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하나 됨
(201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4년 4월 23일
목 차
십자가와 하나 됨 1 (2014.04.14.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2 (2014.04.15.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3 (2014.04.16. 새벽 십자가사경회)
1. 아버지와 아들처럼(요 17:11) 2014.4.14 새벽 십자가사경회 1
십자가와 하나 됨 4 (2014.04.17. 새벽 십자가사경회)
2. 삼위일체의 사랑의 모상(요 18:20-21) 2014.4.15 새벽 십자가사경회 7
3.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 됨(요 17:23) 2014.4.16 새벽 십자가사경회 13
4.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요 17:24) 2014.4.17 새벽 십자가사경회 17
5. 사랑으로 함께 하심(요 17:26) 2014.4.18 새벽 십자가사경회 23
십자가와 하나 됨 6
십자가와 하나 됨 1 (2014.04.14.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2 (2014.04.15.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3 (2014.04.16.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4 (2014.04.17.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5 (2014.04.18.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됨 (1) 2014. 04.14 고난주간새벽사경회
< 아버지와 아들처럼>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11)
I. 본문해설
- 공관복음서: 게세마네의 기도
- 요한복음: 대제사장의 기도내용
- 기도핵심: es영광 + 보호 + ef영광
- 제자들의 하나됨을 구하심
II. 하나됨을 구하신 이유
A. 십자가를 앞 두시고
-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11)
- 세상에 홀로 남겨지는 제자들
- 12사도 아닌 우주적 교회를 바라심
- 두가지 간구: 신적보호 + 하나됨
B. 그 사랑을 보여 주려고
-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23)
- 하나됨과 사랑:
a. 삼위일체 안에서 (5) = 창세전의 영화
b. 그리스도안에서 (23) = 성도들의 사랑
III. 하나됨과 신적 보전
- "그들을 보전하사.. 하나되게"
- tereson => tereo: 감시, 보존하다
- 보전과 지킴: 보호 + 사랑 안에 행함
- 끊임없이 사랑 속에 삶: 신적 도움
- 까리따스 없는 하나됨: 거침 + 독선
IV. 적용과 결론
- 하나됨 자원: 삼위일체 안에 있음
-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심 같이
십자가와 하나됨 (2) 2014. 04.15 고난주간새벽사경회
<삼위일체 사랑의 모성>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요 17:20~21)
I. 본문해설
- 예수님의 기도: 제자 + 미래신자들
-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선교적 확장
- 예수님의 선교 => 사랑의 확장
II. 성자와 성부의 연합
- “내 안에.. 아버지 안에..”
- 위격들간의 완전한 사랑(신적본질 안에서의 사랑)
- “∼안에” => 완전한 연합을 보여줌
III. 교회를 통해 보이심
A.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심
B. 신자들을 하나되게 하심으로
- “하나” => 사랑의 관계임을 보여줌
- 서로 다른 타자성이 존중 되어야 함
- 하나님 때문에 동일한 사랑이 생김
C. 신자의 사랑이 세상 믿음의 원인됨
IV. 적용과 결론
- 진정한 의미의 선교적인 삶
- 사랑으로 믿음의 진정성을 보여줌
- 십자가를 앞둔 유언과 같은 기도임
- 사랑 어려울때마다 십가가 생각함
십자가와 하나됨 (3) 2014. 04.16 고난주간새벽사경회
<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 됨 >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 (요 17:23)
I. 본문해설
-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의 하나됨
-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신 모본
- 사람들을 온전히 사랑하신 모본
II.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 됨
- 온전함: 온전한 지식+온전한 사랑
- 그 진리에 합치+그 사랑에 합치함
- 온전함: 같은 진리와 사랑을 가짐
-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된 일치임
-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포와 섬김을 뒤이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게 함이 교회의 존재의 목적임
III. 진리전파의 방식
-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으로 하나 됨
- 진리: 인격, 생활과 온전히 하나 됨
-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구원의 복음
a.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심
b.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심
IV. 적용과 결론
- 교회의 힘: 사상+윤리(은혜로써)
- 교만을 버림: 부족한 지식과 윤리
- 성령의 은혜를 구함: 지식과 사랑의 유효한 원천이기 때문 임
-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만 나오는 것은 그 하나된 사랑이 곧 성령이기에
- 성령의 은혜를 간구하여야 할 이유
십자가와 하나됨 (4) 2014. 04.17 고난주간새벽사경회
<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 >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요 17:24)
I. 본문해설
- 잠시 후 헤어질 제자들에 대한 소원
- 신앙이 약해서 실망 속에 잠든 자들
- 그들을 향해서 소원을 가지고 계심
- 이는 그렇게 되도록 돕겠다는 의미
II. 고난을 앞두고 품은 소원
A. 당신과 함께 있게 함
- 우리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임
- 1차적으로 제자들에게: 함께하심
- 2차적으로 우리들에게: 함께하심
- 신자 안에 성령을 주심도 이를 위함
- 당신과의 불변적 연합과 사랑 위함
B. 당신의 영광 보게함
-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영광임
- 창세전 삼위일체 안에서의 영광임
- 성부가 성자를 사랑함으로써 주심
- 성자가 성부로부터 사랑을 받음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일치 이루길 원하심⇒영광을 봄
- 하나님 영광: 예수 안에서 나타남
III. 교회의 일치와 영광을 봄
- 이스라엘의 일치: 영광 함께 경험
- 영광=거룩함
a. 그리스도의 초월성
b. 그리스도의 완전성⇒신적영광
- 영광의 경험: 거룩함 갈망
- 겸비함
- 교만과 분열: 거룩한 사랑의 결핍
- 같은 영광을 경험하고 일치를 이룸
- 일상적 경건과 특별한 부흥 갈망함
IV. 적용과 결론
-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의 관계를 봄
- 그런 사랑이 자신과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실현되기를 갈망하며 삶
십자가와 하나됨 (5) 2014. 04. 18 고난주간새벽사경회
< 사랑으로 함께하심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6)
I. 본문해설
- 대제사장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
- 아버지의 사랑의 확장을 기도함
II. 하나님을 가르치심
A. “아버지의 이름”
- 이름과 실체의 일치: 첫 번째 기도
- 이름: 하나님 자신+하나님의 영광
B. 그 이름을 알게 하심
- "알다"의 의미: 경험함으로써 앎
- 당신이 아신 것처럼 알기를 원하심
III. 서로 사랑하게 하심
A.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 성자에 대한 사랑이 교회에 부어짐
- 교회에 대한 사랑을 성자가 받으심
- 성도는 지체로서 그 사랑으로 연합
B. 그리스도께서 함께함으로
-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이 곧 하나가 된다
-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을 알게 하심
- 그 사랑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심
IV. 적용과 결론
- 우리는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자임
- 모든 신적 사랑이 그리스도의 덕임
-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체들이 있음
- 성령충만, 곧 예수충만+사랑충만
십자가와 하나 됨 6
십자가와 하나 됨 1 (2014.04.14.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2 (2014.04.15.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3 (2014.04.16.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4 (2014.04.17.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5 (2014.04.18.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6
십자가와 하나 됨 1 (2014.04.14.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2 (2014.04.15.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3 (2014.04.16.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4 (2014.04.17. 새벽 십자가사경회)
십자가와 하나 됨 5 (2014.04.18. 새벽 십자가사경회)
아버지와 아들처럼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녹취자: 김세나
I. 본문해설
요한복음 17장은 ‘대제사장의 기도’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고 합니다. 같은 내용의 기사들을 각각 다른 사람들이 기록을 하였다고 하여 공관복음이라 합니다. 여기에서는 한결같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광경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목적이 조금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의 일어난 일들을 시간적으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편집을 해서 유대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하고 싶었던 책입니다. 공관복음서는 겟세마네 기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거기에서 드렸던 기도의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셨던 기도의 내용이라 봅니다.
길게 이어지는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만세전에 있었던 당신과 함께 가졌던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을 찬송하고, 거기에 기초하여 당신이 남겨두고 간 제자들, 나아가서는 이후에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보호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탄원하고, 마지막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데 바로 그 세상에서 당신의 제자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효과적인 영광이 나타나도록 세 가지 핵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 기도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던 위대한 영광이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으로 이 세상에서 충만히 나타나기 위하여 제자들의 하나 됨을 간절히 구하고 계십니다.
Ⅱ. 하나 됨을 구하는 이유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 됨을 구하신 이유가 나오는데, 시기적으로 십자가를 앞둔 때였습니다.
A. 십자가를 앞두고
11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니.” 시시각각 다가오는 당신의 고난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가고 나면 세상에 제자들만 홀로 남겨 지는데, 그 제자들을 위해 비는 것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는 간절한 마지막 기도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 제자들을 위해 비는 기도, 제자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비는 기도,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맨 처음에 올리셨던 기도, “나라에 임하옵시며” 그 앞에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라고 하는 기도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1부에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2부에서 이제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를 쭉 드립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남겨진 제자들을 위해 빌었는데, 이 남겨진 제자들은 12사도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이후에 이루어지게 될 역사 속의 모든 하나인 우주적 교회를 바라보시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사 우리의 모든 구속을 완성하셨지만, 지금도 하늘에서 끝나지 않은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비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드셔서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보전되고 지금은 가장 연약해 보이는 신자들이라도 결국 주기도문의 삶을 언젠가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B. 그 사랑을 보여 주려고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의 하나 됨을 구하신 유언과 같은 기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 보여주시려고 하는 계획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23절에서 말하기를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심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보면 제자들이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으면 시기심을 내기도 하고 때로는 언쟁을 하면서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모두가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실 때 아직 우리 눈에는 크고 완전한 교회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작은 겨자씨만한 크기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는 당신을 통해서 사람들이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될 것인가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중요하였지 제자들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 은혜를 받고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알고 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죽고 부활 승천하시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 때에는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 당신 자신을 사람들이 알게 되고 믿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즉, 예수님 전에는 예수님을 통해 교회를 사람들이 바라보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후 승천 후에는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 보여 줘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이들을 많이 사랑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 하나 됨은 두 가지 방면에서의 하나 됨입니다. 같은 것을 믿고 아는 지식의 하나 됨입니다. 똑같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이단으로 여기고 상종도 하지 않고 혹은 핍박을 하는 일들이 언제든지 있었기 때문에 이 하나 됨의 첫째는 지식에 있어서 하나 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앎에 있어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에 있어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모인 교회를 통하는 것 밖에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었는데 모여 있는 그 사람들이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정말 예수님께서 만드시려고 하였던 교회가, 혹은 세계가 이러한 것이구나 깨닫고 감동을 받아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지만, 만약 분쟁하고 찢어지고 나누어지는 일들이 계속되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계속 불행해 지게 된다면 그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 되는 것과 사랑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는 무엇이겠습니까?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었기 때문에 당신이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할지라도 여전히 본질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삼위일체 안에서 나눴던 사랑의 하나 된 교제를 당신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여기 사시다가 지금 죽으시는 이때에도 계속 하나님과의 삼위일체 안에서의 사랑이 지속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 됨과 사랑이 얼마나 밀접한지 23절에서도 보여주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아버지가 계셔서 온전해진 것처럼 당신이 그들 안에 계셔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어 세상을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성도들이 예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이러한 사랑의 하나 됨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구나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이제 이 하나 됨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저는 그러한 이야기를 말씀 드렸습니다만 우리의 가르치는 내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내용과 일치를 이룰 때 가장 뚜렷한 선교적인 효과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믿고 예배 시간마다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온전히 서로 사랑하는 삶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지 여기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고 해서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새사람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갈등들이 다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식으로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직전에 아버지께 간절히 비셨던 그 기도의 내용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줍니다. 당신은 떠나가지만 우리들은 여기에 남아서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바대로 믿고 당신이 살아계셨더라면 사셨던 그 삶을 뒤이어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부르신 것입니다.
Ⅲ. 하나 됨과 신적 보전
그러면서 하나 됨과 신적 보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1절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나옵니다. “우리와 같이” 이것은 삼위일체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나아가 성령과 함께 누리는 그 사랑의 교통을 의미합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성령과 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완전한 아름다움에 기초하여 서로를 완전히 사랑하시고 그 삼위일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투영되어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본받으며 간절히 원하신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실제로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그들을 보전해 달라고 비셨습니다. ‘테레손’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감시’ 혹은 ‘보전’, ‘경계하다’ 잘못하면 즉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경비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보전하고 지키는데 무엇을 보전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변화되어 그래서 이제는 세상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들, 예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서 그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되었는데 그러한 상태에서 변하지 말고 그것들을 모두 보전하게 해달라는 기도이고, 포악하고 악한 무리들에 의해서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달라는 기도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 승천하셨을 때에 아마 남은 그리스도인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12명은 넘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고 돌아가신 후에 예루살렘에 모여 예수님의 본분을 따라 기도하던 사람이 120여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승천할 때에 500여 형제는 어디에서 왔는가 알 수 없지만 그 사람들이 결국 마지막에 오순절까지 기도할 때 120여명 정도였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 한 칼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숫자였지만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우리 주님의 간절한 기도 속에 보호를 받으며 아주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었고, 또한 종자 씨들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핍박으로부터 목숨을 지켜달라고 하는 그것만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들을 지켜달라는 기도가 포함된 것입니다. 끝없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하나님을 믿었지만 이제는 이 부족한 제자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과 나라들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이도 하나 되기를 노력합니다.
(예화) 요새 새해가 접어들면서 대기업 신입 직원들을 모집해서 훈련하는 과정에 아주 극기 훈련 같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남녀 모두 제복을 입히고 모자를 씌워서 엄청나게 높은 산을 오르게 한다든지, 야간에 10시간 산에서 행군을 한답니다. 곱게 앉아서 글이나 쓰거나 TV나 보고 차나 마시던 어린 자매들,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말도 안 되는 힘든 훈련입니다. 여러분에게 밤에 10시간 행군을 하라고 하면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엎드려뻗쳐도 시키면서 자기네 회사의 정신을 넣어준다고 하는데 그러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미개함을 보게 됩니다. 회사라고 하는 것이 일하겠다고 하는 사람과 쓰겠다고 하는 사람의 이익이 맞아서 일하는 것인데 그것을 군대처럼 뺑뺑이를 돌리고 고달프게 해서 정신을 집어넣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정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생활비를 넉넉히 주고 어려운 것을 보살피면서 직원들이 ‘내가 어디에 가서 이러한 보살핌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이 회사에 대해 긍지를 느끼고 이렇게 하면서 회사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야지, 가서 발에 모래주머니 차고 10시간씩 산을 기어오르게 해서 그것이 무슨 자기네 회사 정신인 것처럼 하는 것은 전부다 군대문화의 유산입니다. 그러한 식의 하나 됨은 항상 그 안에 자기네 회사 밖에 없다는 거친 독선이 깔려 있어서 더 많은 갈등을 야기 시킵니다. 이 회사에서 힘들었다고 하면 그 다음 회사는 우리는 더 좋은 회사라고 하는 것을 조금 더 힘들게 훈련해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계속적으로 경쟁을 합니다. 어느 회사에서는 일주일씩 숙박을 하면서 300km 행군을 했다고 합니다. 그 시간에 글자라도 더 배워서 일을 잘 할 생각을 해야지, 군대처럼 그렇게 해서 결국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그러한 식의 문화는 창의성 같은 것을 다 짓밟아 버립니다. 계급이 중요하다고 만드는데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전해 주셔야 할 것은 그러한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악으로부터 제자들을 보호해 주실 뿐 아니라 항상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남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기 위해서 하나님의 매일 매일 도우시는 진리의 말씀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감사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 안에서 보전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Ⅳ. 결론과 적용
아버지와 아들이 하늘에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었습니까? 그 충만한 사랑과 아름다운 교제가 이제 주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였으니 그 교제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제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삼위일체 안에서 나눴던 그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를, 비록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함께 하나 되어 나누고 사랑하고 누림으로써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면, 그러한 사랑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용서하기에 너무 버거운 다른 사람들의 죄, 그리고 함께 하나 되기에 너무나 어려운 난관 같은 것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기 위해 당신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고 끊어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까지 스스로 자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러한 속에서 끊임없이 지체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이 십자가의 정신으로 용서하지 못하였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영광을 나타낼 만한 교회가 되도록 여러분이 이바지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의 모상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인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녹취자: 김세나
I. 본문해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에서 올리신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는 대제사장으로 예수님께서 두고 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여기는 예수님이 지금 데리고 계신 제자들과 미래에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보편 교회의 모든 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포함됩니다. 결국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 기도는 선교적인 확장을 통해 미래에 이루어질 보편 교회 모두를 바라보고 올리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선교는 곧 하나님 사랑의 확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에서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고 결국 그의 책 『신국론』에서 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곧 사랑의 나라의 완성이었습니다.
Ⅱ. 성자와 성부의 연합
예수님께서는 먼저 성자인 자신과 성부의 연합을 먼저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만드시려고 하였던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위격들 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기고 나서 비로소 사랑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아무 피조물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셨고 그래서 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 위격의 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사랑받으시고 또한 서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창조의 이 모든 세계는 이처럼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서로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되신 것처럼 그 사랑과 함께 생명이 넘쳤던 것처럼 이 모든 세계는 그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생명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의 세계는 비록 하나님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만물들이 서로 상호연관을 이루어서 그 속에서 모든 만물들이 하나의 그물망처럼 교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화) 1900년대 최초로 환경운동에 눈을 떴던 선각자 가운데 레이첼 카슨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어린 시절 DDT를 뿌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가 많으니까 학교에서 아이들을 줄 세워놓고 몸과 머리에 하얀 가루를 뿌렸던 기억 말입니다. 레이첼 카슨은 이 살충제를 사용하면 인류에게 어떠한 재앙이 오는지 밝혀내고 그것을 모든 세계에 전파하고 특별히 존.F.케네디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여 새로운 환경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에 의하면 곤충을 DDT가 죽이고 나니까 그 곤충을 죽이는데 모든 곤충이 죽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DDT에 내성이 생긴 곤충이 살아남습니다. 그 곤충을 새가 잡아먹습니다. 새의 몸속에 DDT가 축적되면서 이 새가 불임이 됩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알을 낳아도 그 알이 부화될 수 없는 알을 수없이 까는 것입니다. 결국 그 새들이 멸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하나만 관찰하였지만 그 살충제가 인체에 주는 해, 그것들이 식물 혹은 곤충에 주는 해 뿐 아니라 그것들과 먹이사슬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커다란 해가 되는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호주 같은 나라를 보면 절대로 파리나 모리를 죽이지 않습니다. 불편한대도 모기장을 치고 여름을 지납니다. 그 이유는 그 모기와 파리도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존재할 것이고 하나를 죽이면 자연의 질서들이 깨지면서 재앙이 온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연의 모든 세계가 하나로 연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세상에는 더 놀라운 비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랑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위격들 간의 완전한 사랑과 연합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짐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세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한 사람 아담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후 그들로 하여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게 하신 것은 남녀 간의 사랑 그것만을 의미함이 아니라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 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들이 바로 이러한 사랑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이 모든 상호연관들이 깨지게 되었고 인간은 극도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모든 만물위에 자기를 높여 자기를 중심으로 이 모든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치열한 자원의 다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자원을 많이 모은 사람은 그것을 크게 실현하고 없는 사람은 그것을 작게 실현하고 어떤 사람은 거의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 그러한 의도를 품은 채 살아가기 때문에 수많은 미움과 다툼,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탐욕들이 이 세상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랑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예화) 오늘날 매일 신문 지상을 뒤덮는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는 끔찍한 이야기들은 너무 비참합니다. 한 아버지는 28개월 된 아이를 두고 부인은 이제 이혼을 했는지 별거 상태가 되었는데 28개월 된 아이를 방에 혼자 두고 문을 잠그고 자신은 PC방을 전전하다가 그 아이는 죽었습니다. 죽은 아이를 비닐봉지에 넣어서 쓰레기통에 넣었고 그것이 결국 발각되어서 구속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여러분이 길러내고 있는 자녀들이 그러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하였던 세상과 얼마나 다른 세상이 되었는가 보여줍니다. 그러한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자신의 망가진 인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지 않고 이 세상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말하자면 그 모든 불행과 사랑의 조화가 깨뜨려진 것이 자신의 불행의 원인이라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복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일방적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면서 치유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 단어가 그렇게 싫을 수 없습니다. ‘치유’라는 단어는 인간을 아주 격하시키는 단어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피동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성도 있습니다. 인간이 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습니다. 겪으면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심지어 신체에 어떠한 영향을 남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강조하면 인간이 너무나도 무기력한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참된 인간됨은 그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다 끓어 안고 극복하면서 살아가는데 대부분 인간성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깊이 끓어 안고 자기를 불행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원인들을 행복으로 바꾸고 갈등과 미움의 요소들을 받아들여서 사랑과 화해로 고치고, 이렇게 살아가면서 자신을 완성하는 데에 인간성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동물들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수동성을 아주 극대화해서 인간이 무슨 아주 바보같이 멍하니 있어서 그저 두부처럼 된 인간이 가만히 있어서 이 사람도 와서 파가고 저 사람도 와서 건들고 지나가고 하는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치유’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치유 없습니다.
(예화) 늘 말씀 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로이 클레넨스라고 하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천 명이 넘는 교회를 목회하였습니다. 영국에서 천 명이 넘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함께 도망한 것입니다. 그 정부는 남자였습니다. 영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책도 여러 권 쓰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유서처럼 편지를 하나 남겨두고 사라졌는데, “내 인생에 커다란 두 가지 실수가 있었다. 첫째는 목사가 된 것이고, 둘째는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남자 애인과 함께 증발한 것입니다. 그는 원래 대학 때 게이였습니다. 캠퍼스에서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서 복음을 위해 열렬하게 살았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니까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사람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불신자인 게이와 도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다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원래 술주정뱅이가 아니었습니다. 술주정뱅이였던 사람이 돌이켜 온전한 사람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한 번도 술주정뱅이가 되지 않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치유’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불신자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나도 자존심 상하는 단어입니다. 그것들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깨지니까 인간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심지어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라깡이라는 심리학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알쏭달쏭한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참된 ‘나’라는 존재가 어딘가에 존재하는데, 그런데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는 참된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선가 생각하고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순에 가득 찬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자고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갖고 세계와 온전한 관계를 가질 때 참 자기 자신을 온전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은 참된 자신을 찾는 길이고 그래서 기독교야말로 최고의 휴머니즘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진정으로 함께 서로 사랑하며 그렇게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이 만들고 싶어 하셨던 세계였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두 파괴되고 망가졌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셨던 사랑의 세계를 먼저 교회를 통해 보이셨습니다.
Ⅲ. 교회를 통해 보이심
A.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심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인류 사회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지 당신 자신으로 시범으로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데, 그 아들은 신적인 본질의 측면에서 보면 곧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랑이 사랑으로 받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생명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왔던 것처럼 그 참된 사랑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살도록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B. 신자들을 하나 되게 하심으로
그 이후에 하나님은 이제 아직까지 사람들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채 갈등하고 고통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세상에서 신자들을 하나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는 사랑의 관계임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그 사람됨을 훼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죄와 상관없는 그 사람의 개별성,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저런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품 속에서 죄의 요소들은 모두 빼 버리시기를 아주 집요하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자연적이고 천부적인 성품들은 계속 유지되기를 원하십니다. 음악에 소질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그 소질을 미워하고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신중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성격적으로 그렇게 무엇인가 질질 끌지 않고 속히 결정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논리적이고, 어떤 사람은 창의성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성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존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타자성이 존중되어야 하고, 다만 하나님 때문에 동일한 사랑을 갖게 됩니다.
C. 신자의 사랑이 세상의 믿음의 원인 됨
그런데 오늘 그렇게 하나님이 하심으로써 이 교회가 미래에 이루어질 인류 사회에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맛보기를 보여주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 신자의 사랑이 세상 사람들이 믿음을 받는 원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가 형성될 때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그 안에 있는 참 행복, 그들이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Ⅳ. 결론과 적용
진정한 의미의 선교적인 삶은 이처럼 그 사람이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으로서 그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교입니다. 자식들이 일평생 말 안 듣고 부모 속을 썩여도 부모가 마지막에 눈을 감으면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는 유언은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 자식 된 마음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앞둔 유언과 같은 기도가 바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결국 자신을 끊임없이 죽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자신보다 훨씬 사랑할 때에는 그 일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고 있을 때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고 죄에 물든 인간의 본성의 자연스러움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랑이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이 위에서 주먹을 쥐고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그렇게 사랑해 주셨고 거듭난 우리 안에 그 사랑이 이미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즘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우리가 자기를 꺾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최고의 수혜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사랑함으로 마음에 자유를 얻게 되고 마음의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을 우러러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어려울 때마다 예수님이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생각하고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럽고 어려워도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생명의 구원을 주시기 위해 지신 십자가에 비하면 매우 가벼운 멍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언제나 주님이 사랑하기를 기뻐하시는 모든 사람을 마음에 품고 그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려고 하는 그러한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인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모상이고 그 모앙이 또한 이 사회 속에서 실현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누구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매일 끊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만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 능력의 자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구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주옵소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는 ‘만약에 은혜를 주신다면 나는 사랑으로 하나 된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서약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많이 받고 여러분의 삶이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모상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 됨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3)
녹취자: 김세나
I. 본문해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리신 대제사장의 기도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과 하나님의 하나 되심에 대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모본을 보이셨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신 모본이었고,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을 온전히 사랑하신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신 모본이 참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이라면 사람들을 온전히 사랑하신 모본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참 사람이고 참 하나님이신 그 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참 사랑을 보여주신 동시에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될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Ⅱ.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 됨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의 온전함과 하나 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려 함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하나 되신 것처럼 당신이 구원하신 제자들과 이후에 이루어질 모든 교회의 신자들이 이렇게 온전함으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온전함’은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사랑으로 모든 성도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들이 또한 온전한 교회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온전함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일치만이 아닌 내적인 일치를 이루는 것인데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좋은 지체가 될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의 모임과 함께 아주 좋은 한 지체를 이루며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함’입니다. 그 온전함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입니다.
그 온전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셨던 그 진리에 합치하는 것이고, 또한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사랑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자기를 합치하고 그 사랑의 모본을 따라서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살 때 온전한 사람으로서 같은 진리와 사랑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일치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에 자기를 일치시키고 그 사랑에 자기를 일치시킴으로서 다른 모든 사람도 그렇게 하게 하여 사람은 여럿이지만 사랑은 하나이고, 인간으로서 각자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성격은 고유하고 다르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에 일치를 이룸으로써 하나가 되게 하신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온전함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선포와 섬김을 뒤따라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셨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에게 그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가르치시고 사랑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따라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이 일을 교회가 잘 하면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될 것이고, 이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그것은 교회가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Ⅲ. 진리 전파의 방식
그러면 이렇게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진리 전파의 방식은 어떠한 것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심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이 진리와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어 주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기를 구세주로 보내신 것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이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제자들과 교회가 온전한 일치를 이루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보여주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이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그러한 삶은 바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삶이고, 그렇게 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온전한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진리, 인격, 생활이 온전히 하나가 되어 그 진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은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은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방식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를 알고 그 사랑을 알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매인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구원의 복음은 전파됩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시절에는 그리스도 바깥에서 행복해지려는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그 행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구원의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파해야 할 구원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복음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먼저 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에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이러한 진리와 사랑으로서 온전한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나팔이 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Ⅳ. 결론과 적용
교회의 힘은 사상과 윤리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이세상이 무엇인지, 우리 인간이 누구인지 알고 그 지식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 되고 이 사상과 윤리를 묶어주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의 기원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 윤리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윤리이고, 이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할 때 우리는 교만을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한 지식을 깨닫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것은 이 성령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유용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17장에 보면 놀랍게 성부와 성자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다.”라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시다.”는 많이 나옵니다. 성령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이 나오는데 그 성부와 성자를 하나 되게 하신 사랑이 곧 성령이시기 때문에 굳이 성령에 대해 따로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즉,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어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 되었다고 할 때 바로 그 하나 됨과 사랑이 곧 성령이시고, 아버지와 아들을 일치를 이루는 그 사랑 자체가 성령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그 곳에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을 때 곧 우리는 성령을 받은 것이고, 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그 곳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일치가 있고, 우리가 그 성령의 사랑으로서 그 아버지와 아들과의 일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수많은 이기심과 자신들만이 온전하다는 교만으로 찢기고 갈라지고 나뉘고 분열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를 가로막는 매우 부끄러운 추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노력이 분열된 교회와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져 다투고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로 말미암아 그 노력이 상쇄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외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고 우리의 삶의 드러내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과 그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함으로써 하나 됨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모두가 일치를 이루게 하셨고, 그래서 우리는 사랑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 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게으른 신앙생활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의 삶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 속에 교만이 들어오고 쓴 뿌리가 들어와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깨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너무나 선명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생각 없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거룩한 질서의 일치를 이루고 그 안에서 질서의 일치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그 진리를 알고 그 사랑을 알아서 온전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삶이 되게 해달라고 애씀으로써 그들이 온전한 일치를 이루며 살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사랑 안에서 온전한 일치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녹취자: 김세나
I. 본문해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올리신 기도입니다. 잠시 후면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이고 제자들과 헤어지게 되는데 그 헤어질 제자들에 대한 소원을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던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과 떨어진 곳에서 그들이 기도하도록 부탁하였으나 그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예수님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실망과 예수님이 잠시 후 자신들을 떠나실 지도 모르신다는 약한 신앙심 속에서 그들은 잠들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을 향해 소원을 가지고 계셨으니, 그것은 바로 이 소원대로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우시겠다는 의미였습니다.
Ⅱ. 고난을 앞두고 품은 소원
그러면 당신의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품으신 예수님의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두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함이었고 두 번째는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A. 당신과 함께 있게 함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 제일 먼저 당신과 함께 있게 하는 것이 당신의 뜻임을 기도 속에서 표명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함께 있어서”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복음서의 언급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동행 하시면서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자격과 그들의 천국 생활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일꾼이 된 것도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함으로 자신의 인격과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본을 보여준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차적으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과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2차적으로는 그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만나지만 제자들을 당신이 부르셔서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셨지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맺어주신 인연이라 믿었고 아버지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하셔서 당신께 보내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게 된 것이라 믿으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이 우연처럼 보이고 우리의 힘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마음을 갖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구원받는 백성으로 불러 주실 것을 예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감화시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니, 우리도 또한 아버지께서 주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는 예수님이 이렇게 당신이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겨두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늘에 오르셨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이 모든 약속과 기대가 실현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지상에 육신을 입고 계셨을 때 우리와 함께 하신 방식과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에 오르신 다음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방식으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도 그러한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면 이 전 세계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 몇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볼 수 있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제자들과 보이는 몸으로서 함께 교제하고 시간과 공간속에, 한 장소 속에 계셨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는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독특한 방식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당신을 믿는 사람 마음속에 성령을 주셔서 그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 살게 하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누구든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하셨으니 오늘 우리들이 영적으로 함께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이 육신으로 함께 하던 제자들과의 예수님의 친밀함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할 때 2천 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인데도 오늘 우리 앞에서 재현된 것보다 더 슬프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과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 마치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우리들이 어린 아이처럼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누구든지 그 성령의 소원대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불변적으로 연합하시고 또 그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산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산다는 것과 동일하니, 이는 성령의 임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는 않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생활을 잘 할 때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이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불변적으로 연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는 것이니 이는 곧 성령이 하나님의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가장 큰 소원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비록 이 지구를 떠나 우주 공간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지만 여러분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그 분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고난을 앞두고 품으셨던 예수님의 소원이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임을 기억하시고 어찌하든지 모든 삶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최선의 보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B.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함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이미 창세전에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그 영광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충만한 사랑으로서 하나가 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의 완전성과 위격 안에서의 아름다움으로 서로에게 사랑을 받으셨고 그러한 사랑으로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셨으니 이 성부가 성자를 사랑할 때 성령도 함께 계셨으나 성부가 성자에게 베푸신 사랑이 곧 성령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자가 성부로부터 사랑을 한량없이 받으심같이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성부, 성자가 일치되신 것처럼 우리가 그 하나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긍휼히 여기기를 성부가 성자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한 성자가 성부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처럼 일체의 연합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 수 없었습니다. 커다란 부흥과 이적이 일어날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과 하나님의 엄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전쟁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하고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실 그 때에는 그 모든 광경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거기 계신 것을 알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영광의 초월적인 특성을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광에 대한 경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게 만들어주었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마음이 녹는 하나님의 사랑까지 전달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게 되었고 말로만 듣던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그리스도 예수와의 관계를 통해서 직접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병자들의 헌 데를 어루만지시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죄 가운데 불행해진 사람들을 용서하고 고쳐 주시는 그 모든 광경을 통해서 그들은 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났는지 보게 되었고 또 참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게 되었는지 동시에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의 사랑과 참 사람의 사랑을 함께 알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우리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제자들은 한 공간 안에 시간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체험하게 되었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 생애에서 사셨던 기록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통해서 성령께서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 이 세상에 계셨지만 오늘 성령의 감화 안에서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셔서 오늘도 우리의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우리가 말씀에 굶주릴 때 그 진리의 떡으로 우리를 먹이시고 그리고 우리가 범죄 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우리는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난 거룩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 영광은 위엄과 권능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를 함께 보여주시기에 사도요한은 말하기를 “우리가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Ⅲ. 교회의 일치와 영광을 봄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영광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경험하고 또 보게 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교회의 일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치와 당신의 영광을 보는 것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여러분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일치를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범죄도 하고 하나님께 배도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치를 이루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였고 그것이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씩 그들의 마음에 커다란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키심으로 그들을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일치하도록 만드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 장소에서 부흥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그때 자신들이 구별된 자신이고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부흥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경험한 것이었으니 이 영광은 곧 하나님의 거룩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난 지존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하시고 또한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사랑의 삶에 있어서 가장 완전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전에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기적과 큰 이적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다면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보게 하셨으니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창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게 될 때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자신도 거룩하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의 초월성 앞에서 겸비해지고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앞에서 자신의 죄를 겸비하게 회개하게 하십니다. 사람들 속에 일어나는 교만과 분열은 거룩한 사랑의 결핍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랑의 결핍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를 통해 체험하는 일들이 없거나 혹은 드물게 일어나거나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교만과 분열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죄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도록 우리에게 명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사람을 향한 사랑과 예수를 향한 사랑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사람들이 생각나게 되었고 사람들을 진실하게 사랑할수록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었습니다. 간절한 소원은 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신처럼 경험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이었고 이것이 우리의 끊임없는 전도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Ⅳ. 적용과 결론
우리가 믿음 생활 할 때 매일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매일 분투하면서 우리의 죄와 싸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상적인 경건은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특별한 부흥을 갈망해야 합니다. 이제껏 만난 하나님과의 만남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랑, 우리와 하나님이 다시 만나는 놀라운 은혜와 탁월한 영광,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바라며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를 원할 때 하나님께서 이러한 특별한 부흥을 주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특별하게 경험함으로 하나님 앞에 탁월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러한 부흥이 우리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온 교회, 그리고 온 나라에, 세계적으로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이 우리의 마음 안에 그리고 우리의 가족들에게, 교회 안에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여 많은 성도들이 동일한 영광을 보게 될 때 그 교회는 더더욱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끊임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그 부흥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대로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은혜 생활을 계속하게 될 때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뿐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관계를 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사랑, 삼위일체의 사랑이 당신과 교회와 모든 성도들 사이에 실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를 부흥을 통해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기를 마치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일치를 이루신 것처럼 그러한 사랑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과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은혜의 부흥이 있도록 빌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함께 하심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녹취자: 김세나
I. 본문해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분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로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 마지막 부분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이 세상에 널리 확장되기를 간구하고 계십니다.
Ⅱ. 하나님을 가르치심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셨습니다.
A. “아버지의 이름”
제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부요한 자들에게나 가난한 자들에게나 병든 자들에게나 건강한 자들에게나 언제나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이름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치셨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도제목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굳이 하나님이라 안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 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존귀히 여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사악한 정치가들을 통해서는 주님의 이름이 모욕 받으셨지만 주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의지하며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그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기도 하고 없이 여김을 받기도 하는 그 분의 이름에 대해 가르치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이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 자신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높여지기도 하고 짓밟히기도 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지만 그 분의 이름의 영광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변하는 빛을 주셨지만 그 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느냐에 따라 찬란해지기도 하고 혹은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실 때 아버지의 이름을 가르치셨고, 또한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또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게 하셨습니다.
B. 그 이름을 알게 하심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가르치심에 있어서 또 한 가지 하신 일은 그 이름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고자 나왔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알다”의 의미는 단순한 지식으로써의 앎이 아니라 삶으로써 그것을 경험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셨던 하나님의 이름을 지식으로 뿐 아니라 깊은 신앙과 경건 속에서 경험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또한 그렇게 알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아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을 아시되 단순한 지식이나 이론으로 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인간 아들이 인간 아버지를 아는 것보다 더욱 친근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아셨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지 못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나누시는 교제를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 살아계심을 알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래전에 주님을 만나고 뜨겁게 믿음 생활 하던 사람들이 차가운 가슴으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고 깨달은 그 놀라운 하나님을 아는 방법에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사물처럼 더듬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서 경험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웃들에게 바로 그러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당신의 이름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가 우리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Ⅲ. 서로 사랑하게 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서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A.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우리에게 본성의 빛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파편적인 사랑이고 찢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해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물론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사랑의 원천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당신이 받았고 그 사랑을 또한 우리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 베풀어 주셔서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머리에 접붙여진 몸으로써 그 신부인 교회에게 베푸신 사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우리가 모두 하나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는 그러한 관계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가르치셨습니다.
성도는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음으로써 성도는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고 교회와 일치를 이루고 그래서 그들 모두 한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우리의 마음을 실어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됨으로 우리가 서로 달라도 우리가 가진 사랑이 같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다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데 사용되게 하시는 것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삶의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그 정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접붙여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는 하나님이 교회를 사랑하시는 증거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모든 지체들과 함께 붙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어주신 그 사랑으로 우리들이 그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랑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덕 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지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고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명백히 그 사람의 허물 때문이기 보다는 우리가 오늘 마음속에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랑이 적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충만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덜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거의 못 느끼기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주관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면 따를수록 그리스도께 더욱 사랑받게 느끼게 하시고 우리가 자기의 욕심과 교만을 버리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주장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사랑을 덜 느끼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소명을 생각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덜 사랑한다면 사실은 그 사람의 결함과 잘못 때문이라기보다 우리에게 주관적인 사랑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녹을 때에는 그 보다 더한 원수들까지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이시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저희를 도와주셔서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은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B. 그리스도께서 함께함으로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의 충만함을 구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의 충만 이고 사랑의 충만 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으로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은 곧 예수 충만 이고 사랑 충만 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그는 곧 사랑 충만한 사람이며 그가 성령으로 사랑이 충만할 때 그 중심 속에는 예수님이 충만히 계셔서 그가 그리스도 예수와 충만한 교제를 누리고 그의 분신처럼 살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부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 분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부활의 진정한 기쁨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기도를 올리신 후 병정들에게 체포되셨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 모두 그 하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하나 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고 그 하나 됨을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기까지 쏟으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하며 주님을 향해 사는 부활의 신앙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십자가와 하나 됨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