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부활
2023년
주일오전예배 외
설교기간 | 2023년 03월 26일 – 04월 30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05월 31일
목 차
1. 예수 죽으실 때(마 27:50-51) 2023.03.26. 주일오전예배 10
2. 십자가 지고 가신 길(눅 23:26-27) 2023.04.02. 주일오전예배 18
3. 만세 반석 열리니(출 17:6, 고전 10:4) 2023.04.07. 연합금요기도회 24
4. 예수의 죽음과 부활(롬 1:3-4) 2023.04.09. 주일오전예배 30
5.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행 22:6-10) 2023.04.09. 청년부 회심집회 37
6. 예수와 함께 하는 삶(갈 2:20) 2023.04.16. 주일오전예배 47
7. 예수 생명 나타나는 길(고후 4:10) 2023.04.23. 주일오전예배 61
8. 예수 십자가에서 하신 일(롬 6:6-7) 2023.04.30. 주일오전예배 69
<설교 프레임>
예수의 죽음과 부활1 2023. 3. 26. 주일낮 예배
< 예수 죽으실 때 >
“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마 27:50-51)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죽으신 마지막 광경을 담고 있다.
당시에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기 위한 형 집행(執行)의 한 방법이었다.
따라서 사전에 예수에 대한 고발과 체포, 심문과 재판의 과정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잘못된 동기(動機)와 그릇된 절차로 이루어졌다.
죄가 없으셨음에도 거짓 증인(證人)을 내세워 예수님을 고발하였고, 심문과 재판의 과정도 모두 불법한 것이었다.
심지어 재판장인 본디오 빌라도조차 예수님의 무죄(無罪)를 확신하였다.
그러면 무죄를 확신한 재판장은 왜 예수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을까?
그것은 정치적(政治的) 이유 때문이었다. 거기 모인 군중들이 예수의 무죄를 선고하면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 재판의 판결은 매우 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沈黙) 속에 순순히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죽으셨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知慧)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의 대리적 죽음을 통해 수많은 인류(人類)를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II. 예수 죽으실 때
금요일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晩餐)을 나누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다. 거기서 땀이 핏방울 되어 떨어지기까지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의 모의(謀議)로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되셨다. 당시 예루살렘을 관할하던 빌라도는 이 사건에 관여하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헤롯(Herod) 총독에게로 이송하게 하였다.
당시 마침 잠시 예루살렘에 와서 머물던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이는 그분에 관한 놀라운 소문들을 이미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던 바는 자기 앞에서 무슨 기적이라도 행하시는 것을 보고자 함이었다(눅 23:8). 그는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질문(質問)에 아무 답도 하지 않으셨다. 실망한 헤롯은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사형 언도를 받으셨다.
A. 영혼이 떠나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운명(殞命)하시기 전에 일곱 마디의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네 번째 말씀이 본문에 실려 있다.
“…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그러나 이 외침은 결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절망(絶望)하신 것을 뜻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분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聯合)이 깨어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외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苦痛)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십자가 형벌의 잔혹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시는 형벌(刑罰)에 대한 큰 고통의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한히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죽으시는 순간까지, 생애 내내 예수님 자신은 아무 죄(罪)가 없었고, 단 한 번도 하나님 사랑(love)에서 멀어져 본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은 큰 고통(苦痛)을 당하고 계셨다.
이는 그때가 심판받아야 할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받으시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하나님과의 낯섦이나 거리감을 가져본 적이 없으셨다. 그러나 지금은 무한한 진노(震怒)가 쏟아 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무서운 심판이었다. 또 한편으로 그것은 죄인(罪人)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준다.
“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혼이 떠나시니라”(마 27:50)
여기서 크게 지르신 소리가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십자가 위에서 남긴 제6언(言), “다 이루었다”(요 19:30)나 혹은 7언(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였을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世上)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렇게 거기서 죽으셨다.
일평생 죄인들을 사랑하여 가르치고 섬기셨던 생애를 그렇게 마치셨다.
B. 휘장이 찢어짐
바로 그때 골고다에서 약 2.5km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약 18평의 직각형으로 된 성막 안에 있어, 지성소와 성소(聖所) 사이를 구분하고 있던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이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이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단단히 짠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그룹들, 곧 천사(天使)들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휘장을 만든 천은 그것을 짠 실도 질겼지만, 또한 매우 단단하게 직조된 것이었다. 그 휘장은 황소를 양쪽에 매달고 반대편에서 잡아당기게 해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였다.
휘장은 지성소(至聖所)와 성소를 구분하고 있었다. 지성소(至聖所)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거기는 일 년에 단 한 차례, 속죄일에만 오직 대제사장 홀로 들어가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었다.
성소(聖所)에는 금향단과 금촛대, 그리고 진설병 상이 놓여 있었다.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성막의 구조상 성소를 통하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휘장이 찢어진 의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은 이 일이 결코 자연적(自然的)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말해준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완전히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사실을 계시(啓示)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구원사적 의미였다.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으며, 이제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를 위해, 더 이상 인간(人間) 대제사장이 필요 없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다.
이제 제사장도 필요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인간 제사장의 중보(仲保)가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하나님과의 교제(交際)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벧전 2:9)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다시 발견되어 강조되었던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의 교리다.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중보만을 힘입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된 것이었고,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죄인인 우리가 용서(容恕)받고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우리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는 자신의 죄(罪)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다. 그리하여 거룩함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God)을 버림으로 불행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렇게 비참(悲慘)하게 살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에, 구원을 통해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交際)의 길을 내 주신 것이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살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2 2023. 4. 2. 주일낮 예배
< 십자가 지고 가신 길 >
“그들이 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 23:26-27)
I. 본문해설
II. 십자가 지고 가신 길
A. 골고다로 가는 길
1. “백성들”
“…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눅 23:34下~35上)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눅 23:47~48)
2. “여인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 23:27)
B. 우리는 누구인가?
III. 적용과 결론
예수의 죽음과 부활4 2023. 4. 9 부활주일 낮예배
< 예수의 죽음과 부활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3-4)
I. 본문해설
성육하신 예수는 육신적 혈통으로는 다윗 왕 집안의 자손으로 오셨다.
우리말 성경 본문의 일부를 그리스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육신(肉身)에 관해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靈)을 통해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롬 1:3-4, KNJ 私譯)
여기서 “성결의 영을 통해서 …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라는 표현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意味)가 있다. a. 예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b.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영이시다.
II. 바울이 경험한 혼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復活)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것은 세계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정수를 보여준다.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의 죽음(death)과 부활의 사실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몰랐다. 그들이 어려서부터 믿어온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었다.
A. 십자가와 처형
예수 그리스도의 심문과 처형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교묘한 종교적 고안(考案)이 반영되어 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막 15:13-14)
그들은 왜 단지 예수를 죽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형의 방법(方法)까지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것은 백성들이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종교적 음모(陰謀)였다. 예수의 죽음을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신념과 결부시키려는 것이었다.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써 그분이 선지자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咀呪)를 받아 죽은 죄인임을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나중에라도 제자들이 유포할지도 모를 예수의 부활의 소문에 대해서 백성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B. 예수 부활의 사건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믿고 회심하기 전 사울(saul)은 유대인으로서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a. 심리적으로는 유대인만 선택된 백성이다. b. 신학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다.
당시 사울은 정통적인 유대인으로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대교주의자였다.
그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다(행 9:2).
그러나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부활(復活)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9:3-5)
이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사울은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의 대립을 발견했다. 잠시 커다란 신학적 혼란을 겪었다. a.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咀呪)를 받아 죽었다. b. 부활은 하나님의 인정(認定)을 받은 표지다.
유대인들은 전승을 따라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었다. 이는 모세가 특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은 인물들이 있었는데, 에녹과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창 5:24, 왕하 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이야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예수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인물이라고 믿지 않았다.
사울(saul)이 느낀 신학적 혼란이 이것이었다. 만약 예수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저주(詛呪)를 받았다면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인정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인정(認定)하셔서 다시 살리실 인물이었다면, 그를 저주하여 죽이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믿기로는, 동일한 인물(人物)에 대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동시에 저주하시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의심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었다. 부활하심으로 인정을, 죽으심으로 저주 받으신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III.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함
그는 회심하면서 지성(知性)에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깊은 깨달음을 경험했다.
여기서 사울은 예수 죽음(death)의 이유가 이제껏 자신이 배워 온 것처럼 그분 자신의 죄(罪)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이 구원받을 우리를 위한 대신적(代身的)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두 가지 사실 사이의 모순은 해소되었다. 그 순간, 그의 두 가지 편견, 곧 심리적이고 신학적인 편견이 깨졌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結論)에 도달하게 되었다. a.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신다. b.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로 오셨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분의 십자가(十字架)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의 깨달음의 핵심은 예수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罪)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의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제는 율법(律法)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속죄(贖罪)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義)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성경적 묘사는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or us)
여기서 “우리를 위한”(for us) 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 대해 갖는 세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a. 우리를 대신(代身)하여 b. 우리의 이익(利益)을 위하여 c. 우리를 대표(代表)하여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救援)하신 것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제껏 자기의 의로운 행위(行爲)로써 구원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그가 온 인류와 세상 만물의 통치주(統治主)가 되심을 알게 되었다.
“그의 능력이 … 다시 살리시고 …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0-22)
이 깨달음은 영혼의 어둠을 찢고 들어오는 한 줄기 섬광이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제서야 하나님의 관점(觀點)으로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껏 자기가 알고 있던 육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음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그는 종교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 없이 차가운 율법(律法)과 그에 대한 복종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 성령의 은혜(恩惠)를 받았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하늘 자원이 주어졌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love)이 쏟아졌다. 진리와 함께 풍성한 은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랑의 삶이었다.
지상의 생물들은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식물의 화학 에너지로 바꾸고, 이것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이 인간 육체의 생명(生命)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므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영혼(靈魂)의 생명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 받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요 10:10).
우리 모두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영적 생명(生命)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IV. 적용과 결론
인간의 고통(苦痛)은 지상과 천상 자원의 부족 때문이다. 지상의 자원은 육체를 위해 필요하지만, 천상의 자원은 영혼을 살게 한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그 생명과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우리의 죄(罪)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고 부활의 능력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救援)을 받으라. 은혜를 받으라.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에 붙잡혀 살라!
청년부 회심집회 2023. 4. 9 주일 낮예배
<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
“가는 중 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아 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행 22:6-10上)
I. 본문해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復活)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것은 세계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정수를 보여준다.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그분의 죽음(death)과 부활의 사실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의미를 잘 몰랐다. 그들이 어려서부터 믿어온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었다.
II. 바울이 경험한 혼란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믿고 회심하기 전 사울(saul)은 유대인으로서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a. 심리적으로는 유대인만 선택된 백성이다.
b. 신학적으로는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다.
당시 사울은 정통적인 유대인으로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대교주의자였다.
그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다(행 9:2).
그러나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는 부활(復活)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9:3-5)
이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사울은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의 대립을 발견했다. 잠시 커다란 신학적 혼란을 겪었다.
a.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咀呪)를 받아 죽었다.
b. 부활은 하나님의 인정(認定)을 받은 표지다.
유대인들은 전승을 따라 모세가 부활했다고 믿었다. 이는 모세가 특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은 인물들이 있었는데, 에녹과 엘리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다(창 5:24, 왕하 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이야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예수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인물이라고 믿지 않았다.
사울(saul)이 느낀 신학적 혼란이 이것이었다. 만약 예수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저주(詛呪)를 받았다면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인정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인정(認定)하셔서 다시 살리실 인물이었다면, 그를 저주하여 죽이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믿기로는, 동일한 인물에 대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동시에 저주하시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의심할 수 없는 사실(事實)이었다. 부활하심으로 인정을, 죽으심으로 저주 받으신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III. 세계와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뀜
그는 회심하면서 지성(知性)에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깊은 깨달음을 경험했다.
여기서 사울은 예수 죽음의 이유가 이제껏 자신이 배워 온 것처럼 그분 자신의 죄(罪)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이 구원받을 우리를 위한 대신적(代身的) 죽음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두 가지 사실 사이의 모순은 해소되었다. 그 순간, 그의 두 가지 편견, 곧 심리적이고 신학적인 편견이 깨졌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結論)에 도달하게 되었다.
a.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신다.
b.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로 오셨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분의 십자가(十字架)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의 깨달음의 핵심은 예수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罪) 때문에 대신 죽으신 것이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의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제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속죄(贖罪)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義)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성경적 묘사는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or us)
여기서 “우리를 위한”(for us) 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 대해 갖는 세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a. 우리를 대신(代身)하여
b. 우리의 이익(利益)을 위하여
c. 우리를 대표(代表)하여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제껏 자기의 의로운 행위(行爲)로써 구원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그가 온 인류와 세상 만물의 통치주(統治主)가 되심을 알게 되었다.
“그의 능력이 … 다시 살리시고 …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0-22)
이 깨달음은 영혼의 어둠을 찢고 들어오는 한 줄기 섬광이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제서야 하나님의 관점(觀點)으로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껏 자기가 알고 있던 육적 이스라엘이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그림자였음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그는 종교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 없이 차가운 율법(律法)과 그에 대한 복종뿐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 성령의 은혜(恩惠)를 받았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하늘 자원이 주어졌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love)이 쏟아졌다. 진리와 함께 풍성한 은혜의 삶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랑의 삶이었다.
지상의 생물들은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식물의 화학 에너지로 바꾸고, 이것을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이 인간 육체의 생명(生命)이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므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영혼(靈魂)의 생명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 받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라신다(요 10:10).
우리 모두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영적 생명(生命)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IV. 적용과 결론
인간의 고통(苦痛)은 지상과 천상 자원의 부족 때문이다. 지상의 자원은 육체를 위해 필요하지만, 천상의 자원은 영혼을 살게 한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그 생명과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우리의 죄(罪)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고 부활의 능력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救援)을 받으라. 은혜를 받으라. 십자가와 부활의 생명에 붙잡혀 살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6 2023. 4. 16. 주일낮 예배
< 예수와 함께 사는 삶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I. 본문해설
갈라디아는 소아시아의 한 지방이며, 비두니아의 남쪽, 갑바도기아 북서쪽에 위치했다. 비옥하고 농사와 무역이 활발해서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바울은 AD.51~52년경 그 지방을 처음 방문했고(행 16:1), 그 후로도 목회적 필요에 의해 한 번 더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행 18:23).
그때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天使)”같이 여기며 복음을 받아들였다(갈 4:4). 그러나 몇 년 후 거짓 유대인 교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율법의 행위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이단(異端)에 설득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갈라디아 교회는 그에게 아픈 상처였다.
바울은 두 가지를 강조했다.
a.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b. 모든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II. 예수와 함께 사는 삶
갈라디아 교인들이 신앙을 떠나서 다시 율법주의(律法主義)로 돌아가려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신앙의 비밀에 관한 것이었다. 참 자유인으로 사는 길이었다.
A.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
먼저 그는 자기(自己)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上)
그런데 이 고백의 문장이 그리스어 성경에는 현재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현재완료의 시제는, 사건(事件)은 과거에 일어났으나 그 영향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갈 2:20, KNJ私譯)
복음서나 사도행전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죽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곁에 그가 함께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 곁에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있어 왔나니…”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시간적(時間的)으로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그렇다는 뜻이다.
회심하기 전 사울(Saul)이라는 젊은이는 뛰어난 유대 종교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열정과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 예수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그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했다는 소문은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굳게 확신했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꾸며낸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가 직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 만났을 뿐 아니라 땅에 엎드러진 채 그분과 대화까지 나누었다(행 22:7). 그것은 바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충격적 경험이었다.
그는 비로소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事件)임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그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예수 자신의 죄(罪)가 아니라 구원받을 모든 인류의 죄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로 그는 오로지 예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 그는 예수와 자신의 영혼이 신비하게 연합되는 것을 체험했다. 이는 성령을 통한 것이었다.
그 연합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과 신자의 영혼이 하나가 되는 연합이었다. 그것은 결코 서로 다른 두 실체(實體)가 합쳐져 별개의 개체로 새로운 실체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우리의 영혼은 각기 따로 존재하면서도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뜻이다. 마치 둘이면서 하나가 된 것 같은 관계가 된 것이다.
이것을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의 교리’라고 한다. 이 땅에서 신자가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두 가지로 나뉜다.
a. 칭의의 연합: 원리적 연합
b. 성화의 연합: 실제적 연합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고백하는 것은 다음의 의미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death)의 의미를 믿고 깨달았을 때,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의 죽음이, 현재까지 자기의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재연되어 왔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고백의 문장이 그리스어 성경에는 현재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현재완료의 시제는, 사건(事件)은 과거에 일어났으나 그 영향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갈 2:20, KNJ私譯)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과거(過去)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의미는 여전히 자기 안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뜻이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때는 AD.55~56경이다. 그리고 그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회심한 것은 AD. 33~36경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본문은 바울의 회심 후 약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고백이다.
그런데 이 고백(告白)은 이 편지를 쓰고 약 20년 후, 즉 예수 믿고 40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로마 감옥에 수감된 때도 똑같이 재연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기독교적인 삶의 핵심은 이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현재적 경험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신자가 2천년 전에 겪으신 죽음,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을 현재적으로 다시 경험할 때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a. 우리는 커다란 죄인(罪人)이다.
b.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 십자가 죽음의 경험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 사랑의 경험으로 소환한다.
이때 신자는 예수 십자가 죽음의 빛 앞에서 깨닫는다. 자신은 다만 하나님께 용서받은 죄인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그때마다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자기의 그릇된 사랑과 정욕(情慾)이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만 사랑하고 의지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억하면서 사는 신자가 되자.
B.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
이어서 바울은 이제 죽음이 아니라 삶(living)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자기가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래로 어떻게 예수와 동행하며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中)
이것은 앞에서 언급된 예수와 함께 죽는 죽음의 경험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復活)과 함께 신자가 다시 사는 경험이다. 이것은 그가 예수와 함께 죽은 것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는 부활의 현재적 경험을 말한다.
누구든지 회개하는 순간, 자기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경험을 하면 반드시 그가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生命)이 주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죽은 것과 같은 영혼이 다시 활기를 얻고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신자 안에서 스스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영혼의 생명, 곧 영적 생명이라고 부른다.
신자가 구원받는 순간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성부에 의해 하늘 생명이 그에게 부여된다.
이후로 그 생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신자가 누리는 영적 생명의 풍성함은 그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가에 달렸다.
그 생명은 성령 충만으로 풍성해지기도 하고, 성령(聖靈)을 근심케 함으로 핍절하게 되기도 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경험하는 매 순간,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다시 영혼이 살아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신자는 이 부활 경험의 실재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이것은 2천년 전에 골고다에서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다시 실재화 되는 경험이다.
이것은 너무나 영적이고 신비하기에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의 경험에 대해 바울은 말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그런데 얼핏 보면 이 말은 “나”라는 주체(主體)가 사라지고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주체로 대체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면 이때 내 인생의 주체인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라는 주체가 소멸된 듯한 삶을 과연 내가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이것이다. 여기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할 때, 거기서 말하는 그 “나”라는 존재는 참된 자아(自我)가 아니다.
이는 죄에 영향을 받으며 자기 욕심을 따라 살려는 거짓된 자아(自我)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죄와 욕심에 사로잡힐수록 그만큼 참된 자아에서 멀어져 거짓된 자아로 살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만큼 한 인간으로서의 참된 주체성(主體性)을 갖고 살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치에 대해 성경은 말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것이 무슨 뜻일까?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영으로 살아계시니, 그리스도의 영은 곧 성령이시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다.
a.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에 일치하는 마음.
b. 성령의 은혜 안에 사는 생활.
신자가 성령을 따라 산다는 논리(論理)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a.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b. 진리는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c. 그 사랑은 진리를 따라 살아갈 마음과 힘을 준다.
d.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신 것이다.
이때 신자는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자기의 주체성(主體性)을 가지고 자신의 참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거기서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참 자유다.
“이제 내가 가운데 사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下)
이 고백은 다음 사실을 보여준다. 즉, 순전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떻게 일치(一致)를 이루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마르틴 루터(M. Luther)가 당시 레오 10세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사랑이 항상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불러일으킨다.”(M. Luther)
신앙생활은 믿음생활이다. 매 순간 믿음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죄에 대해 죽는 것이다.
또한 믿음으로써 자기 안에서 예수의 부활에 현재적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의(義)에 대해 사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영적 경험을 통해 은혜의 생명(生命)을 충만히 누리는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을 통해 신자는 살든지 죽든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한다.
이로써 삶의 모든 시련을 이기고 오직 은혜로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
III. 적용과 결론
구원받은 신자도, 예수를 사랑하는 신자도 여전히 “육체(肉體) 가운데” 산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이 신앙이다(고후 12:9).
그러나 거기서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살아있을 때나 죽을 때에도 언제나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께 붙잡혀 있을 수 있다.
거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사로잡힌 삶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7 2023. 4. 23. 주일낮 예배
< 예수 생명 나타나는 길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세속화를 꾸짖으며 AD.55년경에 쓴 편지가 고린도전서다.
그 후 약 1년 후에 고린도후서를 쓴다. 자신의 책망하는 편지를 받은 교회가 회개하고 뉘우친다는 소식을 들은 듯하다(고후 2:2).
많은 눈물과 기도 속에서 쓴 이 편지 속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명(生命)의 비밀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준다.
II.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길
사도 바울은 그 영적 생명을 “질그릇에 담긴 보배”로 묘사한다(고후 4:7).
당시 질그릇은 가장 값싸고 서민적인 그릇이었다. 또한 쉽게 깨진다는 점에서 연약함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질그릇”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육체가 덧없고 연약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비록 신자일지라도, 우리의 육체(肉體)는 연약하다. 물질인 몸이기에 필멸하는 그런 존재로서 쉽게 병들고 다치는 존재다.
그런데 그 하찮은 질그릇과 같은 육체 안에 보배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보배(寶貝)”는 무엇인가? 그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인 신자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이니, 또한 예수의 생명이었다. 왜냐하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영혼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영적 생명 때문에 모든 시련과 역경과 박해를 이기게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그러면 질그릇 같이 연약한 신자 안에서, 이 예수의 생명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어떤 능력(能力)을 가지고 있기에 그 모든 어려움들을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는가? 사도 바울은 그 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A.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
첫 번째 비결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예수의 죽음(the death of Jesus)”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이미 오래전 골고다에서 죽으셨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짊어진다는 말인가?
1. 예수의 죽음
“예수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죽음이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대리적 죽음이며, 우리의 속죄를 위한 죽음이었다.
죽음이란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이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산 사람이었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생명이 끊어진 것을 가리킨다.
2. 죽음을 짊어짐
그러면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짊어짐”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페리페론테스(περιφέροντες)”인데, 이는 “운반하다, 지니고 다니다, 매달고 다니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페리페로(περιφέρω)”의 분사형이다.
그러면 어떻게 시간적으로 이미 끝나버린 “예수의 죽음”을 지금 우리가 다시 짊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현재적으로 다시 실재화(actualization) 되는 예수 죽음의 경험을 가리킨다.
“짊어진다”는 것은 짐을 지는 자와 짐 자체가 하나 된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죽음을 늘 지녀서 우리의 일부처럼 된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이미 2천년 전에 있었던 예수 죽음의 사건이 우리 마음 안에서 현재적으로 다시 경험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예수 죽음의 경험 때문에 육적 자아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약화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비하고 영적인 경험이다. 신비하기에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영적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옛본성은 죽고,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더욱 하나 된다. 이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a. 심판하시는 진노의 경험이다. 즉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던 때에 그분이 몸소 받으셨던 하나 님의 진노를 함께 느끼게 된다. 이때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된다.
b. 용서하시는 사랑의 경험이다. 아들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 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용서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거기서 비록 죄인이지만 자기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때 정욕과 욕심을 사랑하는 자기(自己)를 미워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과 죄에 대한 사랑을 내려놓게 된다. 이런 경험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수의 사람들은 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것이 바로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경험이며(빌 3:10),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경험이다(갈 2:20).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이다(롬 6:8).
B. 예수의 생명이 나타남
신자가 예수 죽음을 현재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그와 함께 죽을 때, 바로 그 순간 또한 예수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1. 예수의 생명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생명(生命)”이란 무엇인가? 예수는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요 1:4).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세상이 그분의 진리 때문에 다시 살게 될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죄(罪) 때문에 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생명”은 단지 그런 원리적인 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죽은 예수의 육체를 다시 부활(復活)하게 하신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살아있는 생물체의 생명의 본질을 다섯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1)세포, (2)신진대사, (3)항상성, (4)성장과 발달, (5)재생산
그러나 그것은 생명이 어떻게 작동(作動)되는지를 보여줄 뿐, 생명 자체가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예수의 생명”에서 말하는 생명(生命)은 “인간의 영혼을 참된 영혼으로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 속성”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죽은 예수의 몸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으로 보여주셨다.
우리의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인 동시에 “예수의 생명”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생명의 능력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그 생명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이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려 주신다.
2. 생명의 나타남
예수의 생명은 우리에게 나타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육체를 다시 부활하게 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나타난다.
이미 죽어서 마른 뼈와 같이 된 영혼(靈魂)에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
그런 생명의 역사가 우리 영혼에 대해 일어난다. 이때 은혜(恩惠)에서 멀어져 죄 때문에 죽은 자처럼 되어버렸던 우리 영혼을 다시 충만한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신다.
이때 마음은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된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영적 부활의 경험이 바로 예수 생명의 나타남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III. 적용과 결론
인생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이런 영혼의 생명 없이 살려고 하기에 힘든 것이다. 내 인생의 무게는 세상의 무게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무게다.
그것은 죽은 옛본성이 역사하는 무게이며 하나님 없는 자기 사랑의 무게다.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살리셨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현재적으로 참여하는 자들을 살리신다. 그 은혜의 생명으로 살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8 2023. 4. 30. 주일낮 예배
< 예수 십자가에서 하신 일 >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I. 본문해설
본문은 로마서 6장이다. 사도는 3~4장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다루었다.
거기서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되게 하는 “새로운 한 의(義)”가 나타났음을 선언하였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획득한 의다.
그러면서 본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信者)가 어떤 영적 원리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준다.
II. 예수 십자가에서 하신 일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비결이 자신에게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 있음을 보여준다.
A. 죄의 몸을 죽게 하심
먼저 그 것은 예수와 함께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해 주셨다.
죄(罪)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정당한 대가(代價)는 무한하고 영원한 형벌이었다. 이로써 세계와 인간은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죄를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용서해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결코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이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그 감격 속에서 사는 것”이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가 죄인이었던 것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신 것이다.
신자는 자신이 받은 구원에 감사하는 것만큼만,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이 구원(救援)의 은혜가 매일매일 신비하게 다가와야 한다. 그것이 결코 당연하게 느껴지지 말아야 한다.
사도는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여서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옛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슬러 살며 하나님을 대적하던 불신자(不信者)로서의 옛성품을 가리킨다.
그러면 그 옛사람이 어떻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가?
a. 거듭남으로써
b. 성화됨으로써
B. 죄에서 의롭게 하심
또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한 것이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7)
십자가의 공로로써 그를 믿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에 이르기까지 모두 용서해 주신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법정(法庭)에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을 지배하던 죄악의 세력을 깨뜨려 주셔서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게 해주신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본성(本性)을 주시고 거룩함을 좇는 새로운 경향성을 갖게 하셨다.
죄의 능력을 이기고 거룩한 성령의 감화를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이전에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살면서 죄의 종노릇했다. 신분은 마귀의 자식이었고, 영혼은 죄의 사슬에 매여 있었다.
그리나 이제 말씀을 깨닫도록 눈을 열어주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의 수단(手段)들을 주셨다.
무엇보다도 죄인인 우리를 예수 공로 힘입어 의롭다 여겨주셨다. 죄와 유혹을 이기고 믿음으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은혜의 방편들을 주셨다.
신자인 우리 안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있으나, 매일 주님 의지(依支)하고 기도함으로 능히 이길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때로는 실패(失敗)할 때가 있다. 그러나 다시 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고 다시 살 소망을 갖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은 모든 나쁜 것은 오직 우리 스스로 선택한 죄(罪) 때문이고, 모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다.
우리를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생각하라. 우리의 지위(地位)가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지를 생각하라.
III. 적용과 결론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그리고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신다. 우리 위해 자신의 몸을 깨뜨려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다.
눈을 들어 구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라. 예수 안에서 끊을 수 없는 사랑에 붙들려 살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 1 (2023.3.26._주일오전)
1. 예수 죽으실 때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0-51)
녹취자: 조복령
Ⅰ.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마지막 광경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기 위한 형(刑) 집행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사전에 예수에 대한 고발과 체포, 심문과 재판의 과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잘못된 동기와 그릇된 절차를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증인을 내세워 예수를 고발했고, 심문과 재판의 과정도 모두 불법하였습니다. 심지어 제사장인 본디오 빌라도조차도 피고인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형 언도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죄를 확신한 재판장이 왜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까? 이것은 정치적인 음모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사주를 한 군중들이 예수의 무죄를 선고하면 그 재판의 결과에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에는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때였고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이때 빅뉴스가 바로 예수의 재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는 순순히 재판을 받고 죽을 것인가?' '다시 한번 기적을 일으켜 자기를 구원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빌라도의 법정 뜰의 언덕에 뒤덮이도록 모였고,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사형 언도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하여 만약 폭동이 일어나게 되면 정치가로서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치명적인 위기가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은 예수가 죄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언도했던 것입니다. 재판의 판결은 이처럼 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침묵 속에서 순순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악한 자들은 자신의 계략대로 예수를 죽이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는 바로 예수의 대리적 죽음을 통해 수많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을 위해 당신 자신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II. 예수 죽으실 때
금요일 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습관을 따라 찬송하며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습니다. 거기서 땀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으나 예수님은 이미 잠시 후 짊어질 십자가의 고난을 온 정신과 마음으로 느끼셨고, 거기서 자기의 유일한 소망이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매달리며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두고 가는 사랑하는 제자들과 교회들을 위해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앞잡이 노릇을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가룟 유다가 하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관할하던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의 이 사건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헤롯 총독에게로 이송하게 하였습니다. 당시에 마침 잠시 예루살렘에 와서 머물고 있던 헤롯은 예수를 넘겨받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는 그가 친히 그분에 관한 놀라운 기적의 소문들을 이미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헤롯이 바라는 바는 예수가 자기 앞에서 무슨 기적이라도 행하시는 것을 보고자 함이었다고 누가복음 23장 8절이 말합니다. 그래서 헤롯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의 진정성을 의심하셨고 진실로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물어보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망한 헤롯은 예수에 대한 심문을 마친 후 다시 빌라도에게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A. 영혼이 떠나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운명하시기 전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눅 23:34), "···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요 19:2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 내가 목마르다"(요 19:28), "··· 다 이루었다 ···"(요 19:30)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남기신 말씀이 "···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눅 23:46)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에는 네 번째 말씀이 마지막으로 본문에 실려 있습니다. 46절에서 말합니다.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그러나 이 외침은 결코 예수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절망하신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분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이 깨어진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이 외침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래 이 십자가 형벌은 로마인이 이방의 야만족이었던 시절에 만든 사형제도입니다. 역사상 인류가 고안해 낸 사람을 죽이는 방법 가운데 가장 잔인한 방법이어서 십자가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조차도 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기분 나빠하였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얼마나 잔인했는지 어떤 죄를 지어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형벌에 처해지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일반적인 범죄자들은 결코 이 끔찍한 십자가 형벌에 처해지지 않았고 강도나 민란을 일으킨 사람, 나라에 반역죄를 지은 자들만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형벌이 선고되고 나면 두 가지 규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독하게 채찍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거기서 옷을 모두 벗기신 후 수없이 채찍질을 당하시고, 침 뱉음을 겪으시고, 모욕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조롱하듯이 예수께 홍포를 두르고 가시 면류관을 눌러 씌어 피가 얼굴에 흘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대를 들려주어 우스꽝스러운 왕의 모습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사람들이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관습을 따라 130kg에서 140kg쯤 되었을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가셔야 했는데, 그 길이는 약 2.5km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가 없게 되자 구레네 시몬을 앞세워 대신 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다 언덕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먼저 세로 막대를 땅에 깊이 심고 그다음에 가로 막대에 예수를 눕히고 양손에 커다란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도르래를 이용해서 세로 막대기 위로 올렸고, 거기에 끼워 십자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세로 막대에 다시 한번 못을 박아 예수님의 두 발을 박았습니다. 처음에는 손바닥 중간에 못을 박았는데,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손바닥이 찢어지면서 죄수의 몸들이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일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후일에는 바로 정맥이 흐르는 손목뼈에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끔찍한 잔혹성은 매달려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최고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못 세 개에 매달려 모든 몸무게를 감당하며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목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 십자가 형벌의 잔혹성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관까지 쓰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 당하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으면 당연히 핏줄을 못이 건드리게 되고, 동맥이라도 건드릴라치면 피가 콸콸 솟아서 쏟아지게 됩니다. 온몸에 출혈이 계속되면 신체에 한 증상이 찾아오는데, 지옥을 넘나드는 것 같은 끔찍한 두통과 심한 목마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 가운데 다섯 번째 "내가 목마르다"하고 부르짖으실 정도였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큰 죄를 지은 자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간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관습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죄수들에게 해융이라는 스펀지 같은 곳에 독주를 적셔 갈대에 꿰어 높이 들어 마시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거를 빨아서 마시면 통증을 좀 줄일 수 있었으니, 이것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죄인들을 향한 예루살렘의 마지막 자비심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께도 그러한 해융에 적신 독주가 올라왔으나 예수님은 잠시 맛보시고 그것이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독주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러고는 마다하시고 당신의 형벌의 고통을 온전히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시는 형벌에 대한 큰 고통의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한히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까지 생애 내내 자신은 아무 죄도 없으셨고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십자가에 매달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 같은 큰 고통을 당하고 계셨으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탄식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그때가 심판받아야 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단 한 번도 하나님과 낯설거나 혹은 거리감을 느껴본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한히 진노가 쏟아부어지는 순간이었고, 이것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든 혹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때에든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5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마 27:50) 여기서 크게 지르신 소리가 무엇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종합해볼 때 아마도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제 여섯 번째 말씀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이거나 혹은 일곱 번째 말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신 누가복음 23장 46절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일평생 모든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분이 무슨 죄가 있길래 십자가에 매달려 반역한 죄인처럼 형벌을 당하셨겠습니까? 그에게 죄가 있으셨다면 사람을 너무나 사랑한 것밖에 없으셨습니다. 주린 자를 먹이시고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고통받는 자와 함께 울어주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허기진 자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당신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지만, 사람들은 당신의 품에서 쉼을 얻도록 그렇게 자기를 모두 받쳐 헌신하며 사신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순간 누가 예수님 곁에 있어 주었습니까? 병 고침을 받은 많은 사람은 구경꾼이 되어 모였다가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들만이 눈물을 흘리며 그 십자가 아래에 있었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사랑하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보다 목숨을 더 사랑하여 멀리멀리 도망갔습니다. 후에 뉘우치며 돌아온 요한만이 십자가 아래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일평생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병든 자를 어루만져 섬기시던 그분의 손을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유다와 갈릴리와 사마리아까지 지나며 병든 영혼을 구원하시던 그리스도 예수의 발에 못 박았습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모두 쏟으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확인 사살하기 위한 로마 병정들의 잔인함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하셨습니까? 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착한 일만 하신 그리스도가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죽으시기 위한 대리적인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구원받을 우리가 모두 죽는 것을 차마 보실 수가 없어서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우리는 살리시고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으로 받으시며 그렇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술 먹고 바람피우고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타락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패역한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은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끔찍한 보혈의 형벌로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구원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타락의 증거인 것입니다. 나는 오늘 묻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 하나의 이유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해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그리고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당하신 흠 없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얼마나 부당한 것이었는가?' (이것을) 생각하며 감당할 수 없는 은혜에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어린아이들조차도 십자가를 설교하면 가슴을 쥐어뜯으며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죄인 받으소서.’ 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우리의 눈에서는 왜 그 십자가의 눈물이 사라졌습니까?
스물한 살에 제가 회심을 하고 두 번째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훈련소에 있을 때 군목님이 가르쳐준 대로 교회에 찾아가자마자 목사님께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이제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제 영혼을 잘 지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쓸모없는 사람이지만 무엇이라도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제가 섬기겠습니다. 교인이 100명도 안 되는 교회였으니까 목사님이 매우 기뻐하시면서 '부탁이 있는데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쳐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몇 년 안 돼서 부장 집사가 됐습니다. 교회가 가난해서 교역자를 쓸 수 없었고 여름성경학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금식하며 여름성경학교에 은혜를 달라고 빌었습니다. 주일 오후에 성경학교가 시작되는데, 비가 장대처럼 쏟아부어지는 것입니다. 우산을 쓰고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너무 서러워서 눈물이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무슨 학생들이 오겠습니까? 한 50명이 겨우 모여서 개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다음 날부터 주님이 역사하시는데 하여튼 80명 정도 모이던 주일학교에 80명도 안 됐습니다. 한 60명 정도 모이던 주일학교에 350명이 모였습니다. 도저히 예배당에 수용할 수 없어서 의자를 다 들어내고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강대에 올라오고, 그것도 모자라서 교회 문을 활짝 열고 골목에 신문지를 깔고 아이들이 앉아서 스피커로 저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저녁때 모여서 설교가 끝나면 아이들이 교대로 지하 기도실에 내려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부르던 찬송이 바로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라는 찬송가였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애통하며 우는지 그걸 그치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어느 집사님 두 분이 아이들에게 간식이라도 주겠다고 왔다가 기도실 문을 열고는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1년 내내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데, 우리 아이들은 저렇게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분의 고난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니 우리가 부끄러워서 아이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학식이나 사회적인 신분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 영원히 죽을 죄인들이고, 이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이것입니다. 일평생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고 그 생명이 나타나게 하며 사는 것입니다. 숨질 때 되도록 예수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 살을 찢으시고 피를 쏟으신 것이 우리의 잊을 수 없는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예수 죽으심의 신앙을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휘장이 찢어짐
바로 그때 골고다에서 약 25킬로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 두 장소를 구분하던 휘장이 둘로 찢어진 것이었습니다. 51절이 말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이 휘장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단단히 짠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그룹들 곧 천사들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휘장을 만든 천은 그것을 짠 실도 질겼지만, 매우 단단하게 직조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단단했는지 그 휘장은 양쪽 끝에 황소를 매달고 채찍질을 하면서 반대편으로 달려도 찢어질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휘장이었습니다. 그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만 오직 대제사장 홀로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며 이스라엘을 위해 용서를 빌 수 있었습니다. 성소에는 금 향단과 금 촛대, 진설병 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성막의 구조상 성소를 통하지 않고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는 것은 이 일이 결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완전히 찢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계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원사적인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셨으며 이제 영적 이스라엘인 신약의 교회를 위해 더 이상 인간 대제사장이 필요 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하기 위해 흠 없는 자신의 몸을 대속제물로 드려 영원히 단번에 구원을 얻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사장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인간 제사장의 중보가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찬양)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위대한 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벧전 2:9上) 주목해 보십시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오"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전의 휘장은 찢어지고 이제 더 이상 인간 중보자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다시 발견된 만인제사장의 교리입니다. 즉 누구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중보만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축복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었고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죄인인 우리가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와 공로를 의존하지 않고 오직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된 것을 자랑하여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은 찢어졌고 제사장밖에 들어갈 수 없는 성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친히 예수의 피로 제사장으로 삼으사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면서 흘린 창에 허리 상하여 흘린 그 피를 주께서 흥건하게 보좌에 이르기까지 뿌려놓으셨고, 이제까지 우리들이 믿고 살아왔던 우리 의(義)의 신발을 벗어버리고 맨발로 그 보혈의 핏길을 걸어갑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쏟으신 그 모든 보혈을 밟으며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보좌로 나갑니다. 나아갈 때 우리의 양심은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끔찍한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하여 걸어가느냐?' (이렇게) 물을 때 우리의 양심은 파랗게 질립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대답합니다.
(찬양)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고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그렇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노라고 예수의 피, 십자가의 붉은 보혈을 의지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자신 있게 믿음으로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이르러 차마 거룩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지도 못한 채 두 손으로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엎드려 우리가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원수로 갚으며 불충하게 살았는지를 고백하며 나는 공로 없으나 나를 위해 임마누엘의 피를 뿌리시고 그 샘에 나를 담갔다가 꺼내신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용서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탕자와 같이 당신을 떠났던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품에서 예수 죽인 것을 우리의 몸이 짊어지고 살아왔으나 이제는 그 예수 때문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웬 말인가! 웬 은혜인가!’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네
그 흐르는 눈물로 우리의 그릇된 삶의 동기를 씻어내고,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의 죄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의 속사람이 그래서 예수와 함께 다시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수인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날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우리의 자랑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그 피로 깨끗게 씻겨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 은혜에 감사하며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 찢어진 휘장 사이로 난 핏길을 걸어 수시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배우는 여러분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멀리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함과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림으로써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렇게 우리 스스로 걸어가 비참하게 살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증거입니다. 그 십자가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의 교제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죽는 날까지 누리며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선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2(2023.04.02._주일오전예배)
2. 십자가 지고 가신 길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눅 23:26-27)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신앙의 깊이는 십자가를 아는 깊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정의가 무엇인지,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올바름이고, 올바르지 않은 우리를 어떻게 용서해 주시는지를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십자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경건의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서 재현되는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죽음, 그 죽음과 함께 경험되는 부활의 재연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과거를 돌아보면 항상 하나님 앞에 은혜 안에 있었던 때는 십자가에 대한 감격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 대한 은혜의 감격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오늘날 메마른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고전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신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고 계실 때 육신적으로 매우 고단하셨을 것입니다. 그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지만 아마 포식하셨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잠든 제자들을 곁에 둔 채 당신은 땀이 피가 되도록 쏟아지는 그 고난을 미리 경험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여 체포되시고, 빌라도에게로 끌려가셨고, 거기서 수난을 당하신 후 헤롯에게로 끌려오셨고, 다시 헤롯에게서 심문을 받으신 후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 브라이도리온이라는 왕궁 수비대가 있는 곳에 끌려가셔서 채찍에 맞으셨고, 가시관을 쓰시고, 홍포를 입으시고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으니 사람의 몸을 지니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얼마나 고단하셨겠습니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의 행렬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꾸 쓰러지심으로 지체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진 곳마다 말뚝에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모두 여섯 개입니다. 지체되는 것을 보며 군병들은 마음이 다급해졌고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들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의 뒤를 따라오게 하였으니 구레네라는 곳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전승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십자가 구경을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도 북부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 내려져 옵니다.
결국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 깊은 사명감을 가지고 짊어지는 십자가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우리들이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감당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당신 가까이 이끄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또 원치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쫓으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았던 구레네 시몬을 생각하며 일체의 원망과 불평을 버리고 자기에게 지어진 그 십자가를 담담히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믿음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 십자가 지고 가신 길
A. 골고다로 가는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오르는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골고다 언덕이 죄수들을 처형하는 곳이었으니 특별히 십자가에 못 박아 죄수들을 처형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고 계셨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멀리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쓰라린 마음을 부둥켜안고 찾아온 갈릴리에서부터 온 여인들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따르는 많은 신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아서 예수를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마음으로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죽는지 한번 살펴보기 위해 따라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섞여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십자가에 순순히 못 박혀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이 예루살렘을 찾아왔던 유월절 명절의 많은 방문객들에게 최대의 뉴스거리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지만, 성경은 그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눕니다. 제일 먼저 백성들이었습니다. 이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라고 그저 되어 있는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도하는 두 구절에 단서가 나옵니다. 제일 먼저 3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눅 23:34), "···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눅 23:35). 즉 이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47절과 48절도 말합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눅 23:48). 그러니 이 백성들의 정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경하기 위해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구경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지금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있습니까? 누구의 죄 때문이었습니까? 그분은 결코 이렇게 형벌에 처해질 만한 죄를 지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은 모두 착한 일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셨습니다.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무지한 자를 가르쳐 어두운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불화한 자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게 예수께서 하신 일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줄도 모르고 주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미래의 심판을 가슴 아파하며 울지 않는 그들을 위해서 대신 눈물 흘려주시면서 사셨습니다. 자기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당신은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경거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백성들 가운데는 한 번도 예수를 만나지 못한 인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벳다 광야에서 나누어 주시던 떡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모두 변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기적의 능력을 사용하여 로마를 무찔러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때문에 앙갚음하듯이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고소해하며 혹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경하며 따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가슴 아픈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어두움은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고, 원래 그리스도 예수는 이 세상에서 환영받으시기보다 멸시와 욕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 백성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구경꾼들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았던 사람,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믿고 그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적어도 그리스도 예수의 이 죽음을 슬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영국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G. Whitefield)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는 것 같을 때마다 자기가 회심했던 교회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자기가 회심했던 그 의자에 입을 맞추며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피로 자기를 구원하셨는지를 되새겼다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 자녀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백성들처럼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대한 일체의 감동이 없이 구경꾼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들과는 전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태도를 가진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백성들 앞에는 수식어가 없는데, 이 여자들 앞에는 긴 수식어가 달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라고 했습니다. 이들 중에는 저 멀리 갈릴리에서부터 여기까지 따라온 여자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경하며 따라갔지만, 이 여인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내내 그 광경을 지켜보았고 주께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실 그때 말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채찍에 피투성이가 되시고 가시관을 쓰신 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오르는 길로 나타나셨을 때, 그때 이 여인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이 가까울수록 이 여인들의 흐느낌은 피어린 통곡으로 바뀌어 갔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구경하며 따라갈 수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이 여인들은 흐느끼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고, 통곡하지 않고는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그렇게 이 여인들을 백성들과 다르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사랑입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이 자기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거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나면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계를 두루 통치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들에게는 이 백성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온 마음으로 항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잘못하셨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 일 이외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 하나님께 용서를 비신 일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분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길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민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바라바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예수를 죽일 바에야 차라리 우리를 대신 죽이소서.'라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함성 속에 이 여인들의 울음소리는 묻혀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는 불의한 인간들의 죄악의 수레바퀴에 짓밟히듯이 그렇게 피를 흘리며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 흘리심은 누구를 위함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세상이 아무리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하고 십자가의 정신을 잃어버렸어도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다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자신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마침 저는 한 이야기의 자료를 찾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공부하기 위해 아마도 10살 미만이던 때에 보내졌다가 수도원이 폐쇄되자 나폴리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총명했던 아퀴나스는 거기서 열심히 공부하기를 열네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공부했습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폴리대학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화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주제로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쓰던 어느 날 채플실에서 주님께 엎드려 간절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하는 광경을 몇몇 친구들이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퀴나스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성전에 걸린 십자가를 향하여 주님 앞에 더욱 기도했습니다. 그때 십자가에서 친구들조차 아주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아퀴나스야! 네가 참 잘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길래 이렇게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 예수님은 라틴어로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당시 쓰던 언어가 라틴어였습니다. 그때 아퀴나스는 엎드렸다가 두 손을 들고 주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도미네, 논 니시 떼(Domine, non nisi te)" "주님이시어, 당신 말고는 아무것도 나에게 원하는 것이 없사옵나이다." "당신 자신을 주시옵소서." 이런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예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글을 쓸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 당신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고, 그분의 마음에 하나님 사랑을 모르던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을 알게 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통곡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습니다.
B. 우리는 누구인가?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백성들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구경하며 따라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이 여인들처럼 가슴을 치며 슬피 울며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마 이 여자들의 마음속에도 똑같이 누군가가 '너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우느냐?', '무엇을 너희에게 해주랴?'라고 물었다면 아마 이 여인들도 똑같이 대답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물으셨다면 이 여자들도 똑같이 답변했을 것입니다. "도미네, 논 니시 떼(Domine, non nisi te)" "주님이시여, 당신 말고는 아무것도 내게 필요한 것이 없사옵나이다."
(찬양)
마르는 눈물 타는 목마름 피에 젖은 십자가 위에
오 나의 주님 용서하소서 죄인 위해 고난받으셨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의 고난에 n분의 1로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그 피로 오직 나를 구원하셨다고 그렇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바치셨습니까? 왜 나를 위해 그 큰 고난과 멸시를 받으시고 죽으셔야 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질문해야 하는 물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뜻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랑이 그를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여인들은 흐느꼈습니다.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숨죽이며 울먹이던 이 여인들은 그리스도께서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를 메고 끌려 나오실 때 그 흐느낌은 커다란 울음소리로 변했고 못 박히실 골고다에 가까이 올수록 이 여인들의 울음소리는 핏빛 통곡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간악한 로마 병정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하였습니다. 그분이 일평생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병든 자를 고치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던 그분의 손을 십자가에 못 박고, 병든 자와 무지한 자를 찾아 여러 곳을 다니시던 그분의 발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하면 그 소리가 들립니다.
(찬송)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III. 적용과 결론
신앙생활은 이렇게 예수 죽으신 골고다 언덕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구경하며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분이 우셨던 곳에서 함께 울고, 그분이 고통당하셨던 곳에서 함께 아픔을 당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여러분이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예수가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를 사랑하여 그분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경건하게 보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한 것임을 깊이 자각하고 흐르는 눈물 속에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여 영원히 살아나는 한 주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3(2023.04.07_연합금요기도회)
3. 만세 만석 열리니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6)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녹취자: 백지영
많은 금요일 중에 고난 주간의 금요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날을 가리켜서 성금요일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굿 프라이데이(Good Friday)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주께서 죽으신 그 날을 서양 사람들은 굿 프라이데이, 좋은 금요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관점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 인류가 누리게 된 유익이 좋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금요일을 성금요일, 굿 프라이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르비딤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는데 큰일 났습니다.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몇 명이 애굽을 출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후에 이루어졌던 인구조사를 미루어본다면 20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가 약 67만 명 정도 되었으니까 어림잡아서 최소한 250만 명은 되었을 사람들이 애굽을 탈출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제 모세에게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고 했으니 모세는 참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어디서 물을 만들어서 조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습성이었습니다. 뭐든지 좋은 일이 일어날 때는 지도자 모세를 칭찬하는 법이 없고, 나쁜 일이 있을 때는 모든 책임과 누명을 모세에게 씌우고 모세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그렇게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마음의 불신앙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모세가 “내가 왜 이 백성들을 이끌어야 됩니까? 내가 이 백성들을 내 몸으로 낳았습니까? 내가 이 백성들의 유모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어찌하여 이 많은 백성을 내게 맡기셔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민 11:11-12)하면서 하나님 앞에 탄식했던 장면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너희는 나와 다투느냐, 왜 하나님께 이렇게 원망하는 말을 하느냐”(출 17:2)고 할 때 그들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로 거기에 가만히 살게 버려두지 왜 우리와 자녀와 우리의 가축들을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여기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고 하면서 모세를 죽일 듯이 덤벼들었습니다. 모세가 너무 안타까우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이 백성들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출 17:4) 모세에게도 아무 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출 17:4) 아마 심정적으로는 “차라리 돌에 맞아서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위기 가운데 몰고 가신 후에는 항상 하나님이 직접 해결을 하지 않으시고 모세를 사용하셔서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긴 광야의 생활 속에서 항상 문제가 닥칠 때마다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에게 책임을 추궁했지만, 결국은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모세를 기억하셔서 그 백성들을 돌아보시는 공식이 되풀이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똑같이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출 17:4) 그러자 하나님께서 백성들 모두에게가 아니라 모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아니 그냥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듯이 그냥 비가 쏟아지게 하셔서 물을 먹게 하시든지 해결을 하시지, 하나님이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모세에게 기도하게 하시고, 모세에게 응답하시고,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 지도자들을 데리고 그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호렙산이 있는 그 바위의 거기에 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있을 테니까 너희도 거기에 서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탈출하게 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 텐데, 그것은 바로 너희들이 보기에 부족한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모세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너희를 이끄는 지도자니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시겠다고 하는 질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었으면 이스라엘은 지탱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도전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에서 그들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만 말하시더냐 우리에게도 말하시지 아니하였더냐 우리와 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더냐”(민 12:2)라고 물으면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는 사람이고 주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매우 나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시고 온몸이 하얗게 문둥병이 걸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치료해 주셔서 고쳐주시고 모든 질서를 다시 한 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면서 광야에서 한 40년 가까이 훈련을 받았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텐데 거기서는 분명히 나라가 서게 되고, 노예살이할 때는 애굽 사람 말을 들으면 됐지만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의 질서에 복종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일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산에 있는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출 17:5-6) 치려니까 모세도 그 반석에 다가가야 되겠지요. “그곳에서 물이 나오리니”, 반석이 어떻게 물을 낼 수 있습니까? 터져야지, 열려야지만 물이 나올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반석을 쳐라. 그리하면 그곳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출 17:6)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렇게 반석을 쳤고, 그러자 거기서 물이 나왔고 백성들은 마시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은 단순합니다. 그런데 또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린도전서에서 해설을 정교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반석을 쳐서 거기서 물이 쏟아져 나왔고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물이었으니, 그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라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바위가 깨지면서 물이 쏟아져 나왔고, 그 물이 내처럼 흐르며 그 많은 백성들이 해갈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해석을 하기를, 바로 우리가 모두 한 백성들로서 모두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백성이 되어 “신령한 음식을 먹었고”(고전 10:3),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일까요? 만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빈부나 귀천이 없이 똑같이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그 이슬처럼 내린 그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빈부나 귀천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빈부나 귀천은 우리의 육체의 생활과 관련이 됩니다. 부요한 사람은 더 좋은 것을 먹고, 가난한 사람은 못한 것을 먹고, 부요한 사람은 더 큰 집에서, 넓은 집에서, 화려한 집에서 살고, 가난한 사람은 그만 못한 집에서 살고, 부자는 아주 화려한 여행을 하고, 가난한 사람은 그저 하려하지 않은 여행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은 좌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건드려주는 문제는 아닙니다.
빈부나 귀천이나 상관이 없이 죽었던 영혼들이 무엇으로 살아납니까? 병들었던 영혼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처럼 그렇게 낙담한 영혼들이 어떻게 살아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병든 영혼들,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을 살린 것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부요한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가난한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많이 배운 사람의 영혼도 진리의 말씀 때문에 살고,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의 영혼도 진리의 말씀으로 삽니다. 어린아이들도 진리의 말씀으로 살고, 어른들도 진리의 말씀으로 살고, 노인도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도 마지막에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변화 받음으로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그렇게 우리를 바꿔놓습니다. 똑같은 그 떡을 먹으며 그렇게 광야를 지났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하기를 뭐하고 하느냐 하면, “똑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세가 그 반석 위에 서서 그 반석을 쳐서 반석을 터트려 물이 쏟아지게 한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고 자신의 육체를 찢으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것입니다. 아멘.
사람이 배고픈 것도 정말 견딜 수 없지만 목마른 것은 정말 견딜 수가 없습니다. 햇빛, 음식, 소금, 물, 이 네 가지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물이 없다고 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반석이 터치면서 물이 확 솟아나오면서 그 물이 냇물같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감격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가축들이 먼저 목말라서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고, 어린 자녀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목이 말라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도저히 생각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하나님은 반석을 깨트리셔서 그래서 그 물이 쏟아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방법으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를 고난 가운데 깨뜨리심으로 거기서 생명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든 사람들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걱정, 근심과 고통으로 가슴이 산산이 찢어질 것 같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와서 찬송을 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받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던 자신의 영혼 저 깊은 곳에서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는 생명의 힘이 솟아납니다. 살 길을 모두 잃어버린 그 사람이 이제 지쳐서 물 한 모금 먹으면서 다시 생명의 기운을 느끼듯이 속에서 생명의 기운이 솟아납니다.
이것이 누구를 통해서 오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만세 반석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깨뜨리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 영혼의 생명의 물을 한없이 마셔서 죽을 것같은 이를 살리시기를 원하셨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 같은 삶을 이기면서 살아가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2천 년 전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일회용으로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오늘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모여 기도하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주님은 만세 반석에서 깨뜨리신 당신 자신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메말랐던 우리의 마음에 은혜의 물이 흐르게 하시고, 그것이 생명이 되어 견딜 수 없었던 현실을 견디고 극복할 수 없었던 현실을 극복하며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온 산하가 가물고, 댐에 물이 십분의 일로 줄어들어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모두 다 심각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비가 왔는데 산에 올라가니까 물이 졸졸졸졸 흐르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좀 더 왔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물이 그렇게 흐릅니다. 산에는 물이 흘러야 진짜 산이고, 교회에는 은혜의 물이 흘러야 진짜 교회이고, 신자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물이 흘러야 그게 진짜 신자의 마음입니다. 한번 예수 믿은 것 가지고 남다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매순간 그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흘려주신 당신의 보혈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 피가 은혜의 강물이 되어 흐를 때, 우리는 원수를 용서하고 고난과 슬픔을 이기고, 죄 많은 이 세상이지만 그러나 여기가 영원한 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며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기한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 받은 때를 돌아보면, “그 힘든 시련의 시기를 어떻게 견뎠을까,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그 시기들을 어떻게 견뎠을까, 내가 어떻게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살아남았더라도 내가 어찌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지 않고 그래도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샘물이 우리의 마음속에 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수없이 많은 고난을 그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외로워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느끼지 못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이 보기에 아무리 외톨이처럼 버려져 있어도 그가 사랑을 느끼면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 마음속에 흐르는 그 은혜의 샘물의 정체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샘물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코로나 팬더믹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욜로(yolo) 노래를 하며 살았는데 이제 그런 말 하는 사람 없습니다. ‘소확행’이 한창 유행어가 됐는데 이제 그런 말 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끔찍한 팬더믹 사태를 겪으면서 오늘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도 영원한 것이 없고 항구적인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일상의 당연하다고 누리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당신의 큰 손과 편 팔로 우리를 보호해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이렇게 우리가 모든 것을 누리고 살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갈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저는 확실히 느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코로나 팬더믹이 일어나고 나서 기독교에 대해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적대적인 사람들은 아주 더 악랄하게 기독교에 대해 아주 반감과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이 코로나 팬더믹 사태를 통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없어도 “아, 인간의 힘이라는 것이 이렇게 하잘 것없는 것이구나. 그리고 무엇인가를 의지하며 살아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들이 많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나 천주교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많고, 제가 증인입니다. 매일 출근했는데, 그런데 평일에도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수시로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너무 힘든데 자기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지 예수 믿는 사람으로 나에게 가르쳐 달라 이런 사람들이 계속 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가 북 콘서트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서 전도지 꼽으면 그리고 길거리에 서서 전도하면 누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1년 통계를 내보니까 재작년 한 해 동안에 길거리에서 전도해서 예수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30명, 35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얘기는 무엇을 얘기합니까? 어느 때도 그런 해 없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가난해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팬더믹 사태를 통해서 완전히 신앙이 미끄러져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있고, 많은 사람은 오히려 더 가난해져서 우리 기도 빌드업(buildup) 운동 같은 것 매년 계속되면서 매년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간절히 찾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로 배우는 바입니다.
만세 반석이 깨뜨려졌습니다. 거기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러자 죽어가던 수많은 영혼들이 그 물을 먹고 살아났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렇게 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만세 반석을 통해 나오는 물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신 그 보혈의 피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시니, 오늘도 그분을 의지하여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의 능력이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이 시간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오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죽어가고 있을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반석을 쳐서 물이 쏟아지게 함으로 살려내셨습니다. 그 반석은 그리스도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찢으신 그 몸에서 쏟아지는 생명의 물로 살 수 있사오니,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십자가 말고 다른 곳에서 생명의 능력을 찾았던 것 용서해주시옵소서. 오늘 이 시간, 오 예수님 우리가 주님께 돌아갑니다. 십자가 앞에 돌아갑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돌아가오니, 주께서 오늘 우리를 받아주시고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속에서 반석의 샘물이 강물처럼 솟아 우리의 메마른 영혼 적시도록,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 현실을 이기며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녹취자: 조복령
예수의 죽음과 부활 4(2023.04.09. 주일오전예배)
I. 본문해설
성육신하신 예수는 육신적 혈통으로는 다윗왕 집안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말 성경 본문의 일부를 그리스어 성경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신(肉身)에 관해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靈)을 통해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롬 1:3-4, KNJ 私譯) 성결의 영을 통해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다. 둘째, 성령은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영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II. 바울이 경함한 혼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세계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을 목격하기는 하였지만 의미는 잘 몰랐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들은 어려서부터 믿어온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고도 그 의미를 몰랐던 것입니다.
A. 십자가와 처형
이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문과 처형에 관계된 이야기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처형은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해 교묘한 종교적인 고안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막 15:1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막 15:14)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를 죽이소서'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지 예수를 죽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사형의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목을 매달아 죽이거나 혹은 참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되 그분의 죽음을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인 신념과 결부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신념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을 수 있는데, 나무에 매달려 죽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1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下) 이제 답이 나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받게 해달라고 간청한 것은 그렇게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함으로써 예수가 선지자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죄인일 뿐임을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라도 제자들이 유포할지도 모르는 예수 부활의 소문을 백성들이 들었을 때 예수는 확실히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살아났을 리가 없다고 흔들림 없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B. 예수 부활의 사건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믿고 회심하기 전에 사울은 유대인으로서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심리적인 편견이었는데, 유대인만 선택된 백성이고 나머지 인간들은 다 쓰레기라는 신념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신학적인 신념이었는데, 나사렛의 젊은이는 결코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에 따르면 메시아는 훨씬 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아주 특별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울은 정통적인 유대인으로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대교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사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되고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쳤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 (행 9:4)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때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밖의 경험을 통해 사울은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이 대립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사람에게 커다란 혼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지금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표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죽었는데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는 경우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인데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이 하늘로 데려가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근데 이 두 경우 모두 그 사람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지만,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의 승천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죽었지만 하나님이 부활시키셨고, 부활한 후에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는 모세가 매우 특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활시켰다고 믿은 것입니다. 또 에녹과 엘리야 같은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림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이런 사람들처럼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은 인물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주를 받아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죽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느낀 혼란은 이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가 죄인으로서 저주를 받아야 했다면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다시 부활시켜주실 인물이었다면 하나님이 그를 저주하여 죽이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믿기로는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 저주하셔서 나무에 매달아 죽이시고 동시에 인정하셔서 부활시키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모두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이 분명하였고 또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지금 자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III.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함
사울은 회심하면서 자기의 지성에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깊은 깨달음을 경험했습니다. 캄캄한 밤하늘 같은 자기 지성(知性)의 방 천정이 찢어지면서 찬란한 빛줄기가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죽음의 의미였습니다. 여기서 사울은 예수 죽음의 이유가 이제껏 자신이 배워 온 것처럼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이 구원받을 우리를 위한 대리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모순처럼 보이던 두 가지 사실이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던 두 가지 편견,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편견과 예수는 메시아일 리가 없다는 편견이 깨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면 하나님이 부활시키실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것이었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더욱 인정하셔서 부활시키시는 것이 전혀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메시아로 죽으신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시 만남으로써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 속죄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깨달음은 예수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데도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의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속죄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義)를 믿음으로 받음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요약할 수 없는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성경적인 묘사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Jesus died for us) 여기서 '우리를 위한'이라는 이 말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 대해 갖는 세 가지 뜻을 나타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다. 둘째는 예수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셋째는 예수가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매달려 죽어야 할 십자가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자기의 모든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당신 자신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지은 죄는 당신이 대신 죗값을 지불하시고 그 대가로 죽으셔서 우리를 살리셨던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껏 사울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디도서 3장 5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셔서 온 인류와 세상 만물의 통치주가 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능력이 그를 다시 살리시고,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캄캄했던 사울의 영혼을 찢고 들어오는 한줄기 섬광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시라는 것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자기가 알고 있던 육적 이스라엘이 그렇게 소중했건만 알고 보니 그것은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밀의 씨눈을 싹 틔우기 위해서 썩어 없어져야 할 한 알의 밀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 믿는 종교 생활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차가운 율법주의와 율법에 대한 복종밖에 없었습니다.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깨어졌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그는 마음속에 솟아나는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하늘 자원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은 빗줄기처럼 쏟아졌습니다. 메말랐던 그의 마음, 율법의 정죄를 받으며 양심의 송사를 받으며 살던 생명 없었던 사람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이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완악하기 짝이 없던 사울은 비로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를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보내게 하였고, 그분이 자신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진리와 함께 풍성한 사랑이 쏟아졌습니다. 이제 옛날에는 사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는 바울로 변했습니다. 완악하던 사람이 깨어졌고, 잔인하던 사람이 변하여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평생 예수의 마음을 품고 잃어버린 영혼과 교회를 위해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기 전까지는 그는 결코 그 생명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의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상의 모든 식물들은 태양에너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태양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바꿉니다. 그 에너지를 가지고 꽃 피고 열매 맺고 줄기의 가지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런 식물들을 먹습니다. 그것이 다시 우리 몸 안에서 화학에너지로 바뀌고, 그 과정을 통해서 육체의 생명이 계속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게 육체의 생명 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체만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것이 변하여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되고 그 사랑이 에너지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인데 용서를 하게 하시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인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게 바로 은혜의 힘입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경험합니다. 시련이 겹치고 환란의 바람이 그치지 않습니다. 마음에 깊은 좌절과 낙심이 밀려옵니다. 상황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습니다. 마음이 열리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찬양)
그 형상 볼 때 내 마음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때 자기도 알 수 없는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힘이 솟아납니다. 어떤 힘입니까? '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우리 주님이 지금 내 마음 안에 와서 내 마음을 붙들고 계시다.'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지만 그분의 십자가 보혈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해주셨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자기를 위해 다시 부활하신 것을 보면서 나도 예수를 꼭 붙들고 있으면 예수와 함께 다시 살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었던 자기 자신이 살아나는 부활을 다른 곳이 아니라 내 마음과 영혼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함과 놀라운 힘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얼마나 충만하게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고,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영혼의 생명을 누리겠습니까? 생명은 우리 자신 안에서 자가생산(自家生産)되는 게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음으로써 생명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고, 그렇게 깨달았지만 살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진리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회개하며 도움을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생명을 우리 안에 풍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가끔 과거를 돌아보면, 저도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시련을 어떻게 이겼을까? 지금 그런 시련이 온다면 이길 자신이 없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고 많이 부족했는데 신기하게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게 내가 이긴 게 아니었습니다.
(찬양)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주께서 내 안에 사신 것이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충만히 있는 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생명으로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처받은 자들을 치료하고, 주린 자들을 섬겨 먹이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무지해서 진리를 모르는 자들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도 행복하게 살도록 도우며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질과 건강과 모든 것을 주신 것도 바로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삶이 바로 예수 오셔서 친히 모본을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생명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사람은 불행을 만나서 비참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이 없어서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받고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잃어버린 영적인 생명을 다시 한번 충만하게 되찾아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 생명으로서만 우리들이 승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이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인간의 고통은 지상과 천상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자원은 육체를 위해 필요하지만, 천상의 자원은 영혼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비참한 것이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무지 때문에 인간은 생명과 사랑을 잃어버린 채 좀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고 그뿐만 아니라 오늘 그 부활의 능력을 실제로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부활과 충만한 생명에 붙잡혀 시련을 넉넉히 이기며 기쁨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행 22:6~10)
녹취자: 이 솔
I. 본문해설
예수의 죽음과 부활 5(2023.04.09._청년부 회심집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계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약 3년간 함께 있었습니다마는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을 목격하였으면서도 그 의미는 잘 몰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려서부터 믿어온 유대교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올바르게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II. 바울이 경험한 혼란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알고 회심하기 전 사울은 유대인으로서 두 가지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심리적 편견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오직 유대인만이 선택된 백성이며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쓰레기라고 믿었습니다. 신학적인 편견으로는 나사렛의 그 젊은이는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은 메시아는 굉장히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그런 존재로 이 땅에 올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울은 정통적인 유대인으로서 아주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대교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 장면에 대해 사도행전 9장이 똑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상황은 이렇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내려와 그를 둘러 비쳤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내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까?”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은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박해를 당신 자신에 대한 박해로 여기셨으니 이는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과 예수 사이에 사랑의 연합이 있음을 영적인 연합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뜻밖의 경험을 통해서 사울은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의 대립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 매우 커다란 신학적인 혼란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둘째로는 그 부활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표시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전승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죽었다고 믿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결코 모세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부활하게 하셨다고 믿었고 부활한 모세는 하늘로 승천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승천기라는 외경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특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인물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구약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인정을 해주신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에녹이나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그 특별한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시거나 혹은 죽었는데도 살리신 사람들은 모두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이런 사람들과 같은 인정을 하나님께 받은 인물이라고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당시에 느낀 신학적인 혼란은 이것이었습니다.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죄인이라면 다시 살리실 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약에 그 예수가 다시 부활하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인물이었다면 그를 저주하여 죽이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믿기로는 동일한 인물에 대해 저주하시면서 동시에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하여 다시 살려내시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팩트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사실이었고 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셨다는 것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III. 세계와 인생을 보는 눈이 바뀜
사울은 회심하면서 지성의 벼락을 맞는 것 같은 깊은 깨달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죽음의 이유가 이제껏 자신이 배워온 것처럼 그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당신은 죄가 없었는데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죽음이 아니라 구원받을 우리를 위한 대리적인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두 가지 사실 사이에 모순이 해소되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를 부활하게 하신 것과 모순이 되지만 만약에 그의 죽음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대리적인 죽음이었다면 오히려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살려내신 부활의 사실이 모순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캄캄한 그의 지성의 어두움을 찢고 들어오는 한 줄기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칠흙같은 어두움 속에 바로 이 복음을 통하여 찬란한 빛이 그의 어두운 지성에 내리꽂혔고 그 눈부신 빛을 통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사실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일평생 지니고 있었던 두 가지 편견 곧 유대인만 하나님 앞에 선택된 백성이요 나머지 인종들은 쓰레기라는 생각이 깨졌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의 그 젊은이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는 확신도 깨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신 모든 계획을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류를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바로 그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는데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어 그렇게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게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정의로우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본다면 우리의 모든 죄를 거저 용서해 주시고 싶은 분이었지만 그러나 정의의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죄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망가뜨린 무한한 크기의 죄였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엇으로서는 그 죄를 죗값을 지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의 희생을 무한한 가치가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대속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받을 우리 모두를 당신 안에 끌어안으시고 우리가 받을 형벌을 당신이 대신 받으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은 당신이 당하시고 우리는 용서받고 다시 살길을 열어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였습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깨달음의 핵심은 예수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속죄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요약할 수 없는 복음에 대한 가장 짧은 성경적인 정의는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Jesus died for us.’입니다. 여기서 ‘for us’, 우리를 위함이라는 이 표현은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 대해 갖는 세 가지 의미를 나타냅니다.
첫째 이것은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우리가 각자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십자가의 형벌을 받고 죽어야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인류가 사라질 것이니 하나님의 창조를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가 당할 형벌을 대신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이익을 뜻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형벌은 당신이 감당하시고 용서는 우리가 받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세 번째 마지막으로 ‘for’는 바로 우리를 대표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대표하셔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품 안에 안으신 채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하나님의 정의의 진노를 한 몸으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당신 안에 있는 우리는 그렇게 형벌 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껏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결코 그분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구원하고자 하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실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렇게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그로 하여금 온 인류와 세상 만물의 통치주가 되게 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복음적인 사실에 대해서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하였습니다. 이 깨달음은 아주 캄캄한 영혼의 어두움을 찢고 들어오는 한 줄기 섬광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는 이제껏 캄캄했던 자신의 눈이 뜨여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한 줄기 빛도 없는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혔던 것처럼 그렇게 살았던 이 사람에게 동굴이 열리고 한 줄기 찬란한 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었습니다. 그분 안에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세계의 전개와 종말에 관한 모든 계획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비밀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의 세계관과 인생관 가치관이 모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은 이제껏 육신적인 이스라엘 백성 이외에 나머지 모든 인종은 쓰레기라고 믿었습니다. 그들 중에 매우 매우 착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있으면 천국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눈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자기가 알고 있던 이 육적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그림자일 뿐임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밀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밀알이 모두 밀을 생산하는 재료가 되는 게 아닙니다. 밀에는 쌀에는 눈이 붙어 있습니다. 눈. 그 눈이 바로 생명의 씨앗입니다. 그 눈에서 싹이 나오고 잎이 돋아서 그래서 밀이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밀은 그 쌀 그 밀의 눈을 싹 틔우기 위한 걸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육적인 이스라엘은 밀이었고 그리고 신약의 교회가 바로 그 밀의 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진정한 신약의 교회인 영적 이스라엘이 탄생하기 위해서 육적인 이스라엘은 썩어서 없어져야 하는 한 알의 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 없이 차가운 율법과 그 율법에 대한 복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이신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에 구속의 사랑
그는 예수를 믿은 후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 아들보다 더 사랑하셨으니 그 아들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시면서까지 구원하고자 하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자 지성에 어두운 장막이 찢어지며 찬란한 빛이 불어왔던 것처럼 이 사도 바울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하늘 자원이었습니다. 생명력 있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렇게 이 참된 생명을 모르고 살아가던 어리석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쏟아부어졌습니다. 진리와 함께 풍성한 은혜가 주어졌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사랑의 삶을 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던 삶을 꼭 닮은 삶이었던 것입니다.
지상에 이 식물들은 태양의 에너지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ATP라는 화학 에너지로 바꿉니다. 그것을 가지고 세포가 분열하고 성장을 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생명의 활동을 통해서 결실한 것들을 먹고 그것을 에너지로 활용해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게 바로 육체의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어딘가로부터 에너지를 얻지 않고는 육체의 생명이 유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도 똑같이 이런 이치로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 사랑을 에너지 삼아서 참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그렇게 살 때 그렇게 살게 하는 힘을 영혼의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충만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인간의 삶은 사랑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과 마음에 커다란 에너지입니다. 이것은 육체를 위한 자원이 땅의 자원이라면 이것은 영혼을 위한 하늘의 자원인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지난날을 생각해봅니다. 매우 힘들었던 인생의 한 시기입니다. 궁금합니다. 내가 그때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인생의 위기를 시련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지금 다시 내 앞에 전개된다면 이번에는 그때처럼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놀라운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지금 닥쳐도 이길 수 없었던 같은 그런 시련을 이겨냈던 것이죠?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어딘가로부터 알 수 없는 사랑의 힘이 우리에게 내려옵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리로다
어디로부터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납니다. 그리고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왜일까요? 내가 어디에 있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나는 견딜 수 있으며 나는 연약하지만 주님이 나를 당신의 품에 안고 있기 때문에 그분 품에서 나는 안전하다고 하는 확신이 이런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 풍성한 삶을 바라시기를 원하시니 이것은 영적인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육신의 가난도 매우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가난함과 배고픔은 육신의 배고픔과 가난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거덜나고 거지가 되어 버린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 바로 절망입니다. 그때 인간은 돈이 있어도 그 돈이 그 사람을 살려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옷이나 명예로운 지위 그리고 즐거운 오락거리가 기다려도 영혼이 파산 선고를 당하고 망해버린 사람은 위로할 길도 없고 살려낼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늘의 자원인 것입니다.
아주 힘겨운 일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면 현실을 마주하기가 싫고 이것이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을 정도로 힘이 듭니다. 근데 신앙이 있습니다. 그때 너무 괴로울 때 그때 주님을 생각합니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결심했던 일을 회상합니다. 세상이 준 모든 괴로움 잊어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그때 처음에 기도를 시작할 때는 고통받는 우리의 현실이 나를 서럽게 하고 외롭게 하였는데 이렇게 주님을 묵상하고 나면 나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이천 년 전에 그렇게 빈 들에서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흘리시며 기도하셨던 주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나의 서러움이 사라지고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이 내 마음에 스며들면서 그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내 마음속에서 ‘actualize’라고 하는데 재연이 되는 것입니다. 재연이 되면서 그 죽음 속에 나의 정욕과 죄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고 싶어 하는 세상 사랑의 욕구들이 함께 그 십자가와 더불어 못 박혀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강한 통증을 느껴야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죄와 욕망과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들이 살아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살아있는 생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양손에 커다란 대못을 박으며 그렇게 못 박을 때 그리고 그 사람을 끌어올려 나무에 매달 때 아프지 않겠습니까? 똑같이 그렇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생각하며 그 죽으심이 우리 안에 파고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그 실체화될 때 그 때 우리는 깊은 고통을 느끼는데 그 고통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그 고통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이 모든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다는 사실이 가슴을 파고들고 파고들면서 들어오고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거슬러 살던 모든 욕심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의 죽임의 경험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죽는 것입니다.
오래 교회를 다녀도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비밀을 모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와 예수 2천 년 전에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죽음이 영적으로 내 마음속에 들어오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실체화되고 그렇게 실체화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 속에서 우리의 정욕과 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되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은 너무 고통스러운데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이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나는 나의 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지만 그리스도는 일체의 죄가 없으신 순결하신 분이신데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찌르기 때문에 내가 아픈 것이 기억에 나지 않을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을 당해서 여러분들이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던 때가 있었습니까? 가족이나 친구 형제나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너무 아파서 차라리 그 사람이 당한 그 사고와 고통이나 혹은 질병을 내가 대신 차라리 그렇게 되는 것이 오히려 더 좋겠다고 할 정도로 느낀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깊은 고통이 고통을 참으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가 당할 그 고통스러운 형벌을 당신이 느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가 죽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찢으며 통곡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어떠한 죄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걸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게 죽는데 죽고 나면 그 죽자마자 새롭게 부활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 찼던 마음인데 그렇게 예수가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고통을 내 마음에 절절히 느끼면서 그 미움도 함께 사라지며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게 영적인 생명이 하는 일입니다.
완전히 낙심하고 절망해서 자기 인생에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근데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예수님이 자기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깊은 절망 속에서 죽어가면서 그렇게 예수의 고난을 생각할 때 그때 예수와 함께 죽게 되는데 죽자마자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 부활의 놀라운 기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부활이 무엇인가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시는 내 안에서 그 죄와 우리의 정욕 때문에 죽어 있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감격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그것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만들어주고 상처를 잊어버리고 그를 용서하게 만들고 절망과 죽음의 유혹 속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희망으로 자기 자신을 설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데 이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비결입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아주 높은 신자 속에 일어나는 경험이 아니라 방금 예수를 믿은 사람 속에서도 경험되는 이것이 없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 경험을 했는데 근데 나처럼 말로 이것을 정확하고 유창하게 표현을 못 할 뿐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경험한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생활과 영적 생활에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알려고 노력을 해야 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탐구해야 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이 견고하게 터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게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한 사람이 가장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비결은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실체화와 함께 거짓된 자기가 함께 죽고 참된 자기가 다시 살 때 그 참된 자기는 그리스도와 일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보이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내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고 싶은 일을 나도 하고 싶고 그분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하고 싶고 그들이 그분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원하지 않게 되는 일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꿔 말하면 ‘그런즉 이제는 거짓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참된 주체성을 가진 내가 산 것이니’라는 표현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류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렇게 너희가 회개하고 나를 사랑하게 될 때 그때 너와 나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질 텐데 거기에 너의 참된 자아가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상태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해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연합이라고 하는데 이 비밀을 깨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면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고 또 잃어버렸던 사람들은 그것을 다시 되새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인류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관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것과는 별로 큰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은 더 약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예전에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어떤 때와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인생과 세계와 그리고 인간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래서 예전의 가치관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교회 나와서 회심 집회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시도 때도 없이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찬송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예수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갖게 된 그 인생과 세계와 그리고 역사와 가치에 대한 관점들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간직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지만 전혀 다른 나라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인생관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함께 섞여서 먹고 마시고 놀러 다니고 그렇게 생활하지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는 다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때 무엇인가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느낄 수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는 교회에 다닌다거나 혹은 착한 일을 많이 한다거나 혹은 아주 범상하지 않은 엄청난 희생을 한다거나 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인생과 세계와 인간과 가치를 보고 살아가는 것 그게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영적인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고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이 별 것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 처음 믿었던 신앙의 관점으로 돌아가 거기서 행복을 찾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인간의 고통은 지상과 천상의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자원은 육체를 위한 것이지만 천상의 자원은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이 천상의 자원이 없기에 인간들은 많은 육신의 자원을 가지면서도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야말로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힘써야 할 의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한 무지가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찬양)
내 생이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앎이라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올 즈음에 로마의 감옥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으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정말 사랑했던 것은 선교가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왜 그것은 자기가 몸소 경험한 바였습니다.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죽을 때까지 유대인 이외의 모든 인간 종자는 쓰레기요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믿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에 친척과 골육과 지체들을 잃어버렸지만 천하보다 더 귀한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장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오늘 이 젊음의 시간에 예수를 알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지하실 교회에서 열린 교회를 할 때 아주 법도 많이 알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하루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교리반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들어오게 됐냐고 소감을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사법고시도 공부해 봤고 CPA 공부도 하고 합격도 했는데 어느 날 자기가 평생 아내를 따라 교회 다니면서 신앙에 대해서는 운전면허 보는 것 만큼도 공부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각을 돌려 교리반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을 진심으로 갖기를 원하면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곁눈질로 절대로 배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배우는 학습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실리지 않고 배우는 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마음을 다하여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비로소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야말로 가장 고상하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생명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모든 것을 가서 Mr. everything이 되고 Miss everything이 된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에 죽는 순간에 모두 두고 가야 되는 것들이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알면 Mr. nothing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과 everything이신 우리 예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 여러분이 염려하지 않는다면 누가 염려하겠습니까? 나에게 예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오래 예수를 믿어도 왜 이렇게 예수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나의 고백이 없는 것일까? 예수는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만나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사도 바울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예수와 함께 사는 삶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예수의 죽음과 부활 6(2023.04.16._주일오전)
갈라디아는 소아시아의 한 지방입니다. 비두니아 남쪽 갑바도기아의 북서쪽에 위치했습니다. 아주 땅이 비옥하고 농사가 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지는 도시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바울은 주후 51년에서 52년경에 그 지방을 처음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후로도 목회적인 필요에 의해서 한 번 더 방문했다고 사도행전 18장이 말합니다. 그때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여기며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고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교회에 거짓 유대인 교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들에게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이단의 가르침에 설득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갈라디아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에 아픈 상처로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마르틴 루터 같은 사람은 이 갈라디아서를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갈라디아서는 비록 짧은 글이지만 「기독교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II. 예수와 함께 사는 삶
갈라디아 교인들이 신앙을 떠나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비밀에 관한 것이었으며, 어떻게 참 자유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A.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그는 자기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나니 ···”(갈 2:20上) 그런데 이 문장이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현재완료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현재완료 시제는 비록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 ···”(갈 2:20, KNJ私譯) 이게 완전한 번역입니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의 기록을 볼 때 바울이 예수를 직접 대면한 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시던 예수 그리스도 곁에 그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시간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회심하기 전 사울이라는 젊은이는 뛰어난 유대 종교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열정과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가 결코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더욱이 그가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했다는 소문은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모두 제자들이 꾸며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기의 두 눈으로 직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만났을 뿐만 아니라 땅에 엎드려진 채 그분과 대화까지 나누었습니다. 이 사건은 바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예수의 부활이 실제 일어난 사건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가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을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의로운 자로 여기셔서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바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로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만 사로잡힌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확고한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 그는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와 자신의 영혼이 놀랍게 연합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걸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암시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 속에서 주어지게 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 번째 건넨 말씀입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아니 만난 적도 없는 예수를 어떻게 사울이 박해를 하겠습니까? 이건 무슨 뜻입니까? ‘사울아! 네가 지금 다메섹에 있는 나의 제자들, 나의 부활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가고 있지? 그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곧 나를 박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나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연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는 순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영(靈)과 신자인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물체가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는 그런 의미의 합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靈)은 그리스도의 영(靈)이고, 사람의 영혼(靈魂)은 사람의 영혼(靈魂)이기 때문에 따로 존재하면서도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아주 신비하고 영적인 관계를 맺어서 여기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이 연합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의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입니다.
이것을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 안에서 설명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칭의(稱義)의 연합입니다. 이것을 원리적인 연합이라고도 말합니다. 처음에 나의 영혼과 예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머리와 생명적인 연합을 이룬 몸이 있고 이 몸이 교회인데, 내가 그렇게 교회에 접붙여짐으로써 머리이신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稱義)의 연합 혹은 원리적인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진다는 것이고, 그 몸과 함께 예수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게을리하거나 교회에 심지어 안 나오거나 예수를 안 믿겠다고 몸부림을 쳐도 이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것이지 받았다가 잃어버렸다가 받았다가 잃어버렸다가 그러지 않습니다. 그게 원리적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께 접붙여진 사람 속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게 희미하냐 강하냐의 차이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성화(聖化)의 연합입니다. 이것을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성도로서 주님과 누리는 연합입니다. 그 연합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접붙여졌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성화의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이 연합이 달라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고 죄 된 본성이 성령의 역사로 순결해지면 순결해질수록,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 연합은 아주 튼튼해집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게 자신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믿고 깨달았을 때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현재까지 자기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실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액츄얼라이즈(actualize) 라고 합니다. 실현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재적으로 재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 성경에 이것이 현재완료 시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 ···”(갈 2:20, KNJ私譯) 십자가에 못 박힌 건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의미는 여전히 사도 바울 안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때가 주 후 55년에서 56년경입니다. 그리고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고 부활하신 모습을 뵈었을 때가 이 편지를 쓸 때로부터 약 20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20년 후에 지금 갈라디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그때 경험했던 똑같은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갈 2:20上)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쓴 다음부터 20년 후에 디모데전서를 씁니다. 디모데전서에서도 똑같은 고백을 다시 반복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표현은 다른데 똑같은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윤리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눈, 인간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가치를 바라보는 안목, 이 모든 것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30년을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30년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는지 그 시대의 이름을 그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선교학자들은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게 짐작하기를 사도 바울이 직접 전도한 사람들의 수가 그 당시에 130만 명쯤 되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렇게 살았으면 잘 산 것 아닙니까? 최선을 다해서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뭐라고 고백합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 ’괴수‘는 그리스어로 '프로토스'(πρῶτός)입니다. 이것은 '퍼스트'(first)라는 뜻입니다. 죄질의 순서대로 죄인들을 줄 세우면 자기가 맨 앞자리에 서야 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20년 후에나 똑같은 고백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에 핵심은 이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2천 년 전에 죽으신 예수의 죽음 곧 그리스도가 못 박혀 죽으실 때, 그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는 죽음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때,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는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커다란 죄인이다. 두 번째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용서해 주셨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 죽음의 경험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 사랑의 경험으로 소환하게 됩니다. 이때 신자는 예수 십자가 죽음의 빛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은 다만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았다고 할지라도 용서받은 죄인일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자기의 그릇된 사랑과 정욕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는 온전히 주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겠습니까? 그래서 설명을 아주 간단하게, 평생 잊지 않도록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자, 우리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예수 믿은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 봉사하려고 예수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거 우리는 관심 없었습니다. 왜 예수를 믿었습니까? 안 믿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경제적인 괴로움 때문에 절망감이 밀려와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혹은 가족들과의 망가진 관계 때문에 아니면 자기도 이 세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나는 누구고 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혼란 속에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들려진 말씀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너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못 박혀 죽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때 어느 한순간 사도 바울의 지성을 찢고 찬란하게 들어오던 어둠 속에 한 줄기 빛 같은 게 여러분 속에도 들어왔던 것입니다. 들어와서 그 빛이 무엇을 말해주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구나!' 이 사실이 믿어지는 그 순간에 2천 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매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이 그대로 내 마음속에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그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는 이유는 2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액츄얼라이즈(actualize), 내 안에서 실재화되고 있는 이 사건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2천 년의 시간, 갈보리 언덕과 한국이라는 이 공간과는 상관없이 그것이 지금 내 안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앞에 떨면서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나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모두 내 책임입니다. 나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만 위해서 죽으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분이 한 번 죽으셨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인류가 구원을 얻었고, 앞으로도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죽으심의 n분의 1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 세상에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 나 한 사람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는 오셨을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피 흘리고 나를 구원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1분의 1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으신 이유가 전부 다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망치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가 겪었던 똑같은 고통이 내 안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죽음의 고통입니다. 그다음에는 내가 예수 믿게 된 동기는 다 간 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돈을 해결해 주십시오.’ ‘생명을 살려주십시오.’ ‘우리 엄마가 아픕니다.’ 한순간에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너무너무 엄청난 사실이 지금 내 마음속에서 재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계시는구나!’ 그 통증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통증의 근거가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심지어 원수가 끔찍하게 죽은 것은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사랑하는 딸이 피를 흘리고 있는 광경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아들이 어렸을 때 죽었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으로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차라리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했을 것을...’ 그 위대한 장군이 무너지듯이 통곡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랑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내 안에서 재연되었을 때, 그때 그것은 진짜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 육체의 죽음이면 우리 손에서 피가 흘러야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이성적으로 일어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죽음은 영적인 의미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함께 못 박히는 죽음의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죽음의 기운이 살아있는 것들을 죽여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누구입니까? 그게 우리의 옛사람입니다. 우리는 복합적인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예전에 예수 믿기 전에는 옛사람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음으로써 옛사람과 새사람이 공존하게 됩니다. 이 옛사람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 짓기를 좋아하며 나를 주인으로 삼으며 살아왔던 옛 본성인데,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현재적으로 경험할 때 그런 옛사람과 그리스도가 함께 십자가에 포개져서 예수가 내 마음에서 죽으시는 것을 경험할 때 그 옛사람이 함께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 왔나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게 현재완료로 쓰여진 것은 뭐냐 하면 이런 일들이 일회적으로 끝난 게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 의미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 재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어갑니다.
B.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
그 다음에 두 번째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제는 죽음이 아니라 이어서 사도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회심하고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하면서 죄와 욕망을 따라서 살려는 자기가 예수와 함께 못 박히는 죽음의 경험을 한 이래로 어떻게 그런 일들의 재연 속에서 예수와 동행하며 살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中) 이것은 앞에 언급된 예수와 함께 죽는 죽음의 경험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의 부활과 함께 신자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입니다. 이것은 예수와 함께 죽은 것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다시 살리심을 받는 부활의 현재적인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다시 설명해 드릴 테니 들어보십시오. 예수의 십자가가 예수를 믿을 때 그 사건이 내 마음 안에서 재연된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는 순간에 연합이 되고, 그 연합이 사랑의 연합이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고통이 바로 나의 고통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어떤 고통이냐면 우리의 옛 자아(自我)가 죽는 고통입니다. 옛 성품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이 죽는 경험입니다. 죽는 모든 것은 다 고통을 겪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죽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자기가 몸소 경험하면서 결국은 죄를 지은 자기를 미워하게 되고, 자기 안에 남아있는 죄의 본성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가 스스로를 임금 삼아서 살아가려는 자아(自我)에 대한 미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자아가 죽으면서 그렇게 죽으면서 그런 마음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 하면서 남의 돈을 훔치는 사람 없습니다. 찬송가 부르면서 사기 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하나님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남의 지갑에 손대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두 가지 일은 한 마음 안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하나는 가짜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옛 자아가 죽습니다. 그때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자아라는 것도 살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숨통을 끊으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칼이나 창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양심을 찌르면서 숨통을 끊는 것입니다. 걔도 안 죽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죽습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니까 죽습니다.
죽는 것과 동시에 놀라운 변화가 바로 그 죽음 밑에서 일어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부활입니다. 대체 뭐가 부활한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A대 B는 B대 Y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이 내 안에서 재연됩니다. 그래서 나의 옛 성품이 십자가에 못 박혀 실제적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면 똑같이 죽는 그 순간에 밑바닥에서는 새로운 부활이라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다시 사신 것처럼 그 부활의 사건도 내 안에서 재연이 되면서 죽은 것과 같은 나 자신이 살아납니다. 이 살아나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새 성품입니다. 옛 성품이 십자가와 함께 죽을 때 새 성품이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데, 이 새 성품은 거듭난 본성이라고도 부르고 또 참된 자아(自我)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했는지 왕을 만들어 주었는데도 맨날 기도하는 내용이 '하나님! 나는 궁핍하고 가난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외롭습니다. 나는 비참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게 다윗의 참 자아입니다. 그런데 밧세바와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을 덮기 위해서 우리야를 살인합니다. 교만이 가득 차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구 조사를 실시해서 수많은 백성이 죽게 됩니다. 이건 무엇입니까? 이건 다윗의 거짓된 자아입니다. 둘 다 다윗입니다. 한 다윗 안에 거짓된 자아와 참된 자아가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으면서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 새성품을 따라서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삶이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을 경험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렇게 살기로 세팅(setting)이 된 사람이 자꾸 옛 자아를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둘 사이에 버그(bug)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이렇게 예수의 새성품을 따라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위해서 살도록 완전히 개조된 사람인데, 옛 자아를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차라리 예수를 안 믿었을 때가 훨씬 살기가 편했다는 후회 아닌 후회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기 전에는 새 사람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냥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둘이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이 설교는 현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긴급동의(緊急動議)입니다. 긴급동의가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회무(會務)가 중지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부터 먼저 들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회의 절차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가 바로 그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 나오고 이런 저런 봉사를 하고 약간 윤리적으로 살고 헌금도 좀 하고, 예수 믿는 사람끼리 결혼하고 살아봐야 별로 크게 달라지는 게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판이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커다란 비참과 고통,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안에서 재연될 때 그렇게 죽어가는 것만큼 바로 그 밑에서 부활의 경험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자살을 많이 합니다. 한국 사람들도 여러 명이 스위스에 가서 안락사했습니다. 어떤지 아십니까? 한 열 번 정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서 이 사람은 길이 없다는 판정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돈을 내고 유언장을 쓰고 안락사실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길 말은 없냐고 물어보고, 녹화도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밸브를 남이 열어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고통 없이 잠자듯이 미끄러지면서 스르르 수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입니까? 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잘 살기 위해서는 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결혼하지 않으신 분들은 아직 모르지만, 결혼을 해서 일단 둘이 30년씩 산 것은 무조건 존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이가 좀 나빠도 서로 그냥 살고 있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혼자 사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여러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리시는데 사실입니다. 힘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뜻대로 잘 살겠다는 것이 결심한다고 될 일이면 굳이 예수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운동을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주 회심 집회 때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에 붙들려 살 때, 그때 우리가 살아나는 경험을 한다는 게 이 이야기를 요약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납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갑자기 세상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희망입니다. 믿음은 희망으로 자기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설득이 내가 한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경험을 통해서 예전에 가질 수 없었던 놀라운 희망입니다. 어떤 희망입니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삶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따라서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이 속에서 예기치 못하게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이 힘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갈라디아서를 쓰기 20년 전에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말하게 했고, 20년 후에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도 똑같은 고백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슴이 찢어지도록 가슴 아픈 현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러한 기독교의 생명의 중요한 이치를 아예 알려고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뭐라고 하시든지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어지는 많은 가르침 가운데 그 코드에 맞는 것만 가끔 꺼내서 갖다 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새 사람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똑같은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둘 다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한 사람은 너무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Why me? 모든 아이들이 다 정상으로 태어났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아이가 태어났을까?' 그 생각 속에서 이 아이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에 불행의 씨앗이고, 가족을 슬픔 속에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고, 심지어 가족들과의 관계를 깨트리는 애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엄마의 그런 마음이 자식에게 전해지겠습니까? 안 전해지겠습니까? 아무리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어도 인간은 영혼을 가진 사물입니다. 그게 그대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현을 못하지만 이 아이의 안에서 더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내가 왜 살아야 하나?'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그러고 싶은 게 아니라 남편도 똑같이 죽고 싶고, 얘도 말하진 않지만 태어나서 너무 미안한 것입니다.
반대쪽에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충격이고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투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 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가시는 그 죽음을 내가 시련을 통해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던 일, 이 아이를 사랑하지 못하던 일, 모든 일이 생각나면서 거기서 죽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생명의 기운이 확 살아나면서 원망하고 미워하고 저주하던 자기 옛 사람이 죽는 경험을 하면서 사랑하고 믿고 희망을 갖는 새 자아가 부활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마지막 고백이 '이 아이가 나의 가정에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내가 이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짐승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 아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고통보다는 축복이 더 많았습니다.' 똑같은 상황인데 한 사람은 죽음을 꿈꾸고, 한 사람은 감사로 충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이기 때문에 그 고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 가운데 나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 새 사람으로 좋은 일이 되도록 소화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쁜 걸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게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 생명이 충만해져서 미운 사람을 만날 때 역설적으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면서 사랑의 마음이 생기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을 만날수록 용서할 마음이 생깁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갈수록 일치를 이루고 싶고, 무지한 사람을 만났을 때 진리를 깨닫는 도구가 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예수의 사랑입니다. 절대 이런 꿈은 꾸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행복하기를 꿈꾼다. 그 행복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고, 내가 힘들어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다.’ 그러면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불행하게 살다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복은 세상에서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고통도 겪고 시련도 겪겠지만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생명의 힘입니다.
예수는 고통이 삭제된 삶을 사신 분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에 순교 당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계속 고통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고통과 불행이 삭제된 상태가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 고통은 행복과 양립(兩立)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고난받으신 예수가 맞는데, 그 고난 때문에 불행해진 예수라고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통받던 사나이였지만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끊임없이 시련과 핍박을 받았지만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지는 않았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예수와 함께 다시 죽고 사는 부활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고통이 고통 그 자체로 그냥 불행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온갖 고통의 바다를 지납니다. 그런데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역설이라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 매 순간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2천 년 전에 골고다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다시 재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거기서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죽는 것도 예수와 연합해서 죽고, 사는 것도 예수와 연합해서 사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 2:20中) 얼핏 보면 이 말은 좀 이해가 안 갑니다. 이런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아! 이게 뭐지?’ 언제나 인간이 참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살아야 된다고 끊임없이 외쳐놓고 지금에 와서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란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예수가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느낌을 받느냐 하면 '아! 그럼 이건 뭐지?' 그러면 내 몸만 껍데기로 남겨놓고 내용인 나는 빼서 던져버리고 예수를 끼워 넣어서 사는데, 그러면 그게 예수의 인생이지 그게 어떻게 내 인생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결국 주체성을 버린 삶이네. 자기(自己)라는 주체가 사라진 삶이 결국 이상적인 삶이네. 그러면 도대체 사는 게 내가 아닌데 어떻게 주체성이 없는 인격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런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라고 할 때 '내가'가 누군지를 먼저 알아야 됩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만약에 ‘내가’라는 것을 그냥 ‘나’라고 생각하고 집어넣고, '그리스도'를 하늘에 계신 보좌 우편에 계신 그분을 집어넣으면 이것은 완전히 엉터리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껍질일 뿐이고 내 안에 어떤 조종사가 들어와서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했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비밀은 전혀 그게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앞에 나오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을 때 이 '내가'는 '거짓된 자아'입니다. 옛 성품으로 이제껏 주체랍시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주체가 아닙니다. 그게 주체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주체가 되려면 자유가 있어야 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언제 어느 때든지 자기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거절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옛날에 화투에 미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다 탕진하고 마지막에 자녀들까지 다 노름빚으로 팔려 가고 아내까지 팔려 갔습니다. 이 사람이 너무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장작 패는 나무 위에 (손을) 올려놓고 도끼로 손목 자체를 끊어버렸습니다. '내가 다시는 손이 없으면 놀음을 못 하겠지.' 그런데 몇 년 후에 이 사람은 갈고리를 낀 채 다시 화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자유를 잃어버린 삶입니다. 그 자유는 내가 돈이 있어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그런 자유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누구에 의해서도 조종되지 않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자유와 자율,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플라톤 같은 사람은 네 가지 없이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성의 자유입니다. 그러려면 지혜가 있어야 됩니다. 그다음에는 정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정의 자유를 가지려면 절제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를 가지려면 거짓된 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혜, 정의, 절제, 용기입니다. 이것을 사추덕(四樞德)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독교에서도 똑같이 한 인간이 자유인으로서 자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고, 무슨 옷을 입느냐, 어떤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느냐,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무엇에도 속박받지 않는 자유인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속박하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의 정신을 속박하는 것은 불의와 죄입니다. '저 사람은 정의에 속박받는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사랑 때문에 구속받는다.' 그렇게 말 안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라고 했을 때 그 '내가'는 부정적인 의미의 자아(自我)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자기가 사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무엇이냐 하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입니다. 새성품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제유법화한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가지고 진정한 내가 아닌 '나'를 뜻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하자면 '예수 닮은 성품'을 제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부활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까 그다음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 아니오, 나의 옛 사람이 더 이상 주체가 되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주체는 나는 난데 옛 자아가 아니라, 나를 임금 삼으며 살아가려는 옛 성품이 아니라, 예수를 닮은 새성품이 내 인생의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체의 축출이 아니라 주체의 진정한 복귀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건 주체의 축출이 아니라 진정한 주체의 복귀입니다. 그때 뚜렷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이 목회자일 수도 있고, 디자이너일 수도 있고, 자동차 수리공일 수도 있고, 판사일 수도 있고, 의사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바리스타일 수도 있고 아니면 간병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양태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속박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알았으면 '아멘' 해보십시오. 아멘.
신자라 할지라도 결국 죄와 욕심에 사로잡힐수록 참된 자아에서 멀어지게 되는데 그럴수록 주체성을 갖고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에 대해서 성경은 다른 표현으로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영(靈)으로 살아계십니다. 성령은 예수의 영(靈)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면 예수의 마음으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예수의 분신처럼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각과 뜻에 일치한다는 뜻과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세 가지인데, 첫째는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신 이유는 병을 고치시거나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닙니다. 그런 일을 행하시는 때도 있지만 그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런 방식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어떤 목적입니까?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를 깨닫게 하고, 진리는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았는데 마음에 사랑이 안 생긴다면 진리를 안 게 아닙니다. 진리를 진정으로 알면 마음에서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된 사랑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리를 알면 너희가 자유로워진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이 생기면 그 사랑은 다시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과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신자는 한 인간으로서 완전한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의 참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참된 자유인 것입니다. 그만큼 신자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험했는데 문제는 이러한 이치를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정신적으로 게으릅니다.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바울이 이런 의미심장한 고백으로 20절을 끝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下) 이것도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안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Thats OK. 충분합니다. 다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주 굉장히 슬픈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고백을 끝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에게 속편을 예고하는 티저(teaser) 같은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러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요약해서 정리하자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약간은 우울한 이야기로 끝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육체, 그리스어로 '사르크스'(σάρξ )라는 이 단어가 문제입니다. 이게 그냥 고깃덩어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육체라는 말이 죄와 상관없이 신약성경에서 쓰인 것은 딱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 1:14上) 이때 그것은 죄와 완전히 상관이 없는 예수의 육체입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모두 다 육체라는 그 자체는 모두 그 안에 죄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내지는 죄에 대한 '버너러빌리티'(vulnerablity), 죄에 감염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연약함, 이것을 내포하고 있는 상징어가 육체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육체대로 살지 말라는 이야기는 몸 없이 살라는 뜻이 아니라 사고방식이 육체를 따라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sinful, 죄 된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산 것 아니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눈을 다시 자신에게로 향하고 보면 나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가 필요합니까? 한 번의 그런 경험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육체’라는 말은 우리에게 위대한 승리의 전주곡이 울려 퍼진 다음에 쨍그랑하고 울려 퍼지는 심벌즈의 소리처럼 우리에게 긴장감을 주는 것입니다. '아! 맞아. 내가 산 것 아니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계셔! 정말 이건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삶이야.' 그런데 알았습니다. '슬프게도 나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구나!' 그래서 무엇입니까? 예수를 매 순간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찬양)
폭풍우 흑암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승리했는데, 승리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이길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그의 손안에 붙잡혀서 살고, 나는 그분을 붙잡는 믿음의 삶 속에서 내가 진정한 주체성을 가진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그리스도를 찾고 어린 아이처럼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게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즉, 순전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일치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당시 교황 레오 1세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황이시여, 사랑은 항상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언제나 사람을 불러일으킵니다."(M. Luther) 그러니까 어려운 사람을 돕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항상 우리에게 믿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지만, 참된 믿음을 가지면 언제나 그것은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믿었는데 사랑이 불러일으켜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믿음으로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이고,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으면서 죄에 대해서 죽고 세상 욕망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예수의 부활에 현재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다시 영적인 소생함을 얻는 것이 신앙입니다. 매 순간 예수와 함께 죽고 매 순간 다시 사는 영적인 경험을 통해서 예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을 통해 신자는 살든지 죽든지 예수만 믿고 예수만 의지해야 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삶의 시련을 이기고 오직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구원받은 신자도 예수를 사랑하는 신자도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삽니다. 이런 육체의 연약함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함으로 살아있을 때나 죽어갈 때나 언제나 함께하시는 그리스도께 붙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려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이 고백의 의미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에 사로잡힌 삶을 살기를 꿈꾸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핵심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7. 예수 생명 나타나는 길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예수의 죽음과 부활 7(2023.04.23._주일오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세속화를 꾸짖으며 고린도전서를 쓴 것이 주 후 55년경쯤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약 1년쯤 뒤에 고린도후서를 씁니다. 자기가 책망하는 편지를 받은 교회가 회개하고 뉘우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눈물과 기도 가운데 쓴 이 편지 속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명의 비밀에 대해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II.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길
여기서 사도는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는 길에 대해 말합니다. 그 영적 생명을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고 7절에서 묘사합니다. 당시 질그릇은 가장 값싸고 서민적인 그릇이었습니다. 또한 쉽게 깨어진다는 점에서 연약함의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 질그릇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육체가 덧없고 연약한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비록 신자라고 할지라도 육체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물질인 몸이기에 결국은 죽을 존재이고 또 죽을 때까지 쉽게 병들고 다치고 힘을 잃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찮은 질그릇과 같은 신자의 육체 안에 보배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보배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육체를 가진 인간인 신자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이니 또한 예수의 생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영적 생명 때문에 모든 시련과 인생의 역경 심지어는 핍박과 박해까지 이기게 된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9)
그러면 질그릇같이 연약한 신자 안에서 예수의 생명은 어떻게 역사하는 것입니까? 또 이 생명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길래 환란과 시련, 인생의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이기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원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어린 학생들이 보더라도 이 본문은 딱 두 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 그리고 예수의 생명,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A. 예수의 죽음을 짊어짐
첫 번째 비결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예수의 죽음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는 이미 오래전 골고다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짊어진다는 말입니까? 예수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예수께서 목숨을 잃어버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바로 영혼이 떠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위한 대리적인 죽음이었고 우리의 속죄를 위한 대신 죽으신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정의하기 어렵지만 사전적으로 보면 죽음이란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이었던 그분이 생명을 잃어버리고 운명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다고 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짊어짐’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는 ‘페리페론테스’(περιφέροντες)라는 단어입니다. ‘운반하다’, '지니다', ‘매달고 다니다’, ‘지고 다니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페리페로’(περιφέρω)의 분사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시간적으로 이미 끝나버린 예수 죽음을 지금 우리가 다시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까? 지난주에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 원리를 배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갈 2:20)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예수 죽음이 다시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짊어진다’ 혹은 ‘지닌다’라는 것은 가지고 있는 물건과 가지고 있는 사람 자체 혹은 짊어지는 짐과 짐을 진 사람 자체가 떨어질 수 없이 하나가 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는 예수의 죽음을 자신의 일부처럼 늘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알 듯하면서도 모를 듯합니다. 이것은 이미 2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 죽음의 사건이 지금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다시 경험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고 낙심이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어디서 도움을 얻을 때가 없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누가 도와주어서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술이라도 먹고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 정도로 괴롭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괴로운 마음에 집을 나섰다가 교회당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불 꺼진 예배당에 와서 나오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안 됩니다. 기도가 잘 되었으면 그렇게 절망적인 염려에 휩싸일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끙끙거리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기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때 마음속에 들어오는 광경이 있습니다.
(찬양)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나 항상 생각 할 때
세상에 모든 욕심은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하면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바로 예수의 십자가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그 어려움 속에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통하다가 보니까 예수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냥 고통을 당하는데, 그 고통 때문에 예수 십자가 죽음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죄 때문에 불완전한 이 세상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데 그분은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데 그 고통을 당하셨다는 생각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죽으셨는데 지금 내가 그 십자가 아래 서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못 박히신 채 창에 허리 상하시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시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처럼 아픔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통곡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죽음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가슴을 쥐어뜯을 정도로 아프고 간절히 기도할 때는 조금 전 교회에 올 때까지 나를 괴롭혔던 문제가 문제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현재적으로 경험되니까 예수 고난으로 나의 고통이 승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가리켜서 예수 죽음을 ‘지닌다’, ‘짊어진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 예수 죽음의 경험 때문에 육적인 자아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 사는 동안에 그것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현저하게 약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하고 영적입니다. 너무 신비하기에 이성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고, 영적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재현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옛 본성, 즉 예수를 믿었지만 여전히 자기를 임금 삼아서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은 죽고 새 본성.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본성은 살아나서 예수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와 나 사이에 떼어놓을 수 없는 연합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이런 경험을 자주 하는 그리스도인을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고, 아무리 윤리적으로 의롭게 살아도 이런 경험이 없으면 그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 경험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진노의 경험입니다. 즉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통해서 예수가 나의 죄를 지고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때 하나님의 진노를 함께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의 경험입니다. 아들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물을 때 그것은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용서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하나님 사랑의 경험에 깊이는 용서를 경험한 깊이와 일치합니다. 거기서 비록 자기가 죄인이지만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질그릇 안에 담긴 나의 영혼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때 진노와 사랑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사랑하는 자기를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과 죄에 대한 사랑을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쉬운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게 빌립보서 3장에서 이야기하는 예수 고난에 참여하는 경험이며,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이며, 이것이 로마서 6장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인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이 없이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쉽게 말할 수 없고, 이런 경험 없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거룩해져 간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개업할 때 목사님 모셔다 예배를 드리고, 회갑 때 목회자가 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께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와 연합된 자이며, 그 예수 죽음을 몸에 늘 지니고 있어서 반복적으로 회심을 경험하며, 현재적으로 예수 죽음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들은 약하나 주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고 매 순간 예수 죽음에 참여함으로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B. 예수의 생명이 나타남
이런 사람이 될 때, 그때 하나님이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의 죽음을 현재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그분과 함께 죽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순간 예수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는 처음부터 세상에 오실 때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고 요한복음 1장 4절에서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세상이 진리이신 그분 때문에 다시 살아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죄 때문에 죽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예수의 생명은 그냥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셨다는 선언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생명은 실제로 죽은 예수의 육체를 다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생명에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규명이 안 되는 것이 생명입니다. 생물학은 생물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물학이 답을 못합니다. 제가 50대에 들어섰을 때 공부를 꼭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되어서 생물학 과외선생님을 제 사비로 초빙을 해서 한 학기를 매주 배웠습니다. 나에게 생물에 대해서 많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생명이 무엇입니까?” “우리 생물학에서는 그것을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현상에 관해서 연구할 뿐이지 생명 그 자체는 생물학의 탐구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뜨악했습니다. 마치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고 물으니까, 신학은 하나님 믿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생명의 본질을 다섯 가지 요소로 설명합니다. 첫째, 세포가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는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세 번째는 항상성(恒常性)이라고 하는데,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라고 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동일성(同一性)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너무 피곤합니다. 그래서 약을 먹고 일찍 푹 잤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까 아주 몸이 가벼워지면서 다시 원래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것을 항상성(恒常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장하고 발달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자기와 같은 개체를 계속 재생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세포, 신진대사, 항상성, 성장과 발달, 재생산, 이 다섯 가지가 생명체의 기본적인 본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생명을 가진 물체는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생명 자체가 무엇이고 어디로 오는지 또 생명이 사라질 때는 어떻게 사라지는 것인지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생물학적으로 굉장히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본질은 설명을 못합니다. 그렇게 생명에 관한 관점을 가지고 이 단어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생명에서 말하는 이 생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육체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을 참된 영혼으로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 속성입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인간 영혼으로 하여금 참된 영혼으로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인 속성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설명 불가능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다시 확 살아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죽은 예수의 몸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죽은 몸을 다시 살아나 산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은 죽은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릴 수 있으며, 후일 죽은 우리의 몸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하게 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생명이라고도 말하고 예수의 생명이라고도 부르고 또 성령의 은혜라고도 말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능가하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그 생명의 능력으로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죽은 자처럼 된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의 생명은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육체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 것처럼 된 우리의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생명의 모든 기능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말을 하고 떠들던 사람도 딱 죽으면 금방 숨이 멎고, 심장이 멈추고 모든 생명의 활동에 불이 꺼집니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면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면 시체에서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게 인간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 사람은 다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죽음은 육체의 죽음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불멸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육체처럼 물을 흘리고 없어져서 먼지로 돌아가는 것은 육체일 뿐이지 영혼은 그럴 수 없습니다. 영혼이 그렇다 보니까 살아있다는 의미와 죽는다는 의미도 다릅니다.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은 영혼으로서 고유한 기능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우리의 이성을 지도하고 이성이 우리의 육체를 지도하면서 하나님을 알아보고 세상을 알아보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며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죽음은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닙니다. 영혼이 살아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는데, 영혼이 죽어 있으면 시기와 다툼, 배교와 도덕적인 타락 같은 불결한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죽은 행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죽어 있는 영혼을 마른 뼈와 같이 된 영혼을 새 생명을 주셔서 살아나게 하시는데, 이 생명을 오늘 예수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명의 역사가 우리 영혼에 대해서 일어납니다. 이때 은혜에서 멀어져 죄 때문에 죽은 자처럼 되어 버려 육체의 열매만을 맺으며 살아가던 우리를 다시 충만한 예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온유와 절제와 희락, 이런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고 청결한 자가 됩니다. 팔복(八福)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영적 부활의 경험이 바로 예수 생명의 나타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下) (이렇게) 말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어제 기사 하나를 읽으면서 한참 동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인터뷰를 한 사람은 고아들을 돌보고, 고아의 인권을 위해서 일하는 단체의 대표였습니다. 왜 그 일을 하게 되었는지 기자가 물어보니까 자기가 여섯 살 때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는데 부부 사이가 매우 안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맨날 폭력을 행하고 밖에 나가서 살다시피 하고 엄마는 이혼을 하고 새롭게 시집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딸과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부잣집이 나타나서 시집을 가려고 했더니 애 둘 다 버리고 오면 결혼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엄마는 이 아이 둘을 버립니다. 일곱 살 된 딸을 서울역에 갖다 놓고 결국은 버립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지방의 고아원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6살 먹은 이 아들을 고속버스터미널에 데려다가 놓고 말합니다. “너 여기 있어.” “엄마가 잠깐 갔다가 올 테니까 여기 꼭 기다리고 있어라.” 이 아이는 그 전날부터 좀 이상했다고 합니다. 외할머니 댁에 가는데 평소에 그렇게 유행하는 야구복이 입고 싶어서 하나 사달라고 졸랐지만 엄마가 절대 안 사줬는데 그날 이상하게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무 신이 나서 야구복을 입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이 마지막 이 아이를 버리기 전에 준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고속버스터미널의 대합실에 놓여 있는데 한없이 기다려도 엄마가 안 오는 것입니다. 밤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너 왜 여기 있냐?”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하루 종일 지나도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시민들이 경찰에 신고를 해줬습니다. 경찰관 아저씨가 밤중에 와서 이 아이 손을 붙들고 “그럼 엄마가 어디 있나 우리 한번 찾아볼까!” 그리고 고속터미널을 한 바퀴 다 돌 때 엄마는 그때까지 벽 뒤에 숨어서 이 아이가 경찰의 손에 이끌려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그때 경찰이 오지 않았으면 아마 엄마가 자기를 다시 데려가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 아이는 누나와는 전혀 다른 고아원에 버려졌습니다. 여섯 살, 일곱 살이니까 엄마 아빠의 이름은 물론이고 사는 집까지 다 찾아갈 수 있는 지력을 가진 아이들인데 안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아원은 그 아이들 하나를 데리고 있으면 국가에서 보조금이 나오니까 굳이 찾아주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짜 나쁜 사람들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엄마가 왜 그 아이를 버렸겠습니까? 특별한 사람이라서 버렸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왜 버렸겠습니까? 사랑이 모자라서 버린 것입니다. 대부분의 엄마는 그렇게 아이를 잃어버리면 미친 듯이 찾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홀로 남으면 콩나물이라도 길러 팔아서 그 아이를 키웁니다. 그게 정상적인 엄마입니다. 버린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이 없으니까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 사랑이 여러분 안에 없으면 예수와 세상을 선택해야 될 때 아주 쉽게 예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할지라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림을 당하고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서 30대 중반이 되었을 때 드디어 엄마를 만났습니다.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모든 묻는 말에 일체 대답을 안 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결국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똑같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그렇구나.’ 결국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으면 우리는 언제나 예수를 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그 말은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언제든지 자식을 버릴 수 있는 엄마’ 그 말은 형용모순입니다. 언제든지 버릴 수 있으면 엄마가 아니고, 엄마는 아이를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말했던 바와 같이 그 아이의 생명과 자기의 생명이 결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엄마의 심정입니다.
그 예수의 사랑이 어떻게 해서 생겨납니까? 예수의 생명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통해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성경이 수많은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성경 전체 또 제가 7천 번을 넘게 열린 교회에서 설교했지만, 그 모든 설교는 두 개의 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으신 주와 함께 우리도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사는 것, 이것이 모든 성경과 설교의 중심 내용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찬양)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신앙생활은 요란한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며 내가 누군지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죽음을 착하게 지금 내 마음속에 느끼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내가 산 것 아니요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때문에 사는 것이다.’ 이 고백을 하는 게 신앙입니다. 오늘 설교를 보십시오. 제가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막 혼내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인생이 힘든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인생 자체가 힘든 게 아니라 이런 예수 생명 없이 살려고 하니까 힘든 것입니다. 내 인생의 무게는 세상의 무게가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의 무게입니다. 이것은 죽은 옛 본성의 무게이며 하나님 없는 자기 사랑의 무게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죽은 손과 발 못 박히시고 창에 허리 상하여 죽으신 그 예수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당신 자신의 능력으로 살려내셨습니다. 그를 살리신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의 죽음에 현재적으로 참여하기만 하면 죽은 것 같은 우리 영혼도 단숨에 살려내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은혜를 받으십시오. 이 생명의 능력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8. 예수 십자가에서 하신 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사도는 3장과 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교리를 다루었습니다. 3장 21절에서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되게 하는 ‘새로운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획득하신 그 의(義)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용납받는 의(義)입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가 어떤 영적인 원리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줍니다.
II. 예수 십자가에서 하신 일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비결이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에서 이룬 그 일이 기초가 되어서 자신 속에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죽음의 부활이 재연될 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A. 죄의 몸을 죽게 하심
먼저 그것은 예수와 함께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먼저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롬 6:6上) ‘우리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과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에 핍박받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거리상으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만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사도 바울이 공통적으로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그 체험이 무엇이었는가 하니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의 옛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옛 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옛 본성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 가지고 있었던 우리의 옛 본성이었습니다. 그 본성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렇게 본질적으로 요약이 됩니다. 온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자기가 어디로부터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심지어는 자신이 곧 죽을 존재라는 사실조차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온 우주의 중심이 자신이고, 최고의 가치는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질서를 따라 살려고 했던 불신자의 그 본성을 옛사람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런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죄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무한하고 영원한 형벌이었습니다. 이로써 세계와 인간은 비참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죄를 어떻게 용서해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결코 거저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구원받을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진 한 어린 양으로 대속의 죽으심으로써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편에서 보면 구원은 거저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당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내놓고 희생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구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입니다. “예수 날 위해 죽으셨다.” 그 사실을 기초 삼아서 그 위에 삶의 모든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며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사는 감격 속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때는 모두 불신자였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기 전에 무신론(無神論)자였고, 심지어 반신론(反神論)자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사람이 어느 한순간 인생의 새로운 문턱을 넘던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복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우리를 위해 죽으셨도다.”입니다. '무엇 때문에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복음을 우리의 마음에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우리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두 손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발도 그렇게 못 박힌 채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창에 허리 상하여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 복음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2천 년 전에 예수 죽으신 그 사건이 바로 나와 관계가 있다는 어두운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천둥과 번개 같은 깨달음이 다가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못 박히신 그분의 두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예수의 박히신 발에 나의 발을 포개었습니다.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피투성이가 되어 얼굴을 적시며 흐르는 그 피 묻은 얼굴에 나의 얼굴을 포개었습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에 나의 옆구리를 포개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과 하나 되었고 그때 예수 죽으시는 그 모든 고통이 동일하게 내가 겪는 것처럼 2천 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내 마음에 재연되었습니다. 똑같은 고통을 겪으며 이렇게 아프게 고통을 받으시며 예수가 죽으신 것이 인류의 죄가 아니라 내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영혼에는 신비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생각 없이 내가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것처럼, 내 질서대로 산 것이 큰 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어긋나 살았기에 나는 가시덤불 속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 온몸에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깨닫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찬란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구원의 진수가 느껴진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반응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눈이 떠지면서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티끌 같은 피조물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던 것이 씻을 수 없는 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과 아픔은 사실 하나님이 나를 징벌하신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고 산 데서 겪은 상처와 불행과 비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겸손히 피조물의 위치로 내려왔습니다. 하나님보다 못하고 모든 만물보다는 뛰어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처럼 고귀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선하게 돌보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자신은 죽을 존재이지만 결국 예수와 함께 부활함으로 영원히 살 소망을 주신 존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사도 바울과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을 안 해도 서로 '우리가 알거니와'라고 통용될 수 있는 공통된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는 구원에 감사하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 타락입니다. 이 은혜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영적인 침체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매일매일 신비하게 다가와야 합니다. 이상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찬양)
손과 발 날 위해 못 박혔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 했나 왜 날 사랑하나
이것이 새롭게 느껴져야 합니다. 결코 당연하게 느껴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로 내가 구원을 얻은 것이 현실인가? 살을 꼬집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에 기반이 되는 예수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옛사람은 창조 목적을 거슬러 살며 하나님을 대적하던 불신자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창조 목적을 거슬러 살며 대적하던 옛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옛사람이 어떻게 예수와 함께 못 박혔습니까? 거듭남으로써 못 박혔습니다. 처음 회심의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쓰나미처럼 밀려왔고 자연인으로서는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 2천 년 전에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그분이 바로 나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그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고 우리의 마음에도 죄의 아성은 무너졌으나 죄의 잔재들이 남아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꽃길만 걷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살고 보니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겪을 많은 슬픔과 고통, 이별과 배신, 고독과 상처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사람과 똑같은 고통과 아픔, 병듦과 상처를 겪어도 예전에는 나 홀로 그것을 모두 겪으며 켜켜이 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쌓였고, 이것은 내 본성을 망가뜨려 나쁜 사람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달라진 유익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때로는 죄를 짓고 상처와 고통을 받을 때, 예수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쁜 일을 통해서는 예수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고통스러운 일을 통해서 예수를 생각하며 그분의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맨 처음 그렇게 혼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목숨을 끊어볼까 몇 번씩 생각하던 그때 만난 예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십자가에 나 자신을 포개어 예수와 함께 죽던 때, 그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던 때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예수 십자가를 생각하며 다시 거기에 피 묻은 예수의 몸에 내 몸을 포개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깊은 회개를 경험하고 다시 한번 살아난 내 옛 본성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와 믿음의 경험인 것입니다.
처음 일어난 것은 첫 번째 거듭남과 회심이었지만 그다음부터 일어나는 것은 성화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복됩니까! 외롭고 고통스럽고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만나고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으로 이별하여 심장이 발톱에 갈가리 찢기는 것 같은 고통을 겪을 때 예수를 조용히 생각합니다. 그렇게 예수 죽으신 죽음을 경험하며 우리는 똑같이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 죽음의 현재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통하여 즉시 나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서 예수와 함께 다시 부활하는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행과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으로 자기를 설득할 소망이 돋아납니다.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며 현실을 긍정할 수 있는 어디로부터 오는지도 알 수 없는 힘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사람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 죽음과 생명을 경험하면서 살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죄의 종이 된 것은 그냥 종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죄를 좋아함으로 종이 된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처럼 억지로 행하면서도 또 한편 마음에 그것을 좋아하기도 하여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감정이 실타래처럼 엉켜 죄의 종으로 살면서 어디서 이 삶을 끝내야 할지 그리고 이 삶을 진정으로 끝내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의 경험을 따른다면 이제 완전히 끊고 주님의 자녀로 살고 싶어 할 때 온갖 예전에 지었던 죄들이 속삭이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아! 정말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이제껏 네가 나와 함께 그렇게 즐거운 나날을 보냈는데 너는 나 없이 정말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우리 인연이 얼마나 오래되었는데 나를 매정하게 뿌리치고 네가 잘 살 줄 아느냐?” “너는 결코 나 없이 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정하자 그것들은 힘이 없는 가련한 목소리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꿋꿋이 자신 안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살겠다는 결심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경험인 것입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 하지 않고 그것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물론 때로는 잘 믿어도 울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상처도 받을 것이고 때로는 고통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죄에서 의롭게 하심
마지막으로 또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7) 아멘. 십자가의 공로로서 그를 믿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영혼과 마음을 지배하던 죄악의 세력은 깨뜨려졌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하는 새 본성을 주셨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살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성을 우리 영혼에 심으셨습니다. 죄의 능력을 이기고 성령의 감화를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우리 안에 주셨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 살면서 죄의 종노릇 했습니다. 신분은 마귀의 자식이었고, 영혼의 상태는 죄의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씀을 깨닫도록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의 수단들을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후에 결코 주님은 우리를 홀로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혼자인 줄 아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닌 것을 주님이 깨닫게 하십니다.
저는 어제 밤늦게 성경의 열왕기서를 읽었습니다. 읽는데 거기에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오바댜가 100명의 선지자를 50명씩 굴에 숨겨주고 아합의 박해를 피해 물과 떡을 공급해주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 남았고 그 선지자들을 꾸짖으며 지금이 어느 땐데 너희들이 숨어 있느냐고 야단을 쳤습니다. 사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뒷장을 넘겨보니까 그는 벌판에 로뎀나무 아래 기대어 모든 기력을 잃어버린 채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혼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그를 믿음 없다고 꾸짖으시는 대신에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이 그를 어루만져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야!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단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떡과 고기와 물을 먹고 다시 잠이 든 엘리야를 깨우며 한 번 더 먹으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은 우리를 벌판에 홀로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교회에 두셨습니다.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하셨고 목양의 그늘아래 살게 하셨습니다. 내가 힘이 없는 때는 사랑하는 형제의 어깨에 나의 지친 머리를 기대고 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나의 서러운 사정을 토해 놓으며 지체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지체의 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체가 지쳤을 때는 나의 어깨를 빌려주며 한때 내가 그렇게 힘이 없어서 다른 지체의 어깨에 기댈 때 그들이 친절했던 것처럼 어깨에 기대게 하고 그를 어루만지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위로가 아니라 주님의 위로였던 것입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차가운 겨울 벌판에서 어미가 어디 있는지 집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린 사슴들이 서로 기대며 추운 겨울을 지내는 것처럼, 어린 양들이 벌판에 떨면서 함께 모여 서로의 몸에 기대며 체온으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며 함께 모여 있는 것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거기서 약할 때 강함을 주시고, 지칠 때 용기를 주시고, 삶의 모든 소망이 끊어졌다고 믿을 때 지체들과의 교제를 통해 믿음으로 절망하는 자신을 희망으로 설득할 용기를 얻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서 여기까지 살아있게 된 것입니다. 누가 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주셨습니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온 것입니다.
특파원이나 영문과 교수를 원했던 제가 주님의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30년의 긴 세월을 가슴앓이하며 여러분과 함께 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좋은 세속의 꿈도 이루지 못한 채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저는 제 과거를 진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리스도 때문에 저에게 여러분을 섬길 수 있는 영광을 주셨고, 30년 세월 동안을 여러분 곁에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나도 지칠 때 여러분의 어깨에 기대었고, 여러분의 품에서 울었습니다. 이는 여러분의 가슴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품이었던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얕은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죄 때문에 쓰라린 고통을 겪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고통은 원래 떠났던 좋은 상태로 우리를 되돌려 놓으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죄의 경험 때문에 더욱 거룩한 성도가 되어 가는 것이니 자신의 죄를 깨닫지 않은 사람이 진실한 성도가 되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을 통해서 결코 우리를 행복한 자리에 돌려놓기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아멘. 그렇게 하나님이 구원 얻은 다음에 우리를 결코 벌판에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 사랑으로 그 은혜로 우리를 구하여 교회의 그늘아래 주님 사랑의 품 안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신자인 우리 안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있지만 매일 주님을 의지하고 예수와 함께 못 박히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를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때로는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십자가 은혜로 용서받고 살 소망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자는 누구도 버리시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겪은 나쁜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죄 때문이고 좋은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와 함께 다시 살아나심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생각하십시오. 그 묵상에 더 많이 잠기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지위가 얼마나 높고 아름다운지를 자주 생각하십시오. 고통을 받을 때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며 나를 행복한 곳으로 데려가시는 나를 고치시는 과정이라고 여기시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의지하십시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무한히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받은 여러분은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세상에 보내어 죽이시기까지 하면서 구원하고 싶었으니 여러분 한 사람을 한 사람 볼 때마다 못 박혀 죽은 아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든지 심지어 죄의 구렁텅이에 구른다고 할지라도 진주와 같이 보배로운 사람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구원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죽고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십시오. 끊을 수 없는 그 사랑에 붙들려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주님이 잡은 손을 놓지 않으시니 여러분도 주님을 잡은 그 손을 결코 놓지마십시오. 주님의 온기로 이 추운 인생을 이기며 인생의 어두운 밤을 반드시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