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붙잡힌 종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계 2:1)
녹취자: 백지영
우리가 흔히 신학사상은 달라도, 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각각 차이가 나도, 우리 모두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그런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역을 하는 것,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신학사상이 틀린 사람이라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목회를 하고,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선교를 사명을 감당해 나가면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우리 모두 즐겨 쓰는 말,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20년을 목회를 해왔습니다, 지금도 저 목사님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입니다. 그게 도대체 뭘 의미하느냐는 것이지요.
오늘 여기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계시를 사도 요한에게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 각각 계시의 말씀이 주어지는데, 칭찬만 받은 교회도 있고,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고,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 교회가 어느 교회이든지 간에 그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주시기에 앞서서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계시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상태에서 또 어떤 분으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지가 나오는데 이게 각각 다 달라요.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당신 자신을 할 때에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에 다니시는 이’라고 소개를 했지만 서머나 교회에 소개할 때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 또 어떤 교회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아멘이요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시며’, 이렇게 각각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가 주어지는데 이것이 그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자기의 성품을 모두 동일한 비율로 계시해 주신 것은 아니지요. 고난이 많고 괴로움이 있는 시대에는 ‘자비의 하나님’의 성품을 충분히 보여주셔서 핍박받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교회를 위로하시는 것이에요. 불의하고 악을 행하고 돌이킬 줄 모르는 세대에는 ‘하나님의 위엄과 공의’를 보이시면서 사람들을 두려워 떨고 죄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지요. 오류와 비진리가 가득 찬 시대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신실하심’을 보이셔서 불변하는 진리에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그 시대 속에서 혹은 그 공동체의 영적인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각각 당신 자신의 성품의 어떤 면들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어느 시대건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안 전부이다고 말할 수 없도록, 지나온 시대를 보면서 도움을 받게 하시고 자기 세대가 앞서 올 세대에 대해서 도움이 되게끔 하심으로써, 신학에 있어서 이 역사적인 공부의 중요성이 얼마나 우리에게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지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신 그리고 계시는 이미 끝났지만 우리로 하여금 새롭게 당신 성품을 알게 하시는 그것에 충실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축적해서 그래서 그것들을 잘 남겨서 교회를 풍요롭게 하고 다음 세대에 유산으로 영적이고 학문적인 유산으로 물려주고 죽으면, 다음 세대들이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만나는 그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그 위에 쌓아 올리면서 점차 점차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하게끔 그렇게 가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에요. 어떤 때에는 교회가 그 일을 아주 충성스럽게 감당해서 지난 시대에도 별로 없고 앞선 시대에도 많지 않을 위업을 이루어요. 종교시대 같은 것 아니면 그 이후에 있었던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 같은 때 아니면 사도시대 그 다음에 이레네오스 터툴리안을 비롯해서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지는 초대의 교부들의 기독교의 초석을 놓는 그런 시대, 또 이성의 요소들의 섞이기는 했지만 그러한 이후의 신학들이 모든 사고들의 토대가 되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기초를 놓는 일에 허신했던 중세의 시대라든지, 이런 것들이 다 나름대로의 사명을 가지고 그것을 쌓아올리면서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이 세대에 가고 오는 세대에 남겨 놓고 죽는 것이에요.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 개인의 삶을 보면 그 세계의 교회의 역사가 우리 개인의 삶하고 놀라운 일치를 보여요. 그래서 저는 21세에 회심을 했는데, 회심한 이후로 살아온 이 긴 세월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때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관해서,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해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자비에 관해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영원성에 관해서, 이렇게 순간순간 강한 빛으로 다가오셔서 그런 관심들 속에서 학문적으로 경건적으로 성숙하면서 한사람의 목회자는 죽을 때까지 빚어져 가는 것이라 이것이지요.
그런데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자기 계시를 하느냐 하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들고 일곱 금 촛대를 다니시는 이가’ 그랬거든요. 이 성경구절 밖에 없었으면 상당한 혼란이 왔을 것이에요 그런데 그 바로 앞에 그게 뭔지를 다 설명해 주었어요. 그래서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즉 목회하는 사람이요. 금 촛대는 교회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일곱 교회로 대표되는 그리스도 이후에 이어질 모든 종말에 이르기까지 이 지상의 교회를, 별을 붙들고 계신 분이 그리스도시다, 즉 당신의 종들을 붙들고 계시는 것이지요. 당신의 종들을 붙들고 계시고 그 붙든 그 손으로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또 다니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일곱 금 촛대는 교회인데 일곱 금 촛대를 다니신다는 것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 예수의 완전한 주권 그리고 그 교회를 어느 교회에 임재 하셔서 당신의 큰 영광을 보여주시느냐 하는 것이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오늘 날 여러분들의 사고가 매우 잘못 되어 있어요. 내가 금년에도 거의 열 학교 가까운 교회를 다녔는데 학생들을 만나고 대화를 해 보면 너무 걱정스러워요. 꿈이 큰 교회를 하는 거야. 그리고 그 큰 교회가 되는 비결은 목회 기술의 습득에 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1학년 때부터 크고 잘 나가는 교회에 가서 훈련을 받아야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는 매우 생소한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한 사람이 충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보다는 일만 명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지요. 그래서 스태판 차녹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하나님은 소수의 사람이 예배하는 것보다 다수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할 때 더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했어요. 단 조건이 있어요. 그 예배자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어야 해요. 그러니까 만약에 일만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려도 그들이 충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면 충심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두 세 사람을 통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지요. 그러나 그들이 공정하게 하나님을 높인다면 다수를 통해서 더 많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지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 질 때 그 충만은 수의 충만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온 땅의 모든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 자비와 영광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본다면 큰 교회를 해야 되겠다는 것이 꼭 나쁜 생각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중간에 전제들이 다 빠진 가운데 큰 교회만 하고 싶다. 왜? 교회도 크고, 한 번 연설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듣는 것도 나쁠 게 없고, 차도 좋고, 집도 좋고, 월급도 많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이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결국은 교회의 영광은 주님이 그 교회에 다니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 아주 현저하게 주님이 그 가운데 계신 증거를 드러내 보여 주시고, 그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들과 동행하시는 것을 보여 주시고, 그들이 세상을 위해 부르짖을 때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실 때 그것이 교회의 영광이에요.
제가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했어요. 그러면서 요즘은 여러분 교회개척을 한다고 하는데 교회 개척은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개척을 하면 되요. 누가 그래요. 믿음으로 개척을 하라고 해서 ‘믿사옵니다’ 하고 문을 확 여니까 벼랑이래요. 낭떠러지래요.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교회를 개척하지 않았거든요. 옛날에는 시유지 땅에다가 미군부대에서 텐트 얻어다가 그리고 사과 집에서 궤짝 하나 주워다가 놓고 했고 쌀집에서 가마니 얻어다가 깔았어요. 그러니까 다 얻어온 것이지 자기건 없어요. 거기서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우리 주일학교에서 찬송 부르면서 교회를 시작했어요. 호롱불을 켜놓으면 사람들이 모여 그리고 구청에서 와서 뜯으면 또 하고, 뜯어가야 텐트 하나 가지고 가는 것이니까 또하고, 또하고. 그러니 구청에서 지쳐서 그러면 차라리 불하를 받아라 그때 땅이 하도 많으니까. 그러면 온 교인이 눈물로 기도해서 돈을 갖다 주고 불하를 받고, 강변에서 모래를 퍼 다가 블럭을 찍어서 교회를 지었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렇게 해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다 차려놓아도 개척교회라고 안 오는데 지금 그렇게 하면 누가 올 사람이 있겠느냐 그렇게 하면서 설교가 아주 은혜롭게 끝났어요. 그런데 그 중에 모 대학교의 사회학을 전공한 교수가 있었어요. 지긋하신 분인데. 그때 내가 교수였어요. 그분이 “교수님은 그렇게 천막치고 교회를 시작하면 오늘날 올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씀하시지만요 제 생각은 좀 틀립니다. 그때처럼 설교하면 지금도 갑니다.” 그때는 신학적으로 부실했어도 정신이 있었어요. 목회자가 그 길 들어설 때 대형교회 만들어서 큰집에서 살고 월급 많이 받고 그런 생각, 그렇게 폼 나는 목회를 하는 분도 없었고 그러니까 그런 표상이 없는 것이지요. 오직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요즘은 개척하겠다고 하는 전도사들이 전도를 못해. 아니 안 해. 그리고 설교만 하려고 하는 것이에요. 자기가 무엇 그렇게 명설교라고. 그러니까 교회를 해도 누가 모아주면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자기 생각이지 모은 그 사람들이 얼마나 수준이 놓은데. 그런 생각가지고 안 된다 이 얘기에요. 교회의 영광은 주님이 거기에 임재하시는 것이에요.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그런데 제가 오늘 관심을 갖는 것은 일곱 금 촛대에 다니시는 그분이 바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이지요 오른 손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선택을 보여 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주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어요. 그러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셨다고 했는데, 이게 모두 긍정적인 면만을 보여 줍니까? 그러면 에베소 교회에의 이 목회자도 예수님의 손에 붙잡혔는데, 그런데 오늘 뭐라고 그래요?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져라. 만약에 내가 안 그러면 내가 내 촛대를 자리에서 옮겨버리리라.” 무슨 뜻이에요? 여기서 주님이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다고 하는 그것은 우리가 설교시작하면서 “나는 주님의 손에 붙들리고 싶습니다” 말할 때 그런 의미의 붙들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의 사역자들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계신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높이 들어서 쓰시고 어떤 사람은 뭘 해도 안 되게끔 정리하시는 것이에요. 실지로 여러분들의 목회 현장을 보면 하나님이 저 사람과도 함께 하실까 라고 회의를 느끼게 하는 교회의 현장들이 여러분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이것이에요. 목회한지 십 수 년이 지나도 괄목할 만한 회심을 거의 보는 일이 없이 그렇게 교회가 지리멸렬하게 계속 된다 이거에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목회자의 무능이나 아니면 학문의 부족정도로 생각을 하는데 그러면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목회하는 교회는 다 그렇게 제대로 되느냐 하면 그것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주님이 주권을 가지고 당신의 종들을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붙들기도 하고 선택하기도 하시는 이것은 주님의 주권이지만 우리들은 그 주권에 대해서는 개입할 수 없는 것이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또한 우리가 주관적으로 우리 중심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손에 붙들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살고 싶습니다, 주님의 손에 일평생 붙들려서, 주님의 손에 사로잡혀서”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 정체가 무엇이냐 이것이지요. 나는 그 정체를 ‘신적 강제력’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런 신적인 강제력은 무얼 의미하느냐? 사도 바울의 경험이 잘 보여 주지요. 예수를 만나기 전에 이 사람은 종교적으로는 유대교에, 문화적으로는 헬라주의에,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의 배경에서 자란 사람이었어요.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당대의 최고의 학자였던 가마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해요. 그리고 로마 시대 때에 식자들이 널리 접하고 있었던 그리스 헬레니즘의 학문과 문화적인 토양 속에서 살아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연설을 보면 그 중에 아리스테아스라고 하는 희랍의 희곡의 작품들의 인용구들이 쏟아져 나와요. 이것이 무슨 얘기냐 하면 당대의 식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방대한 희랍의 문헌에 대해서 널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확신하건데 이 사람도 플라톤에 대해서 상당히 정통했을 것이에요. 당대의 스토아 철학은 물론이고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는 장면도 아데네에서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러한 모든 학문과 지적인 토양을 폭넓게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들은 전부 쪼가리 쪼가리 나누어져서 도대체 이게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물위에 기름덩어리 떠다니듯이 그렇게 떠다니던 사람이었어요. 오직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신학적인 신념이었는데, 그 종교적인 신념은 잘못된 신학의 조직체였어요. 그게 무엇이지요? 휴라이즘이에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났어요.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온 분이시라는 것이 그의 어두운 지성 속에 찬란한 빛으로 벼락이 떨어지듯이 디밀고 들어온 것이지요. 찬란한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 수많은 쪼가리 쪼가리 찢어졌던 지식들이 놀라운 연결을 이루게 된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모든 진리의 중심이 그리스도시니까. 그래서 제가 즐겨 쓰는 비유가 뭐냐 하면, 여러분이 110볼트에다가 220촉짜리 전구를 꽂아본 적이 있을 것이에요. 그럼 어때요? 한 10와트 밖에 안 되게 희미하게 들어오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한 만개 정도의 100와트짜리가 끼어져 있어요. 10만 촉광이지요. 그런데 그게 만촉광도 안 나요. 왜? 110볼트밖에 전기가 안 들어오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느 순간에 220볼트로 승압을 시켰어요. 그리고 그 일만 개의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찬란한 빛이 확 들어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놀라운 위엄에 압도당한 것이에요. 그게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두 개의 편견이 완전히 깨뜨려지면서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신학적 편견과 심리적 편견이었어요. 신학적 편견은 ‘나사렛의 젊은이 그가 메시아일 수는 없다’고 하는 편견이었어요. 또 하나는 ‘이방인은 쓰레기들이다’라고 하는 이 편견이 깨뜨려지면서 찬한한 빛이 들어오면서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리스도 예수의 찬란한 위엄과 영광을 보게 된 것이에요. 그런 지성의 놀라운 빛이 들어와서 이 수많은 지식은 있었지만 신학적인 통합을 이룰 수 없었던 이 지식들이 놀라운 연결을 이룰 때에 또 다른 변화가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영혼과 마음속에 일어난 변화가 무엇이냐 하면 그 그리스도 예수께 강력하게 사로 잡혀서 그 마음에 예수의 마음이 부음 바 되는 것이에요. 언제 예수님이 너 복음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셨어요? 그런데 뭐라고 했어요? “내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이 복음에 빚진 자다 내가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적인 강제력’이에요. 자기도 어찌할 수 없게 그렇게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그리스도를 외치고, 이 진리를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아난케, 숙명에 매이게 된 것이에요. 그 사람의 숙명이 된 것이에요.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버리고, 포기하고, 그럴 수 없게끔 강력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손에 붙잡히게 된 것이에요.
그러나 우리들이 여기에서 또 다른 신학적인 균형을 필요로 해요. 이 일회적인 그리스도 예수의 강력한 회심의 경험과 소명의 경험, 이것은 그의 이후의 모든 삶의 방향을 결정했지만 이것 하나를 가지고 일평생을 산 것은 아니다 이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의미, 그분이 우리 같은 인간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신학적인 의미,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의 경험을 했던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손에 계속 사로잡힐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와 함께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갈라디아서에 나온 고백에 의하면 ‘쒼 에스타오로마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게 무엇이냐 하면 계속 해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에요. 현재완료형태에요. 계속해서. 그래서 그러한 그 그리스도에 대한 끊임없는 경험이 그로 하여금 처음 소명으로 계속 돌아가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럼 이후에 일어나는 처음 소명의 계속된 반복, 반복적인 경험, 이것이 그로 하여금 예수께 한번 붙잡힌 그 상태에서 계속 붙잡혀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 신학교 오기 전에 예수의 손에 한번쯤 안 붙잡혔던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나도 신학교 다닐 때에는 전철에서 전도 열심히 했어요. 협박도 받고 그러면서. 놀랍게 기도 열심히 하고 전철에 한 11시쯤 타고 전하면 진짜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이 느껴졌어요. 확 사람들이 압도하는 것이 느껴졌어요. 나는 전하면서 한번도 ‘조용히 해’ 이런 소리 한 번도 못 들었어요. 성령님이 그렇게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그럼 그렇게 안 살던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리고 그때에는 어떻게 그렇게 산 기도를 많이 다녔어요? 방학시작하면 금식기도 일주일 하는 게 주님께 인사였어요. “한 학기동안 신학공부하면서 묻은 내 때를 씻어버리려고 왔습니다.” 뭐 죄가 있고 엄청난 기도제목이 있어서가 아니라 씻어 내리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런 상태를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계속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소수인지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그 사람 속에 반복적인 경험 속에서 처음의 소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 때문이지요? 그것이 성화의 삶의 부족이에요. 그런 끊임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은 모든 거룩한 삶과 경건한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초석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학문만을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학문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경건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바퀴와 함께 굴러가지 아니하면 신앙과 사역, 우리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 앞에 올바로 끌어갈 수 없는 바퀴 한 쪽이 없는 마차와 같아요. 학문은 진리에 대한 개별적 사실들을 이성이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만 이성을 넘어서는 것들을 그것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경건의 영역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개별적인 학문의 사실들은 우리들이 이성으로 파악하지만 이 전체를 한꺼번에 묶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을 위해 이 학문을 이바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이 통합과 통섭의 위대한 힘은 경건에서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에 앞세웠던 그 모토가 ‘스키엔티아 에트 삐에타스’가 아니라 ‘삐에타스 에트 스키엔티아’, 학문과 경건이 아니라 경건과 그리고 학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분의 손에 강력하게 붙들린다고 하는 것, 그러한 은혜의 경험들이 재현된다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시간이 없어서 간략하게 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을 접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신학 책이 아니라 성경을 접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을 깊이 만나고 설교자의 길로 들어선 20여 년 전부터 같은 방식으로 이 일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경을 읽는 그 일에 마음을 많이 기울이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하면 통독이냐 정독이냐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한꺼번에 읽는 것은 한꺼번에 읽는 것대로 유익이 있고,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정독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을 천천히 읽어요. 하루에 세 장을 읽어야 되겠다, 매삼주오(每三週五) 이렇게 해서 한 번 띠어야 되겠다. 이렇게 맘먹지 말고 그런 것은 다른 때 시간을 내서 하고, 중심이 되는 시간에는 천천히 시간에 관계없이 천천히 성경을 읽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읽다가 마음에 다가오는 것들이 없으면 그냥 넘어가요. 그런데 어느 부분에 딱 가서 이건 무엇인가 있다 생각되면 딱 멈춰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요. 저는 어떤 성경구절 한 절을 세 시간 동안 연속해서 읽은 적이 있어요. 누가복음 11장 1절, 그럼 거기 뭐 대단한 것이 쓰였냐 하면 아니에요.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그게 일절이에요. 그것을 세 시간을 읽었어요. 그리고 한 달 동안 설교했어요. 천천히, 천천히 읽는 것이에요. 그리고 다시 돌아가요. 그런데 서너 번 했는데 뭔가 떠오르는 것 같더니 사라져버렸어요. 그러면 미련을 두지 말고 진도를 나가요. 그런데 이것이 사라지지 않고 읽을수록 계속 떠오르는 것이에요. 그러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속 반복해서 읽는 것이지요. 옆에 오리지널 텍스트가 있으면 더 좋아요. 희랍어와 히브리 성경을 보면서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서 읽는 것이에요. 그러면 드디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성경을 가볍게 읽을 때에는 내가 성경을 읽지만 성경을 깊이 읽으면 성경이 나를 읽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 단계까지 가야 되요. 천천히, 천천히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그러면 거기서 풀려나오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 음성이 어떻게 들리느냐고 말하지 마세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오늘 아침 제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성도들이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언어에요. 그게 전부 다 이상한 사람들에게서 오는 것이에요. 성경을 읽다가 깨달았는데 이렇게 이야기해도 알아 듣는다 이것이지요. 그렇게 천천히 읽어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때 절대로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은 거의 매춘행위에요. 그렇게 읽지 말고 쭉 자기가 이것을 섭취해야 되는 것이지요. 자, 우리가 자식이 있어서 아이를 기른다고 할 때 계란도 먹고, 밀가루도 먹고, 고기도 먹지만 그것을 자기가 먹고 소화시켜서 젖을 물려야지. 다 먹어놓고 얘들 좀 줘라 그랬더니 왁 하고 토해서 물에다 씻어서 고기점댕이, 국수가락 이렇게 나누어 준다면 그게 양육이냐 이것이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이것을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되요. 일체 설교해야 할 욕구를 과감하게 버려야 해요. 과감하게 포기해야 되요. 그러면서 천천히 읽어나가는 것이에요. 그럼 막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은혜를 받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눈물이 나와요. 회개를 시켜요. 성령이 역사하셔서 내가 잘못 살았다는 것을 보여 주세요. 내가 무지했다는 것을 보여 주세요. 막 밀려들어 오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 다음서부터는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고 난 다음에, 그러면 도대체 내가 오늘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혹시 누군가가 여기서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어보면 내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어떻게 정리해서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저는 열린교회를 일곱 명을 데리고 개척을 해서 15년이 지났어요. 한 번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기억에 거의 ‘다음 주 설교를 뭘 하나? 큰일 났다. 어떻게 하지?’ 그래본 적이 없어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주일 날 되면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과 헤어질 때는 마음에 근심이 왔어요. 할 얘기는 이렇게 많이 남았는데 어떻게 또 일주일을 기다리나. 지금은 교회에서 아예 설교도 분업체제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담임목사는 주일 날 낮에 한번 딱 하고 나머지는 다 부목사들에게, 전도사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 편 설교에 전심을 기울인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목회 안 됩니다. 강대를 자신이 딱 쥐고 그리고 새벽서부터 쭉 설교를 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일관된 신학과 열정을 가지고 달려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교회를 비우는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부교역자들에게 설교할 기회를 안 주어요. 금요일 날에는 제가 내줍니다. 새벽기도 월요일 날 빠질 때, 수요일 날 내가 집회에 나가거나 여기 이렇게 올 때 그때 내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럼 과연 그렇게 풍성한 내용이 올 것이냐?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해석학적 순환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똑같은 글을 읽어도 깨닫는 바는 틀리는 것이지요. 초등학교 일학년이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면 이 아이는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것이에요. 걔네들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을 조금만 한 사람이라도 산전수전 겪고, 시집장가 간 애들도 속 썩이고, 암에 걸려서 고통 받고, 이리저리 두들겨 맞으면서 60줄쯤 오면 신앙이 별로 없어도 그런 찬송 부르면 눈물이 확 쏟아지는 것이지요. 그건 왜 그래요? 똑같은 찬송가를 애들은 이해를 못하는 데 이 어른은 이해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지요? 이 속에 애들에게는 없는 다른 내용이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성경을 볼 때에 똑같은 성경이지만 이것은 아무렇게나 지어서 쏟아 놓은 덤불더미가 아니라 신학적 체계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학문을 열심히 공부해서 신학적으로 올바른 지식을 많이 섭렵하고 있으면, 성경을 딱 들어갈 때에 성경이 안 보이던 것이 확 열리면서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이 요소가 둘이에요. 성령의 역사와 지성을 밝히는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각성하게 하시는데 이미 있는 지식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비추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 되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데 제가 목회를 해 보니까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분별하고 전할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양보할 수 없게끔 5년, 5년은 전심으로 공부하되 건강에 위협이 와서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까지 공부해야 해요. 난 6시간 이상씩 자는 것은 범죄라고 생각해요. 아프지 않는 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줄일 수 있 시간은 잠 밖에 없어요. 잠을 덜 자야 해요. 여러분 정도면 4시간 정도면 충분해요. 그리고는 온 힘을 기울여서 책을 읽어야 해요. 공부를 해야 해요. 취운 책 읽지 말고 쉬운 책은 쉴 때 읽어요. 그리고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해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책들을 읽어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신학적인 골격을 잡아야 해요. 공부해야 하는 사람에게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은 공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것은 휴식이에요. 그렇게 공부해야 해요. 그러면서 지성이 자라면서 성경을 접할 때 확 밀려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가 증거를 하나 보여 드릴께요. 설교할 게 없어서 고민해서는 안 되지요. 배추장사가 배추가 없어서 못 팔면 어떻게 하겠어요? 2005년 1월 13일 10시부터 시작해서 10시에 민수기28장 3절에서 5절을 읽다가 깨달음이 왔는데, 아침에 8시쯤부터 읽기 시작해서 깨달음이 와서 깨달은 것에 너무나 은혜를 받고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1월13일 10부터 시작을 해서 21시24분까지 정리를 했어요. 이 정도 가지면 6개월을 설교할 수 있어요. 천천히. 실제로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책 1권을 이 속의 내용 중에 1/4 을 가지고 한권의 책을 썼어요. 이렇게 하면서 이 날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날도 나가는 것이에요. 계속해서 그러니까 이건 언제 설교할 지 몰라요. 좋은 본문이 나오면 히브리어 텍스트를 찾아서 원문을 써보면서 해석을 해서 한글 성경을 바로 잡으면서 나가는 것이지요. 아니, 왜 설교할 게 없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기도하다 보니까 성도들이 요즘 너무 기도 안 한다. 그럼 뒤져봐요. 그러면 기도 안한다고 하는 구절이 어디 나와요. 가만히 20분만 읽어보면 그때의 은혜가 살아나요. 그럼 기도하고 이것만 가지고도 설교가 되지요. 그러니까 길게 할 것 없지요. 이렇게 해 놓고 설교하러 올라갈 때는 복잡하게 안 해가지고 가요. 요렇게 딱 들고 올라가요. 이게 100분 정도 설교할 수 있는 분량이에요. 여기다 놓고 이거야 6줄밖에 안 되니까 외우면 되잖아요? 설교를 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신이 있어. 왜냐하면 이건 내가 누구 걸 보고 쓴 것이 아니라 내가 계속 경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혼나고 은혜 받고 변화 받은 거니까 그걸 가지고 천천히 써내려 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님께 붙들렸다”라고 하는 의미는 다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하게 붙잡혔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 성경 읽기가 모든 신학의 중심이 되어야 되요. 이것이 한 책이고, 한 책을 위한 여러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래서 한 책을 위한 다른 책이 되어야지, 다른 책을 위한 한 책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에요. 저보고 자꾸 설교 준비하는 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하는데, 저는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데 1시간을 넘긴 적이 거의 없어요. 만약에 그렇게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제가 아마 전혀 연구할 수 없을 것이에요. 목회할 수 없을 것이에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보고 그 한 편을 준비하는데 30분밖에 안 걸리면 당신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하고 그 한편을 준비하는데 25년이 걸렸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 날 성경을 준비한 것은 30분밖에 안 되고 1시간 밖에 안 되지만 그러나 이전에 그 본문을 가지고 몇 시간씩 씨름했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공부한 시간을 합쳐 보세요. 그래서 스펄전 목사가 설교 한 편 준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려요 목사님 그랬더니 ‘20년’ 그랬더라잖아요. 매 설교마다 20년씩 걸린다. 왜? 20년 전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기 때문에 2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꽉 붙들려서 성경만 펴면 설교가 이 안에서 가득 차서 외치고 싶어야 된다 이것이에요. 올려다 놓으면 하기 싫은 사람처럼 그럼 안 된다 이것이지요. 수문을 열면 물이 확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깊이 파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