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
(200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획(엡3:9-11) 2009.4.5 주일오전 1
2.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히2:10) 2009.4.6 십자가사경회(새벽) 13
3 .십자가와 순종(롬5:19) 2009.4.7 십자가사경회(새벽) 22
4. 십자가와 희생(엡5:2) 2009.4.8 십자가사경회(새벽) 30
5. 십자가와 유화(롬3:25) 2009.4.9 십자가사경회(새벽) 39
6. 십자가와 화목(골1:13-14) 2009.4.10 금요기도회 47
7. 십자가와 구속(롬5:10) 2009.4.10 십자가사경회(새벽) 55
8. 십자가와 부활(골2:15) 2009.4.12 주일오전 65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1 (09. 4. 5 주일오전)
1.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계획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 9-11).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지극히 개인적인 소식을 전하는 가운데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동안 바울이 복음을 아는 지식에서 얼마나 성숙해갔는지를 보여줍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부터 복음을 아는 지식은 그에게 있어서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 지식이 점점 증가하여 이제는 이 복음의 의미를 우주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시킬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던 것이죠. 이 편지를 쓸 때에 사도바울은 옥 속에 있었습니다.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거기에서도 주님을 아는 지식은 점점 자라가게 되었고 그래서 이 에베소서는 로마서와 함께 가장 깊이 있는 복음의 심오함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라고 여기고, 또 그리스도를 우리 인생의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대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오늘의 이 강론을 잘 듣는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구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차지하는 위치를 알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먼저 사도는 영원 전 부터의 하나님의 만물 창조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말할 때에 사도바울은 목적이 있는 세계의 창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작정하신 의지를 따라 이루어진 창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르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활동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 세계를 의지를 가지고 창조하셨다는 것이죠. 이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서 창조되었습니다.
이 영원한 지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지혜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계획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고 의지한 모든 것은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시고 이 세계를 창조하실 수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는 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포괄적이고도 구체적인 개별계획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지혜로,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영원한 지혜와 능력으로 만드실 뿐 아니라 창조된 피조물과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데, 그 피조물 중 특별히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 그 무한한 사랑으로써 창조를 이루신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이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이 영원한 지혜와 사랑을 가지고 계셨고 이 영원한 능력으로 창조한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로 창조되었고, 거기에서 창조된 인간들은 창조되는 것과 함께 즉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관계는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의 관계였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만약에 이 세계를 창조하신 동기 내지는 수단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 세계가 하나님께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무엇인가 모자라는 면이 있으시지 않나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들고, 또 필요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에게 잉여의 존재가 되어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의, 의미가 없는 그러한 사물들이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하나님 자신에게 이 세계가 없으면 부족했기 때문에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세계의 창조 그 자체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불변하시는 성향의 자연스러운 효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고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덩어리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존재라고 한다면 이 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존재의 효과도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계를 보십시오. 세계 안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놀라운 효과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창조된 이래 한 번도 그대로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화하고 소멸하고 회귀합니다. 이런 커다란 자연의 변화는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신 효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변함없이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 분 안에 있는 어떤 본성 자체가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이 세상에 발현하시고자 하는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자연스럽게 창조된 것이죠. 그러니까 오히려 이 모든 세계의 창조와 끊임없는 생성과 변화는 하나님이 불변하신 성품을 가지고 계신 것을 훌륭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우리가 볼 수 있고 접할 수 있는 이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의해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피조세계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갖고 계십니다. 우선 불연속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 안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현저한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하나님은 원래 계시는 분이고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그것이 아무리 크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인간처럼 하나님을 훌륭하게 빼 닮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그것은 전적인 타자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구별됩니다. 건널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들의 위치의 차이가 분명하게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연속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속에 당신의 흔적을 남겨놓으셨습니다. 흔적만 남겨놓으신 게 아니라 당신이 친히 이 모든 피조물과 섞이지 않으면서도 이 피조물 가운데 임재 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이 피조물 속에 하나님이 없는 곳은 아무데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초월적인 하나님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이 피조물들과 함께 이 피조물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피조물도,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가운데 계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을 느낍니다. 그러나 간략하게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 ‘있다’라고 하는 동사가 사용될 때 동사의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있다’의 의미는 현저하게 달라지는 것이죠.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이러한 그릇이 있다고 할 때에 이 ‘있다’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다른 사물들을 배척하면서 존재합니다. 즉 무슨 뜻이냐면 이 그릇이 있는 곳에는 이 그릇과 함께 또 다른 종류의 물건이 같은 공간과 시간을 차지하면서 그 자리를 공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뜻으로만 있지 않고 또 다른 뜻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영혼이 있다고 할 때에는 이런 거하곤 개념이 틀리죠. 만약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런 식으로 인간의 영혼이 있는 여기에는 공간과 시간을 다른 것들이 밀고 들어올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영혼이 있는 것은 아니죠. 만약에 그렇게밖에 영혼이 있을 수 없다면 우리 몸 안에 커다란 구멍이 있어서 거기에 영혼이 모여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빈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물질은 아니지만 우리의 몸 밖에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있는데 여러분들의 영혼이 부산으로 출장갈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존재하지만 우리 안에 있게 마련이죠. 어렸을 때에는 몸이 1m 10cm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 안에 있고, 성장해서 1m70cm가 되었는데도 그 영혼이 1m 80cm 까지 배꼽 아래만 있고 위에는 없는,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은 우리 몸 안에 어떤 장소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죠. 이것이 존재하는 두 번째의 존재하는 양상이에요.
마지막의 세 번째의 존재하는 양상은 모든 물질에 의하여 존재가 방해되지도 않고, 그가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존재들을 배척할 필요도 없이 무한히, 영원히 존재하는 방식이 있어요. 이 세 번째 방식이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세계 안에 있다고 말할 때에 마치 영혼이 우리 몸 안에 있는 것이나 혹은 이러한 그릇을 비롯한 고체가 지구의 한 공간 안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방식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당신이 만물을 초월하시면서도 만물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세계 속에 당신이 당신의 흔적을 남겨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친히 임재 해 계심으로 그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십니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스스로 충족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이 있어야지만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깊으신 뜻을 따라서 이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마치 거울로 우리가 자신을 들여다보듯이 이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님 자신이 바라보심으로, 피조세계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지만 피조세계를 통해서 피조세계 너머에 있는 당신 자신을 바라보시면서 행복해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고 모든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기쁨을 발견하는 획기적인 이 모든 하나님의 관상 속에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셨는데, 창조하신 모든 일을 마치고 난 후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은 틀림이 없지만, 더 이상 아름다워질 수 없는 극치의 아름다움으로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아름다움을 주시되 현실로 나타날 아름다움도 주셨고 앞으로 나타나게 될 잠재적인 아름다움도 주셨습니다.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앞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있습니다. 노랗고 빨갛고 하얗고 보랏빛인 이 꽃들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이 꽃이 태어날 때부터 활짝 피었던 것은 아니죠. 언젠가는 이 꽃이 파란 봉우리 이었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이 꽃은 이미 활짝 핀 꽃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원래 이 꽃 자체가 이렇게 활짝 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햇빛과 물과 양분이 공급되니까 어느 시간이 되어서 잠재되어 있던 아름다움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활짝 드러나게 되어 오늘 여러분 앞에 이렇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게 된 것이죠. 우리 인간의 보고 판단하는 것은 대부분 시간의 변화 속에 묶여 있기 때문에 이 꽃이 활짝 피지도 않은 봉우리 이었을 때에 이미 활짝 피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꽃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사물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것을 시간을 초월해서도 감상하실 수도 있고, 시간 속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는 이 대목은 하나님 마음 안에 아직 창조되기 전에 있었던 계획으로 말한다면 실현된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시는 것이지만, 이후에 인간의 노동과 섬김을 통해서 활짝 드러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잠재적인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잠재되어 있는 피조물들의 아름다움을 함께 보시면서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세계를 그렇게 잠재적인 아름다움과 현재적인 아름다움을 함께 집어넣어서 창조하신 후에 인간으로 하여금 종처럼, 임금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섬기고 다스리며 노동할 때에 이 잠재적인 아름다움은 활짝 드러나고 현재적인 아름다움은 유지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시간 안에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맨 처음 창조하실 때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실 수 있도록 이바지하는 목적을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죠.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바로 이 인간의 고유한 목적으로부터 이탈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죠.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하나님 안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바깥에서 발견하려고 애 쓸 때 인간은 불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목적이고 인간의 존재는 이러한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 일은 매우 어렵고 영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과 달리 창조하시지 않으면, 인간은 이 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영혼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실제이고 이 영혼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영혼이었습니다. 이 영혼으로써 인간은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이 창조의 계획들을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이해하고, 아래로는 자기의 피조세계를 이해하고 그렇게 해서 이 두 대상을 아는 지식을 자기를 아는 제 3의 지식과 연결 지어서 이 창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뜻들을 구현해 나갈 수 있는 지성과 애성과 의지의 능력을 아울러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성과 사랑, 의지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위탁받은 본분을 따라서 이 세계를 돌보고 가꾸는 것이 인간의 계획이었고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은 이러한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싫어했습니다. 그는 위로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고 아래로는 이 모든 피조세계가 자기의 지배 아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인자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밀물처럼 밀려들어왔고 이 세계에 가득 찼던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피조물들 사이에 있어 하나님의 영광을 전달해 주던, 찬란한 빛이 되던 이 모든 상호교통은 끊어지게 되었고 이 끊어진 모든 연결들은 인간에게 하나님과 그리고 모든 관계의 파괴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를 경험하게 되었고 옆으로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파괴를, 안으로는 자신과의 관계의 파괴를, 아래로는 하나님이 맡기신 이 모든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깨뜨려지는 위기를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다스리고 통치해야 할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함께 사랑함으로써 삼위일체의 모상을 이루어갈 이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는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던 것이죠.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깨뜨려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 세 가지의 관계가 깨뜨려진 자연스러운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자 많이 탐구하면 탐구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오리무중의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모든 인간들과 자연세계와의 관계도 끊어진 채 고립된 존재가 되었고 그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을 송두리째 박탈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지금도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며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사는 이 비참한 현실의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이 타락하였지만 타락한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계획, 곧 작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곧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한 것이라.” 하나님이 미리 의지를 가지고 작정하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자! 우리가 바보가 아닌 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홀로 계셨는데 처음에는 만족하셨는데 심심하셔서 세상을 만들어서 갖고 싶다는 생각이 생겨난 겁니다. 그래서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세계가 아무래도 너무 심심해서 당신과 말상대를 할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이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이죠. 그랬더니 뜻밖에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는 너무 충경이었고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랴부랴 이들을 구원할 계획을 수립하셨습니다. 그리고 계획을 수립하셨는데 사람들이 순순히 이 계획을 따라오지도 않고, 율법을 주었는데 보니까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도 못해요. 이것도 하나님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주기로 작정하셨죠. 그랬더니 이번엔 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주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열심히 신앙을 가질 줄 알았는데 안 믿는 인간이 다수가 생겨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처리할 수 있는 쓰레기통 같은 지옥을 만드셨다는 것이죠. 지옥을 만들고 그것으로 협박을 해봐도 사람들이 안 믿으니까 하나님이 영원히 이 일을 못하겠다. 이것도 시간을 정해서 그때까지만 하고 잠시 후에는 내가 내려가서 직접 이 세상을 쓸어버려야 되겠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계획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명쾌하게 말하기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 정하신 뜻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의 영원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순서로는 하나님이 먼저 계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겠죠. 여러분이 인생의 계획을 짰다면 태어나야지 인생의 계획을 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논리적인 순서로 보면 하나님이 먼저이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겠죠. 그렇지만 이 계획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계획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성 속에서 계획을 갖는 것과 하나님이 이 영원한 계획을 가지시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에요. 우리는 이미 존재 자체가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고 공간 안에 묶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계획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순서적으로 시간적으로 우리 존재가 먼저이고 철이 든 것이 두 번째이고 세 번째는 생각하는 것이고 네 번째는 생각했기 때문에 계획을 갖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정신 속에 일어나도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고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논리적으로는 하나님이 먼저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두 번째 따라오지만 시간적으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원한 계획 없이 하나님이 홀로 계시던 때는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성자가 성부에게서 나시지만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 없이 계시던 때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영원히 정하신 뜻, 그 안에서 이 모든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완성의 계획들이 전개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격적인 존재이십니다. 인간도 인격적인 존재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인간에게 있어서나 의도가 없는 행동은 없습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의 핵심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의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의도는 보다 더 구체적인 계획의 일환이 되는 것이죠.
영국에 있을 때인데 새벽에 갑자기 아주 시끄러운 소리가 나요. 뭔가 했더니 우박이 쏟아지는 거예요. 우박이 소리를 내면서 지붕을 때리면서 막 쏟아져요. 왜 쏟아졌을까요? 우박에게는 아무 의도가 없습니다. 원래는 수증기 상태였는데 수증기가 1m2가 뭉치면 빗방울 한 알갱이가 되요. 그럼 비가 하루 종일 쏟아질 때에 그 구름은 수 십km의 두께로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데 이 뭉쳐진 물방울이 떨어지는데 기온이 너무 차가와요. 그것이 오다가 얼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것이 얼음덩이가 되어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쏟아질 뿐이지 어떠한 의도도 그 안에 없어요. 모든 피조물들의 움직임은 타율적이에요. 무엇인가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죠. 교통 표지판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표지판이 하나 있어요. ‘낙석주의’ 아니, 산길을 가는데 앞에다가 낙석주의라고 써 붙여놨어요. 쏟아질 것 같으면 바위들을 붙들어 매든지, 아니면 터널을 뚫어서 안전하게 다니게 하든지 하지,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돌멩이들이 위에 있는데 ‘낙석주의.’ 마치 쏟아져 내려도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여기를 통과하려면 목숨을 걸어라, 그런 뜻 아니에요? 바위가 위에서 쏟아지는 것은 바로 그 아래 나쁜 놈이 차를 타고 지나가기 때문에 쏟아지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바위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죠. 아무 의도 없이 도저히 중력 관계상 자기를 지탱할 수 없을 때 바위는 쏟아지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시죠.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의도를 가지고 계세요. 그렇기 때문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창조했더니 우연히 타락했고, 타락하니까 하나님이 황급히 구원계획을 만드셨고, 구원계획을 만들었더니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아서 지옥을 창조하시는 이런 식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창조와 타락, 구속과 완성에 관한 계획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이미 작정하고 가지고 계신 것이라는 거죠. 그 계획이 하나씩 하나씩 시간과 공간 안에서 펼쳐 보여 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마음 안에는 논리적인 순서일 뿐이지 시간적인 순서는 없이 하나의 평면 속에 존재하게 되는 거라는 얘기죠. 그것이 시간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이끌려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본질인 것입니다.
이 계획은 시간 세계가 있기 전부터 영원히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었던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과 역사의 세계는 하나님 안에 미리 정해진 이 하나님의 원대하고 영원한 계획이 실현되는 하나의 장엄한 무대에요. 이 영원한 신적인 계획이 오늘 성경에 의하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예정된 것도 예수 안에서 된 것이고, 이루어진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현되어 가는 그 모든 역사의 전개의 과정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조되기 이전, 하나님 마음 안에 있던 그 영원한 계획의 상태에서부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된 거죠. 그래서 에베소서 1장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비밀이었는데 이 비밀이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세계의 창조와 타락, 구속과 완성, 그리고 찬란한 영광의 점증에 이르는 이 역사의 전 과정, 영원으로 향하는 이 모든 창조세계의 영원한 과정 자체를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갖고 계셨고 그 계획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가지신 것입니다. 이 계획은 성부에 의해 독점된 계획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 안에서 공유된 계획이었고 이것이 시간 속에서 전개되어 창조로 나타날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창조에 있어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계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것이죠. 그래서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선언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 있어서만 중보자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영원한 계획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시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도 친히 로고스의 중보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심으로 우리의 구원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고, 구원받은 이 모든 성도와 완성된 세계의 영원한 영광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취되게 됨으로써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 교회를 이루고, 이 교회가 성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안에 있었던 것들이 시간이 되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이제 잠시 후 여러분에게 증거 되는 말씀 속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단지 하나님이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드는 한 과정이나 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이 가지고 계신 영원한 계획의 중심이며 목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단서를 오늘 성경은 10절에서 “교회로 말미암아”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계획을 이 시간 세계 속에 펼쳐 보이는 하나님의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당신의 몸에 접붙이시는 영적인 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교회로 말미암아” 라고 하는 이것은 단지 지상에 있는 이 껍질로서의 지상 교회가 아니라 우주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보편적인 몸으로서의 영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영적 교회, 영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영적 몸이 이 교회라면, 이 지상에 있는 시간과 공간 안에 자리 잡은 이 지역에 있는 이 교회들은 바로 그 영적인 몸을 잠시 간수하고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이죠. 인간의 육체는 영혼과 함께 만났을 때에 인간 존재가 됩니다. 영혼 하나를 빼어서 존재할 때 그것을 우리는 인간존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육체와 함께 만나 어우러질 때에 이 육체는 단지 영혼을 보관하는 창고나 그릇이 되지 않고 영혼이 하나님을 위하여 활동하고 움직일 수 있는 훌륭한 섬김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육체도 창조하셔서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의 목적을 위해 인간이 노동으로 이바지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교회를 잠시 이 세상에 남겨주시는 껍질로 쓰시지만 이 세상에 이토록 경륜되어진 한도 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진 영적인 몸이 이 육신의 껍질처럼 여겨지는, 이 눈에 보이는 시간과 공간 세계 속에서의 이 성도의 연합, 그리고 이 세상의 자원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들의 뒤를 잇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도구가 아닙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교회는 이제 역사의 경륜 속에서 이 껍질을 벗고 완전한 영적인 교회로 일체를 이루어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영광스러운 예수의 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 교회는 하나님을 위해 훌륭하게 봉사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었던 창조와 타락, 구원에 관한 위대한 계시들이 이 교회의 섬김을 통하여 널리 널리 전파될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완전하게 구별될 때까지, 그래서 하나님이 이 땅에 성결한 하나님의 백성들만 남겨두실 때까지, 그때까지는 이 껍질인 교회가 한 알의 밀알처럼 썩으며 영적인 몸의 한 도구로 훌륭하게 봉사하며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로 말미암아 이 땅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반포하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계획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즉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구원의 계획도 펼쳐 보이셨고 그리하여 인간이 타락한 즉시로부터 하나님은 역사와 인물, 사건과 사람,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의 전달과 선지자들의 해석의 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풍부하게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와 행동에 대한 기록들은 이것이 바로 성경의 내용을 구성하게 되었고, 오늘날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살아갈 때에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 구원의 역사 전개는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하는 훌륭한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의 인생의 문제의 해결은 인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앎으로써 인간은 이 모든 속박과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야지만 죄로 말미암는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참 인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할 때에 도대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은 두 가지로 구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속성의 어떠함을 아는 것과 두 번째는 속성이 시행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 속성이 어떤 것을 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예로 들어봅시다.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안다고 하는 것은 계시의 내용들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는지도 내가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해,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이 사랑의 속성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방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되고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들음으로써 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해는 증진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될 때에 그것은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이 되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직접 관상함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가르친 모든 가르침은 거짓입니다. 인간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기 위한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직접 바라봄으로 알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원의 계획을 전개시킴으로써 당신의 속성의 어떠함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의 이러저러함을 인간에게 보이시고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교통하면서 구원의 길을 찾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시작이 되었고, 구약에서부터 시작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에 대한 계시는 신약으로 올수록 보다 더 점진적으로 명료한 계시의 형태로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가 차매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이 영원한 계획의 절정을 보여주시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기만 하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생생하게 볼 수 있었고 육성으로 들을 수 있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서는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와 같이 명료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그 몸은 거짓 사람의 몸이 아니라 참 사람의 몸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참 사람의 몸이었던 것이죠. 이렇게 예수님이 오셔서 33년을 사셨고 특별히 3년의 공생애를 지내시면서 인간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으니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진리는 성경을 통해, 선지자를 통해, 예언을 통해, 부활 사건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던 이 진리에 대한 증언보다는 훨씬 아름답고 명료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거짓이라고는 없는 참 사람이시고 참 하나님이신 참 예수를 통해 전달되는 진리였으니 이 진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지식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 치료의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긍휼과 자비하심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주 현실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신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이 모든 계시들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 많은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는 자비를 베푸셨지만, 그 떡을 먹고 병 고침을 받은 사람도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것도 이후에 일어날 한 가지 사건을 보면 그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한 예고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지막 정점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십자가 사건은 그 의미가 명백해지게 되었고 또 부활의 사건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연한 귀결로써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만물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사 모든 만물로 그 발아래 무릎을 꿇고 주로 시인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은 자연스럽게 십자가 사건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활의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닌 우리를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 쳐 주셨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이를 통하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이고 이 속성이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찬란하게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 위에 하늘 높이 쏘아올린 불꽃과 같습니다. 캄캄한 어둠을 배경으로 한줄기 밝은 꼬리를 그리며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커다란 불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두운 밤하늘에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긴 빛줄기를 보면서 사람들은 거기에 놀라운 빛이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에 비하면 그것도 절정이지만 잠시 후에 있을 그 모든 불꽃의 작렬하는 불빛, 하늘 높이까지 올라간 한 줄, 빛줄기를 그으며 올라간 그 불꽃이 폭죽이 되어서 찬란하게 터져 온갖 색깔을 그리며 아름답게 작렬하는 빛에 비하면 그것도 예고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작렬하듯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팡’하고 터져서 불꽃처럼 현란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의 나타남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많은 하나님의 속성들 중 특별히 구약에서 오랫동안 관심되어 왔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입 맞출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희미하게 하나님의 이 성품에 대해서 보여주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이 도저히 못 봤다고 말할 수 없는 찬란히 작렬하는 불꽃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성육신하고 오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인간들 중에도 배신자가 있지만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중에는 배신자가 없어요. 잠시 미끄러질 수는 있겠죠. 그러나 배신자는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봤지만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령에 의해 증거 받지 못했던 사람들 보다는 우리가 훨씬 예수님을 잘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작렬하는 불꽃을 다시 한 번 해부해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어두운 밤하늘에 한 줄기 불빛을 그으며 올라간 이 불꽃이 찬란하게 폭발하며 작렬했습니다. 그 찬란하게 쏟아지는 불빛은 눈부셔서 볼 수 없을 정도지만 굳이 그 불빛을 구분하자면 둘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죄인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절친하고 친밀했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를 짊어진 죄인의 대표로 보시고 짓이겨 죽게 하셨습니다. 머리에는 굵은 가시관을 쓰고 그 손은 못 박혔습니다. 그 다리에도 굵은 못이 박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죄를 향하여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죠.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 하나님의 눈에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아니라 죄악의 덩어리였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창조주이신 당신 자신을 반역하며 덤벼드는 이 모든 인간들의 죄를 한꺼번에 짊어지게 하시고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꽃처럼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여기에서 난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삽니까?” “아니요. 저는 죄도 많이 짓고 나쁜 짓도 많이 하고 마음속으로 악한 일을 생각할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십니까?” “되게 괴롭습니다.” “앞으론 어떻게 될까요?” “그렇지만 잘 해결될 겁니다.” “왜요? 하나님이 나를 참 사랑하시거든요. 저는 그 사랑을 믿어요. 그래서 나를 이렇게 내버려두시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하나님이 좋게 해주시리라 믿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주 뛰어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인 것이죠.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와 하나님과의 불화의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할 때에 그 믿음의 본질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막연한 믿음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좋게 해 주실 거야. 그런 것이었습니까? 아니죠. 우리들이 죄를 해결 받을 수 있었던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믿음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은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이 죄는 너무나 큰 것이고 악한 것이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나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이 믿음, 그것이 우리를 죄에서 용서받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은 있으면서 그 잘 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속죄적인 죽음에 기초해서 잘 될 것이라는 신앙은 결핍한 것이죠. 그러면 그것이 좋은 생각을 가진 운명론자들의 생각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상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지극히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예수에 의해 죄 용서를 받아본 사람들에 의해 보다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이 있었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를 향해 이글거리는 하나님의 분노의 쏟아 부으심이지만 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죽이셨을까? 죄를 지은 당사자는 우리들인데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 진노를 쏟아 붓는 대신 죄 없으신 예수에게 그 진노를 쏟아 부으셨을까?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했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나를 사랑하실까?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도 거역하실 수 없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사랑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던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실행인 창조, 그리고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이루어질 세계의 모든 완성을 통틀어 봉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는 이유는 단지 나 한 사람이 구원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행복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십자가사건은 나 하나하나의 개인을 구원해주는 사건일 뿐 아니라 이것을 뛰어넘어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계획,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피할 수 없게 된 이 죄와 수많은 혼란, 이후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과 그 안에서 영원 무궁히 계속될 점증하는 하나님의 영광,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꼭짓점 속에 있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 가운데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이 영원한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 마음 안에 먼저 들어가 그 계획을 먼저 알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연역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귀납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비밀스러운 경륜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비밀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우리 인간의 그렇게 가슴 아픈 타락을 허용하셨던 하나님의 작정의 위대한 계획을 보게 되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대한 계획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계획 너머에서는 우리는 영원한 세계 안에 있는 무한한 지혜와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그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개되는 이 모든 역사의 전개, 그리고 인간의 모든 구원과 모든 세계의 완성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정점으로 하여 전개되는 굽이치는 하나님 아버지의 찬란한 속성의 나타남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예수 믿은 나 한 사람의 자랑이 아닌, 교회 전체의 자랑이고, 교회 전체의 자랑일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고대하고 기다리는 영광스러운 자랑입니다. 타락해서 구원을 얻은 인간 뿐 아니라 아직까지도 이 십자가의 영광스러움을 모르는 모든 인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영혼이 없는 이 모든 피조물들, 인간의 몸에 구속을 기다리며 탄식하는 이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이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자랑거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천 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이 피 뭍은 십자가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최고의 자랑거리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그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또한 세상이 나를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말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이 위대한 계획을 전달하는 아주 아름다운 하나님의 계시의 작렬하는 절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세상을 통해 창조를 봅니다. 그리고 이 창조를 통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계획이 비밀스러운 것이지만, 경륜을 따라서 시간과 공간 안에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십자가를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감히 이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되어가는 이 영광스러운 전개의 과정에 자기 자신이 회심한 것이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이렇게 구원하여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이렇게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풍부함을 이방인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우주적인 계획과 나 한 사람의 구원이 관련이 있다, 내게 은혜를 주신 것이 관련이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났다 공간 속에 나타났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질 지푸라기와 같은 인간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있던 이 영원한 경륜, 그 비밀을 드러내는데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용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 벅차고 놀라운 일입니까? 인생의 의미는 길이와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 실현되는 일에 얼마나 이바지하며 살았는가? 그 구원사적인 의미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위 높지 않고 천재 같은 지식 없어도, 만약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은 십자가를 깊이 알고, 그 십자가 때문에 주님도 두려워하고 떨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그 십자가 때문에 이끌리는 사랑을 느끼며 경건하게 산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들풀과 같지만, 여러분들의 인생들 때문에 비밀 속에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경륜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작은 전도가, 보잘것없는 영혼을 구원할 때, 그들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에 이바지 하면서 살다가 그 계획 속에 헤엄치며 그 무한한 계획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도바울이 고백한바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느니라.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어지이다.”하는 하나님의 찬송의 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복음이 이 세속적인 사상에 희미하게 물 타서 그래서 전달되는 이 혼탁한 시대일수록 여러분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가슴 벅차오르는 이 감격을 이 십자가에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최대의 자랑거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 속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위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면서 살아가는 삶, 그 안에서 인간은 무한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2 (09. 4. 6 십자가 사경회)
2.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2:10).
히브리서 2장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지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쭉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이 마치 바람에 떠돌고 물결에 흔들리는 그런 헛된 신앙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이 든든히 닻을 내려야할 지점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다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하나님 안에 품었던 그 모든 계획의 절정이고 하나님 안에 품으셨던 계획들이 하나씩 시간 세계 속에서 전개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계획을 직접보고 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만남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구원을 알고 교회를 알고 인간의 타락을 알고 창조를 알고 그래서 하나님 안에 영원한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계획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는데 드러난 그리스도 예수의 이 놀라운 구원사역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서 시작되었죠.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신 동안에는 당신의 피조물인 천사만도 조금 못하게 하신 상태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천사만도 못하게 잠시 이 세상에 계셨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도록 이끄셨는데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은 합당하다. 즉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이치에 꼭 맞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과의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했느냐고 물을 때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천하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우리에게 구원을 줄만한 또 다른 이름을 줄만한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 의견을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의견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꼭 필요하였는가? 라고 할 때 이 생각은 둘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의견은 가설적 필요론이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 라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많은 방법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많은 다른 방법 가운데 하나님이 그것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이런 속죄나 구속이나 이런 복잡한 절차를 밟지 않고도 얼마든지 우리를 완전히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 속에서 이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해서 많은 종교개혁의 여러 신학자들, 심지어는 우리가 존경하는 칼빈 선생까지도 이런 의견에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러나 예수님이 굳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실 필요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고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안하실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하나님이 굳이 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의견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렇게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도 자기의외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혀죽게 하시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는 견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백성들이 이 구원이 실현되어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의해서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함이 합당하도다.”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들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그 일은 하나님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의견, 하나님에게도 조차도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는 것이 꼭 필요했다고 하는 의견이 훨씬 성경적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인간이 지은 죄의 크기 때문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똑같은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그 마주하는 당사자가 누군가에 따라서 그 죄의 크기는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자,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누가 여러분을 때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의 재산에 무슨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여러분과 유감이 있는 이웃이 여러분들이 길거리에 지나가는데 구두를 휙! 집어던지면서 맞추지도 못했습니다. 구두를 휙! 집어던지면서 저 나쁜 놈의 여편네. 하고 욕을 했다고 칩시다. 벌이 얼마큼쯤 될까요? 그것을 가지고 경찰서에 가서 저 사람이 나에게 구두를 던지면서 나쁜 여편네라고 그랬으니까 당장 감옥에 넣으십시오. 그러면 경찰이 웃을 것입니다. 그럼 그게 굳이 처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큰 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부시 대통령이 와서 기자가 신발을 휙! 던졌는데 3년 징역형이 떨어졌습니다. 부시 대통령이니까 3년 살고 말지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이 만약에 중국에 황제였다면 아마 사형일 것입니다. 사형 정도만이 아닐 것이고 아마 그 부모, 형제들까지 다 죽일 것입니다. 중국에서 반역이 일어나면 우리는 삼족을 멸했다고 하는데 거기는 구족을 멸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다 잡혀가서 죽는 것입니다. 씨를 말려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상대적 성격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상대방이 누군가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무한한 크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죄의 크기가 무한하다면 그것에 대해서 공평하게 판단을 내리고 벌을 준다면 그 벌의 크기는 얼마나 되어야겠습니까? 무한해야겠지요? 그럼 무한한 죄에 대해서 무한한 징벌을 받아야 되겠네요. 그래야지만 죄의 용서함이 있겠는데 그러면 무한한 죄에 대해서 무한한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데 만약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형벌하셨다면 그게 무한한 크기가 희생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서는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이 지은 무한한 죄, 그것들을 모두 합친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을 합쳐서 짊어졌을 때 그 죄의 크기는 무한하고 무한한 것이었고 그 무한하고 무한한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그 받으신 형벌의 크기가 희생이 무한하고 무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받으시는 형벌이 아니라면 무엇으로서 그 크기가 무한한 속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일은 하나님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보다 더 큰 사랑을 하나님도 보이실 수 없었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것은 명백히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있는 제자들을 포함한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해서 자신이 죽으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 곳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박혀죽도록 내어주신 그것이 더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단지 하나님이 안 그러실 수도 있었는데 그냥 그 방법을 선택하신 것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또 하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의 외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아픔이었을 텐데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그 일이 가능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굳이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고 그리고 당신과의 완전한 교통 속에 사시는 아들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절규하게 만들면서까지 그 방법을 택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하나님에게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는 이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하나님께 강요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성품 자체에서 오는 긴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무한히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랑 때문에 그 공의를 희생하지 않고 공의 때문에 사랑이 멸시되지 않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그분께 담당시켜 우리의 죄에 대한 진노를 거기에 푸심으로 공의를 만족시키시며 형벌을 이루시고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죄를 담당하신 분은 예수가 되게 하셔서 우리에게는 형벌을 면하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한 관계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여셨으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입 맞추게 되었고 오히려 우리는 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공의가 조금도 희생당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면서 공의가 하나도 희생되지 않고 또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를 느끼면서 조금도 하나님의 사랑이 희생되지 않는 완벽하고 신비로운 조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동시에 경험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하면서 사는 신자의 경건한 삶의 출발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에게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었다고 고백을 해야지 되고 이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높으신 하나님을 더욱더 그의 거룩하심을 따라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 때문에 감격하면서도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남김없이 형벌을 당하셨다는 이유 때문에 두려워하고 또 두려워하면서도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갚지 않고 예수에게 전가시킨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게 됨으로서 떨리는 두려움 속에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 교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뭐라고 그러든지 마음속에 깊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었고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었다고 고백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큰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느끼며 사랑 때문에 교만해지지도 않고 공의 때문에 종의 마음이 되지도 않는 자유 속에서 주님을 향해 거룩함과 성결로 섬기는 신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역을 이루셨는데 이 십자가 사역은 완전한 사역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사역이 완전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원 전에 가슴에 품으셨던 그 모든 인간의 구원에 대한 세계의 완성에 대한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사역의 완전성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인 객관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시간과 공간속에 오셔서 진짜로 죽으신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 사건이 진짜로 이천년 가까운 세월 전에 이스라엘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에 깊이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이 사건이 굳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날 이유는 없었다라고 말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느냐, 일어나지 않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믿으면 우리에 대해서만 예수님은 그렇게 실제로 죽으신 것이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역사 속에 진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믿느냐, 안 믿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역사 속에 실제로 이루어진 사건이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도 역사 속에 진짜로 오신 것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신 사건도 실제로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이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도 실제로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여기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기사를 어떤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신화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화 속에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죽으셨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초대교회에 성도들이 그렇게 믿기를 원하는 마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얼마나 우스운가 하면, 보십시오. 역사 속에서 일어난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신화 속에서 죽으시고 상상 속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역사 속에서 죄를 지은 것이 상상 속에서 죽었는데 죄가 속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둘 다 부인하고 그리스도인이 안 되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둘 다 시인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역사 속에서 진짜로 죽으셨다는 사실, 이것이 십자가 사역의 완전성입니다.
두 번째는 속죄적인 최종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다 이루었도다.”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속죄의 공로로 충분했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톨릭이 생각하는 것처럼 성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또 인간의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거나 혹은 죽은 후에 다시 한 번 연옥에서 우리의 죄를 속하여 또 한 번 구원받을 길이 열린다든지, 죽은 후에 우리의 친척과 가족들이 우리를 위해 열심히 선행을 하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면 우리가 다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든지 하는 모든 이론을 거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것도 죽으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달려오던 구원에 관한 수많은 계시들, 제사제도 속에 감추어져있고 그리고 율법 속에 담겨있고 선지자들의 외침 속에 전개되어왔던 그 모든 그리스도 말미암은 속죄의 가능성에 대해서 완전히 성취하시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도록 그렇게 완전히 이루신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이 고난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충분한 대가를 치르신 최종적인 것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다시 우리의 속제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없을뿐더러 예수 그리스도 홀로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이 우리 억 만 인류의 구원받을 백성들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받게 하기에 충분한 최종적인 그런 십자가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마음에 그림을 그려보시고 그리고 눈을 크게 떠보십시오.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영원한 계획 속에서 세계는 창조되고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범했을 때 우연히 이 일이 일어난 것 같았지만 하나님 마음 안에는 이것들이 이미 작정되어 있었고 인간이 그렇게 타락하면서 죄가 물밀 듯 밀려들어왔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깃들게 하신 창조의 영광은 빛이 바래고 그리고 인간의 눈들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이제는 의미 없이 된 것처럼 보였고 그리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계획은 좌절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은 죄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라면 있을 수 없었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우리의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 아름답게 펼쳐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회복되고 영원한 영광을 하나님 앞에 바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을 이룬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종적으로 십자가에서 충분히 이루심으로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 한사람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망가졌던 이 세상이 다시 창조의 목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됨으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속제적인 최종성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이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이루어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믿으면서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가난하다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들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을 보면서 부요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만약에 죄에 눌린다면 죄를 짊어지고 대신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모든 부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병들고 연약하다면 우리의 허물과 질고를 지고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치유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영적으로 곤고하고 핍절하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기 때문에 하늘을 열고 우리의 영혼에 한없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풍부하신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죄를 짓고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얻고 있다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누구든지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를 보며 우리는 거기에서 용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죽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서 육신으로는 죽으셨으나 다시 영으로는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오며 우리는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면 십자가 앞에 끌고 가서 예수님이 바로 네가 사랑하는 것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설복함으로 거기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정욕으로 죄를 짓게 될 때는 죄를 짓고자 하는 나를 끌고 가 그 십자가 앞에서 네가 짓고자 하는 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셨다고 말함으로 우리는 그 죄의 결박에서 벗어나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루 다 말해도 다 말할 수 없는 부요함이 바로 이 십자가에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지시며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중보자 독특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나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하신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육신으로 오셔서 진리를 잘 가르쳐주시는 것으로 당신의 생애를 끝냈더라면 결코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벳세다의 이적을 베푸시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그 떡과 물고기로 먹이셨다면 그것으로 끝났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잠시 떡과 물고기로 육체의 배는 불릴 수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일들이 자랑스러운 일이었다면 사도 바울은 아마 ‘내게는 벳세다 광야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다였다고 할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은 ‘내게는 나사렛의 무덤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고백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성육신하고 가르쳐주신 진리 그 자체가 그것으로 끝났다면 아마 사도 바울은 ‘내게는 팔복산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말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천하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핵심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모든 길을 예수 이외에는 모두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영혼이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 전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여러분의 구원의 개념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수 있을까? 그것이 여러분들의 구원관이었습니다. 그런 구원관에 있어서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벌고 그리고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 자기 몸을 보호하고 그리고 명예를 얻고 그리고 세상의 높은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육체의 쾌락을 즐기는 것도 구원의 한 방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나를 구원할 수 없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나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모든 믿음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 얻을 길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으로도 무엇으로도 잃을 수 없는 중보적인 독특성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심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이름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이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내재적인 효능성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단지 아무 효과도 없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단지 우리의 모범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들이 있어왔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알버트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실제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이천년 후를 살고 있는 우리의 죄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미신적인 생각이다. 오히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이런 목적이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죽으신 장엄한 희생의 광경을 보여주면 그것을 보고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 함께 예수님처럼 희생할 것이라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평화가 올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실제로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도덕적인 모범을 끼치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좋은 세상을 만들라고 죽으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왔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만을 자랑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우리에게 모본을 끼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안에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죄, 그리고 한사람, 한사람이 그 죄악 때문에 형벌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이 십자가에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제적인 효능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서 놀라운 방식으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자, 우리가 이제 죄악 가운데 살다가 자기의 죄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고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내가 정말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나의 이 죄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게 되는데 믿는 그 순간에 우리의 영혼 안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단지 예수님이 이렇게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이제는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도덕적인 결심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줄에 얽매어 있어서 도무지 죄를 버릴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었던 우리의 마음속에 놀라운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들은 파괴되어 무너지고 생명과 성령의 법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졌던 은혜의 샘은 터져서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쏟아지고 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과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 그리고 용서에 대한 감각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전혀 없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겨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향한 질기디 질긴 자기 사랑은 파괴되는 역사는 경험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는 눈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신령한 것이라고는 아무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이제는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보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게 되고 하늘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에 대한 감격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들은 서서히 훈련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봇물이 터지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확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이루신 내재적인 효능성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심으로 이렇게 누구든지 믿는 사람들 속에 이것들을 한꺼번에 주실 수 있는 이런 효능을 충분히 이루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는 아무 것도 보탠 것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파괴되는 그 일을 위해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솟아나게 하는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보탠 것이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파괴되고 하나님을 향해 뜨거운 사랑이 솟아나는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이바지한 것이 없습니다. 신령한 것들을 볼 수 없었던 어두운 눈이 열려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었던 이 모든 일에 우리는 보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명령하셨을 때 나사로가 자기가 살아나기 위해 아무 것도 예수님의 그 명령에 보탠 것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내제적인 효능 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구약에는 아무도 이런 일들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와의 모든 구원받을 사람들과 불화의 모든 담을 허무시고 이 모든 것들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하늘의 그 유업을 우리에게 물같이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죄를 짓고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 죄가 물밀 듯이 들어왔던 것처럼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속죄 하셨을 때 우리가 그것을 믿고 나자마자 하나님은 이런 은혜와 사랑을 밀물처럼 우리에게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니 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의 완전성을 입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은 단지 모범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잘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살 수 있는 모든 내재적인 효능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원기를 잃어버렸을 때 다른 곳에서 이 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질 때 우리는 다른 곳에서 샘을 파보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갈한 목을 축일 수 있는 그런 샘물을 길어낼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이 은혜의 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이 효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이 충만한 아름다운 구속의 효능성을 굳게 믿으며 누구든지 그리스도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랑이 오직 십자가일 뿐이라는 것을 노래하게 됩니다. 이 십자가는 이천년 전에는 흉악한 죄인들을 죽이는 사형 틀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들을 능하게 하고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부르심이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이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많은 이유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미끄러져 세상으로 흘러가지만 돌아올 때 모두 돌아오는 길은 여러 길이 아니라 한 길입니다. 오직 십자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다시 경험하고 다시 이 현재적인 신앙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드러내는 가장 중심적인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3 (09. 4. 7 십자가 사경회)
3.십자가와 순종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오늘 성경은 어떻게 한사람 아담을 통해서 죄가 들어오고 또 어떻게 그 들어온 죄가 비록 모든 인류의 왕 노릇 하였지만 한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가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표성의 원리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아담을 창조하였을 때 그 사람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두 가지의 명령을 인간에게 내리시는데 하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는 노동의 명령과 또 하나는 종교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종교의 명령이란 하나님이 비록 이 모든 세계를 만드셔서 아담에게 다 주셨지만 그와 하나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하여 주신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 동산 한복판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당신 자신을 경외하고 순종하는지를 알리려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동산에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 마음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너는 먹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만약에 아담이 거기에 잘 순종하면 모든 하나님과의 평화와 그리고 복을 누릴 수 있지만 만약에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는데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뿐 아니라 영혼의 죽음까지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아담에게 내리셨을 때 그것은 아담 개인에게 내리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머리로서 아담에게 내린 명령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한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가 들어왔고” 했습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라면 하나님과의 평화와 영생의 복을 누렸고 맨 처음 인간이 창조된 영혼과 육체의 불사를 향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후손들은 그런 명령을 지키는 수고 없이도 조상의 순종 때문에 그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아담의 대표성은 입증되는 것입니다.
가고 오는 모든 세대 가운데 이런 대표성을 가진 인간은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합니다. 한사람은 아담이었고 두 번째 사람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 아담을 첫 번째 아담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대표성의 원리에 의해서 아담을 통해 죄가 들어온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단지 한사람 예수로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가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선택한 모든 사람을 안으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대표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심으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선택된 모든 사람들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런 의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구원의 의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의는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말할 때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만을 말합니다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그리스도의 순종이라고 하는 이런 그 뒤에 있는 큰 배경, 거기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순종이라는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때에 그분은 성자로서 성부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인간의 구속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가난과 고통, 비참과 핍박의 생애였지만 그 모든 생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드려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고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이 순종의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이 모든 구원의 의미는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자체 때문이 아니라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자기를 완전히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전적인 순종을 통해서 구원의 의는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한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올바르게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되었던 이유는 아담에게서 설명이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놀랍게도 한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인된 것같이 한사람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하지 않고 처음 아담도 두 번째 아담도 모두 순종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불순종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사건, 하나만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이미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였던 내면의 불순종, 그리고 아담이 이렇게 죄에 미혹된 이후로 일관되게 범죄를 수행할 때까지 나타났던 모든 안팎의 불순종의 의도 그리고 실제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의 사건, 이후에 이렇게 불순종하고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며 살아야 되는 이 모든 불순종까지를 다 포함해서 오늘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사람이 태어날 때 바로 이렇게 조상인 아담의 죄를 물려받고 태어남으로서 이제 모든 인간은 한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태어나고 그리고 죄 아래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맨 처음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는 이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그들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는 죄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는데 이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는 자기의 힘과 결심으로 된 것이 아니라 중생의 은혜로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중생의 은혜의 죄를 이기는 성격은 가변적입니다. 자신이 거듭나고 구원을 얻었어도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를 주장하여 죄를 이기며 살 수 있게 해주지만 불순종하면 반대의 경우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네 번째 상태는 영화 이후의 상태인데 이때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바치는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구원의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은 지상생애 동안에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의 특징입니다. 이 지상 생애에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 때문에 우리는 한사람의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데서 용서를 받아 구속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상생애 동안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특징은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우선 제일먼저 순종의 전일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외면적인 행위의 순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이 내면의 세계 속의 전심으로의 순종이 동반된 안팎의 순종이 모두 하나를 이루고 있는 온전한 전일성의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 고난이나 핍박, 시련이나 위기,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 평온함과 모든 주어진 환경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안팎으로 온전하게 되도록 만드는 일에 이바지 하였으니 이는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팎에 있는 이 온전한 순종이 어떤 여건이든지 그것을 이용하여 당신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하고 순전한 복종을 드러내도록 하는데 이바지하게끔 만드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커다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를 우리의 환경과 그리고 많은 형편 속에서 우리는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분에게 주어진 많은 결핍과 고난, 위기와 시련, 이런 환경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온전한 순종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없는 어떤 것들은 우리의 환경을 통해 이끌어내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선한 것이든지 악한 것이든지 있는 것이 우리의 환경을 통하여 밖으로 이끌려져 나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과 여건을 이유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지만 사실은 이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환경과 여건이 우리에게 넣어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족한 순종의 의도,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불순종의 의도를 거기에 어울리는 환경과 형편이 밖으로 이끌어내어서 결국은 우리의 밖에 행동으로 불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의 의를 모두 이루시기까지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완전한 순종의 전일성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생애였습니다. 안팎에 모두 완전한 순종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구원의 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상생애 동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의 두 번째 특징은 순종의 점진성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도 순종에 대해서 배우셨다고 가르쳤습니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고 히브리서 5장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계신 동안에 배운 순종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예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신성을 인성 아래 자원하여 감추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서는 모르시는 일이 없으셨지만 그 하나님 되심을 사람 되심 아래 겸손하게 감추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스스로 모르는 것이 있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라고 성경은 아름답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 없지만 스스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 아래 감추셔서 스스로 모르는 일이 있기로 작정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으로서 직접 획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사람처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가심으로서 모르는 순종의 비밀들을 터득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배움, 즉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는 이 순종의 점진성을 마치 구원받은 신자가 아직 그 마음 안에 죄 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많이 은혜를 받으면서 불순종의 상태가 순종의 상태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어떤 불순종도 없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과 복종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셨다고 하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불순종 때문에 불안전한 상태에서 이렇게 고난과 순종을 통해 온전한 상태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다가오는 모든 시련과 고난, 특별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가까웠을 때 다가왔던 그 격렬한 시험과 고통 속에서도 이런 것을 맞이하면 맞이할수록 더욱더 불같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야지 되겠다고 하는 소명감에 불타셨다는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물을 뿌릴수록 불길이 더욱더 치열하게 타오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다가왔던 모든 결핍과 고난, 핍박과 시련은 예수님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려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이 결심을 꺾거나 끄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이런 시련과 고난, 위기와 역경이 닥칠수록 예수님의 마음은 더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를 바침으로 주님이 사랑하는 선택된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치열하게 타오르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의 점진성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공정하게 살핀 사람마다 예수님이 원래 하나님께 순종하셨지만 고난이 다가올수록 더더욱 순종하셨고 본래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가까워올수록 더욱더 우리를 향한 사랑은 주님의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불붙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자기의 때가 가까워 옴을 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의 점진성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데서 순종에서 순종으로 나아가 구원의 의를 이루셨지만 우리는 죄 있는데서 끊임없는 성화를 통해 죄 없는 데로 나아감으로 우리의 순종은 보다 온전해지고 불순종의 남아있는 요소들이 제거되어 순결한 순종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도인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의 점진성을 보면서 배워야 할 대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우리는 즉시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진리의 빛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어두움과 그리고 불순종의 완고함을 성령의 은혜로 제어하는 가운데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우리들이 은혜를 받음으로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 앞에 순종하고자 할 때 부딪히는 어려움, 안에 있는 불순종의 죄악들과 밖에 있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도 매일매일 부어지는 은혜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순종하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수님과 달리 매순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매순간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안 하나님의 진리는 존재하고 있는 진리 가운데 지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어느 한순간에 이 진리를 많이 터득하고도 뒤로 물러가는 것은 진리를 너무 많이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진리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숙고하고 적용하지 아니한 게으름 때문이고 또 이렇게 자기가 많은 진리를 알았어도 숙고하고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러난다는 사실도 새롭게 비추는 진리의 찬란한 빛을 통하여 자신의 허물들을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빛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 더 많은 진리의 빛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야지만 우리의 순종도 점진성을 가지고 더욱더 주 앞에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뒤잇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순종의 극치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안팎으로 온전한 순종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일생을 사는 동안 고난을 통해 순종을 더 많이 배워 온전한 순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모두 갈보리 언덕으로 올라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순종의 극치를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머지 모든 순종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 제사 드리는 헌제자를 위해 하나님은 많은 규례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규례를 따라서 헌제자가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 앞에 바칠 제물을 가져오고 제사장은 그 짐승을 잡고 그리고 껍질을 벗기고 그리고 내장을 발라내고 피와 살을 모두 분리하여 완벽하게 성경의 규례를 따라 제사를 준비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만약에 그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는다면 그 충실했던 제사의 규례에 대한 복종을 어디다 쓸데가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마음과 성품을 다해 복종하고 그리고 고난을 통해 점점 더 순종의 열기를 더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의를 이루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려 하나님의 쏟아지는 진노를 담당함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순종의 극치성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전일성의 순종으로 점진적인 순종을 통해 마지막에 극치 점에 다다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이 순종인 것입니다. 이 순종의 극치의 핵심은 바로 죄인들을 향해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를 기꺼이 당하시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시면서 조금도 처음에 하나님을 향해 자기를 바치고자 하던 헌제자의 마음, 동시에 제사장의 마음, 동시에 자기를 제물로 바친 마음이 조금도 이탈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지상생애의 모든 순종의 극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자기를 다 바치는 이런 특징을 가진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셨던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에서 우리는 두 가지 순종과 목적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예수님의 순종은 두 가지 순종으로 나누어집니다. 이 두 가지 순종을 전통적으로 수동적 의미의 순종과, 그리고 능동적 의미의 순종으로 구별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태어나시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지키시고 율법을 따라서 형벌을 받으시는 이 전 과정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그 율법아래 복종하신 것을 수동적인 순종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의 몸을 스스로 제물삼아서 하나님 앞에 바친 이 모든 고난에서의 형벌은 능동적 순종이라고 불러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생애 고난 가운데, 순종 가운데 어느 것도 마지못해 당하여야 하는 수동적인 순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상생애에 예수님의 순종은 강요되었기 때문에 하는 순종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린 순종이었기 때문에 이 순종도 역시 모두 능동적인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서 이 생명을 빼앗는 이가 있지 아니하고 나 스스로 기쁘게 이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지못해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당신 자신을 드리는 그 순종이 예수님의 순종이었다는 점에서 이 두 가지의 순종은 오히려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분류해오던 이 수동적인 순종은 수동적인 순종이라기보다는 자격적인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지만 율법을 온전하게 지킴으로 아무 것도 어기지 아니하심으로 마지막 골고다 언덕에서 자기의 몸을 깨트려 바치는 그 순종이 흠 없는 제물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자격적인 순종에 자기를 바치신 것입니다. 율법을 소유하신 분이시면서 율법 아래 태어나셨고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분이시면서 예수님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바쳐지는 당신의 몸이 순전해지기 위하여 그 율법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셨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는데도 예수님은 죄인들과 하나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죽음과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가시는 온전한 삶 전체가 죄인들의 대표자로 행하시는 것임을 보여주시고 메시야로 공적인 취임을 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순종은 결국 마지막에 형벌적 순종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형벌적 순종이야말로 예수님의 순종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 형벌적인 순종은 기꺼이 자기 자신을 우리 모든 사람이 받을 죄에 대한 형벌의 진노를 위하여 자기를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짊어지신 십자가가 아니라 기쁘게 우리를 위하여 당신은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도 우리는 그 진노 때문에 하나님과 화해를 누릴 것을 바라보시며 능동적으로 드리신 순종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고통을 받아도 우리는 유익을 누릴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꺼이 당신 자신을 그 끔찍한 십자가의 형벌에 바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시련과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죽어도 우리는 사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주 기쁘게 당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신 것인데 이것을 예수님이 당하신 형벌적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순종의 목적이 있었으니 이 순종의 목적은 대신적 형벌을 위한 것입니다. 대신적 형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당하여 할 형벌을 우리 모두 끌어안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실제적으로 고난은 예수님이 당하셨지만 형벌의 효과는 우리 모두에게 미치게 하신 그것이 바로 대신적 형벌입니다. 대신적 형벌은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끌어안으셨기 때문에 이 죄인들의 대표자로 죄 있는 자가 되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형벌을 가리키는데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내포적인 대신의 형벌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모두 끌어안고 그 죄인들을 친히 끌어안아 죄인들의 그 죄를 당신의 죄로 짊어지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형벌을 하심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끔찍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는 그 형벌을 받을 때 우리도 그 형벌을 예수님 안에 품어져서 함께 형벌을 당한 자들이 되게끔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그때에 우리의 죄를 위한 모든 형벌을 함께 당함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할 때 아담 안에서 우리 모두 함께 범죄하며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한사람 그리스도 예수께서 순종하실 그때 우리는 그 안에 모두 포함된 내포적인 대신의 존재로서 예수님이 형벌을 당하심으로 그때에 그 형벌을 우리의 형벌삼아 우리도 그 형벌로 함께 죽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이 대신적 형벌을 위해 내포적으로 우리를 끌어안고 죽으시는 이 형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의 목적은 내포적인 대신의 형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죽었던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실 그때 우리 모두 함께 구원받을 우리 모두를 함께 끌어안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저주를 받고 죽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셨지만 그렇게 저주를 받은 효과는 당신이 끌어안고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나타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의 어두움 속에 살면서 이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내가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기 이전에도 예수님은 나를 끌어안고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나는 그분의 형벌을 그분 안에서 나의 죄의 형벌을 감당한 것이었지만 아직 그렇게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 효과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 되었을 때 내가 지은 모든 죄를 알게 되었을 때 이천 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쏟아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담당하고 죽으신 그 십자가가,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멸시와 욕을 모두 당하신 이 끔찍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형벌 받으신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한 그때에 그 회심의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의 효과가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랑이 오직 십자가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 의로운 것이 없고 죄는 지었지만 스스로 죄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음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적 형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그분은 피나게 순종하셨고 우리의 죄 때문에 그분은 당신 자신의 목숨을 드려 의를 이루셨습니다. 결국은 오늘날 우리가 우리된 것은 우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받게 된 모든 가치 있는 것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유익한 것들은 우리 자신 때문에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의 중보, 형벌의 중보를 통해 우리에게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서 주님 앞에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악한 것들은 우리 때문에 온 것이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대신적인 은혜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의 인생 전체는 순종의 생애여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마음에 깊이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형벌 받을 죄인들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일생동안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마지막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으니 우리의 우리 된 모든 것이 우리 때문에 된 것이 아니요,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된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가 일생을 사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드려야 할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우리가 주님의 이 사랑을 배반하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의 옥체를 깨트리시기까지 온전한 순종으로 일생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어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 고난을 배반하지 않도록 은혜를 달라고 매일매일 빌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4 (09. 4. 8 십자가 사경회)
4.십자가와 희생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속하게 되었는지를 오늘부터 사경회 끝나는 날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 속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도 바울은 1장서부터 4장까지 기독교의위대한 교리에 대해서 전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 이제 그 모든 기독교의 영광스러운 교리를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의 삶과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고 말한 이 내용이 바로 기독교의 교리가 이러하므로 이런 뜻입니다. 먼저 사도는 이 편지를 받는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정체성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합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녀, 그렇게 하나님이 불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받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절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본받는 구체적인 길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본받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받는 비결은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래 뵐 수 없는 분이지만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그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을 훌륭하게 보여주셨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에 주목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 하나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속성 가운데 하나, 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속성들을 모두 연결해주는 공통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중요한 교리, 속제에 있어서 한 요소인 희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치르신 희생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이것이 희생의 핵심입니다. 이익은 다른 사람을 위해 그리고 그 이익을 불러오는 희생은 당신이 직접 지셨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바로 이 뒤에 나오는 구절,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드리셨느니라,” 하는 이 대목을 제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을 가르치는 것이고 생축은 그보다 넓은 의미에서 당신 자신의 모든 생애를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바치신 예수님의 지상생애 전체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죄 용서를 받게 되는 이것을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가 영원한 속제와 만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속제란 무엇일까요? 이 속제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함에 있어서 다른 이의 희생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속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속제를 통해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을 속량이라고 말하고 이런 죄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누군가가 대신 치루어 주어야 하는 것을 가리켜서 속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속제, 속량, 속전, 이런 개념들은 이미 구약부터 있어왔지만 신약에서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는 당시 사고팔 수 있는 물건과 같았습니다. 이런 노예제도에서 그 노예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숙명적인 사실입니다. 그런 숙명적인 노예의 상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노예의 신분에서부터 풀려나야 되는데 이 일을 위해서는 노예의 주인이 되는 사람에게 그 노예의 몸값을 지불해야지만 풀려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노예를 파는데 인자하고 돈이 많은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그렇게 노예의 상태에서 팔리는 그 비참한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다행히 노예의 가족이 아내와 남편, 아이들까지 한집에 팔리게 되면 그들의 슬픔은 덜하겠지만 이제 사가는 사람이 없어서 가족들이 각각 찢어지게 될 경우에 그들의 슬픔과 비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 비참한 과정을 본 돈 많은 사람이 순수하게 이 노예를 어디에 부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들이 노예상태에서 서로 가족이 찢어지는 비참함 때문에 자극을 받은 자비한 마음으로 자기의 돈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그들에게 해방증서를 써주어서 노예를 해방시켜줍니다. 그렇게 되면 유익은 노예들이 얻게 되었고 이것은 예기치 못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노예의 주인은 그것을 인해서이 사람들에게 아무 관련이 없이 그 노예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그 돈을 허비하여야 했는데 이렇게 지불한 돈을 가리켜서 속전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지불한 돈을 치루기 위해서 입어야 하는 손해를 우리들이 희생이라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속량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노예의 상태에 있던 사람들에 입장에서 예전에는 노예였지만 풀려나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속량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과 죄인,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을 속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란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께 무한한 손해를 입히고 죄를 지은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 죄 값을 아들로 대신 치르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이것을 가리켜서 속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는 구약의 제사와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한 직후에 그때부터 하나님은 인간에게 속죄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속죄의 길은 두 가지로 제세가 되었는데 하나는 일시적인 속죄와 영원한 속죄, 두 가지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일시적인 속죄는 하나님이 즉시 타락하자마자 즉시 길을 열어주시고 영원한 속죄는 앞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약속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제사제도와 메시야가 오실 것에 대한 예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기 전까지는 제사에 대한 상세한 규례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제사 제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온 이후에 광야에서부터 주어진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부터 있었던 제도입니다. 성경의 이 제도들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이미 제사를 지냈던 기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청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을 때 모세가 바로에게 요구하였던 바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고 싶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니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계시를 통해서 이것들이 주어졌는지는 우리들이 규명할 수 없지만 이런 제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미 족장 중의 한사람인 아브라함이나 야곱 같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낸 흔적이라든지 특별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주실 때 제물을 바치도록 요구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볼 때 제사의 제도는 일반화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청교도 학자들은 이 제사제도는 오랜 후가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에노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는 그 기록 자체를 제사를 드린 기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힌 이 사건도 희생제사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일시적인 속죄의 방편을 열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일시적으로라도 인간의 죄를 속해주지 않으면 죄 있는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었고 이렇게 되면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은 완전히 하늘자원이 끊어진 상태 속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약속을 주셔도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붙들고 살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인 방편으로나마 그들에게 속죄의 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 제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자신이 지었지만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서 짐승의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으로나마 그가 지은 모든 죄를 짐승에게 담당시켜 그를 비참한 죽음으로 벌하시고 그리고 거기에서 쏟은 그 모든 피와 그리고 죽임 당한 생명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일시적이나마 용서해주십니다. 잠시나마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그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통해서 하늘의 은혜가 그에게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지성은 일시적으로나마 명료해지게 되고 제사를 드린 과정에서 그의 정서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미움과 자신이 이런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마음은 뜨거워지게 됩니다. 의지는 이전에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려고 하는 선한 의지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몇 가지 요소를 갖게 하셨는데 첫째는 순종의 요소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뿐만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과정, 마지막에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순종을 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 모든 제사의 과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후에 이루어질 구원의 대의를 분명하게 가르치시기 위한 실현식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설명해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그림같이 생생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 제사장이 드리는 이 중재의 기도를 통하여서 확신하게하고 그 짐승이 자기 앞에서 비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자기가 지은 죄의 무서움과 하나님의 공의에 엄중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죄는 자신이 지었지만 대신 이 짐승이 형벌을 받고 자신에게는 화해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끝없이 넓은 사랑을 깨닫게 만들었고 자신이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수 없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것들이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이 제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속함 받는 일시적인 방편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시적인 속죄의 방편은 보다 더 근원적인 속죄,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완전히 영원히 단번에 다시 화목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영원한 방편을 택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를 통한 그런 속죄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구약에서 계시된 이렇게 짐승이 대신 죽어 유익은 헌제자가 누리게 하는 바로 이런 희생의 모델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를 도입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제사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영원히 단번에 그리고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후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는사람들, 이들을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공로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화목을 누리고 가족관계로 살아가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이 영원하고 단번에 이루어진 이 속죄는 바로 이런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속죄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만족을 드린 속죄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이전에 제사를 통해 짐승을 죽이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영원한 종류의 만족이 아니라 일시적인 만족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 죽음은 하나님께 영원하고 완전한 만족을 드린 그런 속죄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을 인간의죄의 크기는 무한히 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드리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가치도 무한하였기 때문에 무한한 인간의죄가 무한한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의 크기에 의해서 창조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 희생은 대리적인 속죄였던 것입니다. 즉 죄는 인간이 지었지만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께 커다란 손해를 끼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인간이 그 손해를 배상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것입니다. 죄의 크기는 무한했고 인간이 무엇을 하나님께 희생으로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유한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한한 자신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파멸에 떨어지는 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치로 말미암아 인간의 속죄는 어차피 대리적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짐승의 피는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그들을 속죄하시고 은혜의 방편으로 그들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으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완전한 대리적인 속죄였습니다. 이 대리적인 속죄를 통해서 희생은 그분이 담당하시고 유익은 우리가 얻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셋째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를 지기 전에 성취되었던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순종, 자격적인순종과 형벌적인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속죄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리스도의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순종은 당신 자신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이 순종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중보자로서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자격을 유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단번에 속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속죄의 효과를 입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속죄에는 네 가지 요소가 포함이 됩니다. 이 속죄에 포함된 네 가지 요소는 희생, 유화, 화목, 구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희생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손해를 보고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신 것이고 유화는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풀어주셨던 것이고 화목은 그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다시 화해를 이루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가리키고 구속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제 이전에 인간이 받고 있던 모든 속박 속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헌제자, 제사장, 제물의 일치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세 요소는 완전히 분리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고 싶어 하는 죄인이 있고 이 죄인은 헌제자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고 이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는 반드시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제물을 가진 이 헌제자는 비록 희생제물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제사장의 중재 없이는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에서는 헌제자와 제사장, 제물이 각각 나누어져서 역할을 분담함으로 완전한 제사를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헌제자, 제사장, 제물이 있었지만 이것은 외형적인 제도일 뿐이고 이 헌제자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그리고 희생의 제물을 드림으로서 이 속죄의 효과를 이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일시적인 속죄가 아닌 영원한 속죄로서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린 이 십자가의 사건은 헌제자가와 제사장과 제물이 일치된 사건이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의 제사장이라고 여겨지지 아니하고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어집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개인의 죄를 위해서 중보하며 속죄할 수 있었지만 그중에 뽑힌 제사장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한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자격이 있는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사장이고 불리어지기보다는 대제사장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이 우리의 속죄와 관련하여서는 적합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죄가 한사람, 한사람의 죄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은 누구 한사람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백성들의 죄를 공동체적으로 도말하기 위하여 지신 십자가였기 때문에 속죄와 관련하여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이 헌제자가 되어서 그래서 당신 자신이 제물을 가지고 당신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 헌제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유익을 당신 자신이 받기 위한 그러한 제물이 헌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속죄를 받으셔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대제사장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구속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죄 있는 자신을 씻어야지만 이 속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으셨기 때문에 두 번의 희생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자기를 위한 희생은 필요 없고 그리고 자기가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끌어안고 당신이 대신 드리시는 제사였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제사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이 헌제와 그리고 대제사장의 이런 육적인 헌제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직접 당신 자신이 헌제자가 되시고 또 제사장이 되시고 그리고 동시에 제물이 되셔서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독특한 속죄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헌제자가 될 수 있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도 자격이 없었고 이렇게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자격도 그리고 당신 자신을 직접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분도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기독교 신학의 세계에서는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교리 자체가 아주 미개한 피의 신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수천 년 전에 있었던 근동지방의 그런 이방의 제사적인 개념이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모든 이방의 제사의 개념들이 성경적으로 계시된 이 속죄의 비밀들이 곡해되고 인간의 세계관에 의해서 왜곡된 결과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속죄하심에 있어서 일시적인 방편으로 짐승의 피, 영원한 방편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피를 통해서 인간을 구속하시고 속죄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게 되었는데 이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영원하고 완전한 구속의 비밀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와 죄인들을 향한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심으로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와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그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명민하게 깨닫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희생 제물로 죽으시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죽으셨다고 하는 의미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이 희생 제물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한한 그리고 한시적인 방편으로 속죄의 제사를 허락하셨을 때 그 제물의 자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정해주셨습니다. 아무 것이나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율법에 따라 지시된 짐승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했습니다. 제사에는 짐승을 죽이는 제사와 액체를 뿌리는 제사, 그리고 곡식을 태워 바치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 뿌리는 제사와 곡식을 태워 드리는 제사는 단독적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아니라 짐승을 죽여서 바치는 희생의 제사가 있고 난 후에 첨가적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 흘림이 없이는 제사가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치게 될 때 하나님은 완전한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를 드릴 때 짐승들 중에도 흠 없고 완전한 짐승을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희생 제물로 죽으셨다고 하는 의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피 흘려 죽으실 수 있는 유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그분은 죄 없이 완전하고 순결하신 인간이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약에 그렇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위한 영원한 속죄의 희생제물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은 바로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나무에 매달려죽은 것이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이 사건을 이제 구속의 사건의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의 제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관점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 사건은 오히려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는 순결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고 죄 없는 인간이 아니시면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희생의 제물이 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죽으실 수 없고 하나님이 아니라면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요, 완전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하나님이 모든 율법 아래 태어나 그 율법을 모두 지키는 완전한 복종 안에서 순결한 인간의 성품에 추호의 불순종과 죄의 때도 없이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영원한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의 그 더러운 무한한 죄의 크기와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순결을 동시에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십자가는 이제 그리스도의 예수의 완전한 순결과 우리의 그 무한한 불결과 죄악을 동시에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신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순결과 우리의 무한한 불결과 죄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시고 그 공로로 구원을 받은 우리의 삶에 의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십자가를 통해서 받으신 이 누명을 벗겨드리는 것이 우리의 일생의 사명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전하여 그분의 누명을 벗겨드리고 그분이 순결하고 거룩하신 분이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분의 십자가의 그 고난과 희생의 형벌의 크기는 우리의 죄의 크기를 말해준다고 하는 이 역설적인 변증은 바로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 일평생동안 우리의 입술에 혀가 굳어지고, 우리의 입에 혀가 굳어지고, 우리의 혈과의 피가 식을 때까지 전하여야 할 사실이고 이 사실을 통해서 구원을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우리의 죄의 크기가 생각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믿음을 가져 그리스도 앞에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희생 제물로 죽으신 또 하나의 의미는 죄의 전가와 유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희생 제물로 죽으셨다고 하는 것은 바로 누군가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일시적인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리던 구약의 백성들은 제일 먼저 제사를 드리기 전 자기의 짐승을 가지고 제사장 앞에 가게 되고 손을 얹어 기도함으로서 자신의 죄를 제사장의 기도에 의해서 짐승에게 전가시키는 과정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그때까지도 죄인들은 단지 자신이 지은 죄가 짐승들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좀 자극을 받을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윽고 이 짐승에 죄가 전가된 이 짐승 위에 떨어지는 형벌의 죽음을 통해서 이 어린양이 죽음을 당하고 시뻘건 피가 삼지 사방으로 흩어져 이 모든 하얗고 순결한 양의 털을 붉게 물들이고 이것들이 벗겨지고 그리고 각이 떠지고 그리고 내장이 발라지고 온갖 더러운 이물들이 오물들이 거기서 쏟아져 나오고 그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순결한 제사장의 옷을 입고 제사를 드리는 이 제사장의 헌제의 헌신 속에서 정상적으로 제사를 드리던 이 죄인들은 순결한 제사장의 모습과 그리고 더러운 자기의 죄의 모습, 그리고 죄 없는 양이 죽어가는 그 비참한 죽음의 광경, 그리고 타올라가는 제사의 불길과 그리고 짐승이 타는 모든 냄새, 그 속에서 자신의 죄의 심각성과 죄를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럼에도 용서를 받는 이외에는 자신의 인생의 소망이 없는 이 모든 복합적인 그림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 희생의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이런 제사를 통해서 그가 얻는 유익은 죄가 짐승에게 전가되고 용서의 유익은 자신이 받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십자가 희생 제물로 돌아가심으로서 우리의 죄는 그에게 전가되었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는 그 처절한 형벌을 통해서 우리가 누릴 수 없는 속죄의 유익을 희생제물의 제사를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죄인이 제사를 드릴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한 아무 공로가 없듯이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희생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아무런 공로가 없었습니다. 이 제사를 드릴 때 헌제자는 제물이라도 자신의 것을 가지고 왔지만 우리는 제물도 그리스도 예수 자신을 드림으로서 우리가 거기에 보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바친 것이 없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다만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으니 곧 죄를 전가시키고 그리고 그 죄의 전가된 희생은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고 그 죄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유익은 우리가 누리게끔 만들어주심으로서 영원히 죽을 우리의 인생을 다시 한 번 살려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희생 제물로 죽으신 마지막 유익은 죄의 도말과 자유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그 모든 죄책들을 도말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통해 주어질 때는 이것이 일시적인 도말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희생의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단번에 도말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고 영원히 이미 우리가 지은 죄, 짓고 있는 죄, 우리가 미래에 지을 죄까지도 용서해주심으로 우리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연약함으로 말미암는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구원에 관계된 이 화목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지 깨질 수 없도록 우리를 영원히 죄에서 도말하여 건져주셨던 것입니다. 죄가 도말된 이 사건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말되어야 할 사건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심으로 사랑하시는 우리는 건지시고 미워하시는 죄는 씻어버리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 자유는 우리에게 두 가지로 주어졌는데 하나는 신분의 자유였는데 즉 우리가 예전에는 죄의 종이었고 노예였던 상태,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식이었던 상태였습니다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시고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죄의 진노의 자식, 그리고 죄인의 상태, 죄의 종이 된 상태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으로 옮겨주셔서 신분의 자유를 누리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상태로부터의 자유인데 예전에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사슬에 매어 내적으로 억압을 받고 있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해도 살수 없는 마음과 영혼의 속박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고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그 모든 억압과 속박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분은 이미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화목, 이 자유를 우리가 원리적으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것을 누리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으로 알고 그 십자가의 대의와 도를 배우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자유를 끊임없이 누리고 이것을 위하여 믿음으로 끊임없이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론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룰 수 없는 이 영원한 희생의 제물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바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고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유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고 아무 희망이 없는 인간이 다시 죄의 용서를 받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은 그분이 나쁘게 당하신 고난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가 누리는 모든 아름다운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짊어지신 비참한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고귀하고 주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이 화목이 아름다울수록 우리는 이 일을 위하여 치르신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의 대가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느 한순간도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는 이 모든 값없이 주신구원의 은혜와 사랑과 화목과 모든 아름다운 좋은 것이 소중하게 여길수록 이것을 위해 지불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주님 앞에 나의 나 된 것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자랑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뿐인 줄 알고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이 십자가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희생을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께 보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5 (09. 4. 9 십자가 사경회)
5.십자가와 유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롬 3:25).
속죄는 하나님이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죄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당하여야 할 모든 형벌로부터 건져주고 구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속죄에 한 요소가 바로 어제 공부한 희생이라는 요소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유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보면 화목제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말 성경에 화목제물이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희랍어로 ‘히라스테리온’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히라스코마’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유례가 되었습니다. 이 단어를 오늘 화목제물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사실은 비슷한 뜻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이 히라스테리온이라고 하는 이 단어에는 크게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하나는 꼭 하나님께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의 죄를 없애주는 도구, 이런 뜻이 있고 또 죄를 없애주는 자리, 죄를 없애주는 것,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화목제물, 혹은 화목제라기보다는 죄를 깨끗이 씻어주는 결과로 화목을 가져오게 되는데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 혹은 그런 일을 하는 것, 그런 일을 하는 장소, 이런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의미는 원래 누군가의 범법 행위 때문에 많이 분노하게 된 사람을 달래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것들이 정확하게 번역이 되지 않았는데 어떻든 그런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고 그래서 이 히라스테리온이라고 하는 명사가 있게 하는 히라스코마에라고 하는 동사 자체가 사람을 달래는 것, 진정시켜주는 것, 이런 의미를 가진 동사로 사용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말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찾을 때 ‘유화’라고 하는 단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안 쓰는 단어입니다만 이 ‘유화’라는 말의 의미는 누군가의 범법행위로 인해서 어떤 사람이 손해를 입고 많이 진노하게 되었을 때 그 분을 풀어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화목제물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분노를 풀어 부드럽게 해드는 것, 이런 정도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저 뭉뚱그려서 이렇게 화목제물이라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로 인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부드럽게 달래드린 그런 유화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제 배운 십자가의 희생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책을 지닌 것으로 전제를 한다면 오늘 이 유화라고 하는 계명은 인간이 죄 때문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희생제물의 효과가 두 가지인데 이 희생제물은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주는 유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현저히 손해를 끼쳐드린 인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은 일차적으로 당신의 거룩함에 도전한 인간들에 대한 진노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먼저 진노한 인간들에 대해서 마음의 노를 푸시는 일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대신적인 형벌은 일차적으로 바로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리는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희생제물의 또 다른 두 번째 효과는 ‘속상’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지은 죄를 대가를 대신 치러줌으로서 더 이상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수 없게끔 죄를 하나님 편에서 도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침으로서 하나님은 믿는 우리의 죄를 깨끗이 도말해주시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리는 일을 이 십자가의 형벌이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의 그 끔찍한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고 그리스도 예수를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리신 사실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풀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사랑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속에 깃들어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유화 없이 속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의 진노가 풀리는 일이 없이는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보시면 이 교리가 아주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누가 여러분들에게 큰 죄를 지어서 아주 엄청난 일생에 잊어질 수 없는 큰 손해를 입혀서 여러분들을 고통에 빠트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마음 진심으로 용서해주는 일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손해를 끼쳐서 큰 분노를 자아내게 했던 사건과 중심으로 그를 용서해서 다시 사랑하게 된 그 사건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그렇게 불붙는 진노가 한 번에 그를 향해 불붙는 사랑으로 바뀔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히 그 사이에는 마음에 그 사람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분노가 사랑으로 바뀌기 전에 그 사이에 여러분들이 그를 향해 가지고 있었던 진노하는 마음이 풀어지는 일이 있고 그 후에 그를 용서하고 용서한 후에 사랑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유화 없이는 속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구원받을 우리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진노가 풀어지는 일들이 있고 나서야 믿는 자들의 죄를 씻어주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우리 인간들의 죄를 향한 진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렇게 풀어드리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민한 기독교의 교리를 두고 이런 십자가가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행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마음을 풀어드린 유화의 교리를 포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노의 교리를 수정합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가끔 이런 설교, 혹은 가르침의 내용들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소개함에 있어서 옛날처럼 우리의 죄,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 이런 부정적인 개념을 이제는 더 이상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현대인의 생각에 너무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많이 말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축복, 이런 것들을 이런 부정적이지 않은 적극적인 개념들을 더 많이 사람들에게 말할 때 우리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잘 전해질 것입니다. 라는 이런 종류의 가르침들을 접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가르침들이 기독교의 어떤 한 면을 부각시키자고 하는 한 방법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뒤에 거대한 교리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우리에게 명백히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교리를 포기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노하시고 그리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실 수 없고 그것은 모두 미숙한 종교적인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그려낸 허구일 뿐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을 우리들이 전해야지만 기독교가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렇게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교리를 부정하게 되면 그러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이 당하게 되는 큰 곤란과 고통, 그리고 우리가 심판이라고 부르는 우리가 혹은 징계라고 부르는 그런 고통스러운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진노의 교리를 거부해도 여전히 하나님께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끊임없는 고통과 재앙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없는 우주론적인 기계적 법칙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간의 육체가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고 살면 질병과 많은 고통이 생겨나게 되겠죠.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분명히 자연법칙으로 볼 때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그 나쁜 담배를 수없이 피어대고 그런데 살면 안 되는데 막 발암물질이 쏟아져 나오는 공장 옆에 살면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 사람의 육체에 질병이 생기는 것처럼 또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도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칙을 따라 살지 않으면 도덕적 우주의 필연성 때문에 인간이 끊임없는 고통과 그리고 괴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도덕적인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이 어떤 행동이나 마음의 움직임, 그리고 정신의 태도, 이런 것들을 전혀 관할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이 자연의 우주 속에 만들어놓으신 법칙처럼 도덕의 우주 속에 또한 법칙을 또한 만드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지 않으면 그 인간의 정신이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마음이 괴로움을 당하도록 그렇게 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불이 있으면 그 불 가까이 가면 데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법칙이 우리 안에 존재하고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직접 하시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법칙이 가진 필연성 때문에 인간이 악을 행할 때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이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직접 통치하시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아시고, 보시고, 우리의 행하는 것을 지켜보시면서 영광을 받기도 하시고, 모욕을 받기도 하시고, 이에 대해서 하나님이 상을 주시기도 하고, 벌을 내리시기도 하시는 이런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은 하늘로 철수하시고 이 세상은 법칙만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이 법칙에 의해서 인간은 괴롭힘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뉴질랜드나 호주 같은데 가면 양을 많이 키웁니다. 그 양을 키우니까 양을 일정한 구역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쌓아놓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이 울타리도 삭고 또 양떼들이 가서 들이박고 이러면서 결국 부서지고 그리고 양떼들이 어떻든 그 우리 밖으로 나가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요즘 새로운 울타리가 유행하는데 그렇게 높지도 않고 낮은데 양떼들이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밑으로든지 가운데로든지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울타리입니다. 그런데 절대 빠져나오지 못하는데 그것은 전기가 통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건드리면 전기가 통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양이라도 몇 번을 경험하고 나면 아예 그 울타리 근처에도 안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고 불순종할 때 당하는 고통을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이 생생한, 지금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고 법칙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수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몇 가지 난제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구원받을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형벌을 당하심으로 그렇게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남기신 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울부짖으셨는데 그렇게 부르짖으시는 그 부르짖음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고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 당신을 향해서 부으시는 진노에 대한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반응이라고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을 때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영원과 육체를 버리시는 것 같은 그런 단절과 큰 진노를 느꼈는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망상에 사로잡히신 것이라고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까?
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래서 이 유화의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 지옥의 교리를 설명할 수 없게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유화의 교리를 포기함으로 지옥에 관한 교리도 포기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 지옥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마지막 영광, 그리고 정당성을 입증하는 훌륭한 구원역사에 있어서 최종적인 답변입니다. 만약에 이 지옥이 없다면 천국의 영광도 우리는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했던 하나님의 용서가 없는 원수들, 끝까지 믿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거부했던 불신앙의 사람들, 이런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에 이 십자가의 형벌과 고난, 속죄를 받아들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이 모든 구속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들어갈 곳이 지옥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정당한 공의를 시행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를 입어 천국에 간 사람들과 그리고 당신의 진노 아래 있는 지옥에 형벌 받는 사람들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하심으로서 그래서 하나님은 이 두 장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벌을 받는 이 지옥의 끔찍한 광경은 단지 하나님의 비정상적이고 울분을 토해놓는 분노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함께 일치를 이루는 공의를 보여주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노의 교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진노의 교리는 하나님에 죄에 대한 신경질적인 분노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거룩하신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그 죄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죄를 지을 수 있는 피조물은 이 지상에서는 오직 인간 이외에는 죄를 지을 수 있는 피조물이 없습니다. 물론 마귀는 이미 이 죄를 지었고 그리고 그들은 천사들이었던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우리 인간 이외에는 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도 식물도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무생물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죄는 인격적인 피조물들만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격적인 존재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죄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 죄의 의도는 하나님에 대한 폐위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로서 왕의 자리에 계셔서 이 모든 피조물들을 당신과 관계를 맺으시며 통치하시는데 인간의 이 죄는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끌어내려 폐위시키고 자기가 거기에 등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가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양립할 수 없는 성격 때문에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화를 내신다.’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것은 불변성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있었는데 없어진다면 맨 처음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없는 것이 있다면 이전에 있어야 되는 어떤 것들을 하나님이 결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변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인간의 죄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또 인간에 의해서 자극을 받으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들이 깊이 인정하고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갑자기 화를 내시든지 화를 내시다 다시 그것을 포기한다든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은 마치 태양과 같아서 하나님은 그 태양이 빛을 비추어 이 땅에 있는 많은 식물들을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고 균을 죽이고 얼음을 녹이는 많은 다양한 효과를 가져 오지만 녹는 얼음 속에서 우리는 태양을 찾을 수 없고 돋아나는 파란 싹에서 아무리 현미경으로 태양을 찾아보려고 해도 태양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태양은 불변하도록 먼 우주에 떠있고 거기로부터 비추는 햇빛으로 말미암아 태양은 불변하지만 수많은 태양의 효과를 이 지상의 생애에서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 효과가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효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진노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사랑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마치 살아계신 하나님처럼 우리와 함께 진리와 성령 안에서 동행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감격으로 느끼며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하나님의 진노가 거짓이고 단지 법칙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우리가 기도와 말씀 속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도 우리의 착각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유화를 통한 속상을 우리의 화목의 기초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유화를 속함이 아니라 통한입니다. 유화를 통한 속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죄로 말미암아 원수가 되어 있었는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죄는 거룩함에 대한 도전입니다. 단지 죄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이 거룩함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이 모든 피조세계에 있는 당신이 지으신 사물들과는 구별되는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인간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을 보여줍니다. 인간도 사랑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도 사랑이시지만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다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고 인간의 사랑은 불안전한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를 때는 내가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사랑에 내 사랑을 비추어볼 때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런 도덕적 완전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죄는 이런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 위에 아주 뛰어난 위대한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모든 도덕을 초월하시는 완전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하찮게 여기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이 이렇게 당신의 거룩함에 대한 끝없는 도전을 내버려두신다고 할 것 같으면 오만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죄를 짓고 까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인간이 인간을 칼로 찌르거나 주먹으로 때리면 피가 나거나 찔려서 상처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우리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에게 본질적으로 손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인간으로 인해서 당신 자신의 존재가 해쳐지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당신의 피조물로 여기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거울처럼 바라보시면서 당신 자신과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안에서 인간이 행하고 저지르는 죄는 하나님 자신에게는 손해를 끼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 창조하신 세계에서 끊임없이 손해를 끼침으로 결국은 하나님 자신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잠깐 생각이 난 비유인데 만약에 이러면 어떨까요? 여러분이 거울을 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여러분들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와서 여러분들이 거울에 있는데 거울에다 수염을 그렸다고 칩시다. 그 수염은 여러분들의 얼굴에다 대고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어째든 그 거울에다 수염을 그려놓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은 여러분들이 아니지만 그림에다 안경을 그려놓고 거기다 모욕적인 말을 썼다면 그것은 어차피 내가 아니니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겠습니까? 아니면 누가 내 사진에다가 이렇게 낙서를 하고 나를 모욕한 것이야. 하고 화를 내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침을 뱉고 그림을 그리고 찢어버린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가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거룩함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데 이 하나님에 진노는 당신의 거룩하심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피조물들이 직접 영향을 끼칠 수는 없지만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안에서도 창조주로서의 거룩함이 존중받고 또 유지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죄를 짓고 그리고 하나님을 깔보고 주님을 폐위시키고자 하는 이 끔찍한 도전, 그리고 이 모든 시도들은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번에 영국을 다녀왔는데 영국의 이층버스 안에는 뭐라고 쓰여 있는가 하면 ‘There is probably no God, Dont worry. Enjoy your life’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마세요. 당신 인생을 즐기시지요.’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써 붙이겠다고 사람들이 모금을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25만 파운더가 걷혔다고 합니다. 미친 사람이 아닙니까? 거기에 주동이 된 인간이 누구인가 하면 리차드 도킨슨이라고 하는 ‘조작된 신’이라고 책을 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신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 그렇게 하면서 수많은 증거들을 이야기했는데 그 책도 읽어보니까 자연의 모든 세계 속에 놀라운 질서가 있다고 하면서 그 질서를 누가 창조했는가 하면 절대로 신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돈을 거두어서 하나님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 하나님이 있는 게 걱정이 됩니까? 난 이해가 안 갑니다. 하나님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즐기십시오. 결국 그 즐긴다는 그 즐거움이 죄의 즐거움입니다. 아니, 나는 큰 소리로 묻고 싶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있는 것이 걱정이 되는가 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면서 살면 되는데 그래서 요셉도 영국에 있는 교회에서 열심히 돈을 모아서 반대광고를 써 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참 우스울 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느니라” 고 말입니다.
결국 십자가의 형벌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린 유화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들,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전하여 지을 그 많은 악, 상대가 무한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죄를 지은 인간들의 죄의 크기는 그야말로 무한한 크기였습니다. 이 무한한 죄를 지은 인간을 향한 형벌이 무한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무한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으로도 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영원히 단번에 풀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리고 형벌을 당하셨을 때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 가시는 광경을 보시면서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다 흘리신 그 끔찍한 고통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푸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용서해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 고난은 하나님의 마음을 유화해드리기 위한 십자가였고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속죄함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모든 진노를 푸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 가운데 사는 우리들을 깊이 화해하시고 사랑할 마음만 남으셨는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그 구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효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신 이 십자가의 형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드린 십자가의 형벌이었고 예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렸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사랑으로 간 것이 아니라 그 진노와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는 모두 십자가에서 사라지고 우리가 그분을 믿는 그 순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서 우리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는 발견하고 우리가 직접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고통을 보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지신 십자가에 유화의 형벌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현실적으로 밀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형벌을 당하게 하심으로 마음을 푸시고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자비를 받도록 만들어주셨으니 결론은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자랑하나 우리에게는 오로지 십자가밖에 없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자랑인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며 살기를 원하는 신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6 (09. 4. 10 십자가 사경회)
6.십자가와 화목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이 로마서 5장 전에 4장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의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5장에서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들이 의롭다하심을 입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말하면서 이제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화목을 누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 5장에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기독교의 십자가의 복음에 있어서 십자가로 말미암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화목의 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말하고 있습니다.
이 원어의 의미를 보면 우선 제일먼저 화목해 되었은 즉 되어있는데 여기에 보면 ‘카텔렉멘’이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원래 ‘바꾸다’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시제는 제이 부정과거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은 성경에서 ‘화목하게 되다.’ 이렇게 번역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꾸다’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 화목케 되다. 라고 하는 것은 수동태로 여기에 나오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화목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아들의 죽으심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화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루어진 화목의 수혜자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 다음 여기에 보면 “원수”라고 나오는데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나오는데 화목하게 된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이 원수가 ‘에크스로이’ 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적, 혹은 원한을 가진 적수, 원수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 이 구절을 보면서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대적하니까 결국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원수처럼 행동한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본문을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이렇게 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참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즉 이 원수라고 하는 것은 정 반대의 단어를 생각해보면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이 원수의 정 반대의 단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원수된 것과 반대의 경우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음으로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이것이 명사이지만 사랑받는 자녀라고 할 때 이것은 동사에서 온 분사형태를 취하는데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하는 이름 그 자체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입은 자”입니다. 똑같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하는 자,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 이것이 결국은 성도의 정체성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사랑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똑같이 여기에서 이 원수라고 하는 것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여기에서 표현하는 원수되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주님을 대적한 것이 먼저가 아니라 먼저 인간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마음은 일차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원수 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원수 되어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향하여 그렇게 원수와 같이 적대감을 가질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를 미워하실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원수 되게 하시는 이 이유는 우리 인간들 자체에 대한 우리 구원받을 사람에 대한 그 자체에 대한 미움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 된 상태 때문에 발생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미움입니다. 이것을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원수 되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침범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간들로부터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려고 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속성의 발휘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로 말미암아 불화한 관계가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대적하는 미움의 마음은 부당한 것입니다. 스스로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니 이것은 아무 이유와 근거가 없는 부당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미워하시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성품으로 비롯되는 인간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진 악이요, 또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여기에서 말하는 원수 되었을 때,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거룩한 미움의 상태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된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었을 때 결국 이 죄라고 하는 것은 위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는 원죄와 죄책이요, 또 자신으로서는 그 원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마음과 행동으로 짓게 되는 실행 죄를 가리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아담의 죄가 먼저 있고 그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물려받은 죄의 영향, 즉 죄책과 오염이 그 다음에 후손으로 태어난 각 사람의 본성 안에 있고 그리고 그 본성을 따라서 사물의 자극을 받으며 욕망을 움직여 마음속으로 행동으로 죄를 짓고 있는 실행 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순서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는 시간을 초월해서 이 모든 것들을 보실 때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죽은 아담의 첫 범죄와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물려받은 이후에 태어날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그런 악함과 죄책과 그리고 오염, 시간이 흘러서 실제로 죄를 짓게 되는 실행의 죄,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시간을 초월해서 보면 하나로 아담과 이후에 모든 태어날 인간을 하나의 머리와 그리고 몸통의 관계로 하나로 묶으며 그 안에 한꺼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로 말미암아서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 관계가 깨트려지게 되었을 때 그 모든 인간들도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트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이 범죄의 결과는 인간은 불화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죄를 짓기 때문에 불화해진다기보다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서 태어나고 그런 불화를 토대로 인간은 더욱더 죄를 지으면서 이 불화를 구체적으로 실제의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렇게 이루어진 불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대한 변화를 도입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는데 적극적인 불화의 결과와 그리고 소극적인 불화의 결과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적극적으로 볼 때 반감과 대적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자, 이 반감과 대적은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반감과 대적은 적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반감과 대적은 적의를 가리키는데 이 반감과 대적은 결국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깨트려지자 이 두 사이에는 반감과 대적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반감과 대적은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 안에도 있고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 안에도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먼저 이 반감과 대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를 깨트리게 되었고 이후에 태어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어린아이들 아주 유아들은 죄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안에서 본성상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께 대한 강한 반감과 대적을 가진 그런 죄성을 간직한 채 태어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이제 이미 본성 안에 있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발현이 되어서 그래서 결국은 이 반감과 대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실행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그리고 마음으로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며 죄를 향하여 죄를 행하는 지체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도 이런 반감과 대적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 안에 있는 반감과 대적과는 좀 다릅니다. 그 성질에 있어서는 같지만 이유와 원인에 있어서 훨씬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화하므로 반감과 대적을 갖는 것은 이유가 없고 근거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인간을 향하여 반감과 대적을 가진 것은 이것은 정당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기는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성품과 반대되는 어떤 것들이 그 사람에게 부착되어있을 때는 그 사람을 사실은 그 사람을 사랑받는 사람이 충분히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죄와 은혜의 지배를 설교하면서 이런 예화를 여러분들에게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많이 사랑하시지만 우리 인간들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느껴지는 그 반감과 대적,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고 징벌하시는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가운데 이런 예화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자, 어떤 남녀가 있는데 아주 사랑하는 연인 사이입니다. 이 여성은 남성을 지극히 사랑하는데 이 여성에게는 어떤 성품이 있는가 하면, 동물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런 성품 때문에 동물이 다치거나 죽거나 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는 그런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그 야생동물을 먹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실제가 아니라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고속도로 휴게소 근처에서 이 두 남녀가 각각 만나기로 했습니다. 차를 타고 오다가 이쪽 숲에서 저쪽 숲으로 뛰어가던 토끼 한 마리가 차에 치어 죽은 것을 이 남자가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토끼 탕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 토끼를 보는 그 순간 ‘저것을 국을 끓여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생각을 하고 차에서 내려 깔려 죽은 그 토끼의 귀를 들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갔습니다. 저 멀리서 사랑하는 여인이 걸어오는데 보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그 연인입니다. 허우대도 멀쩡하고 그리고 옷도 말쑥하게 입고 머리에는 무스를 바르고 누가 봐도 너무 예쁜 신랑감입니다. 그리고 선글라스도 끼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모습인데 멀리서 보니까 손에 들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확인이 되는데 차에 쳐서 죽은 토끼입니다. 그래서 차가 얼마나 심하게 치어 죽였는지 배가 터지고 내장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얀 토끼의 귀를 들고 한손으로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남자가 그것을 들고 있다고 해서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동물을 사랑하고 차마 죽은 것을 보지 못하는 그 여성의 본성이 그 남자를 지극히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가서 그 품에 안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과연 이 여인이 비난을 받아야할까요? 그런 성품 때문에 평소처럼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달려가 그 품에 안기지 않는다는 것이 그 남자를 향한 사랑의 부족을 뜻하기보다는 오히려 동물을 사랑하고 끔찍한 것을 보지 못하는 이 여자의 착한 심성을 말해주듯이 또한 하나님이 범죄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이 반감과 대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라서 인간, 그 구원받을 사람 자체를 향한 반감과 대적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반감과 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이것이 우리가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죄를 가지고 있는 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이 반감과 대적이 나에 대한 것과 죄에 대한 것이 분리되어서 잘 느껴지지를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자가 된 이후로도 만약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마음으로 떠나게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그런 행실과 올바르지 않은 마음을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향한 미움처럼 똑같이 느껴지지 나는 너무 너무 사랑하시는 것이 느껴지고 죄에 대해서 미워하시는 것은 또 다르게 느껴지는 그런 이중분리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이 경험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특성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반감과 대적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죄와 그리고 불순종과 악에 대한 것인데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 반감과 대적은 사실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에 대한 반감과 대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만 싫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 행동, 태도, 냄새, 분위기, 말투, 심지어는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조차도 싫은 것처럼 이렇게 우리의 반감과 대적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어떤 것에 대한 반감과 대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어떤 죄나 하나님과 분리되어야 마땅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감과 대적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반감과 대적인데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모든 속성 전체에 걸쳐서 포함되어있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반감과 대적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반감과 대적 그 자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불화의 (?)입니다.
두 번째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낯섦과 거리감이 도입되었습니다. 낯설다고 하는 것은 친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낯설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엄마하고는 늘 얼굴을 마주치고 있기 때문에 안아주고 업어주고 얼굴을 쳐다보고 해도 울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이 더 친절하게 안아주어도 아이들은 낯가림을 하면서 소리를 내어 웁니다. 이것이 바로 낯섦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이런 낯섦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보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너무나 잘 아시고 특별히 당신이 구원하기로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게십니다. 그래서 찬송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
안다.’ 라고 하는 동사가 하나님께 사용이 되면 이 구원받을 자와 관련해서는 정확하게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구원하고자 하셨던 모든 인간들에 대하여 조금도 낯설지 않고 아주 친숙하시지만 우리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낯섦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리감이 도입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낯섦과 거리감이 도입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심을 말미암아 이런 거리감을 해소시켜 실제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제일먼저 사라지고 철폐된 것은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이 거리감을 하나님이 해소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와 가깝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못박혀죽으시는 그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거리감을 치워버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와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갖는 그 순간, 인간은 낯섦을 버리고 낯섦이 사라지고 그 친숙한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있었던 거리감이 사라지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낯섦과 거리감을 치워버려 주셨던 것입니다.
한번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의 경험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 순간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복음의 의미를 붙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처음 회심의 경험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때에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들어올 때 우리가 어색한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낯설었습니까? 아닙니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하나님이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하나님이고,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마치 오랜 여행을 떠나서 방탕한 길에서 자신의 가정으로 따뜻하게 돌아간 듯한 느낌이 아니었습니까?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이 내가 오래 전에 있어야 했던 그 참된 안식이고 기쁨이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나요?
보십시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낯섦과 거리감은 치워지고 그리고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루어진 불화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와 화목의 관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와 화목의 관계는 제일먼저 이 십자가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적의와 그리고 거리감들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죽으심으로 먼저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이 적의와 모든 거리감들을 치워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매달리신 그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참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그 비참한 형벌을 한 몸으로 담당하고 죽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철저한 죽으심과 그리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시는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유화시켜 달래 드렸고 그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이 낯섦과 거리감은 해소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일 먼저 하나님을 화목하게 해드렸던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화목의 결과가 결국 적의와 거리감을 치워버린 사건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것이 언제 일어났는가 하는 시점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유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해 진노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적의와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책은 담당하시고 진노는 풀어드리고 불화는 해소하셨습니다. 문제는 오늘 성경에 보면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이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이 일차적으로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화목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 화목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화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이미 구원받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예수를 믿기 전에도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가 위하여 죽으셨던 구원받을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적의가 사라지고 거리감이 치워지고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해소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처음 회심할 때 놀랍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공의로운 성품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느끼는 하나님의 성품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복음의 고마움을 알게 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만나게 되는 처음 회심의 때에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부들부들 떠시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에 하나님 마음 안에서 사라진 불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그럼 여기서 우리들이 매우 중대한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자, 그럼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설교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회개하십시오. 당신이 회개하지 않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 위에 있습니다. 하는 설교나 가르침이 과연 교리적으로 올바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이 적용적인 의미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이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원받을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가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정말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누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마음에 화목이 이루어진 사람들인지는 복음을 전해봐야 압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분명하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복음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누가 하나님께 구원받을 자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런 가르침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하나 문제가 없는 사실은 비록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 마음 안에는 화목이 누려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 전까지는 하나님 안에 있는 이 화목한 사랑이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화목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떠나 악과 죄에 빠져서 고통을 겪게 되니까 우리는 그에게 그렇게 선포해서 복음으로 부르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 집을 떠나 탕자는 아버지가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을 떠나 굶주리고 배고프고 고통 받고 외로운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하게 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여전히 죄 가운데서 회개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그 화목과 사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 구원을 얻을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사람들, 이미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을 열고 화목하게 되셔서 저들을 부르고 계시는데 저들은 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감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 화목은 또한 인간 안에 이루어진 화목인데 이것은 결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도덕적으로 감동을 주어 하나님께로 스스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리고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인간을 향한 적의와 거리감을 사라지게 하셔서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신 후 그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그 화목한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이 인간이 화목으로 돌아오게 하셨는데 첫째는 그 화목이 하나님을 향한 화목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가지고 계신 이 화목한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받아들이게 될 때 인간의 마음에는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많은 불화와 주님을 향한 미움이 근본적으로 부서지게 되고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인간의 회심입니다. 이 회심이 바로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는 사랑 속에 이루어진 화목은 이웃을 향해서도 나타나게 되는데 모든 인간을 향하여 마음을 열게 되고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참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미워하고 악을 행하고 싶었던 인간들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화목을 깨닫는 그 순간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내가 하나님께 화목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용서할 수 없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놀라운 변화를 우리 안에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결과인 것입니다. 성화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그만큼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누구를 여전히 미워하고 그리고 누군가를 마음에 깊이 질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성화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화목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불화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결론은 다시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라는 평범한 사실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한편으로는 주님의 거룩한 성품과 한편으로는 우리의 죄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화한 관계가 해소될 수가 없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여 희생하시고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마음을 풀어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던 적의와 거리감을 사라지게 하셔서 맨 처음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셨던 그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과 화목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다시 회복하시고 하나님을 우리에게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신 이 화목의 도구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았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십자가 없이는 하나님과 화목을 누릴 수 없었는데 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화목을 누리게 되었고 죄의 상태에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주님과의 평화와 화목을 누릴 때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이 사랑을 받을 때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루신 그 희생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모든 영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화목제물로 주신 아버지께 돌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 시면서까지 우리에게 화목케 하셨은즉 우리는 더욱 이 화목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면 이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 이 화목을 이루고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불화하다면 이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이 화목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7 (09. 4. 10 금요예배)
7.십자가와 구속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오늘 이 시간에는 6번에 걸쳐서 계속되어온 사경회 시리즈를 토대로 하면서 속죄의 마지막 요소인 구속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리고 주일날에는 이제 이 십자가 사건이 우주적인 영적인 세계에 어떠한 영향력을 가져왔는지를 밝힘으로 신자인 우리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밝히는 오늘의 이 신학적인 설명들의 근거를 발견하는 것으로 십자가 사경회의 대미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다음 주일에는 여러분들이 꼭 나오셔서 이 십자가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어떤 연관이 있고 그 연관 안에서 우리 신자의 영혼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밝히 깨달아 안다면 여러분의 생애에서 가장 뜻 깊은 부활절 중 뜻 깊은 하루가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좀 해설해 보자면 골로새서는 길이는 짧지만 중요성이 길이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서신입니다. 비록 짧은 서신이지만 이 골로새서는 하나의 장엄하고 신비한 우주적인 기독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런 기독론을 펼치기에 앞서서 먼저 사도는 우리의 신분이 어떠한가를 밝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우리의 신분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아들 예수 안에서 구속을 입은 사람들인데 그것은 곧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 짧은 성경 구절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우선 이 두 구절에 중요한 단어의 의미를 명백하게 이해해야지만 우리의 구속에 대한 깨달음이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 원어의 의미를 보자면 여기 13절에 보면 똑같은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는 것과 주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속해주셨다는 이야기는 얼핏 보면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가 똑같은 반복이기는 하지만 건져내어진 곳이 어딘가에 따라서 각각 다른 동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다른 동사, 그리고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온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우선 “건져 내사” 했는데 이 구절에 희랍어 단어는 ‘엘 히사토’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흐리오마이’라고 하는 동사에서 온 과거형인데 ‘구하다. 건져내다. 이끌어내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우리의 구원을 가리키는 동사로 광범위하게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내셨다. 구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해내셨다. 자 이것도 구원입니다. 악한 권세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다. 이것도 구원입니다. 이런 식으로 광범위하게 사용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14절에 보면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고 나옵니다. ‘곧’ 이라고 한 이야기는 무슨 뜻일까요? 구속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구속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서 그것으로 좀 부족한 것 같으니까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고 기록했으니 구속은 곧 죄를 용서해준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틀린 단어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구속은 구속이고 죄 사함은 죄 사함인데 그런데 이 구속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데 그 단어가 ‘텐 아폴류트로씽’이란 단어입니다. 좀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 단어는 구속을 가리키는 명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것의 동사를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데 그래서 구속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단어가 두 개정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하나는 오늘 구속이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가 동사, ‘아폴류트로’ 라는 단어인데 이게 ‘구속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포’ 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무엇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부터 떨어진 그런 것이고 ‘류트로’ 라고 하는 단어는 노예 같은 존재가 누군가에 의해서 값을 치루고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둘째 날인가 설명을 드린 것처럼 노예가 있는데 돈이 많은 부자가 있는데 그냥 단순히 그 노예가 불쌍해서 자신의 돈을 주고 그 노예를 사서 자유하게 했을 때 이것이 바로 노예의 입장에서는 류트로 하게 된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거의 구속하다는 한글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건져내다”라고 하는 것은 힘이 있어서 이렇게 집어 들면 건져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값을 지불하고 산다는 의미가 분명하게 들어있기 때문에 구속을 이야기할 때는 구원을 한다는 단어와는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 진노, 악한 권세, 시련 이런 것들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건져내는 것이고 죄로부터 그를 건져내는 것은 건져낸다는 동사를 쓰지 않고 구속하다는 단어를 썼다는 것이 제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이 단어 말고 성경에서 또 구속을 나타내는 말로 자주 쓰는 단어가 있는데 ‘아고라주’ 라는 단어입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아고라 어쩌구, 저쩌구 라고 많이 들을 것입니다. 그게 희랍어로 ‘시장’ 그런 뜻입니다. 시장, 성경에서는 ‘장터’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장, 장터가 오게 된 동사의 의미는 값을 주고 사다는 것입니다. 이런 꽃을 사오기 위해서 돈을 십만 원을 내고 오 만원을 내고 꽃을 사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많이 쓰이는데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로 값 주고 사신 바 되었다.” 라고 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이제 구속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은 단지 죄와 사망, 권세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를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대가를 지불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데려오셔야 하는 그런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능력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통적인 신앙에서 빛나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비참에서 건져내셨을 뿐이라고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우리나라의 어느 큰 교단에서 커다란 신학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편을 나누어서 논쟁을 했다기보다는 신학교 교수 두 사람이 아주 파격적인 강의를 강의실에서 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이것이 총회에까지 징계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결과 그들은 그 총회에서 출교라고 하는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는 최종선고를 받고 교회에서 잘려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의 피와 돼지의 피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이었습니다. 자, 이 사람들이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우리들이 정통적인 신앙에서 보면 그 사람은 신자도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니고 그들은 진정으로 거듭났을 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도대체 돼지 피와 예수의 피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렇게 물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이야기가 아니라 피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속함을 받는다는 것, 우리들이 속한다고 할 때 그 구속이라는 단어를 보면 구속이라는 단어가 우리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기가 막힌 단어입니다. 구속할 때 이 ‘구’자는 구원하다 할 때 그 구자를 썼습니다. ‘속’은 돈을 주고 사올 때 그 속입니다. 그러니까 ‘박연차 회장을 구속하니’ 그럴 때 그것은 성경의 이 구속하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구원한다는 의미와 돈 주고 산다는 단어를 기가 막히게 결합시켜서 구속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절묘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주 기가 막히게 이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게 영어의 Redemption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전면적으로 부인한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와 돼지의 피가 차이가 무엇인가? 그렇게 묻는 그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기독교 교리의 전체를 무너트리겠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도대체 아니,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주시고 싶으면 그냥 죄이든, 사망이든, 고난이든 건져내시면 되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를 사람의 몸으로 내려 보내시고 그것을 죽여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를 가지고 우리를 겨우 구속해 내신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 미개한 원시인들의 신관에나 맞는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런 교리를 믿는 그 자체가 매우 미개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오셔서 죄든지 뭐든지 상관없이 그냥 능력으로 번쩍 건져서 그를 이제 좋은 곳으로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든, 영혼에 있는 것이든, 밖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건져내어서 나쁘고 힘든 것에서 번쩍 건져내어서 좋은 곳으로 옮겨놓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표적인 구약의 사건을 어디서 드는가 하면 출애굽 사건에서 드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보면 하나님이 당신 스스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지극히 큰 능력으로 너희를 구워하시기를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름같이 하였느니라.” 자, 독수리 새끼가 둥지에서 떨어지려고 발발 떨고 있을 때 그 독수리 새끼가 그 어미에게 오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주석가들의 설명에 의하면 난 본 적이 없으니까 모든 새들이 새끼를 나를 때 발톱으로 잡아서 옮기는데 독수리는 새끼를 어깨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도 안 움직이는 부분이 있는데 이곳은 움직이는데 여기는 안 움직여서 여기에 올려놓으면 새끼는 발톱으로 엄마의 날개 앞에 이 부분을 움직이지 않게 꽉 붙들고 그리고 이동을 한다고 합니다. 나는 그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성경은 그것을 업어 나름과 같이 하였느니라, 그렇게 독수리 어미가 새끼를 업어 나를 때 독수리가 능력이 있으니까 업어 날랐을 뿐이지 그 새끼가 어미에게 업히는 그 중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이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번쩍 들어서 바로의 손에 건져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보내셨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우리가 이 이야기를 신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간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출애굽 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어린양을 죽이는 이 이유는 어린양을 죽여서 애굽을 탈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애굽을 탈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려고 이 애굽의 큰일을 행하셨는데 이게 바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바로의 처음 난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짐승의 첫 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도록 되어있었을 때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에게는 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알려졌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어린 양을 죽여 인방과 설주에 바르면 그 피로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을 보지 않고 나머지 애굽의 모든 전역에 이제 처음 난 것들이 죽는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결국 무엇인가 하면 구속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 각 집안의 처음 난 자들이 죽어야 했는데 대신 남이 죽임을 당함으로서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것도 하나님의 구원이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구원은 구속적인 개념을 가진 구속적 구원입니다. 이 구속적인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 죄와 사망, 악한 권세, 진노, 시련, 이런 것들로부터는 능력으로 번쩍 들어서 구해주셨지만 죄로부터 건져내시는 것은 하나님이라도 우리의 죄에 대가를 치르고 우리를 사오셨고 하는 것입니다.
자, 만약에 생각해봅시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가출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녀석이 하루 이틀이 되면 돌아오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한 달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길을 찾아 나섰더니 결국 찾았는데 어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았기에 가자고 했더니 그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고를 내서 그래서 그 회사에 제법 큰 손해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애가 돈이 없으니까 그러면 네가 일 년 동안 일해서 우리 회사에 입힌 손해를 갚아라, 그렇게 해서 노동을 해서 매달 월급도 못 받고 그것을 갚고 있었는데 그 애를 여러분들이 데리고 온다면 그 아이가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값을 지불하고서야 그 아이를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사망, 진노, 악한 권세, 시련 이런 것들로부터는 그런 것이 필요 없고 하나님은 능력으로 건져 오시면 되는데 이것이 죄일 경우에는 이렇게 갚을 치르고 건져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실 것을 예고하시면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심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몸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할 류트리온’ 이라고 하는 단어가 바로 14절에서 쓰여진 이 구속이라는 동사와 같은 어근을 가진 명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 보면 우리를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주시면서 말씀이 이렇게 우리에게 전합니다. 너희 몸은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이 바로 구속적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제 우리를 값 주고 사왔다면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사오는 것인가? 구속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게 됩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런 종류의 설명을 주일학교 다닐 때부터 들어 오셨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전에는 하나님의 집에 있던 자녀였는데 우리가 죄를 지었더니 우리가 마귀에게 팔려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마귀가 우리를 사서 마귀에게 팔려가서 우리는 마귀는 시키는 대로 실컷 일하고 그가 기뻐하는 일을 하면서 종처럼 살았습니다. 그게 너무 불쌍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못 박게 죽게 하셨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신 그 죽음이 마귀에게 그 값을 지불한 것이 되어서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마귀의 손에서 사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고 마귀에게서 우리를 사온 것인데 이것을 곧 구속이라고 합니다. 이런 종류의 설명입니다. 아마 여러분, 모르기는 몰라도 여러 차례 그런 설명을 들으시면서 신앙생활을 해오셨을 것이고 그나마도 안 들었다면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고 아주 유서 깊고 역사가 오래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교리가 전해져오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교리는 매우 잘못된 교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굳게 하는 그런 그릇된 교리인데 심지어는 하나님의 사람 어거스틴 종교 개혁을 일으킨 위대한 지도자 룻터 같은 사람도 이런 교리를 신봉하였다고 하니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다른 점에서는 어떻든지 간에 그 두 분은 중대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에서 여러 차례 ‘아고라조’ 라는 단어를 쓰면서 너희를 내가 사왔다. 너희는 값으로 산바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표현하셨는데 그러면 도대체 누구에게서 우리를 사 오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듭니다. 결론을 내자면 이것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사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이지 하나님이 하나님 아닌 마귀에게 가서 예수를 주고 거래를 해서 다시 찾아오고 한다면 마귀와 하나님은 동등한 것이 되고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을 마귀에게 손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손해를 입혔다면 하나님이 마귀에게 배상을 해주실지 모르지만 마귀에게 손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한분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손해를 입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귀도 그는 비록 죄의 권세를 가지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놔라. 그러면 놔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지 대등하고 거래를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진 그런 존재론적인 위치를 가진 피조물이 아닙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어떻게 그렇게 대등한 거래의 관계가 그것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고 거래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마귀에게 팔린 우리를 어쩔 수 없이 값을 주고 우리에게 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운 성품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대신 십자가에 못 박고 당신의 진노를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우리를 위해 유화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화목케 하시지 않고는 우리를 사실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속성 때문에 지불하심 값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이 구속의 전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십자가와 구속이 이런 관계에 있는데 그러면 이 십자가의 구속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의 구속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자, 이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셨는데 이것은 두 가지부터의 구속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첫째는 율법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돈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값 주고 그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다시 구해서 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세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첫째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구속해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13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주 받으신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야 될 당사자였는데 율법은 우리를 그렇게 저주하고 있었고 우리로서는 그 율법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저주를 받아야 될 인간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께 가장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는 영원한 죽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 지속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선택된 우리는 저주의 죽음 대신 하나님의 축복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율법의 저주대신 은혜의 생명을 주셔서 누구든지 죽을 영혼과 죽을 몸이 다시 살아나 영광스럽게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은혜의 자리로 옮겨놓으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율법의 의식으로부터의 저주입니다. 이 의식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제사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가기에 필요한 제사의 의식들입니다. 이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23절은 말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에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느니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율법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 얼마나 복잡한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수많은 의식의 법들이 나옵니다. 제단을 쌓을 때는 정으로 쪼지 않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을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여자들이 생리를 한 후에 얼마까지 하나님을 만나러갈 수 없는지, 남자들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하거나 물건을 만졌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규례, 이런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규례들이 있고 이것은 도저히 지키려야 지킬 수 없는 규례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과연 하나님께 우리가 순종하는가를 보시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들입니다. 이런 의식 법들 중에는 섭생과 관련된 것도 자주 나옵니다. 먹어야할 짐승과 먹지 않아야 할 짐승, 그리고 음식물을 보관하는 방법과 그리고 전염병의 치료에 관한 많은 규정들도 나옵니다. 이러한 특별히 음식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섭생학적인 연구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음식은 안 먹으면 몸에 좋은 것이고 자유가 주어졌지만 먹으면 몸에 나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의 그런 규례의 핵심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돼지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면 그러면 돼지고기를 먹으면 몸에 해로울 것인데, 비늘이 없는 생선을 먹으면 몸에 해로울 것인데 과연 그것이 입증될 것인가. 만약에 그것이 몸에 해로워서 그렇게 명령하셨다면 정으로 쪼지 않은 돌로만 제단을 쌓으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제단을 지나다니다가 혹시 사람이 긁혀서 다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잘 다듬은 돌이 훌륭하지 않을까요?
그런 섭생학적인 질문을 가지고 대답할 수 없는 많은 난제들이 이 의식에 법속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많은 구약학자들은 생각하기를 섭생적인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핵심은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잡한 규례를 주어서 도저히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또 어느 만큼 당신에게 순종하려고 하는지 그 마음을 확인하시는 의미에서 그것을 주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들을 지키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단번에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이제 이 모든 율법의 의식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이 율법의 의식을 지켜야할 의무로부터 우리를 예수의 십자가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당신 스스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얼마나 복되고 단순한 예배 속에 사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자, 우리가 만약에 죄를 지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와서 겸손히 우리의 죄를 토설하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면서 주님 앞에 탄원의 기도를 드리면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쳐 주셔서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에게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은혜를 내려주시지 않습니까?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 사경회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에 가장 크게 다가왔던 부분이 하나님과의 화목의 부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때에 이미 구원을 얻을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은 화목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간곳이 없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만이 우리에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많은 죄를 지었고 주님을 떠났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큰 화목,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되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화목케 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주님께 순종하며 화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세 번째는 율법의 행위로부터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 위한 것이라고 로마서 10장 4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우리가 선한 행실로 살기 위해서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지만 이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는 우리가 지었으나 저주는 그분이 담당하시고 구원의 은총은 우리에게 주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진노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에서 구속해내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죄로부터 구속하신 것입니다. 먼저 이것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곧 신분으로부터의 구속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7절에 말하기를 “너희가 그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전까지는 신분에 있어서 우리는 진노의 대상들이었고 죄 가운데 있는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마귀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를 믿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죄책에서 구원하여 이제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을 바꾸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분은 결코 변함이 없으니 우리는 어디서 살든지 어느 순간이든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라도 하나님의 우리의 아버지시고 나는 그의 자녀라고 하는 확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를 받고 죽으심으로 마귀의 종이었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상태로부터의 구속이니 이것은 바로 속박 받는 상태로부터의 구속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는 우리는 신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에서 쫓겨나 마귀의 종, 죄의 종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죄를 짓지 않으면 살수 없는 마음과 영혼이 죄에 의해 속박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잠시 하나님과 화목을 누려도 잠시일 뿐이고 그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다시 죄가 속박을 해서 죄로부터 도저히 벗어날려야 벗어날 수 없고 마음도 그 죄로 말미암는 속박에서 해방될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을 끊을 수도 없고 풀 수도 없었습니다. 죄를 짓고 싶어서가 아니라 죄를 짓고 싶지 않아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마음과 영혼이 죄에 사로잡혀 사망과 죄의 법에서 끊임없이 솟아난 욕망과 그리고 욕심의 종이 되어서 그 노예가 되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리고 행동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면서 살던 그것이 운명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죄의 속박들을 깨트려버렸습니다. 이제는 마귀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주님이 산산이 부셔버리셨고 아직은 잔존하는 죄가 남았지만 은혜의 도움을 받기만 하면 이 모든 것들의 속박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놀라운 자유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 수 있는 온전한 신념과 믿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속박의 상태로부터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건져주신 것은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일로 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우리의 믿음도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믿음은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기 위한 도구였을 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하나님께 대신 치루시고 속죄의 제물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해주심으로서 우리가 믿을 때 이런 놀라운 해택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원받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의 얽매인 죄와 그리고 얽매인 사슬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고 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끌러주신 것처럼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미끄러졌을 때 이런 죄의 속박을 느낄 때마다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을 구하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이런 속박의 상태로부터 건져주어 주님을 향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디도서 2장 14절에서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히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불법이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얽어매고 있는 내적 속박의 사슬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을 주님이 끊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자유는 사람의 욕망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방종 속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놀라운 자유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 우리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얽매인 영혼과 우리가 도저히 스스로 끌러낼 수 없는 마음의 속박들을 주님이 벗겨내시는 이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건져주시고 구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해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다시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을 다 주기까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우리를 사랑한 것만큼 우리에게 요구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을 자유롭게 살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부족하지만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자기의 생명까지 주신 주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애쓰지만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주님과 거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쓰러지고 넘어지는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인간들이지만 미력이나마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주님이 주신 은혜의 분복을 따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자 하는데 이것은 결코 이렇게 할 테니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거래를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모두 교회를 버리고 떠나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눈동자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보다 그리고 목회자보다 당신 자신의 몸인 교회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이 이렇게 주님 가까이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은혜 받은 교회를 주시고 그리고 구석구석 교회의 아픔들을 알게 하셔서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충성되게 살아야지만 구원의 빚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손짓해도 거기서 우리가 참으로 행복할 수 없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자유롭게 살라고 했지만 주님이 너무나 좋고 주님의 교회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내가 여기서 비록 가진 것 없고 그리고 탁월한 능력이 없지만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큰 사랑과 은혜 때문에 코에 호흡이 붙어 있는 날까지 주님을 섬기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때는 내게 부족한 은혜를 발견하고 그리고 충분히 섬기며 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는 내게 부어주신 은혜의 크기에 대해서 감사하며 주님을 새롭게 알아가며 고난과 시련, 주님을 위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와 그리고 많은 고통, 속에 근심과 밖에 걱정, 그 모든 괴로움들을 통해서 주님의 속성이 어떠한가, 그리고 속성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났는지를 배우며 고난 속에서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며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미끄러질 때도 제일먼저 십자가에서 미끄러졌고 돌아올 때 제일먼저 붙드는 것이 바로 이 피 묻은 십자가가 아닙니까?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고백인 것입니다. 매일 매일 그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다짐합니다. 주님이 저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셨지만 사실 저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주님은 최고이시고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아있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랑하는 지체들, 그리고 아직도 이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인간들, 천사를 통해서도 이 십자가를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당신 스스로도 우렁차게 외치지 않기로 하셨으니 이는 십자가의 사랑을 안 우리로 그들에게 예수님처럼 눈물로, 예수님처럼 기쁨으로,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는 섬김으로, 예수님처럼 자기를 다 버리는 헌신으로 전하기 위하여 전하는 동안에 듣는 그들은 유익을 얻고 전하는 사람들은 전하는 그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내가 받은 이 구원의 가치와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을 누리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주님 섬기는 자로 불러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우리 앞에 남은 날들의 수를 알지 못합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길면 금년이 아니면 내년에 혹은 십년 후에 우리는 주님 앞에 가게 될 것이고 언젠가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지금 자랑하는 아무 것도 그때는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때 마지막 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몇 번을 반복해도 감동적인 일화가 있습니다. 캐나다에서 목사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 마지막 면접관이 강도사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같이 더러운 인간이 어떻게 목사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때 이 강도사가 잠시 생각하더니 가슴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오! 주님, 하고 그리스도를 불렀습니다. 면접관이 ‘당신은 합격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벌래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 이외는 모든 사랑은 이 세상과 함께 정욕과 함께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승리할 그날까지 이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성도의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십자가와 부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 2:15)
오늘 성경의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부활과 더불어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고난주간의 금요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금요일을 가리켜 Good Friday 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직역을 하자면 좋은 금요일이 되는데, 왜 그것이 좋은 금요일이 될까요? 그날에 일어난 일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처참하게 죽으셨는데 그것이 Good Friday가 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자체는 비참한 형벌이었지만 그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유익이 좋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그 금요일을 Good Friday, 성 금요일이라고 불러 왔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어떻게 서로 떨어질 수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지만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이렇게 이렇게 승리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벗어버려’라고 하는 이 동사는 ‘아페크뒤 사메노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시제 상 과거를 뜻하고, 부정과거이면서 분사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희랍어에서 부정과거는 돌이킬 수 없도록 과거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을 지시하는데 사용하는 시제법입니다. 그런데 이 ‘아페크뒤 사메노스’라고 하는 단어를 오늘 우리 성경에서는 벗어버렸다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정사와 권세를 짊어지셨다가 벗어버리신 것처럼 이렇게 오해되는 번역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단어 ‘아페크뒤 사메노스’는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무장해제를 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동사에서 변형된 분사형태입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자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정사와 권세를 무장해제 시키셔서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 하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바로 사탄의 존재와 활동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자! 이 사탄의 존재는 이미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그 시점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후에 이 모든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탄도 원래는 그 피조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성경의 자료를 통하여 미루어볼 때 인간이 창조되기 전 이미 영적인 세계에서 이 천사의 일단의 무리들이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하고 반역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과 저주를 받아서 그들은 사탄과 그들을 따르는 졸개들이 되었습니다. 이후로부터 그들은 이제 끊임없이 하나님께 대적하며 이 세상 나라를 정복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라서 이 세상의 역사가 흘러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이죠.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였을 때에 한 사람이 단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이 모든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고 있던 놀라운 생명의 관계를 철회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던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한 것을 당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서 다시 되돌아가게 만들었고, 그리고 특별히 영계인 이 공중의 권세를 사탄에게 넘겨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으셔서 이 공중의 영적인 세계를 사탄에게 넘겨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인간을 향하여 거룩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 인간과 함께 하나님과 상호 교통을 이루고 있던 자연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도 함께 거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 공중의 권세는 사탄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죠. 이후로부터 이제 사탄의 역사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천상의 지배를, 이 공중의 영적 세계를 지배하는 가운데, 이 공중의 영적 세계의 후원을 받는 악한 무리들이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준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더 기쁘고 놀라운 일은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서 인간 안에 있던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영광의 충만한 빛을 거두어 가셨고 그 사랑을 하나님이 다시 거두어 가셨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 맺은 상태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안에 이미 죄 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잠재적인 것들은 이제 그가 점점 성장하고 어른이 되면서 백일하에 드러나고 그리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사탄을 두려워하고 그를 섬기며 사는 인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악의 활동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이 세상은 악의 왕국이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의 왕국이 있는 가운데도 아담이 타락한 즉시로부터 이 왕국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미리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제사의 제도를 주셔서 그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는 한시적인 교제의 길을 열어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해 한 가정 아브람함을 택하시고, 아브라함에게서 다시 한 나라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 땅에서는 그런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빛을 거두어 가셨어도 그들에게는 계시의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을 자신들이 알고 누리게 하시고 또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과정을 우리는 구원의 역사라고 부릅니다. 이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사탄이 공중의 권세를 붙들지 않았더라면 드러내 보여주실 수 없었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자비와 은총의 놀라운 역사는 사탄의 어두운 왕국,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칠 흙 같이 어두운 밤에 찬란한 불꽃처럼 타오른 한 줄기 불빛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그 어두운 왕국 속에서 찬란한 빛줄기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셨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그들에게 열어 놓으셨습니다. 한 번에 찬란하게 보여주셔서 그들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희미한 촛불로, 밝은 등불로, 더 환한 횃불로, 마지막에는 대낮과 같이 찬란한 태양 광선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셨으니 이것이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즉시로 이 모든 공중의 권세는 사탄의 왕국이 우뚝 서게 되었고, 사탄의 수많은 무리들에 의해 후원을 받는 이 지상의 나라는 캄캄한 악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한 줄기 작은 빛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었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씨앗에서 묘목으로, 묘목에서 한 줄기 식물로, 식물에서 나무로 점점 자라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어두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작은 나라가 왕성하게 하나님 앞에 번성하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죄 때문에 더 선명하게 보여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탄의 존재와 활동은 더욱더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그들의 손에 넘겨주신 이 공중의 권세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죄로 지배하였습니다. 그들의 권력과 힘이 강해서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빛이 사라지자 그렇게 어두움이 빛을 이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어두움 속에서 당신의 사랑과 긍휼,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찬란한 진리의 빛을 비추셨지만, 그것을 전달해주는 이스라엘 민족에까지 파고들어서 그들을 죄 가운데로 이끌어 하나님의 이러한 시도를 무산시켜버리려고 끊임없이 시도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신실한 주의 종들이 끊임없는 말씀 선포를 듣고 눈앞에 일어나는 기적을 보면서도 그렇게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자!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그들 안에 있는 부패성도 있었지만 하늘의 공중 권세를 잡은, 이 악의 왕국의 후원을 받은 수많은 사탄과 졸개들이 이 짓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끊임없는 계시의 빛, 은혜의 불에도 불구하고 악을 행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본문에 나오는 이 정사와 권세는 바로 마귀와 그에게 딸린 졸개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천사들에게도 등급이 있었기 때문에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등급이 없을 리가 없습니다. 구체적인 내용들은 신비에 싸여있지만 성경의 몇몇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바는 이들은 하나의 등급이 아니었습니다. 사탄을 우두머리로 하여 혹 마귀라고 하는 그는 단수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딸린 수많은 귀신과 졸개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정사와 권세, 하늘의 주관자 등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그러한 영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무기를 가지고, 어떤 힘과 권세로서 성도들을 대적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범한 것이었으나 그 자유의지의 그릇된 행사 뒤에는 인간이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인 배경으로서 사탄의 끊임없는 유혹과 도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은 어차피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의 모든 목적은 이 모든 세상을 자기가 다스리고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고 영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세상의 피조물은 그에게 있어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덕적 의지를 가지고 있는, 영혼을 지닌 지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은 당신 손으로 창조하셨지만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는 그 일은 하나님이 돌보시되, 인간에게 생육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그 일을 이루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섬기면 이제 이 세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충만하게 드러낼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속에 간직된 아름다움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노동과 섬김을 통해 더욱 찬란하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실 수 있는 그러한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모든 사명을 위탁하셨습니다. 이것을 사탄은 제일 먼저 알아차렸고 그리고 그는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의 목표는 집요하게 인간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죄에 빠지기 전에 이미 사탄은 면밀하게 한 번이 아니라 끊임없이 아담과 하와의 마음을 두드리며 유혹하였습니다. 결국은 그들은 집요한 그들의 유혹 앞에 넘어졌고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세계는 한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죄가 홍수가 난 것처럼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공중에는 그의 나라가 서게 되었고 이 땅도 그의 나라의 통치아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왕국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로 이 왕국을 파멸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은 그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죄와 불순종의 근원이 되는 사단의 왕국에 대한 파멸로 나타났습니다. 이 십자가에 의한 악의 왕국의 파멸은 세 가지 지평으로 집약됩니다.
첫 째는 우주적인 지평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짓자 이 공중의 권세는 사단의 왕국이 되었고 그리고 이 공중에는 사단의 권세와 나라가 웅장하게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있는 악한 영들의 역사는 하늘의 후원을 받으면서 이 세상의 인간을 철저하게 지배하였습니다. 먼저 그들의 지성을 캄캄하게 만들어서 도무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도무지 볼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희미한 것들은 자연을 통해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의 어두운 영혼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빛 때문에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죄악과 자기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의지는 굽어서 그의 의지 전체를 설득하여 죄 가운데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도록 끊임없이 그를 붙들었던 것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왕국은 이 지상에서 끊임없이 자기 나라의 확장을 위해 애쓰는, 지상에서 수고하는 모든 이 사단의 졸개들의 든든한 후원지요 전진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바로 이 공중의 왕국이 무너지는 놀라운 우주적인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도, 악한 사단의 나라도 물리적인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볼 수 없어도 영계에는 이미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나라는 부서지게 되었고 무너져 내렸습니다, 왕권은 산산이 조각이 났고, 왕국은 부서졌으며, 사단은 그 보좌에서 이끌어 내어졌고, 그리고 그가 앉았던 자랑스러운 의자는 파괴되었고, 그의 머리는 도끼로 내려치듯이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의해서 박살이 났고, 그의 허리는 하나님께 맞아서 부러졌습니다. 이제 기동조차 할 수 없이 설설 기는 처지가 되었습니다마는 그의 목숨이 아주 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일은 이제 마지막 심판 때에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세워 오셨지만 그 이전의 나라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진정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꿀, 그런 왕 중의 왕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신 즉시로 이분이 십자가로 곧바로 직행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30년 동안을 평범한 집안의 목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참된 인간으로 완전히 성숙해지기까지 사람의 길을 따라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고 그에게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그는 한 사람의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죄인인 세례요한에게 이끌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에 일어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한량없이 부어졌던 것이었습니다. 이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유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도 사람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을 유혹하듯이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하였지만 그는 번번이 패배하였습니다.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셔서 하나님의 이 구원의 사건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요, 이제는 악의 왕국이 무너질 때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권세 있는 말씀이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회개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병이 낫게 되었고 심지어는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어두운 지성에 빛이 들어오며 진리의 참다운 의미가 그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지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면서 놀라운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에 사단은 그동안 견고하던 지상 왕국의 어느 부분이 부서져 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리석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여야 되겠다는 어리석은 뜻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가는 자기의 왕국이 계속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을 충동하고 그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해 달라고 외쳤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은 로마 병정이지만 죽게 내버려 둔 자는 빌라도요, 빌라도가 사형 언도를 내렸으나 그 배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한 반항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또한 도구에 불과했으니 그 배후에는 사단의 면밀한 궤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의 돌이킬 수 없는 뼈아픈 실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광경을 보면서, 자신의 왕국이 부서지는 광경을 보면서 예수를 죽였더니 이번에는 죽이자마자 이번에는 천상에 있는 자기의 공중 왕국이 한 번에 무너지는 이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마치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과 죄를 통하여 공중의 권세가 사단에게 넘어가고 죄가 밀물처럼 들어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의로운 순종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자마자 이제껏 일어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으니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왕국이 단번에 부서져 내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 왕국의 힘이 이 세상에 밀려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주적인 지평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의 증거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보여주셨으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무덤이 터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난 이적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조차도 “정령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 이었도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한 일들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도록 두려움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우주적인 놀라운 지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놀라운 왕국의 파멸의 지평은 교회적 지평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은 교회였습니다. 물론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신약교회와연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 어느 부분들은 연속성을 상실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은 교회의 뿌리였습니다. 이 뿌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끊임없이 이 뿌리에 악을 행함으로 이 교회가 참다운 교회를 미리 보여주는 이 예표적인 역할을 못하게 하는 철저한 방해 공작을 이 사단의 세력이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약속대로 성령을 이 예루살렘에 물 붓듯 부어주셨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생겨날 때부터 이렇게 성령의 충만한 강림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지상에 대한 새로운 통치가 시작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이 땅에 남아있는 졸개들은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줄 알고 썩은 신자, 아직까지 죄 가운데 있는 회심하지 않은 영혼들 속에서 대단한 힘을 발휘하지만, 하지만 그는 이미 망해버린 나라의 포졸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제 하늘은 더 이상 그들을 후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공중의 그의 나라 자체가 파괴되었고 부서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왕 중의 왕인, 그들이 왕 중의 왕처럼 여기고 있는 사탄 자신의 머리가 박살나고 등뼈가 부러져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가 어떻게 그들을 후원한단 말입니까?
그리하여 교회는 충만한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죄의 통치가 끝나고, 죄의 지배가 끝나고 은혜의 통치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의 교회는 아주 불완전한 교회였지만 신약의 교회는 이렇게 성령께서 이 교회적인 지평에서 악의 왕국을 파멸하고 은혜로 통치함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교회와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찬란한 속성들을,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가 교회적인 지평에서, 우주적인 지평에서 철저하게 그렇게 악의 왕국을 파멸했다면 이 땅에 교회 같지 않은 교회, 사단의 공작이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교회의 모습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이 십자가를 통한 악의 왕국의 파멸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입니다. 즉 ‘이미’의 측면과 ‘아직’의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6·25전쟁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서 이 나라가 다시 북진하게 되고 적당한 선에서 전쟁은 휴전하게 되어서 끝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일어났습니까? 지리산에서 갇혀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투항하면 될 텐데 절대로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였습니다. 그래서 민가에 내려와 사람들을 죽이고 양식을 뺏어가고 하는 약탈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자! 이미 6·25전쟁은 끝났죠? 그러나 잔당들이 지리산 곳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군인과 경찰이 동원되어서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작은 전투를 하면서 지리산 토벌을 수행했던 것이죠. 그 승리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3·8선이 끊어지고 더 이상 물자를 북조선에서 공급해주지 않는데 제한된 식량과 총, 탄환을 가지고 남부군이라고 불려 지던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약속된 승리였지만 잘못 전쟁을 하면 아군에게 많은 전사자들이 발생했습니다. 자! 이것보다도 더 훌륭한 비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전쟁은 끝났습니다. 이제는 전쟁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아직까지도 도망하지 못하고 남아있는 졸개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미 사단과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전쟁은 끝났는데 그런데 여기에 그런 빨치산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다닙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은혜를 받고 이 교회의 질서를 따라서 목양 적이고 생명적이고 통치적인 질서를 따라 교회가 한 마음이 되고 은혜 아래 있고 진리의 빛 아래 있으면 그런 것들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신자들이 죄에 눈이 어둡고 자기 아집에 빠져서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고 자기의 욕망대로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런 인간들의 마음만 가서 두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제법 놀라운 일들을 행사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을 공갈하고 협박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어서 그들을 굴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설명이 되었습니까? 만약에 당시 우리가 적절하게 군과 경찰 병력으로 마지막까지 이것을 소탕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철저하게 공비를 소탕했으니까 망정이지 중간 쯤 하다 내버려 두었으면 지리산에서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내려올 수 있으면 대전까지는 안 내려 왔겠습니까? 그들의 목표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북조선의 도움이 없어도 서울까지 올라가 보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요? 이보다 더 정확한 경험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에 의한 은혜의 통치가 사라진 그곳에서만 사단의 지배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지배는 절대적인 지배가 아니에요. 언제든지 은혜로 돌아오면 단번에 허깨비처럼 날아가는 그런 종류의 지배라는 얘기예요.
이러한 십자가에 의한 악의 왕국의 파멸은 개인적인 지평에서도 입증되는 것이죠. 자! 이제 드디어 우리는 복음의 매우 중요한 핵심까지 왔습니다. 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믿기 전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는 우리를 다스리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 임금이 누구였을까요?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가 임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임금은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그 임금은 더 높은 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임금은 여러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임금은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그 꼭두각시는 더 높은 보이지 않는 왕을 섬기는 종이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사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전의 별명은 진노의 자식이요, 사단의 아들들이었습니다. 혹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의 하수인이요, 종이었습니다. 그게 구원받기 전에 여러분들의 신분이었던 것이죠. 신분에서만 사단의 종, 자녀가 아니라 이 마음 안에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스스로 왕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았지만, 그것은 사단이 위에서 대단히 영광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산 줄 알았는데 일평생을 살고 보니까 결국은 사단을 열심히 섬긴 것이었고 그렇게 섬긴 것은 죄였고 그 죄의 삯은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할 때 그 삯은 희랍어로 보통 사람들이 대등한 관계에서 받는 월급이 아니라 고용관계에 있는 군인이 영주에게서 받는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죄에 철저하게 종노릇하며 자기가 임금인줄 알았지만 사실은 더 높은 왕을 섬기면서 삯을 받았는데, 그렇게 최선을 다해 섬겼더니 마지막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영혼의 죽음, 육체의 죽음, 두 죽음이 동시에 그들의 유업이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구원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구원받는 중생과 회심의 사건은 이 왕국이 무너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왕국이 무너진 사건은 중생의 사건이고, 이 왕국이 무너진 것을 알고 새 왕국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역사는 회심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면 주의 깊게 설교를 들은 어떤 분들은 이렇게 날카롭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자! 잠시 전에 목사님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이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회적 부정과거의 사건이었다고 우리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십자가를 통해 우주적인 지평에서 왕국이 파괴되고, 교회적인 지평에서 왕국이 파괴되었다면 이미 그것은 이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회심하기 전에 왜 그렇게 내 마음은 철저하게 어두움의 나라요, 마귀의 왕국이었습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난 십자가 사경회를 통하여 감격적인 복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화목의 교리였죠?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이미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들과의 화목이 하나님 안에서는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여러분들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뜻으로 접혀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영원 전부터 이루어진 화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학에서 영원속에서의 칭의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자! 더 복잡한 신학적인 담론을 제기할 의사는 없습니다마는 좀 더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그 때에 이천 년 후에 구원받을 우리들과도 화목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죠.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와의 화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안 믿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지 못해서 주님을 대적했지, 주님은 우리와 이미 화목을 이루셨다고 하는 이 복음의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들이 감격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주님이 우리와 화목하셨는데도 그 화목이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 누려질 때는 언제였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영접할 때, 그때였습니다. 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의 이 악의 근원이 되는 우주적인 지평의 이 악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그때에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 왕국도 시간 안의 왕국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바로 그 시간 안에 부서져 내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서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성령으로 사역하시는 동안에 이미 사람들에게 깊이 경험되고 자각되고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그렇게 우주적으로 부서진 악의 왕국의 파멸이 우리에게 적용되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실효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믿고 회개하자마자 봇물처럼 터지면서 한 번에 우리 안에 있었던 악의 왕국은 부서져 내려가고 그리스도의 왕국이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왕좌를 차지하고 임금 노릇하던 사단은 박살이 나고 그리하여 나는 눈을 뜨고 일생 내가 자유롭게 살았다고 여겼던 수많은 날들이 사실은 사단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날들인 것을 깨달아서 우리는 죄악 된 세상을 방황하였던 것을 후회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구하였음이라.”고 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악의 왕국의 전형적인 통치였습니다. 이것들은 한 번의 회심과 함께 부서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성령의 법과 생명의 법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율법으로 통치했지만, 죄가 다스렸지만 이제는 은혜로 다스리는 왕궁이 우리 안에 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은 이중적인 승리와 부활의 관계를 보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바로 앞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 우리의 다시 살아난 것과 관련이 있다고 1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라고 말입니다. 즉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죽음은 우리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고 육체까지도 부활할 소망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부활과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실 때의 그 죽음이 내포적 대신의 죽음이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원래는 우리가 담당하고 죽어야 할 십자가인데 주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를 당신 안에 끌어안으시고 우리가 형벌을 받는 대신 우리를 끌어안으시고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당신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당신과 함께 죽은 자가 되어서 죄 값을 치른 자가 되게끔 그렇게 만드신 것이 바로 내포적 대신의 구속적 죽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그리스도를 인정해 주셔서 다시 살리실 때에 그분 안에 내포적으로 안겨 있던 우리들이 모두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던 것이죠. 이렇게 살아난 우주적인 부활의 승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들이 다시 살게 된 사건이었다고 하는 것이죠.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과 함께 내포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다시 살아난 부활의 경험은 두 가지로 집약되는 것이죠.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몸으로 다시 부활하여 사신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었던 것처럼 또한 우리는 지금은 아직 완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끝나고 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날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다시 그와 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이 최종적인 부활에 대하여 소망을 버리지 말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에요. 그게 무엇이냐면 우리의 영혼의 소생이에요. 우리들이 신자라도 죄를 짓고 불순종하면 우리 영혼이 활기를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게 되는데 이것은 영혼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죽음과유사한 상태죠. 활발하게 걸어 다니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죽음과 거리가 멀지만, 눈도 뜨지 못한 채 코에 호스를 꽂고 숨만 쉬고 있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는 죽음에 훨씬 가까운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신자가 되었을 때에도 회복의 소망은 있죠. 그가 그렇게 죽어있는 것 같을 때에는 죄의 힘이, 그리고 죄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사망의 권세가 매우 큰 것처럼 여겨지지만 마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숨에 삼 줄을 끊고 일어났던 삼손처럼 그가 일어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데 그게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진리와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수십 년 동안의 죄 가운데 있어서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 한 편의 말씀을 듣고, 한 절의 성경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는 놀라운 부활의 광경을 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날마다 주와 함께 다시 사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다시 살게 되는 것이죠.
사단이 마지막까지 인간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히든카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고 하는 카드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죽음이 두려워서 죄의 종노릇하던 사람들이었다고 우리의 정체를 밝히 말합니다. 자!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죄에 종노릇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간혹 인간이 자기의 뜻에 굴복하지 않을 때 사단은 죽음이라는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초월해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권세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가 그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그는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그것을 받아서 독자적인 권세를 누리는 것처럼, 죽고 살리는 일이 자기 손에 달린 것처럼 협박을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마치 가짜 공무원이 가짜 신분증을 가지고 힘없는 사람들을 협박하듯이 그렇게 못된 짓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망의 카드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주저앉아서 그 죄에 종노릇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그런 식으로만 성도들, 이 세상의 인간들을 다룬 것은 아니죠. 당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명령을 따르고 자기에게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즐거움과 성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아름다워서 한 번 물고 나면 이것은 낚시 바늘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더 큰 낚시를, 더 큰 낚시를 물려서 이제는 아주 작은 힘으로도 자기 마음대로 그 인간을 움직여서 자기 나라를 위한 하수인을 만드는 일을 하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조는 때가 있고 충성하지 않는 때도 있고 때로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배신의 때도 있지만 그러나 마귀와 그 졸개들은 자기의 대장에게 지사충성합니다. 배신하는 적이 없고 자기의 자리를 떠나는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휴 레티머라고 하는 종교개혁자 중 한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 세상의 사탄보다도 훌륭한 종교적인 일꾼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귀신이 마귀를 배반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게을러서 놀고 있는 게으름뱅이 마귀를 본 적이 있냐고 그는 되물으면서 그리스도인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자기의 고전적인 무기는 죽음에 대한 위협의 카드와 유혹에 대한 낚시 바늘 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람에게 유혹의 미끼를 던졌더니 그들이 그것을 얼른 물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고 마음속에는 그걸 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잠시 생각하는 거죠. 지금 내가 이 유혹의 미끼를 물고 즐거워하려는 이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형벌을 당하셨는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던 이 죄를 내가 다시 지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이 안에서 역사하고 있지만 자기를 오히려 꾸짖으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죠. 네 속에 이 낚시를 물고자 하는 마음이 있단 말이냐? 바로 네가 물으려고 하는 이 죄악의 낚시를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못 박히시고 창에 허리 상하여 죽으셨는데······.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특수한 인간들이 생겨나게 되요. 이 사단으로서는 이제껏 까지는 볼 수 없던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예요. 더군다나 이렇게 자기를 죽이는 일들이 구약에서는 그냥 결심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게 아니라 이제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이는 역사가 일어난 거예요. 그 자기가 죽어갈수록, 그 신자를 향해 디뎌야할 사단의 발판은 계속 밀려나면서 미끄러지면서 도저히 그 성도의 마음에 오를 수 없는 상태가 되요. 그렇게 해서 자아가 죽고 나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놀라운 경험이 그 영혼 안에서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거예요. 혈기가 솟아날 때, 정욕이 솟아날 때, 미움이 뼈에 사무칠 때, 복수하고자 하는 감정이 혀끝에까지 밀려올 때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피 뭍은 미움의 칼을 땅바닥에 던지고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지체를 미워했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이 다른 것이 아닌 나의 죄 때문에 못 박히셨는데 난 지금 그 죄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의 자아를 죽여주시옵소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나를 죽게 하옵소서. 그렇게 해서 죽어가는 그 놀라운 인간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뿐만이 아니죠. 이제는 진짜 육체의 죽음의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네가 그렇게 불순종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카드 말이에요. 그래서 사단의 권세라는 시위에 사망이라는 화살을 먹여서 저격수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을 겨누며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그들은 놀랍게 온 마음으로 그 죽음을 향해 팔을 벌리며 “죽음이여, 어서 오라. 나에게 죽음은 영광의 부활로 들어가는 문일 뿐이로구나.” 외치는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죽음의 카드로 위협을 했더니 여기저기서 신앙의 고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사명,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반문하면서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 영광을 그리워하고 그 죽음을 통과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로마시대 때 지독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니까 상황을 보면서 황제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옥에 가둬라.” 옥에 가두면 그들은 더 기뻐합니다. 기도할 시간을 가졌다고 말입니다. “능지처참을 해라.” 그들은 더 좋아합니다. 예수를 위해서 이렇게 고난을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죽여 버려라.” 그래도 그들은 춤을 춥니다. 이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영광의 세계로 가자고 말입니다. “그래, 어찌해야 되겠느냐?” “어쩔 수가 없나이다. 그들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다 준 승리였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사죄를 도입하였는데 이 사죄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승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첫 째는 오늘 성경에 의하면 의문의 증서를 도말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의문의 증서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손으로 쓴 율법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바로 율법에 나오는 모든 규례와 규칙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선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은 선한 것이었지만 인간이 이것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선한 것이었지만 인간이 이것을 지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지킬 수 없는 그 모든 규칙들을 통해서 인간이 마주 대하게 되는 것은 끊임없이 죄를 짓는 자신, 그리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한 송사 밖에는 이것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이 의문의 증서를 모두 도말해 버리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상상을 여러분들이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 여러분들이 악한 세력들이 준동하는 더러운 나라에서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전사처럼 싸우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을 다닌다고 생각해 봅시다. 드디어 그 나라에서는 첩자까지 파송하고 자객까지 풀었습니다. 그래서 집요하게 여러분들이 도망 다니는 나라를 향하여 추격을 계속 하였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여러분들이 범법자이기 때문에 잡아오라는 독재자의 도장 찍힌 체포영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도망을 다니던 어느 날 신문 지상을 통해서 그 나라가 망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한 군주가 그 나라를 되찾아 왕권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들을 추격하며 나섰던 그 저격수나 체포자의 체포 영장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의문에 쓴 증서들은 효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이제는 누구든지 구약의 그 복잡한 규례를 거쳐서 제사를 드리고 삶의 규칙으로 삼지 않아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한 번에 그가 찢으신 보혈의 휘장을 지나, 그가 뿌리신 보혈의 핏 길을 걸어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그 영광스러운 승리의 첫 부분인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승리는 바로 정사와 권세를 무장해제 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종종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많은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적게는 악몽에 시달리는 정신 현상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기타 등등의 많은 영적인 괴롭힘을 당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아주 심해서 엄청난 힘과 권세를 가지고 죽일 듯이 여러분들을 향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경험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는 이 설교의 말씀이 양약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말고 그 어두움 속에서 나오기 바랍니다. 양지에는 양지에 적합한 식물들이 살고 음지에는 음지에 적합한 식물이 삽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마귀의 세력들이 여러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들이 스스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훌륭한 발판과 여지들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렇게 되는 것이죠. 마귀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 밝은 진리의 빛,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복종,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성숙한 생활, 이런 것이 있는 곳을 매우 혐오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그가 생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찬란하게 내리쬐는 오뉴월 햇빛 아래에서 지렁이가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는 돌아다니며 수박 장사가 수박을 두드리듯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드려 봅니다. 그리고 충분히 골았을 때에 더 세게 두드립니다. 안 열어주면 이변이 일어날 것처럼 협박을 하며 두드리는 것이죠.
제가 직장생활 할 땐데 아주 고위직에 오르신 관료였어요. 그분이 한 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초청을 했더니 오셔서 간증을 해주셨어요. 그때 참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분이 자신의 간증을 하는데 정말 특이했어요. 시골에서 집이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일곱 살이 될 때 까지 학교를 못 다녔대요. 그리고 몸도 약해서 늘 시름시름 앓았는데, 간질병이었대요. 그런데 선교사가 전도를 했어요. 이 청년이 너무 불쌍하니까 선교사가 데려다가 밥도 먹이고 같이 기도도 하고 성경을 가르쳐 주다가 “너 꿈이 뭐냐?” 그랬더니 “나는 외교관이 되고 싶어요.” 그 시골에서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아이가 외교관이 될 가능성은 없겠지요. 그래도 이 선교사가 성경을 가르쳐 주었대요. 그래서 그때 RSV 성경을 주면서 영어를 하나씩 가르쳐 주었는데, 이 소년이 너무 행복하고 좋아서 성경을 매일 품에 안고 외운 거예요. 그런데 이 간질병이 있었어요. 이 간질이 오는데 오는 게 느껴진대요. 쭈욱 느껴지고 어느 한 순간 왔다고 느껴질 때에 의식의 필름이 끊기면서 쓰러지면서 거품을 토하고 게거품을 물면서 소리를 지르고 벌벌벌 떠는 거예요. 친구들이고 뭐고 다 도망가지요. 한번만 그러고 나면 사람들이 그를 지목해서 “저건 병신이다.” 그러는 거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는데 겨울에 날도 추우니까 처마 끝에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는데 간질이 확 하고 오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신앙이 들어가 있었어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어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나 이 간질에 다신 시달리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계속 기도를 하려고 했는데 더 이상 기도를 할 줄을 몰라요.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고 외우기 시작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간절히 기도를 했어요. 간질이 오다가 확 눈 녹듯이 녹아내리면서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경험했어요. 그게 자기가 경험한 마지막 간질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람이 그 후에 후학의 열정을 불태워서 결국은 고등고시에 합격하고 결국은 고위관료가 되었어요. 외교부에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해서 외국에 나아가서 끊임없이 조약을 맺으며 이렇게 국제관계를 하는 전문가가 되었어요. 그분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자기가 외국에 나가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고 어디 제대로 된 학원도 다녀본 적이 없는데 외국의 높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한 결 같이 자기와 나중에 사석에서 이야기 한다는 거예요. “당신 도대체 영어가 한국 사람이면서도 품격이 높으냐?” 당연하지. 성경을 외웠으니까. 당신 영어는 참 품격이 있다고 한 대요. 이렇게 신자들을 향해 어떤 영적인 세력들이 위협하고 할 때에 두려워 떨고 그것이 엄청난 것인 것처럼 생각하는 그 두려움이 발판이 되는 거예요. 밀고 들어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에게 이런 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를 독점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이 일들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이 일들은 어떤 한 사람이 힘을 가지고 하는 그 일이 아니라 이미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그리스도 예수의 왕국의 파멸시키신 사건들을 통해서 이루신 것이에요. 물론 그 사람이 경건하고 깊은 은혜 속에서 사는 사람이면 더 강력한 힘이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이에요. “나는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네가 감히 나의 문을 두드리느냐? 나의 영혼과 나의 마음을 향해서는 네게 추호의 분깃도 없다. 넌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네 나라는 부서졌고 너도 죽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결국은 다시 우리는 우리의 자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철저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시 살았고 우리는 주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또 죽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들은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이 큰 십자가의 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의 수많은 문제들을 이 임마누엘의 샘에서 해결하는 대신 이 세상의 흙탕물 속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죽음의 권세가 두려워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를 지시고 대신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 앞에서 그분이 이미 무장해제 시키신 정사와 권세들의 권세를 담대히 맞아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꺾고 이기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처럼 우리의 모든 삶을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이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들은 이 십자가를 깊이 사랑하고 무엇보다도 이 십자가 때문에 내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의 작시자인 J. Newton목사님은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전에 노예상인이었는데 은혜를 받고 회심한 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었던 것이죠. 노년에 치매기가 찾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목사님 기억이 점점 쇠퇴해 지십니다.” 그러자 Newton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내 기억이 아무리 쇠퇴하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두 가지 사실만은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한 때 흉악한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 이 두 가지는 내가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진 매일매일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주님은 나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불러 주셨지만 그러나 사실 나는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이 손으로 피를 묻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죄인이고 이 팔로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가 흐르게 하였던 죄인입니다. 산 것은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에 묶여서 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고백해야 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주님을 위해서 손해를 보는 것 같을 때,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받는 아픔이 크다고 느껴질 때 주님이 세워주신 사명의 길이 힘겹게 느껴질 때마다 매일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입니다. “주님이 그 순결한 몸으로 보좌에서 내려오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죄인처럼 죽으셔서 그 죽음으로 나를 사신 바로 그날, 그 사랑을 안 그날, 나는 이제 내 인생을 주님께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나에게 드릴 생명이 없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숨질 때 되도록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영광을 전하고, 종노릇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이 티끌만한 유익이라도 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광이 되겠습니까?
십자가와 하나님의 계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