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
2022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2년 4월 24일 – 6월 5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6월 24일
목 차
1. 가족, 특별한 타인(창 1:27-28) 2022.04.24. 주일오전 6
2.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까?(엡 6:4) 2022.05.01. 주일오전 16
3.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 6:2-3) 2022.05.09. 주일오전 31
4. 남편과 아내-장년편(엡 5:24-25) 2022.05.15. 주일오전 42
5. 결혼과 비혼-청년편(고전 7:7) 2022.05.15. 주일오전4부 53
6. 부부, 서로 괴롭게 하지 말라-장년편(잠 25:24) 2022.05.22. 주일오전 74
7. 네가 천연기념물이냐?-청년편(잠 7:21-23) 2022.05.22. 주일오전4부 91
8. 참척에 슬피 울 때-장년편(눅 7:11-16) 2022.05.29. 주일오전 113
9. 다시 그 죄를 범하지 말라-청년편(요 8:2-11) 2022.05.29. 주일오전4부 125
10. 가정, 회심의 화로입니까?-장년편(말 4:6) 2022.06.05. 주일오전 140
11. 회복-쉽지 않지만 확실한 길-청년편(시 51:16-17) 2022.06.05. 주일오전4부 152
<설교 프레임>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1 2022. 4. 24 주일낮예배
< 가족, 특별한 타인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I. 들어가는 말
가족이란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의 구성원이며 혼인, 혈연, 입양에 의해 이뤄진다”
가족 때문에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이 많다. 가족에 대한 세 관점
a. 긍정적 관점: 구조기능론
b. 부정적 관점: 갈등론
마르크스(K. Marx)와 엥겔스(F. Engels)는 가족이라는 제도가 부르주아 제도의 표상이며, 이 질서를 떠받치는 특정 권위에 굴복하게 만들게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착취적 속성이 가족을 비정상적으로 의존하게 한다고 보았다.
페미니스트(feminist)들은 남성에 의한 지배와 불평등을 강조하면서 가족화를 권력단체화로 본다. 가족제도를 성의 갈등과 착취 구조로 본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두 기관은 가정과 교회 밖에 없다.
II.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
흙(apar)과 생기로 사람을 만드셨으니, 육체의 생명(生命)은 영혼이며,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God)이시다.
하나님 보시기에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았으니, 이는 아담 홀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기에 온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와를 지으심은 단지 아담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됨으로써 이루실 인류 창조의 계획과 관련되어 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은 인간(人間)을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가족을 이루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방식이 다르다. 아담(Adam)은 하나님께서 직접 흙으로 지으시고 하와는 그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여기서 창조의 방식은 남자와 여자의 우월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에서 남성 우위론은 힘의 소산이고, 이러한 논리는 여성에 대한 잔인한 억압과 폭력을 가져왔는데 이는 죄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서로 다른 기능적인 질서(秩序)가 존재할 뿐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동등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나님은 한 몸에서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을 만드셨으니, 이는 분리된 몸으로는 둘이지만 사실상 그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가 결혼할 때 보였던 사랑의 고백(告白)을 보라.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이는 남편과 아내의 우열이 아니다. 서로 다른 타인(他人)이 사랑으로 하나의 연합을 이루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합은 아담과 하와만이 아니라 이후로 태어날 모든 인류(人類)가 함께 이루어야 할 연합을 보여준다.
처음 조상들의 타락으로 이 연합(聯合)이 깨어졌고 그 결과로 악이 들어오게 되었다. 미움과 갈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구약의 이스라엘(Israel)은 이 연합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체로서 이 사랑의 연합을 회복하셨다.
이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 사랑 안에서 모든 인류를 연합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먼저 결혼관계를 통하여 이루게 하셨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와 교회(敎會)의 관계도 결혼관계의 유비로 표현되었다.
III. 두 가지 명령을 주심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아담과 하와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하셨다. 그것이 바로 종교명령과 문화명령이었다.
A. 종교명령
종교명령은 모든 것을 주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계명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사랑과 순종이었다.
B. 문화명령
1. 생육하고 번성함
여자를 ‘하와’라고 부르심으로써 여성이 가진 생명성(生命性)을 알게 하셨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아담과의 결합을 통해 인류(人類)를 생산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인류를 형성하고 그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는 관계(關係) 속에서 살게 하셨다.
인간의 타락으로 잠시 그 계획이 보류되는 것 같았으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이루셨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의 연합을 미리 보여주는 곳을 교회(敎會)로 삼으셨다.
2. 정복하고 다스림
정복과 다스림은 파괴와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통치가 미치지 않던 영역을 새로 얻어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이 가장 좋은 상태를 누리게 되는 일이다.
개척(開拓)을 위해서는 용기와 투지 그리고 결단이 필요하고, 다스림을 위해서는 지혜와 세심 그리고 공감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이를 위하여 남자에게 정복을 지향하는 성향을 주시고, 여자에게는 관계(關係)를 지향하는 성향을 주셔서 조화를 이루게 하셨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다른 타인(他人)으로서,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서로 온전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받고 사랑함으로써 서로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함으로써 가정을 이루신 뜻을 이루어가야 한다.
VI. 적용과 결론
인류창조를 향한 하나님 경륜(經綸)을 숙고하라. 그 경륜 안에서 가정을 세우신 뜻을 바라보라.
남편과 아내를 비롯한 가족 간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은 서로가 그 안에서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길이다.
인간은 가족관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의지함으로써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眞理)와 사랑으로 참 사람이 되어 가라.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가정을 세우신 뜻을 이루라.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2 2022. 5. 1 주일낮예배
<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까?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I. 본문해설
II.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까?
A. 노엽게 하지 말라
B.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4 2022. 5. 15 주일낮예배(청년부)
< 결혼과 비혼 >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전 7:7)
I. 본문해설
II. 결혼과 비혼
A. 창조와 결혼제도
B. 비혼에 대한 재해석
1. 거룩한 목표
2. 삶의 양태와 본질
3. 하나님 안에서 행복함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3 2022. 5. 8 주일낮예배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I. 본문해설
II. 네 부모를 공경하라
A. 약속이 있는 계명
B. 부모를 용서하라
C. 부모를 사랑하라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4 2022. 5. 15 주일낮예배
< 남편과 아내 >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4-25)
I. 본문해설
II. 남편과 아내
A. 피차 복종함
B. 서로 사랑함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4 2022. 5. 15 주일낮예배(청년부)
< 결혼과 비혼 >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전 7:7)
I. 본문해설
II. 결혼과 비혼
A. 창조와 결혼제도
B. 비혼에 대한 재해석
1. 거룩한 목표
2. 삶의 양태와 본질
3. 하나님 안에서 행복함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5 2022. 5. 22 주일낮예배(장년부)
< 부부, 서로 괴롭게 하지 말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
I. 본문해설
부부, 은퇴 후 필요한 것이 다르다.
II. 서로 괴롭게 하지 말라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하라.
A. 괴롭게 하지 말라
비인격적인 무시와 억압을 일삼다.
배려 없는 언사로 끊임없이 다투다.
배우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라.
B. 자기를 완성하라
C. 관계를 소중히 여기라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5 2022. 5. 22 주일낮예배(청년부)
< 네가 천연기념물이냐? >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잠 7:21-23)
I. 본문해설
II. 네가 천연기념물이냐?
A. 유혹과 협박
B. 뜻밖의 결말
C. 순전함을 지키는 길
1. 성도임을 잊지 말라.
2. 결과를 기억하라.
3. 은혜를 간구하라.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6 2022. 5. 29 주일낮예배(장년부)
< 참척에 슬피 울 때 >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 7:11-16)
I. 본문해설
II. 참척에 슬피 울 때
A. 참척이란 무엇인가?
B. 영혼의 참척
C. 슬피 우는 어미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6 2022. 5. 29 주일낮예배(청년부)
< 다시 그 죄를 범하지 말라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2-11)
I. 본문해설
II. 잡혀온 여자를 용서하심
A. 모세의 율법
B. 예수의 율법
1. 용서하시는 사랑
2. 다시 범죄하지 말라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7(끝) 2022. 6. 5 주일낮예배(장년부)
< 가정, 회심의 화로입니까? >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I. 본문해설
II. 가정, 회심의 화로
A. 하나님을 떠날 때
아비에게 자식 사랑이 없음.
자식에게 아비 사랑이 없음.
땅이 저주받을 죄임을 알라.
B. 가정, 회심의 화로
1. 자식은 무엇인가?
a. 육체와 영혼을 닮음.
b. 살 중의 살처럼 여김.
2. 부모의 본분은 무엇인가?
a. 회심과 회심의 보존
b. 그리스도를 보여줌
c. 가정, 회심의 화로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7(끝) 2022. 6. 5 주일낮예배(청년부)
< 회복 – 쉽지 않지만 확실한 길 >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I. 본문해설
II. 그 죄로부터의 자유
A. 다윗의 시도
1. 제사를 통한 해결
2. 실패로 깨닫게 됨
B. 마음을 고침
1. 자기 마음의 심연을 봄
2.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C. 사랑을 믿음
III. 적용과 결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5 (2022.05.22_주일4부예배)
1. 가족, 특별한 타인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녹취자 : 조복령
인간에게 가장 큰 위로도 가족을 통해서 받고 상처도 가족에게서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가족을 주신 경륜과 가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우리를 어떻게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뤄가시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확고한 교리와 적실한 예화들로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을 받게 할 것이다.
I. 들어가는 말
태어나서 가장 많은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도 가족이고, 때로는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도 가족입니다. 가족이란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구성원을 가리킵니다. 가족은 혼인, 혈연 혹은 입양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가족 때문에 행복해지는 사람도 많지만, 불행해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가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견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긍정적 관점이 있고, 부정적인 관점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관점은 여태까지 대부분의 인류 사회가 지탱해왔던 관점인데, 가정을 구조와 기능의 측면에서 보면서 가정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 관계 안에서 육체적으로 보호를 받고, 정신적으로 양육을 받으면서 사회에서 활동하기에 적합한 사람들로 길러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가족을 부정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마르크스(K. Marx)와 엥겔스(F. Engels) 같은 사람은 가족이라는 제도를 부르주아(bourgeois) 제도의 표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bourgeois) 질서를 떠받치는 특정 권위에 굴복하도록 가정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착취적인 속성이 가족 구성원들로 하여금 서로를 비정상적으로 의존하게 한다고 본 것입니다. 즉, 사회가 너무 각박해지니까 가족에 대한 비정상적인 의존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칼 마르크스(K. Marx)는 가족을 끔찍히 사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프로이센의 귀족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후에 그 여자는 예니 마르크스 (J. Marx )가 되는데, 모두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네 명의 자녀는 빈곤과 가난으로 모두 어려서 죽고, 세 명의 딸이 남았습니다. 세 딸 중에 두 명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자녀들이 죽을 때마다 칼 마르크스는 아주 깊이 괴로워하고 가슴을 쥐어뜯을 정도로 가슴 아파했고, 아내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이러한 괴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한편 패미니스트(feminist)들은 가족 관계를 남성에 의한 지배와 불평등을 심화하는 구조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가족화되는 것 자체가 권력 단체화되는 것으로 보면서 결국 가족 제도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性) 갈등과 착취하는 구조라고 봅니다. 그래서 패미니스트(feminist)들은 아이의 출산과 양육, 그리고 아이를 교육하는 모든 것을 사회가 책임져야 되고, 여성은 육아로부터 해방되거나 최소한 남성과 똑같은 위치에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할 책임을 분담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것을 어떻게 보고 있겠습니까? 성경에서는 가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오히려 교회보다 더 먼저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기관은 하늘 아래 딱 두 개밖에 없습니다. 가정과 교회, 둘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타락하면서부터 나타나게 된 제도니까, 결국 교회와 세상이 구별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하나님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당신이 직접 만드신 제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가정과 교회라는 두 기둥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우리가 진정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이라는 제도 안에서 자신이 정말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온전한 가족이 되어 가고, 교회라는 제도 안에서 참다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가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나란히 평행으로 가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숙제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가정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 내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에 달린 것입니다.
II.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빚으사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산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영혼이고,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고, 그가 혼자 사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아담 홀로 있는 것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기에 온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인류를 창조하여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이 세상을 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건설해 가는 행복한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시면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와를 지으신 것은 단지 아담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 부부가 됨으로써 그 후에 이루어질 인류 창조의 계획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에 적합하도록 하나님은 남자에게는 그에 맞는 본성을 주시고, 여자에게는 또 그에 맞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이루게 하셨고, 남자와 여자의 성질들이 자녀를 통해서 물려 내려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결국 제3의 성(性)은 없고 모두 남자 아니면 여자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남녀는 함께 가정을 이루면서 인류를 번성하게 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자기를 사람으로 지으신 뜻을 이루어가면서 사는 데 행복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의 방식이 다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직접 흙으로 그의 몸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육체를 지으신 소재는 흙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아파르(עָפָר)'입니다. 이는 '먼지' 혹은 '티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창조 재료와 창조 방식 안에서 인간의 비천함과 위대함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로 말하자면 먼지와 티끌로 지어졌으니 그는 아무것도 아닌 허무한 존재이지만, 그 코에 친히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당신을 닮은 영혼을 지으시고 그 사람 몸의 주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아니라 영혼 때문에 그는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서 위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옆으로는 사람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자연 세계를 이해하면서, 인류의 복지와 자연의 모든 세계의 쉼과 질서를 위해 이바지하며 살게끔 창조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이 남자는 직접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여자는 남자의 몸의 일부를 취하여 여자로 만드신 것에서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우열을 가려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결국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남자들은 남성 우위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사회 구조를 만들었고, 심지어 가정까지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잔인한 억압과 폭력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가정 제도가 인간의 탐욕과 폭력에 의해서 죄로 물든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다른 기능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열의 질서가 아니라 기능의 질서일 뿐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동등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적인 사실을 사회가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참으로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은 한 몸에서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는 모두 동일하게 존귀한 자이며 존엄한 자이고, 하나님 앞에 아주 소중한 사람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성(性)의 차별 혹은 빈부의 격차, 피부 색깔의 차이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아야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리된 몸으로서는 둘이지만 사실상 그들이 하나의 사랑으로 연합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아담과 하와가 결혼할 때 이루어졌던 고백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 2:23) 히브리 문학에서 '무엇 중에 무엇'은 최고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뼈 중에는 잘라내도 목숨에 지장이 없는 것이 있고, 잘라내면 절명하는 뼈가 있습니다. 살도 한 점 떼어내도 생명에 아무 지장이 없는 살이 있고, 1센티미터만 손상되어도 죽음에 이르는 살이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와를 보며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동일하게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락하고 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결국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반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죽음도 없었겠지만, 그들은 살아있는 날 동안 언제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사랑의 고백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사이에 가인이 태어났을 때도 똑같이 '우리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는 우리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동일하게 고백했을 것이고, 온 인류가 지구상을 뒤덮어도 서로 모두에 대해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이 흔적이 아직 인간의 양심 속에, 마음속에 일부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국제적인 연대가 가능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전쟁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심을 느끼고, 잘 끝나기를 바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이런 사랑으로 하나가 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남녀의 우월을 가리기 위해 지배 받고, 지배당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매튜 헨리(M. Henry)라는 주석가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남자 몸의 지체들 중 유독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을까?"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해 심장 가까운 곳에서, 보호받게 하기 위하여 품 가까운 곳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이렇게 해설을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연합은 아담과 하와만이 아니라 태어날 모든 인류가 함께 이루어야 할 연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타락으로 사랑의 연합은 깨졌습니다. 그 결과 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사라졌으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끊임없는 지배욕과 정복욕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신과 동일한 형상을 가진 사람을 향해서까지, 가족을 향해서까지 실현이 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움과 갈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먼저 이 연합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확장된 가정이라고 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체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셔서 교회의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 사랑의 연합을 회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사실은 당신의 몸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당신의 몸을 위해서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당신이 못 박으신 몸은 육체의 몸이었으나 당신이 위하여 죽으신 그 몸은 영적인 몸이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여 당신과 영적인 연합 안에서 사랑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을 먼저 결혼 관계를 통해서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생겨났고, 이후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결혼 관계의 유비(類比)로 표현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서로 지배하고 지배당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오,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존경하게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특별히 하나의 사랑의 연합 속에서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으로만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고백을 하던 두 사람이 바로 다음 성경 한 장 너머에서는 파경에 이르게 됩니다. 둘이 다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각자 범죄했고, 그러자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졌습니다. 그러자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가정은 파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은 특별한 타인입니다. 나 이외에 모두 타인입니다. 자기는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 타인입니다. 모든 타인들 중 가족은 특별한 타인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헤어지기가 어렵습니다. 포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족 관계를 탈퇴하는 것은 그렇게 가볍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특별한 타인이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나와는 다른 개체라는 점에서는 타인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관계라는 면에서는 특별한 타인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숙제는 둘로 요약이 됩니다. 그것은 고대나 현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신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하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아니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종교에 따라서 각자 자기의 신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어떤 절대자의 관념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마땅히 되어야 할 자신 앞에서 자기가 어떻게 하면 거기에 맞는 온전한 사람이 될지 고민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고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고민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웃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개의 축 안에서 자기가 어떻게 행복을 누리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은 결국 이 두 축과 함께 만나는 지점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포기하고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돈을 위해서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이은해’라는 여성이 구속 수감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살아온 이야기가 간간히 보도되는데, 종합해 보면 참 특이한 인성을 가진 여성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범죄 전문가들은 아마도 소시오패스(sociopath)일 것이라고 합니다. 남의 고통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진단을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그가 자신의 행복을 바로 이 두 축 사이에서 찾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온전한 사람이 되고, 내가 살아있는 것이 나의 이웃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두 축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지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이 두 축을 벗어버리고 자신만 행복해지려다 보니까 이런 괴물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우리의 숙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보다 더 나은 온전한 사람이 되며, 내가 살아있는 것이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두 축이 만나는 지점에서 어떻게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축과 그 지점이 만나는 곳에서 내가 누리는 진정한 만족감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두 축에서 우리 자신이 완전히 일치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을 완벽하게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정말 매우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완벽하게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당위(當爲)의 원칙이 있습니다. 당위(當爲)라는 것은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이 이루어질 때 가족 속에는 당위(當爲)의 원칙이 있습니다. 가족이 행복해지려면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엄마는 엄마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다움’이라는 것이 당위(當爲)입니다. 그런데 이 당위(當爲)는 항상 하고 싶은 것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지금 날이 추워서 좋은 따뜻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추위로부터 보호를 받아서 따뜻하고 편안합니다. 그런데 옆에 너무 추워서 거의 동사 직전의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당위(當爲)는 옷을 벗어서 그 사람에게 입혀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걸 입혀주고 나면 나는 너무 춥고 따뜻한 외투를 입고 있을 때의 편안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도와준 것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행복을 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것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에 추워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두 개가 일치를 안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완전히 일치하는 지점이 있으니, 그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두 개가 완전히 일치되는 최고의 선(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복해하시는 것과 같은 상태에 도달하려고 인간이 끊임없이 애를 쓰면서 욕심을 버리고, 선을 좇고, 자연의 본능보다는 도덕의 당위(當爲)를 따르면서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인데,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 것은 지키는 것보다도 덜 힘듭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의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가족들이 모두 나 때문에 불행해지고, 그 불행은 세월이 흘러가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소외로 돌아오든지, 보복으로 돌아오든지, 염치없음으로 돌아오든지, 어떤 식으로든지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마냥 자신이 원하는 욕심대로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족 관계 속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가족 모두를 온전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잘 믿는다는 것은 결국 좋은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자식이 되는 것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고백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여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II. 남자와 여자로 지으심
그리고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이 명령은 결국 이후에 생겨나게 될 하와가 공유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A. 종교명령
그것은 두 가지인데 종교 명령과 문화 명령입니다. 종교 명령은 모든 것을 주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한 가지를 금하신 계명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말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하나님이 뭐가 아까우셨기에 열매 맺는 나무 하나를 지정하시면서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겠습니까? 이유는 무엇입니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그것이 아까워서 한 것이 아니라 그 상징을 통해서 인간에게 무엇을 끊임없이 생각나게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단 하나의 나무를 보며 비로소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격차를 깨달으면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도 자신이 하나님 아래에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가족 관계가 불행하고 깨지는 이유는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족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과 방종한 사람이 섞여 있으면 결국 방종한 사람들이 갑질을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손해를 입고 희생을 강요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경외하고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가정을 온전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들에게 참 사랑을 보여주고 자비를 베풀어 준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마음대로 까불고 나댑니다. 그러나 부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인내하면서 자녀를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납합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아이는 까불고 떠들어도 엄마는 교회 가서 눈물로 기도하고, 아버지는 마음속에 구름이 걷힐 날이 없어서 자녀를 위해서 늘 눈물을 짓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주님이 주신 은혜가 크기 때문에 그 은혜로 아버지 어머니의 자리를 지키고 자식들을 끝까지 사랑해 보십시오. 결국 까불던 아이는 철이 들고 인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들의 부모가 자신에게 베풀어 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때 결국 어머니의 인내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내가 이만큼 살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 때 가족은 콩가루 집안이 됩니다. 그리고 가족 관계에서 찢어진 사람들이 다른 가족을 이루면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매우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아주 평범한 얘기가 있습니다. '며느리를 얻으려면 그 집 어머니를 보고, 사위를 얻으려면 그 집 아버지를 보라.' 그 부모가 너무 훌륭하고 자식을 사랑해준 부모이면 그 자식은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보면서 자란 환경이 그 아들과 딸의 인간성을 형성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가 깨진 것도 둘이 싸워서 깨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범죄하고 났더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힘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 힘이 끊어지자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모두 사라져버렸고,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모든 것들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가 서로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신앙적인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정을 회복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의 모든 가정이 새로워지는 첫 걸음인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B. 문화명령
1. 생육하고 번성함
그리고 두 번째는 문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노동 명령이라고도 하는데 결국 사람은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완벽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 노동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웠지만 인간이 노력하고 애쓰면 더욱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가능성을 남겨두신 세계였습니다. 바로 그런 세상을 건설해 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신 것입니다. 요즘 소위 젊은 나이에 스스로 은퇴하는 파이어(FIRE)족들이 있습니다. 이번에 교회 40대들과 함께 서로 토론하는 가운데 파이어(FIRE)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30대 후반이 됐는데 부부가 20억을 모았습니다.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직장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직업을 정리하고 그 돈으로 시골에 가서 예쁜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직업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좋은 취미생활 하면서 소일거리를 하며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복잡한 경쟁 사회에서 지친 사람들에게는 낭만적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경적으로는 이런 삶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즉, 직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문화를 건설하는 방편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직업 활동을 통해 돈을 벌지 않아도 좋으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것으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고 이웃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경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하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와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다’는 동사에서 온 것입니다. 하와라고 부르심으로써 여성이 가진 생명성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도 신비하지만 여자도 신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자들에게 생산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무(無)에서 유(有)로 잉태하게 하셔서 인류를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신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결합을 통해 인류를 생산하도록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인류를 형성하고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피비린내는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의 허무한 생명, 전쟁 속에서 광기에 사로잡혀서 서로를 죽이는 비이성적인 모습들은 인류가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재난인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어떤 인간도, 서로를 저런 식으로 비참하게 파멸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게 하시려는 계획이 보류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그 계획을 다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과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지게 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 생명의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특별한 타인들을 돌보고, 아낌으로써 연합을 이루어 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연합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먼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는 가정, 사랑으로 연합을 이루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2. 정복하고 다스림
그것은 바로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정복과 다스림은 파괴와 착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통치가 미치지 않았던 영역을 새로 얻어서 아름다운 질서를 만들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쉼과 평안을 얻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었던 어떤 분이 시골에 내려가셔서 자신 인생의 슬픔과 설움을 나무를 가꾸는 데 바치면서 일생을 자기를 치유하는 마음으로 사셨답니다. 그래서 황무지 같던 땅에 수없이 많은 매화나무를 심었습니다. 수십만, 수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서 오십 년이 되는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동네 전체가 그 나무로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게 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무엇인가를 이 세상에 가꾸게 하기 위하여 교회를 창조하시고, 가정을 만드신 것입니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함께 서로 사랑으로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인류 사회와 자연 세계 속에 이루어져 인간으로부터 자신까지, 그리고 모든 자연 사물에 이르기까지 쉼과 평안을 얻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사람으로 지은 바 된 의미입니다. 개척을 위해서는 용기와 투지, 결단이 필요하고,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지혜와 세심함, 그리고 공감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위하여 남자에게는 정복하는 지향성을 주시고, 여자에게는 관계를 지향하는 성향을 주셔서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다른 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타인으로 관계를 맺게 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바로 다른 특별함이 아닌 사랑의 특별함입니다.
가족 관계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이 아닌 일반적인 타인은 싫으면 안 보면 되고, 보기 싫으면 헤어지면 되지만, 가족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깊이 기억에 남아서 죽을 때까지 어디서도 우리는 가족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특별한 타인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표는 그가 가족들 속에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라면, 그는 분명히 가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에게만 순종하는 사람이 어머니라면, 그는 가족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아내요,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자녀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함으로써 우리의 가정을 교회와 더불어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족을 위한 눈물을 언제 흘리셨습니까? 가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가족 구성원들이 여러분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입니까?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까? 주님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여러분을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가족이 되는 첫 번째 두 사람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서로가 서로 때문에 온전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격과 모든 성향이 일치하는 두 남녀가 연애를 할 때는 너무 행복할 것입니다. 꿈꾸는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부부가 되어 살면 그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남자가 약간 사치하는 기운이 있고 기분을 내는 버릇이 있습니다. ‘여보, 오늘은 우리 호텔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고, 결혼기념일에 우리도 한번 기분 좀 내보자.’ 그럴 때 ‘너무 좋아요’라고 따라가는 사람이 애인일 경우에는 대출을 받을지라도 행복한 연애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출을 많이 받아야 될 겁니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 만약에 부부가 그렇게 궁합이 맞는다면 가정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들뜬 마음이 있을 때 아내는 ‘중심 잡으시오. 된장찌개나 드시오.’ 하고 식탁에 남편을 앉혀놓고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을 때 균형이 맞는 것입니다. 진짜 똑똑한 남자들은 연애할 때는 자기하고 성격이나 경향이 비슷한 여자를 만나서 불같이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자신과 사뭇 다른 여자를 만나서 조화를 이루고 산다고 합니다. 저도 안 해봐서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웃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벌써 일수불퇴((一手不退)가 되어 버렸으니, 삼가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다른 것이 사랑이 없을 때는 가시처럼 느껴지지만 사랑을 갖고 나면 아내가 나와 다른 것, 내가 남편과 다른 것 때문에 내가 넘어지지 않고 지탱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것이 노년에 깨닫게 되는 게 문제입니다. 40대들 40명이 네 시간씩, 네 번 모여서 토론회를 하고, 그게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세 번을 했는데, 이게 필요한 이유가 뭐냐 하면, 40대에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40대에는 절대 못 깨닫습니다. 40대는 이제 겨우 20대에 대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20대 때는 이렇게 이렇게 준비하고 살았어야 된다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은 사람의 효용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항상 살아본 다음에야 깨닫습니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도 40대 때는 못 깨달았습니다. 60대가 되고 보면 40대 때는 이랬는데 라는 게 한눈에 확 들어오는데, 40대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건 책을 아무리 읽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살다가 죽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너무 잘 살았다고 가슴에 두 손을 얹으면서 자부심을 느끼며 살다가 죽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후회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80대에는 그렇게 살으면 안 되는데 라는 것을 90대 후반에 느끼면서 눈을 감는 게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를 함께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족은 특별한 타인입니다. 특별한 타인이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특별한 행복을 안겨주지만, 때로는 특별한 고통을 안겨줍니다. 결국 구성원 하나하나가 맨 처음 가정을 이루게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 즉,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 있을 때만 가족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그 사람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가족들에게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힘들지만 오래 참고 인내하며 가족들을 사랑하며 이길 때 결국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옵니다. 결국은 함께 가족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날이 찾아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들이 가족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에 소망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특별한 타인인 가족들과 함께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잘 살 것인지 생각하십시오. 이제까지 힘들고 포기했다면 새롭게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을 발견하십시오. 반드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변화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니를, 아버지를, 나를, 아내를,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충분히 바꿔놓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변화된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 경륜은 가정을 세우신 뜻과 결코 나눠지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를 비롯한 가족 간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은 서로가 그 안에서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길입니다. 인간은 가족관계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나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음으로써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참된 사람이 되어 가도록 믿음으로 힘쓰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여러분의 망가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하나님의 도구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2022.05.22.주일오전4부)
2.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까?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은 미래의 희망입니다.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자라야지만 다음 사회는 지금의 사회보다 훨씬 좋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당시 에베소는 로마 제국 중 손꼽힐 정도로 발전한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거기에 가보면 엄청난 문명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질문명은 번성했지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렇게 번영하지는 못했습니다. 우상과 술수들이 난무하였고, 그만큼 하나님을 거스르는 도시 속에 교회가 섰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가정을 이루어야지만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과 같이 될 수 있는지를 오늘 이 교훈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까?
오늘의 주제는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까?>입니다. 오늘 사도는 이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A. 노엽게 하지 말라
제일 먼저 “노엽게 하지 말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서 “노엽게 한다”라는 것은 “화나게 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을 향하여 부모에게 주는 교훈 중 골로새서 3장 21절에 보면 왜냐하면, “··· 너희 자녀들이 낙심할까 하노라”라고 나옵니다. “낙심”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뒤모신(ἀθυμῶσιν)”이라고 합니다. “아(ἀ)”는 “없다”는 뜻이고, “디모신”은 “의욕(θυμῶσιν)”입니다. 의욕, 욕심, 의지, 욕망, 아니면 어떤 기상, 이런 걸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없어져 버릴까 봐 걱정이 된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노엽다’는 뜻은 어른들이 노여워서 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마음에 어떤 노여움을 품어서 점점 살아갈 의욕이 상실되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비들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자녀를 노엽게 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비에게만 주는 명령은 아닙니다. 모든 부모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 모두 아이를 노엽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어리고 힘이 없습니다. 자기의 노여움을 표현 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노여움이 쌓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노여움이 마음속에 계속 쌓일 때 일그러진 자아상을 갖게 되고, 구김 없이 어린아이처럼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열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때문에 아이들은 마음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노여움을 간직한 채 일그러진 자아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까?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우선 첫째는 부모의 그릇된 욕망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마땅히 기대하지 말아야 할 그 이상의 욕망을 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공부입니다. 부모가 공부에 대해서 강조하고 아이들을 공부하도록 채근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온몸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얼마나 냉혹한가를 체험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비교적 기회가 적게 찾아옵니다. 경쟁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나은 기회가 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섭게 아이들을 채근하고, 유치원 다닐 나이밖에 안 된 아이들을 음악 학원부터 시작해서 체육, 수학, 영어부터 해서 수없이 뱅글뱅글 돌립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 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만들어 놓은 트랙을 따라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다람쥐처럼 그런 기질이 배인 채로 부모가 정해준 그 트랙을 따라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매우 나쁜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아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과도한 욕망을 가지고 아이에게 분량에 넘치는 기대를 가지고 아이를 재촉하고, 아이를 비인간적으로 교육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선물이 분재입니다. 분재를 들여다보면 희한하게 예쁜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엔 반드시 구리 철사줄이 감겨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이런저런 모형을 비틀고 만들면서 자라도록 나무에게 강요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분재를 싫어합니다. 선물 몇 개를 받았는데 그냥 바깥에 버려둡니다. 옥상 같은 데 올려놓고 그냥 비바람 맞으면서 마음대로 자라게 놔줍니다. 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들을 그런 식으로 양육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교육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모두 경쟁해서 이기는 아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각자 능력에 맞게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무엇이든지 한 인간으로서 성숙한 길을 가면 무엇을 해도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성숙하지 못하면 그가 경쟁에서는 이겼을지라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껏 가리켜서 의대 보내놓고 의사 만들어서 어려운 전문의 과정까지 통과하고 났더니 자기 인생의 무게를 못 이겨서 가족들 남겨놓고 자살을 해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껏 가리켜서 수많은 경쟁을 뚫고 로스쿨에 보내서 결국 법조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법을 저지르면서 온갖 나쁜 짓을 다 하고 법꾸라지 짓을 합니다. 그리고 사회의 지탄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교 교수가 됐는데 학교에서 온갖 못된 짓을 다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여학생 성추행했다고 신문에 나고 가문을 완전히 망신시킵니다.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경쟁에서 이겼지만, 인간성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온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모든 의사가 된 자식, 모든 법조인이 된 자식, 교수가 된 모든 자식이 그렇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뭐냐 하면 결국 경쟁 사회에서는 이기는 사람도 있고, 지는 사람도 있고,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덜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걸 여러분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어떤 의미에서는 경쟁에서 진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회적인 지위나 재산이나 모든 것들이 거기밖에 안 된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나와 똑같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기고, 어떤 사람에게는 질 수 있습니다. 공부에서는 뒤질 수 있고, 어떤 예술에 있어서는 뛰어날 수도 있고, 둘 다 못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쿨하게 인정해야 됩니다. 부모가 앞길까지 모두 정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럼 부모가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유명하게 되든지, 무명하게 되든지, 장사꾼이 되든지, 월급쟁이가 되든지, 아니면 학자가 되든지, 의사가 되든지, 무엇이 되든지 간에 한 사람으로서 성숙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그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인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건 학원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학교 선생님이 해주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이와 함께 살면서 한 인간으로 어떻게 올바르게 의미 있게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자식에게 강요하면서 자식의 인격적인 깊은 공감이 없이 무조건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길로만 아이를 내모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인간화된 교육입니다. 그런 교육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이번에 회심 집회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중·고등부 학생들이 많이 회심을 했습니다. 회심 집회할 때 어느 선생님이 얘기했습니다. “목사님이 어떤 말씀을 하실 때 아이들이 눈이 보석처럼 빛나고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어깨를 내밀면서 목사님 설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이 한마디였습니다. “너희들 조심해라.” “엄마 말만 듣다가 쫄딱 망하는 수가 있다.” “그리고 엄마는 절대로 네 인생에 대해서 책임 일(一도) 안 져준다.” “너희들이 옴팡 뒤집어쓰는 거다.” “명심해라.” 그래서 5월 12일에 속편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과도한 징계입니다. 아이들이 뭘 잘못했으니까 야단을 치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성질부리지는 마십시오. 야단을 치는 건 뭐냐면, 따끔하게 야단을 쳐서 아이가 교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질을 부리는 거는 자기 속에 있는 오물을 아이에게 확 쏟아놓는 것입니다. “네 생각해서 잔소리한다.” 아이고 웃기지 마십시오. 성질을 못 이겨서 쏟아 퍼붓는 거지 무슨 아이를 위해서 입니까? 왜 그렇게 위선을 떱니까? 그리고 아이에게 나무랍니다. 몇 년 전에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설교했더니 어떤 분이 장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 교인은 아닙니다. ‘목사님 설교를 오래 듣고 목사님 존경했는데, 이제 보니까 정말 아닙니다.’ ‘다음 한 가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잠언에는 분명히 아이를 때리지 못하면 아이를 망친다고 했는데, 왜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합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첫째, 법으로 못 때리게 돼 있습니다. 자녀에 대한 징계권이 부모에게 법적으로 없습니다. 말로는 할 수 있는데 주먹으로 때리고, 뺨을 때리고, 몽둥이로 때리면, 얘가 고발하면 여러분 잡혀갑니다. 미국 같은 데서는 바로 체포됩니다. 아동학대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건 뭐냐 하면 잠언에서는 아이를 차마 때리지 않으면 아이가 망친다고 했지만, 매라는 것이 육체를 두드린다고 아이가 변합니까? 그게 변합니까? 그게 아니라 아이에게 매를 때리는 이유는 마음의 매를 맞게 하기 위해서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 어느 시절인데 여러분이 아이를 때려서 기르려고 합니까? 오히려 성경의 강조점은 뭐냐 하면 아이가 그 매를 통해서 마음의 매를 맞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엄마에게 아빠에게 맞는 거 갖고 끝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그렇게 맞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매를 때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정신세계가 아이가 안 돼 있으면 아무리 두들겨 패도 그거는 개 패는 것입니다. 개는 오히려 변하지, 사람은 안 변합니다. 그리고 그건 폭력이지 그 집안이 정상적인 인격적인 교육을 하는 집안이 될 수 있겠습니까? 때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만드십시오. ‘아! 엄마가, 아빠가, 내가 얼마나 잘못했으면 저렇게 마음 아프게 말씀하실까?’ ‘그걸 생각하니 내 마음이 회초리를 맞는 것 같구나.’ 그리고 아이가 마음이 아프도록 감동을 주는 사람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징계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과도하게 징계하거나 이성을 잃고 홧김에 아이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합니다.) 기도도 안 하고, 예배도 안 나오고, 금요기도회도 안 나오다 보니까 은혜가 바닥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혈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소리 소리를 지르고 혹은 아이를 때리거나 아니면 심지어 욕까지 하면서 아이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기 자신의 인간성이 부모로서 망가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는 여러분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이는 동등하게 여러분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아이 안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잘 발휘되도록 여러분에게 맡기신 것이고, 책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결코 여러분에게 전권을 주어서 아이를 자기 소유물처럼 흔들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뭘 하면서 살지 아이가 결정하게 두십시오. 공부를 할지, 말지, 아이가 결정하게 두시는 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걱정이 될 것입니다. 내버려 둬도 될까? 내버려 둬도 됩니다.
저하고 형제처럼 지내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딸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딸이 문제입니다. 애들이 초등학교 때 대게 인형, 동물, 소급 장난, 이런 것을 하고 놉니다. 그런데 얘는 창, 칼, 방패, 이런 것만 좋아하는 것입니다. 중학교를 갔는데 너무 학교 적응을 못 하는 것입니다. 중학교 다니다가 ‘아빠 나 학교 안 다닐래.’ ‘엄마 나 학교 안 다닐래.’ 엄마가 난리가 났습니다. '너 학교 안 다니고 어떻게 할껀데?' '나 학교 다니기 싫어.' 아빠는 쿨합니다. ‘너 다니기 싫으니? 그러면 둬라.’ 그래서 학교 안 다녔습니다. 그런데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겹지 않습니까? '너 뭐 하고 싶은 거 없니?' '아빠, 책을 읽고 싶어.' 한 달에 백이십만 원어치 책을 사줬다고 합니다. ‘네 마음대로 읽어라.’ 그런데 책 읽는 것도 지겹지 않습니까? 마음대로 읽고 아빠하고 대화를 많이 하더니, ‘아빠 나 영어를 좀 했으면 좋겠어.’ '그래라.' 그래서 인도네시아로 영어 연수를 갔습니다. 영어를 하니까, 그것도 괜찮으니까 거기서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중학교는 아마 검정고시 봤을 겁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를 봐서 갔습니다. 년 동안 공부하더니 이제는 이것도 싫다고 합니다. ‘뭐 할래?’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들어와서 또 집에서 책 뒤적거리면서 영화도 보고 노는 것입니다. 한참 있더니, ‘너 그럼 뭐 하고 싶은데?’ ‘나는 영화계통의 일에 종사하고 싶어.’ ‘프랑스가 영화로 유명하다는데 나 거기 좀 가보고 싶어.’ '그러면 가라.' 그래서 프랑스에 갔습니다. 가니까 적성에 맞는지 년 동안 어학연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너 어떡할래?' '나 영화계통에서 일하고 싶어.' 그래서 또 프랑스에 갔습니다. 결국 학교에서 적응도 못 해서 이리저리 돌았습니다. 그거를 만약에 경쟁이라는 각도에서 놓고 보면 부모 속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이번에 소르본느대학 들어갔습니다. 프랑스에서 고등학교 졸업한 애들이 어렵다는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자격시험을 치르고, 그 애들하고 똑같이 경쟁해서 이겨서 소르본느 대학에 속해 있는 파리 대학에 영화과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자녀가 공부를 못합니까? 공부 못하는 자식은 없습니다. 공부가 수학 풀기, 영어 풀기면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해봐야 압니다. 자기가 진짜 영어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수학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면 얘네들은 하게 됩니다. 아까 그 아이한테 중학교 때 불어 공부하라고 막 족쳤다면 걔가 그렇게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영어를 해야겠다는 목표가 또렷하게 생기니까, 불어를 해야 할 이유가 생겨나고, 그러니까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프랑스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도대체 소르본느 대학에 가는 애가 년에 우리나라에서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중학교에서 이리 처지고 저리 처지면서 자퇴할 때 걔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생각했겠습니까? 공부 더 해봐야 되겠지만, 여태까지 일을 보면 교육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두는 것입니다. 하게끔 내버려 두면 아이들이 주체적인 판단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네 엄마 말 듣지 마라.’ ‘말 듣다가 너 쫄딱 망하는 수가 있다.’ ‘너 쫄딱 망하면 엄마가 일(一도) 책임 안 진다.’ ‘어떻게 할래?’ 그때 아이들이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입니다. ‘그럼 내 인생은 어떡하지?’ ‘내가 어떻게 결정을 해야지?’ 하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이 인생을 살게 하는 눈빛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걔가 뭘 하고 싶어도 하게끔 놔둘 수 있어야 됩니다. 비인간적으로 징계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나는 애들에게 말합니다. ‘너네 엄마 아빠가 비인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면 (경찰서에) 고발해 버려라.’ '너희에게는 그런 걸 당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아이들 맡기기 겁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훌륭하게 자랍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3학년 아이들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엄마 말만 들으면 쫄딱 망하는 수가 있구나.' 항상 망한다는 건 아닙니다. '망하는 수가 있구나.' '그런데 엄마는 책임을 못 지는구나.' '그럼 난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 살아야 될까?' 그럴 때 생각이 있는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트랙만 따라가는 아이가 아니라 내가 어느 트랙으로 가야 될지, 뭘 해야 될지, 그리고 엄마 키를 넘어서 바깥 세상을 보면서 우리 친구들은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지, 선배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하는 전망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교육을 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교육을 시키는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최고로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절대로 화풀이하듯이, 성질부리듯이 아이들한테 잔소리하지 마십시오. 잔소리를 많이 하는 엄마 아빠에게는 아이가 굵은 소리가 뭔지 모릅니다. 아주 인생의 중요한 이야기를 해도 잔소리의 연장으로 듣는 것입니다. 아무런 교훈이 안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뭐냐 하면 무관심입니다. 이건 가장 나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들이 모두 자기 자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지 아십니까? 안 그런 사람 많습니다. 저 먹고, 저 바르고, 저 미용하고, 자기 옷 입고, 자기 놀러 다니는 것에는 흠뻑 빠져 있으면서 자식에게는 형식적으로 밥을 해주고 그냥 같은 집에서 살지만 진지하게 아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관심을 갖지 않는 부모들 많습니다. 무관심입니다. 그건 버린 것입니다. 함께 살아도 걔네들은 버림받은 애들입니다.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애들 가정 교육 망치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어려서부터 얘들은 부모를 교회에 빼앗겼다는 피해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교회에 대한 반감, 하나님에 대한 반감이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은 나름대로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인간은 기가 막힌 감각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관심이 있는데도 함께 조금 부족한 시간을 갖는지, 아니면 함께 달라붙어 있어도 나에게 전혀 무관심한지 아이들이 귀신같이 압니다. 작은 어린애들도 다 압니다. 어린애만이 아니라 우리 코코도 압니다. 코코는 강아지인데, 강아지 무관심한지 다 압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교회에서 봉사도 많이 하면 일주일 동안 살아갈 때 아이들과의 접촉하는 면들이 훨씬 더 많아야 됩니다. 따뜻해야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이들을 품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표현을 많이 하고,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고, 아이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공감해주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서, 비록 주일날 엄마 아빠가 봉사하느라고 잠깐 떨어져 있지만 아이들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아이들과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그것은 아이들에게 상처가 됩니다. 노여움이 되는 것입니다. 밖으로 표현도 못하는 노여움이 안으로 안으로 쌓일 때 그때 자아상이 일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일그러진 자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세상을 공정하게 못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도 굽은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볼 때도, 자신의 미래를 바라볼 때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거나 혹은 자기 비하, 열등감 같은데 빠지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적 환경의 영향이 매우 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녀를 노엽게 합니다. 그래서 쌓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렇게 되면 부모와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깨어진 아이들은 운명처럼 깨어진 관계를 결국 자기 자녀들 속에 투영합니다. 그래서 내가 내 자녀와 올바른 관계를 갖고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지 못할 때 내 자녀는 태어날 자신의 자녀와 그 관계를 못 누립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결국 공부하고 학습하는 거는 학원에서라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인간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부모와 자식이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이것은 아버지 엄마한테 못 배우면 아무 데서도 못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표현을 못 합니다. 그것이 결국 아이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고, 이렇게 될 때 아이들은 일그러진 자아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를 맡기신 계획과 너무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마음에 깊이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경쟁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면 (기회가 많이 생기기)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경쟁에서 항상 이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경쟁에서 상당히 패배했기 때문에 이 정도밖에 안 된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내버려 둬도 얘들이 살면서 터득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입니다. 어려서부터 경쟁을 먼저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용납하고 이해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런 인간성에 대한 교육을 부모를 통해서 충분히 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교육을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 살면서도 그것이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참다운 인간으로 교육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내가 공부 잘하고 학교에서 1등하는 것보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밝고 명랑한 사람,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한다는 인상을 아이에게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엄마 말고 누가 주겠습니까? 학교에서 밝고, 명랑하고, 건강하면 1등 시켜 준답니까? 아닙니다. 그런 거 상관없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사회에 나가면 예쁜 사람이 최고입니다. 인간성 좋고 못생긴 것보다 차라리 인간성 나쁘고 예쁜 사람하고 사귀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오죽했으면 미국 같은 데서는 이력서 낼 때 사진을 요구하지 못하게 합니다. '내 얼굴이 너한테 왜 필요한데?'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게 엄연한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또 다른 가치를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서 자기가 직면해야 하는 수많은 모순적인 세상의 현실들을 헤치고 이겨나갈 수 있는 정신적인 내면의 가치를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 아빠가 더 세속적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더 많이 세속적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속에서 아이들은 진실한 인간으로서 밝고 명랑하게 자라가야 할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로 구겨진 인간성이 되어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자라도록 아이들을 믿고 맡겨야 됩니다. 그리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자율을 주면 애들이 책임감이 생깁니다. 그런데 자유를 주지 않으면 절대로 책임감이 안 생깁니다. 여러분, 어른이 된 사람들 가운데도 전혀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아내, 남편이 있습니다. 무능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배경을 캐들어가 보면 가정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율적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본인이 담당하게 하고, 그것을 자기가 감당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요새 드라마 같은데, 여러 번 보지는 않았습니다. 어제 스치듯 잠깐 봤습니다. 고등학교 아이들이 아이를 가져서 고민하는 드라마가 나왔습니다. (TV)를 켜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남자, 여자 아이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꽉꽉 조여매서 복대를 하고 얘가 다이어트 하는 것처럼 다녔는데, (여자 집) 아빠가 알게 되었습니다. '너 미쳤냐, 당장 아기 떼라.' '걔 때문에 네 인생 망칠 수도 있다.' '똑바로 살아라.' 그런데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는 데 6개월입니다. 복대를 푸니까 배가 (벌써) 불쑥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를 낳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해서 그랬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딸을 엄청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펑펑 울더니 너무 분하니까 가슴을 때리고 런닝셔츠를 찢어 버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더니 손을 들고 딸은 못 때리니까 자기 뺨을 때리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입니다. 얘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아빠 미안해'라고 하면서 살려달라고 합니다. '너 애 낳아서 어떻게 할래?' '그러니까 아빠가 좀 도와줘.' '나 애 낳고 나서 몸 풀면 다시 열심히 공부해서 예정대로 서울대 들어갈 거야.' 이 세상이 만만한 줄 아느냐고 하면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아빠가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한편 남자의 집에서는 ··· 왜 이렇게 놀랍게 집중을 하십니까? 남자의 집에서는 아버지가 완전히 꼭지가 돌은 것입니다. 냉장고를 열더니 단번에 소주 두 개를 마셔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아들을 꼬시는 것입니다. '너 같이 착하고 순진한 애가 그랬을 리가 없다.' '여자애가 살살 꼬셨지?' 꼬시긴 뭘 꼬십니까? 자기가 덮쳐 버린 것입니다. '왜 그랬냐?' '아빠, 난 장난이 아냐.' '내가 실수한 거 맞지만, 나는 사랑해.' '그래서 우리 같이 결혼할 거야.' '지금 고등학생인데 뭔 결혼할 거야?' '니가 돈 있냐?' 그러면서 막 난리를 칩니다. 애를 싸대기를 때리고 발길질을 하는 것입니다. 애가 몇대 맞다가 나중에는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머리를 벽에 찧고 데굴데굴 구르며 인생 끝난 것처럼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쌩쑈를 하고 있네.' 그럼 목사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너무 가슴 아플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그런 경우를 만났으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안 그랬을 것 같습니다. 괴로운 시간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색 안 하고 딱 마음에 정리하고 딸을 안아 주면서, '너무 고생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니?' '이제는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뭘 도와주면 되겠니?' 그게 낫지 않습니까? 이미 벌어진 일인데 길길이 뛰고 런닝셔츠를 찢고, 뺨따귀를 때리고 데굴데굴 구르면 태교에도 안 좋습니다. 어차피 손주고, 태어날 아이입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설교를 들을 때 뭘 하나 배웠습니까? '고민해도 바꿀 수 없는 일은 깨끗하게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것 때문에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라.' 마음이야 너무 아프고 괴로울 것입니다. 안 괴로우면 부모도 아닙니다. 현실이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확 끌어안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렇게 끌어안으면 고통스러운 상황이 가슴속으로 싹 들어오면서 내 고통이 나머지 것들을 물들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아빠가 뭘 도와줄 수 있겠니?' '힘내라. 너는 살 수 있다.' '옛날엔 너보다 어렸을 때도 결혼했단다.' 내가 아는 교수님도 고등학교 학년 때 결혼했습니다. 아들딸과 같이 늙어 가고 계십니다. '그럴 수도 있는데, 아무 상관 없다.' '이미 주어진 일이니까 너희 열심히 사랑하면서 살아라.' '아빠가 뭘 도와주면 되겠니?'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이 제일 편하겠니?' 나는 그럴 것 같습니다. 그게 삶의 명랑을 유지하며 사는 방법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고민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아이들의 인간성이 불행한 일을 만나도 망가지지 않고 활짝 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괴로운 짐을 지는 것, 그게 부모가 해야 될 일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자녀가 죽을 때까지, 아니면 자기가 죽을 때까지 늘 그 짐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힘으로 그 짐을 지느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는 단 한 사람이 부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그 아이를 버리지 않는 마지막 한 사람이 부모여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를 의지하면서 어떠한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부모는 자기 편에서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덮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가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졌으니 수치심과 도덕적 책임감, 자책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통, 그동안 숨기며 살아온 날들, 얼마나 많은 눈물을 그 어둠 속에서 흘렸겠습니까? 둘이서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것을 부모가 종식 시켜줄 수 있어야 합니다. '괜찮다.' '매우 어려운 일이 생겼지만, 이것으로 네 인생 끝나는 거 아니다.' '아빠가 도와줄게, 엄마가 도와줄게.' '괜찮다.' '힘내라. 우리 아들, 우리 딸.' 그렇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됩니다. 무슨 여유입니까? 사랑의 여유입니다. 나 자신 인생의 무게는 너끈이 지고 내 딸, 내 아들의 무게까지도 싸안고 갈 수 있다는 넉넉한 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어디서 옵니까?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아멘.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잠들 때까지 계속 생각이 되었습니다. 내가 딸이 돼 본 것입니다. 큰일 났다고 아빠한테 겨우 고백하고 초음파 사진까지 내밀고 난리가 날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고생했니?'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있잖니?' '어떻게 도와줄까?' 이랬을 때 그 아이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죽을 것 같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다가 아빠 앞에서 그것을 털썩 내려놓는 듯한 느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아빠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울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 딸.' '순서가 좀 바뀌었을 뿐이다.' '공부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래야 되는데, 순서가 좀 바뀌었을 뿐이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나쁜 일도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도와줄게.' 따뜻하게 두드리면서, '일어나라.'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누가 있겠습니까? 엄마 아빠밖에 없습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게 바로 아이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이고, 인생의 어떠한 비극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비결입니다. 그 사랑의 힘이, 그 관용의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로 가득 차 있는 부모에게서 그 자식과 함께 슬픔과 비극을 딛고 넘어갈 수 있는 힘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언제나 충만한 사랑 속에서 아이들이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그러면서 적극적인 명령을 합니다. 그게 뭐냐면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오직"이라는 것은 "그러나"라는 뜻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아라.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교훈"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그리스어에서는 "영양", "훈련", "교육"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훈계"에는 "경고", "책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뭔가 정신적인 영양을 공급해 주는 종류의 가르침이고, 그다음에는 아이들이 잘못될 때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꾸짖는 기능 두 개를 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다 태어납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때는 엄마 초유를 먹습니다. 그리고 젖으로 모자라면 우유를 먹습니다. 조금 크면 이유식을 먹습니다. 조금 크면 어린애들 밥을 먹습니다. 그러다 크면 갈비도 뜯어 먹으면서 (양은 적지만) 어른과 꼭 같이 식사를 합니다. 드디어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 엄마 아빠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을 먹으면서 모든 음식을 섭렵하면서 아이가 쑥쑥 큽니다. 그게 젖이든지, 이유식이든지, 어린이 음식이든지, 청소년이 먹는 음식이든지, 어른이 먹는 음식이든지 간에 모두 형태는 다르고 양식은 각각 일치하지 않지만 속에 영양분은 동일합니다. 동일한 영양분이 있어야만 인간의 몸이 계속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같은 데서 내전(內戰)을 만나서 아이들이 먹지 못하면 피골이 상접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다. 그 반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영양 상태가 좋아서 쭉쭉 빨아 들이면서 아이들이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당분 등등을 섭취하면서 온갖 영양소를 먹으면서 아이들 육신이 자라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 아이들이 자라려면 육신만 자라면 안 되고 속에 정신까지 같이 성숙해서 육체를 떠받쳐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신에 영양분이 공급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집은 마련해 줬고, 넓은 방도 줬고, 학원도 끊어줬고, 킥보드도 사 주고, 온갖 걸 다 사줬는데, 정신을 공급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외 할 데가 없습니다. 그것은 과외가 안 됩니다. 그러면 아이가 어떻게 됩니까? 몸은 컸는데, 정신은 말라비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정신이 지탱을 못 합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삶의 주체성도 잃어버리고, 자율성도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아이의 인생은 매우 비극적인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육체만 신경쓰지 말고, 정신을 신경써야 합니다. 정신에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고 있는가, 그것을 여러분이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로 부르신 이유는 자녀를 육체적으로 따뜻하게 영양을 공급하며 돌보고, 정신으로는 한 인간으로써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정신적인 양분을 받게 하기 위해서 부모를 세워 준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사명은 아이 앞에서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때 아름다운 삶이고, 어떻게 살아갈 때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지 아이에게 실감나게 보여 주게 하기 위해서 부모가 거기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적인 것을 얼마나 공급해서 주고 있는지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생존 경쟁에 이기는 것 못지않은 질문입니다. 생존 경쟁에 이기는 건 기껏해야 육체를 위한 것이지만, 정신적인 문제는 영원히 자신이 끌어 안고 있어야 할 자원입니다.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입사 시험을 치러서 대그룹에 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나이가 스물여덟 쯤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20년, 48세 정도 되면 벌써 퇴직 압력을 받기 시작하고, 58세 되면 확실하게 없습니다.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으면 58세까지 대그룹에 다니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기껏해야 유효기간이 년입니다. 그때 벌은 돈 가지고 후에 까지 먹고 사니까 오십 년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자신이 인간으로서 살아가야할 날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 같은 자식을 낳으면 감당해야 합니다. 나는 거기서 본 게 그것입니다. 그렇게 펄펄 뛰면서 미치광이처럼 두 아빠가 난리를 치는 것을 보고 결국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부모의 모습이 무엇인가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 아이 앞에도 펼쳐질 텐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게 될 때, 그때 아이들이 대기업을 다녀도 결코 행복하지 않고, 노년에도 자기 자식하고 똑같은 관계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그런 것들이 충분히 스며들도록 해야 됩니다.
신앙생활도 잔소리가 되게끔 하면 안 됩니다. 아이의 인격을 감화시켜서, 그 아이가 스스로 신앙을 찾게 끔 격려하고, 유도하고, 칭찬해주고 돌보면서, 인격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게끔 만들어서 자기 신앙이 되게끔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가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아이의 마음에 변화를 위해서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이와 떨어져서 혼자 기도할 때는 통곡하며 울고 가슴을 쥐어 짜도 아이 앞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신앙이 없어서 내가 지금 가슴이 찢어질 정도다.' 그것을 대놓고 계속 이야기를 하면 신앙이 아이에게 스트레스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만 키워갑니다. 아이들을 광범위하게 접촉하게 해줘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심이 되도록 만들지만, 그것과 함께 문화, 역사, 철학, 사회, 직업, 예술, 경제 활동, 모든 것들을 통해서 어떻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녹아 있는지 아이들이 많이 체험하게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학교 그만두겠다고 하면 기함(氣陷)하지 않겠습니까? 아이가 뭐가 되려나? 더군다나 한 년 동안 집에 처박혀 있다고 생각하면 아마 폭발할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참아주니까, 이해해주니까 그렇게 좋은 날도 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녀들도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이 태어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밝혀지지 않아서 그렇지 어딘엔가 너무나 훌륭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 가지 상황과 접촉하게 끔 경험을 넓혀 주면 어느 한 지점에서 부지직 하고 불꽃이 튑니다. 거기에 아이가 소질도 가지고 있고, 부르심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리든지, 예술이든지, 영화든지, 연극이든지, 공부든지, 법조인이 되든지, 의사가 되든지, 뭐든지 간에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얘기 하나 하겠습니다. 아이가 청소년 때 아웃리치를 갔습니다. 거기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고통받는 많은 원주민들을 본 것입니다. 의사가 되겠다고 뜻을 세운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꿈이 먼저지, 먹고 사는 게 먼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거는 내 마음이 그걸 쫓아갈지 안 쫓아갈지 모르고,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쫓아가면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하는 일이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불꽃이 튀고 자녀의 최대한의 능력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교육시키고, 그 말씀이 딱 중심이 되어서 아이들이 다양한 삶의 측면들을 접촉하면서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가 녹아 있는지 아이들이 체험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기회를 많이 주면 어디에선가 불꽃이 튀는 것입니다. 거기에 아이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진리가 아이 속에 확고하게 심겨진 가운데 자유롭게 세상의 문화에 접촉하면서 자기의 부르심이 무엇이고, 자기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가 찾아 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학원을 가지고 그렇게 뺑뺑이를 돌리는 것보다는 나 같으면 그 돈 가지고 책을 읽게 하고, 영화를 보게 하고, (다양한 곳에) 여행을 시켜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가 많이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무엇인가 자기에게 맞는 무엇을 찾아 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계"라고 했는데, 말하자면 아이에게 한없이 잘해주고, 절대 성질 부리면 안 됩니다. 성질 부리면 신앙생활도 안 됩니다. 성령님이 슬퍼하십니다. 짜증내고 신경질 부리지 말고, 기도생활 많이 해서 마음을 다스리면서 에너지를 축적하십시오. 에너지를 축적하고, 그 에너지를 가지고 아이들을 용납하십시오. 그러다가 이게 아니다 싶을 때,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가르쳐 줘야 되겠다 싶을 때 정색을 하고, '아들아, 그건 아니다.', '딸아,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다.'라고 얘기해야 합니다. 일 년에 몇 번 얘기 해야지, 아침에 다섯 번, 저녁에 다섯 번 하면 애들이 뒤집어 집니다. 나중에는 듣기도 싫어집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는 부모의 약점이 뭐냐면 굵은 소리를 해도 아이들에게 굵은 소리로 안 들리는 것입니다. 잔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괜찮은 것은 그냥 참아 주고,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리고 진짜 양보해도 안 되는 것은 아주 분명하게,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 말이 권위 있게 다가오게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삶을 그 가르침 위에 부모인 자신이 얹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이 되려는 의지가 없는 부모가 자식을 사람 만드는 것은 강아지를 인간 만드는 것만큼 힘들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결국 부모의 모든 아름다운 권위있는 가르침은 자신이 그 가르침에 자신의 온 인생을 걸고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칠 때 비로소 자식에게 그것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것입니다. 삶으로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스물일곱에 결혼하고 7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신기하고 귀여웠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갖는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둘이 키웠습니다. 둘이 키웠다기보다는 아내가 혼자 키웠습니다. 어쨌든, 안 하던 가사 일들을 하고 어떻든 도와야 되니까 너무 힘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주의 일들을 못 하고, 공부를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아이를 보는 기쁨은 잠깐이고, 내 갈 길을 가야 된다는 부담감과 중압감이 너무 컸습니다. 결국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지고, 아버지는 저한테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뿐 아니라 어머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혼자 떨어져서 서울에 유학하면서 밤중에 할머니하고 고모들이 잠들고 나면 밖에 나가서 쓰레기통 옆에 앉아서 골목에서 달을 쳐다봤습니다. 달을 보면 달이 밝게 빛이 납니다. '저 달을 엄마 아빠도 보고 있겠지?' '동생들도 보고 있겠지?' '나는 왜 혼자 여기 서울에서 이렇게 살아야 되나?'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엄마 아빠는 달 보면서 내 생각하며 운 적 없습니다. 나 혼자 울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입니다. 별로 그렇게 애틋한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一)도 못 느꼈습니다. 결국 뭐냐면 자식으로서 어렸을 때 잠깐 동안 엄마가 보고 싶고, 아빠가 보고 싶은 걸 느꼈지만 어떻게 부모와 자식이 교감하면서 살아야 되는가 학습을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대로 자식들과의 관계에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그게 뭐냐면 아들이라는 존재는 사랑스러우면서도 귀찮은 존재입니다. 내 할 일을 못하게 하고, 내가 지금 준비해야 될 것들 다 못 하게 하는 것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이는 자랐습니다. 저는 정신없이 교수 생활하고, 바쁘게 주의 일 한다고 다니고 살았습니다. 너무 예쁩니다. 생긴 것도 잘 생기고, 너무 총명합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학교가 끝나도 어둑어둑 해가 질 때까지 수위 아저씨가 나가라고 할 때까지 도서관에 처박혀서 책을 읽고, 책을 한번 손에 들면 놓지 않았습니다. '야! 천재가 났구나.' '저 올라온 집중력, 내가 진짜 갖고 싶었던 건데.' '내가 못 이룬 천재의 꿈을 네가 이루어주겠구나.' 너무 예뻐했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뭔가를 먹습니다. 공부하는 것은 관심이 없고 마구 먹으니까 살이 투실투실 찌는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정리정돈에 대해서 저는 참 예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리정돈도 안 합니다. 그리고 공부도 못하고, 몸은 이리저리 불뚝불뚝 튀어나와서 아이가 굴러다니니까 너무 짜증이 났습니다. 집사람에게 '당신 어떻게 아이를 저렇게 안 돌보느냐?' 그때는 내 책임이라는 생각을 별로 안 했습니다. 점점 마음이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얘는 좀 맞아야 되겠다 해서 손을 댔습니다. 때렸는데 손으로 막 때린 건 아니고, 네가 뭘 잘못했는지 말하고, 히브리서 성경 한 구절을 읽고, 그다음에 회초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1년에 한 번 정도씩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3년 정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착착 소리를 내면서 보라색 줄이 생길 때까지 맞으면서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반성문을 쓰곤 했습니다. 그런데 정리 안 하는 게 어디 갑니까? 그리고 아이가 공부를 못 하고 싶습니까? 이미 벌써 궤도를 이탈해서 안 됩니다. 그리고 관심사가 딴 데 가 있는데, 재미가 없으니까 허덕허덕거리는 것입니다. 제가 느끼는 게 뭐냐면 아빠에 대한 심한 열등감입니다. '자기는 아빠처럼 할 수 없다.' '나는 결국 아빠의 기대에 영영 부응하지 못하는 존재다.' 이런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차를 타고 어디를 갔다가 오는데, 아마 설교하다가 왔을 것입니다. 지점까지 얘기해 주겠습니다. 사당동 있는데서 넘어서 과천 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호등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생각이 내 마음에 확 내려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 소리를 내가 듣게 해 주셨다는 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떠오른 것입니다. "얘야!" "네" "너 내 아들이지?" "네" "네 아들은 네 아들이지?" "네" "그런데 이상하지 않니?" "뭐가요?" "너는 내 아들이어서 내가 너를 대해준 것과 네가 네 아들을 대하는 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없냐?" 쉽게 얘기하면 네 아들도 너에게 아들이고 너도 내 아들인데, 아버지인 나는 너를 그렇게 안 다뤘는데, 너는 네 아들을 왜 이런 식으로 다루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비슷한 얘기를 우리 집사람이 했느냐, 아닙니다. 누구도 나한테 비난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열린교회 담임목사인데 누가 나를 비난하겠습니까? 그런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결국 차를 틀어서 갓길에 세웠습니다. 차가 거의 없었습니다.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운전대를 붙들고 우는데, 옛날에 토막토막 사진이 다 떠오르는 것입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회초리를 맞고 울고 있는 장면, 그리고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는 아이의 자의식, 이런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컸는데, 이제는 무관심한 게 아니라 아이를 내 마음속으로 싫어하고 있구나.'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시면서 나를 세워주셨는가 생각하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때 그 마음의 감정이 언제와 똑같았냐면 마루로 된 교회당에서 추운 겨울에 엎드려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아버지와 화해할 때 감정하고 너무 똑같았습니다. 그때는 피해자로서 아버지와 화해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가해자로서 아들과 화해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을 커다란 회칼로 막 도려내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운전대를 붙잡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얼마를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통곡을 하면서 울었습니다. '아, 잘못했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는가 생각하면서 그때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그게 자녀교육을 향해 회심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나와 그 이후에 나로 나누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없었더라면 여러분에게 이런 설교 못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슴에 깊은 회개가 있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에게도 얘기 않했습니다. 그 가슴 저미는 감동이 한 6개월 내지 1년 가까이 갔습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내게 있었던 경험을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에게 얘기해 줬습니다. 몇 달 후였습니다. 그리고 아이한테 돌아와서 아이를 보니까 그렇게 가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빠인데 아빠의 사랑을 별로 못 받은 것입니다. 때리고 욕하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무시하고 내 마음속에서 쟤는 뭘 해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영리하고, 똑똑하고, 인간성도 좀 더 착하고, 명민한 아이가 태어났을 뭐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못마땅해 했던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한없이 아빠를 향해 열등감을 느끼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불행해 하는 기죽은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딸한테는 별로 사과할 일이 없습니다. 큰소리 낸 적도 없고, 장난이라도 꿀밤도 때린 적 없습니다. 자기는 그걸 느낄지 모르지만 온 마음으로 사랑해 줬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날 '영래야, 우리 가자.' 그리고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백화점에 갔습니다. 제가 색깔을 맞춰서 옷을 잘 고릅니다. 그래서 머리에는 모자부터 시작해서 티셔츠, 점퍼, 바지 그리고 양말, 운동화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새로 옷을 사 주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그러더니 엄마한테 가서, '엄마, 내가 여태껏 오해했나 봐.' '아빠가 나를 많이 사랑했나 봐.'
그 후로 가슴에 손을 얹고 대학 졸업할 때까지 아이 성적표 한 번도 안 봤습니다. 보고 싶지도 않고, 보여달라고도 안 했습니다. 그리고 공부에 대해서 싫은 소리 한 적 없습니다. '마음껏 네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커라.' 늘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지만 노력했습니다. 공부 별로 못했습니다. 대학 좋은 데 못 갔지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너 자유롭게 커라.' 그리고 대학교 가고, 대학원 가고, 너무 공부를 잘합니다. 여러분, 제가 공부 못합니까? 아는 사람은 날 보고 너무 많이 공부해서 문제라고 얘기하지, 아는 게 없다고 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교가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얘기하지 내용이 없어진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누구 못지않게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고등학교 때 제 성적표 보면 여러분이 깜짝 놀랄 겁니다. 이게 우리 담임목사님 성적표 맞아? 왜냐하면, (왜 해야 하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영어는 전교 1등이었습니다. 나머지 과목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해야 할 동기를 발견 못했습니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고민하고 있는 아이에게 그까짓 성적표 나부랭이가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결국 뭐냐면 그 아이에게나 나에게나 한국에서의 교육이 더럽게 안 맞았던 것입니다. 너무 체질에 안 맞았던 것입니다. 맞는 애들은 쭉쭉 뻗어 나가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안 맞았던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 아이들 공부 못한다고 해서 걔네들이 능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까 걔는 그렇게 열등생처럼 처져도 소르본느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모릅니다. 지금 너무 즐겁게 공부 잘하고, 너무 너무 똑똑하고, 너무 훌륭하게 삽니다. 나중에는 뭐라고 고백하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우리 아빠는 내가 하나님만 사랑하면서 바르게 살면 모든 것을 양보하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실 회심한 이후로는 그랬습니다. '무엇이든지 너는 필요해서 태어났으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라.'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우리 인생은 한번 밖에 없고, 여러분 자녀들과의 관계도 한번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이 소중합니까? 진심으로 아이를 사랑해 주십시오. 그 아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세상일에 바쁘고, 직업에 바빠도 가족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을 버리고 얻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노년을 맞이하는 데도 아이들이 찾아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것은 1년, 2년 투자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일생을 투자해서 얹는 것입니다. 물론 유산을 물려준다고 하면 그날 하루는 생글생글 웃고 옆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한 1년 있다가 식어지면 또 유산 준다고 부르면 또 생글생글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잘해주는 놈한테 모든 물려줄 것이라고 하면 옆에서 얼쩡거릴지 모릅니다. 그것은 마음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아무것도 없이 병들고 나면 자식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식과의 관계가 깨뜨려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이의 모든 것을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부모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늙고 병들어도 자녀들은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가족으로 손에 손잡고 마음에 마음을 이어가며 살아갈 것입니다.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3.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한사람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생을 잘 사는 것은 가족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이 된 것만큼 가족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으니 한 가족과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 사람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II.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것은 바로 “네 부모을 공경하라”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많은 자녀들이 부모와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고통을 받고 또 부모는 자녀와의 깨어진 관계 속에서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A. 약속이 있는 계명
제일 먼저 오늘 성경은 약속이 있는 계명을 말합니다. 이 계명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두 개의 돌판으로 되어 있는 십계명에는 1계명부터 4계명까지와 5계명부터 10계명까지 나뉩니다.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 것이냐를 보여주고,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계명에 명령만 있지 약속은 없습니다. 약속은 그냥 일반적인 것이고 뚜렷하게 한 계명에 알맞은 약속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내게 있게 하지 말라”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한 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인 부모 공경 계명에 대해서는 약속이 따라붙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계명입니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지 첫 번째 계명이 부모 공경이라는 것은 이것이 인류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중요한 계명에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것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해야 했고, 대대손손 물려가며 그 땅에서 고통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치하에서 벗어나 애굽을 탈출했지만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고, 땅에 대한 약속은 주어졌으나 아직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될 것이라는 이 약속은 아주 매력적인 약속이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사는 동안에는 잘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잘 될 것이라는 번영과 성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에 부모 공경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것은 인구가 적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땅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살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약속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장수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과 같이 백세 장수 시대에는 장수 그 자체를 자연적인 것처럼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전쟁과 질병, 기근과 박해 등등으로 수많은 사람이 젊은 날에 요절하였고, 수명이 매우 짧던 시대였습니다. 그때 이런 모든 것을 피하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것을 약속하시면서 까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류 사회를 사랑의 사회로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어디서 배웁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사람을 태어나게 하시고, 태어난 그 사람이 사람 속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인간이 어떻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가정 안에서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는 것은 그 자신이 한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매우 중요한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예쁜 여자 만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돈 잘 버는 남자를 만나면 모든 걸 얻은 것 같습니다.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재산이 늘어나고 훌륭한 직장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인생 최고의 가치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예쁜 자매도 멋있는 형제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 갈 수 없으니, 결국 늙으면 외모는 평준화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도 힘이 없어서 비행기를 탈 기운이 없으면 결국 모든 사람의 경제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류 대학을 나왔어도 나이가 들어서 깜빡깜빡하면 결국 학력 평준화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더 세월이 지나가면 그 모든 것들은 다 쓸려가듯이 내려가고 노년을 맞이하는 두 노인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은 잠시 지나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의 완성도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완성되어 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가족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여러분이 노년이 되었을 때도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고 남편이 아내를 보고 싶어 하고, 부모가 여러분과의 관계를 즐거워하고, 여러분을 만나고 싶어 하고, 자녀들이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고 너무 함께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싶어 하는 노년은 어느 한순간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 가족들 속에서 자기가 완성되어 가는 사람이 맞이하는 노년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족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한 인간이 얼마나 성숙하게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왔는지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의 거울에 비친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혹시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서 거울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거기 가도 여러분은 역시 여러분의 가족을 갖게 될 것이니,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이 이 거울에 비친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자기가 생긴 것만큼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니 가족의 거울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만큼 미래에 이루어질 가족 앞에서 여러분의 삶도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 공경이라는 하나님의 커다란 인간 경륜에 관한 뜻을 깊이 이해하고, 어찌하든지 현실을 극복하고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삶이 여러분 자신을 완성시켜가는 과정이 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지만 여러분이 참사람이 될 수 있고 참된 사람이 되는 것만큼 여러분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은 돈이나 물질, 젊음 그리고 명예나 재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인간으로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웃도 덕을 얻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엡 6:2) 이 말씀을 뒤집으면 "네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너는 이 땅에서 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젊은 날에 요절하리라“ 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 공경의 도리는 사실 부모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많은 재산과 많은 조건을 물려주려는 부모들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경고를 삼으십시오. 여러분 자녀들이 복 받는 비결은 부모인 여러분을 진심으로 공경하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어떻게 부모 공경의 도리를 배우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부모에게 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살아있는 학습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이 없어도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부모를 보면서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말이 없어도 삶으로 체득하는 교육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자녀들에게 복을 물려주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이 있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이 그들은 잘 되게 하고 이 땅에서 장수하게 하겠다고 복을 약속하십니다. 부모를 공경하려 할 때 우리 안에서는 두 개의 자아가 싸웁니다. 하나는 이 말씀대로 끊임없는 자기 죽음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섬겨야 되겠다는 하나의 자아입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을 기억하면서 부모와 관계를 개선하고 싶지 않은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화해의 길입니다. 자기 일을 완성하는 길이고, 자기 안에 찢어졌던 자아가 하나로 화합되는 경지입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사랑할 때 여러분은 한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께 순종하며 변해가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복을 주시려고 하는 사람을 이 세상은 결코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등장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좋은 것인 줄은 알겠는데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혹은 심지어 가정폭력과 학대에 시달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무책임하게 가정을 팽개치고 가정을 배신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자녀들이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B. 부모를 용서하라
그래서 먼저 필요한 것이 부모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누가 이 말이 낯설게 들리거든 감사하십시오. ‘우리 부모가 무슨 일 때문에 나에게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의 부모는 더없이 자애로우신 분이며 존경스러우신 분이며, 나는 그 부모로부터 티끌만한 상처를 받은 적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은 매우 희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희귀하게도 그 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배(倍)나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고, 고통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여러 해 전이었는데 주일 예배를 마치고 비서실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비서가 만류할 틈도 없이 달려오면서 어깨로 문을 밀치면서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뭔가 저에게 항의를 하러 오신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벌컥 들어오더니 허락과는 상관없이 제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으셨습니다. 그는 자기가 누군가 밝히지 않으면서 두 손을 얼굴에 감싸고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울고 난 후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의 교인이고 올해 65세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부모에게로부터 버림을 받고 고아원과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 자신이 버려진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생후 일주일밖에 안 된 아이를 엄마가 버린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오십 대에 알게 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오늘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설교하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인 것은 알겠는데, 나의 마음이 너무 상처가 깊어서 나의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는 눈물의 고백이었습니다. 그 연세가 되면 자식들은 다 시집 장가가고 손주를 볼 나이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어린 날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한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러운 상처를 제 앞에서 고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아주 커다란 천고(千古)의 아픔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엄마 아빠를 판단하기 전에 무조건 그리워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그게 한두 살, 세 살, 네 살, 다섯, 여섯 살까지 해서 한 10살까지 정도까지는 부모를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부모의 품을 파고듭니다.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지방에 계신데, 나는 무엇 때문에 서울에 혼자 올라와서 할머니 집에 얹혀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여기에는 뭔가 부모님의 깊은 뜻이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자라면서 보니까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 그냥 보낸 것입니다. 나는 밤마다 달을 보면서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가족들이 잠들었을 때 달을 쳐다보면서 엄마 아빠도 저 달을 쳐다보며 나를 생각하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며칠에 한 번씩 울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나 혼자 울었던 거지 우리 엄마는 운 적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전혀 부모가 그립지 않았습니다. 이게 상처가 깊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얻고 생각해보십시오. 엄마가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빠가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그만큼 망가져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족이 그리워해야 가족입니다. 그리워하지 않으면 특별한 타인이 아니라 일반 타인입니다. 그건 가족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같이 살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하고 마주 앉아 있는 것은 아주 심술궂은 교장 선생님하고 같은 방에 있는 거랑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자리를 뜨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너무너무 미워해서가 아니라 아주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고 아주 싫은 시간이었습니다. 엄마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습니다. 스물한 살에 회심하고도 저는 아버지가 용서되지 않았습니다. 스물일곱이 되던 2월이었습니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오후에 집 앞에 있는 교회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1층 교육관이 차가운 마룻바닥이었는데, 나무로 된 마룻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계획도 없이 하나님이 제 마음에 어떤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네 아버지를 용서해라.’ ‘네 아버지도 너처럼 젊어서 예수를 믿었으면 너에게 더없이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고, 너도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미래에 태어날 아이에게 세상에 나쁜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네 아버지는 너를 버렸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제는 용서하거라.’ 저는 그 마룻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찬양)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얼마나 울었는지 태어나서 아빠 때문에 그렇게 울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구원받고 나서 부모의 영혼 구원을 위해 형식적으로 기도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아파하면서 울어보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장면이 젊어서 자기 마음대로 사시고 우리 아버지 엄마는 부자였습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 찢어진 양말을 신고 학교를 다닐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땐 그게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그게 더없이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나는 결국 두 분으로부터 그 대답을 못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없어도 그냥 나는 용서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사과 없이도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자원을 가지고 부유하게 살 때는 당신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아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형제에게도 존경받지 못하고, 심지어 자식인 나에게도 공경 받지 못하는 아버지의 힘없고 늙고 외로운 모습만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 아버지 나이 오십 세였습니다. 그때 그 외로운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가엾은 우리 아빠, 저렇게 일생을 사느라고 얼마나 외롭고 힘겨웠을까?’ 그것이 부모 공경에 대해서 저의 최초의 회심이었고, 마지막 회심이었습니다. 그 후로 부모를 공경하기 어려울 때는 있었지만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사라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 없이 사랑하고 공경하며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상처를 주님 은혜의 통로로 생각하며 이겨냈습니다.
아직도 여러분 중에는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간직한 채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이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여러분을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지 않고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벽은 아주 쉽게 넘을 수 있는 벽입니다. 거기서 자신과 화해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강물처럼 여러분의 가슴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니 거기에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후로도 아버님은 끊임없는 인생의 열정을 가지고 노년이 되실수록 일에 일을 더 많이 만드시고, 그때마다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들은 고스란히 저희 자녀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때 그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면서 부모와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을 통해서 종(種)을 보존하고 번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어렸을 때 처마 끝에 제비가 집을 짓는 광경을 자주 봅니다. 사람들은 제비가 자신의 처마 끝에 집을 짓는 것을 매우 반가워했습니다. 배설물을 흘리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웠지만, 그것은 특별히 자신이 선택된 것인 양 좋아했습니다. 제비는 드디어 새끼를 낳습니다. 그리고 어미는 부지런히 가서 벌레를 물어옵니다. 그러면 새끼는 모두 노란 주둥이를 벌리고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마리, 어떤 때는 열 마리 가까운 새끼들이 입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정확하게 순서대로 벌레를 넣어줍니다. 그렇게 하기를 해 뜰 때부터 시작해서 해지기 직전까지 그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 새끼들은 점점 자라서 날기 시작하고, 결국은 어른 제비가 되어서 둥지를 훨훨 떠나는 것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고 21일 있으면 병아리로 부화합니다. 그 광경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일단 어미 닭이 알을 품으면 알을 품은 그곳에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끔 내려와서 물 한 모금 먹고, 모이 한 줌 주워 먹고는 황급히 올라가서 알들을 품에 품고 이리저리 골고루 굴리며 알이 깨어나기를 21일 동안 기다립니다. 그동안 어미 닭은 비쩍 말라 뼈만 남습니다. 그래도 자기 새끼들을 부화시키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노란 병아리가 모두 깨어난 다음에는 도대체 누가 그런 본성을 주셨는지 어미는 새끼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면서 맛있는 모이를 주우면 먹지 않고 꼬꼬꼬 소리를 내면서 병아리들을 불러 자기 새끼들을 먹입니다. 그리고 솔개가 뜨든지 매가 떠서 위기 상황이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면서 새끼들을 품 안에 불러들이고 날개로 가려 아무 병아리도 보이지 않게끔 하며 매와 맞설 기세로 소리 소리를 지르는 게 어미 닭입니다.
가시고기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엄마 물고기는 알만 낳아 놓고 어디로 가버리고, 아빠는 그 알을 지킵니다. 알이 부화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산소가 필요한데 물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 아빠 가시고기는 부지런히 물질을 계속하면서 새 물을 보내어 산소를 공급해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여러 날 동안 기다리고 나면 거기서 작은 새끼가 알에서 부화합니다. 그러면 그를 나가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밖에서 적들이 들어와서 새끼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해서 물질하며 새끼들을 보호합니다. 그리고 새끼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 일을 합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빠의 지느러미는 수없는 물질 속에 허옇게 변색되어 가며 박테리아균으로 오염되면서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 갑니다. 그리고 도저히 자기 기력으로 더 이상 물질을 할 수 없을 때 가시고기는 거기서 죽고, 죽은 아빠 가시고기의 시체는 새끼들의 먹이가 됩니다. 거기서 아빠의 살점을 뜯어먹으며 몸집을 키운 다음 물의 세계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오묘한 섭리 속에서 자기의 새끼들을 무작정으로 보호하고 돌보도록 그런 본성을 주셨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종(種)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만이 자연의 본성을 거슬러서 인간답지 않은 짓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개는 개 이하가 될 수 없지만, 개보다 비할 데 없이 존귀한 인간은 잘못 선택할 때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됩니다. 이 오류에 스스로 선택을 통해 빠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위대성에 한 근거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부모 되기를 교육할 필요가 없으나, 부모는 부모가 안 될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한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며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고, 자기를 버리며 부모를 공경하려는 자세의 변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결국 사랑으로 지탱되어야 할 부부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는 여지없이 파괴되게 되었으니 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먼저 마음 깊은 곳에서 부모와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진심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로 남은 그것은 부모의 진심이 아닐 수도 있고, 여러분이 알고 있는 많은 사실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부모를 용납하고 화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여러분이 진정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와의 깨어진 관계, 망가진 관계를 가지고 고통을 받는 사람은 그 상처의 결과를 자녀에게 그대로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 자녀는 부모로부터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되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또 똑같이 자기 자녀와도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배우지 못한 사랑을 어디에서 할 수 있겠으며, 익히지 못한 인간의 도리를 어디에서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부모를 진심으로 용납하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과와 용서를 비는 간곡한 말은 기대하지 마십시오. 참된 사랑은 사과 없이도 용서하는 것이니, 그 사랑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셨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C. 부모를 사랑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공경의 핵심이니, 인격적인 사랑 없이 공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부모를 사랑해야 합니까? 세 가지로 말씀드리고 싶은데, 첫째는 부모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는 것은 아직 사랑이 있다는 뜻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잊지 않는다는 뜻이니, 잊지 않는 사람의 마음속에 부모를 향한 사랑이 깃드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이고, 그분들이 나의 부모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그리고 이 기억이 나의 생각을 지배하고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자녀의 가장 중요한 도리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를 잊지 않으므로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부모가 여러분을 도와주어야 할 정도로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면 사실 물질적인 도움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 부모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때 여러분은 자녀로서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고 경제적으로 그분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섬기는 것이 부모 공경의 도리인 것입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를 경제적으로 돕는 거기에 부모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 일을 위해서 부모를 도우십시오. 결혼했다면 서로 다투지 말고 양가의 부모를 공평하게 서로의 부모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분들을 섬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부모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함입니다.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여러분은 자기를 완성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 공경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고,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부모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잘못하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생명을 주시고, 여러분이 누리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부모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니 어찌 그것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관계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모이고 내가 자녀라는 것 때문에 행복해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 그것이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자녀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로 하여금 내가 그들의 어머니이고 아버지인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이것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최고 섬김입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동영상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곱 살밖에 안 되는 아이가 동생들을 돌보면서 생활하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엄마를 노래하면서 울먹이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십시오. 엄마를 향한 사랑이 절절히 묻어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부모를 향해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부모가 자신과의 관계를 즐거워하도록 기쁨을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나이가 들고, 자녀들이 성년이 되어서 바쁘게 살아가면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별로 덕스럽지 않은 며느리까지 들어오게 되면 자식들 보기는 정말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녀를 불러 모으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얘들아, 이번 추석에는 모두 좀 모이자꾸나.’ 첫째 며느리의 편지가 옵니다. ‘어머니, 저희가 여행이 계획되어 있어서 추석에는 갈 수 없으니 약소한 금액이나마 보내드리는 송금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며느리가 옵니다. ‘어머니 그때쯤이면 우리 애가 아플 계획이어서 못 갈 것 같습니다.’ 셋째 며느리 연락이 옵니다. ‘친정어머님이 편찮으셔요.’ ‘제가 거기 가서 효도해야 되겠으니, 올 추석은 두 분이 조촐하게 보내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 모으는 문자 한 줄이 있습니다. 그것만 보내면 모두 옵니다. ‘그래 너는 못 온단 말이지.' '어쩔 수 없구나.’ ‘모인 아이들끼리 유산분배에 대해 의논하도록 하겠다.’ 한 줄 보내면 모두 모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자식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유산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문자를 보낼 능력도 없었습니다. 유산이 있어야 분배에 관해 의논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는 자식에게 관계를 원하고, 자식은 세월이 흐를수록 부모와의 관계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 우리의 인생은 흘러가고, 얼마간 세월이 흐른 다음에 부모가 있던 외로운 자리에 우리가 올라가고, 우리가 있던 괴로운 자리에 우리의 자녀들이 올라오게 되면서 결국 우리의 슬픔은 대물림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어디선가 누군가 큰 소리로 우는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 밤에 도대체 누가 운다는 말인가?' 울음소리에 어쨌든 놀라서 잠을 깨었습니다. 캄캄한 밤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제가 덮고 자던 이불이 눈물에 흠뻑 젖었습니다. 그렇게 소리를 내며 운 것은 저 자신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우는 소리에 놀라서 깨어난 새벽이었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비닐하우스 같이 큰 화원 같은 곳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무로 만든 상자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담고 계셨습니다. 평소 입으시던 까만 헐렁한 바지, 그리고 다 낡은 하얀 와이셔츠를 단정하게 입고 계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당신 하던 일을 묵묵히 하고 계셨습니다. 좀 더 큰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아버지!’ 그래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이 저를 만나셔서 ‘얘야 나는 도대체 귀가 잘 안 들린다,’ 병원을 다니셔도 별 특별한 치료책이 없어서 보청기를 하는 곳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청력을 테스트하고 보청기를 맞추어 드렸습니다. 어쨌든 꽤 비쌌습니다. 거의 한 달 치 월급이 들어갈 정도의 큰 금액이었습니다. 의료보험도 안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걸 끼워드렸더니 귀에 끼고 ‘얘야! 이젠 참 잘 들리는구나. 살 것 같아.’ 그러시던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할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 어깨와 와이셔츠를 살짝 건드리면서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때야 윗몸을 저에게 돌리시면서 활짝 웃으셨습니다. 평안하기는 하지만 당뇨로 바짝 마른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시면서 ‘그래, 큰애야 너 왔니?’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두 가지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버지 앞에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못한 후회 때문에 저도 모르게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는 어색한 자세로 저를 끌어안았고, 저는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다 저의 우는 소리에 깨어났던 것입니다. 어둠 속에 멍하니 혼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꿈에서의 통곡이 아닌 현실에서 통곡이 쏟아졌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고, 깨닫고 난 후에는 습관이 되지 않아서 마음속으로는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면서도 표현하는 걸 배운 적이 없어서 쑥스러워서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러가 버린 것이 너무나 서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고 저 혼자 덩그러니 이 세상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나간 날들이 그렇게 후회될 수 없고, 살아계셨을 때 좀 더 사랑을 표현할 걸 하고 후회의 눈물을 흘렸지만 떠나가 버리신 후였습니다.
부모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인 줄 아십시오. 아직은 화해할 기회가 있고, 그분들을 공경할 기회가 있고, 사랑을 표현할 기회가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후배 목사님 한 분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경건하던 아버님이었고, 돌아가시는 그날 새벽 기도까지 가셨고, 그리고 오전에 갑자기 상태가 안 좋으시며 운명하셨습니다. 아들 된 후배 목사님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마음으로 아버지를 너무 존경하고 좋아했는데, 너무 바쁘게 사느라고 자기의 마음을 아버지께 표현할 기회가 없었고, 아버지와 함께 있어 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된다며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부모가 살아 있는 것은 선물입니다. 미워할 부모라도 남아 있다는 것은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부모가 있다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기고 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름답던 외모도 세월의 흐름 속에 시들어가고, 많던 재산도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누릴 기력이 없어지고, 총명하던 기억도 모두 사라져 혹은 치매에 걸려 자기가 누구인지도 잃어버렸을 그때 결국 우리가 영원할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은 순간을 스쳐가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남는 것은 관계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어머니와의 관계, 사랑하는 동생들, 누나, 형들과의 관계,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과의 관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지체들과의 관계, 내 이웃들과의 관계, 이것들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남아서 스스로 자신과 화합하는 진리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 안에서 자아가 일치되는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의 분노함과 노여움, 상처와 미움 없이 모든 사람을 마음속에 사랑으로 끌어안고 한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고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III. 적용과 결론
모든 상처와 슬픔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나쁜 것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것이 혹은 좋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나쁜 것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결국 내가 상처와 고통이라고 생각했던 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십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고, 모든 이웃을 향하여 아름다운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람의 힘으로는 우리의 부모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 하시네
아버님을 생각하면 늘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5년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내가 정말 더 많이 효도했을 텐데, 그분에게 기쁨을 드렸을 텐데,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은 나에게 무슨 상처를 주셨는지, 뭘 잘못하셨는지, 기억도 못하실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내 마음에 아버지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것으로 주님 자신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드립니다. 부모님이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너무나 소중한 선물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선물인데,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이 얼마나 선물입니까? 그래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 마음의 그림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26년 동안 가슴에 안고 살아왔던 그림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립고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가정의 상처를 극복하고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일이었다는 것,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몸부림친 성화의 날들이 나를 사람 되게 하는데 이바지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분께 경배를 드리고, 그분을 높여 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살아 있는 것은 선물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있는 것은 선물 위에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상처가 없다면 사랑할 시간을 번 것이고, 상처가 있다면 화해할 시간을 번 것이니, 부모님이 살아있는 것은 여러분에게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남겠습니까? 마지막에 부모님이 죽어가면서 여러분 때문에 상처를 받은 채 죽어간다면 여러분은 잘 산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손에 넣었어도 여러분은 결코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진 것 없고 내놓을 지위가 없어도 부모가 마지막 이 세상을 하직하며 여러분의 손을 붙들고 ‘네가 내 아들이어서 너무 행복했다.’ ‘네가 내 딸이어서 언제나 삶에 위로가 되었다.' '너는 내 공기였고, 내 산소였고, 내가 쉴 수 있는 숲이었고, 내 인생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벤치였다.’ 이렇게 말할 때 여러분은 누가 뭐래도 아주 훌륭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한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열납 될 것이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에게 하나님의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까운 세월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모와 화해하십시오.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부모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참신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주신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전혀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고 고고히 피어나는 연꽃처럼 내 삶을 꽃피울 수 있을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일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십시오. 찬란한 진리의 빛과 뜨거운 성령의 은혜를 구하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셔서 하늘의 복을 땅에서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남편과 아내 - 장년편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4-25)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어느 날 남편이 오래간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뭘 잘해줬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왠지 기분이 업(up)되고, 아내가 사랑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큰 인심을 쓰듯이 저녁 때 아내에게 고백을 했습니다. “여보, 내가 할 말이 있어." 아내가 물었습니다. “뭔 할 말?" “여보, 정말 중요한 거야." “한번 들어봐." "뭔데?" "여보, 나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어." 아내가 "여보, 정말 고마워"하고 안아줄 줄 알았는데, 짜증을 내면서 “당신은 이 생(生)에도 당신 좋은 대로 살았는데 다음 생(生)에도 당신 마음대로 하겠다고? 나는 싫어." 남편은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충격을 받는 남자들을 보면서 아내들은 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아내를 힘들게 하고 다음 생(生)에 다시 태어나도 아내하고 결혼하겠다는 것인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어느 해 가정 시리즈를 설교하다가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를 설교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남편이 투덜거렸습니다. “도대체 오늘 설교는 왜 이렇게 긴 거야.” “목사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가정 시리즈라는 미명 하에 이혼에 관해서 설교하시나.” “도대체 우리 중 누가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긴 설교로 이혼에 관해서 설교하시나." 투덜거리며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정색하면서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나는 여러 번 생각했어.” 이렇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2021년에 혼인한 사람이 19만 2천5백 명이고, 이혼한 사람이 10만 1천6백7십 명입니다. 평균 33세에 초혼을 경험하고, 평균 50세에 이혼합니다. 우리나라 지난해 통계입니다. 얼핏 보면 19만 명이 결혼하고 10만 명이 이혼했으니까, 결혼한 사람 둘 중 하나는 이혼했다는 통계가 단순 비교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이혼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부부가 서로 헤어지려고 갈등을 겪어도 양가의 부모님이 말렸습니다. 이제는 둘이 어떻게 좀 갈등을 딛고 살아보려고 해도 양가의 부모가 나서서 때려치워라, 찢어져라, 혼자 사는 게 편하다, 저런 인간하고 살아봐야 희망이 없다고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시대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를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오늘날은 왜 이렇게 부부간의 갈등이 심하고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까?
오늘의 관심사는 이혼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혼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이 부부의 정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냥 무덤덤하게 혹은 미워하고, 안타까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설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사실 이 문제를 사회심리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 현대사의 물결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정신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도덕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까지 다루어봐야지만 비로소 무릎을 치며,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이렇게 결혼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은 제가 여러분에게 그 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간략하게 말해서 이제 세상은 바뀌었고, 많은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시대의 조류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사람은 자기를 지나치게 내세우며 자기중심주의에 빠져서 사람들과 관계를 어떻게 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산업화 사회의 가족 해체와 핵가족 제도, 핵가족 제도를 넘어서서 혼자 사는 독신 거주 비율이 높아지면서 사회적으로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훈련이 너무나 안 된 상태에서 혼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혼한 사람들이 많은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랑에 대한 갈망은 어느 때보다 굉장히 큽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대중문화를 보면 거의 십 중 칠팔은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유행가부터 시작해서 놀이와 심지어 멋있는 장소, 숙박시설과 패션에 이르기까지 이성과 연인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호텔에서 상품을 내놓을 때도 이제는 가족 상품보다 연인 상품을 더 많이 내놓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정조(貞操)의 관념은 이제 쓰레기통에나 던져버릴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속에서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사랑받기를 갈망하고 아이들의 노래 속에서도 사랑에 대한 갈망은 폭발하듯이 작렬하며 사람들의 대중문화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솟구치는 정념으로서의 감정은 되지만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일생 동안 운명을 함께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의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지만 결혼한 후의 사랑은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노력해야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어떻게 항상 좋을 수 있겠으며, 항상 만족할 수 있겠으며, 싫증도 나지 않는 그런 완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받은 회심자들도 하나님에게 싫증이 나는데, 도덕적으로 모순이 있고 완전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한 훈련이 거의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II. 남편과 아내
그래서 저는 오늘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설교하고자 합니다. 이에 대해서 가르칠 내용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해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A. 피차 복종함
첫째는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아할 것입니다. 분명히 오늘 성경에 보면 남편에게 아내가 복종하라고 되어 있는데, 웬 피차 복종이란 말인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것은 남성을 여성보다 우월하게 여기는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에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교적인 사상을 성경 속에 욱여넣는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장에서 그리고 있는 가정은 신실한 성도의 가정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남편,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아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가장,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아내, 이 사람을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한 남편,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남편, 그런 남편을 상정하며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라는 이유,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써 아내도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여성에게 복종을 받아야 한다든지 혹은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 창조된 아담의 후손이기에 우월하고, 여성은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후손이기에 자신보다 열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서 있는 그 사람이 우월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그 사람에게 복종하면서 살아가야지만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부생활의 기본적인 원리는 서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뜻을 존중하며 서로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감화받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가정 전체가 교회에 일부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 복종 되어 남편과 아내가 함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부부의 연합이 깨뜨려지는 것이 남편이 잘못하고 아내가 잘못해서 연합이 깨뜨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 평생을 첫눈에 반했을 그때의 감정을 가지고 관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손잡고 눈을 감는 부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어디서 그런 것을 보셨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하고, 모든 사람은 누군가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완벽한 만족을 누가 줬습니까? 여러분의 어머니가, 여러분의 아버지가, 여러분의 아들이, 여러분이 누구로부터 그런 완전한 만족을 얻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에게 상처를 준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도 한때는 부모에게 실망스러운 자식이었고, 아비의 마음을 후벼 파는 자식이었고, 여러분의 자녀에게 고통을 주고, 슬픔을 주고, 외로움을 안겨준 부모였습니다. 누가 온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부부의 연합이 깨뜨려지는 이유는 서로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한 남녀가 목사 앞에서 혼인 서약을 하고 주례를 받으며 부부가 되기로 맹세하였을 때 그의 좋은 점하고만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 모두를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병들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고통받을 때나, 아파할 때나, 모두 그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다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질 것을 기대하는 것이 혼인 서약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 안에 이러한 서로의 단점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는 충만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으니까 없는 것 같지만 사실 털어놓기 시작하면 모든 인간관계는 이 관계를 과연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 중에 안 그러신 분은 하나님께 백배나 감사하십시오.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우리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었더라면, 한 번쯤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이놈의 집구석에서 태어나지 않고 다른 집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내가 왜 하필이면 이 남자하고 만나서 결혼했을까?’ ‘아무 남자를 만나도 이 남자와 만난 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본 아내 없습니까? 남편은 ‘도대체 내가 왜 결혼했을까?’ ‘독신으로 살아도 이렇게 외롭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생각 안 해본 남자가 있습니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누가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착각에 빠졌거나 천사를 만난 것입니다. 백배 감사하시고, 백배나 더 잘하는 남편과 아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한 여자의 남편이 될 때, 한 남자의 아내가 될 때, 그는 혼자 살았더라면 짊어지지 않을 무거운 짐을 지기로 서약한 것입니다. 물론 혼자 살았더라면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나누어지는 것 같아서 내 인생의 짐이 가볍게 느껴지는 때는 가끔이고, 누군가를 업고 가야 하는 무거운 인생길이라고 느껴지는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미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나의 아내입니다. 이 사람이 나의 남편입니다. 일수불퇴(一手不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이혼을 생각하고 이 여자를 이 남자를 안 만났더라면 혹은 다른 누군가를 만났더라면, 이렇게 생각할수록 현실은 더 힘겹게 느껴지고 피차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가는 사람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의욕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지막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열매는 어떤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이혼합니다. 아이들 어린 나이에 이혼합니다. 50세쯤 돼서 아이들이 대학생쯤 되었다고 하더라도 혹은 고등학생쯤 되었다고 하더라도 부모 이혼의 상처는 어린아이 때와 다름없이 자식들에게 깊은 고통으로 남습니다. 오늘날 비혼율이 이렇게 높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부모들이 결혼에 대한 기대감을 상실시킨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너무나 행복하게 금실 좋게 살아가는 모습을 본 형제자매들에게는 당연히 결혼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찢어지고 서로 갈등하면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부모를 본 가정의 자녀들은 결혼에 대한 기대가 현저히 적어집니다. 심지어 저는 여러 가정에서 딸의 결혼을 말리는 엄마도 많이 만났습니다. ‘하지 마라, 정말 고생이다.’ ‘그냥 건강하게 너 편하게 일생을 살다가 가라.’ 이렇게 말하는 부모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고 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는 비혼이 많은 상태에 대해서 상당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자녀들에게 결혼이 얼마나 의미 있고 행복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혼자 사나 결혼을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을 어떻게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끈끈한 사랑으로 극복하고 거기에서 발견하는 의미를 자신에게 적용하며 헤쳐 나가는가를 자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혼자 사는 세상보다는 함께 결혼하고 사는 세상이 훨씬 더 살만하다는 기대감을 아이들이 갖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차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에 애정이 넘쳐서 그저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으면 언젠가는 실망하게 되어서 그런 자연적인 애정이 끝나는 시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부를 다루시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편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아내의 예쁨에 반해서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다 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우리를 아내와 남편으로 만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남편과 아내가 서로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차이가 있고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가 누구입니까? 특별한 타인입니다. 남편이 누구입니까? 특별한 '남'입니다. '남', '타인',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착각을 합니다. 자기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는 그 사람에게 자신이 되어 본 적이 없고, 그 사람만 자신에게 자신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기심입니다. 결혼은 우리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주신 제도가 아닙니다. 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어떻게 내 인생의 외로운 실존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아프기만 해도 그 아픔을 아내와 남편이 모두 이해합니까? 물론 절절하게 느끼고, 내가 아픈 것을 절절하게 아파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크고 작은 육신의 질병의 고통을 나만큼 아내가 느끼지는 못합니다. 물론 차에 치여서 팔다리가 부러지고,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면 아내의 마음은 살이 찢어진 남편보다 더 아플지 모릅니다. 그러나 대부분 허리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쑤신다, 구역질이 난다, 그걸 어떻게 모두 다 느끼겠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 결국 나는 나고, 아내는 아내고, 우리는 다만 특별한 타인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외로움을 극대화시키면서 자신이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소외받고 있다는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 인간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에 아직 주체로서 여물지 않은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미숙한 인간성으로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 험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부부간에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 홀로 해결하고 살아가야 되는 문제임을 여러분이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내와 남편으로부터 끊임없이 외로움과 소외의 감정을 느끼고 혹은 따돌림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자기에게 무관심하다는 느낌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사랑에 금이 갑니다. 왜 그렇게 사십니까? 특별한 타인인데 이만큼 나를 특별하게 대해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하고, 이 정도의 연합을 느끼고 서로 아파하고 긍휼히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명 안 되는데,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나의 아내고, 남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원리가 ‘피차 복종'입니다.
아내가 나보다 더 나은 신앙적인 생각을 할 때, “감히 남편이 말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이 벌써 인간성이 파괴된 것입니다. 비록 아내가 어떤 말을 하면 남편도 당연히 자존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너무 지혜로워서 남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도 우회적으로 이야기해서 남편의 자존감을 세워주며 옳은 길로 인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여자가 왜 여러분 같이 못난 남자하고 결혼을 했겠습니까? 더 좋은 남자를 만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부분 못 합니다. 대부분 열받았을 때 옳은 소리를 합니다. 그때는 마음이 상해도 곰곰이 생각합니다. 에드워즈도 말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혀 볼 수 없는 진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아내가 열받아서 남편의 단점을 말할 때 거기에 상당한 진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기도하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아내가 짜증 섞어 비난하면서 바른 소리를 했지만, 이튿날 아내 앞에 무릎까지는 안 꿇더라도 조용히 아내에게 “‘내가 어제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당신을 무시했는데 밤새도록 생각해보니 표현은 동의할 수 없지만, 당신의 말이 맞구려” “내가 잘못했소.” “내가 고칠게, 여보.” “노력할게." 그러면 아내는 그 남편을 얼마나 존경하겠습니까?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의 무엇을 고치고 싶으면 남편이 말하는데 왜 그것도 안 듣느냐고 윽박지릅니다.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사고방식이 먹혀들어 가겠습니까? 직장에서 상사가 이야기해도, 회장이 지시해도, 설득이 안 되면 회사를 때려치우더라도 그만두는 정신을 가진 자율성의 시대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알아주지도 않는 남편 행세하면서 우쭐거리는 마음으로 아내를 윽박지르듯이 할 때 아무리 그 말이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아내는 마음에 반발이 생겨서 결코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갈등만 커가는 것입니다.
제 아내가 청계산을 산책하는데 노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말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 친구들 모임이 있는데 거기도 못 가고, 내가 좀 가야 할 텐데." 아내가 말합니다. “친구들 모임을 간다고?” “가봐, 그러면 내가 당신 안 데리고 살지." 그게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된 건지 아십니까? 아내가 무엇 때문에 친구 모임에 간다는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안 데리고 살지' 할 정도로 못 가게 할 만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까? 도대체 친구 잠깐 만나러 가는데 아내에게 무슨 손해를 주고 고통을 줍니까? 그렇게 가로막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옛날에 남편이 아내에게 똑같이 한 게 수십 년 동안 전과로 쌓여서 아내의 마음속에 상처를 주어서 이제는 그 남편을 자기가 옛날에 당했던 방식으로 똑같이 다루면서 노년에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상처가 그걸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계신 젊은 남자 성도들에게 말씀드리는데, 지금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권력상 여러분은 우위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업 활동을 하고 돈도 더 많이 벌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하고 혹은 같이 직장생활을 해서 여자가 큰 회사의 임원이 된다든지 CEO가 돼서 여러분과는 비교될 수 없는 경제권을 행사하는 가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는 여러분이 더 열정적으로 사회에서 대우도 받고 활동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 잘하십시오. 그때 아내에게 복종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아내에게 받을 복종은 감화를 통한 복종이어야 합니다. 감화를 통해서 하게 되는 복종은 상처를 남기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권위주의를 통해서 받은 복종은 복종한 만큼 상처를 남깁니다. 그리고 감화를 통해 받은 복종은 상처를 남기질 않습니다. 그것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감화를 주어서 복종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서 아내의 그 말이 옳다면 남편이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과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가정의 목표는 남편과 아내가 모두 서로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대신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가정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아내와 남편이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십시오. 그리고 존중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복종할 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주십시오. 가볍게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작은 상처들이 쌓이게 하지 마십시오. 노년에 외로워지게 됩니다. 특히 남성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지금 시절에 아내에게 잘하십시오. 그리고 인격적으로 대해주십시오. 어디 가도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도록 존중하는 마음으로 아내를 대하십시오. 아내에게도 말합니다. 남편에게 공손하십시오. 예의를 갖추십시오. 험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남편을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 남편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혼해서 재혼하지 않는 한 없습니다. 그러니 피차 복종하며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가는 가정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서로 사랑함
마지막 두 번째,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그러면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도 됩니까? 말도 안 됩니다. 교회가 누구를 사랑합니까? 오늘 세례 서약에서도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온 교인이 한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그 교회는 어두운 밤하늘 같은 세상에 반짝이는 별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땀을 흘리고 애를 써서 목회자가 목회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고 목회자가 그 많은 시간 자신의 지성과 모든 성품을 바쳐서 설교에 애를 쓰고 힘 드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저는 평균 여섯 시간, 한편 설교를 위해 최소 여섯 시간에서 최고 삼십 시간까지 사용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를 설교하고 두 달 동안 건강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제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나 지식을 여러분에게 자랑하기 위함입니까? 어디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마음은 여러분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설교자가 헌신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평신도들이 하나님 말씀의 종이 되어 자기가 가진 재능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부르신 자들이 세상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왜 그 많은 부모들이 청소년의 회심 집회를 놓고 여러 날 동안 낮이나 밤이나 교회를 찾아서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애달프게 기도하고, 마치 집 안에 무슨 커다란 우한이나 난 것처럼 그렇게 통곡하며 자식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자식들 예수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학력이 높을수록 이혼율이 높은 것은 이게 또 무슨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이혼 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혼한 것쯤은 흉이 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흉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혼으로 찢어진 가정에서 상처받은 아이들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은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받으며 찢어진 가정에서 상처받으며 자랍니다. 아이는 마음에 있는 것을 그대로 모두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망가진 영혼을 부모로부터 받은 유업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상당한 놀라운 일이 그의 생애에 일어나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는 것이 부모가 서로를 사랑하기 힘든 것 같은 똑같은 가시밭길을 걸어야 될 것입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각해보셨습니까? 불과 젊음에 찬 날들 그저 잠깐 한 년, 년, 기껏해야 년 정도 지나가고 나면 젊은 날의 열정과 이성에 불붙는 정욕도 사라지고 육체는 쇠락합니다. 그리고 찢어져서 흩어진 가족들과 상처받은 아이들이 남습니다. 그게 내 인생의 이력서입니다.
돈 많이 버셨습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까? 곧 은퇴합니다. 그리고 돈 많이 버셨습니까?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그것이 인생에 진정한 가치가 될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며 인생을 사는 것이 과연 정말 좋은 것일 수 있겠습니까? 한 인간이 인생을 살고 가족들이 그 사람의 인생을 인정해줄 때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잘 산 사람입니다. ‘우리 아빠 비록 높은 지위 그리고 많은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지 못했어도 참 인간의 도리를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매일 눈물로 기도하던 우리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믿으셨던 주님의 도움을 나도 받으며 살아갑니다.' ‘엄마 아빠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던 것처럼 나도 부족하지만 내 자식을 사랑하며 살아가렵니다.'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면서도 한 번도 우리에게 낙심하거나 실망의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는 우리 엄마,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고 항상 우리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준 우리 아빠 모습을 생각하며 삶의 용기를 얻습니다.' 그건 아무나 얻을 수 있는 면류관이 아닌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사랑을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배우자를 보십시오. 그리고 상처받은 일 기억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세상은 맨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피부가 다 벗겨지고 맨 살갗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껍질 벗겨진 살갗이 서로 스칠 때, 그때 서로 가해자가 없어도 그렇게 고통을 받으며 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는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해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인정하고 아내와 남편도 내 뜻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인정해야 됩니다. 힘으로 그것을 눌러서 자기에게 맞추고 나면 그것은 세월이 흘렀을 때 어김없이 상처가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고통을 되돌려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산 사람들은 자기 인간성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를 하나님 앞에서 그의 고귀한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읽어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봐야 됩니다.
언젠가 제가 교회의 자매들에게 숙제를 내줬습니다. 오늘 밤 한 번 해보십시오. 남편이 잠들 때까지 자지 말고 좀 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푹 잠들었을 때, 남편의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분 안에 울지 않을 수 없는 아내가 없습니다. 그렇게 슬픈 모습일 수 없습니다. 뭘 했는지 대자(大字)로 뻗어서 한번 자신감 있게 자면 좋을 텐데, 자궁에 있었던 때처럼 두 발의 오금을 오므리고, 두 팔을 지고, 무슨 꿈을 꾸는지 끊임없이 인상을 쓰고. 이를 갈고,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잡니다. 평안한 얼굴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스며들어오는 죽음의 기운이 젊었을 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모두 축출하고, 이제는 머리도 벗겨지고 눈썹까지 흰 눈썹이 나오기 시작하며 주름이 점점 깊어지고, 로션도 하나 제대로 안 바르는지 얼굴은 거칠하고, 나이 오십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노인 반점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코를 골며 자는 남편을 위에서 한번 내려다보십시오. 사랑이 없어도 좋으니 한 인간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아마 틀림없이 그 남편이 마음 둘 곳 없이 외로운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느낄 것입니다. 그걸 못 느끼는 아내는 인간도 아닙니다. 인간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본적인 인성을 가질 수 있으면 남의 아픔을 읽어낼 수 있어야 됩니다. 나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지만, 자신도 행복한 사람은 아니구나, 참 외로운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위에서 느끼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저는 그때마다 우리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돈도 꽤 많이 버셨고, 권력도 가지고 계셨고, 당신 마음대로 왕처럼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족 중 아무에게도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없는 사람 취급하셨고, 형제들에게도 별로 존경받지 못했고, 자식들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부모님에게도 늘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회심하고 나서 보니까 그 긴 세월 동안 때로는 악의가 있어서, 때로는 악의는 없는데 어떻게 가족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될지 인간의 도리를 잘 몰라서, 그리고 알 때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는 대로 살 힘이 없어서, 그분은 그렇게밖에 못 산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아버지가 그렇게 홀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물이 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족 중 아무도 ‘얘야', ‘여보', ‘아빠', ‘오빠', 하고 다가가며 안아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걸 생각할 때 며칠 동안을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내가 왜 진작 그렇게 상처받고 외로웠던 한 인간을 깊이 끌어안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지 못했을까.'
결국은 모두 가족들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지 남의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도 내가 말합니다. 아내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혼자 아이들을 양육하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 합니다. 여러분은 돈 버느라고 애쓰고 힘들었다고 하지만 가정에서 주부의 일을 하루만 휴가 내서 한번 아내를 안방에 눕혀놓고 여러분이 아내의 역할을 모두 해보십시오. 얼마나 고단하고 고통스러운지 나가서 돈 버는 게 훨씬 편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힘든 일을 하면서 남편에게 별로 큰 관심을 받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시댁으로부터 무슨 존귀하게 여김을 받지도 못하면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이라도 열심히 믿어서 은혜의 샘물이 강물처럼 그 마음에 흘렀으면 그 신앙 때문에 이겼을 텐데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마음속에 수많은 상처와 고통이 남는 것이니, 남편이 받은 것 못지않은 서러움과 슬픔들이 가슴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내의 자는 모습을 자지 말고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다가 자는 모습을 위에서 한 번 내려다보십시오. 실신한 듯이 잠이 들어 있는 아내의 화장기 없는 얼굴을 한번 보십시오. 한 인간으로 얼마나 가엾은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닙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측은지심이 있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팔다리가 끊어지고 머리가 깨진 사람만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자기 인생의 멍에를 짊어지고 가족들과 함께 사슬에 엮여서 살아가는 것 같은 아내를 보면서 감동을 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남의 아픔을 생각하면 놀랍게도 자기 인생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사랑받은 사람은 불행할 수 있지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한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아니 고양이 한 마리, 개새끼 한 마리라도 끌어안고 뜨겁게 사랑한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동물이어야 합니까? 아내와 남편을 바라보면서 내 인생의 모든 의미를 걸고 마지막 이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겼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내 인생의 성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좋음 때문에만 사랑한다면 영원히 지속될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그렇게 끝없이 좋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좋았던 사람도 때로는 나빠지고, 아름다웠던 사람도 한참 살고 보면 추함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양극단에 처하는 그런 골을 메워주는 것이 사랑과 용서와 인내입니다. 그것을 참고, 이기고, 견디면서 살아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내 아내로 받아들일 때 나는 그 사람 때문에 서약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나게 해주신 그리스도 때문에 서약했고, 내가 그 남자와 함께 혼인을 언약할 때 나는 그 남자에게 약속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섭리 속에서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서약을 한 것입니다. 적어도 그 서약에 배신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맺어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아내에게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발견하고, 때때로 아내는 여러분에게 실망과 슬픔을 안겨줄 때가 있지만 예수는 그런 때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느낀다면 여러분이 생각이 망령되어서 예수를 오해하는 거지 예수를 진짜 올바로 알아서 그렇게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할 때 그 남편 안에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면, 때로 남편이 실망시킬 때라도 그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 때문에 그 실망을 극복하고 결국은 사랑하며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을 기점으로 삼으십시오. 그리고 제발 사랑을 좀 표현하십시오. 가끔 편지도 쓰고, 문자도 보내고, 선물도 하십시오. 쑥스럽지만 ‘고맙다, 당신을 만나서 참 다행이다.’ 다음 생애에도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있지도 않은 내세를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다음 환생을 생각하면서 상처받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되지도 않는 얘기 하지 말고 되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정말 고맙다.' ‘당신이 내 아내인 것이 정말 고맙다.' ‘나를 만나서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나를 품어 주었기 때문에 내가 너무 부족했지만 내가 아내로서 살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든든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기며 다시 사랑으로 연합되는 부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내 인생 최대 실수는 저 인간 만난 거다.' ‘어떻게 하면 저 인간하고 헤어질 수 있을까?’ ‘애들 대학 들어갔을 때, 시집·장가 보내고 언제쯤 찢어질까?' ‘그리고 재산은 얼마나 나누어 가질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하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결혼 생활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끝없이 용서하고 아내의 혹은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한번 아내를 보십시오. 행복해합니까? 여러분과 만난 것을 즐거워하고 보람을 느낍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없이 우울하고 너무나 불쌍하고 비참하게 느껴집니까? 그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때로는 부부니까 실망을 느낄 때도 있고, 슬프고 괴로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조용히 인생을 넓게 보십시오. 그리고 이것도 잠시 지나가는 한마당의 어지러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영원히 딱 한 번밖에 없는 인연입니다. 천국에서 만날 때 우리가 서로 아내와 남편인 것을 알아보겠지만, 다시 거기서 한 집에 가족끼리 모여서 사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속에서 그날을 바라보면서 남편과 아내를 긍휼히 여기며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잘 살아야 되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에 상처가 있고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아내에게 바뀔 것을 기대하고, 남편에게 바뀔 것을 기대하는 대신, 조용히 우리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니 내가 내 사랑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주님의 사랑으로 내가 하겠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남편과 함께 살아온 상처받은 수많은 날을 생각하면 내 남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모든 은혜를 내 남편을 위하여 바치고 싶습니다.' 인생을 모두 산 후에 서로 손을 잡고, ‘여보, 많은 시련과 역경이 있었고, 당신과 함께 미워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애달파하는 날들이 많았지!' ‘결국 우리가 모두 이겼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불완전했던 사람들이 이만큼 온전하게 되었으니 우리 만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지!’ ‘여보, 그렇지! 감사해.’ 그렇게 하고 인생의 황혼에 손을 잡을 수 있는 부부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태도를 바꾸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결혼과 비혼 - 청년편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전 7:7)
녹취자 : 김지혜
I. 본문해설
오늘날 비혼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들도 많은 사람이 이혼을 합니다. 어느 날 저녁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남편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예뻐졌고 그래서 심각하게 아내에게 고백했습니다. “여보 나 할 말이 있어” “무슨 얘긴데” “내 말 좀 들어봐” “말해봐” “여보 나 당신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도 난 당신과 결혼할 거야” 아내가 감동을 하며 자기 목을 끌어안고 즐거워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짜증을 팍 내는 겁니다. “당신은 이 생도 자기 마음대로 살고 다음 생도 어쩜 그렇게 이기적으로 생각해? 나는 당신하고 다시 결혼하고 싶지 않아” 이런 이야기는 이미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닙니다. 2021년인 작년 192,507명이 결혼을 했고 101,673명이 이혼을 했습니다(2021년 혼인 건수는 192,507건, 이혼 건수는 101,673건이었습니다). 평균 결혼 연령은 33세였고 평균 이혼 연령은 50세였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결혼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로 국가 정책, 가정에 대한 지원, 산업화 사회에서 자녀 양육을 위한 비용의 증가 등등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것은 사람들이 비혼을 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비혼을 택하는 이유는 단지 사회적인 지원의 부족이나 제도의 미비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낮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결혼에 따르는 인간의 도덕적인 의무에 대한 해체 의식이 우리 의식 속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성적인 자유를 구가하면서 성 윤리로부터 자유로워진 많은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결혼이 이제 성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 없이도 얼마든지 성애를 즐길 수 있는 도덕적인 길들이 충분히 열려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부가 함께 성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보았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음욕을 피하기 위함이고, 적극적으로는 부부의 정신적인 연합을 위해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앞세운 것은 자녀의 생산입니다. 이제는 이러한 부부 관계의 정신적인 유대나 연대 그리고 또 자녀를 생산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시대를 살고 있고 이것은 이미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니 사도 바울이 결혼에 대하여 말하게 된 동기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파당의 문제, 물질 숭배의 문제와 함께 교회의 질서의 문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함께 간과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적 타락의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시는 지정학적인 위치가 항구도시입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아고라라고 하는 장소에서 엄청난 국제무역이 이루어지던 지역이었습니다. 이미 이러한 지정학적인 현상은 이미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던 일이고 로마 시대의 고린도 시는 매우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가 만나고 뱃사람들이 짐을 싣고 와서 부리는 곳이니까 당연히 무역 거래가 활발해졌고 엄청난 양의 재화가 유통되게 되었고 재화가 발달되고 여러 가지 문화들이 엉키면서 도덕적인 해이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고린디아조마이’라고 하면 그것은 ‘성적으로 방탕하다’라는 동사로 사용될 정도로 고린도 시는 성적인 타락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도시의 정승이 교회에까지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의 사람들이 이 풍조를 따라서 그런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고 심지어는 계모 된 자신의 어머니와 통간하는 자들이 교회에까지 있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가운데 결혼의 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뜸 사도 바울은 음행을 피하기 위해 시집 장가를 가라라고 어떻게 보면 생경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바로 만연한 성적 타락의 징조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오늘 사도 바울은 결혼과 비혼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독신이라고 많이 불렀지만 이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독신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혼이라는 말로 포괄적으로 부르는 것이 훨씬 더 결혼과 대조를 이루는 단어라고 생각을 하여 저는 오늘의 설교 제목을 <결혼과 비혼>으로 잡았습니다.
II. 결혼과 비혼
그러면 결혼과 비혼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요?
A. 창조와 결혼제도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와 결혼의 제도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을 창조하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시는 방식으로 인류를 증가시키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창조하시고, 두 번째 사람은 창조하시되 그 사람의 몸의 일부를 취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즉 아담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재료를 삼아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와는 사람을 재료로 삼아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얼핏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하는 중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왜 남자를 흙으로 빚으셨으면 여자도 흙으로 빚으시지 왜 그 많은 흙을 버려두시고 하필이면 남자를 잠들게 하셔서 그 몸의 일부를 떼어내어 그 재료를 가지고 여자를 창조하셨을까?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재료가 없으면 창조하실 수 없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근데 여기에는 결혼 제도에 관한 매우 결정적인 중요한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되었지만 살과 피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또 다른 흙으로 여자를 빚지 않으시고 남자의 몸에서 일부를 취하여 여자를 빚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여자가 남자를 의존해 있다거나 혹은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었다라고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여자는 남자와 한 몸이다. 한 피요. 한 살이요. 한 뼈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한 사람만 물질에서 창조하시고 다른 사람은 사람의 살과 피 뼈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부터는 두 사람이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신비한 방법으로 무에서 유를 만드시는 방법으로 아이를 낳게 하셔서 온 인류를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한 사람 한 사람 어차피 영혼은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창조하시니 육체까지도 창조하여 만드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사람의 몸을 재료로 하여 또 다른 사람을 만들고 두 사람의 결합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태어나고 그 아이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태어나도록 인류의 번식 방법을 택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결국 모든 인류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방법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 제도는 하나님이 인류를 만드시기 위해 택하신 너무나 자연스러운 제도의 도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나 결혼하게 하셨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는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 있게 하시고 그의 정신과 마음이 연합된 가운데 육체의 결합이 이루어짐으로써 후손들이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아담과 하와 사이의 갈등도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가인이 자기의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끔찍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담이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가인도 아벨을 향해 아벨도 가인을 향하여 아담과 하와도 두 아이를 통하여 그리고 두 아이도 엄마 아빠를 향하여 똑같이 “여러분들은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회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는 바로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모든 인류가 모든 인류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는 완벽한 사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세계의 인류를 통해 보여줄 영광은 그 모든 개체인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이 별빛처럼 서로 연결되어 온 인류가 사랑으로 빛나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세계를 바로 꿈꾸면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결혼의 제도는 인류의 번식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신적인 제도입니다. 이 결혼의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오늘날까지 인류가 그치지 않고 이 세상에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결혼의 제도가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과 제도이냐’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B. 비혼에 대한 새 해석
그것이 바로 신약시대에 와서 비혼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합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성도로서 기업을 누리게 하는 그 사명에 적합한 삶의 양식이 독신, 비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결혼할 권리도 있었고 자유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이 말려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비혼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 비혼의 삶의 양식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데 매우 유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 매우 임박하다’라고 하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함 때문에 느끼는 확신이지 어떤 신학자들이 잘못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이 예수의 재림을 곧 몇 년 안에 일어날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갖게 되었던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경험하는 바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력하게 느낄 때 천국이 바로 여러분 눈앞에 있는 것 같은 근접한 장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해서만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그저 건조하게 살아갈 때는 예수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역사의 한 토막처럼 느껴지고 여러분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피 흘리시는 그 고통이 여러분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지는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모두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랑이 바로 그 미래를 현재에 침투해 들어오게 만들고 흘러간 과거를 현재로 역행하게 만들어서 결국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서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을 통해서 영원을 알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현재성입니다. 영원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이 현재적인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단순히 예수님이 몇 년 후에 올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이런 윤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절대 불변의 한 원칙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라고 겸손하게 말할 정도로 유연성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 전도 열정에 불탔던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동정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던 것을 볼 때 역시 이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1. 거룩한 목표
그러면 비혼에 대한 새 해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비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충분히 베드로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거느리고 살 권리가 있었고 그런 자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혼을 택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에게 결혼보다도 더 높은 그 이상의 거룩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이 너무나 지엄하기 때문에 어떤 일들로도 자신의 마음이 갈리지 않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비혼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고린도서에서 사도바울은 혼인의 유익과 단점을 함께 말합니다. 장점으로는 음행을 피할 수 있고 또한 부부 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아는 인격적 성숙에 이를 수 있다는 장점도 거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편한 점도 이야기합니다. 비혼일 때에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다 드렸던 자매들이 결혼과 함께 하나님보다는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녀들 중에 어떤 사람은 한때 매우 탁월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결혼과 함께 그렇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결국 우리에게 맡겨주신 한 사명의 길로 달음질치기에 결혼이 방해가 되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사도 바울이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결혼을 하나의 단점으로 꼽았습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고자 그분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비혼으로 살 것이니 그 당시로서는 크게 돈에 욕심이 있을 이유도 없고 생기는 것마다 이웃을 돕고 구제하고 교회를 섬기고 그림자가 없이 순결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예수의 복음을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자신을 모두 쏟으며 살던 형제들이 결혼과 함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자매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때로는 그들을 향한 사랑이 너무 넘쳐서 때로는 그들이 결혼으로 말미암아 남편인 자신을 얽어매는 속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일에 방해를 받는 그런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예전에는 아무것도 없이 줄달음질치며 그리스도를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이 이제 발목에 무엇인가 무거운 추를 감고 달려가야 하는 것 같은 것이 때로는 결혼 생활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도 바울은 결혼이 주는 불편함이 그런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비혼을 오히려 칭찬하기도 했던 이유가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제3의 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분법적인 이원론적인 해석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살았으면 그러지 못할 사람들이 결혼함으로써 부부의 연합 속에서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서로에게 힘이 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서 더 훌륭하게 살아내는 부부들을 우리는 적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비추어 볼 때 결국은 우리가 깨닫게 되는 하나는 이것입니다. 결혼이냐, 비혼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해야 할 거룩한 목표, 비혼으로 남아 있어야 할 신령한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결혼의 제도에 대해서 참 신기하게도 양면을 모두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매우 신령한 제도로서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인 것처럼 강조하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가장 세속적인 일이야말로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해보면 결혼은 어떻게 보면 가장 세속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노아 홍수가 일어나기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계속했다는 점에서 가장 세속적인 가치 없는 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령하게 하나님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관계를 맺는 것처럼 부부가 영적인 결합을 이루는 하늘의 결합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해서 결혼이 하늘의 일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결국 무엇일까요? 진짜 결혼은 이런 것이기도 하고 저런 것이기도 할까요? 아닙니다. 무엇을 위한 결혼이고 무엇을 동기로 하는 결혼이냐 그리고 결혼의 그 결합을 통해서 서로 찾아가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결혼은 세상 속되고 정욕적인 것이기도 하고 또한 가장 거룩하고 무엇으로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제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한 결혼이냐 하는 것입니다. 쫓기듯이 결혼하는 것, 좋은 것이 아닙니다. 떠밀리듯이 결혼하는 것,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비혼의 상태에 있다고 해서 자책하는 전근대적인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결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입니까? 그게 결혼입니까? 무슨 어마어마한 의무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아무리 결혼해도 거룩한 목표가 없다면 가장 세속적인 일입니다. 노아 홍수 일어나기 직전에 사람들이 했던 그 세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뜻을 세우고 있다면 독신으로 살아도 여러분은 훌륭한 선택을 하고 있고, 그 목표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보람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결국 거룩한 목표를 갖지 않으면 결혼이든지 아니면 비혼이든지 간에 모두 대단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사람에게 결혼은 끊임없이 고생문이 열리는 것이고 혼자 살아도 고독의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혼해서 뭐가 좋겠습니까? 시집가서 아이가 빨리 들어서지 않아서 심지어 불임 치료를 받고 난임 치료를 받고 심지어 인공 수정까지 하고 시험관 아기까지 하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참아내면서 겨우겨우 아기를 가집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상당한 퍼센트는 또 정상이 아닌 아이로 태어납니다. 이렇게 되면 낙태할 수도 없고 엄청난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 다행히 정상적인 아이로 태어납니다. 근데 그렇게 태어나면 쌍둥이가 많이 태어납니다. 그러면 한 번, 한 아이를 낳아서 차례대로 길러도 죽을 맛인데, 한꺼번에 둘을 낳아서 이놈을 재우면 저놈이 울고 이놈을 먹이면 저놈이 난리를 치고 하면서 한 5~6년 이상 버틴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결국은 혼을 다 빼놓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나면은 남편이 아름다운 사랑의 연합을 이루면서 끔찍이 가정을 사랑하느냐? 그런 확률은 상당히 낮습니다. 믿음 안에서 결혼해도 쉽지 않은데 믿음 바깥에서 결혼을 할 경우에 매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소외된 감정을 느끼고 아내는 아내대로 독박 육아를 하면서 죽겠다고 고생을 합니다. 거기에다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직장까지 여러분들이 가져야 할 상황이 된다면 더더욱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고 오히려 부모님의 병수발을 들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면 앞이 캄캄한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좋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 낳고 고생 고생하면서 기릅니다. 근데 그 애들이 바르게 자란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온 속을 긁어놓고 하여튼 인간이 어디까지 비참해지는지를 시험하기라도 하는 듯이 아이들이 자라면서 머리가 크면서 처음에는 육체적으로 부모를 괴롭히지만 나이가 들면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영적으로 괴롭힙니다. 지독한 고통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비관적으로 바라보면 결혼 생활은 박탈감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합니다. 이게 단순히 한 아이 낳는데 두 당 2억 5천이 들어간다? 돈 문제만이 아닙니다. 돈 문제 때문이라면 이런 문제를 일찍이 해결했던 유럽에서는 왜 그렇게 출산율이 적었을까요? 여러분들 프랑스의 교육 제도를 아십니까? 두 살이 되면 의무 교육입니다. 다섯 살까지. 당연히 다섯 살부터 다시 초등학교 들어가면 의무교육이고 중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두 살부터 다섯 살까지 가르치는 소위 에꼴 마떼르넬(école maternelle)라고 하는 유아 교육이 말하자면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정식 교사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제도권의 학교입니다. 전국의 육아 예산(교육 예산)의 10%를 2세부터 5세까지 교육하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우리나라 그걸 배워야 됩니다. 대학 등록금 지원해주는 것보다 더 급한 게 빨리 아이들을 그렇게 길러야 합니다. 왜 1년만 휴직을 줍니까? 한 2년 휴직을 줘야죠. 그래서 2년 키워놓은 다음에 에꼴 마떼르넬(école maternelle) 같은 데 집어넣으면 엄마가 출근하고 퇴근할 때까지 학교에서 안전하게 보살펴주어서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출산을 장려해야 되는데 그까짓 것 치사하게 10만 원 20만 원 통장에다 넣어주고 쿠폰 몇 장씩 나눠주는 걸로 출산을 촉진한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인구가 점점 줄고 있습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립니다. 아니 저같이 시골에서 목회하는 평범한 사람도 다 알고 있는 이 상식을 왜 정책 입안자들이 모르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갑니다. 모르면 차라리 프랑스 같은 데 가서 배워 오든지 정 자신이 없으면 외주를 줘서 그 사람이 와서 전권을 가지고 육아 제도를 개혁하게 해야 되잖아요. 내가 왜 지금 쓸데없이 육아 제도에 대해서...이것도 결혼을 안 하는 이유잖아요. 그중에 하나잖아요. 왜 육아휴직을 1년만 써요? 2년이고 3년이고 원하는 대로 쓸 수 있게 해주자. 왜냐하면 더 세월이 흐르면 세금 낼 사람이 없습니다. 노인네들만 모여 사는 사회 연금만 축내는 사회가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데. 희망을 주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을 정부가 거의 혁신 혁명적인 방법으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에 자녀 출산을 위해서 쓴 돈이 200조라고 합니다. 근데 어디다 갖다가 퍼다 버렸는지 난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해놓고 지금은 좀 올랐는지 모르지만 한 달에 120만 원씩 월급을 줘서 유아교육 교사나 넉 달 코스로 인터넷에 등록해가지고 자격증 받은 교사들에게 아이들을 맡기니 인성검사조차 되지 않아서 아이들을 두들겨 패고 죽이고 하는 이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잖아요. 무슨 나라가 하는 일이 이런 모양입니까?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일 수가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세상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제도 때문에 인구 제도의 근간이 무너지고 있고, 청년층들이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미래에 이 아이들이 태어나서 이 아이들이 자라야지만 이 아이들이 우리의 생애를 복지를 지탱해주는 것입니다. 그 최소한 둘이 결혼하면 둘 이상을 낳아야 합니다. 그래야지 현재 인구가 유지됩니다. 그것도 모든 남녀가 결혼한다고 할 때에 그게 유지가 됩니까? 사실은 두 명이 아니라 세 명, 다섯 명 이상 아이를 낳아야지만 사실은 인구가 기본적으로 유지가 됩니다. 550년 후에는 한국이 사라진답니다. 이런 바보 같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깐 여담으로 흘렀습니다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결국은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독신이라고 하는 것은, 비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표를 가진 결혼이냐’ ‘어떤 목표를 가진 독신이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비혼을 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결혼해서 행복한 꼴을 못 봤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런 사람이 너무 드뭅니다. 주위에 작년에 결혼한 사람 19만 명이 결혼하고 10만 명이 이혼했으니까 두 사람의 하나꼴은 이혼한 것입니다. 뭐 그렇게 비교를 억지로 한다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주위를 한번 보면 결혼을 해서 너무 행복하게 살아서 너무나 부러운 친구들을 여러분들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가끔은 있겠지만 많지 않습니다. 점점 그런 것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눈길을 부모에게로 돌려볼까요? 부모가 너무나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엄마 아빠를 보니까 나는 너무 결혼하고 싶다’라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 들어 보십시오. 예전에는 부부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 양가의 부모님들이 도시락 싸 들고 와서 말렸습니다. ‘그러면 너 후회한다. 애들은 어떡하려고 그러니 그러지 마라. 그래도 이해하고 살아라. 조금만 어려움을 이기면 된다.’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그게 상식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갈등이 생겨도 좀 교회에서 타일러 가지고 부부가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양가의 부모들이 들고일어나 ‘야 찢어져 버려. 희망이 없다. 혼자 살아라. 집어 쳐버려라. 갈라져 버려라.’ 그리고 심지어 ‘어린아이는 고아원에 주고 새 출발 해라’ 부모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부모가 왜 그런 식으로 가르칩니까? 더군다나 신앙이 있는 집안에서조차 그런 식으로 자녀를 지도하는 경우를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왜 그래요? 본인이 결혼 생활에서 별로 재미를 못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 남편 그런 아내와 함께 그렇게 살아온 날들이 너무나 후회됩니다. 딸, 아들들에게는 그런 불행을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질러 보면서 살아라, 때려쳐.”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갈라집니다. 그러면은 둘이 살다가 갈라져도 그 상처가 그렇게 쉽게 아물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상처가 없다면 인간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안에 자식이,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거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건 2순위, 3순위입니다. 4순위입니다. 자신들의 행복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들도 결혼 생활에서 너무나 행복을 느끼고 부부의 연합을 느끼고 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그런 식으로 그릇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걸 어디서 배웠을까요? 사회의 메스미디어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신문만 펼치면 잡지만 펼치면 TV만 켜면 인터넷만 열면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 수많은 세속주의적인 풍조입니다. 그런 정신들이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현대 정신에서 물들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성과 결혼이 따로 놀고 성이 육체의 쾌락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이것은 결혼의 제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엔조이하는 수단으로 전락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고 가정의 가치라든가 이까짓 건 필요가 없고 서로 함께 살아간다는 개념 자체가 훈련이 안 되어 있습니다.
핵가족 사회 그리고 산업화 사회에서 가족들은 모두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아빠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혹은 농사하는 걸로 먹고 사는 사회가 아닙니다. 식구들하고 만나는 시간이 한밤중에 아니 며칠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오면 식구들 자고 있고 그다음에 식구들 자는 걸 보고 출근합니다. 그렇게 살면서 인간은 점점 고립화되고 소외의 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어려서부터 한 자녀 두 자녀만 낳았습니다. 서로 양보하고 사랑하고 화합하고 심지어는 어떻게 처세를 하면서 살아야지만 형제들 간에 소외되지 않고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훈련이 일도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또 처세술 책은 가볍다고 안 읽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신신당부하겠는데 성경도 안 읽는 여러분들 처세술 책 좀 읽으십시오. 제발 수준 낮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보다는 수준이 높으니 처세술 책이라도 읽어서 내가 어떤 태도를 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고 사회 속에서 손해를 보는지 보십시오. 이미 가진 거 다 갖고 올라갈 때까지 올라간 사람이 갑질하면서 자기 자신을 뻐기는 것을 보면서 교훈하지(얻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은 갑질해도 되는 사람인데 여러분들은 대부분 을의 위치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도 도움을 못 받고 옆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지지도 못 받고 여러분 밑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닥에서 혼자 용트림하는 것입니다. 제발 처세술 책이라도 읽으십시오. 깊이 있는 신앙의 서적을 읽을 자신이 없다면 처세술 책이라도 읽어서 눈치라도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전히 세상은 아무리 각자가 내가 최고라고 부르짖으며 자기를 뻐기고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도 사회는 일정한 자기의 질서에 따르는 사람들이 성공할 기회를 얻고 더 많은 기회도 갖게 됩니다.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독점적인 기술을 가지고 소비를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 아니라면 그런 삶의 양식은 여러분들에게 권할 만한 것이 못 됩니다. 계속 루저가 되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 없이 모든 질서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체적으로 무엇이 자신의 인생의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하며 사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결혼과 비혼은 그 자체로서는 거룩하지도 않고 속되지도 않습니다. 또 결혼과 비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둘이 결혼식을 올리고 “뼈 중의 뼈여 살 중에 살”이라고 뜨겁게 포옹했을 아담과 하와를 보면 결혼이 너무너무 서로를 행복하게 했지만 파경에 이른 다음에 보면 아담은 하와를 만나지 않았으면 훨씬 좋았을 사람이었고 하와도 창조되지 않았으면 훨씬 더 나았을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잖아요.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결국 성경 한 장 넘기면서 뜨거운 사랑이 파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혼이라고 하는 것, 비혼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거룩하고 저것이 무슨 속된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한 결혼이냐 무엇을 위한 비혼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결혼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결혼하고 싶으십니까? 목표가 무엇입니까? 비혼으로 있고 싶습니까? 그 목표는 무엇입니까? 결혼하고 싶지도 않고 안 하고 싶지도 않습니까? 왜 그렇게 주체성이 없습니까?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누굽니까? 주체성도 없습니까? 자기 의견도 없습니까? 떠밀리듯 사는 것입니까? 그게 뭐 사는 겁니까? 생존하는 거지. 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선택도 안 하고 그렇게 흘려보냅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못 만났다고요? 그렇게 무엇인가 이렇게 가슴에 꽂히는 그런 비범한 사랑의 경험이 없었다고요? 왜 없습니까?
사람은 매력이 있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건 여러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매력이 있는 사람은 찾으면서 자신은 매력이 없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같은 여자라도 자기를 선택 안 할 거라는 것을 거울을 보면서 자각하지 못합니다. 미모가 빼어나든지 그러면 성격이 좀 못돼도 일단 남자가 속아서라도 결혼을 합니다. 아니면 지성이 뛰어나서 클레오파트라처럼 미모는 없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모든 남자들의 영혼을 빼앗을 정도로 역사·철학·문학·과학·예술·신학을 넘나드는 그런 화려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정신적인 매력을 뿜어내든가 아니면 너무 인격적이고 훌륭하고 경건해서 신앙으로 살고 싶은 형제에게 매력을 느끼게 하든가 여러분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장점을 개발하는데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봐도 별로 매력이 없습니다. 제가 매력을 느낀다고 해서 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결혼하지 않은 형제라도 이렇게 매력을 느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아마 결혼이라고 하는 시장에서 자기 자신이 선택받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자신의 장점을 매력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목사님, 그렇게 꼭 결혼식장에서 팔려야 됩니까? 아니 팔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다 너에게 나는 결혼 안 합니다. 나는 비혼을 선택했습니다. 주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할 때 비혼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가십시오. 그 길로. 근데 여러분 대부분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누가 선택해 주겠습니까?
예전에 교회 간사로 있던 자매 하나가 어느 날 와서 나한테 사정을 합니다. “목사님, 저 시집 좀 보내주십시오.”, “시집을 네가 알아서 가는 거지. 내가 어떻게 보내주냐”, “그래도 목사님은 힘이 있으시잖아요. 좀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그래. 나도 노력하마. 너를 위해서 나도 오늘부터 기도할 거고 너도 노력해라. 그 대신 내 기도만 가지고는 안 될 거다. 왜냐하면 내가 결혼하는 게 아니라 니가 결혼하는 거니까. 세 가지만 나한테 약속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거다.”, “그게 뭡니까?”, “첫째, 예쁘게 하고 다녀라. 그리고 두 번째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거라. 세 번째 기도 많이 하거라.” 근데 세 개 다 안 해. 누가 데려가겠습니까?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 저 장가 좀 보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래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내게는 능치 못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에겐 없지만. 그렇게 불가능한 걸 나에게 강요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했습니다. “그래. 나도 자신은 없지만 내가 널 위해 오늘부터 기도하마. 그 대신 세 가지를 하거라.”, “그게 뭡니까?”, “첫째, 능력 있는 사람이 되거라. 두 번째, 항상 예쁘게 하고 다녀라. 특히 깨끗하게 냄새 안 나게 하고 다녀라. 그리고 세 번째, 기도 많이 하거라’ 셋 다 안 해. 그러니까 안 됩니다.
무엇인가 매력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결혼을 하든지 비혼을 하든지 그것은 여러분들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둘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목표가 있다면. ‘그 대신 못해서 못했습니다. 결국은 그냥 하고 싶은데 그렇게 특별하게 하고 싶은 의지가 없어서 떠밀리다가 보니까 결국 선택받지 못해서 비자발적인 비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지는 맙시다. 결혼해야 되겠다고 뜻이 세워졌으면 부지런히 결혼의 문을 두드려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과정이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 결혼하기에까지 이르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고 추구하는 과정이 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너무 주체성이 없는 삶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번 작정기도 해보시면 어때요?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손담비도 새벽기도 나가서 시집갔다고 합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고 ‘하나님 나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결혼입니까? 비혼입니까? 나에게 거룩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내가 결혼을 해도 비혼으로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주님 나에게 그러한 길을 보여주시고 결심과 용기를 주셔서 추호도 결혼한 후에 후회하지 않고 비혼으로 산 후에 과거에 대해서 아쉬운 것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저에게 결단을 주시옵소서. 내가 이 모양이든지 저 모양이든지 예수를 위해 살겠습니다. 아멘.’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 그 정도의 결단의 순간은 필요하잖아요. 확신도 없으면서 ‘혼자 사는 것도 살만 해’ 하고 TV에 수없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 다 돈 벌어 놓은 사람들이고 사회적 지위 있는 사람이고 자기 집 있고 강아지도 있고 다 친구들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하고 비교하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그 사람의 인생입니다. 나는 분명히 결혼이냐, 비혼이냐. ‘떠밀리는 결혼 하지 말자, 떠밀리는 비혼 하지 말자, 능력이 없어서 결혼하는 것도 하지 말고 능력이 모자라서 비혼하는 것도 하지 말자. 언제든지 누가 나에게 물어볼 때 나는 비혼을 택했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택했다. 비록 택한 것이 좀 늦기는 했지만 분명히 나의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선택의 이유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주체성 있게 자기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아멘.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아멘. 하십시오. 그리고 정말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 앞에 아주 온몸을 다해서 한번 기도해보면 어때요? ‘교회에 와서 제가 40일 동안 처리하며 기도하겠습니다. 40일 금식은 못 했더라도 하겠습니다.’ 아니면 ‘매일 매주 하루에 한 번씩 교회 와서 처리하면서 제가 1년을 기도해보겠습니다.’ 매달리면 하나님이 다양한 간증을 주십니다. 그게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아닙니까? 거룩한 목표를 갖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삶의 양태와 본질
두 번째는 삶의 양태와 본질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바란다.’ 이것은 비혼의 방점이 찍힌 게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갖기를 바란다’라고 할 때 비혼의 방점이 찍힌 게 아닙니다. ‘나처럼 독신으로 살아라’ 거기에 방점이 찍힌 게 아닙니다. 예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면 시집가나 장가가나 비혼으로 사나 그건 사도 바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모든 사람이 내가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명을 받고 그 일이 중치함을 깨닫고 나의 모든 것을 드려 비혼을 택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 산 것처럼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소명이 있는 사람들은 굳이 결혼하려고 하지 말고 나처럼 비혼으로 살면서 우리 함께 예수만 섬기자.’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비혼 했다고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일 없고요, 결혼했다는 그 자체 때문에 칭찬받을 일은 없고요, 더군다나 이혼했기 때문에 칭찬받을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것 자체는 칭찬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결혼 생활을 했느냐’, ‘어떤 비혼을 영광스럽게 살았느냐’,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비혼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위해 잘 살 수 있었느냐’, ‘결혼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불꽃처럼 살 수 있었느냐.’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점이 비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신에 있는 겁니다. 헌신에. 그래서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혹시 마음으로 ‘내가 이 짧은 인생을 내가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까, 나는 예수께 바쳐졌다. 그리고 동정녀로서 나는 예수께 바쳐졌다.’ 그리고 형제들은 ‘동정으로서 나는 우리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면서 살겠다. 그것이 선교든지 혹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는 것이든지 아니면 그 학원 선교를 위해서 사는 것이든지.’ 난 누구나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비혼을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탁월한 경건 속에서 예수가 전부인 것처럼 살아야 되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결국은 온갖 부패가 파고듭니다.
내 주위에는 기독교인인데 아주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비혼을 택한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성적인 범죄에 빠집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입니까? 인간이니까 그렇게 연약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때문에 비혼을 결정했을 때에는 보통 은혜를 받은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상한 죄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예수께 사로잡혀 살지 않으면 한 번 가슴을 울렸던 비범한 생애적 결단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붙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그분들은 예수가 전부인 사람으로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은혜 받고 특별한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아내로 남편으로 여기면서 친밀한 교제 속에서 날마다 자기의 정욕을 피하면서 살아가야 할 그 무거운 십자가를 또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비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진짜 답답한 사람이 수도사처럼 살아가는데 너무 세속적입니다. 수녀처럼 세상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데 신앙은 없습니다. 그럴 때 아주 불합리한 삶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에서도 만족을 못하고 세상에서도 만족을 못하는 이방인 같은 존재가 됩니다. 예수 믿은 것이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기죽어 사는 여러분들을 보면 딱합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어깨를 피십시오. 어깨만 똑바로 펴고 걸어도 건강에 좋은 물질이 몸에서 쏟아진다고 합니다. 어깨를 딱 피고 모든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자신감 있게 힘을 주어서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그렇게 해도 놀라운 건강 신경 전달 물질이 나와서 여러분들에게 자신감을 촉진하고 건강을 증진시킨다고 합니다. 위풍당당하게 사십시오. 비혼 누구도 여러분들을 약 잡아보거나 결혼했다는 이유로 여러분들을 우습게 보지 않을 수 있도록 주체적인 자존심을 가지고 주체적인 결정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는 사람들이 이기는 사람입니다. 가난하면 좀 어때요? 그게 그렇게 기죽는 일입니까? 기죽을 것 없습니다. 높은 지위에 못 오르면 어때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매일매일 비혼이든지 결혼이든지 선택한 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이 결혼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매일매일 보며 부부가 함께 즐거워하고 혹은 혼자서 즐거워하고 친구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기쁘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독신을 선택했는데 막 음욕이 불붙듯 합니다. 매일 그 정욕을 형제든지 자매든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독신의 은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비혼의 은사가 아닙니다. 그럼 빨리 결혼을 해야 됩니다.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도 결혼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지만 울타리가 되어서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결혼이든 비혼이든 삶의 양상이지 양태이지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룩한 뜻을 이루는 데 자기를 바치면서 사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인생을 다 살고 난 다음에 ‘하나님 참 감사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즐거웠습니다.’ 이 고백을 하면서 주님 앞에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 기억하시죠? 현대 사상이 기초를 놓았던 아주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인류 역사상 철학자들 중 세 사람만 꼽으라 그러면 어김없이 들어가는 두 사람이 확실히 있습니다. 플라톤과 임마누엘 칸트입니다. 나머지는 자기 취향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집어넣든지 토마스 아퀴나스를 집어넣든지 니체를 집어넣든지...자기 마음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철학계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입니다. 이 시간에 저는 칸트를 소개할 의향은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심오한 사상가입니다. 거기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섞여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서는 신앙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하는 것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순수 이성 비판>이라는 책을 쓰고 이것을 통해서 인간이 무엇을 판단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없는지 경계를 명확하게 그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실천이성>을 써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궁구하고, 신을 요청하였습니다. 마지막에 <판단력비판>을 씀으로써 미학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완성하면서 비판 철학을 종결지었습니다.
그 이전의 유럽 역사를 보면, 사물을 판단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본유의 관념을 가지고 그 관념에 기초해서 사물을 판단한다는 합리주의의 계열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계열에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치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영국을 중심하는 경험론에는 ‘모든 것은 연역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귀납을 통해서 아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백색 서판의 상태에서 태어나고 경험을 통해서 선악과 아름다움과 해롭고 유익한 모든 것을 판단한다.’라고 하는 합리론(경험론)이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존 로크, 버클리, 흄으로 대표됩니다. 양쪽이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임마누엘 칸트가 정리합니다. 결국은 선험적인 철학을 비판하고 경험적인 철학을 비판하면서도 일부를 수용해서 결국은 비판적인 제3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학문의 오류를 막고 근대정신의 발전에 기틀을 놓을 수 있는 그런 엄청난 철학을 만들어서 결국 양대의 갈래가 칸트라는 호수 속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물려받은 피테, 셰링, 그리고 니체, 헤겔 같은 사람이 마지막에 이것을 결국 서양 사상의 바다에서 형이상학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비판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제 한쪽으로는 보편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개별과 정신을 비판하면서 물질의 중요성을 강조한 포이엘 바하, 마르크스 같은 사람이 등장하게 되고, 또 우파 쪽에서는 그 보편을 비판하면서 개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하는 것을 강조하는 키에르케고르나 니체 같은 사람이 등장하면서 균열이 일어나면서 현대 사상이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양태와 본질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양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느냐,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고 사느냐 하는 그 본질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나의 삶의 양식이 결혼이냐 비혼이냐 이것은 하나의 양상의 문제이고 양태의 문제입니다. 본질은 그 양태에 달린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삶이냐 그리고 무엇을 바라는 삶인가 무엇을 소망하며 사는 삶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여러분들이 이성적인 분석이나 경험적인 균합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경험을 통해서는 끊임없이 많은 것을 배워도 결국 그것이 종합되어서 여러분에게 어떤 가치관으로 남지 않는 한 끊임없이 우리를 회의주의에 이르게 만들어 버리고 경험이 동반되지 않는 끊임없는 분석을 통해 도달하는 결론을 여러분을 독단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런 진리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 여러분들이 세계를 보는 독특한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연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견해입니다. 그것을 하나로 뭉뚱그려서 우리들이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세계관 속에서 결혼은 무엇이죠? 여러분의 세계관 속에서 비혼은 무엇입니까? 결혼과 비혼은 양상의 문제이지, 결코 그것은 인생의 본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혼한 것이 자랑스러운 것일 수도 없고 비혼으로 있는 것이 영광스러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면 결혼한 것이 영광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며 산다면 비혼이 하나님의 영광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 본질을 채워주는 것은 결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 하는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 결정해줍니까? 우리의 이성과 철학이 결정해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철학사를 꿰뚫고 사물을 보는 관점을 수없이 우리들이 이해하고 섭렵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우리의 삶을 거기에 얹을 수 있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 허무한 사람들이 그 철학사를 뒤적거리면서 정신적인 유희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가엾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만화책 보듯이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작은 진리를 발견해도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얹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지혜롭게 살 수 있는 사람, 확신을 가지고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사람, 오늘 살아있는 이유를 말하라고 말하면 즉시 피를 토하듯이 자기가 살아 있는 생존의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고 자신의 인생을 아주 가치 있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돈 많이 가진 사람들한테 주눅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돈을 위해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쁜 사람들 보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풀잎처럼 사라져가는 것이 인간의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거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사라져버리고 모두 은퇴의 때가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어떤 직업을 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파트 경비를 서고 여러분들이 볼 때에도 참 저런 일들은 인간으로서 참 하기 어려운 3D 업종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아주 높은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생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 지나가면 사회적으로 자신의 필요가 끝나고 자신은 자기가 기대하지 못했던 훨씬 또 낮은 직종에서 일하면서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인간이 높은 지위에 오른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덧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병들었을 때나 건강할 때나 그리고 정신이 온전했을 때나 흔들릴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결혼하여 함께 살 때나 독신으로 살 때나 혹은 결혼하고 한 배우자가 먼저 죽고 홀로 남았을 때조차도 자신이 살아야 할 존재의 이유를 분명히 하고 두 눈에 광채가 나면서 자신의 살아있는 삶의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이유를 가진 자신이 있는 사람이 가장 주체적인 인간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면 될까를 고민하면서 사람들은 합리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사고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경험주의적인 방식으로 사고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니체처럼 ‘아니다. 끝까지 그거를 종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리고 결국은 모든 것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출발점을 가지고 도덕을 세우라’고 극단적으로 얘기하는 사람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의미 있고 주체적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온 인간성을 다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가를 가지고 몸부림치며 투쟁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을 물려받아서 고민 없이 그 지식을 팔아먹으면서 사는 것이 학계라는 것입니다. 별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화려한 지식들이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을 얹어 놓을 수 있는 그러한 절대적인 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면 살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발견하고 죽어야 한다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또렷한 이유를 발견해서 그래서 삶도 죽음도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고 한 인간으로 태어난 자존심에 부응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떠들며 덤벼들어도 “나는 나다”라고 말하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주체성이 없으면 인간은 결국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도 인간이 왜 존엄한 존재인가라고 하는 것을 전통적인 기독교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찾았습니다. 그것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자기 자신을 향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은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필연성에 결코 매이지 않는 자기 결정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거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의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주체적이 아니라 현실에 떠밀려서 살아가고 그렇게 현실에 떠밀려서 결혼이든지 비혼이든지 강물처럼 흘러가고 후회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삶을 보면 그의 존엄성을 어디서 찾아야 될지 칸트 같으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편입니까?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뭘 해도 좋으니 성경이 금한 것을 빼고는 무엇이든지 해도 좋으니 적극적으로 결정하라는 겁니다. 주체적으로. ‘하나님 내가 혼자 살아야 합니까? 그러면 혼자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를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는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주십시오. 그 일을 위해 내 모가지를 드리우고 목이 떨어져 피가 흘러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그런 가치를 나에게 주십시오.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눈물과 땀과 피를 뿌리며 그 일을 위해 살다가 장렬하게 산화하고 주님 앞에 칭찬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멘.’ 이렇게 뭔가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냥 <나 혼자 산다>나 보면서 키득키득그러고 ‘독신도 할 만하네’ <우리 이혼했어요> 보면서 ‘이혼하는 것도 할 만하네’ <우리 결혼했어요> ‘결혼도 할 만하네.’ 그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결혼입니까? 비혼입니까?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결혼이고 무엇을 위한 비혼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양상은 본질을 위해 양상이 있는 것이지, 양상을 위해서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본질이 무엇입니까? 뭘 추구하며 살고 싶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없다면 여러분들은 죽은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가슴을 뛰게 하는 게 없다면 경건한 게 아니라 죽은 사람입니다. 만약에 세상의 정욕이 가슴을 뛰게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거룩한 열정이 가슴을 뛰게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 경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쪽입니까?
나는 정말 가슴이 미어집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안타깝게 설교를 합니까? 오전에 한 설교 아닙니다. 여러분만을 위한 설교입니다. 왜 이렇게 왜 이렇게 안타깝게 설교를 합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보통 제가 평소에 한 편 설교 준비하는 데 6시간 걸리고 최장 길게 걸린 시간이 30시간입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 여섯 편을 설교하고 두 달 동안 건강이 회복이 안 됐습니다.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피를 토하듯이 설교해야 합니까? 왜 미친 듯이 설교합니까? 내 학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할 일 없네요. 뭐가 있다고 자랑을 합니까? 그리고 또 있다고 한들 뭘 그렇게 알리고 싶겠습니까? 여러분 변화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근데 어떤 때는 목석을 놓고 설교하는 것 같습니다. 왜 열정이 없습니까? 자신의 삶을 끌려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삽니까? 자기 인생 아닙니다. 그거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떤 인물의 인생을 사는 것이고, 드라마에 나오는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리고 제 삶의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을 사는 거지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자기의 인생을 향한 사랑이 있고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성이 있습니다. 내가 연출이고 내가 주연이고 그리고 내가 감독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분노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데굴데굴 구르며 주님의 은혜에 호소하기도 하면서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그런 일들을 위해 여러분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뭐래도 너무너무 소중한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학생이 개발새발 그려놓은 그 글씨로 ‘엄마 사랑해요’라고 만든 카네이션 같은 존재입니다. 어떤 생화와도 비교될 수 없습니다.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누구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결혼이고 무엇을 위한 비혼인가 생각하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길을 선택했다’라고 말하십시오. ‘선택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온몸을 쏟아부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결단하십시오.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십시오. 저 같으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해주시든지 끝까지 발견하게 안 해주시려면 내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뭐 좋은 꼴을 보겠다고 여기에 남아 있어요? 뭘 그렇게 좋은 것이 있어요? 가슴이 찢어지도록 그렇게 감격스럽고 행복한 것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런 걸 느껴도 후회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 지난 한 주간 동안에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그냥 물에 젖은 빨래를 입은 것처럼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잖아요. 완전 군장을 한 채 물속에 빠졌다가 나온 군인처럼, 그렇게 힘겹게 군홧발에 물을 질척거리면서 진흙 길을 걸어가듯이,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겨우 그런 삶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나는 억울했어도 그런 젊음은 보낼 수 없습니다. 피를 토하더라도 나는 그런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인생을 종칠 수 없습니다. 그런 하잘것없는 일을 위해서 나는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내 자신이 태어난 것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취하지 마십시오. 가치 없는 일에 취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없어도 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쳐내십시오. 그리고 ‘상관없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꼭 필요한 것은 내가 가져야 되겠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주체성입니다. 자율성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자존감입니다. ‘내가 너무너무 소중한 존재로 여기 있다. 살아있는 매일매일이 하나님한테 받은 선물이다. 우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내가 그렇게 결정할 수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모든 긍휼에 뛰어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 인생을 인도하시고 나의 삶을 붙들어 오시면서 나를 이끌고 계시다’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매일매일이 아주 감격스러워요. 자랑스러워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사실 지구 한 모퉁이라도 내가 깨끗게 하고 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을 만들 수 있으며 살 수 있다는 것 의미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그래서 존재의 울림이 내가 있는 곳에서 널리 널리 울려 퍼지는 그런 삶을 사는 것, 그런 사람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선포입니다.
그래서 저 위에 사람들이 보면서 저렇게 너무 살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에게 돈 많은 사람, 예쁜 사람,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인기 있는 사람에게서 맛볼 수 없는 어떤 아우라를 여러분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나도 저런 아우라를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얘야, 무슨 일로 그렇게 방황하니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거란다. 그렇게 힘들어하지 마라. 이것도 곧 지나갈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때 무엇인가 커다란 울림이 주어지면서 ‘그 사람이 나보다 높은 위치에서 나를 붙들고 있다’라고 하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아우라입니다. 무엇이든지 선택을 하십시오. 삶의 양태와 본질을 구별하여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 안에서 행복함
마지막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젊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뭘 하면 돈을 벌 수 있을지 그런 생각도 필요합니다. 뭘 하면 사회에서 대접을 받고 인기를 누릴 수 있을지 그것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살아가니까 물질도 필요하고 적절한 인정의 욕구 의식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격려도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어야 하니까 필요합니다. 지식도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사람이라는 건 금방 싫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고 소화하고 있느냐에 의해서 매력이 발산됩니다. 그래서 기품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지식 없이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무한한 매력을 발산한다고요? 착하면 되지 않냐고요? 착한 것만큼 지루한 게 없습니다. 그게 눈에 콩깍지가 꼈을 때 착한 게 빛나는 거지, 착한 사람 착한 것만큼...착한 사람은 주변머리가 없는 법입니다. 사람 복장 터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남자를 평가할 때 내세울 곳이 없을 때 ‘그냥 착합니다. 성실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착한 것 이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과 그다음에 그 지식에 언제든지 얹어 올릴 수 있는 삶에 대한 경험이 풍부하게 묻어날 때 그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우리의 정신을 매우 아름답고 맑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부모님이 물려주신 외모를 우리의 인간적인 힘으로 고칠 수 없잖아요. 그거는 그냥 받아들이더라도 정신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으로 성숙해 가야 합니다.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결혼이든 비혼이든지 이거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하지만 내가 지겨워 싫고 죽어도 싫은 결혼을 해야 합니까? 내가 하루라도 계속하고 싶지 않은 비혼을 계속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소명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셔서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어도 하기 싫으면 소명 아닙니다. 그리고 소명은 반드시 재능에 의해서 입증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이 뭔지 아십니까? 아까 말한 ‘돈을 벌어야지, 그래도 지위도 받아야지, 세상에서 인정받아야지’ 어쩌고저쩌고하는 거 다 인정합니다. 어느 정도는 인정합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그것이 여러분들을 완전하게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과감하게 자기 하고 싶은 걸 하십시오.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 그리고 적게 벌어도 내가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못 받아도 가슴 뿌듯해지는 일, 그 일을 하면서 살아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반드시 먹여 살려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선택하면서 살아야 될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때 거기에서 자기의 인생의 존재 가치를 자기가 느끼게 됩니다. 인간이 자존감을 못 느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치감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쳐지는 것 같고 자기 자신의 그 가치감을 못 느낍니다. 그게 자존감 하락의 정치입니다. 자존감을 느끼는 것은 내가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할 수 있고 남이 모르는 일에 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그 일에 내가 헌신하며 살면서 너무 행복한 느낌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소명도 확인해 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며 살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데서 너무 기쁨을 느낍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은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승진한 것보다 더 가슴이 뜁니다. 그거를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그런 게 없다고요?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 삶은 너무 슬픈 삶입니다. 가슴이 뛰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슬픈 삶입니다. 치유책이 뭔지 아십니까? 그렇게 정신적으로 소일하며 사는 것으로부터 멀어지십시오. 용감하게 외로워질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지 자기가 가슴이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생각이 납니다. 스마트폰 멀리하십시오. 음악 정도 듣는 건 괜찮아요. 빠지지 마십시오. 인터넷 빠지지 마십시오. 게임 하면 안 됩니다. 절제한다고요? 안 됩니다. 하지 마십시오. 포르노 절대 손대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을 망쳐버립니다. 그까짓 거 보는 게 무슨 큰 죄겠습니까? 근데 정신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하지 마십시오. 안 됩니다. 은근히 쾌락을 즐기고 그러는 일 그리고 연애도 아니고 무슨 사귀는 것도 아니고 썸 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이성을 만나서 객쩍은 이야기나 하고 돈이나 허비하면서 꽃놀이하듯이 다니는 허무한 일들은 그만두십시오.
용감하게 외로워지십시오. 홀로 있기를 결단하십시오. 얼마만한 외로움까지 내가 견딜 수 있는지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십시오. 그게 여러분들의 정신적인 성숙도입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들은 비로소 자기의 정신 상태가 얼마만큼 이르렀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거기서 여러분들은 자신이 끊임없이 미디어에 빠지고 오락에 빠지고 세상의 맛집, 멋진 풍경 좋은 데 돌아다니면서 사는 것이 정도를 지나치게 될 때 결국 그것은 현실 도피임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좋은 친구들 얼마나 좋습니까? 근데 그것은 마치 여러분들에게 달려가는 육상 선수가 구두끈(끈)을 매는 것 같은 역할만 해야 됩니다. 거기서 육상화를 벗고 퍼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그런데) 계속 달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렇게 해서 거기서 끈을 묶고 새롭게 달릴 수 있는 힘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책을 느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즐겁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너무 바람직한 것입니다. 근데 거기에 몰입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정신적인 힘이 약해져서 혼자 있을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모든 인생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는 홀로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씀을 많이 들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고독한 시간에 말씀이 소화가 되는 것인데 한꺼번에 먹고 하나도 소화시키지 않을 때 그냥 배설로 설사를 해서 그냥 내보냅니다. 영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값진 음식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먹었는데 한 번에 다 물처럼 그날 저녁에 다 쏟아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살이 찌는 게 아니라 수분이 빠져가지고 탈수증에 걸려서 바짝 말라버립니다. 소화해내는 시간이 고독의 시간입니다. 홀로 고요히 있는 고독한 시간. 거기에서 성찰이 나오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나옵니다.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기도할 수 있어요?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말씀을 묵상할 수 있습니까? 외롭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어요? 불가능합니다. 그것부터 연습을 해야 합니다. 밤에 잘 때 핸드폰을 저 높이 얹어 놓고 저녁 시간만이라도 홀로 조용히 아침 시간만이라도 홀로 조용히 고독한 상태에서 ‘나는 행복한가?’ 그리고 ‘나는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속에 녹여내면서 그 삶의 밧줄 위에 자신의 삶을 얹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리가 있어도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할 수 없습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은 육신의 만족을 통해 얻는 행복이 아닙니다. 육신의 만족은 물질을 통해서 얻습니다. 돈 많으면 호의호식할 수 있습니다. 몇십억짜리 하는 차를 타고 다닐 수 있습니다. 임금도 웬만한 대통령도 누려보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호사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하룻저녁에 몇천만 원짜리 포도주를 마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행복이지, 우리의 진정한 정신의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행복은 우리의 정신의 자유와 행복이고 주체성의 회복입니다. 나를 확실히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고독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며”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고독한 시간이 없으니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비혼과 결혼 같은 이 어마어마한 내 인생의 지축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이 엄청난 일들을 위해 거의 기도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빈약한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것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거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더욱이 결혼과 비혼의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누군가가 나에게 왜 살아 있냐’고 물을 때 더듬거리지 않고 “나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위해서 살아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피 묻은 고백이 있습니까? 왜 그런 고백이 안 나오는 것입니까? 왜 떠밀리듯 살아가는 것입니까? 몸은 교회에 있으면서 행복은 세상에서 찾고 정신은 세상에 있고 몸만 교회에 나오는 그런 불협화음의 삶을 살면서 결국은 교회와서는 세상 때문에 불행하고 세상에 가서는 교회 때문에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를 가도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듭니까?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놀라운 자유가 있는데 왜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사십니까? 젊은이다워지십시오. 용기를 가지십시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걸 하십시오. 너무너무 하고 싶은 일, 너무너무 갖고 싶은 것을 위해서 하나님 안에서 사십시오. 큰 꿈을 꾸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는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내가 태어났다. 다른 사람보다 외모에 있어서 못하고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았어도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내가 없는 것보다는 더 아름답기 때문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이 세상에 모든 희귀종 중에 마지막 남은 개체라고 여러분 자신을 자리매김해보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적극적으로 삶의 이유를 찾으십시오. ‘하나님 저도 불꽃처럼 살고 싶습니다. 심장을 토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내 심장을 뜯어내어서 마지막으로 내 소원을 하얀 벽에다가 쓰고 싶을 정도의 소원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나에게 주십시오. 꿈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이 긴 세월을 사느니 불꽃처럼 인생을 살아서 피를 토하듯이 토혈의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자신도 행복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나에게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존귀한 사람으로 인정받으며 살게 해주십시오. 가난하든 부하든 당신의 손에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생긴(만드신) 대로 살겠습니다. 당신이 주신 재능을 묵히는 일은 없게 도와주시옵소서. 내가 주님의 열정을 가슴에 품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티끌만 한 도움이라도 끼치면서 사는 존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때문에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형제와 같이 그렇게 살게 해주시든지 자매와 함께 그렇게 살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친구와 함께 살게 해주시든지 어떤 삶의 양상이든지 상관없으니 하나님 나에게 주신 은사를 확인시켜주시옵소서. 내가 불꽃처럼 살고 싶습니다. 아멘.’ 그리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결혼을 해서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요양원에서 살다가 결국 치매에 걸려서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어간다고 하더라도 나는 예수의 품 안에서 눈을 감고 싶습니다. 비혼으로 살아서 혼자 살다가 결국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 내가 홀로 조용히 내 방에서 눈을 감아도 사람들은 나를 다 떠나 있어도 예수님은 나를 당신의 품에 안을 것이니 내가 당신의 품에서 중생으로 눈을 뜬 것처럼 또한 죽음으로써 영화롭게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저를 그렇게 만들어 주신, 저의 운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나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든지 주님만 내 곁에 계시면 저는 아무 인생이라도 괜찮습니다. 내가 주님 앞에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칸트가 마지막에 나이 많아서 죽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이 긴 연세를 살았습니다. 마지막에 남긴 유언이 뭔지 아십니까? ‘에스 이스트 구트’ ‘참 좋았다. 참 좋구나.’ 그리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묘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내 마음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내 마음에 빛나는 도덕률.’ 우리와는 사뭇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 사람조차도 인간의 사는 이치를 터득했다고 믿을 때 마지막에 눈을 감으며 ‘에스 이스트 구트’ ‘참 좋다’라고 말하며 죽었다면 신앙의 참된 도리를 알고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의 호흡을 느끼며 매일매일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날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칼빈의 아내 이들레뜨의 죽음을 두고 묘사했던 것처럼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주님의 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 하나님의 품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의 이 젊음의 기회를 추호도 낭비하지 아니하고 가치 없는 일을 위해 허비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불꽃처럼 살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부부, 서로 괴롭게 하지 말라-장년편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오늘 말씀은 <부부, 서로 괴롭게 하지 말라>입니다. 은퇴한 후에 부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남편과 아내 모두 다 필요한 것 1순위는 건강이었습니다. 의견의 일치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을 때 남편들은 아내 혹은 배우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비해서 아내들은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이제 뭔가 어긋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젊은 날 아내는 너무나 남편이 필요했습니다. 배우자가 필요했습니다. 남편은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위해서 애쓰고 힘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남자는 아내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아내는 남편보다 더 필요한 것은 돈이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늙어서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결코 젊어서의 헌신이 없이는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수 박기영이 노래한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노부부가 되어서 아이들 대학 입시 때, 그리고 아이들이 결혼할 때를 회상하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사랑하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함께 격려하고 눈물 흘리는 관계는 젊어서 헌신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루어질 수가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여자는 너무 일찍 눈을 뜨고 일찍 포기하는 반면 남자는 너무 늦게 눈을 뜨고 너무나 늦게 후회를 하기 때문에 비극의 쌍곡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부부 관계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만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II. 서로 괴롭게 하지 말라
그것은 <서로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적극적으로는 서로를 열심히 사랑해야지만 노년이 되어서도 서로를 고맙게 여기며 좋은 관계를 가지고 일생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소극적으로는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가 깊으면 그 위에 사랑이 함께 부어져도 그것은 마치 달콤한 케이크 위에 쓸개의 즙을 뿌린 것처럼 소용이 없게 되어 버릴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과 함께 가능한 한 서로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노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일평생 사는 비결임을 기억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서로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를 깊이 존중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괴롭게 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인격적인 배려가 없이 제멋대로 살아감으로써 배우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결점과 허물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상대방이 주관적으로 배우자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괴롭게 하는 것이다, 이 뜻입니다. ‘괴롭게 하다’의 그리스어는 ‘소나무'라는 명사에서 유래한 동사입니다. 왜 '소나무'라는 명사에서 이 동사가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진이나 이런 것을 한번 혀끝에 대보면 엄청나게 떫고 아주 쓰디쓴 맛이 납니다. 그런 데서 ‘소나무’라는 말과 ‘괴롭게 하다’라는 명사, 동사가 서로 같은 뿌리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 것입니다. 결국 부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는 헌신의 씨를 뿌리지 않고는 사랑의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비극은 헌신의 씨앗은 뿌리려고 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열매만을 거두려고 할 때 그때 아주 추한 이기심이 드러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 속에 많은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A. 괴롭게 하지 말라
결국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은 남편이 아내를,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인격적인 무시와 억압을 일삼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젊어서 남편은 모든 면에서 능력이 있습니다. 안 그런 집안도 있지만 대부분은 돈도 남편이 벌어 와서 생활을 하고, 사회 활동도 남편이 훨씬 더 많이 합니다. 시계를 한 이십 년 전으로 거꾸로 돌리면 가정에서 생활하는 것을 가사 노동이라고 여기고, 그것이 가족을 위한 매우 중요한 기여라고 경제적으로 평가해 주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돈을 벌어오는 사람, 아내는 그 돈을 쓰면서 사는 사람, 남편은 일하는 사람, 아내는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가정이 자꾸 깨뜨려지고 아이들의 교육이 제대로 안 되다 보니까 아내가 가정을 지키며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가사 노동이 정당한 노동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시계를 한 20년 뒤로 돌려보면 남편은 근거도 없는 우월한 지위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여기며 배려 없는 은사로 끊임없이 아내를 괴롭히고, 무시하고, 비인격적으로 대하면서, 쓰디쓴 맛을 아내에게 남겨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괴롭게 하면서 사니까 결국 그것이 마지막에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의 노년기에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고 사회적인 지위를 가졌어도 우리나라에는 정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년이 아니더라도 몸이 더 이상 일을 허락하지 않아서 그만두어야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만두고 나면 비로소 남편은 깨닫습니다. 자기가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은퇴하자마자 한 달 안에 평소 오던 전화의 90%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열 사람 전화 오던 게 한 사람밖에 안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가족까지 희생하면서까지 살아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지 그 집단에서 떨어져 나오고 나니까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가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은퇴하고 시간이 있으니까 열심히 집안일도 거들고, 청소도 하고, 시켜도 안 하던 쓰레기도 갖다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뭔가 아내와 가족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 마음이 되어 있고, 또 어느 정도는 과거에 대해서 반성하는 마음도 생겨났습니다. 미안한 마음을 표하며 아내와 함께 있기 시작하는데 이미 아내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남편이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매우 귀찮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따라나서는 남편이 너무 귀찮은 것입니다. 그때 과거에 쓰디쓴 상처가 생각나면서 남편에게 그것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퇴를 하고 나니까 시간도 나고 아이들하고 사이좋게 살고 싶습니다.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2층에 아이들이 있길래 올라가면 아이들은 슬그머니 1층에 내려오고, 1층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가면 조용히 자기 방에 갑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면 탈칵 잠그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도 문을 두드리면 아이들은 외출복을 입고 묵묵히 바깥으로 나갑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 자신이 한없이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런 종류의 외로움을 아내는 젊은 시절에 많이 겪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동안에 젊었을 때는 돈을 자신이 쥐고 흔들면서 아내를 지배했지만, 나이가 들면 결국 벌어다 준 돈을 관리하는 거는 아내고 남편에게는 실권이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경제적으로도 아내는 남편을 의지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고, 이혼의 위기까지 몇 번 겪었던 아내들은 면밀 주도하게 가정이 쪼개질 것을 준비해서 자기 몫을 다 챙기고 준비가 끝났습니다. 언제든지 헤어질 준비가 끝났고 이혼의 충격도 별로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남편은 아내와 계속 있고 싶은데 아내는 매일매일 곰국만 끓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곰국 한 번 끓이면 그 다음에 어디론가 가서 며칠씩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결국 남편은 아주 쓸쓸한 노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것입니까? 젊어서는 그렇게 아내를 외롭게 하고 힘들게 하더니 그다음에 늙어서는 또 아내가 남편을 그렇게 괴롭히고, 외롭게 하고, 쓸쓸하게 여기고, 소외감을 느끼게 만들고 살면서 늙으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서로를 끊임없이 비인격적인 무시와 억압을 일삼으면서 상대방을 존중해주지 않았고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의 관계라는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데서 판별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사회적인 성공은 잠시 봄날에 내려서 쌓인 눈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봄은 오고 따뜻한 햇볕이 비치면 모두 녹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박수 치고, 갈채를 보내고, 찬사를 보내도, 현직에 있을 동안이지 사라지고 은퇴하고 나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인생을 세상적인 지위와 돈을 벌어 놓은 것에서 어떤 영광을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성공 여부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주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하는 것은 가족의 얼굴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족이 여러분의 거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온 것은 여러분이 거울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아내의 얼굴에 외로움과 소외감, 쓸쓸함, 미움과 그리고 남편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가득 쌓여 있어서 인생을 우울하게 살면서 사랑의 열매를 추수하지 못하고 있는 가난한 정신을 가진 아내를 보면 여러분이 그런 정도의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의 얼굴을 보면서 그 남편이 행복하지 않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외롭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일생을 살아온 모습입니다. 두 부부가 나란히 서서 아이들을 거울로 놓고 보십시오. 그 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를 불편해하고, 부모와의 관계를 지겨워하고, 어떡하든지 결혼을 해서 가정으로부터 탈출하고, 탈출한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 것을 꿈꾸게 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많은 영광, 그리고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미모, 그까짓 게 몇 년이나 갑니까? 그리고 누가 그런 걸 관심이나 가져줍니까? 멋있음, 예쁨, 이런 것들의 유효 기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짧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괴롭히면 결국 마지막에 아내도 남편을 괴롭히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제도를 주셨을 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과는 완전 반대의 가정생활을 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지난날 우리의 무지와 부족함으로 잘 몰라서 우리가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남편을 괴롭혀서 고통을 주었다면 지금쯤 그 고리를 끊어야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은 인생이니 미워하면서 살기에는 얼마나 짧은 인생이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그렇게 해서 남편도 자식들도, 아내와 자식들도, 아끼는 사람 없이 쓸쓸히 죽어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일생이 마지막에 많은 사람에게 무슨 감명을 주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성도의 죽음일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사랑의 삶을 살도록 애덕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애(信愛)의 삶, 믿음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 마지막 열매를 보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잘 하였구나,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판단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을 통해서 감동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았던 성도의 아름다운 영혼은 나다나엘 호돈의 에 나오는 인물과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을 향해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 그것이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말합니다. 젊은 날에 아내를 괴롭게 한 사람들은 오늘 후회하십시오. 그리고 아내에게 헌신하지 못했던 것을 뉘우치십시오. 그리고 나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로 인해서 복수를 하듯이 저무는 인생의 날에 남편을 외롭게 하고, 소외시키고, 그를 서럽게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당신 자신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십 대는 쌓인 것이 많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십 대는 지금 현대적인 사고와는 다른 시대에서 젊음을 보냈으니까 서러운 것이 많은 시대일 것입니다. 특히 아내들 말입니다. 오십 대 아줌마들이 주고받는 문자 메시지들이 SNS에 올라와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남편 세일즈 시리즈입니다. ‘남편을 팝니다.’ ‘연봉은 6천만 원이고 기름 값은...’, 여기서 이거는 술값입니다. ‘2천만 원쯤 들어갑니다.’ ‘아직 수리비...’, 이건 병원비입니다. ‘아직 수리비는 별로 들어가지 않고, 비교적 상태가 괜찮습니다.’ ‘싸게 드립니다.’ ‘남편을 구매하시는 분에게는 사은품으로 시어머니를 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문자 메시지가 오고 가고 장난하는 거를 보면서 너무 슬펐습니다. 뭐냐 하면, 오십이 다 됐으면 이제 곧 시어머니가 됩니다. 그럼 며느리가 자기를 사은품으로 내놓으면 좋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중고 매물로 내놓으면 좋겠습니까? (20년 후에) 왜 그렇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을 못합니까? 그런데 그것도 한편으로 보면 젊은 날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고 힘들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내는 아이들하고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일단 태어나면 한 살 때는 생리적인 필요에 의해서 엄마가 젖을 주니까 엄마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돌쯤 지나고 나면 아빠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관계에 집착을 하게 됩니다. 어디를 가면 “엄마 어디 가?”, “아빠 나도 데리고 가.” 아빠가 출근만 해도 막 울면서 아빠 따라간다고 떼를 씁니다. 그게 얼마쯤 될 것 같습니까? 그게 두 살부터 빠르면 아홉 살, 열 살, 그리고 좀 더 오래 간다고 치면 한 열두 살 정도까지밖에 안 갑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4, 5학년 때 사춘기 오게 되면 엄마 아빠가 뭣도 사주고, 뭣도 태워줄 테니까 우리 같이 가자고 하면 “다녀오세요. 제가 집 볼게요.”그럽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럽니다. 그 다음에는 엄마 아빠가 가까이 다가가도 같이 있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불과 몇 년입니다. 그때 사회적인 필요를 아빠가 잘 채워주면 애들이 자라서도 아빠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애들이 시집가고 장가간 다음에 엄마 아빠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엄마 아빠가 특히 아빠가 헌신을 많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싫습니다. 그리고 유산이나 좀 있으면 만나고 싶어 할지 모르지만, 유산은 받아도 아이들의 마음은 안 좋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어린 시절에 너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 부모와 함께 살아가는 기쁨, 부모가 자기에게 헌신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의 열매를 거둘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똑같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내의 마음이 흩어져 있습니다. 세상 모든 남자가 다 자기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한 남자에게 딱 정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한 남자에게 온전히 집중합니다. 남자는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러면 결혼하기 전까지는 놀랍게 집중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이제 안심을 합니다. 그리고 관심이 바깥으로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일, 성공, 성취, 세상에서의 지위, 이런 것들로 향하여 뻗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돈을 버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아내는 간절히 남편과 있고 싶어 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관계를 갈망합니다. 그런데 항상 그러는 게 아니라 짧으면 2, 3년, 길어야 5, 6년, 아주 길어야 7, 8년 되고, 더 이상 남편이 자신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남편에 대한 관계를 마음속으로 절반쯤 접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 주위에는 결혼한 지 20년이 됐는데도 남편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보면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출렁거린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매우 희귀한 예입니다. 다큐멘터리에나 소개될 이야기고, 실제로는 그런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대로 남편은 되돌려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필요할 때 좀 있어주고, 가엽게 여기고, 관계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일과 가정의 조화를 이루면서 아내에게 정말 소중한 남편이라는 것을 잘 심어주면서 살지 않았을 때 결국 마지막에는 더 이상 남편이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 후에 남편이 은퇴하고 나서 아내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어디도 가고 싶고, 같이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싶고 신혼부부처럼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게 훈련이 안 됐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귀찮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되돌려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완강하게 그런 남편의 태도에 적응하지 않으려고 할 때, 그때 결국 젊었을 때 자기가 받았던 소외된 감정, 남편이 자기를 소외시키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남편에게 복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리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남자는 젊어서는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옵니다. 탈모도 거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고 여성 호르몬이 늘어납니다. 탈모도 생기고 그렇게 사기충천하고 열렬하던 사람이 갑자기 아주 겸손해지고 기운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 의존적이 됩니다. 반대로 아내는 나이가 들수록 여성 호르몬은 줄어듭니다. 그래서 목소리도 걸걸해지고 무엇이든지 한 팔에 잡고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해서도 말도 굉장히 격하게 하고 젊었을 때 쌓였던 상처가 늘어난 남성 호르몬이 융합을 하면서 때로는 폭력적이 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젊은 날에 받았던 아내의 상처와 똑같은 방식으로 남편이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의 자살률을 보면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고독사, 목매어 죽고, 음독자살하는 고독사의 선택이 남성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늘 남성의 편을 들고 여성의 편을 드는 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뭐냐 하면, 제3의 길은 없는가? 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모두 해봤던, 우리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는 그런 실패를 반복하며 그렇게 일반적인 인생을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작년에 이혼한 사람의 평균 연령이 오십 세입니다. 딱 오십 세가 결국 부부 관계를 끝내는 평균 연령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시사해주는 게 무엇입니까? 젊었을 때는 희망을 가지며 살고, 혹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오십 대 딱 됐으면 아이들이 철들어서 중학교, 고등학교, 빠르면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서른 살에만 결혼했어도 아이들이 이십 세고, 그리고 스물다섯 살쯤 결혼했으면 아이들이 결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이들에 대한 부담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억눌려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더욱더 직장에서도 쫓겨나고 아내를 의존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관계의 기쁨을 찾기 위해서 아내의 가슴을 파고드는데, 아내의 가슴 속에는 가시나무 숲이 가득합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상처만 많이 생길 뿐이지 안식할 쉴 곳이 그 아내의 마음에는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느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젊은 남성분들에게 나는 오늘 이야기합니다. 뭐냐 하면, 젊어서 헌신의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사랑 관계의 열매를 노년에 거둘 수 없습니다. 지금 잘하십시오. 있을 때 잘하십시오. 능력이 있을 때 잘하십시오. 아내에게 관계의 기쁨을 주십시오. 그리고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표현하십시오. 가정에 헌신하십시오. 아이들과 일평생 좋은 관계를 갖고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결혼해도 아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아빠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 하고, 여행을 가자고 조르고, 손주 손녀들과 함께 다니는 꿈을 꾸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지금부터 시작하셔야 됩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아이들을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따뜻하게 사랑으로 대하고 함께 있어 주십시오. 제가 그렇게 못한 사람으로 여러분에게 충고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우러나온 경험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성경의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헌신의 씨앗을 뿌리십시오. 그래야 사랑의 열매를 거두게 되고 관계의 열매를 추수할 때 여러분 인생의 노년에 외로움이 없습니다. 가족들에게 에워싸여서 웃고, 사랑하고, 존경받으며 사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여러분, 쏟으십시오. 그리고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이들과의 관계, 아내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남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이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남편도 참 가엾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직업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계약 관계로 생각하고, 이직도 자유롭고, 직업도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었지만 직업 선택의 기회도 훨씬 폭넓어졌습니다. 예전에는 한 직장을 다니면 2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회사를 사랑한 사람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니 가족과 시간을 함께 갖고, 정해진 시간에 상사들 눈치 안 보고 땡하고 퇴근을 해서 가족들과 함께 어울려주고, 휴일은 일체 근무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있어 주는 것은 현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상당히 어느 정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으면 그 사회의 직장 문화가 그렇게 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거를 가엾은 눈초리로 아내들이 한번 이해를 해보면 굉장히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였고 지금은 포스텍에 석좌 교수로 있는 송호근 교수가 어느 날 퇴근을 했습니다. 한잔 걸치고 택시를 탔는데 우연히 택시 기사하고 말을 트게 되었습니다. 택시 기사도 옛날에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택시 운전을 합니다. 50대 중반쯤 됐는데 자기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인생을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이리 치이며 저리 치이며 외롭게 사는지 호소했습니다. 이 교수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하루 일하면 얼마나 법니까?” "10만 원도 벌고, 아주 잘해야 20만 원 법니다." "그럼 내가 오늘 저녁에 20만 원이나, 30만 원을 줄 테니까 사람 태우지 말고 나하고 드라이브 하면서 인생 얘기나 합시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엮어서 책을 썼습니다. 몇 십만 부 팔렸습니다.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아이들은 소리 내면서 울고, 아내는 때로 악을 쓰면서 울어도, 남편은 소리를 내서 울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게 오십 대의 위로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뭐든지 감당해야 할 짐을 지고, 심지어는 형제들까지도 아버지가 부탁하면서 죽습니다. 유산은 쥐뿔도 남겨주지 않고 동생들을 잘 돌보아 주라며 죽으면, 그때 남자들은 동생들에 대해서 여동생들에 대해서 안 그런 사람도 있지만 무한 책임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였습니다.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된다는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퇴근하고 돌아와서 자기는 하루 종일 애들하고 씨름하고 애를 썼는데 남편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들어와서 "밥 줘."하고 밥 먹고는 들어가서 문을 쾅 닫고 컴퓨터를 켠다고 아내는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만,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김 부장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좀 그만둬 줬으면 좋겠어.” “새로운 적합한 사람을 찾았거든.” “순순히 떠나가 주는 게 좋을 거야.” “다른 직장을 알아보게.” “두 달 치 월급 줄게.” 그러면서 일을 한 보따리 줬습니다. 내가 퇴사하면 이 가정은 어떻게 할 것이냐 고민을 하면서 할 수 없이 컴퓨터를 켜고 일을 해야 되는 처지에 놓여 있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 일반적인 남자들은 집안에 와서 직장에 있는 일들을 시시콜콜 말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외롭고 힘든 경쟁의 시대를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 서러움을 아내들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까? 아내가 자기의 외로움과 힘든 것을 남편이 몰라주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남편에게는 남편 나름대로의 괴로움과 시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누구도 사랑이 없으면 남을 가엽다고 여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서로 사람에게 긍휼히 여기는 감정이 없기 때문에 집요하게 괴롭히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그런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원수도 사랑하고 용서해야 되는데 아내와 남편이 살면서 젊은 날에 없었던 힘이 노년의 여자에게 생기고, 재력도 갖게 되고, 주권도 더 많이 생겼다고 해서, 남편에게 복수하면서 남편을 괴롭히며, 마지막에 죽음을 꿈꿀 정도로 고독하게 만드는 그런 인생을 살고 주님 앞에 가서 어떻게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다투는 여자와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는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5:24) 지혜자의 이 고백은 그냥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체험적인 간증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봤고, 그런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기 때문에 한 것이었습니다. 위로가 되는 아내, 샘물과 같은 아내, 샘솟듯이 솟아나는 기쁨을 주는 아내, 그런 아내를 원했던 것입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얘기는 이것입니다.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 지난날에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은 아내를 무지해서 혹은 사랑이 부족해서 괴롭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 그리고 젊은 날에는 상처받고 외로워서 남편을 사랑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른 태도를 가지고 남편을 대하라.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서 자녀들이 그 부모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면서 어떻게 미래의 남편과 아내를 만나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되는지 그거를 배우게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 때 주님 앞에 칭찬받는 한 사람의 인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오늘도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괴롭게 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B. 자기를 완성하라
두 번째는 <자기를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 보면 많은 사람이 결혼을 후회합니다. 말은 안 하지만 실제 조사해 보면 아마 많을 것입니다. 많을 것이고, 아마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은 분들에게 제가 말씀드리는 건 뭐냐 하면, 선택할 때 신중하게 선택하십시오. 가전제품은 십 년을 좌우하는데, 배우자 선택은 평생을 좌우합니다. 그러니까 선택할 때 신중하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이게 실천하기가 힘듭니다.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은 장점과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결혼할 인연이 되면 단점에 대해서 눈이 감기는 것입니다. 그거를 콩 꺼풀이 씌운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그 콩꺼풀 효과 때문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허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사람만 재다가 결국 비혼으로 인생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결혼하신 분들은 언젠가 콩 꺼풀이 씌워서 남편과 아내의 단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잘못 거래를 한 것처럼 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마십시오. 한 번 샀으면 물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수불퇴입니다. 한 번 남편과 아내를 받아들였으면 장점만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인간성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가끔 얘기합니다. 우리 아내는 이런 게 부족하다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냐고, 다른 사람은 안 그러는데 왜 그러냐고, (얘기합니다.) 아내가 그것까지 완전했으면 왜 자기 같은 사람한테 시집을 왔겠습니까? 더 좋은 데로 갔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는 좋은데 뭐는 나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까지 완전했으면 결혼이라는 시장에서 그 남편은 자기 차례에 오지 않았습니다. 더 예쁘고, 더 성격 좋고, 더 집안 좋은 사람에게 장가를 갔을 것입니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시는데,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게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남편과 아내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은 운명으로 여겨야 됩니다. 결혼하고 나서 많은 사람이 겪는 어려움 중에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본가에 가면 끊임없이 본가의 식구들이 여동생을 비롯해서, 누나를 비롯해서, 어머니 심지어 아버지까지 자기 아내 흉을 보는 것입니다. 걔는 이런 게 좀 부족하더라, 이런 게 못 되더라, 어떻게 그렇게 배워먹지 못 했냐, 걔는 왜 이렇게 인사성이 없냐, 걔는 왜 그렇게 좀 예의가 없냐, 그러고 막 욕을 합니다. 그때 거기에 절대 동조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데리고 살 사람 아니고 내가 데리고 살 사람이니까 빠지시오." 그렇게 얘기하십시오. 그리고 얘기하십시오. “다 안다, 내 아내의 단점을 내가 다 안다." “천천히 고치고 살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오." 그렇게 얘기를 하고 가정을 지킬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안 고쳐져도 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얘기하십시오. “그거 내가 다 안다." “그리고 나도 아내가 그렇게 바뀌기를 원한다." “근데 아내가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여기밖에 안 된다." “근데 지금 내가 그걸 당장 바꾸라고 아내를 막 윽박지르면 이혼해야 된다." 딱 잘라서 이야기하십시오. 그리고 제발 참견하지 말라고 그러십시오. 그리고 계속 참견하면 본가에 가지 마십시오. 하등의 도움이 안 됩니다.
충격 안 받으십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친정에 갔는데 자기 남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김 서방은 뭐도 사람이 안 됐고, 뭐도 들 됐고, 예의도 없고, 뭐도 없고, 뭐도 없고, 그럽니다. 얘기하십시오. “됐어요. 당신들이 데리고 살 사람 아니니까, 이제 그만 좀 해라." “내가 알아서 고치고 살 테니까 신경 묶어 놔라."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염장 지르는 이야기를 하면 가지 마십시오. 한참 동안 가지 마십시오. 됐다고, 내 가정 내가 지킬 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시오).
한 번에 고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안 고쳐집니다. 절대 살아온 관성이 있기 때문에 한 번에 안 고쳐집니다. 그리고 협박을 해서 고친다고 치겠습니다. 그게 진짜 고쳐진 것입니까? 고쳐진 게 아닙니다. 더 큰 상처를 남기는 것입니다.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편이 여러분을 젊은 시절에 교정하려고 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상처받은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남편들에게 얘기합니다. 살아보니까 어떻습니까? 아내가 정말 정리를 안 합니다. 그러면 얘기를 하십시오. “여보, 나 정말 정신이 산란해서 살 수가 없어.” 그리면 아내는 노력을 합니다. 정 안 되면 정리하는 거 가르쳐주는 학교도 있습니다. 가서 2개월만 수강하면 인생이 바뀝니다. 그런데 아내가 끝까지 안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억압으로 느끼면서 안 합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지저분한 집안에서 일평생을 사는 게 내 운명이구나, 이렇게 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웃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걸 빨리 받아들이고, 아내 대신 기쁨으로 아내가 이런 걸 못하니까 내가 치우면서 사는 데서 나는 보람을 느낀다고 살면 제일 좋고, 그게 힘들면 그냥 ‘지저분해서 살도록 적응하게 해 주시옵소서, 비위생적이어도 괜찮사옵나이다.’ 하고 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남편을 윽박지릅니다. “돈 좀 벌어 와. 당신은 도대체 왜 이렇게 능력이 없어." “맨날 하는 것마다 뒷북이야. 그리고 주식 투자는 도대체 왜 하는 거야, 돈도 못 벌면서. 그리고 맨날 뒷북이나 쳐가지고 다 날려버리고." “당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한 번 동네 사람들 봐. 당신처럼 능력이 없는 사람 어딨어?" 한두 번 잔소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 네 번 해도 안 되는 것은 그 남자가 미안하지만 여러분의 남편이 세계적인 능력이 거기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을 계속 요구하는 것은 마치 여러분 보고, 집에서 빨래만 하던 사람들 보고 김연아처럼 스케이트를 타라는 거고, 손연재처럼 리듬 체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남편 능력이 거기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런 남자를 찾아나서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지금 있는 남편을 부족한 대로 데리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버리고 가면 그런 남자가 어디 기다리고 있습니까? 다 시절 지난 얘기지, 데리고 살아야 됩니다. 인정해야 됩니다.(빨리) '내 남편은 능력이 없다.' '그리고 돈 못 번다.' 빨리 접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기대를 꺾고 자신이 벌든지 적게 벌어오는 걸 가지고 능력에 맞춰서 살든지, 그렇게 살고 남편의 단점에 의해서 상처를 안 받으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능력이 안 되는데, 돈 벌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데, 그게 아쉬우면 처음에 조사를 좀 잘 해보고 고르지 왜 덥석 골랐습니까? 그걸 빨리 인정하고 우리 남편은 거기 안 된다, 그리고 이제 될 수 있는 것에 기대하면서 살자, 그렇게 하고 사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아멘. 현실적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고 살아야 됩니다.
어느 날 소파에 앉았는데 아내 핸드폰이 울리는 것입니다. "띠리링" 그래서 우연히 핸드폰 뚜껑을 탁 열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자기가 활짝 웃는 사진이 핸드폰 지갑 왼편에 여권 사진만 한 게 하나 딱 꽂혀 있는 것입니다. '어, 이 여자 봐라.' '맨날 나보고 젊은 날 상처 줬다고 막 그러더니 여기에 내 사진을 꽂고 다니네.' "여보 전화 왔어." 전화를 받고 끊었습니다. “여보, 당신 내 사진 갖고 다녀?” “그럼.” “언제부터?” “한 10년 됐어.” “무슨 계기가 있었어?” “너무 어려운 일이 있고 나서 당신 사진을 갖고 다니게 되었어.” 이해가 안 갔습니다. “그거 왜 그래? 나 자주 봐?” “그럼,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을 열 때마다 당신 사진을 보지.” 남편이 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보, 내 사진 보니까 어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난 핸드폰을 열어서 당신 사진을 봐. 그리고 나는 말해. 나 스스로에게 스스로 격려해. 이 인간도 데리고 살았는데 내가 뭘 못하랴. 이 어려운 일도 내가 감당하고 살았는데 뭘 못하랴. 그래서 당신 사진을 보면 힘이 불끈 솟아.”
호세아서에 보면 호세아에게 충격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호세아는 경건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를 가라” 고멜은 호세야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온 나라의 아주 유명한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장가를 가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경건한 선지자, 거룩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본을 보여야 할 선지자가 하필이면 그 이름 난 창녀에게 장가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극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다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선지자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학자들이 아는 바로는 그냥 일반적인 창녀가 아니라 바울의 신전에서 제의(祭儀)의 한 과정으로서 몸을 파는 종교적인 창녀였습니다. 결국 얼굴을 보고, 선을 보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그다음에 일어났습니다. 호세아가 그 음란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극인 것입니다. 의무감만으로 결혼했으면 남 보듯이 하면서 사는데, 그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수시로 집을 나갑니다. 기본적으로 이 여자는 하여튼 음탕하기 때문에, 남자 맛을 이미 봤기 때문에, 한 남자에게 정착할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수많은 남자로부터 서로 다른 성적인 쾌락을 매일매일 맛봐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여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가서 알지도 못하는 남자하고 동거를 하면서 결국 애를 낳아가지고 오갈 데가 없게 되면 연락이 옵니다. 그럼 찾아서 결국 데리고 와서 그 아이의 이름을 붙여주고 그 아이를 길러줍니다. 집안에 묶어둘 만하면 또 바람이 나서 이 여자가 나가서 또 알지 못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가지고 돌아오고. 이 일이 계속 반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럴수록 호세아의 마음속에 사랑은 점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게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절절하게 사랑하니까 아내를 향한 죄는 밉지만 이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는 감정이 가슴 속에 가득한 것입니다. 이 피나는 형극의 과정을 통해서 호세아 선지자는 결국 이방신을 섬기며 끊임없이 영적인 간음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가슴 절절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자기의 눈물과 피를 섞어서 토할 수 있는 선지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이 사람만큼 이렇게 절절하게 피를 토하는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했던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최고의 선지자입니다. 복음에 대한 엄청난 계시를 이 호세아서가 담고 있습니다. '호세아'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이 똑같은 뜻입니다. ‘구원, 구원하다,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일생을 산 것입니다. 결국 호세아 선지자는 그렇게 음란한 여자를 만났지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를 사랑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창녀와 함께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 가려고 몸부림침으로써 결국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더욱 절절히 알게 되었고, 온전한 선지자가 되어 갈 수 있었고,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사랑을 받는 것은 인간성이 완성되는 일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어린 시절의 자녀들을 사랑해 주십시오. 그 자녀들이 사랑받지 못하면 온전한 인간성을 갖출 수가 없습니다. 마치 화분에 물을 주지 않고 적절한 햇빛을 쬐게 해주지 않으면 죽지 않을지라도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라날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의 자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는 자신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함으로써 함께 완성되는 것이지 사랑을 받음으로써만 인간성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완성해 가시기 위해서 불완전한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그걸 통해서 불완전한 교회를 만나게 하심으로써 당신을 향한 신자의 사랑이 진실한지를 시험하십니다. 그 사랑이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교회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상처를 주고 교회를 배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의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동참하면서 자신이 더욱더 사랑하고 인내하여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는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누리며 완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쉽습니다. 어차피 추상명사이기 때문에 흔적이 안 남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실제적으로 자신의 희생과 헌신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없는 사람이 박수를 치고 여러분을 칭송하는 것은 조금만 보여주면 받을 수 있는 찬사입니다. 그러나 24시간 함께 생활하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인정해 주는 것은 진실이 없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결국 이렇게 자기를 끊임없이 완성해 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불완전한 남편이 불완전한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불완전한 아내가 불완전한 남편을 견디면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면 결코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어떻게 자기를 내어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일이 힘들 때마다 어떻게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야 되는지를 배우면서 예수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고, 하나님 때문에 남편을 사랑하는 관계가 될 때, 그때 우리는 신앙으로 관계를 극복하면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완전한 방식으로 주어지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모여서 자기 남편을 자랑하면 끝이 없이 남편을 자랑하게 되고, 한 사람이 남편한테 상처받은 이야기를 하면 울음바다가 되면서 자기 자신이 가장 더 비참한 결혼 생활을 했다고 서로 경쟁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생사는 결국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관측하는 마지막 결론이 아주 심하게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될지 한번 보십시오. 긍정적인 면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면을 보면서 비관적인 인생을 살면서 돌이켜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는 과거의 결혼에 대한 후회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바꿔놓을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기고 견뎌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자신은 얼마나 완성됐습니까? 아내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얼굴이 바로 여러분이 얼마나 완성됐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얼굴을 보십시오. 여러 사람 눈앞에 비친 그것이 여러분의 모습이 아니라 남편의 얼굴에 비친 그 모습이 그것입니다. 남편이 그 나이에 외롭고, 소외되었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낌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남편을 그렇게 한 사람입니다. 아내가 그런 감정을 느껴도 남편은 똑같이 그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울처럼 마주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모자라는 인간인가를 깨달으며 살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긍휼이라는 감정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엄마가 엄청 열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요새 개차반입니다. 공부도 안 하고, 게임만 하고, 하여튼 못된 짓하고, 학폭위에 몇 번씩이나 불려가서 전학을 갈 처지가 되고, 너무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날도 하여튼 아들하고 한판 했습니다. "이 자식이 말이야." 하면서 가방을 확 뺏었는데 포르노 잡지가 툭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뭐야 도대체?” 그리고 가방을 뒤지니까 담배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 미친 녀석이.” 그리고 등짝을 후려갈겼습니다. “에이씨, 그지 같은 집구석." 그러면서 가방을 확 집어들더니 "내가 들어오나 봐라." 그리고 화가 나서 모자까지 집어던지고 막 뛰는 것입니다. "저 나쁜 자식, 지애비 닮아가지고." 꼭 그 얘기를 합니다. "나쁜 자식, 그냥 나가 죽어버려.' 엄마도 포악을 떨면서 소리를 질렀는데 갑자기 끽 하는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쾅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열 받아가지고 밖으로 뛰어나가다가 달려오고 있는 택시에 부딪혀가지고 아들이 쓰러졌습니다. 하얀 교복이 피로 붉게 물들면서 머리에서 피가 터진 것이 보이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보니까 아들이 뻗어 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정신이 나가서 막 뛰어가서 아들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얘야, 얘야." “광수야, 광수야.” 그러면서 막 머리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때 엄마의 마음에 뭐가 있겠습니까? 아까 못된 짓했고 상처를 줬던 것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지금 비참하게 되었다는 마음밖에는 안 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런 모든 맥락과는 상관이 없이 지금 이 아이가 매우 비참하게 되었고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우리 새끼 어떻게 하나."라고 절규하면서 119를 불러달라고 울부짖는 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관계니까 열 받을 때도 있고, 짜증 낼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고, 심지어 다시 선택하라면 이런 관계 선택 안 할 것이라고 하는 판단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있으면 뭐합니까? 지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그 관계를 지속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숙제 내드렸습니다. 집에 가서 남편 얼굴 좀 들여다보라고, 어떻게 해보셨습니까? 일찍 잠드셨습니까? 왜 그 정도도 못합니까? 오늘 가서 한번 해보십시오.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한번 제 설교를 듣고 균형을 잡으면서 아내들 생각만 하지 말고, 남편이 그런 사회 구조 속에서 그렇게 미친 듯이 살아왔다는 거를 생각하면서 이 인간도 그렇게 나쁜 인간은 아니었고, 그래서 내가 선택했는데 하고 내려다보십시오. 그러면 회사에서도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내에게서는 인정받지 못한 지 이미 오래됐고, 아이들에게서는 소외되었고, 그나마 꼬리치며 반가워해 주는 거는 개밖에 없는데, 개도 아내를 더 좋아합니다. 밥을 주는 사람이니까 (좋아합니다). 그런 소외감을 느끼는 남편의 얼굴, 그리고 부쩍 늙어가고, 여기저기 아파서 약을 먹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십시오. 곧 죽을지도 모릅니다. 십 년도 못 살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한 번 인간을 이렇게 내려다보십시오. 눈물이 나지 않습니까? 그게 긍휼의 감정입니다. '참 가엽다.' '이 사람도 결국 이것밖에 못 살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가엽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 곱던 얼굴이 다 지나고 결국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뭐가 단점이 많다고 고쳐보려고 그렇게 소리소리 지르고, 그렇게 못되게 굴었구나.' '결국은 고친 것도 없고, 아내는 상처만 받고, 이렇게 외로운 처지가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가엽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거를 내려다보는 그 마음이 긍휼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사랑의 마지막 감정입니다. 그 긍휼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거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양심입니다. 그게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지 말고 상대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이렇게 연단하셨구나.' 생각하면서 자신을 돌아다 볼 때 비로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용납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족한 점 때문에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의지하게 되었고, 매달리게 되었구나.' '그래서 결국 우리가 거울처럼 마주 보면서 서로를 완성해가면서 살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내의 부족한 점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도 남편의 그런 점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파고들게 되었다.' 고백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부 관계는 자기를 완성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사랑해서 서로를 완성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C. 관계를 소중히 여기라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보면 아내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벧전 3:7)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다', 이런 뜻입니다.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은혜'라는 게 무엇입니까? 멀리 바라보면 우리가 결국 이 세상을 떠나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이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매일매일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하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못된 자식들을 사랑하고, 무지한 남편을 불쌍히 여기고, 그리고 바뀌지 않는 아내를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준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내는 이 생명의 은혜를 함께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마음 아프게 하면 남편이 아무리 교회 와서 꿩처럼 머리를 의자에 처박고 기도를 해도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다가 하다가 기도가 막힌다고 그러는데, 뚫려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막히는 것도 모릅니다. 한참 기도가 안 되면 포기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은혜가 없는데 무슨 선한 삶이 나오겠습니까?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그렇게 우습게 여기고, 마음의 한을 간직하고, 마치 나이 들어서 자기가 힘이 있으니까 남편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남편에게 혹독하게 대하면서, 너도 한번 맛 좀 봐라, 하고 보복을 하면서 살아갈 때 꽤나 기도 생활이 잘 되겠습니까? 껍질만 교회에 다니지 봉사한답시고 왔다 갔다 하고 떠들고는 다니지만 깊이 있는 기도 생활이라는 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함께 생명의 유업을 누리게 되어 있는데 남편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그렇게 영적인 은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도 기도가 안 되는데 생명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를 그렇게 미워하면서 기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결국 부부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채 살아가고, 관계가 깨어진 채 살아가니까 서로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일체의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살아가지만 남남처럼 살아갑니다. 죽어도 눈물조차 나지 않는 그런 처지가 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결국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입니까? 그렇게 예수를 믿어서 수많은 사연을 안고, 만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일구면서 살아온 마지막 그림이 그것밖에 안 된다면, 살아온 인생의 날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겨우 이까짓 그림을 그리려고 그렇게 힘겨운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그래서 이거는 결국 남편에게, 아내에게, 뭘 해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가는 것이 결국 관계를 소중히 여김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과 망가진 관계를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자각이 생겨나서 가슴 아파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결국 이웃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마지막에 사랑으로 보듬은 후에, 그때 내가 참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관계가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가족을 교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함부로) 심지어는 자식이 되어서 부모까지 바꾸려고 하는데, 그건 여러분이 안 바뀌는 거와 똑같이 그분들도 안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족 관계가 파괴됩니다. 여러분이 불편한 거 있으면 말을 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할 때 어머니 제가 힘듭니다." 제가 어저께 아이들하고 <열띤 캠프>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엄마가 너를 힘들게 하면 그냥 참지 말고 엄마하고 이야기를 해라." “엄마 이게 내가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하세요." “그리고 엄마 의견을 들어봐라. 그러고도 엄마가 계속 고집하면 그 엄마가 바보다. 그러니까 얘기를 해라.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해라." 부모라 하더라도 너희가 정말 싫은 거는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할 때 내가 너무 힘들거든요."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 그렇게 얘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부모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족이 누구든지, 자식들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얘기를 하십시오. “너희가 이렇게 할 때 나는 너무 힘들다. 너희가 힘든 거 나도 배려해 줄 테니까, 한 번에 안 고쳐지더라도 내가 배려해 줄 테니까, 나한테 이렇게 하지는 마라." “할 말 있으면 얘기해 봐라." 그렇게 아내와 남편 사이에 얘기를 해야 됩니다.
얘기를 안 해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자기도 다른 사람 몰라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은 자기를 완벽하게 이해해 주고 배려해 줄 거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그런 꿈꾸지 마십시오. 라이프니치 같은 사람에 의하면 원래 인간은 소통이 안 되는 게 정상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원래 소통이 안 되는 그런 존재가 인간 각자 각자입니다. 기적적으로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말하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말도 안 하고 상처를 받으면 안 됩니다. "하지 말아라." 싫으면 싫은 거에 대해서 "하지 말아라." “나는 우리 관계를 더 잘 키워가고 싶으니 그런 언동은, 언사는 우리 관계를 계속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 말아라.” 냉정하게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서로와 소통하는 방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보면서 안타까운 건 뭐냐 하면 30년을 함께 살았는데도 아직 아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모릅니다. 남편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A성향이 있는 사람인데 B성향을 계속 강요하면서 왜 그렇게 못 사느냐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거는 마치 원래 태어날 때부터 잘못 태어난 남편 보고 ‘네 얼굴은 왜 정우성하고 안 닮았냐?'고 얘기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거는 현대 의학으로도 그렇게 못 고칩니다. 아내인 자기는 김태희입니까?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크림 바른다고 김태희가 됩니까? 안 됩니다. 안 되는 거는 ‘이 사람이 원래 틀이 안 되는 틀이구나.’ 라는 걸 인정을 하면서 그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내 처지는 그냥 이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관계라도 남아서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관계를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윈스턴 처칠이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력 하에서 결국 어쨌든지 간에 연합군은 승리했고, 영국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나라를 건졌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수상이 되고 난 다음에 모교에 가서 한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Don't give up."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독특한 영국인의 발음으로 뒤에다 말했습니다. "never, never, never,"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남편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건 여러분 인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선택은 하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이제는 그 관계를 고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상응하는 요구를 하면 그건 진정한 관계의 고침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신을 반성하십시오. 그리고 젊은 날에 아내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했으면 오늘 저녁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가서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십시오. “여보, 말 안 해도 내가 알고 있는 줄을 당신도 알았겠지만 사실은 젊은 시절에 내가 인간에 대해 너무 모르고, 이기적인 내 생각에 사로잡혀서 당신을 구박하고, 소외시키고, 외롭게 하고, 아이들을 하찮게 여기면서 살아왔던 것 미안해. 지금 돌아보니 정말 헌신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 게으른 농부였어. 지나간 일은 내가 어쩔 수 없지만 평생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잘 하면서 살게.. 여보, 날 용서해줘." 한 번 가지고 안 되면 두 번 얘기하십시오. 그게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혼자 잘했습니까? 자기가 뭐 하나님입니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정의로우시고 인간은 언제나 불의하지만, 인간은 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관점에서 보면 결국 자기만 상처 입은 피해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보면 서로의 부족함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정하십시오. “여보, 내가 젊은 날에 당신한테 대접받지 못하고 당신이 힘들게 한 기억이 너무 오래 남아서 나도 모르게 복수의 마음이 되었어.” 그래서 당신을 괴롭혀서 미안해. 그리고 아이들이 당신을 지금 이렇게 싫어하는 것도 사실은 나한테 책임이 커.” “아빠는 존경할 만한 인간이 아니다. 니 아빠가 나한테 어떻게 했냐."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심어줘서 결국 아이들과의 관계도 깨뜨려지게 된 거야.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옹졸했어.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당신한테 너무 가혹했어. 미안해,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잘할게. 여보, 사랑해.”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III. 적용과 결론
그러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것을 정리하고, 지금부터 좀 늦은 감이 있어도 지금도 부지런히 헌신의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늦게라도 추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의지하며 남은 날들을 석양에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듯이 노부부가 바닷가 벤치에 앉아서 저무는 인생의 노년을 함께 바라보며 “힘들고 어려웠어도 당신이 있음에 내가 견딜 수 있었어." “그리고 마지막 순간도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주님의 품으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갑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부부로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7. 네가 천연기념물이냐? - 청년편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잠 7:21-23)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매우 특별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만연해 있는 성적인 타락의 풍조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키며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性)에 관한 모럴은 무너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유교의 관성으로 버텨왔지만, 이제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이런 도덕들이 무너져버린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모럴(moral)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공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에 섞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도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도 교회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은 우리가 모두 공통적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은 원래부터 세상에 살고 있고, 교회에 있는 사람도 사실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니, 소금이 바다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성도들 또한 세상에서 만들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언제든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락성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세상의 도덕적인 수준과 풍조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독특성을 갖고, 성도가 성도로서 경건의 힘을 갖고 있지 않으면, 세상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은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교회에 있는 사람들, 형식적인 신자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쉬운 것처럼 똑같이 교회도 세상을 따라 하기 쉬운 것이니, 장소의 구분만 있을 뿐 교회도 세상이고 세상도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삼투압 현상에 의해서 모든 물이 수평을 이루듯이 우리는 그렇게 되는 것이 세상의 풍조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혜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성(性) 모럴(moral)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위험에 직면해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이런 것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는 일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생각 없이 떠밀리듯이 살면서 죄를 짓고 영적인 손해를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올바르게 알아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 사이에 이미 성(性)의 문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자유로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십 년 전으로만 시계를 거꾸로 돌려도 연인을 위한 호텔 패키지 상품 같은 것들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사회의 모럴(moral)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없는 것은 상관이 없고, 공공연하게 공포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면에 있는 도덕이 있고, 표면에 있는 도덕이 있습니다. 표면이 아무리 높은 가치를 내세워도 뒤에서는 모든 불법을 저지르며 어두운 도덕들이 행해지는 것은 창조이래, 인간이 타락한 이래,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금지된 가운데 암암리에 행해지는 것과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가운데 행해지는 것 사이에는 모럴(moral)의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품들이 이제는 거침없이 나오게 되고 연인을 위한 10박 11일 패키지 혹은 호텔 패키지를 비롯해서 숙박 상품에 대한 이야기들이 공공연하게 방송을 타고 흘러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조차도 이제는 이런 것들이 낯설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밀려오는 파도에 조금씩 조금씩 해변이 깎여나가면서 절벽이 무너져 해안선이 뒤로 밀려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식 속에서도 이런 문화의 물결을 타고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의 도덕적인 선상이 어디에 있는지도 불분명해질 정도로 의식 속에서 이미 세상의 모럴(moral)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고 성(性)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닌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흔히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혼과 함께 순결을 간직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허락하는 것은 이미 소설에나 나오고 희극에나 나오는 소재가 되어 버렸고 현실적으로는 그런 게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들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성(性)에 대한 자유로운 개방의 풍조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도덕에 자유로운 정신을 불어넣은 것은 1968년에 일어난 '파리학생혁명'이었습니다. 이 물결을 타고 기존의 가치관들이 무너져버렸습니다. 이 일의 시작은 1968년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사를 일부 프랑스 대학생들이 공격한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학생들은 체포되었고 학생들을 처벌하려고 하자 프랑스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그간 누적되어 오던 프랑스의 보수적인 정권의 태도와 도덕에 대한 전면적인 말하자면 항거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정치적인 세계 상황은 월남전을 중심으로 미국이 참전하는 문제로 미국이 분열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프랑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학생운동은 여러분이 잘 아는 체코로 들어가서 <프라하의 봄>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학생 권리의 억압에 대한 항거로 나타나고, 이런 속에서 공산정권의 사주를 받은 당국자들이 어떤 공연을 금지시킨 데서 자유에 대한 항거의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유럽 전역으로 불길처럼 번져갔고, 미국으로 번져가면서 베트남 참전의 문제를 가지고 나라는 양분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기존의 권위에 대해서 전면적인 회의를 표명하면서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모토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베트남전 참전을 두고 보수와 진보로 극명하게 갈리게 되었고, 반전 운동을 시작으로 미국의 권위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반성이 일어나게 되고, 기존 질서에 대한 해체까지 부르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남미로 들어가서 '체 게바라'와 같은 해방주의 인물을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이러면서 이것들이 쿠바, 남미를 휩쓸면서 이러한 자유 저항의 물결을 만들어냈고, 좌파의 물결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으로 오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이것들이 뉴질랜드, 호주까지 내려가면서 전 세계는 68혁명의 기존 질서와 제도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결국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결국 현대 정신이 꽃피우는 새로운 세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프랑스는 68년도 이전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국가였으나 68혁명 이후에 가장 진보적인 나라가 되어 버렸고, 좌파 이념들이 새롭게 생겨나면서부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전 세계에 유포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는 결국 '파리 코뮌(Paris Commune)'이 지지를 받지 못하면서 완전히 공산화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역시 자유의 물결을 저항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덕적인 풍조와 함께 미국에서는 수많은 히피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것이 70년대에 미국을 휩쓸었던 히피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전 세계 근대사의 한 획을 긋는 어마어마한 질서의 재편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는 오류와 참된 것이 섞여 있습니다. 모두 나쁜 것도 아니고, 모두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이제 절대적인 권위는 없는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정신은 1940년대 이후로 발견된 천문학적인, 물리학적인 새로운 발견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우주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대적인 개념들이 생겨나면서 기존의 도덕적 질서들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게 되었고, 뉴턴주의가 지배하던 획일적인 세계관에 중대한 타격이 가해지며 균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자유의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 된 모럴(moral)의 한 분야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性)의 분야였습니다. 결국 인간의 자유는 성적인 자유 없이는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으며 인간 모든 억압의 역사는 결국 성적 억압의 역사였고 인간성의 진정한 해방은 성(性)의 자유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사상들이 폭넓게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럽 사회 전체가 성(性)에 대한 관대한 말하자면 성적 방종주의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동성애나 혹은 성적인 순결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유럽 사회에서는 금기시 되었고, 그것은 매우 부적절한 언행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68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받지 않았던 이유는 그때 바로 박정희 정권이 강력한 독재 정책으로 병영국가화하고 있고, 남북의 대치 상황으로 인해서 나라 전체를 일종의 군대처럼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상이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런 성(性) 모럴(moral)에 있어서 절대적인 자유를 부르짖는 전 세계 유럽과 미국의 성적 방종주의의 흐름을 최소한 외관상으로는 어느 정도 시기를 늦출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옛날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들이 허용되는 시대에 이르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 우리 모든 사람에게도 파고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결혼과 함께 특별한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는 전통적인 관념은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처음 성(性)을 경험한 나이가 십삼 점 몇 세라고 하게 되니 초등학생 수준까지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네가 천연기념물이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 설교 제목이 어디에서 왔는지 너무나 잘 알 것입니다. 이것은 사귀고 있는 남자가 성적인 관계를 여자에게 요구할 때 여자가 상당한 기간 사귀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에게 내 몸을 허락할 수 없다.'라고 항의할 때 남자 쪽에서 하는 말의 전형적인 어투입니다. '네가 천연기념물이냐?' '우리가 1년을 사귀었는데 아직도 너와 내가 합방할 수 없다는 말이냐?' 그럴 때 네가 천연기념물이냐고 내뱉는 말입니다.
Ⅱ. 네가 천연기념물이냐?
‘네가 천연기념물이냐’고 묻는 이 속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여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암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네가 정말 그렇게 소중한 존재냐?' 그런 뜻이 아닙니다. 너의 정조라는 것이 내가 이 엄청난 욕망을 누르고도 보호해줄 가치가 있을 정도로 희귀한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조의 가치에 대한 도전적인 질문입니다. 모르셨습니까? 그런 사회 심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정조가 그렇게 지켜야 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냐?' '특히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나보다도 그 정조가 그렇게 중요하냐?' '내가 나를 희생해서 그걸 지켜줘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거냐?' 묻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제까지 지켜오던 성(性) 모럴(moral)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의 의미가 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질문은 상당히 68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금지되어 왔는데 <나는 금지하는 그것을 금지한다> <무엇이든지 나의 자유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A. 유혹과 협박
그러면서 유혹과 협박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지혜자가 아들에게 간음의 길로 치우치지 말라는 충고를 하면서 생생한 예화를 들며 그림처럼 아들의 마음속에 호소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대충 이야기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음란한 여자가 골목길로 나와서 젊은이를 유혹합니다. '내가 오늘 너와 함께 사귀고 싶다.' '나와 함께 내 집으로 가자'고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내 침상에는 요가 있고, 당시 선진국이던 애굽의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이불이 펼쳐져 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까지 뿌려서 아주 고급스러운 아로마 처리까지 한 방이 준비되어 있다.' '남편은 집을 떠나서 먼 곳으로 갔는데 얼마나 오래 출장을 가는지 돈을 두둑이 가지고 갔기 때문에 보름이나 되어야만 집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 혼자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고 누구에 의해서도 발각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고운 말로 남성을 아주 적극적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입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음욕이 발동하게 되고 그 여자를 따라가게 됩니다. 그 모습을 지혜자가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평가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소가 무엇인가 유혹을 받아서 끌려가는데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수장을 본 적이 없으실 겁니다. 도축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볼 수 없게끔 되어 있고, 지금은 아주 현대적인 기술로 짐승을 죽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도수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소를 팔려는 사람이 소를 끌고 도수장으로 옵니다. 도수장으로 와서 도수장에 있는 육축업자와 함께 거래가 끝나면 그 소는 이끌려서 나무 말뚝이 양쪽에 서 있는 곳으로 서서히 이끌려집니다. 그러면 벌써 피 냄새를 다 맡고 소는 안 가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용을 씁니다. 그리고 눈물까지 뚝뚝 흘립니다. 그러면 엉덩이를 아주 채찍으로 심하게 내리칩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소는 떠밀려서 가게 되는데, 맨 앞에는 아주 날렵하고 날카로운 곡괭이를 들고 있는 백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고 있는 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방에 정수리를 내리쳐서 구멍을 뚫어야 되는 것입니다. 잘못 맞으면 소가 길길이 뛰면서 어떤 위험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절대로 실수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소는 고삐에 끌리고 채찍에 맞으면서 할 수 없이 앞으로 밀려가고 턱 앞까지 왔을 때 백정은 날카로운 곡괭이로 정수리를 내려치고 구멍을 뚫어서 한 방에 가게끔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가 도수장입니다. 그렇게 죽은 소는 금방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끌어내지고, 끌어내진 소는 가죽이 해체되고 부위가 해체되면서 결국 고기가 생산되는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도수장입니다. 수많은 소의 죽음이 이루어지는 곳, 비명 소리가 이루어지는 곳, 동네 가득히 피 냄새와 함께 진동하는 곳이 도수장입니다. 그렇게 음란한 유혹을 받아서 그 여자를 따라가는 그 젊은이가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어서 순순히 끌려가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으로 나오지만, 이것을 뒤집어 놓고 보면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유혹하고 때로는 협박을 합니다. 네가 천연기념물이냐고 묻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으면 너와 헤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일종에 협박이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매가 형제를 사랑하게 될 경우에, 자매 형제도 아니겠지만 어떤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 원할 경우에는 기로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천연기념물이기를 포기하고 이 남자와 관계를 계속 갖느냐, 아니면 끝까지 천연기념물이기를 고집하고 이 남자와 갈라서느냐 라는 위기까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성 모두가 엄밀하게 두 갈래 길에만 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음욕이라는 것은 천사를 빼놓고 모든 인간 피조물에게 피할 수 없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성 중 하나입니다. 더 젊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런 것들이 매우 강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양쪽으로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유혹을 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음란한 욕망들을 자극하여 이끌어내고, 또 한편으로는 관계에 대한 위기로 협박하면서 결국 정조를 바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정조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성적인 관계를 갖겠다고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성은 이런 요구에 거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이런 요구에 응해 본들 크게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이겠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하면서 성적인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되면 이번에는 반대로 여자 쪽에서 남자에게 매달리고 그런 일을 하지 않고는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번 그렇게 길들이게 되면 계속해서 더 이상 유혹하고 더 이상 협박할 필요가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성적인 일들을 할 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 속에서도 육체관계의 섞음과는 상관이 없이 순전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비극은 훨씬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는 정욕으로 시작된 관계는 정욕으로 끝이 납니다. 정욕에는 언제나 싫증이 있습니다. 한 여자에게서 성적인 즐거움을 끝없이 맛볼 수 있는 남자는 없습니다. 한 여자를 정복하고 나면 그다음에 또 다른 새로운 정복을 시도하게 되고, 새로운 관계를 찾게 되면서 결국 남성은 남성대로 자기 속에서 계속 강화되는 성적인 죄를 짓고자 하는 성향을 극복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정신의 도덕성은 해체되고, 마음은 이미 정욕에 물들고, 예전에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음행을 했는데 이제는 도저히 하지 않고는 자신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음행을 해야 되는 비극적인 상황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얘기하는 정확하게 죄의 노예가 된 상태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남녀가 모두 이렇게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아주 죄가 일상화되는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양심에 많은 가책과 고통을 느낍니다. 신은 절대 없다고 말하고, 도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던 사람들조차도 성추행이나 혹은 성적으로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심하면 결국 정신적인 문제까지 와서 치료를 받아야 될 위기에 이르게 되거나 혹은 목숨을 끊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이 죄에 대해서 유독 그렇게 강하게 가책을 받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십계명으로써 돌비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 속에 욕정을 향한 욕망을 공통적으로 주신 것처럼 또한 이 계명이 참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겨서는 안 되는 계명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인간의 양심 속에 깊이 깊이 새겨놓으셨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이 가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더욱더 심하게 교육을 받고 암시를 계속 주어서 더 많은 사람이 이러한 풍조에 빠지는 것을 확인하게 될 때 인간은 죄에 대해 담대한 욕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보면 말하기도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이지만 단순한 포르노물은 개개인이 성적인 행위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그룹으로 섹스하는 음란물들이 가장 비싸게 팔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런 속에서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훨씬 덜 받을 수 있는 소위 얘기하는 비도덕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책 의식이 훨씬 줄어드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너무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1970년도에 68혁명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히피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많을 때는 7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성적인 자유와 마약 복용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너무 재밌는 것은 뭐냐 하면 역사를 보면 그 히피들 중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전도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허무주의에 끝까지 가고 나면 결국 인간이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역설적으로 신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미국 역사에서 한 아이러니입니다. 그래서 히피가 기독교 선교에 준 영향은 상당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극단적인 허무는 결국 극단적인 의미를 찾게 만든다는 한 공식을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신자들도 양심의 가책을 깊이 느끼게 된다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이런 선을 넘었을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이미 경험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한번 과거를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 속에 깊이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가책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그것이 가책을 느끼는 깊이만큼 중요한 도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래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의논을 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결국 신 앞에서 받은 계명이 도덕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면 안 된다고 하는 도덕은 인간이 합의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신 앞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싸우는 것은 나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백한 것이 결국 도덕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은 한 사회의 합의라는 사회적인 측면과 함께 종교적인 측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살인에 대한 금지의 명령이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아프리카에서나 에스키모에서나 똑같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부모를 학대하는 것을 칭찬하는 도덕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고 극히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성(性)에 관한 모럴(moral)들이 나라와 시대를 막론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졌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일생을 난봉을 피우고 바람을 피우고 난잡하게 살던 남자도 자신의 아내만은 순결한 여자 중에서 취하고자 했던 심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근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세상은 이런 것들을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성적인 타락이 주는 쾌락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성(性)에 대한 것들은 결국 해방구를 찾아온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산업화 사회가 되고 현대사회에 진입하면서부터 인간은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고 물질적인 번영의 시대에 살면서 더욱더 감각에 이끌리는 문화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모든 성(性)이 상품화되어 가고 있는 것을 한번 보시기를 바랍니다. 엄청난 어마어마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오늘날 문화입니다. 그것을 제외해놓고는 오늘날 현대 문화를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마어마한 산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자극적인 것들을 원하고 무지막지한 디지털 성(性) 착취나 폭력물 같은 것들이 생산되는 것도 결국은 강력한 소비자들의 계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욕망을 가진 존재이고 그 욕망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성적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눈을 감는 그 날까지 말입니다. 얼마나 많이 그런 것들을 느끼느냐, 덜 느끼느냐, 그리고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통제의 범위 안에 있느냐, 통제할 수 없게 되었느냐는 차이만 있는 것이지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모두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네가 천연기념물이냐?'라고 물어오면서 관계를 미끼로 협박하고, 유혹을 가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단순히 여성이든 남성이든지 이러한 욕정의 위협을 받으며 때로는 관계를 담보로 하여 협박과 유혹이 밀려올 때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할 것입니까? 입장이 분명히 서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규칙이 서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이 서 있습니까?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제 우리는 <열띤 캠프>를 했습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한 영상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1, 2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유튜버로 나와서 고등학생들의 성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스킨십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선을 넘었습니다. 도를 넘었습니다. 성인 채널과 다름이 없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스스럼없이 오고 가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어디에서 그것을 배웠겠습니까? 사회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수없이 학교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교사에 의한 성추행 사건들과 어른들의 세대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성폭력의 현장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교육을 받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개나 줘버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풍조들이 만연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세상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여기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예배가 끝나고 가면 여러분이 살아야 될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사귀는 남성이, 여러분이 사귀는 여성이, 바로 그런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경우에는 여러분이 유혹과 협박을 피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쉽고 쉽지 않고를 떠나서 여러분이 이것에 대응할 수 있는 여러분 나름대로의 확고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묻는 것입니다. 원칙이 있고 규칙이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라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고, 다르다면 여러분은 적지 않은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당해야 될 텐데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여러분에게 있는지 나는 그것을 묻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배가 지나간 물 위에 흔적이 남지 않고, 죽을 떠먹은 그 자리에 자국이 남지 않습니다. 똑같이 남녀 사이에 일어난 일은 극히 비밀스럽습니다.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가족들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B. 뜻밖의 결론
뜻밖의 결말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니까 젊은이가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왜 따랐겠습니까? 지혜자는 바깥에서 보기에 소가 도수장으로 끌려가서 정수리에 곡괭이를 맞으러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젊은이의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무늬가 놓여진 요와 애굽의 최신식 고급 무늬가 놓여 있는 이불, 그리고 아로마 처리가 되어 있는 아름다운 침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를 따라가면 아침까지 흡족하게 사랑을 누릴 것이고 최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혜자는 냉정한 입장에서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리고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말합니다. 필경은 네가 그렇게 그 여자를 따라가서 하룻밤을 즐기고 나면 결국 화살이 날아와서 네 간을 관통하게 될 것이다. 새가 미친 듯이 빨리 먹이를 보고 달려가지만, 그물 속으로 들어가고 날개가 걸려서 결국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생명을 잃어버린 채 사냥꾼들에 의해서 잡혀가서 그날 저녁에 숯불에 태워지는 구이가 되어 버릴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물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미래에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고 행동했는데 뜻밖의 결말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가책입니다. 나 자신이 그렇게 가책받을 만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계의 파괴로 나타납니다. 제일 먼저 이런 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됩니다.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눈물은 흐르지만, 하나님 앞에 살 힘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궁창에까지 미치는 것을 본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요, 시인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예술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고매한 사람도 결국은 이 죄에 빠지게 되었을 때 그는 말했습니다. "···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사옵나이다" (시 51:3 下) 심지어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어도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욕망에 사로잡혔을 때 도덕적인 판단과 그 욕망에서 모두 해방된 다음에 느끼는 판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소위 현자타임(현실자각타임)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들어온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아까까지는 욕망에 들끓었기 때문에 그 욕망에 의해서 사태를 잘못 판단했는데, 욕망을 모두 해소하고 나니까 이제 현타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잘못됐는가, 라는 것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타임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잠깐입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바로 욕망이 축적되고 욕망이 차오르게 되면 다시 그런 현재 타임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의 타임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죄에 빠진 인간이 가는 마지막 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원하십니까? 젊기 때문에 이런 욕망을 느끼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인류가 다 겪는 일입니다. 아무도 이 일에 예외가 없습니다. '세네카'도 자기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하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훌륭한 도덕적인 인물도 정력의 괴로움 때문에 힘든 인생을 보냈다는 것을 실토한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마음속에서 그런 갈등을 느끼면서 사는 것과 이것이 바깥으로 나타나서 실제로 이 죄를 짓고 행했을 때의 그 결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그런 것을 결국 무엇이 보여주느냐 하면 쉽게 해소되지 않는 양심의 가책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스스로 말했습니다. "···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3 下) 다른 죄가 아니라 바로 그 죄가 항상 나를 그 의식으로 데려갑니다. '네가 이런 죄를 지었지, 이런 죄를 지었지?' '하나님이 금하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강제로 취하여 네가 결국은 간음했지?' 이 질문으로 끊임없이 데려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떠한 죄도 회개하고 나면 그 정도까지 자기를 괴롭히는 죄는 없었는데 도저히 자기 자신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물로 씻고 비누로 씻어도 그 가책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욕망에 들떠서 잠자리로 들어가는 젊은이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이 아니겠습니까?
지혜는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혔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을 미리 내다보는 것입니다. 코를 비틀면 경험해보지 않아도 코피가 난다는 사실을 알고, 칼로 살을 찌르면 살이 찢어지고 피가 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그것을 굳이 내 온몸으로 실험해보지 않아도 남의 결말을 보면서 자신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삶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이러한 일들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뜻밖에 결말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유혹한 그 여성이나 혹은 그 여성의 유혹에 따라간 이 젊은 청년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파국이었습니다. 결국은 간을 뚫게 됩니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팔과 다리를 뚫게 되면 생명을 보존하는 데 지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간은 1센티만 찢어져도 절명을 하게 됩니다. 우리 몸에서 치명적인 장기가 바로 간과 우리 몸에 있는 심장입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것입니다. 궁수가 활을 쏴서 복부에 정통으로 맞고 간을 꿰뚫었을 때는 누구도 그 상처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것이 치명적인 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적인 부도덕이 만연해 갑니다.
온통 사람들이 불법 게시물들을 올리면서 자신이 얼마나 즐거운 밤을 보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나 그러고 나서 얼마나 괴로운 삶을 보내야 되는가 하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이 읽어주지 않습니다. 올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정한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러한 죄를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누릴지도 모르는 기쁨과 희락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과도히 제공받게 됩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므로 일어나는 뜻밖의 결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 앞에 펼쳐진 수많은 정보는 죄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이상한 것이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툭 털어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습니다. 교역자를 앞에 놓고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고 부모에게 이런 문제를 털어놓고 고민을 하기에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났어도 어느 정도 친한 사이가 아니면 이런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 친구가 이런 쾌락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자기만 우스운 사람이 되기 때문에 더더욱 털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판단을 유보한 채 젊음의 욕망에 끌리면서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결국은 수시로 화살이 간을 뚫는 것 같은 치명적인 위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결국 영적인 생활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자녀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어서 영적인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게 되어 더 이상 영적인 전쟁을 할 수가 없는 부상병들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마음속에서 이러한 정욕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서 떠나는 것 이외에는 마음의 어떤 위로도 찾을 수 없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극단적인 성적인 방탄과 마약 중독과 게임의 중독에 빠지고 심지어는 섹스 홀릭에 빠지는 모든 것들이 별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평범한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이크 펠라우어'라는 1980년대 미국에 유명한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평생 다니면서 젊은이들과 목회자들에게 성적인 순결을 지키도록 영향력을 끼치는 연설가였고, 설교자였고, 강사였습니다. 그가 독특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회자인데도 성 중독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습니다. '마이크 펠라우어'는 자신의 글 속에서 자기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하는데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어디선가 수거해 온 쓰레기를 치우는 가운데 뒷마당에서 그것들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그 불속에서 타려는 한 잡지책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화집이었습니다.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였습니다. 불붙으려는 것을 잠깐 끄고 꺼내서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보기 시작한 것이 음란물에 접촉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 깊은 성 중독에 빠지게 되고 나중에 이것들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고맙게도 자신의 아내에게 어느 날 눈물을 흘리며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내는 그 남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고민하며 치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회복한 후에 이런 것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나쁜 것인지를 아는 나팔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세상의 풍조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믿지 마십시오.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주식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비트코인에 거의 미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비트코인 한 개에 결국 1억 5천만 원 가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까지 호언했습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앞으로의 일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3만 달러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곡소리가 나고 이번에는 또 무슨 코인 한다고 해서 57조 원이 한 번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네이버보다도 더 큰 자산을 가지고 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고, 수십 명의 사람이 피해를 입고 목숨을 끊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놈들, 그런 걸 만들어 낸 놈들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 그것도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알고 보면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찾아서 그런 일들을 벌인 것입니다. 왜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이익을 얻을 생각을 안 하고 몇백만 원을 투자해서 몇억을 얻을 꿈을 꾸고, 몇억을 투자해서 몇천억을 얻을 개발 사업에 눈독을 들이는 것입니까? 그런 탐욕의 결과가 결국은 비참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온통 인터넷을 뒤지면 결국 주식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오지만, 비참하게 마지막으로 죽음의 길에 접어들면서 주식하지 말라고 글을 쓰고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글이 일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 사람들은 주식에 대한 허황한 꿈을 꾸게 되고, 부동산에 대한 허황스러운 꿈을 꾸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모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이 우리가 반성해야 될 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우리의 인생사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나는 천사와 같이 순결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저나 모두 욕망에 시달렸던 사람들이고 또 지금도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날 동안은 상당 기간 동안 계속될 것이고 특히 젊음이 유지되는 날 동안은 할 수 없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제하고 우리 자신이 그 모든 길에 대해서 판단을 분명히 하면서 어떻게 처신해야 될까 하는 것을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불나지 않은 때도 우리는 부단히 화재 연습을 합니다. 온 교회가 불붙었을 때 어떻게 피하여야 하는지, 온 건물이 불덩어리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지, 심지어는 적군이 핵폭탄을 떨어뜨렸을 때도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연습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타버리지 않을 보장,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 살아남을 보장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1%의 가능성이 있다면 아는 사람이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그때 내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판단은 서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마지막에 분위기에 이끌리고, 협박에 못 이기고, 유혹에 이끌려서 덜컹 이런 죄를 저질러놓고 감당할 수 없는 비극 속에 빠져든다면 결국 그 슬픔은 누구의 몫입니까? 여러분 한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사랑스러운 자녀가 떠밀려가듯이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알았을 때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형제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또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목회자의 마음은 죽을 만큼 괴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최소한 판단은 서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반성이라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래야만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사오니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못난 인간이 주체성이 없는 인간입니다. '네가 천연기념물이야?' 하고 물을 때 명확하게 여러분의 의견을 얘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나는 천연기념물이다'라고 이야기하든지, '난 천연기념물 아니다.', '천연기념물은 동식물에 해당되는 거지, 나는 인간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천연기념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개체수가 너무 많으면 천연기념물 지정이 안 된다.' 얘기를 하고 자기 태도를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네가 천연기념물이냐고 묻는데 우물쭈물하고, 어쩔 줄 몰라 하고, 관계에 집착하면서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때 만만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기는 겁니다. 한 번 그렇게 꺾이고 나면 그다음엔 꺾이지 않을 이유가 없고, 꺾이지 않을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물들어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예가 믿는 형제자매들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이런 사조가 안 믿는 형제와 믿는 자매가 사귀는데 이런 대사가 주어졌다면 이상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믿는 형제와 믿는 자매가 사귀는데 이런 대사가 오고 가는 것입니다. 미친 거 아닙니까? 왜 그러는 것입니까? 결국 무엇입니까? 몸은 교회에 나오지만, 정신은 완전히 세상에 홀딱 바쳐진 것입니다. 세상에 헌신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정신이 껍데기만 남겨놓고 모두 지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똑같은 이런 세상에서 배운 것을 묻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드물긴 하지만 여성이 강력하게 남성에게 원하고, 관계를 담보로 성적인 관계를 요구할 때, 그럴 때 경건한 형제인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실제로 종종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요구를 합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이든지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간에 어쨌든 자기가 싫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싫다는 걸 표현할 것 아닙니까? '나는 비록 신은 믿지 않고 종교는 믿지 않지만, 난 그러고 싶진 않다.' '나는 그저 순전하게 살다가 내가 진짜 원하는 사람에게 나 자신을 허락한다.' 허락한다는 것도 전근대적인 용어지만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성적인 결합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이 나의 소박한 시민으로서의 나의 정신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싫다고 합니다. '그럴 바에 나는 너를 더 이상 사귀어야 될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이렇게 관계를 깨뜨리면서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가라 그러십시오. 그 사람은 얼마 전에도 어떤 여자 만나서 똑같은 이야기하고 여러분에게 온 것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성 중독이 시켜서 여러분을 사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무슨 평탄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혼을 했는데 여러분의 남편이 끊임없이 바람둥이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여자를 찾아서 떠나는 사람이고, 몸만 집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남자하고 살고 싶으십니까? 과연 성적인 결합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그거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분명하게 얘기를 해야 됩니다.
더군다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질문해 올 때 아주 솔직하게 얘기하십시오. 덤벼들듯이 얘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천연기념물은 아니다.' '내가 널 참 사랑한다.' '난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나는 너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다.' '내가 사랑하는데 네가 해달라는 거 뭐는 못 해주겠냐.'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고 나면 내가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될 것 같다.' '내가 용서가 안 될 때 너는 나를 도울 수가 없다.' '나 자신의 자아가 분열되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내가 괴로워할 때 너는 나를 도와줄 수 없다.' '그래도 네가 원하느냐?' 그런데도 원한다고 하면 그거는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괴롭다고 이야기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싸우고 다투고 그날 갈등을 하면서 막 집어던지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헤어졌어도 밤에 전화를 합니다. '자기야!' '뭐야, 또.' '나 너무 아파. 나 죽을 것 같아.' 그러면 달려올 수 있어야지 그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 낫고 난 다음에 한 번 치고받고 싸울지라도 일단 아프다고 하면, 이거 어떡하나, 이러다가 죽으면 하고 달려와서 들쳐업고 응급실에 가서 눕혀 {놔야 합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일단 치료부터 받아.' '깨어나고 네가 건강을 회복하면 내가 반쯤 죽여 놓을게.' 얘기를 하더라도 일단 아프다고 하면 데려가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게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뭔가 바뀌기를 원하는 거 아닙니까? 그의 성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막 싸웠다고 해서 '아파서 나 죽을 것 같아.', '오빠 나 죽을 것 같아.' 그럴 때 '너 죽어도 싸.' 그러고 탁 끊어버리면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침에 진짜 죽었습니다. 그런데 가슴이 안 아픕니다. 나쁜 놈입니다. 인간도 아닙니다. 그런 날도둑놈 같은 친구를 왜 사귀었습니까? 그러니까 뭐냐면 많이 아픈 사람이 갑(甲)입니다. 일단 아프다 그러면 달려가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통장도,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도, 너한테 다 맡길 수 있다.' '그런데 그거는 내가 못하겠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또 내가 힘들어서도 아니다.' '나도 원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게 되는 뜻밖에 결말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 듣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통 안 되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봐야 별 볼 일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래 천연기념물 혼자 잘 해라. 나는 간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럼 얘기하십시오. '그래, 또 다른 천연기념물 찾아 떠나가라.' '너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람이 아니다.' 주님 없이 형제와 함께 살기보다는 형제 없이 예수와 함께 살기를 택하여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훨씬 더 좋은 결말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걸 여러분이 태도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C. 순전함을 지키는 길
그러면 이런 뜻밖의 결말이 찾아오지 않도록 자신의 순전함을 지키는 비결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1. 성도임을 잊지 말라
제일 먼저 <성도임을 잊지 말라>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이 사는 윤리의 세계가 따로 있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독특한 윤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양식을 만들어내고, 독특한 세계관에 기초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욕에 시달릴 수도 있고, 심지어 때로는 우리 자신을 차마 지키지 못해서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킨십이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스킨십은 결코 뒤로 물러가질 않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전진하려고 합니다. 그 마지막 끝은 결국 끝까지 가야지만 만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끝나지 않고 그 일을 반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죄의 계획이고, 죄의 계획은 이런 욕구를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결국 우리가 성도임을 자각하지 않는다면 엄청나게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사조에 대해서 우리들이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항하는 사람 자체가 매우 촌스러운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고 나서도 사람들이 서로서로 감추고 숨기는 것이 하나의 예의처럼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에게 많이 떠버리고 떠드는 것 자체가 무슨 무용담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 이야깃거리 하나 정도 없는 것은 젊음을 지나는 사람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속에는 멸시의 암시가 이 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현재의 도덕 불감증에 걸린 사람, 그리고 시대에 너무 뒤처진 사람, 꽉 막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이 안에 함께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성도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사람이고, 주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성도가 이런 성적인 죄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 사이에 어떤 타협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를 취하면 저를 버리게 되고, 저를 버리고 이것을 취하게 되면 그만큼 고통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억하십시오. 남성을 사귀든 여성을 사귀든 그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버리지 마십시오. 성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거룩한 자들과 함께 기업을 얻을 거기에 속한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구원해서 하나님이 성별해주신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도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죄들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이 세상 속에서 참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 하는 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거침없이 밀려드는 형제의 도전 혹은 자매의 유혹 앞에서 어느 날 선을 분명하게 긋고 "이건 아니다."라고 선언을 (하십시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지만 이건 아니다.' '우리가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된다.'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한다.' '이런 관계 없이도 나는 너와 인격적인 관계가 너무 소중하다.' (이렇게) 선언할 때 상대방은 부끄러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또 다른 윤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뜨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그런 일이 있고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살뜰하게 여기고, 인격적으로 존중해주고 그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할 때 결국 그도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고, 그동안을 끊임없이 성적인 욕구를 갈망하고, 상대를 자신의 욕망을 해소시키는 도구로 삼는 그 속에서 과연 인격적인 존중이나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을 그 안에서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 이야기에서 한 줄만 바꾸면 형편없는 소설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아가씨가 헝클어진 머리와 흐트러진 매무새를 하고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고 한 줄만 쓰면 성폭행이 일어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원하십니까? 우리의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그렇게 쓰면서 살아가야 되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의 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결혼을 하든 비혼으로 남든, 그 사람을 사랑하고 끝까지 결혼에 이르든 혹은 그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든 혹은 결혼하기 전에 죽어버리든 혹은 늙어서까지 나 혼자 살든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구김 없이 살아야 될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영혼의 생명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하지만, 그 요구를 들어주고는 내 영혼 안에 있는 이 생명이 지탱될 수 없다.' '그때 내가 돌아버릴지도 모르고 아주 후회 속에서 너를 미워해 버릴지도 모른다.' '우리 관계가 끝날지도 모르고, 나는 정말 비참한 사람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이 평화를 흔들고 싶지 않다.' '만약에 정 참을 수 없으면 우리 결혼을 좀 당기자.' '내년에 결혼하기로 했는데 올가을에 하면 어떻겠냐.' '너무 급하면 다음 달에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 하면 되는 거지 왜 못합니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노력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전세로 시작할 거 월세로 시작하면서 우리 다시 살아보자.' 그러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정직하게 자기 상황을 돌아보면서 성도임을 기억해야 됩니다. '나는 성도다.' '그래서 내가 넘을 수 없는 도덕의 선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지켜야 된다.' 자기의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주님과의 관계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이런 정욕에 나 자신이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려면 그냥 머리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져야 됩니다. 여러분 사귀어 보셨습니까? 사랑에 푹 빠지고 나면 아무 여자도 성적인 매력을 줄 수 없습니다. 준다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이 세상에는 그 여자와 사람만 존재하지, 다른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포르노 중독에 걸렸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매일 친구가 포르노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주 밝고 쾌활해졌습니다. 그리고 전혀 그걸 안 한다고 했습니다.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너 무슨 노력을 했냐?' '치료를 받았냐?' '아니, 나는 치료도 안 받았고,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런데 왜 그러냐?'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고 나니까 그런 포르노 물에 관심이 하나도 없어졌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순결하게 하는 놀라운 힘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결국 끊임없는 사랑의 유혹이 자기의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쓰여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빠질 때가 되면 그런 것들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진짜 마음에 사랑했고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원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 정도는 성도가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현실적인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지 않으면 내가 성도라는 사실을 계속 기억하면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젊음의 시기에 더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 정욕들을) 한 번 둑이 무너지고 나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가책도 줄어들면서 결국은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서부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처럼 처음에 뚜껑은 자신이 열었는데 뚜껑을 연 다음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결과는 자신에 의해서 통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매 순간 여러분이 성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다양한 즐거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퇴계 이황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학문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 이 기쁨은 돼지고기보다 훨씬 맛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돼지고기가 얼마나 희귀했으면 그 돼지고기 한 점을 새우젓에 찍어 먹으면서 느끼는 고소한 그 맛에 선비들이 심취했던 것입니다. 진리의 맛은 그거보다 훨씬 더 크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도 유튜브에서 보니까 한 철학자가 그 얘기를 했습니다. 자기는 인생에 많은 즐거움이 있는데, 책을 읽으면서 어떤 진리를 깨닫게 된 그 기쁨이 이 세상에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너무나 도덕적이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이 너무 큰 것에 눈을 떴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학문과 함께 사노라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 중에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 아름다운 것들에 감정선을 골고루 배치하면서 살 때, 그때 이런 성적인 욕망에 매몰될 위험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술, 음악, 스포츠, 그리고 특히 젊은이들의 경우에는 운동을 통해서 이 에너지를 발산하면 이런 것들이 절제력을 키우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우고 내가 헬스를 해서 몸을 만든다든지, 독서를 통해서 이번에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파악을 하겠다든지, 아니면 플라톤을 한 번 용기를 내서 읽어본다든지, 세상에 머리가 터질 정도로 힘든 책이라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한번 독파해보겠다든지, 어떤 목표를 세우는 것입니다. 성적인 데에 쉽게 휘둘리면서 거기에 몰입돼 들어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건전한 정신적인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치 저녁때 목욕탕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이 목욕탕에 물 드레인(drain)을 확 빼버리고 나면 발이 빨려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물의 힘에 빨려서 하수도 바깥으로 나가는 것처럼 한 가지 성(性)이라는 탈출구를 향해서 욕망과 모든 에너지가 빨려 나가듯이 자기도 모르게 빨려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선을 골고루 배치하는 것입니다.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 음식을 먹는 즐거움, 독서를 해서 내가 모르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즐거움, 정원을 가꾸고 아니면 등산을 하는 즐거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공부해가는 즐거움, 심지어 건전한 취미 생활이나 예술, 교양, 이런 것들을 통해서 얻는 즐거움도 꽤 크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것이 성적인 욕망을 해소하는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의 폭풍들을 덜어낼 수 있는 역할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육체적인 운동은 꼭 필요합니다.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떠오르려고 할 때마다 스톱 핑킹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데 더 이상 그 생각을 파고들지 않는 것,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음란물에 빠지고 게임에 빠지는 이유도 결국 뭐냐 하면 스톱을 못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고, 가상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니까, 현실은 점점 부적응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기에 너무 불편한 것이 현실이 되어 버리고, 그 대신 가상의 세계가 자신의 현실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듯이 똑같이 성적인 욕망도 그러한 국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고들어 가면서 결국 자신이 육체의 정욕을 따라서 흐느적거리는 뼈 없는 연체동물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자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소위 얘기하는 사드의 욕망론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인간의 욕망에 대해 칭송을 하는 풍조들이 68운동 이후에 엄청나게 많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의 해방을 부르짖는 그런 것들이 막 물결처럼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결국 자신도 거기에 설득이 되어가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윤리 속에서 결코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거기에 영원하고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결과를 기억하라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결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까 얘기한 뜻밖에 결말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죄를 방비하는 가장 좋은 비결은 뭐냐 하면 그 죄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이어트 하려고 하는데 많은 사람이 실패합니다. 결국 한 가지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다이어트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주관적으로 밖에 못 보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절대 못 보는 것입니다. 너무 맛있으면 위염이 걸려도 마라탕 먹어야 됩니다. 오죽했으면 어느 미식가가 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위염이 있습니다.' '마라탕 더 이상 드시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을 하니까 '저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 그냥 위염을 달고 살게요.'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건 뭐냐 하면 결과를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음식을 보면서 식이 조절을 해서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해야 될 게 음식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이 음식이 나에게 들어와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입니다. 너무 맛있지만, 칼로리 계산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 초콜릿 케이크 하나를 먹으면 밥 두 공기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태까지 아침 점심 배를 움켜쥐고 밥을 안 먹었던 것이 초콜릿 파운드 케이크 하나로 반까이(ばんかい)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이 지방을 이렇게 퍼먹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면 <치즈 팩토리>라는 디저트 전문 브랜드가 있습니다. 진짜 맛있습니다. 하여튼 의심할 여지 없이 맛있습니다. 여러분 가면 꼭 찾아가 보십시오. 절대 후회 안 합니다. 그 식당 특징이 항상 단독 건물에 있습니다. 빌딩 같은 데 있는 게 아니라 단독 건물에 있고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한쪽에는 경양식을 팔고, 한쪽에는 케이크을 팝니다. 거기는 항상 식당에 들른 다음에 거기를 갑니다.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잔뜩 먹고 거기를 갑니다. 거기 가서 미국 여자들이 접시를 들고 나오는 거 보면 우리는 기염을 토하게 됩니다. 케이크 두 조각에 바나나 푸딩 등을 수북이 담아서 오는데, 제가 보기에는 최소 천오백 아니면 삼천 칼로리는 될 접시를 들고 오는 것입니다. 아까 먹은 것도 어마어마한데 그거를 먹습니다. 그러니까 (몸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먹겠습니까? 그거를 객관적으로 못 보는 것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음식에 자기의 욕망이 통제가 안 되니까 결국 음식을 객관적으로 못 보는 것입니다. 내 몸이 이걸 원한다는 사실만 느낄 뿐이지 이게 들어가면 내 몸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고 어떤 결과가 미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생각의 연결을 끊임없이 난도질해서 끊어놓습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숨기에 굉장히 좋은 마음의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뭐냐 하면 모든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도 마음에 대해서 공부해야 되고,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아도 마음에 대해 공부해야 되는데, 공부는 추호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결국 머리가 나쁘면 온몸이 고생하듯이 마음에 대해서 공부를 안 하니까 온몸이 상처를 받으면서 아주 쥐꼬리만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결국 반복된 실패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지혜는 결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적으로 자유로운 견해를 가질 때,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대답할 말이 없을 때,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의 욕망을 따라서 우리들이 가게 되면 마지막에 돌아올 결과는 무엇인가? 오늘 저녁 아름다운 요와 애굽의 무늬가 있는 이불을 덮고 몰약과 침상과 계피가 뿌려진 아로마 처리된 방에서 즐거움을 아침까지 흡족하게 누리고 난 그다음 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개운한 몸과 마음, 그리고 기지개를 켜면서 "아, 참 잘 잤다." 그리고 아침 스케줄을 넘기면서 '일도 해야지', '누구도 만나야지', '이것도 먹어야지', '여기도 가야지', '기도도 해야지', 교회 모임도 있지' 이런 것들이 싹 뭉개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무기력해지는 그 현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런 관계에 빠지고 나서 뒤통수라도 치는 경우에는 정말 칼로 찢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그 위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건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결과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과 그 속에서 죄가 어떻게 역할을 해서 어떤 결과를 몰고 올 것인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상황을 수없이 설정하십시오. 내가 지금 의심의 여지 없이 순전하게 사귀고 있는 이 형제가 어느 날 습격하듯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올 때, 그리고 행동으로 나에게 돌격할 때, 그리고 내가 신뢰하고 소중하게 여기던 자매가 마음의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에게 이렇게 유혹해 올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것을 아무 생각 없으면 안 되고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하십시오. 반복해서 생각한 것이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낼 수 있는 훌륭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군인은 수 없는 훈련을 통해서 군인이 됩니다. 훈련하지 않는 군대는 아무 쓸데 없습니다. 당나라 군대입니다. 아무 소용 없습니다. 끊임없이 훈련을 실제처럼 반복하는 군대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을 훈련하듯이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은 굉장히 기분 나쁜 일일 수 있습니다. 저렇게 순진한 형제를 바라보면서 어느 날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 묻는 것,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왜 기분 나쁘게 하나? 우리가 어디로 여행을 갔는데 분위기 있는 저녁에 우리가 그런 유혹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디렉션(direction)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매뉴얼대로 딱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죄에 대한 대응 능력은 훨씬 더 뛰어나고 유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언덕에서 미끄러지고 있는데 돌부리 하나만 튀어나와서 거기에 발에 힘만 줄 수 있어도 아주 떨어지진 않습니다. 올라올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결말을 미리 생각하면서 여러분이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시뮬레이션 한 것이 그 돌부리 하나를 마련하는 것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사귈 때 툭 털어놓고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십시오.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고 우리의 관계를 잘 가꾸어 가고 싶다.' '너무 소중하고 넌 너무 좋은 사람이야.' '미래에 대해서 확신할 순 없지만 나는 적당한 날에 프러포즈는 아직은 모르겠지만 결혼할 마음도 내게 있어.' '그러니 내가 부탁 하나 하자.' '우리 서로 이 관계를 소중하게 잘 가꾸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예 툭 털어놓고 솔직한 심정을 얘기하십시오. '나 너한테 성적인 유혹을 느꼈어.' '너한테 요구도 하고 싶었어.' '그런데 후회할 거 같아서 내가 못 했어.' '그러니 나도 그랬어.' '그날 만약에 네가 나에게 요구했으면 무슨 일이 이루어졌을지도 몰라.' '그런데 너무 잘 지나간 거 같아.' '내가 너한테 부탁하자.' '나 너무 사랑하고 무엇으로도 너를 잃고 싶지 않다.' '아직까지는 너를 만나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 같다.' "너 너무 소중하고, 나도 너 헤어지고 나면 너만큼 훌륭한 형제는 (못 만날 것 같아.)" '너만큼 착한 자매는 못 만날 것 같아.' '나는 너무 소중해.' '우리 한번 약속하자.' '우리 선을 잘 지키자.' '서로가 절제를 못 할 때 말리고, 말릴 때 우리 서로 들어주기로 하자.' '너무너무 같이 있고 싶으면 우리 부지런히 노력해서 결혼을 앞당겨 보자.'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떻습니까? 너무 현실적이지 않습니까? 깨끗하지 않습니까? 상황이 안 일어났을 때 (해야 합니다.)
상황이 일어났을 때 이야기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상황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때, 형제가 삼겹살 구워 먹느라고 정신없을 때, 들이밀듯이 한번 말해보는 것입니다. '이거 어떠냐?' 먹다가 삼겹살을 물고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감정이 없을 때 깨끗하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 생각 많이 해봤는데,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어.' '그런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러면 삼겹살은 맛이 없겠지만 어쨌든 이성적인 답변을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더 뜨겁게 사랑하자.' '옛날보다 더 소중히 여기자.' '그리고 사랑하자.' '모든 사람 앞에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자.' '부끄러움 없이 웨딩마치 올리는 그 날에 우리 함께 결혼식장에서 목사님 앞에 주례를 받자.' 얼마나 깨끗합니까? 솔직히 털어놓는 것입니다. '결코 네 입에서는 날 보고 네가 천연기념물이냐?' '이런 질문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입에서도 나는 오늘 천연기념물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도 안 나오기를 바란다.' 깨끗하게 이야기하면서 관계를 가꿔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당당하지 않습니까?
3. 은혜를 간구하라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미 이런 일에 있어서 실패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린도서를 보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예전에 너희가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목자 되신 주님께 돌아와서 성결한 성도가 되었느니라 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인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 중 누가 순결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구는 그걸 자랑할지 모릅니다.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순결한 사람 없습니다. 모두 죄인이고, 우리는 크고 적지만 성적인 죄에 있어서, 특히 마음으로 지은 성적인 죄에 대해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 중에는 몸으로써 죄를 지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을 용서하십니다. 아마 창녀와 기생이었을 마리아도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푼 미역 같은 검은 머리로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을 씻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지고한 성녀가 되었습니다. 지고한 거룩한 여자가 되어서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는 그 여자의 섬긴 일들도 기념하라는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실패가 있었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이 끝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에 못 이겨서 괴로워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지금부터라도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순결은 몸의 순결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순결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고 싶은 마음, 순전하게 살고 싶은 마음,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혹시 이런 일로 인해서 여러분이 정신적으로 많은 괴로움을 당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다면 속히 정신과 치료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돌이키십시오. 여기에서 물러서서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여러분 인생이 너무 소중하고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이런 일로 인해서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순결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현재적인 순결입니다. 오늘 주님께 돌아와서 회개의 눈물로 자신을 씻고 다시 당신의 품을 파고드는 모든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다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은 모든 사람은 결국 죄를 지으므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지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은 죄와의 씨름 속에서 그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그렇게 간절히 은혜를 받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들으십시오,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책을 읽으십시오, 교제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십시오, 간절히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소금이 결국 바다와 다르지만, 바다에서 취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소금은 민물에는 잘 녹지 않는데 바닷물에는 금방 녹습니다. 바로 성도의 고향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취한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을 떠나고 은혜를 떠나고 나면 세상 사람과 똑같아집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동안 맛보지 못한 세상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더욱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세상의 바다로 달려들어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이렇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받고 양심에게 비난을 당하고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처럼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누구십니까? 많은 사람이 여러분에게 이런 것쯤은 괜찮다고 가르치고 성(性) 모럴(moral) 해방을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여러분에게 요청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한 말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는 유일한 주체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율성에 있고, 주체성에 있고, 하나님이 주신 형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 형상은 의와 거룩함과 진리로 지음을 받은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교회, 그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가 사귀는 즐거움, 그리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 이런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런 성적인 즐거움 말고도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아름다운 즐거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기분 좋은 피로감 속에서 저녁에 잠들게 하는 보람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사귀게 되면 제가 개척교회 때부터 상당히 교회가 클 때까지 일률적으로 청년들에게 요구하던 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커플이 생기고 마음의 뜻이 세워지면, 즉시 목회자에게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연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요즘은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있지만 안 듣는 사람도 많습니다. 감시받고 조언받을 수 있는 통로가 없으니까 더 나쁜 길로 빠질 위험이 많은 것입니다. 이야기하십시오. "목사님, 우리가 사귀게 되었습니다." "결혼할 때까지 우리를 좀 잘 지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고 목회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경건하게 연애하고 사랑하십시오. (뜨겁게) 그리고 서로를 위하십시오. 아름다운 사랑을 가꾸어 나가십시오. 연애가 주는 즐거움은 정말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기쁨입니다. 그 속에서 정욕의 노예가 되는 대신에 오히려 사랑함으로 삶의 위로와 용기를 얻고, 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 혼자 헤쳐가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가슴 따뜻한 사랑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마나 놀라운 위로고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 아니겠습니까?
나는 여러분 모두가 연애하기를 바랍니다. 난 간절히 원합니다. 정말로 비혼의 부름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 좋은 형제자매를 만나서 따뜻하게 연애하고, 정말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이런 정욕과 세상의 풍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도 깊이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여러분이 살아간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유로운 양심입니까? 이러한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관계가 파괴된 가운데 괴로워하고 정욕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저녁때 교회에 나와서 그 형제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자유, 그 자매의 건강과 장래의 길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 줄 수 있는 영혼의 자유로움, 그리고 함께 만났을 때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목회자를 향해 부끄러움 없는 아름다운 관계가 되는 것,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자신들을 축복해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결혼하는 그 날에 결국 사랑하는 우리들이 열매를 맺었다는 기쁨 속에서 자신을 알아가는 최고 극치의 기쁨의 날이 되게 하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커플들은 얼마나 행복한 커플입니까? 그런 아름답고 희망에 찬 날들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로 들어가는 길은 항상 어둡고, 칙칙하고, 희미하고, 항상 자극적입니다. 그러나 성결로 이르는 길은 때로는 눈물이 있고 외롭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빠진 사람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자유가 있고, 쾌락의 노예가 된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주체성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언제든지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것,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뜨겁게 포옹을 해도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는 연인 관계,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입니까?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젊음을 주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나는 여러분이 이 말씀을 따라서 현대의 조류를 거스르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서 행복한 나날을 누리는 젊은이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참척에 슬피 울 때-장년편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 7:11-1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은 죽은 자를 떠메고 가던 행렬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렬을 만나 그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곳은 나인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은 갈릴리에 있는 아주 작은 동네였습니다. 사연을 이렇습니다. 그 나인성에 한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과부였습니다. 어떻게 홀로 됐는지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만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었는데 외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미 다 길러놓은 청년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도 여기에 안 나오는데 어쨌든 그 아이가 젊어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그 과부가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통곡하는 과부를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II. 참척에 슬피 울 때
A. 참척이란 무엇인가?
이 여자는 참척(慘慽)에 슬피 울었습니다. 참척(慘慽)이란 무엇입니까? 오늘날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인데 참척(慘慽)이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한국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자식을 잃은 슬픔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예비 의사의 길을 걸어가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는 두 달 동안 술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냈고, 두 달 만에 밥숟갈을 뜨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을 보내고 살겠다고 밥을 먹는 내가 너무 징그러웠다.” ‘칼 마르크스'는 1855년 당시 아홉 살이었던 맏아들 ‘에드가 마르크스'를 잃었습니다. 지독한 가난으로 아이를 먹일 수 없어서 거의 굶주림으로 죽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그는 가진 자에 대한 분노가 더욱 타오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10월 4일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들 ‘이면'의 죽음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위대한 장군이었으나 그는 탄식하였습니다. “내가 먼저 죽고 그 다음에 네가 죽는 것이 하늘에 이치거늘 어찌하여 너는 나를 버리고 먼저 갔다는 말이냐." “내 간담이 녹고 타는 것 같다."고 탄식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 ‘자하'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여의고 얼마나 슬펐는지 그는 눈이 멀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참척(慘慽)은 아들딸을 막론하고 자식이 먼저 죽은 것을 참척(慘慽)이라고 부르지만, 아들이 죽은 것은 상명(喪明)이라고까지 불렀으니 ‘눈이 멀어서 부모는 빛을 잃어버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슬픔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가 사랑스럽기를 부모보다 두 배는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어쩌면 손자 손녀를 낳으면 자녀보다 두 배나 사랑스러울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 부모의 죽음보다 자녀의 죽음이 가슴 아픈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냉정하기는 하지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오고, 자식이 죽으면 평생 가슴에 묻고 산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제가 왜 이 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오늘 성경이 바로 그 참척(慘慽) 혹은 상명(喪明)의 슬픔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인간 육체의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B. 영혼의 참척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기초로 영혼의 참척(慘慽)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구원의 원리는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누구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저절로 구원을 얻는 자녀는 없다.' 이런 뜻입니다. 거듭나야 하고, 그 거듭남은 회심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래서 그들이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영혼의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은 성경으로 볼 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영혼입니다. 죽어 있는 영혼, 그것이 바로 영혼의 참척(慘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불신자였던 시절에는 이런 이치를 몰랐기 때문에 불신하는 여러분의 자녀들,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교육을 많이 시키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장을 갖고, 유산을 많이 물려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자신의 행복도 그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젠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진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거듭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사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어떻게 돌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강남에 있는 부모들이 다섯 살 때부터 '아이를 서울대 입학시키기 프로젝트'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 프로그램을 한 번 보고 기함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철저하게 기계처럼 철저하게 하나하나 코스를 밟으면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열한 개의 학원을 돌리면서 서울대가 요구하는 아이로서의 자격을 모두 갖추도록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입시 제도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면서 스펙을 쌓고, 봉사활동을 하고, 해외 연수를 가고, 그다음에 이웃을 위해서 헌신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에 남기는 것입니다. 허위 스펙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결국 입학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 부모들의 노력이 때로는 정당하지도 않고 그렇게 교육시켜서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런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산 부모들은 자녀를 잘 교육시키겠습니까? 아닙니다. 강남에 사는 출신 학생들이 훨씬 더 도덕적이라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회에서도 승자가 되는 사람들로 나왔습니다. 부의 세습은 교육의 세습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강남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자녀들을 강남 엄마들처럼 교육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관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나는 없다고 봅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미치지 못합니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강남 엄마가 그들을 육신적으로 출세시키기 위해서 서울대에 들여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치열한 열심을 가지고 여러분은 자녀 영혼의 참척 상태에 대해서 한번 헤아려본 적이 있습니까? 자녀를 가지신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자녀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린 때가 언제입니까? 그런 부모를 삯꾼 부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목자만 참 목자와 삯꾼 목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도 참 부모와 삯꾼 부모가 있습니다. 삯꾼 부모는 자녀를 향한 진정한 눈물이 없습니다. 자녀의 영혼을 향한 눈물이 없습니다. 그렇게 삯꾼으로 자식을 기르는 것은 양육이 아니라 사육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소중한 신앙을 가질 기회를 모두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아이들이 점점 머리가 커갑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교회에 와서 아이들의 회심의 경험을 통틀어 볼 때 아이가 어릴수록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기가 쉽습니까? 머리가 커지고 세상에 물들수록 구원받기가 쉽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몇 살입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 아이들의 부모들은 말합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크면, 철이 나면 신앙을 갖겠죠." 그러면 여러분은 철이 들어서 신앙이 저절로 생겼습니까? 나이가 많이 들고 세상에서 고생을 하니까 저절로 믿음이 생겼습니까? 도대체 그런 복음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원수 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린아이부터 죽어가기 직전의 노파에 이르기까지 똑같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세월을 흘려보내는 부모들은 자녀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도 잘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선생님과 교역자들이 회심집회에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합니다. 그건 나쁜 게 아닙니다. 부모도 많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아이를 협박합니다. “너 이번에 회심 못하면 넌 영영 기회가 없다." 사실 아닙니다. 그리고 아이가 회심을 못했습니다. 너무 낙심하는 것입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얘가 이번에 회심해야 되는데." 당연히 설교할 때는 “이번에 회심 안 해도 괜찮습니다." 전도할 때 “이번에 안 믿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죽기 전에 언젠간 때가 오지 않을까요?" 그런 전도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순간이 어쩌면 당신이 전도자를 만나는 마지막 순간일지 모릅니다. 미루지 말고 오늘 결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당연히 그렇게 설교하지 않습니까? 문해력이 있어서 그걸 이해해서 교회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도 부모가 집에 가서 아이들을 잘 다독거리면서 사랑으로 품어주면서 “이번 회심 집회에서 꼭 회심하자. 네가 정말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주님이 만나주실 거야.” 그렇게 하고 열렬히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혹시 아이가 주님을 못 만났으면 “그래도 하나님은 널 사랑하셔. 엄마가 아빠가 널 위해 많이 기도했으니까 다음에 또 주님을 만날 때가 있을 거야. 아빠도 사실은 회심 집회에서 주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주일에 예배드리다가 주님을 만났단다." 이렇게 따뜻하게 위로하면서 아이를 격려해야 되지 않습니까? 부모가 회심 집회에서 자기 아이 회심 안 했다고, 아이는 낙심하지 않는데 혼자 덜컥하고 낙심을 합니다. 기도 안 하는 부모들이 가끔 그러는 것입니다. 삯꾼 부모가 참 부모 한번 흉내 내보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평소에 간절히 기도하며 아이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뭐냐 하면 부모들이 자녀들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자식이 자기 앞에 죽었다는 상상을 해야 됩니다. 육신으로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것 아닙니까? 참척(慘慽)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있을 때 여러분을 그렇게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돈이 없는 것을 가슴 아파하고, 사업이 잘 안 된다는 것이 가슴 아파했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여러분의 마음을 쥐어뜯고 갈기갈기 찢어놓았던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자가 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를 이렇게 많이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 은혜를 받은 나는 왜 하나님을 이렇게밖에 사랑하지 못할까? 이런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찢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자녀를 향해 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코로나가 끝났습니다. 술집 가보십시오.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음식점 가보십시오. 예약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로 꽉 꽉 들어차서 별로 맛도 없는 음식점이 표 받고 줄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거기를 다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자녀는 교회 안 보냅니다. 왜냐하면 혹시 코로나 걸렸다가 기말고사 못 보면 어떡하나 걱정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보게 해준다고 학교에서 얘기했습니다. 교육부에서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다 보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진정으로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녀에 대한 아픔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존 칼빈 선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의 구원에 태만한 사람이 타인의 구원을 위하여 성실하게 염려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남이 심판받을 것을 두려워하며 그들을 도울 수 없다." 결국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기도하고 너무 안타까워서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 보내십시오. 교회 보내십시오.” 합니다. “그냥 놔두세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면 교회에 왜 나옵니까? 광야에 가서 혼자 생활하십시오. 목회자들이 그렇게 전화를 해서 아이를 교회 보내라고 간곡히 할 때 떡이 나옵니까, 돈이 나옵니까, 수당이 나옵니까? 여러분도 울어주지 않는 자식의 영혼을 위해서 울어주는 교역자입니다. 부모인 여러분이 통곡해야 될 텐데 교사하고 교역자가 통곡하는 것입니다. 토요일 날 등불학교 수료식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나와서 소감문을 읽었습니다. 학생들이 한 다음에 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주일 학교 다녔는데 너무 교회 가기 싫어서 뺀질거렸는데 선생님이 심방을 오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할 수 없이 불려서 나갔는데 나가보니까 선생님이 운전대를 잡고 통곡하면서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선생님의 기도 때문에 자기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이 나이에 주일학교 선생으로 섬기고 있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미안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자녀의 참척 상태에 대해서 울지 않는데 타인이 울어줍니다. 남이 울어준다는 것입니다. 피도 살도 안 섞인 남이 울어준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울어주고, 교사가 울어주고, 자기 자식의 친구들이 울어줍니다. 눈물을 흘려줍니다. 은혜 받은 애들이 울어줍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 줍니다. 그런데 부모인 여러분의 눈에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눈으로 무엇을 찾아가는 것입니까?
회개하십시오. 그러다가 여러분 대학 들어가면 보내실 겁니까? 열린 교회에서도 고등학교까지는 간신히 교회 나오다가 대학 들어가면서 교회 끊는 아이들 많습니다. 언제쯤 정신을 차리시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집요하게 1년에 한 번씩 온 학생들을 심방하고, 그렇게 각 가정마다 찾아가서 영혼을 심방하는 교회가 흔히 있습니까? 총신대학원에서는 이름이 났습니다. 열린 교회 교역자 지원 못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1년에 한 번씩 대심방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물어본다고 합니다. “대심방이 뭐냐 도대체?" 요즘 시대에 누가 심방을 합니까? 그렇게 찾아가 주는 게 고맙지 않습니까? 왜 부모로서 기본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까? 회개하십시오. 여러분 자녀들의 영혼을 어느 날 한번 그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물론 그런 부모는 마음의 귀가 닫혔기 때문에 자식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아이가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통곡하며 슬피 우는 그 광경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4백억 대의 재산가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자수성가했는지 신문에도 유망 중소기업으로 대서특필될 정도였고 상도 받았습니다. 이분이 강원도에 지인의 상(喪)이 있었습니다. 문상을 갔다가 시간이 남으니까 카지노에 갔습니다. 하룻저녁에 7백만 원을 땄습니다. 돌아오면서 자기도 모르는 천부적인 재능이 자신에게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게 카지노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작심하고 한 번 돈을 긁기 위해서 갔다가 하루에 2천만 원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도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자수성가한 사람의 특징이 지고는 못 배기는 것입니다. 걸고 걸고 걸고 해가지고 4백억 기업을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마지막 판에 아내에게서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빨리 와.” “왜?” “미국으로 유학 간 우리 딸이 미국에서 죽었대.” “나 지금 아주 바쁜 회사 일로 시간이 없어.” 털커덕 끊었습니다. 나중에 제정신이 돌아오고 난 다음에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나는 미쳤었다고, 그 돈이 뭐라고, 노름이 뭐라고, 미국에 유학 간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오지 않고 카지노에 처박혀 있던 자기를 원망하면서 머리를 쥐어박았습니다.
여러분, 그게 부모입니까? 그러면 그 부모가 왜 그랬습니까? 평소에도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도박에 미치지 않았더라면 미국에서 딸이 죽었다고 할 때 아마 미친 듯이 공항으로 달려 나가 아무 비행기나 타고 가서 그 딸의 시신을 끌어안았을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왜 딸이 죽었다는 비운의 소식이 들렸는데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딴 거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위해서 왜 눈물 흘리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믿겠지.' 그것은 믿음 아니고 핑계입니다. 미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모든 신앙의 책임을 교회가 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착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적으로 자녀의 신앙과 구원의 책임은 1차적으로 가정에 있습니다. 부모인 여러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예수 믿지 않고 여러분이 일생을 마친다면, 여러분은 주님께 가서 반드시 한 가지 질문을 받을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준 은혜, 내가 너에게 준 수많은 기회를 네 자녀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였느냐?" 물을 것입니다. “네 자녀는 어디 있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마음이 딴 곳에 가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로서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무엇입니까? 그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자녀에게 여러분이 유아세례 줄 때 주님 앞에 서원했습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 아이의 신앙을 위하여 이 아이의 구원을 나의 구원처럼 여기며 우리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약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애들 교회 안 보내십니까? 왜 교회 안 보내십니까? 초대교회 같으면 다 치리 대상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을 때 치리 대상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주례도 안 서 줬습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십시오. 기본으로. 주일날 가방 들고 덜렁덜렁 교회만 오지 말고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라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에 대해서 여러분이 부모로서 무슨 책임을 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책임이 얼마나 엄중한지에 대해서 생각하라 이겁니다.
신대원 일학년 때 저는 경남 함양으로 전도를 갔습니다. 거기서 동네 사람들에게 제가 직접 전도했습니다. 밭일 나가는 아주머니 한 분을 만나서 심각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분이 아주 잊히지도 않는 표정의 40대 중반의 아낙네였습니다.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까?” “네." “그럼 나는 믿으면 천국을 간단 말이죠?” “네, 맞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모르고 죽었던 제가 모시던 시어머니 시아버지는 어떻게 되나요?” “안 믿으셨으니까 지옥에 가셨죠.” 그랬더니 이 아낙네가 정색을 하고 손을 흔들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더더욱 예수를 기독교를 믿을 수 없습니다.” “왜요?” “아니 평생 모시던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지옥에 있는데 나만 천국을 간다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차라리 고통 받는 지옥에서 우리 시어머니 시아버님을 모시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해머(hammer)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졌는데 나는 그렇게 반론하는 그 아낙네의 말에 단 한마디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그 사람은 시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어떻게 어떻게 턱걸이라도 해서 천국에 갔다고 치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지옥에 있습니다. 난 묻습니다. 거기가 천국이 되겠습니까? 보일 텐데, 천국이 되겠습니까? 두 번째 기회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만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열렬히 전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가지고 있든지, 여러분이 얼마나 뜨겁게 주님을 만났던지, 그건 소용없습니다. 전하다가 보면 불신자요 혹은 이교에 빠진 수많은 사람 가운데 목사의 자식, 그다음에 장로의 딸, 심지어 감독의 아들, 수없이 만납니다. 신앙은 각자 개인적인 것입니다.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영혼이 참척 상태에 있는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그 많은 날 동안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구원에 관한 지식을 주시고, 천국과 지옥을 계시하시고,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할지 경험을 주시고, 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게끔 여러분에게 힘을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가지고 자녀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눈물이 있습니까? 적어도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부모는 교역자가 심방해서 전화하고 선생님들이 심방할 때 “냅두세요. 우리 애들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뭘 알아서 하십니까? 뭘 알아서 하신다는 것입니까? 내버려두면 다행히 아이가 교회 안에 붙어 있으면 그 엄마 아빠하고 똑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난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처럼 그렇게 신앙 없이 그 애들이 자녀를 낳아도 자녀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 하기를 바라십니까? 그 믿음 가지고 천국 가실 수 있겠습니까? 정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주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까? 한 아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단정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 거기에는 그 아이 자신의 눈물과 통곡이 있든지, 그 부모의 눈물의 통곡이 있든지, 아니면 목회자와 교사들의 통곡이 있든지,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병에 눈물이 담겨지기 전까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로서 그 아이를 너무 사랑하지 않습니까? 목숨도 줄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전도사 때 목사님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목사님이 공부를 안 한다고 때려가지고 고막이 나갔습니다. 그거를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하다가 결국 나한테 얘기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사랑하는 막내아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목사님, 때리셨습니까?” 고개를 푹 숙이시면서 “죄송합니다. 고막이 나갔습니다.” 목사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도사님 혹시 내 고막을 떼어서 우리 아들에게 대신 심어줄 수는 없을까요?”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화가 나서 때렸을지라도 자기가 때린 뺨을 맞고 아들이 고막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이가 뺨에 느꼈을 그 아픔과는 비교되지 않는 아픔을 부모가 느끼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제 고막을 잘라서 제가 평생 이 귀를 못 듣더라도 이 고막을 떼어서 우리 아들에게 주면 안 되겠습니까?” 기꺼이 줍니다.
여러분 자식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심장을 떼어주면 자식이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난 그렇게는 못합니다."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모든 부모는 기꺼이 자식을 위해 심장을 떼어주고 눈을 감을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그건 부모도 아닙니다. 유전자 검사해 보십시오. 본인 자식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 자녀의 영혼에 대해서는 왜 그런 슬픔이 없습니까? 그런 희생이 없습니까? 간절히 우리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참척의 상태에 있는 자식의 영혼을 보면서 매일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슬피 우는 어미
<슬피 우는 어미>가 나옵니다. 이 여자가 어떻겠습니까? 과부에다가 외아들입니다. 그 당시 과부가 얼마나 많은 사회적인 천대를 받았겠습니까? 그 모든 수욕을 견디면서 자신에게 희망을 주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미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엄마는 그 아이를 보면 안 먹어도 배부르고, 그 아이가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그때 그 어미는 대사가 안 나옵니다. 통곡하는 장면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면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크게 울었으면 예수님이 과부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며 울지 말라" 하셨겠습니까?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스플랑크니스데’라는 말인데, ‘창자까지 떨린다’이런 뜻입니다. 그 사람들은 영혼이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창자까지 떨린다'는 것은 아주 ‘무한 감동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 여기셨으니'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울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며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눅 7:14下)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 빛이 있었던 것처럼, “청년아 일어나라”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살아났을 때 이 과부 어머니는 꿈을 꾸는 것처럼 감격스럽지 않겠습니까? 감격을 하면서 이 어머니는 기쁨을 다시 회복하면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결국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어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치성을 드린 것도 없었고, 무슨 물질을 드리고 제사를 드린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울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고, 주님은 가셔서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실 필요도 없이 이 불쌍한 과부의 그 외아들을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자녀를 위해서 돈을 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은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어떤 노동을 하라고 하면 병들어 연약한 부모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무슨 무슨 일을 해야 한다면 그 능력을 갖추지 못한 부모는, 재능이 없는 부모는, 자식을 위해 헌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울기만 하면 구원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자녀를 위한 눈물이 우리들에게 있습니까?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사람만 남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거 별거 아니야.” “우리 아들 회심 집회에 참석하고 나서 한두 달은 그래도 효과가 있더니 그다음에 똑같이 말같이 소같이 또 뛰고 똑같이 말썽을 부려.” 여러분도 그렇게 신앙생활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회심하고 은혜를 받으면 아이들도 어른하고 똑같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목양을 잘해서 매일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경건서적을 읽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부모와 함께 손잡고 기도하고, 이러면 회심의 효과가 오래 지속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회심은 했는데 집 안에 가봐야 아무도 경건 생활하는 사람을 못 만납니다. 엄마가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도 없고, 아빠가 성경 읽는 모습을 볼 수도 없고, 가정 예배도 안 드립니다. 그리고 아이를 놔 먹이는 것입니다.
학교에는 온통 세상 문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게 6일 동안을 살다가 주일날 교회 와서 달랑 예배 하나 드리고, 오후에는 또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몇 시까지 돌아오라고 아이를 윽박지르는 것입니다. 간신히 예배 달랑 드리고는 집으로 달려가서 부모 명령을 따라서 공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결국 2시간 대 6일 동안의 이 비율을 이겨야 되겠는데, 그 예배를 위해 부모가 눈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사경회 때 받은 은혜 두 달도 못 가서 다 잃어버립니다. 그게 애들의 모습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깊이 주님을 만나고 은혜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옛날에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갈급함도 느끼고 회개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회심을 어떻게 그렇게 하찮게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는 하지 않고 말만 많은 부모들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퍼붓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될 것 같으면 진작 됐을 것입니다. 잔소리 가지고 결코 사람 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자녀들은 부모 앞에서 부모의 말을 듣고 인성을 키워가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쯤 돼서 크고 나면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믿음 없이 살고, 성령 충만하지 않고, 가정에서 늘 갈등이나 하고, 부부간에 싸움질이나 하고, 자녀들하고 항상 사이가 원만하지 않고, 비인격적으로 살아가는데, 자녀들이 그 속에서 뭘 하겠습니까? 교회에서 뜨겁게 불붙여 놓으면 집에 가면 얼음판입니다. 그 위에다가 뜨겁게 붙은 숯을 얼음판 위에다 던져보십시오. 그게 금방 꺼져버리지 그 숯이 계속 불이 타겠습니까? 따뜻한 채로 가득 찬 화로에 그 불씨가 놓였을 때 잘 보존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 아이들의 회심이 보존될 수 있는 은혜의 화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자녀들 교회에 보내기 싫으면 보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책임지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주님 앞에 말합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눈물로 설교하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심방하고, 걱정이 될 때마다 전화로 연락하고 부모를 면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한사코 자녀를 교회에 보내지 않았나이다." 주님 앞에 가서 그렇게 변명을 할 때 우리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이고, 여러분의 눈에는 피가 흐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백성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를 목양하는 여러분의 목회자와 여러분의 선생님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당연하지. 그건 사명이니까." 그런 이야기는 하나님이 주의 종들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그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내게 맡겨진 자녀 신앙의 양육 과업을 남인 이분들이 애쓰며 수고해 준다는 마음을 가지고 항상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부모의 도리입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하나도 기도하지 않고, 아이들을 위해서는 눈물 흘리지도 않고, 그리고 마치 자기 자식을 교회에 보내기만 하면 교회에서 모든 서비스를 책임져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참 부모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자녀를 교육하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교육 좀 받고 소통 좀 하자는데, 어쩌면 그렇게 안 나옵니까? 내팽겨 칩니다. 여러분 개를 길러도 그 정도 성의 가지고는 기를 수가 없습니다. 개 기르는 견주들도 학의천에 모여서 양육의 경험을 나누고, 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어떻게 자기 개를 편하게 기를까 궁리를 합니다. 아프면 밤이라도 개를 들고 애견 병원으로 달려가서 치료를 해줍니다. 수술비가 150만 원이 나온다 하더라도 콩나물 하나 살 때는 아꼈었던 사람들이 그 애견을 위해서는 150만 원의 수술비를 마다하지 않고 고쳐달라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게 견주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로서 자녀들에 대한 마음이 견주만 합니까? 회개하십시오.
개 키우는 사람이 얼마나 애지중지 정성껏 그렇게 길렀는지 아십니까? 우리 직원 한 사람이 여기 농수산물 시장 앞에서 목격했다고 합니다. 건널목을 건너는데 개가 탕 하고 뛰쳐나갔는데 줄이 끊어졌습니다. 풀어졌습니다. 개가 미친 듯이 뛰어나갔는데 신호가 바뀌면서 차가 와서 그 자리에서 치어서 개가 피를 흘리면서 즉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견주 부부가 털썩 땅에 주저앉아서 망연자실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게 개새끼의 죽음을 보는 견주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자녀의 죽음을 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슬피 울기만 했을 뿐인데 예수님이 그 여자를 너무 가엾게 여기시기를 창자가 떨리시기까지 가엾이 여기셨습니다. 그 가엾은 여자에게 돈을 주면 되겠습니까? 지위를 주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생명을 연장시켜주면 되겠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아들밖에 그 외아들 이외에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어떻게 여러분의 자녀가 구원을 받게 될지, 어떻게 여러분의 자녀들이 신앙에 관심이 없는데, 형식적으로 교회에 간신히 다니고 있는데, 자녀가 예수를 믿고 변화될지 우리는 그 방법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 있습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간절히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아이를 살려주십니다. 이걸 여러분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자녀를 위해서 정말 더 많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놀라운 신앙을 여러분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녀의 구원을 위해서 갚는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신앙이 별로 없다면 여러분은 자녀를 위해 두 배나 더 기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결코 자녀가 여러분 같은 인생을 살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살게 하시겠습니까?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배나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결국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안타까워하는 깊이만큼 자식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전 회심 집회입니다. 교육관입니다. 거기서 저는 설교했고, 아이들이 저 바닥에 모두 모여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 저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했거나 대학에 다닙니다. 그중에 상당수가 아직 우리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사진에 나옵니다. 이 아이가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한번 표정을 보십시오.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오늘 회심하고 싶어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결국 만나고, 이 아이가 한 3학년쯤, 2학년쯤 됐을 것입니다. 저 속에서 진실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정말 예수님은 살아계시고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저를 구원해 주세요." 그런 울부짖음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예수 못 만나면 대학교 졸업해도 철이 없습니다. 장가가서 애를 둘씩 셋씩 낳아도 철이 없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저렇게 회심하는 아이를 보면서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그러니 나중에는 신앙이 들어올 거라고 하십니까? 언제 들어오는지 한번 두고 보십시오. 보십시오. 이번에 어린이 회심 집회 때 아이들이 이렇게 모였습니다. 자기 엄마 아빠들은 코로나가 무섭다고 교회에 안 나오는데, 코로나가 무서워서 그러십니까? 교회 나오기 싫어서 핑계 대느라고 그렇습니다. 기저질환자 이외에 말입니다. 그렇게 나와서 애들이 저렇게 가득 메우면서 주님 만나고 싶어 합니다. 굉장히 많은 애들이 저렇게 회심했습니다. 회심한 아이들 중에는 부모의 기도를 한 시간도 못 받은 아이도 있습니다. 마음이 찔리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보십시오. 그다음 보십시오. 369명의 청소년들이 나와서 지금 열띤 캠프를 하고 있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와가지고 아이들이 여기서 열렬하게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찬양 인도자가 전국의 교회를 다니는데 지금 이 시국에 이렇게 모여서 뜨겁게 찬양하는 교회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고 인생에 관한 질문, 신앙에 관한 질문을 두 시간 십오 분 동안 그 지루한 담임 목사의 설명을 귀 기울이면서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만약에 은혜 안에 들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기도 안 해서 그렇습니다. 누구를 핑계 대겠습니까?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만약에 아이가 수학 실력이 형편없고 처져서 도저히 못 따라간다면 여러분이 파출부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서 아이 과외 보내지 않겠습니까?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내버려 두면 부모 마음이 아닙니다. 대출을 받아도 아이들 교육시키지 않습니까?
그럼 여러분의 자녀가 신앙이 도저히 안 생길 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자녀를 위한 특별기도라는 거 해보셨습니까? 집 살 때만 하는 기도 말고 말입니다. 자녀를 위한 특별기도 해보셨습니까? 내 자녀의 회심을 위한 금식기도 해보셨습니까? 내 자녀를 위한 철야기도 해보셨습니까? “엄마는 이제 아무 소원도 없다." 마치 오스티아 해변에서 모니카가 회심한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를 대견하게 여기며 고백했던 것처럼 “아들아, 이제는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나는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단다." 실제로 모니카는 거기서 열병에 걸려서 객지에서 죽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마음은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로 부름을 받은 것은 단지 그 아이를 육체적으로 기르게 하기 만을 위하여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를 여러분에게 주시는 순간, 이 아이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으로 여기고, 이 아이의 구원을 여러분 자신의 구원처럼 여기며 이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이 아이에게 여러분이 믿는 신앙의 도리를 (대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찬송)
또 우리 자손들 다 주를 기리며
옛 성도들 같이 주 찬송하다가
저 세상 끝날 까지 주님을 찬송하는 그런 가정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을 부모로 부르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언젠가는 저도 죽고 여러분도 죽을 것입니다. 죽는 마지막 날에 우리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둘러싼 자녀들과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손을 잡으며 “아들아,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다." “너는 우리의 기쁨이었다." “네가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젓한 신앙을 갖고 가정까지 거느리게 되고 또 그 자녀들을 사랑으로 양육하니 아빠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빠는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너는 주님을 잘 섬기다가 천국에서 만나자." 그렇게 눈을 감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침표가 되겠습니까? 만약에 우리의 자녀들이 그때까지 예수를 믿지 않고 주님을 향해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후회가 가득할 것입니다. “주님 내가 살아있을 때 우리 자녀를 위해 전도하고 양육하고 돌볼 수 있는 수많은 신앙의 기회들을 잃어버렸던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버지 앞에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자녀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숙고하십시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의무가 부모의 의무입니다. 하나님 앞에 판단하시고 자녀의 구원과 신앙의 성장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다시 그 죄를 범하지 말라 - 청년편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2-1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매우 중요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잡혀온 여자를 용서해 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여자는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른다면 이 여자는 돌로 침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자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새롭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속에는 아주 많은 복음적인 진리들이 담겨져 있지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율법이 어떻게 대조되는지 그것이 우리의 성적인 실패에 대해 어떠한 교훈을 주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II. 잡혀온 여자를 용서하심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 체포되어 온 변명할 길이 없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이 여자를 대면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 앞에 이 여자를 세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 8:4 下) 무슨 의미입니까? ‘변명할 여지가 없이 이 여자의 죄는 사실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
A. 모세의 율법
예수님은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면 이제껏 예수님이 가르쳐온 용서와 사랑의 계명에 정면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더 놀라운 정치적인 트랩이 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에게는 사람을 돌로 쳐서 죽게 할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라의 주권은 로마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예수님이 이 여자를 돌로 치라 해서 민중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서 죽여버리면 살인죄를 예수께서 뒤집어쓰실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시 모세가 더 권위가 있었겠습니까? 예수가 권위기 있었겠습니까? 비교도 되지 않는 권위를 모세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늘처럼 떠받들고 있는 오경은 바로 모세가 쓴 저작들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모든 신앙은 바로 이 다섯 권의 율법책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모세 오경이라고 불리어지는 이 책은 모든 성경 중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으니 마치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예수의 말씀과 같은 정도로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만약에 하지 말라고 하면 온 백성들이 '예수는 이단자다.',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악한 자다.'라고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아마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는 꽃놀이패를 자신들이 쥐고 예수를 희롱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예수님은 지혜로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세의 율법에 관한 설명을 듣고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로 쳐라' 혹은 ‘그러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대신 조용히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글씨를 쓰셨습니다. 그 글씨가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마 거기다가 예수님이 사랑이라고 쓰셨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야말로 그것은 순수한 추측이지 땅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쓰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당장 대답하지 못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아 옳다구나, 드디어 예수가 코너에 몰렸구나.’ 생각하고 마치 권투 경기에서 코너에 상대 선수를 몰아넣은 채 수많은 ‘잽(jab)’들을 날리는 권투 선수처럼 예수에게 다시 물어보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말해보십시오.’라고 채근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만 되어 있지 이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 위에 하나를 더 추가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돌로 치게 되었으니 너희들이 쳐라.' ‘그런데 너희들에게 죄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이 여자에게 돌로 쳐라'고 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너희 중에 간음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돌로 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 가지 중요하게 살펴볼 것은 소위 얘기하는 ‘투석형’입니다. 돌을 던져서 죽이는 이 형벌은 이스라엘 율법에 있어서 가장 큰 극악한 형벌이었습니다. 극악한 죄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간음죄에 대해서 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구약에서 정한 것입니까? 이걸 먼저 알아야만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정신으로 이 문제를 풀어가시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이 간음죄의 심각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원칙을 이렇게 세우셨습니다. ‘큰 죄에는 큰 벌을, 작은 죄에는 작은 벌을'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조금 잘못한 것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형벌을 내리거나 어마어마하게 큰 죄에 대해서 거의 형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을 어떻게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러한 죄의 판단이 시마다 때마다 장소마다 사람마다 각기 달라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정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는 공평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구약의 많은 죄들 중 모든 죄를 이렇게 돌로 쳐서 죽이는 끔찍한 형벌로 다루셨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하나님이 큰 형벌로 다스리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고 또 이스라엘을 세우신 거룩한 질서 안에서 이 질서를 거스르는 매우 큰 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간음죄가 그렇게 엄청난 죄입니까? 더욱이 오늘날은 간통죄가 이미 폐지되었으니 부부 사이에 간통죄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고통 주기 위해서 처벌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시대의 정신인데 왜 성경에서는 이 죄를 이렇게 끔찍하게 다루었겠습니까? 요즘은 남녀가 성적 관계를 갖고 더욱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로운 성애를 즐기는 것을 심지어 권리로 여깁니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들조차도 이제는 양심의 가치가 별로 느끼지 않으면서 불륜과 성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때입니다.
이런 때에 너무 시대에 뒤진 생각이 아닙니까? 왜 이렇게 성경은 이 죄를 시대의 정신에 어긋나게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까? 참고해야 될 것은 이렇게 엄격한 법을 세웠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음하지 않았느냐? 아닙니다. 엄청난 많은 간음의 죄가 있었고 브엘바욜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간음하고 몇 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죽임을 당하는 예가 수시로 일어납니다. 집단적인 광기에 빠져서 음란의 죄를 짓고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엄격한 율법 하에서도 있었던 것이라면 이제 이런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 오늘날의 시대에 사람들이 이러한 성적인 타락을 하고 간음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이상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솔직하게 얘기해 보자면 성적인 쾌락만큼 우리 인간에게 자지러질듯 한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맛있는 음식이 주는 기쁨, 아름다운 장소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훌륭한 즐거움, 책을 읽으면서 맛보는 어떤 독서의 명랑함과 기쁨, 이런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 방면으로 생각이 꽂혀 있는 사람들에게 이 쾌락은 한 번 맛보고 나면 좀처럼 끊을 수 없는 아주 엄청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비이성적으로 성추행을 하고 혹은 불륜을 저지르고 혹은 혼전에 관계를 저지르고 인생에 심각한 위기를 겪고 심지어 사회에 명망이 있던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곤욕을 치르는 사람들을 신문 지상에서 많이 볼 것입니다. 정치인이나 사회인이나 교수나 혹은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을 막론하고 모두 성에 미친 사람들처럼 헐떡거리는 개처럼 이런 죄를 짓고 험한 꼴을 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저 사람들이 저렇게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정도로 대망의 길을 걷는가?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것이 주는 즐거움이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쓸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을 때가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한 번 뚜껑이 열리고 나면 열린 뚜껑과 함께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악들이 우리 삶의 질서를 허물어뜨려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는 이 시대의 풍조와는 상관없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저에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안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언니는요 수많은 남자하고 헤아릴 수 없이 쾌락을 즐기면서 사는데 늘 명랑합니다." “목사님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친구는 신앙이 물론 없기는 하지만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면서 끔찍이 쾌락을 즐기며 살아도 우리 가운데 삶의 의욕이 제일 충만하고 친구들이 만나면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구김이 없이 희망에 찬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럼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하고 여러분을 비교하시겠습니까? 화인을 맞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불로 지진 바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가 되면 노예의 집 주인이 도망가도 자기 집 노예인 것을 알 수 있도록 등에다 목에다 심하면 이마에다가 불도장을 찍습니다. 그러면 노예의 목에 옷이 벗겨지고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 인장을 부지직하고 찍습니다. 살갗이 타들어 가면서 연기가 나고 도장이 찍힙니다. 며칠 동안 이 노예는 괴로워서 견디지 못해 누울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냅니다. 결국 아뭅니다. 결국 아물면서 거기에 엄청나게 두껍게 흔적이 새겨집니다. 이상하게 거기는 만져도 감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버린 껍질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이치라는 것입니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과 여러분을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결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런 죄를 저지르게 된다면 여러분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칠흑과 같이 어두운 밤길을 지나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생각보다는 엄청나게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남긴다는 것은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풍조에 의해서 쉽게 이러한 정절의 관념을 포기하고 세상의 정신에 휘말려 들게 될 때 받게 되는 고통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에 대한 형벌도 죄의 크기에 비례하고 죄에 대한 가책과 고통도 그 죄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심의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 양심에 기능은 어떤 경우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화인을 맞은 사람은 하나님이 특별한 진노로 그들의 죄를 따라서 하나님이 화인을 맞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대하고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형벌을 당해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게 결국 죄가 가져다주는 맹렬함과 무모함, 담대함, 세 가지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죄는 발광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이 죄는 결과를 감추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죄의 결과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그 낚시를 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직 이런 죄에 빠지지 아니하였더라면 여러분이 깊이 경계하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매우 큰 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이 간음죄에 빠지게 되면 그 결과는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백배나 더 무시무시한 현실이 여러분 앞에 전개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미 이 죄를 범한 사람들이 있다면 제 설교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계실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그 죄를 짓고 3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나는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디 가서도 그런 간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조차도 사람들은 이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서 아주 과소평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매스미디어를 통해 우리들이 날마다 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색 영화 같은 거 눈을 뜨면 안 됩니다. 포르노그라피 같은 거 눈을 뜨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도 다 하는데, 내가 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계속 우리 마음의 생각을 허물며 간음죄의 크기를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경험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 길은 죽음의 길이 팬티 바람으로 가시밭길을 걷는 것 같은 무서운 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결국 여러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간음의 죄가 이렇게 큽니다.
그러면 도대체 간음의 죄가 뭘 그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가져온다는 것입니까? 첫째로 간음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던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가득히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되었고, 호흡이 있는 자마다 모두 주님을 찬송하도록 격려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간음의 죄에 빠졌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그의 마음에는 어두운 깊은 밤이 깃들었고, 하나님을 향해 아름답게 뛰놀고 춤추던 그의 영혼은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시 51:11上) 이미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시 51:12上) 주의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下)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위기를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거두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의 전임자가 바로 사울 왕이었습니다. 성령을 거두시자 사울은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죽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바로 그 앞에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눈물로 회개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입니다. 어떤 자매가 남성을 매우 사랑합니다. 둘 사이에 사랑이 너무 풋풋하고 뜨겁습니다. 그럴 때는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압니다. 사랑은 좋아함과 귀하게(valuation) 여기는 것입니다. ‘딜라이트 엔드 벨류에이션’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기뻐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너무너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랑이 식어지고 나면 기쁘지도 않고 소중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굳이 정절을 지킬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도가 간음의 죄에 빠질 때는 그 사람이 어느 한순간에 죄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죄는 오랜 시간 동안 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의 마음에 길을 예비했던 것입니다. 서서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를 멀어지게 만들고, 은혜에서 소외되게 만들고,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씀에 감화를 사라지게 해서, 그를 에워싸고 보호해주던 안전장치를 하나씩 하나씩 모두 착실하게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죄에 항거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간음의 죄가 덮치는 것입니다.
자, 이런 거 아닙니까?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너무너무 사랑하고 결혼까지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자가 갑자기 감옥에 가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끌려간다는 것보다도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어마어마한 슬픔과 고통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상대방 생각에 잠을 못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맨날 한 1년 동안 싸움질만 했습니다. 만나면 박 터지게 싸우고 ‘야, 우리 찢어지자.’는 이야기를 일주일에 서너 번씩 할 정도로 이미 관계에 금이 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군대에 갑니다. 그리고 그 자매가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럼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가는 거야. 군대에 가는거야?’, ‘이제 한참 동안 못 만나는 거야?’ ‘좀 서운하기도 하겠네.’, ‘가라 그러지 머.’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사랑이 끊어지고 나면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잃어버릴 게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느낄수록 죄에 대해서는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될 게 이것입니다. 눈물 흘리며 찬송 부르다가 간음하러 남자와 함께 침대에 올라가는 자매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앞에 뜨겁게 기도하고 회개하다가 찬송 부르면서 외간 여자와 침대에 올라가는 남자는 없습니다. 은혜로부터 소외되는 일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간음의 죄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고 성경의 명백한 기준을 버리고 모호한 세상의 기준을 근거도 없이 여러분이 따라가고 만약에 동의를 표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걸레이기 때문에 외간 남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십니까? 여기서 외간 남자는 세상이고 참 자신의 애인은 예수입니다. 스펄전이 자기의 설교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성도들에게 설교하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향해 침을 뱉은 세상의 입에 어떻게 키스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때린 그 손과 어떻게 악수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그렇게 미워하던 세상의 품에 어떻게 우리 순결한 주의 신부들이 안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가 정말 신자이겠습니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간음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파괴합니다. 저는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도 많이 보았습니다.
두 번째, 간음의 죄는 사람과의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결국 어떻습니까?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고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했었더라면 결혼에 이를 수도 있고 행복하게 될 수도 있었는데, 한순간의 정욕에 굴복함으로써 관계의 파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의 관계는 예전에 여러분이 나눴던 관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계곡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신학교 교수였을 때 일이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집회를 갔고, 거기에서 이런 순결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청년 하나가 아주 한사코 따라오면서 “교수님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누굽니까?” “저는 무슨 무슨 신학교를 다니는 학생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하고 얘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 집이 방배동이기 때문에 나는 지금 가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내일 일정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차를 타고 가면서라도 얘기를 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한테 그날 밤에 말을 안 하면 꼭 죽어버릴 학생 같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타라고 했습니다. 강북에서부터 꽤 먼 길을 차를 타고 오면서 학생이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있었던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넓게 말하면 기독교 대학이었고, 거기에 신학생이었습니다. 같은 클래스의 학생 가운데 예쁘장한 여학생이 있는데, 늘 오빠 오빠 하면서 너무 잘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여워해주고, 예수 믿는 학교니까 같이 기도회도 참석하고 동아리 활동도 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여자애가 어느 날 가까이 오더니 “오빠 좀 할 말이 있어.” “그게 뭔데?” “오빠 나 해 뜨는 거 보여줘.” 해 뜨는 거 보고 싶으면 저 혼자 가서 보면 되지, 왜 남의 총각 에게 해 뜨는 거를 보여 달라고 합니까? 해 뜨는 걸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바닷가를 가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쨌든 그 전날 근처에 가 있어야만 해 뜨는 걸 볼 거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해 뜨는 거 보여 달라고 그랬더니 노량진 수산시장을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래 네가 해 뜨는 거 보여 달라고 그랬지? 여기 회 많이 뜬다.' 그런데 얘는 진짜 해였습니다. 이 형제 녀석도 정신이 산란한 친구입니다. ’야, 우리가 그럴 사이냐? 왜 해 뜨는 거를 내가 너한테 보여줘야 되는데? 보고 싶으면 네 혼자 네 발로 걸어가서 동해 바다에 가서 보고 와. 왜 나보고 해 뜨는 걸 보여달래? 아니면 비디오를 보든지.' 그래야 맞는 것입니다. ‘그럴까! 나도 해 뜨는 거 보고 싶었는데.' 뭘 해가 뜨는 게 보고 싶습니까? 그걸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슨 해가 뜨는 게 그렇게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갔습니다. 해 뜨는 걸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당연히 남자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니까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아, 얘가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도 나를 좋아했는데 몸까지 바쳤으니 이제 나를 얼마나 사랑하랴.'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여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입니다. 남자의 속도 복잡한데 여자는 어떻겠습니까?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자애는 학교도 안 나오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전화가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시간에 전화를 안 받으면 엄청난 폭언과 폭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화통을 붙들고 한 시간에 한 번씩 수업을 받다가도 뛰어나가서 그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이 자매가 거의 절명하기 직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마어마한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목사님 제가 정말 이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뭐냐?" “저는 자매를 만나서 얘기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벌어진 일이니까 나는 너 사랑하고 너는 나 사랑하니 우리 결혼으로 이 잘못을 승화시키자." 승화는 개뿔 무슨 승화입니까? 결혼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매는 그때 나이 스물둘인가 스물셋 밖에 안 되었습니다. 스물셋도 안 되고 스물하나나 스물둘이었을 것입니다. 1학년인가 2학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할 처지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그 자매가 그렇게 못 견디니까 형제가 찾아온 것입니다. 집을 찾아왔는데 이 자매는 또 오빠에게 저 녀석이 계속 와서 나를 괴롭히니까 오빠가 가서 혼 좀 내주라고 했습니다. 오빠는 엄청난 운동 선수였습니다. 가서 반쯤 죽여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전화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혼을 하자고 얘기를 했더니 이 자매는 그거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이까지 임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등록금을 닦아세워서 결국 그 아이를 지우도록 종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다음의 일들은 엄청난 혼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 형제의 말을 통해서 듣기에는 그 자매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될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빠졌던 것입니다. 나는 그때 정신 심리에 대해서 그렇게 깊은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정신과를 가보라는 말까지 못 했습니다. 그게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 다음 얘기가 더 재미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말씀은 안 드리려고 했는데 그런 괴로움 속에서도 이 자매는 후딱 하면 며칠에 한 번씩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 손을 끌고 모텔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엊그제 번개 미팅에서 이야기한 한편으로는 그 죄에 빠져서 가책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미 그 쾌락의 맛을 봤기 때문에 상체에서 느끼는 양심의 가책과는 상관이 없이 하체에서 강력한 욕구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자매가 손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들이 결혼으로 맺어졌느냐, 못 맺어졌습니다. 못 맺어졌고, 그 형제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자매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에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학교에 아침에 왔을 때마다 훤칠한 키에 예의 발라 보이는 오빠를 만나고, 사랑스러운 동생을 만나고, 그렇게 서로 사랑을 키워갔더라면 대학을 졸업했을 것입니다. 급하면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도 양가의 허락을 받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진 게 아니라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정말 좋아하던 그 여자 애가 제가 보기에는 아주 순수한 여학생이었는데 그 여학생에게도 그 남학생이 소중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형제가 거의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이처럼 간음의 죄는 인간관계의 파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런 죄를 짓게 되면 세상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대인기피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의 가책의 무게도 너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에너지가 없는 것입니다. 칩거하게 됩니다. 문을 딱 걸어 잠그고 잠수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 같은 경우에 미친 듯이 돌아다니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피합니다. 왜냐하면 혼자 조용히 있는 어두운 밤에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 그리고 잘 때 기도는 해야 되지 않습니까? 기도할 때마다 들려오는 ‘나는 네가 며칠 전에 한 그날 밤에 일을 알고 있다.' 끊임없이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걸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 사람들이 불친절하게 대하게 되고 에너지가 없으니까 평소에 자신과 절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서포트 할 수 있는 사회적인 힘을 내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친구들도 급속하게 멀어지게 됩니다. 만약에 절친으로 지내는 사람이 서너 번만 퉁명스럽게 대하고, 문자 씹고, 전화 씹고, 잠수 타면, 여러분이 웬만한 사이 아니면 집에까지 찾아가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여러분 그렇게 매달리겠습니까? 싫으면 그만두라 그러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치정 관계에 얽힌 일의 경우에는 매우 복잡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연예인 중에 한 사람이 고백을 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오은영 박사에게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목회자였습니다. 목회자인데 그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교회 안에서 결혼한 여성이었습니다. 남편이 와서 이 연놈들 죽여버린다고 칼을 들고 교회에 와서 난리를 치는 광경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몇 십 년 동안 끊어졌는데 감옥에 들어가서 불쑥 연락을 해서 ‘너 내 보석금 1억 6천만 원 내주면 좋겠다.' 이런 통지가 온 것입니다. 오은영 박사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용서가 안 되면 용서하지 마세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다른 답변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간음의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린아이에게 어마어마한 상처를 남기고 상대편의 가정에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파국으로 몰아넣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죄 가운데 그렇게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진 죄가 몇 가지나 되겠습니까? 살인 이외에 또 다른 죄가 그 정도까지 파괴력을 가진 죄가 있습니까? 아마 없을 거라고 봅니다. 간음과 살인이 거의 동급의 죄로 취급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세 번째는 자신과의 관계를 파괴시켜버립니다. 내가 지금도 이렇게 흔들리지 않고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자아의 단일성 때문입니다. 자아의 단일성을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복잡하지만 내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한 사령부를 가지고 전체적인 지배력을 형성하면서 질서 있게 움직이기 때문에 내가 오늘도 가지런한 모습으로 나다움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간음의 죄를 저지르는 순간 자아가 수십 개로 분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자아와 쌈박질을 하면서 이 마음에서 예전에는 겪지 못했던 대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자아는 죄를 지었다고 자책을 하는가 하면 또 한 자아는 ‘며칠 전에 네가 느꼈던 그 쾌락을 오늘 저녁에도 내게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자아가 생깁니다. 두 자아가 충돌하면서 쌈박질을 합니다. 옆에 있던 자아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인생을 왜 이렇게 사나?', ‘내가 진짜 살아야 되나?' 라고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또 한 자아는 ‘오늘 이 모든 고통을 끝내는 좋은 방법이 있어. 자살해버리는 거야. 그럼 모든 게 다 깨끗이 끝나는 거야' 수십 개의 자아가 안에서 찢어져서 쌈박질을 하면서 도대체 어느 것을 찾아서 갈피를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보며 쾌락에 자신의 몸을 맡기는 것도 잠시지 언젠가는 그 흥이 끝나고 나면 다시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찢어진 자신을 봐야 하는 그 고통을 나는 여러분이 모르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고 어마어마한 죄와 갈등입니다. 무시무시한 고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거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혹시 강신주 박사라고 아십니까? 전혀 모르는 눈빛인데 어떻게 합니까? 세상에 정보가 그렇게 없이 살아가서. 철학자입니다. 소장 철학자고 지금은 중년으로 접어들었는데 한때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휩쓸었습니다. ‘힐링캠프’에도 출연을 하고 특히 그가 만들어 놓은 벙커 특강은 아직까지도 여러 학자들과 함께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기서 소위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을 아주 광범위하게 전파합니다. 그분의 활동에 흥미를 느껴서 돈, 섹스, 자본주의 소비, 등등 벙커에서 이루어진 특강들을 여러 권으로 묶어온 책들을 제가 여러 권 읽었습니다. 그리고 가서 특강도 들어보고 했는데 그중에 한 가지 상담 사례가 있었습니다. 공개적으로 질문을 한 것입니다. 특강 한 다음에 질의 응답할 때 한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사실 제가 고민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털어놓은 게 뭐냐 하면 젊은 남자 청년인데 여자 청년에게 지인인데 너무 딱하니까 좀 돈을 빌려달라고 그래서 돈을 빌려줬다고 합니다. 그 금액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는데 제 느낌에 수천만 원은 아니고 몇 백만 원 정도 되는 그래도 꽤 큰돈을 빌려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돈을 그 여성이 잘 못 갚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빨리 돈을 달라고 하고 이 여성은 돈을 못 갚고 있던 터였는데 훅 하고 여성이 치고 들어와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돈을 안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서 내가 꼭 필요할 때 돈까지 빌려주고 여러 가지 많이 나를 돌봐줘서 고맙다.' ‘우리 여행 안 갈래?' 이 남자는 그 후로 머리가 하얘지고 복잡해져서 이게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벙커 특강에 와서 강신주 박사에게 자신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은 것입니다.
강신주 박사는 당연히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분이 뭐라 그랬는지 아십니까? “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 여행의 목적은, 두 사람 여행의 목적은 여행이 아니라 섹스입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당신이 가장 괴로울 것입니다." "그때의 고통의 크기는 맛보는 즐거움보다 훨씬 클 테니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가지 마세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가지 마세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이 사물의 결과를 꿰뚫어 봅니다. 그래서 그게 뭘 가져오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너무 혼란스럽고 끔찍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그 죄가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지게를 지고 날품을 팔고, 오토바이로 라이더를 하면서 근근히 먹고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질서 잡힌 하나의 나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삶의 무게가 비교적 견딜 만합니다. 그런데 이게 갈가리 찢길 때, 그때 우리는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정신적 정신이 어려운 증세까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매들이나 형제들 중에는 까다로운 사람하고 연애하다가 결국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쨌든 갈등이 심해서 괴로워하다가 불면증에 걸리고 상사병에 걸리고 혹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위에 간음이라는 죄를 짓고 여러분 자신이 갈가리 찢겨질 때 어떻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이 어리석은 것이고 필경 결국 화살이 배에 맞으면 간을 꿰뚫게 되는 것처럼 경고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의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모든 것을 다 설득하실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언적명법(定言的命法)으로 그들에게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유 달지 말고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마라. 이렇게 해야만 너희들이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첫 번째 계명이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이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까지 흘러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에서 이 계명을 어길 때 가져오는 결과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모두 배려하신 하나님께서 그 죄의 크기만큼 비중 있는 권위를 가지고 커다란 명령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 그 형벌이 바로 돌로 침을 당하는 형벌입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누군가가 이 죄를 짓고 성난 군중들에 에워싸여 있고 그 군중들이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합니다. 돌멩이를 던질 때 그냥 툭 하고 던지는 게 아닙니다. 죽일 목적으로 의도를 가지고 머리를 향해 가격을 하는 겁니다. 여기저기 돌멩이가 날아오고 터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쓰러지고 피 묻은 돌멩이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생각할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형벌이지 않습니까? 사실 역설적으로 보면 결국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시무시한 형벌을 거기다가 경고하심으로써 절대로 그런 죄를 짓고 불행에 빠지는 일은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B. 예수의 율법
그러면 예수님의 율법은 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완성했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돌로 치지 말라, 이것이 아니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그런데 다행히 거기에 모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거기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다행히 이 정도까지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양심에 뜨끔한 가책이 찔려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모두 죄인이며 사람들에 따라서는 자신도 이렇게 돌팔매질을 당하고 죽어야 할 정도의 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도저히 돌멩이를 들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집었던 돌멩이들을 모두 내려놓고 한 사람 한 사람 흩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렇게 위협을 가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를 보임으로써, 사랑을 알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형벌을 밝히 보여주시고 그 형벌 때문에 죽임당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였습니다. 즉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크고 작은 죄가 있었기 때문에 돌멩이를 들어서 이 여자를 칠 수 있는 율법적인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적으로는 자격이 있을지 모르지만, 율법을 원래 우리에게 주신 목적인 완성되어야 할 양심의 율법으로는 도저히 이 여자를 돌로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 그 여자를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남아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셨고 율법 중 어느 것도 어기신 적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돌멩이를 들어서 그 여자를 쳐서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존중하면서도 그런 식으로 모세의 율법을 성취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 용서하시는 사랑
그리고 예수님은 돌멩이를 드는 대신 하나님의 또 다른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 8:10 下) 여자가 눈을 들어 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사람들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거기 서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요 8:11) ‘정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가 있다고 판결을 내릴 뿐만 아니라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죄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은 다분히 형법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행동에 접근하지만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관계라는 측면에서 접근을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저질러 손해를 끼쳤으니 대가를 받아야 된다는 식으로 보복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결국 이 죄를 통해서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모든 인생을 지탱해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의 근거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깊이 경험했던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회개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했는데 죄가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회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이 회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음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바로 성령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명이 이렇게 아무런 대책 없이 죄를 짓고 이렇게 아무것도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사람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파괴되어 내팽개쳐져 버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거두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간음죄를 짓고 그 형제처럼 비교적 순수해서 '내가 잘못했지만 내가 널 책임질게.', ‘우리 사랑으로 이 잘못을 완성하자.'라는 아주 이성적이고 비교적 착한 남성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세 번 간음을 하고 난 다음에는 육체의 쾌락의 도구로 그 신비감을 잃어버리고 가차 없이 여성을 버리는 남자들도 있고, 남자들을 그렇게 버리는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와 똑같이 내 마음속에서도 그를 같지 않게 여겨버린다면 상처가 적겠지만 이런 간음의 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남아 있고 한쪽이 변절한 경우에 그것은 단순한 간음의 죄가 가져오는 고통 이상의 인생의 비애 속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를 성의 쾌락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용납해야 할지 그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결국은 이 죄가 가지고 있는 무서운 흡입력입니다.
이런 죄에 빠진 사람들은 결국 끊임없이 가책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그 가책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할지라도 아무 곳에서도 가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깊은 무기력 속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신학교에 다니면서 이런 죄에 빠졌던 학생들을 여럿 상담했습니다. 가다가 가다가 마지막에 찾아오는 것이 제 교수실이었습니다. 두드리면서 예외 없이 많이 웁니다.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위로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오랫동안 돌봅니다. 어느 학생은 일어서기도 하고, 어느 학생은 끝내 일어서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보여줍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회복의 시간을 걸립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여러분을 용서해 주십니다. 더 큰 죄도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는 용서받기에 너무 큰 죄라는 것은 없습니다.
한 번 이런 기회에 빠졌다고 해서 여러분이 인생을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이 설교를 듣고 나도 여러분의 마음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여전히 힘들고 외로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신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리고 간음한 이 여인 앞에서 “나도 너를 정지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희망을 가지십시오. 목회자에게 고백하십시오. 할 수 있으면 그렇게 고백 하십시오 그리고 특별한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좀처럼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회자에게 영적인 도움을 받고, 필요하면 의사에게 정신적인 도움을 받고, 그리고 또 친구들에게 사회적인 도움을 받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한 번 넘어진 것으로 크게 상처를 입었지만 여기서 내 인생을 끝장낼 수 없다는 마음을 굳게 가지셔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던 사도 바울이 너희들도 한때는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와 목자의 양무리가 되었노라고 하며 그들의 전력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지독한 죄인들이었는데 우리가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의 때를 위해 죽으신 것이니, 여러분이 예수에 대해서 소망을 품고 거룩한 지식을 따라서 회복의 길을 걸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반드시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넘어진 것 때문에 여러분이 결코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1. 다시 범죄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다음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여자는 가서 어떤 길을 걸었겠습니까? ‘다시는 이 죄에 빠지지 않고 건실하고 정숙한 여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두 번째, ‘죄를 용서받았지만 그러나 이 여자는 쉽게 그런 죄에서 떠날 수가 없을 것이다. 또 옛날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우리는 두 개의 가능성이 모두 열려 있다고 봅니다. 이 여자가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계기로 삼아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갖게 되고 옛 생활과 결별하고 매일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간절한 기도와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았다면 마치 막달라 마리아가 죄인인 여자였다가 성결한 거룩한 여자가 되어 장례를 치르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눈물을 흘리며 푼 미역 같은 검은 머리로 그의 발에 흘린 눈물을 닦아주었던 성스러운 여자가 되었던 것처럼 이 여자도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만약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과연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왔는데 이것이 처음이었는지 두 번이었는지 세 번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다는 것을 볼 때 결국 이 여자의 죄가 이것이 일생의 첫 번째 단 한 번의 죄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간음의 죄, 음행의 죄를 무섭게 다루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모두 행하는 죄는 자기 몸 밖에 있다. 그런데 음행의 죄는 그 몸 안에 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모든 죄들은 죄를 짓는데 이것이 바깥에 있습니다. 바깥에 있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환경이 되고 어느 정도 되면 이게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간음의 죄는 인간의 본성 깊이 쾌락을 좋아하는 부패한 심령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모든 여건이 다 갖춰진다고 하더라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죄의 정념을 자기도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은혜 안에 살지 못했다면 그는 그 음행이 가져다주는 간음이 가져다는 달콤한 쾌락을 결코 말하자면 끊어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섹스홀릭'이라고 아실 것입니다. 섹스 중독증입니다. 걸린 남성도 많고 여성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친소관계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성 관계의 처음이자 마지막 의미입니다. 그렇게 아무하고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한 때는 정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걸레 같은 마음을 가진 남자와 여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몸 안에 있는 죄가 끊임없이 자라서 무성하게 깃들어서 그를 어떤 욕망으로 데려가기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음의 죄가 가지고 있는 무서운 음욕입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 여러분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던 감추어진 욕망이 확 고개를 들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상할 수 없는 기세로 뻗어나갑니다. 그래서 램프에 들어 있을 때는 잠잠하던 지니가 나오고 난 다음에는 누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힘을 가지고 휩쓸고 다니듯이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음욕은 온 여러분의 삶을 휘저으면서 초토화시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나이 많은 세월이 지나가도 그것들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 인간과의 관계의 파괴, 자기의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혹은 중독증에 걸려서 자기 자아를 아예 망각해 버리고 살아가는 자아상실의 영혼에 화인을 맞은 사람처럼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신실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에 대해서 개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가 그것에 대해서 늘 열린 마음을 가지고 모든 남자들과 간음을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 심성을 가진 여자라고 했을 때 과연 그 여자와 함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고 싶겠습니까? 남자가 그랬을 때 과연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그럴 때 과연 그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진짜 포르노의 세계를 접근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 웬만한 사람은 구토가 나서 볼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일들이 그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n번방 사건 같은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 생전 처음 일어난 것처럼 보도하는데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늘 있었던 일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입니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은 이미 니콜라스 게이지가 주연했던 지금부터 한 십오 년 전에 나왔던 라는 ‘스너프(snuff)' 영화에 이미 예고되었던 광경입니다. 스너프(snuff)가 무슨 장르인지 아십니까? 단순한 포르노그라피가 아니라 거기에다 살인과 폭력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섹스를 하면서 사람을 죽여버리고 목을 잘라버리는 그런 광경입니까? 우리 정상적인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토할 것 같아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쾌락을 넘어서 아주 가학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끝을 모르는 무서운 심리입니다.
염려하는 건 이것입니다. 간음의 죄에 한 번 빠진 사람이 두 번 빠질 때는 한 번 빠질 때의 망설임에 5분의 1이면 되고, 세 번 빠질 때는 5분의 1 중에 3분의 1이면 됩니다. 네 번 빠질 때는 그 5분의 1의 3분의 1의 절반이면 됩니다. 결국 여러 회 반복되고 나면 마음에 아무런 준비가 없이 자신의 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간의 신뢰와 신실성 그리고 사회에서 질서의 신실성 같은 것들이 모두 파괴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갈 때 결국 어디에서 인생의 확실성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참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름다운 꿈을 꾸며 살아가던 젊은이들이 결국 그런 죄로 꿈을 모두 반납하고 그 아름다운 젊음의 시절들을 어둠 속에서 신음하면서 고통을 받으며 갈가리 찢어진 자아와 함께 말하자면 불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이 몇 번 고생하고 나면 젊은 시절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십 대에 그렇게 산 사람들은 삼십 대에도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같은 삶을 살게 되고, 사십 대 오십 대 되면 그런 삶을 지속할 가능성이 더 많이 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이 주시는 단정한 삶의 질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최대한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입니다.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죄에 빠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두 가지만 오늘 기억하십시오. 두 번째, 이렇게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끊임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나의 양심의 가책 그리고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성적인 욕구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 같은 욕망이 부리는 광란의 춤 속에서 나는 통제할 수 없도록 갈가리 찢어졌는데, 나는 어떻게 실제적인 회복의 길을 걸을 것인가? 지금 우리는 돌에 맞을까 봐 무서워서 이 설교를 듣고 있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간음의 죄를 저질러도 지금은 아무도 여러분을 돌멩이로 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회의 법정에 간음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발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의 치리는 남아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영적인 치리이고 여러분의 인신을 구속하거나 혹은 폭력을 폭행을 가하거나 여러분에게 형벌을 가할 어떤 수단도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그보다 더 무서운 자기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견딜 수 없이 자기를 용서할 수 없어서 스스로 씨름하고 고뇌하고 갈가리 찢겨진 자아 속에서 분열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로는 위로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복의 길을 구체적으로 걸어야 하겠습니까?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10. 가정, 회심의 화로입니까? - 장년편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말라기는 성경을 기록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방금 우리가 읽은 성경 구절은 구약성경 전체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한 말씀이 마지막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게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땅을 크게 징벌하실 것”이라는 경고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어서 신약성경이 시작됩니다. 신약성경이 시작되면서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이 오늘 말라기 선지자가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의 상징이었고,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도 말씀과 능력이 뛰어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능력의 선지자를 보내심으로써 신약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임합니다. 그 말씀이 바로 이 아이가 주의 두 눈앞에서 큰 자가 되며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게 할 사람이라는 이야기로 이 사람의 출연이 예고됩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이 구약과 신약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동시에 신약을 여는 나팔수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이 끝나는 지점도 가정에 관한 이야기로 끝나고, 신약이 시작하는 지점도 가정에 관한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에게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가장 뚜렷한 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가정에 속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고 또 경건한 자녀를 낳아 경건하게 기름으로 그도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것, 이것이 크리스천 가정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이렇게 되지 못할 때 그는 신앙이 온전하게 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매우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음 세대의 교육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거의 신경 쓸 틈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미 먹는 문제는 다 해결된 사람들입니다. 40년 전을 비교하면 여러분은 너무나 풍요로운 물질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정을 돌보지 아니하고 이 세상 살기에 급급해서 자녀의 신앙을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그런 여러분의 행태가 교회 안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저는 지난 주일에 심하게 탄핵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불편한 설교였을 수도 있었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아이들의 신앙교육은 교회에 위탁된 것이 아닙니다. 1차적으로 여러분의 가정에 위탁된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신약시대에 교회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갈라디아 교회’라고 하니까 여러분은 갈라디아라는 도시 한 군데에 빨간 벽돌로 지은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가 하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교회 없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교회가 있으면 로마가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회라는 것은 갈라디아에 있는 예수 믿는 가정들의 총합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냥 가정 단위 하나하나를 교회라고 보고 눈으로는 건물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예수를 믿는 가정들의 연합을 갈라디아 교회라고 부른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불린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가정에서 자기 자녀의 신앙교육을 담당했겠습니까? 당연히 경건한 엄마와 아빠가 그 아이의 신앙을 책임졌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자녀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을 가지고 가끔 교회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는 결코 교회를 탓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부족해서 자기에게 일차적으로 위탁된 자녀들인데 그 자녀가 아직도 회심을 하지 못하고 또 회심을 했어도 다시 은혜에서 미끄러져서 방종하게 살아가는데 그것을 자기의 책임이라고 느끼지 않는 부모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의 자녀를 담당하고 있는 학교 선생님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주일학교 선생님 이름은 알고 있습니까? 그 부서의 교역자는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이 경고가 아프겠지만 이것은 여러분의 자녀가 예수를 믿지 않을 때 앞으로 당하게 될 쓰라린 눈물에 비하면 이건 예고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여러분이 고통을 당해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지금 이렇게 교회를 다녔지만, 부랑아로 자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세상에 막돼먹은 인간으로 자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그걸 보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신앙이 없는 것, 전혀 회심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조금도 마음에 안타까움이 없는 부모들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 저한테는 자녀에 대한 상담 메일이 많이 들어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들어오고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도 들어옵니다. 그러면 내가 종종 답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녀를 향한 모든 올바른 염려와 헌신은 자기 영혼에 대한 염려와 헌신에서 나온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를 염려하지만 내가 보기에 염려되는 사람은 자녀를 염려하는 당신 자신이다.”
II. 가정, 회심의 화로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가정이 회심의 화로>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A. 하나님을 떠날 때
제일 먼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 사랑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낯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마음이 떠날 때, 그때 아비에게서 자식 사랑이 사라지게 됩니다. 여기서 아비라고 얘기했지만 어떻게 아버지만을 의미하겠습니까? 부모 모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아버지가 가정을 대표했으니까 아비의 마음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모가 하나님을 떠날 때 부모는 참된 자식 사랑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랑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새끼 더 먹여야지, 더 좋은 옷 입혀야지,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해야지, 더 건강하게 키워야지, 더 좋은 학교 보내야지, 이런 욕망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인 나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사랑 안에서 그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육체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식을 보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가면 잘 길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세상 살아보니까 인생이 그렇습니까? 만약에 그랬다면 여러분 중에는 잘 살고 좋은 학교 나온 사람들은 절대 예수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생의 무게는 그런 데서 오는 게 아닙니다. 그걸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신 것 아닙니까? 당연히 그런 인생의 무거운 무게가 내 자식에게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 인생의 근본적인 무게를 내려놓게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나머지 인생의 많은 성공이 의미를 가진다고 여러분은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자녀에게도 그걸 똑같이 해야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교역자가 전화를 해가지고 “이제 코로나도 끝났으니까 아이의 신앙을 위해서 교회 보내십시오.” 하는데 “대학 가면 보내겠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옵니까? 그때까지 살아있을 줄 어떻게 압니까?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교회에 그런 식으로 반응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학교에서 선생님이 전화 올 때 그딴 식으로 반응을 합니까? 누구 아이입니까? 교역자 자식입니까? 교회의 자식입니까? 여러분 자식입니다. 여러분도 눈물 흘리며 기도해주지 않는 그 자식을 위해 교역자가 눈물로 기도하고, 선생님들이 울어주면서 그 아이의 신앙을 위해서 교회 보내라고 하는데, 지금은 고3 때라 바쁘니까 대학 가서 보자고 합니까? 나는 신앙을 가진 부모들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뭐 하러 자기는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옆에서 선생님하고 통화하는 전화를 듣는 그 아이의 마음속에 무슨 신앙이 들어가겠습니까? ‘아, 이런 거구나!’ ‘우리 엄마 아빠 마음에 있는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 이따위구나!’ 얼마나 중차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사명을 여러분이 해태(懈怠)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게으르고 나태하게 포기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자식이 그렇게 한다고 좋은 대학 들어간다는 보장 절대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경건한 고등학생들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렬하게 하면서 서울대 의대, 법대, 다 들어갔습니다. 물론 못 들어간 애들도 있습니다.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한창 예민한 시기에 신앙이 들어가서 하나님 의지하며 살아야 하고 이 세계에 대한 관점이 막 생겨야 할 그 나이에 아이들을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해서 여러분 나중에 아이들이 신앙을 버리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뭐라고 변명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흘린 눈물의 열 배는 교역자들이 더 흘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식을 기릅니다. 계모 아닙니까? 혹시. 친부모 맞습니까? 계모 같습니다. 계모도 신앙 있는 계모는 그렇게 안 합니다. 어떻게 교역자한테 그걸 전화에다 대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까?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부모의 마음이 신앙에서 떠나게 되면 자식을 육으로만 사랑하지 영으로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영혼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밥 벌어 먹고살아야 하는 기계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시편에서 말했듯이 열심히 재산을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이 세상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에 대해서 반감을 여러분이 가지셔도 좋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시는 마음이 아닙니다. 얼마나 안타까우면 내가 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자녀의 교육에 대해서 그렇게 하니까 결국 그렇게 교육시킨 자식이 절대 효자 안 나옵니다.(그 안에서) 그리고 끔찍이 대학 입시 학교 공부를 배려해 준 여러분의 배려와 사랑이 아이들에게 사무치는 게 아니라 신앙과 인격의 모순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해하십니까? 아이들이 말을 못 해도 마음속으로 모두 헤아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 집사라고 하면서 저녁때 술이나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집에 들어가서 횡설수설하면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갈가리 신앙이 찢어지는 것입니다. ‘저게 예수 믿는 집사인가?’ ‘우리 아빠는 집사라면서 어떻게 저렇게 술을 먹고 와서 저러고도 자기가 신앙이라고 가지고 있는가?’ 아이들이 그런 생각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합니다. ‘우리 엄마는 예수 믿는 권사라면서 어쩜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을까?’ ‘어쩌면 저렇게 사회생활에 있어서 작은 이익 때문에 부정직하게 살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에서 욕먹는 것은 깊은 영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시민적 소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개신교회 수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과 행위가 일치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걸 자녀들에게 보여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자녀에게 그런 식으로 신앙의 가치에 대해서 거꾸로 가르칩니다. 그 아이가 부모를 통해 뭘 배우겠습니까? 교회에서 열심히 가르쳐주는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집에 가서는 허물어뜨려버리는 것입니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교회 교육을 허물어서 되겠습니까? 회개하십시오. 결국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도 부모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실 정도의 엄청난 죄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이 아니라 가정이 다 깨뜨려지고 파괴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나라도 있고, 민족도 있고, 사회가 있는데, 가정이 왜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정도로 엄청난 것일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사랑의 관계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별 떨기처럼 각 사람 사람이 그 별빛을 주고받으면서 온 우주가 별 떨기로 가득 찬 것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잉태되는 알집과 같은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그 가정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그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고, 그 사랑을 받으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배웁니다. 이렇게 하면서 세상이 가정이라는 사랑의 알집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태어나서 장성하여 또 다른 사랑의 알집을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온 세상이 사랑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는데, 이건 태어나자마자부터 버림받고 폭행을 하고 어린아이를 메다쳐서 죽여 버리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아에 대한 폭력과 살해 행위는 더 이상 벌할 수 없는 최고의 등급의 벌을 줘야 됩니다. 인류 사회에서 영원히 퇴출해야 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폭행과 폭언 심지어 유아에 대한 말하자면 성추행과 강간 같은 것들이 이루어지는 말도 되지 않는 이 더러운 세상이 구역질나지 않습니까? 그런 세상을 보면서 왜 이렇게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할까를 생각하며 현실을 바라보며 구역질을 하고 구토를 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아야 될 사람이 그 구역질나는 일을 똑같이 가정에서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웃이 그 가정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떠날 때 마지막 가장 뚜렷한 표징은 가족들 간에 사랑의 관계가 모두 깨지고 그리하여 땅이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B. 가정, 회심의 화로
결국 가정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바로 회심의 화로입니다.
1. 자식은 무엇인가?
자식이 무엇입니까? 자식이라는 것은 자기의 몸으로 태어난 자녀입니다. 그게 자식입니다. 신기하게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자식을 사랑하는 본성을 주셨습니다. 동물의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본능이라고 부르지만, 그런 본능과 사랑을 인간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동물들이 새끼를 낳으면 그렇게 예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강아지를 길렀습니다. 강아지가 산통을 하고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할머니가 마루 밑에 있는 강아지를 수시로 들여다보십니다. “야야야야 이제 강아지가 새끼를 낳는다. 저거 봐라.” “내가 가서 쟤네들 다 돌봐주고 올게.” 그러고 마루 밑으로 내려가셔서 하나씩 하나씩 받아줍니다. 저는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태어나면 껍질을 쓰고 태어납니다. 그 껍질을 하나씩 벗기면서 할머니가 하나씩 하나씩 받아놓으면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가 오락가락합니다. 그러면 어미 개가 그렇게 그윽한 눈빛으로 한 번에 한 여덟 마리씩 낳는 강아지를 아주 정성껏 하루 종일 혓바닥으로 핥아서 목욕을 깨끗이 시킵니다.
그런데 그 눈빛을 어린 나이에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그윽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새끼를 낳으면 어미의 눈에서 불이 납니다. 나를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내가 가까이 가도 으르렁거립니다. 할머니 빼놓고는 다 으르렁거립니다. 할머니는 항상 뭘 갖다 주니까 환영하고 의심을 안 하고, 내가 들여다보려고 해도 눈에서 파란 빛이 나면서 으르렁거립니다. 그리고는 그 자식들을 그렇게 품에 끌어안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더 신기한 걸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젖을 먹입니다. 젖을 먹이면 (양쪽에) 젖이 여러 개 있습니다. 그러면 와서 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애들이 크기가 다르게 태어납니다. 똑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약간 덩치도 좀 낫고 좀 우등한 놈이 제일 잘 나오는 젖을 뭅니다. 참 신기합니다. 맨 위에 젖은 별로 안 나오고 중간에 젖이 잘 나오니까 뭅니다. 거기는 유량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쭉쭉 빨아먹으니까.) 며칠만 그걸 계속 빨아 먹으면 얘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거는 개가 이걸 교대로 먹입니다. 애를 툭툭 칩니다. 그렇게 갈아 먹이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라는 건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 데도 안 갑니다. 오줌 누러 잠깐 나오고 변 보는 거 이외에는 딱 그 자리에 앉아서 새끼들 여덟 마리를 다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혓바닥으로 핥으면서 그 아이들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곤충을 비롯해서 동물의 종(種)을 보존하는 한 방식으로 그런 본능을 부모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그보다 더 우월한 사랑을 갖게 하셔서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고 애절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거의 없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 인간이 갈 데까지 간 무정(無情)함입니다. 성경에도 나옵니다. 죄에 대해서 나오면서 무정(無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정이 없음’입니다. 일체의 어떠한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향해서) 그런 부모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육체에 대한 것이면 육체로 끝나는데, 그 무정함이 영혼에까지 미치게 될 때, 그때 그 아이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아이입니다. 하필이면 그 가정에 태어나서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할 나이에 부모로부터 마음으로 버림을 받습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것은 장소적으로 버린다는 말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마음으로 그 자식과 상관없이 한 울타리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니까 아이들이 부모를 향한 존경심이나 사랑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결국 자식은 육체와 영혼을 닮은 개체로서 태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식을 태어나게 하실 때 신기하게 부모를 닮아서 태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어쩔 수 없어서 그러신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나게 하심으로 마치 그 아이를 보면서 자신의 형상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자신 둘을 빼닮은 아이가 태어나서 자신의 닮은꼴을 아이들에게 발견하면서 그를 사랑하게 하십니다. 정상적인 부모의 경우에는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고백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아담이 하와에게 했던 고백과 똑같은 고백입니다. ‘내가 내 살을 주고라도 너를 살 수 있으며 내 뼈를 주고라도 너를 구할 수 있다’라는 마음이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사랑의 본성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동물에게까지 뼛속 깊이 새겨진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니 그 악한 본성의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만을 위하는 극도의 이기심이 결국 혈육의 인연까지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회심의 화로’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가정에서 결국 회심이 일어나는 것이고 또 회심한 아이들이 가정에서 그 회심의 은혜를 보존한다’ 이런 뜻입니다.
2. 부모의 본분은 무엇인가?
이게 결국 부모의 본분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본분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은 회심하고 그다음에 그 회심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자, 한 사람이 회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회심은 죄에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어떤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예수 이외에 자기를 구원할 이가 없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분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기 시작하는 것이 회심입니다. 이 회심은 의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회심하는 예라는 것은 없습니다. 중생과는 달리 이 회심은 아주 또렷하게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며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이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걸 경험하셨습니다. 예전에도 살아 있었고 예수 믿은 후에도 살아있었지만, 전혀 다릅니다. 예수 믿은 후에는 자기가 살아있는데 자신이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슬픔과 근심, 걱정이 밀려옵니다. 캄캄한 어두움과 폭풍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와 간절히 기도합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습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데 거룩한 은혜가 자신의 마음속에 출렁거립니다. 그러면서 이 현실을 극복하고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안에 가득 생겨나면서 현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던 사람들은 용서하고, 하찮게 생각했던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자신이 불행에 처해 있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힘을 줄 수 있는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특별한 죄를 짓지 않고 일주일을 살아도 마음이 건조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마음이 왠지 건조해집니다. 팍팍해집니다. 그때 교회당에 나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이 은혜 허락하시네
그러면 눈물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내게 베푸셔서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셨고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주셨는지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마음에 새 희망이 솟습니다. 제가 매일 빼놓지 않고 드리는 기도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어떤 경우라도 저는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설교하고 나서 늘 아쉬운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앉아 있게 하지 마시고 번쩍 들었다가 한 번 교회 바깥으로 패대기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지지난 주간에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한번 이 회중을 모두 들어 올리시고 패대기치시옵소서.” “그래서 자기가 있던 자리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다시 일어서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게 안 될 때 설교하고 아주 심한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게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 생명의 역사입니다. 그 생명의 역사를 힘입어서 우리가 생각해 보면 참 험악한 세월을 살았는데도 그 세월을 어떻게 이겼는지 모르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기면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게 결국 우리가 회심했기 때문이고, 회심한 우리가 결국 회심의 은혜를 어떻게 보존하며 사는가에 따라서 이 대답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말씀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기도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기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살면서 넘쳐흐르는 은혜로 기도하던 때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때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이니 더욱 많이 기도해야 되고, 자녀를 가정이라는 회심의 난로에서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열렬히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종종 은혜에서 멀어진 부모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에잇, 애들이 은혜 받아봐야 그거 별거 아니야.’ ‘애들 회심했다고 뭐 좋아서 날뛰는데 한 달 되니까 원래대로 다 돌아가더라고.’ 자기는 2주 만에 되돌아갔습니다. 겨울사경회, 새해말씀사경회 1월 중순에 하고 2월이면 벌써 기도회도 안 나오고, 전도도 안 나오고, 봉사도 게을리 하고, 개인 경건 생활도 내팽개쳤는데, 자기 자식이 한 달 갔으면 오래 간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얕잡아 봅니다.
그런 사람에게 자식이 은혜를 받게 해달라고, 회심하게 해달라는 간절하고 애절한 눈물의 기도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게 삯꾼 부모입니다. 삯꾼 목자만 있는 게 아니라 삯꾼 부모 많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선한 부모가 희귀합니다. 선한 부모가 (희귀합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아이들을 길러놓으니 그 아이들이 자라서 우리의 신앙을 이어가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근거 없는 끝없는 낙관, 우리 애는 인간성이 좋으니까, 사회성이 뛰어나니까, 공부를 잘하니까, 인물이 훤칠해서, 우리는 모아놓은 돈도 있으니까, 유산도 물려줄 테니까, 그게 바로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인생관입니다. 그거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엎드려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가치관을 자식에게 대입시키고 그것으로 위로를 삼으십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골 생활을 아주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 시골에서 좀 살았고 아주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방학 때 시골에 가면 우리 집은 화로를 들여놔야 될 정도로 가난한 집은 아니었지만, 친척 집에 가끔 놀러 가면 화로를 요긴하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집주인이 가마솥에다가 밥을 하고 저쪽에는 소죽을 끓이고 장작을 땝니다. 저녁까지 다 끝내고 설거지도 다 치운 다음에 거기서 남은 숯을 삽을 깊숙이 집어넣어서 불씨들을 놋으로 된 화로에다가 담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는 것은 그 위를 재로 두툼하게 덮습니다. 그러면 아랫목은 탈 정도로 뜨거워도 윗목은 춥습니다. 그리고 외풍이 셉니다. 그러면 그 난로를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습니다. 거기다가 감자도 집어넣고 고구마도 집어넣어서 구우며 이야기를 하면서 밤에 그것을 까먹으면서 서로 대화를 합니다. 그게 화로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말입니다. 그렇게 길같이 타오르던 장작불은 꺼져도 화로에 묻혀 있던 재는 그다음 날 아침까지 불씨가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성냥도 흔하지 않던 시대에는 그 화로를 가지고 나와서 그 불씨에다가 마른 옥수수 껍질 같은 것들에 불을 붙여서 그다음 날 아침밥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그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는 것입니다. 설령 한 달이나 두 달 있다가 다시 신앙이 미끄러져도 좋으니 일단은 회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심하면 이 회심과 함께 하나님은 그 아이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보다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가장 뛰어나다는 지식이 머리에 아주 깊이 박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떨어질 때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에 정신이 팔려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을 통해서 심겨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감각이 작동을 하면서 ‘그래 바로 저거야.’, ‘내가 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느꼈을 때 가장 행복했어.’ 하는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감각이라고 에드워즈가 부른 것입니다. 그 감각은 중생하고 회심함으로써 우리 안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이건 일생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학교를 합니다. 울고불고 회개하는 애들 중 대부분은 과거에 회심했던 애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실하게 깨닫고 뉘우치고 결심하는 애들은 옛날에 회심했던 애들입니다. 자기가 타락했었다고, 미끄러졌었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언젠가 똑바로 선 적이 있는 아이들이 그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라고 찬양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어찌하든지 거듭나고 회심에 이를 수 있는 그 처음 회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어른하고 똑같이 성화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화가 무엇입니까?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회심과 함께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감각도 생겨납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입니다. ‘아, 하나님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분이시구나.’ ‘나는 그 하나님 앞에 정말 지푸라기 같은 인간이구나.’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겸비해지는 감각도 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죄에 대한 감각도 심겨집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는다는 게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영리 가지고 전도하다 보면 첫 번째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해놓고 그다음에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왜 죄인입니까?’ 동의를 안 합니다. 진도가 못 나가는 것입니다. 가끔 양심에 무엇인가 많은 가책을 느끼거나 혹은 죄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진도가 나가기 쉽습니다. ‘내가 왜 죄인입니까?’ ‘한번 증명해 보십시오.’ 이렇게 얘기할 경우에는 진도가 안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보면 그런 방식의 전도가 가지고 있는 어떤 한계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의를 안 하는 것입니다. 동의하는 것이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안 됩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을 보고 비로소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이 되어서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런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이 그 죄를 사죄해 주십니다.
그때의 그 기쁨이라고 하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죄의 용서를 통해서 이루어진 경험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한 모든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이 끔찍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빼놓고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니까 거기에서 사죄의 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죄를 지었을 때 용서받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일평생 (머리에)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회심의 은혜를 성화를 통해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의 회심을 목표로만 놓고 간절히 기도하지 말고 회심하면 그 회심한 아이가 경건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부모가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아휴, 그것까지요!" 그게 부모입니다.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늘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회심한 아이를 사랑으로 잘 타일러서 엄마 아빠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그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그 아이에게 우리가 믿는 종교의 도리를 말로 삶으로 사랑으로 잘 가르쳐서, 그 아이가 인격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한 자식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과정은 부모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상담해 보면 아이들이 신앙에서 느끼는 근본적인 회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를 어디서 느끼는지 아십니까? 학교에서 진화론이나 과학을 배우면서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거는 오해입니다. 진화론 따위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열띤캠프>에서 학생들에게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상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상당히 많은 학생이 설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 못지않게 아이들이 신앙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게 부모의 행실입니다. 부모가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서로를 지체로 받아주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갈등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싸우고 다툽니다. 그리고 그것이 적나라하게 아이들의 모습에 비칩니다. 가정이 사랑으로 뭉쳐진 가정이라는 생각이 일도 안 듭니다. 아빠는 아빠대로 딴 주머니 차고 나쁜 짓 하고,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에 대한 일체의 신뢰가 없고 자기 즐거움을 따라서 살고 자식들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형제들이 끔찍이 서로 사이가 좋은 형제들이 태어나는 것은 힘듭니다. 한 달이 지나도 누나가 동생 얼굴 보는 적이 없고, 동생이 오빠 얼굴 본 적이 없이 콩가루 집안으로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신앙의 싹이 납니까? 꽃이 핍니까? 그런 부모들에게 아이들의 회심을 걱정하면서 ‘아이가 회심하지 않아서 어떡합니까?’, ‘아이가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지 않아서 큰일입니다.’ ‘부모님 어떡하면 좋죠?’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겁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해주십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십니다. 자기는 자식을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와서 자기 아이를 1년 동안 어떻게 지도할지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누고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의 신앙 교육이 성공할 수 없으니 학부모 설명회에 나와서 교육을 좀 받으라고 해도 무지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절대 안 나옵니다. 그리고 내버려 둡니다.
강아지를 유치원에 보내도 그렇게 안 합니다. 강아지 유치원 보내고 학부모 소집하면 칼같이 옵니다. 문자하면 칼같이 답장합니다. 돈도 강남에서는 강아지 유치원이 최하가 170만 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키워서는) 견주도 못 됩니다. 그러다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유기견으로 버리는 것입니다. 알록달록하게 귀에다가 발에다가 색깔 칠해놓고 리본까지 달아서 깽깽거리고 우니까 그냥 던져버리고 도망가 버리는 것입니다. 비정한 인간들입니다. 그리고 걔네들이 늑대처럼 온 산을 돌아다니면서 짐승들을 잡아먹고 심지어 행인들을 공격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 영적으로 여러분의 눈에 들어오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녀가 지금 교회에 억지로 나온다고 해서 그 아이가 결코 예수 잘 믿는 아이가 될 거라고 믿지 마십시오.
한 청년이 열린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오래전 얘기입니다. “넌 어떻게 우리 교회에 왔냐?” “말씀이 너무 갈급해서 왔습니다.” “너 어디서 왔냐?” “절에서 왔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어린 나이에 인생에 너무 회의가 느껴져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불교에 진리가 있겠다 싶어서 절에 갔다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열심히 쓰레질를 하고 스님들 수발을 들면서 봉사하니까 아주 귀여운 예쁨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던 불교 신자들이 ‘참 저분은 저렇게 신실하다' 그러면서 ‘앞으로 훌륭한 스님이 되시면 옷은 제가 맞춰드리겠습니다.’ 이런 헌신자들도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조만간 계(戒)를 받고 승려에 입적할 쯤이 되었습니다. 주지 스님이 기독교로 말하자면 담임 목사입니다. 제일 높은 분입니다. 주지 스님이 “얘, 이리 오너라. 읍내에 좀 나갔다 와라.” 메모지에다가 글을 써주면서 ‘이러이러한 책이 있을 테니까 사가지고 오너라.‘ 얘가 이제 읍내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주지 스님이 사 오라는 책을 몇 권 샀는데 뭔가 하나가 눈에 탁 들어오는데 그게 오디오북이었습니다. 그게 생명의 말씀사에서 만든 저의 설교집이었습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라는 호세아 설교였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시리즈입니다. 네 번의 시리즈를 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걸 하나 사가지고 같이 가져온 것입니다.
낮에 일을 다 하고 밤에는 법당에 가서 승려들이 참선을 합니다. 그때 걔는 이어폰을 밑에다가 녹음 테이블을 꽂고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를 들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난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스님이 참선을 하는데, 참선을 할 때는 온전히 집중해야 되는데 귀에다가 뭘 꽂고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너 이게 뭐야?” 그리고 확 잡아당기니까 목사의 설교가 나온 것입니다. 당장 끌고 주지 스님한테 간 것입니다. “내가 절에서 오래 살았지만 이런 미친놈은 처음 봤습니다. 아니 이놈이 글쎄 법당에서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서 개신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지 뭡니까?” 그러니까 주지 스님이 “사연을 말해봐라. 뭐냐?” 이 청년이 얘기했습니다. “스님은 사실은 제가 불교가 길인 줄 알고 와서 이렇게 오랜 기간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건 제 마음의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진리는 기독교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주지 스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니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거기에 진리가 있는 거다. 가거라. 사실은 나도 주일학교 선생이었다.”
이게 여러분 웃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주지 스님이 여러분의 아들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는 승려를 여럿 만났습니다. 그중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한 승려는 전도사까지 하다가 불교에서 아주 유명한 사찰을 일구었습니다. 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회심과 함께 회심의 은혜를 계속 보존하며 사는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회심한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지만,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회심의 은혜를 보존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이들이 기도 생활 안 하는 것을 공부 안 하는 것만큼 괴로워하십니까? 아이들이 말씀에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을 학교 잘 다니지 않는 것만큼 괴로워하십니까? 정신을 차리셔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잘 보여주는 부모가 돼야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이 어떤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는지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 마음을 모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습니다. ‘엄마 훌륭하셔요.’ ‘제 인생의 스승이셔요.’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저같이 방황하고 있는 어린 양을 이렇게 보호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그거 아이들이 마음에 있어도 말 안 합니다. 자존심 상해서도 말 안 합니다. 그거는 10년이나 20년 지난 다음에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걸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화목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부족한 엄마가 경건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지, 얼마나 부족한 것이 많은 아빠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엄마에게 용서를 받는지, 그거를 보여주면서 서로 부족하고 모자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배하면 이렇게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존중하며 살고 사랑하고 가정을 진심으로 행복해한다는 것, 그것이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신앙의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거 다 팽개치고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한답시고 교회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자녀는 거의 돌보지 않고 자녀들과의 인격적인 관계 거의 없이 살아간다면 그 아이가 여러분의 가정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위선과 거짓, 다툼과 증오, 멸시와 천대, 이런 것들 밖에 배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국 가정은 회심의 화로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엄마가 아이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을 가슴 아파하고, 하나님 말씀 사랑하는 엄마가 아이에게 한 숟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먹이지 못해서 안타까워합니다. 자기가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은 애들이 수련회를 하든지, 사경회를 하든지, 뭐 하든지,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기도 자신의 영혼을 이미 팽개쳤으니까 자식의 영혼에 대해서 애달픈 눈물이 안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신앙적으로 자식을 기를 기대를 부모의 마음속에서 포기한 것입니다. 삯꾼 부모입니다. 그런 아이가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눈물로 기도해주고, 사랑해주고, 감싸 안아주고, 용기를 주고, 긍휼히 여기고, 무엇이든지 더 베풀어주고 싶어 하고, 그 아이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이 되기까지 멈추지 않는, 그런 부모의 섬김을 받았을 것 아닙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자녀에게 물려줄 영적인 유산이 있습니까?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녀들을 위하여 여러분의 좋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방탕하게 사는 자녀들이 아니라 그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들이 되어서 그들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르고 돌보며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건전한 믿음의 가문을 일구어 갈 것이니 하늘에서도 여러분의 기쁨이 클 것입니다. 오늘이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우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 회복-쉽지 않지만 확실한 길 - 청년편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저는 세 번에 걸쳐서 우리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부끄러운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서 ‘우리가 과연 이 죄에서 회복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회복은 가능합니다. 확실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전혀 쉽지 않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일에 있어서 우리에게 가장 풍부한 심리학적인 성경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구약에서 이 사람만큼 순결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무엘하 11장까지의 역사를 보면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던 시인이었고, 위대한 장군이었고, 또 통치자였으며, 동시에 천상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철학자였습니다. 실로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고 뛰어나게 감성적인 인물인 동시에 탁월하게 이성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독특한 성품이 이렇게 무지개처럼 어우러질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역사적으로 약 3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시편 23편의 복음은 오늘 우리들이 읽으면서도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한 번에 커다란 죄를 짓게 됩니다. 그것이 입에 담기도 민망한 간음의 죄였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후궁과 비빈들이 있었고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네가 원하였다면 내가 더 주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여인에게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불륜의 상대로 택한 사람은 이미 남편을 둔 여자였습니다. 그 남편은 가엽게도 다윗을 최고의 임금인 줄을 알고 신명을 바쳐서 충성하던 군인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죄를 덮기 위해서 충성스럽게 자신과 왕국을 섬겼던 우리아를 아주 야비한 방법으로 전쟁에서 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죄가 결국 하나로 끝나지 않고 그 죄는 또 다른 죄를 불러들이고, 불러들인 죄는 그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지어야 하는 끊임없는 연속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청교도 제이 씨 라일(J.C.Ryle)은 자신의 『거룩함』이라는 책 속에서 말했습니다. “죄를 마음에 들여놓지 말라. 한 번 들어온 죄는 절대로 나가지 아니하리라” 이런 말로 우리를 경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에게 어떠한 죄도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몸은 건강해도 암세포를 지닌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10만 개까지 모이지 않는 한 인체에 거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십만 개가 넘어서 그것이 한곳에 모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암이라는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되고 때에 따라서 목숨까지 잃게 되는 불행한 사태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균에 에워싸여서 살고 있습니다. 숨 쉬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병균이고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한 번 손바닥을 칠 때 약 7백만 마리의 세균이 죽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학적인 근거야 알 수 없지만, 우리의 몸에도 수많은 세균과 아주 작은 벌레들에 에워싸여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균들은 우리의 장내에서 활발히 활동함으로써 우리의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오히려 우리를 살아있는 몸으로 살아가게끔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것을 유익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유익한 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어떤 죄들이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갈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우리 안에서 힘을 발휘하고 성향을 갖게 될 때, 그 성향이 증대될 때, 그때 죄는 우리 마음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되고 그 지배력을 갖게 되면 이제는 내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내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말씀드린 이 죄라는 것은 일반적인 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음이라는 특별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음란이라는 특별한 성향이 드디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뚜껑이 터졌습니다. 그전까지는 병에 넣어서 통제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나니 이제는 자신이 도저히 스스로 통제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저녁에는 다시 그렇게 하고 싶은 욕망에 불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모순이 한 사람의 인격 속에서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조금도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이 오늘날 나의 설교가 이해 안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런 심리 묘사가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사람이 많기를 바랍니다. 그건 여러분이 아직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장담하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은 계획을 세워놓고 간음의 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간음이 일어난 그들의 경험을 더듬어보면 그저 보통 사람처럼 똑같이 살다가 어느 날 습격을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시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이전에는 마음의 준비가 있었을 것입니다. 뚜렷하지 않은 윤리의식, 정조에 대한 기독교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관점, 그리고 세상의 가치관과 뒤섞여서 마음에 많이 양보하고 있는 상태, 그리고 사랑이면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 있다는 현대 정신의 침투, 이런 것에 의해서 둑이 무너지듯이 서서히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확신이 사라지고 이것을 견뎌낼 수 있는 하나님 은혜의 힘이 상실됐을 때 어느 한순간 강도가 습격하듯이 일격에 넘어뜨리는 것이 바로 간음의 죄입니다. 그래서 결국 최선의 방책은 언제든지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계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최선의 방책은 ‘언제든지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하는 경계심을 갖는 것입니다.
1년에 50조, 60조가 되는 돈을 국방에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돈은 그냥 없어지는 돈입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확실하게 알면 국방에 대비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돈을 쓸어 넣습니다. 비싼 무기를 도입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고철이 되고 폐품 처리가 되어서 결국 아무 가치 없이 폐기 처분됩니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무기를 사 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가 점령당하면 우크라이나와 같은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불행을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을 확실히 일어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대비하는 것이 모든 나라의 국방 정신입니다.
우리는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강탈당하듯이 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남자의 마음속에는 늑대를 키우고 있고 모든 여자의 마음속에는 간악한 여우를 키우고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들의 통제를 벗어나서 그 늑대가 고개를 들고 여우가 고개를 내미는 날이 나옵니다. 그날이 바로 습격을 당하는 그 날인 것입니다. 아무도 장담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도상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을 피해야 하고, 어떤 상황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는가 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일에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위기와 고난의 때에 훌륭하게 신앙을 지키고 핍박과 순교의 순간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오롯이 간직했습니다. 마치 가시밭에 피어난 백합화와 같이 고난이 겹치면 겹칠수록 그의 신앙은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냈습니다. 드디어 나라는 넓어졌고 까불고 대들던 많은 나라들이 다윗의 정복으로 복속되었습니다. 나라의 판도는 최고가 되었고, 이스라엘 왕국 건국 이래 최고의 국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고, 인자한 다윗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는 평안했습니다. 국지적으로 전쟁이 작은 전투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국가의 명운을 흔들 정도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참전할 가치조차 없는 그러한 작은 분쟁들이었습니다. 넉넉히 나라를 다스렸고 왕국은 평안했습니다. 바로 그때 습격하듯이 이 탁월한 경건의 사람 다윗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격에 넘어졌습니다. 지금 바로 그 쓰라린 마음으로 회상하면서 우리가 읽은 시편 51편에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51편을 모두 강해하지 못하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중에서 오늘 한 구절을 설교함으로써 쉽지는 않지만 확실한 회복의 길이 있다는 확신을 여러분에게 심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미 잊혀져버린 책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2004년도에 기독교 출판문화상을 받은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이러한 고민 속에서 쓰인 책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 책을 인내심을 가지고 모두 읽을 사람들이 많지 않겠지만 혹시 만약에 이런 죄에 빠지거나 혹은 이러한 죄에 빠지기까지는 아니하였더라도 가책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 안에서 정욕의 힘이 자기가 견디기에 부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책은 어둠 속에 찬란한 빛이 될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저의 설교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25년 전만 해도 제 설교가 이렇게 느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인자한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카랑카랑하고 속도는 약 1.3배속 정도 내지 14배속 되는 속도로 어마어마하게 빨랐습니다. 그 증거가 똑같은 시간을 설교했는데 녹취했을 때 그 양이 한 시간에 몇 페이지씩 차이가 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쏟아낼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죄에 대해서 엄중하게 설교를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고 청교도적인 순전한 삶을 살도록 촉구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완전주의를 외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나라는 존재, 설교 전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약간의 반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싫으면 어쨌든 그 사람 목소리도 싫고 얼굴도 싫고 그 사람이 쓴 글도 싫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 사람을 내가 잘 알진 못하지만 한 다리 건너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때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나에게는 그다지 신경 쓰여지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그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설교 시리즈를 탐독하고 있으며 그 책을 읽고 감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바뀌게 되었겠습니까? 유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로 한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선진국이었습니다. 이민 사회에 있는 청년들을 돌보게 되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청년부 중에 여러 명이 동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해도 얘들은 그게 왜 잘못되었는지 전혀 설득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그리스도인이고 심지어 매주 교회에 나오면서 저녁때는 손잡고 동거하는 아파트로 들어갈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죄와 은혜의 지배가 모든 답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가 극대화되면 결국 우리는 불신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교회를 다니는 것 이외에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우리를 설득하고 마지막에는 죄에 동조하는 세계관, 인생관을 갖도록 설복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종종 인문학을 인용하고 혹은 여러분에게 특강 시간에 철학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주려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압니까? 복음이 충분하지 않고 기독교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만약에 우리의 세계관, 인생관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마른 막대기와 같아서 툭 치면 쓰러지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생각했고, 우리는 그 인생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세계관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이해해야 되는지를 배우기 위해서 제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드리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모두 다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시간은 그런 걸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시간을 내어서 열심히 여러분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이제까지 나 자신의 지식 자랑을 위해서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칸트를 탐구하고 있지만 난 칸트 자신을 숭배하지도 않거니와 그의 사상에 백 퍼센트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논리로 어떤 정신 구조를 가지고 기독교의 복음을 떠났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복구할 수 있는지, 그것이 나의 관심사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여러분의 목자로 세운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것이 나의 중요한 직무이고 그 일은 내가 먼저 온몸으로 걸어가고 난 후에야 여러분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 학문에 헌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여러분이 ‘어떤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사느냐?’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관대로 살아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필요한데 죄는 이런 것들을 모두 박살내어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 그 세계관을 따라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그 끔찍한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습니다. 계곡이 깊다는 증거는 산이 매우 높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런 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공의는 더 커다란 비참과 고통을 그에게 안겨다 줍니다. 이 시인은 바로 이러한 죄를 짓고 결국 뼈가 녹아내리고 살이 모두 말라서 뼈에 달라붙는 끔찍한 육체의 고통까지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두려움, 구원의 기쁨이 모두 사라지고 죽는 것과 같은 그런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괴로움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자들조차도 이런 죄에 빠졌을 때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고뇌의 밤을 보내고 심지어는 신이 없다고 굳게 믿는데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가책을 느끼는지 때로는 자신의 과오에 대해 후회하며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의 심장 깊은 곳에 예리한 칼로 아주 깊이 새겨놓으신 양심의 한 근거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68혁명은 결국 성(姓)의 혁명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언제나 동성애가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인되어서 활짝 꽃피고 이제는 더 이상 시비를 거는 것이 실정법에 위반되는 세계의 질서가 시작된 것도 1968년도에 있었던 파리학생혁명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값있는 것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스마트폰 하나에 익숙해져서 노인네들이 답답하게 보여지기 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 스마트폰에 헌신했습니까? 그런데 자기를 이 불행과 도탄에서 구할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모순입니다. 남을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런 죄에 빠졌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탐구하리라는 정신을 가지고 기독교에 입문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입문한다'라는 것은 그 진리의 가르침을 온몸과 마음으로 탐구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세우고 헌신하기로 다짐하는 것이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이는 여러분은 결코 기독교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예수 믿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을 얼마나 보셨습니까? 또 예수를 믿기 때문에 탁월한 정절의 관념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보셨습니까? 말씀드린 선진국의 청년부는 여러 커플이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지장 없이 양심에 어떠한 가책도 없이 예배를 드리고 성찬에 참여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까? 사상까지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들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문화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을 수 없고 벅차오르는 경건의 감격이라든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담대한 신앙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II. 그 죄로부터의 자유
그러면 그 죄로부터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까?
A. 다윗의 시도
제일 먼저 다윗의 시도를 한번 눈여겨봅시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만난 주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구약에서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고 담고 싶은 인물입니다. 특히 그가 도달했던 그 심오한 철학적인 진리는 하나님 사랑으로 이어지는 우주적인 진리였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람을 본받고 싶은데, 그 사람이 간음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순간 상상도 못 했던 어마어마한 경험이 그에게 쓰나미처럼 밀려닥쳤을 것입니다.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죄의식, 율법은 우리의 마음에 살아서 정죄의 작용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양심은 고소의 작용을 하고 율법은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서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자신이 하나였는데, 자신이 찢어져서 하나의 자신이 또 다른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발을 하며 양심으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죄를 지을 때 무슨 판결이 내려야 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돌에 맞아 죽는 것이었습니다. 투석형(投石刑)이었습니다. 온 사람에 에워싸여서 돌팔매를 던지는데 그냥 아프게 하기 위해 던지는 게 아니라 머리를 겨냥해서 죽게 하기 위해서 두개골을 부서뜨려서 던지는 것이 투석형(投石刑)이었습니다. 아마 그의 의식 속에는 자기가 사랑하고 자기와 알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자기 일을 대적하던 사람들까지 떠올랐을 것입니다. 아마 밤마다 돌에 맞아 죽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런 죄를 전혀 저지르지 않은 사람처럼 위선적인 행동 속에서 눈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경건한 왕으로, 도덕적인 군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선지자로, 주님을 향한 최대의 찬송자로, 숭앙받던 백성들 앞에 존경스러운 모습으로 자기를 위장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 아니라 계속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모습을 보이고는 꿈틀거리는 음욕을 품고 밧세바에게 달려가서 다시 간음을 반복하지 않으면 정욕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괴로움을 여러분이 나의 나레이션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이심전심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삶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끊어진 삶이었습니다. 다윗이 아버지의 사랑도 못 받고, 형들에게도 무시당하고, 자기가 좋아서 결혼했던 아내에게도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외롭지 않습니다. 그는 살 수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찬양)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찬양)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하나님 때문에 그 모든 외로움과 시련을 이기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고난은 찬송의 제목이 되었고, 시련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역경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의 인격은 하나님의 향기를 풍기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 부모가 없이 그렇게 외롭게 살았는데도 하나님 한 분만을 기대고 있는 그 시인의 심정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관계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간음의 죄를 짓는 그 순간 두꺼운 쇠로 만든 벽이 덜컹하고 여러분의 영혼 앞에 칸막이를 치는 것입니다. 예배할 수도 없고, 기도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은혜받은 형제자매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목회자 앞에 얼굴을 들 수도 없고, 혼자 있으면 음욕에 불타고, 여럿이 앉아 있으면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끔찍한 일이 다윗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너무 무서웠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성령을 거두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지만, 구약시대에는 필요할 때 오셔서 일하시고 떠나가는 성령의 경륜이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떠나가시는 게 그냥 하나님이 할 일을 할 일이 끝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연적으로 성령을 거두시는 경우도 있지만 징벌로서 성령을 거두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냥 성령이 거두어지는 게 아니라 악령이 임했습니다. 그 무서운 결과를 자기 전임자였던 사울에게서 똑똑히 본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떠나갔을 때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죽을 때까지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될까 봐 너무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이 무시무시한 두려움 속에서도 간음을 하고자 하는 강력한 성욕은 억제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게 풀 수 없는 미스터리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한 마디를 남길 테니까 기억하십시오. 두 번 반복하겠습니다. “불타는 성욕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은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운 일이지만 그것을 쏟아 놓은 후에 죄책감 속에서 사는 것은 지옥이다.” 다시 “불타는 정욕을 가슴에 간직하고 사는 일도 너무나 괴로운 일이지만 그것을 쏟아 놓고 죄책감 속에서 사는 것은 더 큰 지옥이다.” 죄책감만 있으면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죄책감은 꼭 사랑의 기억과 같아서 시간이 흐르면 잊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이라는 것이 라틴어로 ‘콘시엔티아(conscientia)’라고 부릅니다. ‘콘(con)’은 ‘함께’고 ‘시엔티아(sciéntĭa)’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항상 자기가 잘못한 일에 대한 기억과 함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집니다. 양심도 덜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도 잊히는 것입니다. 죄책감도 잊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단지 그 정욕을 쏟아 놓았을 때 죄책감만 남는 것이면 시간이 해결해 주는데 계속해서 그 죄를 더 지어달라고 우리 안에서 항거할 수 없는 욕망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이 “우리를 죄 아래로 사로잡아 가는도다”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던 어떤 강한 힘을 가지고 끌려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는 반복적인 성폭행범들이나 아니면 섹스 홀릭에 걸려 있는 사람들 심지어는 70여 명의 영유아를 욕보였던 사람들의 살인적인 기행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으로는 상상도 못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자기 안에 이 욕망을 방치하고 자라게 내버려 두면 그보다도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판도라의 뚜껑을 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지 어떤 방식으로든지 통제 가능한 범위에 두면서 살아가는 게 행복의 가장 중요한 관건 중에 하나입니다.
이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점에 있어서 절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사람들과의 신뢰를 지키고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이게 표면적으로 읽으면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걸 모두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성찰과 심리학적인 이해 그리고 자신의 작은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확대하여 유추하고 그걸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삶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의 감각이 없는 사람은 두 그릇을 퍼먹고도 맛을 모르지만 미식가나 뛰어난 셰프는 한 젓가락을 먹어봐도 그 음식의 모든 본질을 다 파헤친단 말입니다. 그런 통찰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은 간음과 상관없이 단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자에 의하면 머릿속에 10만 번의 생각이 하루에 스쳐지나간다고 합니다. 그중에 천분의 1만 음란한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백 번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거기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작은 경험을 통해서 그거를 미식가가 한 젓가락의 음식을 통해서 음식 한 접시 전체의 음식의 본질을 파악하듯이 그렇게 그 죄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한 거라 이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보상은 행복입니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거 아니까 걸레처럼 살면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덕이 더욱이 더욱 기독교에서 약속하는 행복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고통 속에서 살다가 기가 막힌 해결 방법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해결하려고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그런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짜 습격당하다시피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나단이 와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으로서 다윗에 죄를 지적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회개가 터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거울로 비추어지지 않으면 그는 절대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회개하다’라는 말이 그리스어로 두 가지 종류가 나옵니다. ‘메타멜로마이(metamelomai)’ 라는 그리스 단어와 ‘메타노에오(metanoeó)’라는 단어입니다. ‘메타멜로마이(metamelomai)’ 라는 것은 그냥 후회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도덕적인 반성이나 과거의 과오를 거울삼아서 생각이 바뀌고 미래가 변화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슬픈 것입니다.
그 단어가 어디에 쓰였냐 하면 가롯 유다가 예수 한 것을 후회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에 그 메타 멜로마이라는 단어가 쓰여졌습니다. 가롯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냥 후회하고 죽었을 뿐입니다. 목매달아 죽었고 떨어지면서 배가 터져서 창자가 흘러나와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회개하라’고 외치셨을 때의 단어는 ‘메타노에오(metanoeó)’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그리스 문학과 철학에서는 지성과 관련이 됩니다. '메타(meta) 라는 것은 ‘애프터(after)', ‘~후에', ‘다시', 그런 뜻dlqslek. ‘메타피직스(metaphysics)'는 ‘피직스(physika) 너머에 있는 것', ‘후에 있는 것', 그래서 그걸 ‘형이상학'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메타(meta)'라는 단어와 ‘노에오(noeó)'라는 단어입니다. ‘노에오(noeó)'는 ‘생각하다'입니다. 그러니까 ‘후에 생각하는 것' 혹은 ‘다시 생각하는 것' 혹은 ‘예전과는 달리 생각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가장 중요한 증거는 감정이 아니라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그런데 그 회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다윗은) 그런데 그 관점을 누가 제공해줬냐 하면 나단 선지자가 제공해 준 것입니다. “너는 죄를 지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매우 진노하시는 죄다." 이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죄에 대해서 끔찍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지만 완전한 회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아직까지도 해결해야 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결국 진심으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사랑했습니다. 하룻밤에 노리개쯤으로 알았더라면 때려치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밧세바의 태도를 문제 삼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다윗의 정신 구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제껏 인간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했던 따뜻한 사랑의 눈빛을 불륜의 관계에서 접수했고 그리고 그는 빨려 들어갈 듯이 자신의 인생을 거기에 걸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죄가 가지고 있는 어떤 모험적이고 무모한 성격이 얼마나 엄청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 죄에 빠지면 목숨을 걸게 됩니다. (놀랍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 번 빠지면 못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나마 하나 찾아낸 게 있었습니다.
1. 제사를 통한 해결
그게 뭐냐 하면 제사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제사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왕이었습니다. 왕을 위해 제사 드려줄 제사장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더욱이 그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아마 인류 역사상 그런 부자는 없었습니다. ‘저커버그'나 ‘일론 머스크' 이런 사람들의 돈을 합쳐도 게임도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게 뭘로 증거가 되느냐면 그가 성전을 짓는 데 바친 금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제물도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제사를 ‘진짜 제사가 있었구나’ ‘제사를 내가 성대하게 드리고 정성껏 들이면 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겠지’ ‘왜냐하면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죄 용서를 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제사장도 사죄를 선언해주지 않았던가’ 이렇게 생각하고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아주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선명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제사를 전혀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만약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더라면 내가 드렸을 것이다. 아니 뭐 1천 번은 못 드렸겠습니까? 아마 뭐라도 해서 이 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는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
2. 실패로 깨닫게 됨
결국은 뭐냐 하면 실패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실패를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죄가 아니구나’ ‘이 간음의 죄는 이런 식으로 제사를 드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간음의 죄를 저지르고 나면 결국은 요즘 신약의 언어로 환원해서 말하자면 ‘아무리 예배를 드려봐야 소용이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간음의 죄뿐만이 아니라 양심을 거스르는 중대한 죄를 저지르고 나면 심지어는 양심에 거스르는 죄까지는 아닌데도 낙태와 침체에 빠지게 되면 예배가 아무 감격도 여러분에게 주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옆에서 옆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내 뒤편에서 내 앞 편에서 사람들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수를 만나는데 내 마음에는 얼음장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 있는 게 말할 수 없이 어색하고 괴롭고 빨리 예배를 끝내고 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양심이 너무 괴로워서 예배 시간 중간에 일어나서 그냥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동안 교회에 나오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양심에 뚜렷하게 거스르는 간음의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이 제일 먼저 보여주시는 것은 차가운 거절감입니다. 냉혹할 정도로 차가운 거절감입니다. 자신이 그냥 소외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주 확실하게 나를 거절하고 계시다는 느낌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입니까? 예배, 기도, 말씀, 묵상, 독서, 교제, 모든 섬김,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는 너의 것을 받고 싶지 않다"라는 차가운 거절감입니다. 그게 가늠의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회복을 하려고 애쓸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결국 거기에서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제를 반복해서 겪으면서 아무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거기서 차갑게 거절하시는 하나님을 배우면서 때로는 마음 안에서 깊은 실망감을 느끼면서 내가 생각했던 거보다도 큰 죄에 빠졌으며 여기서 쉽게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 큰 병리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느 한계에 딱 도달하게 되면 그다음에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런데 문제는 그 반항하는 순간에도 정욕은 계속 솥에 물이 끓듯이 끓는 것입니다. (수시로) 해소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그냥 환경과의 싸움이었는데 이제는 이게 밖에서 오는 환경의 싸움과 함께 내적인 욕구에 의해서 싸움이 함께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빠진 남자들이 유곽 (遊廓)을 찾는 이유가 그런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미 봇물은 터졌고 통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돈으로라도 자신의 욕망을 푸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넌 크리스천에게만 가능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것을 다윗이 철저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순간에 다윗이 딱 말씀을 듣고 그냥 칼로 무를 자른 것처럼 딱 회개하고 칼같이 돌이켜 섰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입니다. 나는 다윗을 그 정도의 인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냥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랫동안 그 두 사이에서 갈등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는 것입니다. 제사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아주 중대한 환상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이 이 문제를 저절로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사도 그때의 다윗이 받았던 충격은 아마도 엘리 제사장 때의 법계를 가지고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갔지만 전쟁에 패하고 법계를 빼앗겼을 때의 이스라엘이 받았던 충격 비슷한 거였을 것입니다. 제사가 무위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결국은 다윗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봤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바로 그 지점이 하나님이 다윗을 회복시키는 시작점으로 삼으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B. 마음을 고침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마음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다윗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깊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이 죄를 저지르고 난 다음에 이제 뭘 보게 되냐면 이제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거스틴을 닮은 여정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어거스틴이 따가스테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데 아주 호기심이 많고 천재적인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로 말하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파트라키우스였고 철저하게 로마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고 끝까지 회심을 안 하고 죽었습니다. 엄마는 모니카였고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진 경건한 어머니였습니다 두 사람이 일치를 본 게 있습니다. ‘우리 아들에게는 최고의 교육을 시켜야 된다’ 아버지는 그렇게 부자는 아니고 로마의 하급 관리였습니다. 그 열성에 의해서 이 아이를 열렬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가지고 나가스트에 있는 좋은 학교를 들어갑니다. 들어갔는데 이 교육이 어거스트에게 너무 안 맞는 것입니다. 로마의 건국 신화 같은 것들을 그리스도로 읽게 하면서 그 단어를 모르거나 해석을 못하면 막 모진 회초리를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주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이 아이에게 이 스파르타식 이 학교 교육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은 거였습니다.
결국은 부적응아로 결국은 학교를 교육을 다 못 마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상의를 해서 이 아이를 카르타고로 더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이야기가 나왔냐 하면은 어거스틴이 그렇게 해서 이제 카르타고로 교육을 받으러 갔는데 그런데 그 속에서 어 이제 이 정신이 방탕에 빠집니다. 그래서 나이 열일곱 살에 미혼부가 된단 말입니다. 열일곱 열여덟 그 사이에 미혼부가 됩니다. 여자와 사랑에 빠져가지고 환락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고 하는 지금은 사라진 작품을 만나게 됩니다. 그 작품을 읽다가 한 단어를 발견하게 되면서부터 어거스틴의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한 단어가 뭐냐면 필로소피아 (philosophia)라는 단어였습니다.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철학이 거기서 왔습니다. ‘필로스(philos)'는 사랑이고, ‘소피아(sophia)'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사랑이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지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많은 과정을 거쳐서 만일의 오류로 벗어나서 이제 기독교로 기독교도로 돌아가 회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서양 문명의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따로 돌았었는데 이 두 개의 고리를 탁탁 채우면서 오늘 우리가 아는 서양 사상의 바다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라는 인물은 서양사에 있어서 플라톤과 버금갈 정도로 그 서양의 세계를 연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보다 더 위대하게 서양의 사상을 연 수문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게 제가 그분을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가 한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진리를 찾기 위해서 성경을 찾아 헤매고 실망을 합니다. 그리고 마니교를 비롯한 철학을 철학에 배회하면서도 찾지 못하는데 마지막에 진리는 그렇게 찾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위 인터란에(?)라는 사상을 이야기합니다. ‘너의 내면으로 들어가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 다윗이 그렇게 훌륭한 삶을 살았으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도 뛰어났을 것 아닙니까? 아마 자기와 같은 그런 철학의 세계 신학의 세계 미학의 세계 그러한 시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을 이렇게 볼 때에 아주 허접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허접한 사람도 짓지 않는 끔찍한 간음의 죄를 짓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이 지옥의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마지막에 돌아가게 된 것이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성에 대한 심오한 통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 죄가 그냥 내 밖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깊은 내 뜻 속 깊이 사무쳐 있었던 죄가 나의 잘못된 의지의 행사로 자연스럽게 발현되었을 뿐입니다’라는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간음의 죄를 짓고 회복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확실한 확실하게 회복될 수 있는 길이라고 나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첫 번째 길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사실을 자기를 잃어버린 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간음의 죄를 지은 것도 형식적으로는 자기가 지은 죄지만 사실은 자기 속에 있는 내밀한 진정한 자아가 외치는 소리를 따라서 지은 죄가 아니라 거짓된 자아 병리적인 자아가 나를 충동하는 것에 꼬여서 거짓된 나로서 응답한 것이 간음의 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죄를 지은 순서와 거꾸로 죄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죄가 결국은 맨 처음에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죄가 자라고 그 정욕이 커져서 간음의 죄를 짓고 삶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그리고 도저히 일은 저질렀지만 자기는 해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모님 찾아가게 되잖아요. 자식이라는 게 물론 안 그런 자식도 있지만 자기가 그런 죄를 저질러서 아이를 가졌다든지 하여튼 자기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질서가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할 수 없이 창피하지만 부모한테 가서 용서를 빌면서 ‘내가 이렇게 됐으니까 도와주십시오.'라고 하는 게 부모 자식 간입니다. 부모는 그걸 거절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주체적으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마무리를 할 수가 없는 거야 어디서부터 마무리해야 될 수도 없고 기도해도 노래를 불러도 뭘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뛰놀던 육체는 고깃덩이가 되고 하나님 앞에 부르던 그 아름다운 수금의 가락들은 이미 다 현이 끊어져서 그 아름다운 소리가 하나도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취하지도 않고 정욕에 이글거리는 그냥 보통의 보통 남자만도 못한 짐승 같은 남자 새끼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벌어진 이 무질서의 문제를 자기의 손으로 수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수습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신앙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이제 믿음입니다. 끊임없이 다윗이 상기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인자’입니다. 인자, ‘헤세드’입니다. 가치 없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 자비 그거를 굳게 믿으면서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를 정죄에 항거하면서 그래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나는 하나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첫 번째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복을 원한다면 일단 삶을 정리하십시오. 그리고 의미가 없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 힘든 거를 달래기 위해서 어울리면서 돌아다니는 그런 것들을 끊으십시오. 정리를 하십시오. 정리를 하고 그리고 회복의 길을 가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정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자들이 이제 아이를 갖고 아이를 해산할 때가 되면 서서히 몸 준비를 합니다. 아이를 순산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회복이 되기를 원한다면 일단 삶의 질서를 정리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만나지 말고 독방에 갇혀 있으라 그거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어떤 것이 나의 경건에 도움을 주는가 안 주는가를 생각하며 정리를 해야 됩니다. 과감하게 정리를 하고 지금은 내가 마치 병든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것처럼 내가 이 죄로부터 회복을 해야 될 특별한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을 하고 특별한 기간을 가지고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과감하게 정리를 하고 내 영혼이 회복되는 데 꼭 필요한 그런 시간들을 가지고 그러한 삶의 활동과 연관 짓는 그런 삶의 재정비가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음이 자신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해야 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고쳐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굳게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가 지은 죄대로 율법을 그대로 적용하신다면 아마 이 세상에는 머리 터져서 죽은 사람과 피 묻은 돌멩이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하시고 넘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양심에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때 마음을 굳게 먹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나는 하나님이 뭐라고 비난하시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이 항상 옳다고 고백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은 살고 싶습니다." “내 인생이 여기에서 마음 끝날 수는 없습니다." “나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십시오." 이거를 수시로 외우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다. 이때 끊임없이 성경 구절을 외우고 그다음에 은혜로운 음악을 듣고 그 다음에 사랑스러운 지체들과 위로와 격려에 그 연락을 주고받고 하는 것들은 아주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두었을 때에 내가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는지 어떤 환경에 두었을 때 내가 조금이라도 격려를 받게 되는지 어떤 환경에 두었을 때 내가 회복에 대한 열망이 불타게 되는지를 머리로 잘 살피면서 그 좋은 쪽을 끊임없이 선택하고 그 환경에 자기를 두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거는 목회자의 도움을 받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사람들을 회복시킬 수 있었던 경험자로서 확실히 회복된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주에 이번 주에 시작을 해서 다음 주에 끝날 거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오늘 밤 눈물 흘리고 철회해서 내일 아침에 자유를 얻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이 걸리는데 믿음으로 그 시간을 극복하면 반드시 회복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 많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으셔야 됩니다.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전문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얻어야 합니다. 그 한 번의 실수를 가지고 그 긴 세월 동안을 낭비하며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경건 생활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기도가 안 됩니다.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무 신기한 게 죄를 짓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나옵니다. 눈물이 막 철철철 쏟아집니다. 그런데 그 눈물을 이용해서 하나님하고 이름을 부르면 눈물이 딱 끊어집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인간 인간의 일반적인 슬픔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달은 경건한 슬픔의 차이입니다. 두 감정은 겉으로는 똑같아 보이는데 전혀 길이 다른 감정입니다. 그래서 자기 신세가 처량해서는 우는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눈물을 흘리려고 하면 울음이 그치는 것입니다. 이게 딜레마입니다. 그래도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경건의 문을 두드려야 됩니다. 정해진 분량의 성경을 읽으십시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기도를 드리십시오. 제가 치료한 사람들 중에는 도저히 기도를 죽어도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글은 쓸 수 있냐고 했더니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편지를 써라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교회에 가서 그 편지를 소리를 내서 읽어라.”
존 오엔 목사님에 의하면 하나님이 잘못했다는 것을 뉘우치고 그 정도 되면 어느 정도 정리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매일 저녁 그 죄를 저지르러 가면서는 그 두 가지 세 가지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형식적으로 정리가 된 것입니다. 정리를 해야 됩니다. 끊어야 됩니다. ‘이젠 안 하겠다’라고 마음을 강하게 먹고 끊어버려야 됩니다. 최악의 경우 자위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 더 이상 그 죄는 짓지 않겠노라고 그냥 결단을 해야 됩니다. 이 이상은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에 물러설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하고 거기서 결단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고독한 결단이고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결단입니다.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하나님 앞에 이제 매달리는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허공을 향해 기도하는 것 같아도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루시는 이유를 저희 노회는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죄를 짓는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거구나 하는 것을 가슴 깊이 가르쳐 주심으로써 이제 그 죄를 통해서 한 번 더 온전한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죄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를 다루시는 방법은 몽둥이로만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놀라운 은혜로 죄를 다루시면서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빚어져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 섭리를 깨달을 정도가 되면 신앙의 차원이 훨씬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경건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의식적으로 선한 일만을 생각하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획을 짜도 선한 일에 대한 계획 그리고 내가 비록 성령 충만하진 못하지만 작은 것이라도 섬기면서 살려고 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보람을 느끼는 삶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친구나 동료가 옆에 있으면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혹시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이 자신의 일인 것처럼 극렬히 여기고 그에게 밥도 사주고 야외에 산책도 시켜주고 그가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깨우쳐 주어서 아직은 인생이 살만하다는 걸 느끼게끔 삶의 명랑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그거는 진짜 하나님 앞에 너무나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한 섬김입니다. 결국은 거기서 헤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자기 마음의 심연을 봄
그래서 결국 다윗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의 심연을 깊이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죄에서 회복되는 사람들이 그 진짜 회복의 결심이 서고 나면 세상 것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정욕의 쓰라린 맛을 보았기 때문에 회복되려고 하면 그 다음에는 매일매일 성경 읽고 말씀을 듣고 그리고 그것을 나누고 책을 읽고 그리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살고 싶다는 의욕을 불태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 죄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깨끗이 씻으시고 하나님이 넘치는 사랑으로 자신을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렇게 말로 할 수 없는 아주 신비한 경험이 되는 동반되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습니다. 형제들에게서도 보고 자매들에게서도 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결국 이 시인은 자기의 마음의 심연을 보았고 그리고 결국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제사가 무엇인가 하는 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그게 뭐냐 하면 상하고 통해하는 심령이었습니다. ‘상한 마음’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레브 니쉼바르(lêḇ-niš·bār)라는 것입니다. ‘샤바르(shabar)'는 화병 같은 것들이 딱 하고 깨지는 것입니다. 금이 가는 걸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하나님의 위엄', ‘거룩하심', ‘영광', ‘자신의 죄', 이런 것 때문에 자기를 신뢰하던 마음이 조각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통회하는 마음'은 ‘레브 딱케에(lêḇdak·kə·’ê-)'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레브'는 ‘마음(heart)'입니다. 그리고 ‘다크에’는 ‘짓이겨진'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비유하면 될 것입니다. 닭 한 마리를 갖다 바위 위에 올려놓고 야구 방망이로 한 삼백 번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속에 뼈가 다 으스러져서 흐물흐물한 고깃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뼈가 형체가 다 으스러져서 닭의 모양이 남지 않고 들면 말하자면 햄버거 고기 패트 뭉쳐놓은 것처럼 될 것 아닙니까? 그런 상태가 다그입니다. 결국 무슨 얘기냐 하면 마음의 고집을 버리고 주님의 손에 의해서 어떻게 빚어지든지 간에 그대로 빚어질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갈 수 있습니다.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돌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런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에게 신앙의 변화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놀라운 변화라는 신비한 일들이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우리에게 얼마든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그런 것이 변해서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터는 자기의 죄를 뉘우치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결국은 광명을 찾았다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얼마든지 하나님이 바꾸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이 시인이 고백한 건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이런 과정을 겪어보니까 내가 비로소 주님의 윤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어리석은 자에게 이 죄와 하나님을 믿는 인생의 도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는 마지막에 결국은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C. 사랑을 믿음
말씀을 맺자면 그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곱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며 버린다고 느끼는 그것은 나를 하나님께로 다시 불러들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라는 것을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예화를 든 적이 있습니다. 자식이 너무너무 속을 새겨 그리고 온갖 나쁜 있을 다 합니다. 엄마가 너무 화가 나가지고 “이놈의 자식아 너 같은 녀석 나가서 뒤져라” 그러고 욕을 했더니 “에이씨 이 더러운 집구석 내가 오나 봐라” 그러고 문을 쾅 닫고 애가 가방을 들고 막 뛰어나가는데 끽 하는 소리가 나면서 하는 비명이 들리는 거야 열 받아 가지고 뛰어나가다가 그냥 급발진하는 택시에 쳐가지고 두개골이 깨지고 피투성이가 돼서 쓰러진 거야 그런데 엄마는 어떡하겠습니까? 나가서 걔를 보면서 ‘내가 뭐라 그랬어. 내가 나가서 죽으라 그랬지. 거봐라 네가 엄마 말 안 듣다가 결국은 돼줬구나’ 엄마도 아닙니다. 엄마도 아닙니다. 계모도 안 그럽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보는 그 순간에 그 아이가 잘못했던 모든 기억이 완벽하게 지워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만 남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피투성이가 됐다. 죽었나 살았나 가서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 자식 고쳐서 수술해서 다 고쳐놓으면 똑같이 속을 새길지라도 엄마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된 그 아들을 부여안고 내가 널 대신하며 죽었더라면 압살롬아 압살롬아 하고 울던 다윗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런 죄로 고통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은 더 큰 고통을 느끼신다는 위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나와 하나시고 그리고 내가 어떠한 경우에 처해있더라도 내 부모는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보혈의 공로가 나를 이 끔찍한 지옥 같은 죄에서도 건져내실 것이다. 그걸 굳게 믿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 이외에는 다시 살 수 있는 어떠한 길도 없습니다. 어떠한 길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여러분이 다시 그런 죄를 안 짓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자유'라고 이야기할 때 ‘프리덤(freedom)'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거는 항상 ‘프롬(from)'이라는 전치사를 동반합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입니까? 억압이냐, 가난이냐, 무지냐, 질병이냐? 그런데 가난에서도 벗어나서 돈 많아졌고 질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지에서 벗어나서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To what?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 freedom from. freedom to what. 그것 없이는 인생에 대한 답이 없는 것입니다. 해방을 외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해방과 함께 무엇을 향해 이 자유를 구가하며 살 것인가라는 목표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음은 그 잘못된 목표 설정에서 나온 죄에 한 형태일 뿐입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속임과 음란과 방탕과 술 취함과 모든 것들이 여기에 다 명예 역과 모든 더러운 것들이 다 나옵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무엇으로부터 해방 문제가 아닙니다.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부를 추구하고 억압으로 더 해방되기 위해서 자유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고 하는 것을 현대사회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요한 건 뭐냐 하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함께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속박시키는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어야 할 것인가?’를 또렷이 알고 끊임없이 우리의 자유를 가로막는 것과 항거해서 그걸 끊어내고 우리는 자유로운 사람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똑같이 고민해야 될 건 뭐냐 하면 해방되는 것만큼 내가 무엇을 향하여 이 자유를 사용할 것인가 그것입니다. 간음의 죄는 그 목표 설정을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였거나 군대에 있는 군인이었으면 그런 죄를 지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못 지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free from 된 것입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무엇을 향한 자유인지를 설정을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현행법이 다 허락을 합니다. 유럽에 가면 아예 사이트에 유료 성매매 사이트가 다 뜨고 불법이 아니라 합법입니다. 동성이건 무슨 이성이건 아무 상관없이 신용카드로 긁고 결제해가지고 그냥 사람들을 불러서 성관계를 할 수 있고 다 합법입니다. 미성년자만 아니면 완벽하게 자유가 다 보장돼 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 같은 나라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전부 다 정기 검진 다 받은 사람이고 국가에서 신분을 보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다 자유입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향한 자유겠느냐 이것입니다. 내 욕망으로부터 해방되고 나면 그다음에 내 인생은 어디로 가느냐 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러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기적인 마음만 가져도 우리는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없다는 거지 이성적으로 벌레처럼 살아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그 죄의 노예가 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것입니다. 순간의 쾌락,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순간의 쾌락으로 끝날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는 양심의 가책과 고통 누구도 가보지 못한 그 캄캄한 어두운 길에서 언제 헤어 나올지도 모르는 그 깊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거는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것입니다. 에너지는 넘쳐흐르는데 그 자유를 자유는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는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무엇을 향해 써야 될지 인생의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 있고 그다음에 집이 있고 그다음에 시간이 있고 그다음에 매력이 있고 젊음이 있으면 그리고 그런 정욕이 있으면 그런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요구에 응할 여성과 남성은 세고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 아닐지 모르지만 세고 버렸어요. 또는 울 부부가 얘기하는데 뭐야 오늘도 누가 얘기하는지 보는 거 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까 원나이트 한 사람 찾는다는 게 아주 공공연하게 자기 이름까지 다 어울리면서 다 사이트에서 나와서 거기서 맺어져가지고 그렇게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거지 그런 시대에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동영상 이런 거 올라오면 막 그걸 지우기 위해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그러죠. 이제는 그런 거 하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냥 내버려 둡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힌다 그렇게 생각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식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무엇입니까? 그런 이 세상의 사조를 거슬러 살면서 또 다른 인생의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가 남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이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죄를 짓고 안 짓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이 세계관의 문제이고 인생만의 문제인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에서는 결코 그러한 판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어떤 것들이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만 분명히 하면 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런 문화로부터 좀 떨어져야 됩니다. 떨어지거나 아니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무장해서 아주 그런 영화를 보면서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저는 이런 얘기하는 게 웃길지 모르지만 가끔 봅니다. 제가 오래전에 본 영화 중 큰 충격과 함께 나에게 현대 정신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을 준 영화가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8MM’라는 영화였습니다. 벌써 한 15년 전에 영화입니다. 최근에는 제가 그런 영화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문제작이라고 생각하는 거 가끔 봅니다. 그런 거를 보면서 삼자적인 입장에서 빠져들지 말고 그걸 비판적인 정신으로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뭔가 거꾸로 교훈을 얻으면서 자기를 무장시키는 문화적인 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고 멀어지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것과 맞서면서 그걸 비판적으로 개선하고 바꾸는 노력을 해가면서 오히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미친 듯 탐닉하는 그 속에서 허무를 읽어내고 그 허무함 속에서 진정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니 예 지향해야 할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안에서 읽어내는 것입니다. 지성이 끊임없이 무장되고 가슴은 경건으로 무장되고 그리고 생활은 좋은 습관으로 몸에 탁 배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에 정성을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나태하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은 이겨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죄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모든 죄 가운데서 오직 은총으로 자기를 건지신 하나님 한 분만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승리한 것입니다. 비극과 시련은 그의 죄에 대한 대가로 남아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는 기회로 삼았고 하나님의 품에서 죽었습니다. 결국은 승리한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말합니다. 이런 죄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내일은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매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항상 도상 연습을 하십시오. 그리고 이 죄에 빠진 사람들은 믿으십시오. 내가 회개하라고 여러분을 족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쉽지는 않지만 확실한 회복의 길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고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분을 건지신다는 사실을 믿고 헤어 나와서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