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따라간 십자가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눅 23:26-27)
녹취자: 원수연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은혜를 많이 받았던 때가 있고 또 은혜에서 미끄러진 때도 있었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던 때에는 눈물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이 재판은 엉터리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는데 이 재판은 진행되었고 재판장인 빌라도조차도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했는데 강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증거도 찾지 못했지만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 언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거세게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뒤에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음모가 있었고 결국 많은 군중이 밀어붙임으로써 빌라도를 굴복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는 유월절이었고 유대인 최대의 명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심문에 관한 이야기는 최고의 뉴스거리였습니다.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고, 벳세다 광야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던 그 기적의 사람이 과연 순순히 죽을 것인가, 아니면 자기를 위해 기적을 행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그런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형 판결을 받으시고 일체의 저항이 없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있지도 않은 죄에 고소를 당하여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조용히 십자가를 메고 가신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으로 취급을 받아서 하나님을 모욕한 죄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여겨졌지만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인류가 지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지은 그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고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받을 형벌을 당신이 대신 받으시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악인들의 손을 빌려 이루어지는 일이었지만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지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도의 판결이 무섭거나 두려워서 굴복한 것이 아니라 저 죄인들은 하나님의 도구들이요 저 사람들의 악한 결정으로 말미암아 당신이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실 위대한 계획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속에서 어떤 교부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 사단을 향해 내민 낚시 바늘이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였을 때 사실은 그 낚시를 물고 결국은 자신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는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 조용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당시 십자가 형벌은 웬만한 죄수들에게는 언도하지 않는 아주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로마인이 변방의 야만인이던 시절에 고안해 낸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로마 제국시대가 된 후에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로마 사람들은 이런 방법으로 목숨을 끊지 않았습니다. 희랍어로 ‘스타우로스’(σταυρός)라고 하는 이 십자가는 원래 종교적인 의미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이것은 원래 막대기를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죽음의 공로로 인간의 구속이 이루어진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이 십자가에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십자가 형벌의 가장 잔인함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최고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데 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먼저 세로 막대기를 땅에 굳게 세우고 가로 막대기에 죄인을 못 박습니다. 마치 기차 철로 위에 박는 것과 같은 그런 못을 손에 박습니다. 처음에는 손바닥에 박았었는데 무게에 의해서 자꾸 찢어지니까 손목에다가 못을 박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리에 박고. 그리고 그 사람을 도르래 같은 것으로 가로 막대를 끼워 올려서 공중에 매다는 것으로 십자가 형벌이 이루어졌습니다.
의학적으로 그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 볕 아래에서 피를 흘리게 되면 찾아오는 두 가지 신체의 변화가 있는데 하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무서운 통증과 몸이 찢어지는 데서 오는 통증, 그리고 출혈에서 오는 통증이었습니다. 출혈과 상처로 말미암아 온몸이 특히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두통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진통제 같은 것을 갈대에 꿰어서 스펀지 같은 재료에다가 적셔서 입에 대어주곤 했습니다. 또 하나는 타는 듯한 목마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서너 시간 만에 출혈을 하고 죽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3일씩 매달려도 죽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은 필설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심으로 인간이 지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고 그때의 관습을 따라서 예수님은 골고다까지 가셨습니다. 당시 십자가 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행하는 두 가지 규례가 있었으니 하나는 십자가를 지기 전 죽도록 채찍에 맞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자신이 짊어지고 형장까지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일 먼저 브라이도리온(πραιτώριον)이라고 하는 왕궁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셨고 거기서 옷을 모두 벗고 비참한 채찍질과 모욕과 매 맞음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 시대에 채찍을 연구한 사람들이 이런 죄수들에게 쓰던 채찍을 제시하였는데 그냥 평범한 가죽으로 된 채찍이 아니라 채찍 끝에 쇠붙이나 동물의 뼈 같은 것을 매달아서 내려치면 그것들이 살점을 움켜쥐고 후드득 떨어지는 그런 무서운 채찍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기 전 그 채찍을 맞고 절명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어쩌면 이런 채찍에 맞아 온몸이 피로 물드셨고 머리에는 긴 가시를 가진 면류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리고 홍포를 예수님의 목에 두르고 갈대를 들려주어서 마치 코미디에 나오는 왕 같이 만들어 버리며 조롱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왕이라고 한 것은 그렇게 붉은 홍포를 입고 호를 치켜든 이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생각한 왕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 영적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왕궁수비대가 있는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하게 매를 맞으시고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두 번째 규례를 실행하셨습니다. 130kg에서 150kg은 족히 되었을 그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은 끌려가셨고 예수님은 기력이 없으셔서 아마 자주 넘어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 전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그리고 체포되어서 빌라도에게, 헤롯에게, 또다시 빌라도에게 끌려오시고, 재판을 받으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브라이도리온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그리고 골고다를 향하여 자기가 매달린 십자가를 지고 가셨으니 아마 그때가 일곱 시에서 여덟시 반 정도 시간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홉 시에는 예수님이 완전히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위해 이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을 때 자꾸 쓰러지니까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따라가게 하였고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오르셨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명절인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과 처형의 과정을 눈여겨보았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성경을 기록한 누가는 그렇게 수없이 많이 따르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백성’이라는 사람들과 그리고 ‘여자의 큰 무리’의 두 부류로 나눠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 백성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성경 34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그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치욕을 구경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또 같은 성경 47절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 47절을 한목소리로 읽어보실까요?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백성들은 무엇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죄가 없으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비참한 죄인들이 짊어져야하는 이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린 몸이 되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까? 당신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죄가 없으셨고, 순전하신 하나님의 외아들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멸시와 모욕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피 흘리고,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많은 사람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면서 까지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분들이 계시겠지만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난 경험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인줄 알았고 내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내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도저히 내 인생을 내 힘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생각합니다. 왜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때 어디에선가 복음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앞에서 엎드립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I was blind, but now I see.
눈을 뜨며 비로소 나라는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인생의 이 쓰라린 고민과 모든 고통은 내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났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 혼자 도저히 그 생명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었을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우리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이 바로 내 눈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그래서 그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2000년 전에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끔찍한 고난이 바로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껏 하나님 앞에 주님 없이 살아온, 나를 주인으로 삼으며 살아온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은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 됨을 내려놓고 겸손히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내려놓는 것이 바로 예수 앞에 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자,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그분이 어떤 죄를 지으셨습니까? 어떤 사람들을 괴롭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신데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그분이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일생은 결핍과 시련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외로운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위해서 그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기셨고,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더러워서 멸시하는 죄인들을 예수님은 불러 그들과 함께 먹으면서 그들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 당신의 한 가족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당신 자신의 몸뚱이를 십자가에서 깨트려 우리 모든 구원받기로 작정된 인류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 사랑의 본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찬양)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우리의 죄 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많은 사람들이 이 백성들의 모습이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모습은 오늘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지는 사람들,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뼈저린 고동이 없이,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동참이 없이, 감각적으로 살아가는 많은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맨 처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알았을 때 우리에겐 눈물이 있었습니다. 저는 스물한 살 때 예수를 믿고 회심을 했습니다. 그전에도 교회에 다녔지만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스물한 살 때 인생의 곤고한 골짜기에서 이전의 교만을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날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매일 눈을 뜨면 꿈같았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길을 걸어가다 울고 밥을 먹다 눈물을 흘리고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흠도 없으신 그분이 이 불결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고 고난을 당해서 죽으셨을까? 그 마지막 대답은 왜 그런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면 충분하리라고 믿었습니다.
내가 오늘 설교자로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가장 최근에 다른 이유 말고 이 쓰레기 같은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그 끔찍한 고난을 당하고 살 찢고 피를 쏟아 죽으셨다는 이유 때문에 그분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찰스 스펄전 목사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말하기를 성도는 마른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욕심으로 살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살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기회들을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까? 예배가 끝나고 그 앉은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왜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을까? 그리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을까?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 때문에 예배가 끝났는데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눈물로 여러분들의 성경을 적셔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예수 믿을 때 한 번 경험한 십자가가 아니라 매순간 그 사랑이 죽은 나를 살게 하고, 그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이 나로 하여금 죄를 버리게 하고, 그 십자가의 끔찍한 고난의 기억이 나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때 고난과 시험을 당해도 그 십자가를 생각하며 인내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런 피 묻은 신앙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피 냄새가 사라지고 성공과 권력, 부와 꿈의 성취,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욕망들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일제 강점기 때 혹은 공산 치하에서 그 무서운 신앙적인 박해를 견뎠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 모든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두 개의 기둥과 같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종말 신앙이었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주를 위해 죽을 차례라는 십자가 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에 이 피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흘리셨던 피, 겟세마네 동산에서 쏟으셨던 그 땀과 눈물이 우리에게 아직도 있습니까? 백성들처럼 예수님이 자기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데도 구경하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가 어떻게 죽는지 혹은 요란한 기적을 일으키지는 않는지 궁금해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뒤를 슬리퍼를 끌고 껌 씹으며 따라가는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예수님의 마음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숨 쉬고, 그 마음으로 먹고, 그 마음으로 섬기고, 그 마음으로 마지막 호흡이 멎고 혈관의 피가 식으며 눈을 감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너무나 많은 백성들이 예수의 십자가를 구경하며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자들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좀 긴 설명을 붙입니다.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라고 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멀리 갈릴리로부터 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어디로부터 왔든지 이들은 백성들과는 다른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백성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경하며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슴을 쳤고, 슬프게 울었고, 그러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가슴을 왜 치는지 아십니까? 슬픔이 격하면 이 폐가 응축되면서 피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통증이 느껴집니다. 가슴을 두드리면서 고통을 완화시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남들은 구경하며 따라가는 이 십자가를 이 여자들은 가슴을 치지 않고는, 슬피 울지 않고는 예수님의 따라갈 수가 없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이 백성들에게 없는 그 무엇이 이 여자들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일평생 병든 자의 헌 데를 만지시고, 그들을 고치시고,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어주셨던 예수님이,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예수님이 오늘 그 끔찍한 형벌을 당하고 부끄러운 수치 속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이 여자들의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왜요? 너무나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이 예수를 대신해서 저 십자가를 지고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슬피 울었고 이제 예루살렘을 떠나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저 멀리 형장이 가까이 다가오자 흐느끼던 이 여인들의 울음소리는 피어린 통곡으로 변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결국 끌려가셨습니다. 그 고통 중에도 당신을 향해 슬피 우는 이 여자들이 얼마나 가엾었으면 고개를 돌리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것은 약 40년 후에 다가오게 될 예루살렘의 멸망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티투스라고 불리는 로마의 장군이 군대를 몰고 와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끔찍한 도륙을 행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채 반역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은 너희의 생명을 위함이지만 얼마 후 너희 세대에 그 무서운 심판의 날이 도래할 터이니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해 울어다오.” 예수님은 여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 여자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여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의 고통은 자기의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예화) 1903년과 1904년 사이에 인도 카아시라고 하는 지방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부흥이 웨일즈에 영향을 주고 그 부흥이 평양의 대부흥의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 소식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존스턴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인도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네를 다녀보니 정말 어른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한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부모님들은 어디 가셨니?” “우리 엄마 아빠는 부흥회 갔어요.” “그런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울고 있니? 엄마가 보고 싶니?” “아저씨 아니에요.” “그럼 왜?”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아서 그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슬퍼서 이 아이들이 울고 있는 거예요.”
양파 껍질 같은 신앙의 껍데기를 다 벗겨버리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 한 인간이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끔찍한 고난이 자기가 마땅히 당하여야 할 형벌임을 깨닫고 자기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자기에게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주신 그것을 기억하며 자기를 모두 부인하고 예수를 사랑하는 것, 그것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고 그리고 거기에 매달리셨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매달리셨고 하늘도 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여인들이 피어린 통곡으로 예수님을 위해 울었지만 간악한 병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끌고 가 그 십자기에 매달았습니다.
(찬양)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골고다의 언덕의 십자가도 치워졌고 통곡하며 따르던 여인들도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던 골고다로 향하는 언덕길에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쓰러졌던 곳에 표식이 되어있습니다. 이름 모를 집들과 상점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골고다의 언덕길,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길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그 길을 장난삼아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십자가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그 십자가의 의미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구경꾼이 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눈물로 십자가 소명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되겠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이 질문에 삶으로 대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