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먼저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먼저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요일4:10) 2002.3.3 주일예배 1
2. 죄와 화목제물(요일4:10) 2002.3.17 주일예배 12
3. 받은 사랑, 베풀 사랑(요일4:11) 2002.3.24 주일예배 23
4. 신자에게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마26:13) 2002.3.25 십자가사경회(새벽) 36
5. 가룟 유다의 실패(마26:14-16) 2002.3.26 십자가사경회(새벽) 41
6. 예수님의 기도 십자가:복종(눅22:42) 2002.3.27 십자가사경회(새벽) 48
7. 예수님의 기도 십자가: 헌신(눅22:44) 2002.3.28 십자가사경회(새벽) 57
8.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높이심(빌2:8-9) 2002.3.29 십자가사경회(새벽) 61
1.먼저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이든지 믿지 않은 사람들이든지 간에 세상이 점점 거칠고 황폐해간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질 문명은 점점 우리에게 편안한 생활을 제공해주고 있고 그리고 하늘높이 치솟는 빌딩, 그리고 많은 생활 환경의 변화들은 우리의 삶을 안락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실제 파고 들어가 보면 우리는 그 물질 속에 파묻혀서 점점 매몰되어가고 있는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느낌이 듭니다.
요즘 바빠서 제대로 못합니다만, 가끔 산에라도 올라가 깊이 심호흡을 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하고 그리고 얼마나 힘든 환경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점점 더 사람들은 물질 문명 속에 묻혀서 살면서 뭔가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 주위에서 다루는 많은 이야기 거리들,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만화 영화 속에서도 극도로 발전한 물질 문명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고독해지고 방황하고 불안한 존재가 되는가 하는 것들은 여지없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답이 무엇일까요? 어렸을 때 자라면서 어른들이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때 좀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되기도 했습니다만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인생을 오래 산 사람들이 비로소 이 세상도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보십시오. 사람들이 너무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대화, 말속에서도 그 거칠음은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공중전화를 너무 오래 건다고 전화부스에서 사람을 때려죽이는가 하면, 차 하나 세우는 문제를 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살인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밤중에 빵빵거리면서 차를 끌고 다녀서 잠을 깨웠다고 해서 바로 이층에서 엽총을 들고 내리갈겨서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는 그런 상황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살인, 폭력, 방화 이런 것들이 일상적인 일처럼 다루어지고 있고 영화나 소설이나 어느 곳에서든지 이런 내용들이 주된 테마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영화를 봐도 애틋한 사람들의 사랑 같은 것을 다루는 그런 영화들은 별로 인기가 없고 때려부수고 전쟁이 나고 악랄한 범인이 도시를 폭파하는 이야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정답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이런 세상에서 좀 살만한 그런 인생에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역설적으로 이런 모든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은 동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포악하고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만들어 가면서도 역시 무기와 폭력으로는 사람들을 행복할 수 없고 사랑으로 사람들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더 참지 못하고 물질 문명에 매몰되어 살아가면서 오히려 한편으로는 더 뜨겁게 사랑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은 사랑을 찾고 있을 뿐이지 누구도 그 사랑을 베풀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참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부부가 같이 살면서 마음이 안 맞고 괴로워도 자식을 보면서 그저 팔자이니 하고 그렇게 살아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안 맞으면 며칠 전에 결혼했어도 갈라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그런 속에서 아이들이 깨트려진 가정 속에서 고통 합니다.
이제는 한 부모 밑에 태어나면 그 어버이는 하나님 되시니 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분들께 복종하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겸손한 효성스러운 자녀들의 상은 구시대의 산물이 되었습니다. 자녀들도 서슴지 않고 부모가 부모 같지 않으면 인연을 끊고 가출하거나 혹은 그 인연을 끊은 채 살아가는 자식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부모들도 늘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오늘날 이 도시 속에서 부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하는 것이 가능할까 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가치라고 믿었던 부모들의 사랑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 결국은 사람들은 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만 그러나 누구도 사랑을 베풀 각오가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사랑 받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그 사랑을 베풀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고통 하는 인간의 모든 비극에 대한 최종적인 해답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만 그러나 누구도 받을 준비는 되어 있지만 베풀 준비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은 사랑 받을 필요는 점점 늘어나고 있으나 사랑할 능력은 고갈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사랑을 말하지만 사도는 오늘 분명하게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통 하는 이 세상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모두 관계가 깨트려져서 망가져도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감화를 받으면 그는 이제 사랑 받는 것보다도 사랑하는 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며 살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사회에서 남을 위한 희생이라고 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까? 이제는 가족들간에도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도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고 이제는 형제들 간에도 서로 이기심이 대립하고 사랑과 양보 같은 것들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여기 있나니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입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적어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도전을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인류의 미래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국민소득이 50,000불이 되고 100,000불이 되고 사방이 모두 기름진 논밭이 되어서 먹고 입을 것이 쏟아져 나온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한, 지구 한 모퉁이에서 어디 한군데서 굶어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고 어디인가는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해서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간격들은 결국은 절대적인 물질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 감동되어서 그 사랑에 가치를 알고 그 사랑을 받으며 사는 이 행복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를 아는 성도들이 사랑하는 맛에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때에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밝은 복음의 빛이 비치게 되고 그리고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트려진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비로소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인간의 모든 사랑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의 인생에 소망을 걸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감화를 입은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덜 받았어도 훌륭하게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선도하시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그 사랑은 하나님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주님이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신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는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또 하나는 그 인간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가 하는 그 사랑에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사랑 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이 많이 누리고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찾았기 때문에 그 공로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저는 21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다음에 깊이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기 전까지는 내가 젊은 시절에 사상적으로 많이 방황하고 마지막 선택한 것이 기독교 신앙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를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사실은 내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서 당신 곁에 부르시기 위해서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사상적으로 방황하게 하신 것도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저의 인생을 인도하셨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 앞에 거친 돌을 두시기도 했고 웅덩이를 파기도 하셨지만 그리고 깊은 물을 헤엄쳐 건너게도 하셨지만 그 걸려 넘어지는 돌, 빠져서 부러진 발목을 붙들고 우는 웅덩이, 그리고 죽기 살기를 각오하고 헤엄을 치며 건너야 하는 환난의 그 파도를 통해서 결국 분산되었던 제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그리고 주님이 언제든지 찾아오셔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기만 하면 나의 모든 자만심을 꺾고 주님의 그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갖추어지도록 만드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았고 내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이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처음 신앙을 가질 때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쓸모 없는 인간, 무엇인가 좀 아는 것이 있다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제 멋대로 살고 하나님은 죽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이 죄악 덩어리의 인간을 용서하셨을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을까?
저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처음 경험했을 때를 한번 회고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방황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신앙에 귀의해야지 되겠다고 저처럼 결심을 하고 교회를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여러분들이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고 좋은 신자가 되겠다고 그렇게 결심하고 그리고 어느 한순간에 불신자의 삶에서 신자의 삶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신앙이 들어가면 갈수록 내가 결단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라는 고백이 얼마나 황당한 고백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도 주님이나를 사랑하셨고 그리고 예수를 믿고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그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끊임없는 설복, 돌같이 차갑고 쇠같이 강해 무엇에도 녹아지지 않는 우리의 마음을 녹이시기 위해서 오랫동안 그 십자가의 피묻은 품에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기까지 실로 지루하리 만치 긴 세월동안 주님이 우리의 완악함과 더불어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완악함을 신앙으로 변화시키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설복해 오신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요한도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경험뿐만 아니라 주님을 만나고 오랫동안 육신 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다가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그 변화의 순간에도 이 같은 원리는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다음에 오직 신앙의 위기를 걸어온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여러분 중에는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했으면서도 또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가치 있다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랑의 마지막 결과는 비참하고 주님의 사랑의 마지막 결과는 끝없는 기쁨과 영생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외곬의 길을 걸어오지는 못했습니다. 미끄러지는 때도 있었고 혹은 나는 믿을 마음이 있었지만 선명한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되었고 또 그것을 변명으로 삼으면서 자기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로 삼은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십자가의 사랑과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면서도 오히려 뒤로 미끄러져서 물러나는 때는 왜 없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혹은 특정한 죄에 빠져서 장시간을 하나님 없는 자와 같이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여러분들을 만나주셔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끌어내신 회심의 사건들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랫동안 굳어졌던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그리고 화석처럼 굳어졌던 자신의 마음이 깨트려져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빛줄기와 같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쏟아지던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랫동안 죄 가운데 빠져서 도무지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고 살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었던 그때에 어느 순간에 샘이 터지듯이 여러분들을 뒤덮고 있었던 죄악의 껍질들이 깨트려지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말미암은 은혜의 감격이 살아나서 혼돈스럽고 어둡던 자신의 신앙과 삶의 미래가 확연하고 명료하게 복음 아래 드러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은혜에 감격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어떻게 그렇게 만나셨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올라오기 전에 지체들이 쓴 오늘 나온 열린 신문에 간증들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의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자 이전에 폼잡고 살았던 자신의 헌신적인 신앙생활은 마치 종이 호랑이와 같았다는 지체의 그 고백은 정말 지체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가 아니라 그런 육신 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죄 가운데서 회심이 필요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그 비참한 죄인들의 그 얽매인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오래된 슬픔이 있고 나서야 어느 한순간에 이런 은혜에 감격적인 만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는 주님의 그 선도적인 사랑에 빚진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할말을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공로 없는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먼저 오셔서 베푸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 중에는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 억제할 수 없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나의 나된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그런 사랑스러운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그렇게 외치고 싶은 지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 차이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느끼는가 못 느끼는가의 차이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도저히 느끼지 못하고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도 후일에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깊이 변화를 받고 나면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나의 죄를 대속했네
그래서 주님을 믿고 변화를 받은 다음에 모든 사람이 느끼는 것은 그 옛날에 그렇게 후회가 됩니다. 왜 그렇게 오랜 동안 주님을 멀리 떠나서 주님의 사랑을 거절하며 살았을까? 하나님의 선도적인 사랑을 하나님이 먼저 주도권을 쥐고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놀라운 것은 다른 것은 많이 가지고 있으면 교만해지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그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의 선도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더 겸비하고 그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 자신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선도적인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로 그 선도적인 사랑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제로 주셨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로 드리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도적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요한일서를 쓴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제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 성령의 놀라운 은혜는 이제 구약에 나타났던 진리들과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를 만나고 경험한 복음의 진리들이 함께 조직적으로 엮어져 이해되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매개체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이 요한은 구약의 화목 제사가 생각났습니다. 이 화목 제사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죄 제가 만약에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위한 것이오, 번제가 하나님 앞에 헌신을 위한 것이오, 속건제가 하나님의 거룩을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였다고 할 것 같으면 이 화목제는 겨냥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화해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언제든지 열린 관계를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과 자유롭게 영적으로 교통하는 그 통로를 다시 열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화목제사에는 반드시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 필요했고 그 죄에 대한 죄 값을 치룰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영적 화해가 수립되고, 재건되고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함께 하나님 언약에 참예한 모든 사람들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의 용서와 화해의 회복을 경험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희생을 무릅쓰시며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셔서 화목을 누리게 하신 그 은혜를 힘입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맺힌 사람들과의 관계를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고 풀고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 사랑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용서해주신 것처럼 그렇게 풀고 그래서 위로부터의 화목이 수평적으로 적용되어서 모든 언약의 공동체가 다시 하나님과의 사랑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되는 그런 의미를 가진 것이 바로 화목제였습니다.
그래서 번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다 태워드렸고 나머지 제사는 제사를 드린 후에 그 제물을 제사장들이 취하였지만 이 화목제 만큼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과 그리고 백성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면서 자신들이 주님 안에서 한 몸 이루고 한 피된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한 제사가 바로 이 화목제사였습니다.
한번 그 광경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범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서 영적으로 고통 하는 많은 백성들이 그 제사에서 회개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등진 자였지만 제사를 드린 후에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그 은혜와 사랑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맺혔던 지체들과의 원한을 풀고 서로를 끌어안고 나의 형제,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자매라고 부르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기를 자원하는 사랑으로 가득 찬 화목의 공동체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맺힌 것들을 풀고 하나님보시는 앞에서 한 형제 된 것을 기뻐하고 사랑스러워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해하며 음식들을 서로 먹고 나누면서 축제를 벌입니다. 이게 얼마나 감격적인 광경입니까? 형제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를 이루며 함께 하고 기뻐하는 그 곳에 주님이 임재하셔서 당신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셔서 거기에 있는 모든 자기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거룩한 자부심을 느끼게끔 만들어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그 화목 제사 속에서 하나님도 기뻐하셨고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도 기뻐했고 그 제물을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됨을 즐기는 백성들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 속에서 죽어간 한 제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린양이었습니다. 화목 제물로 죽어간 짐승이었습니다. 그 화목 제물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져서 하나님도 기쁘시고 우리도 기쁘고 우리를 바라보는 천군 천사들도 찬송을 돌립니다만 그러나 이 기쁨의 축제 속에 이 기쁨의 축제를 위해서 죽어간 한 어린양이 있었으니 바로 그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그 화목 제에서 그 제물을 모두 함께 먹는 그 광경은 정말 기가 막힌 그림입니다. 후일 그리스도 예수, 생명의 떡인 그분을 우리들이 모두 먹고 마시면서 살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미래를 전망하면서 보여주신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선도권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깨트려졌습니다. 우리의 조상이 범죄 하였고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려받았고 우리 속에 또한 죄 된 씨로 말미암아 태어난 그 부패에 종자가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 온갖 더러움들이 내재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더러움과 부패를 간직한 채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 세상에 사는 절망적인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은 바 되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은 거의 느낄 수 없고 죄를 충만하게 짊어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할 그 마음속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자기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사는 것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처럼 군림했고 그리고 자신의 그 만족을 위해서 모든 일을 서슴지 않는 그런 강포한 사람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역사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펑펑 울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던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면서도 자기가 만족을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서슴지 않는, 그래서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더러운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신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더럽혀졌고 점점 더 이 세상은 죄 속에서 고통 하는 세상이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아무리 타락한 죄인들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주님에 대한 그리움을 남겨 두셨고 하나님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신앙의 씨앗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살면 살수록 그는 더더욱 비참해지게 되었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점점 더 자신의 삶에 무목적과 그리고 무가치함에 시달리게 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들의 과거입니다.
그때에 그 가치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을 흙으로 빚으셔서 숨을 불어넣으시고 사람을 만드셨지만, 두 번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케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 아들로 하여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보내셨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그렇게 보내신 것은 궁극적으로 바로 당신을 떠나서 범죄한 우리와 화해를 이루시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었고 지금도 죄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런 인간들을 벌하지 않고 내버려두신다고 할 것 같으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를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을 떠난 자기의 자녀들을 심판하셔서 모두 쓸어버리신다면 그분도 또 하나님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랑을 가지고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들의 죄를 오래도록 참고 그리고 쓸모 없는 인간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 아래 감추시고 그리고 스스로 하나님이기를 포기하신 분처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셔서 3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결핍과 고통 속에서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말하신 바와 같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오, 섬기려하고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바처럼 그대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오셨습니다.
복음서 속에 기록된 그분의 눈물어린 생애는 바로 이런 기록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지한 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선지자로서 사셨고, 죄인들을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주님이 주신 권세로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제사장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아버지께로 위탁받은 통치권을 가지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우리의 왕이시며 만 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우리의 가슴에 아로새겨져야 할 가장 위대한 일은 그분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위한 제물이 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죄를 징벌하지 아니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마리의 어린양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사실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한 마리의 제물인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피나는 고통과 아픔의 생애는 바로 화목 제사를 위한 전주곡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종처럼 섬기신 그 생애가 말할 수 없이 겸비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죄를 짊어진 한 마리의 어린양이 되어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신 그 형벌 받으심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잡히시던 밤을 생각해보십시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분은 피 흘리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제자의 입맞춤과 함께 은 삼십에 팔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한 사람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야바의 뜰에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헤롯의 법정에서 그분은 수많은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비참하리 만치 취급을 받으시면서 온 밤을 지내신 후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오르는 길에 나타나신 그분의 그 모습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 그리고 채찍과 구타로 피멍이 든 몸, 그리고 흐르는 피, 그리고 벗으신 몸, 땅에 끌려 메고 가시는 그 무거운 십자가, 수많은 사람들의 욕설과 침 뱉음 돌팔매질 그것이었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인가
어린양 보혈의 피 어이해 흘렸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의 죄 값일까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가치 없는 죄인들을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고통 하는 인간의 모습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스스로 우리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한 마리의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흠 없으신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흉악한 형벌 아래 복종하셔야 할 한 죄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과 찢으신 그 몸은 바로 죄에 대한 하나님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보여주신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후회함이 없는 선도적인 사랑으로 주님을 필요조차 하지 않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용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시고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얻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단번에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이 왕으로서 다스려주시기를 마치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이 지상에서 우리를 위해 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지만 그러나 성령께서 이제는 그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셨던 그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들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화목을 받아들이고 다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 화목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가장 간절한 가슴 저미는 소원이었습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녀인 우리들을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회복시키기 위해서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형벌은 그분이 당하셨고 우리가 잘못했는데 그분이 대신 그 잘못에 대한 형벌을 받으셔서 그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화목케 하시는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힘입어서 기동하며 살아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위해 살든지 우리는 항상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 앞에서 생각합니다. 그 선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나였지만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구원하셔서 주님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늘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받을수록 우리들이 교만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항상 나는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흉악한 죽음을 당한 것은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예수 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복잡한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시키는 대로 그 사랑 때문에 내 생명도, 내 소유도, 내 인생에 만나는 수많은 기회도 모두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면서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기 적으로 우리는 사순절 가운데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의 날을 향해서 하루, 하루 다가가고 있고 그 영광의 부활의 새아침 이전에는 고난의 밤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많이 안 사람들에게는 주님이 더 많은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의인처럼 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처럼 살아가야지 됩니다.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집니다. 예전에 신앙이 없을 때에는 저 좋은 대로 살았으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나서는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오 내 안에 주님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생에 가장 큰 자랑이 바로 우리 같이 쓸모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자기를 화목 제물로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최고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사랑이 없어서 고통 하는 세상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 그늘 아래 살아가지만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 하는 세상을 보십시오. 예전에 우리들이 살던 그 세상이 아닙니까? 그 사람들의 모습이 이전에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로 자기를 드려 화목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것을 깊이 경험하고 우리는 또 다른 화목 제물이 되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고통 하는 세상 한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들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살아야 할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화목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얼마나 고난에 넘치는 생애를 사셨는지를 기억하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삶에 역경과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온다고 할지라도, 혹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욕을 먹고 희생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완전한 복종의 생애를 걸어가신 예수님의 그 모본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고난과 시련들을 특권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광스럽게 생각해야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평생에 여러분들이 힘써야 할 의무는 그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서 마치 예수님 밖에 없는 것 같은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지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여러분들을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죄와 화목제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어서 사도는 그런 하나님의 선도적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10절 하반 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 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죄가 무엇일까요? 그 죄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못박게 하셔야 했을까요? 우리들은 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이웃을 향해서 악을 행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이 거의 없는 사람들조차도 죄에 대한 관념은 남아 있습니다. 살인이 나쁜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살인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폭행을 하거나 속여서 제물을 빼앗는 것을 죄라고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죄인 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교육도 영향을 미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간들 가운데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죄인지에 대한 생각을 심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웃에게 악을 행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조차도 악을 행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악을 곧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는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악과는 다른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악은 죄라고 하는 뿌리에서 맺은 열매라고나 할까요, 죄는 보다 더 특별한 악입니다. 악의 근원이며 그리고 악의 뿌리요, 그 많은 악을 낳게 하는 본질적인 실체가 바로 죄입니다. 그리고 이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 죄인가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적극적인 거역을 죄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한번 어느 형제를 상담한 적이 있었는데 그 형제가 뭔가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형제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는 것을 알고 불순종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이나를 심판하신다고 할지라도 나는 나 갈 때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것은 단순한 잘못 허물이라기보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입니다. 구약으로 미루어본다면 이런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적극적인 거역의 죄는 사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있어서는 안 되는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가운데는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그것에 도전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은혜 안에 사는 성도들에게는 이런 경향성들이 약하지만 은혜에서 멀어진 성도들에게는 이런 경향성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알고 마음대로 그 법을 넘나들면서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범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율법을 우습게 볼 때 그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는 바로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확신했기 때문에 사실은 그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죄였고 그런 확신에서 출발한 모든 잘못들은 적극적인 거역이오, 적극적인 범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먼저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교훈은 없습니다. 나머지는 나중 문제이고 우선 아이들에게 제일먼저 가르쳐주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그것을 아이들 가슴속에, 아주 어린 나이에 깊이 심어주어야 합니다. 나머지 교육은 그 나중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주님을 모를 때 우리들이 그렇게 살았던 모든 삶들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시다. 그러니까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원하는 대로 삶을 사는 그런 적극적인 거역의 생활이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이런 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역시 개인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은혜 안에서 살아갈 때는 분명히 현저하게 그런 죄의 의지들이 줄어들고 적극적인 범죄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예화: 교회 개척하시기 전에 성경 공부를 인도하셨는데 그 중에 어느 집사님이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시는데 그 남편이 많은 여자들 속에서 혼자 유일하게 남자로서 사업을 하기에 사람들이 그 부인에게 여자들 틈에서 일하는 총각처럼 어려보이는 남편이 걱정되지 않는가 했더니 부인하는 말이 걱정하지 않는다면서 죽으려면 뭔 짓을 못하겠는가 하며 자기 남편이 신앙이 있으니까 믿었다는 이야기)
사람들은 주님을 믿은 다음에도 얼마든지 적극적인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고 변화 받고 은혜를 유지하게 되면 이 적극적인 거역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아주 현저히 줄어듭니다. 감히 그렇게 못합니다. 현저히 줄어듭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을 때 그런 여자들 속에서 사는 것은 사람들이 유혹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기회라고 생각을 하지. 그런데 은혜 받고 나면 그것을 유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유혹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적극적으로 거역하면서 살수 없다라고 하는 자기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간혹 적극적인 범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패역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두 번째 죄는, 죄의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는가 하면 소극적인 불순종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앞에 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적극적 거역이라면 뒤엣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기에 모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라. 이런 사람이 되어라. 하나님의 율법의 표준이 있는데 전자는 그렇게 안 하겠다고 처음부터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이고, 후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그랬는데 마음을 바쳐서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현저히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 요구에 모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어렸을 때 참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렸을 때 칭찬 안 받은 사람이 없지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동리 아줌마들이 다 날 좋아했습니다. 왜 좋아했는가 하면,
(예화: 어린 시절 여러 가구가 사는 집에 살았는데 아줌마들이 저녁에 아이들을 맡기고 놀러 가시면 애들과 함께 한집씩 돌아가면서 청소를 시켜 깨끗하게 해놓고 기다리는 동안에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애들과 지내고 있으면 아줌마들이 와서 깨끗하게 정돈된 것을 보고 기뻐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나만 만나면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집안을 청소한다고 할 것 같으면 제가 한 그 수준은 집안을 청소해야지 된다라는 그 법적인 요구를 완성했을 때는 그런 결과가 오는데 이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다 일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 마음을 압니다. 저기 예배당 짓는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소할 것이 있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일당을 주고 시키면 여기서부터 저기 걸어가는데 한나절은 걸립니다. 삽 자루 질질 끌고 정말 속이 터집니다. 그런데 벌써 그냥 빠른 걸음으로 막 움직이면서 뛰는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서 봉사하러 온 청년들입니다. 하기는 하는데 뭔가 근본적인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어떤 도덕 표준을 제시하셨을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부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안 살려고 노력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써서 그것을 성취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요구에 차마 미치지 못하는 것, 그것을 가르쳐서 죄라고 말합니다. 소극적인 불순종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또 무엇이 죄인가 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동기를 가지고, 그러니까 모든 살아가는 삶의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는 것, 이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죄는 첫 번째, 두 번째 죄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비난을 받았던 장면이 그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사실 두 번째 하나님의 요구가 있으면 그 요구에 부합을 했습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금식이면 금식, 십일조면 십일조 외형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부합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있을진저”라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렇게 외형적으로만 동기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성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었어야 하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 내면의 세계 자체가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그래서 그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바리새인들은 대체로 세 번째 문제에 걸려서 그들이 죄에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모든 삶과 섬김에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 교리 반에서 깊이 토론하는 가운데 목양에 대해서 토론을 하면서 목회자의 소명에 대해서 함께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을 흔히 이렇게 나누기를 좋아하고, 뭐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향해서도 도대체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했으니까 오늘부터는 좀 사람도 사랑하자. 이런 식의 논리는 사실 형식적으로는 맞는 것 갔지만 실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사실은 그런 말이 얼마나 모순이 많은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목회의 소명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 목회의 소명이 유별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회의 소명은 어떻게 보면 그런 목회자로서 갖는 소명이 특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가 목회의 소명을 받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성도들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경험과 공통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선 여러분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날 천국도 지옥도 모르고 자기 갈 길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복음에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쓸모 없는 죄인이고 자신의 살아온 인생, 그리고 심지어는 태어난 존재 자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바로 그런 자신의 비참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주셨다는 사실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자기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이거니와 자기를 위해 그런 구원의 계획을 예비해놓으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자기와 같은 죄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를 위해 하신 일과 그 하신 말씀이 믿어지게 만들어주신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가슴속에 밀려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가 주님의 마음 없이 살아간다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현저한 증거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주님이 자기 안에 오셔서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것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에 눈을 뜨고 보니까 주님의 마음속에 많은 눈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전에 자기처럼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무지한 인간들을 향한 그 예수님의 커다란 사랑, 그리고 그 인간들을 끊임없이 염려하시고 탄식하시는 그 성령의 사랑,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위해서 우리를 보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애틋한 사랑의 마음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삶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전점 더 강렬한 심도를 가지고 자기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점점 더 강렬한 심도를 가지고 밀려와서 나중에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밀려들어오는지 다른 일들은 별로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자기가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불쌍한 영혼들에 다급한 상황을 내버려둔 채 뭔가 다른 일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께 큰 화가 있을 것 같은 그런 정도에 다급함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어떤 근원을 알 수 없는 강제력에 사로잡혀서 그래서 예수의 사랑도 전하고 그 예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풍성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무엇인가를 드리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자신의 대치할 수 없는 부르심이라고 느끼는 것이 목회의 소명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상황적으로 볼 때 신학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습니다. 소명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상황을 사용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소명의 증거를 겨우 상황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소명을 그렇게 주시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좀더 깊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회심하지 않은 신자들이 자라나는 것은 작은 재앙이고, 아주 분명한 목회 사역에 소명이 없는 사람들이 목회의 길에 들어선 것은 커다란 재앙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의 가는 길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있는 동안에 부지런히 그렇지 않은 학생들을 속아서 설득해서 세상으로 다시 내보냈습니다. 2-300명은 내보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신학교 재정의 악화에 기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신학교를 위해서 헌금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증명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저희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이 가끔 있는데 목회의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씀을 듣고 깊이 은혜를 받고 제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소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목회 사역을 접고 신자로서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하면 신자의 삶이 지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안 나옵니다. 그것은 순 가짜입니다. 그것은 목회의 소명이 믿음 위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의 기초에서 그 깊은 사랑 속에서 열매를 맺는 그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그러면 아니 목회 소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그래서 장사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섬기면서 살도록 그게 하나님의 뜻인 줄 깨달았습니다. 바뀐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 목회 사역이 자기 사명인줄 알았는데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니면 아니지, 아니면 이제 신자로서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이제껏 까지 간신히 버텨온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 사역이라고 하는 자기의 인본주의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에 지탱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가짜라는 것으로 판명이 되고 나니까 다시 신자의 삶도 모두 궤멸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목회자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주님을 깊이 사랑해서 처음에 이렇게 내가 신학교에 가고 목회자가 되면 아, 답답한 세상에서 뭔가 비전을 얻을 수 있겠다 그것은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매일 술만 마셔서 위가 빵구가 나고 술독에 걸려서 얼굴이 시뻘건 사람이 신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왜 들어왔을까? 아무래도 신자 같지 않았습니다. 담배 냄새도 나고, 그래서 어떻게 신학교에 들어왔는가 했더니 큰 꿈이 있어서 왔다고 해서 무슨 선교의 꿈이 있나 했더니 기독교 시장이 얼마나 넓은지, 여기는 뭔가 돈벌게 있을 것 같아서, 출판을 하든지 아니면 물건을 만들든지 그러기 위해서는 이 교계에 대해서 알아야겠는데 교계에 대해서 아는 비결이 무엇일까 했더니 신학교에 가면 알 수가 있다고 해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출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어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그래서 영혼들을 사랑하게 되고 그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간다고 그럴 때, 그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구별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별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이 기초가 되어서 모든 섬김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 이것은 목회 사역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의 소명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이 목회의 소명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한 명 택하셔서 목회자로 부르십니다. 목회자로 부르시는 사람에게 나가서 돈벌고 사회 사업을 하는 것도 가치가 있는 일 같고, 또 돈을 열심히 많이 벌어서 좀 한번 큰 회사를 해보는 것도 한번 해볼만한 일 같기도 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존경받는 학자가 되는 것도 한번 해볼만한 것 같기도 하고, 초야에 묻혀서 농부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인생의 보람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이런 마음을 다 하나님이 갖게끔 내버려두시면 그가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실제로 이 세상에 모든 일들이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목회 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유하게 그의 맡기실 일들에 대해서만 가슴이 불타게 만들어주십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부름을 받고 나머지 대부분의 많은 신자들의 삶이 어떠해야지 되나. 동일한 것은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성령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깊이 깨달아서 그래서 그 마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모든 삶에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돈 많이 벌어서 한번 원 없이 돈 써보려고 사업을 했습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그런 사고를 가지고 사업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예전에는 공부를 많이 해서 월급 많이 주는 직장에 들어가려고 그냥 쌔가 빠지도록 공부했습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좀 다릅니다. 자기 먹으려고 돈벌고 자기 출세하려고 공부했는데 이제는 돈벌어서 남 주고 공부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삶의 전동기를 지배해야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 자체가 결핍된 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런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가. 그것은 형벌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제 이 요한이 사랑의 사람답게 이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좀더 쉬운 말로 하면 무슨 뜻인가 하면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있는데 그런데 이 사도는 그 형벌, 하나님의 진노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를 지음으로 인간은 하나님과 불화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도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을 경솔히 생각하는 것은 아닌데 신자로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죄가 결국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가로막는다,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서 이 사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자, 그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사도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음이라” 그러니까 이 화목 제물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희랍어로 ‘히라스모스’인데 이게 구약으로 넘어가면 바로 ‘셀렘’ 화목제를 의미합니다. ‘샬롬’에서 온 말입니다. 샬롬이 거기서 왔는데 ‘셀렘’입니다. 화목제입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인가.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결국은 형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죄의 값입니다.
그래서 일단 죄를 지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데 문제는 인간들이 그 죄를 짓고 나면 하나님 진노가 있는데 그 진노가 모두 가시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죄 값을 치르는 일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풀리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죄 값을 담당하는 것은 인간이 형벌을 받음으로서 가능해지고 진노가 풀리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누그러트리셔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죄 때문에 불화 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화목을 회복하고 다시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지금 사도가 이 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죄 값의 문제입니다. 죄를 당한 그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그 죄에 대해서 자기가 지은 죄 값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그 죄에 대한 치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 설교를 생각하면서 이제 생각이 났는데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예화: 학교에서 오는 길에 인사동 골목에서 일어났던 사건- 지게꾼이 그 당시 흔하지 않은 외제차를 실수로 긁어 놓아 차 임자가 화를 내었지만 지게꾼의 능력으로는 수리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지게꾼이 잘못했다고 비는 모습은, 죄를 지었지만 뒷감당을 못하는 모습은 죄에 있던 인간의 상태가 그랬다는 이야기)
한번 그 자리에 여러분이 서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오셔서 돈을 대신 내주신 분이 있었으니 누군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문학적으로 이해가 갑니까? 아니 그때 인사동에 왜 예수님이 오셨나. 또 그렇지 말고, 또 이단 나왔다고 그렇지 말고 지금도 눈을 끔벅 끔벅 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죄 값은 우리가 도저히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죄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스펄전의 설교집에 보면 스펄젼이 그 대속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뭔가 잘못해서 사람이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재판장을 만났는데 그 죄를 지은 사람과 그 다음에 재판하는 그 판사가 아주 어려서부터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관측하기를 ‘저것은 큰 벌금을 내릴텐데 아마 저 판사가 너무 막역한 사이니까 좀 봐 줄 거야’ 그렇게 다 생각했는데 아주 거액의 벌금형의 판결을 내려버렸습니다. 모두 인정머리가 없는 판사라고 욕했습니다. 물론 또 봐주었으면 봐주었다고 욕했을 것입니다. 인정머리 없는 판사라고 욕했습니다. 이제 사업이 다 망하고 거덜난 사람에게 거액의 벌금형을 선고했기 때문에 그는 돈이 없기 때문에 몸으로 그 벌금을 때워야 하는데, 그때 재판이 끝난 다음에 판사가 내려와서 친구의 손을 붙들고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제껏 판사 생활을 하면서 모아둔 재산이 있는데 우선 그것을 다 털어서 당신 벌금을 내고 새 출발을 하게. 그것이 바로 죄는 지었지만 뒷감당을 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대신 죄 값을 치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셔야 했던 제일 커다란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죽으시려면 사람이셔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잘못, 우리의 죄, 아까 말씀드린 세 가지 점에서 그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짊어지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매달려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셔야 했던 그 끔찍한 고통, 그리고 자기를 죽음에 내어주는 그 극심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결과를 짊어지고 예수님께서는 그 죄를 담당하시고 죄 값을 치르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죄 값을 담당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보시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시고 그래서 우리를 다시 사랑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게 화목의 요건입니다. 그 요건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사도 요한이 볼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가져온 것이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치르신 그 죄 값을 아멘 하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죄 값을 위해서 자기를 비움으로 지불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시 하나님이 화목의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실제로 당신의 호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화목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로 자기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서 원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래서 그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고 먼저 하나님의 용서의 손을 우리를 향해서 내미셔서 그래서 우리를 붙들어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은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나면 우리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으면서 살아온 이래로 우리의 인생은 부족하나마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족하지만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맘때까지 미력이나마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영혼들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면서 살아오도록 주님이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믿어왔고 그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에게는 저의 이 말이 더욱 가슴깊이 다가올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본 일이 없고 그리고 평생 교회를 섬기면서 그렇게 살아온 것밖에는 특별히 세상의 향락에 젖어본 적도 없고 또 괄목할만하게 또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독자적인 삶을 살아본 적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온 수고한 모든 날들은 주님 앞에 기억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다 더 본질적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며 살아왔던 날들이 아무리 훌륭했다고 하더라도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면 사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거절하고 죄와 어두움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주님을 거역하고 또 주님을 믿은 후에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기에는 모자라고 겉으로는 이런 저런 의로운 일을 행하면서 살았지만 그 모든 섬김의 진실한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이 동기가 되지 못할 적이 많았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자기 깨어짐과 은혜를 많이 경험했어도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살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목하게 해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쫓아서 살지 못한 날들이 많았고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자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다라고 하는 그 깨달음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산 날들은 주님께로부터 용서의 은혜를 입은 그 크기에 비하면 너무 적은 것들이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도 당하고 물질적인 손해도 보고 희생도 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불화한 우리들을 당신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위해서 지불하신 그 희생은 말로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큰 것이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바로 이처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불화 한 원수 맺은 인간이었고 자기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어떤 희망도 없는 존재였는데 주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한 죄 값을 치르시고 그리고 우리를 향한 진노의 마음을 누그러트리셔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단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 때문에 우리를 다시 화목하게 여기시고 다시 평화를 회복시켜주신 그 은혜가 우리가 입은 은혜이고, 우리는 그럴 은혜를 입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 대한 은혜의 체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할 그런 기도의 제목입니다. 죄인의 마음속에 언제나 결별하지 못하는 세상의 사랑이 있고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의 마음에도 주님만을 위해서 외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신앙의 결단은 얼마든지 흔들리고 유혹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로 돌아가신 십자가를 봅니다. 거기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셨던 그 선물, 하나님과의 화해, 자신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 진노 가운데서 숨지시면서 한 손으로 주님의 손을 붙드시고 또 한편으로 우리 손을 피묻은 손으로 붙드셔서 그 두 손을 함께 잡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을 주시려고 했던 그리스도 예수의 유언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로 돌아가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의 감격이 있는 곳에는 항상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소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산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이 하나님과의 평화라고 하는 신자의 고백이 있습니다. 물론 신자도 가끔 유혹을 받고 하나님을 순종함에 있어서 적극적인 죄로 주님을 거역하거나 또 온전한 순종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혹은 이렇게 저렇게 주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그 섬김의 동기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되지 못해서 삶 전체가 죄로 오염될 적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사랑 붙들고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눈을 들어서 우리를 위해서 화목 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 죄 값을 치르려고 좋으신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고 죽으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린다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들은 이 세상을 위한 것이고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이 세상에 두고 가야지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화목을 위한 사랑보다 또 더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부르고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한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단번에 자기를 죽여 이루신 그 화목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도록 우리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신자라고 고백하는 우리를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늘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못 박혀죽으셨음으로 너희들은 주님과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라고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많이 죽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가 더 많이 십자가에 매달리면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것들은 날마다 우리 안에서 죽고 우리는 주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습니다. 날마다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 묻으면 묻을수록 주님과 우리와의 화목의 관계는 증진되고 우리는 그 십자가에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평화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 때 뭘 바라셨을까요?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 때 여러분들에게 원하신 가장 커다란 소원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하나님 앞에 슬픔이었던 여러분들이 기쁨이 되고 이전에는 하나님 앞에 아픔이었던 여러분들이 주님이 보실 때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되는 그런 삶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주셨을 때 기대하셨던 사랑의 뜻이 아니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오직 한가지 소원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섬기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이 시간 불화 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그분이 얼마나 간절한 소원으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 그리고 주님을 등지고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주님과 불화 한 관계 속에서 살면서 번민과 불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러분들을 보시며 우리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요? 길이 있습니다. 오늘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들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을 멀리 떠나서 화목의 십자가를 멀리 버리고 살았던 여러분들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화목을 다시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을 다시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죄가 주홍과 같이 붉을지라도 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3.받은 사랑, 베풀 사랑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인하여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따라서 사랑할 의무가 있다라고 하는 것이 오늘 사도가 말하고 있는 요지입니다.
우리들이 많이 접촉하고 또 가까이 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말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물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누구도 물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묘사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모두 물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많은 시인과 그리고 많은 노래하는 사람들은 사랑을 알 수 없다고 묘사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누구도 그 사랑이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묘사는 별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모두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모두 크던 작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아! 이런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라고 경험이 있을 것이고, 또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을 것입니다.
성경이 오늘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화목 제물로 죽으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를 여신 그 구속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두고 사도는 "이처럼 사랑하셨은즉..." 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할 때도 이처럼의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우리와의 화해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건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결론이 지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면 그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구체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어떻게 연결이 되며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곧 정확한 지식은 아닐 수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 태양 볕을 쪼이면서 그 태양 빛 아래 살아가고 있지만 그 태양의 빛을 경험한 그 모든 사람들이 태양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듯이 우리는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이 시간에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여기서 우리가받은 사랑은 무엇이고 또 우리가 베풀어야 될 사랑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세 가지 각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 첫 번째 각도는 오래 참음이고, 두 번째는 은혜이고, 세 번째는 긍휼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즉 성경 전편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오래 참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찬란하게 빛나는 삼각형의 보석을 이쪽 저쪽에서 볼 수 있는데 그 한쪽 면이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음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적극적인 거역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표준에 미달하는 미완성의 순종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랑의 결핍이 곧 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만약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그들의 죄에 따라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셨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는 형벌 받아 죽을 시체밖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음을 통해서 나타내 보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진멸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살면서도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당신에 대해서 거역하는 죄인들을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사랑은 처음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영혼과 동시에 육체의 죽음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리고 그들은 즉시 범죄 한 죄인이 되었고 그들의 범죄를 통해서 세상은 죄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이 더렵혀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창조의 세계까지도 모두 죄로 가득 차게 만들어버린 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일은 당연히 하나님이 해야 할 몫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범죄 한 즉시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되고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육체를 영원히 죽이지 아니하시고 살려두셔서 일정 기간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유해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로 말미암아 사실은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의 빛을 받았고 그 구원의 도리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 후로부터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당연히 자신들이 짓고 있는 죄와 그리고 아담을 통해서 짓게된 그 죄로 말미암아서 당연히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해야 마땅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 살려두셔서 그래서 하나님께 거슬리고 죄 짓는 다수를 보지 아니하시고 그 중에 하나님을 아는 신앙을 가지고 그 씨를 퍼트려가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기대하시면서 하나님이 당신의 심판을 연장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래 참음이십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는 바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거역하고 당신에게 도전하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을 향해 오래 참으시는지를 보여준 인내의 기록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았습니다.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적극적으로주님께 대항하는 죄 짓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주님이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난 다음에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고 일생동안을 방황하면서 나 좋은 대로 살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도록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면서 살아가던 내 인생 전체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괴롭혀 드리고 그리고 주님의 왕권에 도전한 반역자의 삶이었지만 주님이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오랫동안 참아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이라는 사실을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에 비로소 이제껏 까지 내가 살아온 많은 날들 동안 죄밖에 지은 것이 없고 주님의 심판을 당해서 즉각적으로 멸망을 당했어야 마땅한데도 이렇게 살아 있어서 결국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실 사랑한다고 하는 이 말은 발설하기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이와 같이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사랑의 감정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충동에 가까운 감정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지불하셔야 했던 그 커다란 희생을 생각해보십시오. 공의로우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처단하셔서 당신의 피조 세계를 보호하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억누르게 만들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 주님을 거역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당신의 원수로 보지 않으시고 오래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 당신의 품으로 돌아올 집나간 탕자처럼 생각하시면서 기다리시는 그 심정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주님을 오래 참게 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은 다음에 주님이 누구인지 알고 주님이 어떻게 우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이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주님 거스르지 않고 시종일관 살았습니까?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끝까지 순종하며 살았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되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마음을 유지하면서 일생을 살았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분의 뜻을 쫓아서 사는 것 이외에는 삶의 아무 희망도 없다고 그런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항상 주님을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항상 순종하지도 않았고 항상 충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 다시 주님 앞에 우리가 있어서 재생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오래도록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오래 참으시는 사랑은 주님을 만난 모든 성도들에게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수 없는 찬송의 소리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 감격적인 찬송이 구약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마지막에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이처럼 오래 참으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을 노래한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사랑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 둘이서 한 사람은 무신론자였고 한 사람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말했습니다. 나는 십분 동안에 너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보일 수 있다. 썰렁해진 그리스도인이 한번 해봐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입을 열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수 없는 욕을 하나님을 향해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시다면 내가 이렇게 욕하니까 날 한번 어떻게 해보십시오. 그러면서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리고 십 분을 기다렸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의기양양한 이 친구는 말했습니다. 봐라. 하나님이 없지 않는가. 그랬더니 그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입증했네. 어떻게? 봐라. 하나님이 이렇게 오래 참으시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보호하기 위함이지 하나님이 참을성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을 향해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그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어떤 때는 나도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고 나도 도저히 나의 현존에 대해서 참을 수가 없는데 하나님은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제일먼저 거론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키가 작고 배가 좀 나오고 그리고 앞머리가 벗어지고 아주 못생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격이 불같고 과격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많이 깨트려졌습니다. 그러면서 난폭하고 성질이 급한 사람이 인내를 배운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그런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오래 참음이 없이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자기하고 좋은 일, 신나서 열심히 하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얼마나 오래 참는지를 보여주시는 한 표적이 되었습니다.
원래 화해라고 하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먼저 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것으로 화해가 시작이 되는 것인데 피해를 당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가해자는 우리 인간인데 누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까? 인간들은 오히려 범죄 한 이후로 더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거역하고 그리고 주님께 거스르고 주님을 미워하면서 대적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런 모든 인간들의 불순종과 대적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래도록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때리셔도 고치시고, 책망하셔도 다시 용서하시고 싸매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통해서 주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감화시키셔서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약 속에 나타난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그런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마지막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다름이 아니라 범죄 한 인간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신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오래 참음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가장 잘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그야말로 인내의 생애였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후로 예수님은 참고 견디는 일생을 사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심에도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성육신부터 예수님께서는 인내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산 것은 사람이 돼지우리에 산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자기를 낮추신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 모든 삶의 상황은 예수님께 인내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참음의 생애였습니다.
주님의 오래 참음의 생애가 더 결정적으로 꽃피운 것은 십자가에서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 자기를 모욕하고 때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아서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고 그리고 오히려 당신 자신이 기쁨으로 사람들에 버림을 받으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죄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드린 그 눈물의 탄원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오래 참음으로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징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미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바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그분은 누구를 저주하거나 포악해지거나 원망해지거나 독설을 퍼붓지 않으시고 그 십자가의 고난 뒤에 있는 모든 불쌍한 자기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를 아셨기 때문에 조용히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이 져야 할 고난을 당하시며 죽어 가셨던 것입니다. 바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인내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이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받던 사람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들을 죄인을 다루는 것과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이 다루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그 현격한 차이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죄인들을 정죄하고 가치가 적은 사람들을 막 다루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우리가 한때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으며 지금도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겸비함을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속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단칼에 목을 쳐버리고 그리고 유익하지 않는 사람들은 한번에 그 관계를 날려버리는 그런 난폭함 속에서 정말 아가페의 오래 참음을 우리들이 읽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고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데도 주님이 여러분들을 살려두신 것은 그 죄를 용납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 죄에서 돌이켜 주님을 가슴아프게 한 날보다는 남은 날을 더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희망이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주님을 오래 참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지연되고 여러분들은 기회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께 진 그 사랑의 빚,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오래 참으시는 그 사랑 때문에 오늘 내가 살아 있고 그리고 진멸 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인생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라고 하는 그 부채 의식을 떨쳐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아무 쓸모 없는 우리를 향해서 오래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 그리고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는 사람, 우리를 비난해서 우리의 명예를 더럽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주님이 우리를 향해 참으셨던 것처럼 오래 참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는 곳에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었는데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 믿게 만들어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변심했습니다. 아마 영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도시의 방탕함과 부를 누리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 보니까 한때는 은혜가 되었던 사도 바울의 설교와 충고, 가르침들이 목을 조이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야, 예수님의 열두 사도는 예수님이 직접 세웠지만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나했나. 자기 말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동행하는 사람들도 못 봤다고 하는데 그것이 헛것을 봤는지 꾸며댄 것이지 어떻게 아나.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가르친 모든 가르침을 일시에 종이조각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하는 그런 불 신앙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눈물로 편지를 씁니다. 나 사도다. 웃을 대목은 아닌데. 난 사도다. 그런데 그 증거를 댔는데 내가 사도가 아니면 어떻게 죽은 자를 살렸겠는가. 내가 사도가 아니면 어떻게 내가 이렇게 말을 잘하겠는가. 아니다. 나의 사도 된 표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인내입니다. 인내가 사도가 자기의 사도 직을 변증하는 첫 번째 근거입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12절에 나의 사도 된 표는 인내와 그 다음에 기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증거, 이것은 뒤로 밀리고 내가 사도인 것이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내 소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오래 참을 수가 있는가.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그 인내라고 하는 것을 어떤 은사로 받은 것이 아니라, 인내는 은사가 아닙니다. 인내의 은사가 있다고 하는데 인내는 은사가 아닙니다. 인내는 은사가 아니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간 그 한 결과입니다. 그게 바로 인내입니다. 오래 참는 것, 그래서 자기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참으시되 오래도록 참으셔서 마지막에 그 배역의 길에서 돌이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그 참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참아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을 향해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인내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제 이렇게 봄이 되면 가정의 달이다가옵니다. 그럼 마음에 부담이 생깁니다. 꼭 가정 설교를 들으면 예수 안 믿는 집 식구들이 생각이 납니다. 가정 복음화가 왜 빨리 안 되는지 아십니까? 오래 참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늘 말씀드립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참아야 합니다. 핍박도 참고 놀려도 참고 희생해도 참고 깊이 그렇게 인내하는 가운데서 거기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가치가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동반한 호의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찬송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은혜는 항상 그 배경에 죄인을 깔고 있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개념을 밑바닥에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죄입니다. 쓸 가치가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는데 왜 가치가 없습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 가치 없는 죄인들, 창조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섬기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는데 주님께 도전하고 하나님께 거역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인간들이 바로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런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인가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시고 호의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 앞에 그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가장 실감나게 느껴지는 때가 언제인가 하면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그 순간에, 자기는 이제껏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죄 가운데 살아온 쓸모 없는 인간이었는데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자기를 향해 부으셔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 부으심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항상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분히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지 않다, 하나님이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베풀어주시는 것 같지 않다라고 느낄 때에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로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은혜로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이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거룩한 삶을 위한 원동력이라고 말할 때 그 십자가의 경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줍니다. 하나는 자기의 정체를 깨닫게 만들고 또 하나는 자기를 하나님이 아직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그게 바로 은혜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은혜입니다. 그럼 먼저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우리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가 정말 누구인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쓸모 없는 일에 자기를 소진하면서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영원의 관점에서 눈을 열어서 보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세상 그리고 우리들이 탐닉하며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일들이 헛되고 정말 헛된 일들입니다. 우리 교회 다니던 어느 집사님 한 분이 그런 간증을 했습니다.
(예화: 친구들과 먹는 이야기를 하면서 어디는 무엇을 잘하고 어디는 무엇이 맛있고 한참 토론을 하다가 생선회 이야기가 나와 군산에 가기로 하고 차를 타고 열심히 가는데 어떤 차가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며 마음을 바꿔 돌아섰다는 이야기)
참 허무한 것입니다. 월드컵 한다고 막 난리를 치고 상상할 수 없는 돈을 퍼붓고 몇 사람 모여서 공 차는 것을 가지고 수 십억의 인구가 열광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든지 항상 그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은 인간들이 뭔가 이렇게 미쳐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정말 그게 의미 있는 열광입니까? 뭐 그럼 당신은 애국심도 없는가 하면 아니 있습니다. 나도 우리 나라가 본선에 진출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떨어지지나 말고, 그런데 그 열광이 마지막 본질을 다 깨트려가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허무합니다. 그러니까 그 자체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모든 허무한 일들 속에서 그 일이 아니라 일 속에서 무엇인가 불변하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순간을 살아도 이 순간의 삶이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로 향해서도 의미가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을 주님이 사랑해주셨는데 그 사랑이 은혜로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결심문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합니다. 나는 매순간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의미가 없어지지 않는 그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합니다. 주님보다 세상을 사랑할 때가 있고 범죄 할 때도 있습니다. 불순종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헛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부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심지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일, 높은 지위에 올라서 사람들을 다스리면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입에 오르내리면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 모두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신자들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로지 의미 있는 일은 주님이 나같이 이렇게 쓸모 없는 인간, 십자가에서 주님이 못 박히신 그 자리에 형벌 받아야 할 죄인으로서 거기에 매달려야 할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그 형상을 보면서 얼마나 주님께 많은 은혜의 빚을 진 것인지 그것을 깨닫는 사람, 그 사람이 신자입니다.
고달픈 세상에 살도록 자기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의 은혜를 잃어버려도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주님은 그 어린양의 피로서 우리를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가 아니라 어린양의 흠 없는 보혈의 피로 우리를 낳으셔서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셔야 할 무슨 의무가 하나님께 있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게 하셔서 우리와 화해해주셔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에게 있었습니까? 우리는 숙명적으로 하나님을 등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님을 거스르고 반역하다가 형벌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나 우리의 선행으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가 믿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 은혜로 우리를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우리가 보탠 것이 없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고 하나님을 거스르던 사람들이었고 거룩하신 우리 주님 앞에는 토해버릴 것처럼 역겨운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그런데 크리스천이 누군가. 여기 오늘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셨은 즉" '아가파오' 아가페의 동사입니다. 아가파, "우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아가파오 같은동사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자들아" 원래 성경에는 "사랑 받은 자들이여" 이렇게 나옵니다. 피동명사 호격입니다. '아가페 토이' 무슨 뜻입니까?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여"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보면서 왜 날 사랑하시나. 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에게 이런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푸십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질문하듯이 우리를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왜 당신은 이렇게 나같이 쓸모 없는 사람, 당신을 괴롭히기만 하고 당신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 이런 쓸모 없는 사람을 이렇게 분에 넘치게 대우해줍니까? 그런 질문을 우리도 하나님께 하고 사람들에게 우리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기대하는 삶입니다.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단칼에 목을 날려버리는 그 포악함,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삶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은혜 베푼 그 사랑의 삶은 하나님의 그것과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불안전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예수 믿은 후에는 사랑해야지 되는데 예수 믿은 후에도 잘 사랑이 안 됩니다. 가족을 위해서 더 많이 희생하고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더 많이 인내하고 견디고 참고 내가 죽어서 가족들을 구원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아는데 잘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또 다른 의미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객관적으로는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지만 주관적으로는 그런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계속 내 마음속에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것, 이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은 두 번째로 우리에게 그런 현재적인 영혼의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147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머리와 손발 보니 큰 자비 나타나셨네 또 마지막에 나오는 게 무엇입니까,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이게 두 찬송가의 마음입니다. 공통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사랑,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알면서도 주님을 위해 희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주님을 위해서, 왜 현재적인 은혜가 그로 하여금 그 삶을 살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러니까 한때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서 크게 은혜를 입었다 라고 하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현재적으로 오늘 내 마음에 예수님의 그 은혜가 살아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을 또 다른 각도에서 본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성경에서는 '자비'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이 긍휼, 혹은 자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여러분들이 학습 세례문답을 받으면서 외운 문답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십니까? 답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각성시키시기 전까지는 인간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죄로 말미암아서 경험되게 되는 인간 속에 있는 비참함에 대해서 눈뜨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주님의 은혜의 빛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성령이 역사 하시면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깨닫고 그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가에 대해서 확연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이게 성령의 역할입니다. 성령이 무슨 병 고치시는 일을 하시는 것만 성령의 일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본업이 무엇인가 하면 죄와 그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인간들에게 깨닫게 만들어주시는 그 일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아무리 많이 성령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죄에 대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인식과 죄의 비참함을 직시하는 통찰이 없는 사람들의 성령의 경험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령님의 본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긍휼은 무엇인가 하면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 죄로 말미암은 비참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죄의 결과로 반드시 따라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그런 상상을 하나 했는데 비유로 생각했는데 약을 보면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먹지 마시오. 먹으면 죽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다고 칩시다. 지혜로운 사람은 병이 아무리 예쁘게 생겼어도 '주의 사항' 그리고 해골이 그려져 있고 먹으면 죽습니다 그것을 아직 경험해보지 않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예뻐 보이는 병에 들어 있는 맑은 물처럼 느껴지는 이 약이 인간의 몸에 들어가면 어떻게 인간이 고통 가운데서 혀를 깨물고 비참하게 죽는지에 대한 비참함이 먼저 이 경고문 하나를 보고 연상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반드시 비참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그 죄를 지어서 그 죄에 대한 심판을 당하기 전에도 그 죄가 마지막에 무엇을 몰고 오고 자기를 얼마나 비참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압니다. 그것을 미리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 경고문을 무시하고 인간이 어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즉각적으로 비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죄인의 비참함은 동정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경고되었고 그리고 또 믿는 자들의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그가 그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위해서라도 그는 비참해져야 마땅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그것이 맞는데 그렇게 죄에 빠진 그 인간이 죄를 지은 당연한 결과로서 경험하고 있는 그 비참함을 제거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슬픈 마음이 담긴 사랑을 우리는 긍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의마음, 자비의 마음은 종종 논리적이지 않고 논리를 뛰어 넘는 것처럼 뛰어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아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애들은 그렇게 위험한 짓만 합니다. 그래서 까불다가 넘어져서 머리가 터졌습니다. 그런데 두 아줌마가 앉아서 두 아이를 보고 말합니다. 누가 엄마인지 얼굴도 비슷합니다. 한 아줌마가 까불더니 꼴좋다. 그 사람은 엄마입니까, 아닙니까? 엄마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막 뛰어가서 그 아이를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은 엄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가 떨어져서 머리에서 피가 흐를 때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아줌마의 마음에는 오랫동안 이 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 논리만 생각이 났고, 엄마의 마음에는 그 논리와는 상관없이 지금 그가 엄마 말을 듣지 않아서 넘어져서 피가 흐르는 그 비참한 광경만이 마음을 자극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서 그 애를 치료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전도사 생활 때의 이야기-할아버지 목사님을 비방하는 몇 사람들이 떠났는데 그 일로 인해서 목사님이 마음 아파하시며 떠난 분들을 찾아가서 다시 오라고 권면했지만 오지 않아 오랜 시간이 지나 떠난 그분들 가운데 어느 부부가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서 목사님이 가신다고 해서 왜 가시나 했더니 불쌍해서 가신다고 했다는 이야기)
그게 긍휼입니다. 그 한마디는 모든 논리를 다 끊어버린 것입니다. 불쌍하잖아. 주님이 매 순간 우리에게 그 긍휼의 마음의 출발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지은 죄, 우리들이 잘못한 불순종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징벌을 당하고 그 비참하게 살아도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비참함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논리를 뛰어 넘어서 마치 부모의 경고를 무시하고 까불다가 넘어져서 머리가 터진 아이를 끌어안고 상처를 염려하는 것처럼 그렇게 죄로 말미암은 비참함을 어떻게 하든지 우리에게 제거해주시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긍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예수님의 온 삶은 이런 긍휼을 베푸시는 삶이었습니다. 그분이 의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고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그 시대의 더러운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셨던 이유도 바로 이런 긍휼의 마음이 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범죄 하였고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비참하게 되었습니다만 예수님의 마음에 긍휼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비참하게 된 원인을 통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오히려 그 죄의 결과인 비참함을 그들의 영혼과 삶 속에서 제거함으로서 그들을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 기회를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고 싶어하셨던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긍휼, 혹은 자비를 힘입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속에서 살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모든 공로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유대 백성들을 심판하셔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 그리고 비참한 멸망을 경험하게 하신 가운데서도 예레미야가 노래했던 하나님의 그 인자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래야 마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징벌하기보다는 그들의 죄가 그들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이 그들을 그렇게 비참한 처지에 놓이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떠한 자비를 베푸셔야 할 의무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은 슬펐습니다. 그래서 진노 중에서라도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은혜를 잊지 않으시고 심판 중에서라도 자기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 심판 속에서 예레미야는 아침마다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자비, 그리고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의 연대를 예레미야는 보았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우리의 인생 전체는 이런 긍휼의 빚진 생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긍휼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확연하게 나타났다고 믿는 것입니다. 불꽃처럼 하늘로 쏘아 올려진 하나님의 불투명해 보인 사랑은 정상에 올라가서 작렬하며 터지는 그 폭죽의 불꽃놀이처럼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그 절정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순종을 인해서 자기의 외아들을 심판하심으로서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우리들에게 그 죄로 말미암은 그 비참함을 우리에게 제거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놓으신 하나님의 백성의 그 아름다운 형상을 회복하시고 싶으셨던 것이 바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런 긍휼을 입은 사람들은 긍휼을베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죄를 찾아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찾아내서 그들을 정죄 하시려고 마음먹기보다는 그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 사람들의 비참함을 제거하시는 긍휼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죄를 우연한 사고로 당한 질병을 다루실 때와 다른 방법으로 취급하지를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소경이 되었던, 부모의 죄로 말미암아 장님이 되었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앉은뱅이가 되었던 예수님의 눈을 끄는 것은 지금 그들이 불구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삶 그들의 실존이 너무나 비참하다는 것,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득 메었고 그 긍휼의 마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치료의 생애를 사시도록 만들었고 무지한 자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친구가 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가슴아파하는 자들의 눈에서 흐르는 그 눈물을 씻겨주는 종 된 섬김의 삶을 살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답은 부요한 물질문명도 아니고 고통 하는 이 세상에 대한 답은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쾌락이나 환락도 아닙니다. 고통 하는 인간 세상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 죄를 알고 그 죄의 비참함을 가슴아파하며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넘치는 마음이이 고통 하는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들어 사면을 돌아보십시오.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이외에는 삶의 어떤 대안도 갖지 못한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누가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런 사랑, 이 세상에서 낙인찍히고 어떤 희망도 없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에 넘친 이 사랑을 증언해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바로 이런 긍휼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가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과 그리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신 분이 하나님 한 분이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주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살려두신 동안에 그렇게 가치 없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주님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사랑하시고 우시고 마지막에 죽으셨던 것처럼 그렇게 죄인들을 부여안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이외에 우리의 삶에 어떤 대안도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신자에게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오늘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는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사건입니다. 이 여자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께 접근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실 때에 이 여자가 향유를 잘 준비해 가지고 와서 예수님이 식사하시는데 그 머리에 향유를 부었고 그 향유를 부은 사건 마지막 끝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가 행한 이 사건에 대해서 설명을 달고 계시는데 “이 여자가 향유를 내게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나를 기념하리라”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생 전체를 통틀어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섬김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섬김을 받는 자리, 그리고 어떤 은혜로운 자리에서도 이만큼의 커다란 인정을 해주신 적이 흔치 않습니다. 더욱이 여인은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죄인인 한 여자였고 많은 주석가들은 그래서 이 여자가 틀림없이 창기였을 것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런 죄 많은 여자가 예수님께 이례적인 칭찬을 받게 된 데에는 무슨 사연이 있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향유를 부은 것, 그리고 예수님께 와서 눈물을 흘리는 것, 그 모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내게 행한 것도 말하여 기념하리라”고 하신 이 말씀은 복음이 정상적으로 전파되는 곳에는 그래서 그 복음에 감화를 사람들이 입게 되면 반드시 영혼의 변화가 오게 되는데 그 영혼의 변화의 가장 커다란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신자는 신앙에는 열심히 있으나 예수님에 대하여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이 없거나 혹은 결핍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매우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핵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그분을 개인적으로 깊이 사랑하는 것인데 그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이 없이 신앙에 열심히 있다고 하는 것은 첫째는 그의 신앙이 복음에 기초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의 영혼이 그 복음에 의해서 충분히 변화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매우 불행한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영혼의 참된 변화, 한 사람의 영혼이 주님의 손에 의해서 변화되었다 라고 하는 가장 뚜렷한 징표는 무엇일까요? 어떤 놀라운 은사를 경험하거나 신비한 체험을 하거나 혹은 예전에 보지 못했던 이상을 보거나 혹은 감정적인 격렬함으로 기도의 체험을 갖는 것, 이런 것들이 그 사람의 영혼이 변화되었다 라고 하는 확실한 징표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지금 읽어드린 본문 바로 뒤에 보면 바로 예수님께 그렇게 향유를 부으면서 눈물로 예수님께 대한 개인적인 사랑을 느끼는 바로 그 시점에 갸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선금을 받았습니다. 그가 신령한 세계나 신비한 경험이나 놀라운 영의 경험을 이 죄인인 한 여자보다 적게 경험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모든 약한 것을 고치고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쫓는 권세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여자보다 더 많이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고 예수님의 채취를 맡으며 함께 생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갸롯 유다는 변화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니 그렇게 말씀을 듣고 그렇게 능력을 받고 그랬는데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어떤 신비한 체험의 유무나 아니면 헌신, 열심의 유무나 이런 것들을 가지고 그 사람의 영혼의 참된 변화의 여부를 재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숨길 수 없는 중요한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는지 변화되지 않았는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훨씬 더 잘 압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변화 받은 영혼, 주님이 깊이 복음을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변화 받은 영혼 그 인격 속에는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 인격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초석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믿음의 성결을 지키면서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성화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녀라고 확신하면서 교회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경험의 핵심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십자가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가 하면 복음을 깊이 경험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주님과의 친밀함이 있습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그런 깊은 사랑입니다. 그것이 성도일수 있는 참된 표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깊이 듣고 그리고 그 복음에 의해서 감화를 받고 나면 즉시 멀게만 느껴지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그리고 나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삶의 동기를 몸에 퍼진 핏줄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개인적인 사랑이 동기가 되게끔 핏줄처럼 나의 모든 삶 속에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에 깊이 감화를 받고 나면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주님을 느낍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게 주 밖에 없네
그런 주님의 세심한 인격적인 터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모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독특한 삶을 살아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인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사랑의 장, 고린도 전서 13장을 기록하면서 그 뒤편으로 넘어가서 자기의 편지를 끝낼 무렵에 가서 무엇을 말했는가 하면 “누구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죄는 살인이나 도적, 간음이나 사기, 협박 이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 중에서 가장 심각한 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성령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이처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열심 있는 종교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지방 출신인지도 알려져 있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그 흔한 아버지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의 대사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이 밝히고 있는 것은 이 여자가 죄인이었다는 사실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자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도들 위에 뛰어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걸어온 길이라고는 죄악의 발자취밖에 없었고 사회적인 신분은 하잘 것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향유 한 옥합 밖에 없는 그런 가련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여자가 사랑으로 유명한 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자기의 전 존재를 바치는 그 사랑 하나로 불결하고 더러운 창녀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여자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주님을 향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 없으면 그의 삶과 존재 전체는 모두 더러운 것입니다. 불결한 것입니다. 그가 일생을 어떤 열심을 품고 신앙생활을 해왔고 그리고 불굴의 투지로 자기의 뜻을 이루어왔다고 할지라도 그가 주님을 깊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깊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찮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처럼 일생동안 지은 것이 죄밖에 없고 그리고 하찮은 여자로 낙인찍혔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쓸모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복음을 알고 그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희생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주님 앞에 그 주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분을 향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나를 기념하리라”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며칠동안 여러분들을 떠나 있으면서 말씀도 준비하고 그런 가운데 어느 날 주님을 만난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회상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89년도에 주님을 만나고 설교자가 되었으니까 89, 90.....93 주마등처럼 10여 년의 세월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설교도 서툴렀는데 지금은 원숙해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어린아이와 같이 소심하기만 했는데 이만큼 목회를 해오고 영혼들과 부대끼며 주의 일을 해오면서 이제는 여러분들 중에 아무도 저를 보고 우리 목사님은 소심해서 아무 일도 못 저질러.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어느 정도 담대함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기술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전에는 그저 미숙하고 서툴렀는데 이제는 교회를 이끌어가고 여러분들을 이끌어 가면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교회를 경영해나갈 수 있는 그런 지혜도 생긴 것 같습니다. 부족하지만, 그리고 처음에 받았을 때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사람에 대해서는 몰랐는데 이제는 목회랍시고 여러 해 해오면서 인간이 누구인지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하면 듣는 사람의 마음에 예전보다도 훨씬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도 연구했으니까 성경에 대한 지식도 그때보다는 나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그렇게 가슴이 아려오면서 그런 게 떠올랐습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정말 그때만큼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에 전부이고 그리고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주신 그 사랑에 진 부채의식 등,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나를 그렇게 많이 사랑하신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육체로 마친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 그리고 처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혼이 변화되던 때에 어린아이와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급격하게 뒤로 미끄러지면서 차가운 신앙의 껍질만 남아버린 여러분들의 모습도 눈에 어김없이 떠올랐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깊은 사랑이 없다면 예전에 우리가 주님을 만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고 오늘 그렇게 열심을 내는 교회 생활은 도대체 사랑하는 이도 없는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 어떤 선행도 주님을 향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데 성실한 교회 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모든 것보다 귀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 여자가 부은 그 향유가 계산하기 잘하는 제자들의 판단에 보면, 다른 복음서에 보면 300데나리온 쯤 될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요즘 교회 일을 하다가 보니까 5만원 주고도 사람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7-8만원 아무 기술이 없는 사람도 그 정도 주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 300데나리온이 2,400만원정도 되니까 오늘날 인플레이로 평범한 셀러리맨의 1년 치 연봉에 넘는 거액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에게 부어버리는 것보다는 그래서 바닥에 흘러서 없어져 버리는 것보다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그러십니다. 이것이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여자가 향유를 부은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인데 제자들이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그렇게 섬기고 싶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자의 편을 드신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이렇게 깊이 사랑한 이 여자가 이것을 팔아서 예수님이 눈물로 사랑하셨던 가난한 자를 섬기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제자들이 너는 그렇게 버릇이 없냐, 예수님을 위해서 다 부어버려라. 그랬다면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편이 아니라 이 여자의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싸워야 할 가장 피나는 싸움은 이 사랑의 싸움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우리의 신앙의 정절을 지켜서 주님 한 분이 우리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일생을 살아갈 수가 있는가. 거기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다른 일에 모두 성공했어도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주님을 상하지 않는 것을 인해서 회개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을 많이 사랑해주셨는데 나는 주님을 너무나 조금밖에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슴아파하신 적이 있는지 말입니다.
보십시오. 이 여자는 결함 투성의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살아온 삶의 발자취는 전부 죄악이었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도 한마디 말을 건네지 못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모두 짓밟히고 더렵혀진 그런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 앞에 순결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의 향유가 이 여인을 순결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거액의 향유가 이 여인을 순결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진실 된 회개,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서 예전에 사랑하던 세상에 대한 욕심, 물질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한 것, 이것이 이 여자를 끔찍한 더러운 죄인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순결한 여자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일평생이 다 가도록 누가 여러분들에게 신앙의 가장 커다란 숙제가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여러분들이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왔고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원수 된 나를 화목케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아낌없이 부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그분의 사랑 속에서 그분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쇠잔해져 가도 우리의 마음은 점점 더 주님을 향한 사랑에 깊어가서 어디서든지 주님을 그리워하고 주님의 사랑 받음에 행복해할 수 있는 그런 신자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이길 수 없는 고난도 이기고 주님을 위해서 져야 하는 쓰리고 아픈 십자가도 감사함으로 감당하고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가룟 유다의 실패
“그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주거늘 저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마26:14-16)
창녀요 기생이었던 더러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던 바로 그 순간에 열두 사도 중에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로 데리고 가서 예수를 넘겨줄 터이니 얼마를 주겠는가 하고 흥정했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한 사람인데 성경에 대제사장들이라고 나오는 이유는 전임 대제사장들까지 모두 대제사장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전에 대제사장을 하던 사람들과 현재 대제사장 모두를 포함해서 지금 대제사장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의 신앙에 관해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서 그는 예수님을 너희에게 주리니 얼마를 주려느냐 흥정했고 그들은 가룟 유다에게 은 삼십을 달아서 선금으로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를 넘겨줄 계약이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넘겨주려면 돈을 받고 넘겨주는데 예수님을 팔려면 정말 예수님이 얼마만큼 가치 있는 분인지 알고 계산을 해서 예수님을 팔 것이지 은 삼십에 팔았는데 이것은 당시 사회의 한 노예의 몸값에 불과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노예로 흥정하듯이 흥정해서 팔고 은 삼십을 챙겼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모든 사건이 완료된 후에 선입견을 가지고 가룟 유다는 결국은 예수를 팔아먹고 그래서 목매어죽은 사람이지, 그런 견해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가룟 유다의 말이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그 사람을 낙인찍힌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과정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복음서가 한편의 영화였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이렇게 흥정하고 노예 하나의 몸값에 팔아버리고 결국은 그 돈을 써보지도 못하고 저주를 받아서 목매어죽을 것이라고 하는 상상은 여러분은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증거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실 때 상당히 분명하게 가룟 유다가 당신을 팔자라고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가르쳐서 그 경고를 하시는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평소에 가룟 유다가 수상한 짓을 하면서 다닌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의심받을만한 행동을 하거나 무엇인가 수상한 짓을 해서 위험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모두 도대체 우리 중에 누가 예수님을 판다는 말인가. 의아해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한국 교회에서는 가룟 유다 애찬론이 나와서 교회 전체를 떠들썩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지는 무엇인가 하면 가룟 유다는 나쁜 짓을 하고 가책이라도 느꼈는데 회개는 고사하고 가책이나 느끼나, 그런 면에서 자기는 오늘날의 신자들보다 가룟 유다가 훨씬 더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런 논리였습니다. 어째든 그는 누가 꾸짖는 사람이 없는데도 양심의 깊은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그들에게 던져버리고 억누를 수 없는 가책 때문에 목매어 죽었고 줄이 끊어지면서 떨어져서 결국은 배가 찢어져서 창자가 흘러나와 짐승과 같은 최후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였습니다. 사도로 부름 받기 훨씬 이전에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삶의 자리를 함께 하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분과 함께 탁월한 친교를 누렸고 그리고 열두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힘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입었고 그리고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약한 것을 고치며 병든 자를 치료하는 영적인 권세도 받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가서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쫓는 놀라운 일들을 하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가슴 벅찬 기쁨으로 그 승리의 보고를 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 동행들이 쓸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으니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예수님께로부터 제자로서 생활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성령의 놀라운 권능도 경험하고 이적과 기적의 역사도 보고 예수님과 탁월한 친교도 누렸던 그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을 받고 팔 수 있었습니까?
우리들은 성경 어디를 뒤져도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군데 답이 나오는데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사단이 가룟 유다에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수를 팔 생각을 그에게 갖게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단이 가룟 유다에게 들어가서 이렇게 망가진 사람이 되었으니 책임은 가룟 유다가 아니라 사단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로부터 책임을 전가 받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사단도 성령도 모두 보통 사람의 마음에는 오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성령님이 오시는 것처럼 악을 향해 준비된 사람의 마음에 사단이 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무엘상 15장에서 다윗이 성령의 임하심을 받을 때에 한편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성신이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임하는 장면을 읽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성령으로 충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순간 임한 그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것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지만 사울은 그 마음과 믿음을 통해서 불 신앙을 통해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보내고 악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에게 여호와의 신은 떠나고 그리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해서 그렇게 정신병자와 같은 인생을 비참하게 마치게 됩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단이 어느 한순간에 그에게 임했고 그리고 예수를 팔 마음을 넣어주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위해서 철저하게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이 일을 위해서 잘 준비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결정적인 그 순간에 그렇게 사단이 임했고 그를 이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사단은 왜 하필이면 모든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의 마음을 택했을까? 어떻게 보면 가룟 유다도 실패한 사람이고, 베드로도 실패했고, 또 요한도 실패한 사람이고 모든 제자들의 실패는 오십보 백보처럼 느껴집니다. 살겠다고 예수님을 버리고 간 사람들이나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예수와 일행이지 할 때, 나는 예수를 절대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나 다 오십보 백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결국 나머지 제자들은 회복을 해서 다시 주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도록 기회를 제공받았고 가룟 유다는 견디기 힘든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주님의 돌아봄을 받지 못하고 목매어 죽은 비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닌 가룟 유다 속에는 온갖 기적에 대한 경험도 있었고 능력에 대한 경험도 있었지만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한 여자는 창녀요 기생이었고 죄악 덩어리의 인생을 산 사람이었지만 주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깊이 회개하고 사랑하게 되자 그는 거룩한 여인으로 변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 가룟 유다는 긴 기간동안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 일을 열심히 거들었지 만 결국은 목매어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속에서 오늘날 주님의 일을 한답시고 열심히 섬기면서 주님을 향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은 거의 없는 신자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모두 현대판 가룟 유다들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그날에 주님이 심판 할 때에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인정을 받고 어떤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랫동안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왔는데 주님이 그들을 인정해주시지 않습니다. 주여 우리가 귀신도 내어쫓고 선지자 노릇도 했으며 이렇게, 이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이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희랍어 성경에 보면 ‘에그노’로 되어 있습니다. 그 동사의 의미는 처음에는 알았는데 나중에 잘못하니까 모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서부터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을 부르고 귀신을 내어쫓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그런 동안에 그때도 예수님은 그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인가 섬기면서 살아가노라고 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당신과는 상관이 없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가룟 유다는 주님을 섬긴답시고 하고 다니면서 주님께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은 없는 그런 형식적인 신자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그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속속들이 변화되지 않은 그런 오늘날의 신자들의 전형인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많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한가지 잘못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향하고 인격적이고 진실한 개인적인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룟 유다는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로 들었던 많은 교훈과 주님께 가르침을 받았던 그 많은 가르침,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던 예수님의 아름다운 모범, 그런 모든 것들이 이 사람의 일생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은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단지 기회일 뿐입니다. 영혼의 진정한 변화를 받고 이 세상 밖에는 사랑할지 모르던 사람이 변화되어서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이는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일 뿐인 것입니다. 이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간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기회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가.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얼마나 훌륭하게 많은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동기에서 그 일을 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 없는 도덕적인 삶은 자신의 평판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신자의 삶에 있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내 마음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긴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라고 하는 것 그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당당히 순교의 길을 걸어갔던 믿음의 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살 기회를 전혀 제공받지 못하고 순교의 길을 간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태도를 바꾸면 살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음을 택했습니다. 왜 그런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까? 그들 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신앙을 양보하고 주님을 배신하고 다시 생명을 누리면서 이 세상에 살 마음을 갖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영국 런던에 가면 동상 세 개가 서 있는데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동상입니다. 그 중에 ‘크렌모’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였습니다. 그리고 영국 교회 개혁을 위해서 열심히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악한 종교지도자들이 결국은 그를 회유하고 협박합니다. 그때 그는 잠시 자기의 태도를 바꾸는 듯한 글을 몇 장 씁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갈등이 생겨나고 결국은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화형에 처해집니다. 그때 크렌모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이제 이 시대를 위해서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주님 잠시 내 손이 주님을 배신했으니 태우시려거든 먼저 내 손을 태워주십시오.’ 그리고 손을 벌려서 불길에 확 휩싸여서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한 사람의 신념이 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진실한 개인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순교의 길을 걸어가게 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의 제자인 폴리갑의 그 최후의 증언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번만 너의 신앙을 거짓으로 고백하라. 회유하는 악한 자들 앞에서 그는 담담히 말했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86년 동안 이 늙은이가 되기까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거나 배신한 적이 없으십니다.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어떻게 구차한 목숨을 잠시 얻고자 86년 동안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 그분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이기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무슨 믿음이 어떻게 세상을 이깁니까? 그 믿음의 핵심이 바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사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분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모든 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그 분의 십자가 아래서 내가 원래 누구였고, 그리고 그분이 왜 나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죽으셨는지 그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자기의 신분이 정확하게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많은 재산을 소유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조금 부러운 것이지만 그러나 세월이 수없이 흘러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 온갖 실패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점점 깊어져서 그 사랑의 지배를 받는 인격을 가진 사람, 그래서 그 사랑이 핏줄처럼 그의 모든 삶 속에 번져가서 먹고 입고 마시며 사는 모든 삶의 동기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애정에 기초하고 있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룟 유다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때는 주님의 가르침도 받았고 주님의 놀라운 기적도 경험하고 예수님의 심방도 받고 예수님께로부터 따뜻한 위로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 속에서 보이지 않은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점점 깊어지기는커녕 말라비틀어져 점점 그 사랑이 고사되어서 차가운 신앙의 형식만 남아서 예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고 그저 습관적으로 이어오는 종교생활로 굳어진 사람들은 제 이의 가룟 유다입니다. 그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팔 사람들입니다.
저는 가끔 그래서 동업자들이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 속에 있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리고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은 결국 그의 모든 삶 속에서 숨길 수 없이 나타납니다. 누가 부모를 잃고 홀로 되었다고 하면 슬프지 않는가. 누가 실족하고 믿음에서 미끄러졌다고 하면 불쌍하지 않는가. 사람들을 향한 눈물과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메마른 것은 모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기 같은 사람을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다면 그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렇게 쉽게 정죄의 칼날을 내밀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지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을 베풀어서 분에 넘치는 마음을 갖도록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는 힘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죄인들을 긍휼히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 그래서 그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유일한 소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사랑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그것이 없었습니다. 다른 많은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가 없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을 향한 진실하고 인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새벽녘에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주님의 질문에 답하던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실패했으니 이제는 어부로서도 실패했고 예수님의 제자로서도 실패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고 밤새도록 고기잡이에도 실패하고 바닷가에 서 있는 베드로는 실패한 사람의 전형이었습니다. 그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배반했고 고기잡이에도 이제는 더 이상 축복이 없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실패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그에게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 그 사람이 온 세상을 뒤흔들 기독교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베드로가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교회 초석을 놓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전에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한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자로서는 물론 어부로서의 실패,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내게 오는 많은 양떼 내게 맡겨줄터이니
사랑하는 내 친구야 나의 양떼를 부탁한다
너 왜 나를 버렸니? 앞으로는 안 그럴 것이지, 교회가 맡겨주면 충성할래? 아무 서약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딱 그 주님은 그것 하나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가룟 유다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실패한 것은 똑같았는데 이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영혼을 깊이 움직이고 지나간 흔적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한번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음 지킴의 교리를 하면서 신자가 죄를 짓지만 죄를 짓는다고 해서 그가 그 죄가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바로 정말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안 사람의 특징입니다. 실패했지만 그러나 베드로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주님을 제일 사랑하는데 실패했지만 사랑하는데 왜 그렇게 했는가 하고 물으면 할말이 없지만 내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주님을 배신했지만 그러나 내가 목숨보다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였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고백한 것입니다.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이후로 그의 인생에는 참된 자유가 없었습니다. 새벽닭이 울 때마다 괴로웠을 것이고 풍랑이 이는 밤이면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깊이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 그때 그의 마음속에 진짜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전부인 것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실패를 단숨에 날려버리고 그리고 망가진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교회를 세우심으로 수많은 죄인들의 희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는 그런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순간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복잡한 것처럼 보여도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 여러분들의 마음을 원하시고 그리고 그 마음은 곧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주님을 깊이 사랑할 때는 신앙생활이 인생에 너무 단순합니다. 너무 간단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은 그냥 사는 것이고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충만하면 신앙생활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너무 간단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버리고 나면 복잡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걸리는 것들도 너무 많고 그리고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주님을 섬겨나가면서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너무나 많고 심지어는 내가 이렇게 신앙에만 미쳐도 되는가, 언제 미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 있을 때에는 주님을 추구하면서 열심히 주를 섬기며 살아갈 때 주님께로부터 수없이 베 품을 받는 그 많은 은혜, 그것들이 늘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데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식어버리고 나면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동안에 잃어버리는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열심히 믿는 동안에 친구도 잃어버리고 또 뭐도 잃어버리고 생각이 납니다.
보십시오. 가룟 유다의 실패한 삶은 가룟 유다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고유하고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식어버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목숨을 건 마음으로 우리 안에 이미 주님이 주신 사랑을 지키고 그리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주님을 더 깊이 사랑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주님에게 무슨 일을 행했고 주님이 자기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고 그분이 어떤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를 주의 자녀로 삼으셨는지를 되새기면서 늘 그 상에 빚진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또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것에 대해서 감격해하는 그런 진실한 신앙생활, 그것은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매일매일 취해야 할 그런 전쟁과 같은 싸움입니다. 여러분들이 고난의 주간에 이렇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예수님의 기도 십자가:복종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下)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할 때 십자가를 지고 피 흘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그 고통의 현장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고난받으시는 생애였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부터 시작해서 결핍과 고통 속에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존재했던 것, 그리고 율법 아래 복종하시며 우리 인간들의 종이 되어서 일생을 사셨던 생애, 마지막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결국은 무덤에 누이게 되신 그 사건까지 전 생애가 고난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예수님의 고난 가운데 흔히 잊기 쉬운 고난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 생활의 고난입니다. 더욱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자기를 드리는 헌신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드린 이 겟세마네 기도는 단지 승리하는 사역을 위한 헌신적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기도는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 사이에 통로가 되었고 그 통로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음날 당신이 지셔야 할 그 끔찍한 십자가의 고난의 형벌을 자신의 온 영혼으로 충분히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골고다 언덕에서의 죽으심의 고난이 만약에 육체의 고난이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 영혼의 고난은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헌신적인 기도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의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 가운데 우리의 마음에 남는 기도는 아버지의 뜻 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의심할 여지없이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열심히 드리며 온 밤을 지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상상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 앞으로 다가오는 이 십자가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 예수님의 기도의 무게는 그 기도에 있었다기보다는 그 뒤에 나오는 기도, 즉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 이 기도의 오히려 무게 중심이 실렸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보면서 의아해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 예수님 그 마음속에도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구나. 그러나 예수님이 오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는 그 기도의 심정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입니다. 이것은 단지 죽는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 기도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아오신 그 평화로우시면서 도 용감한 생애를 되돌아보면서 그분이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을 두려워하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에 하나님의 나라에 영생은 목숨을 버림으로서 취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많이 가르쳤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쫓기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많이 가르쳤으며 심지어는 목숨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사실도 예수님께서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그러셨던 그분이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이 잔을 내에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우리는 그 해석을 어떻게 신뢰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잘 들어보십시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죄 가운데 살고 죄를 짊어지고 그리고 이미 주님을 믿기 이전에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주님을 믿은 이후에도 하나님과 평화 한 상태보다는 불화 한 상태를 많이 경험하면서 살아온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제일 크고 무서운 것은 죽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경험해보지 못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온 인류의 죄를 당신이 짊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예수님이셨지만 그러나 경험해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것을 짊어지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죄와 친숙하고 친화적인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었지만 사실은 죄와 아무 관계가 없는 순전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짊어지셨습니다. 그 죄가 자기의 죄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그런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몇 번 죽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육체적인 죽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짊어지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경험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그리고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그 순간까지 요한 복음 8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도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교 속에서 사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죄를 짊어지고 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실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단지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그 순간 하나님이 그를 외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경험하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전이나 혹은 이 세상에 계실 때조차도 죄악 된 세상에 죄인들에게 에워싸여 계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런 기도를 드리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는 그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직면해야 합니다. 말씀드릴 요지는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할 때 예수님이 염두에 두었던 견디기 힘든 고통은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육체의 영역이기보다는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큰 것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겟세마네 기도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그 사건의 본 게임이고 이튿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못 박히신 그 사건은 그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이긴 그 승리의 마무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건 기도를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두 가지 기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데 하나는 복종의 기도였고 또 하나는 헌신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그 오늘 그 전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 피력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의 도리가 아닙니다. 모든 기도를 드린 후에는 항상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나이다” 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그런 복종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복종의 기도를 먼저 드리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드리는 속죄의 피를 십자가에서 받으시기 전에 먼저 피 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그 복종의 기도를 들으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받으신 후에 그 보혈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그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오히려 예수님이 참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음을 모르는 그분이 복종의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기 원하기 전에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아버지께로 받을 그 진노와 우리를 대신해서 짊어질 우리의 수많은 죄의 짊어진 때문에 견디기 힘든 고통과 죽음을 영혼 속에 경험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도께서는 잠시 자신의 원하는 바를 아버지께 아뢰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원대로 되지 말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그 자기 비움으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풍성한 삶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 가운데 또 하나는 복종의 결여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자기가 좋아서 하는 그 일은 십자가일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하기 싫은데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원리는 예수님에게도 동일했습니다. 이유야 어째든 간에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이미 당신은 구주였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대속 제물이 되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33년의 생애는 그 한 꼭지 십자가를 향해 달려온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그 잔을 자기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이처럼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 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굴복시키시는 데에는 자기의 뜻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이 필요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셨는데 이렇게 자기 복종이 필요했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에게는 더더욱 그런 복종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생애를 거론하는 가운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순간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이에 존재하는 33년의 예수님의 생애를 복종의 생애였다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생애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조차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섬기는 그 일은 예수님에게 조차도 복종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죄 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까? 왜 죄인들과 한 몸이 되셨습니까? 왜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그 죄인들의 발을 씻기시고 죄인들 속에서 사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이 그것을 좋아하셨기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 큰 능력과 마음에 넘치는 긍휼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일평생 그렇게 많이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순간까지 열렬하게 따라다닌 그 사람들이 마지막 예수님의 곁을 다 떠나고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곁에서 사라졌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열렬하게 환영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게 된 그 배경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사람의 뜻에 복종하신 분이었다면 마지막까지 그 인기를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그 사람들을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계셨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는 전 생애가 결국 예수님을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 많은 과정들, 우리의 삶의 긴 발자취들은 우리의 마음이 걸어간 발자국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 앞에 내 뜻을 꺾으며 복종하는 자기 복종의 철저한 아픔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의 삶에 십자가가 있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만 사실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지 않았을 때에도 은혜를 받은 후에도 죄 된 인간의 본성을 거슬려서 사는 일은 모두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은혜 안에 있을 때는 덜 힘들뿐입니다. 죄 된 인간에게 신령하고 거룩한 삶이 자연스러운 삶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이런 자기 깨어짐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몹쓸 사람이라고 고백하면서 많이 깨트려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결점을 수없이 발견하고 가책을 느끼던 때에는 신기하게 죄 가운데 살 때가 아니라 은혜 가운데 살 때입니다.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항상 깨트려짐이 있습니다. 왜 깨트려짐이 있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는 신령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그 욕구와 자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이 충돌을 할 때 그때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궁극적으로 자기의 뜻을 완전히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을 온전히 실행할 때 그때 자기의 깨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져야 할 가장 무거운 십자가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기를 항상 꺾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고 그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해야 할 고통을 인내함으로 감수하는 것, 그런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이것이 시련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예수님이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고 결국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셔야 했던 그 이유도 그분이 마음 깊은 곳에서 세상의 뜻도 버리고 사람들의 기대도 저버리고 자신의 육신의 소욕도 외면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길을 택하셨기 때문에 일생동안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복종이 있습니까?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주님을 안 믿었더라면 가지 않을 그 길을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걸어가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정말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걸어갈 분명한 계획이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그 계획을 고통스럽지만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쫓아본 적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 동안에 우리는 불순종에 익숙한 사람이 되었고 복종이라고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결국은 겉으로는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삶을 보면 결국은 자기 원하는 대로 걸어간 발자취에 불과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그 모든 것이 복종의 생애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런 철저한 복종의 기도를 드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꺾으면서 영혼과 육체에 온 고통을 물밀 듯이 들어오도록 허락하신 그것은 단지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생동안 살아오신 삶의 자세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복종의 정점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를 사셨고 그분의 전 생애는 이런 복종 속에서 살아오신 삶의 발자취였습니다.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분을 본받는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소명이 성화의 사명이라고 할 것 같으면 부패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어떻게 거룩한 주님의 사람으로 성결해지게 됩니까? 그 비결이 무엇 때문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자기가 성결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자신이 많이 성화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좋은 목회자를 만나면 자기가 성화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교육의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교회에 들어가면 자기가 성도다운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생각입니다. 성화는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에게 부분적인 도움을 줄뿐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복종하는 삶의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그 사람이 성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종하는 삶으로서 순례자의 길을 걸어감으로서 그가 그 길을 행하는 가운데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설교 듣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성화 될 것이다. 잠깐 동안은 아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나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회개하면 이제 자신의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 느껴질 것이고 그리고 진짜 자기가 옛날에 이 세상에 짐승처럼 살았구나. 정말 내가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지 되겠다 라고 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거기까지입니다. 그 다음에 뭐가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무리 우리에게 감화를 주어도 말씀이 우리의 목덜미를 집어지고 순례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례의 길은 자기가 걷는 것입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셨습니다.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 은혜에 이끌려서 저절로 즐겁게 복종의 삶을 사셨습니까? 아니 예수님에게 조차도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조차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동안에 잘못 배워온 교리 가운데 하나가 소위 이야기하는 은혜의 교리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워치만이 같은 사람입니다. 뭐라고 했는가 하면 당신들이 죄를 이기고 주님의 온전히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다 주님께 맡기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해결한다. 당신이 성화 되지 못하는 것도 결국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기를 다 비우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를 주관하시도록 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리고 그 은혜만이 역사 할 수 있도록 자기를 다 비우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 한 일이라고는 내가 아직까지 붙들고 있는 게 있나. 내려놓아야지.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지 그래야 은혜가 역사하지. 아직까지도 그것이 한국 교회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표준적인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야기를 하면 거의 정신착란증세입니다. 성경은 그런 진리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삶의 과정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존재 자체에도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군대 생활을 하면서 군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을 강의실에 모아 놓고 그냥 군대가 무엇이고 죽도록 충성해야지 된다고 가르치면 군인이 되겠습니까? 군인 정신은 군대 생활을 해나가면서 무릎에 피가 나도록 박박 기고 그리고 진짜로 적군과 싸워보고 사선을 넘나들면서 그러면서 군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성도도 똑같습니다. 복종의 삶의 현장 속에서 진짜 자기의 뜻을 다 버리고 주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성도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열렬해지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우리의 복종의 결여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어도 우셨다는 기록은 여러 번 나옵니다. 그리고 그 대목들은 기도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애 동안에 그렇게 열렬한 기도 속에서 사시고 본성을 거슬려 눈앞에 다가온 이 십자가의 형벌 앞에서도 피가 땀이 되도록 매달려 일체 열렬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전체의 생애가 열렬하신 생애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열렬하신 생애는 자기의 뜻을 쫓아서 열렬하신 생애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생애에 전체는 복종하시기 위해서 열렬하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종 속에서 일생을 사셨고 오늘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복종의 기도를 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역사를 보면 대체적으로 헌신된 수 만 명의 사람보다 자기를 완전히 바친 한 사람이 더 위대한 일을 성취하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찾으실까요?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도 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힘을 주시기도 합니다. 은사가 없는 사람들은 한순간에 하나님이 주시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복종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권능으로 직접적으로 굴복시키시는 예는 흔치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할 힘을 주시고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할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애에 우리의 삶에 복종이 있습니까? 주님이 아니었다면 너무 하고 싶은데 주님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기 복종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원수 맺고 살아갔을 텐데 강건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그런 복종은 뼈를 깎는 자기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기의 뜻이라면 이쯤에서 사명을 그만 감당하고 편한 길로 돌아가고 싶지만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그 계획에 복종하기 위해서 주님이 자기를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이를 악물고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은 모두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십자가를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를 알아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고통 속에서 복종의 생애를 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일생동안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사셨지만 그분에게 자신의 집도 없고 가정도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자기를 위해 쌓아두신 물질이나 소유, 명예 같은 것도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그때에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도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던 제자들은 자기를 팔거나 배신하고 도망갔습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의 육체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십자가에 매달아 찢어서 내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양식으로 나누어주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종은 곧 예수님에게 있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고 죄 없으신 그분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주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종의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별명을 ‘아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멘이요 충성된 주님이시오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사도 요한이 고백을 했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이처럼 전 생애가 아멘의 생애였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멘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는 가시밭길과 같은 생애였습니다. 멸시와 천대와 모욕을 한 몸에 받으신 것도 아버지께 아멘 하셨던 것이었고 마지막에 피 어린 십자가에서 자기를 깨트리는 이 극심한 고난도 아버지를 향해서 아멘 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죄를 위해서 산산이 깨트려져서 피를 쏟고 죽어 가는 것은 이제껏 짐승들이 담당하던 그 일이었는데 예수님이 짐승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떻게 제물이 될 수 있습니까? 그분이 죄가 없으셨는데 어떻게 죄 값을 받으실 수 있으며 불의를 모르신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로 지목되어서 주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 길을 가신 것은 오직 하나 우리를 사랑하시기보다는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우리를 위한 제물로 양처럼 짐승처럼 죽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물밀 같이 밀려 들어와서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되어 어떤 희망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아멘으로 복종의 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바치시는 그 복종을 실행하심으로서 이번에는 생명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와서 아무 희망이 없는 우리가 예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의 복종의 위대함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는지를 봅니다. 이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만 존재하는 원리이지만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법칙들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복종하고 죽어지면 우리의 가족들이 삽니다. 내가 온전히 복종하고 주님 앞에 죽으면 나 때문에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살고 죄로 말미암아 도탄에 빠진 내 형제 내 자매들이 삽니다.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 다리 밑으로 지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일반적으로 우리를 밟고 지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질그릇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던 아름다운 종들의 공통점은 모두 주님의 말씀이라면 껌뻑 죽는 복종의 생애를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십자가도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죽음의 잔도 주님의 뜻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마시기를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구원의 계획은 이렇게 당신의 뜻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자기를 다 드리고 복종의 생애를 산 사람들 하나 하나 밟고 지나온 그 놀라운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역사입니다. 불복종과 불순종은 맑은 하나님의 은혜의 물이 흐르는 개울 사이에 존재하는 오물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나의뜻을 버리고 주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예수님이 어떻게 까지 복종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복종을 보고 배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복종하는 일이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피를 흘리기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죄를 모르시던 예수님의 온 영혼에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힘들지는 않습니다. 날마다 나의 뜻을 버리는 것을 양식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항상 자기 깨어짐이 있습니다. 흐느껴 우는 성도, 아버지 앞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달라고 매달리는 성도들에게는 항상 그 고통 하는 기도 이면에는 자기의 뜻을 버리는 아픔이 있습니다.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은 죄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인들에게 복종이 얼마나 힘든지를 아시기 때문에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드립니다. 한 성도가 흐느끼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자기의 뜻을 버리고 주의 뜻을 쫓는 것을 더 큰 제물로 여기시고 주님 앞에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뜻을 포기하며 순종하는 그 아름답고 헌신된 제사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생동안을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도 일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깨어져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복종의 과정 속에서 맛본 십자가보다도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한 사람의 성도가 아무리 헌신적인 삶을 살아도 자기의 뜻을 버리고 주님 앞에 깨트려지는 그 복종의 실천이 없다면 그의 삶은 꽃피지 않은 무정한 잎으로 나무에 다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주간에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드릴 최고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우리의 죄를 위해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부활을 축하하며 그분께 드릴 최고의 예물이 무엇입니까? 감사헌금 봉투 하나로 끝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그분이 사셨던 일생에 그 복종을 기억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아직도 복종되지 않는 수많은 거역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양식처럼 생각하고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의 완악함들, 이 고난 주간에 깊이 깨트려야 합니다. 그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기억하면서 그 고난이 우리의 몸에도 이루어지리라 하고 복종할 수 없었던 부분에서 복종하고 순종을 배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함에 이르렀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우리도 그런 복종의 생애를 사신 아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서 깊이 복종하며 살겠노라고 내 뜻은 날마다 하찮은 것입니다. 내 계획은 날마다 사소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영원히 서야 합니다. 고백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예수님의 기도 십자가: 헌신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보여주신 겟세마네의 동산에서의 기도의 모범이 두 번째 요소는 헌신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된지라”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된지라” 하는 이 부분은 예수님이 기도를 열심히 하셨기 때문에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고 그리고 예수님의 노출된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떨어지는 모습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만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오히려 “예수님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피가 되어 땅에 떨어진지라 ”고 해석을 해야지 맞습니다.
저는 이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그 한 예로 한 일주일 정도 금식하고 나면 몸에 이상이 없는데도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를 쏟아 부어서 간절히 힘을 쏟으면 반드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들이 흔히 살아가는 삶 속에서 땀이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순간의 기도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던 헌신된 기도의 순간이었고 열렬한 기도는 예수님에게 무한대의 육체의 힘을 요구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의 기도를 돕게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힘을 돕도록 만들어주셨을까요? 이미 예수님께서 기도 속에 자기의 힘을 모두 소진하시는 헌신을 바치셨기 때문에 기도는 남아 있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육신의 힘은 다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 예수님의 힘을 도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실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평범한 인간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도 십자가의 고난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듯이 예수님이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그 강도와 자기를 바치는 그 헌신을 우리들이 아무리 많이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일상적인 기도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기도의 본, 자기를 바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그 모범을 우리들은 따를 수도 없고 또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경지를 흉내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다 드리는 헌신 속에서 하나님 앞에 철저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바친 헌신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육체의 모든 힘을 소진하기까지 그렇게 기도를 드리셨으니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기도에 자기를 바치신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라고 나오는데 이 “간절히” 라고 하는 대목을 희랍어 성경은 ‘엔 아고니아’ 라고 기록을 하고 있는데 ‘엔’은 ‘인’이라는 뜻이고 아고니아는 영어로 agony 라는 뜻입니다. ‘고뇌’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아고니아 라는 말은 아곤에서 왔는데 이것은 씨름입니다. 그러니까 고대 로마에서 콜로세움 같은 곳에서 힘센 투사들이 격투기를 벌이던 그런 종류의 씨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씨름 속에서 힘쓰고 애써 기도하시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예수님의 기도에도 대적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기도는 이 대적을 이기기 위해서 몸부림치시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는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우리처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로 말미암아 기도가 방해받는 일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한대로 사단의 표적이 되시고 그리고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셨으니 비록 우리와 같이 마음에 죄는 없으셨기 때문에 유혹에 시달리고 마음에 부패성 때문에 기도의 영이 흐려지는 일은 없으셨을 것이지만 자기에게 덤벼드는 그 수많은 영들의 세력과의 싸움은 우리보다 훨씬 컸으리라고 하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것과 더불어 싸우셨고 또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짊어지셨을 수밖에 없는 육체의 연약함과도 싸우셔야 했고 참 사람이셨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을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과도 더불어 싸우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바치는 그 승리하는 헌신을 위해서 먼저 기도의 동산에서 자기를 다 드리신 이 기도에 자기를 바쳐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그 기도의 헌신으로 먼저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흘린 그 피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골고다 언덕에서 자기의 아들의 피를 받으시기 전에 먼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눈물을 받으시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모두 섬기고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마지막 남은 그 힘을 아버지 하나님 한 분 앞에서, 그 십자가와 그리고 남아 있는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위해서 자기를 다 쏟아 붓는 기도를 모두 바치시고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다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를 다 드리는 헌신에 이르기까지 자기 바침에 일생을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이후로부터 공생애 들어서신 이후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쉼도 없이 안식도 없이 주님은 자기를 다 드리는 헌신 속에서 일생을 사셨고 그리고 오늘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혼자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의 몸부림, 기도의 고뇌는 일생동안 우리를 위해 살아오신 예수님 자신의 생애, 그 자체의 결정판입니다. 그 모든 헌신된 삶과 자기 바침의 전 생애가 어우러져서 마지막에 한 알의 구슬처럼 십자가에 자기를 바친 그 헌신, 그것을 준비하는 기도의 헌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의 이런 생애를 생각하면 우리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과연 우리에게도 헌신이라고 하는 것이 있을까요? 정말 헌신이라고 할만한 것이 얼마나 있을까요? 특히 오늘날과 같이 잠들어 있는 교회의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는 많이 애쓰고 힘써 간절히 노력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함으로 헌신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번은 사석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이야 뭐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 노장입니다. 내가 교회를 짓는다고 하니까 심히 염려되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0%정도의 교인은 떠난다. 성공적이면 10%의 교인이 떠나고 보통은 30%가 떠나고 최악의 경우에는 70%의 교인이 떠난다. 잘 하라. 그런데 그분 말씀이 제일 배신감을 느낄 때가 언제인가 하면 교회를 짓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다 떠나는데 그냥 떠나지 않고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면서 떠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 지어놓고 난 다음에 다시 들어오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교인은 많아도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정말 소수이다. 그런데 그분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와도 교회를 안 떠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빚에 몰려서 중직들이 집을 팔고 목사님이 경찰서에 끌려가고 하는 일이 벌어져도 끝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쉬운 길은 쉬운 길입니다. 어려운 길은 힘든 길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겠고, 이 세상에 누가 협잡하고 가시 넝쿨이 널브러진 형극의 길을 가기를 기뻐하겠습니까? 누구든지 육체의 본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 더욱이 마음속에 죄가 남아 있는 우리 인간들은 고난이 싫고 십자가가 싫습니다. 희생도 싫고 더더욱 헌신은 정말 싫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벽에 편히 자면 쉽고 하나님을 위해서 비참하게 봉사하는 것보다는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안락하게 지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좋은 것만 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편안한 것만 찾고 살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안일하게 살고자 하고 주님을 인해 헌신하는 것이 너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묵상합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괴롬 모두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하나님이신 그분에게도 바람 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수시지 못하고 주무시지 못한 채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탄원하신 그 일은 씨름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었고 피 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고자 하는 헌신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희생의 기도, 기도의 헌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그래서 결국은 주님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모든 삶의 방면에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취합니다. 자기의 유익과 그리고 하나님의 명예가 충돌할 때 잠시 고뇌하지만 결국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현저히 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와 자기가 원하는 바가 일치할 때에는 헌신하고 애쓰지만 그러나 자신의 이익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결국 자신을 꺾지 못합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서 안일하게 사는 것, 그리고 자기의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큰 자랑거리요, 명예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에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날들은 부끄러움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씨름하며 고뇌 속에서 헌신적으로 살아온 모든 생애는 하나님 앞에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그리고 명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자신의 피를 쏟으며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해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은 어쩌면 이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이 헌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프게 느껴질 때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며 그 모본을 힘입어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엎드린 그 자리에서 우리도 엎드리고 주님이 희생한 그 자리에서 우리도 희생하면서 마지막에는 주님이 죽으신 그 자리에서 우리도 죽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높이심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8下-9)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신약의 기동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에 관한 총체적인 교리를 담고 있는 영광스러운 본문입니다. 그 중에 특별히 오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마지막 지점과 그리고 높아지시는 지점을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철저한 복종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종은 죽기까지의 복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복종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주님의 생애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도, 그리고 율법에 복종되시고 이 금생의 비참함 속에서 사신 것도,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것까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신 결과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은 우리같이 하나님을 떠나 유리 하는 영혼들에 대한 연민에서 솟아오른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선적으로 우리의 대한 사랑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물론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더 소중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 지나가게 해달라고 탄원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처절한 기도가 기억나실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은 지나가게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동기가 우선적으로는 아버지께 대한 복종이었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대제사장의 모습을 읽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일년에 한차례씩 하나님의 임재가, 그리고 그 엄위함이 있는 지성소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탄원을 올리던 그 대제사장, 이제껏 사람의 대제사장들은 죄 있고 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흠 없으신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에 우리를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는 일은 자기의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고 용서를 간청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대제사장이었다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백성들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 큰 일이었다 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 정도는 기본이었습니다. 지성소 속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그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분께 복종되며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중보해야 하는 수많은 백성을 향한 간절한 사랑을 가지고 아버지 앞에 탄원해야 하는 이중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보 하는 대제사장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복종과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눈물겨운 사랑이 교차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바로 그런 우리를 향한 사랑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아버지 앞에 자기의 뜻을 복종하신 전 생애였는데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그 복종이 죽기까지의 복종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그 복종은 목숨을 건 복종이었는데 그 복종의 마지막 결과는 십자가의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자기를 낮추시고 또 낮추시며 복종하시고, 복종하시고 또 복종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생애를 모두 사셨는데 결국 그 마지막은 쏟아지는 축복이 아니라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한 이 대목에서 쥐꼬리만치 신앙생활하고 하늘을 열고 쏟아지는 무한대의 축복을 바라는 기복 신앙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주님을 잘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급과 함께 이 땅에 기름진 것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든 일에 한 증인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고 그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신자가 되려고 애를 쓰면 하나님이 그에게 많은 축복을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또한 누리게 하면서 또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주님을 의지하며 산 좋은 신앙의 결과이어야지 그것이 신앙의 목표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종하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분에게도 복종은 눈물나는 것이었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한 복종의 생애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요구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복 신앙을 정죄할 의도는 없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고난을 기억하면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시고도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취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버린 것도 없고 주님을 위해 희생한 것도 없으면서 아주 작은 신앙생활 가지고 이 세상에서 큰 축복을 누리는 것이 신앙의 훌륭한 간증인 것처럼 말하는 이 기복 신앙이 이 십자가 아래서는 설 때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곤고할 때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곤고할 때에도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신앙에 목표일 수는 없고 더욱이 그렇게 해주시면 주님을 믿겠다는 식의 흥정일 수는 더더욱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그런 생각을 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도 고통이었고 그리고 율법 아래 태어나서 그 율법에 복종하시고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가난과 고통의 세월을 이 세상에서 보내신 것도 주님의 낮아지심이었지만 그 모든 낮아지심에 극치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제물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밤 기도 속에서 피 흘리시는 겟세마네 동산의 그 헌신도 하나님으로서는 꿈꿀 수 없는 비참한 일이었습니다. 빌라도의 뜰에서 가야바의 뜰에서 헤롯의 뜰에서 멸시와 천대 모욕을 받으시는 그 일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한 본격적인 시작이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라고는 영혼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는 불쌍한 병자들을 눈물로 섬기고 돌보시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중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취급하고 체포하고 심문했습니다. 그리고 심문 받으시는 곳마다 비참한 채찍질과 구타와 침 뱉음 조롱과 멸시가 뒤따랐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바로 이 시간쯤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그 언덕길에 떠밀 듯이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나오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수난 받으시던 그 모습을 생각합니다. 일생동안 고통받고 가나한 자들을 위해서 눈물겨운 생애를 사셨지만 이 세상이 그분에게 한 일은 그렇게 십자가를 메어서 피 흘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애에 있어서 낮아지심에 극치는 십자가에서였습니다. 생명이신 그분이 나무에 높이 매달리셨는데 구약에 그 나무에 매달린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표시였습니다. 악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홀로 매달지 아니하고 당대에 가장 비루한 더러운 죄를 저지른 강도들과 함께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매단 것은 죽은 순간에도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떤 명예도 부여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는 가정을 파괴하고 돈을 빼앗고 사람들을 살인한 비루한 강도 중에 한 인간이었으며 그에게는 도무지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강도와 함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천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그 흉악한 강도들과 함께 매달려야 했습니까? 우국지사도 아니고 의인도 아니고 선한 일을 행하다가 죽은 열사도 아닌 비루한 강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으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깔보고 무시하는 이 세상에 시기심을 봅니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극치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는 그 비참한 진노의 형벌을 받는 아들의 기도였습니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평생 단절되어본 적이 없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했으며 그 순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진 끔찍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엄위한 형벌을 받는 중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외침 속에서 우리가 당해야 할 저주를 한 몸에 받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는 바로 그렇게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고 철저하게 죽으신 생애였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낮아지신 그 비천함에 생애의 그 마지막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의 최후였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더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을 깊이 생각하며 감화를 받을 수 없었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더할 수 없이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우선 하나님은 그를 부활하게 하심으로서 이 세상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높이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에 계셨던 하늘로 승천하게 하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하늘에 오르게 하셔서 당신이 다스리시던 이 온 인류가 우주에 관한 통치를 예수 그리스도께 위탁하심으로서 세 번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통치의 보좌에서 온 우주와 왕으로 아버지를 대신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세상을 심판할 심판 주로 오시게 하셔서 이 온 땅을 판단하실 수 있는 심판주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분의 초림은 숨어서 오시는 것이었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 임하심이었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초림이었지만 그분의 재림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그를 찌른 사람이나 모두 보게 될 재림일 것이며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천사장의 호령 소리와 더불어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임하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영광 중의 재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버리기까지 낮아지셨더니 하나님이 그 아들을 높이사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통치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원리는 오늘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많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의 그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불같은 핍박과 그리고 시련 수많은 죽음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를 따라 살다가 그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고 죽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순교하면 그 뒤에 지망자들이 순교자들의 뒤를 이었고 한 사람의 순교의 피를 뿌리고 가면 순교할 수많은 사람들이 떨치고 일어섰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각 성에서는 환난과 결박이 자기를 기다린다고 하였지만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이 일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깝지 않게 생각하였노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이 죽음을 각오한 담대한 순교의 신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모두 한 가지 단순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리라’ 하는 믿음, 그것 하나 때문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신앙이 없는 곳에는 결코 순교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점에서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낮아지고 복종하는 삶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섬기기 위해서 희생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기를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할 정도로 충성하는 사람들이 적은 이유는 그들 마음에 십자가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진리,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그 신앙이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눈을 들어 우리 자신을 보고 우리 가정을 보고 또 교회를 보고 내게 맡겨주신 사랑하는 지체들을 보고 희어져 추수하게 된 세상도 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영역들은 소리쳐 우리에게 외칩니다. 그대가 죽음으로 내가 살수 있노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는 이것, 그 순교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운데 마지막에 결국 순교하고 죽은 사람이 몇 사람이 될까요? 신앙이 없어서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거의 무제한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는 나라에서 순교 당할 일이 있습니까? 최근에 순교자가 나왔습니까? 그래서 정말 어려운 것을 한번 순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깨어짐, 그리고 가슴을 찢는 진실한 참회, 이것이 작은 순교가 아닐까요?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예수 죽인 것을 가슴아파하며 이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어찌할 수 없거니와 한번으로 족하다고 믿으며 예수 매달 그 십자가에 내가 매달리고자 하는 자기 깨어짐, 그래서 진흙과 같은 나를 빚으셔서 주님의 형상대로 만드시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자기 죽임의 경험들, 나도 나를 많이 사랑하지만 내게 맡겨진 양떼들을 볼 때마다 주님이나를 위해 생명 버리신 것이 생각이 나서 나를 위해 살고 싶은 욕심을 입술을 깨물며 버리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 사랑하기를 영혼들에게 쏟아 부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나의 유익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가 아닐까요?
내 사랑하는 가족들, 남들은 가족들로부터 사랑도 받고 덕도 받는다는데 사랑할 수 없는 남편, 용서할 수 없는 아내, 용납할 수 없는 자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부모와 함께 섞여 살면서 나는 저런 인간들과 상종하며 살고 싶지 않지만 예수께서 그들보다도 더 나쁜 나와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던 그 고난, 그리고 이제껏 까지 일생을 살면서 받았던 무한대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 가족들 때문에는 희생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지만 나 위해 생명 버리고 무한대로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화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용서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그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날마다 자기가 죽는 아픔이 있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와 같이 쓸모 없는 인간을 위해서 그런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신앙생활 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지 아니하고는 정직하게 자기가 누구인지도 깨달을 수 없고 자기가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을 깨닫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고 할 때, 자기와 같이 더러운 죄인들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것을 기억하면서 사람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어도 주님 때문에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 이것이 그리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항상 부활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육신이 펄펄 살아서 육체의 욕심대로 살 때에는 우리의 영은 사망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주의 말씀에 찔림을 받고 내 안에 있는 각양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난폭하고 포악한 마음을 품고 내 멋대로 살아온 그 삶이 너무나 부끄러운 삶이었고 그리고 그렇게 살아온 내 삶이 죄 된 삶이었다고 주님 앞에 고백할 때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쓰라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의 죄를 주님 앞에 토 설하면서 영혼의 찔리는 그 아픔은 십자가에 못박는 아픔에 비할 만큼 그렇게 아프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는 훌륭한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 앞에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고백하고 나면 신기하게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부활의 때를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활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날마다, 날마다 계속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혀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주님처럼 이 세상을 다스릴 놀라운 권세를 주십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성도들이 천사들조차도 심판 할 것이라는 사실은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고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심판의 사역에 어느 정도 심판의 주체로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동참할 것이라고 하는 것도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가 되기 전에도 우리는 이 세상에 통치에 참여하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를 통한 응답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마음으로 주님만을 섬기며 살기로 작정하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편이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한 인생에 분명한 동기를 갖고 그 꿈을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희생하며 살고 그래서 날마다 자기의 부패한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고난받는 자기의 종들의 기도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그 기도에 귀를 기울이셔서 하나님이 마치 그를 통해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처럼 그의 기도를 통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십자가를 보며 많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어제도 제가 교회당이 지어지는 것을 생각하면서 아 이제 우리가 얼마 후 여기에 입당할텐데 여기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입당 선물이 무엇일까? 물론 감사헌금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 가지고 어떻게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뭘 드릴까?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면 이 성도들이 드리는 성물을 하나님이 진짜 우리 평생동안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실까? 정말 좋은 선물은 평생동안 안 잊혀집니다. 그 고마움에 그런 선물을 하나님 앞에 좀 바치라고 그렇게 해야지 되겠는데 뭘 바치라고 그럴까! 그러다가 점점 마음에 다가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십시오. 그것은 평생 새벽 기도의 서원, 일주일, 무슨 사십일 그게 아니고 내가 살아 숨을 쉬는 동안 내가 이 교회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면서 내가 이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겠습니다 라는 그런 기도,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높이십니다. 세상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나라에는 그들의 이름이 소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축복하십니다. 주님의 생애는 특별한 아주 매우 특별한 생애였고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순교의 제물로 죽어간 사람들의 생애는 각별한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세상에 있는 명예와 그리고 세상에 있는 물질과 축복과는 상관없이 고난만 받다가 죽어 가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매우 사랑하신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 희생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갚아주실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그를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으며 주님을 위해 많이 희생하고 주님을 위해서 많이 복종하고 주님을 위해서 많이 사랑하면 주님이 이 세상에서 많이 축복해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수고하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넘치도록 위로하십니다. 주님의 뜻대로 아버지를 위해서 살 새 희망과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껏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만 이제 여기서 정말 새롭게 분발하여 예수의 정신을 가슴에 품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한 크고 작은 십자가를 기쁨으로 잘 감당하여 여기에서 주님의 칭찬을 한 몸에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 먼저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