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궤적인데 그 삶의 궤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이 그리고 지나간 발자취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굽은 사람이면 굽은 궤적을 남길 수밖에 없고 그리고 가시와 같은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찌르는 일 이외에는 남겨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저주하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은 항상 상처받은 사람들이 적으로 등장하고 그 적들이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끊임없이 돌아옵니다.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결함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더더욱 두 번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그 인생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본성적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여러분, 옛날의 경험,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보십시오. 부모가 있습니다. 위에도 부모가 있고 아래도 자식이 있는 중간의 부모입니다. 우리 같은 부모, 그 부모가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홀대를 하고 무시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병적인 사랑을 퍼붓습니다. 그러면 이 집안에서 효자가 나와야 되는데 그런데 안 나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극복하고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자식들을 속으로 사랑하면서 매질하면서 키운 집안에서 신기하게 그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자식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옛말에 으으! 하고 키운 자식 중에서 효자 없고 회초리로 키운 자식 중에서 효자 아닌 자식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에게 일반적으로 사랑을 퍼부어주는 자기 사랑의 변형된 형태의 사랑보다 필요한 것은 참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올바른 대의와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을 이해를 못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의 생각은 어리고 미숙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그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사랑하고 존경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계가 다시 회복되지 못하면 결국은 그런 것들이 자식에게 내려갑니다. 그러면 그 자식은 부모에 의해서 그 부모가 자기를 병적으로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부모에게서 올바른 모본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존경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을 때가 되면 부모는 자신의 안중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또 그런 방식을 가지고 부모를 대하는 그 사람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그 부모를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그들을 형벌적 의미에서 저주하지 않으셔도 그런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저주는 3대 4대까지 흘러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스스로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가 어떤 잘못을 여러분들에게 했든지 간에, 어떤 상처를 여러분에게 주었든지 간에 부모와의 관계를 심정적으로 포기하고 있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런 삶을 고집하고 있으면 기도는 공중에서 계속 흩어질 것이고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착한 삶은 위선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여러분의 중심을 울리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미덕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봐야 중국 사람들이 절 보고 웃겠지만 저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중국의 미래를 밝게 보고만 있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지금은 생각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발생될 것이고 우리처럼 그런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 한 예가 지금 하나 이상을 낳으면 우리로 말하자면 호적에 올려주지 않는 무 등기 자녀들이 지금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애들이 지금 17세쯤 되었습니다. 법적으로 낳아서는 안 되는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 왜 하나밖에 입적을 안 시키니까 딸을 낳으면 죽여 버리거나 아니면 등기를 안 하고 그러니까 학교를 입학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막 돌아다닙니다. 아들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 애들이 쉽게 이야기하면 주민등록이 없이 돌아다닙니다. 사실 죽여도 표도 안 납니다. 그런 애들이 지금 동남아로 200불씩 팔려갑니다. 그래서 동남아로 가면 오히려 중국에서 온 그런 환락가의 여성들을 많이 만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라난 아이들이 가족관계를 알까?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는데 그들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사회심리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무서운 재앙입니다. 이게 엄청난 재앙입니다. 이게 무슨 핵폐기물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좀더 하고 싶은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하면 복된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그 부모를 깊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만약에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 마음을 접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중대한 도전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에 의해서 언젠가 여러분들도 그렇게 접히게 될 것입니다. 원하십니까? 한 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참된 인간으로서 완성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받는 경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완성은 사랑을 받는 경험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시작일 뿐이고 진정한 완성은 자기와는 다른 사람,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자녀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뜨거운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완성되기는커녕 완성을 향한 출발도 안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고 사랑할 수 없게 위협하는 악함까지도 사랑해본 사람만이 참된 자아의 완성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실이고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사실입니다. 시간은 없지만 여러분들을 위해서 조금 더 팁을 붙이도록 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참 인간으로서 살아야지 되겠다. 그리고 참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결심을 언제 하게 됩니까? 연관계획표 일생계획표를 세워놓았을 때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 그렇게 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부합하는 존재가 되고 싶고 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그가 원하는 바를 행함으로서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힘입니다. 정신의 작용입니다. 그게 출발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사랑만 받으면 성화가 됩니까? 대답 좀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사랑만 받으며 성화가 됩니까? 질문 자체가 안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오히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출발이고 거기에서 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을까? 이 벌레만도 못한 나를 늘 넘어지고 깨트려지는 가치 없는 죄인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이기며 주님을 사랑하려고 할 때, 거기서 끊임없는 자기 죽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된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너무 자존심이 상할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 때문에 누군가의 이름 석자가 가슴에 사무치는 두려움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에 대해서 논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숙한 인간입니다. 귀저기를 찬 청년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분열이 있는 곳에 지혜를 심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깊이 사랑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치명적인 결함은 사색을 하지 않습니다. 진짜 생각을 하지 않고 살기로 결심한 피조물처럼 명상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모두 피상적으로 만들고 드라이하게 만듭니다. 의무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시간 이외에 모든 시간은 명상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일에 몰두하는 시간 이외에는, 그래서 사색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그런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을 받는데 공경은커녕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접어두고 공경하라고 그러면 기껏해야 성공해야 적선적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적선적 효도. 그렇게 해서 어버이날 하루 가서 생색을 냅니다. 그것도 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피상적인 관계를 통해서는 절대로 그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다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가끔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가장 멍청하고 천치바보 깡통인데 얼른 시집이나 가버리지 이놈의 집구석, 난 장가가면 분가할 것이야. 이 꼴, 저 꼴 안 보고, 나쁜 녀석입니다. 베드 크리스천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주일날 와서 그 뻔뻔한 얼굴로 하나님 앞에 축복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태어나면 자기가 부모에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대해줄 것이라고 상상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은혜는 포장은 달콤해 보이지만 속에 피가 고여 있습니다. 그게 은혜의 선물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프랑스에서 1930년대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은 양이 문제가 아니라 시기가 문제라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입증을 해드렸습니다. 똑같은 것이 있는데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은 지식과 사랑 이 두 가지에 의해서 참 인간으로 형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본성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그렇고 이게 신령한 세계로 들어오면 은혜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랑이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시기마다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자. 엄마가 저고리 섶을 푸르고 쭉 짜는 젖은 언제나 젖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하면 태어나자마다 금방 먹는 모유는 초유라고 합니다. 이게 이 아이의 질병으로부터 막아주고 면역력을 강화시켜주는 치명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보십시오. 요즘은 태어나자마자 소젖을 먹고 사는 세상이지만 옛날에는 다 엄마가 젖을 먹이고 엄마가 일찍 죽거나 병에 걸리면 젖을 먹일 수가 없으니까 그때는 동리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동냥젖을 먹였습니다. 그것도 마땅치 않으면 그때는 좋은 이유식도 없으니까 밥물을 끓여서 그것을 해서 먹였으니 그게 무슨 영양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딱 표가 납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애가 안 큽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돼지고기를 실컷 먹어도 키는 안 크고 배만 나옵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참으로 사람이 되는 데도 이런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 시기마다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공급되어야 하는 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인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좀더 자라면 그 다음에는 양성의 사랑을 모두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자라면서 동기간의 사랑을 받고 사랑하면서 사회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으려면 최소한 3명은 낳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3명 이상을 낳으십시오. 진짜입니다. 3을 낳으면 교회에서 3번째 아이는 우유를 사줄 용의가 있습니다. 선교적 차원에서 말입니다. 3명이 되어야지만 그래야지만 사회학적으로 사회가 형성이 됩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 큽니다. 그러면 이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 속에서 스승의 사랑을 받습니다. 더 성장해서 시집장가를 갑니다. 남편과 아내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더 크면 자식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이러면서 죽을 때까지 마지막에 사랑하는 자녀의 품에 안겨서 임종하는 순간까지 소유하듯이 사랑이 공급되면서 한 사람이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모든 비극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모두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누가 성자가 났다고 그것을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랑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그러면서 죽을 때까지 임종까지 지켜보니 어느 놈이 그 짓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 없는 것이 이 모든 인간을 모두 파괴하고 망가트린 것입니다. 그러면 막 무자비한 방법으로 지식을 막 쑤셔 넣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는 지식 속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은 있는데 그 지식이 뭘 지혜화 되어버리는 것이고 어디로 흘러가야지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망가진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세계가 회복되어야지 하나님의 뜻인데 점점 더 가정을 통해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파괴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게 불신자들이 지금 자녀를 낳아야지 된다고 그러는데 그리고 막 90일 휴가를 준다고 꼬이는데 그것을 우리가 애를 많이 낳아서 지면을 덮어버려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방법입니다. 단 하나의 조건만 충족되면 됩니다. 그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기를 수만 있다면 그럼 여러분들은 애만 7-8을 낳고 죽어도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아이들을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런 사랑이 가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 태어나서 엄마의 사랑을 못 받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그래도 운이 좋아서 좋은 남편을 만났습니다. 진짜 헌신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의 상태가 개선될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망가진 부분이 고쳐지지는 않습니다. 남편의 사랑으로 그것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또 노년에 복이 있어서 효자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효자, 효녀, 효부가 지극정성으로 사랑을 쏟습니다. 그래도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그래서 망가진 인간성은 회복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통합하는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려서 부모로부터 사랑을 못 받아서 망가진 것도 그 불필요로 하는 인간성의 그 부분에 들어가면 신기하게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뛰어난 대용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것도 펴집니다. 자식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것도 펴집니다. 이게 놀라운 적응성과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특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그렇게 간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떨 때는 어머니같이 그리고 어떨 때는 아빠 같습니다. 어떨 때는 신랑 같습니다. 어떨 때는 또 친구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사랑의 폭과 넓이가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오히려 부모로부터 사랑을 못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깊이 알게 되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사람의 세계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의 세계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이 다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사랑을 생각하지 않고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만을 계속 끌어안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친 짓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가슴에 칼을 품고 살 때 부모가 여러분들을 통해 기뻐하고 행복한 상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부모의 상처 준 과거와 결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러분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누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해는 갑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깊은 상처, 그리고 뼈저린 고통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픈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남이 못 받은 사랑을 받게 하셨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게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여러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때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그 부모님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라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데 조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실조차도 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쉽겠습니까? 그렇지만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말씀드림으로서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부모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그 일에 있어서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공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그렇게 많이 우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몰라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도 바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부모님이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그렇게 여러분들을 기른 것 같지 않아도 부모의 마음은 항상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식이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나도 아이들을 낳아보니까 알겠습니다. 자식을 향해서 부모의 마음은 항상 젖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을 부모를 향해서 젖은 마음이 되는 마음이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고 살았다고 하더라도 또 지금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사실은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했습니다. 나는 보증할 수 있습니다. 표현은 못됐을지 모르지만 가슴속에 흐르는 그 사랑을 여러분들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지 않았습니다. 난 다 그게 미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태어났으면 시골학교에 그냥 보내면 어떻습니까? 뭐 서울에 유학을 보내봤자 하나 잘된 것도 없는데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서울에 데려놓고 초등학교 때부터 유학을 시킨다고 그렇게 하니까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무지할 수 있겠는지. 지금 공부를 많이 한 자매들이 지금 또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산산이 해체시키고 무슨 유학을 보낸다. 무슨 부모와 떨어져서 무슨 학교를 보내고 그러는데 절대로 미친 짓입니다. 나중에 후회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얻는 유익은 매우 적고 잃어버리는 것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저 멀리 시골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저희는 중학교 시험까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된 아이들이 과외공부를 하고 5-6학년 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학원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학교 끝나면 바로 거기로 갑니다. 가서 12시가 되기 직전까지 공부를 하고 통행금지 시간에 맞추어서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 6학년밖에 안된 이 13살짜리 애들을 놓고 칠판에다가 3당 4락이라고 가르쳤습니다. 4시간을 자면 중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3시간을 자면 붙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방학 때가 되어서 딱 일주일밖에 가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주일동안 집에 갈 생각에 부풀어서 밤잠을 못자고 11시간을 멀미하면서 구역질을 하면서 집에 가서 일주일 꿈같이 엄마 아빠하고 지내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와서 한 달 동안 마당에서 달을 보고 울었습니다. 우리 엄마도 저 달을 보고 있겠지 그러면서, 그게 왜 그렇게 애들한테 못할 짓을 시킵니까? 그렇게 몇 년 울고 나니까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시기에만 그렇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드라고 하는 것, 관계에 대한 필요라고 하는 것은 조금씩이라도 그 필요를 채워줄 때 그 미드가 지속이 되는 것이지 공급이 안 되면 미드가 지속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파플로프의 그 조건반사 시험에서도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종소리가 땡 하고 울리며 밥을 주니까 침을 질질 흘립니다. 그 다음에는 종소리를 계속 울리면서 밥을 안 줍니다. 그러니까 종소리가 울려도 침을 안 흘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인간이 자라서 아이가 되면 부모를 며칠 못 보면 부모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고 그래야지 이게 정상적인 인간이지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도 보고 싶지 않으면 이것은 벌써 중대하게 망가진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롭게 뛰놀면서 시골학교에 다니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무슨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그래서 오늘날 무슨 사회적으로 엄청난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무슨 학문적인 천재성을 소유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게 도대체 뭔지 나는 이해가 안 갑니다.
저는 그래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케이스에 속합니다. 그 부모님의 빈 자리를 할머니가 채워주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그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 울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만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셨다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많이 입었습니다.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니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내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그분이 읽으시던 다 낡은 성경 신앙은 깊지 않으셨지만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으려고 애쓰시던 모습 안경너머로 나를 쳐다보며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천국에 속히 가기를 원하는 소망 중에 삼분의 일은 그분을 뵙는 일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많은 사람을 만나고 나니까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침마다 새롭고 해마다 새롭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을 때는 왜 내가 그 사랑을 그렇게 몰랐을까? 그리고 왜 따뜻하게 그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
여러분의 부모님이 누구인지를 모르지만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많이 사랑했습니다. 가서 물어보십시오. 정말입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오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고 산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부모님의 상처 준 과거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엄마 우리 아빠가 지셨던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때 밤낮으로 날 위해 애쓰지 않은 우리 엄마의 부족한 사랑, 그리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를 모두 버리지 못한 아버지의 그 부족한 사랑을 하나님이 다 갚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보지 못한 사랑을 보게 해주시고 남이 알지 못한 내 세계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남이 가보지 못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우리들이 지금 여기에 서있습니다. 아직도 이 사랑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부모로부터 받은 그런 상처도 주님을 붙들며 살아가게 만드는 은혜의 도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역설적으로, 그러니까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로 나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그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납 이상의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와 상충하는 경향성을 참아주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변화되리라 믿고 또 그것이 도덕적 판단에 기준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성향을 그 사랑하는 사람의 성향에 맞추려고 하면서 기다려주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자녀로서 부모를 교정하려고 그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교정은 하나님의 은혜가 하게 두고 여러분들의 의무는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를 상처 입은 한 영혼으로 보고 자기의 살과 피를 빌려서 태어나게 한 나 같은 자식에 의해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존재로 보고 그리고 그를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러면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생각하면서 아무 가치 없는 죄인, 하나님께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대적하면서 죄 가운데 살았을 때라도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에게 분리되기를 기다리시면서 우리를 버리시는 대신에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런 인내의 설복이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앞에 서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끌어안고,
지금 우리가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도 지구 어느 구석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순교하고 있습니다. 살고 안 섞이고 피도 나누지 않은 사람들인데 예수 사랑이 그들을 시켜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그런 사람들보다 낫습니다. 자기를 박해하는 원수보다는 낫습니다. 그런데 왜 그 관계를 접으려고 하십니까? 바로 그런 망가진 것들을 고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고 누구에 의해서도 고쳐질 수 없는 망가진 그 삶의 구석들을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고치게 하시려고 우리를 문제가 있는 그 삶의 현장에 우리를 두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갑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나중에 많이 후회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주셨던 것처럼 자격을 논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거래입니다.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그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가 그이기 때문에 그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가 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해도 하나님이 대답을 못하시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하나님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렇게 부모를 영혼으로 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깊이 끌어안고 그렇게 기도하시면 사랑이 생깁니다. 내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내게 그런 사랑을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사는 태도들을 고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 경험에 의해서 이런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저를 기분 나쁘게 비난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면전에서 그런 적은 거의 없지만 아무튼 그런 이야기가 들린 적이 있습니다. 저도 많이 망가진 사람인데 왜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 주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별로 타당성을 갖지 않는 악의적인 비난일 경우에는 그 사람을 향한 미움의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막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이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섭섭하고 억울한 감정이 있습니다. 저도 말을 하라고 그러면 누구에게 지지 않는 사람이니까 당장 쫓아가서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러고 싶은데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터득하게해주신 놀라운 지혜가 뭔가 하면 아침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한 사람을 가장 먼저 가슴에 품고 그를 한없이 축복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도 따로 마음 따로 돕니다. ‘하나님, 저 사람을 축복해주십시오.’ 마음속에서 ‘축복은 받을 짓을 해야지 받지’ 그런 마음의 반론이 여기서 생깁니다. ‘하나님 저를 보호해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사랑받을만하면 누가 사랑을 안 하겠어.’ 이런 마음이 막 생깁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깊이 끌어안고 축복해줍니다. 언제까지 진심으로 그 사람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때까지 그러면 내 영혼이 장려를 받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되고 다시 만났을 때 그 사람을 기쁘게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끌어안고 깊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 아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리 엄마 나도 만약에 이 복음의 빛을 받고 주님의 은혜에 세계에 대해서 눈뜨고 수시로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나를 강권하신 신령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더라면 쓰러질 때마다 붙들어주는 은혜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더라면 우리 엄마 아빠보다 더 악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그 부모에게 있어서 내가 상한 영혼인 내 부모에게 마지막 치유자라고 생각한다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와 도구로 써주소서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남이 받지 못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들의 지난 상처 입은 과거와 결별하는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은적인 효도나 적선적인 효도가 아니라 부모가 여러분의 신앙의 기대에는 못 미치고 심지어는 불신자이고 심지어는 세계관과 생각이 다르고 도덕적인 수준에 있어서 여러분이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말씀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부모를 깊이 존경해야 합니다. 높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효도를 받고 공경을 받으면서도 부모가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그렇게 부모를 깊이 높여드려야 합니다. 선한 것을 그 부모를 통해 조금이라도 배우려고 하고 배우게 된 것을 부모에게 감사함으로 갚고 이렇게 부모를 높여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도 치유되고 여러분들의 부모도 치유되고 가정도 치유되고 세상도 고쳐집니다. 그런 것을 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3. 돕는 배필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아직 아담 한사람밖에 없었을 때 어떻게 그의 배필인 하와가 창조되었는지를 창조하는 그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아담이 혼자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담이 당시 혼자 거처했고 하나님은 아담이 그렇게 홀로 거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아담이 그렇게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하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돕는 배필이라고 그랬는데 도대체 뭘 도와준다고 그러는 것입니까? 아담이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도 그러니까 원래 하던 일이 있었고 그가 사람으로서 이 땅에 존재했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아담 혼자서 사는 것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창조하셔서 아담과 함께 도와서 그 원래의 아담이 종사하던 그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상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드라마는 창조, 타락, 구속, 완성 이 네 가지의 커다란 드라마로 성경 전체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생활의 많은 문제는 창조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구속으로 넘어가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고 그 구속의 적용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창조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구속으로 넘어가버리니까 이 구속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또 실제로 그 구속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은 이후의 우리의 삶이 어떤 목표를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지향성에 있어서 확정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매우 좁디좁게 해석을 해서 구원받았으니 지옥의 형벌을 면했고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나는 복 받으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한다. 이런 지극히 현세적이고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의 맥락에서 떠난 또 다른 삶을 꿈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자체는 거대한 사상을 물려받는 구도의 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색하고 지성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신앙은 모래위에 세워진 집과 같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고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신봉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의 질이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지성적으로 기독교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이고 내가 어떤 사상 속에서 살고 이 세계를 바라보고 해야지 되는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사색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그리스도인은 매우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창조, 타락, 구속, 완성 이 네 가지 과정에서 바로 이 창조의 원래의 모두 타락에 의해서 모두 파괴되고 무너졌고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도 좌절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난 다음에는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했고 그것 때문에 인간이 매우 불행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는 그 불행한 상태에서 되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속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구속을 통해서 인간은 창조의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원들을 회복하게 되고 그 길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로부터 명백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조에 대해서 우리들이 적절한 이해를 갖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구속을 받아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원을 하나님이 많이 주셔도 그 자원을 바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는데 활용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또 다른 목적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구속의 목적과 계획이 바로 창조의 목적과 계획의 계승입니다.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좌절된 것 같은 그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과 의도를 구속을 통해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창조의 원래의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해야 하고 이것들은 성경 계시의 빛 뿐 아니라 일반 계시의 빛 속에서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색과 사유의 대상은 성경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그 다음에 인간 본성 안에 남겨두신 모든 계시의 빛이 우리의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살아갈 때는 탱탱히 놀고 아무 생각도 안하고 뇌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다가 어느 날 성경을 펼쳐놓고 그 머리로 묵상을 하려고 눈을 지극히 감는데 뭐가 묵상이 되겠습니까? 원래 사람이 사색하는 사람이 아닌데 성경을 펼쳤다고 해서 갑자기 된다면 이것은 몽유병이지 사색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정통 가운데 심각할 정도로 퇴화해버린 정통이 무엇인가 하면 신자의 사색하는 생활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내가 묻고 싶습니다. 사색하는 생활이 있습니까? 사색하는 생활이 없는 삶은 동물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유하는 삶, 사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색을 우리들이 오늘 이 창조의 이 원래의 남녀, 이 가정의 문제로 우리들이 한번 가져가봤으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뭘 돕는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미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도 아담이 무엇인가 하고 있는 일이 있었고 그리고 그의 인생이 의도하고 있었던 종사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창조의 계획과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작은 나무도 불안전하지만 나무이고 그러나 완전히 나무지만 그 나무가 점점 자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전한 세계였지만 그러나 더 많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창조의 세계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은 순결한 영으로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이는 물질세계 속에 투영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보이는 사물의 창조를 통해서 그 안에 당신 자신의 영광의 빛을 드러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입니다.
하늘에는 하늘을 창조하시고 이 땅에는 땅을 창조하시고 두 세계를 통해서 천상과 지상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보는 모든 사람과 피조물이 만드신 원 주인이신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송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런 창조는 완전하게 이루어졌지만 인간이 끊임없이 섬기고 봉사함을 통해서 이 창조의 세계의 빛을 더욱더 찬란하게 빛나도록 작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부름을 받고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아담이 이미 그 일을 위해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기여하기 위해 아담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충성하지 않았고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할 때 이것이 주의법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아담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아담의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사람, 혹은 인류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홀로 거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죄도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창세기 1장을 생각나게 만들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런데 왜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했을까요?
아담이 이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창조된 순간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쁜 것이 없고 모두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창조된 세계 안에서 아담은 놀고먹지 않고 하나님의 훌륭한 대리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개발함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게끔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일을 상당한 시간 동안 아담이 홀로 시행을 했습니다. 죄가 없고 뛰어난 지성을 소유하고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넓은 감성을 소유해서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의 섬김은 오늘 우리의 섬김과는 비교도 안 되게 뛰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섬겼는데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즉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섬기게 해서 더 찬란하게 드러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계획에 충분히 부응하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좋지 못하다고 하나님이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와를 만드신 장면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합쳐져서 그래서 이 세계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가꾸고 돌봄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이 더 찬란하게 빛나서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천군과 천사들이 이 땅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더 잘 알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보면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하는 이 대목에 와서 많은 사람들은 남성우월적인 생각에서 이런 성경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제 계속해서 비판을 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어보겠습니다만 하나님께 원래 남성과 여성을 지으신 의도는 사실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문제를 좀더 올바른 복음적인 견해에서 봐야지만 우리들이 이 세상을 고치는 주의 도구로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은 신자의 양보할 수 없는 거룩한 소명은 망가진 이 세상에 끊임없이 항거하며 고치고 사는 것입니다. 그 망가진 것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덕을 배은망덕하게 갚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하나님께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입었으면 이제 그런 구속의 은혜를 토대로 성경적이지 않는 이 세상의 시류, 그리고 이 시대의 풍조와 더불어서 다투면서 살아야지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살에 따라 배를 하늘을 향해 내보이면서 그 물에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물고기는 흐르는 물을 거슬려 헤엄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짜로 살아있는 신자는 이 세상의 풍조에 떠밀리지 아니하고 세상의 풍조가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역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또한 온몸으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 시류에 거슬려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동안에만 신자는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성우월주의적인 시각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고 남성과 여성을 자리매김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오늘날 가정을 일그러지게 만들었던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남성과 여성은 무엇일까? 한번 우리가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방대한 내용을 사실 한 시간에 다룬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언제 한번 시리즈로 우리들이 한 10-20시간에 걸쳐서 다루어보기로 하고 오늘은 맛만 보는 정도로 여러분들이 만족을 하시고 삶의 교훈을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은 불변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이 복음이 그대로 자기 속에 들어오게 해서 그래서 자기 안에 있는 잘못된 모든 사고의 틀, 마음의 틀들을 개혁하고 새롭게 하는 것은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안에 여전히 부패한 성품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유리하게 하는 도덕적 판단이나 혹은 진실에 대한 인식이 개입되어 있을 때는 더더욱 복음을 굳게 받아들이기가 매우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유교적인 문화권에서 생활해왔습니다. 우리의 유교 문화권에서는 고전적으로 남존여비사상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은 폭압적인 억압 아래서 생겨난 남성우월주의 산물입니다. 이런 구도 속에서 복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사실은 복음을 제대로 공부하고 제대로 체험하고 그 순전한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남성우월주의적인 문화의 시각에서 거기에 부합하는 내용들만을 빠른 속도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는 곧 신앙의 이름으로 더욱더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증진시키고 여성들을 폭압과 억압으로 받는 그 일을 위해서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속의 계시를 알려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에 정면적으로 대치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런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곳에는 순수한 영혼의 변화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저 역시 여러분과 똑같이 그런 염려스런 환경 속에서 태어났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깊이 만나고 끊임없이 복음을 탐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순간순간 제 눈에 있는 많은 비늘들을 벗겨주셨습니다. 아마 여러분보다 좀더 많이 벗겨졌을 뿐이지 여전히 아직까지 그 비늘들은 남아 있어서 성경을 보는데 제악이 되고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인격으로 여성들을 대하고 그리고 가정의 문제를 다루는 이런 미숙함이 있다고 하는 것을 겸손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어차피 완성된 사람들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니까 구도자의 마음으로 진리를 탐구해가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부르심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런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는 그 사람들이 정말 아름다운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자유와 평등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탁하신 이 세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기에 봉사하도록 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이런 것들이 깨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남성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치권력과 그 다음에 힘의 완력, 혹은 물질 같은 것을 통해서 여성을 폭압적으로 억압하고 압제해서 자기중심의 남성우위의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모든 학문과 철학들을 쌓아가고 윤리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여성도 거기에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여성은 여성 나름대로 자신이 자신을 지키고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을 활용해서 남성의 세계에 항거하거나 혹은 남성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많은 자원들, 또 심지어 능력이 있는 여성들은 정치의 권력을 손에 넣고 이 땅에 있는 자원을 손에 넣고 혹은 남성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성의 매력을 도구로 사용해서 그래서 남성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고 그것이 바로 양성의 갈등 속에서 빚어져온 인류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런 남성우월주의적인 시각에서 지배해온 모든 그릇된 창조의 원리에서 벗어난 문화를 비판하고 그리고 그 속에서 참된 성경적인 대안이 무엇인가를 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정이 결국은 그 격동하는 문화의 한 복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 속에서 이런 잘못된 문화가 깊이 들어와서 가정을 산산이 박살내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고 타도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갈등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성경을 보면서 이런 갈등 속에서 이어져온 남성우월적인 시각을 견제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아담이 먼저 지어지고 하와가 나중에 지어졌으니까 이제 아담이 더 중요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러는데 사실 그 얘기가 맞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보면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신제품이 아닙니까? 훨씬 더 좋은 제품일 수 있습니다. 또 제품의 생산의 원 재료를 추적해가더라도 그 아담은 기껏 해봐야 흙 부스러기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 흙보다는 더 고귀한 살코기와 뼈다귀를 가지고 지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훨씬 더 좋은 재료를 가지고 사용해서 만들어졌으니까 그런 것을 근거로 해서 남성우월주의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또 두 번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차피 여자는 남성의 몸에서 빼낸 갈비뼈를 가지고 만들었으니까 존재론적으로 볼 때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는데 그것도 아주 굉장히 황당한 말입니다. 헛소리입니다. 내가 그 남성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 갈비뼈를 뽑아서 백번을 던져보라고 여자가 태어나나.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사용하신 것은 틀림이 없지만 아담의 갈비뼈가 여자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이 여자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흙을 가지고 창조하셔서 사람을 만드신 사역이 더 공들인 사역이겠습니까? 아니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창조사역을 통해서 여성을 만드신 그 사역이 더 세밀한 사역이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이 흙으로 하와를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굳이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서 하와를 만든 것은 존재론적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해있다 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둘이 밧사르 에하드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본래 한 몸이라고 하는 것을 결국은 그 둘이 한 몸으로 연합을 이루어야지만 온전히 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희랍의 신화에서 보면 어떤 게 나오는가하면 인간이 원래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나 영원을 생각하는 경지에 있어서 신과 동격이었다고 합니다. 신들이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본 바탕이 틀린데 끊임없이 지성이 개발되어서 신들하고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반을 쪼개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을 해놓으니까 이게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아서 힘써야 할 이 사명을 잃어버리고 나이가 들면 짝짓기에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려서 신들에는 미치지 못하는 아주 저급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황당한 이야기나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이 성경계시에 대한 어떤 본성적으로 빛을 받은 것이라고 우리는 여겨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의도를 보여주신 것이지 존재론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예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메튜헨리 주석가는 뭐라고 해석을 하는가 하면 이렇게 은혜롭게 해석을 합니다. 여성이 남성을 짓밟도록 머리 가에서 취하여 창조되지도 않고 남성에 의해서 짓밟히도록 발바닥의 뼈에서 창조되지도 않고 남성의 보호를 받도록 팔에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창조되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남성들은 이렇게 반론합니다. 것 봐라. 결국은 남성의 보호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여성이 아닌가. 그러니 남성이 우위에 있지 않는가, 그러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둘 다 다 필요했던 것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정복하고 그 다음에 취하고 지배하고 이런 것은 남성성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개척적인 정신, 창조적 정신, 투쟁의 정신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남성에게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부스고 지나갑니다. 그럼 뭐해, 미치광이지. 왕이 있는데 전쟁의 대가입니다. 그래서 전쟁만 하면 이기는데 다 때려 부습니다. 그것밖에는 아무 것도 못해. 그럼 그게 나라입니까? 미치광이 왕국이지. 그렇게 점령하고 나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그럼 나라를 잘 돌봐서 무너진 것을 다시 수축하고 백성들을 사랑해서 자기의 나라의 국민으로 만들고 그 다음에 문화를 장려하고 문학과 예술, 정치, 경제 이런 것들을 잘 이렇게 일으켜 세워서 그래서 사람들이 행복한 상태에서 살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고래로 볼 때 현재, 성군, 이런 사람들은 이 둘 다를 다 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단, 용기, 창조, 도전, 파괴, 심판 이런 것들도 잘해야 나라가 감히 넘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것들을 사랑으로 잘 돌보아서 그래서 백성들을 아름다운 나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성입니다. 그러니까 두개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나는 하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완성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성이 남성의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월주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당연히 죄가 들어온 이후에 생겨난 경향성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또 하나 세 번째로 여기에 보면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그랬으니까 이것은 분명히 보조적인 역할이 아닌가, 그러는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그 이전에 이것은 그 앞에 전치사를 동반합니다.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그랬는데 여기에 써진 그를 위하여 라는 단어가 for him이 아닙니다. 영어의 for him이 아닙니다. 히브리 언어로 만약에 for him이라고 쓰려면 로라고 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케네고도 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전치사를 사용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우리말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맛 먹는, 대응하는, 상응하는 그런 것입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correspond ing, 혹은 correspond dent 정도의 의미로 거기에 가까이 다 가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누구에게 입니까? 아담에게 맛 먹는 혹은 아담과 대응이 되는 아담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이것입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는 둘이 되어있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에제르'라고 하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단어 에제르는 시편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입니다.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며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니, 여호와는 나를 돕는 자시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소이다. 이런 말이 사용될 때 그 돕는 자, 돕는 말로 이런 말로 번역된 단어가 에제르입니다. 그런데 이 에제르라는 단어는 전쟁문맥에서 잘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전쟁을 치르는데 이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아군이 점점 기세가 꺾입니다. 질 것 같은 위기를 만납니다. 그때 저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리면서 지평선에 먼지가 막 일어나면서 수많은 군대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게 에제르입니다. 그 패배에 이르게 된 전황을 뒤집어놓기 위해서 온 그 전쟁의 승패의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우군, 응원군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 이 본문이 남성우월주의적인 시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은 질서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이후에 하와가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지고 창조의 질서를 이야기하고 가정의 질서를 이야기하는데 이 성경 구절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이 질서는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폭압적이고 노예적인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질서는 조화와 평등, 균형과 사랑이 어우러진 그런 종류의 창조의 질서에 부합하는 그런 종류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 안에서 아담은 만족했고 하와도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표현을 잘 들으십시오. 이 질서 안에서 아담도 하와를 무시한 적이 없고 하와도 아담을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왜 서로는 서로에게 매우 필요한 존재였고 서로가 서로 없이는 참으로 사람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에게 너무나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이것을 입증하는 성경구절이 바로 그 뒤편에 나오는데 그것은 하와를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결혼시키기 위해서 이끌어 부부가 되게 하실 때 아담 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아, 네까짓 것 오는구나. 네 존재 자체가 나의 부채지(?) 결국은 네까짓 것 내 갈비뼈에서 만든 존재가 아닌가.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 문학에서는 이 표현은 the best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실감나게 표현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너는 나의 모든 뼈 중에 없어서는 안 될 뼈이며 나의 모든 살 중에 없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만약에 없다면 내 생명이 끊어질 그런 종류의 살이구나. 그런 의미입니다. 살도 종류가 많잖아요. 굳은살은 아무리 칼로 깎아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심장에 있는 살을 한 숟가락을 잘라냈다고 칩시다. 그런 종류의 살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이 바로 그런 의미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온 이후에 생겨난 그 모든 남성이 여성에 대한 우월적인 시각에서 그를 폭압하고 압제하는 이런 현상이나 그 다음에 여성을 남성에게 존속시키려고 하는 그 노예복속적인 신음이나 또 그 안에서 그저 편안함을 느끼면서 사는 안일한 여성들의 이런 사고나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죄의 결과입니다. 창조의 원래 질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럴듯하게 윤리로 포장해서 덕목을 만들고 그런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남성이 여성에 대한 우월과 그 노예적인 복종을 함구시키려는 하는 문화적인 음모입니다. 형제들 얼굴이 대게 썰렁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러니 그런 사고방식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장가를 가면 누구를 불행하게 하겠습니까? 가정을 이루어봐야 창조의 세계를 꾸겨놓을 사람들입니다. 배우십시오. 고치십시오. 사색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이 어떤지 생각해보십시오. 현실은 아주 폭력과 억압입니다. 그런 속에서 끊임없이 여성들을 억압하고 지배합니다. 여성들은 무슨 일상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성은 여성대로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죄가 시키는 모든 것을 행하면서 그러면서 거기에 항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이 그런 세계에 굴복하면서 살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창조의 원래의 뜻에서 멀어진 양성의 갈등, 특히 남성우월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진 여성에 대한 폭압과 이런 모든 압제, 이런 모든 것들을 제일먼저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그것을 펼쳐야 될 때가 어디겠습니까? 교회와 가정입니다.
믿는 자의 가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딸 낳았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펑펑 웁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맞습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신실한 자녀가 딸을 낳았다고 우울해서 울고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딸만 낳았다고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그리고 또 그런 의식을 남성은 여성에게 주고 그런 것을 인해서 부부관계가 깨트려지고 압박을 주고 이게 도대체 껍데기만 성도지 속은 완전히 짐승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사소한 것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어야할 것에 대해서는 발로 차버리고 그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세상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렴 어때,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세상이 안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것을 거스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배어있습니다. 이런 우월적인 시각들이 배어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런 것들을 제일먼저 굽은 것들을 펼치는 일들을 여러분의 가정 속에서 보아야 하고 교회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요즘 여러분들이 결혼을 많이 해서 좋은 일이기는 합니다. 원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낸 표준예식서가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할 수 있으면 그 예식표준대로 행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생각이 없이 그렇게 산 사람은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발견이 되었습니다. 주례를 서는데 결혼서약을 받는데 표준예식서에 서약내용에 남자에게 받는 내용과 여성에게 받는 내용이 틀렸습니다. 똑같은데 딱 하나가 틀렸습니다. 제일먼저 신랑에게 물어봅니다. ‘신랑 아무개는 신부 아무개양을 아내로 맞이하여 일평생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사랑하며 부부의 대의와 정절을 다하겠는가?’ 묻습니다. 분명히 ‘사랑하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네’ 하면 그러면 오케이 하고 받아줍니다. 그런데 여성은 하나가 추가됩니다. ‘신부 아무개양은 신랑 아무개를 남편으로 맞이함에 있어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래서 아니 그러면 여성은 남성에게로부터 강아지처럼 사랑만 받으면 되고 남성은 여성으로부터 사랑도 받고 존경까지 해야지 되는가. 그것을 더더구나 결혼식장에서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서 맹세를 해야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 다음부터 다 빼든지 다 넣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어제 다 넣었습니다. ‘신랑 아무개는 신부 아무개양을 맞이함에 있어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이 신부를 존경하며 사랑하며 이러이러하겠는가?’ 그 형제가 좀 썰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든지 아니면 다 빼든지 그래야지 됩니다. 이런 것들이 그대로 부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목회를 하고 나서 생각이 없이한 것은 아닌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이 맨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학습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 세례를 받습니다. 거기는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집사가 되는 길은 틀립니다. 남자가 가는 길, 여자가 가는 길이 틀립니다. 남자는 바로 집사가 됩니다. 여자는 권찰을 거쳐서 그 다음에 집사가 됩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것은 아니다. 고치려면 아주 고치든지 안 고치려면 둘 다 가든지 해야지 이런 것이 뭔가. 그래서 둘 다 남자도 권찰을 거쳐서 투표가 되라. 그랬습니다. 주일날이 되어서 기도를 해도 왜 주일날 낮에는 남자만 들어가고 여자는 밤에만 들어가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것을 다 섞으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다 변해야 합니다. 교회는 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내가 원한다고 해서 갑자기 여자목사를 만들고 여자 장로를 만들고 이것은 교회적인 합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모든 것이 허락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이 의식 속에서 계속 배이니까 이런 세상의 남성우월적인 시각, 거기에서 오는 가정에 대한 폭압과 압제 이런 것들에 항거하며 살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져갑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에 항거하고 참된 창조의 원리를 따라서 남성과 여성성이 제대로 자리매김이 되어야 합니다. 구분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고 질서가 있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노예적 질서가 아닙니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노예적 복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와도 아담에게 한동안 순종을 하면서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던 그런 종류의 인격적이고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는 순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을 사용해서 남성이 특권을 누리고 자기가 해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순종을 사용해서 그 질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보다 더 잘 가꾸어갈 수 있는 그 길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망가트린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극도의 이기심들이 서로를 짓밟고 지배하고 이렇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다 바보짓입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우리가 분명하게 바로 잡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해서 너무 남우세스럽기는 합니다만 나는 형제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너무 가부장적이 되지 마십시오. 여보, 물, 밥 가져와. 와이셔츠, 양발 여기 있어. 자기가 하십시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남우세스럽기는 하지만 난 옷을 벗어서 침대 위에 놓고 어떤 때는 시간이 조급합니다. 약속시간이, 스케줄이 있으니까. 저는 일주일을 내내 살아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3시간도 안됩니다. 그래서 아주 가장 당혹스러운 게 돌발적으로 나타나서 시간을 내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곤혹스럽습니다. 뭘 하나 깨트려야지 되니까. 그러니까 어떤 때는 옷을 벗어서 놓고 빨리 가야지 시간이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생각을 합니다. 누구보고 치우라고 하는 것인가. 아내가 이것을 나를 대신해서 치워야할 의무가 있는가. 그래서 딱 합니다. 양말을 하나 벗어나도 내가 벗어나서 침대 아래다 벗어났으니까 내일 아침이면 청소를 하다가 갖다가 넣을 것입니다. 그것을 꼭 아내니까 해야지 되는가. 그래서 내 손으로 갖다가 항상 넣습니다. 물 자기가 따라서 마십시오. 그리고 그래도 도움을 요청할 때는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물통이 아내 가까이 있다든지, 내가 다리가 아파서 못 일어난다든지, 뭔가 몰두하는 시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 도움을 받고 싶다든지 그것은 괜찮습니다. 애들한테도 절대 못 시키게 합니다. 우리는 그런 식의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 여성이 마치 남성을 돕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돕는 그것이 마치 자기 개인의 일신적인 것들을 돕는 것들로 그래서 자기가 제왕적인 해택을 누리는 그런 종류의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여전히 아직까지 눈꺼풀이 벗어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면서 가정을 이끌어 가는데 여성들이 거기에 고분고분 순종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갈등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있는 경제력이나 자기가 있는 완력 이런 것을 사용해서 여성을 억압하고 누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누르고 억압하는 가운데 그 아내, 혹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인간성들이 파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위해행위입니다. 그럼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격을 하나님께서 그런 권력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모들로부터 그런 식으로 억압과 폭압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들 중에 망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매들이 그런 경우에는 남성을 전혀 믿지 못합니다. 결혼에 대한 기대감이 없든지 두렵든지 이런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리고 있는 이런 진정한 남성성과 여성성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조화와 균형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아름다운 연합이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서 뭘 우리들이 깨달아야 하는가 하면 이것이 절대로 질서를 이야기하지만 이 질서가 폭압적인 질서가 아니고 그리고 이 질서가 남성의 권위에 의한 질서가 아닙니다. 이 질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잘 섬기고 그 세계를 빛나게 하기 위한 질서입니다. 그런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질서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근본적인 의도입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왜 그럼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조하셨는가 하면 이게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격하고 파괴하고 정복하고 그런 것은 남성성이지만 그것들을 자기화하고 만들어 가꾸어가는 이런 것들은 여성성입니다. 이 두 가지가 창조의 세계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해서 전개해나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꼭 필요한 양성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원래 이런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빛이 있으라. 그래서 이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고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쿵쿵 만들어집니다. 남성성을 보여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본입니다. 문학적으로, 그러니까 폭풍, 파도, 작렬하는 태양 이런 단어는 어느 나라든지 대부분 남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보존자이십니다. upholder입니다. creator일 뿐만 아니라 또한 upholder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창조된 세계를 잘 가꾸고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곳에서 새로운 것들이 쿵쿵 만들어 가시는 이 놀라운 작용들, 대지를 가로지르고 지나가는 그런 폭풍과 모래사막에 파란들, 작렬하는 태양. 삼킬 듯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파도,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남성성을 보여주지만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이 하나도 부딪히지 않고 운행되는 이 아름다운 광경, 하나님의 모든 별들을 똑같은 빛을 발하게 하지 않으시고 찬란한 다른 색깔로 빛을 발하게 하시고 그래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시고 우주를 만드신 그것들을 유지해 가시는 이런 방법은 말하자면 어머니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남성성과 여성성이 하나님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여성을 창조하신 것은 부부생활을 하고 애나 낳으라고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성이 창조되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아담보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남녀의 결합의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인간을 계속해서 창조해내실 수가 없었겠습니까? 없었다면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실 수 있었는데도 여성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인간들에게 나누어져서 공급이 되고 그래서 남성이 남성으로서의 동질성,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동질성을 갖는데 이것들은 나누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게 의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남성 속에 여성 호르몬이 있습니다. 여성 속에 남성 호르몬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이 대머리가 누가 잘 벗어지는가 하면 사고방식이 가부장적이고 이렇게 권위적인사람이 잘 벗어집니다. 아니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 중에서 여성성이 많아서 이렇게 살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표현을 해서 미안한데 살살이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인데도 몸을 비비꼬면서 이야기를 하고 느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안 벗겨집니다. 왜냐하면 여성 호르몬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들도 머리가 벗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같이 장부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닌데 벗겨집니다. 그래서 남성들도 대머리를 좀 덜 벗겨지려면 여성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폭압적이고 폭력을 행사하고 그러면 빨리 벗겨집니다. 그럼 안 됩니다. 의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조사해본 일입니다.
그런 양성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데 그 두 가지를 인간에게 그 두 가지를 함께 당신처럼 넣어주면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남성으로서 동질성을 갖습니다.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동질성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망가져서 파괴된 모습이 오늘날의 동성의 질서들이 파괴된 것입니다. 이것도 얘기하면 깁니다. 그런 것들이 파괴된 것입니다. 굉장히 무서운 재앙입니다. 인간 속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 속에 남성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의 동질성을 해체시키면서 역사할 때 역성적 성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바꾸는 것입니다. 역성적 성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성적 성향은 충분히 인간이 극복할 수 있는데 여기에 순응해버립니다. 그때 동성연애자가 되어버립니다. 그것도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성적으로만 동성애가 되려고 하는가 아니면 성을 바꾸어서 살려고 하는가에 따라서 다시 사람들이 나누어집니다.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좀 틀리기는 합니다.
이제 끝내고 그렇게 남성성과 여성성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을 인간에게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남성성과 여성성이 두개가 합쳐져야지만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창조의 세계를 가꾸고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바보 남성이 누구인가 하면 여성보고 자기하고 다르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제일 바보 여성이 누구인가 하면 남성이 자기하고 다르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두개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처음에는 신날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짜증이 날 것입니다.서로 앉아서 바느질만 하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돈은 누가 벌 것이며 개척은 누가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벌레만 나타나면 둘이 같이 어머나! 그러고 누군가 하나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게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성이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혼자가 아니라 둘이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 같지 않으니까 나는 남성성이 우월해. 공격, 파괴, 재창조, 정복 그런 것입니다. 여성의 마음은 가꾸고 예쁘게 이렇게 하면서 나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인간에 의해서 점점 더 정복되어지면서 창조의 원래의 계획과 목적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이것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이 교회 안에 같이 있어야 합니다. 여성성만 많이 있어도 교회가 문제가 있습니다. 매일 모여서 이것만 합니다. 서로 친교만 합니다. 그럼 안 됩니다.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이렇게 미지의 세계를 정복해나가기 위해서 뻗어 나가고 이런 과감한 순교의 결산을 방불케 하는 이런 용기 이런 것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남성성이 필요합니다. 이런 것들이 함께 다 조화롭게 이루어졌을 때 그때 이 교회가 하나의 인격체같이 성도들을 잘 돌보는 그런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남성과 여성입니다. 이런 진리들이 동양사상의 맥락에서 이해되었을 때 음양사상이 어쩌고저쩌고 그러면서 막 썰을 풀면서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남성성과 여성성을 당신 자신이 행하시는 일, 사건들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다 이것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 한 사람을 만들어서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남성성과 여성성이 딱 공전하는 그 인간의 형체를 가진 하나님의 그 본체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결혼을 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돕는 배필이 필요 없으셨습니다. 그게 무슨 금욕의 삶을 사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가야할 길이 바쁘니까 가정을 신경 쓰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왜 남의 가정에 왜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셨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돕는 배필이 필요 없었습니다. 당신 자신 안에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지고 계셨고 그 완전성 중에 하나님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진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풍랑이 막 이는 바다에서 일어나서 잔잔 하라. 이것은 아버지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귀신들린 자를 향해서 귀신에게 명하여 물러갈찌어다. 이것은 아버지의 위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것은 아무리 우리가 생각해도 이것은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마음이 좋고 따뜻한 엄마의 마음입니다. 병든 자를 그 헌데를 어루만지면서 기도하시면서 고쳐주시는 이 손길은 엄마의 손길입니다. 죽어 있는 나사로를 보면서 그 무덤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광경도 이게 모성이지 부성이 아닙니다. 이게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또 심판을 앞둔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통곡하며 가슴이 저미도록 우는 모습은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그런 심리가 당신 자신의 고백 속에도 나옵니다.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어미 닭이 새끼를 품은 것같이 너희를 품으려 했던 것이 몇 번인가.” 여기서 아주 선명하게 예수님 안에 있는 모성이 나타납니다. 여성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이 완전한 한 인간으로서의 그 자체가 남성성과 여성성,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과 모성을 함께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차라리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아버지입니다. 제가 최초로 이런 표현을 여러분들에게 썼습니다. 그게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러데 우리는 그렇게 완벽한 부성과 모성을 가진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날 수가 없고 그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완벽하게 조화된 상태 속에서 한 인간 안에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돕는 배필이 필요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돕는 배필이 필요한 것입니다. 치명적으로 필요합니다. 절대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매우 특별한 뜻 가운데 독신으로 살도록 허락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소명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모든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런 돕는 배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창조의 세계를 가꾸어가기 위한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평등과 질서, 조화의 관계이지 폭압과 억압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죄의 결과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이 양성이 대결과 갈등의 구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양성이 함께 섞여서 어떻게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면서 망가진 이 세상을 고쳐갈 수 있는 지를 그것을 어린아이들이 배우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제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성품, 모성과 부성을 함께 가지신 하나님 자신의 성품, 여성성과 함께 남성성을 가지신 자신의 본성을 자녀들에게 심어주셔서 남성은 보다 남성답게 하고 여성은 보다 여성답게 하시면서도 양성을 서로 잘 이해하고 조화를 이룬 그래서 폭력과 억압이 아닌 평등과 사랑, 조화와 균형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에 기여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가정을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귀한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속에서 양성의 영향 아래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망가진 자녀들이 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부모의 사랑을 못 받은 아이들도 망가지지만 이 양성이 한쪽으로 쏠린 집안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망가진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 이 자식 그따위로 살 것이야. 그리고 때리면 엄마가 여보, 뒤에서 이러고 때리고 나간 다음에 아이를 약을 발라주면서 아빠가 너를 미워서 때리겠니. 이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되는데 남편이 이 자식 너 이따위로 살아, 그리고 때렸는데 엄마가 와서 그게 때리는 것인가 하면서 방망이로 두들겨 때리면 아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때리려면 제대로 때리지 내가 시범을 보여주지 그리고 마구 때립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대로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부당하게 감싸고 그러면 아버지가 그렇게 합니다. 여보, 그렇게 해서는 안돼. 너 잘못했잖아. 다 큰 녀석이 엄마 치마폭에 숨고. 이렇게 해야지. 그냥 잘못하면 막 덮어주고 이러는데 아버지가 와서 여보, 당신은 엄마가 되어서 그 정도밖에 사랑이 없어. 그리고 그 아이를 더 싸고돌면 아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이 아이는 완전히 망가진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실컷 때렸을 때 그때 아내가 아이를 가서 다독거리고 아빠가 너를 미워서 때렸겠니. 그때 뭐 나 따라 때리지도 못하고 내가 때리면 점수를 따려고 애들에게 알랑거린다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자기 임무는 그것입니다. 아버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엄마는 엄마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양성을 보면서 아이들이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도 그 어머니의 사랑이 충분하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문제는 한 인간으로서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맞으면서 자라면서 원망과 미움이 생기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동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마한테도 아버지는 인간이 아니다. 고로 내가 어렸을 때 생각한 선입견이 맞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불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양성을 같이 영향을 받으면서 자녀들이 균형 있게 자라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함으로서 이렇게 자라나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사랑에 있어서 성숙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 남성성과 여성성이 자기 안에서 성의 균질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게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안정적인 인격의 상태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있어서 완성입니다. 그런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끌어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섬기니까 하나님께서 고치려는 세상의 모습으로 자꾸 변화시켜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자녀들이 그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런 관계, 이런 조화와 균형, 평등의 아름다운 관계를 지향하는 이 부부관계가 되기 위한 대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서로 때문에 서로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폭력이나 억압의 힘이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폭력이나 억압, 이런 것들을 통해서 상대방을 누르고 복종시키고 굴복시켜서 자기가 원하는 뜻대로 그를 우겨넣으려고 하는 이런 폭압적인 시도가 행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각 빈부나 귀천에 있어서 각기 다른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위가 각기 다르고 소유의 다가도 다릅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에 의해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고 그 사람의 중요성 유무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람의 고귀한 가치는 그가 누리고 있는 지위나 소유하고 있는 물질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고귀한 가치는 그가 살고 있는 도덕적인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의 고귀한 가치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창조되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지 어떤 이유로든지 그것을 파괴하고 짓밟고 폭압하고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악들입니다. 그러고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가장 미워하고 혐오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창조의 아름다운 질서의 복원을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가정을 보고 발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용납해줄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도 그것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럼 도대체 뭘 참는다는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이 오래 참는다고 할 때 그 참는 그 참음의 대상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와는 다른 경향을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 경향은 그 사람의 본질과 일치합니다. 참아주는 것입니다. 왜 그 존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경향을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스럽고 때로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과 그 사람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 그 경향을 참아줌으로서 나중에 그 자신이 본질적으로 변화될 날을 기다리면서 인내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들이 신앙에 있어서 인내하기 힘들 때마다 죄인인 우리를 그렇게 오래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오래 참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셨더니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이 변화의 날들이 이루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에 있어서 대의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순종의 강요,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질서를 회복시킬 수가 없습니다. 노예를 하나 데리고 사는 것이지 뭐하겠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사랑이 없는 순종은 외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순종하게 됩니다. 그의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이것은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 대해서도 남편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가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시하고 마구 짓밟아버립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상대방을 폭압적으로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래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문제는 처음 결혼할 때는 사랑하니까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사랑은 끝까지 지속되어야 할 삶의 질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한 사람을 향해서 영원히 오래도록 참고 뭐 그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화: 어느 형제자매가 서로 좋아해 결혼하려 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동반자살을 하려 고 하자 부모님이 할 수 없이 결혼을 시켰으나 몇 년 안 되어 헤어졌다는 그런 사랑의 감정을 믿을 수 없다는 내용)
그래서 어느 철학자들은 이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사실 누구도 명확히 정의를 내리지 못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충동적 정염과 연결시킵니다. 정염입니다. 그런데 이 정염은 희랍어로 ‘파도스’라고 하는 것인데 원래 이 파도스의 철학자 어의는 이성적인 추론이 없는 충동적인 정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함에 있어서 이유를 이야기하기가 참 힘듭니다. 그런 충동적 정염이 사랑이라고 철학자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정말 정상적인 가정을 만들고 부부의 대의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사랑은 그런 충동적 정염으로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그것들이 있을 때는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그것이 좌절되면 둘이 함께 죽음을 택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아까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충동적인 정염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창조의 본래의 목적에 기여하는 가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사랑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험이 끊임없이 공급될 때 그때 우리는 상대방의 결함, 나와는 다른 경향성들을 인내를 가지고 참아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을 기다려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 기다리고 사랑하고 견디는 과정을 통해서 그래서 사랑의 과정은 자기 죽음의 과정입니다. 자기는 그런 경향이 아닌데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는 전혀 싫은 경향을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이기심이 파괴되고 보다 더 자기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넓은 인격을 가지고 아내나 남편뿐만 아니라 자녀 그리고 이 세상에 곤고한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흐를 수 있는 그런 무형의 자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원을 펼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 소명이 제일먼저 가정서부터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아름다운 형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이번 주와 다음주 두 주에 걸쳐서 가족관계에 있어서 형제 우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먼저 해설하고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형제 사랑과 우애에 대해서 1절을 기초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고 그리고 이어서 표제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었다는 것이고 또 이 노래는 예배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그런 표제일 것입니다. 이 성경의 위대한 본문 1절을 해설하기 전에 먼저 이 표제 자체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또 감동을 전해줍니다. 그림처럼 묘사된 이 아름다운 133편 시편은 형제가 함께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의 아름다움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큰 축복에 대해서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째로 이 다윗은 이 시의 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은 자기의 세대 안에서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렇게 연합하며 동거하는 즐거움을 못 누린 사람이었고 또 자기가 낳은 자식들로 이루어진 그 형제들로부터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축복을 못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다윗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많은 형제가 있었지만 형제로부터 이런 사랑을 못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부모로부터도 이런 사랑을 못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그리고 위대한 신앙을 소유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상처가 많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다윗은 오히려 “내 부모는 나를 버렸다”고 고백할 정도로 상처가 많고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위로 형들이 많이 있었지만 형들로부터 따뜻한 사랑의 돌봄 같은 것을 받지 못하면서 자라온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가 결혼해서 낳은 많은 자식들이 있었지만 그 자식들 또한 형제가 사랑하고 연합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여줌으로서 아버지인 다윗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권력과 미움, 시기와 다툼으로 암투를 벌이고 서로 많이 투쟁하고 갈등하고 심지어는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그런 투쟁의 관계까지 들어갔고 그 중에 한 자식은 아버지인 자기를 죽이려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반란까지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상처가 많은 과정 속에서 다윗이 자라났고 그 상처는 자기가 가정을 이룬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모든 상처와 아픔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 세상이 철저하게 의지할 곳이 없는 곳이며 오히려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계시의 충실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어째든 다윗은 자신의 세대에서도 그리고 또 자녀들의 세대에서도 이런 형제들과의 아름다운 연합과 동거의 많은 축복들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형제의 동거와 많은 연합을 믿음의 형제들에게서 부분적으로 누렸던 것 같고 그래서 오늘 여기에 나오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이 아름다운 광경도 사실은 믿음의 형제들과의 연합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런 아름다운 연합은 제일먼저 가정에서 육신의 형제들 속에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지체들 속에서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아름다운 연합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 다윗에게서 이런 상처받은 자신의 가정, 그리고 또 갈등과 고통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의 자녀의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성취하지 못했던 그 형제의 아름다운 연합과 사랑을 믿음 안에서 성취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영역, 하나는 믿음의 형제들 안에서 이런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어가고 또 한편으로는 육신의 형제들 안에서 이런 연합을 동시에 이루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것이고 또 그 가정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기여하는 그런 가정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노래가 두 번째로 성전에 올라가는 예배용 찬송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는 이 찬양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운데 울려 퍼져야 할 내용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영적생활과 우리의 실제적인 육신의 삶이 이렇게 아름답게 조화가 되었을 때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빛나게 되고 또 우리의 육신적인 삶도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하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들이 이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워지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형제들과 불화하고 육신의 형제들과 갈등이 가득 차고 미움과 원망이 가득 찬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언제나 흠 있는 예물이 되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제물을 제단 앞에 드리려고 제사하기 전에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이 나거든 돌아가서 화목하고 난 후에 와서 그 예물을 드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그 성전에 올라가는 아름다운 이 노래는 하나님께 은혜 받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육신의 형제들과 화목해야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형제관계에 대해서 거시는 기대가 무엇일까요? 본문에 두 가지 단어로 나오고 있으니 하나는 “선하다”는 것과 두 번째는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시를 고백하는 사람은 다윗이지만 그러나 이 다윗은 지금 자신 개인의 마음으로 이것을 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형제들과 함께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을 보며 선하고 아름답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하다”고 하는 것은 먼저 “착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착하다. 선하다. 좋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의 의도와 생각, 계획 혹은 목적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우리의 자녀들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을 느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안아줍니다. 너 참 요즘 착하구나. 요즘 너는 참 착하구나. 정말 예쁘다. 넌 정말 착하구나. 이것은 그 아이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모든 모습이 부모인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과 의도에 부합할 때 그 아이에 대해서 착하라는 칭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린이 유괴범이 있다고 칩시다. 그 어린이 유괴범이 그 아이를 유괴해가려고 하는데 애가 자꾸 엄마 아빠의 말에만 순종하려고 하고 거기에서 배운 대로만 행동하려고 하면 꾀이는 꼬임에 살살 빠져 들어올 때 이 마음 나쁜 아저씨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 진짜 착하구나. 말을 잘 듣는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와 있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다, 선하다고 하는 것은 그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작게는 그 사람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 때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되었으면 바라던 그 모습으로 그 사람이 존재하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이런 일을 하였으면 하고 바라던 바대로 그가 행동하고 생활하고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사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인 교회도, 함께 이루어진 가정도 각기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이유와 목적 그리고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대로 움직일 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착한 교회, 그리고 선하고 착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가 연합해서 동거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계획과 의도에 부합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먼저 만나는 세계는 이 넓은 세상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입니다. 엄마의 품에서 젖꼭지를 입에 물고 눈을 떠봐야 가슴밖에 보이지 않는 그 세상이 한 아이가 태어나서 제일먼저 만나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을 통해서 더 큰 세상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사랑을 받는 관계를 통해서 인간이 완성되어갑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를 만납니다. 성장하면서 그러면서 부모의 가슴을 통해서 아이가 이 세상을 배웁니다. 좀더 성장하면 이후에 태어나는 형제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만납니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 미워하는 이유, 갈등, 양보, 인내 이런 것들을 배워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완성된 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태어나서 그런 관계를 통해서 점점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시고 싶어 하는 완성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완성되는 과정이 뭔가 하면 사랑의 관계를 통해서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 죽음의 과정입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한 사람이라도 진실 되게 사랑하는 거기에는 목숨을 건 자기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완성되어갈 수 없고 그 사람이 완성되어가는 것과 함께 그 사람의 인간성이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만 받은 사람은 방종한 사람이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자기를 희생하며 사랑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훨씬 앞에 말한 사람보다 성숙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형제들입니다. 그 형제들과 함께 그런 사랑의 관계를 나누면서 연합을 이루고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믿음의 형제이건 아직 불신상태에 있는 형제이건 부모의 한 혈육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이 형제는 연합하여 함께 동거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두 번째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형제관계를 주셨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형제관계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을 때 그 형제관계가 아름답게 빛나는 그런 모습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원래 이 철학적으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울림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지도 모르고 어디에 소용되는지도 모르고 또 이것이 무엇과 함께 놓이게 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생전 처음 본 물건을 딱 여러분들에게 보여주면서 이것 아름답습니까? 하고 물으면 여러분들은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행기에 들어가는 수 십 만개의 부속 가운데 여러분들이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부속 하나를 꺼내어서 펼쳐 보이면서 여러분, 이것 예쁩니까? 하고 물어보면 여러분들은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미’라고 하는 것,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주위에 있는 다른 것들과 어울리고 합치하는 관계 안에서 아름답다. 더럽다. 이렇게 정의가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를 주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 형제와의 관계를 통해서 형제로 함께 어울림이 있는 그런 모습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 관계가 각 사람을 참으로 사람으로서 완성해가는 데 기여하고 또 그런 아름다운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자기가 어느 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 그래서 그것이 모든 형제들과 함께 어울릴 때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 명백하기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좀더 도움이 되는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자, 생전 처음 본 이것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렇게 풀잎이 그려져 있는 컵 위에 풀잎이 그려진 뚜껑이 덮여질 때 여러분들은 이것 예쁩니까? 하고 물으면 틀림없이 정말 예쁩니다. 아름답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똑같이 그래서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를 뚝 떼어놓고 그것이 아니라 다른 형제들이 어떠한지를 보면서 그 한 사람이 그 형제들과 함께 어울림이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그 사람 때문에 형제관계 전체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자, 좀더 쉽게 한번만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형제가 있는데 각각 그들이 받은 은사도 틀리고 또 그들의 상태도 다릅니다. 형제가 여럿 있는데 한 사람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이런 문자의 이치, 학문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형은 공부를 많이 해서 아주 유식하고 학문을 많이 알고 인생사는 이치를 깨달은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은 함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울리려면 같이 공부를 잘한 사람끼리 어울려야지만 이렇게 격이 맞고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려야지만 이게 품위가 납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정 반대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인생을 아는 지혜가 많이 있는 형이 그런 형제들 관계 속에 들어가서 내가 공부를 제일 많이 했지, 너희들은 무식깡통이야. 너희들은 나하고 함께 교제를 나누고 형제관계를 누릴 수 있을만한 자격이 안돼. 그런데 내가 할 수 없이 너희들의 형 노릇을 하는 거야, 이것은 이 사람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려가서 자기만큼 공부하지 못한 동생이나 그 다음에 누이들을 타이르고 그래서 삶의 지혜를 빌려주고 모르는 것들을 가르쳐주고 할 때 그 사람이 들어감으로 형제관계가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이제야 이해가 가는 눈빛입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형제가 살아도 사실 화목하려면 형제들이 경제수준이 비슷한 것이 좋습니다. 형제 넷이 있는데 다 굴지의 회장이다. 그러면 사이가 좋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뭔가 달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형은 아주 가난해. 동생은 돈이 아주 많아, 있는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게 격이 안 맞습니다. 동생이 형에게 저녁이나 한번 먹읍시다. 그리고 데려갔는데 한 끼에 한 백만 원을 주고 먹는 곳입니다. 먹으면서 오늘은 내가 샀으니까 다음은 형이 사, 그때부터 근심이 됩니다. 어디에 가서 몇 달치 생활비를 덜어서 이것을 먹나. 그러니까 격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이 세상의 기본적인 이치 아닙니까? 그런데 동생이 그러지 않고 형은 가난해. 자기는 돈이 많아. 그래서 나타나서 형 그것도 사는 것입니까? 그래도 나처럼 살아야지. 내 사실 여기에 올 상황은 안 되고 누추한 형 집에 와서 앉아있을 상황은 아닌데 내가 봐주는 것이야. 그럼 형제관계가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 많은 돈으로 형을 섬깁니다. 그래서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때 그 동생이 들어옴으로 형제관계는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이제는 완전히 이해하는 표정입니다. 됐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런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호교통이 일어나야 합니다. 형과 동생이 의절하고 살고 그리고 만나기는 만나도 마음을 꽉 닫고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마음을 나누지 않고 이런 식으로 서로를 의존하지 않고 완전히 찢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이 모습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제관계를 주셨을 때는 하나님이 그런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이런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육신의 형제가 아닌 영적인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영적인 관계 속에서 이렇게 나 하나가 이 형제관계 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이 형제관계, 예수 안에서 맺어진 이 형제관계가 선한 목적을 지향하고하나님이 보실 때 그 시각에서 예쁘게 보이기를 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이 영적인 형제관계를 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틀립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말씀을 별로 많이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지만 그러나 돈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또 돈도 많이 없고 말씀도 많이 깨닫지 못했지만 하여튼 사람들 앞에 잘 아사바사 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각기 나는 말씀을 많이 알아. 너희들은 천치바보 깡통이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하는 것은 수치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난 돈이 많아 수준이 너희들하고는 안 맞아.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난 이런 것을 참 잘해, 너희들은 참 바보야. 망부석 같아,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세 사람이 함께 모였으면 한 사람은 저처럼 말씀전하는 사람이 되고 돈 많은 사람은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고 세 번째 사람은 새가족반 위원회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나는 돈은 있고 이것은 잘하지만 말씀이 없는데 그 형제 때문에 유익을 받는 것입니다. 쉽습니다. 또 나는 말씀을 잘 가르치지만 돈은 한 푼도 없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으면 그 돈이 많은 형제가 그 돈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돈도 없고 말씀도 없지만 이게 잘합니다. 그래서 내가 새가족 위원회로 서있으면 등록숫자가 변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어울림을 통해서 아름답게 된다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형제 관계가 바로 그런 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죄가 들어와서 망가진 이 가족들의 관계를 보십시오. 돈이 많은 형은 가난한 동생을 무시하고 공부 많이 한 동생은 공부를 못한 형을 우습게 압니다. 그리고 또 재주가 있고 이런 동생은 다른 형제들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막 암투와 질투 이런 것들로 막 뒤엉킨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형제들이 모이면 그렇게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였을 때 오히려 그들이 함께 마음이 나누어진 것이 확인이 되고 함께 살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갑니다. 거기에다 또 그 형제들이 결혼을 해서 그 부인들까지 가세해서 거기에 작용할 때 이것은 또 보통 복잡한 춘추전국시대가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몰랐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뭔지 그런 것이 뭔지 모르고 저 좋은 대로 마치 그냥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모양 돼지는 정말 돼지입니다. 뜯물을 주면 막 밥통 속에 들어가서 서로 머리를 밀치면서 밥을 먹겠다고 하는 그런 모습이 우리의 옛 생활입니다. 지금은 이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가족관계, 특별히 형제관계에 거시는 주님의 기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말은 쉽지만 아름답다는 것은 다 제가 동의할 수 있지만 그거 가능하겠습니까? 목사님은 우리 형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몰라서 그러지요. 저밖에 모르는 놈입니다. 유산도 다 빼앗아가고 껍데기만 조금 남겨준 그런 사람이고 또 뿐만 아니라 목사님, 내가 원수하고는 화해해도 우리 누나하고는 못합니다. 그 인간의 소갈머리는 하나님도 감당 못하십니다.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목사님, 계속 하소연이 이어집니다. 더더군다나 목사님, 예수님이라도 믿으면 그래도 이해를 하겠는데 그 예수님도 안 믿는 불신형제입니다. 도저히 용납이 안 됩니다. 과거의 상처가 아물라치면 현재에 상처를 더 주고 이러면서 계속 갈등이 생기는데 저 의절하고 산지 오래되었습니다. 이것이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람만 알도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한번 조용히 묵상을 해보십시오.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 흘리며 죽으셨습니다. 내 마음에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 왜 이 쓸모없는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몹쓸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주님,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이렇게 죽은 것은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기 때문이고 너희 죄를 속하기 위해서 너의 죄를 내가 다 담당하였도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밖에 없다면 그러면 예수님, 이제 내가 뭘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베푸신 그 크고 놀라운 사랑 앞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형제를 사랑하여라.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렇게 주님이 보실 때 선하고 아름다운 형제관계는 어떤 것인가? 오늘 이것을 성경에서 두 가지로 얘기하는데 형제가 연합하는 것과, 두 번째는 동거하는 것. 이것입니다. 연합은 정신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그 다음에 동거한다는 것은 삶을 나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답고 선한 형제관계에 첫 번째는 연합입니다. 이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둘인데 사실은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연합입니다. 분리의 반대입니다. 왜 이렇게 한 지붕에서 같이 살아도 콩가루 집안처럼 다 쪼개진 집안이 있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각기 연합을 못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그냥 집입니다.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그 속에서 연합을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가져다 준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연합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이 질병으로 깊이 고통을 받는 것은 불쌍합니까, 안 불쌍합니까? 불쌍한데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는 불쌍하다는 생각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 그 아픔이 나에게도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게 바로 연합의 감정입니다.
(예화: 남편이 병에 걸려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 누워있으니까 아내가 수시로 남편의 등 에 손을 넣어보는데 그 이유는 욕창이 났는지 확인하면서 죽기를 기다리는데 그 것은 연합의 감정이 없어서 남편은 식물인간으로 죽어가는 데 그 고통이 아내의 마음에 전달이 안 되기에 연합이 없으면 같이 살아도 남과 같다는 이야기)
형제가 같은 지붕에서 살아도 이런 연합의 감정이 없으면 매일 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관계를 주셨을 때 그것이 아닙니다. 이런 연합의 감정은 사랑할 때만 가능합니다. 사실 지금 이 근대화를 겪으면서 이 가족이 산산이 쪼개져서 핵가족이 됩니다. 핵가족 정도가 아니라 나는 이제 원자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자가족이 뭔가 하면 전에는 핵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같이 이렇게 살다가 시집장가를 가면 가서 따로 사는데 지금은 시집장가도 안 갔는데 독립선언하고 나갑니다. 하나는 고시방으로, 하나는 자취방으로, 하나는 서울기숙사로 다 찢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핵가족보다 더 무서운 원자가족입니다. 이렇게 다 해체가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형제사랑을 잘 모르면서 아이들이 자랍니다. 형제사랑을 잘 모르면서 자라니까 그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서로 형제들에 대해서 무관심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익이 충돌하면 갈등을 일으키고 가서 자녀들을 낳으면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배웁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똑같이 행하고 갈등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다 불화가 되어서 찢어져 나갑니다. 가끔 남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사실 사촌만 되어도 남이라고 생각하고 육촌이면 사실 얼굴도 모르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옛날 같았으면 대가족 사회에서는 육촌정도는 같은 지붕 아래서 얼마든지 살수 있는 것이고 또 같이 안 산다고 그래도 같은 동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때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형제들과의 관계가 매우 유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도 사실 형제가 있지만 그렇게 교제를 나누어본 적은 없지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저보다 훨씬 위 세대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석 달, 혹은 넉 달, 멀면 한 일곱 달 만에 형제가 만나면 만나서 펑펑 운다고 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반가워서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런 것 우리는 잘 모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제들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고 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부모나 삼촌 세대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무서운 질병처럼 번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이에 형제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이기심으로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 간에 소송도 불사하고, 의절도 불사하고 자기 이익을 충돌이 되기만 하면 언제든지 관계를 깨트려버릴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연합이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런 연합이 없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한국 사람이 4명 가운데 1사람이 봤다는 영화가 있는데 ‘태극기 휘날리며’ 무슨 1200만인가 1500만이 봤다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봤다는데 저는 볼 시간이 없어서 그래서 얘기들을 하는데 자꾸 그 얘기를 해서 그래서 또 설교할 때라도 뭘 써볼 게 있을까 해서 우리 집 사람에게 비디오 집에 가서 하나 빌려오라고 해서 틀어서 무슨 휴일인가 공휴일인가 해서 봤습니다. 그래서 날을 잡아서 일부러 오후에 침대에 쉬면서 그 영화를 다 봤습니다. 참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한 4분의 1은 보셨겠지만, 그 영화 내용이 있는데 형제가 있는데 아주 뜨거운 형제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그 형이 동생을 구하고 살리기 위해서 희생을 무릅쓴 이야기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동생이 형의 마음을 모르는데 형이 죽고 난 다음에 그때서야 형의 마음을 알게 된다는 그런 영화입니다. 보면서 아! 그렇구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족들이 모여 앉았는데 우리 형제들이 모여앉아서 농담 비슷하게 서로 자기 요구상황을 안 들어준다고 투덜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많이 투덜대지 않았지만 투덜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셋째 동생이 그러는 것입니다. 형, 태극기 휘날리며 봤어, 그래서 봤지. 굉장히 반가운 눈빛으로 거기서 뭐 느끼는 것이 없어. 그래서 있지, 더 반가워하는 눈빛입니다. 뭘 느꼈는데? 동생은 영원히 싸가지더라. 굉장히 실망하는 표정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영화가 상영이 되었는데 두 사람이 각각 보는 각도가 틀립니다. 형의 입장에서 보면 어쩜 저렇게 형이 뼈 빠지게 희생하고 나중에 목숨까지 버리는데 동생은 저렇게 싸가질까? 동생은 영원한 싸가지다. 그게 형이 내가 보고 내린 감동입니다. 동생은 그 영화를 보면서 말은 안 했지만 이렇게 봤을 것입니다. 동생 싸가지는 눈에 안 들어오고 ‘아! 형이 저런 게 형이구나. 동생을 위해서 한없이 주고 끝없이 희생하고 그리고 뭔가 더 줄 게 없나. 생각하다가 죽는가, 저런 가시고기 같은 인생이 바로 우리 형인데 저 형은 우리 형 하고 얼마나 거리가 멀까. 우리 형이 장동건이었으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연합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이것인데 내가 형인데 네가 나에게 해준 게 쥐뿔이나 뭐가 있어. 내가 동생인데 형이 나에게 뭐 해준 게 뭐가 있어. 이런 것 묻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는 그런 것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함께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 동생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선물입니다. 그렇게 뭘 해주면 형 시켜주고 안 해주면 잘라버리고 싸가지가 없으면 동생 잘라버리고 뭐 좀 해주면 붙여주는 그런 것이 형제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업상 거래할 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도움이 안 되면 그 사람과 관계를 정리하면 되는 것입니다. 돈 남기자고 하는 장사인데 그 사람이 내 사업에 도움을 안 주는데 뭘 매일 만나서 물고 뜯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익이 되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업상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가족관계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제일 바보 같은 관계는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 아빠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 엄마 아빠는 그런 것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인 네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니. 자식은 그런 거를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관계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시장에 가서 거래하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당신 회사와 20년을 거래했는데 쥐뿔이나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나.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관계에서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금지사항입니다. 가족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랑하면서 연합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입니다. 세상에 살다가 지치고 곤할 때 그리고 마음이 갈 곳을 잃을 때 어디에 도저히 기댈 때가 없을 때 누가 생각이 납니까? 돈 많은 친구가 생각나면 정신병자입니다.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친척이 생각나면 바보입니다.
아무 가진 것이 없고 능력이 없는 우리 엄마, 지금도 시골집에서 군불을 때서 밥하고 세상권력이라고 하는 것과는 담쌓고 오늘도 아침에 썩은 오줌통이 지고 밭에 나가서 거름 주고 오는 우리 아버지, 내가 달려가면 싸릿문을 열고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뛰어나오시는 우리 엄마. 그 가족이 생각나는 게 이게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뭘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겠습니까? 가족과의 관계는 그렇게 해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래관계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기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서로를 무한히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을 용납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람들이 가족입니다. 그 형제가 부족해도 마지막까지 보듬고 용납해줄 수 있는 사람이 형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동생입니다. 그게 바로 동기간입니다. 이런 연합은 바로 사랑을 위해서만 실제적으로 이 연합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해야지만 이런 연합들이 경험이 됩니다.
형이 보고 싶은 적이 있습니까? 내가 묻고 싶습니다. 언니가 보고 싶은 적이 있습니까? 동생이 눈에 밟힌 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없다면 여러분들은 상당히 많이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이 그런 연합을 앗아갔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연합을 이야기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뭔가 하면 현실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과도한 희생을 요구합니다. 상식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지 않고 자꾸 그 관계를 파괴시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나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줄 때 그럴 때 이 관계를 지속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형제와 의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 들으십시오. -악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가 형제와 등지고 싶겠습니까? 그렇게 자기를 고통 주는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관계도 의절하고 피를 나누고 살던 부부와의 관계도 자르고 돌아서는데 그까짓 것 형제가 왜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특히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아름다운 연합에 대한 충성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말씀하심으로서 당신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신 것이 메시야요, 구세주이신 동시에 또한 우리와 같이 한 형제로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을 이룸에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이 연합에 헌신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실제적으로 이 연합 속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의 모본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죄를 짓고 불순종해서 주님의 품을 멀리 떠났을 때는 예수님이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다시 어린아이처럼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스스로 주님을 멀리 떠나고 그 연합을 끊어버리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아가면 언제나 주님은 거기에 변함없이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입고 오셨는데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이유 중에 우리들과 형제 됨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모두 맛보시고 죄는 없으셨지만 당신과 같이 육신을 몸을 입고 사는 인간들의 온갖 연약함을 다 경험하시면서 우리와 더 깊은 형제애를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수시로 우리의 죄와 욕심 때문에 부당한 자기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연합을 끊어버리는 우리의 불순종과는 대조적으로 언제나 우리와의 연합을 끊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사랑에 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이 당신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족을 허락해주시고 또 우리에게 고통과 아픔을 많이 주는 형제들 속에 우리를 두게 하신 것은 우리 없이는 우리 형제관계가 아름다워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희생하라고 거기에 세워주신 것입니다.
경우가 없는 우리 형, 나에게 아픔을 많이 주는 우리 누나, 그리고 나를 언제나 무시하는 우리 동생 등등을 생각하면 참을 수없습니다. 그리고 그 연합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 연합에 드는 그 고통과 에너지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참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사랑, 십자가에서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채찍에 맞고 그리고 옆구리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까지 그렇게 죽어 가시면서도 그분은 단 한 마디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무리들을 원망하지 않으시고 당신으로 하여금 아버지 앞에 저주받은 자가 되게 만들었던 범죄한 우리들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망치소리 내 마음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형제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한 형제로 여기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고난을 주는 우리들을 오히려 위해서 아버지 앞에 용서를 빌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주님께로부터 받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의복, 우리를 품위 있게 하는 지식과 인격, 따뜻한 환경, 좋은 교제, 넉넉한 이 세상의 물질, 그리고 우리의 생명, 심지어 우리의 영혼에 베풀어지는 하늘위로와 사랑, 은총과 긍휼, 그리고 하나님의 넓은 축복까지 무엇 때문일까요? 왜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것들을 주셔서 우리를 누리게 하실까요? 그리고 왜 우리의 많은 죄를 용서해주시고 당신은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사랑과 위로를 베풀어주실까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대우해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이렇게 베풀어주신 많은 자원들을 가지고 망가진 세상을 고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부지런히 은혜를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바로 우리들이 고쳐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동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는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 떨어져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의 가치는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삶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의 삶이 내 삶이 되고 내 삶이 또한 그의 삶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쁠 때 함께 그에게 일어난 기쁜 일인데 내가 기뻐하게 되고 그에게 일어난 슬픈 일인데 또한 내가 슬퍼하게 되는 것, 나에게 일어난 가슴 아픈 일인데 다른 사람도 함께 가슴아파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족관계의 가치이고 형제는 바로 이런 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형제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제를 소중히 여기는 관심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형제가 변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고 미워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가장 찬송 받으실만한 위대한 일이 무엇입니까?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게 뭔가 하면 동거하는 삶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한번도 나를 떠나가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동거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면서 나와 함께 동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마음에 들고 착하게 행동할 때만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혹은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불순종 할 때도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축복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형제들이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 우리 형, 우리 동생, 우리 누나는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다. 그래도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우리 형이, 우리 누나가, 내 동생이 나와 삶을 나눌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지체다 하는 마음, 그것을 여러분들이 상대방에게 주고 있는지 한번 반문해보십시오.
여러분들 가운데는 형제들로 인해서 많이 마음이 상하고 심지어는 말도 안 되는 형제들의 몰상식한 행동을 통해서 심령에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더 많이 희생해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왜 우리에게만 희생하라고 합니까? 희생하는 것이 공평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한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에게는 항상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답지 못한 형제관계 속에 여러분이 들어가서 그것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한번 보십시오. 원래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창조된 사람의 머리이셨습니다. 죄가 들어와서 이 관계가 모두 깨트려졌습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또 다른 새로운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그 아름다운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이 겪으셨던 그 희생과 고초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지 않으셨다면 아마 교회는 이렇게 아름다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를 그렇게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치르신 희생과 고난을 생각해보십시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자기 사랑이 깨어지지 아니하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자기죽음의 과정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외로울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 자기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운 가치는 삶의 양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위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삶의 아름다운 것은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생명과 기쁨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문제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문제 많은 형제들 속에서 여러분에게 치료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형제는 어떻습니까? 의절했습니까? 의절까지는 안했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되도록 안 만나는 관계입니까? 마음에 맺힌 것이 많아서 얼굴을 보기만 미운 마음이 드는 관계입니까?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습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렇게 살아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주님의 편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점에서 형제들에게 하늘나라의 맛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름에 보면 수박 파는 사람이 수박 하나를 잘 쪼개서 리어카에 끌고 다니면서 하나씩 먹어보라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 수박을 사고 싶은 마음이 들듯이 여러분들이 그런 맛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찾아가십시오. 될 수 있으면 오늘이 제일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때 은혜 받은 마음 하나님의 마음, 식어질 때 마음 사람의 마음, 죄에 사로잡혔을 때 마음 마귀의 마음입니다. 즉시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용서를 비십시오. 그리고 내 형제가 가시처럼 따가워도 내가 그것을 죽는 순간까지 가리라, 그것이 힘들 때마다 나는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보리라. 그분이 나를 위해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 그리고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피,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나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뒤를 따라가리라. 그런 마음을 가지면 용서를 비는 것도 쉽고, 가지고 있는 것을 주는 것도 쉽고,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게 살라고 여러분들을 아픔이 많은 가정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나를 예수 믿게 만드시고 나중에 예수 믿었어도 남이 보지 못한 사랑을 받게 하시고,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게 하시고, 남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형제를 찾아가서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형제가 준 상처를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오히려 주님의 상처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부당한 자기 사랑을 버리고 참다운 주님의 사랑에 붙잡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치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네 형제와 입 맞추라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창33:3-4)
지난 시간에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왜 그런지 오늘 한 번 더 형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림으로서 가정에 관한 시리즈를 금년에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라고 하는 인물은 매우 흥미 있는 인물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야곱은 믿음이 깊고 경건한 사람의 대명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힘으로 교만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본보기와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보다는 이 야곱이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훨씬 더 와 닿는 것이 많은 그런 인물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야곱의 생애 전체를 살펴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잠깐 야곱의 생애를 돌아볼 필요가 있고 어떻게 해서 오늘 이 본문 시점에까지 야곱이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오늘 우리의 설교를 위해서도 매우 유익합니다.
우리가 야곱의 생애를 돌아볼 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야곱의 끊임없는 연단이었습니다. 사실 이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이 있었는데 둘이 한 쌍둥이로 한 어머니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둘이 서로 먼저 태어나기를 다툴 정도로 이 배속에서도 두 사람 사이에 경쟁과 그리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야곱이 연단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제 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고 아버지 이삭이 나이가 많아서 죽게 되었을 때 축복을 받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이 족장이 아버지인 동시에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언약공동체의 가정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서 축복을 하면 그 축복이 임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죽기 전에 유언처럼 남기며 비는 이 축복은 더욱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에서를 사랑했고 엄마는 이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장자인 이 에서에게 축복하고자했고 그리고 엄마는 이 야곱이 어떻게 하든지 그 남편의 축복을 받아서 장성하여 훌륭한 가문을 이어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야곱과 리브가에게 이제 두 아이가 태어날 텐데 그 동생을 하나님이 특별히 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나라가 형보다 훨씬 큰 나라가 되고 큰 자가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애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나이가 들면서 영적인 안목이 흐려지게 되었고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애정에 끌려 에서에게 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운 아버지와 그리고 어리석은 형을 속여서 이 야곱과 리브가는 야곱으로 하여금 축복받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모든 축복을 이 두 아들에게 준 뒤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가 축복을 받아야 할 당사자인 에서를 만난 것은 그 모든 축복을 해준 직후였습니다. 슬피 울면서 나에게도 축복해달라고 비는 아들에게 이미 네 동생에게 모두 축복해주었기 때문에 너에게 축복해줄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로부터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 동생으로부터 빼앗겼으니 형이 동생을 향한 미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야곱은 멀리 밧단 아람으로 도망가게 되었고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거기에서 외삼촌의 집에 머물며 짐승을 치면서 품팔이를 했고 2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그곳에서 봉사하다가 이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야곱을 철저히 연단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 고향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그 무서운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야곱은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 고난을 통하여 점점 온전한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가 있어서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자신에게는 풀지 못하는 무서운 숙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큰 축복을 자신에게 빼앗기고 평생을 칼을 갈며 복수의 날을 기다리던 형 에서와 대면하는 문제였습니다. 야곱이 많은 돈을 모았고 제물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형과 대적해서 형을 죽이거나 싸움을 해서 형을 꺾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화해하고 그리고 자신의 지난 잘못들을 용서받고 싶었지만 자신의 죄가 너무나 크고 형의 축복을 통째로 가로챈 것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형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가 없는 그런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본문처럼 얍복 강가에서 형과 화해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적마다 사실 마음의 눈물이 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야곱과 에서가 얍복 강에서 뜨겁게 끌어안으며 화해했던 것처럼 남북이 그렇게 속히 화해하게 될 그런 날이 기다려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야곱과 에서 사이는 정말 철전지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런 철저한 적대감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특별히 야곱이 에서에 대해서 가진 적대감보다는 축복을 빼앗긴 에서가 야곱에 대해서 가진 적대감이 더 큰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제 도저히 화해할 것이 예상되지 않을 때에 얍복 강에서 이 놀라운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제 에서를 맞이하러 가기 전에 지혜롭게 정탐꾼을 먼저 보내서 에서의 동향을 살폈습니다. 선물을 들려서 종들을 보내어 형의 마음을 풀려고 또한 특사도 보냅니다. 보낸 사람들로부터 오는 보고는 너무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생을 맞으러 온다고 하는데 동생이 무슨 군대를 몰고 오는 것도 아니고 만약에 동생이 사랑스러우면 형 혼자 와서 따뜻하게 맞아줄 텐데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데리고 자기를 맞으러 온다고 그러니 이것은 복수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잠시 후에는 얍복 강에서 두 형제가 뜨겁게 끌어안고 지난날들을 화해하며 이제 처음 가졌던 형제의 우애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화해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안고 “입 맞추고 울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았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표시라는 반가움의 표시라면 입 맞추었다고 하는 것은 애정의 표시고 “울었다”고 하는 것은 그 이전에 있었던 깊은 앙금들을 쏟아내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어째든 이 안고, 입 맞추고 그리움과 설음 속에서 우는 이 장면은 사실 최고의 사랑의 관계에서나 볼 수 있는 애정 표현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번 우리 자신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어제 지난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났더니 여러 몇 명의 지체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제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저희 집안의 자녀들이 이렇게 불화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가 나이가 들어서 자식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좋은 옷이나 넉넉한 용돈, 그리고 값진 반찬이 아닙니다. 부모가 나이가 들어서 자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슬하의 자녀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게 부모가 나이가 들어서 자식에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사실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는 자식들도 이렇게 형제끼리 우애하고 화합하는 가정에서 생겨나게 마련이지 서로 물고 뜯고 소송이나 하고 다투는 그런 형제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효자가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을 보면 형제간이 불화한 가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사실 옛날부터 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치열한 경쟁시대,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물질이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는 이 시대에는 더더욱 이런 각박함이 증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생각을 한번 해보십시오. 옛날에 농경시대에도 사람들이 보다 넓은 땅을 가지고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여서 좋은 옷 입고 잘 먹고 살고 싶다는 욕망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먹고 살면 족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사회가 산업화되고 발달하면서 사람들의 욕망도 훨씬 커져서 이제는 편안한 환경에서 먹고 마시고 자연과 함께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서 사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더 자극적이고 더 쾌락적이고 그리고 더 많은 허탄한 것들을 행해야지만 마음에 만족을 얻을 수 있으니까 채워지지 않은 만족을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많은 제물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사람들과 경쟁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신의 자원을 더 많게 하려고 치열하게 싸우는데 불행한 경우에는 형제가 이런 경쟁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형제들 간에 이런 무서운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슬픈 모습입니다.
또 이런 치열한 경쟁으로 말미암은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형제가 서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무관심은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미워하거나 혹은 갈등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는 형제들, 일년에 한번 만나든지 말든지 그저 잘 있는지 마는지 죽었다는 소리만 안 들리면 찾아갈 볼 일이 없는 그런 냉담한 관계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 사이에서 어떤 마음의 연합이나 그리고 삶을 공유하는 동거함 같은 것들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사실 점점 더 사람들이 물질에서 오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 더 치열하게 물질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생활에 참된 행복은 이런 물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없이 살수 없지만 -그 가치에 중심성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쁨을 얻고 그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또 그 사람을 도움으로서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 이런 것은 일반은총 차원에서도 보면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같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내 신앙 안에서 복 받게 하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안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함께 사랑하면서 그 관계 속에서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선교적으로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너무 각박합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형제와 다투어서 의가 상하거나 더 많은 자원을 얻기 위해서 서로를 미워하고 자기 욕망에 맞게끔 움직여지지 않는 형제에 대해서 한탄한 마음을 갖거나 혹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사랑 없는 무관심 속에서 살아가는 이런 풍조들은 너무 가슴이 아픈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도 너무 가슴 아픈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그에게 거시는 기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을 보내셨다고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려서 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게 하시고 또 패역한 이스라엘의 마음을 고쳐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륜이 다 무너져서 이기심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아버지를 버린 이렇게 창조의 원 이치를 깨닫게 해준 가족관계가 무너진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면 자신의 가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진실 된 신앙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참되고 진실하게 헌신하는가에 대해서 입증이 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야곱과 에서의 집안에 있었던 이 절망적인 적대감이 일시에 걷히고 그렇게 오랜 세월을 동생을 미워하며 칼을 갈던 형이 그 칼을 버렸습니다. 형을 향하여 절대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던 야곱의 마음에 형을 향한 모든 적대감을 버리고 그 강가에서 둘이 서로 뜨겁게 끌어안고 화해의 입맞춤을 하고 지나간 모든 자신들의 과오와 가족사에 얽힌 슬픈 이별의 사연들을 생각하며 서로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사랑을 회복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서로 반목하고 미워하며 몇 푼 안 되는 물질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발길을 끊으면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보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이 자신 앞에서 그렇게 미워하고 다투게 되면 부모의 마음은 지옥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형제가 되어서 여러분의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볼 여러분들의 부모가 안 계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부모보다도 여러분을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마음이 얼마나 더 아프시겠습니까? 첫째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많이 아프실 것이고 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는 여러분의 가족에게 선교사로 파송된 사람처럼 부르심을 받았으니 주님의 마음이 더 많이 아프실 것입니다. 선교라고 하는 것은 선교 받아야 할 사람들을 사랑하는데서 선교가 되는 것이지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추호도 있다면 그게 선교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역장으로 교사로 영혼을 돌본다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모두 여러분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때로는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데도 여러분들을 비난하거나 인격적으로 여러분들을 모독하거나 혹은 여러분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순간적으로 섭섭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인간이니까 피할 수 없는 감정의 현상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감정을 거두어버리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여러분들 곁에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들을 향해서 오히려 오래 참고 인내함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자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때 그들이 목양이 되는 것이고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 그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지라도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그렇게 끝까지 사랑함으로서 선교를 성취하고 그리고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그 일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원래 이 목양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인간들을 목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한 형제를 하나님을 만나게 하셔서 그래서 목양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셨더라면 완전한 목양이 되었을 것인데 형제 중에 한 사람을 취하여 여러분의 목자로 삼으셨으니까 그가 비록 여러분들보다 더 많이 만나고 여러분의 영혼을 목양하도록 사명을 받고 성경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며 여러분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불안전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에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부족할 수도 있고 때로는 잘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부분적인 것들 때문에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서로를 비난하거나 미워하거나 시비의 판단에 휘말려서 논쟁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오래참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만나게 하셔서 이루시려고 하는 그 뜻을 오히려 존중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불안전한 목자를 보면서 양떼들은 그래서 목자를 신뢰하고 따르지만 목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목자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또 목자를 양떼들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아서 양떼를 사랑하나 그러나 양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목자로 세우고 부르신 자신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양떼를 돌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형제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리고 목양의 관계에 있어서도 일체의 논쟁과 비난, 그리고 사사로운 미움과 악한 감정 같은 것들을 품으면 그것은 직접적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매우 슬퍼하십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특별히 심판 날에 다시 만날 분쟁하는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이라는 그 책 속에서 무엇을 가지고 목자와 양떼들이 서로 다투든지 그 둘은 마지막 날에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불려나가 예전에 그들이 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다투고 분쟁하였던 바에 대해서 질문을 받을 것이며 응분의 책임을 질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형제와 맺고 있는 관계는 하나님 앞에서 맺고 있는 관계이고 또 영적인 가정인 교회 안에서 맺고 있는 형제와의 관계도 역시 정확하게 하나님 앞에서 맺고 있는 관계이고 목자와의 관계는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되기를 원하고 분쟁하고 미워하고 다투는 형제들이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처럼 갈등과 분쟁을 거두어내고 얍복 강가에서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울었던 야곱과 에서처럼 화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 형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드러나게 되고 인간의 허물은 감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화해를 마음속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의견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얽혀서 형과 미워하며 살고 동생을 보지 않고 발걸음을 끊고 살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항상 마음속에서는 형제간의 화해에 대해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렇게 자유한 마음으로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늘 마음에 화해를 원하지만 받은 상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혹은 태도를 바꾸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이런 관계의 회복이 힘들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야곱과 에서가 그런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이제 이 야곱이 에서가 그 모든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었으니 우리가 거기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는데 그래서 원수 같은 사이가 얍복 강에서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설음과 기쁨으로 함께 우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런 일들이 있기 위해서는 야곱의 놀라운 변화가 선행되었고 이어서 에서의 변화가 뒤따랐다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믿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렇게 불화하게 된 형제의 관계를 청산하고 사랑과 애정이 있는 관계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에서는 신앙이 원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든지, 마음을 드렸다든지, 깨달았다든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철전지 원수처럼 가슴에 불타고 있는 복수심에 자극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군사 400인을 이끌고 와서 단칼에 죽여 버릴 마음을 갖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불과 얼마 지나기 전에 그 칼을 내려놓고 뜻밖에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미워하던 동생을 끌어안고 얍복 강가에서 통곡을 하며 화해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그림은 에서와는 잘 맞지 않습니다. 에서는 원래 들 사람이고 사냥을 좋아하던 기개가 있는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끌어안고 여자처럼 울었습니다. 그가 받은 감화와 그리고 동생을 향한 깊은 화해의 회복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이 모두 야곱을 통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야곱이 얍복 강에서 전날 밤에 자기 깨어짐이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터에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형이 곧 400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온다고 그러는데 내가 싸울 수는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이제 선물도 보냈지만 자기의 본 배열을 둘로 나누고 그래서 앞으로 한대 보내고 거리를 상당히 떨어트려서 두 번째를 보내서 앞에 자신의 짐승과 종들을 친다고 하는 소문이 들리면 뒤에 것들은 도망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그 아내들과 자녀들 중에서도 자기가 특별히 아끼는 라헬과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은 이제 뒤에 세우고 이제 마지막에 이들만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야곱은 형과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화해를 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형이 복수나 안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무서운 생각이 확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족을 건네 보낸 다음에 강가에서 그는 홀로 섰습니다. 예전에도 인생의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겼지만 그때마다 특유의 재치와 지혜로 극복을 했고 꾀로 그 모든 어려움들을 피해갔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려움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피해갈 수 없는 그런 이치에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거기에서 천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천사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온 천사였습니다. 야곱은 천사를 만나자 또 옛날에 자기의 힘대로 문제를 해결하던 기질이 발동해서 천사와 씨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이제 이 천사에게 매달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야곱의 믿음이라고 해석합니다만 호세아서 12장에 가면 이것이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혈기로 하나님 앞에 매달린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으니 그의 환도 뼈를 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철저한 자기 깨어짐을 한번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간의 방법과 힘으로 이제껏 인생을 살아왔고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도움이 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의지해서 살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밧단 아람에서부터 여기에 오기까지 수없이 난관을 거치게 하시면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이 술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뛰어난 외삼촌을 만나게 하시고 그래서 장가를 들기 위해서 그는 거기에서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품삯 하나 받지 못하고 노예생활과 다름이 없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됩니다. 다시 쇠경을 위해서 7년을 일했으니 야곱이 그의 삼촌의 집에서 일한 기간이 20년이 넘는다는 셈이 됩니다. 그 속에서 삼촌은 품삯을 10번이나 더 바꿨고 그리고 속속들이 우려내어서 이 야곱의 모든 괴로움을 더했습니다. 오늘 이처럼 많은 때를 거느리고 재산을 소유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지 야곱의 재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야곱 속에는 여전히 자기의 인간의 고집과 술수대로 인생의 문제를 극복해보려는 습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천사를 붙들고 천사에게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축복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못 간다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그 교만을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징벌하셨습니다. 그래서 환도를 친 것입니다. 옆구리 아래입니다. 모든 힘이 거기서 나오는데 아마 다리를 질질 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철저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깨어짐과 함께 경험되었던 것이 울며 간구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인간의 술수로 하나님의 천사를 붙든 것이었다면 이제 환도 뼈가 상하는 징벌을 받고 나서 이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울면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오늘 형제들이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결국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먼저 자기 사랑에 대해서 깨트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여러분의 형이 나쁜 사람일 수가 있고 또 여러분의 동생이 나쁜 인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쁜 인간이라고 판단하고 상종할 인간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 중심에는 자기는 도저히 바뀌지 않으려고 하는 그리고 형제의 입장은 생각해보지 않으려고 하는 완고한 자기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형이 되면 내가 사랑해줄 텐데, 내가 원하는 동생이 되면 내가 예뻐해 줄 텐데’ 하는 생각이 가슴속에 팍 박혀있어서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형이 되라고 명령하시나. 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어떤 누나, 어떤 동생이 되는 것일까? 이런 것이 아니라 모든 기준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고 기준에 맞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니까 형제를 미워하고 그리고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일체 오래 참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가진 예수님께서 이렇게 문제가 많고 갈등이 많은 집안에 처음 하나님을 믿는 나 같은 신자로서 내 자리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우리 형제들을 끌어안으셨을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의롭고 그리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만의 친구가 아니라 죄인이며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도록 버려진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인간구실을 하며 살 수 없는 많은 더러운 죄인들과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상종해줄 수 없는 인간들이 있었는데 그 쓰레기 같은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당신의 순결한 품에 모두 끌어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서 자신의 품에 넣고 새사람을 만드셨고 우리가 어려울 때마다 시시때때로 우리를 도우시고 고난 속에서 우리를 축복해주시고 위기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어주신 것은 바로 이런 일들을 하게 하기 위해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마음입니다.
은혜가 왜 필요합니까? 은혜 없이도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일들을 위해서는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의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은혜가 필요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친절과 인내로 내 형제 이끌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정말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큰 권력도 사랑을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무릎은 꿇을 수 있게 만들고 머리를 숙일 수 있게 만들어주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엎드려지게 만드는 것은 큰 권력의 힘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좋지만 그래서 그 물질의 힘이 위대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은 물질의 큰 것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힘, 그것이 가장 큰 힘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고통 하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바로 이런 사랑이 없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이 야곱을 보면 그를 적대감으로 가득 찼던 에서, 잠시 전만해도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죽이러 올 것 같았던 그 에서가 어느 날 그 갈았던 칼을 버리고 동생을 뜨겁게 끌어안게 되기까지 그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징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철저히 깨트려져서 울며 통곡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울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우리 형 에서는 나쁜 놈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때에 통곡하고 울면서 이 야곱은 불화한 형제를 보고 마음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느꼈고 부모의 마음도 느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한테 축복을 빼앗기고 긴 세월동안 마음에 고통 하던 형의 아픔까지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며 자신의 잘못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화: 형제가 강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려 올라온 돌맹이를 건져 보니 뜻밖에 금덩어리여서 형제가 너무나 기뻐하며 가는 동안 형제의 마음에 침 묵이 흐르면서 갈등이 생기자 형이 강 한가운데 금덩어리를 던져버리자 동생이 펄펄 뛰니까 형이 타이르며 하는 말이 건져서 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가난 에서 벗어날 것에 기뻐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생각을 고백 하는 말이 동생이 없었으면 자기 것인데 하며 동생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 는가 하면서 소중한 우리 형제가 금으로 인해서 관계가 깨트려질까봐 금을 버렸 다고 고백한 내용)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냉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소리 질러 사랑받기 원하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이 어리석은 것은 형제들이 물질 때문에 형제들과 불화하고 서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형제와 갈라진 것과 물질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래 참지 못해서 형제와 불화한 것, 형제를 판단하고 그리고 형제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미워한 것, 이런 모든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사랑이 샘솟게 만들어주는 원천입니다. 회개가 터질 때 막혔던 사랑의 샘은 열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인격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아무도 없는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혼자 거기서 있으면서 경험한 것이 바로 이런 자기 깨어짐과 회개였습니다. 깊은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고통 받는 형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깨트려졌습니다. 여러분, 형제와 화해해보고자 할 때 형제가 내게 대해서 한 일을 생각해보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화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내 모습이 옳은지 하나님 앞에 직접 물어보셔야 합니다. 형을 보고 결정하지 말고 내게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여주시고 나를 사랑하여주시고 용서해주시되 자기의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나의 허물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형제와 불화하게 지내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형제와 이렇게 불화한 가운데 위선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불행한 삶이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불화가 교회 안에서 영적인 형제들 간에 있게 될 때 그는 기도의 문이 막히게 되고 영혼은 점점 고갈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형제가 모두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머리이기 때문에 형제를 향한 미움과 원망은 곧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되고 예수께 대한 미움과 원망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정면적인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영혼에 항상 어두운 그늘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의 흔적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쓰다듬은 것이고 자신의 영혼을 도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깊이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의 결점을 끌어안고 그를 용서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이 이처럼 형과 화해할 수 있었던 또 하나는 실질적으로 그가 형 앞에서 자기를 많이 낮추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야곱이 그렇게 얍복 강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울며 회개하고 자기가 깨어졌고 이전에 형과 그렇게 원수 된 관계에 있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리고 형의 마음에 고통을 주었던 것을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축복해주셨습니다. 다 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주님이 축복해주시겠다고 그랬는데 이제 만사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더 남아 있었습니다. 형 앞에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형 마음에 씻을 수 없는 큰 고통을 준 것에 대해서 그는 형을 만나자마자 일곱 번 절하며 형 앞에 용서를 빈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을 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형 앞에 깊이 낮아졌습니다. 화해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동기간 사이에서나 상대방이 일단 내가 상대방에게 누가 잘했든지 간에 마음을 낮추고 그리고 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저를 이해해주시고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이 배척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가장 큰 의무가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의 견딜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결과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다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의지하고 사랑하며 기대며 살아가야 할 형제들 간에도 이기심과 미움과 질투, 원망 이런 것들이 아주 치열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그렇게 깨트려진 관계를 화해를 시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깊이 낮추어야 합니다. 형제 우애 관계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여기에서 형, 나는 형을 너무 사랑해. 형 나 보고 싶어, 이렇게 얘기하는데 저쪽 메아리가 난 너 같은 놈 보기도 싫다. 이 나쁜 자식아. 이런 메아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보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희는 예수의 향기라”고 그러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이렇게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한 편지로서 살아있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의 냄새를 날리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는 항상 용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는 항상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 자기 죄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아무 관계도 없는 예수님이 자기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죽으신 것을 생각하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는 해야지 되지 않습니까?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주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빚진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먼저 더 안 사람이 더 많이 죄인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이 적어도 용서를 빌고 그리고 아픈 것이 많아도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형제와 깊이 화해하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옵니다.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원수까지 품에 안고 용서해주신 예수의 사랑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정말 형제를 용서하는 과정은 바로 자기 죽음의 과정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사라지기 전에 화해하십시오. 먼저 가서 용서를 비십시오. 그래도 잘못한 것이 생각나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라도 용서를 비십시오. 그리고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형제를 주님이 주신 가시가 아니라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섬기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에 이처럼 화해를 이루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가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