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심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 3:4)
녹취자 : 장주은
시편 3편의 저작자는 다윗이고 그 표제에 나온 바와 같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서 도망하던 때에 쓴 시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4절을 통해서 기도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이 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을 ‘여호와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성함 중 가장 거룩한 이름이며, 특별히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심을 지시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굳게 붙들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자신의 죄, 약함, 그리고 자신의 처지와 형편, 이런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 같은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변하지 아니하시는 그 여호와를 굳게 붙들고 기도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한 이 사람은 시인이었는데, 인생에서 커다란 난관에 처하여 고통을 받던 시기에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를 굳게 붙들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이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못하는 수많은 이유들을 만들어 냅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하나님이 돌아보실 리가 없어.’ 이런 양심의 송사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처한 어려움은 너무나 독특하고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도우실 수 없을 거야’, ‘이렇게 어려움이 위중한데 내가 엎드려 기도할 때가 아니라 뛰쳐나가서 행동해야 할 때지’라는 속삭임까지 수많은 외침들이 들리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의 영혼은 피곤해지고 기도를 거두어 버리게 됩니다. 그 때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언약의 여호와를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흘러가고 우리는 그 흘러가는 것들 중에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불멸하고 완전하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이유가 없겠습니다. 그 사실을 명심하면서 언약의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것이 기도할 마음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영혼으로 하여금 세상과 자신에 붙어있었던 시선을 떼어서 언약의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마음에 스쳐가는 수많은 생각과 염려, 걱정, 유혹, 이런 것들과 싸우는 것은 낙심과 혼란의 불 속에서 기도의 빛으로 나아오기 위해서 씨름해야 하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입니다. 한 시간을 기도한다고 해서 한 시간을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 어두움을 헤쳐 나오는데 50분이 걸렸다면 그는 겨우 10분을 기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 어두움을 헤쳐 나오지 못했다면 그는 아무것도 기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선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위에 있는 성도들, 그리고 여러분 자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하러 나오는 것 까지는 우리의 힘으로 했지만 기도를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는 나왔지만 엎드려서 혹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수많은 상념들과 다투면서도 결국은 그것을 뿌리치지 못한 채 자기의 기도의 시간을 접고 맙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기도의 모양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는 악한 세력의 궤계는 처음에는 우리가 기도할 수 없게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예 기도하는 모양을 버리도록 우리를 채근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어떠한 신뢰도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저항할 수 없는 무장해제 상태를 만들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통해 행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의의 병기가 되기보다는 그저 우리의 욕심을 따라 사는 우리의 욕망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오는 첫걸음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량만큼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모든 것이 요동치고 변하고 내 환경이 바뀌고 마지막에는 나까지 변해도 ‘내 기도를 들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리고 그분은 불변하신 분이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모든 기도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반응을 가져옵니다. 그 하나님의 응답은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어떤 때는 우리에게 의심할 여지없이 명료한 방식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되어질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까지는 가르쳐 주시지 않았지만 예전에는 없던 어떤 놀라운 평화를 우리의 마음에 주심으로서 우리의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또 어떤 때는 우리가 기도하는 바를 아주 분명하게 거절하시고 사태들을 우리가 기도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심으로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도 합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모든 응답들은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왜 많이 기도해도 뭔가 딱 떨어지는 응답을 받은 적이 별로 없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답변될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우리의 기도가 기도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매모호한 기도는 응답의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애매모호한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을 해 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지를 알아차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는 대부분 마음에 깊은 진심이 실리지 않은 기도입니다. 생각이나 마음도 실리지 않은 때 쏟아내는 언어들, 난무하는 수많은 습관적인 어투와 말들, 이런 것들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앞에 마구 쏟아내는, 자신도 마음도 알지 못하는 그냥 일상적인 소리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소리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분명하고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습니다.
두 번째 가능한 설명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기도를 통해 충분히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같은 기도를 여러 번 마음을 다해 매달리게 하십니다. 마치 하나님이 간절하지 않으면 혹은 한 번의 간절한 기도로는 거의 안 들으시는 것처럼 느끼게끔 만들어서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러 번에 걸쳐서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심령을 토하게 만드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에 이전에 없던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린 기도라 할지라도, 또 열렬히 드린 기도라 할지라도 응답이 없는 것은,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응답을 충분히 알게 될 때까지 더 많이 기도하게 하심으로 우리 자신을 당신의 마음에 합당하게 바꾸어 놓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열렬히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바꾸어 놓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셔서 기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겨우 어떤 일의 사태를 파악하실 수 있다면 그분은 우리보다 뛰어난 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의 반복이라는 기도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꿔놓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결국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기도다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응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바뀔 때까지 끈기 있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응답을 못 받은 것이거나 혹은 응답하셨는데도 우리가 그 응답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언약에 충실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을 것이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첫 번째 교리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언약의 여호와를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교리는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은 당신의 성산에서 이렇게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산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오늘 시인이 이 기도를 토할 때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막이 있는 곳,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에든지 계시지만 특별히 어떤 장소에서 당신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기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장소를 예루살렘이라고 믿었고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그 예루살렘과 시온을 중심으로 당신의 임재와 그리고 통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든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그 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렇게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모임 가운데 함께 하셔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성산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을 뵈옵는 영광을 누리게 된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 그리고 그들이 함께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의 교회를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서 기도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특별히 예수와의 만남이 있는 그곳에서의 기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함께 당신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공동체적인 기도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나의 목소리로 부르짖는다’라고 했습니다. ‘에크라’() 라고 되어있는 이 단어는 실제 소리를 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비명을 포함해서 전쟁의 위급을 알리거나 혹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어서 왕에게 혹은 재판장에게 호소하는 부르짖음을 모두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열정이 육체의 열정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육체로 소란을 떠는 것이 영혼의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의 찬송과 기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경배의 행위는 좀 더 단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주목하는 그런 경배의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지적하자면, 우리의 연약함이 항상 이 기도에 방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하고 그 마음의 기도가 참으로 진실해질 때 그런 마음의 열렬한 기도의 은혜는 외적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든지 마음이 뜨거워진다든지, 그래서 기도가 하나님 앞에 아주 애절해진다든지 혹은 기도하다가 너무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서 언어를 잃어버리게 된다든지 하는 일들은 있을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행위들이 이런 내적인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들은 마음 안에서 시작이 됩니다. 렌즈를 가지고 초점을 맞추어야지만 불이 붙듯이 문제는 기도할 때에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돋보기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겨울에 산 속에 홀로 떨어져도 얼어 죽지는 않습니다. 돋보기로 마른 나뭇잎을 비추면 불을 피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의 조건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한 곳에 정확히 맞추는 초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점이 잘 맞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수많은 생각과 상념들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은 이 일을 힘들어 합니다. 초점을 맞추는 일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안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하는 일 보다도 집중적으로 앉아서 연구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독서를 할 때, 혹은 논리적인 글을 읽을 때 에너지 소모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마음에 끊임없이 그 초점을 맞추는 것 자체는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이 에너지가 아주 많으면 오고가는 상념들을 뿌리치고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너지가 약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런 상념들에 잠식되어 버립니다. 이런 상념들이 한참 오고가는 것도 피곤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혹은 누워 있어도 이런 생각들이 오고가면 휴식이 안 됩니다. 뇌의 활동을 정지시켜야 휴식이 됩니다. 그런 활동들이 오고가면 마음에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고 마음에 초점을 내려놓고 나면 상념들이 물결처럼 지나가는데 그것도 에너지의 소모가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기운이 빠집니다. 그러면 잠이 옵니다. 피곤하니까 강제로 뇌가 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생각 뒤에는 잠이 옵니다.
지금 말씀드린 일이 기도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기도하러 나왔으면 초점을 하나님께 딱 맞춰야 합니다. 여태까지 살면서 삶의 초점이 주님께 딱 맞춰져 있고 생생한 기도를 수시로 드리면서 살아있었던 사람들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자마자 무릎을 딱 꿇고 시작하면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그것이 부르짖는 것이든 묵상하는 것이든 개의치 않고 기도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점을 하나님께 맞춰야 합니다. 마음은 이것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수많은 상념들이 오고갑니다. 결국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씨름이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는 상념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런 초점을 맞추기 위한 씨름, 그것이 끝난 다음에 오고가는 상념들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이 뇌의 에너지를 많이 앗아가기 때문에 졸음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조는 것이 일상적인 졸음이 아닌 이유가 바로 이런 정신과 마음에서의 싸움에서의 실패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방배동에 있을 때 어느 교역자가 진짜 늦게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9시가 다 되도록 계속 하는데 어쩜 저렇게 기도를 많이 하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새벽기도 와서 계속 자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푹 잠이 들었습니다. 또 한 교역자도 정말 오래 기도를 합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까 기도가 아니라 책을 가지고 와서 펼쳐놓고 읽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의 설교가 끝나자마자 책을 읽기 시작해서 그때까지 읽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역자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면서 목회를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후암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겪었던 일입니다. 교회가 특별새벽기도를 선포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그 당시 45년 된 그 교회는 예배시간에 성도들의 2/3 이상이 잡니다. 목사님 설교 시간에 2/3 이상이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설교를 안 듣습니다. 항상 예배는 12시 3분에 딱 끝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성도들의 교회사랑은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제가 교회 개척하기 25년 전에 700명도 채 안 되는 교회인데 25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헌금을 했는데 25억이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교회 교인이 3천명인데도 복구헌금이 25억이 안 나왔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비록 예배시간에는 자지만 교회를 자신의 일부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새벽기도 때의 일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열심인지 우리 교회도 아마 그렇게 동원을 못할 것입니다. 서울역 근처에 있던 교회였으니까 교인들이 그 동네에 살 수가 없습니다. 서울역 근처에는 집이 없기 때문입니다. 700명이 약간 안 모이는 교회였는데 새벽기도에 450명이나 나왔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교역자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2300명을 동원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할겁니다. 아마 안될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천안에서부터 차를 몰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새벽기도에 말입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두 번째 놀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새벽기도 끝나고 15분 뒤에는 교회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깊이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사람을 모을 수는 있지만 기도하게 하지는 못하는구나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본문을 읽은 이유는 그렇게 기도의 초점이 모아지지 않을 때에, 그리고 상념들과 싸우며 대부분의 기도의 시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할 때 그것을 뿌리치고 기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를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본문을 읽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언어로 구체화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그 진흙 밭에서 그 진흙을 하나하나 빚듯이 언어화 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소리를 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 하는 것입니다. 그 언어를 빚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래도 그 언어를 빚어내야 합니다.
정말 기도가 안 된다고 근심하는 평신도들에게 권하는 것은 내일 새벽기도 나가서 할 기도를 오늘 밤에 직접 써보라고 충고합니다. 쓰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써보십시오. 편지를 적든 한번 적어 내려가 보십시오. 편지를 쓰고 나서 그것을 가지고 새벽에 나와 차라리 진심으로 읽어보십시오. 그래서 기도의 문이 열린 사람도 있습니다. 교역자들에게 제가 부탁합니다. 도저히 기도할 수 없으면 밤에 일찍 들어가서 편지지를 놓고 한 다섯 장 하나님 앞에 편지를 쓰십시오. 그리고 새벽에 나와서 펼쳐놓고 ‘하나님 아버지 전상서’라고 읽으십시오. 농담이 아닙니다. 조크가 아닙니다. 비꼬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빚어내는 것입니다. 묵상기도도 언어가 없는 묵상기도는 멍 때리는 것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언어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신비주의로 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도에 있어서 언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혼의 응시니 뭐니 하면서 탈혼 상태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유혹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언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언어들을 빚어서 소리를 내서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를 방해하는 많은 상념들을 뿌리치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게 언어를 마음속에서 길어내고 길어낸 언어를 소리로 말하면서 자신의 귀로 그것을 들으며 자신 속에 있는 상념들을 떨쳐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깊은 곳으로 들어갈 때 그 때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 앞에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묵상의 기도를 할 정신의 힘도 없는 상태에서 묵상을 시작하는데, 묵상이 아니라 묵침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시인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만났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시련을 만났기 때문에 비통한 마음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부르짖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 속에 일어나는 수많은 상념과 싸우며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언어로 빚어서 구체화 했습니다. 그래서 시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뜨겁게 간구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내일부터 한번 해보십시오. 기도할 때 언어로 만드십시오. 따발총을 단 것처럼, 청산유수처럼 빠르지 않으면 무슨 상관입니까? 마음속에서 그것을 언어화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귀에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자신을 일깨우고, 또 다른 기도를 길어낼 수 있도록 기도할 때 우리는 기도하지 못하는 마음의 연약한 많은 작용들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효과적인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