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부활 사건의 의미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26:14-18)
녹취자 : 장소연
I. 본문의 배경
본문은 사도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재판장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나온 자기 간증입니다. 촉망받는 유대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던 한 젊은이가 어떻게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치욕스럽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기 고백이요, 복음의 변호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의 사건을 새롭게 경험하여 그 빛으로 십자가 사건을 재해석함으로써 우리가 아는 사도바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사도바울의 회심사건이라고 말합니다.
II. 사도바울의 회심
A. 그의 두 가지 확신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회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먼저 이 문제를 풀기 전에 그가 회심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회심하기 전에 두 가지 확신에 붙들려 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이었고, 또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심리적인 편견은 인종주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민사상 때문에 이스라엘 이외의 모든 민족들을 아주 하찮게 여기는 인종 우월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하나님에게 의미 있는 인간들이며 나머지는 의미가 없는 인간들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만약 이방인들 중에 아주 열심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면 그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몸종 정도의 역할을 하면서 그 나라에 들어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누군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많은 이방인들을 왜 창조하셨을까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그들을 쓰기 위해서 창조하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표준적인 유대인들의 생각을 사도바울도 공유하고 있었고 그것은 매우 커다란 선민사상의 편견이 가져온 인종주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기던 사람에게 그들이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신학적인 편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편견이며,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리스도는 희랍어 ‘크리스토스’를 옮긴 것이고, 이것은 ‘기름 붓다’라는 ‘크리오’라는 동사의 피동명사입니다. 피동명사형은 ‘메시아’이며, 이것은 히브리어로 동사 ‘맛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 역시 ‘맛사’의 피동명사입니다. 구약에서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에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기름을 부었고, 그렇게 기름을 부은 사람을 가리켜서 메시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은 미래에 나타날 보다 더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확고하게 하나님의 선민사상과 함께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메시야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는다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메시야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메시야 사상은 바로 인간이기는 하지만 아주 초인적인 존재가 하나님의 특별한 기름 부음을 받고 나타날 텐데, 그는 정치적 지도자로서 이 땅의 백성들을 규합하여 군대를 일으켜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고, 이스라엘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다윗 시대의 부흥을, 국가적인 부흥을 다시 한 번 일으켜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왕성한 대국을 이룰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 배신감을 느낀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런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나라에 관심이 없고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주의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식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올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B. 극복할 수 없는 두 명제
1. 나무에 달리신 예수
그러다가 이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를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 사건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고, 두 번째 사건은 자기가 직접 맞부딪친 사건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으시던 장면을 여러분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재판장인 빌라도도 예수의 무죄를 확신했고, 자신은 불법한 재판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자기의 손을 씻었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여 달라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죽여야 할 지 사형집행 방법까지도 요청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한결같은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전에 위대한 선지자들이 순교를 당했고, 죽음 이후에 그들의 죽음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나면서 그들을 향한 더 많은 추종자들이 생겼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사형시키면, 이후에 구약의 수많은 의로운 사람들이 피를 흘린 것처럼 ‘예수도 죽였다’라는 재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유대인들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 변방의 야만인이던 시절에 만든 간악한 사형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형벌은 공교롭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알고 있는 율법 신명기 21장 23절과 연결이 됩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 고 하는 종교적인 확신을 이 종교지도자들은 이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려서 죽은 자는 죽음에 대한 재해석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저주하신 자라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보편적인 종교적 확신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신명기 21장의 종교적인 확신을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에 사도바울은 종교지도자를 꿈꾸는 신출내기 젊은 이였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이 연루되어 있는 거대한 종교적인 음모에 관해서 그가 어떠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틀림없이 사도바울도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평균적인 인식을 갖고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라는 대중적인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고, 사도바울에게 좀처럼 흔들릴 수 없는 강력한 종교적 확신이 되었습니다.
2.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런데 누군가 허망한 풍설을 퍼뜨리면서 예수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전한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에 그는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러 다메섹으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처벌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명제와 맞닥뜨리는 사건을 여기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찬란한 빛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일행과 모두 함께 땅 바닥에 엎드러졌고 거기에서 사도바울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대화하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생생하게 목격하였습니다. 만약에 들려온 이야기라면 허망한 풍설이라고 부인할 수 있고, 남에게서 전해들은 소식이라면 그렇지 않겠지 하고 웃어넘길 수 있었을 텐데, 이 소식은 들려온 소식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 눈으로 직접 뵈옵고 그의 음성을 똑바로 그의 귀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사건은 사도바울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의 시체를 이 땅에 두시지 않으신 것은 모세를 부활하여 승천시켰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승천기라는 외경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구약 속에 죽음을 보지 않았던 인물에 대한 기록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았던 에녹, 죽었으나 주님이 부활시켜 승천하게 하셨다고 믿는 모세,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던 엘리야, 이 사람들은 죽음을 넘어선 사람이었고 또 부활을 경험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께 아주 특별히 인정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지성에 혼란을 더하는 모순 명제였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는 것은 흔들 수 없는 명제이며, 또한 하나님이 예수를 인정하여 놀랍게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셨고 인정을 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다시 살리실 분이시면 저주하지 마셔야 했고, 저주하신 사람이라면 다시 살릴 수가 없을 터인데 어떻게 모순된 두 가지 명제가 양립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C. 십자가 죽음의 재해석
그리고 즉각적으로 이 사람 마음속에 들어오게 된 놀라운 해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재해석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면 두 개의 명제는 성립하지 않지만, 그 죄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면 두 명제는 양립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셔서 구원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더욱 인정하셔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나사 부활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죽음의 재해석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유대주의의 붕대에 가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고 그것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결과를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사 그에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모든 진노와 형벌을 대신 담당하여 죽게 하시고 그 공로로 우리를 구원하고 사랑하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새롭게 발견한 소명
이렇게 해서 사울은 유대주의의 껍질이 깨지면서, 두 가지 모순된 명제가 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의 위대한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아가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즉각적으로 그 사랑에 반응하는 또 다른 사랑을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 사랑과 일치하는 반응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한 한없는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에게 있었던 심리적인 편견과 신학적인 편견이 산산이 부서지게 되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찬란한 진리의 빛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100볼트 전기와 220볼트 전기를 함께 병용하던 시대에, 220볼트에 사용하는 100W의 전구를 꽂았는데 전원이 110인 상태에서 스위치를 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전구에는 분명히 100W라고 쓰여 있는데 실제 불을 켜보면 5W나 10W 정도도 안 되게 필라멘트만 불그스름하게 불이 들어옵니다. 아마 그런 전구를 1000개를 끼운다고 할지라도 예배를 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예배당이 될 것입니다. 똑같이 사도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는 많은 지식들이 있었지만 지성은 어두웠습니다.
이 사람은 정통 유대인이었고, 히브리인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제사 제도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 아래 태어났고, 종교적으로는 유대주의 아래에서, 문화적으로는 헬라주의 아래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마리아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고 유대 종교뿐만 아니라 그리스 철학과 헬라의 모든 문물을 꿰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두운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역사의 중심인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은 220볼트로 승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배당에 희미하던 불빛이 천개의 전구가 10만 촉광의 불빛을 쏟아낸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눈부시도록 찬란한 빛이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게 지성에 벼락을 맞는 회심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지성의 벼락을 맞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이 깊은 자들에게 십자가의 도리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그리스 철학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인간이 누구이고,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변과 논변을 통해서도 결론에 도달할 수 없었던 철학의 지혜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찬란한 의미로 그의 지성 속에 다가오게 되자 파편처럼 돌아다녔던 구약에 대한 지식과 역사, 철학과 문화에 대한 모든 지식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놀라운 통합을 이루며 진리의 밝은 빛을 증거 하는 유용한 도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사울에서 바울로 회심하게 되고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아주 놀라운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에게 구원하실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신 후 그를 형벌하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단지 유대인들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이 아니라 당신의 형상을 닮은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마음속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넘치면서 구원받지 못한 모든 인간을 향한 치밀어 오는 연민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한 사도의 소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도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형벌할거라고 위협하신 적이 없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 사랑에 붙잡혀서 그는 온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될 열망과 강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 다하는 날까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둘째는 이 사건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세우시려는 궁극적인 왕국이 다윗 왕국의 회복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도입하시려는 나라는 기껏해야 땅 덩어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작은 나라들을 억누르고 호령하는 초라한 왕국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름다운 왕국의 모습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게 될 위대한 영적 왕국의 그림자였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크고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면 서도 세상 나라에 대해서는 왜 관심이 없으셨는지, 그가 가르쳤던 애매모호한 모든 말씀들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설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제 보이지 않는 왕으로서 어느 곳도 안 계신 곳 없이 계셔서 사람들 마음속에 좌정하사 당신의 통치를 행사하시는 위대한 영적인 왕국의 도래, 이것이 바로 다윗 왕국이 영영히 무너지지 아니하리라고 한 구약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는 이 사건을 통해 사도바울은 일평생 두 가지를 힘써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먼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여줌으로 자신들의 죄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한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향하여 전심으로 기대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일평생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그는 이 복음의 가치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버리는 삶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고통의 원인은 수없이 많지만 해결책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알았습니다. 세상의 많은 고통들의 이차적인 원인은 가난, 질병, 무지, 인간관계의 깨뜨려짐, 자아의 파괴, 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궁극적인 일차적인 원인은 죄로 수렴하고, 죄 때문에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자비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에 이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신명을 바치며 사는 사람이 되었고, 우리에게까지도 복음이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도바울을 바꾸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의미는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천년 전에 발생하고 그것으로 끝난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이천년 전의 사건이 될 것이고, 만약에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간신히 구원을 얻게 되었다면 회심할 때만 우리에게 필요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새롭게 발견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재해석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새로운 비결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첫째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영적인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천년 전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 전에 세상을 방황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가치의 기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주인 삼는 삶을 마음껏 살았고, 그 삶이 성공했더라면 예수 믿었을 리 없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살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우리가 완벽한 삶을 살았습니까? 언제나 순종했고 언제나 성결했고 언제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하나 밖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불순종과 죄들이 남아 있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떻게 우리의 죽은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들려오고,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공정하게 진리의 빛 아래에서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들의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진실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아픔을 함께 느끼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이천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 자기가 짓고 있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재현되게 만드셨고, 그래서 우리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실제화 되었기 때문에 회개할 때마다 언제나 우리가 처음 십자가 앞에서 회심하던 그때에 그 마음과 인식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깊이 회개하게 되었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로 인하여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게 될 때 깊은 영혼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고,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죽음이 어떠한 아픔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영적인 소생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부활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영적인 신비였습니다. 항상 가슴을 찢는 십자가의 고통과 같은 참회가 있고 난 후에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살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침체되었던 영혼에 윤기가 흐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다시 살 소망을 갖게 해 주셨고, 어두움과 죄를 뿌리치고 빛 가운데 살 희망을 갖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계획이었고, 죽은 자와 방불한 자들을 살려 아버지 앞에서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계기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그 분과 함께 살아났던 부활의 경험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 부활이 현재적으로 우리 속에 재현되고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죽음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가졌던 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지 알려하여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윤리적으로 욕을 먹고 있는 것은 단지 이 세상에 있는 도덕과 윤리의 기준에 그리스도인들이 따라 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 생활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힘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교회의 영적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체험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입니다.
마지막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할 우리의 소명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도 예전의 우리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이 있고 죽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방황하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복음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의 벼랑 끝에서 다시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사람들도 우리의 도움 없이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구속의 위대한 일들은 하나님이 홀로 이루셨지만 죄인들을 구원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합력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고 만약 우리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갈 것입니다.
열린 교회를 개척하기 직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에 6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 청년부를 담당하는 전도사로서 일하면서 교수 생활을 하였습니다. 한 7명 정도 청년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제가 가서 그래도 60명 가까이 청년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주기도문을 연속 설교하려고 마음을 먹고 성경을 폈습니다. 첫 시간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설명하는 주일이었습니다. 얼굴이 예쁜 자매 한 사람이 화장을 짙게 하고 앞줄 맨 앞에 앉았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자매는 교회 다니던 자매가 아니라 26년 동안 불교집안에서 자란 불교 신자였고, 교회는 태어나서 처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도 교회를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친구가 점심 사준다고 제안을 하니까 나와서 점심을 얻어먹은 다음 낚아채듯이 붙들려 교회로 와서 맨 앞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저는 굉장히 신앙이 돈독한 자매인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펴고 설교를 시작할 때 자매의 눈길은 내 얼굴에 꽂혔고 내가 전하는 모든 말씀이 그 자매의 마음속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15분이 지나지 않아서 자매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화장은 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적진을 진격하기 위해서 공격을 하려고 하는데 후퇴하는 적군들이 수없이 지뢰를 매설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수색 부대가 지뢰 탐지기를 들고 수백 명이 지뢰밭을 누비며 지뢰를 찾아냅니다. 근데 안 나옵니다. 실패한 겁니까? 아닙니다. 지금 모든 땅에 지뢰가 깔린 게 아니라 터질지도 모르는 하나의 지뢰를 찾기 위해서 수백 평의 땅을 지금 탐지하는 중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이 거절할 때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누가 복음을 받아들일지를 찾아내는 전개의 과정입니다. 어둠 속에서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핏기 잃은 손을 내밀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생의 벼랑 끝에서 굳게 붙듭니다. 그래서 전도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전해야 합니다. 지금 사랑을 가지고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친구들과 가족, 이웃을 돌아보세요. 너무너무 곤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 교회의 어떤 자매가 기도하다가 오래전에 헤어졌던 선배 생각이 나서 기도를 끝내고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받으면서 울면서 하는 말이 “나 지금 동맥을 끊으려고 면도칼을 들고 화장실로 가는 길이었어.” 라고 말했답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에 구속의 사랑
IV. 결론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사랑에 붙잡혀 이웃들에게 마음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비결은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우리는 가장 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시간 속에서 어둠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을 활짝 웃게 할 수 있는 소멸되지 않는 행복이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공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할 대상을 보여주지만 시간은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어떠한 공간 안에서도 어떠한 시간 속에서도 우리들이 영원히 사랑하실 분이 하나님 한 분 외에 어디에 있겠으며 누구든지 우리의 전파하는 복음이 아니고서 무엇을 통해서 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새롭게 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당하게 하시는 모든 고난을 십자가로 여기고 묵묵히 이 십자가를 지면서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주님의 의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나는 영적 소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이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