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함께 못 박힘은
(201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1 (2012.09.02 주일오전설교)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2 (2012.09.16 주일오전설교)
목 차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3 (2012.09.23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4 (2012.10.07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 박힘은5 (2012.10.21 주일오전설교)
1. 죄에 종노릇 하지 말라(롬6:6-7) 2012.9.2 주일오전 1
2. 십자가에 못 박은 것(갈5:24) 2012.9.16 주일오전 8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6 (2012.10.28 주일오전설교)
3. 성령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갈5:25) 2012.9.23 주일오전 18
4. 상속자의 영광과 의무(롬8:17) 2012.10.7 주일오전 27
예수와 함께 못 박힘은 7 (2012.11.04 주일오전설교)
5.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1:24) 2012.10.21 주일오전 41
6. 교회의 일꾼되게 하심(골1:25) 2012.10.28 주일오전 52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8 (2012.11.25 주일오전설교)
7. 보이지 않는 교회의 건축(엡2:22) 2012.11.4 주일오전 66
8.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1(갈2:20) 2012.11.25 주일오전 81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9 (2012.12.02 주일오전설교)
9.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2(갈2:20) 2012.12.2 주일오전 91
10. 우리를 하늘에 앉히심은(엠2:7) 2012.12.9 주일오전 100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1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1 (2012.09.02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2 (2012.09.16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3 (2012.09.23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4 (2012.10.07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 박힘은5 (2012.10.21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6 (2012.10.28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 박힘은 7 (2012.11.04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8 (2012.11.25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9 (2012.12.02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10 (2012.12.09 주일오전설교)
예수와함께못박힘은(1) 2012. 09. 02 주일오전예배
죄에 종노릇 하지 말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I. 본문해설
- 3, 4장: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룸
–5장: 외롭다 함을 받은 자의 삶
II.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A. 죄를 용서해주심
- 인간의 무한한 죄의 크기
–그리스도의 무한한 의와 공로
B. 의롭다 해주심
1. 명목상의 칭의가 아님
2. 죄의 능력과 권세에서 벗어남
III. 십자가로 구원하심은
- 죄의 몸을 죽게 하심
1. 여전히 남은 죄의 몸
2. 우리 죄의 몸을 죽임
3. 죄에 종노릇하지 말게 하심
IV. 결론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2) 2012. 9. 16. 주일 낮예배
<십자가에 못 박은 것>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 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I. 본문해설
- 서론, 복음 신앙의 변질1/ 칭의, 오직 믿음으로써2
- 예수, 유일한 중보자임3/ 복음, 구원하시는 방법4
- 자유, 성령 안에서의 삶5
II. 신자는 그리스도의 소유임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A. 그리스도의 소유임
- 소유의 두 방식
- 자유를 통한 종 됨, 종 됨 통한 자유함
B. 소유주 ‘그리스도 예수’
-천상의 성자: 그리스도
-지상의 인간: 예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히 4:15)
III. 십자가에 함께 못 박은 것
A. 신자의 ‘육체’
1. ‘육체’(σάρκα)의 의미
- 중립적 의미(요 1:14)
- 죄 된 육체(벧전 2:11)
- 죄를 실행하는 도구로서의 육체
- 새사람의 성품과 옛 사람의 성품
2. 십자가에 못 박은 방식
- 그리스도의 대신적 죽음
- 그리스도의 내포적 죽음
- 육체를 따라 삶: 원리적 모순
B. ‘정욕과 탐심’
1. ‘정욕’(πάθημα)
-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정염”
- ‘정욕’: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
- 자기를 주인 삼는 마음의 힘
- 회심할 때 버렸던 바로 그것.
2. ‘탐심’(ἐπιθυμίαις)
- 자기본위적 삶의 실행 도구로서의 ‘욕망’
- caritas←은혜, pathe ←탐심
III.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 자기본위적 삶으로 행복불가
-죄의 길에서 돌이킴, 약할 때 의지함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도우심
IV. 결론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3) 2012. 9. 23. 주일 낮예배
<성령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I. 본문해설
II.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
-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고 있다면’
A. 십자가 죽음과 성령주심
- 십자가 죽음의 양면성
- 적용: 축복과 저주(마3:11“성령불로 세례주심”)
- 불의 저주는 당신이 받으심
- 성령으로 우리를 세례주심
B. 성령을 통한 신자의 연합
1. 구원의 영적측면
- 성령을 통한 신자의 연합
-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는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
- 그리스도와의 영적연합: 신자들과의 연합 안에서 구체화되게 하심
2. 성령과 실제적 연합
- 그리스도와의 엽합: 원리적 연합+실제적 연합
–실제적 연합의 본질:사랑(성령)
III.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삶
- ‘또한 성령 안에서 행하자’
A.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삶
- 인격적이신 성령님
- 신자에게 하나님의 성품, 지성, 감정, 의지를 전달하심
- 성령을 근심케하지말라(그 안에서 인치심을 받음-엡4:30)
B. 성령을 따라 사는 삶
1. 계명을 따라 살아감
- 성령이 좋아하는 마음의 풍취
- 순종+지식+죄죽임+사랑
2.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심
- “함께 장사되었나니..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하심이라”(롬6:4)
- 인생의 근본문제: 영적생명
–생명의 결핍(영적죽음): 악한행실을 생산함
–육체의 생명은 그냥 살아있음, 영적생명은 선을 향해 살아있음
IV. 적용과 결론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4) 2012. 10. 07. 주일 낮예배
<상속자의 영광과 의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I. 본문해설
- 문맥: 생명의 법의 승리
- 조건: 죄를 죽이는 삶
- 증언: 하나님의 자녀됨
II. 구원의 양면적 성격
A. 하나님의 자녀가 됨
- 구원: 한가족으로 부르심
- 질서: 생명, 통치, 사랑
- 사랑: 가족-교회⇒세상
B. 하나님의 상속자가 됨
- 자녀됨: 자유, 명분, 담대함, 징계
1. 법적 권리를 가짐
- 은혜로 주신 합법적 특권들
- 외적지위+내적자유
- 상속하는 것들: 언약, 생명, 은혜
2.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함
-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
(συγκληρονόμοι δὲ Χριστοῦ)
–그리스도와 더불어 상속자가 됨
- 그리스도의 모든 누림에 동참함
–영광을 누리게 하심: 현재+미래
III. 고난과 영광에 참여함
- 신자를 위해 예비된 하늘영광
–하나님을 위해 교회와 세상을 섬김
-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함
- 고난받게 하심으로 예수 죽음 경험
- 은혜받게 하심으로 예수 생명 경험
- 그의 큰 영광에 참여하게 하심
IV. 적용과 결론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5) 2012. 10. 21. 주일 낮예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골 1:24)
I. 본문해설
- 로마의 1차 투옥기간 61겨울-63봄
- 골로새에 들어온 이단: 율법적 의식주의, 금욕주의, 천사숭배, 영지주의
II.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A. 고백적 측면
1. 모든 구원의 길 포기
2. 절대적 의존의 마음
3. 그리스도의 주되심
4. 무제한의 순종 헌신
B. 신령적 측면
1.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힘
2.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함
3.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
III. 교회와 함께 살게 하심은
A. 지체들을 위한 고난
- τοῖς παθήμασιν ὑπὲρ ὑμῶ
: “너희 때문에 겪는 고통들을”
- 교회를 통한 생명과 섬김: 운명
- 교회의 섬김: 하나님, 교회, 세상
- 지체들을 섬김: 온전한 몸을 이룸
B.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 다 이루신 고난과 남은 고난
- 홀로 당한 고난과 참여하게 한 고난
- 교회를 위하여 남기신 고난
- 주의 고난을 남겨두신 지혜(의존+은혜+지식)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알게하심
- 그의 고난을 나의 육체에 채움(몸으로 수고함+정욕을 죽임)
-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의 신비
IV. 적용과 결론
- 예수와 함께 못 박히게 하심
–다시는 육신을 위해 살지 않음
–교회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함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6) 2012. 10. 28. 주일 낮예배
<교회의 일꾼되게 하심>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골 1:25)
I. 본문해설
II. 교회의 지체됨의 세 지평
A. 유기적 생명
- 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심
- 그 생명으로 사랑하게 함
- 예수의 생명, 성령의 은혜
- 생명누림과 생명잃음
B. 유기적 통치
- 그 생명은 신적의지를 따라 살도록 주신것임
: 교회의 머리이심
- 신적의지는 율법과 복음 안에서 계시되었음
- 그것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통치하시는 방법
: 율법과 양심, 복음과 은혜, 교회를 통한 통치
C. 유기적 봉사
- 천상과 지상세계가 하나님과 화목하길 원하심(20)
- 이 일을 위해 교회를 당신의 몸처럼 사용고자함(성화의 필요성)
- 개교회와 보편교회의 지평에서
III. 교회의 일꾼을 삼으심
- 사도만이 아닌 모든 성도를 일꾼 삼으심
A. 교회의 일꾼이 됨: διάκονος
- 예수 생명 누리는 자로 일꾼삼으심
: 은혜와 섬김⇒교회의지체됨
- 식탁에서 섬기는 자: 노예로 섬김
B. 하나님의 청지기직을 따라
: κατὰ τὴν οἰκονομίαν τοῦ θεοῦ
- 교회는 자신의 소유가 아님
- 섬김은 총체적이고 유기적임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임
- 충성을 기대하며 직분을 주심(고전4:2)
C.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려고
- πληρῶσαι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υ
- ‘가득차게 하다, 완성하다’
- 그말씀: ‘그일’ 곧 세계의 완성을 향한 하나님의 감취어진 경륜
- 그 일의 핵심: 인간을 구원하심
D. ‘너희를 위하여’: εἰς ὑμᾶς
- 그 경륜의 성취에 교회가 참여함
- 성도가 성숙한 것만큼 봉사할 수 있음
- 개인의 온전함이 곧 교회의 온전함
- 개인의 성화와 섬김 성례전적 봉헌
- 구원받은 모든 성도의 거룩한 소명
IV. 적용과 결론
-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우리를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심
–교회의 지체됨은 그 경륜을 위한 일꾼이 된 것임
–그 경륜은 참사람이 되고 세계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
–그 일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 가치를 따라 살아가게 함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며 교회를 향한 하나님 사랑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심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7) 2012. 11. 04. 주일 낮예배
<보이지 않는 교회의 건축>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2)
I. 본문해설
- 신령한복(1), 죄인됨+십자가(2)
- 외인X, 하나님의 가족
- 사도,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
-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교회
II.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A. 보이는 교회
- 신앙고백과 행위
- 말씀과 성찬, 세례
- 외형적인 조직과 정치
B. 보이지 않는 교회
-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체
- 교회의 통치의 영적측면
III. 지어진 교회와 지어져가는 교회
A. 지어진 교회
B. 지어져 가는 교회
- 예정된 구원의 수를 채워감
- 구원받은 신자들이 온전한 몸 이룸
-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
-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
IV.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감
A. 모두 함께 지어져 감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비연합
-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함께
- 개인의 성화와 교회적 성숙
B. 성령 안에서 지어져 감
- 모퉁이돌인 예수 그리스도
-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 성령
- 성령의 풍취: 진리+죄죽임+순종
C.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감
- εἰς κατοικητήριον: 처소 속으로
- 하나님 지성 속의 처소를 모본삼음
- 그 처소 속을 향해 지어져 가게 하심
-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이 거하실 곳
- 흠 없고 깨끗함+거룩한 영의 충만
- 처소: 기쁨+동행+교통+사역
V. 적용과 결론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8) 2012. 11. 25. 주일 낮예배
<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1)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갈 2:20상)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
A. 핍박자 사울의 회심: 대속의 교리
1. 사울의 편견
2. 사울의 고민
- 하나님의 징벌로 죽은 그리스도
- 하나님의 인정으로 다시 살아남
B. 대속 교리의 핵심: 못 박힘
- 우리를 위한 죽으심
- 이익+대신+대표
- 내포적 대신의 형벌적 죽음
III. 우리 안에 함께 사시려 함
A. 본문의 주해
- "내가 그리스도와‥"(19절에 속함)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다"(KJV)
- "함께 못 박혔나니"(συνεσταύρωμαι)=I has been co-crucified
B. 그리스도가 사시는 방식
1. “살아 있음”: 목적이 있는 활동
2.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적 연합
- 그리스도의 영적 몸인 교회
–그리스도와 교회+교회와 신자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 성령의 교통
3. 인격을 가지신 성령
–그리스도의 지성과 의지를 전달하심
–사랑으로 감화하여 순종하게 하심
C.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실제적인 삶을 위해 죽으심
- 구체적인 삶으로 나타나시려함
- 대속을 통해 우리 몸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여김(고전3:16)
- 삶으로 열매를 맺어 영광을 돌림
IV. 적용과 결론
- 구체적 실천이 없는 무신론적 생활
- 대속이 구체적 생활로 나타나야함
-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신자의 삶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9) 2012. 12. 02. 주일 낮예배
<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2) >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하)
I. 본문해설
II. 육체 가운데 사는 신자
A. 모순된 삶의 두 원리
1.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
2. 육체 가운데 살아감
- 중립적 의미로서 육체
- 구원의 대상으로서 육체
B. 육체 가운데 살게 하심은
1. 실제적 삶을 원하심
- 현존으로서 빛된 삶을 살아감
- 그리스도인됨: 무제한의 순종과 헌신에 자신을 바침
- 회심의 보존: 지식+경험
2. 하나님 의지하게 하심
- 그리스도는 언제나 계심
- 육체는 항상 그 분을 따르진 않음
- 새사람 ⇔ 옛사람의 갈등
III. 그리스도가 사시는 방식
- 은혜의 필요: 절대 의존을 배움
A.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함
-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심
- 신자 자신: 함께 못 박혀 죽음
-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이룸
- 실제적 연합과 그리스도의 사심
B.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함
- 독생자 죽음의 동인: 하나님 사랑
- 구원의 계획: 생명+사랑으로 삶
- 하나님 나라의 종자씨로 살게 함
C. 믿음 안에서 살아감
- 믿음의 대상 그리스도: 경외
-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를 의존함
- 구원의 길, 절대선, 의존, 순종
- 순종하는 만큼 성령이 함께하심
IV. 적용과 결론
- 태만하고 지리한 신앙생활을 경고
-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린 마음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 사람들
- 첫 회심의 은혜로 돌아오라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10)끝. 2012. 12. 09. 창립기념 주일 낮예배
< 우리를 하늘에 앉히심은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엡 2:7)
I. 본문해설
- 창조와 구속 사이에 있는 교회
-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가 됨
II. 신자와 함께하신 그리스도
A. 내포적 대신의 4중 사역
- 죽으심(갈2:20), 살리심, 부활, 하늘 앉히심
- 안식(히4:10), 영광(계4:10), 심판(14:16), 구원(7:10)
- 예수 안에 함께 있게 하심
- 죽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완성해 가심
B.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심
1. 신적 사랑과 계획을 알게 함
- 십자가는 그 사랑과 계획의 핵심
2. 구원 가치와 행복을 드러냄
- 생명을 통해: 전도, 구원, 회심
- 풍성한 삶 통해: 회심은혜 유지
- 인격+생활: 하나님, 교회, 세상
III. 열린교회를 세우신 하나님
A.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 말씀으로 깨우심(마9:35-38)
- “찢어지는 마음”에로 부르심
- 일평생 품어야 할 목양자의 마음
B. 고생하며 기진하는 무리들
-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들, 죄의 힘
- 궁극적 문제 해결해 주도록 부르심
- 생명+풍성한 삶의 결핍: ‘고독사’
- 예수 형상 닮아가며 그의 몸을 이룸
IV. 적용과 결론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1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1 (2012.09.02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2 (2012.09.16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3 (2012.09.23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4 (2012.10.07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 박힘은5 (2012.10.21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6 (2012.10.28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 박힘은 7 (2012.11.04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8 (2012.11.25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9 (2012.12.02 주일오전설교)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10 (2012.12.09 주일오전설교)
1.죄에 종 노릇하지 말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본문은 로마서 6장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소위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루었습니다. 우리에게 한 새로운 의가 나타났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의라고 시작되는 로마서 3장 21절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없는 우리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얻는 의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사도가 늘 그러하듯이 5장에서는 그렇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천국 백성에 합당한 삶은 우리 평범한 죄인들이 다다르기 높은 수준의 삶이었습니다마는 사도는 6장에서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신자의 생활의 복음적인 원리를 소개함으로써 이 모든 궁금증의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죄의 몸은 죽고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원리를 설명한 것입니다.
II.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
우리는 제일 먼저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백성들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이 삶이 근거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신 것일까요?
A. 죄를 용서해주심
첫째는 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는 무한한 크기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불순종함으로 더럽혔고, 온 세계의 죄의 영향력이 물밀듯이 들어오게 만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인간들과의 관계도 깨지고,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도 깨뜨려져 이제는 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관리자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가꿀 수 있는 지위를 상당부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하나님과 원수 된 처지에서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없으면 죽을 때까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하나님께 반역할 수밖에 없고,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인간의 크기의 죄악을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해 주셨습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구원받을 인류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치루사 우리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는 이 구원의 용서가 거저 받은 용서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것이 더없이 무한한 대가를 치루고 우리에게 주신 용서인 것입니다.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한때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추호도 믿지 않는 사울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야 말로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어리석은 것이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미혹하는 것은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모순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틀림없이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저주에 따라 죽은 것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습니다. 남에게 들은 것이라면 부인할 수 있겠지만 자신이 직접 그 분을 뵈옵고 또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커다란 혼란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여 저주하신 것이고, 다시 부활하셨다면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고 인정한 것인데 하나님이 인정하실 사람이라면 어찌 십자가에서 저주 하셨고, 저주하신 사람이면 어찌 용서해 주셨는지 궁금했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저주를 받으신 것도 사실이었고, 다시 사신 것은 자기가 직접 목격했으니 더욱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대속의 교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구원받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예수를 인정하사 더 사랑하여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서는 어두운 지성의 천장이 찢어지면서 찬란한 빛이 들어왔고, 그 눈부신 빛은 이 사람의 영혼을 가득 채워 이제까지 유대교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둠속에 있었던 자신의 모든 지성의 세계를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형벌 받음으로 이루신 그 무한한 의와 공로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인가를 한 줄로 이야기한다면 아주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그 구원의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무한대의 순종으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다운 모든 삶의 비결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고, 나는 그 분 앞에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우리가 치매에 걸려 우리의 가족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때가 온다 할지라도 결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우리는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존 오웬 목사님이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신자의 부패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 구원받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매일매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습니다. 왜?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매일 매일 신비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니었더라면 죄 가운데서 모질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분께 반항하며 살다가 진노가운데 심판을 받았을 이 막되고 더러운 인간을 위해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하는 깊은 감격 속에서 주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내게는 과중한 것이었고,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리든지 내게는 너무 많이 주님을 위해 희생한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 속에서 사는 그 단 한 줄의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 타고 값싼 복음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이 완전한 복음은 우리에게 너무 시대에 뒤지는 거친 지성적인 폭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맙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람의 사고를 좇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음을 믿으십시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우리가 살아있는 날 동안 단 한순간도 너무나 당연한 사건이 될 수 없도록 우리가 그렇게 이 십자가의 진리 아래에서 삽시다.
B. 의롭다 해주심
둘째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의롭다 해주실 수 있는 근거를 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지난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해 주시기만 했다면 그러면 도대체 그 이후의 삶은 우리들이 다시는 죄 짓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겠노라고 우리가 보증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칭의는 명목적인 칭의가 아닙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법정적 칭의라고 하는데 죄가 있지만 법정에서 죄가 없다고 선언을 해 줌으로 이제는 무죄로 방면된 것입니다. 예전에 죄를 지은 기록은 있지만 더 이상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그것이 바로 법정적인 칭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칭의에 대한 반쪽의 설명일 뿐입니다. 이 칭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법정적으로 의롭다 선언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놀라운 변화를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외적으로만 의롭다고 바깥에서 선언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죽었던 상태에서 살아나게 하시고, 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는 믿음의 성향, 그리고 사랑의 성향을 우리에게 새롭게 주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매일매일 은혜를 받을 때에 이 성향이 강해지도록 만들어 주셔서 그래서 죄의 능력과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예수님이 우리의 지난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도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 합당하도록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근거를 우리 안에 놀라운 변화를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는 여러분이 불순종하고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명분은 마귀의 자식이었고,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은 죄의 사슬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것을 벗어나서 하나님이 구원받은 자에게 합당한 삶을 아무리 살려고 몸부림쳐도 그렇게 몸부림치는 사람도 없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십자가의 사실을 믿고 주님께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번만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의 방편들을 주셨습니다. 마음은 찢어질 것 같은 슬픔과 괴로움, 죄를 지은 자책감과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길이 없는 것처럼 절망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 교회에 와서 하루 만에 새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오는 그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여 이제까지도 믿음 안에 용사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의롭다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들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립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가 낙심하고 절망하여 이 땅을 향했던 우리의 눈을 들어 천상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그러지고 꺾어졌던 것들이 다시 피어납니다.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그럴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을 때 이 예배 속에서 깨달은 주님의 말씀과 은혜는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여 예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다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나의 힘으로는 아무리 도전해도 할 수 없었던 그것들을 주님의 은혜는 그것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두운 우리의 지성을 하나님의 은혜의 빛으로 밝혀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변화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의 근거를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영원토록 우리의 찬송의 제목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죄는 티끌만큼도 차마 보지 못하시는 완전히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 주님의 이름을 짓밟고 더럽힌 더러운 똥과 같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현재적으로 감격하는 마음이 없이는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없고,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 할 수 없습니다.
III. 십자가로 구원하심은
그러면 주님이 이 십자가에서 이렇게 이루셨다면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일까요? 천국 백성으로서의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삶을 살게 만드는 영적인 원리를 어떻게 우리에게 활용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일까요? 성경은 오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 이거는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의롭다 함을 얻게끔 근거를 마련해 주셨다고 했는데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말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뒤집으면 그렇게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여전히 죄의 종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죄에서 용서해 주셨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하셨고, 우리를 의롭다 여김 받게 해 주셨고,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얽어매고 죄의 사슬들을 끊어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게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를 완전히 없애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몸이라고 칭하는 이 옛 사람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새 사람은 운명적으로 옛 사람을 짊어지고 일평생 살 수 밖에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새 사람은 의롭다 여겨 주시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신 그 영적인 본성을 뜻하는 것이고, 옛 사람은 죄 가운데 살던 옛 사람의 본성을 뜻합니다. 옛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 사랑으로 향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께 대적하려고 하는 사람이고 새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려고 하는 성품입니다. 이 죄의 몸이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 남아있는 죄의 몸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매우 나쁜 것이지만, 그러나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매우 좋은 것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안에,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깊이 감격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도 하나님이 이 십자가에 대한 감격을 주고 계신데 우리가 이 십자가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고 눈물을 흘릴 때 우리가 그 십자가가 왜 그렇게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는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라는 것이 떠오를 수가 없어요. 십자가는 바로 자기의 죄를 위해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십자가고, 하나님의 은혜는 2000년 전에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날 마음속으로 데려와 바로 이 예수가 지금 너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려 죽으셨다고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십자가를 깨닫는다고 말할 수 없지만 십자가에 대한 깊은 감격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는 죄에 대한 인식을 사용하여 감격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 풍성하게 나타나느니라”고 말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을 수 있느냐 그럴 수는 없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 건강한 사람들의 몸에도 일반적으로 대부분 암세포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별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10만개까지는 괜찮대요. 근데 그 10만개가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하면 이게 이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일병 장수라는 말 들어봤습니까? 더 쉽게 말하면 골골 80입니다. 씩씩 60입니다. 씩씩하게 살다가 덜컥하고 죽어요. 과로로. 골골하는 사람들은 뭘 해도 모든 힘을 다하지 않아요. 항상 골골하면서 살기가 가늘고 길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남은 죄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겸손하게 해요. 제리 토마스라고 하는 사람이 책을 썼는데 우리 사상하고는 꼭 맞는 거 같지는 않는데 신학교 학생이었어요. 매점에 문을 닫았다는가, 어쨌든 해서 기숙사인가 어딘가 어쨌든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음료수를 사려면 그 슈퍼마켓에 가야 되요. 그래서 갔더니 음료수를 사 가지고 오면 되는데 계산대 앞에 아주 야한 누드집이 비치가 되어 있는데 자꾸 눈길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 때마다 유혹을 받아요. 어느 날 그 사람이 목이 말라서 목구멍이 터져도 내가 그 놈의 가게는 절대 안 간다 그러고 결심을 하고 한 2주 동안 지켰대요. 그래서 기도가 잘 될 줄 알았더니 그래도 기도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안 되나 그러고 생각해 보았더니 첫 번째는 그 그림에 유혹을 받아서 기도가 안 되는 거고, 두 번째는 내가 그것을 이겼다고 생각하니까 그것 때문에 기도가 안 됩니다. 이거는 존 오웬 목사님도 이미 말했어요. 뭐냐 하면 복음 이외에는, 우리 안에 있는 복음과 성령 이외에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일 수 없고 혹시 우리가 그것을 누르면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눌렀다고 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예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막 이렇게 마음이 녹아내리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일어날 수 없는 정신의 작용들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이 죄를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이 죄는 무시하기에는 상당한 잠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절망하기에는 이 죄에 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기도록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무한대로 크기 때문에 사실은 그렇게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이렇게 나와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에 참여해야 합니다. 기도에 열심히 참여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그리고 예배에 늘 참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무엇보다도 골방에서 마음을 쏟으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토하며 간절히 빌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장 연약한 신자라도 여러분을 능히 이기며 살 수 있는 큰 은혜의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어떤 때에는 우리의 마음을 우리 스스로 다스릴 수 없을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때려 주셔서 그래서 변화시키시고 그 은혜로 우리에게 선한 의지를 갖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여전히 남은 우리 죄의 몸을 날마다 쳐서 복종시키며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 그런 기쁨 경험해 보셨습니까?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깨뜨려지고 포기하고 죽는 것이 형벌과 같지만 사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일평생 주인 삼으며 살아오던 삶을 버려두고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를 붙들고 나를 깨뜨리는 그 순간 한편으로는 고통스럽지만 이 세상에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신령한 하늘의 기쁨과 희락이 그 사람 마음속에만 강력하게 밀려옵니다. 그 환희는 무엇으로도 알 수 없는 그래서 이상하게 가슴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고 눈물은 폭포수처럼 흐르는데도 가슴 속에서는 그 찢어진 마음 사이로 기쁨의 샘이 솟아나는 경험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이 있는 거기에 생명을 주시고, 자기가 깨뜨려지는 그곳에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구원하심은 이렇게 매일매일 나는 죽고 주님은 사시고,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다시 불끈 일어서서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 큰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주님이 바라보실 때 그 분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예전에는 참 사람으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막 살았지만 이제는 가르쳐 주었는데도 안사는 사람들, 은근한 자기 사랑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주님은 붙들지 않는 사람들,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때문에 할 수 없이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거지의 신앙생활을 하는 그 속에서 행복하십니까? 기쁘십니까? 앞으로도 그런 삶이 일평생 지속된다면 여러분은 죽을 때에 정말 예수 믿기 잘했다고 하나님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행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행복하시면 여러분 가족은 여러분이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행복한 자는 단 하나 뿐입니다. 마귀 하나만 행복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고 이렇게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 중 주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어떤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여러분이 잘못해서 스스로 얻은 것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그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십자가의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것 이외에 무슨 못된 일을 여러분에게 하셨습니까? 그런데 왜 여러분은 제대로 예수 믿지 않는 것입니까? 왜 여러분은 반쯤 순종하고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살아버리는 것입니까? 왜 여러분은 여전히 죄에 종노릇해서 십자가로 여러분을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의도에 정면 적으로 대적하며 사는 것입니까? 설령 이 땅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이 여러분 너무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나님 불순종하며 살아도 죽을 때까지 절대로 하나님이 야단치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럴 리는 없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먼저 부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벼랑 끝에서 살 소망이 모두 끊어졌을 때 피 묻은 손을 내미신 분은 그분이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손을 잡고 일어섰고, 그리고 세상은 끊임없이 나를 버리고, 나를 가장 사랑하던 친구들도 나를 떠났지만 주님은 언제나 내 곁에 서서 우리와 함께 계셨고 심지어 우리가 주님을 버릴 때조차도 주님은 우리를 따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말할 수 없는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도대체 누가 씩씩한 걸음으로 용사같이 승리만 한 사람이 있습니까? 때로는 넘어지고 지쳐서 쓰러질 때도 있고 때로는 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이 곁에 계셨기 때문에 쓰러지긴 했지만 아주 엎드려지지 아니 하였고,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마귀의 발아래에 완전히 밟히는 적은 없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우리를 시련과 환란 속에서 구하시고, 죄 가운데 우리를 건져주시고, 시련 속에서 우리에게 이길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두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죄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오래전 불순종 가운데 있고, 죄의 노예의 상태에 있다면 내일이 아니라 또 다른 날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왜 오늘이 아니고 또 내일이어야 합니까? 왜 모레이어야 합니까? 지금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해 주시고 의롭게 해주시겠다고 이미 그렇게 해주셨다고 부르고 계시는데 왜 또 내일이어야 하고 모레이어야 합니까?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오늘 숨을 거둘지라도 추호의 거짓 없이 여러분에게 증언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무한하게 사랑하십니다. 그 분이 당신 스스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고난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눈을 들어 우리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이 여러분을 위하시면 누가 여러분을 대적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가 없으니 오늘도 이 십자가를 의지하여 주님께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십자가에 못 박은 것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다른 모든 서신서에 나타나는 친절한 인사말이 생략된 채 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만큼 이 교회가 심각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버리고 유대교 완전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유혹을 받아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참이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복음과 그리고 참 자유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여 주고,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문제의 발단이 된 갈라디아 교회의 복음신앙의 변질을 다루고 있고, 2장에서는 오직 믿음으로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칭의의 교리에 대하여 선포한 후, 3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4장에서 복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이고,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5장에서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삶이고, 어떻게 우리들이 속박을 벗어나 참된 복음적 자유에 이를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II. 신자는 그리스도의 소유임
사도는 먼저 16절 이하에서부터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성령을 따라 행할 수도 있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할 수도 있는데 육체의 일은 아주 현저해서 모든 사람들의 눈에 띄게 드러나는 그런 악들로 이어질 것이요,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그 선의 열매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제일 먼저 신자가 그 정체성에 있어서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즉, 신자는 그리스도의 소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고 했으니 이는 신자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신 사람들임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A. 그리스도의 소유임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소유가 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고 영원한 죽음에 떨어져야 할 진노의 대상들이었는데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고 우리를 살려 주셨기 때문에 이런 구속하시는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인이 자기들이 걸어가던 인생길에서 돌이켜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 형벌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서 자기가 그렇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을 자신에게로 받아들이게 될 때에 그는 이제 자기의 인생을 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의 주인이 자기인 줄을 알고 죄를 이루며 살았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이제는 자신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드리는 것, 여기에는 무제한의 복종과 헌신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다 드리고 나면 하나님이 그를 소유하십니다. 그런데 이 소유하는 방식은 사랑을 통한 소유입니다. 즉, “내가 너를 구해 주었으니 이것은 거저 구해 준 게 아니라 이제 너는 나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하면서 우리를 노예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기와 같이 멸망에 떨어질 비참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속해 주시는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구원을 받고 나니까 이제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떻게 살아야할까 하고 생각했을 때 예전에는 인생의 목표가 많았었는데 이제는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 이외에는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강요가 아니라 그 사랑이 너무나 커서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주님 앞에 드려 종이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구약에서 노예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사실이었지만 인류를 악으로 몰아넣었던 신분 세습적인 노예의 제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어떤 잘못에 의해서 노예가 되는 일이 잠시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율법 속에서 그들이 해방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특히 희년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은 이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유인이 되었는데 이 종이 가만히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집안에서 나를 이렇게 사랑해 준 주인, 나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준 주인과 내가 가족처럼 살았는데 내가 이 사랑하는 주인을 떠나서 자유를 누리며 산들 내가 거기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율법은 자신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자유를 버리고 끝까지 주인의 집에서 종노릇하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가서 귀를 기둥에 대고, 송곳으로 뚫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스스로 그 주인의 종이 되었다라고 하는 표시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주인의 노예로 살게 만들었을까요? 만약에 주인이 공포와 채찍으로 다스리고 그의 모든 이익을 빼앗았더라면 과연 그가 그렇게 기둥에 귀를 뚫고 일평생 노예가 되기를 자청할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주인에게로부터 받은 놀라운 은혜와 사랑, 신분은 종이지만 자기를 아들처럼 대해주는 이 주인의 자애로운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매여 종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렇게 당신의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제는 우리가 예수의 것이라고 할 때에 한번 감격적으로 십자가에서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체험하는 가운데 그 사랑에 매일매일 붙들려 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우리는 예수의 소유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B. 소유주 ‘그리스도 예수’
그런데 오늘 소유주는 그리스도 예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을까요? 라고 하는 질문은 어쩌면 말장난처럼 사소한 질문으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천상의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예수라고 하는 이 말은 지상의 인간인 예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신 그 분이 천상의 성자인 동시에 우리와 꼭 같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이 여기지 않는 분이 아니다. 그 분은 우리와 꼭 같이 육체를 입고 한 결같이 시험을 당하였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 예수는 지금도 시험당하는 자들을 도우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같은 인간들이 어떻게 유혹을 받고 시련을 당하게 되는지를 다 경험하셨습니다. 죄는 티끌만큼도 없으셨지만 우리가 겪는 시험과 고난의 모든 고통을 예수님은 몸을 입고 친히 다 겪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한 몸을 나눈 형제로서 우리들이 이런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에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경험하는 모든 인생의 불행과 번민,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변심하여 이제는 예수의 소유로 사는 대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살려고 하는 데서 모든 죄와 번민, 불안, 고통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한번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공포와 그리고 두려움에 매여 예수님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살 찢으시고 죽으신 하나님의 그 각별하신 사랑에 붙들려 예수의 종이 되었으니 매일매일 말씀 속에서, 예배 속에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간절한 기도 속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같은 죄인이요 오직 주님만이 자기를 구원하신 유일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은혜에 감격할 때만이 신자는 그리스도의 소유로 살아갈 수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III. 십자가에 함께 못 박은 것
A. 신자의 ‘육체’
성경은 이렇게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것이고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소유가 될 때에 신자는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못 박은 것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못 박은 것은 신자의 육체와 그리고 정욕, 탐심입니다. 이 두 가지는 구분이 되지만 사실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신자의 육체, 오늘 희랍어 성경에 “사르카”라고 되어 있는 이 육체는 무슨 의미일까요? 성경에는 이 육체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첫째는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중립적인 의미에서의 육체입니다. “사르코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래 살코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 이 몸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장 15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육신이라고 번역된 이것이 바로 오늘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쓰인 “사르코스” 혹은 “사르카”라고 하는 이 육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입으셨으니 이것은 죄 있는 육체가 아니라 죄와는 상관이 없는 육체입니다. 그러나 이 육체는 우리와 꼭 같은 몸으로서의 육체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는 육체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요한 사도가 이 글을 썼을 대에 이 편지를 받아보던 헬라 세계에 살고 있었던 모든 독자들에게 이 선언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인 로고스가 육신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존재관에 의하면 세계는 저 위에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로부터 이 아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세계까지 커다란 층차를 이루고 있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육체와 물질로부터 벗어나 정신과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고 이럴수록 아주 순결하고 영적인, 그리고 선한 세계에 도달하게 되고, 내려올수록 이 선으로부터 벗어나 물질과 육체의 형태로 다다르게 되는데 이때에 이 물질과 육체 속에는 반드시 악이 깃들어서 그래서 선으로 멀어져 악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육체 자체가 물질계 속에 속하는 거고, 로고스인 말씀은 천상의 세계에 속하는 거기 때문에 그 완전한 선이 내려와서 완전한 악인 육체를 입는다고 하는 것은 희랍사상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모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헬라의 철학의 사상들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모든 세계가 그렇게 악한 물질의 세계라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창조행위 자체가 선한 하나님이 악을 창조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타락하기 전 인간이 입었던 온전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이것이 바로 육체를 가리키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러나 베드로전서 2장 12절을 비롯한 보다 많은 성경 구절에서는 이 육체를 죄를 품은 육체, 죄 가운데 있는 죄와 결별할 수 없는 부패한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사용된 육체라고 하는 이것은 바로 후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죄를 실행하는 도구로서의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공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에 우리는 거듭나게 되었고, 하나님이 우리를 거듭나고 회개하게 하셨을 그때에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새롭게 살리신 새 성품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우리를 형벌 받아 죽게 한 옛 사람의 성품이 공존합니다. 예전에는 나를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거의 전부였습니다. 티끌만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복음을 듣고 우리의 죄에 대해서 회개할 때에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그 큰 고난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배하던 죄의 세력을 분질러 버려서 그래서 허리뼈가 부러져 기어 다니는 신세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성품을 충만하게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십자가에 우리 신자의 육체를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일까요? 매우 어려운 교리입니다마는 제가 간략하게 두 가지로 여러분에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피웁니다. 아직도. 저는 어린 나이에 담배를 배워서 약 10년을 피웠고, 깊이 인이 배워서 예수를 믿은 후에도 담배를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네 번을 결심했지만 세 번은 실패했고 마지막에 한번 성공해서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담배 피는 사람들을 금연의 습관에서 끊어주는 금연학교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담배 피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계속 담배를 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폐암에 걸려 죽은 사람들의 절제된 폐를 실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상으로도 보여줍니다. 저도 봤는데 그 보통 사람의 폐는 붉은 빛입니다. 선홍빛입니다. 그런데 니코틴에 깊이 중독된 사람들의 폐는 어떤 형태냐면 빨간 선지를 짜장에 묻혀 놓은 것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시커먼 것이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발암 물질을 품고 그것들이 암을 일으키고, 폐가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걸 일단 보고 나면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해도 그걸 보고난 다음에 자기가 들고 있는 이 담배는 그거를 보기전의 담배가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있으리라고 하는 것까지는 생각을 안 하면서 담배를 피웠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뿐 아니라 죄가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이고, 복음은 바로 그 죄의 결과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봅니다. 거기에 매달리신 분은 죄 없이 순결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끔찍한 형벌을 받으며 짓이겨 죽임을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우리는 모든 죄를 지고 바로 그런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 이었습니다마는 그렇게 우리들을 모두 죽이시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해결하고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싶었기 때문에 예수를 보내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볼 때 이제까지 내가 죄를 지은 것이 무슨 의미였는지 지금도 내가 짓고자 하는 이 죄가 결국은 본질상 하나님의 어떤 진노를 불러오는 것인지를 십자가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대신적인 죽음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이렇게 다시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고 이렇게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신자가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어떻게 해서 형벌은 예수님이 당하셨는데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입게 되었을까요? 설명을 하자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실 때 만약에 구원받을 우리와 상관이 없이 단절된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당신을 벌려 구원하실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품에 품으시고, 그래서 그들의 죄를 당신에게 전가시키시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감당하심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내포적으로 그 대신적인 형벌의 공로를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나셨고,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생명은 당신께서 끌어안고 죽으신 우리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내포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의 옛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분이 다시 육체를 따라 살고 죄를 짓는 것은 형식적으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구원의 원리에 모순된 삶인 것입니다. 누구도 이런 모순된 삶을 계속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만약에 그가 어떤 행복을 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행복이 아니라 마귀와 그리고 육체가 준 일시적인 행복이고, 그 마취적인 즐거움이 끝나고 나면 살을 에는 것 같은 더 커다란 고통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과 거리가 먼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은 방식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육체를 따라 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무엇인가 마치 육체를 따라 죄를 지으며 살면서도 자기가 누릴 어떤 행복이나 기쁨,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전면적으로 위배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모든 복음적 사실을 알고도 육체를 따라 살고 만약에 여러분의 마음에 원하는 소욕을 따라 죄를 짓고 살아간다면 이것은 원리적으로 모순된 삶이고, 그 안에는 어떠한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그 분의 은혜로 말미암는 진정하고 영속적인 기쁨 같은 것들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안 속에서 아침에 눈을 뜨게 될 것이며 밤에는 두려움 속에서 눈을 감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삶을 살면서도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교회를 위해 이런 저런 직분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일부의 물질을 주님께 드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주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악 된 여러분의 삶에 대한 책임을 경감해 달라고 드리는 뇌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이고 외식적인 삶으로는 진정한 복음적인 평화에 도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을 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 속에서 이 믿음 생활을 이어가지 않습니다. 살기 싫은 노년의 부부가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묶여서 사는 것처럼, 혹은 이 나이에 갈라선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슨 욕을 먹으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정도 없이 어거지로 살아가는 부부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환란입니까? 시련입니까? 가난입니까? 여러분의 늙음 때문입니까? 건강의 부족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따위 것들에 의해서 막히지 않습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이중적인 신앙생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는 외식적인 생활 때문에 여러분의 영혼은 죽어가고 있고, 기쁨이 없는 어거지 같은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도 영혼이 자유를 얻은 기쁨이 없고 주님을 만난 영광의 소망이 그들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세상을 따르자니 주님의 사랑을 등지는 것이 두렵고 주님을 붙들자니 두고 온 세상이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영혼은 파리해져 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 따위 더러운 삶을 우리에게 물려주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을까요?
(찬양)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맘을 녹이셨네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물론 여러분 중 아주 일부는 아직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십니까? 언제입니까?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다 찢으사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여러분에게도 아픔이 되어서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왜 죽으셨을까? 그렇게 눈물을 흘리신 적이 언제입니까? 여러분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혔던 그 육체가 다시 살아나서 여러분을 모순된 삶을 살도록 이끌 때에 여러분은 그 육체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못 박힌 내가 어찌 다시 살아나 나의 주인이 되려고 하느냐”라고 하는 분노가 있느냐고 나는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성경의 진술은 분명합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인 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B. ‘정욕과 탐심’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또 있는데 정욕과 탐심입니다. 나는 우리말 성경의 이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우선 여기에 정욕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파데마”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파데”에서 왔고, “파데”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희랍 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원래 이 “파데”라고 하는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겪음이라는 뜻입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일까요? 자, 여기에 이런 물질이 있습니다. 이거를 오랜 동안 여기에 두었다고 칩시다. 세월이 흐르고 공기에 부딪치고 바람에 부딪치고 비를 맞겠지요? 겪는 것입니다. 겪으면서 이것들은 서서히, 서서히 변질되어 가고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나면 이 물질 자체가 없어질 것입니다. 물론 수억 년의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생물이기 때문에 그냥 당할 뿐이지 그 겪음에 대해서 반응은 못합니다. 식물은 좀 더 잘 반응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식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 선인장은 가시가 그게 잎이었는데 물 없는 건조한 지역에 오래 살면서 수분을 보존하기 위해 잎이 가시로 변했다고 설명을 합니다. 이것도 수많은 겪음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동물들은 좀 더 고등하게 반응을 합니다. 추위가 오면 따뜻한 곳으로 피하고, 배고프면 먹고, 그리고 자기를 해치려는 어떤 대상이 나타나면 방어를 하거나 공격을 해서 자신을 지킵니다. 인간은 이 동물이 없는 영혼과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훨씬 복잡하게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어이, 친구 잘 있었어?” 그러고 툭 머리를 치고 지나간다고 합시다. 자기가 당한 겪음은 손가락으로 툭하고 머리를 치고 지나간 것입니다. 이 마음속에서 수많은 정동들이 일어납니다. “이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걸까? 아니면 친하다고 하는 걸까? 나를 우습게 아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나를 더 생각해 준다는 뜻인가?” 하면서 손가락 하나 탁 건드리고 지나가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 수많은 생각들이 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겪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여러분도 종종 누구의 말 한마디 들었을 뿐인데 밤에 잠을 못하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고민하던 적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적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이것은 영혼과 마음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여진 정욕이라는 단어가 그런 겪음을 가리키고, 또 이런 겪음을 통해서 생겨나게 된 욕망을 의미합니다.
자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약간 야한 동영상이나 영화나 잡지나 이런 것들을 보는 것 자체가 과연 커다란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겪음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게 되면 이것이 유혹으로 작용해서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을 자꾸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겪음 들이 없으면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를 자꾸 겪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 밑에 충분히 가라앉았던 것들이 이끌려져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야한 동영상에 빠지고 거의 중독중세에 걸린 사람들이 청소년이 아니라 늙은 노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중년은 물론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겪음을 통해서 부정적인 욕망을 우리 안에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정욕이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근데 그 뒤에 나오는 탐심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정욕이라는 단어로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에피듀미아이스”라는 단어인데 원래 “에피듀미아”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면 정욕인데 좁은 의미에서는 성적인 욕망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게 하는 모든 정신의 힘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마음과 정신의 힘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자기 본위의 삶을 실행해 나가는 도구로서의 죄 된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본위,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무엇이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죄라고 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죄는 본질은,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으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죄악의 뿌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 믿기 전에 우리의 인생이 그런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고, 하나님도 자기 허락을 받아야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사람들이 증거 해주고 성경이 증거해도 “그래. 그건 네 소리고,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하면 하나님도 삭제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삼은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삶을 활발하게 만들어 준 것이 욕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았습니다. 마지막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된 것이었고, 그 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간 모든 삶의 결국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정욕과 탐심에 이끌려 사는 그것은 원리적으로도 명백한 모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내려올 때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 까리따스를 가져다줍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서 계속해서 살면 이 욕심은 계속 충전이 되면서 정욕으로 발전해서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은 그리스도의 구속해 주신 은혜의 계획에 정면적인 배치가 되는 삶이고, 따라서 자기의 탐심을 좇으면서 살아가는 삶은 우리의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우리의 구원 목적에 전면적으로 대항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향한 미움과 그리스도의 구속을 깔보는 마음 없이는 누구도 자기의 정욕과 탐심을 따라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체로 살아가는 정욕과 탐심은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육체를 사용하여 우리의 몸으로 온갖 죄를 짓게 하고 악을 행하게 하여 그 악이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리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게 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자기를 나누어주고 섬기면서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이 위대한 경륜에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III.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여러분이 한번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와서 온갖 미소를 짓고 여러 가지 일로 여러분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런데 가슴에는 기회만 닿으면 여러분을 죽이고자 하는 칼을 품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가 눈부시면 눈부실수록 여러분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진의와 겉모습 사이에서 소름끼치는 모순을 발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고 하는 이 모든 결단에 앞서서 제일 먼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백히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의 육체와 모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들이 연약하고 부족해서 때로는 넘어지고 불순종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강력하게 그 죄를 붙들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신자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규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함께 못 박았고, 그리고 우리의 정욕과 모든 탐심들이 결국은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던 때에 우리들이 따라서 살았던 것임을 알고 이것을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버리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진정한 행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사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었을 때에 우리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신자는 은혜가 떨어지면 종종 자기가 버리고 온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세상은 그 사람들의 마음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신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사랑해 주기 위해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그들을 떼어놓기 위해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못을 박고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났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신자가 세상을 뜨겁게 붙들 때 세상은 그를 손을 뿌리치고 짓밟아 이 세상에 버림받게 하는 것입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이 밖에 던져졌을 때 사람들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하고 길거리에 밟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자의 모든 어리석음과 불행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본위적인 삶을 살면서 그러면서도 행복에 이르게 해 달라고 비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한발을 세상에, 한발을 십자가에 걸쳐놓고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몸이 찢어지는 모순과 그리고 갈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죄의 길에 계속 머물러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진노와 엄중한 심판이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죄의 길에 서 있는 자신의 처지에 무서운 두려움을 느끼면서 하나님 한분 밖에는 피할 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자기의 모든 죄를 다시 한 번 회개하고 내가 지으려는 이 사랑하는 죄악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의 책 속에서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오늘날 여러분이 지은 많은 죄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고, 또 때로는 율법도 여러분을 정죄하며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단 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 분이 용서해 주신 죄를 누가 다시 용서 받지 않았다고 말하겠으며 그 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신 사람들을 누가 대적하여 송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은 당신을 멀리 떠난 여러분이 당신의 사랑을 생각하고 죄를 뉘우치며 당신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달려가 여러분을 낚아채서 당신께 이끄실 수도 있지만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여러분이 충분히 여러분이 지은 죄에 비참한 결과에 대해서 자각하며 인격적으로 회개하여 돌이키기를 기다시리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당신을 배반하여 죄의 길에 빠졌던 것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눈물로 뉘우칠 때마다 지나간 우리의 죄가 너무나 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게 만드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단 한번 그의 피로 구원을 받게 하심만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들은 얼마든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죄 짓고 악을 행하고 미끄러질 수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로 찢으신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찢어진 휘장을 지나 보혈의 핏 길을 걸어 자기 의의 신발을 모두 벗고 맨발로 그 핏 길을 걸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주께 불순종하고 있었을 때에는 몰랐던 길이었으나 복음을 다시 듣고 어찌하든지 아버지께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악을 행한 것밖에 없고, 주님을 배반한 죄밖에는 없지만 그 모든 죄를 고백하며 보혈의 핏 길을 걸어 찢어진 휘장을 지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에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고 성령도 우리가 차마 기도할 수 없었을 때에 우리 마음속에서 탄식하며 우리들이 이 십자가 아래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위해 자기를 다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우리를 불러 주셨고 그래서 그 보좌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야비하게 죄를 지은 우리들의 죄를 자존심도 없으신지 언제나 용서해 주셨고, 새로운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셔서 우리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 다시 살 수 있도록, 전날의 두려움이 변하여 오늘의 기도가 되도록, 지난날의 한숨이 변하여 오늘 나의 노래가 되도록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주셨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마르지 않는 이러한 사랑으로 당신을 멀리 떠난 죄인들을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은들 그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입술을 쉬지 않고 일만 일을 외친다고 할지라도 어찌 하나님의 그 마르지 않는 은혜를 칭송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가장 가까이 오셔서 죄 가운데 살고 십자가로부터 멀어져 죽어가는 여러분을 보실 수가 없어 하십니다. 피 묻은 손으로 오늘 여러분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너는 내게로 들어와 나로 더불어 먹고 나로 더불어 살자고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살지 않았던 모든 날들은 우리의 실수였습니다. 회개하고 이제라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성령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라디아서 5: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지난 주 사도가 고백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소유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의 육체와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죽음의 소극적인 측면을 말해 준다면 오늘 십자가 죽음의 적극적인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를 성령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정체성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얼핏 보면 우리가 성령으로 살지 못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성령으로 산다면 성령으로 행하자 이런 뜻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여기에 만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뒤집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자, 네가 만일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만일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뒤에 나오는 구절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면, 살아가고 있다면, 또한 성령 안에서 행하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정체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II.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
A. 십자가 죽음과 성령주심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사는 생활이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먼저 십자가의 죽음과 성령 주심에서 풀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에게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당신이 끌어안으시고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대신 형벌의 심판을 받으신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로 죽으신 장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음이 또 하나의 국면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심판의 형벌이 아니라 축복과 은혜의 국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형벌의 심판을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와 당신 사이에 있는 불화한 관계를 청산하시고 다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놀라운 사랑이 넘치게 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 끔찍한 심판은 불의 저주를 받으신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허무시고 화목케 하신 것은 바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께서는 언제나 계신 영원한 하나님이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이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을 다스리시는 은혜의 시대를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성령이 하실 일이 있으면 각 사람에게 오셔서 일을 하시다가 끝나면 다시 떠나셨지만 이후로는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믿는 사람들 마음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는 내주의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B. 성령을 통한 신자의 연합
1. 구원의 영적측면
이렇게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은 사랑의 성령으로서 이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들을 하나로 연합시키시는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우리의 구원의 영적 측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각각 우리 인생의 어느 시기에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마음이 열렸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이 사건이 개인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영원 전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 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는 그 순간에 그는 그리스도의 몸인 영적인 몸인 교회에 접붙인바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교회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이 교회의 연합 안에서 한 사람의 성도가 되고 그는 함께 그리스도의 머리에 접붙여진 모든 몸의 또 다른 지체들과 성령 안에서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을 이루시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연합 안에서 성도는 다른 모든 성도들과 함께 연합을 이루게 되는데 이 연합이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연합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실 때에 아주 놀라운 일들을 여러분 안에 행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크고 놀라운 일들이 구원과 함께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무를 깎아 만든 피노키오가 요술 지팡이를 맞고 생명이 있는 사람처럼 된 것보다도 더 놀라운 일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심으로서 여러분들은 실제적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성령과 연합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연합에는 원리적인 연합과 실제적인 연합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원리적으로 하나님과 연합되었습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연합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영적인 교회에 접붙여진 것이고, 그 모든 지체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졌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연합을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은 변함없이 여러분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고 더욱이 여러분들을 한번 구원받은 자녀로서 끝까지 지키시며,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원리적인 연합은 사망이나 깊음이나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천사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그 어떤 것들로도 끊어놓을 수가 없고, 심지어 육체의 죽음조차도 이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받은 여러분들과의 이 연합을 끊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성령과 실제적 연합
여러분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구원받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불변하도록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주님을 떠나고 심지어는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도 이 한번 맺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연합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러한 연합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기 전에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아무리 많이 사랑하셨어도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알고 여러분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까지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교회에 접붙여 당신과 원리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셨다고 하더라도 그 연합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실제로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여러분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결코 예수 믿는 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믿기 전에는 돈 있고, 그리고 지위가 있고 모든 것이 평안하면 그냥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들에게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또 다른 보다 커다란 갈망을 여러분들에게 주셨으니 이는 여러분들이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은혜를 이미 누려본 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사람이 된 성도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도 훨씬 불행한 처지에 떨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제 3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고, 그러니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또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 세상은 예전에 우리들이 즐거워하던 그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갈 길은 오직 하나뿐인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원리적인 연합뿐 아니라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 본질이 사랑의 영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 받은 사람들은 사랑하게 되고, 이 성령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 바로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를 주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할 교회와 모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성령이 인간의 마음 안에서 하고 싶어 하시는 일입니다. 이 실제적인 연합의 품질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의 품질에 비례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순수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어린 아이처럼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탄탄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내가 그 분을 사랑한다는 것과 그 분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과 어떠한 처지에서도 나의 이름이 그 분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환란이 오는 그 날에는 누군들 괴롭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바로 이런 실제적인 사랑의 연합을 누리는 성도들은 그 안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수많은 원수들이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보호가 되시며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분 한분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이렇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에서 혁명적인 일을 행하셨고, 이제는 하나님 믿기 전에 옛 사람처럼 살아서는 원리적으로 그가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처럼 복음 안에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는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지한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며 허비하고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과 접붙여진 교회는 그들의 죄와 불순종, 교만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그리고 도처에서 영광받기 위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셨건만 그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껍질만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키셨으니 이는 마치 여름철에 나무 상자 안에서 다 썩어가던 생선을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푸른 바다를 헤엄치게 하신 것과 같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와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한 연합을 이루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이제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 모든 지체들 속에서 함께 연합을 이루며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당신은 저주의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축복의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III.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삶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가슴에 깊이, 깊이 아로 새겨야 합니다. 이전에 주님 모르고 살 때에는 돈 있고, 시간 있고, 건강이 있고, 젊음이 있고, 지위가 있으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이제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 생명을 맛보았고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내면의 세계를 완전히 뜯어 고치셔서 하나님의 생명의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도록 완전히 개조시켜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변화된 인간인데도 여전히 하나님 모르던 옛날 육에 속한 사람일 때 살던 방식을 고집하며 살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인간의 불행과 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새기십시오. 여러분들은 비록 하잘 것 없는 성도라 할지라도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A.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삶
만약에 우리가 이처럼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우리의 정체를 규정하였다면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와 함께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의 구체적인 삶은 어떤 것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자”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우리의 육체와 정욕과 탐심이 함께 못 박혔다면 그 자체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참으로 주시고 싶었던 축복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 축복이 바로 성령 안에서 행하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중생과 함께 주어진 이 성령은 세력이나 기운, 감화력이나 에너지, 하나님이 옆에 계신 효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이 성령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일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알게 하여 예수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이 하시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사람의 가장 뚜렷한 표지는 사랑하는 인격입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그리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성령의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이 성령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어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어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감정으로 품게 하시고, 하나님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의지를 갖도록 우리를 감동시키시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4장 30절에서 사도는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촉구하면서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여기에서 인을 친다고 하는 것은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자, 이런 비유를 들어보십시다.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많은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갚을 의지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애가 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생각하다가 그 사람에게 각서를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에다가 적어주었습니다. “빌린 돈이 얼마인데 몇 월 며칠 언제까지는 반드시 갚겠으며 만약에 안 갚을 경우에는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했고 그 사람만 가지고는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사람보다 돈이 많아서 대신 책임져 줄만한 사람이 밑에다가 보증인으로서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마음에 적잖이 안심이 됩니다. 이제 그 사람이 며칠까지 기다리다가 돈을 안 갚을 참이면 이 증서를 내밀면 그는 증거가 있기 때문에 꼼짝없이 자기가 빚을 갚지 않은 일에 대해서 법적인 책임을 지게 될 것이고, 보증을 선 사람은 그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에 대신 갚아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저 빚쟁이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매우 불안해질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냐? 나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 보증선 사람도 나는 그런 도장을 찍은 일이 없다고 부인을 하면 여러분들은 돈 받을 길이 막막하기 때문에 불안해지고 떨릴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가 때로는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혹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여 믿음에서 미끄러질 때조차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실한 보증으로 도장을 찍어주신 그 도장이 바로 성령님이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신자가 이 성령을 근심시켜 드리고 소멸하는 일을 하면서 이 성령을 마음 아프게 할 때에 그는 마음속에 하나님이 영원히 나를 버리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나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마음속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을 잘 모시고 그분이 기뻐하시며 즐거워하시도록 그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게 되면 이 보증이 너무나 확실해서 눈앞에 어떤 시련이 와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구원한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세상 끝 날까지 나를 지키실 것이다. 심지어 원수들이 나의 육신의 생명을 멸할지라도 주님은 나의 영혼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는 불타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확신 때문에 핍박과 시련, 고난과 환란을 이기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섬기는 이것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대하시는 삶이고, 바로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대신 형벌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축복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은 바로 이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서 성령과 연합하여 성령 안에서 사랑하면서 성령께 지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었던 생명의 삶입니다.
B. 성령을 따라 사는 삶
1.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심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문제. 다시 말해서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있을 때에 그 사람은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고, 그 사람이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주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생명이 사라지면 조용히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영혼은 죽는 법이 없습니다. 왜? 영혼은 그 자체가 불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들의 영혼만 불멸하는 게 아니라 악한 사람들의 영혼도 불멸합니다. 그러니까 육체는 생명이 사라지면 조용히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데 영혼은 이 생명이 사라지면 악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악한 열매들을 맺는데 이것을 성경이 가리켜서 영혼의 죽은 행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신자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어 버리면 신자는 머릿속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의 한 지체이고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연합되어 있다고 믿으면서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느낌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도 알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바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따라 사는 생활이고, 이렇게 될 때에 신자의 삶은 매우 커다란 부조화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만 잠시 은혜를 받을 뿐 시간이 잠깐만 흐르고 나도 다시 미끄러져 고갈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은 아마 대부분의 지각이 있는 성도들이라면 낭비와 사치를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사치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저는 종종 집회를 가면, 혹은 여행을 가면 호텔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그리는 어느 정도의 선을 넘어서면 그게 내 돈으로 얻었든지, 남의 돈으로 얻었든 지는 상관이 없이 너무 불편합니다. 이것은 돈 있는 사람들이 보면 가난의 때가 벗겨지지 않은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은 캐나다로 집회를 갔는데 호텔에 방을 얻어줬는데 화려하지는 않은데 엄청 컸습니다. 옷 갈아입는 방이 따로 있고, 목욕하는 데가 따로 있고, TV보는 데가 따로 있고, 침대가 있는 따로 있는 들어가 보지 못해본 엄청나게 큰 방입니다. 방이 너무 크다고 그러니까 그냥 여기에서 주무시라고 그러고 문 닫고 가버렸습니다. 밤에 침대에 드러누웠는데 이 방이 얼마짜리인지가 너무 궁금해서 걸어와 가지고 방안의 곳곳을 뒤져보니까 1박에 그때 돈으로 30만원이 훨씬 넘는 방이었습니다. 그게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이니까 굉장히 비싼 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만나서 “나는 이 방이 너무 싫다. 내가 너무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서 작은 방으로 옮겨 달라.”고 그랬더니 같이 온 어느 집사가 얘기하는데 그 호텔의 직원이라고 합니다. 그 직원에게는 1년에 10장인가 5장인가 티켓이 나오는데 2달러를 내면 그 방을 빌려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티켓으로 빌렸으니까 마음 편하게 쓰시라고 그러는데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추운 겨울이어서 방이 너무 크니까 밤새도록 난방을 켜도 춥습니다.
세 사람이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운데 있는 신사는 키가 크고, 머리가 벗어졌고, 옆에 있는 사람은 머리는 벗어졌는데 뚱뚱하고 안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삐쩍 마르고 키도 작고 안경을 안 썼습니다. 세 사람 중 누가 그 교회 담임 목사이겠습니까? 셋 중에 복도의 불을 끄는 사람이 담임목사입니다.
우리는 내 돈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너무 사치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고 왜 저렇게 살까 하는 마음에 상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을 낭비하는 것은 잠시 후에 있을 가난한 삶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우리들의 양심이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육체를 위한 물질을 낭비하는 것은 미래에 육체의 삶을 불편하게 하지만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자원을 낭비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 본 적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 그래서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간직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과 몇 달이 지나고 나니까 다시 마치 돼지가 토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개가 토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돼지가 씻은 곳에 다시 누워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한때 여러분들에게 많이 주셨던 은혜의 자원,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죄는 육체를 위해 물질을 낭비함으로 후에 가난한 삶을 살게 되는 물질적인 낭비의 죄보다도 훨씬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2. 계명을 따라 살아감
왜 사람들이 한때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는데 그 은혜가 쉽게 고갈된 삶을 살까요? 이것이 무엇 때문이냐 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성령이 좋아하시는 풍취를 간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충만한 생명을 주셨어도 그것을 곧 고갈해 버리는 것입니다. 풍취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좋아하는 취향이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약간 어두운 레스토랑이 분위기가 있고, 앉아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끼리 얼굴을 볼 수 있는 아늑한 장소가 좋았는데 나이가 드니까 그런 음식점은 싫습니다. 그리고 한옥같이 잘 지어진 집에 그리고 창호지가 있고, 창이 커서 밝은 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천장이 높고 깨끗하여 예의 바른 사람들이 오는 식당이면 혹시 그곳에서 음식이 좀 맛이 적어도 용서할 아량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풍취가 내게 어울리기 때문에 거기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마주하여 식사를 끝난 후에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면 아무리 오랫동안 있어도 일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풍취입니다. 만약에 그런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을 니나노가 나오고, 술 먹은 사람들이 옆에서 토하고, 그 다음에 유리그릇 부수는 소리가 나는 소란스러운 주점 같은 데에 나를 데려다 준다면 어쩔 수 없이 있어야 된다면 잠시는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하던 일이 끝나고 나면 즉시 거기를 떠나고자 할 것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신자의 마음 안에서 좋아하시는 풍취가 셋이 있는데 첫째는 뭐냐 하면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성령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셨고, 그리하여 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순종함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한 신자가 어쩌다가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때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그 길을 고집하며 가겠다고 할 때에 거기에서 커다란 부조화가 일어나게 되고, 성령을 현저하게 근심시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주어진 성령의 은혜는 불순종하는 죄로 말미암아서 소멸될 것이고, 그는 다시 고갈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번 받은 은혜를 간직하면서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커다란 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에 있어서까지도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에 그 마음은 성령이 아주 좋아하시는 풍취를 간직하게 되고, 이때에 주님의 영적 생명이 신자 안에서 넘치게 되어서 영적으로 활기 있고, 기쁨이 있고, 희락이 있는 삶을 살아서 많은 사람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관용과 애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성령이 좋아하시는 마음의 풍취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인 그 지식을 의미하는데 이 지식은 성령이 아주 좋아하는 취향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이 마음에 계속 들어올 때 성령의 사랑의 불은 이 지식이라는 나무에 계속 옮겨 붙으면서 마음속에서 계속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특별히 죄를 짓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은혜를 많이 주셨는데도 이 지식이 없다면 그 불은 소멸되기 아주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산을 보면 나무가 빽빽한데 마치 바리깡으로 사람의 머리를 고속도로를 내서 민 것처럼 산 어느 부분을 탁 잘라서 그래서 바리깡으로 밀듯이 나무를 모두 밀어버려서 나무가 없는 산을 만든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게 방화 구획을 만드는 것입니다. 산불이 났을 때 무한히 번지지 못하고 거기까지 오면 불길은 계속 활활 타오르는데 더 이상 태울 나무가 없습니다. 그리고 풀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불이 멈추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아주 좋아하시는 풍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공부를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며 이것들이 마음에 수시로 떨어질 때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불이 이 지식의 나무에 옮겨 붙으면서 계속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비오는 여름날에 캠핑을 가서 성냥을 켜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성냥을 켜려고 그으면 성냥골 유황은 이미 습기를 먹어서 자꾸 부스러지고 간신히 불이 붙었는가 했더니 성냥개비 나무 자체가 습기를 꽉 머금고 있어서 불은 붙었는데 그것이 나무에까지 옮겨 붙지 못하고 성냥골에서 계속 꺼지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순간에 성령님께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면서 은혜를 주셔도 여러분들이 성령이 기뻐하시는 취향을, 풍취를 여러분들이 갖고 있지 못하면 주셔도 그 성령은 소멸되고, 소멸되고, 소멸되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원기 있고 생명력 있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성령이 좋아하시는 풍취가 뭐냐 하면 죄 죽임의 생활이입니다. 즉, 성령은 여러분들이 매일매일 마음을 지키려고 하고 그 마음을 지키면서 매 순간, 매순간 자기의 생활을 반성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았던 죄를 뉘우치며 그것을 버리는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할 때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성령님은 아주 좋아하는 풍취를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계시기에 아주 좋은 그런 환경이 되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시찰회를 했습니다. 시찰회 목사님, 사모님이 오셔서 그래서 에드워즈 파크에서 저녁을 일찌감치 먹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밤 10시가 다 됐는데도 안 가시는 것입니다. 의자 편하지, 춥지도 덥지도 않지, 잔잔한 음악이 흐르지, 따뜻한 차도 있지, 에드워즈 파크에 경치 좋은 풍광도 있지 하니까 거기가 편안해서 안 가시는 것입니다. 성령도 그 분이 계시기에 아주 좋은 풍취를 머금은 마음 안에서 더 풍성하게 당신의 생명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칭찬할 만큼 훌륭한 일이지만 그 은혜를 하나님이 주실 때에는 여러분들이 그 은혜를 잘 간직하도록 순종과 지식과 죄 죽임의 실천으로서 성령이 여러분 안에 늘 계실만한 그러한 풍취를 간직할 때에 성령께서는 여러분 안에 더 충만한 은혜를 불러 일으키셔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며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가운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 모든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영혼의 생명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국민 소득이 몇 백 불 밖에 안 되고 서울에 판잣집이 가득하고, 거지들이 깡통을 들고 다니던 시대에 먹고 살기 위해서 막 몸부림치면서 산업화의 길을 걸어갈 때에 사람들 별로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넉넉한 상황과 환경이 되었는데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죽음의 길을 택합니다. 왜? 육체의 자원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영혼의 자원이 모자라서입니다. 옆에 있는 이 큰 건물을 지은 그 사업주도 재계에서 이름을 내놓으라 하면 다 아는 그룹의 회장입니다. 근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데 이 건물이 지어지기 직전에 자살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그랬겠습니다? 입을 것이 없어서 그랬겠습니다? 문제는 정신의 힘이고, 영혼의 자원입니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는 다른 말로 많이 표현하지만 성경은 이것을 영혼의 생명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소극적으로는 우리의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못 박게 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하신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 생명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의 죽음에 보답하는 가장 훌륭한 길은 충만한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 분의 사랑에 붙들려서 시련과 고난을 이기며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세상의 사람들이 다 버려도 우리는 그들을 다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시려고 그 안에서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 성령 사랑의 영 안에서 살아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충만한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상속자의 영광과 의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로마서 8장에 놓인 본문입니다. 7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악에 가까워 있는지, 심지어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으나 악이 함께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지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8장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하나님이 그들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서 죄와 사망의 법으로서 구원해 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어떻게 우리를 이기며 살도록 역사하는 것이며, 또 이렇게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서 충만히 사는 삶을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심겨져 있지만 우리가 매일매일 실제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고 내면의 죄를 죽이는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명을 유지하면서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구원의 양면적 성격
우리는 오늘 이러한 사도의 증언을 대면하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속에서 구원의 양면적 성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할 때에 그 구원받았다고 하는 의미의 양쪽 면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런 뜻입니다.
A. 하나님의 자녀가 됨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라고 말입니다. 구원의 한 측면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 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는 많은 자녀들이 있으니 그 자녀들과 함께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오래전에 시골에 가면 한 마을이 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한 집안이 어느 마을에 정착하고 거기서 자손을 퍼뜨리고 계속 번성함으로써 그들이 일가로서 한 마을을 이루게 되었죠. 문만 열면 만나는 사람들이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대부, 그리고 사촌 형제, 팔촌 형제, 육촌 형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그러니까 그렇게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개념이 없는 생활을 한다든지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왜냐하면 그 모든 삶의 질서들을 공동체 속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내 위에는 대부와 그리고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들이 있고, 그리고 내 아래에는 사랑해야 할 조카들과 또 다른 가족들이 있고 옆으로는 형제, 자매들이 있는 가운데서 자기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본분을 공동체 속에서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들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산업화와 그 물질 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은 도시에 모이기 시작했고, 이제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이유가 혈연이나 지연이 아니라 어떤 물건들을 생산해 내기 위한 물질주의의 일환으로 함께 모여 살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생산을 제외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은닉 성들이 생겨나게 되고, 여기에서 사람들이 모든 절대적인 가치를 부인하는 상대주의가 유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 중심의 사회가 되고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도덕적인 기준들이 예전과 같이 도시 속에서 유지되지 못하는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세상이 타락하지 않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고, 이때에 나아오는 하와를 보면서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두 사람이 부부이기 때문에만 한 고백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계속 인류가 번성해 갔더라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최상의 사랑의 고백을 하게 하심으로서 인간 사회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모상을 이루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오는 이 삼위일체의 모상의 아름다움은 사람들의 수가 많아서 가족을 넘어 한 사회를 형성할 때에 그 아름다움이 더욱더 찬란하게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을 내려다보실 때 삼위일체 안에 있는 이 아름다운 모상들이 온 땅을 뒤덮으며 영적인 연결을 이루면서 아름다운 교제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광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족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가족은 이렇게 세계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의도였습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끔찍이 사랑해야할 관계는 끔찍이 미워하는 관계가 되었고, 그래서 분열과 다툼이 있게 되었고, 심지어는 한 가족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족이라는 의식대신에 이익을 둘러싸고 원수요, 대적자라는 의식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는데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때 거기에는 끔찍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던 그 본래의 목적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첫 조치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때 다른 모든 자녀들과 한 가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한편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의 교통의 모상인데 창조 시에 죄로 말미암아 실패한 것들을 교회 안에서 다시 구현한 것이고, 이 교회의 영적인 연합은 미래의 마지막 완성 때에 이루어질 인류 전체가 하나의 가족이 된 아름다운 상호교통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한 가족으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을 받은 것은 개인적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그 구원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위 중 한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인 교회와 하나가 되셨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 그 교회에 영적으로 접붙여짐으로써 우리들이 예수와 한 몸을 이루게 되고, 예수는 하나님과 하나를 이루게 되어서 하나님의 신적 생명과 모든 사랑을 공급받는 하나님의 아들의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질 때에 우리는 크게 네 가지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생명의 질서, 사랑의 질서, 통치의 질서, 그리고 봉사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지만 좀 더 상세하게 말하면 이렇게 생명, 사랑, 통치, 섬김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생명과 은혜를 공급받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통치를 받고 그렇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이 교회와 이 세상을 힘을 다하여 섬겨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게 되면 그러면 제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두 개의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는 가족이고, 하나는 교회에요. 이 두 가지는 아주 묘하죠. 왜냐하면 이 가족은 원래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교회와 하나 되었을 가족인데 아직까지도 죄의 통치 아래에 있는 불신자들와 함께 이루어진 가족들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그 약속이 완전히 실현이 안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우리 육신의 가족들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적인 한 가족이 되어서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마지막에는 구원받은 모든 인류와 함께 교회는 껍질처럼 사라지고 마지막에 거기에서 그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 인류로서의 열매에요. 그게 한 가족,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가족으로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바로 그렇게 깨어진 하나님의 가족의 이상으로부터 출발해서 마지막에 완성될 가족의 이상으로 나아가는 과도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가지고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감으로 마지막에 이것들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그 날에 그 인류에 한 가족된 사회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고 교회 속에서 경험해온 사회가 되게 하는 것이 인류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고 이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옥 갈 자식들을 천당으로 보내셨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할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고 하는 그 의미 이상의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낡은 건물의 찌그러져가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외모를 가지고 그 교회를 판단하면 안 돼요. 그 교회는 적어도 마지막에 완성될 인류 전체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드시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중요한 매개체로,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앞당겨 맛볼 수 있는 하나의 선취적인 예표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지위의 아름다움은 단지 하나님이 나를 죄 용서해주셨다 데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 존재와 이 몸이 마지막에 이 지상의 세계를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답게 빛낼 인류의 한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말 영광스러운 직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참된 신자가 되라고 우리에게 간곡히 요청하시는 이유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때에 비로소 그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진정한 신자가 되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진정한 신자가 되는 그것이 바로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안 해도 되는 어떤 일을 우리가 행복하기 위하여 추가적으로 하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그게 아니라 이게 우리가 참으로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궁극적으로 진실한 성도가 되기 위함인데, 진실한 성도가 됨으로써만이 하나님이 이 땅에 두시고 싶으셨던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기독교는 학문은 아니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위대한 철학이고 그리고 정말 거룩한 사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구원의 한 성격은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B. 하나님의 상속자가 됨
이 구원의 또 다른 측면은 이 하나님의 자녀가 바로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다.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상속자다”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고도 표현하지만 보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집에 입양된 것으로 표현을 합니다. 입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집안에서 태어난 그 자식은 입양이라는 말을 사용을 안 합니다. 입양이라는 말이 성립하려면 원래 그 집안에 태어난 자식이 아니고 다른 집안에서 태어난 자식인데 법적으로 그를 옮겨 자기의 자녀가 되게 할 때 그것을 입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 법적 권리를 가짐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두 측면을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자녀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 안에서 낳으셨다. 왜?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내어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누가 도와줘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셨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해도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해도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 다른 측면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원래 정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거는 이미 인류가 하나님 앞에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고, 그래서 결국은 그것은 이미 소멸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정체를 뭐라고 말하냐 하면 너희가 전에는 이 세상의 자녀요, 마귀의 자식이었다고 말합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요, 그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있는 심판의 대상자들이었습니다. 이게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정체입니다. 그런 자식들이 입양이 되어서 하나님의 집에 법적인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를 마치 하나님이 직접 낳은 자식이 아니라 딴 집안의 아이를 우리 집안에 들여 입양시킨 것처럼 우리를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집안에 입양이 되어 그 집안의 법적 자식이 되면 그러면 이제 부모도 취소할 수 없는 어떤 권리가 그 자식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 부모에게 속한 것을 자식이 누릴 수 있는 법적인 권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십시다. 아무리 그 집과 가까이 지냈어도 그 집 자식이 아닐 경우에는 문을 열고 몰래 그 집에 들어가면 무단 가택침입죄가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집에 입양이 되어서 호적에 올라갔으면 아무리 늦은 밤에 내가 밖에서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가도 그것은 무단침입죄가 성립을 안 합니다. 왜? 내 집입니다. 왜? 그러면 그 집 살 때 내가 돈을 보탰느냐? 뭐, 가난한 집에서 몸뚱아리 하나 입양되어서 왔는데 무슨 그 집을 살 때 돈을 보탰겠습니까? 그런 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 집안의 아들로 등록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그 집안에 담장을 넘어가도 그게 무단 침입죄가 성립을 안 하는 거라는 것입니다. 주변에 먹을 것과 쓸 돈들을 늘 놓아뒀습니다. 근데 내가 아무리 그 집과 가까워도 자식이 아닐 경우에 그거를 꺼내서 집어넣으면 절도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 집안에 입양 된 다음에는 설령 그것을 내가 잠시 가져가서 썼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채려진 음식을 내가 부모 허락을 안 받고 먹었다고 하더라도 부모가 나를 감옥에 집어넣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 집이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합법적으로 주어진 특권들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보태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그것들을 실제로 누리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특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법적인 특권이 크게 두 가지로 주어지는데 하나는 외적인 지위에요. 예전에는 세상의 자식이요, 진노의 자식이요, 마귀의 자식들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것을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종자가 그런 영광스러운 명분을 얻을 만한 종자가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종자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지위이고, 이 세상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높은 그런 명분입니다. 하나님이 이것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외적인 자유도 주셨죠. 옛날에 보면 명망이 있는 집안인데 돈이 없는 집안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떠하든지 누구를 찾죠? 자기네만큼 명망이 높지 않아도 돈이 있는 집안과 혼인을 맺고자 합니다. 왜? 명분 하나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자원으로 명분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위와 이 세상의 지위가 재산과 만날 때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고 사람들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외적인 명분만 주신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허울만 양반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로마서 8장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첫째는 객관적이고 규범적인 법입니다. 자 예를 들자면 몇 년 몇 월 며칠부터는 이 도로를 사람이 건널 수 없습니다 라고 법을 붙이면 그러면 그것은 국가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명령을 어기고 그 길을 건너면 처벌하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 이런 걸 법이라고 부르고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법이라고 성경이 말할 때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주관적인 경향으로서의 법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죠. 참새가 방앗간 옆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고 할 때는 국가에서 참새보고 방앗간 옆 그냥 지나가면 죽여 버리겠다, 독약을 먹이겠다는 공고를 붙인 게 아니라 참새 자신 안에 낱알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어서 공중을 날아가다가도 방앗간을 발견하면 내려서 낱알을 몇 알 주워 먹고 간다. 모든 참새가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걸 가리켜서 법이 없다,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성향이 법이 됩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저녁에 술집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죠. 그 사람보고 국가가 술을 안 먹으면 벌을 내리겠다는 게 아니라 이 사람 안에 있는 성향이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술집 옆을 그냥 가는 것을 이 사람 마음이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집에 들어가서 술을 먹어야지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의 습관이지 않습니까. 습관은 그것을 계속하는 버릇이고, 그 버릇은 바로 우리의 성향을 나타내요. 그것이 예외 없이 그렇게 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법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게 되고,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예전에 우리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무얼 하든지 간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고,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끌러버리거나 훼파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망의 법이었습니다. 그 사망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죽음의 행실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슬에 굳게 얽혀 있어서 도저히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러한 처지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이전에 우리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구속의 공로를 기초로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하셨고,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 죄와 사망의 얽어맨 법들을 끊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우리의 몸이 이렇게 묶이면 꼼짝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묶여 있는 것입니다.
소 같은 거 보면 알지 않습니까. 소가 태어나서 몇 달 되면 빨리 데리고 가서 코를 뚫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게 하루에도 몇 kg씩 자라요. 그래가지고 커지면 개처럼 목에다가 줄을 매서 끌어봐야 사람을 막 데리고 산으로 올라간단 말입니다. 풀 먹으러. 그래서 옛 말에 “코 뚫지 않은 송아지 삼부자가 감당을 못한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세 아버지하고 두 아들하고 붙들리고 매달려도 사람을 끌고 산으로 막 올라가요. 근데 그거를 코를 뚫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거를 규율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전에 그렇게 코 뚫린 송아지처럼 마귀에 의해서 붙잡혀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그러면 가고 코가 아파서 그렇게 끌려 다니던 비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데려가는 곳이 죄였고, 그렇게 데려가는 곳이 죄였고, 그렇게 죄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받는 삯이 사망이었습니다. 근데 그거를 하나님이 끊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치 삼손을 얽어매고 있었던 그 삼 줄이 불탄 것처럼 이렇게 끊어져 버리고 자유를 얻게 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자유를 주시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묶으신 것입니다. 이 생명과 성령의 법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얽어 매였던 모든 사슬로부터 속박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상속받은 것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상속받은 것들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육신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까지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누가 창조하셨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누구 것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의 근원은 누구입니까? 그러면 그 모든 지식은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이 모든 것들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하나님만이 근원이신 이 모든 지식들을 불법적으로 점거해서 주인 의도와는 맞지 않게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뭐냐 하면 그것을 뺏어야 됩니다. 그걸 뺏는데 어느 날 부자한테 가서 “당신 재산 다 내놔라.” “왜?” “우리 하나님 거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를 정신 병원에 집어넣겠죠. 그러니까 그런 부당한 방법이고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빼앗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심방을 가거든요. 사업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까. 제일 물어보는 게 “요새 사업이 어떻게 됩니까?” 그러고 물어보지 않습니까. 그때 제일 듣기 싫은 말이 뭐냐 하면 “목사님 밥은 먹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얘기가 그게 물론 사업하는 사람의 겸손의 표시이지만 내가 그랬습니다. “아니 밥 먹으려고 그 힘든 사업을 하냐? 밥 먹자고.” 요즘 우리는 사회 보장제도도 웬만큼 돼 있어서 의지할 곳 없으면 한 달에 한 30만원씩 주니까 그것만 가져도 라면은 먹지 않습니까. 뭐, 밥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쌀 팔아서. 밥 먹으려고 사업을 하냐? 그럼 뭘 위해서 사업을 하냐? 열심히 사업을 해서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돈을 자신에게로 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왜? 그 사람 손에 있으면 그 돈이 잘못 쓰여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자꾸 굽게 만들고 망가뜨려요. 그래서 그거를 자기가 가지고 이 세상을 올바로 펴고 그리고 아름답게 만드는데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돈 없이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어떤 면에서는. 왜? 아니 우리 이교도들이 굶어죽어도 우리는 구제해야 됩니까? 안해야 됩니까? 해야 된다고 그랬죠. 왜? 살아 있어야지 선교의 기회가 주어질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들이 비록 죄를 짓고 악을 행해도 그렇게 궁핍 속에서 벗어나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밭에만 비를 내리시는 게 아니라 이교도의 땅에도 비를 내리시고 더위와 추위를 주셔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거 먹고 힘내어 하나님을 대적할지라도 하나님은 밥을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것을 본받아서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근데 뭐 밥은 먹는다는 게.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있습니까?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되죠. 그러면 안 돼요.
공부도 마찬가지죠. 여기 젊으신 분들도 있는데 아니 젊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치열하게 공부를 해야 돼요. 왜? 지식은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 자녀 아닌 사람들이 그 지식을 많이 가지고 가서 요거를 조작을 해 가지고 잘못 사용을 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보면 옛날 한 20년 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그런 성범죄자들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거 왜 그러는지 아세요? 내가 요새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게 90% 이상이 인터넷과 현대 문화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사람이 다 누구나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누르면서 사는 사회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발달한 기술을 가지고 사람들이 그것을 막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늙은이든지, 젊은 애들이든지 그걸 억제하고 참는 훈련이 안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산해도 좋다고 자꾸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회 문화가. 그러니까 그렇게 끔찍한 폭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해서 올바르게 사용했더라면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줄이거나 방지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밥이나 먹으려고 사업을 한다든지 간신히 어디나 취직이나 하려고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밖에 나갔을 때 무식하다는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 공부하는 정도가 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그렇게 돈을 벌고 그렇게 하면서 이 세상을 고치는 이런 역할들을 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 큰 꿈을 가지고 사업을 하면 참 좋겠습니다. 돈을 벌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 보니까 사실은 돈 없이 영적으로만 할 수 있는 일도 많이 있지만 실제로 이 세상의 자원을 사용해야지만 완전하게 이 세상이 고쳐질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아요. 여러분들은 혹시 강철왕 카네기를 기억하시죠? 이 사람은 미국 사람으로서 강철 산업에 손을 대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번 사람입니다. 특히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전쟁은 어마어마한 철을 요구했고, 그래서 그 물자들을 사용하기 위해서 이 철강을 생산해서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번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조용히 자기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사제를 털어서 그가 사회를 위하여 일평생 공헌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뭘 하다가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자신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미국 전역에 아주 잘 만들어진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몇 개를 세웠는지 궁금하죠? 삼천 개. 그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가지고 아름답게 건물을 짓고, 그 건물을 좋은 책들로 가득가득 채운 도서관을 생전 삼천 개를 세웠습니다. 역사가들은 모두 카네기가 세운 그 도서관이 다음 세대에 미국의 변영을 가져온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젊은이들이 야비한 일을 버리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남녀노소 할 거 없이 과학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산업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인문학적인 지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됨으로 오늘날의 미국을 만드는 정신적인 기틀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얘기 나왔으니까 이 얘기를 나온 길에 안할 수가 없죠. 잘 들어보세요. 역사적으로 보면 10개의 교회보다는 하나의 신학교가 영향을 미치고, 10개의 신학교보다는 하나의 도서관이 더 큰 영향을 미친 역사가 많아요. 책은 그렇게 미래의 사회를 변혁시키고 현재의 사회를 개혁해 나가는 커다란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 도서관을 그렇게 제가 치열하게 하는 이유도 그거 뭐하겠습니까?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아세요? 왜냐하면 한 권, 한 권 가서 사와야 됩니다. 그거는 누가 돈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그거를 가서 그 고단한데 그거를 하루 종일 어떤 날은 9시간씩 매장에 서서 그거를 책을 꺼내서 컴퓨터에 두드려서 여기에 있나 없나를 확인을 해 가지고 그거를 뿌려 가지고 그거를 싣고 와야 합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요. 근데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나보고 지금 있는 책을 다 읽었느냐고 물어보는데 신학 전문 도서관에 있는 책이 300년 읽을 분량의 책입니다. 내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그거를 다 읽었겠습니까? 그렇게 질문을 하지 말아요. 근데 반드시 이 조국의 교회들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하는 나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신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서관 운동을 해서 만약에 근데 그 돈이 그렇게 카네기 같은 사람들에게 흘러갔으니까 바르게 쓰였지 세상 사람들에게 들어갔으면 어떻게 쓰였습니까?
오늘 한번 보십시오. 대선 때가 다가오는데 몇 년 전 몇 해 전 어떤 대선에서는 사업하는 사람들이 돈을 모아가지고 트럭에다가 가득 실어가지고 지하실에서 트럭 키 째 인계를 해서 정치인이 그걸 받아가지고 갔대. 나는 정말 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그때처럼 창피한 적이 없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일화입니다. 트럭으로 돈을 하나 가득을 싣고 그 트럭을 정치인에게 넘겨줬다는 이야기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서 버젓이 걸어 다녀요.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거는 나라의 수치에요. 그런 사람들은 그냥 감옥에 넣어서 이게 뭐, 5년 3년 이렇게 선도해서는 안 돼 1000년, 2000년 언도를 내려서 아니 진짜 외국에서 그렇게 내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감형이 되더라도 100년 이하 못 넘어가게 만들어서 그냥 거기서 죽게 만들어야 됩니다. 사형을 시키든지. 지금도 한번 보십시오. 뭐,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어느 그룹에서는 뭐 정치인들과 권력 있는 사람들한테 주는 돈을 포장하는 방이 있다고 누가 폭로를 해 가지고 발칵 뒤집혔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너무 수치스러운 거고, 이 세상의 자원이 불법으로 점령된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이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선교건 뭐건 교회 일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야, 이 세상 사람들은 정말 어리석다. 왜 돈을 자기의 영혼도 망가뜨리고 세상도 망가뜨리는 일에 사용할까? 이게 우리는 이 망가진 세상을 펼치고 그리고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이루어지게 하는 이 쓸 곳이 이렇게 많은데 사람들은 왜 그럴까? 그리고 열심히 참되게 돈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줄라치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떡거리는 모든 사람들은 돈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야. 그게 문제입니다. 부자는 감동을 별로 안 받아요. 그러니 이제 어쩔 수 없지. 여러분들이 부자가 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돈이고, 이 세상의 권력은 권력일 뿐이지 돈이나 권력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면 좋을 지까지도 가르쳐 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들이, 권력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만을 우리에게 상속하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생명과 사랑, 은혜를 상속받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전에는 이 세상을 살면서 고난과 시련을 만나요. 그러면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힘들어 하고, 그것이 너무 심할 때에는 차라리 죽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죽고 싶다는 얘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진짜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에 의하면 너무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은 욕망, 이게 자살하고자 하는 욕망의 정체에요. 너무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싶어 하는 욕망,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 거야. 근데 내 힘으로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될 때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게 됩니다. 근데 그래서 어려움을 만나면 우리는 그 속에서 괴로워하고 고통을 받고 신음합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요. 그리고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신자인데도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소외감을 느껴요. 단절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인생의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라고요?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의지할 마음이 생겨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요. 그 은혜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생명과 사랑이 충만하게 부어질 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거나 시련이 멈춘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의 자원이 없는 궁핍이 해결된 것도 아니에요. 괴로움이 없어진 것도 아니에요. 근데 어떤 고백이 나오냐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는 고백이 생겨나는데 이러한 고백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내적인 유업들, 하나님의 생명과 그 사랑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함
이것을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한 것이라고 말하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좋은 것들을 먼저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은 그것을 당신과 한 몸을 이룬 교회가 누리게 하셨고, 교회는 자기에게 접붙인바 된 우리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누리면서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언제나 우리가 곤고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요청하는 은혜를 공급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게끔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을 때 진리의 빛을 구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날 때 주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영혼에 능력을 주셔요. 그리고 우리를 선한 뜻을 품고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고치시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었다고 하는 의미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이 세상에서 임금의 아들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커다란 지위를 가진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시지도 않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충만하게 누리게 하심으로써 이 생명과 은혜 안에서 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훌륭한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은 바로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주시고, 당신이 우리에게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이 모든 것들을 상속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그 분을 그 나무에 매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상속자인데 이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모든 것을 상속하여 누리게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이 세계의 완성을 바라보며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매달려 충만한 은혜와 사랑을 받은 후에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자원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이 세상을 위하여 섬기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그 모든 것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죄악 된 세상은 하나님께 멸망할지라도 거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깨끗하게 정결함을 받아 하나님을 알고 우리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이 세상이 모두 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가족이 되게 해야겠다고 하는 소명감이 우리에게 넘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을 깨닫고 죄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그리고 깨뜨려진 세상과 고장 난 사람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살려고 할 때에 그 살려고 하는 몸부림은 이 죄악된 세상이 흘러가는 물줄기와는 반대의 물줄기에요. 그래서 언제나 거기에는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고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과는 다른 세상이기 때문에 마치 어두움이 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싫기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들의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진실한 신앙의 자세는 오래 참고 인내하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 견디고 참는 것,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내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고난을 받는 것은 나에게 영광입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열렬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개척교회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수요 예배 설교가 끝났는데 처음 보는 청년 하나가 상담을 하고 싶대요. 그래서 교회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누구냐 그랬더니 “신학대학원 3학년 학생입니다.” 그래요. “뭘 물어보고 싶으냐?” 그랬더니 두 가지를 여쭤보고 싶대요. 그래서 “뭐냐?” 그랬더니 “설교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서 “설교를 잘하려면 잘하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봐야지. 나 같은 사람한테 와서 물어보느냐? 내가 설교를 잘했다고 그러면 이 지하실 교회에서 교인 50명 놓고 설교하고 있겠느냐?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면서 수많은 영혼을 살렸겠지.” 결과는 1:0이었습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졌다 이 뜻입니다. 두 번째 질문이 뭐냐? 그랬더니 “목사님, 열렬하게 기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열렬하게 삽니까? 당신이 열렬하게 기도하려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데 당신이 열렬하게 살고 있다면 나한테 질문할 필요가 없이 열렬하게 기도가 될 것이고, 당신이 열렬하게 살지 않는다면 그 열렬하게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2:0으로 패하고 그는 심히 슬픈 기색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6개월 후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그날 이후로 자신에게 은혜를 주셨는지를 아주 열렬하게 간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영적으로 살림을 받아, 영적으로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살아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분들이 기동하며 교회오고, 예배드리고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산다고 해서 그것이 다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미로슬라프볼프라고 하는 신학자가 삼위일체와 교회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동서독을 가로막고 있었던 베를린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동서독 사람들이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외친 첫 번째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We are the people.” “우리는 인민이다". 라는 구호였습니다. 그 역사적인 사실을 예로 들면서 미로슬라프볼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단 세 사람이 모였어도 우리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니고 종교 의식에 참여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 세상을 바꿔 놓고자 하는 결심 때문에 그 세 사람을 우리는 교회라고 이야기 하면 이것은 진정한 교회를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의 매체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 세 사람이 모였어도 우리는 교회입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어떠한 영적인 일들이 이 세 사람 안에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영적인 연결을 가지고 한 몸을 이루어 한 하나님이 되신 것 같은 사랑의 교통이 이 거듭난 신자들 안에서 연결을 이루어 삼위일체의 모상을 이루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가 있을 때에 그는 단 세 명밖에 안 되지만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바로 우리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교황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직제와 사제들과 이 모든 계급이 교회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는 그게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는 그 사람이 그 사람들 속에 있는 예수 안에서의 이 연합 때문에 세 사람이 모여도 우리는 교회입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뜻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III. 고난과 영광에 참여함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은 한번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름을 받았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명과 그리고 그 은혜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을 주셔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쓰고 입고 먹고 마시고 누리는 모든 것들이 단 하나의 예외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주셨는데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죄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그 유업을 지금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물어보시지 않을까요? “나는 너를 자녀 삼아서 내 집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너희에게 누리게 해 주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쓸 물질적인 풍족함 뿐 아니라 사랑과 동정과 우정과 모든 정신적인 것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생명과 성령의 법을 너희에게 주었다. 그것으로 너희는 무엇을 하였느뇨?” 라고 물을 때 여러분들은 무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무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제가 매 예배시간마다 눈물로 여러분들에게 호소하는 얘기가 뭔지 아세요? “무위도식하지 마라.” 내 죽을 때에도 눈감으면서 유언할 것입니다. 무위도식 하지 마라. 왜? 그 무위도식하면 가장 무위도식하는 일에 최대의 피해자가 누구인지 아세요? 가정에서 가장이 무위도식하면 그 피해는 가족들의 궁핍으로 돌아오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여러분들이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러분 자신의 영혼입니다. 왜 여러분들 여기 지금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있죠. 여러분들이. 여러분 가운데 30%이상은 지난 한 주간 동안에 10분도 기도 안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고도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서 볼 때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리고 기도와 말씀은 그 영적인 힘을 공급받는 가장 중요한 통로인데 여러분들은 여러분 가운데 제가 보기에는 30% 이상은 지난 일주일 동안 단 10분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여러분 가운데 취침 기도도 안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비추어 보면 그런 식의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거는. 마치 50일 굶은 사람이 노동을 못하듯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도를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모든 진리를 성경은 무기로 비유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곧 칼이라고 말합니다. 전쟁할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끊임없이 공급해 주는 것은 짐만 늘어날 뿐입니다. 쌀을 등에 짊어주면 행군하고 가다가 먹으면서 줄어들기라도 하지. 이 무거운 무기를 짊어지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가 없으니까 전투적인 삶이 없으니까 간절한 기도가 없고, 간절한 기도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런 거 없는 것입니다. 이번 가을에도 가을 기도학교, 사경회 인생의 벼랑 끝에 선 그대에게 하지않습니까? 진짜 벼랑 끝에 선 사람은 벼랑 끝에서 한숨짓고 있지 여기에 안 와. 그러고 인생을 조금 더 살면 머리가 허예져서 인생 끝나는 것입니다. 두 손을 쥐고 그 늙은 손으로 결심을 해 봐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얻은 그리스도 안에 얻은 생명인데 우리가 그렇게 일생을 살다가 죽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의 간절한 소원이 뭐입니까? 왜 사세요? 정말 간절하고 절실한 소원이 뭡니까? 주님이 오셔서 한 가지 소원만 말해봐라. 내가 뭘 들어주랴 그럴 때 과연 자신 있게 이것을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말해도 하나님 앞에 쑥스럽지 않은 소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얼마나 될까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가슴에 맺힌 것이 있는 사람입니다. 맺힌 것이 미움 때문에 맺힌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맺힌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 데려가실 거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에 너희 끝났다. 이젠 인생을 마감하라. 넌 내게로 오라.” 그럴 때 “아 7년 전부터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죽이십니까?”그럴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아마 “지금 나 너 데리고 가야 되겠다. 그러면 “지금은 아직은 안 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거 뭐입니까? 만약 하나님이 지금 나를 데려가신다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소원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이것입니다. 정말 그게 있느냐 이 얘기에요. 무위도식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유업들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할 소명감이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죽는 것은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내가 지금 죽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우리 가족이 아직 다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우리 구역의 식구들이 아직 예수를 잘 안 믿습니다. 아니면 열린 교회가 이렇게 약합니다. 아니면 남북통일이 아직 안 되었습니다. 아니면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돌보아야 할 청소년들이,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내가 지금 눈을 감겠습니까? 우리 엄마가 아직 예수를 안 믿고 늙어 가시는데 예수를 믿는 것을 봐야지만 내가 눈을 감겠습니까? 뭐든지 좋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근데 그게 정말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없으니까 하나님이 많은 유업들을 주셔도 감사하지 않고 주신 그 유업을 가지고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의도대로 사용하는 대신 자기의 욕심과 만족을 위해서 사용을 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추루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지금은 물자가 넘쳐서 애들이 과자를 줘도 잘 안 먹는 시대에요. 우리 초등학교 때만 해도 하여튼 주전부리라고 그러죠. 그 간식거리가 없습니다. 오후에 이제는 점심시간도 지났고 저녁 먹자니 아직 때가 먼데 방학 때 같은데 구루마를 끌고 아저씨가 가위로 소리를 내면서 와요. 애들이 새카맣게 모여요. 엿 장수. 엿 장수. 그리고 엿 장수가 와서 아이들이 새카맣게 모이면 일장 연설을 하는 것입니다. “야, 너희들은 이제 가라. 너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고물을 찾아와라. 할머니가 신다 버린 다 떨어진 고무신, 그 다음에 찌그러진 양은 냄비. 그 다음에 형이 쓰다가 버린 책, 다 가져오면 준다.” 그러면서 엿판을 두드려서 깨뜨려서 그래서 하여튼 딱 손가락 마디 하나 만큼이야. 요만큼씩 그것도 애들 손도 못 대게 합니다. 왜? 더러우니까. 애들 손이 보통 더러운 게 아니에요. 입에다 하나씩 넣어줘요. 그러면 엿 요만큼을 입에다 넣는데 이게 달콤하게 속에서 녹는 거야. 이게 평소에 먹어보지 못한 이 달콤한 엿이 들어가면서 온 몸에 당분이 퍼지면서 눈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벗어놓고 안방에서 낮잠을 주무시는데 할머니의 신고 다니는 고무신인데 그 엿을 먹고 나니까 이게 고물로 보이는 것입니다. 형이 보다가 마루에 잠깐 놓고 간책인데 이게 형이 다 쓴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에도 거기에다가 죽을 담아가지고 개가 밥을 먹었는데 저녁때에도 그 밥그릇을 써야 하는데 그게 그 찌그러진 냄비로 보여서 그걸 고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명에 충실한 애들이 고물을 가져오면 그 아저씨가 엿을 잘라서 주죠. 그리고는 그 엿을 손에 들고 빨아 먹으면서 왜? 깨물어 먹으면 금방 먹으니까 빨아먹으면서 이제 온 동네를 돌아다니고 그날 밤에는 골목 여기저기서 타작하는 소리가 들려요. 아니 이건 조금도 보탠 게 아니라 실화 그대로에요. 여기저기서 얻어맞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보고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한다면 그게 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보지도 못한 그것을 위해 산다는 것은 너무 막연하니까 그렇게 안살아. 그래서 하나님이 맛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직까지도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는데도 이렇게 사경회 때나 예배 때 와서 은혜를 받고 나면 우리의 마음속에 이 말씀이 들어오고, 은혜가 들어오고, 생명이 들어오면서 우리의 마음을 확 적시면서 회개가 나오고, 이젠 우리 인생을 이렇게 덧없이 살아선 안 되겠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좇으며 우물가에 있는 여인처럼 헛되고 헛된 것을 구하면서 인생을 살았구나. 난 이렇게 살 수 없다 다짐이 생겨나면서 결단하며 난 이렇게 살 수 없다 결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눈을 뒤집어 놓는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엿 먹은 애들이 눈이 뒤집혀서 세상 모든 만물이 고물로 보이는 것처럼 생명과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이게 눈이 뒤집히면서 세상 모든 만물이 예전에는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누리고 쾌락을 맛보기 위해서 존재하는 세상이라고 믿었는데 이게 뒤집히면서 세상 모든 만물이 사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 같은 인간을 어디에다 쓰시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시면서 나를 구원하셨는가?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치열한 마음이 생겨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은혜를 받지 못하면, 누구도 사명을 발견하지 못하면 무위도식하는 삶을 떠날 수가 없고, 누구든지 은혜를 받지 않고는 사명의 근처에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 그게 주일 학교 다니는 어린 아이에게도 사명이 주어지고, 골골해서 내일이면 숨을 거둘 노인에게도 마지막 남은 이틀 동안 무슨 일을 이 세상에서 해야 될 지를 사명으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이렇게 소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평탄한 길을 주시는 것만은 아니에요. 고난과 시련이 있고 그리고 이 세상의 질서가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 놓은 질서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2000년 전에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고난을 당하셨는지를 거기에서 체험하면서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다시 은혜를 하나님이 주실 때에 우리가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그 큰 영광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나 속히 세월이 흘러요. 그래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세월이 속히 지나가요. 그런데 우리의 남은 인생의 날들은 한 뼘도 안 남은 아주 짧은 인생의 날들입니다. 그날을 우리들이 헛되이 사용하지 말고, 무위도식하지 말고 뭐라도 하세요. 내가 하라는 얘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눈물을 흘리며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을 하시라는 얘기에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고난도 받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에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구나. 그리고 그 소명을 따라 살 때 우리는 매일매일 시련을 이기고, 고난을 극복하는 생명과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5.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에 첫 번째 투옥되었던 주후 61년 겨울부터 63년 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여겨집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62년경에 이 골로새서가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골로새서는 제가 매우 좋아하는 성경 중 한권이고,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우주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었고, 아마도 에바브로디도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래도 이 교회는 사도바울의 목회적인 지도력 아래에 있었고, 그 신학적인 영향력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훌륭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좋은 교회였고, 그래서 사도는 편지의 서두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자기가 들었기 때문에 이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서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쓰게 된 동기를 보면 그렇게 만만치 않은 어려움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훌륭한 신앙을 가진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많은 이단들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율법적 의식주의와 철학의 영향을 받은 금욕주의, 그리고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상, 당시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영지주의의 도전까지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제시함에 있어 그 출발점을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두었습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뒤로는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을 말하고 현재적으로는 구속의 계획을 가르치고, 미래적으로는 완성의 전망을 교훈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그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사 우리를 속량하기 위해 죽고 다시 사셨으며 그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들을 토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완성해 가기 위하여 교회의 머리가 되셨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바로 그렇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셨다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나의 육체에 채우노라” 하였습니다.
II.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우리는 지금 ‘예수와 함께 못 박힌 것은’이라는 시리즈를 다섯 번째 듣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사신 것이 무엇을 위한 경륜이냐고 물을 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우리의 육체에 채우기 위한 경륜이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정황 속에서 결국은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이 질문이야 말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신 경륜과 우리를 예수와 함께 못 박히고 다시 살게 하신 경륜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느 시대이든 그리스도인이 누구냐고 하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교회의 수많은 분열과 그리고 타락,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까지도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놓치거나 다시 찾아온 역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을 그저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거나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이룰 수 있는 고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오늘 이 본문이 말하는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두 측면 즉, 고백적 측면과 신령적 측면, 두 가지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A. 고백적 측면
우선 고백적인 측면에서 보면 첫 번째로 이것은 모든 구원에 이르는 길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묻고 싶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의 길을 알겠으며 그것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이 구원이라고 하는 의미가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이 사용할 때의 의미와 아직 이런 구원의 도리를 모르는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이방인이었을 때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죄인이고,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때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없어도 분명히 알고 있는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행복해지려고 예수를 믿은 것이지 더 비참해지고 짓밟히려고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모든 길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학문을 통해서 보다 더 행복한 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많이 모아서 그것을 소비함으로써, 어떤 사람들은 자기 일생에 하고 싶은 일들을 행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여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높은 도덕에 도달함으로써 자기가 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점에서 그들에게는 그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이 모든 것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정하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길이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 이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모든 행복에 이르는 길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백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나의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다른데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부활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이러한 고백을 토대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 이외에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길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내가 구원받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해 주신 그 은혜만을 의지 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이런 고백을 스스로 씹어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고백을 해 놓고, 그 다음에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해지는 비결이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게 되는 유일한 원인입니다.
저는 닷새 동안 여러분에게 사경회에서 설교를 했고, 설교의 전체적인 핵심은 오직 하나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어 보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불행이다. 라고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치명적인 교훈입니다. 자,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참된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는다고 하면 입술로는 구원의 길이 예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마음으로는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찾는 사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영혼의 질병이 생기고,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이 부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로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는 죽음과 방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이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불행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를 구원해 주시고,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그래서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주되심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일생 살면서 유지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우리들이 육체로 잘못된 죄악 된 습관에 물들어서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욕의 죄를 비롯해서 그리고 젊은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오락이나 육체의 쾌락에 빠지는, 육체의 즐거움에 빠지는 것, 심지어는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게임에 심각하게 중독이 되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오늘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있는 지침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것 자체가 비록 심각한 범죄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또 어떤 것들은 그 자체가 이미 심각한 범죄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성적인 쾌락에 탐닉하여 범죄하고 있는 경우 같은 것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강력한 습관이 되어서 여러분을 끌고 갑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의 은혜로 구원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주인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씹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중 여러분 자신이 고유하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그리스도 예수의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사실을 가슴에 명심하고 여러분의 육체도, 마음도 단 하나 그 중 티끌만큼도 여러분의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심각한 죄에 빠져서 이런 신앙의 고백을 전적으로 씹어버리는 그런 배신의 길을 걸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행복합니까? 그것은 마귀가 여러분이 죄를 짓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주는 하나의 싹입니다. 그리고 그 싹을 계속 받으면 마지막에 이르는 곳은 영혼과 육체의 완벽한 죽음입니다.
(예화) 여러해 전에 미국에서 나온 광고였는데 섬뜩했습니다. 예쁜 여자가 화장을 곱게 하고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하나씩 지웁니다. 여기에는 깊은 다크 서클이 생기고, 그리고 입을 여니까 예쁜 입술이 지워지고 나니까 이빨이 빠지기 시작하고 피가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온 문구가 ‘마약의 중독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라고 나왔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순간 나의 육체도, 나의 마음도 단 한치도 내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쾌락에 빠지고, 마음을 미움으로 물들이고, 죄악 된 생각을 하고, 허무하고 허탄한 것에 그 마음을 쏟아버리고 이럴 수 있는 권리가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그 마음은 예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몸 중 어느 발톱 하나도 여러분의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여러분의 육체를 가지고 쾌락의 도구로 삼고 그리고 아무 가치가 없는 일에 여러분의 육체를 사용해서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할 수 있는 권리가 여러분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예수의 것을 여러분이 훔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평화와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아가 확실하게 살아있는 가운데 더럽게 무자비하고 야비한 교리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이 자기를 꺾고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 그 분의 마음에 합치된 상태에서 이런 설교를 듣는다면 지극히 달콤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삭임처럼 들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토대로 네 번째 측면이 무제한의 순종과 헌신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가 너무나 무한하기 때문에 이제 내가 산 모든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예수가 사신 것이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그 하나님께 무한한, 무제한의 순종을 드리고 주님이 나에게 당신을 위해서 살라고 하시는 삶이 어떤 헌신적인 삶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가혹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다 빼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널널하게 해 준다면 당장은 그 소리가 감미롭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신앙생활해서는 신앙 때문에 행복해지는 길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때문에도 행복하고 세상 때문에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고, 쉬운 믿음의 길을 택하지만 예수 때문에 행복하지도 않고 세상 때문에도 행복하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망에 이르는 길은 넓고 그리고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B. 신령적 측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이런 고백적인 측면이 아니라 신령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과 정신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사람은 수백 번을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도 결코 알 수 없는 어떤 신비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인 사람입니다. 즉, 죄와 그리고 허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완전히 죽었던 인간, 그래서 죽었기 때문에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의 행동은 못하고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만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사람,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냄과 복수와 이런 모든 육체의 열매만을 맺을 수밖에 없는 이 사람이 살아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진 사람입니다. 이 교회는 영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 지정되었고,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받은 백성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그 교회와 상관없이 동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인데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부분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 직접 접붙여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을 제도로서의 교회와 사제들의 조직 속에서 찾지만 그러나 우리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의미를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영적인 교회와 관련시켜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관련시켜서 이 교회 밖에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사실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영적으로 접붙여져 그의 지체의 일부가 되었다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즉, 교회 몸에 접붙여짐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내려오는 그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에 참여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 분의 마음과 뜻에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생명적인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추론해 볼 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은 필연적으로 교회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도를 향한 모든 좋은 것과 그리고 사랑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부어진 것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에 전달된 것이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이 모든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 그리고 모든 은총들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모든 좋은 은사는 이처럼 교회가 공유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고 심지어는 여러분이 오늘날 사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해서 번 돈도 사실은 하나님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한 생명을 이루면서 서로 공유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의 일부인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예수와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예수와 함께 살 때에 우리는 교회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와 함께 살게 하신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III. 교회와 함께 살게 하심은
A. 지체들을 위한 고난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이처럼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죽은 우리를 교회와 함께 살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지체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오늘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토이스 파데마신’이라고 하여 ‘너희 때문에 겪는 그 고통들을’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는 그 순간 영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와 떨어질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다면 교회와 함께 참여하는 것이고, 교회로부터 교회에게 부여하신 그 생명의 은혜에 우리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은 동떨어질 수 없고, 이때 이 교회의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영적인 교회의 전체의 운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교회들은 이제 보이는 이 교회 속에서 구체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교회가 여러분의 영혼이라고 말한다면 보이는 이 교회는 여러분의 육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교회 속에서 우리가 예수와 연합된 것을 보이는 교회 속에서 구현해 나가고 보이지 않는 교회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보이는 이 교회의 지평 속에서 실현해 나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생명과 은혜를 주시고, 성도들은 그것으로서 자원을 삼아서 하나님이 일반 섭리 속에서 성도들에게 주신 이 껍질로서의 교회와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자원들을 가지고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함께 모든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온전히 이루어 가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제가 종종 여러분에게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그 얘기는 교회에 와서 이런 저런 봉사를 하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위도식하지 말라는 것은 이렇게 영적인 몸인 그리스도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면서 사는 일치의 삶이 없으면 여러분 자신은 이렇게 충만한 예수의 생명과 은혜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교회는 무엇을 섬기기 위해서 수고하도록 우리를 예수와 함께 사랑하게, 교회와 함께 살게 하셨을까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여러분은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이 모든 헌신이 결국은 이 세상 모두를 하나님께 예배하는 세상으로 만들고, 이 세상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자로 만들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섬김의 대상이 있는데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를 섬깁니다. 이것은 목양과 그리고 교회의 많은 헌신, 지체들을 양육하고 붙들어 주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고 섬기고 봉사하고 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자체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 것처럼 이번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회가 교회 자신을 위하여 헌신하고 섬기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섬겨야 할 두 번째 대상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세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이교도들이 고통을 받을 때에도 우리는 구제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이교도들이 어려움을 당해도 성도들이 헌금으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루시는 지를 보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할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특별한 은혜와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 심지어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까지 햇빛과 단비를 내리시고 곡식을 주셔서 먹고 입어 살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헌금한 것이 이교도들을 구제하여 그 음식을 먹고 힘을 내 자기네 신을 열심히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베푸는 것이 하나님 뜻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것들에 계기가 되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과 경배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을 따라 이교도들에게도 구제하고 먹이고 헐벗었을 때 입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이 분명하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제하는 이것이 세상을 향한 섬김인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섬긴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를 위한 섬김이라고 사도가 말했을 때에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위한 섬김인 동시에 세상을 위한 섬김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깊이 변화되어서 온전한 신자가 될 때에 최고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은 여러분의 가족들입니다. 더 많이 희생하고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고, 긍휼히 여기고 눈물로 위하여 기도해 줄 것입니다. 가족들이 그 사랑을 몰라도 여러분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온전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지체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처럼 살아가지는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무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밝은 진리로 더 깨우쳐 온전한 지식의 사람이 되게 하고, 지식은 있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그들을 격려하고 북돋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새롭게 만들어서 온전히 선한 의지를 가지고 주님께 복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더 많이 은혜 받은 사람들을 노예처럼 사용하셔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상전처럼 섬기게 하십니다. 받은 것이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섬기도록 낮아지게 하시고 낮아지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사도바울은 오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이런 망발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배우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위한 충분한 고난을 치루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충분한 고난 때문에 그것이 대가가 되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당신의 자녀 삼아주셨다고 배웠는데 남은 고난이 있다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감히 그 고난을 자기가 성취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혹시 복음을 전적으로 오해한 교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다 이루신 고난과 남은 고난, 홀로 당하기로 작정하신 고난과 우리를 참여하게 하신 고난으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 이루신 고난은 절대적으로 예수 홀로 당하기로 작정된 고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때에 자기도 기꺼이 따라 죽겠노라는 결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허락을 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칠 때에 양들을 모두 흩어지게 하셨고, 심지어는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 부인하였는데 어쨌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받으시는 그 고난에 누구도 참여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은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고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고난의 십자가를 혼자 지는 것에 대해서 제자들을 원망하거나 제자들에게 실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어차피 당신 홀로 당하셔야 하는 고난이고, 이것은 우리의 죄를 위한 고난인데 충분히 다 이루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보탤 것은 추호도 없고 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예수의 몸에 접붙여 그리스도 교회의 일부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는데 남은 고난은 교회론 적인 지평과 관련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남은 고난은 당신 홀로 당하시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를 그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면서 예수와 그리고 우리가 함께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이런 종류의 고난인데 이런 고난은 기독론적 지평이 아니라 교회론 적인 지평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진 고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교회라고 할 때에는 교회도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머리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당신의 몸도 당신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사도바울이 성경에서 이야기 하듯이 머리와 몸이 어떻게 나뉘어질 수 있겠으며 지체와 지체가 어떻게 쪼개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것은 몸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고난은 다 이루신 고난이 아니라 남겨진 고난이고, 그 고난은 당신 홀로 당하시는 고난이 아니라 우리도 그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이 아주 아름답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충분히 받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남겨두신 고난을 또한 교회가 짊어지게 하심으로써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예수의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주 놀라운 아주 오묘한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예화) 교회에서 직원으로 있던 자매가 결혼식에 오랜만에 왔어요. 시집가서 벌써 다른 교회 사역을 나갔고 사모일을 하면서 아이가 벌써 한 너댓 살 되어 아주 예쁘고 키도 크고 잘 생겼습니다. 그래서 보면서 얼굴을 보니까 벌써 많이 완전성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내 그랬어요. ‘얘야, 애 기르는 거 힘들지?’ 눈을 지그시 감으면서 ‘목사님 너무 힘들어요.’ 그랬습니다. ‘이제 엄마 마음 알겠지?’ ‘네’ ‘목사 마음도 좀 이해가 되니?’ ‘네 목사님.’ 청년 때 제가 양육했던 자매 하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애 둘을 기르면서 펑펑 운다고 합니다. 자기가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지를 얘네들이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여자는 해산을 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애 낳아보지 않은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 영원히 애라는 이야기입니다. 해산함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야기는 애기를 낳아야지 천당 간다는 그 뜻이 아니라 애를 낳아봐야지만 비로소 그 자기를 낳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애를 낳아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 낳아서 친정에 맡기거나 시집에 맡겨 놓고 자기 좋은 대로 룰루랄라 돌아다니는 그런 애 낳는 거 말고 연년생으로 셋을 낳아서 그냥 시댁도 멀리 있고, 친정 엄마도 아파서 돌볼 수 없고 남편도 바빠서 직장생활 하는데 그리고 길러봐야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엄마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주님이 아니 그냥 다 끝내시면 되지 왜 남은 고난이라고 라벨을 붙여서 그래서 교회에 남겨 두시고, 그리고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는 것 같은 그 고난 받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는 그 섭리가 무엇인지 아세요? 그렇게 하면서 예수의 마음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 보세요. 여러분이 교회를 30년, 40년 다녀서 장로가 됐어도 그리고 뭐 교회에서 온갖 풍파를 다 겪어서 산전수전, 화생방전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죽어봤어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뼈저린 눈물을 흘려 봤어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경험해 봤어요? 그것을 해보지 않았으면 여러분은 아직 그리스도인들로서 애예요. 애. 그 얘긴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면에 있어서 신앙생활이 유치하다는 뜻입니다. 유치하고 치기열하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유치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직을 맡고 있으면 그 교회는 정말 유치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위해서 직분이 아무것도 없는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이상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아주 놀랍고 신비한 지혜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살아보려고 희생하고, 몸부림 치고, 연약하고 못된 지체들을 인해 고통을 받고 그것을 참고 인내하고, 눈물로 그들을 섬기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예수 앞에 누구였는지, 그리고 어떤 나쁜 인간이었는지, 그리고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얼마나 아프게 하였는지를 절절하게 깨달으면서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오늘 자신의 삶속에 스며들어 와서 그래서 자기를 그 남은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제가 무위도식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가 되어서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우는 만큼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 것만큼 주님이 사시고 내가 그렇게 죽는 것만큼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충만해지는데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함께 그 남은 고난에 참여하며 죽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어도 항상 허접해요. 그리고 마음에 예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 하는데 왜 그런지 이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 교회의 아픔이 자신에게 고통이 된다는 것, 그리고 성도들에게 누군가에게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을 때 자신도 행복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영적으로 핍절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영적으로 핍절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가끔 열린 교회를 멀리 떠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좋은 교회를 소개해 달라고 합니다. 소개해 줄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없을 때도 많습니다. 그냥 충고해요. ‘그냥 기도 많이 하고 가서 그래서 교회를 하나 선택해라. 그리고는 열심히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해라. 그런데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열린 교회만 못하다고 하더라도 투덜거리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섬겨라.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가끔 열린 교회의 사이트에 들어와서 설교를 듣는 것이 그렇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하거라. 그런데 열린 교회 사이트에 들어와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교회에 점점 적응할 수 없다면 인터넷을 끊어라. 그리고 차라리 잊어버려라.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 교회에서 작은 말씀이라도 붙들고 은혜를 받으려고 애를 쓰고 그 교회에 바로 그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그것 때문에 너를 거기에 보내신 것이니 네가 한 알의 밀알이 되라. 그리고 열린 교회의 교인이었던 기억도 지워버려라. 그리고 스스로 이제 이 교회 밖에는 나에게 교회가 없다고 생각을 하거라.’
은혜로운 교회, 그리고 사랑이 있는 목회, 그리고 참된 진리의 말씀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 섬기라고 주신 진리이지 그 진리를 알면 알수록 그 교회에 부적응하라고 주시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든지 아니면 가지를 말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이유입니다. 여기에서 그의 고난을 나의 육체에 채운다고 했는데 이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육체를 가지고 주님을 섬기면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늘 고난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일을 재미로 하려는 사람이 있거든요. 아, 재미가 없다고 그러는데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재미로 죽으셨어요? 그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는데 재미가 있을 수 있어요? 제가 말씀 드리잖아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그게 재밌고 너무 즐겁고 모든 것이 잘될 때는 예외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외적인 시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고난과 시련이 오고 그리고 어려움이 생기면 이게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의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몸을 아끼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수고한다는 뜻입니다. 조지 윗필드라는 설교자가 말했습니다. ‘썩어서 죽느니 닳아서 죽어버리겠다.’고 말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더 감동스럽게 말했습니다. ‘죽도록 주님을 위해 일하십시오. 그러다가 진짜 죽게 되면 그때 살려달라고 그러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한 주간동안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당신의 수고를 그 분이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삶이었습니까? 또, 한 가지는 그의 고난을 나의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정욕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고난을 나의 이 육체에 채움으로써 정욕을 죽이고, 이 죄를 따라 살려고 하는 나의 본성을 죽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욕망이 고개를 들거나 자신의 인생을 허무한 일에 굴복하면서 쓰거나 혹은 아무 쓸모도 없는 염려와 근심이 엄습할 때마다 여러분은 다짐해야 합니다. 나의 마음에 어느 한 구석도 예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고, 나의 육체 중 발톱 하나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없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에 나 자신을 낭비할 수 없다고 다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길은 수고 하는 길이고 눈물이 있는 길이고, 고통이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에는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충만한 생명과 은혜를 주십니다.
IV. 적용과 결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우리의 육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의의 병기로 드리도록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이 세상을 위하여 주님 섬기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여러분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남겨 놓으신 이 십자가의 고난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참여하고 그 고난을 여러분의 육체 속에 채움으로 교회와 함께 충만한 생명을 누려 복의 근원이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6.교회의 일꾼되게 하심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1:25)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는 이렇게 자신이 그리스도 교회에 접붙여진 한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사실을 앞서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자신이 일꾼된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오늘 25절에서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또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살리신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게 하심이었고, 그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알고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II. 교회의 지체됨의 세 지평
A. 유기적 생명
우리가 교회의 지체됨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최소한 세 지평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지평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유기적인 생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거듭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생명을 독단적으로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던 교회에 영적으로 접붙여졌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리는 이 생명은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주신 생명이고, 이 생명을 여러분이 누리는 것은 그의 몸에 접붙여져 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느 날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다면 그래서 예수의 생명이 여러분 속에 넘쳐난다면 그 생명은 원래 교회의 것이고, 그리고 그 교회의 생명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그 생명의 은혜를 누릴수록 하나님의 교회에 이 생명이 충만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여러분이 사랑을 받을수록 이 사랑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한다는 의식을 항상 가지고 이 생명의 은혜에 참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충만한 생명은 예수의 생명이고,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이 생명과 성령의 법인 이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라지거나 쇠퇴하지 않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생명입니다마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교회에 주신 이 생명은 가변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충만해지기도 하고 교회에서 쇠퇴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륜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같은 교회라고 하더라도 이 모든 인류의 구속이 완성된 다음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생명은 고갈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우리가 충만히 누리는 생명이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게 모든 것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생명이고 예수의 사랑이지만 이것은 교회가 그 언약에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 생명이 충만하게 누려질 수도 있고 혹은 쇠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 안에 이런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혹시 은혜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이 은혜와 사랑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있는 교회에 접붙여짐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전수받게 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누릴 적마다 하나님이 이것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충만히 주셨고, 나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 있기 때문에 이 충만한 것을 누린다고 생각하며 이 생명에 대한 교회론적인 숙고를 우리의 몸에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 교회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충만하게 넘쳐서 그래서 모든 교회가 이 생명으로 충만해지기를 원하는 것, 그렇게 되기 위하여 순종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주신 생명이 실제로 그리스도인 안에서 충만하게 넘치기 위해서는 신자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순종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한 개인이 개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몸의 일부로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 전체에 충만한 생명이 우리에게 더 많이 누려지기도 하고, 덜 누려지기도 하게끔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신자의 영적 삶에 있어서 개인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고 은혜를 사모하면 이것은 여러분을 위한 일인 동시에 교회의 유익이 되는 일이고, 미끄러져서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고 부패해지면 그것은 여러분에게만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중대한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교회의 지체됨 안에서 유기체적인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B. 유기적 통치
두 번째는 유기적인 통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생명을 주신 것은 살아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자기를 만드시고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로 하여금 어떤 교회가 되고, 어떤 삶을 살아가게 할지 그래서 우리가 그 교회의 일부로서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또 교회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 자연 만물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지를 당신의 의지를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의지는 율법과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고, 이런 하나님의 의지를 따라 살도록 하나님은 교회에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화) 요새 매스컴에서 소위 ‘미다졸람’이라고 하는 마약 성분이 있는 이 신경안정제를 주사 놓는 것에 대해서 거의 매일 이렇게 신문에 기사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경 안정제의 일종인데 그 주사를 맞으면 편안하게 미끄러지듯이 잠이 드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이 중독성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아침에 병원에 가서 이 병원에서 맞고, 그 맞고 잠드는 게 조절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두 시간에서 세 시간정도 걸립니다. 끝나고는 그 다음 병원에 가서 또 맞고, 깨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 병원에 가고 하는 것을 밤늦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몸에 매우 안 좋은 것은 분명합니다. 옛날 우리 노인들이 우리가 잠이 많아서 젊은 사람들이 잠을 지나치게 자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은 귀신이 씌였나? 왜 이렇게 잠만 퍼질러 자냐?’라고 말입니다. 옛날 노인들에게, 어른들에게 이 잠은 죽음의 모상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삶이 아닙니다. 잠도 삶의 일부일 수 있지만 잠을 통하여 에너지를 축적하고 이튿날 일어나서 그 에너지를 가지고 뭔가 인간인 자기에게 부여된 목적과 가치를 따라 살 때에 그 잠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만하고 살 수 없어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잠시는 자기가 집중하던 일에서 신경을 돌려서 신경을 분산시켜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휴식 또는 레크리에이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뭔가 가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 때에 그것이 바람직한 휴식이 되고 정신의 흐트러짐이 되는 것이지 목표가 없다면 그것을 어찌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계속해서 연속해서 주사만 맞고 계속해서 잠들어 있는 상태에 빠져 버린다면 그에게 생명은 무엇 하라고 준 것이겠습니까? 모든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활동하라고 주신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의 기운이 남아있는 동안에는 이 육체의 고깃덩어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면서 사는 것이 생명을 주신 이유일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는 것은 살았지만 사실은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의 생명을 풍성하게 주실 때에는 당연히 그 생명을 가지고 어떻게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주셨겠지 그냥 살아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의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 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양심으로도 사람들을 통치하시지만 특별히 신자는 복음과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를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하심으로써 성도들이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성도의 삶을 세속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주일을 잘 지키지 않고 방종하게 사는 사람들을 가두는 지하 감옥 같은 것 없습니다. 등록한지 2년이 지나도록 새 가족, 성장반을 완주하지 못하면 구류에 처한다든지, 아니면 곤장을 친다든지 그런 권한이 교회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는 지하실도 없고 감옥도 없습니다. 자유입니다. 너무너무 잘못하는 사람들을 교회는 너는 교인이 아니니 이제는 이 교회에 나오지 말라 하고 선언을 하고 그를 출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뿐입니다. 최고로. 그러니까 자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생명을 충만하게 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않고 살아가면 세상 편한 교회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무서운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우습게 보이는데 사람이 왜 무섭겠습니까? 마음대로 첨벙거리고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그런 식으로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고 언젠가는 여러분이 교회에서 왜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살았는지를 준엄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변명해야 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아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알고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영적인 생명은 은혜를 받아 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법보다 무섭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책망할 때에는 지하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더 떨립니다.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이렇게 당신의 통치에 복종하면서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보면 은혜를 받을 때에는 진짜 열렬하게 은혜를 받는데 받으면 뭐하나 하는 사람들이 있죠? 왜? 받을 때에는 그렇게 열렬하게 앞자리에 앉아서 그저 막 온 몸이 들썩이도록 박수를 치면서 은혜를 받는데 몇 달 지나고 나면 개가 자기가 토한 곳으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던 웅덩이로 돌아가듯이 똑 같은 사람으로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받은 은혜를 유지하지 못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순종하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분에게 순종하라고 힘을 주시는 것이지 그 은혜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즐거우라고, enjoy하라고 자기 소비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내게 이런 은혜를 주셔서 생명을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심이라고 생각하고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온전한 순종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C. 유기적 봉사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고 하는 의미의 세 번째 지평은 유기적 봉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 우리가 그 생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게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봉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당신이 몸소 창조하셨고, 죄로 말미암아서 이 지상의 세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죄가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나 원래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그 목적에 위배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만 영광을 못 돌릴 뿐만 아니라 그 대가로 인간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님을 멀리 떠난 세상과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화해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이 일을 위하여 교회를 당신의 몸처럼 사용하셔서 예수가 친히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의 뒤를 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온 세상에 단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는 교파와 신조와 모든 것을 막론하고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영적인 연합니다. 이 교회가 활발하게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진리를 따라서 그 분의 통치에 복종하고 세계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기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해 놓으신 거룩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본인들이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와는 상관없이 예수를 믿는 그 순간 교회와 한 몸이 되었고, 이제 교회의 운명은 여러분의 운명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바라든, 바라지 않던 세상 끝 날까지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그 몸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의 일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 몸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 살점은 우리에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10개의 손톱과 10개의 발톱은 한 달에 한 번씩 깎아야 하는 수고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귀찮은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배 나온 사람들이 발톱을 깎는 것은 고역입니다. 보이지 않는 발톱을 깎아야 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 발톱 소용없어 보이는 손톱조차도 힘주어 어떤 사물을 붙들고 그리고 걸음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몸의 지체입니다. 우리의 살가죽은 놀고먹는 것 같아도 추위와 더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더울 때는 우리의 몸에서 땀을 배출하여 우리의 체질을 조절합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혐오하고 싫어하는 여러분 몸에 붙은 기름기도 나름대로 봉사를 합니다. 살가죽 밑에 두툼하게 붙어 있어서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혹시 어디 찔리거나 해도 그 비계 때문에 우리의 몸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도 우리의 몸에서 우리를 스스로 보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온 몸의 지체들은 나름대로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우리의 몸에 붙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교회를 향해서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여기서 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여러분에게 무위도식하는 삶을 질타하고, 그리고 그 삶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얼마나 부끄러운 삶인지를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 안에는 이렇게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와서 단정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동안 먼지를 뒤집어쓰며 이 교회당에서 노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들어온 깨끗하게 깔린 카펫은 언젠가 이번 주에 사람들이 와서 그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깨끗이 닦아 놓은 바닥입니다. 여러분이 잠시 후에 시청할 그저 5-6분 시청하고 나면 지나가는 열린 뉴스도 이것을 여러분에게 편안하게 시청하게 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밤늦도록 대본을 쓰고, 어떤 사람들은 카메라를 들고 담임목사가 가는 데로 지방까지 따라 다니며 촬영을 해서 밤늦도록 편집해서 시간에 맞추어서 여러분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점심에 드신 따뜻한 국수도 누군가가 수고한 것이고, 땀을 흘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밟는 마당 하나도 누군가는 자신의 일부를 떼어 내어 하나님 앞에 바쳤기 때문에 밟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더럽지 않은 것도 누가 와서 허리를 굽혀 그 바쁜 시간에 물로 닦아내고 그리고 세제로 닦아냈기 때문에 여러분이 깨끗한 한걸음, 한 걸음을 떼어 놓는 것입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번 교회를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어느 하나도 생긴 그대로 된 것은 없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사람들의 그 무수한 헌신 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낮고, 나이도 많고 별 볼일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들의 봉사가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지위도 높고 그리고 여러분보다 사회적인 대접을 더 받는 사람들도 여러분보다 더 낮아져서 봉사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했습니까?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분의 통치에 복종하며 살고자 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이 듣기 싫어할지라도 나는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눈 감을 때 할 수 있으면 유언이라도 할 것입니다.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교회에서 놀고먹는 여러분이 미워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것이 여러분의 영혼에 매우 불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 삼주동안 이제 핑계 할래야 핑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의미와 교회와 연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들을 하나님 교회의 지체로 부르신 거룩한 경륜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온 몸이 살가죽 하나라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몸에 붙어있어 육체의 생명을 누리고 영혼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을 선택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봉사를 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 교회에서 한 구석을 섬기고 있습니까? 이런 세 지평, 유기체적인 생명, 유기체적인 통치, 유기체적인 봉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봉사는 교회 전체가 나아갈 바를 위해 이바지하는 봉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은 참으로 생명을 충만히 누려야 하고, 이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하고, 이 통치에 복종하면서 또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섬기는 일꾼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III. 교회의 일꾼을 삼으심
그러면서 오늘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됨의 지평 위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여기서 이야기하는 일꾼이라고 하면 이것들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교역자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따지면 사도는 스스로 장막을 기우며 자비량 하는 선교사요,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따라서 이 일꾼은 사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회에 접붙인바 된 모든 성도들을 일꾼 삼으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A. 교회의 일꾼이 됨: διάκονος
그러면서 오늘 사도는 자신이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디아코노스’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원래 섬기는 종들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크게 반성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과부들을 공궤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며 일곱 집사를 세워서 그 일을 위임하게 됩니다. 이때에 ‘공궤하다’라는 말이 희랍어로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입니다. ‘디아코네임’이라는 것이 바로 거기에서 ‘디아코노스’가 왔고 이것은 원래의 식탁을 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집사라는 말이 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 식탁을 차리는 그 일은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이 그 주인을 위해서 불편함이 없이 식사하도록 이 모든 식탁을 차리는 그 일이 바로 ‘디아코네인’ 다시 말해서 그 일이 바로 ‘디아코노스’였습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도 ‘디아코노스’였습니다. 그러면 ‘디아코니아 디아코노스’였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것은 무엇을 보여 주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셨지만 이것은 거들먹대고 그리고 쟁취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 아닙니다. 더 많이 종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들을 일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마치 주인의 편의를 위하여 식탁에서 낮아지며 봉사하는 노예처럼 바로 그 일을 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교회의 일꾼의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이 일꾼의 직분은 모두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일을 위한 일꾼이 있고, 적은 일을 위한 일꾼이 있고, 이 일을 위한 일꾼이 있고, 저 일을 위해서 부름 받은 일꾼이 있습니다. 그 일꾼이 하고 있는 일의 종류는 다르고, 그 일의 크기는 각기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그 일로 섬기는 모든 섬기는 자들의 정신은 한결같이 디아코노스, 노예로서 식탁을 봉사하는 것 같은 그런 일꾼으로서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자신의 일에 대한 처분권을 스스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번 주인이 맡겨 주면 주인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반항하는 노예이고, 주인의 엄중한 진노를 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디아코노스의 정신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교회든지, 다른 교회든지 어느 교회의 어쨌든 지체가 되었을 것이고, 거기서 주님을 섬긴 적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 오래 전에 섬기신 분들은 섬기지 않아서 추억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추억이라도 좋으니까 더듬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의 한 지체로 살아가면서 이렇게 종처럼 섬긴 날들이 얼마나 드물었습니까? 직분을 맡고 봉사한 적은 있다고 할지라도 디아코노스로 섬기는 대신 주인으로 섬기려고 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지 여러분이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 그 순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일을 못 찾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고 본분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만한 마음, 흐트러진 신앙생활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여러분을 정말로 불러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교회도 모르고, 그리고 하나님도 모르고 마음대로 살다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교회에 접붙인 바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생명의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는 비로소 이 교회 안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 밖에 나아가도 온통 하나님을 위해 하여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얼마 전에 어느 선교사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들을 많이 받기 때문에 웬만하면 답장을 안 씁니다. 여러 번 편지를 보냈고, 그 중의 한 편지는 거의 울면서 쓴 편지였습니다. 베트남에서 온 편지였습니다. 돈을 보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무슨 구호물자를 보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눈물로 간절히 호소한 것은 누군가가 여기에 와서 이 예수는 믿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 많은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으로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달라고 간곡히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장을 보냈습니다.
저는 여행을 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을 한번 하면 해야 할 일들이 수없이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아프리카에 강사로 와 달라고 여러 번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못 갔지만 그 이유와 함께 쉽게 갈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갔다 오면 무엇인가 발견하고 올 텐데 그러면 또 얼마나 많이 우리들이 수고해야 할까? 혹시 이러다가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도 소홀하지 않을까 라고 하는 염려도 많이 작용했습니다. 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들려오는 아프리카에 대한 소식은 정말 손짓하며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담대하게 먹고 한번 갔다 와야 되겠지요. 제가 돌아오면 여러분이 십자가를 많이 갖고 와서 여러분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어떤 때 외국에 가면 뜻밖에 정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야, 이렇게 할 일이 많구나.’ 작년에 유럽에 갔을 때 신학교를 방문했고, 몇 개의 신학교에 방문하고 그 학교의 관계자들과도 이야기하고 그 학교의 최고 책임자하고도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결국 뭐냐 하면 신학교들이 다 죽어갑니다. 그 분들이 말은 노골적으로 안하지만 이 밑에 감추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한국 교회 부흥했다면서요. 교인들이 그렇게 뜨겁고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이 헌신도 많이 한다면서요. 우리 유럽에 있는 신학교들을 좀 도와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한국에는 하나님이 주신 많은 돈 가지고 죄 짓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한국에는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은혜를 어디에다 쓸 줄을 몰라서 허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교리와 지식,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저 개인의 사유물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받는 그 즉시 당신의 교회를 위한 일꾼으로 삼으셨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오늘부터라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목사님이 저렇게 목숨을 걸고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계속 찔리는 것을 보니 내가 바로 그 인간인 것 같습니다. 내 눈을 열어주어서 도대체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 교인으로 만드셨을 때 나를 위해 예비한 두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일주일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분명히 무엇을 위해 일을 해야 할지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무엇이든지 열심히 섬겨서 여러분은 희생하고 남에는 유익이 되는 그런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이게 여러분을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와 함께 살리신 이유입니다.
B. 하나님의 청지기직을 따라: κατὰ τὴν οἰκονομίαν τοῦ θεοῦ
두 번째는 바로 이 일꾼된 것이 사도는 하나님의 청지기직을 따라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직분이라고 했는데 이 직분은 희랍어 성경에 ‘오이코노미안’이라고 되어 있는데 ‘오이코스’ 집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왔고, economy 라는 영어 단어가 바로 여기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집을 세우고 가정을 이끌어 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교회의 일꾼을 세우셨을 때 그 뜻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그 직분을 따라서 하나님이 사도를 교회의 일꾼이 되게 하셨고, 사도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를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한 나라가 전쟁을 수행할 때 그것은 엄청난 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화) 최근에 일본에서 센카쿠 열도 때문에 그 분쟁이 생겨서 중국하고 해군끼리 맞붙어 전쟁을 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시뮬레이션 한 거를 또 방정맞게 발표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일본은 6척인가 9척의 구축함이 파괴되고, 그리고 작은 비행기 착륙선 정도가 파괴되지만 중국은 이쪽에 있는 서해와 이 아래를 담당하고 있는 함대 전체가 궤멸되어서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고 공포를 했습니다. 중국이 얼마나 약이 올랐겠어요? 그래서 전쟁은 시뮬레이션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핵폭탄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은 모양이구나.’라고 세게 한방을 먹였습니다. 좀 좌중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나라가 전쟁을 하는 것은 창, 칼, 군대와 대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그 군인들이 쓸 모든 물자를 공급해야 하고 심지어는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군인들의 구두를 만드는 사람, 주먹밥을 만드는 사람도 존재해야 합니다. 각기 하는 일은 직접적으로 전쟁과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그 모든 것들이 함께 사슬처럼 엮어져 전쟁에 이바지함으로써 그 전쟁에서의 승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이 구원하신 수많은 신자들에게 크고 작은 많은 직분들을 주셔서 하나의 전쟁을 수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 그 모든 일에 있어서 일의 크기와 모양은 달라도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하나의 희망을 품고 헌신적으로 살아갈 때에 그러한 청지기적인 정신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에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원래 이 청지기라고 하는 것은 종의 신분이지만 아무 종이나 청지기로 쓰지를 않습니다. 이 청지기는 종들 중에서 오랫동안 주인에게 신임을 받아서 신분은 종이지만 주인이 거의 가족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청지기가 되어서 자기 집의 중요한 일을 주인을 대신해서 맡길 수 있도록 신임 받는 사람들이 바로 청지기입니다. 바로 요셉이 종의 신분이었지만 보디발의 집에서 이런 청지기로써 섬겼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이 되되 청지기와 같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2절에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바는 충성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충성스러워지기를 기대하신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무위도식하지 말라는 말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정말 여러분이 충성스럽게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충성스럽게 그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일속에서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고 있는지, 주님이 교회를 통해 주신 그 생명을 가지고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봉사하며 살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석구석에는 그 일이 자신의 천직인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 섬기도록 오래전에 자기를 구원해 놓으신 것처럼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일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의 한 구석에서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많은 청지기와 같은 정신을 지닌 직분자들이 필요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충성되게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기왕 나왔기 때문에 다른 때 이 말 하면 또 일부러 찌르는 것이 될 테니까 성경에 설교가 나온 김에 여러분에게 말하겠습니다. 교회 등록하고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집사가 안 되신 분들 있으시죠? 내 오늘 여러분에게 엄중히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예수 믿으면 안 됩니다. 10년이 지나도 여러분에게 집사가 되어 달라고 애걸복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에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교회에 등록한지 수년이 흘렀는데도 그거 한 달 동안 와서 교육받는 것을 하기 싫어서 혹은 못해서 여러분이 집사가 안 되었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정말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인지 한번 자신에게 자문해 보십시오. 피할 수 없이 그런 사정에 처해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자격에 미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 자격에 미치도록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언약의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하십니까? 심지어 다른 교회에서 권사로 그리고 안수집사로 등등으로 교회를 이동하신 분들은 반드시 그 교회에 가서 이명 증서를 떼어가지고 오고 그리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 1년 혹은 2년이 지난 후에 제직교육을 받고 그리고 여기에서 나름대로 직분을 받게끔 되어 있는데 여러분이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은 믿지만 그러나 교회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말을 하면 성도는 들어야 합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이라면 이 목사가 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순종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하고 있고 그 일이 여러분에게 생사와 순교를 가를 정도의 엄중한 일도 아닌데도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어떻게 복음을 아는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어떤 분은 자기 같이 부족한 인간이 집사가 되어서 교회에 누를 끼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할지 모르지만 그러고 있는 것 자체가 누가 되는 것입니다. 기왕에 누될 바에야 기왕 버린 몸, 집사 안수 받고 집사 받고 그리고 깊이 임명장 받고나서 회개를 하고 돌이켜야지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슨 복을 기대하겠어요? 은혜를 달라고 그러는데 줘서 머 하겠어요? 하나님 섬길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어서 뭐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한 나라의 왕이고 나라가 위기에 놓여있다면 그래서 최신 무기를 만들었다면 전쟁을 할 의지가 없는 군인에게 그 총을 주겠어요? 왜 총이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가지고 놀면 재밌잖아요.’ 라는 군인에게 그 총을 주겠냐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끝까지 교회에서 직분 안 받아도 우리는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왜? 교회가 여러분 필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여러분 없어도 무너지지 않지만 여러분은 교회 없으면 무너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런 태도로 교회 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 가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는 날 즉시 인사하고 그리고 기도 많이 하고 이 교회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무엇으로 제가 이 교회를 섬기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만 바라보며 봉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 삼아 일꾼 되게 하신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C.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려고: πληρῶσαι τὸν λόγον τοῦ θεου
그러면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충만한 생명을 누리고 청지기 직을 따라서 교회의 일꾼으로서 충성되게 살아가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완성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가 희랍어로 ‘로고스’라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오히려 말씀보다는 일이라고 번역이 되면 좋을 뻔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 경륜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로고스는 말씀이라는 뜻도 있고 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로 번역을 하면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 세상 속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의 핵심이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있어서 전도와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교회의 삶에 최전선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교회는 헌신하여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도에 많은 재능을 주시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전도가 아닌 또 다른 일을 위한 재능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은 이 재능과는 상관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의 핵심이 영혼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이 허무한 세상의 일들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전파하고 전도하는 그 일이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하신 위대한 경륜을 이루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도를 위하여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고 힘을 기울여 이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 모든 성도들이 부름을 받았고 이것은 교회 안에서 정책을 세워서 하는 일들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약에 현실적으로 교회가 교회를 위해 아무리 봉사하는 것이 중요한 사명이라고 할지라도 더 이상 교회에 접붙여지는 사람들이 없다면 지역 교회에는 돌볼 영혼이 없을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한번 어느 해 1월 달에 전주에서 저를 불러서 사경회를 하는 바로 앞 주에 제가 외출을 안 하는데 할 수 없이 와 달라고 부탁을 해서 갔는데 목회자들이 한 150명 그 시골에 150명, 200명 가까이 모였습니다. 아침서부터 저녁까지 말씀을 전했는데 식사 시간에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 바쁜 연초에. 연초에는 사경회도 하고 그 다음에 1년 계획도 짜고 얼마나 바쁠 때입니까? 심방도 연초 신년 심방도 하고 그래야 될 때인데 그렇게 바쁜 때인데 어떻게 이렇게 목회자들이 많이 모일 수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나를 부른 책임자 목사님이 그럽니다. ‘목사님 시골 교회는 심방할 집이 없어요.’ 교인이 너무 줄어들어서 이제는 심방할 집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시간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하나님이 영혼들을 교회에 붙여주시지 않으면 돌볼 영혼들을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커질수록 목회자와 성도들은 모두 교만해지기 쉬워요. 이게 음식점하고 아주 비슷합니다. 음식점 처음 열었을 때에는 그저 손님이 오면 버선발로 뛰어 나가고 그저 손님 한 사람을 위해 가게 전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냥 몇 번씩 와서 물도 따라주고 맛있었느냐고 그러고 또 오시라고 그러고 충고하면 잘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이제 돈을 좀 벌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그 장사꾼의 독특한 불친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그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맨 처음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님께 우리 자신을 다 드렸던 그날의 헌신을 잊지 말아야 하고 그때에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지체가 되면서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황송스럽게 이 거룩한 교회의 한 식구가 되었을까? 무엇이든지 이곳에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것을 영광으로 알겠습니다.’라고 하는 그 처음 은혜의 고백을 우리들이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계의 완성을 위해서는 전도와 선교가 필요하지만 그렇게 전도되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직은 말하자면 유약하고 그리고 핏덩어리 같은 아이이고, 영적으로는 모자람이 없이 접붙여졌지만 그 사람이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이 세속의 방식 때문에 교회에 접붙여졌을 때에 왠지 우리 식구 같지 않고 성도다운 기품이 보이지 않고 그리스도인다운 품격이 없습니다. 그거를 교회에서 오래 참으면서 주의 말씀과 교양으로 가르치고 사랑으로 돌보면서 오래 기다려 주면서 그 사람을 예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벌써 오래전의 일인데 한 7-8년 됐을 것입니다. 혼자 라면을 끓여 먹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좋은 음식을 그러다가 했으면 들 억울하겠는데 라면을 끓여먹는데 마늘을 좀 썰어서 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바빴습니다. 그래서 칼질을 막 했는데 마늘이 잘라진 게 아니라 살이 잘라졌는데 마늘 한 1/4쪽 만한 게 뚝 잘라졌습니다. 저 속으로 뼈가 보일 정도로 잘라졌습니다. 근데 피도 안 났습니다. 아주 잘 드는 칼로 순간적으로 잘리니까 통증도 안 느껴졌습니다. 조금 있더니 이제 피가 멈출 수 없이 콸콸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갈까 그러다가 의사가 왜 이렇게 손을 다쳤냐고 그러면 너무 창피한 거 같아서 라면 끓여먹다가 그랬다고 하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감고 생각을 했는데 이게 상처가 크게 날 거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칼등을 보니까 살점이 붙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날 한 번도 안 해 본 정형수술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그리고 이제 핀셋으로 칼등에 붙어있는 내 살점을 떼어냈습니다. 여기를 풀고 고통스럽지만 깨끗이 소독을 하고 내가 반드시 이 수술에 성공하리라 하고 딱 갖다가 여기에다가 정확하게 지문까지 맞춰서 딱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거를 감은 다음에 한 달 동안을 정성껏 치료했습니다. 근데 한 닷새쯤 지나고 나서 풀어보니까 덧붙여진 그 살점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안 되는구나. 하긴 그렇게 완벽하게 잘려져 나갔는데 그게 붙겠냐.’ 그러면서 병원에 가야되나 어떻게 해야 되나 그러고 있는데 그래도 곪지는 않고 덧나지는 않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 번 믿고 계속 치료해 보자 그러고 매일 하루에 두 번 정도씩 아침에 교회에 나오면 연구실에 들어가서 하는 일이 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랬더니 한 10일쯤 지나면서 껍질이 두 번 정도 벗겨지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완전히 붙었습니다. 그래서 지문까지 이렇게 딱 일치됐는데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어떤 분이 보여 달라고 그러셔서 한 달 만에 풀었는데 감각이 없었습니다. ‘아,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이것이 상하겠구나. 그러면 할 수 없이 외과에 가서 치료를 받든지 해야 되겠구나.’ 그랬는데 놀랍게 석 달이 지나면서 신경이 살아나기 시작하고 이제 찌르면 피도 나와요. 완전히 몸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 대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칼등에 붙어있는 그 살점은 그냥 싱크대의 물로 확 씻어 버렸으면 지금 시궁창에서 썩어서 원소가 되어서 흩어졌을 텐데 여기에 붙으니까 이 생명에 참여한 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교회에 지체들을 보내주었을 때 사랑하는 마음으로 깊이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만 그렇게 하기 때문에 불공평한 게 아닙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철없었을 때에 은혜 받은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눈물 꽤나 흘리게끔 속 썩이고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나쁜 짓 안 했다고요? 계속해서 무위도식했을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교회 살림살이를 축내면서 산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이게 완전히 낫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도인다운 품격을 갖춘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 전체를 그리스도께 맡기고 그래서 자신의 온 정신과 마음이 그 분의 뜻에 영향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놓으신 경륜을 위해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착하고 충성스러운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D. ‘너희를 위하여’: εἰς ὑμᾶς
오늘 성경은 ‘너희를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에이스 휘마스’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for you’가 아니라 ‘in to you’입니다. ‘너희 속으로’ 다시 말하면 이 성도들을 향한 이 사도의 직분자로서의 사도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섬김이 성도들을 겉모양만이 아니라 속으로 깊이 스며들며 그들을 충심으로 섬기고, 그들을 성숙시키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세우는 이 일을 위하여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헌신하며 살아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의 본분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숙한 것만큼만 봉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이 안됐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안 된 그 사람에게 권력이 많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안 된 사람이 이상하게 돈이 많으면 그 돈 때문에 죄를 짓고 주위의 사람들을 불행으로 데려갑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고 성숙한 신자가 될 때에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복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사용되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바지하는 생활이 되게 하는 것이니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가졌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온전함이 그 총화가 곧 교회의 온전함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예수 향기가 교회 전체가 풍기는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비난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 비난에 장단 맞추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마음을 모아서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지만 좋아할까를 생각하는 대신 그들의 비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게 하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속으로 깊이 스며드는 이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우리와 함께 못 박히신 그 이유를 따라서 목적을 따라서 교회에 온전함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여러분은 홀로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이마에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라는 표가 붙은 것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한 라면 회사에서 발암물질이 들었다고 해서 발칵 뒤집혔고 대만 같은 나라에서는 전부다 리콜을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 라면들을 수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그 라면이 한 동안 안 팔리겠지요? 제 일은 아니지만 안타까웠습니다. ‘그 기업이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쌓은 명예인데 저렇게 하루아침에 완전히 헌신짝처럼 무너지는구나.’라고 말입니다. ‘더 잘하지. 왜 그랬을까?’ 라고 말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여러분 개인이 아니라 작게는 열린 교회의 표를 달고 있고 크게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라는 표를 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아름답게 살아가면 여러분이 그렇게 아름답게 살아가면 하나님의 교회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교회의 지체로 부르신 그 경륜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와 함께 못 박히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기 위하심이었고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리사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 것은 그 생명으로 주님의 통치에 복종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은 바로 그 우주적인 이 경륜을 성취하도록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고 이 경륜은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참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거셨던 그 기대와 목적을 이루어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에 바로 이러한 참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지식과 진리를 주셨고, 또 하나님이 은혜와 복음을 주셔서 이 진리를 안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진리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능력을 주시고 주님의 사람을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그리고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원히 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의 운명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님 앞에 복될 때 그 안에서 우리도 함께 복을 받고 이 교회가 이 세상에서 멸시를 받을 때 우리도 이 세상에서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이 교회와 운명을 같이하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충성스럽게 살아가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다시 한 번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경륜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륜 안에서 여러분의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그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할 때에 여러분은 반드시 여러분의 영혼을 더럽히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계셔야 할 그 자리에 서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성스럽게 자신의 일을 감당하며 주님 앞에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7.보이지 않는 교회의 건축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성도들이 누리게 되는 신령한 복이 무엇이고, 그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 마치 이런 신령한 복의 대조가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난 불쌍하고 비천한 존재인가를 말하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속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구속의 사역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는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들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 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인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으로서의 교회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A. 보이는 교회
사도가 어느 것을 분명히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의 이해를 위해서 교회의 두 가지 측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한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보이는 교회 혹은 가견교회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눈으로 보아서 교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외적인 형태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한 지역 교회에 모여서 한 건물 안에 공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회집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앙고백과 행위에 달린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는 신앙의 조항들이 있습니다. 그 조항을 가리켜서 신앙의 근본 조항이라고 부릅니다. 이 신앙의 근본 조항이 있는데 이 근본 조항하고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또 다른 신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이교라고 이야기합니다. 혹은 이교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여러 점에서는 일치를 하지만 어떤 중요한 신앙의 근본 조항에서 현저히 견해를 달리하여 기독교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기독교가 아닌 사람들을 가리켜서 이단 혹은 이단자라고 부릅니다. 신앙의 근본 조항에서는 일치를 이루지만 근본적인 교회 분립의 분열의 이유가 신앙의 근본 조항 때문이 아니라 사소한 자신의 이익 때문에 교회를 찢어간 사람들을 가리켜서 열교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제 신앙의 근본적인 조항을 일치하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고, 이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한 연합을 이룬 것을 가리켜 우주적 보편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조항에는 이처럼 어느 하나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정통적인 기독교가 될 수 없는 근본적인 조항이 있는가 하면 비근본적인 조항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세례를 줄 때에 세례 받는 사람을 물속에다가 풍덩 담글 것인가, 물로 뿌릴 것인가, 교회 정치 체제를 채택함에 있어서 장로교적 대의 정책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감독제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직접 민주제를 주창하는 회중교회 제도를 택할 것인가 하는 것들은 비근본 조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장로교도들은 성경과 역사를 모두 고찰한 결과 이렇게 직접 민주제가 아닌 장로들을 통해 당회를 구성하여 교인의 주권을 행사하게 하는 대의적 민주제가 성경에 가장 가까운 제도라고 확신을 하기 때문에 장로 교인이 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회중 교회 교인은 자신들도 성경과 신학과 역사를 고찰하건데 각 교인들이 직접 투표를 행사하고 직접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성경이 교회를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확실한 장로교인과 확실한 회중 교회 교인은 두 사람의 의견이 그 점에 있어서 합치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각각 우리는 이 비근본적인 조항에 있어서 교회 정치체제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을 하고도 우리는 역시 근본조항에서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을 이루고 있고, 그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단자도 아니고 열교자도 아니고 각기 다른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것이 바로 우주적인 보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물론 우리는 장로교 신자로서 장로교가 가지고 있는 것이 성경적으로 가장 가까이 가 있다고 믿고, 감리교도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회중교회 신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물론 우리는 이렇게 장로교 좋은 개혁교회에서 투철한 장로 교인이 되는 것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그 다음에 신앙 고백을 달리하는 많은 형제들이 예수의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고려하지 않는다면 좋은 장로교도, 좋은 감리교도, 좋은 회중교회 신자들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도 몸 전체를 사랑하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다고 해서 자신의 신앙 고백을 가치 없게 여기거나 혹은 그것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의 신앙 고백을 견지하면서도 비 근본 조항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을 형제로 여기고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사랑하는 이 일에 있어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우리의 신앙고백과 실제적인 사랑의 행동 사이에 우리들이 균형을 이루어 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교회는 말씀과 성찬과 세례 등을 통해서 기독교 교회에 속한 회중들이라는 것과 기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외형적인 조직과 정치가 사람들의 눈에 볼 수 있도록 명백히 나타나기 때문에 이렇게 교회는 보이는 국면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국면을 우리는 보이는 교회, 혹은 가견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B. 보이지 않는 교회
이에 비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는 단 하나의 교회이고, 이 단 하나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모든 교회의 지체들을 몸으로 하는 영적인 연합입니다. 이 영적인 연합이 바로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외형보다는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영적인 결합이야 말로 교회의 본질이고, 따라서 이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이 모든 통치의 영적인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보이지 않는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는 구분될 수 있지만 그러나 나뉠 수 없는 것이고, 마치 인간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과 육적이고 생활적인 측면이 구분은 될 수 있지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꼭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에 오늘 사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도로서 구원을 받은 것이 바로 이 보이지 않는 교회의 영적인 연합체로서 부름을 받은 것이며 이렇게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에베소 교회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이 에베소에서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으로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개별적인 교회라는 사실을 아울러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말하기를 이 에베소 교회가 이방인들의 교회였지만 그러나 이 교회가 사도들과 멀리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교회가 되었고, 그러므로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외인이나 이방인이 아니요, 하나님의 가족이며 이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하나의 동일한 시민이요, 성도요, 하나님의 권속들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III. 지어진 교회와 지어져가는 교회
A. 지어진 교회
그러면서 사도는 갑자기 “너희도 바로 그렇게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지어져 가는’ 교회의 개념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지어진 교회와 지어져 가고 있는 교회라고 하는 두 측면을 가지고 오늘날 현실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제일 먼저 이미 지어진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지어졌다, 지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교회 건물, 그리고 건축 중이냐, 건축이 끝났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도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에는 핍박을 받거나 세속화 되어서 교회가 사라지고 신자의 수가 줄어들 수 있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죽고 사라져 감으로 현실적으로 어느 시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가 축소될 수 있지만 영적인 교회는 한번 접붙여지면 그 접붙여진데서 다시 잘려 나가는 법은 없기 때문에 현실 교회는 커졌다 작아졌다 해도 영적인 교회는 언제나 증가일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인 교회는 점점 커집니다. 이제 이 외형적인 교회 역시 끊임없이 죽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 외형적인 교회에 가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에는 어느 순간에도 이 교회가 이미 완성된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매순간 교회는 이미 지어진 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지게 되면 다시는 그 접붙여진 몸에서 이탈되는 법이 없으니 이것은 한편으로 보면 지어진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지어진 교회인데 이 교회는 계속 지어져갈 것입니다. 마침내 교회가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세상과 교회가 완전히 일치되도록 그래서 교회가 세상이 되고 세상이 교회가 되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 던져지게 될 그때까지 교회는 계속해서 확장일로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B. 지어져 가는 교회
이와 함께 우리는 영적인 교회의 측면에서 지어져 가는 교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아들을 위한 그림책에 보면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고 점을 크레용으로, 크레파스로 계속 이으면 코끼리도 되고, 사자도 되고, 장난감도 되는 그림책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한 작정 속에서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셨고, 그들을 구원할 것을 하나님은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교회의 계획이 하나님의 관념 속에 있었고, 이 교회들을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교회의 선교와 전도, 그리고 먼저 믿은 자들의 헌신을 통하여 이 구원들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공로로 구원의 기초를 놓으시고, 성령께서 유효하게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도구로 하여 참다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회개에 이르러 예수를 믿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인 바 되어서 예수의 몸을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원하고자 하는 수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을 것이고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찰 때까지 이 세상의 영원한 심판은 지연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완전히 찼을 때에 이제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지옥으로 보내고, 이 교회가 더 이상 이 세상속의 일부가 아니라 완전히 이 세상과 교회가 일치되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교회와 세상의 합치를 이루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구원받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영원히 취소될 수 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졌다는 의미에서 이 구원은 이루어진 구원이고 취소될 수 없는 구원이고 불변적인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조차도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부패성과 잔존하는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모인 교회 전체도 역시 부패성과 잔존하는 죄성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는 이미 이루어진 교회인 동시에 그들이 계속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순결하게 되어 그래서 완전함에 이르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정말 순전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건물이나 체제 이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자의 영혼이 순결해지고 거룩해져야 할 것인데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지불하며 한 성도, 한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교회 안에 교회를 위하여 남겨두신 고난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남은 고난이라고 말하였고, 자신이 부름을 받은 것은 바로 이 고난에 함께 참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지지난 주에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교회의 이 완전함은 단지 외형적인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매우 커도 내적으로 매우 불완전하고 말하자면 불결한 교회가 있을 것이고, 외형적으로는 매우 작아도 내적으로는 매우 완전한 교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반대로 매우 크고 내적으로 완전하지만 어떤 교회는 매우 작고 내적으로도 불완전한 교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수학의 기준으로 본다면 7명의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이제 오천 명 가까이 모인 교회가 되었으니까 세상 적으로 보면 어떻게 보면 교회가 잘 된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지금도 세워진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물량적인 논리로 교회를 본 것입니다. 오히려 일곱 명의 성도들이 모였을 때에 그 교회가 오천 명 가까이 모인 지금 교회보다도 더 훌륭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모두 훌륭하다고 말하면 여러분이 섭섭할 테니까 훌륭한 면들도 좀 있었다고 그렇게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화) 저에게 신학을 가르쳐 준 선생님 가운데 김 희보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오래전에 작고하셨고 우리 교회 와서도 두 번이나 설교하셔서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신 선생님입니다. 학문과 경건이 깊어서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교수님한테 전화가 걸려 왔다고 합니다. ‘교수님 저 아무개 목사입이다.’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아무개 목사. 정말 오랜만이네. 어쩐 일인가?’ ‘교수님, 하나님이 제 목회에 복을 많이 주셔서 큰 교회가 되었고 예배당도 잘 지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을 우리 예배당에 모셔서 설교해 주시도록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전 이제 사표를 내려고 합니다.’ ‘아니 그렇게 성도들이 많이 모이고 예배당도 건축했다면서 왜 사표를 내?’ 그랬더니 ‘개척교회를 했는데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지금 1700명이나 교인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크게 짓고 예쁘게 지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더 이상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교회는 오고 싶다는 목사님에게 넘겨주고 저는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다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교수님이 깜짝 놀라면서 야단을 치셨습니다. ‘자네는 나한테 신학을 배웠나? 건축학을 배웠나? 눈에 교인을 많이 모으고 큰 예배당을 지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네가 할 일이 없다고? 눈에 보이는 교회는 자네가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교회가 됐을지 모르지만 자네가 목회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도 그렇게 훌륭할까 생각해 보게.’ 교수님의 지적을 받고 이 목사님이 크게 회개하고 평생 동안 그 교회에서 충성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를 보면 ‘성공이다’ 아니면 ‘잘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를 생각해 보면 그러한 성공과 성취가 반드시 좋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건축과 비례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소수의 무리가 모이던 교회 시절에 그때도 물론 신통치 않은 교인들이 있고 교회를 늘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교회가 반드시 규모가 작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측면에서 여러분의 교회보다 순결이 떨어졌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떨어진 교회라고 나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 생각해 보면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많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어도 한 구석에서는 아무 개념 없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고, 진리와는 상관이 없이 자신의 영혼의 위험한 상황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이 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이런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결국 교회의 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접붙여진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완전함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완전한 사람인가 이런 매우 어려운 질문을 우리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 형상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특징이고 전 인격적인 특성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 형상이 바로 곧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인간의 영혼의 독특한 특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형상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지성의 움직임과 의지의 움직임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으면 하나님처럼 생각할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으면 하나님처럼 그렇게 의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형상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한 악한 의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사람의 인격 속에서 구체화된 사례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에 그의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주신 그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 속에서 구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정말 좋은 사람일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철학적인 질문인 동시에 우리의 행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지성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로부터 죽도록 고민했던 문제가 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소원은 행복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확실한 것 하나는 사람이 탁월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될 때에 그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러면 도대체 사람의 탁월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문제를 가장 훌륭하게 설명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 플라톤이라고 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폴리테이아’ 즉 이상국가론 혹은 국가론이라는 책 속에서 이 화두를 꺼냅니다. 자,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것이든지 탁월함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칼에 탁월함은 잘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탁월함은 무엇인가라고 할 때 칼처럼 잘 드는 것 이렇게 한 마디로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물의 탁월함은 깨끗함과 순수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물처럼 그렇게 간단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하게 한 마디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말할 수도 없고 그리고 말해도 청취자들이 이해할 수 없으니까 이 플라톤은 인간이 어떠해야 될지를 한번 국가라는 것을 통해서 생각해 보자고 독자들을 유인합니다. 이때에 이 국가는 현대 국가처럼 이렇게 몇 천만 몇 억을 이루고 있는 대형화된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의 폴리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저 인구 1만에서 10만 정도 되는 사이즈에 작은 국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도시, 폴리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어떤 국가가 되어야지만 탁월한 국가 혹은 좋은 국가이겠느냐? 국가가 좋은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로서의 탁월성을 가져야 되는데 무엇이 그 국가를 탁월한 국가로 만드느냐 하고 화두를 던졌습니다. 제일 먼저 거론된 것이 왕입니다. 왕이 나라 전체를 다스려야 할 인물인데 주색잡기에 빠져서 오락이나 즐기는 인물이고, 백성들이 생산해 낸 것을 자기의 쾌락을 위해 착취할 대상이라고 여기면 그 나라가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도 이것이 좋은 나라가 될 가능성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플라톤은 여러분이 고등학교 때 배운 바와 같이 철인 정치를 주창하는 것입니다. 왕은 단지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왕은 위로 하늘의 뜻, 옆으로는 이 모든 세계의 만물 그리고 또 옆으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에 대한 우주적이고, 종합적인 지식을 가지고 도대체 이 국가는 왜 존재해야 하고, 그리고 인간은 누구이고 어떤 인간이 되어야지만 참으로 그도 행복하고, 신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행복한 그런 참다운 존재인 인간을 길러내는 국가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전체적인 지도를 이미 알고 있는 철학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으로서 나라를 어떻게 법을 정하고 규칙을 정해야 할지를 통달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왜? 역사를 보면 좋은 나라가 나쁜 나라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히게 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쪽이 이기고, 악한 쪽이 반드시 지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힘이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짓밟고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왕이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과 공격으로부터 국민의 재산과 국가의 정책성을 보호할 수 있는 전투적인 군인들이 필요합니다. 이 전투적인 군인들은 나라에서 돈 주는 것만큼만 내가 일한다는 정신을 가지면 이 국가를 지키는 전사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라를 지키는 것은 단순한 거래 관계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목숨을 전부 다 버리고 죽는 것도 기꺼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궁극적으로 이 나라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 전사 계급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를, 쾌락을 즐기고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안락한 삶을 사는 데에 재미를 느끼게 되면 과연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장렬하게 사망할 정도의 희생정신을 발휘할까? 그러니까 이 전사계급은 일반 백성과 섞여서 생활하거나 섞여서 아이들이 교육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딱 구획이 지어져서 자기들의 독특한 정신을 물려받으면서 그렇게 양육되고 양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플라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전사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밥은 많이 먹어도 된다. 배부르게. 그런데 맛있는 것은 먹지마라.’ 왜? 맛있는 것을 한번 먹어버릇하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해. 그러면 더 많은 월급을 나라에게 요구하거나 더 많은 것을 먹고,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싶은 욕망들이 증대되는데 이 욕망을 국가가 해소해 주지 못할 때에 이 욕망 때문에 국가를 배반하는 사례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도 우리가 의미하는 이런 종류의 결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 마누라, 내 새끼 그러면서 가족 이기주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뿌리 채 없애버려야 됩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좋은 집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고, 안락한 여행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좋은 무기는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나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때 플라톤의 답은 이것입니다. 그 전사 계급은 일반 백성들이 인생을 사는 것과는 다른 이유 때문에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게 뭐냐 하면 비록 좋은 음식은 못 먹고 자기 가정도 없지만 그러나 최고의 지혜자인 이 왕 가까이에서 진리의 말씀을 듣는 그 기쁨 하나로 세상의 즐거움과 사랑을 다 버리고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고 나라에는 그런 계층의 사람들이 최소한 10%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놓고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최고의 이런 철학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려야 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기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이 머리가 맑은 머리가 아니라 돈 머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머리가 지체들을 지휘하면서 어디를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서 걸어가는 것과 똑 같은 것처럼 나라가 휘청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 길을 가겠느냐는 별개의 문제이고 나라에는 그렇게 이 세상의 부귀와는 관심이 없고, 오직 나라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그런 그룹의 사람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에 대한 보상은 이 세상의 돈이나 이런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있으면 훌륭한 나라가 되느냐 아닙니다. 이 사람들만 있으면 이 나라는 경제는 어떻게 하느냐 이것입니다. 오래전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이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에게 탐욕이 가득 찬 시대에 그런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아마 국가에 꼭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천만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그 사람처럼 산다면 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가 될까? 팔리는 물건이라고는 빠삐용 의자와 녹차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만든 거니까 의자가 팔리는 게 아니라 못하고 망치, 나무가 팔리겠죠? 그것도 주워왔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나머지 산업은 어떻게 될까요? 그걸 그렇게 될 때에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거를 우리 사람에게 적용을 시켜 보세요. 은혜를 받았다 그러는 여자가 ‘아, 이 세상은 정말 더럽고 하찮은 것이구나.’ 남편하고도 이별하고 자식들하고도 이별하고 하얀 치마저고리 가지고 기도원으로 올라가서 사라져 버렸어요. 과연 이게 신앙일까? 아버지가 은혜 많이 받은 다음에 죄 많은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은 이제까지 충분하다. 나는 순결한 영혼을 갖고 싶어. 그리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금식하면서 마지막에 자기 해골을 남기고 조용히 죽었어요. 과연 이것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을 완벽히 따르는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전사들이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맨 주먹 붉은 피라면 저쪽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동일한 군대가 동일한 애국심으로 전쟁을 한다면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우수한 전략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나라가 이기겠죠? 그런데 그 무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무기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자기 무기보다 못한 무기를 보면서 더 좋은 무기를 만들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장사꾼들에 의해서 개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적당한 욕망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터무니없이 이 욕망이 마구 증대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나라의 질서를 깨뜨리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의 욕망이 이 속에서 움직여야지만 좋은 물건을 생산하고 이것을 팔아서 돈을 벌고, 번 돈을 가지고 자신들이 조금 더 잘 사는 재미로 또 다른 것들을 만들고 하면서 경제가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철학자인 왕이나 세상사람 다 버리고 국가를 위해서 죽으려고 하는 전사들에 비하면 열등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열등한 사람들 때문에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그룹의 사람이 없으면 왕은 사색이 끝난 다음에 덮을 이불도 없을 것이고, 자기의 지혜를 전해줄 책을 만들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전사들은 전쟁에 나가지만 항상 후진 무기를 가지고 싸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도 꼭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숫자적으로 대부분이고 소수의 사람들이 왕과 같은 통치자 그룹 그리고 전사들의 그룹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그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 나라가 어마어마한 부를 생산해 내고, 욕망 때문에 엄청난 경제력을 가졌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 국가가 어디로 가야될 지에 대한 선명한 관점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극도의 자본주의와 이기심이 팽배해서 사람도 돈 주고 사고파는 나라가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했습니다. 욕망을 느끼지 않고 생육할 수 있을까요? 욕망이 없이 번성할 수 있을까요? 또, 땅을 정복하라고 했는데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어떤 이상에 대한 욕망이 없이 과연 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 욕망은 단순히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들끓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인 자신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고, 이 창조의 목적이 피안의 세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차안의, 이 현세의 세상에서도 구현되기를 바라는 현실적인 욕망이 있어야지만 이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일들이 가능해 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 잡힌 영혼의 기능을 가진 이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서 그 사람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사람의 연합의 정도가 현실적인 교회의 완전함의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 사람이 되어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아 무지와 어두움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실제로 아는 데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한 의지의 힘이 북돋우어져야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은혜와 사랑과 생명의 힘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부어지고 우리는 거기에 접붙여진 상태에서 그 힘들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성화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만으로서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이렇게 아까 설명한 이상적인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IV.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감
A. 모두 함께 지어져 감
그러면서 사도는 바로 이러한 교회가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합니다. 자, 첫 번째는 모두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자,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아무 차별 없이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고, 이 그리스도와 이 에베소 교인들의 연합은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과 접붙여짐으로써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연합이었고, 이것은 바로 아주 신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었습니다. 자신 홀로 예수께 접붙여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접붙여졌을 때 자신은 이미 교회의 모든 지체들과 함께 접붙여졌고, 나눌 수 없이 영적으로 한 몸이 되어서 이 시간과 공간뿐 아니라 이 현세를 넘어서는 미래의 영원한 나라에서까지도 운명을 함께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지 간에 자신의 행복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함께 연관되어 있는 것은 현실적인 외형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남겨 놓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동의하든 동의안하든 상관이 없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교회론 적인 구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하여 완전함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때에 이것은 개개인이 온전한 신자가 된 성화의 정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성화의 완전함의 총화가 바로 교회의 성숙한 완전함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안 받고, 진리를 깨닫고 안 깨닫고, 기도 생활하고 안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안하고 여러분은 이 모든 것들을 아직까지도 개인적인 문제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적인 문제입니다. 교회의 문제와 여러분 개인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이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항상 여러분 자신이 이 교회의 지체된 가운데 여러분이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이 신앙생활에 도입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교회에 접붙여져 있는 것이 주위에 있는 교인 함께 접붙인 바 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이미 접붙여진 다른 성도들의 온전함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는 성도들로서 접붙여져 있는 것입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은혜 충만하고 진리에 복종하는 삶을 산다면 후자일 것이지만 은혜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없는 삶을 산다면 여러분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몸에 고통을 주고,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곧 예수께, 그리스도께 여러분이 직접 행한 잘못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성숙하고 완전해져 가는 신앙생활과 교회의 온전함이 나 자신의 온전함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교회의 불완전함이 마치 자신의 불완전함같이 아파하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함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남겨진 고난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여하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B. 성령 안에서 지어져 감
두 번째는 성령 안에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비유하였습니다. 모퉁이 돌이라고 하는 것은 벽과 벽을 연결하는 돌멩이입니다. 이쪽 벽은 이쪽으로 달려가고 저쪽 벽은 이쪽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서로 아무 상관없이 달려가던 벽이 모퉁잇돌 때문에 서로 만나게 되고, 그래서 이 한 건물의 벽을 이루며 이 집을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교회는 유대인의 교회였지 이방인의 교회가 아니었고, 이방인들의 교회는 이방인들의 교회였지 유대인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달려오던 이 두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모퉁이 돌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상관없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왔기 때문에 머리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지체들의 머리가 되셔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두 붙어 한 몸인 건물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합은 원리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 종이나 자유자, 유대인이나 헬라인, 오늘날에는 돈 많은 사람이나 돈 없는 사람, 사회주의자나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셔서 이들을 모두 하나로 묶으시고 이렇게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사랑하여 연합을 이루게 하시는데 이 실제적인 연합의 본질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신 성령이십니다. 현실적으로 교회는 모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랑하는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고, 그리고 하찮아 보이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택하신 그리스도 한 몸에 속한 교회라는 점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교회의 크기나 목회자의 학력의 수준이나 그 교회에 모이고 있는 성도들의 성화의 정도에 의해서 좋은 교회, 나쁜 교회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동일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받는 교회도 있고, 덜 사랑받는 교회도 있는 것은 우리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랑을 느낄 때가 있고, 적게 느낄 때가 있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성령의 풍취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풍취가 있는 교회에 더욱 충만히 거하시고 한번 거하시고는 좀처럼 떠나지 않으심으로 당신의 교회를 붙드십니다. 이 성령이 좋아하시는 교회 안에 풍취는 마치 신자 안에 있는 그것과 동일한데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언제나 올바르고 순수하게 선포되는 교회 안에 성령께서는 그 풍취를 매우 좋아하시며 그 진리의 말씀의 선포와 이해하는 그 현장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회심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셔서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더욱이 이러한 진리의 기준을 따라 살려고 애쓸 때에 성령께서는 그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진리의 말씀을 따라 풍성한 삶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 죽임입니다. 죄가 죄로 지적되고 온 교회가 죄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을 가지고 죄가 없는 순결한 교회를 이루어 가려고 애쓸 때 그러한 죄 죽임이 있는 교회 안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충만하게 거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열렬히 구해도 죄 죽임이 없는 교회보다는 그렇게까지 기도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죄를 미워하고 성결한 삶을 살려고 하는 교회 안에 성령께서는 충만하게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순종입니다. 이 순종은 성령이 가장 좋아하시는 풍취입니다. 많은 진리를 깨닫고 조금 순종하며 사는 성도보다는 작은 진리를 깨달았어도 깨달은 그 진리를 따라 모두 순종하며 살려는 성도들에게 성령님은 더 충만히 계셔서 더 많은 생명력과 은혜,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이 교리를 가지고 여러분의 삶을 한번 측정해 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고 그때 여러분은 성령에 참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이 성령 안에서 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이 성령의 좋아하는 풍취를 유지하고 계십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향하여 갈급한 것처럼 진리를 사모하고 깨달음 안에서 고난 받으며 살기를 무지 속에서 형통하게 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있습니까?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성결한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비록 깨달은 바가 적어도 깨달은 범위 내에서는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고자 마음을 지키고 자신을 헌신하고 계십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이 교회 안에 주님의 성령의 은혜가 충만히 거하게 하는 그 일을 위하여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훌륭한 헌신을 이 교회에 바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리의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며 죄를 죽이기보다는 죄와 함께 즐거워하기를 기뻐하고, 순종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거절하며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 당신들은 매우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많은 은혜가 여러분의 그 부패한 마음과 삶 때문에 소멸되고 있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악과 부패에 오염되고 있습니다. 일생을 살아온 삶이 그런 식으로 교회를 힘들게 하고 부패하게 하는데 이바지하는 기생충이나 곰팡이 같은 역할을 하고 살았다면 왜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 놓으신 계획에 전면적으로 배치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죠? 그걸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행복하실까요? 교회는 지금 불행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행복할까요? 여러분 자신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합니까? 얼굴에 행복하지 않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정말 기뻐하고 박수칠 놈은 마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하더라도 기독교인이 되었으면 열심히 순종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은 회피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지 않을 때에는 다른 길을 한번 걸어가 봐도 형통하고 혹시 황소 뒷다리에 개구리 맞듯이 대박이 터져서 복되게 사는 날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여러분은 예수께 붙잡힌바 되었습니다. 이제 그런 대박은 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 다수는 아직까지도 뜨뜻미지근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좋아하시는 풍취가 아니라 성령이 안 좋아하시는 풍취를 여러분 스스로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 이런 풍취를 만듭니다.
자, 어떤 사람이 지체 높은 사람인 여러분을 누군가가 불렀습니다. 공손하게 말쑥하게 차려입고 나와서 예의를 표하고 그리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을 모시겠다고 여러분을 데려갑니다. 으리으리한 집들의 골목을 지나서 점차 허름한 동네로 들어가더니 마침내 어느 한 집에서 멈췄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러분을 돼지우리로 안내했습니다. 온갖 똥들이 질퍽거리는 그곳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방석을 하나 내놓고 ‘편안히 좌정하시옵소서.’ 할 때에 여러분은 그 사람이 공손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돼지우리에 질척거리는데 양복을 입고 주저앉겠습니까? 싫죠? 왜? 그 풍취를 싫어하니까 여러분이 거기에 안 가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의 신앙생활의 또 다른 대안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은 좁은 길 딱 그 한 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욕망의 눈으로 보면 가시밭길이고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왜? 세상이 알 수 없는 성령의 사랑과 위로가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C.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감
마지막 세 번째는 사도는 그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처소 속으로’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 처소라고 하는 것, ‘dwelling place’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얼까요? 하나님은 일반적인 사물도 아니고, 인간의 영혼과 같은 영적인 사물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공간이나 시간에 한정되게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처소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처소는 물리적인 장소로서의 처소를 이야기 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순결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가장 적합한 곳, 하나님이 그곳, 그 상태를 좋아하신다고 당신의 즐거움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그러한 상태와 조건을 가리켜서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처소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고 순결한 영이신 하나님, 어느 장소에 머물 수 없는 모든 우주 안에 아무데도 안 계신 것 같으면서도 어느 한 곳도 안 계신 곳이 없는 그 하나님의 이 처소는 흠 없고 깨끗한 곳이어야 하고, 거룩한 영이 충만하고, 진리에 대한 온전한 순종과 찬송과 경배가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를 당신의 처소로 삼으십니다.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그 성전에 성도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곳을 당신의 처소로 삼으셔서 거기에 거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거룩한 교회에 처소를 정하시고 거기에 계실 때에 그 교회는 네 가지 정도의 특권적인 유익을 누리게 됩니다. 첫째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흠 없고 깨끗하고 완전함에 가깝게 된 교회, 거룩한 영이 충만하고 진리의 선포와 진리에 대한 복종이 있는 그곳을 기뻐하셔서 당신의 기쁨을 그 교회를 향해 표현해 주시고, 그 교회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들에게 당신의 기쁨의 유익을 누리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주적인 교회 전체를 향해 보이시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이 현실적인 교회 안에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내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쁨의 정도는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마다 각각 다릅니다. 어떤 교회를 향해서는 하나님이 책망하시고 싶은 교회가 있고, 책망과 칭찬을 아울러 하시고 싶은 교회가 있고, 온전히 기뻐하시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기쁨의 상태는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 그리고 그 하나님의 경륜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완전하게 하려고 하는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쁨 속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기쁨이 되고 하나님은 당신을 기뻐하는 성도들 때문에 기뻐합니다. 교회는 사람으로 가득하고 교회를 가득 채우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교회, 여기에 하나님의 기쁨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 번째는 동행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 중 어느 교회도 버리시는 경우는 없지만 그러나 모든 교회에 당신과 동행함을 동일하게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버리시지 않는 교회이지만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모습을 닮아갈 때 하나님은 특별히 그 교회와 동행하십니다. 그 교회와 평화를 누리시고 그 교회가 이 평화의 유익에 참여하게 하시며 당신의 영광을 위한 갈망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는 주님이 교회를 지키시는 놀라운 표적이 있고, 악한 원수들의 계획 아래에 쉽사리 무릎 꿇지 않게 하는 거룩한 강인함과 신적인 보호가 있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몇 안 되는 교인들이 힘없이 모여서 한번 밟으면 짓밟힐 것처럼 보여도 그 교회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동행하시고 하나님의 신적인 권능으로 이 교회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교통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닮아간 교회에는 하나님이 신령한 교통을 보이십니다. 여기에서 하늘로부터 거룩한 진리의 빛들이 교회에 부어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들이 이 교회에서 흥황하게 하십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을 경험하게 되고, 삼위일체 안에 있는 사랑을 충만하게 구현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의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교통을 통한 성령의 위로가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충만한 이 교통의 정도는 그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한 몸을 이루어 가는 정도에 비례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처소로 삼으신 교회 속에서 당신은 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임을 아셨고 그러자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 싶었던 모든 일을 이 이새의 아들을 통하여 성취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중의 인침의 외침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 관계에 대한 인침이라면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하는 인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려고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뜻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 예수께 당신의 일을 맡기어 사역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누리는 이 충만한 기쁨과 동행, 교통의 이유는 바로 소명과 연결됩니다. 이 충만한 기쁨과 그리고 동행함과 이 교통을 가지고 교회는 이제 주님이 주신 자원들을 가지고 이 세상을 고치는 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들에게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의 빛을 나누어 주어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넘어진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소망 없이 짓밟힌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가가 눈물로 그들의 상처를 닦이고 일으켜 세워주는 이 일에 쓰임 받는 교회는 많은 교회가 아니라 적은 수의 교회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충만한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에 합당한 교회들이 얼마나 소수인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의 회복의 문제는 우리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이고, 이 세상의 운명과도 직결된 교회인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한번 이 원대한 하나님의 교회의 계획에 가슴 벅차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한 사람이 오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고 지혜로워지는 것, 오늘 내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살아가는 이것이 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교회의 계획과 연결이 되고 이 세상을 복되게 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경륜에 내가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들과 위대한 선지자들이 우리와 함께 한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여 왔고, 지금도 이 세상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의 이 세계를 향한 창조의 위대한 경륜, 구속과 완성을 향한 위대한 경륜에 나같이 티끌만한 존재 80년이나 90년 살다가 사라질 티끌만도 못한 이 존재가 바로 이 원대한 우주적인 계획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당신 홀로 못 박히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못 박히셨습니까? 왜 예수께서 형벌은 당신이 당하시되 고난을 당하는 바로 거기에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내포적인 대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렇게 죽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시고 이 보증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무 생각도 없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살다가 짐승처럼 죽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짐승처럼 살다 죽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를 믿게 하셨을까요?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경륜이 겨우 그 정도였을까요? 그랬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시작일 뿐이고,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바로 이 원대한 우주적인 계획의 성취를 위해 살 교회의 한 몸으로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명은 우주적이고 영원 적이고, 교회론 적인 동시에 이 모든 인류의 행복과 불행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토록 사랑하는 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몸으로 드러나기 위하여 우리는 거룩한 소명을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 일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도 또한 위대한 사도와 선지자들과 더불어 이 땅에 있는 교파는 다르지만 이 신앙의 동일한 고백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영적인 연합으로서의 이 모든 교회들이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허무하고 하찮은 갈대와 같은 인생이 아니라 얼마나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아름다운 인생입니까? 이 속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이 진리 앞에서 복음과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 앞에서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이요.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거둘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전혀 그럴 수 없는 짓밟혀 파멸당할 비참한 존재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와 함께 못 박히고, 우리와 함께 다시 살 약속을 주심으로 우리의 신분을 이렇게 영광스럽게 하였으니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우리의 육체에 채우며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살아있게 하시는 날 동안에 뜨거운 마음으로 이 교회를 사랑하고 우리의 지체들을 자신의 핏줄처럼 여기며 함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8.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上)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급히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은 갈라디아 교회를 미혹하고 있었던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반박하고, 교회를 경계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처음 복음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갈라디아 교회에 숨어 들어온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에 의하여 복음에 대한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이 유대주의자들은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서만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율법의 행위를 보태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교리를 다시 한 번 정립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그 율법과 모든 죄에서 건져내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변호하였습니다.
II.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힘
A. 핍박자 사울의 회심: 대속의 교리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간증하듯이 한 대목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신 것,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핍박자 사울을 회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곧 대속의 교리의 발견이었습니다.
1. 사울의 편견
아직 바울이 되기 전 불신자였던 이 사울의 마음에는 두 가지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었고, 또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신학적인 편견은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가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라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심리적인 확신은 유대인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모두 쓸모없는 인종들이다 오직 유대인만이 이스라엘 백성만이 선택된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들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달려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됩니다.
2. 사울의 고민
여기에서 그는 예전에 알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모순을 겪게 됩니다. 예전에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징벌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죽은 예수였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나무에 못 박혀 죽인 것이었으니 유대인들의 관념에는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의 한 징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믿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났다고 풍설을 전파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오류를 확신했고,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들이 누룩처럼 번져 나간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커다란 누를 끼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신앙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부활의 사건이 거짓이 아니라 꾸며낸 풍설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것을 다메섹에서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죽으신 분이라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고, 하나님이 살리실 정도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분이라면 형벌로 죽이셨을 리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B. 대속 교리의 핵심: 못 박힘
화합할 수 없는 두 명제의 모순 사이에서 사도 바울은 대속의 교리의 핵심인 못 박힘을 발견했습니다. 이 모순된 두 명제는 오직 한 가지 사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형벌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이 두 명제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해결의 순간, 사도 바울의 정확하게 말하면 사울의 지성을 찢고 어둠 속에 진리의 찬란한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비로소 그는 이미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인 지식과 유대교적인 지식 그리고 그리스 문명에 대한 모든 이해들을 통섭하면서 융합하면서 선명한 진리의 빛이 들어오게 되었고, 그 모든 진리의 빛 한 가운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리고 부활이 서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가 죽을 것을 대신해서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한 한 사람의 대표자로서 죽으신 것을 의미했고, 이 핵심은 바로 내포적 대신의 형벌적 죽음이었습니다. 더 쉬운 말로 하면 우리 모두를 내포, 즉,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을 당신이 끌어안고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형벌의 공로가 당신이 끌어안고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게끔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에 주목해야 했던 이유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바로 거기서 하나님을 원수처럼 대하며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였던 자신도 함께 예수와 더불어 영적으로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예수님을 모르고 살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던 자신은 죽은 자로 여겨야 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셨을 때에는 그렇게 죽은 데서 다시 새롭게 살아났는데 그 새롭게 살아난 자신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새 몸을 입으셨던 것처럼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그 새 사람으로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십자가의 못 박힘을 향한 사도 바울의 인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일평생 자신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냥 가볍게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 심장을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이 사실을 십자가로 가슴에 깊이 새겨 어떠한 경우에도 잊혀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라고 종종 말합니다. 이런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갈 때 바로 그 안에서 우리가 이미 경험한 회심의 은혜가 보존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잊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은혜 때문에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는 결코 구원의 목적을 배반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질 때 그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습니다.
III. 우리 안에 함께 사시려 함
A. 본문의 주해
그러면 그리스도가 이렇게 우리가 함께 우리를 끌어안고 우리와 더불어 형벌적 죽음으로 못 박히신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함께 사시려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의 설교를 위해서 부득불 본문을 조금 주해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보면 20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원래 희랍어 성경에는 이게 19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19절로 완전한 문장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것으로 19절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못 박혔다’라고 하는 이 구절이 희랍어 성경에는 ‘쉰 에스타우로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재 완료형입니다. ‘쉰’은 ‘함께’라는 뜻이고, ‘스타우로오’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다’라는 뜻이고, ‘스타우로스’라는 명사가 여기에서 나왔는데 ‘막대기’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이 십자가는 원래 종교적인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종교적인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도입이 된 것입니다. 원래 이 십자가는 유대인의 형벌이 아니라 로마 사람들이 변방의 야만인이었을 때 만든 사형 제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형벌은 아주 가장 야만스럽고 저주스러운 형벌이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민족이나 반역자들을 처단하는 데만 이 형벌을 사용했습니다. 이 형벌의 특성은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고통을 극대화하여 느끼게 하는 데에 이 형벌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죽이지를 않고 매달려서 온 몸에 피가 빠져 나가면서 서서히 말라서 죽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뭐 3일씩 이렇게 안 죽고 매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노라 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그때부터 더 가깝게 말한다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회심하고 자신에게 적용된 그 다메섹에서의 경험 그때부터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사건은 과거에 있었지만 그 사건이 현재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노라’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은 방식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지은 죄가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그 어긋난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근데 만약에 우리 모두가 다 죽어 버린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의미가 없어지겠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가 지은 이 모든 죄들 중 구원받을 모든 인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게 하셨고,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우리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영적으로 당신 안에 두셔서 함께 끌어안고 이것을 내포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끌어안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었고, 그 죄에 대해서 율법이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당하여야할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여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그 큰 대속을 통해서 자신이 그렇게 죽어 있어 왔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19절에 끝나는 내용입니다.
B. 그리스도가 사시는 방식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을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이렇게 번역을 하는데 이게 희랍어 성경을 가장 정확하게 번역한 킹 제임스 버전 초판에는 이렇게 훌륭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계시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사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1. “살아 있음”: 목적이 있는 활동
자, 우선 여기에서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생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목숨만 붙어 있는 것을 우리는 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이 의미는 이런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했을 때 그 나는 하나님 버리고 멀리 떠나 나를 주인 삼으면서 나를 숭배하며 살던 자아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 없으신 분이심에도 죽어야 했던 것이 바로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스르며 불순종하며 산 바로 그것이 예수의 죽음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가 살인하고, 간통하고, 혹은 남의 돈을 훔치고 하는 이러한 것들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라기보다는 죄가 나타난 현상들입니다. 그러면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죄는 이 온 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는 이것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중심에 자기가 있고, 자신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치를 매길 수 있다고 믿는 것, 최고의 선이 자기의 만족이고,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몸 밖으로 펼쳐져 나와서 자기 안에 있는 생각을 구체화하려고 드러난 것들이 사기와 살인과 미움과 간통과 그 다음에 폭력과 이런 거짓과 모든 것들이 바깥으로 분출되어서 쏟아져 나올 때에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이 무인도에 혼자 살고 있는데 어떻게 살인을 하겠어요? 어떻게 사기를 치겠어요? 어떻게 남의 것을 훔치겠어요? 다 자기 것인데. 자기 혼자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간통을 하겠어요? 성폭력을 하겠어요?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안에서 자기를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 것을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악의 구체적이 형태로 나타나는 것, 이것이 마음속에 구체화되어서 머물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서 성경은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던 그것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대속적 사건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충격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 온 우주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으신 분이심에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으신 것이 바로 나에 대한,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던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만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었던 자기 자신의 옛 본성에 대한 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옛 본성을 따라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요, 자기의 새 본성을 따라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의 옛 본성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자기를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십자가 앞에서의 참회하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참으로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무나 필수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앎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보십시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예화를 하나 남겼습니다. 은행에 사람들이 대합실에 쭉 있는데 가방에 수십 만 불이 들어있는 돈이 있었어요. 이것을 잠시 맡기고 어딜 잠깐 다녀오고 싶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한테 ‘이것을 좀 맡아 주십시오. 제가 잠깐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이게 뭐요?’ ‘거기에 수십 만 불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러겠어요? 맡아주는데 돈 주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아니, 이런 큰돈을 왜 나한테 맡깁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했을 때 ‘당신은 잘 모르지만 저는 당신을 잘 압니다. 당신이 이웃에 살고 있고 당신에 대한 좋은 평판을 이웃들에게 들었고, 지금은 이런 저런 일을 하고 계시죠. 평소에도 당신을 존경했습니다. 당신이 이것을 꼭 잠깐만 맡겨 주십시오.’ 하면 이 사람은 자신에게 그것을 믿고 맡기는 행위에 대해서 자존감을 갖게 되겠죠?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맡겼어요. ‘당신이 이거를 좀 맡아 주십시오.’ ‘이게 뭐요?’ ‘수십 만 불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맡깁니까?’ ‘맡길 데가 없어서 당신한테 맡기는 것입니다.’ ‘당신 나 알아요?’ ‘알기는 뭐 알아요? 지금 금방 만났는데.’ 그러면 이 사람은 자기에게 이 큰 돈을 맡기는 것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심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무시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될 거 아니에요?
그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알고 믿으면 여러분의 믿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만 모르고 믿으면 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놀리는 것입니다. 희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예수님 제가 주님을 꼭 믿습니다.’ ‘넌 내가 누군지 아느냐?’ ‘누구면 어때요? 귀신이든지, 신이든지. 그냥 내가 믿는 게 중요하지.’ 그것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끊임없이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라고 힘주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신자의 영적 연합
그러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 안에서 어떻게 사시는가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예수님이 자기 안에 쑥 들어오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영적인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몸인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교회는 접붙여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몸이 접붙여 집니다. 우리의 영혼이 접붙여지고, 그럴 때에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었지만 그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옴으로서 그 생명으로 우리 안에 깃드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거듭난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부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몸은 우리의 지체의 상태에 따라서 우리 각 사람 속에 생명이 충만히 깃들 수도 있고, 현저하게 덜 깃들 수도 있습니다.
(예화) 어젯밤에 다 일정 끝내고 집에 들어가니까 12시가 거의 다 됐습니다. 막 발가락이 아파서 죽겠습니다. 그래서 열어보니까 이게 또 무좀이 또 도진 것입니다. 겨울에 계속 양말신고 이러고 다녔더니. 그래서 한동안 고생하다가 누가 좋은 약을 소개시켜 줘가지고 두 번 바르니까 깨끗이 낫는데 방심하고 놔뒀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내성이 생겼는지 이제는 그 좋다는 약을 수없이 들이부어도 이게 안 낫고, 급기야 마지막 새끼발가락에 구멍이 뚫어졌습니다. 아, 그렇게까지 긍휼히 여길 필요는 없어요.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것보다 불쌍한 사람들 많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제 발을 깨끗이 씻고, 드라이기로 깨끗이 말리고 그러면서 이제 들여다보니까 참 난감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약을 세 번이나 발랐습니다. 그리고는 또 말리고, 또 바르고, 또 말리고, 또 바르고, 그리고 방에 드러누웠는데 발가락이 아파서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이거 큰일 났다. 이거 어떡하나?’ 다시 또 나와 가지고 다시 또 호호 불고 그래서 어쨌든 잤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냐 하면 내 발가락에는 틀림이 없는데 생명이 미약한 것입니다. 발가락의 생명이 미약해. 균들이 들어오면 그 균들과 더불어 싸워서 이기고 쫓아내서 생생한 발가락이 되어야 될 텐데, 이게 30년 넘도록 계속 고질적으로 시달리면서 나았다가는 또 도지고, 나았다가는 도지면서 이 놈의 무좀균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무좀약에 다 익숙해져서 이제는 슈퍼 무좀균이 되는 거예요. 그래도 참 놀라운 거는 이게 얼마나 귀찮습니까? 냄새도 나고 물이 질컥질컥 흐르고, 외국에 한번 갔는데 무좀약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막 쓰라려 죽겠는 것입니다. 갈라져 가지고 뻘겋게 살이 드러나고 쓰라려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어떻게 괴로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한 번도 도끼를 만지작거린 적은 없습니다. ‘야, 네 개만 끊어내면 된다.’ 그리고 생선 토막 치듯이 올려놓고 한방에 끝내버릴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왜? 남의 몸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요. 그러나 내 몸이니까 그런 생각 안 합니다. 교회를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교회에 이렇게 보면서 한때 은혜를 받았다가 요즘 와서 보면 슬슬 교회도 어거지로 나와 가지고 예배도 개떡같이 드리고, 구역 예배 오라고 그렇게 불러도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안 나오고, 교회 봉사도 안하고, 가끔 만나면 그저 까칠까칠한 소리나 하고 이러면서 이제 불평이나 입에다 달고 그리고 사는 사람들을 이렇게 보지 않습니까? 교회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냥 어디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발가락이 담임 목사의 무좀 걸린 발가락이라고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거를 하도 수십 년 동안 괴롭게 구는 그 발가락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도끼를 만지작거리지 않는 담임 목사의 마음은 지체를 사랑하는 예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정확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임신택 목사 이제 개척하는데 이 무좀균 같은 사람들은 따라가면 안 됩니다. 이 교회에 남아 있으세요. 여기 남아서 나를 괴롭히세요. 차라리. 그러면 언젠가는 낫겠죠. 그래도 여기는 그래도 몸이 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조금 무좀균 같이 있어도 어떻게 낫겠죠. 그 조그만 교회 따라가 가지고 일시에 그 균을 퍼뜨리지 말고 은혜 받고 있는 사람들만 가세요. 나머지는 여기에 나하고 같이 있어서 계속해서 그래도 도끼 안 만질 테니까 남아있어요.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서 하나님의 생명을 분여 받는 것입니다. 그 생명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분여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래 아들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에게 사랑을 충만히 부어주셨고, 예수에게 부어주신 그 사랑은 헐몬산에서 이슬이 흘러내림과 같이 그의 머리에, 그의 몸에 예수께 접붙여져 있는 그의 몸인 교회에 흘러내려서 우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인 교회와 그 몸의 지체인 신자와의 영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니까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당신을 향한 박해로 받아드려진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연합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이 바로 성령의 교통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따라서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 산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고, 내 안에 예수가 충만히 사시는 비결은 내 안에 성령의 교통이 충만한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예수가 충만히 사시는 비결입니다.
3. 인격을 가지신 성령
그런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본질이 성령의 교통인데 이 성령은 세력이나 기운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성령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은 성령으로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인간과의 관계에서 표출하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의지와 성령의 생각이 따로 있고, 예수의 생각과 예수의 의지가 따로 있고, 아버지의 생각과 아버지의 의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인격을 가지신 하나의 신적 본질입니다.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것을 우리처럼 절대적으로 독립된 인격이라고 보면 안 되고, 하나님 삼위 하나님의 인격은 서로 교통하기 위한 인격입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은 달라도 독립적인 인격이 아니라 교통하기 위한 인격이고, 성부, 성자, 성령이 세 인격을 가지고 계셔도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생각,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이렇게 신자 안에서 오셔서 그리스도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뜻을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전달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그 뜻을 성령 안에서 우리 신자들에게 전달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그는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에 대해서 잘 알게 되고, 또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감동시켜 예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사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아직도 살아계셨더라면 사셨을 그런 삶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는 방식입니다.
C.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그러면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충만히 사시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끌어안고 못 박히셔야 했던 우리의 옛 본성과 옛 죄악을 따르는 삶을 계속하면 우리 안에 이렇게 주님이 충만하게 사셔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이어가셨을 그 삶의 뒤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에는 죄에 대해서 온전히 죽고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살고 있는 이 신자의 내적인 충만한 사랑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바로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고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영적으로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당신과 함께 나를 살리셔서 새로운 본성을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육체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머물러 있고, 생각에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니라 실제로 예전에 이 몸을 사용해서 죄짓고 불순종하고 악을 행했던 내가 이제는 내 안에 예수님이 충만하게 사심으로써 예수님이 이 땅에 아직도 살아계셨더라면 사셨을 그런 삶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으며 실천하며 살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대속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으로 여겨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몸으로 육체의 일을 행하여 죄 짓는 대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실제적인 생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체적인 실천이 없는 무신론적인 생활이 누룩처럼 오늘날 교회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목이 터지도록 무위도식하는 삶을 살지 말라고 해도 그것이 별로 좋은 것도 없으면서 눌러 붙어서 아무것도 주님을 위해 실천하는 것이 없는 삶을 이어가는 것은 바로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안에 예수 대신 자신이 살아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자기의 설교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매질한 세상의 손과 어찌 악수할 수 있겠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침을 뱉었던 이 세상의 입술에 어떻게 우리가 입을 맞출 수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하였습니다.
한 시대의 교회의 세상을 향한 영향력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진리의 밝은 빛을 머금고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사는가에 의해 결정되고, 그런 아름다운 지식과 윤리의 열매는 그 그리스도인 각자 각자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옛 성품을 죽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사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이나 교육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 아래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인지를 깨닫고, 자기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속성에 감격하여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충만한 은혜를 받도록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열렬히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 없이는 여러분이 결코 충만하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이고, 여러분은 지긋지긋하도록 무좀에 걸려 온 몸에 고통을 주는 발가락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간 인생은 얼마나 모순입니까? 한편으로는 자기 같은 죄인을 끌어안고 대신 형벌을 당하신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그 고백을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옛 사람의 욕망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인생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력히 호소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우리 같은 죄인들을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고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우리를 위해 삶으로 우리가 죽은 자처럼 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여 삶으로써 우리가 산자처럼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향해 살고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우리의 삶의 열매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씀으로 이기며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2)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下)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자기는 예수와 함께 못 박히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사도는 오늘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경험된 그대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쯤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미 승리한 것에 다름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II. 육체 가운데 사는 신자
A. 모순된 삶의 두 원리
1.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
그러나 오늘 우리 앞에 있는 20절 하반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와 함께 못 박히고, 예수와 함께 살아난 그리스도인인데 그에게는 엄연한 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체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육체’라고 할 때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인데 하나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중림적인 의미에서의 육체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성경 구절에 사용된 육체가 바로 죄와는 상관없는 중립적인 의미의 육체입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오히려 성경은 이 육체를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대상으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육체는 끊임없이 죄와 가깝고, 세상의 정신에 의해 침투되어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대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내가 육체 가운데 산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순된 삶의 두 원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왔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신 사람입니다마는 동시에 그는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육체가 늘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정욕의 주인이 되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끊임없는 고통을 이 신앙생활 속에 안겨주는 죄 된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육체 가운데 살아감
바로 이 모순된 삶의 두 원리 속에 끼여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속에서 한편으로는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으로서, 또 한편으로서는 여전히 육체와 함께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이 긴장 속에서 영적인 원리를 따라서 신앙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고 생애적으로 예수님 만났다고 하더라도 6개월만 은혜 받지 못하고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예전에 은혜 받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몸은 껍데기처럼 교회에 왔다 갔다 하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간데없고 육체 가운데 사는 사람만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모순된 삶의 두 원리 속에 끼여 살면서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매일매일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도록 그렇게 부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B. 육체 가운데 살게 하심은
1. 실제적 삶을 원하심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가운데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자, 이제껏 우리들이 하나님 믿고 신앙 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해 드리고 불순종만 하면서 산 것이 아니라 이런 저런 일들로 주님을 섬기면서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일들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이 오늘 흔들리면서도 아주 넘어지지 않고 믿음 안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신앙생활 할 때까지 많은 지체들이 붙들어 주었습니다. 천사가 붙들어 준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붙들어 주었습니다. 육체를 가진 성도들이 도구가 되어서 섬겼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당신의 은혜를 흘려보내 그 성도들을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누가 우리에게 기쁜 복음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까? 우리 중 천사로부터 이 복음의 소식을 듣고 죽어버린 성도들이 부활하여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어떤 신자들이 우리들에게 늘 들려주던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해 주었고, 그래서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에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어느 한편의 강도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일평생 죄만 지으며 강도로 살아왔지만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분이 자신의 구원자라는 사실, 그리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 이 죽음 너머에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까지 한 번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구주를 의지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 낙원에 이르실 때에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눈물로 고백을 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언약해 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이르실 때에 첫 번째 열매가 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얼마나 놀라운 행운인가 라고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생각입니다. 일평생 삶의 목적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는 체 살다가 마지막 십자가에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뵈오면서 그 분이 하나님의 놀라운 아들이요, 자신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 받으시는 모습 안에서 구세주의 모습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생동안 강도 짓한 그 사람을 구원하여 천국에 이르는 첫 번째 열매를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평생 삶의 목적도 모르고 살다가 오늘 비로소 인생이 무엇이고, 누구를 위해 살아야할 지를 알았는데 금방 하늘나라 가게 되었습니다. 기뻤을까요? 아닙니다. 이제 비로소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깨달았으면 이제 비로소 제대로 된 인생을 살면서 우리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얻었는데 그에게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살도록 삶이 허락이 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예수 믿고 맑고 깨끗한 영혼이 되었을 때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죄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 남겨두셨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존으로서 빛 된 삶을 살아서 우리의 육체 안에 있는 이 동안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이 세상에 남겨 두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방황하던 나그네요,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던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의 죄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큰 고난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그리고 이 쓸모없는 죄인을 향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것이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우리의 죄를 위해 살지 않고 불순종하며 살지 않고 무제한의 순종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위해 헌신하며 자신을 바치며 살겠다고 다짐한 것이 그리스도인이 된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을 고백하고 죄를 철저히 미워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사랑하는 그렇게 정결하게 된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이 그대로 하늘나라에 데려가지를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전 이 세상에서 이루실 뜻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슬픔과 문제가 많은 이 세상에 남겨두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자기를 위해서 살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라고, 이제 누구도 이기적인 욕심으로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심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남을 위해 버리셨을 그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이 문제가 많은 세상에 남겨 두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정결한 영혼을 거두어가지 않으시고 육체가운데 남겨두신 것은 이 육체로 우리의 정욕의 기회를 삼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 짓게 하기 위해서 남겨두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육체를 가지고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이 육체를 가지고 주님을 사랑하며 섬긴 어떤 사람들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고, 목양을 받게 되었고, 무지로 가득찬 우리의 영혼의 어두움에 빛을 주시고, 이 세상에 자신은 소망이 없다는 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 사람의 증거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육체 가운데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들이 되었으니 이제 다시는 육체를 죄의 병기로 사용하지 말고 의를 위한 도구로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우리의 육체가 우리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한때는 천하를 얻은 것보다도 예수 사랑 받은 것을 기뻐하던 사람들이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다시 육체를 주인삼은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현재적으로 못 박혀 있다면 결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시련과 고난을 만날지언정 우리가 죄에 져서 곤고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피곤한 삶은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불행은 육체 가운데 살게 하신 이 기회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육체를 사랑하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원수 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자기는 죽고 예수가 사신 사람인데 내 안에 사신 예수와 화목하지 못한 상태에서 육체를 위해서 사는 어떤 삶이 그에게 행복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구원 얻은 우리를 육체 가운데 살게 하신 것은 우리의 육체를 죄의 병기로 들이지 말고, 오히려 이 육체를 사용하여 열심히 주님을 섬겨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고, 이 썩은 세상에 소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 세상 계실 때 단 하루도 당신의 육체를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인간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마치 성찬의 떡을 떼어주시듯 당신의 살점을 나누어 떼어주는 마음으로 섬기면서 사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육체를 가지고 주님 섬기며 살게 하시려고 구원받은 우리들을 천국 데려가지 않고 아직 이 세상에 남겨 두셨으니 주님의 나라로 들어간 강도가 여러분을 그렇게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서 무위도식하는 삶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삶입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피 흘리고, 마지막 땀 흘리고 피 흘리기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셨는데 여러분은 아무것도 주님을 위해 흘리지 않으려고 합니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은 액체의 삶입니다. 주님을 위해 쏟을 땀이 있고, 예수를 위해 흘릴 눈물이 있고, 마지막 그리스도를 위해 쏟을 피가 있는 삶이 될 때에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여러분을 통해 받으실 영광은 천상에서 받으실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천상에서는 우리의 찬송 소리 없어도 주님은 저절로 영광을 받으실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섬김이 필요합니다. 한번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눈을 들어 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고 교회를 바라보고, 가족을 바라보고,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고, 선교지를 바라보고, 그리고 우리의 목양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좀 더 많이 눈물을 흘렸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좀 더 많이 피를 흘리고 죽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주님을 섬길 놀라운 특권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 가지고 자기 섬기며 사는 마지막 열매는 쓰디쓴 사망이요, 고통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줄 것처럼 하나님 버리고 당신께 오라고 유혹하지만 주님 버리고 세상의 품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는 언젠가 여러분이 세상을 버린 것을 여러분의 가슴에 복수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서도 버림을 받는 길가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소금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아직은 이렇게 살아있게 하시는 때를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아직 여기 살려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여러분이 오늘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2. 하나님 의지하게 하심
그러면 우리는 육체를 입고 이렇게 살아있을 때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생애를 본받아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행하셨던 그 일들을 티끌만큼이라도 흉내 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섬김과 봉사 하나를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는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하고 놀라운 일인지를 몰랐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티끌 같은 섬김을 사용하셔서 다시 육체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일깨우고 그들을 복되게 하셔서 하나님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멘
연말이라서 한 해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달력을 열두 달을 놓고 다시 거꾸로 넘겨보니 새카만 글씨가 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을 향해서는 게으르게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애를 쓰면서 살았는데 열매가 얼마나 될까 그런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정말 마음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게으른 적은 없고, 꾀를 피우고 논적은 없지만 한 해를 지나면서 여러분을 잘 돌보았다라고 하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시험에 들어있는 성도들이 있고, 여전히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게 애를 써서 가르쳤는데도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영혼의 어두움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렇게 무감각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하나님 사랑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우리의 자리에 섰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열매로 우리 예수님 기쁘게 했을까 라는 후회, 쓸모없는 인간이 살아서 주님의 일을 가로막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자괴감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한 해 동안 열심히 어느 하나도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은 것은 없지만 선교지에서 애쓰고, 국내 아웃리치에 가서 시골에 있는 교회를 위해 애쓰고, 교회의 여러 가지 행사를 위해서 힘쓰고, 다른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이러는 동안에 너무 많이 일하느라고 교회 안에 지체들을 잘 못 돌보는 것은 아닌가 라는 후회 아닌 후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할까봐 우리의 육체로 주님을 섬겼던 모든 열매를 우리들에게 모두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언제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지 모르지만 뿌리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뿌리거니와 하나님은 그렇게 육체 가운데 살면서 주님을 위해 놀지 않고 씨를 뿌렸던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보셔서 당신이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며 당신의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허공을 향해 뿌린 것 같았고, 아무 열매도 없는 것 같았고, 때로는 우리 교회만 손해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여러분이 뿌린 그 씨를 사용하셔서 여러분이 모르는 곳에서 열매를 거두어 여러분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입니까? 어차피 우리의 육체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다시 살아서 주님 안에 살게 하신 우리의 육체는 결국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위해 살라고 주신 육체이고, 그것이 누구에게서 맺혔든지 간에 그 아름다운 결실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를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이 하나님 섬기며 살아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고 초점을 주님께 모으고, 하나님 섬기고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나의 육체가 예수 위해서 봉사하는 도구가 되도록 살아보십시오. 그렇게 살지 않을 때에 여러분에게 밀려왔던 수많은 근심과 걱정과 염려는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면 우리의 육체는 고분고분하여 하나님 섬기는 생활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영락없이 우리의 육체에 베인 죄들이 우리의 영혼을 무겁게 하여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사시도록 그 분께 매일매일 나 자신을 맡기고 그 분이 내 안에 충만히 사시기에 싫어하시는 그 모든 것들을 매일매일 버려야 합니다. 예수는 언제나 내 안에 살아계시지만 나의 육체는 언제나 그 분을 따르지는 않기 때문에 새 사람과 옛 사람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현저하게 기도가 부족합니다. 세상이 점점 각박하고 너무 어지러워서 이제는 티끌만큼도 우리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가끔은 닫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조용히 우리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그 십자가의 고난의 보혈 앞에서 내가 티끌만도 못한 존재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흘리신 핏방울 위에 나의 인생이 떠 있고, 그 분이 나를 위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간구하시던 기도의 눈물방울 위에 내가 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이 육체를 가지고 충분히 주님을 위해 살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날마다 깨끗케 해 달라고,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구원해 주신 나의 육체가 나의 육체를 위한 도구가 되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마음을 쏟으며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마음 깊이 목자의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간절히 애원하니 제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디에서든지 마음을 쏟으며
(찬양)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예수 붙들고 꼭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기 싫을 때마다 이렇게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육체 가운데서 내가 질 것이다 꼭 믿고 이렇게 기도 속에서 내가 죽는 길이 내 안에 예수 사시는 길이시라 고백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III. 그리스도가 사시는 방식
A.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함
오늘 사도는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충만히 사시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고백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여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그때에 신자인 자기 자신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영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2000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복음의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십자가에 우리 자신도 못 박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게 할 때에 언제나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진 십자가를 통해서도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님 홀로 지셨지만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같지 않지만 이 십자가가 지향하고 있는 의미는 일관된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 십자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모든 시련과 고난,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 죄가 없는데 하나님 잘 섬기려고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썼더니 믿음만 포기했더라면 피할 수 있는 고난인데 믿음으로 살려고 했더니 끊임없는 고난이 다가옵니다. 거기서 우리는 날마다 죽음을 봅니다.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명 때문에 육신의 생각으로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결별하고 싶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여기에 세워줬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이 내가 너를 위해 죽었으니 너는 나를 위해서 여기서 죽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서 있는 동안에 우리는 거기가 어디든지 거기에서 날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봅니다. 그 십자가는 언제나 칼 달린 십자가고, 창 달린 십자가고, 언제나 뾰족한 십자가고, 그 십자가는 언제나 짊어져서 기쁘고 즐거울 때는 없고 언제나 눈물이 없고, 고통이 있고, 피가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 베푸신 그 십자가의 고난에 비하면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 십자가 생각하며 참는 사람들, 반드시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예수가 충만히 사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함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런 순수한 의미의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그렇기 못하게 십자가를 질 적이 많은 것입니다. 주님을 섬겼지만 모난 나의 성격 때문에 사람들과 부딪쳐 고난이 옵니다. 마음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그르쳐 고난의 쓰디쓴 열매를 거둡니다. 마음으로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은 불순종하고 때로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그 쓰디쓴 열매를 우리가 거둘 때도 있습니다. 어둠속에서 흘리는 그 후회의 눈물과 그리고 죄악 속에서 삼키는 쓰디쓴 고통의 눈물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때에 양심은 우리를 향해 소리치며 너는 죄인이고, 너 같은 더러운 죄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소리치고 율법은 너의 죄는 죽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얻을 어떠한 분깃도 없다고 소리칩니다. 사방을 우겨싸는 모든 현실의 고난과 양심의 가책, 울려 퍼지는 율법의 정죄와 그리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현실적인 인생의 벼랑 끝들이 우리를 에워쌉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무에게도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절대 절망의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하는 외아들을 잠시 죽게 하시면서라도 우리를 영원히 살리실 그 마음이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죽음의 고난이 있는 그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시련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때 우리들을 사랑하던 사람들은 우리를 버리기도 하고 버리지 않더라도 우리를 떠나보내고 죽음 저편으로 사라져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그래서 우리들이 당신을 찾을 그때에 언제나 구원의 손길을 우리에게 베푸시는 분입니다.
C. 믿음 안에서 살아감
오늘 사도는 자기 안에 예수가 충만히 사실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을 말하는데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것은 자기를 너무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을 기억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은 여러분을 향해 계속되고 있으니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은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라기보다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 여러분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수단이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불꽃같은 은혜를 불러 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기억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힘이 바로 이 하나님 사랑의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충만히 사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말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에워싸고 환란과 시련이 많습니다. 속에 근심, 밖에 걱정이 나를 에워싸고 어느 곳에도 마음 둘 수 없는 절대적인 고통 속에서 시달립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타이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또한 우리를 위해 아끼실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사도 바울이 두려움 속에 떨고 있던 로마의 교인들을 향하여 권고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믿음이 이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것이니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한 바와 같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절망 가운데 그를 따름으로 손해를 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죽음의 위기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를 너무나 많이 믿었기 때문에 실망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을 의뢰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한 번도 실망을 안겨주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 분을 의지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신 분이었습니다. 바랄 것 없는 중에 온전한 소망을 우리 예수 한 분께만 두고 그 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렇게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구하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때문이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이 믿음, 이 믿음이 바로 사도 바울 안에 예수가 충만히 사시도록 만들어준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산 사람들에게 가장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지 않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는 이런 소망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예수여 내가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힘으로는 갈 수가 없는 길입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마십시오.’ 고백할 수 있도록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 모르시게 살아서 우리에게 행복할 어떠한 삶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요? 만약에 우리가 한때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죄인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 의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병든 자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 건강한 사람들을 위해 고치려고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실패하고 낙심한 사람들이 돌아갈 곳이 예수가 아니라면 희망이 없는 죄인들은 어디에서 영혼의 복음자리를 찾겠습니까?
태만하고 지리멸렬한 신앙생활은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이고, 예수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새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등지고 하나님 불순종하면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고, 주님이 이 세상에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리고는 여러분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와 함께 못 박혔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처음 그 사랑으로 돌아오십시오. 여러분이 이곳에 와서 주님 만나고 눈물 흘리며 이젠 어두움을 뿌리치고 빛 가운데서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그 신앙의 결단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주님도 여러분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여러분이 당신께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10.우리를 하늘에 앉히심은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2:7)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에베소서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고 구원의 완성 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특별히 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창조되었지만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상을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완성시키실 때까지 교회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훌륭한 도구가 되고 한 알의 밀알이 된다고 하는 것이 에베소서의 내용입니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교회이고,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다양한 비유들이 등장하고, 아름다운 언어로서 이 교회의 본질적 성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II. 신자와 함께하신 그리스도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신자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운명적으로 교회를 통하여 신자와 하나 되었고, 그래서 신자는 어떤 처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처음부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그 분의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바울은 2장에서 우리가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이고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 행하며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라서 불순종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욕심을 따라서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A. 내포적 대신의 4중 사역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소위 내포적인 대신의 4중 사역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죽으시고, 함께 살리심을 받고, 함께 부활하시고, 함께 하늘에 안치셨다는 것이 바로 그 4중 사역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했으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교리는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는 우리를 끌어안고, 그리고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셔야 했고, 우리의 죄는 그 분의 어깨 위에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끌어안은 우리는 살게 하셨고,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은 사라지고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긍휼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아직 죽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육체의 부활을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었을 때에 하나님이 중생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이후로는 살아있는 영혼으로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통을 나누게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고 하는 것도 우리에게 이렇게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몸으로 이 세상에 계셨고, 마지막에 승천 하셨고 그리고 맨 끝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장소적으로 하나님께 좌우편이 있다는 뜻도 아니고, 보좌가 있다는 뜻도 아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부여 받으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 세계와 온 우주를 다스리게 된 왕이 되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부활하고 하늘에 앉히시는 일에까지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 우리와 함께 못 박혀 죽으신 것, 그가 살리심을 받았을 때 우리도 중생을 통해 살아난 것이 적용이라면 부활은 마지막 때에 우리들이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 재림하실 때에 우리 모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지만 그 분은 교회의 머리로서 부활하셨으니 하나님 마음 안에는 구원하여야 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그림은 이제 영원 전에 마련된 것이지만 그러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역사의 진행을 따라서 하나씩 성취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아직은 우리들이 육체로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의 부활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우리는 죽을 것이고, 죽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따라 부활하게 되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보다 더 완전한 연합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고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부활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실 때에도 교회의 머리로서 앉으셨고,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모두 성취되었을 때에는 교회의 머리이신 동시에 우주의 왕으로써 거기에 좌정한 것이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이 모든 창조세계의 머리가 되실 때까지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그 연합에서 해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좌에 앉으셨을 때 영적으로 우리도 그의 보좌에 함께 앉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일에 어느 정도는 함께 참여하여 당신의 일의 성취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죽으심과 살아나심, 부활, 그리고 보좌에 앉으시는 이 4중 사역에 신자가 함께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성도인 우리들이 떨어질 수 없는 운명적인 연합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신 이 하늘의 좌정하심은 신약성경에서 크게 4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히브리서 4장 10절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것은 안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 생애는 서 계신 생애였고, 무릎을 꿇으신 생애였고, 종 되신 생애였다면 이제 보좌에 좌정하신 상태는 이 모든 일을 끝내고 안식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이 완전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힌바 된 우리들에게 하늘에서 영원히 누리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그 안식을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미리 누리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의 상급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흔히 가끔 저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주일은 안식일인데 이른 아침서부터 밤까지 너무 교회에서 일이 많아서 고달픕니다. 우리에게 안식을 좀 주십시오. 이 주일날은 좀 조용히 쉬다가 나와서 예배만 드리고 가서 또 쉬면 정말 얼마나 좋은 안식일이 될까요?’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정확한 답은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는 안식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두 단어가 있는데 ‘사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ός)’라는 단어와 ‘카타파우시스(καταπαυσιζ)’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사바티스모스’는 히브리어 ‘사바트’에서 온 단어로서 육체적인 쉼, 일하지 않고 의무에서 해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바티스모스’는 안식은 안식인데 육체의 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영혼이 누리는 진정한 안식과 기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날 간단히 드리고 들어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소파에 벌렁 누워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면서 텔레비전을 돌리고 있는 것만 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영원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이 ‘카타파우시스’의 안식을 오늘 이 하나님의 거룩한 주일에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안에서 성도와 함께 말씀과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말미암아 영혼이 하나님을 한없이 즐거워하는 시간이 ‘카타파우시스’의 안식입니다. 그러면 이른 새벽부터 아침에 6시 50분에 교회에 나왔는데 어떤 날은 교회에서 모두 끝내고 집에 들어가면 밤 11시에요. 나도 그렇게 일시키면 안 되지. 그러면 안식일인데. 나도 한번만 예배드리고 집에 가서 조용히 파자마 바람으로 누워서 안식을 누려야죠.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살면 교회에 찾아온 영혼들에게 진정한 쉼이 있겠습니까? 육체는 쉬지 못해도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안에서 우리는 ‘사바티스모스’의 안식보다도 탁월한 ‘카타파우시스’의 안식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그 영원한 안식 속으로 우리가 함께 들어갈 때에는 이 두 안식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런 하늘 안식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계시록 4장 1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은 영광이라고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의 생애는 수치스러운 생애였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고, 종처럼 사신 생애였으나 이제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후에는 영광의 생애입니다.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를 올리게 하셨던 영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의 좌정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계시록 14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신 것은 바로 심판을 의미합니다. 한 나라의 황제가 중요한 국사를 두고 명령을 내리거나 죄인을 엄히 벌할 때에는 길거리 지나가다가 밥을 먹으면서 혹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장을 하고, 그리고 보좌에 앉아서 발아래 만조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법령을 선포하고 그리고 잘한 자들에게 상을 주고, 그리고 자신의 제국을 위협한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위엄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은 거기에 누워서 쉬시기 위함이 아니고 그래서 하나님의 우편의 보좌는 안락의자가 아니라 이 모든 세계를 심판하고 통치하는 왕의 보좌입니다.
네 번째로 계시록 7장 1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은 바로 구원을 의미한다고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서 심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교회와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이 모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모든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대적 속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하고 보호하고 지키시는 일을 바로 이 보좌에서 천군 천사들에게 명령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놓고 보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 보좌에 앉히고 이 세상의 모든 역사가 끝난 후에는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그 발아래 복종시키는 일에 우리들이 참여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제 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는 자이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 연합 함께 있음은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니 바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그 위대한 언약, ‘나는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이 위대한 언약을 그리스도 예수 임마누엘로 오신 그 분의 이름을 통해서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써 우리를 통해 당신의 몸을 함께 완성해 가시는 운명 공동체로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B.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심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이처럼 지상에서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머리 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 우리를 하나의 예수의 몸 만드는 것일까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를 이 세상에 빛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 무슨 일을 이루시기 위한 것일까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즉, 신자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심으로써 당신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이 세상에, 천상에 아주 영광스럽게 드러내시기 위하여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넓게 보면 우리 인간에게 과분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종종 우리 같은 나이의 세대가 매우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가장 비참했을 때와 이렇게 번영했을 극단의 때를 모두 한 세대 안에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60년대 초반에 초등학교 입학했고 그때 우리나라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만약에 그 역사의 한 50년을 뛰어넘어서 그 현장에 여러분을 데려가면 절대로 그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는 믿지 않을 그 정도로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살았는데도 우리 동네에 사방을 돌아보면 번듯한 건물이라고는 경찰서와 그리고 학교 이외의 번듯한 건물은 없었고, 우리 동네 눈길이 닿는 모든 그 넓은 동네 중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소방서에 있는 화재 감시탑이었습니다. 6층 정도의 높이가 되는 건물이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그 화재 감시탑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냐 하면 모든 집들이 판잣집이었습니다. 지금에 있는 필리핀이나 이런 베트남이나 이런 나라들은 너무 잘사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이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저녁때가 되면 퇴근하는 동네 사람들이 머리에는 커다란 다라니를 이고, 뒤에는 애기를 업고 한손에는 봉지쌀을 들고 한쪽에는 연탄 두 장을 쇠고랑에 끼고 골목길 걸어서 어둑어둑해지는 집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풍경을 매일 저녁 수도 없이 봅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데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창가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래요 ‘남준아, 남준아.’ ‘왜?’ ‘눈이 펑펑 온다.’ ‘그래.’ ‘이 눈이 쌀가루였으면 얼마나 좋겠니?’ 여러분은 웃지만 그 말 했을 때 그 가까이 있는 학생들 중 아무도 웃은 사람이 없습니다. 왜? 모든 친구들이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내 짝이었던 친구는 점심시간마다 도시락 뚜껑을 가리고 밥을 먹었습니다. 근데 왜냐하면 새카만 보리밥이었습니다. 걔는 항상 반찬을 주머니에서 꺼내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꺼내면 신문지에 엄마가 싸준 하얀 소금, 그 위에 뿌려진 몇 개의 깨알이 반찬의 전부였습니다. 그거를 뿌리면서 한 숟가락씩 집으면서 밥을 먹었습니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가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비참하도록 가난한 나라가 지난해에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 이어서 이탈리아를 제치고 8번째의 무역국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없는 일입니다. 어느 영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보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없는 것에 대해서 의아해 하면서 ‘당신들은 왜 당신 나라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한국 사람이 ‘도대체 이 조그만 나라에서 자랑할게 뭐가 있냐?’ 그랬더니 ‘영국이 300년 동안 이루었던 경제 발전을 당신들은 30년에 이루었고, 그렇게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도 다른 후진국이 모두 실패한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루지 않았느냐? 결국 독재자들이 나와서 나라를 그렇게 독재로 몰고 갔지만 끝까지 항거해서 결국은 이 시민의 자유를 쟁취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1. 신적 사랑과 계획을 알게 함
이런 모든 것들을 우리들이 한번 구속사적인 견지에서 보면 그냥 우연히 이루어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뿌리시고 그 복음을 열매 맺게 하여 일정 기간 동안 선교의 역사를 감당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위대한 경륜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게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사랑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러한 일반적인 섭리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인류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이 나라, 이 백성들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 지를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과 계획을 알게 하는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대신적 사랑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 같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았고, 그 깨달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어 영적으로 접붙여진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렇게 우리 한 사람을, 한 사람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의 일부로 삼으신 것은 바로 우리 전체를 몸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풍성함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우리의 세대 뿐 아니라 우리 뒤에 오고 또 올 세대들에게까지 전파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많고 아직까지도 부패한 이 세상에 교회를 남겨 두셔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게끔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들의 본분은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행복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를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그 구속의 은혜의 풍성함을 충만하게 드러내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여 그 분의 은혜 아래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그 사람들을 모아서 교회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교회 하나 하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심으로 진리와 하나님의 생명을 부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당대에만 일어나야 하는 일이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도 증거 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복음의 풍성함을 학문으로 남기고, 글로 남기고,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서 아직 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보지 못한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우리의 남겨놓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남겨 놓은 성경 해석의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가 남겨 놓은 신앙의 유산과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맛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인 책임을 지고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일부가 되어서 바로 창조와 그리고 완성 사이에 있는 교회 시대, 이 많은 세계 가운데 이 동양에, 그리고 이 반쪽짜리 밖에 되지 않는 대한민국 한반도 남쪽에 우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2. 구원 가치와 행복을 드러냄
교회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것이 소명이라면 이것은 크게 두 가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도입니다. 이것은 구원입니다. 형식적인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의 능력으로 회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몰랐던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을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부여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을 충만하게 체험하고, 이제 하나님 앞에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이었던 자들이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들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의 역사가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매주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똑같은 순서를 따라 예배를 드리고 흩어져 가서 어떠한 생명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침묵만이 깃드는 예배가 반복되고 있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이 세상에 나타내 보여줄 수 없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선 사람들이 거기에서 진리의 말씀을 선포 받으면서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로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기의 모든 인생의 문제가 하나님을 등지고 산 죄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아름다운 구원의 길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십자가를 붙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은 사람의 제도나 방법,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도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역사입니다. 참된 복음 진리가 있고 이 복음 진리를 역사하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있을 때에 이들이 이런 생명의 역사를 교회에서 경험하며 하나님이 은혜를 얼마나 풍성하게 베푸시는 사랑의 주님이신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써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생명의 풍성한 역사를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풍성한 삶을 통해서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회심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칩시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미끄러져서 예전보다 더 나쁜 악에 빠져서 하나님 안 믿고 산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 보여 주겠습니까? 악인들이 악하게 원래 살던 자들로서 악하게 살면 사람들은 그것에 주목하지 않지만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줬던 사람들이 악하게 산다면 그들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이 가짜였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회심할 때 받았던 그 은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이 없으면 교회는 보존해야 할 회심의 은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심이 없으면 교회는 보존할 은혜가 없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생명을 보양하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들이 가능하지 원래 생명이 없는 그곳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입에 떠 넣는 보약이 과연 보약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두 개의 회심의 화로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화로 안에서 회심하고, 회심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기를 간직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두 개의 화로가 있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들이 하나님을 분명하게 믿고, 그 분을 경외하면서 살려는 신앙의 열기가 없다면 그러면서도 자신의 자녀들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콩을 심은 밭에 앉아서 팥을 거두기를 기다리는 농부와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가정의 중요한 사명은 이 회심의 열기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신앙에서 미끄러지고 하나님 멀리 떠났다가도 부모의 기도, 찬송, 하나님의 말씀 사랑, 경건한 생활을 보면서 마음의 찔림을 받고 거기서 회개하고 다시 주님을 믿을 열심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 가정의 기능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회심의 열기를 보다 조직적으로 보존하도록 하나님이 지정하신 특별한 화로입니다. 이 회심을 통해 받은 은혜의 불씨들을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목양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양은 넓게는 은혜 받은 성도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지지만 좁게는 하나님이 세우신 당신의 목회자들을 통하여 이 목양의 원리들을 성취해 가십니다. 그리고 그 목양의 원리는 목회를 통해 배운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목회자가 아닌 한 마리의 양으로서 주님께 목양을 받으면서 또 자신도 언젠가는 목회자의 돌봄을 통해서 터득하게 된 그 목양의 원리를 따라서 목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 전체 이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불씨가 모이게 하시고, 이 모여진 불씨들을 목양을 통해서 계속 불러일으키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목양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받은 자녀들이 모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역이고, 또 그 아래에서 혜택을 받기를 원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런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교회에 유입되어서 교회에 와서 교인은 되었지만 목양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등록은 할 테니 절대 우리 집에 연락하지 마십시오. 등록은 할 테니 절대로 찾아오지는 마십시오.’ 이러면서 이제 교회를 자기의 종교생활을 위해서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교회 등록한지 꽤 여러 달이 흘렀는데 아직 성장반 안 하고 계신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계속 성장반 안하고, 그리고 목회자가 뭐라고 그러던지 나는 내 멋대로 살겠다고 그 모든 질서들을 거부하고 산다면 우리는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을 때리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심지어는 그렇게 있으려면 이 교회를 떠나라고 그렇게 야박하게 여러분에게 요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목양의 질서를 거부하고 멋대로 살면 우리는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교회에 소속된 여러분은 이 교회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따라서 목양 속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진리의 사람들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 자라가야 할 의무가 있고, 목회자는 그런 사람들로 성도들을 길러야 할 사명을 받고 온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을 내버려 두지 말도록 주님께 매일매일 당부 받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권력은 완장하나만 차도 무서워서 벌벌 떨고, 교회의 권력을 세상 권력이 아니라고 그렇게 깔보고 그렇게 짐승처럼 살아서 여러분이 정말 자신 있게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회심의 은혜를 유지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목양이라는 질서를 교회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친히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와 권능을 받고 그들이 사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속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가르치시고, 함께 훈련하시고 함께 아파하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사랑하시면서 하늘 천국의 이치를 가르치시고 몸소 보여주셨고, 제자들은 영원히 배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사신 생애를 묵상하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지를 배워갔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목양이 중요하고 이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목양을 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함으로써 회심의 은혜가 보존되고 여러분이 더 많이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삶으로써 여러분의 인격과 생활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교회와 세상을 섬기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시려고 여러분에게 그렇게 목양의 질서 속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III. 열린교회를 세우신 하나님
A.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
하나님이 열린 교회를 세우신 것도 이런 우주적인 교회에 대한 계획의 한 맥락 속에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를 세우실 때에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하셨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의 교수가 되었지만 한 번도 교회를 개척하는 계획은 마음속에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학교에 교수로 들어간 후 한 3년 정도 흘렀을 때에 학교에서 너무 많은 괴로움과 갈등을 겪고 그때에 아무래도 내가 영원히 이 학교에 있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어느 교회에서 나를 오라고 부르면 거기에 가서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 하겠다 하는 소망을 품었습니다. 아주 작은 교회도 말고 큰 교회도 싫고 200명 정도 모인 교회에서만 날 불러주어도 기꺼이 가겠노라고 마음에 결심한 것이 90년도의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100명까지 낮췄는데도 별로 오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1000여명이 넘는 교회에서 진지하게 나를 자기네 교회 담임 목회자로 부르는 것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그 교회의 중요한 장로 중 몇 사람이 제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경험해서 심지어 ‘교수님이 우리 교회에 오시면 우리는 교단까지 옮길 용의가 있습니다.’ 까지 이야기를 했지만 그때에는 제가 두 번째 학교에 청빙 받아 가서 한참 기쁨으로 사역을 하고 있었던 때였고, 아직은 학교를 떠나 교회를 담임하여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2년 정도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이었습니다. 11월의 어느 날, 저는 자다가 초롱초롱 정신이 맑아지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날밤을 새우고 나면 아침에 남는 것이 뭐 있으랴 하고 침대 아래에 내려와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셨고, 밤새도록 침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기도 끝날 때쯤 나도 모르게 ‘하나님 제가 개척교회를 할 것이니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잠시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을 맞았습니다. 간밤에 꿈을 꾼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신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마지막에 개척교회 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한 것은 왠지 영적인 오버 같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루를 지냈고, 그날 밤에도 역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밤새도록 침대 머리 아래에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를 했고, 이번에는 더 열렬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척을 해야 할까요? 말아야 될까요? 물어본 것이 아니라 ‘제가 개척할 테니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역시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이었었고, 그리고 개척 교회 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한 것은 두 번째 오버라고 느껴졌습니다. 3일째에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고, 마지막에 저는 기꺼이 승복하고 이것이 주님의 부르심이라면 교회를 해본 적 없지만, 자신 없지만 개척하겠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제게 주셨던 말씀이 마태복음 9장 35절에서 38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함이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정말 기도할 때에 온 사면 땅 끝에서 울부짖는 이 죄인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교회를 세우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소명이 불붙듯 타올랐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아내에게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에게 개척 교회를 하라고 그러시는 것 같아.’ 그렇게 얘기 했을 때 아내는 두 손을 높이 들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이제 열린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였습니다.
열린 교회 이름을 어떻게 지었냐고 그러는데 신비하게 지은 것이 아니고, 기도 많이 하고 지은 것도 아닙니다. 11월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9월 달에 우리 집사람이 ‘여보 우리가 이다음에 교회하면 좋은 이름 하나 생각났다.’ ‘그게 뭐 필요가 있는데. 내가 할 것도 아닌데.’ 그랬더니 들어보래. 그래서 기도를 하고 계시록을 읽는데 열린 교회라고 그러면 진짜 좋을 거 같다는 거예요. ‘그러던지 말든지’ 그러고 교회를 하게 되어서 교회 이름을 어떻게 할까 그래서 ‘그때 지어놓은 거 있잖아. 그걸로 하지 뭐.’ 그래서 열린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냥 아내에게 순종해서 열린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찢어지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희랍어 성경을 보니까 ‘민망히 여기셨다’는 이 대목이 ‘에스플랑크니스떼’라고 나오는데 ‘창자에 흔들리기까지 감동을 받다.’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으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으셨으니 그것입니다. 그 마음을 부어주시고 그리하여 일평생 이 마음을 품으며 교회를 세워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에는 제가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고, 그리고 아직 본격적으로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수없이 집회를 다녔기 때문에 꽤 알려져 있었고, 그리고 잘 나가는 강사였습니다. 교회도 없는 사람이 서초동에서 부흥에 대해서 가르쳐 줄 테니 모여라 했더니 매주 목요일 밤마다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그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비춰볼 때에 어디서 올지는 모르지만 내가 교회를 한다고 그러면 가까이 있던 사람들 5~60명은 동참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를 한다고 그랬더니 가까이 있던 사람도 다 딴 데로 가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에 모인 사람이 우리 집사람까지 포함해서 7명이 열린교회 멤버가 되었고, 그리고는 이제 지하실 예배당을 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아무데를 가도 교회 할 데가 없어요. 아, 여기 참 길목도 좋고 사람 모이기 좋겠다는 곳에는 꼭 교회가 이미 한 개 내지 두 개씩 교회가 있어요. 아 여기는 교회가 없네. 그런 교회는 사람이 절대 올 리가 없는 위치였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하다가 한군데 장소가 났다고 그래서 가보니까 이거는 지하실로 한없이 고꾸라지듯이 내려가는 곳이었어요. 그리고 그 예배당에 가보니까 흉가처럼 아주 허름하고 곰팡이가 퍽퍽 슬어요. 그래도 기도해 보니까 거기가 하나님이 주신 자리예요. 그래서 학교에서 받은 대출금을 갚기 위해 적금을 들었던 걸 깨뜨려서 1500만원 보증금을 들여 내놓고 60만원씩 월세를 주기로 하고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학교에서 강의가 끝나면 밤중에 와서 청년들과 함께 그 흉물스러운 교회를 뜯어내면서 이제 페인트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나무 의자도 못 사고, 나무 부스러기로 풀 발라서 찍어놓은 그 가짜 의자를 사다가 놓고 그리고 예배를 드린 것이 12월 12일, 의도한 것은 아닌데 그 날이 12월 둘째 주였고, 제 생일인 동시에 우리 김 경해 전도사님 생일이었습니다. 기도해서 응답 받은 것이 11월 15일이었으니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3주 남짓한 동안에 그 모든 일들이 이루었으니 콩을 불에다 튀기듯이 그렇게 바쁘게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축하하러 왔던 사람들이 가고 나니까 마지막에 남아있는 식구들은 7명이었습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7000명이 모인 것처럼 열렬하게 설교하고 기도했지요. 이 교회를 수리할 때에 어느 목사님이 슬리퍼를 신고 오셔서 누군지 자기를 얘기도 안하고 ‘누구십니까?’ 그랬더니 ‘동네에 있는 교회 목사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교회를 개척하게 되어서 축하드립니다. 부흥하십시오.’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아무 관심도 없이 교회를 들여다보면서 ‘쯧쯧. 잘못했어. 잘못했어. 잘못 골랐어. 여기는 오는 데가 아닌데. 무슨 고생하려고 여기를 와. 저런.’ 그러고 나갑니다. 그리고 뭔 일인가 그랬더니 사연이 있더라고요. 몇 달 후에 어느 교인이 교회로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책을 읽고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그 교회 어떻게 가야됩니까?’ 그러니까 교회 직원이 어떻게 오라고 교회 직원도 없었어요. 교회 어느 지체가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어요. 그랬더니 이 형제가 전화를 받고 계속 걸어오는데 이상하게 옛날에 자기 다니던 교회로 자기를 인도하더라는 거죠. 그리고 와보니까 자기가 다니다가 교회가 망해서 문 닫고 성도들이 흩어졌던 바로 그 교회로 자기를 인도한 거예요. 그 교회당에서 두 번 교회가 세워졌지만 모두 문 닫고, 교회가 딴 데로 가거나 흩어져 버린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수리를 해서 들어갔더니 정말 교회는 예쁘게 되었어요. 수리를 해서. 그러나 빛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카타콤 같은 곳이었고, 정말 놀랍게도 바닥에서 생수가 매주일 쏟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최장 일주일에 4번을 물을 펐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어요. 새벽기도를 갔는데 문을 열고 탁 집으니까 풍덩하고 발이 들어가는 거예요. 물에 빠진 거예요. 발목까지. 그러면 당연히 빨리 전기 두꺼비 집을 내리고 물부터 퍼야 되잖아요. 그런데 신앙이 투철해서인지 무슨 소리냐고 우리가 물 조금 찼다고 예배 못 드리냐고 그리고 모두 그 물에다가 발을 잠그고 그 긴 새벽 예배 설교를 다 들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물이 콘센트까지 차 올라온 거예요. 그때 만약에 감전 되었으면 신문에 나고 우리 모두 순교했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어요. 그렇게 교회를 세웠어요.
맨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이 나 교수잖아. 내가 얼마나 바쁜데?’ 일주일에 24시간을 강의를 했어요. 그러니까 전도사 한 사람 써서 새벽기도 하라고 그러고 나는 쉬엄쉬엄해야지. 근데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은 한번 실험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다녔어요. 새벽에 일어나면 새벽기도 갈 때 계속 운동화 끈을 매면서 헛구역질이 나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되나. 그런데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라는 기쁨 속에서 멀리 갔다가도 그 골목만 들어와서 파란 열린 교회라는 그 조그만 간판만 보면 눈물이 확 쏟아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때 지하실 교회에 그렇게 전설처럼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부어 주셨다면서요.’ 그렇게 물어보는데 그래서 ‘그때는 목사님 설교도 달랐다면서요.’ 그러는데 사실 그 말에 모두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너무 불리해지는 거죠.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한다고 말해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미숙했고, 물론 열정은 있었지만 지금보다 설교도 훨씬 못했고, 그리고 눈치도 없어서 주일날 11시에 시작한 예배가 2시에 마치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설교를 하는데 지금도 그때 테이프 들어보면 악을 쓰면서 시작을 해서 소리를 지르면서 끝납니다. 그리고 당시는 성도들이 그때 마음속으로 불러야 할 찬송은 ‘당신은 혼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교인들을 책망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은혜가 넘쳤던 이유는 뭐냐 하면 그 성도들은 지금 열린 교회를 찾는 성도들보다는 훨씬 절박했어요. 그래서 죽어버리든지, 예수를 믿어버리든지 이 교회에서 둘 중의 하나를 해야 된다 그러고 교회를 찾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또 그래요. ‘목사님 그때 그 좋은 성도들하고 목회하던 시절이 그립죠?’ 안 그립습니다. 좋은 성도들 아니었습니다. 한이 많고 고통을 많이 받아서 인생 갈 데까지 간 사람들이 그 사람들만 열린 교회를 찾아왔어요. 자, 뭐 큰 교회도 아니고 유명한 교회도 아니고 지하실 교회에 내려가고 예배는 시작은 하는 시간은 알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근데 누가 그거를 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 죽느니 여기라도 한번 가보자 하는 사람만, 말기 암 환자 같은 사람만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보면 진짜 높은 사회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돈 많은 사람도 많이 옵니다. 근데 모두 옛날에 그랬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제일 부자였습니다. 내가. 그래서 전도사님들이 항상 입에 올랐어요. 목사님이 부자잖아요. 밥 먹을 때도 언제나 나보고 내라고 하고 그랬습니다. 근데 확실한 거 하나는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데 좋은 성도들이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예수를 믿는데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런 어눌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7명이 12월 둘째 주에 시작했는데 1월 30일에 3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럼 모든 은혜의 역사를 회고해 볼 때에 후회도 많습니다. 정말 더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감사도 많습니다. 정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무엇인데 이렇게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몸을 이루게 하시고 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성도들을 만나게 하셨을까? 수요일에 8시에 예배를 시작하면 빨리 마쳐야 10시입니다. 그러면 빨리 성도들이 가야지만 문을 잠그고 나도 가서 자고 새벽기도를 나올 텐데 안가요. 10시에 끝나면 뭐 그렇게 할 얘기들이 많은지 성도들이 붙들고 뭐 이야기하고 웃고 그 다음에는 또 손잡고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내가 ‘이제 나도 좀 자자. 가자. 새벽에 내가 여기에 와서 문 열어야 되는데 다 빨리 가라.’ 등을 떠밀면 현관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얘기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큰 교회 부럽지 않았고, 그리고 고관대작의 지위를 가진 성도들이 모인 교회를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 작은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교회에 휴지 놓는 전통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휴지를 가져오지 않고 예배당에 들어왔다 봉변을 당하는 자매들이 하도 많아서 눈물만 곱게 나오면 좋은데 품위 없게 코까지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 없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휴지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근데 나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 긴 세월동안 우리의 나태함, 불 충성, 그리고 나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결점들을 감추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19년 동안을 이어오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개척 예배드린 것은 19년 전이고 개척 예배를 드린 지 1년 후에 창립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18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서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난 구원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그런 사람들만 들어왔고,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들은 우리의 손에 이끌려 예배당에 와서 주님을 만나고 새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렬하게 복음을 전하면서 헌신적으로 목회했고, 목회자들은 일주일씩 휴가를 주었는데 개척한 후 7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7일의 휴가를 쓰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신념을 다해서 목회했고, 우리 모두는 월요일 날 휴무를 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믿었습니다.
B. 고생하며 기진하는 무리들
이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같이 마른 뼈만도 못한 그런 막대기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아니 흉악하기 짝이 없는 죄인들, 불충하기 짝이 없는 불쌍한 인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어 오늘에까지 이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뜻은 그대로 서 있습니다. 교인은 30명모이던 시절에서 200명, 200명에서 500명, 500명에서 천명, 천명에서 2000명, 2000명에서 3000명, 3000명에서 3200명, 4000명, 5000명 교인이 늘어나도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세우게 하셨던 원래의 그 찢어지는 예수의 마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당신 생명 주셔서라도 구원하고 싶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고생하며 기진하는 많은 무리들이 있고, 그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기진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배후에 있는 영적인 세력들, 죄의 능력이 그들을 그렇게 고생시키고 기진하며 지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에 나오는 이 고생하고 기진하는 무리들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수동 분사로 나오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고생하고 영적인 세력들에게 짓눌리면서 기진한 이 무리들을 궁극적으로 그 모든 문제의 근원에서 건져내 주시도록 하나님이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불러내라고 이끌어서 그들도 당신의 우리 안에 있어서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다른 삶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그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세상에 아무리 물질문명을 풍부하게 구가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인생의 문제는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과 사랑에 있기 때문에 이 생명의 역사 없이는 인간의 불행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에 목숨을 걸고 오직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현실적으로 우리를 이 모든 인간의 비참함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고 확신하면서 이제까지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는 이틀 전 신문 구석에 난 작은 기사 하나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올해 30세가 된 어느 젊은 여성의 이야기였습니다. 지방에서 대학을 나오고 부모님께로부터 독립하여 직장생활을 하려고 도시에 온 이 청년은 몇 번 취직하기를 위해 애썼으나 좌절되었고, 임시직으로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아마도 우울증 같은 것에 걸리게 되었고, 그리고 그가 어느 날 죽은 시체로 자기의 집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5~6월 쯤 되었을 때 연락이 하도 없는 딸이 궁금해서 부모님들이 그 집을 찾아왔을 때는 문이 굳게 잠겨 있었고, 외출을 했나보다 라고 다시 시골로 돌아갔답니다. 그러다가 다시 여러 달 흐르고 나서 부모님의 꿈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 꿈이 연속되기에 딸네 집에 찾아와 보니 여전히 문이 잠겨 있어서 열쇠 수리공을 불러다가 문을 따고 들어가 보니까 딸은 깨끗이 정리된 방에서 빈 맥주 깡통 두 개를 나란히 옆에 놓고 노트북을 켜 놓은 채로 그대로 죽었습니다. 마지막 인터넷에 접속한 것이 작년 11월 23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는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는 그런 상태에서 홀로 외롭게 지내다가 죽었는데 이것을 정신과 의사들은 고독사라고 부른답니다. 그 언제 죽었는지 시신은 부패했고, 얼굴은 삐쩍 말라서 미라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30대의 젊은 여성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건너가 따뜻한 말 한 마디만 건네주었다면, 그 어두움에서 그를 이끌어 내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면, 너처럼 실패한 사람도 너는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그리고 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사람이고, 네 인생은 꽃처럼 향기 나는 인생은 아니어도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란다. 라고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더라면 그렇게 고독한 가운데 죽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살아 있지만 사실은 이미 정신과 영혼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의 마음에 부어졌다면 이 풍성한 삶의 은혜가 그들에게 알려졌다면 그들은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의 품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불러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몸의 일부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지정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아름다운 몸을 이루며 이 목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우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되었으면 이 목양의 질서에 순종하고 여기에서 목양을 받으면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 온전한 예수의 몸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일평생 교회에 다녔는데 그 교회에 병균과 같은 역할을 하고 그리고 신체에 결핍이 있는 부분으로서만 살았다면 어찌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드러낼 은혜의 풍성함에 참여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교회를 세우게 하신 원리를 기억하면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기까지 그의 몸을 이루면서 우리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풍성함을 인류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어 오고 오는 세대에게 증거하여 그들도 우리 같이 하나님의 생명 아래에서 진리를 붙들고 사는 삶이 되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해가 저무는 이때에 간곡하게 권합니다. 절대로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인간으로서 너무 수치스러운 것이고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여러분이 무위도식했던 날들을 뼈저리게 후회할 순간들이 다가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붙여주신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고 우리의 가족들을 뜨겁게 긍휼히 여기면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에게 이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진하며 고생하고 있는 불쌍한 많은 인간들에게 이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전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된 생명의 은혜 속으로 돌아오도록 온 마음을 다하여 섬기고 또 섬겨 주님과 함께 못 박히신 거룩한 구속의 뜻을 온전하게 성취하고야 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예수와 함께 못박힘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