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살기
2021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1년 05월 02일 – 06월 06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1년 6월 30일
목 차
1. 이런 부모가 되라(잠 22:5-6) 2021.05.02. 주일오전 10
2. 네 자녀를 사랑하라(딤 2:4) 2021.05.09. 주일오전 20
3.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2021.05.16. 주일오전 30
4.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골 3:19) 2021.05.23. 주일오전 41
5.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벧전 3:1) 2021.05.30. 주일오전 50
6. 네 가족을 돌아보라(딤전 5:8) 2021.06.06. 주일오전 61
<설교 프레임>
가족과 함께 살기1 2021. 5. 2 주일 낮 예배
< 이런 부모가 되라 >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5-6)
I. 본문해설
인생은 가족(家族)과 함께 시작되어 가족과 함께 끝난다. 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가족들과 작별하는 게 인생이다.
가족 때문에 인생(人生)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가족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감사하고 원망스럽다.
II. 이런 부모가 되라
독신이나 비혼주의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인생은 누군가의 자녀(子女)로 시작되고 누군가의 부모(父母)로 끝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자녀가 어떤 아이든 그 현실(現實)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현실이 바로 내 삶이 펼쳐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해 이 사실을 적용하라. 그런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하는가? 그 자녀는 당신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더 많이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길을 따라서 그 아이를 훈련시키라. 그가 늙은 때에도 그것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잠 22:6 KNJ 私譯)
A. 마땅히 행할 길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녀와 특별한 관계(關係)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독특한 의무와 책임을 가진 사랑의 관계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도리는 “인간이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누구나 부모가 될 수 있지만, 그는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해야”한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차마 사람이라고 불리워질 수 없는 “마땅한 도리(道理)”가 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사명이다.
그것을 잘 가르쳤다는 건 부모가 사람으로서 잘 산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 산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마땅히 행할 바는 무엇인가?
1. 하나님을 사랑함
첫째로, 하나님(God)을 사랑하는 것이다. 시인은 선인과 악인을 대조한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3-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주어진다고 한다.
패역(悖逆)한 자 앞에는 가시와 올무가 기다리고 있으니 고통과 시련이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따라 창조되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살아 있다가, 그분께로 돌아가는 존재다.
인간은 원래 없었다가, 있게 되었다가, 영원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부모의 가장 큰 책임(責任)은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양육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사랑하도록 태어난 그 자녀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거듭남과 회심을 통해서다.
복음(福音)을 듣게 하라. 죄를 회개(悔改)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라.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작이다.
2. 사람들을 사랑함
둘째로, 사람(man)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함께 가르치라.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고 사랑하게 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꼭 그분의 형상을 가진 인간(人間)을 사랑한다.
a. 함께 살아가는 것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르치라. 인생(人生) 최대의 숙제는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으로 창조된 이유이며, 그만큼 자신도 행복할 수 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 사진1
그것은 이웃과 함께 형제애(兄弟愛)로 살아가는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신자들이 형제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인류가 형제다(행 17:28).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고통(苦痛)이지만, 행복(幸福)도 거기에 있다. 그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도움, 관계와 헌신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라.
b. 관계의 기쁨을 배움
관계(關係)의 기쁨을 배우게 하라. ‘홀로 있음’과 ‘함께있음’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 홀로 편히 살고자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끔 훈련(訓練)하라.
거기서 인간을 배우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지 마라. 이웃들 안에 있는 네가 바로 너다.
꼭 필요한 삶의 두 가지 技藝(ars vivendi)가 있는데 이해와 헌신이다.
“이해(理解)”라는 말은 국어사전적으로 “사물이나 일의 이치를 분별하여 깨닫거나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말이 인간관계(人間關係)에 적용될 때는 “타인의 형편과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에서 비롯된다.
헌신(獻身)은 관계를 소중히 여겨 그것이 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과 소유를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희생이 나온다.
사랑은 소중히 여기고(valuation) 기뻐하는 것(delight)이다. 관계를 소중(所重)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람 소중한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삶을 위한 기예의 훈련은 단지 의무감(義務感)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의무와 함께 기쁨을 갖도록 교육해야 한다.
뜻 있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본성(本性) 안에서도 그러하다.
B. 아이에게 가르침
덕(德)을 가르칠 시기는 어릴 적이다. “아이에게” 신앙과 도덕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일 시기에 가르쳐야 한다.
덕스러운 삶은 말보다 자연스러운 삶의 전수(傳授)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성품은 80%이상이 아동기에 완성된다. 아무 때나 교육을 한다고 원하는 성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20년, 인도의 한 고아원의 싱(J. A. L. Singh) 목사가 늑대에게 키워진 2세와 7세 아이를 데려와 교육시킨 이야기가 있다.
* 사진2
7세 아이는 ‘카말라(Kamala)’, 2세 아이는 ‘아말라(Amala)’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아말라가 1년 만에 죽었다. 카말라는 처음으로 큰 소리로 슬프게 울었다.
* 사진3, 사진4
카말라는 인간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했고 7년이 지나서야 45마디 정도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7년 후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인간으로서 덕(德)스러운 삶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아무 때나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안 변하는 것을 보라.
여기서 “가르치라”는 “훈련시키라”(hanok)이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단지 지식이 아니라 총체적 기술(技術)임을 보여준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좋은 사람”(good man)이 되는 것이다.
죄(罪) 때문에 망가진 사람을 창조시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그런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부모의 부도덕(不道德)한 삶은 아이를 망친다. 인간으로 살아야 할 마땅한 도리를 가르치지 않거나 혼란스럽게 해선 안된다.
부모가 신앙 안에서 참신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봄으로써, 아이는 사람이 마땅히 어떤 인격(人格)을 가지고 무엇을 행(行)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좋은 부모 밑에서 양육(養育)되는 것은 행복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배나 감사하라.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인간 도리를 스스로 체화(體化)해 자기의 것이 되게 해야 한다.
* “타락해서라도 뜨겁게 주님 만나고 싶어요”
죄(罪)가 부족해서 사랑의 체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신앙(信仰)이 자기화 되는 과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主體性)을 확립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부모 자신이 참신자가 되어가는 일상(日常)의 과정을 통해 자녀들이 덕스러운 삶의 기술을 익히게 해야 한다.
IV. 적용과 결론
자녀가 회심하지 않았다면 간절히 기도하라. 참척(慘慽)의 슬픔으로 자녀들이 예수를 믿고 거듭나고 회심하도록 힘써 기도하라.
자녀를 위한 눈물이 말랐다면, 당신의 영혼(靈魂)은 누군가 눈물 흘려주어야 할 불쌍한 영혼이다.
부모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子息)들은 얼마나 가엾게 버려진 자들인가? 당신의 자녀(子女)들을 위해 기도하라.
가족과 함께 살기2 2021. 5. 9 주일 낮 예배
< 네 자녀를 사랑하라 >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딛 2:4)
I. 본문해설
당시 사도 바울의 목회적 제자였던 디도는 그레데섬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당시 유대교적 이단의 가르침으로 복음적인 신앙과 삶이 위협받고 있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써서 스승으로서 목회적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신자들이 세속(世俗)에 물들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전(純全)하게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외인(外人)들과 구별되는 경건한 표 중 하나는 가족(家族)을 사랑하는 것이었으니 행복한 가정 생활이었다.
II. 네 자녀를 사랑하라
사도 바울은 순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목회자와 장로(長老)의 직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두 직분을 맡을 사람들의 자격(資格)에 대해 상세히 말했다(딛 1:7-9). 그것은 교회의 질서에 관한 가르침이었다.
이러한 질서는 일반 성도들에게 요구되었다. 이는 성도들도 진리(眞理) 안에서 참된 삶을 서로 가르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늙은 사람들의 신앙과 역할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특히 여자(女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딛 2:3)
그녀들에게 기대하는 바는 교회 안의 젊은 여성들을 경건과 모범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가 가족(家族)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딛 2:4)
젊은 여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질서 있고 선한 삶은 남편들의 경건한 삶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는 데 있어서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A. 배워야 할 사랑
바울은 경건한 늙은 여자들이 젊은 사람을 잘 가르치길 원했는데, 그 첫 번째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었다(딛 2:4).
그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가르치라고 했겠는가? 가족(家族)에 대한 사랑이 본성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배워야할 것임을 보여준다.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생동안 배워가는 삶의 지혜이며, 기예(技藝)임을 보여준다.
일평생 경건하게 살아온 성도, 모든 시련을 이기고 신앙을 지키며 살아온 신자의 노년은 가족(家族) 사랑의 지혜를 보여준다.
가족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들을 사랑하고 선(善)하게 대하는 정도는 그가 사람이 되어간 정도이다. “가족은 그 사람의 거울이다.”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어야할 의무(義務)는 아내만의 몫이 아니다. 남편도 함께 진심으로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신앙이 성숙해간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깊어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람을 사랑(love)하는 것이다. 그것이 목양의 목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에게 자녀 사랑의 도리(道理)를 배우라.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워가라.
부모는 모든 연약함과 역경을 이기고 은혜 안에서 자녀(子女)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B. 자녀를 사랑하라
어린 자녀에게는 부모의 사랑(love)이 필요하다. 부모로부터 받는 무제한의 사랑은 아이들에게 공기고 물이며, 햇빛이고 양식이다.
* 젖을 못 먹고 자란 아이
부모의 도리는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인생의 무게에 매몰되는 것은 아이를 자기와 함께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다.
부모(父母)의 또 다른 이름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부모는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온전히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다.
자식이 잘못 자라고 있고, 그들이 심지어 그릇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부모(父母)가 괴로워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태만한 부모는 자녀의 불신앙을 합리화(合理化)함으로써 자녀 미래에 대해 낙관하기도 한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변화될 것이다”.
안타깝게 기도(祈禱)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녀의 회심에 대해 절반은 포기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사랑 없음에서 비롯된다.
자녀(子女)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을지라도, 어린 시절에는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생각이 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일 그들에게 마지막에까지 남는 것이 있으니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기억(記憶)이다. 인격적인 관계의 경험이다. 그것이 자기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할지를 가르쳐준다.
먼 훗날 부모가 죽은 후에라도, 그 사랑은 자녀(子女)의 마음에 그때 배운 인간으로서의 도리(道理), 부모로서의 도리를 생각하게 한다.
과도한 기대(期待)로 아이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 쓸데없이 실망하여 자녀를 낙담하게 하는 부모가 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쓸모 있게 창조(創造)하셨음을 믿고 사랑하라. 그 아이에게 주신 훌륭한 본성과 재능을 발견하라.
자녀교육에 대해 회심하라. 실제적으로 부모가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래서 은혜(恩惠) 아래 사는 것이 꼭 필요하지 않겠는가?
“엄마가 죽어버릴 거야! 떠나버릴 거야!” 이런 말로 자녀의 마음에 상처(傷處)를 주지 말라. 이런 말을 들을 때 자녀는 자신의 존재감(存在感)이 박탈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말에 정서적으로 상처를 받으면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민폐(民弊)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억눌린 마음으로는 결코 구김 없이 자랄 수 없다. 사랑 받으며 자유롭게 자라게 하라.
그런 말이 반복되면 정서적으로 불안해져서 부모와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다. 심한 경우, 어린 아이인데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모의 이런 태도는 자녀(子女)로 하여금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지 못한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아이는 열등감(劣等感)에 사로잡히거나 타인에 대한 파괴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성장해가면서 타인(他人)과의 관계에 기대를 갖지 못한다. 남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기 힘들게 된다.
“아이들 인생은 그들 것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이지.” 무심한 부모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이런 말도 큰 상처(傷處)가 된다.
어린 시절 자라나는 자녀들의 건전한 자아(自我)는 부모에 대한 온전한 의존(依存)과 인격적 사랑의 정서 속에서 형성된다.
부모(父母)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 그 아이의 마음에는 자신과 세계(世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루어진다.
비뚤어진 심성으로 인생(人生)을 보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그런 인상은 그 후 부모의 노력으로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추억(追憶)이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은 애틋한 기억이 없는데 자녀들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사랑의 관계가 이뤄지겠는가?
흔히들 시집장가 가면 철 들어서 부모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코 저절로 그렇게 변화되지 않는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결혼한 자식 중에는 불효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결혼(結婚)해서 부모가 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로는, 부모가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는, 무엇보다도 자녀와의 인격적(人格的) 관계가 깨어지지 말아야 한다.
가족은 특별한 타인(他人)이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예외가 아니다. 한 번 관계가 깨어지고 나면 타인만도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아이에게 인간의 마땅한 도리(道理)를 가르치는 일은 반드시 뜨거운 사랑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고전 13:4)
사랑은 자녀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영혼의 힘이다. 하나님 사랑으로 살라. 부모(父母)로서, 마음으로라도 자녀(子女)를 버리지 말라.
각자의 삶의 무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지 않음은 정당화(正當化)될 수 없다. 그것은 본성(本性)과 신앙을 버리는 것이다.
“장차 가 를, 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마 10:21)
문제는 이것이다. 부모(父母)도 한갓 연약한 인간인데 어떻게 자녀들을 향해 끝없이 샘솟는 사랑(love)을 간직하고 살 것인가?
첫째로는, 인간의 본성(本性)으로 돌아가라. 짐승에게서라도 배우라.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무정(無情)함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생각하라
둘째로는, 신앙의 은혜(恩惠)로 돌아가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라.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불효(不孝)한 자식이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요일 3:1)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용서(容恕)하고 사랑해 주셨는지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라. 자녀에게 베푼 사랑을 자기의(自己義)가 되게 하지 말라.
I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부모가 된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자녀 사랑에 생명을 걸라.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자녀를 사랑하라.
당신의 자녀(子女)를 참사람으로 키우는 사랑의 과정 그 자체가 부모 당신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되게 하라.
가족과 함께 살기3 2021. 5. 16 주일 낮 예배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I. 본문해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믿음과 삶의 규칙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하나님께 대한 계명(1~4), 사람에 대한계명이다(5~10).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지를 보여준다.
부모(父母) 공경의 계명은 2부의 첫 계명이니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II.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만물을 창조(創造)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까지 정하셨다.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부부간의 사랑의 결합으로 자녀(子女)를 태어나게 하셨으니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정하셨다.
A. 부모를 공경하라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당신을 아버지로 공경하는 온 인류가 한 가족(家族)으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보라. “나는 너희의 아버지니라”(롬 8:15, 갈4:6)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 잘 경외(敬畏)하게 하시려고 보이는 부모를 주셔서 공경하게 하셨다.
‘공경하라’는 의미는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권위를 인정하면서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공경하다’의 반대말은 ‘업수이 여기다’이다. 부모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존중함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공경은 마음과 물질(物質)의 섬김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이는 그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 된 징표다.
예수님도 복음적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부모 공경을 엄히 강조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마 15:4)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는 특별한 사랑과 헌신(獻身)의 관계는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 닭이 알을 품는 21일 / 가시고기 산란
성격(性格) 차이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는 있어도 그 이유 때문에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거의 없다.
성경은 가정의 근본을 세우는 세 기둥을 제시한다. 부부, 부모, 자녀이다.
하나님은 자녀(子女)들에게 그들의 부모를 공경하도록 직접 명령하신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부모 공경의 의무를 다할까?
첫째로, 부모를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가장 큰 도리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처럼 부모를 기억하라.
부모에게 입은 덕(德)을 기억하라. 설사 그렇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소중히 여기고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God)의 자녀가 된 표다.
둘째로, 부모를 물질로 섬기는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부모가 노후에 물질적으로 자녀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안 될 때 자녀는 부모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궁핍으로 고통 받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섬겨야 한다.
부모를 물질(物質)로 섬기는 것은 부부사이에 예민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양가의 부모를 동일하게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이고 자녀의 도리를 다하기를 다짐해야 한다. 그것이 복 받는 길이다.
셋째로, 관계(關係)의 기쁨을 드리는 것이다. 노년에 가장 허전한 것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이다.
*은퇴한 목사님의 시골 생활과 아쉬운 것
매달 보내드리는 얼마간의 용돈 못지않게 중요한 효도(孝道)는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엄마와 딸이 함께 여행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자신의 삶과 신앙을 나누는 인격적 관계의 기쁨을 드리는 것이 효도다.
*농어촌 아웃리치의 경험 “진작 전해주지”
B. 관계를 회복하라
우리가 그렇게 가족관계를 회복하고 싶어도, 이미 깊은 상처(傷處)와 미움으로 얼룩져있을 때는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
이때 가장 필요한 지혜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신이 처한 현실(現實)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 모두 자기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이 고해(苦海)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원망하던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하고 나면 관계를 회복할 길이 보인다. 부모와 자녀가 상대방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악한 이스라엘의 왕들의 최후를 묘사하는 말이 있다.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대하 21:20)
부모들도 변해야 한다. 자녀들과의 관계가 소원하면 그게 단지 자신들이 늙었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늙어가는 날에 지난 날 자녀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상처를 준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진심으로 용서(容恕)를 빌어야 한다.
자녀들은 자신도 자기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기대했던 것만큼 좋은 부모가 되지 못한 것을 회개(悔改)하며 부모의 과거를 용납해야 한다.
첫째로, 화해(和解)할 용기를 가지라. 세상에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 비결 중 하나는 적절한 때 사과를 잘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진심으로 사과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잊고 사랑과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그런데 유독 가족들 간에는 이런 일에 인색하다. 부모(父母)는 그릇된 권위와 체면 때문에 자녀는 쑥스러움과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잘 안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화와 사과 그리고 이해(理解)와 용서는 부모와 자녀의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탁월한 방법이다.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Christ)께서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하며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 추운 겨울 교회 마루바닥에서 깨닫게 하심
우리가 부모에게 모질게 대하고 불효(不孝)하면 그 자녀인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에게 꼭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둘째로, 약속(約束)이 있음을 기억하라. 원래 십계명은 보상의 조건이 아니라 그냥 의무로 주어진 것이다. 포괄적인 복이 약속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 번째 계명에는 유일하게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보상(補償)이 제시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다섯 번째 계명을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불린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이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인류사회(人類社會)를 만드시기 위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복(福)을 주신다.
셋째로, 인간의 연약(軟弱)함을 알라. 어릴 적에는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한 기억 때문에 부모를 용서하지 못한다.
때로는 부모의 동의할 수 없는 과거의 부도덕(不道德)한 삶 때문에 공경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아까운 세월은 흘러간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보면,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윽고 더 나이를 먹으면 인류애(人類愛)가 생겨나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부모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무거운 의무의 짐을 지고 자기도 살아내지 못한 삶을 부모에게 왜 당신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느냐고 원망(怨望)하지 말라. 그전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라. 인류의 한 사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
그렇지 않다면 자신도 상처(傷處)를 준 부모와 꼭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곧 자식들로부터 꼭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 꿈에 본 아버지
III. 적용과 결론
마음 깊이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가 살아계신 것이 기회다. 화해하라. 돌아가시거나 치매에 걸리시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다.
그리스도는 그런 가족관계를 회복(恢復)시키시고 다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화목제물로 주시지 않으셨는가?
가족과 함께 살기4 2021. 5. 23 주일 낮 예배
<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I. 본문해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편지로서, 당시 골로새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이단적 가르침을 꾸짖고 있다. 이 이단(異端)은 유대교와 민간 신앙을 융합한 거짓된 가르침이었다.
이런 이단적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 영향을 끼쳐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미신적 방식으로 율법(律法)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보다 탁월하신 우주의 통치자(統治者)시며 신자들과 생명적 연합을 이루신 분임을 가르친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할지 가르치신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함께 살아야 할지를 말한다.
II.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
남편(男便)에게 강조하는 덕목은 아내를 사랑(love)하고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기에 명령하는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A. 사랑하라
첫째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며”(agapate)는 아가페, 곧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뜻이다.
당시 로마사회는 가정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통치자들은 견실한 가정(家庭)이 안정된 제국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믿었다.
당시 사회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지배하던 사회로서 모든 제도가 남성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남성들은 힘과 권력, 사회적 권위로 가정을 통제했다. 아내의 역할(役割)은 남편에게 복속된 채, 자기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공공장소에서의 여성의 발언은 남편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그렇게 대우(待遇) 받던 아내를 아가페(agape)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에는 “되는 사랑”과 “하는 사랑”이 있다. 연애시절과 결혼생활을 비교해 보라. 저절로 끌리는 사랑(love)의 때가 있다.
결혼한 지 10년, 15년이 지났는데도 남편 목소리를 들으면 설렌다는 아내들은 가끔 있지만, 남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다.
신경과학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感情)을 물리적 원인에서 찾는다. 처음 사랑에 빠질 때에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페닐에틸아민 등 화학물질의 작용으로 격렬한 연정(戀情)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이것들은 바소프레신, 옥시토신, 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바뀌면서 서로가 안정적(安定的)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혼 후 권태기를 겪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새로운 소통의 끈이 생긴다.
새로운 삶의 상황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면서 부부는 끈끈한 가족애(家族愛)로 뭉쳐지는 것이다.
불신자는 아내를 지배(支配)하지만 신자인 당시 수신자들은 신자인 남편(男便)으로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사랑은 인간의 육정(肉情)에서 난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사랑으로 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아내를 향한 남편의 이런 사랑은 인류 최초의 결혼식에서 아내에게 바친 남편의 고백(告白)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이것은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다. 이 사랑 안에서 남편은 아내를 자기(自己)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었으니 모든 인류를 그렇게 사랑하여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첫 인류의 범죄로 그 사랑은 파탄에 이르렀고 남편에게 아내는 존재 자체가 고통(苦痛)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창 3:12).
아담과 하와가 서로 싸운 것이 아니다. 각자가 하나님께 범죄하자 부부(夫婦) 사이의 사랑은 끊어졌다.
그들은 결혼할 당시 고백(告白)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여성에 대한 폭력적 성차별의 잔혹한 역사는 이러한 비극의 결과였다.
남편(男便)이 아내를 사랑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쉬웠다면 명령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아내를 아가페(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필요하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사람의 사랑으로써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결혼(結婚)을 통해 아내를 주신 것은 배우자를 자기 이익을 위해 도구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불행(不幸)하게 하면서 자기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6-27)
불완전한 아내를 만나게 하신 것은 사랑하는 과정(過程)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내의 부족(不足)한 점과 인격적 흠을 발견할 때마다 거기서 그녀의 남편으로서의 소명(召命)을 발견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러한 아내를 온전하게 살도록 돕기 위하여 배필로 삼아 주신 것이다.
B. 괴롭게 하지 말라
둘째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아내를 존중(尊重)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거나, 트집을 잡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은 자기 영혼(靈魂)을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남편이 그렇게 살면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交際)가 막힌다고 경고한다. 기도의 문이 막히게 된다는 것이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모본(模本)을 보지 못하고 자라온 경우에 스스로 배워나가는 과정은 많은 고통(苦痛)을 요구한다.
더욱이 그런 남편이 가정을 이루기 위한 도리를 배우지 못한 아내와 함께 살며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부족한 아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친딸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일에 버거움을 느끼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함에도 그러하듯이 은혜(恩惠)가 필요하다.
은혜는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깨어진 관계(關係)를 회복하고 지속할 수 없던 관계를 이어가게 만들어 준다.
이런 사랑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솟아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恩惠)를 받아야 한다. 자기가 깨어지고 주님이 사시도록 해야 한다.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은 없다. 또 언제까지나 그런 사랑을 받는 것으로 행복(幸福)해지지 않는다.
이는 행복하길 바라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근원(根源)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love)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아내 또한 그러하다.
III. 적용과 결론
자기가 좋을 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 관계(關係)에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신앙(信仰)은 사랑을 위해 있다. 믿음은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이며 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만큼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아내를 용납(容納)하고 사랑할 힘을 얻으라.
가족과 함께 살기5 2021. 5. 30 주일 낮 예배
<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 >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라 …”(벧전 3:1)
I. 본문해설
로마의 대대적인 핍박을 앞두고 쓰여진 서신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배신(背信)한 적이 있기에, 박해 받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다.
1장에서 고난과 소망을 말한 후, 2장에서는 믿음과 생활을 말한다. 3장에서는 그런 소망(所望)을 가진 남편과 아내의 삶에 대해 말한다.
II.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
“이와 같이”라는 말은 바로 앞에 나온 내용을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악을 행한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시고, 용서(容恕)하시고, 구원해 주신 사실을 가리킨다(벧전 2:22~25).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르쳐 주는 지침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 5:2)
성경은 아내와 남편이 부부(夫婦)이기 이전에 신자로서 그리스도께 함께 접붙여진 ‘한 몸’(one body)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영적 기초 위에서 남편과 아내로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A. 순종하라
첫째로 순종(順從)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남편(男便)에 대해 아내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그것은 전도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
여기서 “순종하다”(hypotassomenai)는 그리스어의 의미로 “(어떤 사물을) 질서에 따라 아래에 두다”라는 뜻이다. 당시 사회적 문맥이 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形狀)으로 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여야 한다. 이에 관한한,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중해야 할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子女)로서 그분의 질서를 따라 삶으로써 온전한 교회(敎會)를 이루기를 힘써야 한다. 가정도 그 계획 안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순종하라”는 것은 남편의 말이기 때문에 저절로 순종할 권위(權威)를 가진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남자(男子)이기 때문에 우월하다는 뜻이 더더욱 아니다(딤전 2:13-14). 단지 언약(言約)의 당사자로서 가정을 신앙적으로 이끌 책임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더욱이 아내는 무조건 남편보다 열등하며 그에게 복종(服從)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뜻하는 바가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고 싶어 하는 남성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골 3:18)
개역한글이나 지금 사용 중인 개역개정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번역했다.
그 번역은 전적으로 잘못 되었고,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처럼 보인다.
“아내들이여, 당신들은 그대들의 남편들에게 스스로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한 한에서”(Αἱ γυναῖκες, ὑποτάσσεσθε τοῖς ἀνδράσιν, ὡς ἀνῆκεν ἐν Κυρίῳ. 골 3:18, KNJ 私譯)
참고로, 이해를 돕기 위해 영어(英語)로 정확히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Wives, Submit yourselves to your own husbands, in so far as it is fitting in the Lord”(Αἱ γυναῖκες, ὑποτάσσεσθε τοῖς ἀνδράσιν, ὡς ἀνῆκεν ἐν Κυρίῳ. 골 3:18, KNJ 私譯)
따라서 이 구절은 남편(男便)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동하는 한에서, 아내는 그의 말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강조점은 남편이 그리스도를 본(本)받아 온전히 행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성경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아내는 그 머리의 몸이니 얼마나 사랑을 받아야 할까?
그리스도(Christ)는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남편은 오류가 있고 불완전한 인간(人間)이니 어찌 모든 일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이 말씀도 모든 일이 아니라, ‘주(主)의 뜻인 범사(凡事)’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쁜 것을 교회에 명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건한 남편의 올바른 신앙적(信仰的) 요구에 불순종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 아내의 반대로 봉사도 헌금도 못하던 제직
이 가르침에서 떠나 아내가 완강함과 고집으로 경건(敬虔)한 남편의 뜻을 꺾는 것은 명백히 죄(罪)다. 이것은 남편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그런 빗나간 육신적 고집(固執)과 우월감으로 신앙적인 남편을 꺾으며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아내들은 수치스러운 줄 알라.
하나님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 격려하며 선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주님 뜻을 위해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피차 복종(服從)해야 하지 않겠는가?
B. 사랑하라
둘째는 사랑(love)하라는 것이다. 아내로서 주 안에서 남편(男便)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가페(agape)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8)
어떤 사람들은 남편에게 아내 사랑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베소서의 이 구절에서 “이와 같이”가 무엇인가?
그 해답은 문맥 바로 앞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敎會)를 사랑하셔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을 받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그저 두려워 떠는 노예처럼 복종하면 된다는 뜻인가?
그것이 교회와 그리스도(Christ)의 관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역시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 없는 존경이 가능한가?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love)하듯이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질서(秩序)를 따르는 아내의 복종은 하나님(God)에 대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남편(男便)은 아내와 한 몸이 되기 위하여, 오랫동안 일생을 함께 했던 그의 부모를 떠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5:31)
남편은 아내와의 사랑의 결합(結合)을 위해 옛집을 떠난 사람이다. 이제 그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아내를 의존하며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아내로부터의 사랑을 기대하지 못한다면 부모(父母)를 떠난 그는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가?
* 남편을 비하하는 유머가 유행하는 세상
과거에 남편이 잘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회개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나이가 들어서 능력이 없게 되었다고, 전가의 보도처럼 수시로 써먹으며 남들 앞에서 남편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아내의 도리가 아니다. 그것이 어찌 경건한 아내로서 할 행동이겠는가?
그녀 안에 있는 성령(聖靈)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그렇게 해서 지난날 남편에게 눌려 지냈던 복수심을 나쁜 감정으로 배설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지난날의 상처를 곱씹으며 보복하듯이 남편을 원망(怨望)하며 산다면 아내가 인내하며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하늘의 상급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아무리 교회 일에 충성할지라도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내면(內面)의 세계까지 하나님 사랑(love)이 스며든 사람은 아니다.
남편을 사랑하되 에로스(eros)의 사랑만이 아니라 아가페(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라. 이는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본 딴 것이다.
남편을 존중하라. 그를 외롭게 하지 말라. 남편을 용서(容恕)하라. 그에게 소외감을 줌으로써 복수하지 말라. 그런 아내의 마음을 성령(聖靈)께서 근심하신다.
사랑은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그 긍휼이 지속되기에 오래 참는 것이다.
*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
아내로서 실패한 성도는 예수 사랑하기에 실패한 사람이다. 자기가 남편에게 못한 존경을 자녀(子女)들에게 받는 것은 얼마나 드문 일인가?
당신이 남편을 위해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드린 것이 언제인가?
그렇게도 남편을 꺾고 이겨서 발아래 두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은 차라리 수백 년 전에 태어나 노예와 함께 살았으면 좋을 여자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사랑하면서 한 인간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지난날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던 기도(祈禱)는 무엇 때문이었는가? 대부분 가족 때문이었다. 남편과의 관계를 쉽게 포기한 채 살아가려는가?
그러면 예수를 위해 죽은 것이 무엇인가? 남편을 한 몸으로 여기고 그를 위해 진 십자가가 무엇인가? 아직도 기회가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
가족과 함께 살기6 2021. 6. 6 주일 낮 예배
< 네 가족을 돌아보라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I. 본문해설
이 서신은 에베소교회를 목회(牧會)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쓴 것이다. 그는 거짓 교사들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그에게 주는 목회적 권면의 편지이다.
바울은 이단(異端)에 대처하기 위해 교회가 어떻게 일꾼들을 세우고 복음(福音)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를 설파했다. 특히 가정과 교회 안에서 바르게 살도록 권면했다.
당시는 고아와 과부들이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弱者)였고, 교회에서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 경건의 표지로 교육되던 때였다(약 1:27).
그런데 신자 중에서도 의탁할 데 없는 자기 가족(家族)들을 돌보지 않고 교회에 떠맡기는 이들이 있었다. 이것은 믿음을 저버린 행동이었다.
신자에게도 때로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쉽지 않다. 더욱이 가족이 전부가 혹은 일부가 불신자(不信者)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신자의 가장 큰 고통(苦痛)은 아직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을 둔 것이다. 그러나 은혜에서 멀어지면 친족은 물론, 가족의 구원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恩惠)를 받으면 그것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로 여긴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족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한다.
가족 전도가 어려운 이유는 자기의 모든 삶을 노출하면서 복음(福音)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족 사랑의 모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II. 가족을 돌아보라
우리의 친족과 가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引導)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love)해야 한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랑으로 구원 받지 못한 내 가족들을 불쌍하게 여기시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관심(關心)을 가지고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의 육신적인 환경과 영적인 처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A. 육신을 돌아봄
첫째로, 가족들의 육신(肉身)의 필요를 채워야 한다. 가족들의 육신적 필요를 살피라. 그들을 도와주라.
단지 전도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먼저 한 가족으로써 사랑(love)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참된 구원은 영혼(靈魂)만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까지 아우르는 전 포괄적 구원이다. 예수께서 지상 생애 동안에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셨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예수의 눈물과 섬김을 배우라. 그 위에 구원 받지 못한 가족(家族)들의 영혼에 대한 경건한 안타까움을 더하라.
신자는 먼저 가족들과의 화목(和睦)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이다. 그 화목을 사람에게 전하여 그들도 누리게 해야 한다.
신자에게 가정은 사명 받은 선교지다. 가족들을 사랑으로 섬겨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여야 한다.
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전도(傳道)의 길이 막히지 않게 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적 존재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 가족이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는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주께 하듯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라.
가족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가족 간의 관계에서 사소한 것을 양보하고 큰 것을 지켜라. 그것은 신앙의 가치다.
모든 일에 관용하며 크게 참으라. 특히 가족들의 육적인 형편을 돌아보고 사랑으로 바르게 도우라.
물질(物質)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가족관계를 깨뜨리는 가장 흔한 이유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더 많이 받은 자로서 지혜롭게 섬기라.
B. 영혼을 돌아봄
둘째로, 영혼(靈魂)을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족들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라.
불행한 삶으로 나타나는 가족들의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으라.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라.
가족들의 방황하는 영혼과 소외(疏外) 받은 감정을 헤아리라. 그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라. 포기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라.
가장 탁월한 가족 전도는 자신이 먼저 충만한 기쁨(joy) 속에서 사는 것이다. 행복을 보여주라. 은혜를 많이 받으라. 가족들을 너그럽게 품으라.
가족들 개개인의 영혼의 필요에 민감하며, 형편(形便)을 살피고 섬기라. 그들이 필요로 할 때, 그 곁에 있어주라.
가족들에게 정신적인 동반자(同伴者)가 되어주라. 가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 바로 어려울 때 의지(依支)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열렬한 유대주의자로서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이후로 그는 그 사랑으로 감화(感化)되어 복음을 전했다. 이방인들이 전도되어 돌아올 때마다 불신(不信) 상태의 동족들과 친척과 가족 생각에 구령의 열정은 피가 맺히도록 한(恨)이 되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심지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라도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싶어 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더욱이 그 전도 대상자들이 우리 가족(家族)들이 아닌가?
*병상에 있는 아버지의 전도를 부탁한 교인
가족의 인연도 영원하지 않다. 죽으면 모두 헤어진다. 그러나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라.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서 뿐이다.
*네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라!
우리 모두 언젠가 세상(世上)에 있는 것들을 버려두고 하나님께로 간다. 가족들이 천국에서 다시 만날 기약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기쁘겠는가?
참된 사랑도 오해될 수 있고 때로는 무시(無視)당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한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하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들을 사랑하라. 담대한 믿음(faith)을 가지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셔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구원해 주시리라고 굳게 믿으라.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꿈꾸라.
가족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난날의 불행했던 상처(傷處)는 잊으려고 노력하라.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히 받으라.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사랑을 기억하며 가족을 사랑하라.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라.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라.
III. 적용과 결론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아파하는 영혼이 아름답다. 하나님은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를 위해 끝까지 사랑하셔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자기 영혼을 위해 울지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 기도하자!
가족과 함께 살기1 (2021.05.02._주일오전)
1. 이런 부모가 되라
“패역한 자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거니와 영혼을 지키는 자는 이를 멀리 하느니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5-6)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인생은 가족과 함께 시작되어 가족과 함께 끝이 납니다. 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가족과 작별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가족 때문에 인생은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가족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감사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이런 부모가 되라>입니다.
II. 이런 부모가 되라
독신이나 비혼주의자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자녀로 시작된 사람의 일생은 누군가의 부모로 끝을 맺게 됩니다. 자녀와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아이가 나의 자녀이고 내가 그 아이의 부모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아이를 낳은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까? 이웃의 아이와 비교하며 후회하고 있다면 그 자녀는 다른 부모가 아니라 당신이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을 더 자주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6절을 직접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그의 길을 따라서 그 아이를 훈련시키라. 그가 늙은 때에도 그것으로부터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잠 22:6 KNJ 私譯) 그래서 그의 길을 "마땅히 행할 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A. 마땅히 행할 길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녀와 특별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도리는 인간이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누구나 부모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부모의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차마 사람이라고 불려질 수 없는 마땅히 살아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사명이고 아이는 그것을 양식처럼 받아먹음으로써 사람다운 삶을 살 준비를 가정이라는 둥지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부모가 되어 그것을 잘 가르쳤다는 것은 사람으로 잘 살았다는 뜻이고 그것을 못했다는 것은 잘못 산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이에게 꼭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는 마땅히 행할 바 그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악인과 선인을 대조합니다. 잠언 22장 3절과 4절에서 말합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패역한 자 앞에는 가시와 올무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예기치 못한 고통과 시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살아있다가 죽어서 그분께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원래는 없었던 존재인데 생겨나고 있었다가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책임은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양육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이것을 한 부모는 자녀에게 거의 모든 것을 해 준 부모이고 다른 모든 것을 해주었다 할지라도 이것을 해주지 못한 부모는 거의 아무것도 안 해준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만 사랑하도록 태어나는데 어떻게 그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영혼이 거듭나고 마음이 회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예수를 믿고 회심하는 것은 자녀를 위한 부모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이며 이 일을 위해서 부모는 전심으로 그에게 복음을 듣게 해야 합니다. 그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여러분이 자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헤아리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입니까?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까?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있으나 전심으로 여러분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싶어 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그 자녀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진심으로 빌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 두 번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아이에게 함께 가르치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 얼마나 고귀한 존재로 태어났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이 그를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것을 잊지말게 하십시오. 동시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 비참하게 되었으며 죄인이 되었는지를 함께 가르치십시오.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자녀로 기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게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생의 최대 숙제는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를 사람으로 창조하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좋게 보지 않으셨으며 그래서 그의 씨를 두루두루 퍼트려 온 인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웃을 자기 몸같이 여기며 서로를 사랑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 한 사람만 세상에 있는 것 보다 아름다운 세계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류를 지으신 것입니다. 누구를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까? 누가복음 10장 36절과 3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그림입니다. 저 멀리 뒤에 보면 어떤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급히 사람을 나귀에 태워 어딘가로 가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제사장이 그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지만 지나갔고 레위인도 그를 보았지만 못 본체 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나귀에 태워 주막에 데려가서 돌봐주게 하고 비용도 자신이 부담했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더러운 민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누어진 이후 앗수르에게 멸망되면서 북왕국에 있는 사람들은 사민정책에 의해 피가 섞이는 혼혈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대인으로 독특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은 더러운 땅이 되었고 윗 지방 갈릴리로 가려면 돌아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이 유독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해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버리고 간 불쌍한 사람을 거두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너희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지 마라. 바로 어려움을 당하고 불쌍한 모든 사람이 너희의 이웃이니 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형제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신자들이 형제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인류가 형제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 있는 것처럼 온 인류가 하나님의 소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때때로 불편한 일이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받은 모든 상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이지 짐승이나 자연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또 생각해보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도 사람이 있었지 자연만 있던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이 인간에게 주신 인간의 도리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살아가는 사람은 잘 사는 것이오 못살아 가는 것은 못사는 사람이니 잘사는 사람은 행복하고 못사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도움 관계와 헌신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의 보람을 느끼도록 자녀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 못할 때 어른이 되어서도 잘 못합니다. 그래서 행복해야 할 사람들과의 관계는 고통스러운 관계가 됩니다. 또 어디에 가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이바지해야 할 사람의 도리를 행하는 대신 자신과 이웃을 고통과 불행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된 여러분은 자녀를 진실로 사람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당연히 사람답게 사는 것이 자기의 관심사가 아닌 부모는 자식이 사람답게 자라는 일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소수인 이유가 바로 부모에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기쁨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반드시 홀로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것 없이 마음을 모두 개방하여 타인들이 드나드는 사람은 결코 깊어질 수 없고 그런 삶에는 자기반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홀로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홀로 있음으로서만 하나님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마음으로 홀로 있는 시간이야 말로 더더욱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무엇을 위한 반성입니까? 무엇을 위한 묵상입니까? 무엇을 위한 사색입니까? 결국 한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과 함께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홀로 있음은 함께 있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아무하고 섞이지 않고 홀로 외톨이가 되어서 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그의 심성이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인간이 마땅히 행할 길을 터득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온 사람은 그 관심이 하나님과 똑같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불편하다가도 편해지기를 바라고 고통받다가도 오히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참된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홀로 편히 살고자 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끔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자녀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자기만 들여다봐서는 자기가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지만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자신이 얼만큼 사람이 되었는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삶의 두 가지 기예 혹은 기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해와 헌신입니다. 이해라는 말은 국어사전적으로 사물이나 일의 이치를 분별하여 깨닫거나 해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관계에 적용될 때는 전혀 다른 뜻이 됩니다. 즉 타인의 형편과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이해입니다. 그래서 이해심이 많은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해심이 없고 소갈머리가 없는 사람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사람이 없으니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외톨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 처지에 있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처한 형편과 사정을 잘 헤아리고 그의 입장이 되어서 그를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는 것, 이것이 이해입니다. 당연히 사랑 없이는 이런 이해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이해심을 갖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입니다.
교육학자들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그 배려하는 훈련 중 가장 쉽고 빠른 것이 동물을 기르게 하는 것입니다. 식물보다는 동물이 효과가 뛰어납니다. 강아지를 기른다든지 고양이를 기른다든지 혹은 토끼를 기른다든지 어쨌든 동물을 기릅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이는 책임의식을 느낍니다. '아! 얘를 내가 돌봐야 한다.'라고 느낍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강아지를 키웠고 우리 집안에 강아지가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아지가 죽고 나면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울곤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게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들이 개를 키우자고 몇 번을 얘기해도 절대 안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또 인연을 맺어서 헤어지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이만큼 살아서 사람하고 그 일을 하는 것도 힘든데 내가 왜 또 개하고 인연을 맺어서 그렇게 이별을 경험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이 원해서 강아지를 기르고 있습니다. 3년 조금 넘었습니다. 그런데 책임의식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병아리를 길렀습니다. 학교 앞에서 병아리 감별사에게 퇴짜 맞은 병아리들이 한 마리에 10원씩 팔렸습니다. 그러면 종이 봉투에 병아리를 담아줍니다. 하루는 학교에 갔다가 너무 신기해서 30원 주고 세 마리를 사서 집에서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아이들이 자라는 게 너무 귀여웠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는 꼭 시장을 들러서 배추잎 혹은 야채잎을 주워서 집에 와서는 아주 가늘게 썰어서 사료에 묻혀서 병아리에게 주면 잘도 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병아리를 예쁘게 길러 놓으면 할머니가 "그거 좀 팔아라. 오늘 우리 두 마리만 잡아 먹자." 그렇게 할머니하고 거래를 터서 집안에 납품을 했습니다. 그래서 꽤 많은 돈이 저의 통장에 저금되어 있었던 기억이 뚜렷합니다. 제일은행 미아동 지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확실한 건 동물을 키우면 그 동물을 돌봐야 되겠다는 책임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배려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야! 놀러가자" "안돼, 나 강아지 혼자 있어서 강아지 밥 줘야 돼." 이런 것이 타인을 향한 배려의 훌륭한 훈련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 세계로 들어가 보면 애완동물은 애지중지 사랑하면서도 가족들과는 잘 지내지 못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가족 뿐만 아니라 사람하고는 도저히 함께 지내지 못하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동물은 배신을 안 합니다.
엊그제 유튜브를 보니까 악어가 곤궁에 빠졌을 때 어떤 사람이 구해줬는데 그다음부터 힘든 일이 생겼습니다. 계속 그 악어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 악어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로 야수성을 가진 짐승인데도 자기를 구해 준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동물은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최근에 외국의 동물원에서 범고래가 사육사와 그렇게 친했는데 물어 죽여 버렸습니다. 이유가 뭐냐면 하루에 160km를 헤엄쳐야만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합니다. 대전까지 가야 되는 물고기를 수영장만 한데 가둬 놓으니까 스트레스가 쌓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야수성의 발현이지 사실은 배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잘해줬는데도 배신을 합니다. 그리고 동물이 주는 상처는 기껏해야 할퀴고 무는 정도지만 인간은 마음을 쥐어뜯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앞산 때문에 자살을 합니까? 아니면 뒷산 때문에 합니까?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가 대부분 사람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절망을 느끼는 것 만큼 큰 절망을 다른 데서 느끼는 게 별로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는 것도 결국 알고 보면 사람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은 사랑해도 사람은 그렇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동물은 배려해도 사람에게는 못합니다. 그래서 동물을 대하면서 배려하고 돌보는 것은 준비 운동일 뿐입니다. 진짜 해야 할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배신당할 수 있는데도 그를 사랑할 수 있고 상처를 받을 수 있는데도 그 상처를 뛰어넘어서 사랑하는 기술들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 있어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기술인 것입니다.
여기에 "가르치라"고 되어 있는 이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 하녹(hanok)이라는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크"라는 동사의 명령형입니다. 하나크가 무엇이냐면 "기술을 잘 습득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자전거가 타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빠에게 졸라서 간신히 두발 자전거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자전거를 배우기 위해서 아빠와 함께 운동장에 갔습니다. 자전거에 태우기 전에 아빠가 먼저 설명합니다. "얘야! 자전거는 두 바퀴를 가지고 네가 페달을 밟으면 굴러가는 기구다." "그리고 앞에는 핸들이 있고 오른쪽 손잡이는 브레이크다." 이렇게 설명을 해줍니다. 그러면서 네가 이 자전거를 타면 분명히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서 쓰러질 것이다. 그때 너는 본능적으로 안 쓰러지기 위해서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버티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백발백중 넘어진다. 그러니까 요령은 이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왼쪽으로 자전거가 기울면 너도 왼쪽으로 가만히 같이 기울어지면서 핸들을 기우는 쪽으로 틀어라. 언덕에서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면 브레이크를 밟거라. 브레이크를 밝고 페달을 밟으면 절대 안 된다. 반드시 패달을 밟을 때는 브레이크를 놓고 열심히 밟으면 빨리 간다. 또 질문이 있니?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 이제 배운 그 지식을 가지고 자전거에 올라 탑니다. 다리가 땅에 잘 닿지 않습니다. 걱정마라, 아빠가 뒤에서 꽉 붙들고 있으니까 이제 한번 중심을 잡아 봐라. 중심을 잡았습니다. 자, 페달을 밟아 봐라. 아빠가 계속 붙들고 따라갈 테니까 겁내지 말고 해봐라. 그랬더니 진짜 가는 것입니다. 왼쪽으로 쓰러지려고 할 때 아빠가 말합니다. 자, 몸을 왼쪽으로 굽히고 핸들을 왼쪽으로 같이 틀어라. 그러면 자전거가 똑바로 설 것이다. 이렇게 몇 번을 한 다음에 "자, 이제 한번 똑같이 해봐라." 그리고 아버지는 손으로 놨습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가 잡고 있는 줄 알고 열심히 탑니다. 잘 나갑니다. 딱 보니까 아버지가 안 보입니다. 겁이 덜컥 납니다. 이렇게 넘어지면서 운동장을 몇 바퀴 돌다보면 평생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사람 되는 것입니다. 그 전체 과정, 자전거를 못 타던 아이가 설명을 들어 지식을 갖고 실제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몸에 익히는 것 그것을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켜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자녀에게 인생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만 지식으로 가르치는게 아니라 진짜 사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식이 겸비된 기술로써 익히도록 훈련시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결국은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깨뜨려지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 자신이 가진 바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희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소중한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을 위한 기회의 훈련은 의무감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배운 것만으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지식이 매우 매우 중요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살아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의무와 함께 기쁨을 갖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뜻있는 인생의 기쁨과 슬픔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인생의 보람은 사람과 부딪치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살아가는 모든 사람 곁에는 항상 다른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결국 마땅히 행할 바를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 이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정말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이해와 헌신의 기예를 가진 사람들로 자라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여러분이 그런 삶을 살고 지식으로 그 아이들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이렇게 돕는 부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아이에게 가르침
마지막 두 번째는 아이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곧 덕을 가르칠 시기를 뜻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라고 했습니다. "나아르"이라는 이 단어는 어린아이로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두루 쓰는 단어인데 여기에서는 아마도 어린아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과 도덕의 가르침을 의심 없이 잘 받아들일 나이에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덕스러운 삶은 말보다 자연스러운 삶의 전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본 아버지만이 아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듯이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며 살아온 부모에게는 언제나 자녀에게 가르칠 지혜가 넘쳐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 지혜를 아이에게 가르치고 인생의 기술을 습득해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의 성품은 80% 이상이 아동기 전에 완성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다운 삶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교육은 아무 때나 그 양을 가르치기만 하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920년 인도의 한 고아원에서 싱(J. A. L. Singh)이라는 목사가 늑대에게 키워진 2세와 7세 아이를 데리고 와 사람으로 교육시킨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런 정황을 상상으로 사진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이렇게 고아원에 온 7세 아이는 카말라(Kamala)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2세 아이는 아말라(Amala)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이들은 오자마자 어두운 곳에서 울부짖고 낮에는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 않았고 눈에서는 빛이 났습니다. 심지어 닭을 잡아서 산채로 뜯어먹기도 했습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배운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7세 된 아이는 인간사회에서 7년이나 격리되어 있었을 것이고 2세 된 아이는 2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적응도 2세 아이가 훨씬 빨랐습니다. 그러나 아말라는 1년 만에 죽었습니다. 그때 카말라는 처음으로 죽은 그 아이를 보면서 큰 소리로 슬프게 울었습니다. 인간 사회에 돌아와서 많은 교육학자와 사람들이 이 아이들을 인간 사회로 돌아오는 교육을 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다 큰 아이인데도 동물처럼 네 발로 기어다니고 음식을 동물이 먹는 것처럼 먹었습니다. 꽤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아이는 여전히 인간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카말라는 결국 인간 사회로 돌아오지 못했고 7년이 지나서야 겨우 4, 5세 정도의 지능을 가졌고 45 마디 정도의 언어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7년 후에 요독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결국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사회의 교육이 어느 때든지 시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여러분이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부모 마음대로 아이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아가 뚜렷해지고 강해지면서 쉽게 꺾이지 않게 되는 것이니 이때는 이미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가르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인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이 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 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인간은 망가졌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런 사람을 변화 시켜서 창조 시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가장 하지 말아야 될 일은 부모의 부도덕한 삶입니다. 아이에게 가르치는 말과 삶이 표리부동한 것은 아이에게 폭력입니다. 인간으로 살아야 할 마땅한 도리를 가르치지 않거나 혹은 정의와 정직에 대해 혼란스럽게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정신을 망치는 일입니다. 부모가 신앙 안에서 참 신자가 되어 가는 과정을 봄으로써 많은 말이 없어도 아이는 직관적으로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떤 인격을 갖추어야 하는지 어떤 도리를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들이 지나가면서 그 삶의 기술들은 마음에 자연스럽게 베이게 되고 어려움 없이 자전거를 타듯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시냇물도 건너야 되고 언덕도 넘어야 될 때가 있을 것이고 때로는 자전거를 어깨에 매어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그 기술은 아이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 어려서 자녀들에게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가르치면 그런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정말 행복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제껏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더 많이 느끼고, 덜 느낀 적은 있지만 그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커다란 복입니까? 우리들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지옥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어려운 인생길을 지났는데 그러한 고통이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런 좋은 부모 밑에서 신앙 안에서 양육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하나님께 배나 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인간의 도리를 스스로 체화하여 자기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결코 부모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모에게서 받은 그 신앙을 자신이 고민하며 몸으로 체득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자기의 땀과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타락해서라도 주님을 뜨겁게 만나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죄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죄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자기화 되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참 신자가 되어가는 일상의 과정을 보면서 자녀들은 덕스러운 삶의 기술을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이 일이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시기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지 전까지입니다. 그 때에 부모가 이 아이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이 아이에게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위대한 분이라는 것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이후에 아이들보다 훨씬 쉽습니다. 무엇이든지 엄마 아빠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 나이에 신앙 교육을 잘 시켜서 그 아이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살아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를 그 아이의 가슴속에 굳게 굳게 심어주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어리다고 신앙에 신경을 쓰지 않고 나이가 든 다음에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신앙을 내버려두는 부모들이 있는데 결국은 그 자식의 인생에 말할 수 없이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게 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시기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입니다. 1학년, 2학년, 3학년이 되는 그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아서 비교적 때가 덜 탄 나이에 부모와의 충분한 사랑의 교제 속에서 부모로부터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 들어서 의심하지 않고 받아 들여진다면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이에 진짜 자기가 직접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경험하여 자기의 신앙고백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초등학교 후반부입니다. 4, 5, 6학년 때니까 빠른 아이는 이미 사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빠른 아이는 시작되었고 늦은 아이는 몇 해 더 기다려야 될 것인데 대부분 이때 사춘기가 옵니다. 이때가 너무 중요한 때입니다. 부모가 이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제 막 이 세계에 대해서 열리는 눈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많은 것들을 친절하게 해석해 주면서 신앙적인 생각을 떠나지 않도록 아이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이 시기도 놓치고 나면 그 다음 매우 어려운 시기가 오는데 중학생 때입니다. 중학생이 되는 것은 마치 이 세상의 문화라는 둑이 터지면서 어머어마한 땜의 물이 쏟아서 내려오는 것과 같은 시기입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도 초등학교 6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이 되는 것만큼 큰 충격을 주는 시기는 없습니다. 이때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에 이 때 아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아이들을 사랑해 주지 않거나 더욱이 아이가 부모로부터 신앙의 도움을 받지 않고 또 회심조차 하지 않았다면 이 시기를 매우 어렵게 지날 것입니다. 이때 아이를 세상의 타락한 문화에 오염되지 않도록 최대한 보호하고 아이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아이들에게 비교적 비밀이 적도록 부모와 대화의 장을 트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이 시기가 되면 이제 더 이상 회초리를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인격적으로 대화로 풀어가야 합니다. 좋은 책을 읽히고 그의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 가면서도 부모로서 아이와 소통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이 시기를 지나고 나면 이제 중, 고등학교가 지나가서 대학생이 됩니다. 이제는 매우 늦었습니다. 진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아이가 회심할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고등학교까지는 통제 장치가 있는데 대학에 들어가고 나면 완전한 사회인이 되어서 부모의 통제를 완전히 떠나게 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이 오지만 대학교 때 교수에게 연락받은 부모들은 없습니다. 이제는 완전히 독립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새것을 배우고 터득하면서 여러분은 이미 구시대로 낙인이 찍혔고 그래서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때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게 됩니다. 이제는 더욱 또 주님 앞에 돌아올 가능성이 낮은 시기가 됩니다. 그러다가 고집대로 우겨서 불신자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는 날에는 점점 더 요원해지게 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그 아이를 마땅히 가르쳐야 할 도리를 가르치기에 좋은 시간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를 놓쳤으면 놓쳤을수록 후회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더욱더 자기를 던지는 열심으로 아이의 회심과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 열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부모는 아이에게 인간이 참으로 행하여 할 길을 가르치기 위해서 부모가 된 것입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때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모든 사람을 섬기며 살게 하는 것을 가르치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부모 삼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은 주 앞에 행복한 인생을 살고 노년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 일에 게으른 사람들은 매우 피곤하고 상처받은 노년을 보낼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녀에 대한 근심이 마음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년에 힘없이 아이들의 불신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의 고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바로 그 날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진심으로 주님을 믿고 회심하도록 자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아이들은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여러분은 이미 모든 이치를 깨달았으니 하나님 앞에 사람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터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여러분이 아이들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라도 그 아이를 포기하지 말고 주님께 인도하도록 전심을 다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인류의 계획 속에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부모가 되었고 또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인생의 숙제는 가족과 함께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봉사하고 피차 복종하며 우리가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되었을 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서 우리 가족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마음을 다잡고 자녀를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과 함께 살기2 (2021.05.09._주일오전)
2. 네 자녀를 사랑하라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딛 2:4)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이 편지가 쓰여질 당시 사도 바울의 목회적 제자였던 디도는 그레데에서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적 이단의 가르침으로 인해 복음적인 신앙과 생활이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도는 이 편지를 써서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목회적인 가르침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의 핵심은 신자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순전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불신자들과 구별되는 경건한 표 중 하나는 가족 사랑이었습니다. 가족을 사랑함으로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이 이들에게 요청되는 바였던 것입니다.
II. 네 자녀를 사랑하라
오늘의 주제는 지난주에 이어서 『네 자녀를 사랑하라』입니다. 사도는 순전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장로의 직분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디도서) 1장 7절부터 9절에서 이 직분을 맡을 사람들의 자격에 대해 상세히 말했습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바로 교회의 질서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목회자와 장로에게만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했습니다. 이는 성도들도 진리 안에서 참된 삶을 살도록 서로 가르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사도는 교회 안에 있는 늙은 사람들의 신앙과 역할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특히 나의 많이 든 늙은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야 될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여자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으면 말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많은 사람과 시빗거리를 만들고 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모함하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술이 일부 허용되었지만 그 술에 인 박여서 술독에 빠져 사는 여자들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늙은 여성의 아름다움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젊은 사람들을 잘 가르치는 자들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나이든 여성들이 교회 안에서 훈장질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실과 삶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 경건한 인생의 도리를 젊은 여성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나이든 여자의 미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 2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를 잘 가르치되 삶의 행실과 아름다운 모범으로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질서 있고 선한 삶은 남편들의 경건한 생활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는 데 있어서 매우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A. 배워야 할 사랑
첫 번째 생각해 볼 것은 배워야 할 사랑입니다. 바울은 경건한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치기를 원했는데 그 첫째가 바로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어나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쉬운 일이었다면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특별히 디도에게 편지를 써서 늙은 여자들에게 잘 말하라 젊은 여성들을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도록 가르치라고 지시하였겠습니까?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이 어떤 면에서는 본성적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생동안 배워 가야 할 삶의 지혜이며 또한 생활의 기예(技藝)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평생 경건하게 살아온 성도, 모든 시련을 이기고 신앙을 지키며 인내 해온 성도는 그가 사람이 되어 간 정도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의 가족이 그 사람의 얼굴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얼굴이 바로 가족들이라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내는 재능이 있을 수 있고, 또 그가 돈을 많이 모은 부자일 수도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른 권력자 일수도 있으나, 그가 한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깥에서 환영을 받고 존경을 받아도 가족들을 불행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는 사람은 결코 사람다운 사람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 모든 생활을 다 보는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 너무나 잘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그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어야 할 의무는 당연히 아내만의 몫이 아닙니다. 남편도 똑같이 자녀 사랑을 배워야 하고, 아내와 마찬가지로 남편으로서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젊은 여자들에게 가르치기를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도록 특별히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버지의 그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이들은 많은 시간을 엄마와 함께 보내며 그 엄마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그때나 이때 남자들은 일하러 집을 떠나지만, 아내들은 남아 있어서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훨씬 많이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아내들에게 자녀를 사랑하도록 훈련받으라고, 늙은 여자들을 통해 훈련받으라고 당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해 간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이 깊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에서 성도들을 목양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목양의 목표에 대해서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경건한 신앙의 선배들에게서 자녀 사랑의 도리를 배우십시오. 그들의 경건한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워 가십시오.
부모도 인간이니까 연약할 때가 있고, 자기 인생 자체의 무게에 눌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의 인생만이 아니라 자녀의 인생을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니 부모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모든 연약함과 역경을 이기고 은혜 안에서 자녀들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매일 매일 하나님께 부모로서 이 자녀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사랑은 저절로 부모의 마음속에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오늘날 무엇 때문에 자녀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폭력과 폭행 심지어는 아동들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포악함이 횡행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코 인간에게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 되어야 하고, 단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성품을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은혜로 그 마음이 매일매일 새로워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모로서 혹은 앞으로 부모가 될 사람들로서 이런 사랑을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며 자녀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자녀를 사랑하라
마지막 두 번째는 자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에게는 부모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부모로부터 받는 무제한의 사랑은 아이들이 자라 가는데 필요한 공기와 물, 햇빛과 식량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공기 없이 살 수 있겠으며, 물 없이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햇빛 없이 어떻게 생활을 하겠으며, 양식이 없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의 사랑은 이처럼 공기나 물, 햇빛과 음식 같은 것입니다. 무제한으로 아이들이 그 사랑을 받으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배워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가 얼마나 사랑을 해주는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착각을 가질 정도로 사랑해 주어야 됩니다.
결국 사회에 나가면 자기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그 착각이 깨지는 것은 시간이 얼마 안 걸립니다. 가보면 엄마가 늘 자기를 예쁜이 예쁜이 하고 불렀지만 진짜 예쁜 애들은 우리 집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착한 아들 아무개 아무개 그렇게 불렀어도 밖에도 착한 애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깨닫는 방식이 그들에게 짓밟히는 열등감 속에서 그런 걸 깨닫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뭔가 하나를 깨달을 때 아주 커다란 열등감과 패배감을 느끼면서 억지로 억지로 인정하면서 하나씩 깨달아 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 그것이 상대적인 것이라는 걸 받아들이면서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건전한 자아상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부모의 무제한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마의 품에 있을 때에는 엄마의 품이 유일한 세계입니다. 조금 더 커서 개월 수가 지나가면 아빠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가족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전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느낀 아이들이 바깥 세계에 가서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 혹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고 느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충분히 사랑을 해 주지 않으면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어려운 하나의 결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런 예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죽습니다. 그런 일들이 너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를 낳고 아직 젖 먹을 나이인데 엄마가 집을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아이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할머니가 있습니다. 이제 아이에게 젖을 먹여야 되는데 지금은 질이 좋은 분유도 많이 있고, 젊은 여성들이 아이에게 수유를 안 하는 부모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아이에게 주는 처음 나오는 엄마의 초유 속에는 아이의 면역력을 길러주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성분들이 있습니다. 그게 몇 달 동안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짧은 기간 동안 나오는 그것을 아이에게 먹여 줌으로써 사실 온몸에 면역 주사를 맞는 것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게 유일한 공급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우유도 없었습니다. 있었서도 그것은 매우 특권층들이 소비하는 제품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불쌍해서 손자 혹은 손녀를 안고 동네를 다니면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들을 찾아 다닙니다.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손자도 젖을 주면 안되냐?"고 했습니다. 그것을 젖동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 마음대로 아이를 제때 충분히 배부르게 먹일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하루 세 번 먹는 게 아니라, 자지 않는 시간에는 거의 젖을 물고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당시에 자원도 없으니까 그냥 밥을 끓여 가지고 그 미움을 먹이는 것입니다. 우리 때도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있었는데 평균 신장이 10cm 정도 차이가 납니다. 어릴 때 못 먹어서 그렇습니다. 그게 나중에 큰 다음에 아무리 밥을 많이 먹이고 좋은 음식을 먹여도 체격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 때 부모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 때나 그냥 사랑을 퍼부으면 새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결정적으로 한 인간의 인성을 형성해 나가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린아이 시기입니다. 그때에 충분히 아이를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럴 정도로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때에 아이의 건전한 자아가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도리는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또 다른 이름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런 사랑을 부모로부터 받지도 못했고, 또 부모로부터 못 받았더라도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색과 독서, 성찰을 통해서 이런 사랑을 자기는 못 받았지만 이런 사랑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 인성이 제대로 형성된 사람인 경우에는 힘들어도 이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자기 반성이나 성찰, 더군다나 오늘날은 거의 독서를 안 하는 시대입니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책을 안 읽습니다. 이것은 현시대에 있어서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는 지성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온전한 지식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적합한 종교가 아닙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무속 종교가 적합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책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The religion of one book. 한 책의 종교입니다. 책을 가까이 하면서 인간의 지식이 자라는 것입니다. 독서를 안 합니다. 사색을 안 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습니다. 맨날 먹고, 입고, 마시고, 놀러 가고, 즐기는 정보에만 빠져 있으니까 자신을 성찰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 좋은 대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결혼을 했는데 아이를 낳아도 이 아이를 모성으로 혹은 부성으로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어 있습니다. 훈련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아이들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또 그렇게 배우고, 그다음 또 망가진 삶을 살아감으로써 이런 것들이 반복적으로 대를 물려 가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나마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누구인지 몰라도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그 속에서 참된 부모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행복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이런 부모는 차라리 아이를 안 낳았더라면 그 아이에게 정말 오히려 더 좋았을 그런 사람입니다. 태만한 부모는 자식이 잘 자라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그릇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직 신앙이 없는 데도 그 자녀의 불신앙을 합리화합니다. 자녀의 미래에 대해 매우 근거 없이 낙관을 합니다. "언젠가 철이 들면 사람이 되겠지!" 죽을 때까지 사람이 못되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안타깝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녀들이 참된 회심을 하기를 절반은 포기한 것입니다. 결국은 어른이 되었는데도 자녀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걸 자녀들이 그 즉시 모두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는 부모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아직 생각이 어리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일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있으니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은 기억입니다. 그것은 부모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사랑 안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부모와 함께 소통하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을 잘 배운 아이들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성장합니다. 이런 기쁨을 내가 다른 사람들과도 나눌 수 있고, 나에겐 그런 가능성이 있고, 또 저 사람은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인생에 대한 기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보면 사람과 거의 관계 맺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가가도 웅크리고 자기를 개방하지 않고 그리고 어쨌든 수많은 사람이 있어도 가까이 다가오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 보면 성장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밝게 자라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성품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거기서 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생각이 어려서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이 너무나 당연하고 그리고 자신이 결코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늘 하나님 사랑 안에 살면서 하나님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런데 후일 그들이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은 기억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의 경험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는 결혼의 비결을 형제들에게 말을 해 주자면 딸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엄마를 둔 자매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실패할 확률이 현저히 낮습니다. 공평하게 자매들에게도 하나 조언을 주겠습니다. 엄마 아빠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형제를 선택하면 실패할 확률이 적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못 받은 사람은 희망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받으면 그들도 가족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먼 훗날 부모가 죽은 후에라도 자녀들은 그 때에 배운 인간으로서의 도리, 부모로서의 도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과도한 기대를 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될 기대는 이 아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주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기대는 포기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 해야 된다." 현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부해도 안되는 애들이 있습니다. 공부 방법을 바꿔 보십시오. 교육 환경을 바꿔서 가르쳐 보십시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애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공부 방면이 아니라 다른 방면에 능력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거를 발견하게 해주는 임무가 부모가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것을 어린 시절에 체험하게 하십시오. 공부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많은 능력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치 얼굴을 어떤 사람은 미모로 태어나고, 좀 덜 그렇고, 안 그런 사람이 있듯이, 빼어나게 예쁜 사람이 얼마에 한 사람쯤 있겠습니까? 저는 만 명에 한 명도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없지 않습니까? 그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공부도 아주 특이하게 잘하는 애들은 수천 명, 수만 명 가운데 한 두 명입니다. 더 뛰어난 사람은 100만명에 한 명도 안 됩니다. 그런데 확률로 보면 몇 만분의 일에 자기 아들이 해당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억측입니다.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모는 아이가 좋은 사람이 되게 하면서, 아이에게 있을 수 있는 수많은 능력 중 어떤 것들이 우리 아이에게 실제로 있는가. 미술인가, 음악인가, 예술인가, 아니면 말 잘하는 것인가, 예능인가 아니면 체육인가 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피아노학원 두달 보내면서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를 꿈꾸거나, 운동학원, 풋살 학원에 보내면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에 몇 년 뒤에 갈 것처럼 추측하는 것은 억측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의 한 양식일 뿐입니다. 그런 잘못된 기대감으로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부모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쓸데없이 실망 하여야 할 것에는 실망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는 실망하면서 낙담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물건 가운데 하나가 분재입니다. 어떤 사람 분재를 예찬하는데 저는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인위적입니다. 자연적인 분재도 있지만, 인위적인 분재가 많습니다. 성장억제 약을 뿌립니다. 그리고 나무 가지 사이에 구리철사 줄을 감아서 원하는 모양을 만듭니다. 그리고 물을 조금씩 주면서 그것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데도 6백 년이 된 것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잔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기를 때에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그냥 벌판에서 자라는 아이들처럼 늘 돌보아 주지만 자연 속에서 자신이 마음껏 자라는 아이들이 되도록 자유롭게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기에서 창의적인 인간이 나오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주체성과 자율이 배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아이들을 쓸모 있게 창조하셨음을 믿고, 그 쓸모 있는 본성 중 우리 아이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지 발견해내는 것이 부모의 임무인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 피렌체는 예술의 황금기였습니다. 소위 얘기하는 르네상스입니다. 르네상스의 찬란한 황금기에 그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천재들이 줄지어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문화학자들은 그것을 천재 폭발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알리기에리 단테로부터 시작해서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쟁쟁한 사람들, 브루넬리스키 같은 건축가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마사초 같은 사람들이 등장을 했습니다. 그중에 여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여성들 중에는 그런 예술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습니까? 최소한 절반은 안돼도 40% 정도는 여성들에게서 그런 숫자가 나왔어야 됩니다. 그런데 안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기회를 안 준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기회를 주지 않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발현이 안 됩니다. 그리고 개봉되지 않은 채 묻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많이 주는 부모들이 훌륭한 자녀로 아이들을 기르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진짜 조심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아이에게 열 번을 잘해 준 것은 아이들이 기억이 안 납니다. 그런데 한번 말로 상처를 준 것은 회복이 안 될 정도로 깊이 남습니다. 엄마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육아에 지치게 되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엄마가 죽어버릴 거야." "너희 계속 이러면 엄마 어디 확 가버릴 거야." 그게 진심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열을 받아서 그럽니다. 자기는 그렇게 말하고 잊어 버립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깁니다. 결국 이런 말로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아이들은 존재감을 박탈당하는 느낌을 받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존재가 엄마에게 민폐라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소중하다는 걸 느껴야 되는 것과 정반대의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엄마가 수시로 좌절에 가까운 표현을 쏟아 놓는 것을 보면서 아이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민폐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겁니다. 아이들이 무슨 생각이 있을까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모든 씨앗들이 아이들 마음에서 자랍니다. 제가 직장 다닐 때 한 여직원은 자신의 딸 때문에 고민을 했는데, 다섯 살 짜리가 어느 날 매우 근심에 빠져서 밥도 잘 안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유가 무엇이냐고 잘 물어봤다고 합니다. "엄마 죽는 게 뭐야?" 그렇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다섯 살짜리가 죽음을 가지고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영재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만 그런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이미 그런 초월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 주느냐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강아지 프로 가운데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 본 적이 있으십니까? 견주의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 개들의 마음을 닫아 버려서 견생을 망칩니다. 그러면 개보다 훨씬 더 복잡한 지성과 영혼과 마음을 가진 인간은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인데 그 개로 하여금 견생이 바뀌게 만드는 것입니다. 전문가가 와서 교정을 해주면 그 아이가 평생 동안 그런 개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전혀 그러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없는 지식만큼 나쁜 것입니다. 해로운 것입니다. 이런 말이 반복되면 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아주 어린 아이인데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모의 이러한 태도는 자녀로 하여금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아이는 열등감에 사로 잡히거나 타인에 대한 파괴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타인과의 관계에 기대를 갖지 못합니다. 외톨이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일은 더더욱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쓰라린 고통은 결국 사람에게로부터 옵니다. 인생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행복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이 사람과 함께 사귀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배우는 것 없이는 인간이 결코 행복에 이룰 수 없습니다. 물론 잘못할 때에 매우 쓰디쓰고 불행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잘 피하는 방법을 배우고,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아주 강인한 주체성으로 그것들을 극복하고 새롭게 해석해 나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뜻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때 아이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게 됩니다. 삐뚤어진 심성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추억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애틋한 기억이 없는데 자녀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알 수 있겠습니까? 흔히 시집, 장가가면 철들어서 부모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말하는데,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만약 저절로 그렇게 된다면 결혼한 자식들 중에는 불효자가 거의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전히 있지 않습니까?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결혼한다고 해서, 부모가 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렇게 철이 들고 배우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부모가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어렸을 때 뿐만 아니라 나이 들어서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못된 자식을 부모가 사랑하는 과정은 부모가 참 신자가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맘에 들지 않는 부모를 자녀가 그 결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이기는 길입니다. 무엇보다도 자녀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어져서는 안 됩니다. 생각이 달라도 말을 하고 야단을 쳐서 고쳐질 수 있는 게 있고, 안 고쳐지는 게 있습니다. 안 고쳐지는 것까지 고치려고 하면 결혼한 사람은 이혼해야 되고, 부모 자식 간에는 의절해야 됩니다. 그런데 의절하고 나면 가정이랄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 없이 볼 때는 "저게 인간이야? 저러면 당장 못하게 해야지." 그 부모는 그걸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것까지 고치려고 칼을 들고 덤벼들면 의절을 해야 되기 때문에 못 고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게 아닙니다. 참고 기다려야 됩니다.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이의 마음을 사랑으로 감화시키고, 무엇보다도 간절한 기도 속에서 주님의 성령이 그의 마음에 역사하시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특별한 타인입니다. 특별할 뿐이지 여전히 타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번 관계가 깨어지고 나면 타인만도 못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가르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뜨거운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면 부모의 마음에는 눈물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리고 자식이라면 부모의 얼굴을 생각하고 이름을 떠올릴 때 눈물이 고여야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라고 말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모는 자녀와 교통해야 하고 마음으로라도 자녀를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각자의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 세상을 하직하고 싶을 정도로 큰 무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이미 이 서약에 사인을 한 것입니다. "이 아이를 사랑하고, 이 아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 아이와 함께 기도하고, 이 아이에게 우리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고, 이 아이의 구원을 나의 구원과 같이 여기며 사랑하겠습니다."라는 서약이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한 인간으로서 짊어진 무거운 삶의 굴레도 결국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또 다른 고통의 형태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세에 사랑이 없는 때를 경고하시면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문제는 이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한갓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데 어떻게 자녀들을 끝까지 샘솟는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깨달음이 필요하고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왜 자신의 인생의 도리인지 모르면 차라리 짐승에게 가서라도 배우십시오. 자식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주기까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바쳐서 자신의 종족을 유지하려는 새나 물고기, 그리고 온갖 벌레들의 이야기라도 한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무정함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은혜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는 것은 못했던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십자가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효한 자식들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 신앙안에서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 사랑을 배웁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어려움을 모두 이기고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십시오. 후회 없이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자녀를 사랑한다고 많이 표현하십시오. 그러나 남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자녀를 사랑했는지 자랑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가 잘 해준 것을 잊어버립니다. 자녀를 사랑한 것이 자기의 의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에게 베푼 사랑이 자신의 의에 일부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자신을 모두 주심과 같이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주는 부모들이 되십시오. 그 아이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인생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거룩한 일입니다. 자녀 사랑하기를 여러분의 목숨처럼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자기를 주심 같이 자녀를 위해 주십시오. 당신의 자녀를 참 사람으로 키우는 사랑의 과정은 그 자체가 부모인 당신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좋은 부모는 반드시 좋은 사람이고, 나쁜 부모는 반드시 나쁜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이 된 것 만큼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쓰며 애쓸수록 여러분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항상 기쁘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녀들을 기르면서도 마음이 상하고 고통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된 것이 너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한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좋은 부모가 될 때 여러분도 사람이 되고, 자녀들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야말로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언젠가 자녀들과의 관계도 끝나고 여러분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언젠가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살고 싶은 거룩한 소망이 생겨나고,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가 생겨나게 해주는 사람과의 관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사실 우리는 그 관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힘 때문에 우리가 살아남은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여러분의 자녀에게 여러분의 이름이 그리운 이름은 되도록, 그런 부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과 함께 살기3 (2021.05.16._주일오전)
3.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믿음과 삶의 규칙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치고 2부에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도리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해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이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랑이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동일하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의 계명은 다섯 번째 계명이고 2부에서는 첫 번째 계명입니다. 모든 이웃과의 관계를 규율하는 계명의 첫 번째로 주셨으니 이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II.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미리 정하셨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또한 부부간의 사랑의 결합으로 자녀를 태어나게 하시고 당연히 그렇게 태어난 자녀가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도 미리 정하셨던 것입니다.
A. 부모를 공경하라
그것은 바로 제일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이런 세상이었습니다. 모든 인류가 한 가족이 되어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가족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인류는 아무리 그 숫자가 많아져도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며 서로를 자신의 몸과 같이 여기며 사랑하며 살기를 하나님 사랑하듯이 하였을 것입니다. 모든 이웃을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할 정도로 이웃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나는 너희의 아버지니라"고 계시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더 잘 경외하게 하시기 위하여 보이는 부모를 주셔서 공경하게 하셨습니다. 보이는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여기에서 '공경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부모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며 권위를 인정하며 사랑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공경하다'의 반대말은 '업수이 여기다'입니다. 이것은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를 하찮게 여기고 또 가볍게 여기는 것은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진심으로 무겁게 여기고 공경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 공경은 마음과 육체 물질의 섬김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며 이는 그가 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증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복음적인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부모 곤경의 도리를 엄히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부모를 공경하면 복을 주신다는 정도가 아니라 만약에 부모를 비방하면 다시 말해서 공경하지 않고 무시하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죽음과 같은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는 특별한 사랑과 헌신의 관계는 이미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암탉이 알을 품고 21일 동안 부화하는 장면을 보셨습니까? 저희는 어려서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알을 품고 어미 닭은 둥지에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아주 가끔 와서 물 한모금 먹고는 재빨리 올라가서 그 알이 식지 않도록 심지어 날개로 그 알을 골고루 굴려가며 온 구석구석을 따뜻하게 덥혀 21일 만에 병아리로 태어나게 만듭니다. 달걀에서 깨어난 병아리들을 어미 닭은 지성으로 돌봅니다. 예전에는 마당을 뛰어다니며 지렁이와 벌레를 맛있게 먹던 그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그걸 먹고 싶은 걸 참으면서 큰 소리로 병아리들을 부릅니다. 그러면 노란 병아리들이 삐악거리며 달려가서 부모가 발견한 그 벌레와 모이를 먹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동물들의 보존과 번식을 위해 주신 본성입니다. 인간에게도 이러한 본성이 있었는데 죄가 들어옴으로써 이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도덕이 땅에 떨어져도 부모와 자식 간에는 천륜이 되어서 부모는 자식을 보호하기 때문에 인류가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이혼하는 부부는 있어도 성격 차이 때문에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만약에 있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가정의 근본을 세우는 세 기둥을 제시합니다. 부부, 부모, 자녀입니다 이 세 관계 중 어느 관계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어느 하나에 치우친다고 해서 온전한 가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부모를 공경하도록 직접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부모 공경의 의무를 다 해야 합니까? 첫째, 부모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즉, 부모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가장 큰 도리입니다. 돈이 없으면 물질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아무리 공경해도 자신이 중풍에 걸려서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면 부모의 수발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의 가장 중요한 도리는 부모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것 그리고 그분을 공경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 이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하신 명령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는 기억하라. 너희는 잊지 말라. 나 여호와를 기억하라. 나 여호와가 너희를 위해 행한 위대한 일을 잊지말라. 수없이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집니다. 히브리어에서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실 때도 내가 너희를 잊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효도입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자녀의 가장 큰 도리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처럼 부모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입은 덕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은공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사람이 완전히 영글지 않은 것입니다. 혹시 불행하게도 부모에게 입은 덕이 거의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부모를 소중히 여기고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표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불신자와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부모를 물질로 섬기는 것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부모가 노후에 물질적으로 자녀들을 의지하지 않도록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할 일입니다. 저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죽을 때까지 자녀들에게 손톱만큼도 폐를 끼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이게 어찌 제 마음 뿐이겠습니까? 부모는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부모가 걱정 없이 산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효도에는 동정적 효도와 정치적 효도와 성경적 효도가 있습니다. 동정적 효도는 너무 불쌍해서 인간적으로 가엾어서 "이거나 좀 드슈."하고 던져주는 것입니다. 동정적인 효도입니다. 정치적인 효도는 유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적절하게 유산을 물려 주어서 사는 집이라도 한 칸 갖게 하는 것은 과한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돈많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엄청난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물려받은 부모의 유산을 가지고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그렇게 돕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려줄 돈으로 더 나은 양질의 교육을 시키고 그리고 더 많은 세상을 보게 만들어 주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그렇게 해서 참 사람이 되어가는데 투자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그저 이웃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베풀고 나누어 주다가 떠나는 것이 성도다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모로부터 십 원 한 장 물려받은 것 없이 가난과 싸우며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부모가 도움을 주어서 자녀들이 절망하지 않을 정도로 인생을 출발하게 하는 것은 나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한 것은 결코 그들의 인생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공정한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상속하려면 어마어마한 세금을 나라에서 떼어가는데 아깝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돕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쓴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부모가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안 될 때 자녀는 부모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궁핍으로 고통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물질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자녀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부모를 물질로 섬기는 것은 부부 사이에 예민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효자가 아내를 만나 불효자가 되고 효녀가 남편을 만나 불효녀가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결혼과 함께 양가의 부모를 동일하게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이고 자녀의 도리를 다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그렇게 해서 양가의 부모를 똑같이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서로의 부모로서 서로 공경하려고 할 때 부부 사이의 갈등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 부부를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지지난 토요일 날 딸이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사위와 함께 부부가 인사를 왔습니다. 그래서 절을 받고 저는 꽃바구니를 하나 준비해서 예쁜 결혼식 사진을 찍은 것을 꽂아서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사위에게 주는 선물을 하나 옆에 더 포장을 했습니다. "뜯어 봐라." 뜯어보니까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가슴 시리도록 그립다, 가족」 저자 김남준. 덮으려고 해서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까 제가 만년필로 썼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남기에게 한 가정을 이룬 것을 축하하며 아버지 김남준』 "사위라는 말을 나는 의도적으로 쓰고 싶지 않다." "그러니 너도 너희 집에 가서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나한테는 아버님이라고 하지 마라" "가족으로 잘 지내보자." 얼마나 받아들일지 그것은 본인의 몫입니다. 그런데 어떻든 나는 그것이 나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그 아이들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들이듯이 또한 그 아이들이 양가의 부모를 동일하게 부모로 받아들이며 효도하면서 살 때에 그들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관계의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물질의 여유가 있어도 노년에 가장 허전한 것은 친밀한 관계의 결핍입니다. 누군가 와서 따뜻하고 살갑게 해주는 것이 너무 그리운 것입니다. 그것이 노년입니다. 은퇴한 목사님을 최근에 만나 뵈었습니다. 그렇게 힘들던 목회 사역을 끝내고 시골로 내려가서 두 부부가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사시는데 그렇게 행복하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시간이 많이 나니까 기도도 많이 하게 되고 성경도 많이 읽게 되고 부부 사이에 의도 두터워지고 1월부터 5월까지 벌써 성경을 삼독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도 목회하시면서는 절대 그렇게 못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게 행복한데 한 가지가 아쉽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랬습니다. 이렇게 모여서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식사를 하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부모의 마음도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한 노인이 100억 정도를 카이스트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카이스트가 얼마나 훌륭한지 기부한 사람들을 극진히 모신다고 합니다. 그분이 돌아가시면 아예 빈소를 카이스트에 차린다고 합니다. 학교장으로 지내줍니다. 100억을 내고 이분은 고급 요양원에 가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일이 되면 그 팀들이 7명 정도가 찾아와서 그분을 위한 음악회를 열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여 있던 그 요양원에 있던 사람들도 하는 일 없으니까 노인들이 모여서 그 연주를 듣습니다. 예쁜 차림을 하고 와서 젊은이들이 노래를 불러주고 진심으로 축하해줍니다. 그리고 케익을 선물하는데 혼자 먹을 수 있는 케익이 아니라 20명, 30명이 먹을 수 있는 케익을 선물하고 간다고 합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 다 나누어 주는데 그 광경을 한 부자 노인이 지켜보면서 너무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식들도 그렇게 안 합니다. 그러니까 자식들에게도 물려주지 않았던 200억을 카이스트에 기부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말씀드리려고 하냐면 나이 들수록 노인이 되어 갈수록 그냥 젊었을 때는 돈만 있으면 사는데 나이가 들수록 외롭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와 친구 해주는 사람들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둘이 너무 단짝으로 지내시고 한 친구가 돌아가시면 그 친한 친구 그분도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는 예가 흔히 있는 것입니다. 외로움 속에서 돌아가십니다. 매달 보내드리는 얼마 간의 용돈 못지않게 중요한 효도는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엄마와 딸이 함께 여행을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자신의 삶과 신앙을 나누는 인격적인 관계의 기쁨을 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입니다.
저는 열린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 여러 가지 사역들을 많이 했지만 내가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정말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가 농어촌 아웃리치입니다. 아웃리치를 코로나 때문에 2년 동안 못하고 있지만 갈 때는 평소 예배 인원의 3분의 1밖에 교회 안 남습니다. 나머지는 아웃리치를 다 떠납니다. 저는 직접 지하실 교회 때 이것을 시작하고 가서 보고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는지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에 저는 한 해도 쉬지 않고 이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열 서너 명 밖에 모이지 않아서 목회를 거의 접어야 되는 교회에 우리 아웃리치 팀 12명이 가서 전도를 하고 목사님이 은혜를 받고 열렬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 와서 6년이 지나도록 14명 밖에 안 모이던 교회인데 목사님이 우리가 복음 전하는 걸 보면서 은혜를 받으시고 450여 가정을, 여섯 마을을 모두 심방해서 100명이 넘게 모였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이 생생하게 봤습니다. 봉고차 2대를 사서 사모님과 둘이서 새벽마다 노인들을 실으러 다니면서 그렇게 열렬히 목회하다가 하늘나라 가셨습니다. 이후에도 청년들이 복음을 들고 가서 전하면 그 시골 사람들이 완고한 사람들이 소금을 끼얹고 물을 뿌리고, 빗자루를 집어던지고 흙을 끼얹었습니다. 그래도 생글생글 웃으며 가서 대청마루에 올라가서 할머니 어깨를 주물러 주었습니다. 입으로는 가라고 너희들 필요 없다고 하지만 어깨가 너무 시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주물러 주는데 그만두라는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귀에 대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면서 얘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열립니다.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인계를 합니다. 떠나오고 난 뒤 장년들이 편지를 씁니다. 그분들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아버지라고 불러 드리니까 이 분들이 자기 자식들에게도 못 받던 대접을 열린교회 교인들에게 받는 것입니다. 겨울이 오면 따뜻한 내복을 사서 보내 주고 가을이 되면 내려가서 보일러가 잘 돌아가는지 보고 고쳐주기도 하고 새로 놔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정성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비싼 고춧가루 같은 것들을 한 보따리 해 가지고 그것을 수양아들이라고 보내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외로운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할머니 중 한 분이 너희는 진짜 나쁜 애들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좋다면 진작 와서 가르쳐주지 왜 이제야 가르쳐 주냐고 했습니다. 하여튼 짧은 시간에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감동을 남겼습니다. 부모 공경은 그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동정적 효도나 정치적인 효도가 아니라 성경적인 효도는 그 관계를 기뻐하면서 그 부모에게 관계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효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B. 관계를 회복하라
마지막 두 번째는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효도를 하고 싶어도 이미 깊은 상처와 그 고통이 마음에 얼룩져 있을 때에는 부모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지혜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삶이 모두 자기 뜻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 중 무엇이 중요하다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현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현재는 과거의 종착역이고 미래의 아무리 어마어마한 꿈을 꾸고 있어도 현실이라는 발판에서부터 첫걸음을 떼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이 없으면 사실은 과거의 열매도 없고 미래를 향한 출발점도 없는 것입니다. 현실이 이런 막막한 현실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존경스럽고 어마어마하게 훌륭하시고 훌륭한 사람들은 대개 가정에 무심한데 너무 자애로우시고 그렇게 자애로운 분들은 대게 물렁물렁한데 원칙이 뚜렷하고 그런 분들은 대개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데 자기를 끔찍이 사랑해주고 그런데 사회적인 지위도 높으시고 거기에다 돈까지 아주 많으십니다. 그러면 공경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경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좋은데 어머니가 사랑스러운데 그런데 그런 부모가 아닙니다. 돈도 없고, 배우지도 못했고 그런데다가 어린 시절에 수없이 상처만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과거는 발생했고 현실은 자기가 그런 가정에 있는데 그걸 원망하고 남과 비교하는 것은 주체성이 없는 인생입니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자기 친구 수없이 생각해 봐야 그림의 떡입니다. 그건 내 인생이 아닙니다. 그건 그가 살아갈 인생이고 나는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그런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생이 고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원망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 마음이 생겨 나면 비로소 관계를 회복할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와 함께 상대방을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고 노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부모가 철이 없어서 여전히 젊었을 때처럼 그렇게 자식을 함부로 대한다면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왕들의 최후를 묘사하는 후렴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역대하 21장 20절에서 "... 그는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사람이 못 마땅해 하다가도 그 사람이 글쎄 죽었대 하면 어떡해, 어찌 그런 일이 왜 죽었대, 무슨 일이래 아이고 좀 살지, 왜 죽었을까 아아 너무 안타깝다. 이게 모든 인간에 대한 일반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무도 그가 죽은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을 향해 철들지 않으면 마지막에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눈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자식들 많이 봤습니다. 그 중에 한 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울지 않는 것입니다. 친구들과 웃으면서 술 먹고 베로 된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지팡이 짚고 앉아서 그냥 문상을 받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노인들이 올라 오셨습니다. 그러더니 맏상제의 등짝을 후려갈기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울어라."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니 애비가 죽었다, 울어라." 그때서야 "아이고"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아끼는 자 없이 죽은 아버지입니다. 되고 싶으십니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죽은 다음에 울거나 말거나. 그러니까 그런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에게만 효도하라고 하지 말고 부모도 자녀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녀들과의 관계가 소원하면 그게 단지 자신이 늙었기 때문에 애들이 괄시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늙어가는 날에 지난날 자녀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것 상처를 준 것에 대해서 많이 반성하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자녀들에게 용서를 빌어 보십시오. 그것이 관계를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제일 먼저 화해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는 사람들은 오류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남을 마음 상하게 안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적절한 때에 아주 진심으로 사과를 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사랑과 신뢰를 쌓아갈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잊고 사랑과 신뢰를 쌓아 간다면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기 쉬울 것이고 부모는 자녀에게 공경받기에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독 가족들 간에는 이렇게 사과하고 잘못을 비는 일에 매우 인색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여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남편은 아내에게 "정말 내가 잘못했어. 내 불찰이야." 이런 말을 잘 안 합니다. "아들아, 아빠가 어렸을 때 너를 정말 잘 사랑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 마음이 없지는 않은데 좀처럼 표현을 안 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아버님, 제가 젊었을 때 아직 철이 없어서 마음으로 아버님 미워하고 진심으로 공경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제라도 힘닿는 대로 아버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마음에는 있어도 이것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마음속으로 이해가 되면 그래도 관계가 괜찮은데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마음속에 쌓여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주에 영상을 보셨습니다. 40대 직장인 남자들을 모아 놓고 자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언제입니까? 핸드폰에 자녀 사진이 몇 장 있습니까? 물어보니까 자신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답을 써 내려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단어만 바꾸고 물어봤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최근에 안아주면서 사랑한다고 한 적이 언제입니까? 아버지의 사진이 당신 핸드폰에 몇 장이나 있습니까? 물어보니까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그냥 질문하는 문제지만 던졌을 뿐인데 그 40대 남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양심에 반한다는 증거입니다. 가책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것을 잊고 있다가 그 몇 개의 쉬운 질문이 나는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부모는 그릇된 권위와 체면 때문에 자녀는 쑥스러움과 자존심 때문에 좀처럼 부모에게 사과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화와 사과 그리고 이해와 용서는 부모와 자녀의 마음에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탁월한 길입니다.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하며 부모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생동안 저희 아버지가 제 인생의 십자가였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두운 그림자였고 젊어서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있기가 싫었습니다. 하여튼 멀리 있고 싶었습니다. 아주 이를 갈면서 지겹도록 미워한 게 아니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하여튼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그리고 1도 애정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나에게 당신과의 관계를 기억하게 할 만한 일을 해준 게 없었습니다. 당신은 지방에서 사업을 크게 하시고 나는 할머니와 함께 서울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몇 달 만에 한 번씩 사업차 올라오실 때에 어머니 집을 방문하고 큰 아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니면 그 당시에 문화가 그랬으니까 아들을 끌어안아 주지는 못하더라도 손이라도 잡고 "우리 큰 아들, 엄마 아빠 떨어져서 공부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니. 얼굴이 왜 이렇게 거칠어 졌니? 뭐가 필요한 것은 없니? 내가 지난달에 보내준 선물은 소포로 잘 받았니?" 일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라면 그렇게 올라오고 아이가 초등학생이면 갈 때 할머니 몰래라도 천 원짜리 하나라도 손에 쥐여주고 갈 텐데 당신은 펑펑 쓰시면서 일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들어와서 아랫목에 앉자마자 시험지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몇 달 동안 학교에서 시험 본 것을 큰 양철 집게로 집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걸 아빠한테 무릎 꿇고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면 얼굴도 안 쳐다보고 그것을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점수가 이게 뭐냐? 이건 참 잘했구나. 이건 왜 이것밖에 못 받았니? 넌 산수 공부 못하니? 먹을 거 다 주고 따뜻한데서 재워주고 너만한 나이에 가서 노동하는 애들도 있는데 넌 제일 쉬운 걸 하는데 넌 왜 공부도 못하니? 당신도 못 하셨습니다. 당신 공부 못한 걸 내가 다 압니다. 그런 기억 밖에 없습니다. 무릎 꿇지 않고 아버지 앞에 앉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싫은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나는 그 도덕적인 상처의 기억들 그런 것들은 내가 저 분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게 너무 싫었습니다. 나는 왜 이 집안에 태어났을까?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실은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누그러지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1981년 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루 휴가를 내고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2월인데 아주 추웠습니다. 그래서 두꺼운 털오버를 입고 차가운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실은 다른 기도 제목이 있어서 예배당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주 분명하게 내 마음에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네 아버지를 용서해라." 그때 내게 깨닫게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고 너도 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너도 미래에 똑같은 애비가 될 것이다." 그 말씀이 제 마음을 찌르기를 큰 창으로 내 허파를 뚫고 등으로 꿰어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마룻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서 당신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도록 사랑하셨는데 제가 미워했습니다.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게 저의 부모 공경에 대한 회심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없었으면 저는 아마 지금도 원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안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렇게 회개하고 나니까 그렇게 가엾은 영혼으로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내게 아버지가 가져다 주었던 모든 상처가 용서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가족 중 아무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안 그러셨지만 그 외에 동기간이나 자녀에게나 또 누구에게나 그렇게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고 할아버지에게도 별로 사랑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젊은 날에 사업을 하셔서 돈은 좀 있었지만 인간이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니까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외롭게 사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나니까 너무 가여웠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분이 예수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종갓집의 종손입니다. 아버지는 제사를 1년에 12번을 지냈습니다. 예수 믿는 며느리가 와서 진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12번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4대조 5대조 할아버지까지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열심이었냐면 9대조 할아버지 묘가 무너졌다고 돈을 남에게 일수로 꿔다가 그 할아버지 무덤을 고쳐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9대조면 자손이 얼마나 많을 텐데 그 얼굴도 모르는 그 할아버지 무덤을 고치겠다고 일수를 찍으면서 그거를 하는게 말이 되냐고 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종친회 회장까지 하셨지만 우리한테 생긴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여튼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예수를 믿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성격이 불같으셨습니다. 어머니한테도 수 틀리면 그냥 막 집어 던지시고 패고 그러지는 않으셨습니다. 막 집어 던지시고 성을 확하고 화를 내시는 그런 성격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던 어느 날 명절인데 식구들을 모두 모아놓고 내가 너희들에게 오늘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적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두 모였는데 "이제 제사는 이번으로 끝이다." 며느리들은 너무 환상적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냐고 하니까 품속에서 무언가 하나를 꺼내셨습니다. 뒤적뒤적 하시면서 꺼내 놓으셨는데 여의도 순복음교회 새가족반 수료 증명서였습니다. 아무도 몰래 가셔서 새가족반을 수료하시고 주님을 영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삼촌들을 다 불러놓고 이제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도로 가져가라고 하셨습니다. 삼촌들이 그래도 네가 장손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니까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삼촌 어머니한테 제사 드릴 때 온적 있냐고 말했습니다. 손주인 나한테는 할머니고 삼촌들한테는 어머니였는데 당신 어머니 제사 드릴 때는 오지도 않고 이제서야 뭔 소리를 하냐고 나는 자손으로서 할 도리 다 했다고 당장 가지고 가시라고 했습니다. 아주 칼 같으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신앙 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너무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모질게 대하고 불효하면 그 자녀인 우리는 우리 자식에게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약속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원래 십계명은 보상의 조건이 아니라 의무로 주어진 것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걸로 끝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돈을 줄게.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그럼 내가 권력을 줄께. 그런 약속 없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아라 그걸로 끝입니다. 당연히 해야 될 명령입니다. 약속이 없습니다. 포괄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지만 일대일의 약속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 한 계명만 그 약속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바로 에베소서 6장 2절과 3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게 오늘날의 맥락에서 보면 별로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이 주어질 때 언제였습니까? 수백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하다가 광야로 튀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갖고 온 양식을 모두 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얼마나 광야를 지나야 약속한 땅에 도달할지 약속한 땅은 텅빈 땅이 아니라 이미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엄청나게 덩치가 큰 이민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것을 전쟁해서 뺏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전쟁과 그 다음에 기근과 혹은 재난 심지어는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서 죽는 수많은 사람들이 속출하던 그때에 땅에서 장수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매력을 가진 복이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시시각각으로 느끼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시대의 로마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23세에서 26세 사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일찍 죽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40년대에도 평균 수명이 41세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평균연령이 34세 정도 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로부터 시계를 더 거꾸로 돌려서 주전 1500년 경으로 올라가면 죽음이 살아있는 것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병원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그들이 가장 갈망하는 장수의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사는 동안에 잘 되게 하겠다고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 하리라" 계명을 뒤집으면 이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말아 보아라 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너는 젊은 날에 요절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냐면 십계명 중에 이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스를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사회를 만드시기 위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약속이 있는 복의 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인간의 연약함을 알게 되면 부모를 공경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어릴 적에는 생각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한 기억을 부둥켜안고 부모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부모의 동의할 수 없는 과거 부도덕한 삶, 사랑이 없는 엄한 교육 심지어는 가정 폭력과 폭행 이런 것 때문에 공경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아까운 세월은 흘러 갑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고 중년이 넘어가 보면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어머니에게 원망을 하면서 자신이 살았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들에게 원망을 받는 부모가 되어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더 나이를 들어 노년에 이르게 되면 인간에 대한 애잔한 인류애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게 안 생겨나는 것은 아직까지도 철이 안 들어서 그렇습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빗대어서 머리가 허옇게 되어도 깨닫지 못하는 철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탄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무거운 의무의 짐을 지고 자기도 살아 내지 못한 삶을 부모를 향해, 왜 당신은 이런 부모가 되지 못했느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여러분을 여러분의 아버지보다 별로 낫게 평가 안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자신도 상처를 준 부모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들로부터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고 매우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노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마무리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고귀하지 않습니까?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는데 새벽녘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 밤중에 누가 이렇게 큰 소리로 우나 싶어서 언뜻 잠에서 깼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불하고 베개가 흠뻑 젖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우는 소리에 놀라서 내가 잠에서 깬 것입니다. 이불을 입에 물고 울고 있었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어느 화원 같은 곳인데 실내였습니다.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당뇨가 있으셔서 몸이 바짝 마르신 상태에서 헐렁한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양쪽 팔을 걷어서 팔꿈치 위까지 올리시고 바지는 헐렁해서 새까만 바지를 땅에 질질 끌리도록 입으시고 다 낡은 검정 구두를 신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구부정하게 숙이시면서 모종삽으로 나무 상자에서 흙을 이쪽에서 퍼서 저쪽으로 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그 화원을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더 크게 "아버지"하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청력이 안 좋아지셔서 제가 모시고 시내에 나가서 아주 좋은 값비싼 보청기를 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거를 끼고는 그렇게 좋아 하셨습니다. "이제는 너무 잘 들린다 너무 잘 들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 오른쪽 어깨를 툭 건드리면서 "아버지"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바짝 마르셨는데 아주 깨끗하고 머리는 희끗희끗하신데 깨끗하고 아주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런 얼굴을 뵌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주 평화로우셨습니다. 활짝 웃으시면서 "너 왔니?" 그러시는데 그냥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어깨 뒤에 고개를 내밀고 엉엉 울었습니다. 울 때 제 마음은 "아빠 사랑해." "내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다 표현 못해서 미안해." "아빠 사랑해." 그렇게 울다가 잠에서 깬 것입니다. 일생 동안 몸에 밴 습관인데 그게 한번 회개했다고 그렇게 모든 게 다 금방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늘 사랑하고 효도했지만 때로는 목회에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많이 함께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회심한 다음에 마음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용서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너무 보고 싶습니다. 일주일 만이라도 휴가를 내서 오시면 제가 잘해드릴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래 사실 줄 알았는데 75세가 되던 어느 해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걸 다 표현하지 못 한 시간들이 너무나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안아 드릴걸. 조금 더 사랑한다고 말할걸. 조금 더 많이 섬겨 드릴걸.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덧없이 흘러 갑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무리 못된 부모라도 살아계신 건 선물입니다.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회개하고 다시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주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음 깊이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부모가 살아 계신 것이 기회입니다. 화해하십시오. 돌아가시거나 치매에 걸리시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망가진 가족 관계를 회복시키고 다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 자기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화목 제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그 사랑을 생각하며 부모를 진심으로 공경하십시오 부모님이 살아있는 사람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사람보다 복 있는 사람들이니 주님께 감사 하시고 부모 곤경에 회심하는 여러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과 함께 살기4 (2021.05.23._주일오전)
4.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당시 골로새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이단적인 가르침을 꾸짖고 있습니다. 이 이단은 유대교와 민간의 신앙을 융합한 거짓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이단적인 가르침은 교회 안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고 연약한 자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참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도록 유혹했고, 또 미신적인 방식으로 율법을 지키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보다 탁월하신 우주의 통치자라는 사실과 우리 신자들이 그분과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는 분임을 가르칩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인생을 보고, 교회를 보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는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II.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
남편에게 강조하는 덕목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 쉬운 일이었다면 명령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을 명령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A. 사랑하라
제일 먼저 “사랑하라”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아가파테 (agapate)라는 그리스어가 쓰였습니다. 그냥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가정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통치자들은 건강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견실한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사회는 남존여비의 사회였습니다. 모든 사회제도가 남성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이 로마시대라고 하면 큰 대가족제가 가정의 일반적인 기준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아주 작은 단위로 가정생활을 하기도 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아무튼 남성들은 힘과 권력, 사회적인 지위와 그리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권위로 가정을 통제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역할은 남편에게 복속된 채 자기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아마 조선시대에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의 여성의 지위와 별다를 것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공공장소에서 아내인 여성이 발언하는 것은 남편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남자가 어떻게 집안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 여자가 저렇게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날뛰냐고 하는 사회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아내라는 존재가 그런 대접밖에 못 받던 시대에 아내를 교회에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는 이미 아내에 대한 깊은 존중심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묻어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만큼 여성들의 지위가 상승된 것도 사실 어떻게 보면 기독교에서부터 그런 시작을 착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마 사회도 역시 이 기독교의 가르침은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성 간의 사랑에는 “되는 사랑”과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되는 사랑”은 연애 시절에 좋아서 하는 사랑입니다. 노력할 필요가 없고 마음이 그냥 흘러갑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에서의 사랑은 될 때도 있지만 해야 할 때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저절로 끌리는 사랑의 때가 있습니다. 결혼한 지 10년, 15년이 지났는데도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면 설렌다는 아내들은 가끔 있지만, 남편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신경 과학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물리적인 원인에서 찾기도 합니다. 처음 사랑에 빠질 때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페닐에틸아민 등 화학 물질의 작용이 일어나서 격렬한 연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효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18개월에서 36개월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이것들은 바소프레신, 옥시토신, 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바뀌면서 서로가 안정적인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아주 조화롭게 작용될 때 사랑은 불붙는 사랑에서 서로 함께 의지하고 살아가는 좋은 친구와 같은 관계로 부부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권태기가 옵니다. 그럴 때쯤 아이가 태어납니다. 부부는 서로에게는 관심이 좀 떨어졌어도 아이를 매개체로 새로운 소통의 끈을 갖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상황이 주어집니다.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하면서 부부는 열정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끈끈한 가족애로 뭉쳐지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불신자는 아내를 지배하려고 했지만 신자인 이 편지 수신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남편으로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윤리는 제국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교회에 부여하신 윤리였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학교 다닐 때 기억이 납니다. 동네에서 금슬이 괜찮은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도 막된 사람들이 있어서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비율적으로 보면 여성과 남성이 하나님 앞에 동등한 형상이라는 사실, 그리고 여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회에서 선교사들이 많이 교육하였기 때문입니다. 유교사상과 신사상이 교차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격동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여성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존중하고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남편의 윤리를 교회가 많이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 중에도 부부 관계가 안 좋은 분들이 그때도 있고 지금도 있지만, 제가 만난 목사님들은 인자하면서도 사모님을 끔찍이 사랑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유교사회에서는 남성들의 흠이었지만 교회에서는 그런 모습이 아주 보기 좋은 모습으로 인정되었고 실제로 동네에서 주부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남편들이 변화되어서 가정에 충실하고 아내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리고 부부싸움을 해도 그 아내에게는 할 말이 있습니다. 싸우면서 남편에게 항의하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남편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으셨느냐”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렇게 존중하는 것을 근대사회가 개화하면서 교회에서 배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불신자는 아내를 지배하는 시대였지만, 신자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을 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가르침을 상기하는 것이었으니 이미 그런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육정에서 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사랑으로 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내를 향한 남편의 이런 사랑은 인류 최초의 결혼식에서도 아내에게 바치는 남편의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2장 23절은 말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사랑 고백이 있고 그 두 남녀가 합하여 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만 흙으로 만드시고 또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몸의 일부로 만드신 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거나 혹은 그 반대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두 몸이 나뉘어져 있으나 사실은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순간에 불붙는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하셨으니 모든 인류가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세계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범죄로 그 사랑은 파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둘이 서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존재 자체가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이 서로 다툰 것이 아니었습니다. 각자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그러자 부부 사이의 사랑은 끊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이 끊어지자 그렇게 금슬 좋던 부부는 서로의 존재가 자신의 인생에 말할 수 없이 큰 괴로움이 되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만나고도 인생을 매우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불행이 있다고 할지라도 남편과 아내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 결국 그 사랑으로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이깁니다.
제주도에서 목회하는 제 친구 목사님 사모님이 한 번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두 부부가 금슬이 매우 좋으셨는데, 목회자였다고 합니다. 남편이 질병으로 먼저 하늘나라에 가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아내 홀로 남아서 남편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하나님이 만져주시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부부가 너무 뜨겁게 사랑해도 사실은 어려운 점도 많습니다. 그 상실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이가 서먹서먹하면 한 사람이 죽어도 죽었나 보다 하고 살지만, 그러나 정말 사랑이 너무 애틋하면 남아 있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죽은 자의 생명은 산자의 죽음이 되어 그의 마음을 산산이 찢어놓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조금 아내 사랑을 절제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의지하고 살면 또 하나님이 그렇게 만져주십니다. 그래서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위로하셔서 또 살아가게 만드시니, 사랑에 후회가 있다면 하나님이 왜 사랑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아무튼 교회 목사님이 먼저 돌아가셔서 이제 그분을 무덤에 묻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무덤에 묻고 떠나오는데 사모님이 한없이 우니까 주위의 식구들이 뜯어말리면서 영구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큰 소리로 그 무덤을 향해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나를 이렇게 많이 사랑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목 놓아 외치셨다고 합니다.
결국 남편이 아내를 진실하게 사랑하며 살아가면 인생에 어려움이 와도 인생이 무너질 정도의 불행에까지 빠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고독하지만 않으면 웬만한 역경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것 같지만, 또 어떻게 보면 인간은 한없이 강한 존재입니다. 인간을 그렇게 강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자 결혼할 당시의 고백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적 성차별의 잔혹한 역사는 이러한 비극의 결과였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쉬웠다면 명령할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감옥에 갇힌 사도가 이 우주와 하늘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그런 세계의 미래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삶을 언급하면서 남편보고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가페(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자기가 가진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람의 사랑으로서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해 아내를 주신 것은 배우자를 자기 유익을 위해 도구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힘든 한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불안정한 인간인지 깨달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쓴 뿌리들을 캐내고, 내 마음을 녹이며 하나님이 어떤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셨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상대방을 불행하게 하면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라고 아내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 가게 하신 경륜을 에베소서 5장 26절과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머리가 희어지고 죽을 때가 다가왔는데도 인간이 왠지 거칠고, 상종하기가 싫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람이 돈이나 있고, 권력이 있으면서 거들먹거리더라도 할 수 없이 붙어 있어야 되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돈도 없고 권력도 없으면 아무도 상종해 주지 않는 인간 쓰레기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태어나서 자기 맘대로 살아 봤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가 죽어 본 적이 없는 인간들입니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가 깨어지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불쌍합니다.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이 40이 되면 서서히 젊음이 사라지고 얼굴에도 늙음이 찾아옵니다. 왠지 저 사람은 인간의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그 정도의 인생에 대한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한 인간의 성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 모으고, 공부하고, 자기 욕망을 따라 살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짓밟으면, 그게 인생의 성숙이 되는 것입니까? 성숙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김치든지, 된장이든지, 고추장이든지, 발효 식품들을 보십시오. 된장 담그는 것을 한 번 보십시오. 간장 담은 메주를 꺼내면 본질이 콩입니다. 그 콩이 매달려서 발효되는 과정을 통해 곰팡이가 피고, 발효되는 방식으로 썩으면서 그 질이 변하고, 다시 한번 된장을 담그고 묵히면서 콩이라는 본질은 사라지지 않지만 발효되면서 자기 자신이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된장을 먹을 때는 콩의 본질은 변함이 없지만 삶은 콩과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게 발효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발효가 결국은 사랑입니다. 누군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자신이 온전한 사람이 돼 가는 것이니, 자기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던 사람이 머리가 하얗게 늙었으나 사실은 어린아이 같이 유치한 사람인 것입니다. 거칠고, 떼부리고, 자기 마음대로 집어던지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며, 아끼는 자 없이 쓸쓸하게 죽는 것이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살아온 그 사람의 인생의 대가입니다.
불완전한 아내를 만나게 하신 것은 공평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내가 불완전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은 남자한테 시집을 갔겠지, 왜 자기한테 시집을 왔겠습니까? 그러니까 아내가 주어지면 그냥 나한테 꼭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아내를 만나게 하신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내의 부족한 점과 인격의 흠을 발견할 때마다 그런 여자하고 만난 자신의 팔자를 탓하는 남자치고 잘난 남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한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이 평가해 주는 것이 그 사람의 사람됨의 진실에 가깝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박수를 치고 어떤 점이 훌륭하다고 해도 가슴앓이를 하면서 아내가 살아오고, 그 남편과 만난 것을 가슴 아파하고 후회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그런 남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내의 부족한 점과 인격적인 흠을 발견할 때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딱 맞는 수준의 사람이어서 나에게 주셨다고 생각하고 자기도 얼마나 결함이 많은 사람인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그런 여성을 자신의 아내로 주신 것은 거기서 그녀의 남편으로 그 부족한 점을 채워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고, 자기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힘든 과정을 통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의 결함과 부족한 것을 볼 때마다 저렇게 모자라는 부분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남편으로 보내셔서 보충하게 하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내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줌으로써 하나님 앞에 입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늘을 열고 쏟아 부어지는 은혜와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깨우치시는 진리의 힘과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은혜의 감화는 한 사람을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외로울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할수록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가파테(agapate), 아가페(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내를 온전하게 살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를 배필 삼아 주신 것이니 결국 여러분이 잘살아서 아내를 사람 만들면 하나님 앞에 잘했다 칭찬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이 그러는 중에 너도 사람이 됐구나 하실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가서 아내의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자는 얼굴이라도 좋고, 안 자면 얼굴 한번 보자고 들여다보십시오. 그 아내가 얼마나 사람이 되었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얼마만큼 살았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표독스럽고, 성질도 유별나서 진짜 먹고 싶지만 던져 버리는 가을날의 밤송이 같은 존재였는데, 어떻게 씨름을 하면서 살다 보니까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내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 좋은 친구처럼, 너무나 사랑스러운 지체처럼, 그렇게 끝없이 친밀함을 느끼면서 아내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다음 두 번째로 넘어가겠습니다.
B. 괴롭게 하지 말라
오늘 성경은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라고 했으면 좋지 왜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까?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부부간에 가장 다루기 어려운 경우는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한없이 희생하고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데,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입니다. 남편은 자기의 많은 것을 희생해서 아내와 가족을 사랑했다는 자기의(義) 빠져 있고, 아내는 남편이 사랑하는 방식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자기가 설정하는 방식대로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루미와 여우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어느 날 여우가 두루미를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스프를 접시에 담아 주었습니다.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했을 때 길쭉한 잔에 스프를 담아서 두루미는 맛있게 먹고 여우는 유리그릇만 핥아야 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접대의 방식이었겠지만 상대방에게 맞춘 접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학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부부가 사랑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퍼붓고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내의 마음의 결을 읽는 것입니다. 결이라는 것은 내적인 구조입니다. 그래서 결이 다르다는 것은 내적인 구조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결을 읽습니다. 그래서 그 결을 따라서 사랑해 주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동일하게 아내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사랑하되 자기의 방식이 아니라 결을 따라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 두 결이 서로 충돌을 할 때에는 사실은 자신의 결을 따라 사랑해 주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접고 다른 사람이 먼저이고 자신이 나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피차 복종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어느 한 사람이 기가 세서 자기의 결대로만 사랑해 주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시시때때로 상대방의 결을 읽으며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결이 다르면 잘해주는 것이 괴로움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내를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거나, 작은 잘못을 했는데 크게 트집을 잡아 집요하게 괴롭히며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국 자기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남편이 그런 식으로 살면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힌다고 경고합니다. 기도의 문이 닫히게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즉, 지식을 따라 아내와 함께 살지 않고, 그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지 않고,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지 않고, 그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너희의 기도는 막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모본을 보지 못하고 자라온 남성의 경우에 그런 사실들을 스스로 배워가는 과정은 많은 고통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태어났는데 부모가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정말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고, 이 사회에 대해 정의롭고 인자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그렇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과 비교하자면 100m 경주를 그 사람은 30M쯤 앞에서 시작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더욱이 그런 남편이 가정을 이루는 어미와 아내로서의 도리를 거의 배우지 못한 아내를 만나 함께 사랑하며 사는 일은 그야말로 살가죽을 벗겨내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강을 못 건넙니다. 살지만 포기하고 살거나, 아니면 헤어져 버리거나, 아니면 나이 젊어서는 어떻게 살았는데 늙어서 졸혼이라는 미명하에 별거를 하는 것입니다.
부족한 아내도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입니까? 아무리 남편이 보기에 부족해도 그 아내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중한 친딸이고, 그의 부모 앞에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아주 소중한 딸이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일에 버거움을 느끼지 않을 남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남성들이 아내를 누르고 살려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포기하고 그냥 아내에게 눌려서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내는 자유로움을 누리고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행복한 가정이요, 한 인간을 완성해가는 가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60년 동안 부부싸움을 하지 않고 잘 살아왔던 부부가 있어서 젊은 후배들이 초청을 해서 결혼 생활이 행복했던 비결이 무엇이냐고, 어떻게 그렇게 60년 세월 동안을 한결같이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살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 남편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럴 줄 알고 결혼할 때 아예 둘이 서로 합의를 봤다네.” “큰일은 남편이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모두 아내가 결정하기로 서로 분업했기 때문에 다툴 일이 한 번도 없었다네.” “그래도 그렇지 한 번도 의견 충돌이 없었습니까?” “없었다네.” “왜요?” “60년 동안 크고 중요한 일이 한 번 없었다네.” 나는 아내를 충분히 사랑했다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믿지 않습니다. 첫째는 아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진짜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렇게 사랑했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사랑과 망각의 관계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님에 대해서 나중에 철이 들고 애틋한 마음이 생겨서, “그때 너무 섭섭하셨죠? 제가 철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일을 기억도 못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자식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가 잘해준 게 기억이 안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주 전에 인터뷰에 나온 거 보면 그렇지 않으십니까? 아버지가 순박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어업을 하시는 분 같은데 그물을 정리하다가 말고 그러십니다. 그냥 생각하면 자식들에게 못 해준 것밖에 생각이 안 난다고 하십니다. 그랬겠습니까? 얼마나 잘해 주셨겠습니까?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게 바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자랑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은 진짜 사랑하게 되면 그 대상을 사랑한 것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자기의 장점이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에 깊이 묻혔기 때문입니다.
부족해 보여도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눈에는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그 아내도 부모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여러분 때문에 자기 딸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부모는 눈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은 여러분들 눈에는 하찮아 보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친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딸임을 기억하시면, 아내를 보고는 사랑을 못 하더라도 하나님을 보고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인 여러분 자신도 그런 사랑이 없으면 인생에 소망이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은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지속할 수 없었던 관계를 이어가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사랑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샘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가 깨어지고 주님이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떼쟁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찬송을 부릅니다.
(찬양)
이 모습 이대로 날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것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변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 십자가 사랑 때문에 마음이 녹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아파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 아파하는 사람들만 부를 수 있는 찬송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찬송을 부르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다 부인하고 그분께 빚어 달라고, 그분 맘대로 자신을 빚어 새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는 기도가 되지만,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 없이 이 노래를 부르면 난 내 생긴 대로 살 테니 싫으면 배 째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남은 인생을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아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언제까지나 그런 사랑을 받을 수도 없지만, 그런 사랑을 받는 것으로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행복의 근원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아내 또한 그러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또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좋을 때 한 사람을 자기 좋은 대로 사랑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의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 신앙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가장 뚜렷한 신앙의 표는 결국 사랑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이며, 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만큼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다른 것을 꿈꾸지 마십시오. 아내가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의 인생을 걸고 끝까지 용납하며 사랑하십시오. 그럴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람의 한계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네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아니함으로 여러분이 참 사람이 되어 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가족과 함께 살기5 (2021.05.30._주일오전)
5.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벧전 3:1)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로마의 대대적인 핍박을 앞두고 쓰여진 서신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를 배신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서신을 썼습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고난과 소망을 말한 후, 2장에서는 믿음과 생활을 말했습니다. 3장에서는 그런 소망을 가진 남편과 아내의 생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II.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입니다. 오늘 성경에 "이와 같이"라는 말은 바로 앞에 있는 내용을 가리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악을 행한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서로를 대하며 살아야 될지를 가르쳐 주는 영원한 지침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남편과 아내는 부부이기 이전에 신자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 예수께 함께 접붙여진 한 몸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기초 위에서 남편과 아내로서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A. 순종하라
그러면 아내는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겠습니까? 첫째는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에 대해 아내가 가져야 할 첫 번째 덕목이었으니 이는 남편을 전도하고, 이웃에게 그리스도인이 선한 사람임을 나타내는데도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 3:1).
여기에서 "순종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 의미로 어떤 사물을 이유 있는 질서에 따라 아래에 두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에는 당시 사회적인 문맥이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당시 로마 사회는 남존여비의 사상이 지배하던 사회였습니다. 여자들은 설 자리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고, 심한 경우에는 노예보다 조금 나은 신분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매매도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비참한 때입니까? 그런 때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는 남편에게 복종할 수 없겠지만, 신앙 이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남편과 분쟁을 일으키고 소란을 피운다면 믿지 않는 남편도 그 여자를 보면서 예수 믿을 마음이 없을 것이고, 이웃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그런 문맥에서 신앙 안에서는 남편에게 어쩔 수 없이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예수 믿는 아내들은 가정의 질서를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히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기독교에서 가르치고 싶어 했던 진리는 이것이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기고 사랑하며 존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관한 한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남편과 아내가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런 질서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를 힘써야 하고, 가정도 그 계획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내를 향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남편의 말이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저절로 순종할 권위를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욱이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보다 우월해서 순종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은 디모데전서 2장 13절과 14절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다만 남편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아담의 후예로서, 가정을 신앙적으로 이끌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아내는 무조건 남편보다 열등하며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뜻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무시당하던 아내를 향해서 교회에서는 아가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당시 사회에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남녀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서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동일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신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서로 다른 위치는 위아래의 종속적인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목적이 각각 다르듯이 그들을 어디에 세우고 싶어 하셨는지에 따라서, 기능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히포타스소메나이( hypotassomenai) "아래에 두다"라는 그리스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남자들이 모이면 심지어 아내들이 있는 앞에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북어와 여자는 패야 된다. 어린 저에게도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북어를 패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참 잘 됐습니다. 그 당시에는 북어포를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딘가에는 있었겠지만 우리 같은 서민으로서는 가게에서 구입이 안됐습니다. 그래서 할머니가 북어 요리를 해주고 싶을 때는 항상 저녁때에 북어를 축축하게 물에 적신 베 보자기로 싸 놓고 주무십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셔서 댓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리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축축해진 북어가 분해되면서 속에 뼈는 뼈대로 갈라 내지고, 머리는 머리대로 떼어내 집니다. 그리고 껍질을 벗겨낸 후 손수 살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서 북어채를 만들어 요리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지만, 그런 이야기가 널리 널리 퍼지던 때에 불과 사오십 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했고, 이제는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성차별자라고 낙인이 찍힐 것입니다.
로마 사회도 그런 옛날 우리 사회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에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당시에 무시당하던 여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새로운 피조물로 대우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남성들은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가 복종해야 하듯이 남자도 그렇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아내는 남편보다 열등하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발달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칭송을 받던 미국이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락한 것이 불과 1928년에 일이었으니 얼마나 그것이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렇게 남편이 아내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8절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놀랍게 이 번역은 1960 년대에 번역된 개역한글 성경이나, 지금 사용중인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번역은 전적으로 잘못되었고, 후반부는 오히려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왜곡해서 번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좀 생소하겠지만 그리스어 원문을 함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앞에 나오는 글자가 바로 그리스어입니다. 이것을 글자 그대로 최선을 다해서 제가 번역을 했습니다. 이런 번역이 나옵니다. “아내들이여, 당신들은 그대들의 남편들에게 스스로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 안에서 합당한 한에서”(Αἱ γυναῖκες, ὑποτάσσεσθε τοῖς ἀνδράσιν, ὡς ἀνῆκεν ἐν Κυρίῳ. 골 3:18, KNJ 私譯). 영어에 익숙한 세대가 조금 더 또렷한 이해를 갖게 하기 위해서 영어로도 번역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Wives, Submit yourselves to your own husbands, in so far as it is fitting in the Lord”(Αἱ γυναῖκες, ὑποτάσσεσθε τοῖς ἀνδράσιν, ὡς ἀνῆκεν ἐν Κυρίῳ. 골 3:18, KNJ 私譯). 혹은 순종하십시오. "... in so far as it ..." 여기서 "it"는 막연한 상황입니다. 현대 영어에서는 "fitting"이라는 동사를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fit"는 동사의 뜻이 있고, 그리스어가 동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옛날 영어처럼 보이지만 제가 동사로 썼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뜻이냐면, 그것이 어떤 막연한 상황이 주 안에서 "fitting 적합한", "in so far as ~한에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하면 "아내들이여 당신들은 그대들의 남편에게 스스로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주 안에서 합당한 한에서"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남편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동하는 한에서, 아내는 그의 말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결코 남편의 모든 말에 복종하는 것이 마땅한 아내의 본분이라는 뜻이 아님을 남편들은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남편이 아내의 우위에 있다든가, 아내가 남편의 밑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남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전히 행동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둘 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되는 사람인데, 남편이지만 그릇된 의견을 제시하고 아내가 올바른 의견을 제시한다면 당연히 남편은 아내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놓고도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마음대로 교회를 휘두르시는 것처럼, 남편도 아내의 머리니 아내를 그렇게 마음대로 주장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의 앞뒤 문맥을 잘 보면 교회는 노예고, 예수는 주인이시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든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말씀 하시고 싶으셨으면 머리와 몸의 비유로 설명하지 말고 왕과 신하의 비유로 설명을 하던지, 엄한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설명을 하셨어야 마땅합니다. 몸과 머리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래서 온몸에서 느끼는 통증은 온몸으로 전달되니, 머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손가락에는 피가 철철 흐르는데, 발가락이 즐거운 몸은 있을 수 없습니다. 머리는 터지는 것처럼 아픈데, 손발은 매우 행복한 그런 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예수와 교회가 신비적으로 한 몸을 이루고, 사랑하는 한 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한다면 몸인 아내는 머리인 남편의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겠으며, 또한 머리인 남편은 몸인 아내의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겠습니까? 고통과 기쁨을 공유하며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오류가 없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남편은 오류가 있고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어찌 모든 일에 순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이 말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 안에서 합당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이 구절도 남편들이 즐겨 애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 범사는 문자 그대로 모든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 믿지 말라는 말도 남편 말이니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교회 가지 말라는 말도 남편의 말이니, 범사에 속하는 것이니 순종해야 합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범사는 주님의 뜻, 그 안에 들어있는 범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남편의 말 중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것 중 일부만을 순종 하지 말고, 모든 말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나쁜 것을 교회에 명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경건한 남편의 올바른 신앙적인 요구에 불순종하는 것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가정의 질서를 해치는 것이고, 서로의 신앙의 손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갑자기 성장하고 일꾼은 없었던 때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서리집사가 되고 2년 밖에 안 됐는데 안수집사가 되는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어쨌든 항존직을 뽑아야 했고, 투표를 앞두고 교구는 후보자들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일단 서리집사로 몇 년 지난 남자들 중에서 사람들을 뽑아서 안수집사 후보자로 일단 추려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이 올라왔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 봉사도 많이 한 사람인데, 과연 합당한가 조사를 해보니까 헌금을 안 합니다. 전혀 안 한건 아닌데, 십일조도 안하고 거의 안합니다. 저는 낱낱이 교인의 헌금을 보지 않으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조사해 보라고 했더니, 다시 조사해봐도 맞다는 것입니다. 일 년 동안에 헌금한 흔적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연을 캐봤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남편을 쥐고 흔들어서 절대 헌금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일정액 주일헌금 이외에는 절대 헌금을 못하게 하고, 돈통을 혼자 쥐고 남편에게 일체 헌금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사람은 탈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가르침에서 떠나 아내가 완강함과 고집으로 경건한 남편의 뜻을 꺾는 것은 죄 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남편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빗나간 육신적인 고집과 우월감을 가지고 신앙적인 남편을 꺾으며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아내들은 부끄러운 줄을 아십시오. 수치스러운 줄을 아십시오. 그것을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자랑이라고 하고 다니는 사람은 더 부끄러운 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 만난 것은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며 격려하여 하나님 사랑하며 선하게 살아가도록 가정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세워 준 아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지 못하고, 모든 일에 남편을 주장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나게 행동하려고 할 때에 그 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분이 교회에서 얼마나 여러 번 예배를 드리는지에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불신 남편은 여러분이 교회에 가서 얼마나 많이 봉사하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돌아와서 얼마나 사람답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앞두고 있는 때에 남편도 믿지 않고 불순종하는 가정에서 어렵게 어렵게 신앙생활하는 아내들에게 타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명한다고 불신앙적인 일에는 순종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오는 일이라면 자원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존중하고 순종해야지만 그 남편들의 마음이 열려 예수를 믿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 도(道)가 당시 사회 질서를 허물어트리고, 나쁜 가정을 만드는 것이 아님을 입증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타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껏 주님의 뜻 안에서조차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지 못했던 아내들은 이 교훈을 가슴에 새기면서 깊이 깊이 뉘우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편이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꺾고, 부인하고 피차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사랑하라
마지막 두 번째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로서 주 안에서 남편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주목해 볼 것은 끝에 구절입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무슨 뜻이겠습니까? 알쏭달쏭해 보이는 이 구절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면 자기도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에베소서의 이 구절에서 나오는 "이와 같이"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해답은 바로 문맥 바로 앞에 나오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구속하셨고, 끝까지 사랑하셔서 결국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을 받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그저 노예처럼 복종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까? 이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거듭거듭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교회여, 너희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라는 그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마찬가지로 아내도 역시 남편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존경이 가능합니까?
저는 일생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많이 주신 것도 아니고, 훌륭한 부모님을 만나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생애의 고비 고비마다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스승을 본받고 배우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거의 다 고인이 되셨지만, 아직도 스승의 날이면 30년째 꽃다발을 보내는 두 분의 스승이 계십니다. 그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제가 깨닫게 된 것은 그 존경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깊이 사랑하니까 존경이 가능하고, 존경하니까 사랑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 없이 겉으로만 존경할 때 그것은 아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아내를 원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아내는 남편을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여성이 온 세상의 교회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온 인류를 위해 통곡한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여러분의 남편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남편은 아내와 한 몸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일생을 함께 했던 그의 부모를 떠난 사람입니다. 원래 이 말씀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거기에서 "떠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자브"라는 단어인데 "버리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내는 남편이 부모를 버리고 만난 사람입니다. 물론 아내도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니 남편은 아내와의 사랑의 결합을 위해 자신의 분신과 같았던 옛 집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제 그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아내를 의존하며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로부터 사랑을 기대하지 못한다면 부모를 떠난 그 남편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도 아내에게 사랑을 받는 남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온 인류가 남편을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여자가 절망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남편을 비하하는 유머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중년 여성들 가운데에 오가던 톡 대화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팝니다. 수입은 5천만 원, 유류비는 2천만 원쯤 들어갑니다. 유류비라는 것은 남편의 술값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직 쓸만합니다. 구매하시는 분에게는 사은품으로 시어머니를 드리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깔깔거리며 웃는 여성들은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그렇게 해서 남편을 비하하고, 남편을 얕잡아보는 세상의 시류에 함께 떠내려가면서 여러분이 이루고자 하는 남편과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입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남편을 자신이 돌봐야 하는 것을 또 한 마리의 강아지에 비유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 예쁜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까? 오십이 거의 다 된 사람들이 부부가 서로 "너"라고 대화하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정신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도대체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고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도대체 사랑이 있을 자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존 오웬 목사님은 사랑의 뚜렷한 두 가지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기쁨이고, 또 하나는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중한 것입니다. 하찮게 여기는 것은 결코 사랑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남편은 소중합니까? 여러분은 남편에게 기쁨이 됩니까? 그렇지 않으십니까? 남편도 여러분을 향해서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과연 그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입니까? 제 말이 심합니까? 아닙니다.
아내들이여, 여러분은 한 사람만 사랑하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남편을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면 모든 사람은 이미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한다면 모든 것을 해도 여러분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과거에 남편이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심하게 말해 보겠습니다. 젊어서 폭력과 폭언, 그리고 자기 고집대로, 멋대로, 마음대로, 아내를 손에 넣고 뒤흔들고, 가정을 자기 마음대로 자루처럼 들고 흔들고 살았습니다. 남편이 잘못한 것입니다. 심하면 바람을 피웠을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면 아내는 이혼할 권리가 있습니다. 한 번에 갈라서도 결코 죄짓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삶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지 이혼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내가 외도를 했습니까? 한 번에 끝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리해 버려도 남편은 아내에게 죄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서로의 약속과 의무를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선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좀 다릅니다. 그래도 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더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야단칠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각자 자신이 결정할 일입니다.
과거에 남편이 그렇게 잘못했다면 당연히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반성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남편이 나이가 들었다고, 이제 능력이 없게 되었다고, 전가의 보도처럼 옛날 일을 수시로 써 먹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남편을 수치스럽게 하는 아내들은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수치스러운 줄 아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니 창피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것은 창피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인간의 윤리 수준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마음을 스스로 갖게 되는 것이 인간다운 성품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서 일생동안을 살아온다는 아내들이 그렇게 남편을 무시하는 것 자체가 큰 죄가 아니라, 이미 그 마음속에 사랑이 없거나, 있어도 아침 구름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어도 진심에서 나오는 눈물은 흐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경건한 아내로서 할 도리입니까? 그녀 안에 있는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그렇게 해서 지난날 남편에게 눌려 지냈던 원한을 복수의 나쁜 감정으로 배설하듯이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배설물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그대로 상처가 되고,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해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누가 옳은지 아십니까? 목소리 큰 사람이 옳습니다. 말 안하고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잘못했기 때문에 침묵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점에 있어서는 말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절제심 때문에 말을 안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치 자신의 승리의 표징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남편을 무시하고 더군다나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예수님 믿었지만 속은 불신자인 것입니다. 지난날의 상처를 곱씹으며 복수하듯이 남편을 원망하며 산다면 아내로서 인내하며 살아온 지난 날들에 대한 하늘의 상급은 지금 가불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욕해도 아내에게 사랑을 받는 남편은 자살까지 하지 않습니다. 젊은 날 아내를 마음을 아프게 했던 남편이라고 해서 아내들이 늙은 남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극소수입니다. 대부분 어떤 식으로 복수하는지 아십니까? 소외감을 주는 것입니다. 딸과 사이좋게 이야기하고 있다가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대화를 뚝 그치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하고 있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아들은 이층으로, 딸은 자기 방으로, 아내는 화장실로 가버립니다. 거기에서 큰 소외감을 느끼면서, 남편들은 자존감을 상실해 갑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 일에 열심을 낼지라도, 한 사람,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내면의 세계까지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든 사람은 아닙니다. 남편을 사랑하되 에로스의 사랑만으로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이미 동기 자체가 자기 만족입니다. 그래서 에로스의 사랑은 더 이상 자기에게 이성으로서의 만족을 주지 못할 때 끝이 납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사람을 보고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우리가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 때문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어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로부터 받는 사랑은 우리의 공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성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박애적인 사랑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을 너희가 받았으니 남편도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부족한 점을 발견했습니까? 오십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못 고치고 있습니까? 그렇게 결점이 없고, 그렇게 빨리 고칠 수 있었으면, 여러분보다 훨씬 더 훌륭한 여성에게 장가갔을 것입니다. 그냥 수준대로 만난 것입니다. 공평하게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그 짝이 제일 괜찮아서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내라면 남편에게 어떤 결함이 있을 때 모자라는 채로 평생을 살 남자인데 저것을 보충해 주면서 그래도 사람 만들고 살라고 나를 아내의 자리에 세워 주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 목회는 쉽습니까? 목양은 쉽습니까? 여러분,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모의 기도 제목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보면 이까짓 것이 무슨 기도제목이야, 한번 불러다 놓고 싸대기를 갈기고 회초리로 패면 고쳐질 텐데,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부모들이 750명이 유튜브에 접속을 동시에 했습니다. 거기서 자녀 교육에 대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여러 가지 얘기를 했지만 결국 이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기발한 교육의 방법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나는 목사이기 전에 아버지로서 내 자녀들을 위해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그것이 교육의 기초입니다. 부모가 버리면 끝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해 주지 않고 버리면 끝입니다. 그 나이에 누구한테 가서 그런 사랑을 받겠습니까? 또 아내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을 다른 여자가 닦아준다면 그건 또 행복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박애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하며, 그 눈물 어린 사랑으로 자기가 사랑을 받은 것처럼, 그 은혜로 남편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사람으로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남이 대신 지어줄 수 없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아내도, 남편도 대신 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옆에서 그 손을 붙들고 함께 울어주는 것과 홀로 있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입니다. 저는 부모님의 그런 사랑 없이 청소년 시절을 지냈습니다. 거의 버림받았습니다. 그래서 열넷, 열다섯짜리가 오죽했으면 자살을 생각하고, 자살을 시도했겠습니까? 열아홉 살 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거의 안 보지만 텔레비전에서 육아 프로그램 하나를 봤습니다. 이 아이는 정말 이상합니다. 하여튼 지겹도록 말을 안 듣고, 제가 보니까 30대 후반의 싱글맘인데 바지를 올리니까 두 무릎부터 아래 정강이가 다 시퍼렇게 멍이 들었습니다. 10살 된 아이가 엄마를 그렇게 발로 차서 다 멍들게 만든 것입니다. 전문가가 붙어서 아이를 데리고 교육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보통의 아이들은 6주면 끝나는데, 이 아이는 18주를 교육을 했습니다. 겨우 이 아이의 태도가 바뀌어서 엄마하고 등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그런 문제아를 기르니 엄마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산 위에 올라갔습니다. 아이와 함께 산을 등산하는 것은 생전 처음입니다. 아이는 옆에서 놀고 있는데, 엄마는 두 손을 들고 "야호" 소리를 쳤습니다. "나는 엄마다." "나는 강하다." 눈물이 소낙비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저렇게 못된 아이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엄마가 있는 한 그 아이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그 끈을 놔 버리면 그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 옆에 누가 있습니까? 이제 그 나이쯤 되면 친구가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사회적인 지위가 있습니까? 아주 소수의 사람만 죽을 때까지 그런 것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는 뭘 몰라서, 신앙이 성숙하지 못해서, 정신 못 차리고 까불면서 가족들 우습게 여기고, 자기 일에 미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외롭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에는 아내들이 그렇게 잘 참고, 마지막에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부합하는 행동이겠습니까? 껍질만 남편과 아내로 살아가면 부부가 아닙니다. 예수님만 믿는다고 교회에 나오면 신자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하십시오. 치사하게 소외감을 줌으로써 복수하지 마십시오. 그런 아내의 마음을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사랑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은혜로 지속될 때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름만 대면 거의 알만한 한국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이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간증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당시 경기여고를 나온 인텔리 여성이었고, 아버지는 지주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지방에 살고 있는 어머님을 결혼식 하기 위해서 신랑이 당시로서 평범한 사람은 보기도 힘들었던 택시를 대절해서 싣고 서울로 왔는데 그 교통비가 쌀 32가마 값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색시가 그걸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광경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처자들이 부러워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잠시였습니다. 끊임없는 바람과 끊임없는 가정 불화, 아버지는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인용하면서, 젊을 때 나를 키운 건 8할이 아버지의 바람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고 아주 적대감에 불탔는데, 신기한건 어머니가 한 번도 아버지를 욕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너무너무 화가 나서, 엄마는 도대체 바보냐고, 아버지가 저런 식으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그러면서 분노를 폭발했더니 어머니가 타이르셨다고 합니다. "얘야, 아버지가 나빠서가 아니라 너희 할아버지도 그렇게 바람을 피우셔서 가정에 마음을 두지 않고 일평생을 사시는 바람에 너희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아서 저렇게 마음 둘 곳이 없어서 방황을 하는 거란다." 그리고 오직 신앙으로 이 아들을 키워서 목사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회고하면서 그 어머니의 신앙의 울타리가 아니었더라면 자기가 어떻게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아내로서 실패한 성도는 예수 사랑하기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자기 남편에게 바치지 못한 존경을 어머니로서 자녀들에게 받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아내인 당신이 남편을 위해 잔소리를 한 마지막은 언제인지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남편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 것은 마지막이 언제입니까? 그렇게도 남편을 꺾고 이겨서 발 아래 두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차라리 수백 년 전에 태어나 남편이 아니라 노예와 함께 살았으면 좋을 여자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우월하고 열등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서로 기능적인 질서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그리스도에게 하듯 피차 복종하며 살도록 맺어졌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불완전한 인간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여자 하나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미련한 남편인 나를 가엾이 여기고 은혜를 달라고 빕니다. 이 한 사람 남편 하나 기쁘게 하지 못하는 아내이면서도 많은 사람에게 큰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비용이 들지 않는 일입니다. 어차피 추상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남편을 사랑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죽는 아픔이 동반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받음으로 완성되어 가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완성되어 가는 것이니, 이게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자기를 완성해 가라고 하나님 혼자 살게 하지 않고 남편과 아내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죄를 무한히 용서해 주시는 은혜와 아무리 힘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남편과의 관계를 방치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만약에 사랑하고 있다면 죽을 때까지 이 사랑이 뜨겁게 타오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만약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리십시오. 우리는 지난 날 원수도 용서하며 살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우리의 가족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고 살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그렇게 할 수 있게끔 힘을 주었습니다. 그때 힘을 주신 하나님이 왜 지금은 힘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럼으로 남편을 데리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피차 복종하십시오. 남편을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아내 없이 홀로 흘리는 남편의 눈물은 발등에 떨어지는 칼날입니다. 왜 사랑해도 모자랄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을 그렇게 가슴 아프게 흘려보내고 남남처럼 죽어야 합니까? 그게 과연 그리스도인이 맺을 인생의 마지막 인격의 열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목자로서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한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무한히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주신 것처럼 그렇게 남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남편 안에 예수가 있습니다. 예수 말고 무엇이 그 속에 있겠습니까?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날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했던 기도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대부분 가족 때문이었습니다. 부모 때문에, 회심하지 않는 자식 때문에, 특별히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이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를 포기한 채 살아가십니까? 예수가 우리를 위해 왜 자기의 몸을 모두 내어주기까지 죽으셨습니까? 남편을 한 몸으로 여기고, 그를 위해 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은 살아 있습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남편을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네 가족을 돌아보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이 서신은 에베소교회를 목회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쓴 것입니다. 그는 당시 거짓 교사들에 의해 교회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같은 스승 바울은 이러한 디모데에게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목회적인 권면을 편지로 썼습니다. 바울은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교회가 어떻게 일꾼들을 세우고,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를 설파했습니다. 특히 가정과 교회 안에서 신자가 바른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당시는 고아와 과부들이 대표적인 사회의 약자였습니다. 전쟁과 질병 등을 통해 고아와 과부가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로마 시대의 사회적인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평균 연령이 25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돌봐야 할 불우한 이웃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7절에 의하면 교회에서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 경건의 표지로 교육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도 의탁할 데 없는 자기 가족들을 돌보지 않고 교회의 떠맡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저버린 패역한 행동이었습니다. 친족은 말할 것도 없고 진짜 피붙이인 가족까지도 이렇게 대하면서 뻔뻔스럽게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에게도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은 때로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가족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동의해 주지 않고, 전부 혹은 일부가 불신자인 경우에는 더더욱 고난이 많습니다. 신자의 가장 큰 고통은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은혜를 받기만 하면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은혜가 멀어지면 친족은 물론 가족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거의 고민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한 그 형편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족들의 영혼을 불쌍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가족 전도가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것보다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모든 삶을 노출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인정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족사랑의 모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아예 포기한 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가족을 돌아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II. 가족을 돌아보라
우리의 친족과 가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가족들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육신적인 환경과 영적인 처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에 생명이 넘쳐야 합니다. 능히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가족들의 영혼과 육신을 돌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면 자기에게 집중하게 되고, 주님의 사랑으로 넘치면 넘칠수록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A. 육신을 돌아봄
성경은 제일 먼저 육신을 돌아볼 것을 말합니다. 첫째로 가족들의 육신의 필요를 채워야 합니다. 가족들의 육신적인 필요가 무엇인지 살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힘써 도와주십시오. 단지 여러분의 부담을 떨치기 위해 전도해 버려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먼저 한 가족으로서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의 피할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보이는 자신의 부모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공경하지 못했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식구들과도 어울려 살지 못하던 사람이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서 남의 식구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거짓말입니다.
참된 구원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육체와 모든 삶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구원하는 포괄적인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많은 영혼을 위해 불쌍히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을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사소한 문제에 개입하셔서 화목하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가족과 이웃과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예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예수께서 어떻게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영혼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에게 눈물로 복음을 전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셨는지를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이만큼이라도 예수를 믿고 거미줄 같은 믿음이나마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 예수님의 이런 사랑 때문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위에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가족들의 영혼에 대한 경건한 안타까움을 더하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누군가가 대신 울어주어야 할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는 먼저 가족들과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상한 아버지, 이해할 수 없는 엄마, 이기적인 언니, 그리고 괴로움 밖에 줄 줄 모르는 형, 무슨 일이든지 폐를 끼치기만 하는 동생이 여러분의 가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집안이 그렇게 희망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을 먼저 예수 믿게 하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여러분 때문에 모든 가족이 살아나라고 여러분을 첫 열매로 삼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효자이고, 또 형과 언니에게 사랑받는 동생이고, 동생들에게 사랑을 받는 언니 오빠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가족들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가엾이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온전한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을 그의 영혼의 상태를 생각하고, 그 운명을 기억하며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사랑은 어쩌면 동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먼저 가족들과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화목은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한 화목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으로서 그 화목을 가족에게도 전하여 가족들도 함께 누리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신자에게 가정은 선교지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 묻지 마십시오. 가족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가족들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의 그 모습이 당신의 얼굴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향해 박수를 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노래를 해도, 가족들이 저 사람은 아니라고 하면 가족들의 대답이 진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전도의 길이 막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따라가는 존재이고, 누구나 제일 중요한 것이 자신의 행복입니다. 모든 가족들이 그러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 가족이 온전한 화목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은 가족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돌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써 주께 하듯이 가족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가족을 전도하기 위해 한 가지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하면 가족을 전도하는데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소한 것은 양보하고, 큰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평소에 너그러운 사람이 되십시오. 동생은 나에게 좀 야박하게 해도 형은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언니는 나에게 야박하게 해도, 예수 믿는 동생은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야박해도, 예수 믿는 부모는 자식에게 풍성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소한 것을 양보하는 것입니다. 기꺼이 양보하고, 조금 손해 보는 것을 손해로 여기지 않고, 영적인 투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 착하던 우리 형이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는 저렇게 단호할 때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착하고 모든 것을 양보하던 어린 딸이 예수 믿고 교회 가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해질 때 "아, 저 아이의 마음 속에는 우리에게 없는 무엇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부부가 인생의 벼랑 끝을 걷고 있었습니다. 평일이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두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사전에 약속도 없이 담임목사를 만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이 이단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의 교인이 아니면 안 만난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얼떨결에 만났습니다.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러저러한 인생의 어려운 벼랑 끝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본인이 다니던 교회를 가시지 왜 다른 교회에 들어오셔서 나에게 이 말을 합니까?" "부모님 다니는 교회는 나가다 말다 했는데 너무 멀고, 이 교회가 가까운데 교인들이 열심히 전도하고 좋은 소문이 있어서 염치를 무릅쓰고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무슨 상담할 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따뜻하게 격려해 주고, 우리 교회에 나오라는 말도 안 했습니다. "예수 잘 믿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시련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 타일렀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인생에 있어서 누구나 어려운 때가 옵니다. 그때는 누구든지 의지하고 싶습니다. 그때 불교 믿는 사람을 의지하면 불교 신자가 될 가능성이 많고, 무신론자 의존하면 무신론자 될 가능성이 많고, 예수 믿는 사람을 의지하면 예수 믿을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속으로 참 감사했습니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들은 말씀이 있기 때문에 동네 교회를 찾아오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 보면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때에 가까이 다가와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불쌍히 여겨 주는 것은 아주 놀랍게 그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을 양보하고 큰 것을 지키십시오. 아주 작은 이익을 가지고 동기간에 다투고, 가족들 간에 시비를 걸고, 얼굴을 붉히면, 그렇게 해서 복음이 전해질 리가 있겠습니까? 다니던 사람도 그만두지 않겠습니까? 모든 일에 관용하며 크게 참으십시오. 일체의 시련 속에서도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십시오. 가족들의 육적인 형편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사랑으로 바르게 도우십시오.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망은 가족관계를 깨뜨리는 가장 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은 자로서 지혜롭게 섬기십시오. 아주 어린아이들도 무언가를 주는 어른을 좋아하고, 인사의 각도도 달라집니다. 모든 사람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고, 여러분의 가족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가족들이 꼭 필요할 때 도우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육신의 필요가 무엇인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심정적으로 고통스럽지는 않은지 한번 살피십시오. 그리고 도움의 손길을 뻗치십시오. 형제는 나에게 이익으로 다가와도, 나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사랑으로 다가가십시오. 그러면 그들의 마음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들의 육신적인 필요를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영혼을 돌아봄
두 번째, 마지막으로 영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족들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십시오. 불행한 삶으로 나타나는 가족의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며,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병원에 가면 제일 먼저 물어봅니다.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허리가 아픕니다, 혹은 목이 아픕니다, 기침이 계속 납니다, 열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등등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의사가 진찰을 합니다. 청진기를 가지고 진찰하고, 숨을 들여 마셔 보십시오, 내쉬어 보십시오, 누우십시오, 그리고 왼쪽 오른쪽 배를 누르며 아프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손을 펴보고, 쥐어 보고, 특정 부위를 누르며 아프십니까, 평소와 같으십니까? 그것도 부족하면 기계를 이용해서 검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영혼이 망가진 증거는 결국은 그의 삶과 인격을 통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현명한 의사는 그런 남들이 관심 갖지 않는 육체의 행동이나 몸의 반응을 보고 그가 병이 어디에 걸렸는지를 판단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서 죽은 영혼으로 살아가면 신음소리가 나게 마련입니다.
최근에도 인기가 많고, 돈을 많이 벌었다는 배우들이 프로포폴 투약으로 다시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결국 삶이 돈이 있고 없음에 의해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우면 그런 약품을 의존해서 잠이라도 자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되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습관이 되어서 결국은 그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모두 영혼 속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입니다.
가족들의 방황하는 영혼과 소외받은 감정을 헤아리십시오. 그들을 분열시키지 말고 서로 화목하게 하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족들을 끌어안고 예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처럼 그렇게 하십시오. 가장 탁월한 가족 전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믿는 기쁨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보여주며 사는 것입니다. 처음 한두 번 볼 때는 그저 헛것을 보고 저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가장 탁월한 증거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로 인한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보여주십시오. 은혜를 많이 받으십시오. 어떤 형편에서도 가족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에게 지어주신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벗어 버리면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것이 힘들 때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의 지체들과 목회자들이 여러분을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받은 것을 돌려주는 마음으로 가족들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가족들에게 영혼의 필요에 민감하며, 형편을 살피고 섬기십시오. 그들이 필요할 때에 그 곁에 있어 주십시오.
고립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1인 가구가 엄청나게 많이 급증하고 있고, 인구는 줄어도 주택 수요는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작은 집들이 인기가 있고, 가격도 비쌉니다. 그런데 고립된 채로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집에 누군가 처음 발견하고 들어가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저분한 방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깨끗하게 치워놓고 목매어 죽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은데 드물다고 합니다. 고립사한 사람의 집은 들어가면서부터 지저분한 쓰레기들, 언제 먹었는지 모르는 컵라면, 이런 것들의 껍데기들이 나뒹군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울증 같은 것에 걸려서 더 이상 삶의 의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청소도 하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을 곱게 하고, 집안을 깨끗하게 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자매들은 마음에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삶의 의욕을 모두 잃어버리고 나면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기운이 남아 있다면 죽지 않을 것입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렇습니다.
그래서 들어가 보면 항상 책이 몇 권 꽂혀 있다고 합니다. 예외 없이 있는 책들이 위로에 관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고립되어 있으면서 얼마나 위로가 필요했으면 그런 책이라도 사서, "괜찮아. 너는 소중해. 너는 모든 게 잘 될 거야." 이런 내용의 책들을 읽으면서 스스로 자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랑은 자기위로가 아닙니다. 진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우리를 고립하게 하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그렇게 고립사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족들의 마음은 그제야 찢어집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말없이 혼자 죽었겠습니까? 얼마나 사랑을 받고 싶었으면 그런 책을 읽다가, 스스로를 사랑해 보려고 애쓰다가 좌절해서 세상을 등지겠습니까? 그때 누군가가 있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냥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고, 그가 울 때 조용히 어깨를 빌려주기만 했더라면, 그가 슬퍼하고 아파할 때 그냥 손만 꼭 잡아주고 함께 울어주었다면, 아마 안 죽었을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모든 사람에게 에워싸여서 행복하던 사람들 중에는 예수 믿은 사람이 없습니다. 저도, 설교자인 저도 이 세상에 나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고, 가족이 나와 무슨 인연의 끈이 있는지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때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모두 외로운 존재입니다. 사랑은 남의 외로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열렬한 유대주의자였습니다. 예수는 메시야일 수 없다는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변명할 수 없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났습니다. 이후로는 그 사랑에 감화되어서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사역에 복을 주셨습니다.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듣는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마음은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너무 괴로웠습니다. 왜냐하면, 무지한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배워왔던 불신 상태의 동족과 친척, 가족들 생각에 구령의 열정은 피가 맺히도록 한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라도 그들을 예수께 인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 3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더욱이 그 전도 대상자들이 우리 가족들이 아닙니까? 어느 날 담임목사실이 본관 2층에 있을 때였습니다. 교회를 새로 건축하기 전이었습니다. 주일날 웬 자매 두 명이 찾아왔습니다. 모르는 사람인데 교인이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쩐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 교회에 다니지 않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서울에 있는 큰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저희 아버님이 안양의 요양병원에 계신데, 이 교회에서 가셔서 복음을 전해주시면 안될까요?" 그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다니는 교회가 있는데 왜 당신과 상관이 없고, 부모님과도 상관이 없는 이 교회에 와서 복음을 전해 달라고 하냐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병들어 있는 아버지를 위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절대로 안 받아 드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괴로워서 자매가 기도하다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교구의 부목사님에게 우리 부모님이 이러니까 같이 가서 복음을 전해주시면 안되겠느냐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주 차갑게 "우리 사역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우리가 거기까지는 서비스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요양원과 가까운 교회 중에서 좀 알려진 교회를 찾아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서 복음을 전했고, 예수를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병실에 다니면서 새가족 양육을 해주고, 그 병실에서 세례를 드렸습니다. 하늘나라 가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족의 인연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모두 헤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나의 가족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이 세상에서뿐입니다. 마음의 허함을 느끼고, 어떤 절대자를 갈망해도, 불신자들에게 뱅뱅 둘러 에워싸여 있어서 절대로 복음을 접하지 못하다가 죽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족은 여러분이 다행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혜택을 좀 보아야 될 것 아닙니까?
어린 시절 저에게 신앙에 영향을 주었던 가족 중 한 분이 우리 큰 고모님이었습니다. 고모님이 세 분 다 돌아가셨는데, 저는 고모를 아줌마라고 불렀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셋째 아줌마는 공장이나 다녔기 때문에 공장 아줌마라고 불렀습니다. 둘째 아줌마는 돌아가신 김옥분 권사님인데, 그 때 유일하게 집안에서 대학을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학교 아줌마라고 불렀습니다. 큰 고모는 너무 교회를 열심히 다녀서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닌데 하나님 아줌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줌마, 하나님 아줌마, 그러면서 따라다녔습니다. 어렸을 때 할머니하고 고모 세 분과 같이 살았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큰 고모님이 나이가 많이 드셔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신학생이 되고 난 다음에 저한테 한번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에 절절히 다가왔습니다. "조카, 나는 마음에 천국에 갈 때까지 벗어 놓을 수 없는 짐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저 일곱 살 때에 돌아가셨습니다. 제 옆에서, 버스 안에서 돌아가시는 걸 봤습니다. 포대기에 싸서 서울로 올라오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고모가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당신한테는 아버지, 저에게는 할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주 생생한 꿈을 꾸셨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두루마리가 내려오더니, 그 두루마리가 주욱 펼쳐지면서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얘야, 사랑하는 딸아. 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네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거라. 편지를 쓰거라." 똑같은 꿈을 두 번 꾸고 깼다고 합니다. 그런데 먼 훗날 그러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할아버지는 예수 모르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아무도 전해 준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 고모가 연세가 드셨는데도 그렇게 후회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의심할 여지 없이 "너의 아버지가 곧 죽으니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때는 서울에서 할아버지 계신 곳까지 차를 타고 가면 비포장도로로 거의 9시간을 가야 되는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때 내가 가지는 못했더라도 마음을 모두 담아서 "아버지, 사랑해요. 하나님은 살아계셔요. 예수님이 아버지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어요. 예수 믿으세요." 물론 그 동네는 교회도 없었습니다. 교회를 가려면 거기서도 시외버스를 타고 한 15분 이상 가야지만 교회가 있는 때였고, 시외버스가 하루에 몇 차례 없던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그것도 다하지 못했다는 가책이 계속 들었고, 그래서 회개를 많이 했고, 죽어도 자기 마음에 못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이야기를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간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주님이 물으실 것입니다. "얘야, 너희 가족은 어디에 있니?" 만약에 그때 "하나님, 여기에 모두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여기에 다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참된 사랑도 오해될 수 있고, 때로는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한 사람은 언제나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속박받고 가책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요일 3:18-19)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들의 단점과 결점을 쉽게 얘기해서 가족들을 분열시키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더 많은 사랑을 이미 받지 않았습니까? 그 사랑을 베풀도록 불러 주시지 않았습니까? 담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렇게 가족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건져 주시리라고 믿으십시오.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을 꿈꾸십시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날의 불행했던 상처는 잊으려고 노력하십시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충만히 받으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가족을 사랑하십시오.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는 하고 계십니까?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서 마지막 성경책이 눈물에 젖도록 울어본 적이 언제입니까? 유창하게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하나님 믿지 않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해본 때가 언제였습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을 저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부모님이 아니라 할머니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참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녔는데도 할머니는 예수 안 믿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는 것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가끔 예수 믿는 사람 흉을 보기는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상한 사람들이 교회에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 리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세요. 할머니, 교회에 오세요." 수없이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교회에 오시는 날은 손주가 보고 싶은 날입니다. 그날에나 오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제가 너무 안타까워서 많이 기도했습니다. 늘 기도했지만,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할머니가 찾아오셨길래 할머니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때도 무언가를 많이 가지고 오셨습니다. 제가 손을 꼭 잡고 둘이 있을 때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 나 사랑하지?" "그럼, 내가 너를 사랑하지." "그런데 제 소원이 있어요." "그게 머니? 나 돈은 없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다 들어주지." "저는 할머니가 예수 믿지 않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파요." "예수 믿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다가 천국 가세요." 할머니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잠시 생각하시더니, "그래? 그러면 내가 오늘부터 예수를 믿으마." "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손자가 그게 소원이라는데, 내가 돈은 없지만 그걸 못하겠니?" 그리고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일이 있지 않으신 한 꼬박꼬박 매 주일 교회를 나오셨고, 헌금도 꼬박꼬박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나쁜 사람입니다. 자식이 아니라, 가족이 아니라 딴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시리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아파하는 영혼은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족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를 위해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자기의 영혼을 위해 울지 못하는 우리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대신 울어 줍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함께 손잡고 주님의 교회에 나오는 날을 꿈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