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를 거절하신 예수님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레7:14)
녹취자: 김경애
Ⅰ. 제사의 종류
이어서 성경본문은 13절로 넘어갑니다만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두 번밖에 없기 때문에 13절은 건너뛰고 14절을 오늘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이 화목제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방식에 대해서 상세히 우리에게 보도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거제로 바쳐진 화목제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의 많은 제사가 나오는데 이 제사는 목적을 따른 분류와,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대한 분류로 나누어서 생각해보면 정리가 좀 쉽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목적을 따라서 분류할 때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이렇게 5가지로 제사가 나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구약에서 5대제사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번제는 짐승을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로써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소제는 곡식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인데 이것은 수고의 열매를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속죄제는 죄의 용서를 비는 제사였고 속건제는 성물에 대해서 죄를 범하여 불결해진 사람이 성결해지는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린 제사였습니다. 화목제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므로 하나님과의 샬롬이 어떻게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그런 제사의 유형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제사를 어떻게 드리느냐하는 방식에 따라서 성경은 4가지로 나누어서 제사의 규례를 설명합니다. 화제와 거제, 요제와 전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화제는 불로 태워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인데 이것은 동물의 제물과 식물의 제물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제는 하나님 앞에 흔들어서 바치는 제사였는데 동물과 식물의 모든 제물이 이 제사의 방법으로 드려질 수 있었습니다. 전제는 포도주, 기름, 피 등 액체를 부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였고 이것은 이미 올린 짐승의 제사위에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제는 바로 동물의 제사에만 해당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바로 하늘 높이 제물을 들어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제사의 형태였기 때문에 거제라고 불렀습니다.
Ⅱ. 거제로 바쳐진 화목제물
A. 거제의 의미
이 거제라는 말의 의미는 단어의 뜻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테루마’ 라는 히브리단어로 되어있습니다. 이 ‘테루마’는 ‘룸’ 혹은 ‘람’이라는 동사에서부터 나왔고 이 ‘람’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아브람, 여호람 할 때 뒤에 붙은 그 ‘람’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높다’, ‘높이다’, ‘높아지다’, ‘상징적으로 교만하게 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거제는 바쳐진 제물, 각이 떠져 하나님 앞에 바쳐진 짐승제물을 하나씩 들어서 높이 올려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방식으로 제사를 올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어떤 사람이나 혹은 어떤 구별된 사물을 하나님을 의식하며 높이 든다는 것은 곧 높으신 하나님께만 구별되이 바쳐진다는 의미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시편 40편 3절 그리고 사무엘하 23장 1절 등에서 그 증거 본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B. 하나님께 바쳐짐
그러므로 ‘테루마’라고 불리는 이 거제는 이미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을 하나씩 하나님 앞에 높이 들어 그분께 올려드림으로 말미암아 이 제물이 오직 홀로 높으시고 존귀하신 하나님 한분께만 온전히 드려졌다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표상하는 제사였습니다. 결국 여기에 보면 이 화목제물이 하나님 앞에 이미 바쳐졌습니다. 바쳐진 제물인데 거기에 이미 짐승의 제물 한 부분씩을 그것도 하나씩 들어서 높으신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그 제물을 오직 그 하나님 한분께만 바쳐진 것이라고 표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총체적인 헌신과 개별적인 헌신의 구별을 생각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개념 없이 살다가 어느 한순간에 복음의 진리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악된 세상을 방황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신앙의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놀라운 신앙을 경험하고 났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모두 드렸다. 혹은 드리고 싶다는 소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전에 우리가 흔히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독특한 종교적인 경험일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는 어떤 평화가 찾아오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이라는 확신이 올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교적인 경험들을 과대하게 평가한 나머지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이 이미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원래 25평 되는 지하예배당에서 7명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한 4년이 지나서 도저히 이제 그 예배당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꽉 찼습니다. 그래서 골목의 주산학원, 피아노학원, 전부다 한 달에 십만 원, 이십만 원씩을 주고 주일에 빌려서 거기서 애들 교육을 시키고 공과공부를 하고는 했는데 7군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제 큰 예배당으로 건축업자에게 교회가 팔고 간 그 예배당에 사글세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도저히 더는 안 되니까 지금에 있는 평촌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그때 어느 교인 부부가 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렇게 예배시간마다 눈물을 흘리고 감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건축헌금을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의 건축헌금을 작정했습니다. 그 금액은 이전에도 누가 써낸 적이 없고 이후에도 써낸 적이 없는 우리교회에서는 그 정도의 거액의 헌금을 써냈습니다. 그리고 한 1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결국 교회는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교회에 시험이 든 것도 아니고 무슨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1년 만에 이 부부는 조용히 말도 없이 교회를 옮겼습니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건축헌금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교회를 옮긴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도 하나님은 방배동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고 다른 동네에 가면 다시 또 다른 하나님을 만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마 건축헌금은 방배동에서만 유효하지 그 동네를 떠나면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이 그렇게 거액을 헌금하고 한 푼도 내지 않고 가버렸지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대한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웃지도 않으십니까?
아마 박 순용 목사님도 여러분들에게 설교 말씀으로 영향을 끼치시는 분이시니까 비슷한 사람들이 여기에도 있을 테니까 17년 동안 제가 열린 교회에서 설교했고 새벽기도 설교 말고 제가 약 4,000번의 설교를 했다고 그럽니다. 정말 엄청난 분량의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심방을 하거나 아니면 교인을 만나보면 일 년에 천개의 설교 테이프를 들은 사람을 종종 만납니다. 그러면 지금은 제가 주일날 50분에서 60분정도 설교를 하지만 옛날에는 평균 90분 설교를 했고 길면 120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60분만 설교를 하고 강대를 내려오면 교인들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어디 아프시냐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1년에 1000편의 설교를 들었다는 것은 하루 평균 4시간에서 6시간을 설교를 들으면서 생업에 종사했다는 이야기인데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게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이냐 하면 자신은 모두 많이 변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신앙이 사람이 항상 마치 야구장에서 홈런을 맞은 공이 허공을 가로지르고 야구장 밖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그런 항상 상승하기만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다가 보면 시련과 역경이 있고 시험이 들어서 성장이 멈추거나 둔화되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은혜를 받고 쭉쭉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은혜가 떨어지면 잠시 멈추는 것 같다가도 다시 또 올라가고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은혜가 떨어져도 그래도 무엇인가 신앙의 기본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은혜가 떨어지면 불신자 상태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의 차이를 여러분들은 분별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앙의 수준과 상태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수준이 높으면서도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신앙의 수준은 낮지만 상태가 아주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태가 나쁘면 신앙의 수준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이렇게 신앙의 곡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계속 내리꽂는 그런 식의 신앙의 곡선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토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하니까 해당되시는 분들은 깊이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 결단을 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소위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이 정말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은혜의 경험들이 어떤 사람이 변화되지 않을 때 그 은혜의 경험의 진실성 자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성적으로 깨달아지고 그 위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깊은 자기 깨어짐이 있고 변화가 일어나서 본성이 새로워지는 성화의 과정을 걷는 사람도 있고 또 무엇인가 새로운 인상을 받고 깨닫고 변화되고 느꼈지만 그것이 정서의 변화에 그쳐서 영혼 깊은 곳에까지 이르는 변화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은혜의 경험이나 종교적인 체험이 있을 때 이것이 정말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까지 이르는 참되고 진실한 변화인가? 아니면 우리의 표피적인 감정이 자극을 받은 정서의 움직임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세심하게 구별하여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앙의 많은 혼란과 착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사람이 소위 개혁주의, 청교도 이런 신앙을 배웁니다. 그리고 교리를 알게 되고 무엇인가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을 때 피할 수 없이 이 사람은 우쭐해지는 마음을 갖게 되고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일시적인 마음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교리를 배우고 성경의 지식을 익혀가는 가운데 우월감을 갖게 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주기를 마치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해주듯이 그렇게 아주 많이 선생이 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모든 지식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사도바울이 경고한 바와 같이 모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게 마련이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자기의 발아래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은 그 지식 안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을 함께 우리에게 가져다주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볼품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표피적인 신앙의 경험으로 자기 자신이 우월한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더 많은 교리나 더 많은 지식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신자의 영적인 수준과 동일한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우쭐하는 태도들은 모두 설익은 태도들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영적으로 진정으로 성장하지 않고 자신의 본성 안에 신령한 성화의 작용이 없이 계속해서 은혜가 떨어지면 곧바로 불신자와 다름없이 바닥으로 내리꽂는 신앙생활을 반복해서 하는 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삶의 개벌적인 한 부분 한 부분이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충실한 이 신앙의 실천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를 정도로 그렇게 욕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어느 신학교에 가서 말씀을 전하면서 교수들과 함께 대화를 하는 가운데 영화 도가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그 소설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고 영화도 아직 보지 않았는데 교수들 이야기가 바로 실화인 그 도가니에 나오는 성추행범이 교회의 장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추문과 더러운 범죄 속에 어김없이 그리스도인들이 개입되어있고 이러한 모습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에 대해서 치를 떨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그 증거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러면 너희는 이제 이렇게 살아라.’ 하는 삶의 표준까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소위 믿음의 규칙들을 주셨습니다. ‘레귤라이 끄레덴디’ 믿어야할 규칙들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실한 마음으로 잘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그것을 우리의 삶속에 적용한 또 다른 가르침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생활의 교훈들입니다. 소위 ‘뿌라이 께따이 비벤디’ 라는 살아드려야 할 삶의 교훈들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희를 위하여 생축과 제물로 자신을 바치셨다.’ 이것은 우리들이 믿어야할 규칙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축과 제물로 당신 자신을 드린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의 유익을 얻었다는 것 사이에는 과학으로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기초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곧 이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믿음의 규칙의 동전의 또 한 면과 같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라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리고 ‘나는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으니 주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는 이 고백은 이제 이 세상에서 구원의 길을 찾지 않겠다는 고백이고 나의 모든 삶과 모든 고백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나의 임금이시고, 구주이시고, 왕이시고, 온전한 통치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그 안에 포함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세례와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고 매주 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끼리 모였을 때는 믿음의 연약함이요, 은혜의 부족함이요, 우리 인간의 상처받는 한계일지 모르지만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위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신앙의 교리와 신학, 지식, 성경, 이것을 체계적으로 배우려고 하는 탁월한 열심, 어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을 배우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 자체를 엔조이하거나 우리가 습득한 기독교신학과 교리에 관한, 성경에 관한 지식 때문에 우리 스스로 우쭐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셨겠습니까?
(찬양)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같이 있으려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바로 그것입니다. 살라고, 살라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야합니다. 소위 개혁주의를 좋아하고 보수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삶에 공을 들이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믿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오히려 남들이 보기에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처럼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들려오는 교회의 수많은 추문들은, 금전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교회의 수많은 암투들, 신문지상에 오르는 그런 뉴스들, 그런 것들은 너무 창피한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배의 감격이 없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설교다운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예배의 감격이 없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지 모르지만 예배의 감격이 없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예배시간이 감격스러울 정도로 일주일을 살다가 온 교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 세상에서 올곧게 살려고 몸부림을 칠 때에 세상이 우리에게 박수를 쳐줄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욕을 합니다. 그런데도 신앙을 지킵니다. 지난주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눈물로 예배를 드리게 하시고, 기도 속에서 나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찬양 속에서 나의 심령에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서 믿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삶의 공을 드려야합니다.
총체적으로 ‘저는 주님께 다 드립니다. 제 인생을 다 받아주시옵소서.’ 키에르케고르 의 말에 의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돈이 들지 않습니다.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의무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 믿는 내 남편을 사랑해야지!’ 라고 마음을 먹으면 무지무지하게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 오늘도 그 성질을 받아주어야 하고 내가 참아야하고 용서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양성평등주의자인 것 아십니까? 여성만 갖고 예를 들고 가면 여성들만 불리합니다. 남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으면 그래서 구체적으로 인류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한 인간, 내 아내를 사랑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으면 상상할 수 없는 무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는 별로 힘이 안 듭니다. 어차피 안 할 거니까 말입니다. 또 했는지 안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하늘영광교회 하나를 사랑하는 것은 구체성을 띤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개혁주의란 이런 것이거든. 너희들이 청교도를 알아?’ 하고 가르쳐주기 위해서는 입술에 침을 한번 바르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산 것처럼 살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가 온 사람들은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왜? 여기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감격하며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또 개인의 역사를 보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한다!’ 라는 삶의 투철하고 분명한 목표가 없고 헌신이 없는 사람들의 소위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소비적인 영성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부패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이고 종교의 씨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비적인 경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놀랍게 아주 치열한 과학의 시대에 오히려 비합리적인 미신과 같은 신비신앙이 현대인들에게 광범위하게 환영을 받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러한 영적이고 신비적인 경험들을 갖고 싶고 그것들을 소비해서 자기 자신을 만족하게 하고자 하는 욕망은 불신자들에게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개혁신학을 배우고 청교도 신앙을 배우고 책을 읽고 해서 지식을 반듯하게 세운들 또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들 그 은혜를 주신 목적을 따라서 그 은혜를 사용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개별적인 자신의 삶 하나, 하나를 들어 이 삶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올리는 구체성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총체적인 사랑의 고백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는 연예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젊은이들이 삿된 마음에 잠깐씩 들뜨는 그런 종류의 연애감정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격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 관계를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일관적인 사랑의 성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우리의 입술에 있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표명하며 살고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관심을 갖지만 정말 은혜 받은 대로 우리의 삶에 작은 한 부분이라도 주님 앞에 올려드리고 그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높이 들어 높으신 우리 주님만의 것이라는 고백의 꼬리표를 붙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드려진 삶을 살고 있느냐고 우리 자신이 자문해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반드시 썩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도 그 은혜라고 하는 자원을 가지고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 구체적으로 헌신하여 그분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며 살고자하는 참되고 진실한 소원이 우리에게 없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조차도 우리 안에서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무위도식하는 교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 얼마를 내고, 그리고 돌아가고, 그 다음 주일에 또 교회에 오고, 그 생활의 반복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아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일주일동안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따라서 살아야겠다고 하는 아주 강하고 불타는 소명감이 있느냐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위도식하는 삶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으며 설령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한들 그 은혜를 무엇에다 쓰겠습니까? 전쟁을 할 의욕이 없는 군인에게 지급되는 최신병기, 달려갈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주는 그런 운동화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도 속고 하나님도 속이는 이런 삶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한번 대답해보십시오. 그 은혜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소원대로 주시면 은혜를 어디가가 쓰시렵니까? 그냥 엔조이하시렵니까? ‘은혜를 받으면 갈등하던 마음이 편안해져서 좋습니다.’ 무슨 하나님의 은혜가 진통제입니까? 신경안정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었고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가 항상 아들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가지고 스스로 자기 만족에 빠지고 무지한 자들을 얕보는 삶을 사셨습니까? 아닙니다.
(찬양)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님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하나님이 주신 한량없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임하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는 완전한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는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양식이셨고 남이 모르는 음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삶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처럼 또한 당신은 당신 자신의 모든 삶을 이 세상에 있는 비천한 인간들을 위해 아낌없이 쏟으셨던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보고, 혹은 내가 목회하는 교회를 보고, 조국의 교회를 보면서 어떤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냉담할까? 오늘날 신앙생활은 마치 철 가슴, 돌 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드라마 하나에도 울고 웃고 어떤 사람들은 그 공 하나가 잔디밭 위를 굴러가는 것 때문에 울고 웃고 사람들을 죽고 죽이기도 하는데 어떻게 왕이신 하나님 한분을 위해서 살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냉담할 수 있을까? 라고 말입니다. 일본의 바둑의 역사에 보면 토혈국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둘이 바둑을 마주 두는데 바둑을 두는 것을 옆에서 다 적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적인 기록으로 내려오는데 그것을 기보라고 합니다. 그 기보에 보면 토혈국이라는 기보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둘이 바둑을 두다가 한 사람이 지니까 너무 억울해서 피를 확 토하고 바둑판 위에 엎드려서 절명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토혈국입니다. 어떤 인간은 오락을 하다가도 지니까 원통해서 피를 토하고 죽는데 하나밖에 없으신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이것을 몰랐고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은 우리의 인생과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들었고, 알았고, 믿었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냉랭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5장 7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기록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의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고’ 우리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울부짖으며 기도한 적이 언제입니까? 도대체 우리의 열정은 무엇을 위해 준비된 것이고 우리는 언제쯤 활활 타오르기 위해서 지금도 불붙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쌓여진 성경의 지식, 그러면서 쌓여지는 신학에 관한 지식, 교리에 관한 정보 이것들이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것 이외에 우리를 거룩하게 할 능력이 그 안에 있겠습니까? 어린 양이 아니라 이제 늙은 양이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머리는 커졌으나 손은 오르라졌고 다리는 분질러져버렸습니다. 그것이 우리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신앙의 본질이 지식에 있느냐? 감정에 있느냐? 혹은 의지에 있느냐? 를 가지고 사람들마다 제각기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강조점을 두어왔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성경적인 기독교는 이 모든 것을 통활 하는 인격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지성과 정서와 의지 중에 어느 하나만이 그 사람에게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너무 차갑습니다. 너무 냉랭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에 붙들려 산다면 우리의 삶 한 부분 한 부분이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올려 거제로 드려진다면 아마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작은 어느 부분이라도 감히 하나님 앞에 들어서 ‘높으신 하나님 이것이 당신의 것이옵니다.’ 라고 드릴 수 있는 영역이 하나도 없을지 모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받은바 은혜 그리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고백을 추상화하고 보편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요령을 피우기에 아주 좋은 안개와 같은 신앙의 태도입니다.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까? 잘하고 계십니다. 뺀질거리고 노는 교인들보다 아침에 일찍 나와서 주일학교 학생들 신발이라도 정리하고 하나님의 말씀 한글자라도 가르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잘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의 교회봉사라는 제물이 바닥에 놓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한번 들어서 ‘주님 내가 당신께 드리는 개별적인 제물로써의 거제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내가 교회 봉사를 높이 들었나이다. 부끄러움이 없이 당신께만 바쳐질 제물이오니 받으옵소서.’ 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아무리 온전하게 살려고 해도 ‘하나님! 하나님께 나의 이 섬김은 과분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눈빛에서 보면 그것은 언제나 결함을 가지고 지존하신 우리 하나님께 올려드리기에는 불충분한 제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그 헌신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의 양심에 현저한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 부끄럽게 살았습니다만 저는 최선을 다했고,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만 하나님! 중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바치옵나이다.’
(찬양)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박 목사님과 저는 거의 25년이 넘는 교류를 했고 그리고 우리는 함께 개혁신학과 청교도의 아름다움을 함께 즐거워하면서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목회하는 가운데도 이 청교도 신앙을 좋아하고 개혁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더러움과 위험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은 자꾸 저를 보고 어느 교인들이 나 어느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데 개혁주의를 하는 데를 소개시켜달라고 그러는데 별로 없습니다.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치열하게 신학과 교리와 성경을 탐구해야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그 은혜와 하나님의 그 십자가 사랑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해주시지 않으면 쉽게 말해서 그 영혼을 하나님이 거룩한 손길로 뒤덮고 지나가지 않으시면 누구도 정말 개혁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더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칼 같은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삶에 헌신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아도 좋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가 아는 자매 하나가 강남에 사는데 학교에 돈 봉투를 안 갖다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왕따를 시켰습니다. 선생님이 왕따를 시킨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모두 왕따를 시켰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그런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담대함, 그리고 이 세상이 모두 나를 버려도 내가 주님의 편에 서있으면 내가 주님의 편에 서있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충분합니다.’ 라는 그런 두려움이 없는 불굴의 고백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때 미국이 영토문제 때문에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미국의 온 교회가 들고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쟁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막았습니다. 그때 부른 찬송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모든 죄와 사망 가운데 살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위해 죽게 하시기 위해서 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것이다. ‘너희는 나와 함께 죽자.’ 이것이 신앙이다. 디트리보에모포 라는 신학자의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행복을 누리는 것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건 사람이고,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개별적인 삶 하나하나가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과 허위의 삶을 힘들게 유지해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께만 구체적으로 바쳐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제사장들에게 바쳐짐
마지막으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그 제물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제물은 불에 태워서 모두 없애버린 것이 아니라 짐승의 각을 떠서 하나하나 높이 들어 하나님께 거제로 올린 후에는 그 제물들을 제사장에게 주었고 제사장들은 그 제물을 취하여 자기의 식료로 삼았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구약에서 화목제를 드릴 때 이 제물을 제사장에게로 돌렸다고 그랬는데 그러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실현되었고 또 이것이 예표하고 있는바 실체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화목제도 제사였기 때문에 제사장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올릴 수가 없었고 제사장들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희생을 의미하는 죽음을 상징하는 피를 뿌림으로써 이 화목제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열납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 제물이 돌아갔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신약시대의 목회자나 목사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이 제사장이 무엇을 표상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아야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제사장이라는 말이 모두 40회가 사용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대부분은 실제로 있는 제사장을 직접 가리킨 용례이기 때문에 우리의 탐구에 대해서 별 도움을 주지 않고 남아있는 약 6구절 정도가 제사장이 누구인지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제사장이 신약에서 누구를 예표한 것인지에 대한 대답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7장 3절이나 7장 20절에서 보면 이 제사장은 속죄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도 묘사되고 제사장으로도 묘사가 되었던 것인데 이는 대제사장이 제사장 중에서 취한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거제를 올리고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이 우리 높으신 하나님께 바쳐질 때 그 이익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셔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써 우리 하나님께만 온전히 헌신하는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양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실 때에 양식에 대해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양식이 있으니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신 그 일은 우리가 계승할 수 없는 일이 있고 계승할 수 있고 계승해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은 우리가 계승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의 십자가를 각자 지고 주님이 이 땅에 살아계셨더라면 섬기셨을 그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은 가능하기도 할뿐만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삶의 작은 한 부분 한 부분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개별적으로 구체적인 헌신으로 올렸을 때 그 유익을 속죄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의 뒤를 따라 섬겨 그분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과를 가져와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은혜를 사람들에게 주실 때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함께 있게 하셔서 ‘내안에 사는 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는 고백을 하면서까지 예수를 위해 살게 하시려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용례는 베드로전서 2장 5절, 2장 9절, 계시록 2장 6절, 5장 30절에 나오는 용례인데 왕 같은 제사장은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대제사장과 제사장 사이의 구별이 철폐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에는 오직 대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고 바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이 철폐되고 제사장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완전한 희생으로 이제는 사람인 누구의 중보도 필요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휘장을 지나 그리스도께서 뿌리신 핏길을 걸어 거룩하신 임재가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르러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한 부분 한 부분의 거제와 같은 헌신은 사랑하는 교회의 성도들과 그리고 이 땅에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던 이웃들을 향한 섬김으로 나타나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다 더 정의롭고, 보다 더 자비하고, 보다 더 지혜롭고, 보다 더 순결하고, 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로 이 세상에 나타나야하는 것입니다.
Ⅲ. 결론
요새 교회마다 신천지 때문에 난리인데 얘네들이 자기네 광고 카피를 아시아나 항공사에서 따왔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신천지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카피는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의 성도들에게 속하여야할 카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은혜가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바 은혜의 감사함을 성도와 교회,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을 향해 흘려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저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행복을 위하여 이바지하게 해야지 그래서 저를 이용하여 내가 이익을 봐야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내가 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어떻게 나 자신을 이바지할 수 있을까? 나의 무엇을 주면 저가 부요해지고 지금보다도 더 나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지식이 없다면 나의 지식을, 물질이 없다면 나의 물질을, 지혜가 모자란다면 나의 친절한 지혜를, 능력이 모자란다면 나의 능력을, 상처가 크다면 나의 위로를.’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나에게 은혜를 주셨고 그것이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 써주소서
이것이 바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면 힘든 일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을 많이 주시면 어렵게 할 일을 아주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 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들 가운데 안일하고 태평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신 사람 중에 야유회 하듯이 인생을 살다가 죽은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약에서 가장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신령한 세계를 본 사람이 있다면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백합니다. 살 소망이 끊어졌고 만물의 찌끼와 같고 마음의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어디인들 인생 중 시련이 아닌 것이 있겠으며 주님이 은혜를 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야유회를 하듯이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은혜 안에는 하나님의 소명이 있으니 은혜에 감격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린 후에는 항상 치열하게 살아야할 소명의 자리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하늘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들이 코를 박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온 맘을 다해 주님이 주신 우리의 생애를 사랑하며 성도들과의 만남을 사랑하고 피 흘려 사신 교회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가득 채우지 못하는 모자라는 것이 있게 만드십니다. 은혜 안에 없을 때 하나님이 믿음이 없고 식을 때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의 십자가를 주시고 그리고 놀던 사람, 주를 위해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려야할 소명의 자리로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주십니다. 그런 모든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는 길이 힘겹고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주님의 표준을 따라 나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온전히 버리며 사는 그 길이 고달프게 느껴질 적마다 항상 생각해야합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는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이 큰 것이고 나는 주님을 위해 땀을 흘린 적도 없지만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대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자기의 외아들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가슴에 아로새겨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은혜가 끝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리고 나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십자가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개론적인 총체적인 고백이 아니라 입술에 침을 바른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삶의 작은 한부분이라도 그분께 구체적으로 하나씩 거제로 올려드리며 구체성 있는 삶을 매순간 살아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내게 사는 것이 이렇게 살라고 하시는 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은 내 자신 안에 있는 자원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은혜를 주시면 주실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고백을 토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명하는 바를 내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바를 내게 명령하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에게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이런 삶을 살라고 명령하시려면 그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은혜를 내게 먼저 주시옵소서. 그러고 나서 나에게 너는 이렇게 살라고 명령하시옵소서. 그러면 내가 따르겠나이다.’ 그러니 내가 사는 것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것임을 일찍이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의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고백 속에 묻어있는 애매모호한 신앙의 껍질을 벗기십시오. 그리고 삶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주님 앞에 바쳐졌는지를 생각하고 주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 앞에 여러분들의 삶을 온전하게 엮어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