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되게 하는 십자가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6)
아시다시피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에는 많은 학생들에게 십자가를 읽혔습니다. 이 십자가를 우리들이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샹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학생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냈는데 ‘지난 주일날 나는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못을 밟았다. 못을 밟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신발을 벗고 보니 피가 철철 흘렀다. 이 못 하나도 이렇게 아픈데 예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십가가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것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당한 사람은 지금도 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고통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또 선한 목적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갔던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분이 얼마나 아프셨고, 이런 가시에 찔리셨으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이 전해지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우리가 거기서 멈춘다면 우리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연애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를 생각할 때에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그 살을 찢는 고통과 피를 말리는 그 끔찍한 아픔만이 생각이 난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의미를 먼저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얼마나 아프시고 고통하셨을까 하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그 사실이 내가 자기를 알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저는 여러해 전에 이런 사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깊이 깨닫게 되었어요. 저는 다행히 20살에 회심을 하였는데 다행히 다니던 교회가 아주 복음적인 교회였어요. 그래서 늘 열심히 철야기도하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그런 은혜받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를 다녔어요. 만족스럽지 않은 점도 많이 있어지만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를 보내신 것이 참 예비하신 것이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신앙의 초기에 어느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느냐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런지 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은 언제나 평신도 때 말이죠 마음이 녹을 수 있는 이러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은 참 대견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신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제 뭐 스무 서너살 밖에 안되었는데 제가 설교를 하면은 주일학교 학생들이 막 울었어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그래서 나는 그러면서 계속 살아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고난주간이 되면은 누구보다 경건하게 지내고자 애를 썼고, 그리고 고난주간이 되면은 금식도 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눈물도 흘리곤 했어요. 그래서 저는 십자가에 대해서 저는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언젠가 제가 변화를 받고 이젠 내가 십자가를 설교해야 될 때가 왔다, 그러고 이 십자가를 설교하고자 성경을 펼 때 깜짝 놀라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수난의 아픔에 대해서 내가 그 감각으로 그것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울어야 하는 그 거룩한 십자가라는 그 사실, 고난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넘어서서 비쳐오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설교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저에게 아주 큰 충격이었어요. 그러니까 단편적으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눈물 흘리고 그 다음에 슬퍼하고. 참 놀라워요. 요즘 교인들을 보면은 너무 무감각해. 이건 교회가 고난주간인지, 부활주일인지, 사순절인지, 시집가고 뭐 그 다음에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모든 일을 고난주간에도 다 한다 말이죠. 그때 보니까 초등학교 이제 2학년, 3학년 밖에 안되었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늘 십자가의 복음이 그들 속에 들어가니까 그 고난주간을 그 초등학교 아이들이 그렇게 경건하게 보낼 수가 없어요. 역시 복음은 나이를 넘어서고, 그리고 그 모든 학력을 넘어서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좌우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복음의 깊이와 십자가의 깊이를 깨닫지 못하면은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언제든지 삶이 경박해요. 신앙이 천박해요. 언제나 어린아이 같아요. 신앙의 세계에서 철들지 않은 사람 같아 보여요. 교회 분위기에는 익숙해져 갈 수는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에 익숙해지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인데 그런 일들이 힘들어진다는 것이죠.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목요일 저녁부터 금식을 하는 거요. 그 왜 금식하냐? 주님이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나? 아, 잊혀지지가 않아. 그리고 이제 고난의 날 금요일날이 오면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모아 놓고 다 철야를 하잖아. 그 1학년, 2학년 얘들이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하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예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시도록,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다 하면서 애통하는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면서 살았어요. 한번은 아이들이 고난 주간에 간절히 기도하는데, 본당은 오히려 조용하는데, 교회 기도실에서 바글바글하는 소리가 들려오니까 문을 열어보니까 다 고만고만한 코흘리개들이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하면서 가슴을 치면서 슬피우는 것을 보고 눈물을 왈칵 쏟으면서 문을 닫으면서 밖에 나와서 그러더래. ‘아, 나는 이 어린아이들만 못하구나’ 하고 교회가서 통곡하는 그런 집사님도 있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이 고난주간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초상집 분위기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센티멘탈리즘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이유를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고,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를 깊이 의식하고 느끼면서 그 다음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너머에 있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모든 것을 요약을 하면 딱 한절의 성경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그 위에 십자가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여러분, 영원과 영원 틈바구니에 지푸라기와 같이 왔다가 사라지는 인생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인생들을 모두 쥐어짜고 나면 그 인생의 역사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십자가에 나타난 또 다른 진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둘, 이 둘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있는 이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혈통적으로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 이방인과 자기가 혈통적으로 속해 있는 유대인 그 둘을 둘이라고 대비를 하면서 십자가가 그 둘 사이에 어떤 놀라운 일을 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이방의 사도로 삼으신 사실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도저히 이방의 사람들과는 하나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자부심이 강하고 그리고 교만하고 그리고 신학적인 편견이 있고 이방인들에 대해서 심리적인 편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인들의 선교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이방인들에 대해서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금도 지옥의 땔감정도로 생각을 한다는 말예요. 그런 사람이 그 이방인들을 전심으로 사랑하면서 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이런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그러니까 이 일을 통해서 먼저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이방인들을 향한 편견, 유대인으로서의 자존심, 이방인들을 업수이 여기는 마음, 신학적인 편견, 심리적인 편견, 하나님은 오로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모든 신앙적인 편견들이 먼저 부서지는 일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무엇을 통해서 이것이 부서졌는지 아세요? 여러분, 인간의 확신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 확신 하나에 따라서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공문을 청해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달려가고 있는 이 사람이 그렇게 무너져버리고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의 아버지가 될 수가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마주쳤기 때문이예요.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교만과 어리석음 편견과 아집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예요. 오늘 이 사도바울은 말입니다 2장에서 에베소 교회 교인들, 이방인인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어떻게 이전에 살았는가 하는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의 풍습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다녔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가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녀였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때문입니까? 이렇게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는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저희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그리스도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사도바울이 먼저 권하는 것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까? 구원을 받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불신앙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그들이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도 없는 인생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들을 구원하였음을 말해주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초대교회에 일어난 이 일은 정말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어요. 왜?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가 되어서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선택받은 백성임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왜 이방인들을 만드셨느냐? 하나님께서 지옥의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어땠습니까? 자신들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미련한 돼지같은 인생들이요, 자신들은 철학과 지혜가 있는 빼어난 헬라 문화 속에서 태어난 민족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런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놀랄만한 사건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을 한 교회로 묶어버렸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함께 하나된 기독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실감이 안날 것입니다.
저는 고향이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닙니다. 영남도 아니고, 호남도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이것 때문에 망합니다. 심지어 영남사람둘만 모이는 교회, 호남사람만 모이는 교회가 있다고 그러는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나라 안에 있는 영호남의 벽도 넘을 수 없는 그 복음을 가지고 그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는 어느 목사님이 그쪽 사람은 장로로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고 죽을 거라고 그런 얘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 정신없는 얘기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가 되었다고 하니까 여러분들은 이해가 잘 안되지만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보십시오. 영남사람과 호남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축구대회 한번 한 것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한번 공차는데 그것이 그렇게 신문에 대서특필된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더 신기한 광경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쪽 집안의 사람들이 함께 손을 맞잡고 눈물을 흘리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하고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극단의 공산주의자들과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 눈물을 흘리고 얼싸안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기적이 아닙니까. 이런 일보다 수백배 놀라운 일들이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도저히 하나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된 놀라운 일들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심하게 멸시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반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든지 유대인과 이방인은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이 아니라 보이는 장벽보다 더 두껍고 무너질 수 없는 철책들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높이와 두께만 다를뿐 동일한 장벽들이 수없이 드리워진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딱 하나의 철책이 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넘어갈 수 없고 넘어올 수 없는 그런 땅이 되었어요. 통일전망대에서 이렇게 쳐다보면은 종이 비행기 접어서 던지면은 저 북한까지 날아갈 것같은 눈 앞에 잡힐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못 갑니다. 하늘에는 한가하게 갈매기가 날고 풀벌레 소리 들리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숲속에는 수많은 총칼들이 대포들이 묻혀 있습니다. 눈으로는 손에 잡힐 듯이 보이지만 그러나 가까이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먼 거리를 만들어 놨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그리고 개인의 권리를 한없이 존중한다는 구라파 사회 속에서도 흑인과 백인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인종차별의 벽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 놀면서도 그런다고 하던데. 야, 너 몇 평집에 사냐? 나 25평. 우리 엄마가 40평이하에 사는 아이와 놀지 말라고 그랬어. 여러분, 이런 세상이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수많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아갔을 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더 높은 장벽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높은 장벽이 무너지고 둘이 하나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둘다 한 몸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둘은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유대인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고 또 유대인들이 구약의 신앙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하나가 되게 만든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저 사람이 할례를 받았는냐, 안받았느냐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 사람의 혈통이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구분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구원안에 들어온 사람인가 그 십자가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인가, 이 둘 밖에는 참된 구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제껏까지 많은 편견 속에서 살아왔지만은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신들을 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되엇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자기를 구원하였을 때에 이전에 자신들이 중하게 여겼던 그 모든 구약의 신앙과 그리고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민족의 편견과 신앙의 편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같은 변화가 이방인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를 유대인 가운데 태어난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십자가가 자신들을 구원하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그 십자가의 설복앞에서 자신들의 편견과 그리고 증오심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그 십자가의 사건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준 그러한 유일한 신앙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미암아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과의 화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참된 화목을 경험하게 되었을때에 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피 흘리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사건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사건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며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죄없는 몸으로서 자신들을 위해 보혈의 피를 흘리신 그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의 도리를 깨닫게 될 때에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모든 교만이 파괴되고 자신의 모든 아집들이 무너지고 자기의 모든 어리석은 상식들이 파괴되는 영적인 변화들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들의 무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깨어졌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민족적인 우월주의와 자만심과 모든 이기심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무너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가운데 살아가는 소망이 없는 인생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그분이 죄없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의가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이 하찮은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 있으신 자처럼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과연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은 교만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모든 자랑을 버렸습니다. 왜? 자신들의 참 자랑은 자기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놀라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그 순간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이기심들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나무에 달려서 그렇게 못박혀 죽으시는 그 의미를 깨닫는 그 순간에 자신들의 모든 교만과 이기심들이 십가가에 못박혔습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되지 못하고, 왜 세상이 하나되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인류 최초의 미움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입니다. 가인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아벨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지만 가인의 제사는 불신앙의 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제사를 드리고 있는 아벨이 가인에게 무슨 나쁜 일을 하였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뜻과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있는 이 아벨 때문에 가인이 무슨 해로운 불이익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 자신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는 것을 목격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 가운데 있는 이기심과 교만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은 바로 이러한 인간들 가운데 깃들어 있는 극도의 이기심과 교만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 때문에 교회도 하나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십시오. 그 교회는 뛰어난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은사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어서 예배시간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해서 예배가 문제가 될 정도로 그렇게 은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리자 교회는 나뉘어지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복음의 도리 안에서 생활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벗어나서 생활하는 믿음의 타락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영적인 수준은 교인들이 십자가를 아는 정도에 비례하고, 교회가 은혜로운 정도는 교인들이 그 십자가를 향하여 감격할 수 있는 수준에 비례한다고 말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를 주목하고, 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그 속에서 개인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 앞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들려오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회개하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결코 하나될 수 없는 사람들이 하나될 수 있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에게 이러한 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 놀라운 사건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 예수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죄 있는 자가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의 의로운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꾾임없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경건하고 의롭게 살면서도 언제나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비쳐오는 그 찬란한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의를 바라볼 적마다 자신들의 의가 지푸라기와 같다는 사실을 깊이 느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이 고난의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하나되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하나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유대인 속에 있는 교만을 깨뜨리고 그리고 헬라인 속에 있는 우월감들을 파괴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모두 무너지고 십자가의 정신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동일하게 누가 먼저 하나되자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자 그 십자가 앞에서 함께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이 사건은 우리가 한 번 그 고난을 기억하며 울고 슬퍼하고 그리고 부활절이 오면 잊어버리는 이런 사건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헬라인들이 하나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보고 그 십자가의 도를 깊이 깨닫고 거기서 우리의 모든 사람의 화목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면서 그 십자가의 정신의 지배를 받으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던 때와 오늘은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또 다른 문제에 부딪히며 오늘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그렇게 나누며 고민하던 것과는 다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때 그들의 마음을 주관하고 그들을 사로잡던 그 십자가의 정신이 오늘도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아는 삶이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념하는 삶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언제나 그 십자가의 정신에 붙잡혀서 한 번 생각하고 감성적인 눈물로 그 십자가의 의미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도에 붙잡혀서 그 십자가의 정신에 굳게 사로잡혀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기를 원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십자가에 마지막 남은 그 위대한 일들이 이 세상 속에 성취되는 것들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달려 돌아가실 때에 이 세상이 변화되기를 원하셨던 그 참된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그 십자가를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새롭게 그 십자가를 느낄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간만이 아니라 모든 날들을 우리의 살아가는 삶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채우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지만 아직도 이 세상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지 못한 그 일들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은 잊기 쉬운 인간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는 이 주간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간을 통해서 깊이 자신을 성찰하며 나를 위해서 하나님과 나를 화목되게 하기 위해서 그 사이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그 화목의 정신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