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죽임
(200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성화의 고난이 십자가입니다(롬8:17) 2003.3.23 주일오전 1
2. 십자가를 짊으로 죄를 이김(1):자기부인(롬8:17) 2003.3.30 주일오전 17
3. 십자가를 짊으로 죄를 이김(2):내세묵상(롬8:17) 2003.4.6 주일오전 31
4. 십자가를 짊으로 죄를 이김(3):기도의 실천(롬8:17) 2003.4.13 주일오전 43
1. 성화의 고난이 십자가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오늘부터 부활절 직전까지 이어지는 설교들은 주제는 8장17절 로마서를 통해서 십자가를 지고 죄를 이기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몇 번의 설교를 통해서 어떻게 우리들이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떻게 죄를 이기는 데 도움이 되어서 궁극적으로 우리로 성화의 삶을 살게 하느냐에 대해서 이제 살펴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는 죄와 은혜의 지배의 교리에 대한 부록쯤 된다고 생각하시면 좋겠다 이렇게 이해됩니다.
우선 오늘 우리들이 살펴볼 것은 본문을 일단 꼼꼼히 살펴보고, 그리고 고난이 무엇이고 그리고 어떻게 성화를 위한 고난을 십자가로 삼을 것인가 그리고 이렇게 고난을 당하며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이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중에서 유명한 장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감격이 나옵니다.
그일이 있기 전에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죄와 은혜 사이에서 말할 수 없이 곤고하다가 8장에 와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저희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는 구원 받은 자의 위대한 변화와 역사에 대해서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2절 13절에 와서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으려니와 만일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라고 하는 죄죽임에 관한 핵심 교리를 담은 본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비록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그래서 생명과 성령의 법을 지니고 있는신자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잔존하고 있는죄를 죽이는 죄죽임의 실천이 없이는 영적 생명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12절과 13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후 14절에서16절 까지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양자됨을 확신하게 해주신다는 내용이 나오고이제 오늘 읽은 17절과 그뒤 18절에서는 하나님의 후사로서 이런 영광의 보증이 되었다고 하는 것과 그러므로 그런 하나님의 후사로서 영광을 보증받고 있으니 우리들이 고난에 참여하여야 한다고 고난으로 그들을 초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에는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후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단어의 의미는 결론적으로 법적 상속의 권한이 있는 자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것은 맏아들이었죠. 맏아들이 가산을 물려받았으므로 법적 상속의 권한이 있는 그런 적법한 맏아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집안의 유업을 받는 법적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해 주신 것은 겨우 하나님의 진노를 더 이상 쏟아붓지 아니하시고 간신히 하나님의 자녀로 생명을 부지하도록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 파워를 우리 안에 주셨고, 적절하게 은혜의 원리를 따라서 살면 능력있는 풍성한 삶을 살도록 만드셨을 뿐 아니라 미래에 하늘의 신령한 기업을 약속 받았고, 또한 그것을 이 죄많은 세상에 살면서 맛보고 누릴 수 있도록,, 그것을 가지고 이 현세를 능력있게 하나님의 이름으 위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뒤에 보면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하면 영어에는 코헤어 라고 나오는 데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후사가 되었다. 즉 예수ㄷ그리스도는 본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하늘의 신령한 유업을 우리가 누리게 되었다는 면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같은 입장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누리시는 유업의 풍성함과 예수님이 경험한 그 천국에서의 인성의 영광스러움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것, 우리들이 앞으로 될 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신 것이기는 하지만, 그 하늘의 유업을 함께 받아 누리게 되었다는 면에 있어서는 우리와 동일한 하나님의 후사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후사가 되심에 있어 그리스도를 거론하면서, 그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된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위치는 하나님께로부터 후사가 될 수 있는 그런 특권을 부여받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이고 후사가 되기는 커녕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위에 머물러 있는 어두움의 자식들이었고우리안에는 불순종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영이 지배하는 영적암흑으로 가득찼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무지와 영혼의 어두움속에서 본성상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타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후사가 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스를 수 밖에 없는 본질상 악한 자식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하나님의 집의 모든 영광스러운 것들을 물려받을 수 있는 상속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의 힘과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 죄를 종식시키고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후사로서 누리는 모든 유업의 보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 지상생애에도 해당되는 말이고 또 어느 정도는 예수님의 천상생애에도 이 보증이 해당됩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고액의 물건을 살 때에는 선전만 듣고 구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물건을 우리 옆집 사람이 그것을 써보고 아주 좋더라고 증언을 하면 아주 기쁜 맘으로 많은 돈을 주고도 그 물건을 살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보증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그런 보증이 되신 것.. 이 지상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소 누린 놀라운 특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것 중 한 두가지만 들어 이해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셨죠. 똑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믿을 때에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실 때 성령이 함께 하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성령이 우리 안에도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과 친교하는 기쁨을 누리셨죠. 늘 아버지는 아들안에 있었고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어서 아들을 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런 하나님과의 친교가 보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삶의 목적을 정하시고 충성스럽게 사시는 동안 많은 핍박과 환란을 당하셨습니다. 고난과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수치와 고통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예수님을 멸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더 훌륭하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보증이 되므로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핍박과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리고 승리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우십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 생애속에 보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생애에서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면 마지막날에 영생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활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그것은 찬란한 영광이었고 그 영광은 천상에서도 지속되고 있으니 정도는 달라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나타날 모든 영광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후사로 만드셨을 때,, 우리의 미래의 형편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될 것이다. 그렇죠? 영광은 하나님 혼자 받으셔야 되는데 우리도 받는다니까 죄송하긴 한데 영광이 무엇인가? 오늘의 설교를 통해 영광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해 가슴에 품고 사시면 경건에 도움이 될 것..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이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영광이 나타날 때에 사람들과 이 세상의 반응이 어떠한가를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래서 이 영광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수 있는데, 1. 본체적 영광과 2.효과적 영광입니다.
본체적 영광 즉 ESSENCIAL GLORY 라고 할 수 있는 이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 삭감되거나 보태질 수 없는 영광입니다.
예화) 어느해엔가 서울시내에 캄캄한 어두움이 드리운 적이 있었습니다. 오후 3시 쯤인데 자동차들이 모두 라이트를 켜야 할 정도로 캄캄... 그때 우리는 해가 빛을 잃었다고...그러나 그 말은 거짓말. 비가 펑펑쏟아부울 때는 하늘 위에 시커먼 구름이 가득합니다. 그래도 비행기는 뜰 때가 있어....비행기를 타보면 비행기가 단숨에 땅을 박차고 올라 하늘로 비상. 불과 몇십초 안에 비행기는 5-6천 미터 상공에 치솟아우르게 됨.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뚫고 잠시후 시커먼 먹구름 속에 들어가고 몇 초동안 비행기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솟구쳐 오릅니다. 그러나 몇초후 드디어 비행기는 구름위로 치솟고 캄캄하던 먹구름은 발아래 있게 되고 그 때 하늘에 먹구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태양이 비추니까. 뛰어내리고 싶게 하는 솜털같은 하얀 구름만 있습니다. 거기에서 태양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죠. 한번도 그 해가 빛을 잃는 법은 없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은 모든 구름과 모든 지면 위의 방해물 위에 뛰어나 언제나 영원히 찬란하게 비치는 태양과 같습니다. 이 본체적 영광은 인간이 감히 접할 수 없는 영광이고 출애굽기 33장 20절에 의하면 이 본체적 영광에 인간이 접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되어있습니다.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이나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선지자로 부름받을 때에 스랍가운데에 가리고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는, 살짝 본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이 본체적 영광의 아주 작은 영향을 목격한 것..
이 본체적 영광은 인간에 의해 가감될 수 없는 것인데, 이 본체적 영광의 효과는 찬란한 빛과 같아서, 이 영광을 조금이라도 경험하면, 인간은 그 순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만이 그곳에 가득하시다 라는 완전한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 그때 인간은 자기가 완전한 창조주되신 하나님 앞에 티끌과 같은 존재일 뿐이며 자신은 도덕적으로도 너무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심판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생각 앞에 두려워 떨며 자비와 긍휼을 호소하게 되고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위엄과 함께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인간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부복한 인간 앞에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체적 영광
효과적 영광은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영광.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영광의 효과는 본체적 영광의 효과라기 보다는 효과적 영광의 영향력을 가리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어떤 사람들의 경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을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그것을 통해 그 영광의 주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것.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슨 소린지 잘 모르시겠죠?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하러 갔습니다. 가나안 주민들은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인데 마음이 물과 같이 녹아내렸고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셨다는 것, 홍해를 가르셨다는 것, 백성에게 만나를 먹이시고 요단강까지 말려버렸다고 하는 소문만 들었을 뿐인데도 그들은 마음이 물 같이 녹았고 라합과 같은 어떤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백성속에 들어가 사는 것이 안전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본체적 영광을 본 적 없지만, 그 본체적 영광을 본 사람들이 알려준 소식을 듣고 그 효과적 영광을 경험하게 된 것..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이런 것이 효과적 영광입니다.
예화) 하나 더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열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이 부산으로 이사를 갔어요. 부산에서 열린교회까지 매주 나올 수는 없겠죠. 물론 올 수는 있겠죠. 대구에서도 오긴 했으니까.(웃음) 하여간 어려워서 부산에서 교회를 나갔다고 칩시다. 부산에는 열린교회라는 본체가 없죠. 그 곳에서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목사님이 너무 감동을 받으셔서 “어디서 신앙을 배워 이렇게 반듯하고 내가 정말 만들고 있는 교인이 되고 있느뇨 물었을때 열린교회서 신앙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열린교회라는 본체는 부산에 없지만, 사람들이 열린교회를 칭찬하고 그 열린교회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자랑하게 되지요. 이 때 열린교회라는 본체는 거기 없지만, 효과적 영광이 드러난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서울 왔을 때 열린교회를 찾고 싶어 지겠죠. 이것이 바로 효과적 영광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영광 돌리고 살라고 할 때 그 영광은 이런 효과적 영광입니다. 그리고 효과적 영광 위한 충성된 삶이 없을 때는 충성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효과적인 영광을 받으셨는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잴 수 있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와 지식의 높고 낮음이나 재물의 다과에 의해 우리 인생의 성공여부가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 영광을 경험하고 그 영광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그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 이것이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 효과적인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 지지 않고는 효과적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에 있어 이렇게 우리들이 성화를 통해 거룩해 져야지만, 이렇게 효과적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내가 너를 찬미한다 라는 말은 곧 내가 너를 인정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을 나타내는 그 곳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는 일이 있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하는 것을 인정하며 박수를 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햐 할 것은 세상이 알아주고 박수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효과적 영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복음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대적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하는 하나님 없는 세상의 정체를 솔직하게 말한다면 세상의 어떤 사람들은 떨며 하나님께로 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강력한 반감을 가질 것입니다. 오늘 날 종교다원주의라는 용어를 들어보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상인데 모든 종교는 서로 통하고 궁극적인 것을 찾아 가는 길이 다를 뿐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라는 것입니다.
산을 비유로 해서 어떤 진리는 줄을 타고 올라가 진리를 만나고 어떤 진리는 계단을 걸어 정상에 가서 진리를 만나고 어떤 진리는 풀섶 헤치며 능선을 따라가서 만나고, 어떤 진리는헬기를 타고 올라고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진리를 만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진리를 공유한다는 것이죠.
석가 탄신일을 교회에서 축하하고, 예수님 나신 날에 절에서 축하 플래카드를 내거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종교 다원주의의 산물입니다.
이런 일을 보며 세상은 신기해 하고 불신자들은 박수를 보냅니다. 역시 사이좋게 잘 지내는 구나...역시 기독교는 아량있고 다른 기독교를 품는구나.,..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생각하는 효과적인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세상 많은 사람들 앞에 착한 일을 행해서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하시지만 거룩함을 잃은 채 빛들로 나타나기를 원하지는 않으십니다. 그건 세상이 보기에 반짝이는 빛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그리스도 예수와 동질성을 유지한 데서 오는 배교적 빛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진리에서 이탈한 것에서 온 빛,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많은 칭찬 어떻게 이렇 것들을 인정하겠습니까
세상이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인정하셔서 빛나게 해주시는 효과적 영광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우리로 인해 효과적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거룩해 져야 합니다. 거룩을 포기한 자들은 영광돌리는 삶을 포기한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대속하여 주신 자신의 몸을 짐승처럼 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날 동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그 몸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야기 하지만 자신의 영혼은 손톱만큼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음은 너무나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우리를 모두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엄격하심과 그 모든 위엄을 폐기처분해 버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복음을 이야기 한 주님이 심판을 말씀하셨을 리가 없고, 복음을 증거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 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이야기한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저도 한때는 여러분처럼 복음에 대해 무지했을 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면 비로소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있지만 그 안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해방, 그리고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지만, 여전히 복음은 하나님의 위엄 그 majesty, 하나님의 그 엄위 도 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위엄과 엄위가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복음은 한줄기 강력한 빛줄기가 되어서 오히려 그 하나님의 위엄과 온땅과 하늘 위에 높은 탁월한 위엄을 배경으로 해서 한줄기 찬란한 빛이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들의 엄위와 위엄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아 이 복음이 선명한 복음이구나,, 그래서 기쁜 소식이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에요.
그러면 우리 여기서 중요한 숙제를 하나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면 대체 거룩이라는 것이 뭔가? 거룩이 뭐길래 거룩해 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고 거룩해 지지 않으면 우리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공로를 욕보이는 것이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했길래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얼마나 충성스럽게 살았는지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거룩에 의해서 입증되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 거룩은 크게 세가지로 설명되는데, 하나는 본체적 거룩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essencial holiness 본체적 거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보다는 구별이 되는, 만물위에 뛰어난 분이시고 또 완전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적인 거룩입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속된 것으로부터 구별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카돗이라고 히브리 말로 하는데 잘라버린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속된 것으로부터 딱 잘라지고 거룩한 하나님과 관련된 것으로 거룩이라고 부릅니다.
이 상이 밖에 있을 때는 식탁이나 탁자가 될 수 있었는데 여기 들어와서 하나님의 예배에 기여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 이걸 성구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가구죠. 그렇지만 이것이 다시 고물상으로 가서 폐기처분 되어 버리면 이건 다시 가구죠. 이렇게 거룩의 개념은 분리를 의미하죠.
또 하나 거룩이 있는데 그것은 복음적 거룩입니다. 복음적 거룩은 우리가 깨끗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셔서 얻게 된, 외부로부터 덧입혀진 거룩을 가리킵니다.
거룩은 이렇게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해서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거룩한 자다 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일 속에 개입하시죠.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아주 작은 제목들에도 간섭하셔서 응답하시고 우리 삶에 간섭해 주시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웃집 아저씨라거나, 여러분 생활비 뒷돈 대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삶에 간섭하고 응답해 주시지만, 그 분 본래 정체는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셔서 이 땅의 어떤 피조물과도 동일하게 여겨지실 수 없는 전적인 타자 Holy other 완전한 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가끔 영어를 쓰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외국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적인 타자, 우리는 전적 타자는 아니에요. 우리는 전적인 타자는 아니에요. 집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다는 점에서는 타자이지만, 같이 만나고 같이 밥 먹고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같고 죄 짓는 것도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한 사람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것 아니에요. 전적인 타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에요. 그 분은 완전히 우리와 구별되는 분입니다. 그것을 인간들이 인식을 할 때, 하나님의 뛰어나심에 대한 찬송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이해하게 될 때에,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티끌같은 존재라는 것을 경헙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을 깨달을 때 보이게 되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서 말이죠.
또하나 그것은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이에요. 여기서 도덕적 완전은 우리가 말하는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관련된 것이에요.
예화) 예수 믿기 전에 여러분이 뭔 죄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하는데...나 진짜 죄 없어..그러고 살죠. 그러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 늘 부르게 되는 찬송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왜 그런게 생기는 거에요?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거에요. 감옥소 간 적도 없고, 지명수배 된 적도 없고...누가 나 때문에 피눈물 흘리게 한 적도 없어.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예수님이 얼마나 의로운 분인가 깨닫게 되는 거에요. 그러고 보니 내가 의로운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심지어 더럽다고 깨닫는 거에요. 그 전에는 자기가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어요...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어요.그리고 나니 하나님이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한다...하시며 너의 사랑도 보여다오 했을 때 제 사랑도 상당하죠 하며 이렇게 꺼내놓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
찬송) 나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찼으나 예수께는 진리와 은혜 풍성하도다
이걸 깨닫게 되는 거에요. 누가 사랑 많다고 칭찬하면 아 내가 사랑 빼면 내놓을 게 있나 했었지만.....
예화)내가 청년부 전도사때 한 청년이 고민이 있대요. 전도사님 사람들이 회사에서 자꾸 자기 욕을 한 대...전도사님 절 보고 사람들이 천사라 그래요. 정신병자죠....정신병자. 주님을 만나고 나면 그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성을 거룩이라 부르는 것이에요. 자신이 느낀 그 초월성 때문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띠끌만도 벌레 만도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가득차게 되고...하나님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도덕적 완전성 때문에 자기가 정말 더러운 죄인이라는 처절한 고백이 있게 되는 것..
하나님 살아계신 것, 거룩하신 것도 인정하겠고 그분을 가까이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데 그렇게 나는 한없이 비참하고 더러워.,...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나를 가까이 해주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이제 여기서 성화 (sanctification)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띠끌같은 존재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해도 해도 안 되고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죠. 그런데 지금 내가 거짓말 치고 싶은 거 그건 통제할 수 있죠? 지금 내가 세속적 삶을 살고 싶은 거 그건 통제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단번에 건져 내셨어요.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아무 한 일도 없어요. 그러나 우리를 죄에서 그런 식으로 건지셨지만, 아직 남아 있는 죄에 대헤서는 그런 식으로 건지시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다메섹에서 그렇게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 바울이 뭐라 그래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Oh! miserable man that I am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겠느냐? 그 해결은 뭐에요.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끊임없이 죽이면서 죄를 죽이면서 성취되는 것이에요. 그걸 명심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 성화가 바로 이렇게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띠끌같은 것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어. 본능적으로 부패성을 띤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의 맘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정욕, 범죄하려고 하는 우리의 욕구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성령님의 역사에 참예함으로써, 주님이 우리를 계속 순결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에 영향을 줌으로써 만들어 가시는데 이런 것들은 반드시 우리의 순종을 도구로 하십니다.
여기서 고난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다 할 때 이 고난은 무슨 순교적인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되기 위한 노력에 뒷따르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끊임없이 죄와 싸우고, 그것에 따르는 많은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과의 싸움이며 몸의 행실을 죽이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 싸움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희생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싸움의 주체는 교리적으로 성령님이시지요. 성령님 만이 우리안의 죄들을 죽이실 수 있죠. 그러면 성령님이 고난이지 왜 우리가 고난입니까. 그러나 성령님이 홀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고난을 동반합니다. 그런 고난을 모두 감당하면서 나아가는 이 모든 힘이 어디서 오는가, 이 힘은 십자가화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confirm to Jesus Christ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이 이치가 십자가라고 생각하며 질 때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에 이르는 핵심적 비밀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냥 살아요. 죄는 결국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짐승처럼 살면서도 돼지처럼 행복한 사람 많아요. 그것이 우리의 이전 삶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못 살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요. 구원 받은 자녀로서 이렇게 살 수 없다.....구원 받기 전에는 왠지 이게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죄를 지으며 기쁨 누리고 살아도 왠지 이게 전부는 아닐 것 같다. 견딜 수 없는 허무함이 내 안에 있다. 그 정체가 대체 뭘까? 바로 여러분이 예수 믿게 된 한 동기 아니에요? 세상으로 충분했다면 여러분 중 아무도 예수 안 믿었을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을 넣어 주셨어요. 그것들이 어느 순간 극대화 되어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으로 바뀌는 것이에요. 그때 성령님께서 복음을 들려 주시고 깨달음 주셔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 아니에요.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라고 하는 화란의 신학자는 말하기를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어요.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고 또 한편으로는 죽어라고 하나님 얼굴 피해서 도망하려는 본성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자가 훨씬 우세하죠.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가 죄 아래 있다는 걸 깨닫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하나님 사랑 잃어버리고 이렇게 살 수 없다...그럴 때에 잠자고 있던 강한 작용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에요. 율법의 송사와 양심의 가책들... 하나님 거룩해 지고 싶어요. 하나님 사랑 받고 싶어요. 그런데 율법이 한 죄를 생각나게 합니다. 니 주제를 알아라. 니가 이런 죄를 지은 놈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짐승이라도 이런 죄는 안 짓겠다....우리를 양심의 법정에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때 양심은 율법의 편을 들어줍니다. 그래..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니 주제에 어떻게 하나님을 부르겠냐. 어떻게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 단정한 척 나와 뻔뻔하게 앉아 있니? 은혜를 달라는데 너라면 주겠냐?
이런 송사가 어떤 때는 너무 강하게 다가와 자살을 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고난이죠. 아주 굉장한 고난이죠.
난 깨달았어. 난 그런 것도 다 뿌리치고 양심이 아무리 방해해도 나는 하나님 찬양할래....탕자처럼 방황하는 삶을 끝내고 하나님의 집에 돌아가고 싶어...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는 그 죄가 내 안에 남아있는 거야. 그 집착이 남아있는 거야. 이것이 또 나를 강력하게 옛날로 돌아가도록 잡아당기는 거야. 이 힘이 너무 세서 때로는 우리의 각오와 결단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더 큰 양심의 가책에 빠지잖아요. 그것과 더불어 막 싸우려 할때....짐승처럼 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거룩해 지려 노력하면 그 고난을 겪는 거지요.
또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지성과 의지 정서가 잘 화합하며 우리 속에 존재했어요.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나서는 이 세 개가 우리 속에서 서로 싸우는 거야 그래서 생각은 이렇게 거룩하게 살아. 그런데 마음이 난 싫어. 그러면 또 의지는 의지대로 난 이렇게 해야 돼...속에서 분열이 일어나요. 어떤 때는 반대 경우....어떤 때 정서는 하나님을 따라가...이러는데 의지는 싫어....하며 옛삶을 되풀이해/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인 듯 느껴져. 그래서 어떤 안식도 없는 거야. 영혼은 간절히 그 하나님을 추구하며 애를 써...그러며 아 간절히 기도를 길어내고 간헐적으로 아니라 지속적으로 기도해서 죄를 몰아내야지 영혼은 뜻을 정했어. 마음은 정했어. 그런데 오랫동안 살아온 이 게으름이 협조를 안 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안 따라와, 그 둘 사이에서 고통스러워요. 어떤때는 육체는 해. 새벽기도 일찍이 나왔는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싶은 생각이 없는거야. 그냥 엎드려 딴 생각하다가 가는거여. 예배에 나와서 은혜를 받아야지 그러구 육체는 나왔는데 영혼이 싫증이 나는 거야. 아이씨. 맨날 같은 이야기...길고 짜증나고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듣는 거 보니까 뭔가 있는 거 같기도 하고...그러면서 영혼이 협조를 안해줘. 그 뿐입니까? 끊임없이 쉼없이 죄많은 이세상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고 그렇게 만들어요.
찬송) 속의 근심. 밖의 걱정. 늘 고생하여도...
이세상 온갖 시험 내맘을 흔들고 저 악한 원수 들이 안팎에 있으나...
육신의 질병. 연약함.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무너짐. 경제적 결핍 시련 환란......나하나도 내 안의 있는 나를 감당할 수 없는데...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이 밖에서 몰아닥쳐요. 거룩해지려고 하는 우리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처절하게 다가와요, 우리를....우리를 협박하고 속이면서 세상의 즐거움 낙을 줄터이니 거룩해지는 것을 포기하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속이며 다가와요. 누가 이걸 이길 수 있겠어요. 누가 이것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요. 누가?
사도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나니 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죄와의 끊임없는 싸움 때문...그래서 거룩해지기를 포기하지 않고 거룩해져서 하나님께 효과적인 영광을 돌리며 살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의 무릎에는 굳은 살이 배기고 눈에는 눈물 자국이 지워질 날이 없는 거에요. 이세상이 주는 많은 보람과 기쁨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거둘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저 보기에는 매우 불행해 보이나요? 행복해 보이나요? 행복해요.
나 얼마전 텔레비전 프로에 나가서 그랬어요. 난 원이 없다. 너무 행복해요. 힘든 거 없어요. 젤 행복한 건 뭐냐면 여러분들이 나를 별로 속썩이지 않잖아요. 아니 그렇다고 너무 교만해 지지 마시고...목사님들 만나면 교인들 때문에 피멍이 들었어요. 그런데 누가 나를 이렇게 그냥 가슴 아프게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행복해요. 정말 행복해요.
그래도 모자람은 아무 것도 없이 그렇게 하나님 은혜가운데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죠. 그러나 날마다 울어요. 매일 죽어요. 매일 죽어야 되요. 그래서 그런 많은 이점, 사랑하는 가족들이 곁에 있고, 사랑하는 교인들이 나와 함께 있고, 또 이세상에서 나를 사용하셔서 보람있게 하시고, 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 회심을 보게 하시고, 그렇게 많은 보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훨씬 좋은 것이에요. 내일이라도...주께서 부르시면 전 찬송하며 가고 싶어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끊임없이 환경이 우리를 우겨싸는 가운데도 거룩해지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제왕으로 만들어 주셔도, 죄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고 말 할 수 없어요.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잖아요. 그는 누릴 수 있는 모든 걸 누렸는데도 늘 깨어진 사람으로 살았어요. 상한 사람으로 살았어요. 부서진 마음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었어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참된 소원이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거룩해져야 했는데...밖에는 자신을 절망시키는 것이 별로 없어도 자신의 안에 자신도 용서할 수 없는 죄와 악함 하나님을 거스르는 반역들 때문에 그는 비참해질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시편에서 나는 곤고하고 슬픕니다. 나는 가난하고 괴롭습니다 라는 고백이 수시로 나와요. 그가 왜 가난해요? 온갖 부를 누린 제왕이었는데....그가 왜 괴로워요. 많은 백성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었는데...하나님이 좋은 친구들을 얼만나 많이 보내 주셨어요? 그랬어도 그는 죄많은 이 세상으로 족할 수 없었어요. 왜? 그는 거룩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거룩하고자 하면 큰 고난이 많이 생겨나요. 뿐만 아니죠. 그런 정도로는 안 돼죠. 우리는 주님을 믿었으니까. 우리 내면의 문제는 문제고...우리는 하나님 섬기고 살아야 하니까. 그런 자리에 우리를 세워주셨으니까....그렇게 살아가는것은 우리 의무고 거룩해 질 수 있는 끈이에요. 그래서 영적인 침체가 오고 환경이 어려워졌다고해서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을 헌신처럼 내던지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어두운 곳에 밀어넣는 것과 똑같습니다.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가장 회복되기 쉬운 것이에요. 주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되 성령 충만할 때만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할 때도 감당해 나가야 하고 기쁠 때 뿐 아니라 슬프고 괴로워 결딜 수 없을 때에도 감당해 나가는 것이에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지워져요. 어떤 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지워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직업, 혹은 사업, 가족 속에서 마주치는 많은 인간관계 등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이런 매어지는 것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어야해. 여러분 직장이 단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다니고 있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에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도 하나님과 관계가 있어야해.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어떻게 그렇게 관계 있을 수 밖에 없어요? 어쩔 수밖에 없어서 짊어진 관계 외에는 다 버려요. 지지 않아도 되는 짐은 버려. 그래야 져 질 수 밖에 없는 그 짐은, 그 짐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우리를 성화시키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걸 십자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거죠.
어떤 때는 우리 죄의 결과가 우리에게 십자가가 될 떄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십자가를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와 상대적 의미의 십자가로 나누었잖아요.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는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짊어지는 거 그런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자기는 죄가 없는데 오로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지게 되는 십자가 그게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의미가 다르지만 그것이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에요. 얼마전 잡지를 보니 지난 한 해만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 때문에 순교한 사람이 16만명이라고 통계가 나왔어요. 그들 중 일부는 아무 흠도 없었지만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만 죽임을 당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짐을 질때 훌륭하게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예수님과 하나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confirmity를 경험하는 거에요. 그러나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만 그런 형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적 의미의 십자가. 내가 죄를 지었는데....그 죄 때문에 난관에 처하게 되었어요. 자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제목 없고, 먹고 살기 위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너무 어려움이 많아. 그럴 때 그걸 신앙적으로 해석하면 상대적의미의 십자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짊어져요. 그 고난의 원인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따지지 말고 그 고난이 우리를 어디로 나아가게 하는가 성화의 목표에 관심을 둘때에 그 목표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받은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김없이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마치 제물이 죽어갔던 것 처럼, 한 어린양으로서 철저하게 자기를 깨뜨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 진노가 그 위에 쏟아졌기 때문이죠. 무엇을 위함이었습니까? 우리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천국가는 표 한 장을 주고 이 세상에서는 짐승같이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무엇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로 다만 즉각적인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될 뿐 아니라 성화의 길을 걸어서 또 한번 구원을 완전히 이루고 우리를 통해 효과적인 영광을 이루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위해 고난을 당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이 우리로 고난을 받으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 모티브가 되어야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짜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의 특성입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누구고 그리스도가 누군지 아는 침된 인식이 살아있어요. 이 세상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우리도 세상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세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에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것이 세상의 정체입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을 끊임없이 사랑하지만 그러나 우리 육신의 정체를 알아.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스르고 우리 마음의 법을 따라 살던 사악한 욕심의 덩어리였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그 옛 성품이 발동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우리를 감시하는 그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한 번 말했지만, 제가 아는 장로님 중에 염전을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 날이 좋으면 소금이 말라요. 그래서 소금을 가마니에 담아 배에 싣잖아요. 그런데 바다에 갑자기 하나가 떨어져요. 얼른 건지죠. 그러면 3분의 2정도는 남아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김장할 때 우리가 물에 풀면 잘 풀어져요. 안풀어져요? 잘 안 풀어지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닷물에 소금이 빠지면 불과 2-3분 만에 건져도 가마니만 남는답니다.
그래서 그분 말이 성도라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취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취한 사람들이므로 은혜에서 떨어져 세상으로 돌아가면 순식간에 세상하고 같아져 옛날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소금이 민물에서는 안 풀어지지만 자기가 온 바닷물에 풀어지면 순식간에 녹아버리듯 말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에 섞일 위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화를 위해 애를 쓰고 이 많은 안팎의 고난을 위해서 성실히 애를 쓰고 살아가는데,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럴 때만다 생각하십시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이런 죄인을 위해 당하셨다고. 그리고 나를 구원해 주기 위해 그렇게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으니 나도 이 죄와 싸우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때 놀라운 일이 영혼에서 일어납니다. 그리스도가 자신과 완전히 하나되는 경험이 주어집니다. 그 경험의 정체는 “연합”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면서 연합 누리잖아요. 그런 거 느낄 때 뭐라 고백합니까? “주 내 맘에 늘 계시고 나도 주의 안에 있어” 아니 이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강력하게 우리과 강하게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연합입니다. 사랑에 있어 하나가 되고 고난을 받음에 있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화를 위해 많은 어렴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데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느껴지고, 주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에게 고통이 되는 것이라고 느껴지는데, 이건 말하자면 어려운 용어로 “성전적 하나됨”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떡과 포도주를 떼며 이것이 몸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성전적인 하나됨 sacrimental confirmity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한없는 사랑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증명하겠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스테반의 경험이에요. 그가 참 순교자가 되잖아요? 그런데 어때요. 그들은 처음에 집사였어요. 그가 잡혀갔을 때 너 왜 예수를 믿느냐 말했을 때,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조상 이스라엘때부터 쭉~~~이렇게 설명해서...사람들이 저 놈 죽여! 하며 말 돌을 던지는 거에요. 돌이 막 날라옵니다. 그 순간에 이 스데반이 경험한 것은, 내가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데 이건 부당하다 불법이다왜 돌이 날라올까 그랬다면 순교할 수 없었을 거에요. 돌이 막 날라오는데 누굴 생각했나요. 예수님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인간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고, 나도 이런 인간들 중 하나였는데....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로 나를 살려주셨구나...그렇게 그리스도를 생각한거죠. 아니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어 그리스도를 보게 해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무리 중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내가 본다 라고 그랬어요. 그는 그 순간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경험한 거에요. 사람들이 돌을 막 던질때 하나님 저들에게 원수 갚아주세요 한 것이 아니라 주님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못 박는 무리들을 내려다보며 예수님이 했던 기도와 똑같은 기도를 할 수 있었어요. 그 이유는 거기서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하나되었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강력한 힘이 밀어닥친 것입니다.
지금도 영국가면 사람들이 화형당한 장소가 있어요. 청교도 가운데 휴레티머 라고 아주 거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메리 여왕이 그가 참된 복음을 외치고 개혁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잔학하게 핍박하다 마지막에 그를 화형시켜요. 옥스퍼드에 아직 그 동상이 있어요. 화형이 뭐에요. 태워죽이는 거 아니에요. 장작위에 매달고 거기에 불을 붙였어요. 막 타올라 갑니다. 그때 얼마나 뜨겁겠어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불에 타죽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땠는 지 알아요? 곁에 토마스 크레머라는 청교도가 있었는데 그에게 “여보게 우리는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로 이 불길 속에 타 죽거니와 우리가 죽는 이것은 역사의 찬란한 촛불이 될 걸세. 우리 모두 이 은혜속으로 들어가세” 그리고 죽어갔어요. 곁에 있는 토마스 크레머는 아주 유능한 신학자 였어요. 그래서 개혁신앙을 막 설파했었는데, 지독하게 간악하게 그를 협박했어요. 그래서 잠깐 그가 지조를 굽히고 자기 신앙에 발하는 글을 쓴거야. 이후에 다시 자기 신앙을 지키다 잡혀 순교한거야. 그때 그가 한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그가 잡혀 손을 묶였는데 손을 이렇게 내밀며 기도한 거야 “ 저를 복음을 위한 제물로 삼아주심을 감사합니다. 제발 부탁드리는 바는 내 손이 주님을 잠시 배반했으니 할 수 있다면 내 손부터 처절하게 태워주소서”
순교의 역사를 보면 신앙 때문에 순교한 모든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 이러한 하나됨 confirmity를 경험했어요. 그래서 종교개혁 이전시대의 사보나롤라 라고 하는 사람도 마지막 화형되어 죽으면서 “주께서 우리를 위해 큰 고난을 당하셨도다” 라고 고백했고 존휴스라고 하는 사람도 캐톨릭에 의해 화형당하며 마지막 남긴 말은 아버지여 저희의 죄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두 예수님이 남기셨던 기도, 에수님이 아니면 누구도 남길 수 없는 기도를 죽는 순간에 남긴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해지기 위해서, 성화를 위해서 죄와 더불어 싸우기 위해 분투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짐들을 부담스러워하고 불평하기 전에 자기를 거룩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십자가화 하며 짊어지고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의 놀라운 하나됨의 정체입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오늘날 여러분들이 죄와 더불어 끊임없이 싸울 때 환경의 송사를 이기고 율법의 송사를 이기고 환경의 끊임없는 억눌림과 분투하며 싸울 때 여러분은 혼자 있는 것 같죠. 그리고 때로는 버려진 것 같고, 하나님이 은총을 거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잠시일 뿐이고 여러분들은 그래도 거룩해지길 포기하지 않고 간절히 매달리고 주님을 의지하면, 그 십자가를 감당하는 도중에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해 주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 지 보여주셔서, 내가 주안에 주가 내 안에 있음을 보여 주시고, 모든 십자가를 능히 감당하고 거룩의 길을 걷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죄를 이기게 하시고 당신과 하나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시간 기도하실 때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까지 우리에게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고난 때로 성화따로 의무 따로 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많은 십자가는 불평과 원망의 원인이 되었고 거룩의 길에 발목을 잡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오늘도 이 십자가를 짊으로 죄를 이기고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2.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이김(1):자기부인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임이라”(롬8:17)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이긴다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이어 두 번째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특별히 큰 제목 아래서 살펴 볼 것은 이 자기 부인이라는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이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자기 부인을 통해서 죄와의 싸움에서 이겨가는데 자기 부인이 쉽지 않다는 것이죠. 자기 부인이라 해서 와이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자기 부인이 쉽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고 하니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을 것이니라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므로 이 자기 부인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든 삶에 있어 가장 처음에 실천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기 부인 없이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불가능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 없으면 죄를 이기는 삶도 불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삶 자체가 불가능해 진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말씀드리고 본론을 진행하겠습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해야할 우리의 의무에 역행하는 우리 마음의 작용이나 행동 욕구들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자기부인의 삶이 없다면 신자로서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요? 신자로서 만약 자기 부인의 삶이 없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지 알려면 신자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자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그를 해방했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를 끌러주었습니다. 이제는 놀라운 자유가 주어졌고, 신분으로 말하자면 죄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상태로 말하자면 진노아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 은혜아래 있는 자녀가 되었죠.
내적 효과 면에서는 죄의 법에 매여 어찌할 수 없던 사람이 마음에 해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신자 안에서 일어났고 그를 지배하던 원리는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사람 안에는 부패한 본성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 부패한 본성 속에 깃든 죄는 결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다시 잊어버린 그 옛날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 신자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런데 이 부패한 본성과 죄가 우리에게 끊임없는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어떤 바램을 가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바램들은 순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순종하는 데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은혜의 지배를 받아서 변화된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죠.
아직 까지도 남아있는 죄된 본성, 육적자아로부터 혹은 옛사람으로 부터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고, 하나님을 향해 대적하고 하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죄가 만들어 내는 그 일이 결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당연히 부패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무를 바르게 감당치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 솟아나서 그것이 우리 마음에 소원, desire가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더 강화되면 정욕이 되요. passion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죠. 신자에게도 이런 것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서 솟아나는 생각은 영적인 자아로부터 솟아나는 새 성품의 생각이 있고, 육적자아로부터 솟아나는 옛 성품의 죄 된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은 각각 욕망으로 변해. 그래서 계속 떠올라. 이쪽 것은 부인하지 말고 계속 살려두어야 하지만 이거는 아니다 라고 계속 부정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 없다면 육적자아에서 솟아온 죄 된 욕망이 영적 자아에서 솟은 신령한 욕망을 억눌러 우리를 모두 부패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든단 말이에요.
우리들이 거룩한 성화의 과정을 거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죄와의 싸움, 그리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기 헌신과 성찰이 필요하지만 막 되먹은 사람으로서 짐승처럼 살기위해서는 그런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자기를 가만히 내버려두면 은혜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적자아의 신령한 욕망은 죽고, 육적자아에서 솟아난 더러운 욕망과 생각들이 그를 실재적 범죄로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자기부인이 참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쉬어요. “그 뭐 그렇게 세상을 사랑해? 돈이 그렇게 좋아? 응? 아무리 벌어먹고 사는 게 중요해도 그렇지.....버려..버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남 부인은 잘해(웃음) 타인 부인은 잘해. 그런데 자기 부인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한 주간 동안 살면서, 꼭 하고 싶은데 예수님 때문에 안 한 거 있습니까? 혹은 죽어도 하기 싫어, 그런데 하나님 때문에 한 거 있느냐구요. 대답해 보세요. 마음 속으로. 그런 일이 실재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오후예배마다 게으름 시리즈를 듣는데 순종하고 부지런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들을수록 괴로워지기만 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남의 부인은 쉬워요. 자기 부인이 힘듭니다. 이것도 와이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웃음)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렇게 예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 자기를 부인할 이유가 별로 없어요.
아니, 흔히 그렇잖아요. 담배 피우는 거 몸에 그렇게 안 좋잖아요. 담배 피우는 거 죄여서 라기 보다는 몸에 안 좋잖아요. 피우지 마세요. 그런데 그렇게 담배를 피우잖아요. 그래서 피우지 말라고 권해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하는지 아세요. 한세상 얼마나 하겠다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거지 뭐. 한 오년 빨리 죽으면 되지....그게 그렇게 힘든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무엇인가 우리 내면에서 자기를 부인할 수 있게 하는 그것이 모티브가 되어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자기 부인을 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생각함으로 자기 부인의 동기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셨습니까?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그렇죠?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그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실 수 없는 분이었죠. 그런데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태어나실 때 율법아래 태어나셨어요. 그분은 율법을 초월하신 분이었거든요. 율법을 받은 사람은 모세였고, 그 받은 율법을 모세가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단지 사람일 뿐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율법과는 상관이 없고, 율법을 초월하신 분이었지만, 그러나 율법아래 죄인아래 살아가는 우리를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율법아래 태어 나셔서 그 율법 아래 살아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에게 어울리는 대접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었습니다.
본인도 그것을 거부하셨고, 이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무지와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참 하나님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 예수님께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그러면 가슴에 잘 다가오지 않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셨단 지상 생애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보이지 않는 그 사랑이,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한테 편지만 오다가 어느 날, 이 아빠가 자기 생활을 다 찍어 영상으로 말을 하고, 비디오로 편지를 보낸 것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말씀이지요.
우리에게 그 한편의 생생한 비디오,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이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은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이 바로 찬송가에 나오는 바로 그 기록이예요
예수 세상계실 때 많은 고생보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어머님이 읽던 찬송가 가사가 바로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에요. 여러분이 큰 아파트에 많은 재산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고, 삶으로 생생하게 보여준 그 비디오가 아이들 마음에 찍히는 거에요. 그것이 모든 것 보다도 더 값진 유산이에요. 여러분 자녀들이 여러분을 볼 때 예수세상 계실 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늘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부모들로 기억되고 있나요? 많은 지식, 높은 지위 없어도 예수님은 사랑했던 우리 어머니, 그리스도처럼 거룩해지길 매일 기도하며 참된 신자가 되게 해달라고 눈물 흘리던 우리 아버지, 그렇게 여러분 자녀의 가슴에 아로새겨지는 그것이 이 세상 어떤 교육학자 이론보다 뛰어난 거에요. 왜 아멘이 없나요? 그걸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낮아지셨거든요.
낮아지면 자기 부인 합니다. 그런데 교만하니까 자기 부인을 못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생명주기 위해 오신 그 분이, 하나님의 생명 자체이신 그분이 죄도 없이 무법한 자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하나님이었지만, 사람의 몸을 취하셨기 때문에 춥고 배고프고 아픈 것이 그 분에게 모두 고통이었습니다. 다만, 그 고통이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고, 보다 더 높은 뜻을 위해 사셨던 것이죠.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홀로 그 밤에 간절한 기도로 매어 달리셨습니다. 진액을 모두 쏟아내는 기도로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흘러내리는 기도로 그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예수님이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던 것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그것을 지지 않고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죠. 그렇게까지 낮아지셨기 때문에 성경은 말하기를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그것이 예수님의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율법의 요구대로 복종하셔서 사형을 선고 받으시고, 한 번도 소원해져 본 적이 없으셨던 당신의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분리를 경험하고 그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앞에 간절히 부르짖지 않을 수 없기까지 그렇게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낮아지신 것이죠. 그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인간이 복음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 줄을 알면 일평생 그는 내 것이 내 것이고, 내가 나입니다 그렇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의 증거는 이런 사실들을 잘 증명해줄 수 있는 웅변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기 맘대로 살다가 어느 순간 복음을 듣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많이 깨뜨려 졌습니다. 그 때는 반드시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그 안에 있게 마련이죠.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깊이 깨뜨려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절하게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이죠. 그렇게 비참하게까지 낮아져서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지신 고난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때가 자기를 부인하기에 가장 좋은 때에요. 쉽지요. 이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늘 생각하며 살아가게 하는 이것이 자기 부인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 부인에 힘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러면서 매일 살아가는 것이에요.
두 번째로, 자기 부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런 낮아지심이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율법을 초월한 분이신 그가 율법 아래 태어날 이유가 있었습니까? 율법 아래서 정죄를 받아야 할, 그 율법의 요구대로 고난을 당하실 이유가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모두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 멸시와 천대와 욕을 당하시고, 수난을 당하신 그 모든 것들,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었고 그것은 모두 우리를 위한 희생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이 우리를 위한 철저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그 형벌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영적으로는 이미 죽어있는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후사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을 밟고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리 된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데는 반드시 아픔과 희생이 뒤따라야 합니다. 왜? 무언가 우리 인간이 하고자 하는 것을 가로막힐 때 인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고 죄의 소원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걸 못하게 가로막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 됩니다. 그러므로 희생과 고난 없이, 결코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고통당하고, 예수님을 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고통당하지 않기 위해서 대신 예수님을 아프게 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각각 그 행한 대로 보응 받을 것입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은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예외 없이 우리의 의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의무를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무거운 짐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바보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 의무가 뭔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대개 그 집안에 하나님의 자녀가 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종이 하는 사고방식이에요. 그 중에서도 질적으로 아주 나쁜 종, 그저 밥 얻어먹기 위해 사는 아주 나쁜 종....종도 좋은 종이 있고 나쁜 종이 있어요. 그렇잖아요?
예화) 구약시대에도 종들이 있어요. 종들이 팔려오든지 해서 종이 되잖아요. 그런데 종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 종이 되었는데, 희년이 되면 이제 해방을 시켜주죠. 다 해방이 되는 데 그 해방이 싫다는 종이 있다구. 왜냐면 처음에는 종으로 팔려와 그 집 주인을 섬겼는데 섬기다 보니 그 종이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돼. 그래서 희년이 되었는데도 주인에게 매달리며 내가 주인을 떠나서 어디 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주인님이 좋고, 주인님을 떠나 자유인으로 살기 보다는 종으로서 가족처럼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종은 아주 착한 종이에요. 나쁜 자식보다 뛰어난 종이죠.
그런 식으로 종의 입장에서 의무를 하나님이 주어주는 무거운 부담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질적으로 아주 나쁜 종이 생각하는 노예적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뭐냐? 의무가 뭐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기 위해 택하신 놀라운 은혜의 도구에요. 포장을 보면 그 내용물이 소중하다 아니다 알 수 있죠.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제품이 하나도 좋지도 않은데 상자곽만 그냥 금빛으로 찬란한 그런 제품도 있죠. 과대포장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도 있지만, 쓸데없는 것이죠. 진짜 좋은 제품은 좋은 곽에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어요. 그래서 선물을 받아도 예쁜 오동나무 상자 같은 거 받으면 기분 좋잖아요. 뚜껑을 열었는데 거기서 호떡 같은 거 나올 리 없잖아요. 그죠? 아주 고급 과일이나 인삼이나 그런 거 나오잖아요.
우리의 영혼을 싸고 있는 포장이 뭐냐면 그게 바로 마음이에요. 그래서 죄가 우리의 영혼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래서 언제나 어딜 통하느냐 하면 마음을 통하는 거에요. 마음이 견고하고 은혜 안에 꽉 잡혀 있을 때에는 단단한 포장으로 영혼을 싸고 있는 거 같아서 죄가 와서 가끔 두드리고 발로 차고 그래도 영혼은 안전해요.
그런데 마음이 다 부서져서 해체가 되어 버려. 마음을 지키려고 하질 않아. 은혜도 없어. 그러면 영혼이 노출이 되어 버린 거에요. 마음을 통해서 영혼으로 쑥 들어가 영혼을 부패시키는 거죠. 의무와 신앙이 이런 관계에요. 의무는 신앙을 싸고 있는 껍질이에요. 포장하는 상자와 같애. 그래서 의무를 모두 져버려. 뭐 안해..하기 싫은데 어쩔거야 배째라 정신으로 다 집어치워버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신앙이 알로 이렇게 노출되는 거에요.
예화) 너무 생생한 비유지만 머리가 굉장히 딱딱하거든요. 지나가다 기둥에 부딪혀서 쾅 소리가 나서 벽이 흔들리는 데도 안 깨집니다. 워낙 돌이라서 그렇겠죠. 인간의 머리의 세기라고 하는 것은 뭐 이 센 것은 강도는 대단해요. 우리 살면서 많이 부딪치잖아요. 엊그제도 제가 저기로 나오면서 한번 부딪혀가지구, 아, 별이 얼마나 나는지.....그런데 만약 상상해 보세요. 만일 이게 없어. 그리고 하얀 순두부 같은 골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봐요. 너무 비유가 끔찍하죠. 그 순두부 몇 번 쏟아졌을 거야. 한번 부딪치는 그날이 죽는 날이에요.
의무가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소중할수록 우리는 의무로 똘똘 뭉친 사람이 되어야해. 그러면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에요. 언제는 설교할 때 그 의무 감당하는 거 가지구 안 된다구 그러더니... 맨날 하는 말이 예배 나오면 뭐하냐, 심지어 새벽기도 나오면 뭐하냐....그래요. 맞아요. 이렇게 답변을 드리고 싶어요. 의무 자체 안에는 우리 영혼을 부흥시키거나, 침체에 빠뜨리거나, 영혼에 생명을 주거나 죽음을 주는 그런 요소가 의무 안에는 없어요.
그 의무를 통해, 믿음의 원리로 그 의무를 행할 때 의무를 행하는 과정이 우리 마음과 영혼에 영향을 주어요. 그 영향이 신령한 영향일 때에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새롭게, 리프레쉬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죄를 사랑하던 마음을 털어버리게 되고 불순종하던 마음을 포기하게 되요.
그러니까 제일 나쁜 것은 의무를 형식적으로 행하는 것이죠. 이런 것을 우리 영혼을 보호하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돼. 주일날 꼬박 예배를 나와, 그런데 나올 때부터 그의 마음의 소원은 끝나고 집에 가는 거야. 그리고 무슨 내용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냐 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 시간의 길이야. 그러면 안돼요.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졸고 이러는 거 이거 굉장히 나쁜 겁니다. 이런 게 죄와 타락의 벼랑 끝에서 잔재주 부리는 것이에요. 언젠간 떨어질 겁니다.
예배를 드리면 변화되지 않으면 근본적 원인을 살피고 왜 하나님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만나게 해주시고, 그렇게 변하게 해주신 이 의무인 예배가 나에게는 몇 달을, 심지어 몇 년을 다녔는데도 그런 좋은 영향을 하나도 못 줄까? 그러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입증해야죠. 그 예배가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방법이 아니라고 부인하던가 아니면 내가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던가. 예배시간에 와서 말이죠 그 공상이나 하다 돌아가면 안 돼요. 졸고 말이지....옆에 있는 사람도 같은 사람이에요. 옆에서 조는데 가만 두냐구요. 툭툭 쳐서 안 된다 니가 졸아서 이 예배가 하나님 앞에 열납이 안 되면 책임 질거냐 해야죠. 남의 일이 아니라구요. 아니 하나도 우습지 않은 일인데 왜 웃어요. 옆에서 자면 깨워요. 정신 차리고 말씀 들으라고...남의 일에 왜 간섭이냐 하면 그게 왜 남의 일이냐고.
의무를 형식적으로 이행하는 것은 아주 나쁜 거에요.
죄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이거든요. 그런데 그 죄는 의무를 감당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은? 자기를 직접 공격하지만 않으면 죄가 싫어하지 않아요. 죄도 그 정도는 이해해요.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그 형식 속에다가 잔뜩 죄를 키우는 거나 똑같다구요.
그런데 그거보다 더 나쁜 것이 있어요. 그것도 안 하는 거.
한번은 내가 전도사 땐데, 한 청년이 주일 낦 예배를 안 나왔어요. 그래서 무슨 일 있었냐했더니 아무 일 없었대요. 그런데 왜 안 나왔냐니까 놀러 갔대요. 그래서 왜 그랬냐니까, 예배드리러 와봐야 자기가 전혀 은혜를 못 받으니까, 마음에도 없이 예배드리면 뭐하냐 해서 놀러갔대요. 그런데 그건 예배당에 와서 형식적으로 예배 드리는 것보다 더 나빠요. 왜냐하면 형식적이라도 의무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눈치라도 보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걸 버리는 건 하나님을 막보는 거에요. 하나님께 어쩔거요? 그러는 거에요.
눈치를 보는 사람은 하나님이 고치시려 하지만, 그렇게 막보는 사람은 하나님이 때리는 수밖에는 없어요. 뭐 사랑과 긍휼....좋아하고 계시네. 막보는 사람에게 왜 하나님이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나요? 하나님께 당신 뭔데. 내가 싫다는 데 왜 자꾸 참견이야. 냅 둬. 난 나 가고 싶은 데로 갈거야. 웃기지 마슈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긍휼을 베풉니까? 긍휼을 베푸신다면 그 사람을 때리는 수밖에. 막보고 가는데 그 길을 확 열어주는 거 그게 긍휼이겠냐구요. 그게 오히려 하나님 심판이지. 형식적으로라도 교회오고, 기도 안 되도 형식적으로라도 새벽기도 나오고 형식적으로라도 봉사생활 하는 것은 하나님 눈치라도 보는 거에요. 그런데, 싫어 건들지마, 건들면 터져. 나 폭발해. 이건 사람들은 그 사람 무서워 하지만, 하나님이 볼 떄는 이건 막 나가는 거에요. 특별조치해야 할 인간이죠. 그러는 동안 자기 영혼은 의무의 껍질을 모두 벗어 버린 가운데 알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에요.
이 두개골이 없어지고, 연두부 같이 골이 노출되어 있는 거에요. 지금은 혼자 까불고 살지만 가다가 문 모서리에 한번만 부딪치면 그는 즉사야. 죽는 거에요. 게으름에 대한 설교 아무리 하면 뭐해요. 반응을 보여야 될 것 아니야.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깨어난다 이거에요. 자신이 우리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그 희생의 터 위에 비로소 나의 구원도 가능했고, 성화도 가능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자기 부인이 없다는 사실을 아침마다 깊이 고민해야지....게으르게 사는 여러분들을 보면 분노해요. 분노. 누구든지 다 그렇게 살고 싶어요. 오전예배 달랑 드리고 가서 집에 가서 텔레비전이나 보며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면 오후 밤 늦게까지 교회서 청소하고 봉사하는 것 보다 쉬워요. 누구든 그게 쉬워요. 그런데 그렇게 안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섬기고 그 분을 닮아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자기 속에 그런 소원 있어도 그걸 부인한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그 의무는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는 틀이야. 그래서 의무를 수행하면서, 그것을 믿음의 원리대로 행해서 그 의무를 수행하는 모든 과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실천이 됨으로 자기 마음과 영혼에 계속 죄를 죽이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작용을 경험하면, 그 의무를 통해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난 여러분에게 묻고 싶어요. 예수님 사랑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믿지요? True christian이 되고 싶지요? 그런데 목숨 건 일 있어요? 생명 걸고 나는 이 일을 수행하는 게 목표다,. 그런 일이 있냐구요?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파도치면 치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도는 삶 거기서 정말 우리의 신앙을 안전하게 보전할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이 떨어지거나, 하나님에게서 이탈될 때에 거기엔 반드시 의무로 부터의 이탈이 있거든요. 그 의무로 돌아와야 해요. 그 의무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 우리 신앙과 영혼이 다시 사는 거에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으면 결국 순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순종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데, 가장 강력한 효과를 미치게 되는데, 우리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순종은 우리가 늘 잘 하는 일, 고통 없이도 순종하는 그 일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데 적게 효과를 미치고 많은 고통과 아픔을 지불해야지만 획득할 수 있는 순종을 통해서, 우리를 많이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화) 처음에는 주일을 지키기가 너무 힘들어. 하루라도 더 벌어먹어야 하고, 교회 나온다고 생각하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가게 문 한번 닫으면 돈이 몇 십만원 날라가는데...직원들 하루 놀리면 돈이 얼만데....그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러다 신앙이 들어갔어. 갈등 막 하고 괴로워하다 순종했어요.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오는 거에요. 자기가 진짜 신자가 된 것 같은 거야. 그런 많은 유혹을 뿌리치고 주일을 지키게 되었으니 그 결단 내린 것 자체가 그 사람 삶을 견고하게 해 준거야.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이제는 주일 꼬박꼬박 지켜. 그런데 주일 지키느라 몇 십만원 날라가고, 일도 안 시킨 종업원 월급도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는 어떠냐 하면 지금도 그런 순종하려면 처음 같은 그런 희생을 치르고 있는 거 아니에요. 어쩌면 모든 물가가 올랐으니, 더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사업도 더 커졌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주일 날 와서 예배 드릴 때,맨 처음 자기가 믿음없어 도저히 못 지킬 것 같을 때 결단을 하고 주일을 지켰을 때에 자기를 거룩하게 하던 그 효과가 똑같이 주일일 지키는 데도 안 나타 나는 거에요.
이게 아주 중요한 비밀이에요. 무슨 얘기냐 하면 처음에 도저히 못 할 거 같았을 때 우리 안 에 죄가 있었는데, 순종함으로 그 죄가 상당히 죽었어요. 그런데 그러면서 매주 주일을 지켰거든요. 매주 엄청난 물질적 희생을 치르면서 주일을 지켰는데, 그러는 동안 내 안의 죄는 그 거룩한 결단의 순종이라는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은 죄야. 그래서 결단했고, 그렇게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서 반란을 일으켜, 야, 다시 주일 날 놀자 데모해도 이 사람이 들어주지를 않아. 그런 죄는 벌써 죽었어. 그래서 이 안은, 그걸 그냥 내버려 두면서도 여전히 그 주일을 지키는 것을 쓸모없이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적응력이 생겨난 거야. 이 안에서.....이해 되죠?
그러면 이제 뭐냐하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주일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의 거룩의 진전이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뭐가 필요하냐? 또다른 의미에서, 더 온전해 지게 하는, 온전을 지향하는 순종이 필요해요. 그것이 그 사람에게 또 거룩한 삶의 자극제가 돼. 항상 예전의 한계를 넘어선 또다른 종류의, 자신이 찢어지는 아픔을 동반한 순종이 되어야 한다 이거야. 그러니 이게 계속 희생을 요구하죠. 순종이.....그런거라 이겁니다.
그래서 멍청한 사람이 뭐냐면 자기는 굉장히 많이 희생을 해서 고도의 신앙에 도달했으므로 이제는 아무 고통없이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그거 아니에요.
그러므로 신앙이 깊어지고 은혜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아주 정교한 자기 부인이 필요해요. 아주 정교한 자기 부인이.....그런 자기 부인이 없으면 순종이 불가능한 거에요. 자기 부인이 없고, 순종이 없는 삶을 살아가면 결국 자기 부인이라고 하면 자기 부인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죄를 죽이는 것이 불가능해 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죄가 자기 안에서 다시 창궐해 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렇게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크게 두가지 때문인데, 우선 소극적으로는 죄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기 싫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생각할 것은, 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부인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어떻게 되죠? 그 죄가 주는 은밀한 즐거움이 날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은밀히 죄와 타협하고 이것을 즐기는 데, 이것이 옳지 않다 라고 나를 부정해 버리면 죄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는 즐거움도 사라져 버려요. 그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그 죄를 섬기는 동안 죄가 주는 일당이에요. 일당. 그걸 먹고 사는 거죠. 그래서 죄를 끊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지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어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계속 자기 부인 없이 죄 가운데 살아야 할 이유는 사소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죄를 버려야 할 이유는 중차대하다는 것이에요. 이게 어떻게 입증되겠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죄를 버리면 잃어버리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뭘까요? 죄가 주는 즐거움. 그것만 잃어버리는 거에요. 그런데 그거는 원래 자기 것이 아니에요. 원래 신자는 하나님 은혜 안에서 신령한 즐거움을 누리게 되어있지, 예수 믿고 새생명 받은 사람이 술먹고 노름이나 하고 바람이나 피우고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은 한편으로는 그 죄로부터 즐거움을 얻지만, 한편으로는 그 즐거움으로 인해 개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그 죄에 자기의 생명을 짓밟히는 삶을 사는 거에요.
제일 웃긴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이거든요. 광야에서 그들이 날마다 그리워 했던 것이 뭐였어요. 애굽의 고기, 고깃국을 그리워 했는데.....내 묻고 싶은 게 얼마나 고기를 흐드러지게 먹었길래...묻고 싶어요. 노옌데 먹었으면 얼마나 흐드러지게 먹었겠어요. 옛날 우리 시골에서 가난할 때 가마솥에 물 두 바께쓰 쯤 붓고 병아리 한 마리 집어 넣어서, 무 잔뜩 넣고 펄펄 끓여, 한 그릇에 요거 하나씩.....한 사발의 고깃국을 먹은 건 맞겠죠. 그런데 그 한 사발의 고깃국을 얻어 먹기까지 고단한, 하루종일 채찍에 맞으며 무릎이 터지도록 벽돌을 찧고 돌을 날라야 했던, 참혹했던 노예의 삶은 왜 생각을 안 하냐 이거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성경의 교리들을 깊이 생각해보면, 신자가 스스로 택해서 죄를 짓는 거 미친 짓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 안 하는 거 정신병자에요. 그 마지막 후에 찾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미친 짓이라구요. 바로 그런 이치에요.
죄를 지어야 하는 이유는 사소해. 거기서 오는 즐거움인데...원래 신자는 그런 걸 누리며 살게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예요. 그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할 이유는 중차대 해.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즐거움은 얻지만, 그 후로 비참하게 썩어들어 가는 거예요. 마약하는 사람들 보셨어요. 그 미국 텔레비전 광고에서 한번 나왔잖아요. 아주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던 광고. 예쁜 여자에요. 금발의 굉장히 예쁜 여자. 그런데 그 여자가 루즈를 닦아내고 눈썹 바른 걸 닦아내고, 화장을 지우고 입을 벌리고 나니까, 여기가 다 마약으로 중독이 돼서 이빨이 다 빠지고, 피가 나는 거에요. 드라큘라 같이 된 그 여자 위로 흐르는 자막은 “마약중독, 생각보다 후유증은 심각합니다” 그런 겁니다.
결국 신자가 죄를 택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통해 결국은 모든 것을 깡그리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깨뜨려 지지, 그러면서 사람과의 관계도 부서지지요. 자신과의 관계도 망가지죠. 신분이 구속받은 자녀 야 그런데 바보 같이 막 뛰어 가서 죄의 노예가 되어 산 거야. 일본사람들이 우리를 삼십육 년 동안이나 지배하고, 이제 원자폭탄 맞고 다 자기 나라로 도망갔는데, 그 부두에 뛰어가서 왜놈의 구두를 붙들고 나를 계속 짓밟고 조센징이라 부르라고, 나를 인두로 지지며 고문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매달리는 거에요. 미친 짓 아니에요? 죄가 주는 약간의 즐거움과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사는 그런 어리석은 삶이 어디서 오는 거에요?
처음부터 결단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인 없는 삶이 무르익어 가면서 그런 극악한 삶이 되어가는 것이에요.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을 보며 사도 바울이 저희의 신은 배요 라고 했어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익혀야 해. 그런데 왜 안 해? 싫으니까. 기도가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얼마나 필수적인가 하는 거 지난 15주 동안의 설교를 통해 터득할 수 있었죠? 그런데 왜 안 해? 싫으니까......하나님이 원하시는데, 그 분은 창조주이신데, 너보다 훨씬 높으신 분인데 그래도 안 해. 왜? 싫으니까. 나중에 하다 안되니까 하나님이 널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는데......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그래도 안 해. 왜? 싫으니까.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은 필연적으로 불순종으로 나아가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 그 거룩한 모든 것들을 다 짓밟는 거죠. 그 시작이 어디서 오냐 하면 자기 부인에서 오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과 전혀 갈등이 없는 자신의 친한 친구가 되고 나면, 그 친구가 여러분을 지옥으로 데려가요. 그래서 사도는 말해요. 너희 지체를 죽이라. 지체는 영어로 멤버에요. 뭐의 멤버냐하면 우리의 이 모든 매달린 이것들이 지체에요. 이것들이 원하는 것은 옛사람이 원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자기 부인 없는 삶은 불순종으로 가는 앞길을 자기 속에 훌륭하게 예비하는 것입니다. 예비하는 거에요. 항상 마음 속에서 의무를 생각해야 해요. 이 의무를 형식적으로 이행하면 외식하는 신자가 된다. 우리의 의무속에는 항상 우리의 진심이 깃들이게 하자. 이 의무가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하자,. 그러나 이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구하는 것은 기만이에요. 하나님 앞에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막대하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은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기 원하는 것이 망상이지,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믿음이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로 자기 부인이 고통스런 것은 사실입니다. 그때 주님의 고난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어려워요. 우리 안에 어떤 것이 가장 무거운 십자가냐, 어떤 것이 가장 어려운 십자가냐 그건 사람마다 모두 똑같지 않아요. 그러니 그것으로 신앙을 키재기 하는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에요. 한 사람의 십자가는, 그 사람의 고통은 그 사람 속에 흐르고 있는 강한 경향성에 비례해요. 그러니까 자기 속에 강한 경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부인하기 참 힘들어요. 그런 강한 경향성은, 일반적으로는 죄의 경향성이 흘러가죠. 그래서 죄가 많고 강하게 성품과 고착되어 흘러가는 경우에는 자기 부인이 아주 힘든 거에요. 어느 정도냐 하면 그냥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에요. 그러나 경건하게 살아서, 죄의 경향성이 약한 사람들은 자기 부인이 굉장히 쉬어요. 그건 사실이지만, 그 죄가 어떤 불순종들을 도구로 해서 역사하는 가는 사람마다 좀 달라요.
예화) 어떤 사람이 있는데 워낙 절약을 하고 살아. 노랭이야. 노랭이. 그렇게 해서 인간 그 자체가 짠순이야. 그런 사람은 어느 날 설교를 했는데, 우리가 낭비하며 살지 맙시다. 그건 죕니다, 하면 굉장히 받아들이기 쉬운 거에요. 원래 짜니까, 살던 대로 살면 충분한 거예요. 그러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은 씀씀이가 원래 널널해. 자기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널널해. 그런데 이론적으로 자기에겐 인색하고, 다른 이에겐 너그러우면 좋잖아요. 근데 대개 자기에게 인색한 사람이 남에게도 인색해요. 콜라 한 병을 아까워서 달달 떨며 못 사먹는 사람이 다른 사람 먹으라고 왕창 내고 안 그런다 이거에요. 반대로 자기에겐 무척 너그럽고 남에게는 짠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하여간 이 일이 쉽지 않아요. 그냥 그 사람은 널널해.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카드라도 긁고, 빌려서라도 잠이 오는 사람이야. 근데 이런 사람보고 낭비는 죄라하고, 검소하게 살라하면 자기를 부인하기 너무 힘든겁니다. 일일이 예를 못들지만, 사람마다 이런 것들이 다양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것을 획일적으로 말하기 힘들어요.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아까 얘기를 뒤집을께요. 한 사람은 워낙 짜. 그리고 한 사람은 널널해. 이 사람은 원래 성품이 다른 사람한테 뭘 주길 좋아해. 그런데 설교를 해. 혼자만 먹고 살면 나쁩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세요. 그것이 생활화되게 하세요....이 사람은 좀 쉬워요. 원래 이 사람은 오지랖도 넓고.....번역하기 힘들겁니다. 이 오지랖.....남 주기를 좋아해. 그러니까 그대로 살면 돼. 좀 더 베풀면 돼.
자기가 잘못된 것은 그대로 하려는 경향성이 있는데 이걸 부인하기는 굉장히 힘듭니다.
예화)어떤 목사님께 들은 얘긴데 일제시대에 그렇게 노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화투 말입니다. 그걸로 패가망신하고 다 잃었는데.....예수를 믿었어요. 그때 제일 먼저 충격 받은 건 “네 손이 범죄 하거든 네 손을 끊어 버리라” 그것이 실환지 지어낸 얘긴지는 모르겠어요. 실화겠죠. 이 사람이 변화되고 신자 되었는데도 그 노름의 유혹을 못 끊는 거에요. 너무 괴로운데....나중엔 도끼로 손을 찍어 잘라버린 거에요. 그런데 몇 년 후에 보니까 갈고리 끼고 화투치고 있더랍니다. 한 손으로.....
자기 속의 그런 강한 경향성은 그렇게 부인하기 힘든 겁니다. 자기를 죽여 죄는 죽이고, 은혜는 번성하게끔 만들때에 자기 부인의 삶이 쉬워지는 거에요.
지금은 부인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워지는 거고, 지금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는데 내버려 두면 진짜 갈고리 끼고 화투치기 할 정도로, 그렇게 영원히 죽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며 자기를 부인하세요.
자기를 부인할 때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데 하고 싶어해. 그러면 “하지마. 난 널 부인 할 거야” 했더니 말을 안 들어. 자기가. 그래도 하고 싶어. 하지 말라니까. 그러면 막 설득하는 거야. 부인하지 않을 이유를 설득하는 거야. 죄를 지으면 이런 즐거움이 있고.....막 그렇게 설득하는 거야. “그래도 하면 안 되는 거 아냐?”또 막 유혹해. “그래두....” 막 끌고가. “그러면 안 되는 돼. 혼나는 돼” 결국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야. 자기를 혹독하게 다루어야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 라고 할 때의 그 의미가 그것입니다. “뭐라구? 기도하기 싫다구? 이 자식이 맛 좀 볼래?” 이렇게 다루어야 합니다. “뭐라구? 죄를 짓고 싶다구? 니가 환장했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개 패듯 패야 됩니다. 사도바울이 자기를 쳐서 십자가에 복종시킨다고 할 때 그 희랍어 단어가 노예들을 길들이는 데 사용된 그런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사람을 납치해다가 자기 똘만이들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들었거든요.
첫 번째가 아주 가혹하게 다루어서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모든 희망을 끊어버리는 것이에요. 막 절망스러울 정도로 개패듯 다루는 것이에요. 그렇게 처절하게 학대 받고 나면 정신이 없어져 버리죠.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열려도 못가는 거에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할 때 너무 신사적이야. 하나님을 대할 때는 굉장히 동물적인데, 자신을 자기 부인하려 다룰 때는 너무 예의가 발라. 그게 반대가 되어야 해. 혹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명령해도 신사적으로 하나님을 대해야 해. 저 할 수가 없는 입장인데 어떡하죠....그런데 막 대드는 거에요. 싫어요. 왜? 싫으니까. 심판이고 뭐고, 필요없어요. 배 쨀라면 째요.
사실은 우리 자신을 그렇게 부려야 하는 것이에요. 내 영혼이 막 낙심해. 그리고 막 딱 가라 앉아. 그러면 야단을 치는 거죠. “왜 낙심하냐? 하나님을 바라보아라” 그것이 시편42편 43편의 시인의 고백이죠.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불안하여 하느냐. 너는 오히려 너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아라 이것이에요. 그러면서 야단을 쳐요. 그것이 자기 부인의 삶이에요.
우리가 이기는 비결이 있는데, 그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을 기억하는 것이에요. 내가 지금 나 자신을 부인하게 위해 치르는 희생과,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당하는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놀라운 고난에 비하면 이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야. 겟세마네 동안에서 피를 쏟으시며 기도하신 그 모습과, 못 박혀 피 흘린 채 저주받은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당하는 이 자기부인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예수님의 고통만 못하다. 그리고 실제로 고통이 있다면, 나는 기쁘게 당하리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십자가를 지고 죄를 이기게 되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에요.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그래서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이기는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3.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이김(1):내세묵상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이김 이제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자기 부인의 십자가를 지고 죄와 싸움으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내세를 묵상함으로서 죄와의 싸움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자기 부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삶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묵상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장차 받을 영광스러운 상급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내세를 묵상함에 있어 첫 번째로 자기 부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신자가 절대로 신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속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우리의 옛 성품의 욕망과 생각, 의지들이 역사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우리들이 안일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부인하는 것 없이는 우리의 삶이 결코 성도에 합당한 거룩의 삶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지만 자기 부인이 없이 살아갑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확신하지만 구원의 증거는 보이지 않는 세상과 뒤범벅이 되어서 섞여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은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해주신다고 하는 가르침이나 죄를 통해서 오히려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교리들을 제멋대로 휘게 만들어서 오히려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자기 부인을 실천하지 않는 기회로 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 앞에 변명될 수 없는 악한 일들입니다. 정말 많은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하는 그런 방종하고 더러운 것들을 끊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새삼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왜 그렇게 자기 부인이 어려울까? 자기를 아니라고 부정하고 거절하는 그것이 왜 그렇게 힘이 들까? 그것은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은 세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집착은 곧 자기를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 성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안식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합니다만 그러나 우리의 옛 성품은 세상 안에서 만족을 누리려고 하고 이 세상에서 제공해주는 기쁨들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사랑은 더더욱 이 세상에 집착하고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려고 합니다.
이처럼 자기 부인이 불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인데 성도가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인이 없이 살아가는 것은 곧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버리고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삶에 있어서 거룩을 이루지 못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가 되지 못하고 그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때문에 자기를 구원하신 좋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끊임없이 아프게 해드리며 불효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부인이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떤 순결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면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정절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주의 재림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될 그리스도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며 단정한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며 신랑만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심대로 살고 죄를 따라서 살면 편한 줄 알면서도 그날에 신랑이 오실 때에 우리들이 나타나게 될 그 부끄러운 모습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자신 속에 있는 죄 된 성품을 죽이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 속에서 살면서 성도의 참된 모습으로 변화되어가려고 하는 그런 성화의 열심 속에서 살도록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는가 하는 것은 불끈불끈 이따금씩 충동적으로 솟아오르는 정열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한번 그리스도 예수, 우리 신랑과 맺은 약속을 지키고 모진 유혹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오직 신랑이 오는 그 날에 우리들이 기쁨으로 재회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절을 지키면서 사는 것, 그것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누구든지 쉽게 지을 수 있는 죄를 버리면서 살아가는 삶은 신부로서 단정한 옷을 입고 비 오는 날에 더러운 흙탕물이 옷에 튀지 않도록 사쁜 사뿐 마른 땅을 밟으며 걸어가는 모습에 비교할 수 있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고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을 참회하고자 하는 모습은 날마다 신랑 올 날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얼굴에 붙은 더러운 때를 비누로 씻어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며 날마다 신령한 지혜로 자신의 마음을 채우고 거룩한 교리들이 자신의 영혼 안에 충만하게 살아 역사하도록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은혜 안에서 자라가고자 하는 성숙을 위한 노력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더 아름답게 단장하며 그 밤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화장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자기 부인도 없이 진실한 참회와 깨어짐도 없이 마음을 지키는 수고도 없이 그렇게 일생을 산다면 어느 날 문득 신랑이 오는 그날에 여러분들은 파자마 바람으로 얼굴에는 베개를 베고 누운 자욱이 찍혀있고, 침은 얼마나 흘렀는지 말라붙어 있고, 눈곱은 하도 껴서 눈이 떨어지지 않고, 머리는 폭탄 맞은 채 신랑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신랑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거 내 신부 맞아? 이처럼 자기 부인이 없이는 어떠한 순결도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 부인이 없는 삶은 결국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인데 나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이 없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왜 예수님의 얼굴을, 그 빛난 모습을 우리들이 천국에서 뵈올 때 우리는 그분의 모든 생애가 우리를 위해 다 주신 자기를 비운 생애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다 버리시고 자기를 다 주신 생애였다는 것을 비로소 그때 알게 될 텐데 그때 그 주님을 뵈면서 우리는 즉시 이 세상에서 나는 나를 위해서는 많이 애쓰고 수고했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희생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부끄러워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크게 두 번째로 이 세상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산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상을 묵상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아무리 인간들이 관심을 집중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은 덧없는 것이고 그리고 오직 영원한 것이라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예수님 오시기 전 700여 년 전에 이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풀이오, 육체의 아름다움은 그 풀에 꽃과 같도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그래서 이렇게 이 세상의 덧없음을 묵상하고 그리스도 예수만이 영원하시다는 사실을 생각함으로서 죄를 죽이게 되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다섯 단계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인생의 일반적인 허물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 제일 쉽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가 더럽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 순간만이라도 진실하고 깊은 신앙을 가져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조금만 생각만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떠올랐던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역사를 한번 더듬어보십시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도 인생의 참된 행복은 짐승처럼 먹고 마시는데 있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인간이 궁극적인 존재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 사람은 만약에 그 사람이 사상가의 탈을 썼다면 그것은 의도적인 것일 뿐이지 그 사람의 생각은 사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종교를 불문하고 신불신자를 불문하고 모두 그들이 일반은총의 빛 아래서라도 인생을 깊이 직시했을 때에 그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상가들로부터 시작해서 대중가요 가수까지 모두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했습니다. 인생이 나그네 길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행가 가수의 노래 가락에도 즐겨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먼저 이 세상의 허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허물을 모른 채 쾌락에 빠져서 살아가고 혹은 그렇게 극한 죄는 빠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벌어먹고 사는 일에 신명을 바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것이 힘들고 고차원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것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진단을 나이가 들면 매년 한번쯤은 받아야지 됩니다. 바람직하면 6개월에 한번씩 받으면 좋습니다. 저는 최근 10년 동안에 한 세 번쯤 받은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생각했습니다. ‘왜 건강진단을 안 받으려고 할까?’ 물론 돈이 들어가는 것도 문제가 되기는 되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는 건강진단을 통해서 내 몸이 다 조사가 되고 그 결과 안 좋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사실 성실하게 건강진단을 매년 받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저 옛 사람들이 한 어리석은 말, “모르는 게 약이다.” 그리고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라도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이렇게 직시해야지 됩니다.
제가 이번에 갔던 곳이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가 있었던 땅이라고 합니다. 문화유산들이 많이 있는 곳인데 얼마나 비옥한 땅인지 이천년 동안 한번도 가뭄이 들어보지 않은 지역이라고 하니까 그 땅이 얼마나 기름진 지역이겠습니까? 수황제가 세금을 잘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사람을 동원해서 1680키로 미터의 운화를 팠습니다. 그 운화로 지금도 여객선이 다니는데 중국 사람의 말에 사람이 판, 수로가 얼마나 긴지 그것이 만리장성 버금가는 불가사의한 인간의 역사요, 그 강의 길이가 얼마나 긴지 한살 먹은 애가 배를 타고 종점까지 오면 두 살이 된다고 하니까 엄청납니다. 그 땅을 약간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기름진 땅을 얻기 위해서 삼국시대 때 그 많은 사람들이 피나게 싸우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갔습니다. 그 병사들의 희생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호의호식하던 임금들도 모두 죽었고 보물도 땅속에 묻혔습니다. 지금은 황토 빛 물에 가끔 배가 왔다 갔다 하는 운화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들려오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함성소리들을 들어보십시오. 그게 이 세상입니다.
지난달에 터키 이스탄불에 갔을 때 집회하고 남은 오후 시간에 바로 그 앞에 고고학 박물관이 있으니까 구약을 하시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한번 가보시라고 그래서 갔습니다. 정말 가니까 알렉산더 대왕의 관부터 시작해서 그 대리석을 마치 밀가루반죽 빗듯이 수없이 아름답게 빗어놓은 헬라시대의 문화유적들과 멀리 이집트와 이스라엘에서 훔쳐온 보물에 이르기까지 정말 볼거리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거기에 진열된 보물, 어떤 것은 다이아몬드가 거의 계란만한 것도 있습니다만 나는 솔직히 그곳을 다 열어놓고 가져가라고 그래도 가져갈 게 없었습니다. 양철 같은 깡통에다가 빨간 전구, 파란다마 구슬을 매달아났는데 그거 몸에 걸고 다니면 서울에 와서 왕따가 될 것 같습니다.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꼭 하나 가지고 오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체였는데 관속에 사람이 있는데 제가 말라죽은 시체를 많이 봤는데 그런데 이것은 아주 특이했습니다. 보통 시신을 미라로 만들 때는 내장을 다 빼고 미라로 하는데 이것은 미라가 아니라 시신을 그냥 관에 넣었는데 썩은 것입니다. 그래서 창자가 말라붙은 것까지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가 보기에는 약 이천 년 전 사람입니다. 그런데 키는 1미터 75정도 되어 보이고 그런데 그 사람의 관 앞에 이렇게 붙어 있는데 “더킹 오브 시돈”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시돈의 왕이었습니다. 시돈이라는 곳은 조그만 고을 같은 나라입니다. 거기에 왕이었는데 그래도 왕이었으니까 거기서 서서 한 15-20분간을 자리를 뜰 수 없었습니다.
그때에 몇 달 동안에 걸쳐서 죄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살고 있을 때였는데 이렇게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썩으면 이렇게 뼈만 남고 창자도 다 말라붙어서 마치 포도껍질이 마른 것처럼 갈비사이에 붙어서 눈은 벌레들이 와서 다 파먹어서 다 뼈가 구멍이 나고 그랬는데 이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는 채 살았지. 그리고 이 말라붙으면 배속에 있는 것들이 태양 볕에 말라비틀어진 그 포도껍질처럼 되는 그 속을 가지고 얼마나 탐욕과 죄악 속에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골몰하며 인생을 살았을까? 그것을 깨끗한 유리관에 넣어 있는데 정말 그것을 한번 갔다가 이 서재에다 두고 들어오면서 나오면서 매일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한번씩만 죽음을 생각한다면 삶이 윤택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지 그 허무함은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존재 그 자체를 추론해도 인간의 허무가 나타나지만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짧은 길이를 생각해보아도 인간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간 중국의 그 고장은 명주로 유명한, 비단으로 유명한 그런 고장입니다. 교회 바로 옆에 뽕나무로 기르는 누에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이렇게 보니까 처음 알았습니다. 요만한 누에씨가 마지막에 고치를 남기고 죽는 것이 34일이었습니다. 하루하루씩 병에다가 하루된 놈, 이틀 된 놈, 삼일 된 놈을 넣어났는데 34일 만에 그 고치를 남기고 누에는 죽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34일이면 한달인데 한달을 이렇게 누에가 살다가 죽는데 누에가 자신의 인생이 짧다고 생각해보았을까?’ 아마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하루살이하고 파리가 놀다가 헤어졌습니다. 파리가 하루살이에게 잘 가.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는 돌아오면서 계속 생각합니다. ‘내일이 뭘까?’ 그 다음에 파리가 매미랑 놀다가 헤어졌는데 매미가 다음달에 만나자 그랬습니다. 파리는 제 기억으로는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만 10일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파리는 다음달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달이 뭘까? 그렇게 따지면 만약에 우리가 그런 대화를 천년을 산다고 일컬어지는 거북과 대화를 나눈다면 어떻겠으며 수억 년을 지나고도 지금도 반짝이는 별들과 대화를 나눈다면 인간의 이 목숨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하찮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가는지, 저는 금요일마다 말씀을 준비하려고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있던 고향을 꼭 지나갑니다. 가끔 차에서 내려서 어릴 때 뛰놀던 그 개울언덕을 걸어봅니다. 눈을 가만히 감으면 거기에 보라색 제비꽃들이 가득 피어 있고 잠자리채를 들고 여름성경학교 때 잠자리를 잡는다. 제비꽃을 딴다 하며 지금은 이름도 잊혀진 친구들과 함께 개울둑을 뛰어놀던 때가 어 그제 같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으면 그때 함성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장날에 장사꾼들이 외치는 물건 파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은데 40년이 지나갔습니다. 손을 뻗으면 금방 잡힐 것 같은 시간의 거리인데 4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때 제가 만났던 많은 할아버지들은 그 동네 아무도 사시지 않습니다. 40년 후에 아마도 제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짧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않아도 우리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필요합니다. 이게 첫 단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는 그 사실에서 자기가 지금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특정한 욕망을 그게 허무하다는 것을 일반적인 것에서 추론해내는 것입니다. 말이 좀 복잡해졌지만 이런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짓고자 하는 이 죄도 허무한 것이다.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므로 내가 자기 부인을 하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 집착도 헛된 것이다. 이것도 곧 지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이 정욕이 기세가 확 꺾입니다.
예화: 예전에 계시던 집사님이 친구들과 함께 회를 드시러 군산에 내려가시던 길에 고 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인생의 허무함을 직시하고 나니까 멀리까지 가서 생선회를 먹으려고 했던 욕망이 사라졌다.)
그게 바로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엇인가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하고 싶을 때는 그 생각을 하십시오. 이 세상도 지나가고 이 정욕도 지나가고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한 3-4년 전에 죽어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하던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튼 자기 고집이 그렇게 세서 그래서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때는 기뻤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그 길을 따라가는 고통보다는 주님을 버리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4년 후에 지금 뭐가 남아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래 3년 전에 불순종해서 지금 얻은 게 무엇입니까? 아니 그렇게까지 말할 것 없이 어제 불순종해서 오늘 남아 있는 게 무엇입니까?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던 것이 다 타고 새카맣게 더러운 죄만 우리 마음속에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게 추론하면서 자기가 특별히 하나님 앞에 집착하고 있는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해나가려고 할 때 많은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힘이 듭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게으르게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자기가 희생을 안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것을 안 바치고 삽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곧 죽습니다. 다 썩을 육신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소유도 다 썩어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누가 그것을 취하고 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특정한 죄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두 번째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렇게 놓고 영원하신 그리스도와 영생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정욕으로 꽉 차있는데 그리스도는 영원하셔.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야. 그런데 아니 지나가면 어때. 그래도 좋은데. 누가 그랬습니다. 이 세상은 다 배설물과 같습니다. 명예도 부귀도 재물도 모두 정말 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는 사람이 그 똥 나주지. 난 좋은데. 그러니까 생각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허무함을 직시하고 나면,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그러면 뭐가 의미가 있나. 그때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것들은 지나가는 것인데 영원하신 분은 오직 한분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살고 그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영원히 살리로다. 하는 이 영생에 대한 확신이 떠오릅니다. 그게 정말 중요하구나. 깨닫습니다. 그게 세 번째 단계입니다.
그러면 이제 네 번째 단계에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집착하는 정욕 때문에 얽매었던 죄에서 놓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께 꽁꽁 묵어놓습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하여튼 유별나게 삽니다.
이번에 중국에 가니까 어느 목사님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선교사들에 대한 아주 대대적인 색출이 시작되었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수십 명이 쫓겨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가 참 재미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자기는 라마승들에게 가서 전도를 한다고 합니다. 라마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회교도들에게 전도를 하는데 회교도들에게 갈 때는 항상 성경대신 코란경을 들고 그리고 가서 절은 안하지만 거기 회당에 들어가서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성경 토론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라마승도 돌아오고 회교도들도 돌아오는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 하는 말이 항상 선교의 역사에는 이런 핍박의 바람이 불었는데 그런 바람이 불 때면 항상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라고 뿌리박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핍박을 통해서 뿌리가 견고해지고, 여기가 내 자리인가 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은 싹 하나님께서 속아내신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야기 속에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없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지금이라고 하는 상황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일반적인 진리로 본다면 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역사에서 핍박과 환난을 통해서 세상이 교회를 박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아닌 사람들을 털어내고 신자들을 남은 백성으로 남은 백성으로 삼으셔서 오히려 정결한 교회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정욕은 항상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죄로 얽어매는 힘이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묶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얽어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너 복음을 안 전하면 죽여 버린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묶어놓은 은혜가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은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은혜의 강제력입니다. 그런데 정욕은 우리를 죄에 그렇게 묶어놓습니다. 그래서 죄를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런 강력한 힘을 느끼게끔 만듭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죄의 강제력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생이 허무한 것이고 따라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자기부인이 없는 이 삶도 헛된 것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영원히 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나의 영생밖에는 없다는 것을 깊이 묵상할 때 이 정욕의 사슬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네 번째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이때 특정한 욕망의 중심으로 하는 사랑의 틀들이 무너집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사람이 이 세상을 사랑한다. 그러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좀 가난해도 사람들을 지배할 수만 있으면 잘 살수 있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람들을 지배하지 않고 돈이 없어도 지식이 많으면 세상은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은 없어서 좀 깡통이라도 돈만 많으면 나는 이 세상은 살만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자 사람마다 우선적으로 집착하는 특별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어도 그것은 모두 세상전체를 우리의 마음속으로 끌고 들어오는 도구일 뿐이고 통로일 뿐입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욕망이 딱 시작이 되면 요만한 눈을 이렇게 뭉쳐서 굴려서 큰 눈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요만한 욕망이 있는데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강하게 쏠리게 되면 그것이 중심이 되어서 마치 젓가락을 가지고 솜사탕 만드는 것이 이렇게 집어넣어서 이렇게 감으면서 솜사탕을 이렇게 크게 부풀리듯이 특정한 죄 하나를 마음속에 집어놓고 계속 흔들면 그 마음이 솜사탕처럼 계속해서 엉겨 붙으면서 죄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반드시 중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렇게 생겼는데 돈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부정직하게 살고 해서 기도할 시간도 없고 말씀대로 안 살고 하여튼 모든 불순종의 시작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돈에 대한 사랑이 와르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한꺼번에 힘을 잃으면서 무너져버리기 시작합니다. 그게 죄의 편에서 보면 기가 막힌 파괴고 은혜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갱신입니다. 그렇게 해서 특정한 죄를 중심으로 해도 그 사랑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음의 틀들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와서 성장하기에 적합한 틀이 아니라 죄가 들어와서 성장하기에 적합한 틀입니다. 이게 와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 ‘성도가 마른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러운 돈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불순종하고 그렇게 안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내세에 관한 묵상이 우리의 영혼을 놀랍게 갱신시키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장차 받을 영광스러운 보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굉장히 고통스럽고 희생이 뒤따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자기희생과 고통을 지불하면서 죄와 더불어 싸우며 살아갈 때에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실 하나님의 위로와 상급이 지금에 받은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지 됩니다.
사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고생하면 혼자 고생하고 희생하게끔 내버려두셨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외상을 갚으시는 심정으로 우리를 상 주시는 분이 아니라 궁극적인 상급은 그 나라에서 우리에게 영생과 위로로 빛나는 상급으로 우리에게 주시지만 자기를 부인하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일주일동안 열심히 자기를 부인하면서 살았더니 오늘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가운데 예배드릴 수 있잖아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죄 가운데 살면서 그렇게 살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간구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들이 기억해야지 되는 것은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자기 부인을 위해서 치르는 고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저 세상에서 우리에게 갚으시는 그 상급에 비하면 사소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도가 우리가 받는 이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특별히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첫째는 거룩을 생각하게 됩니다. 내세의 상급을 생각하면서 거룩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만나주실 예수 그리스도도 거룩하신 분이시고 또 우리와 함께 그 예수님을 찬송하게 될 성도들도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오늘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죄를 죽이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내세를 묵상하는 삶을 살기를 거절한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어떻게 그 거룩한 무리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서 우리 예수님을 섬기고 찬송할 수 있을까? 또 당신 자신이 자신의 거룩을 지키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가 거기서 어떻게 뵈올 수 있을까? 그 거룩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내세의 받을 상급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 빛나는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 번째 고통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지불해야지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도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고 또 성도들도 고통을 당한 끝에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지으실 수 없는 분이고 또 유혹을 받아도 죄를 행하실 수 없는 분이셨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자신의 거룩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안에 죄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만하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그 죄와 더불어 고통 하는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 죄를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시고 경계하고 그것을 깨닫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분을 이 세상이 핍박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거룩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핍박한 것이었고 그 핍박 끝에 마지막에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 희생을 통해서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거룩해질 수 없는 많은 백성들을 구원해주심으로 거룩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멸시와 욕을 당하고 많은 고통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분을 찬송하며 함께 경배할 성도들 역시 모두 죄와 더불어 이렇게 싸우면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비록 성도가 완전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일수는 없지만 그러나 자기부인도 없이 죄를 물먹듯 마시고 진실한 참회도 없고 자신의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에 대한 진실한 참회도 없이 마치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죄와 타락을 위한 기회로 삼으며 주님이 주신 흔들리지 않은 구원을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으면서 일생을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도가 되어서 만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가보면 여러분들은 놀라게 될 것입니다. 정말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리고 그 나라에서 그들은 모두 늘 넘어지기도 했고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삶을 택하지는 않은 사람들, 그래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끝없이 거룩해지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진실한 참회 속에서 새 삶을 살고 죄와 더불어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만날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많은 고통을 지불하고 살아온 삶입니다. 그 나라는 위로를 받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위로를 받는다고 말씀하셨나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자신 속에 있는 죄를 인해서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사람, 주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죄로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흐느껴보지 않은 사람, 그래서 신령한 슬픔이 무엇인지를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을 예수님이 어떻게 위로해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흐르는 눈물이 있어야 씻겨주고 흘린 피가 있어야 닦아주시지요. 수시로 죄와 야합하고 정욕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죄와 더불어 피 흘려 싸우기는커녕 죄와 짝하면서 살던 사람들을 어떻게 그들을 위로해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영원한 나라와 거룩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아름다운 이름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으며 살아본 사람이 없는 사람들, 어떻게 예수님이 위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난 중국의 목사님 한분은 젊은 나이에 예수님을 만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을 했답니다. 60년대의 일입니다. 그리고 60년대에 중국에는 문화혁명이라고 하는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 목사님도 체포되어서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22년 동안을 강제노동을 하고 이제 그 시대가 모두 지나서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왔더니 집은 다 부서지고 아내는 죽고 자기 자식은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고 또 한사람은 공산당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 부서진 자기의 집안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그런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더랍니다.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22년을 징역살이를 했는데 돌아오고 보니까 아내는 죽고 아들 하나는 공산당이 되어 있고 아들 하나는 마약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약에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 미쳐버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가고 오는 두 세상에 걸쳐서 사는 사람들이고 오히려 그 영원한 세계에서 누릴 그 영광과 그 아름다움이 참으로 영원하고 크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세상은 그 영원한 세상으로 걸어가는 출입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정말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무릎을 꿇고 우리를 씻겨주실 그 눈물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정말 우리들이 일생을 이렇게 살고 주님 앞에 갈 때 정말 거듭남과 함께 우리에게 믿음의 싸움을 싸우라고 입혀주신 전투복은 정말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그 피로 붉게 물든 전투복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이 땅에서 즐겁고 행복했던 사람들은 그 날에 슬피 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경건한 일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많이 울었던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웃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고 항상 있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위해서 희생했던 사람들, 어찌하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여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많이 눈물을 흘리고 피 흘렸던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감당할 수 없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으면서 용서와 은혜의 교리를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정욕에 자기를 방임하는 방종의 기회로 삼고 어떠한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품고 살아왔던 많은 사람들, 은혜로운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고 목양을 받는 대신 가시와 같은 성품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무지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그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삶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를 묵상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위해 살고 그럴 수 없게끔 망가진 사람들은 그래서 더더욱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탐욕과 그리고 욕심에 가득 차서 주님께 불순종하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사람들이 물었을 때 그는 즐겨하던 말이 “나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로다” 그랬습니다. 원했다면 떠나온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는 자기로 하여금 옛 본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는 새로운 본향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는 나그네라 일컬음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나는 나그네로다” 고백하며 살았고 그 후손인 야곱이 “내 인생의 길이 일백 삼십 세인데 그 길이 내 조상들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하나 나는 심히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길이 나그네임을 고백했고 아들 요셉의 손에 죽은 후에 자기를 약속의 땅으로 보내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삶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약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고 우리가 전파하는 것이 헛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잠시 지나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을 때에는 항상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이 고통이 미래에 이 고통에 대해서 주님이 갚아주실 상급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하고,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죽이기 위해서 고통을 당해야 하고,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죄와 싸우는 수고를 하여야 할 때마다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 우리의 상급을 저축하는 마음으로 아주 기쁨으로 죄를 이기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사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상급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셨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에게 만물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 세상에 있는 땅 아래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모든 것들로 그 발아래에 무릎을 꿇어 주라 시인하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로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를 그 세상에서 높여주시는지에 대한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위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고 영광스럽게 상급을 받는 일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첫 열매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똑같이 그 나라에서 만나는 모든 성도들도 상급을 받고 영생을 즐거워하는 그 모든 성도들도 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다수의 죄와 더불어 사는 먹고 마시는 많은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그들만큼은 믿음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몰라서 그렇지 이 세상에는 막대 먹은 신자들도 많지만 정말 신앙 하나로 살려고 하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참 마음으로 참 마음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참 마음으로
그 날에 상급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 앞에 설 때 그 찬란한 은혜의 광채 앞에서 이 세상의 명예가 주는 빛도 광채를 잃을 것이고 세상의 임금이 썼던 면류관도 광채를 잃을 텐데 그 까짓것 우리의 부와 지식으로 누렸던 명예의 빛이야 어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변화될 수 없겠습니까? 모든 것은 지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이 그 날에서 상급을 예비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한순간도 우리는 단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톨스토이가 말했듯이 이 세상은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입니다. 그래서 잠시 이 세상에 머물며 살 동안에 우리들이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그래서 상급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지 됩니다.
그래서 오늘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이제껏 까지 내가 산 삶 중에서 주님이 상 주실 만한 일을 위해서 내가 산 적이 있는가. 정말 주님이 그 나라에 갔을 때 나를 위해 너는 참 험한 길을 걷고 그리고 나를 만족하게 해주기 위해서 진실한 신자가 되고 참 눈물을 많이도 흘렸구나. 내가 오늘 네 눈에 눈물을 씻겨주마. 못 박힌 손으로 씻겨주실 그런 눈물이 있는지, 거기서 피 묻은 전투복을 벗고 나면 예수님의 잔치에 참여할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혀주실 텐데 아! 그때 죄와 싸운 피가 아니라 죄와 함께 짝하고 죄의 오물들이 그 전투복에 가득하다면 그 날에 우리가 무슨 상급을 그분 앞에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적절하게 이 세상을 경멸하면서 살아야지 됩니다. 이 세상을 경멸하면서 그래. 이 세상은 잠시 지나는 것이고 이 때가 지나고 나면 우리 주님을 만나리라. 내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단 한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놓칠 수가 없고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내가 주님이 보시기에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그 일념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야지 됩니다. 그때 그 나라에서 받을 그 위로와 기쁨은 오늘 여기서 받는 고통과 수고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이김(3):기도의 실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7)
오늘 이 시간은 십자가를 지고 죄를 이기는 시리즈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내세를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을 공부했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기도의 실천이라는 십자가를 짐으로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죄와의 싸움에 있어서 우리들이 기도의 실천은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고 실로 이 기도의 실천이 없이는 우리들이 죄를 이길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기도를 실천하지 아니하면 그 죄가 정말 심각하게 느껴질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신자의 영혼이 죄와 맞붙어 싸워서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전쟁터에서 적의 위치와 적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정보는 결국 싸움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이번 전쟁에서서 보면 그 탁월한 기술력으로 적군들의 소재와 그들의 정보, 심지어는 전화 통화하는 내용까지 완벽하게 감청을 해서 녹음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력을 가진 나라가 싸움을 이겼습니다. 그 싸움이 도의적으로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의 판단은 차지하고라도 이만큼 싸움에 있어서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 것입니다. 그러나 적군을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단지 아는 것에 그치고 실제로 거기에 폭격을 가하고 군대를 보내어서 전투하지 않는다면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죄 죽이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또 깨닫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그것과 맞붙어서 싸우기 전에는 우리들이 결코 죄를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부어지는 복스러운 경험도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라고 하는 이 십자가를 지고 끊임없이 싸워나가면서 예수와 하나 되는 비결을 터득하는 것이 정말 일생동안 이 기도의 줄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저는 오늘 이것을 네 가지로 나누어서 크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 되신 것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기도의 실천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의 그리스도의 기도의 간절함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선 첫째는 이 기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셨던 것을 우리들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셨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 기도하셔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능력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었고, 친교의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셨으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능력이 하나님과 같으시고 친교에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이시고 도덕적으로는 죄가 없는 순결한 분이셨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기도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그 본체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런 능력과 친교, 그 다음에 죄가 없는 순결함을 소유하실 수 있었으니 당신 안에 있는 신적 본질에 자원을 그냥 꺼내어서 쓰시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분의 스스로 낮아지신 지극한 겸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그렇게 택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이시고 그리고 도덕적으로 순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누구에게 빌 필요가 없이 스스로 자원을 꺼내어서 사용하시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한한 능력을 가진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이 무릎으로 생애를 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심에도 자기 안에 있는 자원을 그냥 사용하셔서 사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무릎으로 생애를 사신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이 모본을 보여주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 모본을 뒤따라오도록 만들어주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셨지만 그렇게 당신 스스로 자원을 꺼내서 모든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기를 포기하시고 그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일하시는 대신에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응답으로 사시는 하나님 의존적인 삶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생각 없이 넘어가는 대목이지만 기도생활 가운데 이런 것 한번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아신다고 하면 기도할 필요가 없고, 모르신다고 하면 기도를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신다고 하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요즘 제가 몸이 아픕니다. 하나님이 모르시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지 됩니까?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아뢰도록 우리를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그리고 실제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많이 아뢴 사람들은 응답을 많이 받아서 문제의 해결을 받고 게으름과 나태 속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은 응답을 별로 못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기도해서 늘 응답의 간증이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기도하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사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응답을 받으면 해결이 될 텐데, 자기 생각에는 기도하면서 기도를 실천하는 고통보다는 고민하고 근심하는 고통이 훨씬 더 큰 것 같은데 그런데 고민하기 위해서는 살이 바짝바짝 말라도 기도하기 위해서는 살이 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바보같이 보일 수가 없고 멍청해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 안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왜 기도 안하는가 하고 이야기하면 기도 안하는 사람들은 할말이 없습니다. 늘 가만히 고개 숙이고 그리고 그 다음날도 또 안하고 그렇게 삽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결코 주님보실 때 풍성한 삶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 왜 하나님이 당연히 알고 계시는데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기를 좋아하시는가. 이유는 이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하나님이 무슨 덕을 보십니까. 기도를 간절하게 하게 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지만 기도함으로서 우리에게 두 가지 유익이 주어지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의 영혼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38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가 간구할 때 주께서 내 영혼을 장려하셨나이다” 구절이 나오는데 138편 3절입니다. 그러니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 말고도 먼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는데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중국에 갔을 때 거기가 명주의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누에고치를 봤는데 어린시절에 시골에서 누에를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에가 다 자라면 고치를 남기고 나방이 됩니다. 나방이 될 때 나방이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올 때 사람하고 똑같이 머리먼저 나옵니다. 그러다가 겨드랑이가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날개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하체는 고치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면 이놈이 거기서 나오고 싶어서 부지런히 날개 짓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어떤 사람이 그런 경험의 이야기를 어느 책에다 썼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그렇게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게 너무나 불쌍해서 가위를 가지고 와서 그래서 고치를 딱 따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금방 하체가 쑥 빠져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하체를 질질 끌고 다니는데 하체는 아직 여물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닥에 붙어서 날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그게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려고 막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이 기력이 하체로 몰리면서 하체가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방의 꽁지 부분이 여무는 것입니다. 여물어서 그 다음에 자력으로 빠져나올 때 조금씩, 조금씩 빠지면서 여물다가 그 다음에 날개 짓을 하면 그 날개 짓을 하는 가운데 또 하나가 강화되는 곳이 있는데 어디가 강화되는가 하면 날개가 강화됩니다. 못 날게 붙드니까 날아가려고 막 날개 짓을 하는 동안에 이 어깨에 힘이 붙으면서 날개에 힘이 붙으면서 날아다닐 수 있는 나방의 삶을 살도록 그렇게 이제 체질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 내버려두면 날개 짓을 하면서 거기서 빠져 나오면서 뒤꽁무니가 단단하게 여물면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아가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는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끔 살다가 인생에 어려운 일을 만나면 그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는 기도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움을 당하게 되기까지 하나님이 보실 때에 고쳐야 할 부분들이 우리에게 많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 자신이 형통할 때는 우리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문제가 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으면 그 다음에 고쳐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칠 힘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고칠 수 있을 것 같으면 그런 잘못을 안 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문제를 일으킬 능력은 있는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들을 말씀을 통해서 발견하고 내 영혼의 상태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으면 그것을 고쳐야지 되는데 고치는 작업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아주 세상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 그런 것을 가끔 하다가 고생하는 분이 있는데 절대 하면 안 됩니다. 남의 빚 보증서주는 것, 그런 것 하는 것 아닙니다 그냥 주십시오. 줄 능력이 없으면 보증서주지 마십시오. 그 점에서 있어서는 제가 확실합니다. 저희 가족들이 와서 보증을 서달라고 해도 안 서줍니다. 내가 어떻게 보증을 서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보증을 서주었는데 교회가 자기 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 재산이 과도기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 메카니즘상, 그런데 보증을 섰습니다. 교회에 차압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내 재산이 있어서 날려도 좋을 정도면 아! 그거 한 30억 정도 재산이 있는데 한 3만원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내가 서줍니다. 얼마든지 서줍니다. 언제든지 오십시오. 내가 찍어 줄 테니까. 한 30만원까지는 내가 서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300만원부터는 안됩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망하면 그러면 무슨 문제가 되는가 하면 기도하는 사람은 온갖 신경은 뭐에 쏠려 있습니까? 돈, 그 사람이 자립해서 돈을 갚든지 법적으로 내가 책임을 면제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돈을 줘서 대신 물어주든지 해야 됩니다. 그런데 셋 다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정신 차립니다. 기도도 안하고 뺀질거리고 순종도 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그러다가 정신이 바짝 차려집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기도하고 밤에 나와서 기도하고 그것도 답답하니까 보따리 싸갖고 와서 금식한다고 그러고 뭐 그렇게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관심은 오직 무엇인가 하면 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무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그 문제가 중요하면 그 문제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런데 올바로 기도하기만 하면 반드시 돈 놓고 기도하다가 깨닫게 있는데 돈보다 더 심각한 게 자기 영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집안이 무너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 영혼은 벌써 무너졌구나. 그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못 깨달으면 그 기도도 바르게 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혼의 놀라운 새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인생 살다가 과외공부한 사람들, 그저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비로소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 사업에 망하고 고난을 당하고 억수로 고생한 다음에 목사님,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뭐 깨달았는가. 하나님이 순종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것은 저기 영아부 내려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동반해서 망하게 하고 괴롭히고 건강을 상하고 먹고 싶은 밥도 못 먹고 금식하고 억수로 고생한 후에야 깨닫는 게 아주 상식적인 것, 그러니까 내가 말씀드리는 게 이것입니다. 이렇게 말로 할 때 들으면 여러분 무한히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인생을 엄청나게 절약을 하는 것입니다. 온몸으로 부딪혀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고 거지가 된 다음에야 아! 순종해야지 되는구나. 왜 그렇게 사십니까? 된장인지 간장인지 꼭 먹어봐야지 압니까? 보면 알지, 된장을 뭐라고 통역하나.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가 하면 신자들이 인생을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이 내가 삐딱하게 나가니까 복수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안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에게 화풀이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게 안 됩니다. 우리는 가끔 합니다. 왜요? 이 자식아. 내가 너를 미워서 때리는 줄 아니. 화나서 때리지 그러고 때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절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나에게 화풀이 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고치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에 스스로 새 힘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모든 좋은 것이 아버지께로만 온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가 주는 돈 이외에는 돈이 없고 부모가 베풀어주는 호의 이외에는 어디 기댈 곳이 없는 삶을 아이들이 사는 게 좋지, 초등학교 1학년밖에 안된 애가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면서 돈벌어서 자기 통장 갖고 자립하는 것은 안 좋은 것입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그렇게 하면서도 살아야지 되겠지만 아이들은 항상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됩니다. 그런 속에서 모든 좋은 것이 부모로부터 온다는 것을 배우고 그래서 자기가 부모가 되서도 그렇게 자녀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고생고생해서 청소년 시절부터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자녀들에 대해서 굉장히 매몰찹니다. 인마 너는 뭘 하는 게 있어. 먹여주지, 재워주지, 입혀주지, 공부나 하라는데 그것도 못하니. 네 나이에 이 애비, 그렇게 하면서 나오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짜증이 납니다. 그것은 아빠 이야기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산 것인데 우리에게 그런 삶을 강요한다고 그렇게 자기의 삶의 과정을 아이에게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정합니다. 통계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진짜 인생을 살면서 경험합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자수성가한 사람치고 자녀들에 대해서 정말 이렇게 자녀들을 충분히 품어주면서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그렇게 살아야지 된다고 요구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는 똑같이 우리가 자립해서 살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공급받으며 살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존의 마음이 많이 생길 때 인간은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존의 마음이 없을 때는 잘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온 신앙의 과거를 보면서 하나님께 순종을 잘하면서 살았던 그런 신앙생활을 이렇게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살았나, 그리고 이렇게 돌아보면 하나님께 순종을 잘 했던 때는 항상 어떤 때였는가 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이 있었던 때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가난한 마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정확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되는데 기도는 자기를 이렇게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정확한 자기 인식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물에서 꺼내어놓은 물고기와 같고, 하나님이 없으면 나는 이렇게 배어버려서 버려진 풀과 같고 뿌리 뽑힌 나무와 같고 그리고 공중에서 날개가 부러져 떨어진 새와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해주는 게 무엇인가 하면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우리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시로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정말로 더러운 인간인데 굉장히 잘났다고 어쭙잖게 자기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아주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인데 굉장히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속에서 살아가는데 진실한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정체를 보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기도는 진실한 사람들이 좋아하지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사람들은 기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들이 알아줄 때, 그때 평소에는 기도를 쥐뿔도 안하다가 대표기도만 세워놓으면 15-20분 어떤 교회에서는 대표기도 자가 올라가서 25분을 기도했답니다. 목사님이 하도 화가 나서 기도 끝나고 나서 성경봉독 하더니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더니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고 예배가 끝나서 교회가 갈라졌습니다. 평소에 많이 하고 평소에 기도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진실해져야지 됩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그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이 온다고 하는 의존의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지 되는데 기도가 그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그런 의존의 마음이 생기게 되면 순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는 의존의 마음이 생기기 전에는 사람이 그렇게 호락호락 순종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보실 때 제일 나쁜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혼자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살도록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우리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게 되면 마음의 상태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진짜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주님을 의지할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도 아니야. 그럴 때에 그 인간의 마음에는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그렇게 신자의 마음에 의존심에서 비롯되는 눈물이 가득 고인 가운데 비로소 세상 사랑을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자기를 부인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그렇게 희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도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이 철저한 기도의 모본을 보이심으로서 우리에게 기도하면서 살아야지 된다는 것을 생애 전체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과의 그 완벽한 친교,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한량없는 능력, 그 도덕적인 순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사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더 그래야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없어도 나는 살수 있습니다. 혼자서도 잘해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시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데, 기도하지 않고 뭐가 잘 될 때 인간은 점점 교만해집니다. 그 다음에 기도하지 않다가 일이 망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래서 잘 되면 자기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듯이 잘 되면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 것처럼 더 교만해지고 그리고 잘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어떻게 됩니까? 놀랍습니다. 잘 되면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잘 안되면 자기를 돌아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어차피 기도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잃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많이 설교를 들었으니까 그 다음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얻을 게 없습니다. 잘 되도 교만이 자라기 때문에 사실은 얻은 것이 아니고 잃은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니까 더 많이 잃어버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면 하나님을 원망하니까 더 죄를 지으니까 더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아주 독특한 낮고 천한 자신의 피조물인 종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스스로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은 한없이 낮아지신 메시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겸손해져야지 됩니다. 주님이 한순간도 안 붙들어주시면 뭐 하겠습니까? 예수님도 기도하셨는데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사람 되심을 깊이 생각해야지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은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신적 본질을 소유하신 그 어떤 유익을 가지고도 기도에 있어서 덜 희생할 수 있게끔 그렇게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꼭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고난을 이유로 기도를 게을리 하시지 않으신 생애가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들이 솔직히 성화의 삶에 있어서 이유 없이 의무를 게을리 하는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게으름은 무조건 자기 의무를 무턱대고 안 하는 것만이 게으름이 아니라 작은 이유를 가지고 큰 의무를 저버리는 것, 그 자체가 게으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작은 이유가 없지는 않은데 그 작은 이유를 크게 부풀려서 정말 중요한 의무를 저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게으름의 본질입니다. 그렇습니다. 게으름의 본질입니다.
그런 연약한 육체를 예수님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의 그 신체와 부활하시기 전 십자가에 못 박힐 때까지 예수님의 신체는 아주 현저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의 그 몸은 비록 육신을 가지셨지만 우리들이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육신과도 달랐고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실 때까지의 그 육신하고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멀리 다녀도 피곤하지 않으셨고 시간과 장소에 거하실 수도 있었지만 초월하실 수도 있었고 식사를 하셔도 됐고 안 하셔도 됐고 피곤하거나 지치거나 그런 것이 없는 육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상에 사시는 동안 가지셨던 육체는 우리의 육체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육체가 우리보다 강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많이 걸으시면 피곤하셨고 그리고 설교를 많이 하시면 우리처럼 목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육체를 가지셨다는 이유 때문에 기도를 게을리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우리들이 받을 수 있는 유익입니다.
차이는 오직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의 차이이고 사람의 차이입니다. 새벽시간에 일어나는 일은 우리도 피곤하고 예수님도 피곤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새벽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기도를 시작하셨고 우리는 그냥 잡니다. 왜 예수님이 더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끼시고 거기에 철저하게 헌신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었고 우리는 적당하게 살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싸움이었습니다. 똑같이 육체를 가지시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랬는데도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로 자신을 바치신 철저한 생애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 춥고, 배고프고, 아프고, 슬프고, 기쁘고 모든 것들을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똑같이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랬는데도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이 예수님이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가지셨는데도 그 육신 때문에 방해받지 않은 기도생활에 헌신하셨다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들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렇게 고난을 받고 기도하셨으니까 나도 그 주님을 본받고 싶다. 그럴 때 우리들이 기도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계속해서 우리를 죄를 이기고 능력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지 되는데 하나는 지속적인 기도여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한번씩 와서 와르르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다시 새카맣게 잊고 살아가는 그래서 특별기도회 때 은혜 받고 그 다음에 그것을 저축해놓고 계속 쓰고 살아간다는 그런 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안 됩니다. 기도 자체가 소낙비처럼 어느 한때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왜 우리의 상황이 특별한 상황일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이제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특별한 상황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종종 옵니다. 특별한 시험의 때, 그 다음에 특별한 배교의 위험이 있는 때, 그 다음에 특별히 자신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질 때, 이런 특별한 때가 자주 옵니다. 그때에는 일반적인 기도생활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때 특별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지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늘 건성으로 기도하신 적은 없습니다만 늘 하나님 앞에 열심히 새벽미명에, 깊은 밤에 기도하면서 사셨지만 특별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드리신 그 기도는 특별한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특별한 기도가 하나 더 나옵니다. 어디? 제자들을 불러서 그 중에 열둘을 사도로 세우실 때,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그것도 특별한 기도였습니다. 또 어떤 기도도 특별한 기도였습니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유대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시며 기도하신 그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기도였습니다. 그런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우선적인 것은 지속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꾸준히 기도해나가는 사람이 지금은 특별히 기도해야 할 때라고 하는 것을 쉽게 깨닫고 깨달았을 때 특별기도로 반응하지, 매일 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특별한 기도를 드리며 주님 앞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절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꾸준한 기도생활입니다. 그래서 한주에 하루에 5시간 기도하고 6일 동안 노는 것보다는 하루에 1시간씩 매일 매일 기도하는 것이 훨씬 영혼에 유익을 줍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규칙적인 기도의 실천이 없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의 영혼을 무방비 상태로 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달아서 은혜를 받고 그래도 그것은 담겨온 남의 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가서 자기의 아궁이에 집어놓고 거기에다가 작은 나무들을 살라야지 자기 불이 되지,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또 약과지 자기는 기도안하고 남한테 기도만 받으러 다닙니다. 그것은 꼭 뭐와 똑같은가 하면 살을 빼려면 운동하라고 하니까 자기는 가만히 들어 누워있고 살을 흔들어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살이 빠집니까? 남이 막 엉덩이를 흔들어주고 다리를 흔들어준다고 해서 살이 빠집니까? 살이 안 빠집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자기의 엉덩이로 해야지, 자기는 탱탱 놀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를 받는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그런데 뭘 하나 생각해야지 되는가 하면 기도를 실천함에 있어서 특별한 때에는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늘 드리는 기도가 규칙적이고 정해져 있어야지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정해놓고 그것을 규칙으로 삼고 의무라고 하는 것으로 그것을 포장해놓지 않으면 자꾸 약탈당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할 수 있으면 자기가 희망하는 기도 시간의 길이도 정해놓고 가능하면 거기에 맞추어서 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연약함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해서 매일매일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그 일에 있어서 모본을 보여주십니다. 실로 유대광야에서 드린 기도는 물 한 모금, 떡 한 조각 들지 않으시고 자기를 다 쏟아 부어서 기도하셔서 이기신 특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를 드리셨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 기도 몇 번을 가지고 당신의 공생애를 메워 가신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마나 기도가 간절했으면 땀에 피가 가득 섞여서 핏방울처럼 떨어졌겠습니까? 그런 간절한 기도를 드리신 것이 특별기도였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를 드리실 수 있었고 그 기도로 말미암아 특별한 기도의 상황을 승리로 이끄실 수 있었던 것은 매일매일 드리는 기도에 있어서 헌신적이고 성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깊은 밤, 그리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이 그 피곤한 일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러 나가시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바쁘고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그런 말을 많이 하지 않아야지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바쁜 것 가운데 정말 우리가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 때문에만 바쁜가. 우리가 우리를 바쁘게 하는 일의 질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그리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인가. 혹시 그 일이 나 자신의 만족이나 나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일들인데 붙들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야지 되고 두 번째는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바쁘다고 그러지만 예수님처럼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특별히 성경이 집중 조명하고 있는 당신의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중에 지신 그 일의 부담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짐을 지고 사셨습니다. 마음속으로 다가오는 죄인들을 향한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받는 세상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짊어지게 되는 그 내면의 커다란 고통 말고도 실제로 그 분에게 지어진 그 일이 정말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의 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노시는 장면이 안 나옵니다. 장기나 바둑을 두셨 다든지 아니면 골프를 치며 노셨다는 장면이 안 나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때문입니다. 그럴 시간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 휴식도 반드시 재생산을 위한 휴식이어야지 됩니다.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 휴식이어야지 즐기기 위한 휴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나친 휴식은 반드시 사람을 부패로 이끕니다. 그래서 적당한 휴식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힘을 충전 받고 일할 수 있는 그런 양의 휴식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흔히 기도하려면 꼭 일이 방해를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하면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에서는 이 기도와 일에 절묘한 조합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다 쏟아 부으며 일하셨는데도 일 때문에 기도를 방해받지 않으시고 또 자기를 쏟아 부으면서 기도하셨는데도 기도 때문에 일이 방해받지 않는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저는 한 13-4년 됐나요. 은혜 받고 나서 성경을 보는데 사실 새벽기도는 그때나 이때나 힘듭니다. 새벽기도가 아주 체질에 맞는 분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보십시오. 아무도 안 듭니다. 그런데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힘든 시간에만 기도를 하셔서 우리가 본을 받으려고 하기 그렇게 힘들게 본을 보이셨을까? 아침 먹고 기도를 시작하셨으면 우리도 좀 본받을 수 있는데 새벽 그것도 미명에, 미명이라는 것은 아직 깜깜할 때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또 예수님이 일찍 주무셨는가 하면 성경의 기록 군데군데 보면 밤늦게까지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는 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해떨어지면 주무시는 그런 삶을 예수님이 사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또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깊은 밤에 기도하신 것이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그런데 그것을 뒤쫓아 가려고 보니까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여기에 무슨 오묘한 뜻이 있을까? 왜 예수님이 그렇게 새벽미명에 기도하셨을까? 새벽, 그 서광, 그 새로운 한 날이 밝아오는 게 무슨 깊은 의미가 있을까? 깊이 묵상하다가 마지막에 깨달은 게 있습니다.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을, 그런데 그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그렇게 은혜가 될 수없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아무 뜻도 없습니다. 그냥 새벽 자체에 무슨 기묘한 뜻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새벽에 기도를 안 하시면 낮에 하셔야지 되는데 그러면 병자들은 누가 고칩니까? 말씀을 누가 전합니까? 신앙상담은 누가 해주고 제자들은 누가 교육을 시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그 일에 방해받지 않아야지 되겠다고 생각을 하시고 나니까 그 다음에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잠을 줄이시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끔 기도생활을 하다가 보면 그렇습니다. 하소연을 합니다. 기도 좀 하십시오. 목사님, 말도 마십시오. 목사님도 직장생활을 한번 해보십시오. 해봤습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요즘 직장은 종교단체와 비슷합니다. 왜 그런가. 직장에서 요구하는 게 성실히 근무하라. 정직하라 그게 아니라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네 회사를 사랑하고 사장을 하나님같이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살고 나면 이른 아침에 일찍 나가서 밤이 늦게 들어오는데 진짜 목사님도 내 사정이 되어보면 기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렇게 말합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 그 직장, 그 사업을 가지고는 도저히 기도할 수 없다면 그 사업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는가. 당신이 돈버는 기계도 아니고 그렇게 하다가 죽으면 얼마나 억울한가. 그러니까 기도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기든지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도 돈을 좀 덜 벌든지 그렇게 하든지 아니면 그럴 수가 없으면 잠을 줄여라, 힘든데 그게 쉽습니다.
솔직히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있습니까? 얼마나 있습니까? 나는 진짜 십자가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 지난번 십자가를 정의한 것처럼 그게 하나님이 나의 성화와 영적 성숙에 사용하시는 십자가라고 하니까 십자가지, 얼마나 쑥스럽습니까?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을 해서 결국은 왕자들 사이에 칼이 그치지 않고 말년에 그렇게 곤고한 삶을 살았는데 그거 당신 십자가 진 것이 아니냐고 그러면 다윗이 그래, 참 나의 십자가, 잘난 십자가 그랬겠습니까? 자기가 잘못해서 받았는데, 그러니까 진짜로 이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 자기의 과실이 없이 주님을 위한 순수한 희생이라는 의미에서의 이 절대적인 십자가는 정말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 남은 십자가가 나는 기도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잘 몰라서 그렇지 중국은 지금 심각합니다. 선교적인 상황이 옛날보다 굉장히 힘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느 성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안에 체포당하고 벌금을 물고 투옥당하고 그리고 무슨 집회 같은 것을 해도 다 비밀리에 합니다. 특별한 것 빼놓고는, 그런데 그 성도가 하는 말이 우리는 아직까지도 십자가가 있는데 이 남조선에 있는 사람들도 십자가가 있습니까? 무슨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처럼 무한정의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나라가 없습니다. 그것을 나는 아주 확실히 자부합니다. 미국 비교도 될 게 아닙니다. 상대도 안 됩니다. 이게 완전히 기독교 천국입니다. 한국이, 전혀 아멘을 안 하시는데 정말 천국입니다.
내가 싱가포르에 한번 갔더니 전도를 못하게 합니다. 언제만 하느냐 했더니 12월 25일 딱 하루 허락을 해주는데 그것도 전적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그러면 안 되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오셨다. 예수님 오셨다 뭐 이런 정도만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 기독교의 명절이니까 봐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뭘 합니까? 전도를 열심히 하면 여러분을 누가 박해합니까? 아파트 경비원이 뭐라고 그러는 것은 박해도 아닙니다. 개가 짖는 것, 그것도 박해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전도대원들 간증을 들으면 열심히 전도하다가 담임목사 책의 독자를 만나면 들어오라고 하면서 나도 김남준 목사님 잘 안다고 와서 커피 좀 마시고 가라고 그러면서 점심도 주고 그러더랍니다. 이렇게 무한정의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나라가 없습니다. 아니 도대체 교회를 짓는데 신고도 안하고 교회를 세우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이층에다가 짓고 십자가 붙이고 어제 호떡집 하던 것 뜯어내고 십자가를 붙이고 교회, 그러면 교회입니다. 그게 월세나 전세인가도 문제가 안 됩니다.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 그래도 문제가 안 됩니다. 떠들지만 않으면 됩니다. 이런 무한정의 자유가 주어진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전 세계에서 여러분처럼 대접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설교가 기니까 엉덩이가 아플까봐 푹신한 의자, 아니 정말 없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자유입니다. 내가 그래서 그랬잖아요. 사명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기독교 신앙을 마음껏 꽃피우고 정말 그러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원하실까. 이런 정도로 무한정의 자유가 주어진 나라가 없습니다. 미국만 가도 자기 땅을 가지고 있어도 교회를 지으려면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공청회를 해야지 됩니다. 자기 땅을 가지고 교회를 지으려고 그래도 주민들이 안 된다고 도장을 안 찍어주면 못 짓습니다. 절대 못 짓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무한정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우리에게 정말 절대적인 의미의 십자가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지었을 리가 없는 그 십자가, 내가 예수를 몰랐고 십자가를 몰랐고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더라면 결코 짊어지지 않았을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남은 십자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한대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이런 시대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망가지는 것이 밖에서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들이 기도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자신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망합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한 환경입니다. 적당히 핍박도 받고 도망도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경찰이 쳐들어와서 목사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끌려가는 것도 보고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나와서 다시 설교하는 것도 보고 이러면서 신앙생활을 해야지 이게 간절함이 그쳐지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있으니까. 그런데 무슨 십자가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이 기도의 실천은 환경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그러나 환경에 절대 매이지 않는 그런 간절하고 열렬함이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기도의 실천을 뒤따르면서 그것을 본받으면서 살아갈 때 우리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간절함을 본받음으로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진지함과 열정과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특징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하실 때나 인간을 대하실 때나 함부로 대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진지하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우리들이 이렇게 진지해져야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든 상황으로 의무를 덮어버리지 말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기도안하고 살면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가. 성경이 말하는 은혜는 부패해지고 그리고 생명은 고갈되기 시작할 것이고 그리고 거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갈망들은 쇠퇴해버리고 정욕은 잡초처럼 번성하게 자랄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이 기도에 세계를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진지해져야 합니다. 아, 모르겠어, 난 몰라. 골치 아파, 그러지 말고 좀 진지해지십시오.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리고 왜 그렇게 33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생애를 사시면서 혼신의 힘을 쏟아 부으며 그렇게 기도로 사셨는가. 생각하면서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기도하든지 간에 그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듯이 고통스럽다고 하는 표시를 하나님 앞에 해야지 됩니다. 분명하게 기도의 진지함으로, 그런 기도의 진지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지 않으니까 기도 속에 진지함이 깃들지 않고 형식적인 기도로, 의무적인 기도로 기도 시간을 때우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영혼의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기도의 효과는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에게서 본받아야 할 기도의 간절함은 열정입니다. 열정은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그 기도의 제목에 대한 피어린 소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는 그 영혼에 대한 아주 뜨거운 사랑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그런 애정을 가지고 계셨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실 때에는 이미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미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온 몸으로 느끼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게 열정의 정체입니다. 그런 간절한 열정, 그래서 예수님의 그런 간절한 열정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로 올리셨다고 하는 히브리서 5장 7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런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그것은 분명히 열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기도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진지해지고 하나님 앞에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니까 그 기도가 이렇게 열렬함으로 발전해지지 못합니다. 물론 기도의 영으로 꽉 차서 살아갈 때는 한번만 뚜껑을 열면 기도가 광천수처럼 솟아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게 그 사람도 원래 그렇게 된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기도가 안 되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지 않을 때는 기도가 뭔지 모르고 살던 사람들인데 처음 회심을 통해서 기도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이 쏟아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문이 막혔으면 막힌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 앞에 회복되어서 그런 열렬한 기도의 세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시작은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아뢴 것입니다. 간절히 아뢰고 기도하고 그것을 통해서 이 속에서 그 간절하고 열렬함이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솟아 나와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가 되고 그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가 될 때 그 기도가 뜨거운 열정과 그리고 몸부림을 가진 이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작은 처음서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지금 기도의 은혜를 잊어버렸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를 길어내고 하나님 앞서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그 기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묻고 싶습니다. 진짜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한번 기도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음이 찢어지도록 너무 아파서 그래서 주님의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 이외에 이 세상의 어떤 금이나 값진 옷이나 좋은 보석이나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명예나 쾌락 같은 것 가지고는 도저히 위로받을 수 없는 그런 고통 속에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는 이런 열정으로 기도해야 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요동도 하지 않는 이 죄악 된 세상, 말씀을 외쳐도 진리 가운데 돌아오지 않는 완악한 영혼들, 누군가가 뜨거운 눈물로 그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기 전에는 누구도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냉담하지 않고 우리가 만약에 더 열렬하고 더 뜨겁고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쾌락과 죄악에 탐닉하는 것보다도 더 열렬하게 우리들이 기도에 몰두하고 예수님처럼 찢어진 마음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고 그랬다면 세상은 더 많이 바뀌고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더 많이 새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배워가야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희생입니다. 우리들이 굉장히 힘듭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삶이 정말 너무나 바쁘고 불을 켜놓고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노동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말세가 되면 또 이 세상이 정욕에 미친 세상이기 때문에 그런 세상이 우리를 더 많이 유혹하고 그 속에서 갈등도 더 많이 느낍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하고 싶은 것 다하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희생을 해야지 됩니다. 왜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너무나 많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사랑이 더러운 죄인들의 것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불하신 그 고난과 고통, 그 희생이 너무 큰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이 희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음 놓고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너희 나 사랑해라. 그것이 너희의 의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 정도로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안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든 것을 주셨고 우리가 누리고 먹고 입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왔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끼시지 않으셨으니까 이제 우리도 희생해야지 됩니다. 기도합시다. 싫어요. 왜요, 힘드니까. 그것은 어떤 희생의 마음도 그 속에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앙생활은 누구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여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베푸셨는지 생각해보시고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 어떤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예수 믿고 오랜 세월을 이렇게 살아왔지만 주님을 위해 정말 희생한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 믿었어도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었고, 그리고 쓰고 싶은 대로 쓰면서 살았습니다. 언제 예수님 때문에 마음을 졸여본 적이 얼마나 됩니까?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은 항상 그러셨고 예수님은 날마다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주님을 위해서 희생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정말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버려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좋은 기회였는데 신앙 때문에 그것을 스스로 버린 적이 있습니까? 얼마나 그런 경우가 적습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희생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이 신앙의 도는 파악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랑에는 반드시 비용이 따릅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힘듭니다. 이번에 사경회 때 또 와서 기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또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요.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되는데 단 하나, 왜 그렇게 결심은 하는데 쉽게 또 무너지는가 하면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기도하기가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고 느낄 때, 그때 고통스럽고 힘들 때, 그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와 사랑의 빚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가 뭐가 있나. 그리고 훌륭한 지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몇 십억씩 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주일학교 가르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 보면 이렇게 예쁜 디자인들이 있습니다. 아무나 시켜달라고 해도 안 시켜줍니다. 왜 아무나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지 됩니다. 그런데 기도는 안 그렇습니다. 학식이 없어서 기도를 못합니까? 건강이 부족해서 기도를 못합니까? 예수를 처음 믿어서 기도를 못합니까? 오래 믿어서 기도를 못합니까? 공부를 못해서 기도를 못합니까?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의 순서대로 기도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 드리는 사람, 그 다음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내게 뭐가 있나.
지난 주일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아는 어느 원로목사님은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우면 올라가서 교인들 헌금 낸 것을 보고 야단친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아 여러분들 오늘날 헌금하는 것 보니까 천국이 없는 것 같네. 천국이 있는 줄 안다면 그렇게 헌금할 수 있어. 기도합시다. 그리고 기도 한번하고 나면 다음주에는 헌금이 훨씬 더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 능력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목사로서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진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런데 그런 정도밖에 능력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주님 앞에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이 그나마 있다면 부지런하게 사는 것, 끊임없이 내 육체가 안일해질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피 흘리시기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힘들 때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예수님은 더 힘들었지. 내가 아무리 아파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만큼 아프지는 않지.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이 절대적 의미의 십자가, 이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다시 우리의 무릎을 꿇으려고 할 때, 그때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구나.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순결해지기 시작하고 죄를 이길 거룩한 결심들이 우리 안에 생겨나고 성령이 실제로 죄를 죽이시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예수님을 위로하면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이,
내 주님 쓰라린 고통을 다 체험하셨네
주 지신 십자가 대할 때 나 눈물 흘리네
그래서 주님의 그 기도 속에서 사신 그 고난의 희생을 생각하며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가슴아파하며 눈물을 흘릴 때 우리들이 당한 이 기도의 고통,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끊임없이 분투하지만 연약한 우리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깊이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짐으로 죄를 죽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