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십자가 지실 때
2022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2년 3월 27일 – 4월 15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4월 25일
목 차
1. 용기와 비겁 사이에서(마 26;70-75) 2022.03.27. 주일오전 3
2. 피 묻은 리포트(누 23:34-35) 2022.04.03. 주일오전 12
3. 십자가에서 회심하다(눅 23:39:43) 2022.04.10. 주일오전 22
4. 십자가로 돌아오라(요 19:33-35) 2022.04.11. 새벽십자가사경회 32
5. 십자가에서 풀어주시다(요 19:25-27) 2022.04.12. 새벽십자가사경회 37
6.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눅 23:28) 2022.04.13. 새벽십자가사경회 44
7. 고통을 감당하신 예수님(마 27:34) 2022.04.15. 고난주간연합금요기도회 50
<설교 프레임>
예수 십자가 지실 때1 2022. 3. 27 주일낮예배
< 용기와 비겁 사이에서 >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0-75)
I. 본문해설
II. 용기와 비겁 사이에서
A. 예수를 배반함
1. 예수를 부인함
2. 저주로 맹세함
3. 말씀을 생각함
4. 두려움을 느낌
B. 배반을 예고하심
1. 말씀이 생각남
예수께서 고난을 예고하실 때 제자들은 장담하고 베드로가 호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모두 자신을 배반할 것을 예고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
한 때 베드로는 용기를 보였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머뭇거리고 있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칼을 빼들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예수를 체포하러 온 일행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 그 중 한 사람인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대제사장의 뜰에서 모닥불을 쬘 때, 귀 잘린 종의 친척이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지목하였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을 저주하면서까지 맹세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바로 그때 새벽닭이 울었다.
그제야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2. 후회로 통곡함
이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 밖으로 나가서 심하게 통곡하며 울었다.
이는 진실한 회개라기보다는 양심의 가책에서 우러나온 뼈저린 후회였다.
신앙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감정적인 용기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III. 적용과 결론
예수 십자가 지실 때2 2022. 4. 3 주일낮예배
< 피 묻은 리포트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눅 23:34)
I. 본문해설
II. 십자가 아래 서다
A. 기도로 남긴 말씀
1. 아버지와의 친밀함
2. 죄인을 위해 변명함
B. 죄인들의 관심사
1. 옷을 위해 제비 뽑음
2. 십자가 아래 있던 자들
a. 구경하는 자들
b. 조롱하는 자들
III. 적용과 결론
예수 십자가 지실 때3 2022. 4. 10 주일낮예배
< 십자가에서 회심하다 >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I. 본문해설
II. 십자가에서 회심하다
A. 하나님
B. 심판
C. 예수님
D. 천국
III. 적용과 결론
2022.01.02._공동의회
1. 용기와 비겁 사이에서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0-7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기독교 신앙에서 기둥과 같은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고 살았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비천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는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의 반응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예전에 여러 가지 신앙의 경험을 했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속에 재현하며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II. 용기와 비겁 사이에서
오늘 여기에 보면 용기와 비겁 사이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주인공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일찍이 예수님의 공생애(共生涯) 시작 때부터 부르심을 받은 첫 번째 제자 그룹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이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쉼 없이 따라다니며 그의 모든 기적과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았고, 모든 약한 것과 병과 귀신을 물리치는 권세와 능력까지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던 세 제자, 특히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사람 중에서 베드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베드로가 사도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실 텐데, 그 교회에 지도자로 세워준 사람도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뼈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A. 예수를 배반함
그것은 바로 예수를 배반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이 그 배반의 장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기까지 기도하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의 지목하는 배반에 의해 끌려가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였고,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은 삼십에 팔아버렸으니, 은 삼십은 구약시대에 노비의 몸값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팔아버린 가롯 유다는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서로 암호를 짜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할 가장 적실(適實)한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체포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드디어 가야바의 뜰까지 끌려오게 되었습니다. 먼저 종교 재판을 받으며 그분이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많은 목격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미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세 번째로 부인할 때는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귀를 떨어뜨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친척이 목격자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했습니다. 늘 주님이라고 부르던 예수님을 가리켜 그 사람이라고 한 것도 모자라서 저주하기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저주한 것이라기보다는 내 말이 거짓이라면 내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 그 말도 새빨간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예수를 배신했습니다.
배신의 이유는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예수와 한패라고 지목 받음으로 자신도 예수와 함께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뼈아픈 커다란 실패였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갔기 때문에 그나마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던 이 사람이 그래도 나은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십보백보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백 발자국을 도망간 사람이나, 오십 발자국을 도망간 사람이나, 어차피 그 길이를 재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고난당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뵈오며 그는 마음으로 예수를 이미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여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할 때 새벽닭이 울었고, 그때 베드로의 무딘 마음에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한 말씀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그는 밖으로 나아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후회하고 통곡한 후에 그는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실 때까지 베드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비겁함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 모두에게 마찬가지지만 베드로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버렸다는 기억은 일평생 그를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B. 배반을 예고하심
그러나 이 배반은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에게 임박한 고난을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결코 예수님 혼자 죽게끔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우리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장담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말하는 모든 제자들은 혹시 예수님을 버릴지 몰라도 나는 죽는 데까지 예수님과 동행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주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 베드로는 한때 용기를 보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제사장의 종들은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왔습니다. 베드로는 그때 용기를 내어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 말고에게 내리쳤고, 그 칼날은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칼을 집에 꽂으라"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예수님은 떨어진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며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아직까지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도입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는 창과 칼이 지키는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도 칼과 창 없이는 나라를 지킬 수도 없고, 남의 나라를 빼앗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이루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도입될 하나님의 나라는 칼과 창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나라는 하나님 사랑의 확장으로 이루어질 나라였습니다. 능력 있게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사랑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임하는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칼로 사람을 상하게 함으로 막으려 했던 것은 전혀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무지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신앙이 준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무지에서 솟아난 객기였고, 육신의 혈기였던 것입니다. 혈기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용감한 행동을 일체 칭찬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꾸짖으시면서 그를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용기를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용감했던 베드로가 잠시 후 아주 놀랍게 변모합니다. 가야바의 뜰까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모닥불의 불빛에 베드로의 얼굴은 빛났고, 그를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알아보았습니다. '저 사람이 예수와 한 패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부인한 사람은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귀가 떨어졌던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터였을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를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습니다. 도대체 아까 있었던 칼을 휘두르던 용기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이것이 신앙과 혈기의 차이입니다.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 소자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결국 완벽하게 예수를 배반해버립니다. 슬픈 기록입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죽기까지 따라가겠다고 맹세하고, 또 칼을 휘두르고, 그다음엔 가장 연약한 사람들 앞에서조차도 예수를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는, 이런 업 앤 다운 (up and down)이 도대체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때는 눈물 흘리며 참회했습니다. 예수만 따라가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아니 동참한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그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에 대한 담대한 고백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용기와 고백, 그리고 비겁함과 예수에 대한 부인, 그 사이에서 우리의 신앙은 박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쥐 같기도 하고 새 같기도 한 것이, 새도 아니고 또한 쥐도 아닌 것이, 기회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거대한 세상의 문화에 맞서 그것을 변혁시키고, 변화시켜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그것을 따라 타협하고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아주 버리지는 않는 영악한 신자가 되지는 않았습니까? 거기 도대체 진실성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거기에 정말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복음에 나의 목을 내어 놓는다는 담대한 순교의 결의(決意)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까? ‘나는 이러나저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명료한 고백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업 앤 다운(up and down)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러한 갈지자(갈之字) 베드로의 형태는 마지막에 배반으로 귀결되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야바의 뜰로 끌려가실 때 그분을 따라가던 베드로의 모습에서 이미 예고된 바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체포되어 끌려가셨습니다. 칼을 뽑아 들던 베드로의 용기라면 예수님 끌고 가실 때 다시 한 번 칼을 빼 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만류(挽留)한 것이라면 몸으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막아서고,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함께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베드로는 아주 뛰어나게 변신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체포되어서 끌려갈 때 베드로는 멀찌감치 예수를 따라갔다고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제자의 모습이 아니라 구경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마지막 어디까지 끌려가시고, 어떻게 되시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처럼 제삼자적(第三者的) 관점으로 예수를 따라갔던 것입니다. 결국 간 곳은 당시 대제사장의 뜰, 가야바의 정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놀라운 사건의 결말을 보기 위해서 모였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때는 유월절이었으니, 사람들 속에 숨기 쉬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편으로는 걱정에, 한편으로는 호기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에 어떤 판결을 받으시는지 까지 보기 위해서 가야바의 뜰까지 숨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도 되지 않는 예수님의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죄가 무엇이냐고 말했고, 증인들이 이 사람 저 사람 나와서 떠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증언도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성전을 허물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부숴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몸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삼 일 후에 다시 세울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패한 거기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그 증언을 들으면서 옷을 찢으며, 마치 통렬하게 예수의 발언을 참담하게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옹호하는 사람인 것처럼, 외식(外飾)을 떨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사형에 처해져야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자의적으로 판결을 내려버린 것입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베드로는 도대체 그 광경을 보면서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조용히 숨어 있었습니다. 칼을 빼내 들 그 용기는 어디로 갔습니까? 잠시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는 데까지 가더라도 자기는 끝까지 예수를 버리지 않고 따라가겠다는 그 결기(決起)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두려웠습니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웠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식간에 용기 있는 혈기는 사라지고, 비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하며 변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변절하지 말고, 거짓말까지 하지 말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정직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이 사실을 죽는 순간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를 예루살렘의 목자로 세워주십니다. 이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모든 사도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했던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고난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제자들 모두 다 도망갔습니다. 사도 요한이 중간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처음 못 박힐 때 예수님 홀로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첫 모습은 제자들에 의해 목격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까지 슬피 울며, 가슴을 치며 따라오던 여자들 중 어떤 사람들에게 부활의 영광스러운 첫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소식을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먹구름처럼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죽음이 예고될 터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핍박에 두려워 떨고 있는 연약한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입니다. 신약성경 중 가장 유려한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두 책은 불굴의 소망과 핍박을 이기는 담대한 용기를 담고 있습니다. 실패해 본 사람이 아니면 결코 쓸 수 없는 편지였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실패를 딛고 다시 예수를 붙든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쓸 수 없는 활기찬 필체로 용기를 주는 서신을 두 편이나 남겼던 것입니다.
(찬양)
새벽 닭 울 때 난 괴로웠어 풍랑이면 난 무서웠어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아
이 세상 끝까지 주님을 위하여 죽을 텐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고 나신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어둡던 제자들의 눈이 열리며, 창조로부터 구속에 이르기까지 달음질쳐온 인류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에 불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지혜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회개와 눈물이 넘쳤고,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자신들이 예수를 배반했던 이야기도 간증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결국 깨닫기 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용기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십자가를 질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먼발치에서 구경하듯이 예수를 따라감으로써 모든 실패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여 모든 뜻을 보여주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그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은혜를 우리는 한때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오늘 그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이 오늘 나를 살게 하고, 나를 예수 위해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생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해답을 찾았다고 한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서 용솟음치지 않는 한 우리는 알기만 할 뿐 그 삶을 살아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비겁하게 배반했지만, 아는 우리는 왜 수시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까? 왜 자신을 위해 아무 죄도 없이 가야바의 뜰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향하여 신실함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분의 십자가에서 한때는 눈물을 흘리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감격했던 사람들이, 그 감격을 잃어버리고 건조한 삶을 영위해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보다 목숨을 사랑했던 베드로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해야지만 살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예수보다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는 사람입니까? 자기 목숨을 위하는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사람입니까? 신앙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서 우리에게 어떤 현재적인 감격을 가져다주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고 양심의 가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모든 선한 은덕에 대하여 배신을 했다는 가책이 자기의 심정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참된 회개가 아니라고 베드로를 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런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습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면 그 은혜 때문에 주님 앞에 어떤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결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니고, 안 믿는 사람도 아닌, 무신론을 선택할 용기도, 유신론을 따라 살 용기도 없는 비겁한 사람이 되어서, 세상과 교회 사이에 갈지자(갈之字)로 오가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멀리서 구경하며 따라갈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회색 지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믿는 것과 안 믿는 것 사이에 중간 지점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 사이에 중간 지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은 고난주간을 향하여 올라가는 사순절의 언덕입니다. 우리는 이 기간을 어떻게 지나고 있습니까? 감각적인 것들로부터 정신을 좀 떼어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물들에 대한 인상이 쉼 없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할 때입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 가운데 사시면서 병든 자를 고치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시고, 그리고 귀신 들린 자를 내어 쫓고, 무지한 자를 일깨우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행동을 기억하며, 지금 우리는 누구에게로 보냄을 받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 자신을 모두 바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당신 자신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그분에게 돌아온 것은 박수와 갈채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까이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났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기적을 통하여 놀라운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도 예수님 곁에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홀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탄식하며, 구원받을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애국자는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평생 예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미쁘다 ···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 (딤전 1:15)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매일매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 그런 사랑을 받았던 사람임을 기억한 것이 모든 시련과 역경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믿음의 길을 따라가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똑같은 믿음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조류에 떠밀려 내려가는 삶으로는 결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세상에 붙은 욕심을 좀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눈과 마음을 가득 채웠던 세상에 대한 모든 인상에서 좀 벗어나십시오. 스마트폰을 사순절 기간만이라도 좀 멀리 하십시오. 꼭 필요한 것 이외에 보지 않기로 하십시오. 일하는 것 이외에 컴퓨터에 접속하지 않기로 하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찬양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그러면 놀랍게 여러분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위해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 그리고 여러분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기억날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며 다시 예수 십자가 붙들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결국 혈기에서 나오는 용기는 예수를 따르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신앙만이 예수를 따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로 흐르는 피의 사랑은 세상이 주는 달콤한 사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의 참맛을 안 모든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자기의 몸을 던져서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하며 세상에 붙은 욕심을 거기에 못 박습니다. 거기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삽니다. 세상은 나를 향해 못 박히고, 나는 세상을 향해 못 박힌 자가 되어서,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박해가 아주 심할 때 일이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분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제는 기독교를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쳤고,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과 국가에 의한 백성들에 대한 폭력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지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신앙을 동기 삼아서 광복 운동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골수(骨髓)에 속한 사람들은 나중에 국가로부터 훈장도 안 받았고, 보상금도 안 받았습니다. 자기는 국가를 위해서 항일(抗日) 한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서 항일(抗日) 한 것이라는 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드디어 교회를 말살하고자 하는 일제의 시도가 정점에 도달했을 때 말하자면 행정명령을 내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신사 참배였습니다. 그래서 신사 참배를 가결하도록 총회를 온갖 협박과 회유로 다루었습니다. 결국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의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목회자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이 어느 교회에 모여서 마지막 기도회가 될지도 모르는 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지막 시간에 한 사람 한 사람 나와서 신사 참배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목회자가 마지막으로 나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신사에 절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제 모든 가족을 불러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남편 없이 살도록 아내에게 당부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아빠 없어도 믿음으로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저는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저 뒤에 평신도 몇 사람이 함께 참석해서 그 기도회에서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기 있는 간증을 했지만, 그 집사님은 간증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시종일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 드디어 신사 참배에 대한 강요가 이루어졌습니다. 간증했던 목사님은 변절하고, 뒤에 앉아서 조용히 울던 집사님은 순교했습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때, 여러분은 세례를 받으셨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하나님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오직 예수만 믿으며, 그만 의지하며, 성결한 삶을 살 것이라고 서약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수의 순결한 신부가 되겠다고 작정했습니다. 지금은 신앙을 이유로 여러분이 순교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죽이고자 하는 일제의 핍박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것 같은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될 제목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사실은 창칼의 위협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세속주의의 유혹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게 수없이 타협하는 동안 우리 마음속에 있었던 처음 사랑,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의 감격이 없고, 믿음의 기쁨이 없고, 예수 십자가로 말미암는 환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뜨듯 미지근하여 토해버리고 싶은 미지근한 물과 같은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오늘이 기회입니다. 이 설교를 시작으로 나는 여러분 마음의 모든 시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옮겨놓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제껏 내가 사랑하던 세상의 헛된 욕심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 깨닫고 시키는 사람 없어도 조용히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부끄러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의 문설주와 인방에 예수 십자가의 피를 바르십시오. 그 피로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들어오나 나가나 예수 나를 위해 죽으시고, 예수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인지 잊지 맙시다. 그래서 오늘이라고 일컫는 이 날 동안에 비록 미력(微力이나마 이제까지 십자가의 정신과 상관없이 살았던 우리의 잘못된 삶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모두 내려놓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듭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합시다. '예수 생명의 능력이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나의 옛사람으로서는 옛 삶은 살 수 있으나 새 삶은 살 수 없습니다.' '나에게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 보혈의 능력을 내게 주시옵소서.' 기도합시다.
우리는 비록 공로 없으나, 찢으신 휘장 사이로 난 새롭고 산길을 걸어갑시다. 주의 피로 뿌리신 보좌에 이르는 핏길을 우리 의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걸어갑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립시다. '예수를 죽이시기까지 살리고 싶으셨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고백합시다. '내 모든 것 주님의 소유이니, 내 인생을 주님의 것 삼으소서.'라고 인정해 드립시다. 끊임없이 죄에 지고 세상과 타협하며, 새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박쥐처럼 살던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사자처럼 모든 우리의 얽매인 것을 찢어버리고 자유하게 됩시다. 독수리처럼 하늘을 향해 훨훨 나는 자유인이 됩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베드로는 실패했으나 우리는 베드로보다 더 많은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니, 그때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오늘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감격으로 다시 한 번 살아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4.11._새벽 십자가사경회
2. 피 묻은 리포트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누 23:34-3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저는 89년도에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교수가 되고 한 해가 지났을 때입니다. 주님이 깊은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깨달은 내용이 얼마나 컸는지 저는 그때 이후로 저의 인생이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 인생에 급격한 변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설교자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오전에 온 학생들이 오후 시쯤 돼서 모두 학교 교정을 빠져나가면 한 2시쯤 되면 텅 비고, 6시 되면 야간 학생들이 공부하러 옵니다. 그 사이에 한 3시간 정도 정말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작은 연구실이었지만 바로 숲 옆에 있었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저는 그 가을에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내용이 너무나 컸습니다. 복음서를 다 읽은 다음에는 내가 알고 있었던 기독교와 복음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기독교가 과연 같은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깨달음의 내용을 가지고 제가 섬기던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열린 교회는 없었지만 부교역자로 섬기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책자로 만들어 내가 강의하는 학교의 학생들에게 책을 읽혔습니다. 학생들이 리포트를 썼는데 그중에 한 학생이 아주 예쁘게 리포트를 냈습니다. 읽어보니까 그 내용은 아주 독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것을 읽힙니까?’ ‘이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내용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왜 숙제를 내줍니까?’ ‘이 글을 읽고 교수님이 기분 나쁘셔서 나를 낙제점을 주셔도 나는 할 말은 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학생이었습니다. 두 번의 그런 리포트를 받고 나니까 마음이 매우 상했습니다. 세 번째 리포트가 또 왔는데 똑같은 표지였습니다. 그때 리포트를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앞에 낸 두 번의 리포트와는 전혀 다르게 그는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난 경험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모두 초보적인 내용이라고 믿었는데, 세 번째 리포트를 쓰면서 나도 내가 왜 이런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나는 많이 회개했습니다.’ ‘지금 이 리포트는 책상에서 잉크로 쓰는 리포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피로 쓰는 리포트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쓴 것입니다. 졸업할 때까지 그 학생을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학생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새롭게 체험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남기신 첫 번째 장면을 가르쳐줍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모두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중 첫마디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이다 하시더라 ”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II. 십자가 아래 서다
A. 기도로 남긴 말씀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서 봅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첫 번째 말씀이 기도로 남긴 말씀이었다는데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는 원래 로마인이 변방의 야만인이던 시절에 만든 사형 제도입니다.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가장 최고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사형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능지처참이라고 할지라도 한 순간만 지나고 나면 죽음 저편으로 이르게 되는데, 이 십자가의 형벌의 잔인함은 사람이 잘 죽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사람을 두 팔을 벌려 큰 기둥 같은 막대기에 양손에 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밧줄로 묶어서 이미 서 있는 세로 막대에 도르래를 이용해서 들어 올리고, 끼어 맞추는 식으로 십자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못 박힌 손 이외에 발에도 못을 박아서 몸을 지지하게 했으니, 체중 전체가 못 세 개에 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죄수들이 손바닥 가운데 못을 박으면 몸의 무게 때문에 결국은 손이 찢어지면서 시체가 떨어지곤 해서 나중에는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에다가 못을 박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매달리면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천천히 천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죄수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채 삼일씩이나 안 죽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오죽했으면 그 사형 제도는 로마인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악명 높은 사형 제도였습니다. 찢어진 상처로 말미암아 체중이 실리는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도 없거니와, 더욱이 출혈이 계속되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통증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 고통 속에서 혼절했다가 깨어나고, 깨어났다가 다시 기절하는 일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이때는 타는 듯한 목마름이 계속되는데, 그것도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라는 단어는 금기시 된 단어였습니다. 사람들이 대화 속에서 떠올리기를 싫어하는 끔찍한 단어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악명 높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 말씀을 기도의 말씀으로 남기셨습니다.
1. 아버지와의 친밀함
눈길을 끄는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 (눅 23:34)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버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12살 되었을 적에 부모와 떨어져 성전에서 성전의 박사들과 함께 성경을 강론하시는 장면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 누가복음 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시니" (눅 2:49 下)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십니까?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7 下) 이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만약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의심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 되시는 친밀한 관계를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그 순간까지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그 친밀함으로 일생을 사셨고, 마지막 죽으실 때도 아버지와의 친밀함 속에서 사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세상이 힘들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뭘 잘못하셨습니까?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무지한 자에게 진리를 깨우쳐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든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당신이 대신 형벌을 당하시므로 우리에게는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몸을 가지신 분이니 십자가의 고난이 두려웠을 것이고, 그것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육신으로서는 아버지의 진노를 한 몸에 당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 속에서 그분은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당신의 품에 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삶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신앙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친밀한 아버지가 되어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아버지가 되어 주십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가장 커다란 접촉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속에서 살 때 하나님은 커 보이고 세상은 작아 보입니다. 십자가는 커 보이고, 나는 작아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능히 이 세상살이를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아버지와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그분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그분의 친밀함을 느낄 때 우리의 설움은 위로로 바뀝니다.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할 때 아프지만 그 아픔을 주님께 쏟아 놓을 때 우리는 아픔보다도 더 큰 기쁨과 환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의 세계 속에 있는 아버지와의 친밀함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와의 친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예배 속에서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일주일 동안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이 아무 영향도 자신에게 못 미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친밀한 마음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말씀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이 내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가고 불충한 삶을 사는 이유도 알고 보면 결국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신앙이 형식화되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공간이라는 종이 위에 시간이라는 펜으로 써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올려진 편지가 되어서 그분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이라는 공간 속에 시간이라는 여러분의 펜으로 삶을 써갈 때 여러분이 쓰고 있는 리포트는 어떤 종류의 리포트입니까? 조소와 야유가 묻은 리포트입니까? 아니면 피 묻은 리포트입니까? 여러분의 삶 한 땀 한 땀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써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주신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고난의 주간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만큼 힘들지는 않습니다. 그분이 거기에서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누렸다면 우리는 환경 때문에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가슴에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채,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유혈이 낭자한 채, 아버지와의 친밀함 속에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그 친밀함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죄인을 위해 변명함
그 기도의 내용은 죄인을 위해 변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 "왜냐하면,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뭘 몰랐다는 것입니까? 빌라도는 예수께 사형 언도를 내렸습니다. 그 사형 언도에 따라서 로마의 군병들은 예수를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들의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섬기시던 그분의 손에 못을 박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던 그의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죄를 짓고 살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죄수와 함께 부끄럽게도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단 것은 바로 로마의 군병들이 한 일이었습니다. 도대체 뭘 모른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변명하듯이 저들이 잘 몰라서 하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비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죽어 가는데 바로 이 형벌이 저 죄인들이 미래에 당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고통보다는 무지한 사람들이 미래에 당하게 될 하나님의 형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앞당겨 느끼시며 아버지께 변명하는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고통을 함께 누리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라고 변명하시며 그들의 무지함을 하나님 앞에 용서의 이유로 내세우셨습니다. 우린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육신으로는 예수가 죄인인 줄 알고 십자가에 매단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예수가 참으로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아마 예수님처럼 그들도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예수를 안 사람은 영원히 예수를 동일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외에 아무것도 고상하지 않다는 고백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전에 십자가를 알았어도 우리가 그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면 우리의 마음은 무뎌져서 십자가에 대해 무지무각(無知無覺)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묻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눈물 흘린 때가 언제였습니까? 언제 주님께 돌아왔든지, 처음 주님 앞에 돌아왔던 회심의 때는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 그때 우리는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구원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십자가의 구원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죽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속에서 재현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의 감격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죽으셨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슬픔이 있는 사람의 마음에만 사랑의 기쁨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은 그래서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중보의 기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가 아직 주를 알지도 못하던 때에 나를 위해 기도하셨고, 보좌 우편에서도 나를 위해 간구하셨기에, 그 기도의 응답으로 오늘 우리가 구원 얻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 나의 먹물과 같은 더러운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그 피로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십자가에 대한 사랑에 감격이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자신은 죽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는 사시게 하라’ 이 기도의 제목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없이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는 주님 홀로 받으시옵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겠습니다.’ 이 고백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고백 없이, 그 십자가 아래 서는 신앙의 경험 없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처음 십자가 사랑의 감격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까? 요즘도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십니까? 무엇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 죄 많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 형상 볼 때 마음에 찔림이 있습니까?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의 형상을 보며 지금도 죄를 사랑하고 있는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미워하게 되는 경험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을 다 짜서 한 줌의 손에 쥐고 펼쳐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밖에 안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지혜고 신비한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이유가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섬기는 데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펑펑 울 수 있다면, 아직도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가엾어서 눈물 흘릴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엔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커 보이면 십자가는 작아 보이고, 신앙이 커 보이면 세상이 작아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잠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여정이 끝날 때 내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오직 그것 때문에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고난이 크고 이 세상의 시름이 너무 커서 주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시름과 고통이 어느 정도입니까? 예수처럼 못 세 개에 자신의 온 체중을 싣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야 하리만치 그렇게 큰 고통입니까?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고도 거기서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누리셨습니다. 그 친밀함을 토대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려달라고 기도하시는 대신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타는 목마름 속에서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리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이 말씀이 기도였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나에게도 십자가 구원의 감격을 달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처럼 나는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내가 주님과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십자가의 체험을 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배반을 예고하심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님과는 대조적으로 죄인들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눅 23:34 下)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눅 23:35) (그렇게)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1. 옷을 위해 제비 뽑음
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기 위해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남은 옷이라는 것이 그까짓 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값어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혹시 돈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게 아주 화려한 의복을 지어드렸겠습니까? 우린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죽어 가시고 있는데, 그 밑에 있는 병사들은 예수가 남기고 간 그 옷을 누가 가질지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그 옷 한 벌을 갖기 위해 서로 탐욕을 부리며 제비를 뽑고 있었으니,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그가 왜 죽어 가는지도 몰랐습니다. 심지어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기들을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시고 있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얻었는데,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예수가 아니고 세상입니다. 세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 고민하고, 예배드리러 오는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속에서 염려와 근심이 나오고, 염려와 근심 때문에 더욱더 집착하게 되나니, 우리의 마음의 사슬은 이래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로잡혀 얽매인 채 우리들은 목마른 듯 끊임없이 무엇을 찾으면서도, 마시는 듯 무엇인가 이 세상 죄의 물을 마시면서도, 해갈되지 않는 타는듯한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은 피와 눈물과 땀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없다면 누가 예수를 위해 피를 흘리겠으며, 교회를 위해 땀을 흘리겠으며,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 안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이웃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여러분의 심정을 쥐어뜯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예수를 믿게 되고, 교회에 나오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누군가의 눈물과 누군가의 땀과 누군가의 핏길을 밟고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인도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이를 때까지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서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게 되기까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시간에 우리를 위해 간절히 빌었고, 우리를 위해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도 또한 그런 사람이 되어 누군가에게 예수의 피 묻은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 성경에 금박을 칠해가지고 다니는 시대가 되었지만, 이전에 원래 성경은 모서리가 붉은색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성경이 나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그 사랑을 본받아서 여러분은 이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또 예수께서 여러분을 통해 구원하고 싶어 하시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의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 간절히 기도합시다. 좀 더 많은 시간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바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왔는지, 우리의 살아온 날들을 한번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사랑 없이 살 수 없었음을 고백합시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 없이 하루도 살 수 없었음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십자가 아래 있던 자들
십자가 아래에 있던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멍하니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보며 조롱하였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한다고 돌아다녔으니 자기는 구원을 못하는구나.' '만약에 네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라면 한번 너 자신을 구원해보거라'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무슨 나쁜 일을 했습니까? 도대체 그들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주님의 은혜 안에서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 그렇게 욕먹을 일입니까? 자신들이 믿지 않으면 그만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훼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 하나님께 통치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짜증나고 화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구경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처럼 오늘날도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조롱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해 예수는 매달리셨고 예수는 십자가에 죽어가셨습니다. 그를 보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바로 조롱하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는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나 하였겠습니까? 연한 순 같아서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은 예수의 이렇게 약한 데서 나타났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 공로 없는 죄인들, 죄 밖에 지은 것이 없는 우리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도 아버지를 부를 수 없었다면 어떻게 고통을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신앙의 많은 시련을 당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위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마 버림받은 채 죽어버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때문에 우리는 절망을 딛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핍박을 당하고 가족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을 때도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해주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미움보다는 하늘 아버지로부터 받는 위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고통의 시간들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오해를 받고, 때로는 우리의 진심을 왜곡당하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미움을 당하고, 때로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때도, 어떻게 우리들이 이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까? 우리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거나 따돌림 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팔아서 그 평화를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을 지키고 아버지의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죄 많은 우리들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이 십자가에서 찢으신 자신의 옥체로 말미암아 갈라진 휘장 사이로 우리는 걸어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습니다. 뿌리신 핏길을 양탄자 삼아서 우리 의(義)의 모든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십자가를 걸어갔습니다. 그 보혈의 끝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더 이상 죄인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기에, 그 사랑의 힘으로 이제까지 우리들이 살아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왜 세상사는 것이 힘듭니까? 세상이 어렵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보혈의 능력이 우리에게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쇠약해졌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습니까? 예전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찬송의 제목이었습니다. 때로는 핍박과 시련을 당할 때조차도 우리는 그 속에서 가시에 찔릴 때마다 향기를 날린 백합화처럼 우리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그 찬송을 부를 때마다 감격이 넘쳤습니다. 풍랑으로 인하여 주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가시밭의 백합화의 예수 향기를 날릴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세상은 언제나 세상일 뿐입니다. 그것이 좋은 들 얼마나 좋겠으며, 그것이 나쁜 들 얼마나 나쁘겠습니까? 어차피 우리의 희망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탐심을 버리십시오. 세상에 대한 사랑을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로 매일 살아,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도록 힘쓰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마음을 좀 비우십시오. 고난주간을 바라보면서 세속적인 생각을 좀 버리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의식적으로 많이 생각하려고 하십시오. 복음서를 읽으십시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루는 설교를 들으십시오. 십자가에 관한 책들을 읽으십시오. 시간을 일부러 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마음을 쏟으십시오. 예수의 피에 나의 심장을 담가달라고, 그 피로 다시 한 번 내 온몸의 세례를 주셔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눈물과 기도가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감격이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고, 응답이 있는 기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간구하십시오.) 내 마음에 솟구치는 복음의 열정을 다시 한 번 불일 듯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나의 가족에게 사랑하는 이웃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이 말씀을 전하도록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려는 모든 사람을 용납해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의 주간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이 몇 주간 동안이 예수 십자가의 새로운 감격 속에 사로잡히는 생애적인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와 하나 되고 그 피에 여러분의 심장을 적시기를 바랍니다. 그 피의 임마누엘 샘에서 지난 모든 죄의 행실들을 깨끗이 씻고 용서를 받아 눈같이 희고 순결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동안 여러분 자신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너무너무 아름다운 존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창조의 의미가 빛나고, 우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첫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4.12._새벽 십자가사경회
3. 십자가에서 회심하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9-4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십자가 신앙이고, 또 하나는 내세(來世) 신앙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이 십자가 신앙과 내세(來世) 신앙으로 시련을 이기고 박해를 견뎠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예수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내세(來世) 신앙은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니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 믿음은 기둥처럼 우리 한국 교회를 붙들고 세웠습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박해를 받고 신사 참배를 강요당할 때도 십자가 신앙으로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고, 내세(來世)신앙으로 암울한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6·25 때에 공산치하에서 고통을 받을 때도 역시 십자가 신앙으로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핍박을 견디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내세(來世) 신앙으로 현세의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물질적인 풍요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십자가 신앙은 멀어지고, 이 세상의 일에 골몰하고, 소비와 생산 활동에 종사하기 위해 분주하게 사는 동안에 내세(來世) 신앙이 희미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세상의 구분은 옅어지고, 신자와 불신자 간의 경계는 뚜렷해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의 가슴에 새기며 이번 고난의 주간에 우리의 두 신앙의 특성을 다시 회복하는 기회로 삼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두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오늘 보도되는 기사 속에서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下)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강도와 함께 예수님이 못 박힌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아마 의도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 홀로 십자가에 못 박으면 혹시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추측할까 봐 짐짓 그리하였던 것입니다. 인간 중에 가장 쓰레기 같은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는 죽음이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을 가운데 세우고 양편 오른쪽과 왼편에 강도들을 매달았습니다. 강도들은 일평생 강도짓을 하면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과 교회의 정사(正史)는 이들에 대해서 보도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 밖의 야사(野史)에는 이 사람들의 이름까지 전승으로 내려옵니다. ‘디스마스’와 ‘게스타스’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매달린 것으로 나옵니다.
성경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흥미를 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강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 27:44) 즉,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욕할 때 한 통속이 되어서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 둘이 똑같이 예수에 대해서 욕했다는 이야기가 마태복음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서에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유독 누가복음에만 다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이 다 욕한 것이 아니라 그중에 한 강도가 욕했고, 또 한 강도는 예수의 편을 들어 그를 꾸짖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두 종류의 기사를 모두 종합할 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예수를 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흐르면서 양쪽에 있는 강도 중 한 사람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십자가에서 자기와 함께 매달린 강도와는 다른 견해를 주장하면서 예수를 옹호하고, 예수를 모욕하는 한쪽 강도를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도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선언에 의해서 구원받고 낙원에 이르는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함께 욕하는 이 순간과 신앙을 고백하는 그 순간 사이에 한 강도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II. 십자가에서 회심하다
그는 십자가에서 회심을 한 것입니다. 이것 이외에는 두 기사의 상충되는 지점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똑같이 예수님을 욕하고 모욕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 강도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바로 회심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증해주신 확실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십자가에서 회심함으로 어떻게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까?
A. 하나님
제일 먼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한 강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눅 23:40) 이 사람은 십자가에서 회심하자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니 아마 당연히 하나님에 대해서 듣기는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을 경외했을 것이고, 혹시 죄를 지었더라도 뉘우쳤을 텐데, 그는 시종일관 강도짓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괴롭혔고 결국은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어서 십자가의 극형에 처해지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동료였는지 아니었는지 그건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맥으로 볼 때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이 만약에 일행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함께 협력해서 강도짓을 했던 특수강도범들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일행이었다면 한 마음이 되어서 손발을 맞춰 작업을 했을 것이고, 이익을 나누는 경제적인 공동체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나쁜 죄수들은 감옥 바깥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도 십자가에 매달리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움직였겠습니까? 아마도 한 강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맨 처음에는 그 행악자와 함께 예수를 욕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광경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분은 왜 그런지 자신과 같은 강도떼와는 다른 분이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양으로 따지자면 그분이 더 비참했으니, 가시 면류관까지 쓰시고, 온몸에 채찍에 맞으시고, 얼굴은 붉은 피로 낭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기품(氣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처럼 욕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하나님과의 완전한 평화 속에서 피 묻은 얼굴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인들을 염려하며 용서를 비는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이런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저 선한 사람이 저렇게 진심으로 기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가장 뚜렷한 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강도는 회심하고 하나님이 두려우신 분임을 뚜렷이 느꼈습니다. 이제껏 마음에 하나님이 있었더라면 그들은 악을 행하며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몰랐기 때문에 강도짓을 하고 살았지만, 이제 십자가에서 회심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며, 그는 두려우신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물컵 하나가 있다.” “우리 집들에 사과나무가 하나 있다.” “미국에서 인공위성이 추락했다.” 이런 것들은 그냥 지식일 뿐이지 우리 삶의 방향까지 바꿔놓지는 못합니다. 어떤 것이 있다, 없다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까지 바꿔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지식을 갖자마자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믿어지고 알려지면 우리는 우리의 삶 모두를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보든지 말든지, 여럿이 있든지 혼자 있든지, 마음에 감추어진 생각이든지 드러난 행동이든지,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과 연관 지어서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선악의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그분을 두려워하여 올바른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좋은 대로 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의 가장 뚜렷한 표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주간을 맞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고난의 광경을 그립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흉악한 죽음을 당하여야 했습니까? 도대체 그분이 누구에게 나쁜 짓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나쁜 행동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가장 잔인한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을 우리들이 지은 모든 죄를 예수께서 어린 양으로서 감당하셨습니다. 어린 양으로서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하나님은 죄의 대가에 대한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형벌의 비참함입니다. 옳으신 하나님이기에, 정의로우신 하나님이기에, 우리를 사랑하지만 죄는 차마 보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의 거룩한 공의를 따라 죄에 대해 심판함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셨던 것입니다.
결국 오늘 이 강도의 회심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회심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얼마나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말할 자격이 있으니, 누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삶의 구석구석에서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십시오. 그분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분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십자가에서 회심한 강도가 여러분에게 주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B. 심판
두 번째는 심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 (눅 23:41)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간다.'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 형벌은 우리의 지은 죄에 대해서 가장 합당한 것이지 결코 부당하거나 지나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이 강도도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뵈오며 그의 마음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회심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회심하기 전까지 이 강도는 진짜 나쁜 놈들은 십자가 아래서 걸어 다니는데 자신들은 재수가 없어서 발각되었고, 힘이 없어서 여기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억울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심판이 정당하다고 느꼈다면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욕을 퍼부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회심했습니다. 그러자 이 강도는 비로소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들이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십자가의 형벌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자신의 처지에 고통과 비참함을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그렇게 만든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한 회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의식한 것은 단지 심판만 의식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그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후회한다는 엄연한 경험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앙은 자신이 지은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그 죄가 커다란 손해를 입혀드렸음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었으며, 자신이 받고 있는 죄로 말미암는 고통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마음속에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든지 자유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며 살든지 그것은 모두 주님께 기억한 바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을 때나 죽을 때에나 결국은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서 마땅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신의 욕심을 따라 방탕하게 산 사람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근신하고 경외하며 산 사람이 똑같은 대접을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받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긍정할 수 있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이성의 한계를 확고하게 선을 그어놓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조차도 순수 이성에서는 결국은 시간과 공간 안에 나타나는 사물만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마지막 실천 이성에 들어가서는 결국 인간의 이러한 상황은 신을 요청한다고까지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약에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까? 도대체 인류의 보편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무슨 설득력을 갖겠습니까? 그는 비록 <순수이성비판>에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思惟) 바깥에 있는 주제라고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마지막에 신의 존재 없이는 우리가 도덕률을 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신을 내보냈지만 그러나 또 다른 편은 신을 초청하여 결국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 앞에서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죽은 묘지에는 이런 비문이 써있습니다. “나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둘이 있다. 하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에 빛나는 도덕률이다.” 이것을 보면 이성을 신뢰하고, 이성 이외의 것을 불신하였던 사람조차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었기에 그는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까지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결국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경건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분과 함께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 앞에서 바르게 살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나를 지키실 것이며, 보호할 것이며, 나는 죄 때문에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신앙,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을 갖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예수님
세 번째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 23:41下)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눅 23:42) 도대체 이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기에,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만약에 그런 확신이 진작 있었다면 왜 함께 못 박힌 강도와 한 통속이 되어서 예수를 모욕하고 욕했겠습니까? 우리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대체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예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혹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지 혹은 병 고치는 기적의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비록 강도였지만 예수님이 그 당시 너무나 많은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라도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뵈옵고 회심할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강도인 자신들의 죽음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기도할 수 있고 죽어갈 수 있다면 최소한 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는 그러한 사실 판단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옳지 않은 일을 행하신 적이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회심의 가장 중요한 표징은 예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수를 인간으로 알았고, 좀 더 나은 상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저 유대인으로서 인류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회심할 때에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으로서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참 구주로 모심으로써 자신이 비로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2천 년 전에 육신으로는 죽었으나 영으로는 살아서 오늘 온 세계를 통치하시고 내 마음속에 와 계시며, 나에게 끊임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험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이 나에게 소망을 주시고, 나에게 모든 시련을 이길 용기를 주십니다. 그분이 나에게 모든 악한 것들을 사랑으로 이기며 극복할 수 있는 선한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예수는 이제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이름이 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놓칠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고, 예수 위해 헌신하고, 예수 위해 충성하고, 예수 위해 전도하고, 예수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찬란한 계시의 정점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한 강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욕했으나 회심하고 나자 결국은 예수는 의로운 분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였습니다. 예수는 자기를 사망에서 건져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에게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감동이 있습니까? 그 은혜 때문에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습니까? 세상을 사랑하던 마음을 그분의 십자가 보혈 아래 씻으며 여러분의 심장을 그 피의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다시 하나님 사랑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예수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까?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주간에 온갖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생명이신 그분이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한 주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을 뉘우치며,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아버지 앞에서 살도록 우리는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하십시다. 그리고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예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도 살아 숨 쉬고, 하나님을 경외하노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고난 주간에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 천국
마지막 네 번째는 내세(來世)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낙원은 천국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계시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떻게 정확하게 구분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신학적으로는 낙원(樂園)과 천국(天國)이 구분되기는 마치 음부(陰府)와 지옥(地獄)이 구분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낙원과 음부를 신학자들은 '중간상태(中間狀態)'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죽고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몸이 모두 부활하여 최종적인 심판을 받습니다. 악인은 지옥에 들어가고, 주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부활의 날까지 머무르게 될 곳이 낙원과 음부라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낙원과 천국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낙원은 이미 천국의 기쁨을 앞당겨 누리는 곳이오, 음부는 지옥의 고통을 이미 앞당겨 받는 곳입니다. 결국 낙원과 천국은 하나라고 볼 수도 있고, 음부와 지옥이 구분되기는 하지만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낙원은 천국의 현관이고, 음부는 지옥의 현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결국 내세(來世)를 갈망하는 마음이 이 강도의 마음에 생겨났던 것입니다. 만약에 진작 내세(來世)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결코 강도짓을 하며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며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때는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행했고, 결국은 자신의 죗값을 십자가에서 감당하고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십자가에서 함께 매달리신 분이 있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한 강도는 마지막까지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예수를 믿을 마음을 갖지 않았지만, 한 강도의 마음은 복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몇 시간 후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예수를, 몇 시간 후면 운명할 죄인의 처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회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그 나라를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진실하고 뜨겁게 기도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계심에 틀림없다고 이 사람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결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에 그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예수께 간청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구원의 호소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임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청탁하며 제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 같은 죄인이 십자가에서 함께 매달려 죽었으나, 마지막에 하나님을 믿은 것을 기억해달라고 예수께 간청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낙원에 이르는 첫 열매로 이 사람을 택하셨던 것입니다.
의롭게 살았던 사람, 훌륭하게 용감하게 살았던 사람, 믿음을 지킨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일평생 죄만 짓고 살았던 이 사람을 함께 손잡고 낙원에 첫 열매를 삼으시기에 추호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강도의 구원에서 소망을 갖습니다. 나의 공로 없으나, 나의 모든 행위로 말미암고는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으나, 주님의 은총에 의지해서 내가 그 나라에 이르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강도에게 선언하셨습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눅 23:43) 그것도 오늘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를 구원의 첫 열매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이르게 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구원의 소망에서 오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현실에 충실하고,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는 명랑(明朗)한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세(來世)의 소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일 것입니다. 체념하거나 혹은 몽테뉴(M. E. Montaigne)처럼 영원을 생각하지 않고 현실에 몰두하여 자신의 욕심을 누리는 것으로서 만족을 삼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우리는 올바른 신앙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훌륭한 신앙은 오늘을 소중하게 여기며 내세(來世)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 가치의 지배를 받고, 하늘의 가치에 영향을 받으며, 하늘의 가치를 지상의 세계에서 실현할 기회를 가지는 데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흙이불을 덮고 어느 산 아래 누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것이며, 영원한 나라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은 영혼과 영혼 사이의 틈바구니에 있고, 우리는 무한하게 펼쳐진 것 같은 우주의 한 점처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만 이 세상에 머뭅니다. 만약에 오늘날 우리의 살아 있는 이 삶이 영원한 세계와 의미를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허무한 삶이 되겠습니까? 이 강도는 회심하고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내세(來世)의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기쁨으로 이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에서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실제로 제가 어떤 젊은 사람에게 진지하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는 믿을 겁니다.' '그런데 아직은 믿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더 힘이 없어지고 의지할 것이 없게 되면, 그때 예수를 믿겠습니다.' '그때 그대가 예수를 믿게 될는지 안 될는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똑같은 이야기를 어거스틴도 합니다. '성결한 삶을 주시옵소서.' '그러나 아직은 하지 마시옵소서.' 젊었을 때 너무 갖고 싶은 것이 많고, 맛보고 싶은 이 세상의 즐거움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성결함을 주시옵소서. 그러나 아직은 마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을 매우 럭키(lucky)한 사람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 속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 봅시다. 이 강도가 결국은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낙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도 운명하시고, 이 강도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강도의 영혼을 데리고 천국으로 올라가시게 됩니다. 그때 이 강도는 자기 발 아래로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의 시체를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물론 영원히 멸망할 죄인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적적으로 만나 회심하고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안타깝지 않았겠습니까?
젊었을 때는 힘도 있고, 능력도 있고, 또 시간도 있어서 살았는데,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강도짓 하며 하나님의 심판받을 일만 저지르면서 주님의 진노를 쌓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세상에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며 살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1년만 더 살게 두셨다면 그는 얼마나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일생을 살았겠습니까? 아니 한 달만 살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아마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무지하고,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았을 것입니다. 아니 단 하루만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계시며, 그분은 심판하시며, 예수님은 구주이시며, 내세(來世)가 있다는 사실을 설복하면서, 그들을 하나님 믿게끔 만드는 데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깨달았으나 더 이상 살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인생 전체 잘한 일이라고는 마지막에 예수 믿고 죽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인생으로 기록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러우십니까? 정말 탐나십니까? 그런 삶을 여러분도 살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좀 우스갯소리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는 여기서의 하루가 천국에서의 열흘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의 열흘은 무한대 분(分)의 1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불과 80 곱하기 365분(分)의 1입니다. 90을 살면 90 곱하기 365분(分)의 1밖에 안 되는 유한 숫자입니다. 그러니 오늘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오늘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의 공의의 심판을 알고, 예수를 알고, 내세(來世)를 아는 사람처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도록, 내 마음속에 내가 오늘 하루 살아 있는 것이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끼는 하루가 되도록 선을 행하며 주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고난의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우리가 늘 주님의 고난을 묵상해야 하지만 세상에 번잡하고 자기 사랑에 쉽게 휘둘리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고난 주간이라도 생각해야 합니다. 오락으로부터, 유흥으로부터 자신을 좀 멀리하고, 미디어를 절제하고, 예수를 많이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새겨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십자가 그늘 아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했던 처음 회심 때의 기억을 되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의 행실을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고,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세례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비록 공로 없지만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주간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도는 일생을 허무하게 살았으나 마지막 십자가에서 구원의 은혜를 누렸고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하루도 하나님을 위해 살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내일은 어떨지 모르지만 오늘은 살아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살아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살아 있게 하신, 구원하여 은혜를 베푸신 그 계획이 무엇인지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매일매일의 삶이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어디에서든지 그분의 십자가의 음성을 듣는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4.13._새벽 십자가사경회
4. 십자가로 돌아오라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3-35)
녹취자: 배미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신 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약 6시간 동안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때에 로마 병정들이 이 십자가에 와서 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는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양쪽의 강도의 다리를 꺾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이르러서 보니 예수님은 이미 확실히 운명하셨기 때문에 다리를 꺾지 않았습니다. 왜 다리를 꺾었을까요? 십자가에 죄수가 매달리면 그 몸무게는 세 개의 못에 의해 지탱 됩니다. 양쪽 팔에 박힌 못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리에 박힌 못으로 지탱이 됩니다. 시체가 자꾸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람들은 발밑에다가 작은 딛는 나무를 박아서 두 발을 거기에 살짝 걸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히 죽지를 않으면 혹시 십자가에서 끌어 내렸을 때에 문제겠죠? 그래서 확실히 목숨을 끊게 하기 위해서 아직까지 살아있거나 혹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을 때에는 정강이를 확 꺾어버려서 그래서 온 몸을 다리의 힘을 가지고 지탱할 수 없게 하는 거죠. 그러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될까요? 몸이 아래로 축 쳐지고 그 다음에 못이 세 개 박혔지만 사실상 무릎으로 자기 몸을 떠받칠 힘이 없기 때문에 결국 손에 박힌 못 두 개로 자신의 몸을 지탱해야 합니다. 이때에 폐가 눌려서 호흡을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목숨이 붙어있어도 결국은 호흡을 못하게 해서 숨이 끊어지게 하려고 확인사살 하는 방법으로 다리를 꺾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확실히 예수님이 죽으셨지만, 그래서 다리는 꺾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이 예수가 살아있을까 걱정하면서 군인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찌른 거기에서 ‘곧 피와 물이 나오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으시던 최후의 광경에 이런 다리를 꺾고 옆구리를 찌르는 이 장면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쏟아진 피와 물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추측하기는 오른쪽으로 창을 아래에서 높이 매달린 예수그리스도를 아래에서 위쪽으로 높이 찔렀다고 보고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찔렀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창끝이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을 터트렸고, 그때 다량의 피가 그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여기에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이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요 34-35) 이런 설명이 덧붙여집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이 시작될 때 이 요한복음을 쓰는 이유가 바로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기록할 때에도 믿게 하기 위해서 기록한 성경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요한이 아주 잘 쓰는 자신만의 표현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일류의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과 그리고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강조한 복음서의 저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도 요한이었으니 요한이 자신을 요한이라고 여기에 기록하기가 계면쩍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찔려 심장이 터지고 피와 물이 모두 쏟아지는 광경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현장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은 이렇게 이 기록을 보고 듣고 그리고 그것이 참인 줄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어 가시는 마지막 장면을 보게 되었을까? 마태복음 26장 52절에 보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병정들에게 체포되어 가실 때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한 사람이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나 구경하기 위해서 가야바의 뜰까지 따라가는 걸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유명한 세 번 묻는 사건이 일어나고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닭이 두 번 울기 전 세 번 부인하리라는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서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통곡하며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확실한 것은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하시는 장면을 목격자로서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요한은 어떻게 해서 이 장면의 마지막 증인이 된 것일까요?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요한이 모든 제자들과 함께 처음에는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온 유일한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돌아오는 광경은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세 번째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두 번째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이 바로 ‘여자여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우리 시간으로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여섯시 사이 어디쯤인지 확정할 수 없지만 세 번째 말씀이 주어졌고, 그 세 번째 말씀이 주어졌을 때는 그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이 자기의 제자 요한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자에게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 번째 말씀 할 때에 십자가에 있었고 그 후까지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모든 말씀을 다 받들었고,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후에 마지막 창에 허리를 상하여 피와 물을 모두 흘리는 그 장면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기에 숨겨있는 비밀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한번 골고다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처형을 큰 구경거리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사형 언도를 당했고 예수님은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행한 놀라운 기적들을 기억하면서 ‘예수는 그렇게 사형 언도를 받아도 큰 기적을 행하여 결국 자기 스스로를 구원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번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적으로 넘치는 생애였지만 그렇지만 그 때에는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예수님은 그 판결의 결과를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것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 모습은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실망과 배신을 안겨주었습니다. 기적을 기대하며 호기심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실망감을 주었습니다. 혹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구원할 메시아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너무 실망했습니다. 왜? 그렇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수천 명을 먹이던 그 능력, 물 위를 걸어 다니고,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던 그 놀라운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그 기적의 예수가 왜 이 중요한 지점에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고 끌려갔을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 자신을 구원하라’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들은 구원하고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조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그리스도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틀림없이 세로 막대는 이미 서있고, 가로 막대는 땅에 있고, 거기에 예수를 눕혀 양손에 못 박은 후 그리스도를 도르래에 달아서 높이 올려 끼워 맞춘 후에 마지막으로 다리에 못을 박고 묶었던 줄을 푸는 방식으로 십자가에 매달았을 것입니다. 그때에 높이 십자가에 매달렸고 모였던 사람들의 구경거리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리고 크게 무덤이 터지고 기상이변이 나는 일이 있었지만 그 일이 끝나고 나서는 더 이상 그 골고다 언덕에 사람들이 머물러야하는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큰 두려움을 느끼며 ‘그는 정녕 의인이었다’하고 가슴을 치고 뉘우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냥 두려움 속에서 골고다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한 젊은이가 모든 사람들을 헤치며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던 어린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전에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끌려갈 때에는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웠고 혹시라도 예수님과 한패에 몰려 처형을 당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도망갔습니다.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제자들 중 단 한 사람, 요한의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양심의 울림이었고, 주님과 나누었던 기억에 대한 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생동안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주셨던 그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런 식으로 배반한 것에 대한 깊은 후회가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창에 허리에 찔림을 당해 물과 피를 흘렸으나, 요한은 어느 한 공간에 숨어있으면서 양심의 칼날이 그를 찔러 그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예수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왔으니 그는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달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간 제자들 중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달려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한때 예수를 버리고 간 것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렇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함으로써 요한의 마음을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자기는 그 예수를 버렸으나 예수가 여전히 자기를 제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깊은 감동을 받으며, 십자가에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마지막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 안에 있는 예수를 향한 사랑이 시킨 마지막 섬김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창에 허리를 상하고 물과 피를 모두 흘리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 되었고 죽음과 함께 일어난 자연의 이적들을 함께 경험하는 유일한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은 그 품 안에서 먹고 마시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가슴에 기대어 심장의 박동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제자들에게 친절을 베푸셨습니까? 많은 애정으로 이들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고 진리를 가르치셨고 어떻게 이웃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하는지를 몸소 본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배신할 줄을 아시면서도 일체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한 눈물과 통곡의 기도로 비셨으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을 제자들을 위해 쏟아 부었지만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받고도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고도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예수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나라를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제까지 살아온 동안에 베푸신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들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한 순간순간마다 예수의 사랑으로 붙들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붙잡으신 손을 놓지 않고 끝까지 잡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여러 번 그 손을 놓고 세상으로 가려고 하고 예수를 버리려 했으나 주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 잡으신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연약한 믿음으로나마 예수를 고백하며 살아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한때에 예수가 싫증나서 버리고 도망쳐온 그 십자가, 한때는 우리가 예수를 위해 살기 싫어서 떠나온 그 골고다 언덕, 모든 사람들과 한패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당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제자가 당신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왔을 때 예수님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비록 당신은 홀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리라 결심했고, 제자가 그 아래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으로 당신의 고통이 조금도 감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던 그 제자가 당신을 버린 것을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며 인파를 헤치고 골고다 언덕을 뛰어 달려오고 용기 있게 십자가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는 그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 이 사도요한은 유일하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죽으셨는지를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마지막 모습에 대한 이 사도 요한의 증언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주님이 자신들을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두려워서 예수를 홀로 버려두고 예수는 거기 죽게 내버려두고 자신들은 목숨을 위해 도망쳤다고 하는 그 사실을 어떻게 씻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화목하게 하시고 오순절의 성령이 강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바로 그런 모든 주님을 배반한 사람들을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한 고난의 대속의 피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다른 사람을 생각했더라면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십자가로 돌아간 유일한 제자가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찌하든지, 다른 제자들은 어디에 있든지 요한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 나를 위해서 일생동안 모든 것으로 섬기시는 예수, 그리고 나를 위해서 당신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 올라가신 그 예수를 배반했던 죄를 그는 참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그 십자가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달려가다가 예수와 한패인 것이 밝혀져서 자기도 예수 곁에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골고다 언덕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랑은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자신의 순전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갑니다.
저는 여러 해 전 이 본문을 읽으며 새벽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유일한 제자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신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 예수 버린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찾아갔다는 그 사실은 오늘날 번영의 그리스도, 부자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 연약할 때 도우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예수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우리와는 얼마나 다른 믿음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요한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도 없었고 그 어떤 영광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그리스도는 그냥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어가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두려움을 모두 내어 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서서 그 물과 피가 쏟아지는 광경을 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운명하실 때에도 자신 앞에 있는 요한을 바라보며 눈을 감으셨을 것입니다. 신앙을 떠나서 의리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고난주간을 마치면서 우리의 마음에 다시 한 번 새깁시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예수의 손을 놓았는가? 그리고 무엇이 두려워서 예수를 떠났는가? 무엇 때문에 예수 홀로 고난당하여 죽으시게 버려두고 우리는 숨어있는 사람이 되었는지를 생각합시다. 그리고 이것이 옳지 않은 일이었음을 깊이 자각합시다. 다시 한 번 주님이 용기를 주셔서 그 십자가로 돌아가는 유일한 제자 요한처럼 용기를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 그분의 물과 피를 쏟으시는 광경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이 그 피로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십자가에서 풀어주시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25-27)
녹취자: 김경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사도 요한과 마리아와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어저께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창에 허리 상하여 피와 물을 모두 흘리는 것을 본 바로 그 직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시간으로 9시에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 어느 한 지점에서 이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세 번째 말씀을 주님께로부터 받았고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말씀까지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광경을 보았으니 아마 상당한 시간동안 십자가 아래에 서있던 것 같습니다. 언제 십자가에 돌아왔는지 알 수 없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시는 일곱 마디의 말씀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십자가 아래에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요한이 예수님께 돌아와 십자가 아래에 서있다는 사실입니다. 확실하게 세 번째 말씀을 남기실 때에는 십자가 아래에 서있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제자에게 말을 건네주셨다는 사실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사도 요한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서 숨었지만 이 사람은 뉘우치고 골고다 언덕으로 뛰어올라왔을 것입니다. 많은 인파가 내려오고 있었지만 이 사람은 인파를 헤치며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이제 예수와 한패라고 지목이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달리신 십자가 아래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다가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니 그분은 헤어질 때의 그분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헤어질 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후에 예수님은 끌려가셨고 빌라도에게서 헤롯에게로, 헤롯에게서 빌라도에게로, 이렇게 끌려가시는 동안에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또 왕들 앞에 끌어낸바 되기 전에 예수님은 유대종교법에 따라서 가야바의 뜰에 끌려가서 종교적인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재판이 끝난 후에는 푸라이도리온이라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에 끌려가셨습니다. 심히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옷을 벗기시고 조롱을 당하시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가시관을 쓰신 얼굴에는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그리고 벗으신 몸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자, 요한이 돌아와서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당하고 죽어 가시는 광경을 보았을 때 요한은 예수님께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그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까지 그를 버려두고 도망갔었기 때문입니다. 찌르는 양심의 가책과 그리고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 받는 모습을 보면서 이 요한의 양심은 설자리를 잃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언제 왔는지 모르게 십자가 아래에 섰을 것이고 거기서 차마 예수님을 향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르지도 못한 채 서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은 나오지만 제자인 요한이 말하는 대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이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의 어머니 마리아를 이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온 기력을 쏟으시며 죽어가고 계셨고 이미 유언적인 두 가지 말을 남기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기운이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도 요한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던 그때에 불러주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이다.’ 예수님은 애써서 요한을 바라보시고 요한도 고개를 들고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기에는 어떻게 예수님이 자기의 육신의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뭔가 사람을 한없이 낮추어 보면서 하는 호칭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사실 원문 성경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상대방을 굉장히 높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어머니여 보시옵소서. 아들이 여기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왜 ‘여자여, 보소서’ 라고 말했습니까?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껏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는 비록 그 본체는 하나님이셨으나 육신은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태어났으니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은 이 마리아의 육신의 아들로 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실 구세주로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와의 인연은 끝나고 이제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만유의 주가 되시는 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라는 호칭보다는 이 호칭이 적합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조차도 만류할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높으신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신 제물로 받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두고 마리아의 노후를 부탁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마리아를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다시 당신께로 돌아와서 말없이 서있는 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요한의 마음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너무 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거라. 나는 너희들이 나를 버릴 줄 이미 알았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너희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를 부탁하는 이 일을 하나의 구실 삼아서 요한에게 말을 거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 다른 사형수들처럼 영원히 가족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온 인류와 만물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주가 되실 텐데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 될 터인데 몇 끼 식사를 위해서 그 봉양을 위해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다고 만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철저하게 이 25절부터 27절까지는 당신에게로 다시 달려오고 깊은 가책을 느끼고 있는 사도 요한의 마음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양심에 가책을 받고 십자가 아래에서 모든 기운을 잃어버린 채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것만은 이 제자에게 충분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지나가는 일이니 이제 주님이 남기시고 가시는 사명을 이 사도 요한이 다른 제들과 함께 이루어드리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의 많은 잘못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뉘우침이 없이 어찌 자신의 마음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 가능하겠으며 자신의 마음을 희생 제물로 바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배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회개가 없는 사람 마음에 은혜에 대한 사모함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생각, 우리가 죄인이라는 확신과 함께 또한 하나님은 예배시간 마다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비록 우리가 죄를 지었고 주님을 잠시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단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시고 죄를 회개할 때에 용서의 은혜를 주셔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사이로 돌아간 채 영혼에 힘을 얻고 예배당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끼지만 그 사실보다도 더 확실하게 예수는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우리에게는 다시 이 실패를 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희망이 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하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옛날 잘못에만 사로잡혀서 양심의 가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더욱이 마음에도 없는 긴 회개를 하는 것은 주님이 보시기에 번거로운 일이고 때로는 가증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죄를 짓고 주님을 버린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의 무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은혜의 무게보다는 작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죄로 얽매였으나 주님의 은혜는 나의 죄의 사슬을 끊어주시고, 나는 가책을 느꼈으나 주님이 주신 용서의 자유는 가책의 크기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과거의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로 달려오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만약에 요한이 이 십자가로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어디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의 양심에 사로잡힌 자책감에 사로잡힌 그의 마음을 풀어주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복스러운 사랑을 경험했겠습니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숨어있어서 여전히 예수께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는 더 깊은 양심의 찔림을 경험하며 부자유한 가운데 예수님의 성품을 오해하며 가책을 느끼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달려왔습니다. 이전에 주님을 버리고 주님을 배신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지금 이 모든 가책을 떨쳐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죽더라고 그분과 함께 있어드려야겠다는 그 마음도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이 진실이 저 진실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면목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로 달려가고 한참동안 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고난을 당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차마 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마 눈물만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이 누구에게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신 적이 있습니까? 유언처럼 남긴 그 다락방의 강론 속에서도 어머니의 얘기도 꺼내지도 않으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처럼 흐르도록 기도하시던 그 때에도 어느 제자를 향해서도 어머니를 부탁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으로 다시 달려온 이 요한에게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면목이 없어서 고개도 들지 못하는 이 요한에게 ‘보라 너의 어머니라.’ 이 말씀은 어머니 마리아를 매개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과 매우 특별한 가족관계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저 같으면 가슴이 뛰었을 것이고 눈물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을 버린 나를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용납하시고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주시는구나? 아무에게도 부탁하지 않은 당신의 사랑하는 육신의 어머니의 남은여생을 부탁하기까지 나를 제자로 여기셨구나!’ 하는 감격의 눈물을 쏟았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모두 풀어주신 그 후로부터는 이제 이 사도 요한은 양심의 가책을 떨쳐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죽으시는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덜어드릴 수 있는 티끌만큼의 일도 요한에게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냥 가슴 조이고 눈물 흘리고 심정을 쥐어뜯는 아픔을 함께 느끼며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의 모습 마지막에는 창에 허리 상하여 피와 물을 모두 흘리시는 광경을 지켜보아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얼마 전까지 마음을 짓눌렀던 양심의 가책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오직 눈물과 기도로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제자들 중에는 유일한 마지막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피와 물을 흘리던 광경을 보면서 그 피가 인류의 구속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임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죄 없으신 예수님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들 때문에 죽으시는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섬기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으셨을 리가 없고 만약에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진리를 가르치지 않으셨다면 핍박을 받으셨을 리가 없기 때문에 결국은 혜택을 받은 사람은 자신들이었고 고난을 당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힘들게 말씀을 건넸습니다.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미끼로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으나 그들이 예수님을 버렸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티끌만한 마음의 그림자도 없다는 것을 요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요한으로 하여금 마음의 자유를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너는 나를 버렸다고 해서 너무 큰 가책을 느끼지 말거라 나는 언제나 너희를 사랑했고 그것은 지금 십자가 아래로 달려온 너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변함없이 나를 따르고 나를 기다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습니까? 중생의 씻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전까지 지었던 모든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와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여러 번 있는 용서가 아니라 영원히 단번에 주시는 한 번의 용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잠시 주님을 버렸을지라도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를 능가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 후회하고 진지하게 회개하지만 언제든지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시고 당신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죄와 양심의 가책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풀어주신 그 은혜 때문에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잠시 주님을 버렸고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도망쳤지만 그러나 다시 깨닫고 주님께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이 요한을 이미 용납해 주셨습니다. 마음을 풀어주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 하는 제자들 중 유일한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그 십자가에서 매달려 당신을 바라보시는 사랑의 눈빛을 다른 제자들은 전해줄 수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 모습을 뵈오며 마지막 밧모 섬에서 유배를 당하기까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또 증거 하다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당하다가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흔들렸지만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한 적이 있었지만 십자가에서 이렇게 자기의 마음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을 만난 그 이후로 요한은 다시는 단 한 번도 주님을 떠나지 않았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모진 고난을 당하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예수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고 모든 교인들을 사랑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진리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이렇게 신약성경에 가장 중요한 말씀들을 남기며 우리로 하여금 당신처럼 주를 떠났던 사람들이 예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준 그런 위대한 일을 우리에게 남겼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자유하십니까?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 형상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들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유함이 없습니다. 잠시 세상 사랑에 들떠서 신앙을 버리고 세상 유혹에 빠지고 신나는 자유를 누리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영혼까지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 정욕 속에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8:32)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우리들은 세상의 자유를 찾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더 커다란 속박이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조여 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그것은 모두 환각이었고 착각이었고 잠시 취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참된 자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형상을 바라보는 그 신앙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습니다. 나는 본래 하나님을 멀리 떠난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가 크게 느껴질 때 세상은 작게 느껴집니다. 정말 마음 아파 기도하던 많은 제목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뵙는 동안에 창에 허리 상하여 피와 물을 모두 쏟으시는 그분의 고난의 광경을 보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결코 궁극적인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이 자기를 저렇게 버려서 사신 나의 생애가 바로 오늘 내게 있는 이 시간이 이것이 나의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가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단 하루를 살아도 주님이 내 마음을 풀어주셨듯이 나 또한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주님의 마음을 풀어드리기 위해서 섬기며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그런 삶을 살면서 주님이 가슴 아파 눈물 흘리는 자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셨던 것처럼 그렇게 그들의 눈물을 씻기고 오류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대신해서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어 주님께 돌아오게 하고 아무도 의지할 곳 없어서 홀로 슬픔의 눈물을 음료로 삼으며 고통의 슬픔을 양식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자신의 살점을 떼어주고 자신의 핏방울을 먹여줄 수 있을 것처럼 그렇게 불쌍히 여기고 섬기라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 불쌍한 이웃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늙어가고 언제가 우리는 죽어가겠지만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에 허리 상하여 피와 물을 흘리신 것처럼 그렇게 장엄한 죽음을 죽을 수 없을지 몰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십자가의 사랑을 간직하며 이 땅을 사명지로 여기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며 이웃들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고 싶은 말씀은 더 많이 있지만 이제 말씀을 마쳐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십자가로 달려온 이 제자 요한의 마음을 풀어주셨습니다. 당신의 육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시는 말씀을 남기심으로 이제 요한에게 ‘너와 나 사이에 죄 따위는 없다. 네가 잠시 나를 버리고 도망간 것으로 너무 마음의 가책을 여기지 말거라. 내가 이제 너에게 주는 사명을 받으라.’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 요한의 마음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제 요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며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까지 그 옆을 지켜주었습니다. 이제 두렵지 않았습니다. 무섭지 않았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자기를 잡아갈까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두려움은 사랑에서 생기고 세상과 자기의 목숨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한 사랑이 이 요한의 마음에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모든 제자들이 떠났지만 이 한 제자라도 당신 곁에 와서 당신이 죽으시는 십자가의 고난에 함께 있어주었고 마지막까지 그윽한 눈빛으로 십자가 아래에서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는 제자를 바라보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지막에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그날에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면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보혈의 공로 예수의 십자가 사랑 외에 무엇을 고백하겠습니까?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오늘 이 새벽의 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런 새벽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녹취자: 허혜숙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장면은 빌라도에게서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광경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끌고 가고 그때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을 받을 때에 두 가지 규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심한 채찍에 매를 맞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140kg 정도 되는 이 나무 십자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올라가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체력에 너무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밤을 새워 간절히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 이전에는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유언과 같은 설교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대제사장에게서 빌라도에게서 헤롯에게로 헤롯에게서 빌라도에게로 끊임없이 끌려 다니며 온 밤을 새우고 심문과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당연히 식사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이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가게 되었으니 아마도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자꾸 쓰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따라오던 사람 가운데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게 해 달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러나 또 많은 여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구경하기 위해 따라오는 백성들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님을 따라오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아는 여자들이었고 주님께로부터 죄의 용서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면에서든지 예수가 이렇게 사형에 처해질 만큼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열렬히 따라왔습니다. 아마 그녀들의 마음은 예수를 위해 자신이 대신 죽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십자가 행렬이 점점 골고다 언덕을 가까이 올수록 이 흐느끼는 여인들의 울음소리는 피 어린 통곡으로 변했습니다. 그렇게 흐느끼며 우는 여인들의 통곡소리는 구경하며 따라가는 백성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묘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되나? 과연 순순히 십자가를 질까? 아니면 자기가 늘 행하던 대로 자신을 위해 기적을 일으켜 뭔가 우리가 보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나서 그 위기를 빠져나갈까? 라는 것이 백성들의 가장 커다란 관심사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백성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원할까? 라는 것이 관심사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마치 하나님이 보내신 초자연적인 인물로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우국전사와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범위하게 휩쓸고 있었던 사상은 메시야는 메시야인데 정치를 위한 메시야 사상이 그 당시에 팽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의 나라가 결국 멸망하고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로마의 말발굽 아래까지 밟혀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인자와 같은 사람을 보내실 것이요 그는 구원자가 되어서 군대와 함께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서 다시 다윗의 왕국의 번영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실 것이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의 보편적인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수많은 군중과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박해를 받고 십자가형에 처해졌는지 아십니까? 종교지도자들의 생각과 백성들의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도자들의 생각은 예수의 권세 있는 가르침을 따르는 백성들의 대대적인 이동이 자신들이 누려온 기존의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기득권과 관련되는 문제라고 여겼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예수를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말도 되지 않은 죄가 없는 예수를 죽여 버리고자 하는 종교지도자들의 의도를 왜 많은 백성들이 그렇게 지지를 해 주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복선이 함께 깔려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종교지도자들이 꾸민 계략에 넘어간 순진한 측면이 있지만 또 한 측면에는 예수에 대한 실망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을 보면서 ‘만약에 이런 능력을 무기화해서 로마와의 전쟁에 사용한다면 질 수가 없는 싸움이다’라고 생각하며 구약에서 기적적인 능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수많은 선지자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는 특별히 보냄을 받은 사람일 수 있다는 이런 한 구석에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순순히 체포되시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헤롯의 말에 답이 없으시고 아무 능력도 없이 고난을 다 당하시고 마지막에 죽기 위해서 자신이 준비되는 것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망했던 것입니다. 결국 기대가 어긋나니까 이 실망은 미움으로 변해서 종교지도자들의 계략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것입니다. 너무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그리스도는 결국 십자가 형벌을 당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묘한 기류가 흐릅니다. 그것은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꿈 꿨지만 백성들이 꿈꿨던 하나님의 나라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올라가면서 꿈꾸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 다른 나라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꿨던 나라는 역시 로마를 꺾을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국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가능했겠습니까?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대 제국을 이루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 제국이 커다란 빵이라면 그 빵에서 부스러기 하나의 위치조차 차지하지 못한 그런 아주 영토도 작고 세력도 작은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다윗의 나라처럼 번영해서 주위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조공을 바칠 정도의 나라가 되고 로마도 그 중의 하나가 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성이 있는 희망이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라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를 다시 복구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나라를 위해서였다면 인자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실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와 같이 기적을 행하는 당신의 능력의 선지자들을 보내셨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마음에는 전혀 다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피부색과 국경, 로마와 이스라엘 등등을 가르는 분파적인 하나님의 나라, 똑같은 지상 나라인데 깃발만 바꿔 다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였으며 피부색과 종족에 상관없이 남녀와 나이 지위 자유인과 종이 상관없이 그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나라였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며 이루어가는 영적인 왕국이었으니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면 거기에서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는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그리스도는 이런 큰 원대한 꿈을 품고 이제 당신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내어 주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하늘에 꽉 차있었으나 아직은 내려 온 적이 없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불러들이는 문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그 문이 열리고 그 문에서 생명과 진리가 한없이 쏟아져 온 땅을 계속 메우며 예수는 이 세상에서 단 한 평의 땅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제는 온 지구를 지배하는 통치주가 되셨고 우주를 다스리시는 권능의 주님이 되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저의 마음에,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고 이 방송을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나라가 확장되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뉘우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던 사람이 아버지 앞에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해 달라고 부르짖는 그 사람 마음 안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놓여있든 어떤 상황 속에 살아가든 그 육체와 상관없이 그의 영혼에 자유 함을 얻게 되고 어디서든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구하면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나라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 신앙의 비밀을 아는 것이 믿음의 깊이입니다.
자,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온 몸이 아프고 눈을 뜰 무슨 희망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펴보면 죄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할 기운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진 소외된 느낌만을 가지고 괴로워하며 아침을 맞이하고 한 낮이 되어도 무엇인가 손에 잡히지 않고 심령에 괴로움이 밀려옵니다. 죽어버리고 싶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고 그렇게 힘이 없을 때에는 누가 죽어도 너무 슬픈 사람도 없고 누가 잘 되어도 너무 기쁜 일도 없습니다. 자신을 지탱할 삶의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그까짓 남이 죽고 남이 잘 되는 일이 어찌 그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 볼 기운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형제와 믿음의 지체가 심방을 와 주었습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눕니다. 식탁을 나눕니다. 그리고 권면을 듣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렇게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함께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잠자던 영혼이 깨어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이외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간절히 목 놓아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렇게 아버지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낙심과 어두움에 가려졌던 자신의 마음에 빛이 들어오고 살아갈 수 있다는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겨납니다. 힘이 없을 때마다 예전에는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어 갔는데 이번에는 더 간절히 주님을 의지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을 부어주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힘이 되어서 이전에 내가 살 수 없었던 삶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배를 드려도 사람들이 다 힘이 없습니다. 찬송을 하자고 해도 별로 찬송을 하고 싶지도 않고 말씀을 들어도 별로 듣고 싶지도 않고 마지못해서 어떻게 주일날 예배당에 오기는 왔는데 예배에 있어서 모든 것이 너무 비자발적입니다. 결국 그의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가 죄를 지었을 수도 있고 은혜 생활을 안 했을 수도 있고 뭐든지 가능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너무 많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유혹을 받고 있을 수도 있고 너무 많습니다. 문제는 생명의 능력이 너무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너무나 모자란 것입니다. 그것은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자신의 삶의 능력을 이어가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 그리고 모든 낙심스러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신앙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강한 희망,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랑의 힘, 그런 것들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주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한 교회의 예배의 태도는 성도들의 은혜의 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루시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실제로 이 예수를 위해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면서 따라오는 이 여자의 무리들 속에는 구경하면서 따라가는 백성들 속에 없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랑과 생명입니다. 예수를 향한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따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보다 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열렬히 섬겼고 믿었고 따랐습니다. 그러니 오늘 끊임없이 환경과 처지에 대해서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으로서는 우리 인생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능력이,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제 그 십자가를 지시고 자꾸 쓰러지셨는지 어쨌든 그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에게 지우고 예수는 앞서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수 없을 정도로 이미 예수님이 온 몸에 피를 흘리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 그렇게 걸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보면 예수님이 피를 흘리신 곳마다 표지석이 붙어있습니다. 모두 여섯 번 쓰러지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어떻든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꾸 쓰러지셨습니다. 그런데 슬피 우는 여자들의 울음소리는 점점 더 십자가가 가까울수록 커졌고 흐느끼는 울음소리는 피 어린 통곡으로 변해갔습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시다가 몸을 돌려서 자기를 위해 울면서 따라오는 여자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의 기력이 쇠하신 가운데 쓰러지면서 올라가고 계셨는데 몸을 돌이켜서 여인들을 바라보고 짧지 않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니까 침묵하던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제 입을 열어 이 여인들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으니 진짜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과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 중 첫 번째 구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루살렘의 딸’에 대한 해석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냥 이 여자들이 모두 예루살렘의 여자들만이 아니고 저 멀리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도 있었는데 지금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따라오는 여인들을 바라보시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루살렘의 딸’ 이라는 이 말씀이 사람이 아니라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위성도시입니다. 서울이 있고 그 다음에 안양, 과천, 평촌, 군포 등등이 있습니다. 그렇게 서울에 딸린 작은 도시들을 우리가 위성도시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이 있고 예루살렘은 아니지만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성 밖에 작은 마을들이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불렀다는 해석입니다. 물론 어느 것이 맞는지 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당장 예수님이 바라보시면서 대화하시는 것은 자기를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따라오며 많은 여자들이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고 그 가르침에 감동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따라와서 이 흐느낌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올라오지 않았어도 이미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음에 보면 의미심장한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이르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하는 배와 먹이지 못하는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 사람들이 산들에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눅 23:29-30)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후 70년 이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가 주후 30년경쯤 됐을 때니까 한 40년 후에 있게 될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침공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이 모두 파괴되고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되는데 그 예루살렘 멸망의 최후의 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만 망하겠습니까? 예루살렘에 딸린 모든 위성 도시들도 함께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속에 이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이스라엘이 받게 될 그 심판을 미리 바라보시면서 가슴아파하시며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로마의 침공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지금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울고 있는 여자들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때에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될 예루살렘에 딸린 수많은 도시와 같은 지역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눈물겨운 말하자면 염려입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 하나를 마지막으로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여자들이 당신을 향하여 따라오면서 슬피 우는 것을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꾸짖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여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지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면서 따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라실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애들아 너희가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것이 가엾어서 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단다. 이제 나는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부활하고 승천하게 될 것이고 만유의 주가 될 것이다. 문제는 이 땅에 남아있는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다. 너희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게 될 것이고 로마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끝날 텐데 그때에 너희가 당하게 될 환란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게 되는구나, 그때에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 당할 환란을 생각하면서 그 날에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거라.’ 이렇게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 체험과 우리의 삶의 숙제를 동시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메말랐던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조하던 마음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둡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차갑던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단지 그 십자가의 경험에 감격하며 명상이나 하면서 그것으로 만족을 삼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받은 놀라운 사랑을 간직하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자신의 사명을 따라 살라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우리를 삶으로 불러내고 삶은 우리에게 은혜를 요청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은 너무 힘겹고 어렵습니다. 은혜를 받고 마음에 기쁨이 찾아오면 우리는 즉시 우리의 삶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마음과 입술의 찬양으로서만 아니라 나의 온 삶으로서 우리 하나님을 기념하는 삶을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주어지는 생명의 능력이고 은혜의 힘입니다. 이 생명이 우리 속에 역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지탱해 나가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이 되어서 남의 행복에도 신경을 쓰며 그들의 불행을 나의 불행처럼 여기며 그들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연약한 다리를 함께 의지하며 걸어갈 수 있는 도우미가 되어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두 가지를 구하십시오. 이 여인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예수를 향한 참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나에게도 가슴을 칠 수 있는 애통함과 슬피 울 수 있는 통곡과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예수 위해 흘린 그 눈물을 가지고 나의 삶의 현실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앙과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아버지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랑과 은혜를 주십시오. 우리가 이 눈물로 복음을 전했더라면 가족들이 더 많이 구원을 얻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도 이미 더 오래 전에 예수를 믿는 신실한 사람들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생각하는 동안 주님을 위한 눈물을 흘리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 십자가의 은혜와 삶에 대한 열렬한 의지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비셔야 합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삶을 쓰러뜨려버리고 교만했던 삶을 모두 끝내버리고 여러분의 눈이 가리어져서 여러분들이 보지 못했던 무지한 삶을 모두 끝장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7. 고통을 감당하신 예수님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마 27:34)
녹취자: 황인준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지쳐서 자주 쓰러지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거의 이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스펀지 같은 것에 끼워 갈대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께 드린 요한복음 19장 29절에 나오는 신 포도주 사건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건 아직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전날부터 잡수시지도 못하고 주무시지도 못하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온 얼굴엔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으시면서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인간의 몸에 지닌 많은 기운이 탈진하셨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많은 출혈과 함께 타는 듯한 목마름이 느껴지셨을 것입니다. 예수의 온몸은 상처와 채찍에 맞은 흔적으로 고통의 통증이 깊어져 갔을 것입니다.
사형수들이 이렇게 피를 흘리고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유대인들의 관습이 있었습니다. 잠언 31장 6절~7장에 나오는 교훈을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고통의 통증을 잊게 하려고 독주를 제공하는 자비였습니다. 아마 이런 관습에 의해서 누군가 쓸개를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서 마시게 하였으니 이것은 포도주라기보다는 포도주에 탄 일종의 마취제 내지는 진통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만찬을 베푸시면서 마태복음 26장 2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실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구약에 나오는 나실인의 서원을 차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순간까지 율법에 매이실 필요는 없으셨지만, 구약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드리는 표로 나실인의 서원을 할 때에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고 포도나무에서 난 어떤 것도 먹지 아니하기로 자신을 구별한 것처럼 하나님께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는 표증으로서 포도 열매에 나는 모든 것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의 헌신은 성취되지 않았고 이제 죽음으로서 일류의 모든 죄를 대속해야지만 그 헌신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통증을 감소시키는 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까지 끌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단순히 죽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륜의 모든 죄를 구원받을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고 율법 아래서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정죄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육체로서 그 모든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셔야 하였고 십자가를 지시고 느끼게 되는 모든 고통은 오롯이 예수의 몫이었습니다. 누구도 나누어질 수 없는 몫이었습니다. 만약에 나누어지고 공통으로 짊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래서 통증이 조금이라도 덜 해 질 수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예수님은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을 많이 원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상처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상처도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자들의 배반할 것을 모두 아시면서 오히려 미리 용서하시며 돌이킨 후에는 형제를 굳게 하라고 사명을 일깨워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지신 십자가를 누구도 나누어질 수 없는 분명한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이러한 진통제를 복용함으로써 육체의 고통을 더는 것을 경멸하셨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예수의 고통 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방법이 없었다고 하면 누군가가 하나님을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이 원하시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으로 성숙하게 하시고 때가 되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당해야만 하는 모든 고통은 오롯이 예수 자신의 몫이었고 그래서 부활의 영광도 예수 자신의 몫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그 어떤 인위적인 방법을 모두 거절하시고 오롯이 당신의 온몸으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기꺼이 당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구속주로서 당신의 신실함을 입증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 우리를 이 사람들과 구별해 주셨지만, 그 구별됨을 지키지 못합니다. 세례받는 그 순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고 우리는 그분의 주되심 앞에서 순종하며 믿음으로 사랑으로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이 받쳐졌으며 자신의 것이라고는 없다는 사실을 수시로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입술로는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예수의 것이라고 고백하지만 삶으로써는 오히려 주님을 지배하려고 듭니다. 종이 상전처럼 하고 상전을 종처럼 부리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이 십자가를 감당하기 위해서 그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쓸개 탄 포도주를 온전히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롯이 당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의 고통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홀로 감당하시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 앞에 아멘이요 충성된 증인이 되실 수 있었고 십자가에 육체는 큰 고통을 당하며 지옥을 넘나들었지만, 정신과 마음은 하나님과 교제를 더욱 돈독히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복을 받고 예수와 함께 은혜를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고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자신만의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실 때 그 구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릴 그에게 접붙이심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가 일생을 살아가는 방식은 이제 교회라고 하는 언약 공동체적인 소명을 함께 받으며 언약의 공동체로써 자신의 소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소명은 결코 교회와 분리된 채 발견될 수 없고 자신 없는 교회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으며 살아가는 그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오직 주님만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서든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각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진 십자가는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십자가이고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제자들도 나누어질 수 없는 십자가이었으니 당연히 우리도 나누어질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감당할 때 예수와 일치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고난을 당신이 모두 감당하고 이제는 더 이상 고난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에 충분하도록 대가를 지불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모든 고난을 다 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는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비롭게도 당신의 몸인 교회에 당신의 고난을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 우리가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구속을 위한 고난에는 우리가 일체 동참할 수 없지만,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이 세상에서 교회에 숨겨진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겨주신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예수와 일체된 것을 느끼며 그 고난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 해 전 여러분들에게 설교했던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우리 모든 교회의 지체들은 한 몸으로써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고통을 당해도 우리 모든 영적인 지체로써 그 고통에 참여하며 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고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그 속에서 예수께서 교회를 참다운 교회 되게 하시기 위해 남겨두신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여하면 참여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죄성이 죽는 것을 경험하고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는 사람에게만 예수의 생명이 강물처럼 흐르고 예수님을 위해 죽지 않고 사는 사람의 마음에는 죽음이 무덤처럼 깊이 그들을 덮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문제는 너무 개인적이라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나는 교회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와 언약 공동체로써 누리고 함께 살아가야 할 소명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믿었지만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남다른 삶을 살 것 같지만 살아보면 매일매일 죄에 지고 세상에 휩쓸려 살아가는 한없이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결국 구원받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빛나기는커녕 모욕을 받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을 교회론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부어지고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분인 교회에 부어지고 우리는 그 신부인 교회의 몸에 한 지체로써 그 사랑을 받는 것처럼 또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겨두신 그 고난, 우리와 함께 참여하게 하여서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시는 그 일을 위해 고난받는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우리는 거룩해져 가고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순종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모두 경험한 것입니다. 저는 이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다시피 21살에 회심하였습니다. 그전까지 지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누구도 데려다 놓고 며칠만 데리고 있으면 무신론으로 설득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나의 시도는 여러 번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마음은 교회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은 핍절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을 이어갈 아무 힘도 내게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변절이었고 무신론의 신념의 깊이가 얕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도 자기들만큼 책을 읽었고 자기들만큼 고뇌했고 자기들보다 더한 목숨을 걸고 내 인생에 갈 길을 고민했습니다. 학자들만큼은 아니지만, 당대에 누구와 뒤지지 않을 정도로 고민했고 독서 했고 고통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돌아온 것은 빵 대신 조약돌이었고 그리고 나에게 돌아온 것은 자유 대신 온몸을 칭칭 감은 철조망이었습니다. 내 온몸은 그 철조망에 찢겨서 피가 흘렀고 자유를 얻으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내 살점은 철조망에 찢어져 나가고 피는 낭자하게 발아래 흘렀습니다. 신념이 약했던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에 그 철조망으로 칭칭 감겨 온몸의 살점이 뜯겨 나가는 그 비참한 상황에서 주님은 절 찾아오셨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눈물 흘리며 회개했고 난 구원의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이 꿈꾸는 것 같았고 첫사랑다운 첫사랑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지만, 그 가상되는 첫사랑의 행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게 얼마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은 건 순간에 믿었지만, 진리는 잔인하리만치 천천히 느리게 느리게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그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리고 방탕하게까지 타락하지 아니하였지만, 예수를 믿은 보람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은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다시 주님을 만났을 때 처음 주님을 만났던 것과 똑같은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잊어버리는 동안에는 나는 세상 한복판에 있었고 그 십자가가 생각나는 동안에는 십자가로 돌아왔던 요한처럼 주님께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돌아올 때마다 주님은 용서해 주시고 돌아올 때마다 주님은 나를 다시 소명의 자리에 세워주셨습니다. 나만의 고백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고백일 것입니다. 삶의 자리는 다르고 색깔은 조금씩 달라도 모두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말씀드릴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분은 당신의 소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고통을 받을 때 일체 진통제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당신에게 지워진 십자가의 몫을 온전히 홀로 감당하시며 온 마음과 영혼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린 채 한편 강도에게 감화를 끼치기까지 하나님과 깊은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오늘 한번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구원받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세워준 자리가 어디였는지 말입니다. 이 교회에 와서 두 번 혹은 세 번째 생애적인 회심을 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체험하게 되었을 때 여러분들에게 세워주신 자리는 어디였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 서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충성스럽게 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분투하며 감당하려고 서 있습니까? 만약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오늘 이 밤이 돌아올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위대한 기도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열렬한 기도,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 아닙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가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두신 그 자리에서 벗어나 하는 울부짖는 기도보다는 주님이 세워진 그 자리에서 드리는 속삭이는 마음의 기도가 주님에게는 훨씬 호소력이 있는 기도입니다.
제가 우체국장을 했었습니다. 그전엔 우체국 직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편물이 똑같은 것 같아도 그 당시엔 종류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빠른 것이 속달, 나중에는 스피드 포스트라고 해서 특별 우편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예 창구에서 따로 받았습니다. 보통 우체통에 넣은 편지가 4일 정도 걸려야 하지만 스피드 포스트는 이틀이면 되었습니다. 급한 편지이기 때문에 모든 우편물에 우선으로 취급해서 가장 빠른 통로로 부산 같으면 아예 항공우편에 실어 부산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가 스피드 포스트와 같은 기도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도 예수, 고통 받으며 당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리에 굳건히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요새 코로나를 주신 하나님의 크신 뜻을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에 펼쳐질 한국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오고 있다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이 COVID 상황을 통해서 교회 전체를 키 위에 올려놓고 한 번 확 까버리셨으면 합니다. 쭉정이를 날아가게 하시고 알곡을 키 위에 다시 떨어지게 하나님이 한 번 흔드신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은 코로나 상황 속에서 미끄러져 가고 분명히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교회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떠나갈 이들은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 주위에는 우리 교회뿐 아니라 다른 교회의 많은 목회자를 만나도 이 COVID 상황을 통해서 믿음이 돈독해진 간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교회에 나오지 못하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하나님을 향하여 갈급한 영혼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모임이 차단된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고 축복이고 자기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살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히려 육적으로 교회에 못 나오면서 절실하게 느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간증이 목회자들 모임에는 많이 오고 갑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관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실 때, 온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셨지만 일체 마취제를 거절하시고 하나님 앞에 구별된 서원을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시대가 어두우니 별처럼 빛나야 할 것이고 이처럼 사람들이 신앙이 불확실하니까 우리는 확실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이기적인 때에 우리는 오히려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이고 이처럼 이념을 중심으로 나라가 심하게 찢어져 있는 이때이니 우리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며 예수의 사랑이 무엇이고 그의 정의와 자비가 어떻게 십자가에서 입맞춤하는지를 복음으로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요새 1968년도 이후의 세계 역사를 새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발표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알지 못하는 그 50년 사이에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어쩌면 역사의 필연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역사를 읽고 공부하며 느끼는 것은 복음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이야기로는 이 고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대안도 없습니다. 저는 지난 6개월 동안을 니체와 함께 지냈습니다. 아주 깊이 심취하였습니다. 결국은 많이 가르쳐주고 공감 주는 부분도 있고 우리가 참고할 부분도 많이 있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답이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혼돈의 시대가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복음은 찬란하게 빛납니다. 오늘도 사람들의 영혼은 갈급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이 모든 이론을 파하고 단숨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의 자녀로 살 생명의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도 사람들이 항상 그렇게 말했고 유대인에게는 기적이 없는 종교라고 비난받았고 헬라인들은 지혜가 없는 무식한 종교라고 욕을 먹을 것이 예수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이 복음에 희망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지금도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변함이 없는 진리로 우리에게 우뚝 서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맞이합시다. 희망차게 맞이합시다. 그리고 모두 이 피 묻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낙심하고 실망한 모든 사람에게 전하여 그들에게도 예수의 생명이 넘쳐나도록 봉사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