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는 가정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자녀를 기른다는 것(엡6:4) 2007.5.6 주일오전 1
2. 네 부모를 공경하라(룻1:16) 2007.5.13 주일오전 11
3. 하나님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삼하18:33) 2007.5.20 주일오전 21
4. 지식을 따라(벧전3:7) 2007.5.27 주일오전 29
5. 부부, 질서와 사랑(엡5:22-24) 2007.6.3 주일오전 40
6. 이혼을 생각하십니까?(막10:6-9) 2007.7.8 주일오전 53
7. 이혼한 그대에게(막10:6-9) 2007.7.15 주일오전 66
8. 네 형제와 화목하라(창33:3-4) 2007.7.22 주일오전 74
1. 자녀를 기른다는 것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I. 본문해설
어린이 주일입니다. 원래 어린이란 말은 우리말에 없었습니다. 어린이란 말이 생기기 전에 우리가 부르던 많은 말은 ‘애놈, 애자식, 어린애’란 말이었습니다. 유교 사상에는 나이 어린 아이들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나라의 미래가 없겠다고 생각하고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아이들을 무엇인가 높이는 명사를 만들 수가 없을 까하고 어리다 할 때 ‘어린’이란 말과 사람을 가리키는 ‘이’, 사실은 일하는 이, 밭가는 이 할 때 이 ‘이’는 원래 성인들에게만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이라는 형용사와 사람을 높이는 말인 ‘이’라는 말을 합쳐서 어린이란 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에 대한 관심을 우리들이 갖게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그 아이들에 의해서 언젠가는 우리의 세대가 끝나고 우리의 하던 일들이 아이들에게 물려지게 됩니다. 아이들이 정말 올바르게 태어나고 올바르게 자라나게 될 때에 그 나라가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도 이 세상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치를 똑같이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이 정말 밝고 아름다우면 교회의 미래는 빛납니다. 그러나 어둡고 칙칙하면 교회의 미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의 자녀를 기른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II. 자녀를 노엽게 하는 길
오늘 이 에베소서 6장에서는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노엽게 하다라고 하는 것은 “오르게(ὀργή)”라는 명사가 유래되는 동사인데 이 오르게는 분노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자녀로 하여금 분노를 품게 하지 말고 잘 양육하라는 뜻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명령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명령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우리가 자녀를 기르면서 자녀를 분노하게 하는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신과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부모인 우리에게 모두 이야기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고 또 있는 모든 것이 부모에게 이야기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무엇 때문에 부모에 대해서 이렇게 노여움을 품게 되는 것일까? 이 노여움 속에서 아이들이 망가진 인성을 갖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1. 과도한 징계
부모의 과도한 징계입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기본이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이 분별력을 길러주기 가장 좋은 나이는 언제냐 하면 어른이 되어서가 아니라 세계를 처음 접할 때, 그때에 그 아이들이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가장 잘 갖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기쁨과 분노, 슬픔 이런 것들을 엄마 얼굴을 통해서 볼 수 있을 때가 되면 충분히 선악에 대한 구별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어려서부터 엄마의 표정정도만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시기가 되면 엄마는 그 아이의 하는 행동이나 모든 것에 대해서 싫고 좋음을 선악의 기준에 따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때 그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직감적으로 그것들을 배워나갑니다. 이것이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올바를 때에는 호의를 보여서 상을 주고 잘못했을 때는 그것을 책망함으로써 그 선악에 대한 판단과 거기에 부합하는 행동들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징계는 바로 아이가 잘못했을 때에 적기에 정확하게 징계를 함으로써 그 아이가 선악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인간으로서 그리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면 자녀들을 징계할 수 있는 권한을 부모에게 주신 이유는 그 권한을 통해서 아이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아이를 차마 마음이 약해서 때리지 못하면 그 아이를 망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징계가 올바르지 않거나 잘못은 조금 했는데 부모가 분노에 못 이겨서 과도하게 징계를 하거나 징계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을 때, 어떤 때는 기분 좋게 봐주고 어떤 때는 개 패듯 패고 이러면 부모는 마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조폭의 보스처럼 됩니다. 이러면 아이들은 선악에 대한 일관성 있는 생각을 갖기가 힘들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이 징계가 과도하게 되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는 사랑의 연합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예전에 엄격한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엄격하다는 것과 과도하게 징계한다고 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아이들을 어떻게 기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많이 징계해도 사랑으로 이루어진 부모와의 연합의 관계가 훨씬 튼튼하면 아이들이 잘 받아드립니다. 이것이 약한데 징계가 강하게 되면 아이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부모의 분노를 읽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노여워하게 됩니다. 아이는 아직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 노여움을 부모에게 모두 말하거나 항거할 수 있는 논리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 속에 그대로 남는 것입니다. 아이들에 대한 심한 언어적 폭력, 심한 매질 이런 것들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 그대로 남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녀를 망치는 것입니다.
2. 그릇된 기대
우리 부모들은 모두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게 되면 각자가 어느 정도는 모두 착각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옛날에 돌잔치 할 때(요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만) 쌀, 연필, 실타래, 돈을 놓습니다. 실을 잡으면 오래 살겠구나, 연필을 붙잡으면 공부를 잘하겠구나, 돈을 붙잡으면 부자가 되겠구나, 하여튼 붙잡아서 나쁜 것은 안 가져다 놓고 붙잡아서 좋은 것은 모두 다 갖다 놓습니다. 그 중에서 부모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연필을 붙잡는 것입니다. 연필을 쌀 위에 꽂아 놓으니까 애한테는 제일 잘 보입니다. 열 명이면 아홉 명은 연필을 붙잡습니다. 그 아이들이 다 가방 끈이 긴 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희망사항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 부모들이 꿈을 꿉니다. ‘이 아이는 운동을 너무 잘 할 것이다, 우리 아이는 아니야,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천재성이 있을 거야, 이 아이는 특별히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아이일 거야.’ 이렇게 착각을 하기 때문에 사교육이 이렇게 번창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 중에서 음악학원 몇 개 안 다녀본 아이들 없고 태권도 도장 같은데 안 가본 아이 없고 축구 운동복이나 유니폼 한번 안 입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부모들은 무지개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창조하실 때는 이 드넓은 세상에 각자 개성을 가진 아이들로 창조하셨습니다. 학교에서도 보면 신학교에 들어가면 1학년 때 다 교수되고 싶어 합니다. 교수는 한반에서 한명만 나오면 됩니다. 교수는 많은데 학생이 별로 없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너도 나도 교수가 되고 싶고 자기들이 무슨 공부에 특별한 재주로 태어난 줄 아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 물어보면 모두 대통령이 된다고 합니다. 온 나라가 대통령 천지가 될 것 같은데 점점 현실화 되어서 그 다음에는 대통령은 못 되더라도 아파트의 줄반장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신세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들을 향해서 소망을 갖는데 소망의 종류가 뛰어난 운동선수, 뛰어난 공부 잘하는 사람, 뛰어난 예술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것은 삶의 양태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부하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 악기 잘 타는 사람 이런 각자의 삶의 양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사느냐 하는데 관심이 모아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깨달음이 없었으면 지금도 굉장히 형편없는 부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장하면서부터 다른 것은 모르는데 돈을 많이 벌겠다, 권력을 휘어잡겠다. 그런 것은 별로 없었는데 남이 따라 올 수 없는 천재로서 살고 싶은 소원이 있었습니다. 천재였다면 그런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언젠가 물었습니다. 정말 행복하게 평범한 사람으로 백 년을 살겠는가? 불행하게 1년을 천재로 살겠는가? 하면 난 두 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했을 것입니다. 살아보니까 천재가 아닙니다. 별 볼일이 없습니다. 결혼을 해서 힘들게 7년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애가 어쩜 말을 잘하는지 30개월 되었을 때에는 둘이서 세상 돌아가는 일상사를 다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기저귀 차고 앉아서 했습니다. 천재가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치원 들어가니까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쓰고 한글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책을 읽으면서 혼자 터득했습니다. 선생님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갔더니 들어가는 날부터 계속 100점입니다. 굳이 100점 맞았는지 볼 필요가 없습니다. 100점 못 맞은 것만 보면 됩니다. 4학년 때까지 갔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내가 못 이룬 꿈을 우리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주시는구나.’ 그러니 내 기대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평범하게 행복하게 길게 지리멸렬하게 살면 뭐하나? 1년을 살아도 모든 사람이 따라 올 수 없을 정도의 비범한 천재로서 살다 죽고 나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 사람이 남겨놓은 글이나 사상을 가지고 몇 백 년 동안을 천착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미국 문학사에 키이츠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 65세가 넘은 어느 교수가 있는데 키이츠를 전공했다고 합니다. 학생에게 어느 날 그러더랍니다. “아, 키이츠는 모르겠어. 일생을 연구했는데 나는 이 사람 정말 이 세계를 알 수 없어.” 키이츠는 26살에 죽었습니다. 26살에 죽은 애를 65세의 대학자가 평생을 연구했는데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천재와 평범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전 아닙니다. 자기가 못해 본 것을 자식에게 실현해 보고 싶어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눈물의 씨앗이 시작됩니다. 4학년까지는 그 길을 가더니 5학년부터 범재가 되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성적이 낙엽 떨어지듯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책은 많이 읽습니다.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밥만 많이 먹습니다. 살이 계속 찝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배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허리가 32인치를 넘던 그 날 진지하게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으로 허리가 30을 넘을 수 있을까? 지금도 충분히 30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닙니다. 처음에는 걱정도 하고 염려도 하고 왜 이런가? 했는데 점점 약발이 안 들어갑니다. 나중에는 아내를 향해 섭섭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난 이렇게 사역에 바쁜데 애를 이렇게 밖에 못 키우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얘가 마음으로 아빠가 자기를 만족해하지 않고 실망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를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빠는 젊은 나이에 교수이지 책도 쓰지 오라는 대도 많지 가끔 신문도 들춰보니까 크게 나오고 TV에도 나오고 하니까 애가 계속 주눅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몇 년이 되고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그러는데도 개선이 안 됩니다. 나중에는 포기가 되었습니다. 희망이 없고 내 꿈은 없고 현실은 현실이구나!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더 깊이 이 아이의 교육에 개입을 해서 이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가 확 꺾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봐야 결국 평범한 아이들 중에서 중간도 될까 말까인데...사실 내가 건 기대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과 나의 관계가 아주 멀어졌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녹이셨습니다. 녹인 핵심이 무엇이냐면 “얘야, 나도 네 아버지이고 너도 네 새끼의 아버지인데 네가 자식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가 아버지인 내가 널 대하는 것과 비슷하냐?”였습니다. 이것이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나 자신의 살아온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시인이 시편에서 고백한 것처럼 난 우리 부모님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려서 헤어졌습니다. 항상 시편을 보면서 그랬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리로다. 주님이 나의 아버지셨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물론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 앞에 혼날 때로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누구와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내가 나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을 인해서 기뻐하시고 마치 하나님이 나를 기르시는 것이 잘 자라는 화초에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햇빛이 잘 비치게 하고 바람이 불면 덮어주는 것 같은 양육이었다면 나는 아이에게 철사로 감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자라게 했구나. 자존심이 상해서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여러 날을 울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리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릇된 기대를 가지니까 그 기대대로 안 움직이는 것이 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식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20년이 넘은 때의 일입니다. 춘천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집이 돈도 있고 괜찮은 집이었던 모양입니다. 하늘나라에 간 자기 딸을 위해서 좋은 시설을 빌려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중3의 여자이인데 내가 보기에 천재는 아니더라도 수재에 가까운 아이였습니다. 총명하고 공부 잘하고 사진 보니 얼굴도 예쁘게 생겼습니다. 마음을 강력하게 끄는 것이 문학, 음악, 미술이었습니다. 공부도 탁월하게 잘 하지만 시간만 나면 시를 쓰고 문학 작품을 읽고 그림을 그려서 시화를 만들고 음악을 작곡을 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탁월하게 공부에 능력이 있으므로 부모가 욕심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런 것에 정신을 팔면서 성적이 떨어지니까 이 아이를 강력하게 통제를 하였습니다. 어느 날 공부방에 가보니 아이가 소식이 없어 보니 자살을 했습니다. 아이가 모든 것을 표현을 하지 않으니까 몰랐습니다. 그때서야 부모가 펑펑 울면서 뉘우쳤지만 이미 끝나고 딸은 죽었습니다. 그려놓은 그림들을 수없이 빼앗아서 불 지르고 창고에 감추어 놓았는데 방에 들어가 뒤져보니 여기저기서 수없는 작품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전문가에 보여주니 다들 하는 말이 탁월한 글재주가 있다고 하고 음악을 하는 사람이 보면 이 나이에 어떻게 이런 곡을 만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천재성이 그 아이에게 있었습니다. 꽃을 펴보지도 못하고 부모의 그릇된 기대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다 펼쳐놓고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딸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잘못하는 것입니다.
3. 그릇된 모본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무릎에서 얼굴을 보고 배우지만 자라면서 그 아이들이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엄마 어깨 너머로 세상을 보면서 엄마의 품을 떠나며 이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때에 비로소 주관적으로 보이던 엄마, 아빠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려서는 그 부모가 자기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점점 크기가 줄어들면서 바깥세상이 의식 속에 들어옵니다. 거기서 부모가 객관화됩니다. 아이들이 다른 부모들을 보면서 자기 부모를 객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가르치는 것과 살아가는 삶이 일치하지 않게 되면 아이들은 이제 부모와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 힘들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아멘’하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믿음이 있기 때문이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틀림이 없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은 참 진리이라고 하는 선신앙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성경 속에서 깨닫게 된 진리들을 ‘아멘’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이가 자랄 때에도 엄마 아빠의 품에서 처음 만날 때에는 세계의 전부이므로 의심하지 않습니다. 비추는 것, 들리는 것 모든 것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판단력이 생기고 바깥세상을 보면서 엄마를 보는데 행동과 말이 일치를 이루고 앞에서 보는 모습과 뒷모습이 거의 일치합니다. 또 일치되지 않을 적이 가끔 있어도 엄마 아빠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려고 회개하고 몸부림치면서 부합하려고 한다는 것을 보면 혼돈이 일어나지 않는데 틀립니다. 행동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 아빠는 올바른 사람인데 행동이 무엇인가 이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말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부터 엄마 아빠가 무슨 말을 하면 그대로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고 머리에서 해석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해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판단력까지는 아직 못 갖추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엄마 아빠가 무슨 말을 하면 제가 알아서 알아듣습니다. ‘제가’라고 하는 자기는 선악을 제대로 판단하며 사물의 이치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못 갖춘 자기입니다. 제멋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관계라고 하는 것은 이런 말의 흐름 속에서 관계가 형성됩니다. 이런 것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이들이 노여워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아직 논리도 없고 권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엄마 이렇게 살면 되겠어요? 아빠 이것은 가르쳐주시는 것하고 틀리잖아요? 라고 감히 대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처가 되어 이 아이에게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아이들을 물리적으로 때리는 것이 육체적 폭력이라면 이것은 정신적인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결국은 부모를 향해서 노여워하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의 이 아름다운 관계들이 다 깨뜨려지면 좋은 것들이 흘러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판단 때문에 받아들이기 보다는 전해주는 사람이 좋기 때문에 받아들입니다. 아이들은 인상 나쁜 사람이 돈 주면 받지 않습니다. 인상 좋은 엄마가 약을 주면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생각인데 자녀가 노여움을 품게 되면 이런 관계들이 깨뜨려지게 됩니다.
III. 자녀를 양육하는 길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1. 주의 교양과 훈계
성경에 말하기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질에 관계된 것이고 훈계라고 하는 것은 삶의 태도에 관계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이들 속에 가르쳐져서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교양이라고 할 때에는 머리모양이 어떠하다는 둥, 외모가 어떠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질입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옷을 수수하게 입어도 교양이 바깥으로 배어나옵니다. 교양 있는 사람은 옷을 수수하게 입고 돈이 있어도 옷을 야하게 입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 교양이 숨길 수 없게 바깥으로 풍겨 나오는데 이것이 인간 존재의 품격이 됩니다. 그 위에 좋은 외모까지 갖추고 있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도 열납 될 것이요 외모를 취하는 사람들에게도 열납이 될 것입니다. 그것들이 아이들 속에 배어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를 기르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강남의 엄마들은 아이들 입시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다 틀립니다. 그것 많이 잘해봐야 좋은 대학가고 좋은 회사 들어가는 것 정도밖에 못 만듭니다. 그것이 절대로 교양을 못 만듭니다. 나는 진짜 공부 많이 하고 천박한 사람 많이 보았습니다. 식자의 천박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지식은 쌓였는데 교양이 안 들어간 것입니다. 교양은 그 부모에게서 자연스럽게 신앙을 통해서 그 속에 스며들어갑니다. 물 흐르듯이 깊이 들어갑니다. 세련된 것이 이런 것을 세련되었다고 합니다. 흘려보낼 교양이 있어야지 애들이 교양이 있어집니다. 흘려들어갈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 진리를 자신에 적용시키면서 살아가고 사랑으로 그것을 승화시켜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서 생각하고 적용하는 정신적인 질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을 유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게 하는 그런 교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런 것이 없고 돼지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바르고 무엇을 마시고 무엇을 입고 이런 지극히 세속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고 자기의 정신을 단정하게 하고 내면의 세계를 올바르게 해서 향기로운 인격을 갖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반성하는 것을 본 적 있어요? 세상이 이렇게 될수록 기독교 신앙의 필요성은 증대되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종교 가운데 기독교처럼 참회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 참회의 삶이야말로 우리 안에 이 교양을 깃들이게 하는 정말 훌륭한 비결입니다.
테르톨리아누스라고 하는 교부는 말하기를 자기는 참회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그런 끊임없는 참회를 통해서 자기의 정신과 내면의 세계를 이루어간다고 하는 것을 그 교부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전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정말 너무 힘이 빠집니다.” “왜 그럽니까?” “저는 중학교 밖에 못 나왔습니다.”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까? 그런 학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공부 많이 하고도 천박한 사람 많이 봤는데 정말 세상 공부 많이 하지 않았는데 우아한 사람들 많이 만났습니다. 신앙 안에서 깊이 깨뜨려져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유순하고 겸손한 심령이 되고 겸손이 진리를 배우면서 이 안에서 교양을 갖추게 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지혜로 가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지식이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세상 교양도 별로 없고 뭔가 이렇게 정신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가꾸어야 되겠다라는 그런 것도 별로 없습니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깨뜨려지는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인격에서 아이들이 무슨 교양의 물을 먹겠습니까? 아이들이 정신세계가 거의 없는 황폐한 아이가 되어 삽니다. 좋은 교육환경,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죠? 그래서 큰 아파트 사서 큰 방주고 고성능 컴퓨터 갖다 놓고 있는 대로 모든 것을 다 해줘 보세요. 그 아이를 사람으로서 탁월함을 갖게 만들어주지는 못합니다.
뒤에 나오는 이 훈계라고 하는 말은 인생을 살아가는 삶의 규칙들입니다. 이것들이 태도를 형성합니다. 삶에 대한 올바른 태도들을 형성합니다. 그런 태도들을 형성하게 하는 근본적인 교훈의 주인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오후에 개년 없음에 대하여 설교합니다. 여러분들은 굉장히 감동을 받지만 나는 통탄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그 설교를 들으면서 새롭게 깨닫는다고 하는데 그것 6세 이전에 터득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입고도 인사할 줄 모르는 사람 있습니다. 인사할 줄 모르는 삶의 불구들이 아주 많습니다. 잘못 된 것인데 지금 와서 고쳐보려고 하니까 평생을 그렇게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상태 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안 바꾸어집니다. 어렸을 때에 그것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어린 아이 가진 부모님들에게 이야기하는데 양보하면 안 됩니다. 어렸을 때 다른 사람이 작은 것을 주면 아이들이 뺏어서 도망가는데 부모가 세워놓고 인사하라고 해도 때려줘도 펑펑 울고 인사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고쳐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으로 타일러서 고쳐야 합니다. 6세 이전에 무엇을 하나 받았을 때 ‘고맙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목사님’ ‘아줌마 정말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이런 인사를 배워버릇하면 그 태도가 평생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하고 본인도 고통이 없을 텐데 태도가 마음 중심은 안 그런데 태도가 굳어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부모가 가르쳐야 하는데 부모가 주와 및 그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개념이 없으니, 무개념의 부모 밑에서 무개념의 자식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자식들 결혼시킬 때 집안을 보던 이유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근거가 있습니다. 부모를 보면서 자식이 어떠할 줄을 거의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부모의 교양과 삶에 대한 태도가 분명하면 아이들에게 물려줍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 아이들이 정말 태도가 잘못 되었고 인생의 개념이 없구나. 그런데 왜 그럴까? 라고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면 여러분도 개념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개념이 없다는 것은 주의 훈계로 어렸을 때부터 삶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아이가 어렸을 때에 인간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먼저 가르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4-5살밖에 안 되니까 심오한 영적인 세계를 먼저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항상 보편가치 위에 특별가치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보편적인 가치위에 특별한 가치가 세워지니까 그 특별한 가치가 이 보편적인 삶의 태도의 올바른 것을 통해서 가치가 잘 보존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은혜가 떨어져도 아무렇게나 막 행동하지 않습니다. 은혜 있을 때는 본 인간의 원 모습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그 다음에 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이 원래 저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은혜 있을 때는 잘 하다가도 은혜 떨어지면 교회고 목회자이고 지체들이고 막 보는 사람들 있죠? 원래 그렇게 쓰레기같이 교양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은혜의 하얀 눈에 덮여있었는데 눈이 다 녹으니까 쓰레기가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들 때부터 주의 훈계로 잘 교훈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겁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가 항상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마다 가르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얘들이 큰 다음에도 똑같은 권위를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는 마치 한 알의 밀알 같은 겁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서서히 썩어가면서 우리는 껍질이 되어서 떨어지고 우리 안에 있는 예수가 그 아이들 속에 들어가셔서 아이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여서 계속 교양을 섭취하고 훈계대로 움직이고 다루어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합니다. 거듭남, 아이들이 진실로 중생해야 합니다. 회심해야 됩니다. 신앙 안에서 잘 성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한 가운데 그런 고별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든든히 세우사’ 했습니다. 주와 및 은혜의 말씀께 너희를 부탁하노니 자신은 떠나도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든든히 붙들어준다는 뜻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2. 올바른 모본으로
아이들에게 올바른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 좋은 것을 보면서 배우게 해야 합니다.
3. 사랑으로
아이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의 첫 번째 문장은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이 세상에 건전하게 태어나서 사랑 가운데 자라야 한다.”입니다. 건전하게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 가운데 자라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첫 번째 선언입니다. 아이들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제가 우리 아들을 1년에 한 번씩 때렸습니다. 때리면 아주 무섭게 때립니다. 때릴 때 거의 80%는 정돈 안 해서 맞았고 20%는 공부 안 해서 맞았습니다. 정말 심합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깨뜨려진 다음에 우리 딸은 자랐기 때문에 그 아이는 수지맞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도 내게 많이 혼났을 겁니다. 내 피로는 상상이 안 됩니다. 양말 하나는 책상 위에 하나는 침대 밑에 책은 침대부터 시작해서 방바닥까지 다, 혁띠 달린 바지는 항상 혓바닥을 내 놓고 뒤집고 있고, 방이 방이 아닙니다. 항상 그것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깊이 깨뜨려지고 나니까 그때 마침 무슨 책을 읽었는데 걔네들은 정말 천재에 가까운 아이들입니다. 부모가 영재교육을 시키는데 자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아이들 물건을 정리하라고 소리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밥 먹고 책 위에다가 밥그릇 놓고 진짜 돼지우리입니다. 그 속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더 격려가 됩니다.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천재들이 다 정리를 못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때에야 깨달았습니다. 나는 천재일 수가 없구나. 이렇게 정리를 잘하니 천재일 수가 없다. 어느 교인이 자기는 열린교회에 등록했는데 이유가 교회 마당을 밟자마자 등록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대게 들어와서 인터넷으로 설교 듣고 예배 드려본 다음에 결정하는데 그 분 하는 이야기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에 너무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렇게 관리하는 목회자이시면 내 영혼도 아무렇게나 굴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렇게 깨달은 깨달음하고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이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생각도 상대적이라는 걸 내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애가 정돈을 좀 안 한다고 애를 개 패듯 패냐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애가 그 다음날 고쳐진다면 그렇게 해 볼 수 있지만 뭐가 됩니까?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머릿속에서 뭐가 나오냐고 하는데 그 천재 애들 교육시키는 엄마는 내가 하는 소리를 들으면 바보 하는 것입니다.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보니까 양말이 책상에 올라있으면 올라갈 때 올라갔구나. 바지가 입을 벌리고 있어도 그럴 수도 있구나. 그대신 나는 안 그러지만 그럴 수도 있구나. 그러던 때였는데 어느 형제 하나가 와서 분통을 터뜨리면서 도대체 자기애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옛날의 회심하기 전의 내 모습으로 방방 뜁니다. 왜 그러냐고 하니까 얘는 공부는 안 하고 먹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어이구, 똑같은 애가 또 하나 있구나. 못 먹게 하니까 이불 속에다 빵, 과자 막 감춰놓고 오면 다 벗어던지고 그래서 퇴근하고 들어가면 방문을 열어 보기가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틀렸네. 이 사람아 틀렸다고.” 그렇게 하지 말고 30분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 역시 어제나 다를까 집안을 초토화 해 놓고 저쪽에서 뭘 부시럭거리고 먹으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야, 방 꼬라지가 이게 무엇이냐? 치워라 치워 이게 사람 사는 구석이냐?” 이랬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하나씩 걸어주기 시작하니까 얘가 공부하다 벌떡 일어나서 “아빠 왜 그러세요? 진정하세요. 왜 그러세요?” “아니다. 얘야, 네가 공부하느냐고 얼마나 힘들겠니? 아빠가 치울게.”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아니야, 너 얼마나 힘든데 내가 쓰레기 치울게.” 이불 속에 있는 과자를 꺼내놓고 “이것도 너 얼마나 공부하는데 배고프겠니? 올려놓고 먹어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인해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Ⅳ. 결론과 적용
자녀의 삶의 양태가 우리의 기대에 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들이 살아있는 것이 부모인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아니면 그 아이들이 그 벽을 넘을 수 없는 무슨 나쁜 일을 했는데 그 아이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안돼요? 이것은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인 그대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세상의 유혹을 느끼고 도망칩니까? 안칩니까? 도망치죠. 그런데도 결국은 우리 발로 걸어서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예수님의 몽둥이나 하나님의 채찍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잠시 좋아서 제 갈 데 가보지만 하나님처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와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로 우리의 자식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부모의 품이 싫고 간섭이 싫고 생각이 다른 것이 견딜 수가 없어 뛰쳐나가지만 그러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우리 부모님의 품보다 따뜻한 데는 없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가진 어떤 장점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만 우리 엄마 우리 아빠는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유하나로만도 기뻐하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그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한없이 우리의 삶의 양태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아이에게는 신앙이 잘 들어갑니다.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아주 훌륭한 통로입니다. 어떤 형제가 있었는데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죽어라고 시달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는데 이 개념이 죽어도 안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너무 상처투성이의 단어인데 왜 하나님이 하필이면 아버지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로부터 깨뜨려진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려들어가지 못하도록 이해를 가로 막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식을 향한 사랑도 동물적인 사랑이 아니라 까라따스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생명을 주시기까지 아끼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이러면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부모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I. 들어가는 말
오늘은 어버이주일이라고 불리는 날입니다. 여러분들도 지난 주간에 혹은 오늘 부모님 효도하는 날이라고 하는 것을 가슴에 새기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나오미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원래 이 이름의 뜻은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살아온 인생은 이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아들 둘을 거느리고 모압이라는 남의 나라 땅에 온 것은 베들레헴에 큰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먹기 살기 위해서 고향을 등지고 타관 땅으로 왔지만 불행하게도 이사 온지 얼마 안 되어서 기둥 같은 남편이 저 세상으로 떠나갔습니다. 아들 둘을 거기에서 결혼을 시켜 모압의 여자들로 며느리를 삼았는데 무슨 일인지 그 아들이 하나씩 죽어서 남편과 두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과부만 셋 달랑 남은 슬픈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이 모압으로 이주한 지 10년 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침 고향에서는 기근이 지나가고 곡식이 생산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남편을 떠나보내고 과부가 된 두 며느리가 마음을 찔렀습니다.
II. 뒤틀린 부모의 모습
나오미는 이 두 자부를 놓고 ‘이제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니 너희도 너희 조상이 있는 곳으로 가라 남편도 죽었는데 나를 따라서 고향에 간들 너희가 또 거기서 타향살이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취지에서 며느리들에게 고향으로 자유롭게 돌아가라고 일렀습니다. 큰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성경에 오래도록 남는 이 룻이라는 여인이 단호하게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머니께서 나를 강권하여 따르지 말고 나를 내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것이고 어머니가 유숙할 것이며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결단을 하고 이 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1. 온전하지 못한 부모
나오미에게야 돌아가는 이스라엘 땅이 고향이지만 이제 이 모압의 여인은 정들었던 고향을 버리고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남의 나라 땅에 그것도 남편을 여윈 두 과부가 함께 떠나게 된다고 할 때 이 룻에게 고향을 떠나는 보람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이 여자는 이때까지만 해도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 나오미라는 여자는 자신이 후에 고백하는 바와 같이 희락이라는, 기쁨이라는 이름의 뜻과는 어울리지 않는 쓰디쓴 고생의 길을 걸어간 여자였습니다. 신앙을 팔아서 밥을 먹어 보겠다고 이방의 나라에 도망갔다가 기둥 같은 남편과 사랑하는 두 아들을 이국의 땅에 묻고 고향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슬픔의 여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이 룻은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공경하고 한 마음으로 어머니께 붙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룻의 마음속에 있었던 나오미를 향한 효성스런 마음이었습니다. 비록 부모는 실패하였지만 그 실패와는 상관없이 나오미에게는 시어머니를 깊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이로 인하여 룻이 복을 받고 다윗의 조상이 되고 거기에서 육신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는 계보의 머리 중 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계명을 성경에서도 듣지만 이 세상에서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 부모의 공경의무야말로 터놓고 어기고 어겨도 그렇게 흉이 되지 않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효도를 말합니다마는 그 효도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효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부모를 향한 공경이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효도이기 때문입니다.
효도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치적 효도가 있습니다. 부모가 유산이 많습니다. 그러면 자식들이 서로 부모에게 효도하겠다고 싸웁니다. “생일상은 이번에 내가 차려 드려야 되겠습니다. 형님” “무슨 소리냐? 큰 형이 죽었냐?” 그러고 싸웁니다. 딸은 “자식도 아닌가? 이번엔 내가 차려드릴 거야.” 재산이 몇 백억만 있어도 아니 그것도 필요 없습니다. 집만 서너 채 가지고 있어 보십시오. 아마 얼굴을 붉히며 서로 효도하겠다고 생난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유산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이 많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식들이 속삭거려서 살아생전에 유산을 나누어줍니다. 다 나누어주고 껍데기가 되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언젠가는 형과 동생이 칼부림까지 하였습니다. 병든 부모를 누가 모시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말입니다. 아무리 병들었어도 몇 백억 재산만 있어 보십시오. 아마 숨 넘어 갈 때까지 그 부모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들 속에는 죽을 때까지 유산은 물려주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 물려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살았을 때는 물려줄 것처럼 하십시오. 마지막에는 교회에 넘기고 죽으십시오. 그러면 교회가 그것을 열방을 위하여 유용하게 쓸 것입니다. 절대로 물려주지 마십시오.
둘째는 적선적 효도가 있습니다. 불쌍하게 보아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진정한 효도가 있는데 공경적 효도입니다. 성경적인 효도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효도의 동기를 부모를 향한 공경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에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여기에 쓰여진 히브리 단어가 바로 주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할 때 그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 부모 공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의 대의는 바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심입니다. 이것이 있어야지만 그 효도가 진정한 효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인 여러분들은 부모에게 생활비 몇 푼 보내주고 그러면 충분하다 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긴 그것도 안 하는 자식들이 있으니 그것만 해도 참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효도는 마음을 부모님께 드리는 사랑과 존경이 있는 효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부모님께 드려야 하는데 드릴 수 없도록 마음이 많은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는 효도를 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하라 그러면 기계처럼 돌아가면서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경적 효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서는 부모와 깊이 맺혔던 과거를 풀고 화해해야 합니다.
2. 대를 물리는 불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의 덕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패역이 대를 물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1,000대까지 은혜를 베풀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3,4대까지 갚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가 부모로부터 부모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그 부모를 존경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되지 못하고 상처와 고통을 받게 된 이것은 부모로부터 내려오는 대물림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나는 세계가 부모입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엄마입니다. 이 첫 번째 세계입니다. 그리고 아빠와 함께 그들은 그것이 한 세계로 형성됩니다. 그때의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내려오는 그 많은 사랑을 마음과 정신과 온 몸으로 빨아들이면서 아이가 사람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본을 갖추게 됩니다. 태어난 아이가 눈도 잘 뜨지 못하면서 엄마의 품을 파고들어 젖꼭지를 빨 때에 아이의 마음속에서 객관적인 생각이라곤 없습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빱니다. 그 젖 속에 들어있는 성분이나 먹는 것의 의미, 이것을 먹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자신이 성장할 것이란 생각 아예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거의 본능에 가깝게 그 젖을 빨아먹으면서 이 아이는 하루에 20g씩 몸무게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그렇게 엄마 아빠로부터 본능적으로 젖을 빨듯이 영혼과 정신이 그들에게서 내려오는 사랑을 빨아 먹음으로서 인간이 완성되어 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육체를 위해서 젖을 빠는 것과 마음과 정신을 위해서 사랑을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그러한 부모가 자식에게 그런 사랑을 온전히 이 아이에게 베풀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의 정신, 영혼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빨아들이려고 요구하는데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아이의 정신 속에서 우리들이 예측할 수 없는 변화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이는 건전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의 말할 수 없는 사랑 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이것이 그 아이가 제일 먼저 받아야 될 혜택이고 부모라고 하는 인간들은 이것을 해 주기 위해서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 줄 수 없는 부모는 부모가 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아직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는데 생각 없이 나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또 그 부모를 통해서 선과 악을 배우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이외의 이 세계에 있는 사물들의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사랑도 해주지 못하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자녀들은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왜 부모가 그런 것을 못해 주었을까?
부모가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만들고 자기를 창조하셨는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꺾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했더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평생을 자기 사랑에 빠져서 꺾어질 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녀에 대한 심오한 계획 같은 것 없습니다. 자기들이 좋아서 시집 장가가고 그 쾌락의 산물로서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부모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랑해야할 자식대신 자기를 사랑하고 자식들에게 가르쳐주어야 될 많은 진리들 대신 이 세상의 일그러진 것들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서 그들의 심령 속에 찍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옳게 살지 않는 것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받을 뿐 아니라 그 고통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피해자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어떤 변화가 없이 그렇게 살면 이미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식 안에 부모로부터 받은 이런 것들을 물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십시오. 일평생 아버지가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하는 것을 보면서 피멍이 들면서 자란 아들이 장가가서 자기 마누라를 팹니다. 어머니의 성적인 타락 때문에 가슴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어두운 시절을 자라온 딸이 가서 똑같이 바람을 피우면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심리학에서 보복적 모방 심리라고 합니다. 가계 안에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그들을 징벌하지 않으셔도 저절로 태어나고 번식하고 죽는 과정을 통해서 이런 악연들이 계속되며 내려갑니다. 그 자신에게 상처를 많이 준 그 부모들의 윗대를 보면 똑같이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부모들이 자란 것입니다. 위를 계속 올라가면 끝없이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러한 그 자신의 집안에 흐르고 있는 끔찍한 사슬들을 누군가는 끊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놀라운 이 은혜의 기적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III. 뿌리 깊은 상처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중 대부분은 한 부모의 자식인 경험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자식들의 부모인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둘 사이에 낀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눈을 뜰 수 있고 가정이 무엇이고 가정이 무엇이고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게 됩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나이 많이 들고 자식들이 장성해 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마음속에 부모를 향한 진정한 공경이 있습니까? 살아계셨으면 더욱 좋고 돌아가셨어도 어쩔 수 없고 묻는 것은 부모님이 살아계시든지 돌아가셨든지 그것은 상관없이 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그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하는 그런 애틋한 사랑의 마음,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이바지하겠다라고 하는 이런 공경의 마음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1. 상처의 원인 : 하나님의 사랑을 모름
인간은 상처를 준 사람은 그 상처를 쉽게 잊어버리지만 받은 사람은 오랜 세월동안 그 흔적을 간직하게 됩니다. 상처를 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세월동안 그 상처를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이렇게 설교할 때 여러분 중의 어떤 분들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부모와 화해하고 네 부모를 용서하고 우리 부모님이 뭘 내게 잘못 했기에 우리 아버지는 일평생 반듯하고 가정밖에 모르는 훌륭한 분이었고 사회에서도 존경받고 나도 이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처럼만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나는 우리 아버지를 존경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실 제 밤낮으로 애쓰시면서 나만 사랑하기 위해 일평생을 희생하신 분인데 나에게 무슨 그 분을 용서하고 말 것이 있다는 것인가? 이런 분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감사하십시오. 부모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람들은 아주 소수이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이런 상처와 화해하지 못한 부모와의 과거 때문에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먼저 그 부모와 맺은 과거의 인연 그것을 통해 여러분들이 받았던 마음의 많은 상처와 그로 말미암는 부모와의 불화, 이것에 대해서 깊이 화해하고 마음속에서 묶여있는 부모의 사슬을 풀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분재입니다. 가까이 놓기도 싫습니다.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것이 새장 속에 새를 가두어 두는 것입니다. 아주 큰 새장은 덜 하지만 음식점에 가면 작은 새장에 새 가두어 둔 것이 싫습니다. 새의 행복은 훨훨 나는 것에 있는데 우는 것을 보겠다고 그 주먹만한 새장에 가두어 놓고 물과 좁쌀을 주니 그 새는 살았으나 사실은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할머니를 참 사랑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 가운데 하나가 저희 할머니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셨습니다. “얘야 나는 일생을 시집와 살면서 시부모에게 묶이고 남편에게 묶이고 자식들에게 묶이고 그렇게 속박을 받으면서 살았으니까 내가 죽으면 절대 나를 묶지 말고, 나는 베옷에 휘휘 감는 것도 답답해서 싫으니 그냥 자유롭게 편안하게 나를 관에 눕혀다오.” 제가 그 유지를 받들어서 하얀 인조견으로 옷을 입혀 들이고 아무것도 묶지 않고 관에 그대로 눕혀 드렸습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자유롭게 사는데 있습니다. 얽매인 것을 그냥 내버려두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니 이것이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부모가 돈이라도 많으면 정치적 효도라도 해 보겠는데 가까이 해 봐야 빚밖에 물려받을 것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효도가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맺힌 것을 풀어야지만 영혼이 삽니다. 그래서 이것은 부모를 위해서 해야 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시기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상처를 받는다고 해서 똑같이 오래도록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어릴 때에 우리 심성은 부드러운 진흙과 같습니다. 누가 밟으면 발자국이 잘 찍히고 누가 긁으면 뚜렷하게 흔적이 새겨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햇빛을 받으면서 그 땅이 굳어져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웬만한 상처를 받아도 그것이 상처로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 마음이 옥토와 같고 부드러운 진흙과 같습니다. 부모의 폭언, 자기를 온전히 사랑해주지 않는 부모의 이기심, 심지어는 자기를 버리는 부모의 행동, 폭력, 무관심 이런 것들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찍혀서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그대로 말라버립니다. 그것이 모두 그 사람이 인생을 사는데 영향을 미칩니다. 한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근원을 캐다 보면 모두 유아기로 집중됩니다. 타고난 본성, 교육, 환경 이 삼각형에 의해서 거의 그 사람의 성품이 기울기처럼 작용해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2. 상처의 치유 : 하나님의 사랑을 앎
그럼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엄마 아빠가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만나고 두 분이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성도이고 끊임없는 자기 참회와 깨어짐 속에서 예수를 닮아가고 그렇게 그들이 기도하고 기다리는 가운데 우리가 태어나고 엄마는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며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단아한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가정밖에 모르고 우리에게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그 아름다운 사회생활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존경할만한 분입니다. 높은 사회적인 지위나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만한 커다란 권세,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재물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런 부모의 상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중의 많은 사람은 부모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떤 부모는 그런 부모도 있었지만 마음에 자녀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 부모는 그런 부모가 아닙니다. 나실 제 괴로움을 다 잊으시기는커녕, 기를 실 제 밤낮으로 애쓰기는커녕 어린 시절에 우리를 내팽개치고 바람이 나서 도망이 간 제비 부인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인 우리에게 인생을 사는 길이 무엇이고 여호와를 공경하며 사는 참 인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는커녕 집안에 와서 폭력을 행사하고 술을 퍼 먹고 가산을 탕진하고 타락하고 아무 책임감도 없는 무책임하게 일생을 산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요? 생각할수록 분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정말 다시 한번 태어날 수 있다면 주님을 잘 믿는 가정, 어머니가 말할 수 없이 단아하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교양이 있고 아버지고 그런 아버지 밑에 태어나서 남들이 받은 것처럼 많은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다면 우리가 지금쯤은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왜 그런지 부모의 죄와 악함, 보다도 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는 그렇게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도록 운명 지어졌습니다. 내 부모는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부모가 나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다보니까 하나님의 큰 뜻을 따라서 내가 그 가정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나를 그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모든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때로는 가장 악해 보이는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남이 갖지 못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 때로는 다른 사람은 앓아 본적이 없는 견디기 힘든 가슴앓이 때문에 남이 알지 못하는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이 흐르는 악연을 끊기 위해서는 누군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이 고통스러운 고리를 끊어서 과거와 화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자란 것 같습니다.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도 상처를 받을 수 있겠지만 아이가 태어났으면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하는데 7살 되던 해에 아이 혼자 서울로 올려 보냈습니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자라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엄청나게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냐하면 별거 아닙니다. 그러고 나니까 어느 순간에 커서 부모와 함께 했던 기억을 생각해보니까 아무것도 없고 흑백 사진처럼 한 장이 떠오릅니다. 이빨이 썩어서 엄마가 데리고 동네에 있는 치과도 아니고 의원에 데리고 가서 엄마 아빠는 내 팔뚝을 붙들고 간호사 둘은 다리를 붙들고 의사가 펜치로 이를 잡아 빼다가 결국은 부러졌습니다. 내가 거기서 울고 몸부림 칠 때 손을 꽉 잡고 있던 부모님의 기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치과를 갔더니 그 치과의사가 하는 말이 “어느 무식한 놈이 애를 이렇게 잡았느냐는 것입니다.” 잇몸은 다 붓고 마취를 시키고 툭 치니 쑥 빠졌습니다. 그 기억밖에는 still 사진처럼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가 어렸을 때 단 하나 있다면 4-7살 때 쯤 있었는데 모든 것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학교 들어가서 매일 서울 올라와서 웁니다. 방학 때 내려가면 갈 때에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자고 다녀와서 일주일 동안 달 보면서 웁니다. 식구들이 잠들면 마당에 나와서 수도 옆에서 달 보며 울고 왜 아이를 그렇게 키우는지....얼마까지는 부모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데 안 채워지니까 그 다음부터는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부모님을 만나면 너무 부자연스럽게 싫어 피하고 싶어 합니다. 후에 울고불고 너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이미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감정의 세계가, 인격의 세계가 그런 것입니다.
지금도 아이들을 유학을 보내는데 헛일 하는 것입니다. 가서 외국어 몇 년 먼저 배워 밥 벌어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인생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 심지어 남편은 두고 애를 데리고 유학을 가고, 조기 유학 보낸다고 home stay하면서 대성할 것을 꿈꾸는데 이것은 바보짓입니다. 아이들은 건전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인격적인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라야 합니다. 최소한 대통령은 못되고 학자나 공대교수, 큰 사업가는 못될지 모르지만 그 아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인간으로서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제가 26살 되던 해까지 부모님에 대해서 그렇게 힘들었습니다. 상처가 많았습니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하루 휴가를 내어 동네에 있는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또 가정의 상처 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막 울면서 기도를 하는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기도 속에서 처음으로 그런 음성을 내게 들려주셨습니다. “얘야 네 부모를 용서하거라.” 눈물이 막 나는데 우리 부모는 왜 나를 그렇게 키웠을까? 그렇게 보고 싶어 우는데 왜 안 데리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글 쓰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1학년 때부터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3통 보내면 1통 답장이 올까말까 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나중에는 그것이 다 상처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 다음 주님의 음성이 제 가슴에 들렸습니다. “내가 너를 네 부모보다 더 사랑해 주었잖니?” 그날 기도하는데 부모님이 사람이 아니라 영혼으로 보이는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그분들도 행복할 것이 없었던 것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데 그분들이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님이 상처받은 영혼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21살 때 주님을 영접했지만 부모님을 위해서 그렇게 불쌍해서 울어보기는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한없이 그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과 나의 차이가 무엇인가? 나도 그분들의 피를 받아 태어났으니까 나도 결국은 똑같은 인생을 살아갈 텐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분들은 나만한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고 나는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이 나를 어떻게 인도해서 여기까지 데려오셨는지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해 주지 못한 그 많은 사랑을 하나님이 나에게 갚아 주셨구나. 주님이 그러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열 명의 부모보다 더 낫지?” 저는 예수 믿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그렇게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감동이 안 되었기 때문에 차라리 하나님 할머니 했으면 내가 훨씬 다가왔을 것입니다. 할머니를 통해 사랑을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까리따스의 사랑이 나를 녹이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사랑의 싸움인 것을 알았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결국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혹은 상처가 많았던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쉽게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고 주님과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보니 나 같은 가정 속에서 자라났던 시인의 고백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리로다.” 주님의 가르침을 보니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후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부모가 나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어찌 부모가 나의 원수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그 몸으로 노동을 하고 일을 한 것으로 우리가 먹고 양육을 받고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부모 마음속에는 우리를 향한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있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우리들이 깨닫지 못한 공간속에서 우리 부모는 우리를 위해서 많이 울었을 겁니다. 그러고 생각하니까 감사,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때 효도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은 육신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아버지에게 갚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그것이 아니라 사랑은 하늘 아버지께 받고 효도는 이 땅의 아버지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내 나이 적에 주님을 만나고 내가 맛본 주님의 세계를 누렸더라면 아마 지금 내가 그분들 앞에 자식이 된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부모가 되어서 일평생 나와 함께 동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누가 가해자가 아니라 모두 피해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상처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비결을 터득하지 못했던 나, 모두 피해자였고 찔리는 사람은 있었지만 찌르는 사람은 없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Ⅳ. 부모를 공경하는 길
1. 약속이 깃든 계명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두 번 주십니다. 한번은 애굽을 떠나서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모를 공경할 계명을 주시고 그 후로부터 약 40년이 흘러 광야의 방황생활을 모두 끝내고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는 때에 한 번 더 십계명을 주십니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의 장자가 죽고 어두움이 내리고 재앙이 내리는 전대미문의 기적을 본 백성들이었습니다. 광야의 40년 세월이 기적으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기적적인 승리, 기적적인 음료, 기적적인 식량의 공급, 만나의 사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런 생생한 기적을 체험하면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많이 순종했을 것 같은데 실제 성경을 보면 우리와 똑같이 불순종하며 삽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계명을 주시는데 9가지 계명은 아무 상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무니까 그렇게 지키면서 행해야 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무슨 상이 약속 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미니까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계명이 하나있는데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땅이 없어서 일평생을 거지처럼 떠돌던 사람들에게 이 땅은 얼마나 가슴 벅찬 단어입니까? 그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잘 될 것이고 전쟁과 기근, 하나님의 징벌 속에서 끊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시신을 보던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장수한다고 한 것은 얼마나 큰 복입니까? 삼중의 시상금을 걸고 효도를 명령하셨으니 그렇게 기적을 본 신앙의 사람들에게도 이 효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려운 것입니다. 절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부모를 참다운 마음으로 공경할 수 있다면 인간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내와 남편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이것이 인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창조의 목적을 실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라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은 물질을 희생하면 됩니다. 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것은 몸을 팔면 됩니다. 상처가 많은 가정에 태어나서 부모를 공경하는 그것은 자기 죽음이 없이는 안 됩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므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해야 할 근거를 부모가 나에게 해 준 것에서 찾으면 영원히 이 계명은 준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이 땅을 얻지 못하고 유리하고 방황하고 어느 날 거리에서 비명횡사할 지도 모릅니다. 박명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부모님이 내게 해 준 것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해 준 사랑으로 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빨아 먹으면서 정신과 영혼이 성장하여 인간이 되어 갑니다. 어렸을 때는 엄마 아빠의 사랑, 조금 커서는 형제의 사랑, 조금 더 커서는 친구의 사랑, 조금 커서는 남편과 아내의 사랑, 자식 사랑, 죽을 때까지 인간은 완성되어가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각자의 사랑은 서로 교환이 안 됩니다. 엄마로부터 사랑을 못 받은 여자가 후에 좋은 남편을 만나서 사랑을 많이 받으면 팔자가 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의 꾸겨진 과거의 잘못된 성품까지도 완전히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도 자식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인간이 완성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다 가능하게 하는 상호교통적인 것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사랑을 못 받았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어느 정도 고쳐집니다. 부부의 사랑을 잘 못 받았어도 남편, 아내의 사랑을 덜 받았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늘 마음이 녹으면 인간이 많이 망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경험되는 사랑의 원본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깊이 용서하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때마다 효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큰 사랑 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 목숨을 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목마른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부모로부터 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팔 벌릴 실 때에 달려가서 그 품에 파고들고 예수 밖에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부모를 영혼으로 생각하고 깊이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 설교를 묵상하면서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의 생각이 났습니다. 일평생을 살면서 한없는 거리감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아버지를 깊이 사랑했는데도 어릴 때부터 훈련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줄을 몰랐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몇 달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살아계실 때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다 컸는데도 어디서든지 끌어안는 것이 제 취미입니다. 어떻게 보면 부모로부터 못 받은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예화] 아버님 투병하고 계실 때 머리 감긴 이야기
Ⅴ.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은 지나갑니다. 돌아가셨으면 깊이 회개하고 자녀들에게 잘 하세요. 아직 살아계시면 거기가 어디든지 달려가세요. 사랑하고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깊이 사랑하고 섬기세요. 그것이 힘들 때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것을 생각하세요. 그 주님이 내 마음을 녹이셨기 때문에 내가 그 예수의 사랑으로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 상처 때문에 제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 때문에 제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젠 어두움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겠네 찬양하리 구주 예수 놀라운 구원의 능력 노래하리 갈보리에서 죽이신 주님의 사랑]
주님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으니 이번에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며 그렇게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해서 마지막에 그 부모님들이 말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서 볼 수 있도록 하세요. 어린 시절에는 상처 속에서 살았으나 마지막 부모님들은 여러분 품에서 사랑하면서 잠드시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I. 본문의 배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대의 특별히 부모를 공경하는 대의가 허물어져 간다고 우려합니다. 그 우려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소중한 가치로 여겨졌던 공경들이 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와해버리게 되어 되었을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원인을 고려할 수 있겠지만 사회학적 요인으로서는 핵가족화를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대 가족 사회가 모두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의 창의성이 억압되고 개개인에 대한 존중보다는 나이에 의한 질서 같은 것들이 전횡적으로 작용을 해서 사람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좋은 성질들을 억누르는 면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또 모든 사람들의 개인적인 자유를 존중하면서 핵가족화를 이루어 보고 나니까 대가족 사회의 장점들이 새롭게 파악이 됩니다. 예전에는 부부가 갈등이 있어도 서로 어느 정도는 가슴에 담고 말을 못했습니다. 부모님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행동도 조심스럽고 그렇게 마음에 담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저절로 녹아 없어져서 다시 세월 속에서 정들기도 하고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도리가 자신은 잘 파악을 잘 못해도 부모님들이 가르쳐주시고 동기간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비교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저희 할머니가 시집을 오셔서 사실 때만해도 28명이 한 집에 살았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대가족입니다. 그런 대가족으로 살 때에는 식구들 앞에서 자기를 꺾고 공동체 생활하면서 자기를 양보하고 지는 법들을 배웁니다. 그러나 이제 핵가족이 되어 둘이 삽니다. 둘이 싸우고 나면 조종할 사람이 없고 바로 파국으로 치닫기가 일수이고 또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조금만 기다리면 분가하고 나가버리니까 한번 꺾어진 부모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될 장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우리가 모두 대가족 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이 대가족 사회가 가지고 있는 좋은 장점들을 사회학적으로 어떻게 하든지 복원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현실적인 비결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최종적인 대안이겠지만 이런 환경도 우리에게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특히 젊은이들 가운데 보면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형제들이 많은 곳에서 서로 어울려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자란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개 외아들로 태어나거나 외톨이로 태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어렸을 때 서울로 올라와서 혼자 자취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꺾고 양보하고 사람들을 세우며 함께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것을 가족 속에서 훈련받지 못하고 자라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았던 인물이 없습니다. 인구조사를 한 것과 우레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을 제외하고 나면 다윗은 그야말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함으로 하나님을 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 있는 사람도 아이었습니다. 시간만 나면 그는 악기로 하나님을 연주하고 하나님 이름을 찬양하고 노래했습니다. 궁창에까지 미친 여호와의 신실함을 노래하며 우주적인 명상에 잠겼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정은 불행하게도 상처투성이의 가정이었습니다. 깨어진 관계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에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가정이 그의 탁월한 신앙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대에서 또 다른 상처 받은 가정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우리의 자녀들이 저절로 훌륭한 신앙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과 같이 훌륭한 신앙을 가진 부모였는데도 자식들은 거의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회심치 못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할 뿐 아니라 자녀들을 회심의 요구를 꼼꼼하게 챙기고 그들이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지 죄의 지배아래 있는지를 잘 살펴서 그들로 일평생 우리의 돌봄을 받으며 신앙생활 하게끔 하여야 합니다. 그게 바로 부모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II. 압살롬의 반역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전쟁터에서 압살롬 아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죽은 아들 압살롬 때문에 슬피 울며 문루로 올라가고 있는 다윗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슬피 울며 문루로 올라갔고 올라가면서 망연자실하며 탄식하듯이 비통하게 울부짖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압살롬아” 부르면서 그는 처절하게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통곡으로 지나고 있었습니다.
1. 반역의 불씨
그러면 도대체 왜 다윗의 집안에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 생겼을까? 발단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29명의 자식이 있었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비빈들과 후궁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첫째 아들이 암논이었는데 아주 성품이 감정적이고 음란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아들이 압살롬이었는데 머리가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 둘은 서로 다른 배에서 태어난 이복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압살롬과 같은 배에서 태어난 다말이란 누이가 있었는데 암논이 누이 다말을 보고 마음이 혹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를 열렬하게 사랑을 하게 되는데 이 여자를 그리워하는 나머지 병에 걸린 것처럼 눕고 자신의 이복 누이동생이 자기에게 와서 간호하도록 일을 꾸민 후에 둘이만 있게 되었을 때 이 여동생을 겁탈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 남자의 마음이 차갑게 식고 결국은 이 누이동생을 버립니다. 슬피 우는 이 여동생을 보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던 사람은 압살롬이었습니다. 결국은 이 암논을 죽이기로 뜻을 세우고 기회를 엿봅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을 때에 양털을 깎는 날에 형제들을 모두 초청해서 연회를 베풀고 거기에서 모든 형제들이 보는 앞에서 암논을 무참하게 살해합니다.
다윗 역시 암논의 비행을 알고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큰 아들이 자기의 속으로 낳은 또 다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여 하나는 살인자가 되고 하나는 죽은 자가 되는 이 비참한 광경 앞에서 압살롬을 용서할 리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진노는 하늘까지 이르렀고 이 압살롬은 아버지의 진노를 피하여 도망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아버지 다윗의 마음이 다시 흔들리는 것을 발견한 신하들이 압살롬을 데리고 와서 다윗과 화해를 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를 불러 오는 것은 허락을 하였지만 만나지는 않고 부자 사이에 감정이 깊은 골이 생겨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압살롬은 두 가지 이유 하나는 이렇게 있다가 어느 순간에 아버지의 진노가 폭발하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아버지 왕위를 빼앗아서 등극해 보고자 하는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반역을 보모하게 됩니다. 우선 그는 50명이 넘는 개인 호위병을 결성하고 그 호위병을 데리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또 다윗을 수하에 있던 장수들 중 불만이 있는 사람들에게 포섭의 손길을 뻗쳐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성 앞에 나가 재판을 받으러 오는 다급한 백성들에게 연유를 믿고 아버지는 너를 위하여 재판관을 세우지 않을 터이니 차후에 이런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잘 해 줄 것이다. 이렇게 부왕인 아버지를 따르던 백성들의 마음을 노략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떠날 때가 되었을 때에 그는 나팔을 불며 자신이 왕이 된 것을 선포하고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이 행한 더 악한 행동은 아버지를 쫓아낸 궁에 천막을 치고 모든 백성들이 다 아는 백주 대낮에 아버지와 잠자리를 같이 했던 후궁들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도 흔하지 않은 이 패륜적인 행동을 한 것을 봐서 이는 전혀 회심할 인물이 아니었고 하나님에 대한 일호의 두려움도 없는 막 되먹은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하는 가능성 같은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압살롬의 면밀한 반란은 다윗의 정권에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슬피 울며 벗은 발로 왕궁에서 도망을 치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고 요단 건너편까지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골리앗을 쳐 죽이고 승승장구할 때에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자기를 높이던 백성들이 이젠 차갑게 등을 돌리고 침을 뱉기 시작했습니다. 시무이란 인물은 흙을 던지며 다윗에게 비루한 자요, 꺼지라고 노골적으로 모욕을 가했고 다윗을 따르던 장수가 단숨에 저 녀석을 당장에 목을 베겠다고 하자 다윗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그렇게 된 일이니 저를 나무라지 말라며 타이르고 그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다윗을 향해 예고된 징계였고 그 예고된 징계를 따라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뼈 절이고 고통스런 광야의 길을 홀로 지나고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다윗을 징계하셨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징계할지라도 다윗을 치는 압살롬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은 이 위기 중에서도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2. 반란의 평정
다윗의 군대가 다시 진을 정렬하고 반란군과 전투를 시작하였을 때에 다윗은 출전하는 병사들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너희들이 나의 소년 압살롬을 만나거든 부디 선대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니 이는 정치적으로는 그가 비록 반란군의 수뇌였으나 아버지인 다윗의 마음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제발 그를 죽이지 말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자기의 병사들에게 신신당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시작되었고 결국은 그 전투에서 압살롬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III. 부모의 사랑
반란군이 토벌되고 승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자 그는 그 승리의 소식에 아랑곳없이 나의 소년 압살롬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차마 죽였다고는 대답할 수가 없어서 이 지혜로운 병사가 “왕의 원수와 왕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들은 모두 다 그 소년처럼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1. 다윗의 마음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승리의 기쁜 소식에 아랑곳 않고 슬피 울면서 문루로 올라갔고 올라가면서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나의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 내 아들아” 슬피 울면서 문루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이 가진 압살롬의 아버지인 다윗의 마음이었습니다.
2. 부모의 마음
저는 지난 주 두 주일 걸쳐서 자식과 부모사이에 끼인 인간으로서 양쪽 세대에 대한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상처가 있는 가정에서 일평생을 살아오면서 고통도 많았지만 그러나 또한 깨달은 것도 참 많았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원숙해지지 않으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진리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여러분들에게는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명제입니다.
나이가 들고 인생을 살고 보니까 어렸을 때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인간의 사는 이치와 진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중에 한 깨달음은 부모로부터 받은 자식의 상처는 뼈에 사무치지만 그러나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부모의 가슴에 그렇게 사무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종종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고 친구나 이웃에 하소연 하는 사람은 보지만 자식에게 불효를 당한 그 고통을 호소하는 어버이를 보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죄인이고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식도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부모도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좀처럼 내려놓지 않습니다. 철들기도 전인 어린 시절에 받은 한 장의 흑백사진 같은 그 상처의 기억을 머리가 희끗희끗할 때까지 간직하고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않는 것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받은 자식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평생을 자식들로 상처를 많이 받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자식이 조금만 마음을 열고 사랑해주면 과거의 그 오랜 상처를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자식의 마음에 돌로 쓴 글씨 같이 새겨지고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부모의 마음에 물 위에 새겨진 글씨처럼 잊어진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연적 피조물들인 동물들에게 그 종족을 번식하고 보존하게 하기 위해서 자식을 보호하고 좋아하는 것을 본성으로 주셨습니다. 동물들은 비록 이성이 없기 때문에 자식을 위하여 하는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본성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본성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식을 향한 보살핌은 놀라울 정도로 탁월합니다.
여러분들은 가시고기의 일생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가시고기는 민물에 사는 아주 작은 고기입니다. 그 고기가 산란을 해서 새끼가 태어나면 어미는 어디 갔는지 도망가 버립니다. 자식들은 알에서 깨어나서 헤엄치는 아주 어린 새끼들이 됩니다. 알에서 부화될 때까지 2주가량 걸릴 때 이 아비는 바로 거기서 계속 물질을 하며 산소를 많이 머금은 새 물을 부화하고 있는 알 위로 보냅니다. 그 산소의 도움을 받아서 그 알들이 모두 깨어나길 바랍니다. 드디어 13일 정도 되면 가시고기들이 알에서 나오기 시작하고 아비는 다시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계속 물질을 하여 자식들이 어느 정도의 몸으로 성장할 때까지 보호합니다. 물질을 하다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아비는 점점 말라가고 물질을 하던 지느러미는 너덜너덜해지고 부패하게 됩니다. 다시 일주일쯤 지나서 아비는 거기에서 거의 죽어가고 그때에 새끼들은 마지막으로 아비의 몸을 뜯어 먹으면서 조금 자란 물고기가 되어 물 밖으로 나와 가시고기의 일생을 시작합니다.
인간도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도덕적 질서에 속해 있고 육체를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자연적인 질서 속에 속해 있습니다. 이 두 질서 속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도 이런 자기의 새끼를 향한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본성에 항거할 줄 모르지만 인간은 항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본성을 주신 이유를 잘 깨달으면서 이성 속에서 이것을 영혼의 움직임은 사랑으로 승화를 시키면 동물의 그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아주 찬란하고 도덕적인 사랑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러나 이성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고 만약에 자기를 위하는 일에 이성을 사용하여 본성을 거스를 수 있게 된다면 인간의 자식에 대한 행동은 아주 무정한 것이 되고 그것은 짐승만도 못한 상태로 인간이 전락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짐승만 못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나쁜 부모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완성이 안 되었기 때문에 자식이 무엇인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습니다. 그런 부모는 개념이 없는 부모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나쁜 부모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보다 많은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러한 본성적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반드시 자식을 향해 물이 흘러가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세대는 6.25를 경험한 세대였습니다. 전쟁 통에 많은 고통을 겪고 전쟁 후에 자리를 잡고 나면 이제는 먹고 살기에 급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라가 안정을 찾은 후에는 피눈물 나는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 같은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출근하는 장면을 보고 자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자녀들이 눈 뜨고 나면 아버지는 벌써 가셨고 잠들고 나면 아버지가 퇴근했습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일하면서 그들의 땀과 수고가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이처럼 근대화를 이룩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앞선 세대의 부모들은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고 표현할 시간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바로 그런 부모의 세대 밑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부모의 행동에 의해서 표현된 것, 그것이 곧 부모의 마음의 전부라고 생각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오른 판단이 아닐 것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의 마음속에는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자식을 향한 사랑, 아직 행동으로 미처 태어나지 않은 영글어 있는 자식을 향한 애절한 사랑이 있습니다.
마지막 죽어가는 아버지에 대해서 남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암논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뼈 절인 상처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는 아버지, 일이 터지고 나서 자기를 죽일 정도로 미워하는 엄격한 아버지, 돌아와서 사죄하고 싶었지만 화해를 받아주지 않는 엄격한 아버지에 대한 인상을 가진 압살롬이 자신이 죽으면 그 아버지가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슬피 울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 부모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려가는 사랑입니다. 항상 우리는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상처에 대한 반응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복수하고 상처를 주면서 보복을 했던 자신의 악하고 사랑 없는 행동에 대해서는 잘 반성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Ⅳ.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여러분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많이 아파하는 세월을 지냈다고 칩시다. 그럼 여러분은 부모님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려고 노력했습니까? 저는 오늘 아침에 일찍 마당에 나와서 이 설교 원고를 두 번 읽고 묵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랬구나. 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오래도록 가슴에 품었고 한 번도 내가 부모에게 상처를 주거나 가해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정말 아버지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내가 얼마나 그 분을 사랑했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부모 앞에서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다고 믿는 여러분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두 손으로 그들을 향하며 진심으로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인하여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나에게 너무나 길고 오랜 세월동안을 상처라는 한 단어를 붙들고 아버지를 사랑할 여유 없이 살아왔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에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상처를 받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상처를 부둥켜안고 사는 것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묵상을 하는 동안에 가만히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은 적이 별로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아, 그랬구나.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분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잊지 않았고 그분은 나에게서 받은 상처를 쉬 잊어버리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쏟게 하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그렇게 깊은 상처와 피할 수 없는 고독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 마음에 들렸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 들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는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하늘 아버지는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못해준 사랑까지 해 주시고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베풀어주지 못한 그 자비까지도 다 베풀어 주셔서 우리를 보상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했더니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는 가서 너희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라. 육신의 부모를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정말 한번 사랑의 눈으로 그대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보세요. 정말 여러분으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았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에 아버지 살아계신 것이 기쁨이 됩니까? 어머니 아직 생존해 계신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감격이 됩니까? 감사의 조건이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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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느낄 수 없어도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의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상처의 기억만을 붙들고 있었지만 부모들은 여러분들에 대한 잊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의 추억들은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버림을 받아도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멈출 수 없게 하는 사랑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대들에게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의 기억밖에 없지만 부모의 마음속에는 평생 잊어지지 않는 예쁜 기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대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무한해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외에는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부모의 사랑이 높고 넓어도 그 부모를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 사랑한 자식이외에는 마음속에 알알이 박힌 그 사랑을 알 자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Ⅴ. 결론과 적용
주님의 큰 사랑이 여러분들의 육신의 부모가 진 빚을 대신 갚아 주셨으니 이제는 부모님을 깊이 사랑해요. 만약에 부모님이 생전에 없다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더 많이 사랑하시고 부모님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상처를 주었어도 아버지가 살아있으면 화해할 수 있고 고통스러웠어도 어머니가 살아있으면 다시 그 어머니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상처와 어둠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 남은 날들이라도 빛 가운데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찾아가세요. 마음속에서만 갈등하지 말고 찾아가세요. 부모님 손을 꼭 잡고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러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므로 인하여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주님의 사랑으로 깊이 사랑해서 마지막 숨 지고 눈을 감을 그때까지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것이 그분들 마음에 큰 위로가 되도록 여러분들의 부모가 된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람이 되도록 그렇게 만들어 드리세요. 물론 그 길을 가는 동안에 눈물도 많고 고통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생각하며 참으세요. 상처를 뛰어넘는 아가페 사랑, 고통을 뛰어넘는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있음을 완성하십시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꼭 이 말씀 흘려보내지 말고 빨리 부모님 찾아가서 깊이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4. 지식을 따라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우리는 가정의 대의에 대해서 4주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만을 가리켜서 신앙생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앙생활이라 부르려면 우리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넘치도록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됨으로써만 구원 받은 우리들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지정하신 인간의 자리, 거기에서 인간에게 합당하게 기대되는 행동, 이것들을 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각 구성원, 부모는 자식에 대해 자식은 부모에 대해 각각 있어야 할 자리와 합당한 행위를 지정하셨고 또 이와 같은 원리는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
아내에 대한 남편의 관계, 그리고 그 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가정의 대의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남편에 대하여 아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연약한 그릇
이 그릇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스큐오스(σκεὖο) 라고 하는 말인데 어떤 특정한 그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담는 모든 용기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지 속에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들이 있는데 금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다고 우리에게 비유로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회심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될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나라와 임금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는데 사용되는 아주 소중한 도구 이것을 그릇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내를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였을 때 우리가 연약하다는 말에 주의를 집중하기 전에 그릇이라는 말에 먼저 주의를 집중하여야 합니다.
흔히들 여성은 결혼하면 남성의 부속품 정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여성들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체험하며 살아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남편을 위해서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남편을 돕고 그와 함께 배필이 되어서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자리가 남편에게 사로잡혀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주셔서 있는 자리라고 생각할 때 그가 가정에서 남편을 돕기 위해 행하는 모든 섬김들이 하나님을 위한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릇사상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그릇을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던져도 모양도 변하지 않고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바가지 같은 그릇이 있는가 하면 깨지지 않지만 강압의 힘을 강하면 우그러지는 그런 알루미늄으로 된 양푼 같은 것들을 사용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색깔도 변하지 않고 아무리 던져도 찌그러지지도 않고 흠집도 나지 않는 새로운 주방 기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용하기에는 편리할지라도 미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과일이라고 할지라도 질그릇에다 과일을 깎아서 담아 내놓았다면 예쁘지 않을 텐데 꽃으로 수놓아지고 정교하게 빚어져서 불에 구은 예쁜 도자기에 담겨진 잘 깎은 과일은 대접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그런 그릇들은 때도 끼지 않고 아주 예쁘지만 고가의 물건이고 특별히 잘 깨어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한 그릇입니다.
예화] 충청도로 집회 갔던 장소가 도자기 회사에서 만든 호텔이라 주스 컵으로 쓸 수 있는 예쁜 그릇을 사왔는데 뜨거운 물을 담아 깨진 이야기
연약한 그릇이 우리 집안에는 꼭 있습니다. 아내를 바로 연약한 그릇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연약해도 별로 값어치가 없는 그릇이 아니라 연약하면서도 값어치가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두고 써야 할 그런 그릇으로 아내를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베푸는 사랑은 반드시 인격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 자체가 인격적인데 비인격적인 사랑도 있습니까?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랑처럼 보이는 비인격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더 높은 목적을 위해서 어떤 대가 때문에 사람을 선대해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서 비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애완견 같은 그런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정해놓은 질서의 테두리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그 남편을 떠받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가로서 아내에게 일정한 사랑을 베푸는 이런 희어적인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 같은 권력에 의지한 희어적 사랑이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이 세상에 창조된 인간으로서 서로의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혹은 성경에 나온바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여성은 남성을 위하여 존재하고 여성은 남성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보조적인 존재이니 이것이 바로 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서 종속되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그를 위하여 라고 되어있는 히브리어는 캔네게도(דּוֹ)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맞먹는’ 이란 뜻입니다. 대응하는 그러니까 번역도 내가 그와 대응하는, 내가 그에게 상응하는 그 남자에게 대응하는 한 여자를 지으리니 이런 의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것도 에제르(ר)라는 단어인데 구약에서 많이 나오는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오” 할 때 그 도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신의 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군사적 응원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그것은 누구도 남자이건 여자이건 한 사람이 자신만으로는 충분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구현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서로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드셨고 그런 점에서 여성의 존재는 남성을 완전하게 하고 남성의 존재는 여성을 완전하게 이바지 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성을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그릇으로 부르셔서 남성 곁에 있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먼저 생각할 때에 그가 하나님이 보내셔서 내 곁에 있으며 그것이 그의 독자적인 사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내를 대하면 이런 어리석은 종속적인 사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를 인격적으로 대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흔히 폭력이 있는데 이런 폭력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 된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폐하게 하는 이러한 폭력적인 행동들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크리스챤이지만 집에 가면 이런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남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런 폭력을 휘두르는 여성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우려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이런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들은 거기에 근거한 질서에 절대로 순응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그런 일들이 가정에서 일어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 중 90%이상은 정신 질환자입니다. 그것은 적절한 치료를 요합니다. 그런고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그런 폭력이 있다고 한다면 즉시 교회에 알리고 목회자의 적절한 도움을 받도록 그런 상황을 통제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은 깊이 참회하고 그렇게 폭력을 행사할 때 아내와 아이들에게 주는 고통과 해보다도 더 큰 악이 자신의 영혼과 정신 속에 남아서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런 삶을 돌이키고 필요하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택하셔서 아내와 남편을 세우시고 이것으로 가정의 근간을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보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성경적으로 볼 때 가정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래서 이 일들이 잘 이루어져야지만 경건한 가정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도리에 의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감동받는 대신 쉽게 깨뜨려질 수 있는 그릇으로 알아서 아내를 선대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편은 하나님과 열린 기도의 세계에 방해를 받지 않고 충만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생명의 유업을 공유하는 자
오늘 성경이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릴 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생명의 유업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결코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될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지게 되고 교회에 접붙여진 공동체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통을 누리게 되는데 그 교통의 본질은 사랑과 생명입니다. 이 사랑과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순간 우리 속에 스며들어 오게 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스며드는 삼위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 이 세상과 자기와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되고 그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교통하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그 사랑을 분여 받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박애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랑과 생명의 교통 없이 살아간다면 그는 살아있으나 사실은 동물적인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과 사랑의 분여와 교통, 이것이 바로 생명의 유업이고 이것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누릴 수 있고 또한 죽음 이후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보다 더 충만한 방식으로 이 생명과 사랑을 유업으로 누리게 되는데 바로 아내가 이러한 생명의 유업을 지금 함께 누리고 있으며 앞으로 누릴 자이기 때문에 그를 깊이 공경하고 사랑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생명의 유업을 누리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과 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며 그 하나님께 더없이 소중한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있다고 하면 그 남편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이 생명과 사랑을 아내도 함께 분여 받거나 혹은 함께 분여 받을 자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여야 한다고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내가 이미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사람이거나 혹은 아직 불신 상태에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아내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함께 신앙을 고백하여 자신과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 한 몸을 이루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배나 더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아내는 단지 육신의 아내일 뿐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접붙여져 교회를 이루고 있고 예수의 몸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여러분들의 아내가 미모도 없고 젊지도 않고 많은 지식과 교양도 없고 여러분들을 탁월하게 돕는 은사도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러분들의 그 아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고 여러분들이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는 여러분들의 아내도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내가 마음에 차지 않아도 그 아내는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생명과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분여 받고 있는 존재이며 미구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교통 속으로 들어가게 될 그런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가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구속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일생을 교회 속에 살면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지체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깨뜨리며 그들을 온전하게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봉사하며 일생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귀한 인생을 산 사람이며 여러분들은 그렇게 지체들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의 생애를 산 그 사람을 얼마나 존경하고 높이겠습니까? 바로 여러분들의 아내가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체되었고 예수의 한 몸이 되었으니 여러분들이 아내를 깊이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단지 여러분들의 인생에 만족을 주었던 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몸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나아가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될 것이니 그렇게 사랑하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정말 영혼이 온전해지고 모든 불결로부터 순결해져서 지복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의 아내가 이미 믿는 아내라면 더 많이 사랑하고 깊이 긍휼히 여기고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여러분들의 아내가 불신 아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생명과 사랑의 교통에 참여하고 그 진리의 은혜와 깊이와 넓이를 알며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아내는 신앙생활하지 않고 있습니다. 혹은 교회에 나오고 있다 하더라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오는 그 교회 생활 속에서 아직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회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 안에는 참여하였으나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살이, 한 피가 되지 못한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우리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가 아는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그것은 나의 언사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생명이시고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나의 삶속에서 충분히 보여주고 나의 가족과 친지들을 깊이 사랑할 때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된 자식들이 상처 많은 가정에서 부모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부모들이 네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한번 믿어보겠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부모들 많이 보았습니다. 아내가 탁월한 신앙의 행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되는 아내를 보면서 당신을 그렇게 행복하게 하는 예수라면 나도 한번 믿어보겠다고 하는 남편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어찌 남편의 아름다운 행실 때문에 아내가 주님을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놀랍게 변화된 남편을 보면서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한 자매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내에게 보일 수 있는 아름다운 본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내에게 대한 인격적인 사랑이 없이 남편이 보이는 그 아름다운 본이 어떻게 아내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겠으며 믿지 않는 그 자매의 마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남편들은 가정의 모든 화목과 평화가 신앙 안에서 이 모든 안정을 너무나 당연하고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행복들을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온전하지 못한 아내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현실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들이 얼마나 방황하고 고통을 겪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무분별한 아내들이 아닌 단정한 아내들을 주시고 아직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그래도 남편을 사랑하고 가족 안에서 한 유대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주신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들을 일상적으로 여기고 감사한 마음 없이 살아가지만 그런 생활 속에서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내가 오늘 존재하는 것이 그 아내의 많은 눈물과 희생, 섬김을 통해서 내가 여기에 있는지를 잊고 살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여러분들의 부모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정말 그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기억하지 말고 그 부모가 여러분에게 사랑받고 있는지를 물어보라고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똑같이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아내, 우리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며 희생하는 많은 날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런 많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늘 남편인 우리 마음에 있는 아내는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우리들이 우리 아내를 향해 눈을 감고 손을 높이 들고 이렇게 노래 부를 수 있습니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찬송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좋은 아내를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노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를 끊임없이 깨뜨려 아내에게 서서 섬길 수 있는 자리를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II. 지식을 따라 사랑함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아내를 이렇게 사랑하되 지식을 따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이 지식은 곧 두 가지 지식이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내라고 하는 피조물을 아는 지식입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모든 설교가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납니다. 설교와 모든 사역의 초점들이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해지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인간을 알지니 그 인간을 잘 알면 너희가 자유케 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자원의 결핍, 참다운 은혜의 빛이 없는 가운데 시들어져 가는 영혼 때문에 고통 하는 모든 인간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실 인생사에 묻혀서 허덕이며 살다 보면 진리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자신의 고통의 문제와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실존에 모든 시선을 집중하고 그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많은 투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은 속박에 있고 그 모든 속박을 끊어 낼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로부터 오는 그 힘이 아니고는 누구도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고통 속에서 속박된 그 사람에게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통 하는 많은 인간들에게 진리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해결이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경의 모든 표현은 하나님을 3인칭 남성 단수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남성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서는 존재가 모자란다는 것을 하나님은 보여주시면서 여성을 창조하셔서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아버지 그러는데 하나님은 성경에서 온 단어이고 아버지 그럴 때 그 개념은 우리의 유교적 개념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모습을 잘 반영하는 삶을 살고 성품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면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는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힘듭니다. 우리가 유교적으로 전통적으로 배워 온 아버지는 근엄하고 감정적인 동요가 별로 없고 많이 사랑해도 결코 쉽게 표현하지 않고 냉정한 아버지 상입니다. 그런 남성상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안고 광야의 길을 가면서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가 왜 이 백성들을 다 끌고 이 고생을 해야 합니까? 내가 이 백성들의 유모입니까? 그 사실은 실제로 모세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백성을 어머니처럼 끌어안고 젖을 먹이고 끌고 간 유모와 같은 사역이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을 그렇게 생각하며 끌어안고 가야 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은 모세가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하나님께 배운 것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가슴 아파하시던 예수님의 눈물 어린 마음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집안이 그렇게 발칵 뒤집혔는데 엄마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려면 엄마가 나와서 이 못된 녀석 아버지한테 감히 그러는 것이 어디 있냐면서 야단을 쳐야 되잖아요. 또 멀리 갔으면 아버지는 체면 때문에 못 갔어도 엄마가 야간열차라도 타고 가서 애를 잡아 왔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데 안 나옵니다. 그것을 자식이 유산을 나눠달라고 할 때 회초리를 치는 대신 못 이기면서 유산을 나눠주는 것은 엄마가 할 일이지 아버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가 멀리 떠났을 때 의절하는 결단을 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지만 그 나간 자식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자식을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다가 자식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가서 끌어안는 것도 아버지가 할 일이 아니라 엄마가 할 일입니다. 거기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양성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는 의학자도 아니고 이것은 어디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몸에도 여성 호르몬이 흐르고 있는 것 아세요? 여자의 몸에도 남성 호르몬이 흐릅니다. 여자가 정말 여자 같지 않고 굉장히 강해 보이고 남성적인 여성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이 정식으로 결성되어 있는 것 아세요? 회장도 있고 이사장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여성 속에 남성 호르몬이 많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인데 성격이 왜 그런지 닭살 돋게 하는 여성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잘 하고 남자는 대개 호탕하고 웃는데 이 사람은 여성처럼 웃고 말을 해도 남성처럼 호탕하게 하지 못하고 여자들 귀속 말하는 것처럼 속삭이고 남의 비유도 잘 맞추고 하는 사람은 절대 대머리 안 벗어집니다. 여성 호르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대머리는 권위적인 사람입니다. 여성 호르몬이 적습니다. 이 두 호르몬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균형이 깨뜨려지면 사람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지면서 나빠집니다. 난 이런 것 자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양성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 이 모든 것들이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습니다. 거기로부터 마치 햇빛이 흐려짐을 통해서 찬란한 일곱 가지 빛깔로 분광이 되듯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성품이 인간에게 투영될 때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지면서도 여성을 모두 여성으로 만들지 않고 남성을 모두 남성으로 만들지 않아서 남성 속에 여성을 섞으시고 여성 속에 남성을 섞으십니다. 전 이 사실을 발견할 때 굉장히 뛸 듯이 기뻤는데 여러분 별로 감격을 하지 않네요.
가정이 여성이 약간 남성화되고 남성이 약간 여성화 되어야지만 이 가정이 행복합니다. 남편이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돈을 푹 썼습니다. 그때에 여성이 진짜 여성성에 집착합니다. 그 돈이면 쌀이 몇 말인데 몇 달 동안 장을 볼 텐데 이러면 가정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좀 더 쓰지 그랬냐고 하면서 호탕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남성은 어느 시점에서 보다 여성화 되어 밖에서 크고 웅장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 남자가 여성스러운 경향을 많이 갖게 될 때 가정이 행복합니다. 커다란 사업 3개 할 것 하나해도 집에서 설거지라도 잘 하면 됩니다. 여성성이 없으면 못합니다. 남성이 어느 정도 여성이 될 때 가정의 행복을 이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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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들을 신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방적인 아버지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때가 많습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아내를 향한 사랑이 통합을 이루게 되는 한 근거가 됩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여러 해전에 발견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면 그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 자기 아내를 향한 사랑, 특별히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게 될 때 자신의 아내의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빛들을 통해서 아내를 올바로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2. 아내에 대한 지식
첫째는 보편적인 아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여성으로서 한 남편의 아내가 된 보편적인 아내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아는 지식 속에서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 올바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나만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나를 안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물론 알고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 속에 있는 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학이란 학위는 있지만 ‘김순희학’ 이런 것은 없습니다. 개별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각각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형성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함께 사는 아내는 보편적인 아내인 동시에 개별적인 내 아내이므로 이 둘의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보편적인 아내에 대한 지식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먼저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곧 이어 하나님이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남편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는 흙으로부터 지으시고 여자는 갈비뼈에서 취해서 만들었으므로 남성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 반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흙이 더 소중한 재료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살과 뼈가 더 소중한 재료입니까? 남성은 창조될 때부터 재료가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티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이 두 번 창조한 것입니다. 재료를 흙으로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그 사람의 완전한 몸을 취하여 여성을 창조하셨으니 재료비가 훨씬 더 많이 들었습니다. 고급 재료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성들이 존귀한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고 할 때 우리들이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여기에는 적어도 두 방향의 일이 중첩되어 이 명령을 완수해 나가도록 지정되어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는 일은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일입니다. 외향적인 지향성을 갖습니다. 번성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생육하는 것은 그 안에서 일어납니다. 남녀가 둘이 만나서 한편으로는 생육하고 생육하여 자손들이 번성하고 그 번성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아름답게 인간 공동체 모습을 형성하고 가꾸어져 가는 것은 관계 중심적인 일이고 그것들을 토대로 이 사람들이 뻗어 나가면서 정복하고 땅을 다스리는 이 모든 일은 외향적으로 뻗어 나가는 일입니다. 관계 지향적이고 내적인 일들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밖으로 뻗쳐나가는 일은 남성적인 그 성격을 통해서 성취되는 일들인데 이 두 가지가 아주 균형을 이루면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전혀 새 모습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교회 안에서 이 두 개가 긴장 속에서 잘 균형을 이룰 때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주님 믿고 이제 내가 이 교회 교인이 되겠습니다. 하고 들어온 사람인데 그들의 관계를 잘 가꾸어 주고 주님을 잘 믿고 자라도록 젖을 먹이는 이런 일은 안하고 예수 믿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한다. 돈 다 내놔라. 그리고 헌신해라. 가르치지도 않고 잘 먹이지도 않고 무조건 역량을 모아서 선교하고 전도하고 사회 일하고 다 뻗어나가면 건강한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마치 집안의 관계가 다 깨뜨려지고 남편이 집안에 있는 가산 다 털어서 사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교회가 부름을 받았지만 그 건강한 일을 위해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과 올바른 관계, 온전한 관계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자기와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목양센터에서 하는 사역은 여성적인 사역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성 호르몬 많이 받은 사람이 여기 모여야 합니다. 머리 많이 벗어지고 남성 호르몬이 충만한 사람은 보다 공격적인 일을 위해 헌신하고 여성 호르몬이 많아서 머리도 잘 안 벗어진 사람들이 모여서 여성적인 사역을 많이 해야 합니다. 곱살 궂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한쪽만 합니다. 저희들끼리 모여 먹고 놀고 좋다고 하면서 삽니다.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마누라 좋고 아이들 좋다고 돈 벌러 가지 않고 집에서 가족끼리 오락회만 하고 사는 가정과 같은 것입니다. 알콩달콩 산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그렇게 하고 남자는 세상의 평화도 염려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근심하면서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결혼을 하면 남성들은 가정의 안정을 토대로 뻗어나가려고 합니다. 일 지향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연애할 때에 그렇게 좋고 달콤했는데 그 꿈을 계속 꾸면서 결혼 후에도 왜 그렇게 연애할 때처럼 안 해주냐고 하는데 연애할 때 여성들이 왜 그렇게 행복한지 아세요? 그 이유는 남성이 모든 것을 희생해서 관계에 충실 하는 집중적인 기간입니다. 회사도 없고 출퇴근도 없고 모든 것 다 필요 없고 오직 관계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그 성향이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만 충실하게 살 수 없지요. 평생 연애만 하며 삽니까?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큰 것 가지고 감동하는 것 아닙니다. 며칠 전에 이지스함을 건조해서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이지스함을 소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이 1조원이고 천km 바깥에 있는 수천 개의 표적들을 동시에 추적하고 500km 안에 들어오면 27개의 목표물을 향해 동시에 공격할 수 있고 그런 숫자 못 외워도 결혼 날짜 외우는 것 더 좋아합니다. 삼일절이 뭔지 잊어버려도 약혼 기념일 기억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아도 앞뜰에 자기가 심은 채송화꽃 복숭아꽃 보며 한번 기뻐해 주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아내들의 성품입니다. 아내들이 상처받는 것이 엄청난 것 때문에 상처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작은 것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머리를 하고 왔는데 본 척 하지 않았다거나 집안에 무엇을 새로 해 놓았는데 관심을 안 갖는다든지 그런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세요. 칭찬하고 격려하고 그래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개별적인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결혼 5년이 된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얼마나 남자가 짠돌이인지 외식 한번 안 시켜 주었습니다. 어느 날 전화를 해서 외식 시켜줄 테니 나오라고 한 것입니다. 아내가 칠보단장을 하고 달려 나갔습니다. 보신탕집으로 쑥 들어갑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막 퍼 먹으면서 남편이 “와 안 묵노?” 5년을 살면서도 아내가 보신탕을 못 먹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개별적인 아내를 아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기가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가정이 남편과 아내의 뜨거운 사랑으로 한 연합을 이룬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여러분 남성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만난 어느 목사님은 자기 목회 경험에 의하면 여성들의 외로움보다도 중년 남성들의 외로움이 정신과적으로 더 심각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여자는 관계 지향적이기 때문에 아이들하고 관계에 더 몰입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안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은데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은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이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남성으로서 여러분 남성에게 말하는데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안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안 외로운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외롭다고 느끼면 사실은 사랑을 못 받고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안 해서 외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사랑을 받음으로 그 외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함으로써 외로움 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 남편으로 부름을 받아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깨뜨려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 아내를 온전한 사랑으로 세우고 그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하는데 아내만을 바라보면 너무 어려운 길입니다.
III. 결론과 적용
나는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물론 남편 사랑하고 아내 사랑하겠지만 오늘 예배를 끝나고 가서 만날 아내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가슴 설레는 남편이 몇이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아내들 가운데 예배가 끝나고 나서 남편의 얼굴을 볼 생각 때문에 가슴이 쿵쾅 뛰는 여성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어요. 연애 때는 그랬거든요. 지금 안 그러지요? 항상 그런 감정 속에서만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면 우리의 삶의 지표가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자원만으로는 너무 힘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된 가운데 그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주님이 불완전한 자신을 긍휼히 여겨 주었던 것처럼 아내를 긍휼히 여기며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서 자기를 끊임없이 깨뜨리고 상대방을 온전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완성하고 아내도 완성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정의 행복입니다.
5.부부, 질서와 사랑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I. 본문 해설
지난 시간에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도리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지식을 따라 그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을 다루겠습니다. 그것은 주안에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2,3장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미구에 회복되게 될 우주적인 전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의 총체적인 회복의 종자 씨로서 교회를 택하였고 교회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믿고 주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길이고 그들이 사랑으로 주님과 연합된 가운데 이 사랑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선교이며 이 선교를 통해 결국은 인간이 모두 완성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완성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인간의 구원과 함께 온 피조물이 고대하던 회복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이때까지 하나님이 교회를 종자 씨로 사용하셔서 이 세계의 진정한 회복을 위한 구속의 대업을 완수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교회를 택하셨습니다. 이 교회가 참으로 그러한 역할들을 감당해 나가기 위하여 또 하나의 종자 씨를 택하셨으니 믿는 사람들의 가정입니다. 이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을 회복시킬 귀한 사명을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참으로 그 가정을 통하여 하나로 연합이 되고 가정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올바른 질서로 돌아가게 될 때에 그 가정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고 그들의 확장은 곧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질서가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자녀의 부모에 대한 질서는 순종이고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질서는 사랑이며 아내의 남편에 대한 질서도 사랑이고 남편의 아내에 대한 질서는 복종이라고 가르칩니다. 순종, 복종 모든 것들이 다 사랑이라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II. 설득되기 어려운 명령
그러면서 오늘 제시하는 것이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 이 명령을 받아들일 때 많은 사람들이 복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너무나 자기 본위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군가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매우 화나는 일이고 기분 나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녀의 관계도 이제는 많이 변해서 남녀의 구분이 따로 없이 직업들이 이루어지게 되고 사회활동도 그렇게 거침없이 남녀의 구별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고 평등권이 보장되는 이 상황에서 아내라는 이유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가르침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 통치의 원리이고 이것을 통해서 가정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우열을 논의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주신 질서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1. 복종해야 할 남편
여기에서 우리들이 고려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교회에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이 명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인생관도 없고 방종하고 인격이 매우 비루하고 즉흥적이고 폭력적이고 낭비벽이 심해요. 이럴 때 아내가 그 남편에게 온전히 순종한다면 그 가정은 무슨 꼴이 되겠습니까? 아내만이라고 그런 남편에 저항하고 자기 자리를 지킬 때 자녀들이라도 보호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하는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불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신자가 모여 있는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받들던 자매들 역시 주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깨뜨려지며 좋은 신자가 되어가는 교회안의 성도였고 또 이 말씀을 받는 형제들도 또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참된 신자로 빚어져 가기를 원하는 신앙의 분투가 있는 형제들이었다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의 모든 기본은 일단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인간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대답은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인간적인 차원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가정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자신이 아무리 많은 평화를 이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세상 끝 날에 주님 앞에 갔을 때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정생활은 진정으로 그 행복이 영혼에 잇대어 있는 행복이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한 한계를 갖게 됩니다.
2. 가정과 가장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러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머리로 삼으시고 그에게서 여성을 창조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완전한 사람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 형상을 가진 자들로 빚어졌습니다. 그 둘은 서로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사랑하고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질서를 따라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본래 남편이 서야 할 자리를 이탈하는 남자들이 되었고 아내가 본래 서야 할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망가진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고쳐지지 않고는 원래의 남편과 아내의 자리로 제대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남편이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가정의 행복은 모래위에 쌓아가는 행복입니다. 속히 예수님을 믿도록 그 남편을 주님께로 인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아직 그렇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이 정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기도하지 못하는 여러분 자신의 영혼을 불쌍하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합니다.
예화] 남편 구두를 들고 새벽예배를 나온 어느 자매이야기
자녀들도 깊이 회심하여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가정이 될 때 성경에서 그리는 참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이 가정이 바로 이 땅에 살았을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면서 살아가는 가정이 될 때 그 가정은 그 창조의 목적의 완수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가정의 진정한 가치는 많은 재산과 넉넉한 재물 사회적인 지위나 넓은 집 이런 것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가정의 진정한 가치는 남편과 아내가 자기의 위치를 알고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세워주신 자리에 서 있고 남편과 아내의 합당한 작용을 하고 자녀들은 태어나서 그것을 보고 배우면서 이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가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가정의 최고의 가치는 주님을 알고 그 분을 사랑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남편이 아직까지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또 교회에 나온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의 손에 이끌려서 겨우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오는 단계에 그치고 있다면 여러분들의 가정이 진정한 행복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남편의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위해서 가정을 세우셨으니 그 가정에는 반드시 가장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남녀가 만나서 한 가족을 이루고 그 가족이 한 가정을 형성하게 되고 그럴 때에 이 가정에는 질서가 세워지게 되는데 그 질서가 바로 남편과 아내의 질서이고 하나님이 남편을 그 가정의 가장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둘을 모두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동등한 인간으로 창조하셨으니 이 남편과 아내의 질서에 있어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존재론적인 가치의 질서가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보다 우등하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능적인 질서입니다. 존재론적인 우열관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어린 시절에 운동장에서 수 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원을 그린 기억이 날 것입니다. 그때 그런 원을 우리가 어떻게 그렸습니까? 서너 명의 친구들이 손을 붙들고 가운데는 친구가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습니다. 혹은 서 있습니다. 그러면 밖에 있는 친구가 커다란 막대기로 원을 그리면서 돌고 친구들은 손을 꼭 붙잡은 채 같이 따라 돕니다. 가운데 앉은 어린이는 움직이지 않고 가운데 가만히 앉거나 서서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면서 360도를 그리고 밖에 있는 친구들은 뛰어가면서 커다란 큰 원을 그리면 신기하게 시작한 지점에서 막대기가 그린 자국이 딱 만납니다. 수 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원을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이혼 사유 가운데 제일 많은 사유가 성격차이입니다. 성격이 똑같으면 큰일 납니다. 남자가 기분파이고 아내도 기분파이면 카드 빚 지는 것입니다. 기분이다 쓰다 하면 나는 죽었냐 하고 더 씁니다. 집안이 거덜 납니다.
예화] 직장 다닐 때 동료 중 낭비벽 심한 부부의 이야기
부부가 성격이 다르다고 하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틀린 것은 맞고 틀리는 것인데 남편이 틀린 것인가 아내가 틀린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다른 둘이 같이 만나서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네 명의 친구들이 원을 그리는데 네 명이 다 돌아다닌다고 하면 하루 종일 운동장을 돌아도 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한 친구는 움직이지 말고 서서 뱅글뱅글 돌기만 해야 합니다. 바깥으로 뻗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가정의 질서로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가정에다 하나님께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함께 주신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개척적이고 진취적이고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많고 과업 지향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성격을 주셔서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합니다. 아내는 그렇지가 않고 관계 지향적이고 무엇인가 이미 이루어진 것들을 가꾸고 돌보고 이러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 내면지향적인 사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뻗어나가려는 남편에게 때로 방해가 되기도 하는데 그 방해 때문에 남편이 뻗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월 보름 때 쯤 되면 시골에서 연을 날립니다. 바람이 잘 불 때 연 실타래를 풀어주면 연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아이들이 막 박수를 칩니다. 팽팽하게 실을 잡아당깁니다. 그때 연이 생각합니다. 저 줄을 끊으면 내가 한없이 날아갈 텐데 계속 나를 잡아당긴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잡아당기는 줄이 있기 때문에 맞바람을 맞으며 높이 떠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격 차이 때문에 살게 되었다고 말해야지 헤어지게 되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성격이 같기 때문에 집안이 거덜 나서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성격차이 때문에 헤어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가 다르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은 질서를 세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서가 없다고 하면 이런 모든 것들이 무너지게 됩니다. 질서가 있어야지만 이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가정을 통해서 이루고자하는 뜻들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교회로 인도됩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신자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살면서 거기로부터 사랑과 생명을 분여 받습니다. 이것이 영생의 본질입니다. 그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과의 연합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 하나님을 향한 사랑, 생명의 교통은 보이는 교회 안에서 구체화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인생의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지만 주님께 구원받는 그것은 공동체인 교회에 접붙여져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개인적인 것이지만 공동체와 함께 그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나오면 교회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그 교회를 이끌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입니다. 그래서 저한테는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목회자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학을 공부했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목회자는 너무 남성적이어서도 안 되고 너무 여성적이어서도 안 되니 그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정신적인 크기가 굉장히 큰 것이 요구됩니다. 끊임없이 성도들이 못 가본 세상에 대한 도전, 새로운 영역에 대한 개척, 비전, 정보, 성취 이런 것에 끊임없는 도전을 받으며 하나님을 위해서 이제까지 하지 않은 어떤 일을 위해서 모험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끊임없는 도전을 펼쳐나가야 합니다. 동시에 바깥으로만 뛰쳐나가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가슴을 풀어헤쳐서 연약한 신자들을 먹이기 위한 많은 젖가슴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는 도전과 성취 속에서도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되고 한 영혼을 위한 어머니의 심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잘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가 나도록 회초리로 치지만 돌아서서는 눈물을 훔치면서 그 성도들의 부르튼 종아리에 약을 발라줄 수 있는 엄마의 심성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목회자의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대별되는 이 교회의 사역이 원초적으로는 목회자에게 부여하신 일이고 이 일들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면서 돕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III. 남편에게 복종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목회자에게 보이는 교회에서 복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복종의 질서들이 모두 무너진 가운데 저마다 다 교만에 빠져서 자기 사랑에 질서의 깃발을 세우는 시대에 살고 있고 이렇게 세상에서 하던 버릇들을 교회에도 가지고 와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신하지 않는 한 목회자는 그 교회에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고 성도들은 주안에서 그 목회자에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이런 질서 속에서 교회는 보존되고 하나님의 통치는 실현되며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는 구체적인 교회 안에서 구현이 되어서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고치는데 교회가 이바지 하게 됩니다. 이런 질서가 없고 저마다 깃발을 들고 교회에서 주인이 되고 아무나 아무에게 명령하고 누구든지 아무의 명령에나 복종하는 무질서한 교회가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교회에 하나님이 부어주신 많은 은혜의 자원들은 낭비되고 세상을 고치는 이 일에 있어서 교회가 효과적으로 봉사하지 못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단언적으로 말합니다. 보이는 그 통치의 질서 앞에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복종의 질서를 배우는 이것은 가정에서 복종의 질서를 배우는 것과 유사합니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이러한 목회의 질서들을 무시하고 방만하게 행동할 때 그 사람은 가정에서도 질서 없는 가정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이런 질서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질서를 똑같이 깨뜨립니다. 교회에서 새는 바가지가 집에 가서도 새게 마련이지 교회에서 새는 바가지가 집에 가서 성할 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생활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규모 없이 행동하고 교회에서의 이런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도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가정이 그렇게 질서가 없는 가정이라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고 배웠고 살아왔고 지금도 질서 없는 가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는 진정으로 그의 영혼이 건강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질서를 하나님이 가정에도 세우셨습니다. 남편이 비록 나보다 나이는 어리고 혹은 나보다 경제력이 없고 현명하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남편을 깊이 존중하고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오늘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 상황인지 아내들이 고분고분 순종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오히려 더 많은 남자들이 아내로부터 눈치를 보고 아내에게 복종하는 남편도 많이 생겨나고 있으니 이것은 언젠가 아내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던 역사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잘못되었습니다. 여자들이 너무 드셉니다. 복종이라는 것 아랑 곳 없습니다. 집의 재산도 자신 마음대로 휘두르고 하는 상황까지도 벌어지니 이렇게 질서 없는 곳에서 아이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내가 남편을 우습게 알아 ‘당신이 뭘 알아’가 별명이 된 어느 부부의 이야기
여러분들에게도 남편에 대한 무시, 사소한 것에도 복종하지 않는 것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제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과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하는 그 말을 우리가 문자적으로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순종해야 될 의무가 어디까지 입니까?”
1. 신앙 안에서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명령이 주안에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데 이것이 신앙을 거슬려서도 순종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내인 여러분들이 신앙을 거슬려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는 그러한 남편의 명령을 지혜롭게 거절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지혜롭게 안 하고 조금만 남편이 뭔가를 부당한 명령을 했다고 순교의 각오를 하듯이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대드는 것은 용기는 있는데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비록 믿지 않는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아내에게 요구하는 것이 정말 신앙의 절개를 꺾지 않으면 남편의 말에 순종할 수 없는 것들은 사실은 일부분입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너 교회 나가지마. 네가 교회 나가서 내가 재수가 없으니까 너 계속 교회 나가면 나하고 갈라지자.” 이렇게 노골적으로 핍박하는 남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상식적인 경우에는 그런 것 아닙니다. 작은 부분에 있어서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지 말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순종하고 남편을 존중하고 자존감을 지켜주고 하는 그런 관계를 갖자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한마디 잔소리하면 여자는 두 마디로 대들고 남편이 험하게 이야기하면 여자는 바가지 집어 던지고 이렇게 해서 남편이 무엇인가 요구사항을 아내에게 이야기해도 그것에 남편이라는 권위 때문에 아내가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양보하고서도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는 우리에게 없고 오히려 그것은 복종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만 그러나 그 외의 일에 대해서는 남편이라는 이유 때문에 순종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는 이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내인 여러분들에게 가슴에 손을 대고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마음에는 참 안 드는데 그렇지만 진리의 문제가 아니고 남편이 그것을 너무나 원하기 때문에 자기를 꺾고 남편에게 복종해 본 적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2. 가정의 질서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 질서는 바로 남편을 머리로 하고 아내를 몸으로 하는 그런 질서입니다. 자녀들도 바로 그렇게 되는데 이것은 교회가 삼위 하나님의 모상인 것처럼 가정은 또한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교회의 모형을 본뜨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입니다. 이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질서를 따르지 아니하면 가정 전체가 아름다워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질서를 따르지 않는 아내도 아름답지 않고 아내가 올바른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남편도 아름답지 않은 것입니다. 이 질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생각하며 이럽니다. “여보, 똑바로 봐. 똑바로 복종!” 그럽니다. 그러면 여자는 다음 구절을 읽습니다. “봐라 봐 사랑만 해 줘봐 복종 안하나” 남편이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사랑받을 짓을 해봐. 사랑 안하나?” 이렇게 하면서 평생 평행선으로 달려가는데 언제쯤 만납니까? 절대로 못 만납니다. 죽을 때까지 못 만납니다. 마지막 죽을 때는 손을 꼭 붙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에 의해서 수시로 무시를 당하면서 굉장히 괴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죽을 때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유언을 했습니다. “여보, 당신에게 마지막 유언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어?”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이 죽으니까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당신의 마지막 부탁인데 내가 무얼 못 들어주겠어?” 그랬더니 남편이 “내가 죽고 나면 당신 아직도 나이가 있는데 절대 혼자 살지 마.” 남은 자기의 여생까지도 생각해 주는 이 남편의 갸륵한 마음에 아내는 목이 메었어요. “그런데 내가 죽고 나면 아무아무개 하고 가정을 이루었으면 좋겠어.” “여보, 무슨 소리야! 그 녀석은 당신과 동업하다가 사업을 말아 먹인 나쁜 놈 아냐?” 남편이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이게 내가 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복수야.” 여러분의 남편이 마지막 이 유언 남기기 원합니까? 그러니까 안 되는 겁니다. 사랑받게 해 보세요.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남자들은 사랑합니다. 또 여자들은 사랑만 해 줘봐. 복종이 얼마나 기쁨이 되겠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복종인데 그런데 그것이 누가 하나만 매듭을 풀면 될 것 같은데 죽어도 안 풀리고 평행선을 달리다가 저 세상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이 질서가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이 각각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가정의 기본적인 행복은 예수를 믿어서 예수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바꾸려고 하다가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내가 예수님을 믿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해주시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목숨까지 바치신 주님, 마음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설움들이 물러가고 나 같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이 독점적인 사랑에 깊이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제가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네 남편에게 복종하거라.” 그러면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니까 자기가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짓밟으면서 살아왔던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정말 사랑이 없는 행동이고 남편이 자신에게 올바른 태도를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깊이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쳤습니다. 남편에게 돌아가서 남편에게 잘 하는 것입니다.
직접 듣지 못했지만 교역자들 통해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니까 ‘남편에게 복종하라’ 하고 가장 많이 팔린 tape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였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데 헤어지려고 거의 이혼 단계에 가 있던 부부가 있었는데 아내가 와서 그 순간에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집에 가서 “여보, 내가 잘못했어.” 그러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똑바로 해.” 그럴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도 앉아서 손을 잡으면서 “아니야, 여보 모든 문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 한 거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무너뜨리려고 하면 절대로 안 무너집니다. 여러분 어느 날 남편이 와서 “똑바로 해. 복종하라고 했잖아.” 그러면 여러분들이 마음속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나오겠냐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꺾여 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가슴에 한이 맺히고 마지막에 남편이 치매 걸렸을 때 복수합니다. 설탕물 대신 소금물 먹입니다. 그렇게 해서 꺾이면 반드시 한이 됩니다. 옛날에 며느리들이 가슴 속에 있었던 한이 그렇게 꺾였기 때문입니다. 한은 누구에게 많은가 하면, 남편이 소리 지르면 바가지 집어 던지는 여자에게는 별로 없습니다. 남편이 뭐라고 하면 집에 가서 구석에 앉아서 밤잠 못 자고 가슴 두들기며 훌쩍거리는 여자에게 한이 생깁니다.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꺾으면 한이 생깁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이 와르르 부서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가를 깨닫습니다. 남편이 아내 보니까 꼴도 보기 싫어. 내 인생의 최고 실수는 저 여자와 결혼한 것입니다. 늘 불평하면서 살고 세상에 나를 조금만 신경 써 주고 복종하고 남편을 세워주면 어디 가서 덧나나? 맨날 말을 하면 말꼬리 자르고 자기 멋대로 하고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한 것이 무엇이 있어? 능력도 없는 주제에’ 그런 처지에 있었고 사랑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자기 같이 막 되먹은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말할 수 없이 자기를 위하는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삶을 살면서 그 안에서 마지막 십자가의 정신으로 섬기시다가 그 정신을 따라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시고 그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을 받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로 헌신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깨뜨려집니다.
“주님, 아내가 나에게 복종하지 않고 나를 세워주지 않기 때문에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아내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 큰 사랑을 받고도 사랑할 줄 모르는 나의 완악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의 이 지독한 완고함과 교만함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십자가 앞에 깊이 다 깨뜨려지고 난 다음에 주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얘야, 너에게는 많이 부족해 보이는 아내지만 내가 많이 사랑하는 딸이란다. 너도 사랑하라.” 그럴 때 눈물을 흘리며 깊이 회개할 때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아빠를 통해서 배우는 것 별로 없고 자기 사랑해주지 않는 것으로 상처를 많이 받고 살 때에는 정말 하루 속히 엄마 아빠와 헤어지는 것만이 자신의 인생에 기대하는 기도제목이었는데 주님을 깊이 만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주님의 사랑 앞에 깊이 깨뜨려주셔서 이런 상처 속에서도 이 상처를 능가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 오시고 엄마가 부어주지 못한 사랑을 하나님 어머니 되셔서 나에게 부어주시고 아빠에게서 보지 못한 인자하심을 아버지 되어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경험하면서 외롭지 않게 인생의 고난의 길을 헤쳐 올 수 있었습니다. 깊이 깨뜨려집니다.
“주님, 저에게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주셨는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얘야 너희 부모를 용서하고 깊이 사랑하고 순종하라.” 이럴 때 그가 자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런 작용이 계속 있어야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라고 여러분들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회심하고 은혜 가운데 살게끔 만 그 아이들을 도와주면 항상 옳은 것만 하지 않습니다. 성장과정이니까 나쁜 짓 할 때도 있습니다. 결국은 오래 못하고 꺾습니다. 꺾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부모가 매질해도 안 되던 아이가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꺾어지고 주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부모를 용서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며 자기의 가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아내 남편 엄마 아빠 자식 할 것 없이 모두가 각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를 받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가 되어 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일치이고 가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될 기본적인 기능입니다. 남편의 마음이 굳어져도 아내가 깊이 깨뜨려지면 아내의 자리를 고난을 받으면서도 지킬 수 있습니다. 아내가 흔들리는데도 남편이 은혜를 많이 받고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면 남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서로가 금방 마음먹은 대로 충분히 변하지 않더라도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가정을 교회와 유비와의 관계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사도 바울이 가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많이 변하지 않아도 목회자는 가슴앓이를 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목회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 있어도 아내인 교인들이 오래 참으면서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가정의 각 구성원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가운데 중심을 향하여 주님을 향한 사랑을 향하여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정의 연합과 일치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Ⅳ. 아내의 순종과 부부의 정신적 결합
연합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상 받을 일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복종해서 가정의 질서를 세워갈 때 부부의 정신적인 연합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결혼의 제도를 맨 처음 세우시면서 하나님이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라.” 히브리 성경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적습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버리고 아내 속으로 연합하여 한 살이 될지니라.” 이제까지 결혼하기 전까지는 정신적으로 부모와 결합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끊고 아내와 연합이 되는데 into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성성을 가진 여성과 남성성을 가진 남성이 합하여 져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가진 하나의 단위가 되는데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둘이 본성은 각각 따로 가지고 있는데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함께 구현해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성은 끊임없이 진취적이고 모험적이고 도전적이고 성취적입니다. 끊임없이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개척을 하면서 나아갑니다. 아내는 개척해 놓고 간 것을 가꾸고 돌보고 이러면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격차이가 없으면 그 가정은 형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애들 회초리로 때릴 때 아내가 말리고 마음 아파해야지. 작대기를 들고 와서 머리통을 휘둘러 때리면 그 집 애 죽습니다. 애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아버지가 막 때릴 때 엄마가 안쓰러워하고 말리고 하는 모습을 보고서 부성성과 모성성이 아이들 속에 함께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막 때리는데 더 패! 더 패! 네 자식이라고 아끼지 말고 개 패듯 패라고 하면 아이들이 그 속에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두 남성성과 여성성이 합쳐져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성격차이가 없으면 못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가정의 섭리입니다.
1. 사랑과 누림의 관계
정신적인 연합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여성과 남성이 다릅니다. 여자는 자신에게 집중해 줄 때에 자기에게 잘 해주는 것을 통해서 남편의 아내인 자기를 향한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틀립니다. 남편은 그것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내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의존적인 태도에 의해서 남편은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아내를 위하여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갖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한국 가정에서 남편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한 기점이 있습니다. on-line 생기기 시작하면서 무너졌습니다. 예전에는 25일에 두툼한 봉투를 집에 가지고 와서 온가족이 보는 앞에서 꺼내 놓은 거기에서 권위가 섰습니다. “우리 집안은 아빠가 먹여 살리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젠 남성은 일만 하는 것입니다. 사장이 부인에게 통장으로 돈을 넣어줍니다. 완전히 곰이 되어 재주만 부리고 돈은 아내가 갖습니다. 가서는 ‘한 푼 줍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무엇인가 자신들을 먹여 살린다는 이 개념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회적인 변화라고 보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보면 월급날이면 월급봉투를 도둑맞고 이래서 온통 뒤집히는 경우 많았습니다. 그 중에는 일부러 쇼하는 남편도 있었고 소매치기 당했느니 어쨌느니 했었습니다. 두툼한 봉투를 보너스 탈 때 내 놓은 것이 권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가족들이 점점 더 아이들은 아버지 의존적인 것에서 해방되고 아내도 남편을 그렇게 의존하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족 간의 질서와 의식과의 관계에서 중대한 전환을 가져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 남편들 가운데 자기 월급을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 많을 것입니다. 오직 그 월급이 얼마인지 사장과 부인만 잘 압니다. 남편은 잘 모르고 통보도 잘 안 해줍니다. 내가 학교 있을 때도 보니까 교수 휴게실에 가서 우편통 뒤져보면 언제 넣었는지 월급 명세표만 나오고 돈은 없습니다. 가서 10만 원만 빌려 쓰려고 해도 굉장히 힘들게 부탁하고 머리를 조아려야지만 주는 신세가 오늘날 남성들의 신세입니다. 이런 속에서 얼마나 남성들이 자존감을 상하며 살아옵니다. 이런 것이 점점 더 부부와의 결속과 결합을 약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2. 사랑과 의존의 관계
자신을 깊이 의존하고 그런 속에서 남성은 자기가 바로 그 여자에게 소속된 사람이고 이 가정을 책임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수시로 느끼면서 거기서 사랑이 가는 것입니다. 의존과 사랑이 별다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의 개념인데 여자들은 사랑의 측면에서 어떤 관계에 헌신하는 것이 가슴에 빨리 다가오고 남자는 사랑의 측면에서 의존이라는 측면이 가슴에 빨리 다가옵니다.
모든 사랑은 의존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제멋대로 행동했는데 깊이 사랑하고 나면 약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의존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독립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 모든 사랑은 의존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누구를 많이 사랑하면 그 속에는 반드시 그 사람을 향한 의존의 감정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방법이 의존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은 파산 선고를 받아서 주님만 온전히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유실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그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이미 합의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고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를 향해 전혀 의존적이지 않은 여성이 자기를 사랑한다라고 이야기 할 때 독특한 기분이 듭니다.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면 남자들이 불리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남자들이 원하는 것은 애완견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에 대한 복종이 결여된 사랑은 남성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가정문제를 실제로 많이 다루었던 어느 검사가 글을 썼습니다. 가정문제를 다루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내를 버리고 바람을 피웠습니다. 문제가 돼서 이혼소송이 들어왔는데 그 중에서 굉장히 많은 케이스가 본래 그 부인이 얼굴도 더 예쁘고 심지어는 더 젊고 똑똑하고 교양 있고 누가 보더라도 훨씬 더 많은 점수를 받을만한 여자인데 그 여자 버리고 가서 선택한 여자가 후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얼굴도 별로이고 교양도 없어 보이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남의 집안 이야기해서 미안하기는 합니다만, 영국에 가면 찰스 황태자 그분은 다이애나와 결혼했을 때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 사람 결혼하는 바람에 동대문 남대문이 특수를 맞았습니다. 다이애나가 결혼식 때 신었던 신발의 짝퉁, 머리에 꽂았던 핀 이런 것들이 너도나도 하면서 여자들이 신고 다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여자도 미인이었고 젊고 좋은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결국은 그 여자와 결혼하면서도 파커볼스라고 하는 여자와 계속 관계를 맺습니다. 파커볼스가 결국은 왕실에 들어왔지만 여성으로서의 완전성은 거의 상실한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예쁜 아내 내버려두고 그 할머니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역사를 보면 때로는 왕들이 그렇게 천하절색의 미인인 후궁 궁녀 왕비 제쳐두고 자기보다 20년이나 연상인 여자를 사랑한 역사의 예가 가끔 나옵니다. 거기에 푹 빠집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통해서 모성애 본능을 무기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런 것 아닙니다. 무슨 남자가 젖먹이 갓난이가 아니고 그런 것이 없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움직이는 것이 전체는 아닙니다. 그렇게 높은 자리에서 정상에서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던 괴로움 속에서 출세를 위해서 떠받들어지는데 어느 한 여자에게 자기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느 한 여성이 진정으로 자기에게 기대어 있다라고 하는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 나이와 외모 이런 것은 상관이 없이 줄달음치듯이 사랑이 흘러 들어가서 결합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권좌를 누렸던 여성들이 있습니다.
Ⅴ. 결론과 적용
제가 항상 이야기합니다. 얼굴 예쁜 자매들을 형제들이 무지하게 찾는데 유효기간 6개월입니다. 6개월 지나면 별거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 자신의 마음을 끄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의존의 감정입니다. 남성인 자신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 남성의 마음은 버림받고 자기의 위치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벌이도 혼자서 잘하고 모든 것이 다 필요 없고 힘도 세서 가구도 번쩍 들어서 옮기고, 누가 그러더랍니다. 직장 갔다 오니까 이사했더랍니다. 외국 발령 나서 출장 갔다 오니까 24평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이상하게 공항에서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는데 48평 빌라로 데려 가더랍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하니까 출장 가 있는 2년 사이에 2번 튀겨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더랍니다. 남편으로서는 굉장히 웃지만 사실은 얼마나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 애매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사랑의 결합들이 자꾸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아내와 남편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편을 주셔서 한 가정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아내인 여러분들은 오늘 깊이 생각해 보세요. 어떤 분 중의 여러분은 그럴 겁니다. 나는 여태까지 정말 한 눈 한번 팔지 않고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여자들 매일 하는 소리입니다. 남편들은 누가 먹지 말랐느냐 누가 입지 말랐느냐 입니다. 먹고 입고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신파조로 나가는데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아껴서 재산을 늘려주는 아내보다는 먹을 것 먹고 입을 것 입으면서도 남편에게 의존적이고 복종하므로 남편인 자신으로 하여금 가정에서 올바른 질서의 자리를 세워주는 아내에게 더 많은 사랑이 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어느 대통령이 칼국수만 먹겠다고 선언했을 때 다른 사람 다 박수치면서 환호했을 때 나는 제일 싫어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 살게 되었는데 갈비탕 사 줄 돈 있습니다. 먹고 열심히 일해야지 칼국수만 먹느냐는 것입니다. 칼국수만 먹어서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아닙니다. 집에 가서 남편들에게 제발 그런 이야기 하지 마세요. 듣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으로는 감동 주지 않습니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세요. 본질을 보세요. 범사에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처럼 아내인 여러분들이 남편에게 깊이 복종하고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남편을 세울 때 가정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6.이혼을 생각하십니까?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6-9)
I. 본문의 배경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이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의 빛 가운데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고 결합을 이루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서 생산되어지는 자녀들이 그 부모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보며 주님을 공경하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배워갔을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인생을 살아서 주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자신들은 행복한 존재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처음 조상들이 타락을 했고 죄는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도 없고 하나님보다는 자기를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가정도 일그러지게 되었고 그 가정으로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가르쳐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를 만드시고 이 교회와 가정에서 올바르게 배우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기 때문에 이 가정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교제를 본뜬 것입니다. 교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가정도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결합, 거기에서 경험되는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누리고 계신 그 교제의 행복, 하나님과 연결을 맺고 살아가는 영생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타락 후에도 여전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정에서 태어나서 가정에서 부모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참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사랑하고 살아가야 되는지를 부모를 통해 배우면서 비로소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하나님이 경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교회보다도 가정이 훨씬 더 먼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이 올바르게 되어서 거기에서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는 이것이 바로 국가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일이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가정이 하는 일입니다.
II. 혼인의 원리: 한 몸 됨
성경적으로 볼 때 가정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남성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사랑하는 여성이 만나서 가정을 형성하게 될 때 본래 가정의 그림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가정은 따라서 부부가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인데 이 부부의 결합은 육체적인 결합과 정신적인 결합 그리고 영적인 결합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A. 육체적 결합
오늘 성경은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룰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육체의 결합입니다. 장소적으로 부부는 함께 사는 사람들입니다. 부부는 함께 살 뿐만 아니라 한 집에서 한 방에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는 일 이외에는 방을 따로 쓰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rule쯤이야 오늘날에 아무렇게나 어기는 시대이지만 성경적인 가르침은 부부가 장소적으로 한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육체의 결합은 정신적인 결합과 떨어지지 아니하니 이것은 성 관계를 통해서 맺어지는 육체의 결합을 동반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육체의 결합이 정신적인 결합과 하나가 되게 되고 이런 결합을 통해서 부부의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육체적인 결합은 촉진되고 그러한 육체의 결합의 결과로서 사랑의 열매인 자식들이 태어나게 됩니다.
B. 영혼의 결합
결혼과 함께 남편과 아내는 신비하게도 두 영혼이 연결되게 됩니다. 이 연결은 남편과 아내라는 이유 때문에 생겨나는 연결이라기보다는 각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접붙여진 그 연합을 기초로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며 살아가야할 남편과 아내 사이에 수립되는 영적인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믿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같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살아나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런 의미에서 불신자를 선택하는 결혼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시류에 거슬러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안 믿는 사람하고 결혼했는데 나중에 주님을 믿게 되어서 아주 행복하게 되었더라고 하는 드문 결론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담대하게 불신 결혼을 선택하며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된 것이고 결혼 생활에서 불행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여야 하는 것이지 그 밖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있지도 않거니와 설령 그것을 찾는다고 할지라도 그를 진정으로 행복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C. 정신적 결합
이 정신적 결합은 영혼의 결합에 기초한 결합입니다. 영혼의 결합이 원리적인 결합이라면 그 원리적인 결합이 실재의 삶 속에서 누려지는 것은 마음과 정신을 통해서이니 이 정신적인 결합은 실재적인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리적인 결합은 흔들리지 않지만 정신적인 결합은 실재적인 결합이기 때문에 둘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함께 사랑을 가꾸어 나가면 그 결합이 커지지만 이런 삶을 포기하게 되면 이 결합이 매우 약해져서 같은 집에 살면서도 남남이나 다름이 없는 차가운 마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가정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의 정신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합니다. 집은 있지만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 허울뿐이고 이름뿐인 결혼생활을 이어가지만 실재 그 속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정신적이고 심적인 결합이 없기 때문에 남남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결국 이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III. 이혼이 허락될 때조차도
성경은 이혼에 대해서 두 가지 경우에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허용을 합니다. 첫째는 남편과 아내 중 한 사람이 간음을 하고 부부의 정절을 깨뜨렸을 때입니다. 이 경우에는 남편과 아내 중 한 사람 누군가가 이혼을 청구하고 그 사람과 헤어질 수 있으니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성경이 허락을 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는 신앙의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아서 이혼을 하는 경우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으려고 하는데 남편이 그 신앙을 버리지 않는 한 너랑 같이 살지 않겠다고 고집하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남자와 헤어지지 않고는 도저히 이 신앙을 지킬 수가 없다고 생각될 때 이혼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남편과 헤어질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가 한 번 구박했다고 이혼에 도장을 찍는 것은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됩니다. 지속적으로 핍박하여 도저히 정상적으로 자신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을 포기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논리로 볼 때 남편과 아내가 어떤 한 사람이 이단이나 이교에 빠져서 결국은 함께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부부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고 할 때 부부는 이혼할 수 있습니다. 즉,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배교의 길을 택하게 될 때 그때에 많은 몸부림과 노력 끝에 이혼을 하지 않고는 신앙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될 때도 이혼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성경적인 삶을 살았다고 믿어지는 청교도들조차도 이런 조건들 만으로서는 현실적인 결혼에서의 와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몇 가지 이혼의 요건을 첨가시켰습니다. 예를 들자면, 남녀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었는데 둘 중 한 사람이 심각한 정신 장애가 있는 경우, 즉 정신병일 경우에도 청교도들은 이혼을 허락했습니다. 심지어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성적인 불능 상태가 되어서 남녀의 의무를 각자 다 할 수 없을 때에도 교회에 고백하고 이혼을 할 수 있게 그들이 성도들을 지도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정신 질환도 발견이 되고 가정의 폭력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성경적인 해석의 원리를 적용해서 이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된다라고 하는 주장들이 제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지 그렇게 하면 행복해 진다거나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 주시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 금융회사가 광고를 내 놓았는데 이런 카피를 썼습니다. ‘저희 회사는 최선을 선택할 수 없을 때 차선을 선택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 카피가 가슴에 참 많이 다가왔습니다. 최선을 선택할 수 없을 때 차선을 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서 최선의 것을 선택한다라고 하는 의미겠지요?
이혼이 성경적으로 허락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선 이것은 구약의 경우에 보면 호세아 선지자의 삶을 통해서도 이것들이 입증이 됩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받은 눈물의 선지자였습니다. 이 선지자는 성결한 사람이었지만 왜 그런지 하나님은 이 사람을 음행으로 이름난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가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경건하고 거룩한 선지자가 음란하고 타락한 이 여자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을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에게 그렇게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고 음란함이 가득한 여자였습니다. 수시로 외간 남자에게 이끌려 몸을 버리고 심지어는 자식까지 낳아오는 패륜한 길을 걸어갔던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끊임없이 여자를 찾아와 자신의 아내로서 사랑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 때문에 행하는 의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그의 가슴 속에 이 고멜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으니 이것은 단순한 남녀 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진 아가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를 용서하고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며 정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왔던 모든 선지자들보다도 뛰어나게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신 그 교훈은 너희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나 좋음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그 큰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아가페의 사랑을 본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으니 또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한 가족인 자신의 남편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수까지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라면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자기의 눈에 보이는 가족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너무나 쉽게 이혼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쉽게 이혼을 결심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혼을 하면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죄인처럼 평생 가슴에 딱지를 붙이며 살아야 하던 시대는 옛날이야기이고 지금은 이혼을 해도 아주 당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이혼을 생각하고 결행하는 사람들이 용기 있는 사람이고 그렇게 못하는 사람들이 의식이 없고 시대에 뒤처진 사람인 것처럼 이렇게 그릇된 견해들이 유포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예술과 방송, 미디어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전파된 것들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께서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구별하라.”고 말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도덕의 원리와 이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기준 사이에는 언제나 격차가 있게 마련이고 이 격차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는 안 주시는 은혜를 주셔서 그들에게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한 사람이 이혼을 생각하게 될 때까지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견디기 힘든 많은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그런 일들을 결심하게 됩니다. 일단 이혼을 이야기 할 때 이혼을 하게 되는 경우는 크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과 아내가 같이 살아가다가 배우자로 있는 깊은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이혼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예로 들자면 남편의 무자비한 폭력과 음주, 생활에 대한 무책임, 무절제 혹은 외도 이런 것들 때문에 살아보려고 애를 썼는데도 결국은 이 남자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 마찬가지로 여자의 경우에도 아내하고 웬만하면 살고 싶은데 현저한 성격의 차이 그리고 심지어는 아내의 폭력에 시달리는 남편도 있습니다. 아내로서 정절을 지키기 못하고 아주 현저한 배신행위를 했을 때는 남편과 아내가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자신이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헤어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것보다 더 나쁜 경우는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는데 밖에 있는 요인으로 인해서 남자와 여자가 이끌리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이 끌리는 유혹이 있기 때문에 가정을 파괴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아주 극악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가정의 파괴의 원인이 순수한 괴로움 때문이 아니라 대개 이런 유혹 때문에 가정이 파괴됩니다. 남편의 생활의 무책임이나 구타 폭언 이런 것들이 표면상의 이유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외도를 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성격의 차이가 있고 이야기가 안 통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아내의 정절에 대한 의심이 남편에게 생겨납니다. 이런 것에 있어서 굉장히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의 모든 부부 관계는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어쨌든 살아보자고 결혼했는데 한 여자가 한 남자가 그 결혼 생활을 이제 포기하고 둘이 갈라져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한 순간에 충동으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고통과 번민의 시기가 있고 난 다음에 결국은 이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생각이 반복을 낳고 반복이 기대를 가져다주고 하는 가운데 이혼을 실행하게 됩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이혼한 사람들을 색안경을 쓰고 보거나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당당하게 살아가고 사회에 많은 제도권 속에서 이혼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받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IV. 이혼과 관계의 파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이혼할 수 없습니다.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로 논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과의 관계
이혼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게 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혼을 결심할 때는 이미 영적으로 바닥까지 내려간 상태에서 도장을 찍게 됩니다. 이혼을 결심한 사람이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하고 나서 응답받고 와서 이혼 서류에 도장 찍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가끔 정신 나간 사람들이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암시한 것이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감히 목사 앞에 와서 주님이 이혼을 응답해 주셨다고 하는 정신병자들도 가끔 있는데 그야말로 정신병자입니다. 온전한 상태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교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슨 하나님의 뜻이 그런 뜻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부부의 생명과 사랑의 결합이고 하나님의 삼위의 교제를 본 뜬 관계이고 이 속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 부부의 관계와 그 사랑과 생명을 보면서 하나님을 배워가도록 그렇게 세워진 가정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깨뜨려집니다. 이혼을 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거의 기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영혼의 캄캄한 암흑 속에서 인간의 생각과 충동이 시키는 바를 따라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가끔은 그렇게 하고 나서 아주 자유로워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 길을 인정해 주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 속에 시달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정은 교회입니다. 결국은 둘의 영혼이 결합이 되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가정을 이루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이혼을 하고 깨졌습니다. 둘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께는 계속 접붙여져 있습니다. 둘이 부부로서의 결합은 깨뜨려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잠시 깨뜨려지고 다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깨뜨려진 채로 남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리스도 정교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는 한 영혼에게는 한 영혼만 짝 지워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둘이 결혼을 해서 한 사람이 죽으면 이미 자신과 결합할 수 있는 영혼은 다 없어진 것입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있으면서 예수님은 버리지 못하고 남편과 아내는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깨뜨려진 가정이 됩니다.
교회에서 아주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어갑니다. 어느 날 그럴 계기가 있어서 나 혼자만 있는데 와서 고백을 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행복한 가정처럼 보여도 사실은 아주 오래 전에 우리 각자 가정을 깨뜨리고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긴 세월동안 살면서 여러분들은 잊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가정이라도 만들어 주셨으니까 이제는 잘 살아야 된다고 했더니 그 중에 한사람이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 긴 세월이 흘렀는데 한 번도 가정을 깨뜨린 내 가정에 대해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은혜생활하고 교회를 섬기면서도 가정을 깨뜨리고 하나님과 깨뜨려진 관계에서 온 그 상처와 양심의 가책들, 두고 온 자식들의 기억들이 가슴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혼을 하고 다시 충만한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만 명의 사람 중에 수십 명입니다. 아주 극소수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가정을 깨뜨린 것 자체가 하나님께는 씻을 수 없는 굉장히 커다란 죄입니다. 회복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그것이 매우 쉬운 길이라고는 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죄가 질적으로는 모두 똑같지만 죄의 크기는 죄마다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이루어 가면서 서로 다투고 갈등하고 미워하는 것도 죄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결합, 하나님이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끊을 수가 없는 이라고 하는 결합을 그냥 끊어버리고 가정을 파괴시켜버리는 그것은 죄 중에서도 매우 커다란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한 사람들이 그렇게 영적인 최고의 호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정말 몇 만 명에 몇 십 명이 될 정도로 극소수의 사람들에 불과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설령 이혼의 요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이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최선은 그 고통과 슬픔 속에서 그것을 견디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가정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이고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교회와의 관계를 기억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여러분들이 얼마큼 자주 신랑 되신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달려가려고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음란한 사람들이고 한 신랑이신 예수님께만 안 붙어 있으려고 하는 그런 날라리 기질을 가진 인간들인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우리 신랑과 우리 사이에 혼인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 그분께서 변함없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그 자신들을 부부로서 맺어주신 이 혼인이 인간의 자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매 서셔서 우리를 이루어 주셔서 예수를 신랑으로 한 가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을 깨뜨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현대 사고에는 이 설교가 어울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감히 그리스도 사랑의 정신으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도 아내가 부정행위를 했어도 이혼할 수 있지만 더 좋은 것은 그것도 용서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견해에 따라서 남성이 성 불능이 되고 여성이 임포텐스가 되어서 서로 상대에게 성적인 만족을 줄 수 없을 때 아마 오늘날도 이혼을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더 좋은 것은 자기 속에 일어나는 성욕을 죽이고 그 남편과 아내를 성적인 능력이 상실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편과 아내의 자리를 박탈해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 사랑의 정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내 중 한 사람이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병상에서 그 긴 세월을 지키며 그들을 간호하면서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부부의 결합을 이루다가 결국은 천국으로 떠나보내는 그 남편과 아내의 아름다운 희생은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희생이 되겠네요? 이런 모든 것들은 결혼 자체를 단순한 인간사 속에서 거래 관계로 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들입니다. 더 좋은 것은 사랑으로 그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혼을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서 이혼한 후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영적인 삶과 정신의 삶 육적인 삶 이 모든 것들을 포괄적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누가 행복하게 살아가는지 내가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말고 하나님과 함께 말입니다.
B. 자녀들과의 관계
자식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처음 만나는 세계입니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젖을 물고자라면서 그 아이가 선악에 대해서 엄마의 표정을 보면서 배우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활짝 웃는 표정을 통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선한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엄마의 꾸짖는 표정을 통해서 악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회초리로 때리는 아빠의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징벌을 배우고 칭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상급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아담도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둘이 결혼하면 식 올린 다음 날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놓으면 ‘후~’하고 불어서 사람을 만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결혼한 지 한 20년 후에 흙으로 만들어서 ‘후~’하면 아담같이 큰 애가 태어나서 곧바로 결혼하고 이렇게 하나님이 하실 수도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남녀가 결합을 하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그 몸에서 씨를 받아서 한 아이가 태어나서 태어날 때는 피 덩어리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태어나고 눈을 뜨면서 엄마 얼굴을 보고 그 품에서 엄마 아빠를 보면서 자라게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이들이 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살다 싫어 헤어집니다. 이미 헤어지리라고 마음을 먹었을 때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은 접은 지 오래 이고 자식들에 대한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그런 결혼에서 엄마 아빠가 나누어지고 가정이 공중에 분해되어 버리는 가운데 있게 될 가치의 혼란이나 정신적인 충격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 사랑에 눈이 어두운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작년에도 제가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한 가지가 아니고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부모가 이혼을 했습니다. 유치원 때 쯤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이혼 수속을 끝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너를 애비 없는 자식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 너를 위해 엄마가 시집을 가야 되겠다.” 그러고 결혼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박 씨였는데 2학년 때 전 씨가 되었습니다. 애들이 묻습니다. “너 왜 전 씨니?” 어린아이가 이런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혼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은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그 속에서 가치에 대한 깊은 혼란을 받으면서 파괴되어 갑니다. 그런 집안에서 사람을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남자를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여자도 생겨나고 반대로 여자를 도저히 믿지 못하는 남자도 생겨납니다. 정 반대로 아무 남자에게나 자기의 마음을 쉽게 주는 딸도 생겨나고 어느 여자에게든지 사랑을 느끼는 방탕한 남자도 생겨납니다. 이미 그렇게 이혼한 그 순간 인생에 있어서 그 아이를 가르쳐 주고 지도할 수 있는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부모는 사라진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가정이 파괴된 그 순간에 정신적으로 이 아이들은 고아가 되어 버립니다. 내 눈 앞에서 부정행위를 하는 엄마를 보고 그 부정이 폭로되는 아빠를 모두 본 아이가 이혼한 후에 그 엄마 아빠로부터 어떤 정신적인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목사가 조금만 행동을 잘못해도 그 다음 주에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온다면서요? 난 별로 그런 것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는데 성도들은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거꾸로 생각해 보세요. 한 집안에서 부모가 그렇게 몹쓸 짓을 하고 갈라졌습니다. 결국은 가정이 파괴가 되었는데 그 순간 자식들은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생활비를 보내주고 학교를 보내주고 가끔 만나서 울고불고 하는 것은 다 show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그 굴레를 짊어지고 일평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기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치열한 성화의 길을 가면 그나마 과거에 받은 상처로 인해 자신이 성숙해지는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흔적은 남는 것입니다.
남편이 도저히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고 그래서 나는 결국은 이 남편하고 헤어져야 되겠다. 아내와 성격 차이가 심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남편으로서 존경도 안 해주고 심지어 행실까지 의심스럽다. 그래서 이제 헤어져야겠다. 만약에 그렇게 결심을 했다면 자식들은 무슨 죄인가? 이혼을 통해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수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복수를 한다고 치자. 그러면 자식을 낳지 말았어야 한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을 때에는 태어난 아이의 일생에 대하여 내가 아비와 어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걷겠습니다. 라는 서약이 깃든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하는 것은 개와 돼지가 새끼 난 것하고 똑같습니다. 인간이 자기 사랑에 복받치게 되면 이런 것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옵니다. 결국은 그런 자기 사랑에 빠져버리면 진리의 빛으로부터 한껏 멀어진 상태에서 짐승과 같은 육욕만이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어 치웁니다. 도장 찍고 가정을 박살을 내고 돌아서면서 그래도 이 엄마는 널 사랑한단다.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 사랑 아닙니다. 도장 찍고 집안을 박살내고 떠나면서 그래도 이 아버지 가슴 속에 넌 영원히 있을 거야.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사랑 아닙니다. 혹시 그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순간에 마음에 일어나는 정서의 변화가 시킨 것이지 사랑 아닙니다. 사랑하면 참아야 합니다. 아내가 못 마땅하고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심지어는 아픔이 있어도 자식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가정의 틀 안에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정을 파괴하고 버렸는데 무슨 자식과의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슴에 찔리는 이야기 할까요? 낳아주기만 하면 부모입니까? 이것은 짐승도 할 수 있습니다. 둘이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서로 사랑할 때 자식의 탄생을 갈망하면서 그 일을 합니까? 그러니까 자식을 낳았다는 것만으로는 부모로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그 무엇이 자식을 향해 있어야 됩니다. 자기가 고통스럽고 괴롭다는 이유 때문에 자식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부부의 관계를 박살내버리고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녀에 대한 잔인한 폭력입니다. 그러고도 그 죄를 쉽게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혼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여러분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금 여러분들의 영혼의 상태가 매우 더러워져 있는 것입니다. 혼돈스러워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정말 아프겠지요. 가정에서는 이렇게 끝까지 오래 참는다는 것이 어렵구나. 주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온갖 사랑과 자비를 베푸셨는데도 사람들이 그것 모르고 주님 배신하고 마지막에 주님 십자가에 못 박을 때조차도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요? 젊고 능력 있고 쾌락을 즐길 수 있을 때에는 안중에도 없이 자식들을 버리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제비처럼 훨훨 날아가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육체의 기력과 정신의 힘이라고 하는 것이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젊은 날이 모두 흘러가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 지나온 참지 못한 그 날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그렇게 한 가정을 박살을 내고 자녀들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고 그 날아가 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그들을 많이 희생시킨 충분한 행복을 얻었습니까? 나이가 들면 사람은 핏줄로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자식들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이미 자녀들은 그 마음에 부모 없는 고아가 된 지 오래입니다. 어느 날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이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만의 환상입니다. 결국은 그 자녀와의 관계는 복원이 안 되는 것입니다. 혹시 복원이 된다면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그 딸이 나중에 은혜를 많이 받고 깊이 깨뜨려지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의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니까 자기를 버린 그 어머니 아버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절히 그 자식 속에 마땅히 있어야 할 부모를 향한 그 오래된 기억까지 다 보상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종류의 사랑이 있고 나도 어쩔 수 없어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와 정말 행복하게 일생을 삽니다. 그러면 그 기억들이 굉장히 풍요로워서 부모가 사라졌는데도 그 부모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그 부모는 하늘나라에 갔는데도 그 부모님이 사셨던 삶을 자신도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을 박살을 내 놓고 고아를 만들어 놓고 애미 애비가 찢어졌는데 자식들의 가슴 속에서 그 엄마 아빠처럼 살고 싶은 그 인간의 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그 일을 해 주는 것이 자식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인간의 도리입니다. 밥 먹여주고 학교 보내주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도리입니다. 그것을 송두리째 날려 보냈습니다. 자식은 어떻게 하든지 철들 때까지 엄마편이고 아빠편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가장 커다란 최초의 배신을 자녀들의 가슴에 심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갈등이 있고 숨겨져 있으면 두 사람의 불행으로 끝나는데 이혼하고 나면 먹물처럼 튀기면서 자식들이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 자식이 그 상처를 안고 결혼하면 한 여자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둘 사이에서 그 아버지의 굽은 모습을 보고 자란 애는 손자는 또 어떤 삶을 살아가겠는가? 그러니까 자기 하나가 지은 그 죄가 신앙이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2대 3대로 내려가면서 그 죄의 결과를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이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할 잘못입니다.
C. 자기와의 관계 파괴
그 가책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계 혼혈아가 미국의 미식축구에서 MVP가 되어 1년에 몇 백억씩 돈을 버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하인즈라는 청년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그 아버지가 폭음과 폭력으로 가정을 버리고 뛰쳐나갔습니다. 어느 날 이 애비가 TV를 보니까 자기 자식이 미국의 젊은이들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자기는 끼니가 없이 근근독신으로 사는데 아들이 1년에 받았다는 돈이 몇 백억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나타났습니다. 내가 네 애비라고 나타났습니다. 그때 하인즈가 한 말이 인상 깊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떠난 순간 저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나에게는 어머니만 계십니다.” 문전 박대했습니다. 그것이 그 아이의 가슴 속에 이미 성인이 되었고 명예스런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도 결국은 그때 받은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혼이 자식이 어린 나이에 이루어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현실성은 없지만 한 서른 댓 살 되어서 시집 장가가서 애들은 다 키워놓고 여러분들은 한 65-70세가 되었는데 이혼을 한다고 하면 자식의 인생이 뿌리 채 뒤흔들리고 그러지 않습니다. 이미 분가해서 미국에 가서 살고 부산에 내려가서 사는데 이혼한다고 하면 걱정이 되겠지만 마지막에 잘 사시지? 그렇지만 에고 노인네들 못 말려? 이런 정도로 끝납니다. 이미 인간 형성이 다 되어 그리 큰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나 이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결혼을 하면 박 씨인 자기 딸이 전 씨로 이름이 바뀌는데... 이 나라 법도 웃기는 법입니다. 그런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개인의 행복이 중요하면 혼자 살아요. 처음부터 시집 장가가지 말고. 결국은 죽을 때까지 가정을 깨뜨리고 자식을 배반한 그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정을 깨뜨리고 뛰쳐나간 애미 애비가 마지막에 자식의 손을 잡고 죽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용서해다오. 그것도 말을 안 하고 죽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길을 여러분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까? 한 번 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는 것입니다.
Ⅴ. 사랑으로 고난을 이김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에 관해서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사랑을 사랑하되 하나님 당신 안에서 사랑하게 해 주시옵소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는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밖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릴 것이니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를 걸지 마세요. 그것도 죄인의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어떤 결점이 발견되고 실망스런 점이 발견되면 그게 없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남편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아내를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는데서 충전 받고 아내가 자기를 떠받들어 주는 데서 채움을 받는 사람은 언젠가는 이것이 고갈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개척교회 할 때인데 지금은 다 가고 없는 사람들이지만 자매 한 사람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교인도 얼마 안 되니까 새벽 예배 때는 제가 가끔씩 가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 기도를 해 주고 나면 온 몸에 힘이 쫙 빠집니다. 너무 힘들어서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우리 교인도 아니었는데 새벽기도 나와서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새벽마다 가서 기도하는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이유가 있어서 새벽기도 나온 것입니다. 내 평생소원 이것뿐 이혼하게 응답해 주시옵소서. 그러니 그것이 응답이 될 리가 있습니까? 그 후에 자매가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혈기 충천하던 남편은 기가 많이 꺾어지고 이제는 질병까지 걸려서 수족도 잘 쓰지 못하는 불쌍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방을 갔는데 남편을 목사 보는 앞에서 끌어안고 볼을 비비면서 얼마나 우리 남편이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남편은 옛날처럼 좋은 직업을 갖지도 못하고 위풍당당하지도 못합니다. 풍을 맞아서 몸을 잘 쓰지도 못하고 늙어갑니다. 그런데 머리 허연 그 남편의 뺨을 부비며 우리 남편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고 할 때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그런 사랑으로 부부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가정 그 자체의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가 없습니다. 이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이 이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 이야기를 마음을 열고 잘 들어보세요. 성경의 진리입니다. 아내나 남편에 대한 이성적이고 육욕적인 사랑을 넘어서서 그 남편과 아내를 영혼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가 자신을 배반한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국은 가정이 깨뜨려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에는 가난해서 그러는지 알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정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육욕에 흔들리는 남편, 그렇게 가정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이혼을 생각하는 아내 그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세상 모두 사랑없어 냉랭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소리 질러 사랑받기 원하네]
살면서 정말 이혼하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남편을 그 아내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부부들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인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인간의 사랑은 피었다가 지고 지었다가는 다시 피어납니다. 번성할 때가 있는가 하면 쇠퇴할 때가 있고 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다시 타오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결혼의 관계는 그 상태의 오르내림과는 상관이 없이 유지되어야 할 하나님과 약속이고 의무입니다. 한 번 이혼을 한 사람은 두 번째 이혼 할 때에는 첫 번째 이혼 할 때보다 반도 고민을 안 한 상태에서 이혼을 결행하고 두 번을 이혼한 사람 그 다음부터는 세 번째 네 번째 이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에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혼을 생각하다가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는 너무 사랑이 없습니다. 가혹합니다. 목사님은 이혼을 생각하는 우리의 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십니까? 목사님이라도 내 자리에 있으면 벌써 이혼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혼을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이혼은 오랜 이성적인 추론 끝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에 많이 좌우됩니다. 누르고 살면 변화가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희망을 두어야 됩니다. 총체적으로 우리의 부부, 우리 가정을 고쳐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정은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습니다. 해 봤어요? 해 보았겠지요. 그러나 진정으로 해 보는 것은 죽어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어 봤어요? 이혼하려는 부부를 여러 번 상담을 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마음이 굳어져서 목사의 충고를 안 받아드립니다. 제가 예외 없이 제안한 것이 있었습니다. 일주일만 금식기도하고 도장을 찍으라고 했는데 아무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이미 그 상태가 되면 마음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있기 때문에 일주일씩 하나님을 바라보기에는 그 기간이 먼 것입니다. 더군다나 금식을 왜 합니까? 육이 살아있는데...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정답은 우리가 남편과 아내를 남편과 아내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 한 영혼으로 보고, 남편과 아내의 남녀 간의 사랑 그 이상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우리의 사랑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것은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어떤 자매들은 그렇게 깊은 가정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승리합니다.
한나를 기억해 보십시오.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가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소에 올라갔고 마음의 모든 시선을 자기를 섭섭하게 하는 남편이나 아들을 갖지 못하는 자신의 비참함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주목했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술 취한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해 보았습니까? 그래서 자신이 죽어 보았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아보려고 애쓰는 나에게 이러한 시련과 어려움이 일어난 것이 내 남편의 악함, 내 아내의 악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를 성찰하면서 주님 앞에 매달려서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의 관계가 깨뜨려진 것, 내가 이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 우리의 결혼 생활 속에 밀려온 것, 이 자체가 나의 불순종과 죄 때문이옵나이다. 주님 밖에서 행복을 찾고 주님 없는 곳에서 스스로 행복해지고 높아지려고 하는 나의 교만과 주님 없는 세상사랑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그러고 죽어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Ⅵ.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피하기 위해서 불순종하고 도망친다 해도 주님의 뜻대로 살 때에 온화하시던 주님의 얼굴을 불순종하고 가정을 깨뜨린 후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뿐이지 어디로 간들 주님의 얼굴을 피할 수가 있겠느냐, 바꾸어지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남편이 주는 행복 아내가 주는 기쁨 자식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은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가정이 위기에 부딪혔을 때마다 반성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남편을 더 사랑한 것은 아닐까?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보다는 우리 가족의 안일을 위해서 더 많이 마음 쏟은 것은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을 내 행복에 이용하기만하고 산 것은 아닐까? 내 삶이 소명과는 상관없는 삶은 아니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 가정에 사랑 없음, 남편과 아내인 내가 이혼을 생각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결국은 내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남편과 아내를 향한 사랑, 자라나는 내 새끼들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못 박고 나는 죽이시고 주님은 내 안에 다시 사시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회복되지 못할 가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래 참아야 합니다. 깊이 어려움이 다가와서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될 때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 싫어하고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멸시와 유혹 가시관 쓰셨네.]
생각하면서 고난도 이기고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깊이 사랑하고 시련도 이기세요. 금방 갑니다. 결혼 생활 힘들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20년, 30년 지나갑니다. 참으세요. 참고 또 참고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이 날 위해 얼마나 참으셨는지를 생각하며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게 하고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도록 그렇게 사세요. 그것이 은혜받은 성도의 갈 길입니다.
7.이혼한 그대에게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10:6-9)
I. 본문 해설
그러므로 가정은 육체와 영혼, 그리고 정신의 결합을 통해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남녀를 이렇게 결합시키므로 삼위일체 안에 있는 사랑의 교통의 모상을 삼으시고 그 사랑 속에서 자녀를 태어나게 하셔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도리를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부부의 결합은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나눌 수가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II. 이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이혼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생은 길지 않지만 짧은 인생 안에 일어나는 사연은 수없이 많습니다. 모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한 남녀가 서로 사랑해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기로 맹세했을 때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남에게 모두 일어나는 일이라도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단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고 보니 갈등과 고통이 생겨나게 되었고 결국은 부부가 찢어져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점점 다반사가 되어서 이혼한 것이 흉이 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결혼과 이혼의 의미를 분명하게 새기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지만 앞으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할 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만도 해도 이상적인 가정을 3남2녀 라고 어른들이 말씀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2남1녀가 되고 둘만 낳아 잘 기르다가 하나면 충분하다는 세상이 되었고 요즘은 그거 꼭 낳아야 되나? 이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3남2녀가 가장 이상적인 자녀들의 수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 양보하고 자기를 꺾는 것도 배우고 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배우고 동생이기 때문에 언니 오빠 누나가 입던 옷도 물려받는 것도 배웁니다. 자기가 너무 하고 싶지만 동생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배웁니다. 여기에서 무수한 자기 꺾임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형성됩니다. 그러니 결혼 후에도 자기를 꺾을 줄 알고 남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할 줄도 아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20년 이후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이러한 변화는 이제 더 이상 누구 앞에서 자기를 꺾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요즘 부모들도 자기 자녀들이 누구한테 기죽는 것 못 보는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자면 자녀를 정말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기죽는 법을 배우면서 자라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아이가 행복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적인 조건을 요구받게 됩니다. 첫째는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의 도리가 무엇이고 결혼 생활에 대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 부모 밑에 태어나지 못했으면 인생에 있어서 행복을 위해서 한풀 접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도 희망이 있으려면 좋은 목회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를 존경하고 그가 가르치는 가정과 신앙의 도리를 배우면서 남편과 아내 앞에서는 못 꺾여도 목회자한테서는 꺾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보다도 더 필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꺾어져 본 사람, 그 앞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깨뜨려 질 수 있는 사람이 될 때에 아내 때문에 고통 받는 남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문제를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편 때문에 고통 받는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없으면 남편을 향해 참지 못하면 가정이 깨지고 참으면 울화병이 생기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으면 그 은혜를 통해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고 그 고통을 십자가 삼아서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자녀들이 좋은 부모도 못 만나고 회심도 없습니다. 미래는 어두운 것입니다. 그 아이들 데리고 외국에 가서 공부를 시키고... 왜 그렇게 어리석으세요? 그것으로 인생이 행복해집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혼을 하고 나면 이제 이것은 단순히 내면에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서 자체를 뒤 흔들어놓게 됩니다. 양가의 부모님들이 그 깨뜨려진 자식들의 가정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되겠습니까? 양쪽 가정은 서로 등지겠지요? 남편과 아내는 자기들이 살기 싫어 찢어졌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둘이 서로 재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은 엄마 눈을 피해서 아빠를 만나고 아빠 눈을 피해서 엄마를 만나러 가야 되겠죠? 둘 중의 하나가 결혼을 했다면 엄마가 둘이 되고 아빠가 둘이 됩니다. 아이들은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가정이 찢어지고 나면 폭력과 같은 그것을 그대로 당합니다. 말이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항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이 눌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슴에 그대로 찍힙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형성합니다. 부모가 이혼한 집의 아이들이 이혼할 가능성은 좋은 부모 밑에서 그런 것을 모르고 자라난 아이들의 2배가 넘습니다. 왜? 그렇게 깨어지는 것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의 그 고통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또 그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서로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혼을 하고 나면 엄밀한 의미에서 이 아이의 마음속에는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고아가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바람이라도 피어 그렇게 되었다면 이제 엄마 아빠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인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적으로는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가정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이런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결행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될 일인데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가 14살이실 적에 우리 할머니가 16살에 결혼을 하셨다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남편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같이 자면서도 부끄러워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서로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 한 것이 아니라 사진도 못 보고 부모의 명령에 의해서 결혼하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해로하면서 잘 살았습니다. 지금은 부모들이 지정해주는 남자에게 시집가라고 하면 부모 잡아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좋다고 신나게 연애하고 찰떡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져서 못 산다고 하고 심지어는 같이 자보지도 않고 어떻게 결혼하느냐고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찰떡처럼 사랑하는데 이혼율은 높아집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너무 기대를 많이 해도 이혼의 사유가 됩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주 빨리 이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우리의 사랑이 당신의 사랑의 질서 안에서의 사랑이 되기를 원하지 당신이 정해준 질서를 이탈한 사랑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굳건하지 못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은 대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 사랑이 채찍이 되어 돌아오는 적이 많습니다. 이 사랑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사랑이기 쉽상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며 결혼을 하는데 서로에 대해서 너무 과대한 기대를 가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 밖에서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랑은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꽃처럼 시들고 사라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사랑은 미움으로 돌변합니다. 기쁨은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 바깥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합니다.
III. 이혼의 십자가를 지고
어리석음과 무지 미래에 대한 예측 못하는 판단 때문에 결국은 참지 못하고 이혼을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A. 하나님 앞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지만 일어났다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여러분들이 행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만족스럽지 않아서 버렸습니다. 남편은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은 버리거나 포기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떠날 수 있나요? 내가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으니 내가 나를 벗어날 수 없다 함은 곧 내가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함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피하오리까?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 때에는 온화하시고 유순하신 하나님을 뵈옵지만 주님께 등 돌리고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뵈올 뿐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혼을 했더라도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한번 이혼했다고 죽을 수도 없지 않아요? 이혼을 했는데도 살아야 되겠다고 할 것 같으면 이제 깨어진 관계는 당장 회복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관계는 회복해야 되잖아요. 이혼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이 남자든지 여자이든지 모두 상대방을 일방적인 가해자로 생각하고 자신은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가정을 깨뜨린 것에 대해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심하게 말해서 아내나 남편 한 사람이 바람을 피워서 가정을 깨뜨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왜 그 아내가 한때는 그렇게 사랑하던 남편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졌을까? 왜 한때는 그렇게 사랑스럽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프던 그 아내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되었을까요? 그 책임은 전적으로 어느 한 상대방이 져야 되는 것일까요? 마음에 그런 사랑이 없다고 하더라도 혼인의 약속은 지켜야죠. 그런 점에서 그것을 어긴 것은 상대방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신적인 사랑의 연합이 깨뜨려진 것은 두 사람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이혼을 하고 나서 복수심에 불타서 하나님의 진노가 상대방에 내리기를 마음에 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상대방이 죽기 전에 자신이 먼저 죽어갑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풀고 자신이 잘못한 것만을 하나님 앞에 돌아봐야 합니다.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이 행한 이혼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또 다른 새로운 삶의 출발을 꿈꾸는 것은 두 번째 이혼을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바뀌지 않았는데 새로운 삶이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한 사람의 삶은 그 인간됨이 그리고 지나간 궤적입니다. 인간이 삐뚤어졌는데 새로운 삶을 시작한들 그것이 새 삶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고 더욱이 이혼한 후에는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 부어지게 만드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유일무이한 통로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후에 살아갈 새 삶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B. 교회 앞에서
교회 앞에서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혼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일 아닙니다. 심지어는 목회자가 그렇게 말려도 ‘네가 뭔데’ 하고 이혼을 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이다.” 남편과 아내 모두 서로 상대방의 배우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영혼들이었습니다. 그것을 기초로 남편과 아내사이에 영적인 결합이 부부로서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여전히 붙어 있는데 하나님의 정해주신 남편과 아내사이에 영혼의 결합을 끊어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지요?
내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남녀가 교회에서 목회자의 주례를 받고 결혼을 했는데 둘이 지겹도록 미워하다가 이혼했습니다. 그리고도 두 부부가 한 교회에 출석해서 주님 사랑하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결국은 찢어집니다. 부부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교회의 몸은 상처를 받았고 고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들의 이혼을 통해서 교회에 영적인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람들이 생각합니까? 자기 설움과 아픔에만 복받쳐 있을 뿐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집안의 아이들은 물론 남의 집안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의 아이들도 여러분들의 가정이 깨뜨려지고 이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영혼 속에 심겨지는 그 가치의 혼란들은 누구의 몫입니까? 교회에서 혈기를 부리고 질서를 흩뜨리고 육신을 따라서 아프게 하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다. 남편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의 수많은 말과 간교한 행실들, 아내에게 충분히 존경받지 못하는 남자들의 교회 안에서의 수많은 혈기와 다툼 이런 것들입니다. 거의 90%는 틀림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혼을 해서 가정이 깨어졌다면 그 자체가 교회에 큰 상처를 입힌 것입니다. 그러면 일생을 이제는 깊이 교회 앞에서 나의 가정의 깨어짐을 통해 상처를 받았던 교회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항상 가슴속에 한때 그리스도의 몸에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라는 이 기억을 간직하고 겸손의 기회로 삼아서 그리스도의 몸을 보양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섬기는 자의 마음으로 일평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C. 깨어진 가정 앞에서
깨어진 가정을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혼하기 직전에 충만한 은혜 속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이혼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도 예외가 있지 않을까요?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 없습니다. 이혼을 결심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말려도 돌이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최후의 제안을 늘 했습니다. “일주일만 금식 기도하고 도장을 찍어라.” 순종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주일 금식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을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답이 너무 뻔하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삶 전체가 찢어진 것입니다. 이제 가정은 형식 자체가 깨뜨려져 버렸습니다. 가족도 다 찢어지고 흩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만약에 정신 속에 남아있는 가정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깨어진 가정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매우 어려운 길이지만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돌아가라.
도저히 환경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면 상황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돌아갈 상황이라면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당사자들은 “너무 가혹합니다.”라고 말 할지 몰라요. 그러나 때로는 가장 고통스러운 가시밭길 같은 거기가 생명의 길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깊이 용서를 빌고 돌아가라. 남편에게 깊이 사죄하고 자기가 잘못한 것만을 생각하고 돌아가라. 이혼한 지 얼마가 되었든지 간에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이혼한 자매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목사님, 제가 이혼하기 전에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면 가정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았잖아요. 그러면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처음 가정을 이룰 때는 행복하기 위해서 가정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행복하기 위해서 가정을 이루지 말고 주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가정을 이루어요.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요. 여러분들이 불신 남편하고 결혼하면서 늘 하던 이야기가 있죠? 제가 선교사로 가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겠습니다. 지금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이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한 입빠른 소리였지만 이제는 그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남자의 아내로서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중심 축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흔들리는 가정, 깨어진 자식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나는 돌아갑니다. 가정으로 돌아가지만 제게는 이제 남편도 필요 없고 자식도 필요 없고 주님만 계시면 충분합니다.
개척교회 시절이었는데 우리 교회에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자매였는데 좋은 직장을 다녔습니다. 저는 모르겠는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왜 좋은 직장을 그만 두냐고 했더니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더니 갔습니다. 남편하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 내버려 두고, 그것은 무슨 선교일까?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갔습니다. 그것은 또 뭘까? 은혜는 받았는데 은혜가 직면하기 싫은 현실을 회피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살기가 싫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선교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을 선교할 수 있겠습니까? 선교지로 알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어야 됩니다. 이제 깨달았으니까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저를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합니다. 빌어요. 아내가 저를 용서해 주겠습니까? 계속 나타나서 빌어요. 계속 자주 보면 용납하게 됩니다. 돌아가라는 겁니다. 내가 왜 목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가혹한 명령을 하는지 아세요? 그 길이 가장 올바른 길이고 결국은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렇게 돌아간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의 행복을 위해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가정을 꾸리는 사람들이 되 봐요.
보세요. 아직 혈기가 남아있고 기력이 남아있을 때는 뭐 어쩌구저쩌구 혈기도 있고 정욕도 있지요. 행복도 있고 미래의 꿈도 있고,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지나가고 그 정욕도 지나갑니다. 그리고 늙어보세요. 무슨 낙으로 인생을 살겠습니까? 돌아가라. 그리고 그 사람을 다시 사랑하기가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당신 앞에 원수로 행했던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생명까지 주셨던 그 주님을 생각하면서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D. 깨어진 자신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무엇을 할까요?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나를 피해서 어디로 가겠어요? 좋은 옷을 입어도 맛난 음식을 먹어도 여행을 가도 어디를 가도 나는 항상 나를 따라 다닙니다. 모든 골치 아픈 일로부터 떨어져도 나는 나를 따라 다닙니다.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나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을 곡해하면 안 됩니다. 이혼을 했는데도 다시 그 가정으로 돌아갈 수가 없고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나니까 차선의 길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인도해 주셔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에게 권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의대로 두 번, 세 번 시집가고 장가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한 번 이혼이 어렵지 두 번째 이혼할 때에는 첫 번째 이혼할 때 갈등의 절반 밖에 안 되도 갈라섭니다. 세 번째는 더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 눈에는 기이하게 보이는 이혼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주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진정한 회복도 없이 자기 인생에 일어난 이 엄청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해서 상처받고 고통 받은 자기 자식들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진지한 성찰도 없고 그들의 영혼과 마음에는 지금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도 없이 깨뜨려지자마자 두 번째 세 번째 또 다른 행복을 꿈꾼다면 여러분들은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혼을 하고 나면 이제 현실적인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정을 깨뜨렸다는 정죄감,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받을지 모르는 도덕적인 비난, 깨어져 버린 자녀들과의 관계와 부모로서 당당함을 잃어버려야 되는 비참함, 그 아이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타일러줄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혼을 한 부모들이 대개 자식들에 대해서 비굴합니다. 돈이 안기고 아이들에게 아부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자기 한 일이 있으니까 아이들에게 정당하지 못하니까 일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가정을 서로 꾸려가면서 살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경제생활을 해 나갈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 오랜 동안 결혼하면서 살았으니까 정욕에 길들여진 육체의 성욕들, 이것이 다 십자가로 남습니다. 그래도 갈등이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가정을 꾸려갈 때는 이것이 뱃속에 있었습니다. 이혼하자마자 이것이 다 배에서 쏟아져 나와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한 수습이 전혀 안 된 상태에서 두 번째 결혼을 합니다. 확률적으로는 그렇게 만나는 사람도 가정을 깨뜨리고 만난 사람일 경우가 많겠죠? 그럼 이것은 지난 것보다도 훨씬 많은 에너지가 있어야 극복할 수 있는 굉장히 힘든 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내적인 준비 없이 덥석덥석 두 번, 세 번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사무치게 되고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을 찾는 인간을 향한 질서를 무시한 과다한 사랑에 대한 기대는 끊임없는 배신과 정욕, 보복을 불러오고 이것들은 불에 달군 쇠의 채찍이 되어서 그의 영혼을 후려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일생에 평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참된 평화와 쉼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고 결혼과 배우자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또 불행해집니다. 재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신중하게, 그리고 그렇게 결혼을 불행하게 끝낼 수밖에 만들었던 자신에 대한 충분한 성찰과 은혜에 의한 변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결합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세요. 세상 남편은 나를 버렸으나 하늘 남편은 나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아내는 가장 힘들 때 나를 배신했으나 하나님에게는 배신이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가 이런 권면을 했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그냥 살아라. 그러나 그대들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주님의 재림이 곧 임박 할 때이니 결혼하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마음 쓰던 자매들이 어떻게 하면 내 남편을 즐겁게 할꼬? 결혼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생각하던 형제들이 장가가고 나서는 내 아내를 즐겁게 하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자들에게도 이 권고를 주신다면 이미 결혼하고 불같은 시련을 겪고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 가정이 깨어졌다면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가 없는 한 혼자 사는 것이 자유인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늘 가르치세요. 결혼은 한번 하는 거란다.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날 사랑하는 이는 오직 예술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IV. 결론과 적용
인생을 뿌리째 뒤흔드는 어마어마한 일이 여러분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을 남이 알지 못하는 어둠속에서 고통 했겠습니까? 오죽 했으면 그렇게 이혼을 했겠습니까? 양심은 끊임없이 나를 송사합니다. 아침에 세수할 때마다 거울 속에서 가정을 깨뜨린 나를 발견합니다. 이혼한 나를 발견합니다. 세상은 나를 이혼한 남자, 가정도 못 지킨 놈, 이혼녀, 가정을 깨뜨리고 자식을 버린 여자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상처받은 한 마리의 어린 양에 불과합니다. 결혼을 하겠다고 그럴 때에도 주님이 허락을 해 주셨고 여러분들의 정욕을 따라서 못 살겠다고 몸부림치며 이혼을 할 때도 하나님 침묵을 하셨습니다. 재산을 나누어 가지고 떠날 때에도 그 아버지는 탕자를 사랑했고 모든 것을 허비하고 빈털터리로 돌아올 때도 아버지에게는 그 아들은 단지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혼했어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세요. 여러분들이 상태가 나빠서 그 사랑을 못 느낄 뿐이지 그 사랑이 어디를 가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이혼을 하고도 자기 몸으로 낳은 자식들을 잊지 못하잖아요. 하나님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렇게 당신의 뜻을 떠나서 불순종하므로 고통 받고 하나님 밖에서의 사랑을 꿈꾸다가 대신에 채찍을 맞은 여러분들을 보면서 주님의 마음이 어떠시겠어요. 이 세상의 사람들이 다 나를 버려도 주님만을 우리를 버리지 않으세요. 사랑하십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하나님을 꼭 붙드세요. 그래서 그분을 남편으로, 내 연인으로 모시고 내 삶의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나의 참된 행복은 이제 신랑에게 아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께 있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함이 나에게 복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한 분을 꼭 붙들고 고난과 시련의 파도를 이기며 살아서 결국은 마지막에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8.네 형제와 화목하라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창33:3-4)
I. 본문의 배경
부모와의 관계는 아무리 마음이 굳은 사람이라도 사실 외면하기 힘든 관계입니다. 양심이 자기가 불효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부부는 함께 살기 때문에 어쨌든 상처가 있든지 기쁨이 있든지 그 관계 또한 외면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형제간의 관계는 조금 틀립니다. 왜냐하면 조금 힘들어도 얼마만 견디면 형, 동생 할 것 없이 각자 결혼 후에는 분가해서 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1년에 한 번도 안 보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은 우리 혼자만의 신앙의 경험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동체 속에서 그 사랑의 유무가 확증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좋은 신자가 되면 두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아야지만 진짜 좋은 신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II. 얍복강의 화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삭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이삭은 족장이었습니다. 이 족장에게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주실 그 모든 권세들을 갖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비는 축복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축복대로 그가 비는 자들을 위해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에서와 야곱이었습니다. 두 아이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웬일인지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선택하셔서 그를 통하여 언약 백성의 맥락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왜 그런지 큰 아들인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아내인 리브가는 야곱을 더 좋아하게 되어서 가정이 편애로서 물들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죽을 때가 되어서 마지막 축복을 아들에게 내리고 싶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리브가가 자기가 사랑하는 야곱을 에서처럼 꾸며서 방에 들여보내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후에 에서가 들어와서 보니 아버지가 이미 동생을 모두 축복하고 난 뒤였습니다. 울면서 나에게도 복을 주소서 하고 빌었더니 ‘너는 칼을 믿고 살 것이며 광야에서 들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그가 가진 복이었습니다.
A. 화해의 입맞춤
그 후로 형제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특별히 에서는 틈만 있으면 복수를 꿈꾸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이 일로 정든 집을 떠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도망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외삼촌 라반을 만나 20년 동안 기구한 사연 끝에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많은 재산과 가족들, 노비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자기가 살 곳은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 십 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형에게 동생이 돌아온다는 이 이야기는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었겠습니까? 드디어 수 십 년 가슴에 묵은 이 한을 복수로서 풀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목을 어긋맞기며 통곡하며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랫동안 가슴에 묻었던 형을 향한 두려움, 동생을 향한 복수심이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흐느껴 울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B. 네 형제와 화해하라
여러분들의 형제 관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형제와 화목합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미 형제와 의절하고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동생이 형을 찾아가기 않고 아우가 형을 만나지 않는 의절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자기의 친족,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그 가족은 내게 무엇을 해 주기 때문에 가족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인가 혜택을 받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의무를 행해야 되는 것은 단체 형성의 정신입니다. 가족은 그런 정신에 의해서 수립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가족은 그 자체가 끊을 수 없는 공동체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인간이 행복하려면 좋은 나라에 태어나야 합니다. 법이 잘 되어 있는 나라에 태어나고 인간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덕성스러운 부모 밑에서 태어나야 하고 훌륭한 선생님 밑에서 그 덕이 무엇인지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을 배워가야 합니다. 아주 훌륭한 친구들과 사귀면서 그들이 찾아가는 덕이 같기 때문에 우정을 나누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누가 그런 사람이 있어요? 한국이 좋은 나라입니다. 저는 세계 어느 나라를 다녀도 내가 이 나라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릴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교회에 돌아가면 힘든 일이 많아도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생각해 본적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좋은 나라 많습니다. 언젠가 앙케이트 냈는데 젊은이들이 다시 태어나면 한국에 안 태어나겠다고 한 사람이 74%였다고 합니다. 실수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국가와 가정, 교회 이런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 공동체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서로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화합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많은 요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익의 문제입니다. 결혼하면 더 심각하게 현실로 등장하게 됩니다. 부모가 아직 살아계신 대도 유산 문제로 싸운다든지, 아니면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의견이 나뉘어서 다툰다든지, 생활비를 대 드리는 문제에 대해서 서로 불평을 하면서 언쟁을 한다든지, 돈을 꾸어 주었는데 주고 안 주고, 보증을 섰는데 갚고 못 갚고 하면서 형제들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이 이익에 의해서 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결혼하고 분가한 남자들이 형제가 불편한 관계 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조사해보면 부인들이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도 원래 형제를 잘 사랑할 수 있는 덕스런 인격을 못 가졌는데 개념이 없는 아내를 얻은 것입니다. 합력하여 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내가 부탁하는데 좋은 자매에게 장가를 가세요. 좋은 자매는 S라인이 아닙니다. 유효기간 6개월이라고 내가 이야기 했잖아요. 결혼하고 한참 살아서 40살 되면 용모 평준화입니다. 60세가 되면 학력도 평준화입니다. 좋은 대학 나오나 못 나오나 기억력 잊어버리고 까먹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70-80세 되면 경제 평준화입니다. 돈이 많아도 몸이 써금써금 해서 어디 여행도 갈 수 없습니다. 어차피 집구석에 앉아있는데 돈이 많으면 뭐하고 없으면 어때? 그러니까 사람의 내면을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안에 인격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불화하려고 해도 부인들이 서로 인간사는 도리를 가르쳐 주어서 형제들을 융합시켜도 될까 말까인데 잡아당기면서 분열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경제의 문제가 개입되었다 하면 추호의 양보도 없는 것이 요즘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는 상처입니다. 편애라든지 살아가면서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각자 분가할 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살아가면서 집안 일로 크게 부딪혀서 상처를 받는다든지 보증을 서 달라고 형에게 찾아갔는데 도장을 안 찍어 주더라든지 이렇게 해서 마음이 꼬이고 왜 안 찍어주는가 했더니 형수가 말리더라. 이렇게 되면 합력해서 악을 이룹니다. 싸잡아서 상처를 받고 미운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나쁜 것은 무관심입니다. 아예 처음부터, 자랄 때부터 아이들이 서로 사랑하며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나, 나는 나입니다. 2-3년을 안 봐도 절대로 보고 싶지 않고 하도 왕래를 안 하니까 사촌끼리 얼굴도 모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여러분들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형들에게 물어봅니다. 동생이 여러분 때문에 “형, 형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마음이 참 따뜻해진다. 나는 형이 참 좋다. 우리 형 보고 싶다.” 동생이 그래 본 적이 있을까? 누나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누나, 참 좋은 우리 누나, 누나 보고 싶다.” 동생이 그래 본 적 있을까? 동생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난 내 동생이 참 좋다. 동생아 네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는 것이 나에게는 참 기쁘다. 너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참 따스해지는구나.” 형이 여러분들 때문에 마음에 그런 기쁨을 느낀 적이 있었겠는지 스스로 물어보세요.
가족은 바로 그래야하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이런 가족들과의 관계가 무참하게 깨집니다. 이것이 앞으로 더 심해집니다. 아예 여러분들 세대 정도 되면 형제가 없이 자란 사람이 많습니다. 형제가 있는 집에 시집을 가거나 장가를 가면 형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적절하게 지도해주는 권위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외롭지 않아요? 하나님이 있는데 무엇이 외로워요? 물론 하나님이 있으니까 안 외롭지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차원으로 내려가 생각해보면 얼마나 외로워요? 점점 심해집니다.
C. 하나님과의 관계만큼
인간은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사랑하며 그렇게 자기를 완성해 갈 수 있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이 지금 환경의 문제를 가지고 걱정을 하는데 사실 환경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물리적 환경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정신적 환경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왔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인간이 느끼는 고독은 훨씬 더 심해집니다. 그래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은 산업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내수공업 시대에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물건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공급하는 사람, 만들어낸 물건을 사가는 사람, 이 사람들이 대면하여 거래하는 관계였습니다. 옛날 시골의 장날 보면 기억나지 않아요? 집에서 닭을 키워 계란 까서 지푸라기 엮어 나가면 동네 아는 사람들이 와서 사갑니다. 속이고 이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고장에서 잘 살 수 없습니다. 이러면서 인격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항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갔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 훈련을 받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산업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산업화는 대량 생산이 목표입니다. 효율성을 추구합니다. 전에는 열 사람이 앉아 똑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산업화가 되면서 이것을 수백 명의 사람이 앉아서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레이스만 붙이는데 어떤 사람은 구슬만 답니다. 구슬 다는 사람과 레이스 다는 사람과 만날 필요도 없습니다. 일이 틀리니까, 이러면서 생산하는 과정에서도 사람들과의 상관관계가 별로 필요 없고 생산된 후에도 그것을 익명의 소비자에게 대량으로 쏟아놓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이 물건을 사갑니다.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은 그런 관계가 있느냐하면 불특정 다수에게 생산을 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공급하기 위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상인이 되어 그것들을 파는 것입니다. 물건을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이익을 남기는 기능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관계들이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족 속에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바쁘게는 살아가는데 사실은 그 관계가 이런 생산과 소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가 굴러갈 수 있는 인프라가 제일 잘 형성된 곳이 도시입니다. 도시로 지금 모이는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40%가 도시에서 산다고 합니다. 불과 20년 내에 70%로 늘어날 것이라고 사회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도시에서는 더욱더 단절된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 가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정신없이 핸드폰 받고 이메일 주고받고 살아도 다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익과 상관이 없이 생산과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서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서로 희생하기까지 돌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는데 교회와 가정입니다.
다른 곳, 어디에 그런 곳이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그래서 결국 이렇게 깨뜨려진 가족과의 관계는 단절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의 현실화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이제는 올바르게 해야 될 텐데 너무 힘든 것입니다.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서 그 부모가 아주 뚜렷하게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 줍니다. ‘네 형이다. 네 동생이다.’ 형은 이런 의무를 하고 동생은 이런 의무를 하고 형에게는 이런 권한이 있고 동생에게는 이런 책임이 있고 형에게는 이런 책임이 있고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워서 이것이 마음의 어느 경향성으로 형성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부모들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가 되었는데도 자식들이 그런 것을 부모로부터 물려받기는커녕 자기 형제들끼리 피터지게 싸우고 의절하고 돈 몇 푼 때문에 바가지로 싸우고 옆에서 식구들이 돕는 것을 보고 세상말로 씨알머리 없는 집에서 그 모든 못 볼 광경을 보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빗나간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게 됩니다. 더군다나 형제에 대한 어떤 기대를 안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들에게 그대로 물려집니다. 본 것이 그것인데 형제를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를 본 적도 없고 나빠진 형제들의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노력하는 화해자로서의 어머니를 본 일도 없는데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 어디서 그것을 찾아내서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이후에라도 화목하게 지내려면 서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갈라지게 됩니다. 이미 이렇게 상황이 되었을 때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관계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III. 형제와 화해하는 길
우리들은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형제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가정의 형제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상대방에게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경우가 없는 형, 욕심이 많은 동생, 빌려 가면 셈이 흐린 언니 이런 것이 함께 엮어지면서 사실은 관계들이 자꾸 상처를 받고 깨어지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자꾸 그 형제를 고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그렇게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그렇게 고쳐지나? 안 고쳐집니다. 누군가가 그가 좀 부족한 점이 있고 경우에 어긋나도 잘 가르치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형제를 안 보고 살겠다고 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A. 자기사랑을 버림
자기 사랑을 버려야 됩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평생 잔꾀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잔꾀부리면서 살다가 계속 물먹습니다. 그런데도 성향 자체가 잔꾀로 산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이렇게 인생의 절대 절명의 벼랑 끝이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지요. 머리를 굴렸습니다.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부인도 많았고 종들도 많으니까 두 떼로 나누어서 죽어도 좋은 사람은 앞으로 내 보내고 아까운 사람은,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라헬과 거기서 낳은 아이들은 뒤에 놓고 형이 와서 치면 앞에 것은 모두 잃어버리고 죽어버리더라도 뒤에 있는 것들이라도 도망이라도 가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안 편하지요?
그래서 이 사람이 생애 최초로 철야기도를 합니다. 얍복강가에서 철야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모난 나를 깎아주고 그런 것 없었습니다. 복을 주시옵소서. 내 평생소원 이것뿐 복을 주시옵소서. 이 복이라는 것이 지극히 현세적인 것입니다. 안전하게 고향에 도착할 수 있도록 어떻게 하든지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천사가 내려왔어요. 천사에게 사정을 하면 되겠구나하고 천사를 붙들고 ‘나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는 못 올라갑니다.’하고 씨름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믿음이라고 봅니다.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아닙니다. 천사가 얼마나 후지면 사람이 붙들고 안 놓는다고 하늘을 못 올라갑니까? 그런 천사해서 무엇 합니까? 막 매달리니까 천사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그러지 말고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내가 졌다. 그리고 천사가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것이 창세기를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 이야기가 빠져있는데 빠진 이야기가 호세아서 12장에 있습니다. 다시 재구성을 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혈기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천사를 붙들고 안 놓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지만 여전히 중심축은 자기 사랑입니다. 내가 복을 받아야겠다. 왜? 그래야 내가 행복하니까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그의 환도를 쳤습니다. 환도는 골반 뼈 있는 쪽입니다. 쳐서 위골되었다고 하는데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웬만큼 얻어맞아서는 위골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매달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으면 너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고 섭리 속에서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 밖에 의지할 분이 없구나. 나는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어져야 하는데 그 기질이 남아서 잔꾀로 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신앙이 어렸을 때는 봐 주었지만 이번에는 징계를 하셨습니다. 아무리 힘이 세도 허리가 망가지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요즘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더 아플 때도 있었는데 참았습니다. 주일에 설교하고 나면 구부정하게 집에서 기어 다녔습니다. 그날은 도저히 몸도 뒤로 돌리지 못하겠고 마루바닥에 한참 누워있었는데 일어나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원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계속 똑바로 누워있으라고 하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낮잠입니다. 아프지 않는 한 낮에 드러눕는 것은 싫고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성도들이 나가 땀 흘리며 일하는데 목사가 뭐 하러 누워있나? 목사가 아니더라도 난 그것이 싫습니다. 적응도 안 되는데 그 침대에서 휠체어라도 타고 나오려면 간호원이 어찌나 눈치를 주는지, 배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 허리가 망가졌으니까 주는 대로 먹었더니 살만 쪘습니다. 병문안을 많이들 왔습니다. 각계각층에서 왔습니다. 온 사람들마다 하는 소리가 “많이 아프세요?” “제가 좀 아픕니다.” “얼굴은 좋으시네요.”
허리가 망가지면 힘을 쓸 수가 없으니까 천사를 붙들 수가 없어 놓았습니다. 그리곤 거기서 뼈 절이게 자기 깨어짐의 참회를 경험한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야곱이 최초로 자기 깨어짐을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철저히 깨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천사가 보니까 허리까지 부러져서 자기 통회의 우는 모습이 너무 안 되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이름의 뜻이 황당합니다. 하나님과 겨뤄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길 씨름을 하니까 천사가 못 이긴 것이 하나님이 못 이긴 것이 되는구나. 미뤄 붙이기 신앙이 거기서 나오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을 이겼다는 의미는 싸워서 이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신 것입니다. 자기 깨어짐 속에서 통절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이 지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께 감동을 준 사람입니다.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생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싹 쓸어버리려고 데리고 나왔습니다. ‘내 축복을 다 빼앗아 간 나쁜 놈, 팥죽 한 그릇에 속여서 장자 명분을 훔쳐간 놈, 이 자식 내가 이 식속들을 이가 갈리는 이 집안 식구들 씨를 말리리라.’ 400명을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일단 나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벌어집니다. 장애인 하나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전날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했으니 옷은 얼마나 더러워졌고 얼굴은 잠을 못 잤으니 푸석푸석했을 것이고 다리를 끌면서 장애인이 되어 걸어 나오는 것을 보며 인생무상이 스쳐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만약에 허여멀건 얼굴에 금마차를 타고 나타났다면 단칼에 목을 베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우셔서 ‘너는 나에게 맞아야겠다. 맞아서 허리가 부러지면 네 형의 마음도 내가 움직여줄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다리를 끌고 자기 축복을 훔쳐간 놈이 그러고 오는 것을 보면서 너무 불쌍하다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인생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땅바닥에 엎드려서 일곱 번 절을 합니다. 이것은 종이 상전에게 하는 예의입니다. 최고의 예의입니다. 거기에서 형의 마음이 물같이 확 녹았습니다. 원래 에서의 머리가 단순한 사람입니다. 단세포적인 사람입니다. 단숨에 달려가서 확 끌어안으면서 입을 맞추며 통곡을 하며 둘이 우는 것입니다. 나는 남북이 이렇게 화해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쪽이 형이겠지요. 돈도 많고 나라도 많이 컸으니까... 형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화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화합하면서 살 수 없는 관계를 보면서 난 참 불행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내게 참 사랑이 없구나.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B. 은혜가 필요함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고 선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노력을 별로 안 해도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에게 선대하는 사람만을 선하게 대우(사랑)한다면 그것이 악인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느냐? 악인들도 자신을 선대해 주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주신 계명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사랑하는 사람 안에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사람, 이것이 박애적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아직 멀었다고 하는 것을 사랑이외에 다른 것을 통해서는 그런 것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의 본질이 초월적이고 신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을 내가 참 사랑이 없다. 이것을 수시로 깨달을 수 있는 환경 속에 사는 자체가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는 더없이 요긴한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 왜 우리 형은 이런 사람일까? 왜 나에게 이런 언니가 있는 걸까? 내가 막내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동생은 태어나서 나를 힘들게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제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받아들인 다는 의미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아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목회를 잘 하시고 기도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 교인 한 300명도 안 모이는 교회에 가서 한 10년 목회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말씀도 잘 전하시고 좋은 목사님이셨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다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그런데 한 1년의 한 번쯤 안 믿는 동생이 나타나서 술 먹고 와서 사택 골목에서 돈 달라고 행패를 부리는 것입니다. 돈 안 주면 돌아다니면서 집사님 집만 골라서 유리창을 깨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하는 말이 사람들이 나와서 말리면 “야, 이 사람들아 내가 누군지 알아? 우리 형 아무개 목사를 겸손케 하는 가시야, 하나님이 보내신 가시야.” 한번 그런 일이 있고 나면 목사님이 한 한달 동안은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들 또 깨닫습니다. 교회 부흥하고 성도들이 모이고, 성도들이 목사님 존경한다고 할 때는 내가 무엇이 된 것 같은데 동생이 한번 깽판을 치고 가면 깨닫습니다. ‘하나님, 난 아직 멀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 부모는 왜 이런 부모일까? 난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을까? 나도 참 저런 형이 가져 봤으면,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되지도 않은 일을 왜 하세요. 그럴수록 자기가 무엇인가 부당하게 상실하고 있다는 상실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 남들은 안 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은혜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멀었다는 것, 다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도, 내 안에는 내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사랑은 얼마나 큰데 나는 이것을 못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깨어진 형제관계를 방치하는 것은 서로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은혜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사랑할 마음을 주십니다.
C. 사랑에 빚진 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나님 사랑에 빚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을 방황하면서 살다가 도저히 나 혼자서는 이 인생을 살 수 없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신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의 고난 받는 형상 속에서 나같이 쓰레기처럼 가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까지 형벌하시면서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아구스티누스가 말년에 자기의 죄악 된 삶을 회상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관대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나이까? 그리고 마치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큰 형벌이라고 내릴 것처럼 저를 위협하셨는데 제게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이 하나님 당신에게는 커다란 상실이나 되는 것입니까? 내가 무엇이관대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까지 하시나이까?”
인간의 가치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경에서 보는 우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서 확인되는 존재입니다. 이 인간 존재는 싸르트르나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것처럼 던져 버린 존재, 그리고 우연히 생겨난 의미 없는 존재도 아니고 헤겔처럼 커다란 집단을 구성하는 속에 부속체 같은 그런 개체로서 나도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과 그 훌륭한 가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 확인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난 그 고백을 들으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제가 무엇이관대 당신을 사랑하라고 제게 명령하시나이까? 그렇게 아니할 것 같으면 큰 벌이라도 내리실 것처럼 저를 위협하시나이까?’ 이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의미를 가진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인간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만 발견할 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들에게서도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깊이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고난 받은 예수님의 처절한 희생의 형상을 볼 때 우리는 마음 깊이 깨뜨려지면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고백하게 됩니다.
[손과 발 날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자기가 깊이 깨뜨려지고 그 마음이 녹아내릴 때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있지 않겠어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입었습니다. 예수님 이제 제가 무엇을 할까요? 그럴 때 예수님이 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면 그 회심의 경험 속에서 그것을 무거운 계명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주님의 계명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자기 사랑에 치우쳐 있을 때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잠간 설교 속에서 인간은 사랑할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진리의 빛 아래 있지 않으면 올바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 안에서 질서를 따르는 삶이 못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삶을 살다가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될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고난을 당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이 삶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투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신자인 우리의 삶은 이제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현재적인 감격 속에서 우리들이 생각을 해 보면 그것은 무거운 계명이 아닙니다.
신앙의 모든 타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 때문에 기쁨을 얻기 되면 그 영혼은 급속히 파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이 날 위해 지신 십자가가 나의 죄 때문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닙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런 고백 속에서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가족을 사랑하기 위해서 짊어져야 하는 고통을 자기 성숙을 위한 십자가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상처 밖에 남겨준 것이 없는 부모를 깊이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사랑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 앞에 깊이 깨뜨려집니다.
내가 교회 와서 봉사하고 단기 선교 가서 봉사할 때는 사람들이 믿음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매일 마주하는 내 아버지는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내 형제는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 중의 대부분은 불신자입니다. 여러분, 형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세요? 정말 기도합니까? 언니의 영혼을 위해서, 언니가 영혼으로 보입니까? 싸우고 의가 상한 동생이 영혼으로 보입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까? 전할 수가 없겠죠? 싸움하고 헤어졌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어요? 그러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희생해야 됩니다. 왜 우리만 희생해야 합니까?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마음에 정말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해 보세요.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진 사람과 화해해 보세요. 그것은 자기 죽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성숙시키는 훌륭한 십자가입니다.
난 여러분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조금 사랑을 베풀고 호의를 베풀면 그것이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애적 사랑은 자기 안에서 넘치는 사랑 때문에 흘러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형제의 결점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속에 박애적인 사랑이 충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박애적 사랑이 충만하면 원수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형제인데 왜 못 사랑하겠어요? 형제가 언제쯤 되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 자기에게 나타나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사랑이 없음을 깊이 인정하고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는 그때마다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은 정말 우리의 영원한 집이 아니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갈등과 고통이 없이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 되어 살아갈 하늘나라의 그 가족들의 상태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이기심들이 있는가도 깨닫게 되고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신자의 일생이 그런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IV. 결론과 적용
내가 여러분들에게 사랑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잘 들려주는 한마디의 이야기로 설교를 맺겠습니다. 한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외롭지 않습니다. 자유는 사랑받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자유는 용서의 혜택을 받는 사람의 것이기 이전에 용서해줄 마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서 먼저 역사합니다.
화해하세요. 그리고 깊이 사랑하세요. 만나면 꼭 안아 줘 보세요. 그래서 형, 아우, 누나, 언니, 동생 이런 단어들이 가슴에 정말 별 떨기 같이 영롱한 단어들이 되도록 마음의 그리움이 가득한 단어들이 되도록 그렇게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 아이들을 더 많이 낳아서 이런 우애를 가르치세요. 그것이 그 아이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는 가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