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다시 살다
(2018 십자가새벽사경회 설교모음)
설교기간|2018년 3월26일-3월29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10월 2일
목 차
1. 약한 자를 살게 하심 (고후 13:4) 2018.3.26 십자가새벽사경회 1
2. 십자가 옆에 있던 사람들 (요 19:25) 2018.3.27 십자가새벽사경회 5
3. 포도주를 거절하라 (마 27:3-4) 2018.3.28 십자가새벽사경회 9
4. 화평을 이룬 십자가 (골 1:20) 2018.3.29 십자가새벽사경회 13
십자가로 다시 살다(2018.03.26. 새벽십자가사경회1)
약한 자를 살게 하심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녹취자: 김세나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많은 책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회개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와서 사도바울이 또 다른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13장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자신이 가면 그때 죄지은 자들과 남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폭력을 사용해서 그들을 제압하겠다든지, 그러한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무엇인가 굴복시킬 만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에게 있었으니까 아마 이렇게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하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자신을 강하게 하는지, 다시 살게 하는지 논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약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어야 했지만, 그러나 형식적으로 보면 큰 권세를 가진 황제 가이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권력의 힘으로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결국 로마의 황제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없이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심문 받으시고 마지막에 처형당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셨을 때 그분은 털 깎는 자 앞에 끌려가는 양과 같았습니다. 조용히 끌려가서 마지막에 죽임을 당할 때까지 무엇인가 항거하거나 저항하는 기색 없이 조용히 죽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 때문에 예수가 자신이 무서워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순순히 굴복하셨던 것은 그들의 폭력이나 억압이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그렇게 어린양처럼 조용히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던 것은 당신이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 지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가실 때 거기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을 구원할까, 예수가 그렇게 이 땅에 있을 때 파도를 잔잔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중풍병자와 문둥병 걸린 사람들까지도 구원하였다면 자신도 또한 구원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실망스럽게도 조용히 십자가를 지고 조용히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다음에 나타났습니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려 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에서 다시 살려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기 전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예수의 몸과는 달랐습니다. 병들고 연약하고 지치는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육신이 되어서 그들 가운데 40일 거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당신이 부활한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보좌 우편에 지금도 앉아 계셔서 살아계셔서 이 모든 세계와 우주를 통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약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려내신 증거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살리사 모든 만물을 그 발 앞에 무릎 꿇어 주라 시인하게 하였느니라”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하나님을 대신해 온 인류와 우주를 통치하게 된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고 다시 사시고 그 능력으로 지금도 이 세계를 다스리시는 이야기를 왜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의 희생으로 죽으시고 다시 하나님이 살리신 공식이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말을 안 듣고 복음을 떠나고 나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세속주의가 들어오고 부도덕이 만연한 나쁜 일을 너희들이 행할 때, 그때 너희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정말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들을 감옥에 가두겠습니까? 아니면 교회 지하실에 묶어두고 곤장이라도 치겠습니까? 아니면 칼을 빼서 그들의 목에 겨누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말씀의 의미를 알고 진리에 굴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하나님의 사람이 창이나 칼을 든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까짓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고 발로 차버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종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멸시를 당하고 욕을 먹고 한 없이 악한 일을 당하여도 그냥 고난을 당할 뿐이지, 제지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의 사회와는 구별되는 매우 특별한 사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여튼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는 우리는 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반 절에서 이와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사본에서는 “…그 안에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약하나…”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사본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약하신 것처럼 우리도 약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를 살려내신 것처럼 또한 우리를 살려내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부도덕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 의하여 짓밟히고 교회가 무너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사도바울은 다시 한 번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당신의 탁월한 지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면류관 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온 뺨에 피가 흘러내리고 온 몸에 채찍을 맞으신 그 몸속에서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약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지은 모든 죄를 대신해서 당신이 그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으시면 우리를 살릴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힘없이 죽으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의 비참함은 우리의 죄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그의 고난의 끔찍한 고통들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우리의 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신가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불화한 관계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는 그의 고난은 정말 큰 고난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사형수들에게 주는 해융에 묻힌 포도주를 받지 않으신 것은 바로 그러한 마취제를 통해 당신의 고난을 경감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뜻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내가 범죄한 이 모든 백성의 모든 죄의 대가를 마지막 단 하나까지 모두 치르겠사오니 나의 고난의 심대함을 보지 마시고 당신의 모든 공의를 만족 시키셔서 내 백성들을 구해 주옵소서.”의 중보자의 마음이 그 일을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약하신 분이 아니라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약해지신 것입니다. 그 고난의 순간에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다를 잠잠하게 하실 수 있는 그 분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그 분이, 병든 자를 온전하게 하실 수 있는 그 분이, 자기를 위해 왜 기적을 행할 수 없었겠습니까. 하늘에는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 무거운 십자가를 모두 감당하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당시 로마의 황제가 가이사였음을 보여주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왕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말입니다. 의미심장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약해지셨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목적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약한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합니다. 때로는 주님을 위해 일하면서도 강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떠받들림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한 십자가의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면 하나님이 그 일을 다 마친 다음에 그 사람은 망가진 채로 발견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게 하실 때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 십자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진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하나님께 불평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하루는 꿈속에서 그를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더랍니다. 하늘나라에 가 보니까 월드컵 경기장보다 더 큰 커다란 창고가 있다고 합니다. 하는 말이 ‘네 십자가가 무겁다고 했으니 여기에다가 벗어놓고 너에게 맞는 십자가를 찾아봐라.’ 천사의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쉬운 십자가를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십자가가 너무 거추장스러워 작은 십자가를 지고 싶어서 작은 십자가를 졌답니다. 십자가는 무슨 나무로 만들었는지 무겁기가 엄청나게 무거웠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한나절 지고 있다가 벗어놓고 다른 십자가를 찾았는데 가벼운 십자가를 찾아야지, 가벼운 십자가를 찾았더니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작고 가벼우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짊어졌더니 몸에 딱 맞았습니다. 이게 참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말했습니다. 몇 걸음 걸어 보거라. 몇 걸음 걸어보니 가볍고 작은 것은 사실인데 중간에 커다란 옹이가 튀어 나와 등뼈를 계속 누릅니다. 벗어놓고 어떤 십자가를 지니까 왜 그런지 자기를 위한 맞춤형 십자가 같더랍니다. 그래서 보니까 자신이 일생 짊어지고 살아온 십자가였습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죽어야 될 것들은 죽이고 살아야 할 것들은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우리는 무명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자들 같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십자가를 지고 너희를 섬길 때 하나님은 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하신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왜 그랬겠습니까? 연약함은 자랑거리가 아닌데 그 연약한 그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연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십자가는 우리를 살려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우리의 어깨에 메어진 십자가가, 그 고통이 우리를 살려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고통이 십자가가 아니니 십자가는 믿음으로 내가 지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아멘’하며 우리의 어깨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어떻게 하나님이 이 십자가를 통해 나를 죽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를 살려 내시는가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차피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 고통과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고 때로는 잘못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죄의 대가로 받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뜻을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려 할 때 많은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에 그 십자가를 마음속으로 거부하면 그것은 고통이 되어서 우리를 짓누릅니다. 고통이 지나쳐 도저히 지나칠 수 없을 때 우리는 세상을 원망하고 주님께 불평하고 마지막에 이 세상을 등지고 싶은 유혹까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주님을 붙드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는 놀라운 능력으로 우리를 살려냅니다. 그 십자가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부어집니다. 그래서 예전에 감당할 수 없는 길을 감당하며 걷게 하시는 십자가의 고난 갈피갈피에서 하나님을 고난보다 더 큰 위로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인정을 받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이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십자가로 다시 살다(2018.03.27. 새벽십자가사경회2)
십자가 옆에 있던 사람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녹취자 : 김세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주변 풍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신 시간은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얼마나 시간이 걸려서 걸어 올라가셨는지 모르지만, 실제 예루살렘에 가보니 그 길은 꽤 거리가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멸시와 욕을 당하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쓰러지며 올라가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행렬이 지체되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벗겨 구레네 시몬에게 지어 따라오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모였으니 이는 그 당시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하여 모였던 때였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의 최고의 화재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순순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기적을 행하여 스스로 그 위기에서 탈출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단지 예수라고 하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십자가를 생각하였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 형벌을 빌어서 자기를 대속 제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자신이 그 하나님이 구원할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께 진노를 당하심으로써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진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게 됩니다. 그 십자가는 120-130kg가량 되는 아주 무거운 나무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달 생각이었습니다. 막상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침 9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매달리심으로 예수님은 마치 죄인들 중 한 사람인 것처럼 여김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보니 이제 예수님을 따라왔던 많은 사람들은 별 할 일이 없었습니다. 뭔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예수가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것이라 믿었는데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수많은 사람을 보리떡과 물고기로 먹이고 풍랑이 일던 바다를 잔잔하게 하던 그런 종류의 위대한 능력을 기대하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모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멸시와 욕을 받는 그 현장에 끝까지 예수를 따라와 예수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마지막 예수님을 사랑하였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여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킨 유일한 부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네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경하러 왔다가 구경할 일이 사라지자 떠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그러하였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를 배신하고 처음부터 도망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갈 것이며 죽기까지 따라갈 것이라고 거듭거듭 맹세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고 신문받고 처형 받는 그 순간 제자들은 코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예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현장에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도 한 패지?”라는 말 한마디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히거나 혹은 투옥할 위기에 놓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어느 것도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올바른 삶의 도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기적을 보기 위해 모였던 백성들은 재미난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사라지자 그들은 함께 자리를 비웠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신기한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어떤 기적을 바라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신앙의 도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일평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하였던 사도바울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기리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한 사람의 은혜의 깊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아는 지식의 깊이에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신앙 때문이 아니었고, 오히려 자기들의 사사로운 육신의 안목을 신기한 사건으로 채워보고자 하였던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들 중에는 예수를 처음 만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은 팔복산에서 울려 퍼지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입니다. 뱃세다 광야에서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고 주린 배를 채웠던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그 기적의 사건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영광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되지 아니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예수 버리고 도망간 것도 예수를 따르는 참된 도일 수 없습니다. 신앙을 떠나 인간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양육을 받으며 온갖 섬김을 다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이 세상에 열두 제자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과 시간을 모두 드려 그들을 가르치고 교육하고 친히 몸소 본을 보이시는데 자신을 사용하셨습니다. 자신의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고 하였은즉 너희도 내가 체포되면 모두 도망갈 것이라고 예언하실 때에 주님의 마음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예수님 곁에서 함께 밥을 먹고 고통을 당하며 핍박을 당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섬겼던 사람들이 도망을 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람들을 보면서 나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던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같은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골고다 언덕에 올라섰을 때, “너도 예수와 한 패이지?” 그렇게 지목을 당하고 형벌을 당할 위험이 없었겠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한 이목에 상관없이 이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나와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그 모든 길에 동행했고 누가복음에서 여인들이 슬피 울며 가슴을 치고 예수를 따랐다고 할 때, 바로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 더 많은 여인들이 이름 없는 사람들로서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애지중지 3년을 길렀던 제자들은 도망가고 이렇게 이름 없는 하찮은 여인들이 예수의 곁을 지켰습니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인간의 육적인 정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서 있었습니까. 대답은 딱 하나, 간단한 한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는 순간에 예수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시킨 일이었습니다. 육신의 혈육으로 이 세상에 예수를 낳게 한 마리아,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지만 육신으로는 자신의 아들인 것도 알았습니다. 그 사랑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오게 만들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많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기를 그렇게 칭찬해 주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인생이 바뀐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난관과 핍박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사랑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데까지 따라가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결국 예수 곁에서 예수와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 삶은 단지 좋을 때만 동행하는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꽃길만 걷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오게 하십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그 분이 가신 길을 갈 수 없지만,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분이 자기의 길을 걸어가시며 당하셨던 멸시와 욕, 시련과 고난을 당하며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악한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그리워하게 만드십니다. 보십시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빌라도의 법정으로부터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예수 곁에 남은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예수 때문에 덕보고 예수 때문에 이익을 얻을 때 예수를 따라가며 나는 예수쟁이라고 떠드는 것은 신앙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존귀, 영광은 받으시고 멸시와 천대는 자신이 기꺼이 받음으로 예수 따르고 예수 곁에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은 특별한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수를 버리지 않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마지막 네 번째 사람은 바로 26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서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 이르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6-27)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한 사람 요한은 도망갔다가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계실 때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때가 언제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9시에서 오후 3시, 6시간동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는데, 그 어느 시간에 이 사람은 돌아왔습니다. 일체의 대사 없이 조용히 예수 옆에 있었으니 무엇인가 변명할 대사가 그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잠시 세상을 사랑하고 예수보다 자신의 목숨을 사랑해서 도망갔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신이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양심은 심하게 매질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를 그렇게 사랑한 예수를 너는 과연 버렸더냐? 그렇게 예수가 너를 예뻐하고 자기의 품에 앉아 함께 음식을 먹으며 예수의 심장의 박동소리까지 듣지 않았느냐? 그렇게 사랑한 예수의 사랑을 이렇게 배신으로 갚는 것이 정당하냐?” 수많은 양심의 송사가 있었고 단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요한의 양심은 심한 매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 그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 곁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예수를 만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골고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어깨를 부딪치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젊은 청년이 하나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찬양)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 한 마디로도 꾸중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풀어 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이 제자에게 부탁하는 영광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의 풀어진 마음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란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은 것처럼 잠시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요한을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정이 사라지지 아니하였음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이 설교를 읽으며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 언제나 예수 옆에 있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처럼 될 자신은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이나 예수를 구경하기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뒤따라온 유대인과 같은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예수를 버려도 독야청청 예수 곁에만 있었던 사람으로 살면 너무 좋겠지만, 나는 그럴 자신이 없으니 요한처럼 잠시 미끄러졌어도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 회개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들이 마리아나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나 막달라 마리아처럼 이제까지 일생동안 변함없이 예수 옆에 서서 예수께 충성하였던 사람들이라면 거기 계십시오. 잘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두려워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잠시 있다 사라질 내 목숨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예수를 버린 적이 있다면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요한처럼 그렇게 양심에 심한 매질을 피하지 말고 받으며 이제 그 매질을 끝내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돌아가면 됩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예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기다리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다시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고 사명을 맡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붙들고 사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로 다시 살다(2018.03.28. 새벽십자가사경회3)
포도주를 거절하라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마 27:34)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쓸개 탄 포도주를 주어서 마시게 하였더니 예수님이 맛보고 마시지 아니하더라고 나옵니다. 이 광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있었던 광경입니다. 많이 채찍에 맞으시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올라오셨을 때,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행실은 이미 구약시대 때부터 잠언 31장 6, 7절의 말씀, 즉 그렇게 고통스러울 때 술이 고통을 잊게 한다는 말씀을 토대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한 행동으로서 실천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관습에 의해서 예수님께 이 포도주가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 우리말 성경에 ‘쓸개’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도대체 무슨 짐승의 쓸개이겠습니까? 잘 찾아보면 사실 이것이 쓸개라는 번역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킹 제임스 버전, NIV, ASV 모든 유력한 성경에서 이것을 ‘gall’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론 ‘gall’이라는 쓴 것, 아니면 저 단어 밑으로 내려가면 쓸개라는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우월한 뜻은 쓸개가 아니라 충령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뭐냐 하면 희랍어로 보면 ‘충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중화초 같은 벌레가 식물 속에 기생하면서 거기에서 알을 낳습니다. 나중에 동중화초처럼 그것이 식물과 동물과 합체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약재입니다. 매우 씁니다. 무엇인가 식물이 자라다가 곤충 때문에 볼록하게 되어 버리는 지점이 있는데, 이것을 약채로 썼는데 매우 쓰다고 합니다. 그러한 것을 따다가 포도주에 탑니다. 포도주에 타면 그것을 십자가에 매달릴 사람들에게 먼저 주는데, 그것을 주는 이유는 그것을 먹고 온 몸의 고통을 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일종의 마취제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살짝 맛보시고, 그것이 무엇인지 아신 후에 마시고자 하니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9절에 나와 있는 포도주에 대한 묘사는 이것과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지기 전에 예수님께 드린 것이었고, 요한복음 19장 29절에 나오는 그 내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이미 높이 매달렸을 때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거기에는 대개 독주나 초, 몰약, 이러한 것들을 넣어서 조재를 한 포도주였다고 합니다. 그 포도주는 매우 쓰고 시고 혈액순환을 빠르게 해서 피를 더 빨리 쏟아지게 함으로써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죄수들의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여튼 두 번째 묘사는 예수님이 높이 매달렸기 때문에 자신의 키로는 예수님께 포도주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약 1m 이상 자란 갈대 끝에 스펀지 같은 것을 묻혀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 올려 준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 대한 자기의 행동이라기보다 칼빈의 해석과 같이 그러한 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포도주를 바르면서 조롱을 하는 광경이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다.
포도주에 관한 사건이 십자가에 매달리기 직전과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돌아가실 즈음에 두 번 각기 다른 묘사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9장에서도 “내가 목마르다.” 하셔놓고 막상 포도주를 드리니까 거절하셨고, 또한 여기에서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쓸개를 탄 포도주, 충령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드려 마시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 맛을 보시고서는 예수님께서 맛을 보지 아니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전통을 모르셨을 리는 없지만,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는 죄인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러한 포도주를 맛보신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은 피를 흘리고 멸시와 욕을 당하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셨으니 그 체력이 얼마나 고갈되었겠으며 얼마나 목이 마르셨겠습니까. 그러한 점에서 맛을 보시기는 하셨겠지만 정체를 아신 후에는 그 포도주를 마시고자 아니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바로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의지적으로 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충령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이 마셨더라면, 아마 이후에 이어진 십자가의 고난에서 고통을 훨씬 더 경감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충령을 탄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당하여야 할 죽음을 넘나드는 모든 고통을 남김없이 감당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한 때는 이 잔을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이 막상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 그 고통을 덜 수 있는 마취제가 한잔 주어졌는데 의지적으로 그것을 마시지 아니하시고 그냥 쏟아지는 그 큰 고난을 감당하시려고 하였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그냥 사람들이 예수를 괴롭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 화목한 관계를 잃어버린 인간들, 그래서 하나님을 등지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며 살 수 없는 불쌍한 인간들을 향한 구속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속의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하나님이 그 모든 사람들의 죄를 전가시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은 나쁜 것이지만, 그 고통을 통해 당신이 사랑하시던 수많은 인류를 아버지 앞에 다시 살게 하신 것은 아주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위해서는 완전한 죽음이 필요했고 완전한 평화를 위해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가 요구되었습니다. 당신이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고, 당신이 징계를 받게 됨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 결정적인 순간에 마취제 따위로 당신의 고난을 감경시킬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 이 세상 누구도 대신 져줄 수 없는 십자가인 줄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지막 단 한 순간의 고통까지라도 하나님을 생생하게 의식하는 지성과 의지 안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과 얼마나 다른가 보여줍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십자가 하나를 지고도 끊임없이 그 고통을 잊게 하는 마취제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 마취제가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고난을 너무 주목한 나머지 그 고난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에 압도가 되어 버려서 그 고난을 잊게 할 마취제를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찾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그렇게 마취제를 열심히 찾고 고통을 잊어보려고 하다가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까지 내려놓고 갈 길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을 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는 것은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만들어주는 힘이고, 그 사명을 붙들고 살아갈 우리의 마음에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끊임없는 출혈로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두통과 온 몸에 피가 빠져나감으로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셨습니다.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다섯 번째 말씀을 남기시기를 “내가 목마르다.” 그 십자가가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웠으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나는 목마르다.”고 외치셨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해융에 적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 해융에 탄 포도주로 정말 예수님의 목을 축이게 해 주려고 하는 그러한 애정을 가지고 그렇게 했겠습니까. 예수는 목말랐습니다. 아마도 그 포도주를 해융에 적셔 갈대에 끼워 높이 쳐들어 예수님의 입 언저리를 오가게 왔다갔다 얼굴에 칠하며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서도 또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물이었다면 예수님께서 마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당신 안에 남은 육체의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지어주신 그 십자가를 온전히 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바쳐서 헌신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감당하지 못할만한 십자가가 아니고 또 그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신앙의 길에 만나는 시련은 우리가 피해갈 수 없거나 극복할 수 없는 시련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는 무거운 십자가, 그것을 지고 만나는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 안에서 세상 욕심을 버리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기대하시며 우리에게 그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작은 고난에 너무 많은 진통제를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몸에 무슨 큰 유익을 주겠습니까?
(예화) 저는 2014년에 가슴 수술을 받을 때 의사가 통증이 매우 심할 테니 아프면 언제든지 약을 먹으라고 줬는데, 그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진통제인지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도 그것 하나 먹으면 신기하게 머졌습니다. 그게 시중에서는 살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마약이 들어있는 진통제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의사선생님이 처방해 준 진통제를 40%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참을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참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에만 먹고 보니까, 나중에 69%를 먹지 않고 서랍에 남겨 두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이 진통제가 고통을 낮춰주는 것은 있겠지만, 우리 몸에 무엇이 좋겠는가. 그리고 수술을 해서 통증을 느껴 보는 것도 또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해 보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어리석기도 하지만 그러한 생각 속에서 거절하면서 조용히 침대에 누워서 『인간과 잘 사는 것』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한 큰 고통 속에 있을 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 그동안 내가 세상에서 사랑하던 많은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세상에서 예전에 건강할 때 사랑하고 집착하고 하고 싶고 그러한 것들이 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지만, 많은 고통이 이미 있었고 십자가 위에 올라간 다음에는 그야말로 고통의 정상을 치달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산 사람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다리에 못을 박고 그 가시 면류관을 씌워서 채찍을 맞은 그 몸을 나무에 매달아 하늘높이 올렸다고 할 때 그 무거운 체중이 살을 찢으면서 아래에 내리누르고 그 피가 동맥을 터뜨려 콸콸 쏟아질 때 그때 그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고통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감당해야 하는 최고의 고통이었습니다.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가난한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인생의 길을 살지만 진리의 길을 모르기 때문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이 그렇게 큰 죄였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오해와 미움 속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사람들의 죄를 사용하셔서 인간들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오묘한 비밀을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이 범죄 하여 모든 사람이 죄에 이르게 되었는데, 한 사람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죽게 하심으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땅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들어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탄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생명을 줄 씨앗인 예수를 죽여 버리고 나면 생명은 사라질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사망을 주장하는 자신들이 영원한 승리를 거둘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 나니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부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은 죽은 후 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 먼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경험이 되어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류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리라는 불타는 확신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횃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사탄의 왕국에 항거하는 거대한 군대의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 군대는 약해지는 때도 있었고 강해지던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때로는 패배하는 때도 있었지만 영원한 승리가 보장된 군대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사신 바 된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왜 내게 이런 십자가를 주시는가?’ 질문할 수 있겠습니다. 너무 오래 그 질문을 반복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배반하도록 만듭니다. 그 십자가를 하나님이 큰 뜻이 계셔서 나 같은 사람에게 매게 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생각하고 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면 그 길은 어렵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나에게 이것을 지고 걸어갈 능력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일체의 마취제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낙보다 소중히 여겼던 모세의 신앙을 본받으십시오. 그렇게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길에 마취제의 유혹을 끊임없이 뿌리치고 한 인간으로서, 한 신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연히 감당하고 그 속에서 느끼는 아픔과 고통도 나같이 비천한 인간이 예수를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는 자격 있는 사람으로 여겨주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명과 사랑의 은혜는 눈앞에 펼쳐진 십자가의 은혜를 담대히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주고 이기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대하면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그런데도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에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오늘부터 필요한 기도는 이 십자가를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 ‘왜 나에게만 이 무거운 십자가를 주셔서 괴롭히나?’라는 불평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믿음으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무한한 은혜의 자원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다시 살게 하신 것입니다. 매 순간 어린아이처럼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제는 내가 예수를 위해 죽을 차례입니다. 나는 모두 주님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산다면, 하나님이 고통을 능가하는 큰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화평을 이룬 십자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화평과 연결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바로 화평을 위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본래 불행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가 깨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의 지성이 명료하고 의지는 하나님 앞에 올곧은 상태로 창조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자 인간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을 계속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현저히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이어서 사람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공정하게 대할 줄 모르는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당연히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저주를 받자 이제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내지 않아 이제 끊임없이 수고하고 노동을 해도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인간은 이 자연의 세계를 하나님과 함께 창조된 세계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착취하고 이용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그러한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만물과의 관계도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 깨진 것을 완벽하게 깨진 상태로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고 아무 것도 돕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속히 파멸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로 인해 모든 인류가 멸절되는 것은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확한 시간에 낮과 밤을 구별하시고 해가 뜨고 달이 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절기를 정확하게 때를 따라 일어나게 하셔서 열매들이 맺고 또 그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고 하는 자연의 법칙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완전히 파멸되지 않고 쓰디쓴 노동을 통해서라도 일용한 양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불행이 결국 화평이 깨진 것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 ‘화평’은 곧 ‘평화’이고,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기 때문에 그 관계의 온전함으로 사람과 자신과 모든 만물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깨져버렸습니다. 얼마나 인간의 삶이 불행하면, ‘안녕하셨습니까?’ 이것이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안녕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것들이 깨뜨려지고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니까 그렇게 해를 받지 않고 평안하게 지냈느냐 하는 뜻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불행하고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하고자 한 가장 중요한 일이 화평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물, 즉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땅에 있는 것들은 인간존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자연에 있는 모든 우주 만물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하늘나라에 올라간 성도들, 이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화목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무슨 천사와 성도들 사이에 다툼이 있느냐, 그러한 뜻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존재들과 땅에 있는 존재들과 완전한 화평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그 화평이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성도들의 기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무리들로서 참된 교회를 누리는 백성들 편에 서서 성도들은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교회를 해치고 악을 행하는 세력들, 이러한 세력들과 하늘에 있는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그러한 역량이 축출되도록 하나님께 매 시간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한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래서 하늘에 있는 교회나 땅에 있는 교회, 모든 인류들이 한 하나님 안에서 화평을 누림으로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평화가 그들의 삶 속에서도 구현이 되는 시간이 바로 구속이 완성되는 시점입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모두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일치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화평은 만물의 세계까지 전달되어 인간과 끊임없는 갈등, 대적의 관계 속에 있었던 동물들의 세계도 변화가 되어 화평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짐승들이 사람을 헤하거나 사람이 짐승을 먹기 위해서 죽이고 해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완전한 선의로 인간은 동물들과 모든 자연만물들을 대하게 될 것이고, 자연만물들은 그러한 인간의 아름다운 선의를 힘입으며 자기가 자신된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의 완성입니다. 바로 그러한 완성을 이루는 그 결정적인 계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악과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평, 인간들 사이의 평화, 사물들 사이의 온전한 조화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을 완전히 폭발시켜 버리는 한 도화선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불이 붙어서 마지막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 모든 세력들은 제거됩니다. 그리고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에 접붙여진 하나의 몸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싶으셨던 삶을 살고 그 분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완전한 교회가 됩니다. 인간이 모두 할 수 없었던 마지막 교회의 성화를 그리스도께서 직접 완성시키셔서 온 무리가 점도 티도 흠도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고 찬양하게 됩니다. 그 사랑으로 이제는 미워하는 것이나 갈등하는 것이나 서로에게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나 모든 가슴 아픈 일들이 없이 모두를 사랑하게 되기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그리고 내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같이 사랑하게 되는 사회가 올 것입니다.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동물들과 자연의 만물들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새롭게 변화된 인간을 보면서 한없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래서 독사 굴에 아이들이 손을 넣고 장난을 쳐도 물지 않는 시대가 될 것이며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풀밭에서 뛰노는 광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포악과 피에 굶주린 모든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우주적인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사람들의 인류 사회가 거대한 하나의 사랑의 질서를 이룬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는 오늘 이 성경 구절을 봅니다. 사람이 보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은 이미 굴러가고 있는 역사의 바퀴를 붙잡고 세우려고 하다가 그 바퀴에 치여 죽은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알버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러한 식으로 묘사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렇게 치열한 역사의 현장 속에서, 잘못된 역사의 바퀴를 굴리다가 당신 자신도 죽어버린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정신만이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우주적인 화평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했고 그 피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화평을 이루어가고 있는 사람이고, 마지막에 완전한 성취에 동참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이미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이다.’ 이것을 가슴 깊이 자기 스스로 확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해 집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이미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사람이다.’ 그렇게 굳게 믿어야 합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 록펠러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매일 매일 그 가르침을 주셨다고 합니다. ‘네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사람임을 잊지 말라.’ ‘이미 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나를 적셔서 나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러한 확고한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윤리가 있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도덕이 있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인생관이 있고 세계관이 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간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내가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전자가 칭의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이미 받은 사람으로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경험하며 그 안에서 좀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성화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구원받기 위해 들어오는 출입문이 아닙니다. 들어온 다음에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에 잠겨, 그 피로 매일 매일 아직 내 안에 있는 나를 주인 삼으려 하는 자아와 싸우고 그리고 그 피로 매일 매일 승리하는 삶을 실제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 모두에게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탐구,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객관적인 태도, 그 말씀에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정사의 생활,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매일 매일 하나님과 자신이 화목한 자로서 더욱 그 피에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국 이 세상에 예수의 피로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어떠한 미래의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입니다. 보여주는 그것은 큰 건물이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엄청난 선행이나 위대한 선교 사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교회의 진정한 가치는 하나님과 화목할 때 인간들의 사회가 얼마나 아름다워 지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말미암는 화평한 세상을 이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지 않고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중시합니다. 기도 없이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기도 사역을 중시합니다. 선교하지 않고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선교를 중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면서 나 자신이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고 점점 더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신자들로 자라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는 우리들이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가지만 마지막에는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일시에 모든 사람들을 완전하게 하셔서 이 세상에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밀려오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을 만납니다. 또는 믿음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신앙과 양립되지 않는 가치를 강요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매일 매일 일어나는 현실 속에 살면서 그 거친 물결들을 해치고 이기며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피에 젖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그 화목의 능력을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사랑의 감격을 매일 매일 유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루에 한 번씩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크게 잘못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매일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오늘도 그 화목을 깨뜨리도록 유혹하는 이 세상과 내 마음의 욕망, 이 모든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깨뜨려 피를 쏟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으니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얻은 하나님과의 이 화목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주신 화목인가. 이렇게 힘들게 얻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내가 어찌 나의 작은 욕망으로 깨뜨리리.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빚진 사람임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이 화평의 삶은 우주적이고 광대한 것들을 지양하지만 거기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와 함께 사랑을 나누도록 나와 함께 의지하며 세상을 함께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내 가까이 있는 가족, 아내, 남편, 그리고 자녀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체들, 가장 살을 부딪치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부터 먼저 화목의 삶을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 깨졌다면 서로 용서를 빌고 또 사랑으로 용서하고 그것이 다시 회복되었다면 다시 소중하게 여기고 기뻐하는 가운데 그 화목이 유지되어 가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곁에 두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 우리 곁에 두셔서 우리로 사랑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 ‘저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때로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함으로 다시 화평을 이루며 살기가 매우 힘들지만, 그러나 힘들다는 상황으로 복음을 덮는 것은 그 사람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식의 삶을 살면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속에서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하실 때, 당신의 피를 사용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피를 먹으면 거기에 섭생학적인 불리한 점이 있기 때문에 먹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는 칼슘 같은 것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에 피를 생명으로 여겨 생명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에 대한 아주 존귀한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피, 곧 당신의 생명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가 화목한 관계로 바뀔 수 있는가 이미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화목하게 하신 관계를 지켜 나갈 때 우리에게도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회복해야 할 관계를 위해서 자기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예 그 현실 자체를 외면합니다. 그러한 신앙에서는 생명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신 것은 당신과 화목을 회복한 사람이 사람들과 다시 화목을 회복하고 그 사람과 더불어 당신을 사랑하는 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를 화평으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모든 은혜를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화목한 관계로 돌이키기 어려울 적마다 주님은 나에게 능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그 일을 할 때 내 마음에 겪는 큰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당하신 그 고난과 희생은 훨씬 크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채찍에 맞으시고 또 돌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셨지만 마지막에 군병이 창을 넣습니다. 오른쪽으로 창을 넣어서 그 창이 허파를 뚫고 마지막에 심장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물과 피가 다 흘렀다는 것을 요한이 보았다고 할 때 그 물과 피가 그렇게 쏟아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위해서 당신의 피를 모두 바치신 사건입니다. 우리들도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어진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데려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가 사람과 화목하고 화평을 다시 되찾기 위해 그 일이 아무리 어렵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고난보다는 작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이 일 저 일 하며 가슴이 뿌듯해 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가족부터 돌아보아라. 자신에게 취해서 성취에 감탄할 때 네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한지 살펴보아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를 통해 은혜를 받은 여러분들은 이 화평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데 있는 사람, 나와 함께 사랑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사람들부터 이 화평을 이루어가고 있는지 점검하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희생하신 희생을 어려울 때마다 생각하면서 주님이 나를 화평하게 하였은즉 나도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