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가정
(2006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6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최고의 자녀사랑(잠 22:6) 2006.5.3 수요예배 1
2. 네 부모와 화해하라(신 6:16) 2006.5.7 주일오전 12
3. 가족을 사랑하라(딤전 5:8) 2006.5.10 수요예배 23
4.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 6:4) 2006.5.14 주일오전 35
5. 이 아이를 드리나이다(삼상 1:28) 2006.5.17 수요예배 47
6. 지식을 따라(벧전 3:7) 2006.5.21 주일오전 56
7.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2006.5.24 수요예배 70
8.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2006.5.28 주일오전 80
9. 네 형제와 입맞추라(창 33:3-4) 2006.6.4 주일오전 92
10. 가정의 화목(잠 17:1) 2006.6.7 수요예배 109
11. 네 남편에게 복종하라(엡 5:22-24) 2006.6.11 주일오전 120
12.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막 10:6-9) 2006.6.18 주일오전 141
13. 불신가족들이 복음을 듣게 하라(롬 10:13-14) 2006.6.21 수요예배 157
14. 골수에 사무친 소원(롬 9:1-3) 2006.6.25 주일오전 168
1. 최고의 자녀사랑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
I. 들어가는 말
우리들이 태어나서 자녀들이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행복하고 사람답게 존경을 받으며 살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더라도 자녀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존재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공부 못한 부모가 자식들을 그렇게 공부시키려고 하고 또 못생긴 부모가 자기 자식을 성형 수술이라고 시켜서 예쁘게 만들려고 하는 것도 자기의 존재가 못했던 것들을 자식에게서 실현하려고 하는 하나의 자기 욕구의 반로입니다.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소원이 되어서 자식들에게는 그 많은 재산을 물려줘서 편안한 삶을 살게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자녀에 대한 사랑, 그것을 기초로 해서 정말 그 자녀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혜자는 먼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땅히 행할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내 아이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줄 수 있을까? 그래도 밥이라도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인류 대학을 나와야 되겠지? 이 아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아마 공부를 이만큼은 시켜야 될 거야. 등등의 생각을 가지고 자기 아이들을 대하죠. 그런데 오늘 이 지혜자의 관점을 보면 관심 자체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기준이 이 지혜자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관점을 가지고 인생을 볼 수 있어야지만 자녀도 올바로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II. 빗나간 자녀사랑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을 보면, 이 빗나간 자식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오늘날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도 문제이지만 자녀를 향한 사랑이 비뚤어졌기 때문에 불행한 경우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사실 아이들에게 부모가 공경하듯이 그렇게 대해주면서 사실은 이 가정의 관계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공경은 부모를 향하여 드리고 아이들은 자애롭지만 엄격하게 가르쳐야지만 이 아이들이 참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부모에게 올려드리는 공경은 없고,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 아래로 내려오는데 이것이 공정한 사랑이 아니라. 빗나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기억하시지만 60년 70년대에는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습니다. 특히 50년 60년대에는 어쩌면 그렇게 애들이 많은지 우리가 자라면서도 그저 한 집에 네 명씩 있는 것은 보통이었고, 다섯. 심지어는 한 타스씩 되는 집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처갓집도 장모님이 10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다섯이 남았는데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실 부모에게, 오늘 같이 이렇게 하나를 붙들고 발발 떠는 사람은 받아 본적도 없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워낙 애들이 많아서 엄마가 아이 이름을 한번 부르려면 3번쯤 실수를 해야지 제대로 이름이 나오니까. 그렇게 되었으니까. 그런 사랑의 표현을 받기가 어렵죠. 그러니까 큰애 낳고 한 셋째쯤 낳으면 그 큰 애가 동생 업어서 기릅니다. 초등학교 1학년만 되면 등에다 1살짜리 2살짜리 업고 이놈이 업은 것인지 매달려 있는 것이지 그러면서 돌아다니면서 누가 등판에서 생고생을 하면서 자라죠. 자라면서 수시로 사람대접도 별로 못 받고, 이리 꺾이고 저리 꺾이고 그래요. 그러는데도 거기에서 참 효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뭐 제가 장남이라고 꼭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은 그래도 같은 값이면 장남에게 시집을 가면 좀 낫습니다. 낫다는 것이 뭐냐면 유산을 물려받고, 뭐 어쩌고저쩌고, 그래서 나은 것이 아니라. 장남은 많이 꺾어봤어요. 동생에게 양보해보고, 치어도 보고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하는데 인류 역사를 보면 장남이 특출 난데는 거의 없고, 대게 차남들이 잘했데요. 장남은 희생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꺾어져 본적이 있는 사람이 결혼을 해도 잘 꺾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좀 편한 것입니다. 한 꺾여주는 남자 만났는데 다행히 이 여자는 그래도 좀 많이 꺾어져 본적이 있다. 그러면 좀 다행인데 나도 꺾여 본적이 없는 대 쌘 여자다. 그러면 결국은 부러지죠. 뭐 오래 살지도 못하고 부러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자랐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을 한 둘 낳아서 그렇게 해달라는 대도 다 해주다 보니까 한번만 부모가 뜻대로 안 해주면 이것은 뭐 파르르 떨고, 심지어는 부모에게 폭언을 하고 폭행을 하고 뭐 심지어는 부모를 죽이기까지 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자식 사랑이 정말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부모를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자식의 위치를 공정하게 알게 되요. 그러면 자기도 자식으로서 자식에게 그 위치가 어디인지를 올바르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게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아주 잘 해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잘 해주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잘 해주는 것이 빗나간 사랑이 될 때 그 때 이 아이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불행의 씨앗을 가슴에 심어주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눈을 멀게 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일단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공정한 평가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든지 간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장 공정해질 수가 없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죠. 사랑에 빠져 있으니까. 그것이 공정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녀들의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해요. 그렇게 하면 그 아이가 마땅히 행할 일들을 가르쳐주어야 할 필연성 보다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 현실성이 항상 앞서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빗나간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한국하고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중국에서 식당에서 그냥 땀이 나도록 일하는 종업원들 기껏해야 받는 월급 받아봐야 800원 정도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돈으로 한 10만 원정도 받는 것입니다. 좀 좋은데 근무하면 16만 원정도 받습니다. 그런데 한 달에 70만 원짜리 영어 학원 보내는 것이 유행이랍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들이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부모에게 있어서 많은 사랑을 받는데 그 사랑이 이 아이가 앞으로 정말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경쟁해서 뒤지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데 집중적으로 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아이는 결국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인생의 행복을 묻는 그대에게” 시리즈를 하면서 롯도 복권에 당첨되고, 신도시 개발로 떼돈을 벌게 된 사람들이 예외 없이 불행하게 된 것을 말씀드렸죠. 그것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불로소득입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일정한 재물을 얻기 위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면서 고통을 겪고 그것들을 얻을 때에 잘 들으세요.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재물을 얻기 위해서 정정당당하고, 승부하고 고뇌하고 돈의 소중함 그 돈을 위해서 사람들과는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되고, 자신은 어떻게 절제해야 되고 하는 것들을 다 배우면서 돈을 버는 그 과정 자체가 돈 버는 이 사람을 성숙시키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성숙되었을 때 성숙된 것만큼 돈이 들어와야지만 이 돈을 관리해서 이 돈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시에 돈을 버는 것은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뭐 이렇게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고, 고뇌하고, 자기 절제를 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복권 하나 써서 내니까 그다음에 대박하고 뻥 터졌는데 뭘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아직까지도 그만한 돈을 관리할 수 있는 그런 성숙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 돈이 덜컥 주어지는 것입니다. 100%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불행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닥을 기면서 철저하게 고민하고, 죽도 먹어보고, 그러면서 지게 날품팔이를 하고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하면서 돈을 벌어가고, 정정당당하게 돈을 버는 그런 길을 걸어갔다고 보세요. 남하고 똑같이 살아서 돈을 벌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죠. 이 치열한 경쟁사회인데, 뭐가 나아도 나아야 되고 그렇게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말아야 되고,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말아야 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지 승리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잘 다듬어져서 그 돈을 가지고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돈을 차곡차곡 번 사람들은 그 돈을 어떻게 굴릴까를 생각하는데 이런 기반이 없이 돈이 덜컥 생긴 사람들은 그날 밤부터 뭐가 고민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쓸까? 고민입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돈 몇 푼만 들어와도 이것을 쓰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자녀도 마찬가지로 부모가 빗나간 사랑을 자녀들에게 베풀어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하고 고민하고, 이렇게 해서 남보다 낫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는데 특별히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막 아무런 내력도 없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풍성하게 쓸 수 있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해 달라고 하면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다 모든 질서들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아이에게 좋은 것을 갖다 줄 것 같아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형제들도 오늘 저녁에 많이 나온 것 같은데 형제들에게 부탁하는데 부모에게 아주 귀여움을 많이 받으면서 귀하고 귀하게 자란 자매들하고는 결혼하지 마세요. 고달파요. 차라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자매에게 장가를 가세요. 그러면 그대가 한번 치이게 해도 잘 참아요. 안 꺾여요. 부모도 못 꺾었는데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을 보이지 않게 희생해야지 그래서 자녀가 뭐만 원하면 부모가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하는 그것이 바로 빗나간 사랑입니다. 그 자녀를 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자라나는 자녀들이 잘 되기를 우리들이 바라는데 그들을 위해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혹은 유산이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돈이나 가문의 명예나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 남의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것입니다. 그러면 뭐냐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 혹은 선물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소니냐?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돈을 많이 벌면 아주 부유하게 살 수 있겠죠. 큰 집에서 운전기사 두고 밥해주는 사람 두고, 뭐 그러면서 아주 부유하게 살 수 있겠죠. 돈을 못 벌면 그냥 뭐 가난하게 살겠죠. 그리고 뭐 직장 생활 하든지. 그것도 안 되면 조그만 구멍가게라도 하면서 살겠죠. 그러면 사람들이 보기에는 큰 집에서 살면서 그렇게 자가용을 몇 대씩, 기사 두고 식모를 두고 이렇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작은 구멍가게나 하면서 그냥 먹고 사는 것 사이에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삶의 양태입니다.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이 아니라. 삶의 그저 한 양태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인생의 행복이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누리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느냐? 그것은 바로 인생을 사는 지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오늘날의 풍조가 돈이면 뭐든지 되는 것 같지만 이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고, 또 돈을 모으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많을지 모르지만은 그렇게 자신도 돈을 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돈에 의해서 인생전체가 움직여지지 않은 사람 이 세상에 많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상당수가 그런 사람들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돈에 의해서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 많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참된 행복이 뭔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의해서 그렇게 좌우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아까 설명 드린 바와 같이 오히려 많은 물질은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데도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도 합니다. 왜냐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데 이 지혜로운 삶을 가로막는 두 가지 큰 요인이 있는데 하는 욕정에 굴복하는 삶과, 그다음에 또 하나는 거짓된 영상에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욕정에 굴복되는 삶은 자기의 욕망과 욕심을 따라서 거기에 굴복하는 삶이고, 거짓된 영상이라고 하는 것은 참 지혜로 보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그것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처럼 목숨을 거는 것, 이런 것들이 모두 현혹하는 것들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입니다. 현혹하는 것들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매들이 돈 많은 집에 시집간다고 그러다가 결국은 가서 그 조건 하나 갖추어지면 다른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갔는데 나중에 불행해지는 경우 많이 있잖아요. 형제들의 경우에도 뭐 말로는 신앙 좋은 자매랑 결혼해라. 그랬더니 하는 얘기가 신앙이 좋고, 기도 많이 하고, 얼굴이 못생긴 자매하고 결혼해서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얼굴이 예쁘고 차라리 덜 신앙이 좋은 자매랑 약간 갈등을 느끼는 것이 그것이 훨씬 더 멋있지 않느냐. 그러는데 해봐라. 해봐. 그렇게 아내의 얼굴을 보고 예뻐서 감격하는 건 있죠. 6개월 밖에 안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얼굴이 예쁘고 그러면 그렇게 사랑을 느끼고 성적인 욕망을 느끼고 그러는 것도 뉴트리 신이라고 하는 호르몬 작용 때문인데 그것이 보통 사람에게 2년 동안 나온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2년 반입니다. 그다음에는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이 들면 그냥 그렇게 그런 고민 안 하고 그렇게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렇게 고생을 하고 그러잖아요. 이것이 눈에 보이는 거짓된 영상들에 의해서 현혹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런 것들을 최대한 벗겨버리고 밝은 눈빛을 가지고 욕정에 굴복되지 않는 삶을 사는 그것이 정말 행복의 비결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참된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훈이 필요하고 이 교훈을 통해서 우리들이 지혜를 소유하게 됨으로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데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III. 자녀를 위한 최고의 선물: 가르침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 가르침을 물려줄 것이냐?
A. 진리를 알도록
우선 첫 째는 뭐냐면 진리를 알도록 무슨 뜻이냐면 말로 알아듣게 잘 가르쳐야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제자들에게 오늘은 교리반이다. 그러면서 가르치신 적이 별로 없잖아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얘들아 공중에 새가 날지. 저 새들을 한번 보아라. 곡식 쌓아둘 창고가 없이도 잘 먹고 살지 않니? 하나님이 기르신단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거라. 솔로몬의 입은 그 옷의 영화가 이 꽃 하나만 못하였단다. 그러니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가르치셨습니다. 자녀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에 하나, 하나 성경의 진리를 신앙의 교훈들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에만 맡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잘 가르쳐야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사명이고, 임무입니다. 그것은 안 하고 밥만 해서 먹이는 부모는 아이를 양육중인 것이 아니라. 사육중입니다. 그 아이는 필연적으로 짐승처럼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에 모든 자녀가 일생을 살지만 모든 나이 동안에 부모가 가르쳐주면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가끔 보면 나이 많이 먹어서 연로하신 부모님이 주저리, 주저리, 우리에게 잔소리 비슷하게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말씀하신 것 들은 적 있죠? 노인네 되셔서 귀담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마음속으로 한풀 접고 ‘아이고, 노인네 또 시작이구만 예, 예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진지나 드세요. 예, 압니다. 잘할게요.’ 그러죠. 듣기는 뭘 들어요. 시기가 아주 딱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아주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부모가 가르쳐주면 아이가 찰떡 같이 믿어요.
그러나 머리가 점점 크면 그다음에는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잘 받으려고 하지 않아요. 심겨지지가 않아요. 어려서부터 심겨진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데 훈련이 되어있고, 그 가르침의 기쁨을 알기 때문에 부모의 말에 귀를 기울여요. 그런데 꼭 필요한 어린 아이 시기에 그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의사소통, 교육 소통의 통로가 생겨나지 않으면 어느 날 그 아이에게 가르치려고 할 때에 아이들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이 아이들에게 진리를 알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혜를 아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문제가 있죠. 부모가 무엇을 알아야지. 그러니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생각이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부모가 그렇게 생각이 없고, 진리가 무엇이며, 인생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지혜가 어떻게 얻어지는가? 이런 것에 대한 고민이 없이 사는 부모 밑에서 교육을 받는 아이는 이제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뭘 기대해요? 이 아이의 인생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기적,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기적, 그래서 누군가 목회자나, 혹은 신앙의 선배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부모에게 못 받은 것을 받게 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기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자식들도 그렇게 계속해서 흙으로 만드시면 되잖아요. 아이 갖고 싶으면 진흙으로 빚어라. 내가 바람을 넣어주마. 그래서 5명 낳고 싶은 사람은 5개 쭉 만들어 놓고 예쁘게 하고 싶은 사람은 시간을 들여서 예쁘게 만들어서 놓고, 대충 생기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아, 그렇게 해서 후 하고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단번에 큰 애들로 태어나게 하시면 좋잖아요. 아, 그렇게 안 하시잖아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가르침을 주셔서 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났다. 라고 하는 그 자체는 하나님이 인간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은 이 세상에 있는 만물,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은 탁월한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을 주신 것인데 영혼의 기능 중에 최고의 우의를 차지하는 것이 지성입니다. 그 지성을 주신 것을 가지고 사용해서 진리가 무엇이며 인간이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줘야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성경을 몰라서 진리가 뭔지도 몰라요. 인생을 사는데 생각을 하기는 하는데 매일 돈을 어떻게 벌까? 그다음에 어떻게 이 돈을 신나게 쓸까? 이런 것 밖에는 생각하는 것이 없어요. 그러면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것이 없죠. 늘 농사를 짓는 아버지에게 자식이 ‘아빠, 이 씨앗이 뭐야? 어떻게 심어야지 잘 나?’ 그러면 아빠는 잘 가르쳐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아빠가 그런 것 하는 아빠가 아니라. 바다에 나가서 고기 잡는 아빠에요. 아빠, 생선이 이것은 이름이 뭐야? 이런 것을 물어봐야지 아빠가 신나서 대답을 하지 ‘아빠, 이 씨가 비슷한데 이 씨가 무슨 씨야’ 거 알겠습니까. 물고기 알을 갖다놓고 얘기하라. 그러면 알지 모르지만 씨앗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듭니까. 진리를 끊임없이 배우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리에 부합하면서 사는 것일까? 늘 생각을 하면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이 아주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라고 하는 위대한 교부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꼬삐아 디켄디 모드스 비벤디” “꼬비아”는 라틴어로 “많다”입니다. “디켄디” “가르칠 것” 가르칠 것이 많다. 그런데 뭐에 따라서 “모드스비벤디” “모드스”는 “양식이고, 방식” “비벤디” “삶”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가르침, 삶의 방식, 즉 많은 가르침, 풍부한 가르침은 그의 삶의 방식에서 나옵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합니다. 또 진리를 계속 생각하고, 그 진리를 아이에게 잘 가르쳐주고 싶어지면 그 수많은 비유와 예화들이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삶의 상황, 상황마다 그 아이에게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꽃이 이렇게 너무 예쁜데 아이가 그러는 것 입니다. “엄마 이 꽃이 어제랑 틀려 이제는 다 누렇게 되어서 떨어져” “얘야 이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들 있지. 그 때에 많은 사람이 볼 때에 훌륭해 보이는 것은 이 꽃의 아름다움과 같단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잃어버리게 되면 이렇게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모든 것이 일정한 시기가 있단다. 그래서 그 모든 사람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단다. 그래서 꽃은 마르고 시든단다. 그런데 시들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란다.” 수많은 가르침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늘 진리의 말씀을 사모해야합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와서 설교만 정신 차려서 듣는 것이 아니라.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말아야합니다. 자녀들이 볼 때에 그래서 성경책이 엄마 아빠의 손에 늘 들려있고, 그리고 인생을 지혜롭게 하는 경건 서적들이 늘 들려 있어서 그래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그다음에 기뻐하고, 그것을 아빠와 나누고, 자기들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하는 그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지혜를 습득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릎에 놓고 기독교의 교리를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어머니의 무릎이 최고의 교리학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무릎에 앉혀놓고 동화를 들려줄 때 집중하는 모습을 여러분 기억나죠. 그 때가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단다.” “아, 그랬구나. 엄마 저것 하나님이 만드셨지, 엄마, 이것도 하나님이 만드셨지. 엄마도 하나님이 만드셨어.” 그렇게 아이들이 배워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잘 가르쳐야합니다. 이것 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부모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것 안 한다. 삯꾼 부모입니다. 삯꾼입니다. 목자만 삯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삯꾼입니다. 그러면 삯꾼이 뭐 얻는 것이 뭐 있습니까? 얻는 것이 없지만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르는 것입니다. 애완동물 기르듯이 그러면 그 아이는 인생이 얼마나 불행해지겠습니까. 그래서 첫 번째는 진리를 알도록 가르친다.
B. 모본을 보도록
두 번째는 뭐냐면 모본을 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입니다. 어린 아이들이었을 때에는 부모 자신이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하는 그대로 본받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우리 아들이 한 몇 살 때쯤 되었을까. 86년생이니까 한 6살 7살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한 동안 가정 예배를 드리는데 그렇게 눈물을 많이 주셨어요. 그래서 울면서 가정 예배를 드렸는데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면서 시작하자. 그러면서 기도를 하는데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하늘로 받치고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거기에다 얼굴을 묻은 다음에 그것이 꼭 제 폼이거든요. 그렇게 해 놓고는 우는 소리는 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놀라워요. 본 그래도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주석을 쓰신 박윤선 목사님이 주석을 쓰시다가 도저히 성경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괴로울 때면 그 사택 마루가 있는데 거기에 작은 골방이 있었대요. 거기에 가셔서 그렇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주님 몰라서 왔습니다 .저를 좀 가르쳐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주석을 쓰셨어요. 아들이 그것을 보고 배워서 수시로 그 방에 들어가서 자기도 무릎을 꿇고 주님 몰라서 왔습니다. 뭘 몰라서 왔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냥 몰라서 왔습니다.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세계입니다. 그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정말 놀라워요.
오늘 제가 텔레비젼 방송국에 출연을 하고 왔습니다. 화장까지 하고 출연을 했는데 텔레비전 방송국에 가면 그것이 제일 싫어요. 뭐 끈적끈적 하는 것을 바르고, 그런 것 안 발라도 꽤 괜찮은데 자꾸 발라서 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계신 토크쇼를 진행하시는 분이 장로님이셨는데 저의 책에 아주 열렬한 독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깨어짐 쉽다고, 굉장히 쉽다고 해서 위로를 많이 받았는데 그러면서 자기가 굉장히 은혜를 받는데 거의 다 읽었데요. 교회에 가면 자기가 교인들을 가르치신데요. 장로님이시니까. 무슨 뭐 성경 공부를 가르치잖아요. 그러면 그런데요. 주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기도를 하더라도 깊이 은혜를 좀 받아도 좀 깊이. 그러니까 교인들이 그 모습이 저하고 너무 똑같다고 많이 놀린대요. 그분을 나는 처음 뵈었거든요. 책만 읽어도 그렇게 본받는데 같이 사는데 오죽 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첫 사람을 흙으로 빚었는데 그 다음부터 그 자손을 흙으로 빚지 않고 뱃속에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은 뭐냐면 눈을 뜨면서 제일먼저 산과, 들과, 물과, 불, 인류의 역사와 성공야망, 이런 것이 안 보이고 엄마 아빠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 모습 속에서 참으로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에게 있어서 최고의 축복은 뭐냐면 진짜 인간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 우리는 곰 새끼입니까? 그러는데 그 뜻이 아니라. 참으로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부모, 참으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부모.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을 고민하면서 거기에 가까이.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쓰는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이 그 아이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다음 주일 설교할 것을 준비를 일부 했고, 지금도 준비를 하고 있거든요. 그 설교를 준비를 하면서 교회 마당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냥 가상적으로 내가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무엇이 소원일까? 그림 같이 예쁜 자매를 한번 만나서 결혼을 해볼까?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잖아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뭘까? 나는 지금도 공부를 많이 못하지만 내가 그렇게 욕심이 많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되는 것일까? 그것도 마음이 끌리기는 하지만 정답이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뭘까? 그러면서 저의 어린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쭉 스쳐지나갔어요. 그러면서 뭐냐면 내가 정말 본받고 싶은 부모님, 그리고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고 싶다. 부모님들이 참된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에게 가슴속에 새겨준 인간에 대한 잘못된 그림들을 주님 만나고 지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던가. 생각이 떠올랐어요. 결국은 신앙으로 승리했지만 그 승리하기까지의 그 과정이 얼마나 많이 아픈 과정이었는가.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그럴 리는 없지만 제가 만약에 다시 태어나면 내가 정말 우리 아빠처럼 된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우리 엄마처럼 되는 것 이외에는 내 인생의 목표가 없을 것 같은 그런 엄마 밑에 태어나서 그래서 내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이 사랑의 그림자가 되는 그 사랑을 부모로부터 흠뻑 받으면서 진짜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그런 희생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리고는 금방 제 자신에게 적용이 되었어요. 나는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 정말 우리 아이들 가슴 속에 내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그 부모의 모습으로 내가 남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뭐냐면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는 많은 가르침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면 얼마나 훌륭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그것을 우리들이 본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되거든요. 모본으로서 보여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듣는 것 보다는 직접적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말로 가르치는 가르침은 가르쳐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을 때만 가르쳐지는 것이지만 이 모본으로서의 가르침은 내가 가르치고 싶을 때에도 가르치고 있는 중이고, 가르치고 싶지 않은 중에도 가르쳐지고 있는 중입니다. 솔직하게 여러분들도 아, 우리 자식이 이것만은 본받지 말았으면 하는 것 여러분들에게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하게 그것을 골라서 본받죠. 그렇죠. 그래서 결국은 뭐냐면 아이들로 하여금 모본을 보도록 가르쳐야합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하도록 그렇게 가르쳐야 됩니다.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가르치면서 한 걸음, 한걸음 걸어가야 합니다. 방법이 무엇일까요? 아이들 앞에서 산다고 해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C. 사랑을 받도록
세 번째는 사랑을 받도록 그래서 아이들을 깊이 사랑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깊이 사랑하는 것. 그래서 충분히 사랑을 받도록 어린 아이일 때 아이들을 많이 안아주세요. 그리고 많이 쓰다듬어 주고, 자기 때문에 엄마가 아빠가 행복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큼 그 아이에게 자기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아이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교수님 한 분이 계셨는데 젊어서 공부를 해야 되니까. 늘 혼자 지내게 되잖아요. 유학 간다고 또 혼자 지내. 또 공부한다고 혼자지내. 아이들이 일생을 살면서 매일 일평생 내내 엄마 아빠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다 시기가 있습니다. 얼마 안 됩니다. 얼마 안 되는 그 시기인데 그 때에 엄마 아빠가 아이들을 따뜻하게 사랑해주지 않으면 결국은 그 아이들이 부모와 무한한 벽을 느낍니다.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면 “네 부모를 용서하라” 는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자식들을 그렇게 만들어요. 가까워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엄마 아빠에게 자신의 문제를 많이 털어놔요.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도 비밀이 많은 애들인데 절대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삶이 공유가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민거리들이 공유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골이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결국은 그 골을 매우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수님은 그래요. 이제는 공부도 다 했고, 나이가 먹어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좀 하고, 여행도 가고 싶은데 안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층에 앉아서 신문이라도 보고 있으면 애들이 이층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은 적적해요. 그래서 이층으로 올라가면 아이들이 일층으로 슬며시 내려가요. 그래 결국은 젊은 시절에 뿌린 씨앗을 나중에 나이 들어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빨리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뭐 초등학교 때 뿌린 씨앗을 불과 6-7년 사이에 7-8년 사이에 거두어요. 그러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어려서부터 아주 사랑해줘야 합니다. 아이에게 기대를 갖는 것은 좋은데 아이에게 실망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해 전에 벌써 몇 년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크게 깨닫게 하시더라고요. 아이를 낳아서 시키는데 아니 얘가 정말 얼굴도 예쁘고, 어렸을 때 정말 예뻤습니다. 학교에 데려가면 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예쁘다고, 그랬죠. 그다음에 뭐 공부도 잘하지 초등학교 4-5학년 다닐 때까지 거의 백점만 맞고 다녔으니까 나는 천재가 태어난 줄 알았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내 눈에 안 차기 시작했어요. 그 때에 그 갈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부간에 다툼도 아이 때문에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하고 점점 골이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깊이 실망이 되었습니다. 아니 왜 그럴까. 그러더니 언젠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게 하셨어요. 그 깨달음이 뭐냐면 나도 네 아버지고 너도 네 자식에 대해서 애비인데 내가 너에게 아버지 되는 것과 네가 네 자식에게 애비 되는 것 사이에 비슷한 점이 있느냐? 없습니다. 깨달은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나도 아들이었구나. 우리 부모는 신앙이 없었으니까 그 모본을 못 보았지만 하나님에게서는 내다 아들이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셨을까?” 한 번도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공부할 때나 기도할 때나 야, 나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치 나를 산에 심어놓은 나무를 가꾸듯이 그렇게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에 크게 기쁘지 않으신대도 내다 해보겠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셨어요. 나중에 펑펑 울고 슬피 울면서 돌아오면 그때야 주님이 말씀하셔요. “그것 봐라. 그것 길이 아니지. 왜 그랬어. 괜찮다. 다시 시작해라.” 그러면서 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었구나. 내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그 틀을 가지고 그냥 아이에게 우겨넣고 그대로 안 움직여. 그러면서 이 속에서 분노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정리정돈을 안 하는 거야. 저는 그렇게 산 적이 없거든요.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하고 살아요. 완전히 돼지우리 같이 양말은 벗어서 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연필은 침대 밑에 굴러다니고, 먹던 음식찌꺼기는 뭐 바닥에서 뒹굴고, 아, 어떻게 이렇게 살까. 우리 아들을 3번을 때렸는데 2번이 그것 때문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깨닫게 하시고 나서 내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아주 근본적인 질문에 있어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냐? 아니었습니다. 아이와의 관계가 깨뜨려질 정도로 중요한건 아니었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때 제가 참 이제야 말이지만 많이 울었습니다. 아, 내가 사랑이 아니었구나. 사랑한다면 이럴 수가 없구나. 그러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생각했죠. 어쩌면 이 아이가 받았을 상처가 내가 우리 아빠에게 받은 상처보다 훨씬 컷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제사 후회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 이것은 아니다. 그다음부터 저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아무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방이 지저분하면 그것도 취미인데 살게 두는 거죠 뭐 무슨 뭐 그렇게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책을 읽어보니까 정리정돈이 철저한 사람들이 창의성이 없데요. 이렇게 보면서 아이고 오늘도 창의성이 충만하구나. 참 어떻게 꼬랑내 나는 양말 두 짝이 책상위에 올라갈 생각을 하냐. 이것은 누구도 창의적이 아니면 이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팬티는 문지방에 그리고 러닝셔츠는 저 구석 쓰레기통 옆에 그렇게 처박힐 수 있을까? 얼마나 창의적입니까. 옷이 반듯이 옷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가 안돼요. 처음에는 가서 몇 번 치워줬는데 그러면 그것도 애한테 스트레스일 것 같아요. 그래서 내버려 뒀어요. 지금도 그냥 살아요. 오늘도 몸만 쏙 빠져나간 옷이 침대 밑에 굴렀더라고요. 그것 보기가 하나도 나쁘지 않아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죠. 중요한 것은 뭐냐면 관계입니다. 네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정리정돈을 잘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글씨를 예쁘게 써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너는 너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한다. 그렇게 마음을 바꿔 주시더라고요.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들을 맡겨주셨어요. 우리가 만약에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신앙을 자녀들에게도 물려주어야 되고 우리가 못 섬긴 하나님을 자녀를 통해서 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는 나기고 가는 재산이나. 여러분들이 죽었을 때에 장례식장에 날아오는 그럴 사한 직함이 박힌 수많은 꽃다발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인생이 평가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누구인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땅히 행할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서 인간답게 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크신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베풀며 사는 그런 사람, 그런 자녀들을 남겨놓으면 여러분들이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살았어도 훌륭한 일을 한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아주 훌륭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일생에 4번의 만남이 중요합니다. 한번은 부모, 좋은 부모, 좋은 목회자, 좋은 배우자, 좋은 수승. 이것에 의해서 아이의 일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세요. 아이가 좀 마음에 안 들어도 그것을 싸워서 꺾으려고 하지 말고 나무 기르는 마음으로 물을 주세요. 사랑 주세요. 그래서 오늘 집에 들어가서 한 번씩 자녀들을 깊이 안아주세요. 꼭 안아주세요.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거든요. 공부 잘해서 받는 사랑, 뭐 착한 일 해서 받는 사랑,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이 없는 사랑, 언제나 우리가 미끄러졌다가도 돌아가면 하나님이 언제나 거기 계시잖아요. 그렇게 아이를 사랑하세요. 깊이 사랑하세요. 그런데 이 아이가 그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진리를 알게, 또 모본을 보게. 사랑을 받게. 이렇게 되어 가는데 이 아이가 나무와 같이 뿌리를 곧게 내려서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면서 또한 똑같이 자기의 자녀들을 그렇게 가르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부모가 되어서 효도를 받는데 자식의 마음에 부모에게 효도할 마음이 전혀 없어요. 교회에 갔더니 어버이 주일날 목사님이 쥐 잡듯 잡아요. 부모 공경 안하면 인간도 아니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우거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찾아가서 봉투라도 몇 개 내밀면서 그렇게 효도를 해요. 그까짓 효도 받으면 뭐하겠습니까. 진짜 효도를 받으려면 부모를 정말 사랑해서 그래서 효도해야 되잖아요. 그러면 그 사랑 위에 존경할 수 있는 부모들이 되어야합니다. 사랑은 메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세요. 그리고 조건 없이 사랑하세요. 여러분의 아이들이 어떤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얘야 네가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어도 너를 향한 내 사랑을 막을 수는 없지. 괜찮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구김 없이 커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 네 부모와 화해하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5:16)
I. 본문의 배경
오늘 성경은 유명한 십계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지침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열개의 계명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출애굽기에 한번 등장하고 신명기에 또 한번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두 번 십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신명기의 십계명은 출애굽기 십계명의 반복입니다. 아시다시피 신명기는 모세가 죽을 날을 앞두고 유언하는 것처럼 설교한 내용이 신명기입니다. 거기에서 다시 십계명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은 매우 중요한 계명을 수여하는 정신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출애굽기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창조된 인간들인 너희는 하나님의 이 열 가지 계명을 지키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그 열 가지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너희를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 구속의 은혜 때문에 너희들이 십계명에 순종해야지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넓게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우리가 그분의 손으로 창조된 인간이기 때문에 순종해야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놓으셨기 때문에 그 구원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라도 우리들이 지켜야 하는 이 계명이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가고 새로운 시대가 왔는데 그 구닥다리 같은 십계명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한 예화를 들었습니다. 망망한 바다 위에 배를 타고 항해를 하면서 종에게 주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여기 누워서 잘 테니 너는 저 북두칠성을 보면서 계속 배를 저어 가라, 그러면 아마 우리가 가려고 하는 항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저어도 항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자 주인이 부스스 일어나서 종에게 말했습니다. 애야, 왜 이렇게 머냐.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았냐. 너는 지금 북두칠성 방향으로 가고 있지? 그랬더니 이 종이 하는 말이 주인어른 북두칠성을 벌써 지나쳤는가, 봅니다. 안 보입니다.
하늘에 빛나는 별이 항상 거기에 있는 것처럼 이 십계명도 또한 그러하니 오늘날 우리들이 이 계명에 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1부와 2부로 이루어져있는데 1부에서 1- 4번째 이르는 이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대신 계명이고 5- 10번째까지는 인간을 향한 대인의 계명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계명이 1부의 계명이 새로 막대라면 2부의 계명은 가로막대가 되고 이 두개가 합쳐져서 십자가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와 나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그 인간을 향한 첫 번째 계명 중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두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II. 부모를 공경하라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가정의 기본단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부부관계입니다. 만물의 모든 이치가 그러합니다. 짝짓기를 통해서 자신의 후손들의 개체들을 생산해내고 인간 또한 부부의 결합을 통해서 자손들을 생산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대인 계명의 첫 번째에 부모 사랑을 가르쳐주시지 않으시고 부모공경을 가르쳐주셨다는 점에서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계명을 처음 받은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경하라는 이 히브리단어는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할 때 쓰여진 그 단어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공경하듯이 또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이 명령 때문에 우리들은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기본적인 단위가 부부관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부모 공경을 말씀하신 것은 창조섭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짐승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들의 본성 속에는 인간 안에 있는 고도의 사랑이나 자기를 닮은 종족들의 개체에 대한 그러한 배려와 보호들이 본능처럼 담겨있고 인간에게도 어느 정도 그런 것들이 담겨있게 마련입니다.
지금에야 온돌에다 불을 때서 그렇게 수많은 닭들이 병아리를 부화시키지만 예전에는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었습니다. 알을 품었습니다. 달걀을 낳으면 그 어미닭이 품고 그리고 알을 까게 됩니다. 23일 정도 걸리게 되는데 이때에 닭은 그 둥지를 떠나지 아니하고 그 계란들을 품고 그리고 그 계란을 부화할 때까지 보호합니다. 잠깐 물먹을 때와 모이를 주어먹을 때만 제외하고는 재빨리 다시 둥지로 돌아가서 알들이 식지 않게끔 따뜻한 날개 아래 품는데 그냥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그 날개로 이 계란을 굴려서 골고루 온 계란이 따뜻하게 어미 품의 열을 받으면서 이 계란이 거기에서 병아리가 되어서 깨어나도록 그렇게 품는 것입니다.
그 긴 시간이 지나도록 어미 닭은 배짝 말라서 뼈만 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계란에서 병아리가 깨어 나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이 자식을 향한 어미 닭의 보호본능은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어디에 가다가 먹을 것을 발견하게 되면 자기가 먹기 전에 먼저 목소리를 높여서 병아리를 부릅니다. 그리고 발로 땅을 파헤쳐서 병아리들에게 먹을 것을 찾아줍니다. 솔개라도 뜨게 되면 병아리를 비명을 지르듯이 모두 날개 아래 불러 모아서 그들을 감추고 그리고 자기는 소리소리 지르며 그 솔개에게 대항할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동물들의 세계 속에 남아 있는 종족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 사랑을 닮은 보호본능이 내리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가시고기는 그런 종족의 희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피조물입니다. 알을 까고 나면 그 알이 부화할 때까지 이 가시고기 아버지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한편으로는 다른 물고기들이 알을 먹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물을 공급함으로서 산소가 부족해서 알이 부패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줍니다. 결국은 그 알들에서 작은 새끼들이 깨어나게 되면 아직까지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아비가 보호해주고 새로운 물과 플랑크톤을 공급해서 그들로 자라게 해줍니다. 거기에서 그 새끼들이 넓은 물속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가운데 쉼 없이 새 물을 공급해주기 위해서 지느러미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치열하게 물질을 합니다, 결국은 그 사이에 플랑크톤을 넣고 새끼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갑니다. 그러고 나서 결국은 잠시 후에 너덜너덜한 몸으로 죽어가게 되고 자식들은 그 아비가 보호해주던 자리에서 넓은 물속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또 아비의 죽어가는 시체를 뜯어먹어가면서 그렇게 육신을 부풀린 후에 충분히 성장한 가운데 물속으로 나와 가시고기로서의 일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물의 모든 이치들이 이렇게 내리사랑으로 이어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본능들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십계명 속에서 자식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기 이전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먼저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리사랑은 훈련이 별로 필요가 없는데 올리 사랑은 반드시 도덕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과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왜 이런 것들이 창조 보존의 원칙이 되는가? 잘 들으십시오. 만약에 인간이 동물이라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기의 자손들을 위해서 동물적인 본성으로 자식들을 보호하고 길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는 없는 도덕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즉 잘 자라고 죽지 않고 건강하게 되면 그것이 부모로서 자식을 길러야 할 책임을 완수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사람이 되게끔 길러내는데 그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사랑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양육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선과 악을 배우고 인간의 도리를 배우고 용기와 절제와 열정과 그리고 명철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식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해서는 올리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끊임없이 꺾으면서 부모를 깊이 공경하는 과정을 통해서 참으로 자식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떤 사랑이 필요한지를 그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식을 인간의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게 할 수 있는 참다운 인간 교육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동시에 부모님을 공경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참으로 공경의 대상은 하나님 한분이시고 하나님 안에서 그 밖에 또 공경해야 할 대상은 부모 밖에 없습니다. 부모를 깊이 공경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참으로 자식을 사람으로 기를 수 있는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저는 목자와 양, 요한복음 10장을 설교하면서 삭군 목자가 되는 것이 의도된 것이 아닐 경우가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똑같이 삭군 부모가 되는 것이 의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결국에 가서는 자식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삭군 같은 부모로 일생을 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공경을 통해서 인생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대인에 이웃을 향한 첫 번째 계명으로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부모가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고 좋은 신앙을 가진 본받고 싶은 부모였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이기심만 버리면 부모를 공경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 행복한 사람은 존경하는 부모님을 둔 사람입니다. 그분이 살아있던 죽어있던지 간에 존경하는 부모님을 둔 사람들은 이미 인생에 있어서 반은 다른 사람보다 성공하는 자리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는 자식들을 만납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 같은 여성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매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고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거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남보다 더 많이 불꽃처럼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A. 용서를 통한 화해
하나님을 깊이 경외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너무 훌륭하고 나의 가슴속에 말할 수 없이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준 아버지,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때 밤낮으로 애쓰던 어머니, 눈을 감고 생각하면 어린시절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던 그 어머니의 모습이 여러분들의 가슴에 눈물처럼 다가온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기심만 버리고 나면 부모님을 깊이 공경할 수 있습니다. 일생을 나를 위해 다 바치신 우리 아버지, 일생 자신의 행복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지금도 눈에 눈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생 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일을 보도하는 성경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 나의 성공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시는 아버지라면 공경할 만 합니다. 그리고 정말 여러분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신발을 삼아서라도 부모님을 정말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부모님을 둔 사람이 많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언젠가 앙케이트 조사를 했더니 20대 젊은이 80%가량의 사람이 부모님이 밉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60% 가까운 자식들이 다시 태어나면 우리 엄마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그랬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면 말이야 옳지만 공경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현실적으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경보다도 먼저 필요한 것은 그 부모님을 깊이 용서하고 그리고 자신의 상처받은 과거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공경하는 행동은 했는데 마음은 자신에게 바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증한 행위에 대해서 탄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뭘 보여주는가 하면 우리의 진정한 효도가 그 부모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지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무릎을 꿇는 것이 효도의 첫걸음입니다. 주위에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지만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 없이 부모님께 해드리는 자식들이 있는데 이것은 공경이 아니라 적선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를 깊이 공경하기 전에 먼저 필요한 것이 상처받은 지난날의 과거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분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하지만 오해일 가능성도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인생의 진리는 지성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지성이 제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일정한 나이가 들기 전에는 깨달을 수 없는 진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신은 재수 없어 그런 부모를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나이가 들고 시집장가를 가서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 때문에 긴 밤을 새우며 눈물 흘리며 아파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어머니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양주동 선생님의 시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어려서는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서는 문에 서서 기다리는 마음 알을 싸 그릇될 싸 마음 졸이며 고웁던 어머니의 이마에는 주름이 가득” 그것을 많은 자식들은 자기가 부모가 되어서 눈물을 흘려보기 전까지는 어머니의 그 사랑, 아버지의 그 사랑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부모가 여러분들을 정말 사랑해준 것은 기억이 안 남고 아픔을 준 것만 불공평하게 기억에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화해해야지 됩니다. 또 하나는 백번 양보해서 정말로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정숙한 어머니 밑에서 근면하고 성실하고 자애로운 아버지 밑에서 그렇게 훌륭한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주름이 없는 어린시절을 보내며 자랐더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어쩌면 여러분들이 내일 어버이날을 맞아서 마음속에 상상하고 있는 어머니, 마음속에 떠올리게 되는 그 어머님은 나실 때 괴로운 다 잊으시고 기를 때 밤낮으로 애쓰시지 않은 어머님일 수도 있습니다. 소싯적에 여러분이 어렸을 때 가정을 팽개치고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가버린 제비부인일 수도 있습니다. 자애롭고 인자한 아버지 대신에 매일 폭언을 일삼고 음주와 도벽으로 일삼고 자식인 여러분들을 폭력으로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말합니다. 이제는 그만 하십시오. 그래서 그긴 세월을 부모님에 대한 어두운 기억 때문에 외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사랑과 그리움의 명사가 아니라 사랑하고 또 그리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직면하고 싶지 않은 명사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왜 없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명령입니다. 하려고 하는데 안 됩니다. 그래서 공경보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깊이 깨트리는 마음입니다.
제가 21살 때 회심하고 한 5년 동안도 우리 아버님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아버님이 매우 나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20년이 지나면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한번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것 자체가 저에게는 상처였고 젊은 시절 아버님은 자기의 사업에 정신이 빠지셔서 가족과는 아랑곳없이 그렇게 자기의 꿈을 따라서 사셨습니다. 그리고는 여러분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많은 상처들이 나의 발목을 움켜잡고 있었습니다. 회심하고 나서 5년 째 되던 날 어느 날 특별한 일이 있어서 집 근처에 있는 교회당에 나아가 낮 시간에 직장을 다닐 때였는데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햇살이 밝게 드는 어느 날 교회 마루바닥에 앉아서 기도하는데 옛날의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하셨을까? 나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그리고 아파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야, 네 부모는 너를 아프게 하지만 그러나 나는 너에게 부모가 못해준 사랑을 더 많이 주지 않았니. 그러면서 저는 그 마루바닥에 엎드려서 울면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어머니같이 아버지같이 일생을 사랑을 베푸시면서 이제껏 까지 인도해주셨는데 나는 여태까지 내 마음에서 우리 아버지를 풀어주지 못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 날을 계기로 깊이 회개하고 아버지를 사랑하기 위해서 애썼고 그 결국 저는 승리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슴에 깊이 밀려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우리 아버지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나는 이 나이에 주님을 알아서 이제 빛 가운데 살게 되었고 고통이 와도 아버지께 아뢰고 이 세상에서 외로울 때도 그리스도 예수의 가슴을 파고드는 주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이런 아버지 없이 우리 아버지의 일생은 얼마나 아프고 외로우셨을까? 라는 생각이 밀려들었습니다.
저의 할아버님은 47살에 돌아가셨고 그때 제 나이 7살이었고 그리고 그때 우리 아버님은 30살이었습니다. 17살에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으셨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되돌아보면 그 아버지도 그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으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를 그렇게 사랑하실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모든 추억들이 꼬리를 물면서 나 중심의 생각이 깨어지기 시작하면서 아버님에 대한 연민이 그렇게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든 생애를 사셨을까? 만약에 우리의 부모님들이 우리처럼 젊어서 주님을 영접하고 좋은 교회를 만나고 사랑하는 목회자를 만나서 가정의 도리가 무엇이고 인간의 본분이 무엇이며 성화의 길을 걸었더라면 우리보다도 더 훌륭한 부모가 되셨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알 수 없는 섭리 가운데 그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감추어졌고 우리에게는 비추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그분들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야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많이 기억하지만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은 잊어버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제 마음에 밀려들어오게 될 때 그때 가슴을 에우는 시편의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느니라.” 오히려 우리가 만약에 상처가 없는 평안한 삶을 살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을 못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믿은 모든 사람 가운데 혼자 넉넉히 살아가던 사람들을 주님이 만나신 적은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우리는 이 세상에 모두 슬픈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에 배신당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돼지우리 같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가정이 너무 행복하고 부족한 것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상처와 아픔이 있는 가정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아픔을 통해서 이 세상의 허무함을 알았고 그래서 세상과 함께 끝날 사람의 사랑보다는 영원히 계속될 아버지의 사랑을 찾아온 것이 아닐까요? 그랬다면 우리의 상처는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부모를 깊이 공경해야 합니다.
오늘 새벽이 눈뜨자마자 돌아가신 아버님의 생각이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생각도 밀려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자식새끼들은 부모가 무엇도 안 해주고 무엇도 안 해주고 그리고 부모가 이렇게 괴롭히고 저렇게 괴롭힌다고 앙탈을 부리지만 그러나 사실은 부모님에게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살아계신 것입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깨달을 수는 있었지만 느낄 수 없는 진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새벽에 생각했습니다. 할머니 그리고 우리 아버님, 천국이 너무 좋은 곳이지만 일주일만 휴가로 오신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조선시대에 어느 선비가 지은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단중 주홍감이 고와도 보이나이다. 그 감이 고와보이나 가슴에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내가 그를 서러워하노라” 하는 시입니다. 중국에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시로 옮긴 것인데 효성스러운 효자가 있었는데 남의 집에 마실을 갔더니 먹으라고 내놓은 좋은 감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그것을 가슴에 몰래 감추어서 늙으신 어머님을 공경한 고사입니다. 이 조선시대의 선비가 어느 정도의 지체가 있는 사람이었는지 모르지만 남의 집에 갔더니 잘 읽은 고운 감을 쟁반에 받쳐서 주인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얼른 가지고 가서 품고 어머니에게 가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어머니가 이미 가시고 없다고 했습니다.
어버이날이 가까이 다가와서 제가 우리 집사람보고 그랬습니다. 여보, 이제 다다음주가 어버이 주일인데 미리미리 형제들에게 연락해서 어머님 아버님 모시고 우리 식사나 한번 합시다. 그랬더니 저희 집사람이 아버님이 어디에 계셔, 아! 그렇구나. 가셨구나. 자식이 철이 들기 전에는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많지만 자식이 철이 들게 되면 부모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날들이 바람같이 속히 지나갑니다. 그래서 공경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고 부모님의 연로하신 나이는 지는 해 비낀 볕입니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이 때에 우리들이 진심으로 부모를 용서하고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깊이 화해하고 그래서 마음으로 그 부모를 깊이 사랑해서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깊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동안만 화해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B. 약속 있는 계명
이 계명은 약속이 있는 첫 번째 계명입니다. 앞의 네 계명, 대신 계명은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안 하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이 계명에 첫 번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는 계명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네가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천국에서 복락을 얻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고 이 땅에서라는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이 땅에서 장수하고 그리고 잘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라. 그러면 이 땅에서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그것은 의무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부모공경은 약속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사업을 해도 되는 일이 없고 뭘 해도 가정에 행복이 없고 수시로 건강을 잃어버려서 곤고한 세월을 지내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를 깊이 성찰하십시오. 그리고 부모 공경의 원래의 도리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깊이 사랑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부모님이 아직 신앙으로 돌아오시지 않았기 때문에 공경하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정신병자입니다. 어머니는 신자이기 전에 어머님이십니다. 이번에 제가 미국에 갔어도 은혜 받은 지체들에게 효도하라고 장시간 충고하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의 어머니가 불신자이시면 불신자의 방법대로 효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어머니가 아직 변화되지 않으신 분이라면 변화되지 않은 대로 효도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어머니가 은혜를 많이 받은 부모님이라면 여러분들이 너무 효도하기가 편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변화되지 않아서 세속적이면 세속적인 방법으로 효도하라고 가르치고 왔습니다.
내 어머니가 변화되지 않아서 쇼핑을 좋아하시면 모시고 가서 물건을 사드리고 너희 아버지가 아직 변화되지 않으셔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시면 노래방 모시고 가서 효도해라. 거룩한 척 하지 말고 그렇게 해서 먼저 그 부모님께 깊이 이제 이 나이가 들어서 부모님을 고치려고 무모하게 시도하지 말고 그를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흘러가게 놔두고 부모님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드리십시오. 아직 술을 좋아하셔도 저 아버지 사랑합니다. 술 마시려면 술집에 가셔서 마시지 마시고 우리 집에 오셔서 마시십시오. 어머니가 그렇게 유행가 좋아하면 복음성가 테입만 갖다드리지 말고 유행가 판도 사다드리십시오. 함께 모시고 가수들 공연에도 가보십시오. 마음이 움직여야지만 여러분이 믿는 예수를 믿을 것입니다. 깊이 사랑하십시오. 심지어 여러분들의 어머니 아버지라가 이교도라고 할지라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들이 그 가르침에만 안 빠지면 됩니다. 그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III. 상처를 통한 은혜
그런데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하면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깊이 사랑하십시오. 그 영혼을 위해 울어주고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주고 사랑하고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 들으십시오. 그렇게 부모님의 부족하고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않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 바쳐서 그 부모를 사랑할 때 자신의 마음 안에 하나님이 아니고 누가 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신앙을 보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상처를 통한 은혜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우리들이 정말 분별이 없는 부모님, 신앙이 없고 돈밖에 모르는 부모님, 그리고 음주와 폭력을 일삼는 폭압적인 부모님 아래서 고통을 받으면서 우리가 어린시절을 상처 속에서 지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이 고통 때문에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회심하고 나서 저는 한참동안 하나님 앞에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집에서도 신앙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신학교 갈 때는 호적을 파가라고 까지 아버님이 그러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는 이제 아버지밖에는 내 아버지가 없습니다. 나의 육신은 나의 부모를 빌어 태어났지만 나의 마음에는 하나님 밖에 내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아버지로서만 나를 사랑해주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세심하게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치고 힘겨운 날에는 하나님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곤고하고 두려운 날에는 세상에서 도망쳐서 엄마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을 파고들면서 울었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러면서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고, 외로움도 이기면서 이제는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부모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처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상처를 겪은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 상처를 대하기만 하면 이 세상에 우리를 악하게 만들 많은 고통들은 변하여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기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조개껍질을 깨고 나면 햇빛에 찬란히 빛나는 진주라는 보석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비유하자면 작은 불순물들이 조개의 살을 찢고 들어가니까 그 고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그 상처를 향해 호르몬 같은 체액이 분비되어서 오랜 세월 흐르며 조개가 바짝 마르고 마지막에 진주가 되어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춥고 어두운 시절을 보내게 하신 것은 우리를 보석처럼 만드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이 하셨을 수 있습니다.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형들이 그렇게 자기를 미워하고 헤하여 했으나 결국은 그것을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 조상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은 받았지만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로 인해서 야곱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한 나라를 세웠을 때 그를 지지하는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상처받은 자, 병든 자, 찢긴 자, 원통한 자, 가난한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서 다윗을 임금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 상처 없이 살았더라면 인생 막장에 가있는 그 아픈 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A. 상처보다 큰 사랑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려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시지 않고 상처를 주십니다. 섭리 가운데 하나님이 상처의 장본인은 아니시지만 고통과 연단의 시기들을 거치게 하면서 그렇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눈물을 흘려주셨던 사람들, 그 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찾아와주시던 사람, 병들고 빚지고 원통하고 억울하고 고통 받는 사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깊이 끌어안고 예수의 형상 본받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시절을 살아와서 그런지 몰라도 부모님께 불효하는 자식들을 보면 분노의 마음이 먼저 생기지 않고 연민하는 마음부터 생깁니다. 얼마나 아픈 시절을 보냈으면 저렇게 불효하면서 살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상처보다 더 큰 사랑을 하나님께 체험하는 비결입니다.
B. 은혜의 계획
우리 모두에게는 꿈꾸고 그리워하는 가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 가정의 모습이 우리 대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에게는 그 꿈이 이루어져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리 사랑이 필요한데 그 내리 사랑이 그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올리 사랑이 가능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깊이 깨트려져서 우리의 육신의 부모와 깊이 화해하여야 합니다. 상처를 주목해서는 용서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아직 알지 못했을지 모르는 그 부모님의 그 깊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깊이 끌어안고 그래서 아직까지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 정말 우리들이 꿈에도 그리던 사랑의 관계, 부모님이 우리 때문에 행복해하고 우리는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이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깊이 끌어안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그 사랑이 바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에는 그 은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은혜의 계획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소명과 직결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나아와서 많은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리고 영혼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회개하는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감미로운 사랑의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마치 변화산에 있는 것처럼 행복하지 않았습니까?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일평생을 상처 속에서 살아오면서 돌보는 이가 없는 나그네와 같은 나에게 벗이 되어주신 하나님, 그리스도의 그 피 사랑으로 나를 깊이 어루만지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자비를 생각해보십시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밀려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 중에 괴수인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려주셔서 그래서 나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을 때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무엇이라고 고백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래서 죄는 내가 짓고 구원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셨는데 이제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께 돌려드리고 싶었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싶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고 여러분들의 가정이 바로 그 골고다 언덕입니다. 절대로 가족이 완고해져서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완고해서 안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이 복음을 들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나를 녹이신 예수의 사랑안고 찾아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깊이 녹아내리는 아! 나는 불행해져도 우리 주님은 행복하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깊이 용서하고 그 부모님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님에 대한 의무 때문에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대신해서 일생 나를 업고 안고 길러주신 우리 하나님 엄마, 그리고 아버지 대신 일생동안 나의 보호자가 되셔서 고단한 길에서 나에게 진리를 알게 하시고 상처받을 때마다 나를 품안에 안아주시던 그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일생을 우리를 위해 아끼는 것 없이 모두 주신 하나님, 마지막에는 자기의 외아들까지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그 하나님의 마지막 당부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는 사랑하여라. 네 부모는 너를 버렸지만 내가 너의 엄마, 내가 너의 아빠란다. 네가 많이 아파하는 네 엄마 아빠가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란다. 주님의 그 음성을 우리들이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영성에 핵심은 사랑입니다. 가슴을 녹이는 사랑입니다. 나는 그 사랑 앞에 모두 사라지고 주님 홀로 내 안에 사셔서 당신 사시고 싶은 삶을 사시는 사랑, 그래서 내게는 상처를 주었어도 당신이 사랑하고 싶으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시는 그 사랑, 그래서 그것을 깊이 끌어안고 우리에 대에서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 자식들에게 아픔과 상처가 전달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자식들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의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자식에게는 더 큰 양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올리 사랑을 배우면서 참으로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배워나가고 알아가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을 맞아서 나는 그대들의 가정에 말할 수 없는 행복이 깃들기를 목자로서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둡고 가슴 아팠던 모든 날들은 여러분들의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길 속에 모두 태워버리고 이제는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사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남은 날들이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서로 기대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도 너무 짧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여러분들에게 더 이상 흘러들어오지 못하게 사랑의 둑으로 막고 복음의 빛 안에서 예수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부모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오늘부터라도 일부러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버님을 아직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어머니 병들었지만 아직 생존해계시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날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육신으로 여러분들이 부모의 살과 피를 받아 태어났지만 어쩌면 영적으로는 여러분들의 부모가 여러분의 자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전에 여러분들의 부모가 가졌던 그 마음 말고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가 여러분들에게 주셨던 그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부모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덥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 뜨겁게 사랑하고 그래서 부모님의 남은 생애만이라도 정말 행복하게 여러분들이 살아있고 여러분들이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것이 오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는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당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가족을 사랑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 (딤전 5:8)
I. 본문해설
오늘 설교제목을 “가족을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친족, 그러면서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말이 나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부 이야기를 하나다 이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과부라고 하는 것은 남편을 여위고 혼자 된 여자인데 젊은 사람이 아니라.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제 혼자 있음으로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과부의 명부에 올리고 그리고 교회에서 그들을 생활할 수 있도록 돌봐주었습니다. 그랬는데 사도가 그러한 선한 일을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지시하는 가운데 교회에서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그 가족이 있는지를 살파보아라. 자식이 있다면 먼저 교회에서 돌보기전에 그 자식들로 하여금 타일러 그 과부가 된 어머니를 봉양하게 하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손자가 있는지 찾아봐라. 그래서 손자도 있다면 그로 하여금 과부가 된 그 할머니를 봉양하게 해라. 그렇게 사랑의 봉양을 말하다가, 그러다가 이제 친족, 특히 가족들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다.”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II. 신자와 가족
그러면 신자에게 있어서 가족, 신자와 가족이라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뭐 사실 누구에게나 가족과 자기가 무슨 관계가 있나? 하고 묻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입니다. 종종 가끔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자기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가족은 무엇을 해주어서 가족이 아닙니다. 가족은 그냥 처음부터 가족입니다. 지난 시간에 부모공경의 도리를 배우면서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뭐라고 했습니까? 살아계신 것입니다. 부모님을 여위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뒤집어봅시다. 자식이 여러분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원수라고 합니까. “집에 가서 그러죠. 이 원수야.” 이것도 자식을 비명에 보내본 사람이 아니면 모릅니다.
여러해 전에 있었던 일인데 신문에도 났습니다. 어머니가 매우 극성스러워서 이 딸을 공부를 억수로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얘는 공부를 잘하기는 하는데 너무너무 하고 싶은 것이 음악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술이었습니다. 하여튼 예술 계통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그림을 캠퍼스를 부셔버리고 기타를 치면 기타를 부셔버리고 하면서 “너는 좋은 대학 가야한다.” 그러면서 우겨서 공부를 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얘가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너무 통탄해 하면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한이 맺힌 것입니다. “딸아 이제 네가 죽고 없어지고 나니까 단 한 번이라도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주지 못한 것이 한이다.” 그리고는 그 엄마가 그 아이가 이미 죽었지만 위로하는 뜻에서 그 아이가 엄마 몰래 그러놓은 그림, 엄마 몰래 써 놓은 시, 그리고 엄마 몰래 작곡해 놓았던 긁적거리던 악보 이것들을 한 공간에다 모두 전시를 해서 딸의 유혼을 달래는 전시회를 열어주었습니다. 살아있을 때 잘하지. 왜 그렇게 해요. 바보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은 나무와 같아서 그냥 자신이 잘 자라게 사랑하고, 물주고 쓰다듬어 주고, 그러면서 어떻게 자라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이렇게 하면서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그 엄마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세요. 그 엄마가 만약에 그럴 수는 없지만 그 딸이 다시 살아나서 돌아온다면 이번에는 그 엄마에게 딸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그렇죠.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가족에게만 있는 독특한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입니다. 가족입니다. 상처를 받았어도 가족이 있다는 것은 없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입니다. 왜? 아버지 하고 나하고 관계가 깨뜨려진 가운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시면 화해할 길이 없습니다. 아직 아버지가 나를 박대하고 미워해도 살아계시면 내가 변화되기만 하면 화해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로는 부모님 모두 살아계시고, 옆으로는 형제들이 다 살아있고, 아래로는 낳은 자녀들이 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오늘 예배가 끝나기 전에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그리고 주일날 감사헌금 해보세요. 특이하게 “하나님 우리의 가족들이 살아서 이 땅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감사합니다.” 매일 집사고 그랬다고 감사헌금 하지 말고, 집보다도 더 귀한 부모와 형제, 그리고 자녀들이 함께 살아있는 것, 아내와 남편이 살아있는 것, 이것이 감사와 찬송의 이유가 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신자에게 있어서 이 가족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신자에게는 은혜 받은 자로서 소명이 있는데 그 소명이 바로 무엇이냐면 자기의 가정을 이 세상에 있는 또 하나의 천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가족이 죽고 없으면 사명지가 없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가족들이 살아있으면 지금은 다 박살나고 깨뜨려진 가정이라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는 사람을 향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가족들을 향한 사랑 속에서 제일먼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 사랑이 구원 받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숙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서는 가족을 사랑하는 것 보다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이 훨씬 쉽게 느껴지는 여러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 같이 변화를 받았고, 그리고 같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같이 목양을 받으면서 같은 가치를 찾아가기 때문에 그 속에서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제가 여럿 있어도 주님을 믿고, 깊이 변화된 형제가 있고, 건성으로 주님을 믿는 형제가 있고, 또 건성으로 믿는 형제가 있고, 아예 안 믿는 형제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 형제는 다른 형제들과 잘 어울려지지 않아요. 관심사도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틀리고, 함께 만나서 나누는 대화의 주제도 박자를 맞춰주기가 너무 힘이 들어요. 그런데 만약에 그들 중에 누가 변화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형제하고 매우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의 가족이 불신가족이라면 더더욱 우리는 그 가족과 하나 되기가 굉장히 어렵고, 같은 신앙의 가족이라도 진실한 신앙을 갖고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하지 않는 가족들일 경우에는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사모하는 이 사람에게는 굉장히 하나 되기 어려운 가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고,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들하고는 잘 안 어울리게 되는데 이런 일들이 가족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여러분, 큰 일 때 모여 보면 알잖아요. 형제 동기간들이 다 모였는데 빨리 가겠다고 보따리 싸는 사람 보면 예수 믿는 가정입니다. 왜? 뭐 제사 지내고, 술 먹고, 고스톱 치고, 뭐 이러는 분위기가 왜 그렇게 어색하고 잘 어울려지지 않아요.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 신자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의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가족들을, 친족들을 돌아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가족들을 돌아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가정의 달이면 부모공경에 대해서는 많이 설교하고,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 된다는 것, 부부간의 사랑 안에 지내야 된다는 것을 잘 가르쳐요. 할머니 할아버지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의 없죠. 그런데 오늘 보십시오. 어떤 과부가 있는데 연로하다면 그래서 교회가 도와줄 수밖에 없다면 손자들이 있는지 찾아봐라.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 할머니 과부가 되어서 돌보는 이 없는 그 할머니를 위해 봉양의 의무를 다하게 하라. 이것입니다. 만약에 자식 사랑이 곧 내리 사랑이고, 부모를 향한 사랑이 올리 사랑이라면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치올리 사랑입니다. 거기까지 가야합니다. 왜냐면 자기가 그렇게 공경하는 어머니 아버지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몸에서 태어났고, 그 살과 피를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우리를 빚으셨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노인들을 깊이 공경하고,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가르쳐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좀 덜한데 몇 년 전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렇게 분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바보로 만들어서 주책부리는 것을 코미디의 소제로 삼아서 그렇게 토요일이면 내 보내서 사람들을 웃기는데 그 웃기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것을 보는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아, 역시 늙으면 죽어야 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나라에 돌보지 않고 버려진 노인들이 수없이 많아서 이것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중의 상당수는 예수 믿는 집 가정의 노인네들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인데 복음이 그 나이도 극복해서 사랑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복음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노인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반복되는 이야기를 늘 새롭고 아침마다 새로운 것처럼 들어주는 것입니다. 늘 새로운 이야기처럼 하시잖아요. 그것을 아주 재미있게 들어주고, 그리고 마음을 드려서 그분들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른들을 공경하는 도리입니다.
자, 그러면 그런 이치 하에서 온 가족을 위해 섬겨서 그 가정이 예수 믿는 나 때문에 이 땅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천국이 되도록 가꾸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첫 번째 사명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멀리 있는 사람에 의해서는 오해될 수 있어요.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는 정확하게 판단이 되요. 그러면 여러분,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이 여기 있는데 멀리서 볼 때에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신앙도 아름답고 인품도 멋있고, 외모도 그럴듯해요. 한걸음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와 좀 더 가까워지고 나니까 그저 그런 사람입니다. 매우 가까이 가서 측근이 되어보니까 인간도 아닌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어요. 아니면 반대로 멀리서 봤더니 연한 순 같아서 별로 힘도 없어 보이고 흠모할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조금 가까이 가서 근처에 있는 사람이 되고 보니까 외모와 달리 그 인품이 정말 고상하고, 교양이 넘쳐흘러요. 그리고 성품이 정말 신실해요. 아주 가까이 가서 보니까 이 사람은 내가 평생 본받고 싶은 정말 아름답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어느 쪽이 되어야 되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들 중에 가장 가까이 있는 그 측근이 누굴까요. 가족입니다. 그래서 가족의 얼굴의 비친 여러분의 모습이 참 모습입니다.
뭐 이런 이야기 하면 다 드러누워서 침 뱉기지만 어느 날 은혜로운 주일 밤 예배가 끝났는데 목사님이 그 교회에 딸린 사택에서 이불을 펴고 주무시려고 하는데 사모님이 이불과 요와 베개를 들고 교회로 가더래요. “여보 거기를 왜 가?” “여보 우리 강대에서 삽시다. 당신은 여기에서 있을 때가 제일 그럴듯해” 그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비친 그 모습이 진짜 그 사람의 모습입니다. 밖에 나가면 그 이상일 수도 없고, 그 이하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남자 집사님이 한분 계셨는데 부인이 10살 연하였어요. 그런데 청년들에게 그 남자 집사님이 얼마나 인기가 좋은지 몰라요. 다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청년부에서 투표를 했더니 같이 살고 싶은 사람 1순위에 올라왔어요. 그런데 그 부인에게 청년들이 그 소식을 전했어요. “집사님 기뻐하세요.” “뭔데요.” 그러니까 “집사님의 남편 되시는 그분이 우리 청년들 모두 투표해서 가장 이상적인 남편상이라고 1등 투표했습니다.” “지네들이나 데리고 살아라. 고해” 이분 성에는 안 차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깜짝 놀랐어요. “다들 데리고 가서 살아라. 고해”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평범한 사실을 잊어요. 교회 와서 목사님에게는 인정을 받았는데 남편에게는 인정을 못 받았어요. 아, 그러면 이제 오늘부터 목사님하고도 막 봐야 되겠다. 그 뜻이 아니라. 알잖아요. 알면서 왜 그래요. 한두 번 해 본적도 아니고 다 알잖아요. 교회의 형제들에게는 인정을 받는데 집에 가서 남동생에게는 정말 그 누나가 내 누나인 것이 불행의 씨앗인 것처럼 그 인상을 줘요. 그러면서 그 아이로 하여금 누가 없는 집안에서 맏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잘못된 자화상입니다. 더하고 싶지만 진도를 나가면
III. 가족을 돌아보는 길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리고 정말 가족을 돌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 “돌본다.” 라고 하는 그 단어로 사용된 것이 마치 갓난아이들을 돌아보고 살피는 것 같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혼자 하기에는 모자라는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을 보살펴주는 것 같은 태도로 가족들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감시하라가. 아니라. 애정, 그들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를 희생해서라도 그들을 도울 것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족들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자식이나 손자가 있으면 생활비 보내주라. 그래라. 그 의미 이상으로 과부가 된 어머니나 할머니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족을 돌아보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A. 진실한 사랑으로
첫 째는 진실한 사랑으로 제가 주례 때마다 빼놓지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례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마디 하겠는데 저의 주례사는 항상 똑같지 않습니까. 창세기 2장 23절 24절, “그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연합 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주례를 서고 매일 똑같은 것이니까 주례를 서고 나왔어요. 나는 늘 하던 이야기이니까 저 문을 나서는데 여러 성도님들이 와서 악수를 청하면서 “목사님, 오늘 주례 설교 최고였습니다. 정말 은혜로웠습니다.” 그래요. 나야 늘 하는 것인데 이분들이 이렇게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그냥 날씨도 봄날이고 좋으니까 인사치례인가보다. 그랬는데 우리 집 사람까지도 “당신 오늘 당신 주례설교 최고였어요.” 그래서 그냥 다 쓸데없는 소리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도대체 왜들 그래? 왜 오늘 내 주례 설교가 최고의 설교였다고 그러는 거야.” 그랬더니 저희 집사람이 하는 얘기가 평소에 안하던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그랬더니 애 낳아서 부모님께 맡기지 마라. 거기에 이 집사님들이 엄청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결혼식을 할 때에 그 며느리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신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자, 이제 사랑하는 형제와 드디어 결혼에 골인했어요. 그것도 이 형제 따라다니는 것이 스커트에 껌처럼 지긋지긋했었는데 하다가, 하다가 지쳐서 에이, 그냥 뭐 나이도 이렇게 많이 먹었는데 에이 그냥 주자. 그리고 결혼을 한 사이라면 좀 덜하겠지만 이 형제한테 목을 매었어요. 그냥 나하고 결혼해달라고, 들은 척도 안했는데 천고만고 끝에 금식기도까지 몇 주일 하고 나서 응답을 받아서 드디어 결혼하게 되었어요. 그 때에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에 붙어 있는 것 까지도 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의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 는 속담이 있잖아요. 그러니 바들바들 떨면서 여기 서서 결혼식을 할 때에 그 시어머니 시아버지에게 얼마나 잘 보이고 싶겠어요. 그것은 말할 수 없죠. 그런데 화장실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하고 다릅니다. 또 몇 달 살아보면 그 며느리가 그 며느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효도의 첫 걸음은 잘해야 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며칠 안 간다. 그래서 옛날 말에 지어먹은 마음은 3일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 사람의 경우에는 지어먹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온 마음도 3일밖에 안 갑니다. 그래서 효도의 첫 번째 원리는 마음으로 그 부모를 자신의 가족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형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부부가 같이 살 맞대고 사는 것이 남편은 남편대로 몰래 꿍쳐서 본가로 돈을 보내고,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 몰래 딴 주머니에 모아서 친정으로 보내고, 이렇게 하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서로 사랑하므로 양가의 가족을 가족처럼 생각하며 부모를 공경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첫 걸음이 뭐냐면 마음을 열고나는 이분들과 헤어질 수 없는 가족이 되었구나. 같이 살든, 동네가 따로 떨어져서 살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제 정신적으로 이분들이 나의 가족이구나. 결국 우리는 운명 공동체이구나. 나의 존재는 저분들에게, 저분들의 존재는 나에게 기대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으로 그 부모를 받아들이게 된다. 라고 할 때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진실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집가서 한 몇 달 동안 그냥 잘 보일 요령 하지 말고 또 가서 주판 튕겨보고, 양가의 부모님에게 유산이라도 있으면 살살이처럼 가서 꼬리를 치고, 별 볼일이 없을 것 같으면 멀리 떨어지는 그런 행동하지 마세요. 또 유산이 없으면 근력이라도 좋으셔서 애 낳으면 갖다 맡겨놓고 좀 한번 기댈 수 있으면 잘 보이는 그런 식의 계산을 위한 효도는 모두 진실한 사랑으로 다가가는 가족 사랑이 아닙니다.
지금 이 치매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죠. 이 치매는 사실은 육신의 건강과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치매에 걸렸어도 체력이 좋고, 건강한 노인들이 많아요. 그러니 치매에 걸린 상태에서 오래 사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가족들의 관계를 만신창이로 만든다고 엊그제 신문에 나왔습니다. 누가 이 노인을 모실 것이냐를 가지고 의좋던 형제들이 서로 깨뜨려지면서 형은 형이니까 아버지를 책임져라. 둘째는 우리 집사람은 직장 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곤란하다. 셋째는 넌 직장 다니지만 우리 집사람은 나하고 함께 가게를 하는데 네가 낫지 내가 낫냐. 넷째는 우리 집은 방 두 칸 밖에 없는데 모시고 오면 우리 부부가 따로 떨어지란 말이나. 이러면서 뒤엉켜 싸우면서 형제들의 인간관계가 다 박살나서 깨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해가 가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서 초상이 났습니다. 그 초상에 갔더니 이제 뭐 35쯤 되었을까. 아주 어린 자매인데 뭐 한없이 그렇게 울어요. 시아버님이 연로하신데 중환을 앓으시면서 거동도 못하고 똥오줌을 받아내고 그렇게 오랫동안 계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슬퍼하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무 착해서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내가 자매 얘기 많이 들었는데 자매는 할 일을 다 잘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그리고 위로해 줬어요. 그랬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자매가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더 잘해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가셨어요.” 자기 친정아버지도 아니고 시아버지를 그래서 내가 기도해주면서 그랬어요. 야, 정말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참 신자가 여기 있구나. 마음속으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사랑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날이 따뜻하고, 봄날일 때에는 어떤 나무가 사철 푸른 나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찬바람이 불고낙엽이 지고 눈보라가 날리면 사철 푸르른 나무와 그렇지 않은 나무는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니 후자의 나무들은 잎이 모두 사라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요. 그러니까 아직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시련이 와서 가족들의 관계가 위협받기 전에 가족을 잘 돌아보고, 그 가족들이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도록 섬겨서 그런 시련이 올 때에 오히려 가족들이 더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 되는 그것이 이 땅에 가족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우리들이 진실한 사랑으로 가족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아야합니다. 하고 싶을 때까지만 하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참는 것은 그 한계를 넘어서 깊이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 사랑은 그 이름은 아름답지만 사실 그 속에는 항상 쓴물이 나오는 고통의 기억들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게 하는 힘이 또한 사랑입니다. 그런 진실한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수없이 많은 질문을 아우성처럼 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남편도 가족이겠죠.” “그럼요.” “그 인간, 아직도 참아야 됩니까. 지금도 술 먹으면 날 패고, 교회는 나오지도 않는데 이렇게 긴 세월을 참았는데 또 참아야 됩니까?” 참으세요. 사랑하고, 참고, 그러면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박해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셔요. 오늘도 제가 고려 신학대학원에 가서 고신 섬김의 날을 하고 왔는데 우리 지체들과 함께. 교수님들하고 같이 모여서 고난의 신앙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옥중 성도이신 한 성동 목사님의 회고록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신사 참배를 안 한다고 수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50여명의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 나셨지만 그 긴 옥고를 치루면서 그 잔인할 정도의 고문을 받으면서 비참하게 육체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이빨이 다 빠지고 손톱 발톱이 다 빠지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모질게 고문을 해서 온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순간에 그 목사님은 뭐라고 회고했느냐면 그 때 하나님이 자기를 따듯하게 감싸시면서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는 아주 감미로운 그 연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들을 극복하게 하는 위대한 힘이니 가족들이 그렇게 망가진 사람들일 수록 사랑하는 것 이외에 무슨 다른 할 일이 있겠습니까. 많이 망가진 사람들일 수록 사랑해요. 진심으로 사랑하고 품어 안아야합니다. 그 때에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이 위로를 주셔요. 핍박을 받으면 그것도 사랑으로 이기면서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셔요. 진실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B. 물질로 섬기며
두 번째는 물질로 섬겨야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질로 섬겨야 한다. 형제가 둘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형이고, 동생은 도시에서 그저 그렇게 사는 그냥 월급쟁이였습니다. 유산 문제로 둘이서 대판거리 싸우니까 남편이 대판거리 싸우면 아내들은 저절로 싸우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형제가 거의 명절 때도 오고가지 않을 정도로 의절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싸울 때에 가장 열렬하게 싸웠던 여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동생네 부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화가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까 자기의 지난날들이 너무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고 나니까 옛날에 그 유산 얼마 안 되는 땅 마지기 가지고 그 동서와 더불어 대판거리 싸우고 그리고 시아주버니와 얼굴을 붉혔던 일들이 하나님 앞에 너무 가슴 아프고 회개가 되었습니다. 형제라고는 딱 단 둘이 사는데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잘 타일러서 그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는데 그 때 자기가 제일 남편보다도 더 앞장서서 열혈전사로 싸웠으니 화해의 손길을 한번 내민다고 해서 저 쪽에서 덥석 잡아줄 리가 없죠. 그래서 기도하고 회개하고, 또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이제 화해의 역할을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지금이야 무슨 신도시 개발이니 뭐니 해서 떼 부자 되는 사람도 나오지만 시골에 있는 땅이야 그 때 무슨 재산이었습니까. 땅 값이 오릅니까. 무슨 변화가 있습니까. 그냥 거기 곡식이나 붙여먹고 사는 것이니까 살아가는 삶의 형편이 대단할 리가 없죠. 먹는 걱정은 안 해도. 그래도 시골에서 땅 가지고 제집 가지고 사는 사람보다는 서울에서 웬만한 회사 다니면서 월급생활 하는 사람들이 문화생활은 더 했잖아요.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옛날에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며느리가 기도하고 생각을 하면서 가정이 어느 정도 화평하게 될 때에 선물을 보냈습니다. 아직까지도 남편은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그 때는 겨울이 무척 추웠으니까 시아주버니 내복, 그다음에 동서. 내복, 아이들것 까지 다 해서 정성껏 포장을 해서 그래서 편지를 조카들에게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써서, 마지막에 예수 잘 믿으라는 이야기까지 다 써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본 척도 안 하더래요. 그래서 또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하면서 잘 기도하면서 섬겼어요. 드디어 그 손윗동서하고, 그다음에 그 시아주버니의 마음이 확 풀어졌어요. 그래서 어느 날 집에 커다란 소포가 왔어요. 화물 찾아 가라고 왔더래요. 그래서 뭔가 봤더니 쌀가마 하고, 그리고 큰 자루가 하나 왔는데 고추였어요. 그런데 그 해에 고추가 어마어마하게 비쌌습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한 1년 동안에 1977년도의 일인데 고추 한 근에 12000원인가 까지 갔습니다. 그 때에 공무원들 월급이 불과 한 6-7만원 하던 그런 시절에 고추 한 근에 12000까지 가서 오죽했으면 음식점에서 김치는 따로 돈 내고 사먹은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고춧가루를 잔뜩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다음 얘기가 재미있어요. 그때까지 1년 동안 서너 차례 선물을 보내준 모든 금액의 합계보다도 고추 값이 더 많이 왔데요. 이렇게 누군가가 사랑으로 다가가서 그다음에는 물질로 형제들을 섬겨야지만 그것이 진짜 가족을 돌아보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이고, 우리 형이 우리보다 더 잘 사는데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고, 더욱이 형제가 물질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 동기간이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든지, 잘 안 믿는 사람이든지. 혹은 불신자이든지 그런 것은 상관이 없이 그 물질 섬김, 한 번의 그것을 받고 예수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흘러가는 물에 떡을 떼이고 그 물에 떡을 던지면 물고기들이 그 떡을 받아먹고, 언젠가는 다시 하천으로 돌아오면 우리의 자손들이 그 물고기를 잡고 즐거워하겠지. 라는 마음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생색내지 않고 그렇게 베푸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말입니다.,. 누구든지 선물에는 마음이 잘 열립니다. 그래서 물질로 섬기는 그것이 때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형식적으로 여러 번 기도하는 것 보다는 훨씬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그것도 얕은꾀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으로 다가가는 마음으로 베푸는 물질적인 배품을 통해서 가족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한 5년 전 7년 전에 비하면 제가 외부에 많이 안 나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을 위해서 말씀을 탐구하고 그리고 교회를 돌아보는 일들에 더 많이 시간을 보냅니다. 기도하고, 그런데 항상 저는 웬만하면 한번 간 곳에는 다시 안 가는 원칙은 아니지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섬기라고 기회를 주셨고,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러면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유익하잖아요. 그런데 제가 섬기러 갔던 어느 성경 학교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학생 수도 그저 한 4-50명 모이는 그렇게 뭐 대단한 학교는 아니죠. 그런데 가서 몇 번을 못 간다고 하는데 그렇게 오라고 해서 오전에 두 시간 점심 먹고 한 시간을 해서 두 타임을 강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학생들이 많은 은혜와 깨달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갔는데 그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이 와서 꼭 그렇게 말을 해요. 내년에도 꼭 와서. 그렇게 말을 해요. 그래서 내년에 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뭘 벌써 약속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돌아오면서 한번 왔으면 됐지. 그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가을이었는데 겨울이 되었는데 굳이 찾아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랬는데 잠깐이면 된데요. 그래서 오더니 하얀 와이셔츠를 하나 가지고 왔어요. 집에 많은 것이 하얀 와이셔츠인데 하얀 와이셔츠를 하나 사 왔어요. 그러면서 와이셔츠를 주면서 지난 가을에 강의는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냥 그 말만 하고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타임도 절묘하게 1달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와서 이번 봄에도 꼭 오십시오. 어떻게 안 가겠어요. 받았는데 뭘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다시 오라고 하려면 이것 도로 가지고 가라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가 아닙니다. 신학교에서는 대학교에서 이게 와서 강의 하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 놓치기 싫은 강사가 있어요. 이분이 이미 다른 학교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우리 학교는 작아서 그 교수님을 오시라고 모실수가 없습니다. 또 올 리도 없고, 그런데 이분이 한 학기에 한 1주일에 한 시간씩이라도 나오셔서 강의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원래 대학에서 강사라고 하는 것은 한 시간 강의하면 그것 곱하기 얼마, 곱하기 몇 시간 강의했나. 해서 월급을 주고 방학 때는 강의 없으니까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느 한 학교가 있었습니다. 그 학교를 보고 제가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좋은 교수님이 강사로 거기에 갔는데 9월 중순에 시작해서 9월 10월 11월하면 강의 끝나잖아요. 그러니까 곱하기 얼마 하고 돈을 드렸는데 12월 때는 강의가 없잖아요. 교수님이 집에 있는데 강사료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서 내가 강의도 안 했는데 무슨 강사료냐. 그러니까 아, 아닙니다. 교수님은 학생들이 너무 존경하고 강의 내용도 너무 훌륭해서 강의 안 나오시는 방학 때에도 저희들이 예의상 강의하던 때와 똑같이 그렇게 보내드립니다. 그게 약이거든요. 12월, 1월, 2월을 받았는데 2월말에 전화 와서 3월 말에 나오십시오. 그러는데 어떻게 안 나오겠어요. 나는 그것을 보고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이것이 진짜 좋은 학교다. 지식인들을 이렇게 관리를 해서 자기네 학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렇게 학생들에게 유익을 주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비슷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족들도 똑같이 물질로서 섬기는 일들이 필요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필요는 가장 예민한 필요이기 때문에 도움에도 매우 예민합니다. 처음 한번 도와줄 때는 “쳇, 그까짓 것 옛날에 한 짓을 생각해봐.” 이럴지 모르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변함없이 반복해보십시오. 반드시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이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라도 말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이 신혼여행을 갔다. 오면 꼭 뭐 볼펜이라도 한 사가지고 옵니다. 뭐 어떤 때는 비누고 몇 개 사가지고 오고, 뭐 초콜릿도 사가지고 오고 그래요. 내가 그렇게 작은 선물을 받을 때마다 마음으로 정말 고마운 것이 뭐냐면 그것을 사러 다녔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뭐 하러 이런 것을 사러 다니면서 시간을 허비하냐. 둘이 꿀 같은 시간에 깨소금이나 짜지. 뭐 하러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이것을 사러 다니느냐. 그냥 와서 인사해도 된다. 그럴 필요 없다. 그런데도 마음으로는 뿌듯해요. 그래봐야. 그것 서랍에 넣어뒀다가 사모구역 바자회 때 내놓은 것이 많지만 선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입니다. 그런 것을 형제들에게 베푸세요.
세 번째는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화평하게, 그래서 형제들이 반목하고 서로 다투고 분쟁할 때에 그것을 수습하고 화해시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처신을 잘 해서 어느 형제가 치우쳐서 다른 형제를 섭섭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그래야지만 화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혈기를 잘 내고 분노하는 사람들은 따라서 화해자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참고 온유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화해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찢어져서 다투고 형제간에 이해관계가 얽혀서 산지삼방으로 찢어져서 또 갈등하고, 이러는 가족 관계에서 무엇을 어떻게 섬기고,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르는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들이 제일 중요한 것은 그 혼란스러운 가정에서 지도력을 갖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가정에서 혼란스러울 때 지도력이 누구에게 옮겨갈까요. 많이 희생하는 사람에게 옮겨갑니다. 부모님이 병들고 어려워서 모든 형제들이 돌보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칠 때 누군가가 희생하고 그 부모님을 모시기로 작정하면 지도력이 그 형제에게 옮겨가는 것입니다. 쭉 전화해서 형, 어머님 많이 편찮으시니까 빨리 와. 얘들아, 어머님 많이 위중하시다. 빨리 오너라. 그렇게 지시하면 모두 모이잖아요. 지도력이 있어요. 그렇게 희생하지 않고는 화평케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이속 다 챙기고 어떠한 희생도 하지 않으려고 하다못해 무엇이라도 형제들보다 자신이 더 가지려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할 때 누군가 그 욕망을 꺾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가족들의 영혼을 돌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필요만 채우지 말고 중요한 것은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교회가 초창기에 가족 전도가 참 많았습니다. 지금도 그 뿌리가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교회 보면 유난히 형제, 형제 아니면 동서, 언니 이렇게 얽혀진 가족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동생이 먼저 예수 믿고 형 데리고 와서 변화되고, 그리고 엄마 아빠 먼저 와서 예수 믿고, 자녀들 와서 변화 받고 이런 케이스들이 많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깊은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내 가족들이 제일 먼저 슬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연민이 없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직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가족 구원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막연히 부담은 있고,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사랑이 없으니까 희생을 안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름날에 몇 달씩 비가 안 와요. 바짝 가물어요. 그러면 비포장도로에서 차가 달리면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죠.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 지면서 쏴 하고 비가 막 쏟아지잖아요. 그러면 한 20분오고 나니까 그 물이 도랑을 이루면서 막 흘러가는 것입니다, 콸콸 흘러가는 것입니다. 온 땅이 전부다 물 천지입니다. 그 때에 곡괭이를 들고 쾅하고 젖은 땅을 내리쳐보세요. 그러면 불이 번쩍 납니다. 그리고 먼지가 펑펑 일어납니다. 은혜 받고 펑펑 울고 불 받았다고 펄펄 뛰어도 가족에 대한 연민이 없으면 아직 그 은혜가 표피적인 은혜입니다. 아직 스며들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은혜가 스며들어 보세요. 예수님의 사랑이 스며들어 보세요. 그분의 사랑은 감화가 영혼 속에 스며들어 보세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가족인데. 그 사람하고 돈 때문에 얼굴 붉히겠습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변화 받지 못해서 중생도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인데 내가 참 복음을 알았고, 그에게 예수 믿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인데 자그마한 이해관계 때문에 그 형제와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를 깨뜨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 오늘 얘기했잖아요.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 그래서 가족들의 영혼을 깊이 돌아보아야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가족들의 영혼에 대한 부담이 없고, 구원 받지 못한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어떻게 되겠지. 안 믿고 돌아가서도 결국은 당신들이 강퍅해서 가는 것인데. 그래도 내가 몇 번 교회 가자고 해 봤잖아. 여러분들이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면 이번에는 그분들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메마른 영혼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이 불쌍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지 못하고, 변화 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없다면 그 영혼이 바로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영혼입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니까 사랑도 함께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분을 잊었어요. 자신의 사명을 잊었어요. 처음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고, 구원 받지 못한 가족, 변화 받지 못한 우리 형제를 위해서 흘리던 그 눈물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도 함께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 각종 이기심이 마음 안에 꽉 차서 사명을 주어서 하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가족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파송했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은 그 가정을 변화시켜서 새로운 가정으로 만들어야 할 사명을 버린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중 가장 그 영혼이 아름다울 때는 사명을 따라서 살 때입니다. 그 영혼이 가장 추루할 때에는 그 사명을 팽개치고 살 때. 그 때 그 영혼은 가장 추루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결국은 우리 모두 죽을 것 아닙니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가실 것입니다. 가족 중에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제일 커, 남이 알지 못한 하나님을 알았고, 남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어요. 그래서 그 복음의 감미로운 은덕을 누렸어요. 성화의 길이 무엇인지 배웠어요. 어떻게 죄를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지도 알았어요. 그런데 사명을 따라 살지는 않았어요. 주님 앞에 갔을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틀림없이 물으실 것입니다. “얘야, 네가 드디어 천국에 왔구나. 그러면 내가 너에게 맡겨준 가족들은 어디 있니?” 그 때에 슬픔의 눈물을 흘려야 되겠어요.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되겠어요. “하나님, 여기 다 모였습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가족들입니다. 여기에 다 모였으니 세상에 있을 때에 우리는 때때로 찢기고 할퀴고 고통 하는 영혼들로 화해를 이루면서 살지를 못했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통해 저들을 섬기게 하셨더니 이제는 가족들이 모두 구원을 받고 이 천국에 함께 모두 모였습니다.” 그 때에 우리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흐르지 않겠습니까. 키더민스터의 리챠드 백스터는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저는 참 그분의 그 설교를 읽으면서 전율하는 그 떨림을 제가 느꼈습니다. 그 키더민스터 교구를 얼마나 충성스럽게 돌보았는지 마지막에 그래도 회심하지 않는 가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목사님이 맨 처음에 부임할 때에는 온 동리가 이백 몇 가정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는 가족이 대 여섯 집 밖에 없었는데 17년 사역하고 그만 두실 때에는 두 세 가정을 빼놓고는 모든 가족이 저녁이면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에 그 목사님이 설교 속에서 이런 얘기를 남겼습니다. “내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네 교구에 있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왜 보이지 않니?” 이렇게 주님이 물으시면 저는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온 마음을 다해서 그들을 돌보았고,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에게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힘을 다하여 전하였지만 무슨 일을 해도 그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들은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에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이 갖게 하시고 싶은 마음이 바로 그런 목자의 마음입니다. 가족을 볼 때에 영혼으로 보는 것, 그 가족을 위해서 깊이 사랑하고, 그 영혼의 곤고한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랑의 마음,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다 주셔서 이 땅에 있는 우리들을 섬기신 것처럼 그렇게 그들의 영혼이 잘 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영혼이 주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돌아온 영혼들이 진리를 만나고 주님 앞에 온전히 설 수만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는가.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 오늘도 나오셨겠죠. 집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일을 해 줬는데 돈을 안 주더래요. 얼마나 화가 나는지 오늘 가서 이 인간을 내가 박살을 내리라. 장을 대고 혈기 충천해서 갔는데 들어가서 한참 얘기하다가 눈을 딱 떠보니까 그 사람이 얘기한 빚쟁이 바로 옆에 책꽂이가 있는데 거기에 “십자가를 경험하라.” 김 남준. 꽂혀 있더래요. 그래서 용서해주고 왔데요. 좀 잘 하라고, 그 사람은 진짜 그 책 사기 잘했지. 그 책 거기 없었으면 혼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지 내가 먼저 이 십자가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지. 이 사람이 그렇게 부족해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지.” 생각하면 그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워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는 길이 아무리 멀고 힘들어서 그 고통이 크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은혜와 사랑, 그 고통보다 항상 더 큰 것입니다. 더 큰 것을 이미 받았습니다. 받은 것만큼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고난이 크면 받은바 사랑이 큰 줄 아시고, 그리고 나를 대우해 주신다고 믿으세요. 그리고 그 고난을 견디고 가족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여러분들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슴에 새기세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망가진 가정에 유일한 희망입니다. 왜? 주님이 보내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도하겠습니다.
4. 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
“또 아비들아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I. 본문해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네 번의 만남에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은 불행해질 레야 불행해질 수 없는 인생입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서 부모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결혼해서 아내를 혹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좋은 목회자를 만나서 그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네 번의 만남에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의 인생은 불행해질 수가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에 대해서 상고하면서 하나님 앞에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오늘이 시간에는 그러면 이번에는 그 부모가 자녀를 향하여서는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저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 대다수는 아직은 자녀가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모른 채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자랐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 설교를 객관적으로 듣지 말고 여러분에게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야 한다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깊이 새기고 미리 어떤 부모가 되어야 옳은 것인가를 알고 그리고 소명을 느끼며 결혼을 하고 그래서 그 자녀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모가 될 때 그것이 진짜 결혼이지 그런 것 없이 그냥 시집장가가면 짝짓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들의 가슴깊이 새겨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히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아비들아” 라는 호격이 먼저 나오는 것은 가정에 있어서 자녀를 교육하는데 책임이 어머니는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머니가 유대인이고 아버지가 이방인이면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육신적인 핏줄로는 이방인인데 유대인이라고 인정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머니가 이방인이고 아버지이가 유대인일 경우인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육신적인 핏줄로는 유대인인데 그 아이는 이방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하드웨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적 핏줄이 아니라 인간 내 면속에 뭐가 들어있는가를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아비들아” 불렀다고 해서 어머니에게는 자녀들을 돌보고 양육할 책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버지가 가정의 머리로서 자녀의 교육을 어머니가 실제로 담당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그 자녀를 양육하는 것에 대한 최종적인 권위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라고 먼저 말합니다. 부정명령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생각은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무엇을 하여야 하나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주어야 하나. 뭘 사주어야 하나, 어떤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하나. 교육을 위해서는 어떻게 투자를 해주어야 하나, 이렇게 하여야 할 일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만 오늘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부모가 먼저 하여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노엽게 한다는 말은 원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의미는 전투적인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그 부모와 자신과 관계된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마음의 상함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을 해주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될 것이 먼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자녀가 분노나 상처를 받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령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주는데 우선 우리가 부모로서 자식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큰 뜻 없이 어떻게, 어떻게 했는데 그것이 어린 자녀의 가슴 속에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은 깊은 상심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아이의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영향을 미치고 그 아이가 아버지가 될 때도 영향을 미쳐서 그 자녀를 향하여 망가진 아버지가 되게끔, 어머니가 되게끔 만들어줍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아이를 우리들이 어떻게 길러야 되겠다고 하는 그 강력한 의도보다도 아이를 어떻게 잘 자라게 해야지 되겠다는 이런 의도가 부모에게 있어서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자녀를 노엽게 하는 길
고린도 교인을 향해서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물도 주고 씨도 뿌리고 그랬지만 결국은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라고 말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충고 하면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를 성경이 지시하고 있는 이유는 이 자녀의 상처를 두고 노엽게 하는 이것이 교육의 통로를 막기 때문입니다. 그 교육의 통로가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자식들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이고 영적이 결합입니다. 이 결합은 사람의 결합으로서 이 사랑의 연합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자녀를 정말 참 사람 되게 하는 교훈이 흘러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만이 아니라 부모의 정신과 영적인 자질, 그리고 부모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모든 태도들이 이 영적이 통로를 통해서 전수됩니다. 이 통로가 바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사랑의 연합입니다. 그런데 자녀를 분노하게 하고 상처를 주고 그래서 깊이 괴로워하게 만들면 자녀가 마음의 문을 닫고 그래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 통로가 끊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육은 불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어렸을 때 동리 근처에 개 훈련장이 있었는데 신기하게 개를 그 근처로 데리고 가면 개들이 거기가 뭐 하는 곳인지 압니다. 그리고 개들이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넓은 마당에 여러 가지 구조물을 만들어놓고 개를 훈련시킵니다. 데려올 때 아주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상당히 큰 개들도 데리고 옵니다. 그 개를 훈련시키기 전에 조련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일단 개들이 들어오면 말같이 개들이 들어와서 낯선 사람이니까 막 짓는데 주인은 놓고 갑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개 패듯 때립니다. 그래서 개의 기를 완전히 꺾어버립니다. 그러면 이 큰 개들이 조련사만 나타나면 엎드려서 끙끙거리면서 뒤에다 꼬리를 감춥니다. 그래서 하나씩 불러서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대단합니다. 훈련을 시키면 이 개가 사닥다리도 올라갑니다. 여러분 집에 가서 개 한번 사닥다리에 올려놓아보십시오. 발발 떨면서 오줌을 쌉니다. 그런데 이게 막 뛰어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리고 옆에 걸어가다가도 툭툭 치면 낮은 포복으로 엎드립니다. 사냥개도 훈련시킵니다.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하면 먹을 것을 하나씩 주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통로 없이 완력으로 자식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교육을 시키는 것은 개를 훈련시키는 조련사의 훈련 방식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녀를 훈련시킴에 있어서 자녀가 항상 옳은 것을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에 때로는 야단도 치고 하기 싫은 것도 하게하고 그렇게 해야지만 자녀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하는 통로는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하고 우리는 하나로 연합되어있다. 이것을 아이에게 끊어지게 해서는 어떤 교육도 불가능해집니다.
A. 과도한 징계
그러면 어떻게 할 때 이 자녀가 가장 심각하게 노여워하고 그리고 고통을 받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과도한 징계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녀들은 좋은 것을 항상 기뻐하고 싫은 것을 항상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른인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더 심합니다. 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싫다는 아이를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그래서 공부하기 싫어하면 야단을 쳐서라도 공부를 시키면 그래서 그 길을 계속 가게 하면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부모에게 그렇게 야단을 맞으면서 힘든 길에 서있었던 것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기 싫다고 해서 인격적 교육시킨다고 그리고 관두라고 그러고 중학교 2학년 때 학업을 그만두고 뭐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애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더니 뭐가 되었는지 그렇게 했더니 성공했더라. 그것은 서태지 같은 사람 하나 둘이고 모든 애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양아치 되기 십상입니다. 그게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녀를 징계할 때도 이 사랑의 연합을 깨트리지 않는 방식으로 징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적해야지 될 것은 첫째는 이 징계의 대부분의 원인이 부모의 과대한 기대입니다. 오래간만에 자식 하나 내놓으면 애가 위인전기에 나오는 애 정도나 된다고 많은 부모들이 착각을 합니다. 태몽도 그렇게 꾸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꿈꾼 사람은 많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매우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능력과는 상관없는 기대를 갖거나 이 아이가 만들어질 때의 이 아이의 성향과는 상관없는 빗나간 기대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비인격적인 징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아놓고 이 아이는 실제 능력은 3밖에 안되는데 그런데 10정도 되는 아이들이 아주 예외적으로 갈수 있는 수준에 이 아이에게 요구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아이를 닦달하다가보니까 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 아이는 본래 그 속에서 그런 종류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애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절대적으로 많은 아이들이 해도 안 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한 2-30년 전에 코마니치라고 하는 루마니아의 체조선수가 나와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리듬체조의 여왕이 된 것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모두 훈련시키면 그 애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매트에 누워서 몸을 굴리면 그 발 앞 꿈치로 여러분의 머리를 두드릴 수 있는 원형을 그려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뱃살 때문에 안 됩니다. 손으로 배는 두드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안 됩니다. 훈련시켜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높은 기대를 가지고 그 아이에게 도달할 수 없는 기준을 강요하면서 아이들을 징계합니다. 이게 아이를 분노하게 하고 좌절하게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붕어빵틀에 찍어낸 것처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요,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능력이 다 똑같아도 그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방향이 다 틀립니다. 그래서 그 다양성 속에 일량성을 이루면서 그러면서 이 우주와 세계가 하나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이 아이의 일생을 결정하려고 하고 그리고 그 아이에게 과도한 기대를 강요하고 그 아이를 채찍질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게 다 너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그런다.’ 그리고 아이에게 징계를 행사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녀를 노여워하게 만들고 그 노여움으로 말미암아 부모와 자식간의 교육의 통로인 영적이고 정신적이 연합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예화: 한 10년 전에 어떤 여자애가 수재로 공부도 잘하지만 음악과 예술에 아주 재능이 있어 예술분야에 관심이 더 많았지만 어머니가 예술보다는 공부를 해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강요를 하며 예술을 하는 것을 막자 그 아이가 결국은 중학교 때 자살을 했다. 그때서야 엄마가 후회를 하면서 딸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로 아이가 좋아해서 부모 몰래 감추어두었던 자신의 시나 그림, 악보 등으로 전시회를 열어주었는데 그 부모가 딸에게 인격살인을 한 것이라는 내용)
자녀들은 잘못했을 때 자기를 징계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잘못한 것보다도 징계의 분량이 과도하다고 생각될 때, 그 다음에 윤리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일인데 그것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윤리적인 기반 없이 자기를 징계할 때 이때 자녀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되고 부모의 교육이 아이에게 흘러갈 수 있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통로가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사람은 흙을 빚어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마음을 가지신다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남녀가 결혼해서 둘이 같이 결혼한 첫날밤에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것 목사님에게 가져오면 하나님이 훅! 하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그 두 부부의 손에 재주와 비슷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첫 사람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시고 그 다음부터는 그 후손들이 그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고 그래서 그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게끔 섭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 아이들을 자신의 몸속에서 자라게 하심으로 그 부모와 육체적으로 한 몸을 이루게 하시고 그렇게 된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를 보면서 인간이 누구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는지를 자신의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서 배워나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에게 부모가 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가르침은 다시 둘로 나누어지는데 인간 보편에 대한 가르침과, 개별자인 그 아이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생동안 그 아이에게 새겨지는 기간이 길지 않습니다. 유아 교육자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교육은 5세전에 80%가 완성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 시기에 아이들에게 정확한 무엇인가를 넣어주는 것, 그 통로가 바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는 사랑의 연합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말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모습, 행동 모든 것들이 정신과 숨결까지 함께 흘러들어가면서 그래서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배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흙으로 빚었다면 하나님께서 그 부모를 통해서 훅! 하고 불어넣어주심으로 그 아이가 사람이 되어 가는데 그 통로가 무엇인가 하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사랑의 연합입니다. 이 관계가 깨트려졌다. 그것은 부모의 가르침이 이 아이에게 흘러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산산이 깨트린 부모에게 과연 그 아이에게 흘려보낼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하나 낳아서 그 아이의 부모가 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인간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이 없이 저 혼자 살기 적적해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짝짓기입니다. 제가 그래서 항상 하는 이야기가 혼자 살든지, 시집장가를 가든지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없는데요. 그럼 안 됩니다. 소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자녀들을 잘못 징계하게 될 때 자녀들은 노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 저희 학교에 친구가 하나 있는데 애가 아주 인물도 좋고 키도 크고 공부도 꽤 하는데 운동을 훨씬 좋아합니다. 그런데 애는 매일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우리 꼰대가.’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꼰대가 뭔가 그랬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꼰대라는 말은 젊은 여자가 돈을 목적으로 나이 많이 든 남편으로 같이 데리고 살 때 그때 그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것은 아주 안 좋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내 인생에 뒷돈 대주는 늙은이 정도의 뜻입니다. 그런데 매일 자기 아버지를 꼰대,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 애의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깡패였습니다. 실제로 자유당 시절 때 깡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를 진짜 개 패듯 때리면서 길렀습니다. 그래도 애가 활달하게 잘 자랐는데 드디어 고등학교 3학년 과정이 다 끝날 무렵 예비고사까지 다 끝났습니다. 그러면 사실 고등학교 교복은 입었지만 사실 이제 학교의 통제를 떠나서 사회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애들이 같이 술을 먹으러 갔습니다. 술을 잔뜩 먹더니 애가 호기를 부린 것입니다. ‘나 오늘 더 먹어야지 돼. 왜 나 오늘 우리 꼰대랑 한판 할 거야. 이렇게는 살 수 없어.’ 그리고 갔습니다. 얼마나 술을 먹었는지 비척비척 갈지자로 집에 가더니 발길로 문을 차면서 문 열어! 그러니까 대답이 없으니까 또 문을 차면서 문 열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에는 진짜 꼰대 나오라 할 판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애의 집이 부자라 식모가 나와서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문을 쾅! 열고 들어갔는데 애들의 증언이 골목에서 기다리면서 야, 이제 진짜 한판 붙나보다. 그런데 비척비척 거리며 쓰러질듯 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고함 소리가 나더니 애가 가방도 팽개치고 그 문을 뛰어나오더랍니다. 옛날에는 작은 문이 대문에 달렸습니다. 그리로 나오더니 그다음에 뛰는데 애가 전혀 술 먹은 애가 아니고 100미터를 11초 정도로 달리더랍니다. 뒤에 보니까 그 애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나오더랍니다. 죽여 버린다고, 그래서 결국 독립전쟁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런 식의 자녀를 향한 과도한 징계는 그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합니다. 결국은 그 아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기적? 지난 주 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펑펑 울며 회심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아버지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맺힌 것을 풀겠습니다. 이러고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인생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B. 그릇된 모본
두 번째는 그릇된 모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주 어렸을 때 아직 말을 못할 때는 부모의 표정을 보면서 선악을 배우는 것입니다. 쉿!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기에 아이들이 깜짝 놀랍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해도 되나 하고 살금살금 장난을 했는데 엄마가 활짝 웃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웃으면서 그 일을 계속 하게 됩니다. 그렇게 선악을 배웁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제 막 나불나불 거리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한 미운 7살 쯤 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합니다. 그때 부모가 찾아가서 쉿! 그러면 애가 우리 엄마 오늘 아침에 뭘 잘못 잡수셨나. 개의치 않고 자기 하던 일을 합니다. 이제는 그런 표정관계 가지고는 아이가 통제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딱 놓고 아이에게 논리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지, 이렇게 하면 동생이 아프겠지. 그러면 네가 나쁜 사람이지, 이렇게 하나, 하나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가 이제 말로 아이를 가르쳐야 합니다. 엄마 아빠가 워낙 말을 조리 있게 하면 아이가 승복하게 됩니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 아이의 자아가 완전히 완성이 되는 청소년기로 들어가게 되면 이 아이는 이제 부모가 논리적으로 말을 해도 그 아이가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삶이 그가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를 감시합니다. 그래서 일치하면 말을 신비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말이 일치하지 않으면 부모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부정합니다. 부모 말은 참 맞는데 당신도 여러 가지 연약성과 부패성이 남아 있어서 저렇게 못사시는구나. 부모의 말은 본받아야지 되지만 행동은 본받지 말아야 되겠구나. 이렇게 아이가 사려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특성이 뭔가 하면 자기는 몰래 숨어서 담배피고 술 먹고 그리고 엄마 몰래 포르노를 봐도 아빠 엄마가 그러는 것은 못 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이의 마음에 잘 안 들었는가, 봅니다. 어느 날 아이가 아빠 우리가 온 식구가 모여서 가정 예배를 드린 것이 언제인지 알기나 하세요. 아빠의 마음에 콱 박힌 것입니다, 아이가 한번도 아빠, 나 가정 예배드리고 싶어. 우리 가정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는데 그게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무슨 뜻입니까? 아빠가 가정 예배 언제 한번 인도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피지 말라는 담배 몰래 피고 술 먹고 그리고 야한 그림책도 보고 그러면서 아버지가 그러면 당장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아빠 왜 사람이 그래. 예수 믿는 집사라는 사람이 왜 밤에 술 먹고 들어와. 엄마 권사 맞아? 그런데 왜 싸워, 전사야. 아이들이 그것을 다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도 말을 안 합니다. 그 속에서 계속 노여워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인간이 참된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는 그 부모가 자기 새끼는 참 사람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야무진 꿈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자기가 그런 길을 안 가는데, 그래서 그리스도 이외에 희망이 없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고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참 인간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그런 구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나마 하나님을 안 믿어도 끊임없이 인생에 대해서 숙고하면서 사색하면서 참 인간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는 이 지혜자적인 성격을 가진 부모라면 그래도 조금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정욕을 따라 살고 자기의 좋은 대로 삽니다. 짐승 같은 에미 애비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동물 같은 새끼가 나오는 것이지 어떻게 그 밑에서 인간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기가 진짜 참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런 구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은 시집 장가가서 애를 안 낳는 것이 인류공헌에 기여하는 바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도 걸어가지 않는 인생의 길을 자식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나타나는 것이 모두 그릇된 모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인생을 아주 방종하게 사는 그런 모습을 보이면서 그릇된 모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아이에게 있어서 그 부모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 안에서 이 아이는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가, 그것은 여러분들 부모입니다. 그런데 어! 이 애는 부모하고 정말 틀리네. 그 부모에게서는 이런 자식이 나올 수 없는데, 그것은 여러분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성화의 길을 간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포기한 여러분을 하나님 아버지가 다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돌연변이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그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진실한 신자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것은 이게 우주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다른 인생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그런 잘못된 모본을 받게 될 때 깊이 상처를 받고 노여워하면서 이 아이는 망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아이를 그렇다면 그렇게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소극적 명령이라면 그러면 적극적으로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그게 바로 주의 자녀로 이 아이를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성경에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육한다고 하는 것은 소아과학적 의학용어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러시이한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아이에게 자양분을 공급해서 그 아이를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III. 자녀를 기르는 길
A. 주의 교양과 훈계로
결국 이런 묘사 속에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것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절대적인 영향력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절대적인 영향력을 자녀에 대해서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부모인데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냥 필연적으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녀를 기르는데 어떻게 길러야 되는가 하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인 특질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훈계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외적인 삶의 태도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의 부모가 되어서 아이를 기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내적으로는 그 아이를 참 사람의 성품을 갖고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잘 준비시키고 밖으로는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동시에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이 아이에게 참 사람으로서 사람들과 함께 주님 앞에 살아가는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자원들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자신의 사상과 철학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가 그리스도께 깊이 사로잡히고 그 십자가의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는 주의 교양과 교훈을 따라서 아이를 가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이 그렇게 이 세상에 많은 교훈들도 알고 있고 삶의 태도나 처세술, 또 교양 이런 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께 붙잡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의 교양과 훈계로서 이 아이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예수 믿는 부모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참 잘 자라주었어.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다 들어갔고 그리고 좋은 처자들 만나서 가정을 이루었지. 조금 흠이 있다면 아직 예수를 안 믿는 것이지. 그 부모가 이미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작은 문제입니까?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를 아무리 사랑하고 자녀가 우리로부터 잘 가르침을 받고 또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이 있어서 이 자녀를 지혜의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영원히 자녀와 함께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은 자녀 혼자 남겨놓고 부모가 먼저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누가 책임질까요?
사도 바울이 삼년이 넘는 세월동안 에베소 교회를 목회한 후에 순교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남긴 고별적인 설교 속에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이제 너희를 떠나가는데 내가 가고 나면 이리들이 와서 너희들을 헤칠 터인데 참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이 길은 주님이 내게 주신 길이기 때문에 나는 가야지 된다. 이제 내가 너희를 어디에다 부탁한다고 그랬습니까? “주와 및 그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결국은 자녀에게 우리에게 모든 것을 교육시킬 수 없지만 마지막에 주님이 그 자녀를 꽉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의 자녀가 그리스도 예수께 깊이 사로잡힌 자식들이 되면 그러면 나 없이도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자녀를 붙들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충분하지 않고 또 부모가 우리에게 준 사랑이 모자라고 심지어는 사랑대신 상처를 주었어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주 올바른 삶의 태도, 이것을 이 아이에게 깊이 심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부모가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주님을 향한 신실한 인격적인 사랑과 교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 속에서 자신을 고치며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을 향해 살려고 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 아이는 이미 벌써 행복의 90%는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1960-70년도에 국방부 장관을 지내시던 김성은 장로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전 20대 중반에 그분의 생생한 간증을 들었는데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간증하는 내용이 오늘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많이 열어줄 것입니다.
(김성은 장로님의 간증 이야기)
일생을 선교지에서 지낸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선교 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안정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자녀 교육입니다. 그 자녀들이 워낙 예쁘게 자랐습니다. 그러니까 후배 선교사들이 물어봤습니다. 사모님, 어떻게 하셨기에 자녀분들이 저렇게 여러 자녀들이 아름답게 자랐습니까? 사모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니야.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어. 사역이 바빠서 애들을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한 걸, 그냥 하나만 가르쳤어.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큰 은혜를 주신 내주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B. 사랑으로
그게 부모라는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의 자녀에게 하여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리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섬겼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부모님의 명예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불행한 일은 여러분들의 부모의 대에서 끝나야 됩니다. 그 불행한 일은 이제 여러분들이 마지막 희생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후손은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부모 될 자격은 하나도 없으면서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주의 교양과 교훈으로 그 아이를 잘 양육하는 이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랑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전수되고 이 아이가 그렇게 양육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 하면 자기가 가르쳐야 할 그 자녀를 사랑해야지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깊이 사랑해야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고 7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참 제가 못되었습니다. 한번도 진실하게 무릎을 꿇고 자녀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없으면 없지 뭐,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안 주신다면 굳이 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되지 뭐, 그냥 둘이 살다가 죽으면 되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사람은 틀렸을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7년 만에 아이가 기적적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애가 말할 수 없이 기쁨이었습니다. 똘똘하고 그렇게 아이가 자랐습니다. 항상 너는 7년 만에 낳았다고 늘 주위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애가 하루는 뭘 좀 해달라고 그러는데 안 된다고 그랬더니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게 건넌방 문 옆에 서서 발길로 벽을 차면서 7년 만에 태어났는데 그것도 안 해주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애가 자라는데 어쩜 그렇게 말이 빠릅니다. 그래서 30개월 되었을 때 애가 일상적인 모든 대화 소통이 가능했고 약간의 사상적인 대화도 가능할 정도로 어휘구사력이 풍부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잘하는데 오줌은 못 가려서 기저귀를 차고 말을 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잊혀지지 않은 게 그때 드라마 가운데 고두심이 나오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그 고두심의 대사 가운데 유명한 말이 있었습니다. 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그래. 잘났어. 정말’ 그 이야기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책상 위에다 애를 앉혀놓고 이제 교훈을 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했지,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네가 잘못된 것이지. 네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지. 이렇게 되니까 너는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 그러니까 애가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이더니 한참 있다가 뭐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들더니 그래. 아빠는 잘났어. 정말, 지금은 그런 유행어가 사라졌으니 하나도 웃기지 않는데 저는 한참동안 철퇴에 맞은 것처럼 멍했습니다.
유치원에 가더니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말도 잘 듣고, 초등학교 갔는데 1-4학년까지 모든 시험은 다 100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가 5학년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공부를 안 하기 시작하더니 먹는 것만 그렇게 먹었습니다. 그러니 애가 몸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많이 봅니다. 학교 끝날 때까지 도서관에서 책보고, 그냥 누워서 책보고, 소파에 앉아서 보고, 밥을 먹으며 보고 그런데 학교 공부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책만 보는 것입니다. 성적이 계속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그렇게 산 적이 없는데 어쩜 그렇게 지저분하게 해놓고 사는지 난 무질서함과에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데 일을 할 때는 삼지 사방으로 벌려 놓더라도 끝나고 나면 정돈해서 내가 찾으면 찾는 그곳에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애는 전혀 아닙니다. 한 번도 때린 적이 없는데 아들은 저에게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한번은 공부를 안 한다고 맞고, 두 번은 정리를 안 한다고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 너무 실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6학년, 중학교 1-2학년 그러면서 가끔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지론은 그것입니다. 당신 뭐하냐. 아이가 저렇게 되고 있는데, 우리 집사람은 아니 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하나. 그리고 아이의 교육이 어떻게 엄마 한사람에게만 있는가. 그럼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 강의, 외부의 집회, 지필 이러고 사는데 도대체 왜 저러나, 애가, 그러면서 점점 골이 깊어졌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아빠가 지방에 집회에 내려가서 한 3일 있다가 올라온다고 그러면 아들이 너무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속에서는 접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마음속에서 그리던 그 아들하고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똑같이 나도 아들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외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언제 하나님이 저를 깨우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시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또 아들에게는 내가 아버지고 그 아들은 내 아들인데 그 유비관계 속에서 비쳐보니까 하나님의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애야, 너도 내 아들이고 네 아들은 너의 아들인데 내가 너를 다루는 방식과 네가 네 아들을 다루는 방식을 한번 비교해보아라. 그런데 정말 여러 날 동안 깨우시는데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는 찬송의 제목이 되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많은 성품 중 신실하심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회심한 이후로 올곧게 주님만 붙들고 살지 않았습니다. 미끄러질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싫어지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길로 갔습니다. 결과는 항상 외로움과 영혼의 비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꼭 한번 이렇게 해보겠다고 우기면 하나님은 놔두십니다. 그리고 불에 데어서 아파서 눈물을 흘리거나 가시에 찔려 길이 아닌 그곳에서 상처를 받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6개월 동안 회개했습니다. 오늘 아침도 일어나서 오늘 설교할 내용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 이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나는 이 아이 때문에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아무에게도 얘기 안하고 혼자서 그렇게 여러 날을 씨름하면서 회개했습니다. 내가 아이를 이제껏 까지 양육한 것은 개 조련사의 양육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양육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깊이 혼자 괴로워하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내게 꽃처럼 다가왔는데 나는 너를 동물처럼 기르려고 했단다. 라고 말입니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접었습니다. 내 아이가 최악의 상황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든지 이 아이와 나 사이에 있는 이 사랑과 영혼의 연합, 이것을 파괴하면서까지 이 아이에게 이루어져야지 될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이 아이를 데리고 같이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갔습니다. 애가 어리둥절합니다. 가자, 오늘 아빠가 좋은 곳에 데리고 갈게. 그리고 건널목을 건너고 지하도를 지나서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리고 옷을 사주었습니다. 또 윗옷과 아래옷의 색깔을 맞추는 것은 제가 은사가 있거든요. 나는 지금도 여러분들이 윗도리 아랫도리 색깔이 안 맞는 옷을 입고 있으면 학대받는 느낌이 듭니다. 안 그러려고 그러는데 아주 그것을 죽이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지금도 여전히 힘듭니다. 심지어 거기에 양발까지 틀릴 때는 정말 힘들고 머리는 또 폭탄 맞은 것처럼 그렇게 하고 나타나면 정말 마음을 한참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옷을 예쁘게 코디를 맞추어주고 마지막에 양발,혁띠, 신발까지 색깔을 맞추어서 입혔습니다. 거울을 보면서 예쁘냐. 몸 둘 바를 모릅니다. 집에 가서 내가 사준 옷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면서 엄마에게 가서 엄마, 아빠가 사실은 나를 사랑하나봐.
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많은 날 동안 절제하느라 했지만 과도한 징계와 마음의 분노, 그리고 심한 폭언으로 아이의 영혼을 끊임없이 상처를 준 것을 오늘 아침에도 참회했습니다.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그 아이에게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당하게 하면서 징계를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훨씬 후에 일이었습니다. 결국은 저는 그렇게 아버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것처럼 자녀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지 저의 인격이 아닙니다. 얼마 있으면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는데 그래서 지금도 집에 들어가면 절 안아줍니다. 하루도 안아주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아빠, 힘드시지요? 아빠, 사랑합니다. 나도 너 사랑한단다. 얼마나 많은 날을 그 과도한 징계 속에서 숨 막히는 아빠의 기대 속에서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눈물을 흘리며 잠자리에 들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에입니다. 그래서 깊이 사랑해야지 됩니다. 그 후로는 단 한번도 성적표를 보자고 요구한 적도 없고 왜 이렇게 하느냐고 아이를 징계한 적도 없습니다. 아빠의 가장 큰 관심사는 네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람, 아빠도 사실은 너만 할 때 공부 잘 못했는데 신학교 공부하고 나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지금은 별로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이 되었단다. 걱정하지 마라.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그래서 제 평생소원이 그 선교사님 사모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일평생 한가지 밖에 안 가르쳤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의 일생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결혼하지 않은 여러분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 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여러분들에게 남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부모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IV. 결론과 적용
결혼한 형제자매에게 나는 말합니다. 아이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아주 사랑하십시오. 그 무엇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아이의 존재 자체라고 생각하고 아이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 아이, 나를 세계로 여기면서 자라게 하나님이 내려주신 이 유업이기 때문에 내가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양육하면 여러분들의 자녀는 이 세상에서 정말 굽음과 어두움의 그림자가 없이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꽃처럼 그렇게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이 아이를 드리나이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삼상 1:28)
I. 본문해설
예전에나 지금이나 아이를 낳지 못하면 여자는 시집에서 위치가 매우 불안했습니다. 우리 조선시대에는 시집을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이니 남편과 시집에서 자기를 버리지 않고 데리고 그냥 데리고 있어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를 못 낳는 게 아니고 아들을 못 낳는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히브리말로 아이를 “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벤허” 라는 영화를 들어 보신 적 있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벤”이 아들이란 뜻입니다. “허” 훌 가문의 아들 그런 뜻입니다. 이 “벤”이라고 하는 명사는 “바나” 라는 동사에서 나왔는데 “바나”는 집을 짓는 데 쓰는 동사입니다. 즉 “세우다” “건설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시집을 와서 남자와 함께 살면서 아이를 낳아야지만 그 집안이 비로소 세워진 것이지 둘이서만 사는 것은 집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또 세워진 것은 집만이 아니라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아서 그 집안에 세워주어야지만 그 집안에서 자신의 입지도 세워지게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이 한나는 잘 알다시피 사무엘의 엄마였습니다. 남편 엘가나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조강지처로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불행하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없으니 이 여자는 그야말로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살지만은 자기의 집을 세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가운데 당시에는 일부다처제가 허락이 되었습니다. 이 일부다처제가 구약에서 하락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들의 방종함이 이렇게 여자를 하나가 아니라 둘씩 셋씩 두려고 하는 욕망을 갖게 된 것이고, 조금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거기에는 섭리적인 뜻이 있어요. 왜 하나님이 그런 것을 살인의 죄나 이런 죄처럼 강력하게 징벌하시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셨을까? 이것에 대해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사람들이 매우 미약한 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방종함은 기뻐하지 아니 하셨지만 하나님께서 섭리가운데 그것들을 그냥 내버려두심으로써 거기에서 인류가 번성하도록 ‘경륜하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 해석을 우리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할 수 없지만은 그러나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어쨌든 간에 그런 이유로 해서 그 당시 풍습을 따라서 “브닌나” 라는 여자가 첩으로 들어왔는데 그만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첩이 위세를 부리려고 하겠죠. 한나는 말할 수 없이 마음의 고통을 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가나는 이 조강지처를 끔찍이 사랑했지만은 이 여자의 마음에 완전한 위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성화되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 거룩하게 성화되는 데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성화시키지만 마음을 쏟는 기도가 없다면 성령도 역사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겨져서 성화의 원동력이 될 수가 없죠. 그런 의미에서 이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의 역사가 우리의 영혼에 마음에 각인되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라고 아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기도가 되려면 그 기도가 매우 고상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기도, 교회의 부흥을 위한 기도, 세계 선교를 위한기도, 자신의 부패한 본성을 새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구, 이런 것들을 통하여 우리들이 성화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청구용 기도와 성화용 기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느 것이든지 마음을 쏟아 붓고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기도하다 보면 그것이 그 사람을 바꾸어 놓아서 변화 시켜서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닮아가게 만드는 거죠. 한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였지만 이 기도를 가지고 성소에 올라와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하고 왔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이가 생겨난 거죠. 그리고 그 아이의 이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무엘”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모세 다음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구약의 한 인물이 됩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를 지나서 왕정 시대로 흘러들어 가는 이스라엘 역사의 한 수문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 사무엘의 뜻이 “사무엘”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이 아이를 주셨다 이야기 입니다. 이아이가 젖 뗄 무렵이 되었을 때 이 아이를 데리고 다시 성소로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만약에 아이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면 그 아이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도록 이 아이를 바치겠습니다. 라고 서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야기야 쉽지만 그게 쉽겠습니다. 젖 뗄 쯤 되었으니 우리로 말하자면 돌 박이 쯤 되었을 덴데 얼마나 눈에 밝히고 예쁘겠어요. 그런데 그 아이를 친절하고 좋은 유모가 있는 보장도 없고 좋은 생활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데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와 헤어져야 하는 어머님의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가 집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갈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는데 어쨌든 집에서 개겨요 매일 늦잠자고 용돈 달라고 떼쓰고 밤늦게 진구와 돌아다니면서 들어오지 않고 그러면 엄마가 그러잖아요. 그럼 요즘 국방부는 저런 아이 안 데려가고 뭐하냐 하시면서도 영장이 나오면 잘되었다 하면서 세월이 흘러가면서 다가오면 군대 갈 때 한번 울지요. 빨리 군대가라하면서 군대 가면 혼자서 아들 있던 방을 처다 보면 눈물이 빙 돌아서 훌쩍이며 울지요. 마음이 가라앉을 만하면 보내준 옷을 보며서 또 한 번 울어요. 20살 넘어도 아들 볼 때 그런 마음인데 그 어머니가 걱정 마세요. 요즘 국방부 너무 잘해 준데요. 그런데도 엄마는 그런 마음이 아니죠.
그런데 이 아이가 한살이라고 생각하면 엄마 눈에 얼마나 밟히겠어요. 그런데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킨 거 애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바친 겁니다. 난 이 본문을 읽을 때 가슴이 애잔합니다. 아이를 길러본 어머님들은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아이가 눈에 밟혀서 어떻게 거기다 덩그러니 두고 내려오겠어요. 표현을 이렇게 하지만 하나님이 쓰시는 여자들은 독한 데가 있어요.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요즘 재미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건강에 그렇게 신경 써도 오래 사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점액질은 ‘성격 좋은 것도 없고 싫은 것도 없고 급한 것도 없고 느린 것도 없고, 미운사람도 없고 좋은 사람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런 사람이 오래 삽니다. 불꽃처럼 정렬을 다해서 나의 목숨을 다해서, 조기 단명합니다.
II. 아이를 주께 드림
얼마나 이 여자가 독한 데가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딱 하고 끊습니다. 너보다는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이 먼저다 하고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한 일은 아이를 주께 드린 것이 이였습니다.
A. 인생 최고의 섬김
이 아이를 주께 드리나이다. 이게 인생 최고의 섬김 입니다. 인생최고의 섬김이라는 게 뭐냐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쳐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이치를 한번 보십시오. 꽃이 떨어지고 잎이 시들고 다 말라서 죽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에 다시 살아납니다. 또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결실을 내서 열매를 맺습니다. 죽는 것 같아도 계속 다시 살아나면서 자기의 씨를 퍼트립니다.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죽는 것 같은데 그 새끼를 낳습니다. 그러면서 그 종이 계속 이어집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씨만 퍼트리고 종자만 번식 시키면 되는 게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씨를 퍼트려야 합니다. 그게 인생 최고의 섬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 하나님 앞에 잘 살고 행복하게 살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을 생각할 때 그 인생이 자기중심적입니다. 부모이면 모두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바쳐서 껌뻑 죽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동물은 예외 없이 자식이라면 껌뻑 죽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께서 비 중생자의 무정함을 설명하다가 아이를 버리는 부모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설명하는 한 예로써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이라는 게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자녀들은 영혼의 깊은 상처를 경험하게 되는 것 입니다. 부모가 폭행을 하고, 폭언을 하고, 이혼하는 것에 의해 자녀들의 가슴에 멍든 것이 아니라 자녀를 끔찍이 사랑해 주지 않으면 그 자체가 ‘멍’입니다. 자녀들이 어린 나이에 부모 없이 살아가야 한다면 부모는 나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과 마음을 아이들이 가지게 되면 그 자체가 돌이키기 힘든 인간성을 아이들에게 안겨주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식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아이를 길러서 먹여주고, 길러주고, 교육시켜 주면 끝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부모가 죽은 후에도 이 아이가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참 사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기여하면 살아가는 아이로 키워놓아야 합니다. 그런 적극적인 사명이 부모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 최고의 섬김입니다. 여러분은 많이 배우지 못해서, 훌륭한 부모님 만나지 못해서 고생도 많이 하고 교육도 별로 받지 못해서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셨습니다. 그 아이를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잘 양육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좋은 신앙을 심어주고 잘 교육받게 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갈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본보기가 무엇인지 비록 자신은 비록 위대한 인물은 못 되어도 정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자녀들에게 실물로써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 아이들이 그 부모들에게 없는 더 놀라운 교육의 기회 그리고 더 낳은 재능 더 뛰어난 지성 등을 소유해서 후일에 이 아이들이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해서 경제인이 되고, 정치적으로 성공해서 정치적 지도자가되고, 종교적으로 성공해서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 아이들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간다고 본다면 사실 절반은 여러분들이 칭찬을 받아야 할 몫입니다. 그 어머님, 아버지 아래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럴 수 없었던 사람인데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렇게 때문에 아이를 낳아놓고 부모의 관심사는 이 아이가 인생을 다 살고 나이가 먹고 죽는 때 까지 부모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일깨우고 교육하고 내가 모본을 보여야지만 이 아이가 일생을 방황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참 사람으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며 지순한 사랑으로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며 인생을 살다가 정말 아름답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게 그 아이의 인생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인생입니다.
“장가보내면 끝이지 내가 뭘 알아” 그건 어머니가 아니라 어미입니다. 짐승들도 그렇게 합니다. 시집보내고 나서 매일 찾아가서 간섭을 하라는 게 아니라 그 이후에 까지 그 아이가 정말 참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것을 내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B. 기도하는 어머니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이 아이를 가졌고 기도하면서 이 아이를 낳았고 기도하면서 이 아이를 양육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이 아이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보내고도 한나는 일생동안 기도의 사람을 살았을 것입니다.
아이도 각자의 일생이 있는데 아이가 생겨나기도 전에 목사로 바치는 일, 또는 사모로 바치는 일, 서원을 하는 일로 인해서 아이들이 방황을 많이 합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뱃속에 있는 아이를 하나님께 바칠 정도가 되면 한 참 있다가 아이를 하나님께 비차는 부모보다 더 많이 기도를 해야 하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줄 어떤 엄마들은 엄마로서 잔소리하는 시간에 10분의 1만 기도했어도 아이의 인생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나는 그런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가책을 주는 여자입니다. 분명이 유아세례줄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것과 같이 이 아이의 구원을 위해 힘쓰며 이 아이에게 우리의 거룩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며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기를 힘쓰겠느뇨?’했을 때, ‘아멘’으로 대답했습니다.
어머니로써 아버지로서 아이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아이의 인생을 떨이 물건 팔듯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은 천천히 해도 괜찮습니다. 그 아이가 하나님께 올바른 사람이 되면 여러분이 주님위해 살지 말라고 해서 안살 리가 없고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위해 제대로 기도하지 않아서 아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이 그 아이를 주님께 바쳐서 그 아이가 주님위해 산다고 하면 그 아이가 교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김성은 장로님 어머님의 이야기를 드렸어요. 별 달고 오는 아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앞치마를 걷어 올릴 때에 그 굳은살이 박인 무릎 우리가 이런 어머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 기도한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어거스틴이 방탕한 세월을 보내도 방황했을 때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가 이 사람을 그 방탕한 길에서 돌이켜 서서 기독교 역사에 최고의 교부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어요. 어머님의 기도의 힘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이를 위한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 아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대신 기도해 주고 그 아이가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로 도와주고 그 아이가 참회할 수 없을 때 대신 참회하고 그 아이가 감당할 수 없을 때 기도의 후원으로 그 아이가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 점에 있어서 아주 놀랍고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 일이였습니다. 얼마나 힘드셨겠습니다. 하루 내내 제대로 잡수지도 못하고 주무시지도 못한 체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면서 고문을 당하시다가 마지막에 피투성이가 되어서 150kg 이나 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이 있던 여자들 중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신실한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많은 인간들은 구경하며 따랐지만 이 여자들은 예수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계속해서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애잔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돌아보시면서 말씀하셨어요. 평상시에 하시는 말씀하고 다른 유언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왜 그러셨을까요? 너희가 운다고 해서 안지고 갈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다 이것은 내 몫의 십자가 이다 내가 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너희가 산다. “너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가슴에 손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녀 마음에 안 듭니다. 그럴 것입니다. 정말 어떤 때에는 십자가처럼 느껴지시죠.
그런데 가슴에 손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녀의 영혼이 너무 불쌍해서, 여러분 자녀가 그릇된 길로 가늘게 너무 안타까워서 도와주고 싶지만 도와줄 수 없어서 너무 가슴이 아파서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그 자리를 눈물로 흠뻑 적시며 자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 것이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는 동안 여러분들의 마음에서는 자녀를 향한 수많은 세속적인 기대만이 마음속에서 자라났지 정말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나이다 이 아이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내 평생소원은 이 아이가 진리와 함께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핍박 받는 선교사도 좋고 고난 받는 목회자도 좋고 작은 회사의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상관없으니 이 아이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게 언제이지 생각해보십시오. 대학입학시험 보러갔을 때 합격시켜달라고 교회에서 모여서 기도한 것 빼고 말입니다. 평소에 그렇게 마음아파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이 언젠가는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때 어머님의 어떤 모습이 아이의 마음에 아로새겨졌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집에 앉아서 월말쯤 되면 수첩을 내려놓고 다이얼을 돌리던 계주 엄마의 모습이 남아서 되겠습니까? 많이 배우시지 못하고 사회적인 지위 없었지만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던 어머님! 내가 고통 받을 때 철야하시고 내가 아플 때 울어 주시던 어머님. 그 어머니가 가슴에 깊이 남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무엘은 거기 남아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했습니다. 이러한 사무엘이 자라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었겠죠. 일생동안 하나님을 경배하는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일평생을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처럼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친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시종일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 이였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입니다.
C. 여호와를 경외하는 아이로 키워라
사무엘의 선생님이 엘리 제사장 입니다. 엘리는 이미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쯤에는 하나님의 신이 거의 떠나간 제사장 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제사장인 엘 리가 있는데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아름다운 삶은 스승 엘리에게서 배운 게 아닙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어머니의 영향입니다. 엘리 밑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이 아이를 주님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요즘 아이 많이 낳아야 한다고들 합니다. 아이를 낳아 놓았는데 신앙도 없고 정신이 다른데 가있는 녀석들을 낳았다고만 하면 하나만 낳지 그런 아이 넷 낳으면 선교에 도움이 될까요?낳아 놓으면 무조건 인해 전술로 되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정말 속속들이 꽉 찬 예수의 사람으로 교육을 시킨다는 전제하에 많이 낳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웨슬리의 어머니가 19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웨슬리의 회고록에 나는 철들면서 우리어머니 배가 꺼진 걸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 기도가 내게 아이를 많이 주소서. 이 아이들을모두 주님의 사람으로 기르겠나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정복하겠나이다. 그 어머니도 독한 여자잖아요. 이게 내 사명이라고 하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건 넷, 다섯 낳는 게 아니라 그 아이를 정말 예수의 사람으로 기를 수 있는 가정에서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도 주님의 사람으로 못 길러서 결국 대학가면 교회 다 떠나고 엉뚱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이러한 아이로 길러서는 부모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모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정말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 사랑해야 할 사람의 일 순위로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어머님, 아버지, 사랑하는 아들, 딸 이 사람들이 주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 까리따스의 사랑은 열매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정말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이를 깊이 사랑하고, 그 아이를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으로 길러내야 합니다.이게 부모의 사명, 특별히 오늘 본문에 의지 하면 어머니의 사명입니다. 자녀를 온전한 사람으로 교육시키고 양육시키는데 무슨 자원으로 그것이 가능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돈,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날마다 자기를 깨뜨려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자기 안에 까리따스의 순전한 사랑으로 꽉 차서 무엇을 행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 없이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그렇게 기를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미끄러진 체 그렇게 살아가면 자식농사 망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를 보면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은혜 떨어져서 옛날 기질 나와서 혈기나 부리고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집사라는 사람이 가서 술이나 먹고 들어오고 한 달이 멀다하고 집에서 싸우는 부모를 통해서 자식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어떻게 거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생겨나겠습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 잘하고 은혜가운데 사는 게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고 자기를 죽이는 어머니, 그 어머니 속에서 자식들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목표는 낳는 게 아니라 주님의 사람으로 기르는 게 목표입니다.
중간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물어 봅시다, 여러분들이 지금 어머니로써 자식을 기르는데 지금까지 오던 걸음으로 계속가면 그 아이들이 틀림없이 주님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겠습니까?아이가 회심은 했습니까?구원받았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진실하게 참회하고 그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되겠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의 생명에 접붙여졌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럴 때가 오겠지 아이가 어려서… 그런데 얼마 안 걸립니다. 곧 옵니다.
전 24살 때 집사가 되었습니다. 의도한건 아닌데 한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육을 책임지는 교역자 같은 삶을 강요받았습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설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되지도 않는 설교를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으니까 하나님께서 사역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어린아이들은 회심이 쉽습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친절하게 잘 들려주고 그리고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면 아이들이 울먹울먹하다가 울어버립니다.
“선생님.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어요.” 아이들이 펑펑 울면서 회심을 합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본질로 승부를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때 영혼도 영혼이고 지금영혼도 영혼이고 곤고한 건 지금이 더 곤고합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아이들 위해 목숨을 걸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집에서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라도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똑 부러지게 회심하냐? 잘 되지 않습니다. 된다고 하더라고 집에서 보는 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일치가 되지 않는데 교육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제일 쉬운 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입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만 3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 회심하는걸 보았습니다. 그림으로 그려주고 설명을 하는데 아이들이 회심을 합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교회 학교 교역자들에게 진짜 마음이 찢어지도록 간절히 바랬습니다. 이제 가정이 그이를 하지 못하니까 교회까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면 나는 다음세대에는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유치부에서 유년부로, 초등부로, 소년부로 올라오는데 점점 굳어져서 점점 회심할 가능성이 적어지는 겁니다. 중, 고등부 떠나고 대학생 가서 머리가 크고 정신 다른데 팔려서 연애하고 직장 다니고 이렇게 살면 오늘날 그렇게 전도해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돌멩이 같은 심장을 가진 오늘날 의 여러분주위에 사는 불신자들로 여러분 자녀들이 변해가는 것입니다. 왜 자녀의 회심을 위해 생명을 걸지 않으세요? 오늘밤 자녀의 영혼을 취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기회가 또 있을 거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러분이 10여년의 세월을 지내왔는데 안변화 되었습니다. 앞으로 10년 후면 변할까요?점점 어려워집니다.
정직하게 생각해 보세요. 회심하지 자녀를 둔 여러분 있죠. 금식해 보셨습니까? 단3일 이라도 내가 낳은 아이인데 회심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교회에도 안 나가겠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아이를 살리든지 저를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나 해 주십시오. 매달려 보셨습니까? 그랬더라면 벌써 회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아이들이 다 자라서 직장가지고 취직해서 여러분 주위에서 보지 못했습니까? 시집갈 때 되었는데 죽어도 불신자와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설득을 하고 눈물을 흘려요. 조금 더 일찍 흘려야 했습니다. 아이들 어렸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면 어떻게 하겠어요. 애야 너의 아이는 회심했냐고 물으시면 뭐라고 하시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 그게 저의 슬픔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밤을 이 아이의 회심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이 아이가 하나님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되기 위해서 제가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렸지만 이아이의 마음이 워낙 강퍅해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기도할 자신이 있는지 오늘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에 묻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집사님이 제가 심방 갔을 때 그런 간증을 해 주셨습니다. 아이가 중, 고학년 되었을 때쯤 집사님께서 전도훈련 받는데 4영리를 전하고 오라고 숙제를 내어주었어요. 그래서 아들에게 4영리를 전하며 난생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고난의 죽음과 영생 얻는 믿음에 관해서 전했습니다.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뒤떨어지지 않게 교육시키고 경쟁사회에서 쳐지지 않고 밥술이나 먹도록 자신을 교육시킨 엄마, 아빠 찾아가 봐도 그들에게는 남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고민 많이 했고 투자 많이 했습니다.
III. 결론과 적용
한 아이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운데 살고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인생의 꿈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십자가 아래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이 그 엄마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자식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울지 않는 엄마는 영적인 계모 입니다. 참 엄마가 아닙니다. 눈물 흘려 보십시오. 아이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느 날 여러분에게 상상치 못할 변화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아이가 회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교 믿는 형제와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거짓말로 라도 기독교로 바꾸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고 해도 되겠는데. 완강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를 위하여 눈물 흘리지 않는 어머니는 영적인 의붓어머니입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 그 아이와 함께 울며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그래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 그 아이를 위해 빌어야 합니다. 너무 아파하지 말고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아빠는 아이를 많이 사랑하고 엄마는 아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자녀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더 늦기 전에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많은 아이로 인한 고통이 여러분 자신에게로 노년에 돌아옵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마지막에 우리가 힘닿는 데로 주님을 섬기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수한을 정하시고 우리를 불러 가십니다. 자녀들을 놓고 보면서 애들아 나는 안심하고 아버지께 간다. 왜냐하면 내가 믿음은 너희에게 믿음을 가르친 사람은 나였지만 이제 살아가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나 보다 더 잘 사는 구나. 이제 너희들을 통해 하나님이 내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이 땅에서 이루실거야 우리 모두 잠시 후 새 예루살렘에서 만나자 그리고 안심하고 작별할 수 있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혀 사는 자녀들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6. 지식을 따라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을 보면 아내들이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와 같이” 라고 하는 부사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바로 그 앞에서 1절부터 6절 사이에 아내의 남편에 대한 도리를 염두에 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갖추어야 될 도리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는데 남편에게 복종할 것과 그리고 일체의 거룩한 단정함으로 남편에게 행실의 모본을 통해 감화를 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거룩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처럼 또한 남편도 아내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사도는 이 남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남편으로서 아내를 어떻게 대하여 하는가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하는가 하는 이것이 하나님과 그 남편과의 관계에 치명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생명의 유업으로 알고 귀히 여겨라. 왜냐하면 너희의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약에 아내를 올바른 방법으로 대하지 않으면 기도가 막히고 막힌 기도생활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공급이 끊어져 신자로서의 삶에 고갈이 온다는 것을 사도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II. 부부의 사랑
우리의 신앙의 삶은 단지 교회에 다니는 삶이 아니라 생명과 은혜에 넘치는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명과 은혜에 넘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대로 살 수 있고 우리가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하신 목적대로 살아갈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런 부부의 사랑, 특별히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바 남편이 아내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야 되는지를 오늘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A. 연약한 그릇임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그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휴크유스라고 되어 있는 이 그릇이라는 단어는 어떤 특정한 모양의 그릇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담는데 사용하는 모든 그릇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 그릇이라고 하는 단어는 성경에서 사명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 비유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교회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모든 성도들을 목적에 맞게끔 선택하셨고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개중하면서 교회 안에는 여러 그릇이 있는데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귀하게 쓰인 그릇, 그 다음에 편리하게 쓰인 그릇,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 한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무엇인가 용도에 맞게 사용되는 모습을 그려낸 것입니다. 이 그릇이 사명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그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 바울을 부르시는 장면 속에 더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받은 사도 바울을 귀한 사람으로 쓰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울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가 이방과 임금과 나라들을 나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택한 내 그릇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내의 삶을 남편의 삶에 종속된다고 생각됩니다. 사실 그것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해외 선교에 꿈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확실하게 자기를 해외선교를 위해 부르셨다고 몇 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간증을 하더니 그냥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그러니 이게 어떻게 이 모순점들을 해결할지 엄한 사람과 결혼을 했든지 아니면 사실은 해외선교를 위해 주신 그 꿈이 사실은 그 자매를 향한 뜻이 아니든지 혹은 이다음에 이루실 일인지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이처럼 여자가 가진 꿈은 독립적이지 않고 어떤 남성과 만나 결혼을 하느냐에 의해서 그 꿈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은 우리들이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양상을 보면서 여자에게 특별한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따라가게 마련이기 때문에 결국은 남자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여자는 거기에 종속되고 부속품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늘 여기에서 보여줍니다. 아내를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이 그릇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비록 그 아내와 남편이 결국은 같은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 사명은 각각 따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숙한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돕는다고 해서 아내를 자신의 종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의 일을 돕기 위해서 수종드는 사람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역시 남편과 함께 동일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바로 그 일을 위해 머리로 쓰임을 받고 아내는 남편과 같은 머리는 아니지만 또 남편을 온전케 해서 그 사명을 완수하는데 자기의 고유한 일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남편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자신에게 직접 주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내들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택하신 독자적인 그릇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가정의 가치가 많이 허물어진 시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이 가정을 바르게 세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든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많이 애를 씁니다만 잘 안됩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데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하나는 애완견적 사랑과 인격적 사랑입니다. 애완견적 사랑은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 사랑이 바로 애완견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드라마에 보니까 중고등부 사역을 할 때인데 형제, 자매가 너 이렇게 손 한번 줘봐 그러니까 여자가 손을 내밉니다. 그러니까 남학생이 손을 이렇게 얹었습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잘했다. ‘쫑!’ 이게 뭔 소리인가 했더니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 주인공 집에서 큰 개를 기릅니다. 그런데 가끔 그 주인이 개를 만나서 손을 내밀면 이 개가 손을 탁! 얹어주면 주인이 개를 잘했다. ‘쫑!’ 이 장면이 하도 여러 번 나와서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게 말하자면 애완견적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잘 들으니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혀를 날름대면 과자나 하나 주고 아니면 가짜 뼈다귀나 하나 물려주는 이런 게 바로 애완견적 사랑입니다.
많은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근본적으로는 아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이지만 아내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그 사랑이 아내를 먼저 자신과 함께 동등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서 살아가는 은혜의 그릇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쫑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다툼이 무엇인가 하면 나는 아내를 사랑하는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랑받을 짓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잘 들으면 사랑해주고 자기가 아내 이외에 누가 사랑이 있겠는가. 도저히 손아귀에 들어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바로 애완견적인 사랑입니다. 이런 애완견적 사랑은 베푸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 사랑에 희희낙락하는 생각 없는 애완견적 아내들도 문제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 좀 한번 돈이라도 타내려면 그냥 애교를 부리고 비위를 맞추고 관두십시오. 차라리 없이 사십시오. 벨도 없으십니까. 왜 그렇게 사십니까? 아내가 쓰겠다면 내놓는 것이 남편의 의무지, 벌어서 다른 살림을 차릴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사십니까? 남편에게 ‘생활비 주십시오.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 그럴 때 당당하게 하십시오. 당신은 그런 의무가 있습니다. 싸우지 말고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교가 안 되니까. 은혜 충만했을 때 잘 가르치십시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애완견적 사랑을 받으려고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면 무슨 사랑이 필요할까요? 인격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 인격적인 사랑은 서로를 고치려 하지 않는 그 사랑입니다. 그게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준 방식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아버지는 아주 도덕적이고 빈틈이 없는 삶을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데도 우리에게는 너무 싫은 아버지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식구들을 자기의 마음에 맞게 고치려고 아버지가 그럴 때 그때 그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인격적인 사랑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사랑입니다.
저는 가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저는 남이 받지 못한 소중한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았지만 그것 때문에 마음고생도 참 많이 했습니다. 그것은 내 몸에 어떤 의미에서 운명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하면 가끔 웃는데 난 여러분들이 아랫도리 윗도리가 색깔이 잘 안 맞으면 굉장히 힘들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이게 정말 안 고쳐집니다. 그래서 어떤 때 한동안은 일부러 내가 반항을 해본적도 있습니다. 일부러 양발은 하얀색, 바지는 파란색, 위에는 틀린 색을 해서 하나도 안 맞게 하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내 옷에서 눈이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고 다니니까 사람을 쳐다보듯 내가 색깔이 안 맞아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또 그런 것들이 그런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예민하고 섬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도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잖아. 이럴 때 그게 왜 당연할까?
요즘도 제가 2월서부터 3,4,5월 넉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묵상하는 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도 집요하게 상상을 하는데 그것을 계속 묵상하고 교리를 내 자신의 삶에서 적용하면서 정말 나는 짐승 같은 사람이고 그리고 내가 어쩜 이렇게 몰랐을까? 이러면서 제가 매일매일 살아갑니다. 한권을 쓰려고 정리를 했는데 한권 갖고 안 되고 열권으로 나누어서 써야지 되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이렇게 세밀하게 분석해가는 성향도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 집사람이 미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루는 사택에 이사를 왔는데 사택 자체에 대해서는 교회를 지을 때부터 내가 별로 기대를 안 하고 그냥 빨리빨리 칸막이해서 쓰는 것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어째든 사택이 좋지는 않지만 색깔 전체가 브라운 색깔입니다. 그래서 약간 나무 색이 나는 밝은 그런 색깔입니다. 그런데 식탁을 어디서 얻어왔는데 시퍼런 식탁입니다. 그런데 이게 집에 들어갈 때마다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에 나가면 한 30만원만 주면 식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사놓을 텐데, 그 정도 여유가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이제 알뜰하니까 그런 것인데 그것을 그냥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제안을 했습니다. 안사겠다는 아내의 마음을 내가 바꿀 수는 없고 여기다 우리 이렇게 집안 색깔과 비슷한 밝은 브라운 색 보자기를 씌우고 유리를 깔자고 내가 아주 양보해서 이야기를 해준 것인데 그렇게 하면 밥 먹다가 천에 묻어서 지저분해지니까 유리 안 깔고 파란채로 쓰겠다고 합니다. 옛날 같았으면 제가 아내 잠깐 외출한 사이에 가구점에 주문해서 확 바꿔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비인격적인 것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서 아내들은 감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대한 자신의 주권이 침범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면 매일 그 탁자를 보면서 생각을 합니다. 나는 계속 집에 갈 때마다 학대를 받는 것입니다. 아내가 학대하는 게 아니라 색깔이 나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만 그러면 모르는데 집에 가끔 오는 사람들이 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집안에 이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누르는 연습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모님, 목사님하고 사시기에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렇게 세심하고 꼼꼼하고 그렇게 예민하신 분하고 어떻게 사십니까? 우리 집사람이 집에서는 그렇게 예민하지 않으십니다. 사실은 그 말을 할 수 있기까지 내가 얼마나 자기 죽음의 길을 가는지 모릅니다. 본인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없이 자기 죽음의 길을 간 끝에, 자기 포기의 길을 간 끝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한참 힘들 때는 들어올 때 탁자에게 눈을 안 두고 저쪽을 보고 들어옵니다. 인격적인 사랑이 그렇게 힘듭니다. 애완견적 사랑은 돈만 있으면 되고 기분만 좋으면 되는데 인격적인 사랑은 내가 마음에 안 들어도 나를 꺾고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그 사람을 믿어주고 내 것이 너무 소중하고 귀해도 그를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 없이는 인격적인 사랑이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사랑할 때 인격적으로 사랑해주십시오.
집에서 또 부부간에 꼬박꼬박 높임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싸울 때도 존댓말로 싸우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존댓말 쓰는 사람을 비참하게 갈구어 보십시오. 얼마나 잔인하겠는지, 차라리 야, 너 이따위밖에 못해. 이렇게 하는 것이 낫지, 이렇게 밖에 못하시겠습니까? 당신의 인간성이 겨우 이것밖에 안 되시겠나이까? 그렇게 하면 얼마나 짓밟히는 느낌을 받을 것인지, 중요한 것은 인격 대 인격이 통하는 이런 인격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그것을 요구하십시오.
가끔 보면 집에서 때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아내의 책임이 30%가 넘습니다. 그것은 남편의 인격을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맞으면서 살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참고 이해하고 그래도 가정에 폭력이 행사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단호하게 남편에게 의사표시를 분명하게 해야지 됩니다.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목사인데도 그리고 그 사람들을 주례하는 사람입니다. 오죽했으면 너희 둘이 결혼했는데 남편이 때리거든 일단 남편을 감옥에 집어넣고 그 다음에 얘기하라고 오죽하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내버려두면 폭력이 계속됩니다. 습관적인 폭력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아내가 그 비인격적인 폭력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방배동에 살 때 골목에 사는 어느 부인도 준수하게 생긴 부인인데 남편이 그렇게 때립니다. 그래서 한번은 그랬다고 합니다. 그렇게 남편이 때리는데 어떻게 사십니까? 그랬더니 부인의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몰라서 그렇지 잘해줄 때는 얼마나 잘해주는데, 잘해줄 때 그게 애완견적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집에서 그런 폭력을 행사하여서 비인격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에 깊이 참회하십시오. 아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아내는 예수의 몸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그 몸을 그렇게 때릴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몸을 때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폭행하는 것인데 그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폭행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서 간곡히 부탁하는데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남편들이여 은혜를 받고 그리고 오늘 가서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정말 남자다운 남자는 무릎을 꿇을 때 무릎을 꿇을 줄 아는 게 진짜 남자입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십시오. 그리고 다시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십시오. 그리고 필요하면 자녀들에게도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자녀들의 마음속에서 그것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릇은 그런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이게 연약한 그릇입니다.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더욱더 인격적인 사랑이 필요하고 비인격적일 때 이 그릇이 망가집니다. 여러분, 집에서 그릇을 꺼낼 때 집에서 늘 쓰는 쌀바가지나 고무다라 같은 것은 아무렇게나 막 집어던지고 발로 차고 다니면서 저쪽으로 이동하기도 합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것을 보니까. 그런데 유리그릇 같은 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유리그릇을 얇게 해서 꽃 모양으로 잘 빚어진 유리그릇은 얼마나 조심해서 다루게 됩니까. 아내가 바로 그릇은 그릇인데 그런 고무다라나 아니면 쌀바가지가 같은 그런 그릇이 아니라 연약한 그릇입니다. 잘못 다루면 깨어집니다. 그런 그릇이기 때문에 오늘 성경에서 아내가 사명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지만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아내가 하나님의 지으신 대로 목적에 맞게 사명에 합당하게 쓰이기 위해서 남편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인격적인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내를 대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 아내는 안 약합니다. 체격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아내는 산소 같은 여자입니다. 산소가 아니라 산~소, 진짜 이렇게 강한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 친구 목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인데 목사님은 바퀴벌레가 나타나면 여보, 여보, 저 바퀴벌레, 그러면 부인이 와서 손으로 탁! 때려잡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강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본질적으로 여성은 약합니다. 그 약함을 깊이 헤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그런 경험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심지어는 아버지도 없이 어머니 홀로 자녀를 키우신 어머니가 있을 것입니다. 눈물 한 방울 안 보이고 그렇게 강하게 키운 어머니가 어느 날 남몰래 눈물을 흘린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약한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약함을 보일 수 없을 뿐이지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서 그 아내를 다루어주는 것, 사랑하는 것, 이게 남편의 도리입니다. 그런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성화의 과정을 계속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게 남편의 갈 길입니다. 더 많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냥 넘어갑니다.
B. 생명의 유업을 공유함
두 번째는 “생명의 유업을 함께 얻을 자” 그랬습니다. 자, 이제 이렇게 설교를 듣는 여러분 남편 가운데는 아내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니까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경우와 아직 아내가 불신상태에 있는 경우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남편인 여러분들의 아내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아내라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배나 더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내가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하나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안에서 그 아내를 깊이 사랑하면 하늘나라의 상급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내 사랑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아내의 머리이신 예수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함께 구원을 받고 예수의 몸에 접붙인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형제가 교회 안에서 일생을 끊임없는 자기 복종 가운데서 자신의 안일과 행복은 잊고 연약하고 고통 받는 지체들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섬기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칭찬과 사랑을 받겠습니까? 아내가 바로 구원받았을 경우에는 그런 이치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내를 백번 사랑해야지 됩니다.
여러분, ‘가정 폭력’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 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세계적으로 아내가 맞고 사는 남편이 상당히 많고 우리나라에도 그 여자에게 맞는 남편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한번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보면 아내가 자기를 때릴 때는 거의 인사불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맞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여자가 제 성질에 못 이겨서 기가 넘어가서 거의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편도 그렇게 맞는 것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아내가 그런 이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믿으며 살려고 하는 여러분들을 기도하고 여러분들을 돕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시려고 할 때 여러분들을 섬기려고 하니 그 아내가 얼마나 귀한지 생각해보십시오. 미모는 영화배우 같지 않고, 돈은 많지 않고, 처갓집에서 유산을 물려받지 않아서 남편인 여러분들을 부유하게 해주지는 않고, 공부는 박사처럼 잘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함께 생명의 유업을 나눌 자로 하나님이 그 아내를 선택하셔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수의 몸에 접붙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사랑해야 합니다.
또 한편 여러분들의 아내가 아직까지 예수를 안 믿고 홀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가정 전부를 예수 믿게 만드셔서 온전한 가정을 삼으시고 싶어 하시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아내의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으니까 남편인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 믿게 만드셨습니다. 혹은 먼저 여러분들을 회심시키고 변화시키셔서 참 신자의 가는 길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내에게 예수를 믿고 변화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지만 신앙이 없는 아내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직접 생각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을 말씀 속에서 뵈올 수 있지만 불신상태에 있는 아내는 남편인 여러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남편인 여러분들의 신앙과 인격을 통해서 그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인 여러분들이 얼마나 더 아내를 사랑하고 그가 진정으로 구원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희생해야지 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 먼저 믿은 게 죄입니까? 먼저 믿은 게 죄가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사명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들이 남편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변화를 받았으면 아직까지도 변화 받지 못하고 있는 아내, 아직까지도 예수 믿지 않고 있는 아내에게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를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어떻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해야지 되고 말씀을 아는 지식 속에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 은혜의 물을 흘려보내서 아내에게 남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줄 때 그때 그 가정이 예전에 우리들이 경험했던 상처를 극복하고 자녀들에게 정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그런 아름다운 가정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III. 지식을 따라서
사도는 이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런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져야지 되는지를 말하는데 “지식을 따라서” 라고 이야기합니다. 동거하라. 그러면 이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A. 하나님께 대하여
우선 첫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실은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에 대입하면 안 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 이 아버지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성품을 함께 가진 아버지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성이 없으신 것입니다. 언어적으로는 남성 형을 쓰지만 그러나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진 언어의 소산이고 원래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깃들어져있습니다.
희랍 신화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원래의 인간이 이렇게 하나였는데 쪼개졌다고 봅니다. 그래서 원래 대부분의 사랑은 남성과 여성이 이렇게 한 몸이었는데 이게 쪼개져서 남자와 여자로 갈라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그런가 하면 그 신화를 믿는 게 아니라 그 신화 속에 고대 사람들에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그게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인간관과 비교를 해보십시오. 신들이 이렇게 보니까 인간들이 점점 고상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받게 되어있으니까 그래서 인간을 반 토막을 바꾸어놓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많은 인간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놓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렸을 때는 문제가 안 됩니다. 가서 교육을 받으면서 인간으로서 고상해지는데 이게 성을 느낄 나이쯤 되면 고상해지려고 하는 높은 목표보다는 이게 짝을 찾기에 정신이 팔립니다. 이래서 인간이 고상해지지 못하도록 신들이 조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게 남성 남성으로 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갈라놓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성 여성으로 되어 있어 갈라놓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고대사회에서는 동성애가 아무런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남성인데 여성을 안 찾고 남성을 탐닉하고 남성을 찾아가는 사람은 원래 남성 여성으로 된 사람이었고 소수지만 여성인데 때가 되었는데 남성을 안 찾고 여성을 찾아갑니다. 레즈비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성 여성이 쪼개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소수고 그 다음에 이쪽에 남녀로 된 사람들은 다수라고 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동성연애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이것을 아주 죄악시하고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생각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럽고 본성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는 그런 것이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신화는 우리들이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보면 신기한 게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남성은 남성이고 여성은 여성인데 그 남성 속에 여성 호르몬이 흐릅니다. 여성 속에 남성 호르몬이 흐릅니다. 그런데 그 비율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여러분 나이가 들면 머리가 벗겨집니다. 자꾸 머리털이 자꾸 빠지는데 언젠가는 벗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냥 굉장히 신속하게 벗겨지고 그래서 이발소에 갈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 벗겨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이가 꽤 들었는데도 안 벗겨집니다. 그게 호르몬하고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면 이게 어떤 사람이 머리가 잘 벗겨지는가 하면 가부장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머리가 잘 벗겨집니다. 이게 공짜를 좋아해서 벗겨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 머리가 벗겨진 사람보고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이게 공짜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고 그런 사람, 남성 호르몬이 많으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성에게 남성성을 과시하는 그런 사람, 이런 가부장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잘 벗겨집니다. 그리고 살살 비유를 잘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머리가 덜 빠집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있는데 머리가 다 벗겨져서 진짜 가르마를 탈 머리가 없을 정도로 벗겨집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 머리를 볼 때마다 민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엄마에게 물어봤습니다. 엄마, 아빠는 머리가 하나도 없고 다 벗겨졌어. 다른 아빠는 안 그런데 아빠는 나이도 젊은데 왜 다 벗겨져, 그러니까 엄마가 아빠는 뜻이 크셔서 생각이 하도 많으셔서 그렇게 벗겨지시는 것이란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그래, 그런데 엄마는 아무 생각도 안 해. 이게 신경을 많이 쓰고 그래도 벗겨지지만 근본적으로 호르몬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인체 안에는 두 호르몬이 함께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면서 남성에게도 여성성을 여성에게도 남성성을 주시지만 동시에 이 두 사람이 본성적으로 구분이 되게 만드셔서 하나님 안에 하나로 통합된 것을 하나로 나뉘어서 가지게 하심으로 두 사람을 합쳐서 그 둘이 잘 살면 하나님의 성품을 자손들에게 잘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도구로서 남편과 아내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가 되는가 하면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보실 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건너뛰고는 좋은 남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가정의 평화가 얻어지는 방법이 둘이 있는데 한사람이 힘으로 제압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정을 권위와 폭력으로 휘두르던 때는 그것에 의해서 제압되었습니다.
또 반대로 아예 그 아내가 어떤 방식에도 결코 죽지 않습니다. 산소같이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남편이 꺾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항상 가정에 상처를 남깁니다. 절대로 가정에 평화해도 평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식들에게 깊은 상처와 왜곡된 가정관을 남깁니다. 더 좋은 방법은 아내와 남편이 각각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깨트리면서 하나님을 알아갈 때 거기에서 지식이 생겨나게 되고 그 지식의 빛 아래서 살아갈 때 가정에 평화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먼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아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아내를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아내를 하나님께서 그릇으로 삼으셔서 사명을 주신 것을 존귀하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B. 아내에 대하여
그 다음에 이제 필요한 지식은 아내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 아내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은 두 가지로 다시 나누어지는데 보편적인 아내입니다.
1. 보편적인 아내
이것은 말하자면 결혼해서 한 남편의 아내가 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사람됨, 그러니까 결혼해서 한 남편의 아내 된 일반적인 여자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제 남성과 여성은 아주 현저하게 다릅니다. 다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복잡하게 두 종류로 만들어놓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몸의 생김새부터 틀리고 다 틀립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을 모르던 선조들도 남녀를 설명할 때 음양의 원리로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틀립니다.
여성들의 경우는 일 중심적이라기보다는 관계 중심적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남편과 함께 쇼핑을 하고 영화구경을 하고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앉아서 오순도순하고 도란도란하며 사는 그 관계를 더 그리워합니다. 남성의 경우에는 진취적이고 개척적입니다. 여성의 경우에는 새로운 땅을 넓히고 사업의 지경을 넓히는 것보다 지금 이루어진 일들을 잘 돌보고 가꾸는 것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자기 의지적이 아니라 가정이 이렇게 안정되고 화목해졌으니까 아! 이제 좀 하면서 기지개를 펴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그런데 아내의 경우에는 이제 가정이 화목하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그리고 남편을 잡아당겨서 자기의 가정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성향의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남편은 집을 한 채 더 사야지 행복할지 모르지만 아내는 집 한 채를 더 사서 남편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는 자기 뜻에 따라서 이 앞뜰에 자기 원하는 대로 꽃을 심고 화초를 가꾸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여성입니다. 그런 여성에 대한 이해를 갖고 그 지식의 빛 안에서 자신의 아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계가 나왔는데 그래도 행복하게 사는 가정이 어느 가정인가 했더니 아내가 여성으로 남성화된 가정보다는 남편이 약간 여성화된 가정이 훨씬 행복한 가정이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한번 저희 친구 집에 갔는데 며칠 째 밥을 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랐기에 왜 그러냐고 했더니 어머니가 시골에 내려가셨다고 합니다. 아니! 어머니가 시골에 내려가셨는데 네가 왜 밥을 굶는가, 그랬더니 내가 어떻게 부엌에 들어가느냐고 그래서 잘났다. 그리고 부엌에 가보니까 라면도 있고 별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끓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랬습니다. 너 그렇게 살지 마라. 야, 진짜 너를 누가 데려갈지 걱정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애의 아버지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대로 보고 배운 것입니다. 가부장적이고 아내를 이렇게 제압하려고 하는 그런 남성들은 90%이상이 아버지입니다. 돌연변이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으로서 부부가 이루고 사는 삶은 자기 때만 문제가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그 씨를 그대로 뿌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올바로 보여주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여성을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들도 마찬가지도 남성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여성을 배워야 할 필요가 더 많습니다. 여성에 대해서 좀 배우십시오. 이렇게 배우고 알고. 남자들은 자기 생일도 잊고 살아갈 때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만 아내들은 남편이 3.1절 잊어버린 것은 상처가 안 되도 자기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린 것은 상처가 됩니다. 6.25가 며칠인지 몰라도 자기와 뭔가 관계된 날은 잊어버리면 상처를 받습니다. 그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도 여자들이 묻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안 납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뭔 날인가? 곗날인가, 그랬더니 당신이 나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날, 여자들은 이런 식으로 수도 없이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기억해줄 때 아내들은 행복해합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예외가 없습니다. 모두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아내 된 여성들의 생각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마음과 모든 것들이 아내와 연합된 가운데 동거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2. 개별적인 아내
두 번째는 이제 보편적인 아내가 아니라 개별자인 아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내가 사는데 모든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아내와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아내에 보편성도 있을 것이지만 개별성도 있을 것입니다. 보편의 그 틀 안에 내 아내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보편적인 모든 것 속에 다 들어가 있는 아내는 없습니다. 뭔가 뿌리는 다 같지만 개개인이 다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내입니다.
(예화: 어느 부부가 결혼한지 5년이 되었지만 남편이 무뚝뚝하여 하루에 별 말을 하지않고 살아가는데 어느 날 외식을 시켜준다기에 갔더니 물어보지도 않고 보신탕집에 데리고 가서 아내가 못 먹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남편 혼자 맛있게 먹는것은 아내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
아내가 특별히 힘들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특별히 싫어하는 게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잘 들으십시오. 특별히 싫어하는 게 있는데 그것을 계속 하면 다른데서 아무리 열배로 잘해주어도 빛이 안 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마음이 계속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는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보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안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그러는데 하나님 불순종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계속 불순종해서 자기는 아프게 하면서 봉사를 열심히 하고 돈 많이 내고 그런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것을 그만 두는 것입니다. 아내가 특별히 힘들어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주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부부가 이혼을 했습니다. 이혼의 이유는 성격차이로 이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단서가 부부생활 할 때 남편이 계속 불을 켜고 부부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그 속에서 무한한 수치심을 느낍니다. 아내가 사실은 그렇게 수치심을 느낄 필요도 없을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 계속해서 강요합니다. 그게 정신병처럼 뿌리가 박혀서 미움이 생겨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여러 사건들이 연결이 되면서 이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자기의 아내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천천히 사랑 속에서 타이르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다른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면 고기 못 먹던 사람이 고기를 먹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성향들이 변화되듯이 아내의 태도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아내를 아는 지식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어느 남성들은 목사님, 그거 대게 복잡하네요. 사랑이 없으면 복잡해보이고 힘들어 보이지만 사랑이 있으면 힘들어 보이지 않고 쉽습니다. 사랑의 근본은 오늘 여기에 나오는 것처럼 귀히 여기라, 소중하게 생각하여라. 왜 생명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요, 또 연약한 그릇으로서 너와 함께 인생을 살게 하시는 짝이니까 소중하게 생각하라. 귀하게 생각하라. 가정을 하찮게 여기고 아내를 학대하는 사람들에게서 고상한 영성을 본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내 속에서 그 안에서 존재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아내에 대해서 계속 연구해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일까? 하나씩 배워가면서 그런 지식을 따라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뭐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동거하라. 동거한다는 말은 같이 산다는 뜻인데 그냥 같이 생활하는 것을 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동거라는 것은 마음과 정신이 연합된 가운데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연합된 가운데 함께 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연상해서 항상 가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아주 쉽습니다. 교회에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어중이떠중이 모두 모여서 자기의 이익과 맞아떨어진 한도 내에서 그 교회에 함께 모여 있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동거하는 신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의 동거가 아닙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동거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하나님이 한 목회자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깊이 깨트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께 접붙여져 그래서 꿈과 모든 소망도 이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고백하며 예수께 합치됩니다. 그 목회자에게 은혜를 받은 성도가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또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 나를 통해 당신이 사시고 싶은 삶을 살아주십시오. 자기를 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와 접붙임을 받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이들 속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사랑과 일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진정한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사연을 다 알지 못해도 그 속에서 주님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주님의 기쁨을 함께 경험하며 주님이 가고자 하시는 길로 그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이것을 축소해서 생각하면 그게 바로 가정입니다. 그 가정이 바로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같이 살기만 하는 그런 가정은 가정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꼭두새벽에 출근하고 밤중에 와서 쓰러져 자고 아침에 가족들이 눈뜨고 보면 벌써 일하러 나가고 없고 그런 식의 가정은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신적인 연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친구가 남자를 만나서 얘기했습니다. 이보게, 이번이 아마 자네 결혼 20주년이지. 아! 그래 벌써 20년이 흘렀어, 어떻게 하려고, 우리 아내에게 좋은 선물을 하려고 하지. 그게 뭔가, 호주 여행을 시켜주려고, 야! 정말 잘했다. 그런데 20년 살았는데 그렇게 큰 선물을 주면 30주년은 어떻게 하려고, 그때 가서 데리고 와야지. 정말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는 함께 있을 때도 느껴지지만 없을 때 느껴집니다. 여러분들이 집을 멀리 떠났을 때 아내가 보고 싶어지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떤 일로 인해서 남편과 헤어졌을 때 남편이 그리워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그리움이 없으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동거하라고 가르칩니다. 정신과 마음이 온전히 연합된 가운데 동거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나는 참 그릇이 이만한 교회를 할 그릇이 안 되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너무 큰 교회를 맡겨주셨다는 느낌을 요즘 많이 합니다. 옛날에는 안 그랬습니다. 교인 1-2천명 그래봐야 한 품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정말 날마다 하나님 앞에 눈을 감을 때마다 하나님, 저를 정말 너무 지나치게 과대사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만한 위인이 못됩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제 아침에도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많은 여러분들을 거느릴만한 그런 인격과 깊이나 이런 것을 가진 사람이 못 됩니다. 인격적으로 용렬하고 지식적으로 미천하고 그리고 정말 유리그릇 같은 사람이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장군 같고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날마다 나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의 부족함이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거나 교회에 누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 때는 견딜 수 없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IV. 결론과 적용
교회가 어떻게 연합을 이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목회자가 날마다 죽어야 됩니다. 혈기부린 것은 5분밖에 안 되는데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50년 동안 남습니다. 목회자만이 그렇습니까? 교회의 일군들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거나 마음에 안 들고 지체들끼리 서로 다투고 마음이 상한 일이 있을 때 다투어서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먼저 은혜 받은 사람이 참고 또 참고, 견디고 또 견디고 그 모든 일이 목회자나 교인들에게는 자기죽음의 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교회의 실제적인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원리적으로는 이미 일치가 이루어졌지만 실제적으로 그런 자기희생과 양보, 그리고 철저한 복종과 자기 죽음 속에서 교회가 일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각각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고 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누가 그렇게 했는지 대부분 사람들에게 잊힙니다. 주님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십니다. 누가 당신의 몸을 위해서 더 많이 죽었는지 그리고 누가 당신의 몸을 위해 당신을 더 사랑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주님의 몸을 보양하려고 자기희생의 길을 걷고 자기의 죽음의 길을 걸었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 희생을 통해서 교회가 실제적인 일치와 연합을 이루는 것처럼 똑같이 가정도 그런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불행하게도 이혼을 한 어느 자매가 저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한다는 책을 읽고 가정시리즈를 듣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사님, 제가 가정이 깨트려지기 전에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더라면 아마 깨트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깨지려는 사람이 없었을 때 나도 깨지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부서졌습니다. 그러면서 하염없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깨트림 속에서 남을 세우는데서 자아의 실현을 이루어가는 것이 가정이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남편이라는 완력과 재산, 그리고 힘들을 이용해서 아내를 억누르고 자기 질서에 복종케 함으로서 자기만족을 구가하면 가정의 목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굉장히 가슴아파하시는 것이고 남편인 여러분들이 그런 식의 삶을 살면 여러분들이 생명력 있는 영적생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선심을 쓰는 후한 남편이 되기 전에 유명한 남편이 되기 전에 먼저 착한 남편이 되십시오. 착한사람, 작은 일에 감동받을 줄 알고 마음 아픈 일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눈물 흘릴 줄 아는 착한 남편, 그런 남편이 연약한 그릇인 아내에게 어울리는 남편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든지 이 가정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면서 남편이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주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해야지 됩니다. 주님이 교회에 베푸신 그 사랑은 대가가 없는 사랑입니다. 구원에서 멀어져 방황하는 인간들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예수께서 나를 위해 생명을 버렸고 이 은혜를 주셨으니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아내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가정의 대의입니다. 이런 속에서 그대들의 가정을 세워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7. 네 자녀를 위해 울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을 때에는 그때가 유월절 이였습니다. 유월절을 유대인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 이였습니다. 그 유월절에 예수그리스도를 죽이지 말자고 종교 지도자들이 여러 번 숙의를 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그때에 그 일을 하면 그들이 보기에 불순분자들이 책동을 일으켜서 커다란 민란이 일어날까봐 걱정을 했기 때문에 이들은 유월절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죽이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이 이스라엘을 위해 대신 죽어갔던 그 유서 깊은 유월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죽게 하심으로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어린양의 희생이 예수의 희생으로 이어져서 신약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국 예수님께서는 체포 되셨고 그리고 이들의 본래 계획과는 다르게 유월절 때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그 사람의 목숨을 끊기 위한 형벌집행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형벌을 당하시기 위해서는 형식적이나마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여야 마땅한 죄인이라는 재판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의 앞에 보면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지만 유대인들은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를 죽이라고 고함을 치게 되었고 그 엄청난 인파의 외치는 고함소리는 그만 빌라도를 압도하고 말았습니다. 예수의 무죄를 빌라도도 확신하였지만 예수님 한사람을 죽이고 폭동을 일으키려는 군중들을 잠잠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에 부합한다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빌라도가 재판장으로써의 양심을 속이고 죄 없으신 예수그리스도를 유죄판결을 하여 사형언도를 내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기 전에 사형언도가 확정되자 예수님은 브라이도리온 이라고 하는 왕궁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 가셨고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정말 생애에 다시없을 치욕적인 구타와 침 뱉음과 채찍에 맞음 이런 형벌들을 당하게 되십니다. 거기에서 많은 매질과 그리고 채찍질을 당하신 후에 치욕스럽게도 예수님께서는 옷을 벗기고 왕의 모습을 흉내 내기 위해서 홍포를 두르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제 죄인 예수를 왕의 모양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이 유대인의 왕의로 나신이 라고 하는 명패를 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고난을 당하신 후에 당신이 매달리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이 예수님께 너무나 힘겨운 일이였기 때문에 그 십자를 구레네 시몬에게 강제로 매개하여 지게하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쓰러지실 듯이 형장을 향해 걸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때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갔고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간 많은 무리들과는 구별되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II. 돌이키시는 예수님
이들은 백성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던 여자들이였고 그래서 그들은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A.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그렇게 끌려가던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돌이키셨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돌이키시는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렇게 돌이키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걸어갔던 그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였습니다.
여기서 돌이켰다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시다가 당신 자신의 몸을 돌이켜서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에 하신 행동이라면 우리들이 그렇게 주목할 만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시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자꾸 쓰러지시니까 십자가조차도 지실 기운이 없어서 예수님 홀로 온 몸에 채찍을 맞고 가시면류관을 쓰신 체 쓰러지실 듯이 언덕을 향해 오르고 계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을 가지신 사람으로 오셨는데 얼마나 기운이 진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상당히 긴 기록동안에 예수님이 한 말씀도 말씀을 하시지 않은 것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은 십자기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던 길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다가 그것도 지실 힘이 없어서 쓰러지시며 홀로 올라가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무슨 기운으로 당신 자신의 몸을 돌려 따라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셨으며 바라보신 그것은 무슨 목적인지 하는 것입니다.
B.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 따라오는 사람들을 보셨는데 그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을 바라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그 힘드신 시간에 당신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여인들에게 무언가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서 기운이 진하여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시간이었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여자들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실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이나 기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할 말씀이 많으십니다.
여러분 자신도 자신을 돌아보면서 참 할 말이 많으실 것입니다. 하물며 여러분 보다 완전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 죄,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 섬김 이런 모든 것들을 보실 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시겠습니까? 전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인간인데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애를 쓰고 헌신하느냐고 칭찬해 주고 싶은 말부터 시작해서 어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렇게 생활을 하느냐고 나물하고 싶은 사람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하고 싶은 많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참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언제나 여러분들이 살아가시는 삶을 보시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이 참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 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고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은 꿈이나 환상이나 기적 같은 것을 통해 즐겨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성경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그리고 우리를 설복하셔서 우리에게 알아듣게 하십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매우 열심히 이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성경을 통해, 책을 통해 혹은 설교를 통해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권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자신의 음성을 우리의 마음속에 들려주시지만 많은 사람들은 못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무리 많이 말씀하셔서도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달라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귀는 뚫렸어요. 눈이 열어서 성경도 봐요.’ 들리기는 들리고 보이긴 보이는 데 이것을 해석을 해서 내 마음속에 전달을 해주는 인간의 지성이 잠을 자는 있는 것입니다. 지성이라는 것은 영혼의 기능입니다.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고함을 치신들 알아듣겠냐는 말씀입니다.
C. 주님을 사랑하는 영혼
언제 가장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느냐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때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깊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을 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해석되어 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음성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집니다. 그 음성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고 그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질 때 은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의 감화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꺾어집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기쁨이 우리 안에 생겨납니다. 예전에 그런 은혜를 못 받았을 때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저히 그 말씀이 들릴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도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십니다. 항상 매일매일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고의 숙제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영혼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어떻게 살다가 왔느냐 주일날 주님의 말씀이 들리고 안들리고 좌우하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 대한 염려와 사랑으로 가득 차서 육욕을 따라서 시달리면서 삽니다. 영혼이 다 부패하고 더러워 졌습니다. 귀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눈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보여주십니다. 가슴이 이걸 해석을 해주시 않습니다. 그래서 눈뜨며 잠이든 사람같이 비취기는 비추나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나 마나 마치 눈뜨고 잠자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이 왔다 가나 마나 똑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II.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 이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누구를 위해 그렇게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을까요?
A. 참된 예수사랑
그 앞 절에 보면 “그를 위하여”그랬으니 여기서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예수님을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무리들 이였습니다. 따라가던 백성들은 구경을 위한 사람들이였는데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따라가던 여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들 보고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 여자들이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갈 때 다른 사람들처럼 구경하며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울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비난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에 못 박히신 그것 때문에 눈물이 많이 흐르게 될 때 누가 여러분의 그런 종교적인 감정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오히려 이런 것들은 우리 안에서 예배시간마다 일어나야 하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마다 이런 눈물이 쏟아진다면 우리의 삶에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날 위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들이 문맥을 이해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데 그전에 유월절이 시작되는 맨 처음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는 예수님이 추종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던 것은 참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놀라운 기적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 능력을 사용해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메시아가 되시기를 바랐던 것 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관심은 이 세상나라의 해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그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고 예수님은 바로 무너진 다윗의 육적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오신분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들어가시다가 눈물을 흘리시면서 하신 말씀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품음과 같이 너희를 품으려고 했던 것이 얼마냐? 날이 이를 테니 원수들이 너를 에워싸고 결국은 이 성을 멸망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이후로부터 약 40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주로 70년에 후에 로마황제는 장군이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그 긴 기간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항복이 없으니 그들이 그 성안에서 철저하게 단결을 해서 버티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포위를 더 이상 버틸 수는 없었습니다. 식량이 떨어지고 하면서 그 안에서 큰 소란이 일어나고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이까지 삶아먹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결국은 로마군대가 와서 그 성을 함락시키고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성은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그리스도께서 미리 보시고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B. 영혼을 위한 눈물
여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이 여자의 무리들이 눈물 흘리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는 것 때문에 울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지는 십자가의 형벌은 너희를 살리기 위한 형벌이니까 내가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십자가지만은 잠시 후에 하나님께서 이 예루살렘을 멸망하실 텐데… 그때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너희와 너희의 많은 자녀들이 그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날이 다가올 텐데 그것을 위해서 너희가 울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위해서 흘리는 그 눈물이 정말로 참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라면 너희 자신의 영혼과 너희 자녀를 향한 눈물이 그 안에 반드시 들어 있을 것이다. 참된 예수사랑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참된 예수의 사랑은 예수님만 사랑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만 사랑할 뿐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그 다음에 가슴에 밀려드는 사랑이 내가 이렇게 소중하구나!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속죄의 길을 가셨는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만큼 내가 하나님께는 귀한 존재였구나! 나를 나에게도 귀한 존재가 아니었는데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가시는 것을 보면 정말 예수님에게 나는 너무나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향한 사랑이 곧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곧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혼 그자체가 예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이게 교통적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때에는 자신의 육체보다 영혼을 사랑합니다. 육체의 행복과 영혼의 행복이 충돌을 일으키면 육체의 행복을 포기 시키고 영혼을 행복하게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보호하는 것과 영혼의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 서로 상반될 때에는 육체의 건강을 희생해서라도 영혼의 건강을 도모합니다. 그렇게 영혼을 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흐리는 그 눈물이 진실로 나를 위한 사랑의 눈물이라면 너희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라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육체를 잘 가꾸려면 제때 먹어주어야 합니다. 목이 마르면 먹어주고, 바람이 불고 춥다면 따뜻한 옷을 입고 바람을 피해야 합니다. 내버려 두면 육체가 망가집니다. 영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혼도 병에 걸리기도 하고 피해를 입기도합니다. 영혼도 보호해야 합니다. 영혼이 육체를 통해서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을 봅니다. 그러면 보지 못하게 눈을 가려줘야 합니다. 영혼에 건강을 해치는 좋지 않은 환경은 피해야 합니다. 영혼을 보호해야 합니다. 언제 그런 일을 잘 했냐하면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 일을 가장 잘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떨어지면 그다음에는 육체만 위하여 살게 됩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할 때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데 문제는 이러한 일들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경험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신자의 눈에서 자기의 영혼을 위하여 눈물 흘리는 법이 없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다를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직은 어린 아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40년 후에 다가올 그 예루살렘의 멸망의 순간에 그중에 대부분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로 너희 자녀들이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자녀를 향한 육신의 무정함을 언급하면서 짐승만도 못한 어미, 아비라고 욕합니다. 그런 무정함들은 우리는 종종 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이가 있는데 그 어린 아이를 가두어 놓고 밥도 안주고 폭력을 행사하고 차에 넣어두고 문 잠그고 여러분들이 며칠씩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한다면 여러분이 정말 부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육신보다 더 중요한건 영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우는 것보다도 더 급한 게 있는데 바로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우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부모의 책임을 여기에서 보는 것입니다. 내속으로 낳은 우리의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내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은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내 마음대로 안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교회 나오는 것만으로 만족을 하실지 모릅니다. 몇 살까지 말을 고분고분 듣겠는지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어렸을 때에는 친구 따라 갔지만 중, 고등학교 때는 용돈을 가지고 협박을 하니까 할 수 없이 교회에 갔지만 대학을 다니고 머리가 커서 아이들이 자라보십시오. 그렇게 부모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습니다. 이게 형식적으로 교회를 다니면 육적인 일이지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영적인 일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의 본성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강한 대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원수진 마음이 있단 말씀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영혼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보면서 그것을 관상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그것을 좋아하시고 아빠가 바라시기 때문에 효심하나를 가지고는 그렇게 오래 교회 다닐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때는 교회가자고 따라나선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 때 되니까 슬슬 눈치를 보고 학원을 가야한다고 핑계 대며, 대학 떨어져도 내 책임 아니라는 식으로 협박을 하는 자식들이 있을 것입니다. 벌써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학 들어가서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 머리가 커서 부모 말 듣기 않습니다. 교회 다니라고 이야기 하면은 내 신앙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간섭하지 말라고 그렇게 해놓고 얼마 있다가 안 믿는 자매 데리고 와서 장가보내 달라고 허락 안 해줘도 결혼 할 거라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농사는 정직한 것입니다. 이 농사라고 하는 것은 훌륭한 직장 들어가고 훌륭한 학교 들어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식의 영혼을 위한 농사는 정직한 것입니다. 자식은 명백하게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다. 가장 복음을 전하기 좋은 때가 어렸을 때 입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3살 된 아이들도 알아듣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합니다. 그 좋은 시절동안 하나도 안 가르치고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자라고 세계가 넓어지면서 온갖 것을 다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불신앙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가슴에 정직하게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복음적인 교회에서 성경적인 교리를 배웠습니다. 중생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다녀서 교회의 문화에 익숙해지거나 교회에 대해서 선한 감정을 갖거나 교회에서 모이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 중생이 아닙니다. 중생은 성령께서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서 그 본성을 전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것이며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볼 수고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던 영혼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영혼의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향하여 기뻐하고, 슬퍼하고, 가슴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그러는 가운데 세 가지 감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셨다는 감각, 하나님이 영광이시라는 감각,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감각, 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런 감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거듭났습니까?
예수를 믿고 부모가 된 모든 사람들의 자녀가 절대로 그냥 구원 얻는 것 아닙니다. 유아세례를 받아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이 주어진 상태 입니다.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참으로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그들은 스스로 부모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배반 하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지옥에 갑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여러분들의 우서적인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초등학교가 지나가는데, 중, 고등학교가 지나가는데, 대학을 졸업해 가고 있는데. 직장을 다니는데, 이미 결혼해서 분가했는데.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이 교회 다니고 안다니고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거듭났느냐 입니다. 언제쯤에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요?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얼마나 힘들었느냐를 보시면 자녀들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일 아침이라도 골목을 누벼보십시오. 예수사랑전할 때 듣는 사람마다 무릎을 꿇고 울며 예수의 그 깊은 사랑 왜 이제 전해주십니까? 난 회심하기를 원합니다. 하는 사람 보신일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 부모가 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자식의 영혼의 운명을 자신의 영혼의 운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니카 여사처럼 그 패역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서 오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도 긴 세월동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제가 문제로 삼는 것은 완악하고 강퍅한 여러분들의 자녀를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눈물이 없는 여러분들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키드미스터 리처드 백스터는 자신의 회심이라는 책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 주어야 할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 영혼이 자기 자식입니다. 일생을 여러분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태어나고 품에서 젖을 먹고 여러분의 무릎 앞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여러분 무릎에 놓고 키웠습니다. 매일 함께 먹고 자고 살아왔습니다. 정말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려 보셨습니까? 유아 세례를 준 사람들은 오늘 회개해야 합니다. 그대들은 서약했죠. 이 아이의 구원을 나를 구원받는 것과 같이 여기며 이 아이에게 우리조상의 거룩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고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렇게 사역하기로 힘쓰겠느뇨? 하고 물었을 때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끝까지 회심하지 않았어요. 기적적으로 예수님 믿은 것은 여러분들 혼자만으로 충분합니다. 다시 그런 식의 기적을 일으키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홀로 예수 믿고 집에서 핍박받을 때 무슨 생각했습니까? 제일 부러웠던 게 예수사랑알고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부러운 집은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교회 가는 집이였습니다. 아버지 돈 많이 못 벌어도 깨끗한 옷 갈아입고 온가족이 행복하게 교회 가는 집.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엄마가 있는 집.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주는 아빠가 있는 집, ‘참되거라, 바르거라’ 일러주시는 부모가 있는 집. 그립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의 손자, 손녀에게 또 그 눈물을 물려주려고 합니까?
그 아이의 학업, 육신의 건강, 외모, 교육환경, 이런 것들에 대한 염려와 배려 중 10분의 1만이라도 그 이의 회심하지 못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눈물을 쏟았다면 벌써 회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이 정말 회심하시 않을 때에는 아이가 강퍅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오리가 무정하기 때문에 회심이 연기되는 것입니다. 울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하여
리처드 백스터 목사님은 그 마을에 17동안 있으면서 온 힘을 다해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끝까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했습니다. 그분이 그 유명한 나는 한 죽어가는 사람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설교 한다 고 고백하던 그 사람입니다.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이 애야 네가 목회하던 교회의 교인들이 다 왔느냐 라고 물을 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내가 압니다. 그들의 영혼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위해 울면서 기도했고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려고 했으며 무슨 일이든지 그들을 위해서 해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온 힘을 다했으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가던 길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에 나의 눈에는 눈물이 샘솟듯 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아직 예수 믿지 않고 있는데 회심하지 않았는데 내가 이 아이를 위해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고 달래고 보고 위협도 하고 사랑으로 따뜻하게 감싸도 보고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들려주기도 하고 집회에 데리고 가보기도 하고 하나님의 좋은 말씀을 들려주려고 애도 쓰고 온갖 방법을 다 했지만은 아직도 이아이가 회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런 부모들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여러분들은 경험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자녀들에게 그 길을 또 걸어가게 하려고 합니까? 우리들이 회피하고 싶어 하는 그 복음적인 사실을 우리아이들의 미래에 적용을 시켜서 그대로 한번 생각을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고 있어요. 내버려 두면은 결국은 교회를 떠나겠죠. 떠나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더 큰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시집장가 가서 우리의 손에서 멀어지겠죠. 어쩌면 우리가 그 아이들보다 먼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우리들이 그 아이들이 사는 걸 그대로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고난을 만나고 시련을 만날 때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갈라져서 가정이 깨트려 지려고 할 때에 무엇이 그들을 보호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광야에 버려진 병아리 새끼 같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리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으시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유산이 많으니까 아이들이 넉넉한 환경에서 출발할 테니까? 하지만 한번 불면 날아갈 검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그렇게 주님을 사랑했더니 눈물이 샘솟듯 솟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어라 말씀하셨습니다. 피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들은 신앙생활 잘 하세요? 아이들이 말을 잘 안 들어요. 부패한 아담의 자식들이라서 다 안 듣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육신의 자식이기 이전에 부패한 아담의 후손들이애요. 다 안 듣게 되어있습니다. 기한을 정해 보셨나요. 교회에서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III. 결론과 적용
모든 순간들이 거듭날 수 있는 순간들입니다. 여름이 되면 수련회에 안 보내겠다는 부모와 보내야 한다는 교역자 사이에 줄다리기다 시작이 됩니다. 그 사이에서 거듭나지 못한 녀석들은 엄마 치마폭 뒤에 숨습니다. 저의 경험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교회 권사와 집사입니다.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지 그 자식을 위해 눈물 흘리지 않는 저 부모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너희 안에 있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을 위해 울 거야. 하나님의 그 심판을 위해 기도할거야. 너희 자녀들의 영혼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거야 왜냐하면 내가 그 아이들을 사랑하니까. 하는 이 말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이들의 회심 가능성은 계속 낮아집니다. 자녀의 회심을 위해 아침금식이라도 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잠 못 이루어 본적이 있습니까?
그러는 동안에 이 세상의 더러운 사조와 그리고 마귀의 세력들은 여러분 자녀의 마음을 굳어지게 만들고 시커멓게 더럽힙니다. 그래서 후에는 정말 의심으로 가득차고 안 믿겠다는 고집으로 가득차서 의도적으로 복음을 거절합니다. 정말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하자 몇 번이나 그 마음이 지속되겠습니까? 주일이 오기 전에 모두 사라져버릴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하나님이 복음이 명료하게 선포되는 그곳에 그 아이들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회개에 이르도록 정말 회심하도록 끊임없이 그런 자리에 그 아이를 보내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 아이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결국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새사람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꾸는 그 모든 꿈보다도 가장 시급한 꿈입니다.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그 일을 하지 못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의 품을 훨훨 날아가 버린 자식들이 있다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들이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사랑입니다. 유산 좀 못 물려주면 어떻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데. 세상에 높은 지위 못 올라가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데. 고난도 오겠죠. 시련도 오겠죠. 주님이 동행하시면 괜찮습니다. 자녀를 위해 우십시오.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자녀를 위해 울지도 못하는 자기를 위해 우십시오. 그리고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이킵시다. 그리고 아이를 위해 눈물로 기도합시다.
정말 이제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피하지 말고 아이를 붙들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전해 보십시오. 애야. 나는 너 예수 믿지 않고 하나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봐 두렵다. 간절히 그리고 복음을 들려주세요. 아니면 교역자를 찾아가세요. 나를 기도할 수밖에 없으니 이 아이가 주님을 영접하고 회심하도록 도와달라고…
8. 내 아들아! 아들아!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에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18:33)
I. 본문의 배경
A. 다윗의 가정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니까 아버지가 무엇 때문인지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펑펑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아버지가 많이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아실 수 있는 임금 중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다윗의 집안은 다윗이 왕으로서 여러 명의 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몸에서 난 소생이 29명 정도 되었다고 그랬으니 그야말로 큰 가족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다윗에게 셋째 아들이 바로 압살롬이라고 하는 이름이 좀 그런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같은 배에서 난 다말이라고 하는 누이동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소생이 다윗의 큰 아들 암논이라는 인물이 이복 누이동생인 다말에게 연정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를 좋아했는데 마음에 연애하는 마음이 불붙은 나머지 몸이 아픈 것처럼 위장을 하고 누워 있다가 여동생이 와서 오빠를 돌봐주는 틈을 타서 이복동생을 겁탈합니다. 그 후로도 끝까지 사랑을 했더라면 문제가 적었을지 모르는데 신비감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이 여자를 버립니다. 그리고 이 여동생이 눈물을 흘리며 우니까 친오빠인 압살롬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겠습니까. 압살롬은 용의주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동생을 타이릅니다. 지금은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나중에 내가 원수를 갚아주마. 이 일이 아버지 다윗에게 알려졌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겠습니까? 모든 백성들의 본이 되어야 할 왕가에서 이복남매 사이에 겁탈하고 겁탈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으니 다윗이 얼마나 진노했겠습니까? 큰아들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에서 점점 멀어져갔으며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만큼 맏아들로서 왕위로부터도 멀어졌습니다. 이때에 압살롬이 아버지의 마음이 큰형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을 알고 드디어 오랫동안 기다리던 복수를 실행에 옮깁니다. 연회장에 형을 초청해서 기분을 좋게 한 다음에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찢어지는 사람은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큰아들 하는 짓이 못됐고 그리고 화가 났지만 셋째 아들이 큰아들을 죽여 버렸다는 소식을 들으니 왕의 마음은 더 진노에 불탔습니다. 셋째 아들 압살롬은 멀리 도망을 가게 되었고 아버지의 진노가 풀어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셋째 아들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끔찍한 죄를 지었지만 압살롬을 잃어버릴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마음에 노여움이 점차 가실 때 신하들이 그 마음을 읽고 그 아들 압살롬을 데려와서 아버지와 화해를 시켰습니다.
B. 아들의 반란
형식적으로는 화해를 했으나 다윗의 마음에 입은 상처는 너무나 큰 것이었고 또 그 과정에서 압살롬은 아버지에 대한 진실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돌아온 압살롬은 아버지를 왕위에서 제거하고 그 나라를 자신이 차지하기 위해서 면밀히 계획을 세웠습니다. 첫 번째 한 일은 지지자들을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근위대를 조직해서 사병을 기르는 동시에 성문 어구에 늘 나가서 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그 어려운 사연들을 들어주면서 그들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백성들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자신에게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을 가리켜서 다윗 임금으로 향하는 마음을 도적질 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때가 되자 그는 자기를 지지하는 무리들과 연합하여 아버지가 왕이 된 것을 선포했던 헤브론에서 깃발을 들고 반란을 공식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온 나라에 전파하고 아버지께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이 셋째 아들 압살롬이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그리고 부모 자식 간에 거리가 소원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자기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대책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반란은 졸지에 일어났고 왕은 그만 부지 간에 그 변을 당하게 되어 왕궁도 버려두고 후궁들도 버려두고 벗은 발로 눈물을 흘리며 재를 무릅쓰고 산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인 압살롬이 한 일 가운데 반란을 일으킨 것 못지않게 더 악한 일은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한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워낙 사랑이 많고 너그럽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극을 해서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하면 아버지가 자기를 미워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이 아버지가 인자한 사람이 아니고 포악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민심이 자기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천인공로할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이 다윗은 하나님을 아주 사랑하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큰 변란을 만나게 되자 그는 견디기 힘든 고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군대를 수습하여 반란군을 토벌할 계획을 휘하의 장수들이 세웠고 실행에 옮겨져서 이제 결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하들은 이 다윗 왕을 매우 아끼면서 하는 말이 왕은 전쟁에 나가지 말고 여기 계십시오. 왕은 우리 백성 일만 명보다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고 안전한 곳에 보호해주고 그리고 이제 휘하의 장수들이 병정들을 거느리고 전쟁터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나가는 장군마다 이 다윗이 붙들고 부탁했습니다. 토벌을 하다가 나의 아들 압살롬을 만나거든 제발 선대해다오. 라고 말입니다.
II. 부모의 마음
A. 반란의 평정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의 군대는 아들 압살롬의 군대를 보기 좋게 무찔렀습니다. 반란의 괴수이던 아들 압살롬은 도망을 가다가 나무 가지에 목이 걸리게 되었고 결국은 다윗의 장수들이 찌른 창에 맞아서 결국은 절명하게 됩니다. 난은 평정되었고 이제 모든 상황은 끝났습니다. 문제는 누가 이 승리의 소식을 왕에게 전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압살롬을 사랑하는데 그 아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장수들은 꾀를 짜서 한 번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두 명의 파발꾼을 보내고 맨 처음 파발꾼이 와서 보고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 전장에서 이겼는가? 네, 그러면 내 소년 압살롬은 어찌 되었느냐? 이 소년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말로 “나르”인데 이게 아이입니다. 우리의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는가? 압살롬은 애가 아닙니다. 이미 벌써 어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음에는 어린애로 보인 것입니다. 우리의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는가? 첫째 보고자가 전쟁에서 이겼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당도합니다. 제일 먼저 물어보는 말이 우리 아들 압살롬은 어찌 되었는가? 그랬더니 차마 죽었다는 소리를 못하고 누구든지 왕을 대적하는 사람은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간곡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아버지 다윗이 가슴을 찢으며 망루로 올라가서 거기에서 슬피 울며 통곡하면서 아들을 8번이나 부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그러면서 불렀던 것입니다.
B. 부모의 사랑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부모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는 몰라도 난이 평정되었을 때 이 평정된 상황을 생각해보면 사실은 다윗이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습니다. 난이 평정되었을 때 이 난이 어떤 종류의 난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난이 평정되었지만 반란을 일으킨 자는 왕인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자기를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함께 살던 후궁들과 백주에 동침하고 그래서 자기를 부끄럽게 하였으니 이는 만민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바지를 벗기는 것 같은 수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많은 병사들이 죽었고 온 나라를 도탄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이 다윗이 문루에 올라가서 통곡하면서 아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아,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를 위하여 대신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면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을 보여주는 마음입니다.
언젠가 어느 리서치에서 조사를 했더니 젊은이들의 약 80%가 아버지가 밉다. 그리고 응답을 했습니다. 사실 그 많은 젊은이들이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추억을 머금으면서 유지가 되는 것인데 옛날에는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그렇게 좋은 추억을 쌓아두지 못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하고 어린아이들을 위하고 어린이들에게 뭔가 추억을 심어주고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하는 이런 친절한 아버지는 애 둘 낳기 운동이 시작되면서 겨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애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사실 귀한 줄 몰랐고 아버지들은 또 근대화의 과정에서 새벽에 나가서 별보고 시작해서 별보고 밤중에 들어오니까 아이들 잠든 것보고 한술 떠먹고 나가서 돌아오면 아이들이 건넌방에서 다모여 자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추억을 쌓으면서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핵가족이 되면서 이제는 하나나 둘 밖에 없으니까 애들을 애지중지 하다보니까 이제 가족들이라고 하는 특별한 관계들이 추억을 만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핵가족 제도가 되면서 이제 부모님을 모시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안 계시니까 자연이 마음의 관심을 가족들에게 집중하게 되고 아이들에게 집중하게 되고 부모가 늙으면 아예 가족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풍조들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리사랑과 올리 사랑의 두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로는 부모를 공경하고 아래로는 자녀들을 사랑하는 그 중간에 내가 있을 때 자녀들이 그 중간에 있는 나를 보면서 다시 올리 사랑과 내리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시려고 하지도 않고, 이러고 보니까 자기 아버지가 내리 사랑하는 것은 봤는데 올리 사랑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그 자식이 부모에게서 내리 사랑은 배우는데 올리 사랑은 못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을 별로 못 봤기 때문에 그들이 크면 당연히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는 껍데기처럼 벗겨져나가고 자기 새끼들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큰 문제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가정을 주신 것은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서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의 그 껍질을 깨고 진짜 우리의 참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이라고 하는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세계가 엄마의 품이기는 하지만 철들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세계는 그 다음에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할 때는 이 아이가 자라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말 못하고 생각이 없는 때는 본능적으로 엄마만 찾습니다. 아이가 성숙하기 시작하면서 엄마의 품에서 이제 또 다른 세계를 보는데 그게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처음 만난 세계인 아버지가 폭력과 폭언, 그 다음에 교양 없고 그 다음에 편애하고 이렇게 해서 자녀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게 되면 그 아이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올리 사랑은 배운 적은 없고 내리 사랑만 배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자기의 본능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상처 이런 것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더욱 아버지를 사랑하지 못하는데 그 위에 올리 사랑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아버지하고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있습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는 상처도 받게 마련인데 부모가 자식에게 준 상처를 자식은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가슴에 깊이 남고 새겨집니다. 심지어는 그 부모님이 아주 연로하시고 돌아갈 지경이 되었어도 자신의 가슴속에 아버지가 자신의 가슴 속에 남겨준 이 상처는 좀처럼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게 사실은 많은 오늘날 젊은 사람들이 부모에 대해서 효도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효도를 하려면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하는데 마음이 그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맺힌 것을 풀기 전에는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의 효도는 그것은 적선이지 진정한 의미의 효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내려가는 상처는 잊혀지지 않는데 올라오는 상처는 쉽게 잊혀집니다. 즉 자식이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도 사람이니까 마음속에 상처를 받습니다. 아버지가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거짓말로라도 조금만 잘해주면 아버지는 그 상처를 금방 털어버리고 자식을 사랑합니다. 이게 바로 올리 사랑과 내리사랑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은 부모로부터 상처를 쉽게 받아도 용서는 잘 안되지만 아버지는 자식으로부터 상처는 잘 받지 않지만 상처를 받아도 쉽게 용서가 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다윗이 그 경험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왕위를 뺏겠다고 반란을 일으키고 자기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자기를 부끄럽게 하고 수치스럽게 해서 마음을 도적질하고 그리고 뿐만 아니라 자기의 후궁들까지도 함께 겁탈을 해서 자기에게 수치를 안겨준 아들, 죽여도 시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아들이 아니었더라면 토벌하고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 다윗은 잔치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려 수고한 장병들 앞에서 오늘 이 왕은 통곡을 하며 울면서 그 원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내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아, 이 순간에 이 아버지의 마음은 자기의 왕위를 노린 과거도 잊혀지고 후궁들을 겁탈한 모든 기억도 사라지고 그리고 또 자기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민심을 도둑질한 그 반란군의 괴수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이 그렇게 죽어갈 때 얼마나 외롭고 아팠을까? 그 하나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다윗의 마음을 찔렀고 그래서 그는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게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지만 진짜 가족입니다. 저는 뭐 그렇게 훌륭하게 교육을 받지도 못했는데 왜 그랬는지 부모님들이 시골에서 사업을 하신답시고 큰아들인 저를 유치원까지는 함께 데리고 있다가는 초등학교 들어갈 때가 되자 서울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제 생애 대부분을 나는 우리 부모님이 아니라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할머님이 입학식 날 저를 데리고 학교에 가시고 어버이날에는 할머니가 대신 가시면 친구들이 너희 엄마는 왜 그렇게 늙었는가. 그래서 창피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을 할머니와 같이 살고 고등학교 때 잠깐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습니다. 지금도 말만 하면 가슴이 짠하고 자꾸 눈물이 납니다. 우리 살던 때는 왜 그랬는지 중학교까지 시험을 보고 갔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아는 친구 하나는 중학교 시험 떨어졌다고 월곡동에 있는 돌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투신자살을 한 애도 있습니다. 왜 애들이 죄가 있다고 그렇게 공부를 시켜나 봐야 별로 똑똑하지도 않던데 그렇게 못살게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러니 이제 방학 때 집에 내려가는데 내려가면 한달 두 달 뛰어놀다가 오면 어떤지, 가면 길어야 장날 두 번 설 때, 10일 그것도 너무나 많아서 어느 때는 일주일밖에는 못 놀다 옵니다. 큰아들이 와서 한 일주일 있다 가니 아빠 엄마는 얼마나 잘해주었겠습니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돌아오면 그 전날부터 울기 시작해서 집에 돌아와서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적응이 안 되고 그렇게 밥도 못 먹고 아이가 우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게 평생 그렇게 부모가 그리워서 울 것 같지만 안 그렇습니다.
또 우리 부모님도 무심하십니다. 물론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고 시골에서 여기에 올라오시려면 버스를 11시간 타고 그러기는 했지만 엄마가 뭐 직업 활동을 하시는 것도 아닌데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올라오면 어떤지, 올라오시지도 않으십니다. 아버지는 물건 한다고 사업차 올라오셨다가 오밤중에 왔다가 불고기 집에 한번 가서 불고기 한번 사주고 그 다음날 새벽에 떠나시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부모를 그리워하고 형제들을 보고 싶어 하고 그랬는데 그게 매일 그런 게 아니라 중학교 되니까 그 다음에는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어머니가 와서 손잡고 울고 우리 아들 보고 싶다고 그러는데 냉랭합니다. 하나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일평생 아버지하고 거리감을 가지고 소원함을 가지고 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보면 요즘에 조기유학을 시킨다고 그러면서 어린애들을 외국에 보내고 그러는데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아이를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부모를 떠나 살면서도 제가 부랑아로 살지 않고 모범적으로 잘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속은 이미 다 망가져서 그게 인간입니까? 때가 되면 부모가 보고 싶고 그립고 그래야지 되는데 그게 어느 때까지는 그러는데 그게 어느 때가 지나니까 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중학교 때쯤 되니까 아버지하고 둘이 앉아있으면 너무 싫었습니다. 그때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아버지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무릎을 꿇지 않고는 내가 앉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도 학교 선생님보다도 더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들어오시면 나는 나가고 아버지가 다시 나를 좇아 나오면 나는 들어가고 이렇게 하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런 속에서 아버지의 단점과 잘못하시는 것이 다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린 가슴에 그런 모순과 잘못하는 것, 그 다음에 결국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하는 것들이 가슴에 콱 박힌 것입니다. 이게 자식이 아버지를 향한 마음이기 때문에 상처는 쉽게 받지만 이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제가 21살 될 때까지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21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하나님은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세상이 이렇게 엉터리일 수가 있는가. 전 생각했습니다. 착하고 진실한 사람들이 고생하고 고통 받고 악한 사람들이 번성하고 저렇게 잘살고 이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당신이 만드셨다면 책임을 지셔야지 이렇게 세상이 이 모양이 되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니, 그리고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를 그만두고 안 다녔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방황했습니다. 결국은 도저히 혼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었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해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인생의 무게는 점점 무거웠습니다. 그러던 끝에 결국은 마음이 열리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21살 때 내 발로 교회를 걸어 나간 그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2-30명의 성도들이 모여 앉아서 찬송을 부르고 있는 그때 삐거덕거리는 풍금소리에 맞추어서 찬송가를 보면서 함께 예배를 드릴 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가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많이 울었던 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육신의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일에 정신이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기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에게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강력하게 타이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애야, 네가 육신의 아버지에게는 사랑을 받지 못하였지만 나는 너희 아버지를 대신해서 너를 많이 사랑해주지 않았니. 그러니 너는 이제 육신의 아버지를 이제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교회에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는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생전 처음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렇게 측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제껏 아버지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다고만 생각하면서 상처를 받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를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아서 외로운 것처럼 우리 아버지도 내 사랑을 못 받아서 그렇게 힘들고 외로우셨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그 마루에 엎드려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후부터는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런 화해를 가르쳐주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도 바로 이렇게 하나님 곁을 멀리 떠나서 마음이 갈라진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후로부터 저는 은혜를 받으면서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많이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나하고 아버지하고 똑같이 변했으면 어느 날 뜨겁게 끌어안고 서로 잘못했다고 화해를 할 터인데 내가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갔는데도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으십니다. 평소에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 번 아버지를 사랑하려고 하는 내 마음이 수시로 꺾임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던 너희 아버지는 너를 사랑해주시는 것 같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른 사람들보다 너는 나에게 사랑을 받았으니 너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하여라. 그래서 사랑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결심을 훌륭하게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정말 내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향한 더 큰사랑이 내 마음에 밀렸던 것은 40이 넘으면서 철이 들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때서야 옛날에 일의 한토막이 생각이 났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내가 공부하는 방에 책꽂이에 저 구석에 평소에 못 보던 노트 한권이 꽂혀있습니다. 그래서 열어보았더니 아버님이 쓰시던 일기였습니다. 교육을 많이 못 받으셨기 때문에 글씨도 예쁘지 않고 비뚤비뚤 했지만 그 속에서 난생처음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내는 수신자도 없는 편지 형태로 쓴 그 글 속에서 아버지는 당신의 마음에 있는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때는 아버님이 사업에 망하시고 빚에 몰려서 부도를 맞아서 매일 빚쟁이에 시달려서 끼니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나던 때였습니다. 당신의 그 고통을 피력하면서 마지막에 보태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앞에서 자라고 있는 내 아들들을 볼 때 마음이 한없이 뿌듯하고 나는 저 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고 그리고 내가 어떠한 고생을 하더라도 이 아들을 잘 기르고 싶다고 하는 자신의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그 일기가 그렇게 깊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5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 그 일기가 생각나는 것은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나도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고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은 많이 감추어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평생을 살아도 자식들이 아빠의 마음에 있는 감추어진 사랑을 다 찾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아버지는 자식은 아버지를 많이 사랑했는데 자식들은 아버지를 향해 자기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안 가져주었다고 죽을 때까지 화해를 하지 못하는 새끼들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되고 보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은 다른 마음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TV에서 특집방송을 했는데 소위 로또 복권에 대박이 터진 사람들의 그 후의 인생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추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불행해졌습니다. 신도시가 개발된다고 그래서 보상을 몇 백 억씩 받은 사람의 인생에 행복해지는가, 취재를 했더니 그들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해진다고 결론이 나왔습니다. 어떤 집은 문전옥답을 넘겨주고 180억의 보상금을 받았는데 그 전까지는 화목한 가정이었는데 보상금이 나오면서 형제들이 소송을 하고 싸움질을 해서 가족들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아버지는 그 꼴을 보다 못해서 밖에서 목매어 자살하고 어머니는 그 아버지의 자살의 충격 때문에 풍이 들어서 누어버렸습니다. 풍지박살이 났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이런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부모와 자식의 관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하는 말이 아니라 효도하기 굉장히 힘든 아버님이었습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을 얼마나 수시로 벌이시는지 모릅니다. 나이 70이 다 되어 가시면 이제 노인이 아닙니까? 그러면 뒷방에 가만히 앉으셔서 자식들이 주는 밥이나 먹고 경로당에 다니시면서 산책이나 하시면서 사시면 되시는데 우리 아버님이 정욕이 얼마나 왕성하신지 70이 다 되어서 사업을 하신다고 중국을 넘나드시다가 사업이 망가져서 1억원을 당신이 날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셨습니다. 결국은 다 보상해드리지는 못했지만 자식으로서 할 만큼 했습니다. 목사가 뭔 돈이 있겠습니까. 더 황당한 것은 애야, 네, 너희 150만원 해나야지 되겠다. 왜요? 8대조 할아버지 묘가 다 무너져간다. 아니 그 할아버지의 얼굴을 내가 봤습니까? 지옥에 계신 그 할아버지를, 살아있는 사람 고기라도 한 근 사주지 무슨 그 할아버지 산소를 한다고, 또 그 할아버지가 8대조 할아버지면 8대조 자손이 당신 혼자만 있습니까? 수천 명이 있을 것인데, 그 할아버지에게 유산이나 받은 것도 아닌데 무슨 그것을 하겠다고 마음속에서는 집어치우세요. 하고 싶은 마음이 여기 나왔지만 예, 하십시오. 왜 8대조 할아버지는 내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할아버지의 산소 묘를 고치는 것을 아버지가 좋아하시니까. 그래서 누가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해드릴 마음이 생기는가? 해드린 적은 없지만 아버님이 그것을 좋아하시면 됩니다.
명절 때는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셔서 자식들이 모두 모이는 날 그렇게 기뻐하셔서 일찌감치 오셔서, 어떤 때는 며느리 일어나기도 전에 오셔서 떡 만들라고 그랬습니다. 돌아가시고 나니까 다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구정이 되면 늘 모여서 세배를 드렸는데 저도 여유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마음에 어느 해인가 결심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언제까지 살아계실지 모르지만 내가 매년 새배 돈의 액수를 갱신하리라. 그래서 해마다 작년에는 제 작년보다 더 드리고 그리고 금년에는 작년보다 더 드렸습니다. 내년에는 금년보다 더 드리기로, 늘 드렸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은 제가 새배를 하면서 그랬습니다. 아버님, 지상최대의 새배 돈입니다. 받으십시오. 그리고 백만 원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뭘 주니 그러면서 주머니에 얼른 집어넣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주일이면 예배가 끝나면 저희 집에서 오셔서 사택인 3층에 올라오셔서 식사를 하십니다. 그렇게 진지를 맛있게 드십니다. 그러면 한 달에 한 번씩 용돈을 두둑하게 하여 주머니에 넣어드리면 아버님, 이거 누구 주지 마시고 그저 이것으로 잡숫고 싶을 때 잡수시고 가시고 싶은 곳에 가시고 모자라는 게 있으면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그래. 고맙다. 너 돈도 없을 텐데 이런 것을 뭐라 주니. 그러면서 얼른 집어넣으십니다. 한 번도 돈도 없을 것인데 이거 도로 가져가라 그러시면서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면서 지냈습니다.
그렇게 많은 상처를 생각할 때는 아버지가 용서가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 마음속에는 감추어진 사랑이 많을 것이야. 그리고 생각을 하고 나니까 아버님이 용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이만큼 살아보니까 내가 아버지라도 참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아버지는 정말 외롭고 고단한 인생을 사셨구나. 그래서 매일매일 결심했습니다. 잘 해드려야지, 나 때문에 이 세상에서 참 행복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계실 때 가니까 어머니하고 다투고 계시기에 왜 그러시느냐고 그러니까 머리를 며칠 동안 안 감으셔서 감자고 그러시니까 몸도 불편한데 자꾸 잔소리한다고 아버지가 싫어하신다고 그러십니다. 그래서 아버님, 일어나세요. 제가 머리를 감겨드릴게, 그랬더니 벌떡 일어나십니다. 그러더니 아무 소리 없이 훨체어를 타고 따라오십니다. 그래서 이제 화장실 세면대에 가서 수건을 두개나 두르고 맵더라도 참으세요. 제가 감겨드릴게요. 그랬더니 어머니 말은 그렇게 안 들으시더니 아들 말은 그렇게 잘 들으십니다. 그러면서 머리를 깨끗하게 감겨드리고 세수를 시켜드리고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오랜만에 머리를 감았더니 이렇게 시원하고 좋구나.
살아계실 때는 몰랐습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종종 유산을 많이 남기고 죽는 부모를 보면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적은 별로 없고 가끔 애야, 빚을 많이 졌는데 그러고 뻥하고 터졌습니다. 한번은 그렇게 아파트에 들어가 사시고 싶어 하셔서 동생들하고 돈을 모아서 작은 아파트를 하나 마련해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뭐가 뻥하고 터졌습니다. 그 돈 다 집어넣고 빚까지 집어넣고 제가 한 1년 이상을 정말 가난하게 아버지 때문에 살았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정말 그 상처만 남아있었더라면 아버지가 저에게 그렇게 했다면 다시 안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도 밉지 않습니다. 속은 좀 상하고 경제적으로는 좀 어려웠지만 이게 우리 아버지의 모습인데 달라지실 리가 있겠는가. 내가 변해야지.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으니 (?)하나님 아버지가 좋다고 하시니 그러면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하면서 웃으면서 넘겼습니다. 말은 안 하시지만 그 때 일로 얼마나 마음속에 저에게 고마워하셨는지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늘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어느 날 당신의 생명이 다해서 갑작스럽게 제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전에는 항상 솔직히 아버지가 내게 해준 것은 없지 뭐, 내가 예수를 잘 믿게 하는데 도움이 되셨을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내게 해준 것은 없지, 그러나 돌아가시고 나서 첫 번 어버이날을 맞이하게 되니까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은 살아계신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저를 처음 보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가족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것과는 틀립니다. 그 마음속에 많은 사랑이 있는데 표현이 잘 안되었던 것입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도록 고생하시고
이 어찌 어머니의 마음만을 노래하는 노래일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그 못지않게 매우 큽니다. 엄마의 사랑이 나타나있고 아버지의 사랑은 감추어져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다시 돌아오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다시 머리도 감겨드리고, 그리고 세수도 시켜드리고, 그렇게 가시고 싶어 하시는 곳을 모시고 가고 늘 바쁘다는 핑계로 못해드린 효도도 하고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육신의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인생을 온전히 이룬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고 높은 지위를 누려도 인간이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자식이 아버지에게 막 대해도 아버지는 그 아들 때문에 통곡을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육신의 부모의 마음이라면 우리의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이보다 훨씬 뛰어난 마음이며 육신의 아버지의 마음은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III. 하나님의 마음
성경은 우리에게 육신의 부모보다 더 큰 하나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주시고 그리고 아버지와 자식으로서 뜨거운 가족관계 속에서 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반란을 일으키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도전했습니다.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인간은 그 죄 때문에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도 인생이 70이요, 강건하면 80밖에 살지 못하고 살아있는 날들도 수고와 슬픔뿐인 그런 비참한 슬픔에 처한 인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인간들을 하나님이 차마 그만두고 보실 수가 없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신 말씀이 너는 가서 이 세상에 내려가서 죄 때문에 나를 떠나서 눈이 어두워 도저히 나에게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나를 가르쳐주고 그리고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만 사랑을 알지 못하는 그 인간들에게 내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네가 보여주고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그러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 이 분이 바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 상처받고 아파하는 많은 사람들을 눈물과 땀과 그리고 피로 섬기시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모든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 십자가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의 불행과 고통의 근원이 되는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들이 빚을 져서 빚을 갚아야 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죄의 빚을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후에는 삼일 만에 부활해서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내가 죄인이고 내가 육신의 아버지를 버린 것처럼 내 영의 아버지를 멀리 떠났기 때문에 이제는 난 회개하고 그 사랑하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야지 된다고 생각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과의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출했고 가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집안에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유익도 누릴 수 없었는데 다시 그 집안에 들어가서 양자가 되고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이 문을 열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자원들을 공급해주십니다. 물질이 필요할 때면 하나님께서 물질의 자원을 공급해주십니다. 정신이 너무나 혼미하고 곤고해서 도저히 살아갈 힘이 없을 때는 하나님께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힘들을 공급해주십니다. 제가 만약에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그런 영적인 자원이 없었더라면 아마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사랑하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하고 없었지만 후에는 아버지와 제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의 화목이 이렇게 기쁘다면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목을 우리들이 얼마나 기쁠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제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고 그 아버지를 품에 안을 수 없었다면 제가 여러분들에 이런 설교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고난을 겪을 때 이제껏 하나님 없었던 사람들은 그냥 고난을 겪습니다. 누군가가 미울 때는 괴로움 속에서 마음이 썩어지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때는 마음속에 원망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와 화해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로 피할 길이 열립니다. 홀로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하고 인생에 고통스러운 일들로 인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을 때 전에는 두려움과 원망뿐이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도 이렇게 사랑해주셨다면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는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셨겠습니까? 철들기 전에 아버지를 몰랐던 것처럼 우리가 아직 영혼에 철이 들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입니다. 저는 50이 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 하나님 때문에 고난의 길을 극복하고 미워할 사람들을 용서하고 원수 맺은 사람과 화해하며 살아왔습니다.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슬픔을 환희로 바꾸시면서 광야와 같은 마른 땅에 꽃피고 새 우는 것 같은 인생으로 바꾸어놓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여러분들이지만 나는 오늘 여러분들을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육신의 아버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영의 아버님과 화해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화해와 용서,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축복들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9. 네 형제와 입 맞추라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창33:3-4)
I. 본문의 배경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래도 이렇게 자극을 받으면 마음에 찔림이 있고 잘 해봐야겠다는 자각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한번 깨트려진 형제와의 관계에서 깊이 고통을 느끼며 그 관계를 올바르게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만큼 이 세상에는 깨어진 형제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시집장가를 가도 계속 마음에 부모로서 부담이 남지만 동기간은 각자 흩어져서 자기의 가정을 갖고 나면 이제 마음과 시야에서 함께 멀어지기 때문에 형제끼리 화목하지 못하고 불화한데도 그것을 고쳐보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고치고 말고 할 수도 없는 게 뭐 만나는 때가 있어야 고칠 것입니다. 명절 때 와서 후딱 아침을 먹으면 보따리를 사서 각자 처갓집으로 가야지 된다고 하면서 가기에 바쁩니다. 형제들이 만나도 애틋하게 좀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소하면서 서로 고민을 나누고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 형이 동생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 몇 달 만나지 않으면 형이 너무 그리워서 보고 싶은 사람, 동기간에 그런 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것도 우리들이 깊이 깨트려져서 섬겨야 할 부분이고 이런 형제들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적으로 다루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변화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을 한번 살펴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삭의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쌍둥이였습니다. 형은 에서였고 둘째는 야곱이었습니다. 에서는 사람이 단순하고 남자다운 기개가 있었지만 그러나 야곱은 여성스럽고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이 불행해지려고 그랬는지 아버지는 형을 편애하고 어머니는 동생을 편애했으니 두 형제가 화목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편애는 매우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렇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버지의 위치는 족장이라고 하는 위치였는데 이 족장의 위치는 아직 선택된 백성들 틈에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없던 때였기 때문에 이 세 권한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비는 유언적 축복은 그 축복을 받은 사람에게 그대로 임하는 신적인 효과가 있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삭에게 두 아이가 쌍둥이로 태어나는데 그 동생이 내가 택한 사람이고 그를 내가 더 사랑할 것이다. 라고 선택에 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이 아버지가 나이가 많이 들어 늙으면서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그랬는지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했다고 하신 이 둘째 아들보다는 혈통을 따라 장자가 된 그 큰아들을 더 많이 편애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의논도 하지 않고 어느 날 죽을 때가 다가오자 큰아들을 조용히 불러서 내가 죽기 전에 너를 마음껏 축복하려고 한다. 너는 가서 짐승을 잡아서 맛있게 요리를 해서 나에게 가져와 축복을 받으라. 이 이야기를 엄마가 듣고는 자기가 사랑하는 둘째를 축복받게 하기 위해서 이 둘째에게 털이 많은 형의 흉내를 내어서 차림새를 하고 그리고 형의 냄새가 난 형의 옷을 입혀서 그래서 아버지의 방에 들여보냅니다. 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못하니까 에서가 왔습니다. 나를 축복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아버지가 멋모르고 그 놈이 큰아들인줄 알고 그냥 축복을 다 내려줍니다.
큰아들이 이제 축복받을 요량으로 맛있게 요리를 해서 아버지 앞에 갖다놨을 때 놀란 것이 아버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을 축복을 도둑질해간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축복해주십시오. 라고 울부짖으며 아버지께 매달렸지만 모든 축복을 동생에게 해주었기 때문에 너에게는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니 이 형의 마음속에 동생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에 칼을 갈고 있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 하면 단칼에 이 동생을 죽여 버릴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 아들을 이제 멀리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자기의 오빠 집에 아이를 보냅니다. 거기에서 20여년의 긴 세월동안 천신만고 끝에 재산을 모으고 결혼도 하고 부인들과 아이들을 거느리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야곱에게는 커다란 숙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백번 생각해도 잘못한 자기를 향하여 형과 대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있는 이글거리는 복수심을 어떻게 잠재우고 그리고 형으로부터 다시 환영은 그만두고 복수심에 불타는 형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II. 얍복강의 화해
A. 화해의 입맞춤
그런데 오늘 보면 얍복강에 놀라운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얍복강에서의 이 화해를 오늘 성경에서는 뭐라고 보도하는가 하면, 에서가 달려와서 야곱을 끌어안고 그리고 입 맞추고 울었다고 나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화해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두려움에 가득 찼던 야곱의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나게 되었고 복수심에 불타던 형의 분노에 가득 찬 마음에는 동생을 향한 뜨거운 연민이 솟아나게 되어서 실로 형제가 오래간만에, 아니 태어나서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던 이 형제가 강가에서 뜨겁게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펑펑 우는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B. 네 형제와 화해하라
여러분들의 형제는 어떻습니까? 부모가 여러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살아계신 것이라면 여러분들이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여러분들의 형제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작년에도 제가 형제 사랑에 관한 설교, 가정에서 동기간의 사랑에 관한 설교를 이맘때 두 번을 했습니다. 어느 주일 그 주일 중에 예배를 끝마치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성도 한분이 저에게 오셔서 악수를 청하시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복도에서 펑펑 우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깨를 두드리면서 왜 그렇게 우시냐고 그랬더니 오늘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바로 목사님이 그렇게 가슴아파하시던 그 동기간의 불화한 자식들이 바로 제 자식들인데 제가 너무 이 설교를 듣고 마음이 괴로워서 이렇게 눈물이 나옵니다. 도무지 화해하지 않습니다. 연세가 많이 들어서 늙으신 주름에 뜨거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복도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데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그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제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 아버지는 동기간이 화목하기 위해서 당신이 제물이 되어야 한다면 아마 오늘이라도 기꺼이 죽으실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기간들이 각자 부모에게 효도한다고 고기 근이나 끊어가지고 오는 효도, 때가 되면 챙겨드리는 몇 푼 안 드는 그 봉투, 그런 것들이 무슨 효도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장성했을 때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은 그 부모 앞에서 화목하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죽을 때가 되어도 애들이 삼겹줄 같이 단단하게 연결이 되어있고 뜨겁게 사랑하니 저희들이 서로 기대어 살면 걱정이 없다. 그리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되는 그것이 부모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효도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오늘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오늘 여기에 와서 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형제와 화목한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화목한지 한번 스스로 자문해보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동생으로서 형이 있어서 행복한지, 누이가 있어서 정말 기쁜지, 그리고 여러분들이 누이나 형으로서 동생이 있고 동기간이 있어서 정말 기쁘고 행복한지 여러분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렇게 함께 어울려서 함께 동고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족입니다. 한집안에서 함께 산다고 해서 가족이 아니라 함께 정신적이고 영적으로 연결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말하기를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했으니 여기에서 “연합”이라고 하는 것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유대관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마음으로 하나로 묶어진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과 연합 안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족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고 그것 때문에 가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C. 하나님과의 관계만큼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집장가 가서 흩어진 여러분들의 동기간들을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런 화목을 이루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한번 우리들이 따져봅시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런 화목과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동기간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캐 들어가 보면 불화하기 때문인데 이 불화의 원인 중 90%이상은 이익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래도 서먹하기는 했지만 동기간이었는데 재산의 분배를 놓고 형 동생간의 대판거리 싸움질을 하고 심지어는 소송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보지 않는 관계가 됩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를 가지고 형과 동생끼리 다투다가 다시 얼굴을 보지 않는 그런 동기간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려웠을 때 도와달라고 몇 번 손을 내밀었는데 도와주지 않는 동기간을 보면서 인정이 없다고 관계를 끊어버리고 원한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형이면 도대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는가 하고 대들면서 받은바 이익이 없다고 이제는 형도 없다고 단절을 하는 동생도 나쁜 놈이지만 또 동생을 보면서 너그러움과 사랑 대신에 그의 잘못된 생활의 습관과 그리고 그의 인생의 태도를 문제 삼아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고 아예 거리를 두어서 가족관계에서 끊어버리는 형들도 역시 나쁜 놈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기대며 하늘나라의 모형을 이루며 살아가야 할 아름다운 가정은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그런 속에서 겨우 가족이라는 이름의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는데 사실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연대관계는 다 끊어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익의 문제가 대립이 된 가운데 결국은 형제가 형제를 경쟁상대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고 우리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육체의 자원은 땅으로부터 받고 그리고 정신과 영혼의 자원은 하늘로부터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균형을 잃어버리고 육체를 공급하기 위해서 필요한 이 땅의 자원을 차지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있고 이것들을 통해서 형제가 물질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불화하고 다투고 이익의 문제 때문에 편을 가르고 관계가 깨트려지는 이런 일들을 서슴지 않고 살아가니 이 어찌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사람들 가운데 태반이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니 이런 사람들의 인생의 추루함을 어찌 다 이루 말할 수 있겠으며 그런 사람들의 허위의 삶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교회 안에서 여러분들을 목양하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도 형제간에 관계에서 이미 포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 가운데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찔리기에는 이미 형제와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이 아스라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는 동기간이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비정한 사람들도 여럿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해는 갑니다. 그 많은 세월동안 형으로부터 받은 상처, 누이와 동생으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에 남아있던 가족관의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기본적인 사랑마저 파괴되었으니 여러분들은 사실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손해를 보기 위해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십자가의 생애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서 내려오신 생애 자체가 아낌의 생애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빼앗김의 생애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당신은 부요한 분이었지만 당신 자신이 다 빼앗겨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신 그런 생애였기 때문에 그 사랑과 은혜를 입어서 구원을 받고 덕을 본 사람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인해 덕을 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뼈아프게 지적을 한다고 해서 마음 너무 상하지 말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양약으로 생각하고 아로새기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오늘 좀 후벼놓겠습니다.
형제가 불화하며 살아가는 가정 가운데 거의 100%가 그 형제들도 못되었지만 그 형제들의 아내가 더 못되었습니다. 원인을 많이 제공합니다. 형제는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오누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하거나 형이나 누나가 마음에 고통을 줄 때 우리 동생은 왜 그럴까? 우리 형은 정말 구제불능이야. 우리 누나는 어쩜 그렇게 이기적일까? 10%만 마음이 상해서 집에 돌아옵니다. 그때 그 10%를 100%에 기여하는 인간들이 바로 그 사람들의 아내와 특히 남편도 있지만 아내가 그렇게 합니다. 대부분의 모든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면 너무 이익에 밝은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가족들과의 연대와 화합을 이루고 우애를 이루어야겠다는 그리스도의 정신보다는 얼마 안 되는 물질, 그리고 동생과 형들 때문에 자기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고 하는 이익에 철두철미한 자기중심적 사랑, 이런 것들이 그렇게 가족을 자꾸 분열시키고 깨트리는 것입니다.
난 남편인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형에게 마음이 많이 상해서 집에 가서 부인에게 우리 형 정말 못된 인간이야. 어떻게 동생인 나에게 그렇게 야비하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때 아내가 여보, 그것은 당신이 몰라서 그래. 형의 마음이 얼마나 넓고 당신을 얼마나 생각하는데, 그것은 당신의 전적인 오해야, 어느 모로 보든지 형의 인격이 당신보다 훌륭해, 당신이 참아야 해. 이렇게 아내로부터 지적을 받은 남편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우리 동생은 정말 못되었어. 자식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정말 말도 못하겠어. 어쩜 인간이 그렇게 되먹었는지. 어려서부터 그렇게 저만 알더니 막판에까지 이러네, 이렇게 불평을 하는 남편에게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자기가 맞장구를 치면 집안이 콩가루가 되겠다는 생각 때문에 꾹 누르고 사실은 당신 없을 때 당신에 대해서 염려하고 당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동생으로 이바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동생이 얼마나 미안해하는데 하면서 양자를 화해시키려고 자기를 누르고 노력해본 적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도록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해본 적이 있는 자매들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옛날 어른들 속담에 이런 게 있습니다. “형제들끼리 띠알머리 사나운 집안에 태어난 새끼들이 화목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고 그게 대물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엄마 아빠가 형제들 때문에 계속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싸우는 것만 봤지 자기 아버지가 큰아버지 때문에 행복하고 작은 아버지 때문에 기뻐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자기 엄마가 숙모 때문에 괴로워하고 고통 하는 것만 본적이 있지 행복하고 그들을 존귀히 여기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권력이 없으니까 아직 말은 못하지만 속에서 항상 생각합니다. 형제는 필요악이구나. 그것을 자기를 깨트려서 형제에게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부모는 역설적으로 너희들끼리 사랑하지 왜 그렇게 동생하고 싸우는가 하고 야단칩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그렇게 사니까 그들이 보는 것입니다. 이게 옆으로 기어가는 게 어미가 새끼들에게 왜 이렇게 기는가 하고 야단치고 나를 따라 해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아니 이의가 있으면 한번 얘기해보십시오.
(예화: 몇 년 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영화를 보고 형과 동생이 나눈 대화 내용- 마지막 내린 결론- 동생은 영원한 싸가지라고)
모두 자기 사랑에 빠져서 자기 이익에 밝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것도 하늘자원이 아닙니다. 아니 솔직히 형이 은혜를 너무 받았는데 하나님은 형만 은혜를 많이 주시고 나만 안 준다고 그래서 형을 시기해본 적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그런 것은 또 시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돼지같이 죽통에 고개를 들이미느라고, 형제들이 머리가 터지게 피를 흘리고 회개하십시오.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시골에서 돼지는 역시 돼지인 게 뜯물을 바커스에 가지고 와서 여물통에 부으려고 하면 여물통도 기다라니까 좀 나란히 서서 먹으면 어떤지 그것을 부으려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머리를 치받으면서 머리를 집어넣으려고 하면 결국은 돼지머리 위에 뜯물을 부을 수밖에 없게끔 그렇게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러분들이라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슬프지 않습니까?
그것만 나쁜 게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게 무관심입니다. 아무 형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상갓집에 가봤지만 형이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동생을 많이 봤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렇습니까? 가서 진짜 등때기를 한번 때려주고 싶습니다. 피도 살도 안 섞인 우리는 와서 우는데 어떻게 띠알머리가 그런지. 무관심입니다. 일년이 지나도 형, 동생, 누나보고 싶지 않습니다. 왕래를 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형제가 개길까 봐 왕래를 하지 않고 없는 사람들은 비굴하니까 왕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이상입니다. 여러분들의 동기간이 만나지 않는 자체가 그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져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형을 만나도 아무 접촉점이 없어서 만날 게 없다고, 왜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형이 불신자라고, 잘났습니다. 형이 불신자니까 자주 만나야지 전도를 할 것이 아닙니까? 어느 날 몇 년 만에 나타나서 사영리 들이대면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공갈이나 치면 어느 형이 그것을 감격해서 칼 들고 찾아온 동생에게 무릎을 꿇고 주님을 영접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라도 안 할 것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그렇게 말합니까? “친족 곧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불신자보다 더 악하니라.” 아니 피도 안 섞이고 살도 안 섞인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찾아가서도 전도를 하는데 동기간에 왕래를 해야지만 예수를 믿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닙니까? 한달, 두 달, 석 달, 심지어는 일년, 이년이 지나가도 동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만나는 교제 없이 그러고 살아가면서 자기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오늘도 교회에 나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형제들과의 사랑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런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사랑의 기술들이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 사이에 존재하는 과거로부터 받은 상처로부터 먼저 자유로워야 합니다. 칼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이 꽉 차있는 상태 속에서는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야곱과 에서가 얍복강에서 이렇게 칼부림이 일어나고 누군가 하나 피 흘리고 죽어야 했을 이 비극의 시점에 오히려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통곡하며 우는 이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늘 언젠가 남북간에 이런 화해가 이루어져서 민족이 통일이 되어야 된다는 염원이 없이 이 본문을 읽은 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마음에 간절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국가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의 가정 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결국은 여러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까리따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깨트려진 가족관계 속에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기도하고 교회 봉사한다고 가방 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통해서만 까리따스의 사랑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가까이서 여러분들의 모든 삶을 지켜보는 가족들이 여러분들의 변화된 삶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에서는 하나님을 처음부터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 얍복강가에서 깊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야곱을 변화시키시니까 변화된 그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래서 둘이 뜨겁게 서로 화해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평화가 흐르도록 그들의 관계를 변화시켜주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의 깨트려진 형제와의 관계는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우리 형이 욕심이 많아서, 내 동생이 이기적이어서, 그리고 우리 누나가 경우가 없어서, 그리고 내 누이동생이 셈이 흐려서 돈을 꾸어가고 안 갚는다고, 그렇게 관계가 깨트려졌고 그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동기간의 관계는 개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방치된 형제와의 깨트려진 관계는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많이 깨트려져있다는 증거입니다.
III. 형제와 화해하는 길
A. 자기 사랑을 버림
그러면 형제가 화해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또한 자기 깨어짐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이 야곱은 잔머리에 왕자였습니다.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 아주 얍삽한 인간이었습니다. 잔꾀를 부리기 좋아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지금 이 형을 만나러 가면서도 사실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절대 절명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잔머리를 굴리는 게 잘못했으면 자기가 형에게 가서 목숨을 걸고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고 빌 것이지 먼저 정탐꾼을 보냅니다. 보낼 때 그냥 안 보내고 짐승들을 한 300여 마리 딸려서 선물이라고 보냅니다. 형의 마음을 품기에 내가 만나리라. 그랬지만 사실은 형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한번 정탐을 보냅니다. 그리고 들리는 이야기가 형이 400명의 사람을 데리고 당신을 맞으러 온다고 합니다. 아니 반가우면 빨리 달려오지 왜 400명을 모아서 오는지, 그것은 군사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군사들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도저히 피할 수 없는데도 또 잔머리를 굴립니다. 자기의 가축의 떼를 둘로 나눕니다. 하나를 먼저 보내고 그리고 상당한 거리를 두어서 두 번째 떼를 뒤따라가게 합니다. 그 앞에는 자기가 별로 사랑하지 않는 이런 종들을 다 보냅니다. 죽으면 죽어라. 그리고 보냅니다. 그다음에 마누라가 넷이었는데 하나 빼놓고 다 사은품이었습니다. 그 사은품들을 앞에 보냅니다. 먼저 가축을 보내고 뒤에 딸려 보냅니다. 자식들도 있었지만 뒤따라 보냅니다. 그래서 저것을 치면 이 떼를 거느리고 도망을 가리라. 그런데 잘못하면 가축을 잃어버리리라. 그래도 또 여의치 않으면 이 가축을 잃어버리라. 그래도 또 여의치 않으면 사은품으로 따라온 이 여자들 죽어도 할 수 없다. 내가 덜 사랑하는 새끼들, 그다음에는 죽어도 어쩔 수없지. 내가 끝까지 사랑하는 라헬, 그리고 그 몸에서 난 그 여자와 새끼들은 맨 뒤에 놓고 마지막에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그 식구들만 도망을 치려고 잔머리를 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보냅니다. 그런데 이 잔머리의 왕자도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그 잔머리를 가지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 보내고 혼자 외로이 얍복강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천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신 수행할 수 있는 천사니까 천사를 붙들고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그것을 뿌리치려고 하니까 천사를 꺾어보려고 씨름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리켜서 야곱의 믿음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호세아 12장에 보면 이것이 믿음이 아니라 인간적인 고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토리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를 붙들고 매달렸는데 이 야곱은 짐승을 치면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니까 후에 이런 몸이 아주 튼튼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힘으로 이 천사와 씨름하면서 나를 축복해주기 전에는 갈수 없습니다. 내가 이런 상황 속에 있는데 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주십시오. 이 마음에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에서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주고 형의 가슴에 못 박았다는 이런 자기 뉘우침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여기에서 복을 받고 사는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 꽉 차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사와 씨름하며 매달린 것입니다. 그것은 혈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다가 안 되겠으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시키셔서 환도를 내리치게 하신 것입니다. 환도가 복숭아 뼈가 아니라 허리아래의 골반 쪽의 뼈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나면 환도가 시리다고 합니다. 환도를 그냥 내리친 것입니다. 남자의 모든 힘이 허리에서 나오는데 이게 위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철컥하고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힘을 쓰지 못하고 거꾸러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리가 빠져서 이제는 천사를 붙들고 씨름할 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울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엎드려서 펑펑 울고 나니까 소위 이야기하는 여기에서 자기 깨어짐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며칠을 거기서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통곡하면서 자기가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깨트려진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관심이 자기의 행복, 자기가 힘들게 얻은 이 양떼들, 짐승들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형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기를 짓밟으려고 하면 어떡해하나. 다 잃어버려도 마지막에 내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는 데리고 도망가야지. 그런 것들이 다 깨트려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이런 마음이 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형과 불화하고 사는 동안에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리고 내 형에게는 내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그의 마음에 괴로움을 우리 형에게 안겨주었을까? 형이 얼마나 많이 상처를 받고 아팠을까? 하는 이런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동생의 마음속에 정말 처음으로 무너지고 깨트려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는데 제 느낌에는 야곱이 온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 에서가 동생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평펑 울고 화해해야지. 그런 마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아마 400명을 거느리고 나올 때조차도 죽여 버리려고 나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보니까 그렇게 아버지가 내리는 축복을 빼앗아서 도망간 동생이 잘되었나 보니까 저기서 장애인이 되어서 다리를 질질 끌면서, 환도가 위골되었으니까 여러분 척추가 빠졌는데 어떻게 걸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다리를 질질 끌면서, 바로 제가 그 윗부분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몇 달 전만 해도 허리를 피면 아프니까 허리를 할아버지처럼 숙이고 그리고 천천히 걸으면 덜 아픕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절뚝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입니다. 20여년을 들판에서 짐승을 치며 살았으니 그의 몰골은 오죽했겠습니까. 머슴살이를 하면서 살았는데, 그러니 형이 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인생의 무상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 허무하다. 그리고 와락 동생에 대한 연민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모습을 사용하셔서 에서의 마음을 그렇게 바꾼 것입니다. 확 쏟아지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빼들었던 칼을 꽂고 달려가서 마음에 빼들었던 칼을 가슴에 꽂고 달려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형제간에 이제껏 나누어본 적이 없는 뜨거운 화해와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가족들과의 관계는 가족들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을 먼저 안 여러분들이 깨트려지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 모든 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미워하면서 서로 대치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었을 때는 남편의 마음에는 이 아내가 이미 인간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내의 마음에는 남편이 내가 차라리 혼자 살다가 늙어죽으면 죽었지 저런 인간하고는 살고도 싶지 않다는 증오가 속에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족과의 관계를 포기할 때는 이게 보통으로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게 평행선이지 어떻게 해결의 길이 있겠습니까?
나는 목회 초기에 실수를 한두 번 했습니다. 자매가 와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결혼을 했는데 형제가 자기에게 너무 막 한다는 것입니다. 얘기를 들으니 속에서 막 분노가 끌어 오릅니다. 그런 나쁜 놈이 있나. 내가 혼내줄게 불러와라. 그래서 막 혼내주려고 그러는데 형제가 또 입을 열고 자기 아내는 인간도 아니라고 하면서 얘기하는데 금방 마음이 내가 누그러지면서 어떻게 여자가 그럴 수가, 결국은 야단을 못치고 깨달은 것이 있는데 다 믿지 말자. 다 한쪽 이야기니까 믿지 말자. 해결의 길은 오늘이라도 남편이라는 인간이 은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비췸을 받아서 다 너 때문인 줄 알았는데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못섰기 때문에 가정이 이 꼴이 되었구나. 그리고 오늘 저녁이라도 가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여보, 정말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 화해의 길이 보입니다. 누군가 죽어야 합니다. 안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럼 그냥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들도 이제 고통을 물려받으면서 여러분들의 불행의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가정을 깨트리는 이유는 자기가 깨어지는 것이 아파서 자기를 깨트리기보다는 가정을 깨트려서 끝내는 것입니다. 가정을 깨트리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자기 하나만 깨트려지면 되는데 가정을 깨트려서 수많은 사람을 망가트립니다.
언젠가 어쩔 수 없이 이혼한 자매가 그리고 이혼하고 와서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어느 날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책을 읽고 나에게 와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제가 이 책을 7년 전에만 읽었어도 가정이 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지나갔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게 정답입니다. 그래서 자기 깨어짐 그것 좀 읽고 변화되라고 그렇게 애를 써도 말들을 안 듣습니다. 문서선교부에 물어보니까 한 천명 정도가 사갔다고 합니다. 교인이 이렇게 많은데, 왜 그렇습니까? 개꼬리 삼년 묵어도 황모가 안 됩니다. 황모는 사슴꼬리 털입니다. 붓의 최고의 재료입니다. 개꼬리는 묵어나도 안 됩니다. 땅을 교회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을 개꼬리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여러분을 삼년 묵어나도 절대로 황모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그 인간은 늙어도 그 인간일 따름입니다. 물론 이제 더 이상 형제를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언젠가 형제들이 다 죽을 것이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발 좀 깨닫고 변화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속에 비추어서 여러분을 깨트려야지만 변화될 것인데 오늘 보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해서 깨트려지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니까 깨트려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담임목사는 자기가 쓴 책인데 12번째 읽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읽으면서 그랬습니다. 온 교인이 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기도하면서 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이 책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은 돈이 없어서 못산다고 그러는데 여러분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까이 나아가서 여러분들이 깨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여러분 모두의 행복이고 가족의 행복입니다. 자기 깨어짐 없이는 깨트려진 여러분들의 가정은 죽어도 회복이 안 됩니다.
B. 은혜가 필요함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뭘 깨닫게 되는가 하면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 이런 것입니다. 은혜는 그자체가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리고 그 은혜가 참 하나님의 은혜이면, 우리 안에는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과 그리고 형제에 대한 사랑이 이 속에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가 필요해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는 이런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은혜를 주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에게 형이 있습니다. 형이면 인격적으로 나보다 훌륭하고, 신앙도 나처럼 예수를 믿고 또 예수를 믿어도 나보다는 신앙이 훨씬 좋고 그래서 나를 이끌어주어야 형인데 기왕이면 돈도 훨씬 나보다 많아서 그래서 내가 조금 어려워질 때쯤 되면 형이 이리 오너라, 불러서 너 어려운 살림에 얼마나 힘드냐. 많이 힘들지. 그리고 품에서 돈이라도 꺼내서 한 2백만 원을 쥐어주면서 이것 얼마 안 되지만 갖고 가서 아쉬운 대로 보태 써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만 이야기하는데 너무 어려운 일이 있거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신세지지 말고 형에게 연락하여라. 우리 형이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 형을 왜 안 사랑하겠습니까? 그래도 한번 만나면 돈이 오는데 내가 그 형을 왜 안 좋아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형이 나보고 너 교회에 나오라, 그러면 내가 안 나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형에게 잘 보여야 하다못해 국물이라도 있지. 인격적으로도 나보다 훌륭합니다. 공부도 나보다 많이 하시고, 신앙도 나보다 뛰어나시고,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돈이 나보다 많아. 그러면 내가 그 형을 왜 안 좋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이 있는데 이 동생이 비록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늘 마음씀씀이가 널러리 합니다. 그래서 야 아버지가 우리 가지라고 주었는데 이거 아무래도 공평하게 나누어야겠다. 형제가 우리 둘이니까 우리 둘이 나누어갖자. 그 동생이 형, 그래도 형이잖아. 형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이제 형이 아버지 산소도 돌보고 그렇게 집안을 이끌어가야지 되는데 형, 나는 매달 직장생활을 해서 돈을 버니까 그냥 형이 가져, 이러면 그 동생을 내가 왜 안 사랑하겠습니까? 그리고 자기는 없이 지내도 자기 마누라 생일은 잊어버려도 형 생일은 꼭 기억하고 인사 와서 그래도 무엇이라도 하나 들고 와서 형, 정말 내 마음은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싶은데 내가 이것밖에 여유가 없거든, 그리고 선물 하나 놓고 가, 그래서 펼쳐보니까 형, 사랑해. 형이 있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형은 모르지. 어디에 가든지 나는 형을 자랑하고 다녀, 형, 고마워. 이렇게 편지라도 나오면 동생을 왜 싫어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에 우리 마누라가 몸도 약하고 그래서 아플 때 그냥 여동생이 어떻게 알았는지 달려와서 언니가 많이 아프다며. 내가 요즘 직장을 옮기느라고 한달 쉬고 있는데 내가 거들어줄게. 뭐 시킬 일이 없어, 그러면서 조카들 도시락도 챙겨주고, 학원도 보내주고, 공부도 가르쳐주고 하면서 언니 너무 힘든데 좀 누워서 한달이라도 편히 쉬어, 내가 봉사해줄게. 이렇게 사근사근해봐. 내가 왜 여동생을 안 사랑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동생, 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없습니다. 그런 좋은 형이 왜 여러분들의 형이겠습니까? 그런 예쁜 동생이 여러분들의 동생이 되겠습니까? 분수를 아십시오.
보십시오. 경우가 없습니다. 형이란 인간은 욕심 충만합니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 다 가로채고 뭘 껄떡이면서 뭘 빼앗아갈 것이 없나. 여동생이라고 하나 있는데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코빼기 한번 안 보이고 자기가 어려울 때는 달려와서 오빠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는가 하면서 덤벼듭니다. 동생이라는 녀석은 뭔가 어려운 일이 있고 하면 와서 하지도 않고 자기네 기쁜 일이 있으면 와서 소식도 안 전합니다. 그리고 위급할 때는 달려와서 형, 돈 좀 꿔줘, 형, 뭐 좀 해줘, 그럴 때 어쩜 인간이 그따윌까? 그 애는 가망 없어. 우리 형은 인간도 아니야. 누이라고 하나 있는 게 싸가지가 없어. 네가 그따위로 살아봐라. 네가 어디에 가서 환영을 받나. 그러니까 자기 남편에게 매일 업신여김을 받지. 불쌍한 인생,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마음에 싹 접어버리면 은혜가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에서 이미 싹을 잘라버렸는데 무슨 은혜가 필요합니까? 그런데 이럴 경우에는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형이 그렇게 띠알머리가 없이 이기적입니다. 그런데 기도할수록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네 형을 사랑하여라. 네 형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그러면 결국 마음속에 어떤 정답이 있는가 하면 아! 형이 그렇게 못되었지만 내가 이 형을 포기하면 형은 정말 희망이 없을 것이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하든지 형을 사랑해야지 되는데, 그러면 내게 그런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자원이 들어와야지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형제를 도와주고 싶은데 내가 돈이 있으면 도와줄 수 있습니다. 너무 도와주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꿔 와야 됩니다. 바로 이렇게 꿔 와야 할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됩니다. 하나님, 내가 내 형을 사랑해야지 되는데 난 진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 하나님 아실 것입니다. 나를 변함없이 사랑해주시는 하나님도 내가 사랑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렇게 나를 막 대하는 형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을 갖게 되어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면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야곱이 울며 매달린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동생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입니다. 네가 그따위로 살고 셈이 흐리고 인간이 게으르고 그따위로 경우에 어긋나게 하니까 네가 회사에서도 따돌림을 당하고 결국은 직장에서 쫓겨난 것이야. 저런 인간은 도와줄 가치도 없어, 그리고 딱 차버리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냥 굳어진 마음으로 그 인간을 제외해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하라는 계명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러면 오히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사랑한다면 무슨 상 받을 것이 있겠는가. 너희에게 선하게 행하는 자를 너희가 선하게 대한다면 상 받을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원수도 사랑하여라. 자기 동생이 아무리 경우가 없고 자기 누나가 아무리 인간의 도리를 몰라도 원수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들을 사랑하려고 마음을 갖게 되면 자기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이 발견이 됩니다.
마음이 맞는 교회 안에서 모두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마음에 맞는 형제와 어울려 다니며 밥 먹고 전도 다니고 야유회 다니고 구역모임을 하고 그럴 때는 자기가 예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때때로 너에게는 그런 면도 있지만 사실은 네가 얼마나 변화되지 않은 바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너 보아라. 그러면서 우리의 형제들을 통해서 우리를 한번 껍질을 벗겨서 우리의 속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봐라. 너를 사랑해주고 너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교회의 지체들에게는 네가 이렇게 잘하지만 너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네가 손해를 봐야 하는 육신의 피붙이들에게는 네가 얼마나 야멸차고 무자비한 인간인지 한번 봐라.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북! 뜯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꽉 차서 그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의 결점과 그 사람 자체가 분리되어서 보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결점은 미워하지만 그 사람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형제들이 불화한 이유는 쥐뿔도 사랑해주지는 않으면서 자기 잣대를 가지고 형제를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쳐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도 못 고쳤는데 그게 고쳐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여러분들의 형제들 간에는 진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형이 있는데 동생에게 와서 수시로 돈을 꿔갑니다. 그리고 안 갚습니다. 태도가 잘못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은 고칠지 모릅니다. 한번 제대로 된 빚쟁이에게 걸려서 조폭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남의 돈을 떼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렇게 됩니다. 그거 굉장히 무섭습니다.
(예화; 방배동 지하에 살던 어떤 사람이 이사를 가려고 방을 빼려고 했지만 나가지 않아서 그냥 이사를 갔는데 주인이 다른 사람이 왔음에도 돈을 안 주니까 조폭을 시켜서 신사적으로 엄포를 놓으니까 그날로 돈이 입금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셈이 흐립니다. 그러면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치려고 하면 결국 얼굴 못보고 사는 것입니다. 고치려고 그러지 마십시오. 어떻게 그게 고쳐지겠습니까? 고치면 좋겠는데 자기는 그렇게 고쳐봤나. 동생이 형을 보니까 셈이 흐려. 형을 고치려고 하는데 안 고쳐져. 그런데 자기 밑에 동생이 또 와서 자기는 보는데 그 형은 셈이 흐린데 애는 또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가정에 불화를 일으킵니다. 동생이 와서 하는 말이 형은 다 좋은데 술 좀 먹지마라. 그것 때문에 형수가 그렇게 힘들어하고 애들도 괴로워하는데 좀 끊어, 형 진짜 창피하지도 않아. 그리고 한번 퍼붓고 갔다고 그게 끊어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됩니다. 그런데 형제를 볼 때 저 인간이 저것을 고치면 내가 정말 사랑해줄 텐데. 그게 안 고쳐집니다. 그럼 내가 묻고 싶은 게 그럼 여러분들의 형이 여러분이 볼 때 마음에 걸리는 습관을 안 고칩니다. 여러분들의 동생이 일생동안 살아온 태도를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랑해주려고 애를 썼는데도 안 고칩니다. 그럼 안 볼 것입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안 보고 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가정의 식구들을 대할 때는 목사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보면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변화된 사람도 많지만 변화되었는데 일부만 변화되고 그래서 어떤 성질머리는 죽지 않아서 펄펄 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여러분 안 봤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십시오. 버리는데 그래도 어느 날 집에다 편지를 보내서 당신은 성질머리가 나빠서 열린 교회에서 잘렸어. 이러고 편지를 안 보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있습니다.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참으면서 기다립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또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던 사람들이 후일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됐지. 어차피 인간이 그런 것인데. 형제들이 그렇게 목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번 뭐 여러분이 이해하고 용서했다고 해서 형이 태도가 바뀌고 동생이 인생을 바라보는 인생관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십시오.
언젠가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목사님이 그러시는데 어느 집에 끼니가 간데없다고 그러니 가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러셔서 청년들이 돈을 모아서 쌀과 여러 가지를 사서 갔는데 집에 들어가는 순간 마음이 상했습니다. 우리 집보다 세 배는 더 잘살았습니다. 가전제품이 없는 것이 없이 다 가지고 삽니다. 왜 그렇게 끼니가 간데없나. 그랬더니 월부로 들여놓는 것을 갚느라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돌아오는데 지체들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전도사님 이런 사람도 도와주어야 하나요? 그래서 나도 그때는 정말이다. 배신감을 느낀다고 그러면서 왔습니다. 나중에 다시 나이가 들고 정신을 차리고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생각하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도와야 된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람들을 한번의 선행으로 고쳐놓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안 고쳐집니다. 그냥 흘러가게.
여러분들이 알뜰살뜰 모아서 형을 도와주었더니 형이 그것으로 쌀을 산 것이 아니라 양복을 사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 동서들이 굶니 먹니 해서 그냥 한푼 두푼 모아서 봉투 하나 마련해서 주었더니 동서가 그것을 가지고 쌀을 산 것이 아니고 호텔에 가서 파마를 하고 왔습니다. 뒤집어질 것입니다. 그래도 참으십시오. 그 사람 어차피 그렇게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돈을 안 주면 현금서비스를 받아서라도 그렇게 할 사람입니다. 그런 게 마음에 걸리고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기개로 사용을 하게 되면 결국은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참고 기다리고 그도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되려니 생각을 하고 흐르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그런 정도로 인내하고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화: 울산 집회에 가셔서 들으신 이야기- 무당집을 드나들던 사람이 아무래도 효험이 없는 것 같아 예수를 믿으려고 하자 무당이 어떻게 알고 예수를 믿어야 될 사람이니 잘 믿으라고 해서 교회를 잘 다녔지만 별로 은혜가 없어 다시 무당집에 전화를 하면서 다시 가려고 한다고 하자 무당이 하는 말이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한다며 마음을 바치고 정성을 다해서 믿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효험이 없으니 예수를 꼭 붙들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는 내용)
우리 교인들 중에는 무당만도 못한 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무당도 자기가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하니까 깨달은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이 세상의 신들도 마음을 바쳐야지 돌아보아주지. 그러니까 그 형제가 가서 교회에만 왔다 갔다 하면서 무슨 효험을 보기를 바라니까 이 무당이 야단을 친 것입니다. 마음을 바쳐라.
내가 여러분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우리 형 경우가 너무 없어. 내 동생은 셈이 흐려. 우리 누나는 너무 이기적이야. 그래서 우리와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어요. 제수씨가 꼬드깁니다. 우리 형수가 중간에서 이간질합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 목 놓아 기도해보셨습니까? 마음을 다 바쳐서 그 형제간의 관계를 회복해야지 되겠다고 그렇게 목 놓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뭘 얼마나 참았는데, 한번 얘기해보십시오. 얼마나 참았는데.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참으셨는데 뭘 참았는지 얘기해보십시오. 이 은혜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힘을 가져다줍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꽉 차서 넘치게 되면 여러분들의 동생이 불쌍해 보입니다. 탐욕에 가득 차서 이글거리고 번들거리는 눈, 그리고 그 얼굴이 정말 개기름이 흐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는데 너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의지할 것 없는 우리 형의 영혼, 우리 누나는 누가 사랑해주나. 이 세상밖에 없어서 저렇게 헐떡이면서 살아가는 내 누이동생, 그리고 불쌍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예수 사랑 나의 사랑 내 마음속에 넘쳐 형제를 사랑해
깊이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의 마음에 임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영적인 부모의 마음이 됩니다. 뭘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 상처를 받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뭘 기대할 게 있습니까? 죄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여러분들이 참아야지. 좀 이용당하면 어떻습니까? 좀 손해 보면 어떻습니까? 영혼들이 더 소중하고 가족이 소중한 것인데, 결국은 깊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럼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절절히 눈물이 흐르는 중보의 기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할 때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지 기도 가지고 안 됩니다.
C. 사랑에 빚진 자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깨트려진 그 가정을 위해서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화해의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아무 것도 안 주시면서 그렇게 하라고 여러분들에게 강요하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제껏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에 빚진 자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 이제껏 살아온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쓰레기 같은 죄인들인데 하나님이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아무 공로 없고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경우 없고 막대 먹은 인간들이었는데 왜 그랬는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나의 마음속에 화해의 손길을 내민 내가 주님께 찾아갈 능력도 없을 그때에 주님이 화해와 사랑의 손길을 내미셔서 나를 감동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완악하고 나밖에 모르던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를 깨트리셔서 예수의 사랑에 눈뜨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눈뜨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보면서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사람을 보며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기로 하나님 앞에 운명지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를 베푸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모두 포기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것을 다 주셔서 희생하신 예수의 사랑을 보면 우리들이 그 사랑에 다 빚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참된 가치와 보람이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을 희생하기까지 해서라도 내가 무엇을 많이 움켜지고 누리고 내가 행복해지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목표가 되면 그러면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우리 형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내가 양보하고, 그리고 내가 포기하고 아직까지도 신앙이 없는 내 동생을 위해서 내가 포기하고 그리고 그 동기간들로 하여금 자기의 지위나 그리고 자기가 줄 수 있는 어떤 것들 때문에 형제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이기 때문에 그 형제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하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 형제는 참 소중하고 그래서 여러분 같은 형을 둔 것 때문에 동생들이 행복하고 여러분과 같은 동생 때문에 여러분의 형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고 누이 때문에 행복한 동생, 그 다음에 언니 때문에 동생 때문에 행복한 언니,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가족들 간의 사랑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식들이 그것을 보면서 자랍니다. 우리 아빠가 사랑할 수 없는 우리 작은아빠를, 큰아빠 그리고 우리 고모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심초사하고 얼마나 많이 양보하고 그러면서도 사랑과 평정을 잃지 않고 그리고 그 동생과 그리고 동기간들을 화목 시키려고 노력했는지 그것을 보면서 아이들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집니다. 가족은 포기할 수 없구나. 그리고 가슴에 새깁니다. 그러면 포기할 수 없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붙들려고 할 때 우리의 아이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붙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더더욱 더 하나님 앞에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식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나 돈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에 대해서 그 인간으로서 어떻게 그 깨어진 형제들 속에서 화해를 이루면서 자기를 그 화목의 제물로 바치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그 자식들이 부모를 통해서 보는 가운데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덕성스러운 삶인가 하는 것을 자식들이 교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의 일들도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식들의 마음속에 가족들의 불순, 그리고 형제들의 기대감의 상실, 이런 것들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았고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부자가 되는 것이었습니까? 형제들의 덕을 보는 것이었습니까? 부모 유산을 나누어 가져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였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거칠게 사는 죄인이었는지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생명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한 알의 밀알이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우리를 위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로 당신 자신이 썩히신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희생과 자기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생명과 은혜로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이런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깨트려지고 또 썩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여러분의 가족 속에서 보게 되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째든 우리 가족들은 모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늘나라에 갔을 때 예수님이 여러분들을 맞으러오셨을 때 그때 여러분들에게 애야, 네가 이제야 내 곁으로 왔구나. 정말 보고 싶었다. 그런데 너희 형제들은, 너희 동기간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렇게 물으셨을 때 우리는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 다 같이 왔습니다.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 형도, 우리 누나도, 우리 동생도 모두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샘솟듯 솟아나지 않겠습니까? 한번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형제를 위해서 많이 희생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잖아요. 하나님이 다 주십니다. 형 앞에 여러분들이 비참하게 낮아져도 주님이 높이십니다. 동생 위해서 여러분들이 물질을 양보해도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높임과 축복 속에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했고 영생은 소유한 사람이 자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온전히 내어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의 본질이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갔을 때 여러분들이 동기간과 함께 모두 손잡고 우리 가족들 간에 아프고 쓰린 날이 많았고 오해와 갈등, 고통의 시간이 없지 않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사랑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늘가족으로 다시 만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0. 가정의 화목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I. 본문 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잠언 17장은 1절에서부터 3절까지 또다시 가정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절과 3절에서 가정의 문제를 다루면서, 특별히 이 1절에서는 가정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 이것은 우리말로 말하자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마른 떡 한 조각을 놓고 온 식구가 식량을 삼아야 하니 그게 얼마나 가난한 삶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서도 화목하게 사는 것이 좋은 음식-고기, 육류, 생선 이런 것들로 풍족한 음식이 광에 가득한 것보다도 훨씬 더 낫다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의 생각과 관점은 많이 바뀌죠. 오늘날은 물질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사실은 물질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정말 너무나 어려워서 단 돈 백 만 원 만 마련해 보려고 해도 그게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특히 자기가 벌어서 자기가 사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가 필요한 자원을 조달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이 자본주의 사회예요. 그러니 이 물질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예요. 돈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물질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떼어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행복도 물질에 의해서 이것이 좌우 될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어느 정도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살림인데도 아주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돈이 많고 부유해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지 않죠.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환경적으로 고통을 받게 되면 가족들 간에도 갈등들이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이루게 되면 제일 먼저 가정을 이루게 되는 사람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물질입니다. 물질. 그래서 당장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고 조금 더 중기적으로는 자녀들을 위해서 자녀들에게 어떻게 제대로 된 교육을 시키고 그들을 양육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 때문에 돈에 대해서 많이 집착을 하고요. 좀 더 시간이 지나고 장기화 되면 자신들의 노후를 위해서 경제적인 문제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거지요. 이런 일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목숨을 가지고 살아 있는 날 동안에 계속 되어야 할 고민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황에 도달한 나머지 사람들이 물질이 가정의 행복에 있어서 거의 모든 것인 것처럼 생각을 하고 그래서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도 초미의 관심사가 이 물질을 어떻게 더 많이 소유하고 그리고 이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면서 살 것인가 하는 이런 것에 온 마음을 쓰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II. 가정의 행복
그런데 오늘 성경에는 마른 떡 하나만 가지고도 가족이 화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혜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A. 관계의 행복: 화목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가정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을 누리면서 사는 행복이 아니라 관계의 행복이라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 관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가정에서 무슨 혜택을 보고 가정에서 많은 물질을 누리고 가정에서 많은 부를 누리고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욕심껏 그 물질을 사용하고 이러는 것에 가정의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행복은 관계에서 오는 행복이 가정의 참된 행복이다 이런 이야기예요.
자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가정에 물질이 풍족한데 그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먹을 것 입을 것 이러한 자원들입니다. 사람이 정말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좋은 자원으로 건강을 보양하고 내 몸을 의복으로 보호하고 안전한 집에서 나의 안전을 보장받고 추위를 피하고 더위를 피하고 하는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우리의 육신이 잘 보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진짜로 그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 위해서는 육신이 그렇게 보양을 받을 뿐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의 삶을 살게 하는 정신과 혼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사람이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똑같습니다. 우리가 가족 구성원에 물질도 주어지고 또 그 물질 위에 가정이라고 하는 곳에서 정신을 공급받아요. 그래서 가정에 와서 부모는 부모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자식들은 자식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아내와 남편은 각각 자기의 길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요. 이런 것들로 가정에서 계속 채워질 때 아까 말씀드린 육체적인 자원은 육체를 보양하고 하는 것들은 정신을 강화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정신의 공급이 없이 만약에 물질만 많아진다고 할 것 같으면 가족이 정말 행복해 질 수 있을 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당장은 어떨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가족들은 불행해 질 것입니다. 아이들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어린 시절에 모자란 것이 하나도 없이 필요한 만큼 공급해주고 그래서 아이들이 제멋대로 살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절제와 고난을 이기는 인내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 꺾을 줄 아는 용기 이런 것들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면 결국은 가정에서는 부모가 물질로 아이를 보호해서 아이를 자라게 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아이가 밖으로 나갔을 때는 돈 가지고안 되는 일이 많거든요. 그러면 그 아이는 인생을 살면서 자기를 꺾어볼 수 없는 거지요.
자기를 꺾어보지 않아 본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행복할 수 있느냐 하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사람들이 사랑이 있기 때문에 꺾어져 주었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래서 불행해 지는 거지요. 더군다나 그런 아이가 자라서 결혼을 한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자기를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는 아이가 결혼을 해서 아내를 만나거나 남편을 만난다고 칩시다. 그렇게 꺾여 보지 않은 사람이 자기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과 함께 어울려서 살면서 양보하고 희생하고 설득하고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절대로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절대로. 동기간에 함께 어울려 살면서 형이나 동생한테 자신이 꺾이는 것보다는 아내에게 꺾이는 것이 훨씬 힘들어요. 그러니까 그런 경험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결혼을 할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 그 사람의 불행을 막을 수 없죠. 오히려 그런 불행들을 촉진하는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가정의 화목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마른 떡 하나만 놓고도 온 가족이 화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화목한 가정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관계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과 맺은 관계를 즐거워하고 남편은 아내와 맺은 관계를 즐거워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은 아버지의 아들인 것, 엄마의 딸 인 것을 즐거워하고 그리고 자식들은 서로가 동기간 인 것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가족의 행복입니다. 가족은 무슨 위락시설이나 놀이 공원이 아니에요. 가족은 뭘 함께 많이 누리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가족들이 함께 기대면서 사는 관계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가족이 함께 기대고 사는 관계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것. 관계 때문에 행복한 것.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가족 안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한 번 들어가 봅시다.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들어가 보면 가족이 잘 하면 가족 때문에 내가 행복해지지만 그러나 사실은 가족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바로 인생의 불행입니다.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좋은 부모를 만나서 아버지로부터는 하나님의 부성을 어머니로 부터는 모성을 함께 배우고 신앙 안에서 잘 자라가고 동기간에는 잘 양육되면서 양보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자라가는 법을 아이들이 배우면서 자라면 그 아이들은, 그런 환경이면 그냥 행복할 것만 같지요? 그렇지 않아요. 인간이 누군지 여러분 몰라서 그래요? 인간은 뼈 속까지 부패한 인간입니다. 그 아이가 세월이 많이 흘러가고 신앙이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우리 아버지 그리고 엄마 만나고 신앙의 동지가 될 수 있는 우리 오누이를 만나고 화목한 가정에서 양육 받은 것이 행복하다고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이 아이가 자라면서 신앙이 떠나가고 마음에 욕망이 생기고 호기심이 생기고 그럴 때 얼마든지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숨을 조일 듯이 힘겹게 느껴지고 경견한 생활을 강조하는 자신의 어머니가 정말 힘겨운 조련사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 가정이 좋은 가정이 되면 방종하려는 인간의 일시적인 마음을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꽉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녀들 중 죽어라고 공부 안하려고 하는 애들 있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요. 자기가 안하려고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냐. 그러고서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지. 하고 아이를 탁 놓아 버린다고요. 근데 겨우 중학교 1학년입니다. 그러면 뭐하겠어요. 학교 그만두고. 공부를 안 하려고 해도 때려서 고등학교나 대학교까지는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얻어맞으면서 다니냐면 그게 아니거든요. 중학교 1학년 때 몇 번 얻어맞고 2학년 되고 3학년 되어서 고등학교에 갈 생각을 하면 정신 바짝 차려서 공부를 한다고요 혹 안한다 해도 대학에 몇 번 떨어지거나 한다고 해도 주위에서 좋은 대학가는 것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나면 검정고시라도 해서 대학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방종할 때에 부모가 야단을 쳐서라도 바로잡아 주면 그들이 나중에 방종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나중에 가정이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 속에서 훈련 받아야 할 것은 가족이 가족들로 인해서 서로 행복해지는 법 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목의 본질 입니다. 가정의 화목은 돈의 많고 적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에요.가족 구성원들 끼리 서로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려고 노력을 해야 해요. 그래야만 거기에서 가정의 화목이 오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했는데 우리 남편은 왜 저럴까하고 자꾸 단점을 생각해요. 물론 인간이니까 이런 점들을 고치면 우리 남편이 더 좋은 사람이 될 텐데 이런 점들을 고치면 가족들이 저 사람 때문에 더 행복할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심하게 결점에 집착하게 되면 관계에 대한 소중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생겨나는 것이고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추한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걸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담배 같은 것을 끊게 할 때 담배에 대한 욕망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사람들에게 담배의 아주 무섭고 더러운 면만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금연학교 같은데 가면. 담배를 피우면 정신적 스트레스가 풀린다 이런 헛소리 안 해요. 담배를 피우면 마치 곧 죽을 것 같이 담배 피우다 죽은 사람들의 폐를갈라놓은 것을 쭉 사진 찍어서 보여줘요. 사진이 아니라 아예 유리병에 담아서 시커멓게 된 폐들을 보여 준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게 너무 무섭고 더러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에 대해 정이 떨어지고 싫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가족 구성원도 마찬가지에요. 기왕에 남편이 됐는데 결점을 붙들고 늘어져 본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지금의 그 남편보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자기한테 장가를 갔겠어요? 더 좋은 데 갔지.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이해하고 만족하고 살아야지 그 결점을 집착하고 물고 늘어지면서 결국은 이런 남자하고 사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행이고 손해인 것처럼 생각을 해요. 더 나아가서 다른 남자하고 비교를 해가지고 저 남자는 우리 남편의 이런 결점을 안 가지고 있는데 .. 그러면 어쩔 거예요? 사랑에 빠질 거예요? 그거 다 헛물 키는 것이거든요. 움직일 수 없이 자기 남편은 그 사람 하나에요. 그러면 이해하고 참고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하면서 사랑을 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단 말이지요. 그 사람으로 인해서 스스로 만족하는 법들을 터득해야 한단 말이지요. 절대로 남편과 아내 사이는 고칠 수 없어요. 자식은 부모 맘대로 고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안 됩니다. 그렇게 고칠 수 있을 것 같이 남용을 부리지 마세요. 그러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깨뜨려진 화목 이외에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끔찍이 사랑했다고 하는데 자식은 상처투성이가 되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요.
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애들보다도 공부도 더 잘하고 얼굴도 더 잘생기고 몸매도 늘씬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 하면 더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더 훌륭한 아이들이 많잖아요? 그렇다고 자꾸 비교하면 뭐하겠어요? 움직일 수 없이 내 자식으로 주어졌는데. 그러면 다 자기 뱃속에서 나온 작품인데 밭도 그렇고 씨도 그러니 그렇겠지 하고 소속감을 느끼면서 감사하면서 살아야지요. 귀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지요. 너는 절대적으로 볼 때 모든 아이들 보다 뛰어나진 않지만 네가 나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하나 때문에 나는 네가 사랑스럽다 그걸 부모들이 자식에게 보여 줄 때 자식들의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참 본질이라는 것이 소유의 많고 적음, 지능의 높고 낮음, 지위의 고하 이런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을 참 자기의 기쁨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 거기에 인생의 참된 행복이 있구나 그걸 아이들이 부모를 통해서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인생을 살다보면 유난히 사치스러운 삶에 집착하거나 지위에 아주 집착을 하거나 물질에 집착을 하거나 이런 소유에 집착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어린 시절 관계의 결핍 속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관계의 결핍 속에서 산 사람들이 소유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구성원들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서로를 인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해요. 한 번 집에 가서 조용히 묵상을 하고 생각을 해 봐요. 내가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행복한 스무 가지 이유. 쭉 한 번 생각을 해 봐요. 내가 내 남편의 아내이기 때문에 행복한 이유 열 가지. 하다보면 그런 것도 나올 것 아니에요? 나로 하여금 성화에 도움을 주기에.^^이제껏 까지 예수 안 믿어 나로 하여금 깨어 있게 만들기에.. 그럴 수도 있잖아요? 제가 언제 한 번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고등학교 선생님이 너희 아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적어가지고 와라 그랬더니 자기는 그런 거 없다는 거지요. 그래도 해 갖고 와라 그랬더니 써가지고 왔는데 ‘아빠를 사랑하는 이유’때리지 않는 날도 있기에 그걸 진짜 아버지 앞에서 읽어주었대요. 그래서 아버지가 막 끌어안고 울었다잖아요? 인간의 관계가 그런 거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외로워요.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그런 말을 했어요. ‘모두들 혼자다’ 각자 그렇게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난주에 차 안에서 책을 잠깐 읽었는데 그걸 읽고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환자가 통증이 너무 심하니까 진통제를 놔 달라고 간호원에게 조른 것입니다. 그 여자가 심장병 계통의 병을 앓고 있는데 진통제를 놓으면 치명적으로 위험하답니다. 그래서 안 놔주는 거지요. 나중에는 이 여자가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면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발작을 하는 것입니다. 간호원들이 몇 명이 찾아가서 안 된다고 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그 병원에 간호원들 중에 책임자가 되는 사람이 왔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진통제를 놓으면 왜 안 되는지를 의학적으로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어요. 당신이 진통제 맞으면 통증은 멎을 수 있을지 몰라도 죽을 수 있다라고 심각하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 준것입니다. 이 여자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자기는 여기 있는 간호사들이 다 자기를 미워하기 때문에 진통제를 안 놔주는 줄 알았다고 그러더래요. 그러면서 정말 진통제를 놔 줄 수 없느냐고 물어서 절대로 안 된다고 그랬대요. 그러더니 그 부인이 그 여의사보고 펑펑 울면서 그러더래요. 진통제를 놓아 줄 수 없으면 저를 한 번만 안아주세요. 그러더래요. 그래서 이 의사가 당황한 가운데 환자를 꼭 끌어안았더니 환자가 그 여의사 품에서 그렇게 울더라는 거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이렇게 외로운 게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가족 구성원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아빠는 왜 저모양일까 우리 엄마는 왜 저모양일까 우리 애들은 왜 남의 집 애들 같지 않고 왜 저모양일까 우리 부모님들은 남의 집 부모님 같지 않고 왜 저러실까 그런 생각은 말은 하면 물론 안 되고 그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되요. 생각해봐야 실현 될 수도 없는 건데 하면 뭐해요? 그런다고 해서 우리 애들이 간밤에 저 집 애들하고 바뀌겠어요? 아니면 남편이 바뀌겠어요? 깨고 나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인데 일수불퇴지 투덜거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냥 살아야지요. 그렇게 비교되기 시작하면 감사가 모두 사라지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래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관계다 그리고 가장 좋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가족들 모두가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들이 그 가족 구성원 각자가 자기로 인해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렇게 자기 자신을 자지 자신과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관계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B. 화목의 원천: 신앙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런 화목의 원천입니다. 그렇게 화목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동의 할 수 있는데 그 관계에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는 안 되거든요. 서로 노력을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게 무거운 것을 드는 것처럼 ‘ 자 이제 우리 가정의 화목을 위해 노력하자 하나 둘 셋’ 그럴 때 모든 가족이 이걸 번쩍 하고 들면 간단할거에요. 꼭 무거운 거 들 때 인간성이 드러나잖아요. ^^ 그래도 헌신적인 사람들은 무거운 네모난 것 들 때 사각 귀퉁이에서 양쪽으로 손을 집어넣고 물건을 들려고 힘을 써요. 그런데 좀~~인간성이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꼭 설 자리도 없는 데 이상한 데 서서 한 손으로 슬쩍 힘도 안들이고 드나마나 .. 가족들이 모두 그렇게 하면 되는 데 함께 희생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할 수 있는 자율근육 같은 게 아니에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사랑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인 경우도 있단 말이지요. 하지 말아야지 하는 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래서 여기에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화목하게 살아가게 하는 원천이 필요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신앙입니다.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도 평화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지만 자기의 깃발을 꺾지 않는 평화를 원해요.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꺾어서 자신의 깃발아래 복종시키지 않으면, 한꺼번에 여러 개 던진 돌이 호수위에서 파문을 일으키고 일으켜진 파문이 퍼지면서 서로를 간섭하듯이 결국은 그들이 행복해지길 원하지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요. 여러분 신앙 때문에 가정에서 박해 받아 본 적 있죠? 부모에게 교회 나간다고 매 맞거나 심한 모욕을 받거나 하면서 핍박을 받아요. 그럴 때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텅 빈 교회에 캄캄한 밤중에 집에서 심한 욕을 먹고 혹은 핍박을 받아서 그러려면 보따리 싸고 나가라 라는 내침을 당해서 갈 데가 없어서 교회에 가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요.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해요. 그러면 뭐가 느껴지지요?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지요. 핍박을 받을 때에는 우리들이 사실은 핍박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참 많아요. 왜냐하면 핍박받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는 하나님의 은혜거든요 .은혜를 통한 위로거든요. 그 은혜가 사랑의 감화예요. 사람이 사랑에 감화되게 되면, 사람들이 핍박하는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요. 핍박하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스데반이 일개 그냥 인간에 불과 했잖아요.그런데 핍박을 받아서 돌무더기에 맞아서 죽어가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했던 똑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잖아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가족이 화목하게 살기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투자가 가족들이 절대로 똑같이 투자를 안 한단 말입니다. 절대로 안 해요. 여러분 집에 돌아가서 큰 맘 먹고 남편하고 잘 해보려고 갔는데 남편이 그 날이 장날이라고 남편이 여러분 마음을 뒤집어 놓아가지고 성질내서 대판 싸운 날도 많을 거 아니에요? 그러고 몇 주 있다가 회개는 하지만.. 어쨌든 그런 적 많거든요 그러므로 절대로 자기가 잘 해봐야 되겠다는 시점에서 온 가족이 한꺼번에 똑같이 투자 안 해요. 그런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은혜 받은 사람 그 사람이 잘 해야 되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해주셔요. 그것이 신앙의 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으로 해요. 주님이 내 아내의 남편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주님이 만약에 내 남편의 아내라면 이렇게 바가지를 긁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만약에 이렇게 부족해 보이는 내 자녀의 아버지가 욕심 많고 이기적인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기를 꺾는 거지요.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꺾는 것이지요. 주님 때문에 자기를 꺾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바로 가족들이 화목하게 살아가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많아도 가정에 상처가 많아도 그 가족이 상처가 많아도 딸이 먼저 예수 믿고 깊이 깨뜨려지면 그 딸이 망가진 가정을 고치는 통로가 되어요. 엄마가 상처가 많아도 엄마가 깨뜨려지고 은혜를 받으면 그 엄마의 희생을 통해서 화목의 원천인 신앙을 사용해서 가족들을 섬겨요 참고 인내해요. 왜냐하면 다른 가족들에게는 없는 남이 모르는 사랑이 자기에게 있어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있어요. 그걸 가지고 참고 인내하면서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가족들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그런 도구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 사람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그 일을 위해서 부르셔요. 그래서 헌신하게 하시고 희생하게 하시고 몸을 바치게 하시고 마음을 바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만들어 주신단 말입니다. 신앙의 힘이 아니면 이겨 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족들만 직접 들여다보고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요. 절대로 화목할 수 없어요. 가족들만 들여다보고는 절대로 화목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그 신앙의 원천으로 삼으면서 변화되지 않는 가족을 보며 예수의 사랑으로 참고, 변화되지 않는 가족을 보며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희생하고 이러면서 가족들의 변화의 때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시작은 내가 했지만 나의 그 희생을 종자 씨 삼으셔서 성령님이 계속 역사하셔서 가족들을 하나하나 서로를 즐거워할 수 있는 가족들과의 관계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의 완고함이라고 하는 것은 건물하고 비슷해요. 이렇게 세워진 전형적인 형태의 건물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 뭐냐 하면 하나만 부서지면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건물이 주저앉아요. 두 개만 부서지면 주저앉아요. 무게 중심이 기둥에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한 쪽 기둥이 부러지든지 힘을 받지 못하게 되면 힘이 다른 기둥에 쏠리는 데 그 기둥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면서 한꺼번에 우르르 쓰러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삼풍백화점 같은 게 그래서 무너진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의미에서 가족들이 그렇게 되요. 한 사람이 완고함을 꺾고 주님의 은혜로 희생을 하게 되면 그렇게 완고해 보였던 가족들이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즐거워하려고 하고 화목을 이루려고 하는 그 사람을 기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위대한 힘은 없어요. 정말 사랑보다 위대한 힘은 없어요. 특히 가족들 간에는 사랑보다 위대한 힘은 없어요. 여러분들이 남편과 아내 혹은 부모와 자식 혹은 동기간 간에 마음이 상하고 깊이 갈등을 일으켜서 소원해 졌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열 번만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빌고 사랑한다고 하면 회복되지 못할 수 있는 관계는 없어요. 그 사람이 심장에 철판을 깐 사람이라도 그건 관계없어요. 반드시 회복이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자기의 유익을 꺾고 희생할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일단 자신이 희생을 해야 하는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기쁨 이런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부모가 무정하게 자기 자식도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바로 그렇게 되는 거지요. 자기 사랑에 집착하게 되면 공정성을 잃어버리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사랑해야 될 사람도 버리게 되는 거지요. 자기 이익과 자기 사랑에 깊이 집착하게 되어서 결국은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지 이후에 그 고통을 통해서 가족이 어떻게 될 것인가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런 화목의 원천을 우리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화목의 원천을 주님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신앙을 통해서 은혜를 공급을 받고 은혜의 힘으로서 사랑할 수 없는 가족들을 사랑하고 아무도 희생하지 않는 그 가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언젠가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 뒤를 따라가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마음으로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은 단순히 가족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말 망가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한 번 생각을 바꿔 보세요. 바꿔서 오늘 저녁에라도 가족들이 잠들었을 때 가서 얼마나 측은하고 불쌍한지를 한 번 보세요. 그 얼굴에 평화가 없잖아요? 가서 한 번 봐요. 그리고 그들을 깊이 불쌍히 여길 수 있어요 되요. 그리고 사랑할 수 있어야 되요. 사랑보다 사람을 고치는 위대한 능력은 없어요. 위대한 능력은 사랑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을 바꾸어 놓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요 힘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바뀐 것도 하나님의 그런 사랑에 의해서 바뀐 거죠.
III. 가족을 세워 줌
가정을 포기하기 전에 가정을 위해서 더 많이 희생하는 법을 배우세요. 그리고 절대로 비교하지 말고요. 그리고 감사해보세요.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 이러한 관계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리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높든지 낮든지 소유가 많든지 적든지 가족은 그런 것에 의해서 더 가족 되고 덜 가족 되고 그러는 것 아니에요.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에요. 주님이 여러분들을 하늘 가족으로 삼으셨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돈이 많을 때 여러분들을 특별히 사랑해 주시고 그다음에 가난하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여러분 무시하고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교회는 바로 그걸 배우는 것입니다. 그걸 배워서 이 세상에서는 수 없이 많은 이유들로 차별받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하나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 사회,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사모하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그런 정신들을 구현해 나가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하늘가족으로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여러분들의 가족들의 삶 속에서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깊이 사랑해보세요. 그리고 부모가 아이들에게 ‘나는 네가 내 아들이라서 네가 나의 딸이라서 나는 참 좋다. 행복하다’ 그것을 아이에게 표현을 해보세요. 그것이 전해지지요. 우리엄마가 나를 향한 사랑, 우리 아빠가 나를 향한 사랑은 나의 능력이나 소유에 달린 사랑이 아니라 내가 나이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는 사랑이다. 행복해 하는 사랑이다. 적어도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분들은 나 없는 삶이란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분들이다. 이럴 때 자신이 정말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근데 그들이 아무렇게나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아요. 자존감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요. 그래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만약에 경제적인 문제나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러면 더 더욱 화목해야 해요. 그래서 어려운 때를 가족들이 함께 지나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경제적으로 쪼들린다고 남편과 싸우고 분쟁하고 자녀들을 막 대하고 이러면 그 아이들이 자라면서 우리 집안이 고통스러운 것은 모두 돈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런 걸 가족들이 사랑으로서 어떻게 극복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인생의 자산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정말 화목한 가정이 되세요. 그리고 화목하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그 화목을 위해 제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 시켜 주신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도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죠.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일은 불화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 제물이 바로 화목의 제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한 죄를 지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하나님께는 회개하는 죄인들이 은총만 누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구원의 화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이기심만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화목할 수 없어요. 그리고 그 가정이 그렇게 불행해지게 되면 여러분들의 인생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과정이 그 사람 자신의 자기완성의 과정과 일치해요. 일치해요.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그는 절대로 외로울 수가 있는데 한 사람이라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아요. 그게 바로 그 사랑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해요. 깨뜨려지는 가정은 고통이 많아서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이 없어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만 한 사람만 희생을 하면 되요. 한 사람만.
어느 집안이 있었는데 부부 사이가 매우 나빠요. 매일 싸워요. 그 집이 외동딸이 하나 있었대요. 부부가 그렇게 싸우는 데 중학교 때쯤 되었는데 부부가 갈라서려고 거의 결심을 굳힌 것입니다. 이 아이가 당돌한 아이인데 부모에게 마지막 최후통첩을 보냈어요. 엄마 아빠가 만약에 갈라서면 우리 집이 13층인데 딱 바로 그 날 난 여기서 뛰어 내린다. 그 아이 하나가 가정을 지켜 줬어요. 그아이가 그런다고 해서 둘이 서로 뜨겁게 사랑한 것은 아닌데 안 쪼개지고 애 뛰어내릴까봐 외동딸하나 있는 거 뛰어 내리면 가슴에 피멍들지 않겠어요? 그런데 평소에 하던 성질로는 뛰어내리고도 남을 애라는 거지요. 그 점에 있어서는 부부가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딱 손을 잡고 우리가 지긋지긋하지만 저 아이가 성인이 될 때 까지는 우리 살자 그런데 그렇게 살다보니 늙잖아요? 메뚜기도 한 철이지. 늙었는데 뭐. 그러면서 위기를 넘기고 나니까 다시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그러니까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되요. 우리에게서 거의 사라진 단어예요. “희생” 교회나 가정이나 어디든지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되요. 희생을 해야 되요.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받은 사람들 주님이 더 깊이 만나준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더 경험한 사람들이 가족해서는 인내할 수 없지만 예수님 생각해서 희생해야 되요. 예수님을 생각해서 참아야 되요. 가정에서 참기 어려울 때마다 힘들게 하는 남편이나 애들 생각하지 말고 주님을 생각하세요.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위해서 생명을 다 버리고 죽으신 예수님 그 십자가의 사랑! 생각하면서 깊이 참고 그러면서 인내하면서 참으면서.. 그렇게 하다보면 가족들을 하나씩 하나씩 돌아오게 하셔요. 그게 바로 화평케 하는 삶입니다. 그때까지 흘린 많은 눈물과 희생 그 고난과 외로움 견디기 힘든 고통, 염려하지 마세요. 하늘나라에 다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것들을 참으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이 늘 만져주셔요. 늘 만져주셔요.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요.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그러면서 사랑하고 의지하십시오.
여러분들이 희생하세요.그리고 가족들의 종이 되세요. 참고. 예수님의 모습을 언제나 생각하면서. 받은 것이 많기 때문에 내가 주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족을 위해서 섬기고 희생하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한 알의 밀이 되고 여러분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그 밀 눈이 되어서 결국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열매를 하나님이 맺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니면 천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일을 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 가정을 통해서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겠어요! 기도하겠습니다.
11. 네 남편에게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엡5:22-24)
I. 본문해설
아직 시집을 못간 것도 서러운데, 복종할 남편도 없는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우리에게 설교를 하다니 매우 화난다. 남편을 주고 복종을 하라고 그러지, 그렇지만 제가 오늘 설교를 여러분들에게 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허둥대지만 미리 알게 되면 사람들은 그 일에 미리 대비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날이 왔을 때 사람들은 아! 그것이 그런 이치였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데 그때는 훨씬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다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결혼하기 전에 아내와 남편의 관계, 그리고 시부모님들과의 관계, 그리고 동기간과의 관계, 결혼생활과 함께 들어가서 맺어지는 여러 가지 많은 생각지 않았던 관계들에 대한 성경적인 답을 미리 갖고 있는 것이 매우 좋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시부모님들을 어떻게 모셔야 되는지는 아직 짝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교육을 받는 것이 가장 객관적으로 받을 수 있고 그리고 남편을 공경하고 또 아내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직 짝이 없을 때 싱글일 때 그런 교육을 받는 것이 가장 객관적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결혼을 한 상태에서 시부모님에게 어떻게 해야지 되는지를 성경적으로 가르친다고 한다면 이미 이익의 문제와 결부되어있기 때문에 호락호락하게 자신의 성경적인 견해를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이해관계가 없을 때 이런 결혼생활과 함께 이루어지는 관계의 이치가 어떤지를 이론적으로 착실히 공부해가면 그러면 실제의 상황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다루게 되어서 훨씬 더 좋은 이치에 있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아내들이여” 라고 아내들을 부르며 남편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지 될지를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미 1,2,3장에서 우주와 교회의 이치에 대해서 설명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이 교회를 우주적인 회복을 위한 종자 씨로 삼으셨는지를 설명하고 4장에서 교회로 범위를 좁혀서 하나님이 그 교회를 우주의 회복을 위한 종자 씨로 삼으시면서 어떻게 교회를 만드시고 교회를 하나님께서 교회되게 하셨는지를 설명한 후에 이제 5장으로 넘어와서 이제 다시 한번 교회에 대한 그 교훈을 토대로 가정에 교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나오는 것이 바로 아내들을 부르면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것이 바로 가정의 참된 질서를 세워가는 근본이 된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아내들을 부르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이 교훈은 가정을 참으로 질서가 있는 가정을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또 이런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그래서 이후에 말씀드릴 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헌신적인 결합들을 강화시켜 가심으로서 가정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한 종자 씨가 되도록 교회와 함께 지정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설득되기 어려운 명령
A. 복종해야할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된다는 이 명령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여전히 설득되기 어려운 명령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정말 남편에게 아내인 내가 순종한다면 정말 이 가정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 경우에 더더욱 이런 위험은 증대됩니다. 사고나 그가 찾는 길과 인생의 가치,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남편의 요구에 대해서 복종하게 될 때 그 가정이 진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온전한 가정이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남자가 교회에 다니는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진짜로 회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도록 요구할 때 아내인 내가 복종할 때 그 가정이 정말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생겨나게 됩니다. 더욱이 가정에 들어오면 폭언과 폭력, 강압과 그리고 제멋대로의 방종함으로 이 가정에서 남편이 자신의 이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이것이 가정을 진정으로 행복의 길로 이끌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가 밀려올 때 사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명령은 설득되기 어려운 명령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아내들이여” 라고 부를 때 이 아내는 교회 안에 소속되어있는 진실한 자매들이고 여기에서 남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교회에 소속되어있는 공동체 속에서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경건한 남편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찌하든지 진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가려고 할 때 그런 남편에게 복종하는 그것은 전반적으로 가정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토대 위에 세우게 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겠지만 이 남편이 불경건하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고 육욕을 따라 방종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내가 여기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때 그것은 결코 인격적인 순종이 될 수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복종을 통해서 가정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되는 사람들은 먼저 아내에게 복종을 명령하기 전에 먼저 그런 지지를 성경으로부터 받고 있다고 자부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아내가 복종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인생의 길과 가치를 따라 살고 있는지를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 옷을 입을 때 맨 위에 단추를 잘못 끼우게 되면 그 다음에는 올바르게 단추를 끼어도 결국은 옷 입은 매무새가 매우 흉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인생을 설계해감에 있어서 기본적인 전제들이 올바로 자리를 잡지 않게 되면 그것을 내버려둔 채 다른 것들을 시도하는 것들이 하기는 하지만 항상 부자연스럽고 완전하지 못한 그래서 아름다움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인 사람들이 신실한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불신자라면 어떤 도움을 입어서든지 참회하고 거듭나야지 하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형식적인 신자가 되지 말고 성령 안에서 진리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신실한 신자로 자라가는 사람이어야 하며 또 그렇게 진심으로 회심한 사람이라면 상태에 있어서 뒤로 물러가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속히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기뻐하고 가족 모두를 그런 하나님을 믿는 성경 신앙의 기반 위에 세워놓는 것, 이것이 남편으로서의 꿈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길을 가지고 살 때 그때 아내는 복종하여 할 훌륭한 남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남편이 먼저 복종할 수 있는 남편의 위치, 그리고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신앙의 인격,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일관된 성화의 노력, 이런 인생의 길들이 정해져있을 때 아내가 남편에게 잘 복종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 이미 남편이 이런 성도님들이 계시면 그 남편을 배나 더 존경하고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행복한 처지에 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불편한 것들을 좀 참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진 자매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가정과 가장(家長)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은 가정과 가장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세우시고 그 가정에 우두머리를 세우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남편입니다. 그래서 우두머리라고 하는 것은 이 존재의 질서에 있어서 누가 우월하고 우월하지 않다고 하는 우열관계에 있어서 우두머리로 세웠다는 뜻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끌어 가시고 천지창조 목적에 기여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질서입니다. 이것들을 교회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이야기를 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진리와 성령을 보내셔서 그 하나님을 아는 신앙과 사랑과 지식에 있어서 자라가게 함으로 성도의 전 삶이 애지의 삶이 되게 하십니다. 즉 사랑과 지식의 삶, 혹은 신애의 삶, 믿음과 사랑의 삶이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성도들을 보다 더 온전한 신자로 성숙시키고 그런 가운데 교회는 점점 더 하나님 앞에 완전성을 갖추게 되어서 아름다움을 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이 세상에는 선교적인 소명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성도들을 택하셔서 교회로 모두 부르신 후에 아무 질서도 없이 오합지졸처럼 모아놓으시고 주님이 직접 그들을 통치하고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교회를 만드시고 그 교회에 수없는 질서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그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질서의 아름다운 모형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 세계의 모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적인 아름다운 질서가 축소판이 되어서 이 교회 속에 구현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교회 안에 그런 질서들을 구현하시고 그 세워진 질서를 따라서 각각 사람들을 배치하십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목회자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궁극적인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힘입어서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가시적인 지역교회의 한 대표로 목사를 세우십니다. 그는 세워졌기 때문에 성도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직자로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서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신 사람입니다. 성도들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야 하며 그를 통해서 증거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신앙의 양심이 명백하게 입증하지 않는 한 모든 성도들은 그의 말을 주님의 음성이라고 듣고 복종하고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질서를 만들어놓으셨지만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목자로서 그 교회에 우두머리로 세우는 동시에 목자인 이 사람의 내면과 외면 속에 형제로 있을 때는 없었던 친분에 따른 절대적인 존재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저 모든 성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한 지체일 뿐이고 한 형제일 뿐입니다. 그 중에 하나님이 그를 한 사람으로 택하셔서 그래서 보이는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도와 그 다음에 목회자의 질서는 존재론적으로 종적인 질서가 아니라 횡적인 똑같은 형제들로서 그 중에 한 사람을 구별해내어 하나님이 교회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그를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그를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대해도 좋고 그리고 권위에 있어서나 모든 것에 있어서 나와 똑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지도자로 세우신 뜻들이 보이는 교회 안에서 구체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마땅히 권위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를 주님이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우신 것을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론적인 위계질서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위계질서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그 목회자가 목회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와 틀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당신의 목적대로 이끄시기 위해 기능상의 질서로 세워놓으셨다는 것입니다.그렇게 기능적인 질서가 가정에도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남편의 위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구김이 없는 뜻인데 언제든지 하나님의 이런 구김이 없는 뜻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 그 뜻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억지의견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억견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조시대에 볼 수 있었던 그런 남존여비사상이라든지 혹은 여성들이 남성에게 복종하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굴욕적인 삶을 미덕으로 만든 이 모든 것들은 다 악한 인간들의 윤리적인 조작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지 배우고 따라가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각을 가지고 이것을 들여다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구나. 아! 그러니까 아내는 남편의 밥이구나. 이런 정도로 생각해서 힌트는 성경에서 얻고 사상은 유교로 돌아가는 이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짜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힌트만 얻고 사상은 유교로 돌아가고 삶은 샤머니즘을 따르는 이런 식의 이율배반적이고 종교 혼합적인 신앙생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철학적인 착상들을 성경을 통해서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자신 속에 채우는 방식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성경적인 인간관에 입각해서 이 모든 것들을 해석하고 이해를 해서 그래서 성경을 통해 진리를 배울 뿐만 아니라 해석되어질 때도 성경적인 원리에 의해서 해석되어져서 기독교적인 사상과 신앙으로 앞뒤가 꽉 찼을 때 그가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일 수 있고 그에 의해서 이 세상 속에서 참된 기독교 사상들이 구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지 됩니다. 삶 전체가 자기의 지성을 하나님께 드려서 참으로 이 세상에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고 교회 안에서 참된 신자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이성적으로 철저하게 탐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음을 주셨으면 그 믿음이 어찌해서 내가 믿어야 할 수밖에 없는 진리인지를 이성으로 부지런히 탐구해가면서 더 상위에 있는 진리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그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창조하시려고 했던 그 아름다운 가정들을 이루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볼 때 이런 질서는 기능적인 질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바로 이런 상반된 기능들을 인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성에게는 호기심과 그리고 진취적 기상, 그리고 개척적인 정신, 그리고 따라서 과업 지향적이고 성취지향적인 그런 성품을 남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성에게는 그런 것보다는 이미 이루어진 것들을 잘 가꾸고 지키고 그 다음에 그런 일들을 위해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을 받고 사랑하고 하는 이런 관계중심적인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남성은 끊임없이 원을 그리며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하는 원심력이고, 여성은 그것들을 내부적으로 단단하게 결속되게 만들어주는 구심력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구심력이 없이 원심력만 있으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없고 어딘가에 내동댕이 처지는 것이고 원심력이 없이 구심력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균형과 일치를 이루면서 그렇게 우주의 원리를 따라가게끔 남성과 여성이 창조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질서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많은 인간들을 이 질서를 오용하고 그리고 오도해서 그래서 이 질서가 마치 한 여자를 남자인 자신 앞에 복종하고 짓밟는 것이 인간의 이치고 살아가는 이치인 것처럼 그렇게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매우 타락한 세계관이고 여러분들이 이것들을 극복하며 살아가야 할 그런 사명들이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편이 있는데 이 남편이 복종할 수 없는 사람일 경우에도 문제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가정에서 가장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장을 가정에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중요한 대표자로 남편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하나님을 모릅니다. 또 안다고 하더라도 잘 알지 못합니다. 매우 무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자기를 다스리시고 이끄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영적이 보호와 인도에 대해서 매우 둔감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가정의 질서 자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남편으로서 가정에 있는 가장으로서 대표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제 이 가정에 첫 단추가 잘못 끼어지기 시작하고 그리고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우리들은 신앙, 더 상세하게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 앞에서 정확한 회심과 그리고 자기 깨트려짐, 그 안에서 끊임없이 진리의 물을 먹고 그리고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야 할 남편의 책임을 여기에서 보게 됩니다.
한 가정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좋은 집과 그리고 넉넉한 세간, 그리고 넉넉한 생활비,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가정의 화목조차도 가정의 제 일의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가정의 일의적인 가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장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라고 믿고 그런 가치가 자기 가족구성원 속에서 실현되기를 원하는 목자적인 마음을 가진 가장, 이런 사람이 있는 것이 가정의 일의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은 그 가정의 목회자요, 그리고 아내는 바로 그 목회를 돕는 전도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낳는 아이들은 자기네 교회의 교인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낳으면 교인이 많아져서 큰 교회가 되는 것이고 조금 낳으면 단출한 가정이 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가치 그 자체가 목회자와 같은 마음을 가진 남편이 있고 그의 영성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신앙의 동지가 된 아내와 그리고 그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가려고 하는 자녀들과 그리고 동경해야 할 모본을 자신에게 보여주신 부모님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가정을 이룬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가장이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가장이 못됐습니다. 신앙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고사하고 세상 재미에 빠져서 절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아내나 애들이 교회에 다닐 때 그 남편이 보호해주고 그들의 뒤에서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구심점 역할을 해야지 되는데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핍박하고 예수 믿지 못하게 박해를 합니다. 이럴 때는 처음부터 자녀들과 아내에게 잘못된 남편과 아버지의 상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로 가는 그 길을 가로막는 장본인으로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등장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겪는 많은 일시적인 불행과 고통은 말할 수 없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심겨지는 이 왜곡된 아버지의 상들이 그 자녀들의 미래에 불행하게 될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가정에 평화를 위해서 나옵니다. 그게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해서 가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와 주는 것이 무슨 커다란 적선을 하는 것처럼 유세를 떨고 뭐가 마음에 안 들면 예배를 드리고 가면서도 아내와 다투고 그리고 아내가 신앙이 들어가서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되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이용해서 아내를 막 밟아버리려 하고 이용하려고 하고 자기의 중심적으로 행동하려고 하는 그런 나쁜 남편들이 있습니다. 혼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까불면 되겠습니까? 남편 된 사람들이 말입니다. 이럴 경우에 아내들이 참 순종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이 명령은 유효합니다.
III. 남편에게 복종하라
A. 신앙 안에서
그러면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될 터인데 어떻게 해야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신앙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됩니다. 남편이 아내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높은 신앙, 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내가 거의 무조건적으로 남편에게 복종을 해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 남편이 아내의 복종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아내를 폭압적으로 대하는 기회로 삼을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니까. 그런데 이제 남편이 그렇지 못합니다. 남편이 불신자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그가 요구하는 것들이 현저히 하나님의 명령과 어긋납니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신앙이 매우 어려서 육욕에 가득 찬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럴 경우에 신앙을 제쳐놓고 자기 좋아하는 것을 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때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합니다. 이때 아내가 복종하게 되면 남편이 하나님께 멀어지도록 돕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단서가 붙는 게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되는데 신앙 안에서 복종해야지 됩니다. 신앙 밖에서 복종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성도가 있었는데 남편이 휴일이면 늘 낚시가방을 챙겨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니까 가정은 늘 텅 빕니다. 어떨 때는 금요일 날 갔다가 주일날 밤에 오고 정 안되면 토요일 날 밤에 갔다가 주일날 밤에 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교회에 오고 남편은 그렇게 갑니다. 그래서 아내가 당신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 할 수 있는가, 그래도 내 남편이고 이 가정에서는 아빠인데 이렇게 휴일 날 우리를 팽개치고 당신 혼자 즐기려고 낚시를 하러 가면 되겠는가. 그랬더니 남편이 하는 말이 따라오면 되지 않냐. 너는 예수가 좋아서 교회에 가고 나는 낚시가 좋아서 강으로 가는데 무슨 차이가 있냐. 누군가 희생을 하고 따라와야지 되는데 그럼 여자가 남편을 따라야지 난 계속 낚시를 갈 것이다. 그러니까 점점 부부사이가 멀어집니다. 그래서 아내가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하는데 이렇게 두면 남편이 가정과 너무 멀어지겠구나. 가정이 잘되어야지 신앙생활도 잘 되는 것이지 그리고 사실은 가기 싫은데 남편을 따라서 낚시를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 그런데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갈수록 너무 좋은 것입니다. 결국에는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음식을 만들어놓고 음식이 상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 음식을 만들어놓고 밖에다 가만 내버려두면 하루만 지나면 쉬어서 못 먹고 삼일이면 곰팡이가 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패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냉동실에 냉동보관하고 냉장실에 집어넣는다. 소금을 뿌려놓는다, 말려서 집어넣는다.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패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부패가 침범해도 지연되도록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손에 넣기 위해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따라갔다고 하지만 이미 그것부터가 남편을 돌아오게 할 수 없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입각점 자체를 버리고 남편에게 기울어졌기 때문에 이 여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은근한 싫증과 하나님을 떠나서 살려고 하는 마음들이 남편과 하나가 되면서 결국은 부패하듯이 누룩으로 부풀어지듯이 그렇게 커지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남편과의 평화를 이루려고 하면 평화가 이루어지는가 하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 같지만 자기를 꺽은 사랑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사랑에 충실한 가운데 이해가 맞을 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그 사랑의 목표가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언젠가 충돌이 생기면 서로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면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갈라설 때는 무섭게 갈라집니다. 왜냐하면 이해관계가 충돌을 일으키고 나면 그 다음에는 겉잡을 수 없이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원칙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역시 적용상의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신앙 안에서 복종해야지 되는데 신앙 밖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도 문제지만 신앙과는 상관이 없고 저해하지 않는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남편과 함께 대결의 구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남편이 자기의 요구상황을 이야기하고 아내를 이렇게 하게끔 요구를 하면 그 모든 것들이 이 아내들에게는 신앙을 박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대결의 구도로 자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부사이에 정신적인 연합 자체가 생겨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예에 대해서는 제가 신뢰를 잘 찾지 못했습니다만 언젠가 제가 직장생활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가운데 “주께 하듯이” 하는 부분을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직장에서 신우회가 생겼습니다. 신우회를 하는데 그 직장 상사가 아주 도시락을 싸듯이 말리며 신우회를 방해를 합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신우회 회원들이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왜 우리 신앙을 박해합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합니까? 그러니까 이 예수를 안 믿는 상사가 기가 차다는 듯이 그 사람들을 한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얘기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이 무슨 신을 믿든지 아무 관심이 없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라, 그런데 왜 점심시간이 끝났는데도 직장에 복귀를 하지 않는가. 난 그것만 문제지.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다. 10부터 1시까지 신우회 예배를 드리고 다른 직원들은 다 밥 먹고 1시에 업무에 복귀하는데 당신들은 1시에 성경가방 가지고 밥 먹으러 가지 않는가. 그렇게 예수를 믿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 당신들이 예수를 믿든 부처를 믿든 나는 어차피 무신론자인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난 당신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시샘하는 사람도 아니고 불교를 믿는다고 해서 화내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어차피 신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 헛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헛짓하느라고 직장에 업무시간에 복귀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어라 그 대신 1시에 돌아오라. 난 그럼 아무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 그 사람들은 복음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직장생활에 충실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직장생활의 잘못된 태도 때문에 비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앙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박해를 한다. 아닙니다. 그런 박해받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없습니다. 자기의 삶의 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고생입니다. 영적인 것도 아니고 그것은 사회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우회 활동을 할 때는 그것을 철저하게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신우회 참가를 하려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라. 12시부터 12시 30분까지 밥 먹고 그 자리에서 도시락 집어넣고 성경공부 하고 1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 자리에 복귀하라.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사실 그런 예수를 안 믿는 남편이나 신앙이 어린 남편에 의해서 아내들이 박해를 받을 때 그것이 모두 100% 주를 위한 고난이 아닙니다. 태도가 잘못되었습니다. 신앙을 떠나서라도 아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남편이 사랑할 수 없는 그런 행동을 하고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남편을 공경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야기지, 신앙 밖에서 복종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B. 가정의 질서
두 번째는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되는데 그 복종할 방식이 가정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지 됩니다. 하나님이 이 만물의 질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목적들을 이루어가는 것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철학자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모르지만 제 각기 이야기하겠지만 난 이 우주의 근본적인 우주의 아름다움의 근본적인 핵심이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조화와 균형과 절제입니다. 조화는 다른 것들과의 어우러짐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조화는 다른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관계입니다.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입니다.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개체적 사물의 아름다운 관계성입니다. 그게 조화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완전하기 때문에 아름답지만 그것이 다른 것과 틀리기 때문에 다른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자신도 아름다워지는 것, 그것이 조화입니다.
균형은 이제 힘입니다. 균형, 그 자체는 잡아당기는 힘의 균형, 혹은 무게, 공간적인 대치에 있어서 균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도 이렇게 꺼내놓고 보면 양쪽으로 이렇게 대치를 이루게 되어있습니다. 팔을 벌리면 똑같이 비율을 이루게 되어있습니다. 비율도 모두 이 균형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힘의 균형, 그 다음에 미의 균형, 방향의 균형, 이런 모든 것들이 이 균형에 속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절제입니다. 절제는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에 충분히 만족해하는 특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이 온 우주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주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속에 창조하신 세계의 이 아름다움이 교회 안에 그리고 창조하신 세계 안에 아름다움의 모상으로서 또한 가정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은 아내와 다릅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이 아닙니다. 동시에 자녀들은 부모가 아니고 부모는 자녀와 다릅니다. 형은 동생이 아니고 언니는 누나가 아닙니다. 각각 다른 개체로서 가정이라고 하는 곳에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각각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위치적인 질서가 있고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작용적이 질서가 있습니다. 그 두 질서 안에서 움직일 때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하나의 캄캄한 우주로 생각한다면 거기에 남편이라고 하는 별, 아내라고 하는 별, 자녀들이라고 별, 또 부모님들이라고 하는 별들이 함께 거기에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똑같지 않습니다. A는 B가 아니고 B는 역시 C가 아닙니다.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이 또한 같은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하나가 각각의 작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으로서의 제 일의 덕목은 자식으로서 제 일의 덕목과 다릅니다. 일의적 덕목과 다릅니다. 또 아내로서의 일의적 덕목은 또 남편의 일의적 덕목과는 다릅니다. 그것을 이제껏 가정시리즈를 하면서 쭉 설교를 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한 것은 사랑이고, 또 남편이 아내에 대한 것은 복종이고, 부모의 자녀를 향한 것은 사랑이고, 자녀의 부모를 향한 것은 순종입니다. 그리고 효입니다. 이런 이치로 인해서 모든 것을 통합을 이루는데 이 개별적인 가치들은 보다 더 커다란 하나의 가치 안에서 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 통합을 이루는 가치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사랑입니다.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다른 모든 가치는 참으로 빛을 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의 별이 있고 태양이 있고 그 태양의 여러 별들이 돌 게 하고 그리고 그 중에 지구라는 별이 있고 지구의 주위를 다시 달이 돌게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규칙을 따라서 계속 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질서를 따라서 하나하나가 움직일 때 우주의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질서의 아름다움을 하나님께서 가정 속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족구성원들이 정말 자기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가 어딘지를 깨닫는 겸비함을 지녀야 합니다. 또 그렇게 변화된 후에는 위로부터 공급되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존재에 어울리는 작용들을 그 은혜의 힘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이것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까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이런 작용과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족 모든 구성원에게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 결국은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가족구성원 모두 다가 목표 자체가 좋은 남편 되기가 일생의 목표이고, 좋은 아내 되기가 평생에 소원이 그런 가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실한 신자,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한 인간으로서 신실한 신자. 진실한 인간이 되기를 사모하는 그 큰 맥락 안에서 남편인 나의 자리와 이치를 하나님 앞에 찾아가려고 하고 그리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욕망들을 가족구성원 각자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설 때 각 가족구성원들은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아름답게 자신의 이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이 불행해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그런데 이게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서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이런 질서가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번다고 위세를 부리고 남편을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압니다. 그러면 남편은 돈 좀 번다고 위세를 부린다고 수시로 아내를 때립니다. 자녀들은 그것을 보면서 자랍니다. 그래서 아버지 때문에 상처를 받는 엄마를 보고 그 엄마로부터 아버지를 미워하는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가 또 아내로부터 받는 그 폭압적인 광경들을 보면서 자식들이 상처를 받고 그리고 또 어머니를 비난하는 아버지를 봅니다. 그 앞에서 서로 다투고 전쟁을 하는 광경을 하는 광경까지 봅니다. 그럴 때 그런 광경을 보면서 자라난 아이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룰 가능성이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러니 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자녀들을 참 사람으로 세우시게 하기 위해서 교회보다도 먼저 가정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부모가 세계가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남성성이 아버지에게로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이 어머니를 통해 구현됩니다. 물론 어머니 안에도 잔존하는 남성성이 그리고 아버지 안에도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성이 있지만 주로 그렇게 해서 특징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양성을 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똑같이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돌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양성적인 본성을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것들을 나누어서 각각 두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이 두 부부를 따로 존재하지 않고 이 남녀를 결합시킴으로서 이것들이 보완관계를 이루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돌보시는 그 모상이 되는 작용들을 그 아내와 남편을 통해 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은 결혼과 함께 끊임없이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합니다. 보다 더 나은 사업, 그리고 보다 도전적인 과업, 그 성취 이런 것을 지향하면서 튀어나가려고 합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어떻든지 그 여자를 마음에 들게 해서 자기 곁에 묶어두려고 합니다. 그러면 친구도 다 끊어집니다. 그리고 직장에도 충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여자에게 충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언제까지? 시집올 때까지 일수불퇴 될 때까지, 그때가지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사랑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이 여자가 자기 없이 살수 없을 정도로 딱 달라붙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제 안심하고 밖으로 튀어나가는데 이때 많은 여자들이 남편이 변했다고 생각하는데 변한 게 아니라 원래 그 본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기를 충분히 여자에게서 사랑받고 있고 자기도 이 여자를 사랑에 자신 있다고 하는 관계의 확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여성들은 남자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맹탕입니다. 나는 조금 여자를 아는데 교만입니다. 그런데 어떻든지 간에 그렇게 뻗어나갑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남성성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통해서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난관을 헤쳐 가는 개척정신, 새로운 것들에 대한 모험, 도전, 성취, 거기에서 긍지 이런 것들을 아버지에게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장의 리더십과 책임, 도덕성 이런 것들을 아버지로부터 함께 배우는 것입니다. 딸도 그것을 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이 다음에 커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런 남편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을지를 객관적인 위치에서 아직 이해관계가 없는 아버지를 통해서 미래의 남편 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공평하고 안전한 것입니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시집장가 가고 며느리 맞이하는 교육은 애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그때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반복해서. 이미 결혼을 했는데 목사가 불러다놓고 시어머님 그러면 안돼. 그러면 이 시어머님인 권사님은 야, 이 목사님은 젊은 사람의 편만 드는구나.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반대편 이야기를 하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이해관계가 얽혔으니까 며느리는 역시 그동안에 건축헌금을 많이 한 우리 권사님 편만 드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해관계가 없을 때 그때 교육을 받아서 자신을 충분히 준비할 때 객관적인 판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이 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남편이 그렇게 성취 지향적으로 나가게 되면 이 여자는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 남편과 함께 밖으로 튀어나가려고 하면 이 가정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이 여자의 관심은 영토를 넓히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점령해놓은 그 영토에 무슨 꽃을 심어야 할 것인가, 무슨 나무를 심어야 할 것인가 무슨 집을 지어야할 것인가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관심 자체가 매우 다른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도전, 새로운 성취 이미 이룬 것들을 지키고 그 안에서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쉼을 얻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남성은 성취 지향적이고 여성은 관계 지향적입니다. 그러니까 남성은 개척정신을 가지고 불같이 추진하고 여성은 그렇지 않고 뭔가 고여 있는 아름다운 호수의 물과 같이 잠잠함과 평안, 그리고 질서에 대한 유지와 그런 안식에 대한 사모함, 이런 것들이 여성성입니다.
엄마 아빠를 통해서 그것들을 수많은 삶의 상황 속에서 그런 것들이 어떻게 유지되고 조화를 이루어나가는지 이 아이들이 보면서 자라게 될 때 몇 시간 공부해서 탁 하고 튀어줄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 과외공부를 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그것들을 모든 삶의 환경 속에서, 조건 속에서 체득하면서 그러면서 거기에서 남편과 길과 아내에 대한 길을 터득을 하게 되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란 남자 아이들이 그런 가정에서 자란 여자 아이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 불행해질 가능성이 매우 적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합니다. 그러면 시시각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회에는 깊이 존경하는 목회자가 있어서 그런 삶의 풍부한 경험과 통찰을 가지고 있는 목회자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가정의 문제를 결정하고 가정이 이끌어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이중 삼중 안전장치를 한가운데 그들이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 속에서 자녀들이 또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물려져 내려가면서 믿음의 가정이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 반대입니다. 그런 것을 못 보고 많은 갈등 속에서 질서고 뭐고 엉망진창이 된 가정 안에서 망가진 아버지의 상, 무책임한 아버지의 상, 무책임하고 폭압적이고 폭력적이고 무슨 성취 지형인데 그것도 무슨 가정의 공동체를 위한 성취 지향, 인류를 위한 성취 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욕을 쫓아가는 성취지향을 사는 아버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을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을 보고 그런 아버지를 무시하고 덤벼드는 질서를 무시하는 어머니의 상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게 되면, 잘 들으십시오. 너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딸이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사위 녀석이 바람을 피고 속을 썩입니다. 그때 그 딸을 잘 타일러서 잠시 고난이 있지만 신앙 안에서 참아라. 네가 이해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바라라. 이렇게 가르치지 않고 야 집어치우라, 그러고 사느니 혼자 살아라. 이런 엄마들이 대게 누군가 하면 그런 가정에서 자란 엄마들입니다. 결혼생활에 대한 애착이나 깊은 기대감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딸의 가정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야, 집어치우라. 그때 그 기준점 자체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자기 행복에 있는 것입니다. 딸의 행복에 있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살아가면 덕 볼 날이 뭐가 있겠는가. 야, 때려치워라. 이래서 사실은 이혼하는 많은 가정의 40% 가까이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고 통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손들에게 계속 물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의 원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하지 않고 때가 되면 그냥 결혼하려고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끼룩거린다고 그래서 미안한데 갈매기들이 먹이를 얻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끼룩끼룩 거리잖아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진짜 기도는 늘 시집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게 진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갈망인지 아닌지 짝짓기에 대한 갈망인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짝짓기에 불과하지 뭘 위해서 하는 것인지 뭘 위해서 숙제하듯이 그렇게 몇 살이 되면 반드시 가야지 되고 못 가면 죄를 지듯이 그렇게 살아야 되는지 그런 생각들이 성경적인 생각인지,
내가 여러분들에게 뼈아픈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혼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지 아무렇게나 살면 되지 결혼을 해도 어차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혼자 살아도 자기욕심을 위해 사는 사람인데 그게 자율적 독신인지 타율적 독신인지 그게 뭔 상관이 있는지, 아님 자율적 결혼이나 타율적 독신이의 구별이 없듯이 자율적 결혼이나 타율적 결혼이나 그것도 구별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가장 세속적인 일로 묘사하기도하고 가장 거룩한 일로도 묘사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에 속해있는가 하는 것은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혼을 통해서 완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의 질서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인정을 안 합니다. 질서는 무슨 질서고 무슨 나발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잘해주면 최고고, 못해주면 죽일 놈이지 이렇게 단순한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자기도 잘해주고 못해주는 척도가 계속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어떻게 정신적인 결합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점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행복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 있는 사람들도 그런 오류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니까 제쳐놓고 여러분들은 그래도 여기에 와서 은혜를 받고 말씀 안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런 질서를 곰곰이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성경을 기초로 신앙을 행사해서 그런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의 계획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정에서 하나님께 가장을 주신 위치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가정을 다스려나가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보면 족장들의 시대에 족장들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가정을 위한 영적인 권위를 주시고 그 권위아래서 좋은 신앙을 추구하면서 가족들의 신앙을 보호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족장들도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어떻게 세워야지만 참으로 가정의 질서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그 맥락에서 우리들이 가족구성원으로서 아내의 위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가정의 질서 안에서 남편의 위치를 인정하고 존재론적인 위계질서가 아닌 기능상의 질서 안에서 남편의 고유한 자리를 남편에게 인정해주고 그리고 그 리더십에 자신을 복종시킬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야지만 그 가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 안에서 남편이 정말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은 같이 신앙이 있다고 하는데 남편은 신앙이 워낙 세속적이거나 신앙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이 없거나 이럴 경우에는 이제 어쩔 수없이 과도기적으로 그런 역할들을 아내가 해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고 영구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도 남편을 주장하고 그리고 남편을 폭압적으로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지배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아내인 그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훨씬 많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남편을 잘 세우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남편이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훌륭한 신앙을 갖고 가정에서 리더십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남편이 사업을 하는데 그렇게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했더니 큰 어려움을 만나면서 남편이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회심을 하고 난 다음부터 이제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는데 한번 자기가 인도하고 남편에게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모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그때를 이용해서 아내가 이 남편을 세뇌시킨 것입니다. 당신이 남편이지만 영적인 가장은 나다. 내가 육적인 가장은 당신이지만 영적인 가장은 나고 영적 가장의 권위는 육적 가장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제사장적인 가장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고로 당신은 나에게 순종해야지 된다. 결국은 그렇게 기가 펄펄하던 남편이 이제 무엇을 해도 아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의존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업을 하면서 투자를 할 때도 아내의 기도의 응답을 받아야지만 겨우 움직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기가 환상적으로 행복할지 모르지만 그런 속에서 부부간의 정신적인 연합은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 인간의 생각은 우리를 자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자매들이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넌 어떤 사람을 원하냐? 저는 돈이 없어도 괜찮고요, 거짓말이고. 얼굴도 못 생겨도 괜찮고요. 그것도 거짓말이고, 학벌은 더더욱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더욱더 침도 안 바른 거짓말입니다. 누구도 또 그러는데 목사님 저는 학벌은 상관이 없습니다. 변호사나 검사면 됩니다. 의사도 괜찮고. 그것은 다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게 무엇인가 하면 자기는 아무 것도 없어도 되는 자기가 존경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진 형제와 결혼하고 싶다고 그래서 내가 시집을 안 가려고 뜻을 세웠구나. 아니 도토리 키 재기지 어떻게 여러분 나이에서 여러분 동갑내기에게 존경을 받는 형제가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정 그렇게 하고 싶다면 또래에서 찾지 말고 산전수전 다 겪고 수없는 고난과 성화의 길에서 연단에 연단을 거듭하고 이렇게 많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그리고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넘어지고 깨트려진 성화의 과정에서 상당한 경지에 이른 형제, 한 50넘은 형제와 결혼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충분히 존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안 되는 게 아무리 존경할 수 있는 게 신품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그 자매는 구름 잡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개잡고 있는 것입니다. 좀 현실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혹 그런 형제가 있다면 왜 자기에게 장가를 오겠습니까. 더 좋은 사람 찾아가지. 차례가 오겠습니까? 주님을 부를 것 까지는 없습니다.
어째든 그런 위치입니다. 그런 질서 안에서 남편의 자리가 어딘지 그리고 그에게 복종해야지 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이게 한국사회에서는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방면에 있어서 권위라고 하는 것이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그게 한국에서는 80년대 일어난 일이고 미국에서는 60년대 일어난 일입니다. 민주화항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권위주의에 타파입니다. 권위주의는 실제로 내용이 없는데 그것을 윗사람들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그 권위를 강요한 것입니다. 그게 권위주의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에 통일될 수 없다고 하는 통쾌한 혁명을 보여준 것이 그게 80년대 민주화항쟁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한국현대사회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런 일을 이루어냈다는 자체에 대해서 우리 민족적인 정신, 백성들의 정신에 대해서 아주 높이 평가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어떤 커다란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한 면만 보면 안 되고 이면도 함께 봐야지만 치우치지 않는 역사에 대한 견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훌륭한 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 백성이 그렇게 녹녹하지 않습니다. 정말입니다. 난 어디를 가든지 한국사회는 발전하고 있다고 힘 있게 얘기하는 사람입니다. 녹녹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고난 속에서 다져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 허망한 권위주의가 총칼로도 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군사정권이 총과 대포, 군인들을 동원해서 억누르려고 했지만 결국은 졌습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한국사회에 더 이상 그런 식으로 강요된 집단적인 권위주의가 그것에 의해서 이 백성들을 누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치인들이 정치하기가 힘들어지는 때가 80년대 이후부터입니다. 그 전까지는 쉬웠습니다. 이것은 웬만해서 속지 않습니다. 웬만한 사탕발림해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 확! 여당을 찍어서 대통령을 만들어 넣고 한번은 싹 밀물처럼 빠져나가서 여당을 물먹입니다. 이게 사람들이 철새같이 투표하는 백성들이라고 그러는데 그게 아니라 의도된 것입니다. 뽄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높이 평가합니다. 80년대 민주화항쟁을, 영원히 잊지 못할 한 역사의 한 획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훌륭한 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좋은 것들을 앗아가게 한 것이 바로 80년대 민주화항쟁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권위가 다 업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욕하는 선생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일치가 있었습니다. 선생은 존경해야지 되는 것이 학생의 덕이다. 이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형성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무너진 것입니다.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그런 모든 권위를 가진 것에 대해서 전면적인 거부현상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권위에 대해서 권위가 좋은 권위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잘 복종하고 그 질서에 순종하는 것은 머리에 든 것이 없는 그런 무지몽매한 백성의 표식이 되고 대안도 없으면서도 그 질서에 항거하고 권위를 다 부인해서 완악해진 상태를 만드는 그것이 바로 의식이 있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인텔리겐차에(?) 표지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공감대들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는 철저하게 이익으로 움직이는 살벌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다 무너진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없고 자녀들에게는 존경하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존경하는 목회자가 없고 그러면서 권위 전체를 다 거부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일들이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반전운동과 함께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한 획을 그은 것입니다. 프란시스 쉐퍼같은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무엇인가 기독교적인 에토스, 기독교적인 풍토에 대한 아메리카 전체의 합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60년대를 기점으로 이 모든 것들이 다 붕괴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는 20년 후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성경으로 볼 때 이 권위는 우산입니다. 많은 타락과 부패의 낙진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입니다. 이게 선한 권위일 경우에, 그리고 그것을 선하게 행사할 경우에 훌륭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에게 굉장히 많은 권위를 주십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자식이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 저 목사가 될게요. 하고 서원을 했는데 아버지가 네가 무슨 목사가 돼. 하나님 애가 괜히 헛소리한 것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애가 책임이 면제가 됩니다. 그런 정도의 권위를 하나님이 부모인 아버지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아버지가 얼마나 선량한 아버지시겠는지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버지입니다. 그에게 그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런 것들이 다 깨트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그래서 한국에 정신사 속에 흐르고 있는 이 혼돈상을 기독교의 시각에서 정리를 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오류와 그 다음에 진리를 섭취할 것은 섭취하지만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토대위에 서있는 그런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가야지 되는데 중요한 것은 바로 선한 권위입니다. 당연히 가정에서는 아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하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자녀들은 그 아버지를 어느 정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고 그런 속에서 가정이 모든 부패와 오염으로부터 보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 안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됩니다.
IV. 순종과 부부의 정신적 결합
오늘 이 시간에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의 이런 복종, 즉 순종이 부부의 정신적인 결합을 유지하게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치명적인 사실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좀더 발전시키면 많은 논쟁들이 필요하겠지만 오늘 유익을 위해서 간략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다음에 기회를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찌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 여자 속으로 연합하여 한 살이 될지니라.”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의 살이 될지어다,” 이렇게 나옵니다. 말하자면 비유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이렇게 속으로 둘이 이렇게 결합되는 게 아니라 두개가 이렇게 딱 결합이 되어서 각자 두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여자 속으로 남자가 쑥 들어가서 그래서 둘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혼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혼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데 핵심 그 자체는 이것이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육체가 어떻게 둘이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뭐 밀가루 반죽처럼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인 관계를 통해서 결합을 이룬다고 하지만 물리적으로 하나 되는 것은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정신적인 결합의 한 표현인데 그것이 부부가 서로 결합됨으로서 정신적으로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서 혼연일치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는 구별이 되고 개별적인 본성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그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아주 깊은 진리들을 이 안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핵심을 제가 여기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결합이 성립되려면 남편이 주님을 믿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제 남편이 믿지 않을 경우에도 어느 정도 결합이 있지만 믿을 때 온전한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또 그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결합이 원리적인 결합이라면 실제적인 결합은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우리가 하나라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이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아내가 남편을 통해서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는 요건과 그 다음에 남편이 아내를 통해서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는 요건이 약간 차이가 납니다. 둘이 딱 나누어서 여성은 이것이다. 남성은 이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둘 다 사랑이라는 것은 똑같은데 정신적인 결합을 통해서 그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도적으로 여성이 정신적인 결합을 느끼게 하는 그것과 남성으로 하여금 결합을 느끼게 하는 그것이 약간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A. 사랑과 누림의 관계
우선 먼저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정신적이고 주도적인 결합을 느끼게 되는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누림입니다. 남편이 자기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을 할 때 그때에 이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정신적인 결합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누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제가 언젠가 설교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데 누림이라고 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인데 상위의 목표가 없는 좋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합니다. 결혼을 막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성이 너무 행복합니다. 너 나 좋아. 그러니까 그럼 좋지. 내가 그렇게 좋아. 그럼 좋지. 정말 나를 사랑해. 그럼 사랑하지. 얼마나 좋은데?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 좋아해. 정말 좋아. 좋지. 거기서 끝났어야 하는데 자매가 불행한 질문을 하는데 왜 내가 그렇게 좋은데? 형제가 네 아버지가 돈이 많잖아. 그럼 이게 바로 누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성은 남성이 어떨 때 정신적인 결합을 느끼는가 하면 이 남성이 자신에게서 쉼을 얻는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자신이 그 남편에게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즐거운 존재라는 느낌을 받게 될 때 그것으로서 이 아내는 남편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결합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들은 아내가 나도 그런 적은 없지만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렸다고 해서 별로 섭섭할 것 같지 않습니다. 나도 내 생일을 별로 신경 안 쓰는데 그게 뭐 그렇게 섭섭할까? 나는 별로 안 섭섭할 것 같습니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내들은 못 참습니다. 아마 생일을 남편이 잊어버렸다고 하면 그날 밤 벽에다 얼굴을 대고 자면서 이 사람하고 살아야 되나. 안 살아야 되나. 들랑날랑 할 것입니다. 바빠서 잊어버렸는데 여성들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성들은 남성들이 볼 때는 쓸데없는 정보를 통해서 사랑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뭐 결혼기념일 그것을 안 챙기는 사람은 간이 배밖에 나온 사람이라고 그리고 결혼기념일 생일 그런 것까지는 괜찮은데 어떤 때는 뜬금없이 우리가 손잡은 날이 몇 월 며칠인지 알아. 컴퓨터의 용량이 그렇게 비어있습니까? 그런 것까지 입력하면서 살라고 하는지, 그런데 여자들은 그런 것을 집착합니다. 그래서 거짓말로라도 그것을 만족시켜주면 그렇게 좋아하고 남편과 자신 사이에 정신적인 결합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남자들이 볼 때는 여자들이 덜 떨어져서 그런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본성 자체가, 성향 자체가 그렇게 관계 지향적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여자가 깊이 감동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억수로 큰 선물을 사주고 돈을 갖다 주고 그럴 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물론 그때도 좋아하는데 그것은 진짜 속에서 영혼이 떨리는 그런 도움은 아닙니다. 아내의 영혼을 떨리게 할 수 있는 것은 남편이 자신을 최종적인 사랑에 목표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가 그 남자에 의해서 누려지고 있다고 생각될 때 그때 가난해도 정신적인 연합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들은 남편도 그런 줄 압니다. 그런 줄 알아서 잘 기억해서 남자에게 해주는데 하나도 감동을 안 받습니다. 그때 섭섭합니다. 그것은 남자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모릅니다. 그리고 공부를 안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입맛대로만 해달라고 악악댑니다. 그러니까 행복해질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 뒤집어서 한번 예를 들어보겠으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의 이해가 아주 선명해질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아내가 남편이 자기를 인해서 쉼을 얻고 자기가 남편이 자기를 누리고 있고 그런 맥락 안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를 좋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자한테 그런 관계 지향적 특성이 강합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들어보십시오. 그런데 그럴 때 여성은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남성이 그런 방식으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또 어떻게 하는가 하면 아내가 사업을 잘 합니다. 그럴 때 그냥 아내를 존경합니다. 여보, 이 어려운 때 당신 어쩜 그렇게 머리가 좋아. 어쩜 그렇게 사업수단이 좋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남자들도 못 당할 것이야. 당신, 어쩜 그렇게 사업을 잘하고 그렇게 회사의 경영자로서 결단도 잘 내리고 어쩜 그렇게 탁월해. 계속해, 여보, 살림은 내가 할게. 애들을 내가 키울게 걱정하지 말고 소신껏 해 그럴 때 여자가 아, 내가 한 남자에 의해서 누려지고 있구나. 라고 정신적인 결합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B. 사랑과 의존의 관계
남자가 좀 약골입니다. 그래서 뭘 들려고 하는데 힘이 없어서 들지를 못합니다. 여보, 좀 도와줘, 그러니까 아내가 와서 한손으로 번쩍 들어서 옮겨놓습니다. 그때 남편이 김밥을 싸면서 당신 어떻게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힘도 그렇게 세, 아 우람한 팔뚝, 그때, 아니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그럴 때 아내가 아, 내가 남편으로부터 놀려지고 있구나. 나는 남편에게 정말 필요한 존재야. 그리고 정신적인 결합을 누리게 되는 여성이 있다면 제 7병동으로 가야지 됩니다. 그런데서 여성들이 절대로 남편과의 정신적이 결합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똑같이 그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남편에 대한 관계에서 적용을 해보십시오. 그래서 남편이 아내로부터 정신적인 결합을 느끼는 것은 의존의 관계 안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아까는 사랑과 누림이었는데 이번에는 사랑과 의존의 관계 안에서 남편은 아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결합들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부부들이 많이 다투는 것을 아십니까? 왜 다투는가 하면 아내가 운전을 하면 문제가 좀 적은데 남편이 운전을 하면 아내가 조수석에 탔는데 그러면 대부분의 많은 남편은 어디에 갈 때 안 물어보고 자기가 찾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 갈 때마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정확하게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많은 남성들의 경우에 내가 충분히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차를 세우라고 그래놓고 창문을 열어서 아저씨, 어디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지 되요? 하고 물어봐서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당연한 답을 얻게 되었을 때 쭉 가면 됩니다. 이런 답을 얻게 되었을 때 그때 남편은 아주 굉장히 상실감을 느낍니다.
어떤 형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 아내에게서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느 날 여보, 여기 냉장고와 옷장이 있는데 너무 힘든데 여기 자리를 바꾸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그래서 남편이 내가 옮겨줄게. 그런데 그날 저녁도 밤늦게 들어와서 못 옮겼습니다. 여보, 저거 옮겨주어야지 내가 어떻게 해 그랬더니 남편이 미안해. 내가 내일 일찍 들어와서 옮겨줄게 그랬더니 갔다 오고 나서 보니까 옮겨났기에 어떻게 했느냐 그랬더니 그냥 내가 좀 힘 좀 썼어. 그래서 아주 소외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면 아내는 저 일을 절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한번에 약속을 어기고 두 번 어겼어도 아내가 나한테만 의존하기만 바라는데 훌륭하게 해내는 것입니다. 굵은 팔뚝으로, 그때 남편은 자기가 남편 된 위치를 잃어버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아주 지나칩니다. 그래서 아주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남편은 직장에서 돈을 조금 벌기는 하는데 그것은 부업 수준이고 아내가 더 잘 법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가지고 재테크를 하는데 남자는 그냥 학습하는 수준이고 여자는 이미 득도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엎어 치고 매치고 하면서 계속 튀기는데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어디에 투자 된지도 모르고 남편은 코스피고 뭐고 코스닥이 뭔지 나스닥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 여자는 엎어 치고 매치고 합니다.
실제로 제가 다니던 교회에 있었던 일인데 남편이 대기업에 있었는데 미국으로 잠시 출장을 가서 2년인가 있다가 오는데 가족이 전부 가지 못하고 남편이 잠깐 왔다 갔다 했는데 남편이 보내준 것을 가지고 이 여자가 연립을 샀다가 아파트를 사고 엎어 치고 매치고 이러면서 남편이 돌아왔는데 자기를 공항에서 태워서 가는데 자기 동리로 안 갑니다. 24평 초라한 아파트에 살았는데 다른 데로 가는데 40, 50평이 있는 으리으리한 현대 아파트로 데리고 가기에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당신,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랬더니 당신 오면 기쁘게 해주려고 그래서 들어갔더니 진짜 어마어마한 45평 아파트로 들어갔는데 그럴 때 아내들은 착각을 합니다. 얼마나 이 사람이 지금 감동을 느꼈을까? 그게 아니라 배신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집도 몇 번씩해서 갈아 치울 수 있는 사람이 남편도 갈아 치울 수 있겠구나. 그러더니 이 남편이 막 화를 내면서 당신 무서운 사람이라고 어떻게 그런 것을 자기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하냐고, 그랬더니 여자가 당신이 이것을 한다고 하면 당신 같은 소심한 성격에 하라고 허락을 했겠는가. 나니까 이것을 몇 번 굴려서 순식간에 튀겨서 이렇게 만들어났지 당신 같으면 여태껏 연립주택에 살 사람이다.
그런데서 이제 부부의 정신적인 결합이 계속해서 깨트려집니다. 정신적인 결합들이 깨트려지게도 되면 신뢰할 수 없는 사이가 됩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흐를 수 없습니다. 20대 때 결혼을 하면 남자의 일생은 아내를 두려워하면서 사는 일생입니다. 그런데 20대 때 결혼을 하면 언제가 아내가 제일 두려운가 하면 백화점 가자고 카드를 들고 집을 나설 때 그때 가슴이 덜컥 내리면서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가서 막 긁어서 청구서가 날아올까 봐. 30대 때는 언제가 무서운가, 아이를 둘을 낳아서 이제 2, 3살인데 자기가 뭘 좀 잘못하니까 아내가 정색을 하고 여보, 우리 헤어져. 이럴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애들 둘을 이 젊은 나이에 어떻게 하나, 아내야 뭐 젊으니까 훨훨 날아가 버리면 되니까, 40대가 되면 이혼할 가능성이 훨씬 줍니다. 아이들도 다 크고 그런데 그냥 지쳐서 퇴근해서 집에 들어왔는데 하필이면 그 시간에 아내가 샤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가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나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50대는 아내가 언제 무서운가 하면 뼈다귀를 사다가 곰국을 끓일 때 그때가 제일 무섭다고 해서 하도 심오해서 왜 그런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세 번째까지는 이해를 했는데, 그것은 50대 때는 남성이 경제활동이나 모든 것들이 위축이 됩니다. 특히 50대 중반이 되면 퇴직도 하고 그런 상태에서 아내가 어느 날 화장을 곱게 하고 곰국을 끓입니다. 저것을 끓여놓고 얼마나 돌아다니려고 그러나. 나만 집에 홀로 나두고 이제 저 곰국이나 먹으면서 기다리라고 그러는구나. 60대 때는 뭐가 두려운가 하면 아내가 부드러운 말로 여보 우리 여행이나 한번 할까? 그럴 때 제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행가서 두고 올까봐.
정신적인 결합이 유지되지 않으면 그러니까 사랑이 정신적인 결합을 가져오지만 또 정신적인 결합을 이루는 그 일을 통해서 사랑이 감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말이 통하지 않는 남자하고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말이 안 통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돈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좀 모자라는 것 같아도 말이 너무 잘 통하면 그러면 금방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아! 그것이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만나서 몇 번 무릎을 치고 나면 그 다음에 서로 사랑하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신령한 차원에서 입증이 됩니다.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가끔 사람들이 교회는 큰데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러면 그 사람의 태도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으면 지체들을 만나서 그 은혜를 나누십시오. 그러면 지체들 중에는 자기와 같은 은혜를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 성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보면 금방 말할 수 없는 일체감을 이룹니다. 이게 정신적인 연합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결혼을 한 사람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결혼은 무슨 무릎을 꿇고 존경하고 싶은 사부 같은 형제를 만나려고 하지 말고 없습니다. 그러니 접으십시오. 어차피 독신으로 살지 않을 바에 황당한 생각을 하는지 그런 사람 없으니 접고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20년은 흘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형제가 그냥 성화의 삶을 살아서 20년쯤 지나고 나면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자매가 제 남편을 그렇게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기다리십시오. 그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야 하는 일입니다. 절대 생겨나는 일이 아니니까 엉터리같이 되지도 않는 꿈꾸지도 말고 주님이 응답해주시고도 매우 힘든 꿈이니까 그것은 꾸지도 마십시오. 괜히 서로 무안하게 하지도 말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 없습니다. 좋은 것은 무엇인가하면 스승을 찾지 말고 진리를 잘 나눌 수 있는 동지를 찾으면 그것은 어느 정도 갑니다. 좁혀보면 가능합니다. 물론 그것 하나만 보면 다 된다. 그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으로도 성숙하고 그렇게 진리에 말씀을 기가 막히게 잘 나누고 말이 통하는데 30살이 다 된 처녀가 중학교 2학년에게 그런 것을 느낀다고 지금 시집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다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신앙의 동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면 존경할 수 있는 사이가 됩니다. 영원히 뭐 어마어마한 스승 같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존경할 수 있는 사이가 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정신적인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적인 결합이 진리를 나누면서 아내와 남편이 그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집에 돌아가서 새벽 1시까지 간증을 하면서 정말 그런데 나도 그런데 그러면서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릴 수 있을 정도면 대부분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정도의 부부보다는 그렇지 않은 부부들이 훨씬 많고 그럴 경우에는 삶의 태도들이 많이 문제가 됩니다.
또 진리의 말씀에서 그렇게 나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삶의 태도가 워낙 아니면 그런 신앙적인 신뢰들이 자꾸 금이 갈수가 있게 됩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에 은혜를 많이 끼쳐준 구역장이 있어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의 신앙에서 미끄러지고 나면 구역장들의 허물이 다 보이게 됩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에서 어긋나게 된다고 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더 촉진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신령한 면에 있어서나 본성적인 면에 있어서나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와 연합을 이루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의존하는 관계가 될 때 그 안에서 남편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성과는 틀립니다. 여성은 자기를 충분히 즐거워하고 누린다고 생각할 때 사랑이 촉진되는데 남성의 경우에는 자기를 믿어준다고 할 때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남편이 꼭 끌어안아주고 사랑해. 그때 감동을 받을지 모르지만 남자들은 틀립니다. 남자들은 아내가 자기를 꼭 안아주고 사랑해. 뭐 그런 것에 의해서 감동을 받는다기보다는 난 당신을 믿어. 이런 말 속에서 사랑을 더 많이 느낍니다. 내가 당신을 의지한다는 그 속에 최상의 사랑의 표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하면 안 됩니다. 아내를 꼭 끌어안고 나는 당신이 돌봐주지 않으면 나는 찬밥이야. 나를 고아와 같이 버리지 마. 여자가 사랑하다가도 뻗칩니다. 내가 무슨 고아원 원장인가. 한 남편의 아내인가 고아원 원장인가. 생각이 들 것입니다. 특성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남편에 대해서 의존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안에서 남편의 자존감들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사회적으로도 보면 나무랄 것이 없는 아내를 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모에 있어서나 사회적인 위치, 교양, 모든 것에 있어서 그런데 때로는 그런 사람이 정말 너무 하찮아 보이는 여자들하고 염문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은 정신적인 결합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여성들을 지배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은 표면이고 그 이면을 더 들어가 보면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지배한다기보다는 자기를 의존하는 여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존감을 느끼면서 남성으로서의 자기의 정체성을 그 안에서 확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이런 정신적인 연합과 이런 것들을 이루면서 살게 됩니다. 그게 바로 남성입니다. 그게 바로 남편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향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사랑은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만듭니다.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그래서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가정에 세우신 그 질서에 경건한 남편이 있고 그리고 그 남편의 중심에 주님이 계셔서 그래서 남편이 하나님 앞에서 수시로 깨트려지고 꺾어져서 주님의 사랑으로 합치되고 주님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계명에 순종하는 숙명의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애덕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남편의 위치를 찾고 그 남편의 의해서 아내는 사랑을 받고 그 아내의 사랑 안에서 남편은 존귀히 여김을 받고 하는 이런 속에서 질서가 이루어지는데 이 질서가 누구를 억압하고 폭압하는 질서가 아니라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질서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질서를 이루기까지 지불해야 하는 수고는 쉽지 않습니다. 어차피 가족구성원들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있지만 모두 망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손쉽게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내하면서 서로를 기다려줄 수 있는 태도의 변화를 기다려줄 수 있는 그런 오래 참음과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가 바로 그런 일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V.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는 따라서 소명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진리를 통해 여러분들을 살리시고 여러분들의 영혼에 부흥을 주시고 심령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감화시켜서 그래서 뜨거운 사랑을 갖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런 자원들을 활용해서 그래서 꺾을 수 없는 자신을 꺾고 그리고 더디게 변화되는 남편을 기다려주고 가족구성원들에 대해서 인내하면서 자기를 깨트려서 그 가족구성원을 세우듯이 자기의 남편도 세우려고 하는 그래서 가족들에게 정말 자신이 주장하는 가정이 아니라 가장인 남편이 중심에 서있고 그 사랑 안에서 모든 가족들이 함께 그 사랑의 질서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그런 가정으로 변화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고 구원받은 여러분들에게 성화의 은혜를 주시고 성화되어가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큰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래서 하늘의 힘으로 살아가게끔 만들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가정 안에서 망가진 가족구성원들이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목양을 받으면서 더 온전하고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무엇이 참된 것이고 그릇된 것인지를 옳게 분별하여 그래서 그 지식이 사랑에 넘쳐서 그래서 거룩하여져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들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또 그런 삶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이것이 바로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아내와 남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가정의 이치를 깊이 이해하고 정말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뱀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어두운 시대에 여러분들의 가정을 세우고 또 여러분들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여러분의 자손들이 그런 가정을 세워서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세상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일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2.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막10:6-9)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토대로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무엇이 우습습니까? 왜 그렇게 우스우십니까? 가정 시리즈 중에서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라고 하는 것을 설교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눈물이 가득하고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눈물이 가득한데 여러분들은 왜 웃는 것으로서 설교를 듣기 시작하려고 합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혼인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모세는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그랬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께 무슨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이혼을 하면 안 된다고 하면 자신들이 아주 높디높은 율법수여자로 여기는 모세가 허락한 것을 예수님이 금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또 만약에 해도 좋다고 한다면 그러면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과 어긋나고 특별히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한 여자에게서 한 여자를 만드셔서 둘을 한 부부로 만드신 그 말씀이나 혹은 말라기서에 나오는 영이 유효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지어서 결합시켰다는 이런 성경의 가르침과 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꼬투리를 잡고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이혼할 때는 증서를 써주어서 나가게 하라고 한 것은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원래의 성경의 정신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모세의 전통이 아닌 창세기 2장의 원래의 전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을 한 부부가 되게 하셔서 한 몸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에 나오는 바로 그 부분,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니라.” 라고 한 그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서 이들의 질문을 비껴가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무엇 때문에 이혼증서를 써주어서 아내를 내보낼 수 있게 하는 이혼에 대한 찬동을 표시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법도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들의 완악함을 인해서 일시적으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제 일부다처 사회가 되다보니까 남자들이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임에 있어서 부부가 된 진지한 성찰 없이 함께 살다가 싫증이 나면 그 아내를 버리니까 다른 사람들이 또 그 사람을 아내로 취하거나 이렇게 되니까 부부관계가 불명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사람들이 이혼하고 갈라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면 법적인 관계라도 명백하게 해서 이 가정생활에 혼란을 그래도 조금이라도 막아야겠다는 배려에서 이렇게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모세가 이야기한 것이지 그것이 곧 이혼을 하나님께서 찬동한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II. 혼인의 원리: 한 몸 됨
A. 육체적 결합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런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일부다처제를 허락하셨을까? 그 문제에 대해서 명백하게 답을 내릴 수 없지만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피력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부부가 일대 일로 결합하지 않고 일부다처제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들이 워낙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용을 하셨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마 홍수 후에 인류가 훨씬 줄어들게 되었으니까 그 소수의 사람이 번성하기 위해서 제한적으로나마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그들의 그런 부패를 허용하심으로서 이 땅에 자손들이 많아지게 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우리의 관심사는 왜 일부다처제였는가, 혹은 그 이전에 모계사회에서 왜 일처다부제의 삶이 이 세상에 허락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의 근본적인 이치와 정신, 그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찌니라”
창세기에 보면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찌라 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결혼의 근본적인 원리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 혼인의 원리는 바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한 몸이 되는 결합의 정신은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으니 첫째는 육체의 결합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될찌니라. 우선 부부는 장소적으로 한 곳에 동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부부는 한 공간 안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진전하면 이 육체의 결합은 장소적으로 한 공간 안에서 사는 것뿐만 아니라 성을 통하여 그 부부가 한 몸으로 결합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생활에는 반드시 이 육체의 결합이 있게 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부부는 두 몸이지만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혼인에 있어서 한 몸이 되는 결합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B. 정신적 결합
두 번째 결합은 정신적인 결합입니다. 이 정신적인 결합은 육체의 결합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정신적으로 연합되어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부부가부부가 되는 상태입니다. 들어오든지 나가든지 아무 상관이 없고 있으나 없으나 아무 느낌이 없는 그런 부부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결합을 이룬 한 몸으로서의 부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부는 바로 정신적인 결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같이 공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필요로 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떨어지면 보고 싶고 못 만나면 그립고 하는 정신적으로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에 의해서 자신이 가장 잘 이해되고 있으며 또 자신이 그 상대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서 용납할 수 있다고 하는 서로가 서로를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그 결합이 부부의 결합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 이것이 혼인으로 한 몸이 된다는 두 번째 의미입니다.
C. 영혼적 결합
세 번째 영혼적 결합입니다. 이것은 결혼을 통해서 남녀가, 부부가 영혼이 결합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이신 것 같은 연합의 관계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르친 에베소서의 교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권위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것 같이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여져 있는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인 것 같은 영적인 연합, 영적인 결합이 존재하는데 이런 종류의 결합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영적인 결합은 두 사람이 각각 그리스도 예수이신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적인 결합을 이루며 붙어있는데서 비롯되는 결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혼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남자와 하나님을 믿는 여자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결합이 혼인입니다.
원래 타락하기 전에는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영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래서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연합이 바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영혼과 하나님과의 연합이었으며 특별히 그 영혼 안에 있는 지성과 하나님 자신의 결합이었습니다. 이 결합 때문에 그 사람은 남녀였지만 하나의 결합을 부차적으로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연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인은 처음서부터 중생한 남자와 중생한 여자,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신랑과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신부가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결혼이 아닙니다. 이런 이치를 무시하고 오늘날은 대담하게 불신결혼을 선택합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불신결혼을 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서 아주 아름답게 결말을 맺어서 훌륭한 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반드시 자기가 해당되는 것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신결혼을 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행동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분들은 지금부터 가슴에 새겨서 불신결혼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것은 처음서부터 하나님의 결혼의 제도를 이탈한 결혼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많은 지체들 가운데 이런 결혼을 했다가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녀를 가진 여러분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이런 불신결혼을 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아들이나 딸이 자기의 눈에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이런 선택을 할 수 없는 신앙이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도록 지금서부터 그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어느 날 이런 일들이 여러분들에게 생깁니다. 그래서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렇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이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한 남자나 여자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져있고 그 사람의 배우자가 되는 남편이나 아내는 불신상태에 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이 점에서는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아마도 둘 다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신랑과 신부사이에 있는 결합과는 다르지만 그러나 유사한 가정적인 연합이 두 사람 사이에 있을 것이다. 라고 추측을 합니다. 마치 이렇게 말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아직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자녀들이 예수께 접붙여진 자녀들은 아니지만 아직 영적인 생명은 그 안에 없지만 언약관계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취급을 받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완성되지 않은 연합의 관계가 불신배우자와 신앙을 가진 배우자 사이에 존재할 것이라고 유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한번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히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의 결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또 나름대로 이 세상에 인류를 번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질서 안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렇게 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뜻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의 결혼은 하나님이 없는 결합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어떤 영적인 결합은 존재하지 않고 그냥 그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결혼하는 것을 가장 세속적인 일로 묘사하기도 하고 또 매우 거룩한 일로 묘사하기도합니다. 예를 들자면 노아의 홍수의 때에 사람들이 그런 노아의 선포를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던 이유를 시집가고 장가가는 상황과 연관을 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세속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뜻을 깨닫지 못하고 육욕에 눈이 멀게 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만 에베소서 같은 곳에서는 이 신랑과 신부의 결합이 참으로 신비하고 거룩한 결합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혼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가 만나서 육체적으로 하나 되고 정신적으로 하나 되고 영혼에 있어서도 하나가 되어서 그래서 한 몸을 이루는 그것이 부부의 대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남편이나 아내가 예수를 안 믿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속히 복음을 전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들의 영혼의 형편이 자신의 영혼의 운명인 것처럼 그들을 구원해서 어찌하든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야하고 접붙여진 그들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예수의 형상을 닮아 성화될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남편과 아내는 둘이 그리스도 때문에 결합한 사람이 되고 부족하고 틀린 것이 많지만 그 성령과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깨트려져 지순한 사랑으로 나아갈수록 남편과 아내의 출발점이 틀리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곳이 그리스도 예수이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을 추구하며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내와 남편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결합을 완성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 안에서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 때문에 또한 부부의 연합을 공고히 하게 되는데 일평생 이렇게 완전한 삼중의 연합, 영혼적 연합, 정신적 연합, 그리고 육체적 연합을 완성해가는 그 자체가 한 사람이 온전한 인간이 되는 과정이며 한 사람이 참으로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올바른 성화생활을 해나간다면 한 사람의 남성이 온 남편이 되는 것은 좋은 신자가 되는 과정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한 남자가 완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과 그리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도 역시 일치하게 되며 아내에게 있어서 이것은 마찬가지 원리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이 꿈꾸고 그리고 있는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그렇게 엄마와 아빠가 완전한 남편과 아내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그분들이 자신의 완전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발견하면서 그들의 사랑의 모상이 되는 하나님의 완전한 아버지 되심과 어머니 되심을 관상하면서 살아가는 자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리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분리가 되지 않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자녀들이 신앙 안에서 까리따스를 경험함으로서 체험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 가정을 통해서 경건한 자녀가 생산이 되고 그 가정이 그런 식으로 번식할 때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가정의 원리입니다.
III. 이혼이 허락될 때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혼을 허락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으로 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이혼이 허락이 되는 때가 있는데 그것은 간음했을 때입니다. 상대방이 혼인 시에 언약했던 정절을 배신했을 때 그때에 배우자는 그 사람과 더 이상 살지 않도록 이혼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으로 넘어가보면 사도 바울은 그것 이외에 또 다른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데 아내나 남편이 이제 예수님을 믿게 되어서 신실한 신자가 되어서 살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너하고는 살고 싶지 않다고 청구할 때 헤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혼의 허락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원칙만으로는 사실 혼인생활을 지속하기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대로 넘어오게 되면 이외에도 교회에서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몇 가지 조건들이 추가합니다.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예를 들자면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었는데 한쪽이 성적인 불구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결합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을 때 그때 청교도들이 이혼을 허락해주었습니다. 또 어떤 기록에 보니까 부부가 결혼을 했는데 한쪽이 아주 불치의 병을 숨기고 결혼을 했을 때도 이혼을 허락해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이혼을 할 수 있는 좀더 많은 조건들을 결혼생활을 지탱하기에 어렵게 하는 요소들 안에서 발견해가려고 했던 흔적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이것이야말로 가장성경적인 답변이니 이 모든 것들은 이혼을 할 수 있는 허용적인 사유는 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최선이라고 이것들이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던 선지다 호세아에게서 이런 모델을 봅니다.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불행하게도 창녀로 이름난 디벨라임의 딸 고멜과 결혼하도록 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그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여자는 바람기가 많은 여자였고 한 남자로 만족을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렇게 이 여자에게 사랑을 쏟고 잘해주었지만 그러나 외간남자의 품으로 날아가서는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또 용서하고 사랑해주면 다시 또 그런 일들을 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그 여자를 끝까지 용서하고 그 자녀들을 다 길렀습니다. 그가 이혼하는 것이 무섭거나 선지자의 가문에 명예를 더럽히는 것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이 여자를 향한 뼈 속 깊이 타들어가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여자를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아내를 향한 사랑이 단순한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폐의 사랑이 되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이 아내를 사랑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로서 남편인 자신을 배반했을 때조차도 그 아내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살아있어서 흐느끼는 것 같은 그런 사랑으로 이 아내를 끊임없이 타락에서 구속하여 하나님의 가정에 받아들여 그를 사랑해주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경우에 헤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그렇게 간음한 상태에서 이 부부의 육체적인 결합이 짓밟히고 그리고 또 아내도 그런 남편의 죄를 보면서 다시 또 다른 죄에 휘말리고 이런 식으로 해서 가정의 도리가 다 무너진 가운데 가정이 음란함으로 더럽혀진 그런 속에서의 가정이 되느니보다는 오히려 갈라서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것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신앙을 이유로 박해할 때도 사도가 그것을 허용한 것은 그렇게 남편과의 결합에 집착한 나머지 신앙을 포기하고 그 남자와 함께 혹은 그 여자와 사느니 차라리 홀로 되어서 경건하게 주님을 섬기며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이 결합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가정을 해봅시다. 어떤 여성이 있는데 남편하고 이미 살기가 싫습니다. 남편이 싫어지고 싫증이 났습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미움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남자는 마음 둘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부부의 정신적인 결합이 와해되고 그리고 남편이 바람을 피었습니다. 이때가 기회라고 여성은 이혼을 청구하고 그리고 이혼이 성립되어서 부부가 갈라섰습니다. 이럴 경우에 아내를 단순한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내가 싫었습니다. 더 좋은 여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갈라서려고 하는데 도대체 흠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더 외롭게 하고 학대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바람이 났습니다. 기회를 잡아서 옳거니 하고 이혼을 했습니다. 자,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이혼이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획된 이혼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남편하고 살기가 싫습니다. 자꾸 박해하고 신앙생활을 부자유하게 하는 남편이 싫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교회에 갔다가 늦게 왔다는 이유로 심하게 폭언을 하고 폭행을 했습니다. 그때 난 당신이 없이는 살수 없어도 주님 없이는 살수 없다. 하고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신앙을 완전히 버리게 하고 핍박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을 신앙생활을 그만두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가정을 지키면서도 할 수 있는데 싫은 것입니다.
(예화: 어느 자매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선교사로 가라고 명령하셨다는데 남편과 아이들을 다 나두고 간다는 황당한 말에 그것은 자신이 힘든 생활을 탈출하고자 하는생각으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도 아니고 살기 싫은 이유였기 때문이다.)
(예화: 어느 노처녀가 상처를 한 어느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기로 했는데 알고 보니까그 남자에게는 아내도 자녀도 있다는 말을 듣고서도 결혼을 해서 오랜 세월이 흘러 아이까지 있었는데 어느 날 남편과 아이를 본 부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그것은 선한 마음으로 헤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살기 싫어서 교묘히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라는 내용)
IV. 이혼과 관계의 파괴
A. 하나님과의 관계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도 이혼이 허락된 경우에도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혼이 왜 그렇게 나쁜가? 이것은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슨 관계를 파괴하는가?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이혼한 사람들은 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제 남편이 저에게 어떻게 했는지 모릅니다. 모릅니다. 그렇지만 압니다. 목사님은 내가 아내와 이혼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몸부림쳤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압니다. 그러나 어떻든 아내와 남편의 결합이 깨트려진 그 이혼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예외 없이 자원해서 이혼해서 사는 사람들은 이혼과 즉시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 이혼한 즉시 영혼의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종종 이혼을 하고 나서 매우 홀가분하게 생각하는 지체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참된 평화에서 오는 홀가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매일 교회에 다닌다고 때리고 핍박하던 남편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으니 자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악랄하게 괴롭히고 의심하고 못살게 하며 잔소리하던 아내와 헤어졌으니까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평화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 누리는 평화와 포기하고 죄에 자신을 양보함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거짓 평화입니다. 잠시는 자유를 누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비롯되는 평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평화일 수가 없습니다.
아까 잠깐 제가 설교하면서 잊어버렸는데 청교도들이 이혼을 허락했던 것 가운데 또 하나는 결혼을 했는데 아내나 남편이 정신병자일 때 그때는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최선은 아닙니다. 어떻든 이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남편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는 남편이 나를 얼마나 짓밟고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심지어는 바람까지 피고 그랬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아내가 자기와 끝까지 안 떨어지니까 물론 불신자였습니다. 자기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여자를 집에 데리고 가서 아내는 안방에서 자고 자기는 건넌방에서 그 여자와 함께 자는 사람도 봤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 정도의 모욕을 내가 당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이혼에 있어서 최대의 피해자인데 어떻게 내가 이혼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트릴 수 있습니까?
남편과 아내의 공통된 책임은 혼인과 함께 이루어진 한 몸 됨,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혼적인 결합을 끊임없이 완성해가는 것이 책임입니다. 어느 한쪽의 책임이 아니라 양쪽 다의 책임입니다. 물론 남편이 훨씬 더 방탕하기 때문에 남편이 이혼에 더 많이 이바지했을 수도 있고 아내와 워낙 못되었기 때문에 남편이 참으려고 했지만 이혼할 수밖에 없도록 아내가 더 많이 원인을 제공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더 많이 했는가가 아닙니다. 세상의 법정에서는 그것이 중요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한 남자가 그렇게 해서 아내를 미워하고 멀리 그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육체적인 결합을 풀어버리고 그리고 훨훨 날아가 버리게 되었을 때 뜨겁게 사랑했던 어느 날 아침에 약을 먹은 남자처럼 훨훨 날아가서 어제 밤까지는 내 아내를 사랑했는데 오늘 아침부터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됩니까? 그런 광경은 없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남자가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고독의 기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상당부분이 아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입니다.
기회가 닿으면 여러분들에게 외도라는 시리즈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만 이것이 말하자면 남성들의 외도의 심리학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외도를 육체적인 쾌락을 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내에게서 채워지지 못한 정신적인 결합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결합을 굳게 하면서 살아가야 할 책임은 남편과 아내가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있었는데 바람이 나서 훨훨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때야 남편은 통탄합니다. 뼈 빠지게 돈벌어다주고 나는 가정밖에 몰랐는데 애들 밖에 몰랐는데 내 아내가 나를 배신하고 나에게 칼을 꽂다니 그리고 울분으로 이를 갈지만 그것은 최고의 병신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그렇게 돈만 벌어다준다고 해서 살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자신의 아내를 그렇게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영혼적으로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만족이 되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행복하게 하도록 섬기기 위해서 자신이 그 한 여자의 남편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혼자 내버려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돈 조금 벌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언제 그 아내가 돈을 조금 벌어온다고 핍박을 했습니까? 아니 갈비를 먹을 것을 고기를 먹고 그렇게 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지 자기 아내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보, 인생의 행복이 갈비 먹는데 있어? 그러면 바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 부부가 이혼했을 때 어느 한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저는 경험상으로도 그것을 입증합니다. 다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들을 서로 제공합니다, 둘 다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보다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믿음의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했더라면 자기가 힘들어도 희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안 한 것입니다.그러니 가정이 깨트려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관계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그 상처들을 딛고 충만한 사랑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하시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니까. 그러나 이혼하고 나서 즉시 이렇게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습니다.
B. 자녀들과의 관계
두 번째는 자녀들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는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까 파괴될 것도 없다고 칩시다. 그러나 자녀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 애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마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내가 한 여자로서의 행복이 어머니라는 이름 때문에 무시되어야 합니까? 가장 세속적인 여자들이 늘 읋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로서 나의 의무가 내 행복보다 앞설 수없습니다. 그런 이기적인 인간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수많은 가정이 여지없이 절단이 나고 깨지는 것입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한다고 해서 행복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자매들, 이혼을 생각하고 있는 형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회개하고 그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이미 이혼한 사람들은 오늘 설교를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십시오. 자, 이혼을 하면 자녀들과의 관계가 깨진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물론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미워서 이혼한 것은 아닙니다.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가장 이혼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두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애들입니다. 애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 사랑의 욕망에 눈이 멀게 되면 아이들에 대한 그 모든 고민들이 어느 일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이혼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한번만 남아있는 아이들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아는 지체들 가운데는 이런 지체가 있었습니다. 이미 벌써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가정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웁니다. 치료가 안 된 것입니다. 왜?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습니다. 엄마가 재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생각에는 이 아이를 아빠가 없는 아이로 만드느니 그래도 아빠가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박씨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이번에 이 아이가 분명히 김씨로 계속 자랐는데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박씨로 변한 것입니다. 애가 이 충격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럴 것입니다. 목사님.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혼하는 여러분에게는 안 중요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한 번 더 시집을 가서 이번에는 최씨로 바뀐 것입니다. 웃음이 나옵니까? 불쌍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게 웃음이 나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뭐가 있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우습습니까? 당사자는 피눈물을 흘립니다. 여자 아이가 초등학교 때는 김씨였는데 중학교 때는 박씨,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는 최씨.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은 그런 일이 있어도 어린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성인으로 커갑니다. 속은 짓이겨집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는 형용할 수 없는 경험을 하면서 이 속에서 가치관과 인생관의 혼돈이 생깁니다. 그것은 치유가 안 됩니다. 난 단언해서 치유가 안 됩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누가 한 인간을 자신의 행복을 인해서 그런 식으로 짓밟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살고 싶었으면 처음서부터 독신으로 살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결혼을 해서 자녀들의 마음에 그렇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지 왜 그렇게 합니까? 제가 50이 넘었습니다. 60을 바라보면서 사는 나이가 되었어도 어렸을 때 가정에서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지금도 엎드려서 울 때가 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부모님을 떠나 할머니와 함께 자라면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할머니 돌아가신지 2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며칠 전에도 그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혼자 이불에 묻고 울었습니다. 이 사람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정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부모 자체가 세계였는데 그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게 감당이 되겠습니까? 그 애들은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염려 마십시오.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정말 우리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기적적으로 변화된다면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그렇게 이혼을 하고 찾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녀들을 그렇게 피멍이 들게끔 가학을 하는 그 어미 아비가 진짜 부모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좀더 들어보십시오. 아플만하면 아파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증거를 한번 대볼까요? 엄마 아빠가 피치 못하게 갈라섭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재혼을 안 하고 혼자 삽니다. 제 친구 아버님도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부인이 젊은 시절에 바람이 났는데 30대 후반의 나이밖에 안되었는데 일생을 홀로 수절을 하며 사셨습니다. 또 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고 집안을 박살을 냈는데 피할 수 없이 이혼을 했지만 여자가 혼자 삽니다. 자녀들이 자랄 때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런데 자신들도 인생을 살아봅니다. 고난을 이기고 그러면서 아내에게 남편에게 시달리면서 결혼생활을 해봅니다. 그런데 뼈저린 상처를 많이 경험합니다. 그때에 그 어머니 아버지를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제 친구는 아들이 셋이었는데 아버지가 30대 후반밖에 안된 나이에 부인이 애들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혼자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아이들을 다 키웁니다. 저는 가까이에서 그 광경을 다 봤습니다. 아침이면 아이들의 도시락까지 다 싸서 보냅니다. 그런데 후일에 그 아이들이 그 아버지를 처음에는 정말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 아이들이 그 아버지를 그렇게 존경했습니다. 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그 아이들을 향해서는 말할 수 없는 가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치관의 혼돈, 이런 것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아이들의 나이가 아주 어렸을 때는 거의 치명적입니다. 그것은 이미 성인이 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을 받습니다. 엄청난 혼돈을 경험합니다. 그 아이들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나이가 많이 든 다음에 아이들이 보고 싶고 그리워집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들을 찾아가보지만 아이들은 이미 마음속에 그 엄마 아빠가 지워졌습니다.
이번에 럭비 선수의 일화처럼 아버지가 그렇게 폭행을 하고 한국에서 온 처녀라고 그렇게 멸시하고 그러던 사람이 아들이 대스타가 되고 그러니까 찾아왔습니다. 아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티끌만큼도 사라집니다. 어렸을 때는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 사라집니다. 이게 부모와 자식의 정이라고 하는 것도 있었던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기에 함께 있는가, 그때에 집중적으로 모성애와 부성애에 대한 자각들이 아이들 속에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니는 애들을 조기유학 보낸다고 남편과 떨어지고 엄마 아빠 떨어져서 유학 보내고 하는 그런 것,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서 뭘 하려고, 그렇게 해서 중국어나 배우고 영어를 배워서 밥벌어먹고 살려고 그러는데 얻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잃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애들은 그렇게 교육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뭐 하러 그렇게 합니까? 조금 못나도 바른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길러야지 그거 해서 뭐하겠습니까? 자녀들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찾아가봐야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지워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C. 자신과의 관계
그뿐이 아닙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이 무슨 뜻인가? 이혼을 할 때는 모두 이것으로서 내 인생은 끝장내겠다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혼과 함께 모두 죽어버리게, 이혼할 때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새 출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가정을 깨트렸다는 가책, 그리고 내가 아이들을 버렸다는 가책 이것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이 그를 용서해주셨는데도 그 자신 속에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아주 사단의 좋은 올무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일생을 부자유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V. 사랑으로 고난을 이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참으십시오. 사랑으로 고난을 이겨라.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그럴 것입니다. 펑펑 울면서 목사님, 너무 잔인하십니다. 제가 이 결혼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당하고, 그리고 살수 없을 정도로 박해를 당하고, 남편에게 인간으로서는 차마 받을 수 없는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위로는 못해주실망정 어떻게 날보고 더 참으라고 그러십니까? 참아라. 왜냐하면 그래도 그 길이 제일 쉬운 길이다.
나는 이 설교를 준비라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불쌍한 지체들의 얼굴이 쭉 떠오르는 것입니다. 나라도 살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그런 남편 밑에서 그렇게 멸시를 당하고 인간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여성으로서 자존감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막 대하고 그런 속에 있는 수많은 지체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압니다. 그대들이 얼마나 힘든지 내가 다는 알지 모르지만 알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이혼을 생각하는 여러분들이 내 마음에 떠오르면 여러분들의 잘못 보다는 여러분이 불쌍해서 눈물이 먼저 납니다. 이해합니다. 딸 같은 지체들이 이혼을 생각하면서 괴로워할 때 여러분들이 울 때 사실은 그 옆에 나도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참아라.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A. 은혜가 필요함
그래서 어떻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이혼을 결행하는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들이 은혜가 고갈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올바른 결정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고갈되면 중심으로 생각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서 당하는 많은 고난이 있어도 내게 은혜가 충만하면 고난이 예수의 고난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고난을 통해서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 그런 결정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 남편과 아내가 원수보다는 낫잖아요.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가 자기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여성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남성들은 잘 알 것입니다. 내가 잘못은 있지만 아내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자기를 괴롭히는지 저에게 뭐라고 묘사하는가 하면 아내의 악랄하기가 군대시절에 군 형무소가 있는 남한산성 거기에 있는 간수들보다 더 악랄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는지 그렇습니다. 고난이 와도 은혜가 충만하면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고난으로 인해 은혜가 고갈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되나. 필요 없다. 내가 저 같은 인간 필요하지 않다. 결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필요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지만 제가 여러분들의 목자입니다. 이 교회의 목회자입니다. 어느 날 여러분들이 나를 대하는 것을 보니까 심히 마음에 안 듭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사표를 던졌습니다. 나를 오라는 교회 많다. 어디에 가든지 이정도 대우는 받는다. 내가 당신들 아니면 설교할 때 없는 줄 아냐. 그리고 보따리를 싸서 떠나서 좀더 좋은 대우를 해주는 교회로 갔다면 여러분들은 나를 목자라고 인정해줄 수 있습니까? 목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참는 것입니다. 나는 괴로움을 당해도 교인인 여러분들은 괴로움을 당해도 교회는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난 갈 때가 없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가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나는 이 교회하고 결혼해서 갈 때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라는 곳은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갈 때는 없습니다. 이 교회가 내 생명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잘 들으십시오. 그렇게 가정을 지키려고 해도 내게 은혜의 자원이 부족하면 지키려고 애를 쓰는데 남편의 허물이 아내의 잘못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그 잘못 때문에 그 인간이 미워지고 아내의 그 잘못 때문에 그 여자하고 살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은혜가 충만해지면 남편으로부터 늘 이해받지 못하고 괴로울 때 한나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랬던 것처럼 주님 앞에 울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 때문에 그렇게 외롭고 괴로울 때 주님 앞에 나아가서 매달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그 은혜는 우리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면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꽉 채워집니다. 그러면 남편이 영혼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해지면 남편의 허물이 남편과 나누어져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내의 허물이 아내와 나누어져서 보여 집니다. 그 허물과 과오는 미운데 그 사람은 용서가 됩니다. 그래서 영혼으로서 사랑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은혜를 받고 위기를 넘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간증입니다.
그런데 미움과 원망, 그리고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한탄 이런 것들로 마음과 감정이 뒤엉켜져서 혼돈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죄가 아주 좋아하는 환경입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을 하는데 성령의 비추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생각을 해서 내린 결단이 가장 멍텅구리 같은 결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 잘못된 결단에 열매를 오랫동안 거두어들이고 특별히 죄 없는 아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후에 다시 살려고 하는 그 삶이 어떤 삶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심지어는 어떤 부모들은 요즘 아이들도 많이 개화되어서 이제는 그런다고 합니다. 아빠, 엄마 같은 여자하고 살 필요 없다고 집어치우라. 엄마를 찾아가서 엄마, 왜 저런 남자하고 살아. 집어치워. 지금이라도 엄마 생각해. 그런데 아이들이 말을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엄마 아빠 정말 제대로 살수 없어, 그 뜻이지 그 말에서 용기를 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것은 거의 죽음에 버금가는 결심입니다. 그 결심도 남편과 헤어져야 할 결심을 하기 전에, 아내와 갈라져야 할 결심을 하기 전에 내가 목숨을 걸고 한번 하나님께 매달려봐야지 되겠다는 결심을 가지기를 내가 권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을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모두 사랑할 수 없는 내 아내를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지 됩니다. 그럴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을 거의 못해본 상태에서 결단을 내립니다. 신앙의 상태가 매우 안 좋을 때, 주님의 인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지혜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보면 다 불쌍합니다. 얼마나 자기 같은 남자에게 사랑을 받고 싶으면 그렇게 아내가 불평하고 잔소리를 하고 자기를 괴롭히겠습니까? 기대를 거니까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까? 심지어는 아내가 남편을 증오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깨트리는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의 결혼은 불행이 드리워집니다. 가정에 돈이 있고 그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남편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아내의 진정한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둘 다 회심한 신자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잘못할라치면 말씀을 듣고 깨트려지는 아내, 조금이라도 남편을 향해 역한 감정을 가지려고 하면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깨트려져서 그 남편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아내, 그런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을 때 그때 그들이 부족하지만 계속 다듬어지면서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혼을 생각하는 여러분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혼하기를 사모하지 말고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게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늘 구하십시오. 그리고 한번 다시 눈을 떠서 여러분들의 아내나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마음깊이 불쌍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은혜로 이겨야 합니다. 내가 언젠가 설교해서 인용한 적이 있는데 오늘도 또 인용하고 싶습니다.
(예화; 아시는 목사님의 사모님이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어 아이들에게 늘 화를 내고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대학을 다니는 딸아이가 은혜가 충만해서 엄마의 그런 허물을 보듬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며 엄마를 위로한다는 내용)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제일이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사랑이 내 안에 가득 있으면 그 남편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가 있으면 내 아내가 그렇게 가엽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가 내 안에 있으면 아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이 매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꺾고 하나님 선한 목소리를 따라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가정이 곤고하고 어려울수록 육체의 즐거움에 빠지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울 때도 친구를 찾아가서 울지 말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괴로울 때도 주님을 찾고 그러십시오. 은혜를 받으십시오.
나는 이 시간에도 이혼을 생각하는 지체들, 그리고 이혼한 지체들을 생각하면 마음에 비가 계속 내립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이 이혼을 생각하고 혹은 이혼을 했다는 사실이 여러분들을 향한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인내하십시오. 그리고 참으십시오. 남편을 사랑할 수 없을지 모르고 아이들도 덜 사랑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은 버려도 주님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여러분들이 버릴 수 없는 주님을 여러분보고 이혼하지 말고 참으라고 하십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겠습니까? 참으십시오. 자꾸 생각을 하면 가능하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 이혼입니다.
B. 이혼의 십자가를 지고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미 이혼한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모든 환경으로 볼 때 여러분들이 그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좁은 길을 가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많은 고난이 있을 것이고 그 고난에 비해서는 열매가 매우 적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이혼으로 말미암아 이미 깨트려진 남편과의 관계, 그 다음에 아내와의 관계, 양가의 가족들과의 관계, 특별히 자녀들과의 관계가 여러분들이 돌아간다고 해서 해결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돌아가서 그 사랑을 완성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돌아가십시오. 할 수만 있으면 돌아가십시오. 그래서 신앙의 정체성을 양보하지 말고 그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가족들을 온전히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그리고 성경에서 꿈꾸는 그 자기 깨어진 가정으로 되돌려놓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라면 돌아가십시오. 아마 하나님이 그렇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1. 할 수 있다면 돌아가라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과거에 이혼한 것을 후회하는 지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할 수 있으면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여러분들이 인간적인 결혼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예수의 사랑을 갖고 문둥병자들이 살았던 마을로 들어가셨던 예수님의 그 마음처럼 그런 마음이 되어서 온전히 자기를 내어준 그런 삶을 꿈꾸면서 돌아가십시오. 돌아가는 것이 허락이 되면 그때 돌아가십시오.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 그렇게 돌아가서 새롭게 된 가정도 있습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 자기 부모가 각각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들을 그렇게 불행하게 했지만 노년에 부모들의 인생을 이렇게 봅니다. 그렇게 자녀인 우리를 희생시키고 가정을 깨트리면서 엄마 아빠가 참된 행복을 찾아갔지만 진짜 행복하게 되는 엄마 아빠를 보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그게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 다시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이 시집 장가갈 나이거가 되었어도 여전히 예전에 깨어졌던 가정의 기억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고통의 원인을 제공했던 부모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십시오. 특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돌아가십시오.
2. 두 번 세 번 결혼하지 말라
두 번째는 두 번 세 번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세속적인 행동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질서가 있는데 그런 질서가 이미 헛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할 수만 있으면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주께로 받은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할 수만 있으면 변하지 않는 신앙, 주님을 붙들고 일생을 사십시오.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아이들이라도 깊이 사랑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결혼관계에 있을 때 아이들에게 베풀지 못했던 어머니로서의 깊은 사랑을 아이들에게 베풀어주십시오. 주님과 함께 사십시오. 이미 이혼했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면 주님을 의지하며 일평생을 사십시오. 세월이 많이 지나도 한 가정이 깨어진 그 아픔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헤어진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그렇게 부모의 이혼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은 아이들, 심지어는 그 상처받은 데서 자라나서 또 상처를 대물림 하는 자신의 또 다른 자식들, 아마 모두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 있습니다. 그 고난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행위의 열매로서 일생을 따라다닌다고 할지라도 그가 한번 이혼을 함으로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가 이제는 마음을 온전히 지키면서 그렇게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이 세상에 있는 탐욕과 그리고 정욕들을 미워하면서 난 이제 주님과 혼인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주님만 사랑하면서 살려고 할 때 그 모든 이혼의 아픔들은 그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 성화를 위한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VI. 결론과 적용
저는 다윗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다윗이 그렇게 잘못하고 집안에는 칼부림이 그치지 않았고 왕자의 난과 그리고 수많은 투기와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기 때문에 찾아온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고난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이 잘못했지만 참회하였고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왕이었지만 언제나 가난한 자로 살았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주님만을 앙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죄의 대가로 주어진 징계의 많은 고통이었지만 그것이 다윗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으로 만드는 그 훌륭한 그 성화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안식이 없는 삶이었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왕국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성도로서의 기쁨을 찾으면서 살았을지 모릅니다.
이혼했어도 이혼의 그 십자가는 벗어버릴 수 없지만 이혼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참 사랑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 많은 날들, 그리고 은혜의 말씀에 빛을 받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 때문에 아파했던 여러분들의 참회의 눈물도 하나님이 다 읽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가정을 깨트린 자,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혼녀라고 손가락질해도 주님이 만져주십니다. 창녀요, 기생이었던 그 여자가 그렇게 참회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자가 나를 섬긴 일도 기념하여 전해지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사람의 손가락질이나 멸시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좋은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인생은 변하기 쉽고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상처를 주는 불안전한 남편이 아니라 완전하신 주님을 그분의 남편으로 모시고 사랑하십시오. 거룩한 처녀성을 일평생 간직하고 주님 한분만을 꼭 붙들고 고난도 이기고 슬픔도 이기면서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 옆에 항상 계시고 저도 여러분들 옆에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슬픔은 사랑이 없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남은 인생은 어떻게 하면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서 고민하고 살아가는 생애가 되십시오. 무엇보다 이혼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마음에서 미워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게 하십시오. 아내나 남편, 상처를 받았던 과거로부터 벗어나십시오. 마음속에서 모두 푸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최선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섭리로 차선의 길로 인도하셨으니 이제는 이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시고 여러분들보다 더 연약한 사람들을 붙들어주는 까리따스의 사랑이 가득하시고 일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밤이나 낮이나 완전한 신랑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고난의 때를 이기고 자기를 이기며 천국에 드는 소망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3. 불신 가족들이 복음을 듣게 하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3-14)
I. 본문해설
우리들이 지난 몇 주 간에 걸쳐서 살펴본바와 같이 진정으로 하나 되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가정을 이루는 가족 구성원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의 구심점으로 합쳐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동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마음 아파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할 절박한 필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를 믿을 사람이 없고, 믿지 않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구원을 얻지 아니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개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한 마음이 되는 일은 평범하게 우리 모두 한마음이 되자고 애를 쓴다고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교회생활 속에서도 확인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보이는 형제를 향한 지순한 사랑에 의해서 입증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늘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깨뜨려지는 참회의 경험도 합니다. 그러는데도 여러분들이 일치를 이루며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그래서는 안 되는데 분쟁이 있고 사람들을 서로 미워하고 헐뜯는 세속적인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하물며 전혀 구심점이 없는,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이라는 구심점이 없는 우리의 불신 가족들이 함께 섞여 살면서 여러 가지 가정 속에서 생겨나는 이익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나마 아버지가 살아계시고, 그분이 도덕적이고, 확고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의 가정의 덕목은 이거다’라고 아버지가 권력으로 그것들을 통합시키고,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꼭 주먹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도 아버지가 넉넉히 있고 그러면, 자식들이 눈치 보느라고 아버지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못할 겁니다. 그런데도 계속 그러면 “유산 없다” 그러면 꼼짝 못합니다. 그거보다도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일찌감치 자식들에게 유산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나눠주는 것은 급한 게 아닙니다. 천천히 나눠주는 것도 괜찮습니다. 갑자기 죽는 것에 대비해서는 유언장을 써 놓으면 됩니다. 자식들이 다 신통치 않으면 사회에 기부해 버리면 됩니다. 또 아버지가 아주 도덕적이면 아버지가 살아온 삶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마라. 인간사는 도리가 그러는 게 아니다.” 꼼짝 못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들었습니다. 육신의 병이 들었다는 게 아니라, 도덕성도 없고, 아버지를 자식들이 존경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에 가정은 그야말로 모래알이 되기 쉽습니다. 가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이익이 충돌될 일이 많습니까? 부모님이 계신데 아프시기라도 해봐요.. 며칠이면 자식들이 깨죽을 끓여간다, 흰죽을 끓여간다 하고 난리지만, 장기적인 투병 생활로 들어가면 자식들이 마음이 갈라지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네가 모셔라. 내가 못 모신다.” “형이 모셔야지.” 형은 또, “내가 쥐뿔이나 받은 게 뭐있다고, 네가 방이 세 개니까 부모님 모셔가라.” 그 이후에도 유산이라도 있으면 그것 때문에 분쟁하고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은 화합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형제들이 각각 웬만큼 살아서 누구에게 기대지 않을 만큼 넉넉히 서로 살든지, 아니면 가난해서 간신히 밥을 먹고 산다든지 그러면 문제될 일이 없습니다. 근데 기울어서 형제들이 돈을 빌려가서 안 갚는 일이나, 부인 몰래 돈을 꾸어주고 못 받아서 부부 싸움이 일어나게 되면 가족이 하나 되기가 힘듭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요인들이 많습니다. 수없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앙도 제대로 들어간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번에 여러분들은 가정 시리즈를 들으면서, 부모님들은 여러분들에게 잘해주지 못 했지만 회개하면서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될 마음가짐을 갖게 됐습니다. 동기간들은 여러분들에게 잘해주지 못했지만, 말씀을 듣고 깊이 찔리면서 형제와 다시 화해하게 됐습니다. 남편을 우습게 생각하다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는 남편에게 용서를 빌게 됐습니다. 아내를 아주 우습게 여기다가 말씀의 은혜를 받게 되니까 자신이 아내에게 못 한 것에 대해 회개를 하고 아내에게 화해를 청하게 됐습니다. 이런 작용이 신앙 바깥에서 일어나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도 없는데 ‘내가 형한테 아주 잘못했구나!’ 하고 형에게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고 무릎을 꿇는 동생은 저도 못 봤습니다. 신앙 바깥에서 그런 일은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패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만 가는 게 아니라 가지 말라고 하신 길도 늘 가는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차선은 뭐냐 하면, 그렇게 어느 정도는 가더라도 어떤 계기가 생겨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뜨려져서 예전의 자기가 가던 길에서 돌이켜서는 자기 회기가 필요합니다. 깨어짐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 다음에는 올바른 길을 따라서 걸어가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은혜의 힘이 그 안에 역사해서 자기는 그렇게 바꿀 수 없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 그를 변화시키고 바꾸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것은 하나님 앞에 잘 꺾어지는 온유한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으면 지금은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잘 꺾어지는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변화되어 가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도 많이 알고 교회도 많이 경험했는데, 하여튼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유순하고 하나님 말씀에 굴복하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면 ‘이론이야 그렇지만 실제는..’하고 그럽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주면 ‘자기는 그렇게 하나?’ 또는 ‘요새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어디 있다구!’ 이런 식으로 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꺾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열심을 가진 사람일수록 위험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아집을 따라서 믿는 사람의 영혼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은혜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에게 흘러들어 갑니다. 그래서 가족 구성원들이 주님을 잘 믿어서 깨뜨려지는 신앙의 세계를 갖고 있을 때 그 가정이 희망이 있는 겁니다. 아내가 어느 날 깨닫고 남편에게 용서를 빌고, 남편이 어느 날 깨닫고 아내에게, 부모가 깨닫고 자식에게, 자식이 깨닫고 부모에게, 형이 깨닫고 동생에게, 동생이 깨뜨려져서 형에게.. 이렇게 서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자기를 합치시키려고 할 때에 가족 구성원 각자 각자가 하나님의 의해 다루어집니다. 그러면서 하나로 합쳐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II. 두 개의 복음 채널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복음이 전해지는 두 개의 채널이 있습니다. 복음이 흘러들어가는 통로가 두 개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보이는 복음의 통로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아름다운 행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불신 가정에서 제일 먼저 신자가 되었다고 하면, 가족들이 예수 믿고 안 믿고는 여러분들 손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신 사람들을 믿게 하시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들을 불러 주시지만 결국 그들의 마음이 감동되는 일 없이는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복음을 향해 열리고 하나님을 향해 열리게 되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나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잘 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의 목표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적으로는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외적으로는 기쁨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할 때는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마음의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도 주님과 함께 하는 고통과 괴로움일 경우에는 그 괴로움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기쁨을 소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기 위해서 많이 회개하고 깨뜨려질 때 오히려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했습니다. 그러한 충만한 기쁨 속에서 매일 매일 살아납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볼 때에 자신과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일 마음을 갖게 되는 겁니다.
A. 보이는 복음
또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의 사랑의 삶입니다. 이것 역시 보이는 복음인데, 사람들이 예수 믿고 나서 아주 놀랍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될 때에 그 삶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고, 특별히 늘 같이 생활하는 가족들에게 그의 변화가 뚜렷하게 감지되게 됩니다. 그가 그렇게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변화된 그들의 삶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빨래가 펄럭이는 것을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듯이 자기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있었는데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차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 늘 불평하고 괴로워하던 사람이 소망으로 가득 찬 기쁨과 관용의 삶을 살게 될 때에 그들을 보면서 그들 안에 보이지 않는 실제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고, 알고 싶은 종교적인 호기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복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삶을 산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를 알지 못하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보다는 가까이 있어서 늘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복음을 전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일관성이 없어서 불신 가족들에게조차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가까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을 몰랐을 때에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변해서 다른 가족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가족 모두가 복음을 ‘아, 그런 거구나! 예수님이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고, 정말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니까 저 사람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서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이 깨닫게 되는 겁니다.
가정주부들이 늘 만나서 서로 어울리고 마실을 다닙니다. 집안에 조그만 기쁜 일이 있어도 숨길 수 없는 행복한 표정이 드러나는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의 큰 사랑에 감격을 했을 때 이것이 안 드러날 수 있겠습니까? 가족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복음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삶으로서는 전혀 예수님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랑도 없고, 기쁨은커녕 우울과 괴로움에 가득 찬 삶을 살면서 그가 복음을 전한다고 할 때 가족들은 복음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복음을 보여줄 수 있는 삶을 잘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니”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보면서 예수님이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쓰시는 사연을 세상 사람들이 읽어 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이, 인격이 예수님이 가르침과 정말 합치될 때,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보면서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보이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 받게 됩니다. 복음을 전해보면 끝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교회 근처에도 안 가본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에 가서, 열심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돈 떼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절대 예수 안 믿으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받았을 경우에, 그 사람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인상이 새겨지면 새겨졌을수록 더더욱 그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갖게 됩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잘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집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가족들을 많이 두고 있다면 정말 잘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 믿고 나면 가족들에게 잘하기가 힘듭니다. 주일엔 교회에 가야하고, 공휴일은 교회에 행사가 있습니다. 또 제사 지낸다고 할 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안 가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가족들하고 관계가 계속 깨지게 됩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그러면서 기도를 많이 해도 가족들과의 접촉점을 발견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가족은 대결 국면으로 가면 안 됩니다. 대결이 아니라 가족을 영적인 아버지, 어머니의 심정으로 품을 수 있는 역량과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불신 가족과 더 자주 만나고, 주님을 잘 믿었기 때문에 불신가족과 한마음이 되고 품으려고 애를 쓰고, 그들을 더 잘 섬기려고 애를 쓸 때 그들의 보이는 행실을 통해서 주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잘해야 합니다. 희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었으면 부모님에게 마음 아픈 일이 있었어도 부모님을 깊이 용서하고 효도해야 하고,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불신 아내의 남편이 되었다면 신앙 없는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하고, 반대로 불신 가정에서 아내로서 예수를 홀로 믿게 되었다면 교회 다닌 다음에 오히려 남편을 더 사랑하고 잘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 아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내가 덕을 보는구나!”하는 느낌을 받게 해야 합니다. “목사님, 그게 얼마나 힘든데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제가 예수 믿은 게 죕니까?”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으니까 그 정도는 감당을 해야 합니다. 덕을 보게 해줘야 합니다.
실제로 목회를 해보면, 남편이 교회에 안 다니는데 어느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부인이 그렇게 교회를 가자고 해도 남편은 안 갑니다. 그런데 남편이 예배 시간만 되면 열심히 성경 가방은 챙겨줘요. 남편에게 왜 당신은 안 가냐고 물으면 남편이 당신은 빨리 가서 잘 믿으라고 해요. 그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 왜 요즘 기도 안 해?” 남편이 그렇게까지 합니다. 왜 그러냐면, “목사님, 저는 기도도 신앙도 뭔지 모르지만 우리 집사람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제가 편합니다. 말도 잘 듣고, 아이들도 잘 거두고, 돈도 아껴 씁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동안 안하던 기질들이 나오면서 남편에게 대거리하고 다시 한번 붙어보려고 하고, 그럽니다.” 잘은 모르지만 은혜가 떨어져서 그런 겁니다.
가족들이 참 어려운데, 가족들을 위해 한 번 희생해 주는 것이 힘든 일이잖아요! 작은 것은 몰라도 큰 것을 희생하려고 하면 참 눈물을 삼켜야 하잖아요. 유산을 나눠받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을 세워야지 하면서 양보하는 것,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근데 그런 것은 가족들이 잘 기억을 안 합니다. 열 번 잘하다가 한 번 성질을 부린다든지, 자기 몫을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면 가족들이 “너는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그 정도냐?”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해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잖아요. 할렐루야죠!
잘 보여줘야 합니다. 사랑 이외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깊이 용서하고 사랑하고 자기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부모도, 형제도 몰라준다 할지라도 주님은 모두 기억하십니다. 보이는 복음에 있어서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B. 들리는 복음
또 하나의 채널이 있는데 들리는 복음입니다. 물론 좋은 복음을 보이는 것은 참 좋은데, 그들이 여러분들의 아름다운 신앙의 행실을 본다고 할지라도 기껏해야 그들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좋은 인상, 그리고 자신도 교회에 다녔으면 좋겠다는 것을 깨닫지 여러분들이 선을 행하고 가족들에게 헌신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 구성원들이 자기가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절망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아무리 보이는 복음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들리는 복음의 필요성이 절대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둘 다 잘해야 합니다. 이 두 개는 마치 총천연색 불란서 영화 같습니다. 왜 그렇게 비유하냐면, 미국 영화는 영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불란서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은 잘 모르잖아요. 그림이 계속 나오는데 밑에 자막이 안 나오면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밑에 자막이 나와야 알지 않겠습니까? 근데 영화를 계속 돌리는데, 자막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뭐가 망가졌는지 그림은 안 나오고 자막만 나온다면 영화가 재미있겠습니까? 재미없죠! 그러니까 화면이 아름답게 나오고 그 다음에 사운드가 아주 멋있게 들리고, 그 밑에 번역된 한글 자막까지 나와야지 영화가 재미있구나하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똑 같아요. 가족들에게 여러분들이 아무리 잘해도 그것은 총천연색의 영화의 화면에 불과합니다.
III. 복음을 전하라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겁니다.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이 울려 퍼지는 교회에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빛이 쏟아지는 교회의 현장에서 그가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그가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죠? 예전에는 형제간에 우애가 상하면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한 쪽이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기 전에는 화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등 돌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형제 사이가 나쁜데 동서 지간에 우애가 있을 수는 없죠! 형제간에 우애가 100이면, 동서들 간에 우애가 80되면 할아버지입니다. 100에 반 토막도 안 됩니다. 형제가 아주 인정머리 사납게 서로를 배척하고 지내는 집을 보면, 동서지간에 마음이 다 갈라져서 남편을 쉼 없이 쑤십니다.
형제들이야 아버지, 어머니 피를 받아서 태어났으니까 공통점이 있겠지만, 동서들이야 집안에 대해 끔찍한 애착이 있겠어요? 이익의 문제가 틀어져서 서로가 마음이 상하고 나면 다시 안 봐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들이 태반일 겁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의 갈라진데 보면 그 뒤에서 아내들이 작용을 많이 합니다. 형제들이 물고 뜯고 싸우는데 아내들이, 동서간이 눈물로 서로 교제하면서 화해하자고 하는 집안은 없습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에는 아주 잘못하는 겁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무조건 사랑해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은 나중 문제고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많이 사랑하면, 뼈아프게 잘못한 것을 지적하게 되어도 받아들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조금 지적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잖아요.
부모나 동기간이나 가족들이 그렇게 몇 번 선행을 했다고 해서 금방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어떤 경우에는 수십 년을 희생하고 살았는데도 가족들이 예수를 끝까지 안 믿는 경우도 많고, 심하면 예수 안에서 꺾어지는 나를 가족들이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용당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복음만을 가지고는 안 되고 그들에게 들려지는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선명하게, 따뜻하게 잘 해주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기회가 되면 정확한 예수의 복음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과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회개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령 안에서 우리들이 참된 신자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가족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가족들이 주님을 믿게 됩니다.
가족구원의 문제는 한 판의 승부를 볼 수 없는 성격의 것일 때가 많습니다. 한 번만 전해보고 안 믿으면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가족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변화되어 예수 믿게 될 때까지 오랜 세월이 걸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복음을 전했는데도 그들이 하나님께로 쉽게 돌아오지 않고, 내가 희생을 하고 그들을 섬겼는데도 예수를 안 믿는 것 때문에 쉽게 실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죽을 때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서 조심해야 될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족들의 구원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집중적으로 쏟아 붓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디 가서 전도하고 복음을 전했더니 예수 믿을까 말까하는 사람이 나왔다고 하면, ‘저 사람이 금방 믿겠어? 한 50년 목표로 하고 저 사람에게 전해야지’ 그러지 않잖아요. 50년까지 살아있을지도 모르고, 오늘은 그 동네에 살고 있지만 내년에는 어디로 이사 갈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럼 한 주간 동안 열심히 기도해서 저 사람들이 이번 주 안에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러는데, 자기 가족들한테는 그렇게 다급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가족들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 부담은 계속 느끼고 있었지만 헌신은 별로 안 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부담은 항상 있어요. “어머니는 교회에 나오십니까? 예수 믿으십니까?” 하는 물음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항상 마음에 부담이 있는데도 집중적으로 헌신한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다 결국 부모님들이 끝까지 예수 믿지 않고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려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런 상태에서 부모가 죽고, 형제가 죽어도 그렇게 뼈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뼈아파할 사람들이라면 복음을 전했겠죠! 결국은 그 사람이 복음을 향하여 얼마나 살아있는 심령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아직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늘 부담을 갖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기도하겠지요. 그런데 전심전력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자기를 온전히 쏟아서 목숨을 건 중보기도. 여기서도 문제가 나오는 게, 아직까지도 내가 부모님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서 마음에 용서가 잘 안 돼요. 사랑이 부족한 겁니다. 그 사랑의 부족이결국은 부모님들의 영혼을 위한 뼈저리고 안타까운 눈물의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모든 것들이 미적지근한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겁니다.
예수 믿는 자녀들이 있는 집안의 모든 부모들이 예수 믿고 죽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에요. 불신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에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안타까워했던 사람들만 그런 불신 상태에서 죽었을 때에 뼈저리게 후회하고 눈물을 흘리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그렇게 냉담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들리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연로한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가서 잘해드리고 기회 있을 적마다 가서 그 부모님에게 예수의 참다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진지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박해해도 그것은 주님을 위한 박해입니다. 그래도 해야죠! 결국 가족들의 구원이 지연되는 것은 먼저 믿은 우리들이 그들의 영혼을 향한 열정이 현저히 부족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교회에는 우리 교회의 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와서 간절히 부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여기 근처에 사시는데 우리는 다른 지방에 살아서 자주 올 수가 없는데 이 교회에서 가서 꼭 좀 우리 부모님 예수 믿게 해주세요. 저희들이 눈물로 매일 기도합니다.” 한번도 그런 부탁을 뿌리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렇게라도 해보셨습니까? 용기가 없어서 그렇게 못한다고 합시다. 그럼 가까운 교회에 가서 목회자를 만나든지, 교인을 자주 보고, “여기에 내 동생이 사는데, 우리 부모님이 사시는데, 우리 형이 사는데..아직까지도 가족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해봤습니까?
복음이 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을 일깨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놀라운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복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것들이 그들의 마음속에 잘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들려야 합니다. 그것을 편지로 쓰든지, 녹음을 해서 보내든지, 가서 전하든지, 손을 잡고 이끌고 가서 교회에 앉히든지, 어떻게 하든지 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들리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결국은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전해야 된다는 원칙만 서고 그 영혼이 복음을 듣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복음이 저 영혼에게 들려야 한다는 사모함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집니다. 복음이 들리지 않아서 회심하지 않을 때 그 자녀들이 점점 자라나서 결국 성인이 되어서 부모 말을 듣지 않아요. 제멋대로 삽니다. 나는 이 교회의 장로고, 권사인데.. 그렇게 해서 기른 자식이 어느 날 불신 형제나 자매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한다고 하는 경우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불신자 데리고 와서 결혼한다는 경우가 생겨나는 겁니다. 어쩌다 말은 잘 들어서 부모 체면이라도 세워줄려고 학습이라도 받고 결혼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럼 어떻습니까? 어렸을 때에 많은 세월이 있었잖아요! 그 아이를 신앙으로 가르치고 예수님의 복음을 넣어주면 엄마 말, 아빠 말을 잘 믿고 그것을 받아들여줄 수 있을 그때에 집중적으로 애를 쓰고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넣어 줘야 하잖아요. 근데 무엇 때문인지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겁니다.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는 그렇게 애쓰면서 자녀들은 내버려 두는 겁니다. 회심을 안 해요. 회심을 안했는데 아무리 똑바로 살라고 가르쳐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죽은 사람 얼굴에 분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결국 머리가 크고 독립심이 생겨나고 부모에게 실망까지 하게 되면 자녀들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겁니다. 아이의 마음속에 엄마, 아빠가 위해서 살아가는 복음, 교회, 신앙이 아주 꼴 같지 않은 것들로 가슴에 새겨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부모를 보면서 측은하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유아 세례를 받으면 뭐합니까?왜 그렇게 내버려 둡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 아이를 위해 울고, 그 아이를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그 아이 속에 신앙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강퍅해지도록 내버려두는 겁니까? 물론 우리가 애를 썼죠!
더 많이 희생을 하고, 더 많이 눈물을 흘리고, 더 많이 그 아이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주었으면 변하게 됩니다. 핑계를 대지 말고 더 많이! 그렇게 해야 되잖아요!
동기간들도 마찬가집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의 복음이 들려야 합니다. 보이는 복음을 아무리 잘한다고 할지라도 들리는 복음이 없다면 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정말 거듭날 수 없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거듭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영혼에 들려지도록, 듣는 모든 사람들이 거듭나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특별히 역사해 주셔서 저들이 말씀 앞에 회심하도록 그 영혼을 먼저 깊이 불쌍히 여기고 그게 잘 안되면 가족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없는 자신의 영혼을 먼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오죽했으면 내 가족, 골육지친의 영혼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을까하고 용서를 빌고, 회개해야 합니다.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가도록 온 힘을 다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그거 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여러분의 가정에서 먼저 예수 믿는 사람으로 택하신 겁니다. 그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영원히 세월이 있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속히 지나갑니다.
다시 한번 마음의 뜻을 세우십시오. 구원을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세요. 정말 헌신하세요. 이게 영적인 일이기 때문에 잘 안 돼요. 온 가족 교회 오는 날, 무슨 전도하는 날 정해놓고 가족들 인도하자고 그래도 누가 말을 듣습니까? 이것은 영적인 싸움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고,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미련해 보여도 꾸준히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미련해 보여도 끊임없이 그 일을 하면 그때에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미 벌써 오래전에 저희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은 과묵하시고, 자잘하게 이야기하는 성격이 아니셨습니다. 근데 하여튼 교회 자체에 대해 아주 냉소적이셨는데, 노년에 몸이 안 좋으셔서 여러 달 병원에 계시다가 꼼짝도 못하고 몸져누우셨어요. 매일 가서 복음을 전해 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설교 테이프를 6개월인가 8개월인가를 보내 드렸습니다. 사실 보낼 때 저 자신도 그렇게 보내는 것에 대해서 마음에 ‘참 잘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교회 다닌 사람도 어렵다고 그러는데 전혀 복음도 모르는 분에게 선별된 설교도 아니고 주일에 나오는 설교들을 몇 개씩 묶어서 보내드렸습니다. 하여튼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근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성하게 다니실 때는 귀도 안귀울이시던 분이 아마 드러누워 계시니까 너무 무료하고 심심하셨는지 테이프를 틀어놓고 들으시면서 그러면서 신앙을 받아들이시고 거듭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복음이 들려질 때에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족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정말 구원 얻고, 변화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날까요? 물론 어렵겠죠! 그러나 이 일 말고 우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힘닿는 대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복음이 선포되는 예배의 현장에 그들을 데리고 나오고, 온 마음을 기울여서 그들에게 참 빛이 들어가도록 도와달라고, 온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두 한때는 어리석기 그지없다는 복음을 믿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IV. 결론과 적용
여러분 이제 가정 시리즈를 주일이면 모두 마칩니다. 결국은 그 가족들을 위해 우리들이 많이 희생하고 섬기지만 가족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든 것들이 완전하고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서 보다 시급한 섬김은 복음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을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헌신해야 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기회는 언제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언젠가 여러분들은 뼈아픈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47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제 나이가 7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제 나이였을 때에 저는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습니다. 워낙 일찍 장가를 가셨으니까 그랬죠. 16세에 장가를 가셔서 17세에 우리 아버님을 낳으셨습니다. 아버님은 23세에 저를 낳으시고. 우리 아버지가 30세였을 때에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저희 형제 중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 하나뿐이지요.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다들 가난하고 그래서 그랬지만, 결핵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서울에 치료를 받겠다고 올라오시는 도중에 버스 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불에 싸여 온 할아버지를 보며 모두가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납니다.
저희 가정에 먼저 예수를 믿으시던 큰 고모님이 그러셨습니다. 고모님이 늘 하던 말씀이,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도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다. 아버님을 구원하는 거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3일을 거푸 꿈을 꾸는데 하나님이 “얘야, 네 아버지께 편지를 빨리 써라.” 세 번을 연달아 꿈을 꾸고, 삼 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간이 얼마나 됐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절박하게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도록 주님이 분부하시는 장면을 꿈을 꿨다고 합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고모가 다 아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셨습니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고 하니까 가는 것은 꿈꾸지 못했더라도 편지라도 써야하는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기회가 오겠지.”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온 것입니다. 그때 참 많이 우셨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신앙이 없을 때였는데, 몇 번이나 저에게 안타까워하면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내가 우리 아버지에게 복음을 전했어야 되는데! 그때 편지를 썼어야 되는데! 그러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 것인데!” 그러면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항상 있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항상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을 잘 전하지 않으면 형제들의 가정이 깨뜨려질 때에 그것을 붙잡아줄 수 있는 신앙을 그들이 갖지 못합니다. ‘부모님이 아직도 예수를 안 믿으시니까 내가 전해도 안믿을 거야.’하면서 안전하시죠!
어느 날 부모님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때 얼마나 뼈아픈 눈물을 흘리시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장기적으로 ‘언젠가는 될 일이다’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속히 이 일을 이루지 않으면 내가 안타까워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하는 사모함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진짜 가족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고, 자세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가족의 구원을 위해 고민한 것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민한다기보다는 가책을 받고 부담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부담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편지든지, 테이프이든지, 연극을 하고 춤을 추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들리게 하라, 편지를 쓰라 이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력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가족들이 주님 믿고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4. 골수에 사무친 소원
“내가 그리스도와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I. 본문해설
오늘은 가정 시리즈 마지막 날 마지막 설교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토대로 우리의 가족이 진정한 가족으로 회복되기 위해서 정말 필수적으로 꼭 있어야 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가 무엇인가 가슴에 깊이 치밀어 오르는 그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가슴에 안고 피를 토하듯이 고백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골수에 사무치기까지 처절히 파고든 어떤 근심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명도 버리면서 그 근심이 해결되기를 원하는 마음의 소원을 보이고 있습니다.
부산에 가면 ‘자살 절벽’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태종대에 있는 자살 절벽은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투신했던 곳입니다. 그 지형을 가만히 보면 기가 막힙니다. 뛰어내리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뛰어내리면 저 깊은 바다에 떨어질 것처럼 풍경이 보이고 실제로 떨어지면 절대로 바다에 떨어지지 않고 바위에 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자살 절벽이라고 불립니다. 요즘은 깨끗이 새로 단장을 했습니다만 예전까지 그 자살 절벽 앞에는 푯말이 붙어있었습니다. “인생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꼭 그렇게 자살을 하셔야 됩니까?” 꼭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위험한 절벽에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간다면 우리는 아마 ‘저 사람 왜 저럴까, 저리로 가면 안 되는데’ 이런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어린 자녀나 연로하신 부모님이 앞이 잘 안 보여서 그 길로 걸어간다고 할 것 같으면 아마 소리를 지르며 거기로 가면 큰일 난다고 외치지 않겠습니까? 더러 우리가 우리의 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그 유명한 선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우리를 구원해내셨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러면서 8장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놀라운 특권을 말하다가 8장 후반부에 오면 감격에 찬 어조로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그리고 높음이나 깊음이나 장래일이나 현재 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러다가 9장이 시작됩니다. 9장의 서두 속에서 사도 바울은 골수에 사무친 근심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II. 골수에 사무친 근심
A. 골육의 구원
“골수”라고 하는 성경의 표현은 인간의 영혼에 깊이 핵심적인 자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이 골수라는 말이 그 뼈 속에 흐르는 육체적인 골수를 가리키지만 실제적인 의미로는 이처럼 인간 영혼의 깊은 심장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골수에까지 사무치는 근심이 사도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가족과 동포들에 대한 근심이었습니다. 이런 근심은 골육의 구원을 위한 근심이었는데 이 골육을 위한 근심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은 그분이 나사렛의 이단자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까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구약에 수많은 역사는 이 한분을 바라보고 달려온 역사이고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그 세상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고된 그 하나님의 나라와 실현될 하나님의 그 나라 사이에 바로 선교라는 활동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B. 하나님의 사랑을 앎
그러면서 이 사도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전하기 위해서 일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붙잡혀서 그 은혜와 그리고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지옥에 불을 지피는 땔감 정도로 인식이 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이 새로운 도인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지혜를 추구하며 유대인들을 멸시하고 교만하던 사람들이 이 복음의 빛을 받게 되자 그렇게 무지한 상태에서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단정한 삶을 사는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무지몽매하기 그지없이 야만족에 가까운 인간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자 정말 단정하고 순전한 백성들이 되었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어떤 구약시대의 백성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나는 구원의 풍성함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사도 바울의 마음은 녹아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을 위한 깊은 근심과 염려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더 많은 계시를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선택을 먼저 받은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로부터 멀어져서 예전에 자신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은 뼈 속 깊이 타들어가는 근심과 걱정으로 멍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골육의 구원을 위한 처절한 근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아서 이방인들 가운데 풍성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을 거절하는 자신의 친척, 가족과 동포를 향한 처절한 근심이 뼈 속까지 자기를 태워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영혼의 고통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닫게 되던 때가 사실은 가장 고통을 받던 때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게 된 사람이 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많이 고통하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것의 이치는 이렇게 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이 세상에 살 때도 고통이 왔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결코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그 길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되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그리스도 예수가 내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우리들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자신이 자기를 사랑하면서 살려고 하는데 그것들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런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결핍입니다. 내가 사랑하는데 그 사랑하는 것들이 자꾸 사라지거나 없어질 때, 혹은 사랑하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 그때 그것으로 인해서 당하게 될 마음에 괴로움을 우리들이 괴로움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고통이 언제나 자기를 중심으로 한 고통입니다. 그런 고통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새로운 고통이 밀려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이제는 자신의 이전의 그 고통은 다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기 때문에 예전에 모든 고통들이 이제는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사랑했던 것들을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고통은 회심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주님께 합치시키고 나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주님의 마음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어떤 마음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의 마음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불붙는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목자의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무리들을 당신의 울타리로 인도해놓으신 후에도 여전히 마음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나의 양떼들이 아직도 많이 있는데 그들도 인도하여 이 우리 안에 다시 들여놓아야 한다고 하는 잃어버린 양떼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타올랐습니다. 이런 주님의 마음이 구원을 얻은 우리의 마음에 전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의 진수입니다.
여기 많은 선교사님들이 와계시지만 선교사님들이 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된 것은 선교에 대한 비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이 그분들의 마음을 녹이고 예수의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물같이 녹여서 그래서 이제 자신의 인생의 모든 목표는 사라지고 그분의 마음을 전수받게 되었을 때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이 마음에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느껴졌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믿고 영생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눈물겨운 마음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느껴졌습니다. 다른 이 세상의 모든 일을 해서는 도저히 고통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의 강제력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도는 각각 다르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자녀가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밀려왔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녹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수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붙잡혀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염려였고 근심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런 것들이 나의 근심, 염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마음속에서 단 하나, 하나님이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영혼을 향해 가지고 계신 주님의 마음의 고통과 그리고 그분의 눈물이 내 마음속에 느껴집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우리들이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 속에 소유하고 있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은 사람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산을 옮기는 기적과 기이한 믿음, 그리고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놀라운 언변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다면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시간도 아직까지도 구원받지 못하는 여러분들의 가족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껏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리고 마음의 울분 때문에 부모를 미워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 있다가 사라지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생각하지 않을 때 여러분들의 부모를 하나님이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장례 날은 여러분들이 사랑해야 할 여러분의 부모님이 지옥의 불길 속으로 떨어지는 바로 그 날입니다. 가족에게서 상처를 받고 고통을 받은 것들은 잠시 이 세상에 있다가 지나가는 감정들이지만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의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그 부모들이 지옥의 불길 속으로 떨어진다면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입니다. 지금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있고, 지금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도 그들이 구원 얻기 위해서 그들에게 끊임없이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지만 마지막 심판의 그 날에 어떤 긍휼도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은 그 지옥의 불길 속에 타오를 것이고 천군과 수많은 천사들은 엄위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해 경배와 찬송을 돌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여러분의 남편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 출석도 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세월이 지나면 내 남편도 교회에 나오리라고 믿지만 그게 도대체 언제입니까? 10년 전에도 언젠가 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언젠가로 연기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날들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니 언젠가는 여러분들의 남편을 하나님이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날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많이 사랑해주셨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그래서 복음의 빛을 여러분들의 마음에 비추어주셨고 어두움을 이기며 살수 있는 신령한 은혜와 하늘의 자원을 끊임없이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남편은 아직까지 거듭나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간신히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지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오직 한길 밖에 없으니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마음은 얼마나 다급한지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남편을 위한 이런 뼈 속 깊이 사무치는 근심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남편을 구원해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라고 하는 간절한 사모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불신남편을 두었기에 남편이 예수를 믿어야 되는데 요즘은 태도가 어떤가 하고 물었더니 그 자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은 순순히 하나님께 돌아올 인간이 아닙니다. 강퍅하기 이를 때 없고 마음이 돌맹이 같아서 한번 혼나야지 정신 차리지 절대로 정상적으로 예수를 믿을 인간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깨어져야 할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그 자매가 더 많이 깨어져야지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매가 정말 깨트려진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속에 있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가정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저는 지난 두 달 동안 가정에 관해서 계속 설교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꺾고 이제 부모님을 용서하고 깊이 사랑해서 그리고 효도해서 이제는 대를 이 미움과 증오를 끝내야 합니다. 자식들로부터 섭섭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을 깊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며 이제는 더 이상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횡포를 부리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내를 깊이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을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지 못한 죄도 회개하고 그 남편으로 하여금 정신적인 연합이 끊어져서 방황하지 않도록 깊이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받지 못한 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해주지 못한 것을 슬퍼하면서 가족구성원 서로에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자녀들도 깊이 사랑하고 그 동기간들이 서로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부모님 모시는 문제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사이가 갈라져서 연락도 하지 않는 그런 관계가 된다고 해서야 어찌 믿음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동기간들을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이게 지난 두 달 동안을 설교했습니다. 그동안에 우리에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혼하려던 부부가 서로 붙들고 화해하고 용서하는 일도 일어났고, 다시 부모님을 안 찾아뵈려고 하던 자식들이 발길을 돌려 부모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자식을 학대하고 구박하던 부모가 자식을 끌어안고 용서를 비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일들을 우리 가운데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가운데 하나의 사랑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가정의 진정한 화목을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두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화해한 부부가 싸우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내 마음속에 오늘은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마음을 먹고 부모님께 받은 상처를 삭히고 부모님께 효도를 하지만 다시 부모님이 마음 아프게 하는 행동을 인해서 부모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오늘은 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자녀를 끌어안고 잘못했다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지만 다음에 또 자녀를 노엽게 하고 학대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때도 그런 화해가 있을지 두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가족구성원 전체가 자기 자신은 죽고 나머지 가족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려고 하는 희생과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합니까? 자기를 위해서도 다 못사는 세상인데 어떤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고 애를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내가 다 옳은 것 같은데 가정에 평화를 위해서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내가 잘못했다고 빌어본 적이 있습니까? 절대로 여러분들이 잘못하지 않은 것 같은데 잔소리하는 마누라 앞에서 무릎을 꿇고 당신의 마음을 이렇게 외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정말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어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굴복시키는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가족구성원 모두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지만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모든 가족들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모신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냥 구원받고 예수님만 모신 삶을 사는 정도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 안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참된 신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히 어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가고자 할 때는 참된 남편이 되는 길과 틀리지 않습니다. 자식이 주님을 믿고 회개하고 참된 신자가 되려고 하면 참된 자식이 되는 길과 일치합니다. 내가 아버지로서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참된 신자가 되려고 하면 참된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주님을 모시고 주님 안에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으로서 온전한 신자가 되어가려고 노력할 때 그 가정이 이 땅에서 살고 있고 많은 상처를 지닌 가정이지만 그러나 하늘가족으로 이 세상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III. 지순의 사랑으로 영혼을 사랑함: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래서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지순의 사랑으로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이 놀라운 사랑은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이 놀라운 사랑을 주신 이유는 이 사랑을 가지고 주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여러분들의 가족들,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불신가족과 동포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이 사랑의 은혜에는 항상 소명이 내포되어있으니 사랑의 경험은 항상 희생의 소명을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일평생 받으면서 사신 분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에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셨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 본체를 버리고 사람의 형상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더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시면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며 일생을 사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희생하신 생애였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더 많이 사랑받으신 생애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바로 하나님께 받은 그 놀라운 사랑은 스스로 그 사랑에 취하고 그 사랑에 만족하고 그래서 그 사랑을 받은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월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 놀라운 사랑을 주신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사랑을 품고 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구원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들에게 가서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되어달라고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소명을 주시면서 그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는 구원받지 못한 우리 가족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까리따스의 사랑은 바로 보이는 자기의 가족과 그리고 교회의 공동체,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향한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향한 눈물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공통적으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지 모르는 메마른 성도의 마음 한복판에는 십자가를 잃어버린 냉담한 마음이 그 안에 있게 마련입니다. 한 사람이 아무리 허물이 많고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매일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영혼이 불쌍해서 매일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영혼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하는 애달픈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그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은 그 사람의 편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가족들이 강퍅해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눈물 흘려줄 수 없는 누군가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은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모든 사람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꾸밈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에 관한 가르침을 들으며 회개했습니다. 창녀와 같이 더러운 여자도 회개했고, 세리와 같이 부패한 인간들도 통회하고 새사람의 길을 걸었습니다. 완악하고 강퍅하기 이를 때 없던 수많은 죄인들, 문둥병자와 같이 이 세상의 삶에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저주받은 사람들도 주님을 믿고 그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도개인들과 율법주의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눈물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영혼을 향해 흘리는 간절한 눈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눈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일생을 살면서 예수님의 생애는 목양의 생애였고 그 목양의 생애는 곧 전도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목회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목회란 그 마음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예수님이 바로 그런 생애를 사셨습니다. 일생을 이 세상에 사시면서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고난과 핍박으로 관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그분은 자신의 육신의 고난 때문에 마음이 빼앗기신 적이 없었고 마음에는 처절한 근심이 있었으니 바로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슬픔과 근심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시기 전에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시면서 그분의 마음에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희랍어로 에스프랑크리스데이 라고 하는 단어인데 창자에까지 떨린다고 하는 뜻이니 이는 우리말 표현으로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는 뜻입니다. 그 마음이 사도들을 이 세상에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 찢어지는 그 마음이 어찌 사도들만 파송했겠습니까? 그렇게 이 세상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찢어지시는 주님의 그 아픈 마음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고 구원을 받은 그 사랑에 매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우리를 불신가족이 모여 있는 우리의 가정으로 파송하셨고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내 이웃들에게도 나를 파송하셨습니다. 좋은 신자는 일평생 이렇게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 핍절한 인간들을 보며 마음에 가슴이 저며 하시던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주님의 마음에 그렁그렁했던 눈물을 간직하며 사는 사람이 착한 신자입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신앙을 갖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 그리스도, 멸망을 앞에 두고도 거짓 평화에 붙잡혀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평화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우시던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고통의 핵심이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영혼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영혼들이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 이외에 그 무엇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예수 믿은 이후에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자신의 비전을 따라서 삽니다. 그러나 그 비전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 모든 비전들은 이 하나의 비전에 묶여있는 비전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이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동안에 부모님들은 점점 늙어가고 정말 예수를 믿는 참 신자가 되어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시기들이 타들어갑니다. 내 아내가 미워서, 내 남편이 원망스러워서, 그를 주님의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않는 동안에 내 남편, 내 아내는 그 소중한 인생의 시기를 허랑방탕하며 허비하고 있습니다. 살수록 죄를 지으며 주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고 마음은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기대에 차지 않는 자녀들을 보면서 마음에 갈등을 느끼면서 그들을 미워하고 섭섭해 하는 동안에 자녀들의 마음은 점점 굳어져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녀들이 되어갑니다.
어제도 제가 미국에서 어떤 편지 하나가 온 것을 읽었습니다. 최근에 가정시리즈를 들은 어느 지체가 간곡히 편지를 보냈습니다. 피아노 위에 어린아이의 사진이 있는데 9살 때 찍은 사진인데 그렇게 천진난만했는데 한 4년 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가 얼마나 거칠어졌는지 모른다고 한탄을 하던 자매였습니다. 가정시리즈 설교를 들으면서 방바닥에 엎드려 깊이 회개하고 모든 것이 자기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뉘우치고 아이를 사랑하기 시작했더니 아이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우리들이 조금만 사랑해주면 아이들은 우리의 품속으로 파고듭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부모인 우리의 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이 그렇게 어렸을 때 깊이 사랑하고 무릎에 앉혀놓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것과 그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멸시와 욕을 당하게 하신 것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도 문 밖에서 피 묻은 손으로 네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너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니? 예수님을 네 마음에 모시고 싶지 않니? 아이들이 펑펑 울며 회심합니다. 해보십시오. 회심합니다.
그런 소중한 기회를 상처 속에서 다 내버려두고 자기 사랑에 매어서 쓸모없는 일에 분주하다가 마지막에 그 아이가 크면 이제 부모 말을 안 듣습니다. 부모가 열심히 믿으면 그렇게 냉소하고 비웃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장가가겠다고 자매를 데리고 왔는데 불신자매입니다. 목사님에게 주례 안 받아도 되니까 상관없으니까 예식장에서 10만원 주고 주례사 선생 사서 결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런 가슴 아픈 날이 곧 다가옵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을 그렇게 내버려둡니까? 진짜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들이 삭군 부모인지 진짜 부모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그 아이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여러분들의 그 눈물을 그 아이들이 한번 머리에 적셔본 적이 있습니까? 엄마가 내 손을 꼭 붙들고 애야 하나님이 너를 너무 사랑하신단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거든, 너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래? 우리 부모는 나를 그렇게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부모는 내가 어렸을 때 그렇게 무릎에 앉혀놓고 나를 꼭 끌어안고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나보다 더 사랑하신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단다. 우리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어라, 가르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비극은 우리의 대로 끝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았지만 가족을 위해서 얼마나 인색한 생애를 사셨는지 한번 기억해보십시오. 우리를 하나님 사랑 알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이 사랑을 전하도록 보내시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멸시와 박해의 길을 걸어가신 것처럼 가족의 구원을 위해 희생하라고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남이 갖지 못한 것들을 우리에게 갖게끔 만들어주셨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셨건만 우리는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너무나 적습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찬 가운데 사랑해야할 가족들을 미워하고 평화해야 할 가족들에게 생채기를 내고 질시와 미움, 얼마 안 되는 물질을 가지고 다투면서 가족들의 관계에 상처를 내고 그 과정에서 주님은 수없이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삶을 살다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뵈올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 아끼신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신데도 그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멸시와 욕을 당하시면서 왕의 길이 아니라 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금 마차, 금수레를 타고 다니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행로에 피곤하도록 걸어 다니셨고 고작해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낮아지셨습니까? 박해와 멸시 속에서 마지막 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눈앞에 있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자기가 죽음으로 영혼을 하나님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희생의 길을 걸어가셨고 우리들이 치를 수 없는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서 율법 아래 태어나시고 율법 아래 (?)비참함을 다 맛보시고 그리고 율법의 정죄대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장 흉악한 죄인처럼 괴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이 선교의 원리입니다. 누구든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그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목회지에서 더 많이 죽었더라면 죽어간 수많은 영혼이 살아났을 것이고, 내가 내 선교지에서 더 십자가에 못 박혔더라면 구원받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은 오늘 천국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내 가족을 위해 더 많이 희생하고, 내 가족에게 더 많이 멸시를 당하고, 그리고 내가 내 가족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라고 한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내 것이 되었더라면 지금쯤 우리 가족은 하늘가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러운 자기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매어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전하는 통로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지금이 예수님의 시대였고 주님이 다시 이 세상에 오셨더라면 아마 똑같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리고 그 속에 우리의 가족들도 포함되지 않았겠습니까? 모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 없음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처라는 것은 기껏 해야 이 세상에서 잠시 있다 지나가는 인간의 이념에서 오는 아픔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가족의 영혼들은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우리도 예전에는 불신하는 우리의 가족들처럼 망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특별히 강퍅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렇게 강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는데 우리에게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에게는 그 은혜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예수를 믿은 줄 알지만 그러나 사실 하늘나라에 가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보좌 우편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우리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영혼을 자기의 영혼처럼 부여안고 깊은 밤에 이른 새벽에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생애의 보람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기쁨이 아닙니까? 우리의 생애의 최고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아픔이 아닙니까?
IV. 결론과 적용
오늘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들의 가족들을 지금도 생각해보십시오. 심지어 우리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분들 중에도 아직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나아가서 수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우리 부모들이 아직까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 내 형제, 그리고 내 친척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심지어 우리가 선교하는데도 우리의 가족들, 골육지친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우리의 사역 때문에 우리의 가족들에 대한 복음증거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해서 우리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리고 그 골육들을 위해서 이 복음을 전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를 붙들고 예수의 사랑을 말했을 때 멸시를 받는다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크지 않겠습니까?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저의 경험을 보면 가족의 구원은 먼저 믿은 사람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처음 주님을 믿을 때 저 혼자였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깨닫게 된 것은 구원의 때는 불신가족이 구원받는 때는 다른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불신가족을 위한 선교사로 부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병 하나씩 주십니다. 그 병이 무엇인가하면 시편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주여 내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눈물 통입니다. 그게 차기 전까지는 절대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오늘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누구에게 이렇게 혹독하게 박해를 받았습니까? 복음을 전하러 갈 때는 그렇게 죽어라 하고 모함을 하고 살해하려고 자객들까지 풀어놓은 인간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자기 골육지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남긴 설교 가운데 유대인의 간교로 인하여 당한 시험들을 참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집요하게 자기를 미워하고 자객까지 풀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자기 동족 때문에 상처받은 것 보입니까? 상처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부족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상처받은 게 보입니까? 동족들이 그렇게 이를 갈고 자객들까지 풀었는데 모함을 하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으려고 하면 훼방하고 하는 그런 일들을 유대인들이 했는데 오늘 뭐라고 합니까? 나는 그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는 원합니다. 끊어진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지옥의 불길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차라리 그것을 원하는 바입니다. 그 마음이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다 용서하고 그래서 아버님, 어머님 꼭 끌어안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효도하십시오. 아내와 남편, 상처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수시로 폭언을 하고 멸시하는 내 남편, 나를 너무 외롭게 하고 인간 이하로 대하는 내 아내, 이제는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찾아가서 용서를 비십시오. 손을 꼭 붙들고 여보, 당신 너무 외롭게 해서 미안해. 나 때문에 너무 마음 아팠지. 내가 남편으로서 너무 잔인했어. 여보, 용서해. 아내도 남편에게 당신을 무시하고 막 대했던 것 여보, 정말 미안해. 용서해요. 자녀들에게도 여러분들의 기대에 차지 않아도 꼭 끌어안고 애야, 사실은 네가 내 마음에 안 찼거든, 그래서 내가 너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는데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이제는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해줄게. 그리고 꼭 끌어안아주십시오. 자기만 희생하면 됩니다. 그런 사랑이 없기 때문에 가족들을 위해 기도할 때 눈물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런 미움과 상처가 여전히 있는데 어떻게 그 부모를 위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겠으며, 어떻게 내 아내 때문에 눈물이 나겠으며, 내 남편 때문에 흐느낄 수 있겠습니까?
전에 우리 교회에 다니던 자매가 있었는데 새벽기도에 열심히 나와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너무 가엽어서 몇 번 기도를 해주었는데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는데 내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사연이 많구나. 나중에 고백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일년 반이 넘도록 새벽기도에 나와서 기도 제목이 오직 하나, 내 남편과 이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능력을 달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더니 그 다음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확 살아났습니다. 심방 갔더니 남편을 꼭 끌어안고 목사님, 우리 남편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몸까지 아픈데, 꼭 끌어안고 우리 남편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볼 때 남편이 뭐가 변한 게 있는가 하면 늙었다는 것과 아프다는 것 빼놓고 변한 게 없습니다. 그게 사랑이 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교사 가운데 한분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입니다. 18세기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당시에 미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낮에는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인디언 사냥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인디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래서 가서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때 그렇지 않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였습니다. 21살 때 회심하고 25살에 선교사 소명을 받고 29살꽃다운 나이에 죽었습니다.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읽어보면 눈물 없이 읽을 수가 없습니다. 혈혈단신으로 통역하는 인디언 한둘 데리고 다니면서 선교를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가 처절한 기도생활에 자기를 바치면서 선교를 했습니다. 너무나 과로해서 폐결핵에 걸려서 결국은 29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그가 전도한 기록들이 그대로 일기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이제 복음을 전하러 가야지 되는데 기운이 너무 없습니다. 그러면 말 위에 엎드려서 말이 원래 늘 다니던 길이기 때문에 다음 목적지에 데려다줍니다. 가다가 기운이 없어서 몇 번을 말에서 떨어집니다. 그러면 다시 말에 올라서서 말을 붙들고 가면 말이 거기에 데려다줍니다. 거기에서 몇 명의 인디언들이 선교사님이 왔다고 모두 모입니다. 그러면 그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번 설교하고 나면 주저앉아서 한 사발씩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에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결국은 그 폐결핵으로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가 남겨놓은 일기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모든 대답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자기를 희생하게 하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그 도성인신의 선교의 도를 이루게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가정시리즈를 마감하면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십시오. 첫째도 희생, 둘째도 희생, 셋째도 희생, 첫째도 사랑, 둘째도 사랑, 셋째도 사랑 이런 사랑을, 이런 희생을 가족을 위해 모두 지불하십시오. 어려울 것입니다.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금년이 가기 전에 여러분들의 모든 가족들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하늘가족들이 되어서 복음의 빛 가운데 사는 여러분들의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믿음의 가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