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사람들은 이 신앙의 본질이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간의 지성에 신앙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인간의 신앙의 본질은 감정에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언제나 지성과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신앙의 본질은 의지에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논의는 유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좌소는 인간의 마음이고 그 마음은 우리의 영혼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고 밖으로는 인간의 모든 삶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 자신이 신앙에 붙잡히게 되면 그 자신이 그 신앙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 이 모든 총체가 사실은 신앙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이 디모데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목회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들 같은 자기의 디모데에게 ‘경건의 비밀이 크다.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라고 말한 후에 곧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언급합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함을 받으시고’ 등으로 개진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리고 승천하시고 영광가운데 올리우시는 사건을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경건한 삶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 후에 이렇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직전에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하고 외치는 것은 결국 앞에서 언급한 모든 신자들다운 삶을 살게 하는 비밀이 경건에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경건의 비밀이 곧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영성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을 하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의 본질을 표현하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교의 영성과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자들은 ‘경건- 삐에따스’ 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했고 그것으로서 오늘날 우리들이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폭 넓은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의미를 담아냈던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를 맺은 사이로 태어납니다. 뼈 속 깊이 사무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나죠. 그 인간에게 추호의 경건도 없고 어떠한 경견의 모습도 그 마음 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에요. 그러다 그가 신자가 되면 그렇게 막 살던 인간의 마음 안에 주님을 향한 탁월한 경건이 생기게 되었어요. 그래서 경건한 성도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 경건의 비밀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이 경건은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인간의 경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에요. 이 경건을 구약성경에서는 경외라고 표현했습니다. 히브리말에서 이 경외는 문자적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해 이끌리는 사랑을 동반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죠. 십자가에 경험은 바로 이 고전적인 경건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 속에 불러일으킴으로 그 존재가 경향성을 바꾸게 만들어주는 것이죠. 이 일을 위해서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에게 이 경건의 요소가 되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경험하게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그리스도 예수께 짊어지게 하셔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자기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일평생 하나님 아버지에게 불순종 하신 적이 없이 온전한 순종과 복종의 삶으로 사셨는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끔찍한 진노를 퍼부어 그 순결한 예수의 몸을 짓이겨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하나님이 전가시킨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렇게 누군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당함으로 우리를 살리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순결하고 죄 없으신 그리스도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육체 위에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처절한 분노는 이 세상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죽음으로 타인을 위해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지신 것이니 그의 그 진저리쳐지는 그 끔찍한 고난은 죄를 모든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당해야 했던 그 죄 값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로 인하여 두려워 떨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발현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각하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우리의 죄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참지 못하시는 그 끔찍한 심판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심판이 끔찍하고 격렬할수록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와 함께 어울릴 수 없는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충만하여 계신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며 존재에 있어서 무한하고 그리고 불변하고 영원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경건의 맨 처음 시작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기와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무한한 질적인 격차와 도덕적인 차이 때문에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느끼고 그분 앞에 엎드려서 두려워 떠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 올려야 할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의 제목을 말하기 전에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가 기도 앞머리에서 상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너희들이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거라. 제일 먼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거라.’ 거기에 나오는 묘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어서 그 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에 의해 창조된 아주 하잘것없는 피조물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그 속에서 하나님 향한 탄원을 올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도무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당신의 부름을 받은 종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 옷깃을 여미고 사는 두려움과 지극한 떨림, 그것을 우리가 보여 주었다면 이 백성이 특히 교회 안에서 구원받은 신자들이 이렇게 방자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크고 높은 위엄 앞에 엎드려 두려워 떠는 그것이 경건의 출발입니다. 오늘날 현대적인 신앙에서 바로 이러한 신앙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적응적인 신앙이 되고 기독교의 진리를 이 세상의 견해에 쉽게 내어주는 것을 서슴치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이끌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조인들을 심판하시고 온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셔서 당신의 주권을 홀로 펼치며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위엄 앞에 엎드려 진멸될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지만 그것으로 끝나면 그가 올바르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는 모든 두려움은 이교의 종교, 그리고 우상숭배의 신학적인 기원이 되는 것이죠. 기독교의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두렵고 떨림을 이 모든 종교보다 강조함니다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교는 그런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그분을 피하고 싶지 않은 뭔가 알지 못할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여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이끌리는 자기의 경험이 함께 내재하는 것이죠. 그래서 두렵고 떨리면서 그분에게서 도망치고 싶기는커녕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그분께로 더 깊이 이끌려 들어가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합쳐져서 기독교적인 경건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영성이냐, 삶이냐 이런 종류의 것들을 의논하고 논쟁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그의 지성을, 그리고 그의 마음을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에 대한 인상 앞에 부복하고 그리고 영혼과 그의 모든 마음에 그 신적인 인상에 강력히 지배받게 될 때에 그 영향력은 영혼과 마음, 그리고 심지어 그의 육체에까지 나타나고 온 삶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영향력이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이런 경건의 힘이 현저하게 결핍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다수의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그는 이 세상에 탁류를 거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무 타락했다고 그랬는데 지구 역사상 세상이 타락하지 않은 적이 언제 있으며 세상이 너무 어둡다고 하는데 환했던 적이 언제 있는지 나는 묻고 싶습니다. 어두운 밤바다에 찬연히 빛나는 단 한 대의 등대는 수 백 척의 배들을 안전하게 항구로 인도하기에 충분합니다. 온 바다 위를 수 천 개의 조명탄을 쏘아 올려 대낮처럼 밝혀야 풍랑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등대라도 밝게 빛나고 있으면 수많은 별들이 그 등대를 보고 피하게 되는 것이고 세상에 어두운 것은 등대와 같이 온전한 경건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기회이며 배경이 되는 것이죠. 세상이 이렇게 썩고 하나님의 이름도 짓밟고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경건의 필요성을 더욱더 증대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마다 자기의 교회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각 교회의 전도대원들이 아파트에서 싸움까지 한다니 이것은 정말 통탄할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해전술로 오는 나라가 아닙니다. 서 말의 가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줌의 누룩이 필요한 것이죠. 그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의 영향력은 커다란 능력을 갖습니다. 종교개혁자 오히코나물파디우스는 말하기를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소수가 미치는 효과는 그렇지 못한 다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설파하였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 세상 타령, 세상이 너무 썩고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핑계로 우리의 경건 없음을 감추고 우리들이 이 세상 속에 묻어서 그렇게 살지 우리 깊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현대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신학적으로 회심의 문제입니다. 우리 개혁 신학은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방성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의무를 도외시 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마땅히 자신의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참된 중생에 이르러 회심한 신자가 되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극장 구경만도 못한 예배, 민방위 교육을 방불케 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진력난 백성들이 주일마다 예배당에 모인 그 숫자를 가지고 목회자들은 자긍심을 느끼는 이런 풍조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회심은 중생의 결과입니다.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은 성령의 독단적인 사역이지만 회심은 그런 중생의 결과가 논리적으로 그의 의식 속에 나타난 것이죠.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와 그리고 그리스도이외에 길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이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통렬하게 참회하고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 외에는 아무런 구원의 길이 없다고 믿으면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인간의 구원이 공로가 아닌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인간의 선행과 공로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에 아무런 일도 가져오지 못한다. 오직 믿음만이 그 영혼을 진실하게 변화시켜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영혼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오직 믿음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진지한 회개와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는 자신의 “Born Again" 이라는 논설 속에서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누구든지 성인이 된 사람이 자신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뇌가 없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라고 말이죠. 도대체 오늘날 조국 교회에서는 회개에 대한 설교가 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와 함께 여러분 모두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거기가 어디든지 예배를 드리고 목회하는 현장에서 온 교인이 온 목회자가 모든 예배자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고 통회의 눈물로 눈물바다를 이룬 예배가 언제였는지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 교수님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선명한 선포, 회개하라는 선포를 목회자들로부터 들어 본지가 정확하게 3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고백을 한지가 20년 전이니까 50년이 흐른 것입니다. 목회자의 이런 안일한 대처 속에서 교회 안에는 사실 상 회심하지 아니한 수많은 신자들이 자라고 있고 몸은 교회에 나왔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에는 결코 속해 본적이 없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본적이 없는 그러한 사실상 이교도요, 불신자들이 교회 안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대세를 형성해서 교회를 움직이고 교회를 세속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고 그리고 그 싸움은 이미 너무나 커다랗게 대세가 기운 싸움이어서 목회자들은 그것과 함께 도전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목회 사역을 하고 나서 마지막 때에 어떻게 주님 앞에 우리의 얼굴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뒤로 물러났던 우리의 목회 사역과 현실에 타협했던 수많은 우리의 타협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소명의 발자취였단 것입니다. 우리는 이일에 들어설 때에 이미 이 세상 영광과는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존귀를 누리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모든 그 길에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우리는 그 길을 버렸습니다. 세계 평화의 비전 때문도 아니고 대교회 설립을 위한 꿈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예수님, 그 분이 바로 인간을 위해서 우리가 져야 할 그 십자가를 홀로 지시고,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예화) 대구를 내려갔습니다. 이천 한 오백여명 모이는 교회의 집회에 갔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출타 중이고 저 혼자 청년들을 집회했는데 부목사님이 두 분이 자기 교회 자랑을 시간, 시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참 좋은 교회구나. 좀 뭐 좀 배우고 오면 좋겠다 그래서 뭘 좀 물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에 제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그랬더니 ‘장로님들의 교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목사님도 보수 신학을 공부했으니까 중생과 회심에 대해서 아시죠?’ ‘아, 예. 알죠.’ ‘그럼, 중생과 회심 없이는 구원도 없죠?’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구에서는 중생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교인의 비율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그래 한 동안 고심하더니 ‘30%쯤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교회에 대해 무얼 자랑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맡고 있는 70%의 양이 구원이 없는데 이 건물, 이 탁월한 교회 운영, 성도들의 헌금, 잘 갖추어진 양육 체제, 최근에 들여온 음향기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담임 목사님이 텔레비전과 방송, 신문에 이름을 날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똑바로 하십시오.’ 가슴에 못을 박고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경건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에요. 이 경건은 중생과 함께 우리 안에 경건의 기쁨이 심겨지고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과 성령의 원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이 우러나오며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복음적인 거룩을 향하게 되는 것이에요. 참되지 않은 성도는 예수 믿고 행복해지는 것이 목표지만 참된 성도는 거룩하게 되는 것이 목표에요. 구원과 함께 자기 안에 시작하시는 이 놀라운 일들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것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 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정말 사랑하는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시기 때문이에요. 태어날 때에 인간은 뼈 속 깊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 죄는 그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감을 느끼며 대적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죽으신 그 큰 고난과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도 자기 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큰 사랑에 대한 이끌림이 없이는 누구도 이 세상에 물결을 거슬러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혹은 장사꾼으로, 혹은 목사로, 혹은 선교사로 혹은 학생으로, 혹은 농부로, 교회의 직원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은 모두 삶의 양태일 뿐이에요. 하나님은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경건한 사람들을 사랑세요. 그리고 오셔서 그 경건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성품의 비밀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한 사람이 진정으로 경건한지, 경건하지 않은지는 경건하지 않는 세상 속에 그 사람들을 던져보면 알 수 있어요. 이런 경건을 소유했던 시인은 온 땅에 충만한 더러운 인간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인간들을 만났을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저들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나의 눈에 눈물이 시내를 지으며 흐르나이다.” 특히 여러분들은 신학의 도상에 있는 지체들입니다. 이 신학이 학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 가운데 신학만큼 독특한 학문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학은 차마 학문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이 신학은 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에요. 그런데 이 하나님에 대한 학문은 인간이 이성으로 지존하신 하나님을 묵상함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런 학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을 통해 은혜를 흠뻑 받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존재의 어떠하심과 성품의 어떠하심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의 존재가 무엇이고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우리들이 진리인 성경을 통해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은혜를 받고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우심에 대해서 눈 뜨게 될 때에 이렇게 가슴에 밀려오는 커다란 감동과 인상은 신학의 증거가 되는 것이에요. 그 사람 안에 학문에 대한 지식과 학문 방법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에 이렇게 들어온 신학의 진리에는 부지런한 작업을 거쳐서 놀랍게 빠른 속도로 이것들을 이론하고 논리화해서 기독교 사상의 틀들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이 안에 많은 지식과 학문은 있는데 신앙생활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 찬란한 진리의 빛과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대한 경험이 없다면 그는 그 많은 학문과 기술이 빚어 낼 수 있는 재료가 없는 거예요. 기꺼해봐야 이 안에서 자기 심령 속에서 솟아나는 거라고는 죄에 대한 욕망과 이 세상에 대한 욕구 밖에 없는 거죠. 학문들이 그것들을 빚어낸다고 하면 그것들을 결국 무엇에다 쓰겠어요. 말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신학을 한다고 말하지만 모두 자기 밥 벌어먹기 위한 재주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그러나 또 한편으로 아무리 많은 은혜의 빛, 그리고 진리의 깨달음들이 어떤 인상들이 밀려들어와서 신학의 질료가 많이 형성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빚어서 조직해낼 수 있는 학문과 방법의 틀이 그 마음 안에 없다면 그것은 인상으로만 남아서 잠시 생겨났다간 부패해서 사라지고 생겨났다간 부패하고 사라지고 해서 그는 전혀 논리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임무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철저한 신앙생활. 어제도 월요일마다 신학생들을 교회에서 가르치는데 따끔하게 일침을 놨어요. “내가 50대 중반인데 아직까지 내가 5시간 이상을 안 잔다. 너희들이 6시간 이상 자면 죄 짓는 거다. 몸이 아프지 않으면서 6시간이상 자면 죄 짓는 거다. 최근에 내가 이일을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신학교 들어오기 전에서부터 주님을 만나고 이렇게 살았다. 누구의 이야기처럼 나는 그렇게 수면시간을 줄었기 때문에 일찍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썩은 채로 길게 살기보다는 깨끗한 채로 짧게 살고 죽겠다. 썩어서 없어지기 보다는 닳아서 없어져 죽는 것이 훨씬 보람되지 않겠느냐?” 몇 학생들이 한숨을 쉬었어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여주시지 않아요. 철저한 기도생활, 이 신학대학 다닐 때에 여러분들의 성경은 이 성경이 쭈굴쭈굴 해야 되요. 성경을 읽다가 울어서. 그렇게 돼야 해요. 매일 그럴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그래야 돼요.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 그냥 성경을 읽어요. 그러나 깊이 읽으면 자기가 성경에 읽히는 거예요. 그 단계까지 들어가야지만 진리의 빛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 것 없이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저책에서 그 책으로 옮겨 다니면 난해한 이야기만 머릿속에 안개처럼 돌아다니지 아무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에요. 철저한 신앙생활, 그리고 몸이 부서지도록 공부를 해야 돼요. 몸이 부서지도록 공부하기 싫으면 소명이 아니에요. 땅 장수가 땅에 대한 정보를 싫어한다면 직업을 바꿔야죠. 음식 만드는 사람이 남의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에 비참한 마음이 들고 어떻게 하면 음식을 제대로 만들어서 영업을 할까하는 마음이 안 생기면 음식점 문을 닫고 가서 구두닦기를 해야 하는 거예요. 보수 신학교이라고 알려진 어느 학교에 가서 이만한 학생들이 모였는데 기독교강요를 읽은 학생 손을 들라고 하니까 두 학생이 손을 들었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것이에요? 그러니 진리에 대해서 자신도 조직적인 생각을 갖지 못하고 목회라고 하게 되니 그게 교인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겠습니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신학교 시절에는 두 군데가 닳아야 합니다. 무릎이 닳고 팔꿈치가 닳아야 합니다. 나는 공부하지 않는 신학생들을 보면 분노가 생겨요. 마음을 가눌 수가 없어요. 그 젊은 청춘, 하나님 앞에 아골 골짝, 빈들에도 가겠다며. 근데 아직 갈 때가 아니잖아요. 학교다니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골 골짝은 나중에 가고 우선 공부나 해라.” 붙드는 진리가 있어야지 그 진리와 함께 죽을 거 아니에요. 붙들 진리가 없는데... 공부해요. 정말 공부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서 여러분들처럼 신학교에 있을 때에는 한 학기에 한 두번은 공부하다가 엎드려져서 코피를 쏟아야 돼요. 그래도 안 죽어요. 죽으면 순교해. 웃을 것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가 이루어놓은 어떤 것, 업적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것보다 훨씬 소중한 것은 그 일을 이루어가는 동안의 과정,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배고프고 주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하고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이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파하고 하는 가운데 주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학교는 그 학교가 아니지만 그러나 여기서 열심히 공부하고 주님을 만나서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들이 있는 그곳에 여러분을 지켜보는 사람들, 그들의 복된 사람들이 되도록 그렇게 진리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게끔 경건한 가운데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