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I. 본문해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가 선포하는 두 개의 중요한 진리의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그의 부활, 이 두 가지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육신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집안에서 태어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또한 그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이라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II. 바울의 신학적 혼란
사도바울이 이처럼 확신 있게 기독교의 진리를 언표 할 수 있기까지는 그 역시 상당한 신학적인 혼란을 경험하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순적인 두 사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고 부활 사이에 있는 혼란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경험했던 신학적인 혼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그는 어떻게 그 혼란을 극복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있었을까요?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 십자가 처형에 담긴 유대인들의 의도와 부활사건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A. 십자가와 처형
먼저 십자가와 처형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시는 바와 같이 십자가에서 처형됨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외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요구였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하는 방법으로서 십자가를 선택하게 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예수님에게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가 숨어 있었으니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이 죽인다고 하더라도 평소 그가 예언하던 대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이런 가르침들이 제자들을 통해 유포될 것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 후에 만약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따른다면 예수 살아있을 때보다 더 큰 혼란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놀라운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십자가 형벌이라고 하는 사형 집행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1장 23절의 전통에 의하면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종교적인 확신이 유대인들 속에 보편적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가 만든 십자가 형벌인 나무에 매달려 죽는 형을 택한다면 그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곧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실이 유대인들에게 믿어진다면 그를 믿고 따를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회심하기 전 그런 표준적인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저주를 받아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B. 부활사건
그런데 그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소위 부활 사건입니다. 다메섹에서 이런 허망한 풍설을 퍼트리는 못된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분괴하였습니다. 그리고 권위 있는 대 제사장에게서 공문을 취하여 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권세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근데 바로 그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뵈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었고, 그분께 말씀 드리는 그런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자기의 눈으로 직접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인하고 대화도 나누었으니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III. 바울의 깨달음
여기에서 그는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은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표인데 이것은 뒤집을 수 없는 성경의 명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직접 만났습니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직접 대면하여 뵈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부인할 수 없는 명제였습니다. 이를 토대로 사도는 이 큰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신학적인 어려움 속에서 사도바울에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두 사실 사이에서 엄청난 모순을 느꼈지만 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자 그는 곧바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참된 의미였던 것입니다.
A. 십자가의 신학적 의미
그는 이 다메섹의 경험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신학적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도 사실이고, 부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마지막 남은 질문은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 하는 죽음의 이유였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예수가 하나님이 저주하신 사람이라면 결코 살아날 수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정도로 인정해 주신 사람이라면 결코 자기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이러한 사유 속에서 그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들을 위한 대신적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그리고 부활 사건 사이에 있는 신학적인 모순은 극복되었고, 오히려 사도 바울은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약의 역사 속에 예표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이 한 사람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왔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이제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나서 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의미와 십자가 사건의 의미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사렛의 한 이단자라고 믿었던 청년 예수가 그토록 인류가 기다린 메시야였으며, 따라서 단지 그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요, 온 세상의 임금이며 우주의 통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경험을 통해서 사도가 내리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자기의 죄 때문에 겪은 죽음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우리를 위한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킬 때 사도바울의 서신서에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이 ‘위하여’ 라고 하는 이 말은 세 개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마다 하나님 앞에 저주와 형벌을 받을 것인데 예수님이 죄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우리가 저주 받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위하여’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눈에 그 분은 사랑스러운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진 형벌 받아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모두 받으셨을 때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던 것입니다. 고난과 멸시는 당신이 받으시고 사랑과 은총은 우리에게 이익으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를 대표해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가 범죄했을 때 모든 인류를 파멸시키셔야 마땅했지만은 그러나 우리를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로 해서 죽으시면 그 대표의 공로를 우리 모두에게 인정해 주기로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중, 고등학교 다닐 때 반에서 떠들거나 선생님의 마음을 심하게 상하게 했을 때 선생님이 모두를 패야 되겠는데 기운이 없으셔, 그래서 할 수 없이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니까 ‘반장 나와!’ 그랬습니다. 사실 반장은 떠든 적이 없었는데 거기에 엎드려서 한 열 차례 심하게 빳다를 맞고 나면 선생님이 ‘다음부터 잘해라’ 그리고 용서해 주고 나면, 왜 그렇게 반장한테 미안한지 빵도 사다주고, 라면도 사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당신이 끌어안은 우리는 그 형벌을 받지 않고 당신이 죽은 그 죄 값을 치른 탕감의 효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던 것이에요. 구약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핵심은 두려움과 순경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두려움 속에서 엎드린 가운데 그러면서도 그분을 공경하며 섬기는 순경, 이 두려움과 순경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공경이라고 부르는 거죠.
이것이 구약에 있어서 핵심이었다면 신약에서는 오히려 다른 면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복음을 통해서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복음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을 때 그것을 굳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의 은총을 전적으로 의지하듯이 쓰러지는 것, 그것을 우리의 신앙의 핵심으로 본 거예요. 그래서 구약에는 두려움이 신앙의 첫 번째 이지만, 신약에서는 복음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신앙하는 것이에요. 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을 공평하게 경험하면서 자기에 대한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신약의 경건이고 신앙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은 성령 강림 이후에 온 마음을 다해서 백성들에게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수없이 선포된 이 믿으라는 외침은 무엇을 믿으라는 것일까요? 이것은 영어로 단 세 단어, 우리말로는 네 단어입니다. ‘Jesus died for us’,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멸망당하여야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기초로 용서해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이 놀라운 복음적 사실은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복음적 사실의 발견은 은혜의 경험과 함께 엄청난 지성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캄캄하던 지성의 천장이 찢어지며 찬란한 복음의 광채가 비췄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빛나는 광채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계관과 종교관 그리고 가치관, 인생관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온 교회의 중심이며 역사의 중심이며, 인류의 중심이며, 또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로 있는 동안에는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이 복음적인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종교적인 신념과 거짓된 편견 속에서 해방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가지고 있었던 세 가지 커다란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었는데 신학적인 편견과 심리적인 편견과 영적 편견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이 부활사건에 대한 경험을 통해 신학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의 젊은이이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의 아들인 그 예수가 결코 메시야 일 수 없다는 편견이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그는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의 은총의 대상이고 모든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리석은 인종적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가 이 유대인의 껍질을 깨뜨려 온 인류를 향하여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렇게 한 없이 더러운 짐승처럼 여기던 이방인들을 위해 소명을 받고 이방인 선교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일평생 오히려 유대인들은 나머지 사도들에게 맡기고 오직 자기가 개같이 돼지같이 여기던 만물의 찢기와 같은 이방인들의 영혼을 가슴깊이 끌어안고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영적 편견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육적 이스라엘의 나라와 동일하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유대적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 가는 길에서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새로운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 왕국의 회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로마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으로서 이루어지는 영적 왕국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B 새로운 자원에 눈 뜸
이러한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는 예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자신을 복되게 하고 온 인류를 복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새로운 자원에 눈이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에도 사도바울은 종교적인 열심을 품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 헌신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충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적 신념에 충실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에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노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오,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은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예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는 새로운 자원에 눈을 뜬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은혜와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회심하기 전 그는 기껏해야 지상의 자원으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고 단지 차가운 율법과 의무에 대한 복종만이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다시 살리는 하늘의 놀랍고 신비한 영적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했으나 그는 산 자 가운데 부활했습니다.
육신이 죽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나 그는 육신으로서는 살아있으나 영혼은 죽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죽어있는 영혼을 다시 살리는 강물과 같은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유대교는 결코 줄 수 없었던 이 그리스도의 놀라운 임재를 복음은 그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아주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 그리스도와 함께, 그 그리스도를 자원으로 삼아 원수도 사랑하며, 핍박과 고난을 이기며, 만물의 찢기와 같이 멸시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주님을 높이고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물질적인 문명의 발전을 이룩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비참함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치유에 관심을 갖는 것도 우리가 얼마나 비참해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의 문제가 가난이나 질병, 교육이 없는 무지, 인간관계 등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상적인 요소들을 적절하게 공급해 준다면 인생이 행복해 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느끼는 그 모든 고통은 궁극적인 뿌리가 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몸이 춥고, 기침을 하고, 목이 붓고, 으슬으슬 떨리면 그것은 코나 목이나 혹은 살갗의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감기 바이러스가 온 몸을 이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그 병원체를 죽이는 근본적인 처방이 없이는 내일도 또 다시 콧물이 나고, 기침이 나고, 목이 붓고, 춥고 뼈마디가 쑤실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뼈가 쑤신다고 거기에 빨간약을 바르고, 목이 붓는다고 거기에 크림을 바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고통을 경감시켜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인 병의 뿌리가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증상은 완화되었다가도 또 계속될 것입니다. 쾌락에 빠져서 잠깐 마취 작용을 느낄지 모르지만 고통의 문제는 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아니하면 결코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실은 이처럼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이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고통으로부터 건져 그들을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과 능력을 보여 줍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었고, 또 지금도 하나님과 교통하며 생명을 누리며 살기를 이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고, 2000년 전에 이루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런 부활은 우리의 인생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을 거기로부터 공급받으며 복음의 격려와 위로를 누립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거기에 사로잡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날 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날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않는 이유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들이 바로 이런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알았기에 부활의 의미에 가슴 떨려 하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멸시와 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당신과 함께 부활할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주 친히 죽은 신 지 사흘 만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 그리스도가 바로 오늘날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부활의 놀라운 능력은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당신의 몸인 교회에 전체에 분여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십자가에서 자기의 죄를 토할 때에 부활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 적용되어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엎드러졌던 자가 다시 일어나고, 쓰러졌던 자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의지하여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과 꼭 같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완전한 부활은 미래에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오늘도 그 미래에 이루어질 부활은 선취 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돌아보십시오.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와 같던 영혼들을 끊임없이 살리셔서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생명을 보태십니다.
지난 주간이 고난주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의 위중한 병에 걸린 지체들을 심방을 했습니다. 심방을 하면서 얼마나 감사했던지 몰라요. 죽음을 눈앞에 둔 지체들이 얼굴이 천사와 같이 환하게 빛났습니다. 목회자로서 의심할 수 없이 성령의 은혜로 충만하였습니다. 온 몸에 암 세포가 퍼져서 두 달, 혹은 석 달,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기쁘게 하였을까? 생각했습니다. 아, 그리스도가 그의 영혼을,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계셔서 부활의 능력으로 그들의 영혼을 살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여기저기서 은혜에 미끄러져 죽어가는 성도들도 있지만, 더 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미래에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 이거는 우리 개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를 머리로 하는 몸 전체의 부활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 구원론을 기독론적 맥락에서 보아야 해요. 기독론적 구원론의 시각을, 교회론적 구원론의 시각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를 살리시려는 그 계획안에 우리가 개별적으로 부활하는 영광스러운 계획이 성취되는 거예요. 그 날에 이루어질 그 부활의 생명이 오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 부활의 능력이 부분적으로나마 선취 적으로 우리에게 경험되는 거예요. 스며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이에요. 들어와요.
그래서 미래에나 이루어질 그 영광스러운 부활이 오늘 부분적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죽은 영혼이 다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는 거예요. 왜?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게 되는 거예요. 미래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오늘 신앙 안에서 선취되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참된 복음 신앙은 바로 이런 부활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죽을 때 날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영광스러운 기쁨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수예요.
그러면 2000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고 그리고 그 아침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의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뼈 속 깊이 아로 새길 것을 촉구 받는 것이에요.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한 대신적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아로 새기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부활할 소망이 있다고 하는 것을 굳게 붙들며, 어떠한 처지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에요.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자살했던 고 최진실 동생이 같이 뒤를 따랐더라고요. 참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사람보다도 불행한 사람이 이 세상에 더 많거든요. 더 가난하고, 더 병들고, 사형 선고를 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사실 어떻게 보면 다가오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래서 키에르케고어가 ‘절망이 죽음’이라고 말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에요. 이것이 이 세상 자원의 한계예요. 이 세상 자원으로는 도저히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그것을 주님은 주시는데 누군가가 그 청년에게 이 복음을 전해주고, 자기에게 없는 하늘 자원을 공급받도록 만들어 주었다면 그렇게 슬프게 세상을 등지지 않았을 텐데 그 어머니의 마음에는 큰 못이 두 개나 박히잖아요. 어떻게 그 분이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일 수 있겠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두 번째 요구되는 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부활의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에요. 나는 요즘 청년 1부를 보면 2부가 섞여있는데 이런 이야기 하면 너무 불공평할지 모르지만 사랑스러워요.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열렬하게 전도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난 넉 달 동안에 약 100명 가까운 영혼을 보내어 주셨어요. 물론 거기에는 스스로 떠나간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서 타는 듯한 마음을 품고 기도할 때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순수한 마음의 상태예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개별적으로 보면 내 영혼과 내 이웃의 영혼은 별개이지만 성질 적으로 보면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한 형상을 닮은 것이기 때문에 나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없는 것이에요.
부활의 사실은 우리에게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다시 사신 이 사실을 전파해야할 강력한 소명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에요. 사도 바울이 저주받고 죽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알았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것이 사실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리신 것은 바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실 하나님의 보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헛된 유대교에 매여서 일평생을 살았던 그 어두운 영혼 속에 밀려 들어왔을 복음의 감격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 고집된 영 죽을 험한 세상을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불 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리 주의 사랑을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세상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부끄러워한 이 복음을 우리는 자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아직까지도 이 하늘 자원을 모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마치 예전의 나의 영혼인 것처럼 생각하며 가슴에 품고, 온 마음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던 이 부활의 영광스러운 소식, 우리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던 이 부활의 기쁜 찬송이 사랑하는 이웃들 가슴에도 울려 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 있는 실제를 가슴에 간직하고, 어두운 세상의 등불처럼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