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공동체의 정신과 가정예배의 적용
감사합니다.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어려운 시간을 저희들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게 하시고 기쁨이 있는 시간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저희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하시고 원하시는 그런 계획들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가정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설교를 했기 때문에 막 바로 예배의 문제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목을 잡아놓고 나서 청교도 자료들을 찾아보니까 정확히 가정예배에 대한 자료들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어요. 청교도들이 가정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늘 드리던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자료 자체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 이번에 이것을 준비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청교도들은 가장들이 바로선 청교도들 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가장의 직책 자체를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이 사람들만의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 성경적으로 보면 가장에게 그런 중요한 위치를 주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시종일관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두 가지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될 것 같아요. 하나는 여기 앉아 있는 분들 가운데 여러분들이 만약 가장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를 분명히 깨닫고 바로 서도록 노력을 해야 될 것이고,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불행이도 아직 가장이 신앙적으로 매우 어려서 이 자리에 참석 못했거나 또 가장이 예수를 안 믿거나 또 가장이 혹시 이제 여자인 본인 자신이 되어야 되는 상황이 있다 며는 나름대로 적용을 하면서 말씀을 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은 분들은 다시금 내가 좋아하는 자매를 만난 것이 곧 결혼의 소명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돼요. 자기가 이런 가장이 될 준비가 되어있는가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결혼에 임하도록 그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자, 이 자료를 찾아보면서 제가 깜짝 놀란 게 뭐냐 하며는 청교도들이 결혼을 굉장히 늦게 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초기 17세기에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건너가는데 초기에 이주 했던 사람들의 행정적인 자료들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결혼을 남자는 스물네 살이 넘어야 했습니다. 법으로 정해진 건 아닌데 대개 스물넷 이전에 결혼한 사람들이 매우 드물었고 여자는 17세가 훨씬 넘어야지만 결혼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보면, 어 뭐 그것이 뭐 그렇게 문제냐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 당시로서 보면 굉장히 만혼 이었다, 라고 생각이 된단 말이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특수한 사정이기는 하지만 굉장히 일찍들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인제 그 시대에는 조선시대 중기니까 어땠는지 지금 정확히는 잘 모르겠는데 뭐 불과 한 5-60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굉장히 일찍 결혼 했거든요. 저희 할아버지가 저희 아버님을 낳으시고 아버님이 저를 낳으셨는데 당연한 애긴데... 계산을 해보니까 저희 할아버지가 저를 40에 보셨어요. 40살에 제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 정도로 일찍 결혼하시고 저희 할머니는 열여섯엔가 오시고 저희 할아버지가 열네 살에 결혼하셨다니까 굉장히 조혼이죠. 청교도들이 왜 이렇게 나이가 든 결혼을 고집했는고 하니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며는 성숙이에요. 성숙. 성숙.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가장 그러면 그 사람들은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신앙적이고 인격적인 그런 바탕이 되어있어야 한다고 믿었단 말이죠. 청교도들의 가정은 대가족 사회는 아니었어요. 철저하게 핵가족 사회였어요. 그래서 이제 그들은 뭘 생각했냐 하며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룰 찌니라 그 성경에 기반을 두어서 철저하게 남자가 가정을 떠나서 그리고 아내와 합해서 한 가정을 이루는 그런 형식을 취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자연히 핵가족일 수밖에 없쟎아요? 그래서 인제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 그러니까 핵가족이었으니까 오늘날의 미국이나 구라파에 번지고 있는 가정 단위적인 사고방식이 청교도들에게서도 기원을 찾을 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좀 달라요. 청교도들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함께 한 가정을 이루고 그래서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독립했지만 그러나 떠나 왔는데도 그 떠나온 가정을 전부 자기의 가족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들의 신앙과 여러 가지 형편에 대해서 아주 긴말한 관심을 가졌어요. 여러분들은 제가 지난번에 부모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 한 것을 들었을 거예요. 성경적으로 볼 때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여자와 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데 그렇게 되면 둘이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가정도 이렇게 시가 친가 이런 구분은 그건 우리들이 전통적으로 해 내려오는 거고 말하자면 한 가정을 이루면서 두 부모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 설명을 여러분들에게 한 적이 있어요. 기억나죠? 청교도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심지어는 어느 정도냐 하며는 청교도들은 결혼 생활의 멋을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중세 카톨릭에서는 결혼의 목표를 자녀 생산에다 두었어요. 그러나 청교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결혼의 목표를 친교에다 두었어요. 물론 이 친교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친교가 아니라 두 사람사이에 쉽게 얘기하면 사랑으로 맺어지는 그 결합, 이것이 결혼 생활의 이상이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짝을 찾을 때에는 부모의 동의를 얻기는 했지만 그러나 강제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사랑으로 확인을 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사랑을 하고나서 결혼 한다는 생각보다는 분별해서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사랑을 일구어 가는 것을 훨씬 타당하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하고는 약간 차이가 나는 점들을 발견할 수 있죠? 그죠? 근데 어쨌든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멋을 알았어요. 그래서 청교도들은 결혼이라고 하는 것을 도무지 깨어질 수 없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문헌에 보면 심지어 어떤 경우도 나오냐 하면 남자가 성적인 만족을 아내에게 줄 수 없을 때 충분히 이혼사유에 해당한다고 그렇게 교회에서 이해를 해 주었어요. 그럴 정도로 그리고 그 성에 대해서도 목사님들이 설교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청교도들하고는 잘 안 어울리잖아요? 그죠? 근데 굉장히 많이 하면서 부부의 성적인 결합과 거기서 오는 기쁨을 즐겁게 누리면서 살도록 굉장히 많이 설교가 되어진 것이 문헌에 나와요. 그리고 심지어는 어느 정도냐 하면 결혼을 했는데 죽든지 만약에 어떤 그 용납되어질 수 있는 이유로 이혼을 하게 되면 즉시 결혼을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세 번 네 번 다섯 번까지 결혼을 하는 행운을 누렸다고 합니다. 근데 결혼을 하는데 결혼을 하고 났는데 우리 같으면 이렇게 살다가 부인이 죽고 아니면 남편이 죽은 다음에 그 다음에 다른 배우자에게 결혼을 하면 그 관계는 거의 끊어지거든요 완전히. 혼자 살면 관계가 이어지지만 끊어져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결혼을 하면 부모가 수없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걸 전부다 다 가족관계속에 넣고 친밀하게 관리를 해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는 그런 거는 어떻게 보면 옛날에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대 가족 제도와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핵가족 제도 사이에 아주 아름다운 결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청교도 가장은 가족들의 신앙을 책임지는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렇게 가족들을 돌본다고 할 때 그 가족의 범위는 자기 아내나 아이, 이것 뿐 만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렇게 결혼한 자기의 처가, 그리고 심지어는 거기에서 고용된 사람들, 종, 노예, 이런 사람들 까지 모두 포함해서 그것을 가족이라고 봤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들에게는 가장으로서 아주 중요한 권리가 주어졌어요. 문헌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 중에 하나는 뭐냐 하며는 17세기죠. 그러니까 17세기에 상당히 여러 지방에서 남편이 가정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 아내나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상당히 정당하게 여겼던 지역이 여럿 있었어요. 모두 그러지는 않았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서 결국 뭐냐 하며는 그 시대가 워낙 가부장적인 사회니까 역시 이 땅에 완전한 사람들은 없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 가부장적인 그 시대의 정신에 결국은 말하자면 많이 영향을 받은 그런 모습들을 볼 수 있죠. 그러나 인제 그렇게 허용된 지역도 있었지만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아주 철저하게 결혼하기 전에 그리고 이제 말씀드리는 것이 그 후에 모든 청교도들에게 고루 퍼지게 되요. 결혼하기 전에 서약을 할 때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서약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제정신을 차린 거죠. 인제 돌아온 거죠. 그래서 가장으로서 그렇게 굉장히 중요한 많은 권세들이 주어졌는데 그래서 가장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한 가족의 신앙을 책임질 수 있으리 만치 성숙할 것이 요구 되었단 말이죠. 그러면서 이제 세월이 흘러가다가 1600년데 말이 오고 조나단 에드워드가 나오던 1720년데 30년대쯤 가면 완전히 무너진 것들이 발견돼요. 그때 이제 플로릭 이라고 하는 영어로 말하면 장난인데 플로릭스 라고 하는 모임이 있는데 정확히 그 모임이 무엇인지는 모르는데 아마 결혼하지 않은 남녀 애들이 모여서 뭐 히야카시하고 놀고 하면서 뭔가 이렇게 좀 정상적으로 경건하고 좋은 그런 모임이 아니라 좀 약간 야한 그런 모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누룩처럼 죽 번져가면서 젊은이들이 타락하기 시작해요. 그런데 그 대부분의 그 당시 설교자들이 젊은이들의 타락의 뿌리를 어디서 찾냐 하며는 교회에서 찾는 게 아니라 가정에서 찾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에서 찾지 않고 가정에서 찾는 것이 뭐냐. 가장들이 변변치 못했기 때문에 애들이 그 모양이 됐고 결국은 가장들이 그 모양이 된 것은 교회가 그들을, 가정을 꽉 잡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보는 거죠. 그래서 정상적인 청교도 목회에서는 지금처럼 아내를 통해서 남편을 전도하고 아이들을 전도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통해서 아내를 타이르고 남편을 통해서 아이들을 통제하는 그런 것들이 이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들에게 지시를 하면 그것이 가장들이 가서 가족들에게 전부다 다 전달하고 그 가족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하는 그런 체제를 취했단 말이죠. 그래서 오늘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가정예배를 생각함에 있어서 이것은 가장으로서의 아주 고유하고 독특한 권한이었어요. 말하자면 목사로서 예배를 인도하는 것과 꼭 같은 그러한 고유한 권한으로 여겼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장들은 이 권리를 아주 신성하게 생각을 했고 그리고 가장들은 이제 자녀들을 위해서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과 그다음에 성경을 읽어주고 그리고 예배를 인도하는 이것, 그리고 가족들이 질서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도록 이런 것들을 정돈하는 그 일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청교도들의 문헌과 그다음에 18세기의 부흥의 어간에서 일어났던 많은 현실을 개탄하는 문헌들이 나오는데, 설교 속에 그런 것이 많이 나오고, 그런데 거기에서 개탄하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가정이에요, 가정. 왜냐하면 그 청교도들이 건너올 때, 그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때에 그들은 말하자면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신앙전인 결속의 밑바탕이 가정적인 신앙의 결속력이었어요. 가정적인 신앙의 결속력이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목회 자체가 이렇게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 교회에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그런 것보다도 영혼들이 얼마나 변화 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이고 가정의 변화가 없는 영혼의 변화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 믿은 지 10년 15년이 되는데도 남편 혼자 교회 나오거나 아내 혼자 교회 나오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았단 말이죠. 물론 그 당시에 특수한 선교적인 상황이 있었겠지만 이런 전통이 그들은 성경적이라고 굳게 믿었어요. 그러면서 그런 전통들이 잘 전해 내려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제 모든 신앙의 원리들이 그러하듯이 아무리 좋은 신앙의 전통이나 원리가 충실하게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움직이고 역동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사라지면 그러면 이제 그 모든 형식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청교도들이 건너온 지 50년 정도 지나고 나서 1670년 80년경에 들면 곳곳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개탄하는 설교들이 뜻있는 설교자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에 프린스 라고 하는 목사가 한 설교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그런 설교를 했어요, 자기 할아버지가 건너왔는데 초기 이주민이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시대가 너무 변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와서 처음 7년 동안 그러니까 그 초기 이주민이 와서 7년 동안 신대륙에 살면서 자기는 사람이 등 뒤에서 이웃을 욕하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야비한 말을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하는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주민으로 건너와서 7년 동안 한 사람도 만난 적이 없다 그 사람들이 거기 처음에 건너갔을 때 그 생활이 얼마나 거룩하고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뭐냐 하면, 그들이 그 당시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자기 본국을 버리고 황무지와 질병, 인디언들 맹수들밖에는 없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신대륙으로 도착할지, 못할지도 모르는 범선을 타고 자기 삶을 모두 맡기고 버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를 따르려거든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말하자면 조국도 버리고 고향도 버리고 재산이고 뭐고 다 두고 온 거 아니에요. 그런 신앙을 가지고 건너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성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거기 와서 사회 자체와 교회 자체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꿈꾸었던 것은 신정사회에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사회를 꿈꾼 거예요. 그리고 돌아갔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신앙과 모든 행정이 일치되는 삶을 살았던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160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정부에서 정부라기보다는 식민지 정부죠. 식민지 정부에서 교회에다가 답변을 구해요. 몇 가지 질문을 하는데 질문 중에 뭐냐 하면 왜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쇠약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교계의 의견을 구하고 치료책을 구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니까 정부가 교회에 그렇게 부탁을 할 정도였으니까 철저하게 신앙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죠. 그래서 지금도 그런 전통의 껍데기들이 전해 내려오잖아요.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한다든지, 이러한 전통들이 내려오잖아요. 이런 것들이 그 당시에 생겨난 그런 신정사회의 전통이에요. 그 사회에서 그런 결속력을 유지해 가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정이었다 이거에요.
결국은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이 살아간다고 하더라고 영원히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법은 없거든요.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치고 기도의 영이 식어지고 하면서 세상의 부패들이 들어오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세상의 부패와 잘못된 것들이 들어와도 두 개의 샘물이 계속 작용을 하면 완전히 더러워지는 것을 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정화시킬 수 있단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교회와 가정이에요. 그래서 가장은 그렇게 자기의 가족의 구성원들의 신앙을 잘 돌보는 역할을 한 거예요. 그래서 청교도들은 인식이 분명했어요. 남편은 목사라고 보았고 아내는 전도사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래서 이 청교도 남편들은 권위의 상징이었고 가족들의 온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는 목회자적인 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어디서 따 온 개념이냐 하면 구약의 족장들에게서 많은 향수를 느낀 거예요. 구약의 족장들이 그랬잖아요. 구약의 족장들은 하나님이 가족의 무슨 일을 알리실 때에도 족장들에게 알리시는 거예요. 그 족장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는데, 가족들의 생사를 여탈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정도의 권한을 가진 대신에 가장이 잘못 살면 가정 전체가 엄청난 혼란과 어려움 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한 말하자면 영적인 공동체의 한 대표자로 하나님이 가장을 세우셨다고 하는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가족을 그런 식으로 돌보았어요. 특히 자녀들의 교육은, 굉장히 많은 부분을 가정에서 맡았어요.
이번에 자료를 찾아보면서 제가 깜짝 놀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리차드 백스터의 문집 속에서 ‘마더스카터키즘’ 이라는 글을 발견했어요. 번역을 하면 어머니의 교리문답이에요. 어머니가 아이에게 교리문답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쭉 해 가지고 번역을 한다면 한 1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을 상세하게 다루어 놓았는데 이런 식으로 시작을 하는 거예요. 어머니, 어린이, 어머니, 어린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서 어린이는 질문하고 어머니는 대답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아이를 교육하는 거예요. 이렇게 시작해요. 첫째 문답이 “이리 오너라. 우리 요리문답 배워야지.” 그러면 아이가 답을 하는 것이 이렇게 나와요. “엄마, 요리문답이 뭐예요.” 그러면 엄마가 대답을 하는 거예요. 한 번 봅시다. 뒤에 나와요. 6페이지 봅시다. 자 보세요. 이렇게 나와요. “얘야 이리 오너라 이제부터 교리문답 배워야지.”, “엄마, 교리문답이 뭐예요?”, “이것은 이 세상 어떤 것들보다도 꼭 네가 알아야 할 것들이란다.”, “왜 그걸 꼭 알아야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라고 하셨고, 또 지식 없이는 네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 복된 사람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란다.”, 그럼 아이가 묻는 거예요. “엄마, 다른 애들은 그런 거 안 배우고도 잘 지내는데요.” 엄마 말이 걸작이지요.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것들을 배우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하찮은 사람들이고, 미천한 사람들이며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다.” 참, 확실하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내 무릎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배우지 않으면 너도 성도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결국은 짐승이 된다, 그러니까 아예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번영, 모든 영광, 이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그 영광이 아무리 화려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높은 지위를 누리고 살아도 그것은 짐승이다. 아예 아이에게 그런 생각을 집어넣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된 것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심어준 거예요. “엄마, 영혼이 뭐예요?” 그러니까 가르치고 싶은 것을 아이의 입에 넣어서 자꾸 질문을 하게 하는 거예요. “영혼은 영이란다. 그래서 볼 수가 없지. 그러나 그것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 몸은 오직 흙과 물과 공기뿐이지만, 영혼이 사라지고 나면 육체는 곧 썩어서 흙으로 돌아간단다.” 아이, “그럼 엄마,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죠?”, “영혼이 우리 안에 일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단다. 넌 네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지? 엄마가 말하는 것을 네가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또 더운 것과 차가운 것을 느낄 수 있지? 건강하고 병들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영혼 때문에 네가 이런 것들을 보고 느끼는 거란다.” 상당히 깊이 들어가요. 이렇게 질문하면 아이가 또 캐묻는 거예요. “엄마, 그러면 짐승도 영혼이 있겠네요? 얘네 들도 배고픈 것도 알고, 뭐도 알고, 뭐도 알고, 뭐도 알고... 뭐도 알잖아요?” 그러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벌써 창조론에 있어서 인간의 구성론에 있어서 굉장히 깊은 부분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엄마가 대답하는 거예요. “물론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는데 그것은 영혼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혼이라고 부른단다. 그러면서 이제 그것은 말하자면, 단지 동물적으로 지각하고 느낄 뿐이지 우리처럼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이런 영혼은 아니란다.” 그러면서 깊이 들어가는데 여기서 배우는 내용이 우리 교리반에서 배우는 내용의 수준보다 훨씬 깊어요. 우리 교리반이 악명 높다고 하는데 각성해야 해요. 이게 다 애들 청교도들의 무릎에서 배운 것들이에요. 그래서 어느 교부가 말하기를 어머니의 무릎이 이 세상 최고의 신학교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해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경건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아버지 혼자 모든 짐을 떠맡은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자녀를 철저하게 가르치는, 아버지는 예배를 인도하고 모든 가족들의 신앙을 전체적으로 살피지만 하나하나 자기 자녀들에 대해서는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 심어주는 이것. 이걸 누가하냐 하면, 어머니가 한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결국은 성경의 전통이다 이렇게 본 거예요. 유대인들 사회에서, 유대인들 그러면 혈통을 중시 여기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되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아빠가 히브리 사람이라도 엄마가 이방인이면 그 사이에서 태어나면 혈통이 히브리인인데 그들은 히브리인으로 안치고 그들은 이방인으로 쳐요. 지금도. 그런데 아버지가 이방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그들은 그 아이들을 정통 유대인으로 친다고요. 왜냐하면 피가 뭐가 들어갔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속에 사상이 뭐가 들어갔느냐가 문제라는 것이죠. 아무리 유대인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도 아빠는 아침에 돈 벌러 나갔다가 밤에 들어오잖아요. 그 사이에 오래 있는 시간이 엄마하고 같이 있는데 엄마가 이 아이에게 제대로 된 히브리 교육을 시켰을 리가 없다 이렇게 판단한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으로 안 친 거예요. 이것을 보면 우리들은 가장이 각성하기 전에 먼저 아내들이 깊이 각성해야 해. 도시락 하나 싸 주는 것 가지고 헉헉거리는 이런 가정의 아내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거죠.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실제로 가르쳐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가르칠 때에 경험적으로 생각할 때에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게 문제에요. 그들이 그렇게 청교도 가정의 아내들이 자녀에 대해서 가르치던 그 가장 커다란 것들이 무엇이냐 하면 이거에요. 교리에요. 그런데 이 교리가 이런 식으로 조직신학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한 번 달려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묻고 요셉의 이야기를 묻고 사사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묻고 하면서 성경 전체를 마지막까지 달려가는 거예요. 계시록까지. 굉장해요.
난 오늘날 아이들은 그만두고 어른인 한국교회 교인들이 문답을 가지고 가르쳤을 때 얼마나 이해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그런데 이런 강조점을 모든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은 경험적으로 뭘 깨달았느냐 하면, 잡다한 많은 신앙의 지식을 어린 아이들 속에 넣어 주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해석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는 것들은 이것은 차차차차 자라면서 자기들이 해 나갈 것이고, 어려서 순박한 마음에 굳게 심어주기 좋은 것은 교리의 나무라고 믿었어요. 교리의 나무로서 기둥을 세우고 뼈대를 세우면서 그 다음에 나머지를 다 나중에 신앙적으로 자라면서 채워가게끔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들은 우선 일단 믿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거의 구원받았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또 뭘 믿었느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회심의 경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믿었어요. 개인이 거듭나고 회심하지 않으면 부모가 아무리 경건한 가정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할지라고 그 아이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 이렇게 믿었단 말이죠. 동시에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그 아이들이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는 데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교리를 가르쳤다고 해서 그냥 주입을 해서 쇄내 시키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야 한다는 그것을 깊이 가졌고, 그래서 저도 이제 자료를 읽으면서 많이 가슴이 많이 찔렸는데 어느 청교도의 글에는 이렇게 나와요.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열심히 땀 흘리며 열렬하게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안타깝게 기도하라. 자녀를 위해서. 이것이 부모 된 너희의 도리라.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그러니까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그런 생각이었어요. 그런 생각이 후에 웨슬레에게 와서도 반영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웨슬레가 신자들이 죽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물으시는 세 질문이 있을 것이다. 너희 돈 어떻게 썼느냐?, 너희 시간 어떻게 보냈느냐?, 마지막으로 너희 자녀는 지금 어디 있느냐? 이렇게 세 가지 질문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거에요. 실제로 그런 식의 삶을 철저하게 청교도들이 살아갔어요. 그래서 이제 잡다한 것을 가르쳐주는 대신에 아이들에게 그 기독교 신앙의 뼈대를 세워주는 그 일에 몰두를 한 거예요. 그래서 ‘마더스카터키즘’ 말고 ‘패밀리카터키즘’이라는 것이 또 있어요. 그래서 가정들이 모여서 가정예배 같은데서 가족들에게 가르친 그 카터키즘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경험에서 많이 생겨난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살면서 자기의 가족 중 어린아이들에게 어렸을 때에는 아주 순수하잖아요. 순수해서 어른이 엉터리로 설명하면 잘 못 알아들어도, 이치에 맞게만 잘 설명하면 거의 모두 받아들여요. 아이들이. 이야기 할 때 딴 생각 하는 것은 다 후의 일이에요. 후에. 이게 좀 머리가 커졌을 때 일이지 어렸을 때 막 특히 얘기 좋아할 때 그럴 때 있잖아요. 그 때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요. 제가 옛날이야기 잘 못해도 어린아이 팍 품에 안고 이야기 해 주면 아이들이 막 무서운 이야기 해 주면 자지러지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어요. 그럴 정도로 순수한데 그 때에 교리를 집어 넣어주어야 한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것을 철저히 가르친 거예요.
백스터 목사의 회고에 보면 이런 고백을 해요. 뭐냐 하면, 키도니스토에서 16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처음 갈 때는 그 동네에 가정이 거의 다 무너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들이 막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당신이 거기에 왔을 때에 가정에서 매일 기도회 하는 가정이 한 두 가정밖에 없었대요. 그런데 16년 목회를 마쳤을 때에는 한 두 가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정예배뿐만이 아니라 늘 가정 기도회를 가졌었고, 백스터 목사 자신이 고백하길 뭐라고 그랬냐면, 이제 우리 동네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되는지 신앙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경건한 삶을 살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라고 스스로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물론 그렇게 가르쳐 주었는데도 자기가 마음이 토라져서 안 믿는 사람이 극소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 백스터 목사님이 가르쳤는지 철저하게 그들은 어떻게 신앙 생활해야 하는지를 배운 거예요. 그런데 그게 계기가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10여년이 지난 다음에 백스터 목사님이 우연히 그분이야 뭐 진짜 몇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그런 걸출한 목회자였으니까. 그분이 남긴 유명한 명언 가운데 하나가 난 죽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한다. 라고 남긴 게 그 사람의 명언이에요. 그러니까 전 문헌에서는 확인을 못했는데 어떤 동료 목회자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후에 그렇게 말씀을 전하는데 능한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0여년정도 목회를 한 다음에 실제로 가정에 가서 물어보니까 절망스러울 정도로, 교인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대요. 삼위일체가 뭔지 조차도 모르고, 그럴 정도로 교인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것은 이제 단지 설교 강론만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들을 잘 가르쳐야 되겠다, 라는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이제 이러한 교육을 위한 아주 철저한 방식을 가지고 접근을 하는 거예요. 이것도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전혀 은혜체험도 없고 교회 와서 변화 받지도 못한 사람들한테 어느 날 갑자기 교리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정통신앙이 이거라고 가르쳐 준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계속 신앙의 감격이 있고, 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교리를 잘 배우지 않으면 항상 그 신앙이 항상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그런 신앙이란 말이죠. 자 봐요. 오늘 하나님 앞에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깊이 받았어요. 여러분들은 대부분 그런 은혜를 받고 감격하는 것이 한 주간 계속 안 간다고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말이죠. 이렇게 계속해서 감정의 기복에 의해서 이끌리는 그러한 신앙생활 그 이면에는 뭐가 있냐 하면 든든한 교리에 대한 참된 지식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참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교리라고 하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이거든요. 집을 이렇게 짓잖아요. 집을 이렇게 지으면 여기에는 철근도 들어가고 콘크리트도 들어가고 굉장히 많은 것들이 들어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차례대로 차례대로 해야지만 집이 되잖아요. 제일 먼저 포크레인이 와서 땅을 파고 그 다음에 철근을 세운다음 콘크리트를 붓고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집을 짓는다, 그러니까 한차가 와르르 와서 모래를 쏟고 가고 그 위에다 철근을 한 차 쏟고 가고 그 다음에 그 위에 물 붓고 가고, 시멘트가 오고 한꺼번에 전기 기구고 뭐고 간에 한꺼번에 쏟아놓고 가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기는 있는데 집이 안 되는 거예요. 교리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꼭 뭐야 같으냐 하면, 좋은 이 집에다가 선반을 매는 것과 유사해요. 그래서 책이 몇 트럭 와서 와르르 쏟아져 나오면 있는 건 아는데 어디 있는지 몰라요. 선반을 매 놓으면 책을 가지런히 꽂아 놓으면 뭐, 그리고 찾으면 바로 찾을 수 있단 말이죠. 그러나 사실은 교리의 가치는 그 이상의 의미에요. 오늘날 사람들이 왜 교리를 배우기 싫어하느냐 하면 교리를 통해서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교리를 배우는 것이 딱딱하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맹점들을 가정에서의 교육을 통해서 백스터 목사님이 보완을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직접 자료에서 찾아보지는 못했는데 어느 동역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주일날 설교를 하고나면 특별히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을 심방을 했대요. 심방을 가서는 뭘 물어보느냐 하면 어린아이를 불러서 교리를 물어보는 거예요. “얘야, 영혼이 뭐냐?” 이렇게 물어볼 때 더듬더듬 하면 그 다음 주일날에 그 부모는 서서 예배를 드려야 돼요. 그런 정도로 자녀 교육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리차드 백스터 목사님도 결국은 가정의 자발적인 도움 없이는 자녀들을 올바른 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가장들의 역할을 굉장히 강조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청교도들이 이런 식의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것들을 많이 가족들에게 가르쳤는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거에요. 뭐냐 하면, 가정에서 가정이 올바르게 교화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말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어머니가 되어야 해요. 뭐 든 게 있어야 가르치지, 텔레비전 프로밖에 머릿속에 든 게 없다면, 그 아이들이 뭘 배우겠어요. 그러니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자신이 신앙 지식으로 무장되어야 해요. 그래야지만 거기서 신앙적인 자손들이 태어나는 것이에요. 그리고 가정에서 남편이 이제 가정예배를 인도하게 되잖아요. 가정예배를 인도하는데 그 전에 제일 먼저 남편이 가장이 자기 집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위치를 찾는데 아내들이 도움을 주어야 한단 말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고 동물 같은 것이 자식들 앞에서 자기 남편 흉보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들 앞에서 벌거벗는 것과 같이 부끄러운 것이에요. 그렇게 남편이 못마땅하면 문 걸어놓고 아이들 내 보내놓고 싸우려면 둘이서 싸우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마음속에서 남편의 상이 허물어지는 것은 괜찮지만, 그거야 뭐 자기들 잘못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아이들에게서 아버지의 상이 허물어지고 나면, 권위가 없어요. 아버지, 특히 가정에 있어서 부모, 특별히 아버지의 권위는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우산과 같은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어린아이 시절에 경험하는 정신적인 공백은 무서운 거예요. 어렸을 때에는 자기 아버지가 최고처럼 보이는 거예요. 옛날에 제가 방위생활 했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우리 졸병으로 들어 온 애가 있는데, 아주 죽겠다는 거예요. 아이가, 네 살 먹은 아이가 있는데 맨 날 헬리콥터만 날아오면 애가 막 뛰어 나온대요. 우리 아빠 저거 타고 지금 날아온다고. 방위가 그거 탈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것만 보면 애는 상상에 빠지는 거예요. 가서 잔디의 잡초나 뽑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하는 거죠. 엄마 우리 아빠 저기 탔지. 막 손 흔드는 거예요. 학교에 들어가면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우상이 누구냐 하면 선생님이에요. 선생님. 절대적인 우상이에요. 그런 시기에 자라난 아이들이 아버지가 허물어져 버린 거예요. 그 때에 이 아이들의 좌절은 엄청난 거라고. 황무지와 같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그런데 그런 걸 잘 허물어뜨리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자기 부인이에요.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바르게 안 자라며 결국은 그 무거운 짐들이 자기 자신을 향하여 돌아오는 거예요. 예배를 여러분들이 아무리 드린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가장의 위치를 제대로 찾아주지 않으면 안돼요.
이런 노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자신의 노력이 필요해요. 여러분들은 가장들은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해요. 여러분들은 후일에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 가정이 철저하게 교회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여기서 말이죠. 10년이고, 20년이고 목회를 했어요. 다 했는데 천국에 갔더니, 열린교회 동문회 좀 할려고 봤더니 없어요. 사람들이. 그 때에 내가 여기서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심방다니고 다 했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어요. 똑같아요 여러분들이 나는 신앙이 없고, 우리 부인이 먼저 교회 나갔고. 뭐. 상관없어요. 지금 나오고 있잖아요. 지금. 아니 부인의 손에 이끌려 왔던지, 등 떠밀려 왔던지, 돈 받으러 왔던지. 하여튼 나왔잖아요. 지금 다니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잘 믿으라고 말씀하시잖아요. 누구에 의해서 교회에 나왔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난 부인이 여러분들을 인도했다고 하더라고 언제까지라도 부인의 치마폭 뒤에 가려져 있어야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는 것이 성경의 원리인데, 그렇다면 가장인 여러분들은 분발을 해서 결국은 이 가족들의 영혼을 내가 자격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내게 맡겨주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거기에 대한 중차대한 책임을 느껴야 한단 말이죠. 그것은 도장 찍고 안 찍고 할 문제가 아니야. 아예 처음서부터 하나님이 그런 걸 맡겨주셨는데 하나님도 없고 따라서 가장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그런 인생을 동물처럼 막 살다가 이제 깨닫고 이제 막 예수 믿는 가장이 되었으니까 이제라도 그 책임을 되찾으라, 이거에요. 그건 책임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자리란 말이죠. 거기에 서서 굳게 가정을 지켜나가는 그러한 가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가장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지 않으면 가정예배를 인도하는 것을 인정해 줄수 있겠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먼저 가장이 가정예배를 인도하기에 앞서, 먼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 가족들 앞에서 권위를 가진 그런 사람들이 되어라 그거에요.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에요. 권위를 갖는 것은 두가지 권위를 갖는 거에요. 두가지 권위는 뭐냐 하면 하나는 (?) 남편이 말한다고 해서 죽어라고 복종할 필요도 없고, 아내가 말한다고 해서 무조건 무시할 것도 아니라 이거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진리, 진리. 자기가 가장이면 가장이지, 가장이 아닌 어린아이가 하는 이야기가 더 성경에 가까우면, 승복하는 가장이 되야 해요. 어른 얘기하는데 쬐그만 자식이... 이러면 결국 그 아이가 뭘 배우겠어요. 나중에 그 아이가 커서 교회에 가서 목사가 이렇게 이렇게 믿는 것이 신앙의 도리입니다. 그러면, 다 늙은 것이.. 그러지 않겠어요? 그런데 가장은 완전합니까? 완전하지 않거든요. 그러면서도 권위를 유지하는 비결은 그거에요. 자기가 잘못했을 때에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권위를 인정받는 비결이에요.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가정의 주도권 가지고 싸울 필요가 없어요. 진리가 아니면, 내가 얘기하잖아요. 당신이 아내고 네가 어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네 얘기가 진리고 내 얘기가 진리가 아니면, 그럼 우리 가정은 아빠말에 복종하고 엄마말에 복종하는 그런 가정이 아니라, 진리에 복종하는 가정이다. 그러니 네 말이 진리이면, 손들어 볼 필요도 없고 다수결 할 필요도 없고, 다 네 말을 들을 것이고, 내 말이 진리가 아니면, 내 말도 듣지 말아라. 진리인지 아닌지를 명백히 따지기 어려운 경우도 있어요. 그런 경우는 성경의 일반적인 명령에 순종해야지요. 가장의 권위에 복종하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그러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정리를 하고 나면 깨끗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떤 유익이 있느냐 하면 괜히 가족들 앞에서 괜히 폼 잡고 할 필요 없이 자기가 사는 만큼만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야지요. 지금은 약하지만, 점점점 진보가 있을 것 아니에요? 그래서 살면서, 내가 이렇게 못 살았으니까 용서를 해 달라. 그리고 하고.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권위를 느끼는 거예요. 그 속에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사랑이에요. 가족들을 사랑을 해야지만 그 속에서 권위가 느껴지는 것이지. 코도 안보이고 맨 날 오밤중에 들어와 가지고 말이지. “가정예배 드리자” 그래 놓고 말이지, 다 깨워놓고 말이지. 그렇게 해가지고는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이제 가정예배로 들어가게 되는데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말이죠. 가정 예배를 드릴 때 너무 복잡한 형식을 취하면 안 돼요. 어느 집에 심방을 갔는데 우리 교회는 아니에요. 심방을 갔는데 가정 예배 드리는 것 때문에 가정이 불화해요. 가정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왜 그러냐하면 인제 남편 아내 이렇게만 살고 있으면 되는데 남편, 아내, 고모, 뭐 무슨 이모, 다 있는데 이 사람들이 신앙적으로도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이에요. 다, 뭐, 좋은 설교 안들은 설교가 없고, 좋은 책 안 읽은 책이 없는 거야. 근데 거기 인제 말하자면 그 남자 한사람이 가정 예배를 인도하는 거예요. 근데 인제 설교를 하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저게 진짜, 성경에 진짜 저렇게 되어 있을까?’그리고는 예배 15분 드리고 30분을 토론을 하는 거예요. 설교한 것 가지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당장 고쳐라. 이것은 잘못 됐다. 가정에서는 설교가 주가 아니다. 청교도들도 세 가지가 가정 예배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소였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찬송, 기도, 성경 읽기였어요. 성경읽기. 그래서 로버트 맥체인의 성경읽기 표에 보면 일년에 한번정도 읽도록 표를 만들었는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거 가지고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 표를 하고 돌아가셨다잖아요. 근데, 그 성경읽기 표를 만드는데, 거기에 보면 Personal, 그다음에 이 앞에는 Family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틀림없이 성경읽기 장수 속에 가족과 함께 읽는 장수가 포함되고 개인적으로 읽는 장수가 포함되었어요. 가정이 있는 장수가 하루에 한 장 내지 두장 정도가 되었어요. 그러니까는 가정 예배 시간 같은데 같이 모여서 쭉 성경을 읽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지금서부터 새롭게 가정예배를 시작하려고 하는 가정이 있으면 그러면 지금부터도 괜찮아요. 어떻게 시작하면 되냐 하면 제일 먼저 성경 읽기와 찬송 부르기와 기도하는 것을 집어넣어서 시간을 거기서 부흥회 하려고 하면 안 돼요. 그 부흥회는 우리 교회에서 일년에 네 번밖에 안 해요. 그 어떻게 매번 예배를 드리면서, 가정예배에서 부흥회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가족들이 모여서 찬송을 두곡 정도 부르고 그 다음에 가족 중에 기도를 하든지 아니면 같이 기도를 하든지 하고 그 다음에 성경을 한 장 정도 읽으면 되요. 요새 우리 가정에서 시편을 읽어 나가고 있어요. 사도 신경을 한 일년 반인가 이년동안 했어요. 그리고 이제 한 이년 걸린 것 같아요. 그리고 인제 지금 인제 읽어가요. 그래서 딱 예배를 드릴 때는 아이들 군기를 바짝 들게 해. 그 예배시간에는 눈동자 하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되요. 그리고 그것을 억압이 아니라,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이다, 라는 것을 배워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그것을 실천 하도록 만들어야 되요. 자 보세요. 중고등부 아이들 집중 안합니다. 우리 교회 고등학교 학생들 몇 명이 여기에 나와서 예배드리거든요. 참 신통합니다. 거 왜 그러냐 하면 여기에 와서 몇 달 다니는 동안에 자기 혼자 날쳐봐야 맞장구 쳐주는 사람이 없어요. 여기 앉은 사람도 강단만 쳐다보고 처음엔 가운데서 뭘 하겠어요? 할 수 없이 쳐다보다가 보니까 이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거예요. 보세요. 그런 아이들 장난치는 아이들로 가득 찬 예배당에 갖다놓으면 똑같이 거기서 장난 칩니다. 오죽 했으면 제가 맨 처음에 중고등부 애들 맡았을 때 예배시간에 비행기 접어서 날리고 앉았더라구. 그러니까 어떻게 기르느냐에 따라서 진짜 동물들이 모인 그 동물 농장으로서의 교회가 될 수도 있고, 성도들이 모인 거룩한 교회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거를, 가정예배서부터 그렇게 예배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일깨워 가지고 그렇게 훈련을 시켜야 된단 말이죠. 잘했을 때는 칭찬을 해주고. 잘못했을 때는 따끔하게 벌을 줘야 돼. 그래서 이 예배시간은 구별된 시간이구나. 그런데 이제 제 경험에 의하면 15분은 넘지 않는 것이 좋아요. 왜냐하면 자주 해야 되는 예배잖아요. 청교도들은 아침, 저녁 했어요. 근데 그거를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키기는 굉장히 힘들 거예요. 그 당시는 농경 사회였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되지만, 지금은 아이들은 뭐 다섯 시 반에 학원 간다고 튀어가고 그 다음에 뭐 여섯시에 나간다, 막 밤중에 들어오는 시간도 불규칙 하니까 굉장히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몇 분으로 정하는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각자 정할 것이지만, 제 생각에는 정해놓고 가족들이 모이지 않으면 문제이니까, 우선 시작할 때에는 형편에 맞게끔 시작을 해요. 일주일에 한번도 좋아요. 토요일 같은데 다 모이잖아, 그죠? 아니면 두 번 정도, 이렇게 지킬 수 있을 정도를 시행을 하고 그다음에 점차, 점차, 점차 넓혀 가서, 아침에 한번 드리고 저녁에 모두 모여서 드릴 수 있는 정도의 가정이 된다면 아주 훌륭한 상황이 되겠죠. 어쨌든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가면서 그래서 충격을 최소화 하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읽기, 찬송 부르기, 그리고 기도. 이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이렇게 예배를 인도해 가도록 부탁을 드리고,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는 예배드린다, 그러면 특히 아이들이 아이씨 아이씨 할 것 같은데 실제로 시도를 해 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 굉장히 좋아해요. 왜냐 하면 아이들이 온 가족이 모이는 때를 사실은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에서는 별로 경험을 못해요. 그런데 그렇게 온 가족이 모이게 되니까 우선 아이들이 좋아하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예배드리는 것을 아이들이 즐거움으로 느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교육을 해 나가야 해요. 네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너를 참 사랑하시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신다는 것, 그것을 가르쳐서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그런 예배 속에서 뭐가 이루어지냐 하면, 가정이 영적인 결속을 가지 교회로 형성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갓 결혼한 사람들이 쑥스럽다고 그러는데, 그럴 것 없어요. 둘이서도 훌륭한 예배가 되는 거예요. 그것도 앞에 한사람 놓고 평소에 유감 있던 것 그거 설교시간에 다 털어놓으려고 하지 말고 그건 대화로 풀고 성경을 읽어요. 두장도 좋고 한 장도 좋고 하니까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패밀리 성경 읽기표 같은 거 하나 만들어서 칸을 그어 가면서 읽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지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예배를 드려 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예배시간에 가족들이 회개하는 일도 일어나고, 모이면 왜 그런 일이 안 일어나겠어요.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우리가 예배에 간절히 가는 것처럼 오늘은 우리가 예배가 있는 날인데 이 예배시간에 우리 온 가족이 하나님 은혜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해 나가는 거예요. 복잡한 형식을 가지지 말고 단순한 형식을 가지세요. 그리고 처음에는 횟수를 적게, 그리고 시간도 짧게, 그러면서 정착되어 가면서 점차 점차 늘려가고 그리고 말하자면 시간도 점점 점점 늘려가고, 그 다음에 깊이도 점점 더할 수 있는 그런 정착된 가정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거죠.
솔직히 말해서 말이죠. 아이들이 성경지식에 대해서 매우 무식한 것은 결국은 그 어머니 때문이에요. 어머니,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엄마, 우유가 영어로 뭐야?”, 그러니까 엄마가 “밀크지.” 그러더래요. 한참 있다가 “엄마 사과는 영어로 뭐지?”,“애플이지.” 사람들이 다 쳐다보면서, 애가 너무 귀여워서 막 그러는 거예요. 그러다가 “엄마 버스는 영어로 뭐야?”, “버스는 영어로도 버스란다.”, 그런데 가다가 간판을 보는데 아이가 글자를 읽을 줄 알았나 봐요.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그런 찻집이 나왔어요. “엄마,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는 영어로 뭐야?” 그러니까 갑자기 엉덩이를 때리면서 “엎어져 자.” 그러더래요. 그거 왜 그래요? 애플까지는 수준이 닿았는데,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는 영어로 안돼는 거예요. 그러니까 쥐어 패면서 자빠져 자 그러는 거지. 똑같아요, 똑같아. 왜 어머니들이 성경을 자녀들에게 안 가르치려고 그러느냐 하면, 애들이 바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두 가지 때문인데 하나는 자기에게 간절한 그 어린 영혼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의지는 있는데 텅 빈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뭐라고 불러?” 그러면 “그리스도라고도 부르지.” 그런 거나 대답할 수 있지, “엄마, 영혼이 뭐야?” 그러면 “자빠져 자.” 그것 밖에 안 나와. 뭘 하겠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넘쳐야 되요. 그러니까 자꾸 들어가야 되잖아요. 들어가야 된다고. 그런데 얼마나 한심한지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에서 세례문답 하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전통이 섰어요. 거기는 안 가면 안 되고 문답 통과 안하면 일절 없다고 그러더라. 그러니까 아예 소문이 나서 당연히 그래요. 그런데 처음에는 많이 떨어졌어요. 한 열명 시험 보면, 여섯 명 떨어졌거든요. 재시험 까지 물론 기회는 주지요. 지금도 다 외우지 않으면 안돼요. 최근에 세례 받은 사람들이 옛날에 세례 받은 여러분보다 교리를 더 잘 알아요. 그거 이렇게 거의 500문제 되는 거 완벽하게 외우지 않으면, 세례를 안줘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을요, 몰라요. 모른다고요. 지식자체가 없는 거예요. 분명히 지난 주일날 교회에 와서 눈물 펑펑 흘리면서 대성통곡하고 갔는데 본문이 뭔지도 몰라. 잊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그 성도의 삶을 든든히 붙들어 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계속해서 뭔가는 들이붓는데 그것이 이 속에서 축적이 안 되는 거예요. 지식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안 들어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자녀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제일 좋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부모들이 먼저 교리를 잘 이해하고 그리고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하는데, 예배를 그렇게 드리고, 그 다음에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데에만 전념하지 말고 하루에 하나의 문답씩이라도 좋으니까 무릎에 앉혀 놓고 가르치는 거예요. 하나씩, 하나씩. 그게 처음에는 우습게 보일지 모르는데, 요리 문답지에 나와 있는 것 중에서 전부 다 가르칠 필요는 없고 그 중에서 한 360개 정도 뽑으면, 일년에 한 번씩 돌아요. 한 번씩. 하나씩만 가르쳐도 그것이 다섯 살 때 가르쳐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8년 정도만 가르친다고 하면 엄청난 틀이 세워지는 거예요. 여러분 그나마 카톨릭의 힘이 그 교리에서 나와요. 왜냐하면, 개신교에서 카톨릭 개종하는 사람은 많은데 카톨릭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요.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나마 세례 받을 때, 결혼할 때 철저하게 외우지 않으면 일절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엇이 옳다, 라고 하는 것이 머릿속에 박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가정예배를 회복하는 동시에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지금서부터 라도 가르치세요. 그래서 하나씩 둘씩 익혀가세요. 그러면 아이들이 가정예배와 맞물리면서 아주 좋아할 거예요. 뭐 바람직한 얘기긴 합니다만, 예배드리는 시간을 아주 즐겁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한동안 실천하려고 애를 썼는데, 깊이 이해가 되었어요. 주일날, 모든 기쁜 일을 주일날로 모으라는 이야기에요. 용돈을 받는 것, 새 옷을 입는 것, 새 신발을 신는 것,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 주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주일날로 몰으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일날은 좀 잘못해도 그 날은 용서를 받고, 평일 날이면 반 죽었을 텐데, 주일 날 용서도 받고 용돈도 받고, 자기가 소원하던 것도 얻을 수 있는 그런 날로 만들어야지만, 어린아이 적부터 그 주일에 대한 이 축복된 개념이 생긴다 이거죠. 참 좋은 생각이에요. 그런 식으로 해서 예배를 드린 다음에는 항상 아이들에게 그 예배를 드린 그 때가 참 좋은 때라는 것을 여러모로 아이들에게 인식시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예배들 통해서 누리는 영적인 기쁨에 대한 묘미를 갖도록 그런 식으로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래서 청교도가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지금 전체적으로 보면 결국은 청교도들이 가정예배 그런 것들에 늘 실천했지만 그러나 가정예배 자체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안 나오는 것은 그것을 당연히 삶의 일부분으로 여긴 거예요. 그리고 교회와 가정의 유대관계가 그런 식으로 딱 묶여져 있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그렇게 가정이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가장들이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그런 체제였단 말이죠. 한국교회 초기에도요. 교인이 자기의 딸이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집안에 시집가거나 장가보내면, 징계를 받았어요. 최소의 징계가 뭐였냐 하면, 수찬정지에요. 수찬정지는 출교 다음이에요. 출교는 교회에서 내 쫒아 버리는 거예요. 수찬정지는 뭐냐 하면 6개월이고, 1년이고, 성찬이 되도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동안에 참회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럴 정도로 한국 교회가 물려받은 신앙 자체가 그런 청교도 신앙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도로 강하게 가정의 문제가 어필이 된 거예요. 지금 와서는 전부다 와해된 거예요. 아이들이 전부 다 지멋대로 된거죠. 그래서 예배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청교도들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면, 불경건한 고집을 꺽는 것이 부모가 가진 첫째가는 의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만들어주었고, 그 분은 뭐라고 까지 말했냐 하면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부모가 눈물을 흘린 그것은 그 자녀가 이후에 들어갈 그 지옥에서 불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표현을 했다고요. 그러니까 간혹 가다가 패역한 자식이 나타나서 경건한 부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면, 그는 틀림없이 지옥으로 갈 것이다, 라고 단언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신앙적인 테두리 안에서 가정에서 붙들어 줄 수 있었던 거예요. 안 되는 이유가 뭐예요? 문제는 부모들이 막 살고 싶은 거예요. 어떤 분이 그러대요. 학교에서 건널목으로 건너라고 다 교육을 시키면 엄마가 손잡고 육교 밑으로 뛰어간단 말이죠. 뭐가 되겠느냐 말이죠. 분리수거하라고 다 가르쳐 놓으면 엄마가 와서 한꺼번에 쏟아서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의 삶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투명한 삶으로 살아야 된다 이거죠. 그게 여러분들의 신앙 뿐 아니라 자식들과 가정의 신앙이 한꺼번에 달린 문제에요. 그러니까 결국은 가정의 가장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그러면 그 가정은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가장들이 자기에게 부여받은 목표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준비하면서 실제적으로 이것을 여기서 이렇게 단회적으로만 이야기하고 끝내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들이 작업을 해 가지고 실제로 여러분들이 오늘 강의들은 것들을 그대로 적용해서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서포트를 구체적으로 해 줄 생각을 제가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시간이 좀 걸리는 문제겠지만, 일단 제가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 가정에서는 이번 주라도 좋아요. 오늘 밤에라도 좋아요.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 가정예배를 드리자. 그러면서 모여서 찬송 부르고 성경 한 장 읽고 기도하고 주기도문하고 자녀들을 축복하고 마치세요. 그리고 차츰차츰 가정예배를 발전시켜가서 결국은 그 예배자체가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된 것을 기쁘게 여기고 하나님을 더 느낄 수 있는 그런 좋은 예배가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을 해야 되고 이런 일들을 위해서 가장들이 노력하고 무엇보다 텅 빈 어머니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 특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을 가르칠 책임이 있는 부모들이 일관성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지 바쁜 일 있다고 주일 빠지고 기도도 하나도 안 하고 그러면서 예배시간에만 폼 잡고 아이들 쥐 잡듯이 잡으면서 기도하라고 그러고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부모들인 어머니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또 읽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신앙적으로 가르칠 것이 있도록 하세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요리문답 필요하면 전도사님에게 부탁을 해서 구해달라고 그러세요. 가지고 가서 하나씩 하나씩 아이들에게 읽으면 다 아는 거니까 하나씩 하나씩 들려줘요. 이야기도 하나씩 붙여서 들려주고. 이렇게 해 가지고 해 나가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에 여러분들의 가정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선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