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길, 십자가
(2019년 십자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 | 2019년 04월 15일 – 04월 17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02월 03일
목 차
설교 프레임
1. 예수의 고난을 알라 (막 8:27-31) 2019.04.15. 십자가사경회 새벽……………………………… 1
2. 제자의 길을 가라 (막 8:32-34) 2019.04.16. 십자가사경회 새벽………………………………… 5
3. 복음을 위해 살라 (막 8:32-34) 2019.04.17. 십자가사경회 새벽………………………………… 10
<설교 프레임>
은혜의 길, 십자가1 2019. 4. 15(월) 십자가사경회 첫째 날
<예수의 고난을 알라>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27-31)
I. 본문해설
본문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보도한다.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이다.
이 위대한 고백사건 앞뒤에는 여러 가지의 기적들이 나온다.
예수는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일곱 개의 떡과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축사하여 사천 명을 먹이셨다(막 8:1-9).
또한 벳세다에서 맹인을 고치셨다. 뱃세다는 갈릴리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마을이다(막 8:22-26).
그 뒤에는 변화산에서의 기적과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사건이 실려 있다(막 9:14-29).
II. 예수의 고난을 알라
A. 고백을 물으심
첫째로, 신앙고백에 대해 물으셨다. 먼저 다른 사람들의 진술에 관해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27)”
그리고 제자들 자신에 관해 물으셨다. 그들 자신의 고백에 대한 질문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28)”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부분이 마태복음에는 보다 긴 대사로 묘사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주님은 남들이 믿는대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고백을 원하신다.
당신 자신의 신앙고백을 가지라. 이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갖게 된다. 이 고백은 반복돼야 한다. 고백에는 힘이 있다.
인격적인 사랑은 매순간 자기만의 독특한 고백을 낳는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그러하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당신의 고백은 무엇인가?
참으로 그분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그분이 참으로 그리스도라면 왜 그분을 섬기지 않는가?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는 왜 낙심하고 절망하는가?
B. 죽음을 예고하심
둘째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이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은 나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아는 것은 지금 하나님 사랑을 아는 길이다. 십자가의 감격이 사랑의 감격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대속적 죽음에 대한 앎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후에, 비로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알면 반드시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살아있는 한, 사명을 알게 된다.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알았다면 그의 십자가 고난을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라.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III. 적용과 결론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삶이다.
그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매일 매일 그 고백 속에서 예수 고난을 본받아 사명으로 살자.
은혜의 길, 십자가2 2019. 4. 16(화) 십자가사경회 둘째 날
<제자의 길을 가라>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2-34)
I. 본문해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확실하게 신앙고백을 했다. 그 후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베드로는 불후의 신앙고백을 남겼지만 오류도 남겼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막 8:32)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신 것에 대한 그의 반응이었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의 항변이 보다 상세하게 나타난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그릇된 육신의 방식으로 당신을 위하는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셨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육신의 생각으로 예수를 위하는 길이 제자도가 아님을 보여준다.
II. 제자의 길을 가라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는 우리에게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보여주셨다. 제자의 길이 무엇일까?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A. 자기를 부인하라
첫째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自己)”는 우리의 육신의 생각과 욕망을 따르는 자아(自我)를 가리킨다.
베드로는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부인해야 할 자아가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할까?
제자의 길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들을 부인하는 길이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오직 두 가지에서 나온다. (1)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아는 것. (2)그 신앙고백이 마음에서 역사하는 것.
자기 자신이 바로 스스로 부인해야 할 대상임을 알자. 말씀과 기도로 부인할 힘을 얻으라. 성령이 도우신다.
B. 십자가를 지라
둘째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는 상징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성숙시키고자 사용하시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뜻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의 의무를 감당한다는 뜻이다.
은혜의 경험은 의무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준다. 사랑으로써 우리가 그 의무를 수행하게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는 관계가 있다. 거기서 의무라는 십자가가 생겨난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의무다.
진정한 기쁨의 삶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온다.
십자가 사랑에 대한 반응은 순종이다. 순종하며 드리는 한 마디의 기도는 그렇지 않은 일천 마디의 기도보다 힘이 있다.
내가 버려둔 십자가는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십자가를 짊어지라.
십자가 없는 삶의 끝은 방황하는 삶이다. 허무한 생활이다.
처음 회심의 때를 기억하라. 버려둔 자신의 십자가를 다시 지라.
C. 예수를 따르라
셋째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제자의 길은 세속적 의미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따라 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도 모두 그 일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연합하기 위해서다. 그분을 따르기 위함이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가신 길을 절대적인 모범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그 길을 걸으며 살라.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1)그리스도와의 평화. (2)그리스도를 위한 열정.
당신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를 짊으로 기쁨의 삶을 살라.
III. 적용과 결론
인간의 큰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을 아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는 예수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 행복이다.
세상의 십자가 없이는 하늘의 영광도 없다.
사명을 버린 자의 삶에는 십자가가 없다. 그러나 행복도 없다.
허망한 삶을 떠나자. 십자가 지는 자에게 생명과 기쁨도 주신다.
은혜의 길, 십자가3 2019. 4. 17(수) 십자가사경회 셋째 날
<복음을 위해 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5-36)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신다.
이는 예수를 따르는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사랑이 있다. 자기 목숨에 대한 사랑이다.
II. 복음을 위해 살라
A. 목숨을 위해 살지 말라
구원 받은 신자는 육신의 목숨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인간의 목숨은 그 자체가 아니라, 보다 높은 목적이 있다. 목숨을 가지고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자칭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주님을 모를 때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의 구원은 자기 만족과 행복이었다.
그것이 목숨을 위한 삶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으로서는 살아있는 것이지만 영적으로서는 죽은 삶이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행복을 발견한 사람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사는 삶이다.
복음을 통해 영생하도록 지은 바 된 존재임을 알았다. 죄의 용서를 통해 그 사랑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그러므로 신자는 어느 정도 세상을 멸시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B. 복음을 위해 살라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하)
여기서 “나와 복음”은 동격의 “and”로 연결된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곧 복음”을 가리킨다.
복음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원과 세계의 완성에 담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 경륜의 핵심이 복음이고 복음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시다.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진술: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 대신 죽으셔서 우리를 용서 받게 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신령하고 좋은 복을 누리게 하셨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살아계셨더라면 살아가셨을 삶을 뒤잇는 것이다.
대속적 죽음을 본받아 영혼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다. 그런 삶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복음이다.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영혼을 구원하라. 이웃에게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도록 풍성한 삶을 살아가자. 그는 죽어도 영원히 산다.
헛된 것을 위해 살지 말라. 지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라. 복음을 전하라.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불러 주셨다.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위하려 살지 말라.
오직 복음을 위해 살라.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살라.
은혜의 길, 십자가 (2019.04.15._십자가사경회 새벽 1)
포로 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9.10.16.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1. 예수의 고난을 알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8:27-31)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본문은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는 곳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이었습니다. 이 고백의 사건 앞뒤에는 여러 가지 기적의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일곱 개의 떡과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축사해 사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벳세다에서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고, 또 갈릴리 동북부 해안에 위치한 이 마을에서 이 기적을 행하셨는데, 그 뒤에는 변화산의 사건이 있었고, 귀신이 들린 아이를 고치시는 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의 사건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이 나타납니다.
Ⅱ. 예수의 고난을 알라
오늘의 본문의 요지는 “예수의 고난을 알라.”입니다.
A. 고백을 물으심
두 가지 사건을 다루는데, 첫째는 고백을 물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었더니, 제자들은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 중 하나라고 합니다.” 다양한 대답들을 내 놓았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아직 잘 몰랐기 때문에 선지자라고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에 대한 아주 커다란 높은 평가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담대히 전하고 그 말씀에 사람들이 깨어지는 것을 보면서는 세례요한을 생각했던 것 같고, 기적의 능력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는 엘리야를 생각했던 것 같고, 백성들을 사랑하고 안타깝게 전하는 것에 있어서는 엘리야나 호세아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질문이 끝난 후에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것보다 훨씬 더 길고 정확한 진술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던 최고의 고백이 예수님이 입에 넣어주셔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면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남이 믿는 대로 고백하기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고백을 바라십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신앙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정통교회가 믿어오던 고백과는 다른 고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앙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고백을 그냥 믿고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마음 속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 고백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고백을 갖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 여러분들의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끼친 분이신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는가를 기억하며 여러분 자신의 마음과 언어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고백해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이 불후의 신앙고백을 능가할 수 없겠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능가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와의 체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 어려운 시련과 고난, 인생의 길을 이 고백으로 이겨냈습니다. 병마와 싸우기도 하고 시련을 이기고 연단을 받을 때에도 이 말씀으로 견뎌냈습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들이 가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정말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내놓게 합니까? 만약 그 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이시라면 여러분들은 정말 그 분을 그리스도로 섬기고 있습니까? 만약 그 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러분들은 그 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자신의 인생을 그 분께 맡겨드립니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누구에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이 새벽에 여러분들의 고백을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갖고 사는 여러분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고백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가 누구이신가 고백하게 되면 그 고백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감당하게 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오늘 이 새벽 주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B. 죽음을 예고하심
마지막 두 번째는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정확한 신앙의 고백이 있고 나서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8장 3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고난 후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에 대한 고백과 그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은 나누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연약해 보이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 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고 그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모든 피조물을 자기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주라 부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엄격한 율법을 따라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깊이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것이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고백과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믿음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앎으로써 우리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살아있는 한 그는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따라 살려고 하는 한 하나님은 그에게 살아갈 힘을 주십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해 주신 구원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제 그 분이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똑같이 따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써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얻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겠다고 하셨으며 그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자는 그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었다면 그 다음에는 그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셨던 길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을 들은 후 주님은 큰 기적도 보여주셨지만, 동시에 당신 자신이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이뤄야 할지 본격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라 고백하는 우리들도 그 십자가 고난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난을 받기 위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고 나면 우리는 그 분이 따라간 길을 같이 따라가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기꺼이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좋은 것만을 받고 육신의 안위를 누리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으셨는데, 그랬기 때문에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사명을 따라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Ⅲ. 적용과 결론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삶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매일 매일 그 고백 속에서 예수께 받은 사랑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주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잊지 맙시다.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당하시고 버림받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이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던 것처럼 또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섬기는 자들이 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가 당하신 그 고난을 본받아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처럼 또한 그 사람들에게도 충만하게 나타나 그들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되도록 헌신합시다. 바로 그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의 길, 십자가 (2019.04.16. 십자가사경회 새벽2)
2. 제자의 길을 가라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막 8:32-34)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베드로는 예수님께 최고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할 사실에 대해서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불호의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남겼지만 오류도 남겼습니다. 그래서 3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이 항변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죽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죽이려 한다면 제가 온 몸을 던져서 그 죽음을 막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지만 육적인 사랑에서 온 그릇된 생각이었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짐짓 자기 의를 나타내며 이렇게 주님을 향한 애정을 표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앞에 있었던 신앙고백 후에 나왔던 반응과는 전혀 다른 심한 책망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이르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깊이 책망하셨습니다. 즉, 육신의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기 때문에 끝까지 붙들어 주는 것이었으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니 여기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으로 예수를 위하는 길이 제자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Ⅱ. 제자의 길을 가라
그러면서 참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34절에서 보여주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세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A. 자기를 부인하라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는 육신의 생각으로 자기의 행복을 찾는 자아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그에게는 아직 깨어지지 않은 자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커다란 방해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자아가 있으면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 말았어야 했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으면 자아가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그 훌륭한 신앙고백을 해서 칭찬을 받고 이후에는 왜 이렇게 잘못된 자아에 집착하고 있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께 “사단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고 까지 책망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아름다운 신앙고백과 자아가 양립하는 것 또한 이해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자기중심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부인하는 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오직 두 가지에서만 나오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아는 것, 두 번째는 그 고백이 마음에 계속 역사하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훌륭한 신앙고백을 하였고 그것이 진심이었으나 여전히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한다는 대속의 진리, 예수님이 그렇게 여러 차례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독특한 생각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부인해야 할 자신이 남아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이 진실하였던 것처럼 주는 우리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은 우리에게 참된 고백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 안에는 더 이상 부인해야 할 자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항상 옳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항상 바른 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그 고백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갔던 길이지 제자들이 갔던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 이러한 훌륭한 고백 뒤에 그 넘어지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 중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탁월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버리고 포기하고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자기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영광중에 우리를 받아주시는 천국에 이르는 그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렇게 훌륭한 고백을 하는 신앙적인 자아와 무지와 욕심 속에서 육신적으로 생각하려는 자기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그 말씀의 지식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그 부인한 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들이 이렇게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십자가 사경회에 참여하면서 부인하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하고 훌륭한 고백 뒤에 있었던 실수한 자아들을 찾아내서 주님을 따르는데 적합하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십자가를 지라
두 번째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앞에 관용어구가 붙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한 바와 같이 십자가 형벌에는 한 규례가 있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힐 죄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십자가’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셨던 물리적인 십자가는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인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거룩하고 성숙하게 되게 하시려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거룩하고 성숙한 자가 되게 하려고 사용하시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편안하고 부담 없고 안락한 삶을 원하지 분투하고 무거운 짊은 지고 고통을 당하는 삶을 원할 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이미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한 세상 사람들과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서로의 뜻은 사랑하고 의지하며 좋게 살아보려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깊이 결심하고 세상 모든 사람과는 그래도 둘 사이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렇게 약조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 이상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야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짊어지는 많은 십자가는 대부분 관계에서 오는 십자가입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서로 상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한 사람들은 모두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에서 시인이 토해내는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의 노래들은 항상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의 역사적인 기록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적으로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떠올릴 때마다 그 배경에 있었던 것은 바로의 핍박에서 고통 받던 애굽의 노예 생활이었고 그리고 거기에서 탈출하는 모습 속에서 최고의 신앙의 감격을 노래하였습니다. 모두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가락을 연주한다 하더라도 울리는 공기가 없으면 아무 소리가 전달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훌륭해도 그 현이 뜯겨지는 고통, 그것을 전달해주는 공기가 없다면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십자가를 원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쓸모없고 괴롭기만 하였던 이 십자가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를 주시는 신비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고난 속에 감사를 배우게 하십니다.
주님은 항상 주님의 그 십자가를 기억하며 자기에게 지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며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십자가 사랑을 받은 사람의 반응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순종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그렇지 않은 마음으로 드리는 일만 마디의 기도보다 훨씬 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사람으로 태어난 순간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순간 여러분들에게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곧 십자가를 동반합니다. 내가 버려둔 십자가는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배신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왜 섬기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예수님의 말씀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버려둔다 할지라도 너는 나를 따르라.” 순교를 예언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요한에 대해서 물었을 때 예수님이 답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찌 하든지 관계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십시오. 처음 회심의 때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십자가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으나 감격에 찬 생활을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예수를 따르라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하고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길을 따라가고 그렇게 계셨던 인격을 본받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도 그 자체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고 말씀하시고,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말씀하시면서 자기를 따라올 것을 제 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인생의 길을 절대적인 모범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특히 그 분이 불의한 자를 대하시고 죄인들을 대하시고, 불쌍한 자들을 대하셨던 그 분의 인격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사랑함으로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없으나 마음에 모신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동행하며 예수 살았더라면 가셨을 그 길을 다른 세상에서 걸어가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기까지 하신 우리들에게 그러한 길을 걷게 하셨겠습니까? 대답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우리로 하여금 꽃길을 걸을 것이라 약속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가신 길이 범상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끝없는 희생을 가용하시는 불행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수의 길을 따라 오려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힘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부인이 잘 되지 않기에 자기를 부인하고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구할 것이며 십자가가 여전히 즐겁고 기쁜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감당하며 이길 수 있게 해달라고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꽃길과 수많은 명예는 하지 못하였던 일들을 이러한 고난과 십자가, 자기부인을 통해 하게 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 걸어간 길을 걸어가고 예수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티끌만큼이라도 그 분을 닮은 누군가가 날 보고 예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과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산다는 것이고, 전심으로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내적인 기쁨으로 이 십자가를 넉넉히 지고 제자의 길을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적용과 결론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예수를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날 향한 하나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에게는 예수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세상의 십자가 없이는 하늘의 영광도 없습니다. 사명을 버린 자의 삶에는 십자가 대신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행하나 행복은 거기에 없습니다. 허망한 삶을 떠나십시오. 잠시 있다 사라지는 들풀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함께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기쁨을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이 복음 신앙으로 돌아와 제자의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복음을 위해 살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2-34)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어떠한 동기에서 자기를 부인해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또 예수를 따라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많은 것은 학습을 통해 습득됩니다만,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목숨에 대한 사랑입니다. 아주 작은 곤충으로부터 아주 큰 짐승에 이르기까지 순순히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도록 그렇게 허락하는 생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의 목숨 사랑은 자기 개체를 보존하는데 있지만, 인간의 목숨 사랑은 그보다 훨씬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두 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을 위해 살라고 가르쳐줍니다.
Ⅱ. 복음을 위해 살라
예수님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교훈하십니다.
A. 목숨을 위해 살지 말라
첫째는 자기 목숨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는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어도 이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안 사람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 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그 자체 보다 높은 목적에 도달하려 합니다. 즉, 밥만 먹이고 잠만 재워주면 충분히 행복한 존재가 아니라 그 목숨은 그저 기초일 뿐이고 그 목적을 가지고 보다 더 높은 자기 사랑의 목적을 따라서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은 이 목숨을 가지고 이제는 자기를 사랑하며 방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창조목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경구절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에서 이 구원은 그저 단순히 목숨이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이 멸절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정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칭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에는 육신으로 살아왔고, 최고의 구원은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행복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목숨을 위한 삶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으로서 살아있지만, 영으로서는 죽은 삶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사람의 몸을 입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행복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영생을 얻도록 그렇게 지정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고 실재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었습니다. 신자 아닌 사람들만 시련과 고난을 겪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도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놀라운 그 사랑, 내 마음을 감격하게 하는 하나님의 큰 자비하심은 소위 삶의 고통이라고 하는 그 갈피갈피 사이에서 함께 묻어나옵니다. 누구도 노래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끼는 사람이 없고 환락의 거리에서 예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성적으로 당연히 자기 목숨을 위하여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 “네 목숨을 살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그 목숨이 주는 행복이상의 것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생명은 매일 매일 신자의 마음속에 나타나 고난을 이기고 시련을 극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이 대 사도도 자신의 육신이 늙고 병들고 후패해지는 것에 대해서 신경이 쓰였던 모양입니다. 날마다 다른 자신의 몸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욱이 많은 핍박과 고문을 당하였을 터이니 그의 육신은 더욱 더 노쇠를 재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육신을 보면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까짓 겉사람과는 비교되지 않는 속사람이 생명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의 목숨을 위해 살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예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 넘쳐나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느 정도 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접고 또한 이 세상을 멸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칼빈 선생의 가르침을 우리는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만약에 사도가 낡아가는 자신의 겉사람을 보고 낙심하였더라면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숨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살았던 한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상하게 은혜에서 미끄러지면 정작 기대를 걸어야 할 예수님에게는 별로 기대를 걸지 않고 수없이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고 학습되어 온 세상을 향해서는 많은 기대를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대를 걸고, 세상에 거는 기대 때문에 주님 대신 자신 중심으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렇게 세상을 깊이 의지하는 의뢰하는 만큼 예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요동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기대는 높이고 세상을 향한 기대는 낮추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슬픈 일이 일어나고 우리에게 힘든 일이 일어나고 또한 우리에게 얘기치 못한 시련이 닥쳐도 세상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파도가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세상을 항해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니 그렇게 바다에 파도가 없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 그 파도 속에서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인생의 배를 운행하시면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실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시련 속에서 크게 낙담하여 예수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큰 시련 속에서 오히려 이제껏 못 만났던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위해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고난주간을 맞아서 다시한번 우리 자신을 주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B. 복음을 위해 살라
두 번째는 “복음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것을 예수님은 35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보여주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와 복음”이라는 것은 동격의 and로 연결되었습니다. 내가 따로 있고 복음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나 곧 복음이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곧 복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기쁜 소식입니다. 무엇이 기쁜 소식입니까? 이제껏 몰랐던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원, 이 세계의 완성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에 대한 경륜을 가리킵니다. 그 경륜의 핵심이 복음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러한 뜻으로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세상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고 그러나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고, 이 나빠 보이는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고 선한 세상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고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 때문에 하나님은 그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신령하고 좋은 하늘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성경은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전에는 타락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이제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신령한 복, 모든 복을 누리게끔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았을 때에는 누릴 수 없는 복을 누리게 하셨고 심지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누릴 수 없는 복을 하나님이 누리게 하셨고, 지금 누구든지 그 복을 받으라고 부르고 계시다는 점에서 그것은 복음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이 하늘의 신령한 복을 하나님께로부터 충만하게 받아서 이제 이 땅에 그리스도께서 사셨더라면 여전히 살아가셨을 그 삶을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부릅니다.
대속적인 죽음을 본받아서 자신도 영혼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은 집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가 어떠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깨닫는 데서 오는 복음의 삶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혹은 한 여성이 한 남성을 사랑하면 또 다른 남성과 여성은 세상에 없습니다. 나머지 모두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옆에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식으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과 자신 이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면서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자, 이러한 것입니다. 신앙이 식으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생각합니다. ‘뭐야, 주위에 별로 사람도 없네. 똑같이 교인인데 나 혼자서 이러한 일을 도맡아 해야 해? 나도 직장 다니고 싶고 돈 벌고 싶고 나도 가족들만을 위해 봉사하면 나도 편하고 좋은데 왜 나는 이렇게 교회가 직장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치 전업 신자가 된 것처럼 이렇게 많은 일에 시달릴까?’ 돌아보니까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한둘이 떠나가고 그 일의 짐이 나에게 밀려옵니다. 생각을 합니다. ‘나도 차라리 직장을 다니고 말까? 아니면 쌍둥이라도 더 낳아 가정에 전념할까?’ 별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벌써 마음속에서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각기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랑을 따라서 살 뿐이고 나는 이 자리에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셨고 그리고 언젠가는 나를 여기에서 옮기시겠지만 언젠가는 힘겨운 육신도 하나님이 그 장막을 거두어 가시겠지만 아직은 하나님이 나를 세워두셔서 여기에 있다고 하는 사명감, 그 사명감은 또 다른 삶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엄마는 ‘이 새끼들이 안 태어났더라면?’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짜 좋은 가장은 ‘아, 내게 가정이 없었더라면…’ ‘아, 저 여자를 안 만났더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에는 그 모든 것을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이고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보십시오. 기가 막히게 비싼 바이올린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비싸면 45억-60억을 간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가에 의해 완벽히 조율을 마쳤습니다. 그 비싼 천문학적인 액수의 바이올린에 저절로 소리가 납니까? 누군가가 그 활로 바이올린을 긁어야지만 소리가 납니다. 마찬가지로 똑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이올린의 현이라면 우리가 정말 주님을 만나서 명품 바이올린이 되었다 할지라도 고난이 우리를 건드려야지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것이지, 그냥 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건들기만 했다면 비명소리처럼 들리는게 바이올린인데 그 연주자의 손에 들려서 현란하게 연주될 때 우리를 매료시키는 아름다운 곡조가 그 작은 악기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명품을 드러냅니다. 여러분들이 싸구려 신자인지 명품신지인지는 결국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그것을 위하여 살 때 육신을 위해서 살아도 고난이 있고 복음을 위하여 살아갈 때도 고난이 있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은 허망하지 않습니다. 정말 힘들고 때로는 고통스러워도 허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영원히 그 복음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때 거기에서 주를 섬긴 사람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사람들은 그때 거기에서 주님을 위해서 봉사한 사람이 어떠한 동기로 주님을 섬겼는지 망각하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그 십자가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다른 사람은 어찌 하든지 자신은 예수의 군병이 되어 십자가를 따르던 그 섬김을 하나님은 기록하시고 당신의 생명책에 그 이름을 적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길을 갑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옆에서 사라지는 것은 낙심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질 일입니다. 많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떠났을 때 내가 여전히 거기에서 주님을 위해 충성함으로써 나를 이렇게 섬기도록 나를 움직인 그 힘이 여건과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우리의 삶으로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충성 스럽게 자기를 희생하며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생처럼 느끼지 않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하시거나 마취시키심으로 그리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보다도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고 이 고난이 없이 세상을 위하여 살 때에는 일도 느낄 수 없었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충성스럽게 오직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가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묻습니다. “저희는 힘들 때 목회자를 찾아가지만 목회자는 누구를 찾아갑니까?”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찾아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찾아갈 사람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 영혼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신기한 방법으로 하늘의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슬픔보다 큰 기쁨을 아픔보다 더 큰 위로를 외로움보다 더 큰 사랑의 연합을 보여주셔서 걸어가게 하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지푸라기와 같이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붙들었기 때문에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한 삶을 꿈꾼 적도 없습니다. 왜 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그 값으로 나를 사셨으니 이제 나의 살아있는 생명 뿐 아니라 죽음도 예수의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복음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예언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 너희 중에 믿는 자를 몇이나 보겠느냐.” 그것이 세상이고 말세에 나타날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며 복음을 위해 살려는 사람들에게 더욱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셔서 탄식하던 그 시대가 올수록 예수님의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 살게 하시나니 여러분들이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목숨위해 살다가 실패하는 삶이 되지 말고 복음을 위해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영원한 기쁨을 맛보는 사람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