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가까이Ⅱ
(200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용서의 십자가(마6:12) 2007.4.2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참회의 십자가(요19:34-35) 2007.4.3 십자가사경회(새벽) 8
3. 순종의 십자가(눅22:42-44) 2007.4.4 십자가사경회(새벽) 14
4. 능력의 십자가(갈5:17-26) 2007.4.5 십자가사경회(새벽) 20
5. 헌신의 십자가(마27:34) 2007.4.6 십자가사경회(새벽) 27
1. 용서의 십자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12)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가운데 용서의 기도가 나옵니다. 십자가는 용서의 십자가 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십자가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는 기도 다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하나님이 내리시는 양식은 우리의 육체를 위한 공급이지만 용서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공급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죄 사함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내려주시는 자비가 두가지로 나타납니다. 즉 인간이 많은 죄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서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가 두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죄 사함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앞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해 주시는 것, 두 번째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고 끊임없는 유혹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죄의 경향성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사함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가 여러 가지 많은 부패성을 가진 인간을 이세상에서 여전히 하나님 앞에 희망이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자원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의 12절을 희랍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대를 탕감하여 주옵소서.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에게 빚들을 탕감해 준 것처럼 죄를 빚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그런 종류의 빚입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욱이 인간은 빚을 받을 권리가 있어도 그 채권을 집행할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떼어 먹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인간이 당신에게 지신 빚에 대해서 그 채권을 집행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관련이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실 때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끔 다스리지 않습니까? 교회를 이렇게 지어 놓았는데 교회를 지을때 목적이 여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공경하기 위함입니다. 누가 여기에 와서 그 목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 하실때에는 창조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이 움직일때에는 하나님이 상 주시고 그리고 이것들이 올바르게 수행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의 목적에 반대되게 사는 사람들을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빚은 갚지 않을수 없는 빚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빚을 갚은 방식이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갚으시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 갚지 아니하시고 영원한 세상에서 심판하시고l 이 빚을 한번에 갚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앞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곤고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요즘은 사업을 하는것에 대해서 마음이 많이 열리고 제가 사업을 할 일은 없지만 젊은이들을 만나면 왠만하면 평생 남의 밑에서 월급생활 하지 말고 어느정도 익힌 다음에 네 사업을 한번 가져봐라 그래야지만 뭔가 원대한 꿈을 펼칠수 있지 않겠니? 라고 제가 가끔 유혹을 합니다. 그래야지만 십일조도 많이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강물처럼 흘러갈것 아닙니까?
(예화) 그런데 사업이 잘 되었을때 저는 아버지 때문에 별로 혜택을 받은것이 없지만, 늘 궁핍하고 어렵게 살았지만, 사업을 하다가 망하니까 온가족이 고통입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5학년쯤 되었을까 빚쟁이들이 와서 남편을 찿아내라 어디갔냐?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우리들이 죄인처럼 앉았는데 그 빚쟁이들이 들어와서 소주를 마시더니 찿아내라고 소리 지르면서 나중에 그 소주병으로 장롱의 유리를 깨뜨리는 광경까지 어려서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가슴에 새겨진 것이 뭐냐면 “야! 빚이 참 무서운 것이구나 이렇게 사람들이 폭력적이 되는구나” 그러면서 “이다음에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사업은 하지 말자 두 번째 빚은 지지 말자!” 그것이 마음속에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닌데 빚에 대한 무서움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짖는 죄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청산하지 않으면 안되는 빚이라는 말입니다.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께 반드시 잇기 때문에 그 빚을 찿아 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빚을 갚는 방법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짖고 하나님 앞에 인생 살면서 받는다고 할 때에 그 벌을 받는것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특히 신자들의 경우에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그 지은 죄에 대해서는 이세상에 사는 동안에 다 갚으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곤고하게 사는 사람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의 죄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이 곤고하고 사연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그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죄의 값을 받음으로 이세상에 고통 받지 않는 비결이 있을텐데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용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앞에 진지한 참회가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 테루툴리아노스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참회하기 위해서 이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오늘 잘 들으십시요. 굉장히 중요한 교리 하나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드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죄 사함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한번에 용서해 주시는 것이냐? 아니면 계속 반복해서 용서해 주시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둘러싸고 요즘 이단으로 분류된 어느 교파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 지는데 오늘 저의 설명을 들으면 아마 다 쓸데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여러분들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선 첫째는 죄사함이 단회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에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 봅시다. 이런 한번의 죄사함은 언제 이루워 집니까? 우리가 하나님앞에 이제 내 마음대로 살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주님앞에 와서 우리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앞에 회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십니다. 그러면 그때 용서 해주시는 죄가 어떤 죄 입니까? 어떤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까? 과거의 죄입니까? 현재의 죄 입니까? 미래의 죄 입니까? 과거의 죄라고 한다면 현재에 짓고 있는 죄는 포함이 안될 것입니다. 미래의 죄는 더더욱 포함이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전개 되다 보면 그 앞에 있는 죄들은 용서를 못 받았고 또 혹시 참회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자기가 지은 죄를 빼 놓지 않고 모두 참회할 수가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용서 받지 못한 죄가 남아 있다는 것이 됩니다. 어쨌든 용서 받지 못한 죄가 남아 있다면 구원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르켜서 ‘하나님의 죄사함이 단회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번에 하나님이 과거에 지은 죄, 지금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지을 모든 죄를 한꺼번에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 마음에 짓지도 않은 죄를 뭘 용서를 해주시나 하는데 이것이 이제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시간성의 차이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는 시간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시간을 빼 버리고 나면 우리의 행하며 살아갈 모든 것들이 평면에 보이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안갈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서 이런 나뭇가지가 이렇게 구부러져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시간이 흘러 가면서 모양이 가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없었는데 조금씩 조금씩 모양이 생겨나서 이렇게 된다고 쳐 봅시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자라납니다. 이해 되시죠. 그러면 이것은 시간적으로 나중이고, 여기는 처음일것 아닙니까? 요만한 것부터 점점 자라나게 되었으니까... 그러면 여기 있을때는 이것이 안보이는 것입니다. 아직 안 자라났으니까... 요만큼 자라다 조금 조금씩 자랐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인식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간을 빼 버리면 이것이 확 짜브러 드는 것입니다. 무슨뜻인지 아십니까? 시간과 공간이 없어져 버리면 확 찌부러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을 확 짜브러뜨리면 평면위에 이렇게 이렇게 그림으로 나타날것 아닙니까? 이해가 안 갑니까? 그럼 더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두꺼비집에 휴즈가 있는데 그것을 여기부터 하나씩 잡아 뺀다고 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이렇게 모양을 그리면서 나옵니다. 그럼 태어나서 살고, 초등학교 가고, 그 다음에 학교가서 죄 짖고, 집에와서 죄짖고 이런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간이 없으셔서 그래서 이것을 확 짜브러뜨리는 것입니다. 그럼 평면위에 이렇게 그림으로 나타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는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옛날에도 시간이 흘러 갈을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들이 그것이 다 과거로 돌아가고 나면 우리는 시간적인 순서와는 상관없이 과거의 일을 한꺼번에 알게 됩니다. 어제 일어난 일이나 그저께 일어난 일이나 지금 우리가 한꺼번에 알게 되지 않습니까? 모르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어제 일어 났기 때문에 또 하루가 지나 가야지만, 그저께 일어난 일을 알고 있지만 하루가 지나 가야지만 어제 일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전에 있었던 일은 하루전에 일어 났든 이틀전에 일어났든 십년전에 일어났든지 한꺼번에 확 보이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빼 버리고 하나님이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그렇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지을 죄까지 용서해 주시는 그것이 전혀 이상한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이단들은 용서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구원 못받은 증거다 라고 주장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생각을 확대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것 같은데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가 뭐냐면 하나님의 ‘용서의 반복성’입니다. 반복성이라는 것은 시간을 빼 버리는 세계속에서는 확 짜브러져서 한꺼번에 보이는데 이것이 시간속에서는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을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다 아시겠어요? 모르시겠습니까? 여기서 차를 타고 강릉을 가려면 지금이야 뻥 뚤려서 터널로 가면 되는데 옛날에는 대관령을 넘습니다. 대관령이 아흔아홉구비라고 하는데 제가 운전하면서 세어 보니까 그것은 거짓말이고 일흔일곱번 꺽어 집니다. 77번을 꺽어지는데 이렇게 산을 꺽어 지를때는 산에 가려서 다음에 뭐가 있는지 모릅니다. 돌고나면 나무도 있고 벼랑도 나옵니다. 또 돌고 나면 계곡도 나오고 이렇게 앞을 못보면서 일흔일곱번을 꺽어 지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로 강릉가는 비행기가 지나 갑니다. 그 밑을 이렇게 내려다 보면 한번에 다 보입니다. 아 이제 꺽었구나 다음에 벼랑이 나오는데 아 꺽었구나 다음에 계곡이 나오겠구나. 위에서는 한꺼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뜻이 있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살지는 하나님이 다 아시지만 그것은 시간세계 속에서 갖고 계신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시간세계속에서 펼쳐 집니다. 그때 이제 하나님의 마음은 무덤덤한게 아니라 시간세계 속에서 펼쳐질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아주 익사이팅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동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 하셨는데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영원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시간의 선후 순서 같은것이 있을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간세계속에 그것들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 모든 창조될 것들이 하나님의 생각안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을 빼고 아시는 분이시니까 그 모든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시간세계속에 창조 되었을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오! 이거 새것이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이 다 정해 놓으시고 하나님이 다 아시는 것이지만 이것들이 시간세계 속에서 구현되어 나아갈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아주 놀라운 기쁨, 하나님의 놀라운 감정들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영원성에 대비된 말로 시간성 혹은 한시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살다 죽을지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지만 그것이 시간세계 속에서 펼쳐질때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때는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살때에는 슬퍼하시고 하나님 많이 섬기실때는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진노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시간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이 역동치면서 이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인간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것을 모두 아시고 한번에 우리의 죄를 용서 하셨지만 우리가 죄를 짓는 이것은 우리가 시간세계 속에서 다시 펼쳐 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주님이 마음 아파 하시고, 우리가 그 죄를 참회하고 뉘우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시간세계 속에서 또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죄를 이기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고 이렇게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시간과 공간의 세계는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가 없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피조물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균형을 이뤄야 합니까? 이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가치의 행복은 영원한 나라에 있다라는 생각도 가지면서 살아야 하고 동시에 그렇게 때문에 이세상은 아무 쓸데없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과 거리가 먼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영원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영원한 가치와 하나님의 생각들이 시간세계속에 펼쳐지면서 살아가게 되는 이것을 우리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매순간 순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사는것에 인생의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주님을 믿고 은혜를 많이 받았을때 산으로 안 올라가고 이 죄악이 가득한 도시에서 가족들 버리고 삭발하고 산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천당 못갈까봐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죄의 용서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할때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 주셨지만 그러나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성품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될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한번에 알고 계시고 이미 하나님이 알고 계시지만 하나님이 알고 계신대로 이미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실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시간세게속에서 펼쳐져서 쭉 진행된다고 할때 엄청나게 익사이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합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심리학에서 ‘데쟈브’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일이 옛날에 내 생각속에서 일어났던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꿈입니다. 꿈을 꿨는데 똑같은 상황이 이루어질때 나쁜것이면 섬짓하고 좋은 것이면 감격이 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감격을 합니까? 이렇게 이미 인식하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시간세계 속에서 실제로 펼쳐질때 그때는 너무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마음 아파하고...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믿는 자들에 향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믿는 우리가 죄가 없다하면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믿고 용서 받은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이 지체들을 향해서 죄의 용서를 빌라고 성경 여러곳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순수한 마음이 첫사랑이라고 하지만 첫사랑과 가장 근접하게 간것이 언제 인가하면 회개 하였을 때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을때에 우리가 첫사랑에 가장 근접한 마음으로 돌아갔을때 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히 단번에 우리의 일생을 아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시간세계 속에서 이것이 펼쳐져 나아갈때에는 우리에게 이미 용서하는 것의 끊임없는 시간세계 속에서의 재현 그리고 이미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시간세계 속에서 다시 실제적으로 부어질때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해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커다란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가 죄를 지었을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용서 받을수 있는 놀라운 근거를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나아와서 자기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사람마다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 주실뿐만 아니라 또한 시간과 공간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이 범죄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은혜가 끊어졌을때에 하나님앞에 진실하게 참회하면 그 참회하는 사람들의 죄를 시간과 공간속에서 이미 용서해 주신것을 하나님이 구현해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용서하신 것을 시간과 공간안에서 구현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아주 놀라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은혜의 부으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앞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우리 죄악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래서 보면 영적인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은 참회에 있습니다. 그래서 별로 죄를 안짓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거의 생명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사람이 온전해 보이지 않고 죄를 짓는것 같은데도 더 넘치는 생명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일날 이야기했던 자기 꺽임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꺽임이 참회 없이는 자기 꺽임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것이 환경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그런것이 아닙니다. 그런것이 아무리 좋아져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다시 써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이 끊겠느냐?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죽음이나 천사들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그 어떤것이라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 놓을수가 없다고 성경은 그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왜 기도가 안됩니까? 왜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사는것이 힘이 듭니까? 왜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에 행하기에 그렇게 힘이 듭니까? 그것이 결국은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일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죄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회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사죄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영원히 단번에 용서 받았어도 시간속에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용서해주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앞에 깊이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이 길을 열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 십자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들의 죄를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날마다 은헤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이러한 죄 사함의 권세를 인간에게도 부분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고 할때 인간에게는 아무 손해를 입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죄를 짓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완전히 없을수는 없지만 그러나 거의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는 다른 인간들의 이익과 관련이 됩니다. 이때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만 용서를 받고 나머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라고 살아 간다면 가족, 교회 이런 모든 공동체들이 다 깨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를 지었을때에 그것이 이웃에게 손해를 발생시켰을때에는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을 받아서 화목을 이룰 뿐 아니라 또 이웃에게도 죄의 용서를 빌고 죄를 용서받게 하심으로서 사람들간의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진 죄 사함의 평화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 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 공동체 안에서는 그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공동체가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만약에 자신의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거꾸로 하나님도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그렇게 지체들 간에 이 죄의 용서, 인간들 상호간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에게 주심으로서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큰 손해를 입혔는데 그것을 용서해 주려고 할때 우리는 그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와는 비교 될 수 없을 정도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죄를 지었던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희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희생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신 그 처절한 물과 피를 흘리심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아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보며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놀라운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되었으니 나도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 하면서 다른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의 부족을 채우시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육적인 모자람을 채우시는 것은 나눔을 통해서, 영혼의 모자람을 채우시는 방법은 용서를 통해서 채우시는 것입니다. 두 양식을 공급해 주심으로서 공동체를 부유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기도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거꾸로 말하면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도 사해주지 마옵소서 라고 하는 다소 두려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가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용서 받은 죄인들 뿐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가족들 그리고 지체들이 여러분들이 입힌 모든 손해에 대해서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깊이 용서하고 그 사람을 용납하는것 십자가의 사랑으로 그를 깊이 용서하고 용납하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주께로 더 가까이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언제든지 하나님앞에 나오면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을 다시 입을수 있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화해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화목의 은혜를, 은총을 다시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혹시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를 집요하게 미워하거나 혹은 용서하고 풀지 못한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한번 진지하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다시 사랑할 때 하나님의 그 은혜의 보좌에서 쏟아지는 사죄의 강물, 은혜의 물줄기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의 육신에는 이땅의 양식이 필요하고 우리의 영혼에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아마 오늘 이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하며 용서하지 못한 것들을 깊이 용서하고 그리고 오늘 만나서 은혜 가운데 풀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 합니다. 잘 풀고 서로 화해하고 하나님앞에 다시 그 관계가 열리도록 주님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놀랍게 여러분들에게 다시 화해의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내일 새벽은 아마 오늘 새벽하고 틀린 마음으로 주님께 예배 드릴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 사함의 비밀입니다.
2. 참회의 십자가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19:34-35)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마지막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숨을 거두셨지만 로마 군병이 예수님을 확인 사살하기 위해서 옆구리에 창을 넣었고 거기에서 피와 물이 모두 쏟아 졌다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지신 이 십자가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와 물을 모두 쏟으셔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우선 첫째는 예수님의 이 십자가는 우리의 ‘대속을 위한 십자가’ 였습니다. 대속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죄를 지은 우리가 그 죄에 대한 댓가를 갚을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 지시고 형벌을 당하심으로서 고난은 예수님이 당하셨지만 그 대속의 이익은 우리에게 돌아가게 하신 것이 바로 이 십자가 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올리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 중에 특별히 속제 제사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사 드리는 사람의 죄를 하나님앞에 용서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지금은 하나님앞에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죄를 다시 용서해 주시지만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드려서 짐승을 하나님앞에 죽임으로서 일시적으로 하나님앞에 죄를 용서 받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일시적으로 나마 열어 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제사라는 제도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의 죄를 하나님앞에 용서 받게 하기 위해서 수없이 피흘리고 죽임을 당해서 하나님앞에 제사로 드려진 그 많은 짐승들은 바로 후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실 것을 미리 보여준 대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대속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대속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지 아니 하셨더라면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유익을 아무것도 누릴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그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서 겸손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분이 이루신 그 대속을 오늘 내 마음속에 새기며 그 예수님이 마치 오늘 아침에 십자가에 못박히신것 같은 그 마음으로 주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속의 감격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병든 신앙생활 일수밖에 없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예화) 어느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주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면접을 보는데 목사가 되려고 하는 분에게 면접위원이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하더랍니다. 만약에 누가 당신에게 비난하기를 너같이 더러운 죄인이 어떻게 목사가 될수 있느냐? 만약에 이렇게 공개석상에서 질문을 하면서 당신을 비난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 목사가 되려는 그분이 그 질문을 받았는데 죽어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생각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면접위원들 앞에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면접위원이 “당신은 합격입니다.”
(찬송)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것 내게 요염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는 이세상에는 오직 두종류 사람들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종류의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과 또 어떤사람은 이러한 종류의 죄의 용서를 못받은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속의 의미를 늘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이 십자가는 ‘화목의 십자가’ 이었습니다. 즉 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인간은 하나님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인간에 대해 진노하시는 그런 불화의 관계 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바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불화한 관계를 청산하고 다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은 성도의 도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신 화목은 두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첫째는 ‘원리적인 화목’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그 대속의 십자가를 우리가 ‘아멘’하고 믿음으로 받아 들일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목은 넓은 의미에서 볼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 화목은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분들이 자식을 낳았을때 그 자식이 순종할 때도 있고 불순종할 때고 있고 부모인 자신을 사랑할 때도 있고 그 사랑을 몰라 줄 때도 있지만 그러나 일단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을 영원히 죽을때까지 부모로서 사랑하게 되는 이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믿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일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원리적인 화목이 단회적인 죄 사함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실제적인 화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고 화목하게 해 주셨지만 그 다음에는 실제의 삶속에서 그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 가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 몰래 뭘 훔쳤거나 혹은 아직 부모님이 알지는 못하지만 여러분들이 부모님에게 책망 받을만한 일을 했을때, 부모가 아끼는 물건을 깨뜨렸다든지 혹은 학교에서 성적을 잘 못받았는데 아직 부모님이 눈치를 못챘다든지 등등의 일들이 일어나고 나면 부모는 변함없이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친근하게 대하는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여러분들이 부모를 자꾸 피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가책이 혹은 부모님이 싫어한 일에 대한 사랑이 그 부모님으로부터 여러분들을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서 혹은 부모님 사랑보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모와 낯선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화목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이 아름다운 신앙의 삶,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열매있는 성화의 삶, 우리들이 매일매일 실천하는 정말 아름다운 신앙의 삶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을 토대로 이미 이루신 원리적인 화목을 실제의 삶속에서 구현하며 살아갈 때 일어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원리적인 화목은 우리의 아무런 공로없이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어지지만 실제적인 화목은 두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늘 순종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원리적인 화목이 실제의 화목이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리적인 화목은 깨뜨려지는 법이 없지만 실제적인 화목은 우리들이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 그것이 깨뜨려 집니다. 그때는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깊이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이 실제적인 화목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주님의 그 은혜와 능력을 받으며 주님의 마음을 전수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모여서 새벽 사경회를 드리는 것 도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의 증진을 위해서 하나님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드려서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실제적인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화목을 깨뜨리지 않고 사랑과 순종속에서 십자가의 감격을 유지하면서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셔도 ‘아멘’하고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의 생애를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까 거기에서 피와 물이 모두 쏟아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을 누가 보고 여기에 적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것을 보니까 우리들은 금방 알아 차릴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직접 보고 적은 것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4장 50절을 보면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 오실 때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홀로 끌려 가셨는데 그때 제자들이 두려움속에서 모두 도망하였으니 이는 이미 예수님이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 라고 하는 그 예수님의 예언과 맞아 떨어지는것 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오실 때 제자들 가운데 단 한사람도 예수님 곁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배신자이니까 물론 없었고 열한 사도들이 모두 한사람도 예외없이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요한 사도가 여기서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모두 쏟아지는 광경을 볼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일곱마디 말씀을 남기십니다. 그 일곱마디 말씀 가운데 세 번째 말씀이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는 이 대목도 역시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바로 이것도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자옵는 광경이 나옵니다. 요한도 예수님이 이렇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때에 요한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수 있는 사실은 성경의 모든 기록을 유추해 볼때 알수 있는 사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다가 예수님이 잡혀 갔을때에 모두 도망갔는데 그 중에 한사람 사도요한이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에 못박혀 있을때 그 골고다 언덕으로 돌아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목숨이 아까워서 두려움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도망쳤지만 어느 순간 예수님을 홀로 고난당하게 버려 두는것이 마음 아파서 눈물 흘리며 참회하며 이 십자가 아래로 돌아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다른 모든 제자들이 볼수 없었던 광경, 십자가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신 예수님의 그 네마디 말씀을 모두 받들수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창에 허리를 찔려 피와 물을 모두 쏟으시고 죽으시는 그 광경을 생생하게 지켜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유일한 증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가셔서 십자가에 못박힐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심히 슬피 울면서 몸부림 쳤지만 병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를 섬기시던 그 손을 나무에 매달고 그 발에 못박아 예수님을 높이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진 고난을 다 당하시고 우리를 위해 마지막 남은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공중에 매달리셨습니다. 뜨거운 태양볕 아래 예수님은 그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치욕스러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이 십자가 죽음의 형벌은 금방 죽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두 손에 못을 박고 십자가에 깊이 못박혀 매달리셨습니다. 이제 온 몸이 박힌 그 못에 매달려 늘어지고 양쪽에 손이 찢어지기 시작하고 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 가는 길을 가득 매웠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서 올라 갔던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히신 십자가의 주님을 뒤로한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이가 눈물을 흘리며 그 수많은 인파를 거스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주님과 한패라고 하는 지적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이번에는 사람의 안목에 시선을 안중에 두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어린 사도요한이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수많은 인파와 어깨를 부딪히며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가고 있는 이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는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 자신의 생명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여 주님을 버렸지만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그 어떤 피신의 장소에서 요한은 양심의 깊은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계실때에 가장 나이 어린 이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이 가까워 오실 때 하신 일은 자기의 때가 가까워 오실 떄를 아시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가 가까워 오시자 더욱더 자기들을 사랑해 주셨는데 자신은 예수님의 고난이 찿아 올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것을 깊이 참회 하였을 것입니다. 그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갈 때 요한의 마음은 도망갈 때 요한의 마음과 달랐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 바야바의 뜰에서 “너도 예수와 한편이지?” 라고 했을때 저주 하면서 까지 부인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요한은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 갈 때 사람들이 “너 예수와 한편이지?”라로 물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한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 한 사람입니다. 잠시 목숨이 두려워 우리 좋으신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지신 이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며 내가 예수님께로 돌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과 상관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한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았고 또 하나님이 우리같은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느꼈기 때문에 한때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그 십자가 때문에 받아 들일수 없는 사람들을 받아 들이고 그 십자가 때문에 감당하고자 하는 일들이 너무 힘들때에도 예수 죽으셨으니 나도 죽는것이 마땅하지 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 가다가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노라 하며 우리들이 세상을 사랑하던것을 버렸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것 주님이 맡겨진 사명에 서 있는 것이 힘들게 느껴질때마다 이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는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수치를 다 당하셨는데 그 십자가의 은혜롤 구원받은 내가 이 사명의 자리에 서서 무엇인가를 감당해 나갈 때 흘리는 이 아픔의 눈물, 고난 이것 때문에 주님앞에 불평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주님앞에 뉘우치면서 다시 그 험한 십자가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쓰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주님의 부름심을 따라 여기까지 살아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이마음 입니까? 여러분 모두 한때에는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십자가 보다는 우리 사는 것이 좋아서 요한처럼 주님 버리고 도망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에 눈이 어두워 좋으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아직 두눈을 뜨고 계신데도 저주하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한편이라는 것을 부인 할때는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요한을 보십시오. 한때는 그렇게 예수님 십자가 버리고 도망 갔습니다. 당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채찍에 피투성이가 된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계신 주님을 버려둔체 요한은 도망 갔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는듯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모든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십자가로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찬송)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 울며 돌아 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심한 이후로 변함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그 분이 흘리시는 보혈을 맞으며 나의 평생 자랑은 십자가 밖에 없도다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요한처럼 예수님의 제자처럼 십자가를 떠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한처럼 그 십자가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이 그렇게 자신을 주님을 그렇게 홀로 고난을 당하게 내버려 두신것을 참회하며 십자가 아래로 돌아 갔을때 예수님은 요한에게 “어디갔다 왔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처럼 모시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을때 유일하게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단 한사람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 동안 교회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올때 마다 입을 열고 그분이 마지막에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기도하시다가 아버지 은혜의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운명하신후 로마 군병들이 옆구리에 넣은 그 창에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죽으셨다는 그 마지막 십자가 광경을 교회 앞에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계신곳이 돌아온 십자가 아래입니까? 아니면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버려두고 어디엔가 여러분들이 더 사랑하는 목숨을 위해서 그 십자가를 버리고 숨은 곳입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직도 그 십자가 아래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 아침에 돌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버려두고 제가 이렇게 멀리 도망 왔습니다. 주님을 잠시 버리고 도망쳤지만 여기는 내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이 나 보고 무엇이라고 멸시하고 조롱하든지 나는 골고다 언덕을 내려오는 수 많은 인파를 헤치며 십자가에 아직 못 박혀 계신 예수님께로 돌아 갑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 갑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 갑니다. 내가 정말 사랑해야 할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음을 제가 알고 돌아 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 버리고 도망간 것은 비열한 배신 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수 있었습니까? 지금 이 골고다 언덕에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계십니까? 바로 사도요한과 같은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까? 그 큰 사랑 예수님이 요한에게 베풀어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 품에 안고 함께 떡을 뗄 만큼 예수님은 이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비열하게도 그 예수님 버리고 홀로 도망 갔고 예수님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마지막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못 박히실 때에도 예수님 혼자 였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를 깊이 참회하고 그 십자가로 돌아 갔을때 예수님은 이 요한을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여전히 사랑하는 제자로 받으시고 육신의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이미 요한이 예수님을 버리고 간 때에도 예수님이 그를 용서하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돌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이 여러분들이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눈물이 있는 신앙, 기도가 있는 믿음, 십자가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에 용솟음 치는 그 복음신앙 거기가 바로 오늘 이 새벽에 이 고난주간에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자리입니다. 돌아가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3. 순종의 십자가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눅22:42-44)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그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우리가 이 본문중에 일부를 살펴 보았습니다만 본문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는 아직 끝나지 안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 지난 주일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 본문을 보면서 십자가로 가까이 다가가는 저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선 제일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들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처럼 열렬한 기도의 생활을 원합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기도가 언제나 열렬하고 뜨거웠지만 아마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그 기도가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였을 것입니다. 물론 유대 광야에서 공생에 등장하신 직후 금식하시며 기도 하실때도 물론 열렬 하셨을 것이고 그리고 이제 제자들 중에 열둘을 세워 사도라 부르실 그때에도 틀림없이 예수님께서는 밤이 맞도록 열렬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이 언제나 열렬했지만 그러나 특별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매우 뜨겁고 열렬한 기도 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려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 같이 되었더라 그랬습니다. 이것은 피 흘리듯이 땀이 많이 흘렀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땀속에 피가 배어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온 몸에서 진액이 쏟아져 나온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의학적으로는 지식이 부족하지만 그러나 금식을 한다든지 어떻든 마음을 모아 하나님앞에 금식을 하면서 간절히 기도를 하면 땀은 모르지만 오줌에 피가 배어 나오는 경험을 여러차례 했습니다. 그때마다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온 몸과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앞에 매달리실때에 그 땀에 피가 배어 붉은 핏방울 처럼 이땅에 떨어 졌다는 이야기가 사실일것 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열렬함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굳게 닫혀 있던 수문이 열리자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물이 그 작은 수문으로 힘차게 빠져 나갈 때 그 물살의 힘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을 쏟아 부어서 하나님앞에 열렬하게 기도할 때 그 쏟아져 나가는 물의 힘은, 그 기도의 힘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는 역경이 기도를 막았는데 기도가 열렬하게 쏟아져 나오니까 역경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 기도는 더욱더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가 됩니다. 예전에는 유혹과 시험에 의해서 기도가 방해 되었는데 이렇게 기도가 열렬하게 쏟아져 나오니까 유혹과 시험이 자극할 수록 그 기도는 더욱 뜨겁고 간절한 기도가 되는 것이 마치 타오르는 불길 위에 물을 끼얻을 때 그 불길이 워낙 쌔면 부어진 물 때문에 오히려 더 불길이 치솟아 오르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런 기도를 누구든지 다 드리고 싶어 합니다. 아마 이렇게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앞에 매어 달릴때 우리의 마음에는 신속한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의 상황에도 아주 빠르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평범한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었던 꿈꾸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 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운명처럼 가까이 두고 살았던 실패를 버리고 다시 도전하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깨서는 우리가 이렇게 우리 자신을 쏟아 부어서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적절한 문제를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문제도 주셔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문제를 남겨 주셔서 열렬히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제목이 크다고 해서 기도가 열렬히 쏟아져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새벽에 아마 오랫동안 넘지 못했던 인생의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회복되지 않는 영혼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과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깨뜨려진 가정의 문제일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건강의 문제나 사업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문제를 남겨 주셨고 여러분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앞에 기도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동안 기도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진전이 전혀 없고 상황이 더 나빠지기만 할 뿐입니다. 이럴때 여러분들은 즉각적으로 이 기도의 제목이 보다 열렬하고 간절한 기도를 필요로 하는구나 라고 하는것에 대해서 눈 떠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극복하고 나아갈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실패에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더 간절히 마음을 쏟아 부어 열렬히 땀과 피를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시던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하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제일 싫어 하는 것이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유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유없이 고통을 당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방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하나님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아버지 앞에 나아가려고 할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시련과 어려움을 주셨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마음을 다해서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를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평범하게 기도할때는 들어 주시지 않았던 특별한 기도의 제목들을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간단간단하게 평범하게 기도해도 들어 주시는 것은 쉬운일 일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앞에 열렬하게 마음을 쏟으며 기도해야지 들어 주시는 기도 제목들은 힘든일 일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힘든일도 없고 하나님께는 모든일이 다 쉬운일이지 힘든것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1kg짜리 드는것과 2kg짜리 드는것이 커다란 차이가 나지만 아주 건장한 씨름꾼에게는 1kg짜리 드는것이나 2kg짜리 드는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려운일 더 크고 힘든일 그런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그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마음과 모든 삶을 바꾸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앞에 열렬하게 간절히 기도해야지만 주님이 들어 주실수 있게끔 정해 놓으신 기도의 제목들은 그렇게 여러분들이 마음을 쏟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들어주지 않습니다.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의문은 이렇게 떠 오릅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하나님앞에 열렬히 기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육체의 힘만을 사용하는것 만으로는 열렬한 기도를 드릴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열렬히 기도를 드릴수 있느냐? 오늘 예수님이 그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지난주에 설명 드린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잔이 당신 앞에서 지나 가시는 것 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가 죽는 것이 고통이 무서워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시는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 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수님께서는 내 백성을 위하여 이 십자가를 지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가슴에 새기면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 드렸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아버지 앞에 간절히 매달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게 힘을 주셨습니다. 이 기도가 있고난 후에 두가지 일이 일어 났는데 천사가 와서 예수님의 기도를 도와 준 것과 그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은 더욱 열렬히 기도하여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가 되도록 하나님앞에 매달리셨습니다. 열렬한 기도는 육체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열렬한 기도의 비밀은 자기 꺽임입니다. 마치 기도에 있어서 자기 꺽임은 물이 가득찬 저수지가 있는데 저수지 아래의 논은 완전히 매말라 거북이 등처럼 터졌고 정말 절실히 물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힘을 내면서 하나님앞에 도와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남들이 볼때는 그 기도가 정말 열렬해 보입니다. 목에 힘줄을 세우고 하나님앞에 통성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귓가에는 하얀 침들이 어깨를 이루면서 하나님앞에 매달려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댐 속에서는 물이 나가기 위해서 물이 출렁 거립니다. 그런데 물이 실제적으론 나가지 않습니다. 메마른 땅과 같은 자신의 삶과 심령에 그 은혜의 물이 적셔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꺽임이 있고 나면 수문이 열리면서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면서 삽시간에 메말랐던 대지에 그 댐에서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공급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이라도 모내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쏟아 붇는 열렬한 기도는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자기 꺽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를 꺽는다 하는것은 무엇이냐면 이제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완고한 생각 그리고 완고한 마음, 완고한 의지의 성향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꺽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경향과 인간의 경향 특히 내 의지가 나가고자 하는 방향을 확 꺽으시는 그 주도권은 성령님이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계속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가지가 필요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계속 산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길을 계속 가기 위해서는 의지와 관련해서 최소한 두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 합니다. 그 첫째가 뭐냐면 하나님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의지의 존속입니다. 그 의지가 계속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을 거스려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거스려 살려고 해도 이제는 그런 의지가 어떤 이유로 사라져 버렸으면 하나님을 거스려서 살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면 의지의 힘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의지의 힘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존속하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그 의지가 하나님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간단 합니다. 두가지만 없으면 되는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기는 있는데 그 힘을 빼 버리면 되는것 아닙니까? 그럼 그 방법이 뭘까요? 의지를 존속기켜야지만 계속 하나님을 거스릴수 있는데 그 의지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도록 바꾸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 꺽임입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참회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죄에 대한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가도 어느 한순간 하나님앞에 자기가 꺽여서 회개하게 되면 신기하게 그 순간에 그것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거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의지의 힘을 빼앗는 방법인데 의지가 하나님을 거스르려고 계속 힘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죄의 경향입니다. 그러니까 의지의 힘을 하나님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힘을 빼앗아 버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면 은혜의 감화가 필요 합니다. 은혜의 감화가 있으면 참회는 가던 방향을 바꾸어서 의지의 존속을 막고 그 후에 부어지는 성령님의 그 후에 부어지는 성령님의 은헤는 의지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스려 살고자 하는 힘을 박탈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둘로 요약이 되는 것입니다. 참회해서 가던길을 바꾸고 계속 은혜를 받으면서 죄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둘다 필요 하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없으면 후자가 될 수가 없고 전자가 있어도 후자가 계속되지 않으면 실제의 삶은 전혀 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온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한때는 이 교회에 와서 말씀의 빛을 받고 아주 과감하게 삶의 가는 방향을 바꾸고 주님을 만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 만나고 변화 되었는데 실제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 변화 되었는데 실제의 삶에 있어서 다시 옛날의 삶으로 돌아간 분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말씀은 듣고 이 길을 가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한번 꺽어져서 참회는 하여 방향을 바꿨는데 이후로 계속해서 은혜를 공급 받음으로 죄를 짓고자하는 의지의 힘을 빼앗아 버리는 은혜의 능력이 고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방향전환은 했는데 나도 모르게 다시 방향전환한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그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려 살지 못하도록 돕는 은혜는 가기 꺽임을 통해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방향전환은 방향 전환된대로 살고자하는, 살 수 있게끔 해주는 강한 은혜의 힘은 자기꺽임으로부터 흘러서 들어오기 시작하고 한번 꺽여진 방향은 계속 흘러 들어온 은혜를 통해서만 그 방향이 유지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죄는 없으신 분이시지만 자기 꺽임을 여기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땀이 피처럼 쏟아지는 그 기도속으로 깊이 들어 가십니다. 여러분들이 깊은 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꺽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꺽임의 주체는 원인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자기를 꺽으려고 하는 신자들만 꺽으십니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보십시오. 아무대나 부러뜨린다고해서 부러지지 않는 나무가 많습니다. 근데 신가하게 그 마디에 손톱을 대고 꺽으면 신기하게 딱 하고 뿌러집니다. 그러면 그 가지를 부러뜨릴때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대나 꺽으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은 꺽지 못하는 그런일들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꺽어지는 그 가지에 손을 대어서 부러뜨리면 적은 힘으로도 정확하게 부러뜨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꺽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꺽일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것입니다. 꺽이려는 마음이 없이 제멋대로 여러분들이 살아가면 여러분들은 영원히 은혜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아마 일평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쏟아 부으며 진액을 흘리는 이런 종류의 기도로서 여러분들 앞에 놓여있는 삶의 상황을 바꾸는 도전적인 기도생활은 거의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꺽임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빛이 필요 합니다. 말씀의 빛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가 무엇이 휘었는가 어떤것들이 하나님께서 꺽어 버리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깊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깨닫는 것이 없이는 하나님앞에 올바른 기도의 제목도 나올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와서 그냥 졸다가 가고하면 그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님앞에는 매우 역겨운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무엇을 해 주실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꺽임이 중요하냐? 저희집은 어렸을때 강원도에 있었습니다. 여기 지금에 말하자면 신설동 쯤 되는것 같습니다. 거기에 가면 지금은 동대문 도서관이 된 거기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버스를 타면 제 생각에는 새벽 6시쯤 출발을 했던것 같습니다. 어쨎든 그것을 타면 오대산 밑에까지 가는데 집에 도착하면 사고없이 자동차가 고장나지 않고 곧바로 가면 오후 1시나 2시쯤 도착하고 차가 망가지면 몇시에 도착할지 주님만이 아십니다. 고장난 차가 서울 올라가는 차한테 고장 났다고 하면 그 차가 서울가서 이야기 해서 다음차가 부품을 싣고 와서 고치고 갔으니까 별 보고 집에 들어오는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두시간이면 가는 거리 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일곱시간 여덟시간 걸렸습니다. 6시쯤 그렇게 떠나면 8시쯤 되면 양평에 도착합니다. 지금이야 출발하면 한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 그때는 8시반쯤 되어야 도착하는것 같습니다. 거기서 아침을 먹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원도 운전사들은 전국에서도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차를 험하게 모는지 제가 한번 방학때 집에 갔다가 오면 몇일씩 경기를 하고 그랬습니다. 산이 이렇게 되어 있고 원래 길을 이렇게 파고 여기는 강이고 그래서 경사를 이렇게 짓게하고 여기에 배수로를 파서 이렇게 하는것이 도로공사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 그럴 돈이 어디 있습니까? 공사는 무슨 공사 입니까? 그냥 트랙터가 밀고 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산에서 물이 떨어지면 흘러 내려서 강으로 흘러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 물이 흘러 내려서 길은 점점 깍여서 산처럼 비스듬하게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커브길일때 얼마나 강으로 잘 굴러 내릴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비포장 도로를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달리는지 하여튼 그 강원도 운전수들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와일드한 운전수들 이었습니다. 지금은 차가 핸들을 틀면 힘주지 않고 놓으면 핸들이 다시 돌아 오는 좋은 조향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고 모두 두 팔뚝으로 용을 쓰면서 핸들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정지되어 있을수록 핸들은 무겁고 달려 갈 수록 핸들은 가벼워 지니까 돌맹이라도 튀기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핸들이 꺽어 지면서 강바닥으로 내리 꽂히는 것입니다. 일년이면 한두번씩 심심치 않게 승객을 가득 실은 버스가 30cm의 얼음을 깨고 강속에 빠져 버려서 몇십명씩 죽는 사고는 다반사 였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거기에서 사업을 하셨는데 거기에 사시는 동안 버스를 타고 세 번을 굴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고가 자주 일어났나 하는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차가 그렇게 무서운 힘으로 달릴때 만약에 핸들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떤일들이 일어 나겠습니까? 그 당시 대게 사고의 원인이 핸들과 그렇지 않으면 브레이크입니다. 브레이크 고장도 그렇게 많이 일어나서 차가 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핸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바닥에 내려 꽂히거나 산에 들이 박아서 버스가 찌그러지고 사람이 피가 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열렬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은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앞에 꺽이지를 않는다면 엔진이 좋아서 힘이 나는 자동차이지만 핸들이 말을 안듣는것과 비슷합니다. 차라리 엔진이 안 움직이면 사고가 없을텐데 힘이 있어서 열심은 있는데 핸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뭔가 사람을 싣고 돌진을 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싣고 돌진할 수도 있고 지체들을 싣고 강바닥으로 다이빙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동차의 일차적인 덕은 강력한 엔진의 힘이라기 보다는 그 달려가는 힘을 감당할 수 있는 핸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만약에 핸들이 잘 움직이는 차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전에는 차 세워놓고 핸들을 돌리려면 운전수들이 팔뚝을 불꾼 거리면서 온 힘으로 핸들을 감아야 했습니다. 이제는 소형차들도 전부 스티어링 핸들이라고 해서 기계 핸들이 되어서 손가락 하나 가지고 돌려도 그 엄청난 차들이 커다란 트럭 같은 것도 손가락 하나로 돌려도 몇십톤의 철강을 싣고도 핸들이 돌아가는 그런 자동차를 우리들이 타고 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유익하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동차 기술이 날로 발달해서 천천히 달릴때는 원래 핸들이 무겁게 되어 있고 빨리 달릴때는 가볍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지 되어 있는 상태에서 마찰을 많이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되어서 정지 되어 있을때는 핸들이 가볍게 움직이고 150킬로 160킬로 고속으로 달릴때는 핸들이 무거워지는 그런 차들이 지금 거리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운전하기 편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자기꺽임이 있으면 하나님은 운전하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보면 늘 교회안에서 사는것 같고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뭐 특별히 나쁜것 하는것 없는데도 이상하게 밋밋하고 완고해서예수 믿는 간증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렇게 올곧을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도 그 사람 보면 이상하게 침체에 빠지고 때로는 잘못하기도 하고 뭔가 일관성이 없는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그 사람에게는 예수 믿는 신앙의 놀라운 간증들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뭔가 하고 들여다 보면 전자의 사람은 착실하기는 하지만 죽어도 자기 꺽임이 없는 사람입니다. 보탬은 있습니다. 자기가 가는 그 길을 조금 열심히 가거나 천천히 가는것은 있는데 꺽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참회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자기의 가는길을 꺽는다든지 이런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제멋대로 사는것 같기는 한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앞에 자기를 꺽을 줄 압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실 때 후자의 사람은 엔진은 가끔 쿨럭쿨럭 거리지만 핸들은 잘 듣는 차 같습니다. 전자의 사람은 엔진은 좋은데 죽어도 핸들이 말을 안듣는 자동차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굳이 차를 타야 한다면 어느 차를 다겠습니까? 엔진은 좋습니다. 280킬로미터까지 속도가 나가는데 핸들은 안 움직일 수가 있음 그렇게 쓰여진 그 차를 타겠습니까? 누구를 잡으려고? 가다가 서도 차라리 핸들이 잘 듣는 차가 낮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간증을 많이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이 만약에 자기를 한번 꺽어 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생겨나고 하나님의 복이 그쳤던 자리에 다시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주님앞에 드릴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별로 기뻐하시지도 않는 그 길을 여러분들이 계속 걸어가며 오히려 용을 쓰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던길을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을 꺽기를 원하십니다. 꺽는것이 힘들때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신것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나를 꺽는 이 길이 그리스도를 닮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드리 받게 된 구원의 놀라운 기쁨과 은혜를 이렇게 자기를 꺽는데 사용하게 될 때 여러분들도 이제껏 몸부림 쳐도 깊이 기도할 수 없었던 놀라운 기도의 세계속으로 여러분들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며 이 사명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능력의 십자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갈5:17-26)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에 보면 ‘육체를 쫒아 사는 사람’과 ‘성령을 쫒아 사는 사람’ 두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육체를 쫒아 사는 사람들이 바로 사도 바울이 지적했던 갈라디아 교인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갈라디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안되고 율법도 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을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시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교회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만약에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그 십자가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구원 받을수 없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일부 어리석은 지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까?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계명을 모두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여러개가 아니고 하나입니다. 만약에 그중에 어느 한 율법을 어기면 전체를 어긴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율법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율법을 지킬수 없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또 이 율법은 구원받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이 율법을 다 지킬수는 없지만 율법대로 살 때 어느정도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을 주셔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율법은 그것을 지켜서 하나님앞에 연락될 만한 사람이 되라고 주신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율법은 힘써 지켜도 모두 지킬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럼 오늘날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율법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구원해 주신 것이 감사한데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것을 이 율법에서 신약의 계명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시는 방향을 따라가는 그 길을 율법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율법을 모두 지킬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지키면서 살아 가려고 노력을 하는데 그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약의 율법이 새롭게 해석이 되어서 이렇게 믿고 행하면서 기도하면서 살아 가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 모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은 육체로서 이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고 애쓰고 그렇게 산 어떤것 때문에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그런 것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같은 법조인이기 때문에 판사 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어서 판사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알고 있는 많은 법에 관한 지식이 자신의 형벌을 면하게 하여 줄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율법을 많이 알고 있고 그것을 지킨다고 할지라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없으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 갈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또 한부류의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의 사람들 성령을 쫒아 사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각사람속에 심어주셔서 우리안에 성령님이 지성을 가지고 갈 길을 가르쳐 주시고 또 그 성령님께서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의지 이런것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쫒아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늘 성경은 성령을 쫒아서 사는 사람들로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소욕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도 성령이 하시고자 하는 바가 마음속에 느껴지고 또 한편으로는 육체가 하고 싶어 하는 바가 또한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이 항상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믿고 은혜생활을 잘하면 육적인 더러운 생각들이 계속 살아지고 신령한 생각들이 떠 오릅니다.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이세상에 자기의 욕심에 따라 사는 일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삶 전체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그 능력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왕년의 좋은 신앙은 왕년에 그 사람을 살렸고 오늘은 왕년의 좋은 신앙이 아니라 오늘날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이겼다 승리했다 그럴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가끔 왔던 이 찬수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교회는 엄청나게 교인들이 늘었습니다. 오천명이 넘게 교인들이 늘었고 우리보다 개척을 늦게 했는데 굉장히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이천명 모인다고 하더니 삼천명, 사천명, 오천명...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교인들이 많이 모입니까? 어떻게 목회를 하시길래 교인들이 그렇게 많이 모입니까?” 했더니 목사님이 겸손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열린 교회하고는 틀립니다. 그래서 “뭐가 틀립니까?” “우리 교회가 민방위 대원들이라면 열린교회 교인들은 해병대죠 공수부대나...”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해병대가 그렇게 탈영을 많이 합니까? 수시로 갑니다. 처음와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열린 교회 마당에 자기를 묻어 달라고 할때는... 묻어 줄 마음도 없습니다. 헌금이나 하면서 그래야지... 어디다 묻어 줍니까? “김 목사님하고 목숨을 같이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감동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김 목사님 어쩌구 저쩌구... 요즘은 내가 속으로 “너나 잘 하세요!” 그때는 해병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탈영을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나, 생애적인 발견 다 소용 없습니다. 은혜 떨어지면 탈영을 하게 됩니다. 왕년에는 해병대 였을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탈영병입니다. 그것은 육체의 욕심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뛰어 납니다. 우리 조상들이 수 많은 인간들을 상대해 본후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 물에 어떻게 새깁니까? 고맙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쓰자마자 물에 흘러서 지워져 버립니다. 감사합니다 썼는데 흘러 갑니다. 너 죽일꺼야 라고 돌에 새기는 것입니다. 몇천년이 지났는데 글자가 안 지워 집니다. 그렇죠. 백제 시대에, 고구려 시대에 쓴 글자가 아직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인간을 향해서 그렇게 사는것도 나쁜데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육체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면 과거에 받은 은혜, 십자가의 사랑, 사명, 사랑하는 지체들, 나의 아끼는 가족 거기에서의 나의 임무 다 필요 없습니다. 결국은 뭘 보여 주는 것입니까? “아! 그렇구나”
(찬송)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매일매일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른 지름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죽으면서 성령을 쫒아 사는 사람들을 가르켜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소유격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 그리스도 예수께 소속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의 정체가 뭐냐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 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 잠재의식 저 밑에 깔려 있는 자기의 중심을 따라 살려고 하는 욕망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욕심은 아주 구체적으로 의식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세계 안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육체적인 욕망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죄를 이루는 육체적인 욕망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과 욕심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라고 오늘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이 무슨 뜻 입니까? 우리들이 볼때는 무슨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이 시대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못박는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죄를 지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다 라고 하는 말의 핵심은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뭐라고 하냐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희랍어 성경에 현재 완료형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못 박은 것은 옛날에 못 박은 것인데 그 못 박은 영향이 지금까지 계속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올바르게 해석을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옛날에 못 박았는데 지금도 계속해서 못 박은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이, 궁금한 것이 그러면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즉 거듭나고 그리스도 예수께 속하게 된 사람들이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방식이 어떤 방식일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 정고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화) 아주 오래전 일 이기는 합니다만 지금은 모든 건널목들이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건널목이 되면 저쪽에서 기차가 저절로 속도를 줄이면서 오게 되고 또 이쪽에서 차단기가 자동으로 내려가서 사고가 많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참 건널목 사고가 많이 났습니다. 일년에 몇십명씩 건널목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건널목을 지키던 철도청 직원이 있었습니다. 워낙 통행이 많은 곳에는 초소 같은것을 지어 놓고 간수처럼 철도청 직원이 지켰습니다. 저쪽에서 기차가 오는데 초등학생 하나가 건널목을 건너는 것입니다. 기차가 달려 오니까 놀래 가지고 어떻게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널목을 지키던 간수가 뛰어 와서 아이는 밀쳐내고 자기는 차에 치여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신문에 났는데 철도청 직원의 장례에 참여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사에 나온 내용이 부모가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눈물을 흘리는 것 이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이 사람이 죽었으니 가족들의 손을 잡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로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첫 번째 방법이 뭐냐면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주간에 한번씩 새기는 그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린 교회에 오자마자 ‘십자가를 경험하라’ 라고 하는 그 진리들을 배우는 이유가 바로 그런것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지금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성화도 안되고, 기도도 안되고, 사명도 감당할 수 없고 그 다음에 자기 속에 일어나고 있는 끊임없는 육체의 욕심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아십니까? 새벽에 하나님이 오랜만에 문을 열어 주셔서 기도가 막 쏟아 집니다. 그래서 엎드려서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면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내가 이렇게 밖에 못사는구나 그러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눈물을 흘려도 낮이 되면 육체의 욕심에 시달립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이런 경험이 몇 달을 교회에 다녀도 없습니다. 눈물 한방울 안나오고 삶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대한 아무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이미 자기속에 일어나고 있는 정과 욕심에 지배된 사람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방탕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더 많이 이 십자가의 은혜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방탕하지 않고 믿음의 가정에서 잘 자라서 빗나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십자가의 은혜가 떨어져도 타락해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맛을 많이 본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은혜가 떨어지면 옛날에 갔던때 까지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들이 왜 그렇게 회심을 잘 하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회심하고 나면 그 아이들이 왜 그렇게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왜냐하면 타락해 본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 금방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돌아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악습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 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무엇인가 자기를 즐겁게 하는 일에 깊이 빠지게 되면 아주 인간이 패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도 잘 안되거니와 회개해도 그 회개할 때 하나님앞에 한 약속을 잘 지킬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살아 왔던 사람들은 타락해도 많이 미끌어 지지 않습니다. 또 안 미끌어 지면 뭐 하겠습니까?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데... 그냥 꾸준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꿋꿋하고 밋밋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찬송 중에서도 특별히 십자가 찬송을 가슴에 깊이 품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건조하고 메마르게 느껴질때 잠시 사무실에서, 운전하는 차 안에서, 타고 가는 지하철 안에서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앞에 십자가를 묵상하고 그러면서 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지셔야 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때문 입니까? 지금 자기가 지은 죄, 자기가 짓고 싶어 하는 죄, 자기가 지금 짓고자 욕망을 느끼는 바로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고 나면 할말이 없어 지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지금 내가 지으려고 하는 죄,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있는 욕심이 지향하는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구나. 그리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짓고자 하는 이 죄, 지금 내가 불순종하고자 하는 이것이 과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까지 행하여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것을 내려 놓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은혜 받으셨나
그래서 깊이 하나님앞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또하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은 방식의 첫째가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서 죄의 결과를 숙고 함으로서 못 박는다면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정과 욕심을 못 박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끊임없이 성령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의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좋으신 주님이 나를 위해 못 박히셨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이런 불순종과 죄를 지으면서 불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가책을 느끼는 것이 자기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면 그 못 박는 사람은 다시 계속 내려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끊임없이 내려 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것이 아니오. 이것이 수동태로 나오는데 여기는 현재 완료형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어 왔나니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깊이 현재적으로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나의 죄 때문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이라면 그 못 박힌 상태에 계속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하면 성령님이 계속 베풀어 주시는 그 은혜 아래서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은혜 아래서 계속 살아 갈 때 그때 물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악된 생각 끊임없이 인간의 어리석은 육체의 욕심, 유혹,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정욕 이런것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은혜 아래서 살아가게 되면 이런것들을 즉각적으로 물리치고 이길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예화) 비유가 적합할지 모르지만 한번 들어 보십시오. 눈이 펑펑 쏟아 집니다. 그런데 날씨가 그 동안에 아주 따뜻해서 땅도 따뜻하고 공기도 따뜻합니다. 눈이 펑펑 쏟아 져도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내립니다. 많은 눈이 내려도 땅에 내리자 마자 녹아 버립니다. 그 어디에도 눈을 찿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날이 춥고 땅이 충분히 차가워지면 눈이 조금 내려도 눈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그런 원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 속에서 육체의 욕망과 이런것들이 솟아 납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끊임없는 은혜 아래에 있게 되면 우리가 이것을 끊임없이 이기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런것 아니겠습니까? 배가 항해를 하는데 이 배가 엔진도 튼튼하고 여전히 항해를 합니다. 그런면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 나는데 파도가 항상 배가 가려고 하는 방향으로만 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맞파도가 칩니다. 그래서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파도가 쳐서 그것이 뱃전을 때리면서 배를 흔들거리게 만들고 뱃머리가 파도에 부딪쳐서 하얀 물거품 물보라를 일으켜서 그 차가운 바다 바람에 그 하늘로 솟구쳐 오르면서 갑판을 소낙비처럼 적시며 떨어 집니다. 그래도 엔진의 힘이 있는 동안에는 갈 수 있습니다. 결국 흔들리지만 그 파도를 헤치면서 자기가 가고자 하는 항구를 향해서 항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묵상할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은 나혼자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나에게는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 합니다 고백을 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구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는 행동은 버리게 되고 합당한 행동은 계속 소원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때까지 하다가 안하면 은헤를 많이 받았어도 결국은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하나님 순종하던 자리에서 탈영하고 하는 삶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것 이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자 했다 라는 것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우리에게 사죄 이상의 그 무엇을 중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골로세서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승리 하셨느니라 하고 나옵니다. 십자가는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이 십자가는 죄에 젖어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속에 성령의 능력을 심어 놓으신 사죄 이상의 성령의 능력을 그에게 주어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아주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주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그것을 이기게 하는 성령의 큰 능력이 있습니다. 올바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하고 십자가로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을 주십니다. 도저히 내가 용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그 용서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안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원수도 용서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납하고, 오래동안 온순해졌던 사람들을 화해하고, 오래동안 자기를 이길수 없었던 사람들이 그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능력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가 주님을 믿을때 주님이 우리를 용서 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 안에 이런 성령의 생명을 심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골수에서 끊임없이 피를 만드는 성분이 나오듯이... 그것만 있으면 계속해서 몸이 스스로 피, 백혈구 이런것들을 만들어 내면서 우리의 몸이 계속해서 피가 돌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을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안에 이런 샘을 심어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끊임없이 샘이 올라와서 우리가 죄를 짓거나 욕망에 시달려도 그 속에서 솟아나는 보혈의 샘에서 우리들이 그것들을 이기면서 사죄 이상의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가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한 샘물로 꽉찬 상태을 가르켜서 성령 충만하다고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의 세상살이에 정신이 팔려서 십자가도 생각 안하고 예수님도 주일날 와서 잠깐 생각 하나 마나 하고 꺼떡 거리고 졸다가 예배 끝나면 보따리 싸가지고 가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죄 이상의 능력의 샘이 계속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거의 그 속에서 생명의 능력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신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 가운데 살면 이 생명의 능력의 샘이 거의 닫힘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욕심과 이세상에 더러운 정욕이 막 일어나는데 이것을 해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걸러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기의 육체의 즐거움을 따라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동안 자신의 영혼이 끊임없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 충만의 반대가 뭐냐면 자신의 욕망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순종하겠습니까? 이 속에서 자기욕망으로 충만한데 왜 순종하겠습니까? 이 속에서 자기욕망으로 충만한데 미쳤다고 주님의 세워주신 사명의 자리에 서 있겠습니까? 거기는 죽음의 길인데... 예수 정신 아니면 예수 생명 아니면 서 있을 수 없는 자리인데 거기에 더러운 욕심을 가지고 거기에 서 있을 수가 있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생각해 보십시오. 은혜 떨어진 사람들 여러분이 생각해도 영 아니죠?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 이렇게 믿는 것은 아닌데...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소할려고 합니까? 하나님앞에 진지하게 나의 죄,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기 보다는 여러분의 혈기대로 행할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뭘 가지고 왔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몇 번 탈영하면서 살면 인생 전체가 하나님 거스르면서 사는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쓰레기 같은 생애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끝까지 오래참고 오래 사랑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가는 나라입니다. 쉬운일은 언제나 가까이 있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길은 언제나 내 능력으로 갈 수가 없는 길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 고난의 주간에 우리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의 육체를 이기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열어 놓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내 마음에 이런 성령의 능력을 주시 옵소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 헌신의 십자가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마27:34)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일곱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중에 다섯 번째 말씀은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이 내용에 담겨진 말씀입니다. 여기에 말씀은 안 나오지만 다른 복음서에 보면 “내가 목 마르다” 하는 예수님의 고백이 나오고 이어서 신 포도주를 맛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각각 그 기록들이 틀립니다. 요한복음부터 시작해서 마태복음까지 골고루 나오는데 어떤 기록에는 예수님이 포도주를 마시고 돌아 가셨다라고 나오고 또 어떤 구절에는 이 포도주를 사람들이 주었지만 예수님이 안 마셨다고 나오고 어떤 구절에는 맛보시고 나서 마시려 하지 아니하셨다 나오고 또 어떤 구절에는 이 신포도주가 몰약을 탄 포도주라고 나오고 또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쓸게를 탄 포도주라고 나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종합해 볼때 이 포도주는 쓸게와 몰약을 탄 특별한 신 포도주 였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맛보시고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그 포도주를 안 마셨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습니다. 스펀지처럼 생긴 해임에 그 포도주를 적셔 긴 갈대에 끼워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입에 그것을 갖다 대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고난은 너무 큰 고통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사는 경건한 부녀자들은 잠언 31장 6절 말씀에 ‘독주는 죽어가는 자에게 포도주는 근심하는 자에게 주라 저희가 그것을 먹고 근심하는 자는 근심을 잊어 버리고 죽어가는 자는 고통을 잊어 버리리라’ 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마지막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 쓸게와 몰약을 탄 신 포도주를 죄수의 입에 건내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평범한 포도주가 아니라 일종의 독주로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진통제 내지는 마취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맛보시고는 마시지 아니 하셨다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주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르시기를 “이 몸은 너희를 위하는바 나의 몸이니 이것을 먹을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하나의 떡에서 각각 잘라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식후에 예수님이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이니 이것을 마실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사도들의 죄의 용서를 위해 예수님이 자기의 몸을 찢기실 것을 빵을 찢으시는 것으로 형상화 하시고 피 흘리시고 죽으실 것을 포도주로 형상화 하심으로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 이 떡과 포도주가 그들에게는 주식이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그들에게 있어서 영혼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과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것 처럼 예수님 없이 살 수 없고 그것을 먹었지만 먹은것을 몸속에서 모두 흩어져 하나 되었던 것처럼 또한 예수님도 그들과 더불어 함께 계실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이 특이한 말씀 한마디를 제자들에게 남기시는데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한 말씀 이었습니다. 이 포도주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는데 나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먹는 그날까지 내가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이 포도주는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말로 말하자면 음료 였습니다. 왜냐하면 물이 매우 귀한 지방 이었고 우물을 파도 물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이 나와도 그 물이 쓴물 이어서 도저히 음용할수 없는 우물들도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쪽에 사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여름에 한강을 갔습니다.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시뻘건 물이 상류로부터 쏟아져 나와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리 위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이고 아까워라 저 물이 다 떠내려가네” 그렇게 물이 귀한 지역이고 그래서 옛날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집을 지을때 지붕를 평평하게 지어서 그래서 그 물이 쏟아지면 그 물을 모두 받아서 그래서 그 물이 빗물로 모아져서 땅속의 커다란 항아리로 들어 가게끔 그렇게 시설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빗물을 적절히 걸러서 음용했다고 할 정도로 물이 귀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포도는 굉장히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에스골 골짜기 같은데에 가면 포도 한송이에 4.5kg에서 6kg까지 나온다고 하니까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 포도를 짜서 즙을 내서 먹거나 그것으로 술을 담궈서 사람들이 물을 대신해서 사용했던 일반적인 음료 였습니다. 그런 일반적인 음료를 예수님이 안 드시겠다 말씀하신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십자가에서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잡히시던 날 밤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먹는날 까지는 내가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의문이 되는데 이것은 이제 구약에 나오는 민수기 6장의 나시l린 서원의 빛을 받을때 이 의문이 풀립니다. 민수기 6장에는 나시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시린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앞에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나시린은 뭐하는 사람들이냐? 하나님앞에 어떤 서원을 하고 자기를 특별히 구원을 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자면 삼손 같은 사람이 나시린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특별히 바쳐졌기 때문에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포도 열매는 물론이고 포도에서 나오는 어떤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심지어는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씨 조차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시린의 서원이었습니다. 그 나시린에게는 두가지의 규례가 있었는데 이런 포도주나 포도주에서 나온 독주 이런 것들을 마시지 않는 것과 머리를 깍지 않는 것 이런 것이었습니다.사무엘 같은 사람도 나시린 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특별한 서원을 하고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에 관한 규례가 이 민수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일생을 하나님앞에 사셨지만 이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신 후에는 하나님께 매우 특별히 바쳐져야 할 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늘 하나님께 바쳐진 생애 였지만 특별히 하나님앞에 자신을 모두 드리지 않으면 안되는 바로 그러한 순간이 왔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바로 그 순간이 온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그 순간에 자기를 특별히 하나님앞에 구별하여서 자기를 모두 드리시는 그런때가 다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이루고자 하는 이 놀라운 율법의 완성을 보면서 예수님이 단지 민수기에 나온 나시린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셨다고만 믿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더 큰 뜻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늘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 오셨지만 이제 이때에는 홀로 혈혈단신이 되어서 그래서 아무도 자기를 돕는이가 없는 가운데 예수님 홀로 혈혈단신으로 자기자신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바치는 바로 그 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며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자기를 하나님앞에 남김없이 바치시는 그 마지막 특별한 헌신을 기념하시며 당신 자신을 이러한 서원에 묶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지시는 헌신의 십자가를 봅니다. 이 십자가의 고통은 매우 큰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전날에도 거의 잡수시지 못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서 땀과 피를 다 쏟으며 하나님앞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앞에 처절하게 매달리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그 고통의 진액을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브라이도리온에 끌려 가셔서 거기에서 재판을 받은 후에 그곳에서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벗기신 채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 박았습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손바닥 한가운데 못을 박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서 자꾸 찢어져서 매달린 시체가 떨어지니까 사람들이 그 후로 부터는 손목에다가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보는 옛날 기차 레일의 그런 못을 손목에 박았습니다. 뼈를 꺠고 동맥을 끊으면서 박았을 것입니다. 손이 높이 들렸으니까 피는 덜 흘렸을지는 모르지만 어쨎든 거기에서 계속 피가 출혈이 되고 그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 할 수 없고 사람이 출혈을 많이 하게 되면 목이 마르고 머리가 터지는 것 같은 두통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이때 물을 찿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포도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런 고통을 겪으실 때 그 한모금의 포도주는 갈증과 통증을 동시에 잊게 해주는 포도주 였습니다. 그러나 그 포도주를 예수님이 맛보신 후에 이것이 포도주라는 사실을 알고는 예수님이 받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하여야 하는 십자가의 고난에서 십자가가 주는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려고 하지 않으셨다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지실 그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앞에서 마지막으로 당신 자신을 바치시면서 그 쓰라린 고통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덜어내려고 애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은 하나님께만 특별히 바쳐지기로 예정된 예수님 자신의 몸 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먹는 날까지 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것도 바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할 때 나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사명이 주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겠다 라고 하는 예수님의 각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가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이세상에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기도 하고 또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해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셔야 했고 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이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구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이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매를 예쁘게 가꾸고, 자기가 맛있는 것 퍼 먹고, 자기가 편안하게 뒹굴고 이런것은 사명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명은 자기 자신에게로 유익이 직접 돌아 오는 것들 그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새벽에 실컷 자는 사람이 사명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명은 자기가 희생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통해서 교회, 가정, 사회의 다른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되는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켜 사명이라고 부르고 이 사명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어서 마지막에는 창조의 목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돕는것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 사명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정이나 교회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이 많은 고통과 괴로움이 누군가가 자기가 편안하기 위해서 이 사명을 위해서 희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그 모든 혼란과 고통입니다. 제가 이번주부터 우리 교회 직원들을 모아 놓고 설교 시리즈를 하나 시작했습니다. 20번쯤 하려고 하는데 오후 예배가 시작되면 여러분들과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시리즈 제목이 뭐냐면 ‘개념없음에 관하여’입니다. 웃으시는 분들은 상당히 신세대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말로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도 못잡는 사람들을 향해서 개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것이 요즘 유행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개념없음에 관하여’ 설교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주위에 살아 가는 것을 보면 나도 다른 사람 보기에는 옛날에 그랬겠지만 지금도 교회에 와서 보면 “야 저렇게 하고 어떻게 살까?” 개념이 너무 없습니다. 개념이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해서 사람들 앞에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도 못 잡는 사람들을 향해서 개념 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화) 어느 교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수실에 앉아 있는데 어느 학생이 찿아 왔습니다.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는 학생인데 제가 언제언제 교수님께 수업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는 지금 졸업을 했고 결혼을 하는데 교수님께서 주례를 서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교수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학생이 두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이 다다음주 인데 이것은 여러사람한테 부탁을 하다가 퇴짜를 받고 이제 마지막 쓰레기통 찿듯이 자기를 찿아 온 것입니다. 그것도 좋은데 찿아와서 그 어려운 부탁을 하는데 원래는 결혼 주례 부탁은 본인이 와서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와서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오셔서 목사님 혹은 교수님께 “이번에 저희 아들이 장가를 가는데 미천한 저의 아들 결혼에 주례를 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것은 어른끼리 주고 받는 청탁입니다. “그럼 그러시죠” 그러면 주례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어쨎든 그런것을 요즘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해가 됐다고 하고 10분동안 이야기 하는데 핸드폰이 네 번 울리더랍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다 하는 것입니다. “교수님 저 주례를 부탁하러 왔는데요?” 따르릉 “어 그래 나 지금 어쩌구 저쩌구” 또 전화가 오고... 통화하고 끊고 그때서야 말이 끝나더랍니다. “주례를 좀 서 주시겠습니까?” “싫은데요” 그런것이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앞에 회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불이 났습니다. 그래서 불길이 넘어와서 우리 은행나무도 태웠습니다. 그러더니 교회에 와서 사백만원을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가 왜 당신한테 줍니까?” 했더니 “우리 회사가 교회 옆에 있는데 불이 나지 않았습니까?” “불이 난 것하고 우리 교회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담장 넘어와서 은행나무 다 태웠는데...” 교인들이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다가 담배 꽁초를 버려서 불이 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백만원을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보 입니까? 말도 되지 않는 소리하지 말라고 했더니 주일날 여기에 와서 큰 피켓을 들고 일인 시위를 하는데 그 사람이 교회의 집사라고 합니다. 그것이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경우가 되냐고 야단을 쳤더니 그 다음에는 말이 바뀌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웃이 이렇게 불우하게 되었는데 보태줄 사랑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보태 줬습니다.
그것이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재앙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살면서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어려서 태어나자마자 제일 처음 만나는 세계가 부모 아닙니까? 그러면 그 부모의 품에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고, 덕이 무엇이고, 인간의 도리가 무엇이고, 이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개념이 있는 부모 밑에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되기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것 없이 밥만 먹이면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그런것을 해 줄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부모 자신이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밑에 자라나는 애들은 아주 평범한 사실 하나하나를 피를 흘리며 인생을 배워 가야 합니다. 자기가 피를 흘리는 것은 자기가 못나서 그런다고 하지만 주위의 수 많은 사람들 찌르고 찔리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태도가 잘못되면 기도를 많이해도 고난이 많이 옵니다. 그런데 부모가 십자가를 안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싫데, 내가 왜 너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훨훨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하고 그리고 집어 치워 버리고 자녀를 버려 버리면 그 밑에 세끼들이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학교를 들어 갔습니다. 학교 선생님들 죄송합니다만 정말 훌륭한 선생님들 많습니다. 요즘도 우리딸은 자기 담임 선생님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훌륭한 선생님도 있는데 아닌 사람도 참 많습니다. 두 번째 인간이 걸러지는 것이 그런 선생님을 통해서입니다. 부모는 그렇게 십자가를 지지 않고 도망을 가도 두 번째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그 선생님이 가정에서 망가진 아이들을 쓸어안고 큰 사랑으로 아이들을 사랑해 주면서 인생의 도리는 이것이고, 선은 이것이고, 악은 이것이며 그러니까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선생님이 실천을 하면서 모본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이 아이들에게 깊이 스며들면서 개념이 있는 아이들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십자가를 지는 선생님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거기에서도 걸러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좋은 친구를 만나면 괜챦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모가 자기 자식한테 공부 많이 하라고 해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학교 보내려고 용 쓰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함께 어울리며 지내다가 “야! 너 공부해야 된다” 이렇게 친구들이 열렬히 공부하면서 자기 갈 길을 찿는것을 보면 이 아이는 부모가 천마디의 말보다 더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념이 있는 친구가 개념이 없는 친구하고 왜 사귀겠습니까? 이것은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그런 사람 상대할 때 무한한 에너지를 뺏어 가는 것입니다. 말이 되어야지 무슨 에너지를 아끼던지 말던지 하지... 교인이 누가 담배 피는 사람이 있냐고 했더니 목사님 몰라서 그렇지 담배 피는 교인들 많다는 것입니다. 열린교회에도 틀림없이 상당수가 담배를 피고 마지막 예배 들어가기 전에 한가치 피다가 버려서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이 없는 친구하고 개념있는 친구가 사귀겠습니까? 그런 친구를 용납하고 사랑하려면 특별한 희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왜 하냐는 것입니다. 안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은 외톨박이로 지냅니다. 그러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데 바로 자기 같은 친구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념없는 애들 둘이 합쳐져서 문제를 계속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은 친구들에게서도 안 걸러 집니다. 그러다 시집을 가는데 시집을 가서 그런 개념 없는 사람이 이해심이 많고, 자애롭고, 아주 너그롭고, 무엇을 하든지 용납을 하면서 특별한 사랑으로 감화를 시켜서 갈 길을 하나씩 가르쳐 주면 좋겠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결혼을 해서 도대체 콩인지 팥인지 날 뛰어 그래서 “여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거야” 그러면 이 개념없는 여자가 무엇이라 그러겠습니까? “아이고 저한테 이득이 되니까 날 이용해 먹는구나” 그러지 않겠습니까? 이해 관계가 얽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답이 안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미쳤습니까? 얼굴 좀 못 생겼어도 그냥 마음 맞는 사람하고 살지... 또 그렇게 개념없는 사람이 그렇게 미인입니까? 묻고 싶습니다. 개념 없는 사람이 모두 미인 입니까? 돈이 많습니까? 진짜 모양도 아니면서 내용도 없는 사람 많습니다. 불량식품이 모두 예쁜 포장을 했습니까? 아니거든요. 왜 그런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하냐는 것입니다. 어떤 미친 녀석이 그렇게 합니까? 나는 우리 아들이 개념없는 여자한테 장가 간다면 나는 막을 것입니다. 에너지 정말 쓸데 없다 주님을 위해 써도 모자른데 거기에 왜 쏟냐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네 자식을 낳아도 개념없는 자식이 나올텐데 왜 그렇게 하냐는 것입니다. 못생기면 어떻습니까? 성품이 원만해서 어울리면서 살 수 있는 사람하고 만나야지 그렇게 만나서 무한한 에너지를 쏟으면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조금 있는 남자면 그런 여자한테 장가 안 갑니다. 그런데 혹 하고 가면 그 친구도 개념 없는 친구입니다. 두 부부가 개념 없는 부부가 되어서 계속해서 개념없는 자녀들을 양산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를 계속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군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사회와 자신들의 고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도 폭력을 행사하고 알콜 중독이고 폐인인데 자녀들도 계속 빗나가려고 하고 말을 안들어 그런데 어머니 한분이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잘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또 아내는 춤바람이 나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정말 신실해 그러면 가정이 사는 것입니다.
(예화) 제 친구 아버지 한분은 부인이 군인 이었습니다. 지금은 다 돌아 가셨겠지만 부인이 춤바람이 나서 애들이 초등학교 밖에 안되는데 두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 아버지가 군인이었는데 독신으로 그 아이들을 다 키워서 고등학교, 대학까지 다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참 신기합니다. 군대 퇴직하고 나서 어떻게 결혼도 안하고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 밥해서 도시락 싸서 보내는 광경을 중고등학교때 다 지켜 봤습니다. 그 아이들이 아버지를 무한히 존경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그러한 풍파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르게 자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좋은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 입니까?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 때문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 보십시오. 십자가에 매달려서 몰약과 쓸게른 탄 포도주를 마취제로 예수님께 내밀었습니다. 예수님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이것은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이다. 이것을 내가 감당하는 것은 내 몫이고 만약에 십자가를 감당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여야 한다면 그것은 내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잔을 그대로 받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쏟아지는 고난을 한몸으로 다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이 각자 불러 주신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고통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즐거운 십자가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사명의 자리에는 보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항상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명을 주실 때 십자가도 함께 주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 떄문 일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무슨 나쁜일을 하셨습니까? 올바른 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고난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입니다. 지금도 당연히 예수님을 그 일을 하고 계시다면 픽박을 안 당하시겠습니까? 픽박받고 고난을 당하시겠죠? 그러니까 우리도 픽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십자가가 고통스럽지만 자기를 여기에 세워주신 예수님이 사랑스럽기 때문에 또 예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셔서 이루시는 이 사명을 통해서 예수님이 유익을 얻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집어 치우고 도망가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서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질때의 그 고통을 덜 받기 위해서 마취제를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십자가를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사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또 그 사명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당해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살을 해도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살아 있다고 하는 의미는 편안하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삶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처럼 한 교회를 목회하는 그런 큰 사명일 수도 있고, 회사를 경영하고 사업을 경영하는 그래서 사회에 기여하는 사명 일수도 있고 또 동시에 교회안에서 영혼들을 돌보고 영혼들을 위해 애쓰는 그 모든 사명일 수 있습니다. 좀 아픈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참고 들으십시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주신 일을 그만하겠다고 집어 치우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내게 맡기셨는데 오래도록 감당하다 보니까 이 일이 거의 다 이루어 졌고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구나 그래서 그 일을 내려놓고 다른 사명을 찿아간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없이 어느 한순간에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인데 그냥 내려버리고 그 다음에 그 일이 어떻게 될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이 다른 사람에 의해 온전히 수행되는지 마는지 이 일로 인해서 나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서 교회가 어떤 피해를 입는지 이런것 생각없이 그냥 교회를 그만 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집어 치우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탈영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질문은 많아도 대답은 하나입니다. 힘드니까... 그러면 힘들지 않은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괴로움이 없는 고난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직분이나 사명을 맡아서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대접을 해주고 높은 자리에 세워주고 이렇게 해서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고 즐거워서 감당을 하는 동안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런 십자가 있으면 나도 한번 주세요. 그것이 무슨 십자가 입니까? 상급이 있을까요? 상급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아주 하챦게 생각하면서 아무렇게나 행동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그를 가볍게 생각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보십시오. 이런 신앙생활 본받고 싶지 않습니까? 기도하면 뜨거움이 있는 기도,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 눈물이 쏟아지는 간절함이 있는 기도, 세상을 향해서는 담대함이 있는 신앙, 주위의 수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시비를 걸고 욕을 해도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훼방하고 방해해도 넘치는 너그러움, 고난과 흔들림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 가난하고 곤고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 사람을 향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부어지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경험, 매달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기도만 들어 주시는 것 같은 특별한 대접 이런것을 여러분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생명과 바꿀수 있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안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던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놀랍게 함께 하십니다. 아주 놀랍게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명을 감당케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차이가 별로 안 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도 이 마취제를 마시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힘들면 버리고 괴로우면 떠나고 고통스러우면 탈영하고 이렇게 하면서 일생을 흐느적 거리면서 살아 갑니다. 전자에서 주님을 위해 애쓰고 고난을 받는 사람이 반드시 물질의 복을 받고 부자로 산다는 보장이 없고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그런 증거가 없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그 사람의 삶이 아무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항상 사랑을 받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세워주신 그 사명의 자리에 대한 태도는 주님 자신에 대한 태도와 똑같은 것입니다. 고난이 많이 와도 자신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희생, 자기도 괴로운 일이 많지만 괴롭고 곤고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을 세워주는 그 희생, 자신도 가난하지만 자신의 물질을 떼어 가난하고 지친 병든 지체들을 돕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그 놀라운 헌신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십자가를 지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곧바로 물질을 갚아 주시지 않고 지위로 보상해 주지 않을 지라도 그들에게는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제멋대로 제 편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비교가 할 수 없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찬송) 주 내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친구
감당합시다. 흔들리지 맙시다. 고무신 거꾸로 신고 하나님의 일을 팽겨치는 사람들이 이세상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지켜 볼 것입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킵니다. 부족해 보이고 사람 보기에는 아주 특별한 장점이 없는것 같아도 우직하게 주님의 큰 사랑이 나를 용서하여 나를 여기에 세우고 그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주님으 교회 한 모퉁이를 섬기고 믿지않는 내 가정에서 한알의 밀알이 되겠다고 했던 그것을 잊지 않는 것 그러면서 주님과의 언약을 꼭 지키면서 고난이 와도 잘 감당하고 시련이 와서 고통이 가중될 때에도 사람을 보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니 주님께 꼭 매달려서 주님이 세워주신 자리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부르심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하면서 고통스러워 할 때 마다 오늘 이 장면 생각합시다.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는 그 고통속에서 마르는 눈물 타는 목마름 피로 물든 그 십자가 위에서 그 고통을 경감시키라고 부녀자들이 건네준 그 독주제공 방식에 의해서 예수님께 드려진 이 신 포도주를 거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받읍시다. 주님이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희생의 길을 가셨더니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얻는 유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은 도망친 사람들의 울부짖음 보다 훨씬 하나님의 마음을 잡아 끄는 흡입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사명의 자리가 어디였습니까? 거기에서 제대로 헌신 했습니까? 십자가를 졌습니까?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생각 난 적이 있습니까? 좋으신 주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에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꺽이지 않는 열심으로 사람을 바라보면 자꾸 흔들려 그래서 사람을 바라보면 자꾸 흔들리니까 꺽이지 않는 열심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 하는 마음을 먹고 더 많이 기도하십시오. 어려움이 오고 괴로움이 와서 흔들리때 사람들에 의해 흔들릴것 같을때 더 많이 괴로워하고 그 대신 거기에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시며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는 예수님 생각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사랑받고 싶으시면 그 사명의 자리로 돌아 가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한때 주님을 버렸지만 눈물을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던 사도 요한을 기억하면서 돌아 가십시오. 그러면 거기서 주님께 사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 하십시오. 여기는 내가 매달릴 골고다 언덕이다. 네게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으니 내가 여기서 주님을 위해 나를 죽입니다. 이런 고백으로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십시오. 그 일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