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2008년 설교모음)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1. 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엡6:4) 2008.5.4 주일오전 1
2. 자녀 양육의 길(엡6:4) 2008.5.7 수요예배 11
3. 자식사랑의 본성이라도 져버리지 말라(왕상3:24-27) 2008.5.11 주일오전 19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4. 부모공경의 도리(엡6:2-3) 2008.5.11 주일오후 24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5. 부부 생활의 기초(엡5:28) 2008.5.18 주일오전 30
6. 부부 사랑의 뿌리(창3:12) 2008.5.21 수요예배 40
7.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신앙(딤후1:3-5) 2008.5.28 수요예배 47
8. 이혼을 생각하십니까?(막10:6-9) 2008.6.1 주일오전 54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9. 아비는 자식을 낳고(마1:7-8) 2008.6.1 주일오후 66
10. 가족을 돌아보라(딤전5:8) 2008.6.4 수요예배 70
11. 이혼한 그대에게(막10:6-9) 2008.6.8 주일오전 78
12. 형제의 화해(창33:4) 2008.6.8 주일오후 89
1.네 자녀를 노엽게 말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I. 들어가는 말
A. ‘어린이’의 유래
우리나라와 같이 유교사상의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는 이 어린이와 여자들을 좀 하찮게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어린이’라는 말이 생겨난게 얼마 안되구요, 그 이전에는 이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좀 적당한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 예를 들자면 ‘애놈’, ‘애자식’, ‘애새끼’, 그렇지않으면 ‘어린애’ 뭐 이런 명사로 불리다가, 방정환 선생이 이제 이 나라의 미래가 아이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훨씬 존중하면서도 높일 수 있는 말을 찾다가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원래 이 ‘이’라고하는 말은 성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어린이’라는 말을 붙여서 나이는 어리지만은 어른과 동등하게 존중되어야할 인격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이 말이 성립하게된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Ⅱ. 부모의 역할의 중요성
A 성경은 경건한 신앙의 전수에 있어서 부모의 역할을 강조함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성경은 우리에게 바로 이렇게 자라나는 아이들에 대해서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종교의 대의를 세세토록 이어가는 방법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죠. 학자들에 의하면 이미 아이들이 5~6세 정도 되면 성인으로서 자기가 갖추어야할 인간적인 성품의 80%이상이 완성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유아교육의 중요성은 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죠. 그 아이들을 사랑으로 주님의 가르침으로 잘 돌볼 때에 경건한 신앙이 가정에서 또 후손의 가정으로 이르기까지 아름답게 전수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B.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요소, 먼저 아이가 분노를 품게하지 않는 것
오늘 성경을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하지말고.’ 부모들에게 자식을 부탁할 때에 ‘무엇도해주고, 무엇도 해주고, 무엇도 해주어야지만 이 아이들이 잘 자랄 것이다’라고 말하지를 않고 먼저 하지말아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너희자녀를 노엽게하지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엽게한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잘못된 태도와 자극으로서 아이들이 분노를 품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아이로 하여금 아이를 잘못 대하고, 잘못 다루어서 아이들의 마음에 분노를 품지 않도록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올바른 교정을 필요로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부모는 적절하게 아이들을 다루어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이를 돌보고 다루는 과정에서 이 아이가 분노의 마음을 품지않도록 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적인 교양과 가르침을 인격 속에 흘려보내게 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있는 것입니다.
Ⅲ. 자녀가 노여움을 타게되는 원인
이렇게 자녀가 노여움을 타게되는 것, 그래서 마음속에 부모를 향해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A. 첫 번째 원인, 잘못된 징계
우선 첫째는 잘못된 징계입니다. 성경은 아이를 잘 징계하는 것이 그 아이의 영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영혼이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타락한 영혼이기 때문에 역시 부모의 징계가 필요하고 그것을 통해서 아이가 올바른 삶으로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징계가 잘못될 때 아이들은 상처를 받게 되고, 분노를 마음에 품게됩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 흐를 수 있는 인격적인 교통이 불가능하게되고, 그렇게해서 이제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끊어지게되는 것이죠..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와 눈을 맞치기 시작하면 이제 엄마의 표정을 통해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즉 자신이 하고있는 행동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을 부모의 얼굴을 통해서 보게되는 것이죠. 그래서 최초로 아이가 부모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그 때에 부모는 분명하고 일관되게 선악에 대해서 희로애락을 분명하게 표현해야합니다. 이것이 그 아이의 마음속에 선과 악에 대한 실제적인 믿음을 심어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것이 왜 선이고 악인지는 후에 점점 자라면서 이성의 능력이 향상되는 가운데 배우게 될 것이지만 맨 처음 인간은 이 선악에 관한 것을 오직 믿음을 통해서 부모를 통해 배우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아이가 이렇게 올바르게 그 선악을 분별하면서 자라게 되고 또 성장해서 선악을 알고 있지만 악한 의지나 감정 때문에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할 때에는 부모가 그를 적절하게 징계함으로서, 그 아이로 하여금 그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요즘과 같이 아이들을 그냥 방치하고 내버려두고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죠.
(예화)최근에 대구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추행사건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국회의원들까지 뭐 지방에 내려가고 하는 그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아이들이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거의 반성할 줄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무슨 뜻이냐하면 선악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부모로부터 배우지못했습니다. 오히려 부모들에게서 그러한 행동들을 보고 또 그런 행위들을 즐기는 것을 어른들을 통해서 익혔기 때문에 더더욱 선악에 대한 판단이 현저히 흐려지게되는 것이죠. 이럴 경우에는 이제 이 선악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지게되고 아이들은 그 선악에 대한 판단을 분명하게 갖지못한 가운데 악한 성향을 갖게됩니다. 이렇게되면은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여지기가 매우 어렵게되는 것이죠.
이렇게 과도하게 아이들을 징계하고 공평하지못한 다른 잘못된 방법으로 아이들을 징계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분노의 마음을 품게 만들어줍니다. 근본적으로 이 분노의 마음은 대상파괴적인 성격을 가진 이 정신의 움직임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분노의 마음을 부모를 향해 품고있으면 절대로 부모 안에 있는 아름다운 신앙의 가르침이 자녀를 향해 흘러들어가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기전에 먼저 그 아이의 마음에 분노를 품지말게하라고 부모들에게 권면하고있는 것입니다.
편애같은 것도 유형은 틀리지만은 이와 유사하게 자녀들의 마음에 분노를 품게 만들어줍니다. 이 ‘편애’는 부모가 공정성을 잃고 부당한 방법으로 차별대우하는 사랑을 가리키는거죠. 그러면 이것은 편애를 받는 아이에게는 좋은 것일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받는 다른 아이에게는 큰 고통이 되는 것이죠. 이런 것은 결코 올바른 자녀교육의 태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되면 그 아이의 마음속에 끊임없는 일그러진 분도들이 자리잡게되고 그것은 결국은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뿐아니라 그에게서 태어날 자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되는 것이죠.
(예화)오래전인데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그 부모로부터 그렇게 편애를 많이 당했어요. 그 뭐만 먹을려면 “그거 오빠 먹을꺼다 먹지마라.” 뭐 좀 가지려 그러면 “그거 오빠 줄거니까 너는 손도대지마라” 이렇게 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같은 것들이 마음속에서 자라게되겠죠. 그런데 부모가 오빠보다 자기를 인정해주는 때가 딱 한 번 있어요. 그게 뭐냐면, 공부를 잘 할 때, “공부는 오빠보다 네가 잘하는구나.” 그 소리를 듣기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거에요. 근데 그 열심히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그 열심히 공부하는 이면에는 이 부모를 향한 미움과 증오 이런 감정들이 동기가 되는 거죠. 그래서 스스로 고백하기를 “우리 엄마아빠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그래요. 이 소리를 들으면은 많은 부모들은 “우리 애들도 나한테 복수 좀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게 겉으로는 볼 때는 공부를 잘해서 좋은 것 같애, 그니까 학교도 좋은 데 들어가고 그랬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근데 그 인간성은 계속 파괴되지않겠어요? 그러지않아요? 근데 인간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런 삶의 양태에 달려있는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공부를 잘하면은 누구든지 부모가 좋아하지만은 그 부모가 자식들에게 공부를 잘하라고 그럴 때 그 공부는 참사람이 되기위한 공부라든지, 진실한 인간이 되기위한 공부라든지. 이웃의 행복과 나라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그런 존재가 되기위한 필수적인 요건으로서의 공부 그런 걸 의미하는 게 아니거든요. 너무나 잘 알잖아요, 그죠?. 그런걸 학원에서 어떻게 가르쳐주겠어요? 그러니까 공부에 동의가 안되는거죠, 그죠? 그래서 기술을 통해서 익혀가지고 그래서 하는거죠. 그 사람마다 다 탁구 잘 치는 사람도 있고 아무리 연습해도 또 잘 못치는 사람이 있고, 한 번 보고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칼가지고 두드려도 요리가 안나오는 사람이 있거든요. 다른거는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인생에 차이가 별로 안 나는데 공부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인데 이거는 인생에 차이를 너무 많이 만들어낸단말이죠, 그죠? 그니까 이게 그런게 너무 많은 차이를 만들어낼수록 좋은 나라가 아니지. 그래서 인간이 정말 무엇으로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은 사실 우리의 교육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후퇴하고있는 거죠.
어쨌든 그러한 부모의 편애도 역시 자녀들의 마음에 분노를 품게하는 것이에요. 그뿐만이 아니죠.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B. 두 번째 원인, 부모의 언행의 불일치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부모의 표정을 보면서 배워요. 그리고 좀 크면서는 부모 앞에서 부모가 말해주는 것을 통해서 배워요. 그래서 그 말이 잘 설득이 되면 아이들이 따라요. 그러나 아이가 커지면서 이제 엄마밖에 안보이고, 아빠밖에 안보이던 아이들이 커지면서 이제 엄마아빠 뒤편에 있는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는거에요. 성공한 자녀교육은 아이들이 키가 커져서 엄마아빠 어깨 너머로 세상을 보았을 때에도 엄마아빠가 가르쳐준 것과 꼭 같은 원리가 그대로 통용되는 세상 이런 것을 아이들이 알게되는 것이 그게 좋은 교육이에요. 좋은 사회는 엄마아빠가 가르쳐준 것이 학교에 가니까 정말 사실이고, 학교에서 가르쳐준 것이 사회에 나와보니까 틀림없는 사실일 때 그 사회가 좋은 사회에요. 근데 그런 나라가 별로 없으니까 문제죠, 그죠? 예, 그래서, 그거에요. 근데 이 아이가 부모의 품 안에서 배울 때에는 부모가 참 위대해보이고 훌륭해보였는데 다 커서 세상에 나아가보니까 부모는 부모가 살아가는 그 삶의 뒷모습을 보니까 자기에게 가르쳐준 그거하고 틀려요. 그럴 경우에 이 아이들은 마음에 분노를 품게되는 거죠. 일단 그렇게 자기 부모가 가르쳐주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 일치하지않는다는 모순을 느끼게 되면은 아이들은 마음에 분노를 품게되고 부모가 어떤 가르침을 아이에게 주려고해도 아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일려고 하지않는다는 것이죠. 그것이에요.
그러나 인제 아이가 신앙에 눈을 뜨고 부모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됩니다. 무슨 뜻이냐하면 부모가 가르치는 것과 실제 사는 삶이 다르긴하지만 그러나 부모자신도 그것을 인해서 고민을 하고 참회하는 삶 속에서 온전한 삶을 살아갈려고 애를 쓸 때 그 모습 자체가 아이에게는 커다란 교훈이 되는거죠.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할 표준과 우리들의 현실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되고 그리고 그 살아야할 삶과 우리들이 살지못하는 현실사이의 그 간격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메워간다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들을 배우게되는 거죠. 근데 그런 것조차도 없을 때에는 이제 분노는 그대로 분노로 남게되는 것이에요.
C. 세 번째 원인, 자녀에 대한 그릇된 기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이것보다도 더 자녀들을 노엽게하는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자녀에 대한 그릇된 기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자녀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부모는 자식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매우 특별한 사람일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기대를 갖게됩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가지는 것이 또 자연스러운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가 살지못한 삶을 부모를 통해서 살게하는 사람은 없지만은, 자기가 살고싶었지만 살지못했던 삶을 자식을 통해서 사는 것을 통해서는 이 부모가 만족을 누리게되는 거죠. 그래서 자식은 자신의 존재의 확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부모에게 있는 거죠. 그래서 부모는 어떤 경우에도 자식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지는 부모는 없어요. 근데 자식은 부모를 향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근데 부모는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하면은 자식이 훌륭하게 잘 되어도 그거는 자기자신의 확장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에요. 인간이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정신분열증환자가 아닌한 그런 사람은 없다이거죠. 그니까 자식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갖게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이렇게 자식이 잘 살고 훌륭하게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인데 인제 이 마음이 검증을 필요로 해요. 검증을. 일단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기대를 갖게 마련이고 기대를 가지게되면은 결국은 사랑하게되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하지않으면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는 것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자녀를 향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기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기대를 가지시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향해 기대를 가지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깊은 기대감을 갖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고 그것이 없다면 사실은 참 부모일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우리들이 가지고있는 자녀를 향한 많은 기대들, 자녀를 분노하게하는 우리의 많은 기대들이 그렇게 순리적인, 하나님이 주신 그런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기대가 아니라 이 인간이 가지고있는 자기욕망의 투사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거죠. 그렇죠?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한풀이하듯이 아이들이 자기가 못해본 것들을 해가도록 그렇게 아이들을, 말하자면은 그 향하여 기대를 갖는 것이죠. 당연히 이런 기대가 좌절될 때 부모의 마음은 분노를 느끼게 되는거죠. 그런 관계속에서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는 깨뜨려지게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거에요.
(예화)전 아주 일찍 결혼을 했는데 7년동안 아이가 없었어요. 나는 뭐 안주셔도 그냥 살다가 죽으면 되지 그냥 그런 마음이었는데 아내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열심히 기도를 했어요. 저는 별로 기도를 안했어요. 근데 어쨌든 아이가 태어났어요, 7년만에, 굉장히 기뻤죠.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도 들고했어요. 그런데 어쨌든 저는 어려서부터 평범한게 너무 싫었어요. 그리고 좀 뭐 공부를 잘하든지, 아님 무슨 뭐, 예술을 뛰어나게 잘하든지 운동을 뭐 아주 잘하든지 아니면 뭐 이것도저것도 못하면 말이라도 잘하든지, 근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없지만 잘하는 것도 하나도 없는 그런 평범한 자신이 참 싫었어요. 모르죠, 또, 교육을 이 나라에서 안받고 다른 나라에서 받았으면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확신을 해요. 그래도 위로가 안되죠. 위로가 안되는데. 이 애를 낳았는데 얘는 나보다 틀린 것 같았어요. 특별한 것 같았어요. 6개월이 되었는데 벌써 엄마아빠를 부르고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12개월때는 제법 말을 잘하고 24개월 때는 일상의 모든 회화를 다 했어요. 30개월이 되었을 때에는 서로 어느정도 토론이 가능할 정도로 그렇게 말을 빨리 배웠어요. 근데 오줌은 못가렸어요. 오줌은. 어쨌든 그렇게 말을 하는데 참 그, 재밌었어요. 여러분들은 다 잊어버렸을지모르지만 80년대의 그 드라마에 고두심씨가 대단히 인기를 얻었었어요. 그 사람이 유행어 하나를 만들어냈는데 잘났어정말 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어요. 근데 책상에 앉아서 딱 그 때가 30개월때였는데 걔가 잘못한 것을 논리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따져서 굴복을 시키는 작업을 대화를 통해서 하고있었어요. 인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의해서 예, 아니오. 뭐 이렇게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궁지에 몰려서 자기자신도 모순이다라는 것을 느끼는 거죠. 그러면 당연히 저같으면 아빠 내가 잘못했어라고 할 줄 알았거든요. 그랬더니 바로 그렇게 말해야 할 지점에서 고개를 툭 떨구고 시름에 잠기는 거에요. 그래 아 네가 워낙 똑똑하니까 인제 반성을 하고있는거겠지. 조금있다가 틀림없이 그러니까 아빠 내가 잘못한거야 이럴줄알았더니 한참 고개를 숙이더니 고개를 탁 들더니 그래 아빠는 잘났어. 이러는거야. 얼마나 혼자서 충격을 받았는지. 야 아니, 30개월짜리가 야, 어떻게 그럴수있을까 그러면서 제 꿈도 함께 자라가기시작했어요. “아 얘가 천재일거다.” 이러면서. 진짜로 그 천재같았어요. 그래서 얼굴도 예쁘고 유치원에 가면 선생님 사랑 많이 받고, 발표도 잘하고. 초등학교 들어가니까 단번에 선생님의 시선을 잡아끌고 그리고 뭐 시험보면 뭐든지 앞에 백점 뒤에 백점 늘 백점이에요. 아 정말 대단하다 나도 이렇게 못했는데 아 얘는 역시 매우 특별한 애구나. 그러면서 일학년, 이학년, 삼학년, 사학년 지나갔는데 오학년쯤되면서부터 평범해지기 시작했어요. 이게 저에게는 중대한 배신이었어요. 공부를 안해요. 그리고 책은 보는데 공부하고 아무 상관 없는 책을 보고 학교에서도 선생님한테 생활평가도 썩 좋질않고, 본인도 학교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래요. 근데 또 그렇게 먹는걸 좋아해서 얘가 막 살이 찌기 시작하는 거에요. 사실 내가 찌는 것도 참 용서하기 힘든데 나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아들까지도 쪄가니까 그것도 마음에 안들었어요. 그래서 인제, 그리고 또 하나는 저는 성격이 정리정돈이 안된 공간에서는 막 이게 머리가 아파서 견디지를 못해합니다. 가끔 그런 집에 심방갈 때 있는데, 근데 뭐 요즘은 뭐 없어요, 요즘은 뭐 워낙 담임목사 심방가는게 어려우니까 만약에 가게되면 깨끗이 치우죠. 근데 옛날에 개척교회때 가면은 심방시간 내내 머리가 터지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어요. 근데 얘는 엄마아빠 몸속에는 그런 피가 안 들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지럽히는데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막 천지사방 어지럽혀요. 근데 정리할 줄은 모르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생활환경에서는 절대로 정리된 사고가 나올 수 없다. 정리를 해라. 몇 번을 타일러도 안돼요. 급기야 막 인제 야단을 쳤어요. 그러다가보니까 내 마음속에 자꾸 실망이 되는 거죠. 이제는, 전에는 얘가 결코 평범한 얘가 아닐 거야 했는데 나중에는 제발 평범하기만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서, 걔가 5학년인가 6학년때 교회개척을 했어요. 그니까 개척을 하니까 부부가 새벽부터 밤까지 막 정신없이 코에 단내가 나도록 바빴죠. 더군다나 저는 그 때 또 교수생활까지 했으니까 눈코뜰새없이 바쁠때여서 아이를 잘 못 돌보았어요. 그러면서 점점 이 아이는 나의 기대로부터 아주 멀어지게 되는거죠.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남의 집에 이렇게 가서 이렇게 보면은 뭐 그 집 부모라고 해서 걔한테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없는데 어쩜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정리도 잘하고, 얼굴도 정리가 잘되어있고, 착한지몰라요. 어느 교수님이 그랬대요. 아이 자기 애 때문에 자기 미치겠다고 그러니까 왜그러냐고. 공부를 안한다고. 이놈의자식이 공부를 안한다고 내옆에 있는 분이 위로한다고 그래도 애들이 공부가 다가 아닌데 뭐 바르게 잘 크면 되지않습니까. 아니에요. 애는 공부를 안해요. 공부를. 공부만 하면 대한민국 일등일텐데 하도 공부를 안해서 전교일등밖에 못한다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내가 항상 그랬어요. 야 내가 너보고 일,이등을 하라는 게 아니다 한 삼등만 하라는 거지. 근데 이게 엄청난 스트레스였어요. 결국 마음속에서 나의 기대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날이었는데 이제는 아빠가 집회가 있어서 이번주에 집에 못들어온다 그러면 얘가 좋아하는거에요. 엄마하고 동생하고만 있으니까 참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거에요.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누구 강의를 들은 것도 아니고 책을 읽은 것도 아닌데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으로 내 마음을 후려치셨어요. 그게 이런거였어요. 야. 나도 네 아버지이고 너도 네 자식의 아버지인데 그런데 내가 너를 돌보는 것과 네가 네 자식을 돌보는 것을 한번 비교해봐라. 근데 진짜 하나님도 내 아버지이시고 나도 내 아이의 아버지인데 그 아이를 돌보는 그것이 아주 현저하게 틀렸어요. 하나님은 언제나 인격적이셨어요.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잘못한다고 할찌라도 한가지 끊어지지않는 것은 있었어요. 그게 뭐냐하면은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이었어요. 근데 나는 그것이, 그 아이에 대한 그릇된 기대 때문에 거기에 충족시켜지질 않으니까 아이를 사랑하지못하는 부모가 된 거죠. 그런 깨달음이 확 밀려오면서 내가 얼마나 잘못된 부모인가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만약에 그 때 깨닫지않았으면 지금도 여전히 그랬을거에요. 그러면서 참 여러날동안을 울었어요. 내가 하나님을 만난 이래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셨고, 그리고 항상 하나님은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셨어요. 내가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못할 때에도 내가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신적이 없었어요. 심지어는 내가 정면으로 하나님을 거스르고 내 맘대로 살아보겠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셨어요. 쓴 물을 머금고 상처받은 마음으로 다시 주님을 찾아왔을 때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셨기 때문에 때로는 주님께 매맞고 때로는 칭찬을 들으면서도 하나님께 매맞은 것이 한번도 가슴에 상처가 된 적이 없고 부족하지만 지금도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죠. 이런 생각들이 밀려오면서 정말 내가 얼마나 잘못된 부모인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지금도 그 때일을 생각하면은 너무 마음이 아프고 나중에 알고보니까 항상 아빠를 생각하면서 열등감을 느끼는 거에요. 근데 그걸 보면서 그 부모의 마음에 만족을 주지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을 받지못하는 자신을 비관하면서 뭔가 어두운 마음으로 한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그 아이를 생각하니까 여러날동안 가슴이 에이는 것 같았어요. 아 어쩜 인간이 이렇게 무지하고 그리고 악할 수가 있을까.
(예화)제가 제일 싫어하는 선물이 분재에요, 분재. 그런거 몇 분이 가져오신 적 있는데 저는 보지도않고 즉석에서 저 멀리 갖다가 내놓습니다. 누굴 주든지. 겉으로 보기에는 참 예뻐보이는데 들여다보면 그걸 구리철사로 막 감아놨다구. 그런거는 정말 싫어요.
(예화)저희 할머님이 저에게 평생 남기신 유언이 있었어요. 나는 일생을 살면서 자유롭게 살아본 적이 없다. 늘 어려서 시집와서 남편에게 매이고 시부모에게 매이고 시동생들에게 매이고 자식들에게 매이면서 살았는데 내가 유언을 하거니와 너는 나를 죽으면은 절대로 베옷입히거나 나를 묶거나 하지말고 평소에 입었던 옷 그냥 입고 편안하게 가게 해달라는 것이 할머니의 유언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셨을때 제가 그 유언을 그대로 들어드렸어요. 그래서 베옷 안 입혀드리고 그리고 하얀치마저고리 입혀서 관에 편안하게 눕혀서 그래서 하늘나라로 가게해드렸어요.
근데 그러고 보니까 내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많은 기대들이 아이의 인생을 휘감은 구리철사와 같았던 거에요. 이렇게 자라야된다, 이런사람이 되어야한다라고 하는 그런것이었어요. 그러면서 깨닫게되었어요. 부모는 자녀를 돌처럼 나무처럼 조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이런 화초를 기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녀를 길러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된거에요. 그 아이가 어떤 아이로 활짝 피어날지는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 이미 주셨고 자라는 과정에서 또 주실거에요.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아이를 많이 사랑하여 그 빛을 머금게 하고 적당한 시기에 그 아이를 교양과 그리고 지식으로 가르쳐 비료를 주고 그리고 물을 주고 하면서 그 아이가 그렇게 활짝 자기 자신을 꽃피우면서 성장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가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고 하는 것을 그 때에 깨닫게된거에요. 그래서 참 그 때에 혼자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그러면서 언뜻언뜻 그 아이가 어둠속에서 울고 있었을 그 기억들을 하면서 그렇게 많이 아파하고 근데 그 시기가 그래도 아주 짧았고 즉각적으로 내 마음속에서 아이와 화해하고 그 다음서부터는 진심으로 사랑해주었어요. 한번도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면박을 주거나 야단을 치거나 매를 들어본 일이 없어요. 그 이후로는 매를 들지않았어요. 그리고 항상 마음속에서 이렇게 화초를 가꾸는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사랑할려고 애를 썼어요. 그리고 항상 마음속에 자녀를 향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고 그리고 어디에 있든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래서 부모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위해서 애쓰는 아들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주님에 대한 인격적이고 진실된 사랑 때문에 내가 이 땅 어디에 있는것이 그 분의 마음에 기쁨이되도록 살기만 하면 우리아빠는 내가 무엇이 되든지 기뻐할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게해주기 위해서 노력을 했어요.
(예화)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춘천에서 자그마한 전시회가 열렸어요. 사연인즉 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어머니가 딸의 영혼을 위로하며 만든 전시회였어요. 얘가 중학교 3학년아이였는데 아주 영특한 아이였어요. 사진보니까 얼굴도 너무 예쁘게 생겼어요. 근데 전교에서 늘 1,2등을 하는거에요. 그러니까 이 부모가 이 아이의 공부에 대해서 욕심을 품게되었어요. 그데 얘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공부도 하지만은 공부보다는 오히려 음악, 그 다음에 시, 그리고 미술 이런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런걸 하고있는데 아이가 성적이 떨어지니까 부모가 보기만하면 야단을 치고 뺐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치워버리면서 하는 말이 “몇 년만 참고 대학에 가면 이런거 얼마든지할 수 있는데 왜 이 소중한 시간에 이걸 배우느라고 네 공부가 쳐지냐. 일류대학에 갈려면 제대로 공부해야된다” 그러면서 아이를 채근하고 심하게 질타했어요. 어느날 이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자살했어요. 부모가 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그러나 떠나간 딸이 다시 돌아올리는 없었죠. 죽은 다음에 이제 그 아이의 유품을 방 안 전체에서 정리하는데 구석구석에서 이제껏 보지못했던 작품들이 나오는 거에요. 한결같이 이 아이가 음악에도 소질이 뛰어나고 미술은 물론이고 시를 쓰고 문학을 하는데있어서도 아주 뛰어난 소양을 가지고있었다는 평가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그렇게 억압했던 것을 깊이 후회하면서 그 남은 작품들을 모두 모아다가 전시를 했던 것이죠.
(예화)결국 부모는 아이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어요. 전 그렇게 생각을 해요. 어떤 사람들은 누가 회심했더니 그 아이가 전교에서 일등했다 소리를 듣고 자기아이도 회심하면 일등할줄 아는데 절대 그런 불행한 일은 아무나 집안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회심을 해도 원래 공부머리가 없는 애들은 조금 나아지겠지만은 일등은 안 해, 일등은. 그리고 온 세상이 다 일등을 하면 얼마나 세상이 재미가 없겠어요, 그죠?
(예화)신학교 들어가니까 일학년 때 모든 학급친구들이 다 교수가 되고싶어해, 사실 교수는 그렇게 많이 필요없거든요. 그럼 등록금은 누가 내. 다 교수하면. 그 한 반에서 한 명정도만 나오면 충분하거든요. 이렇게 교수가 되고싶어해. 그 너무 획일적이지 않아요?
부모는 나무처럼 생긴 자기의 아들을 칼과 정으로 쪼아서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조각가일 수 없어요. 그건 생명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라가는 생명이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화초를 돌보듯이 사랑, 끊임없이 사랑해서 모든 것을 용납하고 사랑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를 포기하지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지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부모로서 아이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끔 해주는 그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자격이야.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이미 자녀를 가진 장년들도 있지만 청년들이 많이 있는데, 내가 말하고싶어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결혼의 준비는 인간을 깊이 사랑하는거에요.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살을 에이고 뼈를 깎아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에요. 이 세상에서 많은 일의 업적을 이루어도 그 사람이 완성된 인간일 수 없지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자기를 완성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정말 갖춰야할 중요한 자질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자기의 자식을 노엽게하지 않고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분신이 되어서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부모, 그 부모 마음 안에 있는 신앙,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아름다운 신앙의 교훈, 이것들이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아이들에게 샘물처럼 흘러들가게 될 때 그 때에 그 아이들의 성품 속에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성품이 녹아내리게되는 것이죠. 부모를 통해 그런 사랑을 받은 아이들만이 자기자녀를 어떻게 사랑해야될지를 올바르게 배우게되는것이에요. 그렇게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은 그 사랑이 계속 스며들어가서, 그래서 복된 삶을 살게되는 것이에요.
Ⅳ. 맺는 말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가 자기에게 준 상처는 돌에 새기듯이 오래도록 간직하지만 자녀에게 준 상처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위로는 자신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부모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아래로는 자녀들에게 준 상처를 가슴에 깊이 새기며 자신의 사랑 없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림자처럼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 주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올까?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거죠. 그래서 자식이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부모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젊었을 때뿐만 아니라 나이가 많은 세월이 흐른 때에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결국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마지막 주님의 품에 갈 때까지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지않을 수 없는 그런 존재로 창조된 거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분임을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서도 배우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러분들은 마음에 깊이 한 번 어떤 부모가 될 것인지 가슴에 깊이 새겨보세요. 그래서 여러분의 슬하에서 태어나는 사람들이 정말 복된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은혜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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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녀 양육의 길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1. 본문 해설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 무엇이고 또 어떤 일 때문에 자녀들이 부모를 향해 분노를 품게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같아 보이는 두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교양’과 ‘훈계’라고 하는 단어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별이 되는 말입니다. ‘교양’은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질을 가르키는 것이라면 ‘훈계’는 실제적인 삶의 방식에 관한 가르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양’은 정신적이고 마음에 속한 내면의 질이라면 ‘훈계’는 실제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생활의 교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전수해주는 것이 부모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가리켜서 결코 성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방식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주 발달한 문명을 구가하면서 엄청난 물질문명을 일구고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우주선이 달나라를 넘어서 천왕성, 명왕성까지 날아간다고 할지라도, 외계에까지 도달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큰 권력을 쥐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섭섭할 정도로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자식을 낳았는데 우리 모두의 꿈은 내 자식을 일등으로 만들고,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많은 사람을 다스리고 통솔하는 그런 인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해줘야 될 그 일에 있어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비켜갑니다. 그리고 하나는 정신적이고 마음에 속한 내적인 질을 가리키고, 하나는 실제적인 삶의 교훈을 가리키면서 비켜갑니다. 한 사람이 커다란 권력과 재물을 갖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별로 없어도 내면의 질이 주의 교양으로 가득차고 실제 삶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는 그런 주의 훈계를 따르는 삶이면 그 사람이 리어카를 끌어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하찮은 일에 종사하면서 사람들 보기에 별 대수롭지 않게 살아가면서 인격이 고매한 사람보다는 인격이 야비하고 사람이 좀 못되었어도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돈도 없고 재주도 없는 것이 주관을 뚜렷이 세우면 성깔이 있다고 그러는데, 성질머리만 있다고 그러는데 돈도 있고 권력이 있으면서 성깔을 부리면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자매가 얼굴도 못생겼는데 성질을 부리면 성질도 못되었다고 그러는데, 얼굴이 예쁘게 생겨서 성질을 부리면 주관이 뚜렷하다고 합니다. 그것이 매력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돈도 없으면서 어쩌다가 힘들게 인심을 쓰면 돈도 없는 것이 낭비만 한다고 하지만, 돈이 있으면서 푹 쓰면 역시 통이 크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보는 관점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저와 여러분 모두를 포함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정신의 부모로서 오염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입력이 되어서 자기 자녀도 그렇게 보고 자기자녀의 친구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학교에 가서 친구를 사귀었는데 공부 잘하고, 아파트도 넓은 평수에 살고, 너의 아버지 뭐하니 하니까 총장님이에요, 의사에요, 변호사에요 하면 여러분들이 기분이 좋겠지만, 데리고 왔는데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기고, 지저분하고, 아파트에도 못 살고 너의 아버지 뭐하시니 하면 목사에요 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기왕이면 자기보다 훨씬 더 나은 부모의 자녀들하고 어울려 주기를 원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이렇게 많이 오염이 되었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해야 됩니다. 얼마 전 명색이 권사라는 사람이 고 3이 된 자기 딸에게 ‘교회 가지 마라, 니가 교회 다녀서 대학 입학 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그러나 니가 1년 동안 교회에 안 나가고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입시에 합격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고 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까? 교회도 제 때에 안 나오고 나와도 예배에 달랑 나오고, 아무것도 안 하고 3년을 보내다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철저하게 단도리 한 자기 부모와 그 자녀 데려다가 새벽까지 과외 공부 시킨 학원선생이 영광을 받지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아주 깊이 오염이 된 가치관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명색이 신앙인입니다. 오염된 가치관에 살짝 복음의 분을 발라서 가끔 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앙적으로 주님 안에서 이런 말을 붙이지만 근본적이 그 뼈대는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그 경쟁과 초연하게 살다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교회에서만 필요한 사람이고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제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추구점이 어떤 것이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추구점을 그렇게 세속적인 기준에 두고 자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접촉점이 없어서 비켜가는 것입니다. ‘너의 자식을 잘 기르고 싶으냐? 내가 너를 볼 때에 자식 낳아서 잘 길렀다고 소리 듣고 싶으냐? 그렇다면 자식들에게 분노하는 마음을 품게 하지 말라 그리고 니가 할 일이 있는데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을 하거라’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가지고 있고 자녀들도 가지고 있어야 할 입각점 바로 이런 시야라고 합니다. 분명하게 부모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입각점이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을 보면 하나님께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냐 아니면 이 세상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 될 것이냐 이렇게 양자택일로만 놓이는 것은 아닙니다. 경쟁에서 지고 이 세상에서 못난 사람이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세상과 모두 단절하고 세상에서 짓밟히는 못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신앙 운운하면서 자신의 경쟁에서 실패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것입니다. 지금 문제로 삼는 것은 그런 식의 양자택일의 논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문제로 삼는 것은 중심이 뭐냐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부모로써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자식들에게 품고 있는 소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보자는 것입니다. 진짜 간절한 소원, 우리 마음에는 수많은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우리가 예수 믿는 부모인데 우리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돈만 많으면 신앙이 개떡 같아도 상관없다, 권력만 잡으면 인간성 더러워도 상관없다 그럴 부모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가지 말고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많은 소원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누르고 우리 자식들을 위해 제일 위에 올라오는 우등한 소원, 이것은 꼭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만 되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런 뜻도 아니고 이것을 갖기 위해서 나머지를 다 버린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제일 위에 있는 이런 것이 없다면 나머지 것이 모두 있어도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아주 우월한 그 소원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진짜로 그 소원이 주의 교양과 교훈으로 이 아이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가장 커다란 소원이냐 하고 우리가 되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소원을 품었다고 해서 자기 새끼가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로써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지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가는 길이 직선이라고 하면 아이의 삶이 그 직선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칩니다. 초등학교 처음 들어갔을 때 숫자를 잘 못쓰고 글씨를 잘 못쓰니까 점선을 따라 선을 긋습니다. 그렇게 된다고 할지라도 과연 그 점선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기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3년 전에 이 세상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신조어를 만들었습니다. ‘삯군부모’ 목사만 삯군 목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삯군 부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진도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들어가봅시다. 여러분은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목사님 말씀이 맞는데 왜 내 마음 속에 내 자식이 정말 주의 교양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어야 될텐데, 정말 주의 법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될텐데, 나는 그런 아이가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벼슬을 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보다 더 중요해’ 왜 이런 마음이 제게 안들까요? 그것이 무엇 때문일까요?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부모의 신앙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심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 때 가장 가슴 아픈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저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험입니다. 주님 앞에 가장 죄송스러운 것은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죄송스럽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그 점선을 읽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맞춰 봐도 그 점선이 안 맞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돈을 달라고 하시면 돈을 드리겠습니다. 와서 교회 땅을 파라고 하면 땅을 파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나였으면 하고 바라는 점선이 있는데 내가 거기에 나를 대보니까 틀립니다. 그런데 이것을 틀린다고 해서 한 시간 만에 고쳐서 딱 맞게끔 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내가 나인 것이 나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가슴 아픈 것입니다. 저는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 가장 마음을 찌른 기도 제목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던 그 해 약 2년 동안 새벽마다 그렇게 가슴이 아팠습니다. 너무 울고 나면 갈비와 갈비 사이의 살이 너무 아팠습니다. 왜 내가 나입니까? 나도 나인 것이 싫은데 왜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런 세계가 부모에게 없기 때문에 자식이 주의 교양과 훈계를 따라서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겠다라고 하는 절실한 갈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통령이 아니고 9급 공무원이었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영광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룹의 회장이 아니고 그 회사에서 대문을 지키고 있는 수위를 통해서도 더 큰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요셉 같은 사람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식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앙으로 매일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그 살아있는 생명과 같은 영혼의 변화 속에서만 이 자식을 올바로 기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아이들은 창조목적을 거스르고 악하게 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가 없고,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그 아이들이 끊임없이 변화되고,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춰보면서 주님의 점선이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아파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생긴대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지 내가 나인 것이 너무 죄송하고 아프다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친구를 통해서 굉장히 영향을 받습니다. 늘 그렇게 잘난 맛에 살다가 한 녀석을 하나님께서 탁 쳐서 깨뜨리십니다. 그 때 그 영향력은 부모에 버금갑니다. 가장 확실한 전도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것을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발견되게 될 때에 그 때에 가장 확실한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인 부모는 글 안 가르치고 말 안하고 그냥 그 자식 앞에 서 있기만 해도 훌륭하게 그 자식을 키우고 있는 중입니다. 그 자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은 문제가 자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인 나에게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내가 이 아이들의 신앙을 진심으로 염려하고 걱정할 수 있는 마음이 되었는가? 그리고 이 아이들을 참 올바른 삶의 훈계로 지시하고 가르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었는가? 이것을 생각하고 반성하는 부모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식교육이 어렵다고 하는데 자식 교육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부모인 자신들이 사람답게 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모들도 자녀에게 야단치거나 똑바로 하라고 큰소리 내는 대목은 자기가 평소에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술 먹고 들어와 가지고 집에서 행패나 부리는 부모가 술 먹고 들어오는 자식한테 ‘너 이 자식 요즘이 어떤 시절이라고 술이나 먹고 슬슬 먹고 돌아다녀’라고 나무랄 수 있을 때는 그 아버지가 술이 취했을 때입니다. 맨 정신에는 그 말을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직업도 안 갖고 아내보고 가서 돈 벌어오라고 하면서 자기는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까지 게으르게 빈둥거리면서 사는 사람이 자식이 게으르다고 책망하면서 ‘네가 그렇게 게을러서 이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살아남을 줄 아냐’고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술 먹었을 때나 술기운에 할 수 있는 소리이지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녀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 한 두 방면이 아니라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부모가 온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의 경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 못했어도 자식에게 말을 할 때에는 ‘그렇게 공부해야 되겠느냐 공부를 할 때에는 눈에서 불이 나야지, 너 공부 그렇게 안하면 되겠어? 내 꼴을 봐라 너 공부 안하면 아빠처럼 되는 거야’ 이렇게 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모든 가정에 관한 교훈은 아내와 남편에 관한 교훈이든, 부모에 관한 교훈이든, 자녀에 관한 교훈이든, 동기간에 대한 교훈이든 뭐든지 간에 그 교훈이 아무리 풍성해도 진실한 신자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에게나 이것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이지 이미 이럴 의지가 없는 인간에게는 개발의 편자입니다. 편자가 뭡니까? 말발굽에 붙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개발에 붙여보십시오.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가정의 회복은 누구이든지간에 한 사람이 주님을 진실하게 만나고, 주님 안에서 참 아름다운 신자가 되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내 인생의 참 행복이다’라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만 거기에서 해결의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먼저 받은 사람이 사명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사명을 주시고 은혜를 주실 때에는 그 한 사람이 그 집안에서 가장 약해보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지만, 그가 인내하고 참고, 사랑을 이루며 한 알의 밀알이 되면 이 파문이 번져가면서 가정 전체를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가 회개해서 온 가정이 새로워진 집도 있지만, 엄마가 회개해서 새로워진 가정도 있고, 엄마아빠는 개념이 없는데 자식이 철이 들어서 주님 만나고 오래 참고 인내해서 가정이 회복되어진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 맨 처음에 들게 된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가정의 회복을 위한 사명을 받게 되면 그가 순종을 하면서 그 가정의 회복을 위해서 애쓰려고 할 때 그가 남편이든지, 아내이든지, 아니면 아들이든지, 딸이든지 누구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주의 교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히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이 삶의 질서를 잡아 주어서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호감을 줄 수 있는 질서가 갖추어진 성품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교양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이고 신적인 자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의 자질, 그러니까 교양 있는 사람은 마음에 틀이나 성향 이런 것들이 이 세상의 이치에 적절하게 맞게끔 조율이 되어 있어서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해야 할 말, 안 해야 할 말을 다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입니다. 누구든지 다 아이를 낳으면 자녀가 있습니다. 그러면 데리고 왔으면 아이가 신발을 신고 음식점에서 의자위에 올라가고, 교회에 와서 아이들이 의자 위에 신발을 신고 의자 위에 올라가고, 열린 공간에서 구두를 신고 유리 위에 올라가고 하면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양입니다. 왜냐하면 교양은 아주 크고 위대한 세계라기보다는 어떻게 살아야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질서에서 어울리고, 추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는 본성적인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고자하는 그런 마음과 정신의 틀입니다. 당연히 가방 끈이 긴 사람이 교양이 있었던 것은 옛날이야기 입니다. 요즘은 가방끈 긴 사람들이 더 싸가지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가방끈하고 인품하고 적절하게 비례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잘못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교양이 갖춰진 사람은 어디가든지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환영을 받습니다. 같이 있어보면 다음에 같이 만나서 가까이 있고 대화를 하거나 같은 자리에 합석을 해도 기분이 괜찮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에게 특별한 결함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저 멀리서 보면 피해가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어도, 강한 사랑이 끌리고 원수같이 미워지는 그런 것 말고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교양은 기껏해야 인간미를 개발하는 교양일 뿐입니다. 오늘 여기는 그런 교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교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교양, 굳이 교양에다가 주의 교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마음과 정신 안에 품었던 그 자질들, 닮은 그 무엇을 자녀들에게 갖춰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이야 오늘 호주머니에 넣어주면 어제 없다가 오늘 생기는 것이지만, 교양은 그렇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80년 대 일이었습니다. 강남이 한창 개발이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책장사하는 사람이 강남에서 가끔 책이 이름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cm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책장을 다 짜놓았는데 24cm 짜리 15m, 32cm짜리 7m 그러면 읽지도 못하는 책 쫙 갖다놓고 하나 펴놓고 사진을 찍습니다. 참, 그거요 사진기만 정확하면 아무리 뒤에다가 읽지도 못하는 책 꽂아놓고 사진을 찍으면 사진기만 정확하면 책을 배경으로 하고 사진을 찍어도 교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것은 주의 교양입니다. 그리스도의 교양.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마음에 있었던 그 신적인 자질, 그것이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가 자녀들에게 갖게 해 줘야 할 것들입니다. 참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저는 생생한 경험과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3-4학년만 되어도 어이들이 회심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살면 애들이 몇 달만 지나면 예수 믿는 사람의 품위가 흐릅니다. 절대 욕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틀이 욕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주일학교 사역할 때 욕을 입에 달고 살던 아이가 회심을 하고 난 후 절대 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일이 그것을 지적을 안 해줘도 그 마음 자체가 욕을 싫어합니다. 서서히 투쟁하면서 욕을 하나씩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물에 빠져 나가듯이 욕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교양입니다. 주님의 교양의 본질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배어있는 것입니다.
대학 교수로 있을 때 대학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깜짝깜짝 놀란 적이 많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교수들을 뽑는데 얼마나 어렵습니까? 쟁쟁한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총장이 찍어서 뽑는 것이 아니라 신학과 교수들에게 지원한 사람의 이력이 옵니다. 대학도 좋은 데 나오고, 국에서 박사학위도 받고, 생긴 풍채도 좋고, 그 다음에 추천서도 거창하고, 이 사람 괜찮겠는데, 저 사람 괜찮겠는데, 하면 저기서 나이 지긋한 교수님이 다 좋은데 싸가지가 없어 하면 끝이에요. 야 이럴 수도 있구나.
그런데 자녀들이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부모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가정 속에서 주님의 교양이 충분히 배이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는 굳이 ‘날 좀 봐주십시오, 잘 부탁합니다’ 하며 씨 뿌리고 다니지 않아도 자기를 돕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면서 다니게 됩니다. 그 자체가 그것이 인생입니다. 자녀들에게 그런 것을 넣어줘라 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매한 정신적이고 신적인 자질 이런 것들이 이 세상의 본성적인 변화라면, 이 세상적인 교양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교양이라고 할 때 이것이 어떻게 악한 인간 속에 이것이 들어가겠습니까? 그것을 자식에게 묻기 전에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야 ‘전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겠지만 그래도 여러분 중에 주님의 교양으로 마음이 꽉 차있는 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꽉 차있다고까지 말하면 자신이 없지만 찰락 말락 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만큼만이라도 주님 닮은 교양이 여러분 안에 있게 되었습니까? 학원 다녔습니까? 학습지 공부했습니까? 인터넷 강의 들었습니까?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제발 뭐 배운다고 교회 일 놔두고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너무 많이 문제를 일으키잖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회심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가운데 살려고 애쓰고, 눈물 훔치고,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눈물 흘리고, 늘 꺾어지지만 그러나 늘 새롭게 결심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의지하면서 사니까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이만큼이라도 주님의 교양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자식은 별종이 아닙니다. 똑같이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런 식으로 주의 교양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실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이에게 넣어주는 것입니다. 부모를 보면서 자식들이 ‘우리 아빠가 사장인 것 닮고 싶다, 휘하에 부하가 몇 백 명인 것 그것을 닮고 싶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훌륭한 인격, 주님을 닮은 아빠의 모습, 엄마의 모습 그것을 아이들이 갖고 싶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이 훈계는 실제적인 삶의 교훈을 가리킵니다. 정말 오늘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셔야 됩니다. 나도 아이를 기르는 부모니까 함께 듣는 마음으로 여러분들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일수록 이 훈계가 쉽게 가르쳐집니다. 어른이 뭐 하나를 주면 두 손으로 받고 머리를 숙이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어렸을 때에는 상을 주든지 야단을 치든지 집에서 몇 번만 훈련을 시키면 금방 배웁니다. 그리니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이들도 집에서 연습 시키면 그 다음 날부터 잘 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지나다보면 그런 것을 집에서 잘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지나가다 보면 내가 먼저 ‘안녕’하면 쳐다도 안 보는 애들이 있고, ‘안녕’ 하면 ‘안녕’하고 인사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안녕’ 하면 안 되고 배꼽에 손을 얹고 안녕 하면 부모가 더 좋아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 아이들이 뭘 알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세요. 그것을 안 가르치면 결국은 못하고, 성인이 되어서 배워야 되는데 피가 흘러야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할 수 있을 때 그 때에 붙들어주고 의미는 나중에 가르쳐주면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교훈에 맞게끔 행동을 할 때에는 상을 주고 안 했을 때에는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 너무 상처를 주면 안 되니까 설명을 하고 반복해서 노력을 그치지 말고 반드시 그 아이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의미는 나중에 가르쳐주면 됩니다. 어려서 요만한 것 하나만 줘도 ‘목사님 고맙습니다’ 이러던 애들은 나중에 커서 시집 장가를 갔을 때에도 시아버지가 뭐 하나 해 줄 때에 ‘아버님 너무 고맙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 그렇게 못한 애들은 인사성이 없습니다. 누가 가르쳐주겠습니까? 성인이 될수록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훈계입니다. 지금은 일반적인 도덕에 관한 것을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실제적인 삶의 규칙과 연결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것이 몸에 잘 배어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몸에 배어있지 않으면 악의는 없지만 개념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악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났는데 저는 목사이고 여러분들은 성도인데 성도도 어른이 아니고 젊은 청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애둘려서 이야기하지 모두 사회인이 되었는데 어느 날 불러서 ‘차렷! 배꼽에 손 얹고 다시 해봐’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싶어도 못하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비켜 가는데 본인은 끝까지 모롭니다.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가르칠 때 분명한 생활의 태도, 이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도 결국은 문제가 부모를 보고 배우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부모가 잘 하는 것은 자녀에게 가르칠 수 있지만 잘 못하는 것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결국은 나 하나가 온전하게 되기를 포기하면 나 하나가 문제가 아니라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집니다. 그래서 여자가 해산을 하면 구원을 얻게 되며 성화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자녀를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살 같이 빠른 이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자식에게 빙빙 돌리지 말고 실제적인 교훈과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감사해야 한다, 너한테 은혜를 베푼 분들에게는 감사해야 한다’ 딱 잘라서 가르쳐야 합니다.
5월 달이 되면 마음에 항상 아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외로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5년 전부터 선물을 한 개씩 사서 보내면서 선물을 마련해 보라고 그랬더니 내복, 크레파스, 공책, 이런 것들을 가져오는데 그런 것들을 아이들이 좋아합니까? 아이들 아빠가 살았더라면 엄마 몰래 아이에게 사주고 싶었던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자비를 베풀었을 때 그것을 감사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태도는 인간으로서는 너무 당연하고 쉬운데 그런데 그것은 교훈으로 잘 훈계되어지지 않으면 마음에는 있어도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사랑의 눈을 가지고 보면 그 마음이 읽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마음이 읽히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자녀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 줘야 합니다.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가슴에 가득 쌓여있는 부모들이 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배우게 됩니다.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그 두 가지가 가슴에 있는데 이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없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오를수록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교양과 훈계는 폭력과 우격다짐 그리고 주입식 교육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온전한 사랑 ‘부모인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는 온전한 교육을 하나도 안 받아들여도 아빠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엄마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이것은 부모인 내가 너를 향해 가지고 있는 운명이다’ 그것을 자녀들이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무엇, 내가 하고 있는 어떤 행동 이것이 올바를 때 부모가 기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내가 행하는 것, 내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가 우리 부모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깊이 느껴지도록 그 사랑의 물을 타고 거기에 교양과 그리고 삶의 훈계들이 끊임없이 타고 내려가면 자식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집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부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3.자식사랑의 본성이라도 져버리지 말라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왕상 3:24-27).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 하나님앞에 간절히 구했던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왕이 누렸던 부귀와 영화 그리고 영토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었을때에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왕이 되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지혜를 주시도록 일천번의 번제를 드렸고 그 후로 하나님은 이 솔로몬에게 놀라운 지혜를 주셔서 이 넓은 땅을 다스려 갈 수 있게끔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충만한 지혜로 말미암아서 이제 모든 백성들은 왕을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그 지혜를 입증해준 한 사건이 오늘 읽은 본문안에 나옵니다. 창기였던 두 여인이 한 집에서 살고 있었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떻게해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지 왜 남편하고 살고있지 않고 애 낳은 여자가 둘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쨎든 두 여인이 각기 아이를 낳고 살고 있었고 한 여인이 아이를 낳은지 3일이 되었을때에 다른 여인이 또 아이를 낳아서 두 여자가 두 아이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은지 몇일이 되지 않았을 때인데 한 여자가 아이와 함께 자다가 잠버릇이 험한 탓인지 아들 위에 누워버렸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깔아 죽였습니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저 계집이 밤에 그 아들위에 누우므로 아들이 깔려 죽었습니다. 우리가 이런것은 몰라도 아이를 모유로 먹이는 어머니들은 졸면서 아이에게 젖을 먹여서는 안 되는 것을 아시죠? 젖이 아이의 코에 눌려서 질식사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미 노릇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쨎든 그렇게 해서 죽게 되었고 그러자 한 여자가 죽은 아이를 다른 여자 품에 놓고 그 여자 품에 잠든 아이를 자기 품에 누워서 자기 아들이라고 우기게 되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간단 합니다. 아무리 본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전자 검사하면 거짓말 할 수 없게 명백하게 나오는데 당시에는 그런것이 없었으니까 결국은 이것이 송사가 되어서 누구도 재판이 쉽지 않은지 솔로몬 왕에게까지 이 송사가 올라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솔로몬은 부하에게 명하여 큰 칼을 가져오라고 명하고 그리고 그 칼을 옆에 두고 왕이 이르기를 저 살아 있는 자식을 서로 자기 자식이라고 하니 반으로 쪼개라 그래서 이 여자에게 반을 주고 저 여자에게 반을 주거라 하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그 두 여인중에 진짜 살아 있는 아이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오늘 성경에 보니까 마음이 불 붙는 것처럼 타 올랐다고 했습니다.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아들을 위하여 불 붙는것 같아서 왕에게 가로되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십시요" 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계집은 "죽여서 반으로 나누어 이 여자의 것도 되게 하지 말고 나의 것도 되게 하지 마십시요" 라고 어리석게 말하였습니다. 이 일을 통하여 왕은 산 아들은 바로 저렇게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서 저 여자에 주고 이 아이를 죽이지 마옵소서 한 그 계집이 바로 그 어미다 라고 지혜로운 판결을 내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미에게 주신 하나님의 본성적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어미되는 이 여자가 자기 아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때에 마음이 불 붙는것 같아서 견딜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일평생 그 아이를 보지 못할지라도 차라리 그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이 이 부모에게는 훨씬 커다란 위로가 되었기에 이별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이를 살려 달라고 왕에게 애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왜 드리냐하면 우리의 자녀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 사랑은 이중적인 덕 위에 놓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자녀가 원수라면 자녀를 사랑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사랑의 감화가 아니면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자식은 원수가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주시고 부모가 될 때부터 그 부모인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식을 향한 애뜻한 마음, 자식이 죽음의 경지에 이르게 될 때에 마음에 불 붙는 것 같은 고통과 타는 듯한 심정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자식의 불행을 아랑곳 하지 않고 팽개치는 못 되먹은 부모들의 심사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죄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죄의 위대한 능력을 자기 자식을 버리는 부모의 무정함을 가지고 증거로 제시 했습니다. 그것이 부모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 죄 보다는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못한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 변명할 것이 없고 심판이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수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은 안 주셨습니다. 타락한 이후에 인간에게 그런 정도의 본성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은 동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거스르는 존재가 인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본성 조차도 거스르게 하는 위대한 죄의 능력입니다. 이것이 죄의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그 악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직업이 창기인 이 미천한 여인들도 자기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해서 그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그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아들과 헤어질 지라도 아들을 살려 달라고 왕에게 빌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 본성적인 덕 위에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 놀라운 은혜의 체험, 남이 보지 못한 진리의 세계를 본 그 기쁨 그리고 기도 응답의 경험 그리고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로 인도해 오신 우리의 인생에 대한 간섭하심에 대한 경험,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 본성적인 덕 위에 더 고상한 덕인 영적인 선으로서의 덕을 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이 고상한 덕 위에 기초를 합니다. 그러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본성적인 덕과 고상한 덕 모두를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조금 있어도 가능한 것이지만 자기 세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보통 죄가 역사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다반사로 우리들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악해도 우리 자식이 이 지경이 되면 나도 왕에게 우리 아들을 쪼개 달라고 하지 않고 헤어지더라도 살려 달라고 빌었을 것입니다.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번 영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이 아이는 이제 육적으로 죽음을 당할 위기에 있을때에 이 어미의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 견딜수가 없어서 왕에게 이 아이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 계집이 대신 죽고 그렇다면 내 아들을 살려 줄수 있노라 라고 했더라면 아마 기꺼이 이 어미인 이 여자가 자기의 목숨도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육체로만 살아 있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영적으로도 살아 있는지 한번 되물어 보십시요. 이 여인은 살아 있는 아들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기 친 자식보다는 살아 있는 남의 자식을 원했습니다.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얼굴과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는데 생명이 떠나니까 그 아들이 내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자녀의 영적 생명은 어떤지 한번 되물어 보십시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자녀의 영혼의 생명이 관심사 이기는 합니까? 막연히 부담을 느끼는 것 말고 진짜 여러분들의 마음이 이 창기인 어미의 마음처럼 죽음앞에 놓인 여러분들의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불 붙는 것 같기는 합니까? 그런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부모로서 자식을 많이 사랑하고 부끄러움 없이 자녀들 앞에 부모 구실을 했다면 그 모든 일들을 아무리 훌륭하게 했다 할지라도 마지막으로 그 자녀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앞에 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앞에 온전한 부모의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여러분들은 그 최종적인 완성을 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부어지는 그 큰 사랑, 넓은 자비 그리고 자녀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그 은총과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여러분들 안에 있다는 것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자녀들을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신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구일 뿐입니다. 보이는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도록 선악을 옳게 분별하는 부모의 분별력 있는 지혜와 도덕을 통해서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도록 하나님이 원하셔서 여러분들을 그런 부모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부모인 여러분들을 통해서 자녀들이 마지막 만나야할 진정한 영혼의 부모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잘 길렀다면 그 잘 길러야할 목적이 바로 이것이니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는 하나님이 그 아이의 마음속에 계셔서 그 아이를 통치하고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도록 그렇게 하나님과 그 아이를 단단히 붙들어 메어주고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안하려면 죽을때도 눈을 뜨고 죽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훌륭한 부모가 되지 못해서 마음에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자식에게 상처를 주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면 더더욱 빨리 그 아이가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여러분들이 준 상처가 그 아이에게 굳어지지 않도록 그래서 부모는 불완전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그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은 완전하고 아름다웠다고 하는 것을 그 스스로 하나님앞에 알게 하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의 회심은 앞당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최악의 부모는 자식에게 상처와 고통, 무관심, 사랑없음, 폭력 이따위것들을 잔뜩 안겨주고 자식의 영혼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부모는 제일 나쁜 부모입니다. 더더욱 그 부모가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부모라고 불리우는 부모라면 만약에 그런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천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살아도 그 인생은 산 인생이 아닙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에는 몰랐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았지만 이제 알았으니까 그렇게 살면 안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위해 더 많이 울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여러분 앞에서 보이는 그 모습이 아이들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됩니다. 미련한 부모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완전하지 않았고 그리고 나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후회하게 그렇게 해 주지 못했지만 그래서 아이들 마음속에 원하지 않았던 상처와 어두운 그림자를 남겨 두었지만 그 부족한 나의 모자라는 부족 때문에 내 아이들이 주님을 만나고 그래서 나는 가르쳐주지 못한 부모로서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만나게 될 때 그때 그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대물림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태만합니다. 아주 현저하게 태만합니다. 자기자신의 자식의 영혼의 상태에 대헤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그렇게 목이 메도록 자녀의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해도 안하니까 교회에서 프로그램까지 만들고 설교를 하고 자녀를 위해서 우리 모여서 같이 기도하자 그러면 우리가 온 힘을 다해서 자녀가 회심에 이르도록 우리가 함께 노력하자 해도 쳐다도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온전한 부모가 되어서 자식에게 아무렇게나 해서 길거리에 팽개쳐진 자식의 영혼을 그 위에 돌보기는 커녕 짋밟는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도 무슨 마음이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잘 되기를 바라는지 기이할 뿐입니다. 짐승같은 부모들이 이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았던 날들은 우리의 지난 날들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아픈 기억들을 자식들에게 또 물려 주려고 합니까? 그러면 지금이라도 깊이 뉘우치고 자식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앞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빌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마지막에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할 부모의 의무이고 사람됨의 마지막 경계선입니다. 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마음깊이 자신에게 상처를 준 부모를 용서했더라면 그 용서의 완성은 그 부모도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빌어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말로 부모를 용서했다고 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그 영혼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상처를 준 그 부모를 구원하지 아니 함으로 복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앞에 인정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가 계속 될 때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은 부모가 되어서 자식의 진실한 회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히 매달리지 않으면서 언젠가는 우리 아이가 회심할거야 하고 넋두리를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의 의무를 기피하고 다른 사람에게 미루어버리고 운명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믿음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식의 영혼의 사랑에 대한 진실이 결핍되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일이 없으리라고 믿지만 우리 아이들중 어떤 아이들은 내가 일평생에 눈물로 기도하여도 회심하지 않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안에 있던 자식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부모가 그 일을 위해서는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 아이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인것처럼 그 아이의 구원이 자신의 영혼의 구원인것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요즘도 교회학교 아이들이 얼마나 회심했냐고 물어 봅니다. 아직까지 회심하지 않은 아이들이 많이 있고 그 아이들은 믿음과 상관없이 계속 성장해 갑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다른것들로 많이 새겨지고 그 마음이 굳어집니다. 부모의 간절하고 절실한 눈물의 기도 한번 받아보지 못한체 쓰러져 가고 교회를 떠나가는 영혼들도 나타납니다. 도대체 그런것을 본다면 우리에게 고상한 신앙의 덕 십자가 사랑 때문에 자식을 사랑하는 아주 고상한 믿음의 덕 말고 동물적으로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이라도 남아 있는지 우리는 되물어야 합니다. 자식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크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자기 피 자기 살 받고 태어난 눈에 보이는 자기 세끼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 할수 있습니까? 도대체 그런 부모들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들 입니까? 그 아이 인생의 최고의 불행은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매우 각성하고 자식들의 연령이 어떠하든지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구원 여부 그리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영혼의 선한 상태의 여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식의 죽음 위기 앞에서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 내 아들을 살려 달라고 했던 창기인 이 계집 어미의 자세라도 본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라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을 깊이 사랑하고 부모로서 그 아이를 하나님이 맡겨 주셨으니 회심없이 여러분 곁을 떠나게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아이의 영혼에 대해서 아주 몹쓸일을 하고 아이를 이 세상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 하겠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자녀를 데리고 있는 동안에 그 아이가 회심 없이 여러분 곁을 떠난다면 여러분들은 그 자식에게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입니다. 매달려 보셨습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보셨습니까? 창기인 이 여자, 남자들에게 몸을 팔고 술을 따라서 서방도 없이 애를 낳은 이 막되어 먹은 이 계집중 하나도 자식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불 붙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영혼이 죽어 있는 자신의 자식에 대해서 이 여자처럼 마음이 불 붙었습니까? 그렁저렁 하루하루가 지나 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영혼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못 만나고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태어나 아이에게 어두운 기억을 남기고 하나님도 못 만난체 여러분 곁을 떠나 보내고 나면 그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남에게 전도할 때 너무나 잘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이 여러분들 자녀들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생각이 있는 부모라면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죽이시고 이 아이의 영혼은 살려 주시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믿음의 집안에 태어난 자식의 가장 큰 행복은 부모에게 기도를 받으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깊이 각성하고 적어도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에 들어 온 죄 때문에 불행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그러나 적어도 자식이 나 때문에 더 불행해지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지하게 성찰하고 이 봄이 지나가기 전에 내 아이에게 회심을 주시옵소서 죽어 있는 내 아이의 영혼을 나의 육체의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살려 달라고 비는 것이 부모로서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입니다. 지난해에도 회심 집회를 하면서 올해도 회심 집회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없겠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중에 어느 아이가 장성한 후에 내게 나타나서 "목사님! 나는 왜 회심 안 시켜 주셨습니까? 우리 엄마 아빠가 이 교회를 다니고 내 친구들 많이 회심하고 했는데 목사님 왜 나에게는 회심이 없었습니까?" 그때 무엇이라고 말할까? "미안하다 최선을 다해서 너를 회심 시키려고 애를 썻지만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구나! 그런데 내게 말해 줄 것이 하나 있는데 네 엄마는 너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단다. 그렇게 목 메이게 너를 위해 빌어 달라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쳐도 너를 회심 집회에 보내 주지도 않았고 너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오지도 않았고 너희 아버지, 너희 어머니는 네 영혼에 대해서 그렇게 고뇌하면서 눈물을 흘린 선한 목자가 아니었단다." 이렇게 말해야 할 상황이 올 것인가 말입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족들이 술을 먹고 밥을 먹고 지나간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살자고 악수를 한다고 해서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 깊이 가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아버지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엄마 보다 더 섬세한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빚어지고 다루어지지 않으면 가족들이 그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회심할 뿐만 아니라 은혜 안에서 잘 자라도록 여러분들이 신명을 다 바쳐서 부모로서 아이의 영혼의 지킴이로서 그렇게 아이의 생명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4.부모공경의 도리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지난 주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자녀는 건전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모의 충분한 사랑 속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경우가 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건전한 가정에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사랑 안에서 부모와 가족들을 만나고 부모 어깨 너머로 보는 세상들을 볼 때에 아이들은 굽지 않고 자라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 부모가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럴 경우에는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불행할 수밖에 없는 깊은 왜곡된 삶의 질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자식대신 자기를 사랑하고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할 선악대신 세상의 일그러진 것과 모순들을 자기를 통해 보여주어 아이들의 심령에 이것들을 찍어 넣습니다. 일평생 아버지가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른 것을 보며 가슴에 피멍을 들며 자란 아들이 장가가서 자기 아내를 때립니다. 어머니의 성적 타락 때문에 가슴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어두운 시절을 자라온 딸이 시집가서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결국은 한 인간의 불행의 대부분은 부모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와 올바른 삶을 살지 않으면 그것은 자신에게만 불행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자신의 자식에게 깊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늘 나오는 십계명의 반복입니다. 공경하라고 할 때 쓰여 진 이 히브리 단어는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할 때 쓰여 진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공경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두려움이 함께 어우러진 진심으로부터의 경외입니다. 그런 공경과 사랑을 부모에게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공경이니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는 공경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계명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명이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기 전에 부모와의 상처 난 관계를 회복하고 부모와 진심으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런 설교를 듣는 가운에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부모를 화해하고 용서하라니요? 우리 부모님이 내게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일평생 반듯하고 가정 밖에 모른 분이셨고 사회에서도 존경받는 분이셨고 신앙의 아버지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일평생 우리만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며 사셨고 신앙의 어머니셨고 내 일평생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 어머니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다면 여러분은 감사하십시오. 부모님을 위해 목숨까지 드려야 하고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받아야 할 대부분의 것을 이미 다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더 많은 사람들은 부모와 그런 관계에 있지 못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은 가슴에 맺힌 상처 때문에 화해하지 못한 부모와의 과거가 있고 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부모와 맺은 이러한 잘못된 관계,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은 많은 상처들, 부모와의 불화,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의 사슬들을 먼저 끊어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받는 상처는 우리의 인생의 시기에 따라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받은 상처는 일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마음이 딱딱해지고 나이가 먹게 되면 상처를 받기는 받지만 그렇게 심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의 심성은 밟으면 발자국이 찍히는 부드럽고 연한 황토 흙과 같습니다. 밟으면 발자국이 찍히고 누가 긁으면 자국이 뚜렷하게 새겨집니다. 나이가 드는 것은 바로 그렇게 밟힌 그 마음에 햇빛이 들며 그 땅이 굳어져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이가 들고 마음이 굳어지게 되면 웬만한 일로는 상처를 받지 않고 곧 잊어지게 됩니다마는 어렸을 때는 그 마음이 부드러운 진흙과 같아서 부모의 폭언, 자기를 온전히 사랑해주지 않는 부모의 저만을 아는 이기심, 심지어는 낳은 자식인 자기를 버리는 부모의 행동, 폭력, 무관심, 그릇된 기대와 과다한 징계 같은 것들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찍혀서 세월이 흐른 후에 그대로 말라버리고 이 모든 것들은 그 마음에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인생에 영향을 미칩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만나고 두 분이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성도이며 끊임없는 자기 참회와 깨어짐 속에서 예수를 닮아가고 그들이 간절히 우리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바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가운데 우리가 그 가정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실 제 밤낮으로 애쓰며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단아한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가정과 하나님과 우리 밖에 모르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뇌하며 그 아름다운 인간 생활의 모본을 보여주는 존경할 만한 현자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부모 밑에 태어나면 이미 인생의 필요한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사람입니다. 이후에 그가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훌륭한 나라에서 살게 될 때에 그는 인간으로서 활짝 핀 삶을 살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에는 모든 기대들이 깨뜨려지게 되고 불행하게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부모를 두고 태어났지만 자녀들 마음에 상처를 준 많이 준 부모는 불행히도 그런 부모가 아닙니다.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실 제 밤낮으로 여러분들을 위해 애쓰기는커녕 어린 시절에 여러분들을 버리고 바람이 나서 도망간 그런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인 여러분들에게 인생을 사는 길이 무엇이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는 인간의 참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현자이기는커녕 생각 없이 집에 와서 폭력을 행사하고 술을 퍼먹고 노름에 가산을 탕진하고 바람을 피고 아무 책임감도 없이 무책임하게 일생을 산 생각하기 싫은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필이면 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요?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요? 우리 전생에 무슨 죄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는 왜 하필이면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요?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고 고통스런 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주님을 잘 믿는 가정, 어머니 아버지가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고 자녀인 우리를 기다리는 가운데 태어나고 말할 수 없이 우리를 사랑하며 단아하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이며 교양이 있고 그런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서 남들이 받은 것처럼 많은 사랑을 받고 어린 시절을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아마 지금은 우리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은 다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부모 밑에 태어났고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움직일 수 없도록 큰 뜻 안에서 우리에게 태어난 출생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모든 인간의 지혜를 뛰어 넘습니다. 때로는 가장 악해 보이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남이 갖지 못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고 다른 사람은 경험해본 적이 없는 가정에서 견디기 힘든 가슴앓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남이 알지 못하는 은혜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이 가문에 흐르는 끊임없는 상처와 고통 불경건의 악연을 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운명과 같은 이 고통스런 고리를 끊어서 과거와 화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경쟁이 치열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찍 유학을 보내거나 혹은 부모를 떠나서 먼 곳에서 혼자 공부하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 부모들은 생각하기를 지금은 이 일이 힘들고 어렵지만 나중에는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평가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는 공부를 많이 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한 직업인이 되는 것이 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하다가 사랑한 것이 매우 힘들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부모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과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것이 매우 힘든데도 기다리며 다시 사랑이 회복되기를 고대하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기억입니다. 추억입니다. 서로를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한 추억이 있으면 그 추억을 생각하면서 사랑을 회상하며 그 사랑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추억이 많은 사람은 절대로 헤어지지 못합니다. 그런데 언젠가 커서 제 자신을 돌아보니까 추억이 너무 없습니다.
[7살 때 혼자 서울로 유학 보낸 부모님 이야기] 이 세상에는 외국어 몇 년 먼저 배워 경쟁사회에서 이겨서 밥 벌어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인격적인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배우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그렇게 부모를 그리워합니다. 제가 한글을 일찍 깨쳐서 1학년부터 집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3-4통 보내면 한 통 답장 올까 말까합니다. 그렇게 부모를 만나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고 울고 그러는데 부모가 잘 안 보여주면 나이가 조금 들면 보고 싶은 마음 자체가 사라집니다. 중1 정도면 부모의 영향은 끝나는 것입니다. 아이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부모와의 개선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이켜봐도 딱 하나 치통으로 고생을 할 때 부모님이 제 팔을 붙들었던 기억뿐입니다. 제가 21살에 회심을 하고 주님의 사랑을 알았는데도 부모님과 화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직장을 쉬는 날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내 마음에 들렸습니다. “얘야 이제는 네 부모를 용서하라.” 눈물이 확 쏟아지는데 여러분에게는 다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이제껏 내가 부모를 그리워한 것은 짝사랑이었다는 것이 어린 시절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주님의 음성이 내 마음을 녹였습니다. “얘야 네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지냈지만 내가 너를 네 부모보다 더 많이 사랑해주지 않았니?” 그것이었습니다. 그날 생애 최초로 부모님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데 부모가 아니라 영혼으로 보이던 첫 날이었습니다. 그분들도 행복할 것이 없었던 것 이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었겠습니까?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어머님, 아버님의 다시 어머님, 아버님, 그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부모님도 부모로부터 상처 받은 영혼일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21살 때 회심했지만 부모를 영혼으로 생각하면서 울어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차가운 마루에 엎드려서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분들과 나의 차이가 무엇일까? 나도 그분들의 피를 받아서 태어났으니까 결국은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 텐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나만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고 나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서 이끌어 오셨는지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시지 못한 많은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더 많이 갚아주셨고 마치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네가 슬픔이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 하나님 아버지가 너에게는 10명의 부모님보다 낫지 않니?” 오래 전에 읽었던 성경이 떠올랐습니다. 믿음의 위대한 사람 다윗의 고백 “내 부모는 비록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로다.” 주님의 가르침을 보니 주님의 사랑은 하도 커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원수들까지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부모가 나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부모가 어찌 나의 원수일수가 있겠습니까? 그 몸으로 노동을 하고 일을 한 것으로 우리가 먹고 양육을 받은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저의 마음속에 깊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교회 나가도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 깊이 밀려왔고 부모님으로부터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매 순간 나의 인생을 인도해주시는 한걸음 한걸음의 돌봄이 나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은혜의 감격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효도의 한 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육신의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그 받은 사랑 때문에 아버지에게 효도를 하지만 성경을 보니까 신앙적인 효도의 원리는 그것이 아니라 사랑은 하늘 아버지께 받고 공경과 효도는 이 땅의 아버지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생애 최초로 부모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나이 적에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의 크신 사랑을 받고도 이렇게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만약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내 나이에 주님을 만나고 그 크신 십자가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아마 내가 내 자녀에게 해주는 것보다 나에게 더 많이 베풀어 주었을 것입니다. 결국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고 우리 모두 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 어둠 속에서 생겨난 일이란 것을 깨닫게 되자 마음 깊이 영혼으로 그 부모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모두는 약속이 있는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또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지 상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명령을 받을 때에 그들은 광야를 여행하며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수많은 동족들이 질병과 전쟁 속에서 죽어가던 때에 장수의 복, 한 평의 땅이 없어서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던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었겠습니까? 그것을 걸고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경할 만한 부모를 공경하거나 신앙이 훌륭한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거나 나를 많이 사랑해주었기 때문에 공경하거나 나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줄 것이기 때문에 공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계명을 거꾸로 뒤집는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네 부모에게 불효하라 이 땅에서는 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너는 젊은 날에 비명횡사하리라’ 고 말입니다. 부모님이 내게 해 준 것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성경적인 효도가 아닙니다. 부모님이 내게 해 준 것 때문에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신 그렇게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이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존재이고 사랑을 먹으면서 정신과 영혼이 성장하여 온전한 인간이 되어갑니다. 어렸을 때에는 세상의 평화 없어도 엄마 아빠의 사랑만 있으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좀 커서는 형제의 사랑, 친구의 사랑, 더 성장한 후에는 결혼하여 남편과 아내의 사랑 속에서 인간이 완성되어 갑니다. 더 성장한 후에는 자식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죽을 때까지 인생은 완성되어 가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각각의 사랑은 서로 교환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적절히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망가진 그의 인성은 후에 커서 훌륭한 남편을 만나 좋은 아내를 만나서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굽어진 그의 본성이 그 사랑에 의해서 치료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서 굽은 성품도 좋은 친구를 만나지 못해서 펴지지 못한 성품도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못 받았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을 녹이면 인간이 많이 망가지지 않을 수도 있고 망가진 사람은 고쳐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경험되는 사랑의 원본이 바로 하나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효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큰 사랑 때문에 그 부모를 효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 큰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히려 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한 어두운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어두운 기억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찬란한 빛처럼 우리 마음에 다가왔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우리는 한번 만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 세상에 그렇게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목마른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그렇게 충분한 고임을 받지 못한 어둡고 칙칙한 젊은 시절들 어린 날들이 있었기 때문에 활짝 웃으면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팔 벌리시는 그 모습 앞에서 우리는 그 품을 파고들어 이길 수밖에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것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큰 사랑을 깨닫게 하지 위한 오묘한 섭리가 아니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은 살같이 지나갑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일생을 살아도 모자라는 시간들입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돌아갔으면 깊이 회개하고 천국에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자녀들에게 잘 하셔서 여러분들이 어둠 속에서 부모 때문에 눈물 흘리는 일은 여러분 대에서 끝을 내셔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감사하십시오. 그것은 자녀인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효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깊이 사랑하고 섬기십시오. 이렇게 변화 된 여러분들의 마음을 부모님이 모두 모를 때도 있고 상처를 받은 여러분들은 기억하지만 부모에게는 기억조차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효도하는 일이 어려워질 때마다 가슴에 새기십시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요일4:10). 지난날을 생각해보고 상처받은 기억들을 떠올리면 불공평하게 보이지만 그 인생의 고통스러운 날들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더 목매이게 되었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그 섭리를 상처받은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하신 섭리가 아니었겠습니까? 그 주님이 마음을 녹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어둠을 뿌리치고 이제는 모든 가족이 빛 가운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언제든지 이 아픈 기억들은 우리에게서 잊어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러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난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냈고 우리를 향한 최고로 지혜로운 하나님의 섭리였는지를 깨닫게 되어 그분을 찬송하게 될 때까지는 많이 우리 마음에 어느 정도는 고통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래도 비할 데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셨으니 부모님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여러분들이 영적으로는 오히려 그분들의 부모가 되어서 공경하고 사랑하며 어린 시절에는 여러분들이 상처 때문에 주님의 품에서 떠밀렸으나 마지막에 여러분들의 부모들은 그대들의 품안에서 고이 잠드시도록 효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5.부부 생활의 기초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오늘 성경은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해서 교훈을 하다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고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함으로 교회와 그리스도는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하고 이렇게 해서 가정의 대의를 이루어 가라고하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깨어진 가정이 많은 상태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정을 깨트리는 것을 아주 두렵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가정을 깨트리는 것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세미나에서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여러분들이 아마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 이런 현실 속에 우리들이 매몰되다가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가정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지에 귀를 기울이고 살기 보다는 현시대 속에서 흘러가고 있는 풍조를 따라서 우리도 살아가게 되기가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속에서도 이미 많은 가정이 깨어짐이 있고 그리고 많은 고통들에 그 씨앗이 자녀들의 가슴 속에서 자라게 되고 또 깨트려질 가정들이 자녀들의 마음 안에서 형성됩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볼 때 이 가정은 도대체 어떤 기초를 가지고 있고 또 어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모두 창조하신 후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인간에게 유일하게 영혼을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지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명령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또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번성하고 생육함으로서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창조명령이 연속적으로 수행되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정복은 미지의 땅들을 새롭게 개척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정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스리는 것은 이미 있는 것들을 관계 지우고 조화를 이룸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주신 그 아름다움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현실화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닮은 인간이 위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창조세계를 앎으로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그 질서와 아름다움을 이 창조세계 안에서 구현해감으로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지으신 것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또 정복하게 하기 위하여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셨습니다. 남자는 이 땅을 정복하는 일에 유능하도록 개척정신과 호기심, 모험과 도전의 정신을 주시고 그리고 육체의 힘도 더 많이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남성이 정복한 것들을 질서 있고 아름답게 가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도록 그렇게 잘 돌볼 수 있도록 관계를 중시하고 조화를 기뻐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양성, 남성성과 여성성은 하나님의 성품이 인간을 통해서 이 세상 속에서 프리미즘을 통과하듯이 분관되어서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이루며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그래서 그 성품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이 세상을 개척하고 다스리도록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제도는 인간이 살다가 필요해서 만들었지만 가정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제도인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교통하심으로서 당신 자신의 성품을 이 모든 세계 안에 드러내시는 것처럼 남편과 아내는 함께 사랑으로 교통함으로서 정복하고 개척하는 정신과 돌보고 가꾸는 정신이 이 시간 세계 속의 안에서 실현이 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안에 주님의 영광을 가득하게 하는 것이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랑의 결합을 통해 자녀들이 생겨나고 그 자녀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성을 배우고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성을 배워 그래서 또 다른 배우자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결합함으로서 창조세계를 돌보고 정복하는 인간의 사명을 이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 닮은 영혼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유일한 피조물들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인간의 사랑, 특히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삼위일체 교통의 모상입니다. 그리하여 남녀가 서로 결합하고 한 몸, 한마음이 됨으로서 그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있는 교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부부를 짝지어 한 가정을 이루심으로서 인간을 통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먼저 흙으로 창조하시고 그 다음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월한 존재이고 하와는 후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열등한 존재인 것처럼 해석하는데 모두 남성우월주의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물건도 처음 나온 것보다는 쓰다가 새로 만든 제품이 더 많습니다. 20년 전에 나온 컴퓨터는 요즘 나온 컴퓨터와 비교가 안 됩니다. 원 재료를 보더라도 고기하고 뼈로 만든 아담의 원재료가 고급이지 흙으로 만든 아담의 재료가 고급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하와는 아담보다 훨씬 더 좋은 재료로 그리고 보다 완전하게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지으실 때 아담을 지배하도록 머리뼈에서 창조하시지도 않으시고 짓밟혀 재배를 받도록 발바닥의 뼈로 빚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팔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여자는 아담과 한 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질서에 있어서는 남성을 먼저 창조하셨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도록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유교에서 남겨진 남존여비사상이라든지 남성우위의 사상이 아주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문화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런 문화가 성경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판하면서 성경을 보면 부부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신비한 의미가 더 깊이 가슴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여성은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되고 남편들은 그러면 그 대가로 아내를 사랑해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인 사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창조의 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설픈 주석을 흉내 내는 어떤 사람은 창세기에 보면 “내가 아담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성경이 이야기했으니까 “위하여, 돕는” 이런 단어를 보면 아담이 ‘주’이고 하와가 ‘종’이라는 사실이 분명할 것이라고 주석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을 위하여” 라고 되어있는 그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케네게도” 라고 되어있는데 포가 아니라 “상응하는” 혹은 “맞먹는” “마주 대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내가 아담과 상응하는 하와를 지으리니” 이렇게 번역이 된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말도 성경에는 “돕는 이”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배필”이라는 말만 나오는데 그것은 사실 배필이 아니라 도움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많이 나오는 단어이고 특히 시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며” 할 때 나오는 그 단어입니다. “에제르”라는 이 단어는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지평선에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오는 아군의 응원군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 에제르가 아담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창조하셨고 다만 질서에 있어서 남성은 정복하고 개척하는 그 일을 위하여 여성은 생산하고 돌보는 그 일을 위하여 각각 질서 있게 불러주셔서 그 사미한 것들을 하나로 엮어 그래서 온전함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잘못 사용된 말 가운데 대표적인 것 하나가 “너는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 나는 너랑 틀려,” 그런데 사실은 그 말은 어법적으로 틀립니다. 틀리다는 것은 오류를 가리키는 것이고 나는 너와 틀려 라고 말할 때는 나는 너와 달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기와 같지 않은 모든 것은 틀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들이 이미 우리 말 속에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세우는 오만이 이 어법 속에 스며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그 둘을 다르게 창조하셔야지 만 그 둘이 서로 보완의 관계를 이루면서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의 목적을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면서 온전히 구현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참 우리의 경우를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오래 연애를 했는데 그래서 인간을 속속들이 아는데 결혼하고 나서 즉시 헤어지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르지 않은 사람이 만났기 때문에 연애하기에는 굉장히 편했는데 결혼해서 살기에는 매우 불편한 사람이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혼의 시작은 사랑으로 시작이 되었는데 결혼을 하기 전에 사랑은 되는 사랑이고 결혼한 후에 사랑은 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결혼한 후에도 사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이 결혼과 사랑,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 모르는 사랑입니다. 처음에 연애할 때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보고 한눈에 꽂혀서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그리고 쳐다만 보면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끌립니다.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끌리지 않기 위해서 절제하도록 노력을 해야 할 정도로 눈을 감으면 생각나고, 눈을 뜨면 더 생각나고, 그리고 뭘 먹어도 생각나고, 잘 때도 생각나고, 눈을 떠도 생각이 나고, 그리고 누가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계속 끌리면서 거기로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연애할 때 사랑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끌리는 것입니까? 뭔가 착각일지라도 뭔가 그 여성 안에서 남성이 남성 안에서 여성이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외모일 수도 있고 정신일 수도 있고 혹은 둘을 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째든 연애할 때의 사랑은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이 됩니다. 그런데 결혼한 후에는 그렇게 사랑이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얼굴이 예쁘고 아름다운 사람들은 대게 독신의 소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신으로 살도록 다른 사람이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신으로 살기에 좋은 여건은 그저 외모가 편안해야 합니다. 그러면 소명이 없어도 독신이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보더라도 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내면의 세계는 감추어져있습니다. 함께 살고 생활해서 깊이 이해하기 전까지는 사람이 잘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모는 강한 끌림을 줍니다. 그리고 한번 끌리고 나면 그 사람이 사라져도 이 마음 안에서 상상의 기운이 계속 발휘됨으로서 그 아름다움 때문에 좋아하는 감정이 계속해서 발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심하고 객관성을 결여하게 될 때 콩꺼풀이 씌었다고 우리는 말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외모에 의해서 발생하는 그 강력한 끌림의 유효기간은 6개월입니다. 6개월이라고 하니까 어떤 경험자는 6개월은 너무 길고 3개월이라고 합니다. 어째든 그렇게 끌리게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 사랑하는 것이 둘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해변에서 지는 낙조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결혼은 둘이 같이 그 황혼이 지는 바다물결 속에서 아주 작은 배를 함께 노를 저어서 항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낭만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결혼의 시작은 사랑이 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지만 그 다음에 결혼 생활 전체 속에서 이루어가는 이 사랑은 완성된 사랑이 아니라 계속 완성해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되는 사랑이 아니라 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나면 이제 결혼생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결혼하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아내가 내 뜻을 잘 이해하고 그리고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가정을 돌보고 나를 위해 봉사한다면 기꺼이 사랑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이 나를 연애시절처럼 그렇게 많이 사랑해주고 나를 위해주고 그리고 나를 위해서 잘 봉사한다면 나는 남편을 위해 목숨도 버리리라.’ 그런데 사실은 실제로 결혼을 하고 보면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서로 다른 꿈을 꾼 이 사람들이 누구 한사람의 꿈도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교회에 어느 형제가 결혼을 한다고 들떠서 아주 좋아했는데 연애 한번 못해보다가 이제 꽃 같은 색시를 만나서 결혼을 하니까 마음이 들떠있어 나에게 인사를 한다고 왔기에 혼자 앉혀놓고 차를 한잔 주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의 길이다. 너는 여태까지 연애한번 못해보고 이제 한참 기분이 하늘꼭대기에 올라가 있지만 네가 이제 저 여자 하나를 사랑하면서 네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그리고 인간이 덜 떨어진 인간인지 네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그랬더니 하는 말이 목사님, 이렇게 기분이 한참 좋은데 재를 뿌리십니까? 그러고 나서 불과 한 3주 만에 어떤가 물었더니 신혼여행을 가서 싸웠다고 합니다. 둘째 날 밤에, 그러면서 내가 이 여자와 끝까지 살 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확 밀려오면서 목사님의 그 충고가 뼈 속 깊이 다가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시작일 뿐이다.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목사님, 인생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3주 지났다며 그것 가지고 뭘 그래. 아직 멀었다.
요즘 가정생활 세미나나 가정의 행복이란 책들을 보면 유익하기도 하고 얼마나 재치가 있는지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수의 정보들은 성경적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가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가정이 불화하다가 행복해진 간증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쓴 간증인데 자기가 그냥 무조건 죽고 아내가 해달라는 데로 해주니까 가정의 평화가 오더라. 또 반대로 대를 세우고 남편과 계속 부딪히다가 그저 남편이 해달라는 데로 다 해주니까 가정에 평화가 오더라. 그거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유행을 합니다. 우선 그것을 실행하는 것도 매우 힘들거니와 그렇게 해서 실현을 한다고 한들 그게 뭐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남편과 매일 싸우는데 남편이 낚시를 죽어라 다니는데 휴일은 물론이고 기회만 있으면 낚시를 하다가 안 되니까 옛날에 빌딩에 들어가서 하는 낚시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지만 그것까지 하더랍니다. 그래서 매일 싸우다가 가정이 깨질 지경이 되었는데 아내가 결국은 어느 날 승복을 하고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니까 가정에 평화가 오더랍니다. 그게 무슨 그런 평화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장가를 갔으면 가정을 돌봐야지 가정을 팽개치고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공휴일이고 매일 낚시나 다니고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하면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추억이라고는 낚시를 간 아빠를 엄마와 기다린 기억밖에 안 남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인본주의적인 시도요, 방법입니다.
결혼을 하면서 남편이 좋은 이상을 가지고 있고 그래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도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나한테 적응하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자기의 질서대로 안 하면 막 욕설과 폭언을 퍼붓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해서 심지어는 아내를 때리기까지 합니다. 난 묻고 싶은 게 그렇게 자기가 세운 질서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입니까?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그렇게 절대적이고 대단한 질서를 사상으로 삼고 살아왔는데 왜 인생이 그것밖에 안 되었습니까? 그런 절대적인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요. 사람이 태어났으면 정돈을 잘하는 것,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났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해서 학교에서 모범생이 되는 것 누가 나쁜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좋은 질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자기의 자녀가 그 질서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서 욕설을 하고 폭언을 퍼붓고 심지어는 폭력을 하고 이렇게 하면 그다음에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는 마지막까지 버리지 말아야 하는 사랑의 관계가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셔버리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아가 매우 강한 여성들이 있습니다. 좀 이해하기가 표현이 어려우시면 쉽게 얘기하겠습니다. 대가 센 여자들, 가슴에 다가오실 것입니다. 대가 센 여자들은 굉장히 외롭고 힘듭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져주어도 그게 좋아서 져주는 것이 아니라 아까 얘기한 것처럼 대를 꺾으려고 씨름을 하다가 당하는 고통이 힘들기 때문에 꺾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까지 꺾어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요즘 황혼 이혼이 늘어납니다. 남자가 볼 때 아무런 불편한 것이 없고 그런데 어느 날 잘 살던 여자가 깃발 들고 나타나서 나는 이제 독립해야지 되겠다. 도장 찍어라. 애들도 결혼하고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때가 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하고 고분고분했는데 마음에 상처가 되어 남아서 그래서 결국은 기를 펴지 못하고 살다가 하는 것입니다.
요즘 남자들도 보면 아직까지도 아내에게 소리 지르고 심지어는 경제권도 안 주고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유효기간이 10년밖에 안 갑니다. 이제 여러분, 60넘고 기운이 없어지면 아내에게 그 대접을 그대로 받게 됩니다. 저희 아버님이 생전에 계실 때 식구들이 그 앞에서 숨소리도 못 냈습니다. 얼마나 성격이 급하신지, 그런데 연세가 들어서 경제력이 없어지고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를 다 비우고 꺾게 됩니다. 그런데다 또 나이 들어서 여러분 건강이라도 나빠지게 되면 그때는 진짜 아내에게 복수당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다행이 열린교회에 와서 은혜 많이 받고 깨트려지면 그것도 횡재를 하는 것이지만 안 그러면 그래서 아내에게 잘하고 인격적으로 아내에게 잘하는 것은 자기의 노년에 보험 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해서 독립선언을 합니다. 자기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살아야 할 어떤 가치 같은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할 때 ‘내가 이제 결혼했으니까 이 남자를 의지하고 이 남자가 나의 모든 어려운 것들을 해결해주어서 이 남자의 희생 때문에 내 행복이 보탬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거나 반대로 ‘내가 이제 아내와 결혼했으니까 이 아내가 나를 위해 희생하고 나를 위해 복종하고 해서 결국은 나의 행복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 한도 내에서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해주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미 결혼출발 자체가 잘못한 것입니다. 설교의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남편이 중심축을 세워도, 아내가 중심축을 세워도 둘 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둘 다 서로 존경하고 가야할 그것이 아니라 진짜 세워진 중심축은 가정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중심축으로 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남편과 아내가 절대로 그리스도께 대한 깨어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깨트려지지 않으면 망치를 들고 배우자를 부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배우자의 자아를 부서야지만 자기 한 질서가 일어날 것입니다. 원이 두 개가 파문을 그리면서 간섭을 일으키면 이게 얼마나 머리가 복잡하고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결혼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미 결혼을 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만 만약에 안 한 청년들이 여기에 있다면 얼굴 흰죽사발 핥아먹은 것처럼 멀끈한 남자고 찾지 말고, 그리고 콧날이 오뚝하고 성깔이 있어 보이는 얼굴도 찾지 말고, 아버지 돈 있는 것도 보지 말고, 다 보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많이 깨트려진 사람, 그 사람을 만나십시오. 물론 그 사람이 자기를 거들떠 볼일도 없지만 그 사람을 만나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끊임없이 버리고 꺾으면서 인생의 길을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사람은 자기는 그 사람을 꺾을 수 없어도 불리하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여성과 남성이 꺾어져 본 적이 없다가 인생을 살다가 남편을 만나고 아내를 만난 것입니다. 피차에 강적들이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커다란 고통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서구에서는 감정이 많이 개입되어있는 것으로 사랑을 봅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인간의 이성 기능으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로애락 애오욕 이것은 정입니다. 그 다음에 칠정은 정이고 사단 이의예진 이것은 이성에 속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랑이 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은 시작이고 그 다음에 그것에 있어서 발전은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고 마지막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 되는 것, 다시 말하겠습니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처음의 출발은 가장 낮은 관계는 사랑이 되기 때문에 사랑이 되는 것, 두 번째는 사랑해야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 마지막 높은 단계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 되는 것, 그게 성화의 높은 단계입니다. 그러니 아집과 죄밖에 없는 인간, 껍데기를 뒤집어놓고 보면 쓰레기 같은 것밖에 안 나오는 그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데 예전에 꽁꺼플이 씌웠을 때는 몰랐기 때문에 사랑이 되어서 사랑이 되었는데 이제 살면서 그 껍데기가 하나씩 벗겨지고 나고 현실이 들어오니까 아름다운 것은커녕 못된 것이 계속 보이는데도 그 인간을 사랑해야지 되기 때문에 사랑이 되는 경우에까지 가게 되는 이게 진심으로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화: 이전에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한 부부의 이야기: 삼년이 넘게 연애하다 결혼했지만 잦은 부부싸움으로 목사님이 중재하는 과정에서 남편의 구타로 인한 자매의 이야기만 듣고 형제를 판단했지만 형제를 불러 진상을 알아 보니 아내의 잘못도 역시 크다는 사실을 들으며 그것이 교훈이 되어 이 제는 두 사람의 말들을 반만 믿고 또한 겉으로만 봐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는 것이고 함께 오랜 세월 살아봐야 참된 인간의 실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내용) 해결의 길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혼제도를 인간이 타락해도 이어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아내에게서 아름다움이 계속 보이는 것, 남편에게서 아름다움이 계속 솟아나서 아 내 남편은 30년 동안 지켜봤는데 저 솟아나는 성품 속에서 아름다움은 언제나 끝이 날까? 내가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아직도 너무 많아. 그런 남편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보십시오. 우리 집 사람도 섭섭하게 안 들잖아요. 그런 아름다운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참 부부 속에서의 사랑은 아내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고 남편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제일 싫은 게 결혼하고 삼년도 안 되었는데 머리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원판도 별로인데 화장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좀 예쁘게 화장도 하고 머리도 하고 그러십시오. 그러면 내가 말하고 싶은 게 자기가 아무리 머리를 지지고 볶고 외제화장품을 발라도 결혼 한지 3-5년 되었는데 저녁에 퇴근하고 들어와서 아내의 얼굴이 화장 때문에 그렇게 예뻐 보여서 사족을 못 쓰는 남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남자 있으면 손들어보십시오.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예의지 용모 하나 가지고 남편의 마음을 6개월이 지나서도 계속 사로잡고 있다고 하는 것은 바보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렇게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랑이 되어서 사랑을 할 때는 콩꺼풀이 씌워서 그 결점이 안 보였는데 실제로 살고 생활을 하고 보니까 결점이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그러니 그게 자기의 힘으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억지로 안 됩니다. 지어먹은 마음이 삼일을 가겠습니까? 어떻게 사랑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뭘 발견하게 되는가 하면 아내와 남편이 살면서 얻는 가장 커다란 유익은 자기가 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는 비참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완성이 잘 안 된 것입니다. 발견하게 됩니다. 한때는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 아름답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발견하면서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늘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세계가 없다면 참고 살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부터 만약에 완전한 사랑을 받는다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을 갈망할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부를 완벽하게 행복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우리는 완벽해 완전히 행복해. 그럴지 모르지만 그것은 착시현상이고 하나님도 그렇게 행복해 하시겠는지 물어보면 완전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이런 생각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내 아내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 남편도 내 마음을 전혀 몰라. 나는 이 이 세상에 혼자 있는 존재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적이 없습니까? 아니 옆에 아내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동의를 해보십시오. 있습니까, 없습니까? 많습니다. 그런 사랑이 다른 곳에서 찾아보려고 하면 정욕이 되지만 이 세상의 누구도 나를 완전하게 사랑하는 이는 없다.
(찬양)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않네
그러면서 주님의 품으로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생활을 많이 할 때는 부부싸움하고 나면 교회에 달려와 막 우는 것입니다. 고개 끄덕이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의 진정한 남편은 당신밖에 업습니다. 나의 진정한 아내는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망가진 인간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많이 믿었지만 사랑이 없는 존재인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해야 할 그래서 모두 구하게 됩니다. 나는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래서 그 사랑을 실행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아주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때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내를 혹은 남편을 사랑하기에 힘들 때마다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자기를 깨트리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희생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내가 남편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아내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발견하면서 아내와의 갈등이 남편과의 괴로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이제껏 내게 베풀었던 아내의 사랑이 크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의 사랑이 크기는 했지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였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진정으로 붙어있어야 할 분은 그리스도 예수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깨트려지면서 결국은 아내를, 남편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 결국은 자기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사랑을 버리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꺾어지지도 않는 것이고 꺾어지지 않기 때문에 내 질서에 어긋나는 아내 태도, 내 기대에 어긋나는 남편의 태도를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깨트려지고 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내 아내의 한계가 여기구나. 나를 못 만났더라면 저 한계성을 가지고 부딪치고 고통 받고 사람들을 찌르면서 살았을 모자랄 인간인데 제는 원래 그게 부족하니 남편인 네가 가서 기어주라.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 모자라는 여자에게 짝지로 주셨구나. 그때 자기가 아니면 온전해질 수 없는 그 아내를 보면서 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남성도 그런 경험을 하십니까?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아내에게 자기의 질서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바로 자기가 아무리 따라하라고 명령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부족한 아내의 모자라는 부분, 그게 남편이 그대의 소명입니다. 만약에 그것도 온전했으면 그 여자는 당신 차례가 안 되었습니다. 그것까지 온전한데 왜 그런 시집을 가겠습니까. 그게 자기 소명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게 사랑입니다. 아직 이해가 잘 안 가실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이 개입되어있으니까.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이 실감나게 이해해주겠습니다. 자, 목회자인 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속해서 신앙생활 잘 안하고 허튼짓을 하고 속을 썩이고 기도도 안 하고 순종도 안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어디에 가든지 저런 것들만 못한 존재들을 만날까.’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까? 아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바로 저렇게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셔서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저런 부분을 목회자인 나를 희생하면서 섬기라고 이들에게 보내주셨지.’ 이렇게 생각하기를 원하십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좋은 것은 알아서. 그렇게 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반 정도 더 설교해야지 되는데 시간이 자꾸 가네.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청량리역에서 항상 7시 반에 학교 스쿨버스를 탔습니다. 3년을 다녔는데 딱 그 시간이면 한 40쯤 되어 보이는 한 부인이 휠체어를 밀고 그 앞을 꼭 지나갑니다. 3년을 한결같이, 누군가 하면 지체가 있는 자기 아들입니다. 애는 움직이지 않고 먹기만 해서 살이 많이 쪘습니다. 엄마는 밀고 다니는데 태어나면서 그랬는지 살아가다가 장애를 만났는지 모르지만 장애가 되어서 이 엄마는 아들이 할 수 없는 그것을 위해서 엄마인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는 아이가 장애가 되면 길거리에 갖다가 버리는 인간도 있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사랑의 차이입니다. 엄마는 그 아이가 장애가 있는 아이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그 아이를 위해서 더더욱 필요한 존재라 는사실을 가슴에 새기게 된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게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내의 이런 부분에 내가 희생을 해서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기지만 일방적인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전지전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나는 발견하지 못하지만 아내는 발견하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이 남편이 꽃다발을 갖다 주어서 이게 하루만 자원이 나오겠지. 언젠가 아내에게 주려고 트럭에서 저녁에 꽃을 샀는데 포장을 싸면서 실실거리면서 웃기에 왜 그런가 하니까 아저씨 사모님에게 뭘 잘못했습니까? 그래서 잘못한 게 아닌데, 그렇게 하루는 자원이 되겠고 이틀은 자원이 될 줄 모르지만 그 자원은 완전한 자원이 아닙니다. 그 자원도 인간이 약하니까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자원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자원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 사랑을 알게 하셔서 모자라는 것이 많은 내 남편에게 아내로 나를 보냈습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와는 다른 남편의 부족한 부분을 돕고 섬기면서 나는 사라져도 내가 없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자기를 이루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인생을 내 남편이 살수 있다면 나는 그를 기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 그게 바로 신앙의 마음입니다. 그 사랑이 아내를 사랑한 마음 같지만,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 같지만 결국은 그 사랑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둘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대에 깨어진 가정, 깨어지려고 하는 가정 온전한 사랑이 일체를 이루지 못하는 갈등하는 모든 가정을 향해 수많은 처방들을 내어놓고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것도 많이 있지만 적어도 한 가지가 없으면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은혜,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큰 사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큰 은혜, 십자가의 사랑, 그래서 다름을 서로 인정하고 그리고 모자라는 내 아내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음, 결점이 많은 내 남편의 결점이 내게 있는 결점처럼 생각하며 아파할 수 있는 마음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부부는 온전한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여자로 태어나서 한 남자로 태어나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지 못하고 인류를 사랑하지 못해도 자기와는 다른 한 남자, 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한 사람은 자기를 완성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이렇게 자기를 완성하는 사람이 되도록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주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움이 되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6.부부 사랑의 뿌리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부부가 화목하지 못한 데는 대부분 현실적이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게 보면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는 집안에서 싸움이 잦습니다. 부채에 시달리고 여기저기에서 빚 독촉이 오고 그러면 네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면서 싸우게 마련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인간관계도 부부간의 관계가 갈라지는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예를 들면 긴병에 효자가 없다고, 형제가 여럿 있는데 부모님 중 한분이 쓰러지셔서 누우면 누가 며칠 동안 간호하고 안하는 것 가지고 싸우다가 결국은 눈물 없이 부모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기 십상입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이 내려지면 아내들은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 다투고 불화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원만하여 모든 사람들에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으면 부부사이도 원만해지지만 남편이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한마디로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무능한 남편이 될 때, 책임감이 없는 남편이 될 때 가정의 불화는 그치지 않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돈이 넉넉히 있는 게 부부가 화목하게 사는데 좋은 조건이 될 듯도 싶습니다. 또 남자가 무능력해서 무능력하게 사는 것보다 능력이 있어서 사회적으로 웬만한 대접을 받으면서 사는 그것도 부부가 화목하게 사는 비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인류 최초의 가정불화를 다루고 있는 이 3장에서는 이런 우리의 생각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그런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지난 시간에 설교한바와 같이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생명적인 사랑을 나누며 살도록 아담의 신체의 일부에서 하와를 지어 그래서 둘을 부부가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이끌어 오실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으니 이것은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아마 두 사람은 주님이 창조하신 동산에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며 주님의 분부를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며 그렇게 살도록 그렇게 뜻을 정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관해서 주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산에는 모든 것이 있었고 그 어떤 것도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자연 악이라고 하는 것은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다툼도 없었고 부부간의 갈등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던 부부가 3장으로 넘어와서는 이 둘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서로를 향하여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위와 재물, 적당한 건강과 명예를 누린다고 할지라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만큼 완벽한 환경 속에서 있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완벽한 환경 속에 있었는데도 이 부부의 사이에 금이 가게 되었고 그리고 아담은 하와가 견디기 힘든 존재가 되었고 또한 아담도 하와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이 짝지어져 함께 사랑하며 살도록 지정된 그 관계에서 철저한 깨어짐을 경험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3장의 기록은 맨 처음에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의 시작입니다. 뱀이 왜 하와를 유혹했을까를 가지고 궁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니까 왜 뱀이 아담을 택하지 않고 하와를 택했는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성경 속에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뱀의 꼬임을 받은 하와가 뱀이 먹으라고 유혹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니까 이것은 모두 감각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감각적인 것들이 여성들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물론 전혀 안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만 양발을 짝짜기로 신어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범주적 본성은 바로 이렇게 질서를 알아보고 그리고 그 속에서 미적 감각에서 예민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뱀이 이 여자의 그 뛰어난 미적 감각에 호소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험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쉽게 얘기하겠으니 잘 들어보십시오. 우리들이 외부의 사물이나 어떤 사실을 대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를 맡습니다. 그러니까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하얗다, 초록이다. 맵다, 짜다, 부드럽다. 거칠다. 라는 감각을 우리들이 느끼는데 그것도 경험이지만 살다가보니까 인간이란 참 악한 존재구나. 이것도 경험입니다. 그런데 전자를 가리켜서 감각경험이라고 하고 후자를 가리켜서 인식경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인식경험과 감각경험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하면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지 되는가하면 이 지성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특히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 무엇인지 이것을 진리를 통해서 알게 될 때 아! 예수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구나.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구나. 이런 것들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게 인식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또 그런 진리에 대한 인식의 경험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감각의 경험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이 감각의 경험은 육체로 말하자면 오관을 사용해서 감각을 하게 되지만 촉각, 후각, 시각, 청각, 미각 이런 것을 통해 감각을 하게 되지만 또 우리 정신 안에 감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예전에 다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기억의 밑바닥 속에 내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의 밑바닥에 내려가 있는 것이 상상의 작용을 통해서 올라와서 우리의 마음의 줄을 튕기게 되면 이미 옛날에 일어난 슬픈 일인데 지금 마음이 아리면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이미 옛날에 일어난 일인데 마음의 줄을 울리면서 기쁨이 확 솟아납니다. 이게 감각경험입니다. 이 두 가지 경험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나로 통합이 되는 신앙생활이 좋은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에게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지성으로서 진리를 생각하고 아! 하나님은 선하시구나. 인생은 허무한 것이구나. 이런 것을 깨닫는 인식의 경험보다 육체의 감각으로 보는 경험이 더 강력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보는데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은 그것들을 들여다보는데서 생겨납니다. 거기에서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수시로 경험하게 될 때 마음은 출렁거리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런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있는데 어떤 것이 인간의 마음을 더 빨리 끌릴까? 대답해보십시오. 아름다움, 여러분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오래전에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것을 여러분들은 그냥 단번에 가르쳐주지 않아도 압니다. 대단합니다. 그게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하와가 이끌려서 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음악이나 미술 같은 것들이 아름다워서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인식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서 왜 그렇게 마음이 끌리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처 없이 끌립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감각경험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이런 인식경험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하와는 그런 점에서 여성으로서 이 감각경험에 대한 지각들이 많이 발달해있는 본성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제 남성에게 먼저 유혹하지 않고 여성에게로 다가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담이 하와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말하자면 그 죄가 들어오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했어야 하는데 그래서 결국은 하와가 그것을 먹고 아담에게 그것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담이 다시 생각해보라든지, 아니면 네가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러든지 내가 어찌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버릴 것인가. 이런 항거가 전혀 안 나오고 순순히 받아먹는 내용이 나옵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이때쯤 되어서 아담의 마음은 하와를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보다는 하와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더 많이 뺏겨 이미 마음이 기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그에게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대신 이 여자의 권고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아니지만 성경 이외의 엉뚱한 문헌에 보면 어떤 해설이 나오는가 하면 아담은 하와가 이것을 따먹고 죽을 줄 알았기 때문에 같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열부가 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해석을 다 믿을 수 없지만 어째든 아담과 하와가 이것을 따먹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두 사람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고 그리고 함께 날이 서늘할 때 동산에 있었습니다. 함께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의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함께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을 같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같이 들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에 있던 남편과 아내로서의 아름다운 연합,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연합의 감정이 해체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담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히브리어로 보면 전혀 책망하시는 음성이 아니라 그냥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벗었기 때문에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사실은 여태까지 벗고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벌써 악이 들어온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는가.” 한 글자로 대답하면 뭐라고 그러면 됩니까? 그런데 말이 많습니다. 대게 이런 경우에 많은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말이 많습니다. 아담아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 실과를 먹었는가? 네 그랬으면 됩니다. 그런데 아담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내게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최소한 여기는 표현되지 않은 아담의 마음에 있는 세 가지 원망이 숨어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 뭐에 대한 원망입니까? 하나님이 왜 그런 여편네를 주셨을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셔서 만약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 여자가 이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그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 나무의 실과를 내게 주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스스로 선택하여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예외 없이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그 불평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깃들어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보십시오.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원망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본인은 그렇게 말을 안 해도 반드시 그 이면에는 원망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자기를 두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원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하나님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을 품음으로 마음이 썩으면서 하나님 앞에 신속하게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향한 원망하는 마음이 들면 기도가 불가능해집니다. 기도가 가장 잘될 때는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할 때, 혹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때 원망하는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원망하는 것을 내버려두면 그 원망이 계속 우리를 끌고 갑니다. 그게 바로 절망입니다.. 절망은 우리를 데리고 가려는 목표는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성령은 우리를 절망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소망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키에르 케고아라는 철학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병이 있는데 그것이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그 절망이 데리고 가고자 하는 목표는 없습니다.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절망은 항상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은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존재를 그렇게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 희망이 너무나 강한데 실현될 가능성이 없으니까 자기의 존재를 제거해버리는 것입니다. 절망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할 수는 없습니다만 아무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이 아담의 마음속에 가득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모자라는 여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여자를 주셨습니다. 그 인간이 모자랐다면 자기의 갈비뼈가 모자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여자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신 그 여자라고 말하면서 자기에게 그 여자를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사실 이럴 때 많이 있습니다. 누가 어디서 앙케트 조사를 했더니 태어나도 그 여자와 다시 결혼하겠는가 할 때 “아니요” 가 의외로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그 남자하고 또 하겠는가 할 때 그쪽도 “아니요” 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인간의 영혼에 깊은 침체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깊은 후회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 경험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죄성에 절망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그렇게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의 역사를 제외하고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는 것은 결코 성령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은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체념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에 맡겨야합니다. 충분히 회개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자기를 지켜야 되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일어난 그 일은 원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했는데 이제 아이까지 낳고 사는데 원망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으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이끄시고 인도하시는 그 모든 방식에 대한 반감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반감을 가지고 이전에는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었던 그 하와의 존재를 지금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받아들여야 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일먼저 부서졌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결국은 다 빼고 “네가 먹었느냐?” 하고 물어보실 때 내가 먹었나이다. 하면 될 텐데 그 앞에 많은 이야기들을 제시를 합니다. 그것은 결국 앞뒤 정황을 하나님께 모두 설명함으로 선악과를 먹기는 먹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죄 보다는 자기를 그 죄에 빠지게 한 그 여자, 그리고 그렇게 자기를 죄에 빠트리게 할 수 있는 여자를 주신 하나님께 더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결코 하나님 앞에 서려는 마음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설 때가 되면 여러 상황을 통해 죄가 발생하고 자기가 그 유혹에 빠져서 죄에 넘어졌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나는 불의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원인이 있기는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죄를 선택한 것은 나입니다. 하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겨나는 가운데 자기의 판단을 하나님의 법보다도 더 위에 놓고 교만하던 자기 자신의 집착과 아집이 깨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담이 하와가 둘이 서로 한 번도 다툰 적은 없지만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나니까 두 사람 사이가 서로에 존재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물질도 있고, 건강도 있고, 인간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는 완전한 낙원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자 결국 이 아담과 하와의 아름다운 부부의 연합은 부서져버렸던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부부사이에 깨트려진 관계를 인간적으로만 풀려고 하는 것은 약간의 도움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인간의 모든 곤고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가 잘못되면 곤고한 일이 계속 생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개념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 교양이 있고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부부가 서로에 대한 태도를 좀 바꾸고, 서로에 대한 자세를 고치고 해서 대화 속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가려고 하는 노력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잘해야지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부부와의 관계의 해결의 완전한 성취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문제는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남편에게 나를 한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가정의 평화를 만들어보고자 나 스스로 한번을 꺾으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나의 상대방 배우자가 자기도 한번 꺾어주기를 원합니다. 이게 거래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박자를 맞추듯이 내가 한번 꺾으면 남편도 꺾고 남편이 꺾으면 나도 꺾고 하면 좋을 텐데 사실 이상적인 일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대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꺾어본 정황이 얼마나 드뭅니까. 여러분들은 한번 꺾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이 일을 너무나 하고 싶은데 주님이 하지 말라. 하시기 때문에 너무나 하고 싶어도 안하는 것이 괴롭지만 아픔 속에서 꺾어본 적이 있습니까? 죽어도 하기 싫은 그 일인데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싫어하는 나의 의지를 굴복시켜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고통스러운 가운데서 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은혜 안에서 살고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사는 사람들, 매주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참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인간을 향한 삶의 표준을 그 진리를 듣고 그리고 눈물로 기도하면서도 안 꺾어지는데 인생이 그렇게 무슨 탁구공 치듯이 남편이 몇 번 꺾었다고 해서 자기가 그렇게 쉽게 꺾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내가 꺾었다고 상대방이 수첩에다 적어놓습니까? 나는 굉장히 힘들게 꺾었는데 기억도 못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꺾은 것은 가슴에 칼로 새겨놓습니다.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얼마나 희생했는데, 남편의 마음속에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십자가의 사랑은 사람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고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아주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심방을 갔는데 남편이 좀 별났습니다. 소리도 지르고 술도 많이 먹고 대가 좀 셌습니다. 심방을 갔는데 목사 앞에서 자기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그러는데 뭐 배는 나오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그렇게 볼을 비비면서 자기는 자기 남편을 너무 사랑스럽다고 하는데 남자가 결국은 건강도 안 좋아지고 직장도 그만두게 되었고 풍까지 걸리게 되었습니다. 손을 벌벌 떨면서 다녔습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다 늙었는데 거기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끌어안고 볼을 비비면서 목사님, 우리 남편이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좋습니다. 그때로부터 한 4년 전에 새벽 기도 때 몇 달씩 나와서 기도를 하고 갔습니다. 열렬히 기도한 게 아니라 나무토막처럼 1시간동안 버티고 가곤 했습니다. 그때는 애타는 마음으로 새벽기도가 끝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 가서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손을 얹고 기도하면 감각이 느껴집니다. 갑갑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왜 그렇게 기도를 못하면서 새벽기도를 나오는가? 했더니 하는 말이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우리 남편하고 이혼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그런 마음만 가지고 새벽기도를 나오니 하늘 문이 열리겠습니까? 한 여자가 그래도 몇 십 년 남편과 해로하며 살던 그런 때가 있는데 이제 그만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그것을 목사에게 그만 살도록 기도해달라고 할 때까지는 이제 더 이상 살 힘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남편이 변했습니까?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크게 은혜를 받으니까 그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더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그 다음에 아내와의 관계가 깨지고 그 다음에 자연과의 관계가 깨졌는데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니까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남편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랑은, 잘 들으십시오. 사랑은 그 사람이 나에게 선을 베풀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배려를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 그리고 나를 살려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을 때 부부의 실제적인 모든 삶의 계획들이 도움이 되는 것이지 그 사랑이 없을 때 이런 저런 노력을 따라서 부부가 거래를 한들 그것이 얼마나 부부 사이에 완전한 사랑의 연합을 가져다줄 수 있겠습니까. 심방을 하면서 나오면서 여전히 남편은 회심도 안 하고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그 자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구나. 저 사람은 참 복이 참 많구나. 만약 예수의 사랑이 저 사람의 마음속에 없었다면 지금 손을 벌벌 떨며 요양이나 하고 있거나 아니면 집에서 한손으로 밥을 해먹으며 그렇게 지낼 사람인데 저렇게 극진하게 아내의 돌봄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여기에 보면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줌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제 이 아담의 원망은 아무 죄가 없는 나무에까지 갔습니다. 이미 벌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지 자연과의 친화적인 관계도 이미 부서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우리를 철저하게 고립시키는 그런 작용을 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아내와 남편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여기며 함께 동거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창조세계 안에서 그 모든 나무와 실과를 다스리며 그렇게 생활을 하도록 그렇게 연결되어있었던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자 결국은 하나님과 아내와 자연과 철저히 관계가 부서진 가운데 이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옛사람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었지만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을 잘 썼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평안해야지만 모든 일들이 잘 이루어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참 맞는 말입니다. 그것은 참 성경에 기록을 보더라도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깨어지니까 그 다음에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고 아내와 남편이 물고 뜯는 가운데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이고 도덕적인 질서입니다.
그래서 만약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가정의 회목이 없다면 그리고 남편을 향한 아내를 향한 깊은 원망이나 소외의 감정이 있다면 못난 남편과 바뀌지 않는 그 아내를 쳐다보고 거기에서 무슨 소망을 발견하려고하는 동안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어떠한지 가정의 상황을 통해서 여러분 스스로가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남편을 돌이키려고 하지 말고 먼저 자신을 돌이켜 하나님 앞에 가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는 답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용서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래 참게 하는 인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한 알이 밀알이 되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선함과 인자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7.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신앙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3-5).
디모데는 바울이 매우 아끼던 제자였습니다. 제자도 많이 있지만 이 디모데는 바울에게 자식과 같은 그런 제자였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니야로 들어갈 때 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면서 목회하게 하였습니다. 에베소는 그 당시에 매우 어려운 목회 지였습니다. 나이가 어린 이 디모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바울의 권고를 따라 에베소에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는 경험이 없는 어린 목회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에베소 지역에는 이단사설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영지주의에 이단들이 들어와서 정통교회를 위협하며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혼잡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안팎으로 우겨싼 어려운 목회환경 속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는 바울의 사랑을 많이 받은 목회자였지만 육신이 매우 병약한 목회자였습니다. 이렇게 삼중고에 시달리면서 이제 힘겹게 에베소에서의 목회를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디모데가 사도 바울처럼 큰 능력을 받거나 성령의 큰 역사를 행한 이야기에 대해서 거의 기록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이 디모데는 사도들과 같이 뛰어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디모데 후서 1장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해 너로 생각하게 하느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상당한 성령의 은혜를 그래도 경험한 믿음의 비밀이 있는 목회자였다는 생각을 하게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오늘 사도 바울은 깊이 그리워하면서 디모데 신앙의 특징을 이 두 줄 속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목회자인 디모데의 신앙의 특징은 오늘 성경 본문에서 두 가지로 사도 바울에 의해 지적되고 있으니 그 첫 번째는 눈물이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사실 연소한 나이에 많은 교인들이 그 연소함을 업신여김을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이단들에게 시달리면서 끊임없는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고 몸도 약해서 끊임없이 육신의 약함을 짊어지고 목회하는 이 사람의 모든 환경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 나게 하는 환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판단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상황과 환경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쏟는 그런 눈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처음 주님을 믿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늘 눈물이 있는 신앙이었기 때문에 눈물이 있는 그 신앙 자체가 디모데의 인격의 특징처럼 되어버린 그런 종류의 눈물이 있는 경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짧은 구절에 언급된 내용으로 미루어보아서 디모데를 통해서 본 그 많은 눈물이 있는 신앙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또 무엇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이 디모데가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으로 기억되었는지는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 하나는 이 디모데는 이렇게 불일 듯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은사도 받았고 그리고 목회자였고 사도 바울의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지만 그런 외적인 환경과는 상관없이 어려서부터 그의 신앙은 눈물이 있는 신앙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날은 이렇게 눈물이 메마른 신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사는 반짝이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교회의 가르침, 그것에 만족하고 가슴벅차하는 일만 번의 경험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주의 초월적인 거룩함 앞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오직 주님의 눈물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흘리는 한 번의 눈물의 경험이 우리에게 참된 신앙에 대해서 더 많은 뜻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흐르는 모든 눈물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있음을 입증하는 눈물이 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눈물이 흐르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가슴에 부딪히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들이 그 진리에 아름다움과 뛰어남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기를 보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뛰어나심 앞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흘리는 눈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흘리는 그 눈물의 경험 안에서 신자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렇게 진리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 앞에서 자신이 그 진리와 부합되지 않는 사실을 깨닫고 흘리는 참회의 눈물이 있는 거기에서 우리는 그의 신앙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움직이고 주님의 진리에 부합하려고 하는 살아있는 신앙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디모데는 그렇게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한 것이 많고 때로는 지식의 부족으로 오류에 빠질 때가 없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루에 한 번씩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감격해서 울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에 깊이 때문에 우리들이 눈물을 흘리고 이런 사랑을 내게는 알게 하셨으나 아직까지도 내 주위에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많다는 사실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우리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게끔 붙드실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붙잡은 훌륭한 사람보다는 오히려 주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이 하나님에게는 훨씬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눈물이 있습니다. 바로 그 눈물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을 배우게 됩니다. 그 눈물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순종하고자 하는 순수한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의 우리의 마음에 떠올랐던 그 수많은 더러운 찌끼들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은 그런 작용을 하게 합니다.
(예화; 예전에 성경학교 때 섬기던 시절에 어느 분이 닭도리탕을 해오셨는데 이전에 드시던 닭도리탕과 달라 어떻게 만드셨는지 물어보니 평소에 알고 있는 조리법이 아닌 새로운 그분의 요리법을 말씀해주셨다는 내용)
신앙생활은 이것저것 온갖 잡탕이 섞인 가운데 주일이 오니까 교회에 가고 구역예배 참석하고 봉사를 나오라고 하니까 봉사가고 이렇게 꾸역꾸역 하는 것은 마치 기름을 걷어내지 않고 끓인 닭도리탕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뭔가를 좀 분류하고 건강이 안 좋고 음식의 맛을 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걷어내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걷어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눈물이 있는 회개의 생활입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이 참 사랑스러워 보이는 적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이야 경험이 많으시겠지만 교인들에게 사랑스러운 적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언제 교인이 그렇게 사랑스러운 교인이 될까? 스스로 경험에 비추어볼 때 나는 이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다. 언제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까요? 헌금을 많이 할 때도 사랑스러워 보일 것입니다. 구두쇠보다는 하나님 앞에 헌신된 사람이 좋을 것입니다. 또 자기가 맡겨진 일에 열심히 헌신할 때도 아름답습니다. 또 목회자의 목양을 잘 받으며 순종할 때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언제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트려지는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빚어질 수 있는 마음은 아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트려진 마음, 눈물이 있는 마음, 그 마음에서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 마음이 깨트려지는 것이라면 눈물은 그 가루위에 부어지는 기름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해서 빚어질 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빚어질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름다운 영혼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은 지금은 부족해도 너무 엉터리없는 인간이라도 이렇게 눈물이 있는 신앙과 경건의 사람과 조금씩, 조금씩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변해갑니다. 잘 들으십시오.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깨달음을 얻고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진 성도는 조금씩이나마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그러나 눈물이 없는 사람은 굳어져갈 뿐이지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다시, 지금은 비록 부족할지라도 말씀을 깨달음이 있고 눈물이 있는 경건의 세계를 가진 사람은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손에 의하여 빚어져 변화되어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이렇게 눈물이 없는 사람은 굳어져갈 뿐이지 변화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디모데는 이미 벌써 교회의 지도자요, 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면서도 이 사람은 끊임없이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성도로서 눈물이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들이야 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래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이렇게 늘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 앞에 정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크신 은혜 때문에 내가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혹은 나의 죄와 나의 허물 때문에,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기도의 제사를 드린 때가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디모데에게는 바로 이런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울이 생각할 때 이 디모데의 신앙의 특징은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럼 거짓이 있는 믿음도 있습니까? 틀림없이 거짓이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말했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를 할 때 사도 바울은 거짓이 있는 믿음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이 있는 사람과 거짓이 없는 이 디모데의 믿음을 비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디모데는 성도의 한 모본으로 사도바울의 가슴 속에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이 있는 믿음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선 이 거짓이 있는 믿음은 그 믿음의 동기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유익인 경우에 이것이 바로 거짓이 있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그런 거짓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 지방에 큰 부흥이 일어날 때 귀신을 내어쫒던 그 바울의 놀라운 능력을 보면서 마술을 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신 삼아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귀신에게 명령을 하였다가 큰 부끄러움을 당한 일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이름을 불렀지만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십시오. 늘 가르쳐주어도 그렇게 믿지 않던 사람들이 자기에게 복이 된다면 어쩌면 갑자기 그렇게 열렬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둔갑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모두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계시의 말씀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확신하며 받아들이는 그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기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할 때 이 믿음은 행위와 믿는 내용이 일치하는 것, 그래서 사도 바울은 거짓이 없는 양심으로 청결한 양심으로 그리고 같은 표현을 디모데전서에서는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그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목적이라고 표시했습니다. 그러니 이 수많은 믿음, 순전하지 않고 거짓이 섞인 수많은 믿음들이 그 시대에도 얼마나 많이 믿음이라는 미명아래 판을 쳤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디모데서 속에서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보았습니다. 이 거짓이 없는 믿음은 곧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에 내용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는 거기에서 오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진리가 객관적으로 예리하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의 삶이 그 진리에 합치가 될 때 우리는 가르쳐서 진실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진실하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희망을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때이든지 거짓과 함께 섞인 믿음생활은 쉬운 길이 많이 있지만 거짓이 없는 청결한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은 결코 쉬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디모데 안에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보았던 것입니다.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디모데 안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더 많이 이 디모데를 그리워했으니 바울과 디모데 사이에 있는 관계가 참된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산전수전 다 겪은 믿음의 험난한 인생길을 겪은 노인네도 아니고 신앙의 길, 순례자의 인생의 여정을 달관한 연로한 성도도 아닌 이 젊은 디모데가 이렇게 눈물이 있는 신앙, 거짓이 없는 믿음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진리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그 뿌리를 바로 그 신앙의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같이 낳아서 길렀을 텐데 왜 같이 안 나오고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그렇게 얘기할까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유대인들이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정통 유대인이어도 어머니가 이방인이면 자식들은 유대인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이방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피는 유대인의 피가 아버지로부터 흐를 텐데 유대인이라고 안 부릅니다. 반대로 아버지는 이방인인데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거기에서 난 자식들의 몸속에는 이방인의 피가 흐를 텐데 그 아이는 유대인으로 불립니다. 지금도 그렇게 불립니다. 그러면 이 유대인들이 피로 물려지는 유대인이 아니라 교육에 의하여 대를 잇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엄마가 할 일은 아이를 신앙의 사람으로 잘 기르면 거의 다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여기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웃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요즘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일을 소홀히 합니다. 하나 달랑 낳거나 아니면 마지못해서 둘, 그렇지 않으면 타의로 인해서 실수로 셋, 언젠가도 어느 자매가 전화해서 자기 셋째를 가졌다고 울먹울먹하기에 그렇게 하는 태도를 하나님이 참 기뻐하시겠다. 내가 뭐라고 한소리 했습니다. 그 아이는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생일 때마다 사람들이 왜 태어났니? 이런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생의 보람을 찾기 위해서, 자기 일을 찾기 위해서 아이를 안 낳거나 하나만 달랑 낳으려는 이런 것, 그래서 여성으로서 기독교적인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최고의 선교입니다. 아이를 많이 낳아서 자기는 먼 곳에 나가서 전파하지 못해도 그 아이 중에 하나는 선교사가 되면 됩니다. 아무도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제자 가운데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부모가 아이를 셋을 낳습니다. 그래서 셋의 이름이 아주 독특합니다. 첫째의 이름이 김 외쳐, 둘째 이름이 김 퍼쳐, 실화입니다. 김 비쳐, 그래서 외쳐는 목회자로 가도록 부모가 지시를 했고, 둘째는 선교사가 되도록 지시를 했고, 셋째는 사모기 되도록 지시를 했습니다. 그래서 외쳐, 퍼쳐, 비쳐, 그러니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 게 이 사람들을 다 후원하려면 벌어가 하나 있어야겠습니다. 벌어, 돈 벌어. 그래서 청교도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그 당시 청교도는 소수였는데 그러니까 카톨릭에 의해서도 소수고 영국의 국교주의자들에 비해서도 소수고 하여튼 외로운 소수였습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사명이 아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그들의 경건한 백성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여자에게 주신 가장 거룩한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아무 일도 안 해도 사실은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자매들도 자기 인생의 목표를 이 가정 안에서 자녀들의 양육 안에서 발견하려는 이 중심점을 붙들지 않고 뭔가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자기 때는 빛나는 것 같고 퍼지는 것 같고 외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자녀들 속에 그 신앙이 물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하나를 잘 가르치고 훈육하면 이 어머니 유니게에게 자녀가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째든 디모데 하나를 잘 가르쳤더니 에베소에서 많은 성도들을 목회하면서 이단과 비 진리와 더불어 담대하게 싸우면서 그런 하나님의 나라에 파수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인 여러분들의 인생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갔는지, 아파트가 몇 채인지, 별장이 있는지, 또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은 물질의 해택을 누리고 있는지, 애들은 인류대학에 보냈는지, 유학을 보냈는지 그런 것이 어머니인 여러분들의 성공을 가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자식들의 신앙을 보면서 그 안에서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신앙은 자식들의 사람됨을 넘어설 수도 없고 거기에 멈출 수도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아직까지도 회심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결단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어머니 여러분들 자신들의 영혼의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예수는 믿었지만 성화가 없이 조잡한 인격으로 아이들이 육체만 장성하고 있다면 바로 그 안에서 진실하게 거짓이 없는 믿음과 눈물이 있는 신앙을 찾지 않는 여러분들의 자신의 나태한 신앙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 믿음의 자매들이 자녀의 교육이 자네들에게만 달려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성경이 어머니의 믿음을 이야기하니까 만약에 어머니로서 자신의 삶과 모든 신앙의 중심축을 아이들을 주님의 뜻을 따라 잘 양육하는데 두고 마음이 분산하지 않고 그 일에 전심으로 쏟으며 여러분들이 아이들을 양육한다면 지금은 한두 명의 아이가 여러분의 품안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지만 미래에는 그 아이들이 온 세계를 한 품에 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땅에 있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어머니들이 그렇게 자녀의 교육을 위해 노심초사한다면 지금은 비록 우리의 기독교 신앙 참된 믿음이 미약할지라도 다음 세대에는 땅을 뒤덮을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환란이 오고 풍파가 오고 거짓된 사조가 밀려온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어머니로부터 눈물이 있는 신앙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체험적으로 전수받은 자녀들은 반드시 부모가 살았던 그 삶을 계승할 것이며 자녀들은 어머니를 통해서 어머니가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와 함께 헌신하던 광경을 통해서 자기가 자식을 향해 신앙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은 네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신앙의 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니게에게서 디모데에게로 그 신앙이 전수가 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유니게 속에 있는 믿음이 그 유니게의 어머니고 디모데의 외할머니인 로이스에게서 온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어머니에게서 어머니로, 그 어머니에게서 그 어머니에게로 신앙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로이스의 손에서 유니게가 자라면서 그 어머니의 눈물이 있는 신앙과 거짓 없는 믿음을 배웠고 배운 그것을 유니게는 아들 디모데에게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말로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 삶으로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며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진리 앞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부합시키며 거짓의 찌끼들을 거두어 내고 정결함으로 살아야하는지를 자기 딸에게 물려주었고 물려받은 그 신앙은 다시 디모데에게로 전수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안에 신앙의 뿌리가 깊다고 자랑을 합니다만 오래전부터 예수를 믿었다는 그 사실 하나가 곧 뿌리 깊은 신앙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조사를 해보면 본인도 주님을 믿고 회심하고 중생하여야할 필요에 대해서 긴박하지 않고 그 부모들도 자녀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나태하고 그리고 그릇된 안정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모태신앙이거나 대대로 예수 믿는 사람의 집안이라는 것을 알면 여러분도 놀라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일대에 자신이 급격히 회심해서 주님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 구원이 없는 밖의 세상에서 살아본 아주 분명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들어가기만 하면 자신의 자녀들의 회심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뚜렷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회심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오랜 세월동안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져온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심하여야 하고 자녀들도 그렇게 회심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주 둔감할 정도로 많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로이스의 신앙은 유니게에게, 유니게의 신앙은 디모데에게로 이어져서 디모데는 눈물이 있는 신앙,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한시대의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 유니게에게나 외할머니 로이스가 미쳐 풀지 못했던 훌륭한 일을 수행하므로 초대 교회의 초석이 되는 한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신앙의 유익을 끼쳤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자녀를 그런 깊은 애정을 가지고 그 아이에게 어머니인 여러분을 통해서 흘러들어갈 신앙이 있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정직하게 물어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이 지금 나를 통해서 눈물이 있는 신앙, 거짓이 없는 믿음을 물려받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로이스같은 어머니가 없었더라도 우리부터 시작해야지 될 것이고 만약에 그런 어머니가 있다면 어머니께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이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의 영향을 끼치는 부모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가정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꽉 차서 자식의 자식, 그 자식의 자식으로 물려질 때 우리는 능히 이 세상을 우리의 후손들이 감당할 수 있고, 또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해서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8.이혼을 생각하십니까?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 10:6-9).
I. 본문의 배경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정의 대의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될지니 이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 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II. 혼인의 원리: 한 몸 됨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가정을 만드시고 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가정이 곧 교회였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함께 만나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결합을 유지해가게 되는데 그것을 오늘 성경은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몸이 합쳐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최소한 3가지의 결합이 부부 사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육체적 결합
이 육체적 결합이라고 하는 것은 부부가 한 장소에 사는 것뿐만 아니라 부부가 성적인 연합을 통해서 그 몸이 함께 결합되는 것까지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을 허락하신 이유는 3가지입니다. 첫째는 부부의 성을 통해서 육체의 자녀들을 생산하는 것이고 둘째는 성례전적인 연합을 위해서이고 셋째는 정욕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 자녀의 생산에 대해서는 모를 것이 없고 두 번째 성례전적인 연합은 남편과 아내사이에 정신적인 결합을 위한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많은 번민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이 있다가도 참된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성찬에 참여하게 될 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분을 다시 사랑하게 되고 그분과 마음으로 연합을 이루게 되듯이 부부가 성을 통해 그런 성례전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유혹과 정욕을 피하기 위해 성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결합을 포함해서 한 몸이 되는 첫 번째 결합은 육체의 결합입니다.
B. 영혼의 결합
영혼의 결합은 성경에서 신비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혼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서 그와 영적으로 결합된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영혼의 결합은 그리스도와 남편과 아내 각각의 연합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안 믿는 사람이거나 혹은 한쪽이 안 믿는 사람일 경우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연합과는 다른 종류의 의사적인 결합이 있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C. 정신적 결합
정신적인 연합입니다. 혹은 마음의 연합입니다. 영혼의 연합이 원리적인 것이라면 마음의 연합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영혼의 연합은 불변의 것이지만 정신의 연합, 마음의 연합은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살면 마음과 정신의 결합은 상승하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 영혼은 결합되어 있어도 마음과 정신의 결합이 깨뜨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세 가지 연합, 그 모든 것이 깨뜨려지지 않고 하나로 뭉쳐져 있는 온전한 부부의 결합의 상태를 나누지 말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III. 이혼이 허락될 때조차도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과 아내 중 한 사람이 간음을 하고 부부의 정절을 깨뜨렸을 때입니다. 이 경우에는 남편과 아내 중 한 사람 누군가가 이혼을 청구하고 그 사람과 헤어질 수 있으니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성경이 허락을 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는 신앙의 이유입니다.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신앙을 따라 살고 싶은데 남편이 그 신앙을 갖지 못하게 한다든지 혹은 결혼생활과 신앙생활을 양립할 수 없을 경우, 또는 남편이 자기와 같은 신앙을 갖지 않고 이단이나 이교에 빠져서 그 교를 고집하려고 할 때 정상적인 결혼의 생활과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성경적으로 이혼은 허락이 됩니다.
역사상 가장 성경적인 생활을 했다고 믿어지는 청교도들조차도 이런 두 가지의 기준만을 가지고는 결혼관계를 지속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혼의 사유를 추가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연애결혼보다는 중매결혼이 많았는데 결혼을 하고난 후에 어느 한 쪽이 정신병으로 분류가 될 때, 심지어는 둘이 결혼했는데 어느 한 쪽이 성적인 불능자일 때 교회에 고백을 하고 이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를 보면 부부가 맺어져서 함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면서 사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이혼을 허락해 주신 사례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 요건이 충족될 때 이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최선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의 시대에는 청교도시대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무분별한 가정의 폭력 같은 것들은 현대 의학에서는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정신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교도들의 전통을 원형 하더라도 무분별하게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고 폭언을 하고 자녀들과 아내나 가족들에게 매우 무책임하게 생활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이러한 남편들은 사실은 상당부분 정신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들로 분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혼의 사유를 고전적인 정절의 문제나 혹은 종교의 문제가 아닌 인성과 정신의 불구적 요소에까지 확대해야 되지 않느냐는 목소리들이 현대에 많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당시 농경사회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게 되었고 자기도 어찌 하지 못하는 우울증을 비롯한 수많은 질병 현상들이 정신 안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정상적인 노력으로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부부의 결합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교회의 목회적인 지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무분별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것이 거의 정신병처럼 굳어졌을 경우에는 가만히 내버려 두면 한 배우자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고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두 번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니 한 사람이 그런 폭력 속에서 만약에 희생된다고 할 때 그를 살인자로 만드는 것이니 적절한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가정이 본래적인 하나님의 뜻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면서도 이렇게 복잡화된 사회에서 개인들이 가정의 폭력이나 현대의 정신적인 질병에 의해서 희생되지 않고 하나님께로 받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지 않고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는 목회적인 지도들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이혼이 허락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최선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정의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현대의 삶에 기준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들답게 성경의 기준과 원리로 돌아와서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혼을 아주 쉽게 하는 세대가 되었고 서너 명이면 한명씩 이혼을 하는 시대가 되었고 머지않아서 두 명에 한명 꼴로 이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이혼을 하면 본인도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고 자식이 이혼을 하면 부모는 초죽음이었는데 요즘에는 오히려 부모가 자식보고 이혼을 권유합니다. 이혼을 하찮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어느 세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것에 퍼져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아이들이 둘이 모여 서로 자기네 누나들이 예쁘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는 아이가 “너희 엄마와 누나가 그렇게 예뻐? 우리 이모는 얼마나 예쁜데? 시집을 두 번이나 갔는데” 그러고 자랑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혼에 대해 아주 가볍게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벼워 보이는 것은 모두 남들이 보기에 가벼워 보이는 것이지 이혼을 하는 당사자들은 그 현실이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어느 통계를 보니까 부부가 간절히 이혼하기를 바라서 합의한 가운데 이혼한 사람들 47%가 이혼을 후회하고 있다고 합니다. 결혼생활에서의 고통은 이미 경험해 본 것이지만 이혼에서의 고통은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나을 줄 알고 선택했는데 그 이후의 삶은 너무 후회가 되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혼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는데 거기에는 오늘날 문화나 방송 매스미디어 예술 이런 것들이 결혼의 제도를 하찮게 여기는 태도가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스며들었고 특히 후기 근대주의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장 강력한 가치로 세우고 주장하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 희생을 하고 내 한 몸을 버려서 가정을 지킨다고 하는 이런 고전적인 삶의 태도들이 현대주의 정신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이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이고 이러한 풍조는 상당히 오래 동안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것을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그 기준을 어긴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의 인류 전부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어긴 자는 끊임없이 그 안에서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IV. 이혼과 관계의 파괴
물론 이 세상의 모든 결혼한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을 다음 세 가지 사실로 논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A. 하나님과의 관계
우선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게 됩니다. 한 사람이 이혼을 결심될 때 어느 한순간에 홧김에 이혼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많은 날 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번민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어떤 중요한 한 계기에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 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이와 비슷한 설교를 했습니다. 어느 남편이 집에 가서 “오늘 주일인데 목사님은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그런 설교 왜 하는지 모르겠어. 설교시간 내내 힘들어서 혼났네.” 그러더랍니다. 부인이 정색을 하고 옆에 있다가 “여보, 나 생각 많이 했거든?” 사람의 마음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표하지 않았을 뿐이지 대부분 많은 부부들이 이 시점에서 결혼생활을 끝내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길 때는 무수한 번뇌와 고통의 날이 있고 그 결심을 실행하게 될 때에는 잘 해보자하는 노력과 결심의 끊임없는 좌절 끝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생각할 때와 이혼을 실행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현저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혼을 결심한 모든 사람들은 정상적인 이성의 상태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크게 번민된 상태에서 결정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껏 목회를 하면서 이혼을 하려는 사람, 이혼을 한 사람, 많은 사람들을 다루어 봤지만 기도원에 가서 장기간 금식기도하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이혼을 응답받고 와서 도장을 찍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담대하게 목사 앞에 와서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응답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하나님께로부터 온 응답이 아니라 자기가 끊임없이 생각하는 가운데 경험하게 된 자기 암시의 효과일 뿐입니다. 이혼하기 전 사람들은 극도의 혼란과 어두운 상태에서 이혼을 결정하게 되고 이혼한 후에 내게 펼쳐질 일들이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이혼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적으로 영혼의 깊은 어둠속으로 몰고 갑니다. 종종 이혼을 하고 난 후에 아주 홀가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한데서 온 가벼움이라기보다는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 받았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줄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급속히 끊어지게 되고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혼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인 회복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것이 매우 쉽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지만 이혼하고 나서 이혼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을 어디서 얼마나 만났는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혼은 이처럼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심각한 파괴를 가져오고 큰 단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드리는 많은 예배는 허공에 흩어지는 바람과 같고 마음을 모아 기도할 수 없는 영적인 무기력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진리들은 파편처럼 흩어져 마음에 가라앉아 버리고 집중되지 않는 지성의 무기력한 상태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뿐만 아니라 자녀들과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B. 자녀들과의 관계
자식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모는 처음 만나는 세계입니다. 자녀들에게는 엄마가 처음 만나는 모든 세계이고 나머지 것은 없습니다. 그 얼굴, 그 품에서 사랑과 선, 진리와 은혜 모든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엄마의 어깨 너머로 만나는 두 번째 세계인 아버지는 전부입니다.
제가 눈이 나빠서 군대를 못가고 방위 생활을 했습니다. 후배가 있었는데 자기는 출근할 때마다 죽겠다고 합니다. 예비군복을 입고 출근하는데 4살인 아이는 헬리콥터만 뜨면 소리소리 지르면서 우리 아빠가 저기 탔다고 합니다. 아이에게는 자기 아빠가 군대에 가니까 예비군복을 입었는데도 온 군인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이 세상의 모든 대통령과 황제를 합한 것보다도 더 높은 존재입니다. 그것이 세계입니다. 진리입니다. 완전자입니다. 아이들에게 처음 만나는 세계인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자기 보는 눈앞에서 엄마를 패고 피투성이가 되고 욕설을 퍼붓습니다. 이런 일이 자식이 30-40살 된 다음 일어나면 문제가 별로 안 됩니다. 물론 자식이 40살까지 되면 부인을 그렇게 팰 힘도 없을 겁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아빠가 진리 자체이고 하나님처럼 보이는 그 세계 전부인데 어머니 표정에서 배운 선악의 기준이 무너지면서 혼란이 오게 됩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로 인한 충격과 상처를 운명처럼 지니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의 가정이라고 하는 껍데기 자체가 부서지고 해체되어 버려서 자식이 어느 날 엄마 아빠가 찢어져서 남남으로 돌아서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래도 어느 한쪽에 붙어살면 난데 부모가 모두 그 자식을 버립니다. 가정법원 앞에서 부부였던 두 사람이 아이를 서로 미루면서 가라고 합니다. 이럴 경우는 최악의 상황이 됩니다. 그로 인해서 자녀들이 받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과 같이 살면서 이혼을 결심하게 될 때에는 이미 남편에 대한 사랑이 완전히 식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그 인간 안에 자식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남아 있으면 이혼을 못합니다. 결국은 이혼을 결행하게 될 때에는 남편을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자식을 향한 사랑까지도 모두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이혼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혼하는 이유는 성격의 차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은 시집살이를 하면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남편은 미워도 자식에 대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힘이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오늘날의 후기 근대주의는 자식도 자기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나의 도덕적인 삶이 행복을 보상해줍니까? 자식들의 행복이 나의 불행에 보상이 됩니까? 묻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쉽게 헤어지는 것입니다. 헤어지고 나서야 자식이 그리워서 자식을 찾아와서 보고 싶다고 하지만 거짓말입니다. 사랑 아닙니다. 자기 설움에 겨운 것이지 이미 엄마로서 아빠로서 자식을 버리고 이혼하는 그 순간에 철저한 자기 사랑이외에는 아무것도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너도 지금은 이해를 못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악담을 그렇게 합니까? 그 아이가 평생 이해를 못하고 죽는 것이 행복이지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이르면 그 아이도 이혼을 할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순수한 사랑은 그 안에 항상 논리가 있지만 거짓된 사랑은 그 안에 거짓된 논리밖에는 없습니다.
작년에도 제가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아는 지체 가운데 유치원쯤 다니는 나이에 엄마가 아버지와 마음이 안 맞아서 이혼을 했습니다. 결국은 그 아이를 초등학교 1학년에 넣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불러서 나는 너를 애비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다며 재혼을 했습니다. 1학년 때까지는 박씨였는데 2학년 때 전씨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부모라는 인간은 아주 자기 편의에 의해서 가볍게 생각합니다. 이 아이에게 이 혼란은 나이가 20세가 넘도록 극복이 안 됩니다. 그것이 극복이 되겠습니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나이가 한 40세 넘었는데 부모가 이혼을 하여 따로 산다고 하면 이미 다 형성되었기 때문에 자식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박씨였다가 2학년 때 전씨가 되었는데 아이가 현실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더 우스운 경우도 있습니다. 남녀평등에 의하여 엄마 성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최씨였는데 남편과 이혼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사는데 최씨라고 부르는 것이 끔찍하여 자기 성을 따라 이씨로 바꿨습니다. 끝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살면 한번만 충격 받으면 되니까 할 만합니다. 그런데 우씨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아이들은 최씨에서 이씨로 우씨로...아이들이 정체성 속에서 얼마나 혼란을 겪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을 향한 씻을 수 없는 깊은 폭력입니다. 자녀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따뜻한 집, 만난 음식, 큰 선물, 호화로운 학교생활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상적인 가정의 질서, 그 안에서 관계를 중시하는 사랑 이것입니다. 이것이면 아이들이 피죽을 먹으면서도 조금 영양실조는 걸릴지 모르지만 속의 인간은 꽉 찬 인간이 되어 갑니다. 그렇게 해서 자녀들과의 관계를 산산이 부서 놓습니다.
인간의 자원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젊고 기력이 있고 돈이 있고 쾌락을 찾을 수 있는 자원이 있을 때에는 자녀들과의 관계를 깨뜨리면서까지 이혼을 하는 것이 상당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세월은 곧 지나갑니다. 20-30년 지나고 나서 늙으면 자식들의 마음에 부모는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여러분들의 자식들이 여러분처럼 열린교회 와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네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저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었던 부모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자식에게는 형벌과 같은 큰 고통 속에서 지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주님을 믿고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지금도 믿음의 가정에서 곱게 자라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그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미 내가 목사가 되었고 자식들을 거느리고 아버님을 먼저 여윈 처지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찬송가 304장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어머님이 읽으시던 성경책 손 때 묻은 구절 나에게도 그런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간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이고 내가 왜 살아야하고 눈을 뜨면 인간으로 태어나는 이 현실이 이렇게 무서운데 나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 주어야 할 부모는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은 집안에서 자라나서 부모에게 선악을 배우고 하나님을 배우고 그때에 부모와 함께 손잡고 고통의 시간들을 지나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혼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가족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란 사람들이 제 나이가 50이 훨씬 넘었는데도 지금도 부럽습니다. 결국 그 아이 마음속에서 부모는 없는 것이고 부모가 이혼하는 그 순간 아이는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정신적인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버님을 여의고 나서 순간순간 그분이 그립고 마음속에서 애틋하고 어떤 때는 복받치는 슬픔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회상할 추억이 없습니다. 어떤 한순간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은혜의 효과이고 인간적으로는 그분과 나누었던 추억이 없기 때문에 돌아가서 회상을 하려고 하면 하얀 기억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나마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았으니까 애틋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지 신앙이 없었으면 아무런 그리움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 없을 때 그 사랑은 추억과 기억에 의해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어려서부터 깨뜨려지고 정신적인 고아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너무 심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렇게 자녀들을 대하며 인생을 살게 되면 노년에 지독하게도 외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자녀들이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렇게 부부생활을 하며 살아온 여러분들을 향해 절대로 애틋한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보고 싶어 하는 자식 없이 홀로 늙어갈 것이고 돈이 있어 여러분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한다고 해도 돈 받고 여러분들을 수발들어주는 간호원이외에는 여러분과 함께 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 가혹한 끝은 철저한 단절과 외로움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사람으로부터도 단절되고 철저하게 자기 혼자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값비싼 대가를 노년에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노년에 다윗과 같이 큰 은혜를 받게 되면 그 외로움을 수단으로 삼아서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으며 성결한 노년을 지내다가 거룩한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게 되겠지만 그 사람은 소수입니다. 주위에서 머리가 하얀 노인 분들 중에 지금 제가 말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열린교회에서 조차도 소수입니다. 나이가 들면 정신도 영혼도 무디어지게 되어 진리에 대한 인식도 흐려지고 마음이 굳어지게 됩니다. 그때에는 자기를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는 자녀들이 더 필요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 같이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 시기에 충분하게 채워주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절대로 자녀들의 마음속에 그리운 사람으로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아끼는 자 없이 쓸쓸한 노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잠간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이혼을 하고 자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 새로운 인생을 찾을 때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는지 나는 의문이 갑니다.
물론 저는 그 사상에 완전히 동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스에 가면 그리스정교가 있습니다. 결혼을 허락합니다. 결혼을 해도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대신 모든 교인들은 한번만 결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세전에 한 영혼과 한 영혼을 짝 지워 놓았다는 논리입니다. 만약에 한 사람이 죽거나 헤어지게 되면 그와 결합할 수 있는 영혼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혼자 살라고 가르칩니다. 남편과 아내를 보면서 언제든지 바꿔버릴 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하게 안 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이 만세 전에 짝 지워 주신 유일한 사람이고 이 사람이 죽거나 만약에 헤어진다면 나는 혼자 살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을 한다면 다르게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달리 보이지 않겠습니까? 더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C. 자기와의 관계 파괴
어떤 때는 하나님은 그것을 용서하셔도 자신이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모든 교인들에게 인정을 받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일을 맡기려고 하는데 어느 날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에게만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행복해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유부남이고 유부녀이었는데 가정을 깨고 만났습니다.” 저는 티끌만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생활이 너무 예쁘고 은혜 안에서 하나님 섬기는 것을 보면서 “당신들은 기억을 못하는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다시 살 길을 주셨으니 그것이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며 가정을 잘 지키십시오.” 그랬더니 그 중의 한 사람이 펄쩍 뛰면서 “기억을 못하다니요. 목사님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일이었는데 이제는 이 아이들이 시집 장가를 갈 때까지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는데 단 하루도 가정을 깨뜨린 기억에서 자유 해 본 적이 없고 아무리 큰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때 그 순간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셔도 자기 자신이 용서가 안 됩니다.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것입니다. 우리의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십니까?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Ⅴ. 사랑으로 고난을 이김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에 관해서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하나님 당신 안에서 사랑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때문에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는 사랑이지만 인간의 사랑은 피고 지는 꽃과 같은 사랑입니다. 여러분 마당에 들어오면 꽃이 참 예쁘지요?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든 것을 늘 버리고 새 것을 꽂아 놓아서 마당이 언제 봐도 활짝 웃는 꽃들로 가득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차이입니다.
이 중에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 가정은 행복해 하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남편이 혹은 아내가 자신에게 참 훌륭하게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너무 도취하지 마세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인간의 사랑뿐이면 시드는 꽃이에요. 어느 한순간 자기가 좋았을 때 활짝 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가 싫어질 때 시들어 가는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불변하시는 사랑일 뿐 그 이외의 모든 사랑은 사라지는 사랑이고 변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하나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우리들이 느끼지 못한다면 사람의 사랑은 한없는 사랑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내 아내는 왜 나에게 만족을 못줄까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남편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에게 만족을 주어 보았습니까? 여러분들의 자식도 아버지인 당신에게 만족을 안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모자란다고 여기던 아내도 당신에게 절대 만족을 안 합니다. 목사님은요? 물론 만족을 안 합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한 번도 만족시키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누구에게 완전한 만족의 사랑을 받으려고 합니까? 그런 것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제가 얼마 안 되는 신앙의 생활을 통해 깨달은 사실이 이것입니다. 사랑은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큰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인간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의 힘은 사랑을 받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지 사랑을 받으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 수없는 많은 사랑을 받아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그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철저하게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마음으로 피하지 말고 저의 이 설교를 마음을 열고 들으세요. 여러분들의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세요.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외롭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못 받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결국은 자기는 자신을 배신합니다. 진리를 떠나고 나면 인간은 육체와 구원 중 부당하게 자기 육체밖에 사랑할 수 없게 되고 육체는 언젠가 자기를 버리게 됩니다. 원래 이 사람 속에 있는 모든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 원천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이상하게 이 안에서 사랑이 확 솟아납니다.
개척교회 때인데 자매가 새벽예배를 2년 동안 열심히 나오는데 나무토막처럼 부동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있다가 입도 못 열고 집에 갑니다. 하도 불쌍해서 기도를 가끔 해 주었습니다. 대개 내가 사람들에게 기도를 해주면 우는데 통나무에다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날도 목석처럼 앉아 있다가 내게 와서 이혼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열린교회에 등록하여 신앙 생활하여 은혜를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가정상황에서 포학하고 병든 남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혼에 깊이 부어지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한 영혼으로 자기에게 다가온 남편을 발견하게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참고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이 진실하게 남편을 사랑합니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면서 수족이 불편한 남편을 부축하여 교회에 나오면서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혼을 하려고 한다면 아주 잘 한 것입니다.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않은 것을 다행입니다. 참아요. 지금은 쓰고 고통스럽지만 후일에 반드시 오늘의 이 결심을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것이고 자녀들에게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은혜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보증이 둘 있습니다. 모든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는 은혜의 무한한 공급과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혼할 때가 되면 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혼을 결심하게 되면 이 사람을 잘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의 선택을 의지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택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그렇게 간구하는 그 자녀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해 보았어요?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도장을 만지작거리면서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응답이 없습니다. 나는 여기가 벼랑 끝이다.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믿음의 여인 한나처럼 가정에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 때 사랑스러운 남편도 도움이 안 될 때 홀로 성소에 올라가서 술에 취한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고 바뀐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해 주셔서 그에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혼을 해야 되는 부부를 여러 쌍 상담했는데 항상 이론은 나보다 훨씬 강합니다. 목사님도 내 자리에 있으면 이혼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도 기도해 줄 테니까 일주일만 금식을 하고 내려와서 도장을 찍어라”고 하는데 아무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그것을 선택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원에 올라가서 일주일을 금식기도하면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너무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Ⅵ. 결론과 적용
맨 처음 우리가 이 세상을 방황하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을 때 주님이 오셔서 나에게 ‘너를 위해 내가 십자가를 졌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렇게 말씀하시며 우리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이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셨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가슴 속에 가득 밀려오고 그때 우리의 마음이 어땠어요? 그 큰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밀려올 때 자기 고집대로 살았던 옛 삶들이 너무 더럽게 느껴졌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니 주님이 나를 어디에 두시든지 거기에서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으며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를 꿈꾸기도 했고 선교를 꿈꾸기도 했고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에 가서 희생하며 봉사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고 내게 나를 만나주신 이 교회에서 뼈를 묻으리라 고난과 시련이 와도 주님을 꼭 붙들고 참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남편이 원수는 아니잖아요. 우리 가정에는 나의 피붙이인 나의 아이들이 있잖아요. 내가 세계인 것처럼 바라보고 내가 아니면 돌볼 사람이 없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자기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큰 사랑,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저렇게 망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 사람을 나의 아내로 남편으로 주신 것은 주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나는 또한 이 문제가 많은 이 가정으로 내려간다. 그러면서 더 이상 저 사람을 사랑할 힘이 없을 때 자녀들이 그립지만 자녀들을 위해서는 이 결혼의 관계를 도저히 지속할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 자기 사랑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보세요. 깊이 하나님 앞에.
벌써 한 4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자매하나가 친구 손에 이끌려서 우리 교회에 억지로 왔는데 하필이면 그날 설교 제목이 “남편에게 순종하라”였습니다. 이혼을 하려고 도장을 만지작거리던 자매였는데 생전 처음 교회 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날 저녁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에 돌아가서 남편에게 무릎을 꿇었답니다. 남편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보세요.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깊이 깨뜨려지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각자 자기가 깨뜨려지고 하나님이 서는 그것이 바로 가정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이렇게 빨리 흘러갑니다. 참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극복하며 이기며 살아갈 때 매순간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이 더 많이 느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9.아비는 자식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마 1:7-8).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아비야는 아사를, 아사는 여호사밧을, 여호사밧은 요람을 이렇게 모두 다섯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설교를 하겠느냐? 황당하겠지요? 어느해인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주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가정에 관계된 것입니다. 르호보암이라는 사람은 솔로몬의 아들인데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시대에 와서 왕국이 둘로 찢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신앙이 없을뿐만 아니라 리더쉽도 없고 정치가로서 판단력도 없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머리가 나쁜 임금이었습니다. 오히려 여로보암은 신앙은 없었지만 머리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신앙도 없고 머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으로부터 물려받은 큰 왕국이 남과 북으로 찢어질때에 12지파 가운데 10지파이상이 이스라엘에 속했고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라는 다 찌그러들었는데 아주 볼품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과도한 노력과 봉사로 부역을 동원해 왕국을 짖고 성전을 짖고 하면서 거듭되는 노역과 공사에 동원되면서 백성들이 많이 마음이 떠났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부하들이 아뢰었지만 그러나 나는 내 백성을 더 강하게 압박해서 그래서 이들로부터 봉사를 받아내겠다 하고 백성들을 학대하는 정책을 사용해서 결국은 민심으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고 왕국이 찢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신앙이 없는 아버지에게서 아비야 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인물도 역시 성경에 여러번 나오지만 별로 신앙이 없는 믿음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불경건한 아버지가 불경건한 자식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사람 하나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아비야의 뱃속에서 아사 라는 인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아사는 이스라엘의 어두운 역사 속에서 길이 빛날만한 훌륭한 신앙을 가진 몇 안되는 인물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사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된 후에 겸손함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뢰했고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한 임금이었고 일평생 아사와 같이 순전함으로 하나님을 찿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괄목할만한 일은 그가 이스라엘의 신앙을 순수하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이 애썼는지 왕의 어머니인 마가가 아사라상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태우의 위에서 폐하고 우상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임금이었습니다. 일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라를 다스렸던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말년에 육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아사는 이스라엘에 흔치 않은 히스기아와 더불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빛나는 몇 안되는 훌륭한 임금으로서 다윗의 뒤를 따랐던 신앙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불경건한 아버지에게서 경건한 자식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콩 심은데 콩 난다는 이야기가 위에서는 성립이 되는데 이번에는 콩을 심었더니 팥이 나와버렸습니다. 뒤에 보니까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았습니다. 여호사밧은 비록 정치가로서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사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 아사의 신앙을 본받았습니다. 아사가 왕이 되어서 선정을 펼치고 하나님의 참된 신앙의 회복을 가져오니까 북왕국에 있었던 많은 사람이 남왕국의 신앙을 그리워하면서 국경선을 넘어 남쪽나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제사장들은 이렇게 분담을 나누어서 일이 있을때는 제사장일을 하고 없을때는 쉬었는데 당번이 아닌 제사장들을 모두 조직을 짜서 전국을 돌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때는 모두 모여라 했지만 이번에는 비번인 제사장들을 전국을 순회하며 율법 공개강좌를 만들어서 많은 백성들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신앙을 넣어 주려고 했던 일들로 미루어 보더라도 이 왕인 여호사밧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경건한 사람이었는지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는 경건한 아버지가 경건한 아들을 낳은셈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좋은 신앙을 아들인 여호사밧이 물려 받게 되었고 그래서 일평생 아버지가 걸었던 믿음의 길을 따라서 자기도 신앙을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미 세가지 사실을 파악했는데 불경건한 부모의 신앙은 불경건한 자손을 낳게 되고 그러나 또 부모는 불경건하여도 아사와 같은 자식이 나올수 있고 부모인 아사와 같이 경건한 신앙이 여호사밧과 같은 자식의 신앙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니까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했는데 이 요람은 신앙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사의 경건한 신앙이 여호사밧에게 물려진것처럼 여호사밧의 경건한 신앙이 요람에게 물려지지 않고 요람은 우상을 섬기고 악한 일을 하는 나쁜 임금으로 여기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다섯명의 왕들의 4대를 보면서 우리는 아주 신비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가 신앙생활을 잘하면 그것이 자식에게 물려지는것이 철칙인것처럼 생각했는데 그 아버지의 그 경건한 부모에게서 어떤 이런 자식이 나오는가? 그래서 우리는 부모의 신앙과 자식의 신앙은 상관이 없다 라고 생각하려 했더니 불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꼭 불경건한 자식인 아비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신앙과 가정의 관계에 대해서 2가지를 명확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부모의 신앙은 어찌하든지 자녀와 관계가 있다. 그래서 불경건한 아비에게서는 불경건한 자식이 나오기 십상이고 경건한 아비의 후예에게서는 경건한 자식이 나오기 십상이다. 우리는 이 확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신앙은 반드시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신앙의 여부는 자녀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부모의 신앙은 자기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의 가족들이 달린 신앙이고 특별히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달린 신앙입니다. 그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의 생활을 살지 못할 때 우리 자식들도 함께 쓰러진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인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자녀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다행히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서 공부를 잘하고 남다른 재주를 소유한다면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는 사람일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는 참된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때 그가 가지고 있는 재능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어디에 살든지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좋은 신앙을 물려주지 못한다고 할 때 그 아이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많은 재산을 모으고 높은 학식을 가진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창조 목적을 따라서 쓰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찌하든지 자녀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인것처럼 그들의 구원이 우리의 구원인것처럼 깊이 사랑하며 우리의 신앙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그렇게 경건 하였는데도 결국은 그 경건한 아버지 밑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태어났던 것처럼 우리의 부모가 비록 우리에게 좋은 신앙을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우리는 어찌할 수 없이 지나간 과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을 후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향한 경건하고 아름다운 신앙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가문을 창건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신앙을 시작하고 우리의 자녀들을 향해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의 가문을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또 만약에 우리가 경건한 부모밑에서 태어났다고 하면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앞에 주님을 경외하는 부모를 우리에게 주신것을 감사하며 그 부모들에게서 신앙을 배우고 그 부모들에게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 부모에게서 믿음을 배우고 신앙을 배우면서 하나님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감사하며 자기가 불신 부모밑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배나 더 열심히 부모의 신앙을 본받아서 우리가 훌륭한 신앙을 뒤잇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몫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우리 자녀의 신앙을 우리가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으면 그 회심의 은혜를 보전하면서 일생을 살아서 주님의 은혜안에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사랑하면서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그런사람으로서 전심으로 그를 하나님앞에 세워주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오히려 자신을 위해 기도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녀들로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것이 부모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쩌면 순교할지도 모르는 길을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면서 사랑하는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교인들에게 전하는 말을 그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때 그는 내가 너희를 주와 그 은혜의 말씀으로 부탁하노니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은 비록 사랑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두고 죽음이 기다리는, 환란과 핍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만 자신은 그들을 붙들고 계시는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이 에베소서 교회의 교인들을 위탁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일평생 그 자녀에게 영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때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전부인것을 알고 그 품에 들어오고 사랑해 주고 아끼고 참답게 가르쳐 주면 그 엄마 아빠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그 어린 나이에 그때 신앙이 아주 돈독하고 확실하게 들어가고 그때 회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은 시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사슴이 가을철이 되면 뿔을 자르는데 빨리 안자르면 맨 위에서부터 그 좋은 녹용이 녹각으로 변합니다. 녹각 한바구니를 줘도 녹용 하나를 사기 힘들 정도로 녹용과 녹각은 천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때에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갈수록 그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여러분 보십시요. 우리들이 회심 집회를 하고 아이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면 어린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회심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직장을 다닐정도로 성장한 다음에 그렇게 쉽게 회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심을 해도 또 다시 미끄러지는 예가 많습니다. 이미 세상을 너무 많이 알고 거기에 너무 많이 빠져 있습니다. 그랬을때 아이들의 신앙이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붙들리는 그런 아이들이 되게끔 붙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그 아이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느냐 신앙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느냐 보다도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믿음의 4대의 계대는 바로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힘 있는대로 자녀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가 비록 나이 많아 늙어서 아이들에게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고 또 우리가 죽어서 더 이상 이 아이들의 신앙을 돌보아주지 못할때에라도 이 아이들이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 그래서 우리를 통해 물려 받은 신앙을 잘 보전하고 마치 아사에게서 태어난 여호사밧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슬기로운 자녀들이 되도록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이 진리의 가르침을 가르치기 위해서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물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정말 말하기도 싫은 이런 혼탁한 시대의 정신과 생각속에 물들어서 점점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갈 수 없는 굳어지고 굽어지기 짝이 없는 그런 마음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속에서 우리는 이 자녀들을 잘 길러서 좋은 신앙으로 무엇보다 아이들을 많이 사랑해서 이 아이들에게 훌륭한 신앙을 불어 넣어 주도록 그렇게 이 아이들을 잘 돌보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때 이 아이들은 언젠가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또 우리 교회에는 믿음의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그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자식들 그런 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스스로가 그들의 영적인 부모가 되어서 그들을 나의 자식으로 품고 참된 은혜와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그들이 각기 믿음의 가문을 창설하는 그런 조상이 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신앙으로 지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참된 회심에 이르도록 우리가 그렇게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정의 달에 우리 각자에게 기대하시는 위대한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10.가족을 돌아보라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이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회적인 약자들이 많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로마는 아주 부강한 나라였고 특별히 황제가 있는 로마는 로마의 권력과 번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로마에 들어와서 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창 로마가 번성할 때는 로마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빵을 구워서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걸 보면 가난은 나라도 구제를 못한다 라는 말이 있듯이 여전히 얼마나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당연히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 중에도 과부들 즉 남편과 사별하거나 남편이 없고 교회에 있지만 누가 돌볼 사람들이 없는 그런 사람들을 교회에서 돌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사람들을 구제의 차원에서 돌본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믿음이 좋은 사람들 그리고 선한 행실이 있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성도들을 겸손하게 잘 섬기며 그래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욕심이 없는 사람, 그리고 여러 번 시집갔던 과부는 안 되고 평생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행실이 곧은 사람 자격 조건이 굉장히 엄하죠? 이런 사람들을 교회의 명부에 올려서 모든 생활을 교회에서 책임을 져요. 그런 것 보면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초대 교회는 참 지금 교회보다 사려가 깊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지금도 그런 명부를 만든다고 하면 당선될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조건이 하도 까다로와서.
그러나 어쨌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과부의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그렇지만 만약에 그런 과부를 올리려면 우선 그 사람의 주변을 먼저 잘 살펴서 자녀나 손자들이 있는지 먼저 찾아봐라 그리고 만약 있다면 그 자녀들이 어머니를 공경하는 돌리를 먼저 배우게 해라 교회가 도와줄 능력이 있어도 배우게 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헌신이다. 이렇게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그 때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것임이 드러난 거죠. 그렇게 불효의 역사는 오래고 깊어요.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인간들은 결국은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삶의 도처에서 보여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참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애쓰고 노력해야 할 것이 참 많이 있지만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지고 막되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게 없어요. 생긴 대로 자기 고집대로 살면 늘 인간관계가 깨뜨려 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을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인간성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그 사람의 인간적인 성품이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자기를 죽이고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남의 나라 가서도 그렇게 하고 여기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곳에 가서도 그렇게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벌써 이때에도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불효가 문제가 되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교회에서 자녀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굉장히 어렵죠. 왜? 현대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정신이 자기 밖에 모르는 정신을 갖게 된 거죠. 부모에 대한 깊은 애틋함이나 이런 거 없어요. 그런데 그것도 보면 참 이상하지 않아요? 옛날의 부모들은 아이들 하나하나 다 이름도 못 외운 부모도 많아요. 아홉이나 열 낳으니 어떻게 다 외우겠어요? 그리고 엄마가 하나하나 길러주기 보다는 애 낳아놓으면 자라면서 태어나는 애 봐주고 여섯 일곱 살 되면 벌써 뒤에 애 하나 업고 늘어져서 자고 울고 그러면서 걔를 업고 다니면서 공기도 하고 다마치기도 하고 딱지치지도 하고 고무줄도 하고 그러면서 놀았잖아요? 지금도 눈에 선하잖아요? 지금 만약 애를 그렇게 키운다고 하면 상처투성이 일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자랐을 때는 그래도 애들이 부모를 공경했는데 이젠 하나밖에 안 낳아서 불면 꺼질세라 날아갈 세라 음식점에 가서 누가 야단을 치면 대판 싸움을 하는 한이 있어도 제 자식 역성을 드는 데 왜 그 자식들이 자라서 부모를 무시하고 공경하지 않을까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아요?
결국 자녀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거 하나 가지고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객관적인 규범을 아이들이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지만 그 사랑이 그 규범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규범이 없는 사랑의 베풂 하나는 방향이 없이 사람을 휘모는 것과 마찬가지 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제한 적으로 주어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무계획적이고 방향이 없는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방향이 있고 계획이 있고 우리에게 그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 우리를 데리고 가시려는 목적이 있는 거지요. 그것을 향해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도 자녀들을 사랑할 때 그런 뚜렷한 규범을 가지고 자녀들을 사랑해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향해 진노하신다는 뜻은 우리가 가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에요? 그 길로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겠죠? 그러니까 또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자녀들에게 객관적인 규범을 가르쳐야 하는 데 그게 바로 가족에 대한 의무에요. 어떤 사람은 종종 그러죠? 가족이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냐고. 가족은 뭘 해주는 게 아니야. 뭘 해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라 가족은 그냥 가족이니까 가족이에요. 해 주고 안 해주는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이에요. 그거에요.
왜 그러면 사도가 교회의 여유가 있어도 교회에 있는 것들로 경건한 과부를 돌보기 전에 먼저 그 자식들을 찾아서 자기의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먼저 가르쳤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것이에요. 참 사랑은 동심원과 같이 퍼져 나가요.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면 펑 하는 소리를 내요. 그리고는 그 떨어진 그 자리에서부터 파문을 넓게넓게 그리면서 호수 전체에까지 그 원을 그리며 파문을 일으키죠. 똑같이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알았다면 그래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큰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알고 만약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면 내가 그 사랑을 받은 증거는 제일 먼저 내가 아는 거예요. 내 영혼과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내가 가장 먼저 아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의 큰 사랑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내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에 의한 변화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처럼 파문을 그리며 영향을 행사하게 될 때 이것이 참된 영혼의 변화에요. 만약에 돌멩이를 호수에 던졌다면 그 원이 항상 떨어진 구심점부터 시작을 하지 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먼 거리까지는 아무 파문이 일어나지 않고 돌멩이가 떨어진 10M지점에서부터 원이 생겨나는 그런 물결은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 성경이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신자를 정죄하는 경우는 흔치 않아요.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들의 형편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다 그리고 불신자보다 악한 자다 라고 말하지 않아요. 교회에 와서 수많은 지체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을 실족시키거나 그에게 선을 베풀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게 곧 믿음을 배반한 증거는 되지 않아요. 그런데 가족에 대해서는 그렇단 말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자녀들을 기를 때 자녀들을 많이 사랑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당연하지만 그 사랑이 또 다른 무엇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는 통로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하면 가족에 대한 의무에요. 그리고 그것을 기뻐해야 되요. 그것을 가르쳐야 되요. 오늘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라고 그랬어요.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든지 오늘 처음 회심한 사람이든지 큰 은사를 받은 사람이든지 신비한 경험을 한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깨달은 사람이든지 그 지식이 적은 사람이든지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자기의 친족 특히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니라 왜냐하면 가족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에게 주신 자연적인 본성이에요. 그 본성을 따라서 이 창조의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거예요.
만약 동물들이 태어나자마자 따끈따끈한 자기 새끼들을 잡아먹어 버린다면 세계는 파멸되겠죠. 식인종도 자기 새끼는 안 잡아먹어요.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질서를 이 온 세계 안에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인간에게도 그러한 가족 사랑의, 가족을 위해서 함께 살아가는 공통된 본성을 주신 거예요. 이것을 거스르고 어기는 피조물은 인간 밖에는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종족을 보존하고 가족을 지키는 그 질서를 깨뜨릴 수 있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위대하기 때문이에요. 그 일이 잘하는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워낙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모든 것들은 각기 자기 존재에 만족을 하는 데 인간은 인간 이상이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원숭이나 원숭이가 되려고 애쓰는 풀을 본 적이 있습니까? 각기 자기의 처지에 만족해요. 인간은 끊임없이 도전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이르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서 가족을 돌아본다 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무슨 의미겠는가 무엇을 돌아본다는 것인가? 여기서 돌아본다는 것은 사랑을 가지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의미해요.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의 필요가 보이고 사랑하면 그에게 어떤 필요가 있을 때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가족들의 어떤 필요를 돌아보아야 할까요? 우선 첫째는 육적인 필요를 돌아보아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셨는데 노아 홍수가 있고 난 후에 하나님이 언약한 것이 있어요. 다시는 사람들을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무지개가 나의 이 언약의 보증이 되리라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심음과 거둠도 법칙에 의해 그대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도 전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어 가요.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북한도 지금 식량 사정이 매우 심각해요. 20만 내지 30만 사람이 굶어 죽을 것이다 생각하고 있어요. 참 희한한 게 최근 10년 동안 중국 대만 우리나라 일본 전부 풍년이었어요. 10년 동안 거의. 그런데 북한은 한 번도 풍년이 아니에요. 그러니 물난리 끊임없는 기상이변 해서 몇 년 전에는 벼를 심어서 벼 이삭이 패일 때가 되면 물이 들어서 말랑말랑 해지잖아요? 서리가 쏟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1년 농사 망치는 것이거든요. 햇빛이 바짝 나서 며칠만 지나면 딱딱하게 쌀로 영그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어려움이 계속 겹치는 것이에요. 더 놀라운 건 뭐냐하면 1년에 부족한 식량이 150만 톤인데 남쪽에서 남는 게 150만 톤이에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래서 전 세계의 식량 문제가 문제가 되는 게 식량 자체로는 하나님이 절대로 모자라게 안 주신다는 거예요. 왜? 쌀값이 떨어질 것 같으니까 그 넓은 땅에 아예 쌀을 안 심는 거예요. 그래서 모자라지요? 맛있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 수많은 곡식을 갖다 먹이는 거예요. 소고기 1kg을 살로 먹으려면 그 소가 20kg의 곡식을 먹어야 되요. 그런데 요즘은 어떤 상황이 벌어졌냐면 투기를 하다하다 안 되니까 식량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거예요. 전 세계적으로 규제가 필요하다고 봐요. 그렇게 해서 곡물 값이 폭등을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불공평과 불균등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전 세계의 부의 80%를 10%의 인류가 사용하고 나머지 20%를 90%인류가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쪽에서는 흥청망청 남고 한 쪽에서는 굶고 있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 북한을 도와야 해요. 살아야지 주님을 믿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왜 지금 사도가 간절하게 충분히 교회에 여유가 있을 텐데 그 과부들을 교회에 부양하게 하지 말고 자식들에게 의탁하게 가르치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가족을 향한 참된 의무이고 가족들의 정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각기 하나님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유와 적은 소유를 고정하며 그것으로서 자기를 즐겁게 하고 고통하는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이기적인 정신이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정신이에요,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그 순간 바로 이전까지 살아왔던 그러한 인생관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는 거예요. 죄가 없으신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처럼 취급을 당하시고 부요하신 분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서 스스로 고난을 당하셔서 부요하신 그 분은 가난해 지시고 가난한 우리들은 부요하게 되는 것이에요. 부요하게 만드시는 것이지요.
아무도 누구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사람은 인생관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물질로서 가난한 자를 섬기어서 평균을 이루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정신이에요. 그러한 복음의 정신을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먼저 자기의 과부된 어머니를 사랑으로서 돌보고 자녀의 의무를 다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가족이에요. 비단 여기에서 부모를 향한 도리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요. 사도는 여기서 가족을 넘어서 친족에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육체적인 형편을 돌아보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보석을 사 주고 자가용을 사 줄 의무는 없지만 그러나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교육받게 하고 그렇게 해서 육체의 필요를 채우게 하라는 것이지요. 이것도 그대로 대물림을 해요. 부모들 형제간에 우애가 나쁜 집안에서 사촌끼리 화목한 가족이 없어요. 엄마아빠 모여 앉아서 자기 동생 욕하고 제수씨 욕하는 데 자식들이 편 갈라지요. 그건 고사하고 부모가 동기간에 그렇게 하는 것을 본 자식들은 자기들끼리도 우애하지 않아요. 본대로 자기들이 그대로 행하면서 사는 거예요.
작년에 형제 우애에 대해서 설교를 하고 저 구름다리를 건너서 가는 데 복도에서 어느 교인 한 분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흐느껴 우셨어요. 목사님 얼마 안 되는 우리 자식들이 목사님이 이야기 한 것처럼 서로 그렇게 미워하면서 사는 데 아비인 나의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흑흑 흐느껴 우셔요. 큰 불효를 하는 것이지요. 자기들 각자는 어버이날이 되면 고기라도 몇 근 끊어오고 통장에 몇 푼씩 넣어 주는지 모르지만 그건 효도가 아니죠. 부모의 마음은 자녀들이 자기 생전에 잘 화합하고 우애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것을 못하는데 나머지 것들이 부모에게 무슨 위로를 줄 수 있겠어요 육체의 필요를 잘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에요.
아마 형제 우애가 갈라지는 이유 가운에 90%는 경제적인 이유일 거예요. 돈을 빌려가고 안 갚는다든지 빚보증을 안 서준다든지 --보증은 절대 서 주지 마요. 부모가 와서 서 달라고 해도 서 주지 마요--그런 거 시부모님을 모시는 거 유산의 분배 이런 것들로 형제 우애가 균열 되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그까짓 게 뭐 그리 중요해 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화합하며 살 수 있는 사이인데 우애가 깨지고 인간관계가 갈라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족의 의무를 올바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여러분들이라도 먼저 모범을 보여요. 어쨌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자비를 입은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가족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푸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요. 감당할 수 없는 돈을 빌려 주어서 고통을 당하거나 이런 것은 지혜롭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너무나 동기간을 사랑한 나머지 자기에게도 없는 돈을 딴 사람에게서 빌려서 주고 도산을 해서 부부관계까지 깨지곤 하는 데 가장 미련한 짓이에요. 하지 말라고 늘 얘기하잖아요. 이렇게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렇게 해 주고 싶은데 우리 목사님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고. 핑계를 그렇게 많이 댄대요. 그래도 좋으니까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아요. 그 대신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는 지 없는지는 하나님이 아셔요. 그래서 항상 가족들 동기간을 기억하면서 중심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주고 자기의 작은 희생으로라도 그를 섬길 수 있다면 그를 기쁘게 섬기도 돕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게 바로 은혜 받은 사람이 가족을 돌아본다 라는 첫 번째 의미에요.
두 번째 돌볼 영역은 영혼의 상태를 돌보는 것이에요. 인간의 모든 문제가 절대로 물질의 문제로 해결 되지 않습니다. 급할 때는 그것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인생이 필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과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영적인 면에서 그들의 상태를 보고 그들을 헤아리고 그들에게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헤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고 믿음 생활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 뿐 아니고 그게 바로 경건이에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 거짓이 없는 경건의 증거다 그랬어요. 그것이 바로 참된 사람이에요. 그래서 옹졸하게 아주 작은 경제적인 이익이나 문제 때문에 동기간에 거의 의절하고 지내고 그리고 마음속에서 가족들을 잘라내고 대면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게 살기 원하시는 정 반대의 삶이에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가족들이 영혼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염려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영혼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한 연약한 영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매일 매일 먹을 거 입을 거 쓸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혼의 필요한 은혜의 양식을 구하게 되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놓고 기도할 때 십자가의 사랑 밖에는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래서 매 순간 자기를 위해 피 흘린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 마음이 가족들을 향하여 펼쳐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게 진정으로 예수의 사랑을 이 안에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그게 사랑이라는 거예요.
거짓과 위선에 찬 그리스도인들은 멀리서 보면 너무 멋있고 훌륭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아도 가까이 다가가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그 사람은 아니라고 말해요. 그 중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가족- 아내와 남편이에요. 그러나 참 진실한 성도는 - 부족하지만 진실한 성도가 되려고 하는 성도들은 때로 멀리서 보면 오해도 있고 선입견도 있어서 그 사람 별로인 것 같아 라고 해도 가까이 갈수록 그 사람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요.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내와 남편 그리고 가족이죠.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즐겨서 쓰는 성경 구절이 있죠.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 그런 성경구절은 어떻게 그렇게 잘 외워가지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예수님 혼자서 하시게 놔 주세요. 워낙 진리의 말씀을 선명하게 전하고 찬란하고 장황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셨는데 그 사람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렸을 때 예수에 대한 기억들이 자꾸 방해가 되어서 선입견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주 진실한 진리의 선포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증거 같은 것들이 받아들여 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의 어린 시절을 본 것이 선입견이 될 정도로 그렇게 놀라운 진리를 전하는 선지자이기는 해요? 그러니까 다음부터 그런 말 하지 말고 가족들이 인정을 안 해주면 고향 사람들이 좋다고 안하면 아 내가 틀렸나보다 하고 오히려 회개를 해야 되요. 내가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면 뭘 합니까 교회 지체들이 내가 잘못되었다는 데요 나를 가장 잘 아는 내 가족이 나 때문에 상처를 받고 아빠 잘못되었어 엄마 잘못됐어 라고 말하는 데 그것이 어찌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습 이대로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그리고 회개를 해야 새로운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열방의 많은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말씀을 아주 새로운 관계 속에서 말씀해 주셨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소금이라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러면 빛은 가까이 있을 때 가장 잘 볼 수 있고 멀리 있을수록 그 빛은 우리의 눈을 덜 자극하게 되요. 소금도 자신이 녹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강력한 부패의 억지력을 행사하고 거기로부터 멀어질수록 부패를 억지하는 힘은 약화되기 마련이지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 현저히 미치는 영향이에요. 그러면 문제는 무엇이겠어요 사람마다 다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가족 구성원들이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자신이 다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에는 절대로 가정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바로 그렇게 가족에게 문제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해 주시고 가족들이 다 알지 못하는 큰 은혜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알게 해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사명이요 기회라고 생각해야 해요.
부패할 물건이 한 항아리가 되어도 소금을 한 움큼 집어넣으면 그 소금 때문에 썩지 않아요. 항상 소금은 소수예요.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한 시대는 없어요. 여러분 밤바다를 항해해 본 적이 있으세요? 저는 고등학교 때 한밤중에 여객선인데 풍랑을 만나서 구명조끼를 갈아입고 그렇게 비상사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인천까지 중간까지 왔다가 배가 다시 돌아가는 수고를 겪었어요. 그런데 밖을 쳐다보니까 파도가 뱃머리를 때리면 포물선을 그리면서 반대편으로 떨어지더라고요. 진짜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 장가도 못가보고. 그런데 캄캄하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바람이 무섭게 불어요. 칠흑 같은 어둠이기 때문에 아무데를 돌아보아도 아무것도 없어요. 몇 시간을 사투 끝에 저 멀리서 등대의 불빛하나가 비치는 거예요 그런데 배가 여러 척의 배들이 그 불빛 하나를 보고 항구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거예요. 수천 개의 조명탄을 쏘아서 항구 전체를 환하게 비춰줄 필요가 없어요. 불빛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불빛의 유도를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길을 다시 정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영향력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 참 빛은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비출 수 없는 빛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 말의 가루가 아니라 한 줌의 누룩 불 꺼진 수천 개의 등대가 아니라 불이 선명하게 비추는 단 하나의 등대 이게 더 필요한 거지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이에요. 사랑이 없는 마음으로 가정을 돌아다보면 왜 난 재수 없게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을까 그리고 그렇지 않은 많은 좋은 집안을 비교하게 되는 것이에요.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면 가족들을 돌아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에요. 이렇게 방황하고 갈 길을 모르기 때문에 누구를 통해서도 주님을 전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집안에서 이 문제가 많은 가정 속에서 태어나서 나도 이 모든 식구들 속의 한 사람처럼 살았을 텐데 유독 나에게 이 십자가의 사랑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셨구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내게 알게 하셨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에 내가 나의 가족을 위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문제가 많은 가정 그 자체가 자기의 선교지가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가 강물처럼 가득하게 되어서 날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목매이는 신앙의 감격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그 사람이 살 삶이 어떤 삶일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질문 이해되세요?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고 생애적인 십자가의 은혜 아래서 나 같은 죄인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가슴 저미는 그러한 착하고 진실한 성도가 될 때에 그가 살아갈 삶이 어떤 삶인지 그가 어떠한 삶을 선택할지 한 번 생각해 보라 이거지요.
(찬양) 먼 곳에 나가서 전하지 못해도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기도 힘쓰리 전하고 기도해 매일증인 되리라 세상 모든 사람들 듣고 주사랑 알도록
그것 말고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 사랑이 가슴에 사무치는데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전생에 만난 적이 없어도 그 영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이 계신데 이렇게 놀라운 사랑이 있는 데 왜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 알지 못해서 곤고하게 살아갈 까 그렇게 가슴이 메어져서 이 생명도 달라면 십자가에 놓을 수 있으리만치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 이 동네에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도 정말 좋겠다고 선택할 그런 삶을 살게 될 텐데 나의 피붙이 나를 낳아준 부모 밉거나 곱거나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 한 상에 둘러 앉아 먹고 마시며 기쁨과 설움을 같이 한 내 동기간들 전해주는 사람 몰라서 메마른 가슴으로 살아가는 불쌍한 나의 친척들 그들을 우리들이 사랑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얼굴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사랑하고 가족들은 쉽게 사랑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결국 가족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영혼을 거의 돌아보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자기의 영혼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웃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올바르게 사랑한 분량만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만약에 이미 주님을 믿은 모든 성도들이 일치한 마음으로 구원 얻지 못한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전심으로 매달리며 자기의 영혼처럼 기도하면 수많은 선교사와 전도자들이 못해낼 수 있는 더 큰 일들을 해 낼 수 있을 거예요.
새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거기에 전도 계획을 세우고 자기들의 교회의 푯말을 미리 꽂는 것도 전도겠지만 늘 기도할 때마다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는 가족들의 영혼들을 가슴에 품는 일은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주님이 가까이 계시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그분이 만져주시고 고쳐 주시고 사랑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여러분 때문에 더 많이 덕을 입고 더 많은 사랑을 입고 은총을 입도록 그렇게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에요. 분가되 나왔으니 이제는 내 책임이 아니다 이러지 마시고 떨어져 나왔으니 이제는 나와는 상관이 없다 이러지 마시고 마음 깊이 가족을 품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상처타령하지 말고 오히려 그 영혼을 내게 주신 사명을 더 많이 생각하면서 가족들은 나에게 충분히 사랑해 주지 못했어도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 가족을 대신해서 다 갚아주셨으니 넘치는 사랑으로 더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나누어주고 섬기며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족들의 영혼을 돌보고 육체를 돌보는 그 섬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알고 그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11.이혼한 그대에게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막 10:6-9).
I. 본문 해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혼인의 원리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결합은 삼중의 결합이니 곧 육체적인 결합과 영혼적인 결합, 정신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전한 가정 속에서 그 사랑의 열매로서 자녀들을 생산하고 그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창조의 목적과 덕스런 삶이 무엇인지를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성과 모성을 함께 배워가며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게 하시는 것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한번 맺은 결혼 생활을 끝까지 이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많은 이유들로 말미암아 그들은 혼인에서 맺은 언약을 파괴하고 가정을 깨뜨리게 됩니다. 이혼이란 법적으로 부부가 혼인관계를 청산하고 서로를 향한 의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를 통해 가정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자라온 삶과 배경과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영혼의 결합을 토대로 인격적인 연합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혼 전의 사랑이 마치 낙조가 지는 바닷가에서 둘이 함께 손을 잡고 마주 바라보는 것과 같다면 결혼 후의 사랑은 작은 배를 타고 황혼이 지는 파도를 노 저어 어떤 목적지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생활의 지속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깨어짐이 필요하고 상대방을 용납하고 자기를 꺾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은 가정에서 한 두 명의 자녀만 낳아 기르고 성장의 과정에서 자기를 꺾고 희생하는 훈련이 없는 가운데에 어른으로 자라게 되고 똑같은 방식으로 자란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한순간에 마음에 꽂혀서 서로 좋아는 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육욕적인 사랑입니다. 그들이 삶이라고 하는 실제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갈등에 부딪혔을 때 서로에게 자기를 꺾고 양보하는 깨어짐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얼마 전에 우리 아들을 불러서 분명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너는 결혼하면 나와 같이 살아야한다.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자매에겐 눈길도 주지마라. 너희 둘이 아주 훌륭하면 3년만 살고 성적이 별로 좋지 않으면 5년을 같이 살아야한다.” 아마 굉장히 힘든 일이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남을 이해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모시고 하는 것이 속에서 힘들겠지만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지혜와 깨달음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II. 이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
오늘날 같은 시대에 결혼생활은 최소한 3가지 없이는 행복한 지속이 불가능합니다. 가장 첫 번째는 인간의 도리를 아는 제대로 된 부모를 만나서 그 부모에게 참가정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가르침을 받고 모범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런 부모 밑에 태어났으면 그냥 기어 다니면서 부모님을 업고 다니세요. 둘째로는 그것이 어렵다면 좋은 목회자를 만나서 가정의 도리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모범을 보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가끔 부부가 싸운 후에 목회자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이 싸우다 해결이 안 되니까 누가 옳은지 목사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못 꺾고 아내는 남편을 못 꺾어도 목회자에게 꺾어지면 가정이 통제가 됩니다. 그러면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 가면서 맞춰져 갑니다. 세 번째는 끊임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특히 진리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가정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해하면서 그 지식의 토대위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와 사랑, 이것이 있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가정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함께 살던 부부가 이혼을 결심하게 될 때에는 우선 서로를 향한 사랑이 충분히 고갈된 이후의 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사랑은 대부분 서로의 아름다움에 이끌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언제나 서로에게 실망하고 또 서로를 실망시키기가 십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모든 사람들이 상대방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사랑만으로는 이 결혼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기보다 하나님께 거역한 인간의 죄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다음에 제일 먼저 깨뜨려진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였고 두 번째 깨뜨려진 것이 아내와 남편 사이의 관계였고 세 번째 깨뜨려진 것인 자녀와 부모와의 관계였고 네 번째 깨뜨려진 것이 형제들과의 관계였습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부부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결혼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가정을 꿈꾸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 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떠난 어둠 속에서의 행복이고 그 행복은 슬픔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서로에게 실망하게도 하시고 결혼하기 전 현혹되었던 상대방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상실 때문에 고통을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콩 꺼풀이 씌우면 뭐든지 올바로 못 봅니다. 하나님은 섭리 속에서 이런 과정을 허락하시는데 이것은 서로에게 실망하고 낙심하므로 사랑을 저버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부부의 사랑을 서로의 아름다움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이루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결국은 결혼하기 전에 혼자 주님을 믿을 때에는 제법 자기가 성화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장 사랑한다고 믿었던 인간과 함께 결혼해서 한 집에 살고 보니 자기가 얼마나 막 되 먹은 인간이고 한 사람과 살기에 준비 되지 않은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결혼의 모든 생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늘 다스리십니다. 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므로 그들을 다스리시지만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은혜로서 그 다스리심을 구체화해 나가십니다.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크고 작은 은혜를 받지만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에 이혼을 결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커다란 죄이며 이후에 도래하게 될 결과들은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청산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이혼하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주신 객관적인 가정이라는 가치보다 자신의 행복을 더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거슬리는 인간의 강력한 의지는 바로 이런데서 나타납니다. 자신의 몸으로 낳은 자녀들의 행복을 애타하는 것이 부모의 일반적인 마음이지만 어느 한계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고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든 이혼을 아주 쉽게 결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혼은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교회의 영적인 결합을 찢는 것이며 부부의 연합을 해체하는 것이고 자녀들과의 행복과 평안을 깨뜨리고 그들의 마음속에 회복되기 어려운 고통과 상처를 주어 일평생 멍에를 지고 살아가게 하는 잔인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행한 자신도 이혼을 결행하는 것은 순간이지만 이후에 끊임없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을 행한 자기 자신과 맞닥뜨려야 되고 이것이 하나의 짐이 되어 일평생 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III. 이혼의 십자가를 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사정에서 이미 이혼을 해버린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혼을 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여러분들은 견딜 수 없으리만큼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지났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인생과 영혼의 어둡고 긴 밤을 고통 속에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배우자를 사랑하므로 한 가정을 이룰 때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깨어지고 이혼한 상태에서 살게 됩니다.
현실적인 고통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에는 더 큰 십자가가 남았습니다. 그나마 결혼생활을 유지할 때는 대두되지 않았던 현실적인 문제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신앙을 추스르는 문제, 깨어져버린 자녀들과의 관계, 그들의 불확실한 앞날, 현실적인 경제생활 등등 만만치 않은 십자가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이혼 후에 십자가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이니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좇아 살적에는 기뻐하시고 온화하신 하나님을 뵈옵지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에는 가슴 아파하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 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다.”(시139:7-10)라고 말입니다. 남편은 버렸고 자식들도 결별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버릴 수 없겠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혼한 후에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만약에 그 이혼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빨리 더 이상 미련을 버리고 다음과 같은 지침으로 자기를 돌아봄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A.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이혼을 결행한 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혹시 그 이혼이 성경적으로 허락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당연히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게 더 큰 사랑, 더 십자가를 지는 희생, 남편과 아내를 향한 전적인 자기 포기가 있었더라면 이혼을 피할 수 있을 것이었다고 생각하며 그 모든 이혼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느껴질 때까지 자기를 성찰하며 참회하여야 합니다. 헤어진 배우자에 대한 미움과 독한 심정이 남아있다면 아직 하나님 앞에 자신을 충분히 참회한 것이 아니니 그 미움의 마음도 완전히 버리도록 더욱 철저하게 자기를 하나님 앞에 뉘우쳐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막힌 관계를 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진실한 참회와 회개의 정신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죄의 확신을 주시고 다시 은혜를 회복시켜 살게 하시기까지 이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이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자기의 죄를 충분히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사모하기 보다는 새로운 결혼을 꿈꾸는 것은 두 번째 이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부부를 맺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맺어주신 그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여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한 사람 자신이 바뀌지 않았는데 그가 꿈꾸는 새로운 삶이 그에게 어떤 인생을 보장하겠습니까?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결혼한, 오래 동안 함께 살아온 배우자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 남편과 아내가 누구를 만나면 만족을 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길이 최선의 길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길도 아니었지만 진실한 참회로 돌이키는 과정을 통해 결혼생활을 그렇게 슬프게 끝낼 수밖에 없었던 마음과 영혼의 경향성은 바뀔 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은 아니었지만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또 다른 길을 보이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B. 교회 앞에서
교회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돌이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혼하는 것을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자에게는 개인적인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도 복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무지하기 때문에 이런 이혼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 5:31-33)고 말입니다. 부부는 부부로 만나 영혼이 결합을 이루기 전에 각자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영혼이었습니다. 그 연합을 토대로 부부의 결합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 부부의 영적인 결합이 깨어지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고통을 교회에 안겨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영적인 차원에서만 발견될 뿐 아니라 육신의 차원 속에서도 발생됩니다.
한 교회에서 한 목자에게 주례를 받아 결혼하고 이혼한 부부가 여전히 그 교회에서 그 목자에게 돌봄을 받으며 사랑하는 지체로 신앙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목회자와 단 한 번의 상담도 없이 이혼을 결행하는 사람들 마음에 과연 복음이 있는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가정이 찢어지므로 심각한 상처를 받았고 그것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에게 비쳐지는 가정의 올바른 도리의 왜곡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깨어지는 가정을 바라보며 자라는 어린 세대들 마음속에 형성되는 왜곡된 가정의 상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자녀들에게 가장 훌륭한 일은 이혼에 대해서는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환경 속에서 보호받으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녀들은 이혼을 꿈꾸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에 의해 사랑받고 보호받고 섬겨야 할 몸임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영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심각하게 상처 입히고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상처 낸 자신의 잘못을 깊이 돌아보고 뉘우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며 남은 생애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하지 않고 그것을 싸매고 고치고 보양하는 일에 이바지 하도록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이전에 일어났던 가슴 아픈 이혼을 통해 오히려 이후의 삶은 교회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더욱 온전한 삶을 살게 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C. 깨어진 가정 앞에서
자녀들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언젠가 나의 책을 읽은 독자 중 한사람이 이혼한 지체로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책을 이혼하기 전에 읽었더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가정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혼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자매는 정신병이 될 정도로 남편에게 시달렸고 폭언과 폭력 외도로 인해서 누가 보더라도 성경적으로도 이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의 빛이 없었을 때에는 몰랐지만 지식의 빛을 받고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경험하고 나니까 사실 자신의 이혼이 고통 때문에 이혼한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이 모자랐기 때문에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혼을 했지만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는 후회하는 지체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이혼한 후에 삶이 주는 고달픔 때문에 생겨난 후회만은 아닙니다. 은혜가 고갈 상태에서 그 일을 결심하고 행했는데 은혜가 회복되고 나니까 자신의 아픔보다는 깨어진 가정을 바라보시면서 아파하시는 주님의 마음, 교회의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은혜가 많은 여성과 남성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에 자녀들과 가정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정은 형식을 지키고 있다고 해서 가정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내용도 함께 들어있어야 하겠죠? 폭언과 폭력,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자기를 꺾지 않고 울컥울컥 마음이 솟아오르는 대로 행동을 하며 아내와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이고 그 위에 돌이키기 힘든 죄를 계속 범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시간 무릎을 꿇어도 결코 기도할 수 없을 것이고 진리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 있어도 그것은 마음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져 버려 심령에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태도를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밉고 남편은 용납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부부의 사랑이 아무리 중요하고 오롯한 것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안목에서 보면 모두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각기 아픔을 갖고 있지만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이혼이라는 길을 선택하지만 노년이 되면 정욕도 지나가고 세상도 지나갑니다. 그 속에서 자녀를 희생시키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며 가정을 깨뜨린 사람들이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은 무슨 죄가 있죠? 그렇게 이혼을 하고 자녀들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고 정신적인 고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제 그 자녀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끝없는 긴 터널과 같은 고통스런 길을 걸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화목하지 못해서 가정이 깨뜨려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남들은 모르지만 자신이 헤어진 그 부모의 나이보다 훨씬 오랜 인생을 살았는데도 가슴을 부여안고 고통스러워하는 경우는 당해본 당사자들만이 알고 부모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사랑해서 낳은 자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혼은 자녀들과의 철저히 깨뜨려진 관계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복과 안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신의 행복을 또 다시 꿈꾸며 두 번, 세 번째 결혼을 꿈꾼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인간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오래 참을 수 없었지만 아내는 그렇게 오래도록 인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때문에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 큰 은혜를 받았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우리의 마음이 녹을 때 우리는 즉시 내가 이 큰 사랑을 하나님 앞에 입었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여야 할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 큰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후에는 주님이 나에게 어느 곳에 가서 주님을 섬기라고 해도 기꺼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존귀 영광과 모든 권세는 주님께 돌려드리고 멸시와 모욕이 있는 그 길은 자신이 걸어가서 주님이 기쁨을 받으실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 있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 장렬하게 죽은 많은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온 몸을 던져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말하고 싶었고 자신의 가슴 속에 역사하고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지 않고 묻어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 사랑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랬습니다. 불신 형제와 결혼하는 많은 자매들의 공통된 고백이 ‘선교하는 마음으로 시집을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 선교는 아무런 자신의 이득이 없이 영혼 자체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만 출발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길처럼 보여도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자녀들의 행복을 지키는 그 일은 매우 어렵지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으면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생활에서 오는 그 많은 갈등과 괴로움을 혼자 삭히고 있다면 언젠가는 그것은 댐이 무너지듯이 터져 이혼을 불러올 것입니다. 항상 마음 깊이 ‘내가 내 아내와는 헤어질 수 있어도 하나님은 버릴 수 없고 내가 내 남편을 떠나서는 살 수 있어도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라고 생각하면 가정에서 당하게 되는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앞에서 가정의 많은 갈등과 고통을 기도로 녹여내며 주님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같이 완악한 인간을 향해 오래 참으신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의 인내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혼을 한 사람들, 자녀들과의 이별이 현실화 되어 있는 사람들,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가장 어려운 길처럼 보여도 나는 이혼한 형제자매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다시 그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밖에서의 인간적인 결혼에 대한 행복의 기대를 버리고 한 알의 밀알이 되십시오. 배우자의 마음이 식고 자녀들의 마음이 식어 결합을 원하지 않는다면 인내와 사랑을 가지고 용서를 빌며 하나님 앞에 기회를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이혼한 것 자체를 슬퍼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남편, 자기를 위해 봉사할 아내로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비참한 영혼이라고 생각하고 가정으로 돌아가십시오. 그 일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거기서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진토에까지 낮아지도록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길을 돌아가는 길처럼 보여도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그것은 차선의 길입니다.
D. 깨어진 자신을 향하여
결혼 생활의 상처를 입고 깨어진 자신에 대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가 있으셔서 가정을 깨뜨린 여러분들을 충분히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인도가운데서 두 번째 인생을 출발하게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인도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나는 전적으로 부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피할 수 없이 이혼했다면 두 번 세 번 다시 결혼하므로 자기를 더럽히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세속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이혼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앞에서 예전에는 이 세상의 남편, 세상의 아내를 바라보고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만 바쳐진 자신의 순전한 신부로서 순전한 동정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섬김을 위해 사도 바울이 충고합니다.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따라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구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으리라.”(고전7:25-26)
가정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면 변하지 않은 신앙을 붙들고 일생동안 주님을 섬기며 사십시오. 세상에서 남편은 나를 버리고 실망시켰으나 세상 아내는 날 배신하고 가정을 버렸지만 하늘 남편이시고 우리의 사랑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실망시키지도 않고 떠나지도 아니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오직 그 분 한분만을 평생 마음에 모시며 하나님 나라의 한 모퉁이를 섬기며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자녀들과의 관계는 유지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제 친구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고 군인이었습니다. 남자아이들 3명인지 4명이었는데 그만 아내가 바람을 피우게 되었고 가정은 풍비박산이 되고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당연히 재혼을 했을 텐데 이 아버지는 일평생을 혼자 사셨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을 다 키워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자녀들이 그 아버지에 대해서도 결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융통성이 없고 이해심이 없어 엄마가 가정을 버리고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을 다 돌아보아도 그런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예 이분이 연금을 가지고 생활하면서 가사에 헌신해서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서 보냈습니다. 인생을 살고 나이가 들면서 자녀들이 아버지가 한 그 일을 자기네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 집 가까이서 살았는데 한 번도 아침에 아들들이 나와서 부엌에서 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말씀이 “엄마가 없다고 해서 너희들이 엄마처럼 부엌에 드나드는 것을 이 아버지는 볼 수 없다.” 하시면서 철저히 헌신했습니다. 성장한 자녀들 마음속에 있는 존경심이라고 하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그런 사람도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이혼을 했으면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며 이제 남은 생애는 하나님 한 분을 진실하게 사랑하며 섬기는 그런 생애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자녀들과 관계는 유지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 아이들에게 여러분들의 이혼이 소화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 아이들도 세월이 지나고 이 풍파 많은 세상에서 고통과 인생의 끝없는 시련을 알게 된다면 부모인 여러분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며 큰 효도는 기대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시련의 고통을 십자가 삼아서 사랑의 하나님께 피했던 부모인 여러분들의 신앙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때 그들에게 씻기 힘든 고통의 상처를 이혼을 통해 주었지만 남은 생애는 마음을 다해 그 자녀들을 더 사랑하고 비록 깨어진 가정이지만 참다운 신앙의 도를 가르치기를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자식들은 그러한 부모를 통해서 신앙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요?
나다니엘 호돈의 주홍글씨라는 소설을 보면 청교도 시대에 간음을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음을 한 여자들은 반드시 앞에 Adultery, 음란함이라고 하는 그 머리글자인 A를 주홍글자로 가슴에 새기고 다녀야 하는 종교적 관습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보면서 더러운 여자라고 욕을 하고 멸시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온 마음을 다해서 신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그들을 섬기므로 어느 덧 사람들에게 그 여자의 가슴에 붙인 A는 Adultery의 머리글자로서 A가 아니라 천사라고 하는 Angel의 첫 머리글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IV. 결론과 적용
짧은 인생길인데 사연은 인생의 길이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시련들을 동반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항상 순풍에 돛 단 것처럼 항해하는 것도 아니고 끝없이 푸른 잔디가 펼쳐진 아름다운 벌판을 걷는 것도 아닙니다. 끊임없는 자기 밖의 세계의 환경과 싸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거슬리려는 자기 안에 있는 본성과 다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한순간이라도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넉넉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만에 빠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우리를 낮추시고 당신에게 돌이키게 하심으로서 더 많은 죄벌의 길을 가지 않도록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여러분들이 비록 이혼했다고 할지라도 그 한 번의 실패 때문에 어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남편과 아내와 결별하고 자녀들에게 그 큰 이혼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사랑하사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여러분들의 죄악이 취소할 수 있겠습니까? 이혼의 십자가는 벗어버릴 수 없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십니다.
탕자가 집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몰랐지만 타락하고 난 후에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처럼 아무도 없이 어둠 속에서 헤매었던 수많은 날들, 은혜의 말씀의 빛을 받고 후회해도 버릴 수 없는 과거 때문에 아파했던 여러분들의 많은 눈물 속에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신 분인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가정을 깨뜨린 자라고 비난하고 양심은 끊임없이 여러분들을 송사할지라도 주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뉘우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모든 사람 가까이 계십니다. 한때는 창녀요, 기생이었던 그 여자도 주님을 만나고 그렇게 회개하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어디든지 이 여자가 행한 그 일이 기념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더 깊은 영혼의 침체에 빠지지 않는 지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후회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뉘우칠지언정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인해서 슬픔과 시름에 잠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눈물을 씻고 하나님 한 분과 결혼하고 그 분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내게 있는 이혼의 십자가를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네 남편은 나를 버렸고 내 아내는 나를 배신했으나 돌아가길 원해도 더 이상 돌아갈 수 없게 그 길이 막혔지만 하나님은 심지어 당신을 버리고 가정을 버릴 때에도 일평생 내 옆에 계셔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제는 예전의 남편 때문에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접고 아내 때문에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던 힘겨운 날들을 접고 주님 한분만을 마음껏 섬기며 살아가는 기회로 여러분들의 이혼을 이용하십시오.
이혼한 지체들을 바라보는 모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합니다. 그들을 죄인처럼 보지 마십시오. 이혼했기 때문에 저 인간은 매우 특별한 인간일 것이라는 눈초리를 보내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인데 여러분들은 더 큰 은혜가 여러분들을 붙들었기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혼한 사람들이 여러분보다 덜 주님을 사랑한다고 주제넘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들을 정죄하므로 두 번 죄짓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하고 긍휼히 여겨도 일평생 씻을 수 없는 이혼의 십자가를 가슴에 새겨버렸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매일 밤마다 자기가 이혼을 한 사람이라는 자기 자신과 직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헤맨 그 많은 아픈 날들을 고통스런 사연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으며 또 누구에게 그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된 일이지만 그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고 이미 일어난 일이었고 이제라도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 주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하니 살기를 원하니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하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이 내미는 한 손을 붙들어 일으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이혼을 하고 돌이킬 수없는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내가 말합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고통스런 인생의 날들은 속히 지나갑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대들을 버렸어도 주님은 여전히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어둠 속에 흘린 수많은 눈물과 싸워야 했던 인간적인 악함, 사랑하는 자녀들과 생이별이 가져온 견디기 힘든 고통, 양심의 가책으로 잠 못 이룬 수많은 날들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주님은 모두 보셨습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가책에 시달리며 괴로워하지 말고 복음 안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새로운 결혼에 소망을 품지 말고 없는 남편과 아내를 꿈꾸지 말고 지금 그렇게 불변하는 사랑으로 여러분 곁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 한분을 깊이 사랑하고 육체로는 이미 한 남자와 결혼하고 아내와 연합하여 순결을 잃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분과 결혼하여 거룩한 처녀성 혹은 동정성을 일평생 간직하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사십시오. 가슴 아팠던 과거에 많은 날들은 가슴에 접고 하나님 한분 사랑에 깊이 만족하며 결혼한 사람들은 결코 꿈꿀 수 없는 아무 곳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 속에서 한때는 마음 아프게 했던 주님을 한때는 찢었던 교회를 한때는 상처 주었던 자녀들을 영혼들을 깊이 사랑하며 잠시 머무는 이 세상, 바람처럼 살아가는 세월들을 인내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이혼했어도 주님은 항상 여러분 곁에 계실 것이며 저도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 (2008/03/04,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2 (2008/05/07,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3 (2008/05/1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4 (2008/05/1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5 (2008/05/1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6 (2008/05/21,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7 (2008/05/28,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8 (2008/06/01,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9 (2008/06/01, 주일오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0 (2008/06/04, 수요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1 (2008/06/08, 주일오전예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가정 12 (2008/06/08, 주일오후예배)
12.형제의 화해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창 33:4).
사실 이 장면은 원한 맺혔던 형제가 화해하는 가장 극적인 장면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다시피 야곱과 애서는 쌍둥이로 태어났고 그 이후에 야곱과 애서의 생애는 갈등의 생애였습니다. 아버지는 에서를,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습니다. 이렇게 편애속에서 자라면서 야곱은 항상 형이 되지 못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혈기이고 어떻게 보면 약속의 집안에서 장자가 갖는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워한 믿음이기도 하였겠지만 어쨎든 이 야곱과 에서는 일평생 갈등관계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마지막 죽기전에 비는 축복은 족장으로서 족장의 대를 이을 자에게 베풀어 주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 후에 나뉘어져서 성취될 그러한 직임을 한꺼번에 수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큰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삭에게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때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다는것을 보여 주셨지만 이삭은 인간의 정으로 에서를 훨씬 사랑 했습니다. 남자답게 씩씩하게 사냥을 하고 그 고기도 요리해 오는 아마 그런것 때문에 에서를 더 사랑했을지 모릅니다. 야곱과 어머니 리브가는 이렇게 에서를 마지막으로 축복하려고 하는 계획을 알고 에서처럼 변장하고 들어가 눈이 어두운 이삭에게서 큰 축복을 빼앗게 됩니다. 이후로 에서는 복수의 칼을 갈게 되고 야곱은 메소포타미야로 도망가서 거기에서 긴 세월을 보내며 결혼도 하고 많은 처자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풀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형과의 화해의 문제였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야하겠고 그러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자니 거기에는 원한 맺힌 형이 있었고 형은 지금도 여전히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400명이나 되는 무사를 거느리고 와서 자기를 보복하려는 참이었습니다. 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원한 맺힌 사건이었고 장자로서의 모든 축복을 송두리째 도둑질을 당한 그 배신감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것 같습니다. 그런 갈등관계에 있던 형제가 어떻게 이렇게 뜨겁게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기며 입 맞추고 피차 눈물을 흘리며 울 정도로 그렇게 좋은 관계가, 극적인 관계가 이루어 진것이 오늘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모 살아 생전에 좋은 음식과 의복을 해주고 넉넉한 물질을 공급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이가 들수록 가장 큰 효도는 자기의 자식들이 편안하게 함께 우애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아는 한분은 마지막에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재산이 그렇게 많은 분은 아니었는데 가족들을 불러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분이었는데 큰 유산은 아니지만 유산을 남기고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마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유산을 조금 남기고 죽는데 이것을 형제들이 나누어 가지지 말고 재산을 너희 어머니 계실때에는 어머니 사실 수 있게 하고 나머지 남는 것들은 땅이고 뭐고 다 정리를 해서 공동 명의로 해라. 이것이 재산이 얼마이고 간에 이것은 너희중에 누구도 갖지 말고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이 있으면 이것은 너희들이 함께 우애를 다지는 일에 사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일년에 두 번씩 모이는 날짜까지 지정해주고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아버지의 그 뜻을 받들어서 형제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모이는데 형제들이 결혼 안 했을때는 대수롭지 않지만 결혼을 하면 부부가 와야하는데 애들을 낳게되면 아이들까지 오니까 사실은 유산이 필요 하겠죠 그래야 수련회라도 하니까... 그래서 그날이면 무슨일이 있어도 온 집안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모여서 잔치를 하기도 하고 하는데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영향력도 있었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찢어서 가져라 하면 싸움질이나 하고 그럴것을 아니까 그렇게 놓고 그것을 가지고 그 집안에서 태어나는 자손들은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장학금을 주는 것입니다. 굉장히 본 받을 만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어쨎든 그 재산 때문에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고등학교, 대학교 들어가면 장학금이 여기서 나오니까 그것이라도 타러 갈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서로 얼굴을 보고 우리 할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으로 우리가 공부를 했다 그래서 우리도 밑에서 태어나는 육촌이고 팔촌이고 돕자 해서 그런 집안을 꿈꾸면서 아버지가 지혜롭게 그렇게 하고 죽은 것입니다.
요즘은 부모 자식간에도 맞보는 사회이니, 부부간에도 맞보는 사회이니 형제 관계야 뭐 그렇게 대단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작은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형제와의 관계에 금이 가고 평생 안보면서 사는 사람들이 다반사인 시대에 우리가 이런 성경 본문을 들추면서 이렇게 가족의 평화, 동기간의 화목을 이야기하는 자체가 실의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관계에서 오는 만족에서 오는 행복 아니겠습니까? 내가 비록 돈 없고 이 세상에서는 실패하고 그리고 이세상에서 사람이 보호할 만한 아무것도 없어서 절망과 어두움속을 헤매다가 예수 믿고 그렇게 행복하고 기쁜 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예전에는 없던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이룩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관계가 만들어지게 되자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행복해서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받고 또 남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느끼는 인격적인 관계의 행복과 기쁨도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상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남녀로서 하나님의 부성과 모성을 닮으며 연합을 이루면서 그런 만족을 누리게 되고 부모와 자식간에도 동기간에도 그런 관계를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만족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기뻐하고 좋아하고 그 관계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를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이렇게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행복을 사람속의 관계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것이 덕된 생활이다 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행복한 구두쇠는 친구를 아끼는 사람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 그것이 친구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부모에게서 같이 태어난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면서 살아가는 그것보다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 형제가 믿음 안에서 형제까지 함께 되어서 그래서 육신으로는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사랑을 나누고 영적으로는 한 하나님안에서 다시 태어나 형제의 관계를 이루면 그들이 우애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땅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이바지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보다 행복하고 좋은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에서의 입장에서는 사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인간이 이 동생이었습니다. 돈을 조금 뺏어가고 명예를 더럽힌 것이 아니라 장자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기업을 한꺼번에 도둑질하여 갔으니 죽이고 싶도록 미웠겠지요? 그래서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올때도 이미 벌써 살기가 등등하였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환영을 했더라면 왜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거느리고 왔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사람이 이렇게 에서가 동생을 향해 변화된 태도를 갖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바로 32장에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야뽀강가에서의 기도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 다 인도하여서 시내를 건너고 소유도 건너고 야곱은 아직 건너가지 못하고 홀로 남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리고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날 가망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형은 결국은 자기들을 공격할 것이고 그러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는 깊은 고통과 두려움이 밀려 오는 것입니다. 변명을 할 수 있다면 머리 좋은 사람이니까 얼마나 달콤한 말로 변명을 했겠습니까마는 아무리 머리 좋은 야곱이라도 변명을 해서 형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홀로 남아 앉아 있다가 거기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함께 씨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야곱의 믿음이라고 보지만 그러나 호세아서에 보면 이것은 인간적인 혈기 였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천사와 겨루어서 이겼지만 그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내려 치자 그 환도뼈가 위골이 되면서 다리를 절뚝거리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간절히 매달리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노라고 매달렸는데 이때 통곡하였다고 호세아서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잔재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도저히 자기의 재능으로는 넘을 수 없는 인생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고 자기가 깨뜨려지자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순간에 에서의 마음을 움직여 놓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자기의 축복을 빼앗고 도망간 야곱이 큰 부자가 되어 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앞에 보니 그는 자기 앞에 나와서 몸을 일곱 번이나 땅에 굽혀서 마치 신하가 왕에게 예우 하듯이 그렇게 절을 하는 모습을 보니 밤새도록 자지도 못했고 긴 여행길이었느니 얼굴은 푸석푸석하였을 것이고 거기에다 사연도 모르는 이 에서가 보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그렇게 걸어오는 그 처량한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록 그 축복을 도적질 당했지만 자기에게는 아직까지 실력이 있고 400명이나 더 되는 무사를 거느리고 올 수 있었을 정도로 이렇게 힘이 있는데 그렇게 먼 길을 떠나 결국은 부모도 못 보고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와서 마지막에 돌아온 야곱의 그 비굴한 경배와 절뚝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한순간 에서의 마음이 녹는 일들이 일어 났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달려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달려와서 그를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입을 맞춘 후에 울었습니다. 에서도 야곱도 그 강가에서 펑펑 울면서 화해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에서와 야곱의 사이에 일어난 화해의 사건이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된 사건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간의 우애는 어느 한쪽이 하나님앞에 깊이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마음이 녹게 되면 형제와의 관계는 회복되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지만 작은 경제적인 이익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형제와 등지고 사는 그 사람이 주일날 와서 드리는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상납이 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화목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형제들이 서로 척지고 살아가는 이면에는 그 부인들이 서로 불화에 이바지 합니다. 그러니 그 잘못은 또 얼마나 큰 것입니까? 화평케 하는 사람들은 갈등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서로 화해 시키고 화목케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도 작은 이익 때문에 형제간에 우애를 상하고 남편이 형제와 갈등을 이룰 때 옆에서 부채질을 하여 그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하고 안보고 살게 하니 그 인간의 졸렬함과 그 인격의 일천함을 우리가 어떻게 말로 다 하겠습니까? 그렇게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갈등과 사연이 많은 인생길에서 에서가 원한을 그 오랜 세월동안 품었었지만 그러나 야곱을 만나면서 그 불쌍한 모습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자 화해가 이루어 진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그렇게 따지고 그리고 출원하고, 승패를 가르고, 잘잘못을 가리고 하면서 그렇게 형제 관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돌아가면 그곳에 있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자녀들, 동기간들 모든 사람들이 그 가정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한때는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변함없이 가정이 거기에 있으면 후일 자신의 생각이 그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은 형제와 우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인간의 이치와 생각만을 따지면 굉장히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용납해 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한쪽이 주님을 안 믿는 사람일 때 그 형제들이 우애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사실 그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그물을 놓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끊임없이 손해를 보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속에서 그래서 가정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께 그리고 이땅에 있는 육신의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으로 보고 동기간으로 보면 그 의무에 충실하지 않고 요구만을 하는 형이나 동생, 언니, 누나 모두 다 갈등을 일으키며 살 수밖에 없는 관계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곳이 복음을 전하러 나온 전도지 라고 생각하면 끊임없이 희생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속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고 나눠주는 사람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잃어버려도 얻은 것이고 또 그렇게 얻음으로 말미암아 영혼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공을 드리는데 이렇게 주님을 믿고 너희는 가정에서 빛이 되어라 하고 부르신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에서와 야곱과 같이 수십년 원한에 맺힌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화해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더 그렇게 화해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땅에 사는 동안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기도할 때, 말씀에 접할 때 주시는 많은 은혜의 자원을 어디에 사용하려고 합니까? 그렇게 형제의 마음을 돌리고 형제와 함께 우애하며 살아가는 그런 가정을 이루는 일에 자원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되는 가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