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비밀 그리스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딤전 3:16)
녹취자 : 이민희
우리들이 신앙의 진정한 자리를 어디에다가 두어야 할 것이냐를 두고 역사를 보면 늘 어느 한 쪽에 치우치곤 했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 자리하는 것이고 우리의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칠 때에 그것이 진정한 총체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렇게 일어난 마음의 성향을 우리는 경건이라고 부릅니다. 히랍어로 ‘유쎄베이야’라고 하는 이 경건은 ‘좋은’이라는 말과 ‘두려운’이라는 말이 함께 합쳐진 단어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경건’이라는 말 보다는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썩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성‘하게 되면 구속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배제하기 쉬운 것이고 또 모든 자연을 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던 스피노자 이후 서구에서 이어지는 범신론적인 사유, 현대에 와서는 과정신학적인 사유를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신학자들은 영성이라는 말 대신 삐에따스(경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고 사용하였습니다. 이 경건은 인간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에 관한 총체적인 경험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신앙의 총체적 경험을 우리들이 놓치게 되면 이성을 강조하여 이성주의로 , 감정에 치중하여 신비주의로 가거나, 의지에 치중하여 도덕주의로 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참된 경험이 부실한 시대에는 언제든지 이렇게 세 가지 방향으로 기독교 신앙이 치우치기를 잘 하였고 오늘 지금의 상황은 이성주의는 이미 지나갔고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그러한 신비한 경향의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생각됩니다. 마케팅교회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리고 소위 이야기하는 이머징 교회들이 뜨기 시작하는 이러한 상황은 결국은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경건의 총체성을 놓치고 감정중심에 흐르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포스트모더니즘 적인 사고를 타고 오늘날 교회 속에 들어오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편지하고 있는 바로 이 내용은 이러한 현대의 신학적인 상황에 대해서 그런 신학적인 상황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빠져 들어가며 이 참된 기독교적인 경건으로부터, 참된 신학으로부터 멀어지는 다수의 많은 교인들에 대한 성경적 치유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경건이라고 하는 것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명제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것이 곧 경건의 핵심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학교에 대해서 바깥에서 좋은 소식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공부한다는 좋은 소문을 여기저기서 들을 때마다 참 마음이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함에 있어서 ‘신학함’은 마치 하나의 말에 매달린 마차와 같은데 그 마차는 필연적으로 두 개의 바퀴를 필요로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학문과 경건, 이 두 개의 바퀴가 온전히 제자리에 붙어있을 때에 힘차게 이끄는 말에 의해 마차는 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둘 중 하나가 없거나 부실할 때에는 대형사고로 이어지게 됩니다.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학문의 방식을 따르기는 하지만 학문 안에는 하나님에 관한 많은 신학적인 지식들을 하나로 묶어서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는 통합의 능력이 학문 그 자체 안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들이 학문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통섭할 수 있는 그러한 어떤 학문위에 있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통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죽은 지식에 불과하고 그 사람이 그 지식을 가지고 할 수 일이라고는 그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파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학문에서 통섭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금융학과 공학을 융합시키고 그리고 미학과 심리학을 융합시키고 과학과 미술을 접목하고 또 미술과 공학을 접목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통섭의 필요를 일반학문에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이유는 20세기 이후에 학문이 전문화라는 미명하에 놀라운 분화의 작용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신학도 똑같이 그러한 학문의 흐름을 따라서 아주 지나치리만치 세분화되었던 것입니다.
(예화)
신학교에 계시는 교수님에게 ‘저 교수님 로마서의 바울서신에 대해 문의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저는 구약전공입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약을 전공하는 교수님에게 ‘로마서 9장에 대해 문의사항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저는 8장부터 전공입니다’라고 했다는 우스게 소리가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어느 외국에 가서 박사과정의, 그리고 최소한 석사과정에서 공부하는 많은 지체들에게 컨퍼스를 인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강사와의 대담회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강사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고 그때 몇 사람이 질문을 하였는데 저는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질문 나오는 내용들이 저희 열린교회의 새가족반에서 자주 듣던 질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학생들이 깊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목회를 위한 공부와 논문을 쓰기위한 공부는 다른 거구나. 이것들을 통합해서 엮어낼 수 있는 그것이 필요한데 그 통합의 능력은 학문자체에 있지 않고 사실은 경건에 있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은 정통 유대인이었고 랍비의 길을 걸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이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물을 흠뻑 먹은 사람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대의 히랍의 철학자를 비롯해서 로마의 걸출한 사상가들을 모두 섭렵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가 사도행전에서 설교한 내용을 보면 ‘아리스떼아스’라는 히랍희곡에 나오는 인용문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당시의 지성인들이 그렇듯 방대한 히랍의 문헌들에 능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하고 많은 지식들, 그런 지식들이 일평생 그냥 쪼가리 쪼가리 그렇게 돌아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로 모두 묶어주는 위대한 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다쏘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없이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쪼가리 쪼가리 돌아다니고 이 굽이 저 굽이 각기 다르게 흐르며 달음질하던 수많은 지식들이 한 점으로 모이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마섹의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사도바울의 이 다마섹의 체험은 이후에 펼쳐진 그의 선교사적인 삶, 목회자적인 삶, 한사람의 진실한 성도로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삶, 복음전파에 대한 치열한 탐구, 그리고 이후 펼쳐진 구원론과 기독론을 중심으로 한 바울 신학의 전개,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점(구심점)을 중심으로 파문처럼 번져갔던 것입니다. 바로 그 구심점이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 되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요소, 소위 이야기하는 ‘다트 엘로힘사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사상이 골간을 이루며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사도바울에 의해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사상으로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는 탁월한 구약의 지식은 신약에 와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나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경건은 학문보다 앞입니다. 그래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던 칼빈이 항상 모토로 삼았던 것이 경건과 학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론 앞부분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모든 물질의 원소와 구성요소를 알고 그 모든 것들을 다 아름답게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알고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른다면 그런 것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오직 믿음으로 그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내신 줄 알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이 훨씬 훌륭한 사람입니다’ 라고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경건 하나가 있으면 사실은 학문이 없어도 신실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시골의 할머니들은 문맹자였는데도 주일날 설교 한편씩 들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훨씬 덕스러운 삶을 살았고 마지막 일제시대 때에 순교의 길까지 갔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가 매우 중요하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신학을 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가 함께 가지 않으면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신학교의 개혁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신학교의 개혁이 아주 중요한 핵심을 잃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플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고 여러분들이 진정한 설교가 무엇이고 온 회중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고 그 예배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서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인 것을 알고 참으로 더러운 인간인 것을 알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그 신학은 놀라운 생기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배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종교개혁 이후에 있었던 개혁파 전통주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데 최근에 읽었던 논문들을 보니까 그 시대의 사람들은 정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학문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스콜라주의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미세하게 논쟁하였습니다. 존 오웬 같은 사람을 예를 들자면 네 가지의 방식으로 이런 일들을 해나갔습니다. 성경본문에 대한 참된 주해, 그리고 라틴어교부들의 문헌에 대한 참된 주해, 거기에서 교리를 이끌어내고 그것과 반대되는 다른 교리들과 논쟁하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네 가지의 축으로 진술해나갔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런 사람들이 가르치는 장소가 교회일 경우에는 논점들은 부드러워지고 교훈적이고 교화적으로 통합해내는 일들에 훨씬 더 치중했습니다.
신학에는 로디카의 요소와 레토리카의 요소가 있습니다. 즉 논리적인 요소와 수사학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수사학적인 요소가 훨씬 더 강조되어야 하고 그리고 신학적인 논쟁에서는 로디카의 요소가 훨씬 더 강조되어야 했기 때문에 이것들을 적절히 분배해서 사용하는 놀라운 지혜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전개를 하든지 간에 신학을 균형을 잃지 않고 교회를 위한 신학이 되게 하고 사람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성도로 세우는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신학을 하는 사람 그 자신이 경건과 학문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하면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학자, 하나님 앞에 참회할 줄 모르는 신학생,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 하나를 놓고 그 성경 앞에서 깨뜨려질 줄 모르는 사람의 끊임없는 지식의 대한 욕구, 이런 것들이 건강한 신학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항상 경험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을 보더라도 이런 경건의 세계를 지녔던 사람의 신학 속에는 항상 신비한 요소들이 남아있습니다. 혹자는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이런 신비적인 해석들이 클레르보의 베르나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연합의 교리를 그런데서 근원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주장들이 일리는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기독교강요에 있어서 칼빈의 신비주의적인 요소는 개인적으로 경험한 그리스도를 통한 경건의 비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된다고 봅니다. 사람이 여럿일지라도 올바른 신학 속에서 참된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사실은 이렇게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경험이 다르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복음이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경험의 공통성이 훨씬 더 큰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 간에는 놀라운 질서와 사랑의 일치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되고 또 현실적인 사랑도 그 속에서 꽃 피우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이 경건의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경건이 그리스도를 아는 데에서 비롯된다면 경건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오늘날의 관점은 경건에 마음을 많이 쏟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 신앙을 이용해서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실현의 꿈을 이루는데 이용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이탈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올바르게 돌아오는 일들 없이는 신앙은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기독교안에서 중생과 회심에 대한 설교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다음 시대의 한국의 기독교에 대한 어두운 전망을 우리들이 예감하게 만들어줍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정신 하에서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의 일부이고 그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자아의 실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죄인들의 자아실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면도전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을 향해 회심하고 전향하는 회심 없이는 어떠한 경건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경건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요 경건의 핵심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여기로부터 신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런 두려움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 속으로 이끌리는 사랑의 감정입니다. 이 두 가지가 저는 경건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경건을 인간에게 불러일으키시는 분입니다 특별히 그분의 지상생애 특별히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에게 이러한 그리스도를 알고 경건을 소유하게 되는 구심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부터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경건을 전수 받는데에 있어서 구심점이 되는 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기 전에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일생을 지내신 분이었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기 전에는 천상에서 삼위의 두 번째 위였습니다. 당신스스로 당신의 무한한 신성을 유한한 인성 안에 감추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무슨 일을 행하던지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진 이겨 지듯이 그렇게 처참하게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 것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형벌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구원받을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신 대속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끔찍한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부들부들 떠시는 진노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보복이며 복수이기 이전에, 하나님 자신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거룩한 성품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출되는 의의 반응의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이 의는 자신의 거룩함에 도전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동이요 성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예수의 끔찍한 십자가의 죽음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온 땅과 만물위에 계셔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며 인간에게 단 하나의 불순종과 죄도 용납하지 않은 지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히 크신 엄위와 높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들이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처음 깨닫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이중구조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창조주를 아는 지식이고 또 하나는 구속주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데 그는 명백히 말하기를 이 두 가지 지식 중에서 창조주를 아는 것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이중구조를 십자가사건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그 죄에 대해서 자기 아들을 가감 없이 형벌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한 심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과 구별되는 전적인 타자이시고 만물과 모든 피조세계에 뛰어나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대한 주권을 홀로 가지고 계신 통치주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렇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지극히 끔찍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이상하게도 그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혹은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도망칠 수 없게끔 그를 잡아 이끄는 아주 신비한 사랑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이 두 번째도 보여 줍니다. 죄인을 대신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형벌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발견하고 그 사실이 바로 자기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방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엄위함과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도 구원하고자 하는 그 놀라운 사랑의 힘에 두렵고 떨리면서도 이끌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느꼈던 최고의 신학적인 혼란이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유대교지도자의 편견으로 볼 때에 그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입니다. 신명기서가 가르친바 와같이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구약을 생각해보십시오.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은 예외적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런 사람이었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에녹이 그런 사람이었고 또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세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고 믿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엄위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그 신비하고 위엄에 찬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때 이 사람이 느꼈을 신학적인 혼란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서 영광가운데 다시 살아나 죽음을 보지 않았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신학적 전제가 그의 지성 속에서 모순을 이루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급히 그 신학적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즉, 그가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도 사실이었고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셔서 다시 살리신 것도 사실이었다면 그러면 그 죽음의 이유가 다른데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결을 본 것이 그가 죽으신 것은 죄 때문이었지만 자기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구원받을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때에 밀려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처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는 눈이 멀고 엎드려진 두려움이었지만 이 사실이 자기에게 신학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압도된 위엄과 맘먹는 자기를 잡아끄는 그 신비한 사랑의 위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평생 그 다메섹의 경험에 매여서 예수한분만 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건의 요소,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 속으로 이끌리는 이 불변하는 사랑은 그가 일평생 살면서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 사랑이라면 이것은 감상이고, 그리고 만약에 사랑에 의해 이끌리지 않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두려움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율법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어느 경험으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소망가운데 섬기도록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제가 내리는 성경에 입각한 신학적인 결론입니다. 수많은 증거들이 있지만 그중에 감명 깊은 것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쓸 때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말년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나는 핍박자요 폭행자였으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이 여겨 일꾼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이 두 가지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조국의 교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제 거의 중생과 회심에 대해 설교하지 않고, 그리고 자라난 우리들의 2세들에게서는 회심한 아이들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교회는 온 힘을 다해 그리스도를 만난 설교자에 의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거되어야 하거늘 어떻게 하면 교회가 생존해 남고 그리고 숫자를 늘려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사업을 하는 정신 같은 것들이 교회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화)
지방의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습니다. 부목사 한사람이 나를 만나서 자기 교회 자랑을 많이 해요. 자기네 교회 목사님이 이 도시에서 한참 뜨는 목사이고 교인들이 몰려온다고 이야기를 해요. 근데 너무 자랑을 많이해요. 그래서 제가 궁금해서 “목사님!” “네” “당신은 총신에서 공부했지요?” “그렇습니다”. 당신도 개혁신학을 했으니까 중생과 회심이 무엇인지 아시죠? 네 중생과 회심 없이는 특별한 예외없이 구원없지요? 네. 그러면 당신이 이 교회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장년을 사역하고 있습니다. "몇 명을 사역하고 있습니까?" "600명을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목사로서 손을 얹고 당신의 교인들 가운데 몇 명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갑자기 우울해지더니 “30%가 약간 안 될 것입니다 ” “근데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당신교회가 뜨는 것과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70%가 넘는 교인이 회심한 적이 없는 자연인이고 비 중생자라면서 무엇을 자랑합니까?” 한 침을 놓고 왔습니다.
목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비 회심자가 남아도 목회자는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뜬다, 교인이 몰려온다, 비극이 아니겠습니까? 1000명이 몰려오면 200여명 구원받고 나머지는 구원이 없을텐데 차라리 그 교회에 안 으면 방송선교라도 듣고 회심하지 않을까요?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사조에 대해서 깊이 몸부림칠 수 있어야 됩니다. 몸부림치기위해서는 두 가지가 절실하게 필요한데 자기가 그리스도예수를 만난 경험, 그리고 그렇게 회심과 그리고 중생을 부르짖을 때 수많은 도전들에 직면하게 될 때 끝까지 신학적으로 밀고나갈 수 있는 학문적인 내공. 정말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학의 모든 비밀이 그리스도예수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신학의 비밀의 저장고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알기위해 온 마음을 다해 힘쓰십시오. 그 분의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하셔야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바울의 불후의 아름다운 고백에 나오는 동사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동사가 현재완료인 것을 아십니까. 과거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며 현재적으로 재현되던 사건이었습니다.
(찬양)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제 경험에 의하면 신학의 지식은 그것도 지식인지라 결국은 고린도에서 이야기하듯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은혜의 물에 깊이 담가서 배추를 절이듯 푹 절여서 그래야지만 그 지식이 자기 속에서 용해되어서 사람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양떼들에게 말씀을 먹인다고 할 때 먹고 잘 소화시켜서 그래서 앞가슴을 풀어헤쳐서 젖을 물려야지 먹고 나서 다시 토해서 고기는 고기대로 파는 파대로 얘들에게 먹이면 그게 제대로 된 육아가 되겠습니까. 자기도 소화하지 못한 내용이니까 신학을 많이 배워도 설교는 전혀 신학적이지 않습니다. 소화가 안 되었으니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고민하면서 여러분들이 경건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