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이신 그리스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되 (계3:14)
녹취자: 조봉수
I. 본문해설
아시다시피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뜻하고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각 교회에 주시는 우리 주님의 평가가 나오기 전, 예수님의 자기소개가 나오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소개는 이제 곧 말씀하고 평가하실 각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앞에 나오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다른 어떤 교회에도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아멘이라고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그리스도는 아멘이시다고 계시했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확실히 ‘그렇다’라는 동의를 뜻하는 부사입니다. 원래 이 아멘이라는 말은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오고 ‘오므나’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파생한 양육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깐 이 아멘이라고 하는 부사는 무엇인가를 굳게 하고 든든하게 한다는 말에서 나온 부사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 그러면서도 그 하나님께 대한 굳은 믿음, 언약에 대한 신뢰, 거기에서 오는 절대 순종의 삶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진 사람이면 누가 열렬한 믿음을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고, 뜨거운 감격 속에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아마 여러분은 스스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살고 싶을 것입니다.
II. 아멘의 삶 (예수님의 생애 )
우리의 미지근한 신앙생활은 대부분 이 아멘의 삶의 결핍에 있습니다. 또 우리의 신앙이 미지근하니깐 사실은 아멘의 삶이 불가는 한 것입니다. 오스왈드 스미스라고 전도자는 자기의 설교에 대해서 아멘을 외치는 많은 사람에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Say Amen. Say Amen by your life. (당신의 삶으로써 아멘을 말하라. 예배시간에 아멘이라고 소리치지 말고).” "Say Amen by your life. (너의 삶으로 아멘을 말하라.).” 예수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보좌에서 영광을 버리고 이 낮은 세상에 나를 위해 내 백성을 위해 구속의 제물이 되라 보내셨을 때에도, 아멘하고 내려오셨습니다. 부끄럽게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시는 그것을 선택하셨을 때도, 주님은 아멘으로 여자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가난하고 그리고 힘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목수의 집안에서 곤고한 삶을 살았지만, 그분은 언제나 구김없이 하나님 앞에 아멘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멘의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헌신은 자기 자랑을 위한 것이며, 그의 열정은 자기 사랑의 열정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옳게 사는 것입니다. 전진하고 돌진하는 큰 추진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남이 가진 재능이 없고, 남에게 있는 것과 같은 건강 없고, 남에게 있는 것 같은 큰 지식 없어도 주님이 주신 한계 안에서 주님께 올바로 방향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아멘의 삶을 산다면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A. 아멘의 생애
예수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그 분의 생애에, 그 아멘의 생애는 자기를 철저히 복종시키고. 자기를 철저히 낮추어서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고 주님의 뜻에 순복하는 그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은 아멘이었습니다. 아담이 그 아멘의 삶에 이탈해서 저지른 그 끔찍한 죄의 결과를 예수님은 아멘의 생애로 갚으셨습니다. 그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삶의 방향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가고 있는 속도는 빠를수록 그것은 재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모릅니다. 매 순간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진리의 빛 아래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주님께로부터 깨닫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그 깨달은 것은 우리들이 알아도 그것대로 살수 없기 때문에 아멘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B. 충성되고 참된 증인
두 번째는 그 분이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처럼 행세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종이라고 부르셨고,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증거하러 왔노라고 자기를 겸손이 낮추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증언은 하늘에서 직접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력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율법 중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직접 들려주시는 음성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육신 안의 계신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증거 하실 때, 사람들은 하늘의 음성으로 들린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못했어도, 사람이신 예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말씀은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게 약한 자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리시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 지극히 충성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은 강한 힘이 있었고, 흡입력이 있었습니다.
칼빈 선생이 제네바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제네바에 돌아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였지만, 거기에는 제네바 교회가 직면했던 현실적인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칼빈을 다시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칼빈이 엄격한 목회를 하다가 쫓겨났는데, 그러고 나서 시의 형편이 말할 수 없이 혼란스러워지고, 사람들의 도덕생활과 종교생활은 심각할 정도로 해이해져서 시 전체의 정신적인 통일성이 와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샤돌레트라고 하는 카톨릭의 대주교가 제네바 교회에 정식으로 질의서를 보냅니다.
이 샤돌레트는 아주 상당한 학식을 가진 카톨릭의 학자였습니다. 그 편지는 그래서 아주 유명한 편지입니다. 개혁신학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내용과 함께 질문하는 편지였습니다. 시의회에 이 편지를 보냈는데, 시의회에서 이 편지를 받았을 때에는 제네바에 없었습니다. 그때 모두 의견을 모은 결과, ‘이것을 답변할 수 있을 만큼의 하나님을 아는 학문을 가진 사람은 칼빈 선생님뿐이다.’ 그리고 스트라스부륵으로 사람을 보내, 다시 삼고초려를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칼빈이 안 오려고 하다가, 결국은 부처의 강권에 의해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샤돌레트는 칼빈이 돌아와서 그 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목회가 날로 번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3천명, 5천명 약간 안되는 정도에서 시작했던 제네바 교회의 목회의 개파가 한창 때, 만 오천명까지 되었다고 하니깐, 굉장한 사역이었습니다. 샤돌레트는 측근을 보내서 칼빈을 만나보게 하였습니다. 대주교가 보낸 측근들이 칼빈의 사택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웬 종이, 허접해 보이는 종 하나가 내려와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말했습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우리는 샤돌레트 대주교께서 보내서 왔다. 칼빈 선생에게 안내하거라.” “제가 칼빈인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 겸손한 모습 그리고 검소한 삶, 생활, 그것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남긴 샤돌레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 큰 궁에서 살아도 사람들이 나를 따르지 않는데, 저 젊은이는 저렇게 초라한 사택에서 그렇게 사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따르는구나.” 그 비결이 무엇인가 하였더니, 자기의 가르침과 합치하는 삶이었구나하고 말입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대적의 관계에 있었지만, 칼빈의 말씀에 합치하는 삶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본보기는 바로 우리 주님이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공부하는 일은 어렵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는 종종 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피가 흐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두루마리의 환상을 보면서 그 두루마리를 먹을 때에, 입에서는 매우 달콤했으나, 배에 내려가서는 그게 쓰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입니다. 충성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말씀에 합치하도록 우리가 어떻게 완전히 합치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단 한 번도 말씀에 합치하지 못하는 자신을 정당화시키지 않고, 하나님 앞에 용서와 자비를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르침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C.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님
세 번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그랬습니다. 이 모든 세계는 아들을 통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 구속에 있어서는 단지 그 분이 죽으심으로서 하나님이 구속을 이루셨으니, 어떻게 보면 구속사역 전체의 전개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수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강요당해서 수동적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의 구속받을 토대를 마련하셔서,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사실은 구속의 주체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창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이 친히 아버지와 함께 주체가 되어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창조는 항상 창조주의 위대한 능력의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굳이 이 병들고 뜨뜻, 미지근한 교회에 창조의 근본이시다고 계시해 주신 것은 두 가지 아니겠습니까? 창조하신 그 위대한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가지시고 너희를 심판하실 수도 있다고 하는 것과 너희의 교회의 상태가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 분은 복음의 능력으로 너희의 상태를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목회의 환경, 혹은 우리의 양 때들이 아무리 악한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창조의 능력이신 그 분이 교회의 머리시고 그 언약 백성 안에 함께 하시니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시든지, 그 큰 능력으로 고치실 수 있다는 확실은 가져야 합니다. 그런 두려움과 기대 속에서 섬기게 될 때, 우리는 그 주심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용히 아침에 그 분의 생애를 묵상해 보십시오. 머리 둘 곳 없이 사셨던 그 분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였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풍부한 가운데 있든지, 빈곤한 가운에 있든지, 높여지든지 낮추어지든지, 이 땅에 살아서 주님을 섬길 기회를 얻든지, 혹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던지,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았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렇게 아멘이신 그 분의 뒤를 따라가면서 전심으로 의존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