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와 독신, 연애, 그리고 결혼
이 시간에 사실은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모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어떻게 하면 결혼을 빨리 하고 또 장가를 빨리 할 것인가 하는 그런 실제적인 기교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어요. 결혼이 무엇인가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될 때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또 어떤 면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으며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우리가 명확한 견해를 가질 것인가 듣다 보면 실제적인 적용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이제껏까지 문학에 있어서나 또 각종 예술 작품에 있어서나 마르지 아니하는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희랍신화에서는 인간이 사랑에 얼마나 열중하는지를 이런 식으로 묘사합니다. 옛날에는 인간과 신이 레벨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도 고상하고 형이상학적이었는데 신들이 그것을 보다가 자기의 위치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인간을 반 쪽으로 쪼개서 하나는 남자라 하고 하나는 여자라 하여 분리시켜놨다는 것이죠. 그래서 뭔가 고매한 인격과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고민을 해야할 성숙한 시기가 되기 시작하면 천상적인 추구를 하는 대신에 잃어버린 짝을 찾기 위해 열중하는 동안 신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한 도덕적인 격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이방 사람들의 눈에도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열중하는 일 가운데 하나 그것이 바로 사랑하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침에 잠깐 신문을 보니까 “세기적인 테너는 20대를 좋아하는가”-테너 빅3 이야기
역시 인간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런 추구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남녀 간에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감정을 하나님이 주신 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여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젊다는 사실 자체를 찬송하고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름답게 묘사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런 목적론적인 질문을 다시 한 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던져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선 우리들이 창세기를 한 번 펴 보고 시작해 봅시다. 2장 22절입니다. 이하20절부터 25절까지 교독. 23절을 주목해서 봅시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는 나의 뼈들 중의 한 뼈요 살들 중의 한 살이라 이렇게 나옵니다. 23절의 성격은 고백입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of가 들어가면 best라는 뜻입니다. 최고 최선의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런 고백을 여자를 향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평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결혼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커다란 기초, 필수불가결한 기초는 사랑이다. 그것도 고백된 사랑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랑이 모든 결혼의 조건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서도 결혼하지 말아야 될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어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 것 같은데 사랑은 안 생깁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잠시 동안의 일이라면 괜찮으나 오래도록 안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 자매의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마음 속에 워낙 불순종하는 것이 많으니까 주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데도 사랑이 안 생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항이 아니냐 그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소지가 있지 않냐? 그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오래도록 사랑하지 않고 불순종을 계속 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누가 여러분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편지로 당신과 내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공갈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려라
어느 날 찰스 스펄젼 목사님이 목회하던 메트로폴리탄 쳐치에 한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하나님이 나를 이 교회에 보내셨는데 다음 주일날 설교하라고 그러십디다.” 그러니까 스펄젼 목사님이 “이상하네요. 하나님이 저보고 그런 사람 온단 말 안하시던데요?”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들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갑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자매가 있었는데 맏며느리감입니다. 자매가 아주 후덕합니다. 그런데 같은 반에 형제가 하나 있는데 그 자매가 아주 수줍음이 많습니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 같이 가는데 할 이야기가 있다고 그러더랍니다. 자매가 부대표이기도 하니까 얼굴은 알고 지냈죠. 그러더니 내일 학교에서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해서 만났더니 요즘 기도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뭐 응답받은 게 없냐고 물었답니다. 요점이 뭐냐고 하니까 자기가 오래도록 기도했는데 당신하고 결혼하라고 그러시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형제가 자매에게 시선을 준 적도 없었고 나이도 자매가 더 많고. 자매가 막 떨면서 이야기를 하니까 형제가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나도 기도해 보겠다고 그런데 둘 다 딴 데로 시집 장가 갔어요. 그리고 그 자매는 제가 이수극장 앞에서 만났어요.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과 결혼하는 문제는 너무나 미묘하고 그것 만큼 하나님의 선명한 뜻을 분별하기에 우리의 개인적인 사심이 많이 작용할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결점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흔치 않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럽게 행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결혼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면 반드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틈도 없을 정도로 빨리 결혼을 해치우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응답의 가장 중요한 요건을 확인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반드시 사랑을 하는 기간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것이 성립을 안 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서로 같이 좋아해야 합니다.
결혼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독신의 문제를 말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결혼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독신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 중의 하나가 창세기 2장 18절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고 설명...............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하나님 여호와께서 생각하셨습니다. 좋은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누가? 아담이 그가 홀로 그러니까 아담이 홀로 있는 것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생각하셨습니다. 이러면서 하와를 만든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말 성경이 무엇이라고 번역했냐면 사람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하 아담이라고 했는데 하는 영어에서의 정관사입니다. 아담이라고 하는 이름 자체가 보통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것을 아담이라고 번역을 해야 합니다. 이것에 반기를 든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고유명사에 the가 올 수 있느냐? 히브리 성경에서는 오히려 고유명사에 the가 더 잘 옵니다. 안 나오는 용례보다는 나오는 용례가 훨씬 더 많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 앞에도 하가 붙습니다. 그 하나님 이렇게... 그러니까 여기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그 밑의 성경이 풀립니다. “형제들아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하며 너희가 염려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간 자는 어찌하면 아내를 즐겁게..........그러니까 아내를 기쁘게 하는 일이 세상일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풀어야 될 숙제입니다.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남편을 기쁘게 그러니까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게 세상일이라고 한단 말이죠..........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결혼 그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엿볼 수 있는 것은 혼자 사는 독신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사람을 인생의 낙오자처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이 다음에 판단 받을 만한 잘못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심정적으로 오래도록 장가를 못가고 있으면 꾀죄죄해 보이고 사람이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하고 여자가 너무나 오래도록 시집을 못가면 어이구 못났구나 그런 생각하고 무슨 사연이 있는 게 아닌가 사실을 넘어선 그런 추측으로 지체들을 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입니다.
하나님 내가 독신의 은사가 있습니까? 주여 그러지 말아지이다. 주여 다른 건 다 좋사오나 그런 은사는 남 주시옵소서. 그러나 가장 행복한 인생은 주님이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복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결혼을 안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 사실 이러한 검증의 과정을 거쳐서 독신의 확신이 있어서 독신이 된 사람도 거의 못 만났고 결혼을 한 사람을 불러 놓고 물어보면 결혼에 확신이 있어서 결혼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중요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뭔가 분별을 잘못하고 있지 않냐하는 것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것도 인생을 사는 한 방법임을 여러분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길이 얼마나 고달픈데 아니면 무슨 그런 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데 이런 것은 다 바보 같은 질문들이고 성경에서 그 길을 열어놓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독신이신 거 압니까? 그 목사님이 한국에 한 번 오셨는데 사실 우리나라는 어느 교회도 독신인 목사님을 청빙해서 자기 교회 목사로 모시려고 하질 않습니다. 같이 살다가 나이가 들어 사별을 했다든지 아니면 북에 아내를 두고 왔기 때문에 중혼을 하지 않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언제 이 휴전선이 무너질지 모르는데 그래서 만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갑자기 아내가 둘인데 하나님이 과연 이해를 하시겠는가? 그런 특별한 신념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여교역자들의 경우 비교적 그런 점에 있어서는 너그럽습니다. 그런 사정을 얘기했더니 사도 바울이 한국 교회에서 목회 안하기 참 다행이군요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꼬집은 이야기도 그런 것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그런 은사로서의 독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런 면에 있어서 진지하게 확신을 가지면 좋겠어요. 나는 독신이다. 짧은 인생을 온전히 내가 주 만을 위해서 살겠다. 결혼한 사람이 주도 위해서 살고 남편도 위해서 살겠다. 그런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이야기하니까 그렇지만 결혼이라는 것 자체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겠죠? 한 교회에 여러분들이 몸담고 사는 것도 비용을 요구하죠? 그 교회를 다니며 유익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가 지불해야할 수고와 고통도 감수해야 되는 것처럼 결혼도 상당한 비용이 드는 일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독신이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독신의 은사를 분명하게 받은 사람은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사를 받은 사람으로서 특별히 인정을 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목양적이고 교회적인 배려가 필요합니다.
떠밀리다시피 결혼을 하는 게 주의 일인가? 제가 보기엔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하는 것처럼 그렇게 결혼을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삶에 대한 전망을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저는 자매들을 대하면서 별 꿈을 꾸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누군 유학을 가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 안수도 받고 남성들이 못한 목회의 깃발을 꽂아 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선교사 가고 싶다는 사람... 전 그래요 누구하고 결혼할 건데? 그 사람이 누구하고 결혼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도무지 미국 데리고 가서 부인을 공부시켜줄 마음이 없으면 한국에 앉아서 평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독신이 나에게 허락된 분깃인가? 결혼을 해야 될 것인가? 양쪽에 대해서 모두 사명감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할 수 있겠습니까? 굉장히 어렵죠. 그러나 아멘 해야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리를 해야 합니다. 독신생활을 하면 결혼생활을 하는데 드는 비용이 안 들겠구나 천만에 그 대표적인 예가 말입니다. 지금 카톨릭에서는 신부가 모자라서 난리입니다. 무인가 신부학교 그런 거 없잖아요 거기는 솔직히 개신교가 본받아야 할 정도로 정규적으로 가르칩니다. 몇 년 전에 들은 바로는 500명이 입학을 하면 서품에 이르는 사람이 150명이 안된답니다. 얼마나 독신생활하기 어려운지 알 수 있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술도 허락되고 담배도 허락됩니다. 그리고 신부들은 대개 과격한 운동을 좋아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훈련을 시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해서 발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창 끓어오르는 그런 정욕을 이기면서...얼마나 큰 비용이 들겠는가 생각해 보세요. 쉽지가 않습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런 육체의 정욕을 이기는 것이 상당히 가르쳐졌어요. 그래서 남자보다는 좀 쉬운 면이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 그러나 남성들의 경우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간에 다 비용이 드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오늘날 기독교가 욕 얻어먹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직자의 가족 이기주의입니다. 교회에서 사례금은 얼마 안주는데 자식들 전부 다 유학 보내려고 맘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어떤 식으로든지 그만큼 자기가 그 돈을 소유해야 되는 필요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심 없이 하나님만을 위해서 목회한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서너 명 대학을 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번에 등록금 들어갈 때 돈 천만 원 들어가는데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나중에 얘기하겠습니다마는 목회자의 아내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웬만하면 하지 마십시오. 정말 피할 수 없는 사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생각되면 그러면 가야 됩니다. 그런데 남들이 모두 누리고 갖는 것들을 포기해야 할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됩니다. 사실 그런 정신은 성직자만이 아니라 사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을 해도 비용이 드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 즐거운 적도 있지만 피곤한 적도 많잖아요? 때로는 피를 말리는 고통이 동반될 수도 있습니다. 비용이 듭니다. 그런데 어차피 들 수밖에 없는 비용이라면 분명히 자기의 분깃인 데다 투자를 해야지 독신도 아닌 사람이 혼자 살아가기 위해 길길 매면서 거기다가 모든 정력을 붓는 것도 낭비고 독신인 사람이 결혼하려고 정력을 붓는 것도 낭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경박한 이해가 있는데 무엇이냐 하면 결혼도 마찬가지고 선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에서 어느 한 구절을 끌어가지고 그것을 과대포장해가지고 마치 그것이 성경 전체의 것인양 그렇게 허풍을 떠는 것은 진리에 대한 정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오늘날 결혼을 누리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리고 책도 엄청나게 많이 나옵니다. 가정을 행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야기한다는 이것입니다. 다 좋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혜로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많은 유행하는 생각들 중 어떤 것은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기독교의 옷을 입은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이나 혹은 결혼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더더욱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을 하고 사람들이 둘이 함께 많이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가는 것 그 자체가 결혼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과대포장 하는 예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볼 때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을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풀 수 없는 문제가 하나 떠오르게 됩니다. 뭐냐 하면 그러한 가정을 가지지 못하고 혹은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살아갔던 많은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같은 경우는 중요한 주의 일을 한 가지 안하고 온 경우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한 가지 성경구절만 가지고 과대포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말해야 될 것은 오늘날 결혼에 대한 많은 책들이 나오고 생각들이 나오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세상적인 생각들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달 제가 부산에 내려갔습니다. 어느 교단의 목회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했습니다. 세미나의 내용이 이번에 두란노에서 나온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를 가지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순결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성적인 타락의 문제가 목회 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얼마나 심각한가 그것을 이야기했는데 끝나고 나서 강의를 아주 경청했다고 하면서 와서 인사를 하고 밥을 먹으면서 강의의 핵심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요? 뭐냐 하면 목사님, 성도들이 무지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적으로 타락하면 잘못된다는 것만 가르치지 말고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가르쳐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겠죠. 성도들에게 성을 잘 즐길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서 그분의 지론은 나름대로 논리가 있습니다. 모든 성적인 타락은 가정에서 성적인 기쁨을 상실하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식사하다가 하필이면 밥 먹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제가 밥 먹던 숟가락을 놓으면서 그랬어요. 그러나 그 생각은 위험한 면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직 누구인지를 놀라서 그럽니다. 인간은 이 타락하는 욕망에 있어서는 아무리 아무리 충족시켜줘도 충족이 안 되는 게 인간입니다. 무저갱과 같이 깊이 파인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게 인간입니다. 아무리 쓸어넣고 다 삼켜도 계속 허기진 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성적인 관계가 만족스럽고 좋은 사람들은 성적으로 타락할 위험이 물론 다소 적겠죠. 그런데 그분은 이제 한 쪽 견해만 본 거지 인간 자체 안에 내재하고 있는 그 타락의 경향성, 그런 문제에 있어서 방종하려고 하는 인간의 경향성에 대해서 너무나 안일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도적질하고 싶은 도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합법적으로 도적질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면 그 도벽이 충족되기 때문에 불법의 도적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동체에서 실제로 실행을 해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그런 식으로 허용을 해서 자꾸 길들이면 그 욕망에 대해서 이제는 시들해지는 경향도 물론이지만 그러나 그것에 의해 자극되어가지고 날샌 줄 모르는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산부인과 의사가 상담한 것을 기록한 기독교잡지를 읽었습니다. 자매가 상담을 했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결혼을 하기 전에 두 사람이 이미 동거생활 비슷한 것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저녁에 일곱 번, 여덟 번씩 성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감격을 한 것입니다. 이 남자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면 이럴까? 그러나 카운셀러에 의한 의사의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하고 결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건강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도의 특이한 성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 이야기를 읽고 나서 성경 전체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곳에서도 그러한 성적인 삶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 길을 열어 주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우리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네가티브 하게 말한단 말입니다. 음욕이 불붙듯 하면 차라리 시집가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에 있어서 이러한 성경의 견해가 있듯이 결혼도 그러한 국면에서 생각해야 할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고린도서를 보면 그런 것들이 은연 중에 사도바울의 서신을 통해 비치는 것입니다. 혼자 살 수 있으면 살되 안 되면 결혼을 해라. 이런 충고를 우리들이 보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사도바울의 이러한 발언을 무엇을 의미하냐면 결혼에 있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서로를 즐기고 아주 신나는 가정생활을 이루어 나가는 그것이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우리들에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24장이 말세에 대해 주님이 예고하신 장입니다. 그 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홍수 전에 나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무슨 이야기입니까? 좋은 이야기입니까? 부정적인 이야기입니까? 부정적인 이야기입니다. 결국 무엇을 이야기 하냐면 결혼에 있어서 분명한 결혼의 이유와 목적, 결혼이라는 결합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좌표가 없는 결혼생활은 하나님 입장에서 하든지 말든지 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중 만약 나이가 먹었기 때문에 아! 가긴 가야 할 텐데 이렇게 단지 생각을 한다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간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인륜지대사가 아니라 세속지대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결혼에 대해서 얼마나 허황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결혼을 왜 하려고 합니까? 좌표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겠죠? 그거야 뭐 결혼해봐야 안다면서요? 아니 그것이 아니라 내가 목회를 할지 구멍가게를 하는 사장의 부인이 될지 아니면 샐러리맨의 아내가 될지 학교 선생님의 부인이 될지 전도사의 부인이 될지 그것은 모르지만 결혼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어 하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있습니까? 없다면 결혼을 위해서 하는 여러분들의 기도는 단지 세속적인 꿈을 이루기 위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또 어떤 의미를 드러내면서 쓰여 졌냐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 일이 심판이 임박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마취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한 번 본문을 잘 보세요. 그런 뜻인가 아닌가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들어가고 나서 바로 비가 오잖아요? 그런데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여 멸하기까지 그 다음에 무엇이 나오죠? 그렇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였으니...그러니까 먹고 마시느라고 못 깨달았고, 그 다음에 시집 장가가느라고 못 깨달은 것입니다. 세속적인 일에 매진하여 살다가 궁극적으로 찾아야할 하늘에 속한 일,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에 속한 영원한 일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좋은 게 하나님 보시기에 다 좋은 것이 아니고, 그런 평범한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리가 안 된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가정 자체에 헌신되어서 그런 행복한 삶을 이루어 가기만 하면 그것이 곧 주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잘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제일 먼저는 독신이냐? 결혼이냐? 내 분깃이 무엇이냐? 생각하고 결정하고, 두 번째는 결혼을 결정하는데 빨리 하세요. 어렸을 때 빨리해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결혼을 하되 결혼을 하려고 할 때에 그 결혼을 통해서 다다르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결혼은 오히려 여러분들의 영적인 삶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속에 푹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신을 못 차리죠. 생각해 보세요.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 그 때에도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게 되죠. 사랑에 온 정신을 다 빼앗긴다면 세상도 없고 주도 없고 그 사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이 먼다고 하는 거죠. 종교와 사랑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표가 없는 결혼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 가장 세속적인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이 거기에 팔리기 때문에 그나마 살아있는 우리의 영적인 감각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 결혼이다. 그런 생각을 해야 된단 말이죠. 자 그럼 인제 왜 결혼을 하느냐? 이것도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한 부분은 종족의 보존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성을 즐기라고 이야기하는 대신에 성이 철저하게 종족을 번식시키는 수단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경적인 견해들을 오늘날에 이렇게 범람하는 현대정신과 어떻게 조화를 시키느냐하는 것은 숙제로 남지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런 생각일 들어요. 오늘날 이렇게 범람하는 성적인 타락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성생활을 만족하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일에 교회의 힘을 많이 쓰기보다는 오히려 성적인 만족을 많이 누려서 그렇게 만족을 하게 되면 인간이 타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지말고 오히려 성에 대한 견해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즐거움에 대해서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욕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금욕주의는 금욕을 해서 어떤 도덕을 완성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의 의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을 위해서는 금욕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부부간에 그런 성적인 생활이나 이런 것들의 절대적인 금욕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부부간에 그런 성적인 생활을 해나가면서도 뭔가 이렇게 성에 대해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이상의 기대감을 만들어 주기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갑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사실 어린 사람에게 성교육을 많이 시키면 사회가 더 도덕적으로 될 것 같은데 실제로 해보면 정 반대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기대 이상의 상상을 갖게 하는 것 그런 것들은 금물입니다.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도 금물이지만 그 자체 이상의 기대를 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가 우리에게 그러한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그런 점이 만족이 되질 않으니까 인간이 오히려 더 많이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말라기를 보면 일부일처제를 지지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해서 결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7장에서는 아주 노골적으로 나옵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이? 그 다음에 잠언에서는 만족을 얻기 위해서 그러나 이런 것들은 궁극적인 목표는 될 수 없고 모두 소극적인 목표입니다. 적극적인 목표는 뭐냐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겨야 되겠다고 하는 사상이 둘이 다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내내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이 살아도 둘이 사는 것이 아니라 셋이 사는 것입니다. 한 분은 사시고 두 사람은 살고 그렇죠?
그런데 이러면 아주 커다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 분은 사시고 두 사람은 사는데 신랑이 이 결혼을 통해서 주님을 높이려고 하는 것을 아내가 주님과 남편에게 있어서 자신과 주님이 경쟁관계에 있다고 생각을 한다든지 아니 심리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남편이 아내를 향해 마음 한 구석에서 감히 말은 못하고 당신 날 더 사랑해 주님을 더 사랑해 이렇게 불쑥 질문하고 싶은 그런 독점력 같은 것이 있다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가정과는 매우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기 때문에 가정예배나 드리고 함께 교회가는 것으로 충족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해가 너무 없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럼 그게 뭡니까? 남편도 주님과 나눠 가져야 하고 아내도 주님과 나눠 가져야하고 그게 뭡니까? 나눠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혼자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다 드린대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소서! 신랑은 빼놓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사실 나도 교회생활 오래 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거의 황무지와 같습니다. 언젠가는 여기에 대해서 분명히 정돈된 빛이 기독교인의 마음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가 발붙이지 못합니다. 빛이 없는 곳에 마귀는 아주 신나게 노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와야 합니다. 제가 상세히는 못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지금 몇 개의 주제들이 나왔습니다. 하나하나에 대해서 좀 상세한 연속설교를 하든지 하겠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났더니 여러분 자신이 완전히 딴 사람 되었어요? 안 되었어요? 아니 뭐 잘 산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전에는 전혀 없던 그런 경험을 내 자신의 존재 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가잖아요? 그런 점에서 옛날에 혼자서 살아가던 인생과는 매우 특별하게 달라요? 아니면 변화가 없어요? 다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안에 내가 있는 그런 신비를 몰랐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바뀐 사람 둘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데 그 가정이 안 바뀐 사람 둘이 만나서 사는 것과 똑같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꿔야 될 사람 둘이 모여서 안 바뀐 가정의 모델을 가지고 그것을 흉내 내거나 아니면 그 기준에 맞춰서 자신들의 결혼생활을 보니까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면에 있어서 아주 명쾌한 복음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주님을 섬기기 위한 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 수단은 목적에 가까운 수단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직접 세우신 제도라고 하는 것은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교회이고 하나는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단입니다. 그 수단이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너무나 고상하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를 함부로 이것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 고상한 목표를 지니고 있듯이 가정도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해서 두 사람이 서로 결혼을 안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었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는 결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위에서 혼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을 참 자유하게 섬기던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나서 선명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이고 주 만을 위해서 마음 중심을 드렸던 것들이 갈려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사도바울이 그런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말해서 혼자 살면 다 그렇게 불꽃처럼 사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직하게 생각하면서 결혼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고 주님을 영광을 위해서 참 훌륭하게 살아가야겠다고 하는 거룩한 목표가 없는 결혼은 단지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가는 세속적인 일에 지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목사의 축복을 받고 성도들이 박수를 치며 찬양을 불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꿈꾸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최대의 수혜자는 여러분들이 원하는 그 사람과 그렇게 결혼을 하면 과연 최대의 수혜자는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까?
적극적인 차원에서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왼쪽에서 두 번째 단어가 있습니다. 에제르인데 이것이 바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 에제르라는 말이 어디에 많이 나오느냐 하면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시편에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그런 성경구절 생각나죠? 에제르라는 말은 배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도움입니다. 그런데 그 도움의 원래 의미는 군대에서 많이 쓰이는 것입니다. 응원군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싸우다가 전세가 기울어질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되어서 아군을 도와서 전세를 뒤엎는 그 응원군 그것이 바로 에제르입니다. 보세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오. 잘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제 마음에 느끼는 것을 여러분도 느끼도록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오라고 시인이 이야기할 때 그 시인은 뭔가 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가려고 하는 상황 가운데 있는 겁니까? 그냥 무작정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자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오. 도움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자기가 뭔가 가고자 하는 좌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도움이시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번역을 하면 내가 그를 위하여 정확하게 하면 내가 그에 대하여 corresponding to 이렇게 됩니다. 누구누구와 마주하여... 그와 마주하여 혹은 그를 대하여 도움을 만들리니 그러니까 그가 이미 이 땅에 살아있고 결혼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가야할 좌표를 가진 존재입니까? 아닙니까? 가야할 좌표를 가진 존재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왜 사는지 모르는 사람끼리 결혼을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최악의 시나리오는 어디로 가야할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 세 번째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는 것 같았던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서로 모르게 되는 것 왜? 결혼에 빠져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람.
아담도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이미 가게 하시고 싶었던 삶의 좌표가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여자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결혼생활의 최악의 시나리오 하나는 콩가루 집안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부인은 부인대로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주님을 섬기기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섬기는 삶.
만약 두 사람이 이 좌표에서 일치점을 발견하게 되면 로보캅에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을 거고 로보캅이 걸어만 다녀도 대단한데 날아다니면 얼마나 위대한 파괴력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혼은 영원한 찬송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땅바닥에서 두 손으로 흙을 파며 일했을 텐데 이 사람을 만난 것은 농부가 불도저를 만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결합을 통해서 핵폭발적인 성과를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하나의 목표에 투철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를 섬겨야 하겠다. 그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을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와 있으니까 듣겠죠? 찰스 스펄젼이 이미 결혼하기 전에 총각 때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미 결혼하기 전에 상당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20대 중반에 결혼을 했는데 21살 때 많은 사람이 모인 교회에서 설교를 했으니까 이미 명성이 자자한 후였죠. 그러다가 한 자매를 만납니다. 프로포즈를 합니다. 수만 명의 사람을 울렸던 스펼젼이 자매 한 명 울리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겠죠? 편지를 받아보고 나서 이 자매가 완전히 마음이 끌립니다. 그래서 결국 결혼을 합니다. 연애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결혼하기 전에 워낙 유명해진 신랑과 결혼을 해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차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수시로 나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부인이 혼자서 더군다나 신혼의 재미라는 것이 뭡니까? 그런데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부인이 훌쩍거리고 독수공방을 하는 것입니다. 편지를 씁니다. 여보, 당신이 기왕 나를 하나님께 바치려거든 최선의 것으로 바치시오. 즐거운 마음으로, 그러니까 삶에 있어서 분명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야된다고 하는 원칙에 합의하지 않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있다면 그것은 코미디언 부부이겠죠? 누구이든지 원칙에 있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원칙론적인 동의가 아니라 매순간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면서 매번의 결정 그리고 매순간의 태도가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는 그런 것들이 되고 있느냐 하는 사실입니다. 꼭 결혼 속에서도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보면 헌금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주의 일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비근한 예로 이제 김경해 전도사님이 주님께 바쳐졌는데 사실 담임목사로서 제가 인간적으로 그 가정에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전화해서 얘들이 전화 받으면 가슴이 뜨끔합니다. 얘들이 속으로 우리 엄마 빼앗아갔다면 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결국 하나님이 내 아내를 사용하셔서 혹은 내 남편을 사용하셔서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그 일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지만 이것은 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고 우리 가정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공통된 인식이 없이는 교역자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헌신적인 삶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생활과 왜 비슷하다고 했느냐면 십일조를 드리지만 사실 십일조는 상징입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난 나머지 자기 겁니까? 아닙니다. 십분의 일을 하나님 앞에 드렸지만 십분의 일은 하나님 앞에 바친 상징이고 나머지 십분의 구를 그런 정신으로 사용하겠다는 사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부만을 바치려고 하는 사람, 뭔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일부를 주님께 바치면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마음, 말하자면 자책감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하는 그런 심리,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셋이 함께 산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 사상이 처음부터 깊이 배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고 하는 공통선의 목표, 이것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역자들의 아내가 자기 직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것을 저는 그렇게 썩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물론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마음을 함께 기울이면서 하나님 일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마틴 로이드존스 부부 둘 다 박사였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그 유명한 외과의사 왕실의 주치의이기도 했던 호도의 조수였잖아요? 장래가 촉망되던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버리고 목회의 길로 들어설 때 부인도 함께 의사생활을 그만둡니다. 사람들이 못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부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가 한 번 설교하고 부인이 한 번 설교하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봄에 한 번 목회자의 아내가 되려는 사람을 위해서 세미나를 열테니까 꼭 오세요? ...........기회가 주어지면 ............... 꼭 계획하고 있습니다. .......
결국 그러한 삶의 좌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가만히 깨어진 가정이라든지 고통 받는 가정을 보면 두 사람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깨지는 가정은 오히려 드뭅니다. 사랑이 회복되어도 늘 깨진 도자기 테이프로 붙여 놓은 것같이 불안한 것입니다. 결혼생활의 좌표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애정이 생겨도 테이프로 붙여 놓은 그런 정도입니다. 분명해야 됩니다. 이래저래 변화 받지 못하고 신앙적으로 헤매면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헤매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장가못가면 혼자 사세요. 교회나 다닌다고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가 교회 다닌다고 결혼해서 쓸데없는 일에 피눈물 쏟지말고 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지 않게 신앙생활하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애 낳고 죽어라 고생하지 말고 혼자 사세요. 좌표도 없고 인생의 목표도 없는 그런 사람과 사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물론 본인도 좌표가 없다면 행복할 수도 있겠지 서로 헛갈리니까 해서 뭐 합니까? 그런 가정에서는 생물학적 선교도 잘 안됩니다. 경건한 자녀가 태어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결혼이 갈등관계에 있는 것처럼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있어서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떠밀리지 마십시오. 주관을 가지십시오. 떠밀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세속의 정신 아닙니까? 남들이 하니까 하고 남들이 안하니까 못하고 하는 그런 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당당하십시오. 제일 바보 같은 것은 특히 자매들의 경우, 나이 먹은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아직 못 갔는데... 뭔가 하나님의 응답의 빛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좌로 가든지 우로 가든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굴 택할 것인가?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키도 커야 되겠고 얼굴도 그저 남만큼은 생겨야 되겠고 백수는 안 되겠고 이렇게 저렇게 다 하다보면 선택의 대상에 오르는 사람이 있긴 한데 그 사람에게 자기가 선택이 안 됩니다. 우리 친척 중 한 사람이 있었는데 똑똑합니다. 대학원 졸업하고 결혼을 했는데 두 달밖에 안되었는데 자매가 공개적으로 시집 식구들 앞에서 나 시집 괜히 왔다고 물렀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16년 연애를 했답니다. 그러니까 중학교 2학년 때 만났습니다. 결국 결혼하기 전에 불같이 서로 좋아했던 사람들이 결혼 후에 최악의 상태에 이른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자매 하나인데 성격이 별나긴 별나요. 어느 날 직장에서 형제 하나가 복직을 했는데 자매 하나가 얼굴을 시뻘개지면서 어쩔줄 몰라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니까 어머 저사람이 다시 복직할 줄은 몰랐어. 하면서 자기가 너무 좋아하던 사람인데 뭔가 이루어지려다가 깨진 것입니다. 그러더니 역시 예상대로 뜨거운 관계에 돌입했습니다. 결혼을 했습니다. 자매가 하루는 결혼 후 두달 쯤 되었는데 사무실에 들어 왔습니다. 옆에 있던 자매가 어머 얘 넌 얼마나 좋니 깨가 막 쏟아지겠다. 그런데 아주 얼굴이 어둡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으면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말괄량이 같은 성격이었는데 옆에 있던 직원이 자꾸 눈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자매가 나가니까 말하기를 언니 왜 그런 이야길 해 헤어졌어. 두 달밖에 안되었는데 ... 혼인신고를 했어야 이혼을 하지. 그런 일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제주도에 집회하려 한 번 갔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그 날 택시 운전사가 이야기합니다. 오늘도 억수로 결혼 많이 하네요. 저희가 여기에서 택시 운전을 10년 가까이 했는데 10년 하면서 비행기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아저씨 공항으로 도로 가요 그런 부부도 봤대요. 올라가서 헤어지자고.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냐면 결혼하기 전에 딱딱 잘 들어맞는 사람들은 그것이 좋은 면도 있지만 그러나 때로는 결혼하고 나서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사랑은 이상일 수 있지만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니까 사랑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분히 환상적인 면이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약점이 자기가 섬길 수 있는 점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취미나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잘 안 맞아도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다음 여섯 번째 언제 얼마나 사귈까? 지난 번 SFC수련회를 갔는데 마지막 날 질문을 하라고 했더니 강사님 언제쯤 교제를 시작해야 되나요? 우리 간사님은 대학 4학년 이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는데 목사님, 너무하지 않습니까? 몇 학년쯤 교제를 시작하는 것이 이상적일까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4학년 때도 안 됩니다. 와 대학원가도 안 된다. 취직하면. 자매나 형제를 사귀기 전에는 먼저 뜻을 정해야 합니다. 결혼할 뜻, 그것을 정하기 전에는 연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보탬이 됩니다. 그게 뭐 성경적인 철칙입니까? 성경에서 결혼의 뜻을 세우지 않은 사람들은 서로 사귀지 말라는 말은 안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부분이 지금 제 발언을 지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왜 사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빨리 결혼하라고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네 말로는 전혀 주님을 찾는데 방해가 안 되고 그럴 수 있겠죠. 그러나 사람의 깊은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저는 그렇게 잘 안됩디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그러면 이렇게 질문하겠죠. 그럼 목사님 결혼을 하면 영원히 문제가 되겠네요. 그것은 아닙니다. 연애하는 시기에는 결혼을 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평안히 가지게 되는 감정의 체계와는 다른 체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목사님,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아무런 느낌도 없던데요. 이런 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특별한 감정의 체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총각 때 제가 24세 때 집사가 되어가지고 진짜 내 사랑은 주일학교 학생들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도 없었고, 취미생활이 있어요? 교회 가서 어린 영혼들 만나는 것 그것 때문에 같이 울고 그랬어요. 한창 극성일 때에는 출근하기 전에 교회 가서 아이들에게 성경 한 장 읽어주고 아이들 하나하나 안수기도해 주고 데리고 학교까지 가서 들여보내 주고 직장에 갔습니다. 그러다가 연애를 하게 되니까 그 마음이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숨길 수 없이. 이것은 저만의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체계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잘 아는 사도바울이 신랑과 하나님이 대립되는 것처럼 아내가 주님과 대립되는 것처럼 그런 경쟁관계에 있는 것처럼 성경을 써 내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장가갔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하나님은 간 곳이 없고 대신 아내를 신처럼 떠받들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찾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마음이 나뉘면 안 됩니다. 한 번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다 줬기 때문에 줄 마음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에게만 완전히 미쳐서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서 사랑이 남아있지 않은 그런 상황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마음을 다 바쳐서 사랑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안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말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부훙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을 때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거의 모든 마음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빼앗기고 사로잡힌 그러한 상태를 뜨거운 연애를 하면서 그것이 가능하다면 성경 다시 써야 합니다. 인간이 그런 감정의 체계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꼭 연애지상주의자들에게만 이 말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 마음 빼앗아가는 게 그것 뿐입니까? 물론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나 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명예나 혹은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기회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마음을 뺏길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십니다. 그런 관점에서 마음을 다한다고 하는 그런 삶이 뜨겁게 연애하면서 가능한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그 좋은 일을 왜 바울이 그만뒸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적으로도 수준이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이 정상적으로 잘 맞을 수 있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미갈이잖아요. 법궤가 들어올 때 다윗이 기뻐서 춤을 추는데 미갈이 비웃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짤막한 장면이지만 거기에서는 다윗이 미갈과 함께 살았지만 그러나 영원히 좁힐 수 없는 엄청난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신앙세계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 인식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데 만약 두 사람이, 미갈이 다윗의 그러한 측면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면 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겠죠. 역사를 보면 아주 훌륭한 영적인 인물이면서도 결혼에 있어서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종종 나옵니다. 웨슬리같은 사람도 그랬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배경익?목사님같은 분도 그랬고. 꽤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들이 뭐냐하면 신앙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성직자의 삶 속에만 내재하는 것이 평신도의 삶 속에도 늘 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매일 빌딩 짓고 돈 벌어가지고 신나게 여행 다니는 그 꿈 이상으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결혼생활이 이상적일 수 있겠습니까? 상향조정이 되든지 하향조정이 되든지 해야 하는데 후자로 떨어질 가능성이 참 많이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꽤 신앙이 있는 것으로 폼 잡던 사람들이 결혼 후 주일 예배 한 번 나오는 것을 헉헉 거리면서 나오는 것을 여러분 많이 보죠?
그래서 결국 제일 먼저 뜻을 정하십시오. 결혼의 뜻을 정하십시오. 물론 자기 스케줄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올 가을에는 결혼해야 되겠다. 그러면 지금쯤 사귀어도 됩니다. 뭐냐하면 때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속전속결로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사랑을 느끼고 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할 수 있으면 짧은 기간이 되게끔 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결혼하고 나서 천천히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나는 가장 권할만한 방법이다. 그랬더니 그 중에서 생각이 있는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결혼에 이르기 전에 연애 그 자체에 대해서 꿈이나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저의 견해는 너무 잔인한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 편에만 선 견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 그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결혼할 계획이 없는 사람들은 사귀지 마십시오. 언제 이 바쁜 기간에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뭘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 세속적인 일입니다. 언젠가 한 번 수련회를 했는데 수련회 강사가 와서 교회의 영적인 상황이나 이런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 좋은 때에 연애도 안하고 도대체 여러분들은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그 한마디가 불을 지른 것입니다. 수련회 후 정신들이 다 나갔습니다.
뭘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습관적인 오락이나 잡기에 빠지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 게임에 매료되어서 매일 그거 몇 번씩 안하면 잠 못자는 사람들 있죠? 범죄입니다. 청교도들이 왜 화투나 사행성 노름을 안 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댄스하지 않고 그 이유는 그 자체를 범죄로 봤다기보다 그것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혼할 계획도 없고 고백하기를 잘되면 하고 안 되면 말고 그런데 뭘 얻고 싶어서 만나는 것입니까? 그렇게 마음을 빼앗겨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 같습니까?
(테이프 끊김) 다른 기도제목이랑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몇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환경을 통해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자기가 확신해도 기다리던 그 남자가 장가가서 애 낳고 살면 물 건너 간 것입니다. 하나님 뜻 아닙니다. 환경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를 받는 지속적인 확신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경우에는 처음에는 불같은 확신이 오는데 계속 기도에 헌신하면 헌신할수록 그 확신이 점점 희미해집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실 확신일 경우는 처음에는 희미했었는데 기도하면 할수록 그 확신이 계속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간이 얼마냐? 그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만 보아서는 안 되고 종합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똑같은 질문을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 불같은 시련을 경험하고 나서 결혼하게 되면 아 목사님 그때는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확실히 하나님이 그러시더라고 이렇게 깨달아집니다.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성숙할 만큼 시간 여유를 가지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12월에 대선해야 되는데 아직도 안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국민들 마음 빼앗길까봐 나는 이것이 성경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만나서 결혼으로 골인할 때까지 6개월 안짝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결혼의 계획이 안서 있는 사람들은 연애가 아직 내 분깃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예외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예외에 속한다고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다음 기도의 응답, 최상의 선택은 하나님께 있다. 사람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이런 말은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주님이 하늘에서 그럽니다. 내가 언제 말했냐?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확신을 신령화 할 때 이런 용어를 많이 씁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데 형제랑 결혼하래 내 말 안 들으면 이것은 주님을 배반하는거다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분명하게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는 시간은 생각하는 시간의 10분의 1도 안됩니다. 이 사람에게 가면 잘 풀릴까? 아니야. 겉만 멀쩡한 것 같아 그래도 그것도 차버리면 내가 또 차례가 오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의 10분의 1만 기도해도 그 사람은 기도로 결혼을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공상의 우선순위가 기도의 우선순위는 절대 아니더라 이것입니다. 문제입니다.
뭔가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흔들거리면서 살다가도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는 이상하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부으면서 자신을 승복하고 주 뜻대로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들은 신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오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어떤 사람의 고통스러운 부부생활에 관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들이 만남 그 자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만남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럴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은 뭔가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응답을 받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면 충족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맡길 수 있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항복해야 합니다. 때로는 평소에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응답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 것에 대해서 열려 있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합니다.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결정적이지 않은 평상시에 많이 기도하는 것보다도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에 매달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에 더 크게 기여합니다. 그것을 가슴에 새기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여덟 번째 그러다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확실하게 너는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한다. 그 사람 원래 너 줄려고 만들었다. 그러면 이제 완전하죠? 하나님이 분명하게 원하시는 결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이제 연애하는 측면에서 보면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 하나가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일수불퇴입니다. 한 수 놓으면 물릴 수 없습니다. 분명하게 한 번이면 모든 것이 다 정해지는 것입니다. 연애의 측면에서 보면 끝이잖습니까? 결혼하지 않은 이쪽에서 보면 완성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결혼을 한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회가 주어진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결혼한 사람도 이혼하고 헤어지고 가정이 파괴되고 그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누가 주셨습니까? 그의 말기를 보면 그가 지혜롭지 못했으면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머리가 좋아요. 그 지혜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이나 지혜를 사용하는 솔로몬의 인격이 하나님의 장 중에 붙들려 있을 때에는 이 지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쪽으로 쓰여지는데 하나님의 손에서 놓 바 되니까 그 지혜가 하나님을 떠나는데 오히려 기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주님의 뜻 가운데 결혼을 하게 하시고 응답을 주셨습니다. 기회일 뿐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토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산으로 말하자면 부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로 옳게 들어 선 것입니다. 딴 길로 가면 유턴해야 하는데 유턴할 필요는 없습니다. 직진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기회일 뿐입니다. 이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리고 아내는 아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 남편은 남편이 서 있어야 할 자리, 자녀들은 자녀의 자리,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자리매김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그러한 지속적인 교정과 바르게 함, 이런 것들이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뭔가를 찾아가는 그리고 그 뜻을 성취해 가기 위해서는 단지 기회가 주어지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언제든지 기억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면 안도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긴장이 풀어지게 됩니다. 무슨 긴장이냐면 결혼하기 전까지는 안 되면 어떡하나, 놓치면 어떡하나, 잘못되면 어떡하나, 그랬는데 결혼하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돌아볼 게 별로 없다 이런 안일한 마음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보다도 결혼하고 난 다음에 더 많이 실패하게 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뿐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가정과 교회를 잘 비교하고 있죠? 그렇잖아요? 궁극적으로 보면 주님과 교회 전체가 결혼을 한 겁니다. 그렇죠? 목회자인 제 입장에서 보면 저도 여러분과 결혼한 거거든요. 유사한 면이 많아요. 신랑이 밖에 나가서 아무리 유명해도 집에서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별개다. 마찬가지로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밖에 나가서 아무리 인정을 받고 이름을 날려도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것처럼 교인들에게 인정을 못 받은 그런 목회자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전적으로 동감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에 와서 교회를 개척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서 확인을 했어요.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열린교회에 왔습니다. 만났습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다 잘 됩니까? 기가 막힌 비유가 생각났네요. 주님이 인도하신 교회로 왔으니까 이제 은혜가 폭포수로 넘쳐서 나를 익사시키고 말거야. 그렇습니까? 주님이 딴 데 말고 여기로 가라고 그러셨으니까 이것은 내가 설교하지 않고 바람만 불어도 생기가 들어 갈거다. 그렇습니까?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주님 뜻대로 제가 응답받고 시작했고 여러분은 이곳에 와서 영적인 가정에서 우리가 만나서 살림을 차렸는데 아무 문제없습니까? 내버려두어도 신나게 잘되어 갑니까? 그러면 왜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아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싸워야 되고 눈물이 있습니다. 매순간 그 관계를 정결케 해야 되고 그게 왜 없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도 이 원리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여기 보내셔서 왔습니다. 아 이제는 저절로 잘 될거야 그렇게 우리가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다면 교회는 최악의 경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뜻인데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신앙적인 변화를 받고 나서야 사랑의 의미와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눈뜨고 눈 뜬 후에야 결혼에 대한 계획이 생기고 결혼의 계획이 생긴 후에야 6개월 쯤 되기 전에 좋은 형제나 자매를 만나고 그러다가 차츰 사랑에 빠져서 뜨겁게 사랑하다가 약혼과 결혼에 이르게 되어 한 가정을 이루게 되고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면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 가장 좋겠죠.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 아내이고 그 남편이고 그랬으면 좋겠죠. 그런데 깨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깨져도 괜찮겠지. 안 그렇습니다. 지금은 목사 사모가 되었습니다. 자매가 하루는 전도사일 때인데 만나자고 했습니다. 막 우는 것입니다. 그 형제하고 깨졌대요. 요즘 어떻게 지내냐 했더니 전도사님, 저는 술로 삽니다. 굉장히 헌신된 자매입니다. 집에서 매일 밤마다 술 먹고 잠이 든답니다.
목사님이 하루는 그 자매 안부를 물었습니다. 저야 시종 드는 부교역자이고 목사님이 영혼들의 아버지이니까 다른 사람은 없었고 둘이 있는데 물어 보셨습니다. 목사님, 그 자매가 그 형제하고 그 형제도 목사님이 잘 아는 사람입니다. 깨뜨려졌답니다. 그래요? 저도 참 마음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매일 저녁 술로 산대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그럴수가 이런 게 아니라 예 제가 그 심정 다 압니다. 두 번 충격 받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사랑이 깨어진다고 하더라도 술로 날을 보내고 그런 사람을 제 주위에서 못 본 것은 아니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못 봤거든요. 두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할아버지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전혀 놀래지도 않으시고, 아니 술을 먹다니 그러지도 않으시고 예 제가 그 심정 다 이해합니다. 역시 내가 아 난 아직 멀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자로서 양이 고통하고 있는 그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술을 마신다고 했을 때 솔직히 그 고통에 시선이 간 게 아니라 술에 시선이 갔었는데 술이라니 그럴수가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도 깨지면 자기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과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깨지면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되잖아요? 그 때 그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면서 그런 충고를 했습니다. 제가 상담하고 수많은 사람하고 이야기한 것을 책으로 묶으면 기막힌 소설이 될 거예요.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에도 샘플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가슴에 다 묻어 두고 있습니다. 깨졌어요. 그래서 그런 권면을 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기도해라. 주님 나는 이미 깨뜨려졌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를 내가 버려서 외로워지는 것만큼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서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서 시련을 이겨야 합니다.
(테이프 끊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이거였는데 그것을 안 한 것 다른 것을 한 것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주님은 영원히 사랑을 받으실 분입니다. 깨어져도 주님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 번, 어떻게 마음이 나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답이 다 나왔습니다. 너무 어려운 문제인데, 마음을 다하여 시리즈를 좀 들어보세요. 제일 큰 계명 하면서 아가페를 이야기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결정의 동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고 자매를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랑을 움직인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 되도록 그리고 그 사랑의 지배와 통제를 못 받는 감정이 없도록 그렇게 자기를 그 사랑의 감화에 복종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그 완전한 사랑에 감화를 받는 영적인 생활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 칼빈을 비롯해서 아주 경건했던 사람들을 보면 그런 게 나옵니다. 존 칼빈이 나중에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벨레뜨라고 하는 여인인데, 과부입니다. 그런데 젊고 유명한 총각이 왜 과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일설에는 돈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냐 돈 많은 집의 미망인이었어요. 칼빈이 자기 친구에게 쓴 편지를 보면 결혼생활로 들어서기에 앞서서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하는 마음 이런 게 나옵니다. 그런데 굉장히 불안해하는 겁니다. 결혼을 앞두고 이유인즉 내가 하나님보다 이벨레뜨를 더 사랑하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이 만약에 그렇다고 생각하시면 어떻게 하지 하는 그런 불안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이 참 쫀쫀하고 소심하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아 정말 이 사람이야말로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만큼 신령한 은혜의 부어주심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 통제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런거 저런거 다 빼고 나면 소위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불같은 사랑 그런 것이 좀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같지 않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거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제껏 이야기한 것을 가슴에 잘 새기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잘 분별하면서 그러면서 한 번밖에 없는 이 기회를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후회함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됩니다. 결혼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오. 그냥 하나님 난 아무 것도 안 바랍니다. 시집만 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제가 뭘 바라겠습니까? 장가만 보내 주시면 저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분명하게 그런 의식을 가지고 그렇게 기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시간에 질문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Q 돕는 배필, 사역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A 사역의 파트너라는 말인가보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함으로써 서로 돕는 배필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좀 더 조명을 받아야 될 문제입니다.
Q 독신에 대한 징표는 어떻게 확인될 수 있을지?
A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소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로 소명을 받았다. 이렇게 확신하는데 도저히 설교가 안된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소명이 있는 사람들은 소명을 따라 갈 때에 헌 신된 삶을 살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그 길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독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신으로 살면서 그것이 계속 입증되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결혼을 안하고 독신으로 사는데 한 없이 비참한 생각이 들고 결국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방해할 정도로 심각한 고독에 부딪치고 하는 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그런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헤르만 바빙크가 소명은 은사에 의해서 확인되어진다라고 했습니다.
Q 배필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라고 믿는데, 때로는 사람이 그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임의대로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인가? 또 결정적으로 자신과 결혼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가을에 결혼하기로 뜻을 정하였어도 봄에 상대자가 나타난다고 말할 수 없지 않는가?
A 그것은 맞아요. 당연하지. 그냥 가을에 안 나타나고 여름에 나타나도 해요. 당신은 여름에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 뜻이 아니야 그러지 말고, 때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임의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불순종이라는 게 그런 것입니다. 짧으면 짧을수록, 그러나 사랑이 성숙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12월에 대선해야 하는데 아직도 안 밝히고 있잖아요? 왜 국민들 마음 빼앗길까봐 나는 그저 이것이 성경이다말할 수 없지만 만나서 결혼으로 골인할 때까지 6개월 안짝이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구체적인 결혼의 계획이 아직 안 서 있는 사람들은 연애가 아직 내 분깃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십시오. 예외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예외에 속한다고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라 그 얘기입니다.
Q 목사님의 바른 목회자의 아내상에 근거하여 목회자 아내의 실제적인 자질과 은사는 교회 안과 밖에선 어떻게 활용되어야 합니까? 한국 교회 잘못된 사모의 위상이 있다면, 사모에 대한 평신도의 잘못된 인식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A 이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모도 사람이니까 다양한 은사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목회의 길에 들어섰는데 나름대로 받은 자연적인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겠다고 목회지는 남편 혼자에게 맡겨두고 자기는 가서 딴 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목회자와 결혼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혼자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목표가 없는 사람하고 결혼을 한다든지 그랬어야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목회를 꽤 크게 하고 있으면서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목회자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목회자의 아내는 특별한 사람들의 더 특별한 사람들이 가야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자의 아내의 길을 걷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러나 아마 천국에 가면 목회자들 보다 목회자들의 아내들이 받을 상급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목회자 아내의 실질적인 자질과 은사는 교회 안과 밖에서 어떻게 활용되어야 하느냐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질문 같습니다. 목회자 아내가 있는데 단지 교회에서 가만히 엎드려서 목회자 사모를 한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뛰어난 자질이 있는데 그것을 묵혀 둔다는 것은 너무 아까운 일이 아니냐 그런 뜻인 것 같아요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개발하지 않아서 그렇지 목회자 아내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사람은 목회자 아내로서 훌륭하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좋은 자질들을 이미 그 속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자기는 몰라도, 게으름과 나태나 영적인 무지들이 그런 것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거나 계속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솔직이 털어 놓고 이야기 하자면 나는 목회자의 아내는 목회자가 목회의 길로 들어서면 그러면 직업을 포기하고 그 한 목회자를 돕는 아내로서 풀타임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그 자리가 매우 특별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영적인 수준은 두 가지로 보면 알 수 있는데 목사를 높이고 존중히 여겨주는 것은 웬만한 교회에서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신학생들에 대한 어떤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목회자의 아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가 그 교회의 영적인 수준을 재는 바로미터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아내의 자리가 매우 특별하고 독특한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도저히 설 수 없는 자리이다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목회자의 소명의 엄중함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웬만한 사람은 못가는 길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모에 대한 잘못된 평신도의 인식은 두 가지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는 사모가 목사와 함께 교회의 모든 일에 대해서 권한을 가지고 나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당회를 다하고 나면 가결되어서 회의록까지 올라갔는데 장로들이 흩어지면서 그럽니다. 어이구 결정하면 뭘 해, 왜? 이불당에 가봐야 알지. 이불 속에 들어가서 둘이 다시 추가로 합의를 봐야지만 교회에서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그런데 목회자의 아내들이 일반적으로 그러고 싶어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무슨 꿈이 있습니까? 보이는 게 교회이고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게 교회인데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막 꼬이는 것입니다. 질서가 안 잡히면 사랑과 용서가지고 안됩니다. 정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잘못되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하찮게 취급당하는 것, 목회자는 일반적으로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어떻게 전도사님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냐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장로님들에게 그렇게 버릇없이 대하냐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모님에게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냐고 그렇게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말못하는 게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그 자리를 보아야 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데 형제들 중에서는 아 저 놈 목사되면 참 괜찮겠다. 그런 사람은 가끔 보는데 아 저 자매가 사모하면 얼마나 잘할까 그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군인지 몰라도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겠다. 그런 사람들은 가끔 만납니다. 정말 특별합니다. 거기에 부름을 받고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특별한 사람과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싸고 존경하고 그럴 수 있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Q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결혼의 목적이라면 신앙적인 칼라가 맞지 않아서 각기 하나님을 섬기거나 한 쪽만 섬기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관계가 신앙적인 연합이 안 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또한 이런 경우 신앙적인 동역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A 여기서 칼라라고 이야기했는데 진짜 수평적인 칼라의 문제라면 그것은 극복 못하면 편견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수평적인 칼라의 문제가 아니라 아까 이야기 했듯이 미갈과 다윗과 같은 그런 갈등의 경우에 그것은 어느 한 쪽이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 받는 일들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결혼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Q 결혼생활을 오래 한 부부들 중에 각기 다른 신앙의 깊고 낮은 것을 봅니다. 그런 경우는 무엇 때문입니까?
A 그건 사실 부부여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뭔가 남편의 신앙의 세계 속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면 그 영혼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해서 민감하게 들여다봐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둔감함도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예가 하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울 이래로 역사상 최대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평가를 받는데, 그 사람이 그렇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아는 놀라운 영적인 각성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부인하고의 격차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라 피에르 폰타죠? 그 여인은 아주 부요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약간의 낭비벽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 목사님이 안계셨을 때 다른 목사님이 오셨는데 그 때 놀라운 변화를 받습니다. 그 이전에도 물론 풍부한 신앙의 체험을 가집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변화가 그 이후에 더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둘이 훌륭하게 사역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인식이 안 맞으면 로이드존스 목사 부부같이 그렇게 사역할 수 없습니다. 남편의 설교의 세계를 이해 못하는데 그 사람 데리고 무얼 하겠습니까?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Q 결혼해야 하는가? 헤어져야 하는가? 하나님 앞에 고민하다(이 결정이 시간적으로 급하다고 느껴지고 있을 때) 자신이 회심치 않은 영혼이며 열려지지 못한 영혼임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까?
A 두 가지 질문이 복합이 되었습니다. 자기 영혼이 우선 급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에 매달려서 후자의 문제를 풀면 전자의 대답도 분명하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혼란 속에서 결정하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말입니다.
Q 내가(우리가) 주님 앞에서 사모로서의 고난 받을 각오가 없다면 목회자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까? 배필에 대한 사랑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까?
A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목양지로 보내시면서 당연히 이렇게 물어 봐야 되지 않아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 사랑하니? 그렇게 질문안하시고 네가 날 사랑하느냐? 목자와 양씨리즈 1번과 2번을 들으시면 최악의 상태가 목회자와 교인이 인간관계로 이루어진 것을 말씀드리면서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목자도 예수님 때문에 그 교회에 오고 교인도 예수님 때문에 그 교회에 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인과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매혹되어가지고 매혹은 잠깐입니다. 다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사모로서의 고난 받을 각오가 없다면 목회자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까? 네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