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돌아온 사람
이를 본 자가 증언 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에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19:35)
녹취자 : 윤은정
이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아주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관한 기사가 등장 합니다. 오늘 사도가 요한복음에서 보도하고 있는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고 피와 물이 흘러 놔왔고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자기가 말하는 것이 참이며 이것이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의 복음서에만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본 사람이 요한 한 사람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끌려가실 때에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또, 어떤 제자는 죽기까지 예수를 따르겠노라고 자기의 결심을 표명하였지만 마지막 고난을 받으신 순간에 예수님은 홀로 남겨지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실망하실만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결정적인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이 시점에 사랑하는 제자들이 모두 떠나간 것은 인간적으로는 배신이었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보면 인류의 대속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인간이 보탤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홀로 스스로 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에는 브라이 도리온이라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셨고 거기에서 심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침 뱉음과 매 맞음을 당하시고 그리고 군병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벗겼습니다. 홍포를 씌우고 가시면류관을 얹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긴 갈대로 예수의 손에 임금의 홀처럼 들려주셨으니 이는 고난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시화하여 사람들에게 웃으게 거리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소에 가르치신 것이 평소에 의롭고 공평이었건만 예수님은 이 불법한 무리들의 무법한 재판을 그대로 당하시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못 박혀 죽으시는 그 끔찍한 고난의 길을 가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신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인 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이 세상에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종식시키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사단의 계괴와 그리고 사악한 인간들의 간계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서 오히려 그것으로서 이 모든 사단의 계괴를 꺾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대속의 산 길을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기독교 신앙의 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구약의 성도들도 알았습니다만은 그것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오해받을 수 있는 일이었고, 더욱이 물질은 악할 뿐이고 영이 순결하기 위해서는 물질을 초극하여야 한다는 헬라 사상을 가지고 있는 로마인들에게는 실로 오해받을 만한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아버지의 은혜로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해 동안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바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취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인격을 가지신 분이였지만 인격 없이 사람의 몸을 취하여 하나님의 인격으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는 만지고, 느끼고,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고치고, 고통하는 자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시고, 무지한 자들의 눈을 밝혀주시기 위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참 어버이처럼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을 때, 그들은 구약에서 말로만 듣던 그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 경험하고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사건들이, 행적들이, 기록으로 남아 오늘도 신약의 성경을 읽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눈으로 본바요, 만진바요, 우리가 들은바로라'고 자랑했던 요한이 그리스도를, 예수를 경험한 것 못지않게 성령 안에서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그리스도께 묶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히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에 대해 가장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있고, 그리스도를 앎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알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그리스도를 앎으로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심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중생의 표징이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자기를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규정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토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누군가 하는 정의가 잘못되는 그 순간, 곧바로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보다 더 큰 명제가 위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기독교 문화에 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들어와서 할 수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문화에 젖었거나, 기독교 가문에 태어났거나, 심지어는 교회에 정규적으로 출석하는 사람도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의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 진리를 통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하실 이가 없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새로운 인생관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고 왜 이전에 자신이 사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다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언제나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을 반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에 대한 앎이 있는가? 정말 죄에 대한 심오한 회개와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가? 그리고 나의 인생관의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재편 되었는가? 그래서 나의 인생의 목적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사는 것으로 올바르게 정의 되었는가? 하는 것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충족되어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빛의 자녀이면서도 어둠속을 걷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탐구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복음 진리가 그들에게 믿어졌고,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엄중하고 진실하게 고백을 하였지만, 그러나 실제의 그의 삶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않은 삶, 그가 받은 구원이 진실하다면 삶이 거짓 일 것이요, 삶이 거짓이라면 그의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거짓일텐데,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은 똑같은 이 채플자리에서 지금으로부터 한 7년 전에 채플시간에 강사로 초대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와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머물고 다니던 시절의 총신학교가 아니었습니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는데 저 뒤에서는 일간스포츠를 펴놓고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즐비했고, 더 멀리에서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어떻게 큰지 설교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그런 채플을 삼류, 사류 기독교 대학에서 여러번 보았기 때문에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설교를 멈추고 제가 일가를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사류 신학교가 되어가느냐고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학생들 중, 3분의 2 이상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인상이 오랫동안 남았고, 그리고 한참동안 저의 기도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과연, 저 속에서, 과연, 희망이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배출될 것인가? 예배시간이 구별된 시간인 줄 모르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능욕하는 저 사람들 속에서 도대체 무슨 기대할 만한 기독교 지도자가 배출 될 것인가? 아마 훌륭하게 공부를 가르친다면 그 지식을 무기삼아서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을 섬기기는 커녕, 그 위에 지배하고 굴림하려 들 것이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렇지 못했다면 아마 이 사회에 나가서 발 아래에 밟히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월은 흘렀고 한 5년 정도 흐른 뒤에, 다시 수련회 강사에 초대가 되어서 왔을 때, 저는 두 번째 놀랐습니다. 정말 학교가 변했습니다. 그때 몇 달 동안 우리들이 올렸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좋은 평가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비록 한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로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으로는 그리스도의 삶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위대한 사도바울이 무엇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했을까요? 또, 그 위대한 사도가 어리석게도 구원의 확신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을까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모두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나는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노라.’고 말입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사도가 강력히 촉구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구원은 불변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가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나의 인간적인 생각대신 진리의 빛의 비춤을 받아 나를 객관적으로 살피고, 그 진리를 통해 하나님의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감동되고 자기를 굴복시키고 복종시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아름다움과 잠시 머물다갈 이 세상 나라의 추함을 비교하고, 이 세상의 문화가 하나님을 떠날 때에 얼마나 인간 탐욕과 정욕에 이바지하는 문화가 되는지를 생각하고, 문화 속에 깃든 죄의 요소들을 제거하고, 아브라함 파이퍼가 말했듯이 이 모든 사회를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화하고, 그 안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지식을 심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모든 인간이 일구어 놓은 모든 문화에 아름다운 주님의 경외의 사상이 꽃피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는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현재적 사랑 안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 잡혀가실 때에 모두 도망갔다고 성경은 기록했고, 이 요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요한이 마지막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리시고, 그 관절을 꺽지 않고, 십자가에서 끌어내어지는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보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 과정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침묵해도 전후의 연결을 통하여 무슨 일이 그 사이에 일어났는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열두 제자 중 유일하게 사도요한이 다른 제자들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사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에 십자가 아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세 번째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보라, 너의 어머니라.’ 말씀하신 그 십자가에서의 세 번째 말씀 말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될 때에 주님의 예언을 따라서 모든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요한도 엄습한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고, 어디엔가 숨어있으면서도 그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과 처형에 관한 소식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그런 소식을 접했을 것입니다. 두려워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났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요동쳤고, 주님의 사랑이 이 사람 속에 요동치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쳤을 때의 두려움이 함께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달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려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가 죽는지, 혹은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다시 살아나는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가슴을 치며 우는 여인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백성들도 결국은 모두 흩어져 돌아가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은 대열을 지어 내려오고, 실망에 가득차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뒤로하고 내려오던 참에, 한 청년이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가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왕권과 위엄을 가지신 분도 아니었고, 더 이상 기적의 떡을 베풀어 주시는 분도 아니었으며, 기적의 물고기를 먹여주시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흉악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쫒는다는 자신의 증언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요한의 마음을 충동하자, 그는 그 사랑에 사로잡혀서 두려움도 모른 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사랑했던 몇몇 여인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한때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 눈을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을 거셨죠. ‘보라, 네 어머니이니라.’ 그 후로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처럼 모셨습니다. 한때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가롯유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여 버렸지만, 회개하고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계신 죄인 중에 죄수로 취급을 받아 고난을 당하고, 만약 그를 위한다면 함께 누명을 쓸지도 모르는 위험한 십자가 형벌의 자리로 이 사도요한은 달려갔던 것입니다.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찬양) 새벽닭 울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텐데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날 위해 바친 고귀한 사랑
주님과 함께 있고파서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가네
한때는 두려웠으나 주님이 자기를 위하여 일평생 어떻게 섬기신 것을 기억하듯, 자기를 위해 어떻게 고난을 당하시고, 자기를 위해 어떻게 섬기신 것을 기억할 때에 사랑하는 이 제자는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십자가 형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오늘날 예수 때문에 성공하고, 예수 때문에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고통을 당하려는 사람은 얼마나 소수입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십자가가 마음에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는 것 없이는 결코 자신이 믿는 바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주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는가? 그리스도는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 십자가를 타고가려고 하지는 않는가? 라고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요한처럼 잠시 주님을 떠났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깊이 회개하고, 요한처럼 용기를 내어 십자가의 주님께로 돌아가서 그분의 마지막을 지켰던 이 요한처럼 주님을 새롭게 대면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