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일들을 보도하는 가운데 나오는 기사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강림은 사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눈을 뜨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과 3년이 넘도록 동행하였지만 그들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정말 누구이시고, 그 분이 이 지상에서 행하신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깨닫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의 의미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이 있고난 후에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방언의 기적이었습니다. 이 방언은 오늘날 여러분들이 하는 방언과는 다른 종류의 방언이고, 고린도 전서 12장 나온 방언과도 다른 방언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매우 특별한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순수하게 부어진 기적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언어가 다른 지방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였을 때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지방의 언어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방언을 하는 그 모습이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성령에 사로잡혀 방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했습니다. 이때 열한 사도와 함께 베드로는 굳건히 서서 방금 그들이 본 일의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도 방금 깨달은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계획하셨던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경륜이 하나의 지점을 향하여 달음질쳐 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흠모하고 있는 역사는 다윗 왕국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인 이 베드로는 다윗 왕국을 거론하면서 너희들이 그토록 사모하는 다윗왕의 시대의 국가의 번영은 하나님이 후대에 이루실 보다 완전한 영적인 이스라엘의 번영을 가리키는 예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연히 흠잡을 때 없는 지극히 영광의 종 다윗의 통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며 통치하실 그 영원한 통치를 전망하는 것이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의미도 모르고 알아왔던 구약의 선민으로서의 모든 자랑스러운 역사가 사실은 하나의 지점을 향해 줄달음쳐온 역사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II.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A. 이스라엘이 못 박은 예수
그래서 이 사도는 바로 얼마 전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외침으로 빌라도가 내어 주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누구인지를 이 사람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는 이스라엘이 못 박은 예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을 아는 지식을 이 세상에 흘려보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가정, 한 민족을 택하여 나라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는 아주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만, 이스라엘의 의미는 나라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담지하고 있었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는 지식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만남과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고, 또 그 지식을 전파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수시로 멀리 떠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도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구약의 신앙을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오신 그 사건이 너무나, 너무나 고대하고 기다리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아기 예수가 결례 받으러 온 그날에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의 오심을 보고 찬송하고 하나님을 경배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구약 신앙을 버린 사람이었고 더욱이 유대교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편견과 거짓에 사로잡힌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구약 신앙을 현저하게 떠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들은 도무지 그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지와 반역하는 감정 속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외쳤습니다. 폭동을 두려워한 빌라도가 그가 죄가 없으신 분임을 확신하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렇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얼핏 볼 때 이 사건은 간악한 유대인들이 꾸민 사건이었고 종교지도자들의 음모가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멀리 보면 그 뒤에는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 큰 하나님의 백성들의 씨가 퍼지지 못하도록 말살하려고 했던 사단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 넘어서 더 위를 바라보면 사단도 미처 알지 못하고 예수를 못 박은 종교 지도자들은 물론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놀라운 지혜가 그 위에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지혜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무슨 지혜를 가지고 계셨길래 흠 없으신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간악하고 더러운 사람들의 손아귀에 넘겨주셔서 그들로 예수를 때리고 핍박한 후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허락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잠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이 맨 처음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온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가 필요해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창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영광을 물질의 세계 속에서, 그리고 도덕의 세계 속에서 찬란하게 드러냄으로써 당신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고 즐거워하시고 창조된 인간들이 하나님과 이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기뻐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후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먼저 사람을 빚으셨으니 이는 인간이 단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존재이고, 육체적으로는 하나님과는 멀고 이 세상 피조물들에게 가까이 있는 독특한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인간은 몸으로 이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살면서 창조하신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고, 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창조되어 주님의 영을 형상을 본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인간을 그렇게 지으셨지만 두 번째 인간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또 다른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시지 않고 이미 창조한 인간을 잠들게 하여 그의 신체 중 일부를 취하여 두 번째 사람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이끌려 오는 하와를 보고 아담은 고백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고백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고백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후에 만들어질 부부의 조상인 동시에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머리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후에 이들의 생식을 통하여 번성하게 될 모든 인류를 어떤 공동체로 만들고 싶어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들이 서로에 대하여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가족적인 일체된 사랑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뜨겁게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 속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고 그리고 위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한 몸으로서, 한 뼈로서 공경하는 인류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몸이 된 인류는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자신들에게 다스리도록 주신 이 창조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돌보고 가꾸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가능태 적으로 주셨던 이 세계 속의 아름다움을 경작과 돌봄과 통치를 통하여 더 찬란하게 꽃 피워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 인간의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하며 사는 인류가 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대신 모든 것들을 자기의 발아래 굴복시키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죠.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게 되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에 가득했던 하나님의 영광은 주권적으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갔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인간의 육체를 위한 양식은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지만 영혼을 위한 어떠한 양식도 구할 수 없도록 하나님과 사이에 영원한 단절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는 사람과 깨어진 관계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여야 할 인간들끼리 얼마 못가서 서로 찢고 죽이는 살인의 역사를 연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연과의 관계는 끊어져서 왕처럼 다스리는 인간이 이제는 그 자연의 위협에 두려워하여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인간은 자연과 공존하는 대신 살기 위해서 자연과 몸부림치며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파괴 속에서 인간은 아무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실 때에 인간에게 부여하셨던 고상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짐승처럼 먹고 마시며 멸망해 가는 비참한 인간의 군상을 바라보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자들은 천지가 창조된 이래 이제까지 죽은 인간의 수를 1천억 명이라고 본답니다. 그리고 지금 지구에는 약 67억 명 가량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멸절되지 않고 영생하여 하나님과 같은 그런 영광을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에게 본떠서 보여줄 수 있는 인간의 아름다운 지위는 무참히 파괴되었고, 짐승처럼 이 땅에 나서 죽는 신세가 되었으니 힘으로는 단단한 돌멩이 하나만 못하고, 완력으로는 노새 한마리만도 못하고, 수명으로는 거북이 하나만도 못한 그런 허무한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이미 멀리 떠났고, 하나님을 생각할 줄도 모르는 배반한 존재들이 되었지만 인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주시는 희미한 빛을 한 사람에게, 한 가족에게, 한 민족에게, 한 나라에게 비추어 주시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제사와 율법과 하나님이 주신 많은 만남들과 기적의 역사들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해 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제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아도 인간은 다시 죄를 짓고 또 다른 제사를 필요해야 했고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지식이 있어도 율법을 통해서는 그렇게 살 힘을 공급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젠가 당신의 충만한 영광 속에서 이렇게 비참한 인류를 완전히 구원해 낼 위대한 계획을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절실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의 모습을 통해 알려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류가 지은 그 모든 죄,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원히 용서받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계획을 하나님이 실행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속에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33년 동안을 사시는 동안 그는 유명한 왕도 아니었고, 뛰어난 학자도 아니었고, 휘황찬란한 권세로 두루 입으신 분도 아니었습니다. 나사렛의 목수였지만 그 분이 오셔서 병들고, 눈멀고, 가난하고, 무지하고 병든 자들과 함께 하셨을 때 이제껏 그들은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그 분의 생생한 삶을 통해 그 분의 인격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사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면서도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피 저린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심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이 믿어지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증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고 목격한 사람들의 복음서와 그 사랑을 전했던 사도행전과 그리고 그 사랑을 교회라는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했던 초기 사도적 저술가들에 의해 신약성경의 형태로 남게 되었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 보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았던 것보다도 더 생생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일어난 수많은 역사는 바로 이 한 지점을 향해 달려온 역사였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리고 죽어갔던 선지자들의 순교의 이유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올 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700여 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일들을 예언하였죠.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연한 줄기 같아서 우리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그에게 없었다’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33년 동안을 이 세상에 사셔서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죄 지은 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회개하며 용서하게 해 주셨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무지한 자의 마음의 진리의 빛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나타나게 될 더 큰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그 본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구원받을 인간의 모든 죄를 당신이 담당하시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미움과 원한을 당신의 육체 위에 모두 쏟아 부으시도록 허락하시고 당신 자신을 공언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려 죽어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쓰라린 고난은 바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위해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인류의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쏟아 부어지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한 몸에 수렴하여 십자가에서 비천한 죄수의 몸으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십자가에 비참하고 못 박아 죽이시고 거기에서 진노를 푸신 하나님이 이제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사랑만을 남기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진실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수많은 선포의 제목이 있어도 오직 하나가 비춰주는 찬란한 빛은 능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그리스도인일리가 없습니다. 기독교적인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불리워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떠나 모질게 주님을 대적하고 죄를 지으며 살았던 그 끔찍한 자신의 과거가 얼마나 더럽고 흉악한 날들이었는지를 안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난이 사실은 자신이 매달려서 감당해야할 고난이었음을 안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쏟아 부어져야할 진노를 예수께 쏟아 부으시고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크고 넓은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그리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얼마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인지를 알고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찬양)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성경적인 기독교는 하나님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중심에 계셔서 이 세상과 인간을 위하여 하신 일들 때문에 감격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돌아와 자기가 티끌 같은 존재임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한 뼈 속까지 끔찍이 죄에 물든 더러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은총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 말고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주님 앞에 부복하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 분께 순종하며 살겠다고 주님의 로드쉽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답변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를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기독교 중심을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축을 옮겨놓은 오늘날의 인본주의적인 기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제일가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대답하셔야 합니다.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인간을 영화롭게 하고, 인간을 바라보며 영원토록 행복해 하고,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해 줄 의무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안 사람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죄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들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 끔찍한 고난의 죽음이 바로 역설적으로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큰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사랑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십자가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입맞춤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 당신을 멀리 떠났던 죄인들을 십자가 아래로 돌아오게 하셔서 그 앞에서 자기를 이 세상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았던 자신의 죄 된 날들을 회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평생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억하며 예수 죽인 것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앞에서 다시 하나님 앞에 살 힘을 얻는 존재들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사와 권세들, 즉 사단의 무리들을 무장 해제시켰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의 용서만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은혜의 힘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다수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과 인생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예수를 기리며 살 욕구가 현저히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주일날 출석하는 것은 이마저도 집어치우면 임할지도 모르는 재앙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닙니까? 행운을 기대하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좋은 것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이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영원한 형벌을 짊어지고 살았던 죄인의 자리에서 용서받게 하심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주셔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인류 모든 사람들 속에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날이 도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여러분들은 먼저 교회 안에서 이렇게 이웃을 향해, 지체들을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배우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먼저 여러분들에게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매일 매일의 기도생활과 예배 생활과 거룩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들을 도우시는 지를 체험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이 하늘의 능력이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동안 운명처럼 자기를 사로잡았던 죄의 사슬들이 단 한 번의 회개와 뉘우침으로 끊어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성령의 강력한 능력은 일평생 우리를 죄의 종으로 사로 매였던 쇠사슬을 부셔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우리 모든 사람의 죄의 원인인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흠 없이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던 아버지 앞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기까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한 몸에 당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 분이 그렇게 죽으셨습니까? 그 분이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어떤 나쁜 짓을 이 세상에 오셔서 하셨길래 주님께 그렇게 끔찍한 심판을 받으셨습니까? 병든 자를 고친 것이 진노가 될 만한 죄악이었나요?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의 빛으로 가르치신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일이었나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십자가에서 다 짜주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분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가공할 죄와 우리의 천인 공로할 악으로 말미암아 그 분이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죽이시고 당신을 모질게 대적하는 원수들인 우리들은 살리심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사랑의 하나님이신지를 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보도록 드러내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III. 십자가 앞에서 할 일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십자가 앞에서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였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로 부터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촉구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면 여러분들이 하여야 할 일은 진실하게 자기의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남이 그려놓은 십자가, 남이 알려준 십자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실존이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가 매달려 계신 그리스도 예수의 면류관을 쓰신 그 얼굴과 못 박히신 양손과 발, 창에 찔려 흐르는 그 상처를 통해 떨어지는 핏방울을 온 몸에 맞으며 해야 할 일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나 이것이 나의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래는 흉악하고 더러운 죄인이었고, 진노의 자식이었고, 악독하고 모질게 하나님께 모독을 드리던 능지처참하여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물과 모든 피는 내가 거기에 매달려 쏟아지는 진노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며 짓이겨져 죽임을 당하여야 할 끔찍한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은 오래전에도 배웠고, 우리는 맨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죄를 십자가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이제 그러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이제 고생 끝, 행복의 시작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를 그렇게 회개했고, 하나님은 영원히 용서하셨으니 이제는 해피한 일만 우리에게 남은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십자가의 교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깊이 회개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구원받은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죄의 사슬은 끊어졌고, 사단의 속박은 박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 안에서 원래의 죄 때문에 잃어버렸던 창조의 목적, 그렇게 인류를 피붙이처럼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으며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드러내는 인간으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는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나 죄들이 그 안에 남아 있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순간 이 세계를 건장하게 통치하던 사단의 척추는 복음의 철퇴를 맞고 부서져 버렸고, 목뼈도 부러지고 그리고 병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걸어 다니기는 커녕 뱀처럼 설설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구원의 역사를 뒤집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은 사단에게 없지만, 여러분 한 두 사람 정도를 몹쓸 인간으로 만들 정도의 힘은 얼마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일하지 않고 마귀 닮은 마음을 가진 죄를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역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성을 보고 흘리는 한 번의 음탕한 눈빛은 간음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한 미움의 눈빛은 궁극적으로 살인까지 가고 싶어 하는 죄의 시작입니다. 자기보다 부유한 사람을 보고 시기하는 사람의 눈빛은 도둑질하여 그의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삼을 때까지 욕망은 그치지 않습니다. 요컨대 여러분 안에 남아있는 이 죄는 여러분들이 구원받기 전에 여러분 속에 있었던 그 죄와 동질의 것입니다. 성질이 변한 적도 없고, 바뀐 것도 없는 똑같은 질인데 다만 예전에는 여러분들이 법 없이 하나님 앞에 맘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율법이,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을 마음껏 죄대로 살지 못하도록 붙잡아 주기 때문에 이나마도 여러분들이 거미줄 같은 신앙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순수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나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던 우리 안에 남은 그 사랑은 얼마나 때 묻고, 더럽고 불결하여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조차 없는 사랑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한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 비참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는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신자가 죄를 지으려 할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타일러야 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지금 지으려고 하는 그 죄,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바로 그 죄를 위해서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네가 그 분이 피 흘려 죽으신 그 죄를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고 자신을 타이르라고 충고했습니다.
언젠간 여러분들도 이 교회를 떠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들이 저의 설교를 들을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젠가는 죽겠죠. 그래도 나는 여러분과 여러분 후손에게 유언처럼 말하고 싶습니다. 이 후에 이 교회를 떠나 어느 교회를 다니든지 회개를 설교하지 않는 교회는 출석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교회는 나쁜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목적이 인간의 행복에 있는 것처럼 앞뒤를 뒤바꿔버린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회개는 코드에 맞지 않는 종교적인 요구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말합니다. 이 회개 없이 누구도 주님을 뵈올 수가 없고,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충만히 누릴 사람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회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입니다. 그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과 크기와 넓이, 주님 앞에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우리의 패역하고 완고함의 그 깊이와 넓이를 비교하는 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찌르는 창끝과 같습니다. 아무리 양심에 털이 난 더럽고 몹쓸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사실을 정직하게 생각한다면 그는 가슴 찌르는 양심의 고통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것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하여 당신을 모두 버려 십자가에 죽으셨건만 나는 그 분을 마음 아프게 하는 고통스러운 일들만을 골라서 행하고 있구나’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한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의 고난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나의 자랑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난 나의 자아들, 육욕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다시 은혜 없이 살아난 이 모든 것들과 싸우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참회하며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처절한 회개가 있는 곳에 자아의 담장은 무너지고, 자아의 담장이 무너진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밀려옵니다.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 목마른 영혼을 가득 적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살았던 우리의 강퍅했던 날들을 회개하게 되는 것이죠. 목회자인 나에게 가장 기쁜 날은 예배당이 호기심 많은 교인들로 꽉 차는 순간도 아니고, 헌금이 수십억 나왔다는 소식을 재정부로 전해들은 날도 아닙니다. 바윗돌같이 굳어졌던 여러분들의 얼굴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눈물이 뜨겁게 흐르는 그날, 그리고 우리 모두 저 높고 높은 별을 지나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위해 오셔서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을 찢으며 ‘나의 이 큰 죄, 나의 이 더러운 죄를 어찌할꼬.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울부짖을 때 그 때가 아마 나에게는 아마 천국일 것입니다. 메마른 기도 생활, 힘겨운 헌신, 뿌리 깊이 돋아나는 미움과 원망, 그리고 절망감들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가 없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독초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가 없는 그 자리에서 돋아나는 독초입니다. 나는 압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회심한 사람들이고 원래 주님을 깊이 사랑하던 사람들이고,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고, 주님의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변심했습니다. 이제는 개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거기서 주님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