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짖는 소리의 기도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시 5:1-2)
녹취자 : 장주은
다윗의 시인 것은 분명한데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악인에게 시달리고 고통 받는 극단적인 괴로움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당하며 받는 고통의 때에 쓰였거나 혹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이어진 고난의 때에 쓰였을 시일 가능성이 많겠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괴로움이 어디 다윗에게 있어서 그 두 때 뿐이겠습니까. 그 시기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시련을 통해서 시인은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주 깊이 터득하게 됩니다.
우선 여기에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아주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기도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뛰어다니는 말이 아니라 기도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사실 존 오웬 목사님 시대에도 이것을 가지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에도 관상기도 같은 풍조가 있어서 그냥 조용히 묵상을 하면서 신비한 명상을 하면 그것이 곧 기도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고 카톨릭에서 그런 것들을 아주 폭넓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는 아주 분명하게 기도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공격했습니다. 우리가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기도를 대신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한 그런 불분명한 태도가 우리에게 수많은 신비주의를 양산해내는 그런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인간이 살면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또 우리의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기도는 아니다, 그래서 그것이 기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항상 기도하라고 한 사도바울의 그 권면과 이것을 연결시킬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항상 기도하라고 한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바라보면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면서 기도에 준비된 자세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기도, 그 자체와 하나님을 향한 묵상이 동일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설득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말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기도는 언어로 하는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언어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방언이라고 하는 은사가 주는 유익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들이 하고 있는 방언과 고린도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방언은 또 다른 것이고 또 사도행전 2장에서 있었던 그 방언도 고린도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방언과 다르다는 것이 나의 신학적인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이미 고린도전서 13장을 강의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다 가르쳐드렸습니다.
기도는 언어입니다. 하나님이 왜 기도를 언어의 기도로 삼으셨느냐하면 하나님이 알아들으시기 위해서 언어를 주어, 동사, 목적어, 이런 것들을 배열하라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당신이 뭔가 모르는 사실들을 파악하고 인지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기도를 언어로 정의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효과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효과는 (우리가) 기도를 함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의 심령에, 마음에 더 넓게는 생각과 감정과 행하는 의지, 모든 것에 쇄신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라는 수단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듯이 당신은 우리가 기도를 해야지만 뭔가를 아시는 분인 것처럼,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면 대충 기도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 급해지셔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시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그런 효과가 느껴지게끔 하셔서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를 자극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우리가 형성한 잘못된 질서를 버리고 하나님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 그러면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의 기도의 내용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전심으로 우리 자신의 기도를 인식하고 그 기도 속에 들어있는 감정을 느끼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과 열정을 표현하고 그 기도 속에서 우리의 의지가 일깨워지고 기도 할 때에는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 라고 하는 의지가 우리 안에서 발현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우리를 바꾸시고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입니다. 사람들이 아주 유치한 생각을 기도에 대입하거나 혹은 아무 생각도 대입하지 않아서 기도가 우리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언제 (제가) 외국에 갔었을 때, 어느 교회에 새벽기도를 갔습니다. 옆에서 몇 사람이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주여….” 이렇게 한시간 가까이 기도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사람) 속에서 무슨 언어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전혀 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왜 기도를 저렇게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아주 분명하게 언어로 형성해서 길어 올릴 때 그것이 마음에 주는 영향력과 그렇지 않을 때 마음에 주는 영향력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더욱이 우리가 영적인 상태가 아주 탁월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을 때에는 좀 다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상념들의 방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엎드립니다. (마치) 가장 심오한 기도에 들어간 사람인 것처럼 엎드립니다. 아직 졸지는 않는데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들이 꼬리를 물고 오갑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지나가면 머릿속에 기도에 언어를 만들 능력이 안 됩니다. 그렇게 수많은 상념들이 오고가고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정신의 의지를 빼앗아갑니다. 피곤이 몰려옵니다. 잠이 들어 버립니다. 얼굴에 손자국이 시뻘겋게 되어서 일어납니다. “Nothing happen.”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활이 반복될 때 그런 기도생활을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하지만) 시인은 간절히 부르짖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이 갱신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시편을 정직하게 읽어보십시오. ‘묵상합니다.’ 라는 그 단어가 새 성경 번역에서 ‘읊조립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사실은 그 ‘묵상합니다.’ 라는 번역이 굉장히 좋아 보이지만 그것이 저는 우리의 기도생활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묵상이 무엇인가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는 속에서 그 말도 생각을 탈각시켜버린 조용한 명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큰 소리로 내던 것을 작은 소리로 (내어) 언어로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묵상입니다. 명상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묵상은 언어를 아주 작은 소리로 읊조리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묵상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찬양이든지 기도든지 간에 언어를 원하십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전도에서 신비체험과 관련해서 거짓 선지자들과 참 선지자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혹은 이방 선지자들의 전통에서 접신하게 되면 지성이 멈춥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그리스의 ‘헤르메스의 전통’입니다. ‘헤르메스’(Hermes)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허마스’(Hermas). 웅변의 신입니다. 그래서 hermeneutics 라고 하면 해석학이 됩니다. 신전에 가면 거기에 수많은 -우리로 말하자면- 무녀들이 있습니다. 신전에서 수종을 드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 신탁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줍니다. 그 사람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그 앞에 부복해서 신탁의 말씀을 듣고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지키면서 삽니다. 그 사람들을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헤르메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신탁의 말씀을 받는 사람’입니다. 받으면 이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시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고 논리도 맞지 않는 수많은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지성이 스톱된 상태에서 환상 속에서 말을 막 끌어내는 것입니다. 참 공교로운 것은 -지리적으로 델포이신전이라고 하는데- 그 신전에 돌멩이가 하나 이만한 게 있습니다. 크기는 맷돌짝 3-4개의 크기였습니다. 그 돌멩이는 동그랗게 생겼습니다. 그 돌멩이가 자기네 말로는 우주에서 떨어졌다고 합니다. 저는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떨어졌으면 좀 색깔이 검은빛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떨어진 운석의 이름을 ‘에오로파’(Europa) 라고 부릅니다. 거기서 유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설에 의하면 거기에 옛날에 수많은 유황가스가 나왔다고 합니다. 가스가 솔솔 땅 속에서 나오면서 이방선지자가 심취한 상태가 되어서 거기에 가스에 취해서 몽롱한 상태가 됩니다. 막 말을 쏟아냅니다. 그러면 그것을 헤르메스들이 번역을 해줍니다.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그것이 이방선지자들의 ‘입신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선지자들의 전통은 아주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서 어떤 입신의 경지에 이르든지 간에 지성의 작용은 유지됩니다. 그래서 명료한 정신으로, 더 깊은 신비상태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지성의 활동이 아주 명료해져서 비전을 보기도 하고 그 비전을 해석하기도 하고 명료하게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선지자의 전통과 이방선지자의 전통의 차이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여기서 이야기하는 기도에 관한 전통과도 매우 밀접하다고 봅니다. 이 시속에서 다윗은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 자신으로서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소서.’ 하나님이 무슨 귀가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표현합니다. 신인동명적인 묘사를 가지고 자신 속에 있는 기도에 관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하나님은 언제나 기도 속에서 우리의 언어를 들으시길 원하시는 분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언어를 듣고 싶어 하시는 이유는 당신 자신이 그 언어가 아니면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모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께 통로의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함으로써 그 기도가 우리 안에서 어떤 갱신을 일으켜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우리 자신이 변혁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쇄신되기를 원하십니다.
또 왜 하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기도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염려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염려와 관련을 짓습니다. 즉, ‘너희에게 네가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살아도 네가 먹어야 하고 마셔야 하고 입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기도하지 말아라’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기도하지 말아라’ 그런 뜻이 아니라,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어긋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해석을 이상하게 비틀어서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은 양식이 아니다, 밥이 아니다,’ 라고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6장에서의 초점은 지금 무엇을 하다가 그 말씀을 하셨냐 하면 ‘너희를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왜 그렇게 하냐하면 염려 때문에 인간이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염려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야 할 백성들의 소명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마라, 염려하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즉) “너희에게 그것이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 는 뜻입니다.
그래서 종합하면 결국 하나님이 기도 속에서 언어로 내는 기도를 원하시는 이유는 그래야지만 하나님이 알아들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하게 하시는 경륜 자체가 당신이 우리의 기도에 의해서 바뀌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인 것처럼 이해를 해서 우리 자신을 바꾸게 하시는 것이 기도의 경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십니다. 이 기도는 언어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또박또박 언어로 길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저는 어떤 때 너무 산란하면 정신을 딱 집중시키면서 영어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정신이 딴 데로 안가고 정확하게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말 할 때는 정신없이 하지만 영어 할 때는 -우리가 미국에 살다 와서 잠 잘 때도 영어로 잠꼬대 하는 것이 아니니까- 계속해서 주어, 동사, 목적어, 전치사, 관계대명사까지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할 때 언어를 길어내는 것입니다. 요즘은 좀 안하는데, 한 때 매일 아침마다 그렇게 기도를 해서 꽤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어로 기도하다가 정신이 또렷해지면 우리말로 소리를 내서 기도를 했습니다. 더 좋은 상태가 되면 딱 눈을 감고 아무 소리도 안내면서 수많은 언어로 정확하게 빚어지면서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상태가 좋을 때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막 산란한 속에서 그러다 잠들다 가거나 아니면 그러다 시간이 돼서 벌떡 일어나서 가는데 기도회는 왔지만 기도는 한 적이 없습니다. 마음에 아무 영향이 미치지 않습니다.
오늘 이 한가지만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기도는 언어다.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그래서 언어로 절실하게 기도할 때, 첫 번째로 그 언어 자체는 우리 마음에 던지는 두레박입니다. 그 두레박으로 흔들면서 그것을 길어 올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와서 두레박도 안 내리고 돌아갑니다. 아주 정직하게 얘기하면. 솔직히 우리도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교역자인 우리들도. 직원인 우리들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두레박은 던졌습니다. 근데 물이 안 담겼습니다. 길어 올리다가 그럴 힘도 없으니까 그냥 속에 두레박을 던져버리고 가버립니다. 이 세상에 어느 종교도 신 앞에 지성을 드리지 않고 기도를 말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지성을 드려야 합니다. (보통) 치성을 드린다고 합니다. 자신의 ‘성’을 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가 ‘성의 신학’을 이야기 하면서 그 ‘성’은 말씀 언변에 ‘이룰 성(成)’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성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말씀을 이루어 드리는 고결한 결단을 동반합니다. 이것을 ‘성(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는) 두레박을 던져서 흔들면서 물을 길어내는 것입니다. 조금 길으면 한번 툭 빠트리면 두레박이 쑥 들어가면 더 깊이 들어가면서 물이 완전히 가득 담기게 됩니다. (두레박을) 끌어 올립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언어입니다. 그래서 제가 죽어도 기도가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지체들에게 “새벽에 나와서 할 기도를 밤에 써가지고 와라. 쭉 써서 하나님 앞에 편지를 읽어라. 그게 너를 더 많이 변화시킨다.” 라고 말입니다.
요즘은 왜 그런지 우리 젊은 집사들을 기도를 잘 안 시키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1층에서 예배드릴 때 2부 예배의 대표기도 시간에 젊은 집사들이 순서에 되어서 기도를 하는데 누구의 기도보다도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써가지고 와서 읽으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즉, 기도는 언어입니다.
여러분들도 교인들을 훈련시킬 때 기도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깊이 경험하십시오. 기도에 있어서 언어의 힘이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 우리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소리를 크게 내냐, 안 크게 내냐는 이것은 나중 문제입니다. 그것은 제가 다다음주에 설교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언어가 아닌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아주 명료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언어를 그 마음 깊은 것, 그러면 언어는 모두 기도냐, 아닙니다. 그런 기도는 바리새인들이 유창하게 잘 한 것입니다. 여기에 구관에서만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 깊은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인간의 심성 깊은 곳, 마음에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경륜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그것이 기도의 경륜입니다.
(예화) 운동을 합니다. 열심히 걷는다든지 운동을 하고 나면 몸 상태가 달라지는 이유는 활동을 하면서 내 몸에 가만히 있던 것들이 즉, 임자몸이 몸이 뛰거나 걷거나 운동기구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온몸을 움직이니까 온몸에 모든 기관들이 막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시골에 있는 할아버지도 건강하고 도시에서 헬스클럽 늘 다니고 평생 운동한 할아버지도 건강합니다. 그런데 두 분을 세워놓고 몸을 보면 몸이 현저히 다릅니다. 시골에서 밭 매고 농사지으면서 노동을 했기 때문에 건강하신 분은 그 체형에 대해서 동의가 별로 안 됩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밥 잘 먹고 체계적으로 트레이너에게 운동을 받은 할아버지는 똑같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체형이 동의가 됩니다. 가끔 가다가 이상하게 밭일하니까 이렇게 됩니다. (밭일은) 몸의 모든 부분이 다 근육이 움직이는 게 골고루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일은 어떤 한부분만 일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부분은 안 깨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규칙적으로 헬스와 같은) 운동을 할 때 온 몸이 깨어납니다. 다른 상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쉬는 적은 거의 없습니다. 밤에 잠을 자면서도 꿈을 꿉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그냥 어떤 감각적인 것에 빠져서 게임을 막 합니다. 그때도 영혼의 기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면서 감각적인 기능만 살아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책을 읽으면서 논리적으로 따집니다. 그런데 일부가 들어갑니다. 이와 달리 기도는 이것을 다 동원합니다. 그래서 논리로 파악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관하고 자기의 추함을 꿰뚫어보고 거기서 슬픔과 기쁨을 느끼고 분노와 좌절을 경험하고 그러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해결이 되어서 또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하는, 영혼이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정신활동들이 다 동원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헬스클럽에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운동할 때 온몸이 깨어나듯이 우리의 영혼의 기능 중 한 부분이나 두 부분이 아니라 모든 기능이 다 깨어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을 주신 경륜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이해하고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아주 적게 이해했지만 치열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결국에 있어서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생명력 있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기도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언어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는 열정 속에서 기도하시면서도 당신의 그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기도하시면서 아주 또렷한 언어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던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기도는 언어입니다. 언어가 아닌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 중의 아주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기도는 언어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