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가 있습니까?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십자가가 있습니까?Ⅰ (마10:38) 2002.3.6 수요예배 1
2. 십자가가 있습니까?Ⅱ(마10:38) 2002.3.13 수요예배 14
3. 십자가를 앞에 둔 사랑(요13:1) 2002.3.27 수요예배 25
4. 십자가를 앞에 둔 섬김 (요13:4-6) 2002.4.3 수요예배 31
5. 섬기는 자의 십자가 (고후11:27) 2002.4.10 수요예배 38
6. 은혜를 주신 것은 (빌1:29) 2002.4.17 수요예배 50
7.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8下) 2002.4.24 수요예배 63
8.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난을 이김(벧전4:1上) 2002.5.8 수요예배 76
1. 십자가가 있습니까?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성경에 보면은 십자가를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또 우리들도 신앙생활 하면서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 “나의 십자가“ 그런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히랍어로 ”스타우루스“라고 하는 것인데 ”막대기“라는 뜻이었습니다. 두 개의 막대기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이 ”스타우루스“라고 하는 이 십자가는 아시는 바와 같이 죄인들에게 형을 집행하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 자체안에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갖게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죠.
예수님때만 하더라도 이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오히려 형벌과 저주의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는 그러한 단어였습니다. 십자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라고 하는 그 말의 의미가 새로운 해석을 갖게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그 우리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 그래서 죽으신 그 못 박히신 십자가가 원래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적용이 될 때에는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든지 지지 않았을 무거운 짐이나 고생,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더라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삶을 택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얼마든지 지지 않았을 무거운 짐,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그 짐을 가르켜서 우리들은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그 정도의 정의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보태서 우리로 하여금 비록 질병이나 가난 같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주는 고통이면 그것까지도 십자가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의 종류가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십자가는 “즐겁다.” “즐겁게 십자가 진다.” “십자가 즐겁게 지고” 그래서 찬송가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사실은 말도 안 되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진 십자가는 즐거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지는 십자가가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습니까? 십자가가 뭔지를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제일 잘못하는 것이 등산입니다. 운동을 평소에 별로 못해서 그런지. 평지를 걷는 것은 좀 하겠는데 산을 오르는 것은 정말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교회 설립하고 나서 시찰회 목사님들이 열린교회 등록기념 등반을 하겠다고 하시니, 우리교회 등록 기념이라고 등산을 가자. 그러는 데 안 갈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그냥 안가고 바닥에 있으려다가 올라갔습니다. 올라갔는데 863미터를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안하다 가니까 5시간 30분에 걸쳐서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발이 정말 너덜너덜하게 껍질이 까졌습니다. “목사님 너무 힘든데 그만두라고” 자꾸 목사님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안 오르면 한번 오른다고 올랐는데 발바닥이 모두 뒤집어져도 내가 이 산을 넘고야말지” 그리고 넘었습니다. 얼마나 힘듭니까? 그렇죠. 그런데 나만 힘들겠습니까?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도 언덕을 올라가면서 땀을 뻘뻘 흘리고 목이 말라도 물을 먹으면 지치고 힘들까봐 오이나, 아니면 사과를 씹으면서 올라갈 때에 코에서 단내가 납니다. 힘들죠. 그래도 그것을 십자가라고 안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
십자가가 즐겁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의 해석이고 모든 십자가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힘든 것입니다. 다만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리고 주님께 자기의 무엇이든지 중심을 드리면서 사는 것이 기쁨이라고 믿는 그 신앙이 있을 때에는 고통은 고통인데 그 고통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신앙으로 그러니까 신앙은 해석의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신앙이 없을 때에는 “아이고 내 팔자야.” 그리고 주저앉아서 이 사람 원망하고 저 사람 원망하고 죽을 궁리하지만 신앙이 있을 때는 그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건이어서가 아니라. 똑같은 상황인데 신앙으로 그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면 다 기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람들이 십자가를 안 져요. 왜 그렇게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즐거운 십자가는 없습니다. 다만 신앙은 그것을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그 신앙이 그 십자가를 다시 해석하게 만들어서 십자가를 통해서 기쁨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다가도 충만한 은혜 속에 살 때에는 너무 감사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다음에 복음전도를 하니까 핍박했지 않습니까. 그래 죽도록 두들겨 맞고 핍박을 받은 후에 뭐라 그랬습니까? 주를 위해서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신 것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 그랬느냐하면 죽도록 얻어맞고 고난을 받은 다음에 “이거 아무나하냐? 아무한테나 주신 하나님의 특권이냐?” 그러면서 감사한 것입니다. 그 주관적인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이 없으면 두들겨 맞으면서 “내가 이렇게 얻어맞는 동안 주님은 어디계시나?”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 신앙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 신앙이 해석하니까 그것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 찬송가에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사실은 말이 안됩니다. 성경 어디를 들춰봐도 예수님이 “내 십자가 네가 져라.” 그러신 곳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분의 십자가를 지기에 합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을 묘사할 때 맹목적인 사랑이라고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아가페에 대해서 처음 제가 예수 믿기 전에 그 정의에 대해서 아주 감탄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순엉터리였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나서 보니까 순엉터리였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목적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자녀들을 사랑해주지 않아서 망치는 경우 참 많죠. 사랑해줘서 망친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하면 그냥 사랑해준다고만해서 그 아이가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잘못생각한 것입니다. 절대 안그렇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한쪽은 사랑을 못 받아서 망하고 한쪽은 사랑을 받아서 망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앙을 떠나서 생각해본다고 할지라도 부모가 인생에 대한 확고한 주견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자녀들을 사랑해줄 때에만 그 사랑이 자녀들을 일으켜 세우지 인생에 대한 확고한 주관이 없는 부모가 자식을 “으, 너밖에 없다.” 이래보세요. 결국은 그 아이의 인생은 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맹목적인 사랑이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오히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수단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러면 오히려 그런 표현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뭔가 우리를 수단으로 삼아서 자기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냐? 하나님의 사랑은 오히려 목적지향적입니다. 맹목적이 아니라. 맹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눈이 멀었다는 아닙니까? 맹목적적인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목적지향적인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해 주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무엇인가 목적을 가지고 그를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일수록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가지고 있는 아주 분명하고 뚜렸한 목적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의 그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야합니다. 왜그 렇습니까? 자신의 삶의 목표를 응시하는 그 타오르는 눈빛이 있어야합니다. 눈을떠도 좀 크게 뜨고 좀 반짝반짝하고, 눈동자에 윤기가 있어서 총기가 돌아보여야지 그것이 주님 만난 사람의 모습이지.
제가 요즘 염려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하면 특히 이 정서적으로 풍부한 젊은이들말이죠. 뭐 젊은이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나도 한때는 젊은이였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받았으면서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것도 외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도 그러면 말도 못하냐?” 그럴지 모르지만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자기의 하나님 사랑에 관한 체험을 과도하게 부풀리는 것도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간증이 갖는 하나의 위험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을 많이 말하면서도 그런 사랑의 경험속에 삶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그 사랑의 목표, 그것이 같이 가야지만 그것이 진짜 영적인 경험 속에서 체득된 사랑의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경험입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그 경험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느낌, 사랑에 대한 경험, 이런 것들은 사랑에 대한 감성적 체험, 이런 것들은 굉장히 많은데 그런 사랑과 함께 반드시 나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사명입니다. “미션”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분명하게 왜 나를 사랑하셨나에대한 대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참답게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치열한 삶의 현장이 있는 것입니다. 왜그렇습니까? 미션이라고 하는 것, 사명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주신 우리의 삶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허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괴롬과 죄와 슬픔이 있는 이 땅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영성은 항상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에 여러분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도로 고민해야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지울수 없는 아주 뚜렸한 삶의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인가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항상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대의 마음속에 원한이 되기까지 사무친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이든지간에 나는 당신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한이 되기까지 사무치는 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이 자기를 어디론가 데려갈려고 하는 목적지향적인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무치는 기도의 제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받기 원하죠.? 받아서 뭐할려고합니까? 그것 받아서 뭐할려고합니까. 제가 너무 슬프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하면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하나님의 은혜는 소화적인 자기 위로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이 자기 소화적인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성경적 영적생활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 어디에서 하나님의 그 은혜가 단지 목적도 없고, 지향하는 바도 없고, 맹목적적으로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그래서 소화적인 위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려분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성경 어디를 통해서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당신의 교회에게 부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하나님 아버지의 긍흉의 풍성한 은혜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기쁘신 뜻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신앙생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원한이 되기까지 사무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그 기도제목을 고백하면서 피어린 눈물을 쏟지않을수 없는 그 제목, 장엄하고 원대한 세계복음화의 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무엇인가 주님이 내게 은혜를 주시고 남이 알지못하는 사랑을 부어주시고 남이 받지못한 사랑을 받게하셨을 때에 그 사랑과함께 내 마음에 꽂혔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내가 걸어가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걸어가줄수 없는 그 길, 그것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살아있어야합니다. “내가 그 기도제목이 성취되기까지는 죽어도 눈을 감을수 없습니다.” 그런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정죄되셨습니다. 그리고 풀려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죄받으셨습니다. 입을 열면 흐르는 물같이 한없이 쏟아나오던 그 아름다운 변론을 그치신체 털깍는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과 같이 체포되고 심문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정죄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죽으시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신 그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채찍이 두려워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까? 아닙니다. 그곳이 예수님께서 사셔야할 곳이었기 때문에 지고 올라가신 것입니다.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한맺힌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저는 성경에 의지해서 단언합니다. 뚜f렷한 사명감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가슴을 누르면 아픈 기도제목들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건드려도 아프지않는데 그 기도제목을 건드리기만 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픈 고통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그래 그 고통은 너무나 커서 “그 기도 제목이 성취되는 것을 보기만 하면 그것을 보면서 눈을 감아도 좋다.”라고 하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빨리 달려가면 뭐합니까? 아름다운 옷을 입고 달려가면 뭐하고 더 좋은 길을 알고있으면 뭐합니까? 그 길을 걸어가다가 어디쯤가면 좋은 쉴곳이 있고 어디쯤가면 아름다운 열매가 있어서 먹을 수 있으며 어디쯤가면 맑은 샘이 있다는 정보를 많이 알면 뭐합니까. 가야할 인생의 목표가 없는데 말입니다. 목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 정보도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전체를 뒤집어 업는 듯한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몇 년이나 여러분들을 지탱해준다고 믿으십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준 그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 그것이 가져다주는 목표에 대해서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독자적인 발걸음으로 그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는 순례가적인 행보가 없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전체를 뒤흔드는 획기적인 은혜의 경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다시 뒤로 물러가서 타락하는데는 6개월도 걸리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렇게 인간이 악한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질 때 어땠습니까? 들은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았으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서 250만명내지 300만명의 성가대의 장엄한 합창이 홍해위를 뒤덮었습니다. 괜히부른 노래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었습니다. “여호와” 그리고 그 성가의 제목은 “이 세상에 여호와같으신 이가 뉘뇨”라고 하는 찬송이었습니다. 3일뒤에 그들은 마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범합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그 사랑의 계획, “나같은 사람 왜 만나주셨을까?”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놀라운 사랑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것을 가슴에 품지않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일수 있습니까? 그것을 찾지않으면 여러분들이 어디를 돌아다니면서 뒤집어지는 은혜의 경험을 한들, 그 인생이 다른 삶을 살수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허황되기 그지없는 꿈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바울은 뒤집어졌습니다. 그 때에 본격적으로 사울에게 메시지를 주시면서 주님이 제일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어나 네 발로 서라”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 받았죠. 그리고 여러분 중에는 생애적인 십자가의 사건을 경험한분도 있죠. 말로만 듣던 그 십자가의 경험, 주님을 그렇게 만나고보니까. 이전의 자신의 신앙생활은 너무 부끄럽고 잘난척하면서 폼잡고 살아온 자신의 인생은 정말 교만 그자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그런 놀랄운 사랑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시려고 베풀어주신 사랑입니까. 그것을 찾지않았다면 여러분들이 경험한 그 하나님의 사랑은 신뢰하기 어려운 사랑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정말 분명한 그런 목표, 그런 삶의 분명한 그 사랑의 경험이 가져다준 미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신앙은 자기 갈길을 걸어가고 싶은 사람들 목에 걸린 하나의 데크레이션에 지나지않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국한된 삶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안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생애는 언제나 감동을줍니다. 그들이 불꽃같은 생애를 살수있었던 것은 횃불처럼 타오르는 삶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그 사랑의 경험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따라서 걸어가려고 할 때에 경험하는 고통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야 되기 때문에 지는 짐입니다. 그 길을 안걸어 갔더라면 얼마든지 안질수있었는데 지게되는 짐입니다. 고통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자신의 미션을 발견한 사람, 주님이 나같은 인간에게 이런 은혜를 주셔서 이 삶의 자리에 내버려두신 것은 나에게 이러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다.고 하는 분명한 삶의 푯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의 가야할 길이 분명하고 그 길을 걸어가야하는 몸부림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자기의 십자가입니다. 누구도 대신 질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제멋대로 살다가 당하게되는 고통은 십자가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의 법대로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원칙과 그 공의대로 살려고 할 때에 손해를 보며, 고통을 당하며, 박해를받습니다. 경제적으로 손해를봅니다. 이것은 십자가입니다.
가야할 삶의 목표가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가야할 삶의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슬렁 어슬렁 내 눈이 좋아하는데로 마음이 원하는데로 이리기웃, 저리기웃, 하고 걸어다니다가 개골창에 빠지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사고를 만나기도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까? 그런 십자가는 동네에서 어슬렁 거리고 도망 다니는 도둑고양이들도 당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냥 고생이죠. 그것은 죄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죄인들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고생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십자가라는 이런말 붙일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십자가가 있습니까? 날마다 좋은 것 아니죠. 항상 신앙으로 살면서 주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당하는 많은 고통들을 우리는 신앙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신앙으로 해석하면서 “나같은 사람이 주님을 위해서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해주셨으며 하나님의 그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가.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가” 그런 것을 깊이 느끼죠.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자기가 이 다가오는 이 고통을 자신의 신앙으로 다 해석하기 힘든때도 있지않습니까. 그 때에 견딜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신앙안에서 내게주신 내 삶의 목표를 포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는 고통인데,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십자가가 있습니까? 십자가 외에 특별한이라고 하는 말까지도 붙으면 우리는 할말이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슴 아프지만 잃어버린 것들이 있습니까?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괴롭고 너무 힘들지만 지고가야하는 무거운 짐, 그리고 끌어안기만 하면 아픈 가시에 찔리는 것 같은 그러한 고통들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을 너무 고난의 입장에서만 본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생애전체를 통털어 보십시오. 그분의 생애는 바로 그런 고단한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한때 주님의 사랑을 알았을 때에 흘린 그 눈물이 우리에게 마르는 것은 우리들이 그런 사랑의 계획속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가운데 경험하는 이 십자가적인 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순간마다 우리는 이것을 물어야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만은 여기에서 보면 “내게 합당치 아니하도다.” 그랬습니다. 여기에서 “합당치 않다”는 “악시오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아고”라고 하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아고”는 무게를 달아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 “악시오스“라고 하는 단어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실때에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십자가“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정말 있습니까?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 각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오. 정말 십자가가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준 목적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인상을 우리가 주님께 줄수 있을까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 원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였을 그 초기에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서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왜? 사명이 없으면 내가 무엇입니까? 사명이 없으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너무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그 자존감을 어디에서 여러분들은 경험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할 때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 그것도 한두번이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라고 하는 자존감을 어디에서 경험하느냐는 것입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자기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삶의 목표, 자기가 아니면 누구에 의해서도 대신 이루어질수 없는 하나님의 미션, 사명, 이것을 보면서 괴롬과 슬픔이 있는 이 세상속에 정말 죄인들과함께 섞여 살면서도 때로는 나도 죄인처럼 살면서도 그래도 그것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말한바와 같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르다.” 사상적으로 많이 방황을 하다가 진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가 저는 언젠가도 한번 간증했지만 나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기독교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런다고해서 성경을 연구하나,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도 답답하니까 하나님이 제가 교회에 나가기전에 꿈을 꾸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꿈을 꾸는데 많은 사람들이 먼 길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막 그냥 사람들이 가득 양편으로 술집같은 것들, 깔끔한 술집이 쑥 늘어서서 환한 대낮같이 불이 들어왔습니다. 거기좀 기웃거리고 좀 앉아볼려고 그러는데 가게가 수십군데인데 한군데도 빈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터덜터덜 혼자서 걸어가는데 언덕을 넘고나니까 아주 놀라운 평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쑥 사람들이 걸어가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거기에서 다 보따리를 풀면서 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석양이 쭉 해가지면서 아주 지평선 위에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생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사람들이 왜 벌써 집을 지을까?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래도 저 해가 지평선이 닿을때까지는 걸어가야지” 그리고 그 사람들을 등지고 몇몇 사람들과 보따리를 지고 그 석양을 향해서 쭉 걸어가는 꿈을 꾸다가 깨었습니다. 그 때 느낀 것이 뭐냐하면 순례의 길이라고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을 가진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만약에 삶의 목표가 없다라고 할것같으면 우리는 십자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자는 없다. 그러는데 물론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자는 없는데 안지는 신자는 많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두 미션이 있으니까 그러나 안지는 신자는 많습니다. 십자가를지지 않는 신자는 많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오죽하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그런 사람은 내게 있어서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논리는 그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따랐지만 배와 그물도 버리고 그리고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고, 나를 따라다녔지만 그러나 너희들도 자기 십자가를 안질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를 안따를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내게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분명한 자기에게만 주는 그 미션을 따라서 걸어갈 때에 그 때 경험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오셔서 “얘야 이 수요일 어두운 밤에 교회에 나왔는데 그렇게 네 가슴에 사무친 소원이 뭐냐? 말해라. 내가 오늘 수요예배에 나온 기념으로 내가 들어주마” 그랬을 때 여러분들은 무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오늘 지금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애, 또 뭐드라.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시면 내가 어떻게 말을합니까. 집에가서 생각하고 내일 말씀드릴테니까 내일 이루어주세요.”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가슴을 저미는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많았습니까? 아닙니다. 한가지씩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도제목은 그 한가지 기도제목에 매달린 기도제목들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가슴저미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백성을,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주시옵소서.”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여호수아, 갈렙과함께 가나안의 정복의 역사를 이루어가면서 그들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었던 한가지 기도제목이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약속하신 그 땡에 들어가게 해주시옵소서“ 몇일전에 살펴보았던 시편 6편에서 그 흐느끼던 그 몸부림, 흑암과 같은 긴 터널을 통곡과 눈물속에 통과하고 있는 그 다윗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었던 한가지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용서해주시옵소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구원의 기쁨을 내게 새롭게 해주시옵소서“ 그것이 아니었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33해동안 온갖 고난과 시련을 당하시면서 가슴에 불타고 있었던 기도제목은 무엇이었을까요? 주기도문이 여러 기도로 되어있지만 두 번째부터 마지막번째의 기도는 한가지 기도를 위한 부제목들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주님의 이름이 이땅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되옵나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제가 저자신을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주님의 백성 사이에 화목제물로 드리겠나이다.“ 그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 옥속에 갖혔어도 “로마도 보아야하리라.” 선교의 꿈에 불타던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서에 나온바와 같이 모든 족속으로 믿어 순종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우레의 아들이었으면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성인이 되기에까지 변화되었던 노사도 그의 가슴에 사무치던 기도제목은 무엇이었을까요? “오, 주님 이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 아니었을까요? 말년에 밧모섬에서 사랑하는 가족도, 정들었던 교인들과도 이별하고 외로움속에서 주님을 묵상하던 그 노사도 요한의 눈빛속에 빛나던 그 광채를 생각해보십시오. 매일매일 하늘을 우러르며 주님 앞에 기도와 묵상으로 보내던 그 노사도의 가슴을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슴에 “네 기도제목이 무엇이냐? 나 예수 그리스도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라고 물었더라면 요한은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것을 능가하는 기도제목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사무치게 만듭니까? 무엇이 우리를 원한에 사무치도록 만듭니까? 정말 우리에게 그런 목표가 있습니까? 더 거룩해지기를 원합니까?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에 비해서 거룩에 진전이 없는 자신 때문에 아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을 받아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았는데 예수의 사랑 많이 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그것이 가족들의 구원의 문제이든, 혹은 그것이 여러분들의 성화의 문제든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가장 사무치도록 주신 그 목표, 그리고 당면한 과제, 그것에 대해서 흐느끼지는 않고는 기도할수 없는,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매달릴수 없는 그런 기도제목이 없다면 그것은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것과 같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열열함은 자기흥분적인 열열함이 아닙니다. 삶의 뚜렸한 목표,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속에 발견한 그 미션 때문에 그것을 따라 살고 그것을 성취하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갈망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게 열망이 왜 존재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바로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몸부림이었습니다. 모두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한맺힌 기도의 제목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그를 미션을 가지지 않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이 더 이상 주실수 없도록 자기를 내어주셨지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 세상이 그 사랑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을까요? 왜 한때 그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조차도 냉담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이전의 사랑의 경험이 부족해서일수도 있겠지만 더큰 원인은 주님의 사랑을 알고도 그 사랑으로만 만족을했지 그 사랑이 가득 가르쳐준 미션, 사명, 그것을 못느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잡지 못했으니까 그것을 따라서 사는 삶도 사라진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습니까? 왜 사십니까? 남이 대답한 답 말고, 내 안에 삶의 이유가 있습니까? 오늘도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위해 사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그것은 내 삶에 있어서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당하는 그 고통이 무엇입니까? 이것들이 모아져서 성도들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은혜받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확장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자신의 사명을 따라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그 발걸음, 그 열열한 헌신을 통해서 확장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태어나서 먹고, 입고, 마시고, 시집장가 가고, 자식들 낳고, 그리고 먹고 살고, 그리고 죽습니다. 사명을 받았다고해서 그 삶의 기본적인 스타일이 뒤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주님을 너무나 크게 만났기 때문에 독신의 삶을 결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하나는 그렇게 외면적인 삶이 다른사람과 동일하면서도 그러면서도 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의 발자취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심어주셔서 그래서 그렇게 먹고, 태어나고, 그리고 시집장가 가고, 그리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도 그들은 시집장가 가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애 낳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이들 먹여 살리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남편 하나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분명한 사명이 있어서 그 사랑에 붙들려서 살다가보니까 남편도 만났습니다. 아내도 만났고, 자녀도 만났습니다. 교회도 만났과, 사랑하는 가족들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이 시대는 냉담함의 시대라고 말할수 있지않습니까? 사람들의 가슴을 식어졌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에 그 은혜와 사랑을 붙잡았을 때에 우리속에 타오르던 그 풍부한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곤경에 처하면서도 갈 수밖에 없었던 그 물러설수 없는 그 불퇴전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목표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시련이었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위로부터 부으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필요로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부족을 알고 깨뜨려졌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이 놀라운 은혜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리에게주신 십자가가 그 하나님의 사랑보다 크다고 생각해본적이 없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지않는 삶, 주님을 위해서 목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삶들은 그저 먹고 산 삶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주님이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셔서 그래서 주님의 나라 허물려 살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에게 그 나라를 회복하는 거룩한 소명을 주셨습니다. 일생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 진노를 쌓는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들인데 우리같이 더러운 인간에게 주님을 기쁘시게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무쓸모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아무데도 쓸데없는줄 알았는데 지존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요긴하다고 불러주셨습니다.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해주시면서 우리를 주님이 쓰시고자하시는 소중한 자리에 우리를 세워주셨습니다.
힘듭니다. 사명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은 숯덩이가됩니다. 홀로 흐느끼는 깊은 밤이 있고 몸부림치고 우는 새벽이 있습니다. 사명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애워싸는 것은 밖에 있는 대적들이면 그것뿐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속에 있는 자아가 끊임없이 자기를 괴롭힙니다. 죄의 본성, 부패한 힘, 그런것들이 속에서 살아 역사해서 그야말로 속에 근심 밖에 걱정들이 자기를 애워싸고, 견디기 힘들게만듭니다. 거기에서 마음을 지키며 죄와더불어 싸우고, 그리고 잠시 나태함으로 안락을 누리는 삶보다는 주님을 위해서 이 쓸데없는 죄인에게 주님이 맨처음에 주셨던 그 소명을 따라서 사람의 평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길을 가는 그 성도들이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주님은 마치 그들만 편애하시는것처럼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십자가가 있지만 그러나 남이 못보는 하나님을 봅니다. 남이 받지못한 사랑을 받습니다. 깊은밤 홀로 흐느끼며 울지만 울고난 후에는
험악한 세상을 이길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부어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항상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에 대한 간증이 있습니다. 죽음도 두렵지않습니다. 얼마나 기쁜날일까요. 이 세상에서 수고와 근심의 모든짐을 벗고, 늘 노래불러도 끊어지지 쉽던 노래들이 끊어지지 않는 노래로 이어져 하나님의 마음에 들릴수 있는, 그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고난주간에 한바탕 울고나면 뭐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까? 이 십자가는 매일 지고가야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마지막 주께서 “네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으니 이제는 내가 네게 의의 면류관을 주리니 너는 이것을 쓰고 내 옆에서 쉬라.” 주께서 부르실때까지, 정말 이 냉담함을 어떻게합니까. 이제 사람들은 가슴속에서 흐느낄 기도의 제목들을 잃어버려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흐느낄 기도제목들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교회와 세상사이에 구별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에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깊은 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봅니다. 무엇때문인지 아십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경험하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제대로 만나고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불붙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이 내게 주신 뜻,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는 스스로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는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았는데, 내가 뭐 개척할때부터 이 교회에 있었는데, 그리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데, 내가 뭐 책을 많이 읽고 뭘 어떻게 했는데,” 그렇습니다. 상당할수 있습니다. 이제 처음 믿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수십년 신앙생활의 발자취를 걸어온 여러분들은 정말 우러러보기 어려울 정도로 선배처럼 느껴질수 있습니다. 이구석 저구석 성경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은 이제 처음 성경을 펼치고 복음서 하나를 찾기 위해서 신구약을 뒤져야하는 성도들에게는 귀죽이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른아침서부터 깊은 밤까지 교회에서 애쓰고 수고하는 여러분들의 그 수고는 이제 집안의 눈치를 보면서 주일 낮예배 참석하는 것도 감지덕지해 하는 지체들에게는 정말 평생본받아야할 모본처럼 보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지금 그렇게 살지않을수 없도록 만드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속에 있느냐? 하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아까말씀드린 모든 사람들이 모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내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대단하게 생각해도 우리 주님이 달아보실 때에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주님이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공부 많이하고 돈 많이 가진사람, 아닙니다. 교회 경력이 많은 사람? 그 사람도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때에 정말 소중한 사람은 십자가를 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에대한 지속적인 사랑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포기할수 없는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분들이 되셔야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십자가가 있습니까?Ⅱ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십자가는 사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맹목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는 계획이 있고 그리고 그 계획이 있는 곳에는 사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의 길을 걸어가노라고 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그 계획 속에서 자신에게 사명이 없었더라면 짊어지지 않았을 그 십자가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결국 주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신앙을 갖지 않았더라면 짊어지지 않았을 짐, 그것이 십자가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는 거기에서만 멈추지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주님을 믿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지고 갔을 것이지만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아니했더라면 그냥 고생스럽게 지고 갔을 짐이지만 그러나 주님을 믿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알고 그 계획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길로 가기위해서 그 길로 끊임없이 걸어가려고 하는데 지워진 그 짐, 그래서 그 짐을 끊임없이 신앙적으로 승화시키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걸어 가야할 길을 걸어가는 것, 그럴 때 지워진 그 짐도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물론 연약하던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건강해지는 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믿기 전에 연약했던 사람이 그 영혼에 많은 은혜를 받고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나님이 그 연약함을 그에게 그대로 남겨두시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 믿기 전에도 눈이 매우 나빴고 지금도 눈이 매우 나쁩니다. 호주에 가서 안경을 깨뜨렸는데 안경을 맞추려고 사방팔방을 돌아다녀도 당신 눈이 너무 나빠서 자기네도 주문을 해서 그것을 가져와야 되는데 일주일 기다리면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는데도 눈은 좋아지지 않고 점점 나빠지고 이제는 나빠진 눈 위에 노안까지 겹쳐서 그래서 이제는 더 잘 안보입니다. 전에는 안경만 똑바로 끼면 신학서적의 깨알 같은 각주까지도 시원하게 읽어갔기 때문에 안경을 쓰고 벗는 것 이외에는 눈이 나쁜 것을 인해서 불편을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무슨 안경을 써도 이것이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 병원에를 갔더니 병원에서 이상하다고 눈이 그렇게 시력이 안나올 리가 없다고 자세한 정밀검사까지 했는데 그 의사 하는 이야기가 뭐라 그러냐면 “그냥 사세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안경이나 하나 더 맞춰 드릴 테니까 그거나 쓰고 그냥 사세요.” 그래서 이제는 뭔가 이렇게 작은 글씨로 된 것을 보면 스트레스가 확 옵니다. 그래서 요즘은 신문 만들 때도 “야, 글자 좀 크게 해라.” 헌금 작정서 만들 때도 “야, 글자 좀 크게 해라” 그래서 책 같은 것의 각주 같은 것을 보려면 더군다나 영어 각주 같은 것을 보려면 이렇게 책을 계속 움직이면서 봅니다. 그래도 어떡해요. 봐야죠.
그 정도야 불편한 정도겠지만 그러나 주님을 안 믿었더라도 계속 육신적으로 연약했을 사람들이 각별히 연약한 몸을 이끌고 주님을 믿으며 살아가려고 애를 쓸 때에 그 때 그것은 그 사람이 그 연약함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을 섬기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그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특별히 지워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원래 있는 짐이 십자가로 승화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눈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석 가들은 “빛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그 때에 눈이 안보이게 된 그것을 완전히 치유가 안 된다.” 그것을 낫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질병을 고쳐주고 그럴 때 얼마나 말발이 안서겠습니까? “아니, 남의 병은 잘 고치면서 아니 자기는 저러고 다니나?”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위해서라도 간절히 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충분하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자기의 연약함에 대해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만약에 자랑할 것이 있으면 부득불 나의 연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러니까 그 육신의 질병 그 사건 하나 때문에 자신의 연약한 것을 바라보는 모든 관점에 아주 총체적인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영적 사고에 전환점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그 연약한 몸을 이끌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목사님 제게는 새벽기도가 그런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 그랬더니 나는 그래서 무슨 특별한 질병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침잠이 많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아닙니다. 아침에 늦게까지 퍼질러 자는 그것은 그 자체가 정상적인 연약함이 아니라. 그것이 잘못된 습관 속에서 몸에 베인 하나의 육체적인 패역이기 때문에 그것은 고쳐야지만 건강에도 좋고 몸에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전도한번 하면 며칠씩 드러누워서 앓고 몸이 너무 약하니까 교회 와서 봉사한번 하고나면 몸이 너무 연약해서 하루씩 드러누워야 하고 이런 사람들은 보면 너무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아침잠이 많은데 그것을 못자고 새벽기도 걸어 나오는 사람은 앞에서 보거나 뒤에서 보거나 한번도 불쌍한 마음이 들 때가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도 그러실 거라고요. 아무거나 십자가라고 말하지 마세요.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을 믿었건 안 믿었건 자기가 져야할 짐이지만 그러나 그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려고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긴장감 속에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나를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짊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똑같이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연약함이 있을 때 그것을 짊어지지만 그 짊어지는 태도가 얼마나 다릅니까.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가 짊어진 짐들을 가지고 세상이나 원망하고 사람이나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살다가 죽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신앙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짐을 지고 그 짐이 너무 무거우면 하나님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신 것을 생각하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런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사명이 있다면 그 십자가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사명이 없다면 그런 십자가가 없을 것입니다. 고생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모든 고생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모든 고생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 아니고 모든 연약함이 십자가로 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하면 “누구든지 그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오지 않으면 그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 희랍어로 “악시오스” “아고” 무게를 달아보다는 단어에서 왔다 고했죠. 그러니까 가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나는 좇지 않으면 예수님이 보더니 나에게는 그런 사람은 가치가 없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 어떤 사람이 중요한 사람입니까? 뭐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든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든지. 미모가 빼어나다든지, 아니면 힘이 세사든지, 아니면 주위에 자기와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그 사람들이 사회적인 지위가 자기를 보호해준다든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재능이나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적으로는 악시오스한 사람들입니다.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안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 하나님에게 가치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진사람, 주님이 자신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을 때에 거기에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풍만한 계획을 알아서 그래서 그 계획을 좇아서 살고자 하는 삶의 초점이 있는 사람, 그 초점을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그 짐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 그래서 그 짐을 지고 늘 아파하고 고생하는 사람,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주님을 찾는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주님에게는 악시오스한 사람입니다.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은 신앙의 세계에 와서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을 마치 어른대접을 받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직분을 세상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너무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마지막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는 두 번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한번은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깜짝 놀라고, 또 한번은 이 세상에서 큰 일한 것 같은 사람들은 매우 작은 상을 받고 이 세상에서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던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면서 충격과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김희보 목사님이 여러분들에게 오셔서 설교해주신 내용은 저도 깊이 은혜를 받고 배운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감히 무슨 특별한 지휘하나 없이 65세 무드셀라를 낳고 그리고 나중에 300년을 더 산 후에 죽은 에녹이 엘리야보다 적게 상급을 받았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릇을 감동시켰던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일생에 대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상급이 기라성같이 한 시대에 주님을 섬겼던 위대한 여성들보다 더 못하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여기보세요. 나를 위해서 큰일을 한 자는 내게 합당하다. 아닙니다. 일이 커도 십자가가 별로 없는 일이 있고 일이 매우 작아도 가시 돋친 십자가, 그리고 무거운 십자가, 너무 커서 쓰러질 것 같은 그런 십자가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상급은 일의 불량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주님이 자신에게 베푸시는 그 은혜를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향한 목적을 분명하게 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처럼 육신의 안목을 가지고 바라보던 자신의 인생과 그리고 미래에 대한 모든 견해들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이런 주님의 견해, 그런 견해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주님께 의미가 있는 일이면 그것은 중요한 일이고, 주님께 의미가 없는 일이면 아무리 크고 중요해도 별거 아닙니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은 받았지만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좋습니다. 사실입니다. 저도 맨 처음 어느 집회에 가서 들었을 때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
그런데 그것은 사실인데 그런데 사랑만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에게 주신 분명한 부르심의 길이 있어서 그것을 분투하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지, 뭐 이렇게 맬랑꼴리하게 어느 순간에 감상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느낌의 이름을 제 표현으로는 종교적 연애감정이지 이것이 경건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연애감정입니다. 연애 감정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 연애감정은 연애할 때 느끼는 모든 감정이라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그냥 보면서 으아, 하고 그렇게 사랑한 감정을 느끼는 것 말입니다. 무슨 영화배우나 이런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런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감정은 순간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스쳐갈 뿐이지 우리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젊었을 때 엘비스프레슬리 좋아해서 그래 여러분들의 인생이 얼마나 바뀌었습니까. 레이브가렛 왔을 때 젊은 애들이 그렇게 난리를 치고 그랬는데 무슨 인생이 바뀌었습니까. 가고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정말 눈물 흘리고 재힘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설마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단지 그 사랑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거라고 말할 수 없잖아요. 인격적인 하나님이 거룩하고 도덕적이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자식을 하나 낳아도 그 자식을 향해 뜻이 있고 계획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피로 여러분들을 낳으신 하나님에게 여러분들이 어떻게 인생의 계획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묻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왜? 이 땅에 존재합니까? 오늘도 여러분들이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면 그 길, 여러분이 서지 않으면 안 될 그 자리, 무엇입니까? 그것이 얼마나 크냐? 적으냐?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거기에 세워주셨다고 하는 그것이 위대하고 큰 것이지 그분이 맡기신 일의 크기가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위치적으로 생각해봐도 모든 사람이 다 사도바울과 같이 사역하겠습니까? 큰 교회 하는 사람도 있고 작은 교회 하는 사람도 있고 일평생동안 열심히 해도 200명도 못 넘기고 그냥 목회 사역을 마치는 사람들이 있고,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이상하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다 목회자 안 만드시고 한 교회에서 여러분보다도 영적으로 오히려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는 목회자를 섬기고 그를 위해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일평생 주일학교 교사로도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 맡기신 분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크든지 작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깨닫고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랑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알 것이고 알았다면 여러분들이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발을 벗어야할 신령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거기에 서 있는 동안에는 여러분들이 주님의 부름을 받아서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것들이 십자가입니까?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고 또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내가 아니면 여기에 서 있을 사람이 없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께서 나를 고유하게 그 자리에 세워주셨다. 라고 하는 그 자리. 어디입니까? 그리고 무엇입니까? 만약에 여기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다면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 기도의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매달리기만 하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파오는 기도의 제목이 있을 것입니다. 심하면 한이 되어 가슴에 맺히기까지 주님이 나의 이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래서 나에게 주신 이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는 내가 통곡을 그칠 수 없습니다.라는 소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주님이 오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말씀하실 때에 아주 또렷하게 언제나 그랬듯이 제 소원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어주시옵소서. 하고 했을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경건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습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생활에 생명을 걸지 않습니까? 생명을 걸 무엇인가 자신의 푯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척을 하고 몇 해가 되지 않았을 때. 수요예배가 끝났을 때 어떤 청년하나가 “목사님 면담 좀하십시다” 그래요. 그 때가 10시 20분에 수요예배가 끝났습니다. 그래서 뭐 이렇게 밤늦었는데 설교했으면 됐지 무슨 또 상담이냐“ 그랬더니 잠깐만 자기 얘기를 들어 달래요. 그래서 ”뭐냐?”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빨리 말해봐라. “목사님 설교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을 잘하려면 잘하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이제 개척교회 시작하는 사람에게 와서 무슨 답이 나오겠느냐? 나는 절대로 어떡하면 설교를 잘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런데 어떡하면 못하는지는 내가 안다. 당신처럼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니면서 설교는 어떡하면 잘할까? 그런 거나 물어보러 다니면 나중에 반드시 못한다.” 그랬더니 아주 곤혹스러운 얼굴로 그러더니 그냥 갔으면 좋을 터인데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물어보시라고” “자기는 신학교 학생인데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다고, 자기의 신앙의 생활의 과거에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만 하면 간절히 부르짖던 그런 체험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생이 되었고 얼마 안 있으면 목사가 될 터인데 이상하게 기도가 간절하지 않고 어떡하면 그렇게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열렬히 사냐? 열렬히 삽니까? 열렬히 살아?” 가만히 있어요. “열렬히 살지 않는데 열렬한 기도가 나오면 그것은 정신적인 현상이지. 당신이 열렬히 사냐? 그것을 질문이라고 하느냐? 주님을 위해서 뚜렷한 목표를 갖고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고난 받으며 살아봐라. 주님을 위해서 이런 삶을 살고 이 일을 위해 주님을 위해서 죽겠노라고 다짐하고 오늘 당장 일을 시작해보라. 탄탄가도가 열린 것처럼 길이 쫙 뚫리는 법은 없다. 끊임없이 우리를 좌절시키고 그 목표를 따라서 가지 못하도록 수많은 원수들이 우리의 안팎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를 좌절시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살아야겠다. 그 일을 이루어드려야 되겠다고 간절한 목표를 갖게 되면 어떻게 열렬해 질 수가 없느냐. 어디 가서 불이나 받아서 뜨거워지려고 하는 것은 망가진 발동기 한번 돌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삶이 열렬해야지.” 심히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아주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두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서 이 코페르니쿠스적인 충격을 받고 그리고 이제 새로운 영적순례의 길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무엇인지 압니까? 절제도 없고, 열렬한 기도의 제목도 없고, 항상 신앙생활이 어떤 다이내믹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진 사람들은 눈물이 있습니다. 피를 뿌리는 고통이 있지만 그러나 환희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감당하고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했을 때 그 밀려오는 하해와 같은 기쁨, 그 밀려오는 환희,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자신의 일을 이루셨다. 라고 하는 이 거룩하고 완벽한 환희, 그 놀라운 사랑과 그 놀라운 기쁨, 이것이 가슴속에 확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볼 때에 정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아는 그 지식 속에서 열렬하게 살았던 사람, 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의 목표가 뚜렷한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았더라면 여러분들은 너무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주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그러나 삶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무나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십자를 지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불쌍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에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 십자가 없는 사람들이 불쌍한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호주 시드니에 가서 4일을 있다가 집회 끝나는 날 바로 올라왔습니다. 구경하고 가라고 뭐 바지 자락을 붙잡는데 나는 간다. 그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나고 났는데 밥이 되었는데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저녁이 제 입에 안 맞는 것이 되어서 거의 못 먹었습니다. 그런데 집회끝나고나니까 탈진하게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목사님하고 사모님, 그 집 아이. 이렇게 데리고 같이 파라마트라고 하는 곳에 길거리에 이렇게 먹자골목이 있습니다. 거기에 앉아서 무엇을 먹는데 거기에 들르기 전에 “목사님 여기 이상한 음식점 하나 있는데 거기 가보실레요? 그래서 가보았더니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보니까 유서 깊은 교회였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시에서 못 허물게 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벽돌이 벌써 고색창연했습니다.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었습니다. 맥주고 팔고 그러는 음식점으로 바뀐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신기해서 가슴 아프기는 했지만 들어가 보았습니다. 들어보았더니 교회당 내부를 하나도 안고치고 그대로 놔뒀습니다. 고색창연한 마루, 벽돌로 쌓아올린 예배당인데, 여기에 이렇게 음식점이 쫙 있고, 맥주고 마시고 이런 사람들이 여기에 있고, 여기 단상도 있어요. 그런데 강대상은 좀 비싸데요. 여기는 좀 싸고 강대상이 제일 비싸고 두 번째가 성가대석이 좀 비싸고, 저는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교회가 진짜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되는 수도 있구나. 그 정도 아닙니다. 교회의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심지어 주일날 오후에 댄스파티 하겠다는 사람에게 교회를 한 시간에 얼마씩 받고 밀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자 다 치우고 여기 모여서 바자회 하고, 옷 같은 것 같다놓고 바겐세일 하는 것 유치해서 하고 말이죠.
교회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사람들이 특별히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그러면서 통곡하며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교회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제도의 문제가 교회의 운영의 방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세요. 교회는 항상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서 온 것이 아니라. 아주 하나님 앞에 뚜렷하게 사명을 받은 사람, 그래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그 사명의 길을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한 사람,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자신이 십자가를 짐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해서 오히려 기뻐하며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한시대의 교회는 유지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허허벌판에 그 웅장한 예배당이 세워질 때 무슨 돈으로 그 예배당을 세웠겠습니까. 사람이 없었으면 예배당을 지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거기에 사람아 꽉 차지 않았더라면 그 예배당을 세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감화시켰고,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 이름은 지금은 이름이 잊혀진 그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서 교회당이 그렇게 지어진 것입니다. 지금은 팔려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술 마시는 그런 음식점으로 변한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그런 일들이 다반사로 있는 일입니다. 그냥 100년 가까이 된 예배당들이 헐려나가고 대형 슈퍼마켓 같은 것들이 들어서는 상황,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 있습니까? 삶의 초점이 있어서 그 일이 내 인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고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이미 내게 주신 사명이 완수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너무 아프다. 라고 하는 그런 견디기 힘든 그런 통증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저 주일이면 예배 출석하고 교회의 한 멤버가 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잘하면 구원받겠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우리 삶의 초점을 분명히 합시다. 나는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 모도 다가 일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이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 은혜를 받아서 적어도 나는 이것을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것만 이루어지면 내가 오늘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 그리고 내 일생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며 이 세상에서 호강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는 눈을 못 감을 것 같다.라고 하는 그 무엇, 그 무엇이 모두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을 보십시오. 그분이 괜히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까? 그분이 괜히 박해를 받으셨습니까?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분이 괜히 고난을 받으셨나요? 아니죠. 그분에게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아주 분명한 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끔 그 길을 오해할 때는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사람들이 깨달을 때에는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믿을 때에는 오히려 그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 아닙니까? 어찌 그런 길이 우리 주님에게만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어떤 지체를 한명 만났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가 요즘은 좀 열심히 많이 식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는 지체는 아닙니다. 자기가 사업 얘기를 하면서 자기가 요즘 돈 많이 번다는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대꾸도 안하고 한참 듣다가 한달에 그 정도 벌면 진짜 많이 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행복합니까? 그렇게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합니까?” 그냥 피식 웃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한달 수입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쓰임 받는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고 거기에서 소속감을 느끼는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아멘을 안 하더라고요.
잠시 머물 이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 보다 더 귀하다.
교회는 구석구석에서 사람이 볼 때는 너무 작아 보이는 일도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흐느끼는 십자가진 성도들에 의해서 교회는 교회되어 가는 것입니다. 람보와 같은 목회자 한사람을 통해서 교회가 교회되어간다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교회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이 이것을 섬기시려고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남이 알지 못하는 예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알려주시고 그 사랑이 감당할 수 없어서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기 때문에 그 사랑의 마음이 동기가 되어서 거기 서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괴로우나 기쁘나,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자기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생명보다도 자신의 사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거기 서 있는 사람, 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주님이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쓰임 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십자가가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먼저 은혜를 주셔서 먼저 예수를 믿게 만드시고 남이 알지 못하는 복음의 비밀들을 알게 하시고 이 세계를 맛보게 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맞닥뜨리도록 만들어주신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포기할 수 없는 삶, 포기할 수 없는 사명, 그것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종종 음악의 대가들의 작품에 보면 미완성곡이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미처 다 못쓰고 죽었으면 누가 그런 곡들을 뒤에다 붙여서 완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곡입니다. 여러분의 사명, 여러분 정말 십자가가 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그 십자가,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있을 때 그 십자가에 의해서 여러분들은 가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내게 합당하다. “ ”합당치 아니하다. “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거꾸로 뒤집으면 ”합당하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합당하나는 것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 그런데 그것과 똑같이 한 가지 조건을 더 달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좇는 자” 이 희랍어는 길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무거운 부담을 의미한다면 무거운 짐, 고통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신앙의 삶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면서 예수님을 두가지점에서 인치셨습니다. 하나는 ”이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그래서 청교도들은 이것을 이중인침이라 그래서 앞부분은 관계에 대한 인침이고 뒷부분은 사역에 대한 인침입니다. 이 십자가는 주님을 위해서 사역을 하려고 할 때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섬기며 살려고 할 때에 지는 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를 좇는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사역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기에서 ”나를 좇는 자다. “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예수님이셨던 것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서 걸어가는 그 삶입니다. 보면 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좇는다”고 하는 “아콜루 데오”라고 하는 희랍어인데 이것은 ( ? )길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히브리어로 들어가면 “델레크”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 제가 언젠가 길에 대해서 길게 설교한 적이 있었는데 한번 여러분들이 읽은 성경의 지식을 동원하면서 이 길이라는 의미가 얼마나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왕들을 심판하실 때 “다윗의 길로 행하였고”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난 사람입니다. 그것이 단순히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했고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한 사람이 걸어가는 그 인생의 길은 그 마음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걸어가는 길을 통해서 그 사람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밤중에 이리비척 저리비척 걸어가는 사람은 술 먹은 사람입니다. 차가오는지도 모르고 그저 슬슬슬 걸어가다가 부딪히고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은 지금 딴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앞만 보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사람은 급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걸어가는 길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 드러나듯이 성경은 그 사람이 행해가는 그 인생길 그자체가 그 사람의 존재를 넘어설 수도 없고 모자랄 수도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보면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 배경이 여기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길을 걸어간다. “나를 좇는 자” 어떤 말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래서 마음과 삶이 나뉘어 질수 없었던 것처럼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아가서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자신이 날마다 성화의 길에 서 있었던 사람.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우리의 십자가가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이 들어서지는 십자가가 많아요. 아니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뀌기 위해서 짊어지는 그 십자가가 많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후자입니다. 여러분 일 자체가 힘들다. 아니 얼마나 뼈 빠지게 했기에 일 자체가 힘들어요. 여러분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너무 힘들어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졸도하신 분 있으십니까?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대부분 다 그만둡니다.
요즘 들어서 인덕원 현장에서 고생들 많이 합니다마는 고생스럽죠. 그런데 사실 우리들의 십자가는 마음의 고통이 없는 그 일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힘든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가끔 신학생들 보면 교회에서 전도사생활 열심히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교회에서 전도사 임명해놓고 땅 파서 김칫독 묻으라고 했습니까?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단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마음의 많은 고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짐을 한번 우리 자신의 성화에 관해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나를 좇는다. 주님의 마음 없이 어떻게 주님의 뒤를 좇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주님의 마음을 닮지 않고는 주님의 뒤를 좇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좋아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 아니고는 이 말에 합당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일 하면서 힘들고 고생스러운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전도하고 심방하고 영혼들을 가르치고 그 일이 아무리 힘들면 아침부터 어두움이 땅거미가 질 때까지 허리한번 펴지 못하고 곡괭이질 하는 인부들의 노고에 비하겠습니까. 그것보다는 낫죠. 그런데 고생은 그것이 아니라. 대부분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죠.
가장 큰 적이 자신 안에 있습니다. 악마를 이기고 세상을 이긴 사람도 가끔은 자기에게는 져요. 그런 많은 것들이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분명한 신앙적인 목표가 있으니까 자기 깨어짐이 있는 것이고 참회가 있는 것이고 자기 부인의 고통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되는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런 고통이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성경에는 오늘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그 짐을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 등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똑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들이 개인의 신앙의 신앙에 있어서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주위를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상당히 성공했지만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는 파산한 사람들을 종종만납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위해서 일은했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이 예수를 따르는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마치 성화의 두 요소처럼 똑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할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위해서 그 사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나머지를 모두 하찮은 것처럼 여기며 살 수 있는 신앙의 결단,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이 그 짐을 짊어지고 가면서도 단지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날마다 닮고 그래서 거기에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소욕을 꺾고 주님의 고욕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기 위해서 육신을 죽이면서 날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으며 그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걸어가는 사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요. 세상에 나아가서 사람들이 돈 잘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 유능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며 출세할 때 그 때에 새벽이면 날마다 아버지 앞에 나와서 흐느끼면서 자기와 같이 악한 사람이 없노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깊은 밤이면 자기 속에 물리치지 못하는 육신의 소욕 때문에 괴로워하며 주의 은혜를 구하고 신음하는 것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주님이 보실 때에 값어치 있는 사람입니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의 V. I. P가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서 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주님 닮기 위해서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 주님의 마음으로 자기도 걷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 속에서 자기 부서지고 참회하면서 날마다 주님의 마음을 자신에게 받아 살려고 애쓰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아주 가치 있는 사람이며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자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좀 우리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지위와 그리고 재물,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위치. 이런 것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의 중요성을 재지 말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 길을 걸어간다. 그런 분명한 신앙적인 확신을 가지고 길을 걸어가서 사람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누룩과 같고 또 그저 필부로 한 세상을 살아갔던 에녹과 같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보실 때에는 정말 히브리서 11장 뒤편에 기록해주고 싶은 그런 사람, 그런 사람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십자가를 앞에 둔 사랑
“유월전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오늘 성경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이 장면은 예수님의 생애의 말기중에서도 특별히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 직전에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유월전 전에 그 유월절에 반드시 자기가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유월절에는 예수를 절대 죽이지말자.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모이는 가장 큰 명절이니까. 그 때에 예수를 죽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편이 되어서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유월절에는 죽이지 말자.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그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유월절에 죽으실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여러분들이 아는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포로로 잡혀있을 때 노예생활을 하던 때에 430년만에 그 애굽에서 탈출하기 직전에 있었던 10번째 재앙과 관련된 사건입니다. 어린양을 죽여서 문지방과 인방에 두루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지나가고 그래서 ( ? )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뛰어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않은 집은 처음난 모든 것들이 죽임을 당하는 그러한 유월절이었습니다. 마지막 재앙의 밤에 구원얻은 날이었습니다. 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한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그 문앞에서 죽어간 수많은 어린 양들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죽어서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피를 발라 우리를 대속할 것은 이미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날 보다도 그 유월절 기간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이 그 예수 한분을 바라보면서 달려온 이 구원의 역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유월절에는 예수를 죽이지 말자. 했지만 정작 본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유월절에 죽으실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몸을 입으신 참 인간이셨는데 당신이 어떠한 죽음을 죽으실 것을 알고계셨는데 그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 오고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큰 고통은 크게 세가지고 나뉘어졌을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는 분이신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한가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그 죽음은 점차점차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커다란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커다란 두려움중의 하나는 영적인 부분에 속한 것인데 십자가에 죽는 그 죽음이 단순히 생명을 끊는것이라면 조금밖에 두렵지 않지만 그 죽음이 의미하는바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죄를 짊어져보신적이 없는 분입니다. 더욱이 그 죄를 짊어지고 있는 그 순간 십자가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으시고 죄짐을 담당한 한 어린양으로 보고 하나님 아버지의 저주가 임할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에는 커다란 무게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마지막 또 하나는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의 순간에 가까이 다가오시면서 염려되는 것은 이 땅에 두고가는 자기의 백성들이었을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쉬임없이 일생동안 하나님의 복음을 영혼들에게 전하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고통하는 자들을 그 고통에서 건져주기 위해서 애를쓰셨습니다. 그분의 머리둘곳 없는 생애는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전적으로 바쳐진 생애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두 눈에는 고생하고 유리하는 영혼들로인한 눈물이 마를날이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들을 두고가야 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서 가르치고 그들을 돌보아 주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아직까지도 당신은 이제 가야하는데 여전히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는 세 번째 커다란 무거움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십자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그 때에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자기의 때가 가까워짐을 아시자. 그 모든 무거운 근심과 그리고 그 무거운 고통이 당신의 마음속에 그리고 영혼속에 그리고 당신의 육체속에 시시각각으로 중압감으로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십자가를 앞에둔 무거움과 고통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시지 못하도록 말릴수 없었던 한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덜 관심을 가져도 될 사람들이고 이렇게 세가지 무거움에 눌려 점차점차 십자가를 앞에두고 가까이 다가가시는 예수님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섬김이 필요하신 때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예수님께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떠날것과 심지어는 생명처럼 사랑했던 자기의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시고 그래서 고난받는 그 순간에 외톨이가 될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아셨습니다. 사랑받아야할 시간이었죠. 섬김을 받아야할 순간이었죠. 고난당해야 하는 그 때에 사람들의 보호와 위로가 사랑이, 돌봄이, 섬김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버리고 가기로 작정되었습니다. 당신이 오히려 사랑받고 위로받고 돌봄을 받아야하는 그 순간인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일은 당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잊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리고 당신을 제물로 바치는 그 진정한 의미의 최종적인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언젠가 충성시리즈에서도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관이 뚜렷하고 그리고 강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가 강하고 뚜렷한 신앙의 주관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불행히도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많은 사람들중에 상당수는 충성스럽기만 할뿐 사람을 향해서는 강포하기 쉽습니다. 자기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처럼 살지못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못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려고 들지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쉬임없이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셨고, 머리둘곳없는 생애를 사신후에 지금은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눈앞에 두고 계십니다. 자기의 사랑하던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당신의 사랑을 한몸에 받던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도 그 때에 예수님이 하신일은 외로움을 느끼거나 고독을 느끼거나 인간은 아무 소용없다. 배신감을 되씹으시는 대신에 그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일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재물이 되기 위해서 죽으러 가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오르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뒤를 눈물로 따라왔습니다. 흐느끼던 흐느낌이 변해서 피어린 통곡이 되기까지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따라왔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그리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그 십자가를 지고 당신이 차마 지시지 못해서 구래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가야하는 그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애처롭게 우는 그 여인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가슴아파해야할 일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는 그 일이 아니라. 당신이 이렇게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대속하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데도 아직까지 회개하고 돌이켜설줄 모르는 예루살렘과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자녀를 위해서 울어야 할 것을 사랑으로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지막 장면에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면 얼만큼쯤 살아겠습니까? 또 열심히 산 그 삶가운데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 못했고, 오히려 자기 스스로의 성취감이나 혹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동기에서 행한 것들을 제해버리고나면 정말 순수한 동기에서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의 동기에서 주님을 위해서 섬기고 산 날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조금 충성스럽게 살고 많이 난폭해집니다. 조금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자기 자신의 의를 많이 쌓습니다. 조금 희생하고 자기처럼 희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비난하고 그들보다 우월감을 느낄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당신처럼 십자가를 지고 당신과함께 죽으러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일생동안 그렇게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순간에 더럽게 자기의 스승을 배반하고 구주이신 그분을 부끄러운 십자가의 죽음에 홀로 버려두고 구차한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숨어버린 자기의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이 하신 일은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충성스럽게 살고, 자기를 다 바치고 그렇게 비열한 배신을 당하셨음에도 그것을 눈앞에 두고 계시면서도 아니 그 배신이 실재로 실현된 이후에 조차도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셨습니다. 저는 몇 년전에 예수님의 이 고난의 기사를 한번 읽다가 참 많이 감동을 받은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냐하면 베드로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실패를 예고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죠. "시몬아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는 청구하는구나 그렇지만 나는 네가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네가 돌이킨 후에는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 ”돌이킨 후에는“ 이것이 무슨뜻입니까? 예수님이 벌써 그 말씀속에서 큰소리치는 베드로에게 ”사단이 널 달라고 계속 밀까부르듯 그랬다. 그런데 네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너는 한번 실패할 것이다. 그런데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하라.”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예수님이 아셨는데 배신하기도 전에 예수님은 그 배신할 것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충성스러운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음을 눈앞에 두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다가 사람을 원망하게 되는 경우있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사람을 원망하고 주위의 환경을 원망하고 그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가지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시종일관 그 눈의 초점이 하나님에게 가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가야합니다. 그러니까 여러사람이 일을해도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시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 때문에 거기에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던 사람이 그 시선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즉시 “나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놀까?” “나는 이렇게 많이 바치는데 저 사람은 나보다 부자인데 왜 한푼도 안 내 놓을까?” “나는 이렇게 몸이 아파도 이렇게 무거운 것을 들고 고생을 하는데 저 사람은 나보다 더 건강한데 왜 빈손들고 다닐까?” “ 나는 저 사람보다 더 시간이 없는데도 시간을 내어서 봉사를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놀면서도 봉사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배신감을 느끼고 그리고 그런 비교속에서 주님이 맡겨주신 그 일을 위해서 충성하며 주님 한분만을 바라보면서 그 일을 감당해야 되겠다.라고하는 진실된 신앙의 동기가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일에도 실패하고 신앙에도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많이 충성하면서도 당신처럼 충성스럽게 살지못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당신을 배반할 사람들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 뒤에 뭐가 나오느냐하면 가롯유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확신합니다. 가롯유다도 예수님이 사랑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또 어디에 나오느냐하면 성찬을 베푸실 때, 마지막 만찬을 베푸실 때에 “너희 모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히랍어로 “판테스”인데 그것은 문자그대로 모두입니다. 그러니까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너희 모두 나눠라.” 잔을 주시면서도 “너희 모두 나누어라.” 그 속에 가롯유다가 제외되었다고 우리들이 상상할 권한은 없습니다. 결국은 그가 사단의 도구가 되어서 예수님을 팔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어떡하든지 그가 돌이키기를 주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애쓰는 것만으로 우리는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면서도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파악해지거나 완고해져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못하는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고 우리도 예전에는 그렇게 충성되게 못살았잖아요. 요즘 조금 살고 있는데 또 얼마있으면 안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충성스러운 삶을 나는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요해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면서 주님이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인격적인 감화와 은혜를 통해서 새롭게 세움을 받아서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는 그렇게 기대해야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그런 기대를 가지셨고,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기독교의 역사를 끌고간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모두 실패한 사람들이 끌고간 역사였습니다. 그렇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비겁한 제자들,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비겁한 사람의 대명사 베드로, 의심많은 도마, 이런 사람들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증거하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작정하는 사울과 같은 그런 실패한 청년들을 통해서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를 주님이 이루어가신 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그렇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그런 주님의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지금 실패하고 주님을 위해서 단호한 각오로 살지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자신은 충성하면서도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끝까지 사랑하면서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그렇게 사랑한 사람들이 누구였느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 이 자기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표현으로 하자면 자기 편아닙니까? 아닙니다. 자기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은혜를 많이 받지못했을 때에는 영혼에 대한 부담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영혼, 또 가족들에 대한 영혼, 그런 것 없습니다. 교회에 다녀도 그냥 다니는 거죠. 어떤 자매가 그런 이야기를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서 경악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놀랬는데 뭘 놀랬느냐하면 “내가 어떻게 지옥갈 우리 엄마 우리 아빠하고 이렇게 행복하게 살았을까?” 자기가 변화되고나니까 자기의 과거의 삶이 도저히 이해가 안가더래요. 어떻게 지옥갈 우리 엄마 우리 아빠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을까? 엄마 아빠는 철이 없어서 행복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크리스챤이었으면 그 엄마 아빠의 영혼의 마지막 운명을 생각했더라면 죽어도 행복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옛날에 어느 상가집에는 갔는데 상중에서 연세가 많이 들고 평안히 있다가 잠자듯이 가면 그것을 호상이라고합니다. “좋은 상이다.” 그래서 그 호상이 났을 때는 심하면 시골에서는 꽹과리도 치고 춤도춥니다. 그런데 그 호상이라는 말은 자기가 그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자기가 호상이라고 돌아다니면 어떻게합니까. 주위의 사람들이 덕담으로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네 집에 호상이래요. 그렇지 호상이지 자기네 집에 연세많이드신 아버지가 그저 잠자는 듯이 가셨으니까 호상이지. 그런데 예수 안믿고 죽었는데 무슨 호상이에요. 그것이 다 변화되지 못한 표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딱 변화되고 보니까 예전에 자기의 삶중에서 가장 이해할수 없는 부분이 어떻게 지옥갈 우리 엄마 아빠하고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을까? 그리고보니까 한번도 자기 엄마 아빠를 위해서 울어본적이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했지만 그것은 모두 육체에 속한 사랑이었습니다.
은혜받지 못했을 때에는 자기가 근심해야할 영혼, 그런 것 없습니다. 아니 자기 영혼을 위해서도 근심을 안하는데 뭐 남의 영혼을 위해서 근심하겠습니까. 그렇지않습니까. 그러나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떠오르는 얼굴, 얼굴마다 마음에 근심이됩니다. 누구도 자기와 관계없는 영혼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눈 앞에 두고 고난의 순간에 한발한발 다가가실 때 그분의 마음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은 단지 열두제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곤고한 가운데 당신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찾았던 사람들, 질병으로 고통하였으나 그래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으나 주님이 고쳐주신 사람들, 귀신들렸으나 주님이 내 쫓아주신 사람들을 비롯해서 심지어 아직까지도 당신에게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흩어진 수많은 영혼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그 사람들이 자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책에서도 그 얘기를 했습니다만은 챨스피니가 맨하탄 거리에서 사람들이 출근하는데 길거리에 털석 주저앉아서 막 울었다는 얘기한번 했죠. 펑펑 울면서 “하나님 난 어떡합니까. 저 영혼들이 모두 지옥으로 가고있는데” 그 사람에게는 맨하탄뿐만 아니라.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고난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여러분들이 돌보아 주어야할 사람들 누구입니까? 고난과 시련이 와도 여러분들이 돌봐주어야할 사람, 그래서 여러분들의 마음이 그들의 영혼의 상태에 매여있는 그런 사람, 누구입니까? 그런 사람 있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부를 것 처럼 그렇게 신나고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마지막때가 될수록 사람들은 급히 식어지고 사랑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말로만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느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에게는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십자가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십자가가 아니라. 이 십자가를 지고나면 당신은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었지만 죽음을 통해서 당신이 두고가야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신자가 고난을 이기는 길은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길이 아닙니다. 신자가 고난을 이기는 길은 다른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에 자신보다도 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눈 앞에 다가온 자기 자신의 시련과 고통보다는 오히려 그 와중에서도 자신을 바쳐서 섬기면 유익을 얻을 더 곤궁하고 불쌍한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바로 고난과 위기의 때를 훌륭하게 지나는 신자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못박히신 이 수난의 주간에 가슴깊이 이 주님의 모본을 기억하면서 여러분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무겁고 힘겹다고 하더라도 근심과 염려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더럽히지 말고 오히려 여러분 보다 더 연약한 여러분의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함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함께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가지고 그 시련과 고난의 때를 이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십자가를 앞에 둔 섬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 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요13:4-6)
예수님께서 자기의 때가 가까운 것을 아시고 하신 일은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의 사람들, 자기에게 속한 제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둔때에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없습니다. 자기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임박한 자신의 십자가를 준비하시는 훌륭한 준비였습니다. 당신을 향해서 시시각각 죽음의 십자가가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자신의 관심을 자신의 목숨이나 육신의 안전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남겨두고가야하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양떼들에게 더 많이 마음이 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었지만 그러나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평소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서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고 돌보시되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셔서 당신이 평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그 아름다운 본을 친히 이루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제자들을 향한 마음에 가득찬 당신의 마지막때가 다가온 것을 아는 그 메시야로서 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발씻겨주는 세족의 사건이었습니다. 식사후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른채 대야에 물을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종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결코 이 세상에서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이 자신의 상전의 발을 닦아주는 그러한 천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흔히 볼수 있었던 그런 노예의 모습을 본받아서 그래서 씻을 물을 가지고 와서 그것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으니 제자들은 아마 의자에 앉고 혹은 서고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은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것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바와 같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모본을 남겨두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과시적으로 행하신 그런 선행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한 효과일뿐이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 사건은 예수님이 이 땅에 두고가야하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에서 아가페의 사랑은 반드시 섬김을 동반한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신앙밖에서 우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은 다분히 자기 충족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다가 만약에 사랑하는 관계가 깨뜨려지면 사랑이 깊었던 것 만큼 그들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변합니다. 그렇죠? 사랑했지만 관계가 깨뜨려졌기 때문에 아주 선한 이웃으로 그리고 기억에 남는 좋은 친구로 그렇게 원위치로 돌아가는 그런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뜨겁고 열열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관계가 깨뜨려졌을 때 그들은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기가 쉽상입니다. 이것은 모두 사랑과 미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원수맺는 것, 이것이 얼마나 백치창 한 장 차이인지를 보여주고 그 얇은 두깨사이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요. 자기 중심적인 욕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사랑했다가 그 사랑의 관계가 깨졌다고해서 그를 증오하거나, 미워하는 법이 없습니다. 혹시 그렇다면 그것은 사랑의 미완성이고 그리고 성화된 인격의 미숙에서 비롯된것이지 원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죠. 너무너무 어렵죠. 너무너무 정도 가지고는 안되고 너무너무너무 어렵죠. 정말 어렵습니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밤새 기다리신다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일생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흉내내다가 내다가 죽는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일생입니다.
제가 중학교때인가. 봄이되면 학교앞에 병아리들을 가지고 와서 팔았는데 그 병아리를 5섯마리 사면 세 마리는 죽고 두 마리는 살았습니다. 그래서 병아리를 사가지고오면 재미있는 것이 뭐냐하면 그 병아리가 자기도 닭이라고 급하면 나는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날개가 요만한 것이 붙었는데 그것을 막 흔들어요. 그런다고해서 그것이 날아지겠습니까? 그런데 그러면서 점점자라면서 날개에 힘이붙어요. 그래서 커다란 닭이되면 공중에 휙집어던져도 뭐 새처럼 공중으로 날아다니지는 못해도 던지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정도로 그렇게 온갖힘을 쓰면서 날개를 퍼득퍼득하면서 땅에 착륙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그런것처럼 이제 여러분들은 그런 병아리 몸에 조그마한 노란 날개를 가지고 어떻게 흉내낼수 있는 사랑입니까. 그러니까 누구도 “너는 왜 아가페의 사랑을 못사니?” 그렇게 얘기할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럴 사람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너는 어찌하여 내가 너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는 왜 그 사랑을 쫓아서 살지못하니?” 이렇게 말하실수 있는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흔히 하기 좋아하는 말로 “예수 믿는다면 왜 그 모양이냐?” 그것다 자기 예수 믿은 다음에 회개할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기대와 요구를 갖고계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신앙을 떠난 사랑의 관계는 다분히 자기의 욕구가 많이 계제되어있기 때문에 사랑의 관계가 깨뜨려지면 미움의 관계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우리가 주님을 많이 사랑할 때 주님도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보여주시죠. 그래서 그 은혜의 풍성함 속에서 살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은혜에서 멀어졌습니다. 우리가 삶으로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이켜 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낙인찍힌 사람이 된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분이시다. 이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해어진 그 지점에서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됩니다. 물론 주님의 사랑 안에서 끊임없이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주님의 신실함에 대해서 더많이 실감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때가 다가온 것을 아시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은 반드시 이런 섬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계셨는데 예수님은 잠시후에 제자들이 당신의 손으로 씻겨준 그 발을 가지고 자기를 버리고 도망할줄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음의 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때에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신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방식이 바로 섬김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왕이 신하에게 은총을 베풀 듯이 이렇게 베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밑에서 떠받들며 섬기며 섬기는 그 동반된 사랑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으셨던 그런 사랑인 것입니다. 이 제자들중에는 예수님이 가룟의 발을 씻기셨는지 건너뛰셨는지 알수없지만 아마 가룟유다는 그 사이에 빠져 나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지만 어쨌든 그 제자들 중에는 잠시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할 베드로와, 비겁하게 도망간 나머지 모든 제자들까지 이 속에 들어있었습니다. 종되어서 그제자들을 섬기시던 예수님의 그 섬김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할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웅변적인 그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리고 그 사랑은 제자들을 향한 섬김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자신에 대한 염려와 근심, 그리고 자신의 욕심을 이루는 그 일에 골목해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 하나로 우리는 이러한 섬김의 정신들을 외면하고 자기일에 골목하고 그리고 자신의 일에 코박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죽음을 눈 앞에 둔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제자들, 그러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종처럼 섬기신것처럼 그렇게 우리들이 종말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섬기면서 살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발 씻김을 받았을 때 단지 황송하기만 했지, 이 발씻기신 사건뒤에 담긴 그 놀라운 예수님의 교훈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나같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야가 종처럼 무릎을 꿇고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는 내게진 신세를 영원히 잊지말고 다음번에는 너희들이 종처럼 되어서 나를 섬겨야한다.” 그 메시지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싶으셔서 짐짓 이렇게 비천한 모습을 연기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사랑은 내리사랑이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으니 그들이 예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그 사랑 자체가 이런 분에 넘치는 섬김을 동반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그리고 말과 혀로만 자기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무릎을 꿇는 정신으로 자기의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그런 삶을 살도록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발을 씻기신 이 사건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어디서든지 전해져야할 사건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노예처럼 살다가 죽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주님처럼 고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도 자기의 형제들을 섬기는 일에 생명을 걸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늘날의 교인들의 삶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입니까? 누가 종처럼 섬기려고합니까? 누가 예수님의 머슴처럼 형제들의 종이 되어서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려고 합니까? 말과 혀로만 하는 섬김은 적은 비용밖에 들지아니하지만 자신의 온 몸과 삶으로 보이는 이 섬김은 때때로는 그의 피를 요구하고 때로는 그의 목숨까지도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지 힘든 엄청나게 이 무거운 이 삶의 멍애를 짊어집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수있습니까? 그 사람들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발 씻기시는 종된 형체로 오셔서 자신의 발을 씻기시는 이러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바로 자신도 사람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어 자신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오물을 닦아내시고 깨끗한 수건으로 그들의 발에 물기를 닦아주실 때 황공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잠시후에 다가올 십자가 사건에 비하면 겨우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신 것은 잠시 낮아지신 비천한 종의 모습이었으나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종식시키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그는 종이 아니라. 불앙무도한 죄수의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맑은 물에 담그며 씻기실 때 씻기실 때에는 단지 노예에 불과했으나 잠시후에 우리를 영원히 죄에서 씻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그곳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저주스러운 진노를 한몸에 감당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요, 죽임당하는 어린양의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 사건을 통해서 잠시후 당신에게 다가올 궁극적인 우리를 위한 섬김은 십자가의 그 고난을 향해 당신의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바였는데 그 예고에 따르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의 몸을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그 정신이 예수님의 지상의 생애동안에 계속 이어졌지만 마지막 무릎을 꿇고 마지막 자기를 버리고 다 도망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 세족의 사건에서 극치를 이루게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일전에도 낮아지실만큼 낮아지셨고 그래서 낮고천한 세상에 오셨을뿐 아니라. 율법아래 사셨고, 금생의 비참함과 고통을 다 맛보셨습니다. 그러나 핍박과 고난을 받고 병자들과함께 계셨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종의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자기를 버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에서 최종적인 섬김을 다하기 위해서 마음을 굳건히 하셨던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 세족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이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손에 의해서 발 씻김을 받으며 상전처럼 앉아있는 제자들 사이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런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더 사랑하는 주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의 날카로운 대조를 발견하게됩니다.
사람은 신실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신실하셨고, 사람들의 사랑은 충동적이었으나 주님의 섬김은 봉사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다분히 자기 만족적이었으나, 예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상대방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사건이었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기 위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섬기시는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마음속에 이렇게 종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의 마음속에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칭함을 받으면 불쾌할 이유가 없지만 종처럼 취급을 받으면 견디기 힘들어하는 우리의 모습속에서 사랑의 교훈과 그리고 자신의 몸을 종처럼 낮추어 자기를 배실할 제자들의 그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이 섬김을 보면서 사랑할 대상의 가치를 제고 그럼으로서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아주 영악하기 이를데없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얼마나 커다란 대조를 이루는지 우리는 예수님의 이 모본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있게 되었습니까? 오늘 어떻게 우리가 이만큼이나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고 거미줄같은 믿음이나마 붙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 누구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그 은혜는 우리를 위한 무수한 사람들의 섬김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다 이름을 기억할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자기 희생이 뒤따른 그 헌신과 섬김, 이름없는 곳에서 우리를 위해 부르짖는 기도와 그리고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그리고 우리의 삶의 상태를 걱정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의 그 간절한 섬김을 통해서 우리는 이만큼 성장해온 것이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모두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의 감화 때문에 우리를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가룟유다가 당신을 파실 것을 아셨고, 그리고 가룟유다와 어떤 놀라운 제자들과의 사이에 존재했던 그런 아름다운관계가 차마 형성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저는 주님이 끝까지 사랑하셨던 자기의 사람들 가운데 가룟유다도 들어있다고 저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그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룟유다의 영혼을 염려하셔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회개시키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러나 가룟유다를 근신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시고 그리고 성찬의 떡도 함께 나누어주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 사람들가운데 이 가룟유다가 제외되었다고 우리는 말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돌이킬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의 신앙고백속에 묻혀서 오르내리는 본디오 빌라도 뒤에 있는 또 하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향한 자기의 사랑을 섬김을 통해서 나타내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스스로 자신이 군주가 신하에게 말하자면 은총을 베풀 듯이 그렇게 높은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적선하듯이 사랑을 베푸는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철저한 섬김의 사랑이었고,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당신이 섬기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노예처럼 낮아지시기까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들을 섬기고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이 주님께 받은 사랑을 어떻게 기억하면서 그 사랑을 좇아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제하는 모든 것들이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마셔도 갈증을 채울수 없는 물과 같지만 그러나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했다고 말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받은 그 사람이 아무리 행복했다고 할지라도 사랑을 한 그 사람만큼 행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매순간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떠한 것을 알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기 위해서 어떻게 희생하시고 철저히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를 섬기셨는지를 기억하고 우리는 그런 사랑의 빚진자로서 사람들을 무릎을 꿇고 그 발을 씻기는 섬김속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부채를 갚아나가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이니다.
물론 이것은 영원히 갚을수 없는 사랑의 빚입니다. 첫째는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사랑의 크기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갚기 위해서 베푸는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너무나 소량이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은 우리들이 영원히 갚을수 없는 부채로 남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부채의식을 느끼게 하여서 그로하여금 주님 앞에 그 부채의식을 느끼며 그 의식을 따라서 살 힘과 그리고 용기를 갖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갚을수는 없지만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섬김으로서 당신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듯이 우리는 또한 어렸을때는 주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에 만족하며 기뻐했지만 이제는 주님께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와 같이 어린 사람들을 무릎을 꿇고 발을 씻는 그 섬김속에서 주님 앞에 우리의 행할길을 다 가다가 하나님께 우리의 삶 전체가 사랑을 따라 섬긴 생애였다고 인정받을수 있는 그런 생애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누가 우리의 사랑을 받을 대상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이든지간에 교회 안에는 참 신자와 거짓된 신자가 섞여있습니다. 참신자와 거짓된 신자, 그리고 미성숙한 신자와 성숙한 신자가 섞여있습니다. 신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속에도 때로는 끝까지 신앙을 지킬사람과 혹은 미끄러져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져 배교할 사람들이 섞여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배교할 사람과 참신자가 아닌채 여생을 마칠 사람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형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말아야합니다. 우리는 누가 참신자이고 거짓신자인지, 누가 끝까지 신앙을 지킬사람이고 마지막에 배교할 사람인지, 누가 알곡인고 마지막에는 가라지일지를 가려낼수 있는 절대적인 분별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입술로 신앙을 고백하면 우리는 그를 참신자인줄 알고 우리의 형제요, 우리의 한 지체인줄 알고 우리의 사람들로 생각하며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끝까지 사랑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예수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전파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이 다가오고 마지막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하는 십자가의 고난이 다가오고 있을 때 그 고난을 이기신 방법은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이었고 고난의 순간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으로서 당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결연히 맞이하실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게 못박혀 죽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셨을뿐 아니라. 그런 사랑을 입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종이 되어서 우리의 발을 씻기고 그리고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그 사람들의 마음에 무수히 못박았지만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해주고 그래서 우리를 이제 주님의 사람되도록 섬기는 도구로 살아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때문에 우리를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섬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섬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바로 그렇게 섬기며 살아가야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심 같이 또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소중하지 않은 것 처럼 버리신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형제들의 종이되는 것을 명예로 알고 무릎을 꿇어 연약한 자의 발을 씻기는 것을 오히려 명예로 생각하고 그리고 그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주님의 모본을 따라서 섬기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됨으로서 주님은 우리 안에 끊임없는 사랑의 체험을 공급해주십니다. 정말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충만히 역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은혜를 받지 못하기때문이지만 그러나 좀더 살아보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은혜만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주님께로부터 받은바 말씀을 좇아서 영혼들을 섬기려는 분투하는 진지한 삶이 없기 때문에 바로 우리 안에 사랑이 마르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사랑입니다. 퍼낼수록 가득 고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퍼낼수록 퍼낼수록 가슴에 가득 고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의 샘을 간직한 사람들이 바로 이 황량하고 메마른 세상이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삶으로서 보여줄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섬기는 자의 십자가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기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7)
고린도후서는 사도가 대게 세가지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우선 첫째는 자신이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의심을 퍼뜨리는 사람에 대해서 자기가 진실로 하나님께 부름받고 그리스도로부터 세우심을 받은 사도라는 사시을 확증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썼고,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런 사람들의 시도와 관련된 일인데 이 안에 유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유대주의적인 신앙관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기독교적인 신앙과 유대주의적인 신앙을 함께 섞어서 믿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개종한 유대인들 안에 있었는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교리를 혼잡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된 신앙관을 이 고린도 교회에 전파했고, 그리고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이 유대주의자들의 그릇된 교훈을 사도바울의 교훈보다 아주 쉽게 잘 받아들였던 것같습니다. 그런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쓴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헌금문제 때문에 썼습니다. 예루살렘이 흉년을 당했을 때 그들에게 연보하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격려하기 위해서 이 서신을 썼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의 맥락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자신의 사도직과 그리고 이것을 둘러싸도 훼방하는 유대주의자들에대한 바울의 비난을 담고있습니다. 그를 사도로세운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예수님이 직접 세우셨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그렇게 다툴필요가 없었지만 그러나 사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참된 사도라고 하는 사실을 변증하려고했던 것은 자기 자신의 자존심 때문이었다.라기 보다는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이 사람들이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면서 그가 이제껏 가르쳐서 그들을 세워놓았던 복음의 내용 그 자체를 거절하는 불신앙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자기가 참 예수 그리스도께 세움받은 사도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전해준 이제까지의 가르침은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한 것으로서 그들이 받아 순종해야 마땅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이렇게 길게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이 십자가와 관련해서 발견하는 사실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참된 종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11장에서 풀어나가는 이야기들이 뭐냐하면 자기가 부득불 자장을 하겠는데 그 자랑하는 것을 용서해라. 하면서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당한 그 고난을 정난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뜻이냐하면 사도바울이 정말 주님이 세운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면 내가 주님이 세운 사도가 아닐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주님께 세움을 받아서 순수한 복음적인 신앙을가지고 살아갈 때 그에게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시대를 살았던 마틴루터도 참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종과, 사람이 세운 종 사이의 구분을 말할 때 첫 번째로 지적했던 것이 뭐냐하면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게 고난이 있어야한다는 것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고난을 따라 다니면서 고난을 일부러 받으면서 살아야된다.라고하는 그런뜻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고, 그리고 그 고난에 대해서 인내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것은 그 사람이 참 신자요. 나아가서 참 하나님의 일꾼인 중요한 징표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싸인과 같다.라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기 자신이 사도인것에 대해서 12장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다.” 그런데 이런 것이 빠졌습니다. “내가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사도인 증표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참음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보다도 앞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약에 주님께로부터 세움을 받은 참사도가 아니라면 자기가 고난을 받았을지가 없고, 그리고 고난을 받았어도 이렇게 오래도록 인내하면서 이 고난을 당했을 리가 없다. 그러면서 그 결론을 내리기전에 11장에서 굉장히 긴 세월동안 자신이 당해온 그 고난의 흔적을 쭉기록해 나가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 사도바울의 일대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의 긴 고난의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세상의 모든 직업을 던져버리고 복음을 전하러 다니던 선교자의 삶, 교회를 설립하던 개척자의 삶, 설립된 교회를 목회하던 목회자의 삶, 그런 전문적인 사역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라고하는 면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자기와 같이 쓸모없는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에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일평생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면에 있어서는 종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그것을 적용할 때 잘 생각해서 적용해야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양한 표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자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 그런 의미는 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 이제는 은혜 안에 있는 성도가 하나님과 누리는 그 친밀한 관계의 탁월함, 그것만을 말할 때에 우리를 마치 친구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예수님이 나를 친구하고했으니까, “나는 친구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보면 “친구되기 원합니다.” 가사가 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살펴볼 때 “하나님 나 당신 친구입니다.” 그러는 성경구절이 어디있습니까. 주님이 혹은 어떤 성도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할 때 하나님이 마치 대면하여 말하는 것처럼 얘기했던 모세같은 경우, 친구와 같이 하나님이 대면하여 말하였다. 그랬습니다. 하나의 해석입니다. 그것은 어느분야에서 그러느냐하면 모든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 은혜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 친구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떤 측면을 이야기할 때에 그렇습니다. 그것도 사실은 알고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중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친교의 탁월함을 이야기할 때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는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순간에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그 많은 그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그 영광스러운 기업들을 우리들이 유업으로 받게되지 않습니까. 그런면에서는 후사입니다. 다양한 표현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 그것을 성경이 신자에 대해서 어느 표현을 사용할 때 그것이 어느면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문학적으로 잘 이해를 해서 그것을 적용시켜야지 한참 주를 위해서 일해야될 때 “아, 나는 주님의 친군데, 아니 친구끼리 뭘,”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선교단체에서 돈을 쓸때에 어느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실지로 들었습니다. 직접, 뭐냐하면 신학교를 경영하시는데 학교에서 뭐가 필요하면 자기돈으로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뭐 급하면 강사 월급도 주고 (옛날에 조그마한 신학교이니까 그랬겠죠) 그런데 어느날 그것을 썼으니까 공금이니까 청구를 해야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아들이 돈을 쓰고 그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청구하면 되겠는가?” 그런ㄹ데 그것이 그렇게 적용될 때에는 뭐 그렇게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거꾸로 학교돈을 갖다 쓰고 “아버지 돈을 썼는데 꼭내가 그것을 물어내야 되나” 이렇게 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용을 정확하게 해야합니다. 성경은 사도가 이런 삶을 살았던 이유는 뭐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그러면서 이야기할 때 당시의 문맥으로 보면 그 종이라고 하는 그 표현을 어떤 의미에서든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나는 이 말을 제일 싫어하는데 “하나님의 종” 뭐 ”주의 종” 그런 말이 가지고 있는 그런 종교적인 숭배의 뉘앙스같은 것이 없습니다. 시장에서 흔히볼수 있는 노예입니다. 우리가 머슴이라고 하는 그 단어속에서 어떤 떠받드는 것 같은 그런 것을 느낄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러도 느낄수 없지않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종이십니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도 “어이, 너 교회의 머슴이지.” 그러면 기분이 좋겠느냐고요. 그러니까 전혀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자기의 정체를 가지고있었습니다. 누가 그러느냐?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역자가 그리스도인이나 이 모든 것들이 한 삶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면 안됩니다.
이번에 제가 호주에가서 목회자들 모아놓고 특강을 했는데 특강 제목이 무었이었는데 아세요? 하루종일 특강을 했는데 특강 제목이 뭐냐하면 “신앙생활 잘합시다” 그것이었습니다. 목사들이여 신앙생활 잘합니다. 그리고 우리 다음에 만나면 물어봅시다. “어이, 김목사 신앙이 좋아졌어?” 이렇게 물어볼수 있는 사회가됩시다. 그것이 결국은 사역을 좌우하는 것이 결국은 바로 그것입니다. 뭐가 다릅니까? 여러분 제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목표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목표가 만약에 다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형제가 될수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겨냥하는 수준에 있어서는 차이가 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목표는 결국은 다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목표에 가슴이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무엇입니까? 요약하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 그런 관계를 누리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과 그리고 그런 특별한 은혜의 관계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셨으니까 힘닫는대로 생명이 붙어있는 날 동안에 숨질 때 까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인생의 목표이고 삶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형제 자매들 교회에 와서 교회일 열심히 해서 벽돌도 깨뜨리고 그랬는데 그것을 하는 동안에는 주의 일입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쌓여서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가. 벽돌도 깰일이 있으면 열심히, 땅도 팔일이 있으면 열심히,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서 영광을 받으실것이라고 확신이 가는 모든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확신이 서지않는 일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그 일을 주께하듯이 열심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갈려고 할 때에 끊임없이 부딪히는 이 세상의 죄악과 그리고 그 수많은 난관들, 그 속에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에게 고난이 없을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마틴루터가 이야기 하던 그 원칙이 나는 정확하게 적용될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였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때에
나의 맘의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왜 십자가를 보면서 고통이 사라져요.? 물론 죄로말미암는 고통,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이 우리를 자유케 해주시니까 사라지죠. 그렇지만 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면서 당하는 다양하고 많은 고난은 십자가를 볼때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들이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 신적인 저주의 고통을 감내하신 그 희생의 고난에 필척할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분은 순결한 분이었고 우리는 죄가운데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난들이 사실은 우리가 뿌려놓은 씨앗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 고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셔야했던 그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의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내가 십자가를 진 것이 무거워서 아픈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주님이 당하셔야했던 그 끔찍한 고난, 그것을 보면서 더많이 마음 아파하고 그 십자가에서 당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의해서 감화를 받음으로서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을 하찮게 생각하고 오히려 그 고난을 당하는 것을 영광스러운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일제시대때에 투옥 되었고 또 순교하던 사람들에대한 기록을 쭉 읽어보면 교파가 다르고 사람들이 신앙적인 성향이 아무리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있는 고통적인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십자가 신앙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으니 우리도 주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참된 신자에게는 반드시 이런 십자가가 있습니다. 40에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긴 그 숟한 사도바울이 당했던 고난의 모든 기록들은 사도바울이 그 고난속에서 무엇인가 미학을 발견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도 고통스러운 것이었고 아픈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껏 자랑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두고 있는 것, 사도직을 변증하면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뭐냐하면 자기 자신이 참사도였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단지 고생을 한 것이 아니라. 잘 참아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한 사람이 지고간다. 그럴 때 그것은 단지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면서 그 고난이 그 신자 속에서 신앙으로 소화 되어야지만 그것이 진정한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위해서 많이 고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속에서 소화되지 않고 그 고난속에서 변절하거나 그리고 그 고난속에서 생고생하면서 인격적으로 아주 파탄된 사람으로 망가져가거나, 십자가라고 지고 가면서 고생을 실컷하면서 사람에대한 증오심에 펄펄불붙는 그런 사람이 되면 그것을 십자가라고 말할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교회에 있던 어느 지체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제가 하도 상담을 많이하니까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 형제인가 자매는 엄청난 충격속에서 저를한번 만난적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교회에 복잡한 문제가 있었어요. 막 싸우고 교회가 이상하게 은혜가 깨뜨려지면서 그런 분위기였는데 형제하나가 주일 오후예배시간엔가 “나, 전 교인에게 할말이 있다고” 그리고 앞에 걸어나와가지고 그 자리에서 전 교인이 보는 앞에서 자결을해버렸습니다. 소위 얘기하는 활복자살을 해버렸습니다. 그 죽는 광경을 모든 교인이 지켜본 것입니다. 그래 얼마나 그 교회문제에 대해서 괴로웠으면 그랬겠습니까. 그 내막이야 다 모르지만 그것이 사실 아무렇게나 할수 있는 것입니까?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십자가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십자가는 고생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속에서 신앙적으로 소화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인내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없이는 이 십자가를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결국은 마지막에 자기가 이적과 표적, 기사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일으켰는데 사실 그거면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았다.라고 하는 가장 뚜렸하고 가시적이고 분명한 증거아닙니까? 그것이 사실 먼저나와야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사도다. 다시한번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난 정말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내가 원해서도 아니고 내가 필요해서도 아니고, 주님이 주권적으로 나를 붙잡으셔서 당신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셔서 나를 보내셨다. 주님이 보내셨다. 그 증거가 뭐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치열한 고난의 삶을 인내할수 없었다. 그런 인내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고난을 이기는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교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 일에대한 치열한 성취욕? 그러면 뭐죠. 자기를 사도로 불러주신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대한 사랑과 충성이었습니다. 그것이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당하면서 자기 동족들에게 배신감 느끼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가 교회를 세워서 그 교인들을 자기 젖물려서 길러놓은 이 고린도교회가 자기를 향해서 반기를 들어도 이 사람들에 대해서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참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 견딘 것이 아닙니다. 누구 때문에? 자기를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을 맡은자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그리고 그분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복음의 도를 따라서 살고 그것을 외치는 그것이 고난을 가져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님께대한 사랑과 그 충성의 힘으로 그 고난을 감당하며 자기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세워두셨든지 그 사람에게 맡겨준 일의 종류나, 더더군다나 일의 크기같은 것들은 문제가 안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맡겨주신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맡아서 주님의 참 자녀로서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서 그 길을 걸어가면서 고난을 당하게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제일먼저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종에게는 십자가 있다. 참종에게는 고난이 있다.
두 번째. 그 고난은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40에 감한 매를 5번이나 맞았습니까? 한번 맞았을때에 다시는 맞을짓을 안하면 안맞았을 것 아닙니까. 왜 수없이 옥에 갇혔습니까? 한번 투옥되고 다시 투옥될 똑같은 일을 안했으면 되죠. 강도의 위험, 육로의 위험, 해로의 위험, 먹지못하고 자기못하고 주리고 굶주리고 배고프고 그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심지어는 성령이 내게 증거해서 각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환란과 결박이 내게 기다린다고 하시지만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사명,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함에는 내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 그렇게 생명을 불사했던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습니까? 고난을 감내하면서도 포기할수 없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사명입니다. 고생은 십자가 아닙니다.
옛날에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이 일제시대 때부터 신앙생활 쭉 해오셨으니까 교역자 회의가 끝나면 한국교회의 순교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쭉 갖다놓고 자기가 모르시는 분들은 얘기할수 없지만 아는 사람은 많으니까 그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서 훌륭한 신앙면에 대해서 쭉 이야기 하시는데 어느날은 그래요. “이분이 돌아가시기는 돌아가셨는데 신앙 때문에 죽으셨는지 확신은 없다. 고생은 많이 했는데 평소 그 사람의 신앙생활로 봐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고생을 한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고생을 많이 하는 것 그 자체가 그 사람에게 있어서 공로가 될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거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면서 고생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고생은 피해도 피할수 없는 고생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목회를 한다고칩시다. 제가 잘 아는일이 목회밖에 없으니까 목회를 한다고칩시다. 사례금도 적고 고생을 많이해서 배가 고파요. 힘이들어요. 뭐 그런 목회자들 옛날에 많았잖습니까. 지금도 많습니다. 막 힘이들어요. 어느날 갑자기 그러면 충성하지 말아야지. 그런다고 해서 갑자기 돈이 펑펑들어옵니까? 잘살게됩니까? 그런 것 아니지않습니까.) 그러니까 한 사람이 당하는 그 고통과 주님을 위해서 애쓰고 고생하는 그것의 그 고생이 어떤류의 고생이고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어느부분까지가 진심으로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생인고 고난인가. 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반드시 우리의 인생에대한 결산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자기가 고난을 당하는데 그 고난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한번 매를 맞고도 또 맞아야했고, 또 맞고 죽을뻔했으면서도 또 맞아야했습니다. 굽힐수 없는 어떤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 그 십자가의 고난은 그 고난을 감당하면서라도 성취하여야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 십자가는 빛나는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정말 우리 주위에는 주님을 믿으면서 고생만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죠. 주님을 잘 믿고 어떤 그 신앙안에서 발견한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위해서 분투하면서 주를 위해서 살다가 그 목표를 찾아가노라면 고난을 많이 당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착한 신앙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생도 없느냐하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도 고생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깊이 침체해져서 여러분들이 나태해졌을 때는 신앙의 분명한 초점이나 목표같은 것들이 흐려져요. 또렷해져요? 흐려지잖아요. 그런 목표같은 것들을 거의 잊어버리면서 그냥 흐느적거리면서 살죠. 그런데 그 생활이 행복하고 감미로웠다고 말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괴롭죠. 그렇죠. 주님과함께 동행하고 은혜안에서 주님을 치열하게 섬기면서 사는것보다 오히려 더 괴롭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진짜 우리의 고난이 진정한 의미에서 십자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분명하고 불타는 목표가 있어서 자신의 모든 삶의 방향이 그 한 초점을 향해서 치열하게 치닫고 그리고 그것으로 가지 위해서 거스리는 수많은 난관과 더불어서 싸우면서 고난을 당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십자가에대한 생각, 십자에대한 이런 마음들이 대부분 사라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 타오르는 아주 분명하고 치열한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발견한 그래서 이일을 위해서 내가 살아있고, 여기에 주님이 나를 세우셨기 때문에 내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주님이 이 자리에 나를 세우신 이 일들을 이루고 완수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고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에게 맡겨주신, 그리고 나의 사명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은 바로 이 일에 나를 쓰시려고 여기에 나를 세우셨다. 그런 분명한 사명, 미션, 그것 없이 사는 사람들은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사람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좀더 안락하게 살고 그리고 좀더 다른사람보다. 높은 지위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번 가슴에 깊이 새겨보세요. 아무리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대한 현제적인 체험을 유지하면서 사는 것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나아가는 비결이고 성화의 모든 원동력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잘 생각해보세요. 사명 없이는 십자가도 없습니다. 만약에 한 사람에게 분명히 말해서 한 신자에게 이 엄연한 삶의 현실에서 내가 도저히 회피할수 없고 그리고 이것을 이루지않고는 눈을 감을수 없는 어떤 분명한 삶의 좌표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에대한 현제적인 고난을 제현하면서 살아갈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죠. 만약에 한 사람이 그런 어떤 엄연한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면서 자기가 하나님이 이 사명을 위해서 나를 세우셨고, 그리고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저 십자가를 지고 가야된다.라고 하는 이 삶속에서의 진실하고 분투하는 참여가 없이 모일때마다 십자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눈물을 흘린다면 이것은 하나의 관조적인 상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요법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심리라는 것입니다.
한편의 낭낭한 시나 한곡의 아름다운 노래로도 여러분을 모두 눈물바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우리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매일 질문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이 순간에 오셔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무엇을 이루어주랴? 아마 또 저. 이렇게 갑자기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을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집에 불이났습니다. 뭐 불덩이 속에서 엉겹결에 남편하고 다 도망나오고 아이들하고 도망나왔는데 가많이 보니까 막내 아이 하나가 자고 있는 것을 잊어먹고 나왔습니다. 그 때 주님이 오셔서 “네 소원이 뭐냐?” 그렇게 물으시면 “아, 저 글쎄, 뭐라고할까.”아닙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그 아이를 내게 돌려주십시오.” 이것이 뭐냐하면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한 목표가 없는 삶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도 목표가 없는 삶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목표가 없는데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목표가 있다. 그러면 그것은 자기의 목표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았을 때 자기 인생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그러니까 젊은이들도 보면 뭐 젊은이 아니라. 나이드신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사명이 없으니까 삶의 생기가 없습니다. 사명이 있으면 이겼을 때는 승리에대한 감격이 있고 졌을 때에 피눈물을 뿌리는 분노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아가고, 나아가고, 나아가는 것 아닙니까. 특히 신학생이 되어서 목회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이러한 길은 너무나 많이 걸었기 때문에 이 무릎에 피멍이 든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길로 우리들이 가야된다.라고 말할수 있을 것 아닙니까.
왜? 40에 감한 매를 잘못했으면 한번 맞으면되지 왜 다섯 번이나 맞아야했습니까? 퇴장으로맞고 일주일동안을 깊음속에서 지내고 먹지못하고, 굶주리고, 춥고, 배고프고, 헐벗고, 이것을 그냥 전생애 자체가 마치 이러한 삶의 영역인 것 처럼 사도바울이 고난의 길을 걸어갔던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의 삶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속에 있었던것과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내게 네게 나타난 것은 장차 네게 나타날 일과 네게 나타날 일들에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함이니” 복음의 증인을 삼기 위해서 불어주신 것입니다. 그 치열한 삶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힘들죠. 춤추고 노래할 때 굶주리며 눈물흘립니다. 모두 평안하다고 말할 때 위기를 느끼면서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치죠. 그때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당하셨네
그러면서 자기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요. 부끄러운 것이라. 사도바울이 그 많은 고생보따리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이 여기가 처음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처음입니다. 왜?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정말 주님께 보냄받은 사람이라.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죽은자를 살린 것, 병든자를 일으킨 것, 교회세운 개수, 개척교회 숫자, 성도들의 모인수, 그다음에 무슨 그런일은 없지만 어느 시장으로부터 받은 표창장, 이런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뭐 어디 총재가 어떻고 무슨 이사장 그런 것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왜? 많이 참았으니까” 사명이 있었으니까요.
나는 묻고싶습니다. 여러분 오늘 가슴에 손을얹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주님이 오셔서 딱 한가지만 기도를 들어주신다음에 여러분들을 데려가신다면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누가 이렇게 물어보니까 “살려달라.”그러겠어요. 그러더라고요. 그것말고.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내가 오늘밤에 너를 데려갈터인데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기도제목이 있으면 한가지만 말해라”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저는 한때 일제시대나 공산치하에서 영웅처럼 죽어갔던 이야기들, 청소년시절에 탐독했던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순교자의 심리하고 너무 비슷합니다. 뭐냐면 이런 것입니다. “너희가 나는 죽여도 지하에서 나는 두 눈을 부릎뜨고 이 나라의 광복을 보리라.”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 소원이 뭐냐?” 그러면 “조국광복입니다.”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한참시절에 공산주의자를 데려다가 "너 소원이 뭐냐?“ 그러면 ”적화통일입니다.“ 그랬을 것 아닙니까. ”온 세상이 빨갱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역사를 모두 지배하고 복음으로 점령되어서 하나님의 통치가 오게할 도구로 주님이 세워놓은 사람들이 신자입니다. 우리의 삶이 너무 비전투적입니다. 다시말하면 전투적이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좀 호전적이어야합니다. 도전적이어야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십자가에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생명을 걸고 성취해야할 그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없다면 주님과의 만남은 아직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사십에 감한 매를 맞고, 퇴장을 맞고, 성에서 집어 던짐을 당하고, 그리고 도적의 위험을 만나고, 춥고, 헐벗고, 굶주리고, 자지 못하고,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사십에 감한 매를 맞아본적도 없고, 더군다나 예수 믿는다고 관가에 끌려가서 퇴장을 맞아본적도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굶어본적은 있지만 주님 때문에 굶어본적 별로없죠. 그러면 이제 어떻할까요. 창피해서 고린도후서를 읽을수가 없죠. 여러분 이제 맞으러 갈까요? 굶으러 갈까요? 도적이 오는 곳으로 찾아갈까요? 결론은 그럴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그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삶이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십자가가 사라질것이고, 그리고 뭐 그럴 것이다.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배고플 때에는 신앙이 정결한데 부요해지고 여유로와지니까 그다음에 신앙이 나태해진다. 부요한 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나태하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속에 있는 부패가 그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그것 자체가 그를 정결하게 할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가난과 굶주림, 배고품, 시련, 고난속에서 그것이 그를 성결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그를 정결하게 만든것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신앙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힘들면 더 많이 범죄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지 환경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일제시대 때에 투옥당하고 순교당했던 사진을 이렇게 보면서 상당수는 벌써 다 돌아가셨습니다만은 보면서 명상에 잠겼습니다. 뭐냐하면 이제는 예수 믿을래 순교할래? 하고 목에 칼들여대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으면 직장에서 쫓아내겠다.라고 하는 그런 협박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집안식구들을 결별해야하는 그런 상황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흑백이 아주 분명할 때에 사실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태도를 정하는 것이 얼마나 쉬울까? 배교자 아니면 참 신자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목에 칼들여대는 사람도 없고 신앙적인 신념을 따라서 우리나라와 같이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는 그런 신앙을 빌미로해서 사도바울이 당한 이런식의 고난, 일제시대때 선조들의 그런 고난의 맥락에서 놓고보면 우리에게 적용이 잘 안됩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뭐냐하면 지금도 국민소득이 만불가까이 되고 어디든지 먹을것이 있고 하루가서 품을팔면 일주일은 넉넉히 먹고 사는 이런 시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명이 있어서 그 사명을 따라서 살아갈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매맞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간금되어요. 그들은 지금도 헐벗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자지못합니다. 투옥되지는 않아도 순간순간 다가오는 고뇌속에서 좌절을 느끼고, 절망의 문턱까지 갑니다. 먹을것이 없어서 굶주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주님의 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의 막중함 때문에 고뇌하며 아파하는 끼니를 잇지못할수 있습니다. 먹을 것은 있지만 굶주리면서 기도해야될 때도 있고, 자기못하고 철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그런 사명자의 정신, 그것을 따라서 사는 것이 바로 이런식의 이런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주님의 기대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느시대든지 환경에 떠밀려서 참신자가 되거나 거짓신자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배를 띄우고 있는 물에 불과했고 그 위를 떠 다니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사십에 감한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퇴장으로 맞고 춥고, 헐벗고, 배고프고, 굶주리고 하는 이런 모든 난관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포기할수 없었던 사명, 그것을 붙들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굶지않았어도 그리고 사십에 감한 매 두들겨 맞다가 죽음직전까지 가지 않았어도 이런 평탄한 시대를 주님을 위해서 진실하게 살며, 남들이 먹고 웃고 떠들고 마실 때, 눈물 흘리고, 안락한 길이 있는데도 그 길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서 신음하고 아파했던 가슴알이 하면서 이 신자의 길, 사명자로서의 이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받을 상급은 하늘에 예비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은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렵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정말 너희에게 십자가라는 것이 있느냐.?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정말 인내하면서 가고 있느냐? 그리고 정말 너희의 인생에 있어서 나에대한 은혜의 감격 때문에 세운 목표가 있느냐?”
제가 아는 성도님 한분은 지금부터 벌써 10년이 넘었죠. 한달에 40만원씩 선교헌금을 했습니다. 그분은 부자도 아니고 조그마한 제가 옛날에 한번 그 집에 갔었는데 다 이렇게 쓰러져가는 골목에 한 열명들어가면 꽉찰 정도의 작은 가게에서 보신탕을 끓여파는 그런 아줌마였습니다. 사십만원이면 제가 보기에 그 당시에 엄청나게 큰 돈이었습니다. 10년이 넘었으니까 지금으로 따지자면 한 200만원정도로 계산해야될 정도로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하고있나? 그 돈을 많이 버나? 그랬더니 그 아줌마 이야기는 간단했습니다. 제가 배운 것이 있습니까? 남처럼 말을 잘합니까? 자기는 이렇게 해서 한달에 40만원 내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훌륭한 그 사람의 삶의 목표가 될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배우지도 못했고 말도 못하고 더군다나 먼 나라에 가서 복음전할 처지도 않되니까, 내가 이것을 밥벌어먹기 위해서 가게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선교헌금 하기 위해서 내가 보신탕을 끓여서 판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면 정말 사명을 가지라고 부르는 인생의 목표들이 널려져있습니다. 너무너무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런 추수할 일군들, 주님을 위해서 사명을 가지고 당신을 섬길, 그런 사람들을 너무나 간절히 부르고 계십니다.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 첫째는 절대적으로 이 세상에 주를 위해서 섬길 일들이 세상이 악해질수록 너무나 많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뭐냐하면 주님을 믿기는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살면서 고난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마음은 주님이 오셔서 목자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시면서 마음에 민망히 여기시던 그 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명이라는 것은 바로 그분의 그 마음을 물려받아서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러, 어떤 사람은 보신탕 집이라도 해서 선교헌금이라도 하러, 어떤 사람은 직장에 나아가서 의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 할줄아는 것은 공부밖에 없으니까 그것 열심히 공부해서 뭔가 이 사회에 주님을 위해서 보탬이 되는 도구가 되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삶의 영역들이 다 주님을 위한 진실한 사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은혜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주님의 이 생애자체가 바로 이러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생애임을 기억하면서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은혜,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이 많은 사랑들을 사명을 향한 부르심이라고 느끼면서 그러면서 주님 앞에 자기에게 주님을 섬길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그리고 절대적인 크기에 있어서는 작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 은혜받은 자기를 거기에 세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러면서 주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며 살려고 하는 사람의 그 고난, 주님이 보시기에 너무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말할수 없이 소중한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갖게끔 만들어주신 아주 보배로운 특권입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빼앗기지 말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명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무엇을 보면 그것을 알수있느냐하면 교회에서 은혜를 받기전에는 바쁠것이 없었는데 은혜받고 사명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 24시간밖에 없는 것이 원통할 정도로 일이 많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다 나누어 지면서 함께 갈 수 있는 일인데 응답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힘에 넘치도록 하나님이 당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 둘, 셋, 짊어지어 주셔서 주님을 위해서 살게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아마 선교지에 가기전에는 사도바울이 당한 것같은 이런 원색적인 고난은 당하지 못할지모릅니다. 아마 우리는 일평생, 사십에 감한 매, 맞아보지 못하고 주님께 갈것입니다. 퇴장을 맞지 못하고 주님께 갈것이고 주님 때문에 춥고 배고프 굶주리지 못해본채 주님께 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도 눈을 들어서 우리의 주변을 바라보면 십자가는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도처에 십자가가 있어서 자기를 질 사람들을 부르고 있고, 도처에 그 십자가를 주님이 기대하는 신자들이지지 않기 때문에 죽어가는 쓰러져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은혜를 받은 여러분만큼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 은혜를 누리게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명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면서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해서 그런 은혜를 주셨습니다. 잘 감당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내하셨던 것처럼 사도바울이 잘 참았던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이 맡겨주신 그 십자가를 지고 잘 인내하고 참아서 주님의 의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53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부활하시고 난 후에 승천하셔서 자기가 이룬 그 구속의 사역을 영광가운데 바라보시는 장면에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쓰고, 다른 사람보다도 편안한 삶을 살면서 지나갔던 날들은 우리의 육체의 쇠함과함께 모두 사라질 것이요. 우리의 욕심을 따라서 살았던 많은 말들은 주님곁에서서 살아온 우리의 삶의 족적들을 바라볼때에 그것은 우리에게 고개를 들수 없는 부끄러운 순간들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목표가 있어서 주님을 위해 살다가 당하게된 많은 고통,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내게주신 목표를 따라 살기 위해서 피할수 없었던 그 수많은 갈등, 사람들로부터 받는 원망이나 혹은 심지어는 그 사람들과 깨뜨려졌던 관계들까지도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든지 잘 지낼수 있는 사람들을 작별해야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는 기억못하지만 주님의 마음속에는 모두 주님을 위해서 바친 십자가의 헌신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언제든지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보석과 같이 값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돌맹이와 같은 즐거움들을 많이 잃어버리고 그리고 얻을수 있는 수많은 자갈과 같은 기회들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명을 따라서 살아가며 그 십자가를 지고 이기는 사람들은 정말 복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6.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1:29)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은혜를 생명과 같아서 은혜에 넘치면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속한 사람처럼 살아가고 은혜가 떨어지면 정말 사람의 본성이 다 드러나고 주님을 믿기전에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숨길수 없이 다 드러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할수만 있으면 주님 앞에 은혜받기를 원하고 또 그 은혜받은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기쁨에찬 삶을 살아가게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늘 은혜받기를 원하고 또 그 은혜는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모든 성도들에게 간절히 사모하는 기도의 제목이됩니다. 기도할때마다 우리들이 빼놓지않은 기도가 아마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은혜 안에서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내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많이 은혜를 구하고 또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일생을 살면서 돈많이 벌고 건강하게 살던 것은 간증의 제목이 안되어도 은혜를 많이 받은 것은 언제나 간증의 제목이됩니다. 사업에 실패하거나 혹은 가정이 깨뜨려지거나, 혹은 질병에 시달리거나 혹은 부끄러운일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결국 마지막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기만했으면 그 은혜받은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도 서슴없이 밝히곤합니다. 그만큼 이 은혜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 정말 소중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고 또 우리가 사모해야할 바라는 것입니다. 한 신자의 심령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재는 방법이 많이있지만 그중에 한가지가 뭐냐하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 사람이 아무리 짐승과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라는 애타는 은혜에대한 갈망이 있으면 그는 잠시후에 그 짐승과같은 삶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성자와 방불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주님의 은혜에대한 갈망과 사모함이 없다고 할것같으면 얼마후 그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매우나쁜 사람으로 전락할것이며 그렇게 안된다고 할것같으면 잘 길들여진 짐승관 같은 삶을 살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삶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한다.라고 하는 것은 곧 주님 자신을 갈망하는 것고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은혜에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교회가 세워지고나서 신앙생활 하면서 성도들에게 가장 많이 애청된 설교시리즈 하나가 있는데 “하나님을 찾으라.”라고 하는 시리즈였습니다. 뭐초창기에 이루어진 설교입니다. 그 중에 몇편은 “하나님의 백성은 불꽃처럼 살아야한다.“는 그 책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은 거기에서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권하는바입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주 간절하게 찾는 것이 아닌삶은 하나님을 버린삶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과 같이 남긴 교훈속에서 뭐라고했느냐하면 “너는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으라.”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주님 자신을 추구한다.라는 것이 무슨뜻입니까? 하나님 자신을 추구한다.라는 말이 무슨의미입니까? 그것이 의미하는바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 자신을 찾는다. 하나님을 추구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찾습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추구합니까. 하나님을 추구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니까. 자기가 하나님 처럼 되겠다는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나님을 찾는다. “찾는다.”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히브리말로 “다라쉬”인데 열심히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찾는다.“ 무슨뜻입니까? “하나님을 추구한다.“ 무슨뜻입니까? “하나님을 구한다.“ 무슨뜻입니까? 뭐 하나님보고 어떡하라는 것입니까. 아주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쉬운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받기를 원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에대한 갈망을 가지고 그분과의 깊은 친교속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고 또한편으로는 그분의 성품을 자신의 온삶에서 자신의 온성품속에 본받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분이 가지고 있는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마음이 자신의 마음속에 담겨지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분이 나를 향해서 살기를 원하시는 그 삶을 그분이 안타까워하시는 것같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 자신을 추구한다.라고 할 때에 빼놓을수 없는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 자신에대한 갈망입니다. 그래서 요즘 무슨 비젼을 이야기하고, 꿈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뭐냐하면 주님을 만나고 자신의 모든 꿈이 무너져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꾸는 모든꿈은 허황된 자기 육신의 소원입니다. 주님을 믿고나서 자기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을해보면서 이것이 마음에 맞고 이것을 하면 좋겠다. 생각이 되어서 취향에 끌려서 하는 삶은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암시적인 비젼이지 성경에서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꿈을 가졌던 사람들은 뭐냐하면 그 주님을 만나고 자기 자신이 꾸고있는 모든 꿈들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고 그것이 모두 무너져본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꿈이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찾고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에대한 열망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성취의 욕구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꿈이죠. 물론 그 꿈이 돈많이 벌어서 떵떵거리고 살다가 호강하다가 죽어버려야되겠다. 그런 꿈만 자기꿈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순간순간 제 마음속에 계속 묵상하게 되는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신념과 신앙입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신념을 갖지않도록 조심하자. 신앙을 갖도록 노력해야지 신념을 가지려고 하면 안됩니다. 신념은 주님을 만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주님을 만나지 않고 가질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념과 신앙. 이런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간절히 찾는다. 하나님 자신을 추구한다. 라고 할 때에 그 모든 꿈의 핵심부에는 하나님과의 친교에대한 갈망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갈망이 없이 자기가 하고자하는 어떤 일에 대한 인생의 목표에 대해서 불붙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선하고 훌륭한 목표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자신을 향한 추구하고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향한 추구의 핵심이 하나님과의 친교라고 할것같으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뭐냐하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속으로 들어가면 주님과의 아름다운 친교가 이루어집니다. 그 은혜에대한 갈망이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은혜는 객관적인 은혜가 아니라. 주관적인 은혜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구원받은 신자속에 내제하는 이 풍부한 주님과의 교통, 그 속에서 오는 이 은혜, 이런 것들이 신자의 삶에 있어서 너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 은혜에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몇일씩 금식하고 기도원에를 가고, 철야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그렇게 갈망하죠. 그러니까 은혜가 다 소진된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곤고한지를 맛본 사람들은 주님과의 평화속에서 이 은혜를 입으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복된지를 깨닫게됩니다.
그런데 이러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뭐냐하면 이 은혜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은혜가 내게 오면 먼저 내가 좋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내 자신이 기뻐요. 그리고 은혜를 받으면 내 자신이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나면 즉각적으로 심령이 곤고하고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내게 올때에 제일먼저 덕을보는 사람이 내 자신입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물론 가족들도 덕을보죠. 가족들도 덕을봅니다. 그래서 다른 것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래도 마음편하게 집에서 밥이라도 따뜻하게 얻어먹고 가정같은 집에 매일 들어가서 행복하게 매일 살고싶으면 부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래 부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집에와서 잘 참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잘 인내하고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인이 그나마 편안하게 살려면 남편이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남편을 자기뜻대로해서 자기가 좀 행복해볼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 안되는거 알잖아요. 대판거리 싸워서 남편을 꺾을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요즘은 “맞사모”라는 모임이 있어서 “맞고사는 남편들의 모임“이라는 그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만은 남편들의 말에 의하면 요즘 부임들의 구타가 심각한 수준에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막때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눌려서 눌릴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남편이 하나님을 믿고 깊이 은혜를 받으면 그러면 아내의 부족한 부분도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이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은혜를 받으면 다른 사람이 덕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시간이 좀 걸립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자신이 고통을 지불해야 되기 때문에 먼저 은혜가 오고난 다음에 시간이 걸려서 그런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제일먼저 효과를 보는 사람은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한번만 잘 드리고 주님 만나고 가면 말이죠. 죽어버리고 싶었던 세상속에서 정말 나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어디있을까?
주님의 뜻대로
나 항상 살리라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만족을위한 것이라는쪽으로 자꾸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그 은혜는 우리게에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은혜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으며 그리고 내가 은혜를 받았으면 이것은 바로 그런 계획을 따라서 살기위해서 주님이 내게 당신의 필요에의해서 내게주신 은혜다. 그런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더더욱이 그런 생각을 잘안하고 사는 이유가 크게 두가지때문인데 첫째는 무엇때문이냐하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도 그 은혜를 받는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면서 살지못하기 때문에 은혜를 받아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자신의 삶에대한 어떤 계획, 그리고 그 삶에대한 적용. 이런데까지 안가는 것입니다. 그래 쉽게 이야기하면 냄비처럼 후루룩 끌었다가 확 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요즘 공부하고 있는 “육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교리가 하나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뭐냐하면 한 사람의 신자가 효과적으로 성화되기 위해서는 간헌적인 은혜를 가지고는 안된다. 그냥 막 살아가다 어느날 와서 “으악” 그리고 다 뒤집어져서 눈물콧물 쏟고 그리고 가서는 덜렁덜렁 한 3,4년 살다가 또 부흥회때 “나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하고 펑펑울면 절대 성화안됩니다. 성화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그런식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은혜안에 지속적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러니까 생각해보세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죄죽임의 교리에서도 그 교리를 제가 터득하면서 굉장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뭐냐면 어느 한순간에 우리 기도하다보면 그 기도가 너무애절해서 가슴이 찢어지는것처럼 자신이 확 이렇게 쏟아지는 것 같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이 내 기도를 후후훅하고 빨아들이고 계시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때있죠. 그것 가지고 죄가 죽지를 않는다는 것이 죄죽임의 교리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어떤 생각이 드느냐하면 이 애절한 진심을 주님이 다 들으셨기 때문에 반드시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성화의 문제에 관한한 그런 기도를 가끔드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화되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화에 있어서 늘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이 뭐냐하면 자기 깨어짐이 있는 생활이라고 하는데 “목사님 저도 자기깨어지짐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성화가 안될까요?” 그래서 “아, 그러냐? 자기 깨어짐이 있느냐?” “그럼요. 자주 깨어짐니다.” ‘얼마나 자주깨어지냐?“ ”연초에 한번씩 깨어짐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그것은 자기 깨어짐이 거의 없는거나 거의 비슷합니다. 그 정도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언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매일 그러니까 늘 일상적으로 자기 깨어짐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나는 왜 이틀씩이나 되도록 이렇게 깨어지는 마음이 없을까? 왜 삼일이나 지났는데 자기깨어짐이 없을까?“ 이렇게 일상화 되어져야합니다. ”아, 목사님 그러면 자기깨어짐도 그게 습관화되는게 아닙니까?“ 자기깨어짐에는 습관화가 없습니다. 만약에 습관화가 된다면 자기가 안깨어지지 ”아니 벌써 9시네 아이고 깨어질 시간이네“ 그것이 깨어지냐구요. ”아이고 시간맞춰서 깨져야되는데. 아이고 오늘은 바뿌니까 10분만 깨지고 가자.“ 그것이 깨지냐구요. 습관적인 참회가 있을수 있습니까? 습관적인 종교적 감상주의는 있을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습관적인 깨어짐, 형식적인 진실한 참회. 이것은 말도안됩니다. 있을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각으로 이루어진 동그라미 이런 표현하고 똑같습니다. 형식적인 진실한 참회가 존재하겠습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육적 그리스도인과 신령한 그리스도인에서도 얘기하는 것이 뭐냐하면 가끔 와르르 깨뜨려짐, 과격한 깨뜨려짐이 이따금씩 한번 일어나는 사람은 이따금씩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간헐적으로 경험되는 은혜를 가지고는 그가 효과적으로 성화될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 없는것보다야 낫겠죠. 그렇지만 그가 효과적으로 성화될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합니까? 격렬하게 부서지는 체험이 없어도 은혜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틀렸습니다. 주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놀랍습니다.” 기쁜일이 생기면 “주님 감사합니다. 오, 주님” 너무 아프면 베개를 끌어안고 “주님 오늘은 너무 아파요.” 이렇게 은혜 안에 사는 삶을 통해서 그가 신령한 그리스도인, 진실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참된 성화된 신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지속적이지가 않고 잠깐 경험하다 사라지기 때문에 이제 이 은혜를 항상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만족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첫번째이고
두 번째가 뭐냐하면 이분법적인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은 삶의 지평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한 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이야기할 때에 그 신앙속에는 반드시 두가지가 함께 내제합니다. 하나는 초월적인 성격과 역사적인 성격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초월적인 성격은 뭐냐하면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 세상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들자면 타계적인 것입니다. 초월적인 것,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하면 우리가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든지. 구원받은 우리들의 이름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다든지. 죽은후에 우리가 부활할것이라든지. 죽고나면 우리들을 주님의 보좌에서 심판을 받게되고 그 때 우리들이 많은 상급을 받게될 것이라든지)이런 신앙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초월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나 또 초월적인 성격말고 역사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이 시점에서 여기에 태어나게 하셔서 그래서 내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나는 애국자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매국노는 더더욱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국수주의자는 아닙니다. 나는 한국물건 쓰다가 품질이 너무 나쁘고 그리고 비양심적으로 물건을 만들면 나는 오래전서부터 무역 개방을 해야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업들이 양심적으로 기업을 하지않는 사람들은 여러개 업체가 도산을 해야된다고 내가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험한 세상에서 물건을 팔아서 남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고 활짝 열려진 세계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야된다고 그런 가운데 나라가 부강해지고 그런 것이 정상이라고 나는 그렇게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국산품을 애용하자.” 그럴 때 나는 그 말에 대해서 그렇게 별로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억수로 외제물건을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국수적인 성격은 지금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개방되어서 치열하게 경쟁해야합니다. 그리고 물건이 종류가 같은데 싼 나라에서 만들어서 들어오면 그러면 그것을 팔아서 그 약소국가들이 같이 공평하게 잘살게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나라가 경제적으로 강하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국수적인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그런 국수주의적인 애국이 역사속에서 나라를 지켜준 예는 없습니다. 독일을 보세요. 일본을 보세요. 그런식의 애국심을 고취시켜서 마지막에 나라가 간 것이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두 그 나라들이 그렇게 애국을했는데 부끄러운 나라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는 그런 애국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한번도 태어나서 외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후회해본적도 없고, 그리고 우리 애들도 외국에 나가서 살게해야되겠다.라는 생각을 해본적도 없고,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떨어지면 즉시 향수병에 걸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물론 남들이야. “자기가 영어 못하니까. 그렇지” 물론 그런것도 좀 있겠죠. 그렇지만 다는 아닙니다. 내가 중국에 가서 새우하고 코카콜라 그려서 저녁도 얻어먹은 사람인데 배가 고프니까 중국에 가서 말은 안통하니까 한문으로 작문해서 새우하고 코카콜라 빨대 그려서 그것도 다 먹은 사람인데 나 어디가서든지 서바이벌 할수 있거든요. 그런데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걸로 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 혼란한 시대에 이 한국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 그것을 나는 실수라고 생각해본적 없습니다. 주님이 내가 여기에 태어난 것이 가장 좋아서 여기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미국이 잘살고 못살고 하는 일은 나는 관심이 적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것이냐? 뭐 내가 고민을 해봐야 도움이 별로 안되지만 그러나 걱정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태어났으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잘 살았느냐 못살았느냐 하는 것은 결국은 그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산 족적을 기원전 200년의 역사에 기록하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기원후 3000년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거기 1900년 중반에 태어나서 2000년 초반이나 중반까지 살다죽은 그 속에 기록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이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서 무슨 통일을 이루고 뭐 나 한사람 때문에 국민소득이 만불이었는데 갑자기 3만불이 된다든지, 나 한사람 때문에 제주도와 부산이 합쳐져서 무슨 다리가 놓이고 섬들이 없어지고 땅이 넓혀졌다든지 그런 일들을 이룰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 몇 명이나되겠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역사속에서 주님이 쓰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이 쓰실일입니다. 대통령으로 쓰실 사람도 있고 동장도 할사람 있고 동장도 못해서 반장도 안시켜줘서 반원이 되어서 반상회에 참석할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큰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리어카 빵구나 떼우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똥푸는 사람도 있을수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자기를 하나님이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 한시대에 살게하신 무대입니다. 거기에다가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혜를 가지고 발자취로 그 속에 주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의의길을 걸어가면서 자기의 족족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충성되게 살았느냐? 안살았느냐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양쪽으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초월적 신앙은 그딴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뭐 수틀리게하면 대모하고 화염병도 집어던지고 필요하면 요인도 남치하고, 안되면 암살도 하고,” 그것이 이 초월적인 신앙은 사라지고 신앙의 역사적인 성품만 강조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있는 일반적인 요류는 뭐냐하면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아, 세상은 원래 그런건데. 세상은 잠시있다가 갈건데. 은혜받으면 되지.”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지.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위한 은혜냐는 것입니다. 삶의 지평으로 적용되지 않은 은혜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역사속으로 스며들어서 기록되지안는 충성된삶이 동반되지않은 교회가 받은 영권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거대한 종교권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부패합니다. 그 사람이 무화권력이든 정치권력이든 종교권력이든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치열하고 진실한 삶의 현장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부패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권한은 부패합니다.
그러니까 은혜라고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만족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효과는 제일먼저 자신의 만족으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늘 묻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은혜받아서 뭐할래?” 아주 더 노골적인 질문입니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그러는데 주님이 너에게 은혜주셔서 덕볼일이 뭐가있겠느냐?” 그것을 여기에서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영어성경에는 ( ? )단어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누구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 유익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주어진 너희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랍어 성경에는 수동태로나옵니다. 은혜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너희에게 은혜가 주어졌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신자가 그리스도를 위한다. “그리스도를 위한다.” “위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우리를 위한 생애였다.라고 표현할 때 그 마지막 결국이 무엇입니까?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위하여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가치를 “나는 나라를 위한다.” 무슨뜻이냐하면 자기 자신의 가치보다 나라를 훨씬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 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가 주어진 것은” 그 은혜는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은혜가 목적하고 있는바는 여러분 자신의 스스로의 만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한번 이렇게 받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계속 유지하며 사는 일이 굉장히 힘듭니다. 경험해본사람은 모두 알지만 그렇죠. 올때에는 선명하게 어느 시점에서 강력한 회개와함께, 강력한 은혜의 경험과함께 하나님의 그 은혜가 강력한 경험과함께 그 은혜가 오는데 빠져나갈 때에는 강력한 경험과함께 샥하고 빠져나가는 것은 아니지않습니까. 그렇죠. 11시 59분까지 은혜충만했는데 0시가 딱 되면서 샥빠져나가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59분까지 냉냉했던 사람이 0시에 은혜받는수는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는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 은혜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됩니다.
말은 얼마나 쉬워요. “왜 간헐적으로 은혜를 받느냐고,” “은혜좋지않아?” “좋지.” “그런데 왜 그것을 간헐적으로 받냐? 계속받아 계속, 그리고 아니 간헐적으로 받기 위해서는 은혜를 버려야되는데 아니 그렇게 받기 어려운데 왜버려?‘ 한번 받았으면 꽉붙들고 있어” 그런데 그것이 신기하게 공기를 잡는것과 같아서 이것이 뭐 어떻게 쇠고랑으로 붙들어 맬수 있는것도 아니고 있는가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치 손으로 물을 떠올리려는 것처럼 스스르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어느날 보면 다시 원위치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내 안에 안계시는구나” 느끼는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때문입니까? 그것이 결국은 은혜에대한 자기만족적인 신앙의 결국이 그런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유지하는 비결이 뭐냐? 그랬더니 열심히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눠주어서 보니까. “개인기도에 열열했는가?” “아, 열열히 기도해야되는구나” 막 열열히 기도하는데 목만 아파요. 열열히가 안되요.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경건생활을 열심히하면 은혜까 유지된다. 그러는데 그것은 반만 맞는이야기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무슨이야기냐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분명한 삶의 목표, 매일매일의 시간을 그분께 드리면서 나의 삶을 통해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게 해드려야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순간순간의 삶에 있어서 주님의 주제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위하여 사는 실제적인 삶이 동반되지않으면 개인경건이 왜 열열해집니까? 내가 늘 말씀드리지않습니까. 개으르고 나태하게 주님을 위해서 초점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열열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말했죠. 나보고 “열열히 기도하고 싶은데 어떻게하면 좋습니까?” 그래서 제가 “열열히 사냐?” 열열히 안사는데 뭐 열열한 기도가 왜 필요하느냐? 그냥 허랑방탕하게 살면 그저 허랑방탕한 생각이 필요한 것이지 열열한 왜 필요합니까. 열열하게 기도하면 허랑방탕한 삶이 죽는데 이 삶하고 기도하고 같이가는 것입니다. 결코 이것이 따로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계속 한 신자가 은혜안에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위대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삶이면서도 그것은 위대한 삶입니다. 왜? 그는 자신의 삶의 전영적에서 전방위적으로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느정도로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먹으나 마시나, 입으나 벗으나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은혜안에 사는 것입니다. “아, 은혜안에 살아야지. 매일 한번씩 깨지면 산다며 9시를 깨지는 시간으로 할까?” 그런다고 해서 은혜안에 살아지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매일 은혜받으면 매일 은혜안에 살수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70년대 교인들이거든요. 그래서 매일 보따리 싸들고 이 기도원 저 기도원 용한 부흥강사 찾아다녔지않습니까. 그래서 뭐가 되었습니다. 되기는 뭐가되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무엇하러 기도원에 올라가서 6개월 7개월씩 있어요. 은혜받았으면 빨리 내려와서 열심히 살아야지
청년들에게 늘 얘기하잖아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교회에 나오지 마세요. 내가 제일 속상한 것이 우리 교회는 그런 청년들 거의 없습니다. 옛날에 교회생활 할 때, 은혜만 받으면 공부를 안하는 것입니다. 대학생들이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코가 꿰었으니까 할수없이 가지만 대학생들은 오죽했으면 대학생이라 그러겠습니까. 그렇죠. 공부 안하는 대학생입니다. 공부안해요. 그래서 은혜받으면 교회 느티나무 아래서 여름에 매일 슬리퍼 끌고 앉아서 예수님찬양 무슨 주저리 주저리 유행가 같은 복음송 그것 형제자매들 모여 앉아서 콜라사다 먹고 사이다 사다먹고 그것 부르고 하루종일 그것은 찬양아닙니다. 노래지. 나는 그런 것 보면 아주 심령이 상합니다. 뭐 자기네는 은혜롭게 찬양한다. 그러는데 찬양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가서 살아야지. 그리고나서 성적표보면 바닥을 헤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것처럼 예수믿기 전에는 공부잘했는데, 그런 바보가 어디있습니까. 주님을 믿었으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말이죠. 직장 나가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믿고 은혜받고나면 직장생활을 성실히 안합니다. 승진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승진하는 사람은 자기가 못한 것은 청렴하게 살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이 승진한 것은 모두 김밥쌓기 때문에 승진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높은 사람에게 김밥쌀 때 이렇게 싸지않습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은혜받았으면 요셉과 같이 살아야지.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위해요. 예배당에서만 위하지말고 예배시간에만 위하지 말고 눈물 펑펑흘릴 때는 주님 혼자 사랑하는 것 같이 사하라 사막같은 이 벌판의 세상에서 한번 주님을 위해보세요. 여기에서 주님을 위한 것은 쉽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면 죽이려고 이빨을 갈고 칼을 들고 있는 이 세상앞에서 삶으로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이중장부 쓰라고 강요하는 그 직장에서 그런 노래를 불러보세요. 탈세와 뇌물이 공공연히 횡령하는 곳에서 왕따를 당하면서도 외롭게 “내가 이 직장의 마지막 ( ? ) 나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끝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까지 그 선을 넘어가면 이 세상은 아무 희망이 없고 누가 이 어두운 밤바다에 등대가 될것인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발자국을 써가는 것, 이것이 주님위하는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예수믿는 사람들이 무능해요. 은혜받으면 무능위에 게으름이 첨가되요. 일하다가 팽개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서 행사있다는 것입니다. 일하라그러면 책상 밑에다 놓고 주보나 그리고 앉아있고 왜그러냐 그러니까 “다음주에 주보써야된데요.” 그것을 왜 거기에서 그려요. 집에가서 그리지. 그리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주 선명하고 뚜렷한 정신을 가지고 주님이 내게주신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가지고 주님이 내게 그런 은혜를 주신 것은 주님을 위해서 살라고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주님을 위하는 삶은 치열한 이 삶의 현장에서 기록되어야할 내 생애의 기록이다.
마지막에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그 때에 우리를 상을 주실 때 무엇을 보고 주시겠습니까? “너 1등, 왜요? 아니 네가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냐 뒤집어진 것이 얼마나 많고 또 네가 흘린 눈물과 콧물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말수가 많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주님이 상급을 주시겠습니까? 마지막때에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혜가 오늘날은 우리에게 간증거리가 되고 있지만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면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깊이 만난 것은 모두 빚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빚, 부채가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은혜받은 사람은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다섯달란트 맡은 삶을 살아야되지않겠습니까. 그런데 두달란트밖에 못살고 세달란트밖에 못살고 한달란트밖에 못살면 되겠습니까. 악하고 게으른종이지.
많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보통삶을 가지고는 만족하실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해서 무슨 사고를 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이.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래요. “예수죽인 것을 내 몸에 짊어지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뼈를 찌르는 말입니까. 솔직히 예수님이 바울 한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아니 바울이 그렇게 자기혼자서 예수님을 죽인것처럼 그럴수는 없쟎아요. 나 위해서도 돌아가셨는데 자기혼자 다 짊어질려고 그러느냐?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주님께로부터 자기가 받은 그 은혜가 너무 크고 독점적이기 때문에. 다른사람들 주님이 사랑하셨어도 그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고난을 당하신 것, 그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신 모든 것이 자기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가슴에 새겨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도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큰교회의 목회자가 되고싶은 그런 욕망도 없습니다. 엊그제 저는 저 시골에 내려가서 한 시간 특강을하고 올라왔는데 정말 시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습니다. 제가 맨처음에 주님 만나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눈물흘리면서 혼자 서원할 때에 꿈꾸런 목회지가 이런 곳이었는데 한 20여명 모여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런것도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마음속에 남는 부담이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나는 평범하게 살수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왜?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그래서 가끔 특별한 헌신의 삶을 살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한줄기 불꽃처럼 어둠속을 비쳤던 사람들의 그 치열한 생애는 나는 비록 그렇게 살지못하지만 항상 가슴을 울립니다. 언제나 나 자신의 이 껍질을 깨고 나 자신의 죄악을 넘어서서 후회없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리신 우리 주님처럼 주님의 생애가 무슨 유별난 생애였습니까? 그렇지않쟎아요. 큰 권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신것도 아니었고 온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황제의 삶을 사신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러나 그분의 생애는 평범한 생애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특별히 자기 자신을 드린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런데 세월은 자꾸가는데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없습니다. 산것같은 날들은 불순한 동기를 다 빼버리면 주님앞에 기록될 것이 별로없습니다. 결국이렇게 살다가 죽나 그러면 아주 견디기힘든 좌절감 같은 것들이 종종찾아옵니다. 왜? 항상 주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 항상 다르게 생각하기만하면 이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빚더미 위에 앉은 것입니다. “왜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구원해주셔서 주님 자녀삼으셨을까? 그리고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이 어두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의 지혜로는 어리석기 짝이없는 이 복음의 진실성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만들어주셨을까? 그리고 신앙의 참된 비밀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그리고 핑계될수 없도록 풍부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어두움을 버리고 빛가운데 살게 만들어주셨는데” 이 모든 것이 빚이됩니다.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아서 주님이 받으신 영광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많이 변화되고 깨뜨려지고 주의 은혜로 여러분들의 다듬어지고 변화되고 성화되고 깨뜨려지는 과정을 통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만큼 여러분들의 삶이 주님을 위한 삶이었습니까? 오히려 주님의 은혜가 커다란 힘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일에 추진력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살기에 더 담대해진,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어디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 고백하고 있습니까? 옥속에서입니다. 복음을 인하여 갇히고 그리고 순교의 시간을 기다리는 죄수의 몸으로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주신 것이란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하심이라“ 믿는 것은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렇죠. 믿습니다라고 말하면 무슨 힘이듭니까. 또 믿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은 하나님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지금이나 그 때나 똑같이 주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여기에서는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단지 확신한다.라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은혜를 받을뿐 아무것도 하지않는 사람, 은혜자체를 엔조이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을 아주 쉬운말로 약간자조적으로 ”믿을뿐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이 없는데 그 믿음이 진실된 믿음이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야고보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 그 자체가 죽은믿음입니다. 죽은믿음이라는 얘기는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누어질수 없는데 사도는 그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신자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그가 삶으로서 주님을 위하지 않는다고 할것같으면 그 은혜는 무엇이 보족한 은혜가 아니라. 진실한 은혜일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 힘들어요.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전하는 쉽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노예처럼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희생하고 싶고 그를 이해서 뭔가 해주고 싶고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선물하고 싶은데 그것을 할수 없을 때 그것은 고통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저도 가난하던 시절에 그런일을 경험한적이 있는데 내가 목회의 길에서서 굶느니 먹느니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참을수 있습니다. 이미 예상한 일이니까. 그러나 가장 가슴아픈 것은 뭐냐하면 내가 가난하게 살기 때문에 부모를 마땅히 섬길수 없을 때, 동기간들에게 의무를 다할수 없을 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결핍을 강요할 수밖에 없을 때, 그 때에 고통스럽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고통입니다. 그것이 가장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이 진실하고 그리고 그 믿음이 결국 그리스도 예수께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할것같으면 믿을뿐 주님을 위해서 살지않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 현실적으로 그런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뭐라그랬느냐하면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하려 하심이라” 결국은 뭐냐하면 주님에게 은혜를 받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목표가 있고 그 목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많은 고통과 견디기힘든 통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래서 제가 늘 이야기하는데 은혜받은 사람의 삶이 행복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싸움이 너희에게도 있고 내 안에도 있다. 이제도 너희가 본바요. 듣는바라.“ 그것을 사도가 경험한 것입니다. 다만 그 행복이라는 것은 이 세상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할 때는 고통과 행복이 양립할수 없는데 이 거룩한 은혜의 세계에서는 고통과 신령한 기쁨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안아픈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경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세속적인 의미에서 행복한 삶을 살수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사탕발림에 지나지않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다.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모두 가시밭길 같은 인생길을 걸어갔습니다. 부자였는데도 주님을 위해서 가난해졌고, 권력이 많은데도 주님을 위해서 노예처럼 살았고, 호위호식하며 영광을 받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서 스스로 이름없이 빛도 없이 생애를 택했습니다. 얼마든지 넓은길을 걸어갈수 있는데 주님을 진실되게 믿은 모든 사람들, 주님께 은혜를 받았던 모든 사람들은 좁고 협착한 길로 걸어갔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은혜를 받으면서 발견한 자신의 사명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것도 결국은 자기에게 주신 인류구속의 대업이라는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매순간 주님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런 진실한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셨으면 그 은혜는 나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이 은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그 계획속에는 사명이 있으니 내게주신 그 뜻이 무엇일까? 그리고 어떡하면 그 사명을 이루면서 내가 살것인가.?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서 지는 그 십자가를 기쁘게 생각하며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많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없는 십자가를 내게 지워주셨고, 그리고 이 십자가를 지워주실 때에 내가 주님을 의지하면 이 십자가를 지고 이길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이 내게 이 십자가를 주셨으니 감당하고 승리해야지.라는 자기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모두 살고난후에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청산하실 때 그 때에 우리는 은혜받은대로 주님 앞에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진대로 주님을 진실되게 사랑하고 신념이 아니라. 신앙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은 그 고난의 분량을 따라서 주님이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십자가도 부끄러운 것이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당한 예수의 흔적도 자랑거리일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십자가를 부러워하는 사람 없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감당하기 위해서 못박힌 우리의 등, 그리고 굳은살박힌 우리의 허리를 부러워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들을 당신앞에 세우시는 그 날이 올때는 우리는 지금 사랑하고 자랑하는 모든 것들은 배설물과 같이 더럽고 하잖은 것들이고 그날에는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것이며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 자기에게 주시는 사명을 위해서 눈물흘리며 사는동안에는 그 눈물흘리며 고통받는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 때 주를 위해서 그 은혜의 비밀을 간직하고 고난을 받기 위해서 사명을 완수하려고 흘린 그 눈물 한방을 한방울은 마지막날에 면류과에 쇠하지않고 빛나는 한알한알의 보석이 되어서 박힐것입니다.
사도요한의 표현에 의하면 이 세상은 잠시지나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산 사람들은 영원히 거한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들이 순간을 살면서 영원을 꿈꾸고 세상을 살면서 그 무궁한 세계를 잇대어 사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그 은혜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자기만족을 위한 은혜가 아니라. 주를 위해 십자가 지게하시기 위한 은혜인줄 알고 그 길을 따라서 살아가야만 여러분들이 은혜안에 살 수 있고, 상급이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7.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下)
사도는 아들과 같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쓸때에 그는 옥중에 있었고 디모데는 당시에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서 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는 곤경에 처해있었습니다. 몸은 약하고 그리고 특별히 에베소지방에 있었던 동양의 신비주의 사상과 접목된 그런 이단들이 이 교회의 참된 복음의 빛을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안에 있었던 신자들도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사상에 동요하는 지체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아마 그는 어린 나이에 목회자가 되어서 그 연소함을 인해서 목회하는데 어려움도 격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네 연소함을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런 상황속에서 사도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 8절은 먼저 무엇 무엇 아니고 그러나 ( ? )의 그런 구문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오직“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히랍어 성경에는 ”무엇 무엇 아니고 그러나 무엇 무엇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증거와 또 주를 위해서 갖힌자된, 히랍어 성경에는 ”주의 죄수“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를 위하여 갖힌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그러나 이렇게 이렇게 해라.“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여기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고 또 그 고난을 받는, 감당하는 비결이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복음과 고난이 함께 나란히 나오는 이 묘사를 보면서 우리들은 몇가지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복음 안에는 그 복음대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예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이든지간에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축복보다는 고난이 약속되어 있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약속된 무수한 축복의 언약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크고 놀랍고 또 소중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즉 기쁜소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지만 복음은 이러한 놀라운 축복,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복음의 축복의 대부분은 우리의 영혼의 축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영혼에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이 부어주실뿐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나 이런 것들은 돌아보시지도 않고 우리를 내버려두신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히브리서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무슨 말씀을 하다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느냐하면 “돈을 사랑하지 말아라.“ 무슨이야기냐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고아와 같이 이 세상에 버려둔다면 너희들이 그렇게 끔찍히 돈을 사랑하면서 그 돈을 움켜쥐고 모아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돈 말고는 너희를 지켜줄것이 없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를 지켜주신다. 또 예수님께서는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피는 풀도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그러므로 믿음이 적은자들아 너희는 염려하지 말아라.“ 이런 묘사를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에 복주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의 육신적인 필요까지 돌아보신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자연스러운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복음이라고 할 때에 이 복음이 제시하는 많은 축복들은 그 초점자체가 영혼에 맞춰져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최대의 축복은 영적인 축복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대의 축복은 우리의 영혼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입니다. 다른 모든 축복들은 일반적인 섭리를 통로로하여서 우리에게 흘러들오지만 우리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은 영이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임하게하심으로서 그러한 영적인 축복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들이 더 생생하게 알게되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더 생생하게 알게되고, 그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우리의 인생의 생존의 모든 동기들 조차도 새로워지게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에 베풀어주시는 외면적인 많은 축복들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의 은혜가 그의 심령속에 살아있을때에 그것을 느낄수 있지. 영적인 심령의 축복들이 사라져버리고나면 하나님이 아무리 그의 육적인 삶에 복을 주시고 기적의 방불한 축복을 그에게 부어주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서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텃치를 느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수 있지. 영혼에 하나님의 축복이 사라진 사람들이 결코 하나님 앞에 감사할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떠난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요? 더 멀리갑니까? 벌어보지를 않아서 전혀모르겠습니까? 좀 벌어보세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어떤 가운데? 복권이 맞는가운데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횡재하는 가운데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야되지 않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까 영혼의 축복이 본질적으로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축복이 사라져버리고나면 하나님이 왕국을 그에게 주셔도 그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에보면 뭐라고 나왔느냐하면 “하나님이 저희의 원하는 것은 주셨을지라도 저희의 영혼은 파리하게 하셨다.” 그래도 좀 이해가 안가면 제가 결정적인 예증을 들테니까 아하, 하고 무릎을 치시면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주었더니 처음에 오죽했으면 그것을 만나라고 했겠습니까. 그렇죠. 만나가 무슨뜻이냐하면 ( ? )에서 왔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우리로 말하자면 “이것이 웬떡이냐?“ 그런 뜻입니다. 얼마나 황홀했으면 그 이름을 만나라고 지었겠습니까. 그렇죠. ”야, 이것이 웬떡이냐?“ 그다음에 뭐라. 그래요. ”아니 또 떡이야“ ”맛도없는 맨날 만나.” 그리고는 그렇게 슬퍼하는데 무엇 때문에 슬퍼했느냐하면 “아이, 우리는 고기도 못먹고 마늘이 정력에 좋다는데” 이러면서 투덜데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주셨습니까?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두가지점에서 진짜 하나님께로 온 것이 분명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보노주신다고 말씀하셨고 그들이 그것을 먹고싶다고 할 때 하나님이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시고 그다음에 그것이 갑자기 날아왔는데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보내주신거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발목에 빠질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그것이 아무리 많이 날아와도 그것이 다 도망가버리면 그것을 새총으로 잡겠어요. 아니면 점부해서 다리를 붙잡겠습니까. 안될터인데 날아와서 후루루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뭐 잡아서 고기를 먹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죠. “아아,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그러면서 그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못하고 의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깊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어야지 정상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잇사이에 고기가 아직 끼어있는데 다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과 그다음에 영혼의 은혜에 상관관계입니다. 그런데 잘보세요. 그러면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치면 조그마한 일이 생겨도 어쩌면 그렇게 감사해요. 그렇지않습니까. 저도 옛날에 들은이야기인데 할아버지 목사님이 그랬어요. 열심히 은혜받고 나서 나이먹어서 말년에 전도대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전도를 하는데 누가 불쌍하다고 수고한다고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데요.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서 전도하니까 이 뜨거운 여름에 돈도없는데 진짜 까마귀를 통해서 시원한 아이스크림까지 보내주시는구나. 그러면서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서 우리 아무게 전도사님이 감사기도해주겠습니다. 이 양반이 골목에서 통성으로 막 기도하면서 눈물을 펑펑쏟으면서 기도하고나니까 다 녹아서. 그렇게 감사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요만한 것 하나에도 그렇게 감사해요.
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학대학원 3학년 다닐때에 너무너무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곤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교로 있을 때 모시고 있던 노 교수님이 지금은 다 은퇴하셨습니다만은 노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 노 교수님이 자기집에 무슨 심부름을 오라 그래서 찾아가서 뵈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잠깐 심부름을 했더니 막 갈려고 하는데 김 전도사 그러면서 걸어나오셨습니다. 잠깐만 거기 있으라고 그러시더니 현관에서서 기다리는데 갔다 오시더니 뭐 봉투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생활하는데 어려운 살림에 얼마나 힘드냐? 책이라도 사라.” 그러시면서 돈을 주셨습니다. 한 3만원 들었겠구나. 그러면서 나오는데 한참 걸어오는데 도저히 궁금해서 그것을 가지고 집에까지 가지고 갈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길거리에 보도블럭위에 털석 앉아서 봉투를 이렇게 열어보니까, 돈이 꽤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쉬어도 쉬어도 끝이없었습니다. 만원도 아니고 이만원도 아니고 오만원도 아니고 육만원도 아니고 팔만원도 아니고 구만원도 아니고 십만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 십만원은 지금 나에게 백만원을 그렇게 쥐고있어도 그 정도 감격은 안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 굉장히 많이 지났는데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 목사님 찾아 뵙고 신게를 갚아야되는데 이제 아직 살아계시다는데 미국에 계시니 찾아갈수도 없고, 정말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 교수님이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곤궁한중에 나를 잊지않으시고 참 사랑하시는구나. 이것은 진짜 뼈속깊이 사무치도록 느끼게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번 이스라엘 백성하고 지금 내가 예로든 저의 상황하고 비교를해보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기적속에서 그렇게 받았는데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분명히 보내주셨는데도 하나님의 텃치를 느낄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들이 고갈된 상태입니다. 은혜가 고갈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살아있으니까 눈을 들어서 가만히 생각해보면서 얼마나 감사한게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헤아릴수 없이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 천지입니다. 얼마나 감사한게 많습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 영적인 축복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런 축복을 통해서 작은 자극만 받아도 크게 그 영혼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 정말 감사하구나.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을까” 그런말을 하게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뭘 얘기하고 싶으냐하면 결론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전인적이고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 포커스는 철절하게 영적인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그렇게 놀라운 축복이라고할지라도 복음이 요구하고 제시하는데로 삶을 살려고 할라치면 고난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냐하면 세상에 그만큼 반복음적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비복음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한 도시에 놀랍게 부어져서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들이 모두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지 위해서 애쓰는 그런 사회가되면 그러면 사회가 반복음적이지를 않기 때문에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훨씬 더 활기차고 그리고 말하자면 이 보편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흥이 가져다주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러니까 1907년에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일어나고나서 상당히 오랬동안 그 때를 시발로해서 30년대 40년대 들어와서는 평양이 주일이면 거의 철시상태가 되었다고 하지않습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거의 명절처럼, 주일이면 가게문들을 다 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뭐 주일날 나가봐야 살것이 없으니까 살 것이 있으면 토요일날 먼저 사놓고 그리고 덩달아서 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 왜 일요일인데 제사도 안나오고 교회 그렇게 다닐려면 직장 그만집어 치워” 이러는 사람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07년에 부흥이 일어나고나서 사람들이 많이 변화되고나서 은혜를 받으니까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꾼돈 값으러 뛰어다니고, 쌀집에는 저도 기억이납니다. 초등학교때, 그래서막 잡혀가고 그랬는데 쌀을팔 때 그때는 킬로그램제가 아니고 말로파니까 말 밑에다가 판자를 하나 더 깐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한말팔 때 이만큼씩만 쌀이 쎄이브되도 일년 모이면 엄청난거죠. 굉장히 나라에서는 큰 죄로 다뤘습니다. 도량형을 속이는 사람들은 엄청나게 다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하던 사람들은 싸전에다 이렇게 붙여놓고 “몇 년 몇월부터 몇 년 몇월까지 내가 사실은 쌀되박 밑에다 나무한장 더 깔고 속여팔았다. 우리집에서 쌀가산 사람 다 와라. 내가 그것을 도로 갚아주겠다. 왜냐하면 주인이 회개했다” 그렇게 써붙여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정을 버리던 술 주정뱅이들이 회개하고 가정으로 돌아가고 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될 때에는 말하자면 잠시 복음을 따라서 사는 삶이 보편적인 사회의 동의를 얻게됩니다. 그런데 그런 때가 역삭속에서 얼마나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고 배나 충성해야됩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이렇게 저녁늦게 집에 들어가도 교회 같다 왔다. 그러면 그냥 엄마 아빠가 대견해서 어쩔줄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발이 닳도록 그 엄마 아빠 섬겨야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더 감사하고 백골난망의 은혜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보면 사회에서 복음적인 삶이 보편적인 동의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항상 이렇게됩니다. 그냥 신앙을 버리고 그냥 사회가 고통가운데 있게되죠. 그때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그들이 확 부흥이 일어나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마음이 열리고 말하자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삶으로 가득하게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나 잠시입니다. 그래서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 사실 부흥과함께 종교개혁이 진행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20년지난 다음에 그렇게 눈물을 펑펑흘리면서 복음으로 돌아왔던 많은 교회들이 다시 그 부패하고 타락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커다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20년도 못가서 다시 교회가 옛날로 돌아간단말인가. 그리고 마린루터의 생애에보면 통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은 얼마나 인간이 복음 앞에서 깨뜨려지기는 어렵지만 깨뜨려진 사람들이 쉽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적인 삶이 보편화되는 것,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사회를 꿈꾸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고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회가 복음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 아주 예외적이기 때문에 역사속에서 복음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고난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조들이 그 나라에서 복음적인 삶이 보편화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쓰고 노력한 사회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살고, 이 불의한 세상에서 자신은 외롭고 고통스럽다고 할지다로 이 복음을 따라서 사는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면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삶인동시에 또한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선명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사는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커다란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고있고 바울이나 디모데가 오늘날 우리와는 비교될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목회자였지만 역시 그러한 고난이 그 시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내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복음대로 살려고 하는데 이 세상에서 따돌림을 받고 이해받지 못하고 그리고 복음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데 핍박을 받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생각해야되느냐하면 “아, 이 나라가 정말 하나님께 속한 나라가 아니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은혜주셔서 이 복음을 알게하셨고, 그리고 이 복음을 위해서 살게하셨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이 복음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고난을 받는 현실을 보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복음으로 주님을 만나게해주신 이유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소금이 되는 것이지. 그래서 설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도 우리안에 소유하고 세상도 소유하고, 또 주님께도 소중한 존재가 되고 이 세상에도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이 세상의 정신에 영합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이 교회와 크리스챤의 삶을 보면 그 근본적으로 외곡되어 있는 것이 뭐냐하면 세상에 있는 것이 자기에게도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을 안믿는 세상과 자신으로 하여금 동무라고 하는 인상을 갖게해서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슨이야기냐하면 오히려 복음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존재가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다.라고 하는 것을 아주 확실하고 현저하게 보여줌으로서 그들에게 복음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무조건 세상을 향해서 적대적이 되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대신 뭐냐하면 타협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정체성조차 양보하는 그런 상황으로 가서 그래서 동료의식을 느끼게하여 그들이 우리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정말 감상주의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우리가 세상의 빛이면 세상은 어둠이죠. 그래서 세상에 어둡기 때문에 우리도 너희처럼 어둡다 함으로서 주님을 보여줄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어두운속에서 빛남으로서 우리를 그렇게 빛나게하시는 분이 빛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 없이 살아갈 때 일단의 사람들이 길을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길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이 많이 부패할 때 그 때에 그리스도인이 소금처럼 남아있음으로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 다르고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다를수 있는 이유는 그들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발견하게된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크리스챤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수제의연금이나 몇푼 낸다고 해서 크리스챤의 사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리스챤의 사명은 그처럼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게 주님이 요구하시는 존재가됨으로서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복음을 따라서 복음이 요구하는 존재가 되고, 복음이 요구하는바를 따라서 사는 그런 삶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그 자체가 일반적인 이 시대의 정신에 저항하고 그리고 이 시대의 정신을 거스리면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 ? )라는 사람이 그래서 그것을 얘기합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내게로 오라. 그리고 같이 죽자.” 복음서는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의미를 깊이 알고 그 복음을 따라서 살려고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살고있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점점더 분명하게 터득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이 자신의 영원한 집이 아니라고 하는 그것을 분명히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나라에대한 그런 분명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두 번째로 우리들이 여기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뭐냐하면 “복음과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을 따라서 살려고하면 그 사람에게 고난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데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반적인 진술이고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통해서 고난을 받으라고까지 명령형으로 디모데에게 제시해주는 것을 통해서 두 번째로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뭐냐하면 사명이 고난을 부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디모데의 사명이 무엇이었을까요? 에베소교회를 목회하는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신세계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각종 이단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하고, 잘 양육해서 그야말로 복음의 빛을 지닌 사람들로서 자신의 현존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주님이 자신 안에 있음을 나타내보여주는 그런 사람을 살게하는 것 그것이 디모데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을 것이고 그것과함께 또하나의 중요한 사명은 자기 자신이 교회를 목회하면서도 자신이 이러한 사명의 국외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에게만 그런 사명을 주어서 나가게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복음의 부르심을 따라서 살아가야할 개인적인 부르심을 목회의 부름심과함께 목회자이기 이전에 신자로서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의 사역과 관련해서도 그런 사명이 있지만 자기 자신의 경건한 삶에 있어서도 그런 부르심이 있었다있거죠. 그러데 그것을 목표로 두고 살아야할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목회자로 받은 사람들에게만 사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 모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모습으로 저런 사람들은 또 저런 모습으로 주님이 불러서 각자 자신의 일에 쓰임받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집이 지어지기 위해서 몇백년묵은 거목을 잘라내어서 그래서 대들보로 쓰는 그런 나무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젓가락같이 가느다란 나무들도 교회를 건축하는데 필요하고 심지어는 길거리에 버리는 돌과같은 것들도 기초를 놓기 위해서 땅속에 많이 다져서 넣어야하는 그런 잡속들도 필요합니다. 외국에서 수입하고 국내에서 잘깍아서 만든 그런 초석이나 아니면 화강석이나 대리석같은 훌륭한 돌도 교회의 건축에 필요하지만 그렇게 길거리에 굴러다니면서 그것도 모라자서 파쇠기로 두들겨 부셔서 파석처럼 되어버려서 그래서 돌 하나에 몇십만원 몇백만원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트럭에 이삼만원밖에 안하는 돌맹이들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함께 합력하면서 교회를 건축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건축해나아가실 때 그 때 하나님이 다양한 사람들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그래서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서 교회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모두다 석가래겠습니까? 모두다 주춧돌이겠으며 모두다 대들보며 모두다 기둥일수 있겠습니까. 크고작은 다양한 종류의 건축자제들이 각기 자기의 자리에 놓이므로서 교회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형성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셔서 이 세상에 내어보내실 때에 우리가 어느곳에서 무엇을 하든지간에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저는 요즘 정말 우리 크리스챤들이 교회가 이 민족의 정신을 개조하는데 정말 복음으로 앞장서지않으면 참 이 나라가 정말 어떻게될까? 하는 생각이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나라가 되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이렇게 살아서 우리들이 20년후에 치열한 세계경쟁속에서 우리 후손들이 밥을 먹고 살수있을까? 심히염려가됩니다.
어제 일군들하고 같이 일하고 직원들 몇 명하고 밥을 먹으로 갔습니다. 밥을 먹으러가서 탕을 시켰습니다. 탕이니까 국하나하고 밥하나 하고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래서 탕을 시켜서 세사람인가 네사람이 갔는데 밥을 하나씩 갖다 주는데 한 사람은 국만갖다줘요. 그러면서 하는말이 뭐냐하면 “맛있는 밥을 드릴테니까. 좀 기다리세요.” 그래서 무슨이야기인가. 밥이 덜 되었다는 말을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는 하는것입니다. 그런데 맛있는 밥이 안나와요. 다 먹고 이 사람은 국만 계속 퍼먹는데 밥이 안나와요. 그래서 내가 하도 불쌍해서 내가 먹던밥을 두숟가락을 덜어서 주었는데 국만실컷 먹었는데 밥이 안나와요. 식사가 다 끝났는데 그래도 밥이 안나와요. 그래서 가야되겠다고 그러면서 제가 한마디 했죠. “그렇게 하면되느냐 아니 저 사람은 국만먹다가 갔는데 이렇게 식사가 되느냐?” 그랬더니 하는말이 “밥값 2000원 빼드릴께요” 국만먹었으니까. 국값은 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얼굴도 안붉히고 해요. 그러니까 “야, 어쩌면 이렇게 사람대접을 안해줄까?” 그런데 그런 가게는 문을 닫아야되거든요. 그런데 장사가 되요. 이런식으로 계속되는한 이 나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망해야합니다. 문을 닫아서 실업자가 되어야합니다. 경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T.V에서 월드컵을 앞두고 열명이 시중의 밥집에 들어갔는데 “어서오세요.”인사하는 집이 딱 두집이더래요. 제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장사군들을 상대해본적이 처음입니다. 하루에도 수십명을 만나는데 아주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 “아, 이 민족은 개조가 필요한 민족이다.” 그리고 정말 이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을 갖게되었습니다. 10명을 만나면 3명 전도는 안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그게 무슨이야기냐하면 분명합니다. 그리거 저 사람들은 희망이 있다. 일곱사람들은 아닙니다. 기술도 없으면서 돈에대한 욕심만 있고, 성실하지도 않으면서 한번 일해서 때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한번 팔아먹고 입싹씻고 끝낼려고 하는 사람들, 어떡하든지 자기가 한일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우리끼리 울타리를 치고이 속에서 사니까 구박을 받고, 밥을 달라그러는데 국밖에 안줘도 2000원깍아주면 그 다음에 가서 또 밥달라 그래서 얻어먹고 그러면서 그렇게 비굴한 삶을 살지. 무한경쟁시대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같은 값에 밥을 제공해주면서 친절하게 한다면 거기에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절대 안갑니다.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중에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그 중에 4분의 1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밥을 해주는 집 위에 “이 곳에 들어오는 자에게 평화가” 그런거나 좀 떼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렇지않으면 뭐 “범사에 잘되고 강건할지어다.” 어느 교회에서 갖다붙여논거에요. 심지어는 말이죠. 웃고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 걸어놓고 그 따위로 장사를 하는데 이민족이 희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진짜 가게문을 나오면서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왜 이 백성은 이렇게 사는가?“ 그리고 어느 사회의 진단전문가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역사상 근대사회를 통틀어 볼때에 합리적이고 철저하지 않은 민족이 만불을 넘는 것이 한국이 최초입니다.“ 기적입니다. 정말 기적입니다. 다른 독특성이 있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기적입니다. 나는 무슨 그런 사회의 전문 진단가는 아니지만 중국이 막 무섭다 그러는데 저 사람들은 아닙니다. 순엉터리입니다. 나는 5000불 넘으면 나는 기적이라고봅니다. 물론 개개인은 수만불 버는 사람이 있을수 있을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12억 13억의 인구가 공통적으로해서 5000불이 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중국에서 공장을 차렸는데 형광등을 주문해서했는데 형광등 200개가 한번에 켜지고 꺼지더래요. 그래서 아니 이런 공사가 어디있냐고? 여기 스위치를 달아달라그랬더니 돈을 더달라 그러더래요. 그래서 왜그러느냐? 그랬더니 계약서에 스위치 따로 달아라는 것이 어디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정말 깊이깊이 생각하고 이것을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몇 사람을 만나서 제가 진짜 사명감을 가지고 진짜 내가 손을 붙들고 “우리 이렇게 살면안된다. 이 나라가 이렇게 살면 안된다. 잘못되었으니까 다시 해라.” 그리고 너무 많이 깍지도 말고 밑지는거 하지도 말고 적정한 가격에 주고받고 그 다음에 철저하게 너희들이 돈받은 것에 대해서 봉사하고 그것을 받아라.“ 그래서 저는 이 교회 공사를 하면서 단돈 500만원짜리 하나를 사도 보증증권 끊어주는데 하고 거래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뜻이냐하면 보증증권을 끊어놓으면 그 사람들이 이것을 가지고 가서 잘못되었어요. ”고쳐주세요.“ 그러는데 안고쳐주잖아요.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가서 보험회사에 가서 ”이 회사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갔는데 안해준다.“ 그리고 집어넣으면 그 보험회사에서 고쳐줘요. 그리고 그 회사에서 돈을 그 쪽으로 청구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말을 안들으면 불이행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서 어느곳에 가도 계약을 못하게 아예 낙인찍힌 납품불량자가됩니다. 그것을 마루하나 깔아도 다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갈 때는 항상 뒤가깽기게 2년 후에도 내가 납품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져야된다. 그리고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석자로 붙여놓고 나올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정말 이런 것을 보면서 말이죠. 이제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쳐요. 그렇게 산다고쳐요. 그렇지만 교회에가서 좋은말씀 듣고 복음을 따라서 살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된 사람들이 그런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속에서 뭐가 희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제가 신학대학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믿는 학생들이 다 컨닝하고 말이죠. 레포트 배껴쓰고 말이지. 기독교 정치인다. 그리고 모여서 감사예배드리고나서 맨날 정치자금이나 받고말이죠. 가서 구린돈이나 주워모으고 말이지. 이런식으로 살아가니까 세상이 희망이 없고 변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무슨이야기냐하면 다 불꺼진 신호등이지 불켜진 신호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뭐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도 그렇게 살면 이제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에게” 하고 심방을 받고 현판을 걸었으면 그것을 떼어내고 그리스도인인 것을 숨기고 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내 걸었으면 ‘진짜 저 아줌마 복음송가 틀어놓고 들어니까 야, 이거 진짜 음식도 잘하는구나. 국퍼먹어도 파리도 안떨어지고 콩나물에 머리카락도 없고, 그리고 국하나 갖다주고 국만마시고 돈반만 내고 가라고 안그러고 진짜 이사람은 된 사람이구나.‘ 아니 그것을 느끼게끔 해줘야 되지않겠습니까.
보세요. 교회에 와서 유년주일학교 하는 것만 사명입니까? 교회에 와서 구역예배드리는 것만 사명이냐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전삶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목사에게만 순종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가서 법에도 순종하고 나라의 권위에도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도덕적인 양심에도 순종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그 삶의 순종의 영역이 전방위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고, 그렇다고해서 교회에 와서 또 뼈빠지게 충성을 하느냐? 그것도 또 아니지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삶이 무슨삶이냐? 사명이 없는 삶입니다. 사명이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이유도 없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할 이유도 없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지 이 사명을 완수하나 고뇌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름만 걸어놓고 그저 방향이 없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니까 수많은 교차로가 나오는데 거기 그 사람의 존재를 신호등으로 세워줬는데 불이 안들어와요. 그리고 그 한 사람이 바르게 살지못하니까 수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에 누구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그런 현실을 보면서 너무너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밉다. 화나간다. 그것이전에 너무 가슴이 아파요. 왜? 몇주전에 말씀드렸죠. 나는 애국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국노도 아닙니다. 나는 국수주의자도 아닙니다. 이민가는 사람들을 욕할정도로 그렇게 국수주의자도 아닙니다. 이민가면 어떻고 무슨상관이 있습니까. 예전에 어떤 형제가 미국사람하고 결혼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하면어때. 그렇지만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까지도 이렇게 살아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얼마나 우리들이 한 시대에 태어난 것은 그 시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기업입니다. 밭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여기에서 주님이 주신 은혜로서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나가고 신실하게 살고하면 그렇게 충성스럽게 산 흔적을 교회당 놓이 올린 것, 그것만보고 충성스럽게 살았다고 말할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만난 주님과의 감격, 그 은혜를 가지고 자신자신의 삶에서 전방위적으로 순종하고 그렇게 살아가야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저 사람은 흔히 볼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르다. 다를려고 애를써서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주님이 그 안에 품고 있는 이 복음이라고 하는 최고의 가치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그런 것들을 세상 사람들이 볼때에 비로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신호를 어길 때 있지않습니까. 그냥 지나가요. 그 신호등이 세가지 경우였다고칩시다. 빨간불이 들어와야되는데 신호등이 망가져서 파란불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알았습니다. 저 파란들이 잘못들어온 것이지. 파란불이 30분째 켜있거든요. 그런데 다른 차로에서는 빵빵거리고 생난리지. 그래도 파란불 켜져있으니까 휙 지나갈 때, 그 때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두 번째는 뭐냐하면 신호등이 완전히 불이 나갔어요. 그래서 각 차로에서 사람들이 알아서 눈치를 보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할수없이 눈치를 보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빨간불이 뻔히 켜져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쳐 못보았습니다. 그래서 휙 지나갔습니다. 지나가고보니까, “아, 빨간불이 었네” 이것을 느낀 것, 마지막 네 번째, 빨간불이 엄연히 켜져있어요. 그런데 “에이, 가지” 그리고 밟았어요. 그 때 느낌이 다 똑같습니까? 다름니까? 다 다르죠.
우리들이 주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서 우리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 순간에 펑펑울면서 회개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당신도 그렇게 사는데 나같은 인간 왜 하나님이 여태까지 남겨두셨는지 모르겠다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그길이 잘못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헤롯이 왜 그렇게 세례요한을 만나면 괴로워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세례요한이 비난했기 때문이기는 하죠. “너 불륜의 관계다. 그것은 그럴수 없다.” 그리고 비난했죠. 그러면 그렇게 비난했는데 죽여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또 같이 만나면 세례요한이 뭐라고 말하니까. 고뇌하면서 달게 들었습니다. 그 때는 달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단칼에 날려버려야지만 자신의 명예가 보존되는데도 만나면 그를 어떻게 할수없었던 그 이유가 무엇때문이었습니까? 그는 옳고 자신은 잘못되다.라는 것을 세례요한의 현존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 ? ) 세례요한 그 자체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살아가다가 자신이 양심이 거슬리고 너무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하는 것을 느낄 때 물론 아주 신령하고 은혜가 충만하면 직접 주님이 생각나죠.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도 생각나고 영광과 위엄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모습도 생각나죠. 그렇지만 사람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저는 가끔 사람이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나느냐하면 내가 존경했던 사람들, 그분들에게도 흠이 있었겠지만 내가 보기에 본받고 싶어하였던 사람, 그 때 그 선생님이라면 나처럼 살지않을텐데, 그 때 그 목사님이 나를 보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그런 것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전혀, 떠오르는 눈빛이 아닌데. 그것이 결국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존재가 사라져도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의 기억이 그렇게 살지않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 사명은 자신의 삶의 전방위적인 영역의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양심을 속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직업활동하고 그리고 경건하게 살고,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살아야됩니다. 그리고 무엇을하든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해야합니다.
학생들은 공부열심히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학생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매일 집에서 놀아요. 집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생이든지. 노래방 P.C방, 무슨방, 그렇게하면 안됩니다. 나는 분명히 말해요. 학생이면서 공부안하는 사람이 열열하게 기도하는 것은 다 육신의 정욕입니다. 그렇게 면목없는 삶을 살고말이죠. 어떻게 특별히 각오를하지않고 낙제를 받을수가 있습니까. 그런식의 삶을 살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무슨 기도한다. 그러고 말이죠.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삶이 그렇게 엉망진창인데 하나님이 능력주시면 뭐하겠습니까. 그것가지고 말이죠. 자신의 모든삶속에 하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부르시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섬기라고 부르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그런 분명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통해서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경험하고나면 은혜의 명료도만큼이나 아주 분명하게 자신을 하나님이 왜 은혜를 주셨고, 지금 이시점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부르심이 무엇이다.라고 하는 아주 투철하고 분명한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명없으면 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 이 디모데에도 보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죠. 디모데전서에보면 이 사람에대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나옵니다. 눈물과 거짓이 없는 정결한 양심과 신앙. 이것이 디모데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조상적부터 믿어온 그 하나님. 거짓이 없는 양심과 신앙, 눈물, 이런 것이 이 디모데 그러면 바울의 마음속에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그랬습니까? 그런데도 너에게 고난이 있다. 받아라. 고난을 받아라. 그러니까 고난 그 자체가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이 징벌하시는 그런 표징이라기 보다는 한 성도에게 고난이 있다라고 할 때에 그가 잘못살았을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이 그를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시는 징계하는 싸인이 될수있지만 그러나 그가 정말 신앙안에 살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쓸 때에 고난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살려고 애를쓰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은 생명처럼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확인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가슴아픈 것이 뭐냐하면 그런 사명에 대한 인식들이 너무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돈버는 일이라고 하지만 자기 집사입니다. 뭐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을 소개하고 그리고 담배냄새 푹푹 풍기면서 거짓말이나 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겠어요. 그런순간에 상업행위를 하나님이 받으시겠느냐고요. 자신의 전삶이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되도록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마지박 세 번째. 그런데 그런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데 뭐라그랬느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좇아라고 하는 것은 ( ? ) 무엇무엇에 따라서입니다. 그러니까 비례한다.라는 뜻도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니까 이것은 두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데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는 고난도 많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재미있느냐하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능력주시옵소서“ 그렇지않습니까? 자기 능력이라도 열심히 쓰고 또 달라. 그래야지. 주는 것은 쓰지도 않고 그 능력 달라고 할 때는 무슨이야기냐하면 마치 리모콘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있는 능력으로는 걸어가서 저것을 켜야되는데 능력을 많이 주시면 찍하면 켜면 삐익하고 들어오면서 안되던 일이 될거라는 것입니다. 능력의 리모콘. 그러니까 능력을 많이 받으면 쉽게 주의 일을 할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솔직히 우리에게 잠제적으로 깔려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능력을 많이 받으면 조금 일해도 큰 성과를 거둘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뭐라그랬느냐하면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진짜 하나님께로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이 능력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힘써서 돌아다닐 필요없이 회심해라. 찍. 부흥이 일어나라. 찍. 그리고 전도되어라. 찍. 깨어져라. 삑. 이렇게 해서 원격조정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능력 받으면 고달파요. 능력많이 받으면 고달픕니다.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형극의 삶을 살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래 사도를 비롯해서 성도들이 초대교회때 원없이 성령의 능력을 받았죠. 처음 임하시는 오순절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지않습니까. 그랬죠. 그래서 그들이 모두 산위에 올라가서 그 엄청난 능력으로 예루살렘전도 삑, 병든자 찍, 줄어드는 교회 다시 부흥 삑. 이렇게 해서 사명을 감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거기에서 성령 세례받은 사람들이 거의 다 고난 받아서 죽었습니다. 능력이 모자라서 아닙니다. 능력이 많아서 죽었습니다. 그 능력이 많던 그 능력을 보여주던 한번의 설교로 3000명의 사람을 그 자리에서 뉘우치며 뒹굴게 만들었던 그 사람의 최후가 무엇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었죠. 베드로말입니다. 바울은 어땠습니까? 죽은자를 살리기도했죠.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귀신들린 사람을 안수할 필요도 없이 “나가라.”그러면 그대로 순종하던 그 엄청난 능력의 사람, 그런 사람 바울의 마지막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능력많이 받은 사람의 삶은 고난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능력을 구할때는 항상 마음속에 어떤 것들이 동반되어야하느냐하면 주님 많은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러면 제가 더 많이 희생하면서 주님을 섬겨서 나는 죽고, 나는 낮아지고 주님은 그 능력 때문에 높아지십니다. 그런 고백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일을 계속 맡기시죠.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냥 발이 부르트도록 다니면서 코피가 나도 할 일이 많고 또 어떤 사람은 정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능력을 많이 주실 때에는 그 사람의 고난도 넘친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의 삶의 관심이나 초점이 자신의 행복과 안일에 있는 사람은 수많은 날동안 밤을 지새우며 능력을 구해도 그 기도가 응답될 수가 없습니다. 그 능력은 어떤 사람에게 임합니까? 자신을 모두 던진사람, 삶의 동기를 비우고 주님의 뜻이라면 어디까지 가겠습니다.라는 그런 고백을가진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따라 고난 받으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능력주시면 반드시 그런 고난이 따라다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뭐냐하면 복음을 따라 살면서 고난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께로부터 공급되는 능력이 너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대게 성령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육체로 일을 마치는 사람들의 문제는 뭐냐하면 시작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의 시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무한한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그 에너지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은혜의 능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공급을 받는 것들이 끊어질 때에 그 때에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은 육체로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작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시라고 해서 반드시 성령으로 마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죠. 사울을 세우신분이 하나님이 아니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우셨죠. 그리고 성령으로 시작했죠. 그런데 육체로 마쳤습니다. 그렇죠.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은혜받기 위해서 노력해야됩니다. 그것이 마치 달리는 자동차에게 주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순간마다 그렇게 우리들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주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은혜로서만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매순간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은혜를 힘입으면서 성령으로 시작된 그 일을 육체로 마치지 않고 성령으로 완수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많이 하고, 은혜 받으면서 살아야합니다. 그래야지만 주님이 세우신 그 자리에서 잘 고난을 받으면서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예수님의 마음으로 고난을 이김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 4:1)
베드로는 주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아서 초대 교회의 초석을 놓은 훌륭한 교회의 지도자였지만 평생을 겸손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비록 초대교회의 최고의 지도자로 주님에 의해 지명되었으나 자기가 그럴만한 위치에서 성도들을 지도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사실은 자신이 잘 아는 바였습니다. 뼈아프게도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까지 예수님을 부인했던 뼈저린 배신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광경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초대교회의 초석을 놓는 최고의 지도자로 완전하고 완벽하고 결점이 없는 무흠한 사람을 택한 대신에 이처럼 뼈저리게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한 베드로와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삼으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시는 원리가 사람이 사람을 사용하는 원리와 같지않다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 베드로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난 다음에는 특별히 그가 자기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 가운데는 소망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라는 그 강력한 권고가 그의 서신서 전편에 물같이 흐르고 있고 또 서신서를 기록하기 이전에 성령을 받은 사도로써 유대인들을 향해 외칠 때에도 더없이 담대한 마음으로 이와 같은 사실을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전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포기할 수 없는 소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라고 고백했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고 하는 영생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단지 그리스도를 믿고 고난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극적 소망에 그치지 아니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 나라에서 영원하고 놀라운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자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늘나라의 신령한 상에 대해서 강력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예전에 자신이 성령을 받기 전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뼈저린 배신의 기억에 힘입은 바 클 것이라고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그 배신의 약점이 철저한 소망 가운데 주님을 붙들고 예수 한분 의지하면서 전사와 같은 삶을 사는 오히려 훌륭한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런 소망을 말하고 싶어요. 우리 각자 각자를 보면은 참 결점이 많찮아요. 그죠. 저도 요새 교회를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 교회 짓는 걸 마무리하면서 저 자신의 결점을 참 많이 발견해요.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실망도 참 많이 합니다.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도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어떤 약점은 너무나 심각할 정도로 약점이 크고 자신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해서 그 약점만 생각하기만 하면은 오히려 좌절스러운 그런 분들이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 있을겁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저와 같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소망을 말하고 싶어요. 우리의 그 뼈저린 약점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신앙 안에서 살면 오히려 그 약한 것이 주님의 강함을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심지어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가 만약에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는 부득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은 그 약한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온전하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죠. 베드로가 바로 그런 진리의 진리를 입증하는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것도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모욕과 고난을 받으셔 외톨이가 되신 바로 그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 보시는 그 눈앞에서 모른다고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까지 주님을 부인했던 뼈저린 배신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일생의 약점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안나오지만 나는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능력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예루살렘 교회를 어거해 갈 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치 언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십자가 예수님 지실 때 도망가 놓고 말이지 이제 와선 우리보고 십자가 지라고 그러고 말이지 고난을 당하라고 그러고 말이지 그러면 왜 저는 옛날에 도망갔어’ 그런 사람 왜 없겠습니까? 누군들 없겠습니까?
새벽닭 울 때에 난 괴로워서,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워서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날 위해 바친 고귀한 사랑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고파 사랑의 십자가를 맞이하네
정말 두려움과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 두려움 너무 커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누가 그런 비난을 했다면 사도는 변명할 여지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없었죠.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자신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배신의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그는 흔들리는 신앙의 그 비참함, 끝까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비겁한 신앙의 그 비참한 종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주님을 배신했던 사람, 소망가운데서 한번 흔들렸던 사람이기 때문에 흔들리는 성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고 그리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들의 그 아픔을 깊이 이해하는 목자적인 마음으로 흔들리지 말고 신앙 안에서 담대하도록 외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그 산 소망이 이 베드로전서의 주제요, 흔들리면 안된다 입니다. 왜 흔들릴까요? 왜 견고하게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만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될 텐데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우리가 너무나 싫죠? 그리고 우리는 항상 우리 편이 거든요. 우리는 항상 우리 편인데도 나는 항상 내 편인데도 내가 나를 용서가 내가 스스로 용서가 안될 때가 있잖아요. 그래요? 왜 이렇게 살까? 네? 주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몰랐다고 하면 몰랐으니까 그렇게 살지. 또,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 약할 때 강함을 주시고 패배할 것 같을 때 주님을 의지하면 이김을 주시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경험한 적이 없다 라고 할 것 같으면 승리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연약해지고 패배한다고 치죠. 근데 주님의 사랑도 맛보았고 그 사랑 안에서 이기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자에게 주시는 승리도 경험했습니다. 약할 때 강함을 주시고 오류에 빠질 때 참된 길로 이끄시고 쓰러져 좌절할 것 같은 때에 이김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는데 근데 왜 이렇게 흔들릴까? 흔들릴까? 그래서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가서 내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기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은혜주면 뭐해 또 그렇게 살걸.. 맨날 달라 그래서 니가 나아지는게 뭐가 있냐?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정조를 잃어버리고 만신창이 걸레가 된 창녀가 된 마음으로 우리 주님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죠? 왜 그렇게 흔들릴까요? 네? 왜 그렇게 흔들릴까요? 평생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 주님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과 위로를 삼으면서 살아갈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쉽게 흔들릴까? 무엇 때문일까요? 몇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 우리들이 흔들리는 가장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신앙을 파수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고난을 마다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묘사하는 바는 전쟁입니다. 전쟁.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라 그랬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또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 찌니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정체가 영적인 전쟁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그야말로 승리 하나만 소중하고 나머지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바로 바로 전쟁인 것입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그 전쟁에서는 반드시 고통을 그 전쟁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게 됩니다. 때로는 그 고통이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비참해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존귀함 같은 것들을 상상할 수 없게끔 그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그게 전쟁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런 싸움터에 선 사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파송된 군사로써 전쟁터에 서 있는 한 군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성경이 거듭 거듭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고난을 싫어하는 군인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전쟁을 포기하고 패배하여 포로가 되던가 아니면 스스로 고통이 싫어서 죽음을 택하는 길 둘 중에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도 알고 사랑도 알고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도 알면서 견고하지 못한 것은 우리들이 삶에 있어서 전투적인 자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위로도 그 쉼도 결국은 마지막에 우리로 하여금 꼭 필요한 한 곳으로 내보내기 위함인데 그것이 바로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그 피할 수 없는 고난의 전쟁터를 우리의 삶에 전 영역에서 만납니다. 세상에 나아가서 살 때에도 끊임없이 이 세대는 우리를 그 시대의 정신으로 찍어내려고 합니다. 규격화되고 획일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려고 이 시대의 정신은 우리를 압박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죄악 된 사람들의 평균치로 만들려고 하고 무엇인가 그 시대 속에서 시대의 정신을 거스리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럴땐 반드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때로는 생사를 건 승부를 위한 치열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런 치열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매일 매일 부단한 자기 깨어짐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형상을 나의 인격과 삶 속에 이루기까지 분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나를 스스로 인정해 주려고 하는 자기 인정적인 욕구와 더불어서 싸워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만하면 됐어. 너 만한 사람 없어. 야! 너 같은 사람이 누가 있냐? 너 만하면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야. 어, 너는 이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너 만큼만 신앙생활 하면 목사님이 행복해 하실 거야. 목회 아마 거저 할 거야.”
이렇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려고 하는 이런 욕구와 더불어서 끊임없이 싸우지 아니하면 우리는 받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아주 손쉽게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거나 혹은 그런 정도는 아니라 할 찌라도 처음 은혜의 감격을 잃어버린 건조한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건조한 신앙생활은 다름이 아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출석생활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필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준비하고 마음에 수없이 스쳐지나가는 죄와 악, 더러움과 더불어서 그것으로부터 정결해 지기위해서 싸움이 없이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인 것입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처절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믿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거기에는 부패한 자신의 육체의 본성과 더불어 치열한 싸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피를 말리는 고통스러운 싸움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죠. 우리들이 은혜 받고 나면은 반드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 보기에 커 보일수도 있고 적어보일수도 있지만 그것이 사람보기에 커 보이고 적어보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은혜 받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기원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사명을 주셔서 우리를 어디에 세워두셨든지 간에 그것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일 때에는 그 사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그 정말 처절한 싸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사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도 이를 악물고 그 사업에 성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 진취적인 기업 활동을 하기위해서 노심초사하고 그 일 하나에 신명을 바치면서 살아 옮 으로서 그 분야에서 최고는 아닐지라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 여기서 교회를 지으면서 수백 명의 사업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과의 만남의 경험은 제 인생에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그런 훌륭한 기회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나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정말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거를 느꼈습니다. 근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벌써 이 살아있는 사업가가 있고 정신이 죽은 사업가가 있습니다. 정신이 죽은 사업가는 곧 망합니다. 그리고 그가 망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사기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왜 정직하게 해서 승부를 하지 않으니까 한건 물어서 무슨 그 사기 비슷하게 해가지고 말이지 많은 돈을 벌어서 다시는 그 사람 안 보려고 하는 그런 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예화) 엊그저께도 한번 이제 저쪽 그 텔레비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도 조금 놀라셨는데 다음 주에 오시면은 백평짜리 식당이 스위치를 누르면 쫘 악 펼쳐집니다. 그래 만들고 있습니다. 그 그래서 졸지에 식당이 생겼다가 스위치만 누르면 식당이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을 할려고. 근데 그 분하고 얘기하는데 그런 얘길 해 여러 가지 까다롭게 우리들이 주문을 했습니다. 왜 마당이라고는 요고 하나밖에 없는데 이거 맨 날 텐트 쳐 놓으면 애들 농구는 어디서 하고 공놀이는 어디서 하냐. 그러니까 주일날에는 쓰고 그리고 주일날 저녁에는 스위치 누르면 벽에 붙어서 날라가서 숨어서 누가 와서 보더라도 그 식당 어디로 갔나 그렇게 만들어 달라. 에. 그러니까 아 진짜 이 양반이 머리에 쥐가 나는 거야. 하도 이 주문이 까다로우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얼굴 새카만 양반 힘들지 않으슈. 그러니까 아 목사님 별 말씀을 다합니다. 힘들어도 해야지요. 왜요? 전에는 경쟁업체들이 별로 없어서 그냥 드루룩 드루룩 천막 박아서 팔아먹어도 밥 먹고 살았는데, 이제는 경쟁업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천막을 팔아가지고는 가격이 바닥을 치기 때문에 도저히 밥 먹고 살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럼 어떻게 하냐. 다른 사람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이렇게 머리에 쥐나는 일을 한 두 번 씩 해서 기술 개발을 해서 납품을 하면 노하우가 쌓이고 그 다음에 하고 그 다음에 하고 이렇게 간다 말이지. 그래서 내가 세계적인 발명 특허를 낼 만 한 거를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몇 개 가르쳐줬어요. 그랬더니 현대의 기술 수준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그러고 갔어요. 잔인한 발주자를 만나서 업자들이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근데 그렇게 열렬할 수가 없습니다. 대단합니다. 우리 지난주에 점심 식사를 캐터링 했잖아요. 참 좋은데 돈이 너무 비싸요. 그래 12일 날은 반드시 밥을 먹어야 겠어요. 해먹어야 되겠어요. 돈이 너무 비싸서 지난주에 점심 값을 2백4십 만원 날라 갔어. 그래서 한주만 그렇게 하고 이제는 안됀다. 그랬더니 우리 집사람이 계약하면서 잔인하게 하루 늦는데 10%씩 물어내라고 해서 백팔십만원씩 깍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10일날 까지 설치를 못하면 백팔십만원씩 물어내야 되요. 하루에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냥 이를 악물고 밤을 세워서 하는 거야. 하튼 안전하게 목요일날 쯤 와서 설치를 해서 금요일날은 돌아가게 해주겠다 이거에요. 역시 돈이 무서워요. 그러더니 하는 거에요. 근데 그 양반 하는 얘기가 그래요. 반짝 반짝 해 눈빛이. 그런 사람들이 말하자면 살아있는 기업을 이끌어가는 거에요. 그냥 와 가지고 어디 뚝 떨어지는 돈이나 없나 그러고 다니는 사람들은 망해야지만 사회가 발전적이 된다고.
보세요. 세상에서 자기 기업을 하는 사람, 한 푼 벌어서 입에 풀칠하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살아야 하는데 하물며 지고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전투적인 삶을 살아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이거죠. 얼마나 전투적인 삶을 살아야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라 이거죠. 생각해 보세요. 세상은 사업하기에는 적합한 곳, 이 세상은 사업을 하고 그러기에는 적합한 곳이에요. 세상일이니까. 그러나 이세상은 하나님 일을 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야. 그렇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세상이 괴롭히고. 그렇죠?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살려고 애를 쓰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 질수도 있어요. 여러분 중에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부모와 결별한 사람들도 있을 거에요. 그죠?
(예화) 저도 신학교 가겠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호적 파가라고 그러드라구. 그랬더니 내가 교회를 하니까 또 우리 교회에 나오셔.
봐요.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면 정말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 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 가하는 것을 알게 되요. 더구나 거기에 분명한 사명의 목표가 있어서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 때 그게 얼마나 힘들겠는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너무 너무나 힘들잖아요. 힘들잖아요. 굉장히 힘들어요. 특히 이건 뭐에요? 전쟁이에요. 전쟁. 전쟁이라구.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가치를 과도하게 평가하고 그리고 자기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승리도 이 전쟁에서 맛 볼 수가 없어요. 맛 볼 수가 없어요.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을 하나님의 뜻 이루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서 사는 것을 주님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사는 삶 보다 훨씬 더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승리를 맛 볼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들이 승리를 맛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 승리를 위해서 고난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부단히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 자기 자신의 욕망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꿈도 부인하고 육체의 욕심도 부인하고 자기 사랑도 부인하고 세상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신의 부패한 욕망도 부인하고 자신의 소유도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와 더불어 싸워서 주님의 은혜로 자기를 이겨 자신에게 속하기 보다는 아버지께 속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 그래서 고난을 받으면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에 자기를 바치는 사람들. 남들이 한가하고 평화롭다고 그러면서 먹고 마시고 노래할 때 오히려 금식하고 괴로워하는 아버지 앞에 변화되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끌어안고 아파하며 뒹구는 그런 처절한 고난에 자기를 드리는 사람들. 놀라운 승리를 경험합니다. 놀라운 승리를 경험합니다. 개꼬리 삼년을 뭍어 두어도 황모가 안된되매요. 그 말이 신앙의 세계에는 안통해요. 안통해요. 객고리만도 못하던 사람들도 와가지고 주님 믿고 변화되고 나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지 몰라요. 그죠?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 같은 사람 아니에요. 예전에는 너와 나에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내게 말 할 수없이 유익한 나의 신복이라고 표현했던 사도 바울에게 사랑받던 그 오네시모를 생각해보세요. 그런 사람이 돼야 되요. 뿐 만입니까? 나는 힘이 없고 연약하죠. 근데 그 섬김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신기한게 말이죠 주님이 강한 사람 들어서 강함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같이 결점이 많고 약점이 많은 사람들 올곧게 신앙 하나로 살아오지 못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걸어온 부끄러운 과거가 있는 사람들을 오히려 붙잡으셔서 흠 없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을 창피하게 만드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셔요. 하나님이셔요. 마음을 쏟아 부으며 내가 너무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뼈저리게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 배운 것이 없고 능력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그 은총,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더 처절하게 의지하는 사람들, 자신의 지나간 실패가 너무나 뼈저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서 주의 은혜 밖에는 자기를 자기되게 할 것이 없다 라고 믿으며 하나님만을 간절히 의뢰하며 다시는 동일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이 몸부림치고 남보다 더 많이 섬기고 남보다 더 정결해 질라고 애를 쓰는 그런 사람들의 진실한 몸부림이 있기만 하면 주님이 얼마나 많이 축복해 주실지 몰라요. 얼마나 많이 축복해 주실지 몰라요. 후회해도 다 쓸데없는 일이지만 저는 지금도 가만히 생각하면 20대 때가 너무 후회 되요. 제가 26살에 인격적으로 주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고 목회에 길을 들어서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일찍 21살 때에 회심을 했지만 5년 동안의 그 소중한 세월을 너무 주님 형식적으로 믿으면서 소홀하게 보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교회에 나오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 나이가 그저 스물 하나, 스물 둘 뭐 이러면서 그렇게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시간 마다 눈물을 닦으며 은혜를 받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 정말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요. 저맘때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는데. 그렇게 보낸 한5, 6년의 세월 동안 지금 그 형제, 자매들처럼 주님을 전심으로 추구하고 자기를 정결케 하고 그리고 지성을 연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연단되고 주님을 추구하는 거룩한 삶에 매진했더라면 아마 여러분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큰 그 영혼의 유익을 저를 통해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셨을 텐데. 주님은 많이 주시고 싶으시지만 제 자신은 써금써금한 도구가 되어서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게 그렇게 마음 아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 황금 같은 날들을 주님 앞에 낭비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배가 더 내 자신에 과거에 대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야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있어서 오늘이라는 날이 무슨 날입니까? 여러분에게 있어서 저에게 있어서 즉, 우리에게 있어서 오늘이라고 하는 날은 바로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에요. 그렇잖아요. 우리에게 있어서 오늘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죽어갔던 사람들이 그토록 몸부림치도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 바로 우리의 오늘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어요? 목표 없는 것 같이 그 많은 시간을 자기 위해서 쓰고 주님을 위해서 쓰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는 너그럽고 주님을 위해서 인색하고 자신의 육신적인 소유나 이 세상에 있어서 성공에 대해서는 그 진보 여부 대해서 민감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성취 여부에 대해서는 둔감한 방식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라고 말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명은 생명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에요. 우리의 삶은 그 사명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 사명을 향해서 우리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그리고 우리가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우리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날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전사와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온몸을 스친 수많은 칼자국들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빛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편에 나온 바와 같이 그가 자기의 수고한 것을 만족히 여길 것이라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두고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도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는 뼈아픈 눈물을 흘리며 뼈아픈 고통을 지불하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뼈저리게 부르짓으면서 십자가에 죽어가셨지만 하늘에 오르셔서는 당신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구속의 사건을 바라보며 만족히 여기실 것이라고 성경이 예언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하루를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처럼 오늘 살아있지 못하고 아쉬움 속에 몸부림치도록 살고 싶었던 오늘을 접고 어제 죽어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오늘을 살아야 되요. 그래서 그들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일, 은혜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주시는 법이 없는 그 사명을 향해서 전심으로 달려가는 그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러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난이 많겠어요? 그죠? 얼마나 고난이 많겠어요? 그 고난을 이기는 길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우리를 위해 육체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는 것이다. 갑옷을 삼는 것이다. 우리 모두 갑옷을 입고 전쟁에 나가 본 적은 없지만은 그러나 갑옷을 보면 우리는 쉽게 그 갑옷이 전쟁에서 어떤 용도로 쓰여 졌을 것을 아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본 갑옷은 이렇게 그 비늘과 같은 그 금속 조각을 이어서 만든 갑옷이었습니다. 서양에서도 그런 갑옷을 입었지만 때로는 가슴 같은 데에는 하나의 통으로 된 흉배 같은 것들을 붙였습니다. 때로는 금속으로 된 가느다라고 질긴 강한 줄을 여러 가닥으로 꼬아서 온 몸을 감싸 으로써 적의 흉기에 자기 자신을 상하지 않도록 보호했습니다. 커다란 창 같은 걸로 말을 타고 달려오면서 찌르는 그 공격이야 피할 수 없었겠지만 스치는 칼날이나 스치는 화살촉을 막기에서 충분했을 것 입니다. 만약에 그 갑옷이 아니라면 스치는 칼날 하나에도 충분히 동맥이 절단 될 수 있고, 그리고 그 깊이가 얼마나 되겠어요? 그 까짓것 칼이 한번 스치고 지나가는데. 그리고 그 한번의 칼베임은 곧바로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었을 텐데 갑옷은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육체의 손상으로부터 자신을 훌륭하게 방어하는 아주 소중한 방어용 장비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갑옷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살려고 할 때 이세상이 우리를 버려둡니까? 우리들이 주님을 닮아가려고 할 때 그것이 거저 이루어지는 일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 줄 알아서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분투하며 노력하며 애쓰고자 할 때에 그 일이 거저 이루어집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공격이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야비할 정도로 집요한 악한 영들의 공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노리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많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마음에 쉽게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완수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상처를 잘 받는 것을 그저 자기 자신이 예술가적인 탁월한 감수성에 충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그것도 일종의 패역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저는 요새도 그런 생각을 해요. 이사람 저사람 만나고 이런저런 일 소용돌이 속에서 몇 달을 지내면서 감사한 것도 많지만 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야, 나는 이렇게 사람이 참 너무 잘잘하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내가 며칠 전에도 혼자 이래가지고 어디 큰일을 하겠냐. 그러면 저 속에서 또 누가 큰일을 너한테 맡기겠냐. 아직 멀었어요. 아직 멀었어.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에 영혼은 겁 없겠네.
어떤 사람이 그렇게 노래할 수 있어요? 바로 그런 사람,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며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에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그런 소망을 가진 사람이란 말이죠. 이건 끝임 없이 온전하게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쫓으며 살려고 하는 나의 마음을 그렇게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흔들어 놓는 거예요. 그거 그 마음이 그런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건 벌써 연초에 마음지킴의 교리에서 이미 다 집고 간 이야기 아니에요. 지금 뭐 자세히는 못하지만 하여튼 그건 벌써 근본적으로는 다 집고 간 이야기에요. 그 집요하게 공격을 하는 거죠. 그때에 그것은 모두 마치 전쟁터에서 군인이 맞붙어서 칼과 창을 부딪치며 불을 번뜩이며 싸우는 접전에서 스치는 칼날과 같은 거예요. 그때 갑옷이 없으면 그 칼날, 잠깐 스치는 칼날 하나에 아 그게 뭐 창을 찔러서 그 창끝이 허파를 뚫고 등뼈를 깨뜨리고 나와야지만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에요. 손목만 베어도 동맥이 끊어져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거예요. 스치기만 해도. 그때 꼭 필요한 것이 뭐냐면 갑옷이에요. 이게 얼마나 그림 같은 묘사에요. 그 갑옷이. 그 갑옷이. 그래서 갑옷, 갑옷이 갑옷 없이 팽개치고 다니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만 말만 하면 상처를 받아요. 그 그리고 그냥 상처를 받았다고 막 그러다가 또 한참 있다가 하나님이 치료해주셨대요. 그 사람의 생애 전체, 그러다가 조금 있다가 또 상처받고 그래서 너 이 지상에 살 때 뭐하다 왔냐? 상처받고 치료 받고 치료 받고 또 상처 나고 상처받은 다음에 또 상처받고 치료받고 그러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게 뭐 주님의 일 한거에요. 그냥 혼자 쓰러졌다 넘어졌다 쓰러졌다 넘어졌다 그런 거지. 인생을 낭비한거지. 그래 안돼요. 그래서 너무 깨지기 쉬운 그릇, 그 그릇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적합하지 않아요.
(예화) 언제 한번 저기. 거기가 어디냐. 수안보가 어딘가를 내려갔는데 목회자 세미나 때, 목회자 세미나를 하고 내려오는데 거기서 바로 도자기 공장에서 경영하는 호텔이에요. 거 보니까 주스를 손님들이 오면 주스를 이렇게 따라주는 유리그릇이 예쁜 개 하나 있어요. 그래서 그거를 하나 사다놓고 집사님들이 오고 목사님들이 오시면 거기다가 주스를 따라 야 이거 기분 좋게 주스를 이렇게 한잔 따라주면 너무 예쁘고 좋아요. 그래서 하나 놓고 한 한달 썼나? 녹차를 끊여서 살짝 부었더니 짱 하고 금이 가서 깨지는 거예요. 그 후로 부터는 다시 그런 그릇은 안삽니다. 플라스틱, 얼마나 좋아요. 화나면 집어던져도 안 깨지고. 보기에 좀 그렇지만 말이죠, 튼튼하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근데 그냥 그렇게 잘 상처를 받고 그게 결국 뭐냐 하면 갑옷 벗고 다녀서 그래요. 갑옷 벗고. 갑옷 벗고 다니면 강한 사람이 없어요. 근데 그 갑옷이 뭐라는 거예요? 예수의 마음이라. 그러면 그게 무슨 마음이냐? 육체로 죽임을 당하신 예수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무슨 뜻이냐 하면 그러한 공격을 받을 때 아프잖아요. 아플 때 뭘 생각 하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지.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의 육체를 버리시고 죽임을 당하신 그 뼈저린 고난은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고통에 비할 수가 없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뼈저린 고난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신명을 다 드려 우리를 위해서 죽임 당하신 그 십자가에 고난에 비하면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 고난인가. 그리고 이 고난이 내게 있어서 뼈아프고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걸어가는 나의 길이 외롭고 한없이 고생스럽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으니 내가 어떻게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마다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마음을 가지면 그런 공격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킬 수가 있다는 거예요. 지킬 수가 있다는 거예요. 일제시대 때 그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어떻게 그 치열한 옥고를 치루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저는 그 분들의 그 순교 수기를 한 때 탐독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몇 가지 기억나는 형벌 중에서 그 악랄한 형벌이 그 사람을 매달아서 이 인구를 불에다가 깊이 시뻘겋게 지저가지고 그래서 목서부터 시작해가지고 가슴 아래까지 지저내리는 거예요. 그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그 안이숙씨 쓴 그 수기에 보면은 말이죠 사람들의 살짓는 냄새가 그 가득 했다는 거예요. 살을 짓는 그 인두로 살을 짓는 그 냄새와 비명소리와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놓고 그 고추에다 물을 좀 타가지고 코에다 드리 붓는 거예요. 그건 그래도 좀 낫죠. 커다란 뺀지를 가지고 손톱을 하나씩 다 뽑아버리는 거에요. 더 악랄한 것은 눕혀 놓고서 칼로 등을 벗겨서 소금을 뿌리는 거에요. 근데도 그들은 이겼어요. 견뎠어요.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견뎠어요. 그 이기고 견딘 사람이 원래 그 사람들이 참을성들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러냐 아무도 그런 사람 없어요. 어떻기 때문이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아니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라고 하는 이 예수의 마음으로 갑옷을 삼은 그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그 순교의 길을 가도록 만들었든 거예요.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나는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런 환난의 날이 오면 그렇게 장엄하게 신앙을 지키면서 순교의 길을 갈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대다수는 아니겠지만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왜? 날마다 날마다 매순간마다 매순간마다 자기 자신의 존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빗진 생애이며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렇게 주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주와 함께 죽으면 다신 사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라고 하는 그 부활의 영광스러운 소망, 그걸 가지고 살아 갈수 있을 것이다 이거에요. 살아가게 해주신다 이거에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많이 변해도 주님의 마음으로 갑옷을 입은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는 그 감화가 이길 수 없으리 만치 세상이 강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런 성도들은 세상의 죄가 관영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그늘 밑에 살기를 원합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서 죄 사함을 받기를 원하고 그 그늘 밑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이 고난을 당하고 아니면 안일한 삶을 살고 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 문제는 누구를 위한 삶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고난인가? 이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수 있다면 이 고난을 위해서 치루는 희생은 그 고난을 통해서 성취되는 그 훌륭한 승리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라고 하는 고백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커도 주님이 받으시는 그 영광이 고난보다 크다면 자신의 고난을 사소하다고 생각하고 오늘 하루를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사는 사람들, 항상 통곡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부여잡고 그리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을 마음을 가진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정말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여러분들 자신에게 주님이 허락해주신 독특한 삶의 자리에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되게 하시려고 예수 죽인 것을 평생 짊어지고 예수의 생명도 여러분 가운데 나타나게 하시려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그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그리니 어디서든지 그 사명을 잘 감당해서 주님께 칭찬을 듣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가 있습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