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따라간 십자가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 23:26-27)
녹취자 : 조원정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관심 갖기 보다는 어떻게 신앙의 도움으로 일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기독교, 나의 팍팍한 삶에 격려가 되는 신앙, 나의 외로운 삶에 뭔가 도움을 주는 교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중심에 십자가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이 세계가 무엇이고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이 예수를 안 믿으셨지만 기독교를 믿는 가족들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모님들의 도움으로 기어 다닐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제 나이 열다섯, 정확하게 말하면 14년 3개월의 인생을 살았을 때 어느 주일 교회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서울 변두리였는데 교회를 가다가 논둑위에 엎드려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한없이 울었습니다. 집이 가난하고, 물론 가난하기는 했지만 가난 때문에 울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14년 3개월을 산 아이가 그렇게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며 울었을까?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이 세상은 무엇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그 어린 나이인데도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것도 눈만 뜨고 나면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정말 신은 존재하는가? 한참 동안을 논둑에 엎드려서 아무도 없이 통곡하고 한참을 울고 난 후에 일어난 후 눈물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평생 동안 무신론자로 살기로 다짐을 했습니다.
삶의 근거에 대해서 왜 우리가 여기 인간으로 살아야 하고 도대체 우리 앞에 전개되어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이고 자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 기독교가 주는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 확신 있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과 세계,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증언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믿어지게 할 그때에 우리의 눈을 열어주는 위대한 지식의 세계가 십자가를 통해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그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장면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을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고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최대의 뉴스거리는 과연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바다 위를 걷기도 하고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기도 한 기적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재판을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는데 십자가 형벌은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잔인한 형벌의 집행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형 집행을 위해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 같이 법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 법은 엉터리였습니다. 재판은 죄를 지은 사람을 불러서 혐의를 입증하고 징벌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지었다는 증언은 있었지만 그 증언은 서로 어울리지 않고 서로 모순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뒤에는 종교지도자들의 거대한 음모가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사형언도가 내려지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끌려 나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불법한 재판에 마치 순종하듯이 아무 말 없이 그 악한 자들의 십자가 재판을 담당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보기에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해 죽이는 것 같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러한 잘못된 방법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시는 것이 사람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악을 행해 죽이는 것이었지만 그 뒤에는 그 사람들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원 받을 인류의 모든 죄를 감당해 죽임을 당하게 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게 할 길을 여시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 당시에는 두 가지 율례를 따라야 했는데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기 전 채찍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에 끌려 가셔서 거기에서 온 몸에 옷을 벗긴 채 십자가 지시기전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당시 채찍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이 채찍은 그냥 일반적인 채찍이 아니라 가죽 끝에다가 뼈나 쇠 같은 것을 박아서 그것으로 죄수들을 때리면 살점을 물고 뜯어지는 무서운 채찍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채찍질을 수없이 당하셔서 고통을 받으신 후에 예수님은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나타나셨습니다. 약 130kg에서 15kg쯤 되는 무거운 나무 십자가는 히랍어로 ‘스타우로스’라고 불렸고 원래는 여기에 종교적인 의도가 없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종교 개념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 낸 가장 끔찍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세로 막대를 이미 세워 놓고 가로 막대에 죄수를 묶어 도르레 같은 것을 이용해서 위로 올려 가로 막대를 세로 막대에 끼워 고정시키고 손과 발에 못을 박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손 가운데 못을 박았는데 죄수들의 몸무게로 자꾸 시신이 찢어지니까 다음에는 팔 둑에다 못을 박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차 레일 같은 것에 박는 못과 같은 것이었는데 손목을 깨트리고 들어가서 나무에 고정시키고 다리도 못을 박은 후 몸이 자꾸 찢어지니까 다리 아래에다 판대기를 대어서 몸이 고정되게끔 만들었습니다.
십자가 형벌의 잔혹성은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은 그가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이 십자가 형벌의 잔혹성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셨는데 이 형벌이 너무나 잔인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에게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않고 더욱이 민란을 일으키거나 반국가적인 범죄 외에는 이 십자가 처형을 택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게 되셨던 것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던 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온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지식을 계시하실 때 바로 이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입구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으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우리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가져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우리 인생을 바꾸어 놓은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를 이 안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종교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허망한 풍설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 받아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허망한 풍설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고 이 때 사도바울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히 이 같은 이단들을 박멸해야겠다는 결의에 넘쳤습니다.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해서 그것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허망한 풍설이라고 했는데 직접 뵈었습니다. 그분이 물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리이까?”
그의 커다란 신학적인 고민은 두 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무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함으로 하나님께 저주 받은 사람이 확실한데 그 사람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구약에서 사람이 다시 부활하는 예는 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다시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믿었고 죽음을 보지 않은 에녹, 산채로 하나님께 올라간 엘리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매우 큰 인정을 받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 사울이 생각하기에 혼란은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살아난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맞다면 그는 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했을까?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죽이실 수밖에 없는 분이라면 인정하셔서 다시 살아나게 하실 리가 없는데 어떻게 이 모순적인 신학적인 사실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위대한 지식의 빛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도 사실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다시 살아난 것도 사실이라는 이 놀라운 명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속의 교리를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완전히 죽으심으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하나님이 죽음에서 그를 살리셨다는 신앙을 갖게 되면서 찬란한 지식의 빛이 어두운 하늘을 찢고 사도바울의 가슴속에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그가 죽으신 이유가 바로 자기와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살아온 이 끔찍하고 더러운 죄인 때문에 당하신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참한 십자가 고난은 추호도 객관적인 사건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고난을 받으실 때에 내가 거기에 있었고 그가 저주를 받으실 때 그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 외부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맨 처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그 고백 자체가 나 혼자서는 이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자기 굴복이고 그래서 나는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구원의 은총을 필요로 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렇게 무신론자로 살기로 결심하고 돌아선 그날부터 저의 구원은 책읽기였습니다. 책을 읽음으로서 어떻게 이 인생의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고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제가 보기에는 예수 믿는 사람도 훌륭한 사람 같지 않았고 인생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저 사람은 저렇게 그냥 믿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밀려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당하신 그 끔찍한 고난과 그 피 흘림이 나를 위한 것이었구나, 내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 인생의 불행,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 상태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지셔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이 길을 걷게 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자각이 햇빛처럼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다시는 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의존의 마음에서 순종이 나오는 것이고 그 의존의 마음이 꽉 찰 때 열렬한 기도가 나오는 것이고 그 의존의 마음이 꽉 찰 때 자기 지식을 버리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갈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 들어섰을 때 아마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평소에 단아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채찍으로 피투성이가 되고 모욕을 받으신 그 비참한 그 고난의 모습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쓰러지는 그 모습을 보았을 때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그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온 것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갈 때 따르던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졌습니다. 한 사람은 백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뭔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성경을 보겠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34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누어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백성이 서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그 다음에 47절을 보겠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이 사람들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실 때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손으로 나누어 주는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었던 사람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치유해주는 놀라운 능력에 쾌유함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팔복산에서 울려 퍼지는 장중한 산상수훈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조용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구경하며 따라가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정체가 바로 백성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까? 누구 때문에 채찍에 맞으시고 피투성이가 되고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이 백성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당신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로 일체의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야비한 재판장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손을 씻은 무죄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하는 위대한 교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전도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나라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관건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인생에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이기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뭐든지 너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 교육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인생은 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현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현실 속에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사색하게 만들고 우리의 인생을 땅 바닥에서 기어 다니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높이 하늘을 차고 올라 창공에서 자신의 인생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되는 현실이 재미있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현실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될 때조차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고 그런 의미를 탐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가운데 모든 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인생의 깊은 의미들을 성찰하면서 자기를 성숙시켜 나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예수만 믿으면 뭐든지 잘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좋은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한없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항상 내가 좋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사용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아브라함의 생애에 흉년이 들지도 말아야 했고 요셉은 팔려가지도 말아야 했고 팔려가서도 보디발의 유혹은 없었어야 했고 더욱이 모함을 받아서 감옥을 들어가는 일은 없었어야 했고 예수님이 금 마차 타고 영광만 받으셔야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정말 행복하게 살고 성공하고 번영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지 정말 신앙에 근본의 대의가 무엇인지, 한 인간의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인간인가,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하는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겠다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됩니다. 거기에서 결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그런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험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능력들이 거기에서 나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이런 백성과도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상관없이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한 맛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었는데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르는 여자의 큰 무리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저 멀리 갈릴리로부터 내려온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 갈 때에도 목숨을 돌보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현장까지 동참했던 여자들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잘못하면 예수와 한패로 몰려 같이 고난을 당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를 따랐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오늘 여기 보면 슬피 울며 라고 되어 있는데 흐느끼며 우는 것이 아니라 에클라우생, 큰 소리로 방성대곡하고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서 우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끔찍한 형벌을 당할 정도로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예수님인데 왜 우리 예수님을 이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까?
이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눈물로 따라 갔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큰지 억울함과 고통 속에서 가슴을 두드리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포착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이 여자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눈물로 따라가게끔 만들었습니까? 백성들에게는 없는 무엇이 이 여자들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며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는 그것이 자기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까지는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찢겨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끌려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몸을 찢은 그 피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처럼 느껴졌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아픔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부활도 없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신앙의 중심이 되지 못합니다. 이 여자들을 보십시오. 이 여자들은 비록 배우지 못하고 사회적인 고귀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입고 그 사랑을 경험한 후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섬겼습니다. 병든 자 고치고 눈먼 자를 치료하고 주리신자를 먹이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이타적인 삶을 보았으며 그분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임을 목격했습니다. 그 사랑이 이 여자들의 마음속에 강하게 밀려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사랑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고난의 길에 자신들도 동참하는 것이 도리라고 하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갔던 것입니다.
(예화) 1904년도에서 6년도 사이 인도 카시 지방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이 부흥이 영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선교사들에게 감화를 주어서 그것이 평양 대 부흥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성령의 역사가 복음으로 쓸고 한 마을을 지나갈 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습니다. 선교사가 동네에 들어가 보니까 어른들은 없습니다. 아이들만 동그랗게 모여 울고 있습니다. 선교사가 물어 봤습니다. 너 왜 우니? 엄마 아빠는 어디 갔니? 어른들은 모드 예배드리러 교회당에 갔습니다. 너희들은 왜 울고 있니? 엄마 아빠 보고 싶어 그러니? 6살 7살 8살 이렇게 된 아이들인데, 아니에요 아저씨. 엄마 아빠는 예배당에 가시고 우리는 여기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왜 울어?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 밖에 사랑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나 슬퍼서 우리들이 울고 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고 나면 그분을 사랑합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최근에 다른 괴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나 같은 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 고귀한 몸을 십자가에 찢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때문에 눈물 흘려 본적이 언제입니까? 정말 이 미천한 인간을 위해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 하나님 없이 짐승처럼 사는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찢어 내어 주셨던 그 고난을 기억하며 가슴이 떨려 눈물이 흐른 적이 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당한 고난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남은 고난을 위해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이 세상을 위해, 자신 속에 가득 채움으로 자기는 죽고 예수만 충만하게 살아 여러분이 여기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보람찬 생애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