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6-17).
고린도교회에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이 생겨 났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 가르침을 들으면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나셨으니까 사람이 다시 부활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만약에 죽은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않을 것이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것 보다도 더큰 하나님의 계획을 가르쳐 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 전체를 살리시는 우주적인 부활의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부활했으니까 우리도 예수님 따라서 부활한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류가 다 죽음 가운데 있는데 그들을 모두 부활하여 죽음을 보지 않도록 예정 되었던 창조의 처음 상태로 돌아가게 하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속에서 하나님이 미래에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어떻게 살려내실지를 시범을 보이셨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셨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이런뜻 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두가지 재료로 만들어 졌습니다. 하나는 흙을 통해서 육체가 만들어 지고 하나님이 후하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신 창조의 동작을 통해서 영혼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후 하고 불어 넣었을 때 하나님 자신의 일부를 불어 넣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창조의 동작이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닮은 영혼을 창조하셔서 두개를 각각 창조하셔서 두개를 결합시키셔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은 빠져나가고 육체만 있어도 인간이 아니고 육체는 멀쩡히 있어도 영혼이 빠져 나가면 인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을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을 때 창조된 사람들을 영적으로 하나로 연결하시는데 영적으로만 연결하시는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 연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인간들중에는 아담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와도 사실은 아담의 몸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몸을 재료로 해서 만드셨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모든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따로 떨어진 개별자이지만 그 육체에서 육체를 잉태하여 생산하게 됨으로서 육체적인 연결을 갖고 동시에 하나님 한분이 우리 각자각자의 영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영혼이 커다란 반죽덩어리처럼 있는데 거기에서 하나씩 떼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안되고 하나님이 한영혼 한영혼 만드셔서 각각 다르게 만드셔서 이사람 이사람에게 색깔별로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인간이 되니까 육체와 영혼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육체는 인간에게서 태어나고 생식의 과정을 거쳐서 육체의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고 영혼은 한 하나님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는데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 공통적인 하나의 현상을 다 가진 영혼들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영혼도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육간의 인류는 한 몸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와을 보면서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했을 때 이것이 최고의 사랑의 표현인데 남자 여자만 이런 고백을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이런 고백을 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해서 하나의 몸을 이루었는데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후에 태어나게 하시려는 모든 일들도 다 그렇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의 몸을 이룰 예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그것은 이루어진 몸입니다. 죄를 짖고 타락을 하면서 이 속에서 하나님과의 분리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는 계속해서 사람에게서 태어 나기는 하지만 육체는 죽음이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무서움이 무엇인가 하면 영혼과 육체의 갈등과 이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육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기를 사랑하고 섬기는데 시간이 지나면 육체의 죽음의 기운이 들어 와서 육체가 영혼은 남겨두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또 어떻게 보면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별 합니다. 떠납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결별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의 몸으로서 인류 전체가 병 드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면 병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님께서 일부를 선택하셔서 하나의 완전한 몸을 만드시고 나머지를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해 버리시기로 작정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전개되어갈 그 몸을 마지막에 살리실 때에는 우리들이 원래 죄가 없었던 상태로 돌아 가야 하는데 그 상태라고 하는 것은 육체와 영혼이 다시 완전한 결합을 이루고 영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복을 누리고 육체는 하나님의 덕을 힘있어서 죽지 않고 영원히 불멸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영화의 날에 입게 될 부활의 몸 입니다. 그러면 그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이 선택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부활하여 한 몸을 이루고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은 있는 상태에서 새몸이 되어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의 몸을 이루면서 완전한 사랑과 행복 가운데 살아가게 될 작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을 보고 알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셔서 미래에 이루어질 그 영광스러운 일들에 첫번 본보기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우리에게 소망이 된다는 이유가 바로 그런 뜻에서 예수의 부활이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여러분들에게 전해준 이 이야기를 기초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전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줍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이 죄로인해 타락한 인류를 모두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줍니다. 만약에 그런 계획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지 않았더라면 굳이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의 육체 안에서 태어 나셔서 사람 가운데 오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하는 위대한 계획에 보증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보면서 우리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결국은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한 몸으로 부활하게될 그 영광스러운 날의 예고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에 우리들이 부활하게 될 때에 어떠할 것인가를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부활해 주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맛보게 하신 사건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병원에 가면 성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종류도 가지가지입니다. 머리가 아픈사람, 엉덩이에 뭐가 생긴 사람, 겨드랑이에 혹이 난 사람, 코가 망가진 사람, 심장이 이상한 사람 오만가지 종류별로 다 모여서 어떤 사람은 여기 거쳐서 저기로 저기 거쳐서 여기로 하루종일 순례를 하면서 진찰을 하는데 그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수술대에 누워서 배를 가르고 그렇게 수술을 받는 사람 그 사람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병원에서 수술하기를 포기한 사람 그 사람은 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다 무엇때문입니까? 죽음의 기운이 밀려 들어 오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 팔십의 중간이 사십인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인생을 팔십이라고 보고 중간은 삼십입니다. 왜냐하면 이후에는 삶의 질이 젊었을때 삶의 질하고 다릅니다. 젊었을 때는 어떻게 그렇게 퍼 먹어도 살도 안 찝니다. 신진대사를 해 내니까... 저도 중학교 다닐때는 많이 먹지는 않았는데 한때 운동을 되게 좋아 했습니다. 주일날 교회 잠깐 갔다와서 종일 공차고 야구하고 어두워서 공이 안 보일때까지 노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녁에 들어 와서 온 몸에 열이 나고 몸살이 났습니다. 끙끙 앓아 아침에 일어나면 간단합니다. 세수 하고 학교 달려 가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일날 설교하고 가면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시지만 수요일 정도 가야지만 제 정신으로 돌아 옵니다. 그러면 목요일 부터 다시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이 죽음의 기운이 우리의 몸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들어 와서 생명을 서서히 잡아 당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굴에 나타나면 늙었다고 하는 것이고 허리에 나타나면 기운이 없어서 지팡이를 집는 것이고 죽음의 기운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영화나 텔레비젼을 보면서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느낄때가 언제인가 하면 옛날에 꽃다운 시절을 자랑하던 배우들이 현저하게 늙은 모습으로 나타날때 우리가 거울을 보면서 세월을 못 느껴도 그 사람들 얼굴을 보면서 느끼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꽤 많이 왔구나! 그러니 세월은 흘러 갔구나! 그렇게 우리의 육체는 쇠잔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보면 육체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 다 라고 생각하면 너무 허무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아 본 것도 별로 없는데 벌써 이렇게 휙하고 세월이 지나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는데 그것이 다시 살 부활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것이요 뒤집으면 이런것 아닙니까? 죽은자가 반드시 다시 사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 나셨으며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것이 없었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 나심으로서 결국은 우리가 여전히 죄가 있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지금은 우리가 죽음을 이기지 못해서 죽음의 기운에 우리가 삼킨바 되어서 결국 우리는 점점 늙어가고 죽음의 기운이 온 몸에 퍼져 우리는 결국 시간의 흐름속에서 삼켜 육체를 잃어버릴 것이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서 이렇게 우리도 마지막때에 영광스럽게 부활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으니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 죽음은 부활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이렇게 죽음의 기운에 삼킨바 되어서 젊음을 잃어 버리고 서서히 노년으로 들어 가고 때로는 늙지 않았는데도 강력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음의 기운이 한번에 확하고 삼키고자 밀려올 때에도 우리들이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이것도 결국은 우리가 썩지 않을 몸을 입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두려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가 우리를 향해 가지고 있는 마지막 강력한 카드 이것을 보여 주면 우리가 자기의 종 될 수 밖에 없는 그 강력한 권세 있는 카드가 죽음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죄에 매여서 종 노릇하고 그리고 거기에 굴복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소망은 우리에게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조금아까도 사도행전 12장을 읽어 보니까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세명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베드로, 요한 이렇게 세명 이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세 사람은 기둥과 같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유명한 사도인 야고보가 한칼에 목이 날라 간 것은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유대인들이 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도 죽여서 백성들의 환심을 사면 내가 이 나라를 통치하는데 도움이 되겠지 헤롯이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엎드려 실컷 자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야지... 죽음이 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자고 있으면 어떻합니까? 마이크 그린이라고 하는 학자가 이 부분을 기가막히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듣고 나서 은혜가 안 되던것이 은혜가 되었습니다. 사실 정상적으로 보면 야고보의 목이 떨어졌고 자기도 죽일려고 하고 도망갈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도와 달라고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푹 잠을 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설 했는가 하면 그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뭐냐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재미 있는 것이 예수가 다시 사셨다 라는 단어를 희랍어로 에게게르타르라는 완료형 동사를 쓰는데 그것이 무슨뜻인가 하면 예수님이 살아 나신것은 옛날에 살아 나셨는데 지금 말하는 이 순간에도 자기와 그 사건이 연관이 있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외없이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다는 것이 단순 과거가 아니라 완료형태로 나타 납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마이클 그린이라는 학자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살아 있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부활의 강력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껍질인 이 육신은 언젠가는 벗어 버려야지만 부활의 소망으로 가는 관문이기 때문에 잠시 육신을 죽이는 그 까짓 왕들은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살리실 소망을 바라 보았기 때문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이유가 없고 그냥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도다 하고 푹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거기에서 하나님 야고보처럼 죽기 싫어요 나만 좀 살려 주세요 하고 몸부림 쳤다면 그것이 퍼질러 잔 것 보다는 덜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강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 습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들에게 마지막 카드를 내밀기만 하면 꼼짝 못했는데 카드를 내 밀어도 찢어 버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 죽음 그것 참 좋구나! 네가 나를 삼키면 내가 너를 찢고 부활하리라 이런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그 카드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단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의외로 이 세상에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담대하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때 낙심되는 일들이 왜 없겠습니까? 십자가가 무겁게 느껴질때도 있고 주님의 일을 할때에도 성과가 없거나 뜻대로 안될때에도 우리는 그럴 것입니다. 원하지 않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에도 우리는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는 것이고 우리의 육체는 다시 영광스러운 부활의 상태로 들어 갈 것이라는 강한 소망을 갖고 죽음이 나를 위협할 때에도 푹 주무실 수 있는 그런 신앙을 갖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고 영생의 소망을 가진 우리에게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일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