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
(2019년 주일오전)
설교기간|2019년 5월 26일- 6월 30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20년 2월 4일
목 차
프레임
1.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2019.5.26. 주일오전 1
2. 남편과 아내(골 3:18) 2019.6.2. 주일오전 10
3. 아내를 사랑하라(골 3:19) 2019.6.9. 주일오전 20
4. 네 자녀를 사랑하라(엡 6:4) 2019.6.16. 주일오전 30
5. 참척(慘慽))의 슬픔이 있습니까(눅 7:11-16) 2019.6.23. 주일오전 38
6. 가족을 돌아보라(딤전 5:8) 2019.6.30. 주일오전 45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1 2019년 5월 26일 주일오전예배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 (출 20:12)
I. 본문해설
II.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뜻
A. 공경하라
B. 복주리라
C. 용서하라
D. 사랑하라
III. 적용과 결론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2 2019년 6월 2일 주일오전예배
< 남편과 아내 >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 (골 3:18)
I. 본문해설
- 가정에 주는 권면 중 첫 번째 교훈이다.
-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닌 주의 명령이다.
- 이하의 가족관계 질서의 근본적인 토대이다.
II. 아내와 남편의 관계
A. 남자와 여자를 만드심
- 흙으로 사람을 만드심(창 2:7)
- “흙”(六體)+“생기”(英魂)
- 육체의 필요와 영혼의 필요가 있음.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줌
- 남녀를 서로 다른 개체로 창조하셨다.
-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신앙이 요구된다.
- 다름이 결합을 온전하게 한다. 죄 때문에 갈등이 생김.
- 타락한 인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다.
III.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
- “복종하라” (hypotasesthe)
- “hypo”(under)+“tasso” 배치, 정리, 결정하다
A. “복종하라”는 의미
- 아담의 타락 후 무너진 가정의 질서를 보여준다.
- 무질서 속에 불신앙과 반역들이 생긴다.
1. 여기서 상정하는 남편
-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임.
- 세상은 인간의 힘의 우위로 질서가 세워짐.
- 폭압과 강제가 아니라 인격을 인정하는 사랑.
2. 사랑의 결합과 질서
- 개별적으로 창조된 남편과 아내의 결합임.
- 이것은 육체적․정신적․영적 연합임.
-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봄.
- 사랑이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함.
-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사상을 거부함.
- 인격적 존중과 하나님의 질서를 따른 복종.
B. 하나님 사랑으로 복종함
-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보다 앞서 나온다.
1. 깨진 가정 회복의 길: 질서+사랑
- 사랑 없는 폭압: 인성을 파괴함.
-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함: 사랑의 통로임.
- 까리따스만이 신적 질서를 기뻐함.
2. 남편에게 복종함
- 노예적 복종이나 아부가 아님.
- 복종은 사랑에 대한 보상이 아님.
-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데서 시작함.
- 사랑으로 복종하게 하는 은혜를 받음.
- 신적 질서에 확고히 선 아내가 필요함.
- 권력의 사용은 허무한 것임 – 젊음, 돈, 힘
- 사랑 안에서 피차 존중하고 복종하라.
IV. 적용과 결론
-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19)
- “aneken” 적합, 꼭 맞음, 어울림.
-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기 때문이다”
- 세상의 정신과 성경의 교훈을 분별함.
- 가정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보여 줌.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3 2019. 6. 9 주일낮예배
< 아내를 사랑하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3:19)
I. 본문해설
-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가장 중요한 관계임.
- 당시 로마 제국의 사회에서도 가정은 매우 중요했음.
- 로마는 남성 중심의 사회로 아내는 소외된 존재였음.
- 아내의 덕목: 자녀생산, 가사, 정숙, 침묵
II.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라(agapete)
A. 아내, 사랑의 대상
성경에서 아내는 남편이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줌.
당시 아내는 숭고한 아가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음.
당시 로마 문화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낯선 명령임.
결혼은 되는 사랑에서 해야 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임.
결혼은 에로스의 사랑을 아가페로 완성하는 것임.
가정에 대한 세상의 견해는 폭력적이거나 굴종적임.
그러나 성경적인 견해는 인격적이고 관계적임: 사랑
자기 아내는 지배가 아닌 인격적 관계 맺음의 대상임.
결혼은 치솟는 열정 뿐 아니라 인격의 힘을 요구함.
“사랑하라”, 아내는 지배가 아닌 사랑의 대상
쏟아지는 감정과 함께 사랑의 질서가 필요함.
“아부하라”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임.
그 사랑은 자기 발생적이 아님. 하나님 사랑에서 옴.
B. 사랑, 자기완성의 길
남편과 아내, 한 몸으로 창조하사 한 사랑으로 묶으심.
결혼을 통해서 서로 자기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하심.
결혼은 불완전한 인간을 온전하게 하시는 과정임.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움.
“지니와 마술램프”
사랑⇒집중⇒소외⇒적응을 겪음
때로는 아내와의 관계에 자신 없음이 일중독으로 나타남.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사는데…”
한 인간으로서의 못남을 다른 핑계로 덮지 말자.
권력으로써 아내를 소외시키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것임.
세월이 흘러가고 모든 것은 떠난다. 홀로 남고 싶은가?
사랑한 날도 괴롭힌 날도 아내의 마음에 기억된다.
서로에게서 발견하는 단점에서 소명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혼자 살았더라면 고쳐지지 않았을 점이다.
은혜로써 온전케 하는 희생을 통해 참 사람이 되어 감.
아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아내를 평범한 인간으로 보라. 너무 가르치려 들지 말라.
힘들 때마다 만나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은혜를 구하라.
III. 적용과 결론
- 아내를 사랑하라. 불쌍히 여기고, 오래 참으라.
- 힘들 때마다 예수의 고난과 사랑을 생각하라.
- “그녀를 사랑하는 일에 승리했다”
- 부부로 사는 것이 기쁨이 되도록 살라.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4 2019. 6. 16 주일낮예배
< 네 자녀를 사랑하라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I. 본문해설
순교(64~67경) 직전 62년경 로마감옥에서 기록했다.
에베소서는 미신과 주술의 도시였다.
세속 도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도록 부르셨다.
가정의 문제는 가족의 온전함의 문제다.
II. 자녀를 기르는 길
자녀 양육의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1)노엽게 하지 않음. (2)주의 교훈으로 양육함.
이 두 가지 지침은 사랑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아버지에게 이것을 명령하는 것은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A. 노엽게 말라
자녀를 기르며 노엽게 하는 일이 많음을 보여준다.
힘과 권력이 없는 자녀들은 견디지만 상처를 받는다.
“낙심하다(adumosin).” “절망하다. 열정이 사라지다.”
a.빗나간 욕망 b.과도한 기대 c.지나친 징계 d.무관심
- 자녀를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 여기라.
-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서는 책망과 징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충분한 사랑 속에서 그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B. 양육하라
자녀를 부모에게 맡기신 이유는 두 가지다.
(1)지식 - 바르게 알기 위함.
(2)생활 - 참되게 살게 하기 위함.
1. 주의 교훈으로
의미: nurture, training, chastening
“주의 영양” 성장에 필요한 양분들을 가리킨다.
육체와 음식에 대한 관계는 정신과 교훈과 같다.
어린 시절: 영양+세계 경험+말씀
자녀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양 상태를 확인하라
종교적 엄격함 보다 은혜와 사랑으로 양육하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하라.
구원에 이르는 참된 회심이 필요하다.
부모가 먼저 말씀의 은혜로 사는 것을 보여주라.
2. 주의 훈계로써
의미: admonition, instruction
말씀은 지성을 깨우쳐 감화에 이르게 한다.
바른 훈계는 의무를 일깨워 분발하게 한다.
관계를 깨뜨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자녀에 대한 책망보다 큰 사랑이 필요하다.
책망은 필요하다. 그러나 낙심할 정도로 책망하지 말라.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다. 평생 계속 된다.
지금은 몰라도 후일 깨닫게 된다. 회상하고픈 부모가 되라.
회초리의 아픔보다 마음에 경건한 아픔을 느끼게 하라.
주님이 우리의 잘못을 다루시는 방법을 생각하라.
“내가 너를 그렇게 다루지 않았다”
III. 적용과 결론
자녀를 사랑하기 어려울 때 당신이 마지막 사람임을 기억하라.
자녀에게 인정받길 기대하지 말라. 보상을 기대하지 말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찌 사랑하셨는지 생각하라.
자녀가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형상임을 기억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5 2019. 6. 23 주일 낮 예배
< 참척(慘慽)의 슬픔이 있습니까?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1-16)
I. 본문해설
부모에게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큰 것은 없다.
참척의 경험 : 박완서, 마르크스, 이순신.
춘추전국시대 子夏 : 喪明이라고 부름.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음 맞은편에 예수의 행렬 있었다.
II. 참척을 당한 어미
아들을 잃은 어미의 큰 슬픔. “한 어미의 독자‥청년”(13,14)
과부를 불쌍히 여기심. “울지 말라” (me klaie) “통곡하지 말라”
과부인 어미는 방성대곡하며 아들의 주검을 따라갔다.
신앙심이 깊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들을 깊이 사랑했다.
이혼할 때 자녀를 버리거나 고아원에 보내는 부모들이 있다.
자기사랑 때문에 자식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소외를 겪는다.
자녀 사랑, 육신보다 더 중요한 자식의 영혼의 죽음을 슬퍼하라.
III. 살리시는 예수님
A. 죽은 자를 살림
예수님은 묘지 향하는 행렬 막아서시며 관에 손을 대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 권위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과부로서 독자 아들을 잃은 것을 불쌍히 여기셨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어머니에게 주시니”(15)
영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더 큰 기적이다.
지금도 복음의 능력으로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신다.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영적 죽음의 현상을 보라!
자녀의 중생과 회심을 위해 기도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 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요 3:5)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게 하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 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 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B.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은 죽은 아들보다 슬피 우는 어미를 불쌍히 보셨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불쌍히 여기사” espranknisthe.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받다.
우리말로 “가슴이 찢어지기까지 아파하셨으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 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영적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가 아니라 예수 십자가의 공로로 생명을 주신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 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 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2:24)
부모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참된 부모와 삯꾼 부모.
참 부모는 자식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 받으라. 자녀를 영혼으로 보라.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자식의 영혼을 누가 돌볼까?
자녀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어 회심해야 한다.
부모는 이 사랑을 알았고 자식은 아직 모르니 기도할 뿐이다.
구원 받지 못한 자녀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있는가?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 만큼 비참한가? “울지 말라!”
자녀를 위한 최고 보험은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참척의 슬픔으로 부르짖으라!
IV. 적용과 결론
예수님은 죽었던 아들을 살리셨다. 어미를 불쌍히 보셨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6)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고 믿게 되었다.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나 복된 회심에 이르도록 간구하자.
눈물로써 자녀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6 2019. 6. 30 주일 낮 예배
< 가족을 돌아보라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딤점5:8)
I. 들어가는 말
신자의 가장 큰 고통은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이다.
그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것에 비례한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가족 구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가족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고민한다.
가족 전도의 어려움은 삶 전체를 노출한 채 전도하는 데 있다.
평소 신자의 모범을 보이며 살 것이 요구된다.
II. 가족을 돌아봄
A. 육신을 돌아봄
가족들의 육신의 필요를 채우라. 가족들의 필요를 살피라.
전도만 생각하지 말고 먼저 한 가족으로 살도록 힘써야 한다.
예수의 삶에서 모본을 배우라. 영혼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가지라.
참된 구원은 육체까지 아우르는 전 포괄적 구원이다.
이 일을 위해서는 먼저 가족들과의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
신자에게 가정은 사명 받은 선교지다. 사랑으로 섬기라.
누군가의 희생 없이 다 같이 화목하게 지낼 수 없다.
가족들을 위한 희생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다.
사소한 것을 양보하고 신앙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
가족들의 경제적인 형편을 돌아보라. 올바르게 도우라.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망의 충돌이 가족관계를 깨뜨리기 쉽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더 많이 받은 자로서 섬기라.
B. 영혼을 돌아봄
신령한 생각으로 가족들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라.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증상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나타난다.
가족들의 고통 받는 영혼과 마음의 소외를 헤아리라.
화목하지 못한 것과 삶을 지탱할 힘이 없는 것이 그 증거다.
가장 탁월한 가족 전도는 충만한 사랑과 기쁨으로 사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관용은 충만한 은혜 안에서 살아야 가능하다.
가족의 영혼의 필요를 살피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주라.
가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신자의 고귀한 사명이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십자가에 죽으심은 가족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다.
*병상에 있는 아버지의 전도를 부탁한 교인
나의 가족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가족묘지 앞에 놓인 유품들
우리 모두 언젠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버려두고 하나님께로 간다.
가족들이 천국에서 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면 얼마나 슬플까?
참된 사랑도 오해될 수 있고 때로는 무시당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한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담대함이 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가족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상처를 잊으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히 받음으로써만 그럴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며 가족을 사랑하라.
III. 적용과 결론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아파하는 영혼이 아름답다.
하나님은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를 위해 끝까지 사랑하셔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자기 영혼을 위해 울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기도하자!
실패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7.08.06. 주일오전1)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1 (2019.05.26._주일오전)
1.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오늘날 부모 공경은 간데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유교의 관성에 의해서 그나마 효도의 도리가 살아있었지만 이제 그 관성도 거의 다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를 홀대하고 부모를 무시하는 일은 물론이고, 패륜적인 일들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월은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퍼렇게 살아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켜서 시내산에서 머물게 하실 때에 주님이 모세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1부와 2부로 나뉠 수 있는데 1부는 1계명부터 4계명까지인데 하나님을 향한 계명입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 것,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 것,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 것,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 등의 의무입니다. 2부는 사람들 사이의 도리를 규정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실효 속에 떠밀려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II. 부모에 대한 하나님의 뜻
십계명의 2부에 나오는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들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부모 공경의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와 같은 다른 계명들보다 이 계명을 가장 앞에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A. 공경하라
첫 번째는 ‘공경하라’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공경하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카페드’인데 이는 원래 ‘무겁다’ 라는 상태 동사에서 왔습니다. ‘무거운 것’, ‘중요한 것’, 그리고 ‘존중해야 할 것’ 등에 대한 태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이 말씀의 근본적인 뜻은 ‘부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라’, ‘부모를 깊이 존중하라’, ‘부모를 깊이 마음속으로 섬겨라’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인간 사이를 규정해야 하는 도리를 처음 가르치실 때 그 계명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굳이 명령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앞에 있는 네 계명처럼 이 다섯 번째에 있는 계명도 우리가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고 은혜를 받지 않으면 이렇게 못한다고 하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즉, 부모에게 불효하고, 부모를 가볍게 여기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해야 할 일이 없지만 부모를 중심으로 공경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진리의 빛, 성령의 은혜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계명은 이제는 케케묵은 옛날 교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자신의 부모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공경심은 사라지고 자식을 위해서는 거의 병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자식들은 그것을 부모의 특별한 희생이라든가 혹은 부모의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누리는 공기와 같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부모 공경을 멀리 하고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는 부모는 10년, 20년 지나지 않아서 자식에게 자기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버림을 받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비정상적인 삶을 살까요? 부모를 공경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그래서 자신은 한편으로는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자식에게 공경을 받는 그런 균형 잡힌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자식들이 자라면서 자신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부모를 보았지 자식이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자신의 부모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런 똑같은 사랑을 자식에게 베풀면서 자신은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때늦게 자식들에게 부모 공경의 도리를 가르치려고 하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습니다. 그러니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자식도 사랑하지 않은 인간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사람이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자식에게만 내리 사랑으로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사람은 가까운 장래에 자식에게 버림받기를 스스로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우리에게 주신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보응이 따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렇게 잘못 내려오는 운명과 같은 집안의 잘못된 풍조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보다 먼저 나오는 것을 가슴에 새기셔서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복주리라
두 번째는 그러면 이렇게 공경하면 하나님은 무엇을 해주실까요?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는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고 나와 있습니다. 즉, 에베소서 6장은 이 5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소개합니다. 앞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네 가지 계명은 뒤에 나오는 계명 못지않게 가장 중요한 계명이지만 거기에는 약속이 없습니다. 즉, 넓은 의미에서는 이 계명을 잘 지켜서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겠지만 계명 자체에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로 끝났지 ‘그렇게 한다면 내가 너를 부자가 되게 하리라’는 약속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모 공경의 계명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소개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10가지 계명 중 이 계명만 현상금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에 이 부모 공경의 도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도리가 없으면 인간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인륜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짐승과 같은 사회가 될 것임을 아셨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를 이렇게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우리에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처음 받은 이 십계명은 신명기 5장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됩니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있던 때였고,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묻힐 줄을 알고 신신당부하듯이 이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한 번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이 계명이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나옵니다. 신명기 5장 16절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하는 말씀이 추가됩니다. 그러면 결국 이것은 요약하면 만약에 부모를 공경하면 땅을 줄 것이고, 생명을 줄 것이고, 복을 줄 것이라고 하는 약속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부유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이 없는 사람들은 궁핍하고 삶의 안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땅은 지금 가지고 있는 땅의 의미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농경 사회였습니다. 그리고 목축을 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땅에서 나는 초목으로 양들을 먹이고, 짐승들을 기르고 자신도 그 땅 위에서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종살이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땅을 중심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주인 계급과 땅을 중심으로 그 땅의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종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없었기 때문에 애굽에서 종살이의 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땅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을 대대로 이어갈 수 있는 터전이었습니다. 땅이라면 한이 맺혔습니다. 아브라함이 주전 22세기 사람인데 그때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이 땅에 우거하는 나그네로라”했습니다. 그도 역시 땅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약간의 땅을 사기는 했지만 그러나 영원한 거주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계명을 받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은 얼마나 가슴 뛰는 그런 도전이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 이런 커다란 축복의 도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이 계명을 온 이스라엘이 준수하기를 간절하게 바라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명입니다. 지금은 100세 시대를 바라보고 있고, 한 85세쯤 돌아가셨어도 자손들은 한 10년 더 사셨으면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수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전쟁으로 죽어가고, 질병으로 죽어가고, 그리고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보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너는 장수할 것이다. 네 생명이 길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지금 갖는 장수의 의미보다 훨씬 큰 것이었습니다. 1940년대쯤에 우리 한국의 남자들의 평균 연령들이 40세가 채 안됐습니다. 청교도들 시대는 남자들 평균 수명이 34살이었습니다. 그와 유사한 시대, 그보다 더 열악한 시대에 살았던 이 사람들이 땅에서 생명이 길리라고 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소원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복을 누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복만이 아니라 육체와 물질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하나님의 복을 뜻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는 땅에서 안정된 삶을 살 것이요 또 건강하게 장수할 것이요,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복을 누리리라’ 하신 말씀을 뒤집어 보십시오. ‘너희 부모를 공경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는 거할 곳 없이 방황할 것이요, 젊은 날에 요절할 것이요, 그리고 박복하리라’고 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를 공경했으면 하는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조차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복 없이 자신이 스스로 복을 일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닫으면 열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한번 반성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오늘 그렇게 안정되지 못한 삶을 살고, 끝없이 건강하고 장수한 삶을 살지 못하고, 박복한 삶을 사는 원인이 부모 공경의 대의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지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가도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당신의 명령에 따라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사람들이 자식에게도 공경을 받게 하시고, 땅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누리게 하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사면을 두루 살펴 당신의 계명을 따라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돌이켜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용서하라
그런데 어떻게 부모를 공경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중의 어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어머니가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헌신적으로 여러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고, 학식도 여러분보다 높고, 인격도 여러분보다 훌륭하고 사회적인 지위도 여러분과 비교되지 않게 도덕적으로 고매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부모를 생각하면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머리가 숙여질 것입니다. 더구나 그 부모가 거액의 재산을 가지고 유산을 남겨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더 공손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사람이 그런 부모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사람의 어머님은 결코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밤낮으로 애쓰는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식을 위해 피땀 흘리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고, 때로는 폭언과 폭력으로 어린 여러분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공경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네 부모와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에 이 설교를 하고 제 방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때는 밖에서 모두 볼 수 있는 유리로 된 방이었습니다. 직원의 허락도 없이 어깨로 문을 왈칵 밀치고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앉아서 쉬고 있는 소파에 인사도 없이 맞은편에 털썩 앉으셨습니다. 그러더니 두 손을 얼굴 위에 올리고 우셨습니다. 흐느낀 게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소리 내어서 우셨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목사님, 저는 이 교회 다니고 있는 교인입니다. 제 나이 올해 65세입니다.” 이 분은 어려서 고아로 자라셨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자기가 왜 고아로 자라게 되었는지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난지 7일 만에 이 아이를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부모를 공경하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자신을 버려서 어린 시절을 피멍이 들도록 고아로 살았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거니, 잃어버렸거니 생각했는데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은 낳은 지 7일 만에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것입니다. 제 앞에 울고 있는 반백의 노인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상처 받은 어린 아이였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받은 상처는 흐르는 물에 쓴 글씨와 같아서 지워지지만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돌에 새긴 것 같아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위로해 드렸습니다. “그래도 성도님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부모님은 당신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더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저는 21살에 무신론자에서 회심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넘지 못하는 높은 산이었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큰 산 같은 분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는 뜻입니다. 21살 회심할 때까지 정확하게 말하면 부모공경에 대해서 회심하던 27살 2월 추운 겨울 어느 날까지 저는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한 적도 없고, 사랑한 적도 없습니다. 똑같이 아버지가 나를 그리워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고,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낀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27살 겨울이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하루를 휴가 내고 오전과 오후 일찍 일을 보고, 오후 약간 늦은 시간에 집 가까이에 있는 예배당을 찾았습니다. 추운 겨울 마루로 깔려 있는 1층 예배당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평소처럼 기도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버지 문제를 들고 오셨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버지와 저의 관계의 문제를 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마음을 당신의 말씀으로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모든 아픔 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내 안에 있는 신앙이 나의 이성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네 아버지도 너처럼 젊은 나이에 나 하나님을 만났더라면 너에게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됐을 것이다. 너도 이 나이에 나를 만나지 못했으면 미래에 태어날 네 아이에게 네 아버지보다 더 나쁜 아버지가 됐을 것이다.’ 저는 거기서 제 2의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분가했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나는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만 살아가면 된다고 믿었던 나에게 하나님은 오랫동안 묻어 왔던 가정의 상처를 끌어내시고 내 마음을 휘저어 놓으시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거의 기절할 것처럼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그때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주님이 힘을 주시면 이 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공경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양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내 자신과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을 진심으로 공경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한 말씀 ‘너의 아버지도 나 하나님을 너처럼 젊은 시절에 알았더라면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이 말씀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변명할 것이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 사랑으로 충분치 않니? 내가 너를 열 아버지보다 100 엄마보다 더 많이 사랑했으니 이제 너희 아버지를 용서하거라.’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의 죄를 용서해 여기까지 살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니 아버지의 모든 잘못이 용서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지와 오류 속에서 어떻게 아버지로 자식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가족들에게 소외되고 그 힘겨운 인생을 보듬어 주는 사람 없이 힘겹게 살아왔을 아버지의 젊은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이 나이에 그렇게 죽을 것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살았을 텐데 생각하니 그 분이 잘못한 모든 일이 용서되었고, 그냥 한없이 불쌍한 영혼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한 번도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충심으로 그 분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여러분도 맺힌 것이 있다면 부모를 공경하기 전 먼저 그것을 풀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신에게 한 것을 보고는 풀 수 없을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 받은 무한한 사랑 때문에 유한한 공경을 부모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불공정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를 용서하고자 하면 용서할 용기를 주시고, 사랑하고자 하면 사랑할 힘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부모를 그렇게 진심으로 용납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공경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D. 사랑하라
마지막 네 번째는 ‘사랑하라’입니다. 부모 공경은 외적인 의무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공경은 하나님을 향한 진심의 사랑 없이 불가능한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공경의 행위가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부모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가진 것이 없을 수 있고, 도덕적으로도 여러분만 못할 수도 있고, 여러분처럼 자식에게 잘해주지 못한 부모일 수 있고, 돌아가셔도 물려준 유산 한 푼 없는 가난뱅이 엄마 아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사랑은 그 위에 목적이 없습니다. 목표가 없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저 살아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아들아 내가 내 젊은 시절에 내 맘대로 살고 너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한 번의 사과를 받은 적 없습니다.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자기가 나에게 뭘 잘못했는지 생각도 안하고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자식인 내 맘에 임하니까 그런 사과 같은 것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이 나를 살렸고, 그 사랑 때문에 평생 상처받고 미워하며 살아야 했을 아버지를 다시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사람의 사과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두운 새벽에 잠을 자는데 어디서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냥 우는 소리가 아니라 통곡하는 울음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잠을 깼습니다. 얼굴에는 눈물이 한없이 흐르고, 배게는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꿈을 꾸다가 제 자신이 잠꼬대 하며 우는 울음소리에 깨어버린 것입니다.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깨끗하게 정리된 넓은 비닐하우스 같았습니다. 가지런히 화분들이 있었고, 아버지는 거기서 하얀 긴 소매 와이셔츠와 까맣고 헐렁한 바지를 입고 계셨습니다. 양팔을 약간 걷고 있으셨습니다. 당뇨가 있으셨기 때문에 매우 몸이 여위셨습니다. 무언가에 열중하면서 나무 상자 이곳에 있는 것을 다른 곳으로 부지런히 옮겨 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불렀습니다. ‘아버지’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얼마 전 청력이 너무 나빠지셔서 검사를 받으시고, 보청기를 끼워드렸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 왼쪽 어깨를 살짝 두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아버지’ 그리고 불렀습니다. 이 분은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돌리셨고 그때 여윈 얼굴에 인자한 모습으로 활짝 웃으시며 저를 반가워하셨습니다. ‘어, 그래 너 왔구나.’ 그 순간 저는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오른쪽 어깨에 얼굴을 대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많은 세월동안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 것이 너무 미안해서 어린 아이처럼 울다가 제 울음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살아있는 것은 큰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한다면 복을 받을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고, 만약에 여러분들이 부모와 불화한다면 용서를 빌고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어느 날 여러분들이 저처럼 부모 공경에 대해서 회심했는데 부모가 돌아가셨다면 여러분들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가득할 것입니다. 부모가 살아있는 것은 우리에게 기회입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그 분을 깊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그늘 아래 철없던 어린 나이였던 적이 있습니다. 떼 부리고 부모님에게 혼나고, 사랑을 받고,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즐겁게 하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20년, 30년,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바로 지난 주 같이 느껴집니다. 손을 뻗으면 맞닿을 것 같은 그런 시간의 간격밖에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정말 살같이 세월이 빨리 흘렀습니다. 지나간 세월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는 세월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여러분들이 인생에 철이 들어서 이제 정말 부모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는데 부모님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떨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이 본당 자리의 1/3 쯤 되는 곳이 (리모델링 전에) 저희 사택이 있던 옥상이었습니다. 저는 10년 동안 교회에서 살았고, 7년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아버지는 식사를 하러 사택에 올라오셨습니다. 젊은 시절의 패기와 그 당당함은 간 곳이 없고, 연약하고 힘이 없는 노인으로 그저 말없이 오셔서 식사를 하시고 그리고 대화도 가끔 나누셨습니다. 건강하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없이 맞이하는 첫 번째 이듬해 가정의 달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번 달이 가정의 달인데 아버님 모시고 모두 같이 밥이나 한번 같이 먹자.” ‘여보, 당신이 아버지가 어디 있어? 몇 달 전에 돌아가셨잖아.’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여러 달 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한다면 단연코 말할 수 있는데 여러분도 자식에게 공경 받을 자격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대가로 부모를 공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인생 고비 고비마다 사랑해 주시고 돌보아 주셨던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해야 할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도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부모를 깊이 사랑하십시오. 내게 상처를 주고, 내게 많은 아픔을 주었던 사람으로 기억하지 마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는 한 영혼이라고 보십시오. 이제 그분들은 육체적으로도 연약하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하고, 아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 좋다고 안합니다.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은 여러분들이 그 부모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효막심한 일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며 부모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이 마음을 움직이면 여러분들은 더 이상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안정된 삶을 살게 하실 것이고, 그리고 생명을 줄 것이고, 그리고 이 땅에서 풍성한 복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인류를 향해서 모든 자식들이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며 살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당신의 뜻이었는지 아홉 계명에는 없는 현상금을 거셨습니다. 그리고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앞에다가 이 계명을 두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깨닫고,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그것을 보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내리 사랑으로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고 그리고 빠르면 10년, 20년도 채 안 되서 자식에게 싸늘하게 버림을 받는 것은 그 사람들의 자식이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는지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모는 그냥 자신의 인생을 위한 물주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지금 현재와 미래에 자기 자식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황금률입니다. 여러분의 자식에게 그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부모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라는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부모가 그 부모에게 인격적으로 사랑을 베풀고 행복한 교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부모가 그 부모 때문에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지를 보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신들의 행복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인생을 한 60년째 살아온 한 노인의 충고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그렇게 부모 공경에 대해서 회심하기 전까지 저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부모 공경에 대해 회심하고 그렇게 아버님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개인에게도 풍족한 복을 주셨고, 나의 목회에도 복을 주신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사랑할 때 첫 번째 혜택을 받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라 그런 마음을 갖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부모를 깊이 공경하고 하나님의 축복의 간증자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2 (2019.06.02._주일오전)
2. 남편과 아내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골 3: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설명한 후, 사도는 그 가르침을 가정으로 옮겨갑니다. 이 가정에 대한 가르침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범사에 주께 하듯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안에 있습니다. 가족의 각 구성원들에 관해서 교훈을 주는데 그것은 각자의 덕목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를 향한 덕목은 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고,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덕목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고, 아내에 관한 남편의 덕목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남편에 관한 아내의 덕목은 복종하는 것입니다.
II. 아내와 남편의 관계
그러면 남편과 아내가 어떤 관계에 있기에 성경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칠까요?
A. 남자와 여자를 만드심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온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리고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첫 번째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떼어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두 번째 창조된 사람, 여자가 남자에 의존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두 사람을 한 몸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개체는 둘로 나뉘었으나 사실 사랑함에 있어서는 서로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도록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이 계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이 창조될 때에 그 사상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B. 서로의 필요를 채워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지만 그 둘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게 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홀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실 수 있었으나, 인간은 그렇게 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혼인이 성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하와를 이끌어 오실 때에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가 그녀의 존재에 의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자신은 그녀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자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서로를 각각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에게는 남자의 본성과 특성을 주시고 여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본성과 특성을 주셨습니다. 남자는 도전하고 개척하고 정복하게 하시고, 여자는 오히려 정복한 것들을 가꾸고 돌보고 다스리는데 적합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사회를 만드실 때 의도하신 것은 사랑의 사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첫 번째 부부이기도 하지만 온 인류의 처음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계속되었을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런 고백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나요? 무엇이 우리를 가장 불행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접고 싶을 정도로 절망하게 한 것은 물질이나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이 아닙니다. 살아있어도 죽는 것 같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족들이 우리에게 그런 것을 안겨주었습니다. 누구든지 행복하려고 결혼하지 불행하기 위해서 시집 장가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는데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이렇게 본래의 인간의 참된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로 각자를 부르셔서 그들을 가정의 한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없는 것을 아내를 통해 보충하시고, 아내에게 없는 것을 남편을 통해 그렇게 하심으로써 혼자 살았더라면 이룰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의 사회를 이루어 가도록 하나님이 남녀를 만나 아내와 남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타락한 다음에 인간은 사랑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의 질서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연 모든 만물들을 선하게 대우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은 자기만을 위하는 자기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남편과 아내 사이에 일어나는 많은 불행의 씨앗도 결국 알고 보면 이렇게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커다란 질서에 대한 계획을 버리고 자기 사랑으로 얼룩진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런 망가진 인간 구조 속에서 주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통해 교회와 가정을 회복시키고자 하십니다. 먼저 그래서 이 하나님의 질서를 떠난 가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잘못되어 있는 것을 올바르게 돌려놓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입니다. 그것은 오늘 ‘복종하라’는 명령어로 요약이 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노예적이고 굴욕적인 복종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어 성경에 ‘휘포세스테’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아래로’ 라는 뜻을 가진 ‘휘포’와 ‘제자리에 두다, 배치하다, 정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타쏘’라는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종은 누가 누구를 굴복시키는 복종이 아니라 가정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거대하고도 희망적인 질서 속으로 아내가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III. 남편에 대한 아내의 덕목
저는 아내가 돌아가야 할 질서와 남편이 돌아가야 할 질서를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차례대로 설교하려고 하니 오늘 설교자가 유난히 남자들 편을 든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를 기대하시면 됩니다.
A. ‘복종하라’는 의미
그러면 복종하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말씀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이 인류에 대한 계획을 가정에 대한 계획과 함께 수립하셨습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인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그 계획을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이 인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계획은 교회와 가정을 당신이 의도하셨던 창조의 질서로 돌려놓는 것으로 시발점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바로 그 신적인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누구에게 복종을 한다는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가정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는지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사조는 끊임없이 바뀌었고,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그리고 남성 주도적인 사회에서 여성 주도적인 사회로 끊임없이 변모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논리를 정당화 할 수 없는 현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가 주고 있는 이 명령은 불신자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 보내는 명령입니다.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모두 탁월한 성도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겠으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남편의 도리, 아내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2010년대가 저물어 가고 이제 2020년대를 바라보고 있는 이 시점에 있는 한국사회의 한 남성으로서 이 설교를 듣지 말고 성도로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지속 되어 왔던 남성 우위론적인 사회와 폭압적인 지배에 여성들이 반기를 든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미국조차도 1920년이 되어서야 연방법에 성별을 이유로 선거권에서 배제되는 일을 금지한다는 법을 세우기 전까지 여자는 정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선거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1920년대로 돌아가서 한국 사회를 보십시오. 그때는 아직까지도 봉건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때였고, 축첩과 조혼이 성행하였으며, 여자들은 남자의 노름빚에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고, 어린 자녀들을 돈 받고 돈 많은 사람의 소실로, 혹은 첩으로 매매하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여자는 여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기를 어린 애가 사람 축에 들지 못하는 것과 유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의 남존 여비 사상은 다분히 유교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유교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이 정통 유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곁가지 쳐 나간 잘못된 유교의 가르침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통 유교가 아닌 약간은 사이비인 유교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이야기는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맹자가 부부유별을 말했을 때 원 의도가 무엇인지를 유학자들이 여러모로 논하지만 대게 정리할 수 있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부부유별을 말했을 때에 맹자의 의도는 아내와 남편의 역할이 가정에서 각각 다르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이 부부유별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구별이 있어서 서로를 관계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존중해야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부부는 다른 부부에 대해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부부 사이에 서로서로 구별이 있어서 서로의 영역을 넘나보지 않는 인륜의 도리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후대에 와서 조선 시대에서 성리학이 들어오고, 주역에 나오는 이 음양의 사상을 잘못 해석하면서 남존 여비의 사상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유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우리가 이런 한국의 역사를 굳이 되돌아보지 않더라도 그냥 현실만 직시하더라도 여자들은 끔찍하게 무시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훨씬 더 발언권도 많아지고 그리고 힘도 세어졌습니다.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가정의 영역에서 이제 거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남자들의 발언권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밖에 나가서 하기 싫은 일을 부탁할 때 너무 좋은 핑계는 ‘제 아내가 허락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이야기해도 통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 살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명령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 하나가 하나님이 가정을 향한 모든 질서는 아닙니다. 각 구성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교훈들이 맞추어지면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가정이 드러나고 사회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이러한 복종이 폭압과 강세 속에서 일어나고, 폭언과 폭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에베소서 5장 21절에 나오는 교훈처럼 주 안에서 피차 복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질서를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주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의무가 없고 또 복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남자든, 여자든 남편과 아내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도 폭언과 폭행, 그리고 상대방을 얕잡아보는 비인격적인 언사나 태도 등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안에서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읽고, 무엇에 의해서도 침범될 수 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가치를 인정해 주는 인격적인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바로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고,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대하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의 존귀함을 생각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존엄한 의식, 인간 가치에 대한 인격적인 존중, 이것이 바로 가정에 있어서도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폭력과 폭언, 이런 것들은 다음 시간에 다루겠지만 똑같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폭언과 얕잡아 보는 태도, 비인격적인 언사와 그의 명예를 현저히 실추시키는 경솔한 행동 등은 모두 용납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복종할 만큼 존경스럽다면 왜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아내들이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똑같이 말할 것입니다. ‘사랑스러울 마치 예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사랑해줘 봐. 복종하지 않나?” 남편은 말합니다. “복종해봐. 내가 반드시 사랑할 텐데” 결국은 일생을 개처럼 물고 뜯다가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해결책은 이것입니다. 아내들은 “아내들아” 하는 명령어만 기억하십시오.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한 계명을 크게 염두에 두지 말고 자신에게 주신 주님의 계명에 자신이 충실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도 동일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아내에게 말씀한 것이지 남편에게 그것을 이용하여 아내를 무시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살과 뼈를 깎아서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겠다는 노력이 결국은 남편들로 하여금 아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아내로 하여금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때때로 결혼하지 않은 자매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많은 돈도 높은 지위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제가 존경할 수 있는 남성을 만나 결혼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자매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보다 30살쯤 나이가 많은 남자 중에서 그런 인격적인 사람을 골라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인의 전기를 읽으면서 평생 혼자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어떤 사람이 거의 비슷한 나이에 그렇게 심히 존경할만한 인물이라면 왜 자기 같은 사람에게 장가를 가겠습니까? 훨씬 더 훌륭한 여자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하기 전에만 일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혼하고 나서도 있는 모습 그 자체가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하고,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그런 존경스러운 남편은 없습니다. 누구입니까? 나는 단연코 이야기했는데 아내에게 나는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자기가 불완전한 아내인 것처럼 남편도 불완전한 남편입니다. 돈을 아껴 쓰고 계획성 있는 점에서는 남자보다 훌륭할지 모르지만 남편에게 있는 것이 자기에게 없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를 만나 결합하게 하신 하나님의 큰 섭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연애할 때는 남자와 여자가 성격이나 경향이 똑같을 때 신이 납니다. ‘자, 오늘 기분이다. 우리 오늘 한번 호사하자’ 하고 낭비할 때 여자도 같은 성향이면 얼마나 신나는 연애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연애할 때는 돈의 출처를 묻지 않습니다. 대출을 받았든, 아버지 유산을 미리 받았든, 가불을 해서 가지고 왔든 상관없이 그냥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했는데 남편이 호기 있게 말합니다. “여보, 오늘 결혼기념일이야. 내가 오늘 근사한 호텔을 예약했어. 우리 가서 한 끼에 30만원 짜리 식사를 한번 해 봅시다” 할 때 아내가 “좋아요. 너무 신나요. 매달 합시다.”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총각으로 있을 때에는 돈의 출처를 묻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돈의 출처가 자신의 통장입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적고, 오히려 남편이 한번 ‘호텔가서 밥 먹읍시다’ 할 때에 ‘정신 차려 이 사람아. 된장찌개가 끓고 있네.’ 하는 아내를 맞이한 사람이 행복할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둘이 죽고 못 살아서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결혼한 남녀가 몇 년 안 되서 이혼하는 케이스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연애의 현실과 결혼의 현실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연애는 남자가 무릎을 꿇고 바치는 꽃다발과 같습니다. 아름다운 향기, 여자는 고상한 옷을 입고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바구니만 받은 그 꽃은 일주일을 가지 않습니다. 결혼은 그런 게 아니라 둘이 추리닝을 입고 무릎에 흙을 묻혀가며 호미로 밭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 일은 고상한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 받는 꽃다발을 받는 것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남편과 함께 가꾼 꽃밭을 봅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가꾸면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게 결혼입니다.
과연 우리 시대에 아내들에게 옷깃을 여밀 정도로 존경스러운 남편과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여러분 중에 한번 물어보세요. 누가 그런 남자와 사는지를 말입니다. 만약에 그런 여자가 자기는 그런 남자와 산다고 고백을 한다면 그 남자는 날마다 지옥일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사람이 그런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철부지 없는 어린 아이처럼 보일 텐데 말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겸손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서로 불완전한 사람을 만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요즘에 결혼하는 젊은이들, 20대 후반쯤 결혼한다고 하면 얼마나 어려보이고, 특히 20대 초반에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이구, 쟤네들이 과연 밥이나 해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우리도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불완전한 사람을 불완전한 사람과 만나게 하시는 이유는 그렇게 서로와 서로를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완성되지 않은 인간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랑해야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 앞에서 자기가 한 사람을 사랑하기에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전에도 관계가 있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자녀로서 부모를 존중해야 됐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는 좀 개기어도 되는 관계였습니다. 부모는 우리에게 도리를 다해도 우리는 가끔 땡깡을 부리고 우리의 의무를 태만히 해도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 묻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무한히 참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많은 아내들은 존경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깁니다. 골로새 교회 교인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사도 바울은 주님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아내들아 존경할만하거든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러지 않고 그냥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노예적인 복종이나 아부가 아닙니다. 더욱이 자신을 사랑해 준 것에 대한 보상도 아닙니다.
B. 하나님 사랑으로 복종함
그러면 무엇으로 아내는 이 불완전한 남편에게 복종하고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가정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계획의 핵심은 자기가 죄인인데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 구원 때문에 자신은 예전에 없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 때문에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의 현실들을 극복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그때마다 은혜를 주심으로써 극복하기 힘든 현실을 극복하며 승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남편에게 복종하되 남편의 인격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질서 때문에 하나님 앞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이 잠깐 빗나가고 자녀들이 방황해도 아내가 가정에서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으면 가족들이 하나씩 둘씩 돌아옵니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렸을 때 제 친구 중 하나는 아버지가 아이들이 초등학교 1,2학년, 3,4학년이던 나이에 아내가 바람이 났고, 그래서 이혼한 후 그 아이들을 돌아가실 때까지 돌봤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밥을 해주고 아침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쌓아주는 그 아버지를 자식들이 너무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이 아버지 때문에 깨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아내가 잘못된 길로 빠지고 애들이 빗나가도 아버지가 남편으로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가족들이 하나씩, 둘씩 거기로 그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엄마 아빠가 정신 못 차려도 아들, 딸이 굳건한 신앙에서 가정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면 그 분들이 하나씩 둘씩 돌아와 자기를 영적인 부모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시는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핑계대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못하는 것, 아내로서의 도리를 못하는 것은 부모와 남편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종종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은 ‘너무 상심하지 마라. 네가 그만큼 밖에 못사는 것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야, 혹은 못난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당신이 힘들어서 그러는 거야.’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그렇게 얘기해주어도 자신은 그 모든 잘못된 가족 관계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야지 남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남편을 깎아내리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자,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과오와 약점을 수많은 사람에게 공개함으로써 여러분들에게 무엇이 돌아옵니까?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여러분의 남편을 그 얘기를 듣고 무시하게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아주 고소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렇게 남편의 허물을 공개하는 동안에 자신도 그저 그 남자하고 살기에 적합한 여자로 평가 절하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슴에 깊이 명심하여야 할 바입니다. 존중이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 없고, 사랑은 반드시 존중의 감정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이 해야 될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해야 될 일인 것입니다.
저는 젊어서부터 목사님들이 서는 결혼 주례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결혼 서약이 문제였습니다. 목사님이 시키는 결혼 서약을 잘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신랑에게 묻습니다. “일평생 신부 아무개만을 사랑하겠느뇨”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신부에게 묻습니다. “신부 아무개양은 신랑 아무개 군을 존경하고 사랑하겠느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고 그 위에 존경까지 해야 되고, 남자는 그냥 사랑만 해야 되는지’가 늘 의문스러웠지만 목사님들에게 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제가 드디어 목사가 되고 주례를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순서지를 가져다 놓고 부목사님에게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존경을 빼려면 다 빼고, 넣으려면 다 넣어야 공정하지 않냐? 함께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인격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엄한 한 인간으로서 그렇게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확고하게 서 있으면 그러면 그는 결국은 지금은 어긋난 것 같아도 결국은 가정이 원질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이 의무를 이행할 책임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이 이것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비록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지라도 나의 현실은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그 계명을 따를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이 결혼은 좁은 의미에서는 내가 선택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큰 계획 속에서 우리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앞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구원을 받았을 때 이후의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을 때 이후에 자신의 모든 삶은 그분께 드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삶을 모두 받으신 그분이 바로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아내를 사랑함 같이 아내들은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는 복종의 의무가 있고, 남편에게는 의무가 없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에베소서 5장 21절은 주 안에서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일이 쉬웠더라면 하나님이 이것을 명령하실 리가 없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본성에 속하는 일이었다면 굳이 계명으로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자주 어겨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주 어기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런 명령을 아내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남편은 힘이 없어집니다. 이제 더 이상 수입이 없고, 그리고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습니다. 이제 아내는 아직 능력이 있고, 남자는 나이 들수록 여성 호르몬이 많아지면서 연약한 여성이 되어가고, 여성은 나이가 들면서 남성 호르몬이 증가하여 남성스러워져 갑니다. 그래서 이제는 남편이 아내를 의지하고 싶어하는데 아내는 젊은 날에 받은 상처가 너무 많아서 이제 더 이상 남편이 자기를 의존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내칩니다. 그리고 이제 남편이 무엇인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거의 없습니다.
60년을 부부싸움 한번 안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던 80이 넘은 그 노인에게 젊은이가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60년 동안 부부싸움 한번 안하고 살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길 ‘우리는 늘 싸울 것 같아서 결혼할 때부터 분업하기로 했습니다. 사소한 일은 아내가 결정하고, 중요한 일은 남편의 결정에 따르도록 말입니다. 다행히 60년 동안 한 번도 중요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재정도 아내인 자기가 갖게 되었고 건강도 남편보다 훨씬 좋습니다. 넘쳐흐르는 남성 호르몬으로 이제 남편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현실입니다. 그러면 지금 아내인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젊은 시절에 젊음과 돈과 권력이 많아서 자기를 학대하고 깔보았던 그 남편이 한 행동과 무엇이 다릅니까? 시간만 바뀌었을 뿐이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자신은 남편을 그렇게 의지하고 싶었지만 남편이 일에 빠져서 자기를 멀리 했고, 나이 들어서는 남편이 자기를 의지하려고 하지만 자신이 젊은 날에 상처를 가슴에 간직하고 그 남편을 마구대하며 살 때 결혼하면서 살았지만 한 번도 사랑으로 연합된 적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혼할 때에는 남자와 여자로 만나서 결혼하지만 그 남자에게 여성의 아름다움 때문에, 또 그 여자에게 남자의 아름다움 때문에 생겨나는 사랑의 매력은 몇 년이나 갈까요? 저는 짧으면 4박 5일이고, 길면 6개월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자와 여자로 만났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남편과 아내로 살아가고, 남편과 아내는 결국 사람 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70이 되면 이제 과거에 어떠했든지 인류애로라도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부부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처음에는 넘쳐 오르는 육적 사랑으로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정말 사랑하며 살줄 알았습니다. 잘 안 되는 것을 깨닫기까지에는 불과 몇 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는 결국은 서로를 사랑하며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질서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질서가 아내와 남편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이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질서 속에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살아가는 조화로운 삶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원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얕잡아 보지 마십시오. 헐뜯지 마십시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을 마치 가난한 사람에게 적선이나 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농담으로도 말하지 마십시오. 서로가 서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이라고 고백할 때 그때 여러분들은 한 인간으로서 얼마나 완전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 더없이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지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며 남편을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일이 피차 복종하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유치하게 사랑을 담보로 복종을 언약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녀로 만드셔서 남편과 아내를 삼으셨습니다. 서로 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고귀한 인격체로 여기고 존엄한 인간으로서 깊이 존중해 주도록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존재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이렇게 아내가 남편에게 하나님 사랑으로 복종하는 삶을 삶으로써 가정의 질서는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를 가리 켜서 오늘 성경은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어로 ‘아나켄’이라는 단어는 ‘적합하다, 꼭 맞다, 잘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한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일탈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알맞은 삶이 아닙니다. 모든 아름다움의 근본은 바로 위치에 있습니다.
어느 위치에 놓여있는가에 따라 그 물건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파랑새가 너무 예쁘지만 만약에 그 새가 이 예배당을 날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예쁘다고 표현하지 않을 것입니다. 푸르른 나무 한 그루는 너무 아름답지만 뿌리 채 캐어져서 여러분들의 거실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위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고 옆으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알아서 자신이 그 아름다운 자리로 돌아가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일이 힘겨울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 위치로 돌아가도록 만드시고, 또 거기에 머물러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의 달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또 서로를 사랑하게 된 이치를 깨달았으니 이제 그것을 여러분들의 가정에 실제로 적용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복종하는 가운데 가정의 질서를 회복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3 (2019.06.09._주일오전)
3. 아내를 사랑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지으셔서 부부가 되게 하심으로 가정을 위한 당신의 계획을 펼치셨습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는 로마 제국의 치하였습니다. 로마의 통치자들은 제국의 번영을 위해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건강하게 이끌어 감으로써 로마 제국에 충성하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덕스러운 삶을 살게 하는데 가정의 가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사회는 남존 여비의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사회에서 여성들이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그저 남편에게 복종하고, 가사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고, 자녀를 생산하고, 정숙하고 모든 어려운 일에 침묵으로 인내하는 것이었습니다.
II. 아내를 사랑하라
바로 이런 문맥에서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가정에 관한 두 번째 중요한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은 바로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은 그리스어로 ‘아가페테’입니다. 알다시피 이 단어의 동사 원형은 ‘아가파오’이고 여기에서 나온 명사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가페’ 곧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A. 아내, 사랑의 대상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일 먼저 아내가 사랑의 대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내는 남편이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의 문맥에서 보면 여자는 숭고한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무한한 박애에 기초한 사랑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그러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성 우월주의적이고 그리고 복종적인 질서를 가진 로마 문화에서 아내에 대한 기독교의 이러한 명령은 생경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바로 그러한 로마 제국 시대 하에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남편들이 아내를 그 세상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윤리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윤리가 이 세상의 복종의 윤리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결혼은 결혼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한 여자와 남자가 일생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결혼을 결심하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지고지순한 종교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한 이성이 또 다른 이성에게 끌리는 정서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에로스의 사랑으로 시작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결혼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한 여자로서의 아름다운 이성의 매력이 얼마나 갈까요? 한 남성으로서의 이성이 주는 매력이 얼마나 지속될까요? 결국 결혼은 에로스의 사랑을 신앙 안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대한 부부관계에 대한 세상의 이해는 너무 굴종적이거나 혹은 억압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영혼의 독특성에서 규정합니다. 즉,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된 존귀한 인격적인 존재를 보고 그와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견해입니다. 아내는 지배의 대상일 수 없고, 그리고 아내는 반드시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는 대상이어야 합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그가 그녀의 존재의 가치가 천부적인 것이며 사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하나님 안에서 타고 났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인간 스스로 처분할 수 없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존엄성의 근거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그 사람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혼은 단지 치솟는 열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게 하는 인격적인 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과 함께 나란히 나오는 것은 ‘괴롭게 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공기를 들여 마시듯이 당연히 되는 일이라면 명령할 이유가 없고, 안 해도 될 수 있는 일이라면 굳이 하지 말라고 분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모든 남편들은 본성을 따라 살게 내버려 두면 결코 아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성대로 살게 내버려 두고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하지 않으면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내를 괴롭히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를 괴롭혀 뼛속까지 상하게 하는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 대한 파괴적인 도전 행위이며 남편과 아내는 한 몸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아내를 그렇게 불행하게 하고도 행복할 수 있는 남편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은 끊임없이 아내를 괴롭힐 수 있는 성질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의 그러한 악한 본성과 싸우며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대로 내버려 두면 남편은 결코 아내를 사랑할 수 없으며 더욱이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 둘을 만나서 한 부부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 대신 아내나 남편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인생에 힘든 때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하면 이 무게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기 전 한 인간으로서의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누군가와 함께 살아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즉, 자기 혼자 살아서 행복한 길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남편과 아내로 맞아서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결코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를 보면서 우리는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분들의 세대 속에서 남편이 아내를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우리 중 얼마나 있을까요? 남편은 아내 위에 군림하고, 아내는 모든 시련을 참고 인내하고, 침묵하고,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그릇된 윤리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여자는 함부로 대해도 되고 아내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사실은 올바른 복음적인 부부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출발은 이것입니다. 먼저 내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설정에 있어서 세상의 정신과 가치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내게 제시하신 표준을 따를 것인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남자가 깨끗하게 아내와의 관계에서 어느 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났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승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은근히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의 쓰레기 같은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제까지는 내가 아내와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했지만 이제 이것들을 써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세워야 되겠다는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냥 지루하고 패배적인 삶이 계속 될 것입니다. 가슴에 새기십시오. 남편의 덕목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동등하고 인격적이고 그리고 한 인간의 존엄성을 불가침한 것으로 여기고, 어떤 경우에도 존중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랑이 남편에게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미모를 보고 마음이 끌려 결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뛰게 했던 이성으로서의 그 매력은 사라지고, 함께 인생을 같이 하는 반려자로서의 아내가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실패할 때 그는 온전한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 새기십시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며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은 저절로 아내를 괴롭게 하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도록 관계를 설정해 주신 사랑은 아내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용납하여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사랑, 자기완성의 길
마지막 두 번째는 그 사랑이 자기완성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각각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하나의 영혼을 주시지 않고, 개별적으로 두 개의 영혼을 창조하셔서 서로 다른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또 한 사람은 그 흙에서 만들어진 몸의 갈비뼈를 취하여 두 번째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가 아니라 남자에게 짓밟히도록 발바닥의 뼈가 아니라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살과 뼈를 취하여 여자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고자 싶어 하시는 바는 이것이었습니다. “너희는 비록 눈에 보기에는 두 사람의 몸으로 떨어져 있으나 잊지 마라. 너희는 한 몸이니라, 너희는 한 몸이니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너 자신의 것처럼 느끼고 너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서로를 위하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부부를 한 몸에서 만드신 이유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는 결혼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당연히 그것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반성하는 지성이 있을 때에 가능해집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려고 결혼을 하지, 불행하려고 결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혼자 사는 것보다는 같이 사는 것이 좋다고 믿기에 아내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아내를 얻은 사람이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결혼한 남성에 비해 수명이 짧습니다. 그리고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여자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 여자보다 더 일찍 죽습니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 중에는 암에 걸린 여자가 많습니다.
결국 우리는 결혼을 통한 하나님의 큰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제법 완성된 인간인 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나서 정말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내를 만나 깨닫게 되는 남편의 본 모습이 그 사람으로서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철이 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혼자 살았으면 못 누릴 행복만을 누리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혼을 그런 식으로 준비하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서 혼자 살았더라면 절대 파악할 수 없었던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보면서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마땅히 되어야 할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실제로 현재 여기에 있는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이 참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내 때문에 주께로 더 가까이 가게 하시고, 남편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이 결혼의 원리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어차피 추상 명사니까 하든 안하든 티가 안 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더욱이 아동과 같은 심리를 가진 남성이 그 여성인 아내를 사랑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 쉽지 아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먼 길입니다.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시지만 일관성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아내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해달라는 대로 안 해줬다고 욕을 먹지만, 어느 때에는 꼭 말했다고 그대로 해야 되냐고 야단을 칩니다.
어떤 선한 사람이 바닷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발아래 램프가 하나 굴러다녔습니다. 무심코 발로 툭 찼더니 펑하고 터졌습니다. 그리고는 마술 램프의 지니가 나타났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주인님 당신은 선한 사람입니다. 한 가지 소원을 들어드리지요.” 그래서 이 남자가 말했습니다. “정말 뭘 얘기해도 들어주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사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 고향은 남미였습니다. 가족들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가는 길은 너무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탁했습니다. “정말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아프리카부터 남미까지 고속도로 도로를 직선으로 놓아주십시오. 그러면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나는 한 달이 걸려도 좋으니 내 차를 몰고 달리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지니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면서 짜증을 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성이 있는 사람이냐? 그 바다의 깊이가 얼마나 깊고, 거기에다가 말뚝을 세우고 그 위에 도로를 깔아야 된다면 얼마나 많은 시멘트와 철근과 자갈, 전 세계에 있는 모든 모레를 모두 모아도 될까 말까다. 다른 소원을 말해봐라” 그래서 이 남자가 “그러면 그냥 소박한 거나 하나 해주십시오.” “그게 뭡니까?” 그랬더니 “우리 아내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그랬더니 지니가 한참 고민에 빠지더니 대답했습니다. “몇 차선 깔아줄까요?” 지니에게도 아내의 마음을 아는 일은 아프리카에서 남미까지 고속도로 놓기보다 어려운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성경 말씀으로 자신을 게시하시니까 그것만 공부하면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아내는 그때그때 다릅니다. 그래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게 다음 네 가지 단계를 거치면서 그 사랑에 적응을 해가는 것입니다. 첫째는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 일어나는 효과는 놀라운 집중입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 이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집중력의 결과는 소외입니다. 자기 혼자 외톨박이가 된 것 같고, 자신의 사랑은 허공을 향해 퍼붓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절대적인 만족을 못 느끼게 하셨습니다. 소외를 경험하면서 그 다음에 이것이 사랑의 한계인 줄을 알고 거기에 적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순환적인 관계 속에서 성숙해지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며 사는 길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 모든 인간의 외로움이 사라지고 기쁨이 넘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그런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신과 같은 여자를 만나서 사랑을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자기와 꼭 같은 인간을 만나서 서로 사랑하는 그러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하는 관계가 아무리 깊어져도 도저히 내가 나이기 때문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인간의 한 실존으로서의 본질적인 고민은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의 인생에 대한 정직성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부 사이에 아무 거치는 것이 없고, 서로 뜨겁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누워 있는 아내가 도저히 동참해 줄 수 없는 그 한 인간으로서의 고독과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같이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없다면 그냥 좋은 여자하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면 하나님이 필요 없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아무리 많은 사랑을 남편에게 받고 아내에게 받아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해 주시고 함께해 주실 분이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인간이 외로운 것은 사랑을 못 받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외로운 것은 정말 사랑하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외로운 것입니다. 남편이 사랑을 해주어도 그것으로서 인간의 모든 외로움이 해소된다고 그렇게 어리석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가 주는 위로, 참 크고 진짜 괴로움을 주는 아내와 사는 사람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것은 아내가 나누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영혼으로부터 창조되었으나 시간 안에 갇혀 있고 무한한 주님께로부터 왔으나 유한한 인성 안에 묶여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한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될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들의 비겁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신의 인격의 한계 때문에 도저히 아내와 좋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랑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때 그는 과감하게 자신의 관심을 밖으로 돌립니다. 그리고는 가정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내와 인격적으로 좋은 관계를 맺기를 아예 포기하고 그리고 일에 몰두하거나 자기가 하는 어떤 사업에 자기 자신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명을 지르는 가족들에게 그는 항거합니다. “내가 혼자 먹고 살려고 하냐? 모두 가족들을 편안하게 먹고 살리려고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냐?” 거짓말입니다. 남자는 결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모든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며 일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일 자체가 주는 매력 때문에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가정에서 못 찾은 존재감을 거기에서 찾기 때문에 그는 일 자체에 매달려서 거기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가족들이 먹고 사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모든 동기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동기라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 남자가 아내와 함께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사랑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혹은 사랑할 수 없는 무능력함이 유능력함을 상황의 핑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모자라는 것을 다른 핑계로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더욱이 젊은 시절에 힘이 있고, 권력이 있고, 가진 것이 있다고 아내를 마구 억압하고 그리고 아내를 소외 시키며 자기 세계에 갇혀서 사는 것은 결국 스스로 자기의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지금은 젊음도 있고 힘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여러분들을 향해 박수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은 가진 것도 내려놓아야 되는 때가 있을 것이고, 지위도 잃어버리는 때가 올 것이고, 아무도 박수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들은 떠나가고, 그것을 사랑하던 나도 떠나갑니다. 그때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이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남아있겠습니까?
젊은 날에 그렇게 아내를 함부로 대하고 비인격적으로 대하면 나이 들어서 결국은 홀로 소외되게 됩니다. 그는 아끼는 사람 없이 늙은 세월을 보낼 것이며 슬퍼하는 사람 없이 죽음의 장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한 인간으로 태어난 어찌 보람일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흙이나 돌멩이로 태어난 것보다 좋은 것은 그렇게 다른 인간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인생이지만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사는 데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내를 사랑해 주었던 날은 길어도 아내의 마음에 조금 기억되고 괴롭게 한 날은 짧아도 아내의 마음에 길게 기억이 됩니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멩이에 새기는 인간의 심사가 아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날 동안에 아내를 긍휼히 여기고 진심으로 인격적으로 대해주어야 합니다. 많은 물질이나 그리고 어쩌다가 한번 하는 분에 넘치는 선물로 비인격적인 당신의 태도를 덮어버리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슴에 깊이 새기고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입은 신자가 된 한 나의 피할 수 없는 본분은 내게 주신 아내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고,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지 그 존엄성이 나에 의해 침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여자라는 이유 하나, 아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무시하거나 자기 아래 있는 하수나 복종해야 할 하인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서 단점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혼하는 사람은 생각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이 단점을 주신 것은 그 여자 혼자 살아서는 저런 단점을 가지고 굽은 삶을 살 수밖에 없으니 내가 너를 저 여자의 남편으로 불렀노라 저 단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게 자기 단점인지도 모르는 저 여자를 도와주거라 그게 여러분들을 한 여자의 남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나는 종종 심지어 교회에서도 돌아다니면서 남편의 흉을 보는 아내들, 다니면서 대화 속에서 아내의 허물을 말하는 남편들을 봅니다. 그것은 드러누워서 침을 뱉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를 그것도 특별한 목적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자기 남편이 이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많이 말하고, 아내가 이렇게 허접한 여자라는 것을 말해서 여러분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무시하고 여러분을 똑같은 인간으로 봅니다.
우리의 몸은 많은 질병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그 질병 때문에 우리의 몸을 잘라버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와 남편은 이미 그렇게 한 몸이 되었으니 서로를 깊이 용납해야 합니다. 그 일이 도대체 누구에게 즐거운 일이겠습니까? 자기를 꺾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사랑을 포기하고 남을 사랑하는 일이 쉽고 즐거운 사람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혼은 그런 소명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착각하기 때문에 결혼하고 기억을 못하기 때문에 재혼을 한다.’ 너무 어렵습니까? 사랑에 빠져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착각했기 때문에 결혼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하고 헤어져서 재혼을 할 때는 자기가 결혼 속에서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를 망각하기 때문에 기억력 상실에 걸려서 재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이야기가 결혼의 필연성을 무시하거나 결혼을 후회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누가 그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내 앞에 마주하고 있는 운명 같은 이 여자, 이 사람이 내 아내입니다. 그리고 버릴 수 없고, 그리고 그녀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나의 인생에 자존심에 관한 문제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런 한계에 부딪쳐서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이 아내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아내를 고치려고 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치려고 선생질하는 남편도 자기 자신이 그렇게 안 바뀐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을 못하나 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것은 아내를 너무 학생처럼 보지 마세요. 그리고 무얼 너무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학습이 안 되는 사람이 아내입니다. 그리고 배워도 그대로 안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아내를 평범한 인간으로 보고, 너무 가르치고, 자기가 쎄게 가르치면 이 여자를 놀랍게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자만심을 갖지 마세요. 그러면 그냥 포기하고 살아야 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아내를 그냥 이렇게 인격적으로 잘 떠밀어서 주께로 가까이 가게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 주님이 신앙이 너무 훌륭해서 남편인 여러분들의 편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앉혀놓고 수없이 선생질을 해도 못 알아듣던 아내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오니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그리고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내로서 올바르게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남편으로서 아내를 이기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굳이 이해를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많이 다툽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해를 못하니까 그런데 나이가 좀 들면 이해하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면 꼭 이해해야 할 필요가 없는 거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 할머니 말씀대로 ‘얘야, 웬만하면 놔둬라. 지가 그렇게 하고 싶대잖냐.’ 아내를 향해서도 웬만하면 놔두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게 사는 게 편하다니까 살라고 두는 것입니다. 그게 큰 죄가 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살아라. 그래서 적어도 나 같은 남편을 만나서 고생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나라는 인간 때문에 끊임없이 억압당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그렇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게 두는 것입니다.
그냥 여러분의 아내는 수백 년에 한두 명씩 태어날만한 그러한 어마어마하게 도덕적이고 탁월한 그런 여성이 아님을 명심하세요. 그냥 수없이 태어났다 죽는 수많은 여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남편인 내가 그러한 것처럼 그래서 그냥 그렇게 세속적이고, 평범하고, 때로는 소박하고, 그리고 신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적절히 섞여있는 그런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지 100년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하는 성스러운 여자였으면 왜 우리에게 시집을 왔겠습니까? 천사에게 갔겠죠.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불완전한 그 한 여자를 하나님이 나에게 아내로 허락해 주셔서 그래서 그렇게 누구에게도 긍휼히 여길 수 없는 연약한 부분들을 그렇게 남편인 우리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격려하고,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맺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싸우는 것은 아주 바보짓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 이긴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승리겠습니까? 고쳐지지 않는 것은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몫이려니 하고 그냥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할 수 있는 한 기도하고, 사랑해 주고, 그리고 참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그 여자에게 보여주어서 그 여자가 날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귀한 줄 모르고 긴 세월을 살았는데 ‘야, 이 남자가 정말 하나님의 선물이었구나. 그리고 어디에서도 이런 사랑을 볼 수가 없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남편은 그런 보람에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인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마다 이 결혼 생활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아내들은 많지만 아내를 위해 기도하는 남편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것은 남편의 많은 각성을 요구합니다. 힘들 때마다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셔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저 여자와 만나 남편과 아내가 되고 여기까지 살아오게 하셨는지를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인간으로서 점점 더 온전해지고, 거룩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사느라고 되게 힘들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것 때문에 내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 그게 하나님이 남편과 아내로서 살아가게 하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앞에 있는 아내의 얼굴은 내 인생의 성적표입니다. 그 여자도 불행하고 외롭게 힘들고 소외되어 있고, 나를 남편으로 만난 것을 후회한다면 하나님도 나를 이 세상에 한 인간으로 살게 하신 것에 대한 성적표를 그렇게 매기신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내인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저녁에 가서 남편의 얼굴을 한번 잠잘 때 들여다보세요. 전혀 행복하게 보이지 않아요. 우울과 불안이 가득하고 그리고 사방에서 소외되었는데 집에서는 나한테 더욱 인간 취급을 못 받습니다. 이렇게 보십시오. 그 남편의 얼굴이 한 아내로서 인간으로서 살아온 여러분들의 가슴에 새겨진 하나님의 성적표입니다. 아내를 딱 봤는데 가진 것 없이 정말 힘겨운 인생을 살아왔고 말할 수 없는 시련의 고비와 고통의 세월들을 함께 지났습니다. 그런데 꽃다운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늙어가지만, 얼굴에 평화가 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누려지는 친밀함이었습니다. 남편이 여러분들을 향한 성적표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두 번도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 여자하고는 딱 한번 만나는 것입니다. 다시 안 만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만나도 다시 결혼을 하고 살지 않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가엾게 여기십시오. 그리고 오래 참으십시오. 그 여자하고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고 죽으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아직도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포악한 마음을 뉘우치십시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시련도 만났지만 인생을 다 산 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은 후에 그래도 이 한 마디 말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아내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는 승리하게 하셨구나’라고 말입니다. 꽃처럼 향기 나는 생활은 아니어도 주님 안에서 그렇게 부부로서 서로 기뻐하며 그리고 저 한 여자를 만난 것이 진정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었다고 고백하면서 인생의 황혼을 맞는다면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거기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4 (2019.06.16._주일오전)
4. 네 자녀를 사랑하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빠르면 2년 전, 그리고 늦으면 5년 전에 쓴 편지입니다. 로마 시대에 에베소는 커다란 제국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도 그 유적의 터는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문명의 도시가 미신과 주술로 번성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세속의 도시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II. 자녀를 기르는 길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의 계획을 말한 후 가정을 향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를 기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도는 자녀 양육의 두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침은 하나에 의해 지배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특별히 이것을 아버지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자칫하면 자녀를 노엽게 하기 쉽고, 또 자녀를 주의 교양과 교훈으로 양육하기 어려운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에게만 하는 명령이 아니라 부모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명령입니다.
A. 노엽게 말라
제일 먼저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녀를 기르면서 그들을 노엽게 하는 길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자녀를 많이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가 되어서 자식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직 젊고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직 어리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힘과 권력을 휘두르면 자녀들은 그것을 그대로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르지 않는 견딤일 때 언제나 상처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될 다른 이유를 다른 곳에서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고 말합니다. ‘낙심하다’는 희랍어로 ‘아듀모싱’(ἀθυμῶσιν)인데, 이것은 ‘절망하다, 열정이 사라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을 의지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주체적인 욕망이 있어야 하는데 이 부모와 잘못된 관계는 이것들을 비뚤어지게 하거나 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어떻게 할 때 아이들이 살 용기와 진정한 소망을 잃어버리기까지 낙심하게 되는 것일까요? 첫째, 빗나간 욕망입니다. 배우지 못한 부모는 그것이 한이 되어서 자기에게 못 이룬 꿈을 아이에게 이루고자 하는 설움에 가까운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자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 아이를 최고로 만들겠다고 하는 육신적인 생각들은 때때로 자녀와의 관계를 파괴하고 아이의 가슴에 멍이 들게 만들어 줍니다. 아이는 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는 나와 다른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입니다. 부모의 사명은 그가 부모가 원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그 아이의 희망이 아니라 그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도록 돌보고 지켜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입니다.
둘째, 이런 빗나간 욕망 이외에도 자녀를 향한 과도한 기대가 있습니다. 이 자녀가 다른 사람보다 우수한 자녀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어떻게 하든지 일류 대학에 보내고, 경쟁 사회에서 승자가 되게끔 하려는 부모의 욕심입니다. 그러한 노력들은 어느 정도 자녀들의 사회생활에서의 생활에서의 승리를 보장할 것이고, 그리고 그 미래를 조금 더 안정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지나친 기대는 자녀들이 자기의 뜻대로 살고 싶은 인생의 길을 가로막고 그를 꺾어버립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화초 가운데 하나가 분재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잔인한 방식으로 만드는지를 알기 때문에 저는 모든 분재를 혐오합니다. 자연스럽게 자란 나무가 아니라 철사 줄로 칭칭 감고, 성장 억제제를 주사해서 그렇게 기형으로 만들어서 인간의 즐거움에 부합하는 화초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분재와 같이 기르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가진 한 인간 존재이고 나와는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나보다 열등하지도 않은 그런 동등한 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창조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되고 여러분의 인생을 살도록 창조되었고, 자녀는 그 사람이 되고 그 자녀다운 인생을 살도록 주님께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녀를 향해 과도한 기대를 가지고 그 자녀의 갈 길을 꺾고, 그 자녀의 삶의 의욕을 상실시키시는 것은 부모가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셋째, 지나친 징계입니다. 자녀는 판단력이 어리고, 의에 대해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잘못했을 때에 적절히 견책하고, 그리고 의도적인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어린 나이에 징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한 마음에 자녀를 혈기로 징계하거나 혹은 징계라는 미명하에 분노를 쏟아놓는 행위는 아이들을 절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 노를 다 발동하지 못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는 참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폭언과 폭력, 이런 것들이 난무하는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는 것은 인간을 불행하게끔 만드는 그런 일입니다. 부모는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커다란 범죄인지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넷째, 이것과 함께 지적되어야 할 것은 무관심입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인내함으로 관용하는 것과 내팽겨 쳐 버려서 아무렇게나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런 무관심은 폭력보다 나쁜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녀들은 힘과 권력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상황을 견뎌야 하고, 그러는 동안에 자녀는 끊임없이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기억 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는 여러분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는 천하보다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고, 존엄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이를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하며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 속에서 자라도록 여러분을 부모로 삼으신 것입니다. 자녀들은 따라서 어떻게 태어났던지 어떤 상황에 놓였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무한히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서는 책망과 징계가 때때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매를 두려워하고 징계를 무서워할 때에 이것이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다 성장한 후에는 부모가 자녀를 징계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 이 자녀는 그러한 책망이 필요하지만 충분한 사랑 속에서 그 일이 이루어져야지만 부모의 모든 교육이 그를 사람답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여학교 화장실에서 16살 먹은 어린 소녀가 자기 머리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어떻게, 어떻게 하고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손에는 임신 테스트 키트가 들려 있었고, 그 결과는 임신이었습니다. 그리고 16살 먹은 이 소녀에게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얘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에 대한 끔찍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붕대로 몸을 칭칭 감고, 임신 사실을 숨겼지만 만삭이 되어 불러오는 배를 엄마에게까지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은 탄로 났고, 엄마는 개 패듯이 두드려 팼습니다. 그리고 통곡하듯이 울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아이를 야단치면서 손목을 끌고 당장 병원으로 가서 애를 떼버리자 라고 잡아끌었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가출했습니다. 그리고 연락을 모두 끊었습니다. 4년의 세월이 지나고, 당연히 이 아이는 학교를 중퇴하고 알바를 전전하면서 아이를 키웠습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이제 너무 힘드니 집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을 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또렷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집에 들어갈 수 없고, 두 번째는 다시 엄마의 얼굴을 보고 이 아이와의 관계가 위협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하고 아주 어머니와의 의절의 의사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나도 딸을 낳았습니다. 엄마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딸이 나와 똑같은 상황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엄마처럼 이 딸에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저는 한동안 울었습니다.
도대체 그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요? 반듯한 딸을 원했을까요? 열여섯 살에 푸릇푸릇한 꿈을 꾸며 학교에서 일등을 하는 딸을 원했을까요? 그런데 자기 딸은 그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열여섯에 임신하고 아이를 가진 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중절 시켜버리고 새 삶을 살게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를 낳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기 때문에 딸을 그렇게 의절하듯이 버리는 것이 부모의 도리였을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 미성숙한 것입니다. 자식은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해도 부모는 그 새끼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열여섯 살에 미혼모가 되거나 혹은 열여덟 살에 남편과 사별한다고 할지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엄마를 필요로 하고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 아이는 노여움으로 가득 차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깊이 절망하고 관계에 대해서 모든 열정이 사라지는 것을 어린 나이에 경험했으니 이제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면서 독립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과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그 아이에게 부모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 존재일까요? 여러분은 절대 이런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자녀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마지막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 그 사람이 엄마 아빠여야 하는 것입니다.
B. 양육하라
두 번째는 양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공장에서 만들지 않으시고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부모에게 자녀를 맡기신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지식을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생활을 위해서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을 맡긴 첫 번째 이유는 자식으로 하여금 올바른 지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린 아이는 엄마의 품이 세계의 전부입니다. 자라면서 엄마의 무릎을 밟고 어깨를 넘어서면서 아빠를 발견하게 되고, 그리고 혼자 걷기 시작하고, 철이 들면서 형제에 대해서, 친구에 대해서 눈이 뜨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부모는 아이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창문입니다. 그 창문을 통해 세계를 보게 되고, 그 창문의 유리가 어떤 유리인지에 따라서 비관을 배우기도 하고, 낙관을 배우기도 하고, 혹은 굽어진 세계를 보기도 하고, 맑고 밝은 세계를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공장에서 만들지 않으시고,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부모로부터 이러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의 조건은 사람 같은 부모 아래서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열여덟 살 먹은 애 엄마와 스물한 살 먹은 애 아빠가 바람을 피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그리고 6박 7일동안 각자 친구들과 어울리며 매일 밤 술을 마시고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 재미있는 광경을 SNS에 올리는 동안에 어린 아이는 굶주려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일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중형을 선고하는 것만으로 어린 아이가 다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자녀의 문제를 가정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의 문제로 봅니다. 친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국가의 감독을 받아야 할 것으로 여겨서 자녀에게 사람다운 도리를 다해 자녀를 기를 수 없는 부모의 친권은 과감하게 박탈합니다. 그리고 그 자녀에게서 격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시스템이 아직 현저히 부족하고, 부모의 폭력과 그리고 이러한 부모의 자녀 버림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피난할 데가 없는 현실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아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이 부모의 손에서 이렇게 죽어갑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회의 광경을 내려다보실 때 그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이 땅은 이러한 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을 맡긴 또 다른 이유는 그에게 생활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터득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을 사람에게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 동화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산에 갔던 사람들에 의해서 정글북의 모글리처럼 그렇게 뛰어다니는 야생의 인간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포획되었고, 그리고 사회로 데려왔습니다. 그때 두 아이였는데 하나의 나이가 6-7세쯤 되었고, 또 다른 아이의 나이가 9살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 사건은 전 세계에 커다란 뉴스거리로 전파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의미심장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아교육학자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그렇게 나이를 먹었지만 그러나 지능과 모든 것으로 볼 때에는 거의 갓난아기 수준이었습니다.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낮에는 컴컴한데 숨어있고, 그리고 짐승 소리를 내고, 밤이면 활동을 하는 짐승과 꼭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어떻게 거기에서 발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아마도 짐승들에 의해 길러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노라 하는 전 세계의 유아교육학자들이 프랑스로 속속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과연 교육을 통해 인간 세상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전문가들이 정성을 다하여 아이를 교육했으나 결국은 실패했습니다. 아이들이 꽤 오래 살았는데 큰 아이가 한 16, 17까지 살았는데 그때 지능이 다섯 살 정도밖에 안되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닭이나 이런 가축들에게 모이를 주는 정도의 일까지 하고, 결국은 부적응자로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모두 죽었습니다. 그 결과는 유아 교육자들에게 다시 한 번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인간이 참 인간 사회에 살기 위한 교육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나이에 적실하게 정확한 교육을 받을 때에 비로소 그가 인간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에게 아이를 맡긴 이유입니다.
1. 주의 교훈으로
오늘 성경은 두 가지 방식으로 양육하라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훈은 ‘양육’, ‘훈련’ 혹은 ‘깨닫게 함’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성장에 필요한 양분이 되는 가르침을 뜻하는 것입니다. 육체와 음식에 대한 관계는 정신과 교훈의 관계와 일치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고, 그리고 세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눈도 뜨지 못한 상태에서 오물거리는 입술로 엄마의 젖꼭지를 뭅니다. 그리고 그것을 빨아 먹으며 영양을 섭취하고 조금 커서는 우유를 먹고 이유식을 시작하고, 그리고 아이의 밥을 먹고 성장한 후에는 어른과 꼭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는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게 되고, 몸에 모든 성분들이 활성화 되어서 성장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1년에 10cm씩 키가 컸습니다. 더글러스 스위니 교수는 192cm의 신장을 가지고 있는데 청소년기에 한해에 22cm 키가 자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아팠다는데 성장통이었습니다. 그렇게 자라는 아이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섭취합니다. 우유 1리터짜리를 한 번에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양의 밥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육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갖게 됩니다. 몸은 이미 열넷, 열다섯 살만 되어도 이미 어른의 몸이 되지만 정신은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특히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교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육체적인 상태만이 아니라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양의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거의 책을 읽은 적이 없고,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부동산 시세와 텔레비전 프로그램밖에 모르는 엄마로부터 무엇을 배우겠으며, 1년이 지나도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는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서 나눌 수 있는 인생의 가치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자녀를 주의 교훈이 없이 정신과 영혼을 핍절한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부모 중 누구가 자신의 자녀를 거의 먹이지 않아서 살갗이 뼈에 달라붙어 환자처럼 되어 있는 것을 본다면 여러분들이 그 부모를 잔인하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자녀들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영양의 상태를 한번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종교적인 엄격함으로 교육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성장하도록 주님의 교훈으로 자녀를 길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린 나이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자녀들을 진정한 회심에 이르도록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유아 세례 주었던 때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서약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에게 우리의 경건한 종교의 도리를 가르치며 이 아이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과 같이 여기며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며” 라고 서약했습니다. 그러면 그것대로 행해야 합니다. 자녀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구원처럼 안타까워하고, 그가 진정한 회심에 이르도록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그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에 의해 다루어지는 사람들이 되도록 간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는 부모 앞에 말로 배우지만 아이가 주체성이 생긴 다음에는 부모를 세계 전체의 지도에 놓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를 뒤의 모습을 보며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그러므로 입으로만 주의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부모인 여러분 자신이 말씀의 은혜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보람 있는 삶인지를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때 여러분들이 한 사람을 행복한 인간이 되도록 양육하는 부모가 될 것입니다.
2. 주의 훈계로
두 번째는 주님의 훈계로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이 훈계는 ‘책망’ 혹은 ‘교육’을 뜻합니다. 이 바른 훈계는 의무를 일깨워 분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지성을 일깨워 감화에 이르게 하고 훈계는 구체적으로 참 인간답게 살아야 할 의무를 일깨워 분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부모들이 자녀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관계는 이후로 모든 사랑과 교훈, 부모의 소망과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들어갈 수 있는 통로입니다. 부모를 미워하는 사람이 부모가 사랑했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더욱이 그 부모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자녀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는 아이들을 책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에게 전혀 징계가 없다면 아이들은 사람답게 살아야 할 의무를 일깨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초리의 아픔보다는 마음에 경건한 통증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 진정한 교육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 인간이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 없이는 이러한 경건한 아픔을 느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녀를 사람답게 가르치는 교육의 도구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도구로서 자녀들을 가르치고, 그러나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대신 자기를 사용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교육은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부모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에 의해 자녀의 교육은 완성되고 참 사람이 완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부모가 되던 그때에도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부모의 도리를 잘 몰랐던 것처럼 여러분들의 자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는 교육이고, 평생 계속되는 교육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교육의 지침은 이것입니다. 자신에 의해서 이 모든 교육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못한 것을 이 아이를 인격적으로 다루시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우리를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녀들을 교육 시킬 때에 자녀는 그 의미를 몰라도 후일 그 부모의 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녀와의 관계가 폐기되거나 망가뜨려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자녀가 불경건한 고집에 가득차고, 그리고 부모의 참된 사랑을 몰라서 달뜬 마음에 제멋대로 사느라고 빗나가도 언젠가 세월이 흐른 후에는 부모의 사랑을 회상하게 되는 그런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내가 참으로 어리석어서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몰랐구나. 이제 추억하니 아빠의 그 사랑은 참 사랑이었고, 엄마의 그 돌봄은 끝이 없이 고결한 사랑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이 자녀를 사랑하되 한 사람으로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셨던 것 같은 방식으로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항상 부모인 여러분들의 마음에 순종하는 자식이 아니듯이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그런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러분들의 잘못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멀리멀리 떠나 반역하고,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았어도 주님은 그것 때문에 당신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파산을 선고하지 않았습니다. 철이 들어서 회개하고 돌아가 보면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거기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랑 안에서 어떻게 자녀로 돌봄을 받았는지를 기억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녀들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자녀를 낳을 때에 어마어마한 소명감을 가지고 자녀를 낳지 않았고, 때로는 부모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자각했기 때문에 아이를 출산한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이제 부모의 도리를 이렇게 배우고 있으니 이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부모가 되어 자식을 사랑하고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훈계로 자녀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양육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러듯이 자녀를 사랑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부모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자녀와의 관계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려놓을 수 없는 관계이고, 그 자식이 아무리 인간 이하의 짓을 하고 돌아다녀도 부모는 하나님과 함께 그 자식을 포기할 수 없도록 끝까지 사랑하게끔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여러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다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한 사람으로 완성될 수 없을 것이며, 자녀를 버린 후에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행복이 아닙니다. 쓰디쓴 결과가 그 행복 뒤에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하고 헌신한 것이 한이 되고, 자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 부모의 길이 아닙니다. 자녀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그 나이에 부모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보상을 더군다나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아들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자녀를 사랑하고, 우리가 자녀를 온 마음을 다해 정성껏 길러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었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칭찬하실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일평생 이 사실을 몰라주어도 나는 어떠한 상실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 부모의 길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일이 힘들 때마다 이 아이를 끝까지 사랑해야 할 단 한 사람이 있다면 나뿐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아이가 내 몸에서 태어나는 순간,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내 몸에 잉태되는 순간 이 사랑은 운명적인 사랑이 되었고,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와의 관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힘들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주실 때에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나를 사랑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이 아이를 전심으로 사랑하면서 일평생을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 사람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 부모로서 할 일을 다하는 것이 내가 참 인간이 되어가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녀가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 형상임을 기억하고 그 아이의 엄마도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이고, 그 아이에게 아빠도 꼭 한 사람뿐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모든 은혜를 주신 것은 이 관계를 사랑으로 유지하고, 그 사랑 안에서 사랑받는 자녀가 모든 난관을 이기고 사랑하는 부모인 여러분들을 참 성도가 되고 사람이 되어가기 위해 이 관계를 허락하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자녀를 교육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혼자 살 때에는 주님을 덜 의지하던 사람들이 자녀를 양육하면서 하나님 사랑을 의지하게 되고,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녀를 사람답게 키우고, 여러분 자신도 인간답게 살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5 (2019.06.23._주일오전)
5. 참척(慘慽)의 슬픔이 있습니까?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눅 7:11-16)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부모에게는 자식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습니다. 어느 집에서 개를 한 마리 키웠습니다.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습니다. 모두 순산했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부실하게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숨을 잘 쉬지를 못해서 인공호흡을 하고 그리고 동물병원에서 링거까지 맞았지만 결국은 스스로 어미젖을 빨 수가 없어서 결국은 며칠 있다가 죽었습니다. 주인은 이 죽은 강아지를 애석하게 생각하여 어미 개와 함께 가서 땅에 묻어주었습니다. 정성껏 땅을 파고 새끼를 묻고 그리고 새끼가 나서 맞았던 수액 세트를 유품으로 넣어주고 추울까봐 그 위에 담요까지 덮어 흙으로 모두 다시 묻어주었습니다. 이제 모든 매장이 끝나고 돌아오려고 할 때 어미 개는 미친 듯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개 주인은 새끼를 묻고 갔지만 어미 개는 그 새끼를 잊을 수가 없어서 다시 땅을 파고 새끼가 나올 때까지 또 땅을 파고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주인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자식에 대한 이러한 애틋한 마음을 주어서 연약한 개체를 보존하고 번식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때로는 동물만큼도 자기 자식을 아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주신 본성조차 거스르는 것입니다. 자식을 여윈 것을 부모에게 ‘참척’(慘慽)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슬프고 비참하다는 뜻입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춘추 전국시대 자한은 이 참척을 상명(喪明)이라고 불렀으니, 이는 자식을 앞서 잃은 부모는 빛을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맹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에 모든 희망의 빛을 잃어버리고 상명의 슬픔에 잠긴다는 뜻입니다.
II. 참척을 당한 어미
오늘 성경은 이렇게 참척의 슬픔을 겪으며 상명의 고통을 경험했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나인이라고 하는 성에서 과부의 아들인 한 청년이 죽었고 부모는 그 주검을 앞세우고 뒤를 따라 성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맞은편에서 오는 행렬이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그리고 제자들이 따라오는 행렬이었습니다. 한 행렬은 죽음의 행렬이었고, 또 다른 행렬은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참척을 당한 어미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이 여자는 과부였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여위고, 이 독자인 아들 하나를 바라보고 살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 독자는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자는 이미 늙었을 것이고, 그때에 이 여자의 삶을 움직이는 소망은 바로 이 하나뿐인 청년이 된 독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 과부는 그 슬픔을 무엇으로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 사람 전체가 무너지는 슬픔을 안고 사랑하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그 가엾은 여자를 향해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리스어로 ‘메 클라이에’ ‘통곡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여자는 그냥 흐느낀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며 통곡하면서 앞세운 아들의 주검을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자가 신앙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들을 깊이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통곡하지 않고는 이 아들의 주검의 뒤를 따라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혼할 때 서로 자녀의 양육권을 다투는 부모도 있지만, 서로 아이를 기르지 않겠다고 자녀를 상대방에 미루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는 부모들도 있고, 또 어떤 부모들은 가정 법원 앞에서 아이를 서로에게 떠밀며 ‘엄마에게 가라’ 혹은 ‘아빠에게로 가라’ 하면서 아이가 입술이 파랗도록 울게 만드는 부모들이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무정한 세상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버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녀를 거의 돌아보지 않고 방치하는 부모들도 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젊음이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기운이 남아있기 때문에 자식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버려둔 삶을 살 때 그 부모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자기 소외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은 사랑 받는 사람이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이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 받는 데서는 자기가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없을 수도 있으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자기를 사랑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그는 누구에게 사랑 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소외감을 느낄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III. 살리시는 예수님
성경에 나오는 이 과부는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독자를 생명처럼 사랑했을 것입니다. 슬피 우는 통곡이 어머니의 뼛속까지 사무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앞서서 갔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고, 무엇으로도 죽은 아들을 다시 돌려받을 수 없으니 어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통곡하며 아들의 죽음을 따라가는 것 이외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자녀 사랑은 자녀의 육신만을 위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녀의 영혼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 가운데 만족을 누리며 살기까지 부모는 자식을 바라보며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A. 죽은 자를 살림
이렇게 참척을 당해서 누구에게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서 그녀의 인생이 바뀌는 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살리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은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신기한 행동을 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살려내신 것은 말씀의 무게가 이 모든 세상의 불가능이 주는 무게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로서 하나밖에 없는 독자 아들, 그것도 청년이 되도록 다 키운 아들을 잃고 통곡하며 우는 이 여자를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렇게 살리신 청년을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리심을 받았지만 이 어머니도 죽었을 것이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 아들도 사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으로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것도 놀라운 기적이지만 더 놀라운 기적은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의 능력으로 죽은 영혼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자녀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아직 주님을 믿고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자세히 보면 자녀들에게 영혼이 죽은 징후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자녀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지만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든 삶인지를 우리는 이미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의 구원을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자녀는 아직 젊고 활기차지만 영적으로 보면 여러분은 참척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의 영혼은 하나님을 모르는 채 죽어있고, 그리고 그 영혼은 곤고합니다. 부모가 아니라면 누가 자녀의 이 곤고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려주겠습니까?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새 사람이 될 수 없고, 구원을 받아 새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인생의 외로움과 고통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구원 받지 못한 자녀가 있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인생에 긴급동의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긴급동의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을 잠시 멈추고 자녀의 영혼을 돌아봐야 합니다.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녀의 영혼을 돌아보면서 이 세상에 마지막까지 자녀를 사랑하고 눈물로 기도할 사람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자녀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로마서 10장 9절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 과부인 어미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였지만 살아난 이 아들은 얼마 후 이 세상에서 자연인의 삶을 죽음으로 끝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세상에서의 잠깐 동안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히 이어지는 삶이 있으니 우리는 이 세상이 천국을 향해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대합실과 같다고 한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차가 오면 사람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는 모든 음료수를 버려둡니다. 오락으로 놀던 카드도 버리고, 황급히 기차를 탑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자녀를 맡겨주신 것은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분 의지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부모는 자신의 마음속에 참척의 슬픔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들의 영혼은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어야 할 가엾은 영혼입니다.
통곡과 눈물로 슬피우는 이 여자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이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을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슬피 우는 이 과부를 가엾이 여기셔서 아들을 돌려주신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은 당연히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과 다시 사는 생명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우리가 이미 경험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B. 불쌍히 여기심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죽은 아들보다 아들을 잃고 슬피우는 어미가 가엾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 본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사’라는 이 번역의 그리스어가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입니다. 우리말로 가슴이 찢어지기까지 아파하셨으니 애간장이 녹도록 슬퍼하셨으니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인 여러분이 눈물로 기도하지 않는 그 자식은 하나님의 마음에 절절히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를 가엾이 여기셔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화목재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1서 4장 9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 없이 서로를 당신이 우리 자신의 뼈요, 생명과 살로 여기며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많은 고난과 시련을 예수와 함께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없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의 모습에 비치는 자녀가 전부가 아닙니다. 부모조차 낯설게 여기며 인생의 길목 어느 한 귀퉁이에서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두드리고 있는 아픈 영혼을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런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생명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목회자만 참된 목자와 삯군 목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으로 자식을 낳으면 모두 부모입니다. 그러나 삯군 부모도 있습니다. 참된 부모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충심으로 사랑합니다. 삯군 부모는 자녀를 낳았지만 자기의 이익과 충돌할 때 자기가 사랑한 것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는 부모입니다. 삯군 부모가 부모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자식은 참된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자기가 아직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수 없을 때 참된 부모는 자식의 영혼의 아픔을 돌아보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참된 부모입니다.
부모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자기와 살 한 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피부색깔이 다른 사람도 사랑하여 선교를 떠납니다. 그러니 부모가 되어서 자식의 영혼을 위해 염려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부모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은 고장 난 마음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자식의 공허한 영혼을 누가 돌보겠습니까? 누가 우리의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붙들어 줄까요? 하나님이 누구에게 이 사명을 먼저 위탁하셨을까요?
자녀들은 마땅히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 참된 회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부모인 여러분들은 이 사랑을 알았고, 자식은 아직 모르고 있으니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십니까? 그리고 정말 내 자녀가 구원 받지 못한다면 내가 어떻게 눈을 감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가 없는 천국이 정말 부모에게 천국이 될 수 있을까요? 자녀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을 때 은혜의 눈물이 여러분들의 마음의 창을 닦아내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 너머에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가 보일 때 여러분들은 남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니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렸던 날들이 얼마나 은혜로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길 만큼 비참합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통곡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만큼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였지만 사실상 포기한 것은 아닐까요? 누가, 우리의 자녀를 위해 마지막까지 기도해 줄까요?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자녀를 위해 사랑하고 그들의 구원을 여러분 자신의 구원처럼 여기고, 그들의 곤고한 영혼을 자신의 영혼에 곤고함처럼 느끼며 기도하고 사랑해주도록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자식을 위해 일평생 기도했습니다. 그는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여자처럼 아우구스티누스를 바라보며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효자였습니다. 어느 한 경우도 그녀의 마음을 말로 아프게 하거나 행동으로 가슴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고 스스로 고백할 정도로 아들은 효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효성스러워도 그녀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니교에 빠져서 세상의 철학으로 미끄러졌고, 하나님 없는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멀리 멀어져 갔던 것입니다. 모니카는 눈물로 살았습니다. 하루는 도저히 견디다 못해 아마도 암브로시우스라고 여겨지는 당대의 최고의 학식을 가진 목회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여자는 울면서 이 목회자에게 매달렸습니다. 자기 아들이 이렇게 마니교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났으니 제발 한번 만나 우리 아들에게 다 버리고 예수께 돌아오도록 타일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목회자의 생각은 한창 세상 철학에 빠져서 교만해져있는 그에게는 그런 충고가 쓸모없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도 언젠가는 책을 읽다가 철학의 허망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위로 삼아서 자신도 젊은 시절에 그렇게 철학에 빠졌다가 마니교의 허황한 사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왔다고 위로삼아 말하였습니다. 그래도 한번만 만나달라고 눈물로 애원하는 모니카를 매정하게 뿌리친 이 목회자는 돌아서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지만 “자고로 어미가 눈물로 기도하는 자식 중 망하는 사람은 없소.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요.” 정말 그 목회자의 말을 따라서 어거스틴은 기적적으로 회심했고,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세우는 사도 바울 일에 역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아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보면서 항구에서 잠시 배를 기다리며 어머니 모니카는 말했습니다. “얘야,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아들과 그의 제자들과 함께 카시키아쿰이라는 곳에서 6개월을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아들이 그 제자들에게 기독교가 참된 진리임을 가르쳐 가는 광경을 보면서 그의 은혜로운 변증에 그녀도 함께 참여하며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그 목회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고 싶습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인 여러분들이 힘을 내야 합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자녀가 끝없이 미끄러져 깊은 물 가운데로 바지고 있다면 헤엄 못 치는 부모라도 거기에 뛰어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 사랑의 본성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설 것입니다. 그렇게 깊은 물에 빠지는 자녀의 손을 놓을 부모가 어디에 있고 마지막 일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하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자녀의 머리를 지켜만 보고 있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을 다 주셔도 그것으로서는 위로 받을 수 없는 마음을 안고 자녀들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셔야 합니다. 자녀는 그 기도를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니 주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확신과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의 영혼은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비록 자식은 미끄러져도 그 부모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참척의 슬픔으로 부르짖으십시오. 자녀를 위해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시고, 그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그런 부모들의 간절한 기도를 불쌍히 여기시고 참척의 슬픔을 당한 부모에게 다시 살아난 자녀들을 안겨 주실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예수님은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아들이 가엾어서가 아니라 심한 통곡과 눈물로 슬피우는 이 여자가 가엾으셨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된 회심에 이르도록 쉬지 않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물로서 자녀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가족을 돌아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사도가 이 교훈을 준 데는 문맥이 있습니다. 당시 남편을 일찍이 여의고 홀로된 과부는 사회적인 약자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법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고아와 함께 이 과부들을 돌보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는 선한 행실로 여겼고, 경건의 증거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만약 어떤 과부가 있으면 무조건 교회에서 그 사람을 책임지지 말고 자녀가 있는지, 손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들에게 먼저 권하여 자신의 어머니나 혹은 할머니를 돌보도록 그들을 교훈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을 하다가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다는 교훈이 나온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고통은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느냐에 비례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가족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면 구원 받지 못한 가족 때문에 마음이 매우 아픕니다. 그래서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전도보다 가족전도가 어려운 이유는 전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삶을 노출하면서 전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 전도를 위해서는 평소에 믿는 자로서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II. 가족을 돌아봄
A. 육신을 돌아봄
오늘 이 짧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가족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가족의 육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과부가 된 자신의 어머니를 혹은 할머니를 돌아보지 않고 교회에게 맡기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이 부모에 대한 효도뿐이겠습니까? 가족들의 육신의 필요를 살펴야 합니다. 그들이 무엇으로 궁핍하고 어려운지를 헤아리며 믿는 신자로서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단순한 전도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고 사랑을 베풀며 함께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공동체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본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배웁니다. 그분의 간절한 소원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복음을 믿고 구원 얻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고 믿음을 가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육신의 필요도 부지런히 살피셨습니다. 주린 자는 먹이시고 그리고 병든 자는 고쳐주셨습니다. 참된 기독교의 구원은 영혼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 아우르는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가족들을 구원하되 그들의 육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궁핍 아래에 있는지를 헤아리며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돕고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가족이 불화해서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가족과 매일매일 다투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아마 그런 행실로 가족들을 대하면 믿지 않는 가족들은 그가 복음을 전하면 너나 잘 믿고 올바른 사람이 되라고 조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가족들과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가정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선교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랑과 은혜를 제일 먼저 나타내 보여야 할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가족은 고통스러운 존재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가장 경우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가족이고, 아무리 많이 신세를 져도 고마워하지 않는 것도 가족이고, 크게 잘못하고도 사과 한번 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누군가 희생하고 헌신해져 그 가족을 화목하게 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가족을 위해 화목하게 하기 위해 드리는 희생은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헌신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족 전도를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소한 이익에 집착해서 가족들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신앙의 가치를 가족들에게 양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잘한 것들을 가족들에게 평소에 양보하며 살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 가정은 상처를 받은 곳이고, 또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상처들을 치료하고, 그리고 모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바꾸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여러분들이 그 벽을 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의 생명이 없는 가족들은 어떻게 그 벽을 넘을 수가 있겠습니까? 평소에 사소한 것에 대해서 너그럽게 양보하십시오. 그리고 범사에 희생하기 위해서 자신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커다란 것을 굳게 붙드십시오. 신앙의 가치, 선교의 가치를 지키십시오. 그러므로 가족들이 육신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그리고 돌보십시오. 경제적인 궁핍함에 있지는 않은지, 육신이 질병으로 아파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연약하여 육체의 한계를 느끼지 않는지, 따뜻하게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하늘의 신령한 에너지에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인생도 지탱하지 못해 힘겨워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긍휼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이렇게 과부가 된 여인을 교회가 떠맡기 전 가족들에게 먼저 맡겼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가족들이 가족을 돌보기를 원하십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그리고 욕망의 충돌은 가족들을 끊임없이 분산시키고 갈등을 더 증폭시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형제간이 심하게 다투고, 심지어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형제들 간에 의절을 하고 사는 일은 복음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현저히 욕보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손해 보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이미 너무나 많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실 때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을 돕되 올바른 방식으로 도와야 합니다. 자신의 재산 능력이 거기에 미치지도 못하면서 보증을 서는 것이나 혹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액수의 재물을 차용해서 빌려주는 것 같은 일은 가족 관계를 망가뜨리기 아주 쉬운 행동입니다.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필요하면 자신이 돌려받지 않아도 괜찮을 액수만큼 다시 돌려받을 마음먹지 말고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을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진실로 사랑의 마음으로 가족들을 섬기며 육신의 필요를 돌아보아 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사람이 을(乙)입니다. 주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갑(甲)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도 그들이 갑일 리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사랑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 가까이 계십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자기의 사소한 이익을 정의라는 이름하에 그렇게 폭력을 행하고, 다른 사람의 명예를 현저히 실추시키는 그런 나쁜 일들은 특히 가족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 사랑을 모르는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고 악한 우리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게 만드셨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이 어두운 집안에서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다른 가족도 예수를 믿지만 그렇게 살라고 여러분들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을 전도하기 전 먼저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육신을 돌아보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곤궁에 처할 때에 도움을 주십시오. 거절하는 가족은 없을 것이고, 그 도움 한번으로 그 대가 때문에 그가 예수 믿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족들의 육신을 돌아보며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될 때 복음 전도의 날은 가깝게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을 통해 예수를 믿지 않아도 누군가 복음을 전할 때 여러분들이 심겨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가족들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가족들의 육신을 돌아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영혼을 돌아봄
마지막 두 번째는 영혼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신령한 생각을 가지고 가족들의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 그것은 영혼의 커다란 질병입니다. 이 질병의 현상은 삶의 모든 방면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숨길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것도 숨길 수가 없고, 생명이 사라지고 죽음이 가득하게 된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마른 뼈와 같이 되었을 때 거기에서 무엇이 나올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온갖 미움과 그리고 모략과 시기와 분쟁과 질투와 탐욕과 폭력과 폭언과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입속에서 쏟아진 그 모든 모욕들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은 다시 죄가 되어 그의 영혼을 더럽게 만듭니다. 그런 일에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참여해야 되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헐뜯고 모함한다고 나도 그 사람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더러운 말을 쏟아내며 살아야 되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탐욕으로 대한다고 해서 나도 똑같은 탐욕으로 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저 사람이 평화를 깨뜨리고 나에게 악을 행한다고 해서 그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삶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가족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인데도 매우 부끄럽게 가족들이 하나님의 생명 없는 가족들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현상을 또 다른 죽음의 악으로 대항합니다. 가족들의 관계는 산산이 깨어지고, 여러분이 믿는 그리스도 예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여러분들도 복음을 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누가 복음을 전해도 가족들의 마음에 빗장을 내리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그런 일을 합니다. 실제로 전도해 보십시오. 마음에 뜻을 세우고 끝까지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 예수 믿는 사람들의 행실에 커다란 실망을 느낀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가족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의 영혼의 고통과 마음에 소외된 것을 돌아보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생명으로 넘치는 은혜를 받은 후에 가족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없는 그 죽음의 증거들이 가족들에게 나타납니다. 다른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것, 자신의 삶을 탱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보십시오. 가장 탁월한 가족 전도는 전도자 자신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기쁨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모든 탐욕과 그리고 더러운 욕심을 버리고 거룩한 기쁨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름다움에 취하여 탐욕을 갖기보다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진리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삶의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데서 찾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너그러운 관용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처럼 뻔뻔한 사람들도 없고 가족처럼 배려가 없는 사람들도 없고 가족처럼 좀처럼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진리가 기준이 되어서 그래서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의 영혼의 필요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가족이 외롭고 힘겨울 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가족들을 하나님 없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주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은 신자의 고귀한 사명입니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전도해 본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가족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고, 자신의 기도가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나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칠흑과 같은 거짓 종교의 어둠에서 벗어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핍박했던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고, 전에는 폭행자요, 그리고 악한 자였으나 핍박자였으나 이제는 복음을 옹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수십만, 백만 명이 넘었을 사람이 그의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냉랭했습니다. 자기의 동족들은 자기를 외면하고 오히려 자기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애타는 심정을 로마서 9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한없이 행복하지만 그의 마음을 쥐어뜯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친척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리고 자신이 아끼는 동포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여러분들을 통해서 가족을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10여 년 전 어느 교인이 저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우리 교회 다니는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남의 교인을 상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너무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만났습니다. 두 자매가 찾아왔는데 두 자매의 요청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습니다. 이 교회 가까운 병원에 자기 아버님이 죽음을 앞둔 질병 상태에서 입원해 있으니 이 교회에서 찾아가서 복음을 전해주고 자기 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부탁을 하지 왜 여기에 와서 부탁을 합니까, 했더니 그렇잖아도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가서 간곡하게 부탁했더니 부목사님이 너무 사역이 많아서 믿지 않는 아버지까지 우리가 찾아갈 시간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는 이 교회에 와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성도들이 여러 달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그 분은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분을 전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 부모님에게 옳지 않는 행실을 보이거나 자녀로서 올바르게 부모를 섬기는 덕스러운 행동을 못할 경우에 오히려 복음 전파를 가로막지 않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자녀들이 부모의 영혼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 그래서 실제로 여러 명의 교인에게 제가 충고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이 예수 믿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면 물론 기도해 주겠지만 본인이 직접 찾아가보라고, 그리고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교회 모시고 가라고, 아니면 가까이 있는 교회라도 가서 무릎을 꿇고라도 자신의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돌보아 달라고 눈물로 부탁해 보라고 말입니다. 그것을 거절할 교회가 얼마나 있을까요? 간절한 가족 전도를 위한 열망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렇게 가족들의 영혼을 돌아보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다면 잃어버렸다면 다시 회복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오던 길에 못 보던 공원 같은 것이 있어서 쑥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묘원이었습니다. 어느 불교재단에서 하고 있는 깨끗한 공동묘지였습니다. 잠시 차를 세우고 잔디밭을 걸었습니다. 수많은 비석들이 있었고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비석들 앞에 놓여 있는 아크릴판으로 만든 투명한 상자들이었습니다. 열쇠를 채워놨는데 그 박스 안에는 고인이 쓰던 안경, 담뱃대, 심지어는 소주잔, 즐겨 읽던 책, 그리고 핸드폰과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겨울로 기억이 되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참을 그 묘지들을 돌아보며 상념에 잠겼습니다. 모두 다 죽습니다. 아무도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은 늙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 유품들을 보면서 남아 있는 가족들은 먼저 간 가족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요? 아마 자녀들은 철을 따라 그곳에 와서 아빠가 쓰던 안경과 돋보기, 심지어 술잔을 보면서 아빠의 체온을, 체취를 느낄 것입니다. 어느 묘지에는 젊고 아리따운 여성의 사진이 그 상자에 들어있었습니다. 아마 부모보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에 그 사랑하는 딸의 죽음은 얼마나 애틋했을까요?
우리 모두는 잠깐 이 땅을 살고 지나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은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심판 대신 하나님의 천국이 기다리고 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가족이 천국에서 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면 그 천국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쓸쓸한 천국이 될까요? 참된 사랑도 때로는 오해될 수 있습니다. 진실한 사랑도 때로는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해하고 무시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평화가 없지만 그러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가족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주님이 주시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없이 담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 3장 18과 19절에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고 말입니다.
가족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간직하고 사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심판을 염려하시며 아버지께 그들을 용서해 주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주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아서 감동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모든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미움과 갈등을 극복하며 가족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일이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기도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을 먹어 보십시오. 한없이 낮아질 것입니다. 그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은 할 수 있으면 하지 않을 것이고, 절대로 그를 욕하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한동안 봉사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가족들에게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까? 누가 여러분들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이 사랑이 없어서,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여러분들의 욕심 때문에 가족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비치지 못하도록 거치는 돌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아파하는 그 가족들을 가엾이 여기며 그 영혼이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헌신 하십시오. 반드시 구원의 날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아파하는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가족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끝까지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없는 자들이 불신 가족들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눈물 흘리며 기도해 줄 수 있는 구원 받은 여러분들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눈물을 당신이 병에 담으신 후 그것이 가득 찰 때 하나님은 꿈같은 구원의 은혜를 가족들에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