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이 편지를 쓸 때에 요한은 이미 나이 많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노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땅에 널리 번지고 있는 어떤 이단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단 가르침의 핵심은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동시에 참 하나님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가르침은 제법 영향력이 있어서 이미 예수를 믿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까지도 마음을 혼란하게 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온 사도로서, 그리고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사도로서, 그분이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시라는 사실을 담담히 진술해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아마도 15년 전쯤의 일입니다. 오늘 같이 똑같은 성탄절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본문을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 교인이 예배당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철학교수였습니다. 플라톤을 전공한 학자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였고, 아내와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억지로 교회에 끌려 다니는 남자였습니다. 그날도 동서(同壻) 집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함께 성탄에 모이자고 해서 모였고, 그 사이를 못 참고 후배들과 모여서 24일 이브 밤을 진탕 술을 마시고 보냈습니다. 드디어 그 다음날 아침 성탄절이 되었고, 온 가족들이 예수 믿는 열린 교회로 예배드리러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들어서고 났을 때 이 형제는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앉아보니 의자가 극장 의자처럼 푹신한 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중간쯤 자리를 잡고, '이제 한숨 푹 자야 되겠다.' 숙취도 풀리지 않았으니 이제 잠들 생각부터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잠이 들어서 예배 순서가 진행되든 말든 코를 골며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람이 설교단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성경 본문을 읽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술 취했던 형제가 생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비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설교를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끝났습니다. 다행히 아내는 그 광경을 지켜보지 못했으니, 뒤에 뒤에 줄에 떨어져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집은 대전이었습니다. 운전하고 가는 내내 부부는 말이 없었고, 형제는 깊은 상념에 잠겼습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궁금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놀라운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너무 그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다음 주에 이 교회에 한 번 더 오면 안 될까?"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끌려서 억지로 교회에 나가던 신랑이 대전에서 여기까지 주일을 지키러 올라오자고 하니까, 아내는 깜짝 놀란 것입니다. 형제는 그날 있었던 일을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 다음 주에 다시 열린교회로 예배드리러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너무 궁금해서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똑같이 예배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대신 푹 자려는 심상(心想)이 아니라 뭔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는 심산(心算)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주에도 똑같이 성경 본문을 읽고 설교를 할 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폭포수 같은 눈물이 예배가 끝날 때까지 쏟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가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역시 침묵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아내는 옆 자리에 앉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에게 예배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호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그는 플라톤 철학에서 배웠던 체관(諦觀)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고 합니다. 영어로 인튜이션(intuition)입니다. 이 단어는 플라톤 철학에서 자연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인 진리를 지성이 점프하여 찬란한 진리의 빛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통찰을 갖게 되는 신비한 경험을 뜻하는 용어였습니다. '내가 체관(諦觀)에 대해서 수없이 플라톤 철학에서 배우고 들었더니, 이것을 내가 여기에서 경험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철학자는 본질적으로 의심이 많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어서 내려가면서 아내에게 또 얘기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싫지 않으면 다음 주에 한 번만 더 예배드리고 싶은데, 안 될까?" 아내는 남편이 그토록 교회 참석에 진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기쁘게 허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서야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등록해서 부산으로 이사할 때까지 충실하게 교회를 다녔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학문에 워낙 재능이 있으니, 6개월 만에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신학 책을 완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확고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 형제처럼 주님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설교의 본론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II.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오늘 주제는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A. 하나님의 사랑하심
첫째는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너무나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이 보내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을까?'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자라는 것이 없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결코 당신을 믿게 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열길 물속은 많은 생각을 해야지 겨우겨우 짐작할 수 있지만, 사람의 얼굴은 쳐다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젊은이인지, 늙은이인지, 못 생겼는지, 잘 생겼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이 감각을 사용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육체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비록 믿음이 없어도 예수님을 볼 수 있으니 예수님의 행동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이 무슨 행동을 하시는지를 보면 그 속에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정말 우리에게 살게 하고 싶으셨던 삶이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던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굳게 먼저 믿고 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신 광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야, 신난다.'라는 생각으로 그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분이 뉘시기에 이 놀라운 일을 행하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 너머에 있는 예수님이 진짜 누구이신가를 궁금해 하다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모든 기적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그런 일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때는 믿음이 없어도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걸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도대체 저분이 누구이기에 말씀 한마디로 수의를 두른 나사로를 살려 낼 수 있는가?' 생각하면서, '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절대로 저렇게 하실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의 몸이나 저분의 본성은 사람인 동시에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 '나도 그분을 믿어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을 주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했습니다. 이는 어떤 선한 사람도 본래 하나님이 주신 그 영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학문과 철학, 도덕과 중교, 예술과 문학, 모든 것을 망라하여 자신을 갈고, 닦고, 다듬고, 더 높은 문명으로 진입하면 진입할수록 결국 그것만을 가지고는 도저히 원래 인간에게 하나님의 주신 그 존귀한 영광에 도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귐은 끊어졌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땅에 있는 것을 양식으로 삼고 영혼은 하늘나라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써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살아있는 진짜 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믿지 않고는 구원하실 수 없도록 그렇게 정하셨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던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과 추위, 더위와 굶주림에 굴복하시고, 희로애락을 모두 느끼셨습니다. 우리 인간처럼 똑같이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한 가지 차이는 죄가 없으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핵심은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예수 안에 있는 그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 때문에 이 모든 세상의 시련과 역경을 믿음으로 이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친히 사람의 몸을 있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시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오게 하신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뵙는 모든 사람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을 믿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화목제물로 보내심
두 번째는 화목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제사 가운데 "화목제"라는 것은 그야말로 평화, 화목을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이 화목이 깨지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질 때,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사람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 화목이 깨졌을 때, 우리는 불화해졌다고 말합니다. 그 불화와 화목을 고치기 위해서 화목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자신이 기르던 짐승을 가지고 와서 죽여서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그러면 짐승은 당연히 주인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주인이 부르면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자기를 쓰다듬고 사랑해줄 줄 알았는데 죽이는 것입니다. 짐승도 생명이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에 항거합니다. 드디어 칼에 찔리고 죽어 나갑니다. 그것이 만약에 황소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어마어마한 피가 흘렀을 것이고, 몸부림치는 제물의 몸부림 속에서 수많은 피가 사방에 흩어지고 유혈이 낭자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것들은 율법의 지시에 따라 각이 떠지고, 각이 떠진 것들 증 어떤 것들은 버려지고, 어떤 것들은 제단 위에 올려 불살라집니다. 그리고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게 될 때, 그때 죄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자기를 주인으로 알아보던 짐승을, 짐승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과 불화하고 사람과 화목을 깨뜨린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슬리퍼 신고, 껌을 씹고, 손으로 보드 게임을 하면서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랬더라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는 바로 이 제사 앞에서 자기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린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달으며 통탄해마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죄, 나의 죄, 나의 큰 죄 때문에 이옵나이다.'라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해 주시고, 잠시 하나님과 이 헌제자 사이에 화목의 길이 열리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잠깐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살아 있는 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주님의 충만한 사랑을 아주 잠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 제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오신 날을 기뻐하며 해피 홀리데이(happy holiday)라고 쓰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파티를 갖습니다. 선물을 교환하고 신나는 날로 삼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편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아무 희망이 없던 우리를 위해 우리 자신은 하나님과 도저히 화목을 회복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내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예수님의 편에서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온갖 고난과 결핍을 견디시기 위함이었고, 멸시와 욕을 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었습니다. 끊어질 생명을 지니지 않는 한 죽을 수가 없고,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그것은 희생제물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물이 없이는 어떠한 화목제도 드릴 수 없으니,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류가 고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경험합니다. 여러분, 갑자기 몸살 기운이 나고, 미각을 잃어버리고, 후각을 상실하고, 고열에 시달리고, 신음하게 됩니다. 코로나에 걸린 것입니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서 그것이 활발하게 액티베이트(activate) 하고 있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목을 치료하고, 후각을 회복하게 하는 약을 아무리 코에다 발라서 회복된다고 할지라도 바이러스가 머물러 있는 한 그는 코로나 전파자가 될 수밖에 없고, 더 깊은 코로나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거해야 됩니다. 이 모든 고통, 슬픔, 눈물, 그 많은 쓰라린 인생의 많은 고해(苦海), 바다와 같은 인생의 모든 고통 들은 바로 죄라는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증상들인 것입니다. 이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막대한 물자를 소모합니다.
수십 개 나라의 20대, 30대들에게, 특히 30대들에게 앙케이트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나라가 친구, 가족, 이런 걸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국 사람이 물질적인 풍요, 이것을 1번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 철이 안 든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관계나 친구, 서로 사랑하며 사는 우정, 이런 것들보다는 돈이 최고라는 맘몬 숭배적인 사상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 때문에 살인도 하고, 친구도 등지고, 부모와도 의절하고, 아주 이기적인 마음으로 부모가 자식들을 대하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돈이, 물질적인 풍요가, 모든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절대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 바이러스를 죽이는 일은 못합니다. 증상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절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고, 하나님과 불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눈여겨보시는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당신 없이 충분히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는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요일 4:10) 이 세상에는 반짝이는 수많은 물체들이 있습니다. 정오의 햇빛에 반짝이는 빌딩의 창문들을 보십시오. 여름 바람에 한들거리며 빛나는 은수원사시나무의 반짝이는 잎, 버드나무의 반짝이는 잎들을 보십시오. 바람이 사르르 불 때 호수의 면이 떨리며, 수많은 보석 알갱이를 뿌려놓은 것처럼 호수의 수면이 반짝거립니다. 반짝거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쁘게 화장한 내 얼굴과 친구의 얼굴도 반짝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반짝이는 것은 태양이 있기 때문에 반짝이는 것이지 스스로 반짝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사랑은 여기 있으니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생각해야 될 것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게 하시므로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 사랑을 끊어 놓으시면 그는 아주 실망스러운 한 인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앙의 여부와 상관없이 양심의 거울을 두셨기 때문에 사회가 이 정도는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거울마저 깨뜨려지고 나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천지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이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일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내 힘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 사랑이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찬송)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로 오신 것은 다시는 여러분이 하나님 등지고 살지 말도록, 다시는 주님의 원수가 되어 살지 말도록,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화목 제물로 오셨음을 믿고, 그렇게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서로 사랑하게 하심
마지막 세 번째는 서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말이 나옵니다. "속한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속한다." 돈 많은 로마의 한 부자가 화려한 마차에 타고 뒷자리에 비스듬이 기대어 종이 모는 마차를 타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시장 어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랄 살풍경(殺風景)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얘야, 마차를 잠시 멈춰 보거라.' 그리고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노예 가족 다섯 명이 있는 것입니다. 노예 상인은 아빠 노예에게 채찍을 막 휘두르는 것입니다. '철썩 철썩' 맞으면 노예는 안 아픈 것처럼 힘차게 펄쩍펄쩍 뛰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이렇게 싱싱하고 살아 있는 놈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떨이요.' '이 노예 다섯에 천 냥만 내시오.'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나누어서 팔겠습니다.' '애들 둘, 잘 기르면 쓸모가 많습니다.' '애들 셋, 600원 그리고 어른 둘, 1,400원이요.' '각기 구매해 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아이들에게 흥미를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이제 막 청소년이 되려는 나이입니다. 여자아이 둘, 남자 아이 하나 있는데, 그 중에서 한 여자아이가 빼어나게 예쁩니다. '600원에 내가 사겠소.', 하고 전대를 건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마음씨 좋은 마차 주인이, '잠깐 멈추시오.' '다섯을 모두 나에게 주면, 내가 2천을 내겠소.' 사람들이 조용해졌습니다. '가서 데려 오너라.' 종은 주인의 분부대로 내려서, 마차에 있던 돈을 꺼내 가서 2천 냥을 내놓고 다섯 식구를 샀습니다. 식구들이 찢어지기 직전, 가족들은 울부짖었습니다. 노예로 다 함께 팔려갈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가족이 찢어질 위기에 도달하자 그들의 비통한 피어린 통곡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적적으로 마음씨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말도 안 되는 값 2천이나 주고, 시가보다 2배나 비싸게 주고 그 노예 다섯을 모두 샀습니다. 그리고 마차에 태웠습니다. '가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노예들은 너무 감사해서 백골이 다 부서지도록 이 주인의 집에서 충성할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히거라.' 모두 목욕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다섯 식구가 나왔습니다. '저녁을 주어라.'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얘기하자.' 드디어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 가족들은 불안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자기들은 다 떨어진 헌 옷을 있고 장작이나 패고, 땅이나 패고, 돼지 사료나 주면서 살아야 될 사람들이 지금 거의 양반처럼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식구를 마음씨 좋은 주인이 모두 불렀습니다. '이리들 오너라.' 주인의 책상 위에는 커다란 종이가 놓였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주인이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에는 노예가 너무 많아서 너희들이 필요가 없다.' 내가 너희들을 산 것은 노예로 부릴 심산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도 불쌍해서 내 마음에 눈물이 나서 너희들 산거다.' 노예해방 증서를 써 주었습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자유다.' 도장을 찍어주고, '누구든지 너희를 노예 취급하면 이 문서를 보여 줘라.' '그러면 로마법에 의해서 누구도 너희의 자유를 박탈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쥐어줬습니다. 그때 주인이 아무 대가 없이 지불한 2천 냥, 이게 속전입니다. 그리고 그걸 주고 노예를 사 온 행위가 속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2천 냥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을 화목 제물로 받으셔서 구원받을 우리 모두를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겠다는 약속을 우리가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약속에 기초해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그렇게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면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우리를 구해내 주셨을 때, 우리에게 뭘 바라시고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던져볼 질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거저 우리를 속해 주시고 화목 제물로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구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돈 많은 주인은 이 노예에게 자유 증서를 써 주며 내보냈습니다. 어떻게 해라, 뭘 해라, 아무 말 안 하고 내보냈습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님,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주인님의 집에서 섬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흐느껴 울었을 것입니다. 주인이 단호하게, '아니다, 우리 집엔 노예가 많다.' '너희들은 가서 자유롭게 살아라.' 그렇게 보냈을 때 그 사람들이 각자 한 인간으로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앗싸, 땡잡았다.' '아, 이제 가서 나쁜 짓을 해서 우리도 돈 많이 벌어서 못되게 살아야지.'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주인님의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정말 착하게 살겠습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착하게 사는 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유가 없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유가 많습니다. 신기한 게 뭔지 아십니까? '너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니?' 이유가 되게 많습니다. 논리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너 자신은 사랑하니?' '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이 못된 사람이라고 하는데, 어디 예쁜 구석이 있어서 너는 너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냐?' 너 자신 이외에는 네가 사랑스럽다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넌 어떻게 너를 사랑하냐?' 그러니까 사랑은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끌림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논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논리가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떠한 벌도 내리시지 않음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행한 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화목제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유는 단 하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짐승들을 마구 섞어서 목축을 합니다. 그때는 자기네 짐승이 뭔지를 모릅니다. 각 가문의 문장이 있습니다. 그 독특한 문장을 가축이 들어올 때마다 시뻘겋게 불에 달궈서 그걸 어깨에 '부시싯'하고 지져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낙인입니다. 그리스어로 "스티그마"(στιγμα)입니다. 어깨에 새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면 그 새겨진 문장을 보면서, '저건 평촌동에 사는 김씨 가문의 황소구나.'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죽여서 그거를 벗겨내서 묻어 버리기 전에는 그 표시를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낙인이 심장에 찍힌 사람입니다. 무슨 심장입니까? 예수의 낙인이 찍힌 사람입니다. 내가 아직 죄인이었을 그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사람입니다. 그것이 심장에 찍힌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낙인이 없는 사람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인일 수는 있습니다.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 낙인찍히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낙인이 찍혀서 어느 한 순간도 이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검투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문의 낙인이 찍혔습니다. 싸웁니다. 싸우고 나서 갑옷을 벗고 거울 앞에 딱 서면 누구의 소유라는 낙인이 어깨에 깊이 찍혀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여기에다(팔뚝에) SPQR 글자를 새겼습니다. 그래서 이걸 비춰 보면서 그때 비로소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주인의 가문의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거를 마음으로 느끼는 사람,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그 분이 나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죽으셨으므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으로 구속의 공로로 구원함을 얻은 사람이다.'라는 것이 가슴에 깊이깊이 새겨진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Are you Christian?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존 뉴턴(John Newton)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작사하신 분입니다.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한때 그는 악명 높은 노예상인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냥하다가 영국에 팔아먹는 악질 업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난 죄를 모두 회개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일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실한 종으로 살았습니다. 연세 많이 드셔서 약간씩 약간씩 치매기가 오고 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뉴턴 목사, 정신이 괜찮으십니까?" "내 정신이 아무리 쇠약해지고, 내가 치매에 걸린다 할지라도 눈을 감는 순간까지 두 가지는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오." "내가 한없이 죄 많은 아주 나쁜 죄인이라는 사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화목 제물이신 예수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신 이유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람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다를 게 무엇이 있느냐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사랑을 원수 갚는 세상이 되었으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만큼만 살아도 사람들이 어쩌면 박수를 보낼지도 모릅니다.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은혜를 매일매일 되새기며 내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부모를, 내 형제를, 내 친구를, 내 이웃을, 심지어 나의 원수를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사랑을 부어주셔서 여러분도 그 플라톤 철학자처럼 이성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세계에 눈을 뜨며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서로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를 모든 내어줌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셨고, 예수는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사람,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모든 인생의 꿈이 주님 사랑에 붙잡힌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언젠가는 주님을 깊이 만났던 첫사랑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어땠습니까? 그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피 흘렸고, 그 십자가 아래서 여러분은 회개하며 예수만을 더욱 사랑하기로 다짐했습니다. 기도에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예배 속에서는 언제나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은 솜털처럼 가벼웠고, 마음에 한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찬송)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