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누구를 찾겠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20:15)
I. 본문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금요일 오후 3시였습니다. 9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6시간 만에 운명을 하시고 주님은 무덤에 안장되셨습니다. 그리고는 금요일이 지나고 토요일은 안식일이었으니 누구도 그 무덤에 가볼 수가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평소 당신이 남기신 예언대로 죽으신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이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정말 이 여자처럼 망가진 사람이 없었지만 주님이 이 여인을 고쳐주셨고 그래서 이 여인은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사랑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슬피 울며 가슴을 치던 많은 여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마지막까지 십자가 아래 남아서 일곱 마디의 기도와 함께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처형의 광경을 모두 지켜본 몇 안 되는 여인 중에 한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이었고 그래서 이 여인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가에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여인 안에 있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식지 않았기에 여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시체라도 찾아서 무덤으로 달라갔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새벽에 대해서 꽤 긴 서술을 달고 있습니다. 새벽이었고 아직 어두운 그 이른 시간에 그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서 나섰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끝은 그 이튿날 해가 뜰 때에 안식일이 끝나는 것이니 율법에 잣대를 가지고 이 여인의 행동을 대면 사실은 율법을 어긴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향해 그 산에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 가까이 갔을 때 그녀의 손에는 향품이 들려져있었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닦아주고 향품이라도 발라드리기 위해서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보니까 무덤에 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얼핏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마땅히 누워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두려움과 공포 같은 것들, 그리고 섭섭함과 의문들이 함께 뒤엉켜서 이 여자의 마음을 후벼 팠을 것입니다. 여인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즉시 사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의 문이 열렸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이 달려왔고 베드로와 요한이 가장 먼저 뛰어왔습니다. 늘 그렇듯이 성급한 베드로는 성큼 예수님의 무덤 속으로 들어갔으나 정말 예수님은 사라지고 저 한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르셨던 수의가 깨끗이 단정하게 개어있었고 수건도 또한 옆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때서야 이 제자들이 믿었다고 되어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다시 문맥을 보면 부활을 믿었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이 여자의 이야기를 믿었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여러 차례 죽어도 다시 사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평소에 부활을 외쳤으니 혹시 제자들이 시체를 감춘 다음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퍼트리면 나중의 혼란이 처음 혼란보다도 더 클지 모른다고 염려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을 두어서 그 예수님의 무덤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큰 돌을 굴려 입구를 막아 웬만한 사람이 열수 없었고 또한 그것을 인봉하여 법적권한 없이 뜯어볼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달려가니까 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 사도들이 반신반의했으니 빈 무덤을 확인하고야 예수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예수님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둘렀던 수의와 수건은 깨끗이 개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일이 있고나서 제자들은 돌아가 버렸습니다. 뒤에는 막달라 마리아 한사람을 남겨둔 채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 버렸습니다. 왜 예수님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는데도 뭔가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무슨 대책을 세우지 않고 돌아가 버렸을까? 아마도 이때쯤 되어서는 새벽 미명이 끝나고 밝은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서성이고 있다가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 군인에게 발각이 되면 예수의 시체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기에 정말 기가 막힌 알리바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은 속히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덩그러니 이 여자가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여기에서 지금 울고 있습니다.
II. 빈 무덤을 보고 떠난 제자들
우리는 이 짧은 묘사 속에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모습을 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이면 예배당을 찾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말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갈망이 있을까요? 정말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예배 속에서 만나고자 하는 그런 진지한 탐구의 사랑이 그들에게 있을까요? 지성이 깨어나고 감성이 사랑에 감화를 기다리며 의지가 선한 의지로 회복되기 위한 갈망들이 영혼 안에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영국의 설교자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주일이 되면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왜 그렇게 교회에 모여오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진단한 후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들이 주일날 예배에 나오는 것은 끝나고 집에 가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점점 형식화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어떤 갈망도 없이 그렇게 예배는 진행되고 그렇게 사람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빈 무덤과 같은 교회에 와서 주님도 못 만난 채 그리고 속히 돌아가는 이 제자들의 이 모습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소설 가운데 “11세기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1세기에 매우 형식적이던 그런 어떤 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소설입니다. 매일 예배당에 나아가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사제는 기도할 때 위에 사람이 있는가 보고 없으면 속히 끝내고 돌아가지만 사람이 있으면 더 길게 애처롭게 기도하는 외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의 이름을 마음에도 없이 불렀습니다. 오! 주님, 그러자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여기에 있다. 네가 나를 불렀는가? 이렇게 기도하던 사람은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오늘날 가만히 보면 정말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시면 졸도할 사람들 개신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이게 갈망이 없는 신앙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생활의 근본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 영혼으로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에 이른 신앙이 삶을 통해 흘러나오고 삶 속에서 표출되었던 삶이 정신이 되어서 마음속으로 마음에서 다시 영혼으로 그리고 영혼이 삶으로 휘돌음으로서 이 예배행위와 삶 전체가 마음과 영혼 실제의 삶에 하나 되게끔 이렇게 하나 되어가는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예배한다고 하는 이 말은 정말 오랜 세월을 두고 곱씹어볼만한 가치 있는 명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주일이면 교회를 찾지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이 없습니다. 매일 예배시간에 지각하고 피할 수 없이 지각할 수 있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게 무슨 극장에 가는 것도 아니고, 민방위교육을 받으러 우르르 몰려가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예배당에 예배시간에 다리 꼬고, 팔짱을 끼고 그리고 근엄한 얼굴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졸고 있는지 고개를 푹 숙이다가 예배가 제 시간에 끝나면 그나마 위로가 되고 늦게 끝나면 짜증이 나는 그래서 심술이 생기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겠습니까? 만약에 그런 예배당에 주님이 오시겠다면 우리 모두 말릴 것입니다. 거기에 주님이 오실 자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무엇 하나를 하더라도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면 뭐가 그렇게 급한지 그냥 집에 가느라고 정신들을 못 차립니다. 왜 그러십니까? 예배가 끝나고 나면 예배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리를 뜰 수 없든지, 아니면 주님을 못 만나고 나니까 그렇게 주님을 만날 수 없게 살고 예배를 드린 자신이 미워서 자리를 뜰 수 없든지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겠습니까?
III.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여인
오늘 이 제자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정말 주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사라졌습니다. 틀림없이 제자들이 그냥 갔을 리 없고 이 여자보고도 우리 빨리 내려가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거기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울고 있습니다. 여기에 “울며 누구를 찾느냐” 라고 되어있는 이 부분이 희랍어 성경에는 흐느껴 우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면서 우는 동작을 의미하는 동사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여자는 거기에서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목 놓아 울면서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여자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것은 아직 믿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돌아가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서 흉악하게 죽음을 당하신 그분의 육체에 흐르는 핏자국이라도 씻겨드리려는 그 마음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빈 무덤 앞에서 통곡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애야, 울면서 누구를 찾느냐? 내가 바로 네가 울면서 찾는 나 예수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 내가 이렇게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났단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니 부활의 소식을 알려주시려면 사도들에게 알려주셨어야지 삼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이고 어째든 그들이 교회에 어른이 될 사람들인데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예수님이 정말 부활했을까 하고 의심하는 회중들에게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보았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막 얘기하는데 당신들 봤냐고 그러니까 나도 못 봤지만 저 여자가 그러더라. 그게 뭡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문제들이 있을 것을 아시면서도 당신이 부활 후 첫 번째 그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도, 그리고 예수님을 죽어라 삼년동안 따라다니고 헌신하던 그 사도들이 아니라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보잘 것 없었던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상처받은 이 가련한 여인, 이 여자에게 당신의 부활의 첫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한 20년 전에 이 본문을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오래 믿은 사람들이 있는 곳, 아닙니다.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장소, 아닙니다. 한때는 주님을 생애적으로 만난 감동적인 간증을 가지고 있는 일꾼들이 있는 장소,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 이름 없고 빛이 없어도 주님을 향한 신실한 사랑이 있는 곳, 거기에 주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라지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공허가 깃들었으나 이 여인의 마음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을 때 더 복받치는 사랑이 솟구쳤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친친애애”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랑이 가는 법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영어의 속담이 ‘out of sight, out of mind’ 라고 있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지면 마음에서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같은 속담을 이렇게 따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속담이 모두 맞지는 않고 일부만 맞습니다. 누가 누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자신에게도 잘 입증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정말 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마음이 어떠한지에 의해 그 사람이 정말 사랑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 조금 사랑하면 가까이 있을수록 사랑이 가지만 아주 많이 사랑하면 사라졌을 때 그리움이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됩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2, 3, 4, 6, 7, 9, 11, 42, 43편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편들이 시인들에 의해 기록이 되었는데 이들은 각각 다른 시절을 살던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 임금도 있었으나 장군도 있었고 또 지체 높은 사람도 있었으나 그냥 성막에서 봉사하는 이름 없는 성도도 있었습니다. 뛰어난 지도자도 있지만 무명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공통된 신앙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 그날에 주님을 향한 불붙는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오 주여 어찌합니까
간절히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날에 불렀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날에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한 번의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목말라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랑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을 때는 견딜만한데 그 사람의 이름 석 자가 떠오르면 가슴에 깊이 사무칩니다. 너무 보고 싶으면 가슴이 커다란 칼을 놓고 폐부를 반으로 쪼개는 것 같은 그 묵직하고 쓰린 아픔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너무 보고 싶으면 그 보고 싶은 것을 잊을 수가 없어서 비존재를 택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상사의 죽음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오늘 저 설교자의 비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름 석 자를 불안전한 사람을 사랑해도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그 사람의 이름 석 자는 우리의 마음에 그리움이 됩니다. 너무 보고 싶은 날이면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너무나 그리우면 가슴이 깊이 못이 박히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옵니다. 이 세상의 돈도, 즐거운 여행도, 친구들과의 잡담으로도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존 오웬이라는 선생님을 처음 만난 그 시기에 그의 저작 전집 중 어느 부분에서 얼핏 읽은 한 구절이 가슴에 깊이 꽂혔습니다. 지금 어느 작품이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데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리워하고 그 그리움이 너무나 깊어져서 병들어 누울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성경에 보이면 얼마나 보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시편을 읽어보니까 그분의 그 말씀이 진실입니다. 수많은 시인들이 하나님을 목말라하다 쓰러질 것 같은 경험을 했고 자기의 가슴이 냉과리처럼 타는 경험을 했고 자신의 처지를 슬피 우는 세인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이런 목마름이 있습니까?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사였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퀴나사를 내려다보니 그는 수시로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뭔가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기도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랑하는 내 종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네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기에 그렇게 눈물로 나를 찾느냐?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아 그런데 네가 어찌 그렇게 오랜 세월을 금식하고 고행하며 울며 내 이름을 부르느냐,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해주랴, 그때 아퀴나스는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게 무엇인가 주시고 싶으시다면 주님 자신을 제게 주십시오. 주님은 저의 것이고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 역사적인 사실인지 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내려오는 교회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이후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말 놀라운 성령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를 체험한다 합니다. 아시다시피 신학대전은 누가 보더라도 완성된 작품이 아닙니다. 훗날 그 친구에게 아퀴나스가 보낸 편지 속에서 이 비밀에 대한 단서가 나옵니다.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후 이제껏 써온 나의 작품이 부끄러워서 더 이상 연필을 들 수가 없었다네, 라고 말입니다.
의롭게 살아온 경건한 사람은 주님을 못 만나고 돌아가도 죄짓고 실패한 사람이 감격적으로 예수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살고 주님을 향한 갈망이 없는 사람보다는 죄짓고 실패했어도 주님께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은 자기 깨어짐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거만하고 저 똑똑한 줄 알았던 신자가 누구의 강요나 위협이 아니라 세상의 물질이나 지위를 잃어버린 애달픔 때문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그 사랑의 감화를 입고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고 쓰레기 같은 인간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그 하나님 앞에 자기가 자기인 것에 대해서 그렇게 죄송해하며 자기가 자기일 수밖에 없게 하는 그 자기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슬프게 웁니다. 자기를 정죄하고 미워하며 처벌합니다. 그게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 속에서 신자는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갖게 됩니다. 아무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영혼에 무엇으로도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위로받을 수 없는 영혼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실 때 바로 그 복 있는 자의 심령의 상태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저를 포함에서 우리 모두에게 자문해보고 싶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렇게 목말라본 적이 있습니까? 이 순간에 주님이 오셔서 내 영혼을 어루만지지 않으시면 내가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그 간절한 목마름, 한번 주님과 만나고 그분의 거룩한 터치를 내 영혼이 느낄 수 있다면 이후에 나에게 주어질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서라도 그분을 열애하고자 하는 그 목마름 속에 주님 앞에 매달려보신 적이 있는가? 하고 설교자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너무 허위로 가득 차있습니다. 진실로부터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이 이야기는 도덕적으로 불결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정직함과 진실함,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말씀에 비추어진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인식하고 자기도 바꾸어놓을 수 없는 자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모하는 마음, 그분께 집중된 심령, 그분을 향하여 기울어진 의지의 경향, 그분에 대한 목말라하는 자신의 영혼의 그 탄식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영적인 배려 이런 것들이 정말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시체를 찾고 싶어 간 여인에게 예수님은 부활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말씀하셨지만 그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기보다는 그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주님은 사라지셨으나 여전히 이 여자의 마음에 간직된 당신을 향한 사랑을 보시고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은 누구입니까? 정말 주님께 목마르십니까? 주님을 향해 상사병에 걸리셨습니까? 그래서 정말 너무나 목말라서 주님 이외에 아무 것도 여러분들의 마음을 위로할 것이 없는 그런 마음이 되었나요?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잘 살 때도 있고 잘못 살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때든지 우리의 마음에 항상 살아남아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 그리고 그 주님을 향한 마음을 향한 동정, 주님을 향한 처녀성 이것입니다.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내 생명 예수께 드리리
매일매일 그런 목마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그들이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게 되자 슬픔과 공포, 실의 속에 에워싸여 있던 이 여자의 마음에는 무덤 속에 비친 그 찬란한 빛만큼이나 찬란한 기쁨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우울하게 사는지 아십니까? 일이 많아서, 돈이 없어서, 사람들이 나를 괴롭혀서, 건강이 안 좋아서 아닙니다. 주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이 여인에게 바뀐 것이 뭐가 있습니까? 빈 무덤, 그대로 있었고 제자들은 돌아갔고 홀로 외로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있는 이때라도 군사들이 찾아오면 잡혀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니까 그 기쁨이 빛처럼 찬란하게 이 여인의 마음에 가득 채웠습니다. 주님이 계시기 전에는 의문과 두려움에 싸인 어두컴컴한 무덤이었지만 주님이 찾아오시자 찬란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된 무덤처럼 이 여인의 마음도 주님이 오시자 기쁨과 희락, 영광과 존영으로 가득 찬 그런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충만해져서 사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교회에 역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부흥이 일어나지 않고 사람들이 다 집에 가고난 후에 부흥이 일어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마지막 끝나는 날에도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지 않았습니까? 사회자가 광고하기를 이제 사경회는 모두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시고 더 기도하고 싶으신 분들은 함께 남아서 기도하십시다. 1600~1700명이 모인 가운데 반수 이상 집에 돌아가고 800~900명 남았는데 집회 후에 그들끼리 모여서 기도할 때에 그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평양 대 부흥의 사건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목마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 즐겨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좀 흔드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 고정시키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다 모으고 주님의 얼굴을 찾으십시오.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 자신 이외에 아무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사오니 주님이 제게 찾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 여러분들도 이 여자처럼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