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도의 모본이신 예수님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백지영
누가복음 11장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보도해 주는 귀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어딘가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았더니 예수님은 여전히 기도하고 계셔서 가까이 다가가 그 기도의 분위기를 깨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예수님의 기도가 마쳤을 때에, 제자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그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우리도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평소에 기도하시던 그 기도의 골격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기도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긴 내용은 아니지만 어쨌든 주기도문은 아주 심오한 뜻을 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 시대에 누군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학습자의 상태에서 1년을 주기도문을 배웠습니다. 사도신경을 1년, 십계명을 1년, 이 세 가지를 배우면 기독교 신양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을 골격을 배운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 제가 금년에 새로 쓴 책 주기도문을 한권씩 전해드렸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주기도문을 가볍게 보지 마시고 1년 이상 성도들을 가르쳐야 될 심오한 뜻을 가지는,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여주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드린 책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셔서, 선교지에서 그것을 상황에 맞게끔 잘 가르친다면 기독교 신앙의 부흥이 오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은 주기도문이 아니라 주기도문이 태어나게 된 하나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오늘 성경에 보면 누가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이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빌립보서는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빌2:6). 여기서 본체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로 ‘substantia’인데, 하나님과 같은 신적 본질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의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께 탄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기 위해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좀 의미가 다르지 않을까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시고 또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같은 신적 본질을 가지신 분, 하나님과 하나이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언제나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인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깊이는 성경을 읽으면서 던지는 질문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늘 특별한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가면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저 남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늘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그리고 이것에 대한 성경의 답은 무엇일까를 찾아가면서 올바른 성경의 해석을 구할 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깊어가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도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 그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누굴까? 이렇게 예수님이 기도할 때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모두 함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기도하실 때 그 기도는 성자인 당신 자신을 포함한 성령과 성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린 기도라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짧은 성경 구절 하나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토론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신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당신 자신을 포함하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신 그분이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까요?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가장 큰 목적은 죽으시기 위해서 입니다. 즉, 당신께 죄를 짓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이 인간들과 다시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손해를 입힌 인간의 죄에 대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고, 그렇게 하기에 적합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밖에 없으셨습니다. 그 아들이 죽으심으로써 형벌을 대신 받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야 했는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어린 양이 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인간들에게 두 가지를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 이전 구약시대까지는 하나님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하늘 높이 계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어떤 사랑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거룩한 성품을 가지신 하나님이신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몸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실 때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10:36). ‘민망히 여기시니’라고 되어 있는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 ‘에스프랑크니스데’라는 단어인데, “창자가 떨리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배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콩고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간에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배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실 때 그 불쌍한 백성들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그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실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향해 느끼는 마음이었고, 그것이 예수님의 눈물과 슬픔을 통해서 인간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이상적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참으로 인간이 누구인지를 인간들에게 보여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며 살아가도록 모본을 끼치셨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순종을 배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신 성자에게는 더 이상 배울 지식이 전혀 없었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당신의 신성을 인성 밑에 감추시고 친히 스스로 신성에 속하는 무한한 능력과 그리고 무한한 지식을 유보하셨습니다. 그래서 인성 아래 신성을 감추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스스로 모르는 것도 있기로 그렇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추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시는 성자는 모르는 것이 없으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당신 자신이 모르셨고, 또 사람의 몸을 입고 죄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를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고난과 시련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체득하며 배워가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 인간과 똑같이 시련과 고난 시험을 한결같이 받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시련과 시험을 당할 때 그 고통과 괴로움이 얼마나 큰지를 몸소 아시고 그들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지금도 그들을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그러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당신의 정체는 신이었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은 스스로 신이시기를 양보하시고, 오히려 우리와 똑같은 형제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도움 속에서 사는 것 같은 똑같은 방식으로 겸손한 삶을 사셨는데, 그 가장 탁월한 모본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며 눈물을 쏟으실 그때에는 그분이 하나님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 중 한 사람으로 느껴지리만치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의존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왜 기도를 해서 또 그것을 하나님께 알려야 합니까? 모순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모르시고 우리가 기도를 해야만 겨우 아신다면, 그래서 “네가 그런 형편에 있느냐. 내가 요즈음 미국 쪽에 신경을 쓰느라 아프리카 쪽은 잘 몰랐구나. 이제 내가 알았으니 도와주마.”고 하신다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칼빈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당신께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칼빈은 두 가지로 답변을 했습니다. 첫째로,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기도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좋은 일이 덜컥 생겼을 때,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해 주셨어. 정말 감사해.”라며 눈물을 글썽입니다. 기도안 하는 사람은 “정말 재수가 좋았어.” 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려운 일이 쾅 하고 닥칠 때, 기도 안 하는 사람은 그 자식 때문에 이 일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에 미워하는 마음이 강하게 박힙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우리로 하여금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순종은 의존의 마음이 없으면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순종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이고, 사실은 그 전심으로 의존하는 그 마음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인간의 경우에 참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감정을 동반합니다. 18세기의 미국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논문에서, 하나님은 이 온 세계와 우주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한 인간의 마음 안에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연히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그냥 하는 일상적인 기도여서는 안 됩니다. ‘11세기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대주교가 늘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여!’ 기도하며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봅니다. 사람이 있으면 더 구슬프게 ‘주여!’를 부르짖고, 없으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하고 들어가서 쉬는 것입니다. 어느 날도 ‘주여!’ 하고 형식적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드르륵 열리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내가 여기 있다. 네가 나를 불렀느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주님이 응답하시리라고 전혀 생각을 안했는데, 이변이 일어나니까 너무 충격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고치라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바꾸시면서, 당신을 멀리 떠나 자기마음대로 살던 사람들을 하나님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얘들아, 나는 본질상 하나님 자신인데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이렇게 의지하며 살았단다. 너희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이렇게 의지하며 살거라.”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예수님이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목회를, 선교를 조금 잘하면 성공을 합니다. 그래서 업적들을 만들어냅니다. 늘 선교편지는 승리의 행진곡입니다. 조금 잘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좀 더 잘하면 하나님 말씀에 있어서 선생님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진짜 성공한 선교, 성공한 목회는 기도의 모본을 보여 준 목회자, 선교사입니다. 세월이 오래 흘러도 마음속에 선교 사업을 수단 좋게 하던 사람 이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던 사람 이것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언제나 기도를 배우고 싶었던 목사님,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선교사님 그것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겨질 때 진정으로 성공한 사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눈이 나빠서 논산까지 왔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방위 근무를 했습니다. 그때 육군사관학교에 있었는데 그날 무엇 때문인지 출근이 늦었습니다. 막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니까 헌병이 딱 붙잡았습니다. “넌 뭐야. 임마.” “이러저러해서 늦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만한 몽둥이를 들고 배를 푹 찌르더니 “니가 별 넷이야?” “아닙니다. 방위병입니다.” “야, 임마. 교장선생님이 별 셋인데 그분도 벌써 한 시간 전에 출근하셨어. 임마.” 여러분들이 별 넷입니까?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어느 공중 화장실에 써 붙여 있었습니다. “99세 이상 흡연 가능함.” 예수님보다 높으시면 기도 안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 높지 않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두 번째,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고 마치시매.”, ‘한 곳’,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엔토포티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엔’은 ‘in’, 혹은 ‘at’이라는 전치사이고, ‘토포’는 ‘장소, place’입니다. ‘티니’는 ‘하나의’라는 뜻도 되지만 ‘어떤’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어느 영어 성경에 보면 ‘in certain place’라고 번역했습니다. 정확한 번역입니다. 자,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일정한 거처가 없이 사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부터 시작해서 사마리아 땅과 유대까지 두루두루 다니면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여행하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기도하시던 장소가 고정되어서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어떤 곳에는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고 어떤 곳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장소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살인적인 일정으로 이어지는 아주 고단한 생애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오늘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던 이 제자들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그 어떤 장소가 ‘the’라고 하는 정관사를 붙일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특정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거기서 처음 기도하셨고 이번 기도하고 나신 다음에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 그 장소를 안 찾으셨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마가복음이나 다른 복음서와 종합을 해서 재구성해 보면 이러한 그림이 나옵니다. 전도 여행을 하시다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딘가에서 숙박을 하셨습니다. 어딘지는 모릅니다. 제자들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 예수님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셨을까 하고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밝게 해가 뜨기 전 아직도 캄캄한 새벽에 고단하게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깨울까봐 조용히 일어나시고는 멀리 가셔서 기도를 하셨고, 제자들은 늦게까지 피곤하니까 푹 자고 일어나보니 예수님이 없어지신 것을 알고는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저기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고 계셨는데 그 기도의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고 진지해서 예수님께 말을 걸어서 그 기도의 분위기를 깨뜨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얼마를 기다렸는지 한참 시간이 흘러가고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사고 말을 건넸던 것입니다.
‘한 곳’에서라고 하는 이 수식어 구는 환경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그저 열정이 있고 건강도 있지만 항상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도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지혜도 생기고 신앙도 깊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고 싶은데 육신의 체력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기도에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지 못합니다. 젊어서 30대 때에 저는 교수가 되었는데 일주일에 48시간 정도 안자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즘도 한국에 있으면 다섯 시간 이상 자지 않습니다. 일평생 그랬습니다. 몸이 아프지 않는 한 6시간 이상 자는 것은 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많은 잠을 자면서 성취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가끔 자기 할 일을 다 하면서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은 천재적인 사람이니까 그런 삶의 방식이 통하겠지만, 저는 저 자신이 지능이나 모든 면에서 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만 못하기 때문에 덜 자고 덜 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잘 안 됩니다. 하루를 철야를 하고 나면 일주일이 되도 몸이 회복이 안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환경과 모든 것들은 변합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세상의 환경과 우리의 모든 육신적인 형편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살인적인 기도를 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정당화 하는 핑계거리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에 대해서 귀 기울이고 동의해 준다고 하더라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좋은 환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하는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이 싸움이 쉬운 것이라면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을 것이며, 또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한 후에 자신은 버림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고 고백을 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 우리의 끊임없는 자기 헌신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끊임없는 핍박과 고난,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와 같은 당신의 생애를 사시면서도 언제나 마음을 하나님께 쏟으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들도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단호한 기도생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에는 더 많은 기도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커다란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교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 목사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구약성경 창세기 5장에 보면 최초로 하나님과 동행했던 위대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 그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습니다. 이 동행하다가 히브리어로 ‘히트할라크’인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 동행의 핵심이 두 가지인데, 첫째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입니다.
(찬양)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하나님과의 평화,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함의 핵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인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이 노래했습니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시139:9-10). 도망갔던 요나와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기 때문에 풍랑을 만났지 않습니까? 그것도 일종의 동행입니다. 두 번째로,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는 불타는 정열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하형주 목사님이, 부부가 둘이 손잡고 제자 훈련 나오는 사람 중에는 이혼한 사람이 있는데 둘이 손잡고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 중에는 이혼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딘들 고통이 없겠습니까? 어딘들 시련이 없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여기 오시면서도 그런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고달프냐? 우리 불어권지역은 소외됐어. 영어권은 봄날인데 우리는 소외됐어. 그 불어권 중에서도 내가 있는 나라는 더 비참하고 소외됐어.” 어떤 사람이 목회를 하다 보니까 자기만 죽도록 고생하는 갔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저기 누구 좀 보십시오.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나가고 존경도 받고 편안하게 사역을 잘 하는데, 하나님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같이 이렇게 힘든 사람은 없습니다.”
가을 단풍이 물들 때였는데 어느 후배가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정말 부럽습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무엇이 부럽냐고 했더니, “왜 안 부럽습니까? 남들은 교회 개척하면 안 된다고들 하는데 목사님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지 않습니까?” 또 뭐가 부럽냐고 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교회 가서 장로님들이 하도 못살게 굴어서 고생을 당하는데 목사님 교회 장로님들은 말도 잘 듣고 순종하지 않습니까?” “또 뭐가 부럽냐?”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이 내 자리에 있으면 6개월 안에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라고. 호수 위의 백조 한 마리가 우아하게 헤엄을 치는데 밑에서는 발에서 불이 납니다. “넌 믿기니? 네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선배인 내가 6개월 동안 매일 하나님 앞에, 이제 전 충분히 살았습니다. 내일 아침에 하늘나라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그런 기도해 본 적 있냐?”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예화) 이 사람이 하도 투덜거리니까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났답니다. 이리오라고 데려가는데 월드컵 경기장 천 배는 되는 창고를 보여주더랍니다. 수십억 개의 십자가가 있는데, 네가 하도 무겁다고 하니 여기다 내려놓고 네 마음대로 네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보라고. 그래서 신이 나서 내려놓고 막 뛰어다니면서 찾았습니다. 이 십자가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자기는 하여튼 가벼운 것이면 최고라고 생각을 하고 찾아서 딱 메어보니 진짜 가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고 가겠다고 하였더니 그래도 한번 걸어보라고 하더랍니다. 걸어보니까 가벼운 것은 사실인데 너무 커서 땅에 질질 끌려 몇 걸음 가니까 너무 힘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다시 “작은 십자가를 져야 되겠구나. 가뿐한 것으로.” 생각하고 작은 십자가를 골라서 메어보았습니다. 딱 맞는 것입니다. “야, 이것 진짜 좋다. 뛸 수 있겠다.” 그런데 한참 걷다보니까 이것이 박달나무인지라 엄청나게 무거운 것입니다. 어깨가 빠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깨달았습니다. “아, 십자가는 작고 가벼우면 되겠구나.” 작고 가벼운 것을 드디어 찾았습니다. 딱 짊어졌는데 바로 등뼈 위에 옹이가 하나 튀어나와서 계속 누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루 종일 찾았는데 딱 메니까 괜찮은 것입니다. “이것을 지겠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네가 평생 지고 온 십자가라고 하더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만만하신 분이 아닙니다. ‘네게 지워진 이 십자가’,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맞춤으로 제작하셔서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지고 승리하는 여러분 이 되시기를 빕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여기서 ‘마치시매’라고 한 이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 ‘에파우사토’(επαυσατο)라고 되어있는데, 원래의 뜻은 ‘쉬다’라는 단어입니다. 이것과 맞먹는 동치어가 히브리어가 있는데 그것이 ‘샤바트’입니다. 창세기 2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를 마치시고 쉬셨다고 하였을 때, 그 ‘쉬다’가 ‘샤바트’이고 여기서 안식일을 의미하는 ‘샤밧트 데이’가 온 것입니다. 희랍어로 글을 썼지만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히브리어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편지 자체가 그 당시의 문화가 히브리사람들의 문화였으니까. 그런데 누가복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번역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더니” 즉, 예수님이 그 한적한 곳에서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신 그 기도의 시간의 길이를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짧은 기도로 하늘의 큰 능력을 불러낸 사례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귀신들린 자를 향해, 병든 자들을 향해 명하는 그 명령은 일종의 변형된 기도입니다. 그리고 구약으로 넘어가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가나안 원주민들이 도망을 가니까 추격을 하는데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오면 그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람들을 놓칠 가능성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역시 변형된 기도를 드립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수10:12). 그 기도가 응답이 됩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한 마디의 간단한 기도로 큰 능력이 일어나는 사례가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그것을 따라합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그 순간에 간절히 기도해도 항상 그런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기도의 사람이었던 E. M. 바운즈 목사님, 그분은 은퇴하신 후에 하루에 8시간씩 기도하신 분이셨는데,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순간의 짧은 기도로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불러 내렸던 위대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응답을 보았던 사람들은 평소에 많은 시간을 기도에 헌신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렵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밤을 새워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고, 새벽 미명에 나아가 그 전날 육신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스러운 노동에 방불 하는 헌신 속에서도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때 능력을 유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장 3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이 준엄한 경고를 하십니다. “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만들었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 회막에 가서 마음을 쏟으며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다시 동행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그때 이미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기도하고 돌아가고 다른 사람도 돌아갔는데 끝까지 회막을 지키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이렇게 평소에 많은 시간을 기도의 헌신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의 기도는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불러 내렸던 것입니다.
기도의 길이는 깊이를 보장하지 않지만 깊이는 반드시 길이를 동반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의 길이가 깊이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래 기도해도 졸면서 자면서 공상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형식으로는 기도하지만 마음속에는 세상에 대한 염려가 들락날락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도의 길이는 깊이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기도는 반드시 긴 기도의 헌신을 동반한 결과입니다. 공중전화거는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깊은 기도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 기도의 시간이 언제입니까?” “저는 특별히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늘 기도합니다.” “당신이 기도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저는 그런 것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지 기도합니다.” 이 사람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과 방불할 정도로 깊은 기도의 세계를 지닌 사람이든지 아니면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신하는 위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는, 내가 한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요 큰 업적을 이룬 선교사도 아니요 그리고 목회자도 아니요 신학자도 아니요, 한 사람의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시간의 길이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씀 사역자들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은 후에는 하늘의 이슬로 자신이 흠뻑 적셔지는 가운데 그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젊으신 분들은 정말 많이 기도하셔야 합니다. 교회 개척하고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살아계실 때 어느 날 기자가 물었습니다. “설교와 기도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목사님은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언제나 어렵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어제까지 설교를 잘 하다가 오늘 말도 안 되는 설교를 하는 예는 일반적으로 없습니다. 그러나 어제까지 기도를 청산유수처럼 하다가 오늘 아무 말도 못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한 복음사역자의 눈물을 쏟는 기도는 자기 사역지의 바닥 속에 스며들어서 흘러갑니다. 그래서 쓴 뿌리는 그 기도의 물을 먹고 죽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심겨진 뿌리들은 그것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모든 것이 너무 피상적인 시대입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인간의 재능과 방법 이런 것들은 많지만, 심령을 깊이 찌르는 그래서 설교를 듣는 사람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세워주는,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책망 받아 중생하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경험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통회하게 하는, 복음의 근본적인 역사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입니다. 그 가장 커다란 것이 기도의 현저한 결핍입니다.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Gisbertus Voetius)라는 화란신학자가 있습니다. 자신의 책 속에서 그는 “마음을 쏟는 간절한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액체의 생애였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땀을 흘리신 생애였고, 그분의 생애는 눈물을 쏟으신 생애였고, 마지막 그분의 생애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서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 당신 아들의 대속의 피를 받으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쏟는 아들의 눈물의 기도를 먼저 받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 우리의 목회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목사들이 온 몸에 땀이 흐르도록 기도하면 성도들은 겨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목사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면 죄인들은 삶을 돌이켜 주님을 위해 땀을 흘리며 섬깁니다. 주의 종들이 피를 쏟을 때 성도들의 마음에서는 뜨거운 예수 사랑의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치열한 고난의 일제 시대를 지날 때 그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한 양대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신앙과 종말신앙입니다. 지금은 비록 시련과 고난을 당하지만 언젠가는 이 고난의 시기가 끝나고 주님이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하는 승리하는 종말신앙,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그 사랑을 입었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차례라고 하는 신앙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고난을 모두 짊어지면서 그것으로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비교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이 십자가는 아주 쉬운 멍에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로 이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