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눅 23:26-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눈물이 많았었던 때가 사실은 기뻤던 때였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과 눈물이 있었을 때에 그것은 늘 기쁨의 눈물만은 아니고 고통의 눈물이기는 하였지만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신령한 기쁨이 솟아오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II. 십자가와 하나님의 지혜
A. 하나님의 화목방법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을 때에 눈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들의 예수를 따르는 태도는 오늘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죄 지은 사람을 형벌하는 형 집행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형 당하기 전 먼저 예수님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판결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앞에 보면 예수님이 빌라도에게서 재판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법을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더라도 이 과정은 매우 불법한 과정이었습니다.
우선 재판은 죄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심문하여 범죄에 적합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경계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부터 죄가 없는 분이었고, 거짓으로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들의 증언도 서로 충돌을 하여 합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를 받으셨기 때문에 잘못된 재판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재판장도 이 피고가 무죄하다는 것을 확신하였는데도 사형 언도를 내렸다는 점에서 잘못된 재판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두려움을 느끼고,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빌라도의 뜰을 에워싸고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기세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소리치며 요구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자신의 출세 가도에, 신변에 나쁜 일이 생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를 희생시켰던 것입니다. 민란을 일으키고 살해한 바라바는 놓아주고 평생 불쌍한 자들을 섬기고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이 사람들의 요구에 굴복한 재판이었기 때문에 이 재판은 처음부터 원인 무효였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예수님께서는 이 불법한 재판의 결과를 그대로 담당하시려는 듯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묵묵히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평생의 가르침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정의였습니다. 그렇게 가르치시던 예수님이 왜 자신은 불법한 재판의 결과에 승복하시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죽음의 길로 가시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이 정의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십자가에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숨겨진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들과 다시 화목을 이루시는 방법에 대한 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류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이 모든 세계를 다스려 창조의 목적에 맞게끔 통치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자기를 지으신 주 하나님을 배반하였고, 그 언약을 파기함으로 죄가 강물처럼 이 세상에 밀려들어오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는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타락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에게 죄를 지은 인간은 반드시 형벌하셔야 했고, 그 형벌의 크기는 죄의 크기에 비례하여야 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망가뜨리고 스스로 죄에 빠진 이 인간의 죄의 크기는 무한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무한한 형벌을 감당해야 했고, 그것은 곧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형벌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곧바로 파멸시켜 버리신다면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도 위배되는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고자 하는 정의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용서하셔서 다시 관계를 계속하고자 하시는 사랑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심판하는 정의와 용서하는 사랑이 십자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시편 85편 10절에는 정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춘다고 시인이 노래하였는데 이 정의와 화평의 입맞춤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형벌을 받고 멸망하심으로써 심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채워졌고, 그로 말미암아서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다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심으로써 용서하시는 사랑도 충족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구원의 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이 불법한 사람들의 잘못된 재판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지혜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불법한 자들의 이 잘못된 재판의 결과는 도구일 뿐이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시는 것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 십자가의 의미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기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제자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었던 때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그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었고,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구속 사건의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마지막 때가 가까워 왔을 때 드러내 놓고 인자가 이 세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형벌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셔야 하신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치셨지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까지는 십자가 사건을 알 수 없었고, 부활의 사건도 따라서 이해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은 성령 세례를 통하여 극복이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놀라운 이해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B. 십자가와 부활의 모순
사울은 전도가 촉망되는 유대 종교지도자의 길을 걷던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당시 보편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로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요구를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이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은 정교한 종교적 음모의 결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방법으로 죽으셨다면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가르침이 터져 나왔을 때 사람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죽였다고 비난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참된 선지자들을 수없이 피 흘려 죽인 백성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후일의 문제를 제거하기 위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예수를 죽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려 죽이기까지 요구하도록 구체적으로 사주하였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는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 모든 유대인들 마음속에 예수가 죽은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이요, 그렇게 죽었으니 그는 절대로 다시 부활할 수 없고 부활했다는 소식이 전파되었다면 그것은 거짓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이 확신을 가지고 허망한 풍설을 퍼트려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습니다. 신비하고 찬란한 광채로 말미암아 그는 눈이 멀었고 예수님의 음성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여 내가 어찌하여야 하리이까?” 예수 그리스도와의 대화도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그것은 평범한 대화가 아니라 위대하신 부활의 주 앞에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이루어진 대화였습니다.
예수 부활에 대한 소식이 남으로부터 들려왔다면 부인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진실이라고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에게 잠시 지성적인 커다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분이 예수라면 어떻게 다시 하나님이 부활시키실 수 있을까? 구약의 전통에서 모세는 유대인들이 부활하였다고 그래서 하나님께 승천하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갔고, 엘리야는 병거타고 산 채로 하나님께 올라갔습니다. 이런 모세와 에녹, 엘리야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특별히 인정받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였거나 죽음을 보지 않는 큰 은총을 입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죽음에서 살아난 것이니 하나님 이외에는 그 일을 하실 수 없고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특별히 사랑받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면 저주하실 수가 없었고, 저주하셔야 했던 자면 인정하실 수 없을 텐데 저주받으신 것도 사실이었고, 다시 사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사도 바울의 어두운 지성을 찢으며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당신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가 아니라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한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보면 오히려 예수님이 순종함으로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부활하셨다는 자연스러운 신학적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이 사도 바울의 사상 속에 들어오게 되었고, 유대주의의 편견에 물들었던 비늘들이 벗겨지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찬란하게 비춰왔던 것입니다. 이 빛으로 그는 성경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심지어 자연의 위대한 세계를 바라보는 모든 광채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로써 어두운 소경이었던 그는 이 모든 어두움을 벗어나 진리의 빛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와 교회와 인류와 세계에 대하여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금도 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이 떠올랐고, 이 순간 그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한다는 소명에 강력하게 붙들려 일평생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노예처럼 사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지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 유감을 표명하거나 도덕적으로 불신자보다 약간 나은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이거나 가풍에 따라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영적으로 밝히 깨달은 사람이고, 그래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때문에 다른 세계관과 다른 인생관을 갖게 된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대하여는 자기의 죄에 대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는 절대적인 의존의 믿음을 고백하고 그 분의 주되심 앞에 복종하며 살기로 다짐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한 지체로 영적으로 접붙여진 사람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신자답게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렇게 우리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가 있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게 되셨던 것입니다.
III. 십자가를 따른 두 무리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여러 번 넘어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 전날에도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 수고하셨고, 제자들에게 목 메인 최후의 만찬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피를 흘리시기까지 혼신의 힘을 쏟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고,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가 모진 고초와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에게로 끌려가 재판을 받으셨고, 다시 헤롯에게로 끌려가 모진 치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빌라도의 뜰에 끌려와 우리가 아까 생각한 그 재판의 모든 과정을 밟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초를 당하시고 지치셨고, 온몸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렬이 지체되는 것을 보다 못한 로마 병정들은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짊어지게 하고 예수를 따라오게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형벌에 처하게 되는 사람에 대한 두 가지 규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채찍에 맞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채찍을 연구한 어느 고고학자의 글에 보니 당시에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채찍이 아니라 아홉 가닥으로 되어 있는 채찍이었고, 그 끝에는 짐승의 뼈나 쇠붙이로 장식을 달아서 벗은 죄수의 몸을 후려치면 살점을 물고 후드득 뜯어지는 무서운 채찍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판을 받으신 후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셨고, 거기서 악한 로마 병정들에게 이 규례를 따라 무수히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옷을 벗기시고 채찍과 매를 맞으셨으며 그리고 예수님의 머리에는 굵은 가시 면류관이 눌려 씌워졌고, 채찍에 맞아 피로 물든 몸 위에는 붉은 보자기가 매달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에는 기다란 갈대가 들려져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을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던 자라고 비꼬아 희극 배우처럼 왕 모양을 흉내 내게 되어서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채찍에 맞으시고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 120kg에서 150kg은 족히 되었을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른 아침 십자가 행렬을 따랐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이유는 그날이 그때가 유월절로 유대인 최고의 명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일 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인 그 사람들에게 최대의 뉴스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물위를 걸어가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그 놀라운 능력으로 예수가 자신을 구원할 것인가, 혹은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인가 하는 것은 최대의 뉴스 거리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골고다 언덕으로 따라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A. “백성들”
그런데 오늘 누가는 그 사람들을 두 부류의 사람들로 정확하게 나누었습니다.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백성들이라는 사람은 뭐 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성경 34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누어 제비 뽑을 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백성들은 구경을 하기 위해 이 십자가를 따라 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라고 무엇을 하러 모인 무리들이 있었습니까?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상의 명백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판단할 때 이 백성들의 정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을 때에 이들 중 다수의 사람들이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노래하였고, 겉옷을 벗어 길거리에 깔며 예수 그리스도 가시는 길에 양탄자를 삼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병 고치는 광경을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에 그 물고기와 보리떡을 먹었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렬하게 환영하던 이 사람들은 며칠 만에 완전히 태도가 돌변하였고,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죽는지 구경하기 위해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렇게 위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차갑게 버린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를 원했고, 자기들이 바라는 메시야가 되어 주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뱃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일 때 그들은 예수께 감사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를 우두머리 삼아 로마와 싸워 승리해서 독립을 쟁취하기를 원했고, 다윗 왕국의 영광이 자기들의 때에 재건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주간에 계속해서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육적인 이스라엘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에 육적인 이스라엘은 이제 한 알의 밀알로서 썩고 있는 중이었고, 당신이 새싹으로서 태어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제 옛 왕국 이스라엘은 커다란 씨앗이 되기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썩고 문드러져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새로운 영적 왕국이 세워지는 것이었고, 이것은 다윗 왕과 같은 영광스러운 창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사랑으로 세워지는 나라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예수에게 실망했고, 예수를 향한 기대와 소망은 미움과 원망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기적도 보았고,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의 은택도 입었지만 자기들이 원하는 예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기를 포기하고 버림으로써 예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대의이거늘 오히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꿔 자기가 원하는 구주가 되게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세속화의 중요한 원인입니다. 세속화는 단지 타락이나 방탕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 될 그 자리에 사람이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세속주의인 것입니다.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 그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예수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몰지각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를 올바로 알지 못했고, 그분의 주되심 앞에 복종하는 은혜도 없기 때문에 한번 고백은 고백이고 삶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이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신비한 체험이나 커다란 은사, 지식의 비밀이나 혹은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헌신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백성들에게는 결코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냉담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백성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를 버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따름으로써 진정한 영생에 이를 수 있거늘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욕망에 복종시킴으로 자신들이 예수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구겨진 신앙은 분명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우리에게 남기고 싶으셨던 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B. “여인들”
이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이 여자들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멀리 갈릴리로부터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백성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칼빈의 지적과 같이 이 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나시면 부활하실 거라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자신의 죄를 대속해 주는 근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들에게는 그 믿음과 지식보다도 더 뛰어난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위대한 방언의 신비도 사랑과 견줄 수 없고, 비밀스런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식도 사랑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몸을 불사르도록 내어주는 탁월한 헌신도 사랑과는 견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비록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옳은 지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한 사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끼시던 제자들이 버리고 간 예수 그리스도를 위협을 무릅쓰고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게 만들었던 것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들은 다른 사람이 구경하면서 따라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행렬을 가슴을 치고 슬피 울지 않고는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백성들에게는 없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의 아픔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기의 아픔보다 더 크게 전달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당하거나 아픈 것보다는 자신이 고통을 당하거나 아픈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남의 짐을 대신 지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무한한 크기였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아들에게 짊어지게 하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탁월한 지식이 없고, 남들에게 내세울만한 재능이 모자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 아이처럼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탁월한 것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요?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여기 여자들이 울었다고 하였는데 희랍어 단어는 ‘에클라우센(ἒκλαυσεν)’인데 이는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통곡하는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된 체 십자가를 짊어지고 밀치듯이 성 밖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이 여자들은 흐느끼기 시작했고, 채찍에 맞으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 형장에 가까이 이르면 이를수록 이 여인들의 흐느낌은 피어린 통곡으로 변해갔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이 여자들로 하여금 가슴을 치며 울게 하였던 것입니다.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런 저런 모습으로 교회에서 섬기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의무를 감당한다고는 하지만 압도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 받는 사랑 때문에 우리가 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마음껏 통곡하고 눈물을 흘려본 것이 언제입니까?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설교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마른 눈을 가진 성도에게는 천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 아닐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이 여인들의 피어린 통곡은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동안 끝없이 이어졌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지금도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못 박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찬양)
망치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십자가도 치워지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울던 여자들도 집으로 돌아갔고, 백성들도 모두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십자가는 아직도 우리에게 우뚝 서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고, 가정에 있고, 이 세상 안에 있고, 이 나라 안에 있었고, 우리 직장 안에 있어서 예수가 여기에서 너희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기억하고 너희도 매일매일 나의 죽음을 짊어지고 이 십자가에 참여하는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것을 회피하고는 누구도 참된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없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명백하신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의무는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고 하나님은, 예수님은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해주셔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채워지지 않은 모든 것들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 십자가 사랑을 진정으로 터득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뭐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자기의 피를 아낌없이 쏟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드렸고, 제발 우리의 헌신을 받아달라고 주님께 울며 매달렸습니다.
(찬양)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에서 밀알로 썩게 하소서
고난 없이는 십자가도 알 수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인간을 최고로 삼는 자기중심적인 시대에는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위대한 대속의 공로가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한 찬양이 되도록 우리는 이 십자가의 도리를 묵상하고 적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아침을 기쁨으로 맞이하기까지 우리의 생애 내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으며 이번에는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며 살기로 다짐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그의 죽음을 본받아 그를 위해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리 자신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우리 주님은 아낌없이 부어주셔서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