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오심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에 관해 말씀하신 것을 본문의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때가 가까워짐을 알게 되실수록 당신의 죽음을 말씀하셨고 그 죽으심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죽으심의 의미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오히려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에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이 마지막 날에 이 땅의 임금이 되셨을 때 자신들이 어떠한 지위를 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서로 다투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이 이 광경을 보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에도 당신이 죽으셔야지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오, 도리어 섬기려 하고 또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이 진행하고 있는 부활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대한 사건이 비로소 이 말씀에 대한 참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입니다. 사실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도 제자들이 봤고 또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다시 살아난 부활의 모습은 제자들이 더 분명하게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사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그 대신 거기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의 무리들이 예수님의 최종적인 죽음을 지켜보았고 또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본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정말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아주 부인할 수 없이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혹시 환상이나 유령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을 만져볼 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그 모든 모습을 확실히 보고 경험하게 되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밀하게 보면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를 비롯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은 오늘 우리가 배우는 것처럼 신약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메시아사상, 신약성경의 빛을 받고 해석된 구약성경을 통해서 배우는 메시아사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사상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은 것은 우리가 오늘 공급받고 있는 신구약성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사상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유대교라고 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예언이 그치고 400년 동안 신약시대가 될 때까지 계시의 침묵기가 접어듭니다. 이때를 신약과 구약사이의 중간기 시대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중간기 시대 때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그 바벨론이 메대와 페르샤로 넘어가고 그리고 다시 헬라와 로마에 의해서 나라는 바뀌었지만 계속해서 이 민족의 지배를 받는 정치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대백성들이 삼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이 이제 자신들이 처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상황에 접목시켜서 구약의 여호와의 종교를 새롭게 해석하는 풍조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유대교라고 하는 사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유대교가 구약여호와를 믿는 종교에서 나왔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그것은 구약 여호와의 종교의 뒤를 잇는 정통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메시아사상은 당연히 구약에서 힌트는 얻었지만 구약에서 말하는 정직한 메사아사상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메시아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사아라고 하는 사상은 바로 자신들을 이 모든 정치적인 억압과 이 민족의 부당한 통치 아래서 구원해주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힘 있는 종교적 메시아 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메시아가 나타나서 이스라엘 민족을 모든 이 민족의 압제에서 구원해주는데 그는 뛰어난 정치력과 군사적인 지도력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보다는 매우 탁월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매우 가까이 다가간 그런 걸출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권을 잡으시는 그날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서 권세를 누릴 것을 꿈꾸는 것도 바로 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유대교적인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로서 당신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과 제자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갖고 있던 기대들이 서로 엇박자가 되어서 어긋맞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제 이렇게 메시아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과 그리고 예수님을 추종하던 많은 유대백성들이 사실은 이런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가룟 유대가 예수님을 판 사건도 실망했기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가 꿈꾸는 것처럼 큰 정치적인 능력과 기적을 행하고 종교적인 인물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정치적인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 날이 오면 자신들이 지금은 고생을 하지만 보상을 충분히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제자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본 사람들이 있고 직접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이 있으니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부인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그렇게 다시 부활하신 것을 보고 제자들이 비로소 아, 바로 예수님이 진짜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오신 성경적인 메시아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메시아가 죽는다고 하는 사상이 없었습니다. 또 메시아가 죽는다는 사상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죽는 것은 이제 영원한 세계에서 부활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세상 모든 만민의 죄를 지고 대속 제물로 대신 죽는다고 하는 그런 메시아사상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부활하신다는 사상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없었습니다. 메시아가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처럼 이렇게 이 세상에서 부활하시고 이 세상이 역사 한가운데서 부활하시는 사건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 피안에서 부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더라도 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사상의 틀에서 보면 이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사건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고 심지어 오백여 형제가 모인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나타나시고 그리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사건을 이제 제자들이 깊이 경험을 하고 이제 신학적인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이 사건을 모두경험한 후에 성령이 강림하시자 비로소 예수님의 이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이 부활에 대한 깨달음이 오늘 우리들이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복음의 아주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삶과 행동, 그분의 선포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외친 사도들의 모든 외치는 선포와 가르침을 넓은 의미에서 모두 포함합니다. 그런 기독교 신앙의 초석을 이 부활사건의 경험이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깨닫게 된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두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옳다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활한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지만 걸출한 신앙의 지도자들 가운데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겼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에녹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300세에 무드셀라를 낳고 65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 에녹은 모든 사람의 조상과 후손들이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계속 되는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긴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대해서 유다서가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외치고 당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부르짖었던 예언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경험할 때 구약에 익숙해있던 제자들에게는 바로 이렇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바로 올려졌던 이 에녹이 생각날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 사람이 구약에서 전설적인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특별한 선지자였고 그래서 하나님이 특별히 그를 인정하시고 총애하셨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살아서 하늘나라로 들리 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이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올라가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이 특별히 어여쁘게 여기던 하나님이 당신의 종이오, 당신 편이라고 인정해주시던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유대교의 메시아사상의 틀에서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만을 가지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보면 이것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편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에게도 믿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참 종이오, 아들이라고 인정해주신 사건이었다면 그 참 종이오, 참 아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 자기들에게 가르쳐주셨던 교훈도 참될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껏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남겨놓았던 그 소중한 가르침의 진실성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옳은 분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편이 되어주셔서 예수님을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과 생각을 달리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부딪히고 예수님을 핍박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종교지도자요, 또 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 이 사건을 보고 예수님이 맞았고 예수님을 박해하고 예수님의 교훈을 트집 잡던 사람들이 틀렸다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더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죽음은 반드시 죄의 대가이고 형벌입니다.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스르고 대적하는 무지막지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형벌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적하고 하나님께 원수 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인내하시면서 돌아오도록 경고하시지만 끝까지 돌이키지 않을 때는 그를 하나님께서 목숨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그 죽음이 바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죄의 대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해주셨는데 그런데 그는 죽었다.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형벌을 받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커다란 신학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인정해주셨으며 예수님 편이라는 증거이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매달려서 죽으셨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죽이셨다는 뜻인데 그러면 그렇게 죽었다고 하는 것은 곧 그러면 하나님 앞에 형벌을 받았다는 것인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유대인들이 만들어놓은 사형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나라가 변방의 야만족이었을 때 만들어낸 가장 잔학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다른 많은 방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덮어씌우고 싶었던 많은 죄 중에 가장 많은 경우에 신성모독 죄였습니다.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종교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유대인의 고유한 형벌이 아닌 로마인의 고유한 형벌,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교묘하게 의도된 방법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나무에 매달려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사상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째든 나무에 매달려서 죽음을 당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큰 저주를 받은 죽음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이 율법 사상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죽이면 신앙을 가진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죽는데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십자가, 곧 나무에 못 박혀죽었구나. 그것을 보고 구약적인 사고를 가지고 해석을 하게 되면 예수님이 죽은 것은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였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주하셔서 나무에 매달리신 것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로 그들이 다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셨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죽으셨으니 이것은 곧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고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곧 구약의 율법의 정신에 따르면 하나님께 커다란 저주를 받아서 죽으신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살아나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인정을 받으신 것이고 죽은 것은 하나님의 끔찍한 저주를 받아서 죽으신 것인데 그런데 하나님께 그렇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잠시 전에 그렇게 끔찍한 저주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끔찍한 저주를 받은 사람이 동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가 거짓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둘 다 사실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는 장면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을 비롯한 많은 여 제자들이 바라보았고 또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더 많은 제자들이 보다 더 확실하게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사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사실과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움직이고 고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정확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가 하면 그러면 예수님의 이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예수님이 만약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은 사람임이 부활을 통해 드러났다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죽으신 그것은 아마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된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때에 이런 생각을 갖게 만들어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게 바로 이 날에 말씀하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오,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죄와 그리고 복음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아 캄캄하던 그들의 지성을 찢고 하나님의 찬란한 복음의 빛이 들어왔고 그들의 어두운 정신세계와 영혼과 그들의 지성 속에 진리의 밝은 빛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찬란한 빛이 그들의 온 영혼 속에 뿜어져 들어오게 되었을 때 그때 그들은 아주 명백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멸시와 욕
십자가 지셨네
주님이 당하신 그 멸시와 욕, 주님은 당신이 지신 그 천한 십자가의 죽음이 결국은 하나님이 저주하신 형벌의 결과였으며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인정받으실만한 흠 없는 분인데 그분이 그렇게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라고 하는 깊은 깨달음들이 그 제자들의 마음속에 강물처럼 밀려들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그들에게 감추어져있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시자 그들은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지성의 천장이 찢어지면서 계시의 현란한 빛줄기가 그들의 어두움을 뚫고 임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깨닫지 못하고 알 수 없었던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오, 오히려 섬기려하고 에 나오는 이 단어는 ‘디아코 네임’이라는 단어입니다. 디아코 네임이라는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도 공궤한다, 에 나오는 단어이고 원래 이 단어는 노예가 식탁에서 상전들이 밥 먹기 위해서 수종을 드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던 단어였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deacon 영어의 집사라고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원어적으로 보면 이 집사는 자기 스스로 성도의 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사람들을 종 삼아서 상전처럼 대접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종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예수님을 아무리 많이 그분이 우리를 섬겨주어도 우리는 예수님을 종으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섬김의 정신이 종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진 섬김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대속물이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뉴트론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뉴고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뉴원은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포로로 잡거나 노예로 일생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주는 것을 가리켜서 리오라고 부르는데 뉴트론은 그렇게 리오 시켜주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물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옛날은 노예 시대였고 노예를 팔고 사는 시대였습니다. 시장에 가면 노예들이 즐비하고 그 노예들을 사고팝니다. 돈이 많고 인자하고 어진 부자가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울부짖으면서 가족들이 각기 팔려 헤어지려고 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때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종을 시켜서 야, 가서 저 노예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봐라. 그랬더니 엄마 노예는 얼마고, 아빠 노예는 얼마고, 아이들 노예는 얼마인데 한꺼번에 사는 사람이 없어서 여기저기 찢어서 팔려고 합니다. 온 가족들이 아주 피나게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 부자의 마음속에는 자기와는 상관이 없지만 너무 마음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얼마인가 하니까 얼마입니다. 그 이상의 돈을 줄 테니 이 노예 넷을 전부다 내게 파시오. 그러니까 노예상이야 돈 많이 주는 사람에게 파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네 노예를 이제 많은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그러니 함께 헤어질 위기에 놓여 있던 가족들이 모두 함께 한 집에 그것도 마음씨 좋은 주인에게 팔려가게 되었으니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집에 도착하더니 이 노예들을 깨끗이 씻기고 좋은 옷을 주어라. 그래서 깨끗이 씻고 좋은 옷을 입고 그리고 좋은 음식을 먹은 후에 이제 하늘같은 주인이 불러서 갔더니 주인이 탁자에서 뭘 쓰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그랬더니 해방증서입니다. 이제 노예 누구누구는 원래 내가 주인이었는데 내가 이들을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글을 써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씩 쥐어주면서 이제 너희 가족이 더 이상 노예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니 가서 자유롭게 살아라. 그러니 뭐 그 감격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전에는 종이오, 노예였던 신분의 네 식구가 그렇게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누군가가 몸값을 지불했습니다. 이 인자한 주인이 노예시장에서 지불한 그 몸값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뉴트론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대속물입니다.
그 몸값을 어떻게 지불하셨는가?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창조하신 본뜻도 모르고 제 멋대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망가트린 일에 기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커다란 불명예였고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죄를 예수님이 다 짊어지시고 그리고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당하신 그 형벌의 몸, 우리의 죄를 인해서 십자가에서 찢으시고 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에 이르는 그 고난이 우리를 그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건져낸 뉴트론이 되었던 것입니다. 대속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도구일 뿐이고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몸을 예수님이 희생해서 우리를 위한 뉴트론 곧 대속물로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믿으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깨닫는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을 경험했을까요? 우리는 인간적으로는 예수님을 본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고 그 음성을 직접 들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삼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걸어 다니고, 그분과 함께 먹고, 그분과 함께 자고, 그분과 함께 기도하러갔고, 그분과 함께 병고치고, 그분과 함께 삼년을 동행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종처럼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또 섬기고 봉사하시다가 죽으신 예수님의 그 커다란 고난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인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원래 그분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인정받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실 수밖에 없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적어도 두 가지 생각이 비수처럼 제자들의 마음을 찌르고 또 찔렀던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흠 없으신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한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다는 그 뼈아픈 사실을 깨닫는 것과 또 하나는 그 흠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처절한 고난을 당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한 방법으로 죽으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이 두 가지가 비수처럼 그들의 마음을 후벼 팠던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의 큰 고통은 반드시 그 깨달음 이후에 감격을 몰고 왔습니다. 그 감격은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처절하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 저주를 당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강물처럼 밀려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렇게 밀려들어올 때 그동안 모두 잊고 살았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애들아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나 때문에 번영하려고 하고 나 때문에 높은 지위와 나 때문에 많은 이 땅의 자원을 누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종처럼 섬기려하고 그리고 너희들의 생명을 위해서 내가 너희들의 죄를 짊어지고 아버지께 형벌을 받아서 죽어 대속물로 바치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왔다. 이 진리가 제자들의 마음속에 강물처럼 밀려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심하였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그 처절한 형벌 받으신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받으신 형벌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모든 죄 때문에 당하신 형벌이고 우리는 사실 자격이 없어서 그렇게 못했지만 사실 우리가 그 나무에 매달려서 형벌을 당해야 마땅한 죄를 지은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 십자가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었습니다.
멸시와 욕 십자가 지셨네
주님이 그 많은 고난을 다 당하신 것이 우리 모두에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께 사랑과 인정을 받으실만한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더러운 인간,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찾지도 않는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못박혀죽으셨을까? 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들이 더욱 가슴 아팠던 사실은 이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죽게 하신 것은 흠 없는 아들을 죽이시고 죄 많은 우리들은 살리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사랑의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슴이 아픕니다. 왜 그러셨을까? 도대체 이 죄인이 무슨 가치가 있기에 당신의 흠 없는 아들은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저주하셔서 죽게 하시고 쓰레기와 같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보석보다 더 빛난 자기 아들의 옥체를 깨트리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 십자가 아래서 그 사랑 감당할 수 없어서 눈물만 흘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난이나 시련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 아무나 다 받는 구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하지도 않는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치르신 대가를 기억해보십시오.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양이 되어서 우리를 위해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못 박히시고 옆구리에 찌른 창으로 물과 피를 모두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께 저주받은 하나님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그렇게 소중한 당신의 아들을 뉴트론 곧 대속물로 주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이었고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이 자기의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한 아들을 대속물로 주고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주님 앞에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막 살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아무렇게나 생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 보혈의 피로 씻어서 쓰레기 같은 인간을 정결하게 하시고 예전에는 쓸모없고 하나님과 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였으나 오네시모처럼 우리를 변화시켜서 이제는 주님의 신복이요,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주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이 사랑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사랑에 감격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당하셨네
예수님이 형벌 받을 우리를 위해 그렇게 죽으셨습니다. 이 은혜를 일평생 가슴에 깊이 새기며 이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 아니오,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님이 만약에 이 땅에 계셨더라면 이 놀라운 구속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배도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물도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예수님의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했을 것입니다. 핍박당하시는 예루살렘에서도, 멸시와 욕을 당하신 데가볼리와 시돈에서도, 가버나움에서도 떨어진 떡 부스러기를 모으시던 벳세다 광야에서도 어떻게 하면 이 한 몸이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동안에 예수님의 섬기시는 그 일, 망가지고 구겨진 이 세상을 고치고 펴시기 위해서 섬기신 그분의 일에 보탬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거기에 우리를 드리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다만 다른 것은 이제는 그분이 우리 눈앞에 보이게 계시지 아니하고 우리 마음에 살아 계시다는 것밖에는 차이가 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당신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살고 싶으셨을 그 삶을 우리가 뒤를 이으면 우리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에 매달려 형벌 받으실 수밖에 없었던 그 죄를 우리들이 사랑하면 그분이 우리 안에서 흐느끼십니다. 슬퍼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사랑합시다. 주님만 사랑합시다. 그리고 주님만 따라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