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돌아가라
2020년
십자가사경회 새벽
설교기간 | 2020년 04월 06일 – 04월 08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7월 24일
목 차
1. 다시 작정한 결심(고전 2:2) 2020.04.06. 십자가사경회 새벽1 2
2. 십자가와 생명력(고후 13:4) 2020.04.07. 십자가사경회 새벽2 8
3.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2020.04.08. 십자가사경회 새벽3 13
<설교 프레임>
십자가로 돌아가라1 2020. 4. 6 십자가사경회 (첫째 날 새벽)
< 다시 작정한 결심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I. 본문해설
II. 다시 작정한 결심
A. 예수 그리스도
1. 하나님의 아들
2. 사람의 아들
B. 십자가에 못 박히심
1. 우리의 죄악
2. 하나님의 사랑
III. 적용과 결론
십자가로 돌아가라2 2020. 4. 7 십자가사경회 (둘째 날 새벽)
< 십자가와 생명력 >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고후 13:4)
I. 본문해설
II. 십자가와 생명력
A. 십자가의 죽음
B. 하나님의 생명
1. 부활의 능력
2. 우리의 능력
III. 적용과 결론
십자가로 돌아가라3 2020. 4. 8 십자가사경회 (셋째 날 새벽)
<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5)
I. 본문해설
II.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A. 세상을 사랑함
1. 세상
2. 세상에 있는 것
B. 아버지의 사랑이 없음
III. 적용과 결론
십자가로 돌아가라 1 (2020.04.06._십자가사경회 새벽)
1. 다시 작정한 결심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해설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 아데네에 들리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그 아데네는 철학자들의 도시였습니다. 로마에서 내로라하는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고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다가 이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이는 곳이 바로 아데네였습니다.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아주 깊은 사유를 통해서 인간의 근원적인 이치에 도달하고자 하는 많은 자연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거기에 들렀다가 거기에서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철학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한 신념이 있었고, 그 신념을 따라서 논쟁하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충분히 그들과 논쟁할 수 있을 정도로 학문이 형성된 사람이었고, 당연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세계관을 설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중 몇몇 사람들과 아주 깊은 친분을 가지게 되었고, 또 일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다음 온 곳이 바로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였고, 아데네 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역시 한다하는 이론가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시장 같은 데에서 자유롭게 토론을 할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상, 저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논쟁을 하곤 했던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지적인 수준이나 모든 것으로 볼 때 고린도는 아데네에 비교할 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관록있는 사도였고, 많은 복음 전파 사역으로 혁혁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도바울이 자신의 입으로 고린도에 왔을 때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사도바울은 아데네에서의 말씀사역이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에 올 때 정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사도바울이 아데네에서 철학자들과 논쟁을 한 것이 과연 좋은 방법이었는가 하는 반성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다른 곳에서처럼 힘차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바처럼 사도바울이 거기에서 그래도 그 철학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세계관과 논쟁하면서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거기에서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건질 수 있었지, 그렇게 하지도 않았더라면 아마 아무도 못 건졌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도의 방법과 관련된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꽤 길게 시리즈로 6절부터 설교했지만, “그러나”라는 말로 이어지는 “온전한 자들 중에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하면서 이어지는 그 이하의 부분은 굉장히 심혈을 기울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우리가 말하는 지혜와 세상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 물어서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정말 얼마나 철학적인가를 보여주고, 동시에 철학을 아는 최고의 길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이 구절을 보아왔지만, 조금 새로운 각도에서 이 구절을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즉, 사도바울이 아데네에서 행한 자신의 전도방법에 대한 전적인 부인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열매가 많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거기에서 철학자들과 논쟁만 하다가 예수를 전하지 않았다면 아마 소수의 결신자들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들어오면서 “약하고 두려워 떨었노라.”고 하는 것은 따라서 단순한 전도방법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전도자로서, 사역자로서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내가 도저히 이 사역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깊은 좌절을 함께 표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Ⅱ. 다시 작정한 결심
그러한 와중에서 사도바울은 마음 깊이 결심합니다. 결국 인간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두 가지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이는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늘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 아데네에서의 사역을 계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합니다. 아마도 아데네에서 성과가 부족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전했다 할지라도 거기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절에서 자신의 결심을 피력합니다.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알지 아니하였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담긴 비밀이 열림으로써, 우리가 누구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고, 또 하나님이 어떻게 그 나라를 붙들어 오셨으며,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우신 것과 그리고 그 이전에 있었던 믿음의 사람들의 계보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창조 계획까지 저 뒤로는 구속과 종말의 계획까지 한 번에 관통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다시 한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그 모든 위대한 경륜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 어떤 경륜도 그리스도 예수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터득하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을 더 깊이 착념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이 복음이 전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A. 예수 그리스도
1. 하나님의 아들
그가 결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사람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줄 뿐 아니라 사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을 수 없으니, 그리고 죽지 아니하고는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될 수 없으니 완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바쳐져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2. 사람의 아들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는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에서 배우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사람의 몸을 입고 배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는 없으셨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과 고초를 다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더 배울 것이 없었지만 사람이셨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를 불쌍히 여기며 그들이 어떠한 고통 속에 있든지 당신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고통이 되게끔 당신 스스로 고난을 당하시며 모든 고통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인간들을 보면서 당신도 그렇게 한결같이 시험을 당하시고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우리들의 고통을 알아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하늘에서 곧바로 골고다 언덕으로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평범한 사람의 모든 성장의 과정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성년이 되셨을 때, 복음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당신을 헌신하시다가 마지막 자신의 모든 구원 사역의 마침표를 찍으실 때, 죽음으로 한 점이 되셨던 것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인생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전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은 자신의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에 왔을 때 그는 가장 연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데네에서 한 일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부인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확실한 것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모자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반성을 하면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B. 십자가에 못 박히심
이 십자가에 못 박힘은 결국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가장 흉악한 죄수들만 매달려 죽는 그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그가 무슨 잘못을 하셨습니까. 그가 어떤 나쁜 일을 해서 누구에게 손해를 끼치셨습니까. 사심이 있었습니까. 이미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모두 내어주시는 분임을 이 땅에 계시면서 말씀 사역 속에서, 병을 고치는 사역 속에서, 그리고 불쌍한 영혼들에게 말씀으로 가르치는 사역 속에서 보여주셨습니다.
1. 우리의 죄악
결국 그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짓지도 않은 사람을 형벌하셔서 죽게 하신 것은 당신 안에 우리 모두를 끌어안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셔서 그 대가로 죽임을 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죽임은 당신이 당하시고, 당신이 죽임을 당한 그 구원의 효과는 당신이 끌어안고 죽으신 우리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어떤 은혜를 입고 어떤 넘치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는 노력하지 않아도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 보여주지만, 또 한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보여줍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마땅히 형벌을 당하고 비참하게 죽는 것은 공정한 것인데, 왜 우리가 지은 죄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야 했습니까. 이유는 둘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병들고 무지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전하는 것과 같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결코 보여줄 수 없던 하나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죄를 얼마나 미워하셨겠습니까. 거룩하신 분이니 불결한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죄인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분 자신이 하나님 사랑의 분신이셨기 때문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세월은 많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통해서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난 때가 1990년도였습니다. 30년의 세월이 흘렀고, 사회는 많이 변하였습니다. 문명도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똑같습니다. 우리 중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은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지난 주일 기도하던 어린아이부터 그리고 병상에서 한없는 평화를 누리며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한 최근 세상을 떠난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붙들며 살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는 그 시대에 자신이 목회자로, 선교사로, 신학자로, 전도자로 살면서 수많은 괴로운 일을 만났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여러 번 하였고, 죽을 뻔 돌에 맞기도 하였고, 동족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모든 고난을 이겨온 위대한 능력이 그의 강인한 인간성이나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달려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며 자신이 당하는 모든 시련의 고통 속에서 예수 죽으신 것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예수 죽으신 것을 기억하고 예수 죽으신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그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예수 죽으신 그 고난이 자신 속에 스며들어 육적 자아를 죽이고, 그렇게 죽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아가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날마다 자신이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새롭게 되는 것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소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많은 괴로운 일들, 아픈 일들을 어떻게 이 십자가와 연결시킬지 한 말씀을 드리고 마치려 합니다. 고난이 오고 괴로울 때 분노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내 인생 전체가 그분 사랑의 품 안에 있고, 나는 그 사랑을 떠나 살 수 없다는 사실에 믿음의 닻을 내리십시오. 두 번째, 일어나는 모든 고난을 겪으면 아픕니다. 그때 그러한 고난을 당하고 아프면서 예수를 생각하십시오. ‘이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렇게 순결하고 완전하신 분이셨으니, 아마 우린 큰 죄악을 짓고 보면서도 그렇게 마음 상하지 않지만, 그분은 그 작은 죄에도 쓰라려 하셨을 것인데, 예수가 이렇게 아프셨겠구나.’ 그러면 내 고난이 예수께 봉헌됩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신 예수의 마음이 나의 마음속에 투사가 됩니다. 그 속에 죄를 죽이는 탁월한 능력이 임합니다. 이 힘으로 사도바울을 비롯해서 많은 믿음의 성도들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면서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렇게 해 보십시오. 기도의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십자가로 돌아가라 2 (2020.04.07. 새벽 십자가사경회)
2. 십자가와 생명력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모두 세 통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냈다고 합니다. 그중 중간에 있는 한 통은 유실되었고, 남아있는 것이 이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전서는 13장 사랑장이 담긴 유명한 편지이지만, 거기에서 고린도교인들을 많이 책망합니다. 후에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여전히 악하게 살아가지만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 편지를 듣고 - 그 당시에는 회람서신이라고 해서 권위 있는 사도가 써 주면 그것을 모든 성도들이 들을 수 있도록 읽었던 때입니다 - 그것을 들으면서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조금 더 지나쳐서 큰 슬픔에 잠겨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사도바울이 이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어떻게 많이 고난을 당해야 했고, 그 고난 끝에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다루셔서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시는가 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구약의 예레미야서라 불릴 정도로 고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역시 동일하게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바로 그러한 속에서 이제 이 고린도교회 교인을 향하여 오늘 이 말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Ⅱ. 십자가와 생명력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하였습니다. 십자가와 생명력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A. 십자가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 첫 시작이 “예수 그리스도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혔으나” 라고 십자가와 약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십자가의 죽음은 죽음을 당할 죄를 지은 사람을 소환하여 법적인 절차를 밟아 사형 언도가 내려집니다. 이러한 것은 로마 정부만이 내릴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인의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기적으로 점철된 생애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무엇인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다의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수만 명을 먹이시고, 당시 아무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문둥병자를 직접 고쳐주시고, 그 외에도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니 당신 자신이 살아야 복음도 전하고 또 하던 일도 계속해서 가르치고 고치고 복음을 믿게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못 박으라는 사람들과 침묵하는 다수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침묵하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돌아선 것입니다. 그렇게 큰 기적과 능력을 해 보였더라면 아마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결국 약하디 약한 사람 예수만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 중 아주 몇몇 사람이 가진 약함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서의 약함입니다. 자신이 죽기로 판결 받은 그대로 - 그 판결이 불법한 판결이었지만 - 예수 그리스도는 조용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연약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한 연약한 인간으로서 인류 모든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함으로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강하게 하시는 법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시점에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져야 하는데, 제물로 바쳐지는 모든 짐승들 가운데 약하지 않은 짐승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끌려가는 호랑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만 보기 때문에 예수는 기껏해야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한때 자기의 종교의 꿈을 꾸다가 좌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짓밟힌 자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말하기를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부활하실 뿐 아니라 또한 승천하셨습니다. 완전하게 살아있는 그리스도로서 이 모든 세상의 만물들을 통치하고 계신 생명의 주가 되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구약에 종종 예언되어 왔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또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히 생애 말기에 ‘당신이 죽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이다, 그것도 3일 만에 다시 살아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 중 아무도 그 의미를 깨닫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실 제자들이 예수 십자가의 죽으시는 현장에 달려올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자신들을 돌보시고 먹이고 가르치신 것은 정말 훌륭한 일이었고 엄청난 감화를 받았지만, 예수가 부활하셔서 성령의 능력을 그들에게 다시 부어주시기 전까지는 이 구석의 모든 의미의 파편들만 붙들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왜 전능하신 예수님은 그러한 것을 제대로 가르쳐주셔서 제자들이 모든 것을 알게 하시지,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경륜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 결함이 있었다고 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성령 충만을 받고 나면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야 할지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후에 성령을 받고 그분이 가르쳐 주신 모든 것이 생각나기 위하여 그러한 경륜 속에서 사셨던 것입니다. 그 성령의 회고케하는 감화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있고 예수의 생애를 본 많은 사람이 그 전기를 쓰기 위해서 붓을 들었다고 누가복음 1장에서 말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이 그 모든 것을 알았더라면 아마 자기의 책을 썼을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생명
그러면서 이제 십자가의 죽음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이 (사도바울)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왔는가에 대해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과 고린도교인들에게, 더 넓게는 온 세상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입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사실은 그리스어 성경으로 보면 ‘우리도 그와 함께 약하나’라고 되어 있는 사본들이 있습니다. 비슷한 뜻이겠습니다. ‘그 안에서 약하나’ 혹은 ‘그와 함께 약하나’. 그와 똑같이 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약하지만, 그러나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세 가지의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첫째는 우리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예수처럼 지극히 연약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인생을 살아갈 때, 고난과 눈물이 없는 신앙생활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분은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도 있었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도 있으셨는데도 그분이 죄는 없지만, 인간이 겪는 모든 슬픔과 고통을 한 몸에 다 당하셨는데, 당연히 그만 못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약하여 많은 일을 겪고 고난을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끝없이 더 높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그 속에서 소위 고뇌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의 있는 약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신앙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연약한 죄인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예전에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 살아계시고 내가 죽었던 때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에는 예수는 죽고 나는 사는 때는 없다, 또한 내가 죽고 예수만 살아있는 때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가 변함없이 능력으로 살아계신 것처럼 나도 또한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죽은 영혼이 아니라 살아난 영혼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으실 때에는 예수님이 우리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죄에 대한 형벌로써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으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속으로 우리도 함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쓰는 비유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찢으시고 구원받을 우리들을 당신의 속에 다 들여보내시고,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죄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셔서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은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살아있는 우리에게 우리를 품으신 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를 부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이 바로 영혼의 살림을 얻은 사람들, 그 영혼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오늘 성경에 보면 “그와 함께 살리라.”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그와 함께 살아가는 일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맺어진 연합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에서 세상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슬픔과 충격, 살을 에이는 것 같고, 때로는 내 인생을 하직하고 싶을 정도의 절망적인 고난을 겪습니다. 그런데 다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찬양)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 심사를 통촉하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께로 하여금 나와 함께 하게끔 붙들어 매어 주시니 우리의 힘으로는 못 살아도 예수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합니다. 그리고 병원의 계단을 걸어 내려옵니다. 그런데 건장한 청년들이 양쪽에서 내 팔을 꽉 끌어안고 안전하게 데리고 나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자신은 약하지만, 자기를 그렇게 붙들어 주는 사람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겨우 계단 몇 개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붙드셔서 나 혼자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큰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앙의 비밀입니다.
그러면 셋째로 그렇게 말하면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 말합니다. 몇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주된 뜻은 “너희와의 관계에 있어서”라는 뜻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어쨌든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복음 전도를 하였고, 거기 있을 때나 거기를 떠나 있을 때나 사도바울이 이들을 목회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약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사도일 수 있느냐 의심하였습니다. 그의 몸을 보아라. 늘 질병에 시달리지 않는가. 그것이 그냥 한 인간으로서 사력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살아온 거칠디 거친 인생을 살아온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즉, 그들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이때쯤 되었을 때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경험하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똑같은 사람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이 고린도교인들이 볼 수 있도록, 보아서 알도록, 또 이들을 잘 목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한 이 사람들을 부활의 능력으로 살려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모든 광경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혹시 그들이 보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와 함께 다시 살아서 살아가는 강력한 은혜의 경험은 이러한 위대한 사도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인간의 한계 선상에 서 있는 수많은 성도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흔히 하고 있는 이 근심은 그러한 근심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저녁때 눈을 감고 자면 아침에는 이 세상에서 눈을 뜨고 싶지 않을 정도의 큰 고난과 괴로움이 밀려옵니다. 그러한 것들은 사실 나 혼자 살아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죽을 수도 없고, 살아있으면 정신병이 될 것 같은 그 어마무시한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날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실 때 나도 그 부활에 동참함으로 예수가 받으셨던 그 충만한 사랑과 생명의 능력을 오늘 우리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고난 주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렇게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내가 얼마나 커다란 형벌을 받을 죄인인가, 이 사실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보고, 또 한편으로 그러한 나를 하나님이 어떻게 살려내셨는가. 내가 받은 부활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그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내게 쏟아져 내려오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얼마나 막중한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깊이 터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 생명과 은혜로 모든 역경을 이기며 모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빌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해설
요한 사도가 쓴 편지입니다. 그의 말년, 연도를 확정할 수 없지만 아마도 죽기 최소한 몇 해 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 봅니다. 아마 이 편지가 쓰여진 곳은 요한이 마지막 때 목회를 하던 에베소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편지는 역시 회람서신으로 교인들이 모두 돌아가면서 읽게끔 되어 있는 편지였습니다.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빛이라는 사실, 진리이며, 또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정의롭게 통치하시고 결국 이 의로운 통치를 당신의 사랑으로 완성하신다는 내용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잘 지키는 훌륭한 청년들을 생각합니다. 또 그들을 낳은 아버지들에게도 말합니다.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청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계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다 이겼다.”고 말하였으니까, 엄청난 칭찬을 청년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성경구절이 나오는데,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Ⅱ.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A. 세상을 사랑함
제일 먼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두 가지가 제시됩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1. 세상
신약성경에서 세상, cosmos, 이 단어는 몇 가지 의미를 가지고 사용됩니다. 우선 첫째는 그냥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중립적인 세상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들에 핀 백합을 보라.’, ‘공중 나는 새를 보라.’ 자연에 대한 찬미를 하셨을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피조물로서의 아름다운 자연입니다. 세 번째는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되는, 죄짓고 타락한, 그래서 비참하게 된 세상입니다.
2. 세상에 있는 것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세상이 따로 있고, 세상에 있는 것들이 따로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구체적으로 너희들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어떤 이유 때문인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이해를 한다면, 세상 곧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우리가 믿음과 은혜에서 떠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는 욕망의 산실이 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욕망이 생겨서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은 모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신앙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원래 이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 불릴 정도로 과격하고 성격이 어떤 의미에서 좋게 보면 열렬했고, 나쁘게 보면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셨고, 그분께로부터 받은 큰 사랑의 감화로 그는 ‘사랑’에 관한 글을 수없이 많이 남겼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 이, 삼서 모두 주제가 진리와 사랑, 그리고 그 둘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 하나님의 영광, 이러한 것들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 그리고 진리라는 주제에 대해서 많이 남겼다는 사실은 두 가지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확실하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 깊이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이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입니다. 그는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고 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요.”라고 하면서, 예전의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를 나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것, 그리고 갈망하였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노라고 말하였습니다. 똥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군가 아침에 길을 걸어나가는데 그러한 물건이 가득 길거리에 널려져 있다면 역겨움을 느끼며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가장 엄격한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다는 것, 이러한 등등 모든 것들이 그때는 사랑의 대상이었는데 이제는 격멸의 대상이 되었으니 이는 자기가 정말 사랑해야 할 고상한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라. 당연히 사랑이 지식으로 대치된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고상함이라는 뜻은 그냥 예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엇으로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되자 그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자랑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청년들에게 “너희는 강하고 하나님 말씀이 너희 안에 계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 곧 마귀를 이겼음이라.”고 더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경건한 젊은이들을 추켜세운 후에 이 말씀을 주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주목할 것은 “누구든지” 그러니까. 그렇게 강하고 말씀이 있었고, 흉악한 자를 이겼던 너희들도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격입니다. 그런데 의미는 목적격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이 내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이 내게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가 모두 재물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고, 아침에 일어나 여기 오는 동안에도 소비하면서 왔습니다. 비누로 손을 씻고, 치약과 칫솔을 소비하여, 양치질을 하고, 물을 소비하고, 빗을 사용하고, 얼굴에 약간의 로션을 바르고, 마스크를 소비하면서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재물과 결별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음에 한 사랑밖에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과 사용하는 것, 혹은 누리는 것과 사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이 꽉 차 있는 신자는 모든 재물을 가지고 있고, 사용하나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용하는 것은 그것보다 더 높은 어떤 유익을 얻기 위해서 그야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젊은이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셨습니까. 이 사람들이 불신자이던 때가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셨습니까. 구원해 주신 이 사람들이 여전히 그 젊음을 간직한 채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결국 올바른 삶의 질서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을 행복에 이르게 하기 위한 올바른 질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멀리 떠나 타락하고 범죄하였던 인간들은 이제 질서에 대한 개념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셨더라면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들을 언젠가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고, 또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하나님 사랑은 아니지만, 그 그림자로 살아가게 하셔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즉석에서 자식을 낳아서 먹는 인간은 생겨나지 않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온 세상에 문명이 전파되게 하시고 인류를 존속시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베푸신 일반 은총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또 강하고 말씀으로 흉악한 자를 이겼던 자라 할지라도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그 안에 없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세상을 사랑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 놓고 실제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통일해서 통일된 세계의 황제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러한 꿈을 꿀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아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꼽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샘처럼 솟아나는 육체적인 정욕을 가리킵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성적인 욕망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품는 모든 자기 육신을 목적으로 하는 욕망입니다. 그것을 가장 강력하게 잡아당기는 것이 안목, 이 눈입니다. 눈. 그 보이는 것이 가장 강력한 정동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욕망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자랑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입니까? 그러한 정욕의 마음,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마음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세상, 죄와 부패로 물들어 있는 이 세상, 그러한 세상은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고 그러한 세상으로부터 죄로 물든 세상, 그리고 내 안에 물들어 들어온 그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운명은 어떻습니까. 결국 이 세상은 지나갑니다. 흉악하게 정욕을 행사하고 흉악하게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던 사람도 때가 되면 죽습니다. 죽고 나면 목숨을 걸고 그렇게 나쁜 일을 했던 모든 것들이 다 허무한 것이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니, 세상에서 나오는 것들도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가치 없는 것이 세상이었으니 그 세상을 열렬히 사랑한 것도 미친 짓이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공간에서 비슷하지만 다른 모습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도 정욕도 지나가버리는 그 순간에 오히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영원을 향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람을 느끼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B. 아버지의 사랑이 없음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까? 그것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시면 되지, 왜 꼭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된 것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절대적으로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한 번도 인류를 사랑하시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그 세상도 여전히 좋은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반역하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죄로 물든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불신자들에 대해서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셔도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을 내가 모르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하나님의 사랑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렇게 신천지에 매달려 젊은 세월을 모두 보내고 허망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셨습니까? 왜 지금도 거기에서 회심자가 나오고, 거기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단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선인과 악인, 모두의 밭에 골고루 햇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곡식의 심겨진 밭보다 더 뛰어나게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로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 안에 가득 있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버지께로만 향하고, 사용하는 것은 세상을 향해도 좋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인간이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을 때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와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공허한 삶입니다. 그 공허를 잊기 위해서 미친 듯이 먹고 마시고 쾌락을 즐기고 세상의 권력을 손에 넣어보려고 하고, 남을 지배해 보려고 하고, 아무 가치가 없는 곳에서 쓰레기 같은 보람을 느끼면서 살도록 자기를 채찍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Ⅲ. 적용과 결론
결론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그가 어떤 신앙의 경력을 가졌든지, 어떤 위대한 승리를 경험하면서 살아왔든지, 예전에 하나님 앞에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크게 헌신하였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면 신자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이 세상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을 때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안 사람들은 동방박사들과 헤롯의 군사들이었습니다. 박사들은 경배하러 왔으나 이 군인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다는 말을 듣고 그 어린아이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가난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고, 진리의 말씀을 비로소 전파하기 시작할 때 핍박이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신 적이 없고 남에게 해를 끼쳐서 더욱이 자신이 유익을 얻고자 하신 적도 없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주무시기 위해 머리를 둘 곳도 없이 그러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분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가득하였으니 무지한 자를 볼 때는 그 아름답고 충만한 하나님의 진리가 생각났습니다. 병든 자를 보면 그 질병이 결국 인간의 죄 때문이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분쟁하는 자들을 보면 삼위일체 안에서 나누던 사랑의 기억이 이분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또 인류를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사랑하셨는데, 세상은 창칼로 그분을 죽이고자 준비하였고, 그리고 멸시와 모욕, 천대와 핍박하였습니다. 세상이 오직 하나님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생각하던 예수님의 머리에 그 가시관을 씌웠고, 그리스도의 두 손과 두 발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마지막에 운명하시자 창에 허리를 넣어 물과 피를 모두 쏟은 후 죽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눈물 없이는 대할 수 없는 사랑을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침 뱉은 세상의 입술에 우리가 어찌 다시 입 맞출 수 있겠으며, 모질게 그분에게 채찍질하고 선하신 그 손에 못 박았던 피 묻은 그 세상의 손과 어떻게 악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부들부들 떠는 분노의 가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 세상의 품에 다시 안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버지를 향한 뜨겁고 행복한 사랑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적 표현으로 ‘미워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변함없이 나 같은 죄인을 그리스도를 통해 살려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또다시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서 사랑할 만큼 아름다운 것으로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며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 다짐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고 있는 또 청취하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넣어주셔서 부활의 날에 예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 차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