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신약 성경 중 가장 위대한 서신서 중 하나인 로마서를 사도는 복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인데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선지자들에 의해서 오랜 세월동안 증언되어 오던 바였습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출생에 관해 먼저 언급합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고 말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와 영혼에 관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고 예수님의 영혼은 뭐 이렇게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이 의미는 성결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영혼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성결의 영이라고 성령을 부르는 것은 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고 구원 얻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래 이 구절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성령을 통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 이렇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많은 영어 성경의 번역 중 NIV 성경이 이 부분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믿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장엄한 확신을 가지고 이 위대한 서신서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부활의 의미와 함께 단언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처음부터 이런 놀라운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유대인으로서 종교 지도자의 길을 걷던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류에 빠져 있었지만 신학적인 혼란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이제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II. 바울의 신학적 혼란
그러면 바울의 신학적인 혼란이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신학적인 혼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그리고 부활의 의미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신학적인 혼란이었습니다. 잠깐 이런 혼란이 있고 난 후 다시 신학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유대인 종교지도자의 길을 갈 수가 없었고, 복음을 위해 십자가에 일평생 붙들린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A. 십자가와 처형
제일 먼저 거론해야 할 것은 십자가와 처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 언도해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선고되었습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죄수를 사형에 처하는 형 집행의 방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3절에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다시 소리를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하였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이 듭니다. 우선 첫째는 재판장인 빌라도도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는데 그는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을까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왜 이 종교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을 사주해서 꼭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도록 시켰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선 첫째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신빙성 여부에 대해서 끊임없이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고대의 문헌 중 빌라도의 보고서라고 하는 문헌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의 총독으로서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의 체포와 심문, 처형이 있고난 후 로마 당국에 보고한 보고서입니다. 그 보고서에 의하면 예수님을 재판할 당시 재판장인 자신도 무죄를 확신했지만 엄청나게 많은 유대인들이 그 법정에 모였고 그들은 앞에 있는 동산을 뒤덮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인파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만약 자신이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예수를 사형 언도하지 않으면 폭동이 일으킬 것 같은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예수를 사형 언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왜 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집요하도록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표가 예수를 없애는 것이었다면 예수를 사형시키라고 하면 그만일 텐데 참수든, 효수든 무엇이든지 간에 죽이면 끝났을 텐데 왜 하필이면 이들은 다른 사형 집행 방법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의한 사형 집행을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했을까요? 이것은 종교지도자들의 거대한 음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바로 그 당시에 유대인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었던 어떤 한 종교적인 신념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 종교적인 신념은 바로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율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념이었습니다. 신명기 21절 23절에서 시체의 부정함을 염려하며 그것에 의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모세가 명령한 다음 그 다음에 한 마디 덧붙이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리”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아직 예수를 처형하기 전인데도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 속에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해 죽을 것이고 그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감추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평소의 가르침을 전파한다면 그때에 그 가르침을 따르게 될 백성들 때문에 빚어지는 종교적인 혼란의 사태를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달라고 요구함으로써 그의 죽음 자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임을 백성들에게 선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부활할 수 없고, 혹시 그런 허망한 가르침이 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표준적인 유대인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사울도 속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매달려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모순되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게 예수 부활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했지만 그 소식이 전파되고 있었지만 사울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세장의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갔던 것도 바로 이런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습니다. 직접 그를 보았고 그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빛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아주 자신을 압도하는 찬란한 빛이었고, 그래서 육신의 눈이 아마도 멀 정도로 그렇게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B. 예수 부활의 사건
그리고 그는 여기서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가지 사실의 대립을 마주하게 됩니다. 첫째는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라고 하는 명제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다시 부활했다는 명제였습니다. 두 번째 사실을 그는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모순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남에게 들었으면 부인했을 텐데 자신이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생각하면서 그는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모세가 부활했고 심지어 승천하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외전에 보면 모세의 승천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경에 죽은 사람이 부활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들림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그가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했고, 열왕기하 2장 1절에는 여호와께서 회오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고자 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엄청나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의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 예수는 최소한 이런 사람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III. 바울의 깨달음
A. 십자가의 신학적 의미
사도 바울은 더 큰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가 그렇게 의로운 분이었다면 왜 하나님은 왜 그 예수를 저주하여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하셨을까? 만약에 저주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죄인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셔서 다시 살리실 수 있을까 하는 신학적인 혼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속에서 바울은 커다란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 첫 번째 깨달음이 바로 십자가의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신학적인 의미를 깨달으면서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주 장엄하게 그 사람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알려진 대속의 교리를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즉,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는데 그렇게 저주받은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멸망 받을 인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에 눈뜬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자진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크게 인정을 받아 부활함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논리적인 정확성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유가 자기의 죄가 아닌 구원받을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참된 메시야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마음속에 굳어져 있는 두 가지 편견이 있었는데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었고, 또 하나는 인종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신학적인 편견은 나사렛에서 목수생활을 하던 그 젊은이가 결코 메시야일 수 없다고 하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편견이기도 하였습니다. 인종적인 편견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육적 이스라엘 외에 나머지 모든 인간 종자는 쓰레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사도 바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이 두 가지 강력한 편견, 혹은 신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완전히 부서지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사람의 몸으로 초라하게 오신 그 예수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이며 결국은 이 모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의 재건을 위한 신약 역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태어날 영적인 왕국으로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출현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대속의 비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사실과 우주의 통치자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당하신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당신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이익을 주시려고 우리 모두를 당신 품에 안고 내포적 대신으로서 당신 자신이 대표자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라는 신학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과 같은 신학적인 깨달음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이제 하늘로 승천하셔서 사실상 여호와가 되셔서 이 온 땅과 모든 세계를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표해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창조로부터 구약의 전개, 신약의 역사의 도래와 그리고 미래 종말의 역사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인류 역사의 커다란 구도에서 온 땅과 하늘 위에 두루 높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는 예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자신의 삶과 모든 존재의 질서를 재편했고, 그 존재의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는 보좌 위에 계신 여호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던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그는 한 번에 신학적인 편견과 인종적인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고, 이제 이 육적인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선민이고 나머지 인간 종자는 다 쓰레기라고 여기던 그 사람이 바로 그 이방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신의 몸을 버리기까지 헌신하는 이방의 전도자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단자 중 괴수라고 믿었던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고, 인간 말종들이라고 여겼던 이방인들을 위해 사도가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선교의 역사를 펼쳐 가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예수를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신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생각임이 명백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앞에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학적인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부활에 대한 이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삶의 질서가 재편되는 구원받은 사람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교회를 설립하고 이제껏 까지 이 사실을 외쳐왔고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진심한 회심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진정한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파해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교회가 커지면서 이런 가르침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언젠가 저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여러분 중의 상당수는 저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키더민스터의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가 말했듯이 그때 전 여러분이 거기에 왜 없는지를 하나님 앞에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내가 여러분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께 뭐라고 말할까요? 마음을 다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진정한 회심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외쳐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과 함께 그 말을 농담처럼 여겼다는 사실을 주님 앞에 아뢰어야 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때 주님 앞에 왜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고 회심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진정한 구원에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지 않았는지를 질문 받는다면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깊이 회심하는 일 없이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이 외침은 이제 설교를 넘어서 여러분을 향한 피맺힌 비명소리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여러분이 그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이 엄중하신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 개신교의 훌륭한 전통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깨달음과 진정한 회개와 믿음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정통 기독교 신앙과 위대한 개신교의 역사는 이렇게 뚜렷한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에 의해 그 획을 그어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서신을 전해주고 있는 사도 바울은 원래 회심하지 않을 때 사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부활의 의미를 깨달은 후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의 노예로 바쳤고, 인간 말종들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기까지 삶의 질서가 재편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이래로 가장 높은 기독교 신앙의 금자탑을 이루었다고 믿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당대의 철학을 섭렵하고 거의 천재적인 지성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회개하였을 때 고백록에서 그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인 통회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허망한 마니교의 철학에서 돌이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커다란 지각의 변동들이 있었습니다. 윌리암 틴데이를 비롯해서 종교 개혁 이전에 위대한 개혁가들이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로마 카톨릭의 어두운 오류에서 빛을 찾아 나왔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대의를 스스로 발견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종교개혁의 대의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가 가톨릭 수도사로 있었을 때 그가 수도하고 있었던 에르푸르트 수도원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라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게 깊은 회심을 경험하고 비텐베르크에서 십자가의 보혈의 의미와 그리스도 부활의 신학적인 뜻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아는 마르틴 루터가 되었습니다. 일평생 그는 진정한 신자와 형식적인 신자를 나누는데 집착하였습니다.
제네바의 개혁과 존 칼빈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아마도 파리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났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가톨릭 사제의 길을 계속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가 일생동안 한 일은 진정한 신자들이 모인 참된 교회와 그렇지 않은 신자들이 모인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일이었고, 신자의 일생 전체를 신생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설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자들만이 아닙니다. 이후에 일어났던 위대한 부흥의 시기마다 그 부흥을 주도하는데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았던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뚜렷한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었고, 회심의 한복판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그 신학적인 의미를 깨달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재편된 삶의 질서로 그 시대와 맞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나 요한 웨슬리의 생애가 그러했고, 조나단 에드워드의 두 번의 있었던 위대한 각성도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만나는 그 의에 대한 발견과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심지어 신정통주의의 길을 갔던 칼 바르트조차도 당시에 널리 퍼지고 있었던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견해, 기독교의 본질은 종교적인 경험에 있다고 믿었던 당신에 슐라이어마허의 보편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한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 서는 것임을 명백히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선 자신이 바로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변증법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이 성경과 함께 명확한데도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구원받았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정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만남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늘에 오르셔서 보좌의 우편에 여호와가 되셨으며 온 땅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우주의 통치자이기 때문에 그 분 앞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그 후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뀌었다라고 하는 고백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회개하십시오.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고 그 앞에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전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위해 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으셨는지를 가슴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진실한 회개로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새로운 자원에 눈뜸
두 번째 바울의 깨달음은 새로운 자원에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는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세상 자원으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의 길을 꿈꾸었지만 그러나 새로운 자원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한 후에 하늘의 자원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생명이 없고 차가운 율법과 그에 대한 복종만 있었지만 회심과 함께 복음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고 그 하늘로부터 신적인 생명과 사랑이 쏟아졌습니다. 육신으로 살던 때에 죄와 사망이 법이 되어 자기를 율법에 매여 죄의 종노릇하게끔 만들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는 그 순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사신 것처럼 자신의 속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그를 지배하는 것을 체험하고 그 하늘 자원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고 마음으로는 사형 선고를 받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걸었지만 그 속에서 하늘 생명으로 그 모든 삶의 사태를 이기며 사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가난하지만 부요해지는 법을 배웠고 무명하지만 유명해지는 길이 무엇인지를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산 것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산 것이 아니요, 자기 안에 예수가 사신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으리만치 주님과의 연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IV.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이런 새로운 자원을 힘입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있습니까? 지성으로서가 아니라 경험으로서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어려운 일들이 모두 이 지상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그것이 문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그 근원을 캐보면 사실은 이 땅의 자원이 부족한 것이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썩을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시 살아나는 영혼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이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생명과 사랑으로 넘치는 공급을 받으며 그 회심의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극복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을 극복하면서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신학적인 의미를 깨닫고 깊이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이 새로운 자원을 누리면서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분 안에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점에서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구별이 됩니다. 진정으로 구원 받은 사람 속에는 수시로 자신의 삶을 휘저어놓는 하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만약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한 번 더 묻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렇게 우리를 이기며 살아가게 만드는 하늘의 생명이 있습니까? 이 부활절에 다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십자가를 경험하십시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의 신학적인 의미와 부활의 뜻에 붙들려 승리의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