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 유대교 완전주의들의 꼬임에 빠져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사도가 급히 쓴 편지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런 생각이겠죠? 그들이 이방인이지만 구원을 얻었으면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만 율법도 라는 종류의 미혹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인사말도 없이 격렬하게 편지를 써내려가다가 심지어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갈파한 후에 편지 끝머리쯤 와서는 마음이 누구러지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사랑이 다시 솟아났어요. 그럼녀서 권면의 말을 다하면서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자전적인 고백을 하는거죠.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기서 얘기하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것은 이 스티그마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거죠. 이것은 크게 나누어서 육체적 해석과 형상적 해석으로 나뉘어요. 나는 기존에 내려오던 한국 교회의 견해를 반박하고 새로운 이치를 성경신학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득해 보려고 하는거예요. 육체적 해석은 물리적 여기는 몇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핍박설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여기서 얘기하는 예수의 흔적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그의 몸에 입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입은 상처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많은 박해를 받았죠. 사십에 하나 매를 다섯 번이나 받고 성밖으로 내치기도 하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이런 성경적인 이것이 한국교회가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여러분들도 이렇게 이해를 해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핍박설 말고 또 하나의 주장이 있어요. 이것이 뭐냐하면 신비주의 적인 해석과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가 뭐냐하면 신비적 상흔이예요. 이것은 소위 ‘Stigmatization" 여러분은 아씨씨의 성자 프란시스의 생애를 읽어보셨겠죠? 그럼 아시시의 성자 프란시스가 살던 시대는 중세 후반의 아주 격동적인 시대였거든요. 카톨릭 안에서 굉장히 많은 수도원 운동을 중심으로 해서 자체 내에서 이러면 안되겠다고 하는 각성이 일어났어요. 많은 사가들은 이때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우리가 말하면 고유한 의미의 종교개혁이 안 일어났을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거든요. 아시시의 성자의 생애를 보면 이 사람이 죽을 때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기를 모두 쏟아부었더니 갑자기 주님이 그에게 은사를 주었는데, 주님이 오상을 주었다는 것이예요. 간절히 기도했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흔적이 나타나고 다리에 상처가 나고 진짜 물리적인 피가 흐르더라... 그런 해석이예요. 이건 카톨릭에서 신봉하고 있는 교리니까 사실 우리는 그렇게 건전한 주경학적인 해석이라고 보지는 않는거죠.
세 번째가 뭐냐하면 제이설이예요.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꽤 있습니다. 제이설이 뭐냐하면 당시에 이방 종교에서 자기의 종교에 헌신한 어떤 사람이면 자기가 섬기는 신에 대해서 자기가 dedicate 헌신되었다는 표로서 자기 자신의 몸에 상채기를 내서 자기 자신을 신 앞에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라는 구별을 둔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사도바울이 어쩌면 이방의 많은 사람들도 자기의 신에게 엄청난 헌신을 느꼈을 때 자기의 몸을 상해서 받친다면, 자기는 그리스도께 받쳐진 사람으로서 스스로 자기의 몸에 어떤 흔적을 내서 이방 문화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의 종교성을 보이려고 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사도바울이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않았을 때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까 라고 보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은 사실은 건전한 그런 것이 아닌거죠.
그러면 이제 형상적인 해석은 뭐냐하면 계속해서 논지를 전개하겠지만, 제 얘기는 뭐냐하면 이 스티그마틱 예수는 이 핍박설을 지지하지 않는 다는게 저의 주장입니다. 그러면 이 형상적인 해석이란게 무엇이냐? 여기서 얘기하는 ‘스티그마(Stigma)'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그 시대의 context에서 이해를 하면 이 답이 나온다 하는 거예요. 그럼 이 스티그마 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 이것은 글자 그대로 하면 흔적이라는 뜻도 되지만, 마크(mark)예요. 표식을 해놓는 것이예요. 그런데 이스티그마 라고 하는 것이 그당시의 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로마의 군인이나 노예, 특별히 이 노예의 경우에 그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뭐냐하면 노예들의 도주에요. 그래서 이제 모든 노예들을 법적으로 그렇게 한것 같지는 않고요, 이 노예들을 어떻게 했냐하면 이 스티그마를 매기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글라디에이터‘라는 영화를 보셨죠? 거기에 보면 럿셀 크로우가 잡혀가잖아요. 그때 팔을 벗겨보잖아요. 거기에 라틴어 글자가 나오는데, 그걸 보고 사람들이 ’아, 이 사람이 로마의 군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파악하잖아요. 그런 것이 스티그마예요. 노예에게 그런 스티그마를 새겨서 한 거죠. 이런 스티그마는 원래 짐승한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짐승에다 소나 말 이런 것들이 섞일까봐 불도장, 화인이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자기 소유인 것을 알린 것처럼 노예에도 그런 표식을 해서 그 사람이 도망을 가도 노예라는 증거를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리고 만약 이제 자기가 노예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려면 해방증세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제 주장은 뭐냐하면 이런 Stigmatization 의 관습을 광범위하게 이해하고 있는 문화적 맥락에서, 그걸 다 알고 있는 이 사람들에게 사도가 나는 예수의 스티그마를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 한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육체적으로, 물리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이것 자체가 하나의 은유로써 그것을 가리킨다 라고 하는 거에요. 이것을 내가 왜 ’형상‘이라고 했냐면 이것이 결국 스티그마 라는 표식이 이 사람의 몸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새겨진 특징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를 하면서 이 부분을 받아들이면 된다 이거죠. 그러나 이제 ’헤르만 리델보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핍박설을 지지합니다. 이 핍박설이 강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뭐냐하면 이 스티그마 한정하고 있는 예수의 뒷 구절이예요. 그것이 뭐죠? 내가 내 몸에 (엔 토 소마티 무)라는 단어가 나와요. 이 '소마(soma)'는 뭐죠? 그야말로 體, 몸입니다. ’사르크스(sarx)‘하고는 틀려요. 사르크스는 살이고, 이건 몸이예요. 그러니까 이건 일차적으로 분명한 물리적인 몸이예요. 그러니까 이 한정 어구가 붙어있기 때문에 이건 의심할 여지없이 육체로서의 몸이라 이거예요. 내가 흔적을 상처를 가졌는데 엔 소마티 무, 나의 그 몸 안에 있다... 그렇다면 이 소마는 물리적인 몸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몸에 난 상처 그 이상을 이야기 할 수 없다 .... 그러면 희랍 성경에서 소마가 항상 이것만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나? 꼭 그렇지는 않아요. 예를 들자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을 때도 이 소마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핍박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 ’엔 토 소마티 무‘라고 하는 한정 어구를 가지고 이것을 강력한 근거로 삼아서 육체적 핍박설 이외에 다른 설을 주장할 수 없다고 들이밀면 그러면 풀 수 없는 문제가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에서 나옵니다. 펴보십시오. 4장입니다. 유명한 구절이죠. 10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똑같이 '소마’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말 번역 성경은 잘못된 것이예요. 그러면 ‘예수 죽인 것을 우리 몸에 짊어짐은’ 이렇게 나와요. 그러면 이제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물리적인 몸이라고 칩시다. 우리가... 그러면 예수 죽인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해야되는냐 하는 거죠. 여기서 죽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말 성경에서는 나 때문에 예수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가책을 느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사실 희랍어 성경에서는 예수의 죽음이라고 나와요. 직역을 하면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지는 것은 .... 그 다음 구절이 문제죠.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했거든요. 자 그러면 또 나와요. 예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진다고 하면 여기에 난 무엇을 얘기하는 거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것은 물리적 생명이냐 이 얘기죠. 그리고 갈라디아서 1-6장에서 전개된 문맥으로 볼 때 이건 말이 안되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뭘 가지고 얘기하는 거냐하면 ’할례‘예요. 할례가 뭔지 다 아시잖아요. 성기의 앞 부분, 귀두 부분을 도려내는 거예요. 도려내는 거란 말이죠. 그 사람들 얘기는 내가 이방인인데 할례도 받았다. 그리고 너희는 그렇게 살의 일부분을 도려내서 육체의 할례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하는 거냐? 너는 그 부분에 흔적이 있냐 나는 여기에 있다... 그랬을리는 사실 문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다는 거죠. 대조를 갖는 거죠. 이 사람들은 육체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바울은 영혼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래서 이 사상이 어디서 나오죠?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예요.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이면적 할례가 진짜 할례다. 그렇게 대조시키는 거죠. 또 무엇을 대조시키죠? 네 들은 율법을 이야기 하냐, 아니다 복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리스도로 충분하다. 이렇게 대조 속에서 나오는 거죠.
자 그럼 조금 더 전개해 봅시다. 그러면 또 다르게 이야기를 한 사람도 있죠. 왜냐하면 ‘짊어짐은’이란 단어가 ‘페리페로’란 단어예요. 그런데 여기서 씌여진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것은 ‘bastazo 바스타조’란 단어예요. 그런데 학자들은 이 두 단어가 거의 대동소이 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이 동사가 그렇게 의미의 문제가 안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다른 구절도 많지만 이 구절 하나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모메’라고 하는 한정사가 있다고 해서 이 앞엣 것이 물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상응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거죠. 그러면 이제 도대체 왜 사도는 저 ‘스티그마 투 예수’라는 것을 썼는냐 이 얘기예요. 이것은 결국은 ‘스티그마 투 예수’가 소유격이잖아요. 무엇을 가리키냐 하면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기원과 관련해서 해석이 된다면 이것은 예수 때문에 생긴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가 되는 거죠. 기원이랑 관련되면...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소속과 관련해서 이야기될 수 있죠. 왜냐하면 ‘소격’은 이걸 소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얘기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음을 보여주는 ‘스티그마’예요. 김씨 가문의 스티그마 그러면 그 스티그마가 찍혔으면 김씨 가문의 소든지 말이든지 노예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스티그마는 결국 뭐냐?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다 생략하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도 바울이 서신 앞 부분에서 항상 제시하는 표현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doulos to Christ 둘로스 투 크리스트’ 혹은 ‘크리스토 예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둘로스’는 뭐죠? 종인데... 종이라고는 잘 표현을 안하고 노예에요. 지금은 노예라는 계급이 없으니까 우리가 실감이 안나요. 그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이루어지게 되죠. 그러면 무슨 뜻이냐 하면 ‘스티그마타 예수’는 ‘둘로스 투 크리스트’의 또다른 문학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것을 우리가 직역을 하면... 올바르게 사도 바울의 기록자의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이야기 한다면, ‘이후로는 누구도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런 문제를 가지고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나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다.’ 그 얘기예요. 종이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죠? ‘그런 일로 인해서 내가 설득되지도 않을 것이거니와 또 그런 생각에 대해서 내가 또 다른 견해를 가질 것이라고, 내 입장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예수의 노예인 것처럼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에 묶인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자증하여 알게 되지 않겠느냐?’ 이런 종류의 풍부한 의미를 이 안에 가지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조금더 전개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원래 ‘둘로스 투 크리스트’라고 자기를 생각했는냐... 전혀 아닌 것은 그 사람의 생애를 봐서도 알죠? 그래서 그 사람은 어때요? 유대 종교의 지도자의 꿈을 꾸는 엘리트였어요. 그래서 스스로 뭐라고 했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공문을 청해서 가서- 예수가 그리스도라 전파하는 인간들을 검속할 작정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그리스도와는 상관없던 바울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숙명적으로 ‘둘로스 투 크리스트’가 되게 만들었던 그것은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이죠. 이게 ‘Gnosis 그노시스’예요. ‘지식’ 그럼 이 ‘그노시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생각해야 되요. ‘그노시스’는 형태적으로 희랍어죠. ‘알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인 거죠. 그런데 이게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모든 신약의 기록자들의 공통점이 이 언어를 사용했지만 그러나 신학적인 개념에 있어서는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 ‘그노시스’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에 오히려 사도 바울의 맘 속에 있었던 훨씬 더 풍부한 뿌리가 되는 개념은 ‘다트’라고 하는 단어예요. 이 ‘다트’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 말로 똑같이 ‘지식’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제 지식에 관해서 희랍적 사유와 히브리적 사유는 판이하게 달라요. 어떻게 다르냐 하면, 희랍적 사유는 다분히 이 지식의 활동을 지성과 의지라든지 이런 것들을 상당히 구분하는 양상으로 이 문제를 다뤄요. 물론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서 플라톤이나 위로 올라가면 달라지는 거죠. 그러나 이제 후에 와서는 이런 개념들이 많이 달라지게 되는 거죠. 설명하면 긴데, 어쨌든 그리스 사고와 히브리적 사유는 좀 달라요. 히브리인들에게 이 ‘다트’라고 하는 단어는 뭐냐? 원래 이 ‘다트’는 ‘yada 야다: to know’라는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이 야다는 처음 쓰여진 게 언제냐 하면,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가인을 낳은지라 라는 말이 나오죠. 그때 동침하다라는 말에 ‘야다’가 쓰인거죠. 그래서 지금도 영어 사전 클 걸 찾아보면 노후라고 하는 이 단어 안에 ‘sexual intercourse 성교’를 하다 라는 뜻이 이 노후 안에 들어있게 되요. 지금도 히브리에 가면 혼인하지 않은 여자가 ‘나 저 남자 잘 안다.’라고 하면 혼삿길이 막힌다고 해요. ‘자보지 않고 어떻게 아냐?’ 이렇게 되는거죠. 그러니까 이 ‘야다’라는 단어에서 오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 야다라고 하는 자체는 이런 식으로 인간을 지성과 의지, 지식과 경험 이런 것들을 구분하는 양상이 아니라 통합적인 구조로 이해를 하는 언어의 그림을 가지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 히브리어는 그림언어예요. 시를 쓰기에 아주 적합하고 희랍어는 정확한 묘사언어예요. 그래서 정확한 기술에 적합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두 언어로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은 굉장히 .... 이 틈을 타서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히브리어와 희랍어를 열심히 해야 해. 아니야, 웃지 말아요. 열심히 해야 되는 거에요. 공부를 안하고 그러면 안되요. 열심히 해야해요. 그래서 반드시 original text를 가지고 번역이 잘못된 걸 찾아낼 수 있을 정도 만큼이라고 공부를 해야 된다. 이 ‘야다’라는 단어에서 온 것이예요. 이 ‘야다’라고 하는게, 지험합일의 경험-내가 쓰는 얘긴데-을 얘기하는 거예요. 지식과 경험의 합일된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 ‘다트’는 말이죠. 성경에서 신학 지식으로 많이 사용해요. 여러분,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이 제네바 신학교에 내 걸었던 게 뭐였죠? ‘삐에따스 에트 스키엔티아’ 요게 지식이고 학문이고, 요게 경건. 경건과 학문이예요. 이 두 개가 통합을 이루고 있는 거예요. 이게 신 지식이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다트’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완전히 일치하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서 4장에 보면 뭐라고 나왔냐면 ‘너희가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겠다.’ 호세야 선지자가 선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다트’를 버린 것은 곧 ‘야훼’를 버린거예요. 그런데 왜 다트를 버린것이 야훼를 버린 것이 되느냐?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대표적인 신명이 ‘엘로힘’과 ‘야훼’로 나와요. 그런데 이 두 개의 신명의 사용은 약간의 different(차이)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이 ‘엘로힘’은 -엘로힘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여러 학설들이 많은데,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울히’라는 단어에서 왔다는 이 ‘울’은 뭐냐하면 ‘도토리 나무’예요.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강인한 도토리나무. 하나님은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분이시다. 그래서 아주 강한 신, 모든 신들 위에 강한 신. 그런데 이 존함은 모든 인간들, 이방인들에게까지 포함해서 모든 범주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된 이름이예요. 그러나 이 ‘야훼’는 언약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이예요. 그러니까 이 ‘다트’는 이런 종류(모든 범주에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된 이름)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것도 포함하지만 보다더 고유한 의미에서는 언약 백성으로서 당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험합일의 올바른 신학 지식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럼 그 지식은 어떤 것이냐 하면 단지 지성과 체험과 나뉘어진 그런 개념에서의 미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언약 백성답게 살지 않을 수 없도록 필연적으로 그의 마음 속에 역사하고 있는 산 지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에요.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나서 '베자'나 ‘멜랑톤’ 시대서부터 150년간을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라고 해요. 제가 그 시대에 매료되어서 요즘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때에 개혁파 교회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굉장한 신학적인 발전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물론 그 중에는 알미니안주의나 이런 것들은 다 제외하고 얘기하는 거예요. 나중에 이성주의로 흐르게 되지만... 그러나 발전이 있게 되는데, 그때 화란에 ‘피터판 마스트리우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보회티우스’라고 하는 탁월한 신학자의 제자였습니다. 보회티우스는 고마루트라고 하는 사람이고, 그 다음에 고마르시스는 유니우시스라고 하는 사람이고 이 유니우스는 칼빈에게서 사사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 마스트리우트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이 ‘Theolitia ....' 직역을 하면 ’이론 실천적 신학‘이라고 하는 유명한 두 권으로 된 조직 신학 책이 있어요. 그게 이 개혁파주의 정통 신학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조직신학서 세 질 가운데 한 질이예요. 아직 번역이 안됐는데... 이 양반이 이 마스트리우트가 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 서론에서 설명을 하면서 뭘 얘기하냐 하면, 신학이란 ... 이 사람들이 얘기하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신학 지식을 얘기하는 거예요.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신 지식‘을 의미하는 거란 말이예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이 얘기예요. 신학이란 뭐라고 표현하냐 하면, ’비베레 아듀 데 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이것이 신학이라 보는 거죠.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다트‘는 이런 개념과 상통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란 것은 뭘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냐 하면 ’how to live' 예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것이 잘 사는 것인가 이 고민에 대한 답이 신학 지식이란 거예요. 이런 연결고리들을 굳게 붙잡으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신학의 적실성들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이론을 공부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야지만 그것이 참다운 살아있는 신학이다 라고 하는 것이예요.
자, 그럼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다트’가 이렇게 쓰여지게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특징은 뭐냐하면, 남들이 없는 이 ‘다트’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다트’에 붙잡혀있는 거에요. 그것이 뭐냐하면 ‘다트 엘로힘’ 혹은 ‘다트 아도나이’. 그런데 이제 이게 이 ‘그노시스’와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노시스 투 크리스트’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이 표현과 연결이 됩니다.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물리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죠. 이쪽에서는 어떻게 되죠? 크리스챤들입니다. 그렇죠? 그 다음에 여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되는 것이죠. 그렇죠? 여기가 이스라엘이예요. 언약백성이예요. 그러면 이 언약을 신약 시대의 백성들이 은혜언약으로 계승하고 있는 거잖아요. 자 그런데 뭐냐하면... 이러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 백성다운 삶을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통합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만들었던 정수가 ‘다트’였다 이 얘기예요. 똑같이 하나님은 이제 당신 자신을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던 방법을 보다더 구체화 시키셔서 아주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에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시기를 기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incarnation 성육신’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거예요. 이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에 대해서도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약간의 각각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요. 서방교회에는 그리스도의 ‘incarnation’이 속죄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요. 그래서 속죄의 교리 자체를 객관화시키면서 인간이 지은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셔야 됐는데 그렇게 죽으시기 위해서는 그 분이 사람의 몸을 필연적으로 입고 오셔야 됐다 이 얘기예요.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만족을 얻으시게 되고, 이것을 ‘만족설’이라고 하거든요. 만족설, 통치설 등등으로 나가요.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구원의 근거가 마련됐다 하는 식으로 다분히 사법적 해석을 도입하게 됩니다. 서방교회가... 그러면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이 해석이 조금 달라요. 이러한 개념을 동방교회에서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은 아니예요. 그런데 강조점은 그게 아니라... 이게 교회론과 관련이 되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만드셨는데 이 인간은 거대한 ‘body'로 만들어진거예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이 두 사람을 만드셨을 때, 아담 한 사람만 당신이 직접 만드시고 나머지는 이 사람을 재료로 사용해서 하와를 만드시고 그다음엔 자연적인 생육의 방식에 의해서 태어나게 되건죠. 흙으로부터 직접 빚어지는 인간이 아니란 얘기예요. 이건 전체적으로 뭐냐하면 하나의 바디란 거예요. 이러한 바디가 언약에 의해서 하나로 묶여져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서 이것이 깨뜨려지고 질병 상태가 되는거죠.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전부 깨뜨려지는 거예요.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몸 전체를 치료하시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신이시지만 이 몸의 일부로 오셔야 되는 것은 필연이예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해서 초대 교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별명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藥‘이예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 속에서 아주 자주 우리의 ’약‘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예 그 표현도 없어요. ’우리의 약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게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치료하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incarnation' 자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느냐 하면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끊어져서 하나님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던 이 세상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육신하시고 이 속에 오심으로써 신적 본질이 인간의 바디속으로 침투하는 거예요. 그렇게 보는거예요. 그래서 신적 본질이 -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잖아요.- 신적 본질을 입으신 그 분이 오시는데, 신으로서는 우리와 구별되는 분이시지만 인간으로서는 한 몸을 이루시는 분으로 오셔서 몸안에 하나님이 약을 넣어주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구원받을 인류의 몸에 집어넣으신 사건이 이 ’성육신‘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아주 독특한 교리가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디에프케이션‘의 교리라고 하는 것이예요. ’디에프카치오‘라고 하는 교리인데, 이게 뭐냐하면 ’신화‘된다 이 얘기예요. 그래서 이레네우스가 이단반박 ’아두베수스 헤라수스‘라는 작품 속에서 제5장에서 이런 얘기를 해요.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인간을 당신처럼 만드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결국은 이런 신적인 본질이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나타남을 이루시는데, 그 영광의 발현에 우리를 참여하게 해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도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관한 많은 문제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너무 긴 얘기라서 생략을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교리들의 서방적 형태가 ’Glorification 영화‘의 교리예요. 우리가 이제 중생되고 부활하여 다시 영화롭게 드러나잖아요. 그래서 몸과 영혼 전체가 인간 전체니까 그 구속이 완성되어야지만 우리의 구속이 완성된거란 거예요. 그 ’Glorification 영화‘의 교리와 만나고, 이게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리파탈라치오‘의 교리와 만나게 되는 거예요. 어쨌든 이런 개념에서 보면 소위 얘기하는 ’다트 엘로힘‘ ’다트 야훼‘의 구약적인 표현이 신약에 와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경험하면서 - 전환을 이루면서- ’그노시스 투 크리스트‘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봐야되냐 하면,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의 소명 사건을 구약의 선지자의 소명 사건과 대조를 하면서 봐야지만 사도 바울의 소명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하면...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이 있기 전에 구약의 종교, 구약 여호와의 종교는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어요. 대표적으로 ‘nabi 나비’라고도 하고 ‘로헤’라고도 하고, ‘호제’라고도 이야기 하잖아요. 여러 가지 다른 단어도 많이 쓰이지만 다 비슷한 뜻이예요. 그러면 아까 얘기했듯이 똑같은 질문을 해봅시다. 여기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래 이름은 사울이예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상관이 없었다기 보다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력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돌연히 변해서 숙명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만을 전파하지 않을 수 없는 신적 소명에 사로잡히게 되었어요. 그럼 이 신적 소명의 소스가 뭐냐, 기원이 뭐냐 하는 이런 질문을 여기에 남겨놓고 그리고 이런 신적인 소명,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징벌을 선언하신 적도 없는데 스스로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정도의 강력한 신적인 강제력을 동반한 소명을 느끼면서 소위 ‘Ananke 아낭케’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죠. 숙명에... 그러면 이런 복음 전파자적인 숙명의 소스가 뭐냐? 그 소스가 ‘그노시스 크리스트’라 이 얘기예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이렇게 된거다.... 그러면 똑같은 골격을 가지고 여기서 선지자들의 얘기를 해보자 이거예요. 선지자가 있는데, 이 선지자들은 처음서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을 추구하고 공의를 추구하고, 아무 일 없이 전개되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에 딴지를 걸면서 ‘너희들이 지금 평안하다고 노래를 부르고 춤추지만 지금은 가슴을 찢고 애곡해야 될 때다.’ 하는 위기를 선언하는 사람으로 처음부터 나타났던 것은 아니예요. 그러면 거기에는 무엇인가 ‘momentum 계기’이 있었어요. 계기가 있었다 이 얘기죠. 그게 뭐죠? 그게 결국은 똑같이 하나님과의 만남이예요. 그래서 선지서를 보면 거의 예외없이 이런 표현이 나와요. 대표적인 것이 호세아서에 나오는 ‘아이에르 하타바이 베 호세아’ 이렇게 나와요. 무슨 얘기냐 하면 그리고... 여기서는 ‘떼힐라트’라고 나와요. ‘데힐라트 빗베르 아도나이’ ‘처음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단다. 누구에게...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단다.’ 여기서 전치사는 ‘베루스’예요. 히브리어에서 이 ‘베’는 ‘into'의 의미가 있어요. 희랍어의 ’에이스‘ 정도의 뜻이죠.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여기에 이렇게 호세아라고 하는 자연인이 있어요. 처음부터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말씀하시는 형태가 뭐냐하면 ’into'예요.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셔요.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communication'이 아니야.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쪽으로 들어가서 이렇게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굉장히 파워있게 다가가서 그의 전 지성을 굴복시키고, 그의 가치관과 모든 생각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꿔놓은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이 이러한 지험합일의 체험을 통해서 뭘 소유하게 되냐 하면 ’다트 엘로힘‘을 소유하게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제, ’다트 엘로힘‘의 정체는 뭐냐? 핵심은 ’하나님의 거룩함‘이에요. 예전에는 12 소선지서를 두고 어떻게 이해를 했냐하면, 호세아는 호세아의 신학이 있고 미가에는 미가의 신학이 있고.... 이런 식으로 호세아가 수평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소전지서에 대한 연구에 ’ethos 에토스‘가 굉장히 많이 달라졌어요. 에토스가 어떤 식으로 선지서를 보냐하면 하나님의 계시 계획 속에서 다면체적으로 이해를 하는거야. 그러면 이게 무슨 뜻이예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열 두 선지자를 통해서 당신을 통일적으로 보여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그래서 어떤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이 면을 특별히 보여주시는 거죠. 이게 만약에 ’공의‘라고 한다면 ’아모스‘가 되는 거죠. 또 어떤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이 이 면을 보여주고 싶으신 거죠. 집중적으로.... 다른 것을 하나도 안 보여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면을 주로 보여주시는 거죠. 이게 만약에 ’사랑‘이라고 하면 이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다면화해서 선지자들의 선지서 하나하나는 독립적으로가 아니라 다른 선지서들의, 나머지 11 선지서들의 보완 속에서 이 일이 이루어진다고 라고 보는 거죠. 그렇게 놓고 보면 선지자도 똑같이 예를 들자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쓴 영광의 신학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렇게 각각 다면체적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계시에 있어서는 ’이별성 difference‘가 있지만 각각 통일성을 이루게 되있는 이런 지식 중 어느 주된 부분들을 구성하게 되는 거죠. 어쨌든 이 지식에 의해서 선지자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속에서 강력한 어떤 선지자로서의 숙명에 붙들리게 되는 거예요. 이 똑같은 것이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해서 사도들에게 나타나는데 그 사도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뭐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이런 개념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과 전 우주를 갱신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 그리고 창조의 목적 속에 핵심적인 기둥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찬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선지자들이 새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 강력하게 그 지식에 사로잡힐 때에 신적인 강제력을 느끼면서 그 소명이 그를 주장해서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종류의 지식이 ’그노시스‘예요. 이것을 박사 논문 속에서 잘 가공해서 설득력 있게 쓰신 분이 김세윤 박사님의 ’the origin of Paul's Gospel' 그 이야기예요.
그럼, 이제 이야기를 접어봅시다. 그러면 결국 ‘스티그마타 투 예수’라고 하는 것은 ‘그노시스 투 크리스트’라고 하는 것의 또다른 표현이고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혀서 ‘이제 내가 너희들의 주장에 동조 하고 안하고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지식에 자기가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자기 고백의 용어다... 그러면 마지막에 이 모든 것을 끝내고 application을 하는 것으로 이번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이제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우리가 목회자라고 부르는데, 이 목회자라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우리의 복음 사역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거죠. 영국의 청교도 ‘로버트 머리 맥체이’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 있어서의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많이 닮는 것이다.’ ‘Imitatio 이미타치오’죠? 그래서 청교도들은 -존 오웬 같은 사람은- 이렇게 문제를 풀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 ‘blessing'이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 거죠. 이게 뭐냐하면 ’일반 섭리의 복‘ 이야. 이것은 뭐냐하면 사업이 잘된다던지 건강하다든지 땅을 많이 사놨는데 값이 많이 올랐다든지 애가 대학을 갔다든지 시집을 갔는데 부자라든지... 등등의 이런 것들은 일반 섭리의 복이라고 보는 거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spiritual blessing 신령적 복'이에요. 신령적 복과 일반 섭리의 복의 차이는 뭐냐하면 일반 섭리는 하나님이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셔서 여기에 있는 나라고 하는 인간에게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이 사람을 향하여 자비로우신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혹은 또다른 성품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에 비해서 신령적 복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직접 이 사람의 영혼에 어떤 변화를 주고 은혜를 주어서 physica한 change를 가져오는 거예요. 나는 이걸 ‘심적’이란 말로 번역을 하는데, 심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가 없을 때는 못하던 감사를 하게 하고 은혜가 없었다면 못했을 희생을 하게 하고 은혜가 없었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것들을 깨닫게 만들고, 이렇게 그 사람 자신을 본성과 영혼 자체에 힘을 주어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신령적 복’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것이 가장 뛰어난 복이라고 존 오웬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목회 사역의 참된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우리는 물량주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이제는 더 큰 것을 좋아하고 많은 것을 좋아하고 힘센 것은 힘 없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거죠. 그러나 이것은 예루살렘과 바벨론의 차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거에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Civitas Dei 신국론’에서 두 나라를 대조시키잖아요. 이렇게 두 나라를 대조시키는데 이 나라는 사실은 두 개의 껍질 속에 쌓여있는 거예요. 이것이 세속의 역사야.... 이것이 구원의 역사야. 여기 두 나라가 있는데 이것은 결국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세상 중심의 나라이고 이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나라인데, 이 모든 나라의 질서 자체가 사랑의 질서예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나라고, 이것은 나를 중심으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나라인데, 나라는 존재가 수다히 많으니까 각각의 이런 것들을 이루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제 이 세상 나라는 이렇게 해서 세속 역사 속에서 멸망으로 가고 그 다음에 이 나라(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들리움을 받는 이 개념이... 사람들의 눈에는 이 역사만 보이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면 이 역사가 보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더 크게 많이 더... 이런 것들은 바벨론의 효과예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다음에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 악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본받고자 하는 본성들이 이런 물량주의로 나타나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나라는 고등학교 역사 책에 두 줄 밖에 안 나오는 나라예요. 그러니가 예루살렘은 더더욱 한 단어나 나올까 말까한 단어죠. 그런데도 이 역사가 이렇게 중요한 이유가 무엇때문이죠?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때에 이 교회에 바라시는 것은 뭐냐하면 ‘순수함’이예요. 그래서 배가 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 -깜깜한 밤 바다를 올바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수십만개의 조명탄을 쏘아서 바다 전체를 불 밝힐 필요가 없어요. 별 하나만, 등대 하나만 정확히 빛나면 그것을 보고 수많은 배들은 항로를 찾는 거에요. 그러니까 세상이 어둡고 혼탁한 것은 사실 교회에서 보면 기회인 거예요. 대낮에 불꽃놀이 하는 사람들 봤어요? 어두컴컴한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그때에 그 불꽃은 진짜 불꽃놀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지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목회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뭐냐하면, 우리들이 많은 일을 해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을 목회자가 하지만 이건 모두 부업이예요. 본업은 뭐냐하면 사람들에게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거죠. 그래서 그 예수의 형상을 정신과 마음 안에 본받도록 끊임없이 그를 진리를 가르쳐 새롭게 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 사람이 쇄신되도록 끊임없이 돕는 이 영적 사역이 토대가 되고 이것의 ‘expansion' 펼쳐져 나가는 것으로서 이 기운들이 이 세계와 세계의 행복과 변화에 이바지해서 세계 전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하도록 인간의 노동과 종교를 통해서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에 수렴될 수 있도록 이바지해야 된다 이거예요. 이러면서 중심을 굳게 잡은 가운데 포괄적인 세계관을 전개해 나가야 된다 이거죠. 결국은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목회자가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직무는 뭐냐하면 참으로 진실하고 최대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한다면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이 될까 그것을 생생한 실물 교재로 보여주는 두 가지가 있는데, 원천적인 교재는 그리스도이시고 - 그리스도는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니까 실제로 감각으로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 사람이 목회자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청교도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목사로 세워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그리스도인 닮은 신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온 교인이 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연약한 인간인 우리를 교회의 목회자로 세운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변화되어 가야 하는 것이죠. 목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신자가 되야 된다.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그 과정이 그것이 결국은 나머지는 모두 적용점이야. 가정에서는 아빠가 엄마가 자식이 고용주가 고용인이 학교에서 선생님이 제자가 되어가야 된다는 것이죠.
몇 년 전인데 가을이었어요. 혼자 교회 마당에서 성경을 읽는데 후배 목사 한 사람이 찾아왔어요. 그러면서 나에게 물었어요. ‘선배님!’ ‘왜?’ ‘생명력 있는 목회의 비결이 뭡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죽음’ 그러니까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날 보더니 ‘그게 무슨 뜻인줄 모르겠는데요.’ ‘그것은 목회자의 자기 죽음.’ 그것이 생명력 있는 목회에 대한 비결이다.... 그때가 저 자신에겐 굉장히 강력한 개인적인 부흥의 시기였어요. 어느날... 무지하게 바쁘거든요. 오늘도 나오면서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 먹었지...’ 오늘 저녁에 가서도 또 부흥회 해야되요.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인적인 스케줄이예요. 그때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던 때죠. 17년동안 일하면서 한 번도 안식년을 안 갔어요. 두 주 이상 교회를 비운 적이 없어요. 그것이 의는 아니거든요. 어느 날 주님이 꼭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얘야, 네가 맨 처음 소명 받았을 때보다 일도 많고 진짜 노예처럼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 네 몸에 나 예수의 흔적이 있니?’ 처음엔 내 의식 속에 스쳐가는 이야기로 들었어요. 그런데 기도를 할 때마다 똑같은 음성이 내 마음에 들리는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아주 바람 소리처럼 들리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리는 시냇물처럼 폭포수처럼 나중에는 천둥소리 처럼 들렸어요. 그런데 주님의 그 물음에 대해서 사도 바울처럼 ‘주님, 더 이상 저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저는 내 몸에 당신의 흔적을 지녔나이다.’ 죽어도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것이 제가 목회하고 한 13년쯤 됐을 때의 일이었어요. 그래서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기도했어요. 차 타고 가는 길에서 교회당에 무릎을 꿇고 밥 먹을 때나 서재에 있을 때나 ‘하나님, 제가 종처럼 열심히 게으르지 않고 일하려고는 했지만 저스티그마는 오히려 예전에 더 또렷했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팍함.....’ 그리고 한참동안을 눈물로 지내며 이 쓸데없는 인간을 맨 처음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히게 하셔서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로 불러주셨을 때 그때는 우리에게 예수의 흔적이 뚜렷해서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이 홀로 받으시고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겠다고 했는데 일은 그때보다 훨씬 많이 하고 교회는 그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커졌지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스티그마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게 여러 날을 회개하고 난 후에 아주 소박한 꿈이 생겼어요. ‘언젠가는 하나님이 이 고단한 목회 사역의 날개를 접게하실 때가 올텐데 그때가 5년 후일지 20년 후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목회 사역의 날개를 접는 그날이, 그때까지 살아온 모든 날 중에서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장 뚜렷하게 지닌 날이 되고 이후에 살아갈 앞의 날들에 비하면 그날이 그리스도의 흔적이 가장 흐린 날이 되도록 그렇게만 해주시면 더 이상 아무 바램이 없겠다.’는 그 고백이 제 속에서 나왔어요. 목회자의 한편의 설교는 한 사발의 피야. 자기 자신이 죽어서 흘러나온 한 사발의 피. 그래서 마틴 루터의 고백과 같이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와 명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향하여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큰 교회를 하려고 꿈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이러한 개념은 미국을 기준으로 19세기 중반 이후에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생겨난 풍조예요. 하나님의 종으로 충분하고, 한 목회자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업적을 이루고 사람들에게 박수와 갈채를 받았느냐에 의해서가 아니라 얼마나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나누어줄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전 자신이 진리에 잇대어서 살았는가,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는 것이예요. 중국의 의학사에 ‘신농’이라는 인물이 있어요. 이 사람은 신화적인 존재예요. 그가 중국 의학의 기본 얼개들을 마련했는데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나 하면, 산에 올라가서 온갖 약초를 찾아내서 몸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자기가 먼저 체득하는 거예요. 돌멩이로 자기 무릎팍을 두드려서 피를 철철 흐르게 하고 그 약을 발라보는 거에요. 그래서 부작용이 있으면 그 약은 쓸 수 없는 약이라고 기록을 하고, 자기의 몸의 상처가 놀랍게 낫고 새 살이 돋으면 이 약초는 이런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한 후에 환자들에게 처방을 내려주는 거예요. 그게 우리 목사들이 하여야 할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의 자랑을 위해서 학문을 하는 것은 신학적인 매춘 행위예요. 목표는 오직 하나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충심으로 섬기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아는 ‘다트’ 때문에 이웃들이 행복해지고 유익을 얻게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학문을 하고 신학을 공부해 나가는 것이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일 먼저 무릎을 꿇는 경건과 그 다음에 학문에 착념하는 이 지식이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과 신학을 습득하는 과정,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과정과 영혼을 돌보는 이 모든 과정이 함께 성숙되어 갈 때 여러분들도 비록 연약하지만 마지막 날에는 여러분들도 똑같이...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