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증인 그리스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4~15)
녹취자: 김경애
저녁 맛있게 드셨습니까? 제가 여러분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첫째는 우리 사랑하는 예수가족교회 백금산 목사가 오늘 개척한지 20년 만에 위임식을 했습니다. 거기 설교를 해달라고 해서 갔는데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갔던 이정현 집사를 아십니까? 이번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갔다 왔습니다. 두 번째는 설교준비가 교정을 봤는데 10전에 끝났습니다. 세 번째는 그저께 위경련이 와서 너무 좋아하는 고기를 먹으면 문제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혹시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나서 교인들에게 미움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까? 약간의 시기와 질투 같은 것입니다. 아무데서나 가르쳐 주지 않고 여기서만 가르쳐 드리는데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조언을 드리자면 더욱 겸손해지셔야 합니다. 보통 때처럼 해도 저것이 안수집사가 되더니, 권사가 되더니, 장로가 되더니 교만해졌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겸손하게 하시고 두 번째는 중직자라는 말은 남이 써주는 이야기이지 본인들이 쓰면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학자는 자신을 학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끔 그렇게 이야기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데 학자가 영어로 Scalar인데 외국에서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Scalar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남이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직자도 마찬가지로 남이 이야기 해주어야 하고 여러분들은 지금도 겸손하게 하고 계시지만 그래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다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면서 신앙생활 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열린 교회의 비전에 대해서 합니까? 말씀 나누는 것을 4주 동안 했는데 오늘 말씀 나누는 것을 하고 싶은데 교육의 마지막 때에는 항상 이것을 했습니다. 이것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듣지 못할 수도 있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 보겠습니다.
질문1) 신학전문도서관의 이후 향방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답변)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선 신학전문 도서관이 중단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전체적인 합의 속에서 신학도서관을 이만큼 키워왔고 사실은 이 책의 모두를 제가 읽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300년을 읽어야 할 분량인데 전부 다 읽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읽는 것이라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데 그러나 이 책 전체를 거의 활용하면서 여태까지 목회를 해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신학전문 도서관은 우리들이 이번 당회에서 한동안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신학전문 도서관을 하게 되면 저는 너무 좋은데 교회가 부담을 져야합니다. 직원들을 뽑아야 하는 문제도 있고, 책을 계속 사야 하는 문제도 있고, 지금 당장 문제로 대두된 것은 책을 더 들여올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앞길을 아마 당회에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진지하게 의논하면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 여태까지 왔냐?’라고 질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니고 원래 우리들이 저 도서관을 할 때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신학교, 그것도 CRTS와 묶으면서 학교를 하고 싶었는데 교회에 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예상하지 못했던 약 100억 원 정도가 투입되게 되었습니다. 화재 이후 빌딩 2개를 구입하면서 교회가 많은 부채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것이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당회에서 의논을 하면 무슨 길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고, 또 어떻게 하든지 의미 있는 사역을 해서 한국교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도서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제가 또 계속 죽을 때까지 글을 써야 하니까 등등을 (생각하면 전문도서관을 개관)하고 싶은데 의논을 더해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질문2) 해외신학교(중국)의 이후 향방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답변) 너무 좋은 질문인데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제 이야기를 듣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뭐가 있느냐하면 교회에서 다 합의를 해서 CRTS와 WRTS를 세웠습니다. WRTS는 W는 West, C는 Central입니다. CRTS는 무안에 있고 WRTS는 알다시피 성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CRTS를 설립할 때부터 애써왔던 김조이, 안드레 선교사를 WRTS로 보내고 CRTS는 김성진 교수가 와서 잠시 학장을 맡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당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거의 중점적으로 당회에서 밀어붙여서 결국은 WRTS를 교회에서 손을 떼게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의 생사를 걸 정도로 장로들과 싸워야할 일이 아니라 여겼고, 몇 번이고 수없이 이야기를 했지만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 접었습니다. 그래서 WRTS는 열린교회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열린 교회에서 설립하고 손을 뗀 것입니다. 손을 뗀 대신에 안드레, 김조이 선교사를 그쪽으로 이미 보냈지만 보냈고, 한 달에 천불정도씩 학교에 지원해서 쓰도록 한 것으로 하고 끝났습니다.
그 후로 제가 실질적으로 WRTS에 간적도 별로 없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안드레, 김조이 선교사도 추방이 되었습니다. 지금 WRTS의 현황을 어떻게 되느냐하면 아주 잘되고 있습니다. CRTS 출신의 왕깡이라는 학생이 거기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두 분을 도와서 일을 했는데, 두 분이 나오면서 그 목사가 실질적이고 전체적으로 장악하면서 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빼니까 여기는 대학원생들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나온 목회자들을 모아서 신학대학교육을 시키는 그런 과정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와서 공부를 하는데 우리가 손을 떼고 나니 전체적으로 굉장히 어렵다보니까 자기네들이 이 학교를 살려야겠다는 방향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이사회도 구성되고 교회들이 협력해서 학교를 꾸려나가고 있고 일부는 우리가 여태까지 계속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지원비가 WRTS로 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안드레, 김조이 선교사는 거기서 손을 떼었고, 기도하다가 라오스 사역으로 가려고 하는 가운데 있구요, 그래도 원격 조종은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WRTS에 대한 지원계획은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없습니다. 교회에 알다시피 여력이 없습니다. 부채를 갚고 이자를 내고, 물론 이자는 여기에 들어오는 월세로 본전치기가 되고 있지만 어쨌든 갚아야 하고, 사역을 펼쳐나가야 하는 점에서 WRTS에 대한 새로운 지원은 지금으로는 계획이 없습니다. 그 대신 WRTS를 졸업한 학생들이 CRTS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CRTS는 지금 중국 현지에서 모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교회도 파괴하는 상황이니까 모일 수 없습니다. 제가 입국 금지자가 되어 블랙리스트에 올랐는데 제 자신이 중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업을 이제 중국에서 못하고 중국 밖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굉장히 거부반응이 있었는데, 자기네 선교사인 양연식 선교사 부부가 추방되고, 원장인 내가 입국금지가 되는 것을 보면서 현실적으로 와 닿았는지 (지금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러는 동안에 공안이 와서 결국 CRTS 캠퍼스를 폐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CRTS 학생들은 지금 중국 밖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신입생 모집이었습니다. 이렇게 학생들이 최소한 3번을 외국에 나와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 학생들이 안모이면 어떻게 할까 싶었습니다. 몇 년 동안 일시적으로 학교 문을 닫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별생각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이 새로운 좋은 학생들을 보내주셔서 불리한 여건에도 계속해서 학교를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현실적으로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학기를 해야 하는데 6주를 하니까 최소한 3번은 출국해야 합니다. 인접국가의 어느 곳에 신학교를 세우면 너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미얀마가 붙어있어서 오면 좋을 텐데 그것이 안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래도 출국을 해야 하고 그 출국 기록이 전부 다 개인에게 남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세우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너희들이 왜 똑같은 기간에 항상 태국만 가느냐?’ 이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집단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컴퓨터에 다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학기를 할 때에 관광지를 중심으로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관광지 가운데 제주도도 항상 못하는 것이 너무 자주 하면 ‘무슨 관광을 매년 제주도로 가느냐?’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공안에서 이미 발각되어서 출국금지 조치를 당한 목회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피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인접국가에 중국인 왕래가 쉬운 신학교를 세운다는 것은 일단 중국이 이 문제에 대해서 풀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게하고 모일 수 있게끔 하는 것에 대한 완화된 조치가 있고난 후에야 검토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답이 되었습니까?
질문3) WRTS와 CRTS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십시오.
답변) 우선 WRTS는 우리 학교가 아니니까 여기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CRTS는 현재 입학자격이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돈독한 사람을 시험을 봐서 뽑습니다. 1년에 들어오는 인원은 적으면 11명, 많으면 17명씩 들어왔고, 2008년부터 들어와서 올해가 2019년이니까 11년이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들어와서 임신하고 아이를 가져서 떠나거나 혹은 외국에 이주하거나 해서 낙오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학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따지면 제가 보기에는 130명 정도 입학했는데 실제로 학교를 끝까지 졸업한 사람은 M.div. 3년을 모두 졸업한 사람이 79명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대학을 나오고 3년의 M.div.(우리교회의 전도사님들이 다니는 학교를 이야기합니다)를 마치고 나면 그 위에 더 전문적으로 분야별로 공부하는 Th.M.(Master of Theology)이 있습니다. 거기부터는 진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 과정이 2년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열어서 6년 정도 되었습니다. 거기는 학생들이 매년 적으면 4명, 많으면 14명씩 들어왔고 한해에 한 번씩 뽑지를 못하고 격년제로 뽑았습니다. 왜냐하면 4명이 들어오면 4명을 가르치기 위해서 한 과목당 교수 한분이 들어가셔서 3일 동안 체류하면서 4명의 학생들에게 가르쳐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년 뽑지 못하고 격년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공을 원래는 A, B, C, D로 많이 해서 뽑는데 우리는 그렇게 큰 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실천신학, 성경 신학, 조직신학 이런 식으로 해서 2년에 한 번씩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꽤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현재 Th.M.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들이 35명 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들이 이미 공부를 끝내고 아직 논문만 준비 중인 사람들이 있고, 지금 학기 중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4학기를 공부하고 논문을 쓰고 심사를 받음으로써, 혹은 졸업시험을 보고 끝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학생들이 3년을 공부한 다음에 이것 가지고 안되겠다고 하고 우리가 2년을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추세로 가고 있습니다.
올해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2019년 12월에 학생을 모집하는데 지금 M.div. 학생들은 잠재적인 지원자들이 15명이 되고, Th.M.은 잠재적인 사람들이 지금 14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CRTS가 처음으로 졸업한 사람이 모두 마카오로 모이게 되었는데 79명의 학생 중에 59명이 모였습니다. 며칠씩 기차를 타고 왔는데도 특강을 듣고 기쁨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매년 우리가 그렇게 동문회로 모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책들을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중국 땅덩어리가 워낙 넓으니까 59명의 졸업생이라도 어디에 흩어졌는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같은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하던 이 사람들이 사역하고 있는데 (이렇게 모여서 서로) 공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다시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너희들이 계속 공부를 해야지만 좋은 목사가 될 수 있다’고 강의했더니 이번에 Th.M. 입학원서가 20장이 나왔습니다. 몇 명이나 응시할지 모르지만 절반만 응시한다고 하더라고 올해 24명이 들어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Th.M. 학생들이 M.div. 학생보다 많아지는 현상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우리들이 같은 과목을 한 교수님에게 맡길 수 없고 동일한 과목을 두 교수님을 모셔가야 하는 불편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굉장히 성황리에 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향후 비전은 우리들이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중국 노회를 세웠습니다. 쉽게 말하면 교단을 세운 것입니다. 중국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은 조직을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중국으로 들어가면, (블랙리스트를) 무릅쓰고 들어가면 체포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구속될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그 자리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교단을 세우는 것은 반 국가단체의 수준으로 보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정말로 신학을 배우고 나니까 아무데 가서 안수를 받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교수님들과 목사님들, 그리고 장로님 몇 분이 교단을 만들었고 제가 교단장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우리들이 9명 정도 되는 학생들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목사들이 나왔고 강도사, 전도사까지 시험을 보고 라이선스를 받는 체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졸업생들이 배출될 예정이니까 안수는 계속해서 가을노회마다 받게 될 것입니다. 많이 받을 때는 7명, 적게 받을 때는 2명-3명 정도 되지만 지금 9명이 조금 넘을 것입니다. 첫 해에 6명이 받고, 그 다음 해에 4명이 받고, 그 다음 해에 2명이 받아서 12명에게 안수를 주었습니다. 매년 그렇게 나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주 훌륭한 교단이 됩니다.
그런데 애로사항을 말씀드리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런 목회를 본적도 없고 노회를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겨서 자기네끼리 다툼이 일어나거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면 제가 가서 조정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될 좀 불편한 상황을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저의 시간을 많이 빼앗아 가겠지요. 그래도 가까우니까 홍콩으로 나오라고 해서 만나서 조정을 잘 해서 은혜롭게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퀴즈를 낼 테니 알아맞혀 보십시오. 59명의 학생들이 흩어졌는데 그 밑에 몇 명의 성도들이 모일 것 같습니까? 지금 졸업을 하고 3년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400명씩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10개로 쪼갰습니다. 핍박을 받아서 신학교가 문을 닫을 상황이 되었는데 하나 있던 교회를 10개로 쪼갠 것입니다. 목회자가 몇 명이 필요합니까? 9명이 더 필요하니까 사람들이 신실한 구역장들 모아서 신학교를 보내고 그럽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 학교는 그야말로 대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중박이 났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매순간 신기하게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로 말하면 교구사역을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교회를 개척해서 100명, 200명, 300명, 400명까지 되는 목회자들도 있고, 또 선교사로 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확실한 것 하나는 현재도 CRTS 졸업생들이 돌보고 있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아래에서 목양을 받고 돌봄을 받고 있습니다. 100명씩만 잡아도 79명의 졸업생이 목양하는 사람들은 7900명이 됩니다. 놀고 있는 학생들이 한두 명 있을지 모르는데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비전은 그 학교의 교단이 점점 커져서 교단이 자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돌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짧으면 10년 정도, 길면 15년 정도 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습니까?
질문4) 은퇴 전까지 열린교회의 사역은 어떻게 보십니까?
답변) 열린 교회가 지난번 당회의 사태가 진정되고 당회가 복귀하면서 사실은 저 문제를 토론했습니다. 상당히 깊이 연구를 했고 이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는 제가 은퇴할 때까지 17년이 남았었는데 지금은 7년 정도 남았습니다. 제가 은퇴 이야기를 잘 안합니다. 이유는 은퇴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꾸 이야기를 하면 김이 샙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자꾸 은퇴 이야기를 하면 날 쳐다볼 때마다 ‘저 목사님은 언제까지 하려나?’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은 교회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산발적으로 흩어졌던 사역들을 모아서 잘 정리한 것이 앞으로도 가야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는 철저한 목양사역입니다. 그 다음에 전도사역인데 전도사역 속에는 국내아웃리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해외선교사역이 있습니다. 그 다음 신학교사역은 CRTS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니까 어떻게든 신학교를 돕자고 하는데 사실은 1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돕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재정이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연구사역이 있는데 연구사역도 엄청나게 많이 축소되고 직원들도 많이 축소되고 지금 현재 네 명밖에 없는데 한명이 더 나가면 세 명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교재를 만들고 들어오는 책들을 정리하고 그런 정도이지 솔직히 10년 전처럼 왕성하게 연구를 해서 엄청난 인력을 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제가 건강의 위협을 받으면서 힘든 시간을 지냈는데 그래도 게으르지 않게 계속 연구를 했으니까 책도 나오고, 논문도 나오고, 학교에 기여도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리는 것은 어렵겠지만 그렇게 한 6가지 정도로 압축해서 가지 않을까 합니다. 그중에 목양사역을 그만두겠습니까? 전도사역을 그만두겠습니까? 그러진 않습니다. 그 대신 새로운 사업을 다시 펼치는 것에 대해서는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부르심이 있다면 할 수 있겠지만 될 수 있으면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지금은 뿌려진 것들을 잘 거두고 그럴 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되셨습니까?
질문5) 은퇴 후 후계자에 대한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2020년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이것은 당회에서도 안한 이야기인데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제가 어느 날 ‘이번 연말에 물러나겠습니다.’ 그러지는 않겠습니다. 옛날에는 제가 그러고 싶었는데 그러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하나님이 많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발동을 걸고 나서 마지막에 좋은 후계자가 나와서 물려줄 때까지 아무리 머릿속에서 계산해도 최소한 5년이 걸립니다. 아주 빨라도 5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입니다. 발동 걸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발동이 걸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제 향후 교회에 대한 비전은 2020년에 특별한 비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년 한해에는 특별한 비전이랄 것은 없지만 늘 하던 이야기지만 이것을 힘써야겠더라고 내세웠던 것이 교회 안에 미끄러진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올해가 아니라 작년 말부터 청년으로부터 시작해서 영적침체회복 세미나를 계속해서 지금 여러분이 끝나면 1년 동안 이끌어온 셈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고 내년에도 제 마음을 가장 사로잡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제가 미끄러진 사람들을 설교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렇게 돌봐서 그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년에도 계속되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5년 정도 걸리니까 그것도 장로님들과 의논해서 적당한 시점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기도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그 후에 나와 열린 교회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해서도 저는 아무 욕심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무엇인가 많은 생각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정말 안 하는데 여기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들을 이끌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해야 할 문제이고 그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6)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에 염두에 두는 바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인생에 있어서 결정을 내리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의심할 수 없게끔 이미 알려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기도하면서 거짓말을 해도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그런 응답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면 쓸모없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내 인생의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에 이것이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이 있는가 하는 것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제일 중요할 것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무엇이냐 하면 설령 성경이 가부를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아서 비록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한번 적극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정말 기쁘게 하는 일일까를 염두에 두면 결정이 훨씬 빠릅니다. 토레이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했던 것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유행했습니다.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 유행과 상관없지만 말입니다. 1970년대의 일이었는데 집을 짓고 지하실에 바(bar)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집을 가보니까 실은 가보려고해서 간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런 집을 샀습니다. 교육관이라고 해서 가보니까 까만 타일이 깔렸는데 상스러운 것이 아니라 잘 꾸몄습니다. 저쪽에 바텐더 같이 술을 따라 마실 수 있고 오디오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그런 것이 유행했습니다. 그것을 틀어놓고 이웃들이 먹고 같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춤에 굉장히 익숙한 사람들이라 괜찮은데 문제는 춤의 종류가 문제인데 남녀가 신체를 밀착하면서 추는 춤들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에 뭐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레이 목사님이 아주 중요한 결정의 원리를 도입했습니다. 자기는 그것에 반대한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댄스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지만 더구나 신약성경이 이웃집 사람을 불러서 남녀를 바꾸어가면서 춤을 추는 것이 나쁘다고까지는 하지 않지만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젊은 남녀들이 파트너를 바꾸어서 신체적으로 밀착된 춤을 추고, 불빛 아래에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을 그려보면 기쁨이 될 수 있겠느냐는 화두를 던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 원칙을 적용해도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해야 하는데 벤처다임 지하를 얻어서 설렁탕집을 낼 것인, 아니면 삼부포리마 빌딩을 얻어서 구내식당의 뒤를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기뻐하고 말고를 이야기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하는데 조심해야 할 것은 인간의 마음이 욕심을 버리고 맑으면 하나님의 뜻이 의심할 수 없이 명료하게 비취지만 그것을 일단 갖고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면, 잔잔한 호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찍은 사진이 있는데 바람 한 점 없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수면 위의 풍경과 수면에 비친 풍경은 정확한 데칼코마니가 됩니다. 두 개가 찍어서 복사한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요만한 바람이 불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기도하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어떤 것을 이루어 달라고 매달리는 기도도 훌륭하지만 (자신의 마음의 상태가 욕망으로부터 멀어져 명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짜 설렁탕집을 하면 돈을 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렁탕집 조건이 너무 좋습니다. 인수금도 필요 없다고 하고, 고정고객도 있고 등등 조건이 너무 좋아서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쪽으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하고 중심을 쏟아서 간절히 기도하면 놀랍게 욕망이 사라지며 마음이 맑은 호수처럼 됩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무엇을, 어느 것을 더 기뻐하시는지 확신이 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처음 하고 싶었던 그 일이, 그렇게 열렬하게 기도하게 했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점점 싫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처음에는 진짜 별로였는데 기도할수록 마음의 열망이 생기고 그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과 자기가 하고 싶은 마음이 일치합니다. 그것이 응답입니다. 되었습니까? 명쾌합니까?
질문7) 육신이 지쳐서 사역을 계속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변) 그것을 말씀하시면서 계속 웃고 있는 게 본인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에너지가 넘치는 것이 있습니까? 조금 일을 줄이십시오. 그런데 본인이 너무 잘 압니다. 결국은 육신이 너무 연약하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아프기 전까지는 못하는 모든 일은 정신력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 썼던 이야기가 ‘이차돈을 보아라. 머리가 잘리고도 2미터인가 3미터를 걸어갔다고 하는데 그를 보라. 결국 정신력이 문제가 아니냐?’ 라고 했는데 제가 겪어보니까 정신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육체의 문제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지탱할 수 없으면 사역을 조금 줄이십시오. 그 대신 휴식과 나태의 경계는 누구도 나는 구별했노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육체의 힘이 닿지 않는데 모든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모두 내려놓지 마시고 그중에서 제일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하나님이 나를 많이 사용하시는 일에 포커스를 맞추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모두 사역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휴식도 중요하지만 치료와 영양의 공급, 운동 그런 것들을 잘 병행하셔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지나가는 이 골짜기를 우리 모두가 한 번씩 지나고 있습니다.
질문8) 세상을 살면서 편법을 자행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답변) 찬양 한 곡 부르겠습니다. “이곳 어둔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살아가면서 완벽하게 거짓말을 안 하는 것은 아마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해를 당하거나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그런 부분에서 주저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신학적인 견해가 있는데 어쨌든 거기까지 가면 너무 기니까 생략하고, (집사님처럼 해서) 분양권을 얻어야 되겠습니까?
이런 경우에는 또 어떻습니까? 직원이 퇴사를 하는데 ‘목사님! 저를 좀 잘린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럽니다. 그러면 무엇이 나옵니까? 실업급여가 나옵니다. 그 돈이 꽤 됩니다. 6개월인가 나옵니다. 보십시오. 그것은 써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써주었겠습니까? 안 해주었겠습니까? 제 기준은 명확합니다. ‘팩트가 아니지 않니?’ 그리고 안 해줍니다. 직원들 중에는 교회에서 부서가 없어져서 자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팩트니까 100% 해줍니다. 그런데 자기가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사표를 냈는데 잘린 것으로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중직자들입니다. 우리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울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전라도에 할머니 집에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그것이 합리화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렇게 하지 않아도 집이 필요하면 집을 주실 것이고 차액을 얻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알고계실 것입니다. 이 교회를 살 때의 비화를 알고계실 것입니다. 36억 달라는 땅을 39억에 계약한 교회입니다. 왜? 6억 비자금 달라는 것을 못하겠다고 하고 3억을 더 주었는데 은행에서 빚내서 3억을 더 주었습니다. 그때는 은행이 교회에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의 이자를 준다고 해서 상호신용금고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이 엄청난 이자를 주고 3억 원을 빚을 내서 주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입니다. 저는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그런 것을 하나도 안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그런 점에 있어서 교회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셔도 좋습니다.
여기 보이는 이것은 방송기계입니다. 방송기계는 천만 원은 우습습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것이 없지만 심지어 유니트 하나에 오천만원 육천만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마이크에 대고 여기서 하는데 강대에 모니터가 두 개가 있습니다. 마이크가 있습니다. 이것은 앰프가 따로 움직입니다. 설교자인 제가 무지하게 예민합니다. 너무 예민합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무거운 짐입니다. 다른 사람은 넘어가는데 저는 못 견디게 힘듭니다. 누가 옛날에 교회를 나가면서 그랬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으세요.’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목사한테 그렇게 말하는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십시오. 제가 너무 힘들어서 이것 좀 편안하게 설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꿔달라고 했더니 삼천만원입니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이것이 이천만원짜리 기계인데 교회가 이것을 사고 싶어서 업자에게 ‘이것은 얼마입니까?’ ‘이천만원입니다.’ ‘우리가 구입하겠습니다.’ ‘그러면 물건 먼저 보내드릴 테니 돈을 보내세요.’ 물건이 왔습니다. 검수를 하고 이천만원을 이쪽 계좌에 보냅니다. 돈을 보내니까 보통 영수증을 주는 것입니다. ‘사장님 우리 이것은 안 되고 우리는 세무영수증(세금계산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2,250만원을 내십시오.’ 부가세 200만원에 소득세가 들어가니까 많이 달라고 하면 2,300만원, 적으면 2,250만원을 달라고 합니다. 세무서에서 와서 보는 것도 아닙니다. 세무서에서 교회에 와서 뒤지지도 않습니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우리끼리 하는 장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직하게 세금을 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것을 2,250만원을 주고 삽니다. 그렇게 주고 산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맨 처음에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 2002년도 여기에 와서 세금을 내면서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2,000만 원짜리, 3,000만 원짜리 물건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정직하게 하는 것은 직원들이 떨려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돈이 너무 없을 때니까 말입니다. 담임목사가 빚을 내어서 직원들 월급을 줄 정도로 돈이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솔직히 그 후로 2, 3년 동안은 큰 물건에 대해서 그렇게 못한 적도 있었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약 15년 전부터는 어느 날 선언을 했습니다. ‘교회까지 이러면 희망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무조사를 받든 말든 그것과 상관없이 나중에 당국에서 세무조사 하러 와도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게 하자.’ 그래서 우리는 No Receipt, No Payment입니다. 법적인 영수증이 없는 지출은 없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약할 수 있다는 말이 웃기지만 10년 전만 해도 훨씬 너그러웠습니다. 오히려 나는 손봉호 교수님이 직접 강의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교회는 굳이 그런 영수증이 아니어도 누가 가져갔다 어디에 썼다는 것만 정확하게 영수증으로 근거를 붙이면 된다.’ 한국의 양심이라는 분이 그렇게까지 강의할 정도로 이해를 하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그때부터도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지금 세금을 내기 시작한 것이 -직원들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교역자들이 세금을 내기 시작한 것이 15년 전쯤 되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금액은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그때 당시로 교역자 급여수준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옛날에는 그래도 많이 주는 편이었는데 결코 적지 않은 수입이었는데 이 부목사집 아이들이 유치원을 공짜로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세무당국에 신고가 되지 않으니까 아빠가 수입이 없는 것으로 나오니까 그렇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그것은 아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냐? 당신 때문에 당신보다 가난한집 아이들 2명이 지금 못 들어간 것 아니냐?’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해부터 세금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회계담당직원이 세무서에 가서 우리교회는 세금을 내겠다고 하니까 짜증을 내면서 교회는 안내도 되는데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하느냐고 하는데 우리는 내겠다고 하니까 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고 해서 우리가 세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첫해에 교역자에게서 걷어서 갖다 준 세금이 6,800만원이었습니다. 교역자들의 소득이 감소했습니다. 그래서 그해에 세금만큼 봉급을 올려주었습니다. 본전치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태까지 온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위장전입 하시면 안 됩니다. 위장전입보다 가벼운 것도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사업을 잘하거나 해서 돈을 잘 벌도록 기도를 하시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권사님을 보고 복을 주셔서 넉넉히 집 한 채 사줄 정도로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핵심적인 질문만 합시다.
질문9) 개선되지도 않는 매일 되풀이되는 회개기도에 질력이 납니다. 삶과 동떨어진 믿음이란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답변) 마음이 거칠어서 돌짝밭과 같고 가시덤불과 같은데 무엇을 하면 그 마음이 옥토가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그 읽는 행위가 내 마음을 옥토로 만듭니까? 무슨 행동을 하면 거친 마음이 옥토가 됩니까? 그것을 경험하셨습니까? 무엇을 하니까 옥토가 되었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고쳐달라고 드리는 기도가 잘못된 기도입니까? ‘내 마음을 옥토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라든지 ‘나로 하여금 이렇게 위장전입으로 분양을 받으려고 하는 이 유혹을 나도 떨칠 수 없는데 떨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답을 하겠습니다. 우선 윗부분을 보면 ‘개선할 의지도 없이 형식적으로 늘 되풀이하는 회개기도’라고 했는데, 이 말은 모순입니다. 개선할 의지도 없이 형식을 따라 하는 그 기도는 회개기도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회개의 흉내를 내고 있지만 자신은 하나님 앞에 변화되려고 하는 마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또 한 번 거짓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이 아닌 것은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을 행하는 것이냐고 묻는데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문제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시리즈에 들어가면 사람이 은혜를 떠나서 죄의 지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일어나는 징후들이 여러 개 나타나는데 그중에 무엇이냐 하면 지킬 수 없는 수많은 약속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제가 이제는 매일매일 성경도 읽고 매일 매일 기도회도 나오고 가족들에게 잘해주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는 진심이었는데 이미 이 마음속에 은혜가 사라지고 죄가 큰 힘으로 나를 지배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 속에서 진실하게 대답을 했는데 이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수없이 남발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할 수 없는 헌신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말이냐 하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라 말할 때에는 진짜 자신의 생각으로 진심을 말했습니다. 진짜 기도하고 싶고, 말씀 읽고 싶고 무엇도 하고 싶고, 무엇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냐 하면 여기까지는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이 마음의 구조가 그렇게 살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술에 인이 박혀서 알코올중독이 된 사람이 술을 먹고 큰 실수를 한 다음에 술병을 부수면서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사람새끼가 아니다.’ 그렇게 사람들 앞에 선언을 합니다. 진심입니까? 거짓입니까? 진심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 있는 알코올을 좋아하는 성향이 그 약속을 못 지키게 합니다. 그러면 첫 번째 답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핵심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믿음이란 또는 믿음의 삶이란 지식적으로 알게 된 믿음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거나 정신적으로 내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에 ‘그렇다고 해서 믿음은 비록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고 해도 그냥 여기에만 머물러만 있고 행동으로써는 계명을 지키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믿음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것도 믿음이 아닌데 그러면 도대체 이 괴리감은 어디서 오느냐는 말씀인데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우리들이 믿음이라고 할 때는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세 가지 요소가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첫째는 그 지식의 내용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찬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세 가지 중 하나만 있으면 믿음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첫째는 내용에 대한 ‘찬동’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는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그것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지식적으로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감정적으로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의지’입니다. 예를 들면 중국에 한번 갔더니 줄 위로 오토바이가 간답니다. 뻥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갔더니 300미터 정도 솟아있는 좁은 협곡인데 가운데는 수십 미터짜리 물이 흐릅니다. 양쪽에는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데 진짜 여기에 줄을 매달아 놓고 오토바이가 소리를 내면서 거기를 가는 것입니다. 둥그런 와이어를 놓고 팽팽하게 당긴 그 위를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것을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마술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봤습니다. 저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이 많으니까 비록 높이 떠있지만 자세히 보았습니다. 망원경은 없었으나 자세히 보니까 무엇으로 해놓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와이어하고 이 바퀴하고 떨어지지 않게 고정을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의문스러운 것이 어떻게 이 오토바이를 꺾이지 않게 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이 고글도 쓰고 거기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과학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 줄 위로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300미터 높이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이 아니라 수십 번 반복되는 것을 집사님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줄 위를 오토바이가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동의를 합니까? 안합니까? 동의합니다. 그 다음에 저 사람은 이번에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신뢰를 합니까? 안합니까? 몇 년을 탔으니 신뢰를 합니다. 세 번째로 그런데 집사님이 뒤에 타라고 하면 타시겠습니까? 안타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1번만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가 없으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믿는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동의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신뢰하고 두 번째는 그것이 너무 확실하니까 나 자신의 행동을 혹은 삶을 혹은 결정을 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실 우리는 믿음이 있는데 행함하고 분리된다고 자꾸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어서 지난 주에 명쾌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사실은 믿음이 아닌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믿음처럼 보이고 자꾸 믿음으로 분류를 하니까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동의, 신뢰, 의지입니다. 마지막에 거기에 자신의 삶을 얹을 수 있어야지만 믿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진짜로 믿는다고 하면 수년 동안 타고 간 것을 올 때마다 용경협에서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서 지적인 동의가 분명히 된 것입니다. 의심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신뢰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이 몇 년째 다니는데 오늘 아침에는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뢰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 뒤에 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믿는다면 자신이 뒤에 탈수 있어야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이 고장 난 것입니다. 마음이 고장 날 때는 믿음도 고장 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할 때는 세 가지 다 됩니다. 그래서 2번에서 멈추지 않고 다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식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식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위장전입을 안하고 어떻게 분양을 받을 수가 있어? 권사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드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굳어지고 세 번째 요소에 자기를 얹을 수 있는 용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마음이 고장 난 것입니다. 마음이 고장 날 때는 당연히 믿음이 고장 나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할 때에는 세 가지가 다 됩니다. 그래서 2번에서 멈추지 않고 다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식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식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위장전입을 안하고 어떻게 분양을 받을 수가 있어.’ 지금 권사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이 굳어지고 세 번째 요소에 자기를 얹을 수 있는 용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충만한 믿음이 아닙니다. 충만한 믿음은 그것을 다 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충만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없는 것이라고 성경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믿음을 마음을 나눕니다.
길가에 떨어진 것 이것은 완전히 전혀 말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마음이고 그 다음에 돌짝밭에 떨어진 것은 약간 영향을 받는 마음이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그것보다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인데 결국 신학적으로는 앞에 나오는 세 가지 마음은 전부 구원받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열매를 맺는 마음이 구원을 받는 마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열매가 풍성하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 하나의 팩트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국면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기쁨으로 잠깐 받았다고 해서 그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근본적으로 그 사람을 변화시켜서 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다른 삶을 살도록 만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죄에 영향을 받고 시험에 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의 성화의 과정의 문제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내면에서 믿음이 출렁거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양심의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저렇게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데, 떠나고 나서 눈앞에 이익이 펼쳐지면 그런 생각은 간데없고 그런 이익을 붙잡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런 갈등은 넓게 보면 불신자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신자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해서 자신의 삶을 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령 충만합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다 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진짜 알고 싶습니다. 진리를 알고 싶고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싶고 자신의 삶을 거기에 얹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진리가 아닌 확실한 것에 자신의 삶을 얹기보다는 진리이면서 아직 눈앞에 증거가 보이지 않는 것에 자신의 삶을 얹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결코 행위와 믿음 자체가 그런 식으로 쪼개지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10) 기성교회에서 참여하는 태극기 부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태극기 부대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 왔습니다. 끝나고 나서 저하고 밥을 먹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해요. 제가 어떻게 대답했겠습니까? ‘목사님하고 정치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밥이나 먹읍시다.’ 그랬습니다. ‘왜 나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밥 드세요.’ 그리고 기분 좋게 헤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좌파인 것 같습니까? 우파인 것 같습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어느 쪽입니까? 사람들이 저를 향해서 진보 측이라고 말을 합니까? 설교에 비추어볼 때 그렇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교회를 여러 가지 허가를 내주고 건축을 하게끔 열심히 도와주었던 한 시장이 잠깐 와서 인사하겠다고 해도 안 된다고 딱 자른 사람입니다. 이석현 국회 부의장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네’ ‘제가 예배에 참석하겠습니다.’ ‘인사는 시켜드릴 수 없습니다. 양해하십시오.’ ‘그냥 잠깐만 일어나서 교인들에게 말 안하고 인사하면 안 되겠습니까?’ ‘어쨌든 예배에 참석하시는 것은 자유인데 우리는 안 됩니다.’ 진짜 왔습니다. 비서를 대동하고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소개도 못하겠고 안하자니 저 사람을 다시는 안보겠다는 것이고 잘못하면 내가 우파로 오해를 받을 상황입니다. 그 광경을 기억하십니까? 글자 하나도 틀리지 않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자, 오늘 한번 열린 교회에 처음 오신 분 손들어 보십시오.’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일어나보십시오.’ 일어납니다. ‘이석현 의원도 오셨고 박수로 환영합시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뜻대로 교인들에게 인사를 했는데 혼자 인사한 것이 아니라 그날 새로 온 모든 사람들과 인사했습니다. 제 설교를 듣고 좌파라고 생각하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태극기 부대에 헌금하는 사람도 있고 박대통령의 복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저에 대해 기본적으로 아까 성령파라고 이야기했는데 너무 고마운 이야기지만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정치의 이념이 왜 없겠습니까? 당연히 선거할 때에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가 밝힐 의무가 있습니까? 내가 여태까지 누구를 어떻게 투표해왔는지 알면 의외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마십시오. 혹시 구역에서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정치이야기 하지 맙시다.’ ‘가이드를 주어야하지 않습니까?’ 어느 쪽으로 가이드를 줄까요? 광화문으로 가라고 할까요? 대법원으로 가라고 할까요? 어느 쪽으로 주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목사인 제가 하면 안 되는 것은 구역장인 여러분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왜 합니까? 자기가 가고 싶으면 조용히 두 군데 중에 하나 선택해서 4호선, 1호선을 타고 가든지 아니면 3호선을 타고 가든지 2호선을 타고 가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런데 갔다 왔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하려 합니까?
여러분들이 돌보고 있는 양떼들 중에는 그냥 골수까지 태극기부대인 사람들이 있고, 골수까지 남북끼리 해야 하고 미군은 당장 철수해야한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양쪽 이야기가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가 흘러가면 둘 다 그것이 절대적인 신념이라고 이야기했던 사람들이 다 부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박쥐처럼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할 일없이 뭐가 무서워서 박쥐노릇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요즘은 잘 하지 않는데 한참 사회비판을 많이 했던 때가 아마 팔복설교 할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삼성에서 일어났던 반도체 백혈병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전모를 다 살폈습니다. 저는 진짜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재벌해체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면 재벌 지지주의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자유로운 민주주의 경쟁사회에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다만 재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이 비윤리적이고 엄청난 세태에 대해서는 재벌을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관념과 양심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한일관계 위안부 문제도 자꾸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고 하는데 한국과 일본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강점했던 사람들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보면서 그것을 나라의 대결구도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나라와 일본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일이 어느 나라에 의해서 자행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을 훼손하는 일이고 분노해야 될 일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학살과 이런 것들에 대해서 깊이 참회해야 합니다. 저는 베트남에 가서 참회를 했습니다. 베트남에서 선교사집회를 했는데 나는 몰랐습니다. 예정에 없었는데 베트남기독교연맹의 대표단들이 와서 선교사 인사를 시켜주면서 그때 진짜 가난할 때였습니다. 그때 선교사들의 이름으로 보조를 해주었습니다. 200달러였습니다. 선교사를 불렀습니다. 물론 만났지만 내가 공식적으로 이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통역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먼저 내 소개를 하고 ‘내가 대표성은 없지만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여러분들 앞에 깊이 사죄합니다.’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40년 전에 아무 상관도 없는 나라가 너희 나라에 와서 자유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독재정권을 위해서 싸우고 수많은 양민들을 학생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서 한국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용서를 빈다.’고 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좋습니다.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는데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 나중에 ‘당신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 대국기질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파병되었던 모든 사람들이 살인범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 말아야하는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나라라는 것은 그 당시로써는 정치적으로 보나 군사적으로 보나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어쨌든 가서 양민을 학살한 것은 지금 자료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것에 대해서 그리고 더 나쁜 것은 라이 따이한들입니다. 그 나라 여자들이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정조관념이 강했습니다. 한번 남자와 인연을 맺으면 평생 그것을 짊어지고 사는 19세기의 한국여성들과 같았습니다. 수많은 라이따이한이 나왔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가서 바람을 피우고 와서 입을 싹 씻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사원들, 주재원들, 그때 갔던 군인들입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기도했는데 그것을 이야기해봐야 듣는 사람도 없는데, 이런 말을 했더랬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 올 때 라이따이한이나 코피노들에게 우선권을 주면 얼마나 좋으냐? 여기에 와서 아버지를 찾는다고 난리를 칠까봐 걱정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그 당시에 취업만 시켜주었어도 아마 아버지 안 찾는다고 각서를 쓰라면 썼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을 풀어주었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위안부 문제도 그렇습니다. 위안부의 성노예 범죄를 저지른 일본을 단죄하자는 것인데 그것을 인류의 보편적 양심에 호소해서 일본을 무릎 꿇리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릎을 꿇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끝까지 가야한다고 봅니다. 뭐냐 하면 자신들이 한 것도 똑같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쁜 짓 한 것에 대해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월남에서 있었던 것은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자료가 다 있는데 수사도 하지 않고 대충 덮고 넘어갑니다. 마을 하나를 세 살부터 노인까지 싹쓸이 죽인 것입니다. 그것도 당시의 문맥으로 가보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장한 베트콩이 어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애들이 가서 다 정보를 알아내서 가서 전달해주어서 한국 군인들이 몰살당하는 일들이 수없이 겪은 것입니다. 자기 보호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무엇이냐 하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무엇을 했든지 거기에 대해서 인류양심에 기초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떳떳하게 그것에 대해서 누군가 용서를 빌고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런 일들이 있을 때 인류는 ‘전쟁이 나더라도 절대로 성노예를 한다든지 이런 끔찍한 일은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이 밝혀져서 단죄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저하고 개인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을 것이고 밤을 샐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우파나 좌파라고 이야기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진심으로 위하는 진영은 없습니다. 그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나라 전체가 나라이기를 포기하는 상황으로 간다든지 아브라함 카이퍼의 의견에 의하면 돌이킬 수 없이 국가이기를 거절하는 단계로 접어든다면 그때는 국가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국가에 복종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어느 한쪽의 진영에 목사가 확 쏠리고 그 진영을 위하는 사람이 되고 그것이 신앙처럼 될 때에 그것이 진짜 참 목자의 길인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분을 만나면 목사님께 좌파라고 하니까 전혀 동의하지 않더라고 전해주십시오. 동의하지 않습니다.
질문11) 초창기의 열린교회와 지금의 열린교회는 영적인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듯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답변) 권사님은 몇 년도에 오셨습니까? 2003년이시면 방배동 시절은 아니십니다. 평촌시절입니다. 저는 그때 그 시절을 겪은 사람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도 얼마나 못된 교인들이 많았고, 뺀질거리는 교인들이 있었는데요. 물론 예배를 드리다가 은혜를 받고 졸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갈 사람들은 다 갔습니다. 여기 임동빈 집사님도 지하실 교회에 있었는데 그때 부흥이 있었는지 말해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제가 너무 섭섭합니다. (그때에만 부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적인 부흥이 있었습니다.
물론 초창기 시절에 하나님은 저를 그렇게 사용하셨고, 그래서 저는 안 오려면 오지 말라는 마음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래서 교인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반대의 길을 자꾸 갔습니다. 주일예배에 100분씩 설교하고, 또 교회 서비스도 별로 없었습니다. 1999년도에 새가족 공부를 하려면 45,000원어치 교재를 사야했습니다. 그래서 자꾸 연구소에서 나와서 그것이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았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서비스가 좋은 것입니다.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식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하나님이 부흥의 은혜를 주셨지만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해서 부흥의 은혜가 너무 없냐고 하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설교 말고 그때 시절의 설교를 하고 싶으냐고 하면 저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설교가 훨씬 좋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똑같습니까?
기가 막힌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사랑을 합니다. 여기는 20대가 없지만 20대에 사랑합니다. 20대 중반에 사랑에 불이 붙었습니다. 어떻습니까? 폭발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물불을 안 가립니다. 사랑만 있으면 이 사람이 말기 암환자라도 장렬하게 결혼하고, 내가 이 남자를 떠나보내고 산장의 여인이 될지라도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그랬습니다. 저하고 결혼하기 싫어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저와 결혼하기 진짜 싫어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얼굴을 좀 봅니다. 제가 뭐가 있습니까? 제가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아니면 돈이 있습니까? 집안이 빵빵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마음을 만져주셔서 저를 좋아하고 난 다음에 아주 본인이 또렷하게 고백합니다. ‘자기를 사랑해. 만약에 6개월밖에 수명이 안 남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결혼해야겠다고 어젯밤에 생각했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30대쯤 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두 사람은 서로 좀 잽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이제 그 사랑은 (20대와는 달라집니다). 저는 로맨티스트였습니다. 그런데 확 낚아채서 가는 식의 사랑은 아닙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냐 하면 톨스토이가 결혼의 행복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의 연령에 맞게끔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60대쯤 되어서 저도 집사람을 사랑하고 우리 집사람도 진심으로 나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요새도 서로 끌어안고 볼에다 키스도 하지만 20대 처음 만나서 불붙던 그런 식의 사랑의 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유치하고 오글거려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사랑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나이에 맞게끔 사랑이 끊임없이 스타일을 갖추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추는 것이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65세, 70세쯤 되어서는 얼굴을 쳐다보고 있어도 인류애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확 밀려와서 (사랑하게 됩니다). 나는 많이 쳐다보는데 쳐다보라고 하십시오.
저는 솔직히 방배동 시절의 설교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정말 불같이 저를 사용하셔서 무섭게 설교하게 하셨고, 그때로 돌아가서 설교한 1994년도, 1995년도, 1996년도, 1997년도, 1998년도까지 설교를 들어보시면 속도가 지금보다 20% 내지 30% 빠릅니다. 다다다다 거립니다. 원고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철저히 준비하지만 물론 그때도 철저히 준비했지만 지금과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자유롭게 외쳤습니다. 내용이 그래도 나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책으로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압니다. 그러면서 그때는 그렇게 쏟아놓고 지금은 또 이렇게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 60세 중반이 되어가는 저를 보고 12월 중순이 되면 만으로 64세입니다. 그런데 그런 저에게 다시 30대로 돌아가라고 하는데 본인도 못 돌아갑니다. 어차피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와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배동 시절은 그렇게 하나님이 쓰셨고 지금은 지금대로 부흥을 누리고 있으니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조심스럽게 이야기해야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방배동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는 시계추를 20년 전쯤으로 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20년 전에 예배드리던 광경이 생각날 것입니다. 눈물로 기도했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그때도 예배 중에 도망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랬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거기서 시계를 이렇게 돌려서 20년 뒤로 가보십시오. 그것은 예배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십니까? 20년 뒤로 돌리면 언제냐 하면 1978년 정도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으로 시작했습니다. 끝나고 나면 ‘주여’ 로 끝났습니다. 방언기도가 터져 나오고 여기저기서 쓰러졌습니다. 그럼 제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1995년의 우리의 예배는 1978년의 예배에 비해서 죽은 것입니까? I don’t think so.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렇게 예배가 끝나고 나면 단 10분도 기도를 하지 않고 가는 것은 그러면 권장할만한 것이냐 하면, 물론 거기에는 주님을 더 깊이 만나고 흐느끼면서 예배가 끝났는데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남아있고 그러는 것을 너무 바랍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부족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 바뀐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자꾸 이런 것을 입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평면적으로 놓고 그때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1979년도 때에 교회를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1975년도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20년, 20년이 다 살아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1990년도에 드린 우리들의 예배를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사람들은 20년 전에 소위 은혜를 받았다고 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예배를 그렇게 엄청나게 권장할만한 예배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지성적이고, 너무 설교가 길고, 그 다음에 뜨거운 통성기도와 방언이 없다고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많이 감안됩니다. 사람들을 한번 보면 굉장히 조심스러운 통찰이 필요합니다. 뭐냐 하면 요즘 젊은 애들이 좋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20년 전에 하는 것과 우리가 20대일 때에 하는 것과 어떻습니까?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로 다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예배당에 와서 지금처럼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20년 전의 우리처럼 예배가 끝나고 나면 기본으로 휴지가 이렇게 쌓였습니다. 지금도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는 시대에서 자신의 신앙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표현하는 방식들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점도 고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런 것 보셨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특정 윤리적인 문제나 신앙적인 문제가 들어갔는데 단호한 답을 내립니다. 단호박이라고 합니다. 단호하게 답을 내립니다.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무슨 기도하는 것도 못 봤고 특별히 영성을 별로 못 느꼈는데 어떤 면에서 아주 명쾌하게 신앙적인 자기 노선이 또렷하게 딱 정해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신앙의 열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을 우리들이 고려를 하면서 그런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갈망이 없고 부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들이 보셔서 알지만 사람들이 오늘도 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욜로를 외치는데 사실은 그것을 외치는 사람들은 사실 살만한 사람들이 외치는 것입니다. 욜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번밖에 없는 반복될 수 없는 인생이니까 내일을 위해서 피땀을 흘려 저축하는 것도 좋지만 오늘 그것을 쓰는 즐거움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수입이 있는 사람들이 했는데 요즘은 알바 하는 애들도 돈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씁니다. 그것이 우리 집 애들 한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집 애들이 모두 다 그런 풍조 속에서 삽니다. 그러니까 그런 시류를 생각해보면서 마음의 갈망이 없는 것은 너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너무 없습니다. 그것이 제가 가슴아파하며 설교하는 이유입니다. 부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많이 반성해야 합니다.
질문12) 교역자들에게 꺼내기 힘든 조언을 해야 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그렇습니다. 그것이 어려운데 우리 모든 사람들이 겪는 것이지만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교역자와 교회일꾼들과의 관계는 인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섬기는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아주 예민해집니다. 짜증이 납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지 불거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차적으로는 대놓고 내 의견을 다 이야기했을 때 교역자와의 관계가 굉장히 어려워질 정도가 되면 저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우선 교구에 장로님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면서 교역자와 함께 의논하면서 우리의 의견도 괜찮은지 확인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푸시 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가게 해주시면 어떻겠느냐고 부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역자들에게 해야 될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일꾼들이 자유로운 의견을 내도록 하여 정기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마음의 여유를 교역자가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교역자는 사역을 하다보면 일은 많고 시간은 없고 하니까 자기가 결정하고 혹은 몇 사람이 결정한대로 가고 싶지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그것을 다 의견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매번 기대할 수는 없지만 교구에서 장로님들에게 건의를 해서 (의견들을 수합하는 시스템을 한 번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팀장이라든지 중직자들이라든지 다함께 모여서 한 가지 사항 말고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 일 년에 한두 번씩 모두 서로 의견을 내고 전부 다 버무려서 들어줄 수 있는 시스템을 교구 안에 갖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그것은 기억했다가 이번 연말에 교역자 회의로 모임 할 때 이야기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교역자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역자들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생각이 외골수적인 분들은 그렇습니다. 인격적으로 대화를 하면서 찾아가야 합니다. 제가 교역자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교역자를 움직이기는 너무 쉽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돕는 사람이라고 느낄 경우에는 굉장히 마음을 열고 건의가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교역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 팀장인데 구역장 중에서 평소에는 까칠하고 말을 안 듣는 구역장이 어느 날 와서 ‘팀장이 왜 이딴 식으로 팀을 이끌어갑니까? 내가 적어왔는데 한번 보십시오. 이것도 틀렸습니다. 이렇게 좀 하란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마음속에서 수용이 잘 안될 것입니다. 전도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하고 늘 애를 쓰는데 ‘권사님 이것은 제 아이디어인데 이렇게 하면 어떻겠어요?’ 그러면 훨씬 수용성이 높아집니다. 그것을 한건 한건을 가지고 교역자들과 부딪히기보다는 정기적으로 그렇게 한번 다같이 Brain storming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달라고 공식적으로 건의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질문13) 교구별로 금요기도회를 나눈 이유가 있습니까?
답변) 제가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금요기도회를 나눈 것은 저희들이 우연한 계기에 한 것이 아니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우선 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모여서 본당에서 기도할 때에 250명 정도 모였습니다. 지금은 얼마 모이는지 아십니까? 한참 많이 모일 때는 450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러면 모이는 인원이 전부는 아니지만 200명 정도가 금요기도회에 안 나오던 사람들이 나와서 무릎을 꿇고 일단 기도를 한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제가 최근에 한 결정 가운데 아주 잘한 결정 중의 하나가 교구별로 기도회를 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시스템이 달라지면 만족도가 다르고, 또 이것이 채워지고 저것이 안 채워지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전의 체제 하에서는) 교구교역자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분들은 사실은 옵서버(observer)입니다. 한 사람이 기도회를 인도하면 한 사람이 옵서버같이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금요기도회에 나오라고 강조를 해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교구별로 나눠서 기도회를 인도하니 많이 나올 때가 480명, 490명 정도가 나왔는데 거의 갑절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그때에 모였던 것이 좋았던 점이 있다고 하더라고 일단 그렇게 성도들이 많이 모여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마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교구목사님들이 이 금요기도회를 자신이 인도하면서 기도를 훨씬 더 많이 하게 되었고, 엄청난 부담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20분 이상 설교를 못 하게 했는데 그러면서 설교준비도 하면서 이 교구가 내가 이끌어가는 교구라는 소속감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교구별 기도회를 한 달에 한번 혹은 분기별로 오라고 하시는데 매주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사는 삶은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고 2년 전에는 3일에 한 번씩 링거를 맞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5시간씩 링거를 맞아야지만 제가 생활이 가능합니다. 제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구별로 하나씩 돌아가면서 6개 교구를 돌아가면서 내가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그것도 예고하지 않고 나타나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고 싶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 대신 제가 약속은 드릴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분기에 한 번씩 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시스템이 있는 것을 자꾸 흔들어 놓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양보해서 한 것이 고난주간 때 한번 모여서 하고 가을에 한번 모여서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두 번은 세상 없어도 모두 모이는 것입니다. 지난번 봄에 모일 때 한 800명, 900명 모였습니다. 그것은 보통 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담임목사가 매월 첫째 주에 모인다고 하면 아마 그렇게 안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서 당연히 제가 가서 인도하면 부목사들이 하는 것보다 조금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절대적인 것은 없지만 심리적이라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교구별 기도회를 내가 계속해서 흔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구기도회가 안됩니다. 그래서 교역자들 사이에서 분기에 한번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안 된다고 잘랐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목숨을 걸고 이 기도회를 어쨌든 살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가슴에 와 닿지 않을지 모르지만 교역자들이 기도제목을 내면 상당수의 교역자들의 기도제목의 1번에 올라가있는 것이 ‘금요기도회에 기도의 용사를 보내주시옵소서.’ ‘우리교구 100명이 모이기를 원합니다.’ 이런 기도제목으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한데 모아놓고 했더라면 그런 기도제목이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안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하고 그 대신 약속은 드릴 수 없지만 어느 교구에 가서 하고 싶습니다. 저도 어쨌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어느 때에 내가 도저히 기동을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성경공부 모임도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이 많은 복을 주셨고 내년도에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오늘 많은 말씀을 들었고 오늘 시간이 너무 많이 갔습니다. 내일 주일인데 마지막으로 함께 같이 기도함으로써 이 순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수료기념으로……. 하나님이 이제껏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우리가 부르심을 감당하면서 주 앞에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도록 한마음으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질문14) 교회 세습에 대한 입장을 밝혀 주십시오.
답변) 마쳤습니다. 그리고 헤어지려는데 딱 생각나는 게 있는데 누가 세습에 대해서 질문을 하셔서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보면서 우리 교회 근처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세습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인들 중 어떤 사람이 실족할 뻔했다고 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저는 단호하게 반대하고 우리 아들이 목사지만 열린 교회에 올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온 교인이 100% 투표를 해주어도 내가 못 오도록 막을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웨스트민스트에서 공부를 마치고 박사과정으로 가는데 스위니교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전공하고 싶어 했고 저와 스위니 교수는 아주 친한 친구입니다. 제가 형님이지만 친구입니다. 스위니 교수가 저를 너무 좋아합니다. 이번에 오기로 했는데 그분이 학장으로 가시는 바람에 못 오셨는데 아들 일로 제가 전화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이메일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들에게 이번에도 가서 이야기 했습니다. ‘아빠는 널 위해 추천서도 쓰지 않는다. 네 길은 네가 찾아가라. 도와주지 않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추천서도 써주지 않는다. 나는 스펄전 목사가 아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한다. 아빠의 후광도 없지만 주지 않을 것이며, 후광을 입을 생각도 하지 마라.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아빠가 꽃길을 깔아주어도 목회 못한다. 나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한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네 길을 찾아가라.’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는 공개해도 상관없습니다. 기회가 없어서 못했을 뿐이지 전혀 아닙니다. 1%도 아닙니다. ‘혹시 사람의 일은…….’ ‘Never’ ‘그래도 모르지 않습니까?’ ‘결코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내 의지에 반해서 우리 아들을 데리고 온다면 나는 열린 교회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겠습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으니까 염려하지도 않았겠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왜 그 바보 같은 일을 하고 아들을 그 자리에 갖다놓고 아빠가 또 마음을 졸이면서, 아니 30년 넘게 목회를 했는데 또 아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졸이면서 살겠습니까? 그런 그 바보 같은 일을 왜 합니까? ‘너는 벌판에 던져졌다. 30년 전의 나처럼 아무도 나에게 추천서 써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냥 하나님의 인도로 교수가 되었고, 하나님의 인도로 그 좋은 교수직을 사표내고 생활비 1/3도 안주는 교회로 들어왔다. 그리고 교회에 얹혀서 10년을 살았지만 후회는 없다. 너도 광야에 던져졌다. 너는 혼자서 하나님과 단독적인 관계 속에서 너의 갈 길을 찾아가라’ 널리널리 퍼뜨리셔도 상관없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