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을 토하는 기도(2)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5;1)
녹취자 : 허혜숙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하반 절을 좀 더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선 우리가 첫 시간에는 기도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언어는 너무 중요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언어는 설교에 있어서의 언어와 그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중요한 교리적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많은 시간들을 자신은 기도했다고 생각되지만 기도의 효능이 자신의 영혼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어가 기도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언어가 없는 그 기도는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진정한 기도가 아니고 언어가 없는 그 기도는 결코 그 사람의 영혼과 마음을 기도에 합당하도록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이 하반 절이었는데 ‘그것은 내 심정을 헤아려 주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심정’이라는 말이 히브리 단어로 ‘하기그’()인데 이것은 한숨, 탄식, 혹은 속상임, 묵상, 읊조림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어 성경은 ‘신스’(心思)라고 번역을 해서 우리말도 같이 ‘심사’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근소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시인이 고통 받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실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고통 받는 때가 아니면 내 심사를 헤아려 달라고 하는 기도를 우리들이 드리지 않습니다.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는데 무슨 하나님 앞에 나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그런 식의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에서 배우는 것은 우선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시인은 진정한 기도자의 자세가 단지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께 언어로 말을 하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이 헤아려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심정을 헤아리시지 않는 분이실까요?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당신이 창조하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지식의 범위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여러분 자신이 의식하지 못 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자, 그러면 이 시인의 입장에서 왜 내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일까요?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이미 고통을 받으면서 이 시인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치고는 있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신전의식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 하나님 앞에 헤아림 받지 못한 심정은 하나님과 시인 사이에 있는 정신적인 거리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 그 때에 우리의 심리 속에 도입되는 두 가지 특징을 존 오웬은 거리감과 낯섦, 낯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그러면 이러한 마음의 낯섦과 기도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자, 댐에 물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수문을 엽니다. 혹은 댐의 한 구석을 탁 쳐서 깨트렸다고 칩시다. 그러면 물이 확 쏟아져 나오겠지요. 물은 언제나 갇혀있을 뿐이지 자기가 바깥으로 나아가서 계곡 아래로 떨어질 수만 있게 허락해 주기만 하면 물은 언제든지 쏟아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준비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서 거리감이 있고 낯설게 되면 이러한 기도의 준비성이 떨어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기도할 상황이 됐는데도 기도가 확 하고 터져 나오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것 경험해 보셨습니까? 너무 슬프고 서러워서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눈물을 나오는데 기도는 안 되는 경우, 이것이 바로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거리감과 낯섦입니다. 죄가 거리감과 낯섦을 (신자에게) 도입을 하고 소극적으로는 은혜에서 멀어짐으로써 거리감과 낯섦이 도입이 됩니다. 그러면 이 시인이 나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심정을 헤아리시는 것 같고 (우리가) 기도를 안 하면 하나님이 자기의 심정을 안 헤아리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눈높이 교육으로 가르치시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시인이 기도하는 상태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거리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신자들에게 고통을 주셔서라도 그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거리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다고 하는 신전의식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 회복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우리들이 연애에 비유한다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다가 어느 한 쪽이 그를 버릴 때에는 그것은 뜨거운 사랑이 한 번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헤어지는 그 사이에는 좋아하는 데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사랑의 감각이 흐려지는 일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헤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너무 뜨겁게 사랑하지만 넘을 수 없는 벽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똑같이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의 피부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뜨거운 것을 못 만집니다. 우리 어른들은 뜨거운 것을 제법 잘 만집니다. 단순히 참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뿐만 아니라 뜨거운 일을 많이 경험해 봤고 손이나 이런 것들이 가죽이 많이 생겨서 특히 연세 많이 드신 할머니나 아주머니들 뜨거운 것을 잘 잡죠? 굳은살이 많이 생겨서 그런 것들을 능히 잡을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피부가) 둔해집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드리는 깊은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이런 감각들을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아름다움, 사랑, 용서, 은혜, 순결 이런 것들에 대한 감각을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든지 사람은 머리의 생각보다는 마음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따라서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아는 지식은 머리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지식도 아닙니다. 그 지식이 우리의 가슴을 점유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도 기도의 제목을 잃지 않게끔 관리하십니다. 오히려 당신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은 성경과 교회 역사를 통해서 동일하게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들어주셨습니다. 칼빈의 생애도 우리말로 말하자면 초대형교회를 이룬 셈인데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외적으로는 성공을 했고 칼빈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 존경심은 단지 스위스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개신교의 자유도시인 제네바를 찾아오면서 그런 존경심은 글로벌한 존경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는 끊임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마틴 루터도 마찬가지이고 쯔빙글리도 마찬가지, 그 뒤를 이었던 불링거의 삶이나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은 고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고난을 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사도 요한도 한 때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사랑해주셨던 것과는 별도로 그러한 사랑을 받는 사람도 결국은 죄인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다루셔서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지 아니 하시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조금 사랑한 자들에게는 돈을 주시고 많이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고난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당분간 조금만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아프고 고통 받는 그런 지점들은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또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만큼 온전한 사람들이 되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훌륭한 시금석이 됩니다. 식물학자들이 설명하는 것을 보니까 우리는 꽃향기가 그냥 그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으라고 뽐내라고 (향기를) 내는 것 같지만 벌레와 외부의 침입에 대해서 자기를 보호하는 방어수단이라고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그 향기가 그렇게 좋지만 벌레들에게는 그 향기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질이라고 합니다. 즉 그것을 냄새 맡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해석이 각기 달라집니다. 어쩌면 그 꽃으로 날아드는 벌이나 나비들은 코를 꽉 막고 고통 속에서 그 향기를 맡고 꿀을 채집하거나 혹은 꽃가루를 묻히기 위해서 꽃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시련도 만나고 역경도 만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런 시련과 역경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엎드려지게 되고 넘어지는 그런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시련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노라면 하나님이 그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꿔놓으시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느끼며 그 깨어난 모든 감각, 하나님의 거룩함, 아름다움, 사랑, 순결, 용서 이런 감각들 속에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격하고 슬픈 것을 보고 애통하고 아픔 것을 보면서 아파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뒤따르면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기도가 주기도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 그렇게 무감각해진 마음으로 나아가서 그런 은혜를 회복해야 하는 우호적인 강제나 혹은 개인의 결심은 기도하러 나오게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기도하는 것은 남이 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본인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복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훌륭한 기도에 이르는 비결이라고 말하지만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사람에 대한 미움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에 있는 것을 쏟아내면 하나님 앞에 똥물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진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욕설을 퍼부으면서 칼을 휘두를 때 ‘너는 정말 너의 욕망에 대해서 진실했구나’ 우리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의 위엄과 영광, 그의 높고 위대하심과 그의 거룩하심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옷깃을 여미는 것입니다. 그런 떨리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시종일관 유지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자신의 마음에서 모든 생각들을 다 언어로 토해 버리게끔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자체가 나의 마음의 바르고 바르지 않음을 판단하게 하고 나의 현재 마음의 상태와 마땅히 돌아가야 할 내 마음의 상태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하나님 앞에 언어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 정말 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런 마음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시겠지요?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들어가는 첫 문입니다. 이것 없이는 그는 문을 열고, 기도 속으로 들어가도 거기는 하나님의 존전이 아니라 쓰레기통입니다.
두 번째가 열렬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입니다. 열렬함의 기원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열렬해 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열렬한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신의 신앙상태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밖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거스틴을 읽으면서 (어거스틴이) 무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무지는 그 사람의 잘못이다. 무지는 스스로 알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지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강단에 올라와서 교회를 내려다보면 아마 (여러분의) 예배의 자세가 바뀔 것입니다. 제가 설교하다가 말이 꼬일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여러분들 때문에 말이 꼬이게 됩니다. 다른 이유에서 꼬이는 적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여러분들이 그 원인을 제공합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와서 설교를 듣는데 집중을 안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혜를 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의 눈물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어도 황수관 박사가 와서 5분만 이야기하면 눈물을 흘릴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자세가 그렇습니까? 그는 골방에서 홀로 TV로 예배를 드리면 자기만의 문제인데 다른 사란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기로 선택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 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어루만지신다.’ 는 신전의식의 체험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예배의 영광은 하나님의 깊은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노래를 부르는 감정적인 찬양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머리를 들이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운전교육도 그렇게 받으면 운전면허도 떨어진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교회에 비하면 비교적 괜찮지만 제가 보기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기도를 하든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하나님의 위엄과 위대하심에 대한 인식이 없는데 꼭 태도가 중고등학교 때 대머리 까진 교장선생님이 길게 정신 훈화를 하면 시간 보내는 애들처럼, 그것도 열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했다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보면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뭣 하러 거기에 앉아있습니까? 본인도 고통스럽고 설교자도 괴롭게 하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본을 끼치지 못하고 도대체 그것이 뭡니까? 드물기는 하지만 교역자들까지도 졸고 있고 말입니다. 무슨 그런 교회가 있겠습니까? 백날을 기도를 해도 기도를 할 뿐이지 하나님은 한 번도 기도를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천사가 그릇에 담아서 하나님 앞에 올릴 수 있는 기도를 몇 번이나 드리고 있는 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담임목사가 나오라고 하니까 여섯 시에 나올 수는 있지만 기도하게 하는 것은 담임목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대부분 천국에서 DM 광고 들어오는 것처럼 취급을 받아서 모두 폐기되어버립니다. 정말 소수의 우리가 드리는 기도 중에서 천사가 그릇에 담아서 향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보좌에 올려 드릴만한 기도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애들 때문에 억지로 사는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여러분들이 교역자를 하면무엇을 하며 간사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이 일에 봉사를 하는데 여러분들은 믿지도 않고 그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위선이 아닙니까? 그런 것들은 우리 신앙에 올바른 자세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든 소망은 이 지구상 한 모퉁이에서 이렇게 작은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서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 이 작은 섬김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예배자로 만드는 효과는 언제나 예배자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경배, 그 경배가 또 다른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방식으로 쓰나미처럼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도를 하든, 설교를 듣든, 예배를 드리든, 성경을 읽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