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속성과 그리스도 성육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에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다시 한 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에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7-9).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구속사건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에 우리에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것 같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고, 예정하신 그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시간에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이 놀라운 은혜와 사실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셔서 그 뜻에 비밀을 알리셨으니 곧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다’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우리에 행복을 기준으로 보면은 형벌 받질 않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얻어서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느 사물이든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물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지게 되죠. 같은 지면에 서서 쳐다보는 사람과 3층에서 쳐다보는 사람과 60층 꼭대기에서 쳐다보는 사람은 같은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은 현저히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구속의 목적은 우리 한 사람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은 지옥에 형벌을 면하여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 천국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지만 그것은 학년으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들이 답안에 쓰는 것이고, 이제 성숙하게 되면은 나 한사람을 구원한 하나님의 계획이 나 하나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큰 계획 속에서 나의 구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구속의 목적은 나를 구원하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한 수단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다시피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이런 우연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안에 태어나서 그 제약을 받으면서 사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들은 형체가 있고, 그 시간과 공간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우리에 감각을 통해서 보고, 지각하고 그 사물들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이구나 하는 것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파악되지 않는 것은 우리는 과감하게 ‘없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신 분이죠.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들이 ‘있다’ ‘없다’하고 말할 때에 그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이 계사인 ‘이다’하고 하는 것은 현저하게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마음속에서 ‘바위가 있다’라고 할때 그 ‘있다’는 아주 분명합니다. 크기와 형체 만지면 딱딱하게 느끼는 그 무엇까지 느껴지는 그것이 특정한 시간과 그리고 장소에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예요. 그러나 ‘공기가 있다’하고 할때는 있는 개념이 현저히 달라지는 것이죠. 더욱이 ‘우리 안에 사랑이 있다’ ‘우리 모임 가운데 사랑이 있다’할 경우에는 그 ‘있다’라는 개념이 바위하고는 아주 현저히 다른 것이 되는 것 이예요. 더욱이 그 ‘있다’의 주체가 하나님이 될 경우에는 그럼 그것은 아주 현저히 다른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하나님은 아무데에도 안 계신 것이죠.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하나님이 있다’는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있다’하는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죠. 나는 나에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내 영혼이 박 목사님의 영혼과 교통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늘밤에 박 목사님 머릿속으로 출장 가는 일은 없습니다. 박 목사님 영혼이 우리집에 출장 오는 일도 없구요. 그러니까 같은 영혼이라도 영이신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은 영이시고,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영혼이예요. 그러니까 영으로써 같은 성질을 가지고 교제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은 존재의 양상이 하나님의 영을 닮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고, 하나님 자신은 무한한 창조주로써 그 둘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무한한 격차가 있는 것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파악될 수 없는 하나님이예요. 그런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관상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과 맺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는 알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적으로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예요. 그러나 이 속성은 원래 다발로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은 어떠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우리는 흔히 교리를 배울때,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동그라미를 그리고 가운데를 동그랗게 파요. 그 가운데 동그란데다가는 영원성, 불변성, 무한성, 완전성 등등의 소위 독립적인 속성을 놓고, 그 파인애플를 쪼개면서 사랑, 공의, 자비, 의로움 등등으로 나누죠. 그래서 우리들이 교리를 배우면서도 생각할 때 마치 하나님이 하나님에 다양한 속성들로 구성된 분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잘못된 생각이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성요소가 없이 단일하게 존재하시는 분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떠한 구성요소도 없는 분이예요.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구성요소가 없이 되어있는 피조물은 단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도 금속과 플래스틱과 유리와 철사와 다양한 도장과 이런 것들로 함께 이루어져 있는 거예요. 인간의 존재도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육체 안에도 여러 가지 핏줄과 여러 가지 기관들이 함께 이루어져 있는 거예요. 그렇게 구성요소로 되어 있는 것은 구성요소끼리 서로 의존을 해요. 그것이 잘 의존이 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물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되어 있는 분이 아니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을 들여다 볼때 누구도 그 하나님을 볼 수도 없거니와 알 수도 없고 그리고 무엇을 통해서도 그 하나님은 파악될 수 없는 분이예요. 그 하나님을 파악하는 길은 그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파악하게 되는 거죠.
자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해하기 쉬운 비유를 하나 드려드리고 싶어요. 햇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봄이 옵니다. 그러면 그 햇빛은 여러 가지 작용을 하죠. 겨우내 꽁꽁 얼었던 그 도랑을 햇살이 따뜻하게 비칠때, 얼음이 녹기 시작하고 얼음장 아래로 졸졸졸졸 시냇물이 얼었다가 흐르게 만들어 줍니다 죽은 것처럼 시커멓던 나무에서 물이 오르는 소리가 나면서 새싹들이 돋아나죠. 빨래를 내다 널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득실득실 달라붙었던 균들이 살균되어서 죽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서 태양으로 햇살로 계속 올라가면 그 햇살 속에는 얼음 녹은 물도 없고, 죽은 균도 없고, 파란 새싹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파악될 수 없는 그냥 빛줄기일 뿐이야. 근데 그 빛줄기가 얼음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 얼음을 녹이면서 물이 되어 흘러. 식물과 관계를 맺을 때에는 그 식물, 죽었던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나게 만들어. 더 실감나는 비유를 들자면 우리 학교 다닐 때 초등학교 때 사용해보던 프리즘이 기억나죠. 그쵸? 프리즘. 프리즘을 놓고 햇살을 쫙 받아요. 그 프리즘을 캄캄한 까만 통에다가 놓고 햇살을 쫙 받으면 그 프리즘이 ‘확’ 분광이 되면서 저 위에서부터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 무지개 빛깔이 확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프리즘 너머에는 빨주노초파남보 중 어떤 색깔도 없어요.
아무 색깔도 없어 거기에는. 그러면 오직 우리에 눈으로 파악되지 않는 빛이 들어올 뿐 이예요. 또 빛이 있다는 것은 빛만 보고는 알 수 없어요. 그 빛이 비추는 어떤 비춤을 받는 대상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대상을 통해서 그 빛이 거기 있다는 것을 겨우 알 뿐이죠. 그래서 이 빛의 존재는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와 인식 사이를 걸쳐있는 아주 독특한 피조물이고, 아주 철학적인 물질이예요. 정신이예요 또.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는 그 햇빛과 같아서 분석할 수도 없고, 파악되지 않는 거죠.
그러나 그 빛이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더하는 작용들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속성’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은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이예요. 그거 보다 더 정확한 말이 없어요.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 그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 아무데도 안 계시면서 안 계신 곳이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면서 하나님 당신이 살아계신 그 효과를 나타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에 하나님되신 그 존재의 효과를 비참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는 ‘자비’로 나타나요. 불쌍한 인간과 관계를 맺을때 ‘긍휼’로 나타나요.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인간과 관계를 맺을때 하나님에 ‘공의’로 나타나요. 회개하고 뉘우치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요.
저는 이러한 사실을 여러해 전에 묵상하게 되었을때 막 가슴이 몇 달동안 터지는것 같았어요.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에 주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에 주
그래서 하나님을, 잘 새겨두세요. 인간에 가장 큰 의무가 무엇이냐 하면은 하나님을 아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에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최고에 의무이고 인간으로 태어난 행복이예요. 그래서 인간은 공부하기 위해 태어난 거야. 그래서 우리가 교리반을 토요일마다 하는데 내 카타키스무스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인제 라틴어로 ‘스투데오 에루그숨’ 그게 뭐냐하면은 ‘나는 공부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럼 또 묻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교인들이 대답해요.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은 셋이니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관해서 인데 보편적 존재로써의 인간 일반과 개별적 존재로써의 인간 나에 대해서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 대상에 대한 지식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잘 알 수 있으니 우리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해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게 바로 카타키스무스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묵상한다’ 그러는데 그건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에 하나님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을 응시하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은 마치 태양을 들여다보면서 태양이 무엇인지 보고 싶어 하는. 우리 어렷을 때 장난할 때 돋보기를 가지고 태양 쳐다봤다가 한참동안 눈에 뭐 맞은것 처럼, 그럴때 있잖아요. 장난 심할 때. 알 수 가 없는 거예요. 아니 빛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똑바로 눈을 뜨고 정오에 태양을 쳐다본들 무엇을 알 수가 있겠어요. 여기 이거 망막 다 타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관상하는 것은 미친짓이야 이게. 그럼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을 안다’라는 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파악을 해야되요.
그 하나님을 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서 제6장에서 4장에서 하나님에 말씀을 전달해주죠?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에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 그건 이스라엘을 향한 최대의 저주예요. 그러면 거기서 지식을 버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게 바로 히브리말로 하자면 ‘다트 엘로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예요. 그래서 뭐라 그래요?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아는 너희들은 너희는 여호와를 알라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그리고 하나님을 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심지어 그 사사기서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전통이 끊어졌을때 그 사사기 기자가 뭐라고 말해요? ‘여호와와 여호와의 큰일을 행하는 큰일을 행한 그것을 본 세대들이 다 죽었으므로,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알지 못하므로, 그들이 하나님 없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므로 그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더라. 그러면 도대체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5년전 이었어요. 교회가 성탄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그 성탄예배에 어떤 한 사람이, 누군진 모르지 하도 많이 와있으니까 한 중년 신사가 들어왔어요. 근데 이 사람이 직업이 뭐냐 하면 대학교 강사예요. 그게 뭐냐면 플라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예요. 박사 과정까지 공부한. 근데 그 철학하는 사람들이 예수 절대 안 믿거든요. 그 술을 밤새도록 퍼 마시고 후배들하고. 가정 평화를 위해서 어차피 교회에 끌려왔는데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끌려온 거예요.
그래서 이제 교회 들어와 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잠자기에 너무 푹신한 의자. 그래서 이제 탁 앉아서 잠을 청했는데 ,시작서부터 조는 거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잠깐 있다 자야지 하고 탁 섰는데 앉았는데 제가 올라왔죠. 어느 목사가 올라오더니 성경을 탁 펼치더니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에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음이라’ 근데 갑자기 눈물이 확 쏟아지는 거예요.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래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데 계속 비 오듯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가? 다행히 아내는 저쪽에서 예배를 드려서 자기를 못 본거예요. 집에를 갔어. 그리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너무 센치해져서 그런 일이 생겼겠지. 그리고 그 다음주에 집이 저기 충청남도에서 한 180K정도 떨어져 있어요. 한번더 가자. 그래서 하루 더 올라왔는데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난 거예요. 그때 자기가 철학에서 배운 하나님이 생각이 난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플라톤의 경험, 체관이예요. 직관을 통해서 인간에 이성으로 추론되는 것은 머리를 굴려서 파악하지만, 인간의 이성을 워낙 초월하는 이 속한 초월계에 속한 것은 신적인 체관을 통해서 그걸 뛰어넘어서 알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드디어 그가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 깨닫게 된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다’라는 것은 딱 두 가지에 대한 앎이야. 하나님에 속성과 하나님에 속성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한 앎. 다시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지식이예요. 그러면 그 속성은 하나님의 존재는 형언할 수 없는 분이지만 형언할 수 없는 그 분이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 특별히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그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빛깔의 속성들이 들어나는 거예요. 그 속성이 어떠한 속성이든지 간에 그 속성은 찬란하게 아름다운 거예요. 물론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그에게 임할 때에는 그는 막 심판을 받아서 고생하기도 하고 형벌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쳐서 피를 흘리며 생명을 거둬 가실 수도 있어요. 그 광경은 예쁜 광경이 아니예요.
그러나 그 광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 이것은 찬란한 아름다움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와는, 존재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그 속성은 또 다른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은 물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수많은 사람가운데 한 사람 나를 택하사 흙으로 빚으신 나를 건지셔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그때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고, 이 벌레같은 인간을 구원해 주셨으니 하나님에 놀라운 은혜죠. 바로 그것을 위해서 자기에 외아들을 사람에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에 죄인이 나 하나뿐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쩌면 당신에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나를 구원하셨겠죠.
그러니까 내가 받은 그 사랑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의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청교도들은 신자가 짓는 죄 중 가장 무서운 죄가 구원을 일상적인 거루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에서 모든 타락과 그리고 물러가는 부패가 발생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찬송가 한절을 부를 때 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신 성부, 그렇게 사랑하시는 이 벌레 같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 몸버려 십자가에서 자신을 찢으신 성자, 그런 쓸모없는 인간에 돌 같은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십자가가 믿어지게 하시는 성령에 그 강권하시는 사랑, 이것이 벅차오르도록 눈물과 함께 터져나오는 그 사람은 잘못 살 수가 없어요. 최소한 고의로 하나님 앞에 잘못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건 불가능한 거예요.
그럼요. 생각해 보세요. 뜨겁게 끓는 물이 돌덩이처럼 얼어 붙었다면 식는 과정이 없이 돌처럼 어름이 될 수 있겠죠, 돌 같은 얼음이 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한 거예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이 그게 제가 늘 말씀드리는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이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그러잖아요. 못 박혔다는 그 말이 히브리말로 ‘에스타오르마이’예요. 이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완료예요. I have been crucifixion.
히랍어에서 현재완료는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혔다하는 그 표현은 현재완료로 쓰여졌어요. 더욱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에게게르타이도 모두 현재완료로 사용되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부활하신 그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영향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그거를 히랍어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사는 거예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탕이예요. 그 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을 따라서 선교에, 목회에 ,평신도에 삶에 하나님에 나라를 위해서 영혼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다양하게 주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나무는 땅에 심겨야 하듯이 그 삶에 양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밑에 깔려있는 이 기본적인 고백은 바로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이 사물과 관계를 맺으셔서 그것을 통해서 발현되는, 그것을 통해서 발현되는 다양한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거예요. 그 속성에 대한 앎, 속성이 어떻게 시현되는지를 알면서 우리는 그 사물과 맺은 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 혹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면서 위로 수렴하면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 마음속에 그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 ‘쉭’하고 불길을 내뿜을 때, 거기에다가 나무를 댈 때, 금속 중에서도 마그네슘을 댈 때, 납을 댈 때, 쇠를 댈 때, 동을 댈 때, 철을 댈 때, 은을 댈 때 얇은 막으로 된것을 거기다 댄다고 하면은 그 불꽃 모양자체가 다 다르게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그 밤하늘에 ‘펑’하고 쏘면은 막 형형색색에 폭죽이 확 터지잖아요, 그 다양한 색깔이. 그걸 뭘로 만드는 거냐 하면은 터지는 화약은 다 똑같은데 화약 속에다가 섞는 금속의 성분을 다양하게 변화를 주어서 그렇게 형형색색의 불꽃을 가진 그런 폭죽을 만드는 거예요. 그럼 한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에 다양한 속성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든 속성 중에 모든 속성 중에 다른 속성과 같지 않은 독특하고 중요한 속성이 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예요. 그러면, 왜 그러면은 사랑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많은 속성 중에 이것은 매우 유별난 속성이라고 목사님은 말합니까? 제가 설명해 드릴께요.
하나님은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분이예요. 그것을 신학에서 하나님에 심플리기타스 ‘단순성’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비참한 자와 관계를 맺으실 때 자비를, 죄지은 자와 관계를 맺으실 때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고 불쌍한 자와 관계를 맺으실 때 하나님의 긍휼을 뭐 등등 등등을 하나님이 보여주시잖아요. 그러니까 이 모든 속성들은, 잘 들으세요. 이 모든 속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있어야지만 발현되는 속성이예요. 왜냐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인간이기 때문이예요.그런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는 인간이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사랑은 달라요. 어떻게 다릅니까?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하나님 안에 있었던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나님 안에 그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때에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시지만 3위로써 존재하셨어요. 그래서 그 3위,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셨는데, 이 세계에 아무 사물도 없었을 때에 성부는 성자에게서 사랑을 받으시고 또 성자는 성부와 성령과 성자에게서, 성부는 성자와 성령에게서 서로 사랑을 받으시고 사랑을 하시는 의존의 사랑관계가 성립됐던 거예요. 다른 모든 속성은 하나님과 상대할 피조물이 있어야만 발현되는,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인데 ‘사랑’ 만큼은 피조물이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의 3위 간에 이루어진 교통이요, 사랑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에 독특하고 특별한 사랑이예요. 그래서 요한 사도가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이예요.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어떠함과 그 속성이 어떤 식으로 작용을 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는가 하는 그것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예요.그러면 우리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 대상, 그것을 알고, 그 대상과 하나님이 어떻게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속성을 아름답게 드러내시는지를 배우고, 그 속성이 어떤 역할을 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만물들을 다루는지 그 시행방식에 대한 앎을 증진시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예요. 그러면 그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시는 일차적인 대상은 하나님 자신 이실꺼고, 두 번째는 인간일꺼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일 것이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어떻게 당신에 속성을 드러내시는지를 배워가게 되잖아요?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거예요..이렇게 여러분들이 밤늦은 시간에 여기에 모여 있는 이유도 바로 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예요.
교회의 대체할 수 없는 본분은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자신의 지체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알게 하는 것, 그것이 글이든지 말이든지 삶이든지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든지 무엇을 통해서든지 그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빛된 삶’이예요.
이웃돕기 하는게 빛된 삶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포함되지만, 그 하나님의 속성과 속성의 시행되는 방식을 드러내는 삶,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예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 하고 말할 때, 그 아름다움의 정수는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예요. 그리고 그 속성이 현란하게 움직일때 그 속성의 아름다움은 비로소 실제로 우리에 마음속에 다가오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꽃이 있다, 예쁜 꽃이 있는데, 그냥 어떤 움직임도 없다. 그러면 저게 조활까 이렇게 생각이 들꺼란 말야. 근데 바람이 ‘샥’불어. 꽃잎이 막 춤을 추는 거예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저 끝에까지 형형색색에 꽃들이 가득 물결을 이루고 있는데, 이게 막 움직이는 거예요. 생각해 봐요.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정체는 뭐냐 하면, 그에 속성과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인간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본질이예요. 자, 중요한건 여기부터예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알면 알수록 인간에 마음속에는 어떤 감정이 생길까요? 자네! 아름다운걸 보면 볼수록 무슨 감정이 생겨? 대답을 빨리해야 시집을 빨리 간단 말야. 뭐가 생길까? 어떻게 생길까? 어?
왜 그렇게 성격이 좋고 신앙이 좋아도 못생긴 형제를 보면 가슴이 뛰지 않는데, 성격도 까칠하고 신앙도 없는 멋있는 형제를 보면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 대답을 해야지 빨리 가지. 응? 그치 잘생겨서 그 잘 생겼다는게 무슨 뜻이야? 그렇지 보기에 좋다는 예쁘다는 아름다운거 예요 그래서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 보다 더 우리를 잡아끄는 힘이 있는 거예요. 학생이 밤중에 공부를 하는 것이 선한거야? 아니면은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선한거야? 진도 나가야돼 빨리 대답해요. 공부라는 것이 선하잖아? 근데 이 아이는 착각을 하는 거예요.
공부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는 것을 얘도 아는데 마음에 끌리는 예쁜건 공부가 아니라 게임이예요. 그래 거기에 몰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점점 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 비결이 뭘까?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합시다. 사랑하게 해주세요. 기도해도 응답 안돼 그거는? 기도만 한다고 되는게 아니예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이미 보았던 혹은 아직 못 보았던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자꾸 바라볼때에 그때 우리는 마음이 끌리게 되는 거예요.
사랑에 하나님 귀하신 이름을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작곡한 거예요.
어떻게? 신앙에 눈으로 보니까 온 세상 만물이 그림책 같애.
믿음을 가지고 이 아름다운 그림책 같은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야.
이것이 이렇게 아름다우면 이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존재는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그러면서 흠뻑 그 사랑에 심취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옛날에 인생이 뒤집힐 정도로 은혜를 받았어도 몇 달, 아니 몇 주, 불과 얼마동안만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세상에 추한 것을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꽂히게 되면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 요한이 뭐라고 경고했어요? ‘너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에 사랑이 그 속에 없나니’
그래서 신자에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에 아름다움에 자신의 지성을 집중시키는 거예요.아 정말 아름답구나! 그럴때에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져 가는 거예요. 그러면 질문은 이거예요.. 그러면은 하나님에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 나에게 그걸 좀 보여주십시오. 내가 그걸 좀 한번 많이 보고 예전보다 점점 더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에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 하나님에 아름다움이 이 세상 모든 곳에 흩어져 있고, 심지어는 가장 비참하고 더러운 인간에도 흩어져 있어요. 흩어져 있어요.
제가 아는 형제가 하나 있는데 평생 병원체만 연구하는 형제예요. 근데 균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대요. 아주. 그 균이 우리에게 병을 옮기는 그게 아름답다는게 아니라 하나님에 힘입어서 생명을 가지고 이동을 하는 그 생명의 작용. 너무 너무 아름답다는 거예요. 그 하나님에 아름다움이
온 땅과 하늘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다 퍼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학문은 아름다운 거예요. 모든 학문.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모든 지식의 근원이 하나님 이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들에 대한 지식이지, 없는 것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예요.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었던 것들이예요.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미 하나님 안에 있던 생각을 반영하는 거예요. 그 하나님에 생각이 묻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다 아름다운 거예요. 그 흔적들이 묻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체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천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요. 그 다음에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문학 속에서,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은 미술 속에서, 그 다음에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은 음악 속에서 이런 것들을 확 발견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오늘 좀 오바하는것 같은데 어떻하지? 그러면서 막 온갖 것들이 전부가 다 하나님에 아름다움에 흔적을 품고 있는 거예요. 다 품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아까 얘기 했듯이 어떤 걸 발견해도 그걸 저절로 아름답다고는 판단이 잘 안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냐면 그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을 그때에, 그때에 그것은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생각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예요.
요한 세바스찬 바하에 ‘평균율’이예요. 약 450곡 정도를 작곡을 했는데, 이게 가장 대표적인 거예요.
왜 이렇게 세기가 지나가도록 이 음악이 그렇게 사랑을 받고 아름다우냐, 난 이 음악을 들으면 영혼이 정화 되는걸 느껴요.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이런 얘길 했어요.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지 않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이게 왜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냐 하면은 철저한 수학적인 수열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우리에 몸이 쫙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아주 아름다운 질서를 찾아낸 거예요. 그것이 모두 묻어있는 거죠.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신실의 신앙을 갖고 학문의 세계를 내려다 보면은 막 너무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범죄 심리학도 아름답더라구. 범죄가 아름답다는게 아니라 인간을 그렇게, 그렇게 작용하게 만드신 하나님.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그렇게,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그걸 이렇게 보면서 거기에서 인간에 추함 때문에 인간에 추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에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거예요. 모든 것들이 그냥.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아 그렇구나, 하나님에 아름다움은 전 우주에 모든 지식 속에 모든 사실 속에 깔렸구나, 야 찾으러 다니자’ 그럴 필요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게 찬란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밤하늘에 별이 마치 깨를 쏟아 놓은 것처럼 ‘확’ 많아도 그 별 하나와 별 하나 사이에 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먼 거리예요. 북두칠성에 네 번째와 다섯 번째의 거리가 900만 광년이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런 하나님에 아름다움의 진수, 그 꿀단지 같이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모두 모아 놓은 특별한 한 장소가 있어요. 거기서 그걸 찾는 거야. 그게 뭐냐면 성경이예요, 성경.성경. 그래서 이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들을 모아논 보고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온 우주를 싸돌아다닐 비행기, 로켓트를 타고 싸돌아 다니는 거 보다도 요한복음을 펼쳐놓고 읽는 그것이 훨씬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비록 나는 가진 지식 없고, 그리고 다른 사람만큼 탁월한 학문에 지혜가 없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 만나요.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나님은 수많은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심지어는 영혼이 없는 피조물과도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 자신의 아름다운 속성을 현시하시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 속성이 어떻게 사람들 속에서 피조물들 속에서 실현되는지를 보여주시는 거예요. ‘확’ 가슴이 저밀정도로 그 순간순간이 아주 현란한 거예요. 현란한 거야.
그 분이 팔이 다쳐가지고 이제는 연주를 못해요, 김영국씨라고 있어요. 그 바이올리니스트? 그 연주회를 딱 봤는데 말이죠, 바이올리니스트가 쫙 연주를 하는 거예요. 땀이 막 흘러요. 그러고 한 20분쯤 되니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뭐예요? 그 선율 하나에도 사람이 가슴 저린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눈물을 막 흘려, 물론 저 뒤에서 껌 씹고 자는 사람도 있지. 그 뭐 어딘 없겠어요?
그러면은 하나님에 말씀이 울려 퍼지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이겠어요? 그 비교할 수 없는 거죠. 그거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부스러기들을 모아 놓은 시간이예요. 근데 하나님에 말씀이 예배 속에 선포되는 이 시간은 하나님에 아름다움에 진수가 ‘팍’울려 퍼지는 시간이예요.
(찬양)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그러면서 언젠가는 기도원에 가서 말씀을 준비하다, 산에 올라가다 무릎을 딱 꿇어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인간인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런 진수가, 하나님에 아름다움에 진수가 성경이예요. 그래 이 성경은 항상 좋은 이야기만 나오는건 아니예요. 왜? 좋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이 찬란하게 보여주시고 싶은 당신에 속성이 있고, 악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이 찬란하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으신 거예요. 의심하고 회의하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눈부신 속성이 있고,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충성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빛줄기처럼 나타내 보여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에 눈부신 속성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아까 얘기했듯이 사람이 형벌을 받고 죽는 것은 좋은 건 아니예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 하나님에 속성은 찬란한 거예요. 기가막힌 예증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잘 부르던 복음성가 있죠? ‘무화과나무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그러면서 그 타박국에 나오는 찬송이잖아요, 그쵸? 마지막에 그 유명한 찬송이잖아요. 그게 무슨 뜻이냐 이거예요?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으니까 그러나보다.
문맥이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이 유다나라가 망해져 가는데 하나님에 뜻대로 살지를 않고 아랍나라에 덧붙여가지고 거기에서 그냥 거기다가 거 저기 아부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더럽게 사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번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선지자는 ‘이거 말도 안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말하자면은 하나님한테 항의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에 하나님이 마지막에 될 일을 보여 주셨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에 커다란 심판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인간들을 싹 쓸어버리시는 거예요. 쓸어버리실 때 하나님이 전쟁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쓸어 버리시잖아요. 그러면 전쟁이 일어나서 죽을 땐 항상 악한 사람만 골라서 죽어요? 예?
6.25때 죽은 사람들은 모두 다 나쁜 사람들이었어요? 아니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그 나라로 보면은 하나님의 커다란 형벌이고 심판이예요. 그 광경을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저주받은 상태가 사람들이 다 죽고,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고 뭐고 다 없어져 버렸어요. 이제 굶어죽게 되있는 거야. 근데 뭐래? ‘난 기뻐하리라, 난 기뻐하리라’ 왜 기뻐하냐 이거예요?
무화과 열매도 없고, 포도나무 열매도 없고, 송아지도 없어서 밭도 갈 수가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인제 완전히 거지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고, 불의하신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이 형벌을 받아서 심판으로 다 부서져버린 그 폐허위에 찬란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 속에서 시인은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막 감격을 하는 거예요. 내일 굶어죽는 건 일도 아니예요. 어차피 잠시 머물 세상 속에 스치듯 살아가는 게 인생인데, 영혼을 향해 ‘확’ 가슴 벅찬 감격을 누리며 그거예요. 그게 성경 속에 엑기스처럼 다 농축되어서 들어있는 거예요. 농축되어 들어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성경을 사랑 해야될 이유라 이런 얘기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그러는데 신앙이 건강하질 않아요,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냐면은 성경에 글자는 읽는데 그 글자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발견하는 신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나도 모르게 이끌리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거예요.
아름다움이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하나님에 찬란한 아름다움이 성경에 모두 골고루 묻어있는 것은 또 아니예요. 어느 곳은 진하게, 어느 곳은 여리게,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하나님에 아름다움이 묻어있지 않은 곳은 없도록 그렇게 묻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럼 여러분들은 묻고 싶겠죠.목사님 그럼 성경에서 그 진하게 묻어있는 그 아름다움에 덩어리들이 어딥니까? 거기로 가보고 싶습니다. 그럴꺼 아니예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아는 것이 하나님에 모든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으로 들어가는 관문 이예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에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해동안 사시면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수 많은 인간들과 만나시면서, 관계를 맺으시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속성을 보이는 사람의 인격 속에서 풍부하게 나타나 보여 주시는 거예요. 나타나서 보도록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속성이 우리와 지금 관계를 맺고 있고, 이 모든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속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은 인간이 악하게 살아도 결국은 하나님에 영광에 이바지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악하게 살면 마지막에 어떻게 비참하게 죽는다는가를 보여주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죠. 근데 그 방식은 성경이 권장하는 영광 돌리는 방식이 아니예요. 그건 부정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드는 방식이예요.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에 자녀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에 성품이 속성이 우리를 통해 찬란한 빛으로 나타나되 그 하나님과 그런 관계 속으로 우리와 맺은 관계와 같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을 사람들에게 갖게 만들어 주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거예요.
그런 방식으로 영광을 돌려요. 어떻게 하죠? 할 설교에 절반을 딱 했는데 나머지는 내년에 와서 하면 되겠죠. 안 불러 줄지도 모르지만. 근데 어쨌든 하나님에 찬란한 그 속성이 눈부신 빛이 이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그것들을 나타내게 하시려고 하나님 없이 형벌 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충분히 죽어있는 인간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에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에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평소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여러분 누군가 이 설교단에 서서 나에게 하나님에, 하나님에 그 아름답고 놀라운 그 성품을 티끌만큼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그 설교자에 모든 것을 용서 하겠습니다’ 인간으로써에 삶에 최고에 가치는 이렇게 하나님에 아름다우심을 자기의 구속을 통해서 찬란하게 드러내는 것, 그것이 인간 존재의 가치예요. 변호사로 일생을 살 것이냐, 아니면은 똥이나 푸면서 일생을 살 것이냐,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살 것이냐, 리어카나 끌면서 채소장사나 하면서 살 것이냐, 공무원을 할 것이냐, 아니면 구멍가게를 할 것이냐 이거는 모두 삶의 양상이예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더 많이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못한 직업이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덜 드러내는 것도 아니예요.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찬란한 당신의 속성을 당신과 관계를 맺은 우리들의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구속받은 그 이후에 삶도 넓은 의미에서는 구속의 과정 속에 들어 있는거죠. 왜? 아직은 우리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찬란한 성품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거죠. 이러한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원래 이런 모든 계획이 원래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것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을 때에는 하나님 자신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하나님만 알도록 감추어져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것이 시간에 흐름에 따라서 이렇게 펼쳐져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접힌 채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었을 때에는 필연인데, 이것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펼쳐질 때에는 이게 필연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우연을 이용해서 펼쳐지는 거예요.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다면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왔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누군가에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나온 거예요. 근데 그것은 알고 보면 하나님 안에 거기에 가기로 작정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에요. 펼쳐질 때 이것은 접혀졌을때의 그것과 다를 수 없어요.
하나님 마음 안에 이렇게 때가 차면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구속하고 그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눈부시고 찬란한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 인간들에게 알게 하시고자하는 하나님에 영원한 계획이 있었어요. 그것이 때가 됨에 이 시간 속에서 찬란하게 펼쳐지는 거예요.우리가 바로 그런 죄 사함, 곧 구속을 입은 사람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구속의 이유가 바로 이렇게 존재에 있어서 형언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이 이 세계에 피조물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드러내시는 그 속성의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우리로 하여금 발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끔찍한 죄 가운데서 그리스도에 피로 구속 하실 뿐 아니라 구속받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진리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고 끝없는 연단과 그리고 시련 속에서 주님을 알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우리를 이끄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아름답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거예요.아 위대하신 하나님, 그 분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구속받은 하나님에 자녀, 하나님 안에 이렇게 접힘이된 그 뜻이 우리에 구속 속에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우리에 살아가는 이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필연적인 뜻들이 우리를 통해서 남김없이 선하게 이루어지도록 그렇게 오늘도 주님에 아름다움을 배워가며 그 지식 속에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예요. 구원받는 하나님에 자녀에 행복한 삶이예요.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날마다 우리에 마음 안에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가득 채워서 날마다 그 하나님에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눈부셔하는 인생을 살다가 그래서 인생에 마지막 이 세상에 이 세상에서 우리에 육신을 벗어버리는 그 날이 이 땅에 있는 날 동안에는 육체 바깥에 계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가장 탁월하게 바라보는 그런 삶을 살다가 주님앞에 가는 거예요. 겉 사람은 후퇴해요 날마다 죽음에 기운이 우리에 육체를 삼키기 때문이예요. 육체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때로는 죽음에 기운이 우리에 정신도 삼켜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고 이제는 주님께 버려진 것 같고 그리고 나는 아무 유익한 것이 없는 그런 비참하고 쓸모없고 때로는 자신도 자기가 싫은 존재가 되기도 하는, 그때마다 우리는 다시 생각하는 거예요.
왕이신 나에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에 이름을 송축하리다
그러면서 그 불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죽음에 기운에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삼키는 그때에도 이 죽음에 기운이 우리를 삼키는 이것이 사실은 완전히 우리를 벗고 하나님을 뵈옵기 위한 하나님이 우리를 완성해 가시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죽음에 기운이 우리를 삼키는 것도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송축하고 그 아름다움에 한없이 감격하면서 사는 이런 사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 받으시는 영광은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인 것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