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고난과 사랑
(2008년 설교모음)
십자가 고난과 사랑 1 (2008/08/03/05, 수요예배)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십자가 고난과 사랑 2 (2008/08/03/09, 주일오전예배)
1. 예수 죽으심을 위한 향기(마26:12-13) 2008.3.5 수요예배 1
2. 다시 찾은 십자가(요19:34-35) 2008.3.9 주일오전 8
3. 무슨 악한 일을 하셨느냐?(막15:12-14) 2008.3.16 주일오전 14
4. 징계로 평화를 주셨기에(사53:5) 2008.3.19 수요예배 19
1.예수 죽으심을 위한 향기
십자가 고난과 사랑 3 (2008/08/03/16, 주일오전예배)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 26:12-13).
오늘 설교할 말씀은 12절에서 13절입니다. 제가 6절부터 11절까지 읽고 12절과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미천한 저희들이 오늘 여기에 머리를 숙이고, 주님께 기도하오니 하나님 저희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매순간 주님의 은혜의 붙드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미천하기 짝이 없는 저희들이오니,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저희들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저희들이 깊이 은혜를 받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의 주간을 바라보면서 저희의 온 마음에 큰 은혜가 되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문둥이는 그 당시에 사회에서 함께 지낼 수가 없이 격리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문둥이의 집에 계셨다고 나오는데, 누가복음에 보면 식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문둥이였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이 되고 어쩌면 예수님의 기적적인 능력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그것이 감사해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셨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하게합니다. 그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 그랬습니다. 여기도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당시에 이 향유는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 이였습니다. 금붙이처럼 그런데 그것을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한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귀한 향유인지를 알았던 제자들은 그것을 그렇게 부어서 쏟아서 없애버릴 바에야 많은 값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이 여자를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을 예수님만큼 사랑하신 분이 없지요. 그러니, 제자들이 가난한 자를 위하는 마음이 이정도이면 예수님도 아마 이 가난한 사람을 얼마나 더 많이 사랑하셨겠습니까? 그러면 틀림없이 “그래, 맞다, 한 끼 식사를 위해서 그렇게 엄청난 돈을 쓸 필요가 무엇 있느냐? 그 돈으로 차라리 가난한자나 도와주었으면 좋았을 뻔 했구나”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법한데 예수님은 오히려 의외로, “너희가 왜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했단다.” 이렇게 타이르시면서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그 가난한 자들을 섬길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를 못한다.”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 도한 말씀을 예수님이 남기셨어요. 제자들이 이 말씀을 잘 이해를 못했던 이유는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언이 담겨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굳게 믿었던 제자들은 이 분이 자기들을 이 세상에서 잘 되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이렇게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노라면 뭐 이 세상에서 주님이 큰일을 하고 잘 되실 때 자신들도 여기에서 영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제자들의 수준이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잘 믿어지지가 않지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다니시는 그 환상적인 이적의 광경을 목격했고, 벳새다 광야에서는 다섯 개의 보리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만 명을 먹이고도 남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기도해주셔서 병이 낫을 뿐 아니라, 죽은 자까지도 살아나는 광경을 생생하게 본 제자들이었다라는 사실을 생각을 하며는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실 것이라고 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게 참 이해가 안가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함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이 탁월한 신앙 고백에 까지 동참을 했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여기에서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그러한 기적을 보고 놀라운 이적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리스도는 그렇게 이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큰일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수가 있는 것이에요. 이것을 교리에서는 이적적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적적 신앙은 구원을 얻은 신앙 일수도 있고, 전혀 구원을 얻지 못한 신앙일수도 있는 거죠 그러니까 참된 구원은 그 이적을 경험하고 보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참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기적을 보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싶어 하시는 예수를 보는데서 생겨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적은 보고, 기적이 보여 주려고 했던 궁극적인 대상이 예수를 보지 못한다면, 그럼 그 사람은 이적을 보았어도 참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에요. 자 제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꽃을 가리키고 있지요. 그러나 꽃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 손가락도 봐야 되지만 손가락이 연장선상에서 지목하고 있는 이 꽃을 함께 보아야지만 꽃을 볼 수 있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이 손가락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 꽃은 못볼수 있지요. 이적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 신앙은 손가락을 보고 꽃도 본 신앙이고, 이적을 보고도 예수를 못 만난 신앙은 손가락만 뚫어지게 들여다본 신앙이라고 말해도 정확한 비유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자들은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또 예수님이 겸손히 섬기시고 핍박을 받으시는 광경까지도 다 보았지마는 예수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옆에 있는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옆에 계셨는데도 만나지 못한 것 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물리적인 장소로 내 옆에 있다든지 눈으로 보고, 예수님을 만나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든지 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은 예수의 영과의 만남이죠. 그래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마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지신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분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셨다라고 하는 것을 못만 난거죠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을 전에도 만나긴 만났겠지마는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 여자가 열두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을 친밀하게 지내고 알았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자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을 영으로 만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이 여자가 죄의 용서를 깊이 경험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나니까, 그 용서받은 후에는 이 마음속에서 예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생겨나게 된 거죠. 그래서 구원 얻은 신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 보이지 않는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내가 의지적으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분이 내 마음에 그리움이 되고 사랑이 되는 것, 이것이 중생의 가장 확연한 표야. 눈물 펑펑 흘리고, 뒤집어지는 경험을 하고 이적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랑이 없으면 그는 진정으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기적이 없어도, 이렇게 주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을 만난사람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목사는 자기의 책에서 말하기를 “믿음이 무엇이냐? 사랑! 믿음이 무엇이냐? 사랑!” 믿음은 영혼의 변화이고, 그 변화는 사랑으로의 변화이다 “사랑 ”그래서 이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는데, 자기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찾아보니까 향유에요.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조금씩, 조금씩 모았을 거예요. 그것을 식사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머리에 확 부어 올려, 그 옥합을 깨뜨려 확 부어 버리는 것에요. 그 향유가 예수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죽 흘러내렸어요. 온 방안이 향유의 향기로운 그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여자라고 해서 “예수님이 지금 이렇게 식사를 하시고 얼마 있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실 것이고 그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은 바로 내 죄 때문이다” 이런 생각까지 치밀하게 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이 부은 그 향유를 가지고 해석을 하신 거예요. “이 여자가 나에게 향유를 부었는데, 이것은 내가 곧 죽을 텐데 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한 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내게 붙는 향유이다”라고 말이죠.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당신이 잠시후며는 십자가를 지고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고난을 당하실 텐데 그게 예수님에게는 큰 고통이었죠. 왜 생명이신 그분이 죽으셔야 했고, 죄도 흠도 없으신 그분이 율법의 정죄를 받으시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셔야 했으니, 이것은 예수님에게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이에요. 아직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사실도 제자들은 알지 못하고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나 말귀도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십자가 지실 순간은 점점 다가오는 거죠. 그 예수그리스도 이제는 십자가를 지고 모든 구원 받을 인류를 위해 대신 죽으실 그 분을 위해 이 여자가 향유를 부었어요.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에게 잘 보여서 제자들처럼 마지막 주님이 권력을 잡으시면 여성부장관이라도 한번 해보려고 그랬겠어요? 그럴 리가 없지요. 제자들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이 여자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어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기같이 더러운 죄인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신 그 큰 사랑을 생각하면서 죄를 용서받고 보니까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이 생겨난 거애요. 그래,
회개의 열매는 사랑이에요. 그러면 아까 조나단 에드워드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회개는 곧 무엇의 회복이에요? 곧 믿음의 회복이 되는 거죠. 죄가 쌓이면 믿음이 식기시작하고 사랑도 사라져가는거죠. 근데 회개하면 믿음이 다시 살아나고, 사랑이 다시 살아나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변함없이 계속 사랑하며 살 수 있겠어요. 그것은 누구도 이 세상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식을 변함없이 사랑해요. 그렇지 않아요. 대개 변함없이 사랑하죠. 대개, 여러분들이 아내이면 여러분들이 남편이라면 배우자를 변함없이 항상 충만하게 사랑해요. 안 그래요. 더 사랑할 때 있고 덜 사랑할 때 있고 사랑이 아주 식으면 귀찮을 때도 있고, 그래서 화 나며는 “내가 저 자식을 왜 낳았지?” 그런 이야기도 하지 않아요. 내가 어렸을 때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무자식 상팔자야 아니 낳아놓고 그 이야기를 자꾸 하면 태어난 애들은 얼마나 외로워요. 내가 우리엄마 아빠 행복을 가로막는 팔자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 그런 말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근데, 보이는 사람을 향한 사랑도 그렇게 한결같지가 않은데, 한결 같지 않지요. 그래서 언제 한번 만화 그림에 이렇게 보니까 결혼한 부부가 신혼 초에 아내가 예쁜 옷을 입고 녹즙기에서 막 야채를 갈아 유기농 야채를 사다가 갈아서 “여보 드사와요”그리고 줘요. 그다음에 이제 화면이 바뀌어서 파마를 뽀글뽀글하고 인제 나이 먹은 아줌마가 되었어요. 뭐라고 투더투덜하냐 하면 “이 짓도 맨날 할려니까 힘들어 죽겠어” 그리고 캔을 딱 따라서 드르륵 따라서 “ 먹어” 그래요. 더 나이가지나 흘렀어. 남편이 은퇴했어. 그림이 어떻게 되어있냐 하며는 남편은 저 바깥에서 밭에다가 야채를 심느냐고 안경을 쓰고 쭈그리고 앉아서 무엇을 해, 방에선 아내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 심어서 지가 먹든지 말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게 인간의 사랑이야. 한때 그렇게 사랑하던 보이는 인간을 향한 사랑도 그렇게 변하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시종일관 같을 수 있다면 입에다가 침이나 먼저 발라야지요. 그럴 리가 없지요. 그래서 무엇이 필요해요. 그래서 테라틸리아누스라고 하는 교구가 말하기를 “나는 참회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매순간 하나님 아닌 것들을 사랑할 때가 있어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죄 가운데서 태어난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그러나 더 좋은 삶은 무엇이냐 하며는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면서
(찬송)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
그래서 오늘은 주님보다 세상을 조금 더 많이 사랑했지만 오늘 밤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하신일이 무엇이고 주님이 어떻게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모두 주셔서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며 주님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는데 나는 주님을 위해 가장 가치 없는 것을 아끼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뉘우칠 때 거기에서 다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이 여자가 행한 이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에든지 말하여 이 여자를 기념하리라”고 하신 뜻이 바로 그것이에요.
그러면 신자로서 우리의 삶의 최고 숙제는 무엇이에요. 그것은 우리가 예수 힘입어서 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고 부자가 되느냐 그것 아니에요. 우리가 신앙의 덕을 보아서 얼마나 이 세상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내 꿈을 성취하느냐 이것 아니에요. 그거 아니에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죠. 그래서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그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에요. 다윗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그러셨을 때에 다윗이 왕복을 입고 제왕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합당했습니까? 저 유명한 가문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그 집안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길을 끌어 씁니까? 공부를 많이 하고 학식이 뛰어나서 모든 사람이 귀기우릴 만한 솔로몬과 같은 모세와 같은 학식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를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겼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 그가 내 마음에 합하다고 할 때에 다윗은 아버지나 형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가장 한미한 목동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도 이새의 아들 다윗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어요.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전부였습니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하나님이 자신의 임금이었고, 아버지였고, 엄마였고 애인이었고 사랑하는 친구이었고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다른 사람이 그렇게 고백하며 는 다가올 수 없는 수많은 그림이 그 속에 들어있는 거애요 어머니에 대한 기록도 거의 안나오고 아버지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형들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아내에게도 깊은 사랑을 오래도록 받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애인이었고, 아빠였고 엄마였고 전부였어요. 그 그림을 한꺼번에 목자에다가 집어넣어 버린 것에요. 내 한번 여러분들에게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지요. 그랬더니 위로부터 성신이 충만하게 임했지요. 그러면 성신이 충만하게 임하니까 비로서 하나님을 사랑했겠습니까? 그 전에도 하나님을 사랑했겠습니까? 그렇죠. 그리고 성신이 임하자, 그는 아마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릴 수 있었겠지요. 그 친밀함과 그 영적인 깊이에 있어서 비할 때 없는 것을 누릴 수 있었겠지요. 보십시오. 신자의 가장 큰 의무,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신자의 의무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흘러가고 시간에서 영원으로 세계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미덕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이에요. 그것은 어디에서도 변함이 없는 법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이 앞으로 당하게 되실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계실 때에 이 여자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유를 확 부었을 때 온 집안에 그 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주님은 말씀하셨어요. “이 여자가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라” 자 잠시 후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모두 찢고 흘려죽으실 고난의 날이 다가옵니다. 우리가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그분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가 대신 질수 있습니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돼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그분의 그 고난을 위할 수는 있어요. 그 위할 수 있는데 그분의 고난을 위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분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그렇게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분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 신앙의 대의예요, 대의예요, 대의예요 시대와 상관없이 연령과 상관없이 문화와 상관이 없이 자기의 놓여 인 형편과 처지와는 상관이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지를 정확히 아는 것 그리고 그 의미를 정확히 안후에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분을 깊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최고의 숙제는 무엇일까요 날마다, 날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그 일을 생각하는 것,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 그 십자가를 생각 할 때마다 내가 이렇게 살아 있고 이렇게 기동하며 행복하게 복을 받고 있지마는 사실은 이것이 모두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아요?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와 은총을 받을만한 어떤 선한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한 순간이라도 주님이 은혜를 거두시고, 우리를 내버려 두시면 우리는 가엽게도 나 자신을 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가장 비참한 인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은혜를 주셔서 숙명적으로 자기밖에 사랑할 수 없도록 태어난 인간을 꺾어서 그래서 자기보다도 더 소중한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리고, 자신의 본성을 거슬려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깊이 사랑하며 매순간 의지하며 그렇게 살게 하시지 않아요. 그런 사랑에 붙잡히게 될 때에 우리는 아무런 아까운 것이 없는 것이에요 그분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버리시고 모든 것을 주셨으니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 자기 같은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하도록 허락해 주신 것 그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고 그리고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없으면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모든 것들이 견디기 힘든 부담이 되는 거예요 견디기 힘든 부담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그 일이 달콤한 명령이 되는 거예요 아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셔서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 관대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고 사랑하지 않으면 벌이라도 내리실 것처럼 그렇게 나를 위협하시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거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하나남의 명령에 대한 모든 해석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쏘옥, 쏘옥 들어오는 거예요. 성경을 열면 진리가 금싸라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고 예배를 드리며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속에 확 와 닿는 것이에요. 이게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더욱 감격 할 때에는 어느 때인가 하며는 내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이 쓸모없는 인간이 무엇인데 감히 왕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구나. 감사합니다. 생각을 해요.
(찬송)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한번 우리의 삶을 살면서 우리가 만난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돌아보세요. 예수님께 혜택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마는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조국교회의 한 모퉁이에서 고난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에요 아무의 시선도 끌지 못하는 것을 조금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이 쓸모없는 인간이 예수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소수인지 생각해보세요.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무엇을 행하였습니까? 향유를 부은 것 그거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도 우리는 기름 갖고 와서 부어야 하게요? 그거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헌금 많이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이 여자가 행한 일이 무엇이에요? 예수님을 힘껏 사랑한 것, 예수님은 힘껏 사랑한 것
(찬송)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 여자의 행한 일은 사랑 이였습니다. 이 여자는 그 사랑 때문에 향유를 부었지만 나는 이 사랑 때문에 오늘 교회의 마당을 쓸고 있어요. 이 여자는 사랑 때문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었으나 나는 이 사랑 때문에 나를 깨뜨리며 주님을 닮아갈려고 해요 이 여자는 예수님 사랑해서 식사하는 곳에 와서 향유를 부었으나 나는 예수님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이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예수의 사랑을 전해요. 오늘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어느 곳에든지 지금 네가 행한 일도 말하여 너를 기념해주마” 라고 할만한 그러한 사랑의 고백의 현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만이 아시는 눈물, 주님만이 아시는 고난, 예수님만이 아시는 마음의 깊은 고통, 날마다 나를 죽이고 주님을 붙들려는 사랑의 마음,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주님을 놓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주님을 향한 사랑, 주님이 없이 모든 것을 갖는 것보다는 주님을 얻고 주님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낫사옵나이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렇게 향유를 붇는 그 현장 거기가 여러분들에게는 어디입니까? 어린 영혼을 가르치면서 눈물 흘리며, 고난이 많고 시련이 있지만, 돌 같은 영혼을 가슴에 안고 우는 사람은 바로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께 향유를 붇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너무 우리의 필요에만 민감하고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하는 신앙에 익숙해져 있어요. 이것은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신앙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는지를 당신이 몸소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어서 당신자신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시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사랑에 반응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핑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 매일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에요 주님을 생각하는 것에요 주님이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일부터 이 세상 계시면서 나같이 연약한 자들을 섬기셨던 일과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못 박히고 고난을 당하신 그 모든 일을 생각하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크고 무한한 사랑 때문에 감격하며 주께 향유를 붇는 우리의 삶의 현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디에서든지 그것을 부으면서 살아가는 그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삶이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자기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들이 주님의 이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주님께 용서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자기의 소중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자기의 사랑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살면서 이 향유를 부을 현장은 어디입니까? 거기에 하나님, 우리의 향유, 이 옥합을 깨뜨려 붇게 하여주시고 그리하여 정말 어디서든지 주님을 사랑하고 그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되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기도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자비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 해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리신 것처럼 또한 우리도 주님을 위해 우리를 버리게 해주시옵소서. 사랑이 많으신 주님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옵소서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니다. 자비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신실하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자비하신 주님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비옵나이다. 매 순간 주님의 크신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로 아버지 앞에 살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주께서 은혜를 내려주시고 하나님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 날마다 저희들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들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고난과는 상관이 없이 내 행복과 성공을 위해서 신앙을 이용하려던 우리의 모든 헛된 욕망들과 어리석음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아버지 앞에 살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자비로우신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주여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므로 우리 자신을 주께 드리며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저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매일 매일 주님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너무 약하고 그리고 매일 넘어집니다. 주님 사랑에서 식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 십자가의 뜨거운 피로 우리의 심장에 발라주시고 처음 그 십자가를 만나며 뜨겁게 사랑하던 그때에 하나님 아버지 다시 한번 붙들려 주 앞에 살수 있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려주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붙들어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주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큰사랑과 성령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십자가 고난과 사랑 1
십자가 고난과 사랑 1 (2008/08/03/05, 수요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2 (2008/08/03/09, 주일오전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3 (2008/08/03/16, 주일오전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4 (2008/08/03/19, 수요예배)
2.다시 찾는 십자가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4-35).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실 때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 것을 이미 예수님이 예고하신 것이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정성껏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사랑하시고 삶에 모범을 보이시고 그들을 돌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버렸을 때 인간적으로는 예수님의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이 예수님 버리기 전에 버릴 것도 아셨고 버릴 사람들을 미리 용서하시는 듯 하는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죽는 데까지 예수를 따르겠다고 할 때 예수님이 닭이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고 돌이킨 후에는 형제를 굳게 하라고 충고하실 정도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버릴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자기 혼자 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평상시에는 모든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믿음 생활해 나가는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기 혼자 져야 할 십자가의 시간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떠나게 하시고 그 십자가가 누구와 나누어 줄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혼자 져야 하는 십자가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큰 환난과 어려움, 때로는 주님을 위해 가야하는 고통스러운 사명의 길에서 우리 홀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한 분만을 앙망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셨지만 사랑한 누구도 의지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 사랑하는 제자들이 주님을 모두 버리신 이 사건도 소화해 내실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렇게 홀로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십자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은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외로운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당신만을 의지하면서 주님이 세워주신 그 길에 서길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지실 때 모든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도록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당신이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사랑하되 의지하는 사람은 또한 동시에 그 사랑 속에서 언제나 쓰라린 상처를 받는 것이니 이는 사람을 의지하는 그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요한도 포함되어 있었고 늘 큰소리를 치며 죽는 데까지 예수의 뒤를 따라 가겠다고 하던 베드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당신이 십자가를 질 때에 당신 곁에 있어 주지 못하고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을 향한 미움이나 원망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고 오히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큰 능력과 은사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섬기며 봉사하던 제자들은 도망가고 오히려 이름 없는 여인들, 예수의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켰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님과 한패로 몰리고 함께 고난을 받을 위험이 있었는데도 이 여인들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마지막에 그 십자가 옆에서 주님의 죽음을 지켜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이 여자들 마음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좇는 것이니 주님께 붙어 있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이 여자들, 죽음의 위협이 핍박의 두려움이 예수님의 곁으로부터 도망치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도들처럼 권능을 받았어도 주님을 버렸습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은사를 받았는데도 주님을 버렸습니다. 외칠 천국 복음이 가슴에 있었는데도 주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에게는 귀신을 내어좇을 능력이나 죽은 자를 살려 낼 수 있는 성령의 은사 같은 것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이 여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존귀와 영광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과 찬송을 받을 때에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은 죄인으로 몰려 강도들과 함께 수치스런 죽음을 죽어가고 있었는데도 이 여자들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이 그 십자가의 부끄러운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에 있어서 대의와 본질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 능력을 많이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으셨습니까? 교회를 위해서 넘치도록 헌신한 과거를 가지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입니다. 내게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없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울 능력이 없어도 고난당하는 그 고통의 현장에 있어줄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 그분이 받으시는 영광의 자리에서만 그분과 한패가 되길 원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물질이나 번영이 아니라 자기 같이 비천한 인간을 위해서 생명 버리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시니 주께서 고난을 당하고 모욕을 받으시는 현장에서도 주님 곁에 있어 드릴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회개해야 할 가장 커다란 죄, 우리들이 뉘우쳐야 할 가장 가공할 악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말고 다른 것을 사랑한 죄, 주님이 사소하게 보이리만치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것, 우리의 사랑이 주님을 향한 올곧은 온전한 사랑이 되지 못한 것보다 더 큰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니라.’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다른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아마 예수님이 먼저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두 강도는 거의 죽어가며 숨을 껄떡거리고 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리를 꺾일 필요가 없었고 두 강도는 다리를 꺾여서 완전히 죽인 것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했을 텐데 어떤 악한 군병이 혹시라도 하면서 예수님을 확인 사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 긴 창을 넣었고 이 창이 옆구리를 지나 허파를 뚫고 심장을 터뜨렸던 것 같습니다. 창을 빼자 물과 피가 한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동안 주님께서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하는 왕궁 수비대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구타를 당하시고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된 채 언덕에 올라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머리에 쓰여 진 큰 가시관은 끊임없이 이마를 찔러 그분의 얼굴에 피가 낭자하게 만들었고 채찍과 두들겨 맞으므로 찢어진 상처에서도 피가 흘러서 온 몸이 십자가 피로 물들었는데도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분에게 마지막에 남아있던 물과 피를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도대체 그분이 무엇을 잘못하셔서 저주의 상징인 나무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만으로 모자라서 마지막 죽으신 후에도 옆구리를 찔러 심장을 터트려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분이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을 만한 어떤 못된 일을 하셨습니까?
예수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생애였습니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해 주시려고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친히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서른 세 해 사시는 날 동안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탁월한 사랑을 받으셨고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모든 인간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모든 것을 드리셨습니다. 짧지 않은 생애를 사셨지만 그분의 생애 전체는 고난의 연대기였습니다. 그분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분의 것은 모두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와 같이 길 잃은 양떼들의 것이었습니다. 일평생을 고난과 수고로 섬기시고 마지막 남은 것은 호지 않은 옷 한 벌과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는 몸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호지 않은 옷은 군병들에게 주시고 하나 밖에 없는 당신의 육체는 구원받아야 할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깨뜨려 드린 화목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매 맞으신 큰 피자국과 쓰신 가시면류관과 못 박히신 그분의 손, 마지막에 창을 찔러 쏟으신 물과 피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득 찬 것이 죄 뿐이고 하나님 앞에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로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슬리며 살았던 범죄 한 죄인인 우리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 머리 안에 있는 더러운 모든 생각들 때문에 그분이 쓰신 가시면류관, 손으로 짓는 모든 죄 때문에 그분이 박히신 그 손위의 못 자국,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다니던 우리의 불순종하던 발을 위해 박히신 그분의 두 발에 박히신 십자가의 못 자국, 아직까지도 마음에 움켜잡고 있으며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악을 위해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고 심장까지 터져 쏟으신 물과 피를 보십시오. 바로 그분이 자신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셨지만 용서 받을 수 없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버리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첫걸음은 예수를 만나는 것이며 신앙의 두 번째 걸음은 그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며 신앙의 마지막 세 번째 걸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에게는 분명한 십자가 신앙이 있었으니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니 이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이번에는 내가 죽어야 할 차례라고 하는 예수 죽음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너무나 멀어진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울기 전에 교회를 위해 먼저 울어야 하고 세상이 변한 것 때문에 놀라기 전에 교회가 변한 것 때문에 우리가 먼저 놀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자신의 번영과 행복과 자아의 실현이 우상이 되고 최고의 가치가 된 시대, 인간이 자신 스스로 행복하도록 살아가는 인생을 돕는 한도 안에서만 하나님도 경배 받으실 수 있는 인간 중심의 기독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주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이 참된 십자가의 복음, 나같이 비참하고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그 큰 사랑을 가슴에 인처럼 품고 그분을 위해 죽기까지 살아야 한다는 이 단순한 진리의 복음을 듣기 못했기 때문에 교회는 기웃거렸으나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지옥의 불길 속에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때 얼마나 오늘날 이 안일한 신앙을 후회하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모두 쏟아져 나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의 가슴 속에 있는 가장 큰 소원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만 그 사랑을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이 비참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이 마지막 찔리신 옆구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물과 피의 한없는 흐름을 보며 그대들의 마음이 녹지 않습니까? 평생 강도짓을 한 더러운 강도 중의 한 사람도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을 보며 감동을 받고 그분을 영접 했거늘 여러분들은 자기를 위해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의 은혜, 오늘 내가 바라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 이렇게 주님을 경배할 때 나의 마음에 밀려오는 하나님의 큰 사랑,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좋은 신자의 눈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큰 사랑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 있고 가슴에는 교만하고 싶어도 교만할 수 없는 십자가 앞에서 발견하는 자기, 아무 좋은 것이 없고 그 비천한 모욕의 길을 걸어가신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 받은 황공함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눈에서 마르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등질 수밖에 없고 세상을 향하여 달려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굳이 하지도 않아도 될 이야기를 꽤 길게 첨가합니다.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말하는 것이 참 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옆구리에 창을 찔리실 그때에 물과 피를 모두 쏟으셨는데 생생한 광경을 누군가가 목격을 하였다는 것이고 그것은 참이고 이렇게 굳이 여기에다 증언을 하는 이유는 이 서신을 읽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 참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 속에는 마가복음에서도 그렇고 요한복음에서도 그렇고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 자신을 삼자처럼 위장해서 감추는 문학적 묘사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바로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요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세 번째 남기신 말씀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이다.”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예수님이 하실 때 그것을 들었던 사람이 바로 십자가 아래 있던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이 그 말씀을 그대로 듣고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은 26장 56절에 보면 예수님이 체포되어 끌려가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가 어떻게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려 마지막으로 물과 피를 쏟으시는 그 광경을 생생하게 증언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단순합니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섞여 예수님 체포당하여 끌려가는 예수님을 두고 도망갔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은 아직도 두려움 속에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를 버리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이 어린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망간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받은 그들의 한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너도 한 패지?” 이 질문 하나가 베드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 남겨두고 그는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아직까지 끌려가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시는데 달려와서 내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라고 말하면 예수님 옆에 못 박힐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 것입니다. 잠시 주님을 버렸지만 요한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사랑해 주신 그 많은 사랑이 기억들, 멸시와 욕을 당하고 죽어 가시면서 잃지 않았던 자기들을 향한 큰 사랑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다시 시작하러 늦었지만 달려왔던 것입니다. 어쩌면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시 예수님 만나러 달려가고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기적을 기대하였으나 기적은커녕 피투성이가 되어 죄수들과 함께 나무에 매달려 있는 예수를 보고 실망하며 언덕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그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눈물을 흘리며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어린 청년 하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 십자가 아래 간들 자기의 힘으로 예수님을 구해 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요한에게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예수님을 향한 충성이 무엇인지 압니까? 일을 잘 하는 것 충성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주님이 고통 받으시는 그 현장에 같이 있어 드리는 것, 주님의 남은 고난이 교회에 있어서 많이 아플 때 아무것도 해 주는 것 없어도 아파하시는 주님 곁에 있어 주는 것 그 자체가 충성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파를 헤치며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가고 있는 요한의 마음에는 이제는 아까와 같은 공포와 두려움이 다 사라졌습니다.
(찬송)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소 풍랑이 일면 난 무서웠소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사랑은 그렇게 두려움을 내어 쫓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어린 요한은 언덕을 내려오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한동안 주님이 고난당하시는 그 광경, 아직 살아계시며 거기서 당신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아래서 침묵하며 한편으로는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자신의 죄에 대한 후회, 또 한편으로는 다시 돌아와 주님 앞에 있게 된 이 두려움과 떨림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네가 나를 정말 버린 거야? 너희들이 나만 두고 도망간 거야? 내가 그렇게 먹이고 가르치고 입혔는데 결국은 나를 배신했단 말이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요한을 자기의 형제처럼 불러 주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육신적으로 내가 당신의 아들이지만 이제 이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께 가니 나를 대신해서 또 다른 아들이 당신을 돌볼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버렸지만 요한의 대한 사랑은 예수님 마음에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요한은 다시 그 십자가 아래서 다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무엇일까요?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분 곁에 있어 드리는 것, 그분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은즉, 그분을 사랑하는 것, 두려움과 환난, 핍박과 시련 유혹이 많아도 한 번 붙잡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놓지 않고 꼭 붙들며 행복하고 건강할 때뿐만 아니라 예수 때문에 달콤한 열매를 먹으며 복 받을 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받고 예수 때문에 시련을 만나고 예수 때문에 죽어야 할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꼭 붙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잊었던 우리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수시로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걸레처럼 버리고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며 주님의 마음에 못을 박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는 할 말을 잊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핍박자여 포행자인데 주님께 저주를 받아야 할 걸레 같은 인간인데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 큰 사랑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나는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질 때 우리 몸 안에 영혼 안에 생명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색적인 고유한 복음, 신앙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요한,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은혜의 세계를 목격했던 요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권능까지도 부여받았던 놀라운 은사의 사람인 요한도 주님보다 자기를 사랑해서 잠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우리도 연약함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요한은 돌아갔습니다. 우리도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본래 있었던 그 은혜의 자리, 어린 아이처럼 십자가 사랑 앞에 감격하던 그 사랑의 자리, 예수만 내 안에 사실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는 헌신의 자리, 존귀와 영광은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멸시와 천대의 십자가는 나 혼지 지겠다는 그 순수한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시면서 여러분들이 그 은혜와 사랑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사랑 1
십자가 고난과 사랑 1 (2008/08/03/05, 수요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2 (2008/08/03/09, 주일오전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3 (2008/08/03/16, 주일오전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4 (2008/08/03/19, 수요예배)
3.무슨 악한 일을 하셨느냐?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막 5:12-14).
본문은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셨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사형언도를 받으시는 현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비록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정도로 잘못한 일은 없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모질게 요청했고 빌라도는 이들의 집요한 요구에 의해서 수많은 군중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며 예수를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소리치는 유대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이 예수라는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아무도 이 빌라도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만약에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의 끔찍한 형벌을 그렇게 집요하게 요구할 정도라면, 그 형벌에 합당한 어떤 잘못을 예수님에게 발견하거나 자신들에게 입힌 손해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 중에 모질게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정도로 잘못한 일이 없으십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후 베드로가 유대인을 향해 외쳤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성령을 한량없이 받은 후에 착한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분이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죄로 고통 하는 세상에 내려오셔서 사신 33년의 생애, 그중에서도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리신 공적인 3년의 세월은 착한 일을 하시기 위해 사신 생애였습니다. 병든 자들에게는 의원이셨고 무지한 자들에게는 선생님이셨으며 배고픈 자들에게는 친히 아비와 어미가 되어 주셔서 그들을 먹이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모든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온 자마다 주님은 거절하지 않고 그들의 인생 문제에 깊이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그 문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섬기고 도우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 처형의 자리에 오기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수만 명의 무리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에 감격한 인간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멸시와 욕을 당하시고 일평생 십자가에서 숨 거두실 때까지 자기를 돌보시지 아니하고 불쌍한 이 인생들을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인생 전체는 불쌍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다 바쳐 헌신하신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였으며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최선을 드리는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더욱이 유월절이면 한사람씩 특사로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민란을 일으켜서 자신들의 동족을 죽이고 결박당한 바라바라고 하는 이 끔찍한 죄수는 살려달라고 요구를 했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자신들에게 오셔서 온갖 섬김을 다해주셨던 좋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빌라도를 위협하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많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통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종교적인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그들이 가르쳐주는 가르침을 통해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천국의 문을 가로막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방해하는 자들이라고 심하게 질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자신이 만나서 행복한 그 하나님을 불쌍한 이 인간들에게 가르쳐주고 전해주는 그 사역에 자기를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금식했지만 길거리에서 기도했지만 그 목표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고 영광을 받기 위한 욕망적인 행위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떠받듦을 받으면서 스스로 종교적인 잇속을 챙기고 많은 사람들을 타고 다녔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엾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심령을 빌미삼아서 자신들의 권력을 휘두르며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어느 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자신들의 삶과 비교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는 탐욕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영혼을 위해서 자신을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가정도 없이 아내와 아이들도 없이 온전히 자기를 다 드려 헌신하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한없이 받으셨고 진리의 말씀 자체이셨기 때문에 그분이 입을 열고 진리를 가르쳤을 때 백성들은 전율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 때문이었는데 선명한 하나님의 진리와 그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 때문에 이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유대인들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한다는 미명하에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였고 버림 받아 불쌍한 인간들의 이웃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분 곁에는 스스로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보다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는 불쌍하고 상처받은 영혼들로 가득 찼습니다.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예수께로 옮아가기 시작했고 그분에게로부터 진리를 배우며 은혜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더라면 아마 자신도 그 예수님에게 진리의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 달라고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그 시기와 미움은 급기야 저 예수를 죽이면 백성들의 사랑, 존경이 다시 자신들에게 합쳐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없으셨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했고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거대한 음모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힘만으로는 예수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례 요한을 기억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그렇게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죄와 비리를 공공연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대적 자였습니다. 그러나 죽일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신앙 때문에? 아닙니다. 백성들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좋아했을까요? 나타나자마자 세례 요한이 외친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종교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고 사랑해 주실 분이라고 가르쳤는데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없다 하나님 나라는 저 하나님 나라 바깥에 있는 너희를 위해 불러오는데 올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 그 나라 오는 것이 복이지만 너희처럼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지 않으면 그 나라는 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심판으로 다가 올 것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지도자들이 세례 요한을 좋아했을 리 없습니다.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죽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인간은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실재로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큰 권력의 힘은 빌라도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한두 명이 와서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말했다면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겠습니까?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종교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모였고 빌라도의 법정과 그 언덕을 뒤덮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지 않으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회만 있으며 구실을 잡아서 폭동을 일으킬 궁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왜 이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마지막에 이 무지한 자의 피를 나는 당치 않겠노라고 하고 빌라도가 세수 대야에 손을 씻으니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돌리십시오. 우리가 책임지겠습니다. 저주를 담보로 하면서까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외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너무 이해가 안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에게 상처 받은 사람이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있었을지 모른지만 예수님에게 상처 받은 사람이 유대 백성들 중에서 있습니까? 예수님이 어느 곳에서 내 병을 고쳐주시옵소서 하고 왔을 때 너 같은 인간은 상종해주지 않겠노라고 돌려보낸 사람이 있습니까? 배가 고파 한조각의 빵과 한 마리의 물고기를 구할 때 예수님이 누군가를 차별 대우한 적이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싶어 할 때 너 같은 인간에게 이 소중한 진리를 가르쳐 줄 수 없으니 썩 꺼져라 문전 박대해서 마음에 흠집이 생긴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예수님이 그렇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이 백성들이 원한에 사무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외쳤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 실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실망이었을까요? 이 날이 금요일이었습니다. 정확하게 그 일이 있기 5일 전 주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뛰어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이 겉옷은 존귀의 상징입니다. 겉옷을 벗어서 양탄자처럼 길바닥에 깔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다윗의 자손을 외쳤습니다. 그렇게 열렬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환영했는지 성경은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4일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던 이 유대인들이 지금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소리치게 되었습니까? 성경에 보면 종교지도자들이 시기할 정도로 백성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며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유대인들에게는 교회가 나라였고 나라가 교회였습니다. 우리처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개 같은 이방의 나라 로마에게 점령되어 힘이 없어 식민지가 되어 나라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들의 꿈은 메시야가 오셔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 개 같은 로마를 때려 부수고 다윗 시대의 임금처럼 자기의 왕이 되셔서 사람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 세상을 통치해서 모든 나라가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에게 와서 머리를 숙이고 조공을 바치는 다윗 왕국의 회복을 꿈꾼 것입니다. 그 기대가 한껏 고조된 최고의 정점이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며칠 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만 모였는데 유월절이 시작되므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 4일 동안 보여준 예수님의 행적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로마와 더불어 싸울 놀라운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고 분명히 자신들의 눈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았는데 자기들이 이 때 바로 그 기적을 행하여 로마를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에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예수님께 거는 기대와 예수님이 보여주는 모습이 엇박자가 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의 왕국 같은 나라의 회복을 꿈꾸는데 예수님은 엉뚱하게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네 마음 안에 있느니라. 원수들을 짓밟고 때려 눕혀 하나님의 큰 물질과 번영의 복을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실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소리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예수님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을 꺾어서 내 인생의 목적에 이용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의 시작은 올바르신 그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복음의 진리를 통해 자기가 얼마나 굽은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깨닫고 굽은 자신 때문에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많은 죄를 예수님이 대신 지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발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에게 꺾지 않고 꺾이지 않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신 그 고난의 십자가를 보면서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붙은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그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를 꺾는 것, 내가 십자가의 사랑 앞에 꺾이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교수가 되고 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지금 내가 목회를 못 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가슴 깊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사랑이 밀려옵니다. 나의 행복 같은 것에 대해선 관심이 없어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일은 마음 안에서 먼저 일어납니다.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가장 위험한 일은 구원받은 것이 하찮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일상적인 것처럼 생각될 때 자신의 모든 삶은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그렇게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때는 기도를 시작하니까 나를 향한 기도가 별로 없습니다. 은혜가 마음에 깊이 밀려올 때 ‘하나님 나는 기도제목이 없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마음을 많이 쓰지 마십시오. 나는 충분합니다.’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시니까 더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현재적으로 만나게 되면 욕망을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스도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한 한때 그렇게 사로잡혀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했어도 그 사랑은 식어집니다. 그리스도와의 십자가 앞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 주님이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시고 죽으신 그 가시면류관과 피로 십자가를 적신 그 죽음의 고난이 바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보려고 하는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데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실망을 하겠습니까? 문제는 욕망입니다. 백성들 안에 있는 욕망, 하나님 바깥에서 번영해보고자 하는 욕망, 예수의 뜻과 상관없이 부강한 나라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예수님을 실망하게 만들었고 예수를 꺾어 당신 섬기게 하고 싶으셨지만 예수님이 진리를 끊임없이 가르쳤을 때 이들은 예수님께 열광했던 것만큼 예수님을 미워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신자의 눈에는 항상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눈물이 있습니다. 그 가슴에는 십자가의 피에 시냇물이 흐릅니다. 좋은 신자입니다. 한때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인생의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고 혹은 피나도록 그분을 섬긴 적이 있다고 할지라도 천하에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입니다. 매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던고?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 죄인들의 우두머리였으나 바로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셨구나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죄를 버리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바깥에서 누려보려고 하던 행복, 하나님 바깥에서 성취해보고자 했던 번영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꺾인 사람들은 매순간 그분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분이 늘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그러나 그분을 꺾어서 나를 섬기게 하고 싶은 사람들은 주님의 인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것이 바로 우리의 그런 불순종을 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평생 사시면서 자기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셨고 의로우면서도 죄인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워 하나님 앞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지만 자기를 꺾고 곧 하나님의 뜻을 굳게 붙들며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라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승복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아멘의 생애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난의 주간에 주님께 드릴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제사장이면서도 스스로 당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가져 아버지 앞에 나갔을 때 아들을 온전히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들은 그 피 공로를 의지하여 이번에는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은 제사장들이 되어 또한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제물로 드리며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 앞에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사랑 1
십자가 고난과 사랑 1 (2008/08/03/05, 수요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2 (2008/08/03/09, 주일오전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3 (2008/08/03/16, 주일오전예배)
십자가 고난과 사랑 4 (2008/08/03/19, 수요예배)
4.징계로 평화를 주셨기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이사야 53장은 메시야의 고난을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가장 고민되는 장이 바로 이사야53장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대속의 교리가 너무나 분명하게 나와 있고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는 대목에 가서는 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이 대속의 교리가 너무 분명하게 표현되어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사람들은 ‘그가, 그가, 그에게’를 모두 바꾸어서 ‘우리, 우리, 우리에게’로 바꾼다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되요? 우리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렇게 되면서 결국은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도록 읽는 것이에요.
그래서 민족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함께 고난을 받는 것으로 이렇게 뒤집어서 읽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처지라고 합니다. 이 이사야53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가운데 메시아가 오셔서 이제 우리를 위해서 대신 고난을 받아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죄로 말미암아 멀어진 관계를 화해시키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사야 39장까지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다루는데 40장부터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주님의 메시지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서 전개되는 그 모든 내용들은 결국 마지막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행복한 백성, 주님께 사랑을 받는 은총의 백성들로 변하게 되는데 그 모든 변화의 한 복판에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40장 이후에 전개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 민족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이스라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징계라는 것은 무엇을 잘못한 것에 대해서 내리는 벌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징계의 크기는 벌의 무게에 비례하겠지요. 작은 죄에는 작은 벌이 가해지겠지만 매우 큰 죄에는 큰 형벌이 가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의 징계도 작은 과오에 대해서는 적은 징계가 있겠지만 큰 과오에 대해서는 큰 형벌이 있는 것이죠. 죄인들에게는 매 맞고 형벌을 받는 것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죽음에 종속받기로 되어있는 인간에게는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일뿐만 아니라 죄를 지으실 수도 없는 분이셨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분은 죽으실 수 없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셨어요. 그 죽으실 수 없는 생명 자체이신 그분이 죽임을 당하게 된 이것은 말하자면 그가 받은 징계의 크기가 무한한 형벌의 징계였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죽음이 가해진다고 해도 그것이 무한한 형벌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요. 왜?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인간이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는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이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죽음의 징계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형벌의 무한함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무한함을…….
그러면 그분의 징계로 말미암는 형벌이 무한했다는 이야기는 그가 대속하셔야 할 우리의 죄가 무한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파괴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명예를 더럽히고 이 세상에 생명과 사랑으로 교통하여야 할 모든 것들을 불순종과 죄로 끊어 놓았어요. 그러면 그렇게 입힌 손해는 무한한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그 형벌도 무한한 것이어야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이죠. 그래서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천국에서의 생명과 기쁨이 영원한 것, 그리고 또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게 될 지옥형벌의 영원하고 무한한 것은 아주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것이에요. 그렇게 영원하지 않으면 무한할 수 없고 또 무한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가 행한 죄에 대해서 내리는 응당한 형벌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그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방식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목하게 되는 것이죠. 이 세상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사람들을 죽이는 수많은 방법들이 고안되어 왔어요. 지금도 과학이라고 연구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에요. 한번은 외국의 호주를 갔는데 거기에서 그 나라의 통치에 대항하는 반역자들을 어떻게 죽였는지 박물관을 만들어 놓았어요. 그런데 사람을 이렇게 눕혀놓고(끔찍한 이야기인데…….) 이 위에는 자루가 기다란 큰 도끼가 달려있어요. 그 도끼가 이렇게 드리워져서 이렇게 시계추처럼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도끼는 지면을 스칠 정도로 지나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처형할 사람을 거기다 눕혀놓고 그 줄을 딱 끊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도끼가 확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에요. 몸을 가르고 지나가는 것이에요. 뭐 너무너무 끔찍하지요.
고대에서 사람을 죽이는 방식들을 조사를 해봐도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이집트 같은 데서는 산채로 사람을 관에 넣고 그 관속에다가 사람의 살을 파먹는 벌레를 함께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 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면 벌레들이 파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죽이면서 살을 다 뜯어먹는 것이에요. 때로는 물속에 집어넣어서 식인고기들에게 잡혀 먹히게 하는 방법도 있고 로마시대 때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맹수들에게 던져주었던 것도 바로 그런 것들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끔찍한 것이죠.
지금도 사람들을 사형에 처할 때에 보면 총살을 시키거나 아니면 대게 교수형에 처하거나 아니면 미국 같은 데서는 전기로 죽여 버리죠. 그런데 항상 이런 것들을 택할 때에 고려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순간의 고통 없이 죽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중에서 가장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이 목매어 죽는 것이래요. 집에서 시험을 하지 마세요. 마지막에 죽을 때에 아주 환상적인 속으로 빠져들어 간대요. 그래서 한때 중고등학교 애들이 스스로 목매달아서 그 엑스타시를 경험하려고 하다가 못 풀어서 죽은 애들이 여러 명 있었잖아요. 그런 경험이에요.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일순간에 생명이 끝나요. 일순간에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이에요. 십자가의 형벌은 보세요. 목숨이 붙어있는 그 순간까지 철저하게 최대한의 고통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 이것, 십자가의 형벌이었어요.
이것은 결국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한한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증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예표에 지나지 않고 그 실제는 지옥의 형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바로 그렇게 징계를 하나님께 받으셨다는 것이죠. 우리가 감당해야할 그 무한한 형벌의 징계를 주 친히 담당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이셨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의 가치는 무한하였고, 무한한 생명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무한한 형벌을 위한 충분한 제물이 되실 수가 있었던 것이에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자기를 십자가에 찢고 피 흘려주신 그 고난이 바로 무엇을 사기 위한 고난이었나요? 무엇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나요? 우리들은 흔히 어렸을 때부터 우리를 천국보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복음을 올바르게 적용한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고 다시 우리를 사랑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드린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어요. 평화를 위한 것이었어요. 이 평화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쉘렘’, 혹은 ‘샬롬’이라는 말이에요.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사람들과의 평화, 심지어는 자기의 육체가 모두 평안해서 건강한 것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에요. 그래서 이 ‘샬롬’혹은 ‘쉘렘’이라고 하는 단어는 평화라고 하는 말도 되지만 ‘온전한’이라는 의미에요. 온전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찌그러지거나 깨어지거나 뜯어진 것이 없이 원래의 전일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샬롬’이에요. 샬롬.
저는 아직 성지순례를 안가 봐서 잘 모르겠는데……. 들은 이야기에요. 그런데 히브리사람들의 주식이 빵인 것은 여러분들 잘 아시잖아요? 빵이에요. 구운 빵이에요. 그런데 이제 빵집에 가서 빵을 사면 이렇게 하나로 통째로 잘 구워진 것을 ‘샬롬’이라고 해요. 이게 너무 커서 반으로 자른 것을 ‘하찌’라고 해요. 그래서 빵을 살 때 ‘텐리샬롬’ 그러면 하나 전체를 주십시오. ‘텐리하찌’ 그러면 너무 크니까 반만 주십시오.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온전한 전일성을 이루고 있는 이것이 바로 ‘샬롬’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모든 사람,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의 평화까지고 포함하는 이것이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이 대신 징계를 받으시는 평화의 이유에요. 평화의 이유에요. 오늘날 왜 그렇게 사람들이 물고, 찢고, 싸우고, 그리고 사랑해야할 사람들이 원수처럼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 샬롬이 없기 때문이에요. 샬롬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 샬롬은 하나님 없이 아무리 평화를 이루어 보려고 애를 써도 결국은 인간의 욕망이 충돌을 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 샬롬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요.
요즘도 보면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던 연예인들이 시집, 장가를 가서 1,2년 혹은 6개월 만에 얻어맞고 코뼈가 부러지고 이러면서 이혼하고 야구방망이에 맞고 이혼하고 이러는 광경을 보도하면서 어떤 전문가가 나와서 충고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인생에 있어서 결혼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로 결혼을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결국 평화가 깨뜨려지는 모든 분쟁과 다툼의 현장에는 반드시 평화가 깨지는 그곳에는 반드시 깨뜨려지지 않은 자기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평화가 깨뜨려지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은 자신이 깨뜨려질 때에 온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지만 자신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절대로 온전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어요. 돈이 아무리 많이 생기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교회에서 모든 사람이 떠받들어 존경을 해주어도 온전한 사람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결국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핵심이에요. 하나님과의 평화 그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그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그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에요. 그러한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속에서 신자들은 그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게 된 이 평화를 삶속에서 자신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일체의 평화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그렇게 힘들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이 하나님과 불화하기 때문에 다른 방면에서 어떠한 평화를 이루어보려고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결코 이 세상에서 샬롬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그 모든 평화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그들에게 전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들이 먹고 살기 어려울 때에는 교회에서 밀가루 한 봉지를 주고 그리고 우유가루라도 한 깡통을 주면 교회에 줄을 서던 시절이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조금만 더 잘살게 되고나면 아마 그런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서 예수 믿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에요. 점점 더 잘살게 된다면 미국의 어느 신용평가에서는 우리가 202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86,000달러가 되어서 미국과 똑같이 잘사는 나라가 된다고 그랬는데 뭐 아무리 여러 번 얘기를 해도 기분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요? 그렇지요? 그러나 그때쯤 되면 어떤 일들이 생길까요? 이제 사람들은 먹고 살고 그리고 소중하게 여기는 물질적인 것들은 거의 없는 상태가 되는 이에요. 그런 상태가 되면 사람들에게 이제는 예수 믿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나를 보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지요? 왜?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에도 복 받은 사람들이 많아요. 아들 딸 잘나가는 사람들 많고요. 그렇지 않겠어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것이에요. 가난하고 힘들었을 때에는 그렇게 해서 그래도 배부르게 밥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야~쟤네들은 하나님이 도와주시나보다…….’ 이렇게 부러운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살만큼 살면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면 무엇일까요. 평화! 평화! 현대인은 누가 쫒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불안하고, 누가 위협하는 사람이 없어도 두려움 속에서 살아요. 그리고 외로워요. 평화라는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기 때문에, 나의 인생이 그분의 손안에 있기 때문에, 오직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기 때문에 그분을 푸근히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 평화에요. 평화!
제가 회심하게 된 동기도 그것이었어요. 평화였어요. 평화! 왜냐하면 아무리 인간의 사상과 철학에서 인생을 해결해 보려고 해도 평화를 얻을 수가 없어요. 어느 한순간에 아주 감탄할만한 이론들은 있어도 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이제 여기가 내 쉴 곳이다.’라는 평화가 없는 것이에요. 소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일 속편해보였어요.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자기네들은 있다는데 그래서 얼굴이 편안하고 속이 편하데……. 그래서 어떤 마음이 들었느냐하면 이게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해도 나도 한번 저 사람들처럼 현혹되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 적어도 막판에 가서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막판으로 갈 때까지는 편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그 때쯤 되면 사람들을 강하게 잡아끄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격 속에 잔잔히 흐르고 있는 평화! 평화! 어떤 일생동안 방탕하게 지내고, 가정을 여러 번 깨뜨리고, 그리고 감옥에도 여러 번 들락날락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고, 방탕하게 살아보던 사람이 그 마지막에 고백하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돈도 벌어볼 만큼 벌어보았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낙도 다 누려봤는데 마지막에 이 세상에서 가장 천국 비슷하게 느껴진 것이 언제였느냐 하였더니 쓸쓸히 밤거리를 걸어가는데 어두운 골목 집 한 채에서 밝은 빛이 창문에서 새어나오고 거기서 온 가족이 모여서 깔깔거리고 웃는 그 소리를 들을 때에 그 창문 너머가 천국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에요. 그런 평화를 평생에 맛보지 못하고 산 것이에요. 그게 이제 이 시대가 마지막이 될수록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끌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에요. 지금 벌써 사람들이 그렇게 끌리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험한 징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면 주님이 한번 우리가 화목한 후에는 그 다음에는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에서 만나자고 말씀 하였겠어요? 하나님과의 평화를 십자가의 고난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받은 그 평화를 끊임없이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힌 정신으로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이루신 하나님과의 평화를 우리의 온 삶의 여정 속에서 늘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게 인생의 참된 행복이에요. 그리고 거기로부터 무한하고 끊임없는 자원이 주님이 우리에게로 부어주시고, 그리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자원들을 나누어 주시고 그 자원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그러면서 그 평화 속으로 들어오도록 살아가는 것이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 설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인성 안에다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려고 해야지 그리스도 밖에 어디 다른 곳에서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미끄러지기 시작하고 그 복을 잠시 누리고 맛보기 위해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려야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 아래서 진정한 평화를 잃어버리고 참된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통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끊임없이 예수의 십자가의 그 고난을 보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큰 고난이 우리를 건져주시고 죄에서 살려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 고난과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