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2018년 구역장공과교육 모음)
설교기간|2018년 6월 10일 – 9월 16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9년 1월 11일
목 차
1장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대(사 53:1-2) 2018.6.10. 구역장공과교육 1
2장 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사 53:3) 2018.6.17. 구역장공과교육 6
3장 X (강의 안 함)
4장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사 53:4) 2018.7.1. 구역장공과교육 10
5장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사 53:6) 2018.7.8. 구역장공과교육 15
6장 침묵 속에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사 53:7) 2018.7.15 구역장공과교육 19
7장 대속의 비밀, 하나님의 지혜(사 53:8) 2018.7.22 구역장공과교육 24
8장 십자가와 일사각오의 신앙(사 53:9) 2018.7.28 구역장공과교육 29
9장 정결하게 하신 그리스도와 그 열매(사 53:10上) 2018.8.5 구역장공과교육 37
10장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사 53:10下) 2018.9.2 구역장공과교육 43
11장 지식으로 의롭게 하신 그리스도(사 53:11) 2018.9.9 구역장공과교육 48
12장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원한 승리(사 53:12) 2018.9.16 구역장공과교육 53
1장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1-2)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6.10. 구역장공과교육1)
녹취자: 김정규
지난번에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를 배웠고 오늘부터는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를 배우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과 영광’ 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우선 이사야 53장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약성경에 흩어져 있는 메시아에 대한 묘사는 이사야 53장에서 원석을 캐서 확 뿌려 놓은 것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꾸로 이야기를 하면 구약성경에 흩어져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을 다 이렇게 함축해서 모으면 53장으로 집결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사실 메시아에 관한한 이 이사야서 53장은 정말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래서 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사야서 53장을 읽다가 회심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나와서 유대인학자들을 당황하게 할 정도로 예수님 오시기 전 700-800여 년 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정교한 필체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역에 대해서 놀랍고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판화는 제가 너무 사랑하는 판화입니다. 저는 괴르너의 판화라고 믿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 사람이 아니라는 설도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저자 미상입니다. 원 판화는 이것보다 약간 커서 그 아래는 골고다 언덕의 이 장면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끌어안고 있는데, 거기에 누구라고는 안 나오며,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남자라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가능성이 3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당시 역사적인 인물하고는 상관없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공감하는 신자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두 번째는 이 판화의 작가 자신이라고도 합니다. 세 번째는 요한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요한이라 보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이것이 작가 자신을 그려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주 정교한 판화가 아니라 뭉툭한 판화입니다. 이게 너무 좋아서 제가 30대 교수 시절에, 교수실 뒤편에 항상 걸려있었고, 밑에는 독일 작품이라서 독일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여, 저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나의 것입니다.” 이런 말로 시작하는 시구가 아래에 쓰여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이 속에 넣자고 강력하게 주장을 해서 창문에서 보는 것 같은 이 그림을 넣은 것입니다.
1. 이사야 53장의 1절의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가 전한 것”이란 무엇입니까?(27)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일차적으로 보면 당연히 선지자, 그리고 선지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더 확장해서 보면, 이사야 선지자뿐만 아니라 당시 메시아를 신앙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경 속에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이야기한 사람들, 더 넓게는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우리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사야 선지자뿐만 아니라 후대에 태어나서 메시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 그리고 그 메시아 신앙이 실현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 속에 들어갑니다. 전한 것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휘모아(שְׁמוּעָה)’로, ‘들려진 것’입니다. 영어로 ‘리포트’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튼 전해진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당시로는 메시아로 말미암는 인류구원의 메시지, 이것이 바로 1절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2.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28-31)
답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우리가 믿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시더라” 사람이 여기에 있으면서 도대체 우리의 구원자가 누굴까 하고 여러 가지 생각하는데, 그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라는 것을 여기에서 보여줍니다.
3. 메시아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계시되었습니까?(32-34)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메시아에 예언은 개인을 통해, 혹은 공동체를 통해, 혹은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을 통해 계시되어, 그러나 그것은 한 번에 완전한 형태로 주어지지 아니하고 마치 씨앗이 자라서 싹이 나고 싹이 자라서 조금씩 조금씩 커져서 마지막에는 이 씨앗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나무가 다 자라서 열매를 맺음으로 알게 되는 것처럼 그런 형태로 점점 발전하는 방식으로 주어졌고,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주어지는 방식으로 계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계시되었지만, 씨앗에서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발전하면서 계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구원의 계시가 즉시 주어집니다. 창3:1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첫 번째로 아담에게 말씀하시고, 두 번째로 하와에게 말씀하시고, 세 번째로 뱀에게 말씀하시는데, ‘내가 너로’에서 너는 뱀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왜 선악과를 따먹었는지 물으셨지만, 뱀에게는 일체 묻지 않고 한 번에 뱀에 대한 저주를 내립니다. 그래서 뱀을 보면서 자꾸 이 사건을 생각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뱀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뱀은 하나의 인간을 죄로 이끄는 사단의 도구로서 역할을 한 것이기 때문에 뱀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하신 하나의 아름다운 피조물 중 하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독이 있지 않느냐고 묻는데, 그렇게 따지면 독을 가진 것이 뱀뿐이겠습니까? 뱀의 독도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타락하고, 자연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들이 서로를 해칠 수 있는 기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용을 하지 않았을 것들이 그런 것으로 사용을 하게 되었다고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인간의 구속이 모두 완성된 다음에 이 자연의 세계와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심각하게 자연과 반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2017년도 한국 사람이 쓴 일회용 컵이 257억 개를 썼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은 플라스틱입니다. 여러분들이 종이컵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종이컵이 아니라 안쪽에는 비닐로 코팅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뜨거운 것을 부어먹는 것 자체가 우리 몸에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을 교란시키는 질병, 특히 화학적 질병의 유발요인 중 하나가 화학물질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부터 이런 컵들, 일회용품들을 완벽하게 사용안 할 수는 없겠지만, 사용하지 않도록 규제해야 되고, 더더욱 플라스틱 용품의 사용을 아주 획기적으로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닐로 만든 백이 유럽에 가보면 나라들마다 점점 안 쓰는 추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가방을) 자기가 가지고 다닙니다. 사무실에서도 내가 직원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보기만 하면 일회용 컵을 꺼내지 말고, 모이라고 하면 각자의 컵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커피, 음료수 등을 마시고 자기가 가져가서 씻고 자기 책상에 놓았다가 다시 가져오라고 합니다. 불편하더라도 우리들이 환경을 보호하는 생활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여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네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에서 “여자의 후손이 네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로 이뤄지는 악한 권세들의 소멸입니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입니다.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일어났지만, 하나님의 도구들은 마귀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 놀랍게 나오는데, ‘여자의 후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실은 좀 이상합니다. 남자가 아들을 낳으면서 남자의 후손이 되는 것인데, 근데 엄밀하게 말하면 부모의 후손이지만, 그 당시 여자를 별로 중요하게 취급을 하지 않았고, 마태복음 1장에서도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으로 이어지는데, 놀랍게 마태복음 1장 16절에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그리스도가 나시니라” 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마리아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요셉에게서 낳았다고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낳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혈통이 이렇게 그 가문에 있는 요셉과 결혼한 여자에게서 태어남으로서 이 족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족보를 이해야지만 마태복음의 독자들인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왜 왕일 수 있는가? 왜 그렇게 위대하신 분인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분인가?’ 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생식을 통해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그 집안의 가문에서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제 민수기에서는 놋뱀으로 예표가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뱀이 이렇게 나옵니다. 병원표시에 보면, 지팡이에 뱀이 감겨져 있는 표시가 있는데 이것은 민수기에서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전부다 뱀에게 물리는-불 뱀이라고 나오는데, 빨간 뱀이라는 학설도 있고, 물렸을 때, 불붙는 것처럼 통증을 느낀다고 그래서 불 뱀이라는 견해도 있는데-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죽어갈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치료의 방법을 제시하는데-그것이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이것을 보는 자는 살리라라고 하는 것- 결국, 요한복음 3장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라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되는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해석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두 개를 연결 짓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놋뱀으로 예표되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이 구원 얻는 것처럼,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바라보고 믿는 사람들에게 공로와 상관없이 그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기적을 일으켰던 모세의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라는 인물-모세와 같은 카리스마를 갖지는 않는-이 등장하고,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지도자가 되게 하셔서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들어갔으며, 그의 이름이 바로 ‘구원’입니다. 여호수아, 여수아, 호세아 모두 다 같은 ‘야사’라는 동사에서 오는 활용-예수도 같은-입니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일어난 많은 사건들 중에 속한 것입니다.
4. 이사야 53장 1절의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35-36)
우리가 전한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이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의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이 생각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방식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거의 신에 가까운 아주 특별한 존재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든 억압에서 건져 낼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깨고, 사람들이 예측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메시아가 오시는데, 그를 볼 때에 그런 일을 하실 것처럼 안 보이는 분으로 오셔서 사람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할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의미는 구원에 있어 여호와의 권능을 알아볼 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며, 이 질문의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팔’에서 ‘팔’은 ‘제로아(זְרוֹעַ)’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원래 신체의 부분을 의미하는데, ‘손’(יָד)이 아니라 전체 ‘팔’을 의미합니다. ‘어깨’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 팔은 하나님의 놀라운 힘을 나타냅니다. 남자가 힘을 쓸 때 팔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딱 볼 때 힘이 세게 보이는 사람은 팔에 근육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충분하게 구원하고 보호 할 수 있다는 의미로 ‘편 팔’로 묘사합니다. 편 팔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안을 때 한쪽으로 감아서 안으면 엄마에게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라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여호와의 권능이 나타날 것인데, 그것을 여호와의 구원의 방법,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능력이 권능이 이런 식으로 나타날 것을 알아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우울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 당시 이사야시대이기도 하고, 복음을 듣는 오늘날 우리 시대이기도 합니다.
5.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했던 구원의 방법과 어떻게 다릅니까? 하나님의 구원방법이 자신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마음을 닫는 사람들의 결국은 무엇입니까?(37-42)
그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강력한 정치적인 통치자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순수하게 복음을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도 그 속에 있었지만, 따라다니던 많은 무리의 동기는 예수님이 일으키는 저 놀라운 기적을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키는데서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요한복음 6장에서 임금을 삼으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나쁜 게 없는데, 유대인들에게 철저하게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보았을 때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인 기대가 큰 실망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오는 복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미워하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메시아는 영광스러운 왕으로 아주 초인적인 존재로 올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는 묵시문학적인 전통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오신 모습은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모습이며, 이는-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현실입니다. 이 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메시아를 생각합니다. 메시아는 나를 구원할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을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인물이 와서 우리를 구원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메시아라고 기록되었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구원에 관한 지식이 없기에,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면 행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비슷한 얘기지만, 금덩이가 많으면 자기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 인격이나 인물이 아닌, 이 세상에 있는 비인격적인 지위나 재물 부귀 이런 것들이 자기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억지로 임금을 삼게 했던 요인들입니다.
6.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세상이 보여준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우리에게는 찬양의 제목이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43-47)
답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세상을 재창조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낮아지심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어떤 그림을 보며) 처음에 이 그림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이 그림은 마리아와 요셉,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낮아지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정치를 통해서 나라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 되는 인간이 가진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 속에서 이 모든 인간의 죄를 그냥 넘어가실 수 없는 공의로운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죄를 전가하게 하시고 그 죄를 위해서 대가를 치르게 하신 후,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공로가 전달되게 하여 그를 구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공과는 사실은 어렵지 않습니다. 밑에 각주가 있는데 그것은 그냥 읽으시면 좋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본문을 놓고 이것이 원래 어떤 본문이 되어야 제대로 된 본문이겠는가 하는 것들을 비평하면서 작성한 것입니다. 20여 년 전에 설교한 내용이 2000년에 책으로 나왔습니다. 이것을 보고 만져서 결과를 내놓은 것이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봤는데도 너무 머리가 아파서 다시 꼼꼼하게 책들 찾아 정리해서 초판보다 더 말끔하게 내놓았습니다. 여력이 되시면 읽어보시고, 위에 있는 내용들은 별로 어렵지 않고, 물 흐르듯 내용이 되어 있기에 여러분이 보시길 바랍니다.
2장 고난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6.17 구역장공과교육2)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3)
녹취자: 강정아
1. 메시아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게 될 것인지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부분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50-51)
첫째, 세상에서 메시아가 배척을 받게 될 것이고 둘째, 선지자의 마음은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예언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래서 마치 사람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오셨지만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그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을 부당하게 대접하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51-52)
첫째, 그분이 메시야임을 몰랐기 때문이고 둘째, 그분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싫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셨는데 어떤 사람은 그 가르침을 듣고 환호하면서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그 가르침을 싫어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가르침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의 삶을 가르치고 그 빛을 증거 하는 일이었는데 어둠속에 있고 싶은 사람들은 그런 곳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것을 가르쳤지만 그들이 악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싫어했고 주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가 멸시를 받은 이유는 그 분이 메시아이심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 오실 것인데 그 분이 메시아인줄 몰라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분을 멸시했고 그분의 가르침이 싫었기 때문에 그를 박해했던 것입니다.
3. 저자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당한 대접, 메시아에 대한 모욕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교회 속에 그러한 신앙생활이 만연해져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52-54)
현재적인 구원의 감격 없이 살아가는 것이 메시아에 대한 매우 부당한 대접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 번 구원 얻는데 사용되는 일회용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서 그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경륜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이 지식이 현재적으로 그에게 감화를 끼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배워가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일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사랑으로 사람들을 구원해서 교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고난을 묵상하며 그 분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돌아가신 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어떤 사람은 사랑이 식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고난당하신 그것이 이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리차드 십스라고 하는 청교도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쉽게 영향을 받고, 세상의 욕망에 대해서는 딱딱한, 영향을 잘 받지 않는 마음이 되고, 반면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의 영향을 잘 받고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의 교훈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딱딱한 길과 같아서 말씀이 뿌려져도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적절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해주신 감격 속에서 사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4. 이사야 53장 3절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가운데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55-56)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온갖 고난을 당하셨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외면을 당하고 귀히 여김을 받지 못했다고 본문에서는 말합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에서 ‘간고’는 ‘마크보트’라고 합니다. ‘마크보트’는 ‘질병’, ‘연약함’, ‘상처’, ‘고통’ 등을 의미하는 복수의 단어인데 메시아가 당하게 될 이것이 아주 많고 클 것임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는 없으셨지만 죄 때문에 고통 하는 인간의 많은 아픔들을 이해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죄는 없으셨지만 인간과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들이 당하게 될 모든 고통, 굶주림, 추위, 목마름 같은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경험하심으로서 자기가 구원할 백성들을 당신의 육체로 배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이런 걸 많이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질고와, 질병, 많은 고통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감할 수 있고, 공감하기 때문에 우리를 긍휼이 여기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사람이 얼굴을 가리는 것 같다는 것의 의미는 그 광경이 너무 비참해서 차라리 보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실 정도로 많은 고통을 받으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율법아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정죄를 당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복종하며 사신 그 모든 핍박과 배척받으신 생애 자체가 그리스도에게는 고통 이였고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직시하는 모든 사람들은 차라리 고통을 볼 수 없어서 가리는 것 같이 그런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 ‘우리’라는 사람들은 이 언급이 예언적 과거로서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와 앞으로 올 모든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예언입니다. 이것이 정말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돌아와서 구원을 받았지만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선지자와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있었지만 그 성경이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 오실 것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는데 구약의 사람들에 비해서는 훨씬 풍부하게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이 메시아를 믿어야 할 책임이 훨씬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희미한 그림자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면 오늘 우리는 이미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명백한 사실의 주인공인 예수를 믿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더 큰 믿음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당연히 믿지 않았을 때의 그 책임은 계시가 희미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5. ‘세상의 안목’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의 눈’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다릅니까?(57-59)
외견상으로는 너무나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정치적 메시아였기 때문에 정말 그럴싸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고 아주 탁월한 지도력과 신적인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로마의 압제에서 회복시켜서 다윗의 왕국 같은 영광을 되돌려줄 사람을 메시아로 기대했습니다. 그러한 구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봤을 때 그리스도는 외견상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위대한 왕도 아니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정치에 너무 관심이 없었고 로마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꿈꾸고 더 나아가서는 로마를 멸망시킬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였는데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저런 능력을 가지면 우리 꿈을 이럴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던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삼고 싶어 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그림과 실제 예수 그리스도가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외관상으로는 볼품이 없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데 믿음의 눈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한 민족을 잠시 정치적인 압제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고통과 샬롬을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치료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궁극적으로 주셨다는 것을 믿음의 눈을 보게 될 때 그 예수 그리스도가 힘이 없는 것이 능력이요 약한 것이 강한 것이며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오히려 세계를 정복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구유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구유’를 생각할 때 흔히 나무로 된 말구유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돌멩이를 웅덩이처럼 움푹하게 파서 그 안에 사료를 주던 것이 그 당시의 구유라고 합니다. 그런 밥그릇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에게 어울리는 탄생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생 동안 종처럼 모욕을 당하시고 마지막으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것을 볼 때 외견상으로 너무나 볼품없는 메시아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과연 저 분이 메시아일 수 있을까 의문을 갖게 되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사람들은 이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6. 우리가 정직하게 복음 앞에 서서, 진지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배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61-62)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이 세상이 재창조될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있는 이유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재창조를 이 세상에 보여주고 그 일을 위해 이바지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은혜의 빛 아래서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배워야하는데 그것은 오직 은혜의 빛 아래서만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한 번의 경험으로는 그 분을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고난을 묵상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구원해주신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배워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배워가는 은혜 생활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왜 구원하셨고 우리가 여기에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20161212팀실장수련회
2016
4장 우리를 위해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7.1. 구역장공과교육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5)
녹취자: 이경순
이 판화가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제가 한때 이 판화를 너무 좋아하고 너무 매료가 되어서 제가 서른네 살에 교수가 되고 4년 후에 서울에 있는 신학교에 있을 때 교수실에 걸어놨던 판화입니다. 투박하게 그린 이 판화에서 이 남자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의 표정을 한번 보십시오! 묘사가 기가 막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해서 감격하는 사랑과 눈물 이런 것들이 다 섞여 있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은혜로운 판화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우리를 위해 형벌 받으신 그리스도입니다. 당연히 대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 제사 제도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인 대속의 개념을 보여줍니다. 대속이란 무엇입니까?(84-85)
‘대속’이란 한자에서 ‘대신한다’라는 개념이고 ‘무엇인가 값을 주고 산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에서 잘 쓰는 단어는 아닙니다. 대속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형벌을 다른 이가 대신 당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대속입니다. 제사제도는 일반적으로 존 오웬 목사님 같은 경우는 인간이 타락하면서 즉시 계시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사제도가 창세기 4장에서나 되어야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창세기 4장 보다 훨씬 더 뒤로 가는 게 아닌가, 이렇게 보는데 존 오웬 목사님은 즉시 계시되었을 거라고 보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이 예배행위는 제사를 동반한 것이라고 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부터 추적해 나가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사제도를 주셨을 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용서를 가르쳐주시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메시야를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제사제도가 타락하자마자 즉시 주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제도 자체가 메시아를 바라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사라는 것은 짐승을 죽이는 것입니다. 죽여서 그것을 제물로 하나님 앞으로 바치는 데 그대로 소나 혹은 양을 그대로 목을 조른다든지 숨을 못 쉬게 해서 죽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해체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의 ‘실현식 교육방식’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닭을 잡을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은 닭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잡아놓은 닭을 사면됩니다. 예전에는 닭을 다 잡아 먹었습니다. 파닥파닥 뛰어다는 닭을 잡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목을 비틀고 가슴에다 칼을 꽂아야 합니다. 피를 다 쏟아내야 고기가 맛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물에 튀겨서 털을 다 벗겨냅니다. 그담에 칼로 배를 가릅니다. 우지직 소리가 날정도로 갈비뼈를 꺾어서 그 내장들을 다 긁어내고 마지막에 손가락으로 갈비사이사이에 들어있는 허파까지 긁어 내야합니다. 닭은 그래도 좀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게 개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게 양이라고 생각해보고 만약에 500킬로그램이나 되는 소를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제사를 드리면서 느끼는 인간의 느낌은 ‘너무 무섭다.’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가?’ 어떤 것도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다루지 않는데 죄는 이런 식으로 다룬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 죄는 네가 졌는데, 왜 죄 없는 이 짐승이 죽어야 하는가?’ 거기서 대속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이 예수는 하나님이 그의 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므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하심이니”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단어는 ‘화목제물’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제사는 제사의 목적과 방식에 의해서 분류가 됩니다. 그러면 방식은 예를 들자면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는 ‘번제’입니다. 그리고 액체를 뿌려서 드리는 제사는 ‘관제’입니다. 관제, 소제, 화제는 제사방식입니다. 또한 이 제사가 무슨 목적으로 드려지는가? 에 따르면, 이스라엘 전체가 드리는 ‘속죄제’, 제사 가운데 하나님의 성물을 불결한 상태에서 접촉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들에 대해서 죄를 범한 것들은 ‘속건제’ 라고 드립니다. 이 ‘화목제’ 는 그야말로 화목을 위해 드리는 제사입니다. ‘화목’ 이란 히브리말로 ‘샬롬’ 이라는 것입니다. ‘샬렘’ 이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이것은 상태 동사로써 ‘평화롭다’ 이런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무엇인가 훼손된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게 예쁘게 만든 케이크가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갖고 와서 망설여집니다. 요즘은 너무 아름답게 장미꽃처럼 휘감아서 만드는 케이크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손을 대기에 너무 아깝습니다. 그게 샬롬 때문입니다. 너무 완전해서 훼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를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과의 샬롬,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샬롬, 그 샬롬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모두 펼쳐지고 그 샬롬을 지향하는 사람 자신 속에서 정신과 육체 영혼과 마음 이 모든 것 사이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져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안정되고 평화로운 상태 이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예를 들면 살면서 걱정이 확 밀려오면 샬롬이 깨집니다. 정욕이 확 하고 일어납니다. 샬롬이 깨집니다. 정욕이나 아니면 욕망이나 이런 것은 아닌데 몸에 기운이 없으면서 기운이 쑥 빠지는 것도 샬롬이 깨지는 것입니다. 샬롬은 정신과 육체가 아울러서 완전한 조화와 균형의 상태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그런 샬롬의 상태에서 살게 하시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샬롬의 상태에서 계속 세계의 아름다움이 증진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샬롬이 다 파괴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샬롬에 이바지도록 살라고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설교한 형제사랑도 그렇게 깨지면 샬롬이 무너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샬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샬롬을 복원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이고 신자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어째든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화목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화목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표현하신 것은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의 샬롬을 누리고 사람과의 샬롬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의 주제가 만물의 회복과 샬롬입니다. 화목입니다. 그것을 세 번에 다 할 수는 없을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분이 찔린 것이 바로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두 개의 단어가 눈길을 끕니다. 허물 죄악입니다.
2. “그가 찔림은”에서 “그”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무엇입니까? 이 자격을 가진 한분은 누구십니까?(87-89)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짐승으로서 온전한 짐승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하거나 혹은 병들거나 이런 것들을 드리면 하나님께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래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에스겔 43장에 보면 “다음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 제물로 삼아 드려서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하기를 수송아지로 정결함과 같이 하고”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흠 없는 것’입니다. 결점이나 혹은 오류 흠집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똑같은 사과인데 매대에 나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굉장히 큰 사과인데 한쪽이 약간 상했습니다. 싸게 팝니다. 만약에 상하지 않고 저위에 하얀 종이 위에 쌓여서 앉혀져 있으면 한 오천 원은 갈 건데 매대 이쪽으로 나와서 이천 원으로 뚝 떨어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흠’ 때문입니다. ‘흠이 없는’ 그래서 완전한 짐승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 제물을 준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자신이 온전히 바쳐진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흠 없는 짐승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를 구속하지 않겠느냐 그 뜻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들이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이 죄를 없애시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에게 화목제물로 주셔서 우리의 죄를 이분이 다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시므로 우리가 지은 이 죗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 용서를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오래전부터 구약에서는 이렇게 수없는 짐승들이 죽어가면서 죄의 심각성과 그리고 누군가 메시야가 오셔서 이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시대에 가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는다. 그러셨을 때에 제자들부터가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을 제대로만 믿었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구약시대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가르치셨던 가르치심을 아주 잘 이해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방해물이 유대교였습니다. 유대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간 후에 생겨난 책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성경에 대한 해석들이 나오면서 이 사이사이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많은 사적인 신앙들이 이 해석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내 진 것이 유대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에 푹 빠져버리면 메시야를 발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이 어두워질 것을 미리 바라보면서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허물”과 “죄악”의 원뜻은 무엇입니까? 이를 통해서 알게 되는 인간 존재의 본 모습은 무엇입니까?(89-91)
허물과 죄악이라고 나오는데 여러분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이겠지만 어째든 조금 설명을 드리면 1인칭 복수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리고 우리들의 죄악들 때문에 결국 여기에 패사라고 하는 것은 금지된 것을 넘어 간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반란’, ‘침범’ 이라는 뜻에 인칭 접미사가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경계를 넘어가므로 우리들이 그것을 여기서 허물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복수로 표현 되므로 서 이것이 죄악이라는 집합적인 의미로 사용 되고 복수로 사용되면서 죄가 얼마나 컸는가, 심각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좀 더 보면 모든 인간들이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자를 향한 하나님에 사랑이 십자가에서 이 둘을 함께 녹여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게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는 불붙는 사랑이 십자가에서 함께 녹아진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참한 죽음은 곧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그리스도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사람의 허물과 사람자신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누가 나쁜 짓을 하거나 나에게 해로운 짓을 하면 죄만 미운 것이 아니라 사람도 미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나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4. 대속의 결과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92-96)
하나님과의 평화와 질병적 죄의 치료입니다. ‘질병적’이라는 것은 ‘고질적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병이 우리 온몸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영향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아까는 죄의 짐이 있었는데 이것들을 벗겨주시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두 가지 사랑을 주셨는데 첫째,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평화를 이루셨고 이것은 당연히 샬롬입니다. 샬롬을 이루셨습니다. 둘째,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서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질병적인 죄로부터 치유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저런 질병적인 상태에서 결국은 오전에 제가 설교한 인간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리면 결국은 주체적인 삶을 살수 없게 되고 결국은 인간이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는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가장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회복시켜주시는 일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5. 십자가를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과 사랑의 성품이 만나는 곳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96-99)
죄에 대한 강렬한 분노와 하나님 아버지 사랑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십자가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계신 죄인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비참함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멸시의 표시가 아니라 예수가 짊어진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입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죄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죄에 대해서 너그러우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해서 심각한 훼손이 우려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죄가 사실은 그리스도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만약에 우리가 심판을 받는다면 모두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류가 모두 멸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모순적인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께 죄를 전가시켜서라도 이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 이게 십자가입니다.
6.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감격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99-101)
십자가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성경이 계시해주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계속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고 이런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은 이렇게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증거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7.8. 구역장공과교육5)
5장 세상의 죄를 짊어지신 그리스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녹취자: 김순미
1. 대속을 계획한 주체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죄악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대속의 길을 여셨을까요?(104-106)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길러보면 다 이해가 되지만,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습니다. 요새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들도 많이 있지만 어째든 일반적으로는 모성애 부성애가 있어서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해도 부모가 사랑합니다. 그게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한 성품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대속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아직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누군지 확실히 몰랐을 때에 하나님이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창 15:17-18)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당시의 고대 근동의 언약체결 의식입니다. 그림이 애매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황소를 반 동강 낸 것입니다. 이것을 횡으로 잘라서 놓은 것입니다. 500kg된 황소를 머리부터 시작해서 반으로 쪼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양의 피가 흐를 것입니다. 그 사이를 한 나라의 왕과 신하가 땅을 부여 받으면서 서로 군신 조약을 체결합니다. 그 체결된 언약서를 가지고 이 사이를 지나갑니다. 무슨 뜻이냐면 ‘둘 중에 누군가가 언약을 파기하면 이렇게 살아있는 소가 쪼개지는 것 같은 신의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 하고 천지신명을 증인으로 불러들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증인으로 불러 들어서 언약서를 체결을 해서 한 부는 왕이 한 부는 봉신이 한 부는 사당에 보관합니다. 이러한 언약체결 의식에 아브람은 아주 많이 익숙해져 있을 때에 하나님이 쪼갠 고기사이를 지나가시면서 당신을 걸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눈높이로 내려와서 이제 설명을 해 주시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쨌든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혀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의 약속이 얼마나 신실하고 믿을 만 한 것인지를 교육시키시면서 신앙을 키워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들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동기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성품입니다. 한번 창조하신 사람들을 진멸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창조하실 때에 의도하셨던 목적을 그대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 이었으니 그런 대속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형별 받아야할 백성들과 화목 할 수가 화해 할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우리 모두의 죄악” 에서 “죄악”에 단수형 명사가 사용된 이유는 무엇입니까?(107-108)
히브리말로 ‘아온’이라고 읽습니다. ‘죄악’ 혹은 ‘악’ 이라는 의미이고, 단수입니다. 그런데 무수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다. 혈기를 부리는 여자가 나옵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오늘 아침에도 혈기 부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자매님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몽둥이 들고 도둑질 하러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신앙적으로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죄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많은 죄를 짓는데 이게 단수로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본질 적으로 짖게 되는 죄악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죄악 되기 때문에 모든 뿌리에 죄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 단어가 수식하는 것은 우리 모두는 복수형이지만 단수형으로 죄가 기록 되니까 많은 죄를 지은 것이 결국 하나로 수렴이 됩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잘 설명하면 뿌리가 죄가 있고 죄에서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는 구분해서 이것을 크라임(crime)이라고 부릅니다. 이거는 이제 형법상의 죄입니다. 씬(sin)으로 불러요. 이것은 마음속에 있는 본질로서 우리 죄입니다. 그래서 sin은 뿌리처럼 끊임없이 죄악이라는 crime을 생산해냅니다. 이 하나의 뿌리에서 인간의 죄악이 시작 되니까 사실 법을 엄격하게 하면 이것을 막을 수 있지만 그러나 이죄는 또 다른 방면으로 갈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인간의 죄의 문제가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뿌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3. 메시아가 대속하여야 했던 죄악의 정체는 무엇입니까?(109-110)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가 숨어 있는 것입니까? 어거스틴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이제 절대로 내 자신을 다시는 주인을 삼지 않겠사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 각기 제 길로 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그냥 내가 좋은 것으로 하나님이 지정하신 것을 무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죄입니다. 이런 길로 갔기 때문에 인간이 대속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해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양은 ‘온순한 짐승이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으니’ 이렇게 묘사하지만 양은 무지합니다. 그리고 고집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 마음대로 갑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 올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길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만 돌아오는 양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어떤 중동 선교사가 제 설교를 들었습니다. 중동 지방에서 원주민이 제일 상스럽게 생각하는 욕이 ‘양 같은 놈’입니다. 선교사가 20년을 넘게 있었는데 들어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이 어딘가 잘못알고 왔거나, 뻥치시나 보다.’ 그리고 진짜 중동 원주민 친구한테 ‘내가 이런 이야기 들었는데 맞나?’ 그러니까 ‘맞다.’ 그랬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교사를 만나서 누가 우리로 말하자면 ‘xxx 같은 놈’ 그러고 욕을 할 일이 없으니까 들어 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그 사람들에게는 최대의 욕입니다. 생각 없고 미련하고 고집 세고 염치 모르는 그런 사람을 가르쳐서 양 같은 놈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죄 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게 다 그릇 행하여 연약함도 있지만 이 안에는 결국은 하나님을 주인 삼으며 그분을 의지하며 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중동 지방 사람들은 양의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이 인간을 양에 비유함 으로써 표현하고자 한 인간의 특성은 무엇입니까?(111)
혼자 살아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표현했으면 이렇게 안했을 텐데 뭐 이렇게 말을 비비 꼬는 것입니까? ‘중동사람은 양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성경은 왜 인간을 양으로 비유했습니까?’ 이렇게 하면 초등학생도 다 알아들을 텐데 말입니다. 복잡합니다.
첫 번째 힘이 세어 고집을 부리고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시력이 매우 나쁜 고도 근시어서 3미터만 벗어나면 잘 못 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방어할 무기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카멜레온은 변신이라도 하고 스컹크는 방귀라도 끼는데 양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양을 만든 것은 양이라고 하는 의미 자체가 혼자 살아 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동물입니다.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와일드 쉽(wild sheep) 산양이 있지 않습니까?’ 산양은 세계적으로 멸종 위기의 동물이 되었습니다. 인간 가까이 있어야 되는데 짐승들을 피해서 계속 위로 올라가니까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위에서 실족사를 합니다. 사실 포식 동물에게는 산양은 도시락에 불과하고 자신을 방어하지 합니다. 인간 가까이에서 보호를 받으며 살아야합니다.
인간이 모든 만물의 뛰어난 영장이긴 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개가 자살 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 괴로움이 개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개처럼 되어서 고민 없이 살아야 될까요?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만족한 돼지 보다 고뇌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 그런 고뇌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위대함을 입증하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사를 읽어 보면 거기에는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하늘은 무엇인가? 땅은 무엇인가? 신은 누구인가? 자연은 누구인가? 이런 모든 질문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꼭 필요한 이유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 하는 답이 ‘나는 누구인가?’ 라는 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이고, 인간이 누구인가? 를 규정하는 것을 인간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둘 중에 하나를 택했습니다. 알 수 없는 위대한 자연이라고 하는 신 앞에 하잘 것 없는 존재로 봐 버리고, 두려움에 떨든가 아니면 치고 올라가서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으로 가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에 대한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성경은 우리에게 최고의 휴머니즘을 제시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누구인지 알 수 있고 당연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을 양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확신하는 것 두 가지는 무엇입니까?(116)
우리가 죄인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악을 행합니다. 죄를 짓는데 이것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우리 속에 있는 죄입니다. ‘아온’이라고 표현 된 것입니다. 이 뿌리 때문에 결국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신국론』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네 단계로 분류합니다. 처음 태어나고 죄가 없었던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인간, 타락하고 난 다음엔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인간, 중생하고 구원 받은 다음엔 지를 안 지을 수 있는 인간 그리고 천국에 올라간 후 에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인간 이렇게 넷으로 인간의 상태를 구분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구원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인간은 이렇게 밑바탕에 깔린 죄 때문에 결국은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이 사람이 그래도 자연 계시의 빛을 받으면서 양심의 작용을 따라서 살면 이 죄는 현저히 줄어 들 수 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처럼 사는 사람과 매일 매일 인간의 도리를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옛날의 우리의 선비들이 공부하고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 ‘경(敬’)과 ‘성(誠’)입니다. 경은 하늘을 향해 경건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자신에게로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성은 인간이 정성을 다해서 이 내면의 세계를 가지런히 하는 것인데 이것이 성리학에 와서는 하늘로 까지 뻗어 가서 이 성이 내면의 원리가 아니라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가 돼서 이 성이 인간 마음의 성이 우주의 성으로 승화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런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단적인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간음, 폭행, 치사한 뇌물 받기 등 양심의 더러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안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결국은 죄악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천국을 향해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번 한주에도 은혜로운 공과를 인도하게 해 주시고 모두 배운 후에는 죄인 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아다. 아멘
20161212팀실장수련회
2016
6장 침묵 속에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7.15. 구역장공과교육6)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 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7)
녹취자: 이경순
오늘은 제 6장 침묵 속에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벌써 이사야 53장 7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마음으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 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1. 그리스도의 양성교리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의 크기를 묵상할 때 얻는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원래 고난은 하나님이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것 같은 괴로움과 고통 슬픔 그런 것을 당신자신이 본질 속에서 겪는 분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겪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겪음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소통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교훈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당신 자신은 겪지 않으면서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당신이 겪는 것처럼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자기의 고백록 첫 장에서 당신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움직이시나이다. 당신 자신은 바뀌지 아니하시며 모든 것을 바꾸시나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세 가지 답변이 주어지는데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고 사람의 육체를 취하셨다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다. 하나님으로서는 고통 받을 실수 없지만 참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고통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교리라고 하는 것은 신 절반 인간 절반이 아니라 엄밀하게 말하면 완전한 신이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되시는 그것이 양성교리입니다.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죄 라고 하는 것 자체가 당신이 정해놓은 법을 위반한 것이나 혹은 당신에게 악을 행하는 것인데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에게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음주가 계속되면 알코올 중독이 됩니다. 모든 음주하는 사람이 알코올 중독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째든 술을 먹지 않았다면 알코올 중독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 되면 계속 술을 먹습니다. 자기는 너무 좋아서 그 일을 계속합니다. 그것은 결국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될 사람을 미워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은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악을 행하실수 있다면 하나님이 자기 모순적 존재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악을 행하실수 없고 또 똑같이 당신 자신에게뿐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악을 행하실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조물들이 잠시 악으로 느낄 뿐이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실 때 신성을 감추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질상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아래에다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없애버리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감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서는 모르실수가 없는데 인간으로서는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서 동시에 모르는 것을 고난을 통해서 배워 가시는 것입니다. 순종을 배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순종하기 전에는 예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이셨나요? 그렇게 말장난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죄가 없으셨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은 아니셨습니다. 아담이 죄짓기 전에 모든 것을 알았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를 가르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학습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때에도 물론 탁월한 지성이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계속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언뜻 언뜻 그분이 모든 것을 아시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그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을 인성아래 감추셔서 모든 인간과 똑같이 죄는 없으셨지만 고통을 당하시면서 자기가 구속해야 될 백성들 처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대가를 온전히 지불하심으로서 우리의 구속주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참사람이어야 했고 그리고 당신의 희생이 사람의 희생과 다르기 위해서는 그분은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신 분으로서 우리의 구속의 제사를 드려주신 것입니다.
2. 메시야의 침묵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 같이 이렇게 예언되었습니다. 실제로 대제사장이 가운에 일어서서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이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침묵하고 아무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마가복음 27장에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왜 놀라워 했을까요? 그렇게 대답을 한마디도 안하면 그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당하게 될 텐데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체의 대답을 안 하셨답니다. 이게 바로 이사야서의 예언이 실현된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침묵하신 이유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침묵하신 이유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지혜를 아셨기 때문에 무슨 지혜입니까? 그들은 자기를 죽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못 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죽이고 그들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죽게 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할 수 없는 고난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만족이 있으셨기 때문에 즉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면 서도 그냥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하시고 당신이 하는 일을 인정해주신다는 만족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고 세 번째는 이렇게 당신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침으로 어떤 결과가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목표가 있으셨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3-1. 하나님의 지혜를 아심: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이 지혜를 아신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인간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아셨고 그래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된 모습이 십자가에 죽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것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담에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으로서는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병을 고쳐주셨지만 이것으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 없었고 공생애 동안에 그들을 사랑하고 섬겼지만 이것으로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단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우리의 대속을 위해 죽으심으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오히려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그리스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는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벳세다 광야를 자랑했을지도 모릅니다.
3-2.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내면의 세계는 어떠했습니까? 이 사실이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곤욕을 당하여 많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고 만족하셨기 때문에 그 고난 속에서도 평안함을 누리셨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에도 당신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있는데 회개 하지 않음으로서 이러한 형벌을 당할 죄인들을 위해서 오히려 중보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본받아서 우리가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은 우리에게 언제나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우리의 힘이 사실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3. 목표에 대한 인식: 성취해야할 목표를 아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이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만 십자가 질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취해야할 목표는 인류의 구속이었습니다.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보다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의 완성이라는 목표가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하면서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는 그러한 감화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 ‘이제 허락하라 이같이 하여 모든 일을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 말씀은 세례를 받으실 때 요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너무 잘 아셨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할 터인데 어떻게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줄 수 있습니까 사실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세례라고 하는 자체가 죄 씻음의 표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레온 모리스라고 하는 유명한 신약학자는 우리가 귀담아들을만한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합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받는 세례의 의미와 달았다. 죄 씻음의 표로서 받으신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죄를 씻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 연합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죄 씻음은 없었지만 이 세례를 통해서 자기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십니다. 그것을 당신자신이 세례를 받으심으로 모든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는 세례 시에 있었던 극적인 사건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에서 딱 한번 특정한 장소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만납니다. 만난다기보다 실제로 임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요단강에서의 일입니다. 그럼 이때에 성부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그 음성을 듣고 성령이 임하게 되는 사람은 성자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딱 한번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서 모든 백성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이 예수 그리스도가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의 지정하신 메시야로 공식적인 취임을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두 가지로 해석을 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마땅하니라 할 때의 이 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뜻일까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당신의 백성과 하나 되게 하시고 모든 백성들에게 메시아로서 공적인 취임을 하시고 그리고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백성들을 섬기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인데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바로 인간을 본래 창조하고 세계를 지으신 그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계획은 인간의 죄에 의해서 잠시 이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구속을 통해서 다시 이 계획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셔서 창조의 목적으로 이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완벽하게 같습니다. 그래서 구속의 목적은 오히려 완전한 창조로 돌아가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세계의 완성은 바로 그 창조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전체의 요절을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심이라 이 관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이 여기에 서있다면 사실은 이 3장 16절이 서 있을 수 있는 토대는 창세기 1장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구속은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필요가 없습니다. 타락해서 창조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속을 통해서 인간을 다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를 통해서 계획된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십니다. 사람은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인생을 삽니다. 그러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렇게 살 때에는 자신의 삶의 방향이 결코 창조의 목적일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철학을 통해서 인생의 참된 목적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그 마지막 결국은 철학은 마지막에 스스로 자신을 주인삼고 그리고 인간이 이 온 우주의 궁극적인 절대자가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게 동북아 사상에서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주돈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유교가 성리학으로 가지치기를 합니다. 성리학을 가지치기하는데 그러면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화두가 성입니다. 이 성을 그 전에까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성입니다. 우리가 치성을 다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참된 성품입니다. 그 성이 사실 그 주돈이 전까지는 대체로 유교에서 인간의 내면세계에 있는 덕이었습니다. 그것을 성리학이 시작하면서 그것을 우주적으로 확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 성은 인간의 마음 안에 갇혀있는 것만 아니라 이것이 뻗어서 우주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절대적인 원리가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우주에 있는 우주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그 성 공교롭게도 이 성이라는 글자가 말씀언변에 이룰 성 자입니다. 그러한 성이 바로 인간의 내면에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이것은 우주 전체에 있는 것의 반영일 뿐이고 우주에 있는 세계 전체를 움직이고 있는 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인간성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국은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그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자신 안을 움직이고 있는 이것이 결국은 우주 전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우주전체가 작동하는 원리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곧 하늘이다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상들이 결국은 다 그런 식으로 귀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설명을 자꾸 이런 식으로 했다가 저런 식으로 했다가 자꾸 뒤집을 뿐이지 궁극적으로 이런 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일평생 개혁신학자 종교개혁자로 살았는데 물론 처음에는 가톨릭의 사람이었지만 그 후에 방황하고 변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종교개혁자가 됩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자료에 의하면 놀라운 것은 칼빈이 일평생을 키케로 저서를 자기 가까이 두고 늘 읽었답니다. 키케로 누군지 아세요? 웅변으로 유명한 우정에 관하여 라고 하는 유명한 작품, 의무론, 도덕론 이런 것 쓴 로마시대 두 번째가 라면 서러울 웅변가입니다. 그리고 정치가였습니다. 그 사람이 쓴 책 중에 선과 악의 목적에 관하여 라는 책입니다. 제목을 보고 너무 가슴이 설래서 도대체 이 사람은 뭐라 했을까 하고 미국에 주문을 해서 한 사흘 만에 책이 왔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이틀 동안 다 읽었습니다. 마지막 다 읽고 나서 헐 그랬습니다. 왜냐면 모든 세계를 움직이는 그것이 무엇이고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런데 인간은 자기 욕심대로 살면 안 되고 어느 한 근원으로 돌아가야 된다. 시종일관 부르짖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인간 본성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인간본성이냐 이런 문제를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책을 읽으며 한숨을 푹 쉬면서 아, 결국은 철학으로서는 물론 그 책에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역시 인간의 철학으로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할 수 없는 계속 도돌이표가 되는 구나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너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젊은 날에 벌써 이미 인생사는 이치와 도리를 깨닫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4. 이사야 53장 7절의 하반절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어디에 비유하고 있습니까?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가 있나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었느냐면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시는 고난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으로서 모르는 것이 있을 수 없었는데 인간으로서 그것을 배워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배워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방식으로 이것을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멜기세덱의 관찰을 받은 대제사장 칭함을 받았느니라
2018.07.22구역정공과교육7
2016
7장 대속의 비밀, 하나님의 지혜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7.22. 구역장공과교육7)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녹취자:이경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대속을 위한 고난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느냐? 왜 그럴까요? 그런 대속의 비밀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지만 무지한 우리들이 그 대속의 비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실 때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1. 대속의 지혜는 비밀이었습니다. 마귀에게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게 대속의 지혜는 어떻게 감추어져 있는지 각각 생각해봅시다.
마귀가 때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지적 능력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마귀도 이 대속의 지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면 자신의 왕국을 위협하는 도전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럼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리의 가르침이 전달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깨닫고 그 왕국의 백성답게 살고자 하고 또 성령의 능력으로 그 왕국의 능력대로 살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도래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 모든 문제의 주범이라고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 자신의 왕국에 대한 도전이 그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므로 죽음의 권세를 부수고 그래서 사단을 궤멸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구속의 지혜를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이 고난에 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혹은 구세주가 오셔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그 전망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개인화화 하여 그 민족이 받을 고난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해하기 굉장히 어려운 게 53장에 나오는 명백한 대속은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음으로 누구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더욱이 지난번에 유대교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유대교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미 당시에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서 구원 그 자체를 정치적이고 그리고 지상왕국의 건립 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고난 받는 메시의 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아의 개념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도 이것이 감추어져있고 유대교가 더욱더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는 차단막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대속의 비밀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아주 명백하게 대속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특히 당신 생애의 말기에 와서는 드러내 놓고 대속의 진리를 말하셨지만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명확했던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유대교가 가르치는 메시아사상에 얼마나 철저히 매여 있었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에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데 제자들은 이스라엘을 다윗의 왕국으로 회복시켜 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라고 물을 정도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심지어 십자가의 고난까지 다 보고도 여전히 그들 속에 있는 것은 이 지상의 왕국의 번영 그리고 탁월한 능력을 가진 메시야가 이 세상을 다시 일으켜 이스라엘에게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하셨는데도 그 사실을 못 깨달은 것입니다. 그 눈의 비늘은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비로소 벗겨지게 되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말씀하신바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하는 그 말씀의 실현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만을 믿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이것을 사람들은 종교적인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아주 분명한 복음의 진리가 현대인의 사상과 합치하지 않는 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것을 아주 명백하게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진정으로 회심하고 거듭나서 회심하기 전까지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 대속의 죽음이 자신의 마음속에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형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자기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에 그 마음이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면 명목상의 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그러나 삶으로는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것을 정직하게 묻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대속의 지혜를 알게 하고 믿어지게 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대속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주 차원 높은 지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에게 믿어지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요한복음 15장26절과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이런 단어는 사전에 안 나옵니다. 이것은 파라클레이토스 라고하고 하는 원어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의미를 아예 신조어를 만들어서 여기다가 다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게 100년 가까이 쓰였으면 이제는 한글 사전에 나올 만도 하는데 아직도 안 나옵니다. 보혜사는 보는 우리와 하나님사이를 중보 한다는 뜻이고 혜는 우리를 도와준다는 뜻이고 사는 우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분 그분이 성령이신데 그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불리워지니 이는 진리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마음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할 것이요 어떤 사람의 성령 체험이 참 된 것인가를 알기위한 매우 중요한 열쇠와 같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성령을 받은 사람의 관심과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항상 우리의 관심을 나와 세상 심지어는 영적인 사물에도 돌아가지 않게 하고 그리스도예수에게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성령을 받은 가장 분명한 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이’라는 사람이 ‘비’ 라는 사람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잘 모르던 데에서 변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오게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도구적인 원인이고 이 도구를 사용하여 유효한 효과가 일어나게 만드는 원인은 성령님 이십니다. 비둘기와 같이 임하셨다는 것은 성령을 비둘기로 이해하기 쉽게 형상화 한 것입니다. 그런 성령이 유효적 원인이고 유효적 원인이라는 것은 효과 있게 하는 원인이고 이렇게 말씀을 복음을 전하는 것은 도구적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에게 믿음을 갖게 하는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여기에 전하는 내용이 성령의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진리들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이 망가졌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고 금세에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생명과 능력을 공급 받는다 그리고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주님이 오실 것이며 천국과 지옥이 있다 이러한 성경의 중요한 진리들을 내포할 때 이 성령이 역사하시고 이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믿음이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미끄러진 인생을 삽니다. 이런 사람이었는데 복음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물론 이 믿음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담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도구적인 원인과 유효적인 원인을 통해서 믿음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믿음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주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믿은 우리를 자랑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배의 태도 말씀을 듣는 태도를 중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가 원하시면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수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보면 복음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또 그 사람들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장작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장작을 아무렇게나 자를 수 있지만 나무꾼들은 항상 장작의 결을 보고 내려치면서 그래서 정확하게 장작을 패듯이 하나님은 당신을 믿으려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고 당신을 위해 선하게 살려는 사람에게 선하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누구도 선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은혜를 받은 원인이었고 믿으려고 한 것이 믿음의 원인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선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4. 대속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지녀야 할 부채의식은 어떤 것입니까?
십자가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이 사람은 지금 엎드려서 계속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갈까요? 몇 개월이나 갈까요? 정말 생애 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을 나는 여럿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길게 잡아도 그렇게 소위 은혜만 받는 사람들은 3년까지 가는 사람을 거의 못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이런 은혜를 간구하고 눈물과 감동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인 은혜의 경험이 철저하게 삶으로 실천 될 때에 그 때에 이 내적인 경험들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설교시간에는 책 읽는 이야기를 했는데 구역장님들이 너무 중요합니다. 담임목사가 책을 안 읽는 사람은 교인들에게 절대로 책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저는 실제로 어느 교인이 담임목사님에게 책을 선물했는데 그것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저는 몇 케이스 보았습니다. 겸손이라는 책을 목사님이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에게 목사님이 한방에 날리신 것입니다. ‘내가 평소에 교만하게 보였어?’ 아니 뭐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기왕에 준 선물인데 그렇게까지 이야기 할게 뭐 있습니까. 그냥 조용히 받으면서 기분은 안 좋았을 수 있지만 뭐 기분 나쁠 것 까지 있겠습니까? 사랑은 언제나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해석의 방향입니다. 좋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받으라고 저 사람을 통해서 이런 것을 주셨구나 하고 읽으면 되는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구역장이 구역 원 들에게 책을 권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조심해야 될 것은 구역 원들에게 실제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구역 원들에게 절대로 읽으면 안 되는 책을 어디서 읽고 꽂혀가지고 심지어 공과를 폐지하고 그 책을 놓고 구역공부를 한 구역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발각이 되어서 아주 심하게 책망을 받았는데 그런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뭔가 건전하고 그리고 교역자들이나 누구라도 능히 인정해줄만한 그런 작품들을 읽고 그리고 그것을 읽도록 권장하고 그런 책을 읽고 5분만 시간을 줄 테니까 한번 발표해보라고 하면 얼마나 바람직 합니까? 그런 것들을 건전한 책을 구역장이 읽고 그담에 그 책에서 받은 도전을 이야기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한번쯤은 교회에서 구역예배로 모인다음에 우리 애프터 타임을 도서관에서 갖자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구역장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내가 이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대게 이런 내용이었는데 너무 좋았다 요 책을 읽었는데 요 책은 이런 면에 있어서 나를 바꿨다 장황하게 하지 말고 몇 번만 이야기하면 얼마나 도전을 받겠습니까? 장황하게 하지 않고 말속에서 한 번씩 툭툭 던지는 새로운 은혜의 세계에 관한 지식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자극제의 역할을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역장의 아주 중요한 의무입니다. 여러분 모범답안을 달달 외운 수험생들의 공부는 변형된 문제에 매우 약합니다. 저는 최근 영국에 출장을 가서 거기에서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비롯해서 유수한 대학의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학교성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때로는 1등한 애가 못 들어가는 케임브리지를 반에서 1/3정도밖에 안 들어가는 데 면접을 워낙 잘 본 학생들이 통과를 합니다. 도대체 무슨 내용으로 면접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봤더니 학과별로 질문이 나눠져 있는데 정말 고차원적인 질문입니다. 그것은 밤새 공부해서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수학 물리학 사회학 모든 것을 엮어서 질문을 내는데 나는 읽으면서 내가 도대체 열문제중에서 몇 문제나 답변을 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면접 보면 떨어집니다. 당연합니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거기 합격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창의성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런 문제가 옥스퍼드에서 났답니다. 수험생에게 물었답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당신에게 질문이 될 수 있습니까? 합격점을 받은 정답은 그게 질문이 된다면 나의 말이 대답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네모반듯한 집을 지었습니다. 네 벽에는 각각 창문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열어도 남향인 집이 있습니까? 정답은 북극점에다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냅니다. 얼마나 사고가 창의적인가 보는 것입니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한 저자에게 감탄을 하고 그리고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를 하는 이유는 그 지식을 가능하게 했던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파악해서 그 사람을 딛고 또 다른 자유로운 존재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지식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삶은 기름 치지 않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처럼 힘겨운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명작이라고 수많은 사람이 도장을 찍어준 고전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자들과 현대에 이것은 틀림없는 작품이라고 도장을 찍어준 그런 작품만 읽어도 10년을 읽어도 다 못 읽고 20년을 읽어도 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작품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자신의 마음으로 양식을 삼고 그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면 가르침이 점점 더 풍성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지적인 자극을 교인들에게 주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구역장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사랑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섬김으로도 십자가에서 주신 사랑에 보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으나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에 묶인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삶 이것이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7.28. 구역장공과교육8)
8장 십자가와 일사각오의 신앙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9)
녹취자: 조경훈
1. 이사야 53장 9절을 히브리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어떤 의미를 갖게 됩니까?(153-154)
여기에 제가 사역을 달았습니다. 사역이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지 한 번 보십시오. “백성들은 메시아에게 죄인들과 함께 한 무덤을 할당했으며, 그의 높은 무덤은 한 부유한 자와 함께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잘못을 행치 아니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속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성경하고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한 번 관찰 해 보겠습니다.
“백성들은 메시아에게 죄인들과 함께 한 무덤을 할당했으며…” 왜 그랬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아주 하찮게 생각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과 한 패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무덤을 할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심히 욕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높은 무덤은 한 부유한 자와 함께 하였다.” 에서 왜 이것을 높은 무덤이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뭔가 솟아나게 했다든지 그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이 메시아를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 중에 한 명이라고 여겨서 죽였고 무덤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그렇게 할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시고 한 부유한 자와 함께 있게 하셨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높이신 것을 의미합니다. 부유한 자의 무덤에 묻히는 것이나 악한 자들의 무덤에 묻히는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에게는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큰 죄 없이 잘 살다가 죽었는데 국립묘지는 못갈 망정 그런 데는 없지만 흉악한 죄수들만 모아놓는 무덤이 있는데 장사도 안 지내고 시체를 던져버리고 흙으로 던져버리는 그 곳에 던져졌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불명예스러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유한자 혹은 존귀한 자와 함께 있게 하셨는데 왜냐하면 그 분은 잘못을 행치 아니하였으며 말로도 잘못한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라고 풀이가 됩니다.
그래서 묘미가 있습니다. 그림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 지내셨는데 죄인들과 묻힐 그 분을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서 건져내셔서 그의 무덤에 안치하신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신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돌이 굴러갔다고 했는데 그런 식의 무덤의 문은 아무 무덤에서나 선택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니라고 합니다. 굉장히 고급스럽게 엄중한 중요성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무덤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죽음이 인간의 숙명이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처음 인간에게, 이후 태어난 인간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죽음은 각각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해 봅시다.(155-158)
여기서 크게 우리들이 거론할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담과 하와 그 사람들이 처음으로 죽음을 경험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가보지 못한 것은 언제나 무섭지 않습니까? 한 번도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치 못했던 이후의 세대, 자신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이 자연스러운 적이 없었던 그리스도가 맞이한 죽음,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때 머리띠도 없었을 땐데 이렇게 하고 다녔을 리는 없겠지만 어쨌든 여자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옷까지 입혔습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나무 잎사귀로 만든 옷 같지가 않고 자라나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나온 옷 같습니다. 어쨌든 옷을 입고 머리띠까지 하고 이렇게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이렇게 쓰는데 이것이 이렇게 되면 붉다는 뜻이고 이렇게 되면 땅이라는 뜻입니다. 이게 다 같은 어근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담은 고유명사이기도 하고 일반명사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고유명사가 사실 보통명사가 된 것입니다. 부르스타 회사에서 만든 부르스타가 보통명사가 되었는데 이와 같은 것이 아담의 경우입니다. 하와는 이렇게 쓰는데 아마도 이 이름은 ‘살아있다’ 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고 보고 이것을 생명이라고 봅니다. 하와인데 영어로는 이브가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사이에 라틴어 성경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옮길 때 그대로 이것을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브라는 단어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어쨌든 생명나무 실과를 주셨습니다. 이 실과는 신비한 실과가 아닌 보통 실과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에 대해서 금지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먹는 것은 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고 너는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따먹고 범죄를 하게 됩니다. 이후에 심각하게 물밀듯이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면서 부터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는 모든 인간들과 모든 자연적인 피조물들이 하나의 사랑 안에 있었고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만물들은 인간에 의해 선의를 받으며 하나님이 주신 보편적인 자연의 질서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와 균형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인간에게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슬러서 원수가 되어 살게 만들고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는 어떤 도덕적인 필연성을 지니게 만듭니다.
내일 자유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필연성에는 물리적인 필연성과 도덕적인 필연성이 있습니다. 당구공을 때리면 모서리를 맞고 또 다른 공을 맞으면 맞은 공이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필연입니다. 만약에 누가 완벽한 조건을 맞추어서 공을 때리는 것을 재현한다면 천 번을 때려도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물리적인 법칙이 적용하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정확합니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수학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수학은 그런 것들의 정확한 규칙을 발견하는데 상수(oonstant)에 무엇을 도입하든지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1,000 이하에서는 A값이 나오고 1,000 이상에서는 B값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필연성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마음속에 악이나 선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을 도덕적인 필연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서 주체가 되서 하나님과의 판단과 상관없이 자기 좋은 데로 살려는 필연성이 인간에게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욕망이 아주 강하게 발현이 되고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의 비존재(non-existence) 없는 것을 열망하게 됩니다. 미움이 그런 비존재에 대한 열망입니다. ‘진짜 보기 싫어.’ 이 뜻은 적절하게 통제하니까 그것으로 끝나지만 욕망이 강력하게 확장이 되면 살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살인의 뿌리를 미움이라고 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미움의 문제는 하나님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십니다.
지금은 거의 안 듣는 시리즈인데 지하실 교회에서 1995년쯤의 설교가운데 ‘미움과 용서’ 라는 5개로 된 시리즈인데 4번째 설교를 중간까지만 하고 잘렸습니다. 왜냐하면 지하실에서 불이 나 정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상태에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태에서 저는 설교를 하고 교인은 들었습니다. 전기로 녹음을 한 것이라 녹음이 안됐습니다. 그것이 풀려져 있는 게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라는 책으로 나온 것인데 들어보면 여러분들이 충분히 인생이 바뀔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가족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미움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주적으로 미움의 문제가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는 인류에 대한 우주적인 계획에 정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미움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항상 내포합니다. 그것이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미워하는 것을 자신의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창세기 기사에 의하면 아벨도 제사를 드리고 가인도 제사를 드립니다. 전통적으로 해석하기를 아벨의 제사는 짐승으로 드리고 가인은 곡식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는 하나님께 열납이 되고 하나는 안됐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충분한 설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후대에 나오는 제사에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문제를 믿음의 문제로 풉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제물이 어떤 재료였는지 상관없이 그 제사가 열납된 것이고 그것은 곧 그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가인의 경우에는 그 반대인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이 문제를 풀 때 이렇게 봅니다. 제물을 드린 것도 깊이 관계가 있다고 보고 제물의 종류도 믿음과 관련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후 즉시 희생의 제사에 대한 계시를 주셨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단언을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가인과 아벨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볼 때에 다른 것이 더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시기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보다 더 예쁜 사람을 보면 시기가 납니다. 외모에 대해서 추호의 관심이 없는 사람은 별로 시기심이 안 드는데 내가 지식에 관심이 있으면 누가 시기가 납니까? 나보다 동일하거나 훨씬 어린 나이인데 내가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 우리는 시기심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기심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이고 나는 나의 삶입니다. 내 삶의 고유성은 지식이나 외모 물질적인 환경과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너무 독특한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공감을 해야 합니다.
내일 설교를 좀 어려울 것이지만 쉽게 할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보십시오. 자유의 문제를 3년 내지 5년 가까이 내가 씨름하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나름대로의 독특한 삶이 있는데 이것은 누가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 의해 반복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전 세계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마우지라는 새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뿔 달린 흰꼬리 원숭이가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요리해서 먹을 것이라면 둘 중에 더 맛있는 것이 우등하겠지만 그런 용도를 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를 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 밖에 안 남았다면 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비교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어쩌면 저 사람보다 더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되면 분명히 나에게는 저 사람보다 다른 어떤 점에 있어서 저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없다면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70억의 모든 사람이 하나 쯤은 6,999,999,999명 보다 낳은 것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가능합니까?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겠지만 나에게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불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만의 아주 독특한 삶에 내 인생에 존재의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일깨워지지 않으면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전 세계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그 새를 뜨거운 물에 털 뽑아서 구워먹고 그 다음 점심이면 배설해 버리는데 최후에 남은 한 마리가 멸종하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것을 찬송해 줘야 됩니다. 그런 사람을 주셔서 나는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바를 저 사람의 탁월한 재능으로 기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만약에 그가 자신의 좋은 재능을 가지고 기여할 줄 모르고 나쁜 짓을 행한다면 그 재능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되 올바르게 재능을 사용하지 못한 그 사람을 매우 불쌍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비록 너 만 한 예술적인 재능은 없으나 그렇게 못된 짓 하며 살면 안 된다고 사랑으로 계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세계는 빛나고 내가 그 사람처럼 잘나지 못한 보람이 있습니다. 동의되지 않습니까?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뭘 쫍니까? 쫄 필요가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화보에 나올만한 미모를 지닌 사람이 되겠습니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누가 몇 세기에 한 번 나올 만 한 기가 막힌 철학자나 사랑가나 예술가나 문학가가 되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톨스토이 같다면 누가 책을 보겠습니까? 자기 책을 읽고 있을 것입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주체가 돼서 살아가가는 것입니다. 가슴에 와 닿습니까?
두 번째로 인간의 숙명을 보겠습니다. 인간이 생명이 충만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경험주의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학습을 통해서 사랑을 배운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사랑도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태어날 때 아담과 하와의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웠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즉시 즉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속에 선행된 어떤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새보다는 작고 곤충보다는 큰 어떤 날아다니는 물건을 발견하게 됐을 때 저게 뭘까? 하면서 이 안에서 파일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주루루룩 하고 움직이면서 동물 아니고 광물 아니고 플라스틱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하는 것은 이미 이 속에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이 왜 생명입니까? 육체의 생명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육체는 먹고 마시고 적절히 해야 삽니다. 설교 준비를 일주일 내내 했는데도 모자라서 하다가 결국 내일 설교할 것을 두 토막으로 나눠서 2주로 나눴습니다. 기력이 하나도 없었는데 요만한 만주 세 개 하고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시니까 힘이 솟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힘은 음식과 마실 것들을 통해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육체의 생명인데 영혼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살아있게 만드는 그 힘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만들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만물을 선의로 대하도록 만들어주는 에너지가 바로 사랑이니까 생명이 관계 속에서 나타났을 때 그것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쉽게 시기하고 누구하고도 잘 지내지 못하고 일은 둥글고 마음은 네모지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안살 수 없는 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부재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속에서 알지도 못하지만 혹은 안다고 하더라도 생각만 할 뿐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런 생명이 부재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구원하셔서 주시고 싶으셨던 것이 영적 생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말 쓰지 않습니까? 순장님. 저 너무 곤고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O miserable man that I am! 비천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모자라서 곤고한 것입니다. 네 끼만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 육체가 매우 피곤한 것을 느낍니다. 육체의 생명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많은 죄들을 대속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 죄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이 기준은 율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이 죄에 대해 형벌을 당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기운을 매일 매일 느낍니다. 도저히 살기가 싫고 너무 너무 곤고한 영혼의 죽음도 경험합니다. 육체의 죽음도 느낍니다. 어제까지 괜찮은데 온 몸이 떨리고 뼈가 쑤시면서 도저히 일어나지도 눈도 못 뜨겠는 것입니다. 너무 심하면 팔다리를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고 땅 속으로 깊이 꺼져 들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생명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상당히 소진되거나 박탈된 것입니다. 박탈은 사고 같은 것에 의해서 충격을 받으면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면서 생명의 기운을 급속하게 박탈을 당하는 것입니다. 노화는 천천히. 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너는 죽어야 마땅 하느니라. 그래도 네가 오랫동안 내 곁에서 음식을 만들며 봉사했으니 하나의 자비를 베풀겠노라. 어떤 방법으로 죽기를 원하느냐?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폐하. 늙어서 죽기를 원하옵나이다. 늙으면 죽음의 기운이 천천히 천천히 들어오는 것이고 사고는 순간적으로 박탈당해 버리는 것이고 타살이나 치사는 한 번에 박탈당해서 생명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죽음에 우리는 매우 익숙해 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죽음과는 상관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종속되시고 죽음의 모든 고통을 다 겪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짐작 할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3.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에서 알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온유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온유함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었습니까?(159-161)
하나님께 자신을 잠잠히 내어 주신 온유함입니다. 인간이 나에게 악을 행하는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온유해 지는 비결은 참아야지. 참아야지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냐하면 내 인생의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이 있고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이 일어난 모든 일은 좋은 일이라면 좋게 될 것이요 나쁜 일이라면 하나님이 그 나쁜 일을 좋게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 때에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둘 사이에 연관을 어떻게 지을지 모를 때에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찬양)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유명한 스패포드(H. G. Spafford) 선교사가 대서양에서 모든 가족을 잃어버립니다. 나중에 깨닫고 배를 타고 가족들이 실종된 바다를 지날 때 슬픔을 누를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은 찬송가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담대함이고 믿음의 유익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용의 힘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맡기시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4.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은 무엇으로 성취됩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일사각오의 정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61-164)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대신 나를 살리셨으니 이제 나의 인생은 그 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는 삶이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 대한 단순한 개인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죽으시면서도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하셨던 행복한 그 삶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고자 하시는 의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얘기합니다.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도식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단 하나도 혼자 있는 것은 없습니다. 모두 복합물(composite things) 복합 사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것 하나도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이 이 속에 결합이 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추적하고 추적해서 내려가는 단위가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분자, 원자, 쿼크 더 작은 단위까지 내려가지만 사실 그것도 인간이 다 발견한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세계는 세상 끝날까지 다 추적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모두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훌륭하게 하나님의 존재의 모습을 본 뜬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로 존재하지 않게 만드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명상록을 인용했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당신 정신의 어두운 구름을 걷어내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면 시간을 흘러 갈 것이고 당신도 갈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의미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결국 세상 만물이 하나로 존재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존재하듯이 나라는 인간의 존재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자기 자신은 그 안에서 영혼과 육체 영혼에서 나오는 작용인 인간의 지성과 의지, 이런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상호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하나의 커다란 우주 속에 함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의 행복이라든지 가치라든지 이런 모든 것들이 관계의 설정 속에서 그것이 무엇인가가 정의되는 것이지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거 다 상관없이 다 필요 없고 나는 오늘 행복하면 제일이야.’ 하고 사는 것은 광기입니다. 그런 광기들을 니체나 이후에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배울 것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 속에서 인간에 대해서 이루어진 모든 사유가 단절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문학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왜 그것이 중요하냐 하면 인문학이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최종적인 답일 수는 없지만 우리가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보상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세계와 우주를 향한 경륜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그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살아서 내가 잘생겼든지 못생겼든지 많은 재산을 가졌든지 안 가졌든지, 내가 지식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뛰어나든지 뛰어나지 않든지, 내가 예술적인 탁월한 재능이 있든지 없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의미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보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애국자에게는 대통령이 되냐 장관이 되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를 일사각오의 사랑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죽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나를 위해 죽을 차례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한 사랑 안에서 발견한 인생의 의미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우리들이 조금만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것은 정말 비이성적인 일입니다.
5. 이사야 53장 9절의 하반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선한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안치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두 가지 깨달음은 무엇입니까?(164)
죄인으로 죽으셨으나 존귀하게 안치됨과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구원입니다. 죄인들의 무덤은 그리스도를 깎아 내리고 죄인 중에 하나로 보려는 하나의 시도였는데 부자의 무덤에 묻히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자의 무덤에 묻히셔서 예수가 존귀해 지셨다고 보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이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모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리마대 요셉을 부자였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복음의 빛이 비췄고 그는 담대하게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이른 구원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는지 한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6. 대속의 효과와 복음의 능력은 빈부와 귀천의 구별 없이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미칩니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온 우주에 미친 대속의 효과와 상관없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167)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의 의미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가장 훌륭하게 전하는 길은 여러분들이 남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남다르게 예뻐지거나 부자가 되거나 해서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커다란 우주적인 경륜 안에 놓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사는 것도 두렵지 않고 죽는 것은 더더욱 무섭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유혹이나 돈에 흔들리거나 좌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런 데서 찾지 않았으니까 그러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남다른 삶이고 존재의 울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것을 알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래서 부요한 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21절을 읽음으로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9장 정결하게 하신 그리스도와 그 열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8.5. 구역장공과교육9)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0上)
녹취자 : 조원정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허물을 짊어지시게 된 이유를 이사야 53장 10절 상반절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10절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 받기를 원하사, 왜 하나님이 아들에게 상함을 당하기 원하셨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속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인류와 모든 만물을 구속하시는 방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고난 받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고난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성부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시행하시고 성령하나님이 그 속죄를 인간에게 적용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원 받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2.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두 가지 경우는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속건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입힌 손해에 대한 배상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제사가 다섯 개의 대표적인 것이 있는데 번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라면 소제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백성들의 화목을 구하는 것이고 화목의 결과를 인간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이스라엘 백성의공동체적인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속건제는 배상이 필요한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것인데 첫째는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서 범죄 했을 때인데 성물은 하나님의 성전의 물건들입니다. 이웃의 물건이나 소유에 대해 범죄 했을 때, 이것이 속건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범죄 했을 때 이웃의 물건이나 소유에 대해 범죄 했을 때 이것이 모두 배상이 필요한 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살게 하시는 중요한 윤리 가운데 하나가 남의 물건이나 남의 소유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위배 하였을 때에는 그것에 대한 배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용서를 빌면서 드리는 제사가 속건제입니다.
레위기 5장 15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부지 중 범죄 하였으면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내가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숯 양을 양떼 중에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 속건제라고 하는 것은 배상이 필요한 죄에 대해 용서를 비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헌제자가 불법으로 훼손한 것에 대해 배상을 맞추는 것에 초점이 두어 있습니다. 왜 굳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성경이 속건제로 표현했는가 하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은 곧 하나님의 소유에 대한 범죄이고 그것을 인간이 배상해야 하는데 인간이 자기를 타락시키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트린 데에 대해서 배상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배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대신 해서 배상을 해 준 것입니다. 그러한 메시아의 역할을 여기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속건제물이라는 표현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우리의 죄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함
그리스도의 대속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한 우리의 잘못을 보상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대속의 은혜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거룩이 아니고 거룩함입니다. 사람들이 헷갈리는데 거룩은 형용사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거룩한 이라고 써서 그렇지 원래 거룩 생활 하면 거룩한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꾸 명사라고 착각을 합니다.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삶입니다.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하셔서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당신에게 사랑을 받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하면서 사랑의 사회로 이루어가기로 원하셨습니다. 이런 식의 어마어마한 환경의 파괴, 이런 것들은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회가 각박하고 미움과 원망, 잔인함, 이런 것들로 가득 찬 것은 인간이 지정하신 자리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지정하신 자리를 떠나는 순간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한 것이다. 창조세계에 있는 인간들에게 부여하신 거룩함, 그것을 떠난 것이고 그 잘못에 대한 보상이, 정확하게 말하면 배상인데 이것은 인간 자신이 잘못했지만 인간이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대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때 인간은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타락을 하면서 인간은 거룩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다시 구속하십니다. 창조와 타락, 구속, 구속이 마지막에 종말에 가서 완성이 됩니다. 이렇게 되어서 이 모든 것이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다시 회복하시고 완성하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입니다.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합니다. 그것에 대한 배상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렇게 구원 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렇게 됩니다. 창조되고 타락하고 타락한 사람을 구속해서 다시 하나님을 향해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마지막에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이것도 역시 똑같이 창조, 타락, 구속, 완성, 여기에서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는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사람들이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물을 선의로 대하고 이렇게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생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삶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영웅적인 삶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알아가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삶입니다. 세상은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빛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사상으로만 빛날 뿐만 아니라 윤리로도 빛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목적을 실현해 나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소유를 범함
그리스도의 대속은 하나님의 소유인 인간 자신과 세상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께 손해를 입힌 우리의 허물에 대해 사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지정된 참된 행복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입니까?
오늘 아침에 설교에 나온 내용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자기 이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신 이유이고 그 구속받은 인간이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렇게 있는데 이렇게 해서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게 됩니다. 인간의 고유한 창조의 영광이 사라집니다. 흔적만 남습니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을 저주하시고 이 세계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완전성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들이 여행을 가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 있어서는 보지 못하는 자연과 문화를 접하기 위해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서 음식을 먹고 쉬고 노래 부르고 하는 이 모든 과정 자체가 자기와는 다른 문화와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이 여행의 즐거움을 느낍니다. 여행을 가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보고 우리들이 접하지 못한 문화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없는 장점 때문에 우리들이 감탄하게 된다면 본래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자연의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대부분도 사라졌고 남아 있는 영광도 인간이 제대로 보지 못하는데도 인간에게 이런 경치의 아름다움이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감격하게 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타락 이전의 세상은 우리가 만약에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에 의해서 모두 상실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께 입힌 손해입니다. 하나님께만 손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인간자신에게도 손해가 되어서 이것들을 누리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신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사명은 다른 사람들을 다시 화목하게 하고 사람들 사이에 다시 화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이 부분이 하나님의 현재적인 신분이라면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사명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에 감격하면서 다시 이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 만물들을 아끼게 됩니다. 우리가 정말 자연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을 위해서 단순히 이익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서 자연이 이런 식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더욱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환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선의로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람들을 먼저 하나님과 화목 시키고 사람들 사이에 화목을 이루게 하고 이 사람들이 자연 만물들을 선의로 대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자신만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하게 만들어 주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화목을 입은 자의 사명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고 다시 이웃과 세상이 마땅히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자리로 돌아가고 환경과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본래 상태에 가까이 감으로써 이 세상이 진정으로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입니다. 특히 죄인이 돌이켜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사명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4.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집착하며 우울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을 두 가지로 제시하는데 삶의 목표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은 목표를 따라 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유형이 있습니다. 회심은 했는데 지식의 현저한 부족으로 삶의 목표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을 못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혹시 회심을 했다 하더라도 현저하게 지식이 부족하면 자기가 구원은 받았지만 어떻게 변화된 삶의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것들이 생기지 않습니다. 은혜에서 미끄러지게 되고 다시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삶의 목표가 바뀌었지만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를 다 아는데 그 목표대로 살아갈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런 것은 끊임없이 자신이 힘이 없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못가는 것입니다. 아침 설교대로 설명을 한다면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두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있으나 이것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안에 진정으로 바꾸어진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표를 따라 살아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올바르게 아는 것은 그 진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사랑할 때 진리는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들이 설명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동시에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인생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은 삶의 목표가 분명히 정해져서 이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거룩함을 갈망하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길을 걸어가고 걸어가야 하지 말지를 성경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갈 길을 지도 받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겠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에서 오는 고난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야 되는 것이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인생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렇게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신비한 방법으로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말씀대로 걸어갈 수 있게끔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것에 대한 인식과 거룩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인식하면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십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회심을 경험하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깁니다. 죄에 대한 인식의 깊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같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사람 마음속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살려고 하는 갈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에 보면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구절이고 이렇게 하나님께 사랑받는 소유가 되는 것을 중심으로 구약이 신약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 여기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이 되신다. 두 번째는 너희도 거룩할지라. 즉, 하나님의 구원 받는 백성들의 최고의 특권은 하나님 당신 자신을 그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특별한 가족 관계 같은 사랑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독점적입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 선택된 백성들도 거룩해 지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별된 태도입니다.
6.이사야 53장 10절 하반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성경이 말합니다. 그의 영혼이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의 영혼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범죄를 위한 속건 제물로 드리면 씨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씨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말로 제라라고 하는 것인데 단일 명사가 아니라 집합 명사입니다. 많은 열매들, 많은 씨들, 많은 후손들을 보게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그 죽으심은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 사랑하게 만들어서 예수의 구속의 열매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들의 날은 길 것이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렇게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마지막에 모두 이것들이 모아져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경륜의 핵심부에 바로 인간의 구속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씨가 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09.02. 구역장공과교육10)
10장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下)
녹취자 : 장미연
어느 덧 제 10장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까지 왔습니다. 본문은 이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길 것이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렇게 나옵니다.
1. “그의 나라는 길 것이요…” 라는 구절에 담긴 의미는 무엇입니까?(192-193)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며 죽는 것 같아도 그의 날이 길다.’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구약 성경에서 “그의 날” 이라고 하는 것은 수명입니다. ‘그의 날은 길 것이요.’ ‘그의 생명은 길 것이요.’ ‘그의 생애는 길 것이요.’ 이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지만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시고 그 다음에 승천하시게 됩니다. 승천하신 후에는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로서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날은 길 것이요”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2. 부활의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194-195)
부활의 소망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저는 어렸을 때 소위 ‘메멘토모리’라고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 확 밀려오면서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 같은 경험을 초등학교 5학년 쯤 경험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훨씬 더 먼저, 이어령씨 같은 경우는 7살 때 굴렁쇠를 굴리고 가다가 경험했다고 하는데 워낙 똑똑하신 분이니까 그랬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 느낌이 어디에 맞닿아 있느냐하면 ‘죽음’이라는 문제에 맞닿아 있습니다. 왜냐면 ‘죽음 이후에 뭘까?’ 그래서 어렸을 때는 죽음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것들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답이 부활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후패해가고 병들고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약해져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결국은 이것들을 마지막에 벗어버리고 다시 새 몸을 입게 된다고 하는 것이 소망입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만들어주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를 믿고 저는 개인적으로 제일 얻었던 가장 큰 유익 중에 하나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이 삶이 모두가 아니라 이것을 넘어선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부활의 소망으로 표현이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활의 소망으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의로운 삶을 살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왜냐면 언젠가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이고 부활은 곧 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또 어떤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가서 생명의 부활은 생명을 누리기에 적합한 부활을 심판의 부활은 심판을 받기에 적합한 부활로 떨어지게 된다고 하는 종말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사람이 넘어지고 그 다음에 다시 주님의 은혜를 받고 이렇게 합니다. 앞으로 우리도 그렇게 걸어갈 것입니다. 이런 고단한 인생의 끝은 수시로 이런 부심이 있을 것 아닙니까? 넘어지고 걸어가고 하는 부심. 결국은 마지막에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천국에 있을 것을 아는 신앙인이고 그리고 낙원에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한 날에 부활된 후에 우린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행 24:15-16) 이 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참고 양보하고 이런 사람들은 좀 손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제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올바른 삶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결국 관건은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해서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이것들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정신없이 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바쁜 것과 정신없이 사는 것은 다릅니다. 바빠도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 받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서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 회심한 청년들 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죽기 직전까지 항상 동일한 원리입니다. 매일 매일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바울의 소망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노력한다고 부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에 안이하게 살아서 알고 보니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되는 이런 일은 없도록 하자. 그래서 내가 주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으니 나도 전심으로 성화로서 나의 구원을 이루어가서 마지막에 부활의 그 날에 주님이 인장해주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런 의미입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서 잠시 모욕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고통이 와도 참는 것입니다.
3.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198-199)
첫째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뜻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대속의 위업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동안에 당신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삶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 잘 사셨기 때문에 훌륭하게 죽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죽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의 생애를 초점으로 맞추면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도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이게 무슨 떡이 아니라 요람에 아이가 누워있는 그림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로 사람들을 먹이셨고, 고치셨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오셨지만 그 때까지 가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서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시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모든 세계와 만물을 통치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성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시고 그다음에 섬기시고 병 고치시고 돌보시고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로 먹이신 것이 이렇게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고 또 이렇게 물고기와 보리떡이 다섯 개이고 고기가 두 마리여야 되는데 (개수가 안 맞습니다. 그림 그린 사람이 잘 못 그렸습니다. 내가 너무 디테일해서 이제 그리는 목사님이 괴롭다고 합니다. 떡과 물고기로 먹이셨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빵 안 먹었습니다. 원형으로 된 빵을 먹었지.) 이렇게 먹이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말하지만 하나님이 너희 굶주린 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너희가 믿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눈으로 한 번 봐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병든 자들을 율법에서는 멀리하고 멸시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병자들을 어루만지시고 고치시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이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과정이었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위대한 뜻이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4. 한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며 펑펑 울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덧없이 방황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204)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이 어렸을 때는 우리들도 사람을 다룰 때 그 아이가 아무 철없는 아이인지 혹은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청년인지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공부해라. 그럼 사탕하나 줄게. 공부 안 하면 사탕 못 먹어.’ 그렇지만 이제 철이 들었으면 네가 공부를 게을리 하면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가르쳐 주면서 왜 사람으로 태어나서 학문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설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그래서 여러분들이 책을 많이 읽으셔야 합니다. 이상하게 소설책이나 허접한 것 보면서 독서한다고 어디 가서 자랑하지 말고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고전들을 차분하게 읽으면서 신앙으로 그것을 해석해서 탄탄하게 다져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수많은 고전들에 대한 이야기들 있잖습니까? 『실낙원』, 『복낙원』 그런 것도 있고 그 다음에 『로마 제국의 쇠망사』라든지, (이번에 고등부 얘들 데리고 북 콘서트하는데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계획했는데) 그런 고전적인 책들을 읽으면서 비록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지만 어떤 고민을 했는가를 보고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를 하면서 기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부모가 그런 것들을 잘 이해해서 아이들과 대화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아이들의 지성을 인도해야 합니다. 조금만 하면 됩니다. 신앙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에 많은 설교를 들었으니까 조금만 차분하게 들으면. 결국은 그렇게 펑펑 울었던 것은 신앙의 감정이지만 이후의 삶이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쭉 삶이 모든 것들이 정렬, 정돈이 되어야 합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정렬이 되잖습니까? 군대 가면 핸드폰 다 반납해야하고 친구들 술 먹으러 나오란다고 전화하고 안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군인으로서 의무에 적합하도록 딱 질서가 지어집니다. 그렇게 질서 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도 그렇게 질서 지어져야 합니다. 그 내용을 상세하게 보면 이미 알고 있는 얘기지만 사도 바울이 화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허망한 복설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혼란시키느냐?’ 그래서 ‘잡아넣자.’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해서 갑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비로소 그 분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이 살리신 분이라면 죽으셔서는 안됐고 죽으신 분이라면 하나님이 살려내실 리가 없는데 이게 무엇인가?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이전에 자신의 삶의 모든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가족과 동포도 잃어버립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삶의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36살 되던 해에 춘천에 폭설이 와서 기도원에 갇혔는데 초가집에서 이걸 읽으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신자의 목표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초점이 흔들리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기해야 할 교육을 받거나 올바른 생활을 안 하고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때는 잠깐은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저는 가출을 해본적은 없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가출하는 아이들 보면 제일 신난 날은 가출하는 그 날입니다. 엄마 주머니에서 돈 빼오고 심지어 애들이 재봉틀 뽑아 가지고 도망가는데 청계천 가서 팔아서 주머니에 돈을 집어넣고 돌아다니는 그 날은 너무 신납니다. 한 이틀째, 삼 일째 돼서 돈이 다 떨어질 때는 너무 불행하고 우울한 것입니다. 그 우울함과 괴로워하는 깊이가 첫째 날 기분 좋았던 그 높이를 상쇄해 버립니다.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딴 짓 하면서 잘못된 삶을 살 때 잠시는 그것이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지만 즐겁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인생을 살려는 모든 태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이 먹으면 먹는 것도 없는데 자꾸 살이 몰립니다.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밥을 안 먹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기 싫습니다. 왜냐면 본성에 어울리는 일이 아닙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점점 체력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리반 같은 거 공부해서 (그때는 막 요즘은 좀 덜 그래요. 옛날에는 전투적으로 했거든요. 우황청심환 먹고 중간고사 보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제가 훨씬 못 되서 매주 시험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막 떨어지는 것입니다. 떨어지면 관둬라. 그대는 영원히 열린교회에서 교사나, 구역장은 절대 못한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착하게 해줘도 되는데 어쨌든 그때는 대차게 밀어 붙였습니다.) 진짜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막 열심히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5개월 약간 안 되고 4개월쯤 되는 교리반 동안에 1,500페이지씩 읽고 외워야 합니다. 모든 친구의 만남 끊고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좋잖아요. 그러면 눈이 확 열리는 것입니다. 갑자기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면 책이 다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전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련된 이 정신적인 체력을 가지고 꾸준하게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만 둬버립니다. 그 다음에 퇴화 돼버리는 것입니다. 교리반 마쳐놓고 그런 사람들이 바보같이 이단 협력 공부하는데 가서 고개를 디밀고 기웃 기웃 거리고 그런 쪼다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말씀을 모를 때에는 몰라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은혜도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자기의 것이 이미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매일 매일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현재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다음에 현재적인 십자가의 감격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습니까?(208)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다음에 제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이 참 사람이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면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달콤하게 들리지만 싫어하는 빚쟁이의 음성은 아무리 달콤하게 이야기를 해도 듣기 싫은 소리가 됩니다. 여학생하고 대화를 하면 즐거워도 엄마의 잔소리는 듣기 싫을 거 아닙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결국 뭐가 결정 합니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결정합니다. 결국 문제는 지식이 모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그 지식이 자꾸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마치 바위에 파도가 밀려오면서 깎여 나가듯이 그렇게 닳아져 나가듯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그 지식을 보존하게 하는 화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매일 매일 사랑하고 경건 생활을 하면서 그 사랑을 간직하고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고 이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계속 늘어납니다. 하나님은 공평 하십니다. 그 말씀의 은혜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삶의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말씀을 더 하시고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오늘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2018.9.9 구역장공과교육 11)
11장 지식으로 의롭게 하신 그리스도
“그가 그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사 53:11)
녹취자: 허혜숙
1. 이사야 53장 11절 상반절은 대속을 완성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가 느끼실 만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만족이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 의미는 무엇입니까? (213-214)
첫째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에 대한 만족.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누구든지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죄 사함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당신이 열어놓으신 구속의 길은 영생을 갖게 하셔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은혜를 누리고 살아갈 것에 대해서 주님이 느끼시는 만족입니다.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놓고 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족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후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그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서 이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것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만족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안타까워하신다. 무엇 때문일까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까지도 걱정하신다, 마음에 안타까워하신다, 무엇 때문일까요? 당신이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까지도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많이 전도하고 풍성한 은혜의 삶을 누리면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족시켜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동안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216-219)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신 생애였습니다. 자 그림을 잘 보십시오. 이렇게 큰 원을 그렸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사역의 핵심에 있는 것은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행동은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한 기록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모두 하나의 초점을 향합니다. 그 하나의 초점으로 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렇게 볼록렌즈가 있다고 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빛이 들어옵니다. 이렇게 들어온 빛은 이렇게 하나로 모아집니다. 이렇게 하나로 모아지는 것처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행동과 말씀에 대한 기록들은 이렇게 렌즈처럼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이 경륜에서 모아져서 마지막 한 점으로 집약이 되는데 이것이 ‘인간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 분과 올바르게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들을 다시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셔서 인간에게 그 풍성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주시려고 하는 계획으로 집약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꾸로 봅시다. 거꾸로 빛이 될 수는 없지만 역으로 추적을 해보면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이런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거꾸로 추적해가면 다양한 사건들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의 의도에서 출발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교회를 만드시고 세상을 경륜하시고 마지막 심판할 때가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본다면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결국은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함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던 많은 가르침을 생각해 봅시다. 다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이렇게 많은 일들을 이루셨을 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마지막 핵심은 결국 이것도 역시 구원으로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의 핵심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로 돌아와서 살 수 있게 하는 살아있는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핵심인 것입니다. 설명을 드리자면 한 인간이 타락한 즉시 이런 구원의 지식들이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지식들이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자꾸 오염이 됩니다. 마귀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명하게 진리를 알고 그렇게 해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고 하는 이런 것이 좋겠습니까? 그래서 그것들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는 계획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속에서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거대한 체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의 종교이고 이방의 철학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렇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이 진리로서 이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니라’고 한 그것이 그런 의미에서 이 지식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핵심적인 그 무엇,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을 지식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이것이 복음으로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되는 구원의 반응입니다.
3. 예수님이 이 세상에 끼친 위대한 영향력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영향력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작용합니까? (220-22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받은 대로 살게 하는 힘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살아있어서 우리를 움직이는 힘으로서의 지식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데서 나오는 지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가 이런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하는 중보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적용하심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 안에서 실제적으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나텔로라고 하는 피렌체의 유명한 조각가가 조각한 매우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 당시에는 사실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 이 사람이 훨씬 더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건축가이고 조각가였습니다. 하박국의 모습을 이렇게 고뇌에 찬 표정을 그려낸 것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라’ 이러한 세상을 하박국 선지자가 꿈을 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것,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해서 누구든지 그 하나님을 알기를 아주 뛰어나게 아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본적으로 \지식과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 지식과 사랑이 결국 이 땅에 있어서 신자들이 거룩하게 되는 길이고 불신자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고 믿음을 통해서 이것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완성되는 나라는 지식과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인간이 타락했을 때 결국은 하나님이 원래 주신 지식과 참된 사랑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구원을 통해서 이것을 복구합니다. 성화를 통해서 이것을 유지합니다. 결국 구원, 성화, 타락, 그 다음에 창조, 창조 시에는 이 지식과 사랑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타락과 함께 이것을 잃어버립니다. 구원과 함께 이것을 복구합니다. 성화 속에서 이것을 유지합니다. 마지막에 영화 시에 이 모든 지식들이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보는 지식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 때는 완전하고 지금 이 사랑은 끊임없이 세상의 것과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에 의해서 간섭받는 사랑이지만 여기에서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세계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지식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복구하고 유지하고 완성하고 이것이 세계 역사가 전개되는 큰 뜻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지식을 자꾸 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식을 얻으려고 안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애초에 사랑이 없었고 있었는데 자꾸 그것을 잃어버리고 또 다른 사랑으로 바뀌려고 하고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큰 틀 속에서 우리들이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신구약 중간 사를 보면 이것이 결국 제사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남의 나라 땅에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허락 할 리가 없었고 허락한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이 나라와 백성은 흩어져있어도 오직 제사는 예루살렘에만 드리는 중앙 성소의 전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금지가 됩니다. 그리고 약탈되고 점령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유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회당입니다. 그래서 회당 중심으로 종교의 문화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의 종교에서 포로기를 통해서 책의 종교로 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해석하고 설교하고 이해시키고 그대로 살게 하고 교육하고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강조점이 제사가 이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결국 개신교의 탄생에는 매우 유리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회당에 모여서 제사를 지내던 것들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성경의 의미를 묻기 시작하고 그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탐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좋은 토대가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제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귀담아 듣기 시작했던 것은 책의 종교의 전통이 중간 사(구약과 신약사이 400년을 의미함) 시대에 생겼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아는 바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수받고 아는 바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아는 바대로 살아감으로써 여기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믿음의 삶입니다. 제시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14장 26절 함께 읽습니다. ‘보헤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진리를 기억을 자극해서 생각나게 하셔서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게 해 주는 것이 성령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한 사람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고 볼 때에 그것이 진실한 역사인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표징이 있는데 하나는 그가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성경의 올바른 진리를 올바르게 알게 되었는가? 두 번째는 그가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이 두 가지가 참된 성령의 체험인가 아닌가에 대한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4. 구원의 모든 역사가 지식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거짓된 유대교의 가르침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어떻게 달랐습니까?(222-223)
유대인들은 인간적인 가르침으로 신자들을 구원에 멀어지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드러냄으로서 구원받게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적인 유전들로 많이 가르쳐서 구약의 전통신학을 유대교주의가 왜곡했고 그래서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종교적인 봉사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수많은 의문점을 불러일으키고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에 물들어있었던 왜곡된 것들을 다 벗겨내시고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참된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서 구원의 성취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은 구약 성경을 펼쳤을 때 하나님의 관심사와 일치하지를 않습니다. 자신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그것을 왜곡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있는 관심사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그대로 구현하심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쉬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5. 경험과 지식 사이의 관계는 무엇입니까?(223-224)
경험적으로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현재적인 은혜의 경험과 참된 지식 이것을 통해서 신자는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적인 은혜의 경험, 참된 지식 이 두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참된 은혜는 사랑입니다. 참된 지식은 지식입니다. 지식과 사랑 이것이 온전해 지는 것 이것이 결국은 성화의 삶입니다. 자, 경험으로 완성되지 않는 참된 지식,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한 번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지식이 그 사람 속에 계속 살아있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적인 은혜의 경험이 계속 되어야 하고, 옛날에만 은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은혜를 받아야하고 성경과 설교 이런 것들로 잘 정리된 지식들이 이 사람 마음 안에서 체계화 되고 체계화 된 지식이 불이 붙을 때에 여기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이고 성령이고 지식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결국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6. 그리스도의 가르치시는 사역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계승되어야 합니까?(224-225)
기도와 진리를 탐구함으로 이 참된 지식을 가르쳐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잘 된 것은 보존하고 잘 못 된 것은 교정하고 그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여기는 발전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서 G1 G2라면 1세대에 받았던 것보다는 2세대에 있는 것들이 1을 통해서 2에 들어옴으로 보다 완전한 형태로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후손들은 이러한 작업들을 더 잘 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 결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갈수록 증폭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각 세대의 임무입니다.
우리는 유구한 전통을 통해서 우리에게 올바르게 전달되어진 것들을 우리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전도 공부하고 교회의 역사도 공부하고 신학도 공부해야 됩니다. 그들 속에 잘못 된 것들이 있는데 잘못 된 것들은 교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올바르지 않는 것들이 후손들에게 학습되고 그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교정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 진리의 탐구를 통해서 성경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고 심화해서 더 좋은 지식을 그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면 다음 세대들이 더 잘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더 잘 길러내면 더 잘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많이 있지만 진짜 어린 나이에 회심하고 예수 사랑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을 기뻐하면서 살아가면 여러분들은 자녀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그들도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겪었던 희로애락을 다 겪습니다. 그러나 주님 손에 붙들려 있습니다. 결국 그 신앙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교회가 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자녀들도 교육하지 않고 기도해서 뭔가 세상을 혁명처럼 뒤집으려고 하는 것은 환상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기울어졌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나쁜 이야기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불평이나 이런 것들로 이것을 뒤집을 수가 없습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우리들이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부흥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고 계승하고 참된 진리를 가르쳐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올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오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7. “나의 의로운 종이…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226-227)
십자가에 비춰지는 것은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 이런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모른 체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 사이에서 이들을 하나님을 아는 참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빛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 있는 대로 힘을 다해서 이런 삶을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입니다.
12장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원한 승리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녹취자: 김정규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원한 승리입니다. 이사야 53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아무 편견 없이 그냥 조용히 읽어만 봐도 예수님의 생애를 그림처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사야 53장이 위대한 장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계시 중 이렇게 분명하게 메시야를 드러낸 본문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구약의 복음입니다.
1. 구약시대의 맥락에서 볼 때, 이사야 53장 12절 상반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생애는 영적 전쟁이었고, 그리스도 고난은 전쟁 그리고 부활은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존귀한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여기서 몫은 히브리어로 ‘חלק’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고 난 다음 각자 몫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승리의 분배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림을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가 있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무리들이 있습니다. (쓰러진 무리들은) 뿔도 나고 창도 들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세력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고난은 그리스도에게 영적인 전쟁이었고 그 영적인 전쟁이 부활로써 완전한 승리로 끝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을 엄격하게 나눕니다. 이런 것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의 양 측면이기 때문에 두 개를 찢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하나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즉시 예언이 주어집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원복음 또는 원시복음’이라고 얘기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사단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 속에 원복음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를 보면 계속 남자가 남자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과 관련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었지만, 그의 몸을 통해 잉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마리아에게서 후손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별칭으로 불립니다.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의미는 결정적인 죽음이며,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게 치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예언을 성취하게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승리를 이루시고 받은 상급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후에 더 큰 보상과 영광을 받으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온전히 드려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키셔서 모든 만물을 그 앞에 무릎을 꿇어 그 분이 주로 불리게 됩니다. 원래 주라는 명칭은 히브리어로 אֲדֹנָ֥י입니다. 이것은 사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칭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사역을 이루고 부활하셨을 때 모든 만물이 그를 주로 인정하여 그 발아래 복종하고 그분의 통치에 복속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도 그 상급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상급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에서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모든 무릎을 예수의 무릎에 꿇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주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주를 가리키면 1차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온 세계를 성부를 대신하여 다스리시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고난과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무덤에 장사지내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가 되시고 통치자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성도는 넘어지기도 하고 회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으로 일생을 삽니다. 그러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어서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는 자리에 가게 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영광이 동일할 수는 없으나 이런 그리스도의 놀라운 영광에 참여하여 그 영광을 함께 누리고 그 영광에 동참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꽃길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명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가고 연약해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상급으로써의 면류관이 있기 전 이 세상에 계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똑같이 성도들도 이렇게 사명을 가지고 인생길을 걸으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가면 그게 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최소한 2가지를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므로 고난 때문에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길을 전혀 가지 않는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저런 길을 걸어갈까?’(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도저히 상상되지도 않았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했을 때에 이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직업이 목사였습니다. 실제로 60년대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신랑감으로 목사의 순위가 이발사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찮았겠습니까? 더군다나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저에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번듯하게 지어 놓은 교회도 별로 없고 학고방같은 2층 교회에서 교인들을 데리고 당시 저의 표현으로 코 묻은 돈이나 받으면서 사는 게 어떻게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리도 없지만 내가 그런 일을 강요받는다면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리라고 고등학교 때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불러주시지 않아서 죽을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말이 씨가 된다고 그렇게 내가 하찮게 여기던 성직을 택했고 그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후 바깥에서 볼 때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큰 싸움이 있는데 그 속에는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깨달음이 저를 설교하게 했고 저로 하여금 책을 쓰게 했지 그게 아니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구역장을 하면 뭐가 좋습니까? 누가 대접을 해줍니까? 구역 원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구역장을 존경해주고 앉을 때 방석이라도 내줄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대접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구역장을 10년째 계속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킨다고 하겠습니까? 그 속에 자신들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뎌낸 것을 기억하라.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원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히10:32-34) 두 번째 유익은 하늘나라의 소망입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육신도 쇠해가고 죽음의 기운이 우리를 엄습하고 시시때때로 우리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어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잠시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소한 2가지 유익입니다.
3. 메시야가 영광스러운 보상을 받은 이유 2가지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 의하면 첫째는 자신의 영혼을 버리심입니다. 여기에 영혼이라고 한 것은 ‘נֶפֶשׁ’입니다. 이것은 목숨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혼을 버리셨다는 의미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뜻입니다. 죄인처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바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고, 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이루시는 아들을 영광스러운 보상으로 갚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셨던 일들이 여기에 나옵니다. 몇 가지 사건이지만 첫 번째는 요람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가 있고, (이것은 삼병이어가 아니라 오병이어입니다. 떡이 5개가 있어야 합니다.) 뱃세다 광야에서 사건이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외롭고 불쌍한 자들을 용납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였지만, 이렇게 하나님만을 섬겼고 인간들을 섬기셨지만 마지막에 그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렇게 고백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신 것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십자가에서 겪으신 하나님과의 무서운 단절의 경험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자의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7절과 68절에 이 예언이 그대로 응합니다. 침 뱉고 때리고 욕하면서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하라 너를 친자가 누구냐’라며 이렇게 멸시를 당하신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며 그 예언이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으나’에서 응한 것입니다.
4.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잊은 채 망각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사야 53장 12절이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신 신비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낮에 설교했지만 젊었을 때 예수를 믿으면 궁금한 것이 ‘왜 하나님이 그렇게 오해받기 쉬운 방법으로 자기 아들을 보내셨을까? 만약 사람의 몸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았을 텐데 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을까?’입니다.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이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기 위해서 예수를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그분을 직접 볼 수 있게 하여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그의 사역과 삶, 인격 고난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혀가실 때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말고의 귀를 잘라버립니다. 그때 예수께서 오히려 그를 심하게 꾸짖으며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기꺼이 체포되어 가셨습니다. 그러면서 남기신 인상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근데 이렇게 하면 이런 일-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고 심문받고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이 성경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5.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받은 고난에 대한 오해를 겨냥하여 “그러나”라고 선언한 후 메시야가 어떤 분인지 밝힙니다. 그가 밝힌 진실 2가지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범죄자 중 하나로 여김을 받아서 사람들의 멸시와 욕을 받지만 사실, 실상은 우리의 죄를 지시기 위함이었고, 오히려 우리의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고 흠 없는 분이셨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지은 죄를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피 흘리는 고난을 당하신 것은 이분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기 위해서는 당신이 이 사람들을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의 깊이를 보면서 우리는 이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생애 전체는 피와 땀과 눈물의 생애가 되었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분의 삶은 온 통 피로 얼룩졌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고난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 그래서 생애 전체가 40일의 금식, 전도를 위한 기도, 사도들을 택하시고 변화산의 사건을 겪고 고난의 십자가를 맞이하시고 기도 중에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이 모든 사건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 생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잘 알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이 기도의 사역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계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고난을 가슴에 새기며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