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가족
2023년
주일오전예배
설교기간 | 2023년 05월 07일 – 06월 11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3년 06월 22일
목 차
1. 너의 자녀를 낙심케 말라(골 3:21) 2023.05.07. 주일오전예배 6
2. 네 부모를 공경하라(엡 6:2-3) 2023.05.21. 주일오전예배 12
3.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골 3:19) 2023.05.28. 주일오전예배 18
4.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엡 5:24-33) 2023.06.04. 주일오전예배 26
5. 네 형제를 이렇게 대하라(창 33:1-4) 2023.06.11. 주일오전예배 34
<설교 프레임>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가족1 2023. 5. 7. 주일낮 예배
< 너의 자녀를 낙심케 말라 >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I. 본문해설
골로새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책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가운데 우주론적 기독론을 서술하였다.
그리고는 현실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데, 그것이 가족 관계에 대한 것이다.
부부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고 나서 자녀와의 관계에 대해 가르친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II. 너의 자녀를 낙심케 말라
자녀에게 잘 해 주라는 얘기보다 상처를 주지 말라는 것부터 말한다.
그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때 아이들이 낙심하기 때문이다. 이는 열정의 사라짐(ἀθυμέω)을 뜻한다.
A. 과도한 기대
B. 지나친 징계
C. 그릇된 모본
D. 무관심과 방치
*자녀 교육에 대한 회심
III. 적용과 결론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가족2 2023. 5. 21. 주일낮 예배
< 네 부모를 공경하라 >
“네 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I. 본문해설
이 편지 또한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네 개의 서신서(엡, 빌, 골, 몬) 가운데 하나다.
그는 에베소에서 핍박받으며 신앙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이 편지를 썼다.
그는 우주적인 교회론과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장엄한 경륜을 가르친 후에 실제적인 삶을 교훈하였다.
그 교훈 끝부분에 와서 가정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다. 아내와 남편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고, 이어서 부모와 자녀,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대해 가르친다.
“네 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II.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오늘 성경은 자녀들에게 두 가지를 명령한다. “순종하라”와 공경하라“이다.
여기서 “공경하라”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두려움과 사랑으로 받들다”라는 의미다.
그런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 약 1,500년 동안 지켜온 구약의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네 부모를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A. 네 부모를 용서하라
*아버지 용서의 회심
B. 네 부모를 사랑하라
*새벽 꿈에 본 아버지
III. 적용과 결론
가족 사리도록 그리운 가족3 2023. 5. 28 주일 낮 예배
<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 >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I. 본문해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편지로서, 당시 골로새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이단적 가르침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유대교와 민간 신앙을 융합한 거짓된 가르침이었다.
이런 이단은 교회 안에서 영향을 끼쳐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미신적 방식으로 율법(律法)을 지키게 하였다.
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 위에 탁월하신 우주의 통치자(統治者)시며 신자들과 생명적 연합을 이루신 분임을 가르친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할지 가르치신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함께 살아야 할지를 말한다.
II.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
남편(男便)에게 강조하는 덕목은 아내를 사랑(love)하고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기에 명령하는 것이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A. 사랑하라
첫째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하며”(ἀγαπᾶτε)는 아가페, 곧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뜻이다.
당시 로마사회는 가정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통치자들은 견실한 가정(家庭)이 안정된 제국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믿었다.
당시 사회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지배하던 사회로서 모든 제도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성들은 힘과 권력, 사회적 권위로 가정을 통제했다. 아내의 역할(役割)은 남편에게 복속된 채, 자기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공공장소에서의 여성의 발언은 남편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그렇게 대우(待遇) 받던 아내를 아가페(agape)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에는 “되는 사랑”과 “하는 사랑”이 있다. 연애시절과 결혼생활을 비교해 보라. 저절로 끌리는 사랑(love)의 때가 있다.
결혼한 지 10년, 15년이 지났는데도 남편 목소리를 들으면 설렌다는 아내들이 아주 가끔 있지만, 남편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별로 없다.
신경과학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感情)을 물리적 원인에서 찾는다. 처음 사랑에 빠질 때에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페닐에틸아민 등 화학물질의 작용으로 격렬한 연정(戀情)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이것들은 바소프레신, 옥시토신, 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의 작용으로 바뀌면서 서로가 안정적(安定的)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혼 후 권태기를 겪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새로운 소통의 끈이 생긴다.
새로운 삶의 상황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면서 부부는 끈끈한 가족애(家族愛)로 뭉쳐지는 것이다.
당시 불신자들은 아내를 억압하고 지배했지만 신자인 수신자들은 신자인 남편(男便)으로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사랑은 인간의 육정(肉情)에서 난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사랑으로 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아내를 향한 남편의 이런 사랑은 인류 최초의 결혼식에서 아내에게 바친 남편의 고백(告白)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이것은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다. 이 사랑 안에서 남편은 아내를 자기(自己)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었으니 모든 인류를 그렇게 사랑하여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첫 인류의 범죄로 그 사랑은 파탄에 이르렀고 남편에게 아내는 존재 자체로써 고통(苦痛)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창 3:12).
아담과 하와가 서로 싸운 것이 아니다. 각자가 하나님께 범죄하자 부부(夫婦) 사이의 사랑은 끊어졌다.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아가페, 곧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할 당시 고백(告白)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여성에 대한 폭력적 성차별의 잔혹한 역사는 이러한 비극의 결과였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성도라고 할지라도 남편(男便)이 아내를 사랑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쉬웠다면 명령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아내를 아가페(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필요하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사람의 사랑으로써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결혼(結婚)을 통해 아내를 주신 것은 배우자를 자기 이익을 위해 도구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불행(不幸)하게 하면서 자기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불완전한 아내를 만나게 하신 것은, 그녀를 사랑하는 과정(過程)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내의 부족(不足)한 점과 인격적 흠을 발견할 때마다 거기서 그녀의 남편으로서의 소명(召命)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아내의 부족한 것을 남편으로서 보충함으로 그녀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게 하심이다. 그리하여 행복을 누리게 하신다.
또한 남편은 그런 아내를 사랑하려고 애를 쓰면서 자신도 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B. 괴롭게 하지 말라
둘째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아내를 존중(尊重)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거나, 이런저런 불만과 트집으로 잡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은 자기 영혼(靈魂)을 죽이는 것이다.
성경은 남편이 그렇게 살면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交際)가 막힌다고 경고한다. 기도의 문이 막히게 된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모본(模本)을 보지 못하고 자라온 경우에 스스로 배워나가는 과정은 많은 고통(苦痛)을 요구한다.
더욱이 그런 남편이 가정을 이루기 위한 도리를 배우지 못한 아내와 함께 살며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부족한 아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친딸이다.
이 세상에서 누군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남편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은혜(恩惠)가 필요하다.
은혜는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깨어진 관계(關係)를 회복하고 지속할 수 없던 관계를 이어가게 만들어 준다.
이런 사랑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솟아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에 은혜(恩惠)를 받아야 한다. 무지에서 깨어나고 완악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야 한다.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은 없다. 또 언제까지나 그런 사랑을 받는 것으로 행복(幸福)해지지 않는다.
그릇된 자기 사랑이 깨어지고 자기 안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가 온전히 사시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근원(根源)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랑(love)하는 과정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아내와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III. 적용과 결론
자기가 좋을 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 관계(關係)에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신앙(信仰)은 사랑을 위해 있다. 믿음은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이며 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만큼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다. 은혜를 받으라. 아내를 용납(容納)하고 사랑할 힘을 얻으라.
가슴 사리도록 그리운 가족4 2023. 6. 4 주일 낮 예배
<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 >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 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24-33)
I. 본문해설
바울이 로마에 수감되었을 때 쓴 편지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교훈하고자 했다.
이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과 교회에 관한 가르침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분열하지 않도록,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한 몸이 된 것을 가르쳤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 경륜의 성취를 위한 종자(種子)씨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전(vision)을 가지고 아내와 남편이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다.
II.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
이 서신은 에베소교회의 경건한 성도(聖徒)들을 위해 쓴 것이다. 결혼에 있어서 성도인 아내와 남편의 도리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A. 남편에게 복종함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는 복종(服從)이다. 본문은 두 사실을 강조한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head)라는 것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엡 5:22, 24).
이러한 사실에 쐐기를 박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에서 많은 남편(男便)들은 우월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은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됨에 비유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지극히 제한적이어야 한다. 그 비유를 함부로 남용하여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a. 첫째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은 존재(存在)의 원천이 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다.
b. 둘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人格)이지만 남편은 그 렇지 않다. 이것은 기능적인 질서다.
c. 셋째로, 그것은 보다 상위에 있는 질서(秩序)를 이루기 위한 것이 다. 그 권위는 남자이기 때문에 갖는 것이 아니다. 가정보다 더 높은 우주적인 질서를 이루기 위함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0-11)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성경의 구절을 마치 남편에게는 아내를 지배하고 그녀 위에 군림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원받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기쁨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 구원(救援)의 첫 열매인 사회가 곧 교회이며, 신자의 가정(家庭)은 교회의 일부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0-21)
“복종할지니라”(ὑποτάσσεται)에서 이 단어는 원어적으로 “∼아래에 두다, ∼뒤에 두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이 말은 노예적(奴隸的) 복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피차 복종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것은 가정의 질서다. 그 사랑의 질서로써 창조 시의 두 명령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세상을 가꾸게 하시기 위함이다(창 2:17, 1:28).
그러므로 사랑으로 피차 말씀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복된 가정의 질서를 이루라.
B. 남편을 존경함
이처럼 아내와 남편의 도리를 가르쳐 주신 것은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경륜(經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形狀)을 본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가정은 그런 훈련을 받는 현장이다.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고 아끼며,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라고 가르친다.
“…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下)
‘존경하라’는 것은 함부로 대하거나 하대(下待)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삼가는 마음으로 존중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뜻이다.
결국 이 질서는 사랑(love)이라는 내용물을 지키기 위한 껍질과 같다.
하나님은 결코 남편에게 아내를 지배하고 억압할 권리를 주시지 않았다.
또한 아내에게 남편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권한도 결코 주시지 않았다.
*Matthew Henry와 “갈비뼈”
아내는 그리스도의 경륜을 이루는 가정이 되는데 이바지하는 한도 안에서 남편을 존경할 의무가 있으니, 이는 남편도 마찬가지다.
피차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대하고 존중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첫 인류(人類)를 창조하실 때에 잘 나타났다. 한 몸으로 두 사람을 만드셨다. 이는 사랑의 사회를 만드시고자 하는 뜻을 보여준다.
한 몸에서 두 사람을 만드심은 서로를 자신의 일부로 여겨 자기를 사랑하듯이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창 2:23-24).
인류를 창조하심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한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 안에서 아내와 남편은 서로 인격적(人格的)으로 연합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질서(秩序)를 따라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여야 한다.
아내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자기 남편의 부족함을 아내로 부름받은 소명(召命)의 이유라고 여기게 한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으로 서로를 온전하게 하며 자기 자신도 완성되어 가는 것이 결혼 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사랑의 과정을 통하여 서로 완전해져 가는 것만큼 자기도 하나님 안에서 행복(幸福)을 누리게 된다.
또한 가정을 통해서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족을 어떻게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교회에서 배우며 살게 하신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이기심(利己心)을 가진 인간에게는 이런 사랑이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기적인 자기사랑을 이기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자들에게 진리(眞理)로 사랑의 길을 가르치시고 성령(聖靈)으로 사랑할 힘을 주신다.
한 인간의 자아(自我)의 완성은 소유나 지위, 업적이 아니라 자립적 주체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데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이니 그렇게 사람이 된 것만큼 서로 사랑하게 된다.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라.
가슴 사리도록 그리운 가족5_끝 2023. 6. 11 주일 낮 예배
< 네 형제를 이렇게 대하라 >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창 33:1-4)
I. 본문해설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어머니와 함께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속이고 형(兄) 에서가 받아야 할 축복을 훔쳤다.
이 때문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이별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도망가야 했다.
거기서 외삼촌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버지와 형에게 했듯이 속임을 당했다. 그래서 제대로 보수도 받지 못한 채 20년 동안 젊음을 바쳐 종처럼 봉사해야 했다(창 31:38).
그는 빈털터리가 될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福)을 주셔서 큰 재물을 얻게 하셨다.
야곱은 식솔(食率)들과 가축을 이끌고 도망하였다. 외삼촌과 그 형제들은 원한을 품고 그를 추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아 주셔서 극적으로 화를 면하게 하셨다(창 31:43-44).
그러나 야곱에게 가장 큰 일생의 숙제가 있었다. 그것은 장자의 복을 빼앗긴 원한을 품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었다.
II. 네 형제와 화해하라
A. 얍복강에서 입맞춤
아버지로부터 받을 장자의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긴 에서는 긴 세월 동안 원한을 품고 복수(復讐)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 27:41)
이 위기는 이제껏 넘어온 인생의 다른 고비들과는 달랐다. 이것은 도저히 자기의 힘으로 해결(解決)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 사자(使者)들을 보냈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창 32:6)
20여 년 만에 만나는 동생이 반가웠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400여명의 장졸(將卒)들을 거느리고 오고 있겠는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야곱의 집안과의 전쟁(戰爭)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야곱은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분부, 곧 “전에 네 고향 네 족속에게 돌아가라”고 하신 말씀대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형 에서의 보복의 위협에서 건져주시길 간구하였다(창 32:9-11).
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매달렸다(창 32:12). 이는 이미 이전에 벧엘에서 받은 말씀이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야곱은 하나님께 구원(救援)을 간구하면서 이미 자기에게 주셨던 약속(約束)에 호소하였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 32:12)
거기서 야곱은 모든 식솔들과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어 강(江)을 건너가게 하였다(창 32:7,22). 그리고 형(兄)에게 보낼 예물(禮物)로 짐승들의 떼를 먼저 강 건너편으로 보냈다.
이후에 사랑하는 아내들과 열한 아들까지 얍복강 나루를 건너게 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야곱은 홀로 남았다(창 32:22-23).
그는 말할 수 없는 커다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을 것이다.
홀로 남은 밤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야곱은 자기를 찾아온 천사와 씨름하였다.
힘으로 야곱을 이기지 못한 천사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쳤고 위골(違骨)되었다(창 32:24-25). 이때 야곱은 울며 매달렸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은 믿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껏 자기가 살아오던 인간적인 방식을 고집한 것이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그러나 천사에게 맞아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면서, 야곱은 온 몸과 허리의 힘을 잃어 버렸다. 그러자 야곱은 울며 회개(悔改)하였다. 그것은 은혜(恩惠)의 역사였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4-5)
하나님께서 형(兄) 에서와 화해하게 하시려고, 야곱을 만나주셨다. 먼저 그의 교만을 꺾으시고 깊이 회개하게 하셨다. 그 간구로 에서의 마음을 변화시키셨다. 형에게 용서를 빌게 하셨다.
깨어진 형제 관계를 회복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이 사랑하게 하신다.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和睦)한 관계를 회복하라.
하나님 앞에 화목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라. 회개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恩惠)를 구하라.
B. 형제 관계를 생각함
1. 겸비한 마음을 가짐
하나님은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기 전에, 먼저 그를 깊이 겸비(謙卑)해지게 하셨다.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자기의 무력(無力)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셨다. 먼저 영적으로 쇄신시키셨다.
사람을 보고 사랑하지 말라. 사랑할 수 있으면 자기의(自己義)에 빠지고, 사랑하지 못 하면 상대방을 원망(怨望)하게 된다.
먼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罪人)인지를 깨달으라. 하나님 앞에서 받은 사랑을 생각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깨달으라.
그리하면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게 될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2. 십자가를 생각하라
힘으로는 천사도 이길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육신의 꾀와 힘이 아니라 회개(悔改)의 눈물이었다(호 12:4).
천사가 야곱을 긍휼히 여겨 그의 이름을 물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며 당신을 의지(依支)하는 마음을 보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히 복(福)을 주시려는 뜻에서 물으신 것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7-28)
여기서 “이스라엘”이라고 한 단어는 “하나님과 겨뤄 이겼다”는 뜻이다.
이것은 육체의 완력으로써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로써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게 된 것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신자(信者)임에도 형제와 반목하며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직도 형제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 깨어졌다. 그랬더니 자기를 미워하던 형과 기적적으로 화해(和解)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3:4)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변화되자 하나님은 복수심에 불타던 에서의 마음을 녹이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신 것이다.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아우를 보며 미움이 변하여 긍휼이 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창 27:41) 다짐하던 마음이 변하여 야곱을 끌어안고 입 맞추며 함께 울게 하셨다.
운명(運命) 같은 미움은 없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앞에서 깨어지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신다.
다시 화목(和睦)을 회복하여 살게 하신다.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라.
III. 적용과 결론
연로한 부모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자기 앞에서 자녀들이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이제껏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자. 형제와 다시 화목하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 1 (2023.3.26._주일오전)
1. 너의 자녀를 낙심케 말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가족 1(2023.05.07._주일오전)
골로새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책입니다. 어쩌면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 기다리는 가운데 아주 깊이 있는 우주론적인 그리스도론을 서술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가족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부부관계, 부모와의 관계를 다루고 나서 자녀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 3:21)
II. 너의 자녀를 낙심케 말라
바울은 자녀에게 잘해주라는 이야기보다는 상처를 주지 말라는 이야기부터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노여우면 아이들이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부모의 어떤 점 때문에 아이들은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까?
A. 과도한 기대
우선 제일 먼저 과도한 기대입니다. 혹은 아이에게 적합하지 않은 기대를 함으로써 아이를 강요하게 되고 이로써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에게는 공통된 착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희망이 투영된 것입니다. 내 아이는 남의 아이보다 매우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타날 때 부모는 갈등도 하게 되고 때로는 자식에게 실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똑같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똑같은 방면에서 1등이 되도록 만드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의 얼굴이 탤런트 뺨치는 얼굴이 될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입니다. 그런 사람은 수십만 명 중에 한두 명입니다. 우리 모두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듯이 정신적으로나 혹은 기술에 있어서나 예술이나 운동에 있어서나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탁월하게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잘하고, 저 사람은 저것을 못하고, 또 그 사람은 이것보다는 저것을 더 잘하고 등등 사람이 나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식에 대해서 과도한 기대를 갖습니다. 그 과도한 기대라는 것이 아이가 정말 몇십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거 아닙니다. 대부분의 관심사가 어떻게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이 아이가 이겨 밥벌이를 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를 잘해야 하고,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야 하고 등등 그 일을 위해서 이런저런 공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부모들의 마음이 다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식을 향한 과도한 기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부모가 정말 열심히 밀어줘서 옛날이니까 지금보다 훨씬 사법고시를 통과하기 어려운 때에 그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첫 달 월급이 평범한 사람의 연봉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는 결국 한 3년 뒤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무엇을 해서 밥을 벌어 먹고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인간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인간의 삶이 있고 나서 그 위에 직업도 있고 재능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 인간으로 어떻게 자유로운 주체성을 가지고 살 것이냐 하는 것은 학교 선생님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전적으로 부모의 몫입니다.
춘천 쪽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부유한 집 안에 외동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굴도 아주 예쁘고 공부 머리도 비상해서 항상 전교에서 일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이 아이를 의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공부도 비상하게 잘하는데 그림 그리는 것과 시를 쓰는 것 그리고 소설 같은 걸 읽는 것을 좋아하는 감성적인 문학소녀였습니다. 엄마는 더 뛰어나게 공부에 집중해서 의대에 가기를 바랐는데 이 아이는 전교 1등을 하면서도 수시로 틈틈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문학 작품 읽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엄마는 그게 못마땅했습니다. 여기에서 전교 1등 가지고는 안 되고 더 잘해서 최고 대학의 의대로 진학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딸과의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딸 방에 들어가서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비롯해서 이젤들을 모두 끌어내고 발로 밟아서 부숴버렸습니다. 여기저기 써놓은 시집 노트 같은 것들을 모두 뺏어서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주 후에 딸이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보니까 아이가 자기 방에서 목을 달아서 자살했습니다. 그때 이 어머니가 깊이 깨닫고 뉘우쳤지만 이미 차가운 시체가 된 딸을 돌이킬 순 없었습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감추어 두었던 것들을 다 찾아내고 자기가 빼앗았던 것들을 모두 추려서 남아있는 작품으로 시화전을 열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와서 보고 너무 아깝다고 했습니다. 그 어린 16살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이니까 잘 키웠더라면 아주 훌륭한 화가 그리고 뛰어난 시인이 될 수 있었다고 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그렇게 키우셔서는 안 됩니다. 잔소리 많이 하십니까? 공부를 조금 더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참된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마음을 쓰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회심했습니까? 자녀 영혼의 회심에 대한 관심은 아이의 학업에 대한 관심보다 여러분에게 더 중요한 것이 되고 있습니까? 그 아이의 학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 더 많이 눈물 흘리는 부모들입니까?
B. 지나친 징계
두 번째는 지나친 징계입니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당연히 야단을 치고 잘하면 적극적으로 칭찬해서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아이에게 자각하게 해주는 것은 교육의 매우 중요한 기능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실 때 기대하셨던 것처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 이것은 성경을 가지고 부모가 해야 할 중요한 교육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를 징계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 아파서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나서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혈기로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소화되지 않은 채 가슴에 가서 꽂히는 화살이 되고 이것은 징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했으면 그 잘못한 것에 합당한 야단을 맞되 최대한 혈기가 없는 상태에서 아이의 영혼과 인생에 대한 진지한 염려 때문에 아이를 타이르는 징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징계를 많이 해서 아이가 바르게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지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부모들은 자식들을 강하게 키운다고 아이들에게 자기가 살아온 인생철학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많은 고난을 이기며 살도록 교육하기도 합니다. 혹은 자기가 살아온 경험에 의존하여 아이에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지고 나면 여러분이 그 아이들을 시집 장가보내고 나면 아이들이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요양원에 가서 산소호흡기를 차고 있어도 보호자를 병원에서 부르지 않는 한 그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를 원하십니까? 그렇게 인격적인 관계를 파괴하기까지 아이들에게 혈기를 부리고 징계를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이 아이를 이렇게 대하면 30년 후 내가 기운이 없고 다 늙었을 때 그래도 이 아이들이 늙어가는 나를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고 어디선가 지치고 피곤할 때 엄마·아빠라고 부르며 마음에 눈물이 흐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관을 주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C. 그릇된 모본
세 번째는 그릇된 모본입니다. 폭력 가정이 문제입니다. 어렸을 때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제가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심지어는 다리미를 얼굴에다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그 아들은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폭력이 그렇게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한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권력이 없으니까 아버지 엄마가 뭐라고 폭력을 해도 아이들은 약자입니다.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장을 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점점 권력이 없어집니다. 아이들이 권력을 갖게 됩니다. 그때 그 상처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어서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물리적인 폭력도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만 더 큰 폭력은 부모의 그릇된 모본입니다. 어렸을 땐 아이들이 부모의 얼굴 앞에서 입을 보고 배웁니다. 말을 들으며 배웁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고 판단력이 생길수록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앞에서 가르쳤던 것과 뒤로 보여주는 모습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자녀들에게는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불경건한 엄마 그리고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아빠, 세속적인 부모, 이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갈까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나가서 전도해보면 가장 전도가 안 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예 안 믿었던 사람들은 전도가 쉽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신앙에 실망을 시켜서 교회를 끊은 식구들은 전도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가족들의 그릇된 모본을 통해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거를 보여주는 부모님들이 되셔야 합니다.
D. 무관심과 방치
마지막 네 번째는 무관심과 방치입니다. 부모들이 각기 자기 일에 바빠서 자식에 대해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시간이 없어서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연애할 때 보면 아무리 바빠도 다 만납니다. 그리고 바빠서 못 만나는 것은 사실 바빠서 못 만나는 게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에 못 만나고, 못 만나면 인연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아이에게 무관심한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관심은 미움보다도 더 심각한 잘못입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상처는 부모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옹알이할 때 엄마가 중병에 걸려서 말을 할 수 없거나 아니면 엄마가 세상에 없거나 해서 아이들의 옹알이를 받아주지 않으면 아이의 언어 발달에 심각한 지장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리고 표현력에도 심각한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관심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어린아이 시절에는 엄마가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아빠가 들어오고 이후에 형제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 가족들의 어깨 너머로 세계를 배우는 것이 아이들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이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방치해 둡니다. 이 방치는 최근에 나오는 것처럼 갓난아이에게 젖을 안 주어서 굶어 죽었다거나 혹은 차에 두고 가서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을 추다 와보니까 아이가 죽었더라는 그런 식의 방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관심 밖이어서 그냥 자기 마음대로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의 마음에 큰 실망과 상처를 줍니다. 그 고단한 인생길에서 인생이 무엇이고, 나는 누구이고, 세계는 어떤 것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한참 고민하고 가슴앓이할 때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아이들이 던져질 때 그 아이의 어린 시절은 옷을 홀딱 벗은 채 가시넝쿨 속에 들어가 기어서 그 넝쿨을 헤쳐 나오는 것 같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렇게 저처럼 주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지 않는 많은 사람에게는 일평생 자신의 성품에 발목을 잡는 족쇄로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고 6년 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7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것도 성탄절 전날 성가 연습을 하는 시간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서 너무 총명했습니다.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다 깨치고 누나 형들이 읽는 책들을 한없이 좋아하면서 책 속에 빠져서 지냈습니다. 얼굴도 너무 예쁘고 유치원에 가서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범한 애가 태어났구나!' 내가 차마 밟아보지 못한 미답(未踏)의 땅을 밟아볼 인물이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기대도 엄청 가졌습니다. 사랑했다기보다도 그럴 가능성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리고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나이가 먹어갔습니다. 그런데 1학년 학교 들어가던 바로 그 무렵에 제가 교수로 있다가 아마 한 2학년 때쯤 돼서 개척했을 것입니다. 30년 전이고 아들이 서른여덟이니까 한 여덟 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개척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교수 생활하랴, 그다음에 학생들 가르치랴, 집회 다니랴, 그때도 글을 쓰랴, 또 그때도 공부 좋아했으니까 공부해야죠, 또 새벽 기도부터 설교를 하는데, 구두끈을 매다가 토할 것 같아서 신발장 앞에 주저앉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시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빠 엄마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습니다.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무관심에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식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될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너무 바쁘고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2학년 3학년 4학년 되면서 아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성품이 좀 변했습니다. 게을렀습니다.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고 많이 먹었습니다. 책은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학교 성적은 처음에는 받아오는 시험지마다 100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런 인물이 났구나.’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적도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정돈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그 공간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양말은 책상 위에 책은 여기저기 던져지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습니다. 몇 번을 야단쳐도 말을 안 들었습니다. 급기야 제가 한 일 년에 한 차례 정도씩은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어떤 때는 며칠이 지나도 멍이 들 정도로 그렇게 짝짝 때렸습니다. 나는 그것을 '초달(楚撻)을 차마 하지 못하면 아이가 망하느니라' 그 교훈을 실천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 시간이 흘러가고 나니까 아이와의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아빠를 슬슬 피했습니다. 그리고 아빠가 집회 가서 오늘은 주무시고 온다고 하면 아이가 '야호' 하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방에서 집회를 마치고 올라오는데 신호 대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갑자기 하나님의 이런 음성이 마음에 들렸습니다. “얘야, 너도 내 아들이고 네 아들도 네 아들인데 아버지인 네가 네 아들을 대하는 것은 아버지인 내가 너를 다루는 것과 왜 그렇게 다르니?”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어떤 큰 창이 날아와서 제 갈비뼈를 뚫고 심장에 꽂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차를 한적한 곳으로 피해 길가에 세우고 운전대를 붙잡은 채 몇십 분을 통곡했습니다. 통곡할 때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으면서 살았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때는 불신자로서 무신론자로 하나님을 지독하게 모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고, 구원해 주신 이후에도 가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형편없이 살아온 인간성 덜 갖추어진 나를 어떻게 섬세하게 다뤄오셨는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가 내 아들에게 어떻게 했는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면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빤데 그 아빠를 의지하고 교제할 수 없어서 외로워하고, 아빠를 두려워하면서 자신감을 잃어버린 채 얼굴을 피해야 하는 아이의 어두운 마음이 제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심장을 칼로 다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너무너무 아파서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울었습니다. 그게 제가 자녀 교육에 대해서 처음 회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얼마 있다가 아이에게 둘이 있을 때 "그동안 아빠가 너한테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 너무 많이 야단쳐서 미안해." 울기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아이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데려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옷을 사준 일이었습니다. 모자부터 시작해서 신발까지 (사주었습니다.) 그렇게 입혀 놓으니까 그날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사실은 아빠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속으로 많이 사랑하나 봐."
저는 그 후로 그 아이의 성적 때문에 혹은 정리 정돈이 안 됐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인가 그때 이후로 대학 졸업할 때까지 성적을 보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내 마음에 그 회심이 있고 난 후에 떠오른 생각은 오직 두 가지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아들이 그리워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무엇을 하고 살든지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는 아이가 되면 저는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겠습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도 나중에 나한테 고백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 아빠는 내가 무얼 하든지 하나님만 최고로 사랑하면 기뻐하실 아버지다.' 좋은 대학은 못 들어갔지만 공부 잘합니다. 박사 과정 끝나가고 있습니다. 너무 잘합니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아들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아빠 저는 다 잊어버렸어요." 그런데 저는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아들을 그렇게 때렸던 저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들은 아파하지 않아도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 기억은 나를 아프게 할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여러분은 결코 그런 부모들이 되지 마십시오.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고 훨훨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탁월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때까지 사랑으로 양육하는 부모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가족 2(2023.05.21._주일오전)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네 개의 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골로새서·빌레몬서, 네 권 중 하나입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핍박받으며 믿음을 지키려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모든 편지에서 그러하듯이 그는 먼저 우주적인 교회론과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장엄한 경륜을 가르친 후에 실제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 교훈의 끝부분에 와서 가정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도리, 이어서 부모와 자녀의 도리를 가르친 후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대해 가르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엡 6:2),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 여기에서 이 계명이라는 것은 십계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에 새겨졌고,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었습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를 새기신 후 사람에 대한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이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입니다. 5계명은 첫 번째 계명으로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모든 십계명에는 준수하게끔 계명만 주어지지, 그 계명 자체 속에 약속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모 공경의 계명에는 네가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까지 곁들여 주십니다. 그러니 부모 공경이 얼마나 어렵고 또한 인류 번영에 있어서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저는 성경을 거꾸로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 뒤집으면 '네 부모를 공경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너는 이 땅에서 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젊어서 요절하리라.' 이런 성경 구절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전쟁과 기근, 질병으로 한 치 앞의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계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이 약속은 그들의 가슴에 훨씬 더 크게 다가오는 축복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II.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래서 오늘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자녀들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는데, ‘순종하라’와 ‘공경하라’입니다. 여기에서 ‘공경하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구절입니다. ‘공경한다’는 것은 두려움과 사랑으로 받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 글을 쓰기 약 1500년 전부터 지켜온 구약의 십계명 중 하나를 인용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이처럼 이미 십계명에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후 시내산에서 이 계명을 받았을 때, 그때의 이스라엘은 여전히 옛 언약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1500년의 세월이 흐르고 구속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새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각 사람의 마음에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은 바뀌지 아니하였으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 계명은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북두칠성이 빛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도덕률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계명은 영원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인류의 행복과 평화가 달려 있는 계명이기 때문에 이 계명을 떠나서 사는 데 인간의 모든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십계명 속에 나오는 모든 열 개의 계명이 그러하듯이 부모 공경이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가지고 부모를 사랑함으로써만 공경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많은 아픈 기억들과 상처가 부모를 공경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고 말할 때 멈칫거리지 않고 '우리 부모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신 어머니,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던 아버지,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우며 도덕적이고 신앙적이어서 경건에 있어서나 생활의 능력에 있어서나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모본을 보여주신 성인 같은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더 많이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의 너무나 놀라운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부모를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고 경건하지 않으며,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신 적이 없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신 적이 없는 그런 상처투성이의 부모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중 많이 있는 것입니다.
A. 네 부모를 용서하라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는 화해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먼저 부모와 화해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려가는 사랑은 흐르는 물처럼 쉽습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사랑은 물이 계곡을 거꾸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본성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별로 가르칠 것이 없어도 부모 사랑은 자신의 천성을 때로는 거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먼저 공경하기 전 부모와 화해할 수 있어야 하고, 화해하기 위해서는 부모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용서는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솔직 담백하게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를 끌어안는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 부모와 자식의 상처입니다. 관점이 너무나 다르고, 의도와 생각, 해석과 본심이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에 좀처럼 일치를 이루어 볼 수가 없고, 마음을 터놓고 과거의 상처를 화해하고자 대화를 시도했다가 오히려 낭패당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그저 우리를 사랑하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던 것처럼 그렇게 부모를 먼저 용서하고 부모와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오늘 불신자에게 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십자가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성도인 여러분을 향하여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또 존경할 만한 부모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고아와 같았던 우리들을 주님께서 당신의 따뜻한 품으로 부르실 때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는 사랑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 처음 사랑의 때, 주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강물같이 흘렀습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도 함께 잊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동안 받지 못했던 부모로부터의 사랑을 가득 채워 이 땅에 아버지께로부터 받지 못했던 사랑을, 어머니께로부터 받지 못했던 긍휼을,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받도록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부모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부모는 진심으로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기에 여러분은 부모를 미워하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혼하고 몇 달 돼서의 일이니까 아마 제 나이 스물여덟이 되었던 겨울 2월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날 신학교 입학시험을 위해서 하루 휴가를 내고 오후에 교회당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마루가 깔려 있는 아주 추운 예배당이었는데, 다행히 문이 항상 열려 있었습니다. 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계획에도 없이 갑자기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얘야, 이제 내가 너에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는 네 아버지를 용서하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내 마음속에 들어온 커다란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아스라하게 잊혀져 내 마음에 가라앉아 있었던 수많은 기억을 그 말씀의 막대기가 휘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오랜 세월 동안 마음에 가라앉았던 기억들은 방울방울 떠올라서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의 막을 건드리며 수많은 정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고는 과거에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기억들, 그리고 전혀 무관심하게 어린 나를 버려두었던 아버지에 대한 맺힌 마음, 그리고 그의 그릇된 도덕적인 모본,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삶 등등이 떠오르면서 그 모든 기억이 마음의 막을 건드리며 정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분노와 슬픔, 고통과 괴로움들이 바로 오늘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처럼 그렇게 모두 떠올라 저를 덮쳤고, 저는 거기서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울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제게 베푸신 은혜가 그렇게 크지만, 제가 어떻게 아버지인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에게 다시 한번 또 다른 기억들을 내 밑바닥 마음을 휘저어 떠오르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저의 첫 회심으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랑에 대한 기억들이었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괴로웠던 시절에 내가 얼마나 비참했었는지에 대한 기억과 벌판에 버려진 것 같은 고아였던 나를 당신 사랑의 품으로 부르신 십자가의 예수에 대한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피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정동에 마음 떨리게 하셨으며, 그렇게 구원해 내놓으신 후에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표독스러운 무신론자였던 저를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품으셨습니다. 세상에서 시련과 상처를 받고 당신의 품으로 달려갈라치면 그분은 항상 치마폭을 벌리고 달려오는 아이를 맞아주는 어머니처럼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품어주셨습니다. 서럽게 흐르는 눈물을 주님이 그 뺨에서 닦아주셨으며, 거기서 아무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은혜를 제게 베푸셨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기억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결국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사랑이 너무나 끝이 없고 한이 없기 때문에 내가 이 시간부로 아버지를 용서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마루에 엎드려 한없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그림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아버지가 가해자요 나는 피해자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한 것이 없건만 마음으로 아버지는 나를 아들로 여기지 않았고, 사실상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두 분이 나를 버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그 긴 세월 유학하고 있는 동안에 저는 시골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단 한 통의 편지도 받은 적이 없고, 선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머니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때 나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하고 난 후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가 보니 그 역시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했고, 형제들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없이 외로운 영혼으로 자신의 허기진 마음을 채우기 위해 가정 밖으로 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가난하고 궁핍한 시절에 사업을 하고 벌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그 일에 자신을 바치면서 살아왔던 그 모습이 떠오르면서 비로소 주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얘야! 너도 나를 만나지 못했으면 네 부모보다도 더 나쁜 부모가 되었을 것이다.” “또 네 아버지도 만약에 너처럼 나를 만났더라면 너보다도 훌륭한 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결국 가해자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으로 살았는지 절절히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이번에는 그분의 젊은 시절의 외로움과 아픔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울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 마음속에 강물같이 밀려온 하나님의 사랑이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기억났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정말 그날 그 결심 때문이 아니라 그 결심 후에 나를 붙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돌아갈 때까지 저에게 사과 비슷한 것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런 사랑으로 나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당신을 향한 그런 놀라운 부모 공경의 회심이 일어난 줄을 그분이 알 리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성품을 누구에게 주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회심한 후에도 아버지는 저를 많이 힘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제적인 부담도 저에게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다시 마음에 상처받은 적도 없고 미워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우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와 맺힌 것을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푸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부모를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네 부모를 사랑하라
마지막 두 번째는 부모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사실은 하나님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주신 계명입니다. 결국 미움을 받는 사람은 어떻게든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겠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생명이요, 미움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여러분이 한 인간으로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부모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자녀를 낳아놓고 얼마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깨닫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을 여러분에게 베푸셔서 여러분이 어떤 자식이었을 때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사랑해 주셨는지를 기억하며, 그것을 거꾸로 부모 공경의 도리에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 방에 혼자 누워서 자고 있던 어느 날 새벽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깊은 밤중이었을 것입니다. 4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잠을 자는데 어디선가 크게 사람이 우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울음소리는 내가 소리 내어서 통곡하고 있는 울음소리였습니다. 베갯잇이 흥건히 젖어 있었습니다.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모든 꿈이 그러하듯이 기억이 희미하기는 했는데 비닐하우스를 쳐놓은 어느 공간이었는지 마당이었는지 어쨌든 아버님은 무슨 화분 같은 것을 상자에 담고 계셨습니다. 바짝 마르신 늙으신 몸매에 늘 입고 다니시던 까만 약간 길이가 짧아 보이는 바지 하나와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하얀 와이셔츠를 입으시고 양팔을 걷어 올리신 채 무엇인가 화분 같은 것을 부지런히 상자에 담고 계시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먼발치에서 뵈오며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다가가서 다시 불렀지만 역시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그분이 노년에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모시고 가서 보청기를 맞춰드리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무엇을 담고 있는 그분 뒤편으로 다가가서 오른팔의 와이셔츠를 살짝 잡아당기며 '아버지'하고 불렀습니다. 그때 몸을 돌리시며 활짝 웃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나도 모르게 어떤 그리움이 마음속에서 확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두 팔로 생전 처음 아버지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러고는 오른쪽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많이 울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리고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얼마나 못했는지를 후회하면서 흘리는 눈물이오, 울음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시는 그분은 나를 안아주시지도 못한 채 무언가 흙이 묻어 있는 두 손을 그냥 늘어뜨리신 채 저의 포옹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며 우는 소리에 저는 잠에서 깨어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중이었습니다. 침대에 기대어 천장을 쳐다보았으나 거기도 새카만 어둠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나간 아버지와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며 한없이 다시 한번 울었습니다. 아까는 꿈에서 통곡한 것이었고 이번에는 생시에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했건만 꿈을 꾼 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 지난 후에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아버지가 미워서 사랑할 수 없었고, 좀 더 세월이 흘렀을 때는 사랑했지만 표현하지 못했고, 더 세월이 흐르고 나서 표현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고아가 된 것 같은 마음에 천정을 쳐다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모가 살아있는 것은 선물입니다. 비록 부모와의 관계가 깨어졌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한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악한 본성을 거스르지 아니하고는 결코 부모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그 큰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불속에라도 들어가서 물속에라도 들어가서 세상에 널리 전하고 싶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사랑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미움과 상처의 뿌리를 보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세월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살아계시는 동안에 여러분이 부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표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함께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상처를 용서로, 그 용서가 영광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의 인생은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습니다. 지난날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에 흘려보냈던 수많은 시간을 기억하십시오. 부모를 용서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십시오. 그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복음의 빛 안에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가족 3(2023.05.28._주일오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당시 골로새교회를 위협하고 있던 이단적 가르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교와 민간 신앙을 융합한 거짓된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이단은 교회 안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신앙이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미신적인 방식으로 율법을 지키게까지 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 위에 탁월하신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신자들과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고 계신 분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긴 가르침을 마친 후에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II. 이렇게 아내를 대하라
남편에게 강조하는 덕목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일이 쉬웠다면 굳이 명령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사도는 감옥 속에서 자기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이 명령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9)
A. 사랑하라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하며'라는 것은 명령형으로 나오는데, '아가파테'(ἀγαπᾶτε)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아가페'(αγάπη),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가정을 근간으로 이루어진 사회였습니다. 황제들을 비롯한 통치자들은 건실한 가정이 안정된 제국을 위한 매우 중요한 조건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사회는 철저하게 남존여비의 사상이 지배하던 남성 우월적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제도는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힘과 권력, 사회적 권위를 가지고 가정을 통제했습니다. 아내의 역할은 남편에게 복속된 채 자기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공장소에서 여성이 발언하는 것은 그녀의 남편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그렇게 대우받던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네 단어가 있었습니다. 먼저 '에로스'(ἔρως)의 사랑인데, 이것은 이성 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숙명적인 핏줄의 사랑을 '스토르게'(στοργή)라고 불렀고, 형제간의 끈끈한 사랑을 '필리아'(φιλία))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비해서 '아가페’(αγάπη))의 사랑은 앞의 세 가지 사랑과 구별됩니다. 앞의 세 가지 사랑은 모두 인간들 사이에 오가는 사랑인데 반해서 아가페의 사랑은 신이 인간을 향해 베푸는 사랑입니다. 아주 고차원적인 사랑입니다. 이 개념이 기독교로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말로 아가페가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신의 본성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 자체를 무한정 사랑하는 사랑, 그것을 아가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편지는 불신자에게 쓰여진 서신이 아닙니다. 이것은 골로새교회 안에 있는 경건한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가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을 때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성 간의 사랑에는 되는 사랑과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연애 시절과 결혼 생활을 비교해 보십시오. 연애 시절에는 저절로 사랑에 끌리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저절로 사랑이 우러나와 끌리는 때도 있지만 사랑을 해야 할 때가 더 많이 있는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결혼한 지 10년, 15년이 지났는데도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면 설렌다는 아내들은 아주 가끔 있지만 남편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신경과학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물리적 원인에서 찾습니다. 처음 사랑에 빠질 때는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페닐에틸아민 같은 화학물질의 작용으로 격렬한 연애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것들은 오히려 바소프레신, 옥시토신, 엔도르핀과 같은 호르몬 계열 물질의 작용으로 바뀌면서 서로가 격렬한 사랑보다는 안정적인 관계의 감정을 사랑 안에서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후 몇 년이 지나면 권태기가 옵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새로운 소통의 끈이 생겨납니다. 아이를 매개체로 (생깁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이를 중심으로 매우 특별한 가족 관계라는 것을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진 후에 부부의 관계는 모두 다 저절로 좋아지는 것은 없지만 확실하게 아이가 매개체의 역할을 하면서 부부 두 사람만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가족이라는 개념을 그들의 마음속에 넣어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저의 경험을 보니까 아이들을 시집, 장가를 다 보내고 강아지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강아지조차도 부부와의 관계를 이어주는 좋은 매개체가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외롭게 사시는 분들은 강아지를 기르기를 저는 권합니다. 길러보십시오. 재미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상황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면서 부부는 끈끈한 가족애로 뭉쳐지는 것입니다.
당시 불신자들은 아내를 억압하고 지배했지만, 신자인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경건한 성도인 남편으로서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명령어 속에는 어떤 의미가 함의되어 있냐면 아내를 사랑하되 아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며 아내를 사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자녀 사랑을 설교하면서 부끄러운 간증을 눈물로 했습니다. '네 아들도 너에게 자식이고 너도 나의 자식인데 나 하나님이 자식인 너를 대하는 방식과 아버지인 네가 네 아들을 대하는 방식은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느냐?' 그 말씀에 제가 깊이 깨뜨려지며 자녀 사랑에 대해서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의지할 사랑은 하나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 그 아가페의 사랑을 모든 삶의 동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그 사랑으로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 사랑으로 형제들을 우애 있게 대하고, 그 사랑으로 심지어 자기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육정에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요한일서 4장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아내를 향한 남편의 이러한 사랑은 인류 최초의 결혼식에서 아내 하와에게 바친 남편 아담의 고백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히브리 문학에서 '무엇 중의 무엇'이라는 표현은 최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많은 뼈가 있지만 잘라내도 생명에 큰 지장이 없는 뼈가 있습니다. 우리 몸에 살이 많이 있지만 조금 빠지거나 없애버려도 생명에 지장이 없는 살이 있습니다. 그러나 1센티미터만 잘라내도 안 되는 뼈가 있고, 1미리미터만 잘려도 즉사하는 살이 있습니다. 치명적인 우리 몸의 부분입니다. 심장을 손톱 깎기로 한 두어 번 탈칵탈칵 잘랐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즉사합니다. 굳은살은 칼로 깎아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인간 생명에 있어서 치명적인 살과 뼈, 그것이 바로 너다.'라는 고백으로 결혼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최초이자 최고의 사랑 고백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남편은 아내를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부이기 이전에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담이 최초의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이 하와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의 관계 속에는 남편과 아내에 대한 그림뿐만 아니라 동시에 최초의 이웃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이 말은 자기의 뼈와 살을 취하여 여자를 만든 것이고, 그렇게 창조된 첫 번째 아내이자 이웃을 향해서 자기 몸에 대한 사랑과 똑같은 사랑을 상대방에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아니하였더라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이 완전한 사랑의 고백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만 이루어졌겠습니까?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에게까지도 해당이 되었겠습니까? 당연히 아이에게까지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가인을 낳았을 때 둘이 똑같이 고백했을 것입니다. '너는 우리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또 그 동생 아벨을 낳았을 때도 셋을 낳았을 때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하신 뜻은 모든 인간이 번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죄가 안 들어왔어도 인류는 번성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번성하는 모든 인류가 서로를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느끼면서 사는 사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다수로 창조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처음 조상 두 사람이 창조되었어도 이후에 생육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복수의 인류가 되어서 서로를 아주 아름답게 사랑하는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인간의 죄 때문에 다 깨지고 망가집니다. 그래서 원래 주님이 꿈꾸던 사랑의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한 시작을 보여주신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인류 사회의 모판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 하시는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해 지체들에 대해 그 고백을 하고, 그 고백을 인류 전체로 확장시켜가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인류 사회의 모습은 이것입니다. 서로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여기면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모든 인류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모습입니다. 임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사회가 될 것인지를 교회와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기 위해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지금도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인류의 범죄로 그 사랑은 파탄에 이르렀고 남편에게 아내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각자 하나님께 범죄하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당시에 했던 그 고백을 따라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성에 대한 폭력적인 성차별의 잔혹한 역사는 이러한 비극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도라 할지라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쉬웠다면 명령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이런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남자 성도들은 절망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 거의 모든 사람은 살아오면서 '주님만이 나의 전부입니다. 주님! 나를 모두 가지시옵소서.' 어거스틴이 고백한 것처럼 '나 전체를 공짜로 주님께 드려 섬기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칠 때 우리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었으니,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아내에게 자신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통해 아내를 주신 것은 배우자를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불행하게 하면서 자기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불완전한 아내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불완전하지 않습니까? 아내가 그렇게 완전했더라면 자기보다 훨씬 나은 사람한테 시집을 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불완전한 아내를 주신 것은 아내의 불완전함을 보면서 남편으로 하여금 '아! 나도 우리 아내에게 저렇게 불완전한 인간이겠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불완전한 아내를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다면 아내의 부족과 인격적인 흠을 발견할 때마다 '아! 이렇게 내 아내가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에 나를 만나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이 여자를 보다 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나를 이 여자의 남편으로 불렀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내도 똑같이 남편의 어떤 부족한 점을 발견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것까지 완전한 남자였더라면 분명히 나보다 좋은 여자가 데려갔을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분수에 맞게 만났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남편의 부족한 것을 보면서 '아! 나도 남편의 눈에는 저렇게 모자라는 부분이 있었겠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고 남편의 결함을 발견할 때마다 '저 사람 혼자 살았더라면 늘 저렇게 결함 있는 채 살았을 텐데 하나님이 나를 만나게 하신 것은 저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어서 더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아내로 불려주셨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부부는 상대의 부족함이나 인격적인 결함 속에서 소명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 이런 부족한 부분 때문에 내가 이 여자의 남편으로, 이 남자의 아내로 부름을 받았구나.' 그러면서 거기에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만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남편은 그런 부족한 아내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자신 안에 있는 쓴 뿌리들을 발견하고, 자기가 얼마나 본성이 연약하고 또 악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주님의 은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참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은 끊임없이 깎이고 갈리는 과정입니다. 산에서 덜컥 떠온 돌멩이는 거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 돌멩이를 놓고 망치로 두드리고, 정으로 쪼고, 예술가가 쉼 없이 그 바위와 씨름할 때 아름다운 조각상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면서 자신이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추상명사입니다. 그래서 했는지 안 했는지 표가 잘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피를 쏟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상처받은 가정에서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사는 일은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남편이나 아내를 만납니다.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것도 쉽지 않은데 아이를 낳습니다. 이 아이가 인간이 되어가면서 부모에게 주는 기쁨도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 겪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불완전한 성도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저는 자녀 교육 회심의 그 순간이 내 일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회심의 순간에 버금가는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그렇게 나쁜 아빠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어떻게 보면 쫄깃쫄깃한 심장을 가닥가닥 찢어내는 것 같은 고통입니다. 그게 죽을 때까지 그런 한계를 느끼면서 자기가 얼마나 사랑하기에 부적합한 존재인가를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깨달으면서 자기 안에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길은 눈물과 고통의 길이고, 그 고통과 눈물은 결국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경험하는 시련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충실하게 밟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려고 몸부림칠 때 결국 참된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멘.
B. 괴롭게 하지 말라
마지막 두 번째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거나 이런 불만과 저런 트집을 잡아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은 자기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 초기에는 남편이 많은 권력을 가진 것 같아도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흐르게 되면 권력은 아내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러면 앞으로 권력자 될 사람에게 잘 보이면서 덕을 쌓아야 나중에 험한 일을 안 당합니다. 그 지혜를 아직도 못 가진 사람들이 오십 대에 들어섰다는 것은 매우 큰 비극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무상한 것입니다. 공감을 격하게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부터 아내에게 잘하십시오. 인격적으로 잘하십시오.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소중한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어머니가 딸들이 하도 이런저런 일들로 일을 많이 시키고 힘들게 하니까 그랬다고 합니다. "얘들아! 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소중한 딸이란다." 맞습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눈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하나님의 딸인데 내가 그런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내를 보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편이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고 말하고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그렇게 대하며 살지 않고 괴롭게 한다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힌다고 경고합니다.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큰 시련을 당했는데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삶이 지옥입니다. 아무리 어려워서 생명이 오가는 순간에도 무릎을 꿇으면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깊이 안기고, 거기서 주님의 향취가 느껴지고, 그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며 울 수 있다면 시련은 시련이 아닙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고난을 많이 당해도 이 확신이 있으면 현실은 지옥이라도 마음은 천국입니다. 이기지 못할 시련이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환란 같은 것들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막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편지를 받는 경건한 골로새교회의 남성들에게는 이게 큰 경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 아내한테 잘해라.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 굉장히 두려웠을 것입니다.(경건한 성도들은) '내가 기도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 내가 아내에게 함부로 대하고 아내를 상처 주면 내 기도가 막히는구나.' 경고가 되었을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버지로서 좋은 모본을 부모에게서 보지 못하고 자라난 경우에는 스스로 배워나가야 하는데 그 과정은 매우 큰 고통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자녀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물려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딸에게 아들에게 남편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부모가 어떻게 자녀를 사랑하고 양육해야 하는지를 삶 전체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그 부모에게 받은 감화에 대해서 고맙다고, 감화를 받았노라고 말을 잘 안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본성 깊은 곳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유익입니다. 더욱이 그런 남편이 어떻게 아내로서 가정을 이루어야 할 도리를 자기 어머니에게서 배우지 못한 아내와 함께 사랑하면서 사는 일은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부족한 아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딸이고, 모자라는 남편도 하나님 앞에 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을 서로 기억하며 눈물 어린 사랑으로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 쉬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은혜를 받기 전에는 원수를 사랑해야겠다는 의지를 품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선한 일을 할 때마다 우리 스스로 한계를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행할 수 있게 해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은혜는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지속할 수 없었던 관계를 이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런 사랑은 자기 안에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무지에서 깨어나고 완악한 마음이 부드럽게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런 사랑을 받는 것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그릇된 자기 사랑이 깨지고 자기 안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근원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람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내의 모습을 보십시오. 가능하다면 잠들어 있는 아내의 모습을 한번 조용히 지켜보십시오. 고왔던 젊은 시절의 얼굴은 어느덧 흔적만 남고 거의 사라졌습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깊이 패인 주름과 변한 얼굴 모습 그리고 젊었을 때 시집와서 안 그러더니 이제는 가끔 이까지 갈면서 잡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인류애가 생기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아내에 대한 에로스의 사랑 이전에 인류애가 생깁니다. 보면서 '정말 고생 많이 했구나!' '이 부족한 사람을 만나서 예기치도 못했던 많은 인생의 골짜기들을 걸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했을까?' 도와줘도 시원치 않았는데 오히려 나 때문에 그 눈물이 통곡이 되게 했고 그 아픔이 쓰라림이 되게 하였습니다.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 (Mea culpa. mea maxima culpa.) “나의 죄요, 나의 큰 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며 바라볼 때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까지 이 한 사람을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같이 사랑했노라고, 그리고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때문에 힘들었지만 사랑하며 살 수 있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틀림없이 마지막, 이 세상에 숨을 거두는 순간에 아내의 손을 따뜻하게 붙잡을 자격이 있고, 하나님의 품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친밀감을 느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자기가 좋을 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관계의 책임과 의무를 느끼고 끝까지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을 위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길이며, 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만큼 참된 신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습니다. 지나간 날을 회상해 보면 아이들에게도 왜 그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해주지 못했을까? 왜 표현하지 못했을까? 아버님에게도 그렇게 꿈속에서만 안아주지 말고 생시에 그렇게 안아드리고 쓰다듬어 드리고 돌보아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강물처럼 흘러가고, 흘러간 강물이 되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시간도 다시 오지 않습니다. 오늘이라는 이 현실 속에서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용납하십시오. 사랑할 힘을 얻고 끝까지 이 한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하나님 앞에 다짐하며 그 사랑에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6:24-33)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가슴 시리도록 그리운 가족 4(2023.06.04._주일오전)
이 편지도 역시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쓴 서신입니다. 유대인으로서 또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교훈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커다란 우주적인 교회론입니다. 골로새서가 그리스도론을 다루고 있다면, 에베소서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경륜과 교회에 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살아온 배경이 다르지만 분열되지 않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한 몸으로 일치된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가르쳤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을 위한 종자 씨입니다. 우주적인 경륜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 사랑의 질서로 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랑의 사회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경륜의 비전을 가지고 성도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이 아내와 남편으로서 어떻게 서로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II. 이렇게 남편을 대하라
이 서신은 불신자에게 쓴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교회의 경건한 성도들을 염두에 두며 쓴 것입니다. 결혼에 있어서 성도인 아내와 성도인 남편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아내를 향한 남편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고, 또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과 같이 하라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될지에 대한 도리를 24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4) 아멘.
A. 남편에게 복종함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는 복종입니다. 본문은 두 사실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쐐기를 박듯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전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아주 조금만 복종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가정의 이상(理想)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많은 남편들은 어쩌면 우월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래, 나는 남편이야.’ ‘그러므로 너의 머리지.’ ‘그러니 당연히 너는 나의 지배를 받아야 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음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었다는 이 비유는 마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된 것과 유사한데, 그것은 생명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이 기묘한 영적인 연합의 생명이 마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 생명을 이어받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내를 미워하고 남편을 미워하는 사람이 건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었다는 이 의미는 지극히 제한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점에서 그러합니다. 첫째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은 교회의 생명과 존재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 그렇게 생명과 존재의 원천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인격이지만 남편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었다는 것은 남편이 아내보다 완전하고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기능적인 질서로서 하나님이 가정에 부여하신 제도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것은 즉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었다는 것은 보다 상위에 있는 우주적인 질서를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 권위는 남자이기 때문에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높은, 가정보다 더 높은 우주적인 질서를 이루는데 가정이 이바지하게 하기 위하여 기능적으로 하나님이 질서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우주적인 경륜에 대해서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성경 구절을 마치 남편에게는 아내를 지배하고, 그녀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함으로써 기쁨으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인류가 되게 하기 위하여 가정을 사용하시고자 이러한 질서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첫 열매인 사회가 교회이며, 신자의 가정은 바로 그 교회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머리 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온전히 복종하고 순종하며 살아가기에 도움이 되는 한도 안에서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는 자격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 쓸 때 염두에 두었던 남편은 가정에서 멋대로 행동하고, 아내를 로마의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하찮게 취급하며 살아가는 막돼먹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가 염두에 두었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돌보려는 경건한 남편을 염두에 두고 아내에게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되었다는 것이 결코 남성 우위론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임을 에베소서 5장 20절과 21절에서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복종할지니라' 원래 그리스어로는 '휘포타쎄타이'(ὑποτάσσεται)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언어적으로 '무엇 무엇을 아래에 두다', 또 '무엇 무엇을 뒤에 두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이 말은 결코 노예적인 복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피차 남편과 아내가 서로 복종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의 질서입니다. 즉 아내든 남편이든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 있는 사람에게 복종해야지만 그 가정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가정이 된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가정의 질서입니다.
그 가정의 온전한 말씀 중심, 하나님 중심의 질서를 이룸으로써 창조 시에 인간에게 주신 두 가지 명령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는 종교 명령이었으니,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며 그분을 경배함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하신 명령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하나님이 잠재적으로 주신 아름다움을 인간의 노동을 통해 가꾸어 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고 사람이 살기에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하게 하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그분을 공경하는 데도 필요한 것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고 모든 만물을 선하게 대우하며 관리하여 아름다움을 더하게 가꾸는 것도 하나님 사랑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피차 하나님 진리의 말씀에 서 있는 사람에게 복종함으로써 불완전한 아내는 완전한 남편을 본받아 온전하게 되고, 불완전한 남편은 진리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복종하여 그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남편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복된 가정의 질서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에 입각하여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아내들이여, 진심으로 주 안에서 남편을 기억하고, 그 남편이 진리의 편에 서 있는 한 그 남편을 깊이 인정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남편과 아내가 진리의 편에 서서 서로 피차 복종하는 부부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남편을 존경함
이처럼 남편과 아내의 도리를 가르쳐주신 것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 경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의도는 당신의 영광으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나타나 있지만,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자연 속에도 아름답게 나타나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산, 맑은 물, 그리고 우주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별들의 움직임은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할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창조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말없이 있는 자연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들에게 자연 세계보다도 오히려 인간 세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늘 알코올에 빠져서 살았고, 집에 오면 폭력을 일삼았고 폭언을 일삼았습니다. 청소년 아이들이 둘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가슴은 피멍이 들도록 아빠로 인해서 상처를 받았고, 수시로 아내를 때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업을 해서 돈은 꽤 벌고 있었지만, 그의 가정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사람 인생에 아주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자기하고 거래하던 어느 거래처에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준 것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화를 버럭 냈을 사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어눌하게 전해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고, 마음속에서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차마 창피해서 못 가고 몰래 한 교회의 수요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차피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남편이니까 가족들이 기다릴 리도 없고 의심할 리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술을 끊을 결심이 생겼습니다. 사업상 술을 끊는다는 것이 당시 사회에서 쉽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술에서 지독한 냄새가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저히 술을 마실 수가 없고 토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을 끊고 거래처 사람을 만나도 ‘내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의사가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해서 제가 술을 못 먹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가짜로 약봉지를 보여주면서 거래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변화된 것은 가정생활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무 기대하는 것도 없고, 어떤 면에서는 애정도 없고 상처투성이 가정이었는데, 예수 믿은 이 남편에게 일어난 첫 번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집에 일찍 일찍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술을 안 마시니까 오래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생전 책이라는 것은 가까이 안 하던 사람이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이상한 짓을 한다고 그러는데.' '야, 네 아버지가 아무래도 돌아가시려나 보다.’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족이 무슨 책인가 그러고 봤더니 시커먼 성경책입니다. 빨간 모서리로 되어 있는 성경책입니다. 온 집안사람들이 성경은 본 적이 있을지 모르지마는 예수의 ‘예’ 자도 모르는 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달라진 남편의 모습이 뭐냐 하면 폭언과 폭행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같이 밥 먹자고 하며 숟가락을 뜨는데 남편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왜 그래?’ ‘당신은 어디 아파?’ ‘뭔 일이 일어났어?’ 그런데 일체 말을 안 하고, 전도도 안 하고, 자기가 하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일찍 들어와서 성경을 읽고, 경건 서적을 읽었습니다. 잘 때는 침대 머리맡에서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몇 주가 지나더니 어느 날 아이들과 아내를 부르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지만 그렇게 몇 달이 걸린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는 용서를 빌었습니다. “사실은 내가 교회에 다니게 됐는데 이제 비로소 사람이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여보,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너무 모질게 대하고 당신을 학대했던 것 내가 이 자리를 비로소 진심으로 용서를 비니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아이들에게 내가 참 아버지가 되는 게 뭔지 몰랐다. 사실은 나도 불우한 가정에 태어나서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학대를 받고 폭력을 당하며 살았다. 그 아버지를 내가 그렇게 미워하고 가슴에 상처를 받았는데, 어느 날 보니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와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 말고 다르게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다 교회에 가서 사람 사는 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니 비로소 내가 참사람이 안 되었기 때문에 너희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얘들아, 아빠가 이렇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빈다. 내가 앞으로 잘 할게. 용서해다오.”
가족들이 그것을 믿었겠습니까? 안 믿었겠습니까? 반쯤은 믿고, 반쯤은 안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도 가끔 술 먹고 들어와서 서글프면 울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서 이거는 또 무슨 감정의 장난인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시종일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저녁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 전에 아이들 방에 가서 “내가 너희를 축복해 주고 싶다. 허락해다오.” 예배를 드리자면 애들이 싫어할 수도 있었는데, 기도를 해준다면 대개 좋아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심방을 가도 심방하고 나오면 불신자가 부릅니다. “목사님, 전 예수 안 믿는 사람인데 날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겠어요?” 그래서 기도를 자녀를 위해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만큼 더 웅장한 복음 선포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현존 그 자체가 복음의 가장 커다란 울림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것은 바로 가정이 그러한 울림이 있는 가정이 되게 하기 위해서 남편과 아내를 그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신자가 되면 그 자리가 가장 좋은 아내가 되는 자리이고, 가장 훌륭한 남편이 되는 자리이고, 가장 아름다운 자녀가 되는 자리입니다. 가정은 바로 그런 훈련을 받는 현장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33절 하반절입니다. “···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下) 존경하라는 것은 함부로 대하거나 하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삼가는 마음으로 존중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드라마나 혹은 사람들, 사회 속에서 펼쳐지는 남편에 대한 아주 교양 없는 비웃음, 그리고 낮추어 보는 경멸의 어조들,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세속적인 정신이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한 강사가 강연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렸을 때 자기는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인간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했더니 엄마가 후딱 하면 이 인간아. 그 집 성씨(姓氏)가 이씨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성이 이씨고 이름이 인간인가 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따로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많은 사람에게 그저 스낵처럼 씹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질서는 사랑이라는 내용물을 지키기 위한 껍질과 같습니다. 우리의 뇌는 거의 순두부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몸체 중 가장 단단한 뼈로 두개골을 만드셔서 감싸셨습니다. 그래서 내용물이 순두부인데, 가다가 기둥에 쾅 하고 부딪혀도, 혹은 머리뼈에 금이 갈 정도가 되어도 뇌가 손상당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소중한 내용물을 단단한 껍질에 보호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부가 사랑을 해도 이런 질서라는 껍질이 단단하게 싸고 있지 않으면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사랑의 장(章)이라고 일컬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성경은 말했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 (고전 13:5 上) 우리는 흔히 사랑하면 예의를 초월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적인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욱 예를 갖추는 사랑임을 아가페의 사랑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남편에게 아내를 지배하고 억압할 권리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내에게 남편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길 권한도 결코 주신 적이 없습니다. 남편을 하찮게 여기고 경시하며 멸시하는 태도로 대하는 여성들의 마음이 결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경건한 주석가 매튜 헨리(M. Henry)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왜 하나님이 남자 아담을 잠들게 하여 몸에 많은 부위 중 하필이면 갈비뼈를 꺼내어 여자로 만드셨을까?' 이 질문을 제기하며 해설한 것이 우리 가슴에 새겨둘 가치가 있습니다. 매튜 헨리(M. Henry)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도록 머리의 뼈로 그녀를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의 지배를 받도록 발바닥의 뼈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의 보호를 받도록 그의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뼈를 취하여 여자로 만드셨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그리스도의 경륜을 이루는 가정이 되는데 이바지하는 한도 안에서 남편을 존경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아내에 대해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피차 서로를 하나님의 존귀한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대하고 깊이 존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첫 인류를 창조하실 때 잘 나타났습니다. 한 몸으로 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는 두 사람이지만 사실은 한 몸이기 때문에 남녀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여기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나아가서 인간의 생육 방식을 통하여 번성하는 모든 인류가 이렇게 서로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하는 사회를 만드시고자 하는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만드셔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고 이러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셨지만, 율법으로 그러한 사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이 보여주고자 하는 진짜 실체인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복음 삼으심으로써 하나님 사랑 때문에 온전한 사랑을 배워 서로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한 몸에서 두 사람을 만드신 것은 서로를 자기의 일부로 여겨 자기의 몸을 본성적으로 사랑하듯이 서로를 그렇게 본성적으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신 것은 모든 인간 사회가 하나님의 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자기의 몸처럼 본성적으로 사랑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심이었으니,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그 사회의 모습은 완전한 사랑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너와 내가 구별되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서로를 자기의 몸처럼 여기며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 안에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그때 누릴 사랑을 미리 앞당겨 맛보고 있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안에서 아내와 남편은 서로 인격적으로 연합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질서를 따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그의 부족함을 발견할 때, 그것이 바로 자기가 이 남자의 아내로 부름을 받은 소명의 이유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렇게 해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이처럼 사랑으로 서로를 온전하게 하며, 그렇게 온전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도 모난 부분이 깎여져 나가며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 결혼제도를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사랑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가 깨뜨려지고 부서지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 때문에 자기 자신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자기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자기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 때문이 아니라 아내와 자신을 하나로 연합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의 과정을 통해 완전해져 가는 것만큼 자기도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가정을 통해서 자녀들은 그런 엄마·아빠를 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사랑을 가지고 가족들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가는지를 배우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을 교회를 통해서 배우며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가고자 해야 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나는 아내들에게 말합니다. 자기 남편을 존중하십시오. 자기 남편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하십시오. 그리고 결코 가볍게 대하지 마십시오. 그는 여러분과 생명의 유업을 함께 나눌 자입니다. 여러분 자신처럼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기심을 가진 인간에게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기를 간구하는 자에게 진리로 사랑의 길을 보여주시고, 성령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한 인간의 자아의 완성은 물질의 소유나 사회적인 지위, 이루어 놓은 업적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립적인 주체로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누구든지 눈물을 흘리는 자기 사랑의 죽음 없이는 남편과 아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일은 쉽습니다. 추상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아내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남편도 눈을 뜨면 마주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만큼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편과 아내를 사랑할 때 가장 큰 유익을 누리는 사람은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이렇게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을 완성함으로써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께 많은 행복을 누리는 성도의 가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네 형제를 이렇게 대하라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3:1-4)
녹취자: 조복령
I. 본문해설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눈이 어두워진 늙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가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훔쳤습니다. 이 때문에 야곱은 사랑하는 어머니와 생이별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외삼촌의 집을 만나 우거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버지와 형을 속였듯이 외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습니다. 제대로 보수도 받지 못한 채 약 20년 동안 젊음을 바쳐 종처럼 봉사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빈털터리가 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을 주셔서 큰 재물을 얻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시기의 눈길을 의식한 나머지 식솔과 가축들을 이끌고 몰래 도망하였습니다. 외삼촌과 그 아들들은 원한을 품고 야곱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아주셔서 극적으로 화를 면하게 하셨고, 그들과 화해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일어난 일은 위기의 예고편일 뿐이었습니다. 야곱에게 가장 큰 일생일대의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자의 복을 빼앗긴 원한을 품고 자기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II.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오늘 여러분과 생각해보고자 하는 제목은 “네 형제와 화해하라”입니다.
A. 얍복강에서 입맞춤
아버지로부터 받을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는 긴 세월 동안 원한을 품고 복수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7장은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 27:41) 이 위기는 이제껏 야곱이 살아온 인생의 다른 고비들과는 달랐습니다. 형 에서는 자기를 죽이고자 20년의 세월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제 그 형을 만나지 않을 수 없는 사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용서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주인의 형이 400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고 있나이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20년 만에 만나는 동생이 반가웠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4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겠습니까?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야곱의 집안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앞이 캄캄했습니다.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그가 간절히 매달린 것은 하나님의 분부, 곧 전에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돌아가고자 하신 말씀대로 순종해서 왔는데,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위협 앞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보복의 위협에서 자기를 건져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하나님이 이전에 벧엘에서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야곱이 어디로 가든지 그를 지켜주시며, 또 그를 이끌어 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다 이룰 때까지 그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며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셨던 약속에 호소하며 온 힘을 다해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 32:12)
여기서 야곱은 모든 식솔과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누어 강을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에게 보낼 예물로 짐승의 떼를 먼저 강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 이후에 사랑하는 아내들과 열한 아들까지 얍복강 나루를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야곱은 홀로 그 강 건너편에 남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커다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가난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홀로 남은 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야곱은 거기서 자기를 찾아온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아마도 이 천사는 자기가 이 위기 속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천사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사에게 간절히 매달려 자기를 도와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아마 천사는 쉽게 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는 힘으로 천사를 붙들고 매달리며, 떨치고 가려는 천사를 붙들며 씨름하면서 자기를 축복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힘으로 야곱을 이기지 못한 천사는 그의 허벅지 관절을 내려쳤고, 이로 말미암아 허벅지 관절은 위골이 되었습니다. 남자의 허리 아래의 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하체의 힘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체의 힘을 상실했을 때 천사를 붙들고 있던 상체의 힘도 함께 상실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천사에게 매달리던 그 매달림에서 결국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야곱은 울며 매달렸습니다.
많은 사람이 야곱이 천사와 씨름한 것을 믿음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이제껏 자기가 살아오던 인간적인 사고방식으로 천사까지 붙들고 매달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이 아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천사는 말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천사에게 맞아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면서 야곱은 온 몸과 허리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진짜로 야곱은 더 이상 의지할 힘도 없었고, 천사를 붙들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드디어 가슴이 찢어지며 그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의 샘이 터졌습니다. 눈물로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호세아서는 해석합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 12:4)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5) 아멘.
하나님께서 형 에서와 화해하게 하시려고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그의 교만을 꺽고자 하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셨으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는커녕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려고 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교만을 꺾으셨습니다. 모든 힘을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그의 마음에 샘은 터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할 겸비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깊이 깊이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이 간구로 에서의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그 전까지 야곱, 이 동생을 죽이고자 원한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모든 복을 빼앗기고 장자의 명분까지 빼앗긴 처지에서 그는 이를 갈며 동생이 돌아올 날을 기다렸고, 죽이고자 마음에서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형 에서의 마음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진심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형을 속였던 일을 후회하며 용서를 빌게 하였습니다. 깨어진 형제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살인을 면할 수 없는 깊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살길을 얻는 놀라운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형제의 관계를 어떻게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고, 원수조차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형제의 관계가 깨어져서 서로 의절하며 살거나, 갈등하고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어찌 그 삶의 열매가 믿음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깨어진 형제의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아 온 여러분의 마음에 다시 상처를 더 주고자 이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경우에 어긋나는 것을 요구하는 형, 돈을 빌려 가고 갚지 않는 동생,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와의 관계까지 얽혀서 이익의 문제로 갈등하고 고통받는 형제 관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상처난 모든 형제 관계가 어찌 모두 여러분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형, 이기적인 동생, 그리고 자기 집안 식구 이외에 누구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않으려는 누나, 그리고 동생들, 이러한 것들이 형제들 사이를 갈라놓고 갈등하게 하고 있습니다. 해 아래 많은 가족이 흔히 겪는 일을 여러분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깨어진 형제 관계를 회복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녀의 또 다른 이름은 화목케 하는 사람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게 하심으로서 하나님 앞에 깨어진 형제의 관계를 치료하고 고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화목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십시오.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사랑을 받으십시오. 그분의 은혜의 힘으로 깨뜨려진 형제의 관계를 치료하는 화해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회개하고 뉘우치자 하나님께서는 돌 같은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 동생을 용서할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기 위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형제 관계를 생각함
형제 관계를 화목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겸비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기 전에 먼저 그를 아주 겸비하도록 낮아지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자기의 무력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셨습니다. 먼저 그를 영적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정말 오랜만에 완전히 깨어진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 갈갈이 찢어진 마음으로, 깨뜨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죽음의 칼날이 기다리고 있는 에서와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람을 보고 사랑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실망합니다. 만약 사랑할 수 있다면 자기 의(義)에 빠지게 될 것이고, 사랑하는 데 실패하면 상대방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원래 우리가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원히 비참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 그 십자가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그리스도의 고난의 피를 온몸에 적신 사람들에게는 사랑하기에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흘리심은 누구의 죄값인가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우리는 그 사랑 아래서 주님의 사랑 앞에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너무 궁금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 가치 없는 죄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육체를 깨뜨리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셨을 텐데, 그 아들을 주셔서 가장 쓸모없고 더러운 죄인인 우리를 살리시려고 했던 사랑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목숨까지도 주님 앞에 드렸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우리의 가진 모든 것, 우리 자신까지도 주님의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통째로 주님께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처음 사랑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풀어주지 못할 사람들이 없는 것입니다. 주께 받은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형제와의 관계에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비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니, 형제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일 수 있겠습니까?
힘으로는 천사도 이길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야곱이 가진 육신의 꾀와 힘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터치고 쏟아져 나오는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천사가 야곱을 긍휼히 여겨 그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며 당신을 의지하는 야곱의 마음을 보고 묻게 하신 질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복을 주시려는 뜻에서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창 32:27)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7) 여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육체의 완력으로서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과 회개로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게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감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임에도 육신의 형제와 의절하고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아직도 이런저런 형제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야곱은 얍복강 강가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깨어졌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를 미워하던 형과 기적적으로 화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경우에 없는 형제의 요구에 굴복하며 비굴해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제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마음에 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하고, 형제로서 들어줄 수 있는 일은 마음을 풀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형제의 요구에 굴복하는 종류의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여러분 마음속에는 형제가 미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 그리고 반드시 사랑하고 말리라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화해의 광경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3:4)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한 사건이 떠오릅니다. 어느 해 바로 이런 설교를 마치고 복도를 걸어가던 5월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노인 한 분이 복도에서 나를 따라오면서 내 손을 꼭 붙드셨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우리 집안에 있는 자식들이 그렇게 서로를 미워하며 에서와 야곱처럼 원수가 되어 다투고 있습니다." "제 마음이 지옥과 같습니다." "목사님, 우리 아이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노인의 얼굴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아버지는 자기가 죽음으로써 형제들이 화해할 수 있다면 아마 내일이라도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복도에서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눈물의 자식은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를 쉬지 마십시오." 권면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흐르던 눈물과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합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고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복수심에 불타던 20여 년 동안의 에서의 마음을 한순간에 녹여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용서할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천사에게 허리를 맞아 허벅다리 뼈가 위골 되었으니, 당연히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아우 야곱을 보면서 복수심에 가득 찼던 에서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 긍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야비하게 나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내 축복을 가로채고 온 천하를 얻을 줄 알았더니, 저게 내 동생의 말로인가? 다리를 질질 끌고 절름발이가 되어서 자기 앞에 나와 신하가 왕에게 하듯이 일곱 번이나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하며 형을 주인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다짐하던 에서의 마음은 바뀌어 야곱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통곡하며 울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걸어온 지난날들이 서러워서 울었고, 또 형을 이렇게 만나 화해하게 된 은혜 때문에 울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미워하며 살아왔던 원한의 세월이 허망하다는 사실 때문에 울었으며, 용서하고 다시 얻게 된 동생에 대한 기쁨 때문에 목 놓아 울었던 것입니다.
운명 같은 미움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 앞에서 깨어지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도저히 소망이 없을 것 같은 관계를 회복시키셔서 다시 사랑하는 가족으로 만드시는 은혜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다시 깨어진 형제와의 관계를 화목으로 회복하십시오. 십자가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III. 적용과 결론
연로한 부모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노라면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고, 아무것도 없어도 갖고 싶은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한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 형제들이 둘이 있습니다. 교회가 영적인 형제요, 가족 안에서 만나는 형제가 육신의 형제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한 사랑으로 용서하고 도우며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기를 그리스도께서 죄인이었던 때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라고 여러분에게 진리의 빛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그 마음을 여러분에게 이 설교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날 동안에, 젊은 날 동안에, 형제와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삽니다. 사람을 보며 형제를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십자가 은혜에 덧입게 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 사랑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서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것을 보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